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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페루’

‘페루’

‘잉카’족의 땅, 한 때 ‘잉카’ 제국의 영토였던 곳이 ‘페루’이다. 현재 대략 17,000,000명의 안식처이며, 그 중에는 조상들이 7세기 전에 고도로 개화된 ‘잉카’ 문명을 발견하였던 ‘키추아 인디언’들이 있다.

오늘날 매 100명의 ‘페루’인 중에 대략 46명은 ‘키추아’나 ‘아이마라’족 ‘인디언’들이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인구는 ‘인디언’과 백인들의 사이의 후손이다. 실제로, 그 나라를 서쪽의 건조한 해안 지역과 동쪽의 무성하고 증기가 올라오는 밀림으로 분리시키는 높이 솟은 ‘안데스’ 산맥이 ‘페루’ 주민들의 종족이 나뉘어지는 데 큰 관련이 있었다. 밀림 지역에는 ‘안데스’의 고지대에 살고 있는 ‘알티플라노’ ‘인디언’들과는 풍속이나 언어가 아주 다른 ‘인디언’ 종족이 수십족이나 있다. 대략 2,300‘킬로미터’에 달하는 태평양 해안 지역은 ‘페루’의 ‘스페인’계 주민들이 대부분 살고 있고, 그들 중 상당한 부분은 원주민들과의 혼혈 주민들이다.

‘페루’ 북쪽으로는 ‘에쿠아도르’와 ‘콜롬비아’가 있다. 동쪽으로는 ‘브라질’과 ‘볼리비아’가 있고, 남쪽으로는 ‘칠레’가 있다.

이 나라가 바로 기원 16세기에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자로’가 당도한 고대 ‘잉카’족의 나라였다. 1535년에 그를 따라서 ‘스페인’으로부터 사제들과 수도사들이 왔다. 새로이 소개된 ‘가톨릭’ 종교에 고착하도록 하기 위해 사제들은 많은 ‘인디언’ 관습과 풍습 및 관념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페루’에 있는 ‘가톨릭’ 교회는 결코 태양 숭배하는 ‘잉카’족의 후손들의 옛부터 전해 오는 습관을 완전히 뿌리 뽑지 못했다. 그래서 모든 영매술과 정령 숭배 및 죽은 자 숭배가 ‘가톨릭’의 겉치레로 살짝 칠해졌다. 그리고 현대 ‘페루’는 제휴 종교의 나라이다. 그러나 이 ‘잉카’족의 고대 나라의 산악 지대와 골짜기 구석구석이 영적 빛이 비추어져 왔다. (시 43:3) 어떻게 이 웅대한 성장이 그 출발을 하게 되었는가?

영적 빛이 비치기 시작하다

1930년대에 여호와의 여행하는 증인들이 ‘페루’의 이곳 저곳에 성서 서적들을 전하면서 이 나라를 통과하였다. 또한 외국에 있는 친구들이 이 나라에 있는 친척들에게 그리스도인 인쇄물들을 보내 주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책을 조사해 보도록 권면하였다. 얼마 있다가 이 서적 얼마가 수도 ‘리마’에 있는 헌 책방에서 발견되게 되었다.

1938년에 이러한 한 책방에서 ‘빅터 루라’가 “하나님의 거문고”라는 제목의 책 한권을 찾아냈다. 그 제목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나님이 거문고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 사실일까? 그렇다면 그 거문고는 어떤 모양일까?”라고 ‘루라’ 씨는 사색에 빠졌다. 그 책을 거저 얻다시피 구입하여, 그 내용을 “탐독하는 데” 시간을 낭비치 않았다. 열 가닥의 거문고 현을 탈 때의 아름다운 선율처럼 새로이 입수한 책은 성경의 열 가지 기본적 가르침을 명백히 한 것으로 그 책의 독자에게 기쁨을 주었다. 이들 진리는 ‘가톨릭’ 교리와 그 자신의 오순절교 신앙과는 참으로 달랐다!

곧 ‘루라’ 씨는 ‘왙취 타워 협회’의 더 많은 출판물을 구하려고 그 책방으로 다시 가서 철저히 찾아 보았다. 그래서 몇 가지를 더 발견하였다. 그 때에 그는 오순절교의 그 지방 집회소 관리인이었다. 몇 달이 흘러가자 ‘루라’ 씨는 이 가치있는 책들에서 진화론과 영매술을 폭로하는 문맥을 꼭 복사해야겠다고 느꼈다. 열성으로 충동받은 그는 자신의 비용으로 그 부분들을 발췌 인쇄하여 전도지를 만들었다. 이 전도지는 ‘리마’의 ‘칼라오’ 근방의 많은 주민들에게 전해졌다. 이 때에 ‘루라’ 씨는 역시 오순절교 집회에 참석하는 한 숙녀, ‘라스테니아 카사나’를 만나게 되었다. 1939년에 그들은 결혼하였으며, 그들은 둘이 다 참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 인쇄물에서 그렇게도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는 성서 예언들에 열중하였다.

1943년 어느날 ‘빅터’는 깜짝 놀랄 소식을 가지고 집으로 달려 왔다. “‘여호와의 증인’ 한 사람이 시내에 있소”라고 그의 아내에게 흥분해서 말하였다. 남‘아메리카’ 서해안을 따라 여행하고 있는 전 시간 왕국 선포자인 ‘프레이다 존슨’이 ‘리마’에 머물러 있었다. ‘존슨’ 자매는 한 전도 부인에게 증거하였으며, 그 부인은 친절하게도 그 시 변두리 높은 언덕에 있는 자기 집을 ‘존슨’ 자매에게 숙소로 제공해 주었다. 그 집은 하수 시설과 수도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으며, 벽이라고는 짚으로 만든 거적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우리의 용감한 ‘파이오니아’는 60대의 연령에도 불구하고 그 지방 주민들과 같이 ‘리마크’ 강에서 목욕을 하였다.

지체하지 않고 ‘빅터 루라’는 ‘존슨’ 자매를 만나러 갔다. 오랜 후에 마침내 그는 여호와의 백성과 접촉하게 된 것이다! 바로 그 날 저녁에 하나의 모임을 마련하였으며, 친구들과 이웃들이 초대되었다. 그 첫 모임은 그리 성공적이 못되었다. 거의가 오순절교인들이 참석하였으며, 그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종교적인 어구로 항상 말을 가로 막아 ‘존슨’ 자매는 거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 다음날 저녁에 개최될 모임에는 성서 진리에 진정한 관심을 명백하게 표시한 사람들만 초대하기로 하였다. 그 모임에서 ‘존슨’ 자매는 1914년에 하늘에 하나님의 왕국이 설립된 것을 반복해서 간결하고 요점잡힌 증거를 제시하였다. 귀를 기울이는 다수의 사람들이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페드로 가레이’와 ‘빅터 로메로’가 있었다.

‘존슨’ 자매는 나흘 동안 ‘리마’에 머물면서 증거하고, 새로운 관심자들을 격려하였다. 그리스도인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뉴우요오크 브루클린’의 ‘왙취 타워 협회’ 본부에 그들의 이름과 주소를 보냈다. 그 후에 그는 중부 ‘페루’에 있는 ‘우앙카요’로 떠났으며, 그 후에 남쪽으로 향하였다. 나중에 ‘페루’인 증인들은 ‘존슨’ 자매가 ‘콜롬비아’의 ‘메데인’에서 학질에 걸려 앓다가 1945년에 사망하였다는 것을 확인했다.

‘빅터 루라’와 ‘페드로 가레이’ 및 ‘빅터 로메로’는 함께 20‘달러’를 모아서 ‘브루클린’에 있는 ‘왙취 타워 협회’로 보냈다. 그들은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무슨 일이 있는지를 참으로 알기를 원하였다. 바로 한 달 후에 축음기와 ‘스페인’어로 녹음된 성서 연설과 아울러 서적이 도착하였다. 이따금 서신들과 지시서들이 도착하였다. 이들은 영어로 된 것이지만, ‘빅터 로메로’가 그 언어를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1943년과 1944년에 영적 빛이 ‘잉카’족의 옛 영토에서 비치기 시작하였다.

영적으로 세움이 된 접촉

협회에 보낸 ‘빅터 루라’의 서신 하나는 ‘리마’에 어떤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가슴 설레는 회신은 선교인들이 “땅 끝까지” 증거하러 갈 수 있도록 참으로 준비중에 있다는 것이었다. (사도 1:8) 그러한 희망은 ‘왙취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서 훈련받은 선교인들이 앞으로 ‘페루’에 도착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으로 불붙게 되었다. 사실, 1944년 6월 10일에 ‘왙취타워 협회’ 회장, ‘N. H. 노워’는 자기 사무실로 일곱명의 선교인들을 불러서, 그들의 임명이 ‘페루’임을 말하였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일이 이들 선교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있게 되었다. ‘리마’의 이 작은 집단은 ‘N. H. 노워’와 ‘F. W. 프랜즈’가 1945년 2월 26일에 그들을 방문하기 위하여 도착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형제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여호와의 조직과 접촉한다는 생각은 참으로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

간절히 기다리던 날이 마침내 왔다. 다섯 명의 행복한 형제들과 관심자들은 다가오는 비행기가 폭음을 울리면서 멈추었을 때, ‘라 아탈라야’(‘스페인’어 판 「파수대」)를 기운차게 흔들면서 ‘리마’ 공항에 있었다. 곧 열렬한 인사를 주고 받았으며, 손님들과 ‘페루’인 형제들은 한결같이 ‘빅터 루라’의 집에서의 모임을 기대하였다.

그 날 저녁에 기대에 가득찬 여덟명의 얼굴이 ‘노워’ 형제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놓여 있는 큰 책임을 설명하였다.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 집회가 정규적으로 개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페루’에 선교인들을 입국시키는 문제에 관하여도 설명하였다. 그것은 이 나라가 ‘바티칸’과 정교 조약을 맺은 이래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우기, ‘페루’ 대통령은 ‘로마 가톨릭’교를 제외하고는 어떤 조직도 대중에게 종교적인 예배를 열도록 허락하지 않는 통치를 하였었다. 그렇게 할 경우의 벌은 어떠하였는가? 2일에서 30일까지의 구류와 2‘솔’에서 50‘솔’까지의 벌금이나 혹은 이 중의 한 가지 형벌이다. 그러면 ‘노워’ 형제의 청중은 이러한 점들에 대하여 어떻게 느꼈는가? 그들은 두려움 없이 집집으로 왕국 소식을 전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그 모임은 끝났다.

이 방문객들은 남쪽으로 여행한 후에 3월 26일에 ‘리마’로 돌아 왔다. 18명이 그 날 저녁에 그 집회에 모였으며, 그들 중에 네명은 ‘브루클린’에서 온 두명의 그 방문객과 ‘앨버어트 만’ 및 ‘잭 파우어스’ 형제들로서 이들은 ‘길르앗 학교’를 졸업하고 남쪽으로 그들의 임명지로 가는 도중에 ‘리마’에 잠깐 들렀던 것이다. ‘프랜즈’ 형제는 ‘노워’ 형제가 재방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할 때 영어를 ‘스페인’어로 통역하였다. ‘노워’ 형제는 또한 ‘여호와의 증인’들의 지방 회중을 조직하는 것의 가능성을 토론하였다. 그 새로운 사람들은 그것을 원하였는가? 진실로 그러하였다! 또한 참석자들 중 얼마는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고자 하는 그들의 소망을 표시하였다. 그리하여 ‘만’ 형제와 ‘파우어스’ 형제가 또 다른 모임을 위하여 다음날 저녁에 다시 오도록 마련되었으며, 그 다음날 저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하여 또 모여야 했다. 이것은 ‘페루’에서 처음 있는 그리스도인 침례의 기회였다. 그 때 세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헌신을 표시하였으며, 그 중의 한 사람은 ‘패드로 가레이’였다.

선교인들이 거들어 주다

정부는 증인 선교인들의 입국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1945년 10월에 협회는 ‘볼리비아’에 있는 두명의 선교인들에게 우리의 선교인들에 대한 ‘비자’를 가로막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외무부와 접촉을 하도록 하였다. 문의를 통하여 선교인들은 여행자로서 그 나라에 입국하여, 각자가 그 당시 25‘달러’를 지불하면, 여기에 머무르기 위한 ‘비자’를 취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많은 서신 연락과 많은 노력을 바친 후에 여덟명의 선교인들이 마침내 1946년 10월 20일에 ‘페루’에 도착하였다. 이 최초의 집단에는 이곳에서 양과 같은 사람들을 돕는 데 수십년을 바친 ‘월터’와 ‘크리스틴 아킨’ 그리고 ‘넬레나’와 ‘베르다 푸울’이 들어 있었다.

