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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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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아래의 위도 9도 선과 42도 선 사이에는, 널따랗게 펼쳐진 ‘오스트레일리아’ 섬 대륙이 자리잡고 있다. 동에서 서로는 4,000‘킬로미터’ 그리고 북에서 남으로는 3,200‘킬로미터’로 뻗어 있으니, 이 대륙은 그야말로 활개를 펴고 누워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 땅의 면적은 전 ‘유럽’의 그것을 능가한다.

이 광대한 나라에서는, 참으로 다양한 온갖 기후를 경험할 수 있다—연간 강우량이 1,000‘밀리미터’나 되는 북단의 녹음이 무성한 열대성 기후로부터 어느 때는 10년 동안이나 비가 내리지 않는 불모의 내륙 사막 기후에 이르기까지 그 기후는 실로 다양하다. 남부 고원 지대의 설원은 ‘스위스’의 국토보다 더 넓게 펼쳐 있다.

관광객들과 관련하는 한, 이 “머나먼 남쪽 땅”은 영국인이 18세기에 방문한 일이 있다고 주장하나, 교통과 통신 수단의 미개발로 실제로는 150년 동안이나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었다. 최근 들어, 수십년 동안에 수백만 ‘달러’의 관광 산업이 폭발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다른 나라로부터 점점 더 많이 모여드는 관광객들은, 관광 안내서들이 기대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처럼 그 유일한 유대류(有袋類)인 ‘캥거루우’가 ‘시드니’와 ‘멜버른’의 중심가를 뛰어 다니거나 연도에 줄지어 늘어선 ‘유우칼리’ 나무 숲속에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깜찍한 ‘코알라’ 곰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구 1천 5백만인 이 나라 전역에서 영어가 사용되기는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의 말투는 특이하다. 일부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투는, 대부분의 단어의 마지막 음절을 발음하지 않는 뚜렷한 특징을 지닌 ‘런던’ 토박이 말투를 닮았다. 또 다른 특징은 모음 ‘에이’(a)를 변음으로 발음하는 것인데, 대부분의 외국인들에게는 흡사 ‘아이’(i)처럼 들린다. 이 나라 사람들의 말을 배우고자 애쓰는 새로운 이주자들에게 어려움을 더해 주는 언어 습관은 단지 한 두 단어만 아니라 한 어구(語句) 전체를 ‘하나로 묶어 발음하는 것’이다. 이 습관은 “스트라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일부 방문객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오스트레일리아’식” 발음을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나의 예로, 일을 잘했다고 어떤 사람을 칭찬할 때 사용하는 어구를 들어 보겠다. “굳 온 유우, 메이트”(Good on you, mate! : 잘하셨읍니다!)란 말을 “구돈예르마잇”(Gudonyermite!)로 발음한다.

영국이 200여년 전에 발견하여 답사한 ‘오스트레일리아’는 세계 다른 지역의 나라들과 비교하면 유아기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 초기 이주자들은 주로 영국 혈통이었는데, 이는 사소한 죄를 범하고도 많은 사람들이 죄인의 몸으로 식민지로 이송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전에 살던 지역의 종교를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에,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의 과반수는 그리스도교국의 어느 한 종파에 속해 있다. 이 나라의 땅덩어리가 동떨어져 있고 광대한 탓으로 독특한 독립적인 태도가 발전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스포오츠’, 일광 그리고 광활한 야외를 좋아한다. 태평하고 느긋하고 안이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그들의 신앙에 대해서 만은 완강하다.

진리의 씨들이 뿌려지다

일부 저술가들은, ‘오스트레일리아’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 나라를 가리켜 “가장 머나먼 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사도 1:8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면, “좋은 소식”은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하므로, 이 머나먼 땅에도 전파되지 않으면 안 된다.

1901년에 ‘오스트레일리아’는 연방이 되었다. 그래서 이 무렵, 당시 ‘워치타워 협회’의 회장이었던 ‘차알스 T. 러셀’은 4명으로 구성된 ‘성서 연구생’ 집단을 하나 파견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발육성이 좋은 이 토양에는 그 이전에 이미 진리의 씨들이 뿌려져 있었다.

1896년에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캘구우를리’의 금광 지대에 있던 광업자 ‘아아더 윌리엄즈’ 경이 「시대들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 책을 한권 입수하게 되었다. ‘윌리엄즈’는 이 출판물에 설명되어 있는 놀라운 진리에 매혹되었다. 그는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도인 ‘퍼어드’에서 12명 가량으로 구성된 집단을 하나 형성하였다. 1902년에 그는 이 주(州)의 서남부 지방으로 이사하였으며, 마침내는 ‘돈니브루우크’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는 현재 그의 3대째 가족이 여호와를 숭배하고 있다. ‘윌리엄즈’는 그 시골 지방 도처에 「성경 연구」 책들을 배포했다. 그러나 많은 증거는 그의 가게에서 고객들에게 행해졌다.

그의 아들 ‘아아더 윌리엄즈 2세’는 자기 아버지의 당시 활동을 회상하는 가운데, 그의 아버지가 상품을 사는 고객에게 1914년의 도래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때에 이방인의 때가 끝나고 무정부 상태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음을 상기한다. 그는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고, 그들은 식탁에 둘러 앉아 「시대들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에 나오는 요점들을 토론하곤 하였다.

지부 사무실이 문을 열다

1904년 무렵,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100명 남짓한 사람들이 「시온의 파수대」지를 받아 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멜버른’에 ‘협회’의 지부 사무실을 조직하고 「만인의 설교」와 다른 책자들에 ‘오스트레일리아’ 지부 사무실 주소를 넣어 배포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았다.

초대 지부 조직자인 ‘E. C. 헤닝즈’는, 지부가 운영된 지 8개월 반 만에 ‘빅토리아’ 주의 「시온의 파수대」 예약자가 18배나 늘어났다고 발표했다. 한 예약자는 책자들의 우송료로 사용해 달라고 10‘파운드’(당시에 미화로 40‘달러’에 해당함)를 책자 기금으로 기부하였다. 형제들은 이 금액으로 4,800봉이나 우송할 수 있었다! 주소와 이름들은 어떻게 입수하였는가? 형제들은 선거인 명부에서 명단을 뽑아 100봉 당 10‘센트’(미화)의 비용으로 이 나라 변두리 지방까지 「만인의 설교」를 수천부 우송했다.

친구들이 기차 차창 밖으로 소책자 뭉치를 던졌을 때, 철길 주변에 있던 노동자들과 적적한 시골 사람들이 다가오는 ‘왕국’에 대한 소식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진리의 씨들이 얼마의 사람들의 기름진 마음의 밭에 뿌려지게 되었다. 왕국 소식이 담긴 수천 ‘톤’의 책자들이 우편함 속에 넣어졌다. 토요일 오후가 되면, 열정적인 성서 연구생 집단들은 흔히, 「월간 성서 연구생」 책자를 각각 500부까지 배포하곤 하였다. 그 책자에는 집회들을 소개하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들은 도시의 선창에 정박하고 있는 선박들도 방문하였다. 그리고 신문들과 정기 간행물의 한 난에 주간 설교가 게재되었다.

1907년에는 ‘멜버른’ 동부의 ‘조오지’ 가에 있는, 모양이 똑같고 나란히 서 있는, 소유주가 다른 두 채의 집을 포함한 부동산을 매입하였다. 당시의 ‘벧엘’ 가족이 이 건물에 거주하게 되었다. 사무실은 결국, ‘멜버른’의 ‘콜린즈’ 가에 있는 한 건물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오지’ 가 20-A번지의 그 집 뒷편에는, 형제들에게 ‘태버어내클’이라고 알려지게 된 작은 건물(실제로는 낡은 외양간)이 하나 있었다. 1925년에는 미국으로부터 수직식 ‘미엘’ 인쇄기를 한대 받게 되었다. ‘윌리엄 쉬나이더’ 그리고 후에는 ‘버어트 쉬어물’이 그 ‘태버어내클’에 설치한 인쇄기를 운전하였다. 여기서 인쇄된 책자들과 기타 서적이 ‘오스트레일리아’ 전역과 ‘뉴우지일랜드’까지 보내졌다. 그 이전에는 모든 인쇄가 외부에서 행해졌었다. 초창기부터 ‘멜버른’ 회중(‘에클레시아’)은 ‘콜린즈’ 가에 있는 ‘마소닉 호올’을 집회 장소로 사용했다.

충성심이 시험을 받다

1908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조직에 한 차례의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1910년의 「파수대」지에 실린 한 보고에서 지적되었듯이, 자진 봉사가 느슨해졌다. 「파수대」지의 보고에 의하면, 지부 조직자 ‘헤닝즈’가 이탈하여 “‘멜버른’ 사람들을 한 무리 데리고 나갔다.” 연합했던 100명 가운데 20명만이 확고한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한 시험을 인내한 ‘에드워드 넬슨’은 그 이탈자들에 관하여 ‘러셀’ 형제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그들 중 다수는 (‘협회’의 출판물을) 조금도 읽지 않으며, 진리보다는 능변에 이끌려 그[‘헤닝즈’]의 집회로 가버렸읍니다. 그들 중 일부는 ‘파로우시아’(임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근래에 들어 온 사람들은 아직도 사람들에게는 불멸의 영혼이 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읍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조직을 번성시켜 오는 동안, ‘헤닝즈’의 무리는 오래지 않아 사라지게 되었다. ‘러셀’ 형제는 ‘R. E. B. 니콜슨’을 ‘헤닝즈’의 후임으로 지부의 총무겸 재무로 임명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밭으로 개척해 들어감

1910년에 미국인 ‘콜포오처’ ‘아아더 데이비’는 한 상자의 서적을 그의 자전차에 싣고서,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아’ 남부의 사람들에게 성서 진리를 전해 주기 위해 출발했다. ‘아아더 윌리엄즈’는 그가 ‘돈니브루우크’에 도착하게 된 것을 무척 기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데이비’는 체격이 작고 등이 굽은, 나이가 60이 넘는 연약한 사람으로 결핵을 앓고 있었읍니다. 여호와께 대한 그의 열정과 충성은 놀라왔읍니다.” 이 무렵 ‘윌리엄즈’는 다가오는 이방인의 때의 끝에 관해 열정적으로 선포한 이유로, “1914년에 미친 노인”이란 별명이 붙었다.

형제들로부터 격려의 말이 사방에서, 심지어 바다 건너에서도 왔다. 1912년에 ‘화이트 스타아 라인’호의 선장 ‘존 스미스’는 자기 배를 정박시키면 가급적 빨리 회사 일을 마치고 나머지 시간은 형제들을 격려하고 성서 강연을 하는 데 바치곤 했다. 동부 해안 지방의 ‘브리즈베인’으로부터 서부의 ‘퍼어드’에 있는 회중들은, ‘스미스’가 이 회중에서 저 회중으로 형제들의 활동에 관한 소식을 전해줌에 따라, 이 나라 전국에 있는 형제들과 연합되었다.

1914년 무렵 ‘오스트레일리아’의 밭은, 21명의 ‘콜포오처’들이 선두에서 사업을 이끌어 감에 따라, 멀리 그리고 광범위하게 개척되어 나갔다. 이 나라 전국의 약 35개 신문이 (‘협회’의) 설교를 실었고,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우지일랜드’에서 「파수대」지를 예약한 사람은 908명이었다. 이 밭에는 씨가 잘 뿌려져 있었다. 1906년의 「시온의 파수대」지에서 이렇게 지적한 바와 같다. “밭의 이 부분에서 가장 좋은 성과를 거두는 날은, ‘콜포오처’ 한명이 하루에 「성경 연구」의 주문을 105권이나 맡기도 하였다. 그 중 103권은 후에 한 나절 동안에 배달되었다. 이 ‘콜포오처’는 연속 두달간을, 하루 평균 50권이나 배부하였다.”

“알곡”을 체질하는 일

그 절정의 해인 1914년이 다가왔다. 세계 대전이 터짐에 따라, 여호와의 백성들은 사업의 아주 극적인 단계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천연색 성서 ‘슬라이드’와 영화로 설명된 「창조의 사진극」은, 이미 ‘왕국’의 자녀들에게 공급되고 있는 영적 양식을 크게 증가시켜 주었으며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 진리를 배웠다.

사진극의 상영과 서적 제공으로 감수성이 좋은 마음에 뿌려진 진리의 씨들에 물을 주어야 했다. 형제들이 관심을 나타낸 사람들로 서적 연구 집단을 조직하기 위해 방문함으로써, 양치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선임된 자매들이 관심자들을 함께 모으면, 형제들은 가정 집에서 열리는 집회를 사회하면서 질문에 대답하고, “삼 세계” 등등의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사진극이 처음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후에도, 양치는 일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1915년에 지방적으로 준비되어 ‘멜버른’에서 열린 한 대회에는 250명이 참석하였고, 14명이 침례를 받았다.

초창기에 있은 이러한 한 대회의 마지막 회기에 관해 읽으면, 재미있다. 형제 자매들은 모두 원형으로 둘러서서 손뼉을 치면서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라는 노래를 합창하였으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리고는 싱싱한 포도를 담은 쟁반을 돌렸다. 이것을 애찬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하여 형제 자매들이 서로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우정을 즐겼다.

가슴 아프게 하는 시련 속에서도 인내하고 믿음을 지킴

1916년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점점 밝아지고 있던 ‘왕국’ 활동의 전망은 다시 적의의 불꽃이 일게 하였다. 위기의 조짐이 조직 내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지부의 총무 ‘니콜슨’은 ‘러셀’ 형제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오스트레일리아’에 전해졌을 때, 모두가 느꼈던 감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나는 그를 사반세기 이상이나 사랑해 왔읍니다. 그가 하는 일 때문에만 아니라 그의 아름다운 성품 때문이었읍니다.” ‘러셀’ 형제의 죽음은 ‘니콜슨’에게 불시의 타격이 되었다. 나중에 ‘러더포오드’ 형제가 협회장으로 임명되자, 그는 그것이 자신의 사견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직을 떠나버렸다.

‘니콜슨’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존경받고 있던 터인지라, 그가 이탈할 때 회중의 대부분의 성원들을 데리고 나갔다. 그는 또한 ‘협회’ 재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재산 증서도 가지고 갔다. 그 때문에 충성스러운 형제들은 ‘벧엘’ 집을 이루고 있는 인접한 집들 중의 하나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그럭저럭 꾸려 나갔다.

‘제인 니콜슨’ 자매는 자기 남편이 이탈할 때 그에게 가담하지 않았다. 이 연약한 그리스도인 여인은—남편에게 버림받고 또 남편이 진리를 버리는 이중적인 비극을 경험한—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처럼 낙담할 상황에 처하면 많은 여자들은 굴복해 버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믿음이 약해졌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제인 니콜슨’ 자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1950년대에 죽을 때까지 헌신적인 전 시간 봉사자로서 계속 일했던 것이다. 그와 그의 ‘파이오니아’ 짝인 ‘에니드 더프’는 ‘빅토리아’ 주 전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 다른 지역에서, “니키와 더프”란 애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30년대 중반에 ‘니콜슨’과 ‘더프’ 자매와 더불어 ‘파이오니아’ 집단에 속했던 한 형제는 그들의 초창기 시절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도보로 전파하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으며, 여러 해 동안 철도 연변의 마을들에서 봉사했읍니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한 마을로 가서 호별 방문을 하면서 숙소를 찾았고, 그리고는 숙소로 정한 집을 봉사의 근거지로 삼았읍니다. * 그들은 가능한 한 그 마을 주변 깊숙이 걸어 들어갔읍니다. 그들은 철길 주변에 있는 마을들을 다 봉사할 때까지, 한 마을에서 다음 마을로 옮기곤 하였읍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발견한 관심자들을 돌보기 위해 재방문을 하였읍니다. 그들은 어떤 마을에서는 두 차례, 세 차례 증거를 하였읍니다. 수년간 그들의 충실성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지칠줄 모르는 열심과 그리스도인 태도에 감명을 받은 한 사람이 그들에게 ‘모델 A 포오드’차를 한대 선사하였으며, 그것을 우리 집단에서 사용했읍니다.”

이들 자매들은 믿음과 인내에 있어서, 특히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성실성의 비슷한 시험과 시련을 직면하는 모든 사람에게 훌륭한 귀감이 된다. 이들 자매들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이 마침내 사망하였을 때, ‘저희 행한 일이 따르리라’고 지칭된 사람들 가운데 그들도 포함되었을 것임을 확신한다.—계시 14:13.

시기에 적절한 조정

한 동안, ‘니콜슨’은 ‘협회’의 자금을 잘못 사용하고 있었다. 순례자 ‘에베네제르 브루우스터’는 ‘러더포오드’ 형제에게, “‘니콜슨’이 ‘협회’를 반대하고 있음. 도움 바람!” 하고 전보를 쳤다. 다음과 같은 회신이 왔다. “‘니콜슨’을 직위 해제함. ‘죤스턴’이 남‘아프리카’로부터 돌아올 때까지 ‘브루우스터’를 임명함.”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인 “‘엡’ 아저씨”로 불리던 ‘브루우스터’는, 1917년부터 1918년까지 ‘죤스턴’ 형제가 남‘아프리카’로부터 돌아올 때까지 거의 1년 반 동안 ‘협회’의 일을 돌보았다. 이제 폭풍은 잠잠해지고 있었고, 반역자들의 다수는 자신들을 분리시켰다. 얼굴에 커다란 미소를 지으며 행복한 표정과 겸손한 영을 가진 신임 지부 감독자 ‘윌리엄 죤스턴’은, 형제들에게 마치도 여름철에 내리는 소낙비처럼 생기를 주었다.

‘죤스턴’ 형제는 ‘뉴우지일랜드’를 방문하던 차 ‘모오드 무레이’를 만났고, 그들은 1923년에 결혼했다. ‘무레이’ 자매는 1910년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러셀’ 형제의 강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1912년에 ‘뉴우지일랜드’로 왔었다. ‘죤스턴’ 형제와 결혼을 한 후,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벧엘’ 가족과 연합하게 되었다. 백발이 성성한 이 “‘모오드’ 아줌마”는 87세의 나이로 여전히 이곳에서 활기차게 봉사하고 있다.

계속 고조된 전쟁의 열기로 인해, 정부는 1917년에 「종말을 고한 비밀」 책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형제들은 그 책 가운데 단지 몇 ‘페이지’만이 거부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그 부분을 잘라내고 이들 몇 ‘페이지’ 없이 그 출판물을 계속 배포하였다. 그 지면들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그 부분을 읽고자 하는 호기심을 유발시켰다. 한 육군 대위는, 자기는 그 책을 원하지는 않지만, 잘라낸 ‘페이지’를 보내주면 기꺼이 5‘실링’을 기부하겠다고 한 전도인에게 말한 일도 있었다!

강화된 기간

1919년 ‘오하이오’ 주 ‘시다포인트’ 대회에서 ‘러더포오드’ 형제는 순례 대표자 ‘J. P. 맥퍼어슨’을 ‘오스트레일리아’로 특파했다. 그는 “세상은 끝났다—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란 연설 골자를 가지고 왔다. 여섯명의 연사가 이 나라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청중들에게 이 연설을 했다. 여러 도시에서, 신문들은 종종 한면의 절반을 할애하여 그러한 강연 내용을 게재하였다. 참석자수는 때때로 1,500명에 달했고, 500명 이하로 떨어진 예는 드물었다. 연설이 끝난 후, 관심이 생긴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서적을 받아감으로 열렬히 호응하였다.

