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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프랑스’

‘프랑스’

‘프랑스’는 소련을 제외하고는,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로 영토는 550,000평방 ‘킬로미터’가 넘는다. ‘프랑스’인들은 자기 나라를 “헥사곤”(육각형)이라고 부르는 습관이 있다. 바로 뒤에 나오는 ‘프랑스’ 지도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 나라는 영국 해협과 대서양 그리고 지중해 연안을 따라 아름다운 해변들과 또한 눈덮힌 장엄한 ‘알프스’와 ‘피레네’ 산맥의 혜택을 받고 있다.

‘프랑스’는 공화국으로서 96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지중해의 ‘코르시카’ 섬을 포함한다. 53,000,000이 넘는 이 나라 인구는 여러가지 형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어 그들의 옛 조상 즉, ‘코카사스’족, ‘켈트’족, ‘게르만’족 그리고 ‘라틴’족을 반영한다. 오늘날 ‘프랑스’인 모두가 사용하는 언어는 불어지만 ‘알사스-로렌’에서 나이든 사람들은 아직도 독일어나 독일어 방언을 사용한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폴란드’에서 ‘프랑스’로 온 많은 광부들은 ‘폴란드’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인들과 ‘알제리아’인들도 상당수 있다. 최근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근로자들 수천명이 ‘프랑스’로 왔다. 그리하여 그들의 언어도 이 나라 도처에서 종종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전체로 말해서 ‘프랑스’는 ‘가톨릭’ 나라로,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세력은 16세기와 17세기의 박해로 인해 크게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브리타니카’ 백과 사전」은 ‘프랑스’의 종교 상황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서방 모든 나라들에게 공통적인 현상이지만 프랑스에서 대다수의 국민들이 종교 단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현저하게 볼 수 있다. 이것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성장과 관련되어 있다. 대체로 농촌 사회는 전통적 신앙에 더욱 고착해 있는 반면, 특히 교외 지역에 있는 도시민들은 그리스도교의 특성을 잃어가고 있다.”

‘러셀’이 기반을 놓다

‘프랑스’에서의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19세기말로 소급한다. 1891년 ‘왙취 타위’ 협회장인 ‘차알스 T. 러셀’이 ‘파리’를 방문하였으며 ‘프랑스’ 밭에 대한 자기의 인상을 1891년 11월호 「‘시온’의 파수대」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프랑스’인들이 대범하게 무신앙으로 급속히 전환하고 있는 반면, 아직도 많은 수는 터무니 없는 ‘가톨릭’ 미신에 눈멀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좋지 않은 인상에도 불구하고 ‘러셀’ 형제는 「성경 연구」가 불어로 번역되게 하였다. 그는 또한 여러 가지 책자와 전도지들도 불어로 번역되도록 마련했다. 그리하여 ‘프랑스’에서 장래의 좋은 소식 전파 사업을 위한 기반을 놓았다.

한 무명의 ‘스위스’ 나무꾼

1890년대 중 언젠가 ‘아돌프 웨버’라는 한 무명의 ‘스위스’ 나무꾼이 미국으로 여행하였다. 그는 그곳 ‘피츠버어그’에서 정원사로서 ‘러셀’ 형제를 위해 일했으며, 그로부터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을 얻었다. 얼마 후, ‘웨버’는 ‘유럽’으로 돌아가서 불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에서 전도하겠다고 하였다. 결국 ‘러셀’ 형제는 그의 제의를 수락하고 불어를 사용하는 ‘유럽’에서의 전파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 줄 것에 동의했다.

‘아돌프 웨버’는 농사꾼처럼 생긴 소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영어와 불어 그리고 독일어를 잘 아는 독실하면서도 장성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스위스’로 돌아와 불어 종교 신문과 잡지에다 ‘러셀’ 형제가 쓴 「성경 연구」 제1권과 소책자들에 대한 광고를 냈다.

관심의 첫 표시

1900년 8월 12일 ‘프랑스’ 중부의, ‘보벤’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살고 있는 ‘엘리떼롱’이라는 이름의 ‘프랑스’인이 광고에 반응을 나타내고 성서 간행물을 주문하였다. ‘엘리’는 진리의 소리를 인식하고 이내 그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1905년에 그의 집은 ‘프랑스’에서 ‘왙취 타워’ 간행물을 주문하고 최초의 보관소가 되었다.

1901년 ‘사를레르’와 인근의 ‘벨기에’ 광산촌에 사는 식료품 상인이자 침례교도인 ‘띨망’도 ‘웨버’ 형제의 광고 중, 하나를 읽고 성서 간행물을 주문했다. 그는 1902년에 자기 집에 조그마한 성경 연구생 집단을 조직했다. 곧 살펴 보겠지만, 이 집단이 후에 진리를 ‘프랑스’ 북부로 전하였다.

1903년 ‘러셀’ 형제는 다시 ‘유럽’을 방문하여 ‘웨버’ 형제와 함께 「‘시온’의 파수대」 불어판을 발행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것은 8면의 계간지로 시작하였으며 첫 호는 1903년 10월호였다. 이것이 1904년 1월부터는 월간지가 되었다.

‘프랑스’ 땅을 “경작함”

‘웨버’ 형제의 신문 광고 운동의 결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협회의 성서 간행물을 주문하여 연구하게 되었다. ‘웨버’ 형제는 여름철에는 ‘스위스’에서 나무꾼 및 정원사로서 일하면서 불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인들에게 전도지를 배부하며 전파하곤 했다. 그리고나서 출판물을 주문했거나 「파수대」 잡지를 예약한 ‘프랑스’와 ‘벨기에’에 사는 사람들을 방문하는 긴 여행길에 오르곤 하였다. 그는 여행중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정원을 돌보는 일과 일시적 일을 하였다. ‘웨버’ 형제의 헌신적인 봉사의 결과로, 진리는 ‘프랑스’의 여러 지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1904년, ‘웨버’ 형제는 ‘벨기에’ ‘사를레르와’ 부근에 사는 ‘띨망’ 가족을 방문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프로테스탄트’ 교회 밖에서 책자를 배부하는 방법을 알려 주고, 그들의 활동을 ‘프랑스’ 북부로 확장하도록 격려했다. 이리하여 1904년 8월, ‘띨망’과 그의 어린 딸 ‘죠세핀’은 ‘프랑스’ 북부 광산 지역인 ‘디낭’ 시까지 기차로 여행하였다. 그들은 그곳 침례 교회 밖에서 전도지와 「파수대」 잡지를 배부하였다. 이 교회의 많은 성원들이 흥미있게 간행물을 읽고 「파수대」를 예약하였다. 이 가족들이 곧 자기들의 침례교 목사에게 난처한 질문들을 가하기 시작하자 마침내 그 목사는 그들에게 더 이상 자기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하였다. 그들은 ‘디낭’ 근처 ‘아브류’에 있는 ‘쥴레 레킴’ 집에서 함께 모여 성서를 연구하기로 하였다. 덧붙여 말하자면, ‘디낭’에 있는 이 가족들 즉, ‘레킴’가(家), ‘보캄쁘’가 그리고 ‘뽈라르’가의 자녀들과 손자녀들은 아직도 활동적인 증인들이며, 그 손자들 중 두명은 현재 ‘프랑스’에서 순회 감독자로 일하고 있다.

1906년, ‘웨버’ 형제는 ‘디낭’에 있는 이 집단을 방문하여 그들이 조직화 되도록 도왔다. ‘디낭’ 회중은 즉각 인근 도시 ‘쎙-르-노브르’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밖에서 전도지를 배부하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빨마애르’ 가족을 포함하여 그곳의 여러 가족들이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웨버’ 형제는 그들을 한 집단으로 조직하여 ‘빅또 쥬뼁’의 집에서 모이게 하였다. ‘쥬뼁’은 약 60년간 여호와를 충실히 섬긴 후 1969년 11월 15일에 사망하였다.

‘디낭’에 있는 침례교 목사는 성경 연구생들이 된 사람들이 결국은 침례 교회로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여전히 품고 있었다. 그는 혼자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사망하든지 결혼하게 될 때까지만 기다려 보자! 그 때는 그들이 그런 의식을 사회해 달라고 내게 달려오겠지.’ 그러나 그의 희망은 먼저 1906년에 한 형제가 사망했을 때, 그리고 다시 1907년에 ‘레킴’의 두 딸이 결혼했을 때 좌절되었다. 성경 연구생들의 지방 회중에서 온 형제들이 그 식을 다루었던 것이다.

한편, 이 사업은 더 남쪽으로 여전히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 해 1907년, ‘렝’ 근방에 사는 어느 학교 선생이 ‘가톨릭’세가 강한 ‘브레타뉴’ 지방에서 「성경 연구」 제1권과 「파수대」 잡지를 배부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때까지 ‘프랑스’에서는 세 개의 서적 보관소가 운영되고 있었으며, 불어판 「파수대」 예약은 이들 세 주소 중 어디로든 보내지게 되었다. 1907년 말엽에 불어판 「파수대」에는 “자진 봉사자들을 구함”이란 기사가 실렸다.

1908년과 1909년 사이에 ‘디낭’ 회중과 ‘쌩-르-노브르’ 회중은 인근 지역에서 전파했으며, ‘빠-드-깔데’ 현(縣)에 있는 ‘랭스’와 ‘오슈’와 같은 ‘프랑스’ 북부의 다른 도시들에서 연구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순례자 방문

1908년 12월부터 1909년 2월까지 ‘웨버’는 ‘베장송’, ‘그레노블’, ‘발란스’, ‘보르도’, ‘낭트’, ‘렝’, ‘앙제이’, ‘파리’ 그리고 ‘낭시’와 같은 대도시들을 포함하여 ‘프랑스’ 전역에 있는 20개의 현 즉 행정 구역에 있는 집단들과 격리된 형제들에게 순례자 방문을 했다. 이 무렵, 진리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인 ‘알사스-로렌’에도 침투하기 시작했다. ‘슈띠’ 형제는 ‘쎙뜨-마리-오-민’ 시에서 활동적이었으며 소도시 ‘쁘뗄스바슈’에 있는 다른 성경 연구생들은 독일어판 「생각있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양식」이란 출판물을 배부하고 있었다.

1909년 12월과 1910년 1월에 세명의 순례자 ‘A. 메예’와 ‘S. 세게르’ 그리고 ‘아돌프 웨버’ 형제는 ‘프랑스’의 34개 도시들을 방문하였으며, 그 중 많은 곳에서 집회를 가졌다. 그 중에는 회중이 하나 조직되어 있는 ‘프랑스’ 북부의 대단위 직물 공장 도시 ‘루베’도 포함되어 있다. 가장 오래 머문 곳은 ‘파리’로서 1909년 12월 18일부터 20일까지 머물렀는데, 이것은 이 무렵 ‘프랑스’의 수도에서 관심이 자라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같은 해에 불어판 「파수대」지는 그 명칭이 「르빠르 드라 뚤드 시옹」(문자적으로, ‘시온’ 탑의 등대)에서 「라뚤드 갈드」(파수대)로 바뀌었는데, 오늘날까지 여전히 그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1910년에 불어판 「만인의 설교단」 전도지 첫 호가 발행되었다. 불어판 「파수대」 1910년 4월호는 “자진 봉사자들을 구함”이란 또 하나의 기사를 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지금 「만인의 설교단」 전도지를 대량 비축하고 있읍니다. 이 전도지 첫 호 100,000부가 이제 막 인쇄되었읍니다. 이것은 누구나가 받아볼 수 있는 특별호입니다.”

그해 1910년은 ‘웨버’ 형제가 ‘프랑스’ 전역을 또 한번 순례 여행을 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는 1910년 12월 22일에 여행을 시작해서 ‘프랑스’에 있는 30개의 성경 연구생 집단을 방문했으며, 1911년 1월 28일에 그의 여행을 끝냈다. 그가 여행하기 바로 직전인 1910년 12월 4, 5일에는 ‘프랑스’ 북부에 있는 성경 연구생들의 전국 대회가 ‘랭스’에서 개최되었다.

‘러셀’이 ‘프랑스’를 두번 방문하다

1911년의 큰 행사는 협회장 ‘차알스 T. 러셀’의 방문이었다. 그는 4월 14일에 ‘디낭’에서 열린 대회에서 100여명의 집단에게, 다음 날에는 ‘랭스’에서 70명에게 연설을 하였다. 이러한 대회들에는 ‘벨기에’에서 온 성경 연구생들도 참석했다. ‘웨버’ 형제 그리고 또 다른 ‘스위스’ 형제로서 불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에서 이 사업을 감독하는 데 뛰어나게 활약하기 시작한 ‘아렉상드로 프리따’가 이러한 행사들에서 ‘러셀’ 형제를 도왔다.

1911년 12월부터 1912년 3월까지 ‘러셀’ 형제는 세계 일주를 하였다. 그 여행을 취재한 「수브니 노뜨」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로마’에서 계속 ‘파리’로 갔는데, 여기 그 대도시에서 만국 성경 연구생들의 작은 반(班)을 만났다.” 이 여행중, ‘러셀’이 마련한 것들 가운데는 1912년 6월 ‘스위스’ ‘제네바’에 이른바 “불어 사무실” 개설을 위한 준비였다. 이곳은 ‘프랑스’, ‘벨기에’ 그리고 불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에서의 사업을 감독하기 위한 것이었다. ‘러셀’ 형제는 ‘알사스’ ‘뮐루세’에 거주하는 ‘스위스’인 치과 의사 ‘에밀 랑쯔’에게 이 지부 사무실의 책임을 맡겼다. ‘랑쯔’는 ‘아렉상드로 프리따’의 협력을 구하였는데, 그는 불어판 「파수대」를 번역하는 일을 도왔다.

그리하여 20세기가 시작할 무렵 유럽의 불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이 사업을 그 시초부터 충실하게 감독했던 ‘아돌프 웨버’ 형제는 보다 더 교육을 받은 ‘랑쯔’와 ‘아렉상드로 프리따’를 위하여 물러났다. 그러나 ‘웨버’ 형제는 훌륭한 정신을 유지했으며, 불어를 사용하는 지역에 있는 회중들과 격리된 형제들에 대한 연례 순례 방문을 계속하였다. 1912년 12월, 그는 ‘프랑스’ 전국을 여행하는 긴 여행을 시작하여 42개의 도시와 마을을 방문하였다.

협회장으로부터 온 편지

불어판 「파수대」 1913년 3월호에는 불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에게 보낸 ‘러셀’ 형제의 편지가 실렸다. 그가 한 말 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있었다.

“‘프랑스’와 ‘스위스’, ‘벨기에’ 그리고 ‘이탈리아’에 있는 형제들이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음을 최근에 알고 기뻤읍니다. 나는 이 점에 대해 매우 행복합니다. ·⁠·⁠· 전도지를 실제로 읽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무료로, 그리고 지혜롭게 나눠주는 자진적인 배부자들의 사업의 유익에 관하여 몇 마디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제네바’ 사무실로부터 받게 될 지시에 따라 이 사업은 특히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 수행되어야만 합니다. ·⁠·⁠· 금년 ‘프랑스’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그에 따라 이 추수 사업에 참여하는 자진 봉사자들 모두에게 커다란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프랑스’에서는 다른 곳에서 만큼 ‘콜포처’ 봉사가 잘 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유감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제1차 세계 대전 바로 전해인 그 해에 ‘프랑스’에서는 몇개의 대회가 열렸다. 3월에 이틀간의 대회가 북부 ‘랭스’에서 열렸으며, 여름에는 또 이틀간의 대회가 같은 지역인 ‘디낭’에서 있었는데, 260명이 참석하였다.

‘러셀’과 ‘러더포오드’의 ‘파리’ 방문

1913년 8월 31일, ‘러셀’ 형제는 다시 ‘파리’를 들러 ‘쎙-라자르’ 역 부근인 ‘아뗑므’ 가(街)의 농업 박람회장에서 모임을 가졌다. ‘벨기에’, ‘스위스’ 및 독일에서 온 몇명을 포함하여 약 70명의 형제들이 참석하였다.

수주 후인 1913년 9월 19일에 ‘죠셉 F. 러더포오드’도 ‘파리’에서 공개 강연을 하였다. 그 이튿날에는 ‘프랑스’ 북부 ‘디낭’ 대극장에서 공개 강연을 하였는데, 청중은 1,000여명이나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보고

1913년에 ‘프랑스’와 ‘스위스’의 불어를 사용하는 지방에서 성취한 사업에 관하여 ‘러셀’ 형제에게 보고할 때, ‘에밀 랑쯔’ 형제는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우리는 ‘프로테스탄트’ 후예들인 ‘위그노’ 교도들과 기타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의 성원들이 자리잡고 있는 지방에 각별히 우리의 노력을 집중시키기로 결정하였읍니다. 우리는 이러한 지역에서 공개 집회를 조직하고 있으며, 관심을 나타낸 사람들의 주소를 모으고 있읍니다. ·⁠·⁠· 「뚤드 갈드」[불어판 「파수대」] 예약자는 800명입니다. ·⁠·⁠· 순례자 형제들은 회중이 있는 곳들인 ‘스위스’의 불어를 사용하는 지방, ‘프랑스’ 북부 및 ‘벨기에’밖에 봉사하고 있지 못합니다.”

이와같이 세기가 바뀔 때부터 1913년에 이르는 기간에는 인구의 단지 1.5‘퍼센트’밖에 안되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교인들에게 역점을 두는 것으로 끝났는데, 그것도 그 교인들 모두에게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 하면 ‘프랑스’ 북부에다 중점을 두었었기 때문이다.

1914년에는 또한 ‘알사스’에서의 사업 확장이 두드러졌었다. 2월 20일 ‘뮐루세’로부터 온 형제들은 ‘스트라스부르’에서 첫 공개 집회를 조직하여 열었다. ‘에밀 랑쯔’ 형제는 커다란 청중 앞에서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강연을 하였다. 참석자들 중 350명이 자기들 이름과 주소를 남겨놓았다. 독일에서 온 한 ‘콜포처’ 형제가 이 관심자들을 재방문하였으며, 그리하여 ‘스트라스부르’에 성경 연구생들의 조그마한 집단이 하나 형성되었다. 7월에는 7명의 새로운 형제들이 침례를 받았다.

‘프랑스’에서의 어려운 시기

불어판 「파수대」 1914년 8월호에는 8월 15, 16일에 ‘디낭’에서 전국 대회가 있을 것이라고 광고하였다. 그러나 1914년 8월 3일 독일이 ‘프랑스’에게 선전 포고를 하는 바람에 이 대회는 취소될 수 밖에 없었다. 8월 초에 독일은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침공하였다. 일부 형제들은 ‘파리’ 지방으로 피난하여, 이미 그곳에 있던 작은 회중과 연합하였다. 다른 형제들은 전선의 저쪽에 머물러 있으면서 계속 전파하였다. 비록 그 지역이 독일군에게 점령당해 있었지만 ‘디낭’과 그 주변에 있는 형제들은 매주 일요일 집회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벨기에’의 ‘사를레르와’에 있는 형제들로부터 손으로 베낀 「파수대」지들을 받았다.

더 남쪽에서는, ‘디낭’을 떠나 이제 ‘파리’ 지방에 살고 있는 ‘데오필 레킴’ 형제가 형제들을 위하여 「파수대」 기사를 번역하여 복사하였다. 이렇게 해서 독일군 전선 이쪽에서나 저쪽에서나 형제들은 영적 양식을 공급받았다. 그러나 ‘에밀 랑쯔’를 비롯하여 일부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실망감이 자라나고 있었다. ‘랑쯔’는 데살로니가 전 4:17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1914년이 저물어가는 데도 그리스도인들이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불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에서 사업은 확실히 어려운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1915년 봉사 년도에 ‘러셀’ 형제에게 보낸 보고에서 ‘랑쯔’는 ‘제네바’ 지부의 활동을 정당화하는 긴 글을 써보냈다. 그러나 그는 ‘제네바’ 지부가 필요하게 된 정도로까지 사업이 자라나게 하였던 과거의 노력에 관하여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러셀’ 형제는 ‘랑쯔’가 일을 처리하고 있는 방법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916년에 진상을 조사하도록 독일계 미국인인 ‘콘라드 빈켈’을 ‘브루클린’에서 ‘스위스’로 보냈다. ‘랑쯔’는 이에 분개하여 반역적인 태도를 나타냈으며, 결국 협회를 배반하였다. 그리하여 ‘빈켈’ 형제가 ‘쮜리히’의 ‘스위스’ 중앙 사무실의 책임을 맡게 되었고, ‘아렉상드로 프리따’가 ‘제네바’의 “‘프랑스’ 지부”를 감독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위기는 끝났다.

큰 위기

협회 출판물을 불어로 번역했던 ‘프리따’ 형제는 「파수대」지에 자신의 생각을 삽입함으로써 자기 마음대로 변경하기 시작했다. ‘웨버’ 형제는 이러한 변화를 알아차리고 ‘브루클린’에 통지하였다. 아주 최근에 ‘프리따’를 ‘제네바’ 사무실 책임자로 임명했던 ‘러셀’ 형제는 ‘웨버’에게 “만약 그 ‘프리따’가 악한 종이라면 드러날 것입니다”라고 편지하였다.

1916년 10월 31일에 ‘러셀’ 형제는 사망했으며, 이 일은 형제들에게 의심과 시험을 한층 더 야기시켰다. 왜냐 하면 그들은 누가 그의 후임이 될 것인가에 관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1917년 1월에 ‘러더포오드’ 형제가 협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후에 ‘러더포오드’는 ‘프리따’에게 보낸 편지를 통하여 ‘프랑스’ 형제들에게 ‘베뢰아’ 질문에 따라 제정된 ‘프로그램’을 따르라고 격려하였다. 이 ‘베뢰아’ 질문은 「파수대」 집단 연구를 위하여 제공된 질문에 적용된 말이었다. 1917년에 이러한 ‘베뢰아’ 연구는 불어를 사용하는 회중 가운데서 소홀히 여기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로 인해 ‘러더포오드’ 형제의 편지가 그 점을 언급한 것이었다.

그러나 ‘러더포오드’ 형제가 ‘베뢰아’ 질문의 사용을 주장한 또 한가지 이유는 형제들이 협회에서 발행한 대로 진리에 고착하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아마 ‘러더포오드’ 형제는 ‘프리따’가 「파수대」를 번역할 때 자기 자신의 생각을 삽입한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프리따’가 1917년 10월 6-8일에 ‘제네바’에서 불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을 위한 대회를 조직했을 때 ‘러더포오드’ 형제는 편지를 보내어 그 대회에서 낭독하도록 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그 일부는 이러하다.

“나는 이번 기회에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여러분에게 인사를 드리며 여러분의 영육간의 복지에 대한 나의 깊은 관심을 확증하고자 합니다. ·⁠·⁠· 허락되고 있는 불같은 시험은 과연 누가 참으로 승인받고 있는 사람인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를 나타내줄 것입니다. ·⁠·⁠· 마음이 교만하고 야심을 품은 모든 사람들은 큰 위험에 처해 있읍니다. 왜냐 하면 그들이 이러한 경향을 강력하게 저항하지 않는다면 타락한 천사들은 그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그들을 정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마음에 깊히 뿌리 박혀 있는 악독은 무엇이든 악마가 들어 올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줍니다. ·⁠·⁠· 오류가 아닌 진리의 사자요 또한 종들이 되도록 하십니다. ·⁠·⁠· 헛된 토론을 피하고 온갖 중상과 험담을 멀리 합시다. ·⁠·⁠· 하나님께서는 충실함과 충성스러움을 사랑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해야 하며 주께 충성해야 하고, 그분의 목적 그리고 그분께서 왕국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조직하신 방법에 충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그의 동료들에게 따뜻하고 관대하였지만 또한 무뚝뚝하고 직선적인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는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하는 것처럼 보인 사람들을 의심하였다. 반면에, ‘프리따’는 인물의 부각을 중요시한 사람이었으며 자신에게 주의를 이끌어 찬미자들을 매혹시키기를 좋아했는데, 특히 자매들 사이에서 그렇게 하기를 좋아하였다. 따라서 ‘프리따’는 ‘러더포오드’로 하여금 화를 내게 만든 사람 중의 하나였다.

불어 「파수대」 1918년 12월호에 실린 ‘프랑스’ 사업에 대한 보고에서 ‘프리따’는 본부 사무실이 그에게 이제부터는 ‘제네바’ 사무실이 재정적으로 자급해야 된다고 통고한 데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기억해 두어야 할 점은 그 당시 ‘러더포오드’ 형제와 다른 일곱명의 ‘벧엘’ 본부 형제들이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부당하게 복역중이었다는 점이다. ‘프리따’는 아마 이렇게 추리하였을 것이다. ‘러셀’은 사망했다. 그의 동료 일꾼들은 형무소에 있다. 따라서 그들은 계시록 3:15-21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자기 입에서 토하여 내신 현대판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된 것이다. 나야말로 주님의 사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새 땅을 설립하시고 이제부터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도록 나를 택하신 것이다.

‘파리’ 회중이 ‘피츠버어그’에 통지하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1919년 1월 19일 ‘파리’ 회중은, 편지 한통은 ‘제네바’ 사무실에, 그리고 사본은 협회 본부에 보냈는데, 그 당시 본부는 임시로 ‘펜실바니아’ 주 ‘피츠버어그’로 옮겨져 있었다. 이 편지는, 서적과 소책자 그리고 불어 잡지 번역판의 “오역”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 편지는 그 가운데에는 “오역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형제들이 몇몇 출판물들은 전하거나 배부하기를 주저”한다고 말하였다. 그 편지는 “‘제네바’ 사무실의 책임을 맡고 있는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이 사용한 방법”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이 편지는 ‘파리’ 회중 장로 위원회를 대표하여 서기인 ‘H. 루스’ 형제가 서명하였다.

같은 달인 1919년 1월에 ‘파리’ 회중은 ‘제네바’ 사무실을 대신할 소위 “중앙 집권 위원회”를 형성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제네바’ 사무실이 베푸는 인도가 더 이상 주의 인도를 대표한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프리따’가 주도권 장악을 준비하다

1919년 4월호부터 ‘프리따’는 불어판 「파수대」지 매호 2면에 자기 이름을 더 이상 ‘제네바’ 사무실의 “책임자”로서가 아니라 「파수대」의 “편집자”로서 실었다. 공인 불어판 「파수대」가 갈수록 영문판을 올바로 대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위스’에 있는 일부 형제들이 나서서 영어 「파수대」를 보다 더 정확히 번역하여 발행하였다. 그리하여 한동안은 형제들 사이에 두가지 불어판 「파수대」가 나돌았던 것이다.

1919년 8월, ‘프리따’는 협회의 재고 서적 일부와 그 밖의 재산을 자기 주소로 이전하였다. 이 사실을 안 ‘파리’ 회중은 1월에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피츠버어그’에 알렸으며, 그러는 동안 1919년 3월 25일에는, ‘러더포오드’ 형제가 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물론 ‘프리따’는 협회가 분명히 머지않아 자기에 대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음에 틀림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 재산을 먹어 치우기 시작하였다.

급기야는 불어판 「파수대」 1919년 9월호에서 ‘프리따’는 하나님의 진리가 이제는 ‘제네바’에 있는 자기를 통하여 나오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썼다.

악한 종이 해임되다

바로 다음 호 「파수대」에는 모든 ‘프랑스’ 독자들에게 보낸 ‘러더포오드’ 형제로부터의 편지가 실렸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들.

“·⁠·⁠· 주의 대표자로서 활동한 ‘러셀’ 형제는 여러 해 전에 ‘스위스 제네바’에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 지부 사무실을 설립했으며 ‘A. 프리따’ 형제를 그 지방 대표로 임명했었읍니다. ‘프리따’ 형제의 신분은 협회와 주의 단순한 종의 신분에 불과했읍니다. ·⁠·⁠· 그는 어떤 잡지나 전도지를 발행하거나 ‘러셀’ 형제나 그의 지도 아래 쓴 것과는 동 떨어진 어떤 출판물을 배부할 권한을 결코 받지 않았읍니다. ·⁠·⁠· 그의 경우는 매우 심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왜냐 하면 이제 그는 주께서 그분의 특별한 사자로서 자기를 임명하여 교회의 사업을 완수하도록 위탁하였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불충실한 행동 때문에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 본부는 그를 해임했읍니다. 그리고 ‘프랑스’어 지부와 관련된 제반사를 그에게서 해임했으며, ‘C. C 빈켈’ 형제가 그를 대신하도록 했읍니다. ‘빈켈’ 형제는 나의 승인을 받아 자기의 감독하에 ‘프랑스’ 사업을 맡을 한 ‘프랑스’ 형제를 선출할 권한을 받았읍니다.”

