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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칠레’

‘칠레’

‘칠레’는 많은 대조를 이루는 나라이다! 이 나라는 남 ‘아메리카’ 대륙의 서해안을 따라 4,265‘킬로미터’나 뻗어 있어, 이 대륙의 태평양 해안선의 절반 이상이나 차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나라는 북쪽의 열대 사막으로부터 남쪽의 여러 협만들과 빙하들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변화가 다양하다. 이 지역의 서쪽에는, 광물질이 풍부한 험악한 산들, 완전 불모지인 사막들, 비옥한 계곡들, 수림들, 가물거리는 수많은 호수들과 섬들, 거세게 파도치는 대양에 갇혀 있는 빙하들이 있는가 하면, 동쪽에는 장엄한 ‘안데스’ 산맥이 위치하고 있다. ‘칠레’의 해발고는 해면으로부터 시작하여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에 우뚝 솟아 있는, 높이가 7,000여 ‘미터’에 달하는 서반구의 최고봉 ‘아콩카구아’ 산의 측면에까지 이른다.

‘칠레’의 북부는 지구상에서 가장 심한, 거의 완전 불모인 사막이다. 심지어 ‘아타카마’ 사막에는 20년 동안이나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곳이 여러 군데나 있다! 이 나라의 남부에는 연강우량이 250‘센티미터’가 넘는다.

주로 산지로 되어 있지만, 인구의 67‘퍼센트’가 살고 있는 중앙 지대가 있다. 이 곳은 세계의 공원지들 중 하나이다. 이 중앙 지대의 기후는 ‘캘리포오니아’의 기후와 비슷하며 사과, 배, 복숭아, 살구, ‘플럼’, 버찌, 포도, 무화과, ‘오렌지’, ‘레몬’ 등의 과목(果木)들이 잘 자란다.

남부는 호수 지역이다. 여기에는 ‘에스메랄다’ 호(湖)라고도 불리는 유명한 ‘라고 데 토도스 로스 산토스’가 있다. ‘디어도르 루우즈벨트’는 한 때 이 호수를 가리켜, “이 세상에서 내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호수”라고 했다. 이 호수는, 산봉우리 사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폭포수들이 산기슭에서 이 고요한 호수에 떨어질 때 ‘에메랄드’빛 호수에 물결이 인다.

‘칠레’는 본토 외에도 많은 섬들이 있다. ‘발파라이소’ 시 서방 587‘킬로미터’ 지점에는 ‘후안페르난데스’ 제도가 위치하고 있다. 이들 섬들 가운데는 유명한 ‘로빈슨 크루우소우’ 섬이 있다. ‘칠레’ 해안에서 3,20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이스터’ 섬이 있는데, 이 섬의 주민들은 ‘폴리네시아’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곳에는 고고학자들을 오랫동안 어리둥절하게 해 온 괴상한, 눈이 없는 석상(石像)들이 수백개나 있다.

‘칠레’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스페인’어이다. ‘칠레’인들은, 지난 100년 동안 독일과 영국, 그리고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주로 ‘스페인’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인구의 3분의 1 가량은, ‘스페인’인과 ‘인디언’족의 혼혈 조상을 가지고 있다. ‘칠레’란 국명은 ‘인디언’들이 이 지역을 가리켜 ‘칠리’(Chilli)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였는데, 이 말은 “땅이 끝나는 곳”이란 뜻이다. 한없이 펼쳐져 보이는 태평양을 바라보는 초기 원주민들에게, 이 지역은 정확히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좋은 소식”이 ‘칠레’에 이르다

‘칠레’에서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은 ‘리처드 트라우브’가 도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트라우브’ 형제는 ‘아르헨티나’, ‘브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진리를 배웠으며, 1925년에 그는 여호와께 헌신하였다. 그가 ‘아르헨티나’, ‘안데스’ 산맥 부근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을 때, 그의 마음 속에서는 ‘칠레’에서 전파 사업을 시작하려는 갈망이 자라고 있었다. 당시 ‘아르헨티나’ 지부 감독자였던 ‘후안 뮤니즈’ 형제는 좋은 생각인 것 같다고 동의하였다. ‘트라우브’ 형제는 ‘칠레’로 임명되었다.

그는 1930년 4월 30일 저녁에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물론, 그를 역에서 맞이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 날 밤을 그는 인근 여관에서 지냈다. 이튿날 그는 방을 하나 세냈다. ‘트라우브’ 형제는 사업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그가 받은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고자 하였지만, 그는 그 돈을 즉시 지급받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수표를 지불할 잔고가 있는지 그 은행이 추심해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가진 돈과 선물로 받은 식량이 다 떨어져, 자기 희생적인 우리의 이 ‘파이오니아’ 형제는 8일 동안을 먹지도 못하고 지냈던 것이다.

제공할 서적이 없었지만, 그는 1930년 5월 4일에 호별 방문 봉사를 시작했다. ‘트라우브’ 형제는 여호와께 온전한 확신을 두고서 그리고 진정한 선교 정신으로, 당시 이 나라에 살고 있던 4,000,000의 인구 가운데서 최초의 ‘증인’으로서 봉사를 시작한 것이다.

1925년에 국가와 종교를 분리시키는 새로운 헌법이 채택될 때까지는, ‘로마 가톨릭’교가 이 나라의 국교였다. 호별 방문 도중에 ‘트라우브’ 형제는 경찰의 검문을 받았지만, 그가 하는 사업의 성질을 설명하자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그는 참으로 숭배의 자유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트라우브’ 형제는 그 초창기에 가졌던 그의 느낌을 이렇게 기술하였다. “일요일마다 「파수대」 연구 시간이 되면 나는 ‘산 크리스토발’ 산으로 걸어가 나무 그늘 밑에서 연구와 기도에 열중하곤 하였다. 그렇다, 무척 외로왔기 때문에 나는 다른 형제에게 진리에 관해 말하고 싶은 욕망이 불타 올랐다. 하지만, 개인 연구를 하고 나면 강해지는 것을 느꼈고 또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렇게 하여 다음 주에 일할 준비가 되었다.”

관심자들이 발견되다

집집으로 증거하던 중, ‘트라우브’ 형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후안 플로레스’란 사람을 만났다. 그는 서적을 받았고 많은 질문을 했다. 그 때 그 사람은 ‘안식교’인들의 방문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트라우브’ 형제와의 토론을 잘 듣고난 후에, ‘플로레스’는 「하나님의 거문고」 책을 연구하기로 결정하였다.

‘트라우브’ 형제는 이렇게 말한다. “그 후 나는 ‘아파트’를 하나 세얻어 일요일마다 성서 공개 강연과 성서 연구에 사람들을 초대하기 시작하였다. 초대에 최초로 응했던 사람인 ‘후안 플로레스’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요? 그들은 언제 올 겁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나는 ‘앞으로 올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얼마 안 가서 그들은 오기 시작했다.

‘퀸타 노르말’이라고 불리우는 지역에서, ‘트라우브’ 형제는 서적을 받고서 자기가 속한 ‘복음 전도자 교회’에 와서 성서 강연을 해 달라고 초대하는 한 사람을 만났다. ‘후안 플로레스’는 ‘트라우브’ 형제와 함께 가서 그가 모인 사람들에게 왕국 소식을 전하는 것을 주의깊게 들었다. 그들은 또 와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복음 전도자 교회’ 전도자는, ‘트라우브’ 형제가 방문한 후에는 참석자 수가 늘어나고 연보 접시가 가득 채워졌기 때문에 기뻐했다. ‘트라우브’ 형제는 연보 접시를 사용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 교회에서 요한 10:12에 근거한 “삯군”에 대한 강연을 했다. 그 강연을 듣고 나서, 젊은 아가씨인 ‘콘수에로 갈베스’를 포함해서 그 교회에 다니던 대다수가 ‘트라우브’ 형제가 사회하는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서 그 ‘복음 전도자 교회’ 전도자는 혼자 남게 되었고 그 집단은 없어져 버렸다.

‘후안 플로레스’는 ‘트라우브’ 형제를 ‘콘콘’ 가에 있는 자기 집에 와서 살자고 초대하였으며 또 그 곳을 집회 장소로 사용하자고 하였다. (그 이래 그 집은 증축되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왕국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활동한 지 10개월이 좀 더 지났을 때, 이제 관심자들이 침례를 받을 때가 되었다. 그래서 ‘트라우브’ 형제는 ‘뮤니즈’ 형제에게 편지하여 그 역사적인 행사를 위해 올 수 있는지 문의하였다.

1931년 2월 13일, ‘칠레’에서 최초의 침례가 ‘여호와의 증인’들에 의해 거행되었으며 ‘뮤니즈’ 형제가 침례 연설을 하였다. 그 때 8명이 침례를 받았는데, 그들은 ‘후안 플로레스’와 그의 아내 ‘테레사’, 그의 어머니 ‘델피나 비야블랑카’, ‘후안 카스티요’, ‘페드로 오르티스’, ‘로베르토 로하스’, ‘마르가리타 산도발’ 및 또 다른 ‘플로레스’ 자매였다. ‘트라우브’ 형제에 따르면 이들 8명은 모두 계속 충실하였다고 한다. ‘비야블랑카’ 자매는 ‘파이오니아’가 되어, 사망할 때까지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했다. ‘후안 플로레스’는 ‘이야펠’에서 조그만 회중을 하나 조직하는 일을 도왔다. 하지만, 올 사람들은 더 있었다!

1931년 3월 29일에 5명이 더 침례를 받았다. 그들 중에는 ‘콘수에로 갈베스’가 끼여 있었는데, 그는 ‘트라우브’의 아내가 되어 사망시까지 그의 충실한 반려자가 되었다. 일년도 채 못 되어 13명이 침례를 받았다.

그 동안, 다른 새로운 사람들이 참 숭배를 위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산티아고’에서의 전도 사업은 그 기반이 확고히 잡혀 가고 있었다. 그러나 먼 곳에 진리의 씨를 뿌리는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또 다른 열정적인 ‘파이오니아’가 도착하다

‘칠레’에 온 초기 ‘파이오니아’들 중 하나는 ‘케이드 파암’이었다. 그는 위와 같은 질문에 대답하는 데 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가 ‘칠레’에서 열정적으로 봉사를 수행한 이야기를 좀 들어 보도록 하자. ‘파암’ 자매는 이렇게 기술한다.

“1934년 11월 ‘힐마 스조베르그’는 미합중국에서 ‘콜롬비아’까지 배편으로 갈 수 있는 여비를 ‘왙취타워 협회’ 본부에 보냈다. ‘협회’는 내가 남미에 가서 ‘스조베르그’ 자매를 돕고자 하는지 문의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마련이 아닌가! 그렇게 하여 나는 12월에 ‘콜롬비아’의 ‘부에나벤투라’에 도착하였다. ‘스조베르그’ 자매는 ‘에쿠아도르’에서 그곳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보고타’로 가서 약 1년 동안 머물면서 여러 상자의 서적을 전했다. 그 후 ‘스조베르그’ 자매는 ‘텍사스’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나에게 ‘콜롬비아’에 혼자 남아 있지 말고 ‘칠레’에서 전도 사업을 시작한 한 형제에게 편지를 해 보라고 제안해 주었다.

“‘트라우브’ 형제 집은 ‘파이오니아’를 위해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칠레’로 오라는 초대장이 도착하였다. 봉사 구역은 이 나라 전역이었다! 어떻게 그 곳에 갈 수 있었겠는가? 최선의 방법은 배편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에나벤투라’로 돌아갔다. 항만 책임자는 ‘칠레’의 배가 곧 도착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문이 열렸다.

“‘예, 우리가 태워다 드리겠읍니다’ 하고 그 화물 책임자는 말했다. ‘당신이 가진 전부인 그 돈(15‘달러’)은 받지 않겠읍니다! 그 대신 거기 가지고 있는 책이나 몇 권 주세요. 해변으로 가서 짐을 가져 오시죠. 선실까지 제가 안내해 드리겠읍니다.’ 승무원들과 몇몇의 손님들에게 많은 증거를 하면서 17일 동안 멋진 항해를 한 후에 우리는 ‘칠레’에 도착하였다. ‘트라우브’ 형제가 ‘발파라이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가 1936년 2월이었다.”

‘산티아고’에서 ‘파암’ 자매는, 특히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들의 풍경과 거리 전체에 일본산 벚꽃이 분홍색으로 만발해 있는 것을 구경하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가 아닌가! 하지만, 그는 이야기를 이렇게 계속한다.

“‘트라우브’ 형제가 나에게 준 첫 번째 구역은, ‘산티아고’의 중심지였다. 이 곳은 정부 관저 및 청사, 사무실과 사업체들이 있는 곳이었다. 나는 이 구역에서 책을 많이 전했다. 때때로 당시 ‘왙취 타워 협회’가 출판한 모든 책을 한꺼번에 다 전하였다. 정부 관저에서는, 업무를 방해하면 안 되는 통신실 한 군데만을 제외하고는 사무실을 차례대로 방문하는 것을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마지막 층에는 정부 관저 도서관이 있었다. 그 도서관 직원은 책들을 즉시 알아 보고서는 자기가 이미 받았던 책들의 이름을 모두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시에 가장 새로 나온 것이었던, 「입증」 책(제 1권)을 영어와 ‘스페인’어로 전했다. 그는 그러한 책들을 받게 되어 대단히 기뻐했다. 심지어 한 사람은 정부에 관한 한, 나와 입장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신권 정부를 위해 일하는 것이 훨씬 더 우월한 가치가 있음을 그가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1936년에 상가 지역에서 봉사하면서, 나는 독일인의 이름을 가진 한 보석상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독일어로 증거하였고 「입증」 책을 보여주었다. 그 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보자, 그는 얼굴색이 창백해지면서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권총을 빼어 나를 쏠 것만 같았다. 나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주먹을 휘두르다가 진열장을 너무 세게 쳐서 유리가 깨어졌고 그는 손을 다쳤다! 그 때 나는 가방을 닫고 당장 떠났다. 거리에서 떨다가, 나는 옆집 독일인 그림 가게에 들어갔다. 그 가게 사람들은 ‘아니오, 그 사람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린 그가 열광적인 ‘나찌’ 당원이란 것을 알 뿐입니다’ 하고 말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진가가 나타난 휴대용 축음기

‘파암’ 자매에 따르면,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트라우브’ 형제는 짤막한 성서 강연들이 녹음되어 있는 매분 78회전하는 음반들과, ‘협회’의 휴대용 축음기를 하나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되어 참으로 기뻐했다! ‘파암’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심지어 그는 축음기를 복제해 내어 적지 않은 ‘칠레’의 형제들이 ‘칠레’제 자기 축음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나를 ‘칠레’로 태워다 주었던 그 배의 2등 항해사가 ‘뉴우요오크’ 방문 중에 ‘왙취 타워’ 본부에 들렀다. ‘아담스’ 가 117번지에서 그는 ‘프레드 피이치’ 형제와 ‘해리 피노크’ 형제를 만났다. 그들은 더 많은 음반과 보다 새로운 내용이 담긴 것과 함께 최신 수직형 축음기를 나에게 보내 주었다. 이것은 문전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것을 여태껏 아무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은 크게 주의를 이끌었다! 또한 한 시간짜리 녹음 연설이 ‘산티아고’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되었다. 수년 내에 그 연설들은 지방 주요 도시에 있는 거의 모든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되었다.”

북부 지방에서 진리의 씨를 뿌림

‘트라우브’ 형제는 ‘파암’ 자매가 이 나라의 북쪽 지방에서 진리의 씨를 뿌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자매는 이렇게 보고한다. “그는 내가 ‘아리카’ 최북단 지방과 비옥한 ‘아사파’ 계곡 위쪽에서 봉사를 시작하도록 임명하였다. 그래서 나는 공공 도서관, 학교 도서관, 조합 강당에다 무지개 색깔의 그 아름다운 책 전질을 배치하고자, 각 도시에서 호별 방문을 하였고, 항상 노력하였으며, 보통 그렇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크고 작은 모든 광산 ‘캠프’, 모든 질산염 채굴 ‘캠프’, 모든 회사 지역뿐 아니라 구리 및 철광을 채굴하는 큰 지역에서 호별 방문 증거를 하였다. 각 새로운 주소에 여러 상자의 서적을 미리 발송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거의 모든 증거 활동을 걸어 다니면서 하였다. 당나귀에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안장 부대를 하나 구해서, 한쪽에는 30권 가량의 책을 채우고 다른 한쪽에는 150내지 200부의 소책자를 채우곤 하였다. 그런 다음 나는 방문할 때마다 어깨에 그것을 메고, 사용할 서적을 가득 넣은 또 다른 손 가방을 가지고 다니곤 하였다. 보통 체류하는 곳에서 매일 밤 숙박할 곳을 구했기 때문에, 또한 담요며 치솔 등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있었다.

