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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볼타’

‘오트볼타’

‘오트볼타’

‘오트볼타’ 역시 ‘프랑스’의 서 ‘아프리카’라고 불리웠던 공동체를 구성한 서 ‘아프리카’의 8개 지역 중 하나였다. ‘프랑스’에 의해 60년 이상 지배를 받아왔던 이 나라는 1960년에 독립을 하였다.

이 나라의 대부분은 ‘볼타’ 강의 상류 지류들의 물을 공급받고 있으며 거기에서 ‘오트볼타’란 이름이 유래한 것이다. 이 나라는 하나의 광대한 내륙 고원이며—해발 약 200‘미터’에서 700‘미터’ 이상에 이른다.—대부분의 지역이 나무가 우거진 초원으로 덮혀 있다. ‘오트볼타’는 사면이 육지로 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코트디브와르’, ‘가나’, ‘토고’ 및 ‘베닌’과 그리고 서쪽, 북쪽, 동쪽으로는 ‘말리’ 및 ‘니제르’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오트볼타’는 ‘코트디브와르’보다는 약간 작으며 면적은 약 274,000평방 ‘킬로미터’이다. 인구는 약 6,000,000명으로 비교적 적은 편이다. ‘오트볼타’인의 10‘퍼센트’ 이상이 이웃나라 ‘코트디브와르’에 직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트볼타’ 주민의 약 95‘퍼센트’가 7,000개 가량의 촌락에서 살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영농과 목축업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가장 큰 도시인 수도 ‘와가두구’의 인구는 100,000을 웃돈다. 다른 주요 도시로는 ‘보보-디울라소’, ‘쿠두구’와 ‘와히구야’가 있다.

여러 세기 동안 ‘모시’ 민족이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기원 제 12세기 이후로 그들은 하나의 강력한 조직을 발전시켜 초기 거주민 ‘뇨뇨세’와 ‘구룬시’족들을 몰아내었다. 현재는 ‘오트볼타’ 인구의 절반 가량이 ‘모시’족이며, 그들은 ‘모레’어를 사용한다. ‘듈라’어가 상업 용어이긴 하지만 불어가 공용어이다.

그리스도교국의 종교들이 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이 지역에서는 ‘코트디브와르’에서 만큼 활동적이 되어오지 못하였다. 주민의 5‘퍼센트’ 가량이 명목상의 ‘가톨릭’교인들인 반면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은 극소수이다. 인구의 대부분은 물활론자들이며 조상 숭배를 크게 중요시한다. 아주 최근인 1963년 6월에 와서야 ‘여호와의 증인’들이 ‘오트볼타’에서 최초로 활동하게 되었다.

왕국의 씨를 심음

전파 사업은, 원래 ‘토고’와 ‘베닌’과 ‘브라자빌 콩고’ 출신의 형제 7명이 ‘와가두구’로 이사했을 때 시작되었다. 그들은 정말로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이곳에서 직업을 찾았다. 그들은 서적을 조금 가지고 가서 곧 그것을 사람들에게 다 배포하였다. 그 배포된 서적의 얼마는 비옥한 땅에 뿌려진 씨앗과 같았다.

‘오트볼타’에 거주하는 ‘토고’인 ‘엠마누엘 죤슨’은 ‘와가두구’에 있는 한 큰 회사에서 의료 보조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1963년 어느날 한 친구가 그를 찾아와 책 두권을 휙 던지며 “이거 가져라, 독서광아. 별로 비싼 책은 아니야.” 하고 말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최근에 그 도시에 이사온 어떤 사람들로부터 그 책들을 샀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 친구들 다른 좋은 책도 가지고 있던데” 하고 그는 덧붙였다.

그 중 한권은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였다. 당장, ‘엠마누엘’은 그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읽으면 읽을 수록 그는 이러한 책들을 배포하고 있는 사람들을 더욱 만나고 싶어졌다. 그런데 어느날 바로 그들이 자기 집을 방문하였다! ‘딘가’ 형제와 자매가 그에게 그 책을 공부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정기적인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엠마누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항상 연구를 위해 준비하려고 애썼읍니다. 나는 실제로 진리를 들여 마셨읍니다. 그들은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과 연구를 해 본 일이 없다고까지 말했읍니다. 그들은 정기적인 성서 연구 외에도 여러 차례 나를 만나러 왔읍니다.” 그런데 형제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로마 가톨릭’ 교직자들이 ‘증인’들을 당국에 그릇되게 알렸고 ‘증인’들이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 사업을 반대하는 신문을 발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64년 2월에 모든 전도인들이 체포되어 먹을 것도 없이 13일간 억류되었다. 교직자들의 영향을 받아 관리들은 “‘오트볼타’ 정부는 ‘여호와의 증인’ 종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들을 이 나라에서 추방하였다.

