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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우지일랜드’

‘뉴우지일랜드’

‘뉴우지일랜드’

1769년 ‘유럽’인들이 ‘뉴우지일랜드’ 해안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갈색 피부의 ‘마오리’인들이 그들을 맞이하였다. ‘마오리’인들은 백인들보다도 400년 이상 먼저, 기원 제14세기에 ‘커누우’를 타고 이 외딴 남태평양 섬에 상륙했었다. 한 역사가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기원 1350년의 함대에 대한 ‘마오리’인들 자신의 이야기가 외적 증거에 의해 너무나 명백히 확증되고 있음으로 그들은 당당히 믿을 만한 역사를 소유하고 있다.”

1840년 무렵, ‘뉴우지일랜드’에 있는 백인들의 수가 2,000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을 때 수천명의 ‘마오리’인들이 성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840년대초에 ‘마오리’어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서가 약 60,000부 발행되었다. 당시에 글을 읽고 쓸줄 아는 사람은 백인들보다 ‘마오리’인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수가 날로 늘어나자 ‘마오리’인들과 전쟁이 일어났다. ‘마오리’인들의 인구는 크게 줄어든 반면 백인들의 수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현재 ‘뉴우지일랜드’에는 3,000,000명 이상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이들 가운데 ‘마오리’인은 겨우 8‘퍼센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아직도 매년 많은 사람들이 ‘뉴우지일랜드’로 이민해 오고 있으며, 인구의 약 15‘퍼센트’가 외국 태생의 사람들이다.

인구의 대부분이 두개의 주요 섬, ‘노오드’ 섬과 ‘사우드’ 섬에 살고 있다. 길이가 26‘킬로미터’인 하나의 해협이 이 두 섬을 갈라 놓고 있다. ‘노오드’ 섬이 더 작기는 하지만 주민의 70‘퍼센트’ 이상이 그 섬에 살고 있다. ‘뉴우지일랜드’는 총 면적이 269,057평방 ‘킬로미터’로서 미국의 ‘콜로라도’ 주와 거의 같은 크기이다.

이 땅의 아름다운 경치에 매혹되어 ‘마오리’인들은 ‘아오테아로아’ 즉 “긴 하얀 구름의 땅”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굽이치는 푸른 초원, 절경인 호수들과 협만, 분천과 부글부글 끓는 진흙 웅덩이들로 이루어진 온천 지역, 대단히 아름다운 진귀한 식물군, 수백개의 모래 해변, 꼭대기가 눈으로 덮힌 험준한 산들, 빙하들, 비교적 ‘스모그’가 없는 도시들을 합해서 일컫는 말이다. 이 섬들의 주요 도시들은—모두 인구가 100,000 이상임—크기로 말하면, ‘오클랜드’, ‘웰링턴’, ‘크라이스트처어치’ 그리고 ‘더니든’순이다.

‘뉴우지일랜드’인의 절대 다수는 그리스도교를 믿는다고 주장한다. 900,000명 이상이 성공회에 속해 있으며, 약 570,000명의 장로교인, 480,000명의 ‘로마 가톨릭’교인 그리고 170,000명의 감리교인이 있다. ‘여호와의 증인’의 수는 약 7,000명이며, 이들 중 1,000명 가량이 ‘마오리’인들이다. ‘뉴우지일랜드’에서의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는 75년이 넘는다,

초기의 시작

1904년 경 ‘리처드슨’ 형제와 자매가 미국에서 ‘노오드’ 섬의 ‘오클랜드’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조그만 성서 연구반이 시작되었다. 1907년 무렵 또 한 집단이 ‘사우드’ 섬 ‘크라이스트처어치’의 ‘H. S. 타알턴’ 집에 모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 곧 침례의 중요성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일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그 초기에 좋은 씨가 ‘크라이스트처어치’에 뿌려졌다. ‘콜포처’(당시 ‘여호와의 증인’의 전 시간 전파자들을 그렇게 불렀음) 한 사람이 ‘코로네이션’ 1번가를 방문하였다. 인정 많은 ‘배리’란 한 부인이 ‘그 나이 많은 신사를 딱하게 여겨’ ‘러셀’ 목사의 책 6권을 받았다. 1909년 초에 그의 아들 ‘빌’이 친구 한 사람과 배를 타고 영국으로 6주간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 여섯권의 책을 보고 그들은 여행 도중 ‘심심풀이로’ 읽으려고 그것들을 여행 가방 속에 집어 넣었다. 그들이 ‘발파라이소’, ‘케이프 호온’, ‘리오데자네이로’, ‘테네리페’를 경유하여 마침내 ‘런던’에 도착하여 세계를 반쯤 돌았을 때 ‘빌 배리’는 그 책들을 연구한 결과 그 책의 소식을 진리로 받아들일 정도에 이르렀다.

여러 해가 지난 1914년 6월에 그의 친구는 그에게 이렇게 편지하였다. ‘‘빌’, 세상은 아주 평화스럽기만 하니 ‘러셀’ 목사 말이 틀린게 분명하네’ 그러나 7월과 8월이 오자 성경 연구생들이 그 해에 발생하리라고 기대해 왔던 것 즉 대전이 발발하여 무시무시한 재난의 때가 시작되었다.

1920년대에, 진리는 “‘빌 배리’의 종교”로 ‘크라이스트처어치’의 사업계에 잘 알려지게 되었다. ‘배리’ 형제는 젊은 시절에 몇몇 교직자들과 친분이 있어서 그들과 진리에 대해 토론하곤 하였다. 그는 제 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점잖은’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그 때 이후로는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렇게 된 것은 바로 그들이 전쟁을 옹호하여 유혈죄를 지었기 때문에 여호와께 심판을 받고 배척을 당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중에 ‘빌’은 자기 자녀들의 마음에 성서 진리를 깨우치는 일을 훌륭히 해냈다. 얼마 안 가서 그의 아들 ‘로이드’가 ‘오스트레일리아’의 ‘벧엘’ 봉사에 들어갔고, 일본에서 선교인으로 25년간 봉사했으며 지난 6년간 그는 ‘뉴우요오크’, ‘브루클린’ 소재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에서 봉사해 왔다.

1910년 경의 그 당시 초기로 되돌아가 ‘에반즈’ 자매와 ‘블릭’ 자매가 수도 ‘웰링턴’에 살고 있었다. 한 여행하는 ‘콜포처’가 ‘웰링턴’에서 24‘킬로미터’쯤 떨어진 ‘타이타’의 한 농부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이 방문이 곧 이들 자매에게 큰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다. 이 ‘콜포처’가 방문한 농부는 ‘잭 월터즈’였다. ‘잭’은 「성경 연구」를 3권 주문하였다. 그의 아내 ‘에디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두달 후에 그 책들이 배달되었는데 남편은 밤낮으로 그 책들을 다 읽어버렸지요. 그 동안 우린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어요. 남편은 미국으로 편지하여 성서 한권과 책들을 좀 더 주문하였어요. 그들이 「성경 연구」 제4권, 5권, 6권을 보내주자 남편은 기뻐 어쩔줄 몰라 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 내용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몰랐어요. 그들은 또한 우리에게 ‘협회’의 ‘멜버른’ 주소를 알려 주었죠.”

‘잭 월터즈’는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 편지하여 책을 한 상자 주문하였다. 그 책들을 받자 그는 자전거에 싣고 그가 새로 발견한 믿음에 대해 몇몇 외딴 지역에 사는 농부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 언덕 너머 이웃 ‘와이누이오마타’ 계곡으로 갔다. 현재 그곳에는 주택 개발이 광범위하게 진행중이며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이 하나 있다. ‘월터즈’의 서적 주문을 받자 ‘멜버른’ 사무실은 ‘에반즈’ 자매와 ‘블릭’ 자매에게, 인근 ‘타이타’에 있는 ‘J. F. 월터즈’란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 26세된 젊은 남자가 진리 안의 형제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얼마나 기쁨에 넘쳤겠는가! 이렇게 하여 1911년에 ‘웰링턴’ 회중이 그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잭 월터즈’의 어머니가 진리 안으로 들어왔으며 또한 그의 여동생과 남동생 및 다른 식구들도 진리 안으로 들어왔다.

전파 사업을 개척한 사람들

정력과 열의가 대단하면서도 지나치게 순진한 그러나 주의 사업을 위해 온 영혼을 다한 한 사람, ‘에드 넬슨’이 ‘뉴우지일랜드’에서의 참 숭배의 초기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연설은 단호했고 강한 ‘핀란드’ 억양을 띠었다. 1902년 여름에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침례를 받은 그는 ‘뉴우지일랜드’로 오기 전 1909년과 1910년에 ‘협회’의 ‘멜버른’ 사무실에서 일했다. 그는 1961년 8월에 사망할 때까지 50년 동안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다. ‘뉴우지일랜드’ 북부의 ‘카우리’ 고무 나무 농장에서 ‘블러프’(‘뉴우지일랜드’의 최남단)까지 가 보면 ‘에드넬슨’의 방문을 기억하고 있는 개인들을 아직도 만나볼 수 있다.

‘뉴우지일랜드’에서의 여호와의 백성의 최초의 대회가 1912년 12월에 ‘넬슨’ 형제에 의해 준비되었다. ‘웰링턴’의 어느 개인 집 뒷 마당에 20명 가량이 모였다. 이 무리 가운데 여덟명이 침례를 받기 위해 자신을 제공하러 나왔다. 그 당시 침례는 지원자들이 긴 검은 예복을 입는 하나의 중대한 행사였다.

1914년에, ‘에드넬슨’에게 1913년 12월에 침례받은 ‘프랭크 그로우브’가 가담하였다. ‘프랭크’는 그 후 곧 ‘크라이스트처어치’에서 하던 서점 일을 정리하였다. 그는 1914년 가을에 기대하던 제도의 끝이 오기 전, 적어도 몇 달 동안 ‘파이오니아’ 봉사를 즐기고 싶었다. 후에 ‘프랭크’는 ‘예레미야’ 20:7(신세)의 “오 여호와여, 당신이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속았읍니다”란 말을 즐겨 인용하였다. 잠깐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그의 ‘파이오니아’ 봉사는 1967년 그의 사망시까지 보람된 50년 이상이나 연장되었다.