‘프리따’가 재판을 받다

‘프리따’가 법적으로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 대표자로서 해임은 되었지만 문제가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사무실 직원들이 그를 편들었으며, 그는 ‘제네바’의 ‘뚜르-메뜨레스’ 가 7번지에 있는 협회의 토지 반환을 거절하였다. 그는 또한 협회의 「파수대」 예약철과 재고 서적 그리고 ‘창조-사진극’을 상영하는 데 사용되는 아주 값비싼 장비를 내놓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더 왙취 타워」라는 잡지를 계속 발행하였다. ‘프리따’가 협회 재산을 포기하도록 설득키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허사였다. 결국 이 사건은 재판에 붙여져, ‘프리따’는 협회로부터 도둑질한 재산을 반환해야만 했다. ‘제네바’에 소재하고 있는 협회 사무실은 공식적으로 폐쇄되었으며 그 사무실 운영은 ‘스위스’ ‘베른’으로 옮겨졌다.

자연히 이 모든 일은 ‘프랑스’, ‘벨기에’ 그리고 ‘스위스’의 불어를 사용하는 지방에 있는 형제들에게 큰 시험이 되었다. 주로 ‘스위스’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프리따’를 따랐으며, 그는 자신을 “주님의 사자”라고 하는 하나의 종파를 세웠다. ‘프리따’는 후에 그의 추종자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받아 ‘제네바’ 외곽에 한 커다란 시골 집을 사서 거기서 그의 종파를 이끌어 나갔다. 이것은 “인간의 벗”이란 이름하에 아직도 ‘프랑스’에 존재한다.

평화가 회복되고 훌륭한 발전이 뒤따르다

불어를 사용하는 밭에서의 사업은 새 출발을 하였다. ‘프리따’ 사건이 처리되고 나서 ‘프랑스’ 형제들은 1919년 9월 28일 ‘파리’에서 한 조그마한 대회를 열었다. 그 대회에서는 연합과 평화의 훌륭한 영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형제들은 협회장이 임명한 형제들과 화합하여 일할 것을 결의하였다. “중앙 집권 위원회”는 해체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가 사업을 재조직할 때까지 ‘제네바’ 사무실의 처사에 대한 ‘방어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하나의 불어판 「파수대」만 있게 되었다. ‘아돌프 웨버’ 형제는 번역 위원으로 되돌아왔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불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가 불어판 「파수대」 1919년 11월호에 실렸다. 그는 ‘프리따’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이제 ‘베른’에 있는 ‘엘느 조그’ 형제에게 불어 사업이 맡겨 졌음을 설명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제 주께서 불어를 사용하는 벗들 가운데 연합과 조화가 가득하게 해주심이 온당하다고 여기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 환경이 좀 더 좋았더라면 내가 여러분을 기쁘게 방문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개개인과 국가들이 큰 고난을 겪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렇게 하기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의 뜻으로 내년에 길이 열린다면 여러분을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프랑스’에서의 사업을 관리하기 위한 ‘러더포오드’ 형제의 조직 개편은 다음과 같았다. ‘쮜리히’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콘라드 빈켈’이 총책임자였다. 그리고 ‘베른’의 자기 집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엘느 조그’가 소위 “‘프랑스’ 사업”의 책임자로서 ‘빈켈’ 형제의 감독하에 있었다. ‘조그’ 형제는 두명의 지방 “보조자와 고문”을 두었는데, 즉 파리의 ‘죠셉 르흐브르’와 ‘르 아브르’의 ‘에밀 데라노’이다. ‘르흐브르’는 불어 출판물 발행을 보조하였고, ‘데라노’는 그를 도와 ‘프랑스’ 회중들의 필요를 돌보게 되었다. ‘앙리 루스’ 형제는 ‘파리린’ 가 11번지에 위치한 자기 집의 서적 보관소를 책임지게 되었다.

1919년 8월 27일에 ‘프랑스’ 만국 성경 연구회가 형성되었으며 ‘파리린’ 가 11번지에 그 본부를 두었다. 물론 ‘프랑스’의 사업은 아직도 ‘스위스’ 지부의 감독하에 있었지만 이 지방 협회는 ‘프랑스’ 조직에 확고한 법적 발판을 제공하였다.

1920년 초 ‘조그’ 형제는 ‘프랑스’(‘알사스-로렌’을 포함한)와 ‘벨기에’에 있는 형제들을 방문하는 긴 여행을 하였다. 그는 ‘베른’에 돌아와서 그곳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우리는 협회로부터의 지시와 추수 사업을 확장시키는 일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장비를 기꺼이 기다리고 있는 형제 자매들의 열심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읍니다. 나는 어디에서든지 이같은 지난 몇해 동안 있었던 무서운 시험이 ‘프랑스’와 ‘벨기에’ 그리고 ‘알사스’에 있는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들 가운데 열매를 산출해 왔다는 굳은 인상을 받았읍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존하신 주께서 자신의 소유를 그처럼 준비시켜 오신 것은 그들이 불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아직도 수행되어야 할 사업을 그분의 도구로 완수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위한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읍니다.”

형제들의 가르치는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자”(V. D. M.이라 불리움)라는 설문이 사용되었을 때 증가하였다. 이것들은 4면에 이르는 필기 복습으로 성서 제목들에 대한 22개의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프랑스’ 형제들은 이 설문 용지를 ‘베른’ 사무실로 보내어 채점하게 하였다. 최소한 85‘퍼센트’의 질문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숙한 봉사자로 간주되었다.

그 해 1920년에도 ‘프랑스’에서 형제들이 지방 순례자로 임명되었다. 첫 번째는 ‘루베’에서 온 ‘알프레드 듀리우’인데, 그는 이미 ‘콜포처’ 봉사를 활동적으로 하고 있었다. 8월에는 ‘파리’에서 온 ‘죠셉 르흐브르’ 형제도 순례자로 봉사하기 시작하여, ‘프랑스’ 중부 지방에 격리된 형제들을 방문하였다. 그 지역은 ‘랑쯔’와 ‘프리따’가 ‘프랑스’ 사업을 감독하던 동안 너무나 오랫 동안 돌보아오지 못했었다. 그 다음에는 1920년 12월에 ‘에밀 데라노’ 형제가 ‘프랑스’의 순례자로, 그리고 ‘웨르네 지제’ 형제가 ‘알사스-로렌’과 ‘자아르’의 순례자로 임명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독일은 ‘알사스-로렌’을 ‘프랑스’에게 반환하였다. ‘자아르’ 석탄광 역시 전쟁 배상으로 ‘프랑스’에 넘겨졌지만, ‘자아르’ 자체는 15년간 국제 연맹의 관할하에 있게 되었다. 어찌됐든 이들 두 지역은 다시 한번 ‘베른’의 협회 사무실의 관리하에 있게 되었다.

‘러더포오드’의 방문—새로운 조직

1920년 9월 ‘러더포오드’ 형제는 그가 바라던 대로 ‘파리’를 방문하였다. 9월 19일에 그는 약 120명의 형제들을 만났는데, 그 중 40명 가량은 ‘벨기에’와 ‘알사스’로부터 왔다. ‘알프레드 듀리우’ 형제가 통역을 맡았다. 저녁에 ‘러더포오드’ 형제는 ‘소시에떼 사방뜨 호올’에서 약 1,000명의 청중에게 공개 강연을 했는데, 그 중 300여명이 방문해 달라고 자기들의 주소와 이름을 남겨 놓았다.

1920년 말엽 “중앙 ‘유럽’ 사무실” 창설 발표가 있었다. ‘쮜리히’에 소재한 이 사무실(이전에는 “‘스위스’ 소재 독일 지부”라고 불리웠음)의 감독하에 있게 된 나라들은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 ‘네델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였다. ‘빈켈’ 형제가 사무실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조그’ 형제는 ‘베른’ 사무실과 더불어 “‘프랑스’ 사업”의 책임자로 확정되었다.

‘사진-극’이 훌륭한 결과를 산출하다

‘창조 사진-극’은 1920년에 ‘프랑스’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북부 도시 ‘디낭’에서는 900명에게 상영되었다. ‘알사스-로렌’과 ‘자아르’에서는 이보다 더 훌륭한 성과를 보았다. 불어판 「파수대」 1921년 4월호는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사진-극’은 ‘알사스-로렌’과 ‘자아르’ ‘바쟁’의 여러 곳에서 완전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자아르브뤼켄’, ‘볼끄렝제’ 그리고 ‘스트라스부르’에서는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 ·⁠·⁠· [‘자아르브뤼켄’에 있는] 강당 좌석은 3,000석이나 되는데도 매일 저녁 많은 관심가진 사람들이 돌아가야 했다. ·⁠·⁠· ‘볼끄렝제’에서는 오후 8시에 상영이 시작하게 되어 있었지만 오후 6시 30분에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상점 주인들은 ‘사진-극’에 가려고 문을 특별히 더 일찍 닫았다. ‘스트라스부르’에서는 제4회 상영시 2,000명의 청중이 하나님의 왕국의 놀라운 설립이 그들에게 설명되는 동안 저녁 11시 30분까지 보통 이상의 관심과 깊은 주의를 기울여 시청했다. 우리는 친절하신 우리의 천적 아버지께서 이 씨가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주실 것을 기도한다.”

여호와께서 이 지역에서 그분의 이름과 왕국을 알리기 위한 이같은 노력을 축복하셨음에 틀림없다. 불어판 「파수대」 1921년 8월호에 실린 ‘스위스’ 순례자 ‘웨르네 지제’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스트라스부르’에서의 집회 참석은 계속 매우 좋아지고 있다. 일요일인데도 제7권 ‘베뢰아’ 연구에 100명이 참석했는데, 이전에는 불과 50명이 참석했었다. ‘브류마뜨’에서는 30명의 관심자들로 이루어진 한 집단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집회에 결코 빠지지 않으며 지식면에서 눈에 띄게 자라가고 있었다. ·⁠·⁠·. 여기 ‘스트라스부르’에서는 10명의 형제 자매들이 ‘콜포처’ 봉사에 자진하였다. ‘자아르브뤼켄’에 돌아와보니 이제 그곳에는 정기적으로 함께 모이는 관심자들이 150명이나 되는 집단이 있었다. ·⁠·⁠· 그 지역[‘자아르’]에서는 몇몇의 벗들이 침례받고 싶어한다”

‘알사스’와 ‘자아르’에서 나타난 이처럼 대단한 관심을 소수밖에 안되는 그 지방 형제들과 ‘스위스’에서 온 형제들이 재방문하였다. ‘베른’ 사무실은 ‘프레드 젤망’에게 ‘알사스-로렌’과 ‘자아르’의 사업에 대한 책임을 맡겼다. 거기서 그는 1926년에 다른 곳으로 전임될 때까지 충실히 봉사하였다. 그는 이 사업에서 ‘스트라스부르’ 회중의 감독자였던 ‘엉리 제이제’의 열성적인 후원을 받았다. 이처럼 1921년에 이르러 ‘알사스-로렌’과 ‘자아르’에서 사업이 잘 조직되기 시작했다.

시험에도 불구하고 사업이 전진하다

사업은 ‘프랑스’의 나머지 지방에서도 전진하고 있었다. 1921년초 침례식이 ‘프랑스’ 북부 ‘디낭’과 ‘브류이-앙-아르뜨아’ 그리고 ‘파리’에서도 있었다. 그 해 기념식 보고를 보면 ‘디낭’에서 81명, ‘파리’에서 68명이 참석한 것을 포함하여 ‘프랑스’의 16개의 도시에서 총 참석수는 422명이었다.

‘콜포처’들의 필요가 불어판 「파수대」 1921년 10월호에 발표되었다. 전파 사업은 주로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서적 배부를 통해서 수행되고 있었다. 협회는 형제들이 이 서적을 그들의 친척과 벗들에게 제공하는 데 사용하라는 특별 편지를 발행하였다.

1921년중 ‘프랑스’ 내의 순례자 사업 역시 강화되었다. ‘데라노’ 형제와 ‘듀리우’ 형제는 ‘르와르’ 강 남북 양쪽의 회중들과 격리된 집단들을 방문했으며, ‘아돌프 웨버’ 형제는 ‘파리’와 ‘노르망디’ 그리고 ‘프랑스’ 동부와 북부에 있는 회중들을 방문하여 ‘알사스’에서 그의 여행을 끝냈다.

1919년에 ‘아렉상드로 프리따’가 진리를 떠난 이후 ‘데라노’ 형제와 ‘르흐브르’ 그리고 ‘루스’ 형제가 ‘프랑스’에서 ‘조그’ 형제의 보조자로서 임명되었던 일이 기억날 것이다. 여러분도 기억하겠지만 ‘루스’는 1919년 1월에 ‘파리’ 회중의 서기로서 자기 서명을 한 편지를 ‘제네바’와 ‘피츠버어그’에 보내어 ‘프리따’의 불충성에 항의하고 협회에 대한 충성을 표명한 형제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르흐브르’와 ‘루스’ 형제는 둘다 불만을 품게 되었고 결국 악한 종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 밭에서의 이 두번째 시험기는 사실 그전 1917년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반역의 여파였다. 그 해에 ‘P. S. L. 존슨’과 네 명의 협회 이사회 임원들이 새로 선출된 회장인 ‘러더포오드’ 형제로부터 감독권을 뺐으려고 시도했었다. 자기들의 계획이 좌절되자 그들은 미국, ‘캐나다’ 그리고 ‘유럽’ 각처에 대대적인 연설 및 편지 쓰기 운동을 벌여 그들의 반대를 ‘벧엘’ 밖으로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1920년에 ‘존슨’은 ‘쉐-르-브르’와 같은 ‘프랑스’ 북부의 가장 오래된 회중들을 방문하였다. 그의 목적은 분열을 일으켜서 형제들을 여호와의 조직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결국 성공하였다. 1922년 9월 ‘파리’의 ‘루스’와 ‘르흐브르’를 비롯하여 일단의 ‘프랑스’ 형제들은 “불가피한 재정비”라는 16면에 달하는 선언문을 인쇄하여 ‘러더포오드’ 형제를 비난하였다. 그들은 그것을 불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에게 널리 배부하여 혼란과 분열을 가중시켰다.

1922년, ‘디낭’에서 총회가 열렸으며, 순례자 ‘아돌프 웨버’ 형제가 사태를 수습하도록 ‘스위스’로부터 파견되었다. ‘라쉘 뵈젱’ 자매와 ‘사무엘 농게알드’ 형제는 당시 일어난 일을 이렇게 묘사한다.

“불만을 품은 자들에 의하면 ‘러셀’ 형제는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었으며, 따라서 1916년 그의 사망 이후로 사업은 그가 남겨둔 그대로 두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빛은 나타나게 되어 있지 않았다. ·⁠·⁠· 이들 불만을 품은 자들에게 호별 방문 전파 사업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아마겟돈’때 개입하실 것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성서의 도움으로 ‘웨버’ 형제는 조직이 옳다는 것을 그들에게 입증해 주었다. ·⁠·⁠· 표결이 있었는데 매우 백중세였다. 즉 협회의 견해에 39명이 반대했으며, 42명이 찬성하였다. 39명의 ‘반역자’들은 자기들 의지를 가지고 떠나서 ‘‘디낭’ 성경 연구생 연합회’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1922년에 일부가 진리를 버리고 악한 종이 되었지만, 대다수의 형제들은 충실하게 남아 있었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그 해 6월 ‘파리’를 방문하여 형제들을 강화하였다.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서적을 가지고 하는 호별 방문 봉사가 1922년에 시작되었다. 또한 「파수대」 연구가 회중에서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순례자 사업이 1922년중 크게 강화되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형제들이 겪었던 심각한 시험에도 불구하고 충실하게 남아있던 사람들은 중대한 왕국 선포에 주요한 몫을 담당할 수 있었다.

‘알사스-로렌’에서의 증거 사업

「황금시대」(독일어판) 잡지 배부가 증가함에 따라 ‘왙취 타워 협회’는 ‘스트라스부르’ 시에 ‘알사스-로렌’ 지방을 위해 사무실 겸 서적 보관소를 설치하여 ‘엉리 제이제’ 형제에게 책임을 맡겼다. 「황금시대」지는 ‘베른’에서 포장하지 않은 채로 보내져, 이곳 ‘스트라스부르’ 사무실에서 포장하여 예약자들에게 보냈다. 자매들은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여러 음식점들을 방문하여 식탁에서 식탁으로 다니며 식사중인 사람들에게 잡지를 제공하곤 하였다. 종종 그들은 하루 저녁에 90부나 전하였다. ‘리디아 제이제’ 자매가 특히 이 봉사에 성공적이었는데 때때로 그는 한 달에 2,000부를 전하였다.

1923년 ‘베른’ 사무실은 ‘알사스-로렌’과 ‘자아르’에서 ‘사진-극’을 상영토록 ‘프렌츠 쮜리허’ 형제를 보냈다. 이 ‘스위스’ 형제는 그가 ‘베른 벧엘’로 초대받은 때인 1925년까지 ‘프랑스’와 ‘자아르’에서 ‘사진-극’업을 계속 담당하였다. 1923년 ‘알사스’의 ‘뮐루세’에는 약 50명이 연합하고 있는 회중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그 해 ‘뮐루세’에서의 기념식에는 110명이 참석했으며, ‘스트라스부르’에서도 똑같은 수가 참석하였다.

강화된 조직

조직적으로 ‘프랑스’ 사업은 1923년에 좋은 출발을 하였다. 각 회중에는 협회가 임명한 “봉사 지휘자”가 한 사람씩 있었다. 그는 두명의 보조자를 두었는데, 한명은 보고를 돌보고 다른 한명은 서적 공급을 돌보았다. 이들 세명의 형제들이 “봉사 위원회”를 형성하였다. 이것이 ‘프랑스’ 밭에서 중앙 집중적 신권 감독의 시작이 되었다. 1923년 전체에 걸쳐 협회는 봉사 지휘자들을 통하여 증거하는 날들을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 형제들은 1923년 8월 26일 ‘브루클린’ 사무실이 조직한 “세계적 증거”에 참여하였다.

불어를 사용하는 밭에서의 사업 발전에 있어서 또 다른 이정표는 불어판 「하나님의 거문고」의 발행이었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가르치는 사업에 강력한 촉진제가 되었다. 또한 1923년 9월 2, 3일에는 불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을 위한 전국 대회가 ‘디낭’에서 열렸다. ‘스위스’로부터 ‘조그’ 형제와 ‘웨버’ 형제가 참석하였으며 그들은 ‘프랑스’ 순례자인 ‘에밀데라노’와 더불어 주요 연설들을 하였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그 전해에 미국 ‘시다포인트’에서 한 것과 똑같이 “왕과 왕국을 광고하라”는 커다란 표어가 청중 앞에 펼쳐져 있었다. 형제들은 열광하였으며 참석한 모두가 만장일치로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1923년의 “‘프랑스’ 사업”을 요약하면서 ‘러더포오드’ 형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사업 전체에 있어서 우리는 동료들의 열심의 실제적인 증가에 주목한다. 우리는 지금 왕국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웅대한 특권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한다. 보통 동료들은 5, 6명씩의 집단들을 이루어 ‘콜포처’ 봉사에 나가며, 보통 일요일 오전이면 250부 이상 전한다.”

1924년에는 「황금 시대」 잡지 첫 호가 불어로 발행되었다. 1925년에는 격월지가 되었다가, 1926년에는 ‘러더포오드’ 형제의 지시에 따라 발행을 중단하였다. 그러다가 1932년 10월에 다시 나타나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월간지가 되었다.

1924년 5월, ‘러더포오드’ 형제는 ‘프랑스’를 잠시 방문하여 ‘파리’와 북부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진리를 어느정도 깨닫고 있지만 아직도 ‘프랑스’에는 수행되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7월에는 불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을 위한 전국 대회가 ‘디낭’ 근처인 ‘아브류’에서 열렸는데, ‘조그’ 형제와 그 외 여러 ‘베른 벧엘’ 가족 성원들이 ‘프로그램’을 맡았다.

형제들의 희망

1924년 ‘프랑스’에서의 기념식 총 참석자는 ‘알사스-로렌’의 300명 가량을 포함하여 557명이었다. ‘스잔 뵈젱’ 자매는 많은 형제들의 희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은 자들은 1924년이 끝나기 전에 하늘로 갈 것을 기대했읍니다. ‘디낭’에서 우리를 방문하러 왔던 ‘데라노’ 형제는 큰 군중을 이룬 우리들을 위로해 주었읍니다. 그는 우리가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읍니다. 그렇지만, 1924년말이 되었을 때 나는 아직도 나의 부모들이 거기에 계신 것을 보고 안심했읍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다음 해에 닥쳐온 한층 더한 시험과 까부르는 일의 전조가 되었다.

1925년—위기의 해

1925년은 불어판 「파수대」 잡지가 12면에서 16면으로 증면된 것과 함께 매우 좋은 출발을 하였다. 또한 「교직자들을 고발함」이란 전도지가 ‘프랑스’에 배부되었는데, 많은 부수가 바로 교회 앞에서 배부되었다. 불어를 사용하는 밭 전역에서 이러한 전도지들이 200여만부나 배부되었다!

1925년 5월 ‘러더포오드’ 형제가 또 다시 ‘프랑스’를 방문하였다. 그는 ‘에펠’ 탑 맞은 편의 ‘센’ 강을 굽어보는 ‘트로 카데로’ 대궁전에서 “교직자들의 기만을 폭로함”이란 연설을 할 예정이었다. ‘프랑스’ 북부 형제들은 일주일 전에 미리 ‘파리’로 내려와서 그 지방 형제들이 그 연설을 광고하는 일을 도왔다. 그러나 커다란 광고 쪽지들이 곧 ‘가톨릭’ 교직자의 수중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들은 이러한 가두 광고를 중단시키도록 경찰에 압력을 가하였다. 그 결과 일부 형제들이 체포되었다.

2,000명 가량이 초대에 응하여 연설을 들으러 왔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연설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몽둥이로 무장한 50명 가량의 사제들과 ‘가톨릭’ 행동 대원들이 ‘마르세예에즈’(‘프랑스’ 국가)를 부르며 ‘홀’ 안으로 갑자기 들이 닥쳤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세번이나 연단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반대자들은 “그가 재판관이라면 가서 미국인들이나 재판하게 하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파수대」 1925년 8월 1일호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수 많은 청중들이 교직자들과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 그들은 서로 조롱하느라고 연사에게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연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 모임을 포기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같은 해 1925년에 조직 내에는 더 큰 난관들이 일어났다.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서적이 1921년 이래 ‘프랑스’ 밭에서 널리 사용되어 왔는데, 그 내용을 근거로 1925년에 많은 기대를 하였었다. 그러나 1925년이 되어, 기대했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지나가자 그 책을 읽었던 외부 사람들은 형제들을 조롱하였다. ‘쎙-르-노브르’에 있는 ‘쥘레 아나끄’ 형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우리는 우리의 적들이 쓴 기사들을 통해 조롱당하였는데, 그 중 하나는 그 당시 인기있었던 치료법을 들먹이면서 ‘만일 ‘핑크’ 알약을 복용한다면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제목을 내걸었다.”

설상 가상으로 일부 형제들 자신의 믿음이 흔들렸다. 일부 형제들은 그 해에 하늘에 갈 것을 기대하였다. 이것은 회중들에서 특히 ‘알사스’에서 까부르는 일을 야기시켰다. ‘안나 지멜망’ 자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성취되지 못한 기대가 큰 시험을 야기시켰읍니다.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였읍니다.”

이러한 시험이 있었다는 증거로서 1926년 5월 1-3일에 열렸던 ‘스위스’ ‘바젤’ 대회 중에 ‘러더포오드’ 형제에 의해 마련된 질의 모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회에 관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질문: 고대의 합당한 자들이 돌아 왔읍니까?

“답: 확실히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읍니다. 아무도 그들을 보지 못했읍니다.” 그리고 그러한 발표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될 것입니다. 「수백만」 책에서 1925년 직후에 그들이 돌아올 것을 이치적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단지 표현된 의견에 불과하였읍니다.

과오가 있었지만 ‘러더포오드’ 형제가 말한 것처럼 이것이 주를 섬기는 일을 중단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부는 중단하였다. 그리하여 그 기간은 ‘프랑스’ 밭에서 한층 더 까부르는 일로 특징을 이루었다. 불어판 「파수대」에 발표된 수자를 보면 ‘알사스’의 ‘뮐루세’ 회중의 기념식 참석자가 1925년에는 93명이었는데 비해, 1927년에는 기념식 참석자가 23명으로 떨어졌다.

‘프랑스’ 형제들에게 있었던 잇따른 시험

1925년 7월 중앙 ‘유럽’ 사무실 책임자 ‘빈켈’ 형제는 건강상의 이유로 ‘조그’ 형제로 교체되었다. 이듬 해에 ‘빈켈’은 협회를 등지고 “자유 성서 연구생”이란 독립된 자기 종파를 세웠다. 그후 ‘조그’ 형제는 1926년에 ‘러더포오드’ 형제가 ‘브루클린’에서 보낸 ‘마아틴 하벡’ 형제로 교체되었다. 그러자 ‘조그’ 형제는 전 시간 사업을 중단하고 결국 진리를 떠나고 말았다.

이처럼 2년 내에 ‘프랑스’ 사업 지휘자가 극적인 상황에서 두 번씩이나 해임되었다. 이 소식은 ‘프랑스’에 있는 형제들에게 이르렀으며, 이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불어를 사용하는 밭에서 형제들에게 있었던 전시의 시련들과 전후의 까부르는 일의 오랜 기간이 끝났다.

‘폴란드’인들 가운데서의 발전

여러 가지 정치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이유로 ‘프랑스’ 정부는 제1차 세계 대전후에 많은 ‘폴란드’인들이 ‘프랑스’의 석탄광에서 일하러 입국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내 ‘폴란드’어만을 들을 수 있는 광산촌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폴란드’인 빵 굽는 사람, 도살업자, 식료품 상인들 그리고 ‘가톨릭’ 사제들이 곧 광부들을 뒤따랐다. 1923년까지 ‘프랑스’ 북부에는 ‘폴란드’인들이 100,000명 가량 있었으며, 매일 더욱 많은 ‘폴란드’인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프랑스’ 북부에 있는 ‘프랑스’ 회중들이 이들 ‘폴란드’인 광부들과 그 가족들에게 전파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3년에는 최초의 ‘폴란드’어 회중이 형성되었으며, 이듬 해에 ‘러더포오드’ 형제는 ‘브루클린’으로부터 ‘폴란드’어를 할줄 아는 미국인 순례자들을 보내어 ‘폴란드’인들에게 ‘사진-극’을 보여주게 하였다. 이러한 순례자 방문은 형제들을 크게 고무시켰으며, 본부 조직과의 유대를 강화시켜 주었다.

‘폴란드’인들 가운데서 왕국 사업의 성장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1926년 ‘프랑스’에서 기념식에 참석한 1,138명 중 518명이 ‘폴란드’인이었다. 그리고 그해 ‘프랑스’의 34개 회중 가운데 ‘알사스-로렌’에 있는 12개는 독일어 회중이었고 12개는 ‘폴란드’어, 그리고 10개가 불어 회중이었다. 이들 ‘폴란드’어 회중들은 ‘브루클린’에서 보낸 ‘크레트’, ‘루드윅 쿠즈마’ 그리고 ‘리콤벨’ 형제와 같은 ‘폴란드’어를 할줄 아는 미국인 순례자 형제들의 방문을 받았다. 1926년 ‘쎙-르-노브르’에서 전국 대회가 열렸는데, 불어 모임에는 300명 가량이 참석한 데 비해 ‘폴란드’어 모임에는 1,000명이나 참석하였다! 1928년부터 1936년까지 ‘폴란드’어 회중들에서 순례자로서 봉사한 ‘알버트 코스말스키’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브류이-앙-아르뜨아’를 방문했을 때[1924년] 그는 ‘폴란드’인들에게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프랑스’에서 진리를 배울 수 있도록 그들의 나라로부터 불러내셨으며, 그들과 그들 자녀들은 ‘프랑스’인들도 진리를 알게 되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읍니다. 그는 부언하기를 웅대한 전파 사업은 여전히 수행되어야 하며 여호와께서는 그 사업을 위해 선포자들을 일으키실 것이라고 하였읍니다.”

‘러더포오드’ 형제의 이러한 말은 들어 맞았다. 1929년 「연감」은 이렇게 보고한다.

“‘폴란드’인들은 열정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이웃에서 일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많은 반(班)들이 격지에 가라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책임을 받아들였다. ‘프랑스’ 내에 있는 자기 나라 사람들을 찾아서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로 100‘킬로미터’나 여행하여 광산 지역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폴란드’인들을 찾아내어 그들에게 왕국 소식을 전해준다. 일부 ‘폴란드’ 형제들은 ‘프랑스’인들에게까지도 증거하기 시작하여, 불어판 「자유」 소책자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폴란드’ 형제들은 주의 사업에 있어서의 통일성과 주의 방법과 조직에 따라 사업을 수행해야 될 필요성을 깨닫고 있다. 작년에 332명의 ‘폴란드’ 형제들이 침례로서 그들의 헌신을 상징하였다.”