‘딘가’ 형제가 기차로 떠나기 전에 ‘엠마누엘’은 그와 접촉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연구를 서신으로 계속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딘가’ 형제는 ‘아비잔’에 도착하자 마자 첫 질문 목차를 만들어 보냈으며, ‘엠마누엘’은 그 질문들에 대답하여 답장을 보냈다. ‘딘가’ 형제는 그것을 교정하고 더 많은 질문을 보냈다. 그 후 5년간 이렇게 연구가 계속되었다.

씨가 열매를 맺다

‘엠마누엘’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형제들이 추방된 후에 나는 그 문제에 ‘가톨릭’ 교회가 관련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가톨릭’교 서적, 소책자, 잡지 및 심지어 찬송가 음반까지 모두 함께 모았다. 나는 그것들을 쌓아 놓고 그 위에 ‘파라핀’을 듬뿍 붓고 불질러 버렸다. 나는 여호와께 내가 그분을 섬기도록 도와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이틀 후에 나는 처음으로 불어판 「파수대」 한부를 우편으로 받았다. 나는 참으로 그것이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하였다.”

1968년 중에 ‘프랑스’에서 한 형제가 ‘와가두구’에 와서 몇개월 동안 살게 되었다. 그는 ‘엠마누엘’에게 참으로 도움이 되었지만 곧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엠마누엘’은 혼자 왕국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연감」에서 ‘오트볼타’에 전도인이 단 한명 있다는 것을 보고 그를 격려하기 위해 보낸 여러 나라 형제 자매들의 편지들을 읽고 그는 강화되었다. 1969년 12월에 ‘엠마누엘’은 “지상의 평화”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아비잔’으로 여행하여 거기서 침례를 받았다.

도움이 베풀어지다

‘가나’ 지부의 종 ‘허어버어트 제닝즈’가 1969년에 ‘아비잔’을 방문했을 때 그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오트볼타’에 가서 봉사할 자원자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제임스 콰케’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나는 손을 들었다. 그런데 손을 든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나중에 1970년 5월에 다른 ‘파이오니아’ 한 사람이 또 자원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이 ‘티임’이 되어 1970년 7월 1일에 ‘와가두구’행 기차를 탔다. ‘엠마누엘’은 그 기차까지 그들을 마중나갔고, 그는 이미 그들이 머무를 수 있는 방을 하나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 도착한 그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있었는데 ‘콰케’ 형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다음날 아침 우리는 국가 보안대로 가던 길에 경찰에게 체포되었읍니다. 그 날 오전에 ‘여호와의 증인’의 사업이 ‘카메루운’에서 금지되었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읍니다. 신문이 잘못 보도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세금을 바치지 않는지의 여부에 대한 심문을 받았읍니다. 재빨리 나는 「진리」 책 한권을 꺼내 그 관리에게 ‘법에 대한 그리스도인 복종’이란 제목의 장을 보여주었읍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그와 적합한 항들을 다 토론하였읍니다. 그러자 그 관리는 곧 우리에 대한 신문의 보도가 부정확하다는 것을 깨달았읍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통지가 있을 때까지 호별 전파를 하지 말라고 말했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비공식 증거만 했읍니다. 서적들이 ‘포켓’용 크기여서 우리에게 참으로 다행이었읍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비공식으로 접촉하여 왕국의 좋은 소식을 말해 주기 위해 나갈 때 ‘포켓’이 좀 불룩하였읍니다.

“3주일 후에 우리는 국가 보안대에 다시 소환되었읍니다. 우리는 ‘좋소, 여러분은 이제 전파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소!’란 말을 들었읍니다. 우리는 거주 허가를 신청했고 10년간 체류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읍니다. 이 일에 대해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릴 겸 우리는 정부의 모든 장관들과 다른 고위 관리들에게 증거하기로 결정하고 1971년 1월에 그 일을 시작하였읍니다. 우리가 접촉한 사람들 가운데는 경찰 서장도 한 사람이 끼어 있었읍니다. 그는 진리에 매우 관심이 있어 「깨어라!」 잡지를 예약하였읍니다.

