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바로 가기

차례 바로 가기

‘코트디브와르’(상아 해안)

‘코트디브와르’(상아 해안)

‘코트디브와르’(상아 해안)

‘코트디브와르’는 한 때 서 ‘아프리카’의 8개 지역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일부였던 나라들 가운데 하나이다. 1895년에서 1958년까지 ‘프랑스’가 이 지역들을 다스렸다. 이 공동체는 ‘프랑스’의 서 ‘아프리카’라고 불리웠다.

‘코트디브와르’(상아 해안)가 코끼리의 어금니 상아 거래로 인해 그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과거 1400년대 후반기였다. 지금은 널리 행해지고 있는 사냥 때문에 코끼리는 주로 서남방의 산림 지역에 국한되어 있다. 10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어금니 표본들을 찾아볼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오늘날에는 무게가 아마 최고 18내지 23‘킬로그램’까지 나가는 코끼리 어금니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코트디브와르’는 1890년대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 후 1960년에 와서 이 나라는 독립국이 되었다. 서 ‘아프리카’, ‘프랑스’ 통치령의 독립 운동을 지도해 온 ‘펠릭스 후폭에-보이그니’가 1960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그 후 5년마다 재선되어 왔으며 아직도 그 정부를 이끌고 있다.

이 나라는 서 ‘아프리카’의 불룩 튀어 나온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리베리아’ 및 ‘기니’, 동쪽으로는 ‘가나’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 북쪽에는 사면이 육지인 ‘오트볼타’와 ‘말리’가 있다. ‘코트디브와르’는 면적이 약 322,000평방 ‘킬로미터’로 ‘엘살바도르’의 15배 가량된다. 이것은 대략 미합중국의 ‘뉴우멕시코’ 주와 같은 크기이다.

‘코트디브와르’는 열대 지방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관념을 가진 전형적인 나라이다. 해안을 끼고 있고 기후는 고온다습하다. 전 국토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울창한 수림들이 북쪽으로 뻗어나가 중부의 관목이 무성한 ‘사바나’로 점차 이어져 마침내 잡목이 우거진 건조한 ‘사바나’로 연결되어 있다. 최근에 ‘사하라’ 사막으로부터 가뭄의 영향이 다소 아래로 미치긴 하였지만 보다 남부의 열대 우림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코트디브와르’에는 약 7,500,00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그 중 거의 절반이 20세 미만이다. 아름다운 수도 ‘아비잔’은 인구가 백만이 넘는데, 1945년까지만 해도 인구 약 20,000정도의 비교적 작은 도시였었다. 이 해안 수도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보면 사람들이 ‘바나나’, ‘코오피’, ‘코코아’ 및 ‘파인애플’ 농장들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서부의 ‘가그노아’나 ‘달로아’ 시쪽으로는 사람들이 논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나, 벌목 ‘캠프’에서 거대한 ‘마호가니’ 나무들을 베어넘기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코트디브와르’ 주민은 각기 다른 여러 종족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난 세기 말엽에는 60종족이 넘는 집단들이 이 나라에서 거주하였다. 종족 집단들이 함께 섞여 사는 일은 극히 드물며, 각 집단은 서로 떨어져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급 영농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동부에는 ‘가나’에서 온 ‘아샨티’족들이 살고 있다. ‘베테’족은 ‘리베리아’ 영토 안으로 뻗어있는 서부 산림에서 왔다. 키가 큰 사막민은 ‘말리’와 ‘오트볼타’에서 왔으며, ‘단’족은 ‘기니’의 산지에서 왔다. 모래와 야자수로 둘러싸인 개펄 옆에는 해안을 따라 개펄 어업을 주된 경제 활동으로 삼고 있는 ‘에브리’족이 살고 있다.

불어가 공용어이긴 하지만 이 나라에는 방언과 사투리가 많이 있다. 주민들은 다섯가지 주요 언어 집단으로 이루어진 약 70가지의 토착어를 사용한다. 이들 언어 대부분은 기록 형태로 옮기고자 하는 시도가 거의 없었거나 전혀 없었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상업 용어는 회교 상인들이 사용하는 ‘듈라’어이며 다른 많은 사람들도 거래를 하기 위해 이 언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코트디브와르’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 가지 언어 즉 자신들의 토착어와 불어 및 ‘듈라’어를 사용한다.

주민들의 종교

‘코트디브와르’가 1890년대에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을 때, ‘가톨릭’ 선교인들이 여기에 발판을 구축하였다. 해안 본거지로부터 시작하여 그들은 식민지 세력과 손을 맞잡고 점차 그들의 가르침을 퍼뜨려 나갔다. 많은 집단들, 특히 해안 지역의 집단들이 ‘가톨릭’교를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또한 물활론에 기초한 그들 종족의 종교에도 고착하였다. 물활론이란 강, 호수, 개펄 등과 같은 생명이 없는 물체에 영혼이 있다고 혹은 숭상할 만한 영들이 거처하고 있다고 믿는 신앙이다.

북부 지방에서는 이미 회교로 개종한 ‘수단’족이 쇄도해 옴에 따라 회교가 그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회교의 확장은 커다란 저항에 부딪치게 되었고, 물활론자들이 이 생소한 “복종”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들은 개종을 했을 경우라도 자기들의 물활론 신앙에 역시 고착하였다.

근래에 와서 ‘프로테스탄트’ 종파들 역시 다소 진전이 있었다. 1913년에서 1936년 사이에 ‘해리즘’이란 한 신흥 종교가 ‘코트디브와르’에서 급속히 퍼져나갔다. ‘해리즘’이란, 이교의 창시자인 ‘리베리아’의 한 전도사 ‘윌리엄 웨이드 해리스’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에 기초를 둔 그의 가르침은 일부 성서 사상에 노래와 춤과 이교 의식을 융합한 지방적인 맛을 강하게 풍기는 것이었다.

나라가 독립하여 더 많은 종교적인 자유가 허용되자 다른 여러 종파와 ‘프로테스탄트’ 단체들이 생겨났다. 인구의 약 60‘퍼센트’가 물활론자이며, 25‘퍼센트’는 회교도이고, 15‘퍼센트’는 자칭 그리스도인인, 그러한 종교적 분위기 속으로 참 그리스도교의 빛이 ‘코트디브와르’에 비추기 시작한 것은 30년이 조금 넘는 일이었다.

최초로 기록된 야외 봉사

1948년 2월에 ‘길르앗’을 졸업한 ‘윌리엄 C. 월던’과 ‘조오지 L. 코버어트’가 ‘코트디브와르’로 임명을 받았다. ‘비자’를 얻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협회’는 결국 그들을 ‘코트디브와르’ 입국 허가를 얻기 위해 황금 해안(현재의 ‘가나’)으로 파견하였다.

1949년 3월에 당시 황금 해안 지부 감독자였던 ‘알프레드 G. 베이커’와 ‘윌리엄 월던’이 ‘아비잔’으로 갔다. 거기서 그들은 ‘프랑스’ 총독과 접촉하여 ‘비자’를 신청하였다. 총독은 제출한 서류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듯 하였지만 아무런 즉각적인 조처가 취해지지는 않았다. 형제들은 ‘아비잔’에 머무는 나흘동안 ‘코트디브와르’에서 최초로 기록된 야외 봉사를 하였다.

시간을 질질 끌어 만 일년이 흘렀는데도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반복해서 서신을 띄웠는데도 선교인들의 입국에 대한 아무런 허락이 나지 않았다. 결국, 황금 해안 지부에서는 ‘알프레드 엘리아스 슈우터’를 ‘코트디브와르’에 정규 ‘파이오니아’로 파견하게 되었다. ‘알프레드’는 황금 해안의 수도 ‘아크라’에서 ‘파이오니아’로 봉사해 왔었다.

정기적인 전파가 시작되다

‘슈우터’ 형제의 ‘아비잔’에서의 첫 야외 봉사 보고가 1950년 6월에 ‘아크라’에 접수되었다. 그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100시간을 바쳤고 20건의 재방문을 하였고 2건의 가정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 다음 달에 그는 ‘아크라’에서 ‘아비잔’으로 이사했던 한 무활동 전도인을 재활동하게 하였다. 8월쯤 되어 ‘알프레드’는 12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었다.

‘슈우터’ 형제는 ‘아비잔’의 한 구역인 ‘트레이취빌’의 개펄 옆에 빌린 한 조그만 방의 방세를 마련하기 위해 시간제 일자리를 구하였다. 그는 1950년 12월에 황금 해안에서 열린 전국 대회에 참석하였다. ‘베이커’ 형제는 이 대회에서 그와 ‘코트디브와르’에서의 사업에 대해 토의할 수 있었다. ‘알프레드’의 아내도 1951년 2월에 ‘아비잔’에서 정규 ‘파이오니아’로 자기 남편과 합세하였다. 그들은 ‘코트디브와르’ 주민이 성서 진리들을 배우도록 돕는 데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1951년 3월에 ‘아비잔’에서 있었던 ‘기념식’에 17명이 참석하였고 특별 공개 강연에는 25명이 참석하였다. 서적 연구 집단이 형성되어 정기적으로 12명이 참석하였다.

‘길르앗’ 졸업생들의 입국

1951년 7월에 ‘길르앗’ 제16기 졸업생 ‘가브리엘’과 ‘플로렌스 패터슨’이 ‘코트디브와르’ 입국 허가를 얻어, ‘슈우터’ 부부와 함께 있게 되었다. 황금 해안의 원주민인 ‘가브리엘’은 수년전에 ‘알프레드 슈우터’와 연구를 하여 그가 진리의 정확한 지식에 이르도록 도움을 주었었다. 그들의 외국 임지에서의 해후는 커다란 기쁨을 안겨다 준 재결합이었다.

이들 젊은 부부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가브리엘’은 그들의 숙소 실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가 ‘아비잔’에 도착했을 때 ‘알프레드’는 그들의 단칸방을 판지로 이어서 늘렸읍니다. 그는 ‘플로렌스’와 내가 잠을 잘 곳을 마련하기 위해 ‘타르’를 칠한 종이로 지붕을 만들었읍니다. 이 종이 지붕으로 된 오두막 아래서 우리는 식사를 마련하여 함께 먹었읍니다. 비가 올 때는 빗방울이 떨어져 잠을 깨곤 하였읍니다. 우리는 구석으로 피해 주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썼읍니다.”

최초의 제자

이들 ‘파이오니아’들은 그러한 견디기 어려운 상태에도 불구하고 실망하지 않았다. 머지 않아 그들의 활동은 참된 열매가 맺었다. 황금 해안에서 온 ‘로버어트 마아킨’이란 사람이 한 친구 사무실에서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 한권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 책을 빌려갈 수 있는지 물었다. 친구는 그 책을 빌려주질 않고 ‘패터슨’ 부부와 ‘슈우터’ 부부가 사는 곳을 알려 주었다.

