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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탈리아’

‘이탈리아’

‘이탈리아’를 가리켜 “아름다운 장화”라고 흔히 묘사해 왔다. 왜냐하면, 구두의 뒤축에 있는 ‘아풀리아’, 발끝에 있는 ‘칼라브리아’, 다리의 윗 부분에 있는 ‘알프스’로 인해, 마치도 18세기의 장화와 흡사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탈리아’는 지중해 안으로 길게 뻗어 있는 반도이다. 이 나라의 국명은 고대 ‘로마’인들이 이 반도의 남부를 ‘이탈리아’(Italia)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것은 “황소의 땅” 혹은 “방목의 땅”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시골 지방은 매혹적인 자연으로 유명하다. 평야며 산이며 호수며 해변이며 야자수림이며 포도밭, 그리고 삼나무가 무성한 언덕들은 매혹적이다. ‘이탈리아’에는 또한 두개의 커다란 섬, 즉 ‘시칠리아’ 섬과 ‘사르데니아’ 섬이 있다.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극소수이지만, 5천 7백만 인구 가운데 ‘가톨릭’교인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어떻게 하여 참 그리스도교가 처음 이 나라에 뿌리를 내렸다가, 나중에는 쇠약해져 없어지고 말았는가? ‘여호와의 증인’들의 전파 사업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이 나라에서 시작되었는가?

‘이탈리아’의 초기 그리스도인들

기원 59년에 한 중년 남자가 포함된 얼마의 죄수들이 한 군인 장교의 인도를 받아 지치고 험난한 여행을 하고 있었다. 파선된 배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한 후 그들은 ‘이탈리아’의 남쪽에 있는 ‘몰타’ 섬에 상륙하였으며, 3개월 후에 다시 그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들이 탑승했던 배는, 선원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준다고 믿었던, ‘제우스’ 신의 쌍둥이 아들들에게 영예를 돌리고자 “‘제우스’의 아들들”이라고 명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죄수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리이스-로마’ 신들을 숭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바울’이란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였다. 그들은 ‘시칠리아’ 섬의 ‘수라구사’에 도착하여 거기서 3일을 체류한 후, ‘멧시나’ 해협을 통과한 다음 ‘레기온’에 도착했다. 얼마 후에 그들은 ‘나폴리’ 부근에 있는 ‘보디올’에서 하선하였다. 그 지방에 살던 ‘바울’의 영적 형제들이 잠간 동안 머물러 가라고 청하였다. 7일이 더 지난 후에, 그들은 ‘로마’ 제국의 최장 군사-산업 도로인 ‘아피안’ 가도를 따라 ‘로마’로 향했다. ‘바울’의 도착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로마’ 회중에 전해지자, 형제들은 사랑으로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그를 마중나갔다. 그들은 거기서부터 그 여행이 끝날 때까지 여행자들과 동행하였다.—사도 27:1-28:16.

일찌기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고 쓸 만큼 그는 그들에 대해 좋게 생각했다.—로마 1:8, 새번역.

하지만, 얼마간 번창한 뒤 참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바와 같이, 배교에 의해 삼키워지고 말았다. (마태 13:26-30, 36-43) 종교 지도자들이 휘두른 일시적인 권세는, ‘콘스탄틴’ 황제 때에 종교와 정치 요소들이 세력을 규합할 때까지 계속 위세를 더해 갔다. 그렇게 하여 교황을 둔 ‘가톨릭’교가 설립되었다.

영적 암흑이 ‘이탈리아’를 덮다

암흑 시대 중에, 소위 종교 개혁은 ‘이탈리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이 반도의 거민들을 덮고 있던 영적 암흑이 절대적으로 계속 군림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 지식을 추구한 소수의 개개인들이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새로 발견한 성서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줄 수 있는 외국으로 도피해 갔다. ‘이탈리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투옥되고 종교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1870년에는, ‘가톨릭’ 교회가 지배하고 있던 방대한 지역, 즉 교황령이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었다. 그렇지만 ‘바티칸 시티’가 차지하고 있는 조그만 지역은 제외되었다. 그렇게 하여 이제 이 나라에서는 더 큰 종교적 자유에 대한 훌륭한 전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은 ‘베니토 뭇솔리니’가 1922년에 권좌에 오른 지 얼마 후에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1929년에 그는 ‘가톨릭’ 교회와 종교 협약을 체결하여, 그 교회와 교직자들에게는 예외적인 특권들을 부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압제의 시대를 위한 길을 열었다. 그러므로, 현대 ‘이탈리아’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전파 사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게 된다.

그 시작

참 그리스도교가 재출현한 일은 ‘피에드몬트’의 ‘토리노’에서 38‘킬로미터’ 떨어진 ‘피네롤로’란 소도시에서 지난 세기의 말까지 소급한다. ‘피네롤로’는 “왈덴시아 계곡들”이라고 알려진, ‘코티안 알프스’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계곡들 중 하나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계곡들의 이름은, 많은 성서 진리를 인식한 ‘리용’의 상인, ‘피터 왈도’의 추종자들에게서 유래했다.

1891년에 어느 미국인 여행자가 처음으로 일련의 ‘유럽’ 방문을 하던 중 ‘피네롤로’에 잠시 머물렀다. 그는 바로 ‘왙취 타워 협회’의 초대 회장 ‘차알스 테이즈 러셀’이었다. 거기 ‘피네롤로’에서, 그는 ‘토레 펠리체’의 ‘왈덴시아’ 문화관에서 언어를 가르치던 ‘왈덴시아’ 사람인, ‘다니엘레 리보이레’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리보이레’ 교수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왙취 타워 협회’의 출판물에서 설명된 성서 소식을 전파하는 것에는 많은 관심을 보였다.

몇년이 지나갔다. 그 동안, ‘피네롤로’ 부근 ‘산 게르마노 키소네’에 사는 ‘판니 룰리’란 ‘왈덴시아’인이 미국에 있는 친척으로부터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이란 책을 한권 받았다. 1903년 무렵 그 여자는 그 책의 내용이 진리란 것을 인식하고 자기 집에서 조그만 집단의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를 사회하고 있었다.

더우기, 1903년 경에 ‘리보이레’ 교수는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 책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1904년에 ‘티포그라피아 소시알레’에서 자기 비용으로 그 책을 인쇄했다. 이것은 미국에서 이 책의 ‘이탈리아’어판이 나오기 전이었다. 1904년판에서, ‘리보이레’ 교수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썼다. “우리는 이 최초의 ‘이탈리아’어판을 주님의 보호에 맡긴다. 불완전한 번역이지만 주님께서 축복하시어, 당신의 가장 거룩한 이름을 위대하게 하는 데 기여케 하시고 ‘이탈리아’어를 말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더 큰 헌신을 하도록 격려하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여호와께서는 이 책의 배부의 결과를 축복하셨다.

‘리보이레’ 교수는 「시온의 파수대와 그리스도의 임재의 전령」도 ‘이탈리아’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1903년에 계간지로 발행되었고 ‘피네롤로’에서 인쇄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잡지는 정규 통로를 통해 가장 중요한 지방의 중심지에 있는 주요 정기 간행물 판매인들에게 배부되었다.

같은 기간에 ‘클라라 체룰리 란타레트’와 ‘조수에 비토리오 파스케토’도 진리의 지식에 이르게 되었고, 몇년 후에는 ‘레미조 쿠미네티’도 그들과 연합했다.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우리는 이 모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하나의 회중이 형성되다

1908년에 ‘이탈리아’에서 여호와의 현대 종들의 첫 번째 회중이 생겼다. 집회들은, 목요일 저녁에는 ‘피네롤로’, ‘피아짜 몬테벨로’ 7번지에 있는 ‘체룰리’ 자매 집에서 그리고 일요일 오후에는 ‘산 게르마노 키소네’ 부근 ‘곤디니’에 있는 ‘룰리’ 자매의 집에서 열렸다.

‘러셀’ 형제가 1912년에 하나밖에 없는 그 회중을 방문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다시 왔을 때에는 40여명이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당시 전도 사업은 ‘왙취 타워 협회’의 ‘스위스’ 지부 사무실의 감독을 받고 있었고 그 마련은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이탈리아’어는 물론 영어와 불어를 할 줄 알던, ‘체룰리’ 자매가 ‘이탈리아’에서 ‘스위스’ 지부를 대표하였다.

빗나간 기대들

제 1차 세계 대전 중에, ‘이탈리아’ 형제들의 그 작은 집단도 세계 다른 여러 곳에서 경험한 것과 마찬가지로 시험과 정화의 기간을 경험하였다. 1914년에 일부 성서 연구생들(당시 ‘여호와의 증인’들을 그렇게 불렀음)은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고 또 그들의 지상에서의 전파 사업이 끝나게 되었다고 믿었다. (데살로니가 전 4:17)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기록은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어느 날, 그들 중 일부는 어느 외진 곳으로 나가서 그러한 일이 발생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그들은 매우 실망해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 이러한 사람들 중 다수가 믿음에서 떨어져 나갔다.”

15명 정도의 사람들이 충실하게 남아서, 계속 집회에 참석하고 ‘협회’의 출판물들을 연구하였다. 그 기간에 대해 ‘레미조 쿠미네티’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대했던 영광의 면류관 대신, 우리는 전파 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튼튼한 장화를 한 켤레 받았다.”

‘쿠미네티’ 형제에 관한 재판

1915년 5월에 ‘이탈리아’가 전쟁에 가담함에 따라, 그 회중의 한 성원 ‘레미조 쿠미네티’ 형제에게 대단히 어려운 때가 시작되었다. 군복무 징집을 당하자, 그는 중립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이사야 2:4; 요한 15:19) 이것은 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군재판을 받는 것을 의미하였다. ‘클라라 체룰리’ 자매는 그 재판을 참관하여 그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브루클린 벧엘’에 있는 ‘조반니 데체카’ 형제에게 보냈다. 그것은 그가 ‘이탈리아’의 밭에서 발생하는 일에 항상 관심이 있다는 것을 그 자매가 알았기 때문이다. 1916년 9월 19일자로 보낸 그의 편지는 일어난 일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친애하는 형제,

“나는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레미조 쿠미네티’ 형제가 어떻게 믿음을 위해 확고한 입장을 취했는지,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의 그 재판에서 그가 얼마나 훌륭한 증거를 했는지에 대한 좋은 소식을 지체없이 알려 드리기 위해 편지를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판니 룰리’ 자매와 나는 그 재판을 참관하여 우리의 형제가 확고한 믿음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을 보고 격려를 받는 큰 특권을 가졌읍니다.

“판사가 우리 형제를 입대시키려고 반복적으로 올무를 놓고자 하였지만, ‘레미조’는 결코 당황하는 일이 없었읍니다. 그 재판에서 있은 일을 알려 드립니다.

판사: ‘본관이 경고하거니와, 자네는 이 군법 회의에서 심각한 고발로 재판을 받고 있으면서도 우스운 일처럼 대하고 있어!’

‘쿠미네티’ 형제: ‘얼굴의 표정은 어쩔 수 없읍니다. 내 마음의 기쁨이 얼굴에 반영되고 있는 것입니다.’

판사: ‘군복을 입고 자네 조국의 국방을 위해 복무하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쿠미네티’ 형제: ‘내가 여기 법정에 서 있는 이유는 군복을 입는 것을 거부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뿐입니다. 저는 다른 어떤 법을 어긴 일은 없읍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중 한 사람이 증오와 전쟁을 의미하는 제복을 입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일한 이유로 나는 완장을 두르고 전쟁에 가담하고 있는 공장에서 일하는 것도 거부하는 바입니다. 나는 이웃에 대해 평화스럽게 행동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들 중 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기를 원합니다.’

판사: ‘‘쿠네오’ 형무소에서 옷을 벗어 버린 일을 시인하는가?’

‘쿠미네티’ 형제: ‘그렇습니다, 나에게 세번 군복을 강제로 입혔고, 그래서 세번 그것을 벗어 버렸읍니다. 나의 양심은 이웃을 해치는 생각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나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읍니다. 그러나 동료 인간을 해치는 일을 위해선 손가락 하나 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고 미워하지 말라고 교훈하시기 때문입니다.’

판사: ‘자네는 어떤 종류의 교육을 받았는가?’

‘쿠미네티’ 형제: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성서를 연구하였읍니다!’

판사: ‘본관의 질문에 대답하라. 학교는 얼마나 다녔는가?’

‘쿠미네티’ 형제: ‘3년입니다. 그러나 반복하지만,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운 것에 비하면 중요치 않습니다!’

판사: ‘자네가 그런 사람들[‘룰리’ 자매와 나를 칭하는 말임]과 접촉하여 그릇된 길에 빠진 것이 안됐군. [비난조로] 자네가 ‘성서’라고 부르는 이 책을 공부한 것은 얼마나 되는가?’

‘쿠미네티’ 형제: ‘6년입니다. 다만 더 일찍 시작하지 못한 것이 유감스러울 따름입니다!’

판사: ‘누가 자네에게 이 새로운 종교를 가르치는가?’

‘쿠미네티’ 형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가르치십니다. 내가 성서 진리를 이해하도록 보다 장성한 연구생들이 도와 주었지만, 하나님께서만이 이해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읍니다.’

판사: ‘자네의 불순종적인 행동의 심각성을 알고 있는가? 자네의 결심은 그 결과를 직면할 만큼 강한가?’

‘쿠미네티’ 형제: ‘예, 확신합니다. 어떤 일이 닥쳐도 직면할 각오가 되어 있읍니다. 비록 내가 사형을 당한다 할지라도, 나는 주를 온전히 섬기겠다고 한 서약을 결단코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 후에 검사가 ‘쿠미네티’ 형제에 대해 4년 4개월의 형을 구형하였읍니다. 그리고는 변호할 기회가 주어졌읍니다.

“변호인이 일어나서 우리 형제의 태도에 대해 놀라운 증거를 해 주었읍니다. 그는, 그러한 사람에게는 금고형을 내리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용기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충실성에 대해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했읍니다. 그는, 피고인이 살인하지 말라는 성서의 명령을 범함으로 인해 자기 양심을 범하지 않고자 하고 있다고 지적하였읍니다.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었읍니다.

“그 다음, 판사들은 5분간 휴정한 후 판결문을 낭독하기 위해 다시 법정으로 왔읍니다. ‘레미조 쿠미네티’를 국왕과 국법을 어긴 죄로 3년 2개월의 금고형에 처한다.’

“우리의 형제는 얼굴에 빛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들에게 감사하다고 했읍니다!

“그리고 판사는 그에게 더 할 말이 있느냐고 질문하였읍니다.

“‘레미조’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놀라운 목적에 대해선 할 말이 많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읍니다.

“이 말을 듣고 그 판사는 당장 이렇게 반박했읍니다. ‘그러한 것에 대해선 충분히 들었다. 질문을 반복하지만, 피고는 선고에 대해서 할 말이 더 있는가?’

“우리 형제는 열정이 타오르는 얼굴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읍니다. ‘없읍니다. 반복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나의 생명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읍니다. 그러나 나의 동료 인간을 해치는 일이라면 손가락 하나 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재판은 끝났읍니다.

“‘판니 룰리’ 자매와 나는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읍니다. 모두는 그를 칭찬하였읍니다. 판사들까지도 땅의 권력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빛의 아들들의 용기가 있는 그의 겸허한 태도에 놀랐읍니다. 빛의 아들들은, 그들이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바와 같이 오로지 하나님께만 굴복할 것입니다.”

“어느 양심적 거부자의 기나긴 모험”

그 재판 후에 있은 일도 또 다른 이야기거리이다. 너무나도 두드러진 것이었기 때문에 여러 해가 지난 후에 한 정기 간행물 ‘인콘트로’지는 1952년 7/8월호에 그의 이야기를 상세히 실었다. “제 1차 세계 대전 중에 있은 어느 양심적 거부자의 기나긴 모험”이란 제목으로 실린 그 기사의 발췌문을 여기 소개한다.

“이 ‘증인’은 1890년에 ‘포르테 디 피네롤로’에서 태어난, ‘레미조 쿠미네티’였다. ·⁠·⁠·

“그런데,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기계 제조 공장[‘빌라 페로사’의 RIV]이 전쟁 활동에 가담하도록 편입되었고 직공들은 완장을 차고 자기들이 군당국 아래 있다고 생각하도록 요구되었다. ‘쿠미네티’는 그것을 받아들임으로 민간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가 그렇게 하였더라면 그는 후에 견디어 내야 했던 시련들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는 전문 기술공으로서 징집 면제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즉시 이같이 생각하였다. ‘나의 생명을 하나님께 헌신한 내가 어찌 그분의 뜻을 행하면서 동시에 전쟁을 위한 노력에 기여할 수 있겠는가? 간접적으로라도, 나는 “살인하지 말찌니라” 하는 계명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에 불순종하게 될 것이다.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도 ‘프랑스’인과 영국인과 ‘러시아’인도 마찬가지로 나의 이웃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솔직한 사람에게는 분명하고 명백하였다 ·⁠·⁠·

“그의 연령층 집단이 군복무를 위해 징집되었을 때 그는 자기 확신에 고착하여 군 입대를 거부하였다. 그 결과, 그는 다시 체포되어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다. 그는 3년 반의 금고형[실제는 3년 2개월임]을 선고받고 ‘가에타’의 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 하지만, 군당국은 그의 국민들이 전장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있는 동안 그를 감옥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게 하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라고 생각하였다 ·⁠·⁠· 그들은 그를 감옥에서 끌어 내어 군사령부에 보내 강제로 군인이 되게 하여 자기 조국을 위해 싸우게 하려고 결정하였다 ·⁠·⁠· 또 다시 그는 군복 입기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그는 ‘셔어츠’ 차림으로 연병장에 남게 되었다.

“그의 동료들이 모두 조롱하는 가운데 이러한 상태에서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어떤 옷을 입는다고 해서 그것이 그로 군인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웃옷에 별 표지들을 달지만 않는다면, 아무도 군인으로 간주되거나 군 규율에 굴복하는 것이 될 수 없다고 추리하였다. 그래서 그는 별 표지를 달지 않은 제복을 입었지만, 아무도 그의 옷깃에 별 표지를 달게 하는 일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를 다시 감옥으로 보냈으며 다시 정신 병원으로 옮겼다. 왜냐하면, 군당국은 그가 틀림없이 정신 이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은 사고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병원장은 그를 정신 이상자로 판정할 수 없었으며 다시 그가 배속된 연대로 보냈다. 군의 별 표지를 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나 어떤 종류의 군복무도 하지 않겠다고 확고부동하게 거부하는 것을 보고는 얼마 안가서 그를 다시 감옥으로 보냈다. 그렇게 하여 감옥과 정신 병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여러 달을 보냈다.

“결국, 그는 다시 연대로 보내졌다. 이번에는 어떤 소령이 그의 저항을 단번에 깨뜨리고자 결심하였다. 어느 날 그 소령은 그에게 총부리를 대고서 무기를 들고 참호 안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였다. ‘쿠미네티’는 ·⁠·⁠· 그 소령이 이미 훨씬 사소한 위반 행위로도 많은 군인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그래서 그는 이제 최후의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기에 손을 대기를 조용히 거부하였다. 그러자 그 소령은 다른 두명의 군인을 보고 배낭을 하나 준비하여 등에 지우고, 탄대와 군도 등을 그의 허리에 채우라고 명령했다. 그러한 차림으로 만들어 놓고 그 소령은 권총을 가지고 협박하면서 대열에 들어가 서라고 명령했다. ‘쿠미네티’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소령은 두명의 군인에게 강제로 그의 팔과 다리를 잡고 참호 속으로 끌고 가라고 명령했다. 그들이 그를 강제로 끌고 가려고 할 때, ‘쿠미네티’는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이탈리아’여! 군인을 강제로 참호 속에 끌어 넣고서야, 어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으랴?’ 이 말이 그 사납고 무자비한 소령을 누그러지게 했다. 그는 ‘쿠미네티’에게서 장식을 다 떼고 그를 감옥으로 다시 보내라고 명령하였다.

“얼마 후에 그는 그 연대의 연대장에게 불려 갔다. 이 장교는 그로 군의 별 표지를 달게 하기 위해 친절하게 설득해 보려고 결심했다. 그는 그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서, 그가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총을 만지게도 하지 않겠고 대열 뒤에서 복무하게 하겠다고 모든 보장을 하였다. ‘쿠미네티’는, 그가 여태까지 견뎌야 했던 시련 중에서 이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었음을 ·⁠·⁠· 나중에 인정했다. 그의 겸허하고 존경받을 만한 태도를 보고, 어느 순간에 가서 그 연대장은 자기가 싸움에서 이겼다는 생각을 하고서 마치도 아버지와 같은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가엾은 친구야, 네가 어떻게 전체 군대의 가공할 힘을 대항하여 싸울 수 있겠는가? 자네는 지고 말거야. 자, 내가 별 표지를 달아줄테니 더 이상 반항하지 말게.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자네의 유익을 위해서야. 다른 사람을 쏠 필요가 없게 할 것과 자네의 생각이 온전히 존중되게 할 것을 내가 맹세하네.’

“‘쿠미네티’는 딱 잘라 이렇게 말했다. ‘연대장님, 그 별 표지를 나의 옷에 꽂고자 하신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읍니다. 하지만 밖에 나가자마자 다시 떼어 버리겠읍니다!’ 그러한 불굴의 결심에 직면하여, 그 연대장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고 그의 운명대로 되도록 포기해 버렸다.

“이 소박하고 겸허한 사람은 그의 믿음 때문에, 다섯번이나 재판을 받았다. 그는 ‘레죠 에밀리아’ 정신 병원에서, 그리고 ‘레지나 코엘리’, ‘로마’, ‘피아첸챠’ 및 ‘가에타’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결국, 감옥에서 여러 달을 더 보낸 후 ‘쿠미네티’ 형제는 들것을 메는 사람으로 일하도록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그 잡지는 이렇게 보도한다.

“하루는, 그가 전선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한 부상 장교가 전선 뒤로 후퇴할 기력도 없이 참호 앞에 누워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가서 그를 데리고 오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쿠미네티’는 그 위험한 사명을 위해 자신을 제공하였으며 다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그 장교를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오는 일에 성공하였다.”

그는 그 행동으로 은성 훈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은 훈장을 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하여 그 훈장을 사양하였다.”

1916년 8월 18일에 ‘알렉산드리아’의 군재판소가 그에게 선고한 판결문은 ‘토리노’의 군재판 기록 보관소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재판 기록부 제 10419호에 기록되어 있다. ‘쿠미네티’ 형제는, 의심의 여지 없이, 그리스도인 중립을 위해 입장을 취한 최초의 ‘이탈리아’인 ‘증인’이며 또한 현대 ‘이탈리아’ 역사상 최초의 양심적 거부자였을 것이다.

‘이탈리아’ 사무실이 문을 열다

반도 전역에 시체와 폐허를 남기고, 전쟁은 끝났다. ‘스위스’ 지부의 지도 아래 사업이 계속되었지만, 1919년 이후에 ‘이탈리아’에서 사무실이 문을 열었다. 그 사무실은 ‘피네롤로’, ‘비아 실비오 펠리코’ 11번지에 있는 어느 셋집이었다.

1922년에 ‘레미조 쿠미네티’ 형제는 ‘체룰리’ 자매를 대신하여 ‘협회’의 ‘이탈리아’ 대표자가 되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성실에 대한 아주 풍부한 증거를 보인 남자가 있는 데도, 이 책임의 자리에 여자를 두는 것은 더 이상 적절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체룰리’ 자매는 이 교체로 감정이 상했으며 진리를 떠났다.

전후에, ‘왙취 타워 협회’의 출판물을 번역하는 일은 ‘구우세페 반케티’ 교수가 맡게 되었다. 그는 ‘왈덴시아’인 목사였지만, 진리를 연구하여 그 가치를 인식하였다. 그는 그가 믿게 된 것들을 설교단에서 전파함으로써 자신의 종교에 혼합하려고 하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진리의 씨를 이 나라 여러 지역에 뿌려 놓았다. 1913년 무렵에 그는 ‘협회’가 그에게 정규 서적 발송품을 보내곤 하던 ‘폭지아’ 도(道)의 ‘체리놀라’에 있었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러한 발송품은 그 지방 ‘왈덴시아’ 교회에 계속 도착하였다. 그리고 후에, 그러한 서적을 읽은 사람들이 성서 연구생 집단을 하나 형성하였다.

‘반케티’ 교수는 「파수대」뿐 아니라 여러 가지 소책자와 「하나님의 거문고」 및 「구출」 책을 번역하였다. ‘리보이레’ 교수와 마찬가지로, 그도 ‘왙취 타워 협회’의 성서에 대한 설명을 믿고 성서 소식을 전파했지만, 그 ‘왈덴시아’ 교회에서는 결코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

‘반케티’ 교수가 1926년에 사망하자 번역하는 일은 얼마 동안 ‘코우르티알’이란 부인이 맡게 되었는데, 그는 「창조」 책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1928년에 그 일은 ‘지오쉐 비토리오 파스케토’란 헌신한 형제에게 임명되었고, 그는 번역하는 일을 1939년 11월 7일에 그가 ‘파시스트’ 경찰에게 체포되는 날까지 계속하였다. 그 동안 그가 번역한 책들은 「정부」, 「화목」, 「생명」, 「예언」, 「빛」(2권), 「입증」(3권), 「예비」, 「보호」, 「여호와」, 「부(富)」, 「적」 및 「구원」 등이다. 이러한 출판물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실로 ‘때를 따른 양식’이었다. (마태 24:45) 특히, 그러한 서적들 가운데 하나인, 「적」 책은, 중립 문제에 관한 그 책의 솔직한 태도 때문에 당시 존재하던 조그마한 형제들의 집단을 일소하려는 엄청난 박해의 물결을 초래하였다.

‘파스케토’ 형제가 1943년 8월 23일에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그 때부터 그는 1956년에 지상의 행로를 마칠 때까지 다른 번역자들과 함께 계속 일했다.

해외로부터 온 도움

이제 다시 제 1차 세계 대전의 종전 당시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1918년 직후에, 미국에서 진리의 지식에 이른, ‘마르첼로 마르티넬리’ 형제가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라에티안 알프스’ 산맥에서 아래로 ‘코모’ 호수로 이어지는 그 아름다운 계곡들 중 하나인, ‘발텔리나’의 원주민이었다. 그리고 그는 왕국 소식을 가지고 이 구역을 여러 차례 돌았다. 그는 1923년에 ‘콜포처’, 즉 전 시간 왕국 전파자가 되었으며, ‘피네롤로’ 지역에서 ‘쿠미네티’ 형제와 합류했다. ‘마르티넬리’ 형제는 그의 착한 마음씨 때문에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러한 마음씨로 인해 그는 격렬한 박해의 시기에도, 흩어진 소수의 형제들에게 사랑의 편지들을 쓰게 되었다. 그는 1960년에 그의 지상의 전도 봉사를 마칠 때까지 전파 사업을 계속하였다. 그가 주의 사업을 수행했던 ‘손드리오’ 도에서도, 조그만 성서 연구생 집단이 하나 형성되었다.

1920년에서 1935년 사이에, ‘벨기에’, ‘프랑스’ 및 미국에서 진리를 받았었던 다른 이주민들이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들은 그들이 정착하게 된 곳에서 열정적으로 전파를 수행하였으며 또 듣는 귀들을 많이 발견하였다. 그렇게 하여 다른 여러 성서 연구생 단체들이 형성되었다.

1923년에 ‘스위스’ 지부는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의 ‘티치노’ 주에서 봉사하던 세명의 ‘콜포처’들을 ‘이탈리아’로 이사하도록 초대하였다. 그들은 ‘이냐지오 프로티’와 그의 두 여동생들인, ‘아델레’와 ‘알비나’였다. 그 이듬해는 다른 ‘콜포처’인, ‘엠마호츠’ 자매가 그들과 합류하였다.

5명의 ‘콜포처’들의 열정적인 활동

이들 열정적인 ‘콜포처’들의 활동은 참으로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 세명의 자매들은 같은 구역에서 봉사하였으며, 형제들 즉 ‘이냐지오 프로티’와 ‘마르첼로 마르티넬리’는 다른 구역에서 전도 봉사를 하였다. 1923년에서 1927년 사이에 그들은 ‘피에드몬트’의 여러 지역과 ‘롬바르디’의 일부를 돌았다. 나중에 ‘스위스’에서 온 ‘브룬’ 형제와 결혼한 ‘아델레 프로티’ 자매는 여러 해 전에 이렇게 기록했다.

“1924년에 「바람직한 정부」 소책자가 ‘피네롤로’에서 20,000부 인쇄되었다. 우리는 또한 ‘베른’으로부터 「고발당한 교역자들」 전도지를 100,000부 받았다. 이 전도지에는 1924년에 ‘오하이오’ 주(미국) ‘콜룸부스’ 대회에서 낭독한 고발문이 담겨져 있었다. 그것은 교직자들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이탈리아’의 모든 주요 도시에 배부되었다.”

1925년 12월 1일호 「파수대」지에 실린 한 보고는 그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이탈리아’ 형제들은 「고발」 전도지를 100,000부나 배부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특히 교황과 ‘바티칸’에 있는 다른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각각 한부씩 보냈다.”

그러한 신랄한 소식을 전할 때 ‘콜포처’들이 얼마나 흥분했겠는가는 족히 상상할 수 있다! ‘브룬’ 자매는 이렇게 계속했다.

