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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과 ‘시리아’

‘레바논’과 ‘시리아’

‘레바논’과 ‘시리아’

뱃 사람들인 ‘페니키아’인들의 고향, 성서 시대에 그 유명하고 웅장한 백향목의 땅, 그것이 과거 여러 세기 전의 ‘레바논’이었다.

오늘날 ‘레바논’은 조그마한 현대 공화국으로서 동 지중해를 끼고 있는 해안 지역으로, 좁고 긴 땅에 자리잡은 이 나라는 면적이 약 10,400평방 ‘킬로미터’에 불과하며, 길이는 190‘킬로미터’, 폭은 48-56‘킬로미터’ 가량이다. 이 해안 국가는 ‘바나나’ 나무 숲과 감귤 과수원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아열대 농작물의 축복을 누리고 있다. 푸른 지중해변의 열매가 주렁주렁한 이 광경 위로 높이 솟아있는 그 인상적인 ‘레바논’ 산맥은 높이가 최고 해발 3,000여 ‘미터’나 된다. 이 산맥 뒤에는 비옥한 분곡이 펼쳐져 있으며, 그 너머로는 ‘안티-레바논’ 산맥이 있는데, 이 산맥의 남단에는 높은 ‘헐몬’ 산이 우뚝 솟아 있다.

‘아라비아’어가 산과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레바논’의 여러 마을에서 사용되는 언어이다. 또한 도시의 주요 언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불어와 영어 혹은 얼마의 다른 ‘유럽’ 언어도 흔히 듣게 된다.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레바논’이라는 이 작은 나라에는 가지 각색의 종교가 있다. 가장 큰 “기독교” 단체는 ‘마로니트 가톨릭’ 단체이다. 그 다음으로는 희랍 정교회이며 또한 상당수의 ‘프로테스탄트’ 조직이 있다. 이들 “기독교” 단체가 3,650,000명이나 되는 이 나라 인구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는 여러 회교 종파에 속해 있다. 이것이 ‘레바논’을 과반수가 “기독교”인인 유일한 ‘아랍’ 국가가 되게 한다.

본래 ‘레바논’ 사람들은 매우 우호적이고 말 붙이기가 쉽다. 그들은 항상 인생 문제들을 기꺼이 토론하고자 하며, 심지어 전혀 낯선 사람과도 그렇게 한다. 사실 그들은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시리아’는 ‘레바논’ 북쪽과 동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로서 훨씬 더 큰 나라이다. 국토의 면적은 약 185,200평방 ‘킬로미터’로 ‘레바논’보다 17배나 크다. 그러나 국토의 대부분이 광활한 사막이다. 그리하여 약 8,375,000명의 ‘시리아’ 인구—거의 90‘퍼센트’가 회교도들임—대부분이 비교적 지중해 연안 가까이에 그리고 ‘레바논’ 국경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 이 나라의 공식 언어는 ‘아라비아’어로 인구의 약 80‘퍼센트’가 사용하고 있다.

성서 진리가 ‘트리폴리’에 이르다

많은 ‘레바논’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 다른 나라로 이주하였다. 그리하여 사업에 성공하면 그들은 흔히 해외에서 번 것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1921년으로 소급해서, 이들 성공한 ‘레바논’인 중의 한 사람인 ‘미켈 어바우드’는 물질적 부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미국 체류중에 그 당시에는 성경 연구생으로 알려진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어바우드’는 그의 새로운 성서 지식을 진실한 ‘레바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데 매우 열심이었다.

‘레바논’ 북쪽에 있는 그의 고향 ‘트리폴리’에 돌아온 ‘미켈 어바우드’는 어느 의사의 병원 옆집에 세들었다. 그 병원에 치과를 개업했던 ‘한나 샴마스’ 박사도 미국에 갔다가 ‘레바논’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그는 ‘트리폴리’에서는 치과의로서 최초로 미국에 다녀온 사람으로 매우 높은 명성을 얻었다. 그는 또한 종교적인 사람으로서 주교들과 기타 저명한 교직자들을 가끔 자기 집에서 접대하였다. ‘어바우드’ 형제는 ‘샴마스’ 박사와 금방 친숙해졌으며, 병원을 지날 때 거의 매일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한 특별한 화제는 삼위일체 교리였다. 어느 날, 그 박사는 한 ‘프로테스탄트’ 교직자를 불러왔는데, 그 교직자는 요한 복음 1:1을 사용하여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말을 강조함으로써 삼위일체가 사실이라는 점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어바우드’ 형제는 원 희랍어 교본에 의하면 이것은 “말씀은 하나의 이었다”라고 이해해야 된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또한 희랍 정교회 번역판 ‘아라비아’어 성서에서 이 성귀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지적해 주었다.

토론이 밤 10시 30분경까지 계속되었지만, 그 교직자가 이 점을 믿으려 하지 않자, 희랍 정교회 주교 관저에 가서 요한복음 1:1의 희랍 정교회 번역을 조사해 보자는 것이 제안되었다. 그 ‘프로테스탄트’ 교직자는 이렇게 하기를 꺼려했지만 ‘샴마스’ 박사가 고집하였다. 한밤중에 그는 말들을 마차에 매고 즉시 떠났다. 주교는 그처럼 유명한 사람들이 그 시간에 자기 집 문을 두드린 것에 매우 놀랐다. 그는 그들이 자기 성서에는 요한복음 1:1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보기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 놀랐다. 물론, ‘어바우드’ 형제가 말한 점이 증명되었으며, 그 ‘프로테스탄트’ 교직자는 잠잠하게 되었다.

‘샴마스’ 박사는 이 점이 분명해지자 의기양양해졌다. 그 때부터 그는 성서 연구에서 급속히 발전했으며, 1922년에는 참 믿음 안에서 ‘어바우드’ 형제와 연합하였다. ‘성경 연구생’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태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후에 ‘샴마스’의 병원은 ‘트리폴리’에서 최초의 그리스도인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무렵, 미국인 소년 학교의 유명한 교수 ‘이브라임 아티에’라는 사람이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 다른 지방 선생인 ‘사바 보타리’라는 사람은 그의 희랍 정교회 단체로부터 사제가 되라는 권고를 받았었다. 그는 사양하긴 했지만 종교 문제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미켈 어바우드’에 관하여 듣고는 그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성서 연구 보조서를 하나 구하였다. 그는 그날 밤에 그 책을 전부 읽고는 간행물을 좀 더 보기를 원하였다. 이내 ‘보타리’ 선생은 그가 진리를 발견하였음을 확신하였다. 그의 집이 ‘레바논’에서 ‘성경 연구생’들이 가진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최초의 기념식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의 아내는 기념식을 위해 누룩이 들지않은 떡을 구웠으며, 계속되는 여러 해 동안 여러 번 그렇게 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이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트리폴리’ 밖에서도 많은 사업이 수행되었다. 무성한 감람나무로 뒤덮힌 굽이 굽이한 언덕의 ‘코우라’라는 기름진 땅은 또한 영적으로도 비옥함이 입증되었다. ‘어바우드’ 형제는 거기서 ‘비쉬마진’이라는 마을에 사는 한 옛친구이자 동업자인 ‘니콜라 나자르’를 방문하였다. 처음에 ‘니콜라’는 자기 친구가 성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는 ‘어바우드’ 형제와 함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코우라’ 지역의 다른 사람들도 진리를 신속히 받아들였다. 이들 중에는 ‘아파스 디크’의 ‘살림 카람’과 ‘비쉬마진’의 ‘살림 제하’가 있으며 ‘브테람’ 부근의 ‘이브라임살렘’, ‘딥샤우’ 그리고 ‘딥 앤드로우스’가 있다. 이내 이들 진실한 형제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배운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도박장이 새로운 목적으로 사용되다

1920년대초였다. 당시 가장 흔한 여행 수단은 무엇이었겠는가? 도보 아니면 당나귀였다. 매주 일요일에 소수의 열성스런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성서 진리를 전파하기 위하여 여러 마을로 여행하였다. 이들 마을 중 하나가 ‘아미오운’이었다.

‘아미오운’에서 그 왕국 선포자들은 ‘압둘라 살렘’이라는 한 친절한 사람을 발견하였다. 그는 자기 집 이층 방에다 도박장을 경영하여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는 또한 도박꾼들에게 70일 동안에 10할이나 되는 매우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었다. 한 사제가 그에게서 상당히 많은 돈을 고리로 빌렸는데, 한 동안 그 빚을 갚지 않았다. 결국 그 사제는 ‘압둘라 살렘’에게 원금의 4배의 빚을 지게 되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로 의견 충돌이 생겨, 이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법정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에 ‘압둘라 살렘’은 ‘성경 연구생’들을 만나 그들의 소식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는 성서 연구에서 급속히 발전하였다. 법정은 그의 승소로 판결하였지만 ‘압둘라 살렘’은 한 그리스도인 형제와 함께 가서 그 교직자에게 자기는 전액을 다 받을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 교직자는 또한 얼마이든 그가 지불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을 지불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사제는 깜짝 놀랐다. 상황이 달라지자 그 교직자는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였으며, 그리하여 문제가 해결되었다.

곧 도박장이 ‘성경 연구생’들의 집회 장소로 바뀌었으며, 여기서 12-15명 가량이 모였다. 때때로 왕국 소식을 반대하는 교직자와 여러 광신적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집회를 방해하기 위해 아이들을 보내서 집 밖에서 소란을 피우게 하였다. ‘압둘라 살렘’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바와 같다. “우리는 여기서 도박과 기타 부정직한 일들을 하곤 했는데, 어느 누구도 와서 소란을 피우거나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공부하고 있는데 그들이 와서 우리를 방해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하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인내함

그 당시 ‘코우라’ 지역은 길이 나빠서, 말이나 당나귀를 타고 산을 넘어 여행하자면 여러가지 위험들을 겪게 되었다. 그렇다 해도 그 지역에 사는 충실한 ‘여호와의 증인’들은 참을성 있게 왕국 소식을 선포하였다. 종종 그들은,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거나 진리의 소식을 다른 마을에 전하기 위해서 비가 오고 궂은 날씨에도 24 내지 32‘킬로미터’를 타고 가곤했다. ‘무타노우스 다아보울’은 이웃 마을에서 있었던 기념식에 참석하려고 네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약 24‘킬로미터’를 타고 갔던 일을 기억한다.