‘로버어트’는 당장 개펄가에 있는 그 조그만 집으로 달려갔다. 그는 그 책을 구입했으며, ‘패터슨’ 형제가 그와 함께 그 사람집에 가서 두 시간 동안 연구를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가브리엘’은 ‘로버트’에게 증거 사업이 어떻게 수행되고 있는지 보기 위해 야외 봉사에 나가자고 초대하였다. 그렇게 하여 그는 ‘코트디브와르’ 주민 가운데 최초로 ‘여호와의 증인’이 되는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로버어트 마아킨’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1952년 4월에 ‘아비잔’의 ‘그보보’란 개펄에서 침례를 받았다.

‘로버어트’의 집에서 곧 집회가 열렸다. 대개 집회는 먼저 영어로 사회되었고, 참석한 사람들에 따라 불어나 ‘가나’의 ‘에웨’어와 ‘트위’어 혹은 그 지방 언어 중 하나로 통역되었다. 처음으로 싹트기 시작한 이 집단의 유일한 성원들은 ‘코트디브와르’에 온 외국인들, 즉 황금 해안, ‘프랑스’령 ‘토고’와 ‘다호메이’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1954년이 되어서야 ‘코트디브와르’의 몇몇 지방 주민이 침례를 받았다.

형제들에게 불리한 법적 조처

다섯명이 ‘파이오니아’ 전파 사업에 합세한 후, 1952년 여름에 형제들이 경찰에 고발되었다. ‘패터슨’ 형제가 체포되었고 그의 집은 수색당하였다. ‘협회’ 서적 중 아무 것도 정부의 인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밝혀내기 위해서였다. ‘유럽’인 경찰국장은 조처를 취하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그의 부하들이 금지된 서적을 100권 이상이나 발견했기 때문에 그 문제를 당국에 보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책들 중 일부를 자기가 읽어보기 위해 가지고 갔으며, ‘패터슨’ 형제의 좋은 친구가 되었다.

형제들은 그 당시 대법원이 있는 인근 ‘그랑바상’ 시에서 재판을 받도록 소환되었다. 그들은 금지된 서적을 소유한 일과 “외국인 통행증”을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황금 해안 지부의 종 ‘알프레드 베이커’가 ‘코트디브와르’로 와서 형제들을 위해 변호사 한 사람을 고용하였다. 그 변호사가 이 사건을 매우 설득력있게 변호해 주었지만, 재판부는 정부의 판정을 지지하는 이러한 판결을 내렸다. “‘코트디브와르’ 내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전파와 서적을 금지함.” ‘패터슨’ 형제와 ‘슈우터’ 형제는 유죄가 선고되었고 일 개월에서 육 개월까지의 집행 유예 판결을 받았다. 그에 더하여 5,000‘프랑’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몇 개월 후에 형제들이 ‘그랑 바상’에서 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곳 시장에서 그들은 협회의 압수된 서적들이 판매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정부는 그들이 압수한 서적들을 어느 상인에게 판 일에 대해선 거의 관심이 없는 것이 분명하였다. 형제들은 당장 자기 자신들의 책들 대부분을 사버렸다! 이 나라에 서적을 반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분명히 하나의 축복이었다.

정부 관리들로부터의 도움

동시에, 경찰과 이민 당국은 ‘비자’가 없다는 것을 근거로 ‘파이오니아’들을 국외로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 난처한 문제는 1952년과 1953년까지 계속되었다. 영구 ‘비자’를 얻어내는 길을 찾던 중 형제들은 여러 정부 관청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펠릭스 후프에-보이그니’와 ‘우에진 쿨리발리’를 포함하여 일부 정부의 영향력 있는 요원들과 접촉을 가졌다.

나중에 ‘코트디브와르’의 대통령이 된 ‘후푸에-보이그니’ 씨는 그 당시에 민주 ‘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었으며, ‘코트디브와르’의 지방 의회 의장이자 ‘프랑스’ ‘파리’의 ‘부르봉’ 왕궁에 있는 정부 의회 의원이었다. ‘패터슨’ 형제는 이 유명한 관리에게 자기의 문제를 설명했는데, 그는 동정적으로 들어주었다. ‘후푸에-보이그니’ 씨는 그 때 형제들이 국내에 체류할 수 있도록 해 보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진리는 아무 것도 막을 길이 없읍니다. 그것은 힘차게 흐르는 강물과 같아서 제방을 쌓아도 그것을 흘러넘치고 맙니다.” 그는 그의 부관, ‘우에진 쿨리발리’에게 형제들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는 나중에 ‘패터슨’ 형제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외국인 통행증은 ‘프랑스’의 서 ‘아프리카’의 정부 소재지인 ‘세네갈’의 ‘다카르’에서 발부받아야 하였다. ‘쿨리발리’ 씨가 중재에 나서 ‘패터슨’ 형제가 그것을 쉽게 얻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는 또한 국가 보안국장에게 ‘패터슨’ 형제를 대신해서 말해주어 ‘비자’를 연기하도록 주선도 해주었다. 이 관리는 ‘가톨릭’ 사제 한 사람과 감리교 목사 한 사람이 자기에게 와서 ‘여호와의 증인’이 전파하고 있는 것은 ‘코트디브와르’ 국민에게 좋지 않다고 말하더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쿨리발리’ 씨의 견해는 어떠했는가?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이 나라 국민을 대표합니다. 우리는 국민들이며, 또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이 나라 이곳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훌륭한 기초를 놓는 일

‘쿨리발리’ 씨의 중재가 있은 후로 형제들은 다소 평화스럽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들의 임명을 계속 수행할 수 있었다. 1953년에는 17명의 왕국 전도인 신기록에 달하였다. 3월의 ‘기념식’에는 85명이 참석하였다.

‘패터슨’ 형제는 ‘협회’에 이렇게 제안하였다. “몇몇 형제들이 이제 종으로 섬길 수 있기 때문에 이곳에 회중을 세우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하여 1954년 4월 1일에 ‘아비잔’ 시 ‘트레이취빌’에 첫 회중이 형성되었다.

형제들은 여러 외곽 지역들을 방문하여 전파할 목적으로 조그만 ‘트럭’을 하나 빌려서 여행중에 왕국 노래들을 부르곤 하였다. 오전에 전파를 한 다음 그들은 간단한 야유회를 즐기고, 그 다음에 학교 강당이나 어느 관심자 집의 마당에서 공개 강연을 열곤 하였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트럭’에 가득 타고서 피곤하지만 행복한 기분으로 역시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1954년에 매달 야외 봉사에 참여한 평균 전도인 수는 19명이었다.

교회의 기둥들이 ‘증인’이 되다

1955년에 있었던 가장 흥미있는 일들 가운데는 지방 교회에서 기둥과 같은 두 사람이 진리를 위해 입장을 취한 일이었다. 흥미롭게도 그 중 한 사람인 ‘사무엘 데누우’는 ‘로버어트 마아킨’이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보게 되었던 바로 그 사무실 친구였다. ‘로버어트’를 ‘패터슨’ 형제에게 인도하여 ‘코트디브와르’의 최초의 제자로 결실을 맺게 한 사람이 ‘사무엘’이었다.

그런데 ‘사무엘 데누우’는 지방 감리 교회의 집행위원 중 한 사람이었다. 그와 사경회 회장 ‘엠마누엘 콰쿠 글라고’가 ‘패터슨’ 형제를 그 사경회에서 연설하도록 초대하였다. 그의 연설은 호응을 받았으며 ‘데누우’ 씨와 ‘글라고’ 씨를 포함하여 그 사경회의 많은 성원들과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 교회의 기둥같은 이들 두 사람은 진리 안에서 잘 발전하였으나 반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전 교회를 버리고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한 이유를 설명하도록 그 감리 교회 목사들에게 불려갔다. ‘사무엘 데누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여러분은 나에게 한 사람 이상의 아내가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읍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나를 교회의 고문과 집행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임명하였읍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내가 나의 생활을 성경과 일치시키지 않는다면 침례를 주지 않겠다고 말하였읍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도움으로 나는 여호와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을 어떻게 숭배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읍니다.”

‘엠마누엘 글라고’는 감리교회와 ‘여호와의 증인’과의 기본적인 차이점들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의 교회에서는 평신도들이 하나님보다도 교직자들을 더 숭배하고 순종하고 있읍니다. 교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없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분의 종들로서,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가르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숭배하고 순종합니다.”

교직자 가운데 한 사람이 그들 두 사람이 돌아오면 교회에서 전파하는 일을 허락하겠다고 답변하였다. 그러나 ‘엠마누엘’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무엇을 전파하겠읍니까? 그 맨날 꼭같은 인간 영혼의 불멸이며 사후의 불타는 지옥이며 ‘신비의’ 삼위일체 등과 같은 켸켸묵은 내용을 가르치란 말입니까? 싫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가르침들을 통해 교회의 이러한 교리들이 거짓이며 이교 사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읍니다.”

그 토론은 두 시간 이상이나 계속되었지만 목사들은 그들의 이전 교회 성원들을 다시 얻지 못한 채 떠나고 말았다. ‘사무엘 데누우’는 그후 얼마 안가서 자진해서 자기 집을 왕국회관으로 사용하도록 제공하였다. 그리고 이내 그곳 ‘코트디브와르’에 임명된 대부분의 선교인들의 거처가 되었다.

황금 해안에서 열린 1955년 대회

1955년에 있었던 가장 큰 주요 행사는 의심의 여지 없이 11월 17-20일, 황금 해안, ‘아크라’에서 열린 대회였다. ‘코트디브와르’에서 25명이 소형 ‘트럭’과 배를 번갈아 타고 그 대회에 참석하였다. 국경에서 ‘패터슨’ 형제는 배에서 내려 국경 관리들에게 이 사람들은 ‘아크라’에서 열리는 “동료 시민들” 대회에 참석하러 가는 “신세계” 시민들이라고 설명해주었다. 형제들 중 아무도 방해를 받지 않고 배가 통과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드디어 그 집단은 ‘아크라’에 도착하였다. 대회장에서 그들은 한가지 놀라운 일을 보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집회에 100명이 함께 모인 것을 거의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첫날 회기에 7,000명이 참석하였고, 공개 집회에는 14,331명이 참석하였다! ‘코트디브와르’에서 전파 사업을 개시했던 ‘슈우터’ 부부는 이제 황금 해안에 남게 되었다. 하지만, ‘코트디브와르’에서 온 나머지 형제들은 전파 사업을 수행할 새로운 활력을 얻고 되돌아갔다.

‘부아케’에서 사업을 시작하다

1955년까지만 해도 증거 사업은 ‘아비잔’과 그 인근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다른 지역에 있는 그들의 친척에게 전파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접촉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아크라’ 대회 후에 ‘로버어트 마아킨’은 고용주에 의해 ‘코트디브와르’에서 둘째로 큰 도시 ‘부아케’로 전근 발령을 받았다.

처음에 ‘로버어트’는 형제들과 떨어져서 영적인 생활을 어떻게 해 나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염려하였다. 그러나 ‘패터슨’ 형제는 그에게 이렇게 일러주었다. “그곳에 도착하면 조그만 집을 얻지 말고 큰 집을 얻으시오. 그러면 거기에 오는 모든 관심자들을 위해 거기서 집회를 열 수 있을 겁니다.”