“‘코피아포’에서 나는 ‘안데스’ 산맥 비탈의 높은 곳에 있는 한 유황 광산을 발견하였다. 이 곳에는 30내지 40명의 노동자들과 관리자 및 그의 보조자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여자의 방문을 받고 놀랐다. 내가 어떻게 하여 거기에 도착했겠는가? 나는 그 광산으로 자동차를 몰고 가는 한 남자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는 기꺼이 나를 태워다 주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예, 저기 있는 두 부인 중 한 사람이 아가씨에게 숙소를 제공하도록 해 드리겠읍니다.’

“그 광산에 있는 모두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는 돈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급료는 모두 휴가 때 읍내에 있는 사무소에 가서 지급받습니다.’ 그래서 관리자는 모두에게 원하는 서적을 받고 목록에 금액을 쓰고 서명을 하게 해 주었다. 나는 가진 서적을 전부 전했으며 더 많은 주문을 받았다. 나는 그것을 읍내에 있는 사무소에 갖다 주었다. 노동자들은 모두 출판물을 열심히 읽으려고 하는 것 같았으며 ‘좋은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하였다.”

‘쿠바’에서 봉사하고 있던 ‘베타 아보트’란 자매가 1939년에 ‘칠레’에 올 것이라는 소식을 보냈다. ‘아보트’ 자매는 ‘산티아고’ 바로 남쪽 높은 곳에 있는 “엘 테니엔테” 구리 광산에서 일하는 미국인들에게 증거하도록 임명되었다. 고도가 너무 높은 탓으로, 그는 잠간 동안만 그 곳에서 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산맥 기슭에 자리잡은 ‘랑카구아’ 읍은 훌륭했다.

그 곳 ‘랑카구아’에 있던 ‘루시라 레예스’ 자매는 그에게 자기 여관에서 숙박하도록 마련해 주었다. 그는 수년간을 거기서 머물렀다. ‘레예스’ 자매와 그의 남편은 몇해 전에 ‘트라우브’ 형제가 그들에게 “좋은 소식”을 설명해 주었을 때 진리를 발견하였다. 그 일이 있기 전에는 ‘복음 전도자 교회’ 교역자가 ‘레예스’ 가족을 종종 방문하곤 하였다. 그 교역자는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한다면 ‘호텔’에 있는 포도주를 모두 없애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상당히 좋은 사업이었다.) 그리하여, 가엾은 ‘레예스’ 씨는 ‘취코스’(10‘리터’짜리 통)에 담긴 포도주를 모두 하수구에 쏟아 버렸던 것이다! 그럴 때 ‘트라우브’ 형제가 와서 성서 진리를 설명해 주게 되었다. ‘레예스’는 이렇게 말했다. “뭐라고요! 포도주가 금지돼 있지 않다고요?” ‘트라우브’ 형제가 그들 자신의 성서로 그것을 설명해 주었을 때, 그 말이 그의 귀에는 마치 음악같이 들렸다. ‘레예스’ 집과 여관은 모든 ‘증인’들에게 항상 개방되어 있었다.

1949년에 우리는 ‘랑카구아’에서 전국 대회를 가졌고, 그 때에 지금은 미망인이 된 ‘레예스’ 자매는 가능한 많은 대회 대표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자기 여관을 비워 주었다. “샌드위치 행렬”(주요 강연을 광고하는 커다란 ‘플래카아드’를 몸 앞뒤에 붙인 형제들의 행렬)이 ‘랑카구아’ 중심부에서 있었다. 문교부가 우리의 대회를 위해 사용하도록 허가를 내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형제들이 학교 강당을 사용하는 것을 학교장이 거절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 항소 법원 판사인, ‘다니엘 곤살레스’ 씨가 그 이야기를 듣고, 그 교장을 만나기 위해 여행하여, 몇 주일 전에 그 학교 강당에서 ‘가톨릭’교인들이 모임을 갖는 것을 허락한 이유는 무엇인지 질문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대하자, 그는 이제 더 이상 거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훌륭한 대회가 ‘랑카구아’에서 개최되었다.

여러 해 후에 ‘아보트’ 자매는 ‘산티아고’로 이사했다. 그는 항상 훌륭한 재봉 솜씨로 생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대사관 부인들이며 다른 유명 직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일거리를 얻기가 쉬웠다. 이로 인해 그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증거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는 이것은 틀림없이 여호와의 손에서 온 도움이라고 종종 말했다. 왜냐하면, ‘증인’들이 그들의 우아한 집들을 방문하면, 가정부들이 집 주인과 이야기하지 못하게 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수년 동안 충실한 봉사를 한 후에, ‘아보트’ 자매는 1975년에 향년 93세로 사망했다.

남부 지역을 돌봄

‘칠레’의 최남단도(道)인 ‘마가야네스’는 여름에 봉사하기가 가장 좋았기 때문에, ‘트라우브’ 형제는 ‘파암’ 자매가 배편으로 ‘푼타 아레나스’로 가게 했다. 그가 사용하도록 서적 10상자를 그 곳으로 보냈다.

‘파암’ 자매는 이제 자신이 건조한 북쪽 지방과는 대조를 이루는, 푸른 초목, ‘보우트’들, 범선들, 기정들, 소형 증기선들, 섬들과 더 많은 도서들 가운데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참으로 즐거움을 주는 경치가 아닌가! 여러 날 동안 협만과 빙하 지역을 여행한 후, 마침내 ‘마젤란’ 해협에 있는 ‘푼타 아레나스’ 읍에 도착하였다. ‘파암’ 자매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칠레’의 모든 도시들 가운데서도, 나는 항상 그 곳을 가장 좋아했다. 거기에는 파리, 벼룩, 빈대와 거지가 없다. 내가 방문한 어느 곳에서보다 더 깊이 잘 수 있으며 더 상쾌하게 깨어나는 곳이었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증거하는 데는 ‘스페인’어판 외의 다른 언어로 된 서적들도 필요하였다. ‘유고슬라비아’계 후손들이 많으며, 영국인들이 관리하는 많은 ‘에스탄샤’(양을 치는 큰 목장)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에스탄샤’들은 250,000‘에이커’의 면적에 80,000마리의 양을 기를 수 있다. 아름다운 호숫가에 이르기까지 드리워진 빙하로 덮인 웅장한 산들을 배경으로, 목동들이 잘 훈련된 개들을 데리고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을 보는 것은 오늘날까지도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이 외딴 지역인 ‘푼타 아레나스’와 ‘푸에르토 나타레스’에 사는 사람들은 우정적이고 환대를 베푸는 것으로 이름나 있다. ‘에스탄샤’ 목장에 도착하면, 약간의 빵과 함께 한 주전자의 ‘코오피’나 ‘마테’차(풀잎 음료)가 준비되어 있는 커다란 주방으로 즉시 초대한다. 식사 때에는 항상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는 ‘코르데로 아사도’(구운 양고기)를 준다. 많은 관심을 발견했으며 또 전파 사업에 대한 반응도 좋았다.

‘푼타 아레나스’로부터 ‘티에라 델 푸에고’—불의 땅—까지 여행할 수 있는데, 이 이름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1520년에 자기 이름을 따서 부른 해협을 통과하면서 이 섬에 붙여 준 것이다. ‘파암’ 자매는 이 섬의 소도시 ‘포르베니르’에 도착하였으며 지구상의 이 곳 먼 지역에서도 진리의 씨를 뿌리는 특권을 즐겼다. 어느 친절한 ‘에스토니아’인 가족이 수주일 동안 숙박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그는 그 지역의 모든 ‘에스탄샤’들을 다 방문할 수 있었다.

다시 북쪽 지방으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증기선을 타고 북쪽으로 가야할 때가 되었다. 돌아가는 길에 ‘파암’ 자매는 ‘칠로에’ 섬에 들렀다. 그는 이렇게 기술한다. “그 섬의 보다 작은 항구들에 갔을 때 나는 친절한 사람들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항상 주의깊게 들었으며 질문을 많이 하였고, 또 연옥이며 지옥불 교리에 대해 그렇게 오랫동안 속아 온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가 의아해 하였다. 그들은 거의 항상 얼마의 서적을 받았다.

“어느 조그만 항구 부근에서 한 사제가 내가 하는 일을 몰래 알아냈다. 그래서 내가 주의깊게 살피지 않았을 때, 그의 하수인 하나가 책이 가득 든 나의 안장 부대와, 손으로 짠 밝은 색깔의 ‘볼리비아’산 담요를 훔쳐 가버렸다. 그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을 때,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손 가방에 든 서적을 가지고 그날 봉사를 계속하는데, 어떤 남자가 길을 따라왔다. 그는 이미 내가 도난당한 소식을 듣고서 자기와 그의 부인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으로 가시죠. 제 아내가 댁에게 새로운 담요를 하나 줄 것입니다. (물론, 손으로 짠 것이었다.) 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지내도록 하세요.’ 그래서 나는 그를 따라갔다. 그 담요는 훨씬 좋은 것으로 크기도 더 큰 ‘폰초’였다. 나는 그것을 즉시 샀다. 그렇게 한 것은 대단히 이치적이었다. 나는 그 날 밤을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많은 성서 질문들에 대답해 주었다.” (‘파암’ 자매는 35년 이상이나 사용한 그 ‘칠로에’산 ‘폰초’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파암’ 자매는 ‘트라우브’ 형제의 지시대로 북쪽으로 가는 도중, ‘오소르노’를 방문하였다. 이 도(道)의 지사는 그를 기꺼이 영접해 주었다. 그는 자기가 즐겨 읽고 있던 「정부」 책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는 또 ‘오소르노’에서는 아무도 우리의 봉사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였으며 그의 약속은 참되었다.

‘발디비아’ 도(道)로 갔다. 여기서 ‘파암’ 자매는 ‘코랄’ 항구로 갔다. 그는 이렇게 기술한다. “나는 ‘사실을 보라’라는 한 시간 강연을 할 한 조합 강당을 발견하였으며, 강당은 내가 초대한 사람들로 가득찼다. 심지어 그 강당을 장식하려고 양치 식물 잎사귀와 함께 그 나라의 아름다운 국화(國花), ‘코피웨’ 꽃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강당 안에 풍기는 퀴퀴한 담배 연기 냄새를 없애기 위해, 나는 ‘유칼리’ 나무 잎사귀를 좀 구해 태웠다. 그것이 공기를 향기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한 젊은 소녀는 우리의 장식을 내려다 보기 위해 청중석에 올라와서는 ‘으흠, 꼭 ‘애트킨슨’ 향수 냄새 같아요’라고 말했다. (‘칠레’에 있는 유명한 영국산 향수임)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강연이 끝난 후 참석한 사람들은 소책자와 잡지들을 받아 갔으며 언제 그러한 좋은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는지 물었다.”

또 다른 열정적인 ‘파이오니아’

‘칠레’ 땅에서 종횡으로 진리의 씨를 뿌린 이야기는 미국에서 이곳에 온 또 다른 열정적인 ‘파이오니아’ ‘디어도르 라구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는 부족할 것이다. ‘라구나’ 형제는 1935년 ‘워싱턴 D. C.’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하여, ‘러더포오드’ 형제가 주의 백성들에게 왕국의 좋은 소식을 가지고 남 ‘아메리카’로 가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고려해 보도록 권고하는 격려적인 연설을 들었다. ‘라구나’ 형제는 열심으로 불탔으며 이사할 계획을 세웠다. 1936년에 ‘칠레’에 도착한 후, 그는 ‘콘셉시온’ 시에서 전파 사업을 시작했다. 여러 해 동안 ‘파이오니아’ 봉사를 한 후, ‘라구나’ 형제는 결혼하여 ‘치얀’ 시에서 가족을 부양하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그는 회중이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왔다.

이들 자기 희생적인 ‘파이오니아’들은, ‘왙취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의 졸업생들이 도착하기 전에, 당시 초기 전파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아리카’로부터 ‘푼타 아레나스’, 심지어 ‘티에라 델 푸에고’에 이르기까지 많은 진리의 씨가 뿌려졌다. 더 많은 “좋은 소식”의 전파자들이 부가적인 진리의 물을 가지고 그들에게 도착할 때까지 동면 상태에 있었지만 그러한 뿌려진 씨는 심어졌고 꽃이 피고 자라서 여호와께 찬양이 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초의 왕국회관—최초의 대회

1944년에 ‘칠레’에서 최초의 왕국회관 건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한 자매가 ‘산티아고’에 있는 자기 땅을 기증하였고 형제들은 벽돌이며 ‘모르타르’를 가지고 가서 공사를 했다. 이 공사는 ‘칠레’에서의 최초의 대회 개최 시기에 알맞게 그 해 8월에 완공되었다.

공개 강연 제목은 “평화—그것은 지속될 수 있는가?”였고 250명이 참석하였다. 4개의 ‘라디오’ 방송국이 그 강연을 방송했고, 그 중 두 방송국에서는 그 해의 남은 기간에도 ‘협회’의 ‘프로그램’들을 계속 방송해 주었다.

선교인들과 지부 사무실

‘길르앗’에서 훈련을 받은 최초의 선교인들이 1945년에 ‘칠레’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조셉 페라리’ 형제와 ‘알버어트 만’ 형제였다. 당시 ‘칠레’에는 전도인이 65명밖에 없었다.

‘협회’는 당시 ‘왙취 타워’ 협회장이었던 ‘N. H. 노워’ 형제와 부협회장이었던 ‘F. W. 프랜즈’ 형제의 첫 방문이 포함될 대회 준비를 하였다. 1945년 3월 25일에 “한 세계, 한 정부”란 공개 강연이 340명의 청중에게 행해졌다. 이 대회에서 5명이 침례를 받았다.

그의 방문 중에 ‘노워’ 형제는 ‘조셉 페라리’ 형제를 지부 감독자로 하여 지부를 설립할 마련을 하였다. 이 때까지 사업은 ‘아르헨티나’ 지부의 지도를 받아 왔었다.

게다가, ‘파암’ 자매는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는 것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그는 “‘노워’ 형제, 노력해 보겠읍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하여 ‘파암’ 자매는 ‘칠레’에서 최초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그같이 여러 해 동안 왕국 소식을 가지고 이곳저곳으로 계속 옮겨 다닌 후에, 그는 ‘산티아고’에 정착하여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책이 ‘스페인’어로 번역되었고 성서 연구 사업에 도움이 되는 질문 소책자가 딸려 있었다.

성서 연구 사업

그 후 얼마 안 되어 한 자매가 자기가 가정 성서 연구를 시작하고자 하는 데 같이 가자고 ‘파암’ 자매를 초대하였다. ‘파암’ 자매는 “나는 정말로 떨렸다!”고 회상한다. 상상할 수 있겠는가! 도지사들과 다른 요직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였었지만, 이제 그는 관심자 한 사람과 성서 연구를 사회할 것을 생각하고 떨게 된 것이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방문하여 그 가족에게 그 책을 전했으며 성서 연구를 마련하였다. 그 이후로, 자녀들도 젊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연구 준비를 잘 해 두었다. 다만 아버지만이 연구에 함께 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렇게 하여 나와 성서 연구를 했던 최초의 사람이 진리에 들어왔으며, 자녀들도 자라서 여호와께 헌신하였다.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자 나는 한 사람이 돌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연구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연구를 사회하는 데에 우리의 시간 중에서 절반만 바치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성서 연구가 다른 어떤 증거보다도 더욱 즐거웠다.” 그렇다, 두려움이 즐거움으로 변하였고, 성서 연구는 여호와의 전진하는 조직과 더불어 발전하고 있었다!

많은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1945년 말에, 또 10명의 선교인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루이스 스터브스’와 ‘프랜시스 스터브스’, ‘스텔라 버어튼’, ‘스테판니 페인’, ‘엘자 서튼’, ‘존 백스터’와 ‘루이스 백스터’, ‘클레라 기자’, ‘리디아 월더’ 그리고 ‘롤라 번테인’이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언어며 풍습이며 사람들의 습관들이 생소하였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사람들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새로 온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를 배우는 것을 참을성있고 친절하게 도와 주고자 했다.