‘다아보울’ 형제의 집은 그 당시 초기 여러 해 동안 일종의 방송국으로 사용되었었다. 확성기를 지붕 위에 달아놓고서, 형제들은 그 마을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공개 강연을 하곤 하였다. 비록 어떤 사람들은 반대하여 ‘다아보울’ 형제를 귀찮게 하였지만 듣기를 좋아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증거 사업이 조직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왕국 선포자 각자가 증거할 수 있는 여러 기회를 이용하였다. 예를 들어, ‘살림 카람’ 형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의 어느 결혼식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교회 결혼식 도중 그는 교회에서 나오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간행물을 제공할 의도로 밖에서 기다렸다. 그가 이렇게 하고 있을 때 주례를 한 주교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종교인들의 관습에 따라 ‘카람’ 형제가 입맞출 수 있도록 자기 손을 내밀었다. ‘카람’ 형제는 그의 손을 붙잡고는 “안녕하십니까?” 하고 말하면서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자기가 기대한 존경을 받지 못하자 주교는 ‘카람’ 형제에게 고함을 치고 욕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모인 군중들까지도 주교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할 정도였다. 그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자기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조용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주교는 또한 최근에 ‘카람’ 형제의 부친으로부터 꽤 많은 헌금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많이 헌금한 사람의 아들과 다투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그는 떠났으며, ‘카람’ 형제는 계속해서 성서 간행물을 배부하였다. 이 우발 사건으로 자극받은 관심의 결과로 ‘카람’의 서적 가방은 곧 바닥이 났다.

‘브루클린 벧엘’에서 온 한 방문객!

1925년에, ‘레바논’ 북부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이 작은 집단은 ‘브루클린 벧엘’로부터 ‘A. H. 맥밀란’ 형제가 ‘레바논’을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몹시 흥분하였다. 그들이 ‘베이루트’에서 그의 배를 맞이하였을 때, 그들은 그의 계획에 관하여 문의하였다. 그는 단지 이틀만 그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고 말하였으며 ‘베이루트’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강연을 하고 이웃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다메섹)에 있는 대학교에서도 연설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정이 달라졌다. 종교 학교인 ‘아메리칸’ 대학교는 ‘맥밀란’ 형제가 거기서 강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제 그는 어떻게 할 것인가?

‘트리폴리’로부터 한대의 낡은 ‘포오드’ 승용차를 탄 대표단이 와서 ‘맥밀란’ 형제에게 ‘코우라’ 지방으로 와서 강연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맥밀란’ 형제는 ‘다마스커스’에서 강연을 허락받을 수 있을른지 몰랐으므로 “가겠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낡은 차를 타고 ‘베이루트’에서 ‘코우라’ 지방까지의 울퉁불퉁한 도로 위를 90여 ‘킬로미터’나 여행하였다. 그곳 형제들은 ‘아미오운’ 주위 마을로부터 약 200명 가량의 청중을 모았다. ‘맥밀란’ 형제는 그 유명한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강연을 하였으며, ‘아브라임아티에’ 형제가 통역을 맡았다. 형제들은 이 훌륭한 강연을 듣고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나타낸 것을 보고서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른다. 참으로 이것은 ‘레바논’ 북쪽의 왕국 사업을 위한 훌륭한 자극제였다.

‘맥밀란’ 형제가 떠나기 전에 침례식이 있었다. 침례받은 자들 중에는 ‘한나 샴마스’ 박사와 ‘살림 카람’이 있었다. 키가 작은 ‘카람’ 형제는 추위에 약했다. 그래서 그는 옷을 여러 겹 껴입고 있었다. 침례복을 입기 전에 그는 이들 여러가지 옷을 벗기 시작하였는데, 그 옆에는 옷이 수북히 한더미가 되었다. ‘맥밀란’ 형제는 그가 점점 더 홀쭉해지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농담조로 말하였다. “형제, 침례받기 위하여 당신에게서 뭐 하나 남아 있겠읍니까?” ‘맥밀란’ 형제는 침례 후 즉시 ‘베이루트’로 떠났으며 그가 도착하자 곧 배가 떠난다는 광고가 있었다.

사람을 잘못 본 경우

1920년대 중에는 혁명 당원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시리아’와 ‘레바논’을 합하여 한 나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어느 날 오전 ‘시리아’ 국경 근처의 좀 외진 어떤 마을에서 증거를 하던 중 ‘카람’ 형제와 ‘어바우드’, ‘아티에’, ‘보타리’ 그리고 ‘나집 파야드’ 형제가 그 지방 경관에게 체포되었다. 왜 체포되었는가? 그들이 혁명 당원들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금방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은 누가 체포되었는지 보려고 파출소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계속 모여 들어 200여명이나 되었다.

증거를 할 좋은 기회로 생각한 ‘이브라임 아티에’ 형제는 모인 무리에게 연설을 하고 그들의 질문에 답변해 주기 시작하였다. 경찰관들이 방해하지 않고 방관만 하는 바람에 훌륭한 증거가 행해졌다. 결국, 형제들은 약간의 그리스도인 간행물을 경찰관에게 전한 다음에 비로소 풀려나왔다. 그리하여 사람을 잘못 본 이 경우는 기억에 남는 야외 경험이 되었다.

사업이 확장되다

1926년 어느 겨울 저녁, ‘한나 샴마스’ 형제와 ‘이브라임 아티에’ 형제는 폭풍이 몰아치는 지중해 해안을 따라 ‘트리폴리’로부터 남으로 ‘엔페’라는 어촌까지 여행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조오지 샤크하쉬리’라는 친 형제를 방문하였다. (올해 89세인 ‘조오지’는 ‘브루클린 벧엘’ 가족의 한 성원이다) 그 때 두 청년 ‘지리스 어위잔’과 ‘살림 데마’가 성서 토론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들은 신속히 영적으로 발전하였다. 수개월만에 그리스도인 집회가 일요일마다 ‘어위잔’ 형제 집에서 열려 부근 읍들에서 사람들이 왔다.

1920년대 중에는 ‘레바논’ 형제들이 한달에 한번 일요일에 어디엔가 모여서 온종일 영적인 문제를 토론하는 데 보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아라비아’어로 된 간행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영어와 ‘아라비아’어에 정통한 ‘아티에’ 형제가 「파수대」와 기타 출판물 내용을 번역하였다. 이러한 기사들이 그 달의 모임 중에 읽혀지곤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그들은 영적 양식을 때에 따라 공급받았다.—마태 24:45-47.

‘엔페’ 마을 사람들은 우호적이었다. 그러므로 때때로 그곳에서 공개 강연을 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러한 한 가지 경우로, 공개 강연이 한 지방 학교에서 행해질 예정이었다. 그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 있었는데, 목사는 그들에게 그 공개 강연에 참석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목사의 광고 때문에 교회에 나갔던 거의 모두가 와서 오후에 있었던 성서 강연을 들었다. 그 후에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집회에 계속 참석하였다.

봉사를 위해 훌륭히 조직되다

1920년대 중에 ‘레바논’의 여호와의 백성들은 성서 연구와 전파 활동에 관한 한 잘 조직되지 못했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진리를 배우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고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있었다. 실로 “주(여호와, 신세)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사도 11:19-21.

1930년대초에 ‘트리폴리’의 ‘샴마스’ 박사 병원에서 열리는 그리스도인 집회에는 10명 정도가 참석하고 있었다. 일요일들을 이용하여 보다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야외 봉사를 하곤 하였다. 형제들은 ‘시리아 다마스커스’까지 갔으며, 심지어 북쪽의 ‘알레포’까지 들어가면서 그 중간 여러 곳에서 증거하였다.

1930년대 중에는 일들이 다소 조직적으로 개선되었다. 1936년에 미국에서 여러 해 동안 살았던 ‘레바논’ 형제 ‘유세프 라할’이 방문차 ‘레바논’으로 돌아왔다. 그는 야외 봉사를 위해 형제들이 조직되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사업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고, 그들에게 그렇게 하는 방법을 보여 주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전파 활동을 하였다. 그는 ‘레바논’ 북쪽의 ‘아미오운’ 마을에서 약 20명의 형제들에게 호별 방문 전파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 연설 후 즉시 형제들은 짝을 지어서 호별 방문 전파에 나감으로써 그들이 들은 바를 적용시켰다.

왕국 진리가 울려 퍼지다!

‘라할’ 형제는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1937년에 다시 한번 ‘레바논’을 방문하였다. 그는 확성 장치와 축음기 음반 그리고 두대의 축음기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레바논’과 ‘시리아’는 그렇게 큰데 비해 ‘여호와의 증인’은 소수였다! 그래서 ‘라할’ 형제는 1931년형 ‘포오드’ 승용차 한대를 구입하여 차 위에다가 확성 장치를 하였다. 형제들은 이것을 타고 ‘레바논’과 ‘시리아’ 전역에 이르는 많은 여행으로 먼 지역에까지 왕국 소식을 전하였다.

형제들은 마을로 차를 몰고 들어가서 언덕 위에다 주차하곤 하였다. 간단한 소개 후에 녹음한 성서 강연이 흘러 나왔다. 그 소리는 그같은 조용한 지역의 야산 꼭대기를 넘어서 수 ‘킬로미터’까지 전해졌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음반에서 나오는 윙윙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줄 알고 두려워하였다.

사람들은 처음 방송 후에 확성 차 주위로 모여들곤 하였다. 그러면 소리를 약간 줄이고 모인 무리에게 성서 강연을 행하였다. 그 연설 후에는 질의 문답 회기와 모인 사람들에게 간행물을 배부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흔히 왕국 소식이 도달할 수 없는 지역들에 많은 씨가 뿌려졌다.

물론, 종종 교직자들은 자기들의 양떼에게 전파하려고 찾아온 ‘증인’들에 대하여 분개하였다. 그들은 형제들을 중단시키고 겁을 주어 보내려고 하였다. ‘나집 살렘’은 ‘시리아’의 ‘배이드’라는 마을에서의 다음과 같은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그 마을 변두리에다 확성 장치를 설치했을 때, 그 사제는 자기 집 앞에서 점심을 들고 있었다. 그는 확성기 소리를 듣자 식사를 중지하고 그의 큰 지팡이를 가지고 확성 장치한 차 주위로 모여드는 군중 속으로 헤치고 들어가, 정신나간 사람처럼 화를 내어 그들에게 지팡이를 마구 휘두르며 위협하였다. 그는 연설이 행해지고 있는 ‘마이크’에 이르자 ‘그만! 그만하란 말야!’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마을 사람들이 우리 편이며 그 사제의 명령대로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방송을 계속하였다. 그 사제가 너무 난폭해져서 일부 사람들이 그를 붙들어 그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진정시켜 다시 식사하게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단지 그처럼 큰 소리를 내는 확성 차와 같은 그러한 생소한 것을 보는 것만으로 즐거워하였다. 어쨌든,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 소식을 들었다.”

