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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

‘엘살바도르’

‘엘살바도르’

때는 1945년 2월 24일, 장소는 ‘멕시코시티’ 공항이었다. 소형 ‘프로펠러’ 비행기가 활주로를 서서히 굴러가자 한 선교인이 마음을 조이며 자기 좌석의 양쪽 팔걸이를 힘주어 붙잡고 있었다. 기내 통로 건너편에는 ‘왙취타워’ 협회장 ‘나단 H. 노워’와 부협회장 ‘프레데릭 W. 프랜즈’가 앉아 있었다. ‘노워’가 그 선교인에게 조금만 더 세게 붙잡고 있으면 비행기가 곧 이륙할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잠시 후에 비행기가 이륙하자 그는 그 선교인에게 이제 됐으니까 더 이상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이 선교인은 ‘로스코 A. 스토운’이었다. 그는 자기 아내 ‘힐다’와 함께 외국 임지인 중앙 ‘아메리카’의 장방형의 조그만 나라 ‘엘살바도르’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 부부는 면적 20,700평방 ‘킬로미터’의 태양이 따갑게 내리 쬐는 열대 지방에 사는 그 당시 1,500,000 주민들에게 왕국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기 위해 조직된 활동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스토운’ 부부는 ‘구아테말라’까지만 ‘노워’ 형제와 ‘프랜즈’ 형제와 함께 갔었다. 나흘 후에 이 선교인 부부는 ‘엘살바도르’행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기내에서 그들은 보석같이 생긴 화산 호수들, 사화산과 활화산들, ‘코오피’ 농장들, 수 ‘마일’이나 되는 자연 그대로의 태평양의 해변들 및 ‘망고’, ‘파파야’, ‘마메인’, 서양 모과와 같은, 그들에게 생소한 과일들을 파는 노천 시장들이 있는 한 나라를 발견하였다.

정착

‘왙취타워’ 협회 ‘멕시코’ 지부 감독자는 수도 ‘산살바도르’에 있는 두 관심자에게 공항으로 ‘스토운’ 부부를 마중 나가라고 부탁해 두었다. 그들에게 ‘스토운’ 부부가 알아볼 수 있도록 ‘스페인’어판 「파수대」를 들고 있으라고 하였다. 하지만 ‘스토운’ 부부가 도착 예정일보다 3일 앞서 도착하였기 때문에 공항에 그들을 마중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엘살바도르’가 계엄 상태에 있고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오스민 아귀레’ 대통령은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정부의 여러 부처는 동맹 파업중이었다.

‘산살바도르’ 공항이 수도에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으므로 ‘스토운’ 부부는 ‘택시’를 탔다. 도시 변두리에서 운전사가 검문을 받으려고 차를 멈추는 순간 폭음이 났다. 경찰관들이 ‘스토운’ 부부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택시’로 달려들었다. 운전사는 경찰에게 ‘타이어’에 빵구가 난 것이 틀림없으니 놀라지 말라고 긴장시켰다.

이 위기를 모면한 후 ‘택시’는 우차, 어린이, 노점 상인들의 주위를 누비고 지나 도시의 중심지로 들어갔다. 국립궁(宮) 부근의 모든 거리에는 기관총들이 장치되어 있었다. 한 이민 담당 관리에게 그들의 신임장을 제출했을 때 ‘스토운’ 부부는 ‘프로테스탄트’ 선교인들이 ‘가톨릭’교 나라로 오는 것에 대해 불평하는 말을 들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6개월간의 체류 허가를 받았다.

‘스토운’ 부부는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파티오’(안뜰)가 있으며, 작은 방 두개 딸린 조그마한 집을 한채 빌렸다. 작은 목탄 ‘스토우브’ 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요리 시설이 없었다. 물과 전기가 배급제였기 때문에 정해진 몇 시간 동안만 사용할 수 있었다. 이 도시에 많이 있는 독수리들이 쓰레기 처리를 거들어 주었다. 독수리들이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 담 위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었다. 적어도 그것들이 나타나는 일은 우리를 다소 침울하게 만들었다.

종교 역사

‘엘살바도르’에 도착했을 때 ‘스토운’ 부부는 이 낯선 나라의 종교 역사의 일부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사실상 그 당시 주민들은 모두 명목상의 ‘가톨릭’교인들이었다. 그러나 ‘엘살바도르’의 ‘가톨릭’교인들은 북‘아메리카’의 ‘가톨릭’교인들과는 다른 숭배 형식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살바도르’ 사람들이 그들의 ‘인디언’ 조상들의 관습에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종교 의식들을 융합하여 행하였기 때문이다. 한 역사가가 중앙 ‘아메리카’의 종교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와 같다.

“특히 ‘인디언’ 부락에서는 교회 의식이 고대 이교도의 우상 숭배 형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스페인] 식민지에 있는 여러 동네에서 ‘로마 가톨릭’교는 쇠잔하였고 여러 가지 비그리스도교적 관습을 융합시킴으로 그 종교가 ‘유럽’에서 가진 중요성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개요」, ‘윌거스’와 ‘테카’ 저.

흥미롭게도, 역사가 ‘산티아고 바르바렌나’는 그의 저서 「엘살바도르 정복 고대사」에서, ‘스페인’인들이 ‘아메리카’에 이르렀을 때 ‘인디언’들에게는 이미 ‘파파후아퀸’이라고 불리우는 대제사장 즉 교황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정복자들은 이 점과 기타 여러 가지 그들 자신의 종교와 유사한 점들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 연대기 편찬자들은 ‘인디언’ 교황과 ‘로마’ 교황을 혼돈하지 않기 위해 고의적으로 이 용어의 사용을 회피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성서에 대해 거의 혹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이내 ‘스토운’ 부부에게 명백해졌다. 사실, 그들 대부분은 성서를 전혀 본 적도 없었고, 성서를 읽어본 사람은 더욱 드물었다. 배우는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조건들에 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공식 보고에 의하면 ‘엘살바도르’에서의 모든 출생아의 50‘퍼센트’ 이상이 사생아로 기록된다고 한다.

‘가톨릭’ 사제들은 자신이 부도덕의 본을 세워 놓았다. ‘엘살바도르’의 통치자의 한 사람인 ‘루벤 로잘레스’는 후에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내가 살던 곳인 ‘코후테페쿠에’의 한 사제가 어떤 여자와 동거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그에게서 아들들까지 낳았다. ‘그런데 우리라고 사제들과 달라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식으로 나는 나의 행동을 변명하였다.” 참으로 이 나라는 왕국 소식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왕국 전파의 시작

‘스토운’ 부부는 도착한 3일후 즉 그들이 도착하기로 예정되었던 날 공항으로 나갔다. 거기서 그들은 재림교 잡지 「엘 센티넬라」 한부를 높이 들고 있는 한 남자와 「파수대」를 들고 있는 한 여자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스토운’ 부부는 나중에 그들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남자는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 그러나 여자는 몇주일 후에 ‘힐다’와 함께 야외 봉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틀 후에 그는 ‘스토운’ 자매에게 보수를 요구하였다. 그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섬기는 백성에게 어떻게 보상하시는가를 알고는 연구와 봉사를 중단하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일찌기 사오명의 다른 사람들이 협회의 서적을 일부 배부한 일이 있기는 했었지만 ‘스토운’ 부부가 ‘엘살바도르’에서 살게 된 최초의 ‘증인’이었다. ‘스토운’ 부부는 도착한지 만 한달이 되는 3월 28일에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주의 만찬을 기념하였다. 그리고 1945년 4월 9일 ‘노워’ 형제와 ‘프랜즈’ 형제가 남‘아메리카’에서 돌아오는 길에 ‘엘살바도르’를 통과할 때 약 10명의 ‘엘살바도르’인들이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 공항에 나갔다. 1945년 말에 6명의 선교인—‘마리온’과 ‘코오델리아 바아저’, ‘글래디스 윌슨’, ‘마아궈라이트 스토우버’, ‘룻 프라이스’와 ‘도로시 톰슨’이 더 도착하였다.

초기에 침례받은 사람들

‘길르앗’ 졸업생들이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소식을 활동적으로 전해줌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길르앗’ 졸업생 중 몇 사람은 한 연로한 남자의 침례받는 사진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의 이름은 ‘안토니오 몰리나 초토’였다. ‘스토운’ 형제가 그 당시 69세인 ‘안토니오’와 연구를 하였다. 같은 해인 1945년에 그는 ‘엘살바도르’인으로서는 최초로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았다.

또한 ‘증인’이 된 최초의 ‘엘살바도르’인들 가운데는 ‘헤르미니오 라이레즈’와 그의 아내가 있었다. ‘스토운’ 부부는 그들과 약 3일마다 연구를 하였으며, 약 15일 후에 ‘스토운’ 형제는 ‘헤르미니오’를 처음으로 야외 봉사에 초대하였다. 그들은 충실한 동반자로서 도시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다니면서 성서서적을 전하고 관심자들을 방문했다. 현재 장로인 ‘라미레즈’ 형제는 아직도 약 35년전의 그날들을 아주 즐겁게 회상하고 있다.

‘마아궈라이트 스토우버’는 소년원에서 제화 기술을 가르치고 있던 ‘호아구인 사르미엔토’를 발견하였다. 그는 거의 즉시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처음 참석한 집회에서 그는 다음 일요일에 야외 봉사 마련이 있다는 광고를 들었다. 그는 나타났으며 기꺼이 따라가고자 하였다. 그 이후로 ‘호아구인’과 ‘스토운’ 형제는 봉사에서 자주 짝이 되었다.

지부가 설립되다

1946년 4월 30일에 ‘레이몬드’와 ‘델라매플즈’, ‘위노나 퍼어드’ 및 ‘에블린 힐’이 ‘엘살바도르’에서 그들의 외국 선교 봉사를 시작하기 위해 도착하였다. 그래서 ‘스토운’ 부부가 도착한지 1년 남짓 되었을 때 ‘엘살바도르’에는 이제 10명의 ‘길르앗’ 졸업생이 일하고 있었다. ‘바아저’ 부부는 건강상의 이유로 떠났었다. 이 선교인 집단은 ‘노워’ 형제와 ‘프랜즈’ 형제의 방문을 열렬히 기다렸다. 그들의 방문 기간 중인 1946년 5월에 ‘엘살바도르’에 지부가 설립되었으며, ‘로스코스토운’ 형제가 초대 지부의 종으로 섬기게 되었다.

‘노워’ 형제가 행한 “너희 열국은 즐거워하라”는 강연을 듣기 위해 66명이 선교인집의 안뜰(‘파티오’)에 모였을 때 그 방문은 절정에 달하였다. 4명이 침례를 받았다. 그래서 1946년 5월에 24명—14명의 “동료” 전도인과 10명의 선교인—이 여호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산타아나’에서의 선교 봉사

1946년 6월에 ‘레오 마한’과 그의 아내 ‘에스더’가 ‘밀드레드 올슨’과 ‘에블닐린 트라버어트’와 함께 도착하였다. 그들은 ‘엘살바도르’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인 ‘산타아나’로 임명되었다. 이 도시는 이 나라의 서부 ‘코피’ 지대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도시는 ‘산살바도르’ 밖으로 확장시킨 최초의 선교 활동지가 되었다. 첫날 선교인집으로 적합한 한 집을 발견하였다.

대다수가 문맹자였다. 그래서 종종 선교인들은 증거 내용이 인쇄되어 있는 “증거 ‘카아드’”를 서투른 ‘스페인’어로 읽어야 했다. 이것은 자주 집주인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을 띠게 할 따름이었다. 서적을 전하는 일은 아주 쉬웠다. 그러나 언어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것은 어려웠다. 이 문제는, ‘윌슨’ 자매와 ‘스토우버’ 자매가 그 새로운 선교인들의 말을 돕기 위해 ‘산타아나’에 파견되었을 때 다소 해결이 되었다. 끈기있게 전파사업을 계속한 결과 그들은 성서 진리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기 시작하였다.

‘레오노르 에스코바르’는 그러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 여자와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고, 약 4개월이 지난 후에 그는 야외 봉사에 나오기 시작하였다. 최근 몇년 전에 91세의 나이인데도 그는 아직도 매주 4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전파 사업에서 매달 30시간을 바치고 있었다. 이제 그의 나이는 1세기 선에 육박하고 있지만 그는 계속 여호와의 충실한 숭배자로 머물러 있다. 그는 봉사에서 활동적이 되는 것이 더 좋은 건강을 즐기며 그가 진리를 배우기 전보다 훨씬 더 튼튼하다고 느끼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침례교인인 ‘로자 아센시오’란 사람이 선교인들이 ‘산타아나’에서 성서에 관한 서적을 팔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나타내어 서적 한권을 샀다. 얼마 후에 그 여자의 친구 한 사람이 ‘밀드레드 올슨’을 그 여자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책을 가지고 갔다. 그 다음 주에 ‘밀드레드’는 그와 연구를 시작했다. 단지 네번의 연구 후에 그는 ‘밀드레드’와 야외 봉사에 나가자는 초대를 받았다. 그의 발전은 대단히 빨랐으며, 1947년 6월 6일에 침례를 받았다. 그 이듬해 ‘로자’는 ‘산타아나’에서는 최초로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산타아나’에서 전파 활동을 시작한지 두달째되던 때에 새로운 사람들이 선교인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곧 회중이 하나 형성되었다. 1947년 1월에 ‘에블린 힐’과 그의 짝 ‘위노나 퍼어드’가 ‘산타아나’에 도움을 주기 위해 ‘산살바도르’에서 파견되었다. 동시에 3명의 ‘길르앗’ 6회 졸업생 ‘월터’와 ‘아이오운 위스먼’과 ‘메어리 태시악’이 ‘산살바도르’에 그들의 거처를 정하였다.

새로운 선교인 집

1947년초에 중앙 공원 모퉁이 북쪽 12번가에 있는 새로운 집을 ‘산살바도르’에서의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으로 사용하기 위해 얻었다. 그 집은 침실이 5개였는데, 안뜰의 삼면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른 한면은 높이가 3‘미터’ 되는 담이었다. 그 안뜰에는 몇 그루의 야자나무와 ‘망고’, ‘레몬’, 쓴 ‘오렌지’ 및 무화과나무가 있었다. 과일을 직접 자기 손으로 딸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생소하고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일부 침실밖의 복도에서 회중 집회들을 가졌다. 집회에 일찍 참석한 어떤 사람들이 침실 창문들을 가리기 위해 쳐놓은 ‘커어튼’을 옆으로 걷어제치고 선교인이 화장을 하고 다른 개인적인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그와 즐거운 잡담을 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사생활을 희생하는 일에 익숙해지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씩 조정할 수가 있었다.

집안의 설비 중에는 가정에서 만든, 나무를 때는 커다란 토기 ‘스토우브’가 하나 있었다. 생나무를 여러 짐 사다가 때기에 충분한 만큼 마를 때까지 비축해 두었다. 이따금씩 나무 속에 싸여 들어온 커다란 거미나 다른 열대 곤충들이 신이나 다른 의복에 은신처를 찾기 위해 침실로 몰래 들어오곤 하여 소동이 벌어지곤했다. 그런 일이 흔히 있었지만 상처를 입는 일은 극히 드물었고 심각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 임시변통의 ‘스토우브’에 요리를 하고 물을 끓이는 일은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 일이었다. 식사 당번인 선교인은 새벽 5시경에 일어나서 불을 피우고 물을 데우고 7시까지 조반을 준비해 놓아야 하였다. 목욕 시설은 물을 가득 채우는 하나의 커다란 ‘시멘트’ 저장조로 되어 있었다. 물을 바가지로 퍼서 몸에 껸지곤 하였다.

반면에, 낮에는 즐거운 경험들이 많았다. 그러한 경험들이 최초의 선교인들로 하여금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게 하였으며 보다 덜 중요한 불편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당시에 뿌려진 많은 진리의 씨가 여러 해가 지난 오늘날까지 아직도 여호와를 충실하게 섬기고 있는 좋은 소식의 동료 전도인들을 산출하였다.

‘산타아나’에서의 반대

‘에블린 힐’과 ‘위노나 퍼어드’는 1947년 3월 21-23일에 ‘산타아나’에서 개최되는 최초의 순회 대회를 준비하는 일에 참여하기에 꼭 알맞게 임명되었다. “평화를 조성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라는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해 475명의 청중이 모였다. 이 때에 ‘가톨릭’ 사제들은 우리가 그곳에서 하고 있는 일을 알게 되었다.

3월 30일 일요일에 사제들은 우리를 반대하는 군중 시위를 조직하였다. 그들은 전 도시에 광고지를 배포하였다. 그 중 하나는 이러하였다.

“오! ‘산타아나’의 친구들이여, 우리 도시 ‘산타아나’에 악마가 그의 ‘증인’들로 화신하여 놓은 위험한 덫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도록 성 ‘미가엘’에게 함께 기도합시다. 신중한 ‘아탈라야’들(‘왙취타워’ 사람들)이 우리 땅에 살면서 개종자들을 찾으려고 ‘엘살바도르’로 왔읍니다. 미국 사람들과 악마가 함께 손잡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입니다.”

바로 그 일요일에 주간 「파수대」 연구를 하기 위해 작은 집단이 선교인 집에 모였다. 갑자기 몇몇 소년들이 뛰어 지나가면서 열려 있는 문으로 커다란 돌들을 던졌다. 몇몇 형제들이 맞을 뻔하였다. 그리고나서 사제들이 이끄는 행렬이 왔다. 많은 사람들은 횃불을 들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숭상하는 형상을 들고 왔다. 재빨리 선교인 집의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두 시간 동안이나 그 집은 돌세례를 받았다. 기관총 퍼붓는듯한 돌소리와 함께 이렇게 노래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정녀여 장수하소서!” 그리고 “여호와는 죽어라!” 오후 11시경이 되어 형제들은 무사히 집으로 떠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전파 사업을 대중에게 알리고 사람들이 ‘증인들’에 대해 더 많이 알아보도록 호기심을 갖게 하였다. 사제들이 사람들에게 ‘증인’들만 보면 언제든지 “아탈라야”(‘왙취타워’ 사람)하고 외치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전도인들이 어디를 가든지 널리 광고가 되었다. ‘증인’들과 연합하고 있는 사람들의 자녀들이 공립학교에 다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에 참석하라는 압력을 가하였다.

‘증인’들의 끈기는 ‘산타아나’의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들은 ‘증인’들이 가지고 있는 서적을 다 팔고 나면 곧 이사갈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증인들이 사람들에게 그들이 받은 출판물을 사용하는 방법을 보여주기 위해 관심을 나타낸 집을 재방문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얼마나 놀랐겠는가!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는 나중에 대단히 활동적인 전도인이 된 맹인이 세명 있었다.

4월 6일 일요일은 기념 만찬일이었으며, 기념식을 축하하기 위해 104명이 함께 모였다. 1947봉사년도말에 ‘산타아나’에는 48명의 왕국 전도인이 있었다. 이것은 1946년 6월에 선교인들이 도착한지 1년 남짓되는 기간에 있었던 훌륭한 증가였다.

사업이 진전하다

1947년 8월에 ‘로스코 스토운’은 ‘산미구엘’로 가서 그곳에서 전파 사업을 시작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마한’ 형제가 지부의 종이 되기 위해 ‘산타아나’에서 ‘산살바도르’로 전임되었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스토운’ 부부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산미구엘’로 사업을 확장하는 일은 얼마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지만 전파 사업은 계속 진전되었다. 예를 들면, ‘호아구인 사르미엔토’는 침례도 받기 전에 자진하여 공개 강연을 하였다. 그는 그의 첫 강연 전날 밤을 병원에서 그의 아들 ‘호아구인’ 2세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면서 보냈다. 오전 6시에 그의 아들이 태어났다. 그 다음 ‘호아구인’은 집으로 가서 아침 식사를 하고 야외 봉사에 나가 재방문을 하여 그날 오후에 있을 강연에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그렇게 하여 오후 4시에 40명이 “세계 평화—누구에 의해서?”란 제목의 그의 강연에 참석하였다. 1947년 세상에 태어난 그 어린 아들이 지금은 ‘산살바도르’의 한 회중에서 장로와 훌륭한 공개 강연 연사로서 섬기고 있다.

일부 선교인들이 떠나고 다른 선교인들이 오다

선교인들은 질병으로 큰 고통을 겪게 되어 그들 중 상당수가 ‘엘살바도르’를 떠나게 되었다. 1948년말에는 그곳에서 봉사하는 선교인 수가 1년전의 17명에서 5명으로 감소되었다.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구아테말라’에서 봉사하고 있던 ‘길르앗’ 졸업생 ‘차알즈 비이들’이 지부의 종으로 ‘엘살바도르’에 파견되었다.

‘비이들’ 형제의 일정은 대단히 분주하였다. 그는 목요일에 ‘산살바도르’에서 봉사 모임을 사회하였고, 금요일에는 ‘산타아나’로 가서 봉사 모임을 사회하였다. 당분간 그는 매주 이 일정표를 따랐다. ‘비이들’ 형제는 지부의 종 외에도 ‘산살바도르’와 ‘산타아나’ 회중의 종으로 그리고 ‘산살바도르’ 선교인 집의 가정의 종으로 일하였다.

1948년 11월에 ‘샤를롯 보우인’과 ‘쥴리아 클로그스톤’이 도착하여 ‘산살바도르’의 ‘산하신토’로 임명되었다. 이들 선교인들은 ‘텍사스’와 ‘멕시코 시티’의 ‘스페인’어를 말하는 구역에서 일했었기 때문에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때마침 12월에 일어난 혁명을 목격하게 되었다. 얼마간 가게들이 문을 열었고 사업이 평상시와 다름없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모든 상업이 중단되었고 모두 어디론가 서둘러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구데타’가 일어나 ‘카스타네다 카스트로’ 대통령의 정권을 대치하였다.

‘라디오’ 방송을 사용함

‘라디오’ 방송에 의한 왕국 전파가 1949년 1월에 개시되었다. 한 토목 기사가 자기의 ‘라디오’ 방송국 YSLL을 매주 일요일 저녁 한시간 동안 ‘증인’들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비이들’ 형제는 “온유한 자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란 강연을 함으로 “‘왙취타워’ 시간”을 개설하였다. 그 다음 그는 ‘라디오’ 청취자들에게 “‘로페즈’ 가족”을 소개하였다.

그 다음 수 주일간 청취자들은 가상적인 ‘로페즈’ 가족에게 ‘다이알’을 맞추어 광고된 가정 성서 연구 마련을 통해 토론되는 왕국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성서 토론에는 「파수대」 기사는 물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와 같은 출판물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방송 장면에서 ‘로페즈’ 가족은 지방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여 침례를 받았고, 왕국을 전파하는 일에도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라디오’ 청취자들 사이에는 ‘로페즈’ 가족의 생활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았다.

지부가 이사하다

1949년 3월에 새로운 선교인 집과 지부 시설을 구하였다. ‘톰슨’, ‘윌슨’, ‘태시악’, ‘스토우버’, ‘프라이스’, ‘보우인’ 및 ‘클로그스톤’ 자매들이 ‘비이들’ 형제와 함께 ‘캄포스’가와 ‘리퍼블릭 오브 큐바’가가 접하는 모퉁이에 위치한 철근 ‘콘크리이트’로 지은 침실이 다섯개 딸린 현대식 건물로 이사하였다. 집회는 집 중앙에 있는 덮개를 한 안뜰에서 보았다. 새로운 선교인 집의 이웃 사람들 중에 ‘마리아 루지아 레이에스’가 있었는데, 그는 선교인 중 한 사람과의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고 나중에 진리 안으로 들어왔다.