그리하여, 1946년 후반에 이들—여덟명의 열정적인 선교인들이 이곳에 도착하였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 앞에는 새로이 펼쳐진 구역이 있었다. ‘그들에게 활동하도록 인도하는 큰 문이 활짝 열렸다.’ (고린도 전 16:9, 신세) 이들은 새로운 언어를 습득해야 하였다. 그러나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들이 ‘스페인’어를 알지 못하지만 숙박할 여관을 찾아내야 하였다. 이 숙소는 매우 협소하였다. 네명의 독신 자매들은 잠글 수도 없고, 문을 거는 지렛대도 없는 좁은 방에서 유숙해야 했다. 낯선 환경에서 조심하려고 그들은 그 날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문에다 모든 가구를 겹쳐 쌓아 놓는 예방 조처를 취하였다.

언어와 통화 가치에 대한 지식의 결핍으로 집을 구하러 다니는 일이 매우 힘들었다. ‘페루’에 온지 두 주일 만에 선교인들은 셋집을 하나 찾았으나, 세가 너무 비쌌다. 그리하여 한 달 후에 또 다른 집으로 이사하였다. 자매들은 자기들의 짐 보따리와 몇개의 소지품을 날랐고 ‘아킨’ 형제는 더 무거운 것들을 ‘택시’로 날랐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자리를 잡게 되었다.

‘리마크’에 사는 관심자들과 선교인들의 첫 집회는 그 새로운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 나타났다. 그래서 ‘루라’ 가족과 ‘가레이’ 가족이 이 새로운 선교인 집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도록 초대되었다. 첫 회중 집회가 이곳에서 열렸으며, 불과 네명의 ‘페루’인들이 선교인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초기 몇 주일간에 선교인들은 많은 우연한 기회의 증거를 하였으며, 그들이 속히 ‘페루’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페루-북미 문화원’에서 2개월간의 ‘스페인’어 강습을 받기로 하였다. 강습료는 각자가 지불하였다. 이제 그들은 예습을 해야 하였고 더 많이 ‘스페인’어로 이야기를 해야 하였다. 일치된 노력은 그들의 어휘를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강습을 받으러 가고 오는 동안 그들은 거리의 이름과 다양한 간판에 표기된 글자들을 발음하는 연습을 하였으며, 한 선교인은 다른 선교인들의 발음을 시정하여 주었다. 그들은 발전하였고 그들의 기쁨은 컸다.

‘스페인’어를 배우는 것은 ‘페루’에 임명된 많은 ‘길르앗’ 훈련받은 선교인들에게 하나의 “모험”이 되었으며, 가르치는 방법도 여러 가지였다. 예로서, 한 과정은 이들 새로운 선교인들은 도착 즉시 두 달 동안 집중적인 교육을 받는 것이다. 첫 달에는 하루에 11시간씩 ‘스페인’어에 자신을 사실상 “담그”는 것이다. 둘째 달에는 그들의 시간의 절반은 집에서 언어를 공부하는 데 바치고, 다른 절반은 야외에서 그 지식을 활용하는 데 바쳤다. 물론, 새로운 선교인들은 ‘스페인’어를 배우는데, 선교인 집 식탁에 둘러 앉아서 ‘코오피’를 마시면서 이 언어로 이야기하는 “선배” 형제들의 말하는 것을 듣는 데서 항상 유익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의심의 여지 없이 언어를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것은 야외 봉사를 하는 때였다. 여러 해 전에 왕국 전파 사업에 “증거 카아드”가 사용된 때가 있었으며, 거기에는 훌륭한 증거 내용이 ‘스페인’어로 인쇄되어 있어서 집주인에게 그 ‘카아드’를 읽어 보도록 부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선교인들은 또한 앵무새처럼 암송할 수 있는 짧은 제공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러면 문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나중에 ‘페루’에 온 선교인 중의 한 사람인 ‘에드나 워터폴’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 혼자의 힘으로 증거를 해야 했던 그 첫 집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 여호와께서는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을 나에게 주셨읍니다. ·⁠·⁠· 나는 별안간 식은 땀이 나기 시작하였읍니다. 가정부가 나와서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었으며, 나는 집주인 부인을 만나기를 원한다고 말하였읍니다. ·⁠·⁠· 나는 조용히 여호와께 도움을 기도하였고, 가정부가 다시 나와 나를 거실로 안내하였읍니다. 친절한 미소를 머금은 주인 부인이 나와 나의 말을 들으려고 자리에 앉았읍니다. 나는 암기한 연설을 끝까지 더듬거렸으며, 그에게 증거 ‘카아드’를 보여 주고 ‘스페인’어 「‘왕국은 가까왔다’」 책을 제공하였읍니다. 부인은 그 책을 받았으며, 나는 성서 연구를 마련하였읍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나의 ‘스페인’말이 미천이 다 들어났읍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재치있게 퇴장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그 부인이 나의 입장을 눈치 챈 모양입니다. 그 부인은 웃으면서 아주 숙달한 영어로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좋습니다. 아주 잘하셨어요. 나는 공부를 해 보겠어요. ‘스페인’어를 배우시는 데 도움이 되도록 온전히 ‘스페인’어로 하십시다.’ 나는 깜짝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부인은 영어를 아시는군요? 그러면서도 저의 이 엉터리 ‘스페인’어로 말을 다하게 하셨군요?’ ‘유익을 얻으시라고 그렇게 한거죠’라고 그 부인은 대답하였읍니다. 사실 그러했고 우리는 훌륭한 연구를 하였읍니다.”

‘리마’에서 훌륭한 출발을 하다

1946년 12월 5일에 선교인들은 체류자로서 ‘페루’에 머무를 수 있다는 공식 통지를 받음으로써 여호와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참으로 좋은 일이었다! 그로부터 정상적인 호별 방문 증거 사업이 시작되었다. 선교인들은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데 온전히 그들의 시간과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여덟명으로 된 최초의 집단은 ‘리마’를 여덟 구역으로 나누었다. ‘아킨’ 형제와 부부는 ‘린스’라는 지역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기 시작하였으며, 대단히 생산적인 밭임이 판명되었다. ‘아킨’ 자매는 그곳의 첫 집에서의 증거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그 자매는 그 집 안주인에게 증거 ‘카아드’를 제시하였고, ‘스페인’어 성경을 한 두 귀절 읽었으며, 서적에 대한 헌금을 이야기하였다. 그 부인은 흥미를 가진 것 같이 보였는데, ‘스페인’말로 무엇이라고 술술 이야기하면서, ‘아킨’ 자매를 거리로 밀고 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양복점 앞에서 멈추었다. 그 부인은 결혼 반지를 가리키므로 그것이 양복짓는 자기 남편에게 이야기하기를 원한다는 것임을 ‘아킨’ 자매는 깨달았다. 우리 자매는 그곳에 양복짓는 사람이 한 사람만 아니라 다섯 명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여호와께 마음 속으로 기도를 하고, 이 자매는 용감하게 증거를 하였으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책을 제공하였다. 다섯명 모두가 ‘아킨’ 자매와 이야기를 하려고 하였는데, 마침내 주인이 그 자매의 결혼 반지를 가리켰다. 그 뜻은 나의 남편과 다시 오라는 의미였다. 사실, 이것은 가정 성서 연구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여호와의 봉사의 동료가 된 얼마의 “천거서”가 되게 하였다. (고린도 후 3:1-3) 수년 후에 ‘아킨’ 부부는 ‘리마’에서의 그 첫 성서 연구로 기인한 “천거서”들을 지적할 수 있었다. ‘루이스’와 ‘아드리아나 산체스’는 후에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이들 양복짓는 다섯 사람들 중의 또 다른 사람인 ‘플라비오 라모스’는 결국 ‘리마’에서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그 양복점에서 ‘아킨’ 자매로부터 책을 받았던 한 젊은이는 후에 ‘안데스’ 고지에서 봉사하는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우리의 사업이 수도 전체로 확대되어 식민지 ‘리마’의 가장 오래된 구역인 ‘배리오스 앨토스’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많은 서책들이 큰 통로 혹은 “내부들”의 한 곳에서 전해졌다. 증인들이 그들의 사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돌아왔을 때에, ‘넬레나 푸울’을 만나기 위하여 어떤 집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그는 일주일 전에 그의 동료, ‘라스태니아 루라’로부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책을 받았으며, 그 책을 전부 읽었다. 그 사람은 여러 가지 질문을 기록한 종이를 가지고 있었으며, 마침내 그 대답을 얻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이 사람—‘레오폴도 산체스’—는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고 야외 봉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1948년 1월에 침례를 받았으며, 4년 후에 ‘페루’에 있는 그 지방 형제들 중에서 최초로 등록된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내지로 들어가다

1947년 중반에는 약 20명이 ‘리마’에서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나라의 다른 지역들에서는 어떠하였는가? 사실, 수도를 벗어나 ‘페루’의 내지에서의 선교인들의 모험적인 첫 사업은 1947년 6월에 착수되었다. 1943년 이래 하나님의 백성과 연합해 온 ‘가레이’ 가족은 ‘우앙카요’에 재산이 있었다. ‘안데스’ 고지에 있는 이 도시는 수도에서 기차로 약 12시간 걸리는 전형적인 ‘인디언’ 구역이었다. 그리고 널리 사용하는 언어는 무엇이었는가? ‘잉카’족의 옛부터 전해 오는 언어인 ‘키츠웨이’어였다.

‘마리아 가레이’ 자매는 ‘우앙카요’에서 부지런히 증거하였으며, 그곳에서 관심자들을 발견하였다. 이 자매는 증거 ‘카아드’를 사용하였고 가방이 아니라 잡지 주머니를 메고 다녔다. 그러나, ‘가레이’ 자매가 가두 잡지 배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나라의 법은 ‘로마 가톨릭’ 국교 이외의 다른 어떤 종교도 거리에서 어떤 형태의 종교적 활동을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것은 개종시키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약간의 헌금으로 사람들에게 서적을 “제공하는 것”으로 말하여지지만, ‘페루’에서는 공식적으로 “서적 행상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집집으로 성서를 “팔러” 다니는 사람으로 고려되었으며, 그것은 합법적이었다.

좌우간, ‘가레이’ 자매는 비록 어려움이 많았지만 하나님의 봉사에 바빴다. 사제들은 집집으로 쫓아가서 ‘가레이’ 자매가 사람들에게 전한 서적을 몰수하였다. 이들 교직자들은 또한 그에게 돌을 던지도록, 그리고 “이단자” 혹은 “프로테스탄트”라고 외치도록 어린이들을 충동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앙카요’에서 성서 진리에 관한 충분한 관심이 불꽃 튀어 ‘리마’의 증인 선교인들이 방문해 보게 하였다.

‘우앙카요’로의 여행은 참으로 특이한 경험이다. 기차는 골짜기와 약 3,340‘미터’ 고도에 위치한 ‘우앙카요’ 시로 향한 긴 내리막이 시작되기 전에 거의 4,800‘미터’ 위로 향해서 삐걱거리며 올라간다. 충분한 산소의 부족은 심한 두통과 현기증, 심지어 졸도와 구토를 일으켜서 많은 여행자들을 괴롭힌다.

도착과 동시에 선교인들은 ‘가레이’ 자매와 즐거운 재회를 하였다. 도움과 충고가 주어졌으며, 하나님의 백성의 한 회중이 설립되었으며, 1948년 봉사 연도 끝에 다섯 명의 왕국 전도인들이 ‘우앙카요’에서 야외 봉사를 보고하고 있었다.

잡지로 진리를 전함

1940년대 후반까지 「파수대」와 「깨어라!」의 증가된 사용은 새로운 많은 사람들이 ‘페루’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과의 연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1948년경에 전 시간 왕국 선포자들은 매호 일곱부의 무료 잡지를 받고 있었다. 배부는 증가하고 있었지만, 모든 형제들이 그들의 잡지 모두를 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잡지들이 쌓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어떤 선교인들은 한 가지 생각을 해냈다. ‘우리가 특별한 한 날을 정해서 그 잡지들을 전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곧 ‘리마’의 ‘리막’ 지역에 있는 몇 명의 선교인들은 매주 토요일 증거 사업에 잡지를 사용하였다. 이 활동의 성공을 주시한 다른 전도인들도 그 일에 가담하였다. 오래지 않아, 매주 토요일이면 그 지방 형제들도 가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잡지를 제공하는 일에 바쁘게 되었다. 그리고 짧은 시간 내에 이 생산적인 활동을 위하여 점점 더 많은 잡지를 신청하게 되었다.