1919년에 ‘스코틀랜드’에서 한 가족이 ‘퀴인즐랜드’의 ‘브리즈베인’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성서 연구생이었고, 재담이 있고 용감하고 결심이 강한 그의 아들 ‘리처드 킨닌먼스’는, ‘오스트레일리아’ 전국에서 여호와의 투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969년에 그의 지상의 행로를 마쳤다.

자기 아내 ‘로웨나’와 더불어 나중에 ‘파푸아뉴우기니’에서 아주 사랑받는 여호와의 봉사자가 된 ‘톰 깃토’는 특이한 방법으로 진리를 배웠다. 그의 누이동생 ‘마조리에’가 1920년에 ‘태즈메이니아’에서 진리의 지식에 이르렀지만, ‘톰’은 그것을 반대했었다. 그는 자기 어머니가 읽는 소책자에서 ‘지옥’이란 제목을 보고서, 겉표지 안쪽에다 빈정대는 투로 “부인, 지옥은 없소이다!”라고 써 놓았다. ‘모조리에’는, ‘그가 어머니의 귀중한 책에다 그런 말을 쓴 후 어머니가 그와는 절교를 하고 있었는데도 그는 그것을 잘 모르고 있었다!’고 농담을 한다.

여하튼, 그가 진리를 아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바로 그 소책자였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 그의 누이동생은 그의 침대를 정돈하다 ‘톰’의 베개 밑에서 그 소책자와 그의 성서를 발견하고는 놀랐다. 그 후로, ‘톰’은 감리교 주일학교에서 성서는 지옥불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머지않아, 그는 사임하고 진리를 받았다.

이 무렵, 1913년에 누이동생 집에 하숙을 하고 있다가 진리를 배운 ‘안네벡’이 새벽 2시에 ‘뉴우 사우드 웨일즈’ 주의 조그만 읍 ‘야스’에서 기차를 타곤 했다. 그는 목적지에 도착하여서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자기가 갈 수 있는 집은 모두 다 찾아가 증거를 한 다음, 밤 11시에 집에 돌아갔다.

왕국 전도인의 수는 꾸준히 증가했다. 1921년 무렵, ‘시드니’의 ‘뉴우 타운 호올’에서 전국 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300명이 참석했다. 1922년에 ‘M. A. 하우렛트’ 형제가 환영받는 방문을 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멜버른’의 ‘콜링우드 타운 호올’에서 하나의 대회를 가졌다. 당시 전세계의 다른 대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대회에서도 “왕과 그 왕국을 광고하고, 광고하고, 광고하십시오!”란 흥미를 자극하는 ‘슬로우건’을 내걸었다. 봉사 사업에 새로운 활력이 더해졌다.

‘라디오’ 방송을 이용함

“땅끝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널리 선포하는 데 온갖 가능한 수단을 다 사용하기 위해, 형제들은 1924년에 ‘태즈메이니아’의 ‘로운세스턴’에서 조그만 실험 방송국을 이용하여 무선 방송을 시작했다. 방송 내용은 ‘협회’에서 제공하였고, 한 형제와 그의 부인이 매 일요일에 그 내용을 방송 해설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 지부가 운영하는 ‘라디오’ 방송국들 중의 첫 번째 것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뉴우사우드 웨일즈’의 ‘뉴우카슬’에 있는 2HD 방송국이었다. 뒤를 이어 다른 세개의 방송국이 ‘사우드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 및 ‘퀴인즐랜드’에서 시작되었다.

20개의 ‘라디오’ 방송국이 동시에 ‘오스트레일리아’의 대중에게 왕국 소식을 방송으로 전하고 있었고, 대회 때에는 미국으로부터 중계하여 여호와의 백성들에게 많은 영적 양식을 전달해 줄 수가 있었다. ‘라디오’ 청취자들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해, 지방적으로 성서 연극들, 때때로 극중 인물이 20명이나 등장하는 연극들을 방송하기도 했다.

지부 사무실이 이사를 하다

1928년에 지부 감독자 ‘죤스턴’이 미국에서 개최된 한 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와서, ‘러더포오드’ 형제가 지부의 사무실을 ‘멜버른’에서 ‘시드니’로 옮기기로 결정하였음을 발표하였다. ‘시드니’는 여러 모로 보아, 유리하고 편리했다. 그리하여 지부 사무실은 1929년에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였다.

당시 ‘벧엘’ 가족은 11명의 형제 자매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스트라스피일드’, ‘베레스포오드 로우드’에 위치한 그 새로운 집은 주변 환경이 참으로 좋았다! 그후 얼마 안 되어 새로운 벽돌 건물을 하나 증축하였고, 거기에다 사무실과 발송부를 설치하였다.

1930년에 또 한 사람의 ‘스코트’인 ‘알렉산더 맥길리브레이’가 도착함에 따라, 지부 운영에 변화가 있게 되었다. ‘뉴우요오크’의 ‘협회’ 본부 역원들과 10년 동안 긴밀하게 일한 경험이 있는 그는 꿈과 패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우지일랜드’에서의 왕국 사업에 생기를 불어 넣었을 뿐 아니라, ‘피지’ 제도, ‘타이티’ 섬과 지금의 ‘파푸아 뉴우기니’ 섬,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지아’, ‘타이’, ‘버어마’ 그리고 심지어 ‘베트남’, ‘홍콩’ 및 중국에서까지 왕국사업을 확대하도록 도왔다. 지금은 이러한 광대한 지역을 13개 지부가 돌보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이러한 지역을 ‘오스트레일리아’ 지부 사무실이 관리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지부는 ‘협회’의 외돛배인 ‘라이트 베어러’ 및 진정한 ‘파이오니아’ 정신을 가진 사람들을 파견하여 이들 구역을 개척해 들어갔다.

경제 공황의 시기

1930년대 무렵,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66명의 ‘파이오니아’들과 400명의 전도인들이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1900년대 초기에 뿌려졌던 씨들이 싹이 터 회중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1930년대의 세계적인 경제 공황에 ‘오스트레일리아’가 말려들어감으로써, ‘여호와의 증인’들이 즐기던 영적인 번영뿐 아니라 이 나라의 경제 전망 역시 불투명해졌다.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의 ‘덴마아크’ 회중에서 장로로 봉사하는 ‘데이빗 워어드’는, 그러한 경제 공황중에 여호와께서 그의 가족을 돌봐 주신 가슴 뭉클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우리의 식품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부족했읍니다. 우리의 농산물 가격이 터무니없이 하락되었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농산물이 있는데도 전혀 판매할 수 없었읍니다. 보편적인 식품은 많았지만, 설탕이나 의복을 살 여유는 없었읍니다. 그런데 어떻게 점잖고 품위있는 복장을 하고 호별 방문을 할 수 있었겠읍니까?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말씀인 성서에서, 자선적인 친절을 베풀라고 교훈하십니다. 우리가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데도, ‘퍼어드’에서 형제 자매들이 우리의 주소로 보낸 헌 의복 소포 뭉치가 지방 철도역에 도착하곤 한 것을 보면, 형제 자매들이 얼마나 좋은 반응을 보였는가를 가히 알 수 있읍니다. 진리 안에 있는 다른 한 큰 가족이 우리의 인근에 살고 있었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의복들을 기꺼이 그들과 함께 나눠 입을 수 있었읍니다.”

‘파이오니아’들이 목소리에 힘을 더하다

경제 공황중의 여러 가지 재정적인 고난 속에서도 ‘파이오니아’ 봉사는 번창하였다. 여러 ‘파이오니아’들은 힘을 합세하여 집단 가옥을 이루어 시내에서 전파하는 본거지로 삼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활이 더 용이해졌으며 형제들은 종종 식품을 소포로 보내 기증해 주었다. ‘테드 세웰’이 말하는 바와 같이, 식품에 관한 한, 밀가루 부대와 맷돌이 ‘파이오니아’들의 생계 유지를 위한 필수 품목이었다.

대도시에 임명된 ‘파이오니아’들은,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듣도록 돕기 위해, 참으로 창의력을 발휘하였다. ‘시드니’에서 한 ‘파이오니아’ 집단은 시내 청과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를 접촉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시장은 주야로 24시간 개장하는 곳이었다. 매주 금요일마다 24시간 동안(중단없이) 증거하기 위해 조직했다. 서너 시간 동안은 자동차 집단이 임명되었다. 그들이 돌아오면, 다른 집단이 세 시간 정도 그들 뒤를 이어 봉사했다. 청과를 재배하는 농부들이 주로 ‘이탈리아’어를 말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파이오니아’들은 ‘이탈리아’어 소책자들을 준비하여 갔다. 오늘날 진리 안에 있는 ‘이탈리아’인 가족들 가운데는 그러한 ‘파이오니아’들의 봉사의 결과로 한 밤중에 진리를 배운 가족들이 더러 있다.

충실하고 끈기가 있었지만, ‘오스트레일리아’의 시골 ‘파이오니아’ 집단들 중 일부는 서툴고 성급해 보였다! 일부 집단은 꼭대기에 확성기를 장치하고 보통 천막을 친 낡은 대형 자동차나 ‘트레일러’를 사용하기도 했다. 각 성원은 자전차에 책을 싣고 다니면서 봉사했다. 일부가 ‘캠프’를 떠나 한쪽 방향으로 다니면서 가정을 방문하는 동안, 다른 성원들은 다른 방향으로 가서 그렇게 했다. 모두는 다음 장소로 옮겨 가기 위해 약속된 시간에 ‘캠프’로 돌아오곤 하였다.

서적을 저렴한 가격으로 전하거나 농산물과 교환하기도 했다. ‘파이오니아’들이 밤에 중심 ‘캠프’로 돌아올 때는 많은 경우에, 어떤 이는 감자를, 어떤 이는 호박을, 어떤 이는 계란을, 어떤 이는 육류를 받아오곤 하였다. 그러한 것은 식용품이었기 때문에, 돈보다 더 나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파이오니아’들은 의식주가 충분하여 만족하였으며, 그래서 증거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자기의 창조주를 기억함’

17세의 소녀였던 ‘마르조리에 프라이’가 처음으로 진리를 들은 것은 1930년대 초였다. ‘뉴우 사우드 웨일즈’의 ‘배더스트’에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한 농장에서 살고 있던 그는 자기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혼자 관심을 보였다. 그의 어머니와 일곱 형제의 심한 반대에도 개의치 않고, 그는 ‘배더스트’에서 열리는 주간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기울였던 특별한 노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오빠 중의 한 사람은 ‘프라이’가 영화관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오오토바이’에 태워다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프라이’가 집회가 열리는 집에 가기로 계획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출발 준비가 다 되었을 때, 그의 오빠는 태워다 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제 어떻게 집회에 갈 것인가?

‘마르조리에’는 즉시 작은 목장으로 내려가서 자기의 작은 조랑말에 안장을 채웠다. 그리하여 도착은 했는데, 한 형제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그는 아주 당황하게 되었다. “자매가 남자 복장을 하고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우리는 허락할 수 없읍니다!” 그 자매는 자기의 복장은 승마용 복장—여자용—임을 설명하였고, 그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가를 설명해 주었다. 물론, 그 자매는 허락되었다. 그리고 그가 집회에 참석하여 얻은 즐거움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프라이’ 자매는 진리 안에서 신속히 발전하였으며 아직도 10대의 후반인 그는 1932년에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 봉사를 계속하고 있으며, ‘윌리엄 모스’와 결혼한 이래 그는 서‘사모아’에서 봉사하는 즐거움을 누려왔다.

‘아아더 윌리스’는 19세의 나이로 ‘퍼어드’ 일대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1932년에, 그는 ‘오오토바이’를 타고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의 서남부 지방을 여행하면서 봉사했다. 그 이듬해에는, ‘차알즈 해리스’와 ‘조오지 롤스톤’이 그에게 가담하여 ‘파이오니아’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들은 그 주의 서북부 지방을 통과하여 북부 지방의 수도인 ‘다아윈’까지 갔다가, ‘퀴인즐랜드’로 횡단하는 여행을 시작했다. 당시에 이 모든 지역 즉 3,2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 안에는 왕국회관이 하나도 없었다. 이 형제들이 그 여행을 하는 데는 넉달이 소요되었으며 그러한 지역들 가운데 일부는 그때 비로소 좋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윌리스’ 형제는 나중에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의 ‘핑겔리’에 정착하였고, 거기서 그는 주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으로 구성된 회중이 형성되도록 도왔다.

광대한 구역에서 증거하는 일

강건한 ‘파이오니아’ ‘오오브레이 박스터’는 축음기를 사용하여 전도하던 시기에, ‘퀴인즐랜드’의 중부와 북부의 수천 평방 ‘마일’에 달하는 구역에서 전파한 일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축음기를 탄력성 있는 고무로 쌌고, 또 울퉁불퉁한 도로 위를 갈 때 충격을 받아도 축음기의 ‘픽업’이 부러지지 않도록 그것을 끈으로 묶었읍니다. 우리가 증거한 곳 중에는 재미있는 곳도 더러 있었읍니다. 하룻밤을 ‘캥거루’ 사냥군과 함께 지낸 일이 있었는데, 냄새를 풍기는 수백장의 ‘캥거루’ 가죽으로 둘러싼 오두막의 흙 바닥에서 잠을 잔 일도 있었읍니다. 잠을 이루려고 애를 썼지만, 바깥에서 ‘딩고’개[원주민의 야생개]들이 짖어대는 바람에 쉬이 잠을 이룰 수가 없었읍니다.”

이 지역의 회중들을 방문하다가 ‘박스터’ 형제는 한번은, 심한 홍수로 인해 도로들이 유실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개천들이 홍수로 인해 범람하였고 어떤 곳에서는 수목이 물에 잠길 정도로 물이 불었기 때문에, ‘박스터’ 형제와 대화를 나눈 그 지방의 한 사람은 며칠 전에 지나간 ‘밴’ 자동차에 대해 염려를 표명했다. 그 차는 바로 한 ‘파이오니아’ 집단이 타고 간 것임을 알고서, ‘박스터’ 형제는 걱정이 되었다. 그는 그들을 뒤따랐다. 범람하는 개천을 만나면 헤엄쳐 건넌 다음 계속 걸었다. 이윽고 그는 먹을 것이라곤 하얀 밀가루 조금 밖에 없는, 꼼짝 못하고 갇혀 있는 그 집단을 찾아냈다. 그와 다른 형제들은 그러한 개천들을 헤엄쳐 건너 되돌아와서 식품을 구해 가지고서는 통 속에 넣어 자매들이 있는 곳으로 운반해 갔다.

이 ‘파이오니아’ 집단은, 나중에 일본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그곳 ‘워치 타워’ 지부에서 일하고 있는 ‘퍼어시’와 ‘일마 이즐라우브’ 그리고 지금은 ‘파푸아 뉴우기니’에서 자기 아내 ‘글라디스’와 같이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있는 ‘노르만 벨로티’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이 집단에는 나중에 ‘오오브레이 박스터’ 형제와 결혼한 ‘비이트라이스 벨로티’도 끼어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용맹스러운 ‘파이오니아’들이 많은 열매를 맺고 있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초창기의 ‘파이오니아’ 사업은 많은 열매를 맺었다. 그리고 여호와의 백성의 회중들은, ‘퀴인즐랜드’의 여러 읍들과 도시에서 성장했다.

멀리 외진 지역에서

일찌기 1929년에, ‘클렘 데스캠’과 그의 짝 ‘빕 푸시’는 ‘애들레이드’의 반경 100‘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사우드 오스트레일리아’ 주 전 지역을 다니며 전파하였다. 이처럼 씨를 뿌린 일은, 후년에 회중들과 격지 집단들이 형성되는 길을 터주었다.

1932년에 ‘렌 링크’는, 지역 봉사 책임자 ‘버어트 호오턴’의 ‘파이오니아’ 봉사에 대한 열정적인 연설을 들은 후, ‘파이오니아’ 봉사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로널드 페인’, ‘윌리엄 토링턴’ 및 ‘수투아트 켈티’와 더불어, 1933년에 ‘사우드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을 다니면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했다. 그 해 후반에 ‘토링턴’ 형제와 ‘켈티’ 형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심장부에 위치한 ‘앨리스 스프링’을 방문하였다. 도중에 그들은 ‘애들레이드’의 북방 약 1,000‘킬로미터’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윌리엄 크리이크’에서 한 ‘호텔’ 주인을 만났다. 이 첫 접촉은, 그가 진리를 배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사람 ‘차알즈 버언하아트’는, 그가 아래 지하실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는 동안, ‘켈티’ 형제의 목발이 ‘호텔’ 마루에서 쿵쿵 소리를 내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72세의 나이로, ‘버언하아트’ 형제는 벽지에서 사용하기 위해 헌 자동차를 한대 샀다. 그는 그후 15년 동안 자기 차를 타고 다니면서 아주 먼 일부 시골 벽지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했다. ‘윌리엄 크리이크’에 있는 자기의 상점과 ‘호텔’을 팔기 전에, 그는 어떠한 환경하에서든지 왕국의 권익을 첫째로 두는 훌륭한 본을 세웠다.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는 ‘도널드 맥클리인’은, ‘버언하아트’ 형제를 자기가 처음 방문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윌리엄 크리이크’에 도착했을 때, 나는 기차가 상당한 시간 정차해 있는 동안 사람들이 찬 맥주를 구하기 위해 ‘버언하아트’의 ‘바아’로 달려간 것을 알게 되었읍니다. 그 ‘바아’에 들어서면서, 나는 그것이 신권적으로 치장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기뻤읍니다. 한쪽 벽에는, ‘세계의 희망인 여호와의 천국을 선포하는 「파수대」지를 읽으시기 바랍니다’라고 권하는 커다란 간판이 하나 걸려 있었읍니다. 「깨어라!」지를 읽어 세상의 동정에 깨어 있으라고 사람들에게 권하는 또 다른 간판이 눈에 띄었읍니다. 그 ‘바아’의 ‘카운터’에는 잡지며 책자며 장정한 책들이 더미로 쌓여 있었읍니다.

“마침내 모두가 맥주를 다 마시고 나자, ‘버언하아트’ 형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읍니다. ‘신사 여러분, 제 말씀을 잠간 들어주시겠읍니까? 오늘날 이 지구 상에서 가장 훌륭한 잡지를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가 정중하고 대담하게 증거를 한 후, 30명 각자는 기부금을 내고 잡지를 받은 다음 맥주를 담은 부대를 어깨에 메고 기차로 돌아갔읍니다. 그 ‘바아’에서 ‘버언하아트’ 형제의 그리스도인 명성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로 불경한 일이나 누추한 언사를 삼가한 것은 특이한 일이었읍니다.”

지금은 거의 90세가 된 ‘버언하아트’ 형제는 멀리 떨어진 벽지를 더는 방문할 수가 없지만, 그는 아직도 ‘애들레이드’에 있는 자기 집 주변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있다.

벽지에서 ‘파이오니아’를 하는 일

벽지 ‘파이오니아’인 ‘조우 벨’은 자전차를 타고 시골 지역에서 봉사하던 한 ‘파이오니아’로부터 진리를 배웠다. 첫 접촉이 있은 지 며칠 안에 그는 증거를 시작했다. 그는 ‘퀴인즐랜드’의 ‘브리즈베인’의 서북방 480‘킬로미터’에 있는 가정들을 방문하였는데, 당시 여행할 때 위험했던 점들 중 얼마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제로 길이 나 있지 않은 모래 언덕이 계속되어, 나는 여러 곳에서 자전차를 메고 가야 했읍니다. 그러한 여행 중 얼마는 아주 위험했읍니다. 탁 트인 들판을 여행할 때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떼지어 다니는 들소들뿐이었읍니다. 그리고 그들은 호기심이 대단하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었읍니다. 그래서 이따금씩 나무 속에 피하여 들소들이 풀을 뜯으면서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읍니다.”