노정에서 생긴 문제점들

확성차를 사용할 때 형제들은 한 ‘티임’으로 일했으며, 한 사람은 장치를 조작하고 다른 두 사람은 마을에서 차 주위로 모여든 무리 전체에게 간행물을 배부하였다. 그러한 여행에는 ‘라할’ 형제와 ‘나집 살렘’ 형제 그리고 ‘지리스 어위잔’ 형제가 함께 일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길이 매우 좋지 않아 시내나 강을 건너게 될 때 다리가 놓여있는 곳이 드물었다. 형제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간신히 시내를 건너야 했다.

한번은 그 세 형제가 차를 탄 채 시내로 들어갔는데 거의 중간 지점에 이르자 물이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깊었다. 그래서 ‘모우터’가 꺼져버렸다. 거기는 외딴 곳이고 광활해서 사람들이 살지 않았으며, 세사람 모두가 강 한가운데 차속에서 꼼짝 못하게 되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되었는가?

그들이 농경지에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그들이 가능한한 농부와 아주 흡사하게 보이게끔 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을 부유한 외국인으로 보이게 하는 반지를 빼고 ‘넥타이’와 기타 치장을 풀었다. 다음에 ‘어위잔’ 형제가 차에서 기어나와 강을 걸어서 건너, 약간 떨어져 있는 언덕 위의 한 마을로 갔다. 물에 젓고 진흙투성이가 된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차가 강 한 가운데에 갇혀 있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형제들이 차를 끌어내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인가? 기꺼이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로우프’와 기타 장비를 가지고 와서 형제들과 힘을 합하여 차를 이내 물에서 끌어내었다. 떠나기 전에 형제들은 그들을 구조해 준 친절한 마을 사람들에게 약간의 증거를 할 수 있었다.

그러한 경험은 아주 흔했다. 형제들은 그 낡은 차를 계속 사용했으며, 왕국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심지어 ‘시리아’의 ‘알레포’까지 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그 차가 너무 낡아 그들은 어느 작은 도시에 갇히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그 차를 팔아서 다른 수단을 이용하여 여행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라할’ 형제가 사준 1931년형 ‘포오드’ 차로 행해진 봉사는 그로서 끝났다. 그러나 형제들의 고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날 밤, 그들은 한 조그마한 마을의 어느 낡은 집에 숙소를 구하여 유숙하였다. 그날 밤을 지내려고 구한 방에 이르려면 사닥다리를 딛고 기어 올라가야 하였다. 올라가다가 ‘라할’ 형제가 열두번째 쯤 되는 계단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그는 간신히 ‘트리폴리’로 되돌아와 회복하는 데 두달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실로 즐겁게 찾아냈다.

후에 다른 차들을 구입하여 전 지역에 왕국 소식을 전하는 데 사용하였다. 가끔 형제들은 일요일 새벽 3시나 4시에 ‘트리폴리’에 있는 자기들 집을 떠나 밤 늦게 돌아오곤 하였다. 그러나 참으로 많은 즐거움을 누렸다! 그들은 이전에는 좋은 소식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많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당시의 성서 집회

1930년대 중의 그리스도인 집회는 질서가 있었지만 발전해야 할 점이 많았다. 주로 집회는 연설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질문과 해설을 하는 토론이 되었다. 때때로 형제들은 협회 출판물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하지만 언제나 ‘아라비아’어 간행물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영문 기사를 번역해서, 이것이 낭독되고 토론되곤 하였다.

연사 훈련이 없었으므로 소수만이 청중에게 연설할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최선을 다하였다. 이를테면, 1935년에 ‘지리스 어위잔’ 형제의 조모가 그의 고향인 ‘엔페’에서 사망하였다. 가족들은 ‘어위잔’ 형제가 장례 준비를 돌보기 원하였으며, 그들 중 아무도 증인식 장례를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트리폴리’에 있는 자격있는 형제에게 전갈을 보내어, 와서 장례식 연설을 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그 형제는 오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평생 청중 앞에서 한번도 연설을 해 본 적이 없었던 ‘어위잔’ 형제가 장례사를 하였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그에게 하나의 극적인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상황을 잘 대처하여 모인 집단에게 사망과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 이듬 해에 그의 부친이 사망하였을 때 ‘어위잔’ 형제는 훨씬 더 나은 장례 연설을 하였다.

극소수의 형제들만이 강연할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축음기가 사용되었다. 공개 강연을 듣는다기 보다는 오히려 여러 가족이 한 집에 모여서 녹음된 성서 강연을 축음기로 돌리는 것이었다. 다음에 토론이 있었으며, 가끔 관심자들에게 간행물 얼마를 전할 수 있었다.

열정적 봉사의 한 예

열정적이고 열심있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다. 예를 들면, 1936년 ‘베이루트’에서 ‘자밀 스페어’라는 한 청년이 그의 사업 장소에서 ‘증인’들과 접촉했었다. 오래지 않아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연합하게 되었지만 그는 강한 반대에 직면하였다. 그의 삼촌이 ‘마로나이트’(‘가톨릭’) 사제였다.

다른 가족 성원들과 함께 그 사제는 ‘자밀’이 ‘여호와의 증인’과의 교제를 끊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그의 부모는 만약 그가 ‘증인’들과의 활동을 고집한다면 더 이상 자기들의 자식으로 여기지 않겠노라고 통고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즉 그들은 그를 죽은 자식으로 간주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죽은 자식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하라고 하였다. 그런 직후인 1936년 4월에 그는 호별 방문으로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그의 친척들 간에 논쟁을 야기시켜, 그들은 그를 정신 병원에 집어 넣으려고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자밀’은 이제 그의 마을로 돌아가서 그곳 친구와 친척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기로 하였다. 그는 왕국 소식을 가지고 그 마을을 철저히 돌았으며, 상당히 많은 간행물을 전하였다. 후에 그 마을에 본부를 두었던 주교가 사제에게 사람들로부터 간행물을 모아다가 불태우라고 지시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사제에게 출판물을 내 주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가정에서는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행할 자유가 있다고 말하면서 간행물을 내어주지 않겠다고 하였다. 주교는 이러한 사태 진전에 너무 화가 나 ‘자밀’에 대하여 파문령을 내렸는데, 이로 인해 ‘자밀’은 그 교회에서 탈퇴하는 수고를 덜게 되었다. 이것은 ‘스페어’ 형제가 1937년 침례를 받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자밀 스페어’는 ‘베이루트’로 돌아와 계속해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다. 어느 날 성서 진리에 관심을 보였던 한 구두 직공과 그의 아들이 ‘알레이’라는 인근 마을에 사는 친척들을 방문하는데 함께 가자고 ‘자밀’을 초대하였다. ‘자밀’은 한대의 축음기와 몇개의 음반 그리고 다량의 간행물을 가지고 갔다. 그리하여 한 집단이 녹음된 강연을 주의깊이 듣는 퍽 즐거운 저녁이 되었다.

‘하다드’가의 한 사제가 참석했었는데 의외로 그 소식을 즐기고 있었다. 음반이 다 끝나자 그는 금 반 ‘파운드’를 축음기 위에다 놓았다. 그러나 ‘자밀’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축음기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기 때문에 그것은 헌금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헌금하신 돈에 상당하는 서적 몇권을 드렸으면 정말 좋겠읍니다.” 그 사제는 이에 동의하였다. 수년 후에 이 사제의 손자녀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1937년 중엽에 ‘스페어’ 형제는 ‘파이오니아’ 즉 전 시간 전파자가 되었다. 수개월 후 어느 ‘아파트’ 건물에서 전도할 때 그는 ‘아파트’ 안으로 초대되어 일단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는데, 그들 중에는 한 예수회 사제가 끼어 있었다. 토론이 아주 격해져서 ‘자밀’은 떠나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문을 막 나서자 그 집주인이 그를 세게 밀치는 바람에 그는 층계로 굴러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그 집주인은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를 층계 위에 넘어진 채로 내버려 두었다. ‘자밀’은 2층 아래 거리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소리쳐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주인은 그의 ‘아파트 발코니’에서 소리를 질러 사람들에게 도와주지 말라고 하면서 외치는 그 사람은 미치광이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스페어’ 형제를 개인적으로 아는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사제와 수녀들에 의해 운영되는 한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의 다리를 고정시키고 나서야 그들은 그가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조롱하고 위협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그가 ‘여호와의 증인’을 포기한다면 그를 무료로 특등실로 보내주겠다고 말하였다. 물론 이같은 위협과 제안은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그를 그 병원에서 내어쫓았다. 그리하여 그는 약 180‘미터’의 길을 한 발로 뛰어가 겨우 집으로 가는 차를 잡아 탈 수 있었다.

‘스페어’ 형제는 또 후에 ‘레바논’ 지역의 마을들에서 봉사하고 있을 때 사제들의 반대를 직면하였다. 비록 이곳이 견고한 ‘마로나이트 가톨릭’ 지역이었는데도 사람들은 기꺼이 왕국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사제들은 그가 왔다는 것을 알고는 귀찮게 굴기 시작하여 그는 이 마을, 저 마을로 계속 옮겨다녀야 하였다. 이렇게 하여 많은 왕국의 씨가 이들 지역에 뿌려졌다.

흔히 이러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스페어’ 형제는 간행물 대신 받은 많은 곡물, ‘치이즈’, 달걀 및 다른 것들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이러한 외딴 지역에서는 길을 따라 여행하는 사람들을 약탈하는 강도단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리 중 아무도 ‘스페어’ 형제를 괴롭힌 적은 없었다. 사실상 그는 그들에게 전도하곤 하였다. 이들 중 한 사람—다른 강도들까지도 무서워했던 아주 포악한 사람—은 어린 아이처럼 왕국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변화함

1937년경 ‘크파라부’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루이스 야즈벡’이라는 한 진실한 희랍 정교회 교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에 관하여 듣고는 그들을 찾아 다녔으며 ‘트리폴리’에 있는 ‘샴마스’ 박사의 병원에서 그들을 발견하였다. 물론 ‘증인’들은 기꺼이 그에게 영적 도움을 베풀었다.

