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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요르단’

‘이스라엘’과 ‘요르단’

‘이스라엘’과 ‘요르단’

현재 ‘이스라엘’과 ‘요르단’이라는 현대 국가들이 들어서 있는 땅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 이유는 성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았으며, 그들과 관련된 사건들이 바로 이곳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이 지역에 살았던 고대 여호와의 종들에게 일어났던 일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또한 여호와의 현대 ‘증인’들의 활동에도 관심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이곳을 걸어다니면서 가르치신 이래, 오랜동안 이 지역과 주민들의 상태는 어떠하였는가?

예수 당시와 그 이후로 이 지역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팔레스타인’ *이라고 불리웠다. ‘로마’와의 투쟁의 결과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2세기 초에 ‘팔레스타인’에서 도망쳐 나갔다. 그러나 이 지역은 600년대까지도 ‘로마’ 제국의 일부였으며, 이곳 주민 대부분이 자칭 그리스도인이었다. 그 이후로 ‘아라비아’인들이 ‘팔레스타인’을 휩쓸어, 이 지역은 회교도의 통치하에 있게 되었다.

드디어, 1096년 초에 “이교도들”로부터 이 나라를 빼앗기 위하여 ‘유럽’의 자칭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그 첫 십자군 전쟁으로 ‘예루살렘’은 1099년에 점령되었다. 그러나 그 도시를 1187년 회교 통치자 ‘살라딘’이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다시 빼았았다. 더 많은 십자군 전쟁이 뒤따랐으며, 회교도들과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팔레스타인’을 장악하려고 싸우는 동안, 무수한 사람들에게 잔혹하고 무자비한 확대가 가해짐으로 이 지역은 피로 물들게 되었다.

1517년에는 ‘터어키’의 ‘오토만’ 제국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해서 400년간 지배하였다. 1800년대 후반기에 ‘유럽’에 살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오기 시작하였다. 1914년에는 이 지역의 총 인구 근 700,000가운데 약 85,000명이 ‘유대’인이었다. 그 다음, 제 1차 세계 대전 중인 1917년에는 ‘알렌비’ 장군이 거느리는 영국군이 ‘터어키’군을 격퇴시켜 ‘팔레스타인’에 대한 그들의 오랜 통치가 막을 내렸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여러 해 동안 ‘요단’ 강 동쪽에 새로운 정치 국가가 하나 생겨났다. 그것은 “‘해쉬마이트’ ‘트란스요르단’ 왕국”이라 불리웠으며, 더 최근에는 “해쉬마이트 요르단 왕국”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대부분이 영국의 위임 통치령이었다. 그러나 1948년 5월 14일에는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가 생겨났으며, 바로 그 다음 날 ‘이스라엘’과 주위 ‘아랍’ 국가들 간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에서 ‘요단’ 강 서쪽 ‘팔레스타인’ 대부분이 ‘이스라엘’의 지배하로 들어오긴 했지만, 이 지역의 약 5,607평방 ‘킬로미터’는 ‘요르단’ 지역이 되었다.

전세계로부터 ‘유대’인 피난민들이 ‘이스라엘’로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1951년까지 600,000여명이 이 지역에 들어왔다. 1970년대 초 ‘이스라엘’에는 3,000,000여명의 ‘유대’인들이 거주하여 인구 대다수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몇년 전만 해도 사람이 살지 않고 지구에서 구석진 곳으로 방치되어 있던 곳이 이제는 잘 개발되고 아주 비옥한 땅이 되었다.

대도시들과 각가지 산업이 ‘이스라엘’을 현대 사회로 변모시키긴 했지만, 아직도 고대 사회가 현대 도시들 바깥 쪽에 남아있는 것을 뚜렷이 볼 수 있다. 성서 시대의 장면을 아직도 여러 마을에서 볼 수 있는데, 여인들이 물항아리와 기타 물건을 머리에다 이고 다닌다든지, 나귀로 농산물을 시장으로 운반하는 일, 낙타를 사고 팔고 염소의 검은 털을 자르고, 수소가 곡식을 밟아 탈곡하거나 외줄 밭고랑 쟁기를 끄는 일 등을 볼 수 있다. 동서양이 만나고 고대와 현대가 서로 만나는 대조를 이루는 지역이다.

정통파 ‘유대’교가 재등장하여 예수 당시의 ‘유대’교처럼 현대 ‘이스라엘’ 국가 생활 방식을 크게 지배하고 있다. 정통파 ‘유대’교는 그 종교 지도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연립 정부에 참여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이 땅에는 하나님의 참다운 ‘증인’들도 재등장하였다. 그들의 활동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그들은 어떠한 열매를 맺어왔는가?

‘라말라’—활동이 시작된 곳

‘왙취 타워’ 협회 초대 협회장인 ‘차알스. T. 러셀’이 1891년에 광대한 세계 여행의 일부로서 ‘팔레스타인’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분명히 이 나라에 뿌리를 내린 성서 진리의 최초의 씨가 뿌려진 것은 1913년의 일일 것이다. 제 1차 세계 대전 발발 전 해인 그 해에 진리에 관심이 있던 한 청년이 ‘뉴우요오크’로부터 ‘예루살렘’에서 약 16‘킬로미터’ 북쪽에 위치한 자기 가족의 고향인 ‘라말라’로 이사왔다. ‘라말라’는 성서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고 있는 도시 중의 하나인 ‘벧엘’이라는 고대 도시의 유적 가까이에 접해 있다.

흥미롭게도 이 청년 ‘한나 헤치미’는 미국을 떠나기 전에, 전쟁이 다가오고 있으며 그가 곤경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었다. 그 경고는 참되어 그 이듬 해에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으며, 그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터어키’ 정부는 즉시 젊은이들을 징집하기 시작하였다. ‘한나’는 ‘하이파’ 항에서 배를 타고 ‘뉴우요오크’로 도망쳐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라말라’에서 유숙해 있던 ‘카두라’씨 집에 「성경 연구」 한벌을 전부 두고 왔다.

전쟁 후에 ‘뉴우요오크 브루클린’에 있는 회중과 연합하고 있던 여섯 명의 젊은 ‘아랍’인 ‘증인’들이 자기들의 고향인 ‘라말라’로 다시 이주해 왔다. 그리하여 1920년에 그곳에 하나의 회중이 조직되었다. 그 해에 제 2대 협회장인 ‘조셉. F. 러더포오드’가 그들을 방문하였다. 지부 사무실이 설립되었으며, 그의 방문중 ‘러더포오드’ 형제는 ‘라말라’ 시청 강당을 꽉 메운 청중에게 공개 강연을 하였다. 그는 또 ‘예루살렘’에서 상당히 큰 군중에게 연설을 하였다.

처음에 그 젊은 ‘아랍’인 ‘증인’들은 호별 방문 전파 활동을 조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데 열심이어서 친구와 친지들을 방문하였으며, 남자들이 모여서 일상사를 토론하는 다방에서 연설하였다. 얼마 후 그들은 ‘카두라’ 씨 가족을 만나 그 집 아버지에게 젊은 청년 ‘한나’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에게 남겨 놓은 책들을 읽도록 격려하였다. ‘카두라’ 씨는 회중에서 강력한 형제가 되었으며, 이제 그는 그의 친척 ‘사아’ 씨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후 ‘사아’ 형제의 네 손녀가 전 시간 ‘파이오니아’ 전도인들이 되었으며, 그의 가족 중 다른 사람들도 ‘증인’이 되었다.

‘카두라’ 형제의 또 다른 이웃인 ‘어와드 파라만드’가 좋은 소식에 반응을 나타내었다. ‘어와드’ 부부는 여러 해 동안 충성스럽게 왕국 봉사를 수행하였다. 그들의 딸은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하였으며, 집은 여러 해 동안 모든 회중 집회에 사용되었다. 1920년대 초에는 ‘라말라’ 회중 전도인이 약 12명에 달했는데, 모두가 남자들이었다.

‘라말라’의 이 형제들의 조그마한 집단은 인근 지역으로 들어가서 증거하는 운동을 조직하곤 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 ‘나사렛’, ‘하이파’ 그리고 기타 여러 곳을 다니면서 고대에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돌았었던 동일한 구역에서 진리를 전파하였다. ‘아라비아’어 성서 간행물은 극소수 밖에 없었으므로 형제들은 솔선해서 기본 성서 진리를 설명하는 전도지를 ‘아라비아’어로 발행하였다. 나중에 그들은 그러한 인쇄물을 발행하기 전에 먼저 ‘브루클린’ 본부 사무실의 검열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받았지만, 그 전도지는 결실을 거두었다.

‘하이파’에 남겨 둔 전도지 하나가 ‘하이파’를 방문중이던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온 한 관심자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 사람이 ‘라말라’의 형제들에게 편지를 하고 ‘레바논’의 ‘미켈 어바우드’ 형제에 의해 그의 관심이 계속 돌보아지도록 마련되었다. 이처럼 자기들의 믿음을 전하려는 형제들의 정력적인 노력은 성과가 있다.

초기에 ‘증인’들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아라비아’어 연구 교재는 「시대들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그러나 그 기간 중에 ‘왙취 타워’ 협회의 활동 사진 즉 ‘슬라이드’와 음향 장치를 갖춘 “창조 사진-극”이 ‘팔레스타인’의 많은 청중들에게 ‘아라비아’어 해설과 더불어 상영되었다. ‘뉴우요오크’ 시로부터 몇몇 형제들이 그 사진극을 중동으로 가져왔으며 여기서 훌륭하게 사용된 것이다. ‘아라비아’어판 「사진-극 ‘시나리오’」 즉, 각본 줄거리와 함께 그림이 실려있는 책이 전국의 사람들에게 많이 전해졌다.

초창기인 그 당시 국경을 넘는 여행은 곤란하였다. 그러나 때때로 ‘라말라’의 형제들은 대회에 참석하고 다른 ‘증인’들과 교제하기 위하여 ‘레바논’의 ‘베이루트’와 ‘트리폴리’로 여행하였다.

1924년경부터 「파수대」가 ‘아라비아’어로 발행되었으며, 그 잡지를 개인 집에서 열린 회중 집회에서 연구하였다. 제 2차 세계 대전중에 「파수대」 공급이 중단되었지만, 이미 갖고 있던 간행물을 사용하는 집회가 계속 열렸다.