“‘쿠미네티’ 형제와 ‘호츠’ 자매와 나는 단 하루 동안에, ‘제노바’에서 「고발」 전도지를 10,000부 배부하였다. ‘스위스’로부터 「세계 통치자들에게 대한 증언」 전도지를 십만부 받았지만, 대부분을 당국에 압수당했다. 우리는 대략 3개월마다, 집회에 참석하여 우리 자신을 영적으로 세우기 위해 ‘산 제르마노 키소네’에 있는 우리 형제들을 방문하러 가곤 하였다. 형제들과 함께 잠간 동안 만나기 위한 우리의 동경과 열렬한 갈망은 이루 형언하기가 어려웠다.

“한번은, 어느 마을에서 온종일 봉사하여 대단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숲 속을 지나는 외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을 때 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즐거운 생각에 젖어 걷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한 젊은이가 자전거를 끌면서 걸어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평화와 공평의 왕국 통치에 대해 그에게 증거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알렉산드리아’까지 가는 데 약 2시간이 걸렸다. 우리의 여행이 끝날 무렵 그 젊은이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시뇨리나’, 당신은 내가 끔찍한 죄를 짓지 않도록 해 주었음을 말씀드려야 하겠읍니다. 내가 당신을 뒤쫓아 갔을 때 나는 당신을 해치고자 하였읍니다. 그렇게 하여 만약 당신이 저항했더라면, 아마 나는 당신을 죽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의 밝은 얼굴과 신념에 찬 순수한 표정을 보자 나는 당신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다고 느꼈읍니다. 그 때 당신은 내가 이전에 들어 보지도 못한 여러 가지 놀라운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읍니다. 이 두 시간은 인생에 대한 나의 태도를 바꾸게 할 만큼 충분하였읍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얼마나 비참한 인간이었는가를 깨닫게 되었읍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알려 주는 읽을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나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가방에 남아 있던 서적을 그에게 몽땅 다 주었고 그는 나에게 그 값을 지불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나와 악수를 하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다른 여러 경우에서처럼, 나는 그 경우에 참으로 놀라운 방법으로 보호를 받았다.”

‘브룬’ 자매는 50년 동안 헌신적인 봉사를 한 후, 1976년에 ‘쥬리히’에서 사망할 때까지 계속 충실하였다. 당시 다섯명의 ‘콜포처’들 중 한 사람이었던 그의 오빠 ‘이냐지오’는 1970년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봉사에 바친 시간을 계산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봉사를 하곤 하였다. 흔히 우리는 체포되었다가는 얼마 후에 풀려나곤 하였다. ‘갈라라테’(‘바레세’ 부근)에서 ‘마르티넬리’ 형제와 나는 교직자들이 조작한 거짓 고발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우리에게 하루 한 시간씩 감옥 마당에 나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것은 다른 수감자들에게 증거할 기회를 주었다. 종종 우리는 귀를 기울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였고, 심지어 간수들까지 서서 보곤 하였다. 하루는 감옥소장도 왔다. 우리가 석방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수감자들은 우리를 안고 진심으로 감사했다. 우리도 이로 인해 대단히 감동을 받았으며 또 우리가 그러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

‘프로티’ 형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하루는 내가 호별 방문을 하고 있을 때, 어떤 남자가 따라 오는 것을 보았다. 얼마 후, 내가 한 집에서 나오자, 그는 나를 멈추게 하고서는 자기는 비밀 경찰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하였으며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같은 제목의 소책자를 전할 생각을 하고서, 나는 ‘바람직한 정부의 출현에 대해 선포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자 그 요원은 거의 화를 내며 이미 바람직한 정부가 있다고 응수했다—분명히 ‘파시스트’ 정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댁에서 말하는 정부는 일시적입니다. 내가 선포하고 있는 정부는 영원히 계속될 정부입니다.’ 그 다음 나는 성서를 꺼내어 다니엘 2:44과 7:14을 읽게 하였다. 그가 그러한 성귀들을 얼마나 신중하게 읽었는가를 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는 나에게 성서를 돌려 주고는, 기대했던 대로 체포하지 않고 나를 보내어 주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지금, 나는 아직도, 그 경찰이 ‘파시스트’ 정권이 무너졌을 때 우리가 대화한 것을 기억했을지 궁금하다.”

‘프로티’ 형제는 끝까지 왕국 봉사에 충실하였다. 그는 80세로 1977년 ‘바셀’에서 사망하였다.

1925년—최초의 대회

여러 가지 난관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계속 확장되었다. 그리고 최초의 대회가 1925년 4월 23일부터 26일까지 ‘피네롤로’에서 개최되었다. ‘협회’의 본부로부터 ‘A. H. 맥밀란’ 형제가 일련의 해외 방문중이었기 때문에, 그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 대회는 ‘코로나 그로사 호텔’의 커다란 장소에서 개최되었다.

‘파시스트’ 당국이 그 대회를 허락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래서 형제들은 그 모임을 결혼식으로 가장했다. 그 대회중에 ‘레미조 쿠미네티’ 형제는 ‘스위스’인 ‘콜포처’들 중 한 사람인, ‘알비나 프로티’ 자매와 결혼하였다. 그 역사적인 대회에 70명이 참석하였고 이 중 10명이 침례를 받았다.

그 대회에 참석했던 ‘브룬’ 자매는 이렇게 썼다. “우리의 날들은 축복, 즐거움 그리고 행복으로 가득찼었다.” 그는 또 이렇게 부언하였다. “‘호텔’ 주인은 다른 손님들과 고객들을 그 장소 안으로 데리고 와서, ‘모두들 와서 보시오. 우리 지붕 밑에 초기 교회가 있읍니다!’라고 말했다. ·⁠·⁠· 모든 것이 잘 조직되었고 보통 우리는 순식간에 마루를 청소하고 의자들을 갖다 놓았다. 그 다음에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다시 치우고는 모든 것을 다시 정돈해 놓았다. 우리 모두는 행복하였고 기꺼이 도움을 베풀고자 하였다. 그것은 커다란 증거가 되었다.”

하지만, 그 최초의 대회 중에 묘한 불편이 있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대단히 달랐지만, 함께 잘 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는 데는 일치하지 않았다. 북부에서 온 형제들은 활발한 ‘리듬’으로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남부에서 온 형제들은 느릿느릿하게 불렀다. 또 그들이 부르는 것을 고치게 하면 애석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사회하는 형제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온 형제들이 먼저 부르게 하고 북부에서 온 형제들이 뒤따라 부르게 하였다.”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다

전파 사업은 장래가 대단히 유망해 보였다. 1924년 12월 1일호 「파수대」(영문판)에 발표된 보고는 이렇게 논평하였다. “전국을 여행하면서 인쇄물을 배부하며 서적을 판매하는, 세명의 ‘콜포처’에게 자전거들이 마련되었다. 우리는 가까운 장래에 ‘이탈리아’에서 진리가 광범위하게 전파될 것이라는 커다란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보다 얼마 전에 ‘쿠미네티’ 형제는, 당시로는 상당한 금액인 10,000‘리라’를 상속받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형제들의 고향 구역으로 가서 증거하고 그들을 격려하는 일에 그의 시간을 온전히 바칠 수 있었다. 1925년 5월 1일호 「파수대」(‘이탈리아’어판)지에는 1924년 말에 ‘쿠미네티’ 형제와 ‘마르티넬리’ 형제가 한 “‘이탈리아’ 횡단 여행 기록”이 실렸다. 그들은 ‘롬바르디’에서 ‘시칠리아’ 섬에 이르기까지 격지 지역의 형제들과 여러 지역에 있는 관심자들을 방문하기 위해 무려 5,000‘킬로미터’나 여행했다. 그 기록에는 ‘포르토 산트엘피디오’(중부 ‘이탈리아’)에서 공개 강연을 갖기 위해 한 장소의 사용 허가를 얻기 위해 서류를 제출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당국은 그 문제를 얼마 동안 숙고해 봤지만 우리가 끈질기게 요청한 결과 마침내 허락해 주었다 ·⁠·⁠· 강연이 있은 날에는, “죽은 자들이 돌아올 날이 가깝다”란 강연을 듣기 위해 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전도 사업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1926년에서 1927년 사이에 ‘콜포처’들 중 세명이 건강과 기타 이유들로 인해 ‘스위스’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쇠퇴하게 된 주 원인은 1929년에 교회에 예외적인 특권을 부여한, ‘가톨릭’ 교회와 ‘파시스트’ 국가 사이에 조인된 종교 협약이었다. 그 때문에 종교 탄압의 슬픈 기간이 시작되었다.

여기저기에서 몇개의 조그만 진리의 등불은 계속 타고 있었다. 어떤 지역에는 형제들의 작은 집단이 있거나 고립된 전도인들만이 있었다. 그들과 통신하여 계속 연합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완전히 죽어 없어질 위험에 처해 있는, 마치 잿더미 속에 숨겨져 타고 있는 불씨와도 같았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사실상 영적으로 죽어 없어졌다. ‘쿠미네티’ 형제는 그의 편지 가운데서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는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지만, 보다 면밀히 감시를 당하고 있다 ·⁠·⁠· 그들은 매사를 간섭한다. 우리는 「황금 시대」(지금은 「깨어라!」)를 3월까지 받았다. 그리고는 오는 것이 중단되었다. ‘브루클린’에서는 최근에 나온 책들과 소책자들이 포함된 여러 뭉치의 소포를 보냈다고 통지해 왔다. 그러나 아무 것도 받지 못했다. 주소지에 도착하는 「파수대」지는 점점 줄어 들고 있다. 열심을 보이는 형제는 누구든지 적에게 체포된다 ·⁠·⁠· 다른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유배시키겠다는, 그리고 온갖 학대를 하겠다는 위협을 당한다.”

왕국 사업이 온전히 억압당한 것은 아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었다’면 ‘파시스트’ 추종자들의 후원을 받은 교직자들이, 수십명밖에 안 되는 사람들의 활동을 통제하고 그것을 모두 실제로 짓밟아 없애버리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사야 59:1) 그분은 자기의 충성스러운 자들이 정복당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여기저기에서 작은 집단의 왕국 전도인들이 살아 남았다. 그리고 그들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보존되었다는 사실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강력한 활동력으로 그들을 보호하셨음을 알려 준다.

‘프라톨라 펠리냐’ 집단

왕국의 좋은 소식은, 미국에서 진리의 지식을 알게 된 한 이주민에 의해, 1919년에 ‘아퀼라’ 도의 ‘프라톨라 펠리냐’에 처음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빈첸초 피쪼페르라토’란 이 형제는 1951년에 죽을 때까지 하늘의 부름에 계속 충실하였다. 그는 부근 도시들, 즉 ‘술모나’, ‘라이아노’ 및 ‘포폴리’에서 과일 행상을 하였는데, 그는 손수레에 과일과 배부할 서적을 가득 싣고 다니곤 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거문고」 및 기타 출판물들이 배부되었고, 관심자들의 작은 집단이 그에게 모여 들기 시작했다.

1924년에 그가 ‘포폴리’(‘페스카라’)의 공동 묘지 부근에서 「죽은 자들이 돌아올 날이 가깝다」 ‘팜플렛’을 배부하는 일을 끝내고 있을 때, 한 사제가 ‘파시스트’ 청년과 함께 와서 그의 활동을 방해하였고 그를 심문하기 위해 경찰서로 연행해 갔다. 하지만, 도리어, 서장은 그 소식에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그는 경찰서에 있는 기총병(국립 경찰)들을 모두 불러 이 형제의 말을 듣게 했다. 그래서 훌륭한 증거를 하게 되었고 서적도 전했다. ‘피조페르라토’ 형제가 ‘파시스트’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문제를 당하지 않게 해 주기 위해 그 서장은 두명의 경찰이 기차역까지 그를 호송해 주게 했다.

1925년에 ‘피네롤로’에서 대회가 열렸을 때, ‘피조페르라토’ 형제는 자기 부인과 한 관심자와 함께 참석했다. 그 관심자는 형제가 되었다. 당시에, 그의 집에는 이미 30여명의 집단이 함께 모이고 있었고, 후에 한 가족이 새 집을 지었을 때, 그 가족은 방 하나를 왕국회관으로 사용하도록 제공하였다.

1939년에 교직자들이 당국과 함께 문제를 야기시켜 형제들은 심각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서적이 압수되었고, 집회를 보는 것이 금지되었다. ‘피조페르라토’ 형제는 체포되어 ‘로마’에 있는 특별 재판소에 회부되어 금고형을 받았다. 오래지 않아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석방되었다. 그는 다시 체포될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좋은 소식”을 다시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형제들의 지방 집단이 완전히 억압당하지는 않았다.

‘로제토 데글리 아브루찌’ 집단

‘로제토 데글리 아브루찌’는 ‘테라모’ 도에 있는 한 해안 마을이다. 이 곳 주민들은 ‘카테리나 디 마르코’란 자매로부터 처음으로 진리를 들었다. ‘로제토’ 태생인 그는 미국으로 이민 가서 1921년에 ‘필라델피아’에서 진리에 접하게 되었다. 1년 뒤에 그는 침례를 받았고 1925년에 ‘로제토 데글리 아브루찌’로 돌아왔다. 돌아오자 그는 무슨 일을 하였는가? 그 자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탈의장 근처의 해변에서 전도지와 소책자들을 배부하기도 했다. 그 지방의 어떤 남자가 이들 소책자들 중 하나를 읽어 보고선, ‘아! 이것은 ‘카테리나’가 미국에서 가지고 온 그 새로운 종교임에 틀림없어’ 하고 말했다. 그는 내가 가지고 있는 나머지 서적도 읽어 보기를 원했다. 그는 다 읽어 보고는 그것이 진리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가 진리를 받은 첫 번째 사람이 되었고, 후에 다른 진실한 사람들도 따랐다. 한번은 ‘데케카’ 형제가 ‘디 마르코’ 자매를 가리켜 종교적인 반대자들에게 휘둘러진 “진정한 칼”이라고 하였다. 허약하지만, 85세가 된 이 자매는 아직도 계속 성실을 지키고 있으며 자기의 희망에 고착하고 있다.

그의 전파로 인해 진리에 들어온 최초의 사람인 ‘도메니코 키모로시’는 87세로 사망할 때까지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했다. 죽기 몇해 전에, 그는 그 지역에서 사업이 시작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나의 형제들이며 아버지며 조카들이며 직장 동료들에게 진리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들 가운데 대여섯명이 내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소책자 「만민을 위한 위안」을 읽으면서 자기 성서로 성귀들을 찾아 보고 있었다. 우리는 미국에서 돌아온 ‘카테리나 디 마르코’ 부인을 방문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는 즉시 그가 설명하는 것이 논리적임을 알게 되었고 그의 집에서 집회를 갖기 시작했다. 그 직후 ‘파시스트’들이 우리를 찾아 내려고 하였지만, 여호와의 도움으로 우리는 집회 장소들을 비밀로 할 수 있었다.”

진실한 사람들의 작은 집단에 대한 종교적인 반대는 결코 서서히 행해지지 않았다. ‘카테리나 디 마르코’는 이렇게 말했다. “교구 사제는, 내가 「고발당한 교역자들」 전도지를 배부한다는 이유로 나를 고발하였다. 나는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나의 문제들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후에 나는, ‘총통’[지도자, ‘뭇솔리니’]이 하는 연설을 들으러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음으로 체포되었다. 치안 판사는 내가 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문하였다. 나는 ‘다니엘’ 제 3장에 나오는 금 형상에 절하기를 거부한 세 ‘히브리’인들에 관한 기록을 인용하여 대답했다. 그들은 나를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서의 5년간의 유배형을 선고하였다.”

‘도메니코’의 아들 ‘비토리오 치모로시’는 1930년대에 서적을 종종 압수당하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의 「파수대」지와 다른 출판물들은 주소대로 도착하였다. 그는 이렇게 기술한다. “‘데체카’ 형제는 우리 아버지와 다른 관심자들에게 종종 편지를 하여 영적인 양식을 보내 주었다. 그는 우리가 위태롭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완곡한 표현들을 종종 사용하였다. 한번은, 그가 ‘「적」이 없으면 ‘몬토네’에 가면 만날 것’이라고 편지했다. 이 제안에 따라, ‘구에리노 카스트로나’ 형제는 ‘몬토네’ 마을로 가서 「적」 책과 다른 서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말로’ 집단

“나의 젊은 시절에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고귀한 선물을 주신 것에 대해 여호와께 아무리 감사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이 말은 1962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리스도인 임명에 계속 충실하였던 ‘지롤라모 스발키에로’ 형제가 쓴 것이다. 그의 개인 이야기는 오래지 않아 번창하는 회중이 된, ‘증인’들의 한 집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스발키에로’ 형제는 원래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자기의 죄를 참회하기 위해 매듭을 지은 채찍으로 자신을 채찍질하고 자신을 고행 정화하고자 그 채찍을 자기의 맨 허리에 두르고 다니곤 했었다. 그는 종종 자기의 고행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자갈 위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곤 하였었다. 그는 또한 긴 도보 순례에 참가하였는데, 한번은 50‘킬로미터’를 걷기도 했었다. 그런데 1924년에, ‘지롤라모’는, 미국에서 ‘증인’들과 접촉을 가졌었던 한 사람으로부터 처음으로 왕국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베네토’의 ‘비첸챠’ 부근에 있는 조그만 마을인, ‘말로’ 출신인 이 독실한 목수는 이렇게 썼다.

“나는 낮에는 일을 하였고 밤에는 성서를 읽었다. 나의 고용주가 자기는 성서를 원치 않는다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성서를 나에게 한권 주었다. 읽은 것 중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기록에 매우 주의를 끌게 되었고 즉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피네롤로’에서 봉사하고 있던 ‘쿠미네티’ 형제에게 편지를 하였으며, 그의 편지들은 나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개인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진리를 온전히 깨닫는 데는 8년이 걸렸다. 내가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그때까지 아침마다 하던, 교회에 나가는 일과 영성체에 참여하는 일을 중지하였다.”

박해는 서서히 닥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성서를 공부하기 위해서 외진 장소에 있는 산울타리 뒤에 숨곤 하였다. 한번은 어느 동굴에서 ‘기념식’을 가진 일도 있다. 다른 사람들도 소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우리와 연합하였다. 어느 일요일 오후에 우리 중 다섯명이 성경을 연구하기 위해 한 개인 집에 함께 모였다. 조금 후에 마을 사제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 와서는, 우리는 너무 무식하기 때문에 성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모욕을 주었다. 그는 사제들만이 영혼들을 구원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여 말했다.”

열띤 토론을 하는 동안 사제는 그에게 제기된 질문들 중 어느 것도 대답하지 못했으며, 그 후에 그는 경찰을 불렀다. 하지만, 경찰서장은 그 형제를 알고 있었고 또한 그가 그 지역에서 선한 행실로 높이 존경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스발키에로’ 형제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얼마 후에, ‘협회’는 「왕국, 세상의 희망」 소책자 배부 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소책자 165부를 가지고 자전거를 타고 ‘파두아’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경찰이 나를 세우고는 체포해 갔으며, 나를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으로 유배시키려는 법적 소송이 준비되었다. 다행히도, 고향에 있는 당국자들이 그 사실을 알고 개입하여 도와 주었다. 그들은 결국 나를 석방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며 나를 다시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우리가 주 광장에 도착했을 때 경찰관들은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나는 ‘천만에요. 나의 결심은 이전 어느 때보다 더욱 확고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자, 그들은 놀란 나머지 서로를 쳐다 보았다.”

‘지롤라모’의 아들, ‘주세페 스발키에로’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날 나는 아버지께 ‘우리가 어떻게 우리를 반대하는 수천명의 강자들과 대항하여 증거를 계속할 수 있겠읍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두려워 말아라. 이 일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기 때문이야’ 하고 대답하셨다.”—사도 5:33-40 비교.

‘파엔차’ 집단

1923년에 ‘스위스’로부터 ‘이탈리아’에 온 ‘콜포처’, ‘이그나지오 프로티’를 기억하는가? 이제, 1924년에 그는 그가 태어난 곳인, 산들과 밤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조그만 마을인, ‘마르라디’에서 증거할 기회를 가졌다. 진리의 씨가 “좋은 땅”에 떨어져 여러 사람들이 소식을 받아들였다. (마태 13:8) 또 이러한 사람들은 그들이 받은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다.

몇년 후에, ‘마르라디’에서 멀지 않은 곳인 ‘파엔차’의 ‘사르나’에서 ‘도메니코 타로니’란 이름을 가진 한 농부가 얼마의 서적을 받았다. 그는 기꺼이 “좋은 소식”을 받아들였다. 1927년에 그는 「파수대」를 예약하였지만 몇부만 도착하였다. 아마 그것들 중 얼마는 우연히 당국자들의 주의를 피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는 지하 수단을 통해 도착하였다. ‘타로니’ 형제는 비옥한 ‘로마냐’ 지역에서 최초의 ‘증인’이 되었다. 그가 최초로 접촉한 사람들 중 하나는 ‘빈첸초 아르투시’였는데, 그 사람은 충실한 형제가 되어 나중에는 1981년에 사망할 때까지 ‘파엔차’에 있는 세개 회중 중 한 회중의 장로로서 봉사했다. ‘빈첸초’는 ‘에밀리오 바비니’와 그의 형제 ‘안토니오’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했다. 그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계속 여호와께 충실하였다.

이들 열정적인 형제들은 개인 집에서 함께 모였다. 그들이 교직자들에게 발각되자 곧 박해를 받게 되었다. 몇명은 떨어져 나갔으나, 다른 사람들은 성실을 지켰다. 이 지역에서 1939년까지 남아 있던 9명의 형제들은 전후 기간에 광범위한 활동을 시작하기에 충분하였다.

‘조르테아’ 집단

1931년과 1932년에 두명의 이주민이 그들의 마음에 진리를 간직하고서 해외로부터 돌아왔다. 그들은 ‘벨기에’에서 온 ‘나르치소 스테파논’과, ‘프랑스’에서 온 ‘알비노 바티스티’였다. 그들은 즉시 전파를 시작하였다—첫 번째 사람은, 산기슭에서 1천 ‘미터’나 올라간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수백명의 주민이 사는 조그만 마을인 ‘조르테아’에서 전파하였고, ‘폴란드’ 형제들로부터 진리를 들은 두번째 사람은 ‘트렌트’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칼리아노’에서 전파하였다.

‘이탈리아’로 돌아가기 전에 ‘나르치소 스테파논’은 겨우 「파수대」를 예약하고 ‘협회’의 몇몇 다른 출판물들을 읽을 기회밖에 없었다. ‘조르테아’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얼마간 교회에 계속 참석하였는데, 그가 처음으로 증거를 한 곳이 바로 그 교회였다. 어느 날 ‘미사’에서 교구 사제가 복음서의 여러 부분을 해설하는 설교를 하였는데 ‘나르치소’는 그가 말한 것을 공개적으로 반박하면서 ‘디오다티’역 성서를 사용하여 그 사제가 틀린 곳을 지적해 주었다.

그 교회 사람들은 서로 반대하는 두 파로 분열되었는데, 한 파는 ‘스테파논’을 지지하였고 다른 한 파는 사제를 지지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 사제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그 첫 번째 집단은 점차 줄어 들었으며 몇몇 사람들만이 실제로 왕국 소식을 받아들였다. ‘나르치소 스테파논’은 ‘가톨릭’ 교회를 완전히 떠났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와 연합하여 “충실하고 사려깊은 종”의 출판물들을 연구하였다. (마태 24:45-47, 신세) 그들은 건초간이며 헛간 및 교직자와 ‘파시스트’주의자들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함께 모이곤 했다. 당시 정권은 참 그리스도인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하였다.

‘듣는 귀’를 가진 사람들 중 한 사람은 ‘프란체스코 조르테아’였다. 그의 성은 마을 이름과 같았다. 1933년에 그가 처음으로 진리를 들었을 때, 그는 25세였다. 그 때부터 1977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는 계속 여호와께 대한 그의 불요불굴의 믿음을 증명하였다.

‘조르테아’는 자신의 그리스도인 봉사에 대한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우리는 비밀리에 감시를 당하였고, 성귀들을 고려하고자 할 때는 숨어서 해야 할 정도로 추적을 당하였고 통제 아래 있었다. 나는 그러한 경험을 많이 하였으며 그러한 경험들은 나의 믿음을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강화시켜 주었다. 1934년 4월에 나는 우리 집에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폰차소’(‘벨루노’)에 가서 증거하기 위해 도보 여행을 하였다. 왕국 소식을 가지고 호별 방문을 하던 중, 나는 기총병에게 제지를 당하였고 경찰서로 연행되어 갔다. 거기서 나는 심문을 당했으며 서적들을 압수당했으며 다음 아침까지 감방에 갇혀 있었다.

“그 뒤 1935년 7월에, 나는 어떤 긴급한 공문이 있으므로 경찰서에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내가 도착했을 때 서장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르테아’ 씨, 당신 사건이 ‘트렌트’에 있는 ‘프레투라’[지방 치안 법원]에 회부되었음을 알려 드려야겠읍니다. 그리고 당국은 당신이 종사하고 있는 활동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설명하는 진술서를 요구하고 있읍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고 있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얼마 후 8월에, 경찰서에 출두하라는 긴급한 통지를 다시 받았다. 이번에는 ‘트렌트’에 있는 ‘프레투라’가 나의 첫 번째 진술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는 다른 진술서를 요구했다. 그래서 나는 ‘주 기도문’에 나오는 ‘나라[왕국, 신세]이 임하옵시며’란 말과 일치하게 이 표현의 성서적인 의미를 설명했다. 그들은 그 왕국을 정치적인 왕국으로 이해했음이 틀림없다!”—마태 6:9, 10.

하지만, 이 형제가 겪은 진짜 어려움은 아직 닥치지 않았다. 1935년 10월에 ‘이탈리아’는 ‘이디오피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조르테아’ 형제가 군복무를 위해 징집되었을 때, 그는 중립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나는 군복을 입고서 나의 동료 인간과 싸우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 결과, 그는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서의 5년간의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스테파논’ 형제와 ‘바티스티’ 형제도 동일한 행로의 고통을 당했다.

‘포텐차’ 도의 ‘무로 루카노’에서 유배당하고 있으면서도, ‘조르테아’ 형제는 전파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정착하자마자, 나는 ‘레미조 쿠미네티’ 형제에게 연락하여 전파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서적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후에, 소책자가 든 소포를 하나 받았으며, 나는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배부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일부는 직접 전하였으며, 일부는 도로변에 있는 공용 의자 위에나 주차하고 있는 자동차 안에 남겨 놓았다.”

정부의 사면 덕분에, 그는 1937년에 고향인 ‘조르테아’에 돌아와서 교직자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가한 종교적인 박해의 또 다른 사건을 때마침 목격할 수 있었다. 지방 자매들 중 한 사람이 사망하였으며, 사제는 그를 공동 묘지에 매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성지를 더럽히게 될 것이라는 핑계였다. 3일이 지났으며 상황은 여전히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 때 ‘조르테아’와 그 인근 ‘프라데’ 마을의 교구 사제들이 지방 의회 서기와 ‘포데스타’(‘파시즘’ 하의 시장(市長))와 회의를 가졌다. 그 후에 발생한 일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야기와 흡사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르테아’ 형제는 이렇게 기술했다.

“3일째 오후가 되어서야 우리는, 장례식이 즉시 거행될 것이며 그 시신을 지방 의회가 ‘프라데’에 있는 공동 묘지에 소유하고 있는 조그만 대지에 매장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출발했다. 우리 네 사람 뒤에는 그 자매의 유족들과 다른 관심자들이 따랐다. 읍 의회의 한 관리와 호송하는 경찰이 우리와 함께 하였다. 가는 도중에 우리는 비웃음과 야유와 조롱을 당했으며, ‘프라데’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그 우스운 꼴의 마지막 장면을 지켜 보기 위해 군중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일은 가장 흥미있는 구경거리였던 것 같다.

“그들은 공동 묘지가 ‘축복’받은 곳이기 때문에 정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고 결정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공동 묘지 안팎에서 두개의 사다리를 맞대어 놓고 사다리를 타고 관을 운반해야 하였다. 군중은 우리가 관을 벽 너머로 넘기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 모였었다. 이 때에 지방 의회 관리가 개입하여 그러한 마련을 한 책임자가 누구냐고 질문하였다. 그는 그 결정이 지방 사제가 내린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그 관리는 시장은 장례 행렬이 정문을 통해 들어가게 하라고 명령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몬테실바노’, ‘피아넬라’ 및 ‘스폴토레’ 집단들

1930년대 초에 ‘루이지 단젤로’가 ‘아브루찌’ 지역에 있는 ‘스폴토레’로 돌아왔다. 그는 ‘프랑스’에서 진리의 지식을 알게 되었으며, 돌아오자마자 그는 자기가 알게 된 것을 친척들이며 친구들이며 이웃들에게 전함으로써 그들에게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타냈다.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는 형제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대단히 활동적이었으며 열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격지의 형제들을 방문하기 위해 종종 수 ‘킬로미터’를 여행하곤 하였다. 그러한 여행을 하는 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하였다. 당시에 가장 흔한 교통 수단은 자전거였다. 그리고 ‘아벨리노’에 살고 있는 한 형제를 방문하기 위해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장장 600여 ‘킬로미터’의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여행한, 그의 긴 여행들 중 하나를 상기해 보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격려가 된다. 그는 출발하기 전에, 산을 넘을 때 혹시 늑대들을 만나면 사용하기 위해 자전거에 매어 가지고 갈 튼튼한 막대기를 준비했다. 그는 안장에 방석을 하나 깔고 그 위에 앉아서 우리 모두에게 그토록 필요한 그리스도인 우정으로 다른 형제들을 세워 주고자 하는 갈망으로 불타는 열심에 가득차 출발하였다. 그가 1936년에 병환으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그의 봉사 기간은 짧았다.”