같은 3월에 ‘산살바도르’에서 순회 대회가 열렸다. 처음 이틀간의 회기는 ‘센테나리’ 공원 옆에 있는 구 선교인 집의 안뜰에서 열렸다. 그러나 일요일에는 아름다운 한 시립학교 건물이 사용되었으며, ‘산타아나’에서 온 42명을 포함하여 210명이 공개 강연을 들었다. 그 다음 달에는 ‘산살바도르’에서 기념식을 축하하기 위해 157명이 모였다.

‘산타아나’에서의 발전

1949년 7월에 ‘산타아나’의 형제들은 다시 한번 ‘가톨릭’ 교직자단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그 교회는 우리의 사업을 반대하는 매우 신랄한 기사를 일부 실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 거짓을 실었으며, ‘산타아나’의 사람들은 한달 후에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특이한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중 한 기사에서는 단지 가난한 맹인 세명만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그 기사는 ‘가톨릭’ 평신도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이러한 훈계로 끝을 맺었다. “교회를 떠나 지옥에 가는 것보다 차라리 영어를 결코 배우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한달 후 8월에 두번째 순회 대회가 ‘산타아나’에서 열렸다. 하지만 세 맹인 외에도 다른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광고지를 배포하고 “유일한 빛”이란 공개 강연을 광고하는 ‘플래카아드’를 들고 다니는 데 가담하였다. 약 50명의 방문객이 ‘산살바도르’에서 그 대회에 참석하였다. 총 188명이 그 지방 왕국회관에서 행해질 일요일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해 모였다. 가까운 이웃 사람들은 세 맹인에게 그렇게 많은 친구들이 있는 것을 분명히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 후 1949년에 네명의 선교인, ‘틸만’과 ‘조세핀 험프리’ ‘비비안 우울’과 그의 육적 자매 ‘글로리아 바우어트’가 ‘길르앗’ 10기 학급을 마치고 ‘엘살바도르’로 왔다. 그들은 임시로 ‘산타아나’에서 일하도록 파견되었다.

동부에서 사업이 개시되다

1949년 후반에 ‘산미구엘’에서 전파 사업을 개시하기로 결정되었다. 그 네명의 새로운 선교인이 그곳으로 파견되었고, 새로운 선교인집이 설립되었다.

‘산미구엘’은 이 공화국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이다. 이 도시는 태평양에서 50‘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수도보다는 고도가 460‘미터’ 낮으며, 그늘을 만드는 나무가 거의 없는 곳이다. 거의 일년 내내 숨막힐듯이 대단히 무더운 곳이다. 6개월 동안의 건조기에는 바람으로 인해 많은 양의 먼지와 오물이 집안으로 날러 들어왔다. 하지만 이들 선교인들은 강인한 정신으로 이러한 상황을 잘 견디어 냈다.

이 도시는 대단한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거룩한 주(週)” 동안에는 자갈이 깔린 거리가 형상들을 따라가면서 횃불을 들고 찬송가를 부르는 긴 행렬로 메워지곤 하였다. 맨 앞에는 ‘마리아’와 ‘요셉’의 형상, 그 다음에는 커다란 나무 십자가를 지고 있는 예수의 형상, 그 뒤에는 정교하게 조각한 나무와 유리로 만든 관 속에 든 양손과 발에 피묻은 못 자국이 보이는 예수의 형상이 줄을 지어가곤 하였다.

선교인들은 ‘산미구엘’에 사는 최초의 ‘앵글로색슨’인들 가운데 끼었다. 한 형제가 공개 강연을 하기 위해 그곳에 가면 선교인 집 안뜰이 가득차곤 했다. 금새 30내지 40명이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1951년 5월 6일 일요일에 ‘험프리’ 형제가 집회를 끝맺는 기도를 하고 있는데 강진이 그들의 ‘어도우비’ 벽돌집을 뒤흔들었다. 그가 기도를 끝내고 눈을 들어 보았을 때 안뜰에는 선교인들만 남아 있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관습대로 길거리로 피하고 없었다.

그 이튿날 ‘후쿠아파’, ‘치나메카’, ‘베를린’ 및 ‘산티아고 데 마리아’읍들이 심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후쿠아파’에서는 사람들이 기도하기 위해 교회로 달려 갔었다. 벽돌이 안으로 무너질 때 일어난 먼지로 인해 질식해버린 사람들이 교회의 두꺼운 ‘어도우비’ 벽돌담과 토담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응급 치료 운동이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피난민들은 ‘산미구엘’에 있는 여러 학교 건물에 수용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산살바도르’로 대피하였다.

진리가 병원에 전파되다

‘증인’과 연구를 하고 있던 한 남자가 사고를 당하여 ‘산살바도르’의 ‘로잘레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는 곧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그는 어떤 다른 사람이 결핵병동에서 똑같은 소식을 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선교인 ‘글래디스 윌슨’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그가 ‘루이스 살리나스’와 다른 다섯명의 관심자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놀랐겠는가를 상상해 보라. 그들은 협회의 출판물들을 숙독하고 있었고 ‘여호와의 증인’들을 만났을 때 기쁨에 넘쳐 있었다.

‘글래디스’는 바로 그 결핵병동에서 약 50명이나 참석하는 한건의 연구를 시작하였다. 처음에 시작한 여섯 사람은 놀랍게 발전하여 그 병동에 있는 다른 200명의 환자들에게 증거하였다. 이 환자들 가운데 일부는 사망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퇴원하여 다른 곳에서 계속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라갔다.

1950년 국제 대회

선교인들은 ‘노워’ 형제가 1949년말에 도착한 네명의 선교인을 제외한 모든 선교인이 ‘뉴우요오크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에 참석하도록 허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엘살바도르’의 형제들은 선교인들의 부재중에 모든 집회와 선교인들이 사회하던 성서 연구를 돌보는 책임을 맡게 되어서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잘 해내었다. 여러 달 후 형제들은 먼저 이런 말로 경험담을 시작하였다. “선교인들이 가고 없어서 제가 그들의 연구나 종의 직책을 돌보게 되었을 때 ·⁠·⁠·” 그런 다음 여호와께서 그들의 노력을 어떠한 방법으로 축복해 주셨는가를 이야기하곤 하였다. 선교인들은 돌아와서 지방의 모든 형제들이 그런 때 함께 협조하는 것을 보고 확실히 격려를 받았다.

1950 봉사년도 중에는 18명의 선교인을 포함하여 250명의 왕국 전도인 신기록에 도달하였다. ‘산 미구엘’에 회중이 설립됨에 따라 ‘엘살바도르’에 여호와의 백성의 회중은 네개가 되었다.

성공적인 순회 대회들

새로운 봉사년도의 목표 중 하나는 동부에 있는 ‘산미구엘’ 회중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곳에서 순회 대회를 여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었겠는가? 그래서 1950년 11월에 이 무더운 도시에서 순회 대회를 개최하였다. 모두는 13명이 여호와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물 침례로 공개적 헌신을 하는 것을 보고 기쁨에 넘쳤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 배경은 특이한 것이었다. 두명의 선교인이 물고기들이 조용히 미끄러지듯이 헤엄치며 놀고 있는 ‘리오그란데’ 강의 깊은 흙탕물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서 조용하고 질서정연하게 침례가 베풀어지고 있는 동안 위에서는 야생 앵무새들이 떼를 지어 지저귀고 있었다. 이것은 화려하고 격식을 갖춘 교회의 침례 의식과는 얼마나 대조가 되는 것인가!

1951년 4월에 또 다른 순회 대회가 이번에는 서부에서 열렸다. 대회장은 ‘산타아나’의 아름다운 국립극장이었다. 200명 이상의 ‘증인’들이 그 도시로 모여들었고, “이 세상의 끝을 생존함”이란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해 1,300명이 이 극장을 꽉 메웠다.

왕국회관과 새로운 집

수도인 ‘산살바도르’에서도 즐거운 증가가 있었다. 사실 그곳의 형제들은 집회를 갖기 위해 보다 넓은 시설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회중에 적합한 대부분의 장소들은 월세가 120‘달러’ 내지 160‘달러(미화)’나 되었기 때문에 이 비용을 형제들이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시내 6번가와 남쪽 1번가의 모퉁이에 한 큰 이층 강당을 빌렸다. 회중이 커짐에 따라 왕국 소식에 반응을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공간을 넓히기 위해 벽을 헐어벌렸다. 1951년은 ‘엘살바도르’에서 의미심장한 증가가 있었던 해였다. 7개 회중에서 왕국 전도인이 321명으로 신기록에 달하였다.

그 새로운 왕국회관으로 이사한 동일한 시기에 선교인집과 지부 사무실이 서쪽 23번가와 북쪽 1번가로 자리를 옮겼다. 이 집에는 하나의 넓은 사무실, 식당, 부엌, 식품 저장실 및 하나의 조그만 거실 외에 안락한 침실이 다섯개 있었다. 또한 욕실이 세개 있었다. 이곳에서 선교인들에게 최초로 현대식 설비인 세탁기가 소개되었다. 그것은 한 선교인이 성서 연구생에게서 단지 10‘달러’(미화)를 주고 구입한 것이었다. 모두는 새하얀 침대보를 가질 수 있게 되어 기뻤으며 작은 빨래판을 치워버리게 되어 참으로 기뻤다.

그러나 나무로 만든 구식 ‘아이스박스’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었다. 식사 당번인 선교인은 매일 얼음 장사를 만나 50‘파운드’의 얼음을 사기 위해 새벽 5시에 의무적으로 일어나야 하였다. 그러나 그 ‘아이스박스’도 치워버리게 되었다. 그것은 선교인들이 산 냉장고로 대치되었다. 그리하여 현대식 설비가 선교인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성당이 불타다

1951년 8월 8일에 ‘산살바도르’에 있는 국립극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하늘로 치솟는 불길이 길건너 낡은 성당으로 번졌다. 성당 다락의 80년된 목재들이 화염에 싸이기 시작했을 때 수천명의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일부 영웅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지붕으로 급히 올라가서 그곳에 구멍을 내었다. 그러자 이 구멍은 주문해서 만든 통풍 장치 구실을 하여 불을 부채질하였다. 순식간에 성당은 용광로 마냥 훨훨 타고 있었다.

40분만에 한 때 높이 숭배받던 식민지 시대 양식의 그 건물은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믿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어떤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달려들어 예수의 형상을 건져내어 그 대화재 현장 앞에 있는 국립궁 계단 위에 갖다놓았다. 시편 115편과 일치하게 많은 ‘증인’들은 그러한 형상의 무력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 형상이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그 불타고 있는 건물에서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사용하였다.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성당을 지으려고 정부에 자금을 요청하였다. 교회의 요청을 반대하는 주된 반대자들 가운데 한 젊은 토목 기사 ‘발타사르 페를라’가 있었다. 그가 그 문제를 다루는 위원회에서 제거되자 교회가 승리하게 되었고 결국 미화 400,000‘달러’를 정부는 그 교회에 기부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 교회는 그 나라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하루의 임금을 기부하라고 요구하면서 사람들에게 그 재건 사업을 재정적으로 돕는 일에 협조해달라고 요구하였다. 거의 30년이 지난 현재 그 성당은 아직도 완공되지 않았으며, 그 교회는 건물 건축을 위해 계속 재정적인 도움을 구하고 있다.

한가지 문제를 바로잡다

1952 봉사년도는 ‘산살바도르’에서 한차례의 순회 대회로 시작하였는데, ‘폴리에스’ 극장에서 열린 공개 강연에 640명이 참석하였다. 조직이 수자적인 면으로는 성장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가?

협회의 특별 대표자로서 ‘T. H. 시벤리스트’ 형제가 1952년 1월에 ‘엘살바도르’를 방문하였다. 상황을 검토한 후 그는 그 문제를 재빨리 알아냈다. 많은 부부가 합법적인 결혼을 하지도 않고 동거를 하고 있었는데도, 그들이 왕국 전도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 일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벤리스트’ 형제는 ‘산살바도르’와 ‘찰추아파’ 그리고 ‘산미구엘’에서 강연을 하며 매번 결혼을 합법적인 기초에 두는 것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953년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에 실린 ‘엘살바도르’에서 보낸 보고는 그 상황을 논평하면서 이와 같이 인정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소홀히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우리는 수가 줄어드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여 조직의 질을 해치고 있었다.

그러나 1952년 2월 1일자로 성서에 따라 올바른 생활을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생활을 바로잡아야만 하였고 그렇게 할 때까지는 더 이상 ‘여호와의 증인’으로 간주될 수 없게 되었다. 진실하게 전환하여 그들의 행로를 변화시킨 사람들은 제명되지 않았고 그들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때때로 우리는 상황의 심각한 복잡성 때문에 머리를 짜내야 하였다. 2월의 ‘엘살바도르’의 보고는 전도인수가 지난 최고 수보다 100명이 감소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문제를 끝까지 지켜보기로 결정하였다 ·⁠·⁠·

“3월, 4월 그리고 5월이 지나갔다. 이제 우리 모두는 더 좋아진 느낌이 들었다. 회중 전체에서 훌륭하고도 깨끗한 느낌이 감돌았다. 옛것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모두 일소되었다. 우리의 훌륭한 전도인들은 그들 스스로 바로잡았으며, 우리는 참으로 그 일 위에 여호와의 영과 축복이 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종전과 같이 열심히 일하였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무엇인가 그에 대한 대가를 볼 수 있었고, 그 결과들을 느낄 수 있었다. ·⁠·⁠·

“분명히 우리 전도인들이 수에 있어서는 감소하였지만 전체 시간은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늘어났다. 전도인들은 훌륭하였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였고 이 나라 역사상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재방문을 하였고 더 많은 연구를 사회하였다. 떠나버린 사람들은 우리에게 전혀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가 하는 일만 생각하였다. 이제 우리는 중요한 것이 여호와께 헌신하는 데 있고 어떤 다른 일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결혼을 합법화함

‘산타아나’에서 최초의 ‘엘살바도르’인 ‘파이오니아’가 된 ‘로자 아센시오’는 이 새로운 결정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역시 침례받은 ‘증인’인 ‘빌기리오 몬테로’란 국군 ‘오케스트라’의 한 음악가와 내연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였는가? ‘로자’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누군가가 우리에게 말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관계를 즉시 중지하였고 그들의 생활을 성서의 명령에 따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빌기리오’가 전 부인과 이혼하고 ‘로자’와 결혼하기 위해 필요한 서류를 얻어내는 데 4년이란 긴 기간이 걸렸다. 결국 그들은 합법적으로 결혼하였고 두번째 물 침례로 여호와께 그들의 헌신을 상징하였다. 그 후 ‘빌기리오’는 ‘산살바도르’에 있는 한 회중의 감독자로서 여호와의 축복을 즐겼고, 한때는 순회 감독자로도 봉사하였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엘살바도르’에 있는 형제들에게 대단히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리스도인 봉사를 위해 생활을 바로잡는 이러한 문제는 말보다 행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성서적 요구 조건에 달하기 위해 필요한 조처는 무엇이든간에 전부 취하였다. 이렇게 하여 결혼 합법화 운동이 추천되었다. 그리고 시청 직원들은 선교인들이 결혼을 합법화하기 위해 부부들을 차례로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데리고 왔을 때 감명을 받았다.

‘산살바도르’ 시장이 한번은 ‘메어리 태시악’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은 그들을 가르쳐서 나에게 데리고 오기만 하시오. 그러면 나는 그들을 결혼시켜 주겠소.” 선교인들은 바로 그렇게 했다. 한 어린 소년은 자기 아버지가 결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서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 엄마와 결혼할 거죠?” 하고 질문하였다.

어느날 호별 방문 봉사를 하던 중 ‘메어리 태시악’은 ‘콜로니아라라바다’에서 성서 연구를 하기로 동의한 한 젊은 어머니를 만났다. 얼마되지 않아 그 여자와 그의 반려자인 ‘라몬 아르구에타’는 그들의 연구에 열심을 갖게 되었고 정기적으로 집회에 참석하였다. ‘메어리’가 그들에게 결혼을 했느냐고 질문하자 ‘라몬’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요. 우리는 ‘아담’과 ‘하와’처럼 결혼을 하지 않고 그냥 함께 살고 있지오.”

하지만 ‘메어리’는 여호와께서 ‘아담’과 ‘하와’를 결혼시키셨다고 설명해주었다. 그것을 알자마자 그들 역시 자기들의 결혼을 합법화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그들과 그들의 네 자녀들의 출생 증명서를 찾아내는 절차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라몬’의 출생 증명서를 찾을 수가 없어서 그의 나이를 공식적으로 측정하기 위하여 어느 법의(法醫)를 찾아가야 했다. 그 의사가 ‘메어리’를 보았을 때 이 사람들과 어떻게 되는 사이인지 물어 보았다. ‘메어리’는 “모두 우리 형제들이죠” 하고 대답하였다. 그는 다만 머리를 흔들며 “당신의 종교에는 정말로 형제애가 있군요” 하고 말하였다.

1953년 「연감」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결혼을 합법화하도록 돕는 이러한 노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높은 도덕 표준에 대한 우리의 명성이 널리 퍼졌다. 그것은 사람들을 내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끌어들이기 시작하였다. 세상의 책임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주목하고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호별 방문에서 성서를 사용함

또한 ‘시벤리스트’ 형제는 그의 방문 기간중에 집주인에게 ‘플라스틱’으로 씌운 증거 ‘카아드’를 건네주는 대신 문전에서 성서로부터 직접 몇 귀절의 성귀를 읽어주는 방법을 실연으로 보여주었다. 그가 ‘산미구엘’을 방문했을 때 선교인들은 이것을 처음으로 실천에 옮겼다. 다음과 같은 만족의 표현들이 많이 들렸다. “사람들이 아무 서적도 받지 않드래도 그들에게 실제로 무엇인가를 가르친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머지 않아 ‘엘살바도르’의 모든 전도인들은 그들의 봉사에서 이 방법을 사용하도록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즐거운 때인 순회 대회

조직의 규모가 작았음으로 형제들은 3일간의 순회 대회를 참으로 고대하였다. 특히 선교인들에게는 순회 대회가 교제하는 때가 되었다. 이것은 1952년 5월에 ‘산미구엘’에서 열린 대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회기가 끝난 후 22명의 선교인들은 함께 ‘산미구엘’의 선교인 집으로 몰려갔다. 거기서 그들은 간이 침대, 달아맨 그물 침대 등, 아무데고 누울 틈이 있는 곳에서 잠을 잤다. 환기를 위해 안뜰쪽에 나 있는 문들을 열어 놓았다. 그 날의 활동으로 기분이 상쾌해진 선교인들은 잠들기 전에 야외 봉사 경험담, 대회 ‘프로’에서 즐긴내용, 부엌에서 일어났던 일 등을 함께 나누었다. 피로한 일부 선교인들이 좀 조용히 해 달라고 간청할 때까지 즐거운 농담으로 폭소가 터지곤 하였다. 대회가 끝난 후 전체 선교인 집단은 함께 영화보러 가거나 다른 곳으로 외식을 하러 가곤 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진정한 가족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산미구엘’ 대회의 마지막 날에 “어느 종교가 세계 위기를 살아남을 것인가?”란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해 800명이 국립극장에 모인 것을 보는 것은 감격적인 일이었다. 대회의 다른 절정을 이룬 일은 침례였다. 침례받은 41명 중 한 사람이 얼마 전에 그의 결혼을 합법화한 ‘라몬 아르구에타’였다. ‘라몬’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침례장으로 가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역시 흡연을 하던 또 다른 침례 지망자는 그에게 “이것이 우리에게 마지막 담배요.” 하고 말했다. ‘라몬’은 결코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일년후에 ‘라몬’의 아내 ‘쥴리아’도 침례를 받았다. 그들의 자녀들 중 둘은 나중에 수년동안 전 시간 봉사를 하였다. 아들 ‘빅토르 와렌’은 특별 ‘파이오니아’와 순회 사업을 한 후에 ‘엘살바도르’ 형제로는 처음으로 지부에서 봉사하게 되었다.

그 다음 순회 대회가 1952년 11월에 ‘산타아나’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엘살바도르’ 정부는 계엄을 선포하였고 모든 공민권이 60일간 정지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들이 정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국립극장의 지배인이 경찰에 구속되었으며 이것은 형제들이 그 극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됨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형제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대회 장소를 물색하기에 바빴다. 제안된 세군데가 모두 주인들측의 두려움으로 인해 연달아 취소되었다. 그런데 대회 바로 일주일 전에 정부가 금지령을 해제하여 모든 공민권이 회복되었다. 그렇게 하여 일요일에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해 700명이 그 극장에 모였다. 그리고 그 날 오후에 19명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물 침례로 그들의 헌신을 상징하였다.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다

이 무렵에 진리에 반응을 보인 사람들 가운데는 ‘마우라플로레스’가 있었다. 그는 자기가 속해 있던 안식교에서는 보지 못했던 일 즉 ‘증인’들이 나타낸 연합에 감명을 받았다. 아홉살 된 아들과 함께 그 부인은 정기적으로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아들 ‘마리오’는 후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여러 해 봉사하였으며 그 후에 ‘길르앗’에 갔다. 그 이후 그는 ‘엘살바도르’에서 수년동안 순회사업을 하였다. 현재 그와 그의 아내는 ‘산미구엘’의 선교인 집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테후테페쿠에’ 마을에서 ‘산살바도르’로 일자리를 구하러 온 ‘페데리코 델시드’란 사람이 있었다. ‘에르네스토포르 틸로’를 만나 성당 재건 사업을 토의하던 중에 ‘페데리코’는 ‘에르네스토’가 그 교회를 떠난 것을 섭섭하다고 말하였다. ‘에르네스토’는 그에게 「파수대」 잡지를 한부 주었다.

그 다음 일요일에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읽은 내용에 감동을 받은 ‘페데리코’는 ‘에르네스토’에게 가정 성서 연구를 부탁하였다. ‘테후테페쿠에’에 있는 그의 가족에게 돌아 갔을 때 ‘페데리코’는 식구 모두가 성서를 공부하는 데 관심을 가지게 할 수 있었다. 이윽고 ‘페데리코’와 다섯명의 가족 성원이 침례를 받았다. 여러 해 동안 그는 형제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 왔으며 현재 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1950년대초에 ‘앤젤몬탈보’란 음악가가, 한 특별 ‘파이오니아’가 그에게 증거하자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성서를 한권 사기 위해 자기의 유일한 생계 수단인 ‘기타’를 팔 정도로 대단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잘 발전하여 그는 1953년에 침례를 받았다. ‘앤젤’은 여러 해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으며 지금은 ‘소야팡고 오리엔테’ 회중의 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선교인들이 교체되다

질병과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일곱명의 선교인이 1953년이 시작되자마자 이 나라를 떠나고 말았다. 그들은 다정한 추억들과 잊혀지지 않을 감명을 안고 떠났다. 거의 8년전인 1945년에 왔었던 ‘마아궈라이트 스토우버’는 공동 묘지로 가는 장례행렬을 특히 잊을 수가 없었다. 관을 어깨에 메고 가는 사람들 뒤에 조객들이 따라가곤 하였다. 조객들이 뒤따라가는 관은 모두 흔히 조그만 하얀 관이었다. 하루는 ‘마아궈라이트’와 ‘메어리 태시악’이 바깥으로 나가서 어느 친구의 아기를 넣을 그러한 관을 하나 산적이 있었다. 그들은 아기를 관에 넣는 일을 도왔으며 나중에는 공동묘지로 운반하는 일도 도왔다. 그러한 일은 선교인들이 흔히 하는 경험이었다.