흥미롭게도, 토론중에 흡연에 관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하나님의 종이 담배를 피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점이 ‘루이스’에게 설명되었다. 신속히 ‘증인’이 되어가고 있던 ‘루이스’는 담배와 기타 흡연 용구를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결코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이것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천적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생활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고,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잘 예시해 준다.

여러 해 동안 ‘루이스 야즈벡’ 형제는 ‘크파라부’ 마을에서 유일한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그러나 인내와 다른 형제들의 도움으로 그 마을에 관심을 일으켜 놓았다. 오늘날 이 지역에는 열성스런 작은 회중이 하나 있는데, 이 중에는 아직도 ‘야즈벡’ 형제가 끼어 있다.

1937년 중에 ‘그리이스’계 미국인인 ‘페트로스 라가코스’ 형제가 ‘레바논’에 왔는데, 그는 중동의 다른 나라들에서 열성적으로 봉사해 왔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시리아’ 도시인 ‘에스칸두룬’, ‘알레포’, ‘안티옥’ 그리고 ‘라타키아’에서 일한 후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온 것이다. 그곳에는 많은 ‘그리이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라가코스’ 형제 부부는 그들에게 부지런히 전파하였다.

어느 날 ‘라가코스’ 자매는 ‘카티나 니콜라이도우’라는 부인의 대문을 두드렸는데, 그 여자는 희랍 정교회의 전통에 매우 열성적이었다. 사실 그 집에 들어가면서 ‘라가코스’ 자매는 벽이 온통 종교적인 성인들의 형상과 그림으로 널려 있고 그것들 앞에 작은 기름 등잔불이 하나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부인의 습관은 매일 이러한 형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었다.

얼마 후 ‘라가코스’ 부부의 도움으로 ‘니콜라이도우’ 부인은 성경에 관한 지식에 있어 발전하였다. 곧 그의 모든 종교적 그림과 형상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가 왔다. “아마 그것들을 그냥 교회에 넘겨줄 수 있겠지요.” 하고 그는 추리하였다.

“안됩니다”라는 것이 ‘라가코스’ 형제의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독실한 친구가 많이 있으니까 그것들을 친구들에게 그냥 주겠읍니다” 하고 그 여자가 응답하였다.

그러나 ‘라카코스’ 형제는 “그렇게 해서도 안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됩니까?” 하고 그가 물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처리해야 하는데, 그것들을 깨뜨려 없애야 합니다” 하고 설명해 주었다.

그 부인이 이러한 “성(聖)”물 앞에서 그렇게 여러 해 동안을 기도해 왔기에 이것은 실로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렇게 결정하였으며, 그래서 그림들과 형상들을 부수어서 가족의 목욕 물을 데우는 연료로 사용하였다.—열왕 하 18:1-5.

‘니콜라이도우’ 부인이 그의 생활에서 큰 변화를 하여 ‘증인’이 되자 ‘그리이스’인 동네에서는 그 부인의 재봉업을 망하게 만들기로 하였다. 그들 모두는 더 이상 바느질 감을 그 여자에게 절대로 맡기지 않겠다고 맹세하고는 말처럼 그렇게 하였다. 그러나 담대한 이 새로운 자매는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손님이 있음을 곧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매는 또한 여호와 하나님과의 값진 관계도 갖게 된 것이다! 더우기 그 자매와 그의 남편은 자기네 딸들을 진리 안에서 양육하였다.

전시 중에 박차를 가함

1940년대초에 세계는 전쟁의 와중에 있었다. 상황이 뒤집혀져 아무도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다. ‘레바논’ ‘증인’들이 ‘뉴우요오크 브루클린’에 있는 ‘왙취타워’ 협회 본부와 접촉을 지속하기가 어려웠으며, 그 당시 여러 해 동안 전도 재료가 풍부하지 않았다. ‘레바논’의 많은 사람들은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나찌’당이 중동을 장악하지나 않을까해서 두려워하였다. 한편 일부 교직자들과 다른 사람들은 ‘히틀러’와 그의 정책을 공공연히 지지하였다. 그들은 ‘히틀러’가 장악하는 즉시 그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취할 조치를 강구했으며 심한 협박을 가했다. 그러나 물론 ‘히틀러’가 승전하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증인’들은 전시 내내 계속해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던 것이다.

비록 그 당시 여러 해 동안 확성 차와 축음기가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형제들은 지도를 만들어 그들이 이를 수 있는 도시와 마을에서 호별 방문으로 조직적으로 봉사하였다. 또한 1940년대초에는 조그마한 대회들이 ‘트리폴리’와 그 근방에서 열렸다. 이러한 대회들은 형제들을 영적으로 강화시켜 주었다. 1942년에 그들이 ‘J. F. 러더포오드’ 형제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이 슬퍼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의 조직의 사업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좋은 소식 전파를 계속하기로 결심하였다.

‘레바논’과 ‘시리아’는 제 2차 세계 대전 전에 ‘프랑스’의 신탁 통치령이었다. 1940년 6월, ‘프랑스’가 ‘나찌’에 패배한 후에 ‘레바논’에 있는 ‘프랑스’ 당국은 독일과 협력했던 소위 ‘비시’ 정부의 ‘프랑스’ 정권을 편들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로 전세는 결국 ‘레바논’으로 미쳐 1941년에 ‘비시’ 군대와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및 기타 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베이루트’와 기타 일부 지역에 공습과 폭격이 있었다. 결국 ‘레바논’은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러나 전쟁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계속해서 좋은 소식을 전파할 수 있었다.

‘시리아’에서 전파 활동이 계속되다

‘시리아’에서는 전파의 자유가 차츰 감소되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그곳에 있는 그의 백성들을 계속 축복하셨다. 1942년 중 그리스도인 집회가 ‘아딥 카푸루니’의 감독하에 ‘다마스커스’에서 정기적으로 조직되었다. 종종 형제들은 체포되었으며, 그들의 간행물은 압수당하였다. 여느 때처럼 교직자들이 여호와의 백성에 대하여 거짓 고발을 한 것이다.

이를 테면, 교직자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거짓 누명을 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거 사업은 ‘시리아’의 여러 지역 내로 뻗어 나갔다. 예를 들면, ‘파이오니아’들인 ‘자밀 스페어’ 형제와 ‘라가코스’ 형제 부부는 ‘알레포’를 철저히 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시리아’ 북쪽에 있는 ‘아마르엘 후산’ 마을에는 마침내 하나의 조그마한 회중이 형성되었다.

해외로부터의 도움

제 2차 세계 대전 중 ‘브루클린’ 협회 본부와의 접촉이 대부분 두절되어 왔었다. 그 결과 1945년 봉사년도 중에 ‘레바논’에서 단 한명의 왕국 전도인만이 야외 활동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1946년 봉사년도 말에는 전도인 최고 수가 72명에 달하였다. 어떻게 그처럼 급증하였는가?

이러한 증가는 주로 일을 더 잘 조직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는데, 1945년의 좋은 소식 전파자가 실제로는 한명보다 많았던 것이다. ‘레바논’에 도착한 ‘왙취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 제 1기 졸업생인 ‘아피프 파라’ 형제 부부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 ‘파라’ 형제는 다른 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마련들과 좀 더 일치하게 집회를 사회하는 면에서, 그리고 야외 봉사 사업을 조직하는 면에서 형제들을 도왔다. 그는 흩어져 있는 전도인들을 방문하여 그들의 전파 활동을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마련하였다.

1947년 봄에 ‘레바논’의 사업을 크게 도운 또 다른 일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협회장 ‘N. H. 노워’와 그의 비서인 ‘M. G. 헨첼’의 방문이었다. 그들은 세계 일주 여행 도중 ‘레바논’에 왔는데, 그곳 형제들은 그들의 도착을 열렬히 고대하였다. 수백명이 그 방문중에 열린 대회에 참석해서 그 형제들이 행한 연설을 통하여 영적으로 격려를 받았다. ‘길르앗’ 졸업생인 ‘아피프 파라’가 ‘레바논’과 ‘시리아’의 여러 지방들을 여행하여 ‘증인’들의 집단들을 회중들로 조직하게 하는 마련이 있었다. 따라서 1947년 봉사년도 말에는 ‘시리아’와 ‘레바논’ 전역에서 7개 회중이 운영되고 있었다.

“믿음의 군사들”?

‘트리폴리’에서 ‘노워’ 형제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다섯명의 친형제가 있었다. 그들 중 몇은 최근까지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해 몹시 반대를 해왔었기 때문에 아주 마지못해서 왔었다. 그들은 비록 평생을 ‘레바논’에서 살아왔지만 종교는 희랍 정교회였고, 국적은 ‘그리이스’였다. 그들은 특히 ‘여호와의 증인’들을 반대하기 위하여 조직된 “믿음의 군사들”이라고 불리우는 한 지방 정교회 종교 단체의 성원들이었다.

이 종교 단체의 회장은 ‘스티븐’이란 사제였다. 그는 항상 권총을 허리에 차고 다니는 폭력적인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었으며, 여러 번 그것을 사용한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이 종교 단체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 중에는 여섯명의 ‘스타브로’ 형제들이 있었다.

이 단체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반대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을 고안하였다. 일부 극단주의자들은 폭력으로 ‘증인’들을 위협하고, 필요하다면 그들 중 일부를 죽임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겁을 주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 단체의 한 성원인 변호사는 그들 자신의 무기로 ‘증인’들과 싸우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믿음의 군사들”은 희랍 정교회에 속해 있고 그들이 참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성서를 연구해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릇됨을 증명하는 것이 어떤가? 다수가 이에 동의하였으며, 그들 중에는 ‘스타브로’ 형제들이 끼어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미켈 어바우드’ 형제가 ‘코스티 스타브로’의 양복점에 들어와 그에게 성서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스타브로’가 놀란 것은 그가 듣고 있는 바가 아주 이치적이고 성경과 일치하다는 점이었다. 상황이 달라지자 ‘어바우드’ 형제는 재삼 재사 그를 방문하여, 마침내는 그와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코스티’의 친형제들을 크게 노엽게 만들었다. 격렬한 토론이, 더구나 자기 형제들끼리 서로 의자를 던지기까지에 이를 정도로 난폭한 토론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러나 ‘코스티’는 연구를 계속하였다.