한번은 ‘협회’가 실시한 질문서에 대답하는 가운데 ‘프랭크 그로우브’는 그의 건강에 관해 “시력이 대단히 나쁨”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를 알던 사람들은 그가 끼고 다니던 두꺼운 돋보기 안경과 카랑카랑하고 힘찬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증거 집단들이 점심 시간에 ‘샌드위치’를 먹기 위해 잠시 쉴 때 ‘프랭크’ 주위로 종종 모여들곤 하였다. 그러면 그는 긴 성귀들을 심지어 「레위기」 전체 장과 다른 성서 책들을 줄줄 암송하곤 하였다. 그는 여러 해 동안 ‘크라이스트처어치’ 회중을 감독하였고, 나중에 1940년에서 1945년까지 ‘인버카로길’에서도 같은 자격으로 봉사하였다.

‘프랭크 그로우브’는 전국에서 50명이 참석한, 1913년 12월에 열린 ‘뉴우지일랜드’에서의 두번째 대회에 참석하였다. 당시에는 자동차가 없었기 때문에 대회 참석자들은 기차편으로 ‘로워허트’ 역까지 여행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마차를 타고 농장에 있는 대회장까지 갔다. 대회 참석자들 중 이전에 서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한 커다란 헛간이 대회를 위해 수리되었다. 건초간을 치우고 형제들을 위해 빌린 1인용 침대들로 채웠고, 자매들은 농가나 가구가 딸린 셋집에서 숙박하였다.

1914년께 왕국 선포자들의 아주 작지만 단단한 핵심이 구성되었다. 네명은 ‘콜포처’였고 다른 여덟명은 이른바 “자진적인” 봉사를 하였다. 봉사는 주로 「만민의 설교단」과 「월간 성경 연구생」을 배포하는 일이었는데, 일요일 아침에 그러한 책자들을 문 아래 넣어 두는 일을 하였다. 모두 합해 12명 밖에 안 되는 이 조그만 왕국 전도인 집단은 1914년에 서적 3,172부와 잡지 75부를 배포하였다.

“창조 사진극”

「창조 사진극」이란 성서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활동 사진과 ‘슬라이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왙취타워 협회’가 그것을 제작하여 1914년에 개봉하였다. ‘뉴우지일랜드’에는 ‘캐나다’, ‘밴쿠우버’로부터 ‘리이’ 형제가 가져와서 소개되었다. 그리하여 1914년 10월 1일에 ‘웰링턴’ 시청 ‘홀’에서 상영되었다.

간간히 ‘러셀’ 목사의 녹음된 목소리가 화면을 설명했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것은 원작품과 꼭 같은 훌륭한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꽤 많은 사람들이 진리 안으로 들어왔다. 이들 가운데 ‘앨리스 웹스터’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직도 ‘로워허트’ 회중에서 충실한 전파자로 봉사하고 있다.

당시 ‘크라이스트처어치’에는 성경 연구생이 단지 세명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영화와 ‘슬라이드’ 상영을 돕기 위해 ‘웰링턴’에서 세명이 더 왔다. 그들은 ‘크라이스트처어치’에서 가장 큰 ‘홀’인 ‘킹즈’ 극장을 빌렸다. 그 ‘홀’은 한달 내내 매일밤 초만원이었다! 그 때는 공공 강당에서의 흡연이 법으로 금지되기 이전이었다. 그래서 장내는 담배 연기로 자욱하여 그 탁한 공기를 통과하기 위해 7,000촉광짜리 ‘아크’등을 사용해야 하였다.

그 ‘아크’등이 단지 45‘볼트’용이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110‘볼트’의 전압을 낮추기 위해, 보통 울타리용 철사를 커다랗게 둘둘 만 ‘코일’을 사용하였다. ‘코일’에 이따금씩 열이 대단히 많이 나서 한번은 ‘코일’ 상자에 불이 붙었다. 연락을 받은 소방대원이 재빨리 전류를 끊었다. 그 다음부터 형제들은 그러한 긴급 사태를 대비하여 여러 장의 담요를 물에 적시어 항상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탁한 공기나 원시적인 장비 때문에 그 상영 내용의 힘이 감소되지는 않았다. 관중은 다만 감격하여 정신을 잃고 구경할 따름이었다.

시험 시기

‘왙취타워’ 협회장 ‘차알스 테이즈 러셀’이 1916년에 사망하여 ‘조셉 F. 러더포오드’가 그를 계승하자 불화의 파문은 이곳 ‘뉴우지일랜드’에까지 파급되었다. 조직의 일부 성원들은 ‘러더포오드’ 형제의 임명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다. 미국의 몇몇 교란자들이 분열을 선동하려고 ‘뉴우지일랜드’ 형제들에게 서한을 보냈다. 동시에 외부로부터의 공격도 있었다. ‘뉴우지일랜드’의 신문들이 여호와의 백성에 대해 야비한 공격을 가하였다. 한번은 형사들이 형제들 가운데서 선동자들을 찾아낼 목적으로 ‘웰링턴’의 한 성경 연구에 참석하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파 사업은 성공적으로 진전되었으며, 왕국 선포자들의 수가 1914년의 12명에서 1918년에는 18명으로 증가하였다. 전시에 그 조그만 ‘웰링턴’ 회중에 가담한 사람들 가운데는 전 구세군 대위 ‘올리버 캔티’도 끼어 있었다. 「성경 연구」를 읽고 나서 그는 진리를 발견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구세군에서 사임하였다. 그는 1917년에 ‘웰링턴’ 회중의 한 자매와 결혼했으며 ‘더니든’으로 이사하여 1934년 사망시까지 그곳 회중의 감독자로 섬겼다. 이렇게 하여 이 나라에서 네번째로 큰 도시에 회중이 형성되어 남북에 걸쳐 총 회중 수는 6개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1920년대에 개시된 활동적인 전파를 위한 기반이 형성되었다.

진리가 퍼진 방법

초기의 ‘파이오니아’들은 문자 그대로 개척자들이었다. 그들은 교통 수단이 아주 원시적이었던, 소가 다니는 길 이상은 거의 없던 때에 접근이 가장 곤란한 이 나라 구석구석에 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어얼리’ 자매는 바로 그러한 개척자였다. 나중에 ‘파이오니아’들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어얼리’ 자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왔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파이오니아’는 “‘어얼리’ 자매는 항상 ‘어얼리’였읍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의 이름, ‘어얼리’—Early—의 첫 글자를 소문자로 바꾸면 ‘일찍’이란 뜻이다.)

‘어얼리’ 자매는 1943년에, 향년 74세로, 사망할 때까지 34년간 ‘파이오니아’를 하였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심지어 관절염으로 절름발이가 되어 더 이상 자전거를 탈 수 없게 되자 그는 자전거를 의지하는데 사용하였으며 서적들을 싣고 ‘크라이스트처어치’의 사업 구역으로 돌아다녔다. 계단을 올라갈 수는 있었지만 다리를 저는 불구의 몸이었기 때문에 계단을 내려올 때는 뒷걸음으로 내려와야 하였다. 어느날 저녁 그의 의사가 “‘어얼리’ 씨, 당신은 하늘에 갈 준비가 되어 있읍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그 때가 아무리 빨리 와도 이르지 않습니다, 의사 선생님” 하고 그는 대답하였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는 자기의 희망을 실감하였으며 ‘자기의 행위가 자기의 뒤를 따’랐다.—계시 14:13, 새번역 참조.

‘오스트레일리아’ 지부 사무실에서 방문한 형제들이 행한 공개 강연 역시 1920년대에 신권적인 성장을 촉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예를 들면, ‘빌 쿠우퍼’란 사람이 ‘윌리엄 존스턴’이 1920년에 ‘웰링턴’ 시청 강당에서 행한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란 강연을 들었다. ‘빌’은 진리안으로 들어왔고 여러 해 동안 ‘웰링턴’에서 주임 감독자로 섬겼다.

동일한 강연이 금광 도시 ‘와이히’에서 행해졌을 때 젊은 ‘빌 샘슨’과 그의 아내가 참석하라는 초대에 응하였다. 그들은 이름과 주소를 남겨 놓았다. 그래서 ‘에드넬슨’과 그의 아내가 그들을 방문하였다. 후에 그 방문은 ‘프레드 프랭크스’에게 인계되었고, 그는 ‘샘슨’ 부부가 진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도왔다.

1920년대에, ‘빌더즈 챔버즈’의 어느 어둠 침침한 안방에 모였던 ‘크라이스트처어치’ 회중과 연합한 사람들 가운데는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군인이었던 ‘마이클 캐시디 오할로런’이 끼어 있었다. 그렇다. ‘마이클’은 ‘에이레’ 사람으로 ‘가톨릭’ 교인이었다. 나중에 그가 남은 다리마저 절단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 병원 직원들은 그러한 ‘에이레 가톨릭’계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여호와의 증인’이 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마이클’은 ‘뉴우지일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여러 해 동안 전 시간 봉사를 하였다. 항상 명랑하고 ‘에이레’적인 ‘위트’가 많은 그는 진리의 길에서 노소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열정적인 일군들이 전한 ‘협회’의 서적들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의 길에서 출발하도록 하였다. ‘와이히’ 부근의 또 다른 금광 도시 ‘테임즈’에 살던 ‘레그 존스턴’은 「성경 연구」 6권이 가족의 서가에 없던 때를 기억할 수 없었다. 1916년 사망시까지 그의 어머니는 그 책에 들어있는 내용들을 그에게 이야기해 주곤하였다. 더 많이 알고 싶어서 ‘레그’는 나중에 ‘프랭크스’ “할아버지”(‘프레드 프랭크스’의 아버지를 그렇게 불렀음)를 만났다. ‘레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밤마다 이 연로한 형제는 우리가 그렇게 귀중하게 여기는 진리들을 내가 이해하도록 도와주셨읍니다. 흔히 자정이 가까와오면 ‘‘레그’, 이제 집에 갈 시간이구나’ 하고 말씀하시곤 하였읍니다.

“나의 아버지는 아직 살아 계셨읍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다른 친척들은 ‘테임즈’에서 ‘‘프랭크스’의 종교’라고 불리는 종교로 내가 개종한 것에 분개하셨읍니다. 결국 결판이 났읍니다. 아버지는 성공회에 고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를 집에서 쫓아냈읍니다.”

‘레그 존스턴’은 나중에 결혼하여 아내 ‘레타’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 벧엘’에서 3년 반 동안 봉사하였다. 1940년에 그는 ‘뉴우지일랜드’로 돌아와서 1940년에서 1946년까지 “형제들의 종”(당시 순회 감독자들을 그렇게 불렀음)으로 봉사하였다.

‘켄 페핀’이 1924년에 영국에서 ‘뉴우지일랜드’로 왔었다. 1928년 9월 어느 날 그가 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세속 직장을 떠나려고 하는데 한 사람이 “아아! 무덤에 갈 날이 하루 더 가까왔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을 얼핏 들었다.