특히 외진 어느 지역에서, 한 목장 주인은 다음 인가가 있는 곳까지 40‘킬로미터’를 타고 가도록 말을 한 마리 빌려주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은 “자전차를 타고는 절대로 그곳까지 못갈 것이오!” 하고 말했다. ‘벨’이 그 다음 인가에 도착했을 때, 주인 ‘잭 캐레이’는 밖에서 자기의 소떼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의 부인은, ‘벨’ 형제가 남겨 놓은 책과 목록을 자기 남편에게 전해 주겠다고 말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시드니’에서 있은 한 대회에서, 바로 그 ‘잭 캐레이’는 자기를 위해 남겨 놓았던 그 책을 보고 자기가 진리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조우 벨’을 찾았다. 그는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지부에 편지했었으며 이제는 헌신한 한 형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파이오니아’ 중의 ‘파이오니아’

벽지에도 “좋은 소식을 전해야겠다”는 결의와 끈기로, ‘벤 브리켈’은 이름나 있었다. 수십년 동안 그는 격지 ‘파이오니아’로서 멀리 떨어진 시골 벽지에서 바쁘게 일했다. ‘브리켈’ 형제는 1932년에 ‘뉴우지일랜드’로부터 와서, 이 초창기의 충실하고 강인한 ‘파이오니아’ 집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1974년에 일생을 마칠 때까지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였다.

‘브리켈’ 형제가 마음껏 즐겼던 다채로운 생활과 경험의 대표적인 부면을 여기 소개한다.

“1932년 8월 초에 나는 ‘퀴인즐랜드’의 ‘타운즈빌’을 떠나 ‘카아펜테리아’ 만의 ‘노르만턴’까지 가는 1,300‘킬로미터’에 달하는 여행을 시작했읍니다. 60권의 대책, 얼마의 소책자와 잡지 그리고 갈아 입을 의복, 두장의 담요, 약간의 식품 및 조그만 물통 하나를 자전차에 싣고서 나는 ‘그레이트 다이빙 레인지’의 ‘폭스’ 산을 넘는 첫 장도에 올랐읍니다. 경사도가 3분의 1인 비탈길을 따라, 오른손으로는 무거운 짐을 실은 자전차의 ‘핸들’을 잡고 왼쪽 어깨로는 짐을 밀고 하여 ‘폭스’ 산을 1.6‘킬로미터’ 오르는 데 9시간이나 걸렸으며, 그것은 무척 힘드는 일이었읍니다. 그 산 꼭대기에 있는 조그만 마을 사람들에게 증거를 하고, 그들 중 한 집에서 좋은 대접을 받고, 하룻밤을 묵은 후 그 다음 날 나는 반대 편의 가파른 비탈길을 따라 내려갔읍니다.”

수년 동안에 걸쳐, ‘브리켈’ 형제는 수많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과 접촉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어느 모임에서 연설을 하고 난 후, 청중은 모두, 내가 그들에게 성서로부터 알려 준 진리에 대해 뜨거운 감사를 표하기 위해 앞으로 나왔읍니다. 다른 한번은 ‘캠프’ 안이 캄캄하였는데도, 내가 도착한 지 몇분 안에 50명이나 되는 원주민이 강연을 듣기 위해 모여 들었읍니다.”

봉사에 온종일을 보내며

당시 자동차를 가질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험준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시골 지방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년 동안 ‘벧엘’ 가족 성원으로 봉사한 ‘알란 홀토오프’는 왕국 봉사를 위해 자기의 자동차를 사용한 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앞 좌석 밑에 연료 ‘탱크’를 실었기 때문에, 연료를 넣을 때는 그 좌석을 들어내야 했읍니다. ‘타이어’는 품질이 좋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툭하면 빵꾸가 잘났읍니다. 종종 길가에서 ‘튜우브’를 때워야 했으며, 때운 곳이 말라 ‘튜우브’를 다시 ‘타이어’속에 집어 넣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읍니다. 가파른 언덕을 오를 때는, 이따금씩 차를 돌렸다가 다시 올라가야 했읍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기름 ‘탱크’속에 있는 연료가 압력 때문에 밀려 ‘엔진’으로 흘러들어가지 않을 것이었읍니다. 전파하는 하루 일과는 흔히 새벽 4시 경에 집을 나가 저녁 8시 경에 읍에 도착하는 것으로, 읍내에서 온 종일 증거하고 어두워진 후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읍니다.”

험준한 시골 벽지에서의 생활은 대개 여자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네타 푸시’는 여호와의 ‘파이오니아’ 종으로서 50년 이상을 그러한 역경을 인내하면서 농부들과 또 양의 우리에서 양털을 깎는 사람들에게 축음기를 틀어 주면서 증거하는 일을 했다. 그는 종종 무거운 축음기와 봉사 가방을 들고 걸어서 강을 건너야 했다. ‘모우리츠’ 가족의 충실한 어머니이자 아내인, ‘네타’의 언니 ‘글라디스’는 ‘뉴우 사우드 웨일즈’의 ‘보우럴’ 구릉지에서 팔이 한쪽뿐인 자기 남편과 더불어 활동적으로 봉사하면서 일곱 자녀를 길러냈다. 가족 모두가 구식 무개 차를 타고 봉사나가는 것은 보기가 좋았다. 현재 아들 ‘빕 모우리츠’는 ‘오스트레일리아’ 지부에서 조정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다른 아들들도 모두 ‘오스트레일리아’의 대도시 ‘시드니’에 있는 여러 회중에서 활동적으로 봉사하고 있으며, 그들 중 한 사람 ‘도우글라스’는 도시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다.

가뭄중에—그리고 우중에

한 집단의 ‘파이오니아’들이 서적을 서른 한 상자 싣고서, ‘시드니’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각 농가가 25만 ‘에이커’ 정도의 대지를 소유하고 있는, 인구가 드문 지역으로 향했다. 그 해 여름은 무척이나 무덥고 건조하였으며, 그 집단은 6주일 동안이나 충분한 물이 없어 목욕도 못했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마침내 비가 왔을 때는, 길들이 진창이 되어 지나갈 수가 없었다. 이 집단은 일주일 동안이나 한 장소에서 발이 묶인 일도 있었다. 이윽고 이동하기 시작하여, 8일 동안에 61‘킬로미터’나 여행을 하였다!

‘파이오니아’였던 ‘로버어트 벨’은 하루에 80 내지 96‘킬로미터’를 자전차로 여행하여 단지 다섯 내지 여섯 집을 방문한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자전차를 타고 다닐 때 개와 뱀이 가장 위험이 되었다고 말한다. 매섭게 차가운 어느 날 아침 7시에, 그는 자전차를 타고 초방문을 했다. 진흙은 아직 꽁꽁 얼어 붙어 있었고, 우편함이 있는 곳에서 집까지 가는 데 2시간이 걸렸다. 이들 지역에서는 우편함에서부터 집까지의 거리가 32‘킬로미터’나 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 집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은 후, ‘벨’ 형제는 다시 큰 길까지 돌아오는 모험을 하였지만, 이번에는 태양이 진흙을 녹여 놓았기 때문에 자전차를 타고 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자전차와 서적을 어깨에다 메고 운반해야 했다. 구두에 진흙이 달라 붙으면 무거워서 발을 옮길 수 없었기 때문에, 몇 발자국 걷고서는 멈추어 구두에 붙은 진흙을 떼어 내어야 했다. 그가 단지 한집을 방문하고 다시 큰 길로 돌아오는 데 무려 다섯 시간이나 걸렸다.

“새로운 이름”의 채택과 그 이후

1931년에 회중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란 새로운 이름을 채택한 때는 커다란 즐거움을 주었으며, 그것은 또한 그 이름과 일치하게 살아가야 할 도전을 제기해 주었다. ‘파이오니아’의 수는 계속 꾸준히 증가하였으며, 1932년 무렵에는 280명이 야외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왕국의 권익을 촉진하고 진리의 소식을 가지고 사람들과 접촉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기회를 다 포착하였다. 1932년에 그 유명한 ‘시드니 하아버 브리지’가 개통되어 사람들이 ‘오스트레일리아’ 전국에서 그 도시로 몰려 들었기 때문에, 왕국을 선포할 좋은 계기가 마련되었다. 나중에 ‘월리 우드’와 결혼한 ‘릴리 캐터치’가 당시 ‘증인’들의 집단과 연합하게 되었다. 전도인들은 일찌기 그 도시에 들어가 거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소책자를 제공하였다고 그는 설명한다. 한 열성적인 자매는 도로 가운데 있는 한 경찰에게 가서, 군중을 지도하는 데 사용하라고 소책자를 한권 그에게 주었다. 그는 그 책자가 교통 지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 경찰은 무리지어 몰려 다니는 사람들을 지도할 때, 미소를 지으면서 그 소책자를 흔들어 신호를 했다. 돋보이는 금시계 줄을 번뜩이면서 체구가 큼직한 한 사람이 전차에서 내려서는 얼굴을 두손으로 가리고는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나는 방금 미국에서 오는 길이오. 그런데 여기서도 여러분을 만나다니 생각만 해도!”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처음으로 진리를 알게 된 ‘어어니스트 클라아크’는 왕국 소식을 전하는 데 수년 동안에 걸쳐 사용되었던 여러 가지 방법들을 회상해 보면, 참으로 흥미진진하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따금씩 우리는 공격적이 되기도 하였고, 온유하게 대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때는 ‘증거 ‘카아드’’를 사용하여 말을 거의 하지 않는 때도 있었읍니다.” 집주인이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집주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말라는 제안을 받았던 때를 회상하면서, 그는 미소를 짓는다. 그래서 전도인은, 집주인이 적어도 왕국 소식을 들을 때까지는, 쉬지 말고 계속 이야기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한 집주인은 말을 막으려고 여러 번 시도하다가 결국에는 포기해 버렸다. 그는, 자기는 마치 “눌렸다가 확 튀어 오르는 용수철과도 같았다”고 설명했다. 그가 말을 끝내자, 그 여자는 마침내 입을 여는 것이었다. “그러나 형제, 나는 진리에 들어온지가 16년이나 되었읍니다!”

1932년 3월에 ‘협회’는 ‘시드니’의 교외 ‘아쉬피일드’에서 전국 대회를 개최할 마련을 하였다. 형제들은 읍 회관에 모여 교훈적인 영적 잔치를 즐겼다. 참석한 600명의 형제들에게 가두 증거의 이점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후 수년 동안 가두 봉사가 강화되었으며, 또한 확성기의 사용이 대두되었다. 폭도들의 반대가, ‘완가라타’, ‘빅토리아’ 및 ‘뉴우사우드 웨일즈’의 ‘탬워어드’에서처럼, 사제들에 의해 선동되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영국에서 여전히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는 ‘해롤드 길’은 폭도들을 대항하여 대담한 선전을 시작했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시드니’를 방문하다

1938년에 ‘J. F. 러더포오드’ 협회장이 ‘라이치하아트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한 대회에 참석차 ‘시드니’를 방문했다. ‘시드니 스포오츠 그라운드’에서 그가 공개 강연을 할 계획이 세워졌으며, 그의 연설을 한 조간 신문에 게재하고 ‘라디오’로 전국에 방송할 계약이 맺어져 있었다. 이 무렵 ‘러더포오드’ 형제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정치 문제에 관여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폭로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신문사와 ‘라디오’ 방송 당국은 그의 연설을 사전에 검사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형제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연설은 「자유 혹은 ‘가톨릭’교?」란 제목으로 된 소책자로 발행할 마련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 선명한 빨간색 표지의 “폭탄” 책자는 백만부나 인쇄되어 ‘오스트레일리아’ 전국에 배포되었다. 그 동안 ‘러더포오드’ 형제는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결과 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모였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전국에는 ‘증인’이 1,300명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실로 크나큰 증거였다.

‘러더포오드’ 형제의 방문 이유 중 하나는, ‘오스트레일리아’ 지부가 형제들에게 일자리를 주선해 주기 위해 어떤 상업적인 활동을 한다는 불평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러한 일들이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만족해 하였으며, ‘맥길리브레이’ 형제에게 그의 창안에 대해 칭찬을 해주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들 사업 때문에 문제와 어려움이 야기되었다.

확성기를 장치한 차들이 대두하다!

확성기를 장치한 여러 대의 차들이 도시며 읍이며 시골 방방 곡곡을 다니면서 좋은 소식을 방송으로 전했다. 자동차 지붕에 단 확성기와 차 안에 장치한 ‘터언테이블’로 짤막한 음악을 틀어준 후에, ‘러더포오드’ 형제의 성경 강연을 들려주었다. 그 강연을 들려준 다음에는, 형제들이 호별 방문을 하였다.

‘태즈메이니아’의 ‘호바아트’에서 확성기를 단 한 자동차는 조선소로 가서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삼백명이 넘는 공장 직공들에게 그 강연을 여러 차례 들려주는 데 사용되었다. 어느 날 형제들은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분명히 그것을 못하게 막으려고 경찰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전에 관심을 좀 보였던 친절한 한 어부가 선창에 배를 매어 두고 있었다. 형제들은 그에게 접근하였다. 그 사람은 자기 배에다 확성 장치를 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물론, 이 배는 사유 재산이었으므로 경찰은 간섭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준비된 ‘프로그램’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직공들은 계속 강연을 들었다. 그 반면 경찰은 실망한 나머지 신경을 곤두 세우고선 선창을 왔다갔다했다.

시내에서 쉽게 눈에 띈 차는 지붕에 커다란 확성기를 단, “빨간색의 공포”라고 불린 산뜻한 빨간색의 유개차였다. 지역 봉사 감독자와 순회 감독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벧엘’ 가족의 일원이 되었던 ‘버어트 호오턴’이 그의 아내 ‘비’와 더불어 이 특이한 차량을 수년 동안 이용하였다. 일년 동안 ‘멜버른’의 거의 모든 거리에서 거짓 종교를 폭로하는 연설이 울려퍼졌다.

‘호오턴’ 형제는 이 나라 모든 주에서 “아마겟돈 호오턴”이라는 애칭으로 알려져 있어, 이 일은 그에게 아주 적격이었다. 그런 애칭이 붙은 것은 그의 열정적인 연설과 ‘아마겟돈’이 임박하였으니 왕국을 첫째로 두라고 어디서든지 그가 형제들을 격려했기 때문이었다. ‘버어트 호오턴’과 그의 아내는 바로 그 일에서 훌륭한 산 본보기였으며, 그후 ‘버어트’는 1972년에 사망할 때까지 연로한 나이로 ‘벧엘’에서 충실하게 봉사했다. ‘호오턴’ 자매는 계속 ‘벧엘’ 가족의 일원으로 봉사하고 있으며, 여전히 78세의 나이에도 자기의 하루 일과를 수행하고 있다.

법정 안팎에서

‘파이오니아’였던 ‘조오지 파우엘’은 ‘버어트 호오턴’과 더불어 상당한 기간 동안 확성기를 통한 전파 활동을 함께 했다. ‘멜버른’에서 봉사한 후, 그들은 보다 작은 시골 마을들로 이동해 갔다. ‘휘틀레시아’에서 ‘파우엘’ 형제는, 말 한 마디 없이 자기 손가락 끝으로 5‘센트’를 서적 대금으로 주면서 서적을 받은 한 사람을 만났다. 서적을 받고서 그 사람은 “허가 없이 서적을 판 혐의로 이제 당신을 체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지방의 사복 경찰관이었다. 그리하여 그 날 법정이 개정되었고, ‘파우엘’ 형제는 소환되었다. 재판관은 그 사건을 먼저 심의하겠다고 말했다. 법정은 만원이었다. 참석한 모두에게 훌륭한 증거가 주어졌고, 그들이 ‘파우엘’ 형제에 대해 비우호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무렵 다른 형제들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법정이 개정되고 있는 동안, ‘버어트 호오턴’은 문틈으로 자세히 들여다 보고서는 자기 짝이 증인 석에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파우엘’ 형제는 “허가 없이 책을 판매한 일로” 10‘실링’(당시 미화로 2‘달러’에 해당함)의 벌금을 물게 되었다. 그는 벌금 납부를 거절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와 같았다. “나에게 10‘실링’이 있읍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지불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복음을 전파하고 있으며, 복음을 전파한 일로 벌금을 내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풀려났다. 그러나 수년이 지난 후 경찰은 그 벌금을 징수하기 위하여 ‘멜버른’에 있는 그의 누이동생 집으로 찾아왔다.

폭도들의 협박

분개한 구세군 회원들이 ‘퀴인즐랜드’의 ‘타운즈빌’에서 폭도를 일으켜 형제들을 대항하여, 확성기를 단 자동차를 뒤집어 엎겠다고 협박을 해왔다. 왕국 선포에 대한 반대가 증가하고 있었고, 종교 지도자들은 대중의 여론을 이끌어 여호와의 백성을 대항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 ‘마틸다 마아쉬’는 ‘태즈메이니아’에서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다가, 한 사제의 선동을 받은 폭도들이 그의 ‘트레일러’를 벼랑으로 밀어 바다에 빠뜨리겠다고 위협하는 봉변을 당했다. 나중에, 일단의 분개한 군중은 ‘파이오니아’ 집단에게 커다란 돌멩이를 마구 집어 던졌다. 그리고 그들이 멀리 시골 지역으로 가서 증거를 하고 있는 동안, ‘트레일러’를 불태워 버렸다.

열정적인 전도인들이 확성 장치를 한 자동차를 타고 도시와 읍으로 다니면서, 왕국 소식을 방송으로 전파함에 따라, 그들은 종종 교직자들이 선동한 폭도들의 반대를 직면하였다. ‘로이드 배리’는, 그와 ‘톰 브라드버언’(당시 ‘시드니’ 회중의 감독자와 순회 감독자)이 한 대회에 참석 차 ‘뉴우 사우드 웨일즈’의 ‘가톨릭 메이트란드’에 있을 때 있었던 일을 회상한다. 마지막 순간이 되었는데, 지방 당국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읍 회관을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것을 취소해 버렸다. 그래서 공개 집회가 열리고 있을 때, 형제들은 확성 장치를 한 차를 읍 회관 밖에 세우고서 확성기를 통해 강력히 항의를 하면서 언론과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항의 연설이 끝나자, 많은 폭도들이 자동차 주위로 몰려 들어 그것을 뒤집어 엎으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 현장에 경찰관이 나타났다. 폭도들은, 그가 형제들을 체포해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물러섰다. 그러나 그 경찰관은 자동차 창문으로 머리를 넣고서는 “여보시오, 생명을 소중히 여기거든 빨리 빠져 나가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브라드버언’ 형제는 ‘엔진’의 회전 속도를 가속시켰다. 그러자 기적인듯, 군중 사이로 길이 트이는 것 같았다. 자동차의 발판에 그 경찰관을 손님으로 태운 채, 그 차는 쏜살같이 달렸다! 확성 장치를 통해 활동하던 시대에 이와 같은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대회장에서 폭도들을 대처하는 일

‘배리’ 형제에게 있어, 이것은 왕국에 대한 반대를 연속 3주간 대처하는 중 그 첫 번째 주였다. 다음 주말에, 그는 ‘뉴우 사우드 웨일즈’의 ‘리스모어’에서 개최된 한 대회 의장으로서, 장기간 동안 ‘파이오니아’를 했던 ‘아아더 윌리스’와 함께 봉사하고 있었다. “‘파시즘’ 혹은 자유”란 제목의 공개 강연은 60명의 지방 전도인들에 의해, 특히 ‘플래카아드’ 행진으로 널리 광고되었다. 모두들 ‘여호와의 증인’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가톨릭’교인들이 커다란 집단을 이루어 계획된 집회를 방해하기 위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의장이 ‘러더포오드’ 형제의 녹음 연설을 소개하기 위해 나갈 무렵에 대회장 뒤에는, 건장해 보이는 수백명의 남자들로 구성된 폭도들이 모여 있었다. 상황을 간파하고 난 의장은, ‘가톨릭’의 행동 대원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의 집회를 방해하기 위해 그때까지 사용했던 책략에 대해 노골적으로 말했다. 즉시 그 집단의 대변인은 의자 위에 뛰어 올라서서, “우리 종교에 대한 반대 언사를 중지하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쓸쓸하게 혼자 근무하고 있는 경찰관에게 의장은, “저 사람을 데리고 나가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이 경찰관은 여러 날 전에 가두 잡지 배부를 한다는 이유로 ‘윌리스’ 형제를 체포한 일이 있었지만, 이번의 경우에는 그 사람을 데리고 나갔다.