이 선교인 집단은 ‘산티아고’, ‘론’ 가 3004번지에 최초의 선교인 집을 설립하는 특권을 가졌다. 이 집의 일부를 또한 지부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원래의 회중이 도시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에 식당과 거실 부분을 합치고 새로운 회중을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하여 1946년에 인구 1,500,000의 대도시 ‘산티아고’에 두번째 회중이 생겼다.

최초의 순회 감독자

1946년 7월에, ‘칠레’에 온 최초의 두 선교인 중 한 사람인 ‘알버어트 만’ 형제가 이 나라에서 최초의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치얀’, ‘콘셉시온’, ‘랑카구아’, ‘멜리피야’, ‘이야펠’, ‘산티아고’ 등지에 9개 회중이 있었고 총 전도인은 93명이었다. ‘만’ 형제의 믿음과 헌신의 본은, 진리 안에 있는 많은 젊은 사람들과 연로한 사람들에게 훌륭한 자극제가 되어 왔다.

그가 순회 감독자로서 순회를 시작했을 때, 작은 회중들에는 숙박할 방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숙박업소에서 잠을 자는 것을 의미했다. 때때로 ‘바아’ 또는 유흥장에서 밤새도록 소란을 피우곤 하였기 때문에 잠들려고 애쓰는 경우가 있었다. 각 회중에서 두 주일을 보냈으며, 형제들에게 조직에 대해 가르치고 또 주로 “좋은 소식”의 전도인들로서 야외 봉사를 하도록 훈련시키는 일을 하였다.

‘발파라이소’에서의 선교 사업

1946년 11월에 9명의 새로운 선교인이 도착했다. ‘발파라이소’ 항구 도시에 선교인 집이 하나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넓게 툭 트인 하나의 만을 둘러싸고 초생달같이 이어져 있는, 41개 언덕 위에 세워진 ‘칠레’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에서 증거 사업이 시작되었다. 다른 언덕들에 설치된 16개의 ‘케이블 카아’가 도움이 되었지만,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언덕을 오르는 것은 힘드는 일이었다.

‘발파라이소’에서 반응을 보인 최초의 사람들 중 한 사람은 ‘아이다 구스만’이었다. 그는 1948년에 선교인 집의 거실에서 열렸던 집회들에 참석했다. 그는, 의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긴 의자를 만들기 위해 방 주위에 서적이 가득 들은 상자들을 놓고 상자 위에 나무 판자들을 가로질러 놓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 동안 선교인들은 분주했다. 나중에 ‘홀리스 스미스’와 결혼한 ‘엘자 서튼’ 자매는 성서 연구를 갈망하는 한 청년을 발견하였다. ‘알베르토 무뇨즈’란 이 청년은 그의 어머니의 반대를 받았다. 그래서 연구를 한 공원에서 계속하였다. 그는 배운 것 모두를 두 여동생과 이웃 사람 ‘세르지오 곤살레스’에게 전했다. 이번에는 소녀들이 모든 것을 그들의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그 두 소녀의 사랑의 끈기로 인해 그들의 어머니는 결국 가족 성서 연구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과 두 소녀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고 나중에 그 두 소녀, ‘그래시에라 무뇨즈’와 ‘엘레나 무뇨즈’는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 이웃 사람 ‘세르지오 곤살레스’도 진리를 받아들였고, ‘칠레’에서의 초기 특별 ‘파이오니아’들 중 하나가 되었다.

‘발파라이소’에서 선교인들이 시작한 봉사는 수년이 지나는 동안 확실히 번창해 왔으며 지금 그 곳에는 9개의 회중이 있다.

수도에서의 계속된 확장

1946년에 네명의 선교인들이 ‘산티아고’에 임명되었다. 그들은 ‘래리 레잉’과 ‘마아가렛 레잉’, ‘도로디아 스미스’ 그리고 ‘도라워어드’였다. 새로운 모든 선교인의 경우처럼 이들에게도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과 관련하여 우스운 일들이 발생하였다. 이를테면, 어느 날 한 선교인은 ‘풀파’(pulpa) 즉 고기를 한 ‘파운드’ 사기 위해 정육점에 갔다. 그 선교인이 한 ‘파운드’의 ‘풀포’(pulpo) 즉 낙지를 달라고 하는 바람에, 가게에 있던 정육점 주인과 다른 사람들이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1948년에 11살짜리 한 소녀가 진리를 받았다. 이 어린 소녀 ‘글라디스 라미레스’는 임시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하였으며 선교인들에게 훈련을 받는 것을 즐겼다. 그는 자기도 선교인이 될 수 있는 날을 꿈꾸면서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10여년이 지난 뒤 그가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도록 초청을 받았을 때 그의 열망을 성취할 수 있었으며, 1958년에 졸업했다. 그는 ‘발파라이소’ 시에서 정규 ‘파이오니아’로서 아직도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

우리의 사랑하는 ‘파암’ 자매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산티아고’ 북부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다. 형제들의 수고로 말미암아, 1948년에 세번째 회중이 ‘산티아고’에 생겼다. 한 형제는 자기 차고를 제공했다. 그 차고를 수리하고 칠하여 집회 장소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 ‘인데펜덴샤’ 회중은 커져서 여러 차례 분회되었다. 사실상, 지금 ‘산티아고’ 시의 그 지역에는 12개 회중이 있고 이 도시 전체에는 79개 회중이 있다. 이 회중이 형성되자 ‘파암’ 자매는 본래의 ‘퀸타노르말’ 회중과 함께 일하기 위해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분명히 나타나듯이, 새로운 지역에서 봉사를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

“월요일마다 나는 시외로 나가기 위해 하루를 할애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아니다.) 그 이유는 시골에 가서 증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 그리고는 ‘산티아고’ 주변에 있는 작은 과수원이나 채소 농장에서 봉사한 다음, 저녁 늦게 돌아왔다. 화요일에는 다시 시내 구역에서 봉사와 연구를 시작하였다. 월요일에는, 내가 가지고 갈 수 있는 만큼의 잡지와, 또한 서책이며 소책자를 다 전할 수 있었다. 나는 대개 봉사 가방과 또 하나의 시장 가방에 과일이며 채소를 가득 채워 돌아올 수 있었다.

“이따금씩 나는 닭을 가지고 왔으며, ‘트라우브’ 자매는 자기 닭장에 닭이 늘어나는 것을 항상 기뻐하였다. 한번은 내가 새끼 돼지를 한 마리 가지고 왔는데, 그 때 그는 정말로 기뻐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1953년 ‘뉴우요오크’ 국제 대회가 발표되었고 ‘트라우브’ 형제가 그 대회에 참석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돼지를 키워서 살찌게 하여 팔면 여비에 보탬이 될 것이었다. ‘트라우브’ 자매는 키워서 팔기 위해 암병아리도 사 왔다.

“몇 주일 후 어느 날 아침 ‘트라우브’ 자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의 방으로 왔다. 이제는 무슨 일이었겠는가? 다 자란 구이용 닭들이 여러 마리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전염병이었다! 그후 이삼일 동안 아침마다 나에게 와서 밤새 몇 마리가 죽었는지 말했다. ‘뉴우요오크’에 가야 할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새로운 암병아리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은 가망이 없었다. 그렇게 되었으니 우리는 이제 ‘칠레’에서 가장 오래된 우리의 형제가 대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트라우브’ 자매는 나에게 ‘‘노워’ 형제에게 편지하여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해 보시지 않겠읍니까?’ 하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그 결과 지부 사무실은 ‘트라우브’ 형제를 불러서 얼마나 부족한지 물어보았다. 여호와께서 그 여행을 가능케 해 주셨다. 그가 ‘칠레’에 돌아와서 여행에 대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되어 얼마나 기뻤겠는가!”

판사가 진리를 배우다

그 동안 사업은 성장하고 있었으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왕국 소식이 이르고 있었다. 이 나라에 온 지 단지 몇 개월밖에 안 되었던 선교인 ‘존 백스터’는 1946년에 ‘산티아고’ 항소 법원장 ‘다니엘 곤살레스’와 접촉하게 되었다. 연구가 시작되었고, 이 사람은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대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칠레’대 법대와 다른 학교의 서로 다른 장소들을 확보하는 데 대단히 도움이 되었다.

1953년에 ‘곤살레스’ 판사는 뇌출혈을 일으켜 수주일 동안 많은 시간을 무의식 상태에서 지냈다. 그는 자기 아내에게, 어떤 사제도 자기를 만나게 해서는 안 되며, 단지 ‘여호와의 증인’들만 환영하라고 엄격한 지시를 하였다. ‘칠레’의 유력한 추기경 ‘호세 마리아 카로 로드리구에스’마저도 그를 만날 기회를 거절당했다. 그가 사망하자 그의 부인은 ‘증인’ 한 사람이 장례식 연설을 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대법원장과 법무부 장관, 각료들, 여러 국회 의원들을 포함한 600여명이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몇 분의 명사들이 조의를 표한 후, 우리의 선교인 중 한 사람이 “우리의 벗, ‘곤살레스’ 판사의 희망”이란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그는 ‘곤살레스’ 판사가 간직했던 놀라운 부활의 희망에 대해 설명했다. 이들 정부 고위 관리들에게 훌륭한 증거가 행해졌으며, 그들 중 다수는 연설 후에 그 연사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들은 것에 대해 감사를 표명하였다.

지부의 변화

1949년에 ‘페라리’ 형제는 건강상의 문제로 더 이상 지부 감독자로서 계속 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콘셉시온’에서의 사업을 돕도록 초대를 받았다. ‘알버어트 만’ 형제가 지부 사무실을 책임맡게 되었다. 그는 그 직책에서 10년 동안 일했다. 그는 도시 중심지에 보다 더 가까운 곳에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을 위한 새로운 장소를 찾아보기 시작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산티아고’의 번잡한 중심지에서 단지 몇 구획 떨어진, ‘모네다’가 2390번지에서 한 장소가 발견되었다.

많은 일군이 도착하다

1949년 무렵에 ‘칠레’에는 25명의 선교인이 일하고 있었다. 그들인 일한 결과는 이 나라에 211명의 전도인이 있었다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1945년에 첫 번째 선교인들이 도착했을 때의 65명의 전도인으로부터 훌륭하게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인구 20,000명에 대해 ‘증인’이 한 사람꼴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아직도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형제들의 정신에 있던 큰 질문은, “‘아마겟돈’이 언제 올 것인가?”가 아니라 “끝이 오기 전에 어떻게 ‘좋은 소식’이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게 할 것인가?”였다.

도움이 오고 있었다. 그 해 연말에 ‘길르앗’ 제 13기 졸업생인 20명의 새로운 선교인이 도착하였다. 그들은 조직에 참으로 훌륭한 도움이 됨이 증명되었다! 여섯 명의 형제, 즉 ‘존 윌리엄즈’와 ‘해리 윌리엄즈’, ‘차알스 코레이’, ‘레이몬드 터브즈’, ‘다니엘 데이빗슨’ 및 ‘보이드 콜린즈’는 ‘테무코’ 시에서 일하도록 임명되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테무코’에는 ‘증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1950년 8월경에는 30명의 왕국 선포자가 있는 한 회중이 있었다. 형제들의 두번째 집단은 ‘발파라이소’의 가파른 언덕들에 임명되었다. 그들은 ‘해롤드 잭슨’, ‘드웨인 그레이버’, ‘로버어트 나이트’ 및 ‘조오지 윌크스’였다.

사제들이 반대했지만—영향력을 상실하다

당시에는 아직도, 일반적으로 성서를 ‘프로테스탄트’교의 책이라고 믿었고 ‘가톨릭’교인들에게는 금지되어 있었다. 선교인들 중 한 사람은 우정적인 한 집주인에게, 이 나라에 와서 처음으로 성서를 전했다. 그런데, 나중에 한 사제가 와서 그것을 사람들의 면전에서 찢어 버렸다.

어떤 문전에서는 “성서”란 말만 해도, 주인은 “우리는 교황의 ‘로마 가톨릭’교인들이요”라고 말하고는 이어 문을 재빨리 닫아 버리는 성급한 반응을 보이곤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거룩한 역사’란 뜻으로 들리는 “거룩한 책”이란 말을 사용하였는데, 그것이 성서를 일컫는 다른 말이라는 것을 설명할 만큼 주인이 충분한 관심을 보일 때까지 그 말을 사용하였다.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미사’ 책 ‘오레무스’를 ‘칠레’에 널리 배포했었다. 그 책자에는 ‘성서’는 ‘가톨릭’교의 책이며 모든 신자들이 읽어야 한다는 짤막한 글이 담겨 있었다. 이것을 알아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성서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 우리는 재빨리 “하지만 댁에서는 ‘오레무스’를 읽어 보셨읍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그러면 그들은 “그럼요” 하고 대답하곤 하였다. “그러시면 21면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읽어 보기로 합시다.” 이 방법은 많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 주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문을 계속 열어 놓게 되었다.

‘칠레’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다른 나라들에서처럼 폭력으로 우리의 사업을 반대한 일은 실제 없었다. 그들은 우리를 반대하는 ‘팜플렛’과 한권의 책까지 발행했다. 확성기들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 대해 폭동을 일으키도록 사람들을 선동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이 우리를 반대하는 말을 했을 때는 자업자득이었다. 왜냐하면, ‘칠레’ 국민은 숭배의 자유를 인식하는, 참을성있고 친절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제들의 행동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사제들이 하는 말을 거의 존중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사람들이 흔히 우리에게 “나는 ‘가톨릭’교인이지만, 사제는 믿지 않습니다”고 말하거나 “나는 ‘가톨릭’교인이지만, 내 방식대로 살아갑니다”고 말하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이 곳 사람들은 성서 토론을 좋아한다. 다만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회할 수 있는 성서 연구 수가 제한을 받을 뿐이다.

‘콘셉시온’ 지역에서의 성장

1946년에 도착한 9명의 선교인 집단 중에서 다섯 명이 남쪽에 있는 ‘콘셉시온’ 시에 임명되었다. 그들은 ‘로버어트’와 ‘보라 한난’, ‘도로시 브레머’, ‘윌리 브라운’ 그리고 ‘조안 브라운’이었다. ‘조안’은 심한 병을 앓게 되어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1950년에 사망했다. 하지만 그와 성서를 연구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충실함을 기억하고 있다.

선두에서 봉사를 하는 선교인들의 큰 도움으로, ‘콘셉시온’ 지역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1949년에 ‘보라 한난’이 ‘아르만도 바디야’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란 책을 기쁘게 받았다. 그는 성서 연구에서 배우고 있는 것을 직장 동료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얼마 안 가서 ‘한난’ 자매는 다른 두건의 연구가 생겼다. 몇명 안 되는 그들로부터 나중에 7명의 전도인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중 셋은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바디야’ 형제는 발전하여 회중의 종이 되었고 지금은 ‘콘셉시온’에 있는 세개의 회중 중 한 회중에서 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선교 분야에서는 기쁜 일도 많을 뿐 아니라 문제도 많다. ‘한난’ 자매는 탄저병에 감염되었고, 나중에는 고열로 몸져 눕게 되었다. 그 때문에 그는, 몇년 전에 ‘나찌’ 독일에서 도망해 왔었던 어느 독일인 부인을 재방문할 수 없게 되었다. ‘한난’ 형제로부터 그의 상태에 대해 듣고서는, 그 독일인 여자는, 자기가 처음 이국 땅에서 보냈던 날들을 생각하고서, 즉시 ‘한난’ 자매를 방문하여 자기 의사를 보내어 치료해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이 부인의 도움으로 ‘한난’ 자매는 돈 한푼 들이지 않고 ‘레죠날’ 병원 특실에서 2개월을 지내면서 수석 의사들 중 한 사람의 치료를 받았다. 병으로 인해 그는 청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제 그는 증거 활동에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했다. 그는 ‘칠레’ 사람들의 참을성있고 우정적인 태도가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됨을 알게 되었다.