또 다른 발판—‘하이파’

당신이 ‘이스라엘’ 지도를 살펴보면 ‘갈멜’ 산맥이 지중해로 불룩 튀어나와 그렇지 않으면 곧았을 해안선 위에 불규칙한 돌출 부분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하이파’는 바로 그 지점에 위치해 있다. ‘라말라’의 형제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조그마한 집단이 하나 1930년대 중엽에 이곳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데이비드 파지니’ 형제의 증거 결과였는데, 그는 철도 회사의 일과 관련하여 잠시 ‘이집트’에서 ‘하이파’로 와 있었다.

‘데이비드’는 ‘하이파’에서 독실한 ‘가톨릭’교인인 ‘이브라힘 쉐하디’로부터 방을 하나 빌렸다. 물론 그들의 토론중에 종교적인 화제가 나왔으며, ‘파지니’ 형제는 교회 일부 교리들과 의식이 허위임을 재빨리 폭로하였다. 첫 토론은 너무나 재미있어서 ‘이브라힘’은 자기 습관대로 교회의 정규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그대로 집에 앉아 이야기 하였다. 그는 ‘아라비아’어 간행물을 받아 읽었다. 그 때부터 매일 성서 토론이 있었으며, 성서 낭독은 밤이면 밤마다 한 밤중까지 계속되었다.

‘이브라힘’이 새로 찾은 믿음을 가지고 접근한 최초의 사람은 자기 형 ‘아탈라’였다. 그는 종교적인 전통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말려들까봐 경계하기는 했지만 결국 조사해 보게 되었다. 시력이 약한 ‘아탈라’는 ‘헐값’으로 대형 성서를 한권 구해서 자기 동생이 자기에게 말해준 바를 스스로 조사해 보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마태 복음 23장에서 특히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그 말씀이 자기가 알고 있던 교직자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데이비드 파지니’는 ‘하이파’에서 자기 일을 마쳤으며 ‘이브라힘’과 ‘아탈라’는 그들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남겨두고 고국인 ‘이집트’로 돌아갔다. 그들에 대한 압력과 반대가 일기 시작한 것은 어느정도 그들이 노골적으로 교회를 비난하는 일로 인한 것이었다. ‘이브라힘’은 석유 배달원이었는데, 어느 집에 들어가서 종교적인 그림이나 형상이 눈에 띄기만 하면 그는 바로 그 그림 위에다 성귀 인용문을 한 귀절 적어놓곤 하였다. 그리고는 그 집 주부에게 그의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오면 그 성귀를 찾아보게 하라고 이야기 하곤 하였다. 이 형제들은 자기들 가족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지혜롭지 못하여, 이것이 그들이 겪은 반대의 한 원인이 되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아탈라’는 망치를 가지고 자기 집에 들어와서는 눈에 보이는 형상과 그림을 모조리 때려부쉈다. 아무런 설명이나 경고도 없이 이렇게 하는 바람에, 그 일을 어이없이 멍하니 서서 지켜보던 그의 아내와 어린 자녀들은 몹시 놀랐었다. 그러나 그의 자녀 중 몇몇이 진리 안으로 들어왔으며, 현재 그의 손자녀들이 활동적인 ‘증인’들이다.

‘이브라힘’의 딸이 교회에서 견진성사를 받을 때가 되었을 때, 그는 딸을 위해 만들어 두었던 특별한 옷을 가져다가 지붕 위에다 숨겨버렸다. 수녀들과 사제 그리고 주교까지도 이에 관하여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 일요일 아침에 주교는 ‘이브라힘’에 대해 불매 동맹을 선언하였다. 그 결과 전 가족에게 폭력이 가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이브라힘’의 형제들 중 한명이 불매 동맹 포고를 취소해 줄 것을 주교에게 간청하였다.

“그가 나의 반지와 십자가에 입맞춘다면, 그 교령을 취소하겠소” 하고 주교가 말하였다.

‘이브라힘’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만일 그가 나로 하여금 이 문제들을 성서로 토론하게 한다면 그렇게 하겠오.”

그 주교는 이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나는 주교란 말이요!” 하고 대답하였다.

‘이브라힘’에 대한 불매 동맹으로 그는 난관에 봉착했는데, ‘가톨릭’교인 단골 손님들이 모두 그에게서 석유 사기를 중단하였기 때문이다. 그 지방 회교도들까지도 그를 반대하게 만드는 모함도 있었다. 한번은 일단의 화가 난 회교도들이 그가 ‘모하멧’을 저주했다고 비난하면서 당장 ‘이브라힘’을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에게 이것을 알려 주었다고 말하였다.

“그들이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내가 그들의 형상과 그림의 사용 그리고 삼위일체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반대하는 말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당신들에게 거짓말을 해서 나를 괴롭히게 한 것입니다” 하고 ‘이브라힘’이 말하였다. 그리하여 유일하신 하나님께 대한 ‘이브라힘’의 믿음이 그의 생명을 구해주었다.

주교의 불매 동맹 포고의 결과로 아무도 ‘이브라힘’과 ‘아탈라’와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새로 찾은 믿음에 주의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이브라힘’의 대가족 거의 모두가 ‘증인’이 되었으며, 근년에는 그의 자녀들 중 두 아들과 딸 하나가 ‘파이오니아’ 봉사를 즐겨왔다.

그동안, 1940년대 초에 ‘하이파’에서 서너명으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집단 하나가 매주 집회를 위해 이집 저집에서 모였다. 그리하여 바로 제 2차 세계 대전 내내 하나의 조그마한 집단이 계속해서 연구를 하고,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전파하였다. 때때로 ‘베이루트’의 형제들이 그들을 방문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간행물을 공급받았으며, 전도 봉사 수행에 관한 실용적인 지침을 마련받았다. 제 2차 세계 대전 후에는 ‘뉴우요오크 브루클린’으로부터 간행물이 직접 공급되었다.

제 2차 세계 대전 직후 ‘조셉 압데나워’ 형제가 ‘쿠바’에서 ‘하이파’로 돌아왔는데, 그는 ‘쿠바’에서 ‘증인’이 되었었다. 회중 문제에 있어서 보다 폭넓은 경험을 가진 그는 이 작은 집단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후에 사업 관계로 ‘조셉’은 ‘세겜’이라는 고대 성서 도시에 소재해 있는 ‘나브루스’로 이사하였다. 거기서 그는 1968년 그의 사망시까지 격리된 전도인으로 혼자 머물러 있었다.

제 2차 세계 대전 직후인 어느날 저녁 집회 도중에 대여섯명의 ‘증인’들로 이루어진 이 작은 집단은 갑자기 아래 거리에서 귀에 익은 성서 소식을 ‘아라비아’어로 전파하는 큰 소리를 들었다.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내려가 알아보니 ‘러시아’로부터 이주해온 두명의 ‘증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땅에서 ‘아라비아’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시작하기 위해 한 대의 축음기와 얼마의 ‘아라비아’어 음반들을 갖고 있었다. 알지 못하고 그들이 선택한 길 모퉁이는 바로 집회 장소가 있는 곳이었으며, 바로 집회 시간에 음반들을 틀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형제들은 그 작은 회중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소식이 ‘타르쉬하’에 이르다

때는 1931년이었다. 장소는? ‘레바논’ 국경 바로 남쪽으로, ‘하이파’에서 북쪽으로 약 4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는 ‘타르쉬하’라는 ‘팔레스타인’ 마을에서였다. 한 독실한 ‘가톨릭’ 교도인 ‘크하릴 코브로시’ 교수는 이 마을의 한 학교에서 ‘아라비아’어와 ‘가톨릭’교를 가르치도록 정부에 의해 임명되었었다. 임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곳에 성서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코브로시’ 교수는 즉시 성서를 ‘가톨릭’ 교리 문답책으로 대치시켜 놓았는데, 이는 그렇게하는 것이 학생들에게 훨씬 더 유익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코브로시’ 교수는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책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는 그것을 읽고 그 책 발행인에 대해 몹시 화가 나게 되었는데, 그들이 ‘가톨릭’교에 대하여 무례하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에 그는 협회의 출판물을 많이 구입하여 어떤 책은 여러 번 읽었다. 그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언젠가 이 사람들과 접촉해서 그들을 바로 잡아주려는 것이었다!

협회에서 발행한 전도지 하나로부터 ‘코브로시’ 교수는 ‘레바논’의 ‘트리폴리’에 있는 ‘증인’들의 주소를 입수하여, 그가 오랫 동안 마음먹었던 편지를 썼다. 그는 소위 “선한 ‘펜’ 매질”을 형제들에게 해주었다. 놀랍게도 그는 친절한 답장을 받았는데, 많은 성귀들을 인용한 편지였다. 이것이 ‘레바논’의 형제들과 더 많은 서신 교환을 하게끔 해주었다.

1937년에 ‘하이파’의 ‘이브라힘 쉐하디’ 형제와 더불어 ‘레바논’으로부터 두명의 형제가 ‘코브로시’ 교수를 방문하였다. 형제들이 떠나자 그는 진리를 발견했음을 온전히 확신하였다. 이내 그는 진리를 자기 아내에게 가르치고, 많은 친구들에게 진리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1939년에 그는 ‘트리폴리’로 여행하여 거기서 침례를 받았다.

이제 ‘크할리 코브로시’ 형제에 대한 반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를 죽이려는 시도가 적어도 세번이나 있었으며, 이러한 일은 누구나가 알게 되었다. ‘크할리’ 자신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바와 같다. “만약 이러한 반대가 없었더라면, 나는 그처럼 유명해지지 않았을 것이며 호기심이 생긴 사람들에게나 정의감이 발동하여 동정심을 나타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가 그처럼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이파’와 ‘레바논’에 있는 형제들과의 교신은 ‘크할리’가 혼자서 격리되었을 때인 이 시련기에 그에게 격려가 되었다. ‘타르쉬하’ 마을에서의 그의 전파 활동은 두세명의 다른 사람들이 그와 연구하여 그를 편들었을 때 적어도 일시적으로 얼마의 결실을 거두었다. 그러나 결국 주교가 지방 교육 당국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크할리’를 ‘가톨릭’의 요새였던 ‘타르쉬하’로부터 멀리 남쪽에 있는 ‘헤브론’이라는 회교 도시로 전근시켜 버렸다. 이것은 1940년의 일이었다.

‘베이트 자라’에 세워진 중심지

‘헤브론’에서 ‘코브로시’ 형제는 동료 교사들에게 그의 믿음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2년 후인 1942년에 그는 다시 전근되었는데, 이번에는 ‘베이트 자라’라고 하는 ‘베들레헴’ 외곽의 한 작은 읍이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6.4내지 8‘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베이트 자라’에서는 전파할 기회가 훨씬 더 많았었는데, 이는 여기 사람들 대다수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곧 이 지역에 회중이 하나 설립되었으며, 그것이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다.