후에 ‘노워’ 형제가 ‘페루’를 방문하였을 때, 그는 ‘리마’에서 다른 지역보다 잡지가 더 많이 배부되는 이유를 아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 이유인즉 형제 자매들이 집단 잡지 봉사를 위하여 매주 토요일을 활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이 정기적인 “잡지 배부일”을 갖게 한 생각이었는가? ‘페루’에 있는 우리는 확실치는 않지만 상당한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좌우간, 많은 잡지 통로들이 생겼으며, 다수의 성서 연구가 잡지 배부의 결과로 시작되었다.

지부 사무실의 설립

우리가 ‘N. H. 노워’와 그의 비서인 ‘M. G. 헨첼’이 우리를 방문한다는 것을 알게 된 1949년 초에 흥분은 고조되었다. 따라서, 3월 5일에 약 50명의 형제들과 관심자들이 ‘리마’ 공항에서 그들의 도착을 환영하였다. 그 방문과 때를 맞추어 ‘라몬 다그니노’ 256번지 소재 선교부 왕국회관에서 대회를 개최하였다. 우리는 ‘노워’ 형제의 “때는 생각보다 늦다”라는 공개 강연에 224명이 참석한 것을 기뻐하였다. 이 방문 기간에 많은 증인들이 한 해안으로 가서 20명이 침례받는 구경을 하였다.

그러나 ‘페루’인들에게 놀라운 소식이 있었다. 잠시 후에 ‘노워’ 형제는 그의 방문의 주요한 이유 중 하나를 설명해 줌으로 선교인들을 기쁘게 하였다.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왙취 타워’ 협회는 ‘페루’에 지부 사무실을 설립할 계획이었다. 선교인 중에 한 사람이 첫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1950년 10월에 들어서서 새로운 지부는 여러 가지 혼란을 겪었다. 첫 번째 지부 감독자는 해임되고 그의 책임은 ‘길르앗’ 15기 졸업생인 ‘로버어트 호이트’에게 맡겨졌다. ‘리마’에서의 우리의 사업은 급속도로 확장하였고, 그리하여 그 해 말에 새로운 선교부가 수도의 ‘산 이시드로’ 구역에 설립되었다. 또한, 지부 사무실과 선교부는 ‘리마’의 중심지에 더 가까운 ‘파사제 벨라아드’의 새로운 장소로 옮겼다. 즉시 ‘호이트’ 형제는 지부를 잘 조직하기 시작하였으며, 앞에 놓인 어려운 사업을 위하여 준비하였다.

지방으로 들어가다

새로운 지부 사무실이 조직되었던 그 때, 우리의 활동은 확장되고 있었다. 예로서, 공개 강연이 마련되어 여러 곳에서 제공되었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당시 인구 근 7,000,000명의 이 나라에서 수행되어야 할 거대한 사업량은 상상하기에도 힘이 들었다. 형제들은, “추수할 주인”에게 더 많은 일군들을 보내 주실 것을 참으로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마태 9:37, 38) 즉시 응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길르앗’ 13기의 새로운 선교인들 21명이 ‘페루’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1949년 12월과 1950년 1월에 도착하였다. 북쪽 ‘트루히요’에 여섯명이 파견되었다. 남부의 대도시 ‘아레키파’ 시는 다른 일곱 명의 임지였다. 그리고 여덟 명의 봉사자들을 위한 한 선교부가 ‘리마’에서 서쪽으로 13‘킬로미터’ 떨어진 ‘페루’의 주요 항구 ‘카야오’에 세워졌다.

‘카야오’는 항구 도시였기 때문에 범죄와 부도덕이 만연하였다. 그래도 왕국 전파 활동은 그 곳에서 매우 생산적이었다. 사실상, 몇년 전에 ‘빅터 루라’가 그 항구 도시에서 소책자들을 배부하였을 때 그와 접촉을 가졌던 얼마의 사람들을 찾아내었다. 오래지 않아 ‘카야오’ 주민 다수가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들 중에는 ‘아아투로 구쯔만’과 그의 아내, 아울러 ‘마뉴엘 칼데론’과 ‘빅터 케스페데스’ 및 ‘카를로스 베가’ 가족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여섯개의 활동적인 회중과 연합하고 있는 도합 367명의 왕국 전파자들이 ‘카야오’에서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있다.

‘아레키파’는 ‘다루기 힘든 구역’이었다. 여러 해 동안 이 도시는 “작은 ‘바티칸’”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곳 대중이 ‘가톨릭’의 관습과 풍습에 깊이 젖어 있기 때문이다. 그곳의 새로운 선교부는 그리스도인 집회와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비록 부지런하고 철저한 호별 방문을 통하여 관심자들을 발견하긴 했지만 발전은 더뎠다. 그러나 한 경우는 일이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졌으니 한 관심자가 간절히 진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시오 발보아’라는 젊은이가 공원에 혼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미국 사람”을 몰래 살피고 있었다. 왜 이 사람이 ‘페루’에 왔을까? ‘발보아’ 씨는 알고 싶었다. 그 형제 ‘호레이스 크리스’는 그가 그리스도인이며 교역자라고 설명하였다. 그것은 ‘발보아’ 씨를 뜻 밖에 의아하게 만들었는데, 그가 알고 있던 교역자들은 모두 길고 검은 예복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증거가 시작되었고, 성서 연구로 이끌었다.

단 몇번의 연구 후에 ‘발보아’ 씨는 세속 직장을 찾아 ‘아레키파’를 떠났다. 얼마 후 그는 ‘카야오’로 갔는데, 거기서 그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그들의 집회 장소를 줄곧 찾아 다녔다. 마침내 그는 시장에서 노점을 다니며 잡지를 배부하고 있던 ‘찰로테 바론’ 자매를 만났다. 그에게서 지부 주소를 얻어서 ‘발보아’ 씨는 그리스도인 집회에 몇번 참석하였다. 그러자 그는 세속 직장을 찾아 다시 한 번 이동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안데스’ 고지에 있는 ‘주마사’의 ‘바나듐’ 광산촌으로 갔다. 그러나 서신을 통해서 지부 사무실과의 접촉은 유지되었다. 또한, 길고 힘드는 여행임에도 불구하고 ‘로버어트 호이트’는 ‘발보아’ 씨를 방문하였다. 이것은 그 젊은이를 영적으로 강화시켜 주었으며 또한 그를 도와 증거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 후에 그는 혼자서 증거 사업을 수행하였다. 나중에 그가 ‘아레키파’로 돌아 왔을 때 선교인들은 ‘발보아’ 형제가 전 시간 전파 사업을 시작하도록 영적으로 도와주었다.

북쪽으로 ‘투루히요’에 선교인 ‘하아베이 콘로우’는 양과 같은 ‘엔카아나시온 리이바’를 발견하였다. 이 부인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지만, 겨우 듣는 것만으로도 성서 진리를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 때에 결심을 굳힌 51세 된 이 부인은, 글자를 알아 보고 글자를 모아 단어를 만드는 법을 공부할 수 있는 책을 구하였다. 그의 딸들의 도움을 받아 곧 읽고 쓸 수 있게 되어서 ‘투루히요’에서 유능하게 왕국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진리가 그를 자극하지 않았다면 글을 알려고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후에 시인하였다. 1967년에 사망할 때까지 ‘리이바’ 자매는 여호와의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증인이었다.

‘뉴우요오크’ 시의 유명한 ‘양키스타디움’에서 1950년 7월 30일부터 8월 6일까지 열린 「신권 통치의 확장」 대회는 이곳 ‘페루’에서 흥분을 일으켰다. 열 두명의 선교인들은 세명의 지방 전도인들을 동반하여 그 여행을 하였다. 뒤에 남아 있는 겸손하고 사랑스러운 ‘페루’인 증인들은 다시는 그 선교인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그들의 임명지로 돌아왔다.

‘초시카’의 불량배

1950년에 ‘에밀’과 ‘클라라 뮐러’가, ‘리마’에서 동쪽으로 자동차로 약 한 시간 거리인 내륙 도시 ‘초시카’로 ‘스위스’에서 이사왔다. 나중에, ‘파이오니아’ ‘레오폴도 산체스’가 이 도시에서 증거하고 있는 중에 그들을 만났는데 ‘뮐러’ 형제는 수력 발전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좀더 후에, 1955년 7월에 특별 ‘파이오니아’ ‘베리 마이어’는 ‘초시카’에서 봉사하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마이어’ 자매가, 광신적인 ‘가톨릭’교인으로 그 지방 사제와 절친한 친구인 부인집을 방문하였다. 그 부인은 ‘여호와의 증인’이 자기 집 문을 두드린다는 이유로 화가 나서 날 뛰었다. ‘마이어’ 자매와 그의 젊은 ‘파이오니아’ 동료가 길을 따라 조금 내려 가기도 전에 불량배들인 일단의 젊은이들을 데리고 와서 그 격분한 부인이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 ‘가톨릭’ 동네에 와서 이 두 증인들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를 그 폭도들은 알기를 원하였다. 물론, 그들은 선한 그리스도인 사업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마이어’ 자매는 대답하였다! 그러자 사제가 나타났다. 그는 그 두 증인에게 즉시 떠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한 때 그 사제의 ‘가톨릭’ 여자 친구였던 그 젊은 ‘파이오니아’ 자매는 그에게 성서 어디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지 말라고 하였는지를 보여 달라고 하였다. 이번에는 그 사제가 노발대발하였다. 결국 그 자매는 이 젊은 불량배들 앞에서 옛 남자 친구를 꼼짝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 장면이 우습기 까지 하였지만, 뒤따라 일어난 일은 그렇지 않았다. 그 두 자매가 돌아서서 길을 내려가기 시작하자 그 젊은이들은 작은 돌멩이를 싼 진흙 뭉치를 그들에게 던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두 그리스도인이 진흙으로 완전히 뒤덮힐 때까지 집어 던졌다. 돌멩이 하나가 그 젊은 ‘파이오니아’의 귀에 맞아, 피가 많이 흘러 내렸다. 나중에, 한 나이든 흑인 신사—열렬한 ‘가톨릭’교인—가 그 자매들을 그의 ‘스페인’식 정원으로 불러들이고는 그 젊은이들을 야단을 쳐 쫓아 버렸다.

‘마이어’ 자매는 즉시 경찰서로 가서 그 사실을 고발하고 보호를 요청하였다. 그래서 사복 경찰관 한 사람이 자매들이 봉사할 때 동반하여 다니도록 임명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몇 명의 젊은이가 돌을 던져 다시 성가시게 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사복 경찰관은 그들을 잡아서 이름을 적고는 그들의 가족들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그 일 후에는 ‘초시카’에서 폭도들에게 시달리는 일은 없었다.

선교인들을 위한 새로운 마련

‘길르앗’에서 훈련받은 선교인들은 상당수가 1950년대 초에 ‘페루’로 계속 들어왔다 예로서, 1952년 말까지, 46명의 선교인들이 이 나라에 왔다. 그 가운데 20명은 돌아 갔는데,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선교인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6명은 ‘페루’의 밭에 남아서 활동하였다.

1952년에 ‘페루’로 오는 선교인들을 위한 색다른 마련이 생겼다. 더 이상 그들은 과거의 경우처럼 가르치는 자로 입국할 수 없었다. 그들은 여행자이어야만 입국할 수 있었다. 일단 ‘페루’에 오게 되면 그들은 서반구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산 마르코스’ 대학에 등록하였다. 그들은 그 나라 말을 공부하였으며, 그 조건하에서 학생으로서 영주권을 신청하였다. 그들이 영주 ‘카아네트’, 즉 영주 허가서를 받아야만 다른 ‘길르앗’ 졸업생들처럼 그들의 선교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 마련은 아주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약 4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중국으로’?

1953년 초에 그 해 7월 19일에서 26일까지 ‘뉴우요오크’ 시에서 개최될 ‘신세계 사회’ 대회에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20명의 선교인들과 ‘페루’의 증인 부부 및 ‘볼리비아’에서 온 18명의 형제들은 전세 비행기편으로 대회 도시에 갔다. 영적으로 보상을 준 그 대회 후에 곧 더 많은 선교인들이 ‘페루’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 나라에 있는 왕국 선포자들이 즐긴, 세워 주는 특별한 일은 1953년 말에 있었다.