특별 ‘파이오니아’ ‘세르지오 곤살레스’ 형제는 한 동안 ‘콘셉시온’에서 일한 후에, ‘코로넬’이란 광산촌에서 일하도록 임명되었다. 거기서 그는, ‘복음 전도자 교회’의 가르침과 ‘여호와의 증인’의 보다 정확한 가르침 사이의 상이점들을 즉시 깨닫는 진실한 광부들을 발견하였다. 작업 교대가 되어 집회 참석이 가능하면, 그는 그들에게 27‘킬로미터’를 기차를 타고 여행하여 ‘콘셉시온’에서 열리는 집회들에 참석하라고 권고했다. 가족의 생계를 벌기 위해 노력하면서 이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하였다. 그들이 석탄을 채굴하는 막장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대양의 바다 밑으로 수 ‘킬로미터’를 가야 했다. 이 세상의 재화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왕국 사업을 위해 많은 희생을 했다. 1954년에 ‘코르넬’에 회중이 생겼을 때 이들 여섯 명의 형제들은 그들의 빈약한 수입에서 ‘왕국회관’세를 지불했으며, 그것도 기쁘게 그렇게 하였다.

법정 사건이 장차 확장하기 위한 기초를 놓다

1952년에 이 나라에는 회중이 15개 있었고 총 전도인은 831명이었다. 활동이 증가하자 ‘안식교’로부터 반대가 왔다. 안식교인들은 「엘 아타라야」란 잡지를 배포하고 있었고 우리는 「라 아타라야」지를 배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잡지의 이름이 그들의 잡지 이름과 비슷하다고 따졌다. 그들은 ‘칠레’에서 그 이름을 등록했기 때문에 우리 잡지의 배부를 중지시킬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다음은 ‘N. H. 노워’ 협회장이 그들의 조직 대표자에게 1952년 2월 7일자로 보낸 서신의 일부이다.

“귀하가 이 곳 ‘브루클린’, ‘콜롬비아 하이츠’ 124번지로 본인을 방문했을 때, 본인이 귀하에게 설명한 바와 같이, 「라 아타라야」지는 ‘브루클린’에서 ‘스페인’어로 인쇄 발행되어, 전세계적으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모든 나라에서 배부됩니다. 이 잡지는 전세계적으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왙취 타워 협회’의 출판물로 알려져 있읍니다. 귀하의 잡지 명칭은 우리의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귀하의 잡지인 「엘 아타라야」는 ‘파수군’이란 뜻이며 우리의 잡지 「라 아타라야」는 ‘파수대’란 뜻입니다. 남자, 즉 사람과, 석조 건물 사이에는 확실히 큰 차이가 있읍니다. 본인은 그러한 것들이 혼동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스페인’어 단어들이 서로 비슷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명칭들은 확실히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 ‘협회’에서는 우리의 ‘스페인’어판 잡지의 이름을 바꿀 의향이 전혀 없읍니다. 그것은 미국 출판물이며 세계 어느 곳에나 우송할 수 있으며 남 ‘아메리카’의 어느 곳에서도 배포할 수 있는 잡지입니다. 본인의 기억으로는, 귀하는 본인과 이야기할 때 ‘멕시코’와 다른 나라에서의 귀하의 잡지에 대해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읍니다. 만약 그 문제가 혼동을 준다면 전세계적으로 귀하의 잡지 이름들을 통일시켜 같은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읍니까? 물론, 본인이 귀하의 잡지에 어떤 변경을 주장할 권리는 없읍니다. 원하는 명칭 무엇이든 그것을 사용할 권리는 귀하에게 있읍니다. 그리고 인간 피조물인 ‘파수군’, 즉 「엘 아타라야」란 명칭은 귀하가 선택한 것입니다. ‘파수대’, 즉 「라 아타라야」는 석조 건물입니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이 두 가지를 혼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우기, 이 두 잡지는 모양에 있어서도 전혀 다릅니다. 본인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이해력은 이 두 명칭의 차이를 충분히 구별할 수 있다고 믿는 바입니다.”

이러한 이치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안식교인들은 그 문제를 ‘칠레’ 법정으로 밀고 갔다. 1953년 3월 10일에 내려진 법정 판결은 판사들이 이름의 차이 외에 더 많은 것을 관찰하였음을 나타내 주었다. “여호와의 천국 선포”란 부제가 우리 잡지의 뚜렷한 특징이라고 판정하였다. 그래서 그 법정은 안식교인들의 권리에 손해를 초래하는, 어떤 부정한 행위가 있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 그들은 그 사건을 고등 법원에 항소하였고, 고등 법원은 그 사건을 검토하면서 우리 잡지 「라 아타라야」가 안식교의 잡지보다 훨씬 오래 되었다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법원에서는 원심의 결정을 지지하였으며, 우리의 가장 중요한 성서 연구 보조서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우리에게 안겨 주었다.

즐거운 확장

‘노워’ 형제는 1953년 말에 한 지역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칠레’를 방문했다. 그는 또한 1951년에 세를 얻어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모네다’가 1710번지의 부동산을 매입할 마련을 하였다. 더우기, 그는 이 나라의 보다 먼 지역에서 전파 활동을 시작하기 위해 선교인들을 파견할 마련을 하였다.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많이 강조하여 더 많은 지방 형제들이 먼 곳에 있는 읍들과 도시들에 가서 봉사하는 특권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케이드 파암’ 자매는 여러 도(道)로 옮기도록 요청받았으며 ‘산 안토니오’에 임명되었다. 해안을 따라 있는 이 훌륭한 구역에서 잡지를 많이 전할 수 있었다. 이 지역은 여름이 되면,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모래 사장과 ‘호텔’에서 즐기기 위해 모이는 곳이다. 두 ‘파이오니아’, 즉 ‘올가 치페예’와 ‘글라디스 라미레스’의 도움으로 1956년에 ‘산 안토니오’에 하나의 회중이 생겼다. ‘산 안토니오’는 항구였으며 지부에는 여러 가지 언어로 된 서적이 여러 상자 있었으므로, ‘파암’ 자매는 그러한 언어를 읽을 줄 아는 선원들이 있는 선박들을 찾아보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항만 당국으로부터 허가증을 받아 1959년 말까지 이 색다른 부면의 사업을 하였다.

1954년에, 오랫동안 바라던 1,000명의 전도인 수에 도달했다는 발표가 있었을 때 이 나라 전역에 있는 모든 전도인들은 참으로 기뻐했다! 최고 기록인 1,018명이 야외 봉사에 참여했다.

마침내—남 ‘아메리카’의 첨단까지!

‘마젤란’ 해협에 있는, 당시 40,000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 ‘푼타 아레나스’에 처음으로 여섯 명의 선교인들이 파견된 것은 1956년이었다. 본래의 집단에 속했던 ‘스텔라 셈크지스진’ 자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는 1956년 6월에 그 곳에 도착하였다. 홍수가 막 있었고 날씨는 차고 다습하였다. 진리에 많은 관심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한달에 서적을 60내지 70부 전했다. 사제들이 성서를 읽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서를 본 일조차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는 조그만 방이 다섯 개 딸린 집에서 봉사를 시작했으며 방 하나는 집회 장소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1957년 3월에 처음으로 7명의 전도인이 보고되었다. 1년 남짓하여 15명으로 구성된 한 집단이 우리와 함께 일하고 있었으며, 그 해 10월에는 집회 장소로 사용할 더 큰 방이 있는 더 큰 선교인 집이 필요하게 되었다. 결국은 그것도 너무 협소하게 되어 우리는 방 세개를 ‘회관’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1967년에 그 회중은 다른 왕국회관에 세들게 되었고, 놀라운 성장이 있었다.” 참으로 그러했다! 지금 그 곳에는 전도인이 200명 이상되는 번창하는 회중이 두개 있으며 회중 자체의 커다란 왕국회관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이 대륙의 남단에 있는 또 하나의 도시는 ‘푸에르토 나타레스’이다. 이 도시는 “울티마 에스페란사”, 즉 “최후의 희망”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수도이다. 이 지역에는 양을 치는 커다란 목장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 도시에는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지에 있는 탄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 곳에는 이 나라를 무자비하게 휩쓰는 돌풍이 불어닥친다. 이 곳의 수목들은, 키가 수 ‘피이트’ 이상은 거의 자라지 않으며 9월부터 3월까지 여름철에 부는 시속 96‘킬로미터’의 바람 탓으로 휘어져 있다. 실로 무서운 고독의 땅이 될 수 있는 곳에서 식물들이 땅을 향해 웅크리고 있다.

하지만, 왕국 전도인들은 바람이 불면 허리를 구부려 가면서 전파를 계속하였다. 그 회중을 강화하기 위해 선교인들이나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수년 동안 간간이 파견되어 왔다. 1940년대 초에 ‘파암’ 자매가 최초로 여기에 진리의 씨를 뿌렸으며, 지금에 와서는 여호와와 다른 여러 형제들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자체 ‘파이오니아’들을 가진 회중이 있다.

‘카라마’에서 선교인들과 함께

1957년에 ‘데프니 크럼’, ‘올가 로드리구에스’, ‘루이스 스터브스’와 ‘프란시스 스터브스’ 자매들이 이 나라의 북부 지방에 임명되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카라마’ 시에는 ‘증인’이 한 사람도 없었지만, 선교인 집에서 열린 첫 집회에 100명이 참석하였다.

‘루이스 스터브스’ 자매가 ‘카라마’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파수대」지 예약자였던 ‘가야르 도’ 교수는 개교한 어느 새로운 학교에서 종교 과목을 가르쳐 달라고 ‘스터브스’ 자매를 초대하였다. 그는 그 자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가진 책들을 교재로 사용할 수 있으며 당신이 편리한 방법으로 교과 과정을 정하실 수 있읍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성서”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선한 일을 위해 준비함」으로 그의 교과 과정을 시작하였으며 나중에는 「낙원을 잃을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 책을 사용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지방 ‘가톨릭’ 사제가 그 수업을 맡기 원했다. 하지만, ‘가야르도’ 교수는 그에게, 그들은 학생들에게 ‘가톨릭’교가 아니라 성서를 가르치기를 원하며, ‘여호와의 증인’들만이 성서를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스터브스’ 자매가 2년 동안, 그 다음에는 ‘데프니 크럼’이 1년간 가르쳐 이 나라의 그 지역에 놀라운 증거를 했다. 이것은 ‘카라마’에서 전파 사업의 확고한 기반을 구축한 방법들 중 하나였다.

‘올가 로드리구에스’ 자매는 4명으로 구성된 이 선교인 집단의 한 성원이었다. 그가 선교 정신에 감화된 경위는 흥미있다. 그의 모친 ‘아나 로드리구에스’ 자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딸에게 줄 수 있었던 중요한 도움은 그의 속에 선교 정신을 세워주는 것이었다. 침례를 받은 후 일년간 전도인으로 봉사한 후 그는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그 봉사에서 순종적이 되고 인내하며, 비가 오거나 날씨가 덥거나 다소 고통이 있을 때에도 집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나는 그가 하나님의 봉사가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인식하도록 돕고자 애썼다.

“나중에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에로의 초대가 왔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올가’에게 집에 머물러 연로한 어머니를 돌볼 책임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를 만류하려고 하였다. 심지어 ‘증인’들 가운데서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자녀가 너뿐이냐? 같은 책임이 있는 다른 자녀가 다섯이나 있지 않느냐? 미국이며 ‘캐나다’며 ‘유럽’에서 온 선교인들의 어머니들을 생각해 보아라!’라고 말해 주었다. 이 대화가 있은 후에 그는 크게 격려를 받아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길르앗’ 졸업생이 되었고 나에게 행복과 즐거움의 원천이 되어 왔다.”

‘카라마’ 시와 그 인근 지역의 주민들은 ‘아이퀴나’란 동정녀 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다. ‘가톨릭’ 교회는, ‘카라마’에서 약 96‘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사막에다 그 동정녀를 숭상하기 위한 사원을 하나 지었다. 주민들은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간다. 주요 휴일에는 특별한 춤으로 축제를 벌인다. 각 ‘댄서’ 집단에는, 춤을 잘 추도록 하고 또 다른 ‘댄서’들보다 더 오래 출 수 있게 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여러 시간 계속 춤을 추도록 훈련시키는 우두머리가 있다. 음악은 관악기로 연주하는 단조로운 곡이며 ‘드럼’으로 반주를 맞춘다. 각 ‘댄서’ 집단은 특유한 의상을 입는데, 어떤 이들은 중국 의상, 다른 이들은 ‘스페인’ 의상, ‘인디언’ 의상, ‘볼리비아’ 의상 등을 입고 괴기한 축제 가면을 쓴다.

그 특별한 날이 되면 열광적인 신자들은 동정녀를 찬양하며 그의 옷에다 사례금을 꽂음으로써 그들의 서약을 갚는다. 그러는 동안 ‘댄서’들은 계속 움직이면서, 각 집단은 다른 ‘댄서’ 집단보다 오래 춤을 추기 위해 노력한다. 동정녀의 옷이 돈으로 덮이면 다른 옷으로 갈아 입힌다. 돈은 부대에 모아서 주교가 자기 자동차에 실어 가져간다. 이전에 이 동정녀를 숭배하던 열광적인 신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인간이 만든 형상이 아니라—살아 계신 참 하나님을 숭배하고 그분께 경의를 표하고 있다.

어느 광산촌에서 확고하였던 한 자매

1957년에 ‘에벌린 맥파레인’ 자매는 ‘페드로 데 발디비아’란 광산촌에서 봉사를 시작할 특권을 가졌다. 그 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셋집이나 셋방조차도 얻을 수 없었다. 실망하고 떠나 버리는 대신, 그는 다른 도시에서 알게 되었었던 사람으로 그 곳에 살고 있는 어느 부인과 접촉을 하였다. 이 여자는 진리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맥파레인’ 자매가 자기 집 마루에서 잠을 자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다음에 ‘맥파레인’ 자매는 마찬가지로 진리에는 관심이 없는 다른 여자의 집에서 자신의 식사를 요리하였다.

봉사 첫 달에 ‘맥파레인’ 자매는 한 거리에서만 10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 후에 그는 그들을 한 사람의 집에 모아서 「파수대」 연구를 시작했다. 나중에 그는, 몇몇 관심자들의 도움을 받아, 집회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노동 조합 강당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곧 모든 집회들이 열리게 되었고, 새로운 사람들은 여호와와 그분의 목적을 아는 일에 자라고 있었다.

‘맥파레인’ 자매는 이렇게 썼다. “5월에 봉사를 시작했는 데도, 그 해 12월 25일에 25명의 새로운 사람들을 야외 봉사에 동반할 수 있었을 때 나의 기쁨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후에 탄광 회사가 건축 자재와 부지를 제공해 주어서 왕국회관을 하나 지을 수 있었다.

책임의 짐을 지는 형제들

이 기간에 진리에 들어온 어떤 사람들은 ‘칠레’에서의 왕국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데 탁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들 중 몇몇의 이름은 ‘카를로스 누녜스’, ‘오스발도 베요’, ‘위이 라미레스’, ‘루시오 리오스’ 및 ‘마누엘 윙’이다. 이들 형제들과 ‘에르네스토 오츠’와 ‘세르지오 곤살레스’와 같은 다른 사람들은 실제로 이 나라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1959년에 ‘길르앗’ 졸업생인 ‘프레드 윌슨’ 형제가 ‘알버어트 만’ 형제와 교체하여 ‘칠레’ 지부 감독자가 되었다. ‘만’ 형제는 여행하는 감독자로서 계속 형제들을 섬겼다. ‘윌슨’ 형제는 여호와께 헌신하고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기 위하여 핵 물리학자로서의 장래가 유망한 직업을 포기했었다. ‘윌슨’ 형제가 지부 감독자가 되었을 때 ‘칠레’에는 56개의 회중이 있었고 최고 전도인은 1,879명이었다.

강지진이 ‘칠레’를 뒤흔들다

1960년은 네 차례의 강지진이 있은 해로서 ‘칠레’에서 오랫동안 기억될 해이다. 수분 동안 땅이 대단히 심하게 진동하였기 때문에 발로 서 있는 일이 불가능했을 때 나타났던 그 무시무시한 위력을 생존자들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여호와의 증인’들은 재난을 당했을 때, 그들의 형제들이 나타낸 놀라운 사랑과 연합을 기억할 것이다.