‘부아케’에 도착했을 때 ‘로버어트’는 자기 조카가 이미 조그만 집을 하나 마련해 놓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패터슨’ 형제의 지시에 충실하게 그것을 거절하고 장차 한 회중이 집회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다른 집을 구하였다. 곧 그는 전파 사업을 하던 중에 어느 회교 가족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 중 20명이나 되는 사람이 토론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짧은 기간에 그 도시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 나라 전체에서 1956년에 평균 53명이 왕국 전파에 참여하였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의 방문

1957년 10월에 한 순회 감독자의 방문이 시작되었다. 황금 해안(그 해에 ‘가나’로 개칭되었다.)에서 온 ‘윌리엄 T. 다아코’가 ‘아비잔’ 회중과 ‘부아케’의 조그만 격지집단 전도인들을 섬겼다. 당시에는 ‘달로아’, ‘딤보크로’, ‘그랑 바상’ 및 ‘아비잔’의 교외에 있는 ‘코우마시’에도 격지 전도인들이 있었다. 1957년 12월에 ‘패터슨’ 형제가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그 이듬해 ‘부아케’ 집단은 16명의 전도인을 보고하였다.

‘부아케’에 특별 ‘파이오니아’가 가다

‘가나’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던 ‘나이지리아’ 형제 ‘다니엘케보’가 1958년 9월에 봉사하기 위해 ‘부아케’로 왔다. 그는 도시간을 운행하는 화물 자동차를 타고 이틀간 여행한 후 황토 먼지투성이가 된 채 지친 몸으로 도착했으나 형제들을 만나게 되어 대단히 기뻤다. 그 다음날 그는 지방 형제 한 사람을 동반하고 그 도시 거주 신고를 하기 위해 경찰서에 갔다.

경찰은 즉각 ‘다니엘’의 서적을 압수하고 그들 두 사람을 몇시간 동안 억류하였다. 형제들은 그들의 활동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3개월 후에 법정에 출두하라는 영장을 받았다. 재판관은 그들에게 각각 2,500‘프랑’의 벌금형을 내렸다.

하지만, 동정심을 느낀 ‘아프리카’ 하급 관리들은 형제들에게 그 벌금을 내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그들은 벌금을 받으러 파견되면 형제들을 만날 수 없었다고 말하겠다고 하였다. 이 경험은 당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공적인 태도를 아주 잘 설명해주었다. 그러한 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실망하지 않고 ‘부아케’에서 증거를 시작하였다.

외국인들이 강제 출국을 당하다

1958년에 ‘코트디브와르’에서 진리를 받아들인 지방 사람은 여전히 극소수였다. 대다수의 형제들은 원래 ‘토고’와 ‘다호메이’(지금은 ‘베닌’이라고 부름) 출신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종교를 흔히 ‘다호메이’ 종교라고 불렀다. 한 형제는 단순히 그가 ‘증인’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종종 그를 ‘다호메이’인으로 착각하곤 하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1958년에 와서, ‘코트디브와르’ 내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을 둘러싸고 문제가 발생하였다. 폭동들이 일어났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 사태는 악화되어 정부가 ‘코트디브와르’ 내에 살고 있는 ‘토고’와 ‘다호메이’ 시민들의 안전을 더 이상 보장할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요청을 받았다.

형제들 가운데 폭동으로 사망한 사람은 없었지만, 다른 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생명도 위태로왔다. 그래서 정부의 명령에 순종하여 많은 형제들도 이 나라를 떠나고 말았다. 그 결과, ‘코트디브와르’는 2년간의 수고의 결실인 25명 가량의 왕국 전도인을 잃고 말았었다. 이들 중 많은 형제들은 회중에서 인도하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손실이 대단히 크게 느껴졌다.

이제 제기되는 질문은, 지방 형제들이 그들 자신의 힘으로 견뎌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 대답은 물론, 그렇다! 였다. ‘패터슨’ 형제는 자기가 격지 전도인들을 방문하러 멀리 떠나 있을 때에도 일들을 돌볼 수 있도록, ‘아비잔’ 회중에서 책임을 맡을 수 있는 형제들을 즉시 훈련시키기 시작하였다. 전파 활동은 계속되었고, 얼마 안가서 새로운 제자들이 폭동으로 인해 떠난 형제들을 대치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출국으로 인해, 평균 전도인 수가 1958년의 60명에서 1959년에 46명으로 감소되었다.

그는 사업이 성장하도록 도왔다

이 무렵 ‘아비잔’ 공항에서 근무하던 ‘블레이즈 블레이’란 사람이 불어판 「파수대」를 한부 받았다. 그는 읽은 내용이 마음에 들어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편지를 보냈다. 마침내 ‘패터슨’ 형제가 그의 주소를 받고 연락을 하였다.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1959년 3월에 ‘블레이즈’는 ‘가나’, ‘쿠마시’에서 열리는 ‘성의’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장도에 오른 20명의 ‘코트디브와르’ 대표자 가운데 끼어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충고와 격려를 받는 13,754명의 군중 속에 끼게 된 것은 그에게 얼마나 감격스런 일이었겠는가!

‘블레이즈’는 집회가 열리는 곳에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아비잔’ 교외 ‘뽀르 부에’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세번씩 참석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블레이’ 형제는 자기 지역에 살고 있는 다른 관심자들을 함께 모아서 거기서 그들을 위해 정기적인 집회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부에’ 항구회중의 핵심이 형성되었다.

1959년 6월에 최초의 순회 대회가 ‘코트디브와르’에서 열리어 62명이 참석하였다. 육 개월 후 ‘아비잔’에서 또 한 차례의 대회가 열렸다. 이 때에 153명이 최초로 “성의” 대회들에 관한 ‘협회’의 영화를 구경하는 즐거움을 가졌다.

꾸준한 발전

‘부아케’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던 ‘다니엘 케보’는 이 나라 서부의 ‘가그노아’ 읍으로 옮겼다. 그는 거기서 ‘가나’에서 온 특별 ‘파이오니아’ ‘아브라함 앰폰사’와 연합하게 되었다. 머지 않아 하나의 조그만 집단이 번창하고 있었다. 형제들은 ‘가나’에서 온 지역 감독자 ‘어어니스트 펑크’의 방문을 받았으며, 그는 그곳에 모인 수백명의 관중에게 ‘협회’의 영화를 하나 보여 주었다. ‘가그노아’의 한 회교 족장이 친절하게도 영화 상영을 위해 음향 장비를 빌려 주었으며, 심지어 그 장비를 작동하기 위해 부하 한 사람을 보내주기까지 하였다.

‘아비잔’ 주변에 흩으져 있는 마을들도 증거를 받고 있었다. ‘부에’ 항구에서 모이는 집단 외에 또 다른 한 집단이 ‘코우마시’ 읍에서 모이기 시작하였다. ‘아비잔’에서 해안쪽으로 4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그랑 바상’ 읍도 증거를 받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약 30명의 전도인으로 이루어진 한 회중이 그곳에서 번창하고 있다.

이들 집단들은 각각 ‘가나’에서 온 특별 ‘파이오니아’들의 도움을 받았다. ‘죠오지 콰케’는 ‘코우마시’를 ‘제이콥 핵크먼’은 ‘그랑 바상’을 각각 도왔다. ‘패터슨’ 부부가 ‘가나’로 재임되었기 때문에 ‘데이빗 아두-마누’가 ‘패터슨’ 형제를 대신하여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이렇게 하여 1961 봉사년도는 왕국 전도인 121명이란 훌륭한 신기록으로 끝마쳤다.

파란만장한 여행

1962년은 ‘코트디브와르’의 한 대표단이 ‘가나’, ‘아크라’에서 열리는 지역 대회에 참석함으로써 좋은 출발을 하였다. 이 대표단은 국경의 여러 개펄을 건너며 해안을 따라 여행을 하고 다음에는 도시간을 운행하는 화물 자동차를 이용하였다. 흔히 운전사들이 다소 운명에 맡기는 태도로 운전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교통 수단을 이용할 때 어떤 모험을 각오해야 하였다. 그들은 “만일 우리가 여기에서 거기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무 것도 우리를 중단시킬 수 없읍니다.”고 말하면서 적당히 운전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가 자주 발생한다. 그런데 아아, 이 화물 자동차 여행도 예외가 아님이 증명된 것이다.

국경의 ‘가나’쪽 ‘타코라디’ 부근에서 그 화물 자동차가 그만 길을 벗어나 전복하고 말았다. 곤히 잠을 자고 있던 한 형제는 그대로 자동차에서 빠져나와 어느 갈대 수풀 속에 떨어져 버렸다. 몇분간 마음조이며 찾은 결과 형제들은 그가 수풀 속에 다치지도 않은 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형제들 가운데서 심하게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다른 승객들 가운데는 여럿이 중상을 입었다. 한 병원에서 가벼운 상처를 치료 받고 나서 지방 형제들과 하루 밤을 묵은 다음, 대표단은 그 이튿날에 있을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을 계속하였으며 그 대회를 온전히 즐겼다!

‘부아케’에서 곤경에 처하다

1962년 ‘부아케’에서 열린 순회 대회에서, 여러 해 동안 왕국 전파 사업의 성장에 악영향을 미친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첫날 밤에 182명이 참석하였다. 그 대회중 늦게 제명당한 한 사람이 와서 소란을 피웠다. 힘으로 제지를 당하던 중 그 사람이 갑자기 땅바닥에 쓰러져 간질병 발작을 하는 것 같았다. 이 때 연락을 받은 경찰이 도착하였다. 그들은 그 사람을 병원으로 옮기는 것을 감시하였으며, 그는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흔히 죽음을 단순히 자연적인 원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노령으로 인한 죽음까지도 마술이나 독살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도 이 사람이 아팠었다는 것이 알려졌었고 또 흥분하거나 화를 내지 말라는 의사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척들에게는 전혀 통하지가 않았다. 그들은 병원측이 그 사람이 심장마비로 인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그가 타살되었다고 믿었다.

고소가 제기되었기 때문에 결국 아홉명의 형제가 투옥되었다. 그중 다섯은 며칠 후에 석방되었으나 나머지 네 사람은 살인 혐의로 정식 기소되었다. 넉달 동안 감옥살이를 한 후 세 사람이 더 석방되었다. 검시 결과 그들의 무죄가 결정적으로 입증되었다. 나머지 한 형제는 사망한 사람의 친척들이 복수하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안전을 위해 얼마간 더 감금되어 있었다.