이제 다른 ‘스타브로’ 형제들은 그 사제와 모임을 가졌다. 이들 ‘여호와의 증인’들을 논박하기 위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그들은 알고자 했다. ‘증인’들은 삼위일체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 사제는 요한 복음 1:1을 그들에게 보여주면서 이 성귀가 ‘증인’들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스타브로’ 형제들이 ‘어바우드’ 형제와 만났을 때, 그들은 한 성귀만으론 아주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았다. ‘어바우드’ 형제는 그의 논점을 지지하기 위하여 아주 많은 성귀들을 언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듣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수개월 내에 네명의 다른 ‘스타브로’ 형제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이 가르쳐준 성서 진리를 받아들였다.

사제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들이 적에 가담할 수 있단 말인가? 곧 그 사제는 그들을 ‘증인’에게서 빠져나오도록 이야기해 보려고 그들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이렇게 거짓말을 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유대’인이요. 당신네들은 희랍인이요. 따라서 꼭 정교회에 머물러야만 하오. 당신네는 이곳 우리 희랍 정교회 단체의 기둥들이란 말이오.”

사제의 이같은 강력한 노력은 이상하게 보였다. 왜냐 하면 ‘스타브로’ 형제들이 적지않은 음주 따위를 하는 난잡한 ‘파아티’를 열었을 때도 사제가 결코 그들을 시정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들이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니까, 그로 인해 그들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에게 그가 너무 늦었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증인’으로 머물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스타브로’ 형제들은 지식이 계속 자라갔으며, 마침내 그들의 어머니와 누이가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막내는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후에 그는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고 그 후 ‘시리아’와 ‘이라크’의 ‘바그다드’ 그리고 ‘이란’의 ‘테헤란’에서 봉사하는 특권을 즐겼다. 그는 그곳을 떠나지만 순회 사업을 시작할 때까지 ‘레바논’에서 선교인으로 계속 봉사하였다. 그의 형제들 중 두명은 회중 감독자로 봉사하는 특권을 즐겼다.

지부 사무실이 설립되다

‘아피프 파라’ 형제는 ‘레바논’에서 훌륭히 일하였다. 하지만 그는 개인 사정으로 약 1년 후에 그 나라를 떠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협회는 곧 다른 선교인들을 ‘레바논’으로 보냈다. 1949년 봄에 ‘길르앗’ 졸업생인 ‘돈터틀’과 ‘존 치미클리스’가 도착하였다. 그들은 ‘베이루트’에 임명되었으며, 거기서 그 도시의 ‘라스 베이루트’ 구에다가 선교인 집으로 사용할 집을 하나 빌렸다.

1949년 9월에 ‘왙취 타워 협회’의 지부 사무실이 ‘베이루트’에 개설되었으며 ‘돈 터틀’이 지부 감독자로 봉사하였다. 이 사무실이 ‘레바논’과 ‘시리아’ 그리고 ‘요르단’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사업을 돌보았다. 1949년 봉사년도 말에는 최고 172명의 전도인이 ‘레바논’의 5개 회중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시리아’에는 최고 20명의 왕국 전도인과 더불어 세개의 회중이 있었다.

새로운 선교인들이 성과를 올리다

중동에 사는 상당수의 형제들이 1950년에 ‘뉴우요오크’ 시 ‘양키스태디움’ 국제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들은 여호와를 찬양하는 봉사에서 자기들에게 도움이 된 많은 요점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더 많은 도움이 뒤따랐다.

1951년 1월 ‘베이루트’에서 선교 봉사를 하러 네명의 ‘길르앗’ 졸업생이 더 왔으며, 10월에도 또 도착하였다. 그들은 ‘케이드초우’와 ‘조이스 초우’, ‘올리브 터너’ 그리고 ‘도린 워버튼’였으며, 그 다음에는 ‘안네 비버’와 ‘그웬 비버’와 함께 온 ‘에드나 스택하우스’였다. 모두가 임시로 ‘트리폴리’에 임명되었다.

‘트리폴리’ 회중은 아직도 ‘샴마스’ 형제의 병원에서 모였는데, 30명 내지 50명이 정기적으로 참석하였다. 그 회중에서는 여전히 동양 관습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자기 아내와 딸들을 집회에 데리고 나오는 형제들은 극소수였다. 참석한 여자들은 언제나 뒷줄에 앉았으며, 절대로 남자들 사이에 앉는 일이 없었다. 물론, 선교인들은 이러한 관습을 몰랐다. 그래서 형제 부부는 앞에 앉았으며, 독신 선교인 자매들은 빈 자리면 아무데나 앉았다. 이것이 형제들 사이에 적지않은 문제를 일으켰다.

집회 후 토론중에 선교인 형제가 그들은 모두 형제 자매들이라는 것을 친절히 설명하였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는 구별을 두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확실히 형제는 아무데나 자기가 앉고 싶은 곳에 자기 아내와 나란히 앉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오래지 않아 아내와 딸들이 집에 남아 있다가 가장이 돌아오면 집회에 관하여 질문하는 일이 더는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들은 몸소 집회에 참석하였다.

바로 그 동양 관습은 야외 봉사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선교인들이 오기 전에는 자매들이 호별 방문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선교인 자매들이 매일 나와 대문들을 두드리고, 곧 지방 자매들을 동반하였다. 그들 모두는 참으로 즐거웠었다! 곧 형제들은 자기들의 아내와 딸들의 발전을 보고 매우 흐뭇해 하였으며, 그러한 발전이 가정 주위에서 그들의 정신과 태도에 놀라운 차이를 가져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돈’과 ‘두로’를 향하여

드디어 ‘트리폴리’에 왕국회관이 딸린 적합한 선교인 집을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집회 참석수가 증가하여 곧 왕국회관은 만원이 되었다. 얼마 안있서 그 한개의 회중은 네개가 되었다. 1953년 여름에는 선교인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현명해 보이리 만큼 발전되었다. 그들 중 두명은 고대 ‘시돈’으로 임명되었다.

‘시돈’의 굽이굽이한 언덕과 많은 ‘오렌지’ 및 ‘레몬’ 과수원은 ‘올리브 터너’ 자매와 ‘도린 워버툰’ 자매에게 즐거운 임명이 되게 해 주었다. 대부분의 봉사는 지붕들로 가리워진 골목길들과 조그마한 입구가 있는 그 도시의 고적 지역에서 수행되었다. 이곳은 우기에 봉사하기 좋은 구역이었는데, 길을 따라 걸으면서도 비에 젖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사람들은 두명의 영국인 처녀가 그러한 조그마한 길로 돌아 다니면서 대문을 두드리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주민들은 그들을 정중히 대했으며, 그 자매들은 거기서 오늘 날 서방 도시의 거리를 걸어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안전감을 느꼈다.

‘시돈’에서 남쪽으로 40‘킬로미터’ 지점에 ‘두로’라는 조그마한 도시가 있다. 한 때 ‘히람’ 왕이 다스리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두로’는 고대 세계의 해상 무역의 여왕으로 ‘카르타고’와 같은 그처럼 멀리 떨어진 무역 거래 도시들을 번성케 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곳에 흙으로 다리를 놓아 ‘두로’를 정복하였는데, 그 당시 ‘두로’는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섬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두로’라는 작은 도시는 그러한 고대 도시들의 폐허 위에 세워진 것으로, 그 일부는 ‘알렉산더’가 건설했던 둑길 바로 위에 세운 것이다. ‘터너’ 자매와 ‘워버튼’ 자매는 바로 이 도시에 파견되어 주로 회교도들인 주민들에게 증거하였다. 성서 연구가 사회되어 회교도들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움을 받았으며, 그들은 잘 발전하였다. 후에, 얼마는 ‘시돈’ 회중과 함께 왕국을 선포하게 되었다.

1948년의 ‘아랍’-‘이스라엘’ 전 이래 ‘두로’와 ‘시돈’ 사이의 도로상에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살고 있던 커다란 야영대가 있었다. 그들의 생활 형편은 어려웠지만, 그들은 겸손했고 선교인 자매들은 그들 사이를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는데, 특히 두 가족이 진리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후에 그들은 ‘베이루트’ 근방으로 이사하여 그곳 그리스도인 회중과 연합할 수 있었다.

선교인 자매들은 ‘레바논’의 남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낯선 사람들을 후하게 환대한다는 것을 알고 참으로 기뻐했다. 방문객이 아무리 오래 머물더라도, 심지어 낯선 사람이라 할지라도 집 주인은 그에게 다과를 대접할 것이다. 이 사람들은 대화 중에 자기들의 신분과 직업, 자녀 수, 집세 등과 같은 것을 거리낌없이 이야기해 준다. 그리고 그들은 방문객에게 결코 그의 용건을 묻는 일이 없다. 그들은 ‘그가 자기 용건을 이야기할 준비가 되었을 때 이야기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단지 그를 반가이 맞이할 뿐이다. 그때까지 그는 반가운 손님이다. 사실 사막의 어떤 ‘아랍’인들은 너무 지나쳐서 어떤 사람이 이틀을 지내고도 자기 용건을 말하지 않으면 그제서야 그에게 찾아온 이유를 말해줄 것을 정중히 요청한다. 물론 우리 선교인 자매들은 어떤 집에서도 결코 그렇게 오랫동안 머무르는 일이 결코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기꺼이 자기들이 찾아간 중요한 이유를 말하였다.

때때로 사람들은 단지 그러한 상냥한 사람들의 방문을 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나 ‘시돈’에서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배웠으며, 후에 다른 지역과 나라로 이사하여 거기서 계속해서 여호와를 섬겼다. ‘시돈’의 그 작은 회중은 여전히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사업에 계속 박차를 가하고 있다.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를 향하여

1951년 12월말경, ‘레바논’ ‘증인’들은 또다시 ‘N. H. 노워’와 ‘M. G. 헨첼’의 방문을 받았다. 그해 봉사년도 중에 ‘레바논’에서는 최고 401명의 왕국 선포자가, 그리고 ‘시리아’에서는 82명이 야외 봉사를 보고하였다. 공개 집회를 열기 위한 허가를 받았으며, 형제들은 ‘베이루트’의 ‘아메리칸’ 대학 대강당에서 행한 ‘노워’ 형제의 공개 강연에 793명이 참석하게 되어 기뻐 어쩔줄 몰랐다. 참으로 훌륭한 행사였다!