1953년 12월에 ‘N. H. 노워’와 ‘M. G. 헨첼’ 형제가 ‘페루’를 방문하였다. 며칠 간의 노력 끝에 우리는 그 방문을 위한 매우 적절한 집회 장소로 ‘리마’의 주거 단지 ‘푸에블로 리브레’에 있는 ‘살롱 마제스틱’을 구하였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노워’ 형제가 대회 결론 연설에서 한 말이었다. 선교인들이 ‘페루’에 와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페루’ 형제들이 도달할 수 있는 필요한 영적 장성에 이르러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 내에서 여러 가지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임을 ‘노워’ 형제는 지적하였다. 일단 그 일이 성취되면 선교인들은 다른 밭에서 봉사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 때가 되면, 우리는 선교인들을 중국으로 보낼 것입니다.” 하고 그는 강당을 둘러 보면서 말하였다. 물론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노워’ 형제는 ‘페루’의 선교인들의 특권과 책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페루’ 사람들 가운데서 할 일이 많았다. 따라서, 임명되지 않은 구역을 돌보는 일이 1953년에 시작되어서 1954년에는 더욱 힘차게 추진되어 당시 사업의 특징을 이루었다. ‘리마’와 ‘카야오’의 회중들은 “좋은 소식”을 선포하기 위해서 그 주변의 모든 지역으로 뻗어 나갔다. ‘리마’의 형제들인 ‘푸엔테피에드라’와 ‘안콘’ 및 ‘우아랠’ 방향으로 향하는 동안, ‘카야오’의 증인들은 ‘카네테’와 ‘친자알타’까지 멀리 내려 갔다.

영적 강화의 시기

1952년에 ‘페루’에서 봉사하는 26명의 선교인들 외에도, 260명의 왕국 전도인들이 당시에 활동하던 일곱개의 회중과 연합하고 있었다. ‘리마’에 두 회중, 그리고 ‘카야오’와 ‘아레키파’와 ‘트루히요’, ‘초시카’ 및 ‘우앙카요’에 각각 하나씩 있었다. 삼년 후인 1955년에 ‘페루’에는 평균 전도인 수가 460명이었고, 최고수는 563명이었다.

이 전반적인 기간에 계속된 증가로 ‘페루’의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으로 강화시키는 일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게 되었다. 한 가지 점은 자라나는 자녀들이 거짓 종교의 가르침에 물들지 않도록 관심을 기울여야만 하였다. 법률은 국교인 ‘가톨릭’교를 모든 학교에서 가르치도록 요구하였다. 그렇지만 비‘가톨릭’교인은 이 종교 교육에 대한 면제를 신청하여 허락받을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특정의 사람이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으로서 다른 근원에서 적당한 종교적 훈련을 받고 있다는 취지의 편지문들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서신들은 학교 당국자들에게 제출되었으며 문교부에서 신청서들을 고려한 후에 면제가 허락되었다. 특히, 그 때 이후로 ‘페루’인 증인들은 이 방법을 사용하여 그들의 취학 연령의 자녀들이 큰 ‘바벨론’의 거짓 가르침과 관습에 노출되는 것을 막아 왔다.

도덕적인 정결함의 필요성을 크게 강조하는 일 역시 필요하게 되었다. ‘페루’에 있는 어떤 남자들은 부인을 한 사람,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을 동시에 데리고 살았으며, 각 부인들로부터 자녀를 가졌다. 다른 경우는 한 남자와 여자가 몇 명의 자녀들과 같이 존경받을 만한 가정으로서 함께 생활하였지만 그들의 동거를 합법화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므로 결혼을 성서적으로 귀히 여기는 일을 보호하기 위해서 얼마의 심각한 결정을 내려야만 하였다. (히브리 13:4) 각자의 환경은 다양하였지만, 오늘날 다수의 ‘페루’인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도덕적 문제들을 경건한 방법으로 해결하였다는 사실로 깊은 만족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순회 사업의 도전

1953년으로 소급해 보면 ‘페루’ 전체는 단 하나의 순회구로 이루어져 있었다. ‘시드니 프레이저’가 그 해에 지부 감독자가 되었을 때에 ‘로버어트 호이트’는 야외에서 순회 감독자로서 봉사하기 시작하였다. 성서 진리에 관심을 나타내던 여러 격지 집단들과 일곱개의 회중을 방문하면서 그 나라 전역을 여행한다는 것은 상당한 도전이었다.

잊을 수 없는 한 여행 중에 ‘호이트’ 형제는 산맥으로 마른 생선을 운반하던 ‘트럭’의 적재함 짐 속에서 거의 20시간 동안을 앉아 있어야 하였다. 산맥의 ‘호텔’ 숙소 시설에는 항상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었다. 다인용 숙실이 거기에서는 애용되고 있었다. 방 하나에 침대가 여럿 있어서 남자든 여자든 그 곳에 오게 되어 숙소가 필요하게 된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었다. 습관적으로 가지고 다니는 쇠사슬과 자물쇠를 잘 이용하여 ‘호이트’ 형제는 어떤 침대의 머리맡에다가 그의 여행 가방을 쇠사슬로 매어 놓고는, 목욕탕이나 혹은 그 비슷한 것을 찾으러 나갔다. 돌아와 보니 여자 한 사람이 그의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여자는 거기서 자려고 결정하였던 것이다. 사용할 수 있는 다른 침대가 없었으므로 이것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 침대의 머리맡에는 자물쇠가 채워진 우선권의 증거가 있었다! 다행히도 ‘호텔’ 관리인이 일을 바로 잡아 주어 우리의 순회 감독자는 그 침대를 차지하여 참으로 필요했던 밤의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그리스도인 활동을 번영케 하셨기 때문에 순회구 수는 자연히 늘어났으며, 더 많은 순회 대회들이 계획되었다. ‘리마’의 ‘서어킬로’ 구에서 개최되었던 순회 대회의 참석자들 중에는 치과 의사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그를 무척 반대하였다. 그가 대회장에 도착했을 때 그가 신고 있는 침실 ‘슬리퍼’는 참으로 눈길을 끌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실은 내 아내가 여기에 오지 못하도록 구두를 감추었답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왔읍니다!”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렇다, 극복해야 할 크고 작은 장애물들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진리에 굳게 머물러 있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영화 상영이 많은 사람들을 돕다

1954년에 ‘페루’에서 우리 사업의 새로운 형태의 일이 시작되었으니 그것은 영적으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활동 사진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왙취 타워’ 협회에서 제작한 이러한 영화들의 첫 번째 것의 제목은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였다. 그것은 관람자들에게 참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을 잘 살펴볼 수 있도록 마련된 이 영화를 보기 위하여 수백명이 모여 들었다.

해발 4,600‘미터’ 높이의 ‘카사팔카’의 ‘인디언’ 광산촌의 한 노동회관에서도 이 영화가 상영되었다. 그 회관은 수력 발전소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전압이 너무 높았다. 영사기를 최저 속도로 돌렸는데도 ‘필름’은 대본 낭독자가 따라 갈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돌아 갔다. 그에 더하여, 해발이 높아 공기는 탁하여 호흡하기가 어려웠다.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몇 군데의 구멍이 여기저기에 나 있었다. 그런데도 모든 참석자들은 그 상영을 즐겼다.

1954년 9월에 ‘카야오’의 한 순회 대회에서 ‘필름’을 상영하였는데, 첫 번째 물레가 돌아갈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두번째 물레가 돌아가는 동안에 그 영사기의 ‘필름’ 감는 장치가 고장이 나 버렸다. ‘필름’이 영사기에서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마침내 고장난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온 마루 위에 ‘필름’더미가 쌓여있었다. 그렇다, 형제들의 손으로 그것을 감느라고 수분이 지나갔다. 나머지를 상영하는 동안에 물레 감개를 손으로 돌려야만 하였지만 그 상영은 계속되었다.

수년 후에 협회의 “온 세상에 ‘영원한 기쁜 소식’을 전함”이란 ‘필름’이 ‘페루’ 도처에서 상영되었으며, 그것은 확실히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인 큰 ‘바벨론’에게 강타를 가하였다. ‘토퀴팔라’에서는 3,251명의 청중이 관람하였다. 사실 전형적인 어떤 사제 한 사람이 그 ‘필름’의 상영을 방해하려고 있는 힘을 다하였다.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그 ‘필름’ 상영이 시작된 후에 분명히 호기심에서 어두운 강당으로 살금살금 들어왔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불이 들어오자 그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훤히 드러났다. 입장이 너무 난처하게 되자 일어나서는 어린 아이 같이 큰 소리로 “큰 ‘바벨론’은 무너졌다. 큰 ‘바벨론’은 무너졌다”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춤추는 듯이 강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참석한 많은 ‘가톨릭’교인들은 그들의 사제가 스스로 이 ‘바벨론’적 구경거리를 연출하는 것을 지켜 보았다.

선교인 입국이 쉬워지다

1955년까지도 ‘페루’에 들어오는 모든 선교인들은 여전히 여행자로 입국하여 거주 허가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산 마르코스’ 대학에 입학해야 하였다. 그러나 선교인 ‘루실레 라프레이저’는 이 나라에 도착한 직후 ‘린스’에서 호별 방문 증거를 하다가 외무부의 어느 관리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이 여자가 선교인으로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고는, 물론 그의 이름을 알아내었다.

며칠 후에 ‘넬리나’와 ‘베르다 푸울’ 그리고 ‘라프레이저’ 자매는 ‘넬리나’가 인쇄물을 전한 한 변호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 자매를 따로 불러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넬리나’, 당신네 선교인 한 사람이 난처하게 되었더군요.” 무슨 말이었는가? 사실은, 외무부에 들렀다가 이 변호사는 ‘라프레이저’ 자매의, 거부 결제가 난 영주 신청서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가 이 전에 외무부의 그 관리 집을 방문했던 결과로 이런 일이 발생했음이 분명했다. 즉시 그 일은 협회의 지부 사무실에 보고되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하여 이미 관심을 나타낸 이 변호사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 선교인은 ‘페루’에 머물렀다. 이 변호사의 공로로 다른 선교인들도 그 나라에 들어가는 데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는 대학생으로서가 아니라 선교인들로서 입국할 수 있었다. 그 때 이후로 협회는 이 나라로 임명된 선교인들을 위한 ‘비자’를 수속받을 수 있게 되었다.

젊은이든 나이든 사람이든 ‘페루’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정부가 관련된 시험을 직면해 왔다. 예를 들면 법률에 의하여 19세가 된 모든 남자들은 등록하여 2년간의 군 복무를 해야 한다. 이것은 1956년 당시에 ‘쿠스코’와 ‘아레키파’ 및 내륙 지방의 다른 곳으로 증거하도록 파견된 특별 ‘파이오니아’들에게 문제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 중의 많은 수가 19세 내지 20세 정도의 젊은 형제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페루’에 있는 많은 형제들은 양심적인 거부자들, 즉 교역자들로 인정받으려 하였지만 당국에서는 ‘가톨릭’ 교직자들만을 종교적 교역자들로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교역자로 인정받으려다가 그리스도인 중립에 대한 입장 때문에 매를 맞고, 불결한 감방에 던져지고, 갖은 학대를 겪은 젊은 증인들이 적지 않았다. (미가 4:2, 3; 야고보 1:27) 이 나라에서는 ‘전술 배우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군 복무에서 면제시켜 주는 마련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리스도인 중립을 유지하는 일은 경건한 부모들과 그들의 어린 자녀들에게도 걱정거리이다. ‘페루’에서 취학 자녀들은 예비 군사 훈련 과정을 받아야 한다. 면제를 위한 어떠한 마련도 없으며, 훈련을 받지 않은 학생은 누구든지 그 학기 말에 그 학년에 대한 수료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한 학생은 졸업장을 받을 수 없다. 다른 방법으로 자녀들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돕는 길들이 있는데도, 어떤 사람들은 타협하여 그들의 자녀들이 ‘전술 배우기’를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침보테’에 있는 한 회중은 왕국회관에 학급을 조직해서 형제들 가운데 자진하는 사람들이 자녀들에게 여러 과목을 가르치도록 할 수 있는가를 문의하였다. 이 일은 좋은 결과를 내었는데, 이는 특히 그리스도인 활동하는 일도 격려하여 정규 학과 공부 후에 참여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 중립을 유지하고 우상 숭배를 피하고 구원을 여호와께 돌리는 일에 있어서 부모와 자녀들이 단지 사소한 문제들만 겪게 된 것은 아니다. (출애굽 20:4-6; 시편 3:8) 예를 들면 1970년 ‘토퀴팔라’의 광산촌에서 기 경례와 국가를 부르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0명의 증인 자녀들이 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별개의 다른 경우로는 이러한 의식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도록 그리스도인 자녀들이 당국자들 앞으로 불리워 갔었다.—마가 13:9; 베드로 전 3:15.