옥중에서 형제들은 대담하게 증거를 하였다. 그 지방 제7일 안식교인들은 모든 재소자들 앞에서 형제들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어야 할 입장이 되자 교도소 방문을 중지하였다. 감옥에서 공개 강연을 하는 일이 형제들에게 허락되었다. 그들이 석방되기 전에 3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공개 강연에 참석하고 있었다. 다른 정기적인 집회들도 열렸다. 그리고 두명의 재소자가 진리를 위한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형제들이 무죄함이 입증되었지만 그 사건은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주로 그 죽은 사람의 친척들로 구성되었던 ‘가그노아’ 집단은 얼마 후에 해체되고 말았다. ‘부아케’ 회중도 해산되었다. 그 이유는 그 후 오랫동안 형제들이 시내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는 일은 대단히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도움을 베풀다

1962년 9월에 ‘하이티’에서 추방당한 선교인 ‘심몬’ 형제와 자매가 ‘코트디브와르’에 도착하였다. 그 다음 달에 ‘아비잔’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최고 참석자 수는 108명으로 참석자 수가 줄어든 것은 최근의 분쟁을 여실히 반영하는 것이었다. ‘가나’ 지부의 종 ‘허어버어트 제닝즈’가 참석하였다. 그는 선교인들을 더 많이 파견하면 이 나라의 안정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느꼈다. 그리하여 ‘길르앗’ 제37기생 ‘에니볼드슨’ 형제와 자매가 이곳으로 임명되어 1963년 1월에 ‘아비잔’에 도착하였다. 몇 개월 후에 ‘가나’에서 특별 ‘파이오니아’, ‘코스마스클레보르’가 파견되었다.

‘클레보르’ 형제는 도착하자마자 자기가 형제들에게 상당히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에 놀라며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코스마스’가 자기가 찾으러온 선교인 형제들의 이름을 대자 형제들의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감돌았다. 그들은 단지 몇분 전에 외국에서 온 ‘증인’이라고 주장하는 사기군 한 사람과 이야기했었다고 설명하였다. 그 형제들은 ‘코스마스’도 똑 같은 술책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했던 것이다!

선교인 숙소

1964년 1월에 선교인들은 그들이 묵고있던 ‘아파트’에서 ‘사무엘 데누우’의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트레이취빌’의 중심가에 있는 그 커다란 집안에는 이미 왕국회관이 있었다. 곧 15명이나 되는 선교인들이 이곳에 숙소를 정하게 되었다. 이 곳은 이전의 장소에 뚜렷한 장점들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 않은 단점들도 있었다.

그 집이 교통 신호등 바로 옆 교차로 우편에 위치하고 있어서 교통 소음이 상당히 방해가 된 사실은 적잖은 단점이었다. 게다가, 바로 이웃 복합 주택에 네 아내를 거느린 한 남자가 살고 있었는데, 거의 매일 아침 선교인들은 한 젊은 아내가 나이 많은 아내에게 두들겨 맞아 지르는 비명 소리에 선잠을 깨곤 하였다. 몇년이 지난 후 그 건물이 헐리고 새로운 건물이 그 자리에 세워지는 것을 보았을 때 모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 새로운 건물에 ‘나이트 클럽’이 들어왔다는 것이 알려졌고 거기서 나오는 시끄러운 소리들은 종종 더 이상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1964년에 열린 대회들

이 해는 ‘아비잔’의 ‘코우마시’ 지역에서 열린 순회 대회에 152명이 참석함으로 좋은 출발을 하였다. 1964년 중에 여기에서 ‘아비잔’의 두번째 회중이 형성되었다. ‘죠오지콰케’가 담대함의 가치에 대한 대회 연설을 하였다. 그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을 막 인용하고 있는데 연단에 뱀이 한 마리 나타났다. 앞줄에 앉은 형제들의 기겁을 하는 몸짓을 보고 놀란 ‘죠오지’는 강당 뒤로 달아났다. 다른 형제들이 그 뱀을 처치해 버린 다음에 ‘죠오지’ 형제는 다시 나와 그가 도망했던 자리에서 다소 겁먹은 표정으로 연설을 하였다.

그 후 얼마 안되어 3월에 ‘아비잔’의 ‘트레이취빌’ 소재 문화회관에서 지역 대회가 마련되었다. 불법 집회가 열리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 경찰이 와서 대회를 해산시켜 버렸다. 그들은 ‘프로’를 맡은 여러 형제들을 경찰서로 연행해 가서 그들에게 ‘여호와의 증인’의 사업이 ‘코트디브와르’에서 인정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공개적인 대회들을 여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 대회는 ‘트레이취빌’에 있는 ‘왕국회관’에서 성공적으로 계속되었다. 1964년 중에 전도인이 이제까지 이 나라 최고 기록인 143명에 달하였다.

법적인 인가를 모색함

형제들은 ‘왙취타워 협회’의 활동을 등록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알아보기로 결정하였다. ‘코트디브와르’는 이제 ‘아프리카’의 일개 독립국이었기 때문에, 노력하면 이전보다는 성공할 가능이 더 크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1964년 9월 14일에 ‘코트디브와르’ 대통령 앞으로 사업의 법적인 인가를 요청하는 ‘왙취타워 협회’ 회장의 서한을 보냈다.

그러는 가운데 전파 사업은 계속 수행되었다. 사실, 1965년 5월에 또 다른 순회 대회가, 이번에는 ‘그랑 바상’에서 열리어 공개 강연에 200명이란 놀라운 수가 참석하였다. 그런데 1965년 6월 3일에, 정부는 ‘코트디브와르’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사업을 계속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통고를 발표하였다.

이 일로 실제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이 명령이 발표되기 이전에도 ‘여호와의 증인’의 사업은 ‘코트디브와르’에서 인정되고 있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선교인들은 이 나라를 떠나라는 요구를 받은 적이 없었고 집회도 금지되지 않았었다. 예를 들어, ‘트레취빌’에서는 집회가 커다란 간판을 깨끗하게 써 붙인 ‘왕국회관’에서 열렸다. 그 새로 발표된 명령에 따르는 것이란, 단지 무더운 열대성 기후에도 불구하고 집회 도중에 창문을 닫아두는 일뿐이었다.

놀랍게도, 당시 네명의 새로운 선교인들에게 그들이 ‘코트디브와르’에 체류하는 것을 허락하는 ‘비자’가 나왔다. 그들이 금지된 ‘협회’의 선교인들임이 분명한데도 ‘비자’가 발급된 것이다! 그리하여 ‘길르앗’ 졸업생들인 ‘조셉’과 ‘마아시아크로포오드’ 및 ‘조셉’과 ‘릴리 하인즈’가 1965년 11월 4일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사업에 가해진 제한들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 선교인들은 열정적으로 봉사를 시작하였다. 선교인 중 한 사람은 첫 달에 300부 이상의 잡지를 전하였다.

체포와 시달림

하지만 그 직후 실제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다니엘 케보’가 1966년 1월 1일 ‘코우마시’에서 투옥되었다. 그는 ‘코우마시’ 선교인 집 아랫 뜰에서 살았다. 거기서 살고 있던 새로운 선교인들이 ‘다니엘’의 집 문이 연속 이틀 밤 잠겨 있는 것을 알고 그 일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그가 금지된 종교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들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상상해보라!

선교인들은 황급히 집으로 가서, 선교인 집 아랫층에 걸려있는 왕국회관 간판을 떼어버렸다. 그들은 이 나라에서 추방될 것에 대비하여 짐까지 가방에 다 챙겨넣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은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 때부터 그들은 전파 사업을 수행하는 방법에 있어서 좀더 조심성을 보였다.

몇 개월이 지난 뒤인 6월 5일에 경찰은 더 강한 조처를 취하였다. 그들은 ‘코우마시’에 있는 왕국회관으로 가서 회중 감독자 ‘조오지 콰케’를 다른 두 형제와 함께 체포해 갔다. 그리고 게시판, 연표어, 서적 및 다른 것들을 가지고 갔다. 그 다음날 두 형제, ‘사무엘 아티오우’와 ‘어어니스트 노멜’이 투옥된 형제들을 면회하러 갔다가 그들 역시 그 자리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게시판에서 ‘로버어트 라스메’ 형제의 이름을 입수한 경찰은 그를 체포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갔다. 바로 그 때 그의 집에서는 회중 집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문에서 망을 보고 있던 ‘라스메’ 자매가 경찰이 접근해 오는 것을 보고 신호를 보냈다. 세 형제를 제외한 모두는 빠져 나갈 수 있었다. 이들 세 형제는 재빨리 침실로 달려가 침대에 누웠다. 두 경찰관은 안을 잠깐 둘러다 보았으나 아무런 인기척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집뒤를 살피러 갔을 때 세 형제는 피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섯명의 ‘코우마시’ 형제들이 투옥되었고 선교인들이 그들을 방문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자매가 그들에게 음식을 가져다 넣어주는 일이 허락되었다. 그는 형제들에게 성서 두권을 몰래 넣어 줄 수 있었다. 매일 저녁 형제들은 집회를 사회하고 왕국 노래를 불렀다. 같은 건물에 있던 다른 수감자들은, 이들 중 일부는 이러한 집회에 참석하곤 했는데, “하나님이 이 건물에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말하곤 하였다. 그들은 형제들이 노래부르는 것을 즐겨 들었다.

형제들이 마침내 법정에 출두하게 되었을 때, 경찰관은 ‘코트디브와르’에서 성서를 알거나 가르치는 일은 금지되어 있지 않지만 ‘여호와의 증인’의 사상을 선전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 차이점이 어디에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형제들은 집행 유예 판결을 받고 총 350,000‘프랑’의 벌금을 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후에 항소심에서 고등법원은 그 벌금을 취소하였다. 형제들은 ‘코우마시’로 돌아와서 전파하는 일과 모이는 일을 종전처럼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그 사건뿐이 아니었다. ‘로오런스 람버어트’도 체포되었다. 그는 경찰에게 몹시 구박을 받았으며 그들은 그를 장황하게 심문하였다. 그들은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형제들도 체포할 목적으로 그들의 이름을 알아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람버어트’ 형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제가 자기 교회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읍니까?” 그들은 그에게서 아무런 이름도 얻어낼 수 없었다.

또 다른 사건은 그 당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관리들의 일반적인 태도가 어떠했는가를 반영해 준다. ‘증인’이 아닌 한 ‘나이지리아’ 사람이 그의 트럭에 “여호와”라는 이름이 쓰여져 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그는 자기가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라는 것을 당국자들에게 납득시킨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금지령을 해제시킬 길을 모색함

금지령이 계속 실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업이 발전하기란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 이제 명백해졌다. 그래서 이제 금지령을 해제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선교인 ‘조셉 하인즈’와 ‘조셉 크로포오드’는 내무상 ‘나늘로 밤바’ 씨와 그의 ‘프랑스’인 행정관 ‘끄리스띠앙 브로’ 씨와의 면담을 가질 수 있었다. 미 대사관의 관리들도 협회를 위해 중재해 주었다. 왜냐하면 한 미국 조직의 등록 거부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왙취타워 협회’도 우리의 중립 입장을 설명하는 13면에 달하는 서한을 1967년 4월에 준비하였다. 그 서한은 우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시민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민들에게 권위에 순종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우리의 사업이 서 ‘아프리카’의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합법적으로 인정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공문 사본들도 입수하였다. 이러한 문서들을 1967년 5월 18일자의 한 서한과 함께 ‘펠릭스 후푸에 보이그니’ 대통령에게 전달하였다. 그가 그 서한을 읽고 내용을 승인한 다음 그것을 내무상에게 보냈다는 사실이 나중에 보고되었다.