이 방문 중에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 선교인을 보내는 것이 시기에 적절할 것이라는 결정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교인 집이 마련되었고, 네명의 선교인들이 가능한한 주의를 끌지 않으면서 증거 활동을 시작하였다. 10명 내지 12명의 전도인이 있는 그 조그마한 ‘다마스커스’ 회중은 ‘아딥 카프루니’의 집에서 집회를 가졌었다. 이내 선교인들은 ‘아라비아’어를 하는 능력이 발전하였다.

몇개월 되지 않아 당국은 선교인들의 사업을 알아챘으며 그들을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치안국의 한 관리가 선교인 집을 찾아와서 형제들에게 24시간 이내로 떠나야 한다고 통고하였다. 그리하여 ‘다마스커스’에서의 단기간의 선교 사업이 끝났다. 그러나 그 도시의 형제들은 여호와를 찬양하는 그들의 봉사를 계속했으며, 후에 그들을 돕도록 지방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파견되었다.

1952년 4월에 특별 ‘파이오니아’인 ‘아티프 나오우스’ 형제가 ‘홈스’라는 ‘시리아’ 읍에 임명되었다. 그곳에는 열성스런 형제들이 몇명 있었지만 구역은 넓고 그들은 도움이 필요하였다. 그의 경험은 ‘다마스커스’에서의 선교인들의 경험과 아주 흡사하였다. ‘나오우스’ 형제는 불과 2개월 후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군법하에서 42일간 수감되어 있었다. 처음 5일간에는 극소량의 음식이 주어졌으며, 빗장이 쳐진 단 하나의 창문이 있으며 추위를 이길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독방의 좁은 나무 ‘벤치’에서 잠을 잤다. 한밤중에 ‘나오우스’ 형제에게 정기적으로 자기 외투를 벗어준 어느 간수의 동정심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훨씬 더 고된 경험을 하였을 것이다. 그처럼 모진 대우를 받은 결과 그의 건강은 영구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여호와를 계속 섬길 수 있었다.

박해 중의 축복

‘다마스커스’에서 ‘레바논’으로 돌아온 직후, 부부인 두 선교인이 역사적인 ‘헤르몬’ 산에서 북쪽으로 약 51‘킬로미터’ 떨어진 분곡에 있는 읍인 ‘잘레’로 임명되었다. 그곳은 ‘가톨릭’교 세력이 강한 읍으로, 상당히 큰 희랍 정교회 단체도 있었고 소수의 회교도들이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곳에 회중을 설립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읍에 있던 소수의 왕국 전도인들은 선교인들과 함께 일함에 따라 진리 안에서 발전하도록 도움을 받았다. 집회는 정기적으로 열렸으며, 8명 내지 10명 가량이 참석하였다.

‘잘레’ 대부분이 약 6개월 내에 증거되었다. 봄에는 다른 두 명의 선교인 즉 ‘올리브 터너’와 ‘도린 워버튼’이 그 지역에 있던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였다. 그 무렵 교직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증인’들을 반대하도록 선동했다. 그 읍에는 다른 외국인들이 없었으므로 선교인들이 매일 야외 봉사를 하는 것은 눈에 아주 잘 띄었다. 고함 소리를 듣고 조롱을 당하는 일을 그들은 매일 겪었다. 종종 그들에게 돌을 던지는 바람에 맞는 일도 있었다. 한 자매는 그의 안경이 돌에 맞아 깨지는 바람에 여러 군데 타박상을 입고 몇 군데가 베인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선교인들은 심각한 상처를 모면하였고 2년간 그 주민들의 가정을 계속 방문할 수 있었다. 조그마한 회중이 하나 형성되고 집회는 선교인 집에서 열렸으며, 매주 10명 내지 15명까지 참석하였다.

선교인들은 학교를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거의 모든 학교가 교회에 의해 운영되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 있는 선생들과 교직자들은 모두 어린이들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을 어디서 보든지 그들에게 돌을 던지라고 선동하곤 하였다. 선교인들이 학교 옆을 쉬는 시간에 지나칠 때면, 운동장으로부터 빗발치는 돌 세례를 받기 일수였다.

주위 마을들에서도 상황은 대단히 흡사하였다. 한 때 선교인 자매 세명이 지방 자매들 세명을 동반하여 인근 마을에서 전도하고 있었다. 한 시간 가량 증거한 후에 두 자매는 한 집주인으로부터 사제가 학교 아이들을 불러모아 그들에게 돌을 던지게 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 자매들이 다른 자매들을 만났을 때에는 이미 사제가 아이들을 한데 모았으므로 여느때처럼 도로를 이용해서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폭도들을 피하려고 들을 가로질러 갔다. 그러나 그들은 추적당하였다. 다행히도 그들은 들에서 일하던 얼마의 남자들을 발견하였다. 자매들이 그들에게 도움을 호소하자 그들이 아이들을 중지시키겠노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남자들은 사제에 의해 선동받아온, 심지어 자기 자신의 자녀들에게까지도 돌을 던져야만 하였다.

선교인들이 ‘잘레’의 거리를 따라 걷고 있을 때, ‘슈하우드 야화’(“여호와의 증인”)는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야유”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분께서 그 마을에 ‘증인’들을 갖고 계심을 인식하였다.

부언하면, 여러 해 후에 ‘베이루트’에서 있었던 그리스도인 대회 때 한 청년이 ‘잘레’에서 봉사했던 선교인들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러분은 아마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저는 여러분을 기억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잘레’에 계실 때 여러분에게 곧잘 돌을 던지던 그 아이들 중에 끼어 있었습니다.” 이전에 회교도였던 이 사람은 자기 생명을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들의 그리스도인 형제가 되었던 것이다.

한 사제와 그의 교회 종소리

여름에는 주로 왕국 선포자들이 ‘버스’를 타고 ‘트리폴리’에서 여러 격지 마을들로 여행하곤 하였다. 그들은 점심을 싸 가지고 일요일 아침 일찍 출발해서 온 종일을 야외 봉사에 바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피곤하긴 했지만 매우 즐거웠다. ‘버스’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가는 동안 그들은 왕국 노래를 부르고 성서 ‘게임’을 하였다.

때때로 이들 지역에서 특별한 전략을 사용해야만 하였다. 집단들은 특별히 들어가기 어려운 마을로 들어갔다가 특정한 시간까지 ‘버스’로 돌아오도록 계획하곤 하였다. 이렇게 하여 교직자나 그외 누군가가 전도인들에 대해 말썽을 일으키기 전에 마을들은 재빨리 증거될 수 있었다. 그러한 마을 중 하나를 어느 부자의 장례식 때 방문하게 되었다. 그 마을 교직자들은 모두 장례식에 참석하였기 때문에, 형제들은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마을 전체를 다 돌았다. 사제들이 그날의 정상적인 업무로 돌아왔을 때쯤에 형제들은 이미 모든 가정을 방문하는 일을 마치고 떠나는 도중이었다.

그러나 다른 경우로 한 마을 사제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 지역 내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찾아 헤매기 시작하였다. 그가 주임 감독자가 증거하고 있던 집에 이르렀을 때, 참으로 노발대발하였다. 그 사제는 주로 그 형제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저주하고 욕을 해대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그 사제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결국 그는 그 집에서 즉시 떠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교회에서 파문될 것이라고 소리쳤다. 겨우 절반 가량만이 떠났다. 그러자 그 사제는 더 크게 화를 내었다. 그는 교회로 달려가 종을 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하면 마을 사람들을 모두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이들 30명의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려고 하였다!

‘버스’가 마을 광장에 주차해 있었고 전도인들은 모든 가정을 방문한 후 그리로 모이기 시작했었다. 주임 감독자가 도착했을 때 종소리로 상당히 큰 군중이 모여 들어 있었으며, 사제는 화가 잔뜩난 채 여전히 종을 치고 있었다. 사람들이 계속 오고 있었으며, 전도인들은 그들 가운데 섞여서 증거하고 있었다. 사실 전도하기에 참으로 좋은 기회였으므로, 주임 감독자는 ‘버스’ 옆 바위 위에 서서 모든 사람의 주의를 모아 짧막한 공개 강연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사제가 종을 쳐서 ‘여호와의 증인’ 중 한 사람이 하고 있는 강연을 듣도록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무척 재미있어 하였다. 그들은 심지서 자기들의 사제가 화를 내고 욕을 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한 사제와 그의 교회 종소리가 뜻한 바와는 다르게 사람들을 그리스도인 성서 강연으로 불러 모으게 되었으며, 극렬한 반대는 아주 특이한 기회가 되었다.

잡지가 금지되다

1955년에 이르러 ‘레바논’ 왕국 전도인 최고 수는 501명으로 불어났다. 그 해의 주목할 만한 일은 「그리스도교국 혹은 그리스도교—어느 것이 “세상의 빛”인가?」라는 소책자의 특별 배부였다. 이 소책자는 ‘아라비아’어로 번역되어 ‘레바논’에서는 10,000부가 인쇄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훌륭한 증거가 되었다! 하지만, 물론, 그로 인해 교직자들이 자극을 받고 전파 사업을 반대하기 위해 새로운 노력을 기울였다.

매년 수천부의 「파수대」와 「깨어라!」지가 ‘레바논’ 사람들의 수중에 전해지고 있었다. 사실 1956년 한 해 동안에 왕국 전도인들은 1,106건의 신규 예약을 맡았다. 많은 수의 잡지가 사업가들의 수중으로 들어가 그들의 사무실과 대기실에 놓여지곤 하였다. 그렇다, 어떤 교직자는 사무실에 들어갈 때마다 탁자 위에 「깨어라!」나 「파수대」가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곤 하였다! 교직자들에게 그것이 달가왔을리가 없다.

1956년 여름에 교직자들은 ‘레바논’에서 「파수대」와 「깨어라!」지를 금지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일은 ‘증인’들이 야외 봉사에서 이 훌륭한 도구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증인’들은 이러한 출판물들에 의해 공급된 영적 양식이 여전히 형제 자매들에게 계속 이르고 있음을 감사히 여겼다. 지금까지도 금지령을 해제시키려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레바논’에서는 이 잡지들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증인’들이 영적 양식을 받을 수 있도록 돌보아주고 계시다.

얼마의 조정을 위한 시기

1955년 9월에 ‘길르앗’ 학교 졸업생이며 선교인인 ‘리 플루머’ 형제 부부가 ‘레바논’에 왔다. 이듬 해 5월에 ‘플루머’ 형제는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또한 순회 사업과 전파 활동의 여러 가지 부면을 재조직하는 마련도 있었다. 이를 테면, ‘레바논’ 전도인들은 호별 방문 봉사에서 성서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점이 순회 감독자들을 통하여 격려되었으며, 곧 전국의 왕국 선포자들이 성서를 가지고 호별 방문에 나가게 되었다.