1953년 3월에 ‘제인 캠벨’이 특히 한 형제에게 환영받는 선교인으로 교체되어 왔다. 그는 지부의 종 ‘차알즈 비이들’과 결혼하기 위해 멀리 ‘구아테말라’에서 왔다. ‘제인’은 ‘산하신토’ 회중과 연합하여 일하도록 임명되었다.

곧 선교인들은 다시 한번 ‘뉴우요오크’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에 참석할 계획을 하고 있었으며 ‘엘살바도르’ 형제들은 다시 그들의 부재시에 조직적인 활동을 돌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산미구엘’에 있던 선교인 중 한 사람인 ‘룻 프라이스’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나는 그 대회에 참석할 여비가 없었읍니다. 그런데 어느날 나는 ‘산살바도르’에 있는 선교인들로부터 내가 ‘마이애미’에서 ‘뉴우요오크’까지의 여행을 마련할 수 있다면 ‘마이애미’까지 가는 비행기표를 나에게 사주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읍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과감하게 그렇게 하기로 하였고 선교인들 가운데 그러한 인정이 많은 벗들이 있는 점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했읍니다.” 그래서 모든 선교인들이 1953년 여름에 두번째로 이 ‘양키 스타디움’ 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임명되지 않은 구역 봉사

1953년에 ‘산살바도르’의 전도인들은 수도에서 약 32‘킬로미터’ 떨어진 ‘산후안 탈파’란 조그만 읍을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버스’로 여행했으며 마지막 깊은 산골은 걸어서 갔다. 이러한 여행은 흥분으로 들뜨게 하였다.

한번은 지독한 무더위 때문에 형제들은 조그만 강에서 수영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생각은 자매들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있는데 불개미들이 그들에게 달려들었을 때 비로소 훌륭한 착상인 것 같았다. 물에 들어가서 보호를 받게 되었을 때 얼마나 안심이 되었겠는가!

이 때에 싱싱한 새우를 잡았고 집단 봉사를 하고 있는 동안 ‘산후안탈파’의 한 형제의 친척이 새우 요리를 준비하였다. 선교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새우를 통채로 삼키는 것을 구경하였다. 한 선교인 자매는 머리와 눈과 더듬이가 달린채로 요리된 제일 큰 새우를 특별히 자기에게 주었을 때 깜짝놀랬다. 그 자매는 그 특별 선물을 단단한 껍질과 함께 통채로 삼키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큰 고통없이 간신히 삼켰다.

이러한 ‘산후안탈파’의 방문으로 말미암아 많은 성서 연구가 생겼으며 국민학생 ‘라울 모랄레스’를 포함하여 여러 명이 진리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부모는 집회에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에게 할 일을 많이 주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주어진 일을 빨리 해치우고 집회에 갔다. 결국 그는 야외 봉사에 나가기 시작했으며 때가 되자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고 마침내 순회 감독자가 되었다.

‘산살바도르’ 형제들이 방문한 또 다른 외진 곳으로 ‘산토 도밍고’란 곳이 있었는데, 이곳은 일부 가족들이 사제를 쫓아낸 곳이었다. 후에 이 곳의 읍장이 진리를 배워 침례를 받았으며 주임 감독자로 봉사하였다. 그 당시 초기에 방문한 다른 곳으로 지금 회중이 있는 곳은 ‘쿠에잘테페쿠에’, ‘산세바스찬’과 ‘로스 플라네스 데렌데로스’란 수도의 남부에 있는 구릉지가 있다. 그곳은 아주 서늘하기 때문에 도시에서 성공한 많은 실업가들이 집을 짓기 위해 가는 곳이다. 현재 그곳에는 아름다운 왕국회관이 하나 있으며 왕국 전도인이 번창하는 회중이 되었다.

1953년에 ‘엘살바도르’에서 515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고 회중수는 10개로 늘어났다.

왕국 소식이 한 젊은이의 관심을 끌다

‘로드리고 구에바라’는 ‘산살바도르’의 한 거리 모퉁이에서 선교인들로부터 「파수대」와 「깨어라!」를 받아 정기적으로 구독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기 아들 ‘호르게’가 좋은 교육을 받기 원했기 때문에 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에는 무엇에나 관심이 많았다. 그는 또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책들을 12세된 아들을 위해 주문하였다. 얼마 안가서 ‘로드리고’는 ‘호르게’를 ‘회관’에 데리고 가서 형제들에게 소개하였다. 그는 정기적으로 참석하기 시작했으며 신권학교에 등록하였다.

왕국 소식은 ‘호르게’의 관심을 끌었으며, 그 이듬해에 그는 침례를 받았다. 신권 학교에서 발전하는 중에 ‘호르게’는 약간의 충돌을 일으켰다. 어느날 그는 임명을 수행한 후 학교의 종에게 다소 심한 충고를 받아 감정이 상하였다. ‘호르게’는 실망한 나머지 자기 성서를 마루로 내팽개치고는 다시는 ‘회관’에 오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하지만 그 다음 주에 그는 되돌아가 그 형제에게 용서를 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들어가자 학교의 종은 급히 그에게 와서 용서를 구하였다. ‘호르게’는 신권 가족과의 밀접한 교제를 통해 자기의 외로운 생활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생계비를 주었지만 항상 바빴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다른 가족 성원들은 멀리 떨어져 살았다.

‘프랜즈’ 형제가 방문하다.

1953년 가을에 있었던 아주 뜻밖의 일은 ‘F. W. 프랜즈’ 형제의 방문이었다. 그는 10월 13-18일에 열린 ‘엘살바도르’의 신세계 사회 대회에서 주요 연사로 연설하였다. 형제들은 ‘뉴우요오크’, ‘양키 스태디움’의 거대한 국제 대회에서 몇개월 전에 행해졌던 주요 연설들을 그가 하는 것을 듣게 되어 감개가 무량하였다. 모두에게 기쁨이 된 것은 “‘아마겟돈’ 후—하나님의 신세계”란 공개 연설을 듣기 위해 ‘산살바도르’ 소재 국립극장에 1,225명이 참석한 일이었다. 그 연설은 한 지방 ‘라디오’ 방송을 통해 동시에 방송되었다.

협회 제작 영화의 최초 상영

1954년의 뛰어난 특징 중 하나는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란 영화를 전국적으로 상영한 일이다. 그것은 확실히 여호와의 조직에 대한 형제들의 인식을 드높였다. 항구 도시인 ‘아카후틀라’—인구가 약 3,000—에서는 극장 하나가 무료로 제공되었고 한 시간 동안 확성기로 널리 광고되었다. 그 결과 400명이 참석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 가족은 ‘여호와의 증인’이 되기를 원하므로 누군가가 자기들을 방문하게 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현재 ‘아카후틀라’에는 규모가 꽤 큰 회중이 하나 있다. 전국 각처에서 영화를 상영한 후 그와 같은 경험담들이 자주 있었다.

새로운 지부 건물

1954년 12월에 ‘노워’ 형제가 다시 ‘엘살바도르’를 방문하였다. 그 무렵 북쪽 3번가와 ‘산카롤로스’가에서는 새로운 지부 건물 건축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이 지부 건물이 세워지게 된 경위는 흥미있다.

1949년에 ‘도로시 톰슨’은 ‘가톨릭’ 교회의 성당 건축을 반대했던 그 유명한 토목 기사의 아내인 ‘파우리나 데 페를라’를 방문하였다. ‘파우리나’가 자기의 어린 아들 ‘발타사르’ 2세를 목욕시키고 있는 동안 ‘도로시’는 그에게 증거하였다. 그는 관심을 나타냈지만 다른 이웃으로 이사를 하고나서 그만 연락이 끊어져버렸다.

후에 ‘샤를롯 보우인’은 다시 ‘파우리나’를 발견하였고 그는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다. 그의 남편 ‘발타사르’ 1세는 그 당시 대통령 ‘오스카르 오소리오’ 내각의 한 차관이었다. ‘발타사르’는 그의 영어 실력을 늘리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내를 통해 ‘샤를롯’에게 영어 개인 교습을 좀 해 줄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교습중에 ‘샤를롯’은 성서와 참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곤 하였다. 결국 ‘발타사르’는 대단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샤를롯’에게 ‘스페인’어로 성서 연구를 하자고 요구하였다.

‘오소리오’ 대통령의 정부는 ‘가톨릭’ 교회와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발타사르’는 ‘가톨릭’교인들과 싸우는 방법은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을 그들과 맞서게 하는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또 대통령에게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을 도우라고 권하였다. 그는 동의하였다. 하지만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 ‘발타사르’는 ‘차알즈 비이들’과 ‘샤를롯’을 ‘오소리오’ 대통령과 면담하도록 초대하였다. 이 모임에서 그들은 대통령에게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훌륭한 증거를 할 수 있었다. 그는 들은 내용에 매우 호의적인 감명을 받았으며 기꺼이 ‘증인’들을 돕기로 하였다.

‘발타사르’는 아직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전문 기술에 대한 아무런 보수를 받지 않고 ‘여호와의 증인’의 지부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그의 계획은 승인을 받기 위해 ‘브루클린’ 소재 ‘왙취타워’ 협회에 제출되었다.

이렇게 하여 1954년 12월에 ‘노워’ 형제가 일층 벽과 철근 뼈대로 둘러싸인 건축 현장에 서서 ‘비이들’ 형제가 ‘스페인’어로 통역한 짤막한 연설을 하게 되었다. 그는 머지 않아 그 건물이 너무 협소하여 ‘엘살바도르’에서의 왕국 사업을 적절히 돌볼 수 없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였다. 그 건물은 침실 6개와 그리고 식당, 응접실, 부엌, 저장실, 세탁실, 사무실과 창고 각 한개씩과 그 외에도 약 300명이 앉을 수 있는 왕국회관 및 부가적인 침실을 마련할 수 있는 ‘테라스’ 공간을 갖출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설명은 듣는 사람들에게 다소 요원한 일처럼 들렸다.

‘엘살바도르’가 변모하다

‘오소리오’ 대통령의 재임중에 이 나라는 현저하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사회 보장 혜택을 주는 새로운 노동법이 제정되었다. 또한 최저 임금법이 실시되었다. 새로운 해안선 고속도로가 건설되어 관광객들의 눈길을 끄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전경들뿐아니라 ‘아카후틀라’와 같은 항구들에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은행법의 개정으로 투자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에 보다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그 결과 폭 넓은 중류층이 생겨났으며 많은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

‘오소리오’ 대통령이 집무를 시작한 1950년에 가진 목표는 가난한 사람들이 단칸 방에다 대가족을 몰아 넣어야 하는 수많은 빈민촌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 목표가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도시 주택 공사는 저소득층 사람들이 정부로부터 사거나 임대할 수 있는 단독 주택은 물론 4층짜리 ‘아파트’ 건물을 짓는 조직적인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1950년대에 ‘엘살바도르’는 처음 선교인들이 도착했을 때와는 크게 달라졌다. 자동차가 점점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모우터’ ‘버스’들이 나타나 구식 운반차들을 대치했다. 그러한 차들 대부분은 동체는 나무로 되어 있고 좌석은 가정에서 만든 좌석으로 된 차들이었다. 상점 창문에는 ‘윈도우 쇼핑’을 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여러가지 상품들이 진열되었으며 곳곳에 새로운 공장들이 들어섰다.

영적인 것들에 대한 인식

‘노워’ 형제의 방문 기간중에 노동 회관에서 대회가 열렸다. “위기에 처한 인류를 구출할 사랑의 하나님”이란 공개 강연이 널리 광고되었다. ‘산후안 탈파’에 있던 ‘모랄레스’ 가족이 이 대회에 관해 알게 되었으며, 젊은 ‘라울’은 참석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아침 3시에 일어나서 그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산살바도르’까지 32‘킬로미터’ 이상을 걸었으며 그리하여 공개 강연을 경청한 572명 가운데 포함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그는 영적인 것들을 계속 추구하기로 이전 어느 때보다 더욱 단단히 결심하였다.

선교 사업을 조정함

1954년 12월에 새로운 선교인 두 부부, ‘포올’과 ‘무리엘 코코니스’ 그리고 ‘다니엘’과 ‘조안 엘더’가 도착하였다. ‘포올’과 ‘무리엘’은 즉시 ‘산미구엘’ 선교인집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산미구엘’에 있던 선교인들은 그 집이 ‘산티아고 데 마리아’로 옮기게 될 것이라는 통지를 받았다. 이러한 조처는 전파 사업이 다른 지역 사회에서도 시작할 수 있기 위해 취해진 것이었다.

선교인들은 ‘산티아고 데 마리아’뿐 아니라 그 인근 여러 마을에서도 전파하였다. 그들은 아침 6시에 ‘버스’를 타고 가서 보통 저녁에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곤 하였다. 일요일 오후에는 ‘치나메카’에서 「파수대」 연구가 사회되었고, 밤에 집에 돌아온 선교인들은 ‘산티아고 데 마리아’에서 또 다른 연구를 사회하곤 하였다. 그들은 주중 하루는 ‘우술루탄’과 ‘베를린’ 및 ‘아레그리아’에서 전파를 하였다. 이러한 곳에서 많은 관심자들이 생기게 되었고 나중에 선교인집이 이사를 했을 때 그러한 관심자들을 돌보기 위해 일부 지역에 특별 ‘파이오니아’가 파견되었다.

또한 1955년초에 ‘산타아나’의 선교인집이 ‘손소나테’로 이사하였다. 그러므로 그 무렵에 ‘아후아차판’, ‘산티아고 데 마리아’, ‘손소나테’ 그리고 물론 ‘산살바도르’에는 선교인 집들이 있었고 강력한 선교인들의 집단이 일하고 있었다.

한 대가족

1951년으로 되돌아가서 ‘산티아고 텍사쿠안고스’에 ‘후안 페나’란 이름을 가진 젊은이가 성서를 열심히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952년에 침례를 받았고 얼마 안가서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다. 때가 되자 그는 ‘산티아고 텍사쿠안고스’의 회중의 종으로 임명되었다. ‘후안’과 연구를 한 사람들 중 20명이 그 한 회중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의 가족만으로도 웬만한 크기의 회중을 이루었다. ‘후안’의 조부 ‘아브라함 페나’는 보다 적합한 왕국회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새로운 ‘콘크리이트’ 건물을 지었다.

우리는 ‘페나’ 가족의 이러한 활동이 앞뒤를 가리지 않은 감정에 치우친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항상 종교심이 많았고, 그들의 집은 교회의 형상 보관소로 사용되었었다. ‘아브라함’의 아내 ‘루가르다’는 낮은 탁자 위에 약 20개의 형상을 보관하고 있었고, 그는 매일밤 그것들을 장식하고 그 앞에 절하는 데 한 시간을 소요하였다. 하지만 진리의 씨가 심어졌을 때 ‘아브라함’은 가족의 책임있는 머리들이 ‘가톨릭’ 교회를 탈퇴하려는 결단에 동의하는지를 결정키 위해 한 옥수수 밭에서 가족 회의를 소집했다. 그들은 동의했으며, 따라서 행동에 옮겼다.

‘아브라함’은 새 ‘스테이션 왜건’을 한대 구입하였다. 그래서 그의 아들들은 그것을 타고 타도시로 여행을 하였다. 이러한 여행들은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지역에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 가족은 때때로 2, 3일씩 머무르곤 하였다. 보통 이러한 여행에 함께 다녔던 ‘비이들’ 형제가 저녁에 공개 강연을 하곤 하였다. ‘손소나테’에서 이러한 일이 행해졌으며 관심자들을 많이 찾아냈다. 1955년에 그곳에 선교인집이 설립되었을 때 선교인들이 그들의 관심자들을 돌보았다.

박해를 물리치고 양들을 모으다

‘손소나테’에서 선교인들이 일을 하기 시작하자마자, ‘이탈리아’계 미국인 사제들이 선교인들을 증오하고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 집단의 지도자는 선교인들을 반대하는 여론을 일으킬 목적으로 밤에 그가 담당하고 있던 15분간의 ‘라디오 프로’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헐뜯었다. 이들 사제들은 그들의 자유 방임한 방법 때문에 많은 친구를 얻었지만 그들의 가장 좋은 친구들 중 얼마는 ‘여호와의 증인’을 헐뜯는 일을 중지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사제들은 듣지 않았으며, 심지어 선교인 집주인이 자기 집에서 ‘증인’들을 추방하지 않겠다고 고집하자 그를 파문하기까지 하였다. ‘손소나테’의 유지 중 한 사람인 그 집주인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이미 ‘가톨릭’ 교회와 그 교회의 사제 대표자들에 대한 그의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런데다 이제 그의 인상은 더욱 나빠져버렸다. 그의 아내 역시 그 파문 포고에 대해 불안해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사제들은 이러한 행동으로 사람들에게서 크게 위신을 잃었으며 박해는 후퇴하고 말았다. 선교인들은 계속 충실하게 사람들에게 생명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이 도시에 활동적인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이 서 있다.

양같은 사람들이 ‘아후아차판’에서도 나오고 있었다. 한 젊은 중학생이 어느날 왕국회관 밖에 앉아서 집회를 열심히 듣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이름은 ‘페드로구에레로’였다. 그는 몸무게가 아마 36‘킬로그램’도 안되는 체구가 작은 젊은이었다. 일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증인’을 찾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 때부터 계속 그는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였으며 ‘틸만 험프리’와의 가정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다. 1958년에 침례를 받고 그는 순회의 종으로의 봉사를 포함하여 조직내에서 여러 가지 특권을 계속 즐겼다.

흡연 습관을 물리침

양같은 성품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흡연 습관에 젖어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아후아차판’의 선교인집 길 건너편에 사는 ‘다니엘 잘다나’란 이름을 가진 한 연로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골초였으며 흡연으로 인해 괴로왔지만 끊을 수가 없었다. 그와 연구를 하던 선교인 ‘메어리 노잘’은 그에게 성서 연구에 몰두하라고 말해 주었다. 나중에 그는 그 습관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심할 수 있었다.

어느날 저녁 ‘다니엘’은 ‘메어리’에게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다. 마침내 그가 담배를 끊은 것이었다! 그는 1956년에 침례를 받았으며, 지난 15년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해 왔다. 그는 참으로 훌륭한 본을 세워놓았다. 나이도 많은데다 좋지 않은 건강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는 생활에서 왕국 관심사를 첫째 자리에 두었다.

이 무렵에 ‘후아나’와 ‘헤르미니아 에스코바르’ 두 자매가 ‘메어리 노잘’에게 발견되었다. 그들은 영매술에 깊이 빠져 있었을 뿐 아니라 골초였다. 그들 중 한 사람은 담배를 귀 뒤에 꽂고 다니면서 피우고 있던 담배가 끝나면 즉시 불을 붙이곤 하였다. 그들은 또한 집안의 한쪽벽에 온통 형상들을 걸어 놓았으며, 그들은 그 형상들을 대단히 숭상하였다. 그러나 머지 않아 이 두 자매는 그들의 형상들을 내려서 완전히 불태워버렸고 영매술에서 떠났다. 종종 이 두 사람이 순회 대회나 지역 대회에서 충실하게 취사장의 일을 돕거나 접시 닦는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새로운 지부가 봉헌되다

1955년 6월에 ‘산살바도르’에서 새로운 지부 건물이 완공되었다. 이 안락한 집과 사무실 및 왕국회관을 마련하는 데 오랫동안 힘든 일을 해왔다. ‘제인 비이들’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우리는 지부가 건축되고 있는 곳에서 단지 두세 구획 떨어진 곳에서 살았읍니다. 나의 남편과 ‘발타사르’가 ‘테라스’에 ‘타르’를 칠하며 모든 배선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점심을 가져다 주곤 하였읍니다. 그들은 일을 끝마치기 위해 때때로 하루에 14시간을 일하곤 하였읍니다. 그들이 의자를 만들고 있을 때 ‘커어티스스 메드스타드’도 거기에 있었읍니다. 그리고 그들은 의자들의 철제 부품을 만들고 용접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일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의자를 오백개나 만들었읍니다. 우리 여자 선교인들은 봉헌식을 위한 모든 준비를 하기 위해 건물을 깨끗이 청소하고 ‘커어튼’을 만드는 일에 활동적으로 참여하였읍니다.”

‘죤 파아커’ 형제가 봉헌식 연설을 하기 위해 ‘구아테말라’에서 왔다. 그 때 ‘발타사르 페를라’는 이러한 말을 하여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 건물에 대한 공적은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이 때 그는 여호와를 최고의 권위자로 믿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시인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 건물을 살펴보러 왔으며 모든 방문객들에게 제공되는 ‘아이스 크리임’을 즐겁게 먹었다. 그 다음날 ‘파아커’ 형제는 “이 세대의 두려움을 극복함”이란 공개 강연을 하였다.

‘발타사르’가 ‘증인’이 되다

지부가 완공된지 얼마 안되어 ‘발타사르 페를라’는 미국 정부의 초대를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뉴우요오크’에 체제하고 있을 때 그는 ‘가톨릭’교의 교리에 대한 어떤 통신 교육 안내를 보게 되었다. 그는 이것이 ‘가톨릭’ 교회가 왕국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는지 알아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성서의 주제인 왕국은 특히 그에게 흥미가 있었다. 그는 이 전체 과정을 위해 200‘달러’(미화)를 지불하였다. 그 과정을 위해 두 상자분의 서적과 소책자를 받았다.

그는 자기가 묵고 있던 ‘호텔’로 가서 3일 동안 이 서적들을 성서와 대조해 보았다. 마침내 그는 ‘가툴릭’교가 성서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는 업무상 미국의 여러 지역으로 다녀야 했기 때문에 가능한 모든 곳에서 ‘왕국회관’을 찾았다.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그는 여호와께 헌신하였으며 나중에, ‘뉴우요오크’의 한 대회에서 물 침례로 그 헌신을 상징하였다. 그는 자기를 ‘증인’들에게로 이끈 것은 특히 교리적인 지식이 아니라 그들의 그리스도인 행실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차알즈’와 ‘제인 비이들’의 결혼 생활과 같은 ‘증인’들의 결혼 생활에서의 행복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그는 자기 자녀들이 자라서 그러한 행복을 즐기기를 원했다. 1960년에 ‘커어티스 스메드스타드’ 형제가 ‘엘살바도르’를 떠날 때 ‘발타사르’는 ‘산살바도르’의 도시의 종이 되었다.

두번째 순회구가 형성되다

1955년 10월에 ‘산타아나’ 출신의 젊은 ‘파이오니아’ ‘사울데레온’이 불충실하게 된 ‘안툴린 카스틸로 페나’를 대신하여 순회의 종이 되었다. 그 다음 1956년 1월에 두번째 순회구가 형성되었으며 ‘스메드스타드’ 형제가 다시 순회의 종이 되었다.

또 하나의 협회 영화

1956년 5월에 ‘크리시 윌슨’과 ‘플로렌스 에니볼드슨’이 선교인 대열에 가담하였으며, 그들은 “신세계 사회의 행복”이란 협회의 새로운 영화를 가지고 왔다. 밝은 대낮에 선교인들은 그 영화를 보기 위해 복도를 당장 어둡게 만들었다. ‘길르앗’ 14기 졸업생인 ‘커어티스 스메드스타드’는 자동차가 있었기 때문에 곳곳으로 다니면서 수백명의 인식깊은 사람들에게 그 영화를 보여주었다. ‘커어티스’는 이 나라 북부 지방에서 있었던 경험담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도시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느 개인 소유지를 통과해야 하였읍니다. 지주들은 그들의 길을 사용하는 데 대한 사용료를 받고 있었읍니다. 우리는 자동차를 그 지주의 농장에 두고 말을 타고 여행을 계속해야 했기 때문에 돌아와서 사용료를 내기로 하였읍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중에 많은 군중에게 영화를 보여줄 수 있었읍니다.