그와 동시에 즉시 4명의 형제가 다시 내무상 ‘나늘로 밤바’ 씨를 방문하였다. 우리 협회를 종종 “외국인” 협회라고 불러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코트디브와르’ 형제를 4명 보냈다. 내무상은 제일 먼저 형제들에게 그들이 각각 어느 종족 출신인가를 물어보았다. 그들이 모두 ‘코트디브와르’ 종족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자 그는 만족해하면서 면담을 계속 진행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군복무 문제를 제기하고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기 나라를 위해 싸우기를 거부한다고 말하였다. 우리의 그리스도인 중립 입장을 설명하고 그에게 ‘협회’의 출판물 얼마를 주었다. 그 때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밤바’ 씨는 다른 관리들과 상의해 보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 결정에 대해 알게 됨

그로부터 이 주일이 지난 1967년 6월초에 한 ‘증인’과 관심자가 호별 방문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관심자가 증거하는 일이 대단히 기뻐서 ‘증인’이 떠난 후에도 증거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한 집주인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그는 깜짝 놀랐다. “‘코트디브와르’에서 ‘여호와의 증인’에게 그들의 사업을 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읍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게 전파할 수 있는 권한이 허락되었읍니다.” 그 사람은 그에게 자기도 그 문제를 취급한 관리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과 그 결정이 이 주일 전에 내려졌다는 사실을 확실히 말해 주었다!

그 새로운 전도인은 그 좋은 소식을 가지고 선교인집으로 급히 달려갔다. 이튿날 그들은 이 정부 관리를 그의 사무실로 방문하여 그에게서 그 공식적인 법령서 사본을 하나 얻었다. 그 법령서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일년 동안 그들의 사업을 계속할 수 있다는 공식적인 인정과 허가를 실제로 받았음과 일년을 기초로 그것을 갱신할 수 있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었다.

한 선교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증거 사업의 합법적인 등록은 모두에게 커다란 짐을 어깨에서 벗어버린 느낌을 주었읍니다. 우리는 ‘코트디브와르’에서의 여호와의 백성의 사업 역사에서 이 위험한 시기를 기꺼이 인내하였읍니다.”

금지령 해제에 대한 소식을 듣자 형제들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기쁨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집회가 끝난 다음에 함께 모여 지쳐서 더 이상 부를 수 없을 때까지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고 하였다.

탁월한 인내의 본

1967년에 선교인 ‘릴리 하인즈’가 ‘파울린’이란 이름의 16세된 어느 ‘바울레’족 소녀와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관직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가 요구하는 특정한 과정을 따르도록 기대되었다. 그는 사설 기숙 학교에서의 교육을 포함하여 모든 면에서 우등생이었다.

얼마 안가서 아버지는 그에게 성서 연구를 중단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그를 종족 회의에 데리고 갔으나 그것도 그를 단념시키지는 못하였다. 다음에는 마술을 사용하였다. 그에게 알리지도 않고 한 마법사가 축복한 아름다운 금반지 하나를 그에게 주어 끼게 하였다. 그는 머리가 심하게 아프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반지를 끼기 시작한 후에 두통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고서 그는 그것을 빼어 없애버렸다. 그러자 점차 두통이 멈추었다. 심지어 구타와 협박도 그가 연구를 포기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가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경비원들이 고용되었다. 그러나 그는 경비원들을 속였다. 한번은, 늙은 여자로 변장하여 경비원들 앞을 지나 대회에 참석하러 갔다. 대회장에서 그는 변장을 벗고 회기들을 즐겼다. 대회가 끝난 다음에 그는 다시 늙은 여자로 변장하여 바로 경비원들 앞을 지나 집으로 들어갔다.

또 다른 경우에, 그는 뒷담을 살짝 넘어 ‘부아케’행 기차를 타고 대회장에서 침례를 받은 다음 ‘아비잔’으로 되돌아가는 다른 기차를 타고 그가 없어진 것을 어느 누구도 눈치채기 전에 다시 학교에 돌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부아케’에 갔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누구와 함께 갔었느냐고 추궁하였다. “자매들과 같이 갔어요” 하고 대답하자 당연히, 그가 자기 학교의 수녀들과 같이 갔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아버지는 “그렇다면 됐어” 하고 말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딸이 ‘여호와의 증인’으로 침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노발대발하였다. 그는 그의 소지품을 꾸려서 한 저명한 정치인에게 의탁하여 학업을 마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보냈다. 거기에서 그는 자기 딸이 휘황찬란한 세상의 유혹들에 정신을 빼앗겨 그 새로운 종교를 잊어버리게 되길 바랬다.

‘파울린’은 ‘파리’ 생활이 현혹하는 것임을 알았지만, 그 때문에 여호와께 대한 그의 열심이 식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깨어라!」지에서 지부의 주소를 알아내고 그곳에서 열리는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였다. 나중에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교외에서 보다 가까운 한 회중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학교에서 그는 여러 동급생들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들 중 적어도 일곱명이 현재 침례를 받은 ‘증인’이 되었다.

‘파울린’은 ‘코트디브와르’에 되돌아온 이래 남편과 함께 ‘아비잔’의 한 회중에서 섬기고 있다. 그는 ‘왕국’을 위해 물질적인 부를 포기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고 있다. 그는 언젠가는 아버지의 마음이 변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자기 아버지의 총애를 잃게 된 것 역시 후회하지 않고 있다. 그의 주된 욕망은 여호와를 온전히 섬기고, 자기 남편이 자녀들을 여호와의 길로 훈련시키는 일을 보조하는 것이다.

금지령 이후의 첫 대회

1967년 9월 무렵 형제들은 1965년 5월 이래 그들의 첫 순회 대회를 즐길 준비를 하였다. 마지막 순간에 가서 대회장을 변경해야 했던 사실이나 새로운 장소에 조명 시설이 없어 ‘프로’를 오후에 다시 마련해야 했던 사실도 형제들의 열심이 식어지게 하지 못하였다. 이 대회는 그들이 여태껏 가졌던 가장 훌륭한 대회였고 그들이 온전히 자유로이 함께 모인 최초의 대회였다. 여러 가지 방해에도 불구하고 416명이 공개 강연에 참석하였다. 이년 전 대회의 200명에 비해 참으로 놀라운 증가였다!

많은 선교인을 맞이함

1967년 9월에 있었던 이 대회에서 더 많은 선교인들이 ‘코트디브와르’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해 말엽에 일곱명이 더 도착하여 이 나라의 선교인 수는 총 11명이 되었다. 이 때 ‘아비잔’ 교외 ‘아자메’에 새로운 선교인집이 하나 설립되었다.

그런데, 1967년 11월에 ‘협회’의 ‘브루클린’ 본부에서 ‘돈아담스’가 지구 방문을 하여 훨씬 더 많은 선교인들을 이 나라에 파견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1968년 3월과 4월에 아홉명이 더 도착하였다. 3주간의 짧은 불어 교육 과정을 마친 다음 네 사람은 ‘부아케’에서 새로운 선교인 집을 열도록 임명되었다. 1968년 10월에 아홉명의 선교인이 더 도착하였다.

외국 선교인이 이 나라에 와서 일을 하는 것은 무엇과 같았는가? ‘헤이델린드 포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 마치 ‘사우나’탕에 들어가는 느낌이었읍니다. ‘트레이취빌’ 선교인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유리창도 없이, 이러한 기후에는 물론 필요치도 않은 덧문들이 있는 걸 보고 놀랐읍니다. 사실 너무 더워서 나는 밤중에 종종 침대에서 내려와 몸을 좀 식하기 위해 ‘시멘트’ 바닥에 ‘맷트’를 깔고 눕곤 하였읍니다.

“구역 주민들은 대단히 친절하였읍니다. 처음에는 내가 불어를 거의 할줄 몰랐지만 모두는 대단히 참을성있게 들어주었읍니다. 때때로 그들은 우리에게 증거 가방 속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어보고, 그들이 원하는 책을 꺼내곤 하였읍니다. 성서 연구를 시작하는 일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읍니다. 나는 20건 이상의 연구를 가져 본 때도 있었읍니다.

“내가 방문한 한 남자는 「진리」 책을 받았고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읍니다. 그는 ‘베닌’에 있는 자기 약혼녀에게 그가 새로 발견한 믿음에 대해 편지를 하였는데, 그는 그것을 조금도 고마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그 종교를 계속하고자 한다면 자기를 잊어달라고 말하였읍니다. 내가 그를 처음에 방문한 것은 10월 중이었는데 그는 자기 생활을 깨끗이 정리한 다음 12월말에 야외 봉사에 나갔읍니다. 그 다음 3월에 그는 침례를 받았으며, 현재 ‘아비잔’의 한 회중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읍니다. 그의 약혼녀는 그에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써 보냈읍니다. 그는 휴가 때 고향에 가서 한 자매가 그와 연구를 하도록 마련했읍니다. 일년 후에 그들은 결혼하였읍니다.”

‘부아케’에서의 확장

1962년에 ‘부아케’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회중이 해산된 이래 그 도시에는 왕국 전도인이 단지 서너명 밖에 없었다. 선교인들이 그곳에서 사업을 시작하자 어떠한 일이 발생했겠는가? 단지 2년 동안에 전도인 수가 50명으로 불어났으며, 평균 80명이 모든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선교인들 중 한 사람인 ‘오토호오크’는 그 기간에 12명이나 침례받는 단계에 이르도록 도왔다. 그들 가운데는 고등학교 교장 선생인 ‘쌍떼 뽀떼’도 있었다.

‘쌍떼’는 그의 ‘가톨릭’ 친구들이 아내를 더 가지라고 권하는 것을 거절한 절조가 대단히 높은 사람이다. 얼마 안가서 그와 그의 아내 및 네 자녀가 침례를 받았다. 그는 교직을 맡고 있지만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고, 이따금씩 그의 아내도 함께 ‘파이오니아’를 한다.

종교적인 미신을 극복하다

여러 종족 사람들이 섞여 사는 ‘아비잔’ 시를 제외하고는 이 나라 대부분의 도시는 주로, 주요한 한 두 종족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부아케’에는, 북쪽 지방에서 온 회교도들이 많이 살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바울레’족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바울레’족 사람들은 산림 민족으로 ‘가나’의 ‘아샨티스’족과 친척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나면서부터 물활론 종교 신자들로서 주물들에 대단한 믿음을 두고 있다.

‘부아케’ 부근의 대부분의 작은 마을들에는 대개 어떤 영이나 동물을 대표하는 새겨 만든 커다란 주물이 하나 있다. 그러한 주물은 그 마을의 어느 조상을 대표하는, 나무로 깎아 만든 얼굴 모양일 수도 있다. 그 조각한 주물 속에 살고 있는 영이 밤에는 거기에서 나와 그 마을을 순회하면서 온갖 악에서 보호해 준다고 믿고 있다. 그 주물은 그것에 불충실한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한다고 믿고 있으며, 그것을 달래기 위해 제물들을 계속 바쳐야 한다. 계란이나 쌀, 아니면 한 마리의 양이나 여러 병의 술이 제물이 될 수 있다. 주물 사제가 보통 이러한 제물들을 관리한다.