지진이 있은 지 수일 내로 지구 각처로부터 동정의 말과 도움을 제의하는 내용이 담긴 전신이며 전보며 편지가 지부 사무실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뉴우요오크’에 있는 ‘협회’며 ‘칠레’에 있는 회중들이며 다른 여러 나라에 있는 개인들이 수천 ‘달러’의 돈을 보냈다. 더우기, ‘브루클린’에서는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도록 1‘톤’이 넘는 의복을 보내 주었다. 지진의 영향을 받은 500명의 형제들의 가족들에게 구호품들을 골고루 나누어 주는 마련을 하였다.

지부 감독자 ‘프레드 윌슨’은 지진으로 영향을 받은 대도시들을 방문하였으며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처음 도착지는 ‘콘셉시온’이었다. 가장 크게 파손을 당한 건물들은 벽돌과 ‘어도비’ 벽돌로 지은 것들이었다. 많은 목재 골조로 된 집들은 내화성 벽돌로 지어졌었고 많은 경우에 이 벽돌이 무너지면서 나무 벽을 박살내었고 사람들을 죽게 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과 연합하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서 알려진 유일한 사상자라곤 성서를 연구하고 있던 연로한 여자였다. 그는 중풍병자였는데, 수분간 계속된 두번째 지진의 무서운 충격으로 그만 그의 심장이 멈춘 것이다.

“그 다음 날 나는 한 시간 동안 비행기로 남쪽으로 ‘발디비아’로 갔다. 그 곳은 지진과 무서운 해일로 인해 50‘퍼센트’가 파괴되어 있었다. 전체 구획의 주택들이 마치도 거대한 손이 광범위한 폐허로 만들어 버린 것처럼 납작해져 있었다.”

당시 ‘발디비아’에 있던 선교인들 중 한 사람인 ‘에스더 퍼어킨즈’는 이렇게 보고한다. “우리가 「파수대」 연구를 위해 막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 강한 진동을 느꼈다. 그리고 15분 이상 지난 후에 일련의 긴 지진이 시작되어 이 도시를 흔들어 놓았다. 집들이 마치 한질의 ‘카아드’가 쓰러지듯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사는 거리의 25채의 집들 중 4채를 제외하고는 모두 파괴되었거나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다.

“우리와 연구를 하고 있던 한 사람의 남편은 큰 지진이 나서 해일이 일기 바로 전에 그의 어린 딸들을 데리고 ‘보우트’를 타러 갔었다. 그 ‘보우트’는 강까지 밀려 온 거대한 해일의 파도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는 즉시 어린 두 딸을 ‘보우트’ 바닥에 엎드리게 하고는 ‘보우트’를 강가로 저어 가려고 애썼다. 다행히도 파도가 그들을 강가로 던져 주었다. 그는 즉각 두 딸을 날쌔게 잡고서는 보다 높은 땅으로 달려갔다. 살아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많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그들은 훨씬 다행한 편이었다. 회중 전도인 26명 중에 사망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에 대해 모두는 여호와께 감사했다.”

두 선교인, ‘에스더 퍼어킨즈’와 ‘로레인 셀레스키’는 그들이 원한다면 그 황폐한 지역을 떠나 ‘산티아고’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거기 남아서, 그토록 도움이 가장 필요한 때에 형제들과 관심자들을 도와 주기를 원했다. 이 두 여자 선교인은 거리에서 이틀 동안 지낸 다음, 선교인 집의 주인 집 차고로 이사했다. 이 기간에 매일 200내지 300차례의 진동이 있어서, 계속 그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하였다.

그 무시무시한 때에 그 자매들은 그들과 성서 연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곳에서는 집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고 또 어떤 곳에는 폐허만이 남아 있었다. 다른 평온한 곳에는 집이 있기는 하였지만 사람들은 집을 비우고 없었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선교인 자매들을 찾아와 이야기를 하고 여러가지 질문을 하였다. 그래서 훌륭한 증거를 하게 되었다. 선교인 집의 주인은 그 자매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내와 나는 이런 무서운 때에 여러분을 이 곳에 모시게 되어 참으로 감사합니다. 냉정을 지키면서 광란하지 않은 사람들은 여러분뿐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읍니다.”

1960년 5월 22일 일요일에 ‘푸에르토 몬트’ 시에는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오후였다. 사람들은 아직도 그 무서운 지진들이며 ‘콘셉시온’에서의 많은 사망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푸에르토 몬트’ 시에서는 이전에 그러한 일이 발생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곳에서는 지진이 일어날 수 없다고 그들이 생각한 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었다! 3시 2분 전에 첫 번째 증거로 한 차례의 강한 진동이 왔다. 그리고는 15분 후에 진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발로 서 있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의 눈앞에서 집들이 무너졌다.

그 4명의 젊은 여자 선교인들은 그들의 집의 벽이 바깥 거리로 넘어지는 것을 보는 무서운 경험을 하였다! 그 혼란으로 인해 벽돌들이 선교인들 중 하나인 ‘엘레나 무뇨즈’ 자매의 발 위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 때에는 발뼈가 여러 개 부러진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30분 내로 회중 형제들이 도착하여 즉시 그 자매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베풀었고 그 자매들을 그들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한편, 밤새도록 진동이 계속되는 동안 사람들은 주위의 언덕으로 대피하였다.

법인이 설립되다

1960년 중에 ‘칠레’에서 ‘협회’의 법인 설립을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이 나라의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왕국회관들을 건축하기 위해 부지들을 매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었다. 1960년 9월 29일에 법무부는 ‘여호와의 증인의 종교 협회’란 법인 설립을 승인하였다. ‘칠레’의 법인이 되므로 ‘협회’는 면세 혜택을 받게 되며 또 이 나라에 등록된 모든 종교 조직에 주어지는 다른 유익들을 받게 된다.

1960년에 ‘기념식’ 참석자는 무려 5,995명에 달했다! ‘기념식’ 참석자가 다만 103명뿐이었던 단지 15년 전, 첫 선교인들이 도착한 이래 실로 놀라운 증가가 아닌가!

‘칠로에’ 섬

1963년에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칠레’ 남부 연안에 있는 ‘칠로에’ 섬에 처음으로 파견되었다. 1940년대 초에 ‘파암’ 자매가 ‘칠로에’ 섬을 방문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제는 마침내 철저한 증거가 행해질 때가 이른 것이었다. 이번에는 ‘칠레’에서 ‘번니 발렌수엘라’로 더 잘 알려진 ‘에벌린 맥파레인’ 자매와 그의 남편이 그 곳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는 특권을 받았다. 이 부부는 머무를 장소를 부지런히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전도 사업을 수행하려면 조그만 집을 한채 지어야 하겠다고 결정했다. 돈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건축을 시작하는 데 꼭 필요한 것만 샀다. 그들이 지은 조그만 거처에는 얼마 동안 전기도 수도도 심지어 창문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머무르고 몸을 따뜻하게 할 거처를 갖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이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할 수 있는 거처를 갖게 되었다.

이 구역에서 그들은 대단한 편견, 미신 및 강신술을 직면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가톨릭’ 교회의 통제 아래 있었다. 그래도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첫해에 6명이 그들과 함께 야외 봉사에 참여했다. 형제들의 격지 집단이 하나 조직되었다. 그 이래로 이 아름다운 섬에 있는 ‘앙쿠드’, ‘카스트로’, ‘리나오’에서 회중들이 설립되었다.

대회들이 성장을 자극하다

1965년에 ‘칠레’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은 두드러진 증가들을 즐겼다. ‘기념식’ 참석자는 9,522명으로 뛰었고 표상물을 취한 사람은 21명이었다. 전도인 수가 훌륭하게 증가하여 최고 전도인이 3,758명에 달했지만, 89개 회중에서 왕국 선포자들이 3,917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했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 매우 분명하였다.

1967년 1월에 ‘칠레’에서 최초의 국제 대회를 ‘산티아고’에서 개최하기로 계획하였다. 이 “하나님의 자유의 아들들” 국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캐나다’, 중앙 ‘아메리카’ 및 ‘유럽’으로부터 300명의 여행자들이 왔으며, ‘칠레’의 형제들은 공항에서 민속 의상을 입고 환영하는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하여 그들을 열정적으로 환영하였다.

대회 장소는 신축 건물인 ‘벨로드롬’이었다. 대회 몇 주일 전까지만 해도 건축이 완공되지 않았다. 그래서 1967년 1월 7일 토요일에 시작되는, 5일간의 대회 개최일부터 사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위해 형제들은 엄청난 청소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441명이 침례를 받아 이 나라에서의 이전 봉사 역사상 어느 한해에 침례받은 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다.

‘스페인’어판 「신세계」역 성서가 이 대회에서 발표되어 형제들은 기쁨에 넘쳤다. 한 감독자는 이렇게 썼다. “이 놀라운 도움에 대해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에 감사합니다. 새로운 성서, 훌륭한 ‘콘코단스’, 성서 색인 등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출판물을 그토록 뜨거운 감사로 받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 때부터 1980년까지 지부 사무실은 이 성서 번역판을 350,000부나 발송하였다. 이것은 ‘칠레’의 형제들이 그것을 열정적으로 사용하고 있고 또 그것을 읽고 연구하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발견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 중요한 대회는 ‘칠레’에서 왕국의 권익 확장에 있어서 신 기원을 이루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1968년에는 5,805명의 전도인이 총 1,034,871시간을 야외 봉사에 바쳤다. 더우기, ‘기념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15,405명이었다. 이것은 전도인 수의 거의 3배가 되는 수였다. 이제 103개 회중과 7개의 순회구가 있게 되었다. 정말로 훌륭한 활동을 한 해였다.

1968년에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이 “만국을 위한 기쁜 소식” 지역 대회에서 발표되었다. 이 나라 전국에서 개최된 5개의 지역 대회에 참석한 11,369명이 봉사를 하였고, 그 책이 발표된 이래 1980년 봉사년도 말까지 ‘칠레’의 형제들은 이 책을 670,000부 이상 전하였다! 그 책을 지부 사무실에 재고로 두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새로운 지부 사무실 건물

1968년은 또 다른 면으로 주목할 만한 한 해였음이 입증되었다. ‘칠레’ 정부는 지부 사무실이 위치하고 있던 땅이 새로운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의 건설을 위해 수용한다는 통지를 ‘협회’에 보냈다. 1968년 12월에 ‘노워’ 형제는 새로운 지부 건물을 짓기 위한 다른 장소를 선택하기 위해 ‘산티아고’를 방문하였다. 우뚝 솟은 ‘안데스’ 산맥 부근에 위치한 한 조용한 주택지에서 좋은 장소가 하나 발견되었다. 그 후에 우리는 특별 모임을 가졌는데, 그 모임에 대한 소식이 이 나라 전역에 퍼져서 4,083명이 ‘노워’ 형제의 연설을 듣기 위해 ‘산티아고’로 모여들었다. 그는 연설 가운데서 새로운 지부 사무실을 건축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형제들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열정으로 그 소식을 받아들였다.

1969년 초에, 지부 감독자인, ‘프레드 윌슨’ 형제가 ‘브라질’ 지부 감독자로 봉사하기 위해 이임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수백명의 형제들이, ‘칠레’에서 20년 동안이나 선교인으로 봉사한 후 ‘칠레’의 형제들에게 대단히 사랑을 받게 되었던 ‘윌슨’ 형제와 자매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기 위해 공항으로 나간 그 날은, 그 지방의 많은 형제들에게 슬픈 하루였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길르앗’ 졸업생인 ‘페드로 로바토’가 새로운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새로운 지부 건물의 건축 공사는 1969년 8월에 시작되었다. ‘협회’는 기꺼이 건축 공사의 대부분을 형제들이 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건축 공사에 크게 관계한 외부인은 거의 없었다. 모두 35명의 형제들이 그 건축 공사에서 일했다. 게다가, ‘산티아고’에 있는 형제들이 건축 공사를 진척시키는 데 그들의 시간과 재능을 바치도록 초대되었고 그들은 훌륭하게 응했다. 예를 들면, ‘라 시스테르나’ 회중은 회중 형제들을 작업 현장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버스’를 한대 대절했다. 자매들은 건축 현장에서 형제들이 좋은 식사를 하여 온 종일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야외 주방을 하나 만들었다. 이 건축 공사에는 자진 봉사자들이 총 3,124시간을 바쳤다.

거리에서 11‘미터’ 들어가 있는 그 건물은, 하얀색 2층 건물이며 넓적한 돌을 깐 넓은 출입구가 있고 그 길 양 옆에는 넓은 잔디밭이 있다. 건물 전면은 하얀 ‘시멘트’의 눈부신 빛을 부드럽게 하는 초록색 ‘타일’로 일부를 붙였다. 현관 입구는 ‘알루미늄’ 틀에 끼운 유리 문들과 예리한 대조를 이루는 까만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즐거운 대조를 보여준다.

이 건물의 봉헌식은 1970년 11월 21일에 거행되었으며, 255명이 참석하였다. 봉헌식 연설에서 지부 감독자 ‘페드로 로바토’는 중요한 것은 그 건물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 건물을 여호와 보시기에 값지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건물에는 넓직한 아름다운 왕국회관이 하나 있으며, 사무실 및 발송부를 위한 충분한 시설과 16명을 위한 숙소가 있다.

‘발파라이소’에 있는 선박들을 방문함

1960년 초에 ‘파암’ 자매는 ‘산 안토니오’ 항구에서 주요 항구 도시인 ‘발파라이소’로 옮기게 되었다. 그는 오전에는 선박에서 증거하였고 오후에는 집단들과 함께 호별 방문과 성서 연구를 하였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협회’로부터 여러 상자의 외국어 서적을 받았다. 그러한 서적들 가운데는 영어 성서도 있었다. 나는 그러한 서적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 것인지를 궁리하였다. 그 때 한 ‘아프리카’ 선박이, 전부가 ‘가나’ 출신인 선원들을 태우고 ‘가나’에서 왔다. 그 배에 있던 모두는 영어 성서를 대단히 갖고 싶어 했다. 그들은 모두 그들의 고유 언어인 ‘에웨’(Ewe)어와 ‘가’(Ga)어 외에 영어도 사용했다. 그래서 나는 세번이나 다시 가야 했으며, 30권 이상의 영어 성서를 배로 운반하기 위해 한 젊은 자매에게 도움을 청하기까지 하였다. 더우기, 나는 1등 항해사에게서 「파수대」와 「깨어라!」 예약을 맡았다. 그들과 나에게 얼마나 축복이 되었겠는가!”

‘칠레’의 여러 지역에서 35년 동안 ‘파이오니아’를 한 후, 그는 1936년에 자기를 ‘칠레’로 데려다 주었던 배의 이전의 2등 항해사를 만났다. 그는 이제 독립한 선주가 되어 있었으며 최근에 그 자매를 생각했었기 때문에,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어떻게? 왜 그랬는가? 그 자매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의 배가 ‘푸에르토 몬트’ 지역을 항해하게 되어, 그가 신뢰할 수 있는 선장이 한 사람 필요하였던 것 같다.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어 그를 추천해 달라고 하자, ‘이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입니다’라는 추천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추천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케이’ 씨, 만일 당신이 ‘칠레’에서 ‘왙취 타워’ 봉사를 한 모든 해 동안 아무 것도 못 했다 할지라도 적어도 나는 이 훌륭한 사람을 얻었읍니다. 그는 신뢰받는 사람인, ‘여호와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우리의 자매가 어떻게 느꼈을 것인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의 마음은 여호와께 대한 감사로 넘치고 있었다!

이 열정적인 선교인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제 78세가 되었지만, 아직도 그는 신권적인 활동을 열정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는 ‘발파라이소’의 언덕에서 떨어져서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되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1980년 봉사년도 중에 매달 평균 132시간을 봉사에 바쳤고, 잡지는 168부를 전했으며, 재방문은 56건을 하였고, 연구는 5.6건을 사회하였으며 서책은 24부를 전했다. 꺾이지 않는 그의 믿음과 헌신과 더불어 놀랄 만한 그의 활력은, 그를 알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격려의 원천이 되어 왔다. 최초의 선교인들이, 환경이 허락하는 곳인, ‘칠레’에 초기 전도인들과 함께 남아, 여호와의 풍성한 축복으로 그 놀라운 성장을 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특권이 아니겠는가!

‘마르크스’주의 정부가 권력을 장악하다

1970년은 ‘기념식’에 19,850명이 참석하여 훌륭한 출발을 하였고, 4월에는 7,422명의 전도인 신기록에 도달하였다—이것은 단지 5년 전의 전도인 수의 두배가 되는 것이다!