그러나 이 형제가 심은 진리의 씨들은 죽어 없어지지 않았다. 반대로, 이들 씨는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싹이 텄다. (고린도 전 3:7) 그렇게 하여 ‘페스카라’ 도의 ‘몬테실바노’, ‘피아넬라’ 및 ‘스폴토레’ 읍 들에서 전도인 집단들이 형성된 것은 바로 이 한 사람의 ‘증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들 형제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로서 ‘형주를 지’고 박해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누가 9:23, 신세.

‘몬테실바노’의 ‘디 첸소’ 가족은 왕국 소식을 받아들인 가족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종교적인 형상들을 제거하였고, 그들의 집은 곧 성경을 연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모임 장소가 되었다. 그런데 어떠한 일이 발생하였는가? 아직도 진리의 길에서 충실하게 걷고 있는, ‘마리 안토니아 디 첸소’ 자매는 이렇게 설명한다.

“얼마 안 가서 교직자들이 우리를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인상적인 행렬을 조직하였다. 그 행렬이 우리 집 주위를 서서히 줄지어 돌고난 뒤, 참가자들은 땅에다 십자가를 꽂고서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은 물러가라! 교회로 돌아오라!’ 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대중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러한 반대를 직면하여 우리는 고립되었지만, 오로지 여호와께서만이 우리가 진리에 고착하고 전진하는 데 필요한 힘을 유지시켜 주시며 우리에게 주실 수 있었다.”

‘몬테실바노’ 집단의 다른 성원인 ‘제라르도 디 펠리체’는 여러 차례 믿음의 시험을 당했다. 한번은 그가 자기 집에서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는데, 교직자들의 선동을 받은 열광적인 ‘파시스트’ 당원 일당이 그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마구 때려 의식을 잃게 하고는 마루에 버려 두고 가 버렸다.

그 후에도 그는 계속 확고하고 담대하게 그의 중립을 지켰다. 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먼저 나는 ‘바리’에 있는 군 병원에 보내졌고 그 다음에는 ‘비셰리에’에 있는 정신 병원으로 보내졌다. (여기서 그들은 그가 과대망상증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내 보내 주었다.) 내가 베개 밑에 성서를 두고 읽은 것을 어느 날 한 수녀가 발견하였다. 그는, 그 책은 독이 가득한 책이라고 말하면서 압수해 가 버렸다.”

‘몬테실바노’에서 시계 수리공으로 일하던 ‘프란체스코 디 잠파올로’ 형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사제의 선동을 받은 깡패 일당이 내가 살고 있는 건물에 무거운 진흙 덩어리를 던지기 시작하였다. 이웃 사람들과 세든 사람은 바깥으로 뛰어 나가면서 ‘우리는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이 아니오!’ 하고 외쳤다. 뛰어 나간 그들은 그들이 던지는 것에 맞았지만 나는 다치지 않았다.”

전격적인 운동

이제 1932년으로 돌아가 보자. ‘스위스’ 지부 감독자였던 ‘마아틴 하아벡’ 형제는 사무실이 ‘피네롤로’에 있는 대신, 주요 도시의 보다 중심 지역에 있다면 ‘이탈리아’에서의 전도 사업이 더 잘 진척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해에 ‘밀라노’에 사무실을 하나 열었다. ‘쿠미네티’ 형제는 그러한 거친 박해의 때에 자기가 다른 도시로 이사하는 것은 슬기롭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피네롤로’에 계속 남아서 비밀 수단을 사용하여 형제들과 계속 접촉하였다.

그 새로운 사무실은 ‘코르소 디 포르타 누오바’ 19번지에서 문을 열었다. 그것은 설비가 잘 된 사무실들이 있는 단정한 한 ‘아파트’였다. ‘마리아 피짜토’ 자매가 거기서 ‘하아벡’ 형제의 비서로 일하도록 임명되었다.

‘피짜토’ 자매가 진리를 배운 경위는 흥미있다. 아마 여러분은 금세기 초에 「파수대」지가 각 도의 주요 도시에 있는 일류 정기 간행물 판매소에서 배부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1903년과 1904년 사이에 ‘마리아 피짜토’의 어머니가 ‘비첸챠’에서 가장 큰 정기 간행물 판매소들 중에 하나인 ‘피아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에 있던 한 정기 간행물 판매소에서 그 잡지를 몇부 샀다. ‘마리아 피짜토’가 보다 큰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 잡지들을 읽은 것은 그 후 여러 해가 지난 뒤인 1915년이었다. 이번에는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그는 ‘피네롤로’에게 편지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자매였던 ‘클라라 체룰리’는 그에게 회신을 해 주었고 출판물을 얼마 보내 주었다. 그렇게 하여 ‘마리아 피짜토’는 참된 생명을 주는 지식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밀라노’에 있는 새로운 사무실은 성서 서적과 책자들을 인쇄하고 배부하는 한 협회인, “소시에타 왙취 타워”란 이름으로 그 지방 상업 회의소에 등록되었다. ‘하아벡’ 형제가 책임자가 되었다. 우편 거래 계좌를 개설하고 사서함을 하나 세냈다.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고, 이제 이 나라 전역에서 광범위한 활동이 수행될 것을 확신을 가지고 기대하게 되었다.

전도 사업은 「왕국, 세상의 희망」 소책자를 전하는 운동을 벌임으로써 시작되었다. 사업이 너무나 신속하게 수행되었기 때문에, 반 ‘파시스트’ 활동에 관계하는 무서운 비밀 경찰은 불시에 놀라게 되었다. 당시에 ‘이탈리아’인 형제들은 몇명 되지 않았다. 모두 합해야 50명을 넘기 어려웠다. 그래서 ‘베른’ 사무실은 지방 형제들에게 문제들을 야기시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 20명의 ‘스위스’인 형제들이 실제로 배부 사업을 수행하도록 마련하였다. ‘스위스’인 전도인들 각자는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의 다른 여러 도시, 심지어 ‘피렌체’까지 내려가서 호별 방문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공중 장소에서 그 소책자를 배부하였다.

그 무료 소책자는 또한 ‘밀라노’ 도의 모든 전문 직업인들과 지식인들에게 우송되었다. 당시에 서적을 해외로부터 수입하는 것은 법률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소책자는 ‘밀라노’에 있는 ‘아르케티포그라피아’에서 인쇄되었다. 필요한 허락을 받기 위해 ‘프레페투라’ 현(縣)의 출판국에 3부를 보냈으며 허락을 받았다.

이런 신권적인 전격 작전에 정치 및 교회 당국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 것인가? 모든 것이 예정된 날짜보다 여러 날 전에 다 준비되었다. 그 날은 ‘가톨릭’력으로 성 ‘요셉’의 날인 3월 19일이 되기 며칠 전이었다. 이 특별한 운동에 대해서, 그 운동에 참여했던 20명의 ‘스위스’ ‘증인’들 중 한 사람인 ‘아델레 브룬’ 자매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나는 ‘토리노’로 파견되었다. ‘베른’의 ‘보스’ 형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미 나를 위해 방을 하나 구해 놓았으며, 여러 꾸러미로 된 10,000부의 소책자가 한 지방 창고에 저장되어 있었다. 그 배부 사업은 가능한 빨리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그 형제는 나에게, 지방 신문 판매인들과 접촉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는 마련을 하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였다. 그렇게 하고는, 그 형제는 떠났으며 나는 혼자서 하였다.

“나는 모두 12명의 신문 판매인들과 접촉을 하였고 그들은 각각 20‘리라’를 받고 그 날 그 소책자를 배포하겠다고 동의하였다. 나는 그 활동을 지휘하도록 그들 가운데서 가장 전문적인 사람을 선택하였으며, 잘 조직하면 그에게 10‘리라’를 더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나는 또한 필요한 만큼 소책자를 구할 수 있는 곳에서 조달처 역할을 하도록 4명의 판매인을 선택하였다. 그 활동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음식점이며 사무실을 포함하여 모든 곳에 그 소책자를 남겨 놓았다.

“그런데, 한낮에 소책자를 맡겨 놓은 창고의 주인이 나에게 와서 이튿날인 성 ‘요셉’의 날에는 문을 닫겠다고 말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했겠는가? 만약 그 휴일 다음 날까지 기다린다면 사제들이 그 서적을 압수할 시간을 주게 될 것이다.

“오후 3시경에 12명의 신문 판매인들이 하나씩하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척 피곤하였으며 식사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에 집으로 가기를 원했다. 나는 그들을 집으로 보내는 대신 얼마의 식품을 사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리고는 나는 그들에게 ‘만약 오늘 저녁까지 그 일을 끝내 주면 10‘리라’씩을 더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들은 계속하기로 동의하였다. 조금 휴식을 취한 후에 그들은 다시 배부하러 나갔다. 저녁 무렵 그들은 그 소책자들을 모두 다 배부하였다.”

‘노라바’ 시에서 그 운동에 참여한 후 ‘브룬’ 자매가 떠날 때가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나는 그 소책자가 200,000부나 압수당했었던 ‘밀라노’로 기차를 타고 갔다. 같은 날 밤에 나는 ‘스위스’로 떠났다. 남편이 거기서 내가 도착하기를 걱정스럽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활동은 대단히 신속하게 그리고 예기치 않게 완수되었기 때문에 20명의 형제들 가운데 체포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압수당한 서적의 분량에도 불구하고, 무려 300,000부의 소책자가 배부된 것으로 추산되었다!

반응은 신속히 나타났다. ‘피짜토’ 자매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 운동이 있은 지 2, 3일 후에 신문들, 특히 교직자들의 영향을 받고 있던 신문들이 우리에게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코르소 디 포르타 누오바’에 있던 사무실은 질문의 홍수에 빠졌으며, ‘이탈리아’ 전역으로부터 서적들이나 설명을 요청하는 편지가 쇄도해 왔다.

“이 때에 두 경찰관이 사무실에 와서 ‘하아벡’ 형제와 나에게 ‘퀘스투라’[경찰 본부]의 출판국에 즉시 보고하라고 명령하였다. 거기서 여러 가지 질문을 받은 후에, ‘하아벡’ 형제는 사무실을 폐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압수된 소책자들을 ‘스위스’로 보낸다는 조건으로 그것들을 되돌려 받는 데 동의하였다. 그러한 조처들은 ‘라테 란’ 조약과 일치하게 ‘가톨릭’ 교회의 명성과 위엄을 보호하기 위해 취해졌다는 설명이 있었다.”

문을 연 지 몇달도 안 되어 ‘밀라노’ 사무실을 폐쇄하게 되었으므로, ‘쿠미네티’ 형제만이 남아서 형제들과의 참을성있는 비밀 통신을 하게 되었다. 그는 형제들에게 이따금씩 서적이나 서신을 보내곤 하였으며, 가능할 때는 주의 사업에서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들을 방문하곤 하였다.

1935년에 ‘쿠미네티’ 형제는 ‘피네롤로’에서 ‘토리노’의 ‘비아보르고네’ 18번지로 이사하였으며, 거기서 그는 지하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 마련은 ‘쿠미네티’ 형제가 어떤 수술을 받은 후, 1939년 1월 18일에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끝까지 의사들과 간호원들에게 증거하였으며, 나이가 50이 채 못 되어 죽게 되었지만, 그의 죽음은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 겪어야 했을 또 한번의 “긴 모험”을 면하게 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증인’들은 그 큰 박해의 기간에 여호와께 그들의 성실을 증명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큰 박해

‘이탈리아’가 1935년에 ‘이디오피아’에 선전포고를 한 일과 또 1940년 6월에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로 결정한 일은, 이 나라에 있던 소수의 ‘증인’들에 대한 박해를 더욱 악화시키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형제들이 중립을 지키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스위스’ 지부는 왕국 전도인들과 접촉하려고 최선을 다했으며, 또 1939년에는 ‘아델레 브룬’ 자매가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에 있는 형제들을 방문하도록 임명되었다. 그의 방문은 3주간에 걸쳐 있었다. 일부 형제들은, 그들이 그러한 세워 주는 방문들로부터 받은 즐거움과 격려를 아직도 기억할 수 있다. ‘스위스’로 돌아오자마자, ‘브룬’ 자매는 미망인이 된 그의 자매 ‘알비나’로부터 경찰이 계속 그를 미행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되었다.

전도인들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비밀 전파가 조직되었으며, 특히 ‘마르티넬리’ 형제에 의해 조직되었다. 서적이 ‘스위스’ 국경 너머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 나라에 반입되었다. 그들은 서적을 잘 숨겨 가지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 때 ‘하아벡’ 형제는, ‘쿠미네티’ 형제가 사망한 후에 조직과의 연락이 끊어진 형제들과 접촉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피짜토’ 자매와 비밀 모임을 가졌다. 그는 ‘베른’ 지부 사무실로부터 50여개의 주소를 받았다. 그는 재고 서적을 ‘밀라노’에 있는 한 사망한 그리스도인 자매의 딸로서 분명히 관심자였던 한 사람의 집에 예치해 두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어떤 방법으로 경찰과 내통하였음이 틀림없었다. ‘피짜토’ 자매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업의 이 새로운 국면의 기간은 대단히 짧았다. 1939년 9월에 우리는 소포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소포들은 무게가 3‘킬로그램’을 초과하지 않게 하였는데, 그 이유는 당시 시행되던 우편 법규에 따르면 그 정도 무게까지의 소포에는 발송자의 주소를 기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의심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나는 서적들을 저녁에 포장하곤 하였다. 나는 아침에 봉사 나가는 길에 그러한 소포들을 여러 다른 우체국에서 부치곤 하였다.”

하지만, ‘증인’들에 대한 박해가 불붙게 한 일이 발생하였다. 불행히도, 1939년 10월 28일에 ‘몬테실바노’의 어느 우체국 사무원이 그러한 소포들 중 하나를 뜯어 보게 되었다. 그 속에는 여러 부의 소책자와 「적」 책이 들어 있었다. 그 내용물은 즉시 경찰에 넘겨졌고, 또 조회 결과 발송자의 주소는 없었지만, 그 소포의 출처가 곧 밝혀지게 되었다. 그 서적은 ‘마리 안토니아 디 첸소’에게 보내지는 것이었으며 그 자매는 그 다음 날에 체포되었다. 그 후 11월 1일에는 ‘파시스트’ 경찰들이 ‘피짜토’ 자매를 방문하였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꼭두 새벽에 경찰이 ‘밀라노’, ‘비아 빈첸조 몬티’ 28번지에 있는 나의 집으로 습격해 왔다. 모두 7명이었다.—6명은 비밀 경찰관이었고 1명은 경찰국장이었다. 그들은 황급히 내 방으로 들어와서는, 내가 마치도 위험한 악한이라도 되는 듯이 손을 들라고 짤막하게 명령하였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범법 자료라고 생각하는 것—성서와 성서 서적들을 곧 발견하였다!”

‘파시스트’ 경찰은 ‘피짜토’ 자매의 ‘아파트’에서 다른 여러 형제들의 주소를 발견하였으며, 그래서 경찰은 그들의 집도 습격하였다. 10월에서 12월 초순까지 대략 300명이 경찰에게 심문을 받았는데, 그들 중 다수는 단지 「파수대」 예약자들이었거나 ‘협회’의 출판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대략 120명 내지 140명의 형제들과 자매들이 체포되어 선고를 받았다. 이들 중 26명은 주모자들로서 특별 재판소에 회부되었다.

이 후자 집단의 한 사람이었던 ‘구에리노 단젤로’는 그가 체포될 때 일어났던 일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나는 남자 식구들이 이미 투옥된 형제들의 가족을 위해 옥수수를 심어 주고 있었다. 집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노인들과 어린아이들뿐이었다. 경찰이 도착하여 파종 기구를 제자리에 갖다 두라고 명령하였다. 그 다음 그들은 나를 감옥으로 끌고 갔다. 나는 거기서 심하게 매질을 당했다.”

‘빈첸초 아르투시’는 이렇게 말했다. “1939년 11월 15일에 직장에 가기 위해 집을 나갔을 때, 나는 두명의 경찰관이 계단 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내가 ‘아르투시’냐고 질문하였다. 나의 신분을 확인한 후 그들은 나를 다시 집으로 들어가게 하였고, 그들이 나의 집을 샅샅이 수색하는 동안 기다리게 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불리한 증거를 찾아 내기 위해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으며, 서랍을 다 열어 보았다. 마침내 그들은, 그들이 찾고 있는 것—성서와 「적」 책 위에 손을 올려 놓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자녀들에게 작별 ‘키스’를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은 채 나를 연행해 갔다. 나는 경찰관들이 가득한 방으로 연행되어 가서 세시간 동안 심문을 받았다.”

막 남편을 잃은 ‘알비나 쿠미네티’ 자매도 체포되어 특별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나는 체포되어 자동차에 실려 감옥으로 갔다. 그 차에는 경찰관 두명과 경찰국장 및 내무부에서 온 고위 관리 한 사람이 동승하였다. 그들이 나를 연행해 갈 때 나는, 나같이 연약한 여자 한 사람을 체포하기 위해 고위 관리 두 사람을 포함하여, 네 사람의 남자가 필요했던 것을 생각하고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했다. 그들은 비웃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나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하고서는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 주었다. 나는 그들의 비꼬는 일이 쓰라린 것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실상, 그 경찰국장과 고위 관리는 둘 다 ‘파시즘’이 몰락한 후 옥사하였다.”

‘파시스트’ 정부가 특별 조치를 취하다

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1935년 이후에 더욱 거칠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1935년 4월 9일에 내무부의 종교국에서는 “오순절 협회”에 대한 공문을 발표했다. 당시 당국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신분을 올바로 알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오순절” 단체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공문서는 도 행정 본부에 보내졌고 “우리 사회 질서에 반대되고 우리 인종의 신체적, 정신적 복지에 저해된”다고 선언된 활동을 하고 있는, 그러한 협회들을 즉각 해산시킬 것을 요구했다.

1939년 8월 22일에 “오순절 종파 및 유사 종파들”과 관련하여 또 다른 공문(제 441/027713호)이 발표되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지난 수년 동안 해외, 특히 미국으로부터 들어온 일부 복음 전도 종파들이 ‘이탈리아’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관찰되어 왔다. 그들의 교리들은 어떠한 기성 정부와도 반대되는 것이다. ·⁠·⁠·

“‘오순절’교인들은 극도로 활동적이며 집요하게 포교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조치들이 최근에 취해진 뒤, 그들은 가능한 곳은 어디에서든지 심지어 시골의 노천 지역에까지 가서 함께 모이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당국자들이 경계하며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들 신자들 중 한 사람의 집에 낮이나 밤에 모임을 갖는 경우가 더 많다. ·⁠·⁠·

“최근에 군복무 소집을 받고서도 ‘오순절’교인으로서, 원칙에 따라 무기 사용을 반대하기 때문에 사격 훈련을 거부한 사람들의 경우가 있어 왔다. ·⁠·⁠·

“그러므로 가장 단호한 결의를 가지고 이들 종파들을 저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

“이러한 목적으로 우리는 여러 도에서 그러한 ‘오순절’교인의 집단이나, 다른 유사한 종파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정확한 조사를 행할 것을 요청하는 바이다. 집회며 종교 의식이며, 포교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밝혀지는 자들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든지 법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기타 경우에 있어서 취해야 할 조치에 대해선 부처의 지시를 요청해야 한다. 더우기, 문제시되고 있는 종파들의 신자들로 알려진 사람들을 엄격히 감시하고 또 혐의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들이 포교 목적을 위한 인쇄물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숭배를 위해 동료 신자들과 접촉을 계속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들과 그들의 거처를 정기적으로 수색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

“‘오순절’ 종파의 신자들로부터 지금까지 압수한 모든 소책자들은 거의 항상 ‘J. F. 러더포오드’란 사람이 저술하였고, 미국, ‘뉴우요오크’, ‘브루클린’ 소재 ‘왙취타워 성서 책자 협회’—만국 성경 연구회—가 인쇄한 미국 출판물의 번역판들이다 ·⁠·⁠· 그러한 소책자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 [‘왙취 타워’ 출판물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이러한 소책자들이 이 영토에 반입되어 배부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오순절’ 종파가 뚜렷이 구별된 유일한 종파이기는 하지만, 여기 단 하나의 ‘종파’가 아니라 ‘종파들’이라고 말한 것은, 전술한 소책자들이, 원래 인정되고 있는 여러 복음 전도 종교들 가운데서 다른 종파 혹은 사상이 생겨났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임을 유의해야 한다 ·⁠·⁠·”

이 공문서에서 제안된 조치들이 바로 1939년 말에 ‘여호와의 증인’들의 대다수가 투옥되게 한 체포의 물결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이다.

‘증인’들에 관해 발표된 보고

‘아베짜노’(‘아브루찌’)의 경찰 총경, ‘파스콸레 안드리아니’ 박사는 앞서 언급한 공문서에서 설명한 바와 일치하는 조사를 실시했다. 1940년 1월 12일에, 그는 ‘주 보호 특별 재판소’ 검사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는 또한 사본을 경찰서장에게 제출하였다. 그의 보고서의 제목은 “여호와의 증인 종파”였다. 두드러진 요점들 중 얼마는 다음과 같다.

“지난 8월에 발표된 공문서에서, 내무부는 정치적인 분야에까지 활동을 확대하는 그 종파들의 성원들에 대한 신분을 확인하는 것에 관한 지시를 내렸다. 그러므로 이들 종파들은 전복적인 성질의 정치적인 운동과 동일하게 간주되고 취급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명령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영토 내의 특정 지역에서, 매우 밀집한 신자들의 집단들이 대표하는 여러 종파들을 구별하기 위한 보다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

“[‘여호와의 증인’] 종파는 특히 정치적인 관점으로 볼 때 위험하다. ·⁠·⁠·

“간단히 말해서, [「경고」 소책자에서] ‘총통’은 거인 ‘골리앗’으로 비유되었으며 ‘오늘날의 그 가증스러운 괴물은 절대적이고 방자한 독재자 휘하에 있’고 또 ‘큰 음녀’인 ‘로마’ 교회의 지지를 받고 있는 ‘전체주의 정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국민을 굴복시킨 후에, 이 정권은 ‘그토록 많은 인명의 희생을 치르면서’ ‘이디오피아’의 정복을 개시했다. ·⁠·⁠·

“하지만, 문제의 가장 심각한 부면은 ‘살인하지 말찌니라’란 그리스도인 관념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 그리고 어떠한 이유로든지 동료 인간을 대항하여 무기를 들 수 없다는 그들의 신념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종류의 군복무에서도 면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젊은이들은 예비 훈련을 받기도 거부하며 또 그러한 입장 때문에 투옥을 해도 그들의 형기를 마치고 나와서도 또 다시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그 보고서는 또한 ‘피짜토’ 자매가 형제들에게 보내기 위해 사용한 회람을 언급하며 그것으로부터 몇 군데 발췌문을 인용한다. 그 보고서 내용은 이러하다. “우리가 재고로 많이 갖고 있는 것 중에서 한부를 동봉한, 이 회람으로 ·⁠·⁠·,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재난의 때에 그토록 필요한 영적인 양식’을 박탈당하지 않도록 격려를 받았으며 또 ‘서적’을 주문할 수 있고 「파수대」 예약을 갱신할 수 있는 곳인 보관소를 ‘밀라노’에 설치하였다는 통지를 받았다. 수취인들은 또한 ‘이 나라에서의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고려하여’ 서적을 주문할 때 ‘매우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는 통지도 받았다. 주문은 원하는 서적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번호나 글자들의 집단으로 된 암호에 따라 표시해야 한다. 즉 「적」 책자는 1-33-1로, 「경고」 책자는 2-44-2로, 「왕국」 책자는 3-55-3으로, 「파수대」지는 W. T. 등으로 표시된다.”

선동자들의 정체가 밝혀지다

당국자들이 불확실한 방법으로 우리를 대항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체포 운동의 배후에 있는 자들은 실제로 누구였는가? ‘밀라노’ 사무실의 폐쇄에 관해 말할 때 언급된 그 보고서는 분명히 이와 같이 천명하였다. “배부된 책자들의 반 ‘파시스트’적인 어조와 ‘가톨릭’ 교직자들의 반응 때문에 단지 몇 개월 뒤 그 사무실은 ‘밀라노’ 경찰에 의해 폐쇄되었다.” (‘고딕’체는 발행자가)

그 보고서는 ‘이탈리아’에서의 이 종교 운동에 주된 책임이 있는 체포된 26명의 ‘증인’들의 활동에 대해 계속 언급한다.

교직자들이 ‘파시스트’ 당국과 함께 문제를 야기시킨 주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은 ‘가톨릭’지 「피데스」 1939년 2월호 기사에 실린 거짓 고발로 더욱 증명된다. 익명의 “영혼들의 보호자이며 사제”가 쓴 그 기사는 이렇게 천명하였다.

“‘러더포오드’[‘왙취타워 협회’의 2대 협회장]는 ·⁠·⁠· 민족들과 나라들을 유지하게 하는 기본 원칙들을 잠식한다. 그의 생각은 모든 종교들, 특히 ‘가톨릭’ 교회가 모든 정부들 및 왕국들과 더불어 전복당하게 될 동안 임박한 세계 혁명을 위한 길을 준비하므로 무신론적 공산주의의 공상적인 제도가 들어서게 하려는 것이다. ·⁠·⁠· ‘여호와의 증인’들의 운동은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의 표현이며 국가 안보에 대한 공개적인 공격이다.”

‘파시스트’ 당국은 높은 존경을 받고 있는 교직자들의 이러한 고발을 거의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왕국들과 정부들을 전복’하고 ‘무신론적 공산주의의 이상향’을 설립하기 위해 공작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비난을 받은 것이다.

전도 사업이 완전히 금지되다

그러한 보고서를 받은 뒤 내무부는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의 신분을 분명히 밝히면서 그들이 금지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또 하나의 공문을 보냈다. 그것은 1940년 3월 13일자 제 441/02977호 공문으로, “그 원칙들이 우리의 제도들과 반대되는 ‘여호와의 증인’ 혹은 ‘성경 연구생’들 및 기타 종파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1939년 8월 22일자 제 441/027713호 정부 공문이 배포된 후에, 알려진 ‘오순절’ 종파와 구별되고 분리되며, 교리들이 우리 국가 체제와 반대되는 그러한 종파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러한 조사 결과, 미국 ‘뉴우요오크’, ‘브루클린’ 소재 ‘왙취타워 성서 책자 협회’—‘만국 성경 연구회’—가 ·⁠·⁠· 보통 ‘여호와의 증인’ 혹은 ‘성서 연구생’으로 알려진 독립된 복음 전도 종파임을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체포된 그 종파의 [성원들] 중 다수의 진술을 고려해 보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인쇄물을 조사해 본 결과, 우리는 그 종파의 특성들을 분명하게 밝힐 수 있었다. ·⁠·⁠·

“‘여호와의 증인’들이 인정하는 유일한 법은 하나님의 법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법과 상충되지 않는 시민법을 준수할 것을 인정한다. ·⁠·⁠·

“‘여호와의 증인’들은 ‘총통’과 ‘파시즘’은 악마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또 잠간 동안의 승리 후에, 이러한 현상은 ‘계시록’의 예언대로 반드시 몰락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

“그러므로, 이 종파의 활동이 조금이라도 나타나는 것을 제압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 종파는 ‘왙취타워’에서 편찬한 인쇄물로 유지되기 때문에, 그러한 서적이 우편으로 배달될 것이므로 언제든지 압수하거나 중도에서 가로채는 단호한 조치들을 취할 권한을 여러분에게 부여하는 바이다.” *

특별 재판소에서

1926년 10월에 ‘볼로냐’에서 ‘뭇솔리니’를 살해하려는 시도가 있은 후에 ‘파시스트’ 특별 재판소가 발족하였다. 그것은 ‘파시스트’를 반대하는 자들을 초기에 꺾어 버리기 위해 취해진 여러 가지 조치들 중 하나였다. 공식 명칭으로는 “국가 안보 특별 재판소”로 알려진 그것은 1927년에서 1943년까지 계속 기능을 발휘하였으며, 이 기간에 42건의 사형 선고(이 중에 31건은 집행되었다)를 포함하여 5,000건 이상의 판결을 내렸다. 그 본부는 ‘로마’ 법무궁에 있었다.