‘아비잔’에서 선교인 ‘마아시아 크로포오드’는 ‘부아케’의 인근 마을에서 온 ‘바울레’족의 한 부부와 연구를 하였다. 그 여자의 오빠도 연구에 참석하였지만 배우는 내용에 대단히 비평적이었다. 하지만, 그 부인은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그 부부가 ‘부아케’로 다시 이사를 가게 되어 ‘마아시아’는 섭섭하였다. 다행히 그 때는 선교인들이 ‘부아케’에 선교인 집을 열 때였다. 그래서 연구가 계속되었다. 얼마 안가서 남편도 진리에서 발전하였고, 마침내 그는 모든 주물들을 불태워버렸다.

이 일이 있은 이틀 후에 그 남편은 부친으로부터 부친의 마을로 긴급히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공포에 질린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주물 사제가 신성한 주물 단지 속을 들여다보니까 그 마을 사람들의 영혼은 모두 보이는데 그의 아들의 영혼이 보이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그 사제는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이 사람은 더 이상 우리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오. 그의 영혼이 우리에게서 떠났소. 그러므로 그는 무력하며 이제 더 이상 어떤 주물로부터도 보호를 받을 수가 없소.”

그 아들은 자기 아버지에게 이것은 그에게 최상의 소식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것은 그가 더 이상 악귀 숭배하는 자들 가운데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한층 더 나아가 그는 아버지에게, 이제 그는 주물에 대해 가장 큰 모든 보호를 받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 순간부터 그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으며 주물은 그를 해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문제는 또 있었다. 그에게는 본처에게서 난 자녀 여섯 외에 여러 여자들에게서 난 자녀가 다섯 있었다. 이 자녀들 모두를 한 지붕 밑에 모아 놓고 그들에게 성서 원칙들을 가르쳤다. 그들은 결국 연합된 한 가족이 되었다.

그 동안 ‘아비잔’의 ‘마아시아 크로 포오드’는 이전에 연구에 참석해서 비평적이었던 그 부인의 오빠를 다시 만났다. ‘마아시아’를 놀라게 한 것은 그가 「깨어라!」를 한부 달라고 한 일이었다. 그가 자기의 사고 방식을 바꾸었는가? 정말로 그랬다! 진리의 치료하는 힘에 의해 그의 누이 동생의 가족에 발생한 커다란 변화가 그에게 큰 감명을 주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정기적으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남편과 아내와 오빠 세 사람 모두가 1969년 “지상의 평화” 대회에서 함께 침례를 받았다.

1968년의 훌륭한 발전

1968년은 ‘아비잔’에 다섯번째 회중이 설립됨으로 좋은 출발을 하였다. 그리고 2월에 형제들은 금지령이 내린 이래 처음으로 지역 대회를 즐겼으며 공개 강연에 486명이 참석하였다. 3월에 ‘트레이취빌’에서 장로들을 위한 새로운 천국 전도 학교가 열렸다. 그 학교는 당시 순회의 종으로 섬기고 있던 ‘크로포오드’ 형제가 사회하였다. 이 과정은 확실히 회중들이 조직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4월 ‘기념식’에 577명이 참석하였으며, 이것은 지난 해보다 175명이 증가한 놀라운 발전이었다. 그리고 평균 전도인 수는 1967년의 180명에서 1968년에는 220명으로 뛰어 올랐다. 이들 왕국 선포자들 대부분은 이 나라의 여섯개 회중과 연합하고 있었다.

「진리」 책이 모아들이는 일에 박차를 가하다

1968년 10월에 열린 “만국을 위한 기쁜 소식” 지역 대회는 모아들이는 일에 진정한 촉진제가 되었음이 증명되었다. 646명이란 놀라운 청중이 참석하였으며 21명이 침례를 받았다. 그러나 참으로 절정을 이룬 일은 새로 나온 불어판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을 발표한 것이었다. 이 책은 성서 연구 활동에 혁신을 가져왔으며 사람들을 진리의 지식으로 신속하게 인도하는 데 놀라운 도움이 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 나라의 평균 220명 정도 밖에 안되는 전도인으로 성서 연구가 육개월 동안에 950건으로 껑충 뛰었다. ‘협회’가 발송해 준 첫 5,000부를 몇 주일 내에 다 배포해버렸다.

모든 선교인들은 그 새로운 책을 전해서 연구를 시작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깜짝 놀랬다. 거리에서 그들을 멈추게 하고 “그 파란 책”을 한부 부탁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선교인 집과 왕국회관에 와서 그 책을 한부 부탁하며, 누군가가 와서 연구를 사회해 달라고 요청하곤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문전에 서 있는 ‘증인’의 봉사 가방 속을 살며시 들여다보고 「진리」 책이 있는 것을 보면 당장 그 책을 한부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하였다.

격지 전도인들을 강화하는 일

1968년에 ‘코스마스 클레보르’가 전국을 순회하면서 격지에 있는 형제들과 관심자들을 방문하도록 임명되었다. ‘코트디브와르’에서는 우편 주소와 집주소가 같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있는 곳을 찾아내기가 항상 쉬운 일은 아니었다. 또한 도시의 거리들은 흔히 이름도 없었다.

방문한 첫 번째 도시는 ‘딤보크로’였다. ‘코스마스’는 그곳 형제와 관심자들에게 집회를 사회하는 방법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감동을 받아 신권학교와 봉사회를 매주 갖기로 결정하였다. 이 도시에는 현재 24명의 전도인으로 이루어진 회중이 있다.

거기에서 ‘코스마스’는 계속 ‘구이글로’와 ‘두에쿠에’로 갔다. 그가 ‘두에쿠에’에 있는 형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한 벌목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코스마스’는 그 지역의 부 지방 행정관에게 가서 혹시 그가 그 지역의 한 벌목 회사에서 일하는 ‘여호와의 증인’을 알고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는 마침 알고 있었으며 도시에서 꽤 떨어져 있는 그 형제가 있는 곳까지 ‘코스마스’를 자동차로 태워다 주기까지 하였다.

그 형제는 벌목 회사 현장의 소장이었으며, 자기의 모든 동료 일군들에게 증거해 왔었다. 그날 밤에 그는 이러한 사람들을 ‘코스마스’가 행한 강연에 참석하도록 마련하였다. 이들 일군들 중 한명은 진리에서 잘 발전하였다.

‘클레보르’ 형제는 여러 달 후에 또 한 차례 이와 같은 여행을 하였다. 이 나라 동부에 있는 한 도시 ‘아벤구르’에 머물고 있는 동안 여덟살 된 한 어린 소녀가 ‘코스마스’에게 와서 자기는 ‘증인’들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였다. 그는 어떻게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가? 놀랍게도 일찌기 그의 부모는 그가 ‘그랑 바상’에 있는 학교에 다니게 하기 위해 그곳의 한 ‘증인’과 함께 살도록 보냈었다. 그 ‘증인’은 그를 집회에 데리고 다녔고 진리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부모가 이 사실을 알고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는 그를 멀리 ‘아벤구루’에서 학교에 다니도록 보냈던 것이다. 그는 ‘증인’이 시내에 있다는 소문을 듣자 즉시 그를 만나기 위해 집집을 방문하면서 찾기 시작하였다. ‘코스마스’는 그가 발전하도록 돕기 위해 그를 시내에 있는 한 관심자와 접촉하게 해주었다.

‘클로보르’ 형제는 그런 다음 계속 ‘달로아’로 갔다. 거기서 그는 「진리」 책이 그곳에 있는 격지 전도인에 의해서 뿐 아니라 어느 세속적인 사람에 의해서도 한부에 미화로 거의 1‘달러’에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코스마스’는 그 세속적인 사람에게 서적을 받은 사람들을 시내에 있는 ‘증인’과 접촉하게 해주었다. 그는 또한 그들에게 그 세속적인 사람이 해 주지 않았던 일 즉 그들의 책을 가지고 연구를 하라고 제안해 주었다.

새로운 지역들에 도움을 베풀다

이러한 지역들에서 자격있는 전도인들이 관심자들을 도와 줄 필요성이 분명하게 되었다. ‘아비잔’과 ‘부아케’ 외에는 이 나라 다른 곳에 선교인 집이 없었다. 그래서 1970년 6월에 ‘달로아’에 선교인집이 문을 열었고, 몇 개월 후 또 다른 선교인 집이 ‘아벤구루’ 읍에서 문을 열었다.

거의 동시에 또 다른 선교인 집이 멀리 서부의 아름다운 ‘만’ 읍에서도 문을 열었다. ‘아비잔’에서 이곳으로 변경 임명을 받은 ‘셔얼리 밋첼’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주위 환경이 참으로 달랐읍니다. 나는 개인 소지품을 가지고 밤에 커다란 ‘트럭’을 타고 도착하였읍니다. 우리 주위를 온통 둘러싼 아름다운 산들을 아침에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산들이 그리 높지는 않았으나, 그것들을 구경하노라면 마음이 상쾌해지고 긴장도 풀렸읍니다.” ‘셔얼리’는 ‘왕국’ 소식에 대한 ‘만’ 주민들의 반응을 계속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불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고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도 많았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전해야 할 소식을 열심히 들었읍니다. 우리가 그들의 집에 도착하면 그들은 재빨리 우리의 말을 통역해 줄 사람을 찾아 나섰읍니다. 때때로 우리는 1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곤 하였읍니다.

“흔히 사람들은 우리 집에까지 와서 그들과 성서 연구를 하자고 요청했읍니다. 내가 선교인 가족을 위해 요리를 하고 있을 때 찾아온 한 남자를 나는 기억하고 있읍니다. 그에게 ‘증인’들을 알고 있는 친척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친척이 한 말을 듣고 그의 관심이 불붙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글을 읽을 줄 몰랐읍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그와 연구를 하면서 읽는 법을 배우도록 도와주겠지만 그가 우리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해야 된다고 말했읍니다. 그는 동의했읍니다. 그는 읽고 쓰기를 배웠고, 이제 그는 회중에서 봉사의 종으로 섬기고 있읍니다.”

‘린다 베리’는 1971년에 ‘만’에서 전파 사업을 시작한 또 다른 선교인이다. 그는 ‘라비나드라드 루이’란 어느 ‘인디언’ 수의사와 접촉하게 되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즉시 집회에 나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라비나드라드’는 극복해야 할 상당히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흡연이었다! 순회 대회가 다가왔고, 그래서 그는 그 대회 이전에 끊으려고 대단히 애를 썼다. 그가 한 일은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 땅콩을 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땅콩을 너무 많이 먹어 병이 났으며 대회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여호와의 도움으로 흡연 습관을 버릴 수 있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진리에서 잘 발전하여 지금은 ‘만’ 회중의 성원이 되었다.