‘켄’은 한 직장 동료에게 다가가서 “그 친구가 한 말은 천당에 갈 날이 하루 더 가까와졌다는 뜻인가요?” 하고 물었다.

“아니오. 무덤에 갈 날이 가까왔다는 뜻이오.”라는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그들이 전차 ‘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대화가 몇분간 발전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서로 헤어져 다른 길로 집에 갔다. 하지만 이튿날 아침 ‘켄’의 그 직장 동료는 그에게 「죽은 자는 어디에 있는가?」란 소책자를 한권 가져다 주었다. ‘켄’은 그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난 그 책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설명과 참조된 것을 일일히 성서를 가지고 ‘체크’해 가면서 읽었읍니다. 하지만, 그 책자는 나의 이전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해 주었읍니다. 나는 다시 교회에 나가지 않았읍니다.” ‘켄’은 후에 ‘뉴우지일랜드’에서 여러 해 동안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다.

‘노오드’ 섬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토머루뉘’에서 일하던 ‘클리프 키오건’이란 푸주한이 있었다, 1928년에 ‘오클랜드’에서 그의 약혼녀가 그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성서를 아주 명백하게 설명해 주는 책을 한권 막 읽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거문고」란 그 책을 포장해서 그에게 우편으로 부쳐주었다. 바로 그 날 화재가 나서 약혼녀의 집이 전소되고 말았다.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그 책만은 우편으로 가고 있었다.

그 책은 ‘클리프’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오클랜드’로 돌아와서 그는 성원이 30명 가량되는 그 지방 회중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현재 그는 ‘오클랜드’의 한 장로이며, 그곳에는 21개 회중과 약 1,800명의 왕국 전도인이 있다.

1920년대 후반 ‘뉴우지일랜드’에 심각한 실직 상태가 초래되어, 보통 환경하에서는 세속 직업을 버리는 사람이 없는 때가 있었다. 그러나 1928년에 ‘버어트 크리스텐센’은 그렇게 하였으며 ‘파이오니아’ 봉사에 들어갔다. “난 한 순간이라도 후회를 해본 일이 없읍니다” 하고 그는 설명하였다. 그의 임지는 어디였는가? ‘사우드’ 섬의 서해안 전체였다! ‘버어트’는 친구들의 집이나 하숙집에 머무르며 그 구역을 다 도는 데 6개월이 걸렸다.

1928년 무렵 ‘뉴우지일랜드’에는 10명의 ‘파이오니아’와 약 63명의 전도인이 있었다. 그들은 그 해에 약 12,000부의 서적과 28,000부의 소책자를 배포하였다. 이러한 열정적인 전파자들에게 필요한 서적을 공급하기 위해 1928년에 ‘웰링턴’에 서적 보관소가 설치되었다. 결국 ‘웰링턴’, ‘켄트 테라스’ 69번지에 있는 한 집을 매입하여 보관소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곳은 1947년 ‘뉴우지일랜드’에 지부가 설립될 때까지 ‘여호와의 증인’의 본부가 되었다.

‘마오리’인들의 모임

최초의 ‘마오리’인 대회가 1928년에 ‘노오드’ 섬의 동해안 ‘태러데일’에 있는 ‘투이리 타레하’의 저택에서 열렸다. ‘투이리’는 ‘협회’의 서적을 친척들로부터 입수하였으며, 곧 진리를 발견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교회에서 탈퇴하였다. 그의 아들 ‘차알스’는 그 때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마오리’ 사회에서 아버지가 탁월하였기 때문에 그의 탈퇴는 성공회의 교단 내에 동요를 일게 하였다. 그들은 즉시 그의 탈퇴를 철회하기 위한 목적으로 특별 모임을 갖자고 요청하였다. 아버지는—교회 안에서가 아니라—특별히 이 모임을 위해 커다란 연단을 만든 우리 대지 위에서 그 모임을 갖는 데 동의하였다. ‘뉴우지일랜드’의 성공회 주교 ‘F. 베네트’를 포함하여 많은 교직자들이 백인과 ‘마오리’인으로 이루어진 다른 400명 가량의 많은 군중과 함께 참석하였다.

“성공회의 ‘마오리’인 대변자는 성서를 사용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는 감정에 호소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영혼이 사후에도 계속 존재한다고 믿었읍니다.’라고 그는 상기시켰다. ‘그런데 당신은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는 종교를 선택했읍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성서를 펴서 사람 자신이 영혼이며, 그러므로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이 죽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아버지는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한번 더 산 영혼으로 부활시킬 수 있으시다고 설명하였다.

“그 성공회 교직자는 자기가 설득력있는 주장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게 되자, 나의 증조부가 지었던 옆에 있는 교회를 향해 흥분한 몸짓을 하면서 감정에 복받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당신의 훌륭한 조상들이 당신에게 물려 준 이 거룩한 유산을 버리지 마시기를 최종적으로 호소하는 바입니다.’”

“그 다음 아버지가 일어나 모두에게 와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자기가 이제 진리를 가지고 있음을 이전 어느 때보다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모두에게 우리의 정기적인 성서 연구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며 그들 모두에게 참석하라고 초대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였다.”

진리가 외딴 목동에게 이르다

과거 1929년에 ‘사우드’ 섬, ‘체비오트’ 부근의 어느 양치는 커다란 목장에 ‘루우 제임즈’란 사람이 일하고 있었다. 어느 화창한 날, 점심 식사를 마치고 그가 합숙소에서 잠깐 낮잠을 자고 있는데 한 사람이 문간에 불쑥 나타났다. 그는 젊은 청년 ‘벤브리켈’이었는데 “개인 연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대한 지식을 얻도록 돕기 위해 모든 사람들을 만나고자” 방문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루우’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영원한 고초의 장소가 정말로 있을까요?”

“그 사람이 성서를 쉽게 척 펴서 나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들어있는 성귀들을 읽어주었을 때 나는 정말 놀랬읍니다.” 하고 ‘루우’는 설명하였다. “거의 한 시간 동안 그는 나에게 부활과 다가오는 천년 평화 및 땅이 낙원 상태로 회복될 것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여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읍니다.”

‘루우’는 네권의 책 「창조」, 「예언」, 「구출!」 및 「정부」를 받았으며 우편으로 그에게 더 많은 서적을 보내달라고 요구하였다. 곧 그는 밤이 거의 절반이 지나도록 앉아서 동료 목동들과 성서를 토론했으며 「파수대」를 읽었다. 마침내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지부에 편지하여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는 ‘크라이스트처어치’에 있는 ‘프랭크 그로우브’를 찾으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목장을 떠나 ‘크라이스트처어치’로, 여호와의 봉사에서 ‘파이오니아’로서의 새로운 천직을 갖기 위해 출발하였다.

왕국 관심사를 첫째로 둠

이 무렵 ‘클리프 키오건’이 결혼을 고려하고 있는 중이었다. 월간 「게시판」(현재 「우리의 왕국 봉사」)은 “너희도 포도원에 갈찌어다.”란 머리 기사를 굵은 글자로 실었다. “이것은 분명히 열 한시가 되었다고 우리를 부르는 것 같았읍니다” 하고 ‘클리프’는 설명하였다. 그래서 1930년에 그와 그의 아내 ‘에드나’는 두 주간의 신혼 여행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다. 그들의 구역은 ‘오포티키’에서 ‘단네버어크’에 이르는 ‘노오드’ 섬의 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클리프’는 그들의 어느 숙박 시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오포티키’에서 우리는 함석으로 된 조그만한 오두막을 빌려 철제 ‘매트리스’ 위에서 잠을 잤다. 그것은 여러 개의 상자 위에 철사를 얽어 놓고 그 위에 담요 한장을 깐 것이었다. 하룻 밤을 자고 나면 우리 몸에 철사 자국이 났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인쇄기’라고 불렀다.”

1931년에 ‘키오건’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그래서 그들은 ‘오클랜드’에서 겨울을 지냈다. 그러나 몇달이 지난 후 그들은 어린 아기와 함께 야외에 나가 왕국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어려운 시기에 ‘파이오니아’를 함

‘키오건’ 부부는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는 사람들과 합세하였다. ‘파이오니아’들 가운데는 ‘노르먼’과 ‘올리브코크레인’, ‘월리우우드’와 그의 딸 ‘에이리인’, ‘렌’과 ‘아아더로우’, 그리고 ‘렌 벨처’가 있었다. 이 집단은 ‘오클랜드’ 바로 남쪽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가면서 해안 지역을 샅샅이 봉사하였다.

‘뉴우지일랜드’는 당시 심한 불황을 겪고 있어서 사람들은 생존 경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부 구제 ‘캠프’는 주로 미개간 소택지(沼澤地)인 ‘하우라키’ 평야에 세워졌었다. 의사와 변호사를 비롯하여 남자들이 ‘노오드’ 섬 방방 곡곡으로부터 그 ‘캠프’로 모여들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멀리 ‘웰링턴’으로부터 480‘킬로미터’ 이상이나 걸어서 왔다. 그들은 소택지 개발을 위해 운하와 배수 도랑들을 파는 일을 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파이오니아’들의 말을 잘 들었으나 서적을 위해 지불할 돈은 없었다.

1932년 12월이 다가오자 ‘파이오니아’들은 ‘웰링턴’에서 열리는 전국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그 대회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지부의 종 ‘맥길리브레이’ 형제와 ‘뉴우지일랜드’의 전파 사업을 조직하는 임명을 받았던 ‘해럴드 길’이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두 주요 섬에서 봉사하도록 ‘파이오니아’들을 조직하였다.

‘노오드’ 섬에서 봉사하다.

한 집단의 ‘파이오니아’들은 ‘웰링턴’ 북쪽 14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팔머스턴노오드’에 그들의 본거지를 두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들은 ‘뷰익’ 대형 ‘트럭’과 ‘뷰익’ 자동차 각 한대, 천막 두개 및 네대의 자전거를 가지고 있었다. 자전거는 자동차 앞 부분에다 만들어 붙인 대(臺)에 얹어 운반하였다. 샛길이 있으면 자전거를 한대 내려 ‘파이오니아’ 한 사람이 그걸 타고 그 구역에 봉사하곤 하였다. 보통 시내는 자매들이 증거하고, 시골 지역은 형제들이 봉사하였다.