이곳에서 여러 차례의 토론 후 진리를 받아들인 최초의 사람은 ‘살라메 어소우사’라는 한 청년이었다. 그의 한 친구도 연구에 함께 하였다. ‘살라메’는 ‘레바논 트리폴리’의 한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예루살렘’에서 증거하던 중 ‘살라메’는 ‘파라 바키트’를 만났는데, 그는 첫 성서 토론 후 즉시 그의 모든 형상과 그림을 부숴버렸다. ‘파라’는 후에 회중의 종(주임 감독자)이 되었으며, 그의 충실때문에 겪은 투옥과 기타 고난들을 견디어냈다.

결국 그 지역에서 ‘살라메’의 부모와 아주머니 그리고 두 형제와 세 누이 모두가 그가 세운 훌륭한 본 때문에 진리를 받아들였다. 오늘날까지 그들은 믿음 안에서 계속 강건하다. 또한 ‘코브로시’ 형제의 아내도 활동적으로 연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집회 참석자가 매주 12명 내지 그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그들의 집회는 ‘코브로시’ 형제네 집에서 열렸는데, 그들은 1942년부터 1968년까지 26년간을 거의 한번도 빠지지 않고 계속 거기서 집회를 보았다. 때때로 기념식과 같은 모임을 위해서 그들은 북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라말라’에 있는 형제들의 집단과 함께 모였다.

‘브루클린’에서 온 방문객

제 2차 세계 대전 직후에 ‘유럽’에서 소수의 ‘유대’인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스라엘’의 최대 도시 ‘텔아비브-야포’의 한 교외인 ‘바트얌’으로 이주해 왔다. 이곳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해 있고 ‘하이파’에서 남쪽으로 약 10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여기에서 「파수대」 연구가 독일어로 마련되었다. 그리하여 1947년에는 대부분 각기 독립되어 있는 전도인 집단들이 ‘라말라’, ‘베이트 자라’, ‘하이파’ 그리고 ‘바트 얌’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보고 있었다. 그 해에 ‘브루클린 벧엘’로부터 3대 협회장인 ‘나단 노워’와 그의 비서인 ‘밀튼 헨첼’이 방문하여 ‘팔레스타인’ 형제들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1947년 8월 15일 호 「파수대」지에서 그들의 방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에 12명 가량의 관심자들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모임에는 ‘팔레스타인’ 여러 지방으로부터 40명이 참석하였다. 거기에는 얼마의 ‘아랍’ 형제들과 ‘러시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독일 국적을 가진 형제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는 영어나 ‘아라비아’어 중 하나를 이해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아라비아’어 통역자를 사용하였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전국에 협회의 출판물을 연구하고 있는 관심자들이 실제로는 55명이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모두가 전도인들은 아니지만 그들은 진리를 믿고 있으며, 믿음 안에서 자라가고 있었다. 그 날은 매우 즐거운 날이었다. 온 종일 한 ‘아라비아’어 통역자를 통하여 연설이 행해졌으며, 많은 질의 응답이 있었다. 조직에 관한 지시가 주어졌으며, 한 형제가 ‘팔레스타인’에 대한 협회의 관심사를 돌보도록 임명되었다. 다량의 간행물을 주문하고, ‘베이트 자라’에 보관소를 갖기 위한 마련이 있었다. ‘하이파’, ‘라말라’, ‘베이트 자라’ 그리고 형제들이 함께 모이는 기타 마을들에서 어느 형제들이 회중의 종들 [주임 감독자들]이 될 자격을 가장 잘 구비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의가 있었다. 그리고 임명이 있었다. 그러므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복음 전파 사업이 계속해서 확장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 형제들과 함께한 이번 방문은 우리의 마음을 아주 즐겁게 해주었다. 이곳에서 아주 활동적인 얼마의 사람들이 주말마다 ‘팔레스타인’의 여러 지방을 여행해서 간행물을 배부하고 관심을 불러 일으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던 것이다. 그 날은 금방 지나가고 야간통행 금지 시간인 6시 30분 이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크하릴 코브로시’ 형제에게 ‘증인’들의 여러 집단들과 정기적 연락을 유지할 책임이 주어졌다. 그는 봉사 보고를 수집하고, 간행물 공급품이 여러 집단에게 각기 필요에 따라 분배되는지를 감독하도록 임명되었다. ‘크하릴’은 그 해 동안 모든 집단들과 흩어져 있는 전도인들을 방문하기 위해 몇 차례의 여행을 하였다. 1947년 늦게 ‘하이파’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라말라’, ‘베이트 자라’, 그리고 ‘바트 얌’으로부터 형제들이 왔다. 약 80명이 참석하였으며, 즐거운 교제를 즐겼다. 그 중 다수가 다른 도시의 동료 신자들과 만나기는 그것이 처음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이러한 마련은 오랫동안 계속되지 못하였다.

‘팔레스타인’이 사라지다

정치적 상황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1948년에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팔레스타인’ 전쟁의 결과로, 그 나라는 두개의 별개 나라로 나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도상에서 ‘팔레스타인’은 사라져 버렸다. 이 무렵 야외 봉사를 보고하는 왕국 전도인들은 약 30명이 있었다.

‘팔레스타인’ 일부는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되었으며, 일부는 ‘요르단’의 지배하로 들어 갔다. 그리하여 새로운 국경선 동편에 살고 있던 ‘증인’들—‘라말라’와 ‘베이트 자라’에 있는 집단들과 ‘예루살렘’과 ‘여리고’에 있던 전도인들 개개인—은 이제 ‘트란스 요르단’에 있게 되었는데, 1950년에는 그것이 단순히 ‘요르단’이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하이파’와 ‘텔아비브’의 나머지 ‘증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국가의 국경 내에 살고 있었다.

특정한 종교적 휴일에 이틀 혹은 사흘간 국경 제한이 해제되었을 때의 아주 짧은 방문을 제외하고는, 둘로 나누인 지역에 사는 ‘증인’들간에 직접적인 접촉은 근 20년 동안 즉 1967년까지 불가능하였다. 그 해에 ‘이스라엘’인들과 ‘요르단’인들 간의 전쟁은 국경을 다시 바꾸어 놓았다. ‘요단’ 강 서쪽 ‘요르단’ 지역—‘웨스트 뱅크’—이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리하여 ‘웨스트 뱅크’에 있는 ‘라말라’와 ‘베이트 자라’ 회중의 ‘증인’들은 ‘이스라엘’의 일부가 되었으며, 이것은 ‘이스라엘’의 평균 왕국 전도인이 1967년의 114명에서 1968년의 153명으로 뛴 갑작스런 성장을 설명해 준다. 또한 이러한 정치적 변화로 인하여 ‘요르단’의 전도인 수는 1967년에 53명이던 것이 1968년에는 19명으로 감소되었다.

‘요르단’에서의 발전

‘요르단’의 여호와의 백성들은 어떻게 지내왔는가? 우선, 1952년에 선교인들이 최초로 이곳에 도착하였으며, 선교인 집이 ‘라말라’에 세워졌다. 그 지역은 선교인들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잘 봉사되었다. ‘베들레헴’ 부근 회중 역시 매우 잘하고 있었다. 1952년 4월에 있었던 그곳 순회 대회 중에 침례식이 베풀어 졌다. 연설 후 침례받을 사람들은 ‘여리고’ 바로 밑에 있는 ‘요단’ 강으로 인도되어 예수께서 친히 ‘요한’에게 침례 받으신 장소라고 믿고 있는 바로 그 장소에서 침례를 받았다. 얼마나 즐거운 행사였던가!

1951-1952년 사이의 겨울에 ‘노워’ 형제가 ‘요르단’에 있었을 때 그 나라에 있는 우리 형제들에게 얼마의 구호품을 보내 주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보았는데, 그들 중 많은 수는 1948년의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인한 피난민들이었다. 드디어 약 26개의 헌 옷 묶음이 배에 실려 ‘요르단’으로 보내져, 궁핍한 동료 신자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선물을 대단히 감사히 여겼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이것이 일종의 좋은 물질적 무상 원조라 생각하여 우리 집회에 나와서는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그들은 오래 머물지 못하였으며, 하나님의 백성은 영적인 것들과 왕국 소식 전파에 역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성공을 관찰한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몹시 흥분하여 정부로 하여금 ‘증인’ 선교인들을 ‘요르단’으로부터 추방하도록 심하게 모함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합법적인 조처로 이 일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직자들이 계속 고집하는 바람에 1953년에는 선교인들이 추방되었다. ‘요르단’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선교인들이 그 나라에 파견되었지만 불과 수개월 후에 추방되고 말았다.

1957년초에 ‘요르단’ 교직자들의 줄기찬 압력으로 인해 ‘여호와의 증인’과 우리의 모든 출판물에 대한 공식적인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난관을 초래하였다. 수많은 집이 수색을 당하였으며, 간행물이 압수되었다. ‘파라 바키트’ 형제는 협회 간행물 얼마를 소지한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또한 우체국에서 해고되었다. 이것은 ‘바키트’ 형제의 가족에게 커다란 어려움을 초래했으나, 그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 그의 영적 형제들은 그의 대가족을 잘 돌보아 주었다. 실제로, 그 다음 몇 해 동안 많은 형제들이 체포되었다. 일부는 심문과 협박을 받은 후 풀려 나오는가 하면 일부는 한동안 구류되었다.

이 기간중 집회는 가능한 한 매번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간에 비밀리에 열려야만 했었다. 그러나 형제들이 영적 양식을 즐기고 서로를 격려하기 위하여 함께 모이지 못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히브리 10:24, 25.

1959년, ‘요르단’ 대법원에서의 법정 소송에서 우리는 허위 고발대로 ‘이스라엘’의 첩보원으로 일하고 있는 ‘시온’주의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를 제시하였다. 또한 그 해에 「깨어라!」지의 한 기사의 결과로 편지 쓰기 운동이 벌어졌다. 수많은 편지가 정부 관사로 밀어닥쳤으며, ‘후세인’ 왕은 ‘여호와의 증인’들을 조사하도록 3인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그 위원회가 조사를 하여 정부에 명확한 보고를 하였다. 그리하여 1960년 3월에 ‘요르단’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그들의 종교를 행사할 권리를 가진 하나의 종교 단체로서 승인하는 정부 법령이 발표되었다. 이 법령으로 우리의 법정 소송을 계속할 필요가 없게 되었지만 그것은 굉장한 증거가 되었었다.