충실한 사람들이 박차를 가하다

시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북부의 형제들은 전파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1927년에 ‘프랑스’에서 서적과 소책자를 가지고 일요일 호별 방문 증거를 시작하였다. ‘웨버’ 형제는 회중들과 격리된 집단들을 계속 방문하였다. 새로운 자들이 더해져가고 있었다. ‘리용’이라는 대도시에 사는 한 가족이 독일의 한 친척으로부터 진리를 들었다. 이 ‘록케’가(家)의 세 딸은 결국 모두 진리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들의 이름이 결혼으로 인해 ‘프뉴이’, ‘보아또’ 그리고 ‘브랑꼬’로 바뀌게 되었다. 이 가족들이 후일 ‘리용’ 회중의 핵심이 되었다. 1927년에 ‘프랑스’의 사업을 위한 사무실은 ‘스트라스부르’에 단 하나 있었으며 ‘스위스’ 소재 ‘베른’ 사무실의 지휘하에 있었다.

이 무렵, ‘프랑스’에 사는 ‘이탈리아’인들이 왕국 소식을 접하기 시작하였다. 1929년 「연감」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사진-극은 ‘이탈리아’인들에게도 상영되었다. ·⁠·⁠· ‘무솔리니’는 선한 ‘이탈리아’인들을 그의 지배로부터 몰아냈지만, 그러나 보라, 주께서는 ‘프랑스’에서 그들에게 진리를 주신다!” 1928년 ‘프랑스’에는 7명의 ‘콜포처’(그 때는 ‘파이오니아’를 이렇게 불렀음)를 포함하여 447명의 전도인 신기록이 있었으며, 45개의 회중이 있었다.

‘파리’에 사무실이 개설되다

1929년 ‘스트라스부르’에 있던 사무실이, 협회가 ‘파리’ 18구 ‘뽀아쏘니에’ 가 105번지에 임대한 대지로 이전되었다. ‘알사스’ 형제인 ‘규스따브조페’가 이 새로운 ‘파리’ 사무실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물론 사무실은 여전히 ‘하벡’ 형제가 총책임자로 있는 ‘베른’ 소재 ‘스위스’ 지부의 관할하에 있었다.

1929년에 ‘파리’와 주위 근교에는 약 40명 가량의 전도인이 있었다. 그해 가을에 ‘프랑스’ 북부의 ‘랭스’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약 1,200명이나 참석하였다! 그리고 약 600명이 야외 봉사에 참여하여 5,000부 이상의 서적과 소책자를 전하였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폴란드’ 형제들이었다.

외국인 ‘콜포처’들

1929년에 두명의 영국인 ‘콜포처’(지금은 ‘파이오니아’라 부름)가 영국 해협을 건너와 ‘뒨키르크’ 지방에서 일했으며, 곧이어 더 많은 ‘콜포처’들이 뒤따라 왔다. ‘베른’ 사무실의 책임자인 ‘하벡’ 형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우리는 주께서 ‘프랑스’로 ‘콜포처’들을 보내주실 것을 기도하였는데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었다. 대부분의 ‘콜포처’들은 영국과 그 외의 나라들로부터 왔다.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증거] ‘카아드’를 사용하고 있으며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있다. 1930년에 ‘프랑스’에서 반들은 1928년에 비해 8배나 많은 간행물들을 전하였다.”

1930년에 ‘콜포처’ 수는 27명으로 뛰었다. 이들 전 시간 전파자들의 사업은 주로 광범위한 지역을 돌며 간행물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왕국 소식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지역이 소식을 듣기 시작하였다. 사업이 발전하고 있었다는 또 다른 증거로서 1930년에는 ‘왙취 타워 협회’ ‘프랑스’ 지부가 개설되었다. 그 당시 ‘파리’ 사무실 직원은 ‘베른’의 ‘하벡’ 형제의 지휘하에 일하던 그 지방 책임자 ‘조페’ 형제를 포함하여 다섯명으로 증가하였다.

‘파리’ 국제 대회

‘파리’에서 최초로 큰 대회가 1931년 5월 23-26일에 ‘쁘레이에 홀’에서 열렸는데, 이것은 ‘프랑스’ ‘여호와의 증인’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파수대」 1931년 8월 1일호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가능하였던 가장 정확한 계산에 의하면 대회에는 독일인이 1,450명, 영국인이 778명, ‘폴란드’인이 551명, ‘프랑스’인이 200명 그리고 그 외 여러 나라에서 그보다 적은 수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대회를 조사한 결과 23개국의 사람들이 참석하였지만 거의 모두가 영어, ‘폴란드’어, 불어 혹은 독일어 중 하나를 이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언어들로 연설들이 행해졌는데 종종 3명이나 되는 통역자들이 동시에 연단에 서 있었다. ·⁠·⁠· 협회장이 여러 개의 연설을 하였으며, 이들은 불어, 독일어, ‘폴란드’어의 차례로 통역되었다. ·⁠·⁠·

“열정적인 영이 전 회기 동안 대회에 충만했다. 그리고 대회가 끝났을 때 모두가 ‘확실히 이번 대회는 가장 훌륭한 대회야.’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지금까지 ‘파리’에서 열린 가장 훌륭한 대회였다. 그리고 아마 다른 어떤 곳에서도 더 훌륭하게 열린 곳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 ‘프랑스’에서 사업을 확장할 때임이 확실한 것 같다. ·⁠·⁠·

“더 많은 방과 더 나은 조명이 있는 사무실을 얻기 위하여 새로운 장소를 찾아냈다. 이에 더하여 주께서는 거기에 사무실 직원이 한 가족처럼 경제적이면서도 안락하게 살 수 있도록 집을 마련해 주셨으며, 또한 ‘파리’ 시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할 몇몇 ‘콜포처’를 위한 몇개의 방도 마련해 주셨다.”

야외 봉사는 그 대회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것은 모두 잘 계획되었으며 각 전도인은 지휘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놀라운 성과가 있었으며, 1931년 7월 25일자 「사자(使者)」지는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각 집단에는 봉사자들을 배치하는 인솔자를 돕도록 2명의 통역자를 두었다. 일부 집단들은 대형 관광 ‘버스’들을 타고서 자기들 구역으로 갔는데, 그 ‘버스’들은 그 목적으로 계약된 것으로 ‘홀’ 밖에서 대기했었다. 인근 지역에 임명된 일부 집단들은 전차나 ‘택시’를 타고 혹은 걸어서 갔다. 실제로 그 때 대회장에 있던 100‘퍼센트’가 그 봉사에 참여하였다. 그 날 아침 봉사중에는 봉사자들이 1,329부의 서책과 14,557부의 소책자를 전해서 대회 전체 기간중 ‘파리’에서는 도합 16,776부의 굉장히 많은 서책과 소책자를 전하는 성과를 올렸다.”

‘콜포처’에 대한 부름

더 많은 ‘콜포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파리’ 대회에서 발표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의 명백한 나타남과 함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전 시간 사업에 뛰어들도록 감동을 받게 하였다. 그 당시 유일한 십대였지만 나중에 ‘스페인’에서 선교인으로, 그리고 현재는 남‘아프리카’에서 봉사하고 있는 ‘존 쿡’은 이렇게 기술한다.

“참으로 훌륭한 대회였다. 나는 그 대회를 결코 잊을 수 없다. 조그마한 회중에 있었던 어린 형제가 ‘런던’에서 ‘파리’까지 수백명의 형제들과 함께 여행한다는 것은 감격적이었다. 그리고 독일에서 온 대규모의 대표단과 다른 여러 나라로부터 온 형제들을 만나보는 것은 더욱 감격적이었다. 이들 대륙의 형제들이 우리 침착한 영국인들에게는 참으로 박력있고 열정적으로 보였다! ·⁠·⁠· 모든 것이 매우 잘 조직되고, 매우 활기차고, 모두가 매우 행복해 보였다.

“바로 그 때 나는 내 인생을 바꾼 대 결정을 내렸다. 나는 ‘파이오니아’가 되는 것에 관하여 이미 많이 생각해 왔었으며 ‘파이오니아’가 되고자하는 욕망을 가졌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보류했었다. 그러나 바로 첫 회기에서 나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던 한 자매가 “당신 같은 젊은 형제가 ‘콜포처’를 해야 하는데, 왜 안하지요?” 하고 말했다. 여러 사람들이 수차 그처럼 말했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강한 어조로 ‘해 아래서 아무 것도 여러분 젊은이들이 ‘콜포처’ 봉사에 뛰어드는 것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또 다른 영국인 형제 ‘에릭 윌킨슨’은 ‘어느 나라에서든 누구든지 ‘프랑스’에 와서 그 봉사에 참여하라는 초대를 받았다’라고 말한다. ‘에릭’과 영국 ‘랭카스타’에 있는 같은 회중의 한 친구가 응하여 곧 ‘프랑스’에서 좋은 소식을 전 시간 전파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파이오니아’는 1930년에 27명이던 것이 1931년에는 104명으로 증가하였다.

‘프랑스’에서의 ‘콜포처’ 활동

‘윌킨슨’ 형제는 ‘프랑스’에서의 ‘콜포처’ 봉사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파리’의 빈민굴 지역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다. 우리가 자기들 건물에서 봉사하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수위들[관리인들]의 결심은 봉사해야 되겠다는 우리들의 결심 만큼이나 단호하였다. 종종 경찰을 불러서 우리를 서장에게로 데리고 갔는데, 대개 서장은 동정적이어서 우리를 놓아주었다. 결국 우리는 어깨에 거는 가죽끈이 달리고 다섯 개의 주머니가 있는 일종의 뒤로된 ‘에이프린’을 만들었다. 이것을 ‘자켓’속에 입고 한 ‘빌딩’에 필요한 간행물을 넉넉히 넣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유리창으로 된 방 안에 있는) 수위들을 지나칠 수 있었는데, 나머지 간행물은 우리 자전거 위 상자 안에 넣어두었다. 물론 우리는 증거 ‘카드’를 가지고 봉사하였다. 그러나 나의 친구(불어를 할줄 아는)는 자기 기대와는 달리 내가 자기보다 간행물을 더 많이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사람에게 너무 많이 이야기하는 바람에 자기가 끝낼 때 쯤에는 호기심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파리’에서의 봉사는 상당히 힘든 것이었는데, 특히 시골에서 자란 사람에게 그러하였다. 설상 가상으로 우리가 일하고 있던 지역에서는 ‘아파트’ 넷 내지 여섯 가구당 화장실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화장실은 층계 모퉁이에, 지어져 있었으며 물 방취관도 없이 단지 하나의 곧은 ‘파이프’만 있었다. 당신은 한여름 더위 때의 그 냄새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푸른 들판이 그리웠으며, 그래서 지방에 ‘파이오니아’가 더 필요하게 되자 가겠다고 자원했다.

그 당시 ‘파리’ 지역에 살았던 ‘프랑스’ 형제인 ‘사무엘 농게알드’는 아직 불어를 많이 배우지 못했던 두 전도인의 재미있는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파리’에서 최대의 난관은 관리인들[수위들]을 통과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진짜 집지키는 개들과 같았다. 두 영국 자매가 ‘파리’의 ‘아파트’를 봉사하고 있을 때, 관리인이 계단을 올라와서는 무엇을 하고 있으며 누구를 만나러 왔느냐고 물었다. 이 관리인은, 아주 호전적인 사람이어서 그 자매들은 대답을 재빨리 생각해 내야만 하였다. 문에 달린 한 ‘에나멜’ 표찰을 보고 그것이 집주인의 이름이라고 생각한 그 중 한 자매가 함빡 웃으면서 ‘우리는 ‘마담 뚜르네르부통’ [돌아 들어오시오]을 만나러 왔어요’라고 대답했다.”

본이 되는 열성과 인내

초기 ‘파이오니아’들은 그들의 열성과 인내에 있어서 본이 되었다. 그들은 육체적인 안락을 포기하였지만 대단히 풍부한 영적 축복을 누렸다. 영국 자매인 ‘모나 브르조스카’는 1931년 및 그 후 여러 해 동안의 ‘프랑스’에서의 ‘파이오니아’ 경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우리의 숙박 시설은 대체로 아주 구식이었는데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겨울철 난방이었다. 우리는 종종 아침에 물단지 윗 부분에 있는 얼음을 깨야만 비로소 세수할 수 있은 만큼 몹시 추운 냉방에서 견디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그마한 석유 난로는 단지 요리하는 데에만 사용되었다. 오늘날처럼 편리한 ‘캠핑’ 장비가 그 당시에는 없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설비는 다소 원시적이었으며, 우리의 생활 방식은 아주 검소했다.

“우리는 다른 성경 연구생들을 전혀 보지 못했다. 우리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항상 형제들과 접촉해온 것에 비하면 이것은 가장 큰 변화였다. 우리는 협회 출판물을 함께 정기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러한 고독과 싸워야만 했다. 그 당시 재방문이나 가정 성서 연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녁에 우리는 가족과 특히 다른 ‘파이오니아’들에게 편지를 쓰고 경험을 함께 이야기하고 서로를 격려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몇년 동안 우리는 심지어 우리 단 둘이서만 기념식을 가져야만 했다.

“우리는 여러 날을 장시간 봉사하였으며, 매일 자전거로 50내지 60‘킬로미터’를 여행하였다. 우리는 아침 일찍 출발해야만 했는데, 특히 겨울에는 낮 시간을 이용하기 위하여 그렇게 해야 하였다.”

초기 ‘파이오니아’들 대다수가 영국인들이었지만 독일인, ‘스위스’인, ‘폴란드’인 그리고 ‘프랑스’인들을 포함하여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 ‘파이오니아’들은 흔히 보잘 것 없는 식사로 살아나갔다. 한 ‘프랑스’ 형제는 그가 ‘리용’에 사는 어느 외국인 ‘파이오니아’들을 방문했을 때 자기에게 다음과 같은 요리법을 알려주었다고 이야기하였다.

“저녁에 밀 한 홉을 진공 ‘플라스크’병에 넣고서 끓는 물로 채우시오. 다음 날 아침에 그것을 부어내어 설탕을 넣어 달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먹을 수 있고, 물론 영양가도 있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썩 맛있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프랑스’인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선교인들이 추방되었으나, 그들의 봉사는 결실을 거두었다

1934년 내무상은 경찰에게 ‘왙취 타워 협회’를 위해 일하고 있는 모든 외국 선교인들을 추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명령은 ‘프랑스’ 정치가 ‘삐에르 라발’에 의해 시행되었는데, 그는 후에 제2차 세계 대전 중 반역자가 되어 재판을 받아 총살을 당하였다. 이렇게 해서 1934년과 1935년에 이들 외국인 ‘콜포처’ 대다수가 ‘프랑스’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수행한 봉사는 성과를 거두었다. 1935년 ‘파리’ 사무실의 책임자였던 ‘조페’ 형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1930년에서 1934년까지 이들이 수행한 씨 뿌리는 봉사는 결실을 거두었다. ‘프랑스’ 도처에서 계속해서 날아 들어온 편지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자기들을 방문했으며 자기들이 진리를 어느정도 깨달았다는 즐거움의 표현들이었다.”

그렇다, 그처럼 당시 전쟁 전 여러 해 동안 이들 ‘콜포처’들에게서 처음으로 간행물을 받고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이를 테면, ‘다니엘-오비에즈’ 형제는 수년 전에 협회 지부 사무실에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여기 ‘나르본’ 지역에서 지금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 얼마는 전쟁 전에 영국인 ‘파이오니아’들로부터 출판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또 한 자매는 이처럼 진술하였다. “가끔 우리는 그 당시에 협회 간행물을 처음 받은 연로한 형제 자매들을 만납니다. 바로 지금 나와 성서 연구를 하고 있는 부인은 30년대에 「창조」 책을 받은 부인입니다.”

따라서 전쟁 전에 ‘프랑스’에서 일했던 열성스런 ‘파이오니아’들 모두는 그들이 수행한 봉사의 크나큰 가치를 오늘날 ‘프랑스’ 형제들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은 진정한 ‘파이오니아’들로서 오늘날 회중의 젊은 성원들에게 훌륭한 본이 되었다.

‘라디오’ 방송

1930년 2월 15일에 협회는 ‘파리 라디오’ 방송국 VITUS와 계약을 맺을 수 있었으며, 1931년 여름까지 그 방송국은 불어로 140회, 영어로 35회, 그리고 ‘폴란드’어로 9회의 성서 강연을 방송하였다. 1931년 ‘파리’ 대회 때에는 ‘러더포오드’ 형제의 공개 강연이 이 방송국에 의해 중계되었다. 방송이 좋은 효과가 있었음을 알려 주는 것은 어느 ‘파리’ 시민이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이다.

“나는 어제 VITUS ‘라디오’ 방송국에서 흘러나오는 강연을 주의깊이 청취했읍니다. 그리고 연사의 이름은 기억할 수 없지만 그 연사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VITUS ‘라디오’ 방송국은 언젠가 그처럼 훌륭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었다는 것을 자랑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종교와 과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조화되지 않은 때인 지금도 그러합니다. VITUS 만세!”

1932년 「연감」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파리’와 그 부근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제 중앙에 위치하게 된 ‘파리’에 있는 우리 사무실을 방문하였으며, 거기에서 간행물을 구입했다.”

‘라디오’를 듣고서 진리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는 ‘꿰로와’ 가족이 있었다. 그들은 ‘파리’ 바로 북쪽 교외인 ‘쎙-웽’에 살았다. 이 가족 중 여러 성원이 결국 전 시간 전파 사업에 참여했다. 그 아들들 중 하나인 ‘쟝 꿰로와’는 후에 ‘길르앗’에 갔으며, ‘파리’ 지역에서 아직도 전 시간 봉사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송에는 또 다른 유익도 있었다. 그것을 외국인 ‘파이오니아’ 중 한 사람인 ‘모나브르조스카’ 자매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단순히 “그러한 ‘프로그램’이 방송되었다는 언급만으로도 사람들이 우리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기에 충분하였읍니다. 그들은 무엇이 방송되고 있었는지 자기들이 몰랐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였읍니다.”

여러 해에 걸쳐, VITUS 외에 다른 ‘프랑스’ ‘라디오’ 방송국들이 우리의 성서 강연을 방송하는 데 참여하였다. 더우기, 미국으로부터의 직접 방송이 ‘프랑스’에서 청취되었다. 1935년 1월 13일 일요일에 ‘스케넥타디’와 ‘피츠버어그’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들에 의해 시험 방송이 실시되었다. ‘러더포오드’ 형제의 “우주적인 전쟁이 가까왔다”라는 강연이 단파로 방송되었으며, ‘프랑스’에서 청취되었다. 이 시험의 성공으로 1935년 6월 2일에는 “정부”라는 ‘러더포오드’ 형제의 강연이 방송되었는데, 이 강연은 그가 ‘워싱턴’ 대회 중에 한 것이며, 그것이 ‘필라델피아’ ‘라디오’ 방송으로 중계되어 ‘쁘레이에 홀’에서 열린 ‘파리’ 대회에서 청취되었다.

주소 변경

1931년 4월, 협회 ‘파리’ 사무실은 다소 어둡고 답답한 ‘파리’ 18구 ‘뽀아쏘니에’ 105번지에서 좀 더 편리하고 나은 위치에 있는 ‘파리’ 9구 ‘푸부리 뽀아쏘니에’ 129번지로 이전하였다. 같은 해에 협회는 ‘파리’ 북쪽 교외 ‘앙지엥 레뱅’에 있는 별장 하나를 구입했으며, 그곳이 ‘프랑스’에서 실질적인 최초의 ‘벧엘’ 집이 되었다. 형제들은 여기서 살면서 ‘파리’ 사무실에서 일하기 위해 매일 기차로 ‘파리’까지 여행하였다. ‘규스따브 조페’ 형제가 책임자였으며, 그의 아내는 ‘앙지엥’에 머물러 ‘벧엘’ 집을 돌보았다.

지금 ‘비즈바덴’ ‘벧엘’에서 일하는 ‘알리스 베르네’는 1930년대 초에 한동안 ‘프랑스’ ‘벧엘’에서 살았다. 그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그곳은 커다란 정원이 하나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읍니다. 물론 이것 또한 우리가 손질해야 했읍니다. 그래서 주말에 우리 사무실 여직원들은 정원을 가꾸고 또 다리미질을 돕는 데 시간을 바쳤읍니다.

“아침에 일용할 성귀와 아침 식사가 끝나면 우리는 북‘파리’ 역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달려가곤 했읍니다. 그 열차는 안락하여서 사람들은 조간 신문을 읽곤 하였읍니다. 때때로 우리는 증거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읍니다.

“‘푸부리 뽀아쏘니에’ 가 129번지의 현장은 여러 가지 목적에 기여했읍니다. 그곳은 우리의 사무실이었으며, 또 서적이나 잡지를 가지러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해 간행물이 놓여있는 큰 탁자도 있었읍니다. 또 일부는 저장실로 사용되었으며, 좀 구석진 곳에는 우리가 점심을 집에 가서 먹지 않고 사무실에서 먹었기 때문에 조그마한 부엌 시설이 있었읍니다. 그 당시 우리는 7명 가량이었지만 가끔 형제 자매들이 발송 작업이 한참 바쁠 때 도와주러 오곤 했읍니다. 그래서 때로는 점심 식탁은 10내지 12명이나 되어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곤 했읍니다.”

1931년—새로운 명칭

1931년에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채택되었으며, 많은 연로한 ‘프랑스’ 형제들은 이것이 자기들에게 참으로 고무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1931년 10월 불어판 「게시판」(“왕국 봉사”)지는 “새로운 명칭”이라는 제하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누군가 당신에게 ‘누구시지요?’ 혹은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 부릅니까?’ 하고 물을 때,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흐믓한가!”

전파 사업을 위한 도구

1932년 1월, 「왕국, 세상의 희망」이란 새로운 불어판 소책자 한부씩이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과 각료 장관들, 상원 의원들, 하원 의원들, 지사들, 군대 장성들 그리고 추기경으로부터 지방 교구 사제에 이르는 교직자들에게까지 보내졌다. 그 소책자는 또한 호별 방문으로 널리 배부되었다.

그해 10월에 「황금시대」가 불어로 다시 등장하였다. 그것은 ‘프랑스’인 구미에 맞았으며, 정기적으로 ‘러더포오드’ 형제의 ‘라디오’ 강연을 실었다. 그 잡지는 ‘파리’에서 편집되었으며—‘규스따브 조페’와 ‘아벨 데겔드르’ 그리고 ‘에밀 데라노’ 형제가 편집 위원으로 일하였음—‘파리’의 한 외부 인쇄업자에 의해 인쇄되었다. 그 이듬 해에 불어판 「파수대」는 16면에 달하는 월 2회 잡지로 되었는데, 그때까지는 단지 월간으로만 발행되었던 것이다.

전국을 방문함

1932년 ‘프랑스’에는 85명의 ‘파이오니아’가 있었으며, 총 전도인이 796명이었다. 이들은 100대의 ‘오오토바이’와 4대의 승용차 그리고 두대의 대형 ‘버스’를 사용하여 왕국 소식을 널리 그리고 멀리 선포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보고에 의하면 1932년에 처음으로 왕국 선포자들이 ‘프랑스’ 전국을 돌아 965,808부의 서적과 소책자들을 전하였다고 한다.

추방의 시작

이미 1932년 ‘프랑스’ 정부는 일부 외국인 전도인들에게 그 나라를 떠나라는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상당수의 ‘폴란드’ 형제들과 ‘스위스’에서 온 ‘알프레드 뤼티만’ 형제 부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뤼티만’ 형제는 불어 번역을 했는데 그는 ‘스위스’로 돌아간 후에도 이 일을 계속하였다. 그는 여러 해를 충실하게 봉사한 후 1959년에 사망하였는데, 그는 그때까지도 ‘베른 벨엘’ 가족의 한 성원이었다. 1971년 1월 21일 ‘뤼티만’ 자매는 ‘프랑스’ 지부로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알프레드’는 불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일했다. 그는 불어 번역을 돕는 일에 노력을 조금도 아끼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속에 있는 불타는 열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노력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놀라운 증가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했기를 기원한다.”

협회 서적이 금‘메달’을 타다

1933년 9월, ‘프랑스’ 형제들은 ‘파리’ 전람회에 협회 간행물들을 전시하도록 초대받았다. 2주 후 형제들은 전람 위원회로부터 종교 서적 부문에서 금‘메달’과 상장을 받았다. 이 일은 수 개월 후 다른 전람회에 출품하도록 힘을 주었으며, 이번에는 협회가 금‘메달’과 ‘파리’ 시의 십자형 훈장과 함께 영예로운 표창장을 받았다. 그 전람 위원회는 한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1933년 9월과 12월에 있었던 전람회 때 여러분에게 상장들을 수여한 것은 여러분의 사업의 도덕적인 높은 가치와 여러분의 간행물이 보여주는 흠잡을 데 없는 정직성에 대한 인식에서 입니다. ·⁠·⁠· ‘왙취 타워’ 간행물은 정직, 충성 그리고 용기의 상징입니다.”

‘히틀러’에게 보낸 전문들

이 무렵 국경넘어 독일에서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박해가 격심해졌다. 그래서 1934년 10월 7일에 모든 ‘프랑스’ 회중들은 전세계 형제들과 합세하여, ‘여호와의 증인’들의 박해에 대하여 ‘히틀러’와 그의 정부에 항의하는 전문을 보냈다. 일부 ‘프랑스’ 우체국에서는 이 전문을 보내기를 거절하였지만 대부분은 형제들이 고집하자 들어주었다.

교직자들의 반대와 집단 국외 추방

‘여호와의 증인’들의 사업이 ‘프랑스’에서 번창함에 따라 교직자들은 “그들의” 양떼들에게 중대한 “위험”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파리’에서 일부 ‘폴란드’인 교직자들이 회의를 열어 ‘폴란드’인들 가운데서의 우리의 활동을 중지시키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에 동의하였다. 그들은 교회 문 앞에서 공공연히 우리 간행물들을 불태웠다. 또한 다른 여러 곳에서 교회 입구와 학교 교문에다가 우리 간행물을 구입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표지들을 붙였다.

그리고나서, 1934년 2월에는 ‘프랑스’ 내무상이 발표한 한 공한에서 우리의 서적들이 “파괴적”이라고 하였으며 외국인 선교인들을 모두 ‘프랑스’에서 추방할 것을 경찰에게 지시하였다. 그 훈령은 ‘프랑스’에서 진리를 배운 우리의 일부 ‘폴란드’ 형제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들 헌신한 그리스도인 집단 전체가 48시간 내에 ‘프랑스’를 떠나도록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스’ 북부 뿐만 아니라 ‘프랑스’ 중앙의 광산 도시와 촌락들에 있는, 전체가 ‘폴란드’ 형제들로만 구성된 일부 회중들은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 「1935년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은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다.

“이들[‘폴란드’ 형제들] 중 많은 수가 직업이 없이 그리고 생계 수단조차 없이 무일푼으로 떠나 고국으로 돌아갔다. 극심한 난관이 그들 위에 덮쳐 왔다. ‘프랑스’ 정부는 또한 거기서 ‘파이오니아’ 봉사에 종사하고 있는 독일인과 영국인들도 추방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업이 바랬던 만큼 성공적으로 수행되기 어렵게 되었다.”

1935년에 280명 가량의 ‘폴란드’ 형제들이 ‘폴란드’로 돌아갔으며, ‘프랑스’에 남아있던 일부 형제들은 난관에 직면하여 낙심하게 되어 믿음을 포기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총 전도인 수는 1934년에 1,054명이던 것이 1935년에는 889명으로 떨어졌으며, ‘파이오니아’수도 62명에서 41명으로 감소하였다.

축음기의 사용

1934년과 1935년에는 관심자들의 가정에서 성서 강연 음반들을 틀어주는 것이 왕국 소식을 전파하는 새로운 수단이었다. 100대의 휴대용 축음기가 1935년중 ‘프랑스’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보고에 의하면 1936년 한 해 동안에 ‘프랑스’에서 협회 음반을 들은 사람들은 12,709명이었다. 석탄광에서 일하던 얼마의 형제들은 동료 일꾼들에게 왕국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축음기를 사용하였다. 어느 광산에서는 녹음기가 며칠 동안 설치되어 음반 전부를 광부들을 위해 틀어줄 수 있었다.

1937년 ‘프랑스’에서의 우리의 ‘라디오’ 사용은 교직자들이 방송국 소유주들을 협박하여 우리의 소식이 일단 특정한 검열을 받기 전에는 방송하지 않겠다고 조종하였을 때 중단되었다. 그리하여 형제들이 축음기를 호별 방문 봉사에서 사용하기 시작함에 따라 우리의 음반 사용은 열을 띠게 되었다. 또한 확성차들 역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사무엘 농게알드’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을이나 도시에 도착하면, 먼저 우리는 주로 행진곡과 같은 음악 음반을 틀어줌으로써 사람들의 주의를 이끌었읍니다. 그리고나서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와 같은 음반을 들려주고는 군중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들 가정을 방문할 것이라고 말했읍니다.”

‘쎙-르-노브르’ 회중의 ‘쥘레 아나끄’ 형제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경험을 들려준다.

“‘솜’ 현의 한 마을 ‘삐깔디’에서 우리는 특이한 음향 효과를 냈읍니다. 우리는 확성기를 장치한 우리 마차를, 마을을 굽어 보는 어느 언덕 꼭대기에 세워두었읍니다. 그러나 일단의 나무 속에 가리워져 있었읍니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음을 최고로 높였읍니다. 주민들은 먼저 음악을 듣고 그 다음 강연을 듣고는 자기들이 하늘로부터 소식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읍니다! 우리는 그 마을에서 상당히 많은 간행물을 전했읍니다.”