‘이키터휴너’에서 ‘캠프’ 생활을 하는 동안 형제들은 새벽 6시에 출발하여 하루 종일 거치른 자갈 길을 42‘킬로미터’ 이상이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곤 하였다. 종종 그들은 농장을 차례차례 방문해 보았으나 버려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가족들은 경제 공황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떠나고 없었다. 그들은 가구들을 집안에 둔 채로 버렸다. 만난 사람들은 대개 왕국의 좋은 소식을 듣고 여호와의 정하신 때가 되면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을 알게 되어 기뻐하였다.—이사야 65:22.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긴급 사태가 발생하였다. ‘오클랜드’ 회중 내에, 일부 선출된 장로들이 반역적인 행동을 하여 심각한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오스트레일리아’ 지부 사무실은 그 ‘파이오니아’ 집단에게 ‘오클랜드’로 돌아가 충성스러운 자들을 지지하고 그곳에 ‘파이오니아’집을 설치하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노오드’ 섬 집단의 계획된 사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사우드’ 섬의 ‘파이오니아’ 집단

‘사우드’ 섬 집단은 12명 내지 14명 가량의 ‘파이오니아’들로 구성되었다. ‘해럴드 길’이 이 집단을 조직하였고, 얼마 안가서 ‘짐 테이트’가 가담하였다.

‘짐’은 ‘크라이스트처어치’의 시민 극장에서 행해진 ‘J. F. 러더포오드’의 녹음 강연 초대에 응한 신중한 정신을 가진 젊은이였다. 거기에 도착하자마자 ‘짐’은 ‘해럴드 길’에게 소개되었다. ‘해럴드’는 이튿날 저녁에 시민 극장 밖에서 ‘짐 테이트’를 만날 수 있느냐고 질문하였다. 왜냐 하면 그는 ‘짐’이 들은 것들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날 저녁에 ‘짐’은 소 젖짜는 일을 서둘러 끝마치고 시민극장까지 약 9.6‘킬로미터’의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갔다. 그들은 ‘해럴드’의 자동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내 ‘길’은 “이것이 하나님의 조직임을 확신한다면 당신은 지금 ‘파이오니아’하러 갈 필요가 있읍니다!” 하고 말하였다.

“‘파이오니아’란 무엇입니까?” 하고 ‘짐’이 질문하였다.

그래서 ‘파이오니아’ 집단의 마련을 ‘짐’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불황인 때에 그가 세속 직업과 그것이 주는 안전을 버릴 것인가? 그는 버리기로 결정했으며 발생한 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길’ 형제는 예정대로 나를 집으로 방문하였다. 그 날은 무더웠고 강한 북서풍이 불고 있었다. 나는 짙은 감색 양복을 입고 새로 산 모자를 썼다. 나는 소지품을 자전거와 함께 그의 자동차에 붙들어 매었다. 나는 부모님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파이오니아’ 봉사가 실제로 어떤 것인지도 아직 충분히 모른 채 ‘파이오니아’ 집단에 가담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내가 확실히 믿었던 한 가지는 ·⁠·⁠· 내 자신이 하나님의 조직에 연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좋은 소식의 용감한 선포자들

그들은 어려운 일과 거치른 상황을 기꺼이 인내할 수 있는 대담한 ‘파이오니아’들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수당도 받지 않고 할인하여 받은 서적을 전한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매일 8시간 내지 10시간 봉사하였다.

‘사우드’ 섬의 겨울철은 인내의 시험이 되는 때였다. ‘파이오니아’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이 잠을 잘 때 내쉰 호흡 속의 기체가 응결되어 생긴 고드름이 천막 안에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하였다. 천막의 벽들은 얼어 붙어 딱딱한 판자처럼 되곤 하였다. 아침에 세수를 하려면 1.3‘센티미터’나 되는 얼음을 깨야 하였다. 흔히 형제들은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오우버 코우트’로 몸을 감싼 채 아침 식사를 하였다.

매주 하루는 그들의 “철마”(자전거)를 분해 수리하고 세탁을 하기 위해 별도로 떼어 놓았다. 세탁은 등유 ‘버어너’ 위에 올려놓은, 뚜껑이 없는 주석 깡통으로 삶아서 하는 원시적인 작업이었다. 형제들은 매일 밤 그들의 바지를 ‘매트레스’ 밑에 넣고 눌러 주름을 잡았고 자매들은 ‘가솔린’ 다리미를 사용하였다.

‘파이오니아’들이 멀리 남쪽에 있는, 조그만 도시 ‘튜어터페르’에 도착했을 때 사도 ‘바울’이 고린도 후서 11:26에 기록한 “강의 위험”과 맞먹는 경험을 하였다. 이 때 그들은 각 여섯명으로 된 두 집단으로 되어 있었다. 일부 형제들은 ‘튜어터페르’ 교외 ‘웨이오’ 강둑에 천막을 쳤다. 그들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허술하고 조그만 오두막을 하나 발견하여 그리로 이사하였다.

기온이 평년과는 달리 따뜻하여 제철답지 않게 산 속의 눈이 녹아내렸다. 강물의 수위가 불어났다. 그러나 ‘파이오니아’들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 염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둠이 닥쳤을 때 그들은 물이 마루 바닥을 찰랑찰랑 때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갇힌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불을 밝힐 양초 두 자루 밖에 없었다. 그날 밤 늦게 그들은 여호와께 기도를 드린 후 마침내 잠이 들었다.

그날 밤 강물은 둑을 넘어뜨렸다. 곧 부목(浮木)들과 나무토막들이 그 허술한 오두막에 부딪치는 소리에 그들은 잠을 깼다. ‘파이오니아’들 중 한 사람이 담요를 잠자리로 끌어 당기려고 팔을 폈다가 물이 손에 닿자 기겁을 하였다! 무서운 경험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진흙과 개흙층을 남기고 수위가 마루 바닥 밑으로 떨어진 것을 보고 그들은 여호와께 감사하였다. 일시적으로 고립된 그들은 두려움 없이 여호와의 봉사를 계속하기 위해 길로 안전하게 걸어 나갈 수 있을 때까지 하룻밤을 더 거기서 머물렀다.

‘사우드’ 섬을 이 집단은 두번이나 돌았다. 흥미롭게도, ‘짐 테이트’는 그 집단과 함께 1년 동안 ‘파이오니아’ 봉사를 한 후, 1933년이 되어서야 추운 10월 어느날 바다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 섬을 두번째 돌 때 ‘짐 테이트’는 서적을 전하며 틀이를 한벌 사기에 충분한 저축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이 여행을 끝마쳤을 때 그에게는 꼭 필요한 미화 50‘달러’가 저축되어 있었다. 여호와께서 이러한 방법으로 그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신 것을 그는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그런데, 틀이를 사기도 전에 그는 당시 처녀 구역인 ‘채탐’ 제도로 봉사하러 가고 싶지 않은지 문의하는 편지를 ‘협회’로부터 받았다.

‘채탐’ 제도는 ‘크라이스트처어치’에서 동쪽으로 800‘킬로미터’에 위치하고 있으며 ‘뉴우지일랜드’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당시 그 제도에는 주로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는 800명 가량의 ‘마오리’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자전거라곤 한대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유일한 교통 수단은 말을 타고 가는 것이었다. ‘짐’은 ‘리텔턴’에서 ‘채탐’ 제도의 주요 섬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만 항구 도시 ‘와이탱기’까지 배를 타고 가야 했으며, 그것도 자기가 배 운임—정확하게 50‘달러’—을 지불해야 하였다.

‘채탐’ 제도에서의 봉사

그렇게 하여 ‘짐’은 ‘채탐’ 제도로 갔고, 그의 틀이를 사는 일은 아직 기다려야 하는 장래 희망이 되었다. 그는 서적과 소책자를 여러 상자 가지고 도착하였다. 그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 섬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나를 마중 나오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말을 타고 다녔으며 도로도 없었고 ‘모오터’ 차량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한 농부에게 가서 말을 한 마리 빌렸다. 나는 자루를 찢어, 담을 수 있는 가방들을 만들고 거기에 책들을 넣고 안장 양쪽에 매달았다. 왕국 소식을 가지고 그 섬 전체를 돌기 위해 출발할 때 나는 면도기와 수건을 넣은 다른 가방을 하나 등에 둘러맸다.

“사람들은 궁금히 여겼으며 밤이 되면 항상 누군가가 나를 맞이해 들였다. 나는 그러한 마련을 해 주신 여호와께 참으로 감사하였다! 어떤 날은 수십 ‘킬로미터’나 말을 타고 가서 겨우 한 두 집을 방문하곤 하였다. 한번은 40‘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진 어느 외진 목장으로 가는 아주 이상한 방향 표시를 보게 되었다. 예를 들면, 한 경계표는 죽은 수소의 마른 뼈들을 모아 둔 무더기였다. 여기서 방향을 바꾸어 나는 얕은 호수로 들어가는 한 지점에 이르렀다. 말과 내가 길을 잃고 일종의 유사(流砂)와 같은 수렁에 빠지지 않으려면, 직선 거리가 약 6‘킬로미터’나 되는 그 호수를 건너가야 하였다. 나는 궁금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여호와께서 오늘 밤에도 나를 위해 준비해 주실 것인가? 나를 맞이해 줄 집이 있을 것인가? 그들이 나를 맞이해 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말을 집 난간에 매었을 때 날이 어두웠다. 책이 든 가방을 들고 나는 문으로 다가가 ‘노크’를 하였다.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나를 한번 쳐다보고 깜짝 놀라며 ‘짐 테이트’, 여기서 무얼하고 있는 거예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 젊은 여자는 어릴 때 나와 함께 학교에 다니던 동창이었다. 나는 환영을 받았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시 나를 위해 준비해 주셨다. 나는 참으로 행복했다! 내가 가진 책을 거의 전부 그 집에 전하였고 이튿날 나는 ‘와이탱기’로 되돌아 왔다.”

두달 동안 ‘채탐’ 제도에서 증거하면서 여러 상자의 서적을 전한 후 ‘짐’은 ‘크라이스트처어치’의 항구 도시 ‘리텔턴’으로 돌아왔다. 그는 서적을 전해 받은 헌금으로 비용을 충당하고도 정확히 50‘달러’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틀이를 사 넣을 수 있었다. 수년 후 한 대회에서 그는, 그가 ‘채탐’ 제도에서 방문했을 때 처음 만난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젊은 가족을 이루고 있는 한 자매를 만나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크라이스트처어치’에서의 광고 활동

‘크라이스트처어치’ 회중은 이 도시 심장부에 있는 한 극장에서 공개 강연을 열기 위해 준비하였다. 강연은 당시 ‘왙취타워’ 협회장 ‘조셉 F. 러더포오드’가 행한 “‘파시즘’ 혹은 자유—어느 쪽?”이란 제목의 녹음 강연이었다. 시 의회는 그 강연을 광고하기 위해 ‘샌드위치 보오드’ 행진 즉 앞뒤에 광고판을 달고 다니면서 선전하는 행진을 허락해 주었다. 거의 같은 시간에 계획되었던 어느 악대의 경진 행렬과 충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행진 진로가 지정되었다.