1956-1957년 겨울에 ‘N. H. 노워’ 형제와 ‘F. W. 프렌즈’ 형제가 지구 감독자인 ‘필립 호프만’과 함께 ‘레바논’을 방문하였다. 이것은 영적인 격려를 위한 훌륭한 기회였다. 대회가 열리고 ‘노워’ 형제와 ‘프렌즈’ 형제는 참석자들에게 훌륭한 충고와 격려를 줄 수 있었다.

그러나 1958년에 ‘레바논’에서는 많은 분쟁이 일어나 신권적인 활동이 크게 방해를 받았다. 초 봄에 순회 대회가 ‘트리폴리’에서 열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에 혁명이 일어났다. 결국 많은 지역이 자칭 혁명가들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는데, 그들은 연방 정부와는 무관한 자기들 자신의 조그마한 정부 조직을 이끌어갔다. 이러한 지역에 있는 형제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일부 형제들이 이들 혁명군에게 체포되었다. 대개 이 사람들은 형제들이 어떠한 사람들인가를 알게 되면 풀어주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정치 문제에 관한 한 중립주의자들로 잘 알려져 있었으며, 이것은 그같은 어려운 시기에 그들에게 하나의 보호책이 되었다.—요한 15:19.

1958년은 ‘뉴우요오크’ 시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들의 대규모적인 ‘성의 국제 대회’로 주목할 만하였다. ‘레바논’에서는 대회 참석자들이 타고 떠나려던 비행기가 정부군에 의해 포위당하여 억류되었었다. 그러나 출발 시간에는 항공 취항이 정상적이어서 선교인들과 그 밖의 사람들이 무사히 떠났다.

그같은 어려운 시기에 ‘레바논’에 있던 여호와의 종들은 그들의 야외 봉사에서 조정을 해야만 하였다. 대부분의 주요 도시에서는 야간 통행이 금지되었으며 오후에도 몇 시간 동안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게다가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지역은 흔히 포격과 폭발 때문에 위험하였다. 수도인 ‘베이루트’는 정부군과 혁명군 사이의 격렬한 전투로 그 나라에서 특히 혼란스러운 곳이었다. 몇몇 형제들이 유탄에 부상을 당하였지만, 다행히 그러한 사태 전 기간 동안 죽임을 당한 형제는 하나도 없었다.

마침내, 정부가 전복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미 해군이 상륙하였다. 이것은 사태를 상당히 진정시켜 주었다. 몇달 후 양편이 모두 적절히 만족할 정도로 정부측과 혁명군 사이의 사태가 수습되었다. 그리하여 ‘레바논’에 평화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위태위태한 평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백성들은 전파 사업을 그대로 계속하였다. 또다시 그들은 공개적으로 호별 방문하여 평화스러운 왕국 소식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혼란기 이전보다 더 기꺼이 귀를 기울였다. 1958년 11월에 선교인들 모두가 이 나라로 돌아와 ‘레바논’ 동료 신자들과 더불어 왕국 전파 사업에 다시 즐거이 참여하였다. 1960년에는 최고 608명이나 되는 왕국 증인들이 ‘레바논’의 15개 회중과 함께 봉사하고 있었다.

‘레바논’에서의 잇따른 발전

1954년으로 소급하면, 두명의 선교인 즉 ‘안네비버’와 ‘구엔비버’가 ‘베이루트’에 거주하고 있는 약 60,000내지 80,000의 ‘아르메니아’인들 지역 사회에서 증거하기 시작했었다. 그들은 한 동안 훌륭히 봉사하였다. 다음 1957년에서 1958년 사이의 겨울에 한 ‘아르메니아’인 자매인 ‘소나 헤이도스챤’이 그곳 ‘아르메니아’인들 가운데서 봉사하기 시작하였다. 발전이 좋아 1959년 2월에는 최초의 ‘아르메니아’ 회중이 ‘베이루트’에 형성되었다. 후에 그의 부모들이 ‘소나’와 합류하여 사업은 계속 진전되었다. 1971년에는 두개의 ‘아르메니아’ 회중이 있었다.

1956년 5월 이래 ‘리 플루머’ 형제가 ‘레바논’ 지부 감독자로 봉사했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는 이 봉사의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아피프 파야드’ 형제가 1962년 1월부로 지부 감독자가 되었다. 그 때까지 ‘레바논’에는 17개의 회중이, ‘시리아’에는 두개의 회중이 있었다. 그러나 1965년 1월에 ‘파야드’ 형제는 더 이상 지부 일을 돌볼 수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 ‘길르앗’ 학교에서 최근에 10개월간의 과정을 이수한 다른 형제가 그 봉사의 특권을 맡게 되었다.

‘시리아’의 ‘알레포’를 향하여

1962년에 ‘소나 헤이도스챤’은 ‘시리아’의 ‘알레포’에 있는 또 하나의 ‘아르메니아’인 지역으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 ‘시리아’ 전역에는 약 100명의 왕국 전도인들이 있었다. ‘소나’에게는 ‘알레포’에 살고 있는 ‘증인’이 아닌 얼마의 친척들이 있었는데, 오래지 않아 그들 중 몇몇이 왕국 소식을 받아들였다. ‘헤이도스챤’ 자매의 부모가 ‘알레포’에서 그 자매와 합류하여 1966년에는 25명의 왕국 전도인들로 이루어진 한 회중이 형성되었다. 그 무렵 ‘시리아’의 ‘증인’ 수는 약 120명으로 불어났다.

‘헤이도스챤’ 가족은 하나의 선교인단으로서 2년간을 더 ‘알레포’에 남아 매우 훌륭하게 봉사하였다. 그러나 ‘소나’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으며,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 그 자매에게 다발성 경화증이 있음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그 가족들은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967년 6월 그 가족이 ‘시리아’를 떠나려하던 바로 수일 전에 또 하나의 ‘아랍-이스라엘’전이 발발하였다. ‘알레포’의 경찰은 그들에 대하여 거짓 고발을 한 교직자들의 선동으로 한 동안 형제들을 감시해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국은 ‘헤이도스챤’ 가족의 집에 와서 두명의 지방 형제들과 함께 그들을 체포하였다. ‘헤이도스챤’ 형제는 70세가 넘었고 그의 아내는 60대 후반이었으며, 한편 ‘소나’는 건강이 아주 나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투옥당하였다.

그들은 처음 며칠 동안은 마루 맨바닥에서 자야 했었다. 후에 그들은 두장의 담요를 받았는데, 하나는 깔고 하나는 덮었다. 그들은 약 5개월간 수감되어 있었지만 자기들이 겪는 일로 불행하지 않았다. ‘소나’는 말하기를 자기 병을 치료하려면 휴식을 취해야만 된다고 의사가 말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교도소 내에서는 달리 할 수 있는 도리가 없었다. ‘헤이도스챤’ 형제는 처음에는 돌 바닥이 딱딱했지만 그 위에서 몇 주일 자고나니까 점점 더 폭신해졌다고 말하였다. 그 가족은 ‘알레포’의 새로운 회중에게 충실함의 훌륭한 본을 세워 놓았다.

약 6개월 후, ‘헤이도스챤’ 가족은 ‘다마스커스’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들은 더 많은 심문을 받았다. 얼마 후 그들은 그들이 즉시 석방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여권도 돌려받지 못했으며 ‘알레포’에 있는 자기들 집으로 돌아가서 소유물을 가져갈 수 있는 허락도 받지 못하고 ‘레바논’ 국경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국경에서 그들을 맞아준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다.

여러 해에 걸쳐 ‘시리아’에서는 왕국 전파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자유가 계속 제한을 받아왔다. 그러나 형제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해주기 위하여 그들의 최선을 다 해오고 있으며, 새로운 사람들이 참 믿음에 계속 더해지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에 ‘시리아’에서는 왕국 전도인 최고 수가 200여명에 이르렀다.

‘레바논’에 고난이 가중되다

1968년 5월에 ‘N. H. 노워’ 형제가 ‘레바논’을 방문하여 그 나라에 있는 감독자들에게 연설하였다. 그의 훌륭한 연설은 그들을 크게 격려해 주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전 어느 때보다도, 여호와의 율법을 잊어버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원히 계속 섬길 것을 더욱 더 결심하게 되었다.

1970년대 초에 협회의 모든 출판물에 대한 금지령으로 고난이 가중되었으며, 그 나라의 모든 왕국회관은 폐쇄되었다. 그러나 비공식 증거가 계속되어 훌륭한 결과를 산출하였다. 그리하여 1971년에 ‘레바논’에는 29개의 회중과 3개의 격지 집단이 있었다. 그리고나서 다음 5년간—1971년부터 1975년까지—‘레바논’에서 600명이 더 침례를 받았다! 참으로 양같은 사람들을 계속 찾아낼 수 있었다! 1975년 3월에는 좋은 소식 선포자 수가 1,882명이라는 신기록에 달하였으며, 이들은 46개 회중으로 조직되었다.

내란 중 인내함

1975년 4월에 ‘베이루트’의 한 교외에서 무장 충돌이 일어났다. 그 범위는 계속 확대되어 전국이 내란에 휘말려 들기에 이르렀다. 이 전쟁은 근 2년간 계속 되었고 사망자 수는 결국 수만명에 이르렀다. 많은 형제들의 가옥과 사업 및 기타 재산이 파괴되었으며, 세명의 ‘증인’이 사망하였고 확실치 않은 수가 부상당하였다.

한 ‘증인’ 자매는 빨래를 널고 있을 때 저격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또 다른 한 ‘증인’은 ‘증인’들이 모여있던 집을 떠나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귀가하다가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다른 ‘증인’들은 총알과 포탄 파편으로 부상을 당했으며, 한 사람은 총검으로 부상당하였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러한 사고는 놀라우리만큼 드물었다.

전쟁 중 종교적인 면이 매우 강하게 영향을 받아왔는데, 그것은 아마 전체 분쟁중 가장 무서운 특징일 것이다. 회교도들이 우세한 지역에서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한 밤중에 자기들 집에서 끌려 갔으며, 그들중 다수는 결코 다시 보이지 않았다. 회교도들도 자칭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다르다고 알려져 있다.