지도자를 잃은 그 군중은 이제 조용히 그 한 시간 동안 강연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강연이 끝나자, 그들은 소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성서 서적을 진열해 놓은 ‘테이블’을 뒤엎었다. 폭도 중 하나가 ‘플라스틱’ “악취탄”을 연단으로 던졌지만, 그것이 떨어질 때 의장은 ‘드롭킥’으로 그것을 잡아서 청중석 위로 날려 보내 폭도들 가운데 떨어졌다. 그것이 터지자—그들이 불쾌한 냄새를 맡아야만 했다. 이 무렵 경찰 증원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폭도들을 ‘여호와의 증인’들과 그들의 동료들로부터 분리시켰다. 그리하여 폭도들이 큰 소리로 야유를 하는 가운데, 그들은 대회장을 떠날 수 있었다.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 포고를 한 것이 바로 1939년 9월 3일 그 날 주말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더 많은 문제들을 가져다 주었다.

그 다음 주말은 ‘퀴인즐랜드’의 남쪽에 있는 ‘터웜바’ 시에서 열린 한 대회로 특징지워졌다. 이 대회 역시 ‘플래카아드’를 사용하여 선전하는 거대한 행진이 절정을 이루었고, 경찰은 모여든 폭도들로부터 형제들을 보호해 주었다. 선전 행진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배리’ 형제와 순회 감독자 ‘도우글라스 베그’ 형제는 시장 사무실로 소환되었다. 시장은, 조금 전에 두명의 ‘프로테스탄트’ 교직자가 자기 사무실을 방문하여 행진에 사용된 글귀 중 “종교는 올무며 사기다”라는 표어에 대해 항의하고 갔다고 그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들이 간 지 조금 후에는, 한 젊은 ‘가톨릭’ 사제가 주교의 전갈을 가지고 그를 방문했으며, [‘가톨릭’] 교회는 전쟁을 지지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이끌고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 다음 날에 시청 강당을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것을 취소시킬 것을 요구하고 갔었다. 그 시장은 그러한 이유를 들어, 우리가 강당을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계약을 취소해 버렸다.

계획된 시간에 확성기를 장치한 우리의 차가 시청 강당 밖에 주차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확성기로 선전하는 것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 대회는 공개 강연을 하지 못한 채 해산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 날 저녁에 그 지방 시의회 회의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형제들이 언론의 자유를 부정한 처사에 대해 형제들이 항의하는, 단도 직입적으로 강력한 문구로 항의서를 시의회에 제출할 기회가 되었다. 그 날 저녁에 있은 그 회의에서 우리의 항의서가 낭독되었고, 의원들은 그 내용을 자세히 토론하였다. 그들 중 절반은 언론의 자유를 지지했고, 나머지 절반은 시장을 지지했다. 그 다음 날 아침에는 그 항의서에 전문을 포함한 그 회의의 전체 내용이 지방 신문에 공개되었다. 이것은 ‘터웜바’와 그 인근 시골 지역 사람들에게 굉장한 증거가 되었으며 그곳 사람들 중 다수는 ‘증인’들을 두둔하는 말을 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왕국을 전파하는 일

전파 사업 위에 여호와의 풍성한 축복이 계속 내렸다. 그리고 매년 이 나라 전국에 걸쳐 대부분의 주요 도시에서 괄목할 만한 대회들이 개최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대회를 열기 위해 공공 회관이나 강당을 빌리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종교」 책이 발표된 1940년 7월에 열기로 계획된 대회장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시드니’에 있던 ‘벧엘’ 집 마당에 친 천막 밑이었다. ‘벧엘’ 집과 사무실에 인접한, 지금은 왕국회관과 주차장이 들어서 있는 곳에다 커다란 천막을 쳤다.

이 무렵 ‘플래카아드’ 행진 즉 “선전 행렬”은 왕국을 광고하는 특징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번 대회에서도, 하나의 광고 방법으로 이 선전 수단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대회 운영진이 모르게 경찰관들이 천막 밖 길가에 몰래 모여 있었다. 그들은 야외 봉사 광고를 주의 깊이 들으면서 ‘시드니’의 특정한 길 모퉁이와 교외 상가에서 모이기로 계획된 장소를 낱낱이 다 기록했다. 그리고는 그러한 장소들에 경찰을 파견하여, 형제들이 ‘플래카아드’를 몸에 두르기만 하면 즉시 체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한 형제는 그와 자기의 짝이 실수로 다른 길 모퉁이로 갔던 일을 상기한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그들이 가진 ‘플래카아드’를 몸에 두르고 선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전도인들이 자기들에게 와서 합세하지 않자, 그들은 자기들이 약속된 장소가 아닌 딴 곳에 와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약속된 길 모퉁이를 찾아 갔을 때, 거기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경찰관은 미소를 지으면서 맞이했다. “왜 늦었지요?” 그 다음 그는, 그들이 두르고 있는 ‘플래카아드’와 그들이 가지고 다니던 기치를 뺏고서는 그곳에 이미 와 있던 다른 형제들과 같이 자기를 따라 경찰서로 가자고 했다. 열명 내지 열두명의 형제들이, 행인들이 모두 잘 읽을 수 있게 안내판을 들고 가는 두 경찰관을 따라가는 것은 볼만한 행진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사실상, 이렇게 된 것이 형제들이 방해를 받지 않고 ‘플래카아드’를 두르고 선전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선전이 되었다!

새로운 사람들이 도착함

1940년 12월에 ‘월레이스 박스터’ 및 ‘퍼어시’와 ‘매쥐 던햄’이 ‘스트라스피일드’의 ‘벧엘’ 집에 도착했다. ‘박스터’ 형제는 1930년 이래로 ‘에스토니아’의 ‘탤린’ 지부를 돌보았었고, ‘던햄’ 형제와 자매는 ‘라트비아’ 지부에서 일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맹렬해지고 있었고, 또 ‘박스터’ 형제와 ‘던햄’ 부부는 영국 시민이었으므로 협회장은 그들에게 입국할 수 있다면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들어가라고 통지했다. 이 전시의 시련 중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봉사하고 있던 형제들은 이들 형제들의 노련한 경험을 대단히 감사하게 여겼다.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한 후 여러 해 동안, ‘박스터’ 형제는 ‘브리즈베인’과 ‘멜버른’에 있는 ‘협회’의 발송부에서 전 시간 봉사를 계속했다. 1948년에 그는 ‘벧엘’로 돌아왔고, 지금은 85세의 나이로 지부 위원의 한 사람으로 계속 봉사하고 있다.

‘던햄’ 형제와 자매는 즉시 ‘벧엘’ 가족으로 들어갔고, ‘던햄’ 형제의 오랜 인생 경험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아버지와 같은 태도와 조심스럽게 선정하여 사용하는 성서적 지혜가 담긴 그의 말은 당시 ‘벧엘’에서 봉사하고 있던 많은 젊은 형제 자매들에게 소중하게 여겨졌다. 그는 1951년 6월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던햄’ 자매는 계속 ‘벧엘’에서 봉사하고 있으며, 79세에 접어든 노령에도 불구하고 하루 전체 일과를 수행할 수 있다.

금지 소식을 들음

영국의 전쟁이 맹렬해 지고 ‘오스트레일리아’ 군대들이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수행함에 따라, 병적인 긴장이 고조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여호와의 백성들을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해 지는 것을 이용하여, 정치적으로 압력을 가하였고, 신문들을 통해 ‘여호와의 증인’의 사업을 금지하도록 했다. 여러 주 의회에서 정치인들은 연방 정부가 조처를 취하도록 거듭 촉구하였다. 법무부 장관 ‘W. M. 휴우즈’는 처음에는 이 압력을 저항하여 이 나라는 자유를 위한 전쟁을 하고 있다고 천명하였지만, 일부 시민으로부터 그 자유를 박탈하려는 목적을 물리칠 제안은 하지 않았다.

이 때에, ‘협회’는 ‘오스트레일리아’에 네개의 ‘라디오’ 방송국을 소유하고 운영하고 있었다. 얼마 안 가서 단단히 음심을 품은 한 신문사가, 이 방송국이 몰래 귀중한 정보를 ‘나찌’들에게 방송으로 전하고 있다는 밀고를 하였다. 이 고발은 전혀 법정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은 한 가닥의 증거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털면 먼지 안나는 곳이 없다는 켸켸묵은 속언에 따라 취해진 처사였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병적인 흥분이 사태를 일변시키는 것 같았다.

1941년 1월에 다음과 같은 위원회의 명령이 관보에 실렸다. “연방의 국방이나 효율적인 전쟁 수행에 저해되는 ·⁠·⁠· 개인, 법인 및 협회는 이로써 불법임을 선언한다.” 국가 보안법은, 그러한 단체는 무엇이든 해체시키고 그 재산은 정부가 몰수한다고 규정했다. 그 성원들이 연구나 숭배를 위해 모이는 것이 허락 안 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 조직에 속하는 책자나 기타 출판물을 인쇄, 배포 및 소유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러한 권한을 보유한 연방 당국은 1941년 1월 18일 토요일에 ‘스트라드피일드’에 있던 ‘협회’의 지부 사무실, 공장 및 창고를 장악했다.

하지만, 법무부 장관 ‘휴우즈’와 수상 ‘멘지스’ 간의 조절 미흡으로 인하여, 절박한 금지령의 통지가 여러 시간 전에 이미 형제들에게 전달되었다. 이 시간적인 여유를 이용하여, ‘벧엘’에 있던 형제들은 사무실에 있던 기밀에 속하는 것들을 치울 수가 있었다. 정부의 그러한 혼란에 관하여, 한 군 권위자가 논평한 것이 1941년 1월 18일자 ‘시드니’의 「모오닝 헤럴드」지에 실렸다. 그것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금지령을 내리는 데 있어서 믿기 어려운 대실수가 저질러졌다. 어떤 사람의 건물을 수색하려는 경고를 18시간 전에 미리 알리고 나서, 원하는 것을 찾으려고 기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부 사무실의 책임있는 형제들은, 이로써 천사들의 지도와 인도가 있다는 증거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전 통지를 받음으로써, 사무실에 있던 형제들은 서류와 기록 문서들을 건물에서 치울 수 있었다. 왕국 서적들이 ‘트럭’에 가득 실려 차례로, ‘벧엘’로부터 그 도시 전역의 은신처로 옮겨졌다.

그 뒤 이른 아침에 6대 가량의 검은색 ‘리무진’ 관용차가 이 건물에 도착했을 때, “벽장은 비어 있었다.” 실제로, 형제들에게 아주 긴요한 모든 서적은 발송부로부터 다른 안전한 곳에 옮겨져 있었다.

그 다음 주 ‘벧엘’ 가족 중 다섯명은 중립 문제로 투옥되어 각각 6개월 금고형을 받았다. 법정 측은 교직자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탄원을 묵살해 버렸다.

금지령하에서 봉사함

‘벧엘’ 가족이 계속 기거하는 것이 허락된 주택은 제외하고, ‘협회’의 모든 부서에는 자물쇠가 채워졌고 철조망이 쳐졌다. 이제 정부에 차압된 ‘협회’의 재산 중 아무 것도 옮기지 못하게 하려고 밤낮으로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구내로 출입할 때 가방은 모조리 수색을 당하였으며, 방문객들은 ‘벧엘’에 들어갈 허락을 받기 전에 용건을 말해야 했다.

보안 관계자들은 ‘타이프라이터’를 포함한 사무실 장비에 차압 딱지를 붙였다. 하지만, ‘벧엘’ 성원들은 밤에 천정을 통해 사무실로 들어가서 일부 장비를 옮기고 그 자리에 나무 더미로 채워 놓았다. 그래서 기계들이 그대로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지부의 운영이 다락에서 보이지 않게 계속되었다. 꽤 상당한 기간 동안 아래 마당에서는 경비들이 순찰을 하고 있었고, 위에서는 지부 직원들이 다락에서 비밀리에 일을 계속하였다! 자동차나 보안 관계자들이 접근해 오면 경고하기 위해 마당에는 여러 곳에 신호 장치를 부설해 놓았다. 때때로 자매들은 수상한 방문객이 오는 것을 살피기 위해 한 시간씩 교대로 형식적인 빨래를 하곤 하였다.

금지령이 내리자 ‘벧엘’에 있던 성서와 다량의 종이를 포함한 모든 서적이 모두 압수되거나 차압 딱지가 붙여졌다. 금지령이 내리기 직전에, 상당한 양의 「종교」 책, 「정부와 평화」 소책자 그리고 ‘러더포오드’ 형제의 마지막 성서 강연이 담긴 ‘레코오드’판이 ‘시드니’의 부두에 도착했다. 당시 ‘여호와의 증인’들을 뒤덮고 있던 암영 때문에, 세관측은 이 서적을 이 나라에 반입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래서 서적은 거기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금지령이 내리자, 관청에서는 누군가가 선창료를 물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대신, 이 모든 서적과 ‘레코오드’판을 ‘트럭’으로 실어 ‘벧엘’로 보내어 넓은 발송부에 쌓아 놓았다. 이 모든 서적 및 구하기가 힘든 인쇄 용지와 같은 값진 인쇄 관계 재료들이 더미로 쌓여 있음을 알게 되자 ‘벧엘’ 가족은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무장한 네명의 경비원들이 ‘벧엘’ 건물을 순찰하였고, 발송부와 인쇄 공장에는 차압 딱지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발송부 뒷벽은 드물게 사용되는 철로의 측선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밤에 에스겔 12:5-7을 기억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벽돌을 뚫고 들어갈 수 있었다. 안에서 형제들은 차압 딱지를 떼지 않고 간신히 마당으로 나가는 문들을 열 수 있었다. 그래서 ‘짐을 운반할’ 만반의 준비가 다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벧엘’ 봉사는 경비원들의 주의가 가장 소홀한 자정 이후에 시작하여 새벽 4시 가량까지 계속되곤 하였다. 한 형제는 네명의 경비원들을 모두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서 여러 ‘벧엘’ 건물과 연결된 감추어진 전화선으로 연락을 취하였다. 감시하는 형제는 그들이 자는 동안에는 계속 ‘경계 해제’ 신호를 하였다. 그러나 경비원들 중 하나라도 움직이면 즉시 경계 신호를 하여, 위험이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건물들을 조용히 닫아두곤 하였다.

한번은 ‘맥길리브레이’ 형제가 자동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보통 때에는 앞문에 있던 경비가 없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자동차 앞으로 가다가 그만 자기네들의 사무실에서 달려오는 두명의 경비원과 마주쳤다. 그는 두발의 총탄을 맞았다. 한발은 그의 어깨를 관통하였다. 그는 부축을 받아 ‘벧엘’ 건물 안으로 들어갔으며, 그의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 내렸다. 회복이 좋았지만, ‘맥길리브레이’ 형제는 6개월 후에 사망하고 말았다.

다른 지하 활동

형제들은 2년 반 동안 지하 활동을 계속했다. 전체 금지 기간 중에 「파수대」지가 단 한호라도 결간된 일은 없었다. 그 기간 동안에 장정한 책이며 잡지며 소책자며 기타 출판물들이 수만권 인쇄되었다. 인쇄의 질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본과 견줄 만한 것이었다. 금지 기간 중에 여호와의 백성은 신간서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으며, 완본의 「연감」 책도 매년 발행하였다.

지하 인쇄 시설로 발행된 모든 서적에는 “인쇄인 ‘조오지 깁’; 인쇄인의 주소는 ·⁠·⁠·”라는 간기(刊記)가 적혀 있었다. 그렇게 하여, 모든 인쇄물에는 인쇄인의 주소 성명이 있어야 한다는 요구 조건을 충족시켰다. 경찰은 ‘깁’ 형제를 백방으로 수색하였으나, 그가 있는 곳을 결코 알아낼 수가 없었다.—그가 출판 주소 바로 그곳에 살고 있었는데도! 이렇게 하여 ‘깁’ 형제의 이름은 이 나라 전국에 잘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928년 이래로 아주 사랑받는 ‘벧엘’ 가족의 한 성원으로 봉사해 왔으며, 지금은 85세의 노령인데도 여전히 인쇄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금지령으로 ‘워치타워 협회’의 서적이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회관에서나 다른 큰 집단으로 집회를 갖는 것까지 금지되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개인 가정 집에서 정규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호별 봉사는 성서만을 사용하여 계속되었다. 진실한 관심을 발견하면, 재방문을 하여 서적을 소개하였다.

성서만을 사용하여 정규적으로 호별 방문 증거를 하던 ‘멜버른’의 한 자매는, 집주인들이 전화로 경찰에 신고하는 일이 흔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경찰이 올 때까지 계속 말을 걸곤 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실례한다고 말을 마치고 난 후에, 그 자매는 나오면서 곧장 경찰관과 정면으로 마주치곤 하였다. 경찰은 오래 묵은 판에 박힌 절차를 시작했다. 즉 경찰은 그의 가방을 조사하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심문하고 금지된 서적을 하나라도 찾아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물론, 그들이 찾아낼 수 있는 것이라곤 성서뿐이었다! 흔히 그들은 전도인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가곤 하였지만,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우리의 이 자매는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한 경찰관을 적어도 두 사람은 기억하고 있다. ‘염려 마십시오. 몇 구획 떨어진 다른 곳에 가면 나을 것입니다. 거기는 당신을 반대하는 경찰관보다 당신을 지지하는 경찰관이 더 많이 있읍니다!’

금지령하에서도—1941년에 대회가 열리다!

1941년의 전국 대회—‘오스트레일리아’ 형제들은 그 대회를 갈망했다. 그러나 금지령이 내려져 있는데 과연 어떻게? 우리는, 여호와께서 금지된 상황에서도 그러한 대회를 가능케 하시고 축복해 주실 것인지 아닌지를 알게 될 것이었다. 날짜는 12월 25-29일로 정해졌고, 그 대회는 그 해 일찌기 ‘미주리’, ‘세인트 루이스’에서 열렸던 대회를 모방하기로 하였다. 그 어디에서도 적합한 시설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시드니’에서 약 29‘킬로미터’ 떨어진 ‘하아그리이브 파아크’에 있는 ‘협회’ 소유의 공터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전국에서 모여든 형제들은, ‘가솔린’이 배급제로 공급되었기 때문에, 주로 기차 편으로 왔다. 하지만,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당국은 우리의 대회 참석자들에게 철도 편의를 제공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래서 근 4,8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형제들에게는 대회에 참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같은 상황이었다.