형제들은 이열 종대로 ‘샌드위치’ 광고판을 메고 출발하였다. 그들이 대로에 접근했을 때 악대의 음악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 왔다. 그들이 교차로에 도착하자 장쾌한 행진곡을 연주하는 한 악대가 막 지나갔다. 그 악대와 다음 취주 악대와의 간격은 약 1.5‘미터’였다. 형제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샌드위치’ 행진을 하고 있던 형제들이 강연을 광고하는 ‘플래카아드’를 들고서 이 틈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길 양편에 줄지어 서 있는 수천명의 사람들에게 상당한 증거가 되었다! 일요일 공개 강연에 그 조그만 ‘크라이스트처어치’ 회중에 500명이 참석하였다. 참으로 강력한 증거였다!

열정적인 자매들

한편, ‘노오드’ 섬에서는 ‘이다 톰슨’ 자매가 ‘바아턴’, ‘조운즈’, ‘프리스트’ 자매와 더불어 1930년대의 전파 사업에 앞장섰다. 그들은 한번에 9일 간이나 집에서 멀리 떠나 ‘웰링턴’ 북쪽으로 수백 ‘킬로미터’를 다니면서 모든 소도시와 농장에서 증거하였다. 그들은 서적을 여러 상자 가지고 갔으나 거의 언제나 모두 전하였다. 여러 날 밤 그들은 건초 헛간이나 자동차 안에서 잠을 자곤 하였다. 그들은 ‘왕국’을 위해 그러한 불편한 생활을 “견딜” 각오가 되어 있었고, 1932년에서 1940년까지 이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다 톰슨’의 아들 ‘애드라이언’은 1949년에 일본에 들어간 최초의 선교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최초의 순회 감독자로 어머니와 비슷한 “파이오니아” 정신을 나타냈다.

이 초기 수년 동안에는 전적으로 서적을 배포하는 일에 역점을 두었다. 사람들이 간행물들을 읽고 공부하도록 격려를 받기는 하였으나,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 연구와 같은 것은 들어보지도 못하였다. 하지만, 진리의 씨를 다량으로 뿌리는 일은 달성되었다.

확성차 봉사

그 당시 왕국 소식을 선포하는 주된 방법은 확성차에 의한 것이었다. ‘러더포오드’ 형제의 연설들을 확성기로 크게 확대하며, 이따금씩 5‘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한번은 어느 집주인이 ‘짐 테이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여보시오, 오늘 아침 나는 아주 이상한 소리를 들었답니다. 구름 속에서 음악 소리와 어떤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지요. 나는 세상 끝이 오는 줄 알았답니다!” 그 일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여자는 성서 서적을 쾌히 받았다.

‘오클랜드’에서는 확성차 봉사가 엇갈린 반응을 받았다. 어떤 때는 확성차로 광고하면 집주인들이 손에 돈을 쥐고 서적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화가 난 무리들이 자동차에 돌을 던지고 확성기를 자동차 지붕에서 끌어내리려고 하였다.

‘J. F. 러더포오드’의 방문

1938년에 ‘J. F. 러더포오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뉴우지일랜드’를 방문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리는 한 대회에 가던 중 4월에 들린 그는 ‘우정의 샘’ 강당에서 ‘오클랜드’ 회중에게 연설하였다. 그 날 저녁에 ‘러더포오드’ 형제는 배편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로 떠났는데, 이번에는 14명의 ‘뉴우지일랜드’ 형제가 그의 여행의 동반자가 되었다. 4월 15일 ‘기념식’을 지키기 위해, 모두는 배에 있는 그의 개인 응접실로 초대되었다.

두 주일 뒤 귀국 여행 길에 선상에서 조직된 증거를 하였다. 전도지를 각 문 밑에 넣어 두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어느 누구도 알기 전 이른 아침에 배 전체를 다 돌았다. ‘오클랜드’에 입항한 ‘러더포오드’ 형제는 남는 몇시간을 이용하여 1938년 5월 2일 점심 시간에 ‘오클랜드’ 시청 강당에서 한 차례 공개 강연을 하였다.

먹 구름이 모여드는 시기의 활동

1939년에, ‘로버어트 라젠비’가 ‘웰링턴’에 소재한 ‘뉴우지일랜드’ 서적부를 돌보도록 임명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벧엘’에서 봉사하고 있던 ‘레그 존스턴’이 ‘로버어트’와 합세하였다. 당시 ‘웰링턴’ 회중과 연합하고 있는 형제들은 단지 12명밖에 안되었다. 그들은 69번지 ‘켄트 테라스’ 집의 거실에서 집회를 열었고, 그 집은 또한 서적 보관 본부로 사용되었다. 1939년 경에 ‘뉴우지일랜드’에는 35명의 ‘파이오니아’를 포함하여 왕국 전도인이 320명 있었는데, 이들은 19개 회중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종교적인 박해의 먹구름이 이 때 모여들고 있었다. 특히 ‘가톨릭’ 교회는 ‘증인’들이 배포한 서적이 그 교회의 가르침들과 관습들을 폭로하였기 때문에 분개하고 있었다. ‘뉴우지일랜드’의 ‘가톨릭’이 발행하는 「태블릿」은 1939년 4월 19일자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을 언급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 동안, 이 증대하고 있는 협박에 대항하여 국회 의원들에게 항의하는 것은 모든 선량한 시민의 의무이다. 충분한 항의가 행해지면 정부는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전파 사업이 금지되다.

1년 후인 1940년 10월 13일에 형제들은 ‘사우드’ 섬의 소도시 ‘오아마루’에서 “정부와 평화”란 제목의 ‘러더포오드’ 형제의 녹음 강연을 광고하고 있었다. 그 날밤 한 경관을 포함하여 40명 가량이 그 연설을 듣기 위해 참석하였다. ‘유럽’에서는 제 2차 세계 대전이 진행중이었고, ‘증인’들에 대한 박해가 증가되고 있었다. 그래서 ‘조오지 에드워즈’와 ‘할릿 리들링’이 문에서 경비를 보고 있었다. 총검을 꽂은 0.303구경 총으로 무장한 ‘윌리엄 미이한’이란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꼼짝말고 손 들어! 안 들면 쏴 버리겠다.”

그 사람의 무장을 해체시키기 위해 두 형제와 난투가 벌어졌다. 총이 발사되어 곁에 서 있던 ‘프레데릭 맥오올리’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 그는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다. 엿새 후 중태여서 그는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회복이 잘 되었다. ‘미이한’은 법정에 소환되어 ‘에드워즈’와 ‘맥오올리’를 총으로 위협했다는 이유만으로 유죄가 되어 두달 간의 옥살이와 중노동 형을 선고 받았다.

총격 사고가 있은지 3일 후에, ‘오아마루’ 재향군인회 사무관 ‘A. C. 파이퍼’ 씨는 ‘웰링턴’ 소재 ‘뉴우지일랜드’ 재향군인회 사무총장 앞으로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오아마루’ 재향군인회의 간부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만장일치로 가결하였음: 1940년 10월 13일 ‘오아마루’에서 열린 자신들을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부르는 종파의 한 모임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고와 이 종파에 대한 대중의 강력한 반감을 고려할 때 정부가 이 종파를 ‘뉴우지일랜드’ 전 영토 내에서 금지시키기를 제의하는 바이다 ·⁠·⁠· 그들의 활동은, 다른 지역에서도 분쟁을 더 야기시키기 전에 중지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1940년 10월에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뉴우지일랜드’에서 금지되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6주일 후 전쟁 비상령에 대해 토론하는 가운데 ‘P. 프레이저’ 수상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본인은 어느 특정 교회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시에 사람들의 종교를 모독하는 일을 막고, 가능하다면 당분간이라도 그러한 일을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 ·⁠·⁠· 수상으로서의 본인의 의무라고 봅니다 ·⁠·⁠· 본인은 법무부 장관이 ‘여호와의 증인’들과 어떤 마련을 하도록 희망하는 바입니다. 본인은 그들의 성실이나 순수함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반대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또 그들이 양심에 따라 숭배할 권리가 있음에 아무런 이의가 없읍니다.”

1941년 5월 8일에 정부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내린 금지령에 대한 수정령을 발표하였다. 이 법령은 ‘증인’들이 “성서 연구나 기도 혹은 숭배를 위해” 집회를 여는 것을 합법화하였다. 사실상, 형제 자매들이 성서만 사용한다면 호별 방문하여 증거하는 일도 허용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였다.

금지령하의 활동

금지령이 발표되기 바로 전에, ‘다니엘’ 가 177번지에 있는 부동산을 ‘벧엘’집으로 사용하기 위해 매입하였다. ‘켄트 테라스’ 69번지에 있는 건물이 너무 비좁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켄트 테라스’ 건물은 1945년에 금지령이 해제된 이후까지 기숙사로 빌려서 썼다. 금지령이 발표되자 서적은 전국의 각 회중으로 옮겨졌다. 서적을 침대 밑, 헛간 혹은 지붕 밑에 숨겼다. ‘레그존스턴’은 ‘다니엘’ 가에 있는 그 집 천장 위의 지붕에 큰 공간을 간막이하여 교묘하게 비밀 문을 만들고, 그곳에 서적을 저장하였다. 그는 우편 주문에 따라 이 저장한 서적을 보내주었고, 필요에 따라 그 도시 주위에 있는 형제들의 집에 감춰 둔 서적에서 충당하였다.

경찰이 예고도 없이 전도인들 집을 방문하여 ‘협회’ 서적을 찾으려고 수색하곤 하였다. 종종 서적을 잘 감춰 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허탕을 쳤다. 한 자매는 서적을 ‘카아핏’ 밑에 숨겨 두었는데, 경찰은 그 위를 걸어 다녔으나 발견하지 못하였다. 한 형제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들이 찾아낸 것이라곤 모두 우리가 연구용으로 복사한 것 뿐이었다. 그들은 천장에 50상자의 서적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몰리 톰슨’은 각 「파수대」 연구 기사를 등사 원지에 타자하였다. 사본을 여러 개 만들어 연구용으로 여러 회중에 보내 주었다. 「자녀들」이란 신간 서적도 등사 원지에 타자하고 수천부의 사본을 복사하여 주간 서적 연구용으로 연구를 위한 질문들과 함께 일부분씩 형제들에게 보내 주었다. 인쇄기와 복사 장비는 ‘오클랜드’의 다소 외딴 ‘조오지 코바시치’의 집 벽과 천장의 판자들 뒤에 감춰두었다.