이제 ‘요르단’에서 여호와의 백성의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파수대」와 우리의 기타 출판물에 대한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왕국회관이 문을 열게 되었으며, 집회와 대회가 자유로이 열렸다. 형제들은 이러한 자유를 누리게 되어 얼마나 기뻐했던가!

‘요르단’에 지부 사무실이 설립되다

‘알프레드 누스랄라’ 형제 부부가 선교인으로서 1961년 3월에 ‘요르단’에 도착하였다. 그들의 첫 임지는 ‘라말라’였지만 수개월 후에 그들은 선교인 집이 개설되어 있는 수도 ‘암만’으로 옮겨졌다.

1962년 2월에 ‘M. G. 헨첼’ 형제가 ‘요르단’을 방문하였다. 그의 추천으로 다른 ‘아랍’ 국가에서 봉사하고 있던 두명의 다른 ‘길르앗’ 학교 졸업생이 ‘요르단’으로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3월에 미국인 형제 부부가 ‘암만’에 도착하였다. 1962년 9월에 ‘왙취 타워’ 협회 지부 사무실이 그곳에 개설되었다.

행복, 다음에 다시 고난

1963년에 여호와의 백성 대표단이 여러 도시들에서 개최된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에 참석키 위해 세계 일주를 하였다. 이러한 모임 중 하나가 ‘요르단’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만약 그들이 공개적으로 모이는 것이 허락된다면 ‘여호와의 증인’의 안전이 우려된다고 하면서 허가해주기를 거절하였다. 비록 대회 계획은 취소되었지만 우리의 여행하는 동료 신자들이 관광객으로서는 ‘요르단’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성서의 유적지들 즉 ‘예루살렘’, ‘베들레헴’, ‘헤브론’, ‘여리고’, ‘요단’ 강, 사해 그리고 ‘사마리아’를 방문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이들 모두가 ‘요르단’쪽에 있었다. 일부는 또한 고대 ‘에돔’의 성채인 ‘페트라’로 갔다. 지방 ‘증인’들은 다른 나라에서 온 동료 신자들과 참으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정부는 여호와의 백성에게 자유를 허가했지만 교직자들은 반대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차례 하나님의 백성을 ‘시온’주의 자들이라고 거짓 고발하였다. 번번히 정부가 조사하여 그 고소가 거짓임을 알게 되곤 하였다. 그러나 1963년에 정부는 또 다시 우리의 모든 간행물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1964년 10월 27일에 ‘요르단’ 정부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정부의 승인을 취소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그 나라에서 종교 단체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의 왕국회관은 폐쇄되었고 많은 간행물이 압수당하였으며, 이 나라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문제가 다시 일어났다. 또 다시 그리스도인 집회가 개인 집에서 각기 다른 시간에 작은 집단별로 열려야만 하였다.

1963년 12월에 지부 감독자는 다른 봉사 임명을 받았다. 그러나 ‘누스랄라’ 부부는 1965년 겨울까지 이 나라에 머무를 수 있었으며, 그 때는 강제로 떠나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있기 전, 정계에서 거대한 증거가 행해졌다. 승인을 다시 받기 위해 기울인 노력의 결과로 많은 관리들과 접촉하였으며, 왕을 만나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고등법원에 항소가 제기되었지만, 그들은 그것이 안보 문제여서 그들 관할 밖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소송 신청을 들어주기를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요르단’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누려온 자유는 제한되었고 선교인들은 떠났으며, 지부 사무실은 폐쇄되었고 ‘요르단’에서의 우리의 사업은 또 다시 ‘레바논’에 있는 협회의 ‘베이루트’ 사무실이 감독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르단’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은 계속해서 여호와를 충실히 섬겼다.

1967년 전쟁으로 인하여 ‘라말라’와 ‘베이트 자라’에 있던 회중들이 ‘요르단’에 속하던 것이 ‘이스라엘’의 일부로 간주되는 변화를 겪는 바람에 ‘요르단’ 자체에는 수도 ‘암만’에 단 하나의 회중만이 남게 되었다. 그 나라에서 많은 난관과 여러 가지 방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르단’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들의 봉사를 수행해 왔다.

어려운 시기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탄생되고, 직후에 주위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이 터졌던 때인 1948년의 대격변들은 ‘이스라엘’의 왕국 사업에 어려움을 초래하였다. 협회의 ‘브루클린’ 본부와의 통신이 끊어졌다. 또한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상당수의 ‘증인’들이 그 나라를 떠났다.

극단적인 국가주의 풍조가 조성되어 이것 또한 우리의 전파 사업에 방해가 되어왔다. 많은 ‘이스라엘’인들은 자기들의 업적으로 자만에 가득차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이스라엘’ 정부라는 업적을 하나님과 성서 예언의 성취로 돌렸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은 600만의 ‘유대’인들이 ‘나찌’에게 대량 학살을 당한 ‘유럽’의 참사로 인해 슬프게도 하나님께 대한 온갖 믿음에서 떠나 등을 돌렸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유대’인들의 마음에서 지울 수 없는 한가지 질문은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그러한 대학살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실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것이다. 그들의 종교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제시해주지 못한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식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소위 그리스도인 교회들의 소름끼치는 본은 우리의 전파 사업에 어려움을 야기시켰다. ‘나찌’ 제도 지지를 포함하여 여러 시대에 걸쳐 내려온 그리스도교국의 ‘유대’인 배척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나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극도의 반감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 나라의 거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선교인”이란 말은 실제로 불쾌한 것이 되었다. 형제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교국의 일부가 아니며, 게다가 자기들은 지방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선교인들에 대해 생각하는 그런 선교인들이 아니라는 점을 끊임없이 해명해야만 하였다.

‘텔아비브-야포’ 근처에서 다시 시작함

1942년에 ‘폴란드’에서 진리를 배운 ‘프리다 수제’ 자매가 1948년 2월에 ‘이스라엘’에 도착하였다. 얼마 후 그 자매는 정기적인 「파수대」 연구를 위해 ‘텔아비브-야포’ 근처의 ‘바트얌’에서 모이던 작은 집단에 남아있던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곧 이들 남아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 나라를 떠나는 바람에 관심자 부인 한명과 ‘수제’ 자매만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동안 ‘텔아비브-야포’ 지역에는 단 한 사람의 외로운 음성만이 증거하고 있을 뿐이었다.

‘수제’ 자매는 1950년에 ‘화니 민첼’과 연합하게 되어 참으로 행복하였다. 그 자매와 그의 가족이 ‘폴란드’에서 ‘이스라엘’로 이민을 온 것이다. ‘프리다’와 ‘화니’는 ‘폴란드’의 같은 마을에서 함께 자랐었지만, 여러 해 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었다. 이제는 둘 다 진리 안에 있다는 사실로 그 재회는 얼마나 더 행복하였겠는가! 그들은 연구를 위해 정기적으로 함께 만났다.

그러나 증거할 구역은 어떠하였는가? 그 두 자매는 그 도시 북쪽에 살던 자매가 ‘텔아비브’ 전체를 증거하고, 남쪽 구역에 사는 자매는 ‘야포’ 전체를 증거하자는 데 동의하였다. (‘야포’는 성서 시대의 ‘욥바’이다) 얼마나 거대한 임명이었는가! 집회 장소에 대하여는 그들이 마침 자기 집을 가지고 있어서, 집회는 이 두 장소에서 번갈아 열었었다.

‘프리다’와 ‘화니’는 협회로부터의 연락 즉 지시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위해 훌륭한 열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강건하다! ‘프리다’는 특별 ‘파이오니아’이며 ‘화니’는 아주 활동적인 전도인이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회중의 일부가 되도록 개인적으로 도왔다. 이 외에도 그들은 이민이나 방문객들로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자기들 집을 관대히 개방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참으로 그들의 충실하고 근면한 노력을 축복해오셨다.

‘길르앗’ 졸업생들이 도착하다

1951년 6월에 처음으로 네명의 ‘길르앗’ 졸업생 ‘벤 위인즈’와 ‘그레이스 위인즈’ 그리고 ‘토마스 웨인’과 ‘메어리 웨인’이 도착하였을 때 ‘이스라엘’의 형제들에게는 가슴벅찬 날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정착하여 그곳이 ‘이스라엘’에서 순결한 숭배를 위한 중심이 될 것을 기대하였었다. 그러나 4년간 힘든 수고 후에도 얻은 반응은 얼마 안되었다.

집회는 정기적으로 열렸지만, 새로 연합한 사람들은 그들이 연합을 계속하지 못하도록 실망시키기 위한 협박이나 물질적 유혹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한 때는 26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성서 토론에 참석했었지만 계속 참석한 사람은 몇명 안되었다. 얼마 후 세 명의 관심자가 헌신하여 침례를 받았다. 이들 가운데에는 한 연로한 ‘아랍’인이 있었다. 그는 비록 눈이 멀어 고생하고 친척들의 반대때문에 장기간 고립 생활을 견디어내야 하였지만 자기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충실한 형제로 머물러 있었다.

‘노워’와 ‘헨첼’이 다시 방문하다

1952년 1월의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의 방문은 형제들과 관심자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모두 24명이 ‘예루살렘’에 모였다. 그들이 1월 24일 저녁에 있을 공개 강연을 광고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51명이 참석하였다.

이 방문이 있을 때까지 ‘길르앗’ 졸업생들은 그들의 활동을 ‘예루살렘’에 국한시켜 왔었지만 이제 ‘벤 위인즈’가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 있는 전도인들과 관심자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마련이 생기게 되었다. ‘예루살렘’에 모인 24명 대부분이 과거에 전도를 했었으므로 그들 모두는 다시 시작하도록 도움을 받았다.

1953년에 ‘토마스 웨인’과 ‘메어리 웨인’은 ‘하이파’의 작은 집단을 돕기 위하여 그곳으로 옮겼으며, 한편 ‘벤 위인즈’와 ‘그레이스 위인즈’는 2년을 더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1955년에 ‘웨인’ 부부가 그 나라를 떠나는 바람에 ‘벤’과 ‘그레이스’가 ‘하이파’로 옮겼다. ‘하이파’는 ‘텔아비브’ 지역에 있는 형제들은 물론, 북쪽 마을에 있는 형제들과도 연락을 유지하는 데 적합한 장소였다.