1940년 4월 19일에 삼엄한 ‘법무궁’ 법정에서, 널리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던 ‘트린갈리 카사노바’의 주재하에 판사들이 위압감을 주는 반원형 의자에 착석했다. 피고인들은 여러 명의 기총병들(경찰관들)의 감시 아래 그 법정 한쪽에 한줄로 앉아 있었다. 여자는 4명이었고, 22명의 남자들은 수갑을 차고 있었다. 그것은 고대 ‘로마’ 시대에 참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피짜토’ 자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 재판은 어릿광대극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재판은 단 하루 만에 끝났으며, 판결은 분명히 미리 내려져 있었다. 여러 해가 지난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웃음을 자아내는 일이 하나 기억난다. 나는 법정에서 호명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신경이 예민해진 나머지, 나는 그만 벌떡 일어나 재판장에게 달려갔다. 분명히 내가 난폭한 행동을 하거나 욕설을 퍼부을 것을 예상하고서 기총병이 나를 쫓아 와 떨어진 곳에 세워 놓았다. 재판장인, ‘트린갈리 카사노바’ 공작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법정은 우리의 변호를 위해 ‘로마’ 재판소로부터 여러 명의 변호인들을 지명하였다. 그들이 훌륭하게 변호하였으며 매우 따뜻하게 우리를 위해 말해 주었기 때문에 재판장은, 분명히 비꼬는 조로, 그들 중 한 사람에게 혹시 ‘여호와의 증인’ 종교로 개종한 것이 아니냐고 질문하기까지 하였다!”

그 7명의 변호인들이 최선을 다 했지만, 형제들은 불가피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다. 변호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대담하게도, 그 26명의 ‘증인’들을 “‘이탈리아’ 국민의 꽃”이라고 불렀다. 다른 한 변호인은, “‘파시스트’ 정권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그렇게 강하다면, 왜 이 사람들을 두려워합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이 재판은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질문한 19세기 전에 열렸던 또 다른 재판을 기억나게 해준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 형제들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은 진리를 말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들을 감옥으로 보내고자 합니다. 이 선한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으로 인해 높이 존경을 받아 마땅합니다.” 다른 한 변호인은 이렇게 선언하였다. “이들은 26명이지만, 모두 같은 선생님 아래 있기 때문에 마치 한 사람처럼 말합니다.”—요한 18:33-38.

그 재판정에서, 일부 형제들이 심문을 받을 때 협박을 받고 사형 선고를 당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긴 하였지만, 그들은 담대하고 강하였다. ‘구에리노 단젤로’ 형제는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 26명 가운데 한 사람만이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되어 타협하였다. 그는 ‘파시스트’ 국가에 항복하는 선언문에 서명하였다. 판사들 중 한 사람이 그것을 읽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도 동일하게 형을 받았다. 형제들을 바라보면서 그 판사는, ‘이 사람은 우리에게도, 여러분에게도 소용이 없읍니다’ 하고 논평하였다. 후에 이 사람은 진리를 떠났으며 성실을 지키지 않은 극소수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들 형제들이 선고받은 형기는 총 186년 10개월이 되었다. 각 개인의 형량은 2년에서 11년까지였다. 이 재판소의 판결은 최종적인 것이어서 항소를 할 수가 없었다. 선고를 받은 형제들은 ‘파시스트’ 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계속 수감되어 있었다. 얼마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1943년 8월 이후에 석방되었다.

“제 4호 법정—‘파시스트’ 특별 재판소 재판 기록”이라는 제목의 책에서는, 26명의 ‘여호와의 증인’들과 관련된 1940년 4월 19일자 제 50호 판결문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미국에서 기원한 한 종교 운동이 ‘이탈리아’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불리는 그 종교의 추종자들은 ‘파시스트’들로부터 끊임없이 박해를 받아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쟁을 혐오한다고 계속 선언하였고, 동료 인간을 대항하여 무기를 들기를 거부하였고, ‘파시스트’ 정권을 ‘‘사단’의 조작물’이라고 생각하였다. 1939년 가을에 가장 큰 체포의 물결이 일었다. (국익에 반대되는 단체 형성; 그 단체의 요원; 선전; ‘총통’과 교황을 모독한 일)”

‘비첸챠’ 검찰청이 ‘피짜토’ 자매에 대해 주장한 문서에서 형제들을 대항하여 제기된 고발들의 일부 취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는 5가지 위반 사항으로 선고를 받았다. “정치적 음모를 목적으로 연합한 죄로 5년간의 금고, 정부의 수반인 ‘파시즘’의 ‘총통’의 위엄과 명성을 훼손시킨 죄로 1년간의 금고, ‘로마’ 교황을 모독한 죄로 2년간의 금고, 외국 국가 원수[‘히틀러’]의 위엄을 손상시킨 죄로 1년간의 금고, 왕과 제국의 명성을 훼손시킨 죄로 2년간의 금고형을 선고한다.”

고발된 26명의 ‘증인’들 가운데 13명이 ‘아브루찌’ 지역 출신이었기 때문에, ‘라파엘레 콜라피에트라’ 저(‘로코 카라바’ 발행) 「‘아브루찌’ 지역의 역사적 개요」란 책은 이렇게 밝힌다. “[‘아브루찌’ 지역에서] 어떤 일개 정당이나 공산주의자들이라 할지라도 해안 지방에서 온 이들 온유하고 무해한 농부들만큼 수가 많고 심한 타격을 받은 자랑스러운 집단을 가질 수 없다.”

감옥에서의 형제들

전시에 감옥살이를 한 형제들의 경험들은 우리에게 용기와 믿음의 본이 될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도움이 결코 그들에게 부족하지 않았음을 알려 준다. 그들은 감옥 안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계속 열정적으로 말하였고, 심지어 그 안에서도 교직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체포될 당시 25세였던, ‘로세토 델리 아브루찌’의 ‘산티나 치모로시’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우리가 전쟁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에 위험한 존재라고 하면서 우리를 경찰서로 연행해 갔다. 아버지[‘도메니코 치모로시’]와 나는 각기 다른 감방에 갇혔다. 감방들은 안이 캄캄하였다. 기총병이 손전등을 켜서 잠을 잘 나무 침대가 있는 곳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는 나를 가두어 버렸다.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었을 때, 불안과 공포의 파도가 나를 엄습하였다. 나는 울기 시작하였다. 나는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두려움은 조금씩 사라졌으며 나는 울음을 멈추었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힘과 용기를 주심으로써 나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도움이 없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 날 밤을 기도하면서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나는 ‘테라모’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거기서 나는 아버지와 ‘카테리나 디 마르코’ 및 다른 세명의 형제들과 한방에 갇히게 되었다—우리는 모두 6명이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지도자’들이 누군지 알아 내기 위한 심문을 받았다. 그들은 툭 하면 ‘너는 아직도 ‘여호와의 증인’인가?’ 하고 질문하였다. 그러면 당연히 나는 항상,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내가 영영 감옥에서 나가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나에게 겁을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나는 여호와와 나를 도울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였다. 후에 내가 있는 감방문 앞에 제단을 하나 갖다 놓았다. 그들이 특히 나를 위해 그것을 거기에 갖다 놓은 것이었다. 여러 주 동안 사제가 와서 계속 ‘미사’를 행하였다. 내가 ‘가톨릭’ 교회로 돌아가고자 하는지 알아 보려고, 아니면 내가 ‘미사’를 방해하여 형을 더 받게 하려는 속셈에서 감방문을 열어 놓곤 하였다. 하지만, 나는 바깥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는 듯이 조용히 감방에 있으면서 내가 지혜롭게 행동하도록 도와 주신 여호와께 감사를 드렸다.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서, 그들은 얼마 후에 그 제단을 치웠으며, 그 사제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마르첼로 마르티넬리’ 형제로부터 진리를 배웠던 ‘단테 리오지’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감옥에서 친척들이나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편지를 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서적이며 돈이며 손목 시계를 빼앗겼다. [1939년] 11월부터 2월 말까지, 나는 난방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창문에 유리도 없는 감방에서 추위에 떨었다. 갈아 입을 옷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곧 기생충으로 고통을 당하여 보기 흉한 비참한 몰골이 되었다. 만약 내가 부모님의 종교로 돌아간다면 석방될 것이라고 장담하는 사제들의 방문을 두 세번 받았다. 나는 경찰 본부에 신청하여 성서를 한권 입수하였다. 그 후에, 나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성실을 지켜 여호와께 축복을 받은 성실한 사람들의 본으로부터 용기를 얻었다. 기도 또한 여호와의 약속들에 대한 나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다른 한 가지 방법이었다.”

40년 이상이나 충실하게 봉사해 왔으며 ‘테라모’ 도에서 아직도 한 회중의 장로로 봉사하고 있는 ‘도메니코 조르지니’ 형제는 이렇게 말한다. “때는 1939년 10월 6일이었다. 우리가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고 있을 때, 두명의 기총병(경찰)을 태운 ‘트럭’ 한대가 우리 집 앞에 서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나를 ‘테라모’ 감옥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거기서 5개월 동안 있었다. 그리고 나는 ‘벤토테네’ 섬에서의 3년간의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거기에서 나는 다른 형제 5명과 600명의 정치범과 함께 있었다. 이들 후자 집단 가운데는 나중에 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사람을 포함하여 유명한 정치인들이 많았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증거하는 특권을 가졌다. ‘파시스트’ 정부는 이들 정치범들 중 다수가 특히 위험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 섬은 엄격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탈출을 시도하는 어떤 사람에게든지 발포할 준비가 된 기관총을 장치한 발동기선이 순찰을 하고 있었다.”

감옥에서의 자매들

특별 재판소에서 11년간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던 ‘마리안토니아 디 첸소’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조사하던 치안 판사의 말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진상을 밝히기 위해 그들의 서적을 읽었소. 그리고 나는 고발당한 26명을 심문해 보았소. 그들은 모두 그들의 믿음에 고착해 있었으며, 그들의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기들이 죄를 뒤집어 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소. 상황은 생각처럼 그렇게 심각하지 않소. 교직자들이 그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법석을 떨은 것이오.’”

‘디 첸소’ 자매는 ‘페루지아’에서 복역하였다. ‘페루지아’에 수감되었던 다른 한 자매는 ‘알비나 쿠미네티’였는데, 그는 1962년에 사망할 때까지 하늘의 부름에 충실하였다. 기록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읽을 수 있다. “한번은 다른 수감자가 ‘알비나’에게,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물었다. ‘알비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어요.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동료 인간을 죽이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뭐라고요!’ 하면서 그 여자는 소리쳤다. ‘살인을 거부하기 때문에 여기에 있다고요? 형은 몇년이나 선고하던가요?’

“‘11년입니다’ 하고 ‘쿠미네티’ 자매가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다른 사람이 소리쳤다. ‘뭐라고요? 동료 인간을 죽이기를 거부한다고 당신에게는 11년을 선고하고서는, 남편을 죽인 나에게는 10년을 선고했다니. 이젠 더 참을 수 없어요. 내가 미친 것이 아니면 그들이 미친게요!’”

그 기록은 이같이 덧붙이고 있다. “어느 날 ‘알비나’는 수감자들을 감시하는 책임을 맡은 한 수녀가 있는 곳에서, 감옥 소장에게 증거하는 기회를 가졌다.”

감옥소장이 보낸 편지

1953년 ‘쿠미네티’ 자매와 그와 함께 감옥에 있었던 다른 세명의 자매들이 한 대회에서 만났을 때, 그들은 ‘페루지아’에 있는 감옥소장에게 편지를 한장 썼다. 그 동안 그는 ‘알렉산드리아’로 전근했었다. 그러나 결국 그 편지를 받아보게 되었고, 1954년 1월 28일자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회신을 보냈다.

“친애하는 부인,

“편지에서, 나에 대한 친절한 말씀을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비실존 범죄로 형을 선고받으셨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재판을 받았던 바로 그 도시 ‘로마’에서, 이번에는 여러분의 대회에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찬양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다시 함께 만나셨음을 알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그들이 믿었고 또 계속 믿는 하나님을 위해 그토록 많은 고통을 받은 다른 부인들을 만나시거나 서신으로 연락하실 기회가 있으면, 그들에게 나의 안부를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을 항상 기억할 것이며 여러분의 믿음과 인격의 힘에 항상 감탄할 것입니다.

“보내 주신 책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알렉산드리아’ 수석 형무소장,

‘안토니오 파올로로소’ 박사”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다. “너희 믿음의 시련[시험받은 믿음의 질, 신세]이 ·⁠·⁠· 금보다 더 귀하[니라.]” (베드로 전 1:7) 박해 아래서도 성실을 지킨 형제들은, 그러한 어려움들이 그들을 강화시켜 주었음을 인정한다.

중립이 보호가 되다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중립을 지키는 것이 ‘이탈리아’에서도 형제들에게 보호가 되었다. 예를 들어,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 투옥되었으며 유배 생활을 하였던, 76세의 충실한 형제 ‘알도 포르네로네’는 이 경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찌’들이 후퇴를 하였지만, 그들은 여전히 내가 살고 있던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토벌하는 동안 세명의 독일군들이 우리 집을 습격해 왔다. 그 장교는 한눈에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성서와 늑대와 양과 사자와 염소와 송아지가 모두 어린아이와 함께 있는, 이사야 11:6-9의 장면을 묘사하는 그림이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독일말로 ‘성서 연구생’이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 그는 ‘프랑스’어로 나의 아내에게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하였으며, 그의 부하들에게 문을 닫고 집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명령하였다. 다시 그는 ‘프랑스’어로, ‘나는 부하들에게 여러분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인 ‘여호와의 증인’들이기 때문에 이 곳은 안전할 것이라고 말했읍니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또한 ‘증인’이기 때문에 강제 수용소에 보내진 친척들이 독일에 있다고 말했다. 이들 군인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 바깥에서는 총성이 들렸다. 많은 집들이 불에 탔고 수많은 민간인들이 살해되었다. 토벌이 끝나자 이들 군인들은 마을을 떠났으며, 그 장교는 작별 인사를 하면서 우리와 악수를 하였다.

“얼마 후, ‘이탈리아’ 저항군의 지휘관이 16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도착하였다. 그는 ‘그들이 여러분을 다른 민간인들과 함께 붙들어 가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그는 나를 알고 있었고, 또한 내가 전쟁에 나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옥살이를 한 것과 유배 생활을 한 것도 알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증거를 할 때, 그들은 모두 귀기울여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만민을 위한 위안」 소책자를 받았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좀 든 후, 그들도 가버렸다. 그 지휘관은, ‘모두가 여러분과 같다면 우리가 짐승들처럼 추격을 당하지도 않을 것이며, 또 이 세상에는 이러한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이 경험은 이전 어느 때보다도 개인의 중립을 지키는 것의 가치를 더욱 인식하게 해 주었다.”

형제들로부터의 도움

감옥으로 보내졌던 많은 형제들은 아내와 어린 자녀들을 집에 남겨 두고 떠났다. 누군가가 그들을 도와 주었는가? ‘빈첸초 아르투시’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내가 1년 동안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으로 유배되었을 때, 나는 아내와 어린 세 자녀에 대해 무척 걱정하였다. 나는 또한, 아내가 진리에 관심을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집에 없는 기회를 이용하여 사제가 아내를 유혹하여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지는 않을까 우려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지켜 주셨으며, 또 아직 자유로왔던 형제들의 도움으로 나의 가족은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부양받았다. 형제들의 사랑의 방문으로 인해 나의 아내는 ‘가톨릭’ 교회와는 영원히 결별을 하였으며, 그러한 방문이 또한 영적으로 세워 주고 있었다.”

전쟁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계속되다

‘파시스트’ 정권은 1943년 경에 몰락했다. 그리고 대다수의 형제들이 그 후에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아직도 이 나라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그리고 연합군이 남에서 진군해 올라가는 동안, ‘나찌’ 군대들은 사상자와 파괴를 남기면서 서서히 북으로 후퇴해 갔다.

전시의 가장 어두운 기간 동안에도, 아직 자기들의 집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었던 형제들과 접촉하는 일을 다시 시도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1980년에 사망할 때까지 충실하였던 ‘아고스티노 포사티’ 형제는 진리 때문에 ‘스위스’로 추방되었었다. 그는 1940년과 1941년에 일부 형제들과 통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으며, 그는 자신이 ‘프랑스’어에서 번역한 「파수대」 기사들을 포함하여, 여러 출판물들을 그들에게 보냈다. 그는 1942년 1월에 체포되어 유배되었다.

얼마 후에, ‘나르치소 리에트’ 형제는 ‘이탈리아’에 피신하였다. ‘우디네’ 도 출신인 ‘이탈리아’인 부모가 독일에서 그를 낳았으며, 그는 ‘게쉬타포’가 「파수대」를 강제 수용소 안으로 비밀리 반입하고 있는 그의 활동을 발견하기까지 ‘루르’의 ‘뮬하임’에서 살았었다. 그가 더 이상 계속 머무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 철도에서 일하고 있던 한 형제가 최근에 ‘스위스’ 국경 부근에 있는, ‘이탈리아’의 ‘코모’ 호수 근처 ‘체르노비오’에 가서 살고 있던 그의 아내에게 가도록 도와 주었다.

‘스위스’ 지부는 「파수대」지를 독일어에서 ‘이탈리아’어로 번역하여 형제들에게 발송하는 일을 하도록 ‘리에트’ 형제를 임명했다. 경찰이 우편물을 가로채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 멀지 않은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에 있는 형제들에게 인편으로 배달했다.

‘리에트’ 형제는 타자기를 하나 구입하여 즉시 잡지들의 주기사들을 번역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유배 생활에서 돌아온 ‘아고스티노 포사티’ 형제의 도움을 받았고, 나중에는 1943년에 석방된 ‘마리아 피짜토’ 자매의 도움을 받았다. 그 잡지들은 지하 수단을 통해 ‘이탈리아’로 밀반입되었다. 번역 후에는, 복사기로 사본들을 복사해서 그것을 배달 책임자였던 ‘포사티’ 형제에게 보냈다. 그는 체포와 투옥의 위험을 계속 무릅쓰면서, 형제들에게 이 영적 양식을 가져다 주기 위해 ‘페스카라’, ‘트렌트’, ‘손드리오’, ‘아오스타’ 및 ‘피네롤로’로 여행하였다.

‘피짜토’ 자매가 도착한 후에, ‘나찌’들은 ‘파시스트’ 하수인들의 협조를 얻어 ‘리에트’ 형제가 살고 있는 곳을 알아 냈다. ‘피짜토’ 자매는 이렇게 설명한다. “12월 말 어느 날, 그의 집은 포위되었다. 그리고 한 친위대 장교와 그의 부하들이 뛰어 들었다. ‘나르치소’는 체포되었고, 군인들이 그의 집을 수색하는 동안 그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다. 그들은 곧 그들이 찾고 있던 ‘범죄’의 증거—두권의 성서와 몇통의 편지를 발견하였다! ‘나르치소’는 다시 긴 여행을 통해 독일로 보내졌고, 거기에 가서 그는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거기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오랫동안 천정이 낮고 비좁은 감방에서 개처럼 계속 쇠사슬에 채워져 있었으며, 밤낮으로 몸을 꼬부리고 있어야만 했다. 그는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많은 고통을 당한 후에, 연합군이 ‘베를린’을 점령하기 전에 다른 불행한 수감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유해는 결코 찾을 수가 없었다.”

‘피짜토’ 자매는 ‘리에트’ 형제가 시작한 일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포사티’ 형제가 다시 체포되었을 때 그는 또한 영적 양식을 자신이 배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번역한 각 기사를 약 70부씩 사본을 만들어, 여행이 가능한 곳까지는 직접 배달하였다.

폭격으로 인해 모든 통신선이 방해를 받게 되었을 때, 그는 1945년 1월 1일호 「파수대」(영문판)의 주기사를 번역한 것을 ‘손드리오’ 도, ‘카스티오네 안데벤노’에 있는 형제들에게 우송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기사는 도중에 발각되어 경찰에 넘겨졌다. 그래서 ‘피짜토’ 자매는 또 한번 심문을 받으러 연행되어 갔다. 하지만, 그 후에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관련되지 않게 하려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 지역을 떠나기로 즉시 결정하였다. 같은 날 밤에 그는 1943년 12월에서 1945년 3월까지의 그의 활동의 증거물을 모두 없애 버렸다. 그리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리에트’ 형제의 미망인과 함께 ‘스위스’로 갔다.

전쟁이 끝나자, 모든 피난민들은 ‘이탈리아’로 돌아가야 했으며, 그 두 자매는 ‘체르노비오’로 돌아갔다. 이제 ‘파시즘’이 완전히 일소되고 전쟁이 끝났으므로, ‘스위스’ 지부는 ‘피짜토’ 자매에게 형제들과의 새로운 연락망을 만드는 임무를 주었다. 형제들은 심하게 시련을 당하였으나, 여호와께 감사하였고 열심에 충만해 있었다. 그들 가운데서 마귀의 올무에 빠져 희생물이 되어 버린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제 그들 앞에는 광대한 활동의 문이 크게 열려 있었다.—고린도 전 16:9.

사업이 재조직되고 지부 사무실이 문을 열다

1945년 말경에 당시 ‘왙취타워’ 협회장이었던 ‘N. H. 노워’ 형제와 그의 비서 ‘M. G. 헨첼’ 형제가 ‘유럽’을 방문하였다. ‘스위스’ 지부는 ‘피짜토’ 자매가 ‘베른’으로 와서 ‘이탈리아’에서의 활동을 ‘노워’ 형제에게 보고하도록, 초청했다. 그 때 만난 것에 관하여 ‘피짜토’ 자매는 이렇게 쓴다.

“‘노워’ 형제는 전파 사업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어로 인쇄된 소책자들을 갖는 것이 즉각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목적으로, 우리가 서적이 미국으로부터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특정한 소책자들을 ‘밀라노’나 ‘코모’에서 인쇄하는 마련을 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는 또한, 이러한 일들에 대한 나의 도움이 대단히 고맙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임시적인 마련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가급적 빨리 사업을 책임 맡게 될 한 형제를 미국에서 파견하기로 이미 계획이 되어 있다는 것을 나에게 말해 주었다.”

그 모임에는 ‘스위스’에서 살고 있지만, 또한 ‘이탈리아’ 국적을 가진 ‘움베르토 반노찌’란 한 젊은 형제가 참석하였다. 그 형제는 당분간 형제들의 작은 집단들을 여호와의 방법으로 강화시키고 교훈하기 위해 방문하도록 임명되었다.

‘코모’에서 인쇄 시설을 구하자마자, 즉시 「너희 열방들아, 기뻐하라」 25,000부와 「만민의 환희」 50,000부와 「신세계에서의 자유」 및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소책자를 20,000부 인쇄하였다.

당시 ‘체르노비오’는 인구 약 3,000명을 가진 소도시였으며, 장차 기대되는 확장을 고려할 때 활동의 중심지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1946년 봄에 ‘노워’ 형제는 형제들에게 6, 7명 되는 소수의 ‘벧엘’ 가족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으라는 지시를 하였다. ‘베른’ 사무실에서 온 한 형제의 도움으로, ‘밀라노’의 ‘비아 베제지오’ 20번지에서 방이 6개 딸린 집을 매입하게 되었고, 우리는 새로 조직된 활동의 중심지를 그 곳으로 옮겼다. 이 일은 1946년 7월에 있었다. 그 해에 평균 왕국 전도인은 95명이었고 35개의 작은 회중들의 최고 전도인은 120명이었다. 이것은 앞으로의 확장을 위한 기반이었다.

1946년 10월에 미국으로부터 ‘조오지 프레디아넬리’ 형제가 도착했다. 그는 1943년에 ‘왙취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 제 1기 졸업생이었고, 그 이래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다. 그는 이제 ‘알프스’에서 ‘시칠리아’ 섬에 이르는, 당시 우리의 유일한 순회구에 있는 형제들을 방문하도록 임명되었다.

1947년 1월에 다른 두 선교인, ‘조셉 로마노’와 그의 아내 ‘안젤라’가 도착하였다. ‘로마노’ 형제는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즉시 ‘밀라노’에 있는 새 ‘벧엘’에서 사업에 착수하였다. 몇달 후에, 또 다른 ‘길르앗’ 졸업생 부부가 파견되었다. 그들은 ‘카아멜로 베난티’와 ‘콘스탄스 베난티’였다. 그리고 1949년 3월 14일에 28명의 선교인들이 이 나라에 도착했을 때는 선교인 황금기였다! 그들은 참으로 확장을 목적으로 모든 것을 움직이는 여호와의 마련들 중의 하나였다. 처음에 그들은 5개 도시, 즉 ‘밀라노’, ‘제노바’, ‘로마’, ‘나폴리’ 및 ‘팔레르모’에서 봉사하고 있는 집단에 임명되었다.

전후 1946년에 모든 것이 새로운 출발을 하였을 때 이 나라 전국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전도인들은 겨우 100명 정도였다. 그들은 서로와의 연락이 두절되었고 조직과의 연락도 단절되었었다. 전도인들은 개인 집이나, 심지어 외양간 등, 가능한 곳은 어디서든지 함께 모이려고 최선을 다했었지만, 정기적인 집회는 열리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한 두 가지의 출판물을 읽고, 성귀들을 찾아보면서 할 수 있는 만큼 해설을 하곤 하였었다. 대부분의 경우, 전파 사업은 친구들이나 친척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으며, 그리스도인 회중의 신권적인 조직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도메니코 치모로시’는 이렇게 썼다. “책임에 대한 임명이 일반적인 투표가 아니라 신권적으로 정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겨우 1944년 무렵이었다. 일의 진행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우리는 ‘맛디아’를 선택할 때 사용한 방법을 채택하기로 하였다. (사도 1:23-26) 우리는 집단에 있는 연로한 사람들 가운데서 뽑은 10명의 형제들의 이름을 종이 쪽지에 써서 접은 다음 항아리에 넣었다. 그 다음 한 어린 소녀가 하나씩하나씩 꺼내게 하였다. 제일 처음 꺼낸 이름을 가진 사람이 감독자가 될 것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내가 뽑혔고 우리는 처음 순회 감독자가 도착할 때까지 이런 방법을 계속하였다.”

형제들은 재량껏, 빈약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영적으로 세우곤 하였으며, 성령이 크게 보충해 주었음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이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속히’ 증가시킬 때가 당도하였던 것이다.—이사야 60:22.

전후의 첫 대회

‘밀라노’에서 지부 사무실이 문을 연 후에, ‘노워’ 형제는 새로 조직된 활동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우리를 방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의 방문과 관련하여 1일 대회가 마련되었다. 그것은 전후 최초의 대회가 될 것이었다. 모든 형제들과 관심자들은 그 대회를 기대하고 있었으며,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를 만날 것을 고대하고 있었다.

1947년 5월 16일에 그들은 모두 대회가 개최되기로 되어 있던 ‘치네마 자라’에 도착하였다. 오전과 오후 회기에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으로부터, 심지어 멀리 ‘시칠리아’로부터 온 239명이 참석하였다. 31명이 침례를 받았으며, 그 중에 13명은 자매들이었다. 이 후자의 사람들 가운데 ‘파시스트’ 특별 재판소에서 선고를 받았지만, 그리스도인 요구 조건들에 대한 지식의 부족으로 나중에 침례를 받아야 했던 일부 사람들이 포함된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저녁 8:30에 있은 “만민의 환희”란 주제의 공개 강연은 이 행사를 절정에 이르게 했다. 700명이 참석하였다.

형제들은 몹시 가난했으므로 여비와 하룻밤 숙박비가 대단히 큰 비용이었을 뿐 아니라, 철길들이 전쟁의 후유증으로 아직도 지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그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커다란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체리뇰라’에서 온 연로한 ‘테레사 루소’ 자매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 때 우리는 너무 가난하여 그 대회에 참석하러 갈 돈이 없었다. 어디서 돈을 마련해야 했겠는가? 우리가 설탕을 아껴 저축하기 시작한 것을 마치도 어제의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기차 요금과 숙박비로 사용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그 저축한 설탕을 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우리는 그 설탕을 주머니에 넣어서, 마치 사냥군들이 음식을 차고 다니듯이 허리에 찼다. 우리는 모두 뚱뚱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7명은 그렇게 하여 ‘밀라노’에 가서 그렇게 많은 형제들을 만나는 즐거운 경험을 하였다.”

참석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그들이 이전에 감옥에서나 유배 중에 만났던 형제들과 자유롭게 모였을 때의 느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대회에 참석하였던 ‘알도 포르네로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와 함께 감옥이나 유배 중에 있었던 중부와 남부 ‘이탈리아’에서 온 사랑하는 형제들을 만나 서로 껴안았을 때 얼마나 감격했는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이제 숭배의 자유가 회복된 한 나라에서 우리가 함께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했는지는 오로지 여호와께서만이 아실 것이다.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 개입하신 일에 대해, 우리는 오로지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따름이었다.”

그 대회에서 ‘노워’ 형제는 이 나라에서의 신권적인 확장을 위한 계획을 약술하였다. 6월부터 「통보」라고 불리는, 회중 지시 사항들을 담은 월간지가 발행될 것이었다. 집단들과 회중들은 6개월마다 순회 감독자의 방문을 받게 될 것이었으며, 순회 대회도 개최될 것이었다.

1947년 6월호 「통보」지가 첫 호로 나왔다. 몇 개월 동안은 복사기에다 복사하였다. ‘협회’장이 발표한 활동 계획을 설명한 그 첫 호는 다음과 같은 자극적인 권고로 결론지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시여, 이 곳 ‘이탈리아’에서도 참 하나님께서 다른 나라에 있는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그분께 찬양의 노래를 부르는 성별된 사람들을 가지시게 될 것임을 희망하면서 앞으로 전진합시다!”