또한 형제들은 우편함에 소책자들을 넣어 두기 위해 밤 늦게 비밀리에 만났으며 이따금씩 새벽 2시에 집에 돌아오곤 하였다. 그 다음날 사람들이 경찰에 전화로 신고하여 소동이 벌어지곤 하였다. ‘크라이스트처어치’에서는 ‘메서어비’ 자매가 붙들려 일주일간 감금되었었다. 경찰은 ‘뉴우지일랜드’의 ‘여호와의 증인’의 지도자들을 알기를 원하였다. 그 자매는 그들에게 특별히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말하였다. 세 사람이 귀가 솔깃하여 그 자매 주위에 모여들자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들의 지도자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해, 그들은 더욱 분노를 터뜨렸다.

금지령에 곧이어 4개월 동안 14건의 법정 소송 사건이 있었다. 많은 형제들은 3개월형을 선고받기도 하였고, 다른 형제들은 집행 유예를 받기도 하였다. ‘그레이스 배그널’은 야외에서 증거를 하고 있다가 어느 ‘로마 가톨릭’ 교인의 전화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그 자매는 벌금 10‘달러’(미화)를 지불하기를 거절하여 14일간 감금되었다.

중립 때문에 감금되다

정부는 전시에 임시 수용소를 만들었다. 군복무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형제들은 전쟁 기간과 그 후 6개월 동안을 그러한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그러한 수용소가 8개 가량있었는데, 약 80명의 형제가 각각 4년 반 이상 수용소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소나무 수풀에서 나무가지를 치는 일, 길을 닦는 일 및 기타 다른 일을 강제로 하게 되었다. ‘로버어트 라젠비’와 ‘레그 존스턴’은 한달에 한차례, 1시간 가량 그러한 수용소에 있는 형제들을 면회할 수 있었다.

겨울철에 수용소 형제들의 상태는 가혹하였다. 그들은 오두막에서 생활하였고, 불을 피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잉크’병의 ‘잉크’가 얼 정도였다. 형제들은 냉기를 더 잘 막기 위해 담요와 몸 사이에 신문지를 여러 겹 끼어 넣었다. 수용소는 철조망으로 둘러처져 있고 하루 24시간 경비병들이 순시를 하고 있었지만 「파수대」 잡지와 기타 새로운 간행물들이 수용소 안으로 들어 오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다.

수용소 안으로 간행물을 넣어주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이 고안되었다. ‘도리스 베스트’는 그의 남편 ‘클리프’를 면회할 때 그들의 애기를 남편에게 건네 주곤 하였다. 그는 다시 그 애기를 잠깐 안고 있으라고 다른 형제들에게 건네 주곤하였다. 애기 옷 속에 서적이 감추어져 있었다. 서적을 꺼낸 다음 애기를 다시 그 엄마에게 돌려 주었다. 또한 잡지들을 납지에 싸서 떡 가운데 넣어 구워 수용소 내의 형제들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한편 수용소 안에서 형제들은 들으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왕국 소식을 전파하였다. 집회도 열었고, ‘로토루아’에서 56‘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스트라스모어’ 수용소에서는 대회 ‘프로’가 조직되기까지 하였다. 형제들은 종교 모임 장소로 사용할 수 있는 긴 이중 오두막을 하나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수용소 안으로 몰래 들여온 내용에 기초하여 ‘프로’를 하나 작성하였다. 비밀리에 그들은 다른 수용자들도 참석하도록 초대하였으며 많은 사람이 31명의 형제들과 함께 그 ‘프로’를 즐겼다.

금지령이 해제되다

그러는 동안 바깥 형제들은 정부가 금지령을 해제하도록 강한 압력을 계속 가하였다. 마침내, 1945년 3월 29일 ‘뉴우지일랜드’의 전국 신문들은 금지령 해제를 보도하였다. ‘웰링턴’의 「도미니언」지는 단독 기사로 조그만 제목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가해졌던 특별한 제한의 해제가 어제 법무부 장관 ‘메이슨’ 씨에 의해 발표되었다. 그는 국민 안보 긴급령 아래 그들의 조직이 파괴적이라고 선언한 장관의 담화를 철회했다고 말하였다. ·⁠·⁠·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상당한 기간 동안 제한이 해제되어 왔었고 온전히 만족스런 결과가 있었다 ·⁠·⁠· 정부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제한의 해제가 가져다 준 동일한 좋은 결과를 ‘뉴우지일랜드’에서도 경험하게 될 것임을 온전히 확신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우리 사업의 반대자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전시에 파괴적임을 나타냈다고 비난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난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금지가 해제된 사실로 강력하게 반증된다. ‘가톨릭’은 재향군인회와 손을 잡고, ‘여호와의 증인’들이 분쟁을 조장하고 있으며 만약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제한을 가하지 않는다면 정부는 전국적으로 ‘오아마루’에서의 총격 사건과 같은 분쟁을 기대해야 할 것임을 보이기 위해 공모를 했던 것이다.

금지령 해제로 형제들에게 일부 특이한 상황이 벌어졌다. ‘크라이스트처어치’ 경찰은 전화로 ‘앤드류 다우니’에게, 압수했던 모든 출판물을 와서 가져 가라고 말하였다. 고유의 엄한 ‘스코틀랜드’ 말투로 ‘다우니’ 형제는 “하지만, 그것들을 여러분께 가지고 간 사람은 우리가 아니올시다.” 하고 말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경찰이 책들을 압수해 갔으므로 그들이 다시 가져다 주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였다. 경찰은 호송차로 두번에 걸쳐 서적을 모두 돌려 보내 주었다.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왕국 전도인 수는 1939년의 320명에서 1945년에는 536명으로 뛰어 올라 있었다. 종전이 되자 더욱 놀라운 증가가 뒤따랐다. 1949년에 전도인 최고수는 1,131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 첫 대회가 열려 천명 이상이 참석하였다.

조직을 강화하는 일

1946년 12월에 ‘차알즈 클레이턴’이 도착하였다. 그는 ‘뉴우지일랜드’에 임명된 최초의 ‘길르앗’ 학교 졸업생이었다. 그 다음 3월에 ‘왙취타워’ 협회 회장 ‘나단 H. 노워’가 ‘뉴우지일랜드’를 방문하였고 지부 사무실이 ‘웰링턴’에 설립되었다. ‘로버어트 라젠비’가 지부의 종이 되었다. 몇개월 후에 3명의 ‘길르앗’ 졸업생, ‘하워드 베네쉬’와 ‘오오빌 크로스화이트’, ‘사무엘 베틀리’가 더 도착하였다.

‘베틀리’ 형제는 ‘마오리’어를 배워서 ‘마오리’인들 사이에서 사업이 발전하도록 도울 수 있었다. 「1950년 연감」은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마오리’인들 가운데서 크게 증가할 대단히 좋은 전망이 있다 ·⁠·⁠· 한해동안 ‘마오리’어로 공개 강연이 20차례 행하여졌는데, 총 470명이 참석하였으며, 참석자들 대부분은 생소한 사람들이었다. 강연이 시작되기 전에 ‘마오리’인의 관습에 따라, 마을 연로자들 중 한 사람이 먼저 연사와 다른 마을에서 온 방문객들에게 환영사를 한다. 강연이 끝나도 사람들은 즉시 떠나지 않고 남아서 들은 강연에 대해 토의한다. 한 두 사람이 아마 연사가 제기한 요점들에 대해 각각 자기의 견해를 말하는 즉흥 연설을 한다. 한 사람은 들은 것에 대해 온전히 동의한다는 연설을 할지 모르며 다른 사람은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질문들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연사는 설명을 더 요하는 점들을 명백히 하는 마지막 연설을 한다. 모두 ‘마오리’어로 진행되는 이러한 토론은 종종 공개 집회가 끝난 후 오랫 동안 계속된다.”

‘뉴우지일랜드’ 최초의 왕국회관이 1950년에 ‘와이마’에 ‘마오리’ 형제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대부분의 목재는 그들 자신의 산림에서 베어 사용하였다.

왕가의 방문객들이 서적을 받다

1954년 초에 영국 여왕이 어느 ‘마오리’ 자매로부터 ‘뉴우지일랜드’에서의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대해 들었다. ‘뉴우지일랜드’, ‘웰링턴’의 「도미니언」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왙취타워’ 협회가 발행한 성서 한권과 서적 한권이 오늘 ‘나피에르’, ‘맥클리인’ 공원의 단상에서 황후 폐하와 ‘에딘버러’ 공작을 알현하기 위해 온 어느 ‘마오리’ 여자에 의해 여왕께 예기치 않게 전해졌다. 왕가의 방문객들에게 소개된 74명 가운데 ‘투이리 타레하’ 부부가 끼여 있었다. ‘타레하’ 부인은 여왕의 손을 잡고 악수하는 대신 황후 폐하께 깔끔하게 포장된 조그만 갈색 포장의 선물을 하나 건네주었다.”

그 포장 속에는 「신세계역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서」와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책이 한부 들어 있었다. 한 신문은 ‘타레하’ 형제의 설명을 다음과 같이 인용 보도하였다. “여왕께서는 언젠가 백성을 공평과 공의로 다스릴 수 있도록 ‘솔로몬’의 지혜를 갖고 싶다고 말씀하셨읍니다. 우리는 이 책들이 여왕께 도움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1950년대의 성장

1950년대의 초반과 중반은 ‘뉴우지일랜드’에서 놀라운 신권적인 성장이 있은 때였다. 1951년 ‘웰링턴’ 시청 강당에서 열린 전국 대회에서 ‘노워’ 형제가 행한 “온 땅에 자유를 선포하라”란 공개 강연을 1,645명의 청중이 경청하였다. 1953년 12월 31일자 ‘뉴우지일랜드’의 「헤럴드」지는 최근에 실시한 인구 조사에 대해 논평하는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들이 수자적으로 그러한 증가를 즐기고 있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동지는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이민에 의한 증가가 일부 통계에서 반영되고 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개혁 교회는 1945년에 ‘뉴우지일랜드’에 37명의 추종자밖에 없었지만 1951년에는 264명이라고 주장하였다. 같은 기간에 ‘여호와의 증인’의 수가 650명에서 1,756명으로 불어난 것은 전혀 단순한 이유로 볼 수 없다.”