‘파이오니아’들을 돕기 위한 ‘파리’ 사무실 내의 변화

그토록 많은 외국인 형제들이 떠남으로 인해 1936년에는 전도인 수가 889명에서 822명으로 약간 떨어졌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아직도 40명의 ‘파이오니아’가 있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외국인이었다. 한 동안 그들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파리’ 사무실로부터 거의 혹은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하였었다.

9월에 열린 ‘스위스’ ‘뤼케른’ 대회에서 ‘파이오니아’들이 ‘러더포오드’ 형제에게 이야기했을 때 문제는 절정에 달했다. 「1937년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은 그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그 해에 협회의 지방 대표자가 마땅히 해야 될 일인데도 ‘파이오니아’들과 협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여기에 언급하게 되어 대단히 유감스럽다. 그러나 이 문제는 시정되어 왔으며, 이 문제에 관한 상태가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연감」이 불어로 발행된 최초의 「연감」이었다. 불어 「연감」이 1938년과 1939년에도 발행되었다. 그러자 전쟁이 일어나고 1971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불어 「연감」이 다시 나오게 되었다.

1936년, ‘파리’ 사무실 책임자인 ‘조페’ 형제는, 여러 해 동안 전 시간 봉사를 해온 영국인 형제 ‘프레드 케이브러’로 교체되었으며, ‘에밀 데라노’가 그의 보조자로 임명되었다. ‘규스따브 조페’는 후에 진리를 버렸으며, 심지어 전쟁중에는 ‘나찌스’와 협력하기까지 하였다.

‘파리’에서의 두번째 국제 대회

1937년, ‘파리’에서의 두번째 ‘여호와의 증인’의 국제 대회가 8월 21일부터 23일까지 ‘상호 부조 회관’에서 열렸다. 이곳에는 그러한 모임을 위하여 얻을 수 있는 가장 크고 가장 편리한 ‘홀’들이 몇개 있었다. 연사는 본관에 있는 청중에게 영어로 연설했으며, 그밖의 ‘홀’들은 전선으로 연결되었다. 이들 각 ‘홀’에는 한명의 통역자가 청중의 언어로 연설을 통역하였다. 이렇게하여 대회 전체에 걸쳐 각 집단은 그들 자신의 언어로 동일한 연설을 동시에 들었다. 약 3,500명이 참석하였으며, 주요 강연 때는 1,000명이 더 ‘홀’을 메웠다.

그 당시에 ‘파리’에서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겨우 100명가량 뿐이었다. 그들은 전세계로부터 그들을 방문한 대표자들을 만나게 되어 얼마나 행복하였겠는가! 영국으로부터 2대 그리고 ‘스위스’로부터 한대의 열차가 왔다. 1931년 ‘파리’에서 열렸던 최초의 국제 대회가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번 1937년 대회는 월등히 잘 조직된 것으로서,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들이 개최한 대회들의 하나의 조그마한 예고편을 보여주었다.

대회 후, ‘게이블러’ 형제는 ‘벨기에’에서의 사업을 감독하기 위하여 ‘브뤼셀’로 전임되었으며, ‘벨기에’에서의 사업을 한동안 감독해 온 ‘알사스’ 형제인 ‘샤를레 네흐트’ 형제가 ‘파리’ 사무실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네흐트’ 형제의 지휘하에 왕국 사업은 잘 진전되었다. 그 당시 ‘앙지엥’에 있는 ‘벧엘’과 도심지 ‘파리’ 사무실에서는 열 사람이 일하고 있었다. 음반 봉사는 급속히 확장되고 있었다. 즉 사용되고 있던 축음기 수는 236대였으며 협회의 음반을 들은 사람 수는 1937년의 28,412명에서 1938년에는 103,801명으로 증가했다.

누가 취할 것인가?

위의 제목은 1938년 4월 1일호 불어판 「파수대」에 실린 부제였다. 그 잡지에서 그 당시에는 종종 “요나답 반열”이라고 불리운 “다른 양”들이 기념식에 참석하도록 직접적으로 초대되었는데, 이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초대였다. ‘누가 기념 표상물을 취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많은 형제들의 정신에 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스위스’에 있는 중앙 ‘유럽’ 사무실 책임자인 ‘하벡’ 형제의 연설은 그 문제를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루이 삐에쇼타’ 형제는 ‘쎙-르-노브르’에서의 ‘하벡’ 형제 연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설을 시작하기 전에 그는 청중에게 그들 중에서 자기가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었읍니다.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을 들었읍니다. 그 다음에 ‘하벡’ 형제는 그의 연설 주제를 발전시켜 낙원에 회복될 때 인류를 기다리고 있는 많은 축복들을 묘사하였읍니다. 연설 끝에 가서 그는 청중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졌읍니다. ‘여러분 중에 누가 그와 같은 낙원에서 살고 싶습니까?’ 많은 손이 올라갔읍니다. 그는 ‘만일 여러분의 모든 희망이 그러한 지상 낙원에서 사는 것에 집중되어있다면, 여러분은 하늘의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고 부언하였읍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참석 수는 증가하였는데 기념 표상물을 취한 자의 수는 감소하였다. ‘프랑스’에서 1939년 기념식에 1,510명이 참석하여 불과 631명만 표상물을 취하였다.

전쟁이 다가옴에 따라 강화된 활동

전운이 ‘유럽’에 감돌고 있었다. 그러자 ‘네흐트’ 형제는 독일의 우리 형제들에게 일어나고 있던 일들이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다른 곳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도 조만간 아주 쉽게 닥칠 수 있다고 내다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프랑스’의 지역 대회들과 회중들을 방문하여 형제들에게 앞으로 있을 어려움을 대비하도록 경고하였다.

1938년 ‘베른’ ‘벧엘’에서 온 ‘프랜츠 쮜리허’ 형제는 「그리스도교를 대항하는 십자군」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행하였는데, 거기에는 ‘나찌’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 박해에 대한 상세한 보고가 들어 있었다. 그 이듬 해에 이 책이 불어로 발행되었다. 그리고 ‘쮜리허’ 형제는 ‘알사스’의 ‘뮐루세’ 시에 와서 증권 거래소 ‘빌딩’에 모인 600명의 청중 앞에서 그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1939년까지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주로 성서 간행물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즉 1939년에는 관심자 재방문이 8,739건이나 보고되었다. 봉사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의 이러한 조정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왜냐 하면 그것은 간행물 공급이 극히 제한되었을 때인 전시 여러 해 동안에 널리 사용될 활동 부면에 형제들로 하여금 경험을 갖게 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국경일인 1939년 7월 14일, ‘파리’ 최초의 왕국회관이 ‘네흐트’ 형제에 의해 봉헌되었다. 그 건물은 이전에는 대장장이 점포였지만 형제들은 여러 주일의 고된 작업 끝에 375명이 앉을 수 있는 훌륭한 집회 장소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파리’ 형제들은 거기서 1939년 9월 3일, ‘프랑스’가 독일에게 선전 포고를 하기 이전 몇 달 동안만 모일 수 있었으며 그후 사업은 곧 지하로 들어가야만 하였다.

전쟁 발발 직전에 ‘프랑스’에는 84개의 회중이 있었다. 이들 중 13개는 ‘알사스-로렌’의 독일어 회중이었고, 32개는 대부분 ‘프랑스’ 북부에 있는 ‘폴란드’어 회중이었으며, 39개가 불어 회중이었다. 총 1,004명의 전도인이 있었으며, 이것은 전년도보다 19‘퍼센트’의 증가였다.

흥미롭게도, 전쟁 전 12년 동안 503,801부의 서적과 1,451,523부의 잡지 그리고 5,798,603부의 소책자가 ‘프랑스’ 대중에게 전해져, 간행물 총 배부수는 7,753,927부나 되었다! 만약 그 때 사업이 중단되었더라도 ‘프랑스’ 국민들은 “그들 가운데” 예언자가 없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에스겔 2:5) 그러나 앞에 놓인 어려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의 사업을 완수하려면 아직 멀었다.

조직이 금지당하다

전쟁이 시작된지 약 6주 후인 1939년 10월 중순, ‘프랑스’의 ‘여호와의 증인’의 조직은 금지당하였다. 그러나 ‘네흐트’ 형제는 이러한 가능성을 이미 예상했었으며 형제들에게 경고를 했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회중들은, 그들의 재고 간행물들을 보다 안전한 여러 장소로 분산시킬 시간이 있었으며, 협회의 ‘파리’ 사무실이 수색당하기 직전까지 그렇게 하였다. ‘앙지엥레뱅’에 있는 ‘벧엘’ 집도 수색을 당했지만 ‘네흐트’ 형제가 「파수대」와 「위안」지 예약자들 모두의 주소들이 있는 ‘스텐슬’들과 기타 모든 주요 서류철을 이미 옮겨 놓았었다.

이 무렵 ‘네흐트’ 형제는 폐렴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프랑스’ 사업의 감독자로서 ‘프랑스’의 전 회중들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그의 편지는 1939년 10월 24일자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형제들,

이 편지는 내무상의 명령에 따라 다음과 같은 점들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프랑스’의 ‘라 뚤드 갈드’ 협회와 ‘여호와의 증인’의 협회는 더는 활동권을 승인 받은 단체가 아닙니다. 그 결과 ‘파리’의 ‘푸부리 뽀아쏘니에르’ 가 129에 위치한 ‘왙취 타워’ 사무실은 폐쇄 되었으며 건물은 비워 두어야만 하게 되었읍니다.

“우리는 특히 우리를 공산주의자들로 간주하는 현 추세 때문에 우리의 동기와 사업을 옹호하기 위하여,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우리의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 두 단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여호와의 증인’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책임을 각자가 이행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박해가, 성서에 예언되어 있는 모든 일들이 지나가기 전에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는 마태 복음 24:9의 주의 말씀에 따라 닥쳤다는 사실을 알므로 틀림없이 격려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힘찬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의 따뜻한 인사와 더불어 이사야 43:12; 역대 하 20:15 그리고 마태 10:28의 말씀을 전합니다.

[서명] ‘찰스 네흐트’”

몇일 후인 1939년 11월 2일 ‘네흐트’ 형제는 4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전 시간 봉사로 여호와를 충실히 섬겨왔었다. 그가 ‘프랑스’ 형제들로부터 더 더욱 크게 사랑을 받은 이유는 그 때까지 ‘프랑스’의 사업을 책임맡았던 사람들 모두(‘랑쯔’, ‘프리따’, ‘빈켈’, ‘조그’ 그리고 ‘조페’)가 불충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업의 역사로부터 어떤 일반적인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사업이 확실히 어떤 한 사람에게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찰스 쥬터’ 형제가 ‘프랑스’에서 협회 관심사를 돌보도록 ‘스위스’로부터 파견되었다. 또한 ‘프레드 게이블러’도 영국으로부터 ‘파리’에 파견되었는데, 그는 전쟁 바로 직전에 ‘벨기에’를 떠나 영국에 갔었던 것이다.

“전초전” 기간

1939년 9월부터 1940년 5월까지 전쟁 초 몇달 동안에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군사 행동은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 기간은 “전초전”이라 불리웠는데, 그 때는 형제들에게 실제 시험기가 시작된 때였다. 특히 ‘프랑스’ 북부와 ‘알사스’에 있는 많은 형제들이 투옥되었다.

전쟁 후 순회의 종과 지역의 종으로 봉사한 ‘루이 삐에쇼타’가 5명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은 24일간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이 때는 ‘네흐트’ 형제가 병들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디에쁘’ 교도소로 이 형제들을 방문하였다. ‘삐에쇼타’ 형제는 이렇게 기술한다. “그는 우리에게 사도 ‘바울’처럼 인내하라고 권고하였읍니다. 우리를 떠날 때 그는 눈에 눈물을 글썽였으며, 우리도 글썽였읍니다.”

그러한 전쟁초 여러 해 동안에 여호와의 보호에 대한 많은 실례들이 있었다. ‘프랑스-벨기에’ 국경 도시 ‘와띨로’ 회중의 종인 ‘죨즈 델렘’ 형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루는 한 세관 관리가 나를 세워놓고 매우 철저하게 수색하였읍니다. 그는 내 호주머니에서 「파수대」 한부를 찾아내어 ‘그런데 이건 뭐요?’ 하고 물었읍니다.

“나는 ‘이건 「파수대」지입니다’ 하고 대답하였읍니다. 그가 나를 계속 수색하는 동안 나는 팔을 든채로 손에 잡지를 쥐고 있었읍니다. 그가 내 구두를 뒤지려고 구부렸을 때, 나는 ‘파수대’를 호주머니에 도로 넣었읍니다.

“그는 일어서서는 ‘됐오. 가도 좋소’라고 말했읍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적이든 그는 금지된 잡지를 잊은 것입니다.”

‘쥬터’ 형제와 ‘게이블러’ 형제의 임무는 ‘파리’에 있는 협회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가능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었다. 얼마의 값비싼 장비를 갖춘 ‘레코오드’ 제조 공장, ‘푸부리 뽀아쏘니에르’에 있는 ‘파리’ 사무실 및 ‘앙지엥 레뱅’에 있는 ‘벧엘’ 집이 있었다. ‘파리’ 사무실 건물은 빌린 것이어서 실제로 문제가 될 게 없었다. 그리고 ‘앙지엥’에 있는 ‘벧엘’ 집은 지혜롭게 미국 시민 ‘휴고 리머’의 명의로 해 두었었기 때문에 안전했으며 전시 동안 형제들에 의해 계속 사용되었다.

결국, 당국에 압수당한 재산은 단지 소형 자동차 한대와 얼마의 가구뿐이었다. 그와 같이 자기들 임무를 완수한 ‘쥬터’ 형제와 ‘게이블러’ 형제는 각기 ‘스위스’와 영국의 자기들 집으로 돌아갔는데, 1940년 5월 독일군이 침공하기 바로 직전에 ‘프랑스’를 떠났다. 바로 그 직전에 ‘스위스’ ‘베른’ 소재 협회 사무실 책임자인 ‘하벡’ 형제는 ‘엉리 제이제’ 형제에게 ‘파리’로 가서 그곳 협회 일을 정리하는 것을 돕고, 지하 사업을 조직하도록 부탁하였다. 기억하겠지만 ‘제이제’ 형제는 오랫동안 ‘스트라스부르’와 ‘알사스’ 전역에서 사업을 주도하는 역할을 해왔었다. ‘에밀 데라노’ 형제가 그의 보조자로 임명되었다.

적시에 ‘프랑스’를 떠남

1940년 봄 전쟁의 흐름은 갑작스럽게 바뀌어 ‘프랑스’에게는 비극적이었다. ‘히틀러’의 기갑 사단은 ‘폴란드’를 성공적으로 손아귀에 넣은 후 갑자기 방항을 바꾸어 서방 ‘유럽’을 향해 전격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그들의 전진 속도는 참으로 놀라왔다! ‘존 쿡’은 태연하게 ‘프랑스’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그 나라에 남아 있던 유일한 영국인 ‘파이오니아’였다. 그는 자기가 ‘보르도’ 주변에서 돌보아온 새로운 관심자들의 집단을 떠나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영국 영사는 모든 영국 국민은 지체하지 말고 떠나라고 경고하였다. ‘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떠나지 않으면 십중 팔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집단 수용소에 끌려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 번에 내가 영사관을 들렀을 때 영사관은 텅 비어 있었으며, 문에는 뒤에 남은 사람은 누구나 배를 이용할 수 있는 더 남쪽의 항구 ‘바욘’으로 속행해야 한다는 경고가 붙어 있었다. 가장 최근 보도는 ‘나찌’ 전방 부대가 단지 50‘킬로미터’ 밖에까지 닥아 왔다는 것이었다. 이 때가 1940년 6월이었는데, ‘뒨키르크’ 철수가 진행중이었다. 그래서 나는 떠나는 것이 낫겠다고 결정하였다.

“나는 일들을 정리하고 ‘스위스’ 형제인 ‘조셉’으로 하여금 연구와 집회를 맡도록 마련하면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내가 ‘바욘’행 기차표를 사러 역으로 갔을 때, 역은 기차를 기다리며 여기 저기 앉아서 졸고 있는 사람들로 수용소와도 같았다. 그래서 나는 자전거를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거의 지닌 것이 없는 몸으로 출발하였다.

“나는 후에, 그 다음날 독일 기갑 부대가 그 도시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욘’까지 175‘킬로미터’를 무사히 타고 갔다. 거대한 파도와 같은 피난민들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갔으며, 때때로 차가 길 옆 도랑에 버려져 있었기 때문에 다소 혼잡하였다. 내가 ‘바욘’에 도착했을 때, 숙박 시설이나 음식을 구하기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나는 저녁을 굶고 완공되지 않은 ‘빌딩’에서 잠을 잤다. 다음 날 영국행 배가 정박되어 있는 부두에는 거대한 군중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탈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여자들과 어린이들만 타시오’라는 지시가 내렸다. 배가 출항할 때 배는 과적되어 있었다. 들리는 소문은 그 배가 영국에 도착하기 전에 독일 잠수함에 의해 침몰되었다고 한다.

“우리 남은 사람들은 기차로 ‘스페인’ 국경 아래 부근의 어촌인 ‘쎙-쟌-드-루쯔’로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비행기 폭격을 두려워하여 행한 엄격한 등화 관제로 인해 쥐죽은 듯 고요한 밤에 그들은 우리를 고기잡는 ‘보우트’에 태워 해안에 정박해 있는 배들로 데려갔다. 피난민들은 ‘프랑스’ 남부 곳곳으로부터 막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나찌’로부터 도망하기 위해 가정, 사업 등 모든 것을 뒤에 두고 떠나온 것이다. 이틀을 정박한 채로 타고 있다가 그 피난민 호송선은 지그자그로 영국 ‘플리머드’까지 갔다. 나는 곧장 ‘런던’ ‘벧엘’로 가서, 따뜻한 환영을 받고 옷도 마련 받았는데, 나는 소유물들을 몽땅 잃어버렸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둘로 나뉘다

독일 기갑 사단이 ‘프랑스’로 진군하자, 남으로 가는 길은 침공군을 앞서 도망하는 피난민들로 줄을 이었다. 일부 형제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에 그냥 있었으며, 일부 형제들은 남으로 피난하였다. ‘제이제’ 형제는 ‘파리’를 떠나 그의 아내와 아들이 사는 ‘프랑스’ 서남 중앙의 ‘도르도근’ 현으로 돌아갔다. 1940년 6월 22일 ‘가톨릭’교인인 ‘뻬땡’ 육군 대장이 ‘나찌’ 독일과의 휴전 조약에 서명하였다.

‘프랑스’는 두 지구로 나뉘었다. 즉 북쪽 절반과 서해안 아래로 좁고 기다란 지역은 독일군이 점령하여 그들이 지배하는 한편, ‘프랑스’의 나머지 지역은 점령되지는 않았지만 ‘뻬땡’ 육군 대장이 국가 원수이고, ‘삐에르 라발’이 정부 수반인 친-독일 ‘비시’ 정부의 통치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스위스’ ‘베른’ 소재 중앙 ‘유럽’ 사무실로부터 ‘브루클린’에 보낸 한 보고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정복된 이래 우리는 ‘파리’ 형제들과 전반적으로 점령당한 지역의 형제들과 우리와의 접촉이 완전히 두절되었다. 단 한장의 편지나 ‘카아드’도, 그 외 어떠한 기별도 우리에게 없었다.

“점령되지 않은 ‘프랑스’ 지역에 관해서는 이전에 ‘알사스’에서 협회를 대표했던 형제[‘엉리 제이제’]와는 다소 정기적인 서신 왕래를 하였다. 그 역시 이전에 ‘파리’에서 일했고 ‘앙지엥’ 집에서 살던 형제들 중 누구에게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고 한다.

“또한 ‘스위스’ 형제들이 ‘프랑스’의 점령당한 지역이나 비점령 지역으로 가기 위해 ‘비자’를 얻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휴전 후 사업을 조직함

6월의 휴전 협정의 서명에 뒤이어 ‘히틀러’의 군대를 앞서 피난하였던 많은 ‘프랑스’ 민간인들이 자기들 집으로 돌아왔다. ‘제이제’ 형제도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그의 처자와 함께 한 ‘아파트’에서 살았으며, 낮에는 어느 ‘알사스’인의 공장에서 세속 일을 하고 저녁과 주말에는 증거 사업을 조직하고 형제들을 방문하는 데 바쳤다. 1940년 9월에 ‘프랑스’ 북부의 지하 사업 조직에 관하여 말하면서 ‘제이제’ 형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나찌’ 비밀 경찰이 모든 편지를 뜯어 보았다. 그러므로 각 집단과 격리된 형제를 몸소 방문해야 하였다. 형제들은 「파수대」 연구와 봉사회를 갖기 위해 작은 집단으로 함께 모였다. 그들은 단지 성서만 가지고 호별 방문으로 좋은 소식을 계속 전파하였다. 그들이 관심자들을 발견하면, 출판물을 가지고 재방문하여 연구를 사회하였다.”

‘파리’에서는 서적 재고를 금지령이 내려질 때 건져내어, 여러 주소에 비축해 두었었다. ‘데라노’ 형제는 형제들에게 서적을 나누어 주는 일을 조직하였으며, 또한 그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여러 집단을 방문하였다. ‘르네 쟝드로’ 자매와 ‘일다 네흐트’ 자매는 ‘벧엘’ 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후 ‘네흐트’ 자매는 자기 남편이 죽은 지 약 1년 후에 사망하였다. 바로 독일군 코 앞에 있던 그 곳 ‘벧엘’에서 ‘쟝드로’ 자매는 불어로 번역되어 있었던 「파수대」 사본들을 타자하였으며 「파수대」 기사를 등사하기 위한 등사 원지를 ‘타이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불어와 독일어 그리고 ‘폴란드’어로 번역하기 위한 「파수대」 사본들을 형제들은 어떻게 구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일단 번역되어 ‘타이프’로 찍었을 때, 그 등사된 사본들은 어떻게 이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달되었는가? 그 당시 ‘프랑스’는 점령 지구와 비점령 지구로 나뉘어져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지구들이 다시 구분되어서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여행하는 것이 제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담대히 영적 양식을 분배함

‘앙지엥 레뱅’ ‘벧엘’ 가족의 한 성원이었던 ‘마르떼 에베네’ 자매는 ‘프랑스’ 중앙의 한 도시 ‘클레몽-페랑’에 가서 자기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 그 자매는 영문 「파수대」 예약자였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 이후 ‘클레몽-페랑’은 ‘비시’ 정부하의 비점령 지구에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로 ‘에베네’ 자매는 독일군이 전 ‘프랑스’를 점령하였을 때인 1942년 11월까지 영문 「파수대」 잡지를 ‘브루클린’으로부터 계속 받았다. 하지만 이 영문 잡지가 어떻게 ‘파리’에 있는 ‘제이제’ 형제와 ‘데라노’ 형제에게 몰래 전달될 수 있었는가?

여호와께서 이 일을 위해 사용하신 도구는 한 겸손하고 소박한 형제 ‘엉리 제르무띠’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무렝’ 읍은 점령 지구와 비점령 지구 사이의 경계선상에 있었읍니다. 이 경계선은 독일군 보초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허가없이 통과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발포하였읍니다. 그러나 이 때의 경계선은 그 읍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였는데 그곳에는 독일어를 할줄 아는 한 ‘폴란드’ 자매가 살고 있었읍니다. 내가 그 자매 집을 방문하면 그 자매는 나를 앞서 집에서 나와서 보초의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리는 동안 나는 그 경계선을 넘어가곤 하였읍니다.

“그리고는 열차를 탔읍니다, 그러나 ‘파리’에 도착하기 전에 승객들은 전원, 남자들은 남자들에게 여자들은 여자들에게 수색을 받았읍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지점에서 그들이 이러한 수색을 시작하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지점에 도착하기 전에 열차가 속도를 늦추는 지점에서 뛰어내리곤 했읍니다. 나는 주로 밤에 여행을 하였으며, 열차에서 뛰어내린 후에는 새벽까지 숨어있다가 도보로 여행을 끝내곤 하였읍니다.”

일단 ‘파리’에서 「파수대」가 번역되면 ‘쟝드로’ 자매가 등사 원지를 ‘타이프’하여 그 사본을 등사할 수 있게 하곤 하였다. 그리고나서 사본들을 지방에 있는 형제들에게 전달하였다. ‘사무엘 농게알드’ 형제는 잡지가 어떻게 ‘프랑스’ 북부로 몰래 반입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능한 한 어느 때고, ‘파리’로부터 한 형제가 두 독일군 지구 사이의 경계선이 있는 ‘뻬론’ 읍까지 열차를 타고 왔읍니다. 또 다른 한 형제가 북으로부터 이 읍까지 여행하여 잡지는 ‘뻬론’ 역 ‘플렛포옴’에서 이 형제에게서 저 형제에게로 전달되곤 하였읍니다.”

물론 종이 공급이 제한되어 있고 통신 수단은 많은 위험이 뒤따랐기 때문에 전도인 한사람 한사람 모두에게 「파수대」 사본을 등사하여 보낼 수는 없었다. 생명을 무릅쓰고 전달원으로 활약한 형제들도 겨우 한두부만 휴대하여 숨길 수 있었다. 그러므로 「파수대」기사 한부가 특정 지역에 전달되어 전도인들의 작은 집단들이 중요한 영적 양식이 들어 있는 잡지를 적어도 각각 한 부씩 가지려면 복사를 많이 해야 하였다. 그 당시 ‘리용’ 지역에 살던 ‘디나프누이’ 자매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파수대’ 10부를 ‘타이프’하도록 임명되었읍니다. 나는 한번에 5장씩을 ‘타이프’할 수 있었읍니다. 다시 말해서 매 ‘파수대’를 두번씩 ‘타이프’해야 하였읍니다. 약 14면으로 되어있는 매호는 한칸만 띠어 ‘타이프’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매번 28면을 쳐야만 했읍니다.” 한호 ‘타이핑’을 가까스로 끝마쳐 놓으면 다음 호가 도착하곤 하였읍니다. 나는 이 일을 전쟁 기간 내내 해 냈읍니다. 각 집단은 「파수대」 기사를 한부씩 받았읍니다.”

형제들이 이러한 사본들을 얻는 데 있어서 흔히 직면했던 위험을 설명하는 한 예로 ‘스따니 시꼬라’ 형제의 경험담이 있다. 그는 ‘파리’ 교외 북부의 ‘쎙드니’에서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형제들 집단의 책임자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어느 날 아침 다른 집단에게 주려고 손으로 베껴 쓴 ‘파수대’ 한부를 가지고 가는데, 일단의 독일군들이 앞에서 누구나를 막론하고 정지시키고는 수색하는 것을 보았읍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갔었는데, 계속 천천히 타고 가기로 했읍니다. 나는 군인들의 첫 집단과 나란히 타고 갔는데 그들은 나를 정지시키지 않았읍니다. 나는 계속 매우 천천히 자전거를 몰았으며, 초소에 있는 군인들은 나를 통과 시켰읍니다. 나는 여전히 느린 속도로 자전거를 몰다가 그 다음 길모퉁이를 돌아서서는 굉장한 속력을 냈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사업을 보호하십니다.”

또 다른 배달 통로

독일이 1942년 11월에 ‘프랑스’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하자 ‘프랑스’나 ‘스위스’에서는 영문 「파수대」를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위스’ 지부는 ‘스웨덴’어 「파수대」 한부를 입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알리스 베르네’ 자매는 「파수대」 기사를 독일어로 번역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스웨덴’어를 신속히 배웠다. 이러한 독일어 번역물들은 ‘프랑스’로 반입되어 불어로 번역되었다.

‘프레드릭 아르뜨스땡’ 형제가 전쟁 기간중 ‘벨기에’의 사업을 맡고 있었으며 그는 ‘벨기에’와 ‘프랑스’간에 전달되었던 영적 양식을 구하는 체계를 조직했다. 국경은 폐쇄되었지만 철도에서 일하던 형제들과 직업상 그 두 나라 사이를 여행해야 했던 형제들이 이러한 귀중한 출판물들을 배달해 주었다. 그리하여 전쟁 기간 내내 이같은 방법으로 영적 양식이 배포되었다.

‘알사스-로렌’ 안팎에서

1940년 6월에 ‘뻬땡’이 독일과 휴전에 서명한 후 ‘알사스-로렌’은 독일에 합병되었다. 그것은 “점령 지역”으로 간주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일 연방의 완전한 일부분으로 간주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실제 경계 즉, 국경선이 ‘알사스-로렌’과 나머지 ‘프랑스’ 사이로 그어진 것이다. 따라서 ‘알사스-로렌’에 있는 형제들은 ‘파리’ 지하 사무실 관할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그러면, 그들은 전시에 어떻게 영적 양식을 공급받았는가?