서부 지방에 있던 형제들은 용기를 잃지 않고 자동차를 목탄으로 가게 하는 ‘가스’ 생산 장치를 하였다. 12월 11일 출발 시간까지, 그들은 9,600‘킬로미터’의 기나긴 고된 왕복 여행을 위해 자동차와 ‘트럭’을 아홉대나 준비하였다. ‘노오스맨’에서 ‘사우드 오스트레일리아’의 ‘페농’까지 1,160‘킬로미터’나 되는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 위로 가는 데 필요한 목탄을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왕국 목장에서 공급받았다. 거기서부터는 적어도 적합한 도로도 있고 읍들도 다소 있었다.

‘시드니’까지 여행하는 데 총 14일이 걸렸으며, 그 중 꼬박 일주일은 ‘널러보오’(“수목이 없다”는 뜻임) 평원에서 고초를 겪었다. 물이 부족하여 잔 먼지가 묻은 머리와 의복을 제대로 씻지 못했기 때문에 번뜩번뜩하였으며, 광물질이 많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먼지는 진흙 덩어리처럼 되었다. 자동차는 80‘킬로미터’를 가는 곳마다 목탄 연료를 재공급해야 하였다. 느림보 차들은 하루 24시간을 운행했다. 그 운반차들이 기어가는 듯이 광야를 횡단하는 동안 운전사들은 운전, 식사 및 수면을 교대로 했다.

그들이 사막을 지나기 전 마지막 읍에 다다랐을 때, 군경 연료 관계자들이 형제들의 비상 ‘가솔린’을 압수한 것은 관청이 얼마나 비열해 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처사였다. 그래서 형제들은 첫 번째 차가 목탄 ‘가스’로 시동이 걸릴 때까지 그것을 이삼 ‘마일’씩 밀고 가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그 차는 다른 차들이 시동이 걸릴 때까지 끌고가곤 하였다. 그러나 여행자들은 승리의 쾌감을 맛보며 제 시간에 도착하여 대회의 첫 회기부터 참석할 수 있었다. ‘널러보오’를 횡단하는 달구지 여행이 진행되고 있을 때 그 사실을 안 신문들은 아주 경멸적인 말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 전체 대표단이 무사히 ‘시드니’에 도착했을 때는, 이상하리만큼 침묵을 지켰다.

이 대회의 절정을 이룬 것은 「자녀」 책이 ‘오스트레일리아’어 판으로 발표된 일이었다. 이 책은 만 4개월 전에 ‘세인트 루이스’에서 발표되었었다. ‘맥길리브레이’ 형제는 그 책을 한 권 입수하자 즉시 “「자녀」 책을 인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지하 공장에서 그러한 임명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오스트레일리아’ 지부가 장정본을 출판한 적은 아직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겁을 모르는 인쇄 감독자 ‘맬콤 베일’의 감독 하에, 그 지하 조직은 일에 착수하였다!

사용된 인쇄 공장들은 겉으로 보기엔 보편적인 세속 인쇄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경찰이 때때로 와서 조사를 하였지만, 그들이 본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한밤중이 되면, ‘협회’의 인쇄 계획에 따라 포장 뭉치들이 나오곤 하였다. 동이 틀 무렵이 되면, 판권장까지 인쇄가 다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책들을 제본하는 것이었다. 형제들은 사용되지 않은 채 비어 있는 창고를 하나 빌려 밤을 이용하여 제본 장비를 거기로 운반했다. 형제 자매들이 밤낮으로 거기서 일하여, ‘브루클린’에서 출판한 것과 꼭같은 모양의 책을 만들어 냈다. 며칠이 지난 후 이웃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 지방 경찰에게 어쩌면 발각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것은 그 다음 날 밤중에 제본 장비 전체를 포장하여 ‘트럭’에 실어, 세 얻은 다른 창고로 옮겨야 할 신호가 되었다. 그렇게 하여 책을 제본하여 출판하는 과정은 여러 주일 계속되었다. 제본 장소를 16군데나 옮겨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의 보답으로, 형제들은 대회에서 발표할 준비가 완료된 그 책이 많이 공급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협회’의 서적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물론 그 책은 조용히 발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대회의 이른 아침의 한 회기 때에, 형제들은 여러 지역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개인 집으로 안내되었다. 각 장소에 모인 작은 집단에게 그 책이 발표되었다. 그 다음 「연감」에는 지부 감독자의 다음과 같은 보고가 실렸다. “일손이 압도적으로 부족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인쇄공들이 이 일을 온전히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주’의 힘 때문이었다. 어린이들은 각각 자기의 선물을 받게 되었고, 이 책 20,000권이 ‘오스트레일리아’ 전국에서 배포되고 있다.” 금지령 하에서도 무려 6천 명이나 그 대회에 참석하였다.

지부 운영에 변화가 생기다

그 대회가 있은 바로 직후인 1942년 5월 8일에 ‘벧엘’ 가족에게 24시간 안에 집을 비우라는 퇴거 통지서가 전달되었다. 군인들이 ‘협회’의 건물을 점령할 것이었다. ‘벧엘’ 가족 성원들은 인근 집에 거처를 정하였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1942년 1월 8일에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1942년 7월 22일에, ‘맥길리브레이’ 형제도 그의 인생 행로를 마쳤다. 이제 ‘필립 리이즈’ 형제가 지부 감독자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당시 26세였던 ‘리이즈’ 형제는 15살부터 ‘벧엘’에서 봉사했었다. 그는 지부의 발전과 늘 함께 해왔으므로, 지부의 일을 철저히 알고 있었다. 오늘날 그와 그의 아내 ‘마우디’는 영국 ‘런던’ ‘벧엘’ 가족의 성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사망하기 전에 ‘맥길리브레이’ 형제는 금지령의 유효성에 도전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최고 법원에서 법적 투쟁을 시작했었다. 동시에 꾸준히 항의서와 탄원서를 여러 관리들에게 보냈다.

자유를 얻기 위한 이 투쟁과 전도 사업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것에 분발하여, 전도인들의 활동은 계속 번창하였다. 하지만 우편 제도의 붕괴로 인하여 이전과 같은 조직의 능률적인 기능을 회복시키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수반되었다. 그러나 수개월 후 그 일은 여호와의 도움으로 가능해졌다.

금지령하에서의 어려움들

금지된 상황에서 형제들은 어려움과 압력을 경험하였다. ‘알렉스 밀러’는, 경찰이 (순회) 사업을 위해 훈련받고 있는 모임을 해산시킨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진행중에 있던 집회를 제일 먼저 발견한 경찰이 자기 동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러 간 사이에, 형제들은 그 건물을 떠나 철둑을 통해 안전하게 피신하였다.

후에 ‘협회’는 ‘밀러’ 형제에게 ‘브리즈베인’으로 가서 그 곳의 한 회중을 돌보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그 곳에 갈 수 있을 것인가? 기차 여행은 군인들이나 정부의 임무를 띤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었다. ‘밀러’ 형제는 그 문제에 대해 얼마간 생각한 다음, 교직자의 옷차림을 하고 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기차 승차권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고, 지하에서 인쇄된 여러 권의 「연감」이 가득 든 커다란 옷 가방을 두개 들고 갔다. 이런 방법을 통해 ‘퀴인즐랜드’의 형제들은 「1943년 연감」 책을 받게 되었다.

‘오오브레이 박스터’는 형제들의 손에 서적을 전달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썼다. 그는 ‘브리즈베인’에서 「자녀」 책을 모은 다음, 기차로 그 주의 북단까지 갔다. 회중이 있는 곳마다 그는 기차에 서적을 한 상자씩 싣고 떠났다. 그 때마다 그는 상자 겉에다 원형 톱날을 묶었다. 기차에서는 항상 경찰이 와서 승객들을 면밀히 조사하였지만, 그 원형 톱날과 우리 형제는 항상 무사 통과였다!

‘박스터’ 형제는 과도한 전쟁의 흥분이 사람들의 마음에 일으킨 의심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하루는 경찰과 군인이 두대의 자동차를 타고, ‘퀴인즐랜드’ 북부에 있는 ‘왕국 농장’으로 습격해 와서는, 우리가 적군을 위해 사용한다고 의심한 ‘서어치라이트’가 있는 곳을 찾아내려고 하였읍니다. 우리가 쌓고 있던 ‘댐’에 불을 비추면서 여러 날 밤 일을 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읍니다. 또 하나의 우스꽝스러운 고발은 옥수수 밭에 암호를 하여 적군이 공중에서 읽을 수 있게 했다는 것이었읍니다! 물론, 그 우스꽝스러운 고발 역시 거짓임이 증명되었읍니다.”

대회와 관련된 경험들

나중에 일본에서 선교인으로서 그리고 지부 감독자로서 봉사하였고, 지금은 ‘뉴우요오크’에 소재한 통치체의 일원인 ‘로이드 배리’ 형제는 어려웠지만 흥미로왔던 때의 얼마를 즐겁게 회상한다. 그는, 1942년에 대회를 가정집 집단으로 개최하기로 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그 해 ‘멜버른’ 대회에서 의장으로 봉사하던 그는, 형제들이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위해 바친 놀라운 수고를 기억하고 있다.

하나의 큰 대회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빅토리아’ 각지에서 온 대회 참석자들은 12군데의 형제들의 집으로 분산되었다. 그러한 개인집에서 열린 일부 모임에는 참석자 수가 매일 50 내지 60명이나 되었다. 각 연사는 그러한 집으로 가서 연설을 하였는데, 그것은 한 연사가 30분짜리 연설 하나를 12차례나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비록 형제들은 대회 연설을 정해진 순서로 듣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이들 돌아가면서 연설한 연사들의 훌륭한 노고로 인하여 전체 ‘프로그램’을 모두 즐길 수 있었다.

대회 중에 ‘배리’ 형제는 ‘호오돈’에 있는 ‘파이오니아’의 집에 머물렀다. 첫날은 만사가 순조롭게 잘 되어 갔다. 그러나 그 다음 날 오전 5시 경에 그 집 앞에서 “경찰이 온다!”는 외침이 들렸다. 경찰이 이른 아침에 기습을 한 것이었다!

‘배리’ 형제는 대회 ‘프로그램’의 상세한 골자와 또 만약 경찰이 대회 집회를 기습해 올 경우 따라야 할 대책이 적힌 서류를 그의 손가방에 넣고 다녔다. 이것은 참으로 “긴요한” 자료였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들고 그 집의 안쪽 방에 갇힌 것이었다!

경찰은 이제 그 집에 들어와서 서랍을 열어보기도 하면서 모든 것을 뒤지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그 가방을 침대 ‘매트’ 밑에 밀어 넣고자 하였지만, 그래도 그것이 눈에 띌 것은 분명했다. 그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집 모퉁이 마다 사복 차림을 한 경찰이 지키고 서 있었다.

조금 후 다시 창문을 내다 보았을 때, ‘배리’ 형제는 경찰 한 사람이 자리를 옮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배리’ 형제는 창문을 열고서, 있는 힘을 다하여 그 가방을 배추밭 가운데로 던졌다. 그것이 배추밭 가운데 떨어지자 배추잎이 그것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하는 멋진 장면이 연출되었다! 바로 그 다음 순간, 경찰은 침실로 들어와서, 모든 것을 뒤집었고 또 심문을 하였지만, 우리의 대회 계획에 관한 귀중한 자료가 든 그것을 손에 넣을 수는 없었다.

강화된 제약들이 좌절되다

‘벧엘’의 여러 부서는 분산되어, ‘시드니’의 여러 곳에 있는 지하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증인’들은 성서만을 가지고 호별 방문 봉사를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몇몇의 초방문에서 진실한 관심을 보인 사람들과의 가정 성서 연구들이 여럿 생겼다. 그러한 금지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사업은 계속 증가하였다.

당국자들은 ‘왕국’ 사업이 계속 번창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분쇄하기 위해 더욱 안간힘을 썼다. 그들은, 그들이 알게 된, 이름이 알려진 형제들에게는 모두 제약을 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지시는 관련된 형제들을 각각 격리된 읍이나 마을로 격리시켜 살게 하는 것이었다. 연금 상태에 있는 형제는,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의 반경 8‘킬로미터’ 밖으로 나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당국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부 감독자 ‘필립 리이즈’를 ‘픽턴’ 마을에 연금하였으며 그는 거기서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 마을이 ‘시드니’에서 단지 110‘킬로미터’ 떨어진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가 그 마을을 떠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으나, 다른 형제들이 그를 방문하는 것은 허락되었다. 그래서 제약을 받지 않고 사업을 계속 진행시키고 있던 형제들은 매주 이틀 밤을 목탄 ‘가스’차를 몰고 ‘픽턴’으로 가서, 외진 계곡에서 ‘리이즈’ 형제를 만났다.

금지 해제를 위한 법적 투쟁

시간이 지나면서 ‘연방’을 대항한 ‘협회’의 법적 투쟁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최고 법원에서 심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소송의 근거는 헌법 제 116조였다. 그 법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금지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형제들 가운데 변호사가 없었기 때문에, ‘협회’는 이 나라에서 일류가는 변호진을 확보하는 데 드는 많은 비용을 충당해야 했다. 그들은 훌륭하게 싸웠다. ‘협회’를 대표한 수석 변호사는, 자기의 기대와는 반대로 소송 절차가 아주 즐거웠고 또 형제들의 성실성에 너무나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변호 수수료를 할인해 주겠다고 형제들에게 말했다.

법적인 조사 결과 금지 포고령은 헌법에 위배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최고 법원은 미국의 대법원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사건은 재판관인 최고 법원 판사 ‘스타아크’씨가 심의했다. 이 재판관은 그 금지령이 야기시킨 불공평을 쉽사리 간파하였다. 반대 측 변호인들은, ‘협회’가 「빛」(제1권과 제2권)과 같은 책에서 「계시록」에 나오는 상징적인 짐승들에 대해 해설한 것에 근거하여 감정적인 문제로 책동하려고 애썼다. 그러한 논쟁을 오전 내내 들은 후, 그 재판관은 하품을 하고서는 시계를 보면서 “그 짐승들이 시장한 모양입니다.—점심 시간이 되었으니, 휴정합시다” 하고 말했다.

대법원 판사 ‘스타아크’ 씨는 자신의 판단으로, ‘여호와의 증인’에게 가해진 금지는 “독단적이고, 변칙적이고, 탄압적인”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금지령의 해제를 제안하였다. 하지만 그 사건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최고법원 판사 다섯명 전원이 최종적인 판결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법정에서 밝혀진 것들은 ‘협회’에 유리했다. 이 판결은 미국에서 국기 경례 문제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유리한, 그 주목할 만한 판결이 내려진 지 하루 뒤인 1943년 6월 15일에 전달되었다. 이렇게 하여 ‘오스트레일리아’의 형제들은, 미국에서 그들의 형제들이 웅대한 신권적인 승리를 즐긴 것과 같은 때에, 신권적인 승리를 즐기게 되었다! 결국 정부는 ‘협회’의 재산을 모두 반환해 주었다.

전도 사업의 금지와 또 2년 반 후에 그 금지가 해제된 것에 관해 논평하여, ‘퀴인즐랜드’의 최고 법원 판사 중의 한 사람인 ‘브렌넌’ 판사는 사건의 전모를 다음과 같은 가슴 뜨겁게 하는 말로 요약하였다.

“현금의 세계적 재난이 돌발한 후 얼마 동안, 우리의 공공 생활에는 병적인 흥분이 존재하였다. 우리의 생존이 외국 세력의 침략으로 당장 위협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게 되자, 그 병적인 흥분은 공포로 변하였다. 한 조직으로서 ‘여호와의 증인’은 맹공격을 받았으며, 그 결과 금지를 당하였다. 사태가 다소 진정되자 ‘오스트레일리아’ 최고 법원은 전통적인 영국적 평온함 가운데 그 조직을 금지한 것은 위법이라고 판결을 내려,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종교의 자유에 대한 헌법적인 권리를 회복시켜 주었다.”

금지된 상황 속에서도 ‘왕국’ 전도인 수는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1940년 봉사년도 중에 2,500명을 갓 넘었던 전도인수는 금지령이 해제된 지 한달 후에는, 4,328명으로 증가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것은 비록 지하 활동을 해야 하였지만, 신권 조직을 계속 보존한 덕분에 가능하게 된 것이다.

국기 경례와 중립 문제

최고 법원에서 승리한 직후, 국기 경례 문제가 신문 기사들에서 거론되었다. 1943년 7월 말까지 국기 경례를 거절한다 하여 학교에서 추방된 학생들은 ‘빅토리아’ 주에서 50명에 이르렀다. 후에, ‘여호와의 증인’ 자녀들로 하여금 월요일 오전마다 하나님의 법과 일치하는 국가의 법에는 기꺼이 순종하게 하겠다고 간단한 선서를 하게 하는 약정이 ‘빅토리아’ 주 당국과 이루어졌다.

1943년 6월에 특별 ‘파이오니아’였던 ‘프랭크 그룬디’는 군 입대 선서를 거절한다는 이유로 금고형을 받았다. 교직자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그가 선서를 할 필요가 없다는 그의 주장을, 주 보안관은 인정해 주지 않았다. 항소를 제기했다. 결국 고등법원으로부터 ‘그룬디’ 형제는 ‘병역법’의 견지로 볼 때 “교직자”임을 지지하는 판결문이 전달되었다. 이 판결은 ‘협회’의 다른 대표자들이 인정을 받는 데 무한한 값어치가 있는 공인된 선례가 되었다.

이 유리한 판결의 선례로 인하여, ‘여호와의 증인’ 젊은이들이 교직자로서 군복무 면제 혜택을 주장하는 것을 들을 때, 보안관들의 태도는 현격하게 변화되었다.

‘글레넬’에서의 ‘캠페인’

심지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극성스런 애국자들과 그들의 종교적 동맹자들이 책동한 편견은 계속 영향을 끼쳤다. 1945년 4월 27일에서 29일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전국의 14개 도시에서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강연으로 특징을 이루는 일련의 대회가 열리기로 계획되었다. 이들 도시 대부분에서의 대회는 방해받지 않고 열렸다. 하지만, ‘사우드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들레이드’ 교외 ‘글레넬’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이곳에서는 ‘후버어트 클리프트’가 연사인 ‘빌카아니’(나중에 ‘홍콩’의 지부 감독자가 되었음)를 소개하고 있는 동안, 군인들이 커다란 무리를 지어 대회장으로 난입해 와서는 소동을 피우면서 ‘프로그램’을 애국가로서 시작하라고 요구했다. 한 무리는 확성 시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확성 시설은 이전에 유명한 권투 선수였던 한 형제가 지키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협회’의 재산을 파손시키면, 그는 그것을 보호해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경고를 무시하고 두 사람이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그 나머지는 “그들이 싸움을 안할 줄을 알았어!” 하고 외치면서 황급히 물러가 버렸다. 그러나 소동은 계속되었다. 침입자들을 제어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집회는 취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이 소식을 ‘오스트레일리아’의 다른 13개 주요 도시의 사람들에게 전한 것처럼, ‘애들레이드’의 사람들에게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세명의 형제 ‘필립 리이즈’, ‘로이드 배리’ 및 ‘노오먼 바아넷’은 ‘캠페인’과 집회를 조직하기 위해 비행기 편으로 ‘시드니’에서 ‘애들레이드’로 갔다.

‘바아넷’ 형제는, 제1차 세계 대전중에 자기는 ‘오스트레일리아’ 군인으로서 해외 근무를 자원하여 승락을 받은 네번째 사람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바아넷’ 대위는 1915년 4월에 있은 ‘갈리폴리’의 ‘안자크’ 상륙 작전에서 유산탄에 맞아 중상을 입었었다. 그러나 후에 그는 ‘왕국’의 권익을 위한 용감한 투사가 된 것이다. ‘애들레이드’의 ‘캠페인’에서 그의 임무는 여러 재향 군인회를 방문하여 자기를 “‘안자크’ No. 4”로 소개한 다음, 그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해 나타내야 할 태도를 그들과 토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그는 대단히 효과적인 증거를 할 수 있었다.