순회 감독자 ‘죠셉 아피아’는 ‘달로아’에서 ‘만’으로 새로 형성된 회중을 방문하러 가는 여행중에 의미심장한 경험을 하나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버스’ 안내원이 아내와 내가 마지막 남아 있는 두 좌석에 앉지 못하게 하였읍니다. 이것은 ‘버스’ 주인의 친척 두 사람이 우리와 같은 방면으로 갈 것이었기 때문이었읍니다. 그들이 ‘버스’ 정유소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읍니다. 하지만, 80‘킬로미터’ 가량 갔을 때 그 ‘버스’가 심각한 사고를 냈읍니다. 큰 ‘트럭’과 충돌하여 그 ‘버스’ 주인의 친척 두 사람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말았읍니다. 부상을 입은 승객들도 많았읍니다. 나중에 사고 현장에 도착한 사람들은 우리의 하나님이 매우 강력하시다고 말하였읍니다. 이 일은 우리가 그들에게 증거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되었읍니다.”

‘부아케’에서 열린 순회 대회

1969년 3월에 ‘부아케’에서 순회 대회가 계획되었다. 시장은 시청 ‘홀’을 무료로 사용하라고 형제들에게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대회가 열리기 며칠 전에 ‘라디오’에서 모 정당이 대회가 예정된 날 동안 거기서 모임을 가질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시장이 그 정당의 지도자들과 계약을 체결할 때 그들이 이 문제에 협조하기를 원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시장은 형제들에게 계속 일을 진행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다소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그렇게 하였다. 왜냐 하면 ‘홀’ 부근에서 일부 당원들이 일의 절차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제들은 1962년에 발생했던 것과 같은 사고가 발생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회가 일단 시작되었을 때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 평화스러운 대회가 열렸고 공개 강연에 343명이 참석하였다. 그 대회는 국영 신문에 잘 선전되었고, 「깨어라!」 특별호 “하나님께서 악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란 기사 대부분이 그 신문에 실렸다. 그래서 뚜렷한 증거가 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부아케’와 관련하여 이전의 사고가 아니라 이제 성공적인 한 대회를 연상하게 되었다.

“지상의 평화” 대회들

그 이후 여러 달 동안 선교인들은 제각기 그들의 나라에서 열리는 “지상의 평화”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떠났다. 그들은 돌아와서 ‘코트디브와르’에서 그 때까지 가졌던 가장 훌륭한 대회를 조직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929명이란 많은 사람이 참석하고 78명이 침례를 받은 것도 훌륭했을 뿐 아니라 ‘프로’를 보기 드문 열정을 가지고 받아들였고, 특히 ‘드라마’를 재미있게 즐겼다.

1970년의 주요 행사들

훌륭한 신권적인 성장이 1970년에 ‘코트디브와르’에서 실현되었다. 3월에 1,234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으며 이 수는 바로 2년 전에 참석한 수의 두배가 넘는 수였다. 이 해에 회중 수가 10개로 늘어났다. 그리고 매달 평균 389명의 전도인이 야외 봉사 보고를 냈다. 의미심장하게도, 이 해에 132명이 침례를 받았으며, 이것은 이 나라 전도인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였다!

1970년 8월에 ‘그랑 바상’에서 뛰어난 순회 대회를 즐겼다. 일요일 아침에 일용할 성귀 해설에 거의 400명이 참석하였고 거의 그들 모두가 증거 사업에 나갔다. 이 도시는 다소 작았기 때문에 거리 구석구석마다 ‘증인’들이 떼지어 있는 것 같았다. 또한 801명이라는 놀라운 군중이 “법과 질서—언제 그리고 어떻게?”란 공개 강연에 참석하였다. 이것은 특히 그 지방 신문이 ‘여호와의 증인’들을 선동적이라고 묘사한 사실을 고려하면 특히 적절한 제목임이 증명되었다.

‘아비잔’에서 대회를 열기 위해 경찰의 허락을 얻었던 반면에 ‘그랑 바상’에서 ‘증인’들은 경찰 관리에게 알리는 일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 나타났다. 경찰관이 무슨 대회를 열고 있는지 알아 보기 위해 형제들을 찾아왔다. 그런 다음 그는 아주 만족해하며 만약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법을 잘 지킨다면 경찰이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평하였다.

하지만 1970년의 가장 큰 행사는 12월 중 ‘아비잔’에서 열린 “선의자” 지역 대회였다. 처음으로 미국같은 먼 여러 나라에서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그들은 ‘협회’가 주선한 여행 마련으로 왔던 것이다. 방문객들 가운데는 당시 ‘왙취타워 협회’ 부회장 ‘F. W. 프랜즈’가 끼여 있었다. 지방 형제들은 특히 통치체 성원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형제들 절대 다수가 아주 최근에 진리 안으로 들어와서 천적 생명의 희망을 가진 참 그리스도인들을 만나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코트디브와르’에는 천적 생명의 희망의 상징으로 ‘기념식’ 표상물을 취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대회 전에 이 나라에서 실시된 선거 때문에 대회를 광고하는 일은 제한을 받았었다. 또한 당국이 대회가 개최될 예정이었던 ‘문화회관’을 수리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대회 장소는 마지막 순간에 가서 ‘복싱 클럽’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공개 강연에 1,003명이 참석하였다! 성서 ‘드라마’와 대회의 여러 부분을 짤막하게 발췌하여 전국 ‘텔레비젼’ 방송망이 방영하였다.

지부가 조직되다

그 다음 달 1971년 1월에 당시 ‘왙취타워 협회’ 회장 ‘나단 H. 노워’가 ‘아비잔’을 방문하였다. 수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집회가 마련되었으나 그 소식을 들은 형제들이 전국 각처에서 몰려왔다. 강연과 ‘슬라이드’ 상영에 모두 761명이 참석하였고 그들은 영적으로 크게 격려를 받았다.

‘노워’ 형제는 ‘코트디브와르’에 지부가 설립되는 것을 보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형제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조직을 보다 깊이 인식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보다 큰 영적 발전을 가져 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일년 전에 ‘코트디브와르’에 왔던 ‘말라가시’ 공화국의 전 지부 감독자 ‘사무엘 길먼’이 이 일을 완수하는 후속 일들에 대한 지시들을 받았다. 그렇게 하여 1971년 9월 1일에 ‘코트디브와르’ 지부가 운영되기 시작하여 ‘코트디브와르’의 전파 활동과 ‘오트볼타’의 사업을 감독하게 되었다.

많은 지역에서 사업을 시작하다

‘아고디오 아피’ 형제가 근무하던 회사가 1972년에 그를 ‘산페드로’ 항구 도시로 전근 발령을 냈을 때 그 도시는 최초의 ‘증인’ 거주자를 맞이하게 되었다. ‘아피’ 형제는 많은 관심자들이 있는 것을 알고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파견하여 이러한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돌보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마침내, ‘사무엘’과 ‘델마 길먼’이 거칠고 포장되지 않는 도로로 하루 종일 여행을 하여 저녁 6시경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피곤하고 황토 먼지를 뒤집어 썼지만 형제를 만나게 되어 행복하였다.

도착하자 마자 ‘길먼’ 형제는 20분 후에 그가 시내에서 관심자들에게 강연을 하기로 계획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급히 먼지를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아고디오’가 이 특별한 기회에 함께 오라고 초대한 39명에게 격려를 주는 특권을 즐겼다. 곧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이 지역에 파견되었고, 지금은 이곳에 30명의 전도인과 3명의 ‘파이오니아’로 된 회중이 하나 있다.

‘길먼’ 부부는 그들이 머문 학교 선생집에서 훌륭한 대접을 받았다. 예를 들어, 그는 그 지방의 특유의 별미를 준비하였다. 그 별미는 하마 고기로 만든 것인데 ‘길먼’ 형제는 솔직하게 “제가 좋아하는 고기는 아닙니다!” 하고 실토하였다. 그 주인은 그들에게 “여러분이 지난 주에 여기에 없었던 것이 대단히 섭섭합니다. 그랬더라면 우리와 함께 코끼리 고기를 먹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고 말하였다.

전파사업이 ‘산페드로’에서 시작된 방법은 다른 지역들에서 전파사업이 시작된 방법을 잘 대표한다. 형제들이 왕국 소식에 관심을 나타낸 사람들을 발견했다는 편지를 지부 사무실에 보내면 그곳에서 일주일간 일하도록 순회 감독자를 보내곤 하였다. 그의 추천에 따라 갈 수 있는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관심자들을 계속 돌보도록 임명되어 결국 그 지역에 회중들이 설립되곤 하였다.

선교인 중 한 사람인 ‘랄쉬플리’는 북부 도시 ‘페르케세두구’와 ‘코르호고’를 방문하였다. 그는 그곳의 밭이 영적인 추수를 하기에 무르익은 것 같다고 보고하였다. 나중에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임명되었고, 이 두 도시에는 지금 ‘증인’들의 회중이 있다.

‘가그노아’에서 전파하다

1971년 9월에 네명의 선교인이 ‘가그노아’에 파견되어 그 곳의 총 전도인 수는 다섯명이 되었다. 선교인 중 한 사람인 ‘월트라우드 비스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그노아’에서 첫 날 나는 다른 도시에서 사는 한 남자에게 잡지 두부를 전하였읍니다. 그는 ‘가그노아’에 다시 와서 잡지를 더 많이 구입하였읍니다. 곧 두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그의 고향으로 파견되었고, 그들의 도움으로 그는 진리를 신속하게 받아들였읍니다. 그의 집에서 집회가 열렸고, 얼마 안가서 그는 ‘파이오니아’들을 자기와 함께 살자고 초대하였읍니다. 그는 여호와의 종들과의 그러한 가까운 접촉을 통해 훌륭하게 발전하였읍니다.”

때때로 양같은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내는 데 천사들의 인도가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예를 들어, ‘비스코프’ 자매에게 ‘아비잔’에 사는 형님으로부터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한 젊은이가 접근하였다. 그는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원하였다. 그래서 다음날 어느 특정한 장소에서 그 청년과 만나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 다음 날 젊은이는 일찍 와서 15분간 기다리다 학교에 가버렸다. ‘비스코프’ 자매가 도착했을 때 그는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계시록 14:6과 중천에 날으는 “천사”가 우리의 사업을 인도하는 방법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 청년을 발견하도록 도와달라고 여호와께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그 후 얼마 안되어 그는 길을 걷다가 그 청년을 만나게 되었다. 청년 역시 그 자매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성서를 파는, 어느 ‘프로테스탄트’교의 조그만 전시대에 가서 자기를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인도해 줄 수 있는지 부탁해 보았다. 그들은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는 같은 길을 살피며 걸어오다 서로 만난 것이었다.

「진리」 책을 사용하여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보니파세 트리포 코히’는 겸손한 학생으로서 배우고 있는 새로운 것들을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하였다. 예를 들어, 한번은 그가 해몽에 관한 서적을 가지고 있어도 좋은지 물어보았다. 신명기 18:9-13을 읽어 주었다. 당장, ‘보니파세’는 그 책을 없애버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하였다. 그의 가족은 대단히 놀랬다. 왜냐하면 그 책은 미화로 4‘달러’ 가량 되었는데 그것은 학생에게는 큰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그는 훌륭한 발전을 하였고 지금은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다. 현재 ‘가그노아’에는 30명의 전도인으로 이루어진 번창하는 회중이 있다.