1970년 9월에 ‘기독교 민주당’이 선거에서 여러 정당의 연합체인 ‘유니다드 포풀라’(Unidad Popular)에 패배하여 권력에서 제거되었다. “‘칠레’는 ‘칠레’ 국민을 위해”란 국가주의자들의 외침과 더불어, 신 ‘마르크스’ 정부는 외국인 투자가들이 관리하던 큰 구리 광산들을 완전히 국유화하였고, 또 지주들은 그들의 농장을 몰수당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넘겨 주게 되었다. 일부 가난한 사람들은 참을성을 잃고 무력으로 지주들을 그들의 농장에서 몰아내고 재산을 가로챘다. 도시에 있던 공지들은, 다만 ‘칠레’기를 갖다 꽂고 거기다가 조그만 집을 짓는 사람들에게 불법적으로 점유되었다.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부유층의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 정부를 맹렬히 반대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이 나라를 떠나버렸다. 일부 사람들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변화를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끈질긴 노력이 있었고 그로 인해 폭력과 유혈 사태가 초래되었다.

집단들이 그 정치적 영역에서 서로 양 극단으로 움직이고 있는 동안 여호와의 백성들은 중립적인 행로를 고수하였다. 분위기가 위험 수준에까지 고조되었고, 한 때 고요하였던 이 나라에서는 증오와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서도 사람들을 왕국으로 인도하는 사업은 계속 여세를 몰고 가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 이듬해에 ‘기념식’에 최고 22,918명이 참석하는 신기록을 경험하였고, 평균 전도인은 7,810명으로 13‘퍼센트’의 증가가 있었다.

‘아라우칸’의 ‘인디언’들

이들 전도인들 가운데는 새로 침례받은 ‘아라우칸’의 ‘인디언’ 전도인들이 포함되었다. ‘아라우칸’의 ‘인디언’들은, 아마 ‘스페인’ 정복자들이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사납고 용맹한 투사들이었을 것이다. ‘스페인’ 역사가들은, 이들 ‘인디언’들을 정복하는 데에 남 ‘아메리카’의 나머지를 정복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피와 돈을 희생하였다고 말한다. 2세기 동안 계속해서 싸움을 치른 후에야 비로소 ‘스페인’ 사람들은 ‘아라우칸’ 추장들과 용사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그들을 정복한 무기는 화력이 아니라, 백인들의 악습이었다. 그것들이 ‘인디언’들을 심히 타락시켰기 때문에 그들의 도덕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그들은 싸울 의지를 잃게 되었다.

수천명의 ‘아라우칸’인들이 아직도 정부가 그들에게 정해 준 보호 구역에서, 자기들의 관습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겉보기에는 그들은 ‘에스키모’인들과 대단히 흡사하다. 하지만, 그들의 기원은 아직도 이렇다 할 만큼 조사되어 본 적이 없다. 그들이 고유한 글자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적 신앙들은 그리 명확하지가 않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영혼불멸과 환생을 믿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도 세계적인 대홍수와 몇명의 생존자에 대한 전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도 성서의 표준과 조화되게 살아가기 위해 자기 생활을 조절하고 여호와께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테무코’ 회중에 참석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 형제들과 자매들이 혈과 육으로 사람들과 싸우는 일에가 아니라, 왕국의 좋은 소식을 선포함으로써 이 세상의 신인 마귀 ‘사단’과 그의 악귀 군사들과 싸우는 일에 그들의 조상들과 같은 불굴의 정신과 용맹을 발휘하기를 진심으로 희망하는 바이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가운데서도 왕국을 전파함

‘마르크스’주의 정부의 선출과 그에 따른 사건들은 일종의 지진을 초래했으며, 많은 사람들을 뒤흔들었고 ‘산티아고’의 상류층이 사는 지역, 즉 ‘바르리오 알토’를 나약하게 만들어 놓았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살바도르 아옌데’가 그들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가 하면, 사회 경제의 측면에서 그 반대 부분에 있는 많은 진실한 사람들은 그들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수년 동안을 노동하고 희생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이 위협을 받고 있었다. 안전한 장래를 마련키 위해 물질적인 소유물보다 더 나은 것이 있을 수 있는가? 만족스러운 대답이 “좋은 소식”의 열정적인 전파자들에 의해 제공되었다.

1971년 9월에 ‘바르리오 알토’에서 있은 성장을 설명하자면, ‘산티아고’의 이 지역에는 회중이 6개 있었고 그 달에 324명의 전도인이 야외 봉사 활동을 보고하였다. 지금은 회중이 11개 있으며 최근에 990명의 전도인을 보고하였다—이것은 206‘퍼센트’의 증가였다!

구술 비난과 정치적인 폭력이 일상사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식품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 것도 보통 있는 일이었다. 많은 가정 주부들은 가족이 먹을 빵이나 다른 식품을 사기 위해 하루에 평균 3시간씩을, 이따금씩 6시간까지 소비해야 했다. 이러한 시간을 낭비하는 상황에 대처하여 우리 자매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

일부 전도인은 자기가 읽기 위해, 또는 비공식 증거에 사용하기 위해 서적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한 구획만큼이나 길게 장사진을 이룬 줄에서 한 부인이 시간을 그렇게 많이 소비해야 하는 것에 대해 불평하고 있었다. 가까이 있던 한 자매는 인간이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희망의 왕국 소식을 전했다. 그가 관심을 나타냈기 때문에 그 자매는 그 부인의 집을 방문할 마련을 하였고 곧 연구가 시작되었다. 지금 그 부인은 활동적인 전도인이며 그의 딸은 정규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다.

전파 활동으로 잘 알려졌고 또 그들의 행실로 인해 존경받던 많은 자매들은, 우정적인 상점 주인들이 어떤 물건이 있으며 언제 있는지 그들에게 미리 알려 주곤 했기 때문에 매일 장사진을 서는 일은 하지 않게 되었다. 왕국을 증거하기 위해 그 어려운 상황을 이용한 우리의 열성적인 자매들의 가슴 뜨겁게 하는 경험들이 많이 있다.

1973년에는 330‘퍼센트’에 달하는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 마비적인 파업, 식량 부족이며 폭력이 초래되었다. 사회주의자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까지 수년 동안 ‘칠레’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의 성장은 대단히 빨라서, 20‘퍼센트’, 16‘퍼센트’ 및 17‘퍼센트’의 증가가 있었다. 선거 후에는 증가가 13‘퍼센트’, 9‘퍼센트’ 및 6‘퍼센트’로 떨어졌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기간에 ‘바르리오 알토’에서 증가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 ‘유니다드 포풀러’의 열성에 빠지게 된 많은 겸허한 사람들이 그들의 주의를 하나님의 왕국에서 인간의 노력으로 기울였다. 여러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격려하였다. 예를 들어, 1971년 4월에 80명의 사제들이 “사회주의 건설에의 ‘가톨릭’의 참여”를 지지한다는 그들의 입장을 밝혔다. 이 나라의 종교 지도자들은 신 정부의 정책들을 지지하였으며,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희망하는 왕국이 이 곳에서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 기둥 중 하나는 공평이다.” 그 신 정권에 성서 「이사야」서의 예언까지도 적용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인가?

갑작스런 변화

1973년 9월 11일에 그 대답이 나왔다. 그 때 무장한 군대가 ‘마르크스’주의 정부를 전복시켰다. 전쟁 지역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 우리 대부분에게, 그 혁명은 엄청난 경험이었다. 많은 형제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 날 아침 일찌기 직장에 나갔다. ‘벧엘’ 가족은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고 선교인들은 야외 봉사를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헬리콥터’들이, 거의 지부 건물 바로 위로 날아갔다. 위로 쳐다봤을 때, 문이 열려 있는 ‘헬리콥터’들에 기관총들을 장치하여 즉시 발사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깜짝 놀랐다! “무슨 일입니까?” 하고 누군가가 질문했다. 그것을 보고 ‘라디오’를 켰다. 그러자 무장한 군대가 ‘칠레’인들 가운데서의 수년간의 증오와 싸움을 종식시키기 위해 정권을 인수한다는 발표가 들렸다. 모두는 집에 머물러 있고 거리에 나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도심지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또 ‘산티아고’ 변두리에 있는 보다 가난한 지역에서도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말할 필요도 없이, 선교인들은 사태가 누그러질 때까지 이 곳 지부에서 임시 ‘벧엘’ 봉사자들로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날 아침에 여러 다른 공장에 나간 형제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일부는 체포되었고 좌익주의자들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심문을 받기 위해 ‘산티아고’에 있는 국립 경기장으로 집단적으로 압송되어 갔다. 자기가 ‘증인’이라고 밝힌 사람들은 보호가 되었음이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석방된 처음 사람들 가운데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군정(軍政) 이양이 있기 전에 극단주의자들이 어떤 격렬한 운동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제거할 사람들 가운데는 ‘여호와의 증인’도 있었다는 얼마의 증거가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보호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를 드린다!

그 이양이 있은 후 긴장된 여러 날 동안, 우리의 잘 알려진 중립적인 입장은 축복과 보호가 됨이 증명되었다. 공장들과 회사들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됨에 따라 일자리가 심각하게 비었을 때, ‘증인’ 고용인들이 종종 요직에 배치되었다. 한 경우를 이야기하자면, ‘쿠데타’가 있은 날 오전에, 군인들이 한 ‘증인’ 집에 와서는 그가 지방 정유 공장을 가동시키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릴 것인가 질문하였다. 자격이 있는 다른 사람들은 신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기나 그와 비슷한 것들을 찾기 위한 현장 수색이 동이 틀 무렵 이웃에서 행해졌다. 종종, ‘증인’의 집으로 알려진 곳은 그냥 지나쳤다. 책꽂이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라는 출판물을 꺼낸 한 군인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이 책을 읽고 그대로 실천한다면, 우리가 이런 수색을 할 필요도 없을 텐데 말이요.”

국제 대회

그 후 여러 달 동안 사람들은 여전히 신경이 날카로왔다. 또 산발적인 폭력 사태가 빚어졌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승리” 국제 대회를 위한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산티아고’의 ‘산타 라우라’ 경기장을 사용하도록 계약이 되어 있었지만, 그러한 모임이 허락될 것인가? 9월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큰 집회들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한 시기에 그러한 모임을 갖는다는 것은 실로 기적일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손은 결코 짧지 않으셨다!—이사야 59:1.

대회 날자가 다가옴에 따라 우려가 증가했다. 그런데, 대회가 개최되기 일주일 전에 우리는 허가가 취소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각 두명의 형제들이 국방부로 가서, 많은 외국 대표자들의 도착을 위해 준비한 것과 또 만약 그러한 국제 대회가 허락되지 않으면 외국인들에게 얼마나 좋지 못한 인상을 줄 것인가를 설명하였다. 그러자 대령 한 사람이 그 문제를 상관에게 가지고 갔다가 “허락한다!”는 대답을 가지고 왔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

형제들 가운데 아무도, ‘칠레’에서 사상 최대의 대회임이 입증될 그러한 대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메마르고 건조한 북부 지방과 빙산이 보이는 남부 광야로부터 여행할 비용을 장만하기 위해, 많은 ‘증인’들은 가구, ‘텔레비젼’ 수상기, 전축 등을 팔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칠레’는 해안선이 태평양을 따라 4,265‘킬로미터’나 뻗어 있기 때문에, ‘버스’나 기차를 타고 먼 여행을 해야 한다. ‘아타카마’ 사막에 있는 ‘이퀴퀘’로부터, 어린이들과 유아들을 포함하여 1,300명의 ‘증인’들이 차량을 8개 단 특별 열차를 타고 왔다. 그 여행은 느리고 피곤한 여행이었다. 나흘 반을 여행한 후—여행의 대부분은 사막을 통과하는 것이었다—그 호된 여행이 끝났다. 즉 거의 끝나게 된 것이다. 야간 통행 금지가 막 시작할 때 그 기차가 도착하는 바람에 형제들은 그 밤을 기차 안에서 지내야 하였다!

환영 위원회가 그들을 마중하러 그 날 아침 일찌기 역에 갔다가 기차가 연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것이 그 형제들이 기차 안에서 하루밤을 또 지내게 되는 것을 의미함을 알고는, ‘코오피’를 준비하고 여러 상자의 과일을 사고, 담요를 구하고 ‘샌드위치’를 만드는 등 여러 마련을 하였다. 도착하는 형제들을 돌보기 위해, 그 날 밤에 48명의 형제들이 자진하여 ‘마포초’ 역에 남았다. 물론, 이것은 역을 감시하는 군당국의 허가를 받고 한 것이다. 사실상, 그들은 준비된 마련에 크게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 주었다. 보통 기차가 연착하면, 무질서한 군중이 통금에 따르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군인들은 허공으로 공포를 쏜 다음 모욕하는 군중들을 강제로 기차 안에 들어가서 밤을 지내게 하곤 하였다. ‘증인’들이 열차에 가득 탄 이 경우에는 소리를 지르거나 명령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었다. 한 군인은 이렇게 논평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품행이 방정하고 질서있는 사람들임을 증명하였읍니다.”

이튿날 아침에 대표자들이 ‘코오피’를 한잔씩 더 들고난 후에 ‘산티아고’에 있는 회중들에 속한 형제들이 그들을 숙박소로 데려 가기 위해 역에 도착했다. 대표자들은 그들에게 베풀어 준 사랑의 친절과, 춥고 어두운 기차 역에서 밤을 세운 형제들의 자진성에 대해 참으로 감사했다!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행동으로 보인 실로 훌륭한 본이 아닌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 날이 다가왔다. 그리고 ‘노워’ 형제를 포함한 외국 대표자들이 도착하였다. 열정이 고조되었다. 그것은 형제들과 여호와께 물 침례로 헌신을 나타낸 새로운 사람들—1,502명 모두에게 얼마나 훌륭한 격려가 되었겠는가! 참석자는 대회 사상 가장 많은 21,321명이었다! 우리는, 문을 열어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해 주신 일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한다.

빠른 성장이 재개되다

1973년에 ‘칠레’에서 발생한 사건들은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신뢰하지 말라는 시편 146:3의 요지를 실증해 주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당시 대통령을 신뢰했던 사람들은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희망도 사라졌다.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열정적인 봉사 덕분에, 의로운 마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왕국” 소식을 인류의 유일한 희망으로 받아들였고 참 숭배를 위한 입장을 취하였다.

정부가 교체된 지 한달 후인, 1973년 10월에, 전도인 수가 10,119명에 도달함으로써 ‘칠레’에서는 처음으로 전도인 10,000명 선을 돌파하였다. 그 후 국제 대회가 열렸고, 또 그 대회는 앞날의 증가를 위한 원동력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해 봉사년도를 전도인 22‘퍼센트’의 증가와 평균 전도인 10,962명으로 끝마쳤기 때문이다! 32개의 새로운 회중과 새로운 두개의 순회구가 조직되었으며 최고 전도인은 12,491명이었고 총 2,660명이 침례를 받았다. 그 이듬해에는 더 큰 증가, 즉 30‘퍼센트’의 증가가 있었고 또 야외 봉사에 참여한 평균 전도인은 14,220명이었다. 놀랍게도 3,842명이 침례를 받았다!