그리스도인 중립에 대한 우리의 입장 때문에 우리는 수년에 걸쳐서 문제들을 직면해 왔다. 예로서, 1975년에 증인 학생들이 국가를 부르는 데나 기 경례하는 데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하여 애국 사상의 물결이 일어나 우리는 대회 장소를 ‘트루히요’의 대학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변경해야만 하였다. 지방 관리들은 우리의 중립적인 입장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였으며 북부 ‘페루’에 있는 신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국가의 상징물에 경배하기를 거부하다”라는 1면 전단에 걸친 표제 아래 기사들을 게재하였다. 어떤 기사들은 우리가 “6개월간의 연구 과정”을 통하여 국가 이득에 위배되는 교리를 가르쳐서 사람들을 “세뇌”시킨다고 우리를 거짓 비난하였다.

수도 ‘리마’에서는 한 ‘가톨릭’ 사제가 일 주일간 하루에 두 차례씩 ‘라디오’를 통하여 그와 동일한 이야기로 설교하였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이 실제로는 진리에 대한 훌륭한 증거가 되었다. 그는 우리가 믿고 있는 바를 분명하고도 간결하게 명시하고는 1914년과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우리의 성서적인 견해를 논파하려고 몹시 애를 썼다.

그 불리한 선전과 병행하여 정부는 1976년 1월에 18세의 젊은 남녀들 모두는 군 복무의 의무를 위하여 등록해야 한다고 포고하였다. 여호와의 백성들은 법령에 응하여 등록하였다. 정규 ‘파이오니아’를 하는 젊은 증인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선택한 천직이 하나님의 말씀의 전도자라는 사실을 보증해 주는 편지들을 보급해 주었다. 알려진 바로는 이들 모든 ‘파이오니아’들은 여호와께 대한 봉사에 바친 그들의 헌신 생활에 관한 서류를 준비하여 그들이 전도자들이니까 군 복무로부터 면제해 달라는 진정서와 함께 그 자료들을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 전해에 군법 입문서에 의해서 종파의 제한 없이 교직자와 평신도들이 면제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항이 부가되어, 면제 신청서는 정부가 인정하는 종교인 ‘가톨릭’ 교회의 대주교의 서명과 인가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형제들은 등록할 때에 그들의 증거 서류와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어떤 사람들 것은 인가 도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부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것은 수락되었다. 그리고 1976년 1월에 그 첫 명단이 발표되었을 때에 적어도 얼마의 형제들은 종교적인 활동을 근거로 면제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회 “기록들”

이제 이 나라에서의 우리 그리스도인의 중립에 관한 이야기를 다 살펴보았으니 1950년대의 후반으로 돌아가 보자.

1957년, 그 해는 ‘브루클린’ 협회 본부의 ‘밀튼. G. 헨첼’의 잘 계획된 방문으로 시작되었다. 이 유익한 방문과 같은 시기에 계획된 대회로 ‘페루’ 전역에서 증인들이 모여 들었다. 첫 날에는 단 389명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일요일의 주요 연설의 청중은 1,044명에 이르렀다. 이 나라에서 한 대회에 처음으로 1,000명 이상 참석한 것을 본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었겠는가!

또 다른 대회 “기록”이 1958년에 수립되었다. 그 해에 밀림 한복판의 ‘아마존’ 강 기슭에 있는 ‘아키토스’에서 지역 대회가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그 적도 근처의 지역에서는 비를 예측할 수 없었으며 비가 많이 쏟아졌다. 한 형제가 ‘솔로몬’의 아가에 대한 연설에서 ‘오라, 나의 어여쁜 자여, 우기도 지나고 폭우도 그쳤도다.’라고 말하자, 그 순간 억수 같이 쏟아지는 폭우로 대회장의 양철 지붕이 요란한 소리를 내어 참으로 대조를 이루었다.—아가 2:10, 11, 신세.

그 대회 중에 침례를 줄 장소를 선택하는 일에는 조심해야만 하였다. 육식성의 ‘피라냐’ 물고기가 ‘아마존’ 강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우리는 내륙의 강들과 시내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침례를 아무런 사고 없이 치룰 수 있었다.

난관에도 불구하고 대회를 가짐

1958년 여름에 ‘뉴우요오크’ 시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들의 성의 국제 대회는 ‘페루’ 전역을 흥분시켰다. 많은 증인들이 그 여행을 위하여 저축해 왔었으며, 그리하여 출발의 때가 되었을 때에는 대표단은 82명이 되었다. 출발할 때에 약 350명의 형제들이 공항의 ‘베란다’에서 왕국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가슴을 뭉클케 하였다.

1958년 말경에 ‘리마’의 축구 ‘클럽’의 경기장에서 다음 1월에 개최될 지역 대회를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열렬한 ‘가톨릭’교인인 당시 정부의 지도자는 우리 대회를 폐쇄시키려고 결정했으면서도 대회가 시작한 그 날까지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모든 기구는 그 경기장으로 운반되고, 식당부는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오후 회기를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데, 한 ‘트럭’의 경찰관들이 경기장으로 몰려들어와 우리를 몰아내기 시작하였다. 그 정부의 지도자와 접촉하려고 노력하였지만 허사였다.

그 대회는 두개의 가장 큰 왕국회관으로 옮겨져야 했고, 연사들은 두 군데에서 연설해야 했다. 그래도 우리는 훌륭한 대회를 가졌으며 난관들은 더 나중에 있을 시련들을 위해 형제들을 강화시켜 주었을 뿐이다.

우리는 1958년 대회 연설 “크게 필요한 해외에서 봉사함”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 연설은 많은 나라에서 더 많은 왕국 선포자들이 필요함을 보여 주었다. 얼마 후 자신의 봉사를 확장시키는데 관심을 가진 상당수의 사람들이 개인으로 혹은 가족 단위로 이 나라에 이사왔다. 그러나 ‘페루’에 처음 도착한 사람들 중에 ‘캐나다’에서 온 ‘아일린 소비에’는 실제로는 1957년 9월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형제들과 자매들은 계속 오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떠나야만 하였지만, 우리는 그들 모두가 ‘페루’인 형제 자매들의 믿음을 세워 주는 데 무엇인가 기여하였음을 확신한다.

법적 등록

1958년 ‘뉴우요오크’ 대회에 참석하고 있는 동안 지부 감독자는 ‘페루’로 돌아가면 ‘펜실베이니아’의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를 등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다른 일보다 이러한 등록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1959년 4월 29일에 협회는 정식으로 등록되었다. 그 때 이후로는 회중이 매입하거나, 왕국회관 건축을 위하여 형제들이 기증한 재산은 모두 협회의 명의로 등록되었다.

“큰 재난”의 밤

본래, 발전 과정 모두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때로 비교적 작은 사건들이 커다란 문제들을 일으킬 수 있다. 이제, 우스개 말로 “큰 재난”의 밤이라고 불러온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보자.

선교인 ‘에드나 워터폴’과 ‘루실레 라프레이저’는 해발 약 3,800‘미터’ 높이의 ‘티티카카’ 호 연안에 위치해 있는 ‘푸노’에 임명된 적이 있다. 이 자매들은 그만한 고도에서는 제대로 가동시킬 수 없는 석유 난로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 저녁에 왕국회관에서 집회를 잘 마치고 ‘라프레이저’ 자매는 이층 침실로 올라 갔다. 그러나 전등을 켰지만 전등 뿐 아니라 다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난로가 두 시간 동안이나 검은 연기를 뿜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난로를 끄고 창문을 열어 놓고는 아래 층으로 내려왔다.

‘에드나 워터폴’은 ‘라프레이저’ 자매를 한번 쳐다보더니 놀라는 소리를 내었다. 저런, 그 자매의 얼굴이 그을음으로 시커멓져 있었던 것이다! 모두는 그 검은 “눈 뭉치”를 살펴보려고 이 층으로 터벅터벅 올라갔다. 그 날 저녁과 그 다음 날까지 대청소 작업을 해야만 하였다. 옷, 담요, 그리고 책들에 달라 붙은 그을음을 깨끗이 하자니 얼마나 고역이었겠는가! 그러나 그 주에 ‘푸노’에서 열린 첫 대회에 60명이 참석한 것은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교직자들이 반대를 조장하다

물론 우리는 믿음의 심각한 문제들과 시험들도 겪어 왔다. 때때로 우리는 노골적인 반대와 심지어 폭도들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밀림의 벽촌 마을 ‘모요밤바’에서 선교인 ‘프란시스’와 ‘엘리자베드 구웃’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그 곳에 가는 유일한 방법은 비행기를 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읍은 너무나 고립된 곳이었기 때문에 매우 종교적이었다. ‘스페인’ 사제들은 그곳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지배하였으며, ‘교회의 형상들에게 대항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난을 당하게 된다’는 감정이 스며들게 하였다.

‘모요밤바’에 도착하자마자, 우리의 선교인 자매들은 집집으로 증거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읍에서 새로이 마련된 그리스도인 집회에 오도록 사람들을 초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겨우 몇 명을 초대하였는데 삐라 쪽지들이 거리에 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 내용은? “‘모요밤바’에 위험 요소들이 있는데 지옥 뿐 아니라, 우리의 형상들도 믿지 않는 두 여자가 있다.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의 인쇄물도 받지 말라. 받은 것은 우리에게 가져오라. 그러면 우리가 처리할 것이다.”

그 일이 있자마자, 두 선교인들은 교직자가 선동하는 증오 운동의 대상이 되었다. 한 그리스도인 집회 도중에, 세 명의 사제들이 끌고 온 50명 가량의 남자들과 청년들로 된 폭도들이 한칸 짜리 벽돌 왕국회관으로 밀어 닥쳤다. 그 자매들은 문고리를 걸어 잠겄으며 그것은 반대자들에게 구타당하는 것을 막아 주었다. 그러나 폭도들은 다른 일보다도 바깥 벽 전면에다 쇠똥을 던졌다. 또한, 만일 선교인들이 그 읍을 떠나지 않는다면 신체적인 해를 입히겠다고 협박도 하였다.

다음 날 우리 자매들은 읍장에게 가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었는가를 설명하였다. 그는 놀랐으며, 그들은 그 현의 지사에서 항의서를 작성하여 보냈다. 그 자매들은 보호받을 것을 약속받았지만, 위협과 전반적인 학대는 계속되었다.

사제들은 교구 학교로 우리 출판물 한 부를 가져오는 소년에게는 만화 책을 한 권씩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상당히 후에야 지사는 ‘리마’에서 경찰관 한 명을 파견하여 그리스도인 집회들이 진행되는 동안에 왕국회관 문 밖에 서 있도록 하였다. 반대자들은 그 싸움에서 져서, 순회 감독자의 방문 때에는 집회에 26명까지 참석하였으며, ‘모요밤바’에서 교직자들이 반대를 조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양같은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던 것이다.

이제 교직자들의 반대가 좌절된 다른 예를 고려해 보자. 1959년 11월에 ‘레지널드’와 ‘아이렌 월워어크’가 ‘아야쿠초’에서 왕국 전파 사업을 시작하였다. 나중에 ‘메를리 로오렌스’와 ‘필리스 웨피너’가 그들에게 가담하였다. 사람들이 이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오래지 않아 사제들이 반대를 선동하였다. 그들은 교활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행정 당국자들에게 가서 그 읍에서 선교인들을 추방하는 모종의 조치를 취하도록 그들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그 결과 어느날 ‘월워어크’ 형제가 수사과 사무실로 불리워 갔다. 거기서 그는 많은 질문 공세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들은 아홉명의 사제와 지사가 서명한 진정서를 보여 주었다. 이 진정서는 ‘리마’에 보내졌었으며, 그래서 조사해 보라는 명령이 내려졌었던 것이다. 이 일은 심각해질 수 있었다.