“우리가 농장에 돌아왔을 때 그들은 소문을 듣고 그들에게도 그 영화를 구경시켜 주지 않으면 우리를 보내주지 않겠다고 하였읍니다. 대낮이었으므로 그들은 서둘러 약 75명이나 되는 일군들을 모두 모았고, 우리 모두를 한 조그만 방에 몰아넣고 어둡게 하기 위해 문과 창문을 모두 닫아버렸읍니다. 우리가 증기찜을 당했으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사람도 나가지 않았으며 모두 아주 열심히 보았읍니다. 그들에게 도로 사용료를 지불하기로 했었지만 관리인은 오히려 그들이 돈을 지불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받기를 거절하였읍니다. 서적을 많이 남겨 놓았읍니다.”

새로운 선교인들과 오래된 선교인들

새로운 선교인들은 대부분 다른 나라로 옮길 때 종종 일어나는 문화 ‘쇼크’를 계속 겪었다. ‘플로렌스 에니볼드슨’과 ‘크리시 윌슨’은 ‘산살바도르’로 임명되었다. ‘플로렌스’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첫 집회에서 두 시간 동안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 말이라곤 ‘왙취타워’ 성서 책자 협회란 말뿐이었다. ‘차알즈 비이들’이 결론에서 그 말을 사용한 것이다. 그 다음 일요일에 우리는 ‘에블린 힐’이 포함된 한 집단과 함께 야외 봉사에 나갔다. ‘에블린’은 참을성있게 지방 형제들과 우리들 사이에 통역을 해 주었다.

“그날 오전에 우리는 특히 불결한 ‘메손’[여러 가족이 사용하는 주택 시설]에서 일하였다. ‘크리시’는 커다란 바퀴벌레를 몇마리 보았으며, 그것들은 그에게 심한 인상을 주었고, 기타 상태로 인해 그를 다소 아프게 하였다. 한 부인이 친절하게 그에게 ‘알카 셀처’ 탄산수 한잔을 주었다. 물에 대해 경고를 받은 바 있는 그는 그것을 마시기를 거절하였다. 그래서 그와 함께 있는 지방 자매가 그것을 받아마셔 그 부인의 감정이 상하지 않게 했다. 전도인들은 우리가 길을 알고 있었는데도 친절하게 우리를 선교인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우리는 ‘스페인’어를 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충분한 의사를 교환할 수 없었으며 길을 안다는 점을 그들에게 납득시킬 수 없었다.”

새로운 선교인들이 오면 오래된 선교인들이 종종 떠났다. 때때로 그들이 떠나는 것은 결혼을 하기 위해서였다. ‘엘살바도르’에서 7년간 봉사해 왔던 ‘샤를롯 보우인’은 1955년에 ‘유럽’ 대회들이 있은 후 ‘알버어트 쉬로더’와 약혼하게 되었다. 1956년초에 그는 ‘뉴우요오크’에서 새로운 임명을 받고 ‘왕국’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쉬로더’ 형제는 통치체의 한 성원이며, ‘샤를롯’은 현재 그와 22살된 아들 ‘주다 벤’과 함께 ‘브루클린 벧엘’에서 봉사하고 있다.

‘라디오’ 방송 이용을 확대함

1956년에 또 YSAX ‘라디오’ 방송국이 ‘여호와의 증인’이 준비한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점들”이란 ‘프로’를 방송하기 시작하였다. 이 방송은 ‘가톨릭’ 교회가 그 방송국을 매입하여 중지시킬 때까지 3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러한 방송 ‘프로’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소련에 대한 항의

‘산살바도르’에서 1956년 8-9월에 열린 순회 대회에서 소련의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학대를 항의하는 탄원서가 제시되었다. 약 500명이 이 탄원서를 소련 관리들 앞으로 보낼 것을 결의하였다. 이 탄원서 사본들을 ‘엘살바도르’의 여러 신문사로 보냈다. 여러 신문들이 이 탄원서의 일부 혹은 전부를 실었다. 일부 ‘라디오’ 방송국에서도 그 내용을 방송하였다. 이렇게 하여 ‘엘살바도르’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소련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실증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간섭이 좌절되다

1956년 12월에 ‘아르메니아’ 마을에서 열린 순회 대회에서는 협회의 영화 “신세계 사회의 행복”을 상영하는 ‘프로’가 있었다. 그것은 예상된 사람들 전부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큰 ‘홀’에서 상영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의 ‘가톨릭’ 사제가 그곳에 어떻게 들어와서 전기 접속 부분을 끊어놓았다. ‘비이들’ 형제는 건물 주인에게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갔다. 그렇게 하는 중에 그는 그 사제가 ‘커어튼’ 뒤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사제에게 나오라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그는 기가 죽어서 나왔다.

세를 낸 그 ‘홀’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필요한 보수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그 영화를 길거리에 나가서 하얀 벽에다 비출 준비를 하였다. 그 결과 ‘홀’ 안에서 보려고 했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게 되었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늘어나다

성서를 한권 사기 위해 ‘기타’까지 팔아버렸던 음악가인 ‘앤젤 몬탈보’는 그 당시 같은 ‘아르메니아’ 마을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었다. 그의 짝은 자기가 사는 마을인 ‘산후안 탈파’에서 걸어서 ‘산살바도르’에서 열리는 대회에 처음으로 참석했던 젊은이 ‘라울 모랄레스’였다. 그가 ‘파이오니아’가 된 경위는 흥미있다.

1955년에 침례를 받은 후 ‘라울’은 ‘파이오니아’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서 그가 봉사에 대단히 활동적인 것을 보고 ‘차알즈 비이들’이 ‘파이오니아’냐고 물어보았다. 그 때 ‘라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차알즈’는 ‘피이오니아’는 매달 전파사업에 100시간 정도 바치는 사람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라울’은 “그렇게 하는 사람이 ‘파이오니아’라면 나도 ‘파이오니아’인 것 같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정식으로 ‘파이오니아’에 등록한 후에, ‘라울’은 1956년 1월에 그의 첫 번째 임명지로 ‘고후테페쿠에’를 받아들였다. 그 후에 그는 ‘몬탈보’ 형제와 함께 일하기 위해 ‘아르메니아’로 갔다.

최초의 ‘엘살바도르’인 ‘길르앗’ 학생

‘산타아나’ 출신의 젊은 순회 감독자 ‘사울 데 레온’이 ‘엘살바도르’에서 ‘길르앗’ 학교에 참석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선교인들은 그에게 영어를 가르쳐 줌으로써 그가 준비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그는 1957년 31기 학급에 초대되었으며, 그 이듬해 졸업하였다. 이 때문에 순회 감독자의 자리가 하나 비게 되었다. ‘라울 모랄레스’가 그를 대신하여 1957년 9월에 봉사하도록 선택되었다.

젊은이가 자기 가족에게 증거하다

한 때 신권학교의 종의 충고를 받고 실망한 나머지 자기 성경을 마루바닥에 내팽개쳤던 젊은이 ‘호르게 구에바라’는 영적으로 놀랍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는 겨우 16세 되었을 때 진화론에 대한 제목으로 첫 공개 강연을 하였다. 1957년에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의 어머니와 동생이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산살바도르’에서 동쪽으로 약 140‘킬로미터’ 떨어진 ‘엘호르미구에로’에서 왔다.

‘호르게’는 오랫동안 자기 가족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를 젊은이로 혼자 외롭게 놔둔 데 대해 가족을 비난하였다. “내가 ‘증인’만 아니었다면 가족에게 다시는 말도 걸지 않았을 겁니다” 하고 ‘호르게’는 말한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의 한 종파에 속해 있었지만 그의 말을 주의깊이 들었다.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던 ‘사울 데 레온’이 그들을 방문하도록 마련이 되었으며 그는 놀라운 일을 발견하였다.

‘호르게’가 그들에게 준 서적을 단지 읽고서 ‘여호와의 증인’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이 다섯명이나 있었다. ‘사울 데 레온’ 형제는 그들에게 침례를 주었다. 75명의 군중이 참석했으며 이것 자체가 그들에게 훌륭한 증거가 되었다. 그 이후로 ‘호르게구에바라’ 가족 중 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고 침례의 단계를 밟았으며 그들은 계속 충실하게 여호와의 봉사를 수행하고 있다.

1957년의 중요한 일

1957년에 ‘산살바도르’의 남단에서 가까운 ‘산타아니타’에 아담한 왕국회관 겸 선교인집이 하나 완공되었다. 봉헌식이 있은지 얼마 안된 10월에 ‘길르앗’ 졸업생 ‘프레데릭’과 ‘도러시 보우어’, ‘케니스’와 ‘버어지니아 키이즐’이 ‘엘살바도르’에 도착했다. 두 ‘키이즐’은 ‘크리시 윌슨’ 및 ‘플로렌스 에니볼드슨’과 함께 ‘산타아니타’에 있는 그 새로운 선교인집에 임명되었다. ‘플로렌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는 열대성 폭풍우가 한창인 때에 그 집으로 이사하였읍니다. 사방에서 물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우리는 그 물을 여러 날 동안 퍼내야 하였읍니다.”

1957년 중에 새로운 회중이 두개 생겨서 ‘엘살바도르’에는 회중이 총 12개가 되었다. 또한 21명의 선교인을 포함하여 격지 구역에서 봉사하는 전 시간 전도인이 46명 있었다. 그 해에 ‘산티아고 데 마리아’와 ‘아후아차판’의 두 선교인집이 문을 닫았다. 그래서 회중들이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대신하여 돌보게 되었다.

1957년에 ‘손소나테’에서 또 하나의 훌륭한 순회 대회가 열렸다. 대회장은 낡은 시청 건물이었다. 거기에는 넓이가 약 3평방 ‘미터’이고 깊이가 약 0.76‘미터’되는 ‘콘크리이트’ 물받이가 뒷마당에 있었다. 거기에서 47명이 침례를 받았다.

새로운 장소에서의 대회

1958년 2월에 지구 감독자 ‘오오브리 바이벤즈’와 ‘M. G. 헨첼’이 ‘브루클린 벧엘’에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엘살바도르’를 방문하였다. 형제들이 당면한 큰 문제는 적절한 집회 장소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이전 대회들은 ‘산살바도르’의 노동회관에서 열렸었으나 그곳은 이제 예상되는 참석자들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너무 협소하였다. 이내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나왔다.

지부 건물 북쪽에 사는 한 친절한 이웃인 ‘빅토르 레시노스’란 사람이 ‘증인’들이 오가는 것을 지켜보고는 감탄하였다. 어느날 그는 ‘비이들’ 형제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관대하게 자기 대지를 대회장으로 사용하라고 제안하였다. 그의 넓은 대지에는 다른 계획을 위해 파두었던 천연적인 “우묵한 장소”가 있었는데, 그곳은 여러 그루의 적절하게 자리잡은 나무들로 가리워져 있었다.

여러 형제들이 협조하여 잡목을 치웠으며, 그렇게 하여 그곳은 깨끗하고 산뜻한 원형극장이 되었다. 공개 강연 제목이 “선의자들을 위한 새로운 노래”였으므로 수직으로 악보와 지휘봉 모양을 내기 위해 고안된 낮은 울타리를 연단 앞에 세웠다. 황금빛으로 칠해졌기 때문에 그것은 대단히 눈길을 끌었다. 활짝 핀 여러 그루의 커다란 ‘포인세티아’가 멋있게 장식해 주었다.

간이 식당 시설을 설치한 대지 뒷편에는 조그만 건물이 하나 있었다. 대부분의 음식은 지부에서 준비하여 길건너 그 식당으로 운반되었다. 대회가 끝났을 때 각자는 자기 의자를 들어 머리위에 얹고 길건너 지부 왕국회관으로 옮겼다. 많은 사람들은 그토록 즐겁게 협조하는 것을 이전에 결코 본 적이 없었다고 말하였다.

대회 후의 비극

이 대회에서 그들의 헌신을 물 침례로 상징한 61명 중에는 혈통이 반은 ‘아랍’계인 ‘라위니온’ 출신의 형제가 하나 있었다. 그는 많은 ‘아랍’계 사람들 가운데서 ‘증인’이 된 최초의 사람이었다. 대회 다음날일 월요일에 ‘비이들’ 형제는 ‘라위니온’의 한 특별 ‘파이오니아’로부터 형제들이 타고가던 버스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갓 침례를 받았던 그 형제를 포함하여 세명의 형제가 사망하였다.

형제들은 사고 현장에 모여들어 부서진 잔해 속에서 대회 ‘노우트’와 노래책 및 기타 소유물들을 집어들고 눈물을 흘렸다. ‘비이들’ 형제가 ‘라위니온’에 도착했을 때는 군중이 이미 매장하기 위해 공동 묘지에 가 있었으므로 장례식 연설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라위니온’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그들의 노력의 열매인 그 귀중한 형제들을 잃은 상실감을 깊이 느꼈다.

지부 운영의 조정

1958년 봄까지 ‘비이들’ 형제는 10년 동안 거의 혼자서 ‘엘살바도르’의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감독해 왔다. 그 기간중 대부분을 그는 순회 및 지역의 종뿐아니라 회중의 감독자, 선교인 집의 종 및 잡일까지 모든 직책을 수행하였다. 그는 또한 ‘산타아니타’의 왕국회관 겸 선교인집뿐 아니라 지부 건물을 건축하는 일을 감독하였다. 이 모든 책임이 주는 압력으로 인해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쇠약해졌으며 휴식이 좀 필요했다. 그래서 1958년 4월에 ‘프레데릭 보우어’ 형제가 지부의 종으로 임명되었다. 그 달에 13개 회중에서 ‘기념식’에 1,295명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최고 전도인수는 460명이었다.

신권 가족의 가장이 사망하다

1958년 4월에 ‘아브라함 폐나’ 1세가 고령으로 사망하였다. 그 때 그의 아내 ‘루가르다’는 85세였다. 그들은 진리를 단지 5년 전에 배웠다. ‘아브라함’은 임종 직전에 자녀들을 모두 침대 옆으로 불러놓고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헌신에 계속 충실하라고 권고하였다. ‘루가르다’는 그에게서 1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들 중 단지 7명만이 그 때 살아 있었다.

‘페나’의 집에서 계속 집회를 보았다. 1971년까지 그 가족 중에서 모두 28명이 침례를 받았다. 그 해에 ‘루가르다’는 9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계속 충실하였으며, 임종시까지 그의 마음에는 진리가 분명히 살아 있었다.

‘우술루탄’ 회중의 시작

1958년에 방위 대원 ‘카를로스 레예스’가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고, 배운 내용에 감동을 받아 동거중이던 여자 ‘로자’와 결혼을 하였다. 군인 생활을 그만 두었기 때문에 그는 경제 상태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영적 상태는 계속 발전하였다. 그 해에 그와 ‘로자’는 침례를 받았다. 그 이듬해 그들은 ‘피이오니아’가 되었고 ‘우술루탄’으로 임명되어 그곳으로 이사를 하기 위해 가구를 팔았다. 이렇게 하여 그곳에 단지 여섯명의 전도인으로 한 회중의 기초가 놓였다. 지금 ‘우술루탄’에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90명 이상의 전도인이 있다.

‘엘살바도르’인들이 ‘뉴우요오크’ 대회에 참석하다

1958년 이전에는 단지 서너명의 ‘엘살바도르’인만이 미국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했었다. 그러나 이제 ‘뉴우요오크’에서 열리는 성의 국제 대회가 가까와오자 열심이 높아졌다. ‘엘살바도르’에서 모두 53명이 그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비행기 한대를 ‘플로리다’까지 전세 내었다. 거기서 형제들은 ‘커어티스 스메드스타드’와 ‘오스카르 오소리오’ 대령의 전처였던 ‘레티시아 로잘레스’를 만나게 되었다. 당신은 ‘발타사르 페를라’가 ‘증인’들과 연구를 시작했을 때 ‘오스카르’가 ‘엘살바도르’ 대통령으로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발타사르’는 ‘오스카르’가 진리에서 발전하도록 돕고자 열심히 노력했으나 ‘오스카르’는 세속 정치의 매력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인 비이들’은 ‘레티시아’와 연구를 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미국으로 간 후 진리에서 발전하여 침례를 받았다. 그는 거기에서 동국인들을 만나게 되어 대단히 기뻐하였다.

‘레티시아’는 형제들이 ‘뉴우요오크’로 가는 전세 ‘버스’를 탈 때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그들이 여행중에 있을지도 모를 어떤 문제를 도와주기 위해 ‘차알즈 비이들’ 형제가 함께 같다. 대회장에서 그들은 그 때 ‘길르앗’에 다니고 있던 ‘사울 대 레온’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온 형제들과 자리를 같이하게 되어 즐거워하였다. 많은 ‘엘살바도르’ 형제들은 자진 봉사를 하였으며 일부 형제들은 귀국할 때 다른 나라에서 온 벗들의 이름과 주소를 가지고 와서 그들과 서신 교환을 하였다. ‘라위이온’ 출신 특별 ‘파이오니아’인 ‘페드로 아구이랄르’는 이 서신 교환이 대단히 재미있게 되어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서신으로 교제하던 한 자매와 결혼하였다. ‘라울 모랄레스’도 동일한 결정을 해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외국 여자를 ‘엘살바도르’로 데리고 오는 것이 두려웠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은 마치 언제나 부속품을 구할 수 없는 ‘유럽’제 자동차를 가지고 오는 결과와 같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는 왕국 선포자들을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인 ‘엘살바도르’에서 봉사를 계속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대회는 형제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들은 정신과 마음에 신세계 사회의 사랑과 조화 및 연합에 대한 지울 수 없는 감명을 받았다. ‘제인 비이들’이 자기와 ‘차알즈’가 곧 부모가 된다고 발표한 것이 바로 ‘뉴우요오크’의 한 ‘호텔’에 모든 ‘엘살바도르’인 대회의 대표자들이 모인 한 특별 모임에서였다. 이것은 그들이 곧 선교인집을 떠나야 함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엘살바도르’에 남아 있기로 결정하였다.

선교인에서 부모로

1958년 가을에 ‘비이들’ 부부는 선교인집 밖의 주거지를 찾느라고 바빴다. 하루는 ‘제인’이 시장에서 감자를 팔고 있는 한 ‘증인’ ‘파울라 마르티네즈’에게 말을 걸기 위해 발걸음을 멈추었다. ‘제인’은 그 때 있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감자 부대 뒤에 있는 한 조그만 걸상에 앉았읍니다. ‘파울라’는 내가 아기를 출산할 것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선교인집을 떠날 것이며, 살 곳을 찾고 있다고 말했읍니다. 그는 우리가 선교인집을 떠나야 한다는 말을 듣고 대단히 놀랐읍니다. 나는 그에게 형제들이 전파 사업을 행하는 한가지 목적으로 협회에 헌금한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읍니다. 그러므로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 즉 전파 활동에 전 시간을 바칠 입장에 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선교인집에서 살 권리가 없다고 말하였읍니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는 참으로 훌륭한 조직을 가지고 있군요!’ 하고 말했읍니다. 나는 우리가 소위 ‘쫓겨’나는 사실이 조직에 대한 그의 인식을 높여주었다고 확실히 믿고 있읍니다.

“우리가 가족을 부양하기 시작했을 때, ‘차알즈’는 대부분의 우리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생계를 꾸리기 위해 세속 직업을 구해야 하였읍니다. 이러한 공통적인 상황은 우리가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형제들에 대한 어떤 친밀감을 갖는데 도움이 되었읍니다. 공통된 문제들과 어려움들은 우리가 선교인으로 있을 때는 가져보지 못한 그들과의 어떤 유대 관계를 주었읍니다.

이 무렵에 ‘제시 스메드스타드’도 자기와 ‘커어티스’가 아기를 가질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비이들’ 부부는 그해 가을에 아름다운 ‘아파트’를 하나 발견하였다. 그 주인은 아직 미국에 있던 ‘레티시아 로잘레스’였다. ‘스메드스타드’ 부부도 지부 사무실 부근에 한 집을 발견하였다. ‘엘살바도르’의 전직 대통령, ‘오소리오’ 대령은 각 가족에게 살림살이를 시작할 가구를 얼마씩 주었다.

1959년 1월에 ‘로널드’와 ‘글래디스 애쉬’가 ‘길르앗’ 25기생으로 ‘엘살바도르’에 임명되었다. 그들은 ‘산타테클라’ 선교인집으로 전임되었고, 얼마 가지 않아서 그들도 아기를 가지게 된다는 발표가 있었다. 그들은 단지 7개월간 임명을 수행한 후 고향인 ‘캐나다’로 돌아갈 것이었는가?

그들은 아직 사람들과 언어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로널드’는 넉달간 일자리를 찾은 결과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직업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계속 ‘산타테클라’ 회중과 연합하면서 선교인들이 그곳 회중을 강화시키는 일을 돕고 있다.

1959년의 대회들

1959년에 두 차례의 순회 대회가 계획되었다. 하나는 ‘사울데 레온’이 ‘길르앗’에서 돌아온 후 섬기던 순회구에서, 다른 하나는 ‘라울 모랄레스’가 섬기던 순회구에서 계획되었다. 그 다음에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전국대회로 집중되었다. 전년도에는 전국대회가 지부 건너편에 있는 공터에서 열렸다. 금년에는 형제들이 찾지도 않았던 곳에서 멋있는 장소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산살바도르’ 교외 지역 ‘몬트세라트’란 곳에 현대식 주택 개발을 위해 지은 새로운 공회당이였다.

전직 대통령 ‘오소리오’는 다시 한번 식당에 쇠고기를 선물로 보냄으로써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관대한 친절을 베풀었다. 이 대회에서 ‘보우어’ 형제가 행한 “하나님께서 열국에게 평화를 말씀하실 때”란 공개 강연은 참석한 748명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제인 비이들’과 연구를 하고 있던 ‘비올레타 보닐라데 세발로스’란 한 젊은 벽화가가 무대 장식을 돕겠다고 제의했다. ‘비올레타’는 대통령 관저와 다른 정부 건물들의 벽화뿐아니라 많은 국립 기념물에도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 그는 모든 인종 가운데서 나오고 있는 여호와의 찬양자들을 보여주는 「파수대」 1959년 4월 1일호 67면의 삽화를 ‘모델’로 사용하였다. 그가 그린 벽화는 여러 신문사와 ‘텔레비젼’에서 사진을 찍어 갔으며 많은 논평거리가 되었다. ‘비올레타’는 이 대회에서 침례를 받은 61명 중 한 사람이었다.

축복을 가져다 준 변화

‘셀리아 데리에바노’는 ‘발타사르 페를라’가 관직에 있을 때 그의 비서였다. 얼마 동안 ‘발타사르’는 그 여자로 성서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하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선교인 중 한 사람이 그에게 영어 교습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며, 그 선교인은 수업이 끝난 후에 그에게 증거하곤 하였다. 곧 한건의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셀리아’는 집회에 참석하고 야외 봉사에 나오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는 1959년 전국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셀리아’의 남편 ‘카를로스’는 특히 진화론을 믿었기 때문에 그를 반대하였다. 그는 자기 아내를 그의 새로운 종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도록 예수회 사제에게 데리고 가기까지 하였다. ‘셀리아’는 새로 얻은 성서 지식으로 자기의 새로운 종교를 변호했을 뿐아니라 그 ‘가톨릭’ 사제가 그릇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렇게 하여 ‘카를로스 리에바노’는 1961년에 여호와의 침례받은 ‘증인’으로 아내와 연합하였다. 그 때부터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하는 데 활동적으로 일해 왔다.