신속한 성장과 잘 광고된 대회에 대한 호의적인 논평들은 보다 활동적이 된 우리의 종교적인 적들의 주의를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가이사’와의 특별한 관계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여, 막후에서 공작을 시작하였다. 우리 가운데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있다고 고발했다. 그래서 두번 이상이나 그렇지 않음을 입증하고 침례를 주기 전에 있는 “심사” 과정을 설명해야 했다. 당국자들은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 문제가 보류된 것은 분명하였지만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노워’ 형제가 국제 대회 참석차 방문했을 때 그는 조그만 인쇄 공장에 대한 청신호를 주었다. 1975년 1월 이전까지는, 「왕국 봉사」지와 「필기 복습」 문제지를 ‘아르헨티나’로부터 받아왔었다. 하지만, 그러한 인쇄물이, 겨울에 ‘안데스’ 산맥에 내리는 폭설 때문에 한해에 여러 차례나 너무 늦게 도착하곤 하였다. 이제 우리는 형제들이 필요로 하는 양식, 전도지, ‘프로그램’, 「왕국 봉사」지 및 「필기 복습」 문제지 등을 공급할 수 있는 인쇄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국립 경기장에서의 대회

1949년으로 돌아가서 ‘노워’ 형제가 어느 대회 참석차 ‘칠레’를 방문하였을 때 ‘디그나 곤살레스’ 자매가 국립 경기장을 사용하면 어떻겠느냐고 농담조로 질문한 일이 있었다. 그에게 큰 기쁨이 되게도, 이제 바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때가 왔던 것이다. 1976년 1월에, 우리는 그 경기장을 “하나님의 주권” 지역 대회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보다 큰 지역인 ‘산티아고’에서 15,619명이 참석하였다. ‘프로’ 축구 ‘티임’들이 연말 결승 경기를 갖기로 되었기 때문에, 그 경기들을 저녁에 할 수 있도록 우리는 대회 회기를 한 시간씩 일찍 끝내야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우리는 어려움 없이 그렇게 했다. ‘산티아고’의 일간지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세 시간 만에, 모든 것을 경기장에서 철수하고 원상태로 해 놓아야 했다. 그렇게 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모두가 어려움 없이 협력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경기장을 종교적인 행사의 장소로 만들고 또 그것을 원상태로 바꾸는 기적을 이루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생긴 새로운 화폐

이 모든 기간에 ‘인플레이션’이 계속 악화되었다. 실례를 들자면, 1970년 8월에 미화 1‘달러’가 ‘칠레’ 돈으로 14‘에스쿠도’였는데, 단지 5년 후에는 미화 1‘달러’가 ‘칠레’ 돈으로 6,000‘에스쿠도’가 된 것이다! 1975년 9월에 정부는 1,000‘에스쿠도’를 새로운 ‘칠레’ 화폐인 1‘페소’로 바꾸었다. 미화 1‘달러’에 대한 공식 환율은 6‘페소’로 정했다.

놀라운 확장

‘인플레이션’과 실업 증가가 초래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열정은 계속되었다. 1976년 봉사년도 중에는 전도인 사상 최고 기록인 16,862명에 도달하였고, 2,782명이 침례를 받았다. 전도인 수가 놀랍게 증가하고 있었지만, 그것과 보조를 맞추어 장로들을 발전시키는 일은 분명히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1972년 9월에 131개 회중이 있었는데, 단지 4년 후에 그 수가 269개로 증가하였다—두배 이상으로 증가한 것이다! 새로운 회중들이 생기게 됨에 따라, 한때 장로들이 3명이나 그 이상이었던 많은 회중에서는, 전도인 수는 종전과 거의 같은데, 장로들은 한 두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도인 신기록에 달하는 일, 새로운 회중들과 순회구들을 형성하는 일, 총 참석자가 30,000명을 넘는 순회 대회들과 지역 대회들을 개최하는 일, 그리고 ‘기념식’ 참석자가 사상 최고로 46,940명에 달하는 일 등으로 만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분명히 이러한 모든 신권적 확장을 ‘사단’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우는 사자”는 새로 모이는 “양”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봉사에 대한 반대가 표면화되다

12월에서 2월까지의 여름철이 되기 전에, 지역 대회를 위한 계획들이 마련되었다. 남 ‘아메리카’ 첨단 ‘마젤란’ 해협 부근에 동떨어져 있는 3개 회중이 조그만 대회를 개최하는 것을 군 당국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받게 될 때까지는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형제들이 좋은 평판을 듣고 있는 사실과 한 대령이 개인적으로 여러 ‘증인’들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군 당국의 장군은 그 대회를 허락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서면상의 허락은 해 주지 않고 광고를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 후, 지역 대회들이 아무 어려움 없이 여러 도(道)에서 개최되었다. 얼마 안 가서 지구 감독자가 우리를 방문할 것이었으며, 그가 ‘벨로드롬’에서 연설하도록 계획들을 세웠다. 보다 큰 ‘산티아고’ 지역의 모든 회중이 참석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가서 허락이 취소되었을 때 깜짝 놀랐다. 우리는 그 결정에 대해 호소해 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다음 군 당국은 우리가 ‘산타 라우라’ 경기장에서 개최하기로 되어 있던 지역 대회를 취소해 버렸다. 그들은 비상 사태이기 때문에 큰 모임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의 호소를 거절하였으며 우리가 시도한 회견을 거절하였다. ‘산티아고’ 시내와 인근에 있던 100개 회중의 형제들은 물론이거니와 대회 ‘프로그램’을 듣기 위해 ‘칠레’까지 여행할 마련을 한 형제들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신속하게, ‘산티아고’에 있는 보다 큰 8개 왕국회관에서 4일간의 ‘프로그램’을 내용의 70여 ‘퍼센트’를 다루는, 2일간으로 축소하는 마련을 하였다. 더 많은 형제들이 연설 임명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회관을 번갈아 가면서 연설하는 4개 집단의 연사들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장소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단지 전도인들만 초대되었다. 5개 주말이 경과하는 동안 10,209명이 참석하였다. 왕국회관들이 꽉 메워졌다! 많은 사람들은, ‘프로그램’과 ‘드라마’ 등, 모든 것을 제공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수고한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그 후에 당국은 ‘산티아고’에서 순회 대회를 갖는 것마저 허락하기를 거절했다. 그래서 우리는 내용의 90‘퍼센트’ 정도가 담긴 1일간의 ‘프로그램’들을 마련하였다. 우리는 형제들에게 수도 밖으로 여행하도록 요청하였다. 제한된 시설 때문에, 토요일에 한 순회 대회를, 그리고 일요일에 다른 순회 대회를 가지곤 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1977년부터 1980년 6월까지 훌륭한 결과를 산출하였다. 그런데 이전에 대회가 허락되었던 두 장소마저 이제 허락이 거절되었다. 그렇게 되어 ‘산티아고’의 두 순회구는 이제 순회구 내의 보다 큰 왕국회관에서 순회 대회 ‘프로그램’을 계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하는 데는 가외의 일이 생겼으며 얼마간 불편하였지만, 중요한 것은 형제들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준비한 영적 양식을 공급받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법무부에서는 지방 법인의 이사들이 회견을 위해 출두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 회견은 대부분 중립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회견 중 대체로 분위기가 다소 적대적이었고 긴장된 상태였지만, 기회가 와서 성서를 사용하여 질문에 대답했을 때, 적의적인 분위기에서 존경의 분위기로 변하였다.

그 회견과 우리의 중립적인 입장을 설명하는 진술서의 결과로, 더 이상의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여호와의 덕분에 우리의 적들은 좌절되고 말았다!

통치체로부터 온 좋은 충고

우리는 방해받지 않고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왕국회관에서 집회를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축복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물론, 보다 큰 집단으로 모이는 일은 아직도 계속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 덕분에, 그리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과 관련해서 통치체가 우리에게 준 훌륭한 충고 덕분에, 우리의 영적 낙원은 계속되고 있다.—시 47:7, 신세.

이를테면, 1979년에 ‘M. G. 헨첼’ 형제가 지구 방문차 우리를 방문했을 때 ‘바예나르’, ‘푼타 아레나스’ 및 ‘푸에르토 나타레스’와 같은 곳에서 왕국회관들이 잠시 문을 닫게 된 적이 있다. 우리는 “뱀같이 지혜롭고[조심성있고, 신세] 비둘기같이 순결하”게 행동하여 모든 가능성을 다 강구해 볼 때까지 그것을 문제삼지 말라는 충고를 받았다. (마태 10:16) 오래지 않아 지방 관리들이 바뀌거나 그 문제를 잊어 버리게 되었다. 이제 모든 회중들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사실상, ‘푼타 아레나스’에서 한 장군이 교체되었을 때, 형제들은 회견을 요청하였다. 형제들이 왕국회관에서 집회를 갖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과 또 그 문제에 관한 전임 장군과의 토의가 그의 전임으로 인해 결론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설명했을 때 그 신임 장군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로마서 13장과 일치하게, 당국이 ‘여호와의 증인’들과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잘 알고 있으며 여러분이 훌륭한 시민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여러분이 원한다면, 즉시 여러분의 집회를 보기 시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그 말을 듣고 놀란 형제들은 감사함으로 ‘시’()라고 대답했으며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있는 회중에게도 동일한 허락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요청은—‘기념식’을 갖는 때에 맞추어—승인되었다. 1979년에 그 중요한 ‘기념식’ 행사에, ‘푼타 아레나스’에서 448명이 참석한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 아닌가! 그 이래로 형제들은, 심지어 새로운 왕국회관에서 순회 대회며 지역 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특권까지 즐겨 왔다.

1977년에 문제들이 시작되었을 때 적합한 대회 장소를 얻는 것이 어려웠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문을 열어 주신 곳은 ‘발파라이소’였다. 한 형제가 우리의 대회 ‘프로그램’을 위해 아주 적합한 조그만 경기장이 있는 한 도시의 시장에게 접근했다. 그 시장은 동의하였다. 그리고 형제들이 그 장소를 아주 훌륭한 상태로 남겨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장소에서 여러 차례 대회를 가질 수 있었다.

전도인 감소

우리의 문제들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 형제들 가운데 여러 가지 소문이 돌고 있었다. 계속되는 ‘인플레이션’이 주는 경제적인 압력과 더불어, 아마도 그러한 어려움과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느슨해지기 시작하였다. 1942년 이래 처음으로 1977년에, 전도인이 15,947명에서 15,339명으로 감소되었다. 그러한 도전을 직면하여 믿음에서 계속 자라가고 믿음을 실천하도록 형제들을 격려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

강화된 지부 조직

1975년 12월 10일에, 통치체는 통치체의 6개 위원회의 본을 딴 새로운 조직의 마련들을 모든 지부에 통지했다. 그 결과로 생긴 지부 위원회가 1976년 2월 1일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통치체에 의해 임명된 ‘칠레’ 지부 위원회는 국제적인 풍치를 풍겼다. 즉 ‘아르헨티나’인(‘페드로 로바토’), ‘캐나다’인(‘토마스 조운즈’), ‘칠레’인(‘페르난도 모라스’) 및 두 사람의 미국인(‘알버어트 만’과 ‘리처어드 트래버어소’)으로 구성되었다.

슬프게도, 1975년 후반에 ‘조운즈’ 형제와 자매는 ‘조운즈’ 자매의 좋지 않은 건강을 진찰하기 위해 ‘캐나다’로 돌아가야 했으며, 거기 가서야 그 자매가 종말 질환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사랑하는 ‘플로라’ 자매는 여호와께 41년 동안 헌신적인 봉사를 한 후 1976년 2월에 사망하였다. ‘조운즈’ 형제는 ‘캐나다’에 남아서 지금은 ‘캐나다’ 지부 가족 성원의 하나로 봉사하고 있다. 그들은 1964년 이래 ‘칠레’에서 살았었고 훌륭한 일을 성취했었고 ‘칠레’ 형제들의 가슴 속에 뜨거운 자리를 차지했었다. ‘조운즈’ 형제의 자리는 다른 ‘칠레’인 형제, ‘호세 발리엔테’가 대신하도록 임명되었다. 현재 5명의 위원회 성원들 가운데는 젊은 사람들과 경험이 많은 연로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호와께 헌신한 봉사 햇수를 모두 합치면 131년이 된다.

성서 진리가 큰 변화들을 산출하다

‘칠레’에서 이렇게 엄청나게 증가하는 기간 동안, 특히 1973년 이후로,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진리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얼마를 열거하자면, 대학생, 수녀, 영매술사, 환멸을 느낀 정치인 및 축구 ‘스타’ 등이 있다. 모두는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표준에 달하기 위해 그들의 생활에서 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를테면, 어느 축구 ‘티임’의 주장이었던 한 축구 ‘스타’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섬기는 자들에게 주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이 세상이 제공한 명성을 포기하였다. 그의 행동이 개선되고, 또 더는 시합중에 자주 퇴장당하는 교양없는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프로 티임’의 감독들은 처음에는 그가 성서 연구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가 마지막으로 자기 신을 ‘로커’실에 걸고 떠나는 순간이 왔을 때, 그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결심을 최종적으로 확신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에게 고별 경기 즉 “그를 위한 경기”를 하여 탁월한 선수로 그에게 영예를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는 정중하게, 그러한 영예를 사양하였다. 그는 침례를 받았고 지금은 ‘랑카구아’에 있는 한 회중에서 봉사의 종으로 섬기고 있다.

이와 같이 다른 배경들을 가진 형제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참으로 특권이 아닌가!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들과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르도록 이러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것을 보는 것은 실로 격려가 된다!

의사들이 「피」 소책자로 도움을 받다

1978년 봉사년도 중 절정을 이룬 일들 중 하나는 피 문제에 대한 ‘팜플렛’과 소책자를 배부하는 것이었다. 한 선교인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수술 전에 수혈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지만, 여러 의사들이 항상 ‘증인’들에게 수혈을 하고 있음을 시인했다고 편지했다. 그 소책자는 윤리에 대한 논증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신뢰의 필요로 인해 그들을 위해 우리에게 꼭 필요했던 것이었다. 의사들은 그 문제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다른 한 선교인은, 어느 외과 의사가 자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보고한다. “나는 여러분의 생각에 온전히 동의합니다. 여러분의 입장을 축하하는 바입니다. 과거에는 수혈을 많이 행해 왔읍니다. 그러나 지금은 매일 수혈을 줄이고 있읍니다.” 의사들은 다음과 같은 표현들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나의 관심을 끕니다.”

“승리의 믿음” 대회

“승리의 믿음” 국제 대회는 1978년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였다. 전세계에 있는 우리 형제들의 관대함 덕분에, 선교인들과 다른 전 시간 봉사자들이 그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대회들에 참석하게 되었다. ‘칠레’에서는 99명의 대표자들이 미국이나 ‘유럽’으로 여행하였고, 또 다른 큰 집단은 ‘페루’의 ‘리마’로 여행하였다. ‘프로그램’이며 형제들의 사랑에 관한 감동적인 논평이 많이 나왔다. 그렇다, 참 숭배자들의 이러한 국제적 가족에 속하는 것은 실로 특권이 아닌가!

우리가 ‘칠레’에서 국제 대회를 갖는 것을 당국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1979년 1월에 같은 주제로 일련의 소규모 지역 대회를 시작하였다. 아마도 대회장에 도착하기 위해 이미 큰 희생을 했을 대부분의 형제들은 ‘호텔’ 비용을 부담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대표자들은 영적인 형제들의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한 대회에서는 숙박부가 충분한 숙박 시설을 구하는 데 얼마의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대회 위원회는, 여러 회중에서 형제들에게 환대를 베풀도록 격려하는 간단한 연설을 하는 마련을 하였다. 열정적인 연설을 한 후 그 연사는, 방문하는 대표자들에게 방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 위해 거수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 사람의 손도 올라가지 않았다. 조금 후에 일곱살쯤 된 한 남자 아이가 손을 들어 자기 침대를 제공하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여 한 부부가 그 방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얼음을 녹인 듯 방 제공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사실상, 숙박을 마련하는 일이 끝났을 때 방을 제공한 모든 회중 가운데서 이 회중이 방을 가장 많이 제공하였다는 것이 나타났다.

또 한해의 걸러내는 일

1978년처럼, 1979년 봉사년도에도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양육하기 위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지쳐 버림으로써 또 감소가 있었다. 분명히 걸러내는 일이 여호와의 백성들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새로운 많은 사람들이 침례를 받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수적인 증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감소한 3년 동안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3,357명이었다. 확실히 새로운 사람들이 믿음 안에서 안정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크게 필요하였다.

전망들이 밝아지다

1980년 봉사년도에 들어감에 따라 만사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1979년 10월에는, 1976년 이래 처음으로 연례 법인 총회를 개최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멀리서 여행해 온 장성된 형제들과 함께 회의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리고 여름철의 1월과 2월이 다가왔으며 우리는 “산 소망” 지역 대회를 개최하였다. 무려 총 25,544명이 참석하였다! 여러 달이 경과함에 따라, 우리는 모든 면에서 다시 제 궤도에 오르고 있었다. 이 봉사년도 중에 평균 전도인이 15,081명으로 5‘퍼센트’의 증가가 있었다. 더우기 ‘기념식’에는 사상 최고 기록인 50,508명이 참석하였다(1981년이 되어서야 ‘기념식’ 참석자가 54,796명으로 이 수를 능가하였다)!