동시에 다른 형제들은 「왕국 소식」의 특별호를 썼다. 당시 그 내용은 전화로 ‘시드니’로 불러줘 받아쓰게 하였다. 각 장(章)을 타자하는 일이 끝나면, ‘협회’의 공장에 있는 ‘라이노’ 타자기의 타자수에게 넘겼다. 이 「왕국 소식」을 수시간 내에 식자, 조판 및 인쇄를 했을 뿐 아니라 항공 화물로 ‘애들레이드’로 보냈다. 이번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애들레이드’ 왕국회관’에서 갖기로 다시 계획된 공개 강연이 있기 전 토요일에, ‘사우드 오스트레일리아’의 전도인들이 배포할 수 있는 양이 25,000부나 되었다.

‘글레넬’의 교외에서 「왕국 소식」을 배포하던 중, ‘시드니’에서 온 두명을 포함한 3명의 형제들이 거기에서 큰 무리의 군인들에게 붙들렸다. 이들 깡패들은 형제들의 봉사 가방을 빼앗아 잡지를 길거리에 마구 흩어버렸다. 그들은 형제들에게 손으로 치고 싸우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형제들은 성서를 가지고 이치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쓰면서 약 반 시간 동안 사태를 지연시켰다. 그러자 갑자기 그 폭도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떻게 된 일이었는가? 포위당했던 그 형제들이 길 아랫 쪽을 보았을 때, 다음 길 모퉁이에서 누군가가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바로 다름아닌 첫 대회에서 노련하게 ‘협회’의 확성 장치를 보호했던, 한 때 권투 선수였던 그 형제였다. 그 폭도들은 다시 그와 맞설 배짱이 없었던 것이다.

이 힘든 경험으로 기가 꺾인 형제들은 전차를 타고 ‘애들레이드’ 왕국회관으로 돌아갔다. ‘회관’ 계단에 ‘노오먼 바아넷’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마자, 손에 신문을 한장 들고 흔들고 있었다. 그들은 배포 부수가 약 75,000부나 되는 그 신문 ‘애들레이드’의 「뉴우스」지 석간 전면에 「왕국 소식」의 내용 거의 전부가 논평없이 한 마디씩 한 마디씩 게재되어 있는 것을 보고 감격스러워했다. 이 일을 계기로 삼아, 여태까지 ‘협회’가 내고자 하는 유료 광고를 거절해 왔었던 ‘라디오’ 방송국들은 다가 오는 공개 강연을 ‘뉴우스’ 일부로 자유로이 알리기 시작했다.

또 일요일 오전에는 전도인들이 야외 봉사에서 그 날 오후에 있을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공개 강연 초대장과 함께 「왕국 소식」을 기쁘게 배포할 수 있었다. 좋은 경험들을 많이 즐겼다. 반대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먼저 ‘애들레이드’의 「뉴우스」지의 그 전날 석간지를 보여 주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태도를 달리하여, 기꺼이 「왕국 소식」 한부를 받았다. 일요일 오후에는 폭력의 위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공개 강연은 광고된 대로 그 ‘왕국회관’에서 행해졌다. ‘왕국회관’이 초만원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바깥 길에 서서 강연을 듣기도 했다. 아주 열심히 듣던 청중은 자주 박수 갈채를 보냈다. 이렇게 하여, 여호와께서는 반대하는 극성스런 애국주의자들이 ‘글레넬’에서 계획되었던 원래의 강연을 방해하지 않았을 경우보다 훨씬 더 큰 증거가 되게 마련하셨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있은 심각한 영적인 문제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모두가 다 전도 사업을 잘 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호와의 축복이 흐르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첫 번째 조짐은 전도인 수의 평균이 1944년의 3,898명에서 1945년에는 3,532명으로 떨어진 일이었다. 처음에 그 감소는 당시의 환경 탓이었다. 그러나 감소는 계속되어 그 다음 해에는 전도인 수가 3,294명으로 떨어졌을 때, 그것은 심각한 염려의 원인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고무적인 증가를 즐기고 있었다. 일련의 법적인 승리는 형제들로 하여금 더 큰 열심과 열정으로 불붙게 했어야 마땅했다.

「1946년 연감」을 위해 보낸 보고서에서, ‘필립 리이즈’는 다음과 같은 염려를 나타냈다. “반대받던 기간 중, 특히 1943년과 1944년에는 1945년 봉사 연도보다 더 많은 전도인들이 더 많은 봉사 시간을 바쳐 더 많은 증거를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일부 전도인들의 영적인 시력이 흐려졌고, 그들은 비정규가 되거나, 어떤 경우에는 무활동이 되기까지 했다. 이야기를 나눠보면, 형제들은 보통, 해야 할 일은 많다는 것과 또 자기들에게 주어진 책임이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들은 성령의 흐름에 대한 순응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들의 무기력을 떨쳐버리는 것이 느리다.”

지난 5년 간의 상업적인 활동이 이제 그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전시 및 금지 기간 중 수년 동안, 상업 활동은 금지로 인하여 ‘파이오니아’ 봉사를 계속할 수 없어 중단하게 된 여러 전 시간 봉사자들을 지원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조직이 상업적인 기업을 설립하는 일에 너무 지나치게 몰두한 것이 여러 형제들에게 불온한 영향을 끼쳤다.

지부 위에 여호와의 축복이 회복됨

그러한 기업들을 처분할 입장에 있게 되자, ‘리이즈’ 형제는 곧 기업들을 청산하는 조처를 취했다. 하지만 조직을 지원하기 위해 그러한 봉사에 관여했던 많은 사람들의 생활이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그 절차는 대단히 까다로왔다. 그래도 조정을 하였으며, 1946년에 ‘리이즈’ 형제가 ‘워치타워 길리아드 성서 학교’에 초정을 받았을 무렵에는, 그 기업들은 완전히 청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년 동안에 저질러진 과오 때문에,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한 무슨 조처가 취해져야 했다. 그렇게 하여 모든 형제들은 가장 필수적인 ‘왕국’ 전파 사업을 온 영혼을 다하여 추진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당시 ‘워치타워’ 협회장 ‘나단 노워’ 형제가 1947년 3월에 ‘오스트레일리아’를 처음으로 방문한 것으로 그 계기가 마련되었다.

‘노워’ 형제는 그 문제를 즉시 다루었다. 그는 대리 지부 감독자 ‘로오리 윌즈’를 동반하여, 모든 주의 수도를 일일이 방문했다. 그는 형제들에게 당시 상황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숙고할 결의문을 제시하였다.

‘퍼어드’, ‘애들레이드’, ‘멜버른’, ‘란체스턴’, ‘브리즈베인’ 및 ‘시드니’에서 있은 대회에서 형제들이 채택한 결의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정결한 손과 마음으로 다른 모든 나라에서 우리의 형제들이 즐기고 있는 전후의 축복된 봉사의 특권에 임하기 위하여, ‘왕국’ 전도인 수와 ‘왕국’ 소식의 전파가 이렇게 퇴보한 것에 대해 여하한 책임이든 회피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밀히 지은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왕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는 제2차 대전중에 우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 세상의 부정한 일에 손을 대었음과 또 하나님의 성별된 백성의 여러 재산을 지금 우리가 전쟁과 선전의 일부임을 자인하는 일에 사용하여, 세상에 있지만 그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추종자들의 참된 중립을 범하였음을 고백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명백히 나타난 것처럼, 그러한 행위는 여호와의 축복을 받지 못했읍니다. 그러한 행위는 그분의 이름과 대의 명분에 비난과 오해를 초래하였으며, 또 우리 형제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고 그들을 약화시켰읍니다. 우리는 이러한 행로에 대한 책임을 어느 특정한 개인이나 사람들에게 전가시키기를 원치 않으며, 이곳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생한 이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공통적인 책임이 있음을 겸허하게 시인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이 커다란 대륙에 살고 있는 우리 ‘여호와의 증인’들은 우리의 죄와 과오 및 과실을 그분 앞에서 합동으로 솔직히 고백하며, 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용서와 자비를 탄원하며 그분께서 우리의 범과를 용서해 주시도록 간청합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을 확신하며, 이 전후 기간에 우리는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돌이켜 세상에 물들지 않는 성실을 지킴으로써 보다 더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임을 선언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형제들이 합동으로 여호와께 용서를 간청할 때,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오스트레일리아’ 방문중 ‘노워’ 형제는 생기있는 운영이 필요함을 간파하고, 한해 전에 미국에서 파견되었던 ‘플로이드 가아렛’을 지부 감독자로 임명했다. ‘가아렛’ 형제는 ‘길리아드 성서 학교’ 제1기생으로 졸업하였고 ‘브루클린’ 본부에서 훈련을 받았었다. 그는 곧 ‘오스트레일리아’의 형제들에게는 물론 모든 ‘벧엘’ 가족 성원들에게 사랑을 받게 되었다.

‘길리아드’ 제1기 동기로서 ‘가아렛’ 형제와 함께 왔던 ‘벤쟈민 메이슨’은 지역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이 두 형제는 전후 기간을 대비한 ‘협회’의 새로운 마련에 대해 좋은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봉사는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전후에 재조직함

1947년 2월에 연례 두 차례 갖는 순회 대회가 시작되었으며, 첫 번째 대회는 ‘퍼어드’에서 개최되었다. 더구나, 1948년에 시작된 지역 대회는 영적 발전의 이정표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전후 기간에 활동한 순회 감독자는 ‘아드리안 톰슨’이었는데, 그는 1947년에 다른 17명과 함께 ‘길리아드’로 떠나기 전에 ‘오스트레일리아’의 모든 지역을 다 방문했었다. 후에 그는 일본으로 가서 일본에서 최초의 순회 감독자가 되었다.

1948년 초부터 세명의 순회 감독자가 더 ‘오스트레일리아’의 밭에 파견되었다. ‘길리아드 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다음 파견된 이들 세 형제는 ‘캐나다’ 출신인 ‘죤 커트포오드’, ‘도널드 맥클리인’ 및 ‘로버어트 스마아트’였다.

이들 세 형제들이 선박편으로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는 항해를 시작하기 위해 ‘브루클린 벧엘’을 떠나기 전에, ‘노워’ 형제는 그들을 자기 집무실로 불러 그들이 ‘오스트레일리아’로 파견되는 특별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들의 목표는 제2차 세계 대전시에 있었던 사건들과 또 그때 저지른 과오들 때문에 형제들의 침체된 사기를 북돋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었다. 호별 방문 봉사에서 굳건히 앞장 서서 형제들을 격려하고 세워줌으로써 유익한 일을 많이 성취할 수 있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들 형제들의 충실한 봉사와 본은 그후 여러 해 동안 훌륭한 영적 발전을 이룩하는 데 상당히 기여하였다.

순회 활동

수백 ‘마일’이나 되는 순회구에 임명을 받고서, ‘맥클리인’ 형제는 ‘오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회중들을 섬겼다. 1940년대 후반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일부 시골 길에서 ‘오오토바이’를 타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는 이 생소한 나라에 대해 받은 첫 인상의 얼마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낯설은 곳에 온 우리는 멀리 떨어진 격지들을 여행하면서 매혹적인 순간들을 얼마 경험하였읍니다. 내가 ‘에무’새(타조같이 생긴 커다란 새) 떼와 처음 마주쳤을 때, 그것은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나의 힘이 쫙 빠지게 했읍니다. ‘오오토바이’를 타고 벽지를 가는 중에 나의 길을 가로막는 ‘에무’새 떼를 만났읍니다. 그것들은 호기심이 아주 강하여, ‘오오토바이’의 ‘크롬’ 거울과 ‘핸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에 매혹된 것이 분명했읍니다. ‘에무’새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나는 그 새 떼 속으로 뚫고 들어감으로 자칫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는 대신에 ‘오오토바이’를 세웠읍니다. 그 큰 새들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얼마 동안 그대로 서 있었기 때문에, 내가 먼저 움직이기로 했읍니다.

“나는 경적을 울리고 시동을 걸어 붕붕 소리를 냈읍니다. 그러나 ‘에무’새들은 더 가까이 다가왔고, 그들의 호기심은 오히려 더 커질 뿐이었읍니다. 덜컥 겁이 났읍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뒤로 물러나서 다시 경적을 울리고 시동을 걸어 붕붕 소리를 냈읍니다. 그래도 ‘에무’새들은 자꾸만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었읍니다! 나는 기회를 보아 그 떼 속으로 돌진하는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읍니다. 그때서야 겨우 비켜 주어, 나는 간신히 지나갈 수 있었읍니다. 내가 통과하자, 그 새들은 노변을 따라 나를 좇아오기 시작했읍니다. 내가 시속 64‘킬로미터’로 달렸을 때야 비로소 그 커다란 새들은 뒤에 쳐졌고, 나는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읍니다!”

‘맥클리인’ 형제가 ‘오오토바이’를 타던 시대는 이제 먼 과거의 일이다. 1951년에 그는 한 ‘오스트레일리아’ 자매와 결혼을 하였으며, 그 이래로 지금까지 그와 그의 아내는 ‘오스트레일리아’ 각지를 다니면서 순회 사업과 지역 사업을 충실하게 해왔다.

1948년 말경에 ‘벤쟈민 메이슨’은 지역 사업에서 ‘벧엘’ 봉사를 위해 들어오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래서 ‘커트포오드’ 형제가 지역 감독자의 일을 돌보도록 임명되었다. 당시에는 전국에 14개 순회구로 이뤄진 지역구가 단지 하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매년 2차례 순회 대회에서 봉사하기 위해 수천 ‘마일’을 여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커트포오드’ 형제는 9년 동안 이 봉사를 계속하였으며, 이 광대한 땅 전 지역에 알려지고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의 생기있는 언어 구사력과 비유들 뿐 아니라, 그의 친절하고 접근하기 쉬운 태도며 또 아무리 바빠도 모든 연령층의 형제 자매들의 문제를 듣기 위해 시간을 낸 자진성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1957년에 ‘커트포오드’ 형제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떠나 ‘파푸아 뉴우기니’로 갔으며, 노령과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여전히 봉사하고 있다.

‘커트포오드’ 형제는 ‘퀴인즐랜드’ 서부 지방에서 있었던 한 순회 대회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지방에서 열리는 우리의 첫 순회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수백명의 형제들이 ‘퀴인즐랜드’에서 ‘구운디윈디’까지 서쪽으로 수백 ‘마일’이나 여행을 하였읍니다. 사용할 만한 대회장이 없었기 때문에, ‘브리즈베인’에서 대형 ‘텐트’를 가져다가 공터에 쳤읍니다. 그 주간 초에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읍니다. 토요일에는 폭우가 쏟아져 우리의 대회는 ‘실패작’이나 다름이 없었읍니다. 일요일에는 비가 그쳤고, 햇살이 비쳐 공개 강연을 할 수 있었지만, 읍내 사람들은 폭우로 인한 영향이 끝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읍니다. 인근의 강물이 점점 불어나 몇 시간 안에 물은 읍내까지 올라올 것이었읍니다. 범람하는 물은 우리의 천막까지 찰싹찰싹 때리기 시작하였읍니다. 물은 곧 우리 주위를 휘감았고, 우리는 진흙이며 뱀이며 폐물들이 온통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가운데, 무릎까지 올라온 물속에서 걸었읍니다. 범람하는 물은 읍내 상점에까지 침식해 들어가, 앞문으로 들어와 뒷문으로 나갔읍니다. 우리의 간이 식당이 물속에 잠기고 말았읍니다. 물이 충분히 빠져 우리 모두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그 다음 수요일까지, 식당의 종은 우리 수백명의 식사를 마련해 주느라고 얼마나 수고했겠읍니까!”

순회 감독자들은 관심자들과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것뿐만 아니라, 개인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전국적으로 성서 연구가 증가함과 동시에 전도인 수도 증가하였으며 활동도 확장되었다. 1949년 봉사년도의 보고에서 다음과 같은 논평이 있었다. “선의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순회 대회와 [회중] 공개 강연에 참석한 것은 이 나라에 관심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갈망하며, 참 하나님 여호와를 숭배하기를 원한다. 개인 연구를 더 많이 한 결과 형제들의 시각이 더 예리해졌으며, 그에 따라 그들은 ‘추수할 것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1950년대의 고무적인 발전

1951년 초에 ‘N. H. 노워’ 형제와 ‘M. G. 헨첼’ 형제의 두 번째 방문이 다가옴에 따라, 형제들의 사기가 고조되었다. ‘브루클린’ 본부에서 온 이 여행자들의 방문은 참으로 특이한 분위기 속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것은 4년 전에 깊이 뿌리박힌 문제들을 다뤄야 했을 때와는 날카로운 대조가 되었다. 실로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종들이 ‘노워’ 형제가 제의한 결의문을 채택하고 열심을 새롭게 하고 깨끗한 그리스도인 양심을 갖고 일했을 때 그들을 축복하셨던 것이다.

이 10일간의 방문은 ‘시드니’의 ‘무어피일드 파아크 라세 코오스’에서 개최된 하나의 전국적인 대회로 절정을 이루었다. 이 모임에서 두드러진 것은 ‘기념식’이었는데, ‘기념식’은 대회장 ‘스탠드’에서 거행되었다. ‘노워’ 형제가 연설을 하였고 또 후에 누룩이 들지 않은 떡과 붉은 포도주의 표상물들을 돌릴 때, 구름없는 하늘로부터 밝게 빛나는 만월이 ‘보터니’ 만을 고요하게 비춰 주었다.

이 무렵 ‘플로이드 가아렛’은 미국으로 돌아갔었다. 그래서 1951년 3월에 ‘노워’ 형제가 도착하기 전까지 지부 감독의 책임은 ‘로이 모일’이 돌보고 있었다. 이 방문 기간 중에 ‘모일’ 형제는 제18기 ‘‘길리아드’ 학교’에 입학하라는 초청을 받았다. 졸업 후, 그는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와서, ‘브리즈베인’의 한 회중에서 장로로 계속 봉사하고 있다.

그후 곧 ‘데오도르 재랙스’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부 감독자로 파견되었다. 그는 신권 질서에 대한 열심과 야외 봉사에서의 훌륭한 인도를 통해 이 나라 전국에 있는 형제들을 크게 격려했다. 그는 종종 지역 감독자로서 지부 사무실에서 가까운 곳에서 열리는 순회 대회에서 봉사하는 특권도 즐겼다. 근 5년 동안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봉사한 후, ‘재랙스’ 형제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와 ‘재랙스’ 자매는 미국에 있는 ‘협회’ 본부에서 봉사하고 있는데, ‘재랙스’ 형제는 통치체의 일원으로도 봉사하고 있다.

먼 지역에 도달하는 도전

1952년에는 “임명되지 않은 구역” 봉사가 시작되었다. 외진 내륙 지역이 부채처럼 많이 펼쳐져 있는 ‘오스트레일리아’만큼, 그러한 곳에 도달하는 일이 큰 도전이 되는 나라는 아마 세계에서 드물 것이다. 이러한 먼 지역에 왕국 소식을 어떻게 정규적으로 전하느냐 하는 문제가 다년간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충실한 형제들이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격지 지역에서 봉사한 일이 있었지만 전파와 제자를 삼는 일에 관한 한, 그들은 실제로 변죽만 울렸을 뿐이었다.