순회 활동이 시작되다

형제들을 세워 주고, 그들에게 신권적인 원칙들을 가르치고 전파 사업에서 그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회중들을 방문한 여행하는 감독자들의 활동으로 인해, 왕국 권익의 확장이 크게 고무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45년에 ‘노워’ 형제와 ‘마리아 피짜토’ 자매를 만났던 ‘움베르토 반노찌’를 기억하는가? 1930년대 중에, 그는 ‘프랑스’, ‘벨기에’ 및 ‘홀란드’에서 주로 지하 활동을 통해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다. ‘노워’ 형제를 만난 후에 그는,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형제들을 계속 방문해서, 선교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그들과의 연락을 재확립하였다. 그래서 그가 가장 큰 형제들의 집단들을 방문한 것은 1946년 5월과 6월 중이었다.

하지만, 최초의 임명된 순회 감독자는 ‘조오지 프레디아넬리’ 형제였고, 그는 1946년 11월에 방문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반노찌’ 형제를 동반하였다.

1947년에는 두번째 순회구가 형성되었고, 처음에는 ‘주세페 투비니’ 형제에게 임명되었다. 이 형제가 몇 개월 후에 ‘벧엘’ 봉사를 시작했을 때 ‘피에로 가티’ 형제가 그를 대신하였다. 이 두 형제는 ‘스위스’에서, ‘나찌’들을 피해 도망한 수천명의 ‘이탈리아’ 군인들이 가득한 여러 난민 수용소 중 하나에서 진리를 알게 되었었다. 외국에서 진리를 배운 더 많은 형제들이 전쟁 직후에 왕국 소식을 ‘이탈리아’로 가져오기 위해 돌아왔다. ‘투비니’ 형제와 ‘가티’ 형제는 3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는데, 전자는 ‘벧엘’ 봉사를, 그리고 후자는 순회 사업을 하고 있다.

‘반노찌’ 형제의 여행

‘반노찌’ 형제의 여행담은 당시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견뎌야 했던 여러 가지 불편들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나는 ‘코모’를 떠나 온갖 모험을 한 후 마침내 ‘푸리아’ 지역에 있는 ‘폭지아’에 도착하였다. 나는 기차 역을 찾으려고 둘러 보았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그것은 폭격을 당하여 무너져 있었다. 나는 ‘체리뇰라’행 기차를 탔다. 거기서 나는 나의 첫 방문지로 향하였다. 그러나 어디엔가 가서는 기차가 더 이상 못 간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트럭’을 타고 가야 했다. 나는 무척 지치고 먼지 투성이가 된 채로 그 다음 날 저녁 7시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그러한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형제가 집회 때에 기도 가운데서, 그토록 수년 동안 기다린 뒤 마침내 조직에서 보낸 사람의 방문을 맞이하게 된 것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했을 때 보람을 느꼈다. 형제들은 그 방문이 끝날 때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으며, 나 역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는 전쟁의 파괴로 인해 아직도 손상되어 있는 도로로 ‘이탈리아’의 방방곡곡을 여행하였다. 그리고 성한 다리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2만 2천개의 다리들이 폭파되었고 건널 수 있는 것은 연합군이 임시로 보수한 것이었다. 나는 수백개의 객차들이며 기관차들이 불타 있는 것을 보았으며, 모든 도시들은 폭격의 피해를 입었었다.

“나는 ‘베네벤토’ 도의 ‘피에트렐치나’ 집단을 방문하기 위해 아침 6시에 ‘체리뇰라’를 떠났다. 우마차에 실은 나의 짐 위에 앉아서 3시간 동안을 여행한 후에, 나는 저녁 7시에 ‘베네벤토’에 도착하였다! 역에 도착했을 때, 나는 형제들이 나를 알아 볼 수 있도록, 약속대로 손에 「파수대」 잡지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했겠는가?

“‘피에트렐치아’까지는 아직도 12‘킬로미터’가 남아 있었고, 저녁에는 거기에 가는 교통 수단이 없었다. 내가 거기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 필의 말이 끄는 2륜 마차를 가진 사람이 태워다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그 때가 저녁 9시 30분이었다. 나는 어두움 속에서 ‘미켈레 카발루쪼’ 형제의 집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호와의 천사는 나를 지켜 보고 절망에 버려 두지 않았다. 드디어 나는 그 집을 찾게 되었으며, ‘카발루쪼’ 형제는 기쁨에 차서 신속하게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나는 무척 배가 고팠다! 전날 저녁 이후로 나는 아무 것도 먹지 못했었다. 나는 또한 대단히 피곤하여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카발루쪼’ 형제는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고, 그가 진리에 들어온 경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게 말해 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정까지 자지 않고 있었다. 그 다음 아침에야 나의 도착을 알리는 전보가 도착했다. 나는 전보보다 더 빨리—먼저 도착한 것이었다!

“침례받은 형제들은 거의 없었지만, 35명 가량이 거의 매일 저녁 집회에 참석하였다. 나는 새벽 4시에 ‘피에트렐치아’를 떠나 ‘폭지아’로 향했다. 나는 형제들 중 한 사람이 모는 마차에 올랐으며, 감독자 ‘도나토 이아단차’ 형제도 같이 갔다. 1920년대가 아니었지만, 전쟁 직후에는 이것이 가장 보편적인 교통 수단이었다. 우리는 오전 6시에 ‘베네벤토’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런, 기차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이 때에 누군가가 ‘폭지아’까지 기관차를 몰고 가는 기관사에게 말해 보라고 제안하였다. 내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차를 타려고 애쓰고 있는 다른 몇몇 사람들에게 투덜대고 있었다. 나는 그가 손님을 태울 자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올라 탔다. 그리고 ‘이아단자’ 형제는 가고 있는 차를 따라 뛰어 오면서, 간신히 나에게 가방을 전해 줄 수 있었다. 나는 약 10명이 탄 그 기관차 안 비좁은 곳으로 밀고 들어갔다. 우리는 5시간 내내 빽빽히 들어 차 콩나물 시루가 된 채 여행하였다. 무더워서 우리는 모두 땀을 흘렸고 공기도 부족하였다. 그리고 ‘보일러’ 밑에서 날아오는 불똥으로 인해 우리는 새까맣게 그을렀다. 우리가 ‘폭지아’ 부근에 이르렀을 때 그 기관사는 시골 한 가운데에 기관차를 멈추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내렸다.

“그 후에 나는 ‘스폴토레’, ‘피아넬라’, ‘몬테실바노’, ‘로세토 데리 아브루찌’ 및 ‘빌라 보마노’에 있는 집단들을 방문하였다. 나의 일련의 마지막 방문은 ‘파엔차’였는데, 그 곳에서는 약 50명이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도록 격려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 집단에 대해 이렇게 보고하였다. ‘언젠가는 이들 젊은이들 중 얼마가 이 특권받은 봉사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등록하기로 결심할 것을 우리 함께 기대합시다.’”

‘프레디아넬리’ 형제의 순회 활동

지금은 지부 위원회의 일원인, ‘조오지 프레디아넬리’ 형제는 그의 순회 활동에서 있은 일들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내가 형제들을 방문하였을 때, 나는 그들의 친척들과 친구들이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고 매우 듣고 싶어한다는 것을 발견하곤 하였다. 심지어 재방문을 할 때에도 사람들은 그들의 친척들을 불러 왔다. 사실상, 순회 감독자가 공개 강연을 1주일에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재방문할 때마다 나는 몇 시간이나 연설을 하곤 하였다. 이러한 방문 때 아마 30명까지도 참석하였으며, 때때로 더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듣기 위해 함께 모였다.

“전쟁의 후유증은 종종 순회 사업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형제들도 무척 가난하였지만, 그들의 사랑의 친절은 그것을 보충하였다. 그들은 전심으로 그들이 가진 적은 양식을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종종 너무 가난하여 덮고 잘 것도 여분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들은 덮을 것도 없이 마루에서 잠을 자면서 나는 침대에서 자라고 강권하곤 하였다. 때때로 나는 외양간에서 짚더미나 마른 옥수수 잎 위에서 잠을 자야 하였다.

“한번은, 앞에 있는 증기 기관에서 날아오는 그을음 때문에, 얼굴이 굴뚝 청소부처럼 까맣게 된 채, ‘시칠리아’ 섬에 있는 ‘칼타니세타’ 역에 도착하였다. 80내지 100‘킬로미터’를 여행하는 데 14시간이 걸렸지만, ‘호텔’이나 그와 같은 곳에서 목욕을 하고, 당연히 편히 휴식을 취하는 장면을 연상하였기 때문에, 도착하자 생기가 솟아났다. 하지만 상황은 달랐다. ‘칼타니세타’는 성 ‘미가엘’ 날을 축하하는 사람들로 붐비었고, 시내에 있는 모든 ‘호텔’에는 사제들과 수녀들로 꽉 찼다. 결국 나는 대합실에서 본 긴 의자 위에서나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역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그 역마저 마지막 저녁 기차가 도착한 후 문이 닫힌 것을 보았을 때 그 희망조차 사라졌다. 내가 앉아서 잠깐이나마 쉴 수 있었던 유일한 곳은 역 앞에 있는 계단이었다.”

순회 감독자들의 도움으로 회중들은, 정기적인 「파수대」 집회와 서적 연구 집회를 보기 시작하였다. 더 나아가, 우리가 봉사회의 질을 개선시킴에 따라, 형제들은 전파하고 가르치는 사업에 점점 더 자격을 구비하게 되었다.

‘체리뇰라’ 집단의 영적 상태

‘반케티’ 교수가 전파한 결과로 생긴 ‘체리뇰라’ 집단을 기억하는가? “이 집단의 영적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고 ‘프레디아넬리’ 형제는 말한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거기에는 이상한 상황이 존재하였다. 그 회중—그 집단을 그렇게 묘사할 수 있다면—은 주로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주장하는 ‘프로테스탄트’교인들과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거짓 종교와 관계를 끊어야 하고 정치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지켜야 할 필요성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여러 시간 동안 그들을 설득해야 하였다.

“다음 방문 중에 나는 ‘기념식’ 연설을 하였으며, 다만 기름부음받은 반열만이 표상물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설명하였다. 집회가 끝날 때까지는 만사가 잘 진행되었다. 집회가 끝나자마자, 그 집단 중에서 책임자란 사람이 공개적으로 나를 반대하면서 표상물에 대한 나의 설명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 일이 그 집단 내에 혼란을 야기시킨 것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나는 참석한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결정을 내릴 것을 요구하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진리와 ‘여호와의 증인’편인 사람은 나를 따라 바깥으로 나오십시오! 진리에 반대하는 사람은 남아도 좋습니다!’

“다행히도 거의 모두가 나를 따라 나왔다. 다만 서너명만이 지방 공산당의 유력한 지도자였던 그 반대자와 함께 남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극소수의 예외가 있기는 하였지만, 참석한 사람들은 나를 따라 다른 방으로 왔으며, 그 후에도 계속 진리 안에서 발전하였다.”

최초의 순회 대회

1947년 9월에 최초의 순회 대회가 ‘로세토 데리 아브루찌’에서 개최되었다. 그 대회가 ‘페스카라’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교직자들의 반대로 인하여 강당 사용 허락이 취소되고 말았다. 형제들은 굴하지 않고, ‘도메니코 치모로시’ 형제의 정원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던, 사유지인 막다른 골목에서 모였다. 그 도로를 폐쇄한 다음, ‘타르’를 칠한 방수포를 치고서 덩굴 그늘 아래다 연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탁자를 하나 놓았다. 100여명의 행복한 형제들이 참석하였다.

보통 1950년대 초에는, 대회들이 40내지 6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곤 하였지만, 공개 강연에는 일반적으로 평균 200명 정도가 참석하곤 하였다. 형제들은 그러한 수의 사람들이 참석한 것은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전도 사업은 계속 발전하였고, 1954년에는 ‘조오지 프레디아넬리’ 형제가 지역 감독자로 일하도록 임명되었다.

기타 마련들

1945년 1월에 ‘협회’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개 강연 운동을 실시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몇년 후에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었다. 1948년 2월호 「통보」에서는, 3월 28일에 그 운동이 시작될 것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달 동안에 13개 공개 강연이 행해졌다. 여러 해가 지나서야 모든 회중에서 공개 강연을 정기적으로 개최할 수 있게 되었다.

형제들을 훈련시킬 필요성이 명백하였기 때문에 1948년에 신권 전도 학교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이탈리아’어로 된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출판물이 없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최선을 다해 이 집회들을 마련하였다. 영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 회중들에서는 「왕국 전도인들을 위한 신권적 도움」 책에서 교훈들을 번역하였다. 하지만, 1948년 당시에는 영어를 아는 형제들이 극소수였다. 그 후, 1950년 말경에 회중들은 「모든 선한 일을 위해 준비함」 책에 나오는 교훈들이 들어 있는 복사물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이 ‘학교’의 질을 개선시키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1956년에는 한층 더 발전이 있었다. 「파수대」 1956년 1월 1일호(‘이탈리아’어판)는 「준비」 책의 교훈들을 연속 기사로 게재하기 시작하였고, 「깨어라!」 1956년 1월 8일호(‘이탈리아’어판)는 「전도인으로서 자격을 구비함」 책에서 발췌한 비슷한 일련의 내용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준비」 책은 결국, 1960년에 ‘이탈리아’어로 인쇄되었고, 「전도인으로서 자격을 구비함」 책은 1963년에 인쇄되었다. 그러므로 새로 연합한 형제들도 역시 그 계획을 따라 갈 수 있었고, 집회들을 위해 준비할 수 있었다.

지부 사무실을 ‘로마’로 옮기다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부 사무실을 보다 중심 지역으로 옮긴다면 성장하는 활동에 대처하기가 한층 더 용이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로마’가 선택될 것이 분명하였는데, 이는 그곳이 이 나라의 수도이자 또한 국가 행정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다. 1948년 9월에 지하실이 있는 3층짜리 집을 하나 얻게 되었다. 그 집은 12개의 방과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수목들과 공원들이 있는 ‘비아 몬테 말로이아’의 대단히 아름다운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같은 달에 사무실을 그곳으로 옮겼다. 후에 ‘밀라노’의 부동산은 매각하였지만, ‘비아 몬테 말로이아’에 있는 그 집은 아직도 ‘왙취 타워 협회’에 속하여 이 날까지 잘 활용되고 있다.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책의 번역이 새 ‘벧엘’에서 완성되었고, 이듬해인 1949년에 그 책이 인쇄되어 나왔다. 그 책은 종교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대단히 흥미를 끄는 교리적인 요점들을 다루었으며, 수천명의 사람들이 진리를 발견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선교인들을 추방하기 위한 음모

사람들이 여러 세기 동안 성서에 대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들어보지 못한 곳인 이 나라에서는 선교인들의 활동이 풍성한 열매를 맺어 왔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교인들의 가장 큰 집단이 1949년 봄에 ‘이탈리아’에 왔다. 그리고 그들이 일하도록 임명을 받은 곳마다 회중들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갈구”하고 있었다.

타국에서 정착하고 언어를 배우는 일과 관련된 일반적인 어려움은 차치하고라도, 우리의 선교인들은 훨씬 더 어려운 장애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여권 ‘비자’의 시효가 만료된 후에 당국으로부터 이 나라에서 체재할 허락을 얻는 것이었다. 지부 사무실은 1949년에 허가 신청서를 내무부에 제출하였다. 선교인들은 허락은커녕, 청천벽력같은 출국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끈질기게 요청한 결과, 1949년 12월 31일까지 체류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그 날까지 그들은 모두 출국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은 그같이 장래가 유망한 출발을 했던 그들의 활동에 심각한 타격이 될 것이었다!

선교인들이 출국 명령을 받은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 모든 배후에는 누가 있었는가? 막후에서 진행되고 있던 공작이 1951년 「연감」(영문판)의 보고에서 폭로되었고, 또한 「파수대」 1951년 3월 1일호(‘이탈리아’어판)에도 인쇄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28명의 선교인들이 1949년 3월에 ‘이탈리아’에 도착하기 전에, 사무실에서는 그들 모두를 위한 1년 ‘비자’를 요청하는 정기 신청을 하였었다. 처음에는, 관리들이 정부가 그 문제를 경제적인 관점에서 본다고 했으므로, 우리 선교인들을 위한 상황이 아주 안심이 되는 것같이 보였다. 6개월 후에 우리는 일주일도 채 못 남은 그 달 말까지, 우리 형제들에게 이 나라를 떠나라고 명령하는 통지서를 내무부로부터 갑자기 받았다. 당연히, 우리는 그 명령을 수락하기 전에 법적인 투쟁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반칙적인 타격을 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 내기 위해 그 문제의 진상을 알아 내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 부처에서 일하던 개인들과 접촉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서류에 경찰이나 당국의 불평이 없다는 사실과, 그래서 다만 어떤 ‘고위층’에 책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누구이었겠는가? 그 부처의 한 친구는, 정부의 정책이 미국 시민들에 대해선 대단히 관대하고 우호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선교인들에 대한 조치는 대단히 이상하다고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어쩌면, 대사관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대사관을 직접 방문하고 여러 차례 대사의 비서와 면담을 해 봤지만, 모두 무위로 끝났다. 미국 관리들이 인정한 바와 같이, ‘이탈리아’ 정부에 큰 권력을 휘두르는 누군가가 ‘왙취 타워’의 선교인들이 ‘이탈리아’에서 전파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 분명하였다. 이 강력한 권력에 대해 미국 외교관들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면서 ‘글쎄요, 알다시피, 이 나라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국교이며, 그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라고 말할 따름이었다.

“우리는 선교인들에 대한 그 부처의 조처를 9월에서 12월로 지연시켰다. 마침내 최후의 날이 정해졌다. 이제 선교인들은 12월 31일까지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한 명령에 순종할 도리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 선교인들을 ‘스위스’에서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지방으로 보냈다. 몇달 만에 그 전체 선교인 집단은 다시 ‘이탈리아’로 와서 전파하게 되었다.

“이번에 그들은 다른 도시들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 것은 사업이 더욱 확장되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선교인들이 전에 임명되었던 도시들에서 찾았던 선의의 관심은 어떻게 되었는가? ‘양’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노워’ 형제는, 새로운 ‘이탈리아’인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선택하여 선교인 집에서 살게 하고 선한 사업을 수행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그 과도기를 대처하는 데에 시간을 조금도 허비하지 않았으며, 사업은 타격을 받지 않았다. 이러한 일의 결과로, ‘말씀’이 새로운 처녀지로 전파되었다.”

선교인들이 추방된 후에 어떻게 하여 이 나라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는가? 그들은 3개월 여행 ‘비자’를 이용하여 그렇게 하였다. 이것은 3개월마다 외국으로 갔다가 며칠 후에—매번 ‘비자’가 갱신되지 않으면 어쩌나 우려하면서—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야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어떤 도시에서는 교직자들이 선교인들을 알아 내고서는, 그들을 내 보내도록 지방 당국에 압력을 가하였다. 이러한 경우에 그들은 항상 경계하고 가능한 한 조심성있게 행동하면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교직자들의 속셈은 이러했다. “선교인들을 제거하면 그들을 따르는 소수의 집단은 햇볕에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할 수 없으며 또 그분의 목적을 수행하는 능력을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선교 사업에서의 경험들

‘카아멜로 베난티’와 ‘콘스탄스 베난티’는 ‘이탈리아’에서 33년 이상이나 선교 봉사를 해 왔다. ‘베난티’ 형제는 이렇게 기술한다.

“우리가 ‘브레스치아’에 있을 동안 나의 아내는, 주민들이 부근의 한 종교 단체와, 특히 수도원들 중 하나의 영향을 받고 있는 지역에서 노력을 집중하였다. 그러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16명이 진리를 받았다. 수년 후에, 나는 아내와 함께 우리의 도움으로 진리의 지식에 이른 형제들을 방문하기 위하여 ‘브레스치아’로 돌아갔다. 우리가 한 집단의 형제들과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에, 그들은 우리에게 그 지역에서 처음에 전도 사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해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의 아내는, 수도사가 한 무리의 소년들을 충동하여 자기를 괴롭히게 한 어느 경우를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은 폭격을 받은 집의 벽 뒤에 숨어 있다가 뛰어 나와서 아내에게 돌질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서, 아내는 해를 입지 않게 해 달라고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이 때에, ‘브레스치아’ 회중들 가운데 한 회중의 감독자가 이렇게 말했다. ‘자매님, 내가 그 애들 중 하나였읍니다. 물론, 당시에 나는 아주 어렸읍니다. 그리고 그 수도사는 우리가 당신에게 돌질을 하면 사탕을 좀 주겠다고 약속했었읍니다. 그런데 결국에는 우리가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읍니다!’”

다른 한 선교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폴리’에 있을 때 품위있는 옷차림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나는 부유한 사람으로 보였었다. 내가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때 나는 한 남자가, 아마 강도짓을 할 생각을 품고서, 나를 따라오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돌아 서서 그에게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에 대해 놀랐으며 또 왕국 소식에 대단히 감동을 받았다.—사실인즉, 그는 결국 진리를 받아들였다. 나는 그가 실제로 나에게 강도짓을 하려고 했었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그가 마음의 문을 열고 진리를 받아들였을 때, 그는 당연히 그의 길을 변화시켰다. 한 때 도둑이었던 이 사람은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고 죽을 때까지 여호와께 충실하였다.”

최초의 왕국회관

전후 초기 수년 동안 형제들이 모이곤 하던 장소들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는 것은 그 이래 이 나라에서의 사업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 때 거의 모든 왕국회관은 개인 집에 있었다. 그 이유들 중 하나는, 교직자들이 빌려 줄 만한 건물 주인들에게 협박을 하곤 하였으므로 그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건물을 거의 빌려 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지역 사업을 하고 있는 ‘길르앗’ 졸업생 ‘윌리엄 웬게르트’ 형제는 이렇게 기술한다.

“당시에 우리는 시내에서 지하실에 왕국회관을 갖곤 하였다. 중앙 난방 장치도 없었으며 어떤 회관에는 변소조차 없었다. 전기불 대신 우리는 종종 두개의 기름등을 사용하였는데, 하나는 연단에 또 다른 하나는 청중석에 두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는 그러한 것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 보상으로 형제들은 항상 행복해 했으며 서로에 대한 따뜻한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특히 나는 큰 소리로 노래하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탈리아’ 형제들이 노래를 즐겁게 부른다는 것을 말해야 하겠다. 여호와께서 이 나라에서의 사업을 축복해 오셨으며, 이제 형제들이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기 위해 함께 모일 수 있는 대단히 아름다운 회관들을 마련해 주셨다.”

1950년대의 사랑하는 형제들은 임시변통의 회관으로 만족해야 하였지만, 행복하였고 집회들에 대해 크게 감사했다. 이것은 ‘니콜라 마그니’ 형제의 말로 증명된다. “낭독대란 것이 흔히 식탁 위에 판지 상자를 거꾸로 엎어 놓은 것이었지만, 그것은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참석한 형제들의 즐거움은 그들의 눈에서 빛이 나게 하였으며, 등불이 희미하게 비추는 방에서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그들의 눈빛을 반짝이게 하였다.”

집회 장소들의 환경 때문에, 이따금씩 유다른 상황이 발생하였다. 여행하는 감독자인 ‘프란체스코 본템피’ 형제는 ‘밀라노’에서의 최초의 왕국회관들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 왕국회관은 지하실에 있었지만, 내부는 대단히 깨끗하였다. 어느 날 저녁에 집회가 이미 진행중인데, 유다른 방문객—아주 작은 쥐가 한 마리 찾아왔다! 그 방문객은 회관 안으로 들어와서는 집회 ‘프로그램’에 몰두하고 있던, 약간 뚱뚱한 자매가 앉아 있는 의자로 기어 올라갔다. 그 쥐는 그 의자의 가로대 부근에 멈추고선 거기서 몇분 동안을 지루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집회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간섭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매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상상할 따름이었다! 결국 그 쥐는 그 의자의 밑 가장자리를 돌고서는 그 자매의 발을 피해 조용히 사라졌다—크게 안심이 되었다. 그러한 사소한 불편에도 불구하고, 그 회중은 많은 형제애와 봉사에 대한 열심을 나타냈다!”

1976년 「연감」에 따르면, 미국에서 형제들이 건축한 최초의 왕국회관은 1927년에 ‘지오바니 드체카’ 형제의 공개 연설로 봉헌된,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로제토’ 왕국회관이라고 생각된다. 우연히도, ‘이탈리아’ 형제들이 건축한 최초의 왕국회관 역시 ‘로제토 데리 아브루찌’의 ‘로제토’란 곳에 지어졌다. 이것은 미국에서 그 왕국회관이 건립된 지 26년 뒤인 1953년에 완공되었다.

교직자들이 문제를 야기시키다

지금 ‘이탈리아’에서 즐기고 있는 자유는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이 발효하기 시작한 때, 즉 그 중요한 날인 1947년 12월 27일까지 소급한다. 그 헌법은 독재자의 지배하에서 무자비하게 짓밟혀 왔었던, 여호와의 왕국을 선포하는 우리의 봉사에 직접 관련된 기본 권리들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그 새로운 헌법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증인’들이 겪는 어려움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톨릭’ 교직자들이 이제 더 이상 독재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아직도 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당과의 강력한 관계를 과시할 수 있었다. 교직자들은, 헌법에는 위배되지만 아직 폐지되지는 않았던 ‘파시스트’ 법률 체제에 호소함으로써 왕국 관심사를 질식시키고자 최선을 다했다.

때때로 사제들은 형제들이 집회를 보고 있을 때나 야외 전도 봉사를 하고 있을 때에 그들을 대항하도록 광신자들의 군중을 선동하였다. 이를테면, 일간지 「르유니타」 1954년 9월 22일자는 “한 사제가 ‘몰페타’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을 공격하도록 여자들과 어린이들의 군중을 선동하다”란 표제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정직한 시민들을 공격하도록 한 사제(이름과 주소가 게재되었다)가 선동한 종교적인 광란은 특히 심각한 성질을 띠고 있다. 그들의 유일한 잘못은 그들이 상기 교직자의 종교와 다른 종교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

“며칠 전에, 질서있게 열심히 일하며 질서있는 도시인 ‘몰페타’ 시에서 암흑 시대의 종교 재판에 필적하는, 가장 혐오감을 일으키는 종교적인 박해의 한 장면을 목격하였다. 여자들이며 어린이들이며 청년들의 무리가, 찬송가를 부르는 그 사제(이름이 게재되었다)를 뒤따라 왔을 때에, ‘비아 주페타’ 7번지에는 평상시와 같이 10여명의 시민이 함께 모여 있었다. 그 때 그는 무질서한 소동을 벌이라는 신호를 하였고, 그 소동은 두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 시위에는 그 집회 장소의 문과 창문에 계속 투석을 하고 또 군중이 난폭한 행동을 하고 협박의 고함을 지르면서 욕설을 퍼붓는 것이 포함되었다. ·⁠·⁠·

“최악의 상태를 모면하기 위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 사람들은 조롱과 모욕과 협박을 당하였고 걷잡을 수 없는 여자들과 어린이들에게 둘러싸였다. 이들은 간신히 경찰서에 도착하여 보호를 받고, 또 그 불법적인 공격의 선동자들을 처벌해 줄 것을 요청할 때까지 주먹질을 당하고 돌에 맞았다. 그러나 담당 경찰관은 분명히 이들의 반대편을 동조했기 때문에 법률과 헌법의 권리들에 대한 존경을 보증하기 위해 개입할 의향이 없었다. 그러므로 선동자들과 흉행자들은, 개인의 기본 권리와 안전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자들이 묵인함으로 인해 처벌을 받지 않고 갔다. 이 특정한 경우에, 이러한 권리들은 짓밟혔고 또 가장 비열하고 저속한 방법으로 침해를 당했다.”

같은 신문 1959년 1월 3일자에서는 “‘라피오’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종교적인 박해가 일다”란 표제의 기사를 실었다. 이번에는 어떠한 일이 있었는가? 1958년 12월 29일에 두 전도인 ‘안토니오 푸리엘리’와 ‘프란체스코 비텔리’는 ‘아벨리노’ 도에 있는 소도시 ‘라피오’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있었다. 오전 11시경 그들은 지방 ‘가톨릭’ 사제가 이끄는 청년들과 어린이들로 구성된 군중과 마주쳤다. 그 사제는 “꺼져라!” 하고 외치더니, “너희는 무식하고 무용지물인 거짓말장이들이다! 너희는 성서를 모르고 있다. 너희는 다만 양떼를 망치고 있을 따름이다” 하고 외쳤다.

그 군중이 사건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그 두 형제는 시청으로 피신하였는데, 그 사제는 계단을 따라 위층까지 올라왔으며, 거기서 시장이 개입하여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시내에서 전파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두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시 경비원을 동반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봉사하고 있던 지역으로 갔다. 우리는 그들이, 위협을 가하고 있는 한 사제가 이끄는 한 군중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간신히 그들이 풀려나게 하여, 우리를 태우고 갈 ‘버스’로 데리고 갈 수 있었다. 우리가 ‘버스’를 탔을 때 그 사제는 그 앞에 가로막고 서서 못 떠나게 하였으며 군중이 더욱 폭력을 행사하도록 선동하려고 하였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그를 더 이상 따르지 않았다.”

이러한 사건들은, 교직자들이 선동한 사건들 중 단지 몇 가지에 불과하다. 명백한 이유로, 그러한 행동을 비난한 신문들은 보통 야당측의 관리를 받고 있었고, ‘가톨릭’의 다수당이 관리하는 다른 신문들은 보통 그러한 사건들을 논평없이 넘겨 버렸다.