‘월워어크’ 형제는 사제들의 모든 거짓말에 대해 정확하게 논박하였다. 최근에 와서야 지사와 이야기했었다는 것과 그가 이치적인 사람임을 알게 되었고, 성서에 대단한 관심이 있었다는 것 역시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인가? 그렇다, 지사 사무실의 어떤 자가 사제들과 공모하였던 것이다. 그 사람은 다른 서류 속에 그 진정서를 슬쩍 끼워 넣어 지사가 그 진상을 실제로 알지도 못한 채 그 서류에 서명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 모든 일은 협회의 지부 사무실에 보고되었으며, 우리의 사업이 ‘리마’에서 잘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 모든 음모는 더 이상 어려움을 주지 못하고 “수포로 돌아 갔다.”

물론 사제들이 그 일로 기뻐할리 없었다. 행렬 기도 중에 종교적 형상을 운반하면서 선교부를 지날 때면 언제나 꼭 멈추어서 선교부의 ‘발코니’를 쳐다보고는 거기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저주를 몇마디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확장의 시기

‘페루’에서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사업이 훌륭하게 발전하고 있을 때 ‘N. H. 노워’ 형제가 1959년 12월에 우리를 방문하였다. 그 방문과 관련하여 한 대회가 계획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전 해에 우리가 택한 대회장에서 내쫓겼었다. 그래서 그러한 일이 재발되는 일이 없도록 그 정부 지도자에 대한 인신 보호 영장 소송을 제기하였다. 소송을 제기받게 되자, 그는 그 전 해에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자기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심지어 자기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친구라고까지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U” 경기장에서 훌륭한 대회를 가졌으며 주 강연에는 2,000명은 족히 넘게 참석하였다. 그 수는 그 나라 왕국 전도인 수의 거의 두 배가 되는 수였다. 덧붙인다면, 우리는 인신 보호 영장 소송을 무기 연기하였지만, 그 서류는 ‘리마’의 법무성의 서류철에 그대로 남아 있다.

‘노워’ 형제 방문 당시의 임명된 지부 감독자는 ‘벤트 페더슨’이었다. 그런데 방문자의 협의 사항 중 주요 항목은 확장하는 일이었다. ‘리마’에 새로운 지부 겸 선교부 건물을 짓는 일이 고려되었다.

다음 해 6월에 ‘미라플로레스’에서 건축이 시작되었다. 협회는 738평방 ‘미터’ 넓이의 두 구획의 대지를 구하였다. 그 곳에 아름다운 이층 건물인 지부겸 선교부가 세워졌다. 일층은 사무실과 저장실, 넓직한 통행로와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왕국회관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층에는 12명의 선교인들과 ‘벧엘’ 가족을 위한 숙소가 있었다. 새로운 건물은 어느모로 보나 참으로 “우리 집”이었다. 1961년 10월에 건축을 마쳤으며, 새로운 건물은 그 달 21일에 봉헌되었다.

개인적인 책임 때문에 ‘페더슨’ 형제는 선교 봉사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 갔다. 그리하여 1961년 4월에 ‘돈 버어트’ 형제가 ‘페루’의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재난이 ‘이카’를 강타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사랑이라는 식별의 표를 가지고 있다. (요한 13:34, 35) ‘리마’에서 동남쪽으로 270‘킬로미터’ 떨어진 ‘이카’ 읍을 천재지변이 강타한 1963년 3월에 이 사실은 참으로 잘 증명되었다! 강의 수문을 관리하는 사람이 실수를 저질러서 그 읍과 많은 포도밭이 물에 잠기었다. 얼마의 증인들의 집을 포함하여 많은 집들이 그 지방 왕국회관과 함께 물에 휩쓸려 떠내려 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사랑이 작동하기 시작하였다. ‘페루’ 전국의 여호와의 백성들이 하나로 뭉쳐서 행동하였다. 신속히 구제 기금이 모아졌으며, 2‘톤’의 옷과 양식도 ‘이카’의 재난당한 동료 신자들에게 보내어졌다. 그렇다, 하나님의 종들은 서로를 실제로 돌보아 준다.

왕국회관 건축 문제들을 극복함

서로에 대한 사랑 이외에도 여호와의 백성은 그들의 노력을 자주 성공시켜 주는 다른 경건한 특성을 나타낸다. 이것은 1960년대 중반에 ‘트루히요’에서 있었던 일로 설명될 수 있다. 회중의 빠른 성장 때문에 왕국회관은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없게 되어 새로운 회관이 필요하게 되었다. 다행히 여호와께서 작은 대지와 왕국회관 건축을 위한 대부를 받도록 형제들에게 길을 열어 주셨다.

오래지 않아 형제들은 벽돌과 무거운 철근을 운반하고 건축할 대지에서 열심히 일하느라 바빴다. 물론, ‘시멘트’ 혼합기가 없었기 때문에 심지어 자매들도 “손으로” ‘시멘트’를 혼합하는 일에 매우 숙달되었다!

많은 난관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사무 처리”를 완료하도록 임명된 형제는 설계도들에 기사들의 서명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서명하는 일에 한 기사는 110‘달러’, 또 다른 기사는 150‘달러’를 요구하였는데 그것은 형제들이 지불할 능력이 없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신기한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하루는 “사무 처리”를 하는 형제가 은행에서 줄을 서 있는데 한 남자가 와서는 그 형제 앞에 새치기를 하였다. 그 형제는 불쾌하기는 하였으나, 그리스도인 자제의 열매를 나타내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로 그 날 어떤 사람이 그 형제에게 그 설계도에 필요한 서명을 받도록 어떤 기사를 소개해 와 접촉하도록 알선해 주었다. 그런데, 그 기사는 은행에서 우리의 형제 앞에 새치기를 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대단히 친절하였으며 자신이 좋은 일을 돕고 싶다고 하면서 보수로는 단지 11‘달러’만 요구하고는 그 설계도들에 기꺼이 서명하여 주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 특성을 나타내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 현재 ‘트루히요’에 서있는 왕국회관은 그 부근 그리스도인들의 훌륭한 특성과 수고에 대해서 말 없이 증거해 주고 있다.

다른 대회 “기록”

우리의 첫 번째 국제 대회가 1967년 1월 4일부터 8일까지 ‘리마’에서 열렸다. 여행 대표자들 가운데에는 협회의 감독자들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온 동료 신자들이 포함된 것에 ‘페루’ 형제들은 가슴 설레였다. 여러 나라에서 온 거의 500명의 증인들이 참석하였으며, 그들이 참석한 것은 분명히 그들의 ‘페루’인 형제 자매들을 세워 주었다.

‘F. W. 프랜즈’ 형제는 토요일 저녁에 5,940명의 참석자들에게 기조 연설을 하였다. 그러나 그 때까지 ‘페루’에서 한 대회에 참석하였던 가장 큰 청중이 다음 날 ‘노워’ 형제의 연설을 듣기 위하여 모였다. 청중은 6,925명이었다. 1967년의 ‘페루’의 왕국 전도인 최고수가 2,810명 뿐이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 참석수는 굉장한 것이었다.

1969년에 협회는 ‘페루’에 있는 51명의 선교인들과 순회 감독자들 및 다른 사람들이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어 외국의 대회에 여행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 마련에 그들은 감사하였으며, 이들 대회 참석자들은 이 나라에 있는 그들의 동료 신자들과 나눌 영적인 재산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1970년 1월에 ‘리마’에서 우리의 “지상의 평화” 지역 대회를 가졌다. 그 모임에서 7,414명의 최고 참석수를 올렸던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었던가! 증가된 활동은 1960년대의 후반에 열매를 맺었었는데, 그 이유는 1969년 기념식 참석수가 13,751명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우리는 1970년대에 들어 갔으며,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사업은 이 고대 ‘잉카’족의 땅에서 잘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수개월, 수년 후의 앞 날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가?

지진들!

‘페루’ 역사상 최악의 재난들 중 하나가 1970년 5월 31일 일요일 오후 3시 30분에 강타하였다. 그 때 거대한 지진이 ‘안데스’ 산맥과 해안 지방에 있는 마을들과 도시들을 뒤흔들어 완전히 쓰러뜨렸다. 여호와의 백성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으며, ‘침보테’, ‘카스마’, ‘우아라즈’, ‘트루히요’ 및 다른 지역의 왕국회관들이 손상되거나 완파되었다.

지진에 관한 ‘뉴우스’는 세계에 퍼졌다. 재빨리 여호와의 백성은 행동을 개시하였다. 그들의 반응을 보는 것은 참으로 흐뭇한 일이었다. ‘페루’와 다른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피해를 입은 형제들을 재빨리 원조해 주기 시작하였다. ‘브루클린’의 ‘왙취 타워’ 협회의 본부는 구제와 재건을 위해 25,000‘달러’와 15‘톤’의 의류를 보내왔다. ‘페루’ 내의 형제들은 3,091‘달러’를 기증하였으며, 전세계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2,084‘달러’가 도착하였다. 7‘톤’의 의류가 ‘리마’의 회중들에서 모아졌다. 한 동안 지난 후에 지진들로 인해 피해를 입은 ‘침보테’에 있는 세개의 왕국회관, ‘후아라즈’에 하나 그리고 ‘만코라’와 ‘술라나’의 회관들을 다시 짓도록 기금이 마련되었다.

주요 지진이 강타한 것은 일요일 오후였는 데도 화요일 저녁 늦게까지 길들이 개통되지 않았으며, 자가용 차들을 사용하도록 허락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하여 ‘라디오’를 통해 많은 공론이 있었다. 대담하게도 형제들은 네 대의 자동차, 즉 소형 용달 ‘트럭’들과 한 대의 10‘톤’ ‘트럭’에 보급품을 싣고서 수요일 오전 1시에 재해 지구를 향해 떠났다.

첫째로 도착한 읍은 ‘카스마’였는데, 당시 그 곳에는 20명의 전도인을 가진 회중이 하나 있었다. ‘카스마’의 건물들은 벽돌 건물들로서, 뒤흔들려 붕괴되어 먼지와 으스러진 돌더미가 되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심지어, 읍 병원은 강철로 보강하여 지은 것인데도 붕괴되었다. 불행하게도, ‘휘일 체어’를 의지하는 한 형제가 피신하지 못하여 그 재난으로 사망하였다. 형제들에게 배급하기 위해서 계획된 보급품들을 한 특별 ‘파이오니아’와 함께 남겨 놓았다.

그 다음에는 ‘침보테’ 차례였는데, 그 곳의 인구는 약 200,000명으로 추산되었다. 대략 300명의 증인들이 그 시에 있는 세 개의 회중과 연합하고 있었다. 모든 집들이 파괴되었으며, 왕국회관들도 그러하였다. 그래도 형제들은 한 회관의 ‘시멘트’ 바닥에서 으스러진 돌들을 소제하고, 돗자리로 벽처럼 가로 막아, 화요일 저녁에 그 곳에서 주간 회중 서적 연구를 보았었다. 식량, 음료수, 담요, 의류 등등의 첫 번째 구호품이 그 다음날 아침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안데스’ 산맥의 고지에 있는 ‘우아라즈’와 ‘카라즈’의 증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가? ‘라디오’ 보도에 따르면, 이 읍들은 지진이나 혹은 ‘우아스카란’ 산의 일부가 근처의 한 호수로 빠져들어 갈 때 생긴 거대한 진흙 산사태로 거의 흔적이 없어졌다. 비록 비행기들과 ‘헬리콥터’들이 피해 지역에 보급품을 떨어뜨렸으나, 8일이 지나서야 도로가 복구되었다는 것이 ‘라디오’에 의해 광고되었다. 즉시 두 대의 자동차에 보급품을 가득 싣고 몇 형제들이 ‘우아라즈’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20명의 전도인들과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들로 된 한 회중이 있었다.

도로상에서 지체되었고 위험들이 있었다. 그리나, 마침내 수요일 아침 일찍 형제들은 해발 3,000‘미터’ 쯤의 ‘우아라즈’에 도착하였다. 작은 천막들이 도시 전체에 생겨나 있었으며, 그것은 형제 자매들을 찾아내는 일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마침내 오후 5시에 ‘유우칼립터스’ 나무 가지들로 만든 오두막들에서 그들을 찾았다. 그들을 찾게 되어 얼마나 기뻤던가! 그리고 양식과 약품 그리고 극히 추운 밤에 따뜻하게 해 줄 석유 난로등의 보급품들을 받게 되어 그들은 얼마나 기뻤겠는가!