전 생애에 걸쳐 ‘리에바노’ 부부는 전문 직업에서 탁월해지도록 노력하라는 가르침을 받아왔으며, 또 그들은 그렇게 잘하고 있었다. 그들이 ‘여호와의 증인’이 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세상 친구들은 그들이 이제 전문 분야에서 실패할 것이며 그들이 ‘가톨릭’ 교회를 떠났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려고 하든지 실패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리에바노’ 부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과거를 회상해 볼 때 우리는 여호와의 손으로부터 받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축복에 대해 감사할 수 있읍니다.”

새로운 선교인들의 도착

1959년 9월은 네 소녀 즉 영국 출신의 ‘위니프레드 스코트’, ‘패트리샤 핸코크’와 ‘지인 언윈’ 그리고 ‘남아프리카’ 출신의 ‘티라밀즈’의 생애에 중요한 달이었다. 이들 ‘길르앗’ 학교의 최근 졸업생들은 공항에 그들을 마중나온 여러 선교인들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1960년 5월 5일에 또 34기 ‘길르앗’ 졸업생 여섯명이 더 ‘엘살바도르’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 장면은 초기의 선교인들이 도착했을 때 있었던 일과는 아주 달랐다. 그들을 태운 비행기가 부드러운 활주로를 서서히 굴러 갈 때 조그마하지만 잘 지어진 깔끔하게 보이는 공항이 새로운 선교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이 수도까지 자동차를 타고 가는 일은 더 이상 힘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포장된 4차선 도로를 따라 편안한 승차를 하면서 그들의 새로운 고향이 될 이 나라의 경치를 즐겼다. 이렇게 하여 ‘사무엘’과 ‘델로레스 스타고’, ‘레오나르드’와 ‘힐자슁쿠스’ 및 ‘포올’과 ‘매릴린 월더어드’가 ‘엘살바도르’에 소개되었다. 바로 그 다음날 그들은 하루 11시간씩 한달간의 언어 강습을 받기 시작했다.

선교인 활동이 결실하다

선교인들의 일은 계속 결실하였다. ‘플로렌스 에 니볼드슨’은 ‘차알즈 쉘던’과 결혼하기 위해 ‘코스타리카’로 옮기기 전에 ‘산살바도르’ 남단에서 한 조그만 가게를 가지고 있는 ‘베시데 카나스’와 연구를 시작하였다. ‘베시’의 남편 ‘헥토르’는 시초부터 연구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플로렌스’가 연구를 ‘크리시 윌슨’에게 인계할 무렵 ‘헥토르’는 이따금씩 잡지들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와 ‘베시’는 곧 침례를 받았으며, ‘헥토르’는 현재 지부 왕국회관에서 모이는 한 회중에서 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또한 1960년에 ‘크리시 윌슨’은 당시 17세였던 ‘오스카르젤레야 로페즈’를 만났다. ‘크리시’와 같이 갔던 사람은 누구나 그 가족이 잠을 자는 조그만 오두막 밖에 있는 바위 위에 앉곤 하였다. ‘오스카르’는 날씨가 화창하든 비가 오든 결코 연구를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크리시’는 일요일 오후에 여러 번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우산 밑에 앉아서 연구를 사회하곤 하던 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오스카르’도 ‘산살바도르’에 있는 한 회중에서 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정치 소요 사태

1960년 9월에 대학생들이 정부에 대한 반란에 가담하였다. 그리하여 대령 ‘호세 마리아 레무스’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그 다음 달 그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라훈타(군사 혁명 위원회)”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6인 정부가 형성되었다. 거리에서는 작은 충돌이 벌어졌고, 한번은 ‘바리케이드’를 만들기 위해 ‘버스’를 한대 뒤집어 놓는 일도 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사태는 조용해졌다. 그러나 호전적인 무법자들이 수도를 누비며 시청이나 상가에서 관리하는 공중 시계들을 향해 마구 난사하였기 때문에 도시에 얼마의 상처를 남겼다. 이들 중 어떤 것은 보수하거나 갈아 끼는 데 수년이 경과하였다.

폭력에 대한 소문이 사라질 때까지 며칠 동안 선교인들이 집안의 허드렛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한 것 외에는 이 모든 일 때문에 증거 사업이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오스카르 오소리오’ 대령이 진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돕기 위해 ‘발타사르’가 마지막으로 애쓰고 있는 때가 바로 이 기간 중이었다. 그러나 ‘오스카르’가 미국으로 가서 살게 되자 연구가 중단되었다. 연구는 다시 시작되지 않았으며 그는 배운 성서 진리를 실제로 적용해 보지도 못한 채 1969년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엘살바도르’의 다른 한 전직 통치자의 경우에는 상황이 아주 달랐다. 그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바친 노력을 고려해 보면 흥미있다.

‘엘살바도르’의 정부

1960년 10월에 ‘엘살바도르’를 다스리기 시작한 6인 ‘훈타’의 한 위원은 ‘루벤 로잘레스’였다. 그는 ‘레무스’ 정권을 축출하는 데 탁월하였던 한 군인 지도자였다. 사실상 그가 전복시킨 군부의 기획과 실무 집행을 완전히 관할하였다. 그 새로운 ‘훈타’는 그것이 ‘엘살바도르’의 상태를 보다 개선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만사가 원대로 풀리지 않았다. ‘루벤’은 이와 같이 설명하였다.

“만사가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우리가 집권한 직후에 대주교가 나를 불렀다. 그는 ‘훈타’에게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으며 그 토의는 비밀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대주교는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러분은 하나의 신정부입니다. 그리고 나는 설교단에서 이 정부를 지원할 입장에 있읍니다. 그 대신 여러분도 우리를 지원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우리가 입수할 수 있던 기록에서 우리는 ‘가톨릭’ 종교 단체가 이전 정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대주교는 분명히 우리 신정부가 그 교회에게 그러한 지원을 계속해 줄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다.

“나는 ‘가톨릭’ 신자였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편파적인 대우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다. ‘훈타’의 다른 위원들도 동의하였다. 그래서 우리 여섯은 그 교회에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기를 거절하였다. 그 대주교는 화가 난 기색을 하면서 우리가 나중에 우리의 결정을 후회하게 될 것임을 넌지시 비쳤다.

“얼마 안가서 교회 설교단에서 유세가 시작되었다. 사제들은 우리 정부가 친 ‘카스트로’이며 친 공산주의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연설을 녹음하게 했으므로 어떠한 비난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유세를 억압하는 일에 이익보다는 손해가 더 많을 것이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그 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항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안가서 우리 정부에 악 영향이 미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의 정치 방침에 대해 의심이 일어나게 되었다. 미국도 우려를 나타내며 우리에 대한 승인을 철회하였다. 하지만 진상은 어떠했는가?

“얼마 안가서 교회가 선동한 비난은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래서 미국도 우리를 다시 승인하게 되었다. ‘뉴우요오크’ 「타임즈」는 1960년 12월 1일자에 다음과 같이 실었다.

“공산주의를 묵인하려는 경향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정치적 및 사회적 변화를 겨냥한 모든 운동에서의 ‘카스트로’주의의 새로운 호소는 위험한 것이다 ·⁠·⁠·

“혁명 위원회의 세 민간인 위원이 ‘카스트로’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그것은 근거가 없으며 그들은 자유주의자들이며 민주주의자들이다. ·⁠·⁠· 위원 6명은 모두 스스로 민주주의적인 계획을 공약하였으며 마땅히 그들에게 그들의 선의를 증명하기 위한 모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러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우리에 대한 신뢰성은 교회가 후원하는 비방 운동으로 크게 손상을 입었다. 그리고 군부도 ‘훈타’가 정치적 상태를 어지럽게 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고는 ‘훈타’를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이듬해 우리의 6인 신정부는 전복되었고 다른 정부로 대치되었다.”

‘루벤 로잘레스’는 미국으로 가서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하였다. 거기서 여러 해 후에 그는 진리를 배워서 1969년 8월에 침례를 받았다. ‘엘살바도르’에 있는 일부 친척들을 포함하여 그의 가족 전체가 ‘증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그는 장로로 봉사해 왔으며, 선한 정부가 실현될 방법에 관한 유일한 참된 희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순회 사업이 타격을 받다

1960년 8월에 ‘라율 모랄레스’ 형제가 순회 사업을 떠났을 때 순회활동이 타격을 받았다. 얼마간 그는 ‘길르앗’에 갈 것인지 결혼을 할 것인지 하는 욕망 가운데 갈등을 겪었다. 1961년 1월에 그는 ‘산타아니타’ 회중에 속한 젊은 자매 ‘안드레아 라조’와 결혼하였다.

그 무렵, 이 나라의 다른 순회 감독자 ‘사울 데 레온’이 한 기혼 선교인 자매와의 부도덕에 관련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나쁜 행로에서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깨끗한 조직의 성원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몇달만에 두 순회구가 그들의 순회 감독자를 잃었다. 그래서 희귀한 대장염으로 단지 몇달 전에 아내를 잃었던 선교인 ‘포이 브렌’이 ‘사울 데 레온’ 대신 한 순회구의 순회 감독자로 선택되었다. 그리고 다른 한 순회구에는 전에 ‘아후아차판’의 왕국회관 밖에 앉아 있었던 젊은 청년 ‘페드로 구에레로’가 ‘라율’을 대신하여 순회 감독자가 되었다.

특별 대표자들의 방문

1961년초에 ‘오오브리 바이벤’이 시기에 적절하게, 지구의 종으로 방문하였다. 얼마 안가서 ‘노워’ 형제도 다시 ‘엘살바도르’를 방문하였다. ‘라율 모랄레스’가 그에게 소개되었다. 그리고 ‘라율’은 아내와 함께 특별 ‘파이오니아’ 명단에 올랐다. 그들은 ‘산타아나’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방문중에 ‘사무엘 스타고’가 1961년 4월 1일자로 ‘보우어’ 형제를 대신하여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왕국 관심사를 첫째 자리에 둠

1961년에 ‘기념식’ 참석자 수가 1,878명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지난해에 비해 거의 300명이 증가한 수였다. 또한 그 달에 638명의 왕국 전도인 신기록에 도달하였다. 이러한 놀라운 발전은 부분적으로 1958년 이래 ‘후아유아’ 읍에서 바쁘게 좋은 소식을 전파해 온 학교 교사 ‘안토니아 콘트레라스’와 같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한 결과로 가능하게 되었다.

1961년에 ‘안토니아’는 그의 세속 직업을 버리고 ‘파이오니아’ 대열에 가담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엘살바도르’ 전도인 중 최초로 전 시간 봉사를 하기 위해 전문 생업을 버린 사람이 되었다. ‘안토니아’는 그의 노력과 희생에 대해 풍부한 축복을 받았다. 약 20년이 지난 현재 그는 아직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으며, 이 자매의 부지런한 노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배웠다. 그와 성서 연구를 하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은 나중에 그의 ‘파이오니아’ 짝이 되었다.

모이는 일을 강화함

1961년 12월에 “연합된 숭배자들” 지역 대회가 열렸다. 지부 건물 반대편의 ‘레시노스’ 씨의 대지가 다시 한번 사용되었다. ‘스타고’ 형제가 행한 “열국이 하나님의 왕국 아래 하나가 될 때”란 강연을 듣기 위해 1,200명이 모였을 때 열정은 고조되었다.

그 다음 3월에 ‘노워’ 형제가 또 다시 방문하였다. 총 1,130명이 ‘산살바도르’ 국립 체육관에서 있은 그의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해 모였다. 이 체육관은 11,000명까지 앉을 수 있는 아름다운 현대식 체육관이다. 이 체육관은 지붕을 떠받치는 곧은 기둥들이 없이 주발 모양으로 지어져 있다. 이 체육관은 ‘엘살바도르’의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친숙하게 된 곳이다.

천국 전도 학교

그해 초인 1962년 2월 5일에 ‘엘살바도르’의 지부에서 제 1기 ‘천국 전도 학교’가 시작되었다. 회중의 감독자들, 순회 감독자들, 특별 ‘파이오니아’들 및 선교인들이 참석하여 가치있는 교훈을 받았다. 결국 선교인 모두가 그 교육을 받는 기회를 가졌다. ‘구아테말라’ 지부 감독자 ‘데이빗 히브쉬먼’이 와서 4개월 동안 처음 학급을 가르쳤다. ‘노워’ 형제가 3월에 방문을 했을 때 제 2기 과정이 막 시작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그를 만난 것은 가외의 예기치 않았던 멋진 경험이었다.

학교를 진행하기 위해 준비하는 일이 모두에게 생소한 것이었지만 각자는 열심히 하였고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학생들의 숙소를 정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였다. ‘산살바도르’의 회중들이 숙소를 제공함으로 호응하였고 몇몇 학생들은 왕국회관 윗층에서 잠을 잤다. 회관에서 잠을 잔 학생들은 시장을 보아 아침 식사 준비를 돕는 일에 임명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아침에 매우 일찍 일어나야 함을 의미하였으며,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당황하게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처음에 취사를 맡은 한 형제가 시장에서 일찍 돌아와보니 문이 안으로 잠겨 있었다. 그는 초인종을 눌러 ‘노워’ 형제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한 침실 창문을 두들기면서 ‘크리시 윌슨’을 불러 대문을 열어달라고 하였다. 그는 ‘크리시’가 자기방을 ‘노워’ 형제에게 주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창문 두들기는 소리에 잠을 깬 ‘노워’ 형제는 그 부르는 사람을 쫓아버리려고 그가 배운 ‘스페인’ 단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가시오”란 뜻인 줄 알고 “바모노스”(같이 갑시다) 하고 여러 번 외쳤다. 이 일로 인해 그날 아침 식탁에서 ‘노워’ 형제는 이 집안에서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고 간단히 말했다.

학생들을 위해 준비된 그 첫 음식은 그들 중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주 먹기가 곤란하였다. 그들은 ‘나이프’와 ‘포오크’를 사용하는 것보다 옥수수 빵을 집어먹는 데 익숙하였다. 그러나 곧 그들은 ‘나이프’와 ‘포오크’를 사용하는 데 익숙하게 되었다. 일부 다른 사람들은 선교인 자매들이 준비한 음식류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병에 걸리거나 굶어 죽지 않았으며 불평은 거의 없었다.

선교인 중 한 사람이 학생들에게 수도 관광 여행에 자기를 데리고 가 달라고 제안하였다. 이렇게 하여 소 도시에서 온 사람들은 흥미를 끄는 장소를 몇 군데 구경할 수 있었다. 한편 다른 선교인들은 두세명의 학생들의 도움으로 교대로 설겆이를 했다. 모두는 일하고 공부하는 데 바빴으며 모두 협력함으로 훌륭한 동료 정신이 세워졌다.

‘라울 모랄레스’에게는 ‘천국 전도 학교’를 기억할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아내 ‘안드레아’가 출산할 마지막 달에 그 과정이 시작되었고 그 학기가 끝나기 전에 딸 ‘도로테아’를 낳았다. 그래서 귀여운 ‘도로테아’는 신권적인 시작을 하였다. 그리하여 18년 이상이 지난 후에 그가 특별 ‘파이오니아’로 여호와를 충실히 섬기는 것을 보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새로운 순회의 종들

1962년에 이 나라는 다시 순회의 종들을 필요로 하였다. ‘포이 브렌’이 ‘소야팡고’ 회중의 한 젊은 자매 ‘마리나 비다우레’와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다른 순회구에서 1960년 8월이래 순회 감독자로 섬겨오던 ‘페드로 구에레로’의 식구가 너무 빨리 늘어나서 그의 아내 ‘아메리카’가 더 이상 특별 ‘파이오니아’를 하면서 자녀들을 돌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 때 천국 전도 학교 강사였던 ‘히브쉬먼’ 형제는 ‘구아테말라’ 출신의 두 젊은 형제를 추천하였다. 그들은 순회 경험은 없었지만 열성적인 데다 열심히 배웠으며 대단히 유능하였다.

그래서 1962년 5월 31일에 ‘마르코 롤란도 모랄레스’와 ‘후안 마자리에고스’가 ‘엘살바도르’에 와서 임시로 선교인집에서 살았다. 그들은 몇 주간의 순회 훈련을 받은 다음 순회 사업 길에 올랐다.

순회 대회를 준비함

1962년 여름에 ‘모랄레스’와 ‘마자리에고스’ 형제는 대회 준비를 시작하였다. 동부는 ‘산미구엘’에서 대회가 준비되었고, 서부는 ‘손소나테’에서 대회가 계획되었다. ‘후안 마자리에고스’는 ‘손소나테’에서 대회를 열 만한 적당한 장소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의 관심을 끈 유일한 장소는 한 학교였다. 그러나 ‘엘살바도르’에서는 학교가 순회 대회 장소로 사용된 적이 없었다. ‘후안’은 학교를 빌리는 일에 착수하여 그 학교 교장에게, 다음에 ‘손소나테’의 학교 대표자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는 ‘산살바도르’의 교사(校舍) 및 설비 관리과에 가서 허가를 받으라는 말을 들었다. 학교 사용에 대한 허가가 났다. 그래서 대회 ‘프로’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대회 직전에 ‘후안’이 확인하기 위해 학교에 갔을 때 교장이 허가가 취소되었기 때문에 ‘증인’들이 학교를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산살바도르’로 급히 가 보았지만 교직자들의 반대로 학교 건물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적당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후안’은 여호와께서 그를 도와주실 것을 믿고 그 학교 건물을 사용하기 위해 투쟁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문교부 장관을 방문하여 면담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장관이 너무 바빴기 때문에 거절당하였다. 하지만 ‘후안’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장관 앞으로 훌륭한 편지를 타자하고 여호와의 인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린 다음, 가장 깔끔한 옷을 입고 대회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인 토요일 아침에 장관의 자택으로 찾아갔다. 그 결과 다음 화요일에 면담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날 ‘후안’은 장관의 하급 관리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결정이 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후안’은 수요일 ‘손소나테’에서 대회 준비를 하였고 한 선교인 자매가 그 결정을 알아보기 위해 문교부에 갔다. ‘후안’이 “문교부가 학교 사용을 허락함”이란 전보를 받았을때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 학교장은 ‘후안’에게 학교 열쇠와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사용하도록 안내장을 주었다. 그날 일요일에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해 총 420명이 왔다. 대회가 끝난 후에 학교장은 학교가 아주 깨끗하게 사용된 것을 보고 경탄하였으며 ‘증인’들이 언제 다음 대회를 그곳에서 가질 것인지 물어보았다. 나중에 문교부는 이렇게 편지했다. “우리는 여러분의 질서와 깨끗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학교 시설 사용을 기꺼이 허락하는 바입니다.”

담대한 전도인들 지역 대회

이 대회가 끝난지 얼마 안되어 “담대한 전도인들” 지역 대회 준비가 시작되었다. 이 대회는 1962년 8월 31일-9월 2일에 개최될 예정이었다. ‘산살바도르’의 국립극장을 사용할 계약이 체결되었고 ‘라디오’와 신문을 통해 대중에게 참석하라는 격려를 하였다. 그런데 대회가 열리기 얼마전에 갑자기 계약이 취소되었다. 다행히 다시 국립 체육관을 사용하도록 주선이 되었다. 그곳은 간이 식당, 다과부 및 화장실 등이 충분히 있어 대회장으로 이상적이었다. 공개 강연에 총 1,545명이 참석하였다.

이 때부터 지역 대회가 보다 잘 조직되게 되었다. ‘발타사르 페를라’가 대회 감독자였고, 다른 ‘엘살바도르’ 형제들도 함께 여러 가저 책임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선교인들이 더 이상 이러한 큰 대회를 여는 데 관련된 모든 일을 처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체육관을 깨끗하게 잘 사용하였기 때문에 ‘증인’들은 그 이후 여러 해 동안 그 체육관 시설을 사용하도록 환영받았다.

지부 운영의 조정

‘사무엘 스타고’와 ‘마르코 롤란도 모랄레스’가 1963년에 ‘길르앗’ 10개월 과정에 참석하도록 초대되었다. 그들은 1월에 ‘뉴우요오크’로 떠났다. 그리고 ‘레오나르드 쉼쿠스’가, 지부의 종의 직책을 인계받았다. 이것은 그해 나중에 발전된 상황 때문에 고정된 임명이 되었다. 그 때에 ‘스타고’ 형제가 몇년 전에 부도덕한 행실에 관련되었었다는 사실이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지부의 종에서 해임되었고 제명되었다.

‘사무엘’의 아내 ‘텔로레스’는 ‘산살바도르’에서 계속 특별 ‘파이오니아’를 하였고, ‘사무엘’은 그와 함께 거기서 충실하게 모든 집회에 참석하였다. 일년 후에 그는 복귀되어 모든 형제들에게 기쁨이 되었다. 그와 ‘텔로레스’는 그 이래 참으로 ‘엘살바도르’의 그리스도인 조직에 고무적인 도움이 되어왔으며 ‘사무엘’은 현재 지부 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섬기고 있다.

1963년이 끝나 갈 때 형제들의 정신은 또 다시 대회 준비에 쏠렸다.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가 12월 26-29일에 국립 체육관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총 25명이 거기서 침례를 받았으며 ‘발타사르 페를라’가 행한 공개 강연에 1,340명이 참석하였다.

협회의 새로운 영화

1964년중에 “‘영원한 기쁜 소식’을 전세계에 선포함”이란 협회의 새로운 영화가 ‘엘살바도르’에서 상영되었다. 그 영화는 모든 거짓 종교의 공통 유산을 보여주었다. ‘엘살바도르’에는 거짓 숭배가 만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영화의 상영은 대단히 적절하였다. 관객들은 구경할 때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이 행해온 숭배와 고대 ‘바벨론’ 종교 사이에 관련이 있음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엘살바도르’에는 동정녀, ‘트란시토’, ‘칸데라리아’, ‘구아다루페’ 등 적어도 14개의 다른 동정녀들을 숭배하는 사원들과 교회들이 세워져 있다. 물론 단지 성모 ‘마리아’에게만 바쳐진 사원과 제단도 많이 있다.

광고를 도운 한 사람

대회 마련을 광고하기 위해 ‘라디오’ 방송국들을 방문하던 중 ‘줄리아 클로그스톤’은 YSU ‘라디오’ 방송국의 관리인 ‘라파엘 카스텔라노스’를 만났다. 그 결과 성서 연구가 마련되었다. 첫 연구에서 ‘라파엘’은 ‘줄리아’에게 ‘테콤테 두 노위’ 저 「인간의 운명」이란 책을 한 권 건네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처해 있는 입장이 이와 같습니다. 나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한번 보십시오.”

그 때가 1964년 3월이었다. 그달 하순에 ‘라파엘’과 그의 아내는 ‘기념식’ 축하에 참석한 2,853명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5월에 그는 YSU 방송에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점들”이란 ‘프로’의 협회 시간을 마련하자고 제의하였다. 또한 그 방송국은 알려야 할 대회나 특별 모임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삽입 광고 방송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부부와 두 아들 ‘로베르토’와 ‘리카르도’는 얼마 안가서 침례를 받았다.

‘밀튼 헨첼’이 대회 손님이 되다

“성령의 열매” 지역 대회가 1965년 2월에 국립 체육관에서 열렸다. 그 무렵 형제들은 이 곳을 “일년에 한번 모이는 우리의 왕국회관”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었다. 그 때 지구 감독자로 ‘브루클린’ 본부에서 ‘밀튼 헨첼’이 ‘엘살바도르’를 방문하고 있었다. 그는 “선의자들 가운데 평화 아니면 ‘아마겟돈’—어느쪽인가?”란 공개 강연을 하였다. 총 2,416명이 이 강연을 경청했으며, 이 수는 1963년 12월에 열린 이전의 지역 대회 최고 참석자 수보다 1,000명 이상이 증가한 수였다.