‘가톨릭’ 교회에 의한 그러한 끈질긴 반대는 놀라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톨릭’ 교회가 다른 종교를 대할 때 일반적으로 가진 태도와 일치한다. 그러한 정책의 분명한 윤곽이, ‘예수회’의 월 2회 간행물인 1948년 3월 27일자 「시빌타 가톨리카」지에서 “신부” ‘카발리’에 의해 밝혀졌다.

“‘가톨릭’ 교회는, 유일한 참 교회로서 자기만이 행동의 자유를 주장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 특권은 진리를 위해 전적으로 보존되어야 하고 과오가 없는 것이다. 다른 종교에 대해서, ‘가톨릭’ 교회는 그들을 대항하여 문자적인 칼을 들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러한 종교들이 거짓 교리들을 퍼뜨리게 하지 않기 위해 법적인 통로와 합당한 방법들을 사용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가톨릭’이 우세한 나라에서 교회는, 거짓 믿음들이 법적인 인정을 받는 것은 거부되어야 하며, 또 만약 어떤 소수 종교가 존재한다면, 다만 그들의 사실상의 존재만을 허락해야 하며 그들의 믿음을 퍼뜨릴 가능성은 거부되어야 함을 주장할 것이다. 정부의 적의나 비국교도 집단들의 수적인 우세 때문에, 현존하는 환경이 이 원칙의 엄격한 적용을 불가능하게 만들 경우에, 교회는 스스로 최대의 양보를 하려고 할 것이며, 다른 종파의 법적인 존재를 경한 죄로 간주하여 관용을 베풀 것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가톨릭’교인들이 스스로 종교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인 권리를 유지해야 할 것이며 또 ‘가톨릭’교인들만이 번창할 권리를 가진 곳에서 다른 종파들과 공존하도록 스스로 양보할 것이다. ·⁠·⁠·” (‘고딕’체로는 본 발행자가)

다시 말해서, ‘가톨릭’ 교직자들은 ‘여호와의 증인’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너희들을 제거해 버릴 수 있을 텐데’ 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반대가 ‘그분의 이름을 안’ 사람들을 대항하여 승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시 91:14.

대회들을 방해하려는 노력들

교직자들은 우리의 평화스러운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그들의 권력으로 가능한 온갖 수단을 다 강구하였으며, 우리의 대회들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예를 들어, 사제들은 보통 젊은이들을 야유군으로 청중 가운데 침투시키곤 하였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 대표자들 가운데 얼마 동안 조용히 앉아 있다가는, 소리를 치고 소란을 피우면서 집회를 방해하기 시작하곤 하였다. 그러한 경우에 경찰이 손을 쓰곤 하였는데, 그러한 혼란에 대해 책임이 있는 자들을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집회가 “평화를 깨뜨렸다”는 구실을 내세워 종종 대회를 중단시키곤 하였다.

‘윌리엄 웬게르트’는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가 대회를 시작할 때는, 그 대회를 끝마칠 수 있을 것인지 결코 확신할 수 없었읍니다. 당시에 방해와 어려움이 대단히 많았읍니다!”

대회를 조직하였던 순회 및 지역 감독자들은, 간단하고 실제적인 타개책을 하나 발견해 냈다. 그들은 몸집이 크고 유능한 안내인 집단을 마련하여 출입구 부근에 많이 배치해 두었다. 한 여행하는 감독자는 이렇게 말한다. “순회 대회가 막 시작되었는데, 교직자들의 방해가 예상되었다. 지역 감독자는 입구에 있는 안내인들에게 그들이 모르는 사람은 누구든 멈추게 하여 자연스럽게 ‘어느 회중에서 왔읍니까?’ 혹은 ‘회중의 감독자는 누구입니까?’와 같은 몇 가지 질문을 해 보도록 지시하였다. 확신있게 대답하는 사람들은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말썽을 일으킬 사람이 혹시 청중 가운데로 슬쩍 피해 들어갔을 경우에는 어떠한가? 그런 경우에는 대단히 단호한 모습을 한 안내인 집단, 즉 ‘특별 기동대’가 그 장소로 가서 반대자들에게 조용히 해 줄 것을 친절하게 요구하였다. 그래도 소란이 계속될 경우에는, 그 ‘기동대’가 대단히 사려깊게 그 야유자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여 대회장을 떠나도록 ‘도와’ 주곤 하였다. 경찰은 우리가 방해받지 않고 집회를 볼 수 있는 권리를 보호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제 교직자들에 의해 발생한 여러 가지 사건들 중 몇 가지만 들어 보도록 하자. 첫 번째 것은, 중부 ‘이탈리아’의 ‘아브루찌’ 지역의 비옥한 계곡에 자리잡은 소도시 ‘술모나’에서 개최된 한 순회 대회에서 발생했다. 1948년 9월 26일 일요일에 있은 공개 강연에 2,000여명이 참석하였다—당시 전국에 전도인이 단지 472명밖에 없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엄청난 군중이었다. 이 때 어떤 일이 발생하였는가? 1950년 「연감」(영문판)의 한 발췌문은 이렇게 기술한다.

“일요일 오전 10:30에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내에서 가장 큰 극장을 꽉 채우고 있었으며, 강연이 시작되기 몇분 전에는 문들을 닫아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소책자 하나씩만 받고 들아가야 했다.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심지어 복도에도 사람들이 꽉 찼다! 안에서 열심히 경청하던 청중은 강연 도중과 결론에서 여러 차례 박수 갈채를 보냄으로써 진리에 대한 감사와 동의를 나타냈다.

“하지만, 그 집회가 끝나기 전에, 두 사제의 지시를 받고 대회장 뒤에 서 있던 한 젊은 광신자가 연단으로 나아가서는 두 손을 들고 외치면서 자기 말을 들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사회자는, 조용히 청중의 질문은 집회가 끝난 후에 개인적으로 직접 대답해 주겠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 광신자가 문제를 일으키려 하며, 우리의 공개 집회를 이용하여 그의 종교적인 선전을 늘어 놓을 것이 분명하였다. 의심의 여지없이, 교직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당시에 교회의 좌석이 텅 비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열변을 토할 곳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 비열한 사제 고문들의 부추김을 받아 그는 대회가 끝나자마자, 연단 위로 올라가서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두 손을 흔들면서 주의를 끌기 위해 목청을 다해 외쳐 댔다. 뒤에 있던 두 사제는 그들의 뒤집은 ‘칼라’를 숨기기 위해 머리를 숙이고선, 그들의 고용인에 대해 열광하는 파도가 일어날 것을 희망하면서, 승인의 표시로 소리를 지르고 휘파람을 불어 댔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청중은 개종 권유를 하기 위한, 초대받지 않은 그의 시도를 거절하였다. 박수를 치거나 연설하도록 허락하는 대신에, 청중 가운데서는 ‘‘파시스토네’!’[‘파시스트’!], ‘‘베르고냐’!’[부끄러운 줄 알아라!], ‘그런 짓을 하면 그들이 너에게 얼마나 주느냐?’ 하고 소리쳐, 그의 항의하는 외침을 압도해 버렸다. 사태가 잘 되어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 참견자는 곧 그 무대에서 뛰어 내려와 그의 사제 동료들과 함께 재빨리 사라졌다. 그런 다음 청중은 질서있게, 그리고 조용히 극장에서 나오면서 제공되는 무료 소책자를 기쁘게 받아 갔다.”

그 이야기는 이러한 말로 끝맺었다. “형세는 역전되어 또 한번 여호와께서 승리를 안겨다 주셨다.”

최초의 지역 대회

이제, 종교적 반대의 또 다른 이야기를 해 보자. 우리는 ‘이탈리아’에서 개최되는 최초의 지역 대회를 1950년 10월 27일부터 29일까지 ‘밀라노’의 ‘테아르토 델아르테’에서 가질 예정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가서 경찰서장이 그 곳에서의 대회 개최 허락을 취소해 버렸다. 대회 조직을 책임 맡고 있던 두 형제는, 그 조치가 ‘프로테스탄트’ 집회를 싫어할지 모르는 ‘가톨릭’인들의 위험한 반응을 피하기 위해 취해졌다는 말을 들었다! 터무니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정직한 시민들이 평화스럽게 함께 모일 권리를 박탈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었다.

형제들이 추진한 이러한 그리고 다른 마련들은 분명히 논리적이었지만, 그 경찰서장은 그의 결정을 번복하려 하지 않았다. 최후의 수단으로, 형제들이 이 권력의 남용에 대해 신문사에 알리겠다고 위협하였을 때, 그는 할 말이 없었으며 형제들을 그의 사무실에서 나가게 했다. 그네들의 말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교직자들이 그 일에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였다. 이번에 그들은, 경찰에 그들의 영향력을 사용하는 다른 방법을 고안해 냈던 것이었다.

대회 부감독이었던 ‘조오지 프레디아넬리’ 형제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상황은 이러하였다. 대회가 시작되기까지 24시간도 채 못 남았었고 형제들이 ‘이탈리아’ 전역으로부터 ‘밀라노’에 도착하고 있었으며, 우리는 어디서도 대회장을 얻을 수가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했겠는가? 우리는 대단히 염려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또 한번 개입하셨다.

“대회가 시작되기 전날 아침에 대회 감독자였던 ‘안토니 시데리스’ 형제와 나는 다른 대회 장소를 찾아 다니고 있었다. 우리가 울타리로 둘러싸인 한 땅을 지나칠 때, 갑자기 ‘삼일간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주인에게 물어 보는 것이 어떨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주인은 그 땅을 대단히 이치적인 값으로 빌려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천막 아래서 대회를 볼 수 있도록 큰 천막들을 좀 구하러 갔다. 마침내 우리는, 기꺼이 큰 천막들을 빌려 주겠으며 천막 치는 일까지 도와 주겠다고 하는 유명한 천막 공장을 하나 발견하였다. 그들은 가외로 선전을 할 수 있게 되어 기뻐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당국으로부터 모든 것들에 대해 다시 허락을 얻는 것이었다. 시간적 여유가 거의, 아니 전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확정된 사실을 통고하기로 하였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형제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 보낼 수는 없었다. 우리는 밤새껏 어느 누구도 보기 전에 큰 천막들을 치고 여러 부서들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오전 9시에 대회는 정시에 시작되었다.

“경찰이 곧 도착하였다. 그들은 완전 무장을 한 채 ‘지프’에서 뛰어내렸다. 그들은 참으로 놀라운 대조가 되었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는가! 거기서 평화스럽게 앉아서 종교적인 찬송을 부르고 있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무장한 경찰관들이 파견되었던 것이었다. ‘시데리스’ 형제는 그들에게, 만약 대회를 방해하면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우리는 지방 및 국제 신문사에다, ‘이탈리아’에서는 새 헌법이 준수되고 있지 않으며 또 ‘파시스트’ 독재가 재출현한 사실을 알릴 것이라고 하였다. 겁을 먹은 경찰관들은 상부의 지시를 구하기 위해 되돌아갔다가 나중에 다시 와서는 우리가 대회를 계속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공개 강연에는 800여명이 참석하였고 45명이 침례를 받았다. 공장이 여럿 있는 곳에 천막들을 쳤기 때문에, 형제들은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나온 여러 공원들에게 증거할 기회를 가졌다. 춥고 습기찬 10월의 일기에, 그러한 큰 천막 속에 앉아 있는 것은 무엇과 같았겠는가? ‘페른 프라아세’는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는 ‘코우트’를 입고 ‘프로그램’에 주의를 기울였으며, 우리들 가운데 다수는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뜨거운 물이 담긴 병들을 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훌륭한 영적 양식을 받게 되어 대단히 행복하고 즐거웠다.”

교직자들의 방해가 역효과를 일으키다

교직자들이 선동한 방해의 또 다른 사건이, ‘체리뇰라’에서 개최된 한 순회 대회와 관련하여 1951년 6월의 마지막 주에 발생하였다. 이 경우에는 어떠한 일이 발생하였는가? 1952년 「연감」(영문판)은 이와 같이 설명한다.

“정오에 두 경찰관이 우리의 사적인 집회가 금지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대회장에 왔다. 우리는 즉시 이 모든 것의 진상을 알기 위해 지방 경찰국장의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우리가 경찰국에 들어 설 때, 한 젊은 사제가 얼굴에 큰 미소를 지으면서 그 곳을 떠나고 있었다. 그가 상당히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곧 경찰이 그에게 만족해 할 만한 이유를 제공해 주었음을 알게 되었다. 경찰국장은, 우리가 얻었던 경찰 허락이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취소되었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설명했다. 당국이 제시한 이유인즉, 대회장의 상태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문제에 관해 얼마간 열띤 토론을 한 후, 우리는 도청에 가서 도지사를 만나 이야기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몇 시간 후에 우리는 도경 본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찰국장 사무실에서 만났던 같은 ‘가톨릭’ 사제를 발견했는데, 이번에는 나이가 좀 들었고 중요해 보이는 한 사제를 동반하고 있었다. 나중에 우리가 알게 된 것이지만, 후자는 우리가 대회를 여는 도시의 교구장 사제였다. 사제들은 도지사와 이야기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보조자인 경찰서장이 들어왔을 때 그들은 그의 사무실에 들어가기를 청하였다. 몇분 후에 도지사가 도착하였다. ·⁠·⁠· 그는 우리의 말을 들어 보기도 전에, 그의 마음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했다. 그리고 ·⁠·⁠· 그는 자기 견해로는 집회를 갖기에 부적합한 장소를 빌린 이유로 우리를 체포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말을 시작했다. 그의 책략은 우리에게 겁을 주어, 잘못한 쪽은 우리이고 그래서 책망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우리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

“우리는 경찰의 이 독단적이고 ‘파시스트’적인 행동에 대항하여 싸워 보지도 않고서 그냥 굴복하지는 않기로 결심하였다. 우리는 도지사의 사무실에서 1시간 이상이나 머물렀고 우리의 사건의 법적인 전망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지사는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면 대회는 어떻게 되었는가? 보고는 이렇게 계속된다.

“우리는 돌아가서, 그 대회를 나누어 두 개인 집에서 개최하는 마련을 하였다. 우리는 확성기를 사용하여 두 장소에서 동시에 같은 ‘프로그램’을 즐겼다. 심지어 사제들이 다음 날 아침에 교회에서, (집회가 금지되어 열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날인) 그 날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공개 집회가 금지되어 아무도 참석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발표함으로써 사실을 은폐하려고 하였지만, 교직자들의 반대는 많은 정직한 사람들의 분개를 샀다. ·⁠·⁠· 그러나 여기서 사제들은 또 패배를 당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증인’들은 입을 다물고 있은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거짓 종교인들의 위선과 거짓된 가르침들을 폭로하였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선의의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였기 때문이다.”

긴 법적 투쟁

1956년에 ‘이탈리아’에는 비‘가톨릭’ 인구가 약 190,000명 되었다. 당시 왕국 전도인들은 그 수가 수천밖에 되지 않았지만, 활동적이고 열성적이었다. 여호와의 백성의 특출한 성장과는 대조적으로, 다른 종교들은 일반적으로 차츰 쇠퇴하고 있었다. 진리는 삽시간에 번져 나갔으며, 특히 ‘아브루찌’와 ‘로마냐’ 두 지역의 ‘아드리아’ 해안에서 그러했다. 이 곳의 열성적인 전도인들은 인근 도시로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그러한 곳에 회중들이 설립될 때까지 가서 전파했다.

절박한 위험을 감지하고서, ‘가톨릭’ 교직자들은 우리의 전파 사업을 대항하는 운동을 조직하고자 하였다. ‘바티칸’의 대변지 「르오세르바토레 로마노」지는 1954년 2월 1일과 2일호에서, 교직자들과 교회 성원들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이 수행하는 사업을 반대하도록 고무하였다. 그 기사는 특정한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주로 ‘증인’들을 겨냥한 것이 분명하였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우리는 또한, 보통 외국에서 들어왔으며, 이 나라에 유독한 죄를 심는 목적을 가진 ‘프로테스탄트’의 선전 운동이 강렬해지는 것에 주의를 끌기 원한다. ·⁠·⁠· 우리는 모든 교구 사제들과 교회 조직들과 양무리들이 그러한 것이 출현하는 것을 면밀하게 살펴서 민첩하게 관할 당국에 알려 주기 바란다.” (‘고딕’체로는 본 발행자자)

여기 언급된 “관할 당국”이란 오직 경찰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티칸’은 사실상 전도인들이 체포되게 하라고 사제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사실인즉, 수백명이 경찰의 제지를 당한 후 구금되었다. 다수는 즉시 풀려났고, 일부는 벌금형을 받거나 체포되기도 했다. 여호와의 백성은, 1970년대 초까지 긴 법적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47년에서 1970년까지, ‘여호와의 증인’들과 관련된 100건이 넘는 사건이 법원에 제소되었다.

전도인들은 ‘파시스트’ 법전의 경찰법 제 113조, 121조 및 156조를 어겼다는 고발을 당했다. 이들 조항들에는 인쇄물을 배포하는 사람들(제 113조), 호별 방문하는 행상인들(제 121조) 및 특정한 목적으로 돈을 징수하는 사람들(제 156조)은 허가증을 소지하거나 관공서에 등록할 것이 요구되어 있다.

왕국 전도인들이 상업적인 활동을 하거나 돈을 징수하는 데 종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들이 “좋은 소식”을 전파할 때, 인쇄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헌금을 할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헌금을 받고 잡지나 기타 출판물을 전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업은 종교적인 신념을 전하는 것으로 분류되거나 ‘이탈리아’ 헌법 제 19조에서 승인하는 개인의 믿음을 “선전”하는 방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분명히, 당시에 숭배의 자유를 탄압하기 위한 법률을 시행하고자 하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었다. 마침내 1956년에, 허가증 없이 인쇄물을 배부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제 113조의 그 부분은 ‘헌법’과 반대되는 것으로 간주되어 폐지되었다.

거의 모든 사건들이 유리한 결과를 가져 왔으며, 유죄 판결을 받은 몇명의 형제들은 나중에 상소하여 무죄가 되었다. 몇몇 사건은 ‘이탈리아’ 대법원인, 대심원에서, 권한 문제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모두 형제들에게 유리한 판결이 났다.

우리 형제들에게 제기된 고발들이 전파 사업을 중단시키기 위한 단순한 구실들이었음을 예증하기 위해 이러한 사건들 중 하나를 검토해 보자. 지금 32년 이상 ‘벧엘’ 봉사를 해 온 ‘로몰로 델레리세’ 형제는, ‘로마’ 지방 법원에서 “소책자들과 ‘팜플렛’의 배부와 관련하여 구걸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 4천 ‘리라’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델레리세’ 형제는 항소하여 1959년 12월 2일에 ‘로마’ 재판소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앞서 말한 소책자들과 ‘팜플렛’의 배부는 구걸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수행하는 종교적 선전의 일부”란 것이 인정되었다.

‘로마’에서의 대회!

‘로마’에서의 대회는 형제들이 여러 해 동안 갖기를 열렬히 바라왔던 대회였다. 심지어, 특별 재판소 법정에서 재판을 받던 형제들도, “우리가 투옥된 바로 이 ‘로마’에서 대회를 갖고, 이 도시에서 자유로이 집회를 가질 날이 올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하고 마음 속으로 은밀히 생각하였다.

그러한 기대들이 1951년 12월에 ‘로마’ 무역 박람회관 구내에서 전국 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성취되었다. “순결한 숭배”란 그 대회 주제는, 그 역사적인 도시에서 전통적으로 번성하고 있는 종교와는 의미심장한 대조가 되었다. 14개의 다른 ‘유럽’ 국가들로부터 형제들이 참석하였기 때문에, 그 대회는 국제적인 성격을 띠었다. 1953년 「연감」(영문판)은 다음과 같은 보고를 실었다.

“그 ‘로마’ 대회는 그 해의 잊지 못할 행사였다. ‘협회’장이 그 대회에서 사회를 맡을 것이라고 발표되었을 때 ‘이탈리아’ 형제들은, 큰 희생을 치르고라도 그 대회에 참석하기로 결심하였다. ‘이탈리아’에서의 빈곤 때문에, 국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탈리아’ 형제들이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노워’ 형제가 이웃 나라 형제들을 ‘로마’ 대회에 초대할 것을 제안하였을 때 그 반응은 훌륭하였다. 영국, ‘덴마아크’,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및 기타 ‘유럽’ 국가들로부터 700내지 800명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그리하여 이 ‘로마’ 대회는 ‘이탈리아’ 형제들이 결코 잊지 못할 국제적인 대회가 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국적과 인종이 다른 형제들 간에 존재하는 사랑과 연합을 처음 맛보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다른 나라들에서는 물론, ‘이탈리아’에서도 여호와의 백성의 축복된 비슷한 모임들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이 앞으로 있을 대회들에 참석하기 위해 더 큰 노력을 바칠 것을 알고 있다!”

특별 소책자 운동

1955년에 두 가지 중요한 행사가 있었다. 이 중 첫 번째의 것은, 「그리스도교국 혹은 그리스도교—어느 것이 “세상의 빛”인가?」라는 소책자를 배부하는 세계적인 특별 운동이었다. 모든 전도인은 각자 30부를 배부하도록 요청을 받았으며, 이 나라의 교직자들 모두가 우편으로 한부씩 받게 했다. 모든 주소를 알아 내고 서신과 함께 100,000부의 소책자를 보내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전도인들의 편지에 회신을 한 교직자는 거의 없었지만, 신문사에 편지들을 보냄으로써 난폭한 반응을 보였다. 예를 들어, 1955년 9월 4일에, ‘파엔차’의 ‘가톨릭’ 신문 「일피콜로」지는,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하라—이것이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다”란 대서 특필의 기사를 실었다. 그 기사 내용은 이러했다.

“최근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서’ 고집장이라고 칭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사제들과 종교 기관들에 선전 소책자를 한권 보내어 회신을 요구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을 가리켜 “엄청난 무지와 터무니없는 주제넘음과 고집”을 소유한, “가난한 바보들”이라고 묘사한 후, 그 기사는 ‘단테’의 「신곡」의 한 발췌문을 “숙고”해 보라고 충고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을 대항하여 이런 종류의 기사 및 이와 비슷한 기사들이 쓰여졌다. 때때로 그러한 기사들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고 ‘증인’들이 그들의 집을 방문했을 때 많은 질문을 하게 했다.

승리의 왕국 대회

1955년의 다른 특출한 행사는 승리의 왕국 대회였다. 이 국제 대회에 참석한 4,351명 가운데는 32개국에서 온 대표자들이 포함되었고, 378명이 침례를 받았다. 이것은 참석자들의 거의 10‘퍼센트’가 물 침례로 그들의 헌신을 상징하였음을 의미하며,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수치였다. 형제들이 가득 탄 5대의 특별 기차가 ‘파리’로부터 도착했으며, 그들 대부분은 미국에서 왔다. 그들의 도착은 대단한 흥분을 초래했는데, 이것은 ‘로마’가 한번에 그렇게 많은 미국인 관광객들의 집단을 맞이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회를 위해 ‘팔라쪼 데이 콘그레시’를 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얀 대리석을 입혔고 푸른 공원들이 둘러싸고 있는 그 건물은, 대회 대표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는, 당시에 ‘유럽’에서 가장 좋은 대회장 중의 하나였다. 우리의 첫 번째 신청이 수락되었고, 만사가 잘 되어 가는 것 같았다. 대회가 시작되기 10일 전에, 우리는 대회장 사용 허락이 철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또 다른 계약이 필요하다는 말을 공식적으로 들었다. 결국, 대회 개최일 이틀 전, ‘로마’에서 대회를 개최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보였을 때, 경영자측이 우리가 결국 대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통지해 왔다.

그러한 음흉한 공작 배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그 대답은, 「메리디아노 드 이탈리아」지 1955년 10월 30일자에 발표된 “‘바벨’탑—‘캄피도리오’에서의 까마귀”란 제목의 기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기사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기독교 민주당 도시인 ‘로마’ 시의 의회 의원 ‘코르나키올라’ 씨[그의 이름의 문자적인 뜻은 “작은 까마귀”이다]는 ‘바티칸’ 시에서 유일하게 영예로운 직위를 가진 ‘레베키니’[당시 ‘로마’ 시장]보다 더욱 친‘바티칸’인 것 같다.

“사실상, ‘코르나키올라’ 씨—그렇다, 그 이름은 ‘코르나키올라’다—는 ‘로마’ 시장에게 ‘‘프로테스탄트’ 종파인 ‘여호와의 증인’들이 ‘로마’ 국제 전시장 구내를 그들의 대회 장소로 사용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질문을 하였다. ‘코르나키올라’ 의원은, ‘로마’ 시민들을 위해 ‘이 일에 대해 항의하고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징책하기’ 원하며, ‘우리 교황의 저택인 ‘로마’는, 교황의 저택을 더럽히는 이러한 모임을 관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신문은 이렇게 계속한다. “이제 (‘가톨릭’ 행동대의 요원이며 교역자인 ‘탐브로니’ 씨가) 현청으로부터 문제시되고 있는 허가를 내 준 사실과는 관계없이, ‘바티칸’ 시가 교황이 거주하는 곳이지만, 또 ‘로마’는 ‘이탈리아’ 공화국의 수뇌가 거주하는 곳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론치’ 대통령은, 그의 다른 직무들 중에서 ‘이탈리아’ 공화국의 헌법을 보호할 의무도 가지고 있다. 헌법 제 8조에서는 ‘모든 신조는 자유로이 행사되고 또 개개 정관에 따라 조직할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천명한다.

“만약 ‘코르나키올라’ 씨가 ‘이탈리아’ 헌법에 예외를 두고자 한다면, 그는 그의 ‘로마’ 시 의원직을 사임하고 나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 신문은 또한 ‘증인’들의 행동을 좋게 논평하였다. 「일 조르날레 드 이탈리아」지 1955년 8월 7일자 일요일 신문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공평한 관찰자라면 특히 세 가지 점에 감명을 받을 것이다. 그 첫째는 참석한 사람들의 본이 되는 행동인데, 그들은 제공되는 내용을 존경받을 만한 조용함과 분명한 영적 친근감으로 경청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그렇게 많은 인종이, 도덕적 청렴과 대단한 평온을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 불어 넣는 듯한 한 종교의 이름으로, 함께 모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세번째는 한살짜리에서 13세까지의 어린이들의 수가 두드러지게 많았는데—흑인과 백인과 황인종이 함께 모였지만, 모두는 이상하리만큼 행실이 훌륭하며, 심지어 그들은 설교자의 말을 들을 때 바쁘게 성귀들을 찾는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출판물들의 발표는 대단한 열정으로 환영되었고, 1955년 8월 8일호부터 「깨어라!」지가 ‘이탈리아’어로 발행될 것이라는 소식은 특히 가슴 설레이게 했다. ‘이탈리아’어로 발표된 서적에는 「새 하늘과 새 땅」 책과 「신세계에 대한 신앙의 기초」, 「조만간에 있을 세계 정복—하나님의 왕국에 의해서」 및 「이 천국의 기쁜 소식」 소책자들이 포함되었다.

1957년에 있은 두 가지 의미심장한 승리

1957년에 여호와의 백성은 ‘이탈리아’에서 두 차례의 의미심장한 승리를 거두었다. 첫 번째의 승리는 특별 재판소에서 선고받은 26명의 형제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 재판소에서 선고받았던 많은 사람들은 ‘파시즘’의 몰락 후에 사건들을 재심받아 무죄 판결을 받았다. 충실한 형제들은 그들의 입장 때문에 불공평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이 보는 그들의 개인 입장을 지나치게 염려하지는 않았지만, 한 백성으로서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권리를 입증하기 위해 그들의 사건을 재심받기로 결정했다. 그 특별 재판소는 신권 조직이 “정부 체제의 개혁 및 국민적 주체성에 저해되는 선전을 유포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을 수행하는 하나의 비밀 단체”이며 “범죄적 목적”을 추구한다고 고발하였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정부 당국자들과의 좋은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그 판결을 무효케 하는 것이 우리의 최대 관심사였다.

그 사건은 관련된 형제들 26명 중에 11명이 참석한 가운데 1957년 3월 20일에 ‘아퀼라’ 항소원에서 재심되었다. 우리의 변호인들 중 한 사람은 ‘니콜라 로무알디’였다. 1950년대 초기 이후로 우리의 법적인 사건들을 변호해 주기를 자원하는 변호인들을 찾기가 대단히 어려웠던 때에 ‘증인’은 아니었지만, 이 변호사는 우리 형제들의 권리를 위해 변호해 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30년 이상이나 그리스도인 중립에 대한 권리와 “좋은 소식”을 전파할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투쟁하는 수백명의 우리 형제들을 기꺼이 변호해 주었다.

재판 기록은, ‘로무알디’ 씨가 그 법정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가톨릭’ 교직자단이 정사(政事)에 간섭하기 때문에 음녀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을 때, “판사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의미있는 눈짓을 교환하였다”고 알려 준다. 그 법정은 이전의 판결을 무효화시켰고, 그렇게 하여 ‘여호와의 증인’들의 사업은 불법적인 것이거나 전복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다른 승리는 6월 말에 ‘밀라노’ 지역 대회에서 있었다. 그 대회는 목요일 오후에 ‘오데온 윈터 가아덴즈’ 강당에서 개최되었고, 저녁 회기가 끝날 무렵에 이상한 일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었다. ‘로베르토 프란체스케티’ 형제는 이렇게 기술한다.