우리 구역 끝에까지 이름

‘칠레’에는 태평양 상에 있는 ‘이스터’ 섬이며 ‘로빈슨 크루우소우’ 섬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구역이 있다. 왕국의 좋은 소식은 이들 외딴 지역들에도 이르고 있는가?

한때 ‘이스터’ 섬에는 격지 전도인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지부에 있는 한 선교인 자매와의 서신 연락을 통해서 영적으로 도움을 받았다. 그가 본토 대륙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 섬에 「파수대」지 예약자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980년 4월에 ‘기념식’을 언제 기념하는지를 알고자 하는 장거리 전화를 한 관심자로부터 받고 우리는 크게 놀랐다. 그 뒤 그 해에 한 결혼한 부부가 ‘발파라이소’에서 그곳으로 이사했다. 그들은 관심자들과 성서 연구를 사회해 오고 있었다. 1981년 4월에, 이 섬에서 처음으로 ‘기념식’ 집회가 열렸으며 13명이 참석하였다. “좋은 소식”이 이 외딴 지역에까지 전파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닌가!

그러면 그 유명한 ‘로빈슨 크루우소우’ 섬에서는 어떠한가? 1979년 말 경에 한 장로가 그의 세속 직업과 관련해서 ‘발파라이소’에서 이 섬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서적을 많이 가지고 갔다. 그 섬으로 여행하는 동안, 그는 안내자에게 주민들의 종교성에 대해 물어 봤다. 그 안내인은, ‘가톨릭’ 사제가 다만 이따금씩 드물게 한번 방문하고 있는 실정이며 ‘프로테스탄트’교 교역자는 아주 그 섬을 떠나 버렸다고 대답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으로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우리의 형제가 얼마나 놀랐는가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는 자기가 그 섬에 “좋은 소식”을 가지고 가는 첫 번째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계속된다. ‘산티아고’에서 연구를 하고 있던 한 부인이 그의 세속 직업 때문에 그 섬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산티아고’에 있을 때 그 부인은 야외 봉사에 참여할 정도에까지 발전하였었다. 그 부인은 그 섬에서 “좋은 소식”을 계속 전파하였고, 여러 사람들과 성서 연구들을 시작하였다. 우리 형제는 그들을 만나서 하나의 서적 연구 집단을 마련토록 도왔으며, 5명으로 된 한 집단으로 함께 모여 그들이 받아보고 있었던 한부의 「파수대」를 읽는 비공식적 마련을 조직하도록 돕게 되어 기쁨에 넘쳤다.

여러 사람들이 침례를 받고자 했다. 그래서 ‘세르지오 풀가르’ 형제는 본토에 돌아오자마자, 지시를 받기 위해 지부에 편지를 하였다. 약 5개월 후에 그가 다시 그 섬으로 돌아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돌아가서 지망자들과 80가지 질문을 복습하였다. 그리고 세명이 침례를 받았다. 그는 또한 11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사회하였다. 1980년 3월부터 우리는 이 격지 집단으로부터 야외 봉사 보고를 받고 있으며, 현재 4명이 보고를 내고 있다.

우리의 구역 먼 첨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남극을 빼놓을 수 없다. 그렇다, “좋은 소식”은 이 세상의 그 먼 끝에까지 이르렀다. 한 전자 기술자가 그 혹한 지역에 있는 한 과학 기지에서 근무하도록 파견되었다. 그의 아내는 그의 옷 가방을 준비하면서 성서 한권과 「진리」 책 한권을 살짝 넣어 주었다. 12명이 일하는 그 기지는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어서, 독서가 유일한 오락이었다. 며칠이 지난 뒤 그 남편은 그의 서적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지나치던, 기지에 있는 한 사람이 “여보시오, 나도 그 책을 알고 있어요!” 하고 소리쳤다. 그 두 사람은 다정한 벗이 되어 가능한 모든 기회에 함께 성서를 연구하였다. 그들을 통해 ‘러시아’어 성서 서적들이 부근의 다른 과학 기지에 전해졌다.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현재 ‘산티아고’에 있는 한 회중의 봉사의 종이다. 거리가 아무리 멀고 격리되어 있어도, 강력한 “좋은 소식”은 그러한 지역에도 희망의 소식으로 전파되고 있다.

여러 가지 새로운 성서 보조서—큰 성과를 거두다

‘칠레’의 형제들은 「나의 성서 이야기 책」을 가지고 얼마의 좋은 경험을 하였다. 한 경험은 남부에서 봉사하던 한 특별 ‘파이오니아’와 관련된 것인데, 그는 ‘산티아고’에 있을 때, 그 책을 임명지로 몇권 가지고 가기 위해 지부에 들렀다. 그가 지부에 도착했을 때는 막 문을 닫으려는 시간이어서 8권을 포장도 못 한 채 가지고 갔다. 그 책들을 팔에 안고서, 그는 ‘버스’를 탔다. 한 어린이가 그 책을 보고 자기 어머니에게 이렇게 외쳤다. “엄마가 제게 사 주시겠다고 하던 책을 저 아가씨가 가지고 있어요. 한권 달라고 해 봐요!” 그 어머니는 그에 관해 질문했다. 그 자매는 증거를 하고서 한권 전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 대화를 엿듣고서는 그 책을 한번 구경하자고 했다. ‘버스’에서 내리기도 전에, 그 자매는 8권을 모두 다 전했다! 그래서 그는 임명지로 돌아가기 전에 그 책을 또 구입하기 위해 지부에 다시 갔다—이번에는 그 책들을 모두 잘 포장해 갔다.

다른 한 자매는 「성서 이야기」 책을 어느 부인에게 전했는데 그는 다시 그 책을 자기 아들의 학교 선생님에게 빌려 주었다. 그 교사는 지방 회중에 전화해서 누군가가 자기에게 두권을 갖다 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렇게 해 주었다. 그 교사는 그 책을 자기가 다니는 교회 사제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 사제는 어린이들에게 성서를 가르치기 위해 꼭 필요한 책이라고 말했다. 그 교사는 그 추천을 신중하게 고려하고는, 7권을 더 갖다 달라고 전화했다. 그 책을 학교에 가져다 주러 갔던 자매는, 기다리는 동안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한 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의 자매는 그 문제에 대한 성서의 해결책을 말해 주었다. 그러한 설명을 듣고나서 그 부인은 자기 비서에게, 우리 자매가 다시 방문하여 이야기해 주도록 약속을 해 두라고 부탁했다. 그 부인은 그 학교 교장이었다.

우리 자매는 그 교장과의 약속 때문에, 그리고 또 14권을 가져다 주기 위해 다시 방문하였다. 그 교장 선생과 만나기 전에 그 자매는 5명의 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24권을 더 요청하였고 「청소년」 책도 5권 부탁하였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제가 볼 것은 없읍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그는 「깨어라!」지를 예약하였다. 교장 선생에게 갔다. 거기서 그 자매는 「성서 이야기」 책 두권과 「청소년」 책 한권을 전했다. 후에 그는 부탁받은 24권을 가지고 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다음 주에 14권을 더 갖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지금 그 처음 선생은 점심 시간을 이용하여 우리의 자매와 연구를 하고 있다. 그 학교 선생들에게 종교에 관해 가르치는 데 사용하도록, 지금까지 「성서 이야기」 책 88권과 「청소년」 책 27권을 전했다. 이들 책에 대한 이야기가 퍼짐에 따라 그와 같은 경험은 계속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열정적인 ‘파이오니아’들과 전도인들은 성서 서적들을 광범위하게 배부하는 일에 참여해 왔다. 그것은 1980년 봉사년도에 전한 서적이 총 264,317권이나 되는 것으로 증명된다! 자기 희생적인 ‘파이오니아’들은 새로운 구역들을 개척하고 ‘카라우에’, ‘프레시아’ 및 ‘판귀푸이’와 같은 곳에서 장차 회중들을 세우기 위한 기초를 놓는 데 이러한 출판물들을 사용해 왔다. 우리의 영적 낙원을 확장하기 위해 일치 연합하여 일함으로써, ‘여호와께서 우리로 그분의 뜻을 행하도록 제공해 주시는 모든 선한 것’을 이용하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 아닌가!—히브리 13:21, 신세.

충실한 종들이 봉사에 고착하다

우리가 1982년 봉사년도에 들어감에 따라, 충실한 선교인들이 그들의 임명을 계속 수행하는 것을 보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지금 36년 동안이나 외국에서 봉사한 ‘알버어트 만’ 형제는 그의 부인 ‘글라디즈’와 함께 지부에서 봉사하고 있다. ‘루이스 스터브스’도 1945년 말에 이 나라에 도착한 최초의 선교인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뜨겁고, 메마르고, 건조한 북부의 사막 지역에서, 또한 비가 많이 내리는 남부에서 봉사했다. 그는 74명이 헌신하고 침례받도록 돕는 특권을 즐겼다. 35년 동안 선교 봉사를 하는 동안, ‘한난’ 형제와 자매는, ‘콘셉시온’에서의 첫 번째 회중이 약 1,000명의 전도인이 있는 15개 회중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아 왔다. 그들은 181명이 참 숭배를 위한 입장을 취하도록 개인적으로 도움을 베풀었다. ‘도로시아 스미스’ 자매와 ‘도라 워어드’ 자매는 35년 동안의 선교 봉사에서 짝이 되었었고, 두 사람은 총 100명이 헌신하고 침례받도록 도왔다. 그들은 1946년에 이 나라에 도착했으므로, 전도인이 단지 93명이었던 유년기부터 조직이 성장하는 것을 목격해 왔다.

‘존 윌리엄즈’와 ‘해리 윌리엄즈’(육적인 형제간은 아님)는 ‘길르앗’ 학교 제 13기 졸업생으로 1949년에 ‘칠레’에 왔다. 이들은 각각 이 나라의 여러 다른 지역에서 순회 감독자 및 회중의 장로로서 이 땅에 참 숭배를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이러한 형제들을 얼마나 고맙게 여기고 있는가는, ‘존 윌리엄즈’ 형제가 종말 질환으로 앓고 있던 마지막 몇달 동안 그가 받은 사랑, 위안, 도움으로 증명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놀랍고도 충분한 반응을 보인 지방 형제들은 우리의 놀라운 국제적 형제애를 증명하였다. (요한 13:34, 35) 그는 마지막까지 산 소망을 간직하였고 그를 방문한 모든 사람들에게 격려의 원천이 되었다. 그는 31년 동안 선교 사업에서 충실하게 봉사해 온 후에 사망하였다. 그의 아내는 선교 임명에 계속 머물러 있다.

‘미리암 수멘’과 ‘에벌린 맥파레인’도 같은 ‘길르앗’ 학급 졸업생으로 1949년에 ‘칠레’에 왔다. ‘수멘’ 자매는 ‘칠레’의 남부 여러 지역에서 전도 사업을 시작하는 것을 도와 왔고 참 숭배를 위한 불굴의 투사로서 훌륭한 일을 하였으며 45명이 생명의 길을 걷도록 돕는 부가적인 즐거움을 가졌다. ‘칠레’의 한 형제와 결혼한 ‘맥파레인’ 자매(‘번니 바렌수엘라’)는 1978년에 암으로 사망하였다. 충실한 자로서 지상에서 부활을 받아, 진리의 지식에 이르도록 자신이 도운 113명과 만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현재 ‘칠레’에는 20년이나 그 이상 선교인 봉사에 머물러 온 선교인들이 13명 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조직을 축복하시는 것을 목격해 왔으며 또 그 놀라운 확장에 참여할 수 있었다. 현재 ‘칠레’ 전역에는 총 37명의 ‘길르앗’ 졸업생이 있으며, 그들은 우리의 영적 낙원을 확장하는 일에 ‘칠레’의 형제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일하면서, 여러 형태의 전 시간 봉사를 부지런히 하고 있다.

선교 임명에서 봉사한 다른 많은 선교인들에 대해서 다 말하자면, 지면이 부족하다. 처음 ‘길르앗’ 선교인들이 도착한 1945년 이래, 이 곳에서 봉사한 선교인들은 모두 194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11명은 ‘칠레’인 형제들로서 ‘왙취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를 졸업하고서 본국에 돌아와서 봉사하고 있다.

1930년대에 진리에 들어온 오래 된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사망하였다. 그들은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냈던 최초의 ‘칠레’인이자 1931년에 침례받은 최초의 8명 중에 끼어 있던 ‘후안 플로레스’ 형제, 최초의 ‘칠레’인 ‘파이오니아’였던 ‘델피나 비야블랑카’ 자매(1931년), ‘칠레’에서 최초의 왕국회관을 짓도록 부지를 제공한 ‘콘수엘로 트라우브’ 자매(1931년), 즐거운 표정과 행복한 성품을 소유했던 ‘마누엘 두란’ 형제(1935년), 그리고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54년 동안 봉사한 후에 1979년 4월에 사망한 ‘리처드 트라우브’ 형제 등이다. 그들은 모두 천적 보상을 받기 위해 간 사람들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은 여호와의 봉사에서 계속하면서 ‘칠레’에서 수행되고 있는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른 오래 된 사람들 가운데는, ‘막스 짐메르’(1934년), ‘세바스티안 인닌게르’(1936년), ‘에두아르도 베네가스’(1940년), 그리고 ‘후안 플로레스’ 형제의 조카 ‘세라핀 플로레스’(1942년)가 있다. 그들은 건강이 허락하는 대로 계속 여호와를 위해 봉사하고 있으며 왕국의 좋은 소식을 두려움 없이 선포하는 자들로서 훌륭한 본이 되고 있다. 사실상, 위에서 말한 4명의 형제들은 모두 그들이 속한 회중에서 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트라우브’ 형제가 1930년에 ‘칠레’에 도착하여, ‘칠레’에서 최초의 ‘증인’으로 전파하고 가르치기 시작한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파의 외침은 참으로 멀리까지 들려왔지 않은가! 성서 강연에 참석한 최초의 사람 ‘후안 플로레스’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요? 그들은 언제 올 겁니까?” 하고 질문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트라우브’ 형제의 대답은 무엇이었는가? “앞으로 올 겁니다” 하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들은 수백명, 수천명씩 왔다—그들은 모두 여호와의 조직 안에서 안식과 평화를 발견한 행복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다. 지금은 280개 회중과 격지 집단들이 있으며, 16,000명이 훨씬 넘는 전도인들은, 전도인 대 인구 비율이 높은 북부의 건조한 지방을 비롯하여 아직도 할 일이 많은 풍요한 남부 지방에 이르기까지 전국에서 진리의 씨를 뿌리고 있다. 여호와께서 기회의 문을 열어 두시는 한, ‘칠레’의 형제들은, 여호와의 과분하신 친절에 힘입어 아직도 수행해야 할 사업을 완수하여 그분께 찬양과 영광이 되게 하려고 단호한 결심을 하고 있다.

[85면 그래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전도인 수의 증가

16,000

15,081

14,220

12,000

8,000

6,923

4,000

3,370

2,025

1,034

361

65

0 1945 1950 1955 1960 1965 1970 1975 1980

[34면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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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아리카

카라마

페드로 데 발디비아

코피아포

바에나르

이야펠

발파라이소

산 안토니오

멜리피야

산티아고

랑카구아

콘셉시온

치얀

코로넬

카라우에

테무코

발디비아

코랄

오소르노

프레시아

푸에르토 몬트

앙쿠드

카스트로

푸에르토 나타레스

푼타 아레나스

포르베니르

로빈슨 크루우소우 섬

후안 페르난데스 제도

이스트 섬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대서양

태평양

[36면 삽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요? 그들은 언제 올 겁니까?” 하고 질문하였던, 진리에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낸 최초의 ‘칠레’인 ‘후안 플로레스’

[42면 삽화]

1936년에 ‘칠레’에 도착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진리의 씨를 열정적으로 뿌린, ‘케이드 파암’

[49면 삽화]

‘칠레’에서 전파 사업을 시작한 ‘리처드 트라우브’와 그의 아내 ‘콘수엘로’

[60면 삽화]

‘푸에르토 몬트’에 있던 선교인 집이 1960년에 지진이 있은 후에 남은 모습

[66면 삽화]

‘칠레’의 ‘산티아고’에 있는 지부 건물

[68면 삽화]

1978년에 사망할 때까지, 113명이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도왔던, ‘에벌린 맥파레인’(‘번니 발렌수엘라’)

[87면 삽화]

오랜 선교인의 천직에서 181명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움을 베푼 ‘로버트 한난’과 ‘보라 한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