확대된 봉사의 특권들

순회 감독자 ‘후안 마자리에고스’가 ‘길르앗’ 40기에 초대되었고 ‘후안 데 디오스 페나’가 그의 순회구를 인계받았다. 또한 1965년에 ‘발타사르 페를라’ 2세가 확대된 신권 봉사의 특권들을 즐기게 되었다. 이 때는 그의 어머니 ‘파우리나’가 처음 진리를 배운지 여러 해가 지난 후였다. 7월에 젊은 ‘발타사르’는 ‘브루클린 벧엘’에 받아들여졌고 거기서 그는 아직도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다. 1978년 12월 이래 ‘산티아고 텍사쿠안고스’의 ‘페나’ 가족의 한 성원인 ‘헤르난 페나’도 ‘브루클린 벧엘’에서 봉사해 오고 있다.

1965년에 신기록으로 2,914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고 왕국 전도인 수는 961명으로 늘어났다.

“십자가의 날” 지진

매년 5월초가 되면 ‘엘살바도르’의 시장들에서는 ‘산살바도르’와 그 근교의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5월 3일을 축하하는 십자가의 날을 위해 그들의 나무 십자가를 장식할 수 있도록 특별히 다양한 과일들을 진열한다. 그런데 1965년 5월 3일 오전 4시에 그들의 모든 계획을 바꾸어 놓은 일이 발생하였다. ‘라프렌사 그라피카’가 발행한 「리브로 데오로」(황금의 책)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늘 오전 4시에 46년이래 최고의 강진이 수도와 ‘일로팡고’, ‘소야팡고’ ‘메지카노스’, ‘빌라델가도’, ‘산토토마스’, ‘산마르코스’ 시들과 기타 인근 지역들을 강타하였다. 지진의 강도는 7.5도였다. 국립 비상 대책 위원회가 전면 활동에 들어갔다.”

수백채의 ‘어도우비’집들이 흙더미가 되었다. 그 지진으로 마치 화물 열차가 집을 뚫고 지나간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집이 무너지지 않은 경우에도 병, 장식품들, 도자기, 그림 및 판유리 창문들이 산산조각이 났다. 백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었고 수백명이 중상을 입었다. 다행히 ‘증인’ 가운데 심하게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부 건물도 석고 벽에 금이 약간 간 것을 제외하고는 손상을 입은 데가 없었다.

한 선교인 부부는 지진이 일어나면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고 했을 때 그들은 마치 한쌍의 타조같이 보였다. 그들의 머리만 밑에 꼭 낀 것이다. 첫 진동이 있은 후에 다른 한 선교인은 식당으로 달려가서 찬장에 있는 접시들을 꺼내어 깨지지 않도록 모두 바닥에 가지런히 내려 놓았다. 그 다음에 식당에 달려간 선교인은 지진이 접시들을 하나도 깨지 않고 바닥에 잘 쌓아 놓았다고 생각하였다.

1966년 국제 대회

13개국에서 300명 이상의 외국인들이 12월 10-14일에 열린 “해방의 아들들” 국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엘살바도르’를 방문했다. 다시 국립 체육관이 대회장이 됐다. ‘라디오’, TV 및 신문들이 종전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광고를 하는 데 협조해주었다.

‘프레드 프랜즈’가 대회 첫날 1,640명의 청중에게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라”란 연설을 하였다. 이 나라에 ‘증인’이 995명 밖에 없었으므로 많은 대중이 그 대회를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프랜즈’ 형제가 참석한 4,780명에게 “하나님의 왕국하에 있을 인류의 천년기”란 공개 강연을 했을 때 형제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넘쳤다. 일요일 저녁에 더 많은 군중—4,989명—이 ‘예레미야’의 인내에 대한 감동적인 ‘드라마’를 보러 다시 왔다.

‘프랜즈’ 형제는 그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관람석에 앉아 있었다. 한 방문객은 자기가 말을 걸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그에게 그렇게 널리 알려진 ‘F. W. 프랜즈’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그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들과 좀 다른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래서 ‘프랜즈’ 형제는 그에게 우리의 믿음에 대한 성서적인 이유들을 말해 주었다. 그런데 회기가 끝나기 바로 전에 ‘프랜즈’ 형제가 마지막 노래와 기도를 인도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그 사람은 관중들 가운데 자기 옆에 앉아있던 사람이 바로 ‘프랜즈’ 형제였다는 것을 알고서 대단히 놀랐다. 그는 후에 여러 사람들에게 그러한 책임있는 직책에 있으면서 그렇게 겸허한 사람을 ‘여호와의 증인’들 가운데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여러 대회에 항상 많은 대중이 참석했었다. 때때로 참석자 수는 ‘증인’수의 두배 내지 세배가 되곤 하였는데, 이번 대회에서는 대중의 수가 4대 1의 비율로 ‘증인’을 훨씬 능가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온 많은 방문객들이 현대식 국제 ‘호텔’에 투숙하였기 때문에 침례를 받기 위해 ‘호텔’의 아름다운 수영장을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방문중인 대회 대표자들이 ‘엘살바도르’의 일부 호수와 화산을 구경하도록 관광 여행이 마련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몇 시간의 휴식을 하며 아름다운 화산 호수 ‘코아테페쿠에’에서 수영을 해보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잔잔한 수면 위로 솟아나와 조그만 섬들을 형성하고 있는 용암 퇴적물에 박혀있는 청옥의 사진을 찍는 것을 즐겼다. 또한 이 나라의 양치류와 열대식물들이 여행자들의 흥미를 끌었다.

세번째 순회구가 형성되다

‘엘살바도르’에는 이제 20개의 회중과 상당히 많은 수의 격리된 집단이 있었기 때문에 대회 중에 세번째 순회구를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다. 그래서 1967년 1월에 선교인 중의 한 사람인 ‘마아빈 로드’가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다른 두 순회구를 돌보고 있던 ‘모랄레스’와 ‘마자리에고스’ 형제에 가담하였다. 1967년 ‘기념식’에 참석한 3,363명이란 수는 놀라운 증가의 전망을 보여주었다.

예수의 출생 시기

대회가 끝나고 얼마 후에 YSEB ‘라디오’ 방송국은 예수의 출생 시기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였다. 여러 가지 의견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그 방송국은 여러 가지로 의견이 분분한 것을 보고 놀랬다. 그들이 간단한 대답이 나올 간단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대단히 복잡한 상황으로 변해 버렸다.

어느날 그 ‘라디오’ 방송국의 대표자 한 사람이 협회의 지부를 방문하여 누군가가 와서 방송에서 그 제목에 대해 간단한 연설을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임명이 젊은 순회 감독자 ‘후안 마자리에고스’에게 주어졌다. ‘가톨릭’ 대주교도 사제와 ‘프로테스탄트’ 목사를 한명씩 데리고 초대되었다. 각 교직자가 몇 분간씩 연설했는데 심지어 대주교와 사제도 예수의 출생 시기에 대하여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들 중에서 아무도 답변에 성서를 인용하지 않았다.

‘마이크’가 ‘마자리에고스’ 형제에게 주어졌을 때 그는 예수께서 기원전 2년 10월 1일 경에 출생해야 하는 이유를 성서로부터 보여 주면서 30분간 연설하였다. 더 많은 지식을 요구하는 많은 편지들이 방송국으로 날아왔으며 이들 중 얼마는 성서 연구를 하게 되었다. 한 편지는 한 사제에게서 온 것인데 ‘마자리에고스’ 형제가 위치를 알아내어 방문할 수 있었다.

더욱 고맙게 여긴 도움

「깨어라!」 1967년 5월 22일호에는 1966년 12월에 있은 국제 대회에 대해 보고하는 가운데 “‘엘살바도르’—열대 지방의 보석”이란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많은 ‘증인’들에게 왕국 선포자들을 더 크게 필요로 하는 이곳에서 봉사하도록 이사하는 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죤 트레이어’와 그의 아내가 ‘길르앗’ 제 44기를 졸업한 5명의 새로운 선교인들—‘콘차 도란테스’ ‘후아니타 알라르콘’, ‘엘리자벳 나비스키’ 및 ‘리처어드’와 ‘산드라 브라이언’과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1968년 10월에 ‘죤 트레이어’는 아내 ‘베티’와 함께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69년 4월에 그는 ‘산살바도르’의 어느 회중의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죤’은 그가 겪어야 했던 변화에 대해 몇해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에게 가장 큰 난관은 언어였고. ‘베티’에게는 다 자라긴 했지만 자녀들과 헤어지는 것이었읍니다. 다른 생활 환경으로 옮기는 일은 또한 약간의 문제들이 생기게 하였으며 더위가 우리를 괴롭혔읍니다. 새로운 회중을 하나 조직하는 일을 돕고 대회 일을 도우며 왕국회관들을 짓고 관리하는 유익 등이 있었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온 것을 참으로 기뻐합니다!”

1968년 1월에 ‘차알즈’와 ‘엘리노어 테일러’가 그들의 자녀 ‘배리’와 ‘모니카’를 데리고 도착하였다. 그 가족은 곧 수도 북쪽의 한 마을 ‘아포파’로 파견되었다. 그곳의 15명의 전도인 집단은 ‘테일러’의 가족을 맞이하게 되어 대단히 기뻤다. 얼마 후에 회중이 하나 세워졌고 ‘차알즈’는 회중의 감독자가 되었다. 1971년 4월에 그는 ‘아포파’에서 열릴 순회 대회를 위한 준비를 바쁘게 하고 있었다. ‘차알즈’는 그들의 봉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와 같은 가족은 종종 협회의 선교인들이 할 수 없는 면으로 봉사할 수 있읍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선교인들은 장성한 형제들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집단을 도와줄 자동차가 없읍니다. 그러므로 한 가족으로서 우리는 경험을 통해 도움을 더 크게 필요로 하는 외국 바다에 그물을 던지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특별한 축복이 예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1968년에 ‘엘살바도르’에 온지 얼마 안되어 ‘테일러’ 부부는 세번째 아기를 출산하였는데 그 아기는 현재 육적으로 영적으로 장성을 향해 잘 발전하고 있다. ‘모니카’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으며 미국에서 살고 있다. 나머지 가족은 경제적인 이유로 그들 역시 미국으로 되돌아간 지지난 해까지 ‘아포파’에서 그들의 형제들을 섬겼다. ‘아포파’에는 현재 두개의 회중이 있으며 각각 자체의 왕국회관을 가지고 있다.

1967년 지역 대회

12월에 국립 체육관에서 열린 “제자를 삼는” 지역 대회에서 ‘발타사르 페를라’가 행한 공개 강연에 3,005명이 참석하였다. 신문과 ‘텔레비젼’에 기사와 사진으로 성서 ‘드라마’들이 대회가 있기 여러 주 전에 광고되었다. ‘엘살바도르’ 형제들은 그 ‘드라마’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며 역을 맡게된 특권에 대해 깊이 감사함을 나타냈다. 대회가 있기 전 수주 동안 그들은 함께 충실히 연습하였다. 그리고 성서 시대에 참으로 맞는 의상을 갖추기 위해 진정한 노력을 기울였다. 의심할 바 없이 그러한 온갖 노력은 많은 사람들이 지역 대회들에 참석하게 된 이유의 일부였다.

새로운 지부의 종

1968년에 이민 당국이 선교인들에게 새로운 법에 대해 통지하였다. 만약 선교인들이 5년 후에 이 나라에 계속 체류하기를 원한다면 영주인이 되기 위한 허락을 받기 위해 800‘달러’를 지불해야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이 나라를 떠나야 하였다. 지부 감독자 ‘레오나르드 쉼쿠스’와 그의 아내는 이미 ‘엘살바도르’에 5년 이상 체류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떠나야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레오나르드’는 그들의 체재 기간을 1년 더 연장할 수 있었다. 그 후에 협회는 그들에게 그곳을 떠나 ‘구아테말라’로 가서 선교 사업을 계속하라고 권하였다.

그리하여, 1968년 봄에 ‘마르코 롤란도 모랄레스’는 1968년 6월 1일자로 지부 감독자로 ‘쉼쿠스’ 형제와 교체하게 될 것이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래서 ‘후안 데 디오스 페나’가 ‘모랄레스’ 형제를 대신하여 순회사업을 하도록 임명되었다.

계속된 확장

1968년의 ‘기념식’ 참석자 수는 4,027명으로 껑충 뛰었다. 이것은 지난해보다 664명이 증가한 수였다. 또한 1968년 4월에 ‘산살바도르’에 일곱번째 회중이 생겼다. 이 회중은 현재 ‘시우다드 델가도’라고 불리우는 ‘빌라델가도’ 지역에 있었다. 그 회중은 ‘호세몬토야’의 집에 모이던 29명의 전도인으로 구성되었다. 새로운 지부 감독자 ‘모랄레스’ 형제가 회중의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이곳의 형제들 대부분이 새로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모랄레스’ 형제가 서적, 잡지, 구역을 돌보는 일뿐 아니라 집회의 대부분을 사회하였다. 그러나 점차 다른 형제들이 그 회중에서 더 많은 책임을 맡기 시작하였다.

1968년 중에 다른 여러 지역에서 전파 사업이 개시되기 시작하였다. ‘스타고’ 형제와 자매는 ‘산살바도르’ 화산의 언덕바지에 위치한 ‘산 라몬’이란 조그만 지역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때 그곳에는 왕국 전도인이 전혀 없었다.

‘스타고’ 형제는 ‘산 라몬’의 제일 큰 상점 주인을 재방문했는데, 그의 아내가 약간의 서적을 받은 적이 있었다. ‘호세 차베즈’란 이 사람은 성질이 극히 난폭하였고 나쁜 습관이 많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경심이 조금 있었다. 그래서 연구가 마련되었다. 얼마 안가서 ‘호세’의 나쁜 습관들은 좋은 습관들로 대치되었고 그는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현재 그 가족 중 여섯명이 침례를 받았다. 그리고 ‘호세’는 ‘산 라몬’의 회중의 장로이다.

‘스타고’ 자매는 ‘도미틸라 파즈’, 그의 동생 ‘아나파즈’ 그리고 ‘도미틸라’의 내연의 남편 ‘이사벨 에스코바르’와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이 여자들이 과거 1960년에 수혈을 거부한 후 사망했던 ‘마르틴 파즈’의 딸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이 여자들은 진리 안에서 빨리 발전하였다. 얼마 안가서 ‘아나’는 ‘파이오니아’가 되었으며 나중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다. ‘도미틸라’와 ‘이사벨’은 합법적으로 결혼을 하였고 현재 ‘산 라몬’ 회중과 연합하고 있다. 그 가족의 다른 식구들도 곧 진리를 배웠다. ‘마르틴 파즈’가 무덤 속 휴식의 잠에서 깨어 그의 가족 성원 모두가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1968년 12월에 “만국을 위한 기쁜 소식” 지역 대회가 다시 국립 체육관에서 열려 공개 강연에 4,500명이 참석하였고 109명이 침례를 받았다. 11월에 이 나라에 도착한 6명의 새로운 선교인들에게 이것은 감동적인 일이었다.

갑자기 닥친 비극

「파수대」(영문) 1968년 2월 15일호에 “만국을 위한 기쁜 소식” 지역 대회를 광고하는 가운데 “앞으로 여러 해 동안 우리가 하는 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어떤 계획이 세워졌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 계획이 무엇인지에 대해 대단히 알고 싶어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은 ‘차알즈 비이들’이었다. 여러 해 동안 지부의 종으로 섬긴 후에 그는 ‘엘살바도르’에서 일자리를 구했었고 이제 ‘제인’과 그에게는 세 자녀 ‘산드라’와 ‘차알즈’ 2세 그리고 ‘수지’가 있었다.

최초의 선교인[‘차알즈’의 아내]이 ‘캘리포니아’에서 열리는 지역 대회로 떠날 때 ‘차알즈’는 아내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즉시 그 소식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아내는 그렇게 하였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과 6개월간의 연구 마련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차알즈’는 ‘산살바도르’의 공동 묘지에 묻혔다. 1968년 7월 7일에 있었던 그의 죽음은 갑작스런 것이었으며 모든 형제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손에 찔린 어떤 물고기 뼈에서 감염되어 파상풍 주사를 맞은 후에 사망하였다. 일부 사람들이 “우리는 우리의 ‘타타’[아빠]를 잃었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장례식은 지부 왕국회관에서 거행되었는데 그 건물은 ‘차알즈’ 자신이 바로 13년 전에 도움을 베풀어 지은 것이다. ‘페를라’ 형제가 장례식 연설을 하였다. ‘차알즈’가 사망한지 12시간도 채 안되었지만 500명 이상이 참석하였다.

‘엘살바도르’의 여러 공동묘지에는 ‘아마겟돈’ 후에 부활될 것을 기다리고 있는 훌륭한 형제 자매들의 기억 무덤이 많이 있다. 그 때 생존자들은 여호와의 교육 사업을 수행하며 다시 한번 그들과의 교제를 즐길 웅대한 특권이 있을 것이다.

많은 형제들이 섬기러 오다

1968년 지역 대회에서 왕국 전도인들에게 더 크게 필요로하는 곳에서의 봉사를 강조한지 얼마 안되어 ‘엘살바도르’는 그 문제에 관한 거의 400통의 편지를 받았다. ‘유럽’, 북‘아메리카’ 및 여러 바다의 섬들에서 형제들이 편지를 하였다. 그러나 ‘엘살바도르’는 오직 기술이 뛰어난 기술자들만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오려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 나라 밖에서의 수입을 필요로 하였다. 그래서 1969년에 ‘엘살바도르’에서 가정을 가진 사람들은 얼마 전에 이곳에 왔던 ‘트레이어’ 부부와 ‘테일어’ 부부를 포함하여 8가족이 있었다. 그들 형제들과 그들의 가족은 회중들을 강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그들이 와 있는 것은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그 이후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맹인도 볼 있다

「진리」 책을 가지게 되자 사업은 더욱 급속도로 진전되기 시작하였다. 관심자들은 보다 빨리 결정을 내리도록 도움을 받고 있었다. 한 관심자는 ‘필라델포 알바라도’란 맹인이었는데, ‘샘스타고’가 그와 연구를 하였다. 그는 얼마 안가서 야외 봉사에 참여하였고, 침례를 받았으며 자기와 집회 참석을 시작한 손자녀들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곧 ‘필라델포’는 신권 학교와 봉사회에서 ‘프로’들을 다루었다.

이 무렵 ‘델로레스 스타고’가 한 부인에게 「진리」 책을 제공했는데, 그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책을 원하지만 나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을거예요. 나는 맹인이니까요.” ‘델로레스’는 그 책을 그에게 읽어 주겠다고 제의했으며 ‘빅토리아 카리아스’란 이 부인은 그 말을 듣고 기뻐했다. 성서 연구가 발전하자 ‘빅토리아’는 이렇게 말하였다. “전에 나는 항상 울며 슬퍼했지요. 하지만 이제 나는 여호와 덕택에 참된 희망을 가지게 되었읍니다.”

그도 역시 맹인 ‘필라델포’와 함께 ‘자카밀’ 회중과 연합하기 시작하였다. 곧 이들은 둘 다 행복한 왕국 전도인이 되어 야외 봉사에 참여하고 집회에서 형제들과 즐거운 대화도 나누고 그리스도인 활동에서 서로 격려하였다.

100시간 전쟁

1969년 7월에 ‘엘살바도르’는 표면상 한 축구 경기를 둘러싸고 이웃 나라 ‘온두라스’와 분쟁이 벌어졌다. 거의 같은 시기에 많은 형제들이 미국에서 열린 “지상의 평화”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떠나고 있었다. 한 큰 대표단이 ‘뉴우요오크’에서 열리는 대회로 갔다. 그런데 ‘온두라스’와의 분쟁이 전쟁으로 변하였다. 7월 14일 ‘엘살바도르’가 ‘온두라스’에 폭격을 가하였고 그날 밤에 ‘온두라스’의 비행기들이 ‘엘살바도르’를 폭격하기 위해서 왔다. 그리하여 모든 전력이 단절되었다. 한 선교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공항 폭격이 있은 후에 아무런 비행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우편물도 배달되지 않았읍니다. 형제들은 계속 집회에 대해 전화로 문의해 왔으며 ‘후안 데디오스페나’는 오후에 집회를 갖도록 마련하였읍니다. ·⁠·⁠· 우리는 아주 무거운 서류 ‘캐비넷’을 바깥쪽 사무실 문에 기대어 놓았읍니다. 그리고 ‘온두라스’ 비행기에서 낙하산 병들이 투하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지부의 돈을 감추었읍니다.”

소문이 여러 가지였기 때문에 어느 것을 믿어야 할지 아무도 몰랐다. 미주 기구(OSA)가 ‘엘살바도르’의 ‘코피’를 ‘보이콧’하겠다고 위협하자 나흘만에 싸움은 끝이 났다. 수천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또한 양측에서 잔악한 행위를 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돌았다.

‘온두라스’에 살고 있던 일부 ‘엘살바도르’ 형제들을 포함하여 수천명의 피난민이 ‘온두라스’에서 ‘엘살바도르’로 돌아왔다. 그들 대부분은 물질적인 것들을 잃어버렸다.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는 ‘길르앗’을 졸업한 후 ‘온두라스’에서 순회 사업을 하고 있던 ‘마리오 플로레스’도 끼어 있었다.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그는 ‘길르앗’에서 만났던 한 자매와 결혼을 하였고 그들은 ‘엘살바도르’에서 순회 사업에 들어갔다.

그 전쟁은 참으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대회에서 형제들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뒤에 남아있던 형제들은 긴장을 풀고 형제들이 가지고 온 모든 좋은 소식에 주의를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지부의 변화

지부의 종 ‘롤란도 모랄레스’가 결혼을 하여 1969년에 ‘도미니크 피콘’ 형제로 교체되었다. ‘도미니크’와 그의 아내 ‘엘사’는 ‘길르앗’ 23기를 졸업한 후 ‘모로코’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도미니크’는 1969년 5월에 추방되기 전에 그곳에서 지부의 종이었다. ‘뉴우요오크’ 대회에서 ‘모로코’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엘살바도르’로 재임명되어 1969년 10월 31일에 도착하였다.

‘피콘’ 형제는 이전에 ‘엘살바도르’ 지부에서 봉사한 경험이 있던 최초의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봉사했었기 때문에 언어와 풍습에 이미 익숙해 있었다. 그의 첫 번째 염려 중 하나는 1970년 1월에 열릴 “지상의 평화” 지역 대회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그 대회는 다시 국립 체육관에서 열렸고 “다가오는 천년 평화”란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해 3,850명이 참석하였다.

바로 몇 주일 전인 1969년 12월 16일에 지부 건물 증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15년 전 그것을 건축할 때 ‘노워’ 형제는 왕국 전도인이 늘어나서 그 건물을 증축할 필요가 있게 되기를 기대했었다. 마침내 그 때가 왔다.

이층에 방 세개를 새로 추가하였고 아래층은 완전히 새로 ‘페인트’칠을 하였다. 또한 건물 북쪽의 가로와 세로가 11x27‘미터’ 되는 땅을 마침내 구입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지부 대지를 모퉁이까지 확장하는 일을 가능케 해 주었다.