‘나찌’가 ‘알사스’를 점령하였을 때, 그곳 형제들은 ‘프랑스’와 ‘알사스-로렌’을 분리시키는 ‘보우즈’ 산맥에서 「파수대」 사본을 입수하곤 하였다. 어떻게 그 산맥에서 잡지를 구하였는가? 우선, 뛰어난 등산가였던 ‘젱그레’ 형제가 ‘뮐루세’에서 독일 점령 ‘프랑스’ 지역인 ‘쎙-모리스’로 이사하였다. 그는 불어 「파수대」를 받고 있었는데 매달 첫 일요일이면 그 잡지를 가지고 산길을 오르곤 하였다. 그는 국경 보초병을 피하기 위하여 매우 가파르고 바위가 많은 ‘루우트’를 택했다. ‘알사스’쪽에서는 등산 복장을 한 형제들이 「파수대」를 받으려고 산으로 올라왔다. 그리하여 그 잡지는 지방 형제들에 의하여 불어에서 독일어로 번역되었으며, 그들은 이 일을 극비로 수행하였다. 그 다음 ‘알사스’ 형제들을 위해 ‘마르셀 그라프’ 형제가 사본을 등사하였으며, 결국 일부 사본들은 심지어 독일 집단 수용소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이 산을 통한 전달 ‘루우트’가 ‘프랑스’로부터 ‘알사스’ 내로 「파수대」를 들여오는 수단이었지만, 전쟁중 나중에는 ‘프랑스’ 형제들이 갖지 못했던 출판물들이 바로 이 ‘루우트’를 통해 독일로부터 ‘프랑스’ 내로 전달되었다. 그러나 만사가 항상 예정대로만 된 것은 아니었다. ‘마르셀 그라프’ 형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느 날 우리는 그 산으로 올라가려고 아내들과 함께 새벽에 출발하였읍니다. 날씨는 훌륭하였읍니다. 그러나 우리가 국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정상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히틀러’ 만세!” 하는 소리가 들렸읍니다. 독일군 국경 보초였읍니다. 그는 ‘어디로들 가는거요?’ 하고 물었읍니다.

“나는 ‘우리는 그저 등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읍니다.

“그는 우리를 수상하게 훑어보더니 ‘여기가 바로 국경 근처라는 걸 모르오?’ 하고 말하였읍니다.

“‘정말입니까?’ 하고 우리는 모르는체 하면서 대답하였읍니다.

“그는 재빨리 ‘만약 여러분들이 ‘프랑스’쪽으로 넘어갈 작정이라면 우리 총에는 실탄이 장진되어 있다는 것을 아시오!’ 하고 부언하였읍니다.

“우리는 약속한 지점쪽으로 걸어갔읍니다. 우리가 그 보초의 시야에서 벗어나자 마자, 우리는 ‘젱그레’ 형제 부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읍니다. 우리는 서로 기쁨에 넘치는 인사를 나누었으며, 몇마디 주고 받고는 우리가 가지고 갔던 간행물들도 교환하였읍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기도를 하고 헤어졌읍니다.”

‘시몬 아놀드’ 자매는 겨우 13살 때 귀중한 사본들을 전달하는데 사용되었는데, 그는 사본들을 자기 허리띠 속에 숨기고 다녔다. 한번은 그가 ‘아돌프 꼬헬’ 형제와 동행하는 동안 위기일발을 경험하였는데, ‘시몬’ 자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 세관 감시원이 우리를 막아 세우고는 가장 가까운 농장까지 자기를 따라오라고 명령하였읍니다. 나는 너무 겁이나서 실제로 복통이 일어났읍니다. 이 일은 정말 다행이었읍니다. 나는 농장에서 뜨거운 음료수를 얻어 마셨으며, 감추어 놓은 ‘파수대’를 지닌채로 가서 건초 위에 눕도록 허락되었읍니다. ‘꼬헬’ 형제와 나의 어머니는 수색을 받았지만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가까운 기차역까지 무사히 동행하게 되었읍니다.”

확실히 전달원으로 봉사한 이들 형제 자매들은 대단한 용기와 여호와께 대한 사랑을 나타냈었다. 그러나 형제들에게 배부될 수 있도록 간행물들을 등사하는 일에 참여한 사람들도 그러하였다. 어떤 환경하에서 이 일이 수행되었는가?

배부할 간행물을 준비함

‘아돌프 코헬’ 형제는 ‘알사스’의 ‘뮐루세’ 중심가 중앙역 부근에 이발소 하나를 갖고 있었다. 이 이발소는 5층 ‘아파트’ 건물의 1층에 있었으며, 그와 ‘그라프’ 형제는 각기 이발소 위 건물 내에 ‘아파트’를 갖고 있었다. 등사는 윗층에서 행해졌는데, 심지어 ‘코헬’ 형제가 아래층에서 군인들과 경찰들을 이발하고 있을 때에도 행해졌다! 얼마의 아슬아슬한 방문도 있었는데 ‘그라프’ 형제는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나찌’가 자기들과 ‘협력’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라디오’를 압수했을 때를 기억합니다. 나는 낡은 ‘아이스 박스’를 우유 배달부에게 팔아버렸는데, 그는 그것을 가지러 다음 날 들르겠다고 말했읍니다. 다음 날 아침, 내 아내는 부엌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었고, 나는 일부 등사 원지를 교정하고 있었읍니다. 갑자기 문에서 ‘노크’가 있었읍니다. 우리는 우유 배달부려니 생각하였기 때문에 아내는 문을 열었읍니다. 그 중 하나가 ‘경찰이오! 당신네가 가지고 있는 ‘라디오’를 압수해야 되겠소’ 하고 말했읍니다.

“나의 아내는 놀라움에서 냉철을 되찾고는 ‘빨리요!’ 하고 소리쳤읍니다. 그리고나서 아내는 그 세 경찰관에게 내가 아파 누워 있는데 가능한 한 빨리 옷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읍니다. 그렇게 하여 나는 등사 원지들을 챙겨서 침대 밑에 넣을 시간이 있었읍니다. 내가 그 일을 하기가 무섭게 그들은 아내를 옆으로 밀치고는 방 안으로 들어와서 ‘히틀러 만세!’ 하고 말했읍니다. 그들이 우리 ‘라디오’를 가지고 떠났을 때, 우리는 기뻐 어쩔줄 몰랐으며 다시 한번 우리를 보호해 주신 데 대해 여호와께 감사드렸읍니다.”

‘코헬’ 형제의 이발소에 정기적으로 이발하러 왔던 우호적인 한 비밀 경찰이 갑자기 그에게, ‘‘코헬’씨, 당신은 아직도 성서를 공부하고 있소?’ 하고 물었다. 그러나 그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그 비밀 경찰은 그에게 그가 감시받고 있으니 주의하라고 경고해 주었다. 그는 ‘코헬’ 형제에게 아직 어떤 금지된 출판물들을 가지고 있다면 서둘러 없애라고 충고하였다.

경고에 따라 ‘코헬’ 형제는 그의 이발소 마루밑 바닥을 뜯고 그 밑에다가 「파수대」를 감추었다. 이발하러 왔던 ‘나찌’들 중 자기들이 금지된 「파수대」지 뭉치의 불과 몇 ‘센티미터’ 위를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마루 밑 공간이 꽉 차게 되었다. 그러자 어떻게 하였는가?

‘코헬’ 형제는 멋진 생각이 떠 올랐다. 즉 이발소 창문이 물건을 숨기기에 좋은 장소가 될 것 같았다. 그리하여 등사 원지는 이발소 창문 측면 뒤에 숨겼고, 「파수대」는 진열창 안에 진열되어 있던 판지 간판 속에다 감추었다. 그리하여 전쟁중 상당 기간에 걸쳐 ‘나찌’들은 이발소 창문을 들여다 보면서도 마분지 안에 금지된 「파수대」지가 들어있는 것을 못 알아 본 것이다!

생명을 바친 전달원들

‘그라프’ 형제와 ‘코헬’ 형제는 비밀 경찰을 교묘히 피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다른 형제들은 그렇게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1943년에 ‘뮐루세’의 형제들은 독일로부터 정기적으로 「파수대」 사본들을 공급받고 있었는데, 그것은 ‘프라이부르크 임부라이스가우’로부터 두 형제에 의해 전달되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지역으로부터 더 이상 「파수대」가 도착하지 않았다. ‘마르셀 그라프’ 형제는 그 독일 읍으로 여행하여 그 두 독일 전달원들이 비밀 경찰에게 붙잡혀 도끼로 목베임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로부터도 「파수대」 사본들을 받고 있던 ‘뮐루세’에 있는 형제들은 그때부터 특별히 독일어판 「파수대」 사본들을 만들어서 독일 내로 갖다 주었다. 이처럼 영적 양식의 한 통로가 끊어지면 또 다른 통로가 열리고, 전쟁 기간 내내 그러했던 것이다.

‘알사스-로렌’에서의 지하 집회

조그마한 집회들이 정기적으로 열렸으며, 감독자들은 「파수대」 사본을 전도인들에게 공급하고 그들을 위로해 주곤 하였다. 이러한 집회에 올만한 용기가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간행물도 주어지지 않았는데, 이유는 그들은 신뢰할 수 없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쟉크 다네’ 형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집회가 매주 열렸는데, 다른 날,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열렸읍니다. 연중 계절에 따라서 우리는 숲 속이나 초원 혹은 집에서 모이곤 했는데, 흔히 탁자에 둘러 앉아 ‘커피’를 들었으며, 자매들은 변명 재료로서 뜨개질거리를 지참하고 있었읍니다. 비밀 경찰이 이러한 집회 도중 불시에 우리를 데려가는 일은 한번도 없었읍니다. 형제들은 그들의 책임을 받아들였으며, 집회 참석은 좋았읍니다. 집회가 우리 집에서 열릴 때면, 우리는 우리의 막내 딸을 마당에 남아있게 해서 만약 경찰이 오면 그 아이가 ‘엄마’ 하고 외치고 참석자들은 뒷 뜰을 통하여 나가곤 했읍니다.”

집단 수용소 안으로

1941년 9월, ‘뮐루세’와 그 주위에 사는 여러 형제들이 비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들 중에는 1938년 이래 ‘뮐루세’에서 회중의 종으로 일해 온 ‘프란쯔유베’ 형제와 ‘아돌프 아놀드’, ‘페르낭 살레’, ‘으젠 랑쯔’ 그리고 ‘뽈 도스만’ 형제가 있었다. 1941년말까지 이들 5명 모두는 독일 ‘뮌헨’ 근처에 있는 ‘다하우’ 집단 수용소로 보내졌었다.

거기서 그들은 징벌사(舍)에 배방되었는데, 거기서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그리고 ‘벨기에’ 증인들과 합류하였다. 1942년 4월경 ‘파란쯔유베’ 형제는 잔인한 대우하에서 점점 쇠약해지고 있었다. ‘아놀드’ 형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64세의 ‘프란쯔유베’ 형제는 힘을 점점 잃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자기를 지탱시켜 주던 희망을 표현하였으며, 그것은 일종의 놀라운 증거였다. 어느 날, 그가 사망하기 겨우 일주 전, 그는 나의 양팔을 꼭 붙잡고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겼오!’ 하고 말하였다.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아놀드’ 형제는 수용소 소장실로 불리워가, 그가 믿음을 포기하기만 하면 견사-‘스크리인’ 인쇄공으로서의 그의 전문 기술이 수용소 내에서 선용될 것이며, 그의 아내와 딸을 돌보아 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하기를 거절한다면, 그의 아내는 체포될 것이며 그의 어린 딸은 소년원에 보내질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물론 ‘아놀드’ 형제는 거절했다. 그리하여 그는 수용소 의사에게 넘겨져 ‘말라리아’와 ‘발진티푸스’균을 시험하기 위한 인간 실험 재료로 사용되었다. 그는 살아 남았다. 그러나 그가 살아 남은 것은 자기 아내가 보내준 음식 꾸러미 덕분이라고 하였다. 이 꾸러미들에는 특식이 들어 있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어느 날, 그 꾸러미들 중 하나를 끌러 먹는데 무언가 딱딱한게 씹혔읍니다. 그것은 ‘셀로판’지에 싸인 조그마한 두루마리였읍니다. 그 종이는 깨알같은 글씨로 가득 차 있었읍니다. 그것은 축소된 형태의 ‘파수대’ 기사였읍니다. 물론 내 아내가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가 체포되어 추방된 후에는 처제인 ‘월터’ 자매가 ‘뮐루세’의 ‘코헬’ 형제의 도움으로 이 위험한 통신을 계속하였읍니다. 이처럼 이들 음식 꾸러미 속에는 영적 ‘비타민’이 들어 있었읍니다!”

자녀들이 시험을 받다

이 무서운 박해 기간 동안 자녀들에게는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나찌’가 어린이들에게 가한 격심한 시험하에서도 그들이 충실함을 유지할 것을 기대할 수 있었는가?

학교 수업이 시작될 때마다 독일 국가를 부르고, 총통을 위해 기도해야 하였으며, 어린이들은 오른 팔을 위로 뻗치면서 “‘히틀러’ 만세!” 하고 외쳐야 하였다. 그러나 여덟살의 ‘룻 다네’와 같은 ‘증인’ 자녀들은 거절하였다. 그 아이는 교장과 다른 모든 선생들 앞으로 불리워가 심문을 받았지만, 그는 자기 부모를 핑계로 삼지 않았다. ‘쟈크 다네’ 형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매일 그애가 학교에 가기 전에 우리는 함께 기도하였으며, 그가 심문을 받기 전에 재빨리 여호와께 영과 도움을 구하도록 조언해 주었읍니다.” ‘룻’은 후에 자기 부모와 함께 추방되어 여섯개의 각기 다른 독일 수용소들에 억류되었었다. 전쟁 후 그는 ‘파이오니아’가 되었으며, 미국에 있는 ‘길르앗’ 선교인 학교를 제 21기로 졸업하였다.

또한 ‘아놀드’ 형제의 딸 ‘시몬’도 “‘히틀러’ 만세!”를 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등 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그는 다른 학교로 보내졌다. 그곳에서도 이내 문제를 겪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매주 군수품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낡을 파편 금속을 가져오는 것이 아이들에게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소년 재판소에 회부되어 독일 ‘콘스탄트’에 있는 소년원으로 보내졌는데, 거기서 그는 22개월 동안이나 ‘나찌’ 사상을 교육받았다. 그러나 그는 성실을 지켰다! 후에 그도 ‘파이오니아’가 되었으며, ‘길르앗’ 학교를 졸업하고 ‘아프리카’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다가, 당시 ‘브루클린 벧엘’ 가족의 한 성원인 ‘맥스 리브스터’와 결혼하였다.

죽음 앞에서도 중립을 고수함

1942년 8월에 ‘알사스-로렌’의 젊은이들은 ‘히틀러’ 군대에서 복무하도록 징집되었다. ‘프레예르무뜨’, ‘오페’ 그리고 ‘슈떼’ 형제를 비롯하여 일부 증인들은 생명을 바쳐 중립을 지켰다. 23세의 ‘마르셀슈떼’ 형제는 독일 ‘토르가우’ 교도소에서 도끼로 목베임을 당하기 몇시간 전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나의 사랑하는 부모님 그리고 누이들.

“이 편지를 받으실 때면 저는 더는 산 사람이 아니겠군요. 제가 처형당할 때까지 이제 겨우 몇 시간 밖에 남지 않았읍니다. 부탁드리겠읍니다. 강하고 담대하세요. 그리고 울지 마세요. 저는 이겼으니까요. 저는 행로를 마쳤고, 믿음을 지킨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를 끝까지 도와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까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읍니다. 곧 우리는 평화와 의가 깃든 더 나은 세상에서 다시 서로를 보게 될거예요. 저는 그 날에 대한 생각으로 즐겁기만 합니다. 그 때는 슬퍼하는 일이 더는 없을테니까요. 그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어요! 저는 평화를 갈망합니다. 이 최후의 몇 시간 동안 저는 우리 가족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읍니다. 가족들에게 작별의 입맞춤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제 마음을 다소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이름을 옹호하시고, 모든 피조물에게 당신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입증하실 때가 가까왔으니까요. 이제 저의 마지막 몇 시간을 그분께 바치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 편지는 여기서 줄이고 우리가 곧 다시 만날 때까지 작별 인사를 해두어야겠군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를 높이 찬양할지어다! 저의 따뜻한 사랑과 인사를 전하며,

여러분이 사랑하는 아들이며 오빠인

‘마르셀’”

자매들도 수용소에 갇히다

1943년에는 ‘알사스-로렌’의 자매들이 체포되기 시작했으며, 많은 수가 ‘알사스’의 ‘쉬르메크-보르부르크’ 집단 수용소로 보내졌다. ‘아놀드’ 자매는 성서 한권을 몰래 숨겨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체포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도덕한 여자들을 위해 만든 특수한 ‘코르셋’ 하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공기로 부풀릴 수 있도록 고안된 주머니가 하나 달려 있었읍니다. 나는 이 주머니 속에 조그마한 성서 한권을 감추었읍니다. 그들은 나를 교도소로 데리고 가서 옷을 벗으라고 하였읍니다. 그러나 여 검열관은 이 번거로운 ‘코르셋’을 보자 ‘하 참! 그것을 전부 벗길 시간은 없오!’ 하고 말했읍니다. 이렇게 해서 여호와의 덕분으로 나는 여러 달 동안 우리가 얻을 수 있었던 유일한 영적 양식을 ‘쉬메르크’ 집단 수용소 내로 들여갈 수 있었읍니다. 나는 이 작은 성서를 그 수용소 내의 자매들 수 만큼 여러 부분으로 나누었읍니다.”

많은 자매들이 그 무시무시한 ‘라벤스 브뤼크’ 집단 수용소를 포함하여 독일의 집단 수용소들로 이감되었다. 이처럼 노소를 막론하고 많은 형제 자매들이 격렬한 시련하에서도 성실을 증명하였으며, 일부는 그들의 생명으로 충성을 입증하였다. 참으로 ‘알사스-로렌’에서의 ‘여호와의 증인’의 현대 역사는 여호와의 이름에 영예를 돌린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도 격렬한 시험을 인내하다

그 밖의 ‘프랑스’ 지역에 있는 형제들도 성실을 지키고 있었다. 전쟁초 ‘프랑스’ 당국은 여러 ‘폴란드’ 형제들을 체포하여 ‘프랑스’ 남부 ‘르 베르느’ 포로 수용소로 보냈다. 여기서 그들은 국기 경배를 거부한 이유로 구타당하였으며, 그들 중 ‘프랑소와 바란’ 형제는 사망하였다. 이들 두려움없는 많은 ‘폴란드’ 형제들은 결국 ‘나찌’ 집단 수용소에서 죽었다. 여러 교도소 혹은 수용소를 거친 그들 중 한 사람 ‘루이 삐에쇼타’ 형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는 1944년 봄에 ‘포그투’ 수용소에서 ‘작센하우젠’으로 이감되었읍니다. 여기서 우리는 독일 형제들을 만나는 커다란 즐거움을 맛보았는데, 그들 중 일부는 1933년 이래 줄곧 구금되어 있었읍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소중한 도움을 베풀어 주었읍니다. 호송대가 수용소에 도착하자 마자 독일 형제들은 혹시 그들 중 ‘증인’이 끼어 있지 않느냐고 신입자들에게 묻곤 하였읍니다. ‘증인’들이 있었을 때, 그들은 즉시 우리를 도왔읍니다. 때때로 따뜻한 내의나 통 ‘스웨터’ 혹은 일부 형제들이 식당에서 일하였으므로 간수들의 식사로부터 얼마의 남은 음식을 받는 경우도 있었읍니다. 어느 날 한 형제는 나에게 성서 한권을 가져다 주었읍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독일 집단 수용소에서 ‘프랑스’ 성서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그것을 구했는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읍니다. 이 성서는 나를 매우 행복하게 해주었읍니다. 형제들은 정기적으로 「파수대」를 받아 보았읍니다. 형제들은 영적으로 양육받았으므로 영적으로 강건하였읍니다.

“후에 나는 수용소 제빵소에서 일하도록 임명되었읍니다. 독일 형제들은 나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면 빵 한 조각이라도 가지고 나오지 말라고 권하였읍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조직에 모독을 돌리느니 차라리 굶어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였읍니다. 이 충고는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읍니다.”

1938년에 ‘파이오니아’가 된 다음 ‘파리 벧엘’ 발송부에서 일하던 ‘쟝 꿰로와’ 형제도 여러 교도소와 독일 수용소를 거쳤다. 그는 이렇게 구금되어 있던 곳들에서도 영적 힘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나는 어느 수용소에 있게 되든지 최선을 다해 증거를 하였읍니다. 예를 들면 동‘프러시아’의 한 수용소에는 수감자들에 대한 지시 사항들을 알리는 게시판이 하나 있었읍니다. 나는 날마다 이 게시판 한 귀퉁이에다 일부 성서 제목에 대한 증거를 기록한 종이 쪽지를 핀으로 꽂아놓곤 하였읍니다. 관심가진 수감자들이 나를 만나러 왔으며, 나는 저녘마다 6명, 8명 혹은 심지어 10명의 수감자들과 함께 조그마한 집회를 보곤 하였읍니다.

나는 영적 양식없는 상태에 있게 되지 않았읍니다. 내 누이가 아주 얇은 종이에다 ‘파수대’ 기사를 ‘타이프’로 쳐서 돌돌말아 ‘마카로니’ 속에 숨겨 보내곤 하였읍니다. 이러한 소포들이 간수들의 검열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어떠한 일이 진행되고 있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읍니다. 나는 「어린이들」 책까지도 이런 방법으로 받았읍니다.”

이처럼 비록 독일과 ‘알사스-로렌’에 있는 형제들보다는 덜 했지만 ‘프랑스’ 형제들도 박해를 받은 것이다.

점령 기간중의 도움

금지령과 독일의 점령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이 거리에서 몇 집을 방문한 다음에 저 거리로 몇 집을 방문하는 식으로 성서만 가지고 계속 전파하였다. 그리고 누군가 진정으로 관심을 보이면 그들은 간행물을 가지고 재방문하곤 하였다. 그러나 다음 ‘알버트 코르말스키’ 형제의 경험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조심성을 보여야만 했으며, 여호와의 천사들이 돕고 있었다.

“‘하인리히’라는 사람이 독일어판 「구출!」 책과 「창조」 책 두권을 주문했다. 내가 약속대로 그의 집을 방문하자 그는 내게 손님들이 있으니 한 시간 후에 다시 와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다른 관심자를 방문하기 위해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는 내게 윗층에 다녀 왔느냐고 하면서 ‘하인리히’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그는 ‘알사스’ 사람이고 진리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였다.

“‘아닙니다, 그는 비밀 경찰에 소속되어 있읍니다. 그리고 그는 오늘 당신을 체포할 계획입니다. 그래서 수위[관리인]에게 당신이 이 집을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시켜 놓았읍니다.’ 하고 그 사람이 대답하였읍니다.

“이 신사는 나를 조용히 아래로 데리고 가, 뒷문으로 그 집을 빠져나가게 해주었다. 나는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구출해 주신 여호와께 감사드렸다. 전쟁 말엽에 ‘하인리히’는 거리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원들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사실, ‘프랑스’ 당국은 ‘나찌’ 점령 기간중 ‘여호와의 증인’에게 매우 관대하였다. 그들은 때로는 도와주기까지 하였다. ‘디낭’의 ‘아우구스트 블라스’는 이렇게 보고한다.

“누군가가 독일군 사령관에게, 우리 집에 서적 재고가 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 결과 수색 명령이 내려졌으며, 이 일은 그 지방 ‘프랑스’ 경찰 서장과 통역관 한명의 안내로 독일 당국이 수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 경찰 서장은 서적이 우리 집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독일군들을 우리 집으로 안내하는 대신, 그는 그들을 우리 회중의 종인 ‘마리우스 농게알드’ 집으로 데려갔는데 그들은 거기서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처럼 이 호의적인 ‘프랑스’ 경찰 서장은 내가 집단 수용소로 보내지지 않도록 구해 주었다.”

비슷한 예를 하나 더 들자면, 독일군이 ‘쎙-르-노브르’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왕국회관을 자기들이 사용하려고 강제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연단 아래 침례 ‘탱크’에는 독일어판 서적 「그리스도교와 싸우는 십자군」을 포함하여 서적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래서 형제들은 ‘쎙-르-노브르’ 시장을 찾아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만일 독일군이 이 서적들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그들과 지방 당국 사이에 좋지 않은 관계를 야기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 시장은 독일군에게 자기가 이 회관을 지방 학교를 위해 필요로 한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 회관은 교실이 되었으며, 무엇보다 이상한 일은 한 증인 교사가 그곳 교사로서 일하도록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 지방 ‘프랑스’ 당국은 이처럼 그러한 방법으로 종종 형제들에게 도움이 돼주었다. 예를 하나 더 들자면, 「‘파시즘’ 혹은 자유」라는 소책자 상자를 자전거에 싣고 가던 ‘프랑스’ 북부의 한 형제를 ‘프랑스’ 경찰 검열관이 정지시켰다. 그 검열관은 그가 가지고 가는 것이 무어냐고 물었다.

“상자를 열어 직접 보십시오” 하고 그 형제가 대답하였다.

그 검열관이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이 책들을 가지고 어쩌려는거요?” 하고 그 형제에게 물었다.

그 형제가 그에게 훌륭히 증거를 하자 그 검열관은 그를 가 보라고 하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붙들리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하였다.

지하 인쇄

전시중 ‘프랑스’ 형제들의 주목할 만한 업적 중 하나는 「어린이들」 책의 지하 인쇄였다. ‘사무엘 농게알드’ 형제는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시중 배급제였던 얼마의 종이를 구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 동쪽 수 ‘킬로미터’ 떨어진 한 작은 도시인 ‘쒜느비애르-슐-말드’에 있는 어느 인쇄소에서 인쇄할 준비가 되었다.

‘사무엘’은 이렇게 보고한다. “내가 가서 「어린이들」 책들을 가져오던 그 날, 돌아오는 길에 경찰이 나를 정지시켰읍니다. 때는 1943년 5월이었읍니다. 그들은 ‘트럭’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물었읍니다. 나는 그들에게 책을 운반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읍니다. 그들은 책들을 조사하고는 무엇에 관한 책이냐고 물었읍니다. 마침 그 때 ‘가톨릭’교인 부모들이 자녀들을 첫 성찬식에 데려가고 있었읍니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들에게 예수를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하고 대답했읍니다. 이 설명이 그들을 만족시켜준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내가 가도 좋다고 하였읍니다.”

야외 봉사 보고

‘프랑스’의 전쟁 기간중 형제들은 야외 봉사 보고를 보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지시와는 달리 한 연로한 자매가 엽서에다 평소에 사용하는 약자를 써서 보고를 보냈다. 이것이 한 독일 비밀 기관원의 호기심을 자아냈다. ‘로버트 졍’ 형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느 날 내 친 형제인 ‘오거스트 샤레뜨’ 형제와 저녁을 먹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읍니다. 한 ‘프랑스’ 비밀 순경이었읍니다. 그는 분명히 우리를 ‘레지스탕스’ 운동 대원이라고 생각하였읍니다. 어쨌든 그는 이 문제에 관하여 독일 비밀 경찰을 만족시킬 만하고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게할 만한 보고를 보낼 수 있도록 자기를 도와 달라고 요구하였읍니다. 그는 우리가 어떤 해명을 생각해낼 시간을 갖도록 다음 날 다시 오겠다고 제의했읍니다.

“약속한대로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와서, 우리가 준비한 해명서를 읽었읍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편 성서 ‘게임’이며 약자와 수자는 답이 들어 있는 성서 책들과 귀절들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하였읍니다. 그는 이 해명에 대단히 만족한 것 같았으며, 그가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협조해 준 것을 고마워 했읍니다. 그는 돌아갔고 우리는 더는 그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읍니다.”

야외 봉사 보고는 결국 모두 ‘파리’ 부근의 세 주소로 보내졌는데 즉 ‘제이제’ 형제와 ‘데라노’ 형제에게 혹은 ‘벧엘’집에 살고 있던 ‘르네 장드로’ 자매 앞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형제들과 우리 간행물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1939년 10월에 경찰에 의해 폐쇄되었던 ‘파리’ 사무실로 너무나 자주 편지를 보내왔다. 그래서 ‘장드로’ 자매는 그곳 관리인을 만나러 들르곤 하였으며 이 부인은 협회를 위해 도착한 우편물은 무엇이든 이 자매에게 주곤 하였다. 비밀 경찰이 증인들에 관하여 물으면 이 관리인은 그들에게, 자기는 책임을 맡고 있는 남자(‘네흐트’ 형제)만 알고 있을 뿐인데 그는 사망하였다고 말하곤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 선한 부인이 전시 전 기간에 걸쳐 자기 생명을 무릅쓰고 협회와 형제들을 보호해 주었다.

전시(戰時)의 대회들

1942년초와 독일 점령 전 기간에 걸쳐 조그마한 지방 대회들이 열렸다. 이러한 대회는 ‘제이제’ 형제나 ‘데리노’ 형제에 의해 마련되었다. ‘오거스트 샤레뜨’ 형제와 ‘로버트 졍’ 형제도 ‘프랑스’ 남부의 격지 회중들과 전도인들을 방문하였다. 이러한 대회들과 특별 방문중에 침례식이 있었다.