‘우아라즈’ 회중과 연합하고 있던 단 두 사람만이 부상을 입었으며, 그 재난으로 사망한 증인은 아무도 없었다. 부상당한 한 자매는 치료를 받도록 이미 ‘헬리콥터’가 ‘리마’로 태워 갔었다. 그리고 벽돌 파편 아래 묻혔으나 턱이 부러진 정도로 발견된 한 젊은 형제는 돌아 올 때 형제들이 ‘리마’로 함께 데려왔다.

‘카라즈’로

단지 얼마 후에 ‘카라즈’ 읍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일곱명의 형제들로 된 격지 집단이 하나 있었다. ‘우아라즈’와 ‘카라즈’ 두 읍 사이가 진흙 산사태로 완전히 덮혔으며, 모든 육지 통행로는 막혀 있었다.

1970년 7월 1일경, 우리는 ‘우아라즈’를 지나 산맥을 통과하여 ‘카라즈’로 갈 수 있게 허가해 달라고 신청하였다. 그러나 산을 따라 실제로 왕래할 경우라면 그 산을 오르겠다는 우리의 계획은 거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가를 맡도록 임명된 형제는 허가를 취급하는 그 사람과 자기가 성서 연구를 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황이 바뀌었으므로 그 관리는 형제에게 다섯대의 자동차 대열에 대한 허가를 해 주었으며, 그 서류에다 “우선권—여호와의 증인들의 대열”이라고 썼다. 비록 우리 형제들은 세번이나 정지당하였지만 그 때마다 그 허가서가 통과시켜 주었다.

‘우아라즈’에 멈춘 후에 다섯 대의 차 중에 네 대는 ‘카라즈’로 향했다. 어려움 없이 그들은 ‘란라이르카’ 읍을 강타하였던 첫 진흙 사태 지역을 통과하였다. 기사들이 진흙을 건너는 임시 도로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형제들이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는데 한 민방위 대장이 차에 접근하여 진흙으로 뒤덮혀 버렸던 마을 ‘융게이’까지 그를 태워다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것은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커다란 둥근 돌들과 바위들이 어느 곳에나 흩어져 있었다. 한 지점에서는 차들이 새로이 형성된 물살 센 강을 건너 가야만 하였다. 세 대는 건넜지만 한 대는 되돌아 가야만 하였다.

또 하나의 진흙 투성이가 된 마을 ‘융게이’에서는 냄새가 참으로 역겨웠는데, 그 이유는 많은 시체들이 진흙 사태가 난 곳 언저리 가까이에 눈에 띄게 있었기 때문이다. ‘융게이’를 떠나서 형제들과 그 대장은 ‘카라즈’로 계속 갔다. 그들은 도로 인부들이 만들어 놓은 땅으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갔다. 그리고 길이 나 있지 않은 황무지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모든 것이 잘 되어가다가 그들은 지반이 무른 지점에 걸려서 뒷바퀴 두 개가 다 지축까지 빠져 버리고 말았다. 모두 차에서 내렸다. 그 대장은 도로 인부 약 20명을 불러서, 지면이 불안정하게 움직였지만, 그들은 차가 빠져 나올 때까지 밀었다. 거기서 ‘카라즈’까지 가는 길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카라즈’는 강 줄기를 따라 내려 왔었던 진흙 산사태의 진로에 놓여 있었지만, 산 사태는 그 읍에 미치기 직전에 빗겨나갔다. 벽돌집 대부분이 지진으로 손상되었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그들의 소유물을 구해낼 수 있었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무사했으나 식량과 약품이 심하게 부족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천막, 식량, 담요, 그리고 ‘랜턴’ 등을 남겨 주었다.

‘카라즈’의 형제들은 ‘융게이’로 우리와 동행하였다. 그들이 ‘카라즈’로 추가 보급품을 운반해 가려고 그들의 등에 짐을 지기 시작하자 우리와 동행하고 있던 대장이 ‘트럭’ 한 대를 정지시켜서 그 운전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여기, 이 짐과 사람들을 당신이 가는 데까지 태워다 주시오” 그리하여 우리 형제들은 그들의 무거운 짐을 싣고 ‘융게이’ 진흙 산사태를 가로지른 길의 적어도 4분의 3은 타고 갔다. 거기서부터 길은 비교적 수월하였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 모든 일은 그 지역에 어떠한 통행도 허락되지 않는 동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증인’들이 자동차로 ‘카라즈’에 제일 처음 도착한 사람들이었다.

뒤이은 주간들에, ‘페루’의 다른 지역에서 온 영적 형제들의 방문을 통하여 재해 지구의 우리 동료 신자들은 가일층 강화되었다. 사실상, 그 기간에 한 순회 대회가 ‘침보테’에서 열렸으며, 그 시의 주민들은 이에 대해 매우 놀랐다. 그 모임은 여호와의 백성이 서로를 염려하는 사람들임을 보여 주었다.

그 위기를 통하여 주목할 만한 일은 여호와께서 손수 안내하시어 자기 백성을 인도하신다는 것이 매우 뚜렷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피해 지역의 형제 자매들은 그들의 동료 하나님 숭배자들의 도움과 관대함에 깊이 감사하였다. 물론, 특히 우리는 그 재난의 기간 동안에 일들이 잘 수행된 것에 대해 여호와께 영예를 돌리며 그분의 끊임 없는 도움과 인도에 깊이 감사드린다.

손 대지 않은 구역에 이름

1971년 4월 9일에 ‘페루’ 전체에서 주의 만찬에 합계 18,397명이 참석하였다. 그 해의 왕국 전도인 최고수는 5,384명이었는데, 그것은 주민 2,600명에 한 명의 전도인이 있는 셈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의 봉사에서 할 일이 아직도 많았다. 사실상 도시 지역에서 많은 증거를 할 필요가 있었지만 우리는 광활한 시골 지역을 어떻게 다 돌볼 것인가를 오래도록 염려해 왔었다. 험준한 ‘안데스’ 산맥 전체에 걸쳐서 이곳 저곳에 골짜기마다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손 대지 않은 구역은 거대했다.

사실, 매우 필요한 곳에서 봉사한 특별 ‘파이오니아’들과 수 명의 형제들이 얼마간 침투하였었다. 예를 들면, 특별 ‘파이오니아’ ‘알프레도 디아즈’와 다른 16명이 북부 ‘페루’로 들어가면서 20일간의 증거 여행을 하였었다. 그들은 수백부의 출판물을 전하였으며, 정직한 마음의 소유자들을 많이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 나라 전체에서 할 일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있었다!

행복하게도, 여호와의 손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리하여 1971년 5월에 우리의 손 대지 못한 구역에 더 많이 도달할 수 있도록 해 준 일이 있었다. 한 부부는 ‘페루’에 있는 그들의 아들을 방문하는 동안 역시 이 나라의 격지 주민 모두가 어떻게 왕국 소식을 접하게 될 수 있을까를 염려하였다. 미국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서 그들은 ‘안데스’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온전히 설비되어 있는 ‘홈카’를 아들에게 보낼 마련을 하였다. 두대의 ‘오오토바이’도 이 목적을 위해 함께 보냈다.

이러한 진전으로 새로운 활동의 전체 밭이 열리고 있었다. 선교인 ‘조오 레이디그’와 세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그 중에 한 사람은 출생지의 방언, ‘키츠웨이’어를 말하는)들이 ‘홈카’를 사용하도록 임명되었다. 그것에 ‘카사루즈’, 즉 “등대”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네명의 형제들은 또한 지방적으로 입수한 ‘랜드로버’차(농공업용 경자동차)를 사용하였다.

네 명의 전 시간 왕국 선포자들은 1972년 5월 21일에 출발하였다. 그들의 임명지는? 한 때 ‘잉카’족의 성역이었던 ‘우루밤바’ 계곡이었다. 그곳은 ‘잉카’족의 마지막 요새였던 ‘쿠즈코’와 ‘마추피추’ 시 사이의 산맥에 위치해 있다.

진지한 노력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다

그 계곡 도처에서 3개월 반의 전파를 통해, 네 명의 형제들은 5,042부의 서적과 9,146부의 잡지를 전했다. 시골 구역들을 효과적으로 돌보기 위하여 우리 형제들은 오전 5시에 일어나서, 밭으로 가고 있는 농부들에게 증거하였다. 길가를 따라 있는 마을들은 빨리 돌 수 있었다. 그러나 산비탈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과 높은 곳의 집들, 옛 폐허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들 마을들을 찾아 가려면, 책으로 두툼해진 가방을 지고 가파른 길을 걸어 올라가야 하였다.

흥미있게도 각 마을은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진 것 같았다. 한 마을에서는 서적들이 10세 내지 14세까지의 어린이들에게만 전해졌다. 부모들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다. 다른 마을에서는 모든 사람들, 남자들 여자들 다같이, 실제로 “정신을 잃었다.” 전 날 밤의 축제 때 마구 쏟아져 나왔던 그 지방 특유의 ‘알코올’ 음료의 영향 탓임이 분명했다.

다음 마을에서는 단지 세 사람만 만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밭에 있었다. 그 다음 마을에 가려면 얼마간 등산을 해야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수고한 보람이 있었다. 관심이 많았다. 서적을 받을 돈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모두는 서적을 받기 위하여 다른 것과 기꺼이 교환하고자 하였다. 그 날 오전의 끝에 가서 ‘카사루즈’를 걸어 내려 올 때 형제들은 식량을 지고 있었다. 한 사람은 옥수수 한 부대, 또 다른 사람의 서적 가방에는 고구마가 가득했다. ‘조오 레이디그’는 몇 부의 잡지와 바꾼 계란 두 개를 호주머니에 넣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그것을 잊어 버리고 있다가 ‘랜드로버’차에 기대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 날 늦게, 서적 한 부와 성서 한 권을 산양—식탁을 위한 신선한 고기!—한 마리와 바꾸었다. 또 다른 책과 잡지 두 부는 15개의 ‘아보카도’ 열매와 바꾸었다. 다섯 부의 서책으로 거의 200개의 ‘바나나’를 받았다. 그리고 한 관심자는 ‘커피’콩 1.8‘킬로그램’을 기꺼이 모아서 서적 한부와 바꾸었다. 어떤 크기이든지 가장 가까운 읍에서 이러한 물품들을 팔 수 있었으며 그 돈은 필요한 휘발유를 사는 데 사용하였다.

사람들이 ‘바벨론’적 습관을 얼마나 빨리 버릴 것인가? 두 형제가 한 남자를 재방문하였을 때, 교리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으며, 성서가 우상 숭배를 단죄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벽돌 벽을 장식한 형상들을 쳐다 보았다. 하나씩 차례로 그것을 떼어 내서는 밖으로 나가 그 형상들 위에 석유를 붓고는 형제들 앞에서 태웠다.

고립된 외곽 지역에서 봉사하는 것은 수 많은 산봉우리와 접근하기 매우 어려운 계곡들 때문에 참을성과 결단력을 요구하였다. 이따금 ‘오오토바이’가 쓸모가 있었다. 예로서, 두 명의 ‘파이오니아’들이 ‘오오토바이’를 사용하여 ‘라레스’ 읍에 가까이 닿았다. 그들은 출판물들로 가득 찬 가방들과 서적 몇 상자를 ‘오오토바이’에 묶어 가지고 그 곳에 도착하였다. 그 마을에서 증거하는 일에 훌륭한 하루를 보냈다. 그 날 저녁 몇 명의 관심자들이 성서 강연에 모였다. 그러므로 그 여행도 보상을 받고 있었다.

“방주”와 “전갈”

이 때까지 그 ‘카사루즈’는 ‘페루’ 남부 지역에서 주로 사용되었었다. 그러나 중부와 북부 지역은 어떠한가? 이제, ‘트럭’ 동체를 입수하여 시골길과 오솔길의 어려움에 대처할 만큼 튼튼한 새로운 ‘홈 카아’를 만드는 일이 가능하였다. 이 자동차는 장방형으로 상자같아서 “방주”라고 이름 지었다 그 자동차를 사용하는 다섯명의 ‘파이오니아’들이 종종 사람들에게 서적을 전하고 받은 살아 있는 양, 닭, ‘모르모트’ 칠면조, 및 오리 등을 차 안으로 들여 왔다는 점에서도 그 이름은 적절한 것이었다.