회중들이 세워지다

‘하이파’ 집단의 핵심은 ‘이브라힘 쉐하디’와 그의 불어나는 가족 그리고 제 2차 세계 대전 후에 도착하였던 두명의 ‘러시아’ 형제들이었다. ‘이브라힘’의 형인 ‘아탈라’는 그 동안 ‘레바논’ 국경 근처 마을로 이사하여 진리 안에서 계속 활동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 그 동생 ‘쉐하디’ 세대가 자라가고 있었으며, 일부는 주간 연구 집단들과 연합하였다. 드디어 1956년 6월에 ‘하이파’에 최초의 어엿한 회중이 형성되었다. ‘이스라엘’로 이민 오기 전에 ‘루마니아’에서 진리를 배운 두 자매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텔아비브’ 지역에서도 전파 사업이 열매를 맺고 있었다. ‘폴란드’에서 ‘유대’인 관심자가 ‘이스라엘’로 이사 와서, 그 지방 전도인들과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는 상세하고 긴 토론을 여러 차례 한 후에야,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왕국 희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데이비드 코헨’이라는 한 연로한 형제가 ‘이집트’에서 왔다. 그는 회중의 종으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1956년 10월에는 전도인 7명의 한 회중이 ‘텔아비브’에 형성되었다.

‘키프로스’ 지부의 감독

한동안 협회의 ‘키프로스’ 지부를 통하여 모든 봉사 보고가 제출되고 순회 방문이 마련되었었다. 1955년에 지부의 종이 처음으로 ‘이스라엘’의 형제들을 방문하였다. 그 이듬 해에 그러한 방문과 관련하여 대회가 ‘하이파’에 있는 어느 형제의 집 뜰에서 열렸는데, 그 모임을 위한 멋진 장소였다. 연사의 배후에는 푸른 지중해가 보였고, 청중 뒤에는 ‘갈멜’ 산이 높이 솟아 있었다. 참석한 51명 중 22명이 일요일 오전 호별 방문 봉사에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참석한 모두가 ‘하이파’에 있는 형제들과 관심자들 집에서 유숙하였다.

또 다른 기회에 ‘키프로스’로부터 약 20명의 전도인들이 ‘이스라엘’의 형제들과의 대회를 위해 왔다. 그 다음 번에는 ‘이스라엘’ ‘증인’들이 그들의 대회 중 하나에 참석하기 위해, ‘키프로스’로 여행할 ‘비자’를 신청하였다. 그러나 내무상은 일단의 ‘아랍’인과 ‘유대’인이 종교적인 대회에 함께 여행하고 싶어한다는 생각을 수긍하려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형제들은 허가를 받지 못하였다.

언어 문제

회중들은 초창기부터 언어 문제를 겪었다. 예를 들면, ‘텔아비브’ 회중에서는 최초의 두 자매 중 한 사람은 6개국어(독어, ‘이디시’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히브리’어)를 말할 수 있었으며, ‘이집트’에서 온 ‘코헨’ 형제는 7개국어(영어, 불어, ‘이탈리아’어, ‘아라비아’어, ‘터어키’어, 희랍어, ‘스페인’어)를 다룰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공통 언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이후 그 자매가 영어를 배움으로써 겨우 그들은 그 언어로 의사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집회에서 누군가가 영어와 ‘폴란드’어를 ‘히브리’어로 통역을 하거나 그 거꾸로 통역을 하는 식으로 여러 나라 말이 사용되어야만 하였다. 한번은 ‘하이파’에서 18명의 참석자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기념식이 5개 언어로 열렸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왕국회관에서 매주 「파수대」 연구 때에 줄을 따라 살펴보면, 동일한 기사를 ‘러시아’어, 독어, 불어, ‘스페인’어, ‘터어키’어, 영어, ‘폴란드’어 그리고 ‘히브리’어와 같은 언어로 보게 된다.

전세계로부터 ‘이스라엘’에 도착하는 이민들로 인해 이곳에서는 약 70가지 언어가 사용된다. 이것은 야외 봉사에서, 그리고 집주인들이 읽을 수 있는 언어의 간행물을 제공하는 데 있어서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시킨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가 ‘히브리’어를 배움에 따라 문제가 해결되고 있다. 어린 세대는 모두 그들의 주된 언어인 ‘히브리’어를 사용하며, 이제 대부분의 가정에서 ‘히브리’어를 알아듣게 되었다.

‘텔아비브’에서의 발전

1958년에 ‘길르앗’ 졸업생인 ‘알렉스 파니스’와 ‘아데나 파니스’ 그리고 특별 ‘파이오니아’인 ‘우루구아이’의 ‘아니타 세클레노프’가 ‘텔아비브’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마련한 집이 집회와 야외 봉사를 위한 신권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때부터 특히 여러 가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어와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하는 ‘아니타 세클레노프’ 자매는 그의 야외 봉사로부터 즉시 열매를 보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그 자매는 ‘러시아’ 태생 목수를 그 사람의 직장에서 만났다. 그 목수는 ‘러시아’어로 「파수대」 예약을 주문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그의 아내와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 아내는 충실한 전도인이 되었으며, 오래지 않아서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불가리아’ 태생 ‘유대’인인 또 다른 가족이 호응하였다. 비록 그 집 어머니는 진리를 중단하였지만 그 집 아들은 현재 회중에서 감독자로 일하고 있다.

‘불가리아’에서 온 또 다른 부인이 관심을 갖고 ‘세클레노프’ 자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생활 방식이 성서 원칙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가 변화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부인은 변화하였다! 그는 수년간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하였으며, 그의 가족 중 다른 사람들은 활동적인 전도인들이 되었다. 그 자매는 20여개 언어를 말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을 잘 이용하는데, 그것은 여러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이 나라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중 하나이다.

호별 방문에서 이 자매와 짝이 되어 각기 다른 나라들에서 이민온 사람들을 만남에 따라, 왕국의 좋은 소식을 ‘스페인’어로, 다음에는 ‘히브리’어로, 다음에는 ‘불가리아’어로, 다음에는 ‘러시아’어로, 다음에는 ‘아라비아’어로, 다음에는 영어로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경험이다. 그 자매는 농아를 만나도 문제가 없는데, 농아들의 수화는 그 자매가 할 줄 아는 또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상당한 기간 동안 그 자매의 작은 집의 조그마한 부엌이 왕국회관으로 사용되었다.

여러 해에 걸쳐 ‘텔아비브’ 회중은 수많은 개인 집이나 세를 낸 회관에서 모였다. 그들의 수가 불어나고 회관 주인이 이웃의 압력과 편견 때문에 계약 이상의 사용을 거절하여 형제들이 ‘이제 어디로 가야하지?’ 하고 염려한 것은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집회 시간표는 한번도 어김없이 지켜졌다. 사실, 그 여러 해에 걸쳐 단 한번의 집회만 취소됐었는데, 그것도 바로 집회 시간 직전에 왕국회관으로 사용되던 방의 지붕이 거센 폭풍에 날라가 버렸을 때였다. 드디어 1963년에 ‘왙취 타워’ 협회는 ‘텔아비브’의 중심지에 회중을 위한 왕국회관 구입 비용을 대주었다. 이곳에서의 집회 참석 수가 점점 증가하는 바람에 결국 회중을 둘로 만들어야만 하였다. 과거 여러 해를 돌이켜 볼 때 분명한 것은 여호와의 손이 그같은 방법으로 일들을 인도하셔서 항상 어떤 마련이 베풀어졌다는 것이다.

때때로 새로 이민온 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개척지에 집과 직업을 공급받았는데 그것은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1957년 말에 ‘폴란드’에서 도착한 ‘클루핀스키’ 형제 부부도 ‘하솔’이라는 고대 성서 도시 근처인 그 나라 동북쪽 모퉁이에 있는 아주 외진 곳에 거하게 되었다. 그러나 6개월 후에 그들은 ‘텔아비브’에 보다 가까운 성서 도시 ‘룻다’에 위치한 ‘로드’ 근처로 이사를 하였다. 1959년 이래 그들의 집은 회중 서적 연구 장소가 되어 왔으며, 또한 그곳이 ‘텔아비브’에서 약 23‘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지방 관심자들을 위해 ‘폴란드’어 「파수대」 연구가 거기에서 사회되고 있다.

‘길르앗’ 졸업생들이 ‘텔아비브’에서 ‘나사렛’으로 잠시 옮기게 되었을 때, ‘터어키’에서 온 ‘어바예베하르’ 형제가 한 동안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도인 대부분의 공통 언어인 ‘히브리’어나 그 밖의 언어를 알지 못하였다. 「파수대」 연구를 사회하는 사람이 여러 가지 언어로 주어지는 대답을 알아듣지 못할 때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베하르’ 형제가 ‘터어키’어 「파수대」로 질문을 읽어주고 각기 자기 자신의 언어로 동일한 기사를 가지고 있는 참석자들이 ‘러시아’어나 ‘폴란드’어로 대답을 하면 한 장성한 전도인이 그 대답이 조리가 있고 완전한지 아니면 부족한 데가 있는지를 ‘베하르’ 형제가 알 수 있도록 고개를 끄덕여주는 마련을 하곤 하였다. 만약 대답이 ‘히브리’어나 독일어로 주어지면 다른 전도인이 그렇게 하곤 하였다! ‘스페인’어로 주어지는 신권 학교 연설과 충고는 10살된 어린 전도인이 ‘히브리’어로 통역하였다. ‘스페인’어로 행해지는 봉사회 연설은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전도인들을 위해 한 자매가 ‘러시아’어로,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히브리’어로 통역하였다. 그러한 방법으로 모두가 만족스럽게 이해하여 집회 ‘프로그램’으로부터 유익을 얻었다.

젊은 ‘데이비드 네이머’가 ‘터어키’로부터 그 나라에 도착하게 된 것은 참으로 축복이었다! 그는 이미 ‘히브리’어에 대한 훌륭한 기초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진리 안에서의 연륜은 비교적 짧을지라도 훌륭한 지식과 이해를 갖추고 있었다. ‘길르앗’ 졸업생인 회중 감독자가 그 나라를 떠나자 ‘데이비드’가 한 동안 회중을 감독하였다. 그는 현재 지부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으며, 그의 생애에서 주요 행사 중 하나로 ‘브루클린’에서 5주의 특별 과정을 즐겼다.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

1963년의 주목할 만한 한 가지 행사는 “영원한 기쁜 소식” 국제 대회였다. 방문객들 대부분이 ‘요르단’과 ‘레바논’으로 가고 ‘이스라엘’로 온 사람들은 소수였다. ‘랍비’들이 그 대회를 알아채고 그 ‘홀’ 주인에게 유흥업 면허를 취소시켜 그의 사업을 망쳐 놓겠다고 위협하면서, 우리와의 계약을 취소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형제들은 견고한 계약을 했었지만 주인에게 어려움을 주느니보다 그 현대식 ‘에어콘’ 시설을 갖춘 ‘홀’에 대한 사용 권리를 포기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대회는 왕국회관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형제들의 영은 기가 꺾이기는커녕, 오히려 반대로 인해 고조되었다. 신문 보도 기관들은 그 이야기를 취재해서 많은 영자 신문과 ‘히브리’어 신문에—총 450‘센티미터’의 기사—그러한 강압적인 처사를 비난하는 보도를 하였다. 그리하여 ‘랍비’들의 노력은 역효과를 냈다! 공개 강연 참석자 수는 115명에 이르어 기록적이었다.