1943년에는 ‘리용’의 한 교외인 ‘베니시우’에서 지하 대회가 열렸는데 근 100명이 참석하였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러한 행사들은 형제들에게 위안과 힘의 근원이었다. 물론 이러한 모든 활동들은 상당한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되었다.

한 미군 병사가 제자를 삼다

1944년 ‘프랑스’는 해방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비록 ‘프랑스’를 가로 지르는 전투가 새로운 난관을 초래하긴 했어도 ‘프랑스’ 형제들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파 사업은 아주 묘하게 해방군의 한사람에 의해서까지도 계속되었다.

‘프랑스’ 동북 지방 ‘비뗄’에 사는 ‘수잔 뻴렝’은 1944년 9월 어느 날 저녁에 자기 집 창가에 앉아 있었는데, 그 때 한 미국인 병사가 멈추어서 서투른 불어로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수잔’은 “하나님은 사랑하지만 종교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 병사는 자기가 그의 남편을 만나러 다시 방문해도 좋으냐고 묻고는 실제 방문하였다.

‘뻴렝’ 자매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렇게 해서 ‘리차드 보켈’(그는 징집되기 6개월 전에 진리를 배웠음)이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 주었읍니다. 그는 군복을 입고 전파하였지만, 국기 경배를 거절하였는데, 그로 인해 그는 끊임없이 형벌을 받았읍니다. 그는 ‘비뗄’ 읍 전역에서 열심히 전파하였으며 「창조」, 「구출!」, 「빛」, 「적」 및 「여호와」와 같은 서적들을 배부하였읍니다. ‘리차드’는 우리를 ‘낭시’의 회중의 종인 ‘에밀 에르망’ 형제와 접촉시켜 주었으며, 나중에 그 형제는 자기 아내와 함께 우리를 방문하였읍니다.”

소식이 ‘브루클린’에 전달되다

1944년에 ‘프랑스’의 신권적 활동에 관한 소식이 분명히 ‘브루클린’에 전달되었다. 여러 해 동안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었다. ‘노워’ 형제는 「1945년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파리’의 전 가족들이 무사하며 그들이 아버지의 사업에 분주하다는 소식이 입수되었다. ·⁠·⁠· 형제들은 앞으로 그들과 본부 사이의 통신이 완전히 개시되어 진리의 소식이 ‘프랑스’ 전역에 자유로이 이를 수 있게 될 때를 고대하고 있다.”

전후의 재편성

1945년 ‘나찌’ 정권이 붕괴되고 전쟁은 끝났다. 공정 가격이 있는 생활 필수품은 희귀하였으며, 암시장에서는 지나치게 비싸 ‘프랑스’의 생활 형편은, 극히 어려웠다. 적들이 비옥한 토지를 빼앗았으며, 도로와 철도를 파괴하고 통신 시설을 마비시켜 놓았다. 그러한 환경의 와중에서 육적으로는 허약했지만 영적으로는 강한 형제 자매들이 집단 수용소에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한층 더 어려움을 준 것은 ‘프랑스’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사업이 여전히 정부의 금지령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군들이 사라지자 여행과 우편 통신이 훨씬 용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회중들과 ‘제이제’ 형제에 의해 관리하던 지하 ‘파리’ 사무실 사이에 보다 나은 연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제이제’ 형제와 ‘데라노’ 형제는 ‘프랑스’ 전역의 회중들을 방문하는 긴 여행을 하였다.

1945년 ‘벧엘’ 가족은 ‘제이제’ 형제와 세 자매 그리고 다른 한 형제를 포함하는 다섯명으로 구성되었다. 더우기 ‘에밀 데라노’가 사는 집은 ‘파리’의 정남쪽인 ‘알뀨이’에 있었다. 서적 재고는 ‘파리’의 다른 교외에 숨겨 두었으며 거기에서 발송부가 일하였다.

「파수대」는 외부 인쇄 공장에 의해 「에뜌드 비브리끄」(성서 연구)라는 이름으로 발행되고 있었다. 거기에서 「파수대」가 불어로 2,300부, ‘폴란드’어로 1,200부 그리고 독일어로 500부가 발행되고 있었다. 이것은 형제들이 기사를 손으로 베껴쓰는 귀한 시간을 많이 절약해 주었다.

1945년에 ‘폴란드’ 광부인 ‘프랑소와 위스니위스키’ 형제는 뜻깊은 경험을 하였다. 어느 날 직장에서 식사 시간중 그는 한 젊은이가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기 위해 보호용 가죽 ‘헬멧’을 벗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랬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증거를 하였고, 그 사람은 진리를 신속히 받아들였다. 그의 이름은 ‘레오뽈 종떼’였으며 나중에 그는 ‘프랑스’ 지부의 종이 되었다.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가 방문하다

1942년 1월에 점령 지역과 비점령 지역 양쪽 ‘프랑스’ 보도 기관은 ‘러더포오드’ 형제의 사망을 알리는 급보를 실었다. 그의 사망과, 후임에 ‘나단 H. 노워’ 형제가 되었다는 소식이 1943년에는 ‘다하우’ 집단 수용소에까지도 전해졌다. 그러면 ‘노워’ 형제는 도대체 누구인가?

‘프랑스’ 형제들은 1945년 11월 17일, 그와 처음으로 개인적인 접촉을 할 수 있었다. 그 때 그와 그의 비서 ‘밀튼 헨첼’이 ‘파리’에 잠간 들렸다. 이 방문은 단지 몇 시간에 불과했지만 사업을 재조직하고 그것을 합법적 기반 위에 두는 문제를 토론할 얼마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날 밤 ‘노워’와 ‘헨첼’은 ‘베른’행 열차를 타야만 했으나 다시 올 것을 약속하였다.

11일 후인 11월 28일 아침에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 그리고 그들의 통역자인 ‘알프레드 뤼티만’ 형제가 동‘파리’ 역에 도착하여 ‘엉리 제이제’ 형제와 그의 아들의 마중을 받았다. ‘파리’ 소재 미국 대사관과 미국 상업 회의소 그리고 최종적으로 변호사를 방문하는 일이 있었다. 기억하겠지만 1939년 10월에 내무상의 명에 따라 ‘프랑스’의 사업이 금지되어 왔었다. 따라서 우리의 사업의 합법적인 승인을 얻기 위하여 이 문제를 올바른 경로를 통하여 다루어야 하였다.

그날 저녁 ‘노워’ 형제는 통역자를 통하여 1시간 45분 동안 21명의 ‘파리’ 형제 자매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모두가 매우 열중하였으며, 봉사의 특권에 대한 즐거움을 표하였다. ‘노워’ 형제는 그들에게 의복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는 형제들에게 그러한 물질적 도움이 크게 필요함을 즉, 그들의 의복은 낡아 헤어져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 결과 이 의복이 도착하였을 때에 대하여 ‘제이제’ 형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75개의 상자에 담겨 도착한 이 약속된 구호품—남녀 그리고 어린이들을 위한 의복 8‘톤’—은 형제들에게 분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물을 손에 쥐고는 눈물을 글썽하였으며, 모두가 이러한 참 그리스도인 선물에 대하여 미국 형제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리하여 많은 형제들이 다가오는 겨울의 복음 전파 사업을 위해 더 나은 장비를 갖추게 되었었다.”

전쟁 기간중 감소하였는가?

당신도 기억하듯이 전쟁이 시작된 1939년에 ‘프랑스’에서는 1,004명의 왕국 전도인 신기록에 달했었다. 확실히 그 어려운 전쟁 기간중에는 감소되었어야 하였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1945년 10월의 전도인 수는 2,003명으로 두배나 되었다. 게다가 당신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들 새로운 전도인들은 자유를 내걸고, 아니 심지어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쓰고 전도 봉사를 시작한 것이다!

기념식 참석자 수 역시 1939년의 1,510명에서 1945년의 3,644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와 같이 1939년의 총 전도인 1,004명에 도달하기까지는 거의 40년의 활동이 걸린 반면, 겨우 6년 동안에 그것도 제 2차 세계 대전의 그 어려운 기간에 그 수의 두배가 된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 현대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에 있어서 특출한 사실로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축복하셨음을 입증해 준다.

금지령—어떻게 되었는가?

1946년 비록 금지령이 여전히 발효중이었지만 전파 사업은 계속 전진하였다. 처음에 형제들은 단지 성서만 가지고 호별 방문을 하였다. 그들을 돕기 위하여 1946년에는 순회 사업도 조직되었다. 그 당시에는 순회구가 두개뿐이었는데, 독일 수용소 생활을 한 두명의 형제 ‘뽈 도스만’ 형제와 ‘장 꿰로와’ 형제가 그 순회구들을 돌보았다. 형제들은 두명의 “형제들의 종”—그때는 순회 감독자들을 그렇게 불렀다—에 의한 이러한 방문을 대단히 감사히 여겼다. 그러나 금지령으로부터 풀려나기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었는가?

1945년 11월의 방문중, ‘노워’ 형제는 한 영향력있는 ‘프랑스’ 변호사인 ‘매트른 삐애르 지드’를 만났었다. 그러나 이 변호사의 노력은 성과가 없었다. 그리하여 ‘프랑스’ 형제들은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알아 보기로 하였다. 1946년 가을에 그들은 일을 지체시키면서 이 사업의 합법적 승인을 방해하고 있는 여러 관직에 있는 책임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계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947년 사태는 여러 ‘프랑스’ 정부 기관에서 여전히 수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파리’ 형제들은 현대 ‘프랑스’ 사회당과 그 기관지 「르 뽀쀼레르」의 창시자인 ‘프랑스’의 유명한 정치가 ‘레옹 브븀’이 전쟁중 독일 집단 수용소에서 ‘여호와의 증인’과 함께 지냈으며 증인들에 대한 탄복을 표했었음을 알게 되었다. 비록 ‘레옹 브븀’은 직접적인 정계 활동에서는 물러났지만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계의 원로 중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따라서 형제들은 그의 후원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은 그가 병석에 있어, 어떠한 손님도 맞을 수 없으며, 게다가 그의 주소는 사람들이 그에게 편지하지 못하도록 비밀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형제들은 ‘레옹 브븀’의 자가용 운전수가 우편물을 가지러 매일 「르 뽀쀼레르」 사무실에 들린다는 것을 알아냈다. ‘브븀’ 선생 앞으로 협회의 문제를 설명하는 편지가 작성되어 그의 자가용 운전수에게 직접 전해졌다. 수일 후 ‘파리’ 형제들은 그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그는 기꺼이 도울 것이며, 이미 우리의 사업에 대한 금지령 해제를 추천하는 서한을 정부에 보냈다고 하였다. 그 결과 1947년 9월 1일, ‘프랑스’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사업은 다시 합법적으로 인가를 받게 되었다.

새로운 ‘벧엘’집과 사무실

사업의 조직을 촉진시키기 위해 ‘노워’ 형제는, ‘앙지엥-레-뱅’에 있는 집을 팔아서 그 돈으로 ‘파리’에다가 ‘벧엘’ 가족이 거주하고 사무실로 사용하기에 충분하리만큼 큰 집을 매입하라고 지시하였다. ‘제이제’ 형제는 ‘파리’ 16구 ‘뚜르’ 가 83번지 ‘빌라 규벨’ 3에 위치한 조용한 ‘파리’ 주택가에 적당한 집을 한 채 발견하였다. 이렇게 해서 1947년 10월 1일에 ‘프랑스’ 협회 공식 주소가 이곳으로 옮겨졌다. 처음에는 ‘제이제’ 부부를 포함하여 총 여덟명이 이 새로운 ‘벧엘’에서 일하였다.

‘브루클린’ 방문객들과 함께 즐긴 대회들

금지령이 내려진 이래 8년간은 정식으로 공개 대회를 한번도 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80‘퍼센트’나 되는 형제들이 그러한 모임에 한번도 참석해 본 일이 없었다. 왜냐 하면 그들 대부분이 전시 혹은 전후에 진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947년 ‘리용’ 시와 ‘스트라스부르’ 시, ‘파리’ 시 그리고 ‘듀에’ 시에서 열린 대회에 자유롭게 함께 모인 6,500명을 보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는 물론 ‘프레드릭 프랜즈’, ‘그랜트 수터’, ‘헤이든 카빙튼’ 형제를 포함하여 ‘브루클린’ 본부로부터 온 손님 연사들을 맞이하는 일은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두명의 충성스러운 종의 사망

‘프랑스’에서 다시 「파수대」 잡지를 정기적으로 받을 수 있는 마련이 이루어졌을 때, 회중들을 방문해 왔던 ‘도스만’ 형제와 ‘꿰로와’ 형제는 발송부를 조직하는 일을 돕도록 ‘벧엘’로 초대되었다. 그리하여 ‘에밀데라노’는 그가 이전 여러 해 동안 종종 했었던 것처럼 회중들을 방문하도록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에게 마지막 여행이 되고 말았는데, 그는 병에 걸려 1948년 8월 5일에 사망하였다. ‘데라노’ 형제는 그의 아내 ‘마리’와 함께 약 40년간 ‘프랑스’에서 여호와를 충실히 섬겨 왔었다.

그보다 꼭 일년 전에 ‘아돌프 웨버’도 여호와께 충실했던 그의 지적 행로를 마쳤었다. 당신은 그가 약 반세기 전에 ‘프랑스’에서 사업을 시작한 ‘스위스’ 형제였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몇번이나 불어를 사용하는 밭을 뒤흔든 시험의 폭풍들을 헤쳐 나가도록 ‘프랑스’ 형제들을 도왔었다. ‘웨버’ 형제를 알았던 ‘프랑스’ 형제들 모두는 그가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며, ‘프랑스’ 사업 발전에 있어서 그가 수행한 중요한 역할을 인식하고 있다.

지하 집회가 다시 부상하다

1939년 이래 형제들은 보다 작은 가족 집단으로 모였었다. 그러나 1947년 초에는 회중들이 집회를 보기 위하여 회관을 빌렸다. 그 때 ‘파리’에는 회중이 세개 있었다. 왕국회관에서 집회가 다시 시작됨에 따라 얼마의 뜻밖의 일들이 있었다. ‘말세르 말로렙스지’ 자매는 ‘프랑스’ 동부 ‘베장송’에서 있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업은 이제 다시 자유로와졌읍니다.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첫 집회 때 사람들은 왕국회관에서 서로 만나 그들이 ‘증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읍니다. 이를 테면, 한 식료품 상인은 단골 손님 중 얼마가 그의 형제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읍니다. 한 헌병 딸은 이전 주일 학교 선생을 회관에서 만났읍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모였을 때 느꼈던 즐거움은 이루 다 묘사할 수 없읍니다. 첫 집회에 약 80명이 참석하였읍니다.”

‘파이오니아’ 봉사가 재개되다

1947년 ‘프랑스’에는 비록 2,380명의 전도인과 104개의 회중이 있었지만 ‘파이오니아’는 단 한명도 없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1947년 9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업이 합법적 승인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1947년 12월에 불어판 「통보」(「우리의 왕국 봉사」)에는 ‘파이오니아’들을 구한다는 기사를 실었는데, 그 이듬 해에 좋은 반응이 있었다.

1948년 1월에 ‘시몬 아놀드’ 자매를 포함하여 여덟명의 열성스런 증인들이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다. 8월까지는 20명의 임시 ‘파이오니아’를 포함하여 총 96명의 ‘파이오니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증거를 하는—노소를 막론한 독신과 기혼 형제 자매들—‘증인’들로 이루어진, 행복하고 용감한 무리를 형성하였다. 그 당시 ‘프랑스’의 90개 현 가운데 60개 현에 ‘여호와의 증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파이오니아’ 봉사는 이 나라 여러 지역에서 사업을 개척하는 데 필수불가결하였다.

1948년에 ‘파이오니아’들은 49개의 각기 다른 읍에서 일하였는데, 그 중 어떤 곳에는 ‘증인’이 한명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격지 전도인 집단이 있는 곳으로 보내졌다. 이렇게 해서 주로 그들의 부지런한 노력과 여호와의 축복으로 회중 수는 1947년의 104개에서 1950년에는 150개로 불어났다.

순회 사업이 시작되다

1948년초에 ‘프랑스’ 회중들을 방문하던 “순회의 종”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였다. 따라서 모두 20대인 다섯명의 열성스런 젊은 ‘파이오니아’들 즉 ‘레오뽈 종떼’, ‘앙또안 스칼레키’, ‘프랑소와 박진스키’, ‘레이몽 토마스 제위스키’ 그리고 ‘따데 말리나르스키’가 ‘벧엘’로 초대되어 이 봉사의 임무를 잘 알게 되었다. 1948년 10월 1일에 그들은 회중들을 섬기기 시작하였다.

이들 젊은 형제들이 맡은 순회구들은 컸다. 그리고 그 당시 ‘프랑스’의 대부분의 ‘증인’들은 가난하였고, 조그마한 집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불편한 생활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만 하였다. 그들이 독방에서 자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그들 중 아무도 자동차 한대도, ‘오오토바이’ 한대도 살 여유가 없었다.

기념식과 대회

1948년 ‘프랑스’에서 행해진 기념식은 1939년의 기념식 이래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열린 것이었다. ‘파리’ 지구 형제들은 남쪽 교외의 ‘크레믈린-비세뜨르’에서 빌린 커다란 ‘호올’에 모두 함께 모였다. 그 당시 대 ‘파리’ 시의 10개 회중에는 300명 미만의 전도인 밖에 없었지만 약 500명이 참석하였다. ‘프랑스’ 전역에서 5,912명이 참석하고 407명이 표상물을 취하였다.

1948년에 10개의 지역 대회가 조직되었다. 총 9,235명이 공개 집회에 참석하였다.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가 불어로 발표되었는데, 이 책은 ‘프랑스’ ‘가톨릭’ 교인들을 거짓 종교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수년간 진리의 편에 서 있던 대다수가, 이 성서 보조서를 연구한 후에 그렇게 하였다.

또한, 1948년중 ‘프랑스’에서는 불어판 「파수대」지가 다시 나오기 시작하였다. 전후 첫 번째 「파수대」 운동이 조직되었으며 한해 동안에 6,043건의 신규 예약을 맡게 되었다.

전후 조직의 강화

1948년 1월호부터 불어판 「깨어라!」지는 영문 교재 「왕국 전도인들을 위한 신권 보조서」에 나온 교훈들을 실었다. 이것은 신권 학교에 새로운 열심을 불어 넣어 주었는데, 그 학교는 한동안 「신권 전도 ‘코오스’」라는 소책자로 실시되어 왔었다.

전년도 9월에 금지령이 해제된 후인 1948년에 회중에서 공개 강연이 행해지기 시작하였다. 1939년 이래 그러한 공개 집회는 처음이었다.

그 다음해인 1949년에는 네명의 ‘길르앗’ 졸업생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프랑스’에 왔다. 그들 중 두명은 대서양 건너편의 ‘노르망디’의 ‘르아브르’ 항에 선교인으로 파견되었다. 한 사람은 불어를 잘 알아듣지 못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나는 종종 ‘쉬엥 메샹’[문자적으로, 사나운 개—우리 말로는 ‘개조심’이라는 뜻]의 표시를 보았읍니다. 그러나 나는 ‘메샹’을 영어의 ‘머천트’(상인)과 혼돈해서 이 표시가 ‘개 상인’ 혹은 ‘개를 사고 파는 사람’이란 뜻인줄 알았읍니다. 나는 종종 ‘르아브르’에는 이런 장사를 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을까! 하고 혼잣말을 하였읍니다. 그래서 위험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내 발 뒤꿈치에서 짖어대는 개가 있는 대문을 밀쳐 열곤 하였읍니다. 집주인은 내가 문앞에서 침착하게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리고 내 옆에 개가 있는 것을 보고는 종종 놀라곤 하였읍니다. 나는 한번도 물리지 않았읍니다! 그들이 내가 자기들의 개에게 어떤 마법을 걸었는지 궁금해 한 것은 당연하였읍니다. 불어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읍니다.”

다른 두명의 ‘길르앗’ 졸업생들은 ‘파리’ 지부로 파견되었는데, 그들의 특별한 목적은 지부 사무실 운영과 ‘제이제’ 형제가 ‘프랑스’의 전파 사업을 조직하는 일을 돕는 것이었다. 그 때 ‘벧엘’ 가족 성원은 1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두는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의 지시에 따라 나머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세계적으로 봉사를 수행하는 방법으로 일이 수행되게 하기 위한 제안들에 협력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순회 대회들이 ‘프랑스’에서 열렸다. 이 대회들은 ‘브루클린’ 사무실에서 마련한 ‘프로그램’ 방식을 밀접히 따랐다. 그 당시 막 불어로 발행되었던 「왕국 봉사 노래책」이 1949년 이들 순회 대회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전도인들에게 크게 도움이 된 또 한 가지는 불어판 「여호와의 증인들을 위한 신권 조직에 대한 충고」라는 소책자의 발행이었다. 이제 순회의 종이 베푸는 도움과 함께 이것은 전 ‘프랑스’ 회중들의 전도 방법과 조직 방법을 통일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사업이 전진하다

1949년에 ‘프랑스’ 사업을 신권적으로 조직하기 위하여 기울인 온갖 노력은 1950년에 풍부한 결실을 거두었다. 왕국 전도인 수가 1949년에 3,236명이던 것이 1950년에는 4,526명으로 껑충 뛰어 40‘퍼센트’의 증가를 보인 것이다! 전도인 최고는 5,441명에 이르기까지 했는데, 이것은 그보다 2년전의 ‘프랑스’ 평균 전도인 수보다 두배가 넘는 수였다!

이같은 엄청난 증가가 초래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순회구 수는 10개로 증가되었다. 그 해에 순회의 종들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태생의 두 미국인 ‘길르앗’ 졸업생인 ‘스티븐 베후니크’와 ‘폴 무하르크’의 도움을 크게 받았는데, 그들은 ‘폴란드’로부터 추방되어 미국에 돌아가기 전에 ‘프랑스’에서 순회의 종들과 함께 수 개월을 지냈었다. 이들은 특히 ‘폴란드’ 형제들이 많이 있었던 북부 순회구들에서 일하였다. 또한 1950년에는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1950년은 여러 가지 다른 이유로도 기억에 남는 해였다. 즉 최초로 ‘프랑스’ 형제들 세명이 ‘길르앗’에 갔다. 그들은 1950년 여름 ‘뉴우오오크’ 시 ‘양키 스태디움’에서 열린 ‘신권 통치의 확장 대회’때 졸업하였다. 그리고 나서 ‘프랑스’에서 온 다른 일곱 명이 1950년 9월에 시작한 제16기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였다.

‘길르앗’에 초대받은 형제들을 포함하여 ‘프랑스’로부터 20명의 대표자들이 ‘양키 스태디움’에서 열린 그 잊지 못할 ‘신권 통치의 확장 대회’에 참석하였다. 이 훌륭한 대회의 여파는 그 해 늦게 개최된 지역 대회 때 ‘프랑스’ 형제들에게 이르렀다. ‘프랑스’ 대표자들 중 몇명은 이 대회들에서 그들이 ‘뉴우오오크’에서 보고 들은 훌륭한 것들에 대하여 고무적인 보고를 하였다. 그들은 특히 ‘브루클린’ 본부 방문으로 감명을 받았었다.

전후 첫 국제 대회

1951년의 주요 행사는 1937년 이래 ‘파리’에서 열린 첫 국제적인 모임인 ‘순결한 숭배 대회’였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우지일랜드’, ‘필리핀’ 군도, 인도, 남‘아프리카’, ‘베네수엘라’ 및 북미와 같은 먼 곳을 포함하여 28개국으로부터 대표자들이 왔다. 대회장인 ‘스포오츠’ 궁은 아름다운 ‘센’ 강에서는 단지 한 구획 그리고 하늘을 찌를 듯한 ‘에펠’ 탑에서는 남쪽으로 몇 구획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 전에는 그처럼 방대하게 계획된 대회를 ‘프랑스’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연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 대회는 하나의 커다란 실험과 같았다”라고 「파수대」지는 기술하였다. “이 대회에서 따끈한 식사의 ‘카페테리아’가 처음으로 조직되었고, 잡지 가방을 만들고 나누어 주고 사용한 것도, 특별 열차가 마련된 것도, 이 대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일을 믿음으로 착수하여 장애물들을 극복하였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축복과 도움을 주셨다. 그 결과 대성공이었다! ·⁠·⁠· 참석자 수는 6,188명의 증인에서 광고된 공개 강연에는 10,456명으로 치솟은 것이다.”

대회중 ‘노워’ 형제는 여러 해 동안 충실한 봉사를 해온 ‘엉리 제이제’ 형제의 건강상 그리고 기타 이유 때문에 ‘레오폴 종떼’ 형제가 그를 대신해서 지부 감독자가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프랑스’ 형제들은 퇴임과 신임 두 지부의 종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박수로 표시하였다.

주목할 만한 성장기

1951년에 주목할 만한 전후 확장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1947년 이래 전도인 수는 급속히 증가하였다. 1947년에는 전년도 보다 10‘퍼센트’의 증가가 있었는데 더 많이 증가하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는 ‘프랑스’ 북부에 있던 많은 ‘폴란드’ 형제들이 ‘폴란드’로 귀국하라는 ‘폴란드’ 정부의 제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다음해 1948년에는 20‘퍼센트’의 증가가 있었고, 그 다음해인 1949년에는 23‘퍼센트’ 증가했으며, 1950년에는 40‘퍼센트’, 그리고 1951년에는 34‘퍼센트’ 증가하였다.

4년 동안 전도인 수는 1947년의 2,380명에서 1951년에는 7,136명으로 3배가 되었다. 1951년 봉사년도에만도 대 ‘파리’ 회중에서는 전도인이 650명에서 1,085명으로 늘어났는데, 그 해에 1,065명이 침례를 받았으며 이것은 ‘프랑스’ 전도인 일곱명당 한 명꼴이었다!

이것은 ‘프랑스’ 전도인들 대다수가 영적으로 어린 “양들”로서 장성에 이르도록 도움이 필요하였음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1952년부터 1956년에 이르는 ‘프랑스’ ‘여호와의 증인’들의 역사의 그 다음 기간의 특징은 확장을 늦추는 한편 이미 회중 내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인 장성으로 끌어 올리는 일이었다.

「파수대」가 금지되어 있지만 전파 활동은 확장되다

1952년 1월 8일호부터 불어판 「깨어라!」지는 월 2회가 되었다. 또한 잡지 가방을 가지고 가두 증거가 행해져 그해 ‘프랑스’에서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가 285,837부나 전해졌는데, 이것은 ‘프랑스’ 사업의 역사상 이전 어느 때보다 많은 부수였다. 그러나 1952년 12월말, 공공 신문들은 「파수대」지가 금지되었다는 폭탄과도 같은 소식을 보도하였다.

비밀 경찰 국장의 권고에 따라 행동한 내무상은, ‘프랑스’ 전국과 전 ‘프랑스’령에서 「파수대」지의 배부와 판매를 금지시켰다. 금지 이유는 「파수대」가 젊은이들로 하여금 군복무를 거부토록 선동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프랑스’ 신문들은 이것은 단순한 구실에 지나지 않으며, 진짜 이유는 「파수대」지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위선을 폭로한 기사를 실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1952년은 왕국 사업에 있어 훌륭한 해였다. 한 가지 특별한 이유는 형제들이 ‘증인’이 한 사람도 없었던 ‘프랑스’ 지역들에 이르기 위하여 연합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3월호 불어 「통보」(「우리의 왕국 봉사」)는 ‘증인’들이 회중에게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서 여름 동안 전파하도록 격려하였다. ‘프랑스’ 전도인 대부분이 그 당시 북부 광산 지역에 살았는데, 그곳에서는 큰 회중들이 자기들 구역을 몇 주마다 봉사하였다. 그러나 인근 현에 있는 대도시들에서는 한번도 전파 사업이 수행되고 있지 못하였다. 이것은 지중해 ‘코르시카’ 섬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섬은 ‘프랑스’ 영토로서 ‘리비에라’에서 160‘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다. 그리하여 1952년에 두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코르시카’에서 왕국 사업을 시작하였다.

사업을 공고히 함

1953년과 1954년에 사업은 계속 꾸준히 발전하였는데, 2년 동안 각각 9‘퍼센트’의 전도인 증가가 있었다. 또한 1,657명이 2년 동안 침례를 받았다. 1953년 1월에는 순회구가 재조직되어 11개로 늘어났다. 동시에 각 순회의 종이 방문하는 회중 수는 24개에서 18개 혹은 20개로 줄여서 보다 자주 방문할 수 있게 하였다. 더우기 회중 서적 연구 수가 크게 증가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었고, 사회자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도움을 베풀 수 있게 되었다.

1953년에 있었던 공고하는 일의 또 다른 요소는 7월에 ‘뉴우오오크’ ‘양키 스태디움’에서 열린 ‘신세계 사회 대회’였다. ‘프랑스’에서 72명의 대표단이 이 훌륭한 대회에 참석하고 ‘브루클린 벧엘’과 인쇄 공장을 견학할 기회를 가졌다. 그들은 ‘들은 것은 절반도 못’ 된다는 것을 깨달은 ‘스바’ 여왕과도 같았다.