1973년의 봉사에 사용하였던 “방주” 외에도 세번째 자동차를 증거하는 탐험 여행이라고 부른 일에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계시록 9:3-5의 상징적인 말에서 택한 이름, “전갈”이라고 불리웠다.

그리하여, 이 나라의 임명되지 않은 구역들을 도는 전 시간 왕국 선포자들의 수고로 ‘페루’의 모든 지역들—북부와 중부 그리고 남부—에 이르게 되었다. 수천부의 서책과 소책자 및 잡지가 ‘키츠웨이’족과 ‘아이마라’족 및 ‘스페인’어를 쓰는 ‘인디언’들에게 전해졌다. 우리의 세 대의 자동차 부대가 갔던 곳이면 어디든,—밀림 속으로나, 해발 4,900‘미터’의 광산 촌에든지 훌륭한 결과가 있었다. 1978년 그 ‘카사루즈’는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서 계속 일하고 있었으며, ‘페루’의 얼마의 외딴 지역들에서 왕국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아마존’ 밀림에 진리를 전파함

그러나 기다리라! ‘홈 카’로도 접근할 수 없는 지역이 있었으니 동북부 ‘페루’의 광활한 밀림이 그것이었다. 그곳의 대부분의 지역 역시 임명되지 않은 구역이다. 그 구역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존’ 지역은 크고 작은 강들이 교차하는 뒤엉킨 밀림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강 기슭을 따라 수백의 작은 “차크라스” 즉 농장들과 여기저기에 마을들이 점점이 산재해 있다. ‘아마존’ 지역에는 약 37종의 ‘인디언’ 종족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일부 사람들이 현대 생활 방식에 매료된 데 반하여 이들 중에 얼마는 소위 문명이라고 불리우는 것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우리는 이들 외딴 밀림의 주민들에게 어떻게 전파해야 하였는가?

1973년에 ‘시이저 차베즈’와 ‘마뉴엘 몰리나’ 및 ‘아메리코 맛수다’가 밀림의 강들의 연안을 따라 증거하는 데 사용하기 위하여 ‘보우트’를 한 척 건조할 것을 함께 의논하게 되었다. 곧 이 배는, 건조 책임을 맡아보고 있는 선교인 ‘월터 아킨’에 의해, 항구 도시 ‘칼라오’에서 건조되고 있었다. 완성되었을 때, 그 배를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이 부분들을 ‘푸칼파’ 읍까지 끌고 가서는 거기서 다시 결합하였다. ‘엘 리푸지오’로 명명한 15‘톤’의 그 배를 ‘우카얄리’ 강에 진수시켰다.

특별 ‘파이오니아’ 명부를 철저히 살폈으며 적당한 승무원을 선택하는 데 많은 주의가 기울여졌다. 첫째로 여섯명 모두 수영하는 법을 알고 있어야만 하였다. 또한, 이 사람들은 밀림 생활의 어려움을 견딜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들의 임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커버’한 첫 거류지는 ‘뉴우산후앙’이었는데 약 500명이 초가 지붕, 노천 집들에서 살고 있었다. 형제들이 도착했을 때 마을 사람들(대다수가 ‘프로테스탄트’교인)은 자기들 종교로 새로 온 자들을 개종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곧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그 ‘파이오니아’들은 많은 가정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그리고 곧 평균 23명이 그 작은 마을에 조직된 연설들과 집회들에 참석하게 되었다.

‘시피보’와 ‘코니보’ 종족 중, 그 ‘파이오니아’들은 원주민들과의 ‘특이한 교환’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그들은 언어를 교환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그 종족의 사람들은 ‘파이오니아’들에게 방언을 가르쳤고, 한편 ‘파이오니아’들은 ‘스페인’어와 함께 성서 진리를 가르쳤다.

‘푸칼파’와 ‘아키토스’ 사이의 ‘콘타마나’ 읍은 성서에 관심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밤낮으로 사람들은 성서 질문들과 서적을 구하려고 그 ‘파이오니아’들을 찾아 왔다. 「청소년기—보람있게 사용해야 할 시기」 책들은 “날개 돋힌 듯이” 나갔다. ‘콘타마나’의 10,000명의 주민 중 많은 사람들과 성서 연구를 하는 것이 가능하였고, 다수가 나중에 회중 집회로 발전하였다.

강의 위험

밀림 생활의 일반적인 어려움 외에도 ‘엘 리푸지오’호의 승무원들은 다른 위험들을 직면하였다. 심지어 사도 ‘바울’이 “강의 위험”을 당했던 것처럼 이들 ‘파이오니아’들은 ‘우카얄리’ 강이 급류이며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린도 후 11:26

1977년 8월 10일 수요일 오전 3시에 태풍이 갑자기 그 지역을 강타하여 갑작스러운 홍수가 일어났다. 신속히 물이 증가하여 물결이 거칠게 일어났다. 불어나는 물로 ‘엘 리푸지오’호의 정박시키는 밧줄들이 말뚝에서 끊어져 나가 버려 경비하던 승무원이 강가로 가서 밧줄을 든든하게 해야 했다. 그러나 그 괴롭히는 바람은 곧 모든 밧줄들을 끊어 버렸고 배는 떠내려 가기 시작하였다. 이러는 동안 잠자던 다른 승무원들이 깨어나서 맹위를 떨치는 물결과 대항하려고 ‘엔진’을 작동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허사였고, 물결이 그 배를 가파른 강둑으로 꽝 하고 밀어 붙여도 속수무책으로 쳐다 보고만 있어야 하였다.

바로 그 순간에 쇄도하는 물결로 둑의 넓은 부분이 파헤쳐져서 강으로 무너져 내렸다. 이 때문에 그 배는 우현으로 기울어졌으며 형제들은 선실 내부로 빠져들어 갔다. 그래도 미닫이 문들 중 하나가 열렸다. 이것이 배를 더 빨리 침몰하도록 하였지만 그 ‘파이오니아’들이 배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투쟁하는 데 하나의 통로를 마련하여 주었다. 그들 모두가 빠져 나왔다! 칠흑 같은 어두운 속에서 형제들은 안전하게 강가로 헤엄쳐 나왔다. 그렇다, 그들의 모든 서적들과 의복들, 요리 기구들, 책가방들, 및 개인적인 물건들을 굶주린 강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 살아있었다! 여호와의 보호에 대한 뜨거운 감사를 올렸다.

이른 새벽에 그 형제들은 그들의 배를 볼 수 있었는데 한 쪽 끝이 치켜 세워져 뱃 머리에서 커다란 물거품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배는 이제는 조용해진 물결 가운데 천천히 떠돌아 다니고 있었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일곱시에 읍민들이 친절하게도 빌려 준 굵은 밧줄과 두 대의 견인차로 배를 강변으로 올렸다. 그 날 늦게 석유 회사에 속한 한 대의 거대한 부선의 기중기가 15‘톤’ 배를 곧바로 세울 수 있었으며, 배는 다시 한 번 떠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는 떠다니는 집을 아주 신속하게 원상 복구하도록 길을 열어 주신 데 대하여 여호와께 다시 감사하였다!

이 재난의 소식이 ‘페루’ 도처 형제들에게 알려지자, 기부금과 보급품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결과, 그것은 ‘파이오니아’들이 ‘아마존’ 강 유역의 강들을 따라 계속 봉사하기 위해 장비를 갖추는 일을 가능케 하였다.

확장은 계속되다

이런 사이에 ‘페루’ 도처에서 여호와의 백성의 활동이 증가됨에 따라 더 큰 지부 시설들의 필요를 느끼게 하였다. 1972년 기념식 참석자는 19,772명에 달하였다. 그러므로 ‘N. H. 노워’ 형제와 ‘M. H. 라슨’ 형제의 짧은 방문 동안에 지부 건물 옆에 있는 빈 대지를 매입하도록 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지부 증축 작업은 1973년 3월에 시작되었다. 그 계획은 형제들에 의해 잘 지지되었으며, 증가되는 건축 자재난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건물은 급속히 이루어졌다. 일층에는 300명이 안락하게 앉을 수 있는 넓은 왕국회관이 있었다. 이층에는 가까운 회중들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된 선교인들을 위한 숙소가 마련되었다. 증축된 지부 건물은 ‘N. H. 노워’ 형제가 456명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행복해 하는 청중들에게 연설하는 일로 1974년 1월 19일에 봉헌되었다.

같은 달에 “하나님의 승리” 국제 대회가 ‘리마’에서 개최되었다. 여러 해 동안 이 나라에서 성장하는 우리의 사업을 살펴왔던 사람들의 눈에는 그 모임은 확실히 의미심장하였다. 참석한 19,738명(그 때까지 가장 큰 대회 청중) 가운데는 ‘캐나다’와 미국 그리고 ‘유럽’에서 온 대표자들이 있었다. 흥미있는 영어 ‘프로그램’과 관광 여행이 이 손님들을 위하여 마련되었다. 다채로운 민속 춤들이 유익한 역사 소개를 마지막으로 장식했다. 참으로 그 대회는 외국인 대표자들과 ‘페루’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다 같이 즐거운 것이었다.

계속된 증가로 모든 장소가 우리의 대회를 위하여 너무 작았다. 또한, 우리는 대부분이 ‘스포오츠’ 경기장을 사용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종교적 모임은 그러한 곳에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리마’ 순회구들은 한 위원회를 임명하였고, 오래지 않아 수도의 중심지에서 차로 단 20분 정도 거리인 ‘캄포이’라 부르는 미개발 지구에서 대회장을 위한 한 이상적인 장소를 구하였다. 그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환경 속에서 열렬한 자진 봉사자들이 열심히 일하여 중요한 시설을 갖춘 훌륭한 대회장이 준비되었다. 그것은 합계 18,914명이 참석한 두 개의 1976년 지역 대회들이 시작하기 전까지 준비가 끝났다. 약 1년 후에 대회 장소와 여러 개의 건물들이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의 한 성원인 ‘A. D. 쉬로오더’의 방문 때 봉헌되었다. 그 때에 14,353명이 ‘리마’의 근처 도시들의 96개 회중들을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1977년에 통치체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그 해에 우리는 통치체의 성원 한 사람만이 아니라 두 사람의 방문을 즐겼던 것이다. ‘그란트 수터’ 형제는 그의 아내, ‘에디스’와 함께 지부 사무실에서 6일간의 분주한 날들을 보냈다. ‘수터’ 형제는 또한 ‘캄포이’에 있는 대회장에서 15,056명의 청중에게 연설하였다.

우리는 계속 “빛을 비추는 자들”이 될 것이다

1978년도는 ‘페루’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을 위하여 대단히 바쁜 해였다. 우리의 네개의 “즐거운 봉사자” 지역 대회에는 도합 28,063명이 참석하였는데, 636명이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의 상징으로 이 대회들에서 침례를 받았다. 현재 옛 ‘잉카’족의 땅에는 영적인 빛과 진리를 전파하는 12,925명의 왕국 선포자들이 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호와께서 많은 영적 마련들을 해 주신 것은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예를 들면, 우리는 ‘길르앗’ 훈련을 받은 후 이곳에 파견된 선교인 형제 자매들의 봉사로부터 유익을 받았을 뿐 아니라 어떤 ‘페루’인 증인들도 그러한 훈련을 받았다. 또한 1962년에 이곳에서 ‘천국 전도 학교’가 시작된 이래로 그것은 많은 유익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파이오니아’ 강습에 대하여 참으로 감사한다! 이 모든 유익한 강습은 우리의 사랑 많으신 천적 아버지에 의하여 마련된 다른 풍성한 영적 마련들과 함께 빛을 발하는 유능한 사람으로서 계속 섬기도록 우리에게 힘을 준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대한 확신을 가지고 ‘페루’인 그리스도인들은 앞날을 바라본다. 우리의 광활한 구역 내의 높이 솟은 ‘안데스’ 지방이든지, 뒤엉킨 밀림 길이든지, 어디에서든지 왕국 봉사에 박차를 가할 결심이다. 우리는 전세계의 우리의 동료 신자들과 함께 “세상에서 ·⁠·⁠· 빛을 비추는 자들”로서 충성스럽게 봉사하기를 참으로 기뻐한다!—빌립보 2:15, 신세.

[179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페루

이키토스

모요밤바

콘타마나

트루히요

침보테

융게이

우아라즈

초시카

카야오

리마

우앙카요

아야쿠쵸

라레스

쿠스코

이카

푸노

아레키파

태평양

에쿠아도르

콜롬비아

브라질

볼리비아

칠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