“아직도 ‘프로그램’이 10분 남았는데, 마지막 연사인 ‘주세페 투비니’가 그의 연설을 서둘러 끝맺으면서, 참석한 모두에게 마지막 기도가 있겠다고 했다. 모두는 서둘러서 결론을 지은 것과 마치는 노래가 빠진 것을 알아챘다. 그것이 생략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정문 부근에 서 있던 우리 ‘증인’들이 정중히 머리를 숙여 기도를 하는 동안,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모자를 쓴 사람들에게 포위되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형사들이었다!

“나중에 우리는 상세한 점들을 알게 되었다. 적어도 30내지 40명의 형사들이 대회장에 들어와서는 대회를 끝내라고 명령하였다. 구실은 그 장소의 주인이 필요한 허락을 신청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대회 책임자들은, 그 폐쇄 명령은 그 주인이 아니라 ‘증인’들을 처벌하려는 것임을 분명히 설명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금요일 오전은 야외 증거를 위해 계획되어 있었다. 부근의 한 거리에서 구역, 잡지 및 서적부서들이 형제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모두는 계획대로 봉사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것을 공급받았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장소를 열심히 물색하고 있는 동안 시간은 신속히 지나가고 있었다.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2시간 전까지만 해도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윈터 가아덴즈’의 소유주들이 ‘아레넬라 치네마’에서 우리를 위한 한 장소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모든 형제들이 도움의 손길을 베풀었으며, 부서들은 열심히 그 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시간에 꼭 맞게 이사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회기는 제 시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경찰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 어려움을 주기 위해 새로 구한 그 장소로 찾아 왔다. 나는 안내인으로 임명되었으며 외인은 어느 누구라도, 심지어 경찰관이라도 들여 보내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곧 경찰국장과 그의 부하 두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다. 나는 그들을 멈추게 하고는 잠깐 기다리라고 요청하였다. 그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들어갈 것을 고집하였다. 그래서 나는 손을 내밀어 그의 시계줄 있는 위치에다 대고 경찰국장을 제지하였다. 나는 무릎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 때 대회 감독자가 와서 개입해 주었다.”

그 대회는 개최되었고 형제들은 그 의미심장한 승리의 결과로 크게 세움을 받았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예기치 않았던 신문 운동이 또한 우리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많은 신문에서는 경찰이 취한 방식을, “전대 미문의 권력 남용”이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그 불법적인 개입은, 의회에서 상원 회기 동안 질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 점에 관해서 「일 파아세」지는 1958년 2월 8일자에서 이렇게 천명하였다.

“그 회기의 가장 활발한 부분은 질의 시간이었다. 꽤 까다로운 주제—종교적 활동에 대한 방해란 주제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이 제기되었다. 공화당 상원의원 ‘스팔리치’ 씨는 ‘밀라노’ 경찰국이 ‘여호와의 증인’들(성서 연구생들)의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단체가 개최한, 개인 장소에서 진행되고 있던 한 대회를 즉각적으로 폐쇄하도록 명령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질문하였다. 대답 가운데서, 내무부 차관인 ‘비소리’ 백작은 다소 회피적이었다. 그는, 그러한 조치들이 조직적인 근거로 취해졌었다고 설명하였다. 대체로 풍자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 정부 대표자는 취해진 그 조치가 숭배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조치는 공공 안전 규칙의 준수 결핍 때문에 유발된 것이다.”

이 문제의 결과로, 여호와의 이름과 그분의 백성은 정부의 고위층까지 모두 주의를 끌게 되었다! 하지만, 대회를 중단시키는 데 관심이 있은 자는 과연 누구였는가? ‘로마’의 진보적인 주간지 「일몬도」는 1957년 7월 30일자에서 이렇게 논평하였다.

“헌법 제 17조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질서있는 집회를 가질 권리를 보증하며, 또 그 첫 항에서는 ‘당국은 공개 집회에 대한 사전 통고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더우기, ‘오데온’에서의 그 대회는 한 종교 단체의 신자들을 위해 정해져 있었고, 또 문제가 되었던 그 장소는 4일간 임대되었기 때문에 그 곳은 계약 기간 동안은 개인 집회 장소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법률에 의거하여 마련되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집회의 조직자들이 그 집회를 적절한 때에 경찰국에 통고한 양심적인 처사에 대해 그들에게 존경을 표시해야 할 것이다. 결국, ‘여호와의 증인’들은 국가 안보를 저해하는 수상한 음모자들도 아니며 위험한 선동자들도 아니다.

“국가 관리들이 대주교[나중에 교황 ‘바오로 6세’가 된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를 만족케 하려고 ‘파시스트’ 시대까지 소급하는 보안법을 이용할 때, 법률과 시민적 책임에 대한 양심적인 존중을 대단히 가치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분명하다.”

노골적인 결의문

1958년 여름은 전세계 ‘여호와의 증인’들이 기억할 만한 때였다. 그 때는 ‘뉴우요오크’ 시의 ‘양키 스태디움’과 ‘폴로 그라운드’에서 동시에 개최된 ‘성의 국제 대회’로 두드러졌다. 참석한 253,922명의 대표자들 가운데는 ‘이탈리아’인들의 작은 집단이 있었다. 그들은 기쁨에 넘쳐 귀국하였으며 그들이 보고 들은 것들에 대해 경탄하였다.

‘뉴우요오크’ 대회의 ‘프로그램’은 ‘피렌체’, ‘나폴리’ 및 ‘메시나’에서 개최된 세 지역 대회에서 반복되었다. 참석한 사람들은, ‘프로그램’ 도중에 채택된 “그리스도교국은 모든 인간을 어떻게 실망시켜 왔는가?”란 제목의 노골적인 결의문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예상할 수 있었던 바와 같이 형제들 사이의 열정은, 특히 그 결의문이 특별 운동에서 배부될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고조되었다. 1958년 12월에 각 전도인은 100부씩 배부하도록 요청을 받았고, 이 나라 전역에서 50만부가 배부되었다.

‘산 마리노’에서의 참된 자유

관광객들이 주요 고속 도로를 따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인 ‘산 마리노’로 자동차를 타고 갈 때, “유구한 자유의 땅으로 환영합니다”란 표어로 환영을 받는다. ‘이탈리아’ 영토에 의해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 이 독립 국가에서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사업은 ‘이탈리아’ 지부 사무실의 감독 아래 있다.

면적이 60평방 ‘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이 작은 국가에서 언제 참된 자유가 있게 되었는가?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1958년에 그 구역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0여년 후에 9명의 전도인으로 된 작은 집단이 하나 세워졌다. 그 집단은 1971년에 회중 자격을 얻게 되었다. 1972년에 그 공화국에서 최초의 순회 대회가 개최되었고 1,700명이 참석하였다. 이 특이한 행사는 분명히 그 지방 주민들에게 생각해 봐야 할 어떤 것을 제공해 주었다. 오늘날 그 회중에는 81명의 전도인이 봉사하고 있는데, 주민 252명에 대해 ‘증인’ 한 사람꼴이 된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그것은 대단히 훌륭한 수이다!

중립 문제

그리스도인 회중의 젊은이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라는 영감받은 권고를 명심해 왔다. (이사야 2:4)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논쟁과 관련하여 그들의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해 왔다.—요한 17:14, 16.

우리는 이미 ‘레미조 쿠미네티’의 “긴 모험”과 1930년대에 젊은 ‘증인’들이 겪은 시련들을 설명한 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그리스도인 중립 문제는 더욱 더 격심해졌으며, 훨씬 더 많은 젊은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기 위해 양심적으로 갈망하였다.

이 시기에 재판을 받게 된 최초의 형제들은 대단히 중한 형을 선고받았고 감옥에서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어떤 이들은 다섯번, 여섯번이나 재판을 받았으며, 선고받은 형기를 합치면 4년이나 그 이상 되었다. 그렇게 된 것은, 어떤 젊은 그리스도인이 감옥에서 석방되어 나오면 또 군복무를 위해 징집되고, 그가 따르기를 거부하면 매번 감옥으로 다시 보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연쇄적인 처사는, 이론적으로 볼 때는 소집이 면제되는 45세가 될 때까지 계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몇 차례 반복적으로 형을 준 다음, 군당국은 형제들이 순교자가 되게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건강상의 이유를 붙여 보통 면제해 주었다. 그러한 형제들은 “종교적인 공상” 또는 “종교적인 과대망상”에 빠져 있는 것으로 분류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정신병약자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시험을 극복한 몇몇 형제들의 간단한 경험담을 얼마 듣는다면, 우리 모두에게 격려가 될 것이다. 1950년대에 다섯번이나 선고를 받았던 ‘엔니오 알파라노’는, 그가 그 위기의 경험을 어떻게 겪었는지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가에타’에서 투옥되었다. 지휘관은 우리 세 사람에게 군대식 경례를 강제로 시키려고 하였다. 우리 모두가 그것을 거부하자, 그는 우리들의 팔이랑 다리를 8시간 동안 뒤로 묶어 두어 벌을 주었다. 대단히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로써 그리고 서로를 북돋기 위해 노래를 부름으로써 용기를 유지하였으며 그렇게 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삼일 동안 빵과 물만을 줄 예정이었지만, 그 사실을 안 감옥에 있던 다른 형제들이 우리가 계속 인내할 수 있도록 항상 충분한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1956년에서 1961년 사이에 다섯번 선고를 받았던 ‘주세페 티몬치니’는 이렇게 회상한다.

“군 당국자들은 ‘‘여호와의 증인’들 중에서 오래 버티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기껏해야 한 가지 시련만 당해 보고 나면 군복무를 하기로 결심하게 돼’라고 말함으로써 나를 실망시키려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대답하곤 하였다. 그럴 때면 그들은 입영하기로 동의했다는 사람들의 이름을 줄줄 대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이름들은 지어낸 것이었다.

“여러 달 동안의 답답한 감금 생활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도록, 나는 형기의 끝에 대해선 가급적 생각을 피하였으며, 때때로 나는 내가 아직도 복역해야 할 남은 기간이 몇달 며칠이 되는가에 대해선 완전히 잊어 버리곤 하였다. 나는 내 생애의 이 기간이 나에게 많은 유익한 훈련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 자신을 어떠한 상황에도 적응시키고 겸허해지며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 친밀하게 신뢰하는 것을 배우도록 도와 주었다.”

감옥에서 4년 이상을 보낸 바 있는 ‘지노 토세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감금된 외로운 감옥살이의 첫날들은 견디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나는 ‘팔레르모’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어느 날 아침에 간수가 나의 잠을 깨우면서 ‘‘토세티’, 일어나서 밖으로 나와. 패야 할 장작더미가 기다리고 있어!’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날까지 매일 아침에 나에게 장작 패는 일을 시켜 왔다. 그러나 나는 그 날은 도저히 그 일을 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손에 물집이 너무 많이 생기고 아려서 도끼를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의사를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는 나를 보면서 ‘몸에 열이 있으면 다만 누워 있을 수는 있어.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혼날 줄 알어!’라고 소리치면서 걸어 나갔다. 최악의 상태가 벌어질 것을 생각하고서, 나는 기도로 여호와께 도움을 청하였다. 그들이 와서 나의 체온을 재어 보니 섭씨 39도나 되어 그들도 놀랐고 나도 놀랐다.

“증거할 기회는 많았다. 한번은, 내 주위에 둘러 서서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주의깊게 듣는 약 40명의 군인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우리의 선한 행실은, 간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격려하였다. 어느 날 아침에 근무중이던 한 군인이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토세티’, 내가 당신에게 행한 모든 학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당신에게 그러한 행동을 했는데도 당신은 결코 나에게 복수하려고 하지 않았읍니다. 지난 밤 근무중에 나는 「파수대」지를 읽었는데, 그것은 내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많은 것들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었읍니다. 내가 그러한 것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이 젊은 군인은, 툭하면 나에게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용서해 주고 싶었다. 그 후에 우리는 서로를 만나지 못하게 되었고, 수년이 지나갔다. 이번에는 자유를 얻어 어느 지역 대회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를 기억 못 하시겠읍니까? [그는 자기 이름을 댔다] 내가 당신을 위해 감옥문을 여닫곤 했을 때 당신은 나에게 진리에 대해 말해 주곤 하지 않았읍니까?’ 그는 형제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팔로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증인’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그 문제는 계속 대중과 당국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마침내, 다른 방법으로 복무하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단 한 차례만 형이 선고되게 하는 법률이 승인되어, 우리의 젊은 형제들은 이제 12개월 내지 15개월의 금고형을 받게 되었다.

그 동안, 군형무소의 생활 상태도 개선되었다. ‘증인’들이 정기적인 집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개인 연구를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신권 도서관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순회 대회와 지역 대회 ‘프로그램’도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심지어 필요한 의상을 입고 ‘드라마’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감옥에 있는 동안 여호와께 자신의 생활을 헌신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는 일도 허락되고 있었다. 특별히 이 봉사에 임명된 그리스도인 장로들이 각 군형무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있다.

1978년에서 1980년 사이에는, 중립 문제 때문에 일년에 평균 500여명의 젊은 형제들이 감옥에 있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 깨끗한 양심을 지킨 ‘증인’들은 현재까지 수천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1980년 12월에 국방부 장관은, 전국 ‘텔레비젼’ 방송을 통해 우리 형제들의 입장을 개선하려는 법안이 의회에서 심의중이라고 발표하였다. 그 회견 중에서 그는 ‘증인’들을 일컬어 “예의바른 사람들”이라고 묘사하였고, 그 새로운 법안이 제정되면 “국가는 모든 종교를 존중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스도인 중립과 관련하여 젊은 ‘증인’들의 행동은, 여호와의 백성이 누리는 존경을 더욱 높여 주었다. 이를테면, 「일 코르리에레 디 트리에스테」지는 이렇게 천명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확고함과 통일성은 경탄할 만하다. 다른 종교와는 반대로, 한 백성으로서의 그들의 통일성은, 분쟁하고 있는 서로 다른 양쪽을 축복해 달라고 같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같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나, 또는 국가 원수들이나 정당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정치와 종교를 함께 융합하는 일을 방지해 준다. 마지막으로 언급되지만 가장 덜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은 그들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설정된 기본적인 개념, 즉 살인하지 말라! 는 명령을 범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직면할 각오를 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는 우리 역사상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였다. 하지만, 그 대회를 ‘로마’에서 갖는 것이 불가능했다. ‘가톨릭’ 교회가 1963년에 제 2차 ‘바티칸’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으며, 한 정부 관리는 우리의 대표자에게 그러한 때에 비‘가톨릭’ 종교가 ‘로마’에서 대회를 갖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는 또한 1963년에는 비‘가톨릭’인들이 ‘로마’에 출입하는 것이 금지될 것이라고 말했다. 관광객으로서 그 도시를 방문하는 것은 허락될 것이지만, 집단적으로 그러한 모임을 갖는 것은 금지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의 8일간의 국제 대회는 ‘밀라노’의 자전거 경주장인 ‘벨로드로모 비고렐리’에서 개최되었다. 20,000여명의 대표자들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된, 그러한 커다란 대회를 조직하는 것은 ‘이탈리아’ 형제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경험이 되었다. 그들에게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당시에 대회를 준비하는 일에 참여하였던, 여행하는 감독자 ‘주세페 치알리니’ 형제는 이와 같이 말한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여러 ‘호텔’의 숙박 시설 외에도 수천개의 방이 더 필요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 가정 집에서 숙박할 곳을 찾기로 하였으며 그러한 숙박을 마련하는 일을 하도록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불렀다. ‘이탈리아’에서는 개인 집에서 숙박할 곳을 구한 일이 그 때가 처음이었고, 6,000여명의 형제들이 그러한 방법으로 방을 배당받았다.”

교직자들이 곧 우리의 노력을 반대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대회가 시작되기 며칠 전에 사제들은 그들의 교구민들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방을 제공하지 말도록 경고하기 시작했다. ‘밀라노’의 ‘성 안드류우’ 교구 사제는, 그의 교회 벽에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다”라는 시선을 끄는 벽보를 붙였다. 교직자들의 선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방 제공을 철회하였다.

하지만, 모든 사제들이 다 대회 조직에 대해 적의를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한 특별 ‘파이오니아’의 경험에서 그 점을 볼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집주인과 함께 숙박비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그는 우리가 첫 방문에서 제의한 금액보다 기꺼이 싸게 제공하겠다고 하였다. 그는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는 사제한테 가서 우리에게 방들을 빌려 줘도 괜찮겠느냐고 질문하였는데, 그 사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였다.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 곳에 오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방을 꼭 빌려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유일한 진실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한 탁월한 목적을 가지고 기꺼이 함께 모이는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환대를 베푸는 사람은 인간에게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숙박을 마련하는 일은 다른 관점에서 볼 때도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그것은 ‘밀라노’ 시 전체에 집중적인 증거를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많은 집주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행실에 감사를 표명했다. 그 점을 한 특별 ‘파이오니아’ 자매의 말에서 볼 수 있다.

“문을 두들겼더니 한 부인이 대답하였다. 내가 방문 목적을 설명하자, 그는 10여명이 숙박할 수 있는 방이 있기는 하지만, 약속을 하기 전에 경찰관인 자기 친구의 조언을 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다음 날 내가 방문했을 때, 그 부인은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환영하여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10명이 숙박할 방들을 기꺼이 제공하겠읍니다. 나의 친구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아시겠읍니까? 그의 말을 전하고 싶어요. 그는 “‘시뇨라’, 그분들에게 숙박을 제공해도 안전할 뿐만 아니라, 원한다면 방문 열쇠를 그들에게 맡기고 미국에라도 갖다 올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어요. 여러분의 대회 기간 중에 내가 외출을 할 수 없게 되어 대단히 유감이예요. ‘아파트’ 전체를 여러분에게 제공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예요.’”

대회 준비 일 가운데 가장 힘드는 것 한 가지는, 그 자전거 경주장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 일이 그렇게 힘든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안토니오 카파렐리’ 형제는 이렇게 회상한다. “‘벨로드로모’에서 우리의 대회가 개최되기 얼마 전에, 교황 ‘요한 23세’가 사망하기 바로 전에 ‘몬티니’ 추기경이 소집한 한 ‘가톨릭’ 집회가 있었다. 그 집회에 참석했던 ‘가톨릭’교인들이 모두 촛불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경주장 계단들은 녹은 초와 ‘껌’들로 덮여 있었다. 모든 곳을 긁어 내고 청소하는 데는 수백명의 형제들이 필요하였으며, 일부 형제들은 심지어 멀리 ‘토리노’에서까지 와서 그 일을 하였다. 그 일을 하는 데만도 한 주일 전체가 걸렸다.”

이 대회에는 52개나 되는 많은 나라에서 온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청중을 4부분, 즉 불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및 ‘스페인’어로 나누었으며, ‘프로그램’이 이러한 언어로 동시에 제공되었다. 또한 영어로 제공되는 회기도 여러 개 있었다. 수요일 오후 회기가 끝날 때, ‘노워’ 형제로부터 대회가 진행되는 4개 언어뿐만 아니라 독일어와 화란어로 된 「신세계역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청중은 기쁨에 넘쳤다!

1925년에 ‘피네롤로’에서 개최되었던 최초의 대회에 참석했던 70명 중 몇명이 그 기념할 만한 대회에도 참석해 있었다. 상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이 공개 강연에 참석한 20,516명 가운데 끼이게 된 것은 잊을 수 없는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그들 중 한 자매는 다음과 같이 썼다. “‘피네롤로’ 대회에 참석한 지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 내가 ‘밀라노’에 있게 된 것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넘치는 기쁨을 설명하는 데는 이 한 가지 경험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대회가 끝났는데도, 떠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다른 국적을 가진 형제들은 오랫동안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 다시 말해서, 작별의 시간이 다가와서 섭섭해 했던 것이다. 우리들 중 다수는 ‘스페인’ 형제들과 ‘포르투갈’ 형제들이 계단에 앉아서, 그들의 형제들에게 손을 흔들어 수백개의 손수건을 펄럭이면서 작별 인사를 한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지부 사무실에서의 감독

‘조셉 로마노’ 형제가 1947년에 ‘이탈리아’에 도착하자마자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고, 그는 1954년 5월까지 그 임명에서 봉사했다. 1954년에서 1960년까지는 ‘안토니 시데리스’ 형제가 이 직책에 임명되었고, 다음에 다시 ‘로마노’ 형제가, 1964년에 ‘발테르 파르네티’ 형제가 지부 감독자가 될 때까지 잠시 동안 그 직책에 임명되었다. ‘반노찌’ 형제가 몇년 전에 ‘파엔차’ 회중을 방문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 방문 후에 그는 이렇게 편지하였다. “언젠가는 이들 젊은이들 중 얼마가 이 특권받은 봉사(‘파이오니아’)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등록하기로 결심할 것을 우리 함께 기대합시다.” 그런데, 그 젊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파르네티’ 형제이다. 그는 지역 감독자로 봉사한 후 10개월 과정의 ‘왙취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를 졸업하였고, 다음에는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직도 지부 조정자로 일하고 있다.

두 가지 출판물이 발전을 자극하다

발전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이탈리아’어판 성서와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된 성서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책자를 하나 마련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달리 있겠는가? 「신세계역 성경」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은 참 숭배자들을 교훈하는 데 아주 적절한 시기에 나왔다고 진실로 말할 수 있다.

‘이탈리아’어판 「신세계역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은 1963년 이래 구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출판물이 상당한 진전을 의미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 백성에게 전체 성서의 번역판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였다. ‘이탈리아’ 증인들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번역한 성서들을 꽤 많은 분량을 상당히 비싼 값으로 구입하고 있었다. 집회에서 한 연사가 어느 번역판으로부터 한 성귀를 낭독하면, 청중은 들은 것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른 여러 번역판에 나오는 단어들과 관련시켜 이해하기 위해 정신적 조정을 해야 했다. 심지어 「신세계역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을 낭독할 때에도 ‘히브리’어 성서로부터 인용하기 위해서는 다른 번역판들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이윽고, 완성된 「신세계역」이 ‘이탈리아’어로 인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형제들은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1968년 봄에 도착한 첫 발송품은, 이 성서를 배부하는 특별 운동이 6월에 전개되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바닥이 나버렸다. 그 이래 이 성서는 1,600,000부 이상 배부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서의 저자를 찬양하며 진실한 사람들에게 성서의 교훈을 가르칠 때 통일된 말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은 “적시에 나온 적절한 책”이라고 해도 올바를 것이다. 이 책의 발표는 1968년 여름 대회에서 있었는데, 회중에서는 가을에 받을 수 있었다. 이 출판물의 ‘이탈리아’어판은 1980년까지 이미 4,000,000부 이상이나 배부되었으며, 확실히 왕국 사업의 발전을 가속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

1969년 여름에 또 하나의 커다란 영적 잔치, 즉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가 ‘로마’에서 개최되었다. 그 때에는 자국에서 함께 모이는 자유를 부인당한 ‘스페인’ 형제들도 참석하였다. ‘이탈리아’ 형제들은, 그 아름다운 ‘팔라쪼 델로 스포트’에서 ‘프로그램’을 즐겼고 ‘스페인’ 형제들은 1955년에 “승리의 왕국” 대회가 열렸던 ‘팔라쪼 데이 콘그레시’에서 대회를 즐겼다.

35개국에서 대표자들이 참석하였고, 공개 강연에는 총 25,648명이 참석하였다. 침례를 받은 사람은 2,212명이었다. 침례 지망자들이 그렇게 많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못했었다. 그것은 큰 증가가 진행중이라는 징조였다.

신문들은 대개 대회를 널리 선전해 주었다. 일간지인 「로마」지 1969년 8월 15일자에서는, 침례에 대한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모든 것이 큰 평화와 평온의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있을지도 모를 비상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서 파견되었던 기총병들은 그 장소에 정말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토록 질서있는 참을성을 본 사람은 누구나, 어제 오전에, ‘이탈리아’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더 많이 있다면, 많은 일들 즉 ‘버스’를 타는 일, 공공 장소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일, ‘스태디움’에서 줄을 서는 일, 일반 공휴일에 여행하는 일 등이 훨씬 더 수월해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리비아’에서의 전도 사업

‘리비아’는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거의 완전히 사막인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그 곳의 인구는 거의 2,500,000이며, 대부분이 ‘모슬렘’ 신앙을 가진 ‘아랍’인들이다. 제 2차 세계 대전 이전에, 그리고 그 결과로 이 나라는 ‘이탈리아’의 통치 하에 있었으며 그 곳에는 ‘이탈리아’인 사회가 번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말에 대부분의 ‘이탈리아’인들이 ‘리비아’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리비아’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의 사업은, ‘미첼 안토노빅’이 그의 세속 활동을 하기 위해 ‘이집트’로부터 ‘트리폴리’에 도착했을 때인 1950년 4월에 시작되었다. 이 형제의 전파는 곧 열매를 맺기 시작했고, 특히 ‘이탈리아’ 사람들 가운데서 그러하였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의 전도 사업의 감독이, 1953년 1월에 ‘이집트’ 지부로부터 ‘이탈리아’ 지부로 옮겨졌다. 사업이 발전하자 여러 가지 난관들이 발생하였다. 체포, 법정 소송 사건 및 서적 압수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1957년에 사업을 법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신청을 하였지만, 우리가 ‘시온’주의 운동과 관련이 있는 비밀 단체라는 증거없는 주장을 포함한 거짓 고발 등으로 인해 그 신청은 거절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전도인이 89명이고 특별 ‘파이오니아’가 한 사람 있던 1959년까지 계속 발전하였다. 그 후에 얼마 안 가서 사업은 기울었는데, 그것은 당국자들이 많은 형제들을 추방하였고 그래서 그들이 강제로 ‘이탈리아’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1964년에 사업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1969년에 정부 교체가 있은 뒤, 남아 있던 형제들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이탈리아’인들이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하여 과거에 훌륭한 열매를 산출했던 ‘리비아’의 장래는 이제 여호와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새로운 ‘벧엘’을 건축함

1968년에 ‘이탈리아’ 지부를 방문한 ‘노워’ 형제는, 그의 방문중에 형제들에게 새로운 ‘벧엘’ 복합 건물을 건축하기에 적합한 부지를 찾아 보라고 지시하였다. ‘로마’의 북동쪽 외곽에, 특별히 적합한 장소가 하나 발견되었다. 더우기, 그 지역은 ‘이탈리아’의 자동차 도로 중 가장 중요한 “선 하이웨이”에 인접하고 있어 수송하기에 편리했다.

건축 허가를 얻기 위해 ‘로마’ 시 의회에 계획서를 제출했지만, 신권 조직이 아직도 공식적으로 국가의 인정을 받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난관이 생겼다. 하지만, 1969년에 ‘도시 개발 계획’ 책임을 맡고 있던 사람들이 우리의 국제 대회에 25,000명 가량의 사람들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보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마침내 이 종교가 더는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현실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결국, 1971년 3월에 건축 허가가 났으며, 즉시 공사가 시작되었다. 건축 공사는 거의 전적으로 형제들에 의해 행해졌으며, 1972년 봄에 지하실이 있는 3층 건물이 완공되었다.

그 새로운 ‘벧엘’은 1972년 5월 27일에 봉헌되었다. 그 다음 날 ‘노워’ 형제는 ‘플라미니오 스태디움’에서 15,700명의 청중에게 “영적 교육을 위한 집”이란 연설을 하였다. 이들 형제들 가운데 다수는 그 새로운 ‘벧엘’을 방문하였고, 또 여호와께서 ‘이탈리아’의 밭에서의 사업을 축복하고 계신 것을 보고 대단히 즐거워했다.

“하나님의 승리” 대회

1973년 8월에 ‘플라미니오 스태디움’에서 개최된 전국 대회의 주제인 “하나님의 승리”는 흥분케 하는 주제였다. ‘이탈리아’의 30,000명의 전도인들은 57,000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 감격해 했다. 그 ‘스태디움’은 꼭 메워졌고, 그러한 인상적인 군중 그 자체가 진행되고 있는 거두어 들이는 일의 규모를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이었다. 3,366명이 여호와께 그들의 헌신을 상징한 침례는, ‘이탈리아’에서 있은 사상 최대 규모의 집단적인 침례였다.

합치면 6,000‘센티미터’에 달하는 신문 기사들은, “이례적으로 많이 모인 군중”과 ‘여호와의 증인’들의 “엄청난 증가”에 대해 말했다.

「일 메사제로」지는 1973년 8월 11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대단히 젊고, 대단히 열성적이고, 대단히 열렬한, 그리고 형제 사랑에 가득찬 모든 신자들 ·⁠·⁠·”

「일 템포」지는 1973년 8월 14일자에서 이렇게 논평하였다. “조직들이 분열되고 있고,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도덕 규범, 심지어 자기 나름대로의 종교까지 만들어 내는 이러한 세상에서,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공통적인 구원의 확실한 방법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증진시키기 위해 완전한 조화 가운데 함께 모인 것을 보는 것은 흥미진진하다.”