열정적으로, 형제들은 이 활동의 밭을 개간하였다. 수 ‘마일’ 내지 수백 ‘마일’에 달하는 거리를 여행하기 위해, ‘트럭’, 자동차, ‘오오토바이’, 야영 장비 및 많은 서적을 준비하였다. 한 회중은, 그들의 집이 있는 곳에서 1,600‘킬로미터’나 떨어진 구역의 임명을 신청하였다. 그 여행을 위해 3‘톤’짜리 ‘트럭’ 한대를 준비하였고, ‘오오토바이’ 한대와 여러 대의 자전차 및 공급품들을 ‘트럭’에 실었다. ‘트럭’에 여러 대의 자동차가 합세하였고, 그 구역 임명지에서 봉사하는 데 몇 개월이 걸렸다.

한 회중은 960‘킬로미터’에 달하는 구역을 영구 구역으로 임명받았다. 한 형제는, 자기가 1933년에 서적을 전한 것으로 기억되는 한 집을 방문하였다. 간단한 대화가 있은 후, 그 집주인은 전번의 방문을 기억하고서 최근의 모든 출판물을 받았고 또 두 잡지를 예약했다. 그 형제가 원주민 고용인들에게 증거한 후, 집주인 부부는 그를 문까지 배웅하여 주었고, 또 활짝 미소를 지으면서 또 19년이 지나기 전에 그들을 다시 방문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어떤 지역의 구역은 지방 회중 대신 정규 및 특별 ‘파이오니아’ 집단들에게 임명되었다. 많은 경우, 그러한 형제들은 원시적인 상태에서 생활해야 하였지만, 그들이 나타낸 영은 1930년대 초기의 ‘파이오니아’ 영을 상기시켜 주었다.

‘뉴우 사우드 웨일즈’를 임명받은 한 집단은, 어느 폐기된 낡은 헛간에서 생활했다. 형제들은 자전차를 타고 수 ‘마일’을 여행하여 인가를 찾아다니면서 증거했다. 형제들은 종종 먹을 것이 거의 없었고 또 일반적으로 그 지역 사람의 진리에 대한 반응이 느렸지만, 그 때문에 그들의 정신이 해이해지지는 않았다. 당시 순회 감독자였던 ‘죤 윌슨’ 형제가 이 집단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관심을 보인 사람이라면 그 관심이 식어졌다고 생각되더라도 신속히 모두를 재방문할 것을 제안해 주었다.

이렇게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서 봉사하는 운동과 또 ‘파이오니아’ 집단들이 그러한 지역에서 봉사하는 것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밭 전체가 훌륭한 증거를 받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시골 지역에서 회중이 하나씩 하나씩 생겨났다.

확장이 계속되다

“활동하고 있는 신세계”란 제목의 영화가 도착함으로써, 형제들은 그 영화를 통해 여호와의 조직의 국제적인 규모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세계 본부의 ‘협회’ 공장이며 사무실이며 기타 시설 운영의 치밀함은 형제들로 하여금 “어머니” 조직에 대해 더욱 친밀감을 갖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영화는 이 나라 전국에 걸쳐 읍이며 도시에서 상영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상영장은 만원을 이루었다.

1954년에 이 나라의 평균 전도인 수는 6,874명으로 증가했다. 순회구 수는 21개로 늘어났고, 지역구 수는 3개가 있었다. ‘도널드 맥클리인’이 두번째로 지역 감독자가 되었으며 다른 한 형제는 임시로 같은 자격으로 일했다.

1956년 3월에 ‘노워’ 형제가 세번째로 방문했다. 이 때 우리는, 1938년에 ‘러더포오드’ 형제가 방문했을 때 사용했던 바로 그 ‘시드니 스포오츠 그라운드’에서 전국 대회를 가졌다. 1956년 그 대회에 참석한 사람은 8,149명이었다.

1956년 11월에는, ‘캐나다’로부터 온 ‘도우글라스 헬드’가 신임 지부 감독자로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봉사를 감독하기 시작했으며, 그는 7년간 그 일을 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도 사업은 중단없이 계속 확장되었다. 1957년에 와서 최고 전도인 수가 10,290명으로 신기록을 내어 사상 처음으로 10,000명 선을 돌파하였다. 바로 10년 전만해도 전도인 수는 3,516명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매년 ‘유럽’에서 쇄도해 오는 수만명의 각계 각층의 이주자들 가운데서 성서 연구생들이 계속 생겨났다.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의 형제들은, 그러한 이주자들의 대부분이 정착하여 도움이 아주 크게 필요하게 된 동부 지역으로 가서 봉사할 것을 고려해 보라는 긴급한 초대를 받았다.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항상, 다른 주들에 비해 전도인 대 인구 비율이 훨씬 높았다. ‘데오도르 재랙스’ 형제가 지부 감독자로 있을 때, 그는 ‘퍼어드’에서 있은 한 지역 대회에서 거의 전설적으로 알려지게 된 발표를 하였다. 그는 영적으로 번창하고 확장되고 있는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람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자는 여러분이 삼아 주십시오. 그 뒤는 우리가 돌보겠읍니다!” 이 말은 참으로 감명을 주었다. 그래서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각처로부터 형제 자매들이 이 지원의 요청에 놀랍게 응했다. 서부 지방으로부터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사도 16:9)는 이 부름에 응한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이 날까지, “황무지”에서 회중들이 생겨난 동부 지방의 도시와 읍들에서 책임있는 중요한 위치에서 일하고 있다.

1950년에서 1960년까지 10년 동안 전도인은 4,502명에서 12,746명으로 늘어났으며, 야외 봉사의 최고 수는 14,090명이었다.

햇수가 지나감에 따라, 전국적으로 엄청난 거리를 잇는 교통 수단의 부족으로 초래되는 문제들은 줄어들었다. 정기 항공, 철도 및 ‘버스’ 운행의 편의를 받는 중심지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하였고, 도로들도 크게 개선되었다. 1961년에 ‘오스트레일리아’ 각지에서 형제들이 격지 도시 ‘다아윈’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 참석했을 때, ‘오스트레일리아’ 역사상 “첫 번째” 기록을 냈다. 그 대회에 참석하도록 이 나라 전국적으로 형제들은 초대되었다. 전세 ‘버스’들이 남부의 ‘애들레이드’에서, 동남부의 ‘시드니’에서 그리고 동부의 ‘퀴인즐랜드’에서 출발하였다. ‘버스’가 ‘오스트레일리아’의 북단 도시까지 수천 ‘마일’의 여행을 시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있는 일이었다. 이전에는 다른 중심 지역을 잇는 교통 수단이라곤 기차편이나 비행기편뿐이었다. 그 대회와 ‘버스’ 여행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후에, 두개의 상업적인 ‘버스’ 편이 같은 노선에서 정기 운행을 개시했다.

세계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대회들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의 생활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러한 이정표 중의 하나는 전세계적으로 열리는 “영원한 기쁜 소식”이란 일련의 대회로, 1963년 8월의 겨울철에 ‘멜버른’에서 개최된 대회였다. 그 대회에 관한 다음과 같은 신문 보도가 있었다. “‘멜버른’에서 큰 대회가 몇 차례 열린 적은 있었다. ·⁠·⁠·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들의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와 같은 것을 본 적은 일찌기 없었다고 생각된다. ·⁠·⁠· [당시] ‘워치타워 협회’의 부협회장이었던 ‘F. W. 프랜즈’가 ‘하나님이 온 땅의 왕이 되실 때’란 강연을 했을 때, 12,000명 이상이 모여 [‘멜버른 쇼우 그라운드’의] 그 거대한 양관(羊館)을 꽉 메웠다.” 실제 참석자 수는 독일어와 희랍어와 ‘이탈리아’어로 청강한 682명을 포함하여 13,142명이었다.

원정 전파 활동

1964년 봉사년도 초까지 이 나라 전국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던 ‘증인’은 15,045명이었다. 회중 수는 385개였고, 순회구는 29개 그리고 지역구는 3개가 있었다. 이 해중에, 두명의 젊은 ‘파이오니아’ 형제들이 전혀 봉사되지 않은 구역으로 가서 봉사하는 여행을 시작했다.

이러한 원정 전파는 ‘사우드 오스트레일리아’와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의 1,160‘킬로미터’를 차지하는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지 ‘널러보오’ 평원을 횡단하는 것이었다. 사막을 한번 횡단한 다음, 이들 ‘파이오니아’들은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막의 중심지를 통과하고 북쪽으로 나아가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서북쪽 해안에 도착할 것이었다. 그런 다음 거기서 해안을 따라 ‘다아윈’으로 갈 예정이었다. 34년 전에 ‘버어트 호오턴’ 형제와 ‘프랭크 라이스’ 형제가 자동차를 몰고 ‘시드니’로 가는 길에 이 황무지를 통과하면서 진흙탕 도로 주변에 있는 몇몇 마을에서 증거를 한 일이 있었다. 그 후로도 ‘파이오니아’들은 이따금씩 이 사막 지대를 지나가면서 증거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원정을 할 때, 공도 대신 철도를 따라가면서 증거한 일은 없었다. 그래서 1964년에 원정을 한 그 형제들은 철로에서 무리를 지어 일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전파하려고 했다.

‘퀴인즐랜드’의 서북 지방의 두 ‘파이오니아’ 형제는 지부 사무실로부터 남쪽으로 ‘시드니’로 가면서 봉사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거기서부터 그들은 ‘널러보오’ 평원을 지나 ‘캘구우를리’로 가서, 다음에는 북쪽으로 ‘포오트 헷랜드’, ‘브루움’, ‘더어비’, ‘윈담’으로 간 다음, 1964년 10월에 개최되는 지역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퀴인즐랜드’의 ‘마운트 아이사’로 갈 예정이었다. 이 두 형제 ‘프랭크 램버어트’와 ‘테리레이놀즈’는 6월에 ‘시드니’ 지부 사무실을 향해 떠났다.

‘마운트 아이사’와 ‘시드니’ 사이에서, 그들은 800‘킬로미터’ 이상이나 펼쳐져 있는 위험한 불모의 사막길인 그 형편없는 ‘버어즈빌 트랙’을 횡단하였다. 몇달 전에는 한 가족 전체가 이 험난한 사막길에서 생명을 잃었었다. 그들이 타고 간 자동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가지고 간 물이 부족하여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들이 모두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이 ‘파이오니아’ 형제들은 ‘뉴우 사우드 웨일즈’의 소도시 ‘보우르크’에 무사히 당도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드니’까지 그들은 줄곧 증거를 하면서 갔다.

‘벧엘’에서 어떤 일은 ‘랜드 로우버’차를 이용하여 수행되었다. ‘램버어트’ 형제는 새짝 ‘해롤드 버어켓’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를 횡단하는 여행을 시작했다.

7월 15일에 그들은 ‘사우드 오스트레일리아’의 ‘포오트 오거스타’에서 “문명 생활”을 뒤로 하고, 서쪽으로 철길을 따라 ‘캘구우를리’로 향했다. 이따금씩 거치른 길마저 나있지 않는 곳도 있었다. 한 집에서는 “내가 항상 원하는 종교가 딱 하나 있소—그 종교는 ‘여호와의 증인’ 종교랍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환영해 주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들 형제들은 그런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했다. 그 사람들과 서신으로 성서 연구가 마련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이 격리된 곳으로 이사를 한 이래 진리와의 접촉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하루 저녁을 성서 토론을 하면서 지낸 다음, 그들은 그 다음 날에 ‘탱크’에 연료를 가득 채워 전날 그들을 위해 잡은 양 한 마리를 싣고서 떠났다.

때때로 그들은 표류하는 모래 언덕 위를 한번에 수 ‘마일’씩 여행해야 하였으며, 그러한 때는 계속 4륜 구동(四輪驅動)을 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한번은 특히 표류가 심한 곳에서 자동차 밑에서 꽝하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서 그들은 깜짝 놀랐다. 조사를 해보니, 차동 장치의 ‘크라운’ 톱니바퀴와 작은 톱니바퀴가 부러져 있었다. ‘램버어트’ 형제는 철길을 따라 가장 가까운 작은 도시로 갔다. 8‘킬로미터’쯤 갔을 때, 그는 조그만 ‘모터’ 전차를 타고 가는 철로 보선공을 한 사람 만났는데, 그 나머지의 길은 그 사람이 이 형제를 태워다 주었다. 고장난 그들의 자동차를 수리하는 데 필요한 부속품을 보내달라고 전보를 친 후, 8일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철로 인부들이 사는 조그만 마을에서 철저한 증거를 할 수 있었다.

바야흐로 8월 11일에 이 두 ‘파이오니아’ 형제는 ‘캘구우를리’에 도착하였으며, 그곳 회중은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포오트 오거스타’에서 ‘캘구우를리’까지 여행하는데는,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지연된 시간을 포함하여 5주일이 걸렸다. 그들이 여행한 거리는 2,245‘킬로미터’나 되었고, 야외 봉사에 바친 총 시간은 426시간이었고, 인부들과 그들의 가족에게 전한 잡지는 606부, 서책은 48부, 소책은 15부였고 예약은 16건을 맡았으며 공개 집회도 두 차례 가졌다.

‘캘구우를리’를 떠나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의 중심지인 광야 지대로 향한 후, 만사는 더욱 순조롭게 잘 되어 갔다. 이 두 형제는 그 이상 더 큰 사고 없이 마침내 1964년 10월 지역 대회 시간에 꼭 맞게 ‘마운트 아이사’로 돌아왔다. 이들은 모두 ‘오스트레일리아’의 내륙의 수 ‘마일’에 달하는 황무지를 포함한 이 뜻깊은 여행을 경험한 것에 대해 참으로 감사했다.

지부 운영의 조정과 자극적인 대회들

1964년 1월 3일에 지부 감독자 ‘도우글라스 헬드’는 ‘‘길리아드’ 학교’에 참석차 미국으로 떠났으며, 그 후, 그는 자기가 태어난 곳인 ‘캐나다’에서 봉사하기 위해 돌아갔다. 여행하는 감독자로 8년을 보낸 ‘멜버른’ 태생인 ‘죤 윌슨’이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흥미롭게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순회 감독자 및 다른 자격으로 봉사했던 많은 형제들이 나중에 세계 여러 지역에서 지부 감독자(혹은 조정자)가 되었다. 그들 가운데는 ‘뉴우지일랜드’에서 봉사한 ‘로버어트 라젠비’, ‘파라구아이’에서 봉사한 ‘맥스웰 리오이드’, ‘피지’ 제도에서 봉사한 ‘도널드 클레어’, ‘스리랑카’에서 봉사한 ‘도우글라스 킹’, ‘타이완’에서 봉사한 ‘하아비 로우간’, ‘홍콩’에서 봉사한 ‘윌리엄 카아니’와 후에 거기에서 봉사한 ‘케넷스 간나웨이’, ‘인도네시아’에서 봉사한 ‘로널드 재카’, ‘싱가포르’에서 봉사한 ‘노르만 벨로티’, ‘키프러스’에서 봉사한 ‘조셉 젠킨즈’, ‘파키스탄’에서 봉사한 ‘케이스 영’, ‘말레이지아’에서 봉사한 ‘알프레드 위키’, 일본에서 봉사한 ‘로이드 배리’, ‘파푸아 뉴우기니’에서 봉사한 ‘제임스 스미스’ 그리고 ‘솔로몬’ 제도에서 봉사한 ‘글렌 핀레이’ 등의 형제들이 그들이다.

1966년에 있은 “하나님의 자유의 아들들” 지역 대회는 ‘파이오니아’의 대열에 참가한 사람들을 증가시켰다. 그 해에 758명이었던 ‘파이오니아’의 수는 1970년에 1,946명에 달할 때까지 계속 증가하였다.

1969년이 시작되자, ‘멜버른’에서 개최될 웅대한 국제 대회와 또 한 차례의 ‘노워’ 형제의 방문은 형제들의 생각을 사로잡았다. 이 대회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형제들에게 전례없이 많은 활동을 재촉하였다. 형제들은 이 나라 각처에서 40대의 ‘버스’와 여러 대의 전세 비행기뿐 아니라 여섯 대의 특별 기차를 타고 왔다. 1963년에 개최된 국제 대회에 참석한 사람은 약 칠천 명이었는데, 만 6년 후인 1969년에는 참석자 수가 세배나 되었다! 최고 참석자 수가 26,075명이었다는 것은 형제들의 훌륭한 영을 반영해 주는 것이었다. 그들 중 다수는 참석하기 위해 수천 ‘마일’을 여행해 왔던 것이다.

1970년대에 접어들다

1970년대는 이 나라 전국에 걸쳐 신권적인 생활 및 상업 지역에서의 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왕국 전도인이 이만 명이 넘었는데, 1970년대의 십년이 끝날 무렵 그 수는 삼만을 능가하였다.

이 대륙의 서북부 지방에서는 광산 ‘붐’을 타고서, 실제로 하룻밤 새에 광산 촌들이 생겨났다. 그러면 이내 그러한 곳에 전파 사업이 뒤따랐다. 한 광산촌의 관리자는 그 마을 주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나처럼 17년 동안이나 ‘오스트레일리아’에 살았지만 독일인 태생입니다. 우리는 녹이는 도가니 같고 또 그것이 좋습니다.” 수년 동안 잠을 자고 있던 도시들 즉 ‘포오트 헷랜드’, ‘댐피어’, ‘엑스마우드’ 및 ‘고우브’ 반도의 ‘눌룬부이’가 광산이 발견됨에 따라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인구 이동이 초래되었고, 그곳 사람들에게 전파하도록 ‘파이오니아’들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광산촌에는 고임금을 받을 수 있었고 또 일확천금을 모을 수 있는 기회들이 있어 흔히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가 어렵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관심자들이 발견된다. 지역 감독자 ‘도널드 맥클리인’은 그러한 가슴뭉클하게 하는 반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동료와 나는 이같이 무반응인 구역에서 계속 봉사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읍니다. 마침내 문전에 접근했을 때 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에게 나는 이같이 말했읍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불경한 이 제도를 싫어하고 다가올 하나님의 왕국을 열망하는,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놀랍게도, 그 여자는 잠간 동안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는, 거의 명령조로 ‘들어와서 앉으시오. 당신들에게 물어볼게 좀 있소!’라고 말하는 것이었읍니다.

“다소 얼떨떨한 기분으로, 우리는 들어가, 오늘날 생각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다섯 가지 질문 공세를 받았읍니다. 그러한 질문에 답변을 하는 데 25분도 채 안걸렸읍니다. 이렇게도 짧은 시간 안에, 이 기혼 여성은 진리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여자는 우리가 방문하기 여러 날 전에 ‘하나님을 시험대에 올려 놓고’는, 자기가 품고 있는 의문에 대해 누군가가 그 해답을 주지 않으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도 성경도 종교도 버리겠다고 기도했노라고 설명하였읍니다. 우리 두 사람은 여호와께서 그 여자의 기도에 거의 즉각적으로 응답하시는 데 그토록 극적으로 사용된 것에 대하여 겸허함을 느꼈고 또 특권으로 여겼읍니다.

“그 여자의 다음 걱정은, 자기 남편도 ‘좋은 소식’을 듣게 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는 ‘캐나다’인으로 광산 기술자였읍니다. 나는 ‘캐나다’인으로 ‘‘길리아드’ 학교’를 졸업하고 ‘오스트레일리아’에 왔으니, ‘캐나다’인이 동료 ‘캐나다’에게 증거하는 것은 얼마나 안성마춤이었겠읍니까! 곧 나는 그러한 가상이 얼마나 빗나간 것인지 알게 되었읍니다. 얼마 동안 결실없는 토론을 한 후, 그는 불쾌한 마음으로 방을 뛰쳐 나갔읍니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정죄된 상태에서 출생하였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읍니다.