‘이스라엘’에 지부가 설립되다

드디어 1963년 1월 1일에 ‘이스라엘’에는 독립된 지부가 있게 되었는데, 그 사무실은 ‘하이파’에 위치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순회 감독자 방문과 대회 및 기타 모든 활동을 조직하며, 보고를 수집하고 회중과 집단들과의 통신을 유지하였다. 이 무렵, 이 나라 전도인 수는 거의 80명에 달하였으며, 그들 대부분이 ‘하이파’와 ‘텔아비브’ 두 도시와 그 인근에 살고 있었다. 거의 때를 같이하여 ‘헤릭 피어스’와 ‘캐더린 피어스’ 그리고 ‘데렉한슨’과 ‘쟌 한슨’이 ‘이스라엘’에 도착함으로 부가적인 도움이 베풀어졌다.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발전은 1962년 12월호를 첫 호로 하여 ‘히브리’어판 「파수대」를 발행한 일이었다. 처음 15호까지는 등사판이었다. 개량판들이 나옴에 따라, 발행 부수는 300 내지 400부이던 것이 30여개국을 위해 매호 평균 2,000부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이 나라에 ‘히브리’어 간행물의 수입이 금지되었으므로 「파수대」는 한 지방 인쇄소에서 인쇄되었으며 ‘이스라엘’ ‘증인’들이 번역, 편집 및 교정하는 일을 돌보았다.

번역자 중 한 사람은 ‘쇼샤나 기바티’였다. 그 자매는 이곳 ‘이스라엘’에서 자라났지만 후에 미국으로 이사갔는데, 그는 1960년에 거기서 ‘증인’이 되었다. 그 자매는 한 부부가 ‘이스라엘’ 회중들을 돕기 위하여 그곳으로 이사가려고 ‘히브리’어를 열심히 공부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 자매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들이 그토록 노력을 하고 있다면 이미 ‘히브리’어를 알고 있는 나는 이곳 미국에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 자매는 ‘이스라엘’로 돌아가기 위하여 즉시 자기 일을 정리하고, 가족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 때 이후 이곳에서 봉사해 왔으며 「파수대」 번역에 기여하였다.

1966년 6월에는 보다 적합한 건물을 ‘하이파’에서 임대하여 왕국회관과 지부 사무실 그리고 소수의 ‘벧엘’ 가족을 위한 숙소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1960년대 중반에 정기적인 집회 참석수는 ‘텔아비브’에서 80명내지 100명, ‘하이파’에서 약 40명으로 발전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이 나라에서는 매년 다음과 같은 전도인 신기록에 달했었다. 1964년—88명; 1965년—98명; 1966년—112명; 1967년—126명.

따뜻하고 국제적인 형제애

언어 장벽으로 인하여 부족할 수도 있는 형제들 사이의 이해와 명백한 의사 소통은 그들 사이의 진정한 온정으로 보충되었다. 어느 부인이 그가 처음으로 집회를 보고 이렇게 말한 바와 같다. “여기 여러분 모두는 참으로 친절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 다음의 경험에 나타나 있다.

‘폴란드’에서 진리를 배웠고, ‘히브리’어를 거의 못 알아듣던 한 ‘증인’ 자매는 회중 집회에 가는 도중 자기 고국에서 온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자매는 그 여자에게 자기가 어디를 가고 있는지를 이야기하고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함께 가자고 초대하였다. 그 친구는 쫓아와서 비록 연설 내용 중 많은 것을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형제들의 온정과 친절에 깊이 감명을 받고 정기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한편 그 여자는 자기 남편 직장 동료 부인들 중 두 사람에게 이야기 하였다. 현재 그들 모두가 회중 성원들이다! 이 자매들 중 한 사람은 여러 해 동안 정규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하였으며, 그 자매가 도와 진리 안에 들어온 그의 남편은 충실한 전도인이자 봉사의 종이다.

이곳이 참으로 국제적인 장소임을 더 잘 보여주는 것으로서, 한 회중에 ‘이라크’에서 자란 ‘모쉐 에레즈’라는 형제가 있다. 그는 ‘홍콩’에서 왕국 소식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 그는 일본에 있었다. 거기에서 그는 그의 새로 발견한 믿음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고립과 성서 고등 비평 서적들의 독서로 그의 믿음은 침식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이라크’로 돌아갔다가 ‘이스라엘’로 오게 되었다.

‘모쉐’는 자서전 즉 특히 종교와 성서에 대한 자기 견해에 발생하였던 변화에 관한 책을 한권 저술하기로 하였다. 마침내 그 준비가 끝나자 그는 누군가 자기를 위해 그것을 발행해 줄 사람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 문제를 자기가 일하고 있던 한 마을의 촌장과 상의하였는데, 그 촌장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종교 간행물을 발행하니까 아마 그들이 그의 계획에 도움이 되어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 지방 회중과 접촉을 하게 되었으며, 형제들 중 한 사람과 일련의 세세한 토론을 하였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메시야에 관한 “70주” 예언의 성취와 전반적인 성서 연대의 정확성은 ‘모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홍콩’에서 발견하여 일본에서 잃었던 믿음이 이제 정확한 지식을 토대로 하여 회복되고 강화되었다. 정기적인 연구와 회중 집회에서의 교제는 그를 신속히 세워주었다. 그는 진리 안에서 빨리 발전한 그의 딸 ‘다리아’와 함께 1962년에 침례를 받았다. 자서전을 발행하려던 욕망은 이제 온데 간데 없었다. 그들은 회중에게 참으로 훌륭한 자산이 되어 왔다! 아버지는 집회에서 필요한 경우 ‘아라비아’어와 ‘히브리’어 그리고 영어를 통역하며 장로로서 일하고 있다. 딸은 10년 이상 ‘벧엘’ 봉사를 해왔는데, 「파수대」와 기타 출판물 기사를 번역하고 교정하는 데 전 시간을 바쳐 계속 바쁘게 일하고 있다.

1967년의 6일 전쟁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 내에 넘쳐 흐르는 연합과 상호 신뢰의 훌륭한 예가 1967년 6월의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의 전쟁중에 뚜렷이 볼 수 있었다. 전쟁 전의 긴장된 날들과 바로 전쟁이 일어난 그 주간에 ‘이스라엘’ 내에서는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에 증오와 의심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유대’인 형제와 ‘아랍’인 형제들로 구성되어 있는 ‘하이파’ 회중은 그러한 증오와 의심의 기색이 없이 전쟁 기간 내내 계속해서 함께 모였다. 왕국회관은 불을 꺼버려 불빛이 희미했으나 전 집회 시간표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텔아비브’ 회중은, 해질녘이면 모든 교통 수단이 끊기기 때문에 집회를 오후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중단없이 계속되었다. 확실히 형제들에게는 ‘시대의 징조’와 장래 희망에 관하여 증거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이 있게 되었다. 왜냐 하면 그 달에 이 나라에서는 126명이 전파 활동을 보고함으로써 전도인 신기록에 달했던 것이다!

전쟁 결과로 ‘이스라엘’ 형제들과 ‘웨스트 뱅크’라 불리우는 지역의 형제들 사이의 접촉이 회복될 수 있었다. ‘라말라’ 회중과 ‘베이트 자라’ 회중 그리고 ‘여리고’에 살고 있던 집단은 ‘웨스트 뱅크’ 쪽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곳 형제들은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정해졌던 국경 서편에 있는 형제들과 근 20년만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협회의 지부 사무실 대표단은 한 ‘아라비아’어 번역자와 함께 되도록 빨리 이들 지방을 방문할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형제들의 행방에 관해 알고 있는 바는 극히 막연하였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차를 타고 ‘예루살렘’ 북쪽으로 향하면서 우리는 전쟁 피해의 흔적들—타버린 ‘탱크’와 자동차 그리고 폭격당한 집들—을 지나 ‘라말라’ 읍에 도착하였다.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몇년 전에 그곳에 살았던 가족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집으로 가는 방향을 물어 보았다. 그 집은 아무런 피해도 없었으며,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아서 우리는 문을 똑똑 두드렸다. 문을 살짝 열고는, 다소 경계하는 눈치여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설명하였다. 금방 얼굴 빛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즉시 반가이 안으로 맞아들여졌으며 우리가 도착한 때는 마침 그곳에서의 주간 ‘파수대’ 연구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 형제들은 우리를 보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전쟁이 발발하기 얼마 전부터 협회의 ‘베이루트’ 사무실과의 그들의 연락이 두절이 되어 있었다. 18명이 그날 오후 연구에 참석하고 있었다.

“연구 후에 형제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리는 짧은 연설을 하여 ‘이스라엘’ 회중들의 발전 상황 얼마를 이야기하였다. ‘아라비아’어로 통역된 그 짧은 연설은 아마 ‘라말라’에서 행한 최초의 ‘히브리’어 연설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형제들을 위하여 물건, 즉 ‘하이파’ 회중 형제들이 보낸 선물로서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워줄 최근호 잡지들과 주식 식량을 싣고 갔었다. 세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에 대한 필요도 돌보아졌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통행 금지 시각이 다가옴에 따라 짧게 끝내야만 했으며, 그날밤 유숙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해야만 하였다.

“다음날—이번에는 이름과 주소를 가지고—우리는 ‘베이트 자라’ 즉 ‘베들레헴’ 지역에 있는 형제들을 방문하였다. 이곳 역시 모두가 무사했다! 아무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 회중 감독자인 ‘파라 바키트’는 우리를 보고 너무나 기뻐서 하루 해가 아직 남아 있는데도 그의 조그마한 상점의 문을 즉시 닫고는 우리를 동반해서 그 나라 분단 이래 근 20년간 줄곧 확고한 입장을 지켜온 충실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회중과 연합하고 있는 가족들을 모두 방문하였다. 그 날은 너무나도 빨리 지나갔으며, 우리는 떠나야만 하였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우리는 만약 국경이 그동안 바뀌지 않는 한 다시 방문할 마련을 하였다.”