“1971년 5월에 우리는 ‘딤보크로’에서 열리는 훌륭한 순회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코트디브와르’로 갔읍니다. ‘와가두구’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또 체포되었는데 이번에는 한 경찰관에게 체포되었읍니다. 나는 자동차로 경찰서로 보내졌고, 거기에 도착하자 나는 다섯명의 상급 경찰관 앞에 서게 되었읍니다. 이들 상급 경찰관 중 한 사람이 ‘‘제임스’, 안녕하시오. 나의 이 동료들도 당신의 잡지를 예약하길 원할 것입니다.’ 하고 인사하자 나를 체포한 그 경찰관은 깜짝 놀랐읍니다.

“나는 그들 모두에게 증거할 수 있는 훌륭한 시간을 가졌고 서적 두부와 잡지 다섯부를 전할 수 있었읍니다. 그 관리들 중 한 사람은 나를 체포했던 경찰관에게, ‘바깥 기온이 너무 덥고 게다가 이 사람에겐 아무런 혐의도 없으니 자동차로 집까지 데려다 주라고 말했읍니다!”

한 회중의 기초

‘콰케’ 형제는 그 후 곧 진리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어느 학교 교장 선생과 접촉을 하였다. 연구가 시작되었고 그의 가족 전체가 진리 안으로 들어왔다. 이 새로운 형제 ‘쟌-밥티스테 야고’는 ‘콰케’ 형제와 접촉하여 곧 ‘증인’이 된 세명 중 한 사람이었다.

‘엠마누엘 죤슨’ 집에서 집회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집회가 열릴 때마다 어떤 소년들이 그 집에 투석질을 하곤 하였다. 그러나 ‘제임스’에게는 이들 젊은 불량배들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을 신속하게 중지시킬 경찰 친구들이 충분히 있었다!

‘길르앗’ 졸업생들의 도착

1972년 3월에 ‘조셉 크로 포오드’와 그의 아내가 ‘이비잔’에서 ‘와가두구’로 왔다. 그들의 목적은 선교인 집을 하나 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트볼타’에 임명되었던 여섯명의 ‘길르앗’ 졸업생을 위한 것이었다. ‘크로 포오드’ 부부는 ‘웨인’과 ‘파울라 알모스트’, ‘봅’과 ‘퍼언 허어드’ 그리고 ‘제이’와 ‘글로리아 마아틴’을 거기서 환영할 수 있었다. ‘크로 포오드’ 형제가 이들 새로운 선교인들에게 6주간의 언어 강습을 하고 그들의 새로운 임지에서 기반을 잡도록 돕는 마련을 하였다.

‘마아틴’ 형제가 가정의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주거 허가가 났고 선교인들은 ‘와가두구’에서 자리를 잘 잡았다. 한 동안 사업은 그곳 수도에서만 계속되었다. 그러나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곧 ‘보보-디울라소’로 파견되었고, 그래서 1973년에 그곳에도 선교인 집이 하나 설립되었다. 이전에 ‘케냐’에서 봉사했던 ‘로버어트’와 ‘라나 올리버’ 및 ‘브라이언’과 ‘잭퀄린 피어스’가 ‘보보-디울라소’로 임명되었다. 초목이 우거져 청청한 ‘케냐’의 ‘빅토리아’ 호수의 기름진 지역에 있다가 거의 일년 내내 메마른 ‘오트볼타’의 ‘사반나’에 오니까, 그러한 환경의 변화는 그들에게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왕국 전파의 확장

그 후 얼마 안되어 1973년 12월에 ‘오트볼타’의 형제들은 ‘아비잔’에서 열리는 “하나님의 승리” 대회에 참석하도록 초대되었다. 남쪽으로 긴 여행을 한 집단 가운데는 특별 ‘파이오니아’들로부터 진리를 배운 여러 명의 ‘오트볼타’인들이 끼어 있었다. 그 중 세명 ‘버어나아드 바코이’, ‘노오버어트 웨드라오고’ 그리고 ‘줄레스 탑소바’는 그 대회에서 물 침례로 그들의 헌신을 상징하였다. ‘오트볼타’에 돌아온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의 커다란 모임에 참석하여 얻게 된 즐거움을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열심에서 나타냈다.

후에 ‘버어나아드 바코이’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다. 그의 임명지는 이 나라 북부의 ‘사헬’ 지역에 있는 ‘와히구야’ 시였다. 지금은 그곳에 조그만 회중이 하나 있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또한 이 나라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인 ‘쿠두구’ 시에서 사업을 개시하도록 임명하였다.