“하나님의 승리” 국제 대회

1973년 12월에 ‘코트디브와르’의 여호와의 백성에게 진정한 자극제가 된 것은 “하나님의 승리” 국제 대회였다. 형제들은 다시 통치체의 한 성원의 섬김을 받게 되어 행복해 하였다. 이번에는 ‘윌리엄 잭슨’이 왔다.

대회 장소는 다시 ‘아비잔’의 ‘복싱 클럽’이었다. 2,080명이란 공개 강연의 참석자 수는 3년 전 ‘F. W. 프랜즈’ 형제가 참석했던 대회 참석자 수의 두배 이상의 규모였다.

그리고 1964년에 전국에서 침례받은 수보다 더 많은 103명이 침례받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특히 감동적이었다!

교직자들의 반대

여러 해 동안 ‘코트디브와르’의 형제들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종종 반대를 직면해 왔다. 순회 감독자로 섬기고 있는 ‘죠셉 아피아’는 어떤 경우 반대가 역효과를 가져온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가 ‘아비잔’에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조그만 섬인 ‘티에그바’를 방문하고 있을 때 ‘가톨릭’ 사제들이 우리의 사업을 방해하려고 애를 썼다. 마을 주민 모두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거짓 선지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협회’의 ‘슬라이드’를 보여주고 있는 동안 무려 600명이나 되는 마을 주민 거의 전부가 왔던 것이다! 그들은 사진들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짓 종교에 미혹되어 왔는지를 보았다. 강연이 끝난 후에 사제들은 우리에게 투석질을 하라고 젊은이들에게 명령하였다. 그러나, 한 노인이 일어서서 제지하며 젊은 소년들에게 ‘우리는 이 마을에서 40년 동안 속아왔소. 이 ‘슬라이드’들은 나에게 내 인생의 새로운 어떤 것을 보여 주었소.’ 하고 말하였다.”

또 다른 경우에 사제들은 순회 대회를 열지 못하게 하려고 시도하였다. ‘아피아’ 형제는 있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74년 4월에 ‘협회’는 ‘아비잔’에서 9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아그보빌’에서 순회 대회를 마련하였다. 내가 경찰국장의 허락을 받은 후에 ‘가톨릭’ 사제들은 그가 우리의 대회를 취소하도록 영향을 주려고 시도하였다. 우리는 모임 장소로 문화회관을 사용할 예정이었다. 대회 일주일 전에 국장이 우리를 불러 우리가 그 ‘홀’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게 가능하다면 시내에서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그는 그렇게 해 주었다.

“즉시 우리는 한 지방 형제의 마당에서 대회를 열기로 준비하였다. 그러나 그 일대에 강이 없었기 때문에 침례받을 장소를 얻는 것이 문제였다. 여러 ‘호텔’에서는 그들의 수영장 사용을 거절하였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셨다. 우리는 수영장을 하나 가지고 있는 어느 연로한 ‘프랑스’인으로부터 수영장의 사용 허락을 받았다. 그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우리에게 친절하였다. 우리가 29명의 침례 지원자 중 마지막 사람에게 침례주는 것을 막 마쳤을 때 사제는 그 ‘프랑스’인에게 수영장 사용을 허락해 주지 말라고 말하기 위해서 왔다. 그는 몇분 늦었던 것이었다. 훌륭하게도 공개 강연에 454명이 참석하였다.”

가속화된 성장

1970년대의 전반에 전파 사업이 이 나라 사방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은 고무적이었다. 1970년에는 ‘코트디브와르’에 회중이 단지 10개 밖에 없었고 왕국 소식을 선포하는 전도인은 매달 평균 389명이었다. 5년 뒤에는 회중이 34개가 되었고 매달 평균 949명의 왕국 전도인이 전파를 하였다.

이러한 확장의 대부분은 선교인들이 많이 파견된 수도 밖의 소도시들과 읍에서 있었다. 선교인들은 여러 회중을 세우는 일을 아주 잘 도왔다. 그런데 그러한 곳에서의 활동이 정체되는 것 같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언어가 한 가지 문제였다. 불어가 이 나라의 공용어이긴 하지만—그리고 대부분의 선교인들은 불어에 정통할 수 있었다—각 지방은 그 지방 자체의 종족 방언이 또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지방 사람들을 영적으로 발전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그 지방 방언뿐 아니라 그 지방 사람들의 풍습과 사고 방식을 아는 사람이 있는 것이 중요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 이후 수년에 걸쳐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만’과 ‘아벤구루’ 및 ‘가그노아’를 포함한 이들 내륙 도시들의 선교인들의 일을 인계받도록 임명되었다. 선교인들이 ‘아비잔’의 새로운 회중들을 강화시키고 1,000,000이 넘는 이 도시의 주민들 가운데 일하면서 그들의 시간과 능력을 더 잘 사용할 수 있다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아비잔’에서의 확장

선교인집들이 내륙 지방에서는 문을 닫았지만 ‘아비잔’에서는 새로운 선교인집들이 문을 열었다. 수도의 교외 ‘윌리엄스빌’에 있는 ‘가브리엘 디아네’의 집 윗층에는 여덟명의 선교인이 숙박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다. 이들 선교인들 중 일부는 새로 형성된 ‘윌리엄스빌’ 회중을 강화시킬 수 있었고 한편 다른 선교인들은 인근 교외 ‘아자메’에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최근에 회중이 분회되어 두개의 회중이 되었다.

많은 선교인들이 사업이 금지된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에서 ‘코트디브와르’로 왔다. 예를 들어, ‘스테픈’과 ‘바아바라 하아디’가 1973년 5월에 ‘우간다’에서 도착하였다. 내륙 지방의 몇몇 도시에서 잠시 봉사한 후 그들은 ‘아비잔’으로 와서 ‘부에’ 항구 회중에 임명되었다. 바로 첫 집회에서 몇명의 관심자들이 그들에게 성서 연구를 부탁하였다. 이들 새로운 사람들이 잘 발전하여 회중은 전도인 28명에서 50명 이상으로 신속하게 성장하였다.

새로운 지부 건물

1972년 1월에 ‘노워’ 형제가 다시 방문했는데, 이번에는 ‘브루클린’의 공장의 종 ‘막스 라아슨’을 동반하였다. ‘노워’ 형제는 “우리는 언젠가 여기에 조그만 지부를 하나 건축하기를 희망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하지만 1978년 9월에 가서야 비로소 이 도시 교외 ‘되 쁠라또’에 조그만 대지를 매입하였다. 그 다음 1980년 6월 중에 이 새로운 지부 건물의 건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지부 건물은 정말 필요하다. 현재는 서적을 보관해 둘 적절한 공간이 없는 실정이다. 새로운 건물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뿐 아니라 사무실, 왕국회관 및 12명 가량의 숙소도 제공해 줄 것이다. 이곳은 ‘코트디브와르’에서 보다 적절한 왕국 활동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승리의 믿음” 국제 대회

1978년의 주요 행사는 12월에 ‘아비잔’의 ‘스따데 깡프루’ 축구장에서 있은 “승리의 믿음” 국제 대회였다. 일년 내내 그 대회를 위한 준비를 해왔다. 그러한 준비에는 ‘아프리카’의 다른 여러 나라에서 오는 형제들뿐 아니라 미국에서 시작하는 ‘협회’의 여행 마련으로 오는 많은 형제들의 참석을 위해 준비하는 일도 포함되었다. 통치체의 ‘리먼 스윙글’이 참석하였고 ‘윌리엄 잭슨’도 다시 참석하였다.

대회 회기중 금요일에는 열정적인 수백명의 형제들이 그들의 승리의 믿음을 선포하고 「이십 세기의 여호와의 증인」이란 새로운 ‘팜플렛’을 배포하기 위해 ‘아비잔’의 여러 교외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스윙글’ 형제와 자매 및 ‘잭슨’ 형제도 일부 선교인들과 함께 봉사하였다.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앞을 다투며 열심히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순식간에 ‘플라스틱’ 가방에 든 서적을 모두 전해버렸다. ‘브루클린’ 본부의 ‘벧엘’ 가족의 한 성원으로 63년간 일해 왔던 ‘그레이스 데세카’ 자매도 89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야외 봉사를 재미있게 무난히 잘 즐겼다. ‘아비잔’은 참으로 훌륭한 증거를 받았다!

회기들이 끝난 저녁에 특별 식사가 선교인들과 본부에서 방문한 형제들을 위해 마련되었다. 모두 64명이 참석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가나’에서 건너온 ‘플로렌스 패터슨’이 끼어 있었다. 그와 그의 남편은 과거 1951년에 ‘코트디브와르’에 도착한 최초의 선교인들이었다. 그 자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수년 전에는 지방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증인’들 중에 백인도 있다는 것을 납득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나는 기억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이제 세계 도처에서 온 이 모든 선교인들을 보십시오!”

12월 17일 축구장에서 있은 그 대회의 절정에, 19개국에서 참석한 2,728명의 사람들을 보는 것은 참으로 웅장한 일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자진하는 일군들과 선교인들과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이곳에서 하는 사업을 참으로 축복해 오셨다. 이제 그들의 수고의 결실이 놀라운 방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1980년 1월에 1,322명이란 전도인 최고 기록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1,600건 이상의 가정 성서 연구가 사회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왕국 찬양자들의 수가 더 크게 증가할 좋은 전망이 있다. ‘코트디브와르’의 형제들은 왕국 봉사를 꾸준히 추구할 그들의 결의를 나타내 왔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된 많은 열매를 맺어 왔다.

[120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코트디브와르

말리

오트볼타

기니

가나

리베리아

대서양

페르케세두구

코르호고

부아케

달로아

아벤구루

귀글로

딤보크로

가그노아

아그보빌

산페드로

아비잔

부에-항구

그랑바상

[125면 삽화]

‘가브리엘’과 ‘플로렌스 패터슨’, ‘코트디브와르’의 초기 ‘길르앗’ 졸업생들

[128면 삽화]

‘로버어트 마아킨’(왼쪽)과 ‘사무엘 데누우’ ‘코트디브와르’에서 최초로 ‘여호와의 증인’이 된 사람들

[132면 삽화]

‘블레이즈 블레이’, ‘아비잔’ 공항에서 근무하면서 불어판 「파수대」 한부를 받아 읽은 내용이 마음에 들어 결국 침례받은 신자가 되었다

[139면 삽화]

‘다니엘 케보’, 여러 지역에서 ‘파이오니아’를 하였으며 ‘아비잔’의 ‘코우마시’ 지역에서 전파한다는 이유로 투옥된 사람들 중 하나이다

[143면 삽화]

‘파울린 브로우’, 여호와를 온전히 섬기기 위해 물질적인 부를 포기하였고, 아버지의 총애까지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