서너주 후에 있었던 다음 방문은 보다 온전한 방문으로 그때를 위해 집회가 사전에 계속되었다. 격리된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여리고’와 ‘나부르스’를 방문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나부르스’에 홀로 있는 형제 ‘조셉 압데나워’는 여러 해 전에 ‘하이파’ 회중과 연합했었던 형제이다.

이 나라의 모든 회중을 위한 1일간의 대회가 전후 두달이 채 못되는 8월 6일에 ‘예루살렘’에 있는 한 큰 ‘호텔’ 방에서 열리도록 계획되었다. 그것은 당시 부협회장인 ‘F. W. 프렌즈’가 ‘뉴우요오크’ 시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 나라로 휴가 여행할 때에 맞추어 정해진 것이다. 참으로 훌륭한 날이었다!

형제들은 1919년에 미국에서 ‘라말라’로 왕국 소식을 가져온 최초의 두 집단과 만나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웨스트 뱅크’에서 온 형제들은 ‘이스라엘’의 여러 도시들에서 온 그처럼 많은 형제들을 보고는 감격하였다. 사실 20년 전에는 ‘이스라엘’에 너댓명의 전도인 밖에 없었던 것이다. 총 176명이 단 하루뿐인 모임에 참석하였다. 철조망 국경선으로 말미암아 떨어져 있던 형제들이 이제 말이 통하는 한도 내에서 인사와 소식을 나눌 기회를 갖게 됨에 따라 웅대한 연합의 영을 매우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웨스트 뱅크’의 형제들은 그 후로 ‘이스라엘’에서 열리는 순회 대회와 지역 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고, ‘이스라엘’의 형제들은 그곳 회중들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웨스트 뱅크’의 두개 회중은 이전에는 금지령하에 있었으며 간행물은 압수를 당해 왔었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의 교직자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이러한 제한을 가하도록 ‘암만’에 있는 ‘요르단’ 정부에 압력을 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고위 교직자들은 ‘이스라엘’ 시민이나 군 당국을 좌우할 수는 없었으므로, 우리는 1967년 이래 ‘웨스트 뱅크’에서 대회와 활동의 자유를 누려왔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교직자들이 이전에는 ‘요르단’의 ‘암만’에 있는 형제들을 괴롭힐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곳을 다스리는 당국에 영향을 미칠 길이 없었다.

가장들을 위한 교훈

1947년경에 ‘하이파’에서 ‘나브루스’로 이사한 ‘조셉 압데나워’ 형제의 경우에 일어났던 일로부터 한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그가 왕국 소식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고 기회가 있는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를 하였지만, ‘조셉’은 자기 가족의 영적 필요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집회에 참석하거나 믿음 안에 있는 다른 젊은이들과 교제할 기회가 없었다. 그 결과 그의 자녀들 중 아무도 진리에 관심을 두지 않고 가사와 정치 및 기타 관심사에 몰두하였다.

한 아들은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그의 정치 활동으로 인해 ‘요르단’ 당국하의 어느 사막의 노동 수용소에서 7년형을 치루기까지 하였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성서의 희망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듣긴 했었지만, 그에게 철저하게 설명된 적은 전혀 없었다. 교도소 내에서의 그의 경험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믿음은 산산히 깨어지고 그에게는 아무런 희망의 근원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와 그의 가족은 ‘라말라’로 이사하였는데, 그는 그곳에서 ‘증인’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모아 둔 책들도 가지고 갔는데, 그 중에는 협회의 간행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형제들의 방문으로 그의 관심이 살아나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리하여 하나님과 성서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는 신속히 발전하여 그가 처음으로 참석한 대회에서 침례를 받고, 한동안 ‘파이오니아’로서 일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그의 영적 발전을 보았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였겠는가!

구역 범위

대부분의 ‘이스라엘’ ‘증인’들은 회중들이 위치해 있는 즉 ‘하이파’와 ‘텔아비브’ 그리고 ‘웨스트 뱅크’의 ‘라말라’와 ‘베이트 자라’(베들레헴) 도시 근처에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 구석 구석까지도 대부분 얼마의 증거 활동이 행해져 왔으며 그밖의 많은 읍과 마을에 간행물이 전해져 있었다. 아직도 성서 시대의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 적어도 어느 정도 증거를 받은 도시들 중에는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욥바’, ‘가이사랴’, ‘브엘세바’, ‘엘랏’, ‘예루살렘’, ‘룻다’(지금의 ‘로드’) ‘나사렛’, ‘돌레마이’(지금의 ‘에이커’)와 ‘갈멜’ 산맥을 따라 연해 있는 읍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헤브론’, ‘세겜’(지금의 ‘나부르스’) 그리고 ‘여리고’와 같은 ‘웨스트 뱅크’ 지역도 좋은 소식을 약간 들어왔다.

제 1세기에는 ‘돌레마이’에 그리스도인 회중이 하나 있었다. (사도 21:7) 오늘날에는 그곳에 전도인이 한명 있다. 더구나 그 자매는 참으로 다부진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소아마비’로 불구가 된 그 자매는 옛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안에 있는 자기 집에서 몇 ‘미터’ 반경으로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다. 마침 한 형제가 그의 출입 거리 내에 시계방을 하나 차리고 있었는데, 그 자매는 이야기하러 때때로 그의 가게에 들리곤 했었다. 그 자매는 그 형제가 들려준 소식 즉 그가 언젠가는 달리며 껑충 껑충 뛰게 된다는 희망을 제시해준 고무적인 좋은 소식에 반응을 나타내었다!

진리는 인생의 모든 일에 대한 그 자매의 견해에 일대 변화를 가져와, 그로 하여금 일을 배우고 적절한 직장을 구하며, 심지어 운전 시험에까지 합격하도록 욕망을 심어 주었다. 곧 그 자매는 ‘하이파’ 회중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기 위해 24‘킬로미터’를 여행하게 되었다. 그 자매는 이따금씩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에 참여하는 훌륭하고 열성적이며 정력적인 ‘증인’이 되었다. 그 자매는 1969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도 참석하였다.

여러가지 인내가 필요하다

‘이스라엘’에서 ‘증인’이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유대’인 계통의 사람이 지방 회중과 연합하기 시작하면, 그는 사방으로부터 오는 반대를 직면해야만 한다. 그것은 참으로 그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는지의 여부와 여호와를 섬기려는 그의 결심에 대한 시험이 된다. ‘러시아’ 출신의 한 가족이 바로 그러한 반대를 견디어 냈다.

한 ‘파이오니아’ 자매가 이 가족을 만났는데, 매주 연구를 한 결과 그들은 빨리 발전하여 그들이 배운 것에 고착하려는 훌륭한 결심의 정신을 나타내었다. 돌이 그들 집 창문으로 날아들어 왔으며, 허구한 날 야유와 모욕적인 말을 매일 겪어야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몹시 냉대하였으며, 그들과 말하기조차 거절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이전에 그들을 반대했거나 멀리 했던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 가족이 집회에 참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하자, ‘랍비’ 당국이 이를 알게 되었다. 지방 ‘랍비’ 위원회는 그 가족에게 만약 그들이 ‘유대’교로 돌아선다면 재정적인 도움을 베풀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들은 그 가족이 그리스도인들이 된 것은 어떤 물질적 유혹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 것이다. 그 형제의 대답은 다음과 같이 명백하였다. “돈으로 사거나 팔 수 없는 것들이 있읍니다. 그러한 것들 중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서의 진리입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도움으로 이 진리를 발견하였읍니다.” 그 가족의 아버지가 한 회중에서 장로로서 섬기고 있는 도움에 대하여 가족 중 두명이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해 왔다. 그러한 초기의 시험들은 이곳 ‘증인’들에게 여러 해 동안 크게 도움이 되는 영적 힘을 산출하였다.

새로운 사람들의 신속한 발전

1969년 이래 ‘아니타 세클레노프’는 ‘벧엘’ 가족의 한 성원으로 봉사해 왔다. 그가 넘어져서 척추를 다친 후로 그 자매의 야외 봉사 활동은 주로 지부 바로 인근에 있는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으로 제한을 받게 되었다. 그 자매는 지부에서 약 46‘미터’ 떨어진 곳에서 관심을 보인 한 부인을 만났는데, 언어 문제에도 불구하고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주부가 연구로부터 얻은 즐거움은 그의 남편으로 하여금 관심을 갖게 하였으며, 그 남편도 읽어보고는 연구를 시작하였다.

집회에 참석하라고 격려하였지만 번번이 꼭 집회 시간이면 그들의 많은 친족들 중 누군가가 방문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들이 회관에 와 있을 때도 손님들이 나타나면 곧 집회에서 집으로 불려가곤 하였다. 그러나 집회에서 제공되는 영적 양식에 대한 “구미”가 강하게 당기어, 그들은 많은 친지들에게 세 가지 집회가 있는 밤의 특정한 시간 동안에는 집에 없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이 부부 ‘한나 코우리’와 ‘네하이 코우리’ 그리고 그들의 다섯 자녀는 그 도시에 살거나 멀리 그들의 고향에 사는 많은 친척들에게 훌륭히 증거하였다. 그들은 또 회중에서도 크게 도움이 되어왔다. 아버지는 이내 야외 봉사를 인도하고 회중에서 다른 책임들을 돌보게 되었다. 그는 지부 위원으로 임명되어, 1978년에는 ‘뉴우요오크 브루클린’에서 열린 지부 위원회 성원들을 위한 과정에 참석하는 특권을 즐겼다. 그가 그 나라를 떠나거나 자기 가족과 떨어져보기는 그것이 처음이었다.

대회와 기념식

1967년 이후로 우리의 모든 순회 대회와 지역 대회 ‘프로그램’은 ‘히브리’어와 ‘아라비아’어 두 가지로 제공되어 왔다. 어떤 경우에는 ‘프로그램’이 한 가지 언어로 제공되고, 다른 언어로 통역되었다. 대개는 인접해 있는 ‘홀’들에서 각기 다른 언어 회기가 마련되었으며, 회기 사이에 교제할 기회들이 있었다. 우리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다양한 ‘홀’들—극장, 사회 ‘클럽’ 및 학교 시설—이 이러한 대회를 위해 우리의 필요에 도움을 주었다.