‘웨인 알모스트’는 1978년까지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면서 ‘오트볼타’의 여러 회중들과 격지 집단들을 방문하였다. 그는 사업이 실제 시작되는 것을 목격해왔다. 증거 사업은 이제 주요 5개 도시 ‘와가두구’, ‘보보-디울라소’, ‘쿠두구’, ‘와히구야’ 및 ‘반포라’에서 수행되고 있다. 그리고 정부는 우리가 다른 두 도시 ‘카야’와 ‘파다느 구르마’로 이동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우리는 현재 이 나라에 다섯개의 회중을 가지고 있다.

전파 사업에서의 선교인의 역할

‘길르앗’ 학교의 학급이 졸업할 때마다 우리는 더 많은 일군들이 ‘오트볼타’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받게 되어 기뻤다. 현재 이 나라에는 선교인이 25명 있으며, 그들은 이곳에서 왕국 전파 사업을 확장하는 데 두드러진 몫을 담당해 왔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먼저 불어를 배워야 하였다. 언어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 결과 여러 가지 즐거운 경험들을, 특히 새로운 사람들이 그 지방 풍습에 항상 익숙하지 않는 나라에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경험들을 하게 되었다.

‘르네’와 ‘필립 앨더슨’은 미국에서 온 ‘길르앗’ 졸업생들이다. 1974년에 도착한 직후부터 ‘르네’와 ‘알모스트’ 자매는 야외 봉사에 나가 전파를 하였다. 아직도 언어 강습을 받고 있는 중인 ‘르네’ 자매는 불어로 제공할 연설을 준비하였다. 용기를 내어 그는 어느 한 가장에게 접근하여 담대하게 그에게 말하였다. 그 자매가 왕국 소식을 제공하고 있는 동안 그 가장은 넋을 잃고 그를 쳐다보았다.

‘연설’이 끝나자 그 남자는 ‘르네’를 아내로 살 수 있는지 질문하고 신부값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르네’는 마침내 사람들이 하는 말을 자기가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 남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할 모험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그는 질문을 잘못 이해하여 자기가 결혼한지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해들”(years)이란 단어인 ‘앙’(ans)을 서투르게 발음하여 그만 “나는 5‘안느’(anes: 당나귀들) 받고 결혼했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나는 결혼한지 5년됩니다’라고 말한다는 것이 그만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러자 그 남자는 실망한 어조로 “당신네 나라에서는 신부값이 꽤 비싸군요!”라고 대답하였다.

최초의 왕국회관

‘필립 앨더슨’은 다른 선교인들 ‘로이 마아킨’과 ‘웨인 알모스트’와 함께 ‘와가두구’에서 새로운 왕국회관을 하나 짓는 데 솔선하였다. ‘필립’은 그 계획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당초에 우리는 집회를 선교인 집의 거실에서 열었읍니다. 하지만 참석자 수가 급속도로 늘어났기 때문에 이 장소는 곧 너무 협소하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인 집 울타리 밖으로 ‘덧붙인 집’ 혹은 ‘기댄 집’을 하나 만들까 생각했읍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별채를 하나 짓기로 결정하였읍니다. 그리고 그것을 선교인 집의 울타리 안에다 짓기로 했읍니다.

“지방 형제들은 대단히 열심이었읍니다. 그들은 그 지방 ‘스타일’의 집을 지은 경험이 많다고 우리를 안심시키며, 적합한 왕국회관을 하나 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읍니다. 3면 벽이 트이고 지붕은 이엉으로 덮고, 대들보와 기둥으로 지지되는 커다란 장방형의 건물을 하나 짓기로 결정하였읍니다.”

“우리는 1975년 11월에 일을 시작했읍니다. 하지만 우리가 깨닫지 못했고 지방 형제들이 말하지 않은 점은 그들이 지었던 건물은 모두 조그만 둥근 형태의 오두막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장방형의 건물을 지으려하자 몇가지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읍니다. 하지만 함께 협력함으로써 그러한 문제들은 해결되었읍니다. 사실상 그 계획 전체는 회중을 연합시키는 훌륭한 영향을 주었읍니다.”

특히 주말이 되면 울타리 안이 온통 일하는 사람들로 붐비었다. 형제들은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짚을 꼬아서 지붕에 덮을 거적과 이엉을 만들고, 자매들은 식사를 준비하였다. 인종적 배경이 서로 다를 뿐 아니라, 특히 종족의 배경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집단을 이루어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에 찬양이 될 왕국회관을 짓는 일을 합심하여 성취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벽돌, ‘시멘트’ 및 이 계획에 필수적인 기타 재료들을 구입하기 위한 돈은 다 어디에서 충당되었는가? 비용의 대부분은 지방 형제들의 헌금으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선교인들은 휴가로 고향에 갔을 때 고향의 여러 회중들에게 그 계획에 관한 슬라이드’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은 형제들이 비용을 충당하도록 돕기 위해 자진하여 헌금을 하였다.