1970년의 다른 대회들

1970년 10월과 11월에 25개 회중으로 구성된 세개의 순회구가 ‘손소나테’, ‘산미구엘’, ‘소야팡고’에서 각각 대회를 가졌다. 총 참석자수는 2,909명이었다. ‘라울 모랄레스’가 이들 대회의 지역 감독자로 봉사하였고 ‘마리오 플로레스’, ‘후안 마자리에고스’ 및 ‘후안 데디오스페나’가 순회 감독자였다. 총 83명이 침례를 받았다. 이들 대회 중 하나에 참석한 한 방문객은 그때 한 ‘증인’과 성서를 연구하고 있던 ‘엘살바도르’ 주재 장개석의 대사였다.

12월에 국립 체육관에서 8번째 지역 대회가 열렸다. 그 달에 야외 봉사에 참여한 전도인은 1,785명이었다. 하지만 그 대회에 “온전케 매는 띠인 사랑”이란 ‘드라마’를 보러 참석한 사람들의 수는 5,322명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엘살바도르’ 형제들이 여태껏 대회에서 즐긴 최다 참석자 수였다. 그리고 ‘피콘’ 형제가 행한 “인류를 구원함—왕국의 방법으로”란 공개 강연에 4,072명이 참석하였다. ‘엘살바도르’에서 봉사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 온 많은 형제들은 모두가 보다 편안하게 대회를 자유로이 즐기도록 뒤에서 도왔다.

놀라운 성장

1971년에 회중과 격리된 집단 수가 증가하여 네번째 순회구를 추가할 필요가 있었다. 그 해 중 매달 평균 전도인 수는 1,949명이었고, 이것은 지난해보다 400명이 늘어난 수였다. 이것은 ‘엘살바도르’ 전도인의 거의 절반이 단지 995명이었던 1966년 이후—지난 5년내에 ‘증인’이 되었음을 의미한 것이다.

1971년 4월 9일에 ‘기념식’을 축하한 사람은 7,924명이었다. 이것은 이 나라의 34개 회중에 각각 평균 230명 이상이 모였음을 의미했다. 이들 중에 단지 2명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땅을 다스리는 데 참여할 천적 희망을 가졌음을 나타내는 표상물을 취했다.

새로운 회중들이 형성되다

전도인 수의 증가로 새로운 회중들을 형성할 필요가 있게 됐고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왔던 형제들이 그 일에 두드러지게 참여하고 있었다. ‘찰추아파’에 회중이 하나 형성되었다. ‘차알즈 테일러’가 그 새로운 ‘아포파’ 회중의 감독자로 임명되었고 ‘볼리비아’에서 한때 선교인으로 봉사했던 ‘조셉 백로우페’가 ‘산살바도르’에 형성된 새로운 회중의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또한 ‘뉴우요오크’에서 해충 구제업을 그만두고 자기 아내 ‘에델’과 함께 ‘엘살바도르’에 왔던 ‘로버어트 윌프’가 수도의 한 회중의 부회중의 종으로 임명되었다. 1971년 3월에 늘어나고 있던 ‘산타아나’ 회중이 분회되었다. ‘후아유아’ 집단이 충분히 커져 회중이 되었고 ‘산미구엘’ 부근의 ‘엘플라타나르’에 또 하나의 회중이 형성되었다.

또한 격리된 전도인 집단들에게 주의가 기울여졌다. ‘죤 트레이어’는 1971년에 ‘산살바도르’ 동쪽에 있는 한 도시 ‘코후테페쿠에’의 집단을 돕기 위해 수도를 떠났다. ‘산세바스찬’과 ‘일로바스코’에 있는 전도인들에게도 주의가 기울여졌다. 그 결과 거기에 회중들이 설립되었다. 이제 그러한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자주 ‘여호와의 증인’의 방문을 받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봉사하기 위해 이곳에 온 형제들은 ‘엘살바도르’ 형제들의 사랑과 존경을 크게 받고 있다. 그들은 야외 봉사에 시간과 능력 및 열정적인 활동을 바침으로 여러가지 필요를 충족해 왔다.

대통령의 딸이 진리를 배우다

1967년 3월에 ‘피델산체스 헤르만데스’가 ‘엘살바도르’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그의 십대 딸 ‘마리나’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일의 경우에 대한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저는 거짓 종교에 접해있는 비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랐어요.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교회와의 이전의 개인적인 경험때문에 ‘가톨릭’ 교회와 아무런 관련을 맺고 있지 않았지요.”

“13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대통령에 취임하셨어요. 그리고 저는 주교와 추기경 같은 가장 탁월한 교직자들이 저의 가족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자 얼마나 애를 썼는가를 기억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영적으로 도움이 되었을까요? 글쎄요, 저의 어머니는 공적인 국사와 관계가 있을 때만 교회 행사에 참석하겠다고 매우 솔직하게 말씀하셨어요. 교직자들은 우리를 영적으로 돕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그들은 정치적인 유세가 있을 때나 국가적인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만 나타났지요.

“저는 아무도 믿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어요. 어느날밤 대통령인 저의 아버지를 전복시키려는 기도가 있었을 때 그러한 불신할 만한 이유가 있음이 저에게 입증되었죠. 총격이 시작되었을 때 아버지와 함께 집에 있었던 식구는 저뿐이었어요. 총탄에 거의 맞을 뻔 했을 때 저는 참으로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였어요. 저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지요. 그리고 내가 이 일에서 살아남는다면 하나님을 찾을 것이며 그분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겠다고 굳게 약속했지요.”

‘마리나’는 교직자들이 정치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목격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인도를 구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정부와 반란군들 사이에 중재자가 되었다. 이것이 그를 크게 실망시켰다. 그는 어디에서 도움을 구할 있었는가? 그는 여러 ‘프로테스탄트’ 종파들과 일부 ‘유대’인들과 잠시 연합해 보았지만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나서 ‘마리나’와 그의 약혼자는 ‘여호와의 증인’과의 연구를 받아들였다. 현재 행복하게 결혼한 그리스도인 부부인 이들은 그들의 영적 형제 자매들과 함께 진실한 신뢰의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여호와의 백성들 가운데 속하게 된 것을 깊이 감사하고 있다.

좋은 인식을 나타낸 한 가족

1971년에 ‘조셉’과 ‘낸시 트렘블레이’가 그들의 두 자녀 ‘제니퍼’와 ‘토니’를 데리고 ‘엘살바도르’에서 봉사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왔다. ‘조셉’은 진리를 배우기 전에 ‘뉴우요오크’에서 무용 강사로 일하다가 ‘여호와의 증인’인 자기 가족을 만나러 ‘캘리포니아’로 갔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다른 ‘증인’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의 가족이 ‘여호와의 증인’의 가르침에 일치한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조사해 보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발견한 것은 “인생의 목적”이었다.

진리가 ‘조셉’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그래서 그는 ‘뉴우요오크’에 있는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일자리를 사임하였다. 그는 과거에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데 바쳤던 모든 정력과 생각 및 시간을 이제 영적인 것들에 바쳤다. 그와 그의 아내는 영적으로 계속 바쁘게 일할 수 있는 길을 찾아서 자신들을 세상의 영으로부터 보호하기로 결심하였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엘살바도르’에 오게 된 경위였다.

‘조셉’은 한때 특별 ‘파이오니아’에게 지급되는 수당에 대해 질문한 일을 잘 기억하고 있다. 그 액수가 얼마라는 말을 듣고 그는 “뭐라구요, 그건 내가 ‘칵테일’에 넣는 ‘올리브’값도 안되잖아요” 하고 대꾸하였다. 그는 자기가 ‘칵테일’과 ‘올리브’를 먹을 수 있는 날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거의 깨닫지 못하였다.

왕국회관들을 건축하고 대회의 책임들을 돌보면서 9년간의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난 지금 ‘조셉’의 열심과 열정은 감소되지 않았다. 현재 임명지인 ‘메타판’에서 그는 최근에 새로운 왕국회관을 하나 짓는 일을 도왔다.

‘여호와의 증인’ 협회

1945년에 시작할 때부터 ‘여호와의 증인’의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활동은 법적인 인가 없이 수행되어왔다. 그러나 이제 1972년에 ‘엘살바도르’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협회”가 형성되었다. 법적인 기관으로 그것은 이 나라 사람들이 여호와를 알고 참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돕는 목적을 수행하는 일을 돕는다.

협회 명의로 ‘증인’들은 대회 회관과 선교인집뿐 아니라 왕국회관을 지을 부동산을 매입할 수 있게 되었다. 수년간에 걸쳐 이 나라에서는 ‘산마코스’에 있는 것을 포함하여 여러 개의 훌륭한 왕국회관이 지어졌다. 그 회관을 짓기 위해 거의 수직인 절벽의 땅을 폭파하여 바위를 떼어내었고 이러한 바위와 철 보강재로 벽돌을 건축하였다. 현재 대회 회관과 ‘산타아나’와 ‘산미구엘’에 있는 선교인집 외에도 협회 명의로 된 왕국회관이 42개 있다.

‘산미구엘’에 선교인집과 왕국회관을 겸한 새로운 건물을 하나 지어야 한다는 생각을 형제들의 마음에 심어 준 사람은 1972년 5월 5일에 도착한 5명의 새로운 선교인 중 한 사람인 ‘아레잔드로 라카요’였다. 1974년 8월 무렵 왕국회관이 붙어있는 그 새로운 집이 사용될 준비가 되었다. 그것은 부엌, 거실, 안뜰 및 넓은 입구가 딸린 안락한 침실이 세개 있는 건물이었다. 사업의 진전이 느렸던 ‘산마구엘’에 이제 네개의 회중이 있다.

성장의 속도가 빨라지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엘살바도르’에서 어떻게 잘 알려지게 되었는지 여러 차례 살펴보았다. 그 결과 집회와 대회 참석자 수는 종종 실제 ‘증인’들의 서너배가 되었다. 이제 1970년대초와 중반에 ‘증인’들과 연합하던 이러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께 헌신하고 왕국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으며 침례를 받았다.

1973년에 평균 왕국 전도인 수는 2년전보다 거의 1,000명이 많은 2,854명으로 뛰었다. 하지만 징말로 놀라운 증가가 뒤따랐다. 1974년에는 평균 전도인 수가 4,065명으로—최고는 4,535명—껑충 뛰어올랐다. 그리고 새로 1,509명이 침례를 받았다! 그러나 증가는 멈추지 않았다.

그 이듬해에 1,612명이 더 침례를 받았으며 전도인 수는 평균 5,124명으로 뛰어올랐다! 그래서 2년 연속 1,000이 훨씬 넘는 전도인 증가가 있었다! 그리고 1976년에 984명이 더 침례를 받았다. 또한 그 해에 왕국 소식을 선포하는 사람들의 수는 매달 평균 5,632명으로 뛰었다!

그렇게 하여 단지 3년 동안에 4,105명의 새로운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다. 그리고 ‘엘살바도르’의 ‘증인’들의 수는—2,854명에서 5,632명으로—거의 배가 되었다!

성장을 돌보는 일

상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엄청난 성장은 모든 새로운 자들을 돌보기 위해 조직을 확장하도록 압력을 가져왔다. 단지 한 해 동안—1972년에서 1973년까지—회중의 수가 36개에서 68개로 늘어났다. 그 다음해에 23개 회중이 더 추가되었고 1976년까지 이 나라에 118개 회중이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겨우 4년만에 ‘엘살바도르’는 회중 수가 36개에서 118개로 3배 이상이 된 것이다! 확실히 조직내의 모든 새로운 자들에게 영적인 도움을 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회중 수가 증가함에 따라, 더 많은 순회구가 필요하였고, 따라서 유능한 형제들이 순회 감독자로 섬길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사무엘스타고’와 여러 해 전에 ‘우술르탄’ 회중을 형성하는 일을 도왔던 전직 방위 대원 ‘카를로스 레예스’가 순회 활동에 임명되었다. 갑작스런 성장으로 인해 새로운 순회 감독자들이 반드시 진리에 오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글라디스 로메로’가 자기 남편 ‘사울’이 성서를 연구하는 데 관심을 가지게 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결국 진리를 발견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자 온 마음을 다해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는 1970년에 침례를 받았고 1971년 2월에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1975년에 그는 순회 활동에 참여하도록 임명되었다.

아직도 다른 순회구들이 추가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누가 협회의 여행하는 대표자로 섬길 수 있었는가? 두명의 젊은 특별 ‘파이오니아’, ‘카를로스 빌라누에바’와 ‘로베르토 구즈먼’이었다. 그들은 부족한 경험을 충실과 근면으로 보충하였다. 현재 ‘엘살바도르’에는 137개의 회중과 23개의 집단이 있으며 8개의 순회구가 있다.

대회들이 성장을 자극하다

지역 및 국제 대회들이 계속 ‘산살바도르’의 국립 체육관에서 열렸다. 이러한 연례 모임들은 형제들이 왕국 전파와 제자를 삼는 사업에서 박차를 가하게 하는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1972년 “하나님의 통치권” 대회에서 “회중의 종” 대신 “장로의 회”에 의한 회중 운영에 대한 새로운 마련이 발표되었다. 8년이 지난 현재 이 나라에는 총 182명의 장로가 있다. 이것은 평균 한 회중에 단지 한명이 조금 더 되는 장로가 있는 것을 의미하므로 ‘엘살바도르’에 장성되고 자격있는 도움이 아직도 크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3년 12월에 국립 체육관에서 있은 “하나님의 승리” 국제 대회는 그 때까지 열린 대회 중 가장 고무적인 것이었다. 그 때까지 보고를 낸 한달 최고 전도인 수는 3,310명이었었다. 그러므로 이 대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는가? 총 10,788명이란 놀라운 수의 사람들이 그 체육관을 꽉 메웠다. 침례를 받을 때 1,046명이 여호와의 뜻을 행하기 위해 헌신한 사람으로 나타났고 이제 그것을 공개적으로 상징하기를 원하였다. 이 수는 그 해 최고 전도인 수의 거의 3분의 1에 해당하였다. 참으로 커다란 수확이었다!

“하나님의 목적” 지역 대회는 어떤 것을 가져다 줄 것인가? 그 대회는 1974년 12월에 다시 국립 체육관에서 열기로 계획되었다. 이 장소는 사람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4월의 기념식이 참석자를 예상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었다. 그 때 총 15,836명이 참석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3년 전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거의 두배였다. 그런데, “인간의 계획의 실패와 하나님의 목적의 성공”이란 그 대회의 공개 강연에 수용 능력을 초과한 12,125명이 참석하여 체육관을 꽉 메웠다. ‘엘살바도르’에서 제자삼는 일에 관한 한 하나님의 목적이 성공하고 있는 것이 확실한 것 같았다.

이전의 정치인이 변화하다

1973년 “하나님의 승리” 대회에서 침례를 받은 1,000명이 넘는 사람들 가운데는 ‘아틸리오 가르시아 프리에토’가 있었다. 그는 약 18년 전 ‘발타사르 패를라’가 ‘오소리오’의 행정부에서 일하던 같은 시기에 ‘오소리오’ 대통령 내각의 일원이었다. ‘발타사르’가 ‘증인’이 되자 ‘아틸리오’는 “이 친구가 미친게 틀림 없어” 하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이제 그는 미친 사람은 자기였다고 믿고 있다.

‘아틸리오’는 여호와의 활동적인 종이 된 후에 12건이나 되는 많은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다. 현재 그는 ‘산살바도르’의 한 회중의 장로로 섬기고 있다. 1975년에 그는 ‘엘살바도르’의 그 해의 전문 직업인 상을 탔다. 그는 수락 연설에서 자기의 욕망은 항상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참조 성귀를 사용하여 대통령과 그의 내각을 포함하여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왕국만이 그 일을 성취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지역 대회들을 위한 조정

국립 체육관이 너무 비좁게 되었으니 이제 연례 지역 대회를 어디에서 열 수 있겠는가? 그 체육관이 이러한 모임을 갖기에 이상적인 장소였기 때문에 1975년 “하나님의 주권” 지역 대회를 동일한 장소에서 각기 다른 주에 둘로 나누어 열기로 결정하였다. ‘산살바도르’의 회중들이 한 주에 대회를 갖고 수도 밖에 있는 회중들이 다른 주에 대회를 가졌다. ‘노워’ 형제가 이들 대회에 참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형제들은 얼마나 기뻤겠는가!

참석한 사람들은 이것이 ‘노워’ 형제의 마지막 방문이 되리라는 것을 거의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와의 교제를 온전히 즐겼으며 그가 머무는 동안 선교인 집회와 다른 여러 차례 모임에서 그의 훌륭한 영적 충고를 받아들였다. 2년이 채 못된 1977년 6월 8일에 그는 암으로 사망하였다.

대회를 위해 ‘트렘블레이’ 형제에게 적절한 연단을 준비하도록 부탁하였다. 그는 그 때 특별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던 ‘아후아차판’ 회중 형제들의 도움으로 연단 장면을 아름다운 하얀 궁전으로 만들기 위해 판지를 가지고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하였다. 궁전 위에 위대하신 주권자의 보좌와 왕관이 있었다. 이것은 온 우주 위에 좌정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지위를 나타내는 데 참으로 적절하였다. 총 15,025명의 청중이 ‘프로’를 온전히 즐겼다.

두 대회가 대단히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1976년에는 세개의 대회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1976년 “거룩한 봉사” 지역 대회가 ‘산타아나’와 ‘산미구엘’ 및 ‘산살바도르’에서 계획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이 나라의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훌륭한 영적 양식과 교제를 더욱 편리하게 즐길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총 13,203명이 참석하였다. 이 수는 지난 해의 참석자 수보다 거의 2,000명이 감소된 것이지만 아직도 1976년에 달성된 최고 전도인수인 6,010명의 두배가 넘는 것이었다.

지부 증축

조직이 커짐에 따라 더욱 더 지부 시설의 확장이 필요해졌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1970년에 지부 건물 앞에 있는 조그만 대지를 구입해 두었었다. 얼마간 그곳에는 여기저기 꽃이 핀 아름다운 푸른 잔디밭이 있어 지부 건물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 주었다. 하지만 1975년에 ‘브루클린’ 본부 대표자 ‘로버어트 월른’의 방문중에 시설을 확장하기 위해 이 대지를 사용할 가능성이 고려되었다.

1976년에 이 확장 계획이 수립되어 승인되었다. 자진적인 도움과 모두의 협조로 그 증축 건물은 예상 비용의 절반으로 건축되었다. ‘죤 트레이어’와 더 크게 필요로 하는 ‘아후아차판’에서 봉사하던 ‘비센테 발다라마’란 형제가 이 일에 전 시간을 바쳤다.

그렇게 하여 1977년에 그 새로운 증축 건물이 사용할 준비가 되었다. 사무실을 협소한 곳에서 공간이 넓고 환기가 잘 되는 장소로 옮기게 된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었겠는가! 공급 서적이 복도, 침실 및 욕실에서 옮겨져 넓은 창고에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집이 새로와 보였다.

1977년 12월 “즐거운 봉사자” 지역 대회 때 통치체의 ‘밀튼 헨첼’이 증축된 지부 시설의 봉헌식 연설을 하였다. 다시 한번 이 대회는 두 모임으로 나뉘어 ‘산살바도르’의 국립 체육관에서 열렸다. 이번에는 총 참석자 수가 13,615명이었다. 이 수는 2년 전의 최고 참석자 수에 미달하는 수였지만 전국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하고 있었다. 그 점이 1978년 3월의 훌륭한 21,285명의 ‘기념식’ 참석자 수에서 나타났다.

새로운 대회 회관 건축이 제안되다

여러 해 동안 순회 대회들을 열 적절한 장소를 찾는 일이 지극히 어려웠었다. 몇몇 순회구에서는 모두를 수용하기에 충분한 넓은 장소가 없어서 다섯 차례의 작은 대회로 나누어 열어야 하였다. 특히 장마철에 날씨로부터 보호를 받을 장소가 필요할 때에는 대회 장소를 찾기가 어려웠다. 학교는 이제 종종 이러한 대회들을 열기에는 너무 비좁았고, 게다가 학교 시설이 항상 가장 좋은 것은 아니었다. 다음의 경험이 직면했던 문제들의 양상을 설명해 준다.

한번은 형제들이 대회 ‘프로’를 즐기기 위해 모였는데 육군 군악대가 연단 앞에 자리를 잡고서 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날 토요일 오전에 여러 무리의 학생들이 음악 과목을 위해 모였다. ‘증인’들이 학교를 사용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던 선생 중 한 사람이 육군 군악대가 학생들의 수업을 위해 연주를 하도록 마련을 했었던 것 같다. 약 한 시간 후에 그 악대는 떠났고 학생들은 서서히 집으로 가버렸다. 그런 다음 여호와를 찬양하는 노래와 기도로 그 대회 ‘프로’가 적절히 시작되었다. 이것은 6개월마다 영적인 잔치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 형제들이 직면했던 여러 차례 있었던 어려운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어떤 일을 할 수 있었는가? 8개의 순회구가 활동하고 있으므로 ‘엘살바도르’에 대회 회관을 짓는 일이 이치적이고 가능할 것인가?

이것이 “즐거운 봉사자” 대회를 위해 ‘헨첼’ 형제가 방문하는 동안 다룰 문제였다. 그래서 그 착상이 서면으로 통치체에 제출되었다. 이미 알맞은 가격의 대지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산살바도르’의 한 형제가 물 자체 공급을 갖춘 ‘일로팡고’ 호수 부근의 대지를 제안하였다. 그것은 상당히 넓고 가격도 알맞았다. 많은 형제들이 그 대지를 구입하고 계획을 추진하도록 관대한 헌금을 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엘살바도르’의 형제들은 그러한 계획을 지지할 것인가? 그들은 요구되는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지불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그 문제는 협회의 회원들에게 제출되었고, 그 다음 서신으로 회중들에게 제출되었다. 회중들은 힘차게 “예!”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이 계획에 온전히 주의를 기울이며, 이 문제에 여호와께 인도가 있기를 구하기로 결정하였다.

새로운 학교들이 조직되다

1977년 12월에 “즐거운 봉사자” 대회가 있은 후 ‘파이오니아’들을 위한 특별 학교뿐 아니라 새로운 천국 전도 학교를 위한 계획들이 세워졌다. 1962년 이래 하나의 천국 전도 학교가 운영되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회중에서 책임들을 맡고 있던 형제들이 참석하도록 초대되었다. 1978년 중에 이 나라의 모든 장로들과 봉사의 종들이 이 새로운 15시간의 교육 과정에 참석하였다. 네명의 지부 위원들이 다른 두명의 유능한 형제들과 함께 강사로 일했다. 세 학교가 동시에 운영되었기 때문에 한달 안에 모두가 참석할 수 있었다.

이 학교가 끝나고 바로 ‘파이오니아’ 학교를 시작하였다. 1977년 6월 중순에 ‘파이오니아’ 명단에 적어도 1년간 올라 있었던 ‘엘살바도르’의 모든 ‘파이오니아’들이 이 특별한 10일 과정을 수료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엘살바도르’에 있는 ‘파이오니아’들은 여호와께서 그분의 조직을 통해 베푸시는 이 훌륭한 마련에 대해 참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였다.