아마 ‘여호와의 증인’들의 성장에 대한 일부 대답이 ‘뉴우지일랜드’ 성공회의 지도적 교인인 ‘디인챈들러’에 의해 설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크라이스트처어치’의 「스타선」지는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아마 우리가 가장 심각하게 태만히 해 온 것은 목자의 방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목자는 자기 양무리를 끊임없이 돌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인들의 정신을 혼란케 하는 중요한 문제들을 그들과 함께 토론하고, 그들을 말려들기 쉬운 일부 이단적인 혼란에서 구출해낼 기회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이 점에 있어서 내 자신이 태만히 한 것을 뼈저리게 의식하게 된다.”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인쇄된 말로 입으로 한 말을 더욱 더 보충해야 한다는 것을 이전 어느 때보다 더욱 확신하고 있다. 만일 우리 교인들이 믿음에서 강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들로 현재보다 훨씬 더 많이 읽고 연구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물론이다. 바로 ‘뉴우지일랜드’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격려하고 돕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반응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인 장성으로 자라고 있었다. 사실상, ‘뉴우지일랜드’는 다른 여러 가지 면에서 영적인 도움을 제공하고 있었다. 1951년 경에 ‘뉴우지일랜드’의 ‘파이오니아’들 중 총 13명이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후 다른 나라에서 봉사하도록 파견되었다. 그들 가운데는 최초의 ‘마오리’인 졸업생 ‘루돌프 라위리’가 포함되었는데, 그는 나중에 순회 사업을 하기 위해 ‘뉴우지일랜드’로 돌아왔다.

새로운 지부

1956년에 ‘노워’ 형제가 다시 한번 ‘뉴우지일랜드’를 방문하였다. 이번에는 ‘오클랜드’, ‘카아로오’ 공원에서 열린 전국대회에서 그가 행한 공개 강연을 3,510명이 경청하였다. 그의 방문 중 ‘오클랜드’에 부지를 매입하여 거기에 새로운 지부를 짓기로 결정이 되었다.

‘웰링턴’이 이 나라의 수도이고 지부가 그곳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오클랜드’는 신속히 성장하고 있는 도시이다. 그래서 ‘오클랜드’에 ‘벧엘’집, 사무실, 왕국회관, 발송부 그리고 인쇄소를 위한 건물들이 건축되었다. 이러한 건물들이 완공되어, 1958년 3월에 ‘벧엘’ 가족이 이사하여 거주하였다.

고무적인 3일간의 봉헌식 ‘프로’가 1958년 6월 13-15일에 ‘협회’의 새로운 왕국회관과 지부 건물에서 진행되었다. 이 일은 ‘뉴우요오크’에서 열리는 1958년 국제 대회로 여행중 들른 150명의 ‘오스트레일리아’ 형제들의 1일간의 방문과 우연히 일치하였다. 곧 ‘뉴우지일랜드’에서도 152명의 대표자들이 이 역사적인 ‘성의 국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대표자들은, ‘뉴우지일랜드’의 87개 회중의 태반을 대표하였다. 형제들은, ‘뉴우지일랜드’에서 8월에 왕국 전도인이 최고 3,346명으로 신기록에 달한 사실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이러한 일들로 크게 격려를 받았다. 그것은 이 나라 국민 616명당 전도인이 한 사람 꼴이라는 것을 의미하였다.

‘뉴우지일랜드’ 형제들 다수가 ‘성의’ 대회에 참석한 그 달에 지부의 종 ‘로버어트 라젠비’가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은 갑작스런 일이었다. 그는 ‘오클랜드’의 ‘마운트 알버어트’ 회중에게 봉사 강연을 하다가 사망한 것이다. 그 일에 대해 보고한, ‘기본즈’ 형제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노워’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라젠비’ 형제와 항상 우정을 즐겨왔읍니다. 그리고 그가 이곳 미국에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표현인 충실하게 임무 수행중에 즉 자기 형제들을 섬기다가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떠나는 가장 훌륭한 방법입니다. 그가 아프다는 걸 알고 있었읍니다. 그가 대회에 참석했었더라면 나는 매우 좋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대회와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의 훌륭한 결과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소식을 들어 기쁩니다.”

1957년 이래 ‘뉴우지일랜드’ 지부 사무실에서 섬겨오고 있던 ‘길르앗’ 졸업생 ‘벤자민 메이슨’이 새로운 지부의 종이 되었다.

법적 투쟁

1958년 1월에 형제들은 ‘레빈 앤드 디스트릭’ 전쟁 기념관을 3일간의 대회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신청하였다. ‘레빈’구 의회는 재향군복무회(나중에 재향군인회로 개칭됨)가 강력하게 반대할 때까지는 우리의 신청에 동의하였다. “전쟁 기념관은 위기에 조국을 위해 봉사한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한 거룩한 것”이며, 따라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 시설을 사용할 수 없다는 취지의 결의문이 통과되었다. 몇몇 구의회 의원들은 그 재향군복무회(R. S. A.)의 압력에 저항하였지만 다른 많은 의원들은 약하여 굴복해 버렸다. 이것은 수십개의 기념관이 ‘여호와의 증인’에게는 닫혀질 것임을 의미하였다.

형제들은 이러한 시설의 사용을 거부하는 차별적인 시도를 역전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법적인 조처를 취하였다. 1959년 5월에 있은 청문회에서 ‘협회’의 변호사 ‘F. H. 하이’는 이와 같이 주장하였다.

“이 금지 조처는 기상천외의 일이나 다름 없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중 사람들이 행한 일이 1958년에 와서 어떤 공리적인 전쟁 기념관을 사용할 권리에 대한 시험이 되어야 한다고 결정한 것은 손톱만큼의 공의도 없는 처사입니다. 의회의 그 조처는 부당한 차별에 의해 초래된, 당연한 정의를 부정하는 처사입니다.”

1959년 8월 21일에 ‘뉴우지일랜드’의 대법원 판사 ‘T. A. 그레슨’은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여호와의 증인’ 구민들도 지역 사회의 합법적인 일부를 구성한다는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비교적 소수이지만, 본인의 견해로는, 재향군인회의 성원들과 동일한 법적 권리를 즐기고 동일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원고에게, 그 ‘홀’의 사용 허락을 거부함으로써 피고인 의회는, 본인의 견해로는, 이 신임된 광범위한 의무를 배신한 행동을 하였다 ·⁠·⁠·

“이러한 상황을 참작해서 본인은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린다. ‘‘왙취타워’ 성서 책자 협회는 ·⁠·⁠· ‘로스킬’ 구 의회가 부과하는 그러한 이치적인 시간과 조건에서 성서 강연을 열 목적으로 ‘마운트 로스킬’ 전쟁 기념관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

그 이튿날 모든 일간지들은 그 판결문을 실었다. “‘로우드’ 위원회 굴욕의 주일”이란 제목하에 ‘오클랜드’의 「와이헤케 레지던트」지는 다음과 같이 실었다.

“대법원 판사 ‘그레슨’ 씨는 우리의 어리석은 8명의 위원 모두를 뒤흔든, 지방 위원회들에 의한 종교적 차별 대우에 관한 판결을 내렸다 ·⁠·⁠· 그 위원회는 의지가 약한 전국의 많은 지방 의원회와 마찬가지로, 재향군인회가 ‘여호와의 증인’들이 기념관을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자 쉽게 굴복해 버렸다. ‘그레슨’ 씨는 ‘증인’들이 재향군인회와 동일한 많은 권리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로우드’ 위원회는 이제 ‘와이헤케’ 기념관을 ‘증인’들에게 개방하든지 아니면 그들이 ‘증인’들의 민주적 권리들을 조롱한 바와 같이 법률을 공공연히 조롱해야 할 것이다. 이제 ‘증인’들은 ‘와이헤케로우드’ 위원회의 폭정에 굴복함이 없이 그들 자신의 방법대로 그들의 하나님을 숭배할 수 있다.”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

‘뉴우지일랜드’에서 가장 큰 시민극장이 1963년 ‘오클랜드’에서 열린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모자라 2,000석의 ‘오클랜드’ 시민회관도 청중을 수용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16개국에서 온 191명의 방문객을 포함하여 최고 참석자 수는 6,005명이었다. 당시 ‘왙취타워’ 협회 부협회장이었던 ‘프레드 W. 프랜즈’도 일련의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들에 참석하기 위해 세계를 여행하는 대표자들 가운데 끼어 있었다.

도착하자 마자 ‘프랜즈’ 형제는 시민극장 앞 보도에서 전통적인 ‘마오리’ 차림의 환영을 받았다. 행인들은 아름다운 토착 의상을 차려 입고 노래하고 춤추는 ‘마오리’인들에게 즉시 이끌렸다. 그 특이한 환영을 가장 즐긴 사람들이 열렬한 구경꾼들인지 아니면 ‘프랜즈’ 형제와 악수와 코를 맞대어 비비면서 그에게 인사한 ‘마오리’ 자매들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이 대회는 참으로 ‘뉴우지일랜드’ 역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전례없이 ‘라디오’와 ‘텔레비젼’으로 보도가 되었고 95초간의 침례 장면의 ‘필름’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대회 대표자들의 전파와 그들의 행실은 훌륭한 증거가 되었다. “여러분은 내가 여태까지 보아온 가장 잘 조직되고 가장 행실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하고 시민극장의 지배인이 말하였다.

왕국회관 건축

일찌기 언급된 바와 같이, ‘마오리’인들이 과거 1950년에 ‘뉴우지일랜드’에 최초의 왕국회관을 건축하였다. 1955년에 와서야 비로소 ‘뉴우지일랜드’의 두번째 왕국회관이 ‘기즈번’에서 봉헌되었다. 그런데 1960년대에는 형제들이 세얻은 회관들—종종 곰팡이 냄새가 나고 담배와 술 냄새가 풍기는—에서 이사해 나감에 따라 58개의 왕국회관이 건축되어 아름답고 깨끗한 새로운 건물로 여호와의 숭배를 위해 봉헌되었다. 형제들은 이러한 왕국회관을 갖게 되어 참으로 고마워하였다!

이 건축 계획은 197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현재 ‘뉴우지일랜드’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이 119개 있는데, 이 중 112개 회중이 자체 왕국회관에서 집회들을 보고 있다. 그리고 추가로 왕국회관들이 계획 단계에 있다.