모두와 평화함

‘여호와의 증인’들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든 혹은 회교도이든 간에 다음과 같은 성서의 충고를 적용시킴으로써 누구나 똑같이 대하려고 항상 노력해 왔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로마 12:18) 한번은 ‘가톨릭 마로니트’ 연맹 성원들이 한 ‘증인’을 방문해서 그와 그의 자녀가 자경단(自警團)에 가입하고 탄환 구입비로 300‘레바논 파운드’를 기부하도록 설득시키려 하였다.

이 ‘증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전쟁과 관련된 어떠한 일에도 참여할 수 없읍니다. 더우기 여러분의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머지 않아 모든 전쟁을 끝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통치 하의 평화스러운 제도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후에 그 지역 상태가 호전되었을 때, 그 ‘증인’은 자기의 확고하고 중립적인 태도가 이웃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러한 중립적 입장은 재삼재사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유익이 되었다. 자기가 틀림없이 ‘증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만 있으면 흔히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한 형제는 항상 가지고 다니던 수혈 거부 ‘카아드’를 제시함으로써 생명을 구하였다. 마찬가지로 또 한 형제는 일단의 자칭 사형 집행자들에게 자기가 ‘증인’이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얼마 전에 신권 학교에서 행한 학생 연설을 반복함으로써 처형을 면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그리스도인 행실이 그들의 생명을 구한 경우는 허다하였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어느 날 저녁에 한 ‘증인’이 직장 동료인 어느 회교도를 차에 태워 집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하였다. 무장한 사람들이 그들을 정지시키고는 그 ‘증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회교도 동료는 그를 살려줄 것을 간청하면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 사람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그는 중립입니다. 그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총기를 가진 자들이 듣기를 거절하자 그 회교도는 “만약 여러분이 우리 둘 중 혼자만 놓아 주려 한다면 차라리 우리 둘 다 죽이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의 진실한 간청으로 그들은 둘 다 풀려 나왔다.

또 한 ‘증인’은 말하기를 자기 집에 식량이 떨어졌었는데, 도처에 깔려 있는 무장한 사람들 때문에 밖에 나가는 것이 위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 인근 마을로부터 한 어린 회교도 소년이 그의 집에 나타나 이렇게 말하였다. “부모님들이 이 빵을 당신에게 보내셨어요. 그리고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세요. 갖다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요.”

‘증인’들의 명성이 알려지다

그 나라 북쪽에 회교도 마을들로 둘러싸인 한 “그리스도인”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에는 두개의 ‘여호와의 증인’ 회중이 있었다. 회교도들이 그 마을을 습격하여 ‘증인’들이 모여있던 집에 이르렀을 때, 총기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무기도 소지하고 있지 않으며 우리는 완전 중립입니다. 우리 집들이 여기 있으니 좋을대로 하십시오.” 총기를 가진 자들은 놀랐으며, 그들을 해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또 어떤 마을에서는 심지어 ‘가톨릭’ 사제까지도 기관총으로 무장하였다. 중립적인 입장을 포기하고 예상되는 공격을 대비하여 자신들을 무장하라는 심한 압력이 ‘증인’들에게 가해졌다. 그들이 거절하자 어느 우익 지도자는 “이 전쟁이 끝나면 당신들 어디 두고 봅시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1976년 1월 20일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그 마을 정규 수비대원들은 도망하였다. 사제는 무기를 버리고 숨었다. 스스로 무장하였던 일부 마을 사람들은 무기를 숨기려 하였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무기를 내 버렸다. 어느 우익 지도자는 ‘증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자기 총을 주려고 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무기를 안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증인’들의 집에 숨으려고 하였다. 어느 집에는 60여명이나 몰려들었다! ‘증인’ 중 한 사람이 여호와의 보호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나자 정치 지도자의 한 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제는 안심이 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보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무장한 사람들이 그 집에 들어와서 얼마의 귀중품을 빼앗아 가기는 했지만 아무도 해를 입지는 않았다.

또 다른 ‘증인’ 집에는 약 50명이 모여 있었다. 그곳 ‘여호와의 증인’의 주임 감독자는 이렇게 보고한다. “나는 회교도 이웃이 무장한 사람들에게 ‘이 집은 손대지 마십시오. 그들은 성경 연구생들로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도 나중에 총기들 든 자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모든 문을 열어 놓았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찾아 왔을 때, 나는 재빨리 나가서 그들을 안으로 초대하였다. 나는 친절하면서도 주저하는 기색없이 이야기하였으며,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을 설명하였다. 무기가 안 나오자 그들은 떠났다.” 이 집을 제외한 이웃에 있는 모든 집이 약탈을 당하였다.

북쪽 도시 ‘트리폴리’에서는 싸우는 양편간의 충돌이 몹시 격렬하였다. 수많은 상점과 집들이 약탈당하고 불탔다. 그리스도인들이 밖에 나가는 것은 특히 위험하였다. 그래서 이웃의 한 회교도는 ‘증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사람들은 당신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니 당신이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면 우리가 갖다 드리겠읍니다.”

지부 가족이 위험을 겪다

내란이 시작되었을 때 ‘여호와의 증인’의 지부 사무실은 ‘베이루트’의 회교 지구에 있었다. 거기서 시외의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전에 지부 가족은 얼마의 아슬아슬한 경험을 하였다. 1976년 2월 6일에 한 가족 성원은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근 한달 동안 우리는 잠을 자러 우리의 방에도 가지 않았다. 잠잘 시간이 되면 우리는 ‘매트리스’를 조그마한 입구에다 깔았다. 그곳이 그 집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거기서 웅크리고 옷을 입은채로 잤다. 그 싸움이 한 차례 끝나자 우익파들은 그 도시의 우리가 있는 쪽의 전략상 유리한 건물들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거리마다 그리고 집집으로 본격적인 시가전이 시작되었다. 우익파들은 우리 앞에 있는 길로, 좌익파들은 우리 뒤쪽에서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피난하기로 하였다. 물론 그 지역에서 완전히 빠져나갈 수는 없었지만 보다 안전한 집들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행길을 따라 약 1.6‘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어느 ‘증인’의 집으로 갔다. 우리는 거기서 2주간 머문 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느날 밤은 지부 가족에게 특히 소름이 끼치는 밤이었다. 그날 밤에 ‘베이루트’의 주요 상가가 불에 탔으며, 지부 주위 지역 역시 파괴될 입장에 있었다. 지부의 ‘증인’들은 상세한 점들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저녁 10시 30분경 우리는 바로 집 앞에서 나는 기관총 연발 소리에 깜짝 놀랐다. 우리 가족 중 두명이 ‘베란다’에서 내다보니 대여섯명의 총기를 든 사람들이 바로 우리 맞은 편에 있는 ‘호텔’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큰 소리의 폭발이 있었다. 일곱층의 유리창과 문들이 우리 앞에서 산산 조각이 날 때 소리가 얼마나 컸겠는가!

“다음에 상점들이 차례로 불탔으며, 총기를 든 사람들은 불길에 연료를 더뿌리며 차를 타고 상점 앞을 이리 저리 다니면서 다 탔는지 확인하였다. 그들은 불을 끄려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발사하였다. 밤 하늘은 불꽃으로 온통 붉은 색이 되었다.

“우리들이 뒷 침실 중 하나에서 불꽃을 지켜보고 있을 때, 또 다른 폭발로 진동을 느꼈다. 집 앞으로 달려나가 보니까 우리 건물 내에 있는 식료품 가게에서 폭탄이 터진 것이다. 바로 우리의 건물이 불타고 있었다! 우리가 가장 염려한 것은 건물 내에 있는 ‘가스’ 저장실이었다. 만약 불이 거기에 닿을 시에는 십중 팔구 우리 건물과 우리 옆 건물도 붕괴되고 말 것이었다. 노상에 있던 이웃 모두가 함께 협력해주어 우리는 많은 해를 입기 전에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 집회와 전파 활동

온갖 폭력의 와중에서도 왕국 권익은 계속 돌보아졌다. 회중들은 일정한 시각에 그 지역의 상황에 따라 조그마한 집단이나 큰 집단으로 집회를 가졌다. 심지어 순회 대회와 지역 대회까지도 열렸다! 집회 도중 인근에서 총성과 포탄이 터지는 소리를 듣는 것은 보통이었다. 이따금 연사는 자기 말이 들릴 수 있도록 전투 소음이 충분히 가라앉을 때까지 중지해야만 하였다.

형제들은 가능한 경우에는 언제든지 호별 방문 증거를 계속하였으며, 좋은 소식에 대한 비공식 증거도 계속 많이 행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 소식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한편 어떤 사람들은 살아 남아 무사하게 되는 데에만 매우 급급했기 때문에 왕국 희망에 정신을 쏟기가 어려웠다.

현재 상황과 장래

내란이 시작된지 4년 반이 지났어도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레바논’ 대부분의 지역에는 ‘아랍’ 평화 수호군이 있으며, 그 나라 남부 지역에는 U. N군이 있다. 이 나라 일부 지역에서는 폭력적인 충돌과 일련의 포탄 공격이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 1978년 12월에도 기관총 발사와 폭발이 지부 사무실이 위치한 지역에서 여전히 발생하고 있었다. 1978년 가을의 어느 12일 동안에는 근 200발의 포탄과 ‘로케트’탄이 바로 부근에 떨어지는 바람에 지부 가족은 건물 지하실의 방공호에서 8일간을 지내야만 하였다.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형제들에게는 훨씬 더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 혼란스러운 나라의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큰 환난”을 거쳐 그의 평화스러운 새로운 사물의 제도가 이를 때까지 ‘레바논’과 ‘시리아’에서 좋은 소식 전파를 계속 성취시키실 것은 확실하다. 이 두 나라에 있는 형제들은 그 사업이 완수될 때까지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계속 사용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다.

[134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레바논’과 ‘시리아’

터어키

이라크

지중해

알레포

라타키아

호옴스

다마스커스

헤르몬산

레바논

트리폴리

베이루트

시돈

두로

이스라엘

요르단

시리아

[140면 삽화]

‘브루클린’ 본부로부터 방문한 ‘맥밀란’ 형제(중앙)가 ‘살림 카람’(좌)과 ‘트리폴리’의 치과 의사인 ‘한나 샴마스’에게 침례를 주었다.

[144면 삽화]

이 확성차를 통하여 왕국 진리가 격지에 까지 이르렀다.

[167면 삽화]

전쟁에 할퀴인 ‘베이루트’ 교외를 휴전중 걷고 있는 ‘증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