‘엘살바도르’의 변모

여러 해에 걸쳐 ‘엘살바도르’는 겉모양과 풍습까지도 바뀌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자면, 인구가 1945년의 1,500,000명에서 1980년에는 약 5,000,000명으로 증가하였다. 특히 수도에는 구식 ‘어도우비’ 벽돌집들이 현대식인 밝은 색의 ‘시멘트’ 벽돌집으로 대치되었다. 곳곳에서 새로운 개발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일자리가 더욱 많아지게 되었고, 심지어 임금도 오르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시골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곧 ‘산살바도르’는 여러 가지 면으로, 현대 북미 도시를 닮게 되었다. 1960년대에 ‘햄버어거’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음식물을 조달하는 몇몇 장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양인(洋人) 음식”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이 되자 ‘맥도널드’나 ‘하아디이’와 같은 즉석 음식을 제공하는 장소에서 관광객과 토착민에게 똑같이 ‘햄버어거’나 ‘프랑스’식 튀김을 제공해 줌으로써 번창하는 사업이 되고 있었다. 유흥지들이 이전에는 ‘로스 초로스’라고 불리우는 열대 공원과 ‘코아테페쿠에’ 호수와 ‘일로팡고’ 호수 같은 관광지에만 한정되어 있던 사업이 경쟁하기 위해 도시의 여러 곳에 생겨났다. 손님들을 ‘산살바도르’의 남부에서 ‘산학신토’산의 꼭대기까지 운반하는 ‘케이블 카아’가 가설되었다. 거기에서는 유원지에의 오락을 구경하거나 단순히 그 도시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확실히 많아졌다.

그러나 물가가 치솟았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즐기려면 꽤 많은 돈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맷돌에 탄 옥수수로 동그란 과자를 만들어 ‘치이즈’를 바르고 그 사이에 고기나 콩을 넣어 만든 대표적인 ‘푸푸사’는 가격이 1960년대에 비해 적어도 4, 5배 올랐다. 가족에게 대표적인 ‘푸푸사’와 튀긴 ‘바나나’ 및 ‘코오피’를 대접하려면 이제는 보통 가족 예산의 상당한 부분을 사용해야 한다.

또한 여러 해 동안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거처해 온 ‘메손’과 오두막이 있던 곳에 새로운 고속도로와 확장된 길들이 나게 되었다. ‘산살바도르’의 남쪽 약 35‘킬로미터’ 위치에 새로운 공항 “엘살바도르”가 건설됨에 따라 사람들이 그 공항에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새로운 4차선 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 과거 1960년대초에는 자동차가 소수 특정인들이 즐기는 사치품이었지만 1970년대 후반에는 자동차들은 마치 개미처럼 도시의 거리를 붕붕거리고 떼지어 다녔다. 다만 그 도시 밖의 비교적 한적한 도로에서만 운전사가 다소 안심하고 운전할 수 있었다.

이 나라의 종교적인 양상도 변하였다. 과거에는 ‘프로테스탄트’ 집단들이 항상 소수였고 ‘가톨릭’에 의해 뒷전에 밀려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교직자들의 정치 관여에 혐오를 느끼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다른 어떤 것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가톨릭’교를 버리고 근년에 생겨난 여러 가지 복음주의 단체들에게 호의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은 ‘가톨릭’교도 ‘프로테스탄트’교도 진리를 배우고자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어오지 못하였다.

과거의 종교적인 열정이 조금씩 조금씩 참그리스도교와는 거리가 먼 종교적인 냉담으로 대치되고 있다. 그 내리막길의 경향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가톨릭’교는 ‘가톨릭’의 종교 의식에 여러 종파들의 의식을 혼합하기 시작하였다. 여러 곳에서 형상의 사용을 중지하였다. 종교와 기타 여러 부면의 변화가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끼쳐 왔다. 특히 1975년 이래 쾌락에 대한 욕망과 인간과 하나님의 법에 대한 불경이 희생자를 내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인 회중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쳐 왔는가? ‘엘살바도르’ 지부가 관찰한 다음과 같은 사실은 의미 심장하다.

“심지어 참 그리스도교의 행로를 따르고 있는 사람들도 영향을 받아왔다. 일부 형제들은 회중에서의 그리스도인 특권을 포기하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 특권이 다른 개인적 일들을 추구하는 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경제적인 상태를 개선할 목적으로 다른 나라로 가 버렸다.

“또한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인생을 여호와께 대한 전 시간 봉사에 헌신하도록 관심을 갖게 하는 일이 점차 어려워졌다. 세속 일과 공부가 왕국 봉사를 밀쳐내기 시작하고, 과거에 여호와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 바쳐지던 시간과 정력이 이제 여러 배로 자신의 개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로 돌아가고 있다. 참으로 현 시대는 여호와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상실한, 분명히 마음에 진리가 없는 사람들이나 깨어있지 않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있다.”

물론 ‘엘살바도르’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절대 다수가 그들의 영적인 힘을 유지해 왔다. 그들은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일에서 계속 열심히 일해 왔으며, 그들의 수고로부터 얻은 웅대한 결실을 계속 즐기고 있다.

대회 장소의 변경

1978년 중에 ‘엘살바도르’의 최고 왕국 선포자의 수가 6,017명에 달하였다. 그러한 성장으로 인해 국립 체육관은 이제 순회 대회나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보다 넓은 시설을 찾아야 하였다. 이 체육관에서 단지 몇 구역 떨어진 ‘플로르 브란카’ 국립 경기장이 최근에 보수를 마쳤다. 그래서 그곳이 1978년 12월 27-31일의 “승리의 믿음” 국제 대회 장소가 되었다.

경기장 대부분이 덮개가 없었기 때문에 ‘프로’가 오후와 저녁에 진행되었다. 오전은 야외 봉사와 방문객을 위한 ‘프로’에 바쳐졌다. 그러한 ‘프로’들은 때때로 전형적인 민속 춤들로 특징을 이루었다. 외국 방문객들의 수가 이전 1973년 국제 대회에 비해 훨씬 적었지만 금요일 오전 야외 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확실히 국내 형제들에게 자극제가 되었다. 아직도 이곳의 많은 형제들은 외국 형제 자매들과 함께 봉사하면서 즐겼던 훌륭한 때에 대해 이야기한다.

통치체의 ‘그랜트 수우터’가 이 국제 대회의 주요 연사였다. 그는 ‘스페인’어를 할 줄 몰랐지만 형제들은 그가 참석한 사실과 ‘스페인’어로 통역된 그의 연설을 듣고 격려를 받았다. 그 대회의 최고 참석자 수는 11,109명에 달했고 총 470명이 침례를 받았다.

추세를 역전시키다

1978년 12월에 “승리의 믿음” 대회가 있기 바로 전 수개월 동안 왕국 선포자들의 수가 감소되고 있다. 이것은 많은 형제들에게 염려가 되었다. 그러나 그 국제 대회는 필요한 격려를 정확히 공급해 주었다. 그래서 1979년 1월에 이 나라는 6,058명이라는 전도인 신기록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 꾸준한 증가가 이루어져 왔다.

1979년 중에 총 22회 순회 대회가 열렸으며 참석자 수 합계는 24,794명이었다. 그리고 10월까지 왕국 전도인 수가 6,528명으로 뛰어올랐다. 그 다음 11월에 형제들은 통치체의 ‘알버어트 쉬로더’의 지구 방문으로부터 훌륭한 격려를 더 받았다. 회중들이 ‘산살바도르’의 원형 국제 박람회장에서 ‘쉬로더’ 형제가 행한 특별 강연에 초대되었다. 그 아름답고 시원한 저녁 별이 반짝이는 밤 하늘 아래 7,127명이 참석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산 소망” 지역 대회

약 한달 후인 12월 29일-1월 1일에 열린 “산 소망” 대회가 또 형제들에게 여호와를 섬기는 그들의 결심을 계속 확고하게 유지하게 하는 자극제 역할을 하였다. 이 대회도 ‘산살바도르’ 소재 ‘플로르 브란카’ 경기장에서 열렸다. 그 해에 형제들이 반영한 열정적인 영은 대회 조직을 형성할 때 분명히 나타났다. 최고 참석자 수는 1년 전 국제 대회에 모인 사람 수보다 830명이 더 많은 11,939명이었다.

국내에 소요가 있었지만 경기장 안에 모든 것이 평화스러웠다. 그러나 밖의 위험들은 저녁 ‘드라마’에서 아버지 없는 아들의 역을 맡은 젊은 형제에게 일어난 일로 실증되었다. 그는 다른 형제와 함께 잠깐 산책을 하러 나갔었다. 그가 ‘드라마’에 출연할 의상을 입으려고 경기장으로 돌아오는데, 칼을 빼든 한 남자가 다가와서 소유물을 요구하였다. 그 형제는 시계, 돈 및 기타 소유물을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고 주었는데도 칼에 등을 찔렸다. 그는 먼저 대회 응급부에서 약간 치료를 받고 곧 의사의 치료를 받으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드라마’에 출연할 옷을 입고 그가 부상당한 것을 모르는 관중 앞에서 자기의 역을 고통가운데 수행해냈다.

정치 문제가 나라를 분열시키기 시작하자 범죄와 폭력이 보편화되었다. 대회에서 훨씬 더 큰 문제들이 예상되었지만 만사가 유종의 미를 거두었고 형제들은 별 어려움 없이 귀가하였다.

새로운 대회 회관

“산 소망” 대회는 앞으로 일련의 순회 대회가 ‘일로팡고’ 호수 옆에 건축중인 새로운 대회 회관에서 주로 열릴 것이라는 발표가 있을 때 절정에 달하였다. 과거 1977년에 대회 회관이 제안된 때부터 많은 형제들이 그 계획을 진행시키기 위해 무료로 시간과 노력을 바쳐왔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든 일을 하였기 때문에 문제들을 직면하였지만 극복되었다.

건축 공사를 돕기 위해 이따금씩 전체 회중들이 일요일에 일했었다. 형제들은 건축 자재들을 구입하고 형제들이 취급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인부들에게 돈을 지불하기 위해 아낌없이 헌금하였다. 심지어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사람들까지도 자진해서 도움을 베풀었다. 그래서 몇개월 이내에 대회 회관을 사용할 계획이라는 발표가 있었을 때 경기장이 박수갈채로 울려 퍼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미소를 가득 머금은 형제와 자매들을 가득 실은 ‘버스’가 차례로 1980년 3월 1일에 첫 순회 대회를 위해 그 회관에 도착하였다. 공사를 마치려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지만 현재까지의 협력과 그 일을 후원하는 여호와의 영의 증거로 판단할 때, 계획이 곧 완성되어 여호와께 찬양이 될 것이라고 믿을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정치적 격변

1979년 후반기에 ‘엘살바도르’에서 있은 정치적 소요는 약 30,000의 생명을 앗아간 ‘니카라구아’의 최근 분쟁과 흡사한 전면적인 내란으로 터질 위협이 있었다. 10월에 ‘엘살바도르’ 대통령 ‘카롤로스 훔베르토 로메로’ 장군이 강제로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5인 ‘훈타’로 대치되었다.

이러한 사태 발전으로 그 해 이 나라에서 수백명의 생명을 앗아간 폭력 사건을 종결시켜 줄 것이라는 희망이 높아졌다. 그러나 폭력은 늘어날 뿐이었다. 혁명 단체들은 교회, 대사관, 정부 및 기타 건물들을 빼앗고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두었다. 종종 일부 우리 형제 자매를 포함하여 무죄한 사람들이 무도한 개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예를 들어, 한 젊은 자매가 남자들만이 있는 한 집단과 함께 인질로 잡혔다. 그는 자기가 근무하고 있던 사무실 건물을 점령한 사람들과 동료 인질들에게 그 기회를 이용하여 증거를 하며 담대함을 보였다. 며칠 후에 그들은 다치지 않고 풀려났다. 동료 인질들은 이 젊은 여자 자매의 기도와 영적인 힘이 그들로 그러한 경험을 인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이 자매는 담대함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 참으로 훌륭한 본을 보여주었다!

매일 암살과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사업가들은 두려움으로 인해 떼를 지어 이 나라를 떠나고 있었다. 미국인 사업가 ‘더글라스 버어나아드’는 “공공 및 개인 부문의 유능한 지도자들이 매일 떠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들은 오전 4시에 미국 대사관 밖에 줄을 서서 ‘비자’를 기다리고 있다. 보다 잘 조직된 사업가들이 무리를 지어 ‘파라구아이’, ‘에쿠아도르’ 혹은 ‘볼리비아’에서 새로운 지역을 물색하기 위해 출국하고 있다. 그들은 ‘엘살바도르’를 포기하였다.”

그리하여 사업과 공장들이 문을 닫고 있고 사람들은 국내 화폐를 다른 나라로 가지고 갈 수 있는 외화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일자리가 귀해지며 동시에 물가는 치솟는다. 이것이 공포와 범죄 분위기를 초래하였다.

‘맥도널드’와 같은 장소들이 폭력을 느꼈다. 한 폭도들이 이러한 시설 중 하나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명령한 후, 건물 주위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 잿더미가 되게 하였다. 은행들이 폭파되었고, ‘슈퍼마아켓’들이 폭파되고 불에 탔으며 ‘버스’들이 불에 탔고, 개인들이 사업체에서, 가정에서, 거리에서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정부는 경찰력을 동원하여 극단주의 단체들이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이 때문에 일반인은 법을 자기들의 손아귀에 넣은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법과 질서가 ‘엘살바도로’에서 사라졌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은 빨간 교통 신호를 보고도 멈추기를 거부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차에 앉아 신호 대기중 강도를 만나거나 더 심한 일로 강제로 자동차를 빼앗기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작은 상점과 사업소들은 여러 차례 “돈을 내놓으라 그렇지 않으면 불태워 버리겠다”는 협박을 듣는다. 거리를 걸어야 할 때에는 시계, 귀중품 및 대부분의 돈을 집에 남겨두어야 하였다. ‘버스’ 안에서 도적이 칼을 뽑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가진 돈을 전부 내놓으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형제들이 죽임을 당하다

1979년 10월에 ‘훈타’가 권력을 잡은 후 얼마 동안 상태가 더 악화되는 것 같았다. ‘산 후안 오피코’ 회중의 봉사의 종들인 우리의 두 형제 ‘조르게’와 ‘에우게니오 바스쿠에즈’가 12월로 다가오는 “산소망” 지역 대회에 참석하기 위한 충분한 여비를 장만하기 위해 ‘코오피’를 따기로 결정하였다. 그 농장에서 약 1주일 가량 일해 왔을 때 그들은 ‘코오피’를 따는 많은 사람들이 ‘코오피’ 따기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사회의 불공평과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보냈다. 우리 형제들은 어울리지 않고 ‘코오피’ 따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일하던 많은 사람들은 1979년 12월 17일 월요일에 그들에게 ‘코오피’를 따는 일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발표를 듣고 놀랐다. 그날 그 농장은 어느 전투 ‘게릴라’ 단체의 후원을 받는 농부들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코오피’를 따는 1,500명의 사람들은 강제로 들에서 일을 못하도록 억류되었고 참호를 파도록 강요당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에 무장한 군대가 군인과 ‘탱크’를 끌고와서 반란군에게 항복하라고 요구하였다. 총격으로 응수하자 그 군대는 발포하기 시작하였다.

싸움은 두 시간 반 동안 계속되었고 농장은 황무지로 변하였다. 노소를 막론하고 시체들이 땅에 마치 나뭇잎처럼 즐비하게 흩어져 있었다. 우리의 두 형제들도 그 시체 가운데 있었다. 생존자들은 나중에 그들이 무기 들기를 거절하고 완전한 중립을 주장한 것에 대해 말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겁장이들로 낙인찍혀 전투가 가장 심한 곳으로 보내어졌다.

희생당한 사람들의 남편, 아내 및 친구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떠한 일이 발생하였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하나의 공동 무덤에 매장되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10일 후에 26구의 시체가 한 흙 더미 속에서 발견되었다. 알아볼 수가 없었다. 여러 시간을 찾은 후에 ‘조르게’와 ‘에우게니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비통하게도 이 두 형제의 아내들은 이제 가장의 도움과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무정하게 농작물을 약탈해 가는 도적들의 희생자들이 되었다. 하지만 회중이 그들을 도왔다. 지역 대회가 시작되었을 때 그 두 미망인 자매를 포함하여 이 회중의 형제들이 참석해 있었다.

또 다른 예로, 1980년 3월에 사탕수수를 가공 처리하는 공장에서 농학자로 일하던 ‘산살바도르’의 회중의 한 장로는 정상대로 제 시간에 집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날 밤에는 신권학교와 봉사회 집회가 열렸기 때문에 그는 금요일 밤에는 항상 정각에 도착하고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는 그날 밤에 집에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 다음 주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가족과 그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그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방으로 찾아나섰다. 그러나 모두가 허사였다. 1주일 후에 그는 시체가 된 몸으로 한 동료 일꾼과 함께 발견되었다.

우리 형제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이유는 아직 의문에 싸여 있다. 그가 이 나라의 정사에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부활에 대한 확실한 희망을 갖고 여호와께서 그러한 충실한 종들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을 아는 것은 참으로 축복이 된다!

폭력 저지에 실패하다

1980년 3월에 정부는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일부 권리를 제한하였다. 그 결과 공공 건물을 점유하는 일은 끝나는 것 같았다. 또한 파괴 집단들이 행하던 시위 행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러한 행진들은 모든 사업에 위협이 되었었다. 하지만 비상 사태가 폭력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종식시켜 주지는 못하였다. 아직도 어두움을 이용하거나 가면을 쓰고 자행되는 폭력은 그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1980년 3월 24일에 ‘가톨릭’의 대주교인 ‘오스카르 아르눌포로메로-갈다메즈’가 그의 종교적 임무인 ‘미사’를 행하다 암살되었다. 이 일로 인해 더 심한 폭력과 공포가 터졌다. 그 날 저녁에 공화국 전역에서 여러 건물이 폭발 사건으로 뒤흔들렸다. 호별 방문 활동을 하고 있던 우리 형제 한 사람이 어느 파괴 단체에게 붙들려 그 단체에 가담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았다. 그는 계속 확고한 입장을 취했다. 심한 학대를 받은 후 그는 결국 풀려났다.

3월 30일에 수천명의 사람들이 그 ‘가톨릭’ 대주교의 장례식을 위해 ‘산살바도르’에 있는 성당 앞 공원에 모여들었다. 그 장례식에 파견된 교황의 특사가 군중에게 연설하고 있는데 갑자기 자동차들을 불태우는 일과 총격전이 일어나 그 곳이 공포의 장면으로 변해 버렸다. 안전한 장소로 가기 위해 ‘가톨릭’교인이 ‘가톨릭’교인을 짓밟았다. 사망자와 부상자들은 ‘엘살바도르’란 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인 문제들의 심각성을 나타내었다. 이 나라에서는 정치적인 목적이 관련되어 있는 곳에서는 인명을 희생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여호와의 백성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이러한 모든 소요 가운데서도 ‘엘살바도르’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은 계속 전진해 오고 있으며 그러한 일이 대회와 회중 집회에 참석하거나 야외 봉사 나가는 일에 방해가 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봉사에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 선교인이 1980년 5월에 ‘브루클린 벧엘’ 가족의 한 성원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총성과 폭탄 터지는 소리에 익숙해지고 있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일에 대해 더 이상 흥분하지 않습니다. 신문은 항상 실제보다 더 심한 것으로 보도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여러 형제들이 집회가 취소되었는지의 여부를 알기 위해 전화를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집회를 보고 있읍니다.”

그래서 대주교의 장례식에서 폭력 사건이 있은 다음날 여호와의 백성과 그의 벗들이 ‘기념식’에 모인 수는 기록적인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거리에 나서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데 비해 3월 31일 월요일 일몰 후에 27,319명이 위험을 무릅쓰고 담대하게 그 집회에 참석하였다. 이것은 ‘엘살바도르’에서 이전에 ‘기념식’ 축하를 위해 참석한 사람들의 수보다 5,000명 이상이나 더 많은 수였다!

또한 형제들은 유일한 참된 희망의 소식인 하나님의 왕국 소식을 가지고 이곳의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에 진정한 열심을 보이고 있다. 1980년 1월에 6,655명으로 전도인 신기록을 이루었다. 이어서 2월에 6,690명, 3월에 6,721명 그리고 4월에 7,008명의 신기록과 아울러 매달 관심자들과의 8,000건 이상의 성서 연구가 사회되고 있다. 세상의 전망이 점점 암담해짐에 따라 신권적인 성장의 전망은 점점 더 밝아지는 것 같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엘살바도르’의 35년간의 신권 역사에 일익을 담당해 왔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의심의 여지 없이 여호와의 백성이 그분의 봉사를 계속하는 동안 변화는 계속될 것이다. 그들은 로마 8:28에서 모든 일이 협력하여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선을 이루게 한다고 약속하신 여호와께 온전한 신뢰를 두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예언자 ‘이사야’틀 통하여 이렇게 약속하셨다.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이사야 60:22.

1945년 2월 24일에 ‘엘살바도르’에 왔던 두명의 ‘증인’이 ‘엘살바도르’에서 좋은 소식을 광범위하게 선포한 결과 1980년 5월에 보고한 왕국 선포자가 7,156명이 됨으로 참으로 수천이 되었다. 이 사업에 참여하는 특권을 가졌던 사람들 모두는 여호와께 깊이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장차 신권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 더 많은 축복들을 받기 위해 여호와를 바라보고 있다.

[33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엘살바도르

구아테말라

온두라스

태평양

메타판

텍사스테페쿠에

산타아나

찰추아파

산하신토

테후테페쿠에

아후아차판

쿠에잘테쿠에

일로바스코

후아유아

아르메니아

소야팡고

아포파

코후테페쿠에

손소나테

산살바도르

산세바스찬

산토도밍고

산라몬

아카후틀라

산마르코스

일로팡고 호수

산티아고 텍사쿠안고스

산후안탈파

베를린

산티아고 데 마리아

산미구엘

우술루탄

라위니온

[32면 삽화]

석기 유물들, ‘엘살바도르’에서 발굴된 십자가 상이 새겨져 있으며, 기원전 2000년의 것이라고 한다

[35면 삽화]

69세의 ‘안토니오 몰리나 초토’, ‘엘살바도르’인으로 최초로 헌신하고 침례받은 ‘증인’

[38면 삽화]

‘엘살바도르’의 거미, ‘피이트’자와 사람의 손과 크기를 비교한 것이다

[41면 삽화]

‘차알즈 비이들’, ‘엘살바도르’에서 다년간 왕국 사업을 인도했던 ‘길르앗’ 졸업생

[42면 삽화]

‘줄리아 클로그스톤’(왼쪽)과 ‘샤를롯 보우인 쉬로더’, ‘산살바도르’에 임명된 ‘길르앗’ 졸업생. 현재 둘다 ‘브루클린 벧엘’에서 봉사하고 있다

[56면 삽화]

‘발타사르 페를라’, 정부 관리가 ‘증인’이 되었다. 그의 아들 ‘발타사르’ 2세는 현재 ‘브루클린 벧엘’에서 봉사하고 있다

[60면 삽화]

‘아브라함 페나’, 두 아들과 함께 있는 연로한 가장. 그는 대가족이 참 숭배를 추구하도록 격려하였다

[67면 삽화]

‘라울 모랄레스’, 젊은이로서 영적인 것들에 대해 탁월한 인식을 보였고, 나중에 여러 가지 봉사의 특권들을 즐겼다

[71면 삽화]

‘루가르다 페나’, 남편 ‘아브라함’이 사망한 후 97세에 사망할 때까지 계속 충실하였다

[78면 삽화]

대주교가 현재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인 ‘루벤 로잘레스’(오른쪽에서 다섯번째)를 포함한 정부 요원들과 비밀 회담을 하고 있다

[85면 삽화]

‘산살바도르’의 국립 체육관, ‘증인’들의 대회장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87면 삽화]

1965년 5월에 있었던 ‘산살바도르’의 지진 현장

[96면 삽화]

‘도미니크 피콘’, 1969년에 지부의 종이 되었고 현재 지부 조정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106면 삽화]

‘산살바도르’ 소재 지부 건물, 전면에 증축 건물이 보인다

[113면 삽화]

‘일로팡고’ 호수 옆에 세워진 새로운 대회 회관, 1980년 3월에 이곳에서 첫 대회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