“지상의 평화” 대회

1969년 11월에 아름다운 ‘알렉산드라’ 공원, ‘오클랜드’ 경마장이 1,500명의 자진 봉사자들에 의해 아름다운 대회장으로 변모하였다. 연단을 장식하는 데 5,000개의 화분, 300그루의 교목과 관목 및 수십 평방 ‘미터’의 “즉석 잔디”가 사용되었다. 붉은 ‘베고니아’를 배경으로 하여 녹색의 다채로운 ‘제라늄’으로 “하에레-마이”(“환영”이란 뜻의 ‘마오리’어)란 글씨가 쓰여졌다. 이 6일간의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에는 외국에서 온 다른 수십명의 대표자들뿐 아니라 ‘N. H. 노워’와 ‘F. W. 프랜즈’도 참석하였다.

해외에서 온 대표자들을 위해 ‘마오리’인들의 노래와 춤을 포함한 특별 ‘프로그램’이 마련되었다. 한 ‘마오리’ 형제는 열광하는 관중들에게 이 대회에 자기 육적 친척이 193명이나 참석했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마오리’인들이 왕국 소식에 얼마나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오클랜드’ 경마장 위원회의 위원 중 일부는 전에 ‘여호와의 증인’에게 그들의 시설을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일에 대해 의혹을 나타냈었다. 그러나 대회가 끝난 후 그들이 느낀 점이 간사가 보낸 이러한 서한에 나타나 있다.

“여러분의 대회가 이제 끝났으니 본인은 이 기회에, 여러분과 여러분의 모든 대표자들에게 ‘알렉산드라’ 공원 경마장에서 열린 여러분의 모임들이 진행된 탁월한 방법에 대해 우리 위원회의 감사를 표하고자 합니다.”

“또한 여러분과 여러분의 봉사자들에게 여러분이 나타낸 훌륭한 협조와 시설물 사용중 여러분이 그것을 유지한 방법에 대해서도 감사를 표하고자 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또 이 지역에서 다른 대회를 갖고자 하신다면 ‘알렉산드라’ 공원의 시설을 이용하시기를 희망하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본인은 본인 자신과 경마장 지배인을 대신하여 관계자 여러분 모두에게 개인적인 사의를 표하며 여러분을 맞이하여 정말로 기뻤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렇다. 경마장 관계자들을 비롯하여 ‘호텔’ 주인들, 교통 순경들 그리고 사업가들은 ‘증인’들의 청결함과 우정적이고 모범적인 행동에 대해 자발적인 흐뭇한 찬사를 보냈다. 한 보안 관계자는 자기의 40년 경험에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었다고 말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뉴우지일랜드’에서 이제까지 열린 가장 잘 조직된 대회였다고 평하였다.

‘뉴우스’ 매개체를 통해 또 다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421명의 새로운 ‘증인’들의 침례가 전국적으로 광고되었다. 한 대회 연사는 ‘뉴우지일랜드’의 모든 침례받은 활동적인 증인들의 10분의 1이 그 대회중, 1969년 11월 7일에 침례를 받았다고 말하였다. ‘노워’ 형제의 “낙원의 평화로 회복하는 길”이란 연설에 놀랍게도 8,400명이 참석하였다.

지부 건물의 증축

1973년 무렵 왕국 전도인의 최고 수가 6,000명선을 돌파하였고, 그래서 과거 1958년에 완공되었던 지부 본부 건물은 비좁게 되었다. 그래서 1973년 7월에 원 건물에 대규모 증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1973년 12월 「왕국 봉사」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마지막 벽돌이 11월 18일 일요일에 놓여졌다 ·⁠·⁠· 전체 건물이 그 날까지 18주 만에 사실상 완공되었으며, 임시 집계에 의하면 248명의 다른 형제들이 그 기간 동안 약 16,000시간을 바쳤음을 알려 준다. 우리는 그들의 훌륭한 지원을 참으로 감사한다. 이미 우리는 증가된 작업 공간의 유익들을 느끼고 있다.”

1970년대의 이정표가 되는 대회들

1973년 “하나님의 승리” 국제 대회는 ‘사우드’ 섬의 가장 큰 도시, ‘크라이스트처어치’에서 이제까지 경험한 가장 큰 신권적 행사였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500명의 방문객과 북‘아메리카’에서 온 350명의 방문객이 합세한 11,640명이라는 놀라운 수가 ‘랜캐스터’ 공원에 참석하였으며, 이 참석자 수는 1969년 국제 대회 때보다 3,000명 이상이나 더 많은 것이었다. 통치체의 ‘리오 K. 그린리스’가 주요 대회 연사였다.

5년 뒤인 1978년 12월에 ‘오클랜드’의 ‘에덴’ 공원에서 열린 “승리의 믿음” 국제 대회는 그 때까지 ‘뉴우지일랜드’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가장 큰 모임이었다. 최고 참석자 수는 12,328명이었다. 모두 통치체 성원인 ‘로이드 배리’와 ‘존 부우드’, ‘테드 제라스’가 대회 ‘프로’를 담당하였다.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들을 돌보는 일

다년간, ‘사모아’, ‘통가’, ‘니우에’ 및 ‘라로통가’ 제도로부터 60,000명 가량의 ‘폴리네시아’인들이 ‘뉴우지일랜드’로 와서 살고 있다. 그들 중 36,000명 가량은 보다 넓은 ‘오클랜드’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들을 돌보기 위해 1977년 2월 ‘오클랜드’에 ‘사모아’어 회중이 하나 설립되었다. 이 회중은 이 나라에서 가장 신속히 성장하는 회중의 하나이다. 1980년 3월 ‘기념식’에 216명이 참석하였다.

형제들로 하여금 양같은 사람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돕도록 자격을 구비시키기 위해 특별 학교들이 운영되어 왔다. 1978년에 있었던 개정된 15시간 천국 전도 학교 과정에는 ‘뉴우지일랜드’의 700명의 그리스도인 장로들이 참석하였다. 그 다음 1979년에 있은 2주간 ‘파이오니아’ 봉사학교 과정에서 184명의 전 시간 왕국 전파자들이 크게 유익을 얻었다. 거의 이 무렵에 ‘뉴우지일랜드’ 지부 위원들인 ‘존 윌즈’와 ‘에드 기번즈’, ‘차알즈 타레하’ 및 ‘존 커밍’이 ‘브루클린’ 세계 본부에서 운영된 5주간의 ‘길르앗’ 지부 학교 과정에 참석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뉴우지일랜드’에서 사람들의 영적 필요들을 돌보는 그들의 책임들을 이행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교훈을 받았다.

왕국 교육 사업을 발전시키는 또 다른 훌륭한 마련은 ‘뉴우지일랜드’ ‘여호와의 증인’의 새로운 대회 회관이었다. 원래 1934년에 건축된 ‘오클랜드’ 교외에 있는 낡은 국립극장이 매입되어 400명 가량의 ‘증인’ 자진 봉사자들에 의해 완전히 개조되었다. 이 아름다운 시설은 1978년 2월에 봉헌되었으며, 그 이래 일곱 순회구가 거기서 일년에 두 차례씩 순회 대회를 열어왔다.

여호와의 후원으로

75년이 넘은 ‘뉴우지일랜드’에서의 ‘여호와의 증인’의 사업을 회고해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현재 매주 수천명의 사람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분의 웅대한 목적에 대해 더 많이 배우기 위해 100개가 넘는 훌륭한 왕국회관으로 모이고 있다. 1980년 3월 31일 ‘기념식’에는 15,385명의 커다란 무리가 참석하였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왕국 희망을 활동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뉴우지일랜드’에는 현재 왕국 선포에 참여하고 있는 전도인이 7,000명이 넘는다. 이들 가운데 350명 가량이 ‘파이오니아’들이다. 모두 합쳐서, 그들은 매년 약 백만 시간을 전파하는 데 바치고 있으며 「파수대」와 「깨어라!」를 백만부 이상 배포하고 있다. 사실상 ‘뉴우지일랜드’의 모든 가정은 일년에 세 차례 정도 ‘여호와의 증인’ 방문을 받고 있다.

전세계에서는 물론, ‘뉴우지일랜드’에서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서 성취된 일은 단순히 어떤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 혹은 인간 단체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은 여호와께서 다음에 친히 말씀하신 바에 따라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스가랴 4:6.

[171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뉴우지일랜드

태즈만해

태평양

오클랜드

테임즈

와이히

로토루아

오포티키

기즈번

토머루뉘

태러데일

단네버어크

팔머스턴노오드

이키터휴너

로워허트

웰링턴

체비오트

크라이스트처어치

리델턴

오아마루

더니든

튜어터페르

인버카로길

[173면 삽화]

‘빌 배리’(오른쪽): ‘크라이스트처어치’에서는 진리가 “‘빌 배리’의 종교”로 알려졌다. 그의 아들 ‘로이드’(왼쪽)는 현재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의 한 성원이다

[176면 삽화]

‘프랭크 그로우브’ 1967년 사망할 당시까지 50년이상 ‘파이오니아’를 하였다

[181면 삽화]

‘차알즈 타레하’, 현재 ‘뉴우지일랜드 벧엘’에서 봉사하고 있는 ‘마오리’인. 탁월한 ‘마오리’인인 그의 아버지가 진리를 받아들이자 ‘마오리’인 종교 사회에 굉장한 동요가 일어났다

[187면 삽화]

1930년대 ‘사우드’ 섬에서, “강의 위험”을 무릅쓴 ‘파이오니아’ 활동

[189면 삽화]

‘짐 테이트’, ‘J. F. 러더포오드’의 연설을 단 한번 듣고, ‘파이오니아’를 하기 위해 직업과 그것이 제공하는 안전을 버렸다

[191면 삽화]

왕국 소식을 선포하는 데 사용된 확성 차

[194면 삽화]

‘다니엘’가 177번지에 위치한 ‘벧엘’집. 금지 기간 중 천장과 지붕 사이에 서적을 감추었다

[199면 삽화]

‘마오리’ 형제들이 1950년에 ‘와이마’에 지은 ‘뉴우지일랜드’ 최초의 왕국회관

[202면 삽화]

‘로버어트 라젠비’, 1958년 사망 시까지 다년간 지부의 종으로 섬겼다

[204면 삽화]

‘프랜즈’ 형제,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 참석 차 ‘오클랜드’ 방문중 악수하면서 코를 맞대어 비비는 전통적인 ‘마오리’인의 인사를 받고 있다

[207면 삽화]

‘오클랜드’에 있는 지부 건물

[209면 삽화]

‘오클랜드’ 교외 ‘데본포오트’에 있는 낡은 국립극장을 매입하여 대회 회관으로 개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