기념식이 가끔 ‘유대’인의 유월절과 겹치게 되는 바람에, 이것이 문제를 일으킨다. 모든 대중 교통 수단이 해질 때에 차단되며, 그 지방 가정 중에 자가용을 가진 가정은 거의 없었다. 지방적으로, ‘유대’인 가족들은 ‘모세’ 시대의 출‘애굽’을 기념하기 위하여 백향목 식탁에 둘러 앉는다. 이것은 가정이 분열되어 있는 ‘증인’에게는 참으로 난처한 상황이었다. 가족 중 어머니 혼자 유일하게 진리 안에 있는 경우라면 특히 더 그러한데, 어머니는 집에서 ‘유대’인의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고 시중들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사람들이 참석하여 참 ‘유월절 양’인 ‘메시야’에 대한 자기들의 입장을 취할 때 직면하게 되는 많은 문제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따라서 매년 우리의 기념식에 400명 이상이 참석한다는 것은 관심자들이 참으로 크게 애쓰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서의 땅”을 방문하다

‘이스라엘’을 개별적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이 항상 끊이지 않으므로, 협회는 1973년에 여행 계획을 조직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목적의 성취와 관련하여 그처럼 많은 일들이 발생한 그 땅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스라엘’로 가는 교통편과 잘 조직된 여정 그리고 안락한 숙박 시설이 잘 연결되어 있어서 3,500여명이 그 땅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이곳 방문을 ‘유럽’이나 기타 나라의 대회와 연결시켰다.

좀 더 최근인 1978년에는 비슷한 계획이 반복되었는데, 이번에는 40여개국으로부터 14,000여명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1979년 중에는 수천명이 더 비슷하게 조직된 여행을 이용하였다. 방문자들은 무엇을 보게 되는가?

여정은 일주일간의 여행 동안에 가능한 한 그 나라 구석 구석을—“‘단’부터 ‘브엘 세바’까지”와 때로는 더 멀리까지—돌아보는 것이었다. 어떤 여정은 ‘시내’ 산 지역까지의 방문이 포함되어 있다. 성서의 의미깊은 사건들이 일어났던 실제 장소와 배경—‘므깃도’, ‘갈멜’ 산, ‘가이사랴’, ‘가버나움’, ‘욥바’, ‘감람’ 산, ‘여리고’, ‘힌놈’의 골짜기, ‘나사렛’, ‘베들레헴’—을 직접 구경하는 것은 믿음을 강화시켜 주며 교육적이다. 성서 전체 역사가 생생해지고 한층 더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유익은 거기서 끝나는게 아니다. 많은 방문단들은 그들이 유숙하는 ‘호텔’로 찾아온 지방 전도인들과의 저녁 모임을 마련하였다. 상호 모두의 격려를 위해 경험담과 소식을 교환하는 일을 즐겼다. 그리고 네명의 ‘벧엘’ 가족들이 그들의 조그마한 집에서 그처럼 많은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은 대단한 경험이었다!

더우기, 그 나라 전국을 여행하는 수많은 ‘증인’들은 그들이 접촉하게 되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증거를 하였다. ‘버스’마다 “‘여호와의 증인’—성서의 땅 여행단”이란 표시를 달았으며 많은 방문객들은 신분을 밝혀주는 ‘뱃지’를 달았다. 따라서 언어 장벽 때문에 대화가 불가능했을지라도 형제들이 나타낸 훌륭한 행실과 친절은 뚜렷한 인상을 주었다.

1973년으로 돌아가서 마지막 방문단이 출발한지 채 10일도 못되어 ‘이스라엘’과 그 이웃 나라들 간에 “속죄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1967년처럼 회중의 활동과 집회가 한번도 중단되는 일 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가 군 징집을 요구했을 때 문제가 생겨, 이전에 우리 젊은 형제들에게 용인되었던 모든 면제가 취소되었다. 두명의 장로를 포함하여 어린 자녀들이 있는 몇몇 아버지들과 얼마의 봉사의 종들이 체포되어 군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한 가족은 아버지없이 계속, 2년을 지내야 하였다. 그리하여 지방 형제들은 그 가족에게 집중적인 도움을 주어 식품과 기타 실제적인 도움을 베풀어 주었다.

투옥된 형제들의 집단이 그들의 양심의 지시에 따라 더욱 확고한 입장을 취하여 죄수복으로 지급된 군 작업복 입기를 거절하거나 수용소에서 어떠한 작업 임명도 수행하기를 거절하기로 하자 사정이 달라지게 되었다. 그들은 추운 날씨에 속옷만 걸치고 징벌사에서 비인간적인 상태를 수주일간 견뎌야만 하였다. 그 결과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고 그들의 성실을 깨뜨리려는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음이 분명해지자, 그들은 결국 석방되었다. 관련된 가족들에 관한 개인적인 이야기와 우리의 원칙과 신앙에 대한 설명들이 많은 국내 신문 ‘라디오 뉴스’ 방송과 전화 연결 ‘프로그램’에 나왔을 때, 언론 보도들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이러한 ‘뉴스’ 보도들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가 신문에 실리고 ‘라디오’에서 방송되었는데, 아마 그런 일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테트라그람마톤’이 ‘히브리’어 성서와 기타 종교 간행물에 나오긴 했어도 그것이 세속 출판물에 기록되거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발음된 적은 결코 없었다. 전도인들이 집주인에게 자신을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소개할 때면, 그들은 이것이 실은 “하나님의 증인”을 의미한다는 점을 설명해야만 하였다. ‘유대’인 집주인들은 우리가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국의 일부라고 여긴다. 동시에 ‘아랍’ 사람들은 우리가 ‘유대’인식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사용한다고 해서 우리를 “시온주의자들”로 간주한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것은 참으로 독특한 특권으로 여길 만하지 않은가!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이 반대하다

‘이스라엘’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반면에, 모든 개종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얼마의 선교인 반대 운동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종종 오해하여 우리를 그리스도교국 선교인들과 한 부류로 보았다. 1977년중에 ‘텔아비브’ 회중과 그곳 왕국회관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우리의 사업에 대한 반대는 최고에 달하였다.

‘유대’인 정교회 광신자들이, 일부 ‘증인’ 가족들에게 문제를 야기시켰는데 그들의 이웃에게 모욕적인 ‘팜플렛’을 배부한 것이다. 형제들이 집회에 오고 갈 때면 모욕과 야비한 언사 및 협박이 그들에게 큰 소리로 퍼부어졌다. 다음에 왕국회관에 대한 공격이 연속 3번이나 있었는데, 그 때 폭도들은 비품과 ‘앰프’ 시설, ‘에어콘’, 전기 장치 및 간행물들을 못쓰게 만들었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모두 찢어버리기까지 하였다!

처음에는 당국에게 제시한 항의와 도움을 위한 호소가 무시되었었다. 그러나 지방 신문과 외국 신문들 그리고 지방 ‘텔레비젼’이 그 사실을 보도하자 경찰 당국이 나섰다. 그들은 상호 협조하여 매복해 있다가 3명의 ‘랍비’ 학생들이 네번째 왔을 때 그들을 체포했다. 이번에는 그들이 그 건물을 불사르려고 했던 것이다. 이들 폭도들이 소액의 벌금과 집행 유예로 석방되긴 했지만, 그러한 조처는 공격을 중지시켜 주었다. 다른 나라들에서의 자기들에 대한 냉대를 성급하게 항의한 사람들이 나타낸 편협에 대해 정직한 마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불쾌함을 표하였다.

꾸준한 발전이 계속되다

1970년대 내내 전도인 수가 꾸준히 증가하여 1974년에는 200명, 1975년에는 250명, 1976년에는 최고 276명에 달하였다. 대회와 기념식 참석 수는 400명이 넘었다. 이러한 약진이 있고 난 다음 지난 2년 동안에는 속도가 떨어져 새로운 사람들이 얼마 나오지 않았으며, 일부는 이 나라를 떠났고, 일부는 필요한 인내의 특성을 나타내지 못하였다. 현재 ‘라말라’와 ‘베들레헴’(즉 ‘베이트 자라’)에 있는 회중들은 중앙에 위치해 있는 아름다운 왕국회관들을 갖고 있다.

‘요르단’에 있는 왕국 전도인 수는 ‘라말라’와 ‘베들레헴’에 있는 회중이 더는 ‘요르단’의 일부로 간주되지 않게 된 1968년에 19명이 보고하던 것이 이제는 평균 약 40명의 전도인으로 증가하였다. ‘요르단’에는 아직도 수도 ‘암만’에 있는 회중 하나뿐이다.

제 1차 세계 대전 후 ‘라말라’에 진리를 가져온 최초의 노장 형제들 ‘팀’은 그후 사망하였다. 그 마지막 성원이 1971년 봄에 사망하였다. 또한 최초의 형제들이 1930년대에 ‘하이파’에서 접촉했던 ‘이브라힘 쉐하디’와 ‘아탈라 쉐하디’도 최근에 그들의 충성스러운 인생 행로를 마쳤는데, ‘이브라힘’은 1978년에, 그리고 ‘아탈라’는 1979년 7월에 사망하였다. ‘텔아비브’ 안팎에서 현대 활동을 시작하였던 두 자매 ‘프리다 수제’와 ‘화니 민첼’은 여전히 열심히 봉사에 전념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연합하고 있다. 이들 왕국 전도인들 모두는, 세계의 한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이 중요한 땅에서 그들의 봉사를 하는 가운데 행복을 누리며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

[각주]

^ 3항 “팔레스타인”이란 이름은 간접적으로 “필리스티아”에서 파생되었는데, 그 이름은 원래 ‘블레셋’ 사람들이 점령했던 해안 지역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75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이스라엘’과 ‘요르단’

지중해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 아라비아

이집트

사해

요단강

이스라엘

요르단

아코

하이파

므깃도

가버나움

나사렛

가이사랴

사마리아

나브루스

벧엘

라말라

여리고

텔아비브-야포

아스돗

아스글론

암만

예루살렘

베들레헴

헤브론

브엘세바

페트라

[177면 삽화]

‘이스라엘’—고대와 현대가 서로 만나 대조를 이루는 나라

[180면 삽화]

육적 형제간인 ‘이브라힘 쉐하디’(좌)와 ‘아탈라 쉐하디’가 ‘하이파’에서 증거 사업을 개척하였다.

[191면 삽화]

‘폴란드’의 같은 마을에서 온 ‘프리다 수제’(좌)와 ‘화니 민첼’이 ‘텔아비브-야포’에서 현대 증거 활동을 시작하였다.

[208면 삽화]

1978년에 성서의 땅을 방문하였던 많은 ‘증인’들 중 몇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