또한 1953년에 ‘프랑스’에서는 최초로 전 시간 지역의 종이 임명되었는데, 그 임명은 ‘스칼레키’ 형제에게 돌아갔다. 그 때까지 순회 대회는 정규 업무로부터 쉬는 주말에 ‘벧엘’ 형제들이 준비했었다. 그 이듬 해에 ‘스칼레키’ 형제는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라는 ‘필름’을 ‘프랑스’ 전국에 상영하기 시작하였다. 이 ‘필름’은 ‘브루클린 벧엘’집과 공장의 운영을 살펴보게 해 줌으로서 ‘프랑스’ 형제들로 하여금 본부 조직과 연합하도록 도와주었다.

한층 공고히 함

‘프랑스’에서 1955년 봉사년도는 급성장보다는 오히려 과거의 증가를 공고히 하기 위한 또 다른 해였다. 평균 전도인 수에 있어서 6‘퍼센트’ 증가가 있었는데, 이것은 1954년보다 평균 456명이 더 많았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매우 의미심장하게도 1,246명이 침례를 받았다. 이것은 전도를 해온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께 대한 공개적인 입장을 취하는 즉 자기들의 생명을 그분께 헌신하고 물 침례로서 이것을 상징하는 일을 아직 하지 않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1955년의 이같은 높은 침례자 수는 ‘프랑스’에서 여호와의 조직이 공고히 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 해의 봉사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특징이라면, ‘프랑스’ 대중의 수중에 전해진 잡지 수가 크게 증가한 것이었다. 1954년에는 288,902부의 잡지가 전해졌는데, 1955년에 전해진 잡지 수는 껑충 뛰어서 513,236부나 되었다! 이 해는 잡지 배부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었는데, 배부 잡지 수는 여러 해 동안 일정하게 매년 수십만부씩 증가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들은 전부 「깨어라!」지였다. 왜냐 하면 「파수대」지에 대한 금지령이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

‘파리’에서의 또 하나의 국제 대회

1955년중 ‘프랑스’에서의 주요 행사는 8월 3-7일에 ‘파리’에서 열린 「승리의 왕국」 대회였다. 1951년에 ‘프랑스’에서의 전후 최초의 국제 대회도 같은 장소인 ‘스포오츠 궁’에서 열렸었다. 이 때에는 10,456명이 공개 강연에 참석하였고, 351명이 침례를 받았었다. 그에 비해 1955년 대회는 어떠했는가?

첫날 9,701명이 그 ‘빌딩’으로 모여들어 연단 앞 1층 경기장을 메우고, 원형 경기장 양쪽에 있는 층계식 좌석에 앉아 있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제일 꼭대기 좌석에까지 앉아 있었다. 이틀 후 774명의 지원자들이 침례식에서 ‘프랑스’ 연사가 자기들에게 제시한 질문에 대하여 확고하게 “위!”(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노워’ 형제가 영어로, 그 다음 불어로 통역한 일요일 공개 강연에는 16,500명이나 되는 사람들로 대회장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종떼’ 형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대회를 가능하게 해 주신 여호와께 참으로 감사한다! 그리고 ‘카메라’ 기자들이 침례식을 촬영하는 것과 또한 공개 강연에 모인 거대한 청중을 보는 것은 참으로 가슴을 뭉클케 하였다. 무수한 사람들이 대회 다음 주에 ‘프랑스’ 전국에서 이러한 사진들을 볼 수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이 신문 기사감이 된 것이다.”

보다 큰 발전을 위한 준비

1956년 평균 전도인 수가 8,867명으로 불어났는데, 이것은 전년도보다 겨우 355명 더 많은 것으로 4‘퍼센트’ 증가에 불과했다. 그러나 951명이 침례를 받았으며, 기념식에는 12,801명이 참석하여 232명이 표상물을 취하였다. 또한, 잡지 배부 수도 1955년의 513,236부에서 1956년에는 869,841부로 증가하였다! 이 훌륭한 활동은 앞으로 보다 큰 발전의 전조가 되었다.

회중들은 가능한 한 많은 ‘프랑스’ 사람들에게 왕국 소식이 이르도록 이사를 하였다. 100개 이상의 회중이 임명되지 않은 구역을 요청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그 때까지 ‘증인’이 한 사람도 가지 않은 도시와 마을들을 방문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이르는 것을 돕기 위한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1955년의 33명에서 1956년에는 64명으로 증가되었다. 그들은 이전에는 거의 손을 대지못했던 ‘브리타니’와 같은 지구로 들어갔다. 1956년에는 ‘프랑스’에서 15명의 ‘길르앗’ 졸업생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194개의 ‘프랑스’ 회중들은 12개의 순회구로, 그리고 처음으로 두개의 지역으로 나뉘었다.

1947년에 ‘벧엘’ 집과 지부 사무실로 쓰려고 매입한 ‘빌라 규베’ 집은 벌써부터 너무 비좁았으며, 더욱 발전할 전망으로 인해 보다 넓은 거처를 구하는 것이 시급하였다. 그래서 1956년 7월 18일 거대한 ‘레놀’ 자동차 공장의 본고장으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파리’에서 바로 서쪽 교회의 산업 지역 ‘블로근-빌랑꾸르’에 660평방 ‘미터’의 땅을 매입하였다. 가족과 사무실 그리고 조그마한 인쇄소 하나가 들어서기에 충분하리만큼 커다란 5층 건물을 짓기로 계획되었다. ‘프랑스’ 사업은 보다 큰 확장을 위해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더욱 급증하는 시기가 시작되다

1957년에 처음으로 왕국 전도인이 10,000명선을 돌파하여, 10,954명이라는 전도인 신기록을 수립하였다. 그것은 1956년보다 12‘퍼센트’의 증가였다. 그리고 전파 활동에 바친 시간 수와 잡지 배부 수는 모두 백만 선을 넘었다! 또한, 1,100여명이 침례를 받았으며, 14,488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그 해 212개의 회중들을 섬긴 모든 지역의 종들과 순회의 종들을 위한 보습 과정이 있었는데, 그해 ‘프랑스’ 회중들은 14개의 순회구와 2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편, 새로운 ‘벧엘’ 건축을 시작하려던 시도는 시간을 끌었다. 결국, 그 땅을 구입한지 10개월 만인 1957년 5월 20일에야 필요한 건축 허가를 받게 되었다. 6월 12일에 정지가 시작되고 1957년 10월 2일에 기초가 놓여졌다. 그러나 1년 반이 흘러서야 비로소 건물이 완공되었다.

1958년에 있었던 두 가지 주요 사건

이 중 처음 것은 정치적 사건이었지만, 그것은 ‘프랑스’의 왕국 전파 활동의 안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알제리아’ 전쟁으로 야기된 위기로 인하여 ‘프랑스’ 내에 비상 사태가 선포되어 모든 공개 집회가 금지되었다. 한 동안 군사 위원회가 나라를 지배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6월 1일 ‘찰스 드골’ 장군이 정부 수반이 되고 곧 국가 원수가 되는 데 그가 동의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가 다시 정권을 잡음으로 ‘프랑스’에는 수십년간 누리지 못했던 정치적 안정기가 도래하였다.

‘프랑스’에는 종교 교역자들에게 군복무 면제 혜택을 주는 법률이 없기 때문에 일부 젊은 ‘증인’들은 교도소 생활을 거의 10년간이나 했었다. ‘드골’ 장군은 5년이상 복역해 온 자들에 대한 석방 조치를 취하였다. 후에 그의 정부는 형량을 줄여서, 우리 형제들은 군복무 의무 기간의 두배를 선고 받았다. 이것은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18개월 간의 군복무가 요구되었다면, 우리 형제들은 3년형을 치루어야 함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20세에 교도소에 들어가 언제쯤 다시 자유롭게 될는지 알 수 없었던 이전 형편보다 훨씬 나아진 것이었다.

정치적 안정은 최고 12,141명에 이르는 왕국 전도인의 11‘퍼센트’라는 또 하나의 훌륭한 증가를 가져온 요인이었다. 23개의 새로운 회중이 형성되었으며 ‘파이오니아’ 정신을 가진 열성스런 ‘증인’들이 보다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이사했을 때, 전도인들로 된 격지 집단들이 많이 세워졌다. 지부 사무실은 이들과 거의 100명에 이르는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처음에는 ‘증인’이 없는 인구 50,000이상의 도시들에, 그리고는 이 도시들이 봉사되기 시작함에 따라 점차적으로 인구가 더 적은 읍들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사업은 ‘푸아티에’, ‘디종’, ‘아네시’, ‘리모지’, 그리고 이전의 ‘브리타니’ 수도 ‘렝’과 같은 보다 작은 도시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주목할 만한 발전 하나는 ‘노르망디’ ‘카앙’의 경우였다. 그 도시에서는 소수의 전도인들로 구성된 조그마한 회중이 몇년 안되어 큰 회중이 되고 마침내는 주위 지역에 있는 많은 회중들의 모체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특히 ‘프랑스’ 북부의 광산 지역처럼 특정 지역에만 집중되는 대신, 사업은 ‘프랑스’ 전국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하였다.

1958년의 다른 한 가지 주요 행사는 7월과 8월중 ‘뉴우요오크’에서 열린 8일간의 ‘성의 국제 대회’였다. 641명의 ‘프랑스’ 대표자들—그들 중 551명은 비행기로, 90명은 배로 여행하였다—이 참석하였는데 이 수는 1953년 ‘뉴우요오크’ 대회에 참석한 수의 거의 9배나 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전도인 중 거의 20명 중 한 사람이 참석한 셈이다. 참으로 주목할 만한 수였다! 이것은 ‘프랑스’ 밭에서의 사업을 매우 강화시켜주고 연합시켜 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들 대표자들은 ‘노워’ 형제가 많은 지부에다 강습소를 신설한다는 것과 ‘프랑스’의 새 ‘벧엘’ 건축 진척 상황을 발표하는 것을 들었다.

이 훌륭한 대회의 강력한 여파가 1958년 9월에 ‘프랑스’에서 열린 다섯개의 지역 대회 때 나머지 ‘프랑스’ 형제들에게 이르렀다. 총 677명의 새로운 형제들이 이 대회들에서 침례를 받았다. ‘뉴우요오크’에서 채택된 강력한 결의문이 이 대회들에서도 채택되었으며, 그 다음 12월 중에는 “그리스도교국은 어떻게 모든 인류를 실망시켜왔는가?”라는 전도지를 ‘프랑스’ 전국에 1,670,000부나 배부하였다. 참으로 강력한 증거였다!

새 ‘프랑스 벧엘’

1959년 초봄에, 새 ‘벧엘’이 완공되었다. 그리하여 4월 17-19일인 금, 토, 일요일에 사무실과 집이 ‘빌라 규베’로부터 ‘블로근-빌랑꾸르’ ‘쁘엥-디-쥐르’ 가 81번지에 있는 새로운 숙소로 옮겨졌다. 그 다음 월요일에 새 ‘벧엘’은 업무를 시작하였다.

지하실을 포함한 5층 건물은 인쇄소를 갖추기에 충분할 만큼 컸다. 왕국회관과 사무실이 1층에 있었다. 2층에는 식당과 주방이 있었으며, 같은 층에 사무실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3, 4, 5층에는 총 24개의 침실이 있었다. ‘벧엘’ 가족은 겨우 17명뿐이어서 확장을 위한 많은 공간과 ‘노워’ 형제가 1958년 국제 대회에서 처음으로 이야기를 꺼낸 천국 전도 강습 때 숙소로 사용할 방이 있었다. 5월말경 ‘노워’ 형제가 새 ‘벧엘’을 돌아보기 위해 방문하여 6월 1일에 ‘쁘레이에홀’에서 ‘파리’ 지역의 형제들에게 연설하였는데, 2,026명이 참석하였다.

중요한 법적 승리

이틀 후인 6월 3일에 ‘종떼’ 형제는 ‘파리’의 한 변호사로부터 중요한 소식을 들었다. 1957년 7월 2일로 소급해 보자, ‘종떼’ 형제는 한 판사 앞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그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군복무를 거부하도록 선동했다는 혐의로 즉 그와 ‘프랑스’ 협회의 이사회를 구성하는 형제들에게 실형이 선고될 수 있는 혐의로 고소되었다. 또한 ‘여호와의 증인’의 ‘프랑스’ 협회도 금지당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 소송 사건에 대한 사법 심리는 1957년을 넘겨 1958년 내내 계속되었다. 마침내 1959년 2월 16일에 그 소송이 법정에 제기되었다. ‘종떼’ 형제는 훌륭한 증거를 할 수 있었다. 1959년 3월 2일에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검찰관이 이 판결에 항소를 제기하여 그 소송은 1959년 5월 20일에 제 11 항소원에 제출되었다. 다음 6월 3일에 협회 변호사는 ‘종떼’ 형제에게 전화로 피고인이 다시 무죄로 판명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왔다. 이것은 멋진 신권적 승리로서 ‘프랑스’에서 왕국의 좋은 소식을 더욱 활발히 전파할 수 있는 문이 열려져 있게 해 주었다.

1959년 평균 ‘증인’수에 17‘퍼센트’의 훌륭한 증가가 있었으며, 최고 전도인 수는 13,935명이었다. 또한 회중 수도 ‘코르시카’ 섬 ‘바스티아’와 ‘브리타니’의 ‘렝’에 있는 새로운 회중들을 포함하여 235개에서 254개로 불어났다. 2,106명이라는 놀랄 만한 수가 침례를 받았는데, 그들 중 525명은 6개의 ‘프랑스’ 지역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1960년에 있었던 확장

“1960년 봉사년도는 지금까지 ‘프랑스’의 우리 형제들에게 있어서 가장 주목할 만한 해 중의 하나였다”고 협회장 ‘나단 H. 노워’는 기술하였다. 무엇보다도 자동 주조 식자기, 인쇄기 및 접지기와 제본기를 갖춘 새로운 인쇄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사업에 있어서 정말 획기적인 일이었다. 1960년 3월에 「천국 전도」(「우리의 왕국 봉사」) 초판이 ‘프랑스’ 지부 인쇄기에서 찍혀 나왔다. 그 이후로 모든 외부 인쇄는 중지되었다. 즉 협회의 인쇄 시설이 ‘브루클린’과 ‘스위스’ 혹은 독일 ‘비스바덴’에서 인쇄되고 있는 잡지, 서책 및 소책자를 제외하고는 형제들의 필요를 돌보아 왔다.

다른 부면에서도 계속적인 확장을 즐겼다. 평균 ‘증인’수는 10‘퍼센트’ 증가하여 15,439명이라는 전례없는 최고 기록에 달하였다. 기념식 참석자는 처음으로 20,000명선을 넘어 23,073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26개의 새로운 회중이 형성되어 회중이 280개로 불어났다. 그 해말에 ‘프랑스’에서 인구 20,000명 이상의 읍으로서 아직 미 개척지인 읍은 세개에 불과했다.

1961년의 주요 행사—‘연합된 숭배자들 대회’

‘파리’ 서쪽 경계에 있는 ‘빨 데 쁘렝스 스타디움’이 8월 3-6일의 ‘연합된 숭배자들 대회’를 위해 계약되었다. 그러나 꼭 3개월 전에 ‘알제리아’에서의 군사 폭동은 ‘프랑스’를 끔찍한 내란으로 몰아넣으려 위협하였다. 전국에 걸쳐 우익 ‘테러’ 분자들의 폭발 사건은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정부는 모든 대집회를 금지시켰다. 그리하여 ‘빨 데 쁘렝스 스타디움’과의 계약이 대회가 시작되기 불과 수주 전에 취소되었다. 그러나 결국 ‘파리’ 바로 외곽의 ‘꼬롬보 스타디움’에서 대회를 개최할 특별 허가를 받았다.

이러한 불안한 상태와 대회를 열 장소의 이러한 불확실성은 경험있는 대회 조직자들까지도 힘겹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에서는 처음으로 옥외에서 하는 대회였으며, ‘카페테리아’식 간이 식당 장비들(천막, 탁자, ‘보일러’, 증기솥, ‘트레이’ 닦는 기구 등등)이 형제들에 의해 설치되고 운영된 최초의 대회였다. 드디어, 모두의 상호 협조와 하나님의 영의 후원으로 모든 것이 대회 시작을 위해 제시간 내에 마련되고 준비되었다.

이 대회는 주목할 만한 모임이었다. 약 800명의 형제들이 ‘스페인’으로부터 왔는데, 당시 그곳에서는 우리 사업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언어로 자유로운 가운데 집회를 즐길 수 있었다. 또한, ‘포르투갈’에서도 80명이 왔다. 강연은 불어, ‘폴란드’어, ‘스페인’어 그리고 ‘포르투갈’어로 동시에 행해졌다.

광고가 허락되지 않았고 대회 장소가 ‘파리’ 외곽이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과연 참석자가 1955년 ‘파리’ 국제 대회 참석자 수를 능가할 수 있을 것인지 우려했었다. 그러나 그 수를 능가해서 23,004명이 “만국이 하나님의 왕국하에 연합할 때”라는 ‘노워’ 형제의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해 모였다. 놀랍게도 참석자의 5‘퍼센트’ 이상 즉 1,203명이 그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1961년에는 평균 전도인 수에 있어서 또 10‘퍼센트’의 증가가 실현되어 17,108명의 증인 신기록에 달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 ‘프랑스’에서 천국 전도 강습이 개시되었는데, 첫 반은 순회의 종과 지역의 종들로 구성되었으며, 3월 13일부터 4월 8일까지 ‘프랑스 벧엘’에서 열렸다. 그 후 여러 해에 걸쳐 ‘프랑스’, ‘벨기에’ 그리고 ‘스위스’ 회중의 종들과 특별 ‘파이오니아’였던 형제 자매들도 이 과정에 참석하였다.

7년간 100‘퍼센트’의 증가

7년만에 ‘프랑스’의 평균 전도인 수는, 1955년의 평균 8,512명의 전도인에서 1962년에는 평균 17,299명으로 두배 이상이 되었다. “다른 양들”의 놀라운 수확이 있었던 것이다! 이 때까지는 인구가 20,000명 이상되는 모든 읍에 전도인들이 있었다. 또한, 324명의 감독자들과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이미 천국 전도 학교에 참석하였다.

1920년에 침례를 받고 활동적인 봉사를 시작했던 ‘엉리 제이제’ 형제는, 1920년에 전파를 하고 있었던 수십명에서 이같은 놀라운 성장에 이른 것을 살아서 목격하였다. 1951년 ‘종떼’ 형제가 그를 대신하여 지부의 종이 된 후에도 ‘제이제’ 형제는 한동안 ‘벧엘’에서 계속 일하였다. 그후 그의 건강이 쇠약해 짐에 따라 그와 그의 아내는 ‘벧엘’을 나와 아들과 함께 살았다. 1962년 8월 29일 거기서 그는 그의 지상 행로를 마쳤다. 그의 생애 이야기가 1962년 12월 15일호 영문 「파수대」에 실렸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파리’에 임명되다

이상하게도, 사업이 ‘프랑스’ 전역으로 급속히 뻗어가고 있던데 반해 ‘프랑스’ 수도인 ‘파리’에서의 증가는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벧엘’에서 그리 멀지 않은 ‘블로근-빌랑꾸르 센’ 가 11번지에 선교인 집을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그곳에다 집을 구입해서 이러한 목적으로 ‘벧엘’로 초대받은 ‘파이오니아’ 형제들이 이 집을 넓히고 수리하였다. 1962년 12월 17일에 이 선교인 집은,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거기에 살면서 ‘파리’ 안팎에서 봉사하였다. 이 큰 건물은 또한 ‘벧엘’ 별관이기도 하였다. ‘파리’의 또 다른 곳에 있는 한 창고에 위치해 있던 협회 발송부가 여기로 옮겨졌다.

1963년에서 1966년—여호와의 축복이 계속되다

그후 수년에 걸쳐 ‘프랑스’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에 대한 그분의 축복의 풍부한 증거가 계속 있었다. 우선 1963년에 세계 일주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가 있었다. 비록 ‘프랑스’는 이 대회들 중 하나도 주최하지 못했지만, 약 11,000명의 ‘프랑스’ 형제들—이 나라 전도인의 절반 이상이—‘이탈리아’의 ‘밀란’ 대회나 독일의 ‘뮌헨’ 대회 중 하나에 참석하는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많은 특별 열차가 대표자들을 수송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신세계역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 불어판 발행을 포함하여 참으로 훌륭한 영적인 즐거움을 얻었다.

1963년에 ‘프랑스’의 ‘증인’수가 처음으로 20,000명 선을 돌파하였다. 그다음 1964년에는 전도인 9‘퍼센트’의 증가가 실현되었으며, 2,000명 이상이 침례를 받았다! 또한 「깨어라!」지 배부도 1964년에 처음으로 3,000,000부 선을 넘어섰으며, 임시(보조) ‘파이오니아’를 포함한 근 1,100명의 ‘파이오니아’들이 대중에게 이들 잡지를 배부하는 일에 참여했었다.

1965년 기념식에는 34,862명이 참석하였으며, 22,933명의 전도인 신기록에 달하였다. 「깨어라!」지 배부는 계속 치솟아 그 해에 3,500,000부 이상이 ‘프랑스’인들에게 전해졌다. 이제 ‘프랑스’에는 380개의 회중과 92개의 격지 집단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인구 5,000-12,000명 되는 94개 읍에는 아직 ‘증인’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대도시에서의 증거 사업은 잘 발전하고 있었다. ‘파리’에 11개, ‘리용’에 7개 그리고 ‘니스’와 ‘뮐루세’에 4개의 회중이 있었으며, 다른 몇몇 대도시에는 3개의 회중이 있었다.

1966년의 두드러진 특징 한 가지는 62개의 새로운 회중을 조직한 것이었는데, 이제 이 나라의 총 회중 수는 442개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회중들은 30개의 순회구와 3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졌다. 또한 다섯개의 지역 대회가 이 해에 열려 공개 강연 총 참석자 수는 22,153명이었다. ‘보르도’ 대회에서 ‘프랑스’ 형제들은 ‘포르투갈’에서 온 형제들을 접대하는 특권을 누렸다. 왜냐 하면 이들 형제들 대부분은 숙박비를 지불할 여유가 없었으며, 형제들 집에는 그들 모두가 쓰기에 충분한 방이 없었으므로 영화관 하나를 빌려 남녀를 위해 커다란 이중 합숙소로 개조하고 ‘샤워’ 시설과 세면기 등을 설치하였다. 그들은 ‘프랑스’ 형제들이 나타낸 사랑을 대단히 고맙게 여겼다. 지역의 종이었던 ‘마리안 스주미가’ 형제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떠날 시간이 되자,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눈물을 글썽였읍니다.”

‘때가 되어 속히 이루어지다’

비록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다른 양”들을 모아들이는 일이 꾸준히 발전해 왔지만 이제야말로 여호와께서 ‘때가 되어 속히 이루’시기 시작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사야 60:22) 1967년에 10‘퍼센트’의 전도인 증가가 있었을 뿐 아니라, 기념식 참석자가 41,274명으로 껑충 뛰었으며 143명이 표상물을 취하였다. 심지어 앞으로 더 큰 증가가 있으리라는 또 한가지 암시로 매달 평균 19,327건의 가정 성서 연구가 사회되었는데, 이것은 전년도의 15,964건보다 증가한 것이다. 그리고 「깨어라!」지의 대중 배부 수는 4,000,000부 이상으로 뛰어 올랐으며, 55,446건의 신규 예약을 맡았다.

그해 여름 9개의 “제자를 삼음” 지역 대회가 ‘프랑스’에서 열렸는데, 총 27,009명이 참석하였다. 이 대회들에서는 성서 ‘드라마’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가속화된 성장의 증거로서 그해에 2,269명의 새로운 제자가 침례를 받았으며, 그들 중 960명은 지역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프랑스’의 정치적, 사회적 위기

‘프랑스’는 1968년 봄에 매우 심각한 정치적, 사회적 위기로 뒤흔들렸다. 분쟁은 처음에 ‘파리’에서 유명한 ‘소르본느’ 대학과 ‘파리’ 지역에 있는 다른 대학들에서 학생 ‘데모’로 시작하여, 그후 ‘프랑스’ 전국에 있는 대학과 고등 학교로 번져갔다. 한 동안 ‘파리’에 있는 ‘라틴’구 (‘파리’의 학생가)는 정규적인 싸움터가 되었다. 학생들은 질서를 유지시키려고 노력하는 경찰과 싸웠다. 학생들은 포장 도로의 돌을 파내어 경찰에게 던졌다. 학생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기 위해 ‘파리’의 유명한 가로수 일부를 베어냈으며, 차량들은 불타고, 가게 유리창들은 박살이 났다. 양편에 많은 부상자가 있었다.

그러자 노동 조합이 거들어 자기들 나름의 ‘데모’ 행진을 하고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을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1968년 5월과 6월중 ‘프랑스’는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졌다. 우편도 끊기고 열차도 없었다. 즉, 산업의 원동력이 정지된 것이었다. 심지어 항공편도 정지되었다. 한동안 마치 ‘드골’ 정권이 쓰러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회주의 노동 조합과 비사회주의 노동 조합으로 갈라졌으며, 또한 노동자들과 학생들간의 단결도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부와 고용주들이 약간의 극적인 양보를 함으로써 폭력과 파업은 끝나게 되었다. 6월말에 선거가 있었는데, ‘드골’당이 대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근 한달 간, 지부와 회중들 사이의 통신 연락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형제들은 그들의 활동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더욱 훌륭하게도, 형제들은 세속 직장의 완전 휴업으로 인하여 생긴 시간을 야외 봉사에 더 많이 바쳤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전도인 평균 시간이 12시간으로 올라갔다.

영적 강화를 위한 마련들

1968년 5월 7-12일 바로 최악의 학생 ‘데모’때 ‘밀튼 헨첼’ 형제가 ‘프랑스’ 지부를 방문하였다. 그의 방문은 대단히 격려적이었는데, 그것은 그가 전체 가족에게 많은 시간을 내서 개개인에게 격려의 말을 하고 그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파리’를 아주 적시에 떠났는데, 며칠 후에 총파업으로 항공 여행이 마비된 것이다. ‘노워’ 형제가 6월에 지부를 방문할 계획이었지만 그러한 상황으로 인해 입국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종떼’ 형제와 그의 수행원인 ‘쟌-마리 보케르뜨’ 형제는 ‘벨기에’에서 ‘노워’ 형제를 만나 ‘프랑스’ 형제들에게 영적 양식의 공급을 증가시키는 문제를 의논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프랑스’에서는 「파수대」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격려적인 기사들이 64면의 월간 소책자로 마련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48면의 소책자로 월 2회 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일은 1969년 1월 1일 이후로 시행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스’ 형제들은 매달 64면이 아니라 96면의 번역 기사를 받게 된 것이다. ‘노워’ 형제는 ‘프랑스’ 지부가 이 특별 사업을 돌볼 수 있도록 네번째 인쇄기 구입을 승인하였다.

불어판 「진리」 책을 준비함

1968년 5월과 6월의 정치 사태는 ‘프랑스’의 왕국 권익 사업에 예기치 않은 또 다른 성과를 가져왔다. 많은 사람들이 1968년에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이 발행되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이 책은 이제 서방 세계에서 성서 다음으로 가장 널리 배부된 책으로서 112개 언어로 9,500만부 이상이나 배부되었다. 그렇다, 영어아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특정한 지부들에게 「진리」 책의 교료지를 일찍 공급하도록 마련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각기 자기들 언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이 책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여러 언어들로 동시에 나올 수 있었다.

‘프랑스’ 지부에서는 모든 일이 잘 되어 한 번역가가 한달만에 이 책의 번역을 마쳤다. 번역 사본 일부는 ‘브루클린’에 보내져 무사히 도착되었다. 또 다른 사본 일부가 그 다음에 발송되었는데, 그 때 갑작스럽게 우편 파업이 발생하여 그 사본이 우편물 속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사본이 재복사되어 ‘벨기에’의 ‘브뤼셀’로 보내졌다. 그 당시 차를 가진 형제들에 의해 ‘파리’와 ‘브뤼셀’과의 왕복 운행이 조직되었으며, ‘벨기에’로 보낼 우편물을 ‘프랑스’ 지부에서 싣고 가서 ‘브뤼셀’로 보내진 ‘프랑스’로 가는 우편물을 싣고 왔다. 이리하여 이 책은 완성되어 처음으로 영어를 사용하는 형제들과 동일한 때에 ‘프랑스’ 사람들도 이 책을 받게 되었다. 사실 여름 대회 때에는 단지 몇부만 구경할 수 있었지만, 곧 모두에게 그리고 야외 배부용으로 충분히 공급할 수 있었다.

“지상의 평화” 대회

1969년의 주요 행사는 ‘파리’ 부근 ‘꼬롬브 스타디움’에서 열린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였다. 그것은 7월초에 미국에서 첫 번째로 열린 그러한 일련의 대회의 일부였다. 총 334명의 ‘프랑스’ 대표자들이 이 7일간의 모임을 위해 대서양을 비행기를 타고 횡단하였다. 그러나 다음 8월 5-10일에, 그 대회는 ‘프랑스’로 왔다.