이를테면, ‘마르 가리타 쾨니게르’가 독일을 방문하러 갔을 때 그는 왕국회관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 무렵 그 회관은 건축중이었고, 철근 지붕이 보다 실용적이고 견고할 것으로 보였다. 이 말을 듣자 독일의 한 형제는 철판을 사는 데 필요한 전체 비용을 충당할 수표를 한장 끊어 주었다.

‘캘리포오니아’의 80세 된 한 자매는 요양원에 갇힌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5‘달러’를 보냈다. 음향 시설은 독일의 한 형제가 특별히 제작하여 그 회중에 기증하였다. 참으로, 그 계획은 여호와의 백성의 전세계적인 가족의 도움으로 완성되었다.

여호와와 전세계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감사가 흘러 넘치는 마음으로 94명이 1976년 5월 1일 토요일에 그 새로 완성된 왕국회관을 여호와께 봉헌하기 위해 그곳에 함께 모였다. ‘아비잔’ 지부 사무실의 ‘샘 길먼’이 봉헌식 연설을 하였고 ‘웨인 알모스트’는 ‘오트볼타’ 전국에 걸친 왕국 사업의 확장에 대한 ‘슬라이드’를 보여 주었다.

“승리의 믿음” 대회에 참여함

‘오트볼타’의 형제들이 1978년 12월에 남쪽으로 여행하여 “승리의 믿음” 국제 대회에 참석한 일은 참으로 굉장한 경험이었다! ‘쟌-밥티스테 야고’와 그의 전 가족은 ‘와가두구’에서 ‘아비잔’으로 가는, 특별히 마련된 객차를 타고 여행하기 위해 1년 이상이나 돈을 저축하였다. ‘야고’ 형제의 장남은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다. 12살 된 그의 차남 ‘마트디아스’는 이 대회 토요일 아침에 침례를 받았기 때문에 이 대회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오트볼타’에서 온 형제들을 그들의 경험담들로 대회 청중을 즐겁게 하였다. ‘마트디아스’는, 집주인 역을 한 자기 동생에게 증거하는 방법을 실연하였다. 선교인들은 ‘야고’의 자녀들이 어떻게 매주 그들과 함께 봉사하는지 이야기하였다.

‘야고’ 형제는 보조 ‘파이오니아’를 했지만 야외 봉사에서 ‘마트디아스’만큼 봉사 시간을 많이 바칠 수 없었다. ‘마트디아스’의 젊은 열심은 훌륭한 증거가 되었다. 그를 조롱하던 어른들도 놀라게 되었다. 한 남자는 ‘마트디아스’에게 비웃는 쪼로,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고 질문하였다. ‘마트디아스’가 성경을 척 펼쳐서 ‘히브리’서 11:1에 나오는 믿음의 정의를 그 사람에게 읽어 주자 그는 깜짝 놀랐다.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이러한 그리스도인 열성은 ‘오트볼타’에서 놀라운 결과들을 산출하고 있다. 과거 1969년에 단 한명의 전도인 ‘엠마누엘 죤슨’으로 시작하여 1979년 12월에는 활동적인 왕국 전도인 137명이란 최고 기록에 달했다. 그리고 1980년 3월에는 ‘기념식’을 지키기 위해 이 나라의 7개 회중에 691명이 함께 모였다. 앞으로 여호와의 찬양자들의 수가 더욱 늘어날 전망은 참으로 밝다! ‘오트볼타’의 형제와 자매들은 이러한 새로운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가도록 돕는 데 전력을 다할 결심이다.

[162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오트볼타

말리

니제르

코트디브와르

가나

토고

베닌

와히구야

카야

와가두구

쿠두구

파다느구르마

보보-디울라소

반포라

[163면 삽화]

‘엠마누엘 죤슨’, 여러 해 동안 ‘오트볼타’의 유일한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164면 삽화]

학교 교장인 ‘쟌-밥티스테 야고’와 접촉한 ‘제임스콰케’(왼쪽). 그와 그의 가족 전체가 ‘증인’이 되었다

[166면 삽화]

‘와가두구’에 최초의 왕국회관을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