자기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축복

시편 필자는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라고 말했다. (시 3:8) 1946년에 120명의 전도인으로 구성되었던 그 조그만 집단을 기억하는가? 서서히 그리고 어려운 출발을 한 후에, 이들 충성스러운 숭배자들은 축복을 받아 왔으며 또 보다 풍성한 “추수”를 하는 일에 참여해 왔다. 참조된 도표들은, 특히, 1960년대 중반 이후에 여호와의 백성들이 놀라운 증가를 즐겼음을 보여 준다. 1980년에 ‘이탈리아’에는 84,847명의 전도인이 있었고, 1981년 6월에는 그 수가 더욱 증가하여 90,191명으로 늘어났다.

참조된 도표에 나오는 수치는, 왕국 관심사가 확장되었다는 증거를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장래의 훌륭한 전망을 암시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1,357개의 회중이 84개의 순회구와, 5개의 지역으로 조직되어 있다. 믿을 만한 통계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비‘가톨릭’ 종교임을 나타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계와는 관계없이, 여호와 보시기에 중요한 것은 그분의 승인과 축복을 받는 자가 되는 것임을 우리는 인식하고 있다.—잠언 10:22.

잡지들이 ‘벧엘’에서 인쇄되다

왕국 전도인과 잡지 예약자들의 수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이탈리아’어판 「파수대」와 「깨어라!」에 대한 수요가 점차 증가하였다. 전에는 잡지들을 ‘브루클린’으로부터 직접 받았다. 1969년 후에는 잡지들이 얼마간 ‘런던’ 지부에서 인쇄되었다. 그 후에 1971년 4월부터는 잡지들이 ‘스위스’ 지부에서 인쇄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일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1972년 6월호부터는 「파수대」와 「깨어라!」를 ‘로마’에 있는 어느 상업 회사에서 인쇄하게 되었다. 파업이며 기타 다른 불편함 때문에, 이 마련도 얼마 안 가서 부적합하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발송품이 늦게 도착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협회’는 ‘로마’에 있는 ‘벧엘’에 윤전기를 한대 설치하기로 계획하였다. 마침내 그 계획이 이루어졌다. 마침내, 1975년 말에 ‘로마’ 인쇄 공장이 자체 내에서 잡지들을 인쇄하기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그 인쇄기에서 1976년 1월 22일호 「깨어라!」와 1976년 2월 1일호 「파수대」가 처음으로 인쇄되어 나왔다.

1980년 봉사년도 중에 ‘이탈리아’에서 18,500,000부의 잡지가 인쇄되었다. ‘이탈리아’어 「파수대」의 매호 평균 발행 부수는 520,000부에 달했고, 「깨어라!」는 약 470,000부에 달했다.

가두 잡지 봉사

1974년까지는 ‘이탈리아’ 전도인들이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들을 호별 방문에서는 배부하였지만, 가두에서나 공공 장소에서는 배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형제들이 “좋은 소식”을 전파할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100건 이상의 법정 소송 사건을 제기해야만 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제 가두 잡지 봉사를 하는 것을 막는 법은 없었지만, ‘협회’의 법률 고문은 점차로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제안해 주었다. 우선 호별 방문 전파를 할 수 있는 우리의 권리를 확보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 문제를 한 걸음 더 발전시키기로 하였다.

전도 사업이 전국적으로 훌륭하게 수행되고 있었으므로, 이제 우리의 활동을 확장할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되었다. 전국적인 규모로 가두 잡지 봉사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밀라노’, ‘피렌체’ 및 ‘나폴리’와 같은 몇개 도시에서 시험적으로 그 운동을 전개해 보기로 하였다. 훌륭한 결과가 있었고 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1975년 11월호 「왕국 봉사」지에서는 이 나라의 법률과 일치하게 가두 잡지 봉사를 하는 방법에 관한 지시를 하였다. 그 이래 이 특별한 봉사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수행되어 왔다.

조직이 법적으로 인정되다

1951년에 신권 조직이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밀라노’에서 법적 협회를 구성하여, 그것을 법적으로 인정받게 하려는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1953년 2월 11일에 ‘밀라노’ 현에서는 “그 신청을 허가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이 구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의 신청을 거절하였다. 법적 인정을 좌우하는 이들 “필요한 조건들”이란 무엇이었는가? 법에 의거하여 구비해야 할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즉 (1) 그 종교가 정부에 “알려져” 있어야 한다는 것과, (2) 그 종교의 목적들은 법과 질서 혹은 공공 도덕의 이익에 반대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 조건들이었다.

1950년대 후반에 내무부와 또 한번 시도를 해 보았지만, 이번에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거절한 주 원인은 우리의 조직이 정계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종종 불리한 입장에 놓인다는 점이었다. 우리의 일을 담당한 변호사는 ‘이탈리아’에서는 아직도 “전통적으로 진보적인 정신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기술했다.

여러 해가 지났다. 하나님의 성령의 지원을 받아 ‘여호와의 증인’들의 사업은 번창하였고, 형제들은 탁월한 도덕성으로 이 나라에서 잘 알려지게 되었다. 1976년 2월에 신청서가 다시 제출되었고, 드디어 수락되었다. 지부 사무실은 그 해 6월에 결정의 통지서를 받았다—‘펜실베이니아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가 법적으로 인정된 것이었다.

그 결과, 새로운 전망들이 열렸다. 사실상, 1976년 말에 우리는 결혼식을 주례할 권리를 가지는 교직자를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을 국가로부터 허락받았다. 더 나아가, 1976년과 1979년에는 전 시간 봉사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교직자들에게 베풀어지는 의료 봉사와 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두개의 교직령이 발표되었다. 최근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도움을 청하는 수감자들을 방문할 수 있는 권리를 특정한 수의 감독자들에게 부여하는 또 하나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왙취 타워 협회’가 승인된 것은, 이제 재산이 ‘협회’의 명의로 등록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러 회중들이 자체의 왕국회관을 매입하거나 건축하여, 그 재산을 ‘협회’의 명의로 등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는 거의 모든 왕국회관이 세낸 것이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소유로 된 것은 극소수였는데, 그 이유는 회관들을 한명 이상의 형제들의 이름으로 등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이탈리아’에는 두개의 대회 회관이 있다. 1977년 10월에 봉헌된, ‘밀라노’에 있는 첫 번째의 것은 이전에 극장으로 사용되던 것을 개조하여 우리의 필요에 맞게 만든 것이다. 또 하나는 ‘토리노’ 외곽에 있는 것으로, 특별히 대회 목적을 위해 건축한 것이며, 1979년 5월에 봉헌된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조직이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이래, ‘여호와의 증인’들은 보다 큰 자유를 가지고 활동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순결한 숭배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한층 더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라디오’와 ‘텔레비젼’ ‘프로그램’들

‘이탈리아’에는 전국적인 방송망들 외에도 3,000개소 ‘라디오’ 방송국과 600개소 ‘텔레비젼’ 방송국이 있다고 보고되었다. 우리는 1976년에 “좋은 소식”을 보다 광범위하게 전파하기 위해 이들 민간 방송망들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의 ‘프로그램’들이 정기적으로 280개소 ‘라디오’ 방송국과 30개소 ‘텔레비젼’ 방송국에서 무료로 방송되고 있다. ‘텔레비젼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지부 사무실이 형제들에게 대담이나 회견을 위한 골자들을 제공하며, 순회 감독자들이 행한 강연에서 발췌한 ‘슬라이드’에 기초한, 삽화가 든 ‘프로그램’들을 제공하기까지 한다. 현재까지 우리는 거의 200가지의 ‘라디오 프로그램’과 50가지의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방송하였다.

접수된 보고들에 의하면, 이들 ‘프로그램’들이 대단히 성공적인 것 같다. 때때로 ‘사르데니아’의 ‘오리스타노’에서와 같이, 즉각적인 결과가 있는 경우도 있다. 그 곳에서는 15명이, ‘여호와의 증인’이 자기들의 집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우리의 ‘프로그램’을 듣고나서 ‘살레르노’ 도의 3개 도시에서 35여명이 우리와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 감독자는 이렇게 보고한다. “‘라구사’(‘시칠리아’) 도에서 호별 방문을 하고 있던 한 전도인은,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나는 목요일마다 여러분의 ‘프로그램’을 듣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조만간에 찾아올 줄을 믿고 있었읍니다’라고 말하는 한 남자를 만났다. 그는 성서 연구 제의를 받아들였다.”

물론, 항상 그러한 즉각적인 결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프로그램’ 덕분에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왕국 소식에 대해 보다 좋은 태도를 가지게 되었고, 또 전도인들이 방문할 때 집 주인들은 보다 주의깊게 귀를 기울인다.

「피」 소책자 배부 운동

‘이탈리아’에서는 1960년대에 수혈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에 의사들은 많은 환자들에게 수혈은 필요불가결한 치료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관련된 위험들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수혈을 하지 않고 기꺼이 수술을 해 주고자 하는 의사들을 찾기는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리고 전도인들은 수혈없이 기꺼이 수술을 해 주고자 하는 의사들을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찾아 다녀야 했다. 어떤 위급한 상태가 발생하면, 신문들은 우리를 대항하여 홍보 활동을 벌이는 기사들을 게재하였다. 그러한 환경에서 형제들은 일부 지역에서 나타내는 커다란 적의를 대처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1970년대 중반쯤 들어와서, 더 많은 의사들이 우리의 관점을 이해하기 시작함에 따라, 상황은 개선되고 있었다. 그러나 1977년 12월 이후로, 현저한 개선이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그 달에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과 피에 관한 문제」 소책자를 전하는 전국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그 소책자가 87,000명의 의사들, 48,000명의 법조인들과 행정관들 및 약 200,000명의 간호원들에게 배부되었다. 이 운동의 결과는 대단히 긍정적이었으며, 확실히 우리의 기대를 초월한 것이었다.

우선 우리가 확고하게 “피를 멀리 하”기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에 부당하게 쌓였던 모독이 많이 제거되었다. (사도 15:19, 20, 28, 29) 이제 형제들 자신이 그 문제의 근본적인 원칙들을 더욱 잘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의료 전문인들과 접촉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더우기, 이제 우리의 확신에 기꺼이 존경을 표명하는, 더 많은 의사들이 있게 되었다.

수혈에 관한 회의

이 소책자의 배부로 인해 생긴 관심 때문에, 전문가들이 그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많은 회의들을 소집하였다. 1978년 2월 21일에 ‘밀라노’의 유명한 “카를로 에르바” 협회에서 “수술과 수혈 및 여호와의 증인”이란 주제로 회의가 개최되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과학자인 ‘카를로 시르토리’ 교수가 사회한 그 회의에서는, 그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이해하는 여러 가지 표현들이 나왔다.

1979년 4월 21일에 또 하나의 회의가 ‘시에나’에 있는 ‘대학 법의학 기구’에 의해 개최되었다. “성인 ‘여호와의 증인’들의 수혈 거부와 법적 질서”란 그 회의의 주제가, 연사로 나온 법의학 기구의 회장이자 동 대학의 이전 총장인 ‘마우로 바르니’ 교수에 의해 소개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해결되어야 할 근본적인 문제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명백히 거절하는 데도 불구하고 수혈을 강행키로 결정하는 의사들의 행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윤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행동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며, 또 분명하게 거절한 것을 강행시키는 폭력적인 강제 행동에 관한 형법 제 610조에 해당되는 처사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79년 7월 7일 ‘아스콜리 피체노’ 도(중부 ‘이탈리아’)의 소도시 ‘리파트란소네’에서 한 지방 병원은 “수혈과 대용 치료”란 주제의 회의를 열었다. 주요 연사들 중 한 사람인 ‘체사레 부레스타’ 박사는 수혈없이 성공적으로 행해진 240건의 외과 수술 결과들에 대해 토의했다. 정기 간행물 「파나로마」지는 1979년 7월 23일자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수년 동안 그들은 병원들로부터 거절당해 왔으며, 의사들에게 외면을 당하고, 버림을 받아 왔으며, 기만당하고, 비난받아 왔다. ·⁠·⁠· 하지만 현재는, 새로운 대용 의술이 발달한 덕분에, ‘이탈리아’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조직된 소수 종교 집단들 중 하나인 ‘여호와의 증인’들까지도 ·⁠·⁠· 기나긴 악몽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 같다. ·⁠·⁠· ‘부레스타’ 박사에 따르면, 이들 [대용] 의술을 사용하면 모든 환자의 99‘퍼센트’는 수혈없이 수술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 연구의 결과는 상당한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여러 해 동안 환영받지 못하는 선전을 끈기있게 수행한 후에도, 수혈과 관련된 우리의 입장이 그토록 많이 이해될 것이라고는 결코 상상도 하지 않았었다.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증인과 피에 관한 문제」 소책자의 배부를 축복해 주셨기 때문에 여호와의 백성들은 감사하고 있다.

“승리의 믿음” 대회

“승리의 믿음” 대회에 엄청난 군중이 함께 모인 것은, 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지난 수년 동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였음을 보여 주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였다. 1978년에는 모든 형제들이 다 참석하기 위해, ‘밀라노’에서 한 대회, 그리고 ‘로마’에서 한 대회, 그래서 모두 두 대회를 개최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모두 111,320명이 참석하였다.

1981년에는 22개의 “천국 충성” 지역 대회에 132,200명이 참석하여 일련의 대회에서 최고 대회 참석자 수를 냈다.

큰 도움이 된 ‘파이오니아’들

여호와께서 우리의 노력과 그분의 이름을 위해 나타낸 우리의 사랑을 잊지 않으신다는 확실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더욱 온전히 섬기도록 격려해 주었다. (히브리 6:10) 1946년에는 이 나라 전체에서 ‘파이오니아’가 한 사람뿐이었다.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남에 따라, 이 고귀한 봉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수는 점차로 증가하였다. 1980년에는 특별 ‘파이오니아’가 500명 이상이나 되었다. 1981년 2월에는 정규 ‘파이오니아’가 2,142명의 신기록에 달했다. 1981년 5월에는 10,051명의 전도인들이 보조 ‘파이오니아’로서 왕국 전파 사업에 참여하였다.

가장 많은 수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시칠리아’ 섬과 ‘사르데니아’ 섬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는데, 그 결과 이 두 구역에서 탁월한 발전이 있었다. ‘시칠리아’에는 7개의 순회구와 125개의 회중이 있다. 보다 최근에 봉사가 시작된 ‘사르데니아’ 섬에는, 이 지역의 인구 밀도가 훨씬 희박한 편이지만, 3개의 순회구와 53개의 회중이 있다. ‘파이오니아’들이 수행하는 봉사 덕분에 전국에 있는 구역 가운데서 99‘퍼센트’가 임명되어 정기적으로 봉사되고 있다. 그 나머지 1‘퍼센트’는 가끔 봉사되고 있다.

위급할 때의 형제들

‘이탈리아’는 세계의 지진대들 중 하나를 따라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 나라를 강타하는 천재지변들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이 지진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1976년 5월에 그러한 한 지진이 ‘오스트리아’와 ‘유고슬라비아’ 국경 부근 ‘프리울리’ 지역의 대부분을 황폐시켰고, 거의 1,000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수천 채의 집을 파괴했다. 많은 ‘증인’들이 집을 잃기는 하였지만,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재난 직후에, 그 인근 지역에 있던 형제들은 그 지진 지역에서 도움이 가장 긴급하게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착수했다.

1980년 11월 23일 일요일 오후 7:34에 남부 ‘이탈리아’의 광범위한 지역을 강타한 지진은 훨씬 더 비참한 것이었다. 전국에서 진동을 느꼈다. ‘캄파니아’와 ‘바실리카타’ 지역에서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전체 도시들이 강타를 당해 붕괴되는 동안 수천명의 사상자가 생겼다고 한다. 그 지역에는 130개의 회중이 있었다. 그리고 지부 기록은 8,500여명의 전도인과 4,500여명의 관심자를 합쳐 모두 13,000여명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많은 걱정을 했다. 재난이 있은 다음 날 아침에 지부 사무실은 이미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사상자들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관심자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많은 사망자 수와 생존한 사람들이 당한 고통에 대한 소식을 듣고 슬프기도 하였지만, 우리 형제들이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크게 안심을 하게 되었다.

주위의 땅과 건물들이 흔들리는 그 위급한 상황에도, 지진이 일어난 지역에 있던 전도인들은 여호와께 믿음을 두었다. 그 후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혹독한 겨울을 직면했어도, 그들은 계속 그렇게 하였다. 지진이 발생했을 때 어떤 회중들은 집회를 보고 있었다. ‘에볼리’(‘살레르노’) 회중의 한 장로는 이렇게 기술한다.

“우리가 막 「파수대」 연구를 시작하였는데, 갑자기 왕국회관 바닥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고, 우리 머리 위의 천정과 주위 벽돌이 좌우로 흔들릴 때 삐걱거리는 불길한 소리가 났다. 몇초 동안 우리는 모두 망연자실하였으며, 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또 한 차례의 보다 심한 충격이 있었다. 우리는 4층 건물이 우리 위로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무시무시한 순간들은, 우리가 결코 잊지 못할 기나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연구 사회자로서 나는 참석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즉각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했겠는가? 우리는 왕국회관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다. 나는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인도해 달라고 여호와께 열심히 기도했다. 그 때 나는 몇년 전에 ‘프리울리’의 ‘제모나’ 형제들이 처했던 비슷한 상황이 생각났다. 나는 형제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 회관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요청하였다. 130명 중에 바깥으로 뛰어나가거나 공포의 기색을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나서, 바깥에서는 온 도시가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우리는 여호와께 신뢰하면서 「파수대」 연구를 계속하였다.

“우리는 그 집회를 충심에서 우러나는 감사의 기도로 끝냈다. 우리가 보호를 받은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았다. 우리가 히브리 10:24, 25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권고에 순종한 것을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그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구한 것이다! 우리는 즉시 인근 도시에 있는 우리 형제들과 접촉을 가졌다. 그 곳에서도 50명이 집회를 보고 있었다. 주위의 모든 건물들이 심하게 파손되었었지만, 그들도 안전하였으며 무사하였다. 시내에 있던 두개의 큰 교회는 일부가 파괴되었다.”

‘벨리지’(‘살레르노’) 회중의 한 감독자는 이렇게 회상한다. “집회가 끝난 지 5분 후에, 우리는 갑자기 공포의 상황에 빠졌다. 왕국회관에 참석한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 것 같았다. ‘여호와여,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형제들에게, ‘침착하십시오, 계단을 내려가지 마십시오! 우리는 모두 안전합니다’라고 소리쳤다.”

지진 지역에 있던 형제들은 기꺼이 서로 돕고자 하였다. 또 이 나라 전역에서, 그리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형제들이 아까와하지 않고 기꺼이 의복이며 돈이며 기타 물품들을 기부하였다. 도움이 가장 크게 필요한 곳에는 도움을 베풀기 위한 비상 구호소를 설치하였다. 식품과 천막과 담요와 의복을 가득 실은 협회 ‘트럭’들 중 첫 번째의 것이, 지진이 있은 다음 날 저녁에 그 지역에 도착하였다.

그 지역에 임명된 한 여행하는 감독자는, “형제들은 필요한 도움이 그토록 신속하게 도착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자매들이 요리한 음식을 형제들에게 매일 분배해 줄 주방을 즉시 만들었다. 그 도시의 다른 주민들은 아직도 원조를 기다리면서 스스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물론, 형제들은 이기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증인’이 아닌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우리가 양식을 ‘몬텔라’ 마을로 가지고 갔을 때, 형제들 근처에 살던 가족들에게 ‘파스타’, 쌀, 기름, 설탕, 빵, 우유를 나누어 주었고, 어린이들에게는 ‘비스킷’을 주었다.”

재난이 닥친 달에는 전국에서 전도인 수가 86,192명으로 최고 기록에 달했는데, 그것은 지진 지역에 있던 형제들이 주의 일에 탁월한 열심을 보임으로써 이 증가에 기여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다른 여러 나라에서 동료 숭배자들이 물질적인 도움을 베풀어 준 것에 대해선 물론이고, 그들의 기도 가운데서 잊지 않고 이들 형제들에게 베푼 사랑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바이다. 고난의 때에 우리에게 도움을 베푸시는 분은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모든 것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한다.—시 54:4.

‘벧엘’이 확장되다

1972년 봄에 새로운 ‘벧엘’이 봉헌될 때에, 단지 4년 후에 그것이 너무 협소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에 이 나라에는 참 하나님의 숭배자가 약 25,000명 있었다. 그러나 1976년에 전도인 수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인 60,000명으로 불어나, 그 건물은 우리 전도인들의 필요를 충족하기에는 이미 부적합하게 되고 말았다.

1975년과 1976년에는, 우리의 본래의 부동산에 접해 있던 두개의 부지를 매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지는 총 14‘헥타아르’가 되었다. 하지만, ‘로마’ 시의 도시 계획으로 인해 우리는 그 새로운 땅에 농장 건물 한 채밖에 지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계획을 수정해 달라는 신청서를 내었으며, 그 동안 우리는 ‘벧엘’ 가족을 위한 농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외양간과 헛간을 지을 허가를 신청하였다. 이 공사는 1978년에 시작되었고, 그 조그만 농장 건물은 1980년 봄에 완공되었다.

마침내, 1979년 10월에 새로운 ‘벧엘’ 집과 인쇄 시설을 갖춘 건물의 건축 허가를 취득하였다. 우리는 즉시 공사를 시작하였으며 1980년 10월에 인쇄부가 완성되었다. ‘로터리’식 인쇄기가 이미 설치되었으며 잡지부도 두었다. 반면에, 우리가 ‘벧엘’ 건물을 완성하기까지는 아직 할 일이 많이 있다. 건축 공사는 주로 형제들이 하였다. 이 나라에서 진행중인 확장에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이탈리아’ 전국에서 형제들이 와서 이 공사에 참여하는 것을 보는 것은 격려적이다. 그 건물이 완성되면, 70개의 방, 한개의 식당, 한개의 주방, 한개의 왕국회관 및 기타 필요한 시설들을 갖게 될 것이다.

현재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섬기기 위해 행복한 가족을 형성하고 있는, ‘벧엘’에 임명된 형제들은 98명이다. 그들 중 일부는, 가족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농장에서 일하며, 다른 일부는 발송부에 임명되어 서적이며 잡지며 기타 필요한 공급품들을 회중에 발송하는 일을 바쁘게 한다.

회중들에 서적을 공급하는 일

한때는 우편물 배달 지연과 파업 등으로 인해, 먼 거리에 있는 회중들은 발송품을 제 때에 받지 못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한 순회 감독자는 이렇게 회상한다. “‘시칠리아’에 있는 한 회중을 방문하는 중에, 나는 한 자매와 호별 방문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자매가 두달이나 지난 잡지를 전하고 있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 그 자매는 그 잡지가 회중에서 받은 최근호 잡지라고 대답하였다.”

이러한 지연을 고려해서, ‘협회’는 운송 목적으로 구입한 4대의 ‘트럭’으로 대부분을 배달한다. 이러한 ‘트럭’ 중 하나인, ‘트레일러’가 붙은 ‘트럭’은 34‘톤’을 실을 수 있으며 또한 ‘비스바덴’에 있는 독일 지부에서 보내는 서적을 받아 오는 데도 사용되고 있다. 회중이 주문한 것은 ‘이탈리아’ 반도 전역과 ‘시칠리아’ 섬과 ‘사르데니아’ 섬에 흩어져 있는 120개 이상의 보관소에 배달된다. 그 다음에 이들 보관소에서는 서적을 지방으로 재분배해 보낸다. 이러한 마련으로 회중들은 영적인 음식을 제 때에 공급받으며, 또 비용도 상당히 절감된다.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감사

이상이 ‘이탈리아’에서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에 대한 현대 역사이다. 이 기간에 성취된 일에 대해서 어떤 인간이 영예를 받을 수 없다. 일부 개인들의 이름이 언급되기는 하였지만,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덕분에, 한 백성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교직자들의 강렬한 박해를 어떻게 인내하였는지, 또 그들이 어떻게 번성해 왔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인 것이다.

사도 ‘바울’이 “무슨 신령한 은사를 [그들]에게 나눠 주”기 위해 ‘로마’에 있던 그리스도인 회중을 보고 싶어하는 그의 갈망을 성취한 지 1,920년 이상 지났다. (로마 1:11) 그 이래 있은 대 배교는 이 나라를 여러 세기 동안 깊은 영적 암흑 속에 가두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흩어져 있던 몇몇 개인들에게 처음으로 진리의 희미한 빛이 비치던, 금세기 초와 같은 때는, 이제 여호와의 백성이 충성스럽게 인내했던 그 끈질긴 종교적인 박해의 물결과 더불어 지나간 것이다.

현재의 상태는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하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 평균 왕국 전도인이 90여명이던 것과, 현재 ‘이탈리아’에 “좋은 소식”의 선포자들이 90,000명 이상이나 된다는 사실을 비교해 보라! 장래의 전망은 대단히 좋다. 1981년 5월에는 ‘이탈리아’에서 62,068건의 성서 연구로 최고 기록에 달했다. 그리고 1981년 ‘기념식’에 참석한 사람은 무려 187,165명이었다! 이 역사적인 도시 ‘로마’에는 지금 51개 회중이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수치들은, 하나님의 승인과 더불어 아직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더욱 찬양이 될 더 큰 증가가 있을 것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그분의 행복한 숭배자들은 현재의 번성하는 상태에 대해 오로지 그분에게만 기꺼이 영예를 돌린다. 그들이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참 그리스도교의 현대 역사의 여러 장들을 돌이켜 볼 때, 그들은 시편 필자 ‘다윗’이 감동을 받아 외친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이 그들의 감사를 나타낸다.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그 때에 저희의 노가 우리를 대하여 맹렬하여 무리를 산 채로 삼켰을 것이[라.] 우리를 저희 이에 주어 씹히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찌로다. 우리 혼[영혼, 신세]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2, 3, 6-8.

[각주]

^ 221항 세 가지 공문에서 인용한 인용문은 「경찰 당국이 취한 제압 조치 및 헌법으로 보장되는 특정 종교 활동의 자유」란 책에서 발췌한 것임. (‘조르조 페이로트’ 저, ‘주프레’ 발행)

[201면 그래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전도인 수의 증가

100,000

90,191

75,000

60,156

50,000

25,000

22,196

10,278

120 1,742 3,491 6,304

0 1946 1951 1956 1961 1966 1971 1976 1981

[202면 그래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회중 수의 증가

1600

1,357

1200

1,141

800

433

400

35 97 139 242 275

0 1946 1951 1956 1961 1966 1971 1976 1981

[203면 그래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기념식’ 참석자 수의 증가

200,000

187,165

150,000

130,348

100,000

53,590

50,000

200 2,897 5,790 12,113 19,682

0 1946 1951 1956 1961 1966 1971 1976 1981

[94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이탈리아

게모냐

손드리오

아오스타

바레세

코모

갈라라테

브레이샤

비첸챠

노바라

밀라노

토리노

피아첸챠

피네롤로

알렉산드리아

볼로냐

제노바

쿠네오

파엔차

피렌체

시에나

페루지아

테라모

포폴리

아베짜노

술모나

로마

폭지아

체리뇰라

비셰리에

몰페타

가에타

나폴리

아벨리노

바리

살레르노

시칠리아 섬

팔레르모

멧시나

칼타니쎄타

코르시카 섬

사르데니아 섬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지중해

[98면 삽화]

‘발코니’ 아래 1층에서 최초의 집회들을 보았던, ‘피네롤로’ 부근에 있던 ‘판니룰리’의 집

[105면 삽화]

그리스도인 중립을 위해 입장을 취한 최초의 ‘이탈리아’인 ‘증인’이며 ‘이탈리아’에서의 사업을 책임 맡았던 최초의 ‘이탈리아’인 형제이기도 한, ‘레미조 쿠미네티’

[112면 삽화]

‘콜포처’로서 ‘이탈리아’에서 열정적으로 봉사하기 위해 ‘스위스’에서 온 ‘이냐지오 프로티’와 그의 두 누이 ‘알비나’와 ‘아델레’

[114면 삽화]

1925년에 ‘이탈리아’에서 최초의 대회가 개최되었던 ‘피네롤로’의 ‘코로나 그로사 호텔’

[126면 삽화]

1903년과 1904년 사이에 자기 어머니가 ‘비첸챠’의 신문 판매대에서 몇부의 「파수대」를 사다 준 것을 보고 진리를 배우게 된 ‘마리아 피짜토’

[145면 삽화]

아직도 장로로 봉사하고 있으며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 그리스도인 중립의 가치를 직접 체험한 ‘알도 포르네로네’

[158면 삽화]

1947년에 ‘이탈리아’에서 최초의 대회가 ‘로제토 데리 아브루찌’에서 개최되었다. 형제들은 사유지인 도로에서 무화과 나무와 덩굴 아래 모였다

[171면 삽화]

교직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50년 10월 27-29일에 ‘이탈리아’에서의 최초의 지역 대회가 ‘밀라노’에서 커다란 천막들 속에서 개최되었다

[182면 삽화]

1955년에 ‘로마’에서 “승리의 왕국” 국제 대회가 개최된 곳인 ‘팔라쪼 데이 콘크레시’

[194, 195면 삽화]

지부 건물들. 왼쪽 상단: ‘로마’에 있는 1948년에 매입한 건물. 오른쪽 상단: 1972년에 완공된 지부 건물. 오른쪽 하단: 최근에 증축한 건물을 보여 주는 ‘벧엘’ 복합 건물의 옆모습

[204면 삽화]

1979년에 봉헌된 ‘토리노’ 대회 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