‘스타디움’에는 ‘프랑스’의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을 위한 모임은 물론, ‘포르투갈’어 대회를 위해서도 마련되었으며, 도합 78개국의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포르투갈’어 집회에 2,731명, ‘폴란드’어 집회에 600명이 참석한 것 외에 ‘벨기에’에서 약 5,000명, ‘스위스’에서 1,000명, 미국에서 1,300여명, ‘캐나다’에서 200명, 영국에서 170명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120명이 왔다. 특별 영어 회기들이 있었으며 800여명이 거기에 참석하였다.

‘포르투갈’ 형제들은 그 때까지 이처럼 훌륭한 대회를 즐겨본 적이 없었다. ‘포르투갈’ 사업 역사상 이전의 최고 대회 참석수는 1968년 ‘프랑스’ ‘툴루스’에서의 825명이었다. ‘포르투갈’ 형제들 중 많은 수가 이 ‘파리’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그들이 이 대회를 즐겼던 것은 확실하다. ‘리스본’의 어느 회중에서는 전도인 90명 중 65명이나 대표자로 왔다! 한 자매는 그 여행을 하고 돌아가기에 충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2년간 저축하였다. ‘앙골라’, ‘아조레즈’ 제도, ‘베르데갑’ 제도, ‘마데이라’ 그리고 ‘모잠비크’로부터 형제들이 참석하였다.

이 대회는 맑은 날씨로 시작하여 매일 화창한 햇빛이 있었다. 이것은 하나의 축복이었다. ‘포르투갈’인, ‘폴란드’인 그리고 반이나 되는 ‘프랑스’ 청중이 노천에 있어 폭우에 대해 무방비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 대회의 최고 참석 수는 얼마나 되었는가?

일요일 “다가오는 천년 평화”라는 공개 강연에 47,480명이 참석하였다, 이것은 이전의 1961년 ‘꼬롬브 스타디움’ 대회 참석 수의 두배가 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주목할 만한 일은 3,619명, 바꿔 말하면 이 대회중 정규적인 평균 참석자의 약 10‘퍼센트’가 침례를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여호와의 증인’의 발전은 교직자들에게는 근심거리였다. 1969년 8월 6일자 ‘파리’ 석간지 「프랑스-스와르」지가 다음과 같이 논평한 바와 같다.

“다른 종교 교직자들이 염려하는 것은 ‘여호와의 증인’이 사용하는 엄청난 간행물 배부 수만이 아니라, 그들이 개종을 시키는 일이다. ‘여호와의 증인’ 각자는 호별 방문으로 성서를 사용해서 자기 믿음을 증거하거나, 선포할 책임감을 갖고 그 조직의 지시에 따라 일을 한다. ·⁠·⁠·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는 성서에 기초해 있다. ·⁠·⁠· 그들은 한 하나님(여호와)을 믿으며 삼위일체, 영혼불멸, 지옥과 연옥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신문과 ‘라디오’, 그리고 ‘텔레비젼’이 대회에 주의를 돌린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프랑스’의 미묘한 상황을 고려해서 기자들의 주의를 대회로 이끄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진해서 왔다. 첫날 오전에는 근 10명의 신문 기자들이 왔으며, 다음 날, 널리 읽혀지는 여러 ‘프랑스’ 조간 1면에 사진과 함께 기사가 실렸다. 8월 7일 목요일에 ‘프랑스’에서 가장 널리 시청되고 있는 ‘프로그램’인 저녁 8시 국내 ‘뉴우스’ 시간에, 근 3분간 화면을 포함하여 훌륭한 ‘텔레비젼’ 방송이 있었다. 보도된 모든 것이 호의적이었다.

같은 날, 유력한 「르 몽드」지는 종교 ‘뉴우스’난에, 우리에게는 36단(0.9m)을 할애하고, ‘가톨릭’ 교회에 관한 기사는 단지 9단(0.23m)밖에 할애하지 않았다! 호의적인 보도가 ‘프랑스’ 일류 신문들 모두에 실렸다. 즉 ‘스타디움’ 주위에서 ‘증인’들에게 파는 특별 간행판이 아니라 ‘프랑스’ 전국과 불어를 사용하는 세계 전역에 걸쳐 판매되는 전국판에 보도되었다. ‘프랑스’ 신문들에 인쇄된 기사와 사진을 전부 합하면 873단(22m이상)이나 되었다!

또한 ‘벧엘’ 가족도 두 가지 대회 보고를 인쇄하여 대회 중에 발표하였다. 첫 번째 것은 16면의 보고였고, 다음 것은 사진과 함께 32면의 보고였다. 이것은 ‘프랑스’ 대회에 관하여 불어로 발행되던 최초의 보고였다. 이러한 보고는 또한 대회 후,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조직의 크기와 범위를 알려주는 데 매우 유용함이 입증되었다.

새로운 노래책 「마음의 음악에 맞추어 노래함」 역시 1969년에 불어로 발행되었다. 형제들은 ‘꼬롬브’ 대회 직전에 받았으므로 그들이 그 대회중에 부르게 될 노래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진리」 책이 사업에 박차를 가하다

1969년에는 29,754명의 전도인 평균에 달했으며, 이것은 이 해에 12‘퍼센트’의 증가를 본 것이다. 일년 전에 발표된 「진리」 책이 높은 증가율과 많은 관련이 있었다. 매주 평균 25,949건의 가정 성서 연구가 사회되었으며, 기념식에는 전년도의 49,086명에 비해, 60,457명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4,583명이 침례를 받았는데, 이것은 그 당시까지 한해 동안의 최고 침례자 수의 두배도 넘는 것이다!

이같은 급속한 발전은 계속되었다. 1970년에는 15‘퍼센트’의 전도인 증가를, 다음 1971년에는 14‘퍼센트’의 증가를 즐겼다. 다시 말해서 전도인 수가 1968년의 26,614명에서 1971년에는 평균 39,026명으로 껑충 뛴 것이다. 즉 단 3년만에 12,000명 이상이 증가한 것이다! 그리고 1971년 기념식에는 80,293명이 참석하였는데, 이것은 3년 전보다 30,000명 이상이나 많은 수였다! 또한 새로운 회중도 매주 하나꼴보다 많은 비율—1971년에 53개—로 형성되어 이 나라 회중 수는 총 636개가 되었다. 「진리」 책이 주의 양들을 모으는 일을 돕는 데 있어서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툴루스’ 대회 준비

1971년의 주요 행사는 ‘프랑스 툴루스’에서의 “하나님의 이름” 지역 대회였다. 불어 회기에 약 5,000명, ‘포르투갈’어 회기에 5,000명, ‘스페인’어 회기에는 15,000명 그래서 도합 25,000명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 3개국어 대회를 위해 ‘툴루스’ 주위의 이용할 수 있는 ‘호텔’과 야영 장소는 모두 예약되었다. 그러나 그후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하였다.

‘스페인’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였다. 예방책에 관한 담화가 있었다. 그러나 당국은 이 대회를 금지시키는 것을 몹시 망설였는데, 왜냐하면 그런 결정을 내리면 그 지방 상인들의 원망을 살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은 계약이 되어 있고, 이미 상당한 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협회가 그들에게 손해 배상을 청구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대회 준비가 계속 진행되고 있을 때, 결국 대회는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는 통고를 받았다. 대회 감독자인 ‘쟌-클로드 레제’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실 형제들은 대회 금지가 발표되었을 때에도 끝까지 훌륭하였읍니다. ·⁠·⁠· 그렇습니다, 눈물이 나는 일이었지만 모두는 헌신적인 정신으로 헛수고로 지은 모든 것들을 철거하기 위해 다시 일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였읍니다. 여러가지 부서들을 책임맡은 형제들은 자기들 일을 충분히 해 낼수 있었읍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온 형제들은 철거하는 일을 지원해 주는 한편, 동시에 다른 곳에서 그들의 대회를 열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읍니다.”

금지에도 불구하고 임한 축복

사실상 불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은 모두 ‘프랑스’의 다른 대회들 중 하나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근 900명의 ‘포르투갈’ 형제들은 ‘런던’에서의 “비상” ‘프로그램’을 향해 12대의 ‘버스’, 그 다음 전세 비행기 한대, 그 다음 다수의 자가용 차로 여행하였다. 모두 합해서 48,533명이 ‘프랑스’의 “하나님의 이름” 대회에 참석하였으며, 2,084명이라는 놀라운 수가 침례를 받았다.

이처럼 1971년은 ‘프랑스’에서 굉장한 신권적 확장을 본 해였다. 그 해의 또 다른 특징은 특별히 마련한 불어판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부터 불어판으로는 나오지 않았었던 것이다.

‘벧엘’ 별관이 필요하게 되다

1972년 서부 ‘파리’ 교외 ‘블로근-빌랑꾸르’에 있는 ‘프랑스 벧엘’은 너무 협소해서 별관이 필요하게 되었다. 특히 발송부로 사용할 장소가 필요하였다. 1959년에 ‘블로근’ ‘벧엘’이 완공되었을 때 매년 85,000부의 서적을 발송한 데 비해, 1972년에 이 수자는 소책자와 용지 그리고 다른 인쇄 품목은 빼놓고도 1,094,231부로 증가하였다.

미국으로부터 간행물이 도착하는, 서부 ‘프랑스’에 있는 ‘르아브르’ 항과 ‘파리’ 사이의 어딘가에 이 별관을 짓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았다. 1970년 11월에 ‘파리’와 ‘르아브르’에서 똑 같이 약 10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루비에’라고 하는 ‘노르망디’의 한 조그마한 읍에서 너비 73‘미터’, 길이 33‘미터’의 땅이 있었다. 행정적인 문제를 극복하는 데 약 18개월이 걸려, 1972년 4월 28일에야 비로소 권리 증서를 양도 받았다. 실제적인 건축은 다음 달에 시작되었으며, 그 해 12월에 완공되었다.

이 건물은 외부가 겉치장 벽돌과 초록색 ‘에나멜’을 칠한 판벽널로 되어있는 아주 멋지게 조립한 2층 건물이었다. 넓은 인쇄소와 발송부는 주방, 냉장실 그리고 산뜻한 식당과 함께 1층에 있었다. 세탁실과 도서실 그리고 침실 22개가 2층에 있었다. 건물 총 건평은 약 2,044평방 ‘미터’였다.

인쇄소는 1973년 5월 29일에 ‘루비에’로 옮기게 되었다. ‘블로근’에서 비오는 날에 인쇄기와 그 밖의 기계들을 ‘벧엘’ 밖 길가에 있는 대형 ‘트럭’으로 끌어 올려 싣는 것을 보는 것은 진귀한 광경이었다. 그리하여 기다려야만 하였던 승용차와 ‘트럭’ 운전사들은 하도 신기해서 비록 금지되어 있기는 하지만 ‘파리’에서 교통이 혼잡할 때 아주 빈번히 사용하는 경적을 울리는 것도 잊어버렸다! 결국 4대의 인쇄기와 자동 주조 식자기, 종이 재단기 그리고 접지기가 ‘루비에’에 안전하게 도착되어 이틀 후에는 벌써 사용되었다.

봉헌식 날은 1973년 6월 9일 토요일로 정했는데, 157명이 그 식에 참석하였다. 여러 형제들이 ‘프랑스’의 사업을 회고해 보았다. 사업이 참으로 현저히 증가하였다는 것과 1972년 한해 동안만도 처음으로 5,000명이 넘는 수가 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가장 가슴을 뭉클케 하였다. 또한 인쇄 공장을 책임맡은 형제의 간단한 설명에 의하면 1960년에는 291,530부의 잡지가 인쇄된 데 비해 1972년에는 1,771,300부나 생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쇄된 품목 총 수도 1960년의 4,161,994건에서 1972년에는 32,043,610건으로 증가하였다.

“하나님의 승리” 국제 대회

‘꼬롬브 올림픽 스타디움’은 다시 국제 대회장이 되었다. 대회 시작 7개월 전인 1973년 1월 1일에 대회 위원회가 발족되었다. 그 ‘스타디움’을 거대한 왕국회관으로 변모시키는 일을 감독하기란 참으로 엄청난 과업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참으로 성공적이었다!

‘증인’ 원예가들이 여러 달에 걸쳐 가꾼 수많은 화분용 식물들이 ‘스타디움’ 중앙 즉 연단 주위를 장식하였다. 인공 호수에 두 마리의 산 홍학이 자리잡고 있는 것 또한 멋진 장식이었다. 그 경기장의 소유주인 “‘프랑스’ 경주 경기 ‘클럽’”은 그 장식을 자기 ‘클럽’의 월간 ‘스포오츠’ 잡지 표지의 삽화로 사용하였다.

8월 1일 수요일 개회일을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문자 그대로 벌떼 같은 군중이 경기장으로 몰려들었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종종 매우 신랄하고 반어적인 ‘프랑스’ 신문들은, 정중한 무리에 대한 찬사로 가득찼다. ‘가톨릭’ 신문인 「라 크로와」지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활동적인 호별 방문 개종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프랑스’에서 지금까지 어느 정도의 성공 밖에 거두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꼬롬브’ 대회는 그들의 책임감과 함께 완벽한 조직과 성서 ‘드라마’들로 참으로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언론계는 여름 사건으로서 이 국제 대회를 찬양하였다. 「르 몽드」지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스타디움’은 어떠한 정당도 시샘낼 만큼 정중하고 학구적인 무리로 대만원이었다.”

심지어 신문 배달원들까지도 그 대회 참석자들의 훌륭한 행실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빠리지엥 리베레」지 배달원은 요금함과 함께 신문을 인도에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단 한사람만 남아서 지켜 보게 하였다. 대표자들은 자기들이 혹시 돈을 덜 내고 가져가지나 않을까 염려되지 않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 아닙니다. 우리는 1969년에도 이렇게 한걸요”

8월 3일 금요일에는 총 2,703명의 침례 지원자들이 자기들에게 제시된 질문에 “위(예)”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불과 500‘미터’ 정도 밖에 떨어져 있는 ‘푸울’장으로 질서 정연하게 떠나는 광경은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주르날 디 디망쉬」지는 이 탁월한 행사에 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청천 벽력과 같이 갑자기 ‘진리’를 발견했다 하여 누구나 ‘여호와의 증인’이 될 수 있는게 아니다. 참을성, 시간, 용기 그리고 아주 깊은 그리스도인 믿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또한 성서 법에 제시된 교훈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 ‘꼬롬브’에서의 대회들은 ‘프랑스’ 밭의 발전이 관련되어 있는 점에 있어서 획기적인 행사들이었다. 1961년에는 이곳에 23,004명이 참석하였으며, 1969년에는 47,480명이 참석하였다. 1973년에는 어떠하였는가? “하나님의 승리—그것은 고난받는 인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일요일 공개 강연 시간이 되자, 60,241명이라는 놀라운 수의 사람들이 그 거대한 ‘스타디움’을 꽉 메우고 있었다!

「신세계역」이 불어로 나오다

이전 1963년에 「신세계역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서」가 불어로 발행되었었다. 마침내 11년 후에 형제들은 불어판 「신세계역 성서」 완결판을 매우 열광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프랑스’에서 이 새로운 간행물의 중요성은 특별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왜 그러한가? 환경상 역사를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마 교황들은 ‘프랑스’를 “교회의 장녀”라고 불렀으며, 심지어 오늘날도 ‘프랑스’ 인구의 85‘퍼센트’가 ‘가톨릭’교인이라고 주장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을 생각해 보면, 주민 110명당 한명의 사제가 있었으며, 보다 최근인 1970년에도 여전히 주민 297명당 한명의 사제, 수도사, 혹은 수녀가 있었다.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프랑스’ 국민들에게 성서를 가르칠 매우 좋은 입장에 있었음이 명백하다.

그러나 여러 세기 동안 사제들은 1229년의 ‘툴루스’ 회의가 제정한 규정 즉 “평신도들은 구약과 신약 성서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요하였다. 사실 1950년대 이래 「‘예루살렘’ 성서」와 같은 몇가지 ‘가톨릭’ 성서가 불어로 출판되었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상당히 비싸서 극소수의 가정에서만 한권씩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불어판 「신세계역」 발행으로 가장 가난한 ‘프랑스’ 가정들까지도 성경 전서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974년 이래 이 훌륭한 번역판은 야외에서 전하도록 근 800,000부가 회중으로 발송되어 왔다.

고무적인 희망을 제시함

비록 ‘프랑스’ 사람들의 생활이 물질적인 견지에서는 대체적으로 향상되었지만, 자기들의 생활에서 어떤 실제적인 안정의 결핍으로 절망하고 당황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문제에 부닥치면 절망감을 갖는데, 이는 그들의 종교가 그들에게 영적인 힘과 참다운 확신을 제시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종종 왕국 소식은 그러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참으로 유익한 효력을 발휘한다. 예를 한 가지만 들어보자.

자신이 직면한 많은 문제들로 인해 신경 쇠약을 앓고 있던 한 부인은 자살을 하고 자기의 세 자녀도 함께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는 그 끔찍한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자기의 고민을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었다. 그 여자는 모든 것이 온전히 정돈된 상태로 떠나기 위하여 ‘아파트’ 방을 깨끗히 청소해 놓고 그의 남편과 어머니에게 유서를 써놓고는 쓰레기 통을 가지고 내려왔다.

그러나 층계를 내려가다가 그 여자는 두명의 ‘증인’을 만났다. ‘증인’들은 그 여자에게 이야기를 하고는 재방문 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여자는 ‘아파트’로 돌아오면서 그 약속을 생각하고는 자살을 일주일간 미루기로 하였다. 일주일 후에 ‘증인’들은 제 시간에 찾아왔고, 간단한 소개 후 「진리」 책으로 연구가 시작되었다. 몇주 후에 그 부인은 건강 상태가 너무 악화되어서 병원에 입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여자가 5주일간 입원해 있는 동안 ‘증인’들은 그의 건강이 어떤지 알아보려고 정기적으로 문병하였다.

그 여자가 퇴원하자마자 연구는 계속되었으며, 왕국회관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는데도 자녀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고무적이었기 때문에 그 여자는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증거하여 훌륭한 결과를 보았다. 그렇다, 그 부인만 침례를 받은게 아니라, 그의 어머니와 남편이 모두 연구하여 마침내 전파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행히, 인생의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성서 진리를 배우고 있으며, 그들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즐길 확실한 전망을 알게 됨에 따라 그들의 생활은 변화를 받고 있다. 그리하여 1974년에는 8,689명의 새로운 사람들이 하나님의 친절에 응하여 침례를 받았다. 다시 말해서 ‘프랑스’에서 평균 밤낮으로 매 시간 한 사람씩 침례받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1974년에 53,000여명의 ‘증인’들이 매달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사업에 활동하여 36,000건 이상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다. 또한 그 해에 110,330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파수대」 금지령이 해제되다

1975년에 ‘프랑스’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일이 있었다. 그것은 「파수대」 잡지에 대한 22년간의 금지령이 해제된 것이다. 1월초에 ‘프랑스’ 형제들은 연구용으로 잡지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서 몇주 후에 그들은 호별 증거 활동에 사용할 수 있는 「파수대」도 갖게 되어 몹시 기뻐하였다.

모두의 영적 필요를 위한 마련

당신은 1952년에 두명의 ‘파이오니아’가 ‘프랑스’의 일부인 ‘코르시카’ 섬에서 전파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15년 후인 1967년에는 그곳에 두개의 회중이 있었다. 1969년에는 세번째 회중이 형성되었으며, 1970년에는 처음으로 그 섬에서 순회 대회가 열렸다. 그 이후로 여러 특별 ‘파이오니아’가 그 섬에 파견되어 1978년에는 431명의 전도인들이 9개 회중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지중해 연안에 있는 ‘모나코’라는 한 조그만 독립국이 ‘프랑스’ 지부 관할하에 있다. 알다시피, 이 나라는 그 유명한 ‘몬테카로우’ 도박의 본거지이다. 비록 ‘모나코’의 27,000명의 주민들에게 호별 방문 증거 활동이 금지되어 있지만 ‘프랑스 보솔레이’ 회중 전도인들이 정기적으로 그곳에서 전파하였다. 그리하여 1978년에 ‘모나코’에는 일곱명의 활동적인 ‘증인’이 있었다.

또한 외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영적 필요도 돌보아지고 있다. 그리하여 1975년에 ‘프랑스’에는 희랍어 회중 하나와 독일어 회중을 빼고도 ‘포르투갈’어 회중이 17개, ‘스페인’어 회중이 16개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 회중과 연합해 있는 ‘포르투갈’어 집단이 24개 그리고 ‘스페인’어 집단이 12개 있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온 이들 모든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말로 진리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격려적이다!

잇따른 천국 전도 강습반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61년 3월에 ‘프랑스’에서 천국 전도 강습이 시작되었다. 이 강습의 목적은 장로들이 그들의 성경적 책임을 이행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1971년 12월까지 총 93개 반이 그 과정의 유익을 즐겼으며, 28기반 이후에는 한달간 받던 것이 2주 과정으로 변경되었다.

이 강습은 3년 이상 중단되었다가 1975년 2월에 다시 시작되었으며 교육을 위한 새로운 교재가 사용되고 있다. 그 해에 2,043명의 장로들이 이 새로운 과정으로부터 유익을 받았다. 드디어, 1978년 개정된 이틀간의 과정에는 6주간에 걸쳐 5,300명 이상의 ‘프랑스’ 장로들이 참석하였다. 장로들은 그로부터 유익을 얻었는가? 한 장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함으로써 그 질문에 잘 대답해 주었다. “우리는 회중에 있는 우리 형제들을 세워주도록 우리에게 더욱 명백한 교훈을 베풀어주신 여호와의 사려깊은 조직에 감사합니다.”

두번째 별관이 더해지다

1973년 ‘루비에’의 부속 건물이 봉헌되었을 때, 그것은 “큰 환난”까지 ‘프랑스’의 필요를 돌볼 것으로 생각되었었다. 심지어 1974년 ‘엥깔빌’(‘루비에’ 바로 옆 마을)에 얼마의 대지를 구입했을 때에도, 별관을 지을 생각은 전혀 없었고 단지 왕국회관을 하나 지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왕국 사업의 급속한 성장으로 우리의 생각은 이내 바뀌었다. 결국, 1976년 4월 2일 건평 2,483평방 ‘미터’의 2층 건물을 세울 허가를 받았다.

얼마의 건축 경험이 있는 자진자들에게 문의하는 회람장이 ‘프랑스’의 모든 회중에게 보내졌다. 왜냐 하면, 형제들은 ‘루비에’에 있는 조립식 건물이 별로 만족스럽지 않아서, 새 건물은 그들 스스로 건축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건축 경험이 있는 한 형제는 지부 위원회와 통치체의 감독을 받는 건축 위원회의 한 사람으로서 그 일을 조정하겠다고 제의하였다.

1976년 12월 8일까지 계획에 따라 공사가 진척되었는데, 그때 통치체는 3층으로 올려서 10개의 여분의 침실을 만들 것을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건축 기사는 새로운 계획을 작성하여, 검사를 받기 위하여 제출하였다. 우리는 390평방 ‘미터’의 공간을 더 허락받아, 그 건물의 총 건평은 2,873평방 ‘미터’가 되었다.

드디어, 새로운 별관이 완공되어 1978년 5월 13일 토요일에 통치체의 ‘레이몬드 프랜즈’ 형제가 불어로 봉헌식 연설을 하였다. 그 ‘엥깔빌’ 별관에는 현재 발송부와 또한 ‘루비에’에서 일하는 형제들의 숙소가 있다. 2층과 3층에 있는 34개의 침실 거의 모두가 이미 차있다. 현재 ‘프랑스 벧엘’ 가족은 모두 136명으로서, 그중 46명은 ‘블로근’에, 90명은 ‘루비에-엥깔빌’에 있다.

풍성한 새로운 간행물

최근 여러 해 동안에 엄청나게 많은 번역 사업이 이루어져, 사실상 영문으로 나온 모든 간행물이 불어로 공급되어 왔다. 1976년부터는 심지어 매년 나오는 「‘왙취 타워’ 간행물 색인」까지도 불어로 발행되어 영어 이외에 이 「색인」을 갖게된 최초의 언어가 되었다. 또한 성서 ‘카셋트’ 녹음 ‘테이프’가 불어로 만들어져 「요한 복음」 12,000여 ‘세트’가 28개국에서 전해지고 있다.

“승리의 믿음” 대회

‘꼬롬브 스타디움’은 1973년에 이미 최대 수용 한계에 이르렀었기 때문에, 지부 위원회는 1978년에 ‘프랑스’ 전역에 6개의 “승리의 믿음” 대회를 조직하였다. 그렇게 한 것은 잘 한 일이었다. 왜냐 하면 총 참석자 수가 1973년보다 23,178명이 더 많은 83,419명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금요일 아침, 대표자들은 그 지방 주민들에게 증거함으로써 그들의 승리의 믿음을 함께 나누었다. ‘파리’의 한 젊은 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여호와의 증인’을 환영하였다. “당신네의 방문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읍니다. 나는 이미 신경쇠약에 세 번이나 걸려 심지어 자살까지 하려고 했었읍니다.” 그리고 나서 그 여자는 ‘증인’에게 그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필요성을 느꼈다고 털어 놓았다. 그 여자는 공개 강연에 한 친구와 함께 오기로 약속하였다.

보다 훌륭한 발전의 전망

아직도 왕국 소식에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프랑스’에서 1979년 기념식에 133,584명이 참석했다는 사실로 반영된다. 이것은 바로 2년전보다 9,810명이 더 참석한 것이다. 그리고 이 기념식 참석 수가 ‘프랑스’의 67,000명의 왕국 전도인의 거의 두배가 된다는 사실은 왕국 사업의 성장이 계속될 것이라는 훌륭한 전망을 알려 준다.

1978년 말까지 ‘프랑스’에는 이미 1,188개의 회중과 60개의 순회구 그리고 6개의 지역이 있었다. ‘파리’에 28개의 회중, 그리고 ‘파리’ 바로 인근 지역에는 116개의 회중이 있어 도합 144개나 된다. ‘마르세이유’에는 17개의 회중이 있고, ‘리용’에는 11개, ‘니스’에 10개, ‘낭트’에 8개, ‘툴투스’에 8개, ‘그레노블’에 7개, ‘뮐루세’에 7개, ‘카앙’에 5개 그리고 많은 기타 ‘프랑스’ 도시에 두세개의 회중들이 있다.

20세기 초에 담대하고 단호한 소수에 불과한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어떻게 사업이 발전해 왔는가를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참으로 여호와께서 자기의 백성을 축복해 오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독자들 모두가 이 내용으로부터 여호와의 봉사에서 전진하도록 격려를 받고 여기에 실려 있는 사건 모두가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이 참됨을 입증하는 것임을 명심하기 바라는 바이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라.]”—고린도 후 13:8.

[33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프랑스’

영국 해협

벨기에

독일

룩셈부르크

보스제

로렌

알사스

스위스

이탈리아

알프스

모나코

지중해

코르시카

피레네

스페인

파리

르와르 강

브레타뉴

노르망디

자아르

루베

브류이

쎙-르-노브르

랭스

듀에

디낭

르아브르

카앙

루비에

스트라스부르

낭시

앙제아

낭트

프와티에

무링

리모지

보르도

바욘

툴루스

마르세이유

바스티아

니스

바랑스

보벤

클레르몽-페랑

그레노블

리용

아네시

디종

베장송

뮐루세

[35면 삽화]

1900

‘스위스’ 나무꾼인 ‘아돌프 웨버’가 ‘프랑스’에서 전파 사업을 시작하였다.

[60면 삽화]

1931

(배경) 1931년부터 1940년까지의 ‘파리’ 사무실

(전경) ‘프랑스’와 ‘스위스’ 사무실 직원들과 함께한 ‘러더포오드’ 형제

[64면 삽화]

1932

약 100대의 ‘오오토바이’가 ‘프랑스’에서 왕국 소식을 전하는 데 사용되었다

[66면 삽화]

1933

‘파리’ 전람회의 협회 진열대. 30년대에는 몇가지 서적이 금상을 획득했다.

[69면 삽화]

1937

‘쎙-르-노브르’ 회중 전도인들과 그들이 사용한 확성차

[85면 삽화]

1945

제2차 세계 대전 중 여러 해를 떨어져 있다가 재연합한 ‘엠마’, ‘아돌프’ 그리고 ‘시몬 아놀드’

[99면 삽화]

1948

자전거를 타고 공개 강연을 광고하는 ‘플레카아드’ 증거 활동

[102면 삽화]

1951

‘파리’—전후 첫 국제 대회. 28개국에서 10,456명이 참석하였다.

[111면 삽화]

1959

‘블로근-빌랑꾸르’에 완공된 새 ‘벧엘’

[124면 삽화]

1972

‘루비에’에 세워진 ‘벧엘’ 별관

[131면 삽화]

1978

‘노르망디 엥깔빌’에 세워진 두번째 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