“나의 아내와 내가 다음 순회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 다음 주에 떠나게 되었을 때, 이 방문을 최근에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한 한 ‘파이오니아’ 부부에게 인계하였읍니다. 그 형제는 ‘퀴인즐랜드’의 북부 지방 출신으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말주변도 없었읍니다. 그 ‘캐나다’인과는 아주 대조적인 그가 자존심이 강한 지식인을 발전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인지 우리는 정말 궁금했읍니다. 하지만 또 한번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그 영원한 진리가 참됨이 증명되었읍니다. (고린도 전 3:7) 이 ‘파이오니아’ 형제의 따뜻함과 성실함과 행복에 넘치는 영은 점차 그 까다로운 ‘캐나다’인의 단단한 껍질을 녹여, 마침내 그는 정규 가정 성서 연구를 하는 데 동의하였고 진리를 받아들였읍니다!”

10년 동안에 있은 신권적인 변화

이 10년 동안에 걸쳐 신권적인 문제에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변화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1971년과 1972년 초에 장로와 봉사의 종의 마련이 실시되었다. 그후의 10년 간을 회상해 보면, 전도인 개개인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회중들에게도 놀라운 영적 유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부의 운영이 한 사람의 감독에서 장성되고 경험있는 장로들의 한 집단에게 이양됨으로써, 그 이후 똑같은 유익이 넘쳐 흘렀다. 이곳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죤 윌슨’ 형제가 지부의 조정자로 임명되었고, 다른 네명의 지부 위원은 ‘월레이스 박스터’, ‘맥스웰 리오이드’, ‘데이빗 매드제이’ 그리고 ‘로널드 월터즈’가 임명되었다.

대회장들이 생겨나다

대회장들을 갖게 된 것도 1970년대의 10년 동안에 있었던 일이다. 1974년 7월에는 폐쇄된 한 의류 공장을 매입하였으며, 그 해 9월 말에는 1,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멋진 대회장이 하나 생겨났다.

1975년 12월에는 ‘애들레이드’의 아름다운 ‘리쥐 헤이븐’ 교외에서 아름다운 대회장을 봉헌하게 되었다. 이 대회장은 경관이 아늑한 5‘에이커’의 대지 위에 자리잡고 있다. 만 2년 후에는, ‘퍼어드’의 심장부에서 16‘킬로미터’ 좀 못되는 곳에 위치한 10‘에이커’의 대지 위에 지어진 세번째 대회장이 ‘웰쉬푸울’에서 봉헌되었다. 이 대회장은 또한 주변이 매우 아름답고 시원한 시내가 대지 가운데로 흐르는 풍경 속에 자리 잡고 있다.

1982년에 또 하나의 대회장이 ‘멜버른’에서 완공되었다. 이것은 여태까지 지은 네개의 대회장 중 가장 큰 것이다. 이 대회장은 3,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고, 40‘에이커’의 대지에는 앞으로 수년 동안 조경과 미화를 해야 할 여지가 많다.

이주로 인해 다양성과 신권적인 성장이 촉진되다

수십년 동안에 걸쳐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인구가 한산한 이 섬 대륙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긴급히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이주 정책을 추진해 왔다. 1970년대 중반 무렵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인구 중 40‘퍼센트’는 해외 태생이거나 해외 태생의 부모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 수에는 영어를 그리 잘 못하는 많은 ‘증인’들도 포함되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해 들어 옴으로 인해,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큰 지역들이 생겨났다.

1974년과 1975년 중에 언어와 풍습이 상이한 사람들로 이뤄진 14개의 외국인 회중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그런 회중의 수는 이내 52개로 늘어났다. 현재 ‘아랍’어, ‘핀란드’어, 희랍어, ‘헝가리’어, ‘이탈리아’어, ‘몰타’어, ‘폴란드’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터어키’어 그리고 ‘세르보-크로티아’어를 사용하는 회중들이 있다. 이러한 회중들에서는 집회들이 각각 그들의 나라 말로 진행된다. 최근에 와서는 중국어, ‘프랑스’어 그리고 ‘베트남’어를 사용하는 작은 집단들도 형성되었다. 근년에 와서 있은 큰 증가는 이들 외국인 회중들과 집단들 덕분이었다. 전적으로 희랍어와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회중들로 구성된 순회구들도 조직되었다. 순회 대회와 지역 대회는 영어로 뿐 아니라, 앞에 열거한 이러한 언어로도 진행된다.

지부 사무실의 확장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성장을 보여 주는 가장 두드러진 증거들 중 하나가 1970년대에 있었다. 그것은 1972년에 ‘벧엘’ 집, 사무실들 및 공장을 이전 규모의 4배 정도로 확장한 일이었다. 전체 건축 공사는 노련한 건축가인 ‘로이 배틀’ 형제의 감독하에 자진 봉사에 의해 행해졌다.

형제들은 건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많은 헌금을 함으로써 성원을 했다. 한 형제는 낡은 ‘트럼프’통을 지부 감독자에게 건네 주었는데, 열어보니 그 속에는 1,000‘달러’나 들어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한 ‘파이오니아’ 형제는 집을 처분하여 아낌없이 10,000‘달러’를 ‘협회’에 기부하였고 또 10,000‘달러’를 빌려 주었다.

그 결과, 원래 750평방 ‘미터’였던 건물에다 실면적 3,000평방 ‘미터’를 늘린 3층 건물이 생겨났다. 신축 건물의 봉헌식은 1973년 1월에 있었다.

왕국 전도인 수의 증가

1976년 봉사년도에 왕국 전도인은 29,101명으로 신기록을 올렸다. 어떤이들은 아마 그들이 기대했던 극적인 사건이 그 해에 일어나지 않았을 때 실망한 것 같다. 여호와를 섬기는 우리의 동기에 대한 그러한 시험은, 왕국 전도인 수가 3년 이상이나 이 최고 기록에 달하지 못한 사실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1979년 1월에 우리는 전도인 29,247명으로 신기록에 달했다. 다행히도, 그 이래 여호와를 공개적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이 꾸준하게 착실히 증가해 왔으며, 1980년도에 봉사 보고를 한 사람은 3만명이 넘었다. 1981년 8월에는 전도인 최고 기록인 31,898명에 달했으며, 1982년 봉사년도에는 다섯 차례의 신기록을 내어 4월에는 전도인이 33,982명이 되었다.

또 하나의 감격적인 확장—새로운 ‘벧엘’ 복합 건물 완공

1977년 2월에 우리는 지구 감독자로 방문한 통치체의 ‘밀턴 헨첼’ 형제의 방문을 즐겼다. 그가 ‘브리즈베인’과 ‘시드니’에서 행한 두 연설을 청강한 사람들은 일만 사천 명이 넘었다. 그의 방문중에 지부를 더욱 확장하도록 하는 제안이 있었다.

‘스트라스피일드’에 있는 기존 지부 주 사무실에서 서남쪽으로 약 32‘킬로미터’ 가면 ‘협회’의 ‘왕국 농장’이 자리잡고 있다. 이 농장은 ‘덴햄 코오트’의 ‘잉글버언’ 지역에서 골라잡은 약 100‘에이커’의 고원지를 차지하고 있다. 이 지역은, 번잡한 항구가 있는 ‘시드니’의 심장부에서 48‘킬로미터’ 아래 쪽에 위치하고 있지만, 고지대이고 반전원적인 멋진 장소이다. 보다 큰 새 ‘벧엘’ 복합 건물의 부지로 이보다 더 나은 장소가 있겠는가! 제안된 신축 건물은 ‘스트라스피일드’에 있는 기존 복합 건물보다 규모가 세배나 크게 계획되었다.

1972년에 ‘스트라스피일드’의 건물 확장에서 경험을 쌓은 터라, 시간과 기술을 자진적으로 바치는 형제 자매들의 성원은 대단했다. 직접 현장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재정적으로나 다른 방법으로 지원하는 일은 놀라왔다.

일년이 넘도록, 약 130명의 정규 ‘벧엘’ 건축 식구들이 이 공사에서 일했다. 건축 일에 노련한 몇명을 포함하여 많은 형제들이 이 공사에 전 시간을 바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연방’의 각주에서 한번에 50명으로 구성된 단체가 두주일 동안 현장에서 생활하면서 일하도록 하는 특별 마련을 하였다. 사람들을 가득 실은 몇대의 ‘버스’가 ‘퍼어드’로부터 장장 4,000‘킬로미터’를 여행해 왔으며, 이들 단체는 매번 3 내지 4주일씩 머물렀다. 복합 건물의 공장과 사무실 부분이 완성되자, 이들 건물은 50명의 단체로 구성되는 이들 형제들의 숙소로 사용되게 되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아내와 가족을 남겨 두고 와서 2주일 동안 일하기도 했다. 건축 위원으로 일한 한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2주간 계획은 우리의 건축 공사 마련 중에서 아주 훌륭한 마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계획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큰 도움이 되었읍니다.”

‘퍼어드’에서 온 20명으로 구성된 한 단체는 ‘미니 버스’를 전세 내어, 그것에 ‘트레일러’를 연결하여 짐을 싣고 왔다. 그들 중 세 사람은 교대로 운전을 하여, 그 긴 여행을 3일 만에 해낼 수 있었다. 40명으로 구성된 다른 한 집단은 어느 회사로부터 빌린 대형 ‘버스’를 타고 왔다. 중도에 여러 회중의 형제들은 ‘버스’를 마중 나와, 다과며 음식이며 숙박 및 ‘샤워’ 시설을 제공해 주었다. 서로에 대한 그리스도인 사랑과 진정한 염려가 충만하였다.

장거리 여행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로, ‘버스’가 항상 예정 시간에 도착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한번은 형제들이 새벽 5시에 준비한 식사를 가지고 왕국회관에서 기다려야 하는 일도 있었다. 그 ‘버스’는 오전 10시 15분에야 도착했다. 그러나 ‘벧엘’ 건축 공사에 참여하는 거룩한 봉사에 몇 주간을 자진적으로 바칠 형제들을 돌보는 일이라, 즐거움과 기쁨이 넘쳤고 기분상해 하는 일은 없었다.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여행을 한 집단들 중 하나에 속했던 한 형제는 그 집단을 대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우리의 예정에는, 간선도로에서 몇 ‘마일’ 떨어진 ‘사우드 오스트레일리아’의 ‘민니파’에 있는 한 형제의 농장에서 그와 그의 가족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는 계획이 들어 있었읍니다. 이 농가는 그들의 왕국회관으로 사용되고 있었읍니다. 그리고 회중에는 전도인이라곤 4명뿐이었읍니다. 이 지역은 범위가 아주 넓습니다.—이 형제의 농장 면적은 4,000‘에이커’나 됩니다. 그러나 거기서 몇명 안 되는 이 형제들이 40명이나 되는 우리에게 훌륭한 식사를 차려 주었읍니다!

“우리가 ‘포오트 피리’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왕국회관으로 가서 회관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식탁이 한줄로 정돈되어 있고, 그 위에는 먹을 준비가 다된 맛있는 음식이 아름답게 차려져 있는 것을 보았읍니다. 음식은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양의 두배나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도중에서 먹을 음식과 과일도 받았읍니다.

“우리가 ‘애들레이드’의 대회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9시 30분이었으며, 그 날 밤을 우리는 거기서 지내게 되어 있었읍니다. 우리는 베개와 수건 등 모든 것이 갖춰진 침대가 두 줄로 놓여 있는 곳으로 안내되었읍니다. ‘버스’에서 하룻밤과 이틀 낮을 보낸 후라, 이것은 참으로 환대가 아닐 수 없었읍니다! 하룻밤을 푹 쉬고 맛있는 아침 식사를 먹은 후, 우리는 짐을 챙겨 오전 7시 15분에 작별 인사를 하였읍니다. 그 지방 형제들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마련해 주었읍니다. 그러한 형제들 중 일부는 먼 길을 왔었고, 또 몇몇은 우리의 필요를 돌보기 위해 새벽 3시 30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읍니다. 여호와의 조직이 아니고서야 다른 어느 곳에서 이처럼 크나큰 사랑을 찾아볼 수 있겠읍니까!”

이 나라 방방 곡곡에서 형제들은 재산을 기증했을 뿐 아니라, 탁월한 사랑의 노력을 바쳤다. ‘퀴인즐랜드’의 북단 지방의 형제들은 수목을 베어 직접 목재를 만들었으며, 다른 형제들은 네대의 대형 화물차로 네 차례나 운반하여, 이 완성된 목재를 ‘협회’에 기증했다. 네 차례의 왕복 여행이 각각 6,400‘킬로미터’가 넘었고 또 목재의 가치를 지방 구매 가격으로 계산해 보면, 60,000‘달러’ 내지 70,000‘달러’나 되었다는 것을 알면 형제들이 베푼 관대함을 알만도 하다.

수천명의 형제들과 자매들은 작은 일이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써 그 전체적인 노력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모두가 기꺼이 협력하고자 하는 한 가지 본보기를, ‘협회’가 건축 공사장에서 290‘킬로미터’ 떨어진, ‘뉴우 사우드 웨일즈’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도시 ‘베이트 만즈’ 만에서 갓 잡은 싱싱한 생선 1‘톤’을 구매하게 되었을 때, 볼 수 있었다. 이 지방 회중의 형제들은 모두 함께 힘을 모아 그 생선을 깨끗이 씻는 그 막대한 일을 떠맡았으며, 그렇게 한 다음에는 그것을 ‘잉글레버언’까지 운반해 주었다.

그 복합 건물 중 마지막으로 완성된 부분은 식당, 주방 그리고 ‘벧엘’ 가족이 생활할 숙소였다. ‘벧엘’ 가족은 새로운 주인이 ‘스트라스피일드’의 건물에 입주하는 시간에 맞추어 1982년 2월 중에 그들의 이전 집에서 이사 나왔다.

1929년에 ‘멜버른’에서 이사한 이래, ‘스트라스피일드’의 ‘벧엘’ 집에서 죽 살아왔던 ‘조오지 깁’과 ‘마우드 죤스턴’과 같은 오래된 몇몇 ‘벧엘’ 가족 성원들에게는, 그 정든 집에 “작별”을 고하는 것이 물론 서운했다. ‘벧엘’ 가족으로 40년 이상 생활해 왔던 다른 사람들—‘월레이스 박스터’, ‘차알즈 랜덜’(그 후 1982년 5월 18일에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매쥐 던햄’, ‘비 호오턴’, ‘린다 모일’ 그리고 ‘멜바 위일런드’—역시 그토록 다년간 정들었던 그 집을 떠날 때 얼마의 향수를 느꼈다. 그러나 이들 연로한 형제들이 ‘잉글레버언’의 그 아름다운 새로운 ‘벧엘’ 집이 있는 아늑한 그들의 방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는 나머지 ‘벧엘’ 가족과 더불어 참으로 흥분에 찼다! 그토록 여러 해 동안 ‘벧엘’ 가족의 일부가 되었던 형제들은, 그러한 새로운 복합 건물을 갖게 해주신 것에 대해,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 감동적인 확장을 살아서 보게 해주신 것에 대해 실로 감사하고 있다!

계속된 발전과 변화

‘잉글레버언’의 ‘덴햄 코오트’에 있는 새로운 건물로 이사함과 더불어, 다른 변화들도 있었다. ‘협회’의 전세계의 다른 인쇄 시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그 신축 공장 건물에다 ‘하이델버어그 오프셋’ 인쇄기를 설치하였다. 이전에 ‘라이노’ 타자기로 하던 일의 대부분을, 지금은 I. B. M. ‘셀렉트로닉 콤포서’가 해내고 있다. ‘오프셋’ 인쇄를 하기 전, 인쇄 준비 작업인 ‘그래픽’(graphics)에 필요한 사진식자, 동판제작 및 기타 필요한 장비도 설치하였다. 이것은 결국 ‘레터프레스’ 인쇄 준비에 필요한 기존의 모든 가열 금속 식자와 동판제작을 대체하게 될 것이다.

1981년 9월 1일에 ‘해롤드 V. (‘빕’) 모우리츠’ 형제와 그의 아내 ‘앤’이 도착함에 따라, 지부 운영에 다시 변화가 생겼다. ‘모우리츠’ 형제는 1950년대 초에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청년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 ‘벧엘’에서 일하였고, 그리고 순회 사업 및 다른 전 시간 봉사 활동도 하였으며, 1959년에 제33기 ‘‘길리아드’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해부터 ‘모우리츠’ 형제와 자매는 ‘핀란드’의 ‘벧엘’에서 봉사했다. 통치체의 초청으로, 그들은 다시 ‘오스트레일리아 벧엘’ 가족 성원으로 연합하게 되었으며, 이곳에서 ‘모우리츠’ 형제는 지부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고 지부 조정 위원으로 봉사한다.

1904년 지부가 형성될 때, 이 나라 전국에서 회중들과 연합했던 그 작은 집단의 형제들이, 이제 1982년에 들어와서는, 약 34,000명의 전도인으로 성장했다. ‘파이오니아’ 대열에 가담하는 사람들의 수도 달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1982년 4월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을 기념하기 위해 참석한 사람들은 67,724명이나 되었다. 세상의 밭의 일부인 이곳에서 전파 사업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간 동안,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의 과분하신 친절과 그분께서 공급해 주시는 능력에 힘입어 계속 전파할 굳은 결의를 가지고 있다.

지부 감독직의 특권을 받았던 사람들 가운데 두 사람은 그들의 믿음을 배반하여, 사업의 여명기에 연합했던 사람들로 믿음을 버리게 했다. 하지만 형제들의 절대 다수는 여호와 하나님께 계속 충실하였고, 그분의 조직에 충성스럽게 고착해 왔다. 그 결과는 오늘날 이 나라 전국에 걸쳐 강력히 결속되어 있는 형제들의 집단에서 볼 수 있다.

그 수년 동안에 걸쳐, 노소를 막론한 ‘파이오니아’들, 여러 순회 감독자들, 지역 감독자들 및 ‘길리아드’ 교육을 받은 형제들 역시 이 나라에서의 왕국 사업을 증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해 왔다.

‘오스트레일리아’ 지부의 감독하에, ‘여호와의 증인’들의 전파 사업이 증진하는 데 기여한 요소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의 뚜렷한 영원한 진리가 있다. “여호와의 축복—그것이 부하게 만드는 것이로다.” (잠언 10:22, 신세 참조) 이것은 확실히 이 광대한 “머나먼 남쪽 땅”의 밭에서도 참됨이 증명되어 왔다. 예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특별한 방법으로 성취되어 온 것 같다. “너희가 ·⁠·⁠·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 1:8.

[각주]

[101면 도표]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전도인의 증가

35 *

1982

30

1978

25

20

15

10 1958

5

1938

0 1918

[각주]

^ 321항 천명 단위

[35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오스트레일리아

아시아

태평양

인도양

[지도]

티모르 해

아라푸라 해

카아펜테리아 만

산호 해

대보초

태즈만 해

그레이트 오스트레일리아 만

인도양

노르만턴

타운즈빌

마운트 아이사

브리즈 베인

터웜바

리스모어

구운디윈디

버어크

탬워어드

메이트랜드

뉴우카슬

시드니

배더스트

야스

베이트만즈 만

멜버른

애들레이드

포오트 피리

포오트 오거스타

미니파

페농

윌리엄 크리이크

앨리스 스프링

노오스맨

캘구우를리

덴마아크

돈니브루우크

핑겔리

퍼어드

엑스마우드

댐피어

포오트헷랜드

브루움

더어비

윈담

다아윈

눌룬부이

태즈메이니아

로운세스턴

호바아트

[41면 삽화]

‘윌리엄 죤스턴’(“아빠”라는 애칭으로 불리웠음) 1918년에서 1930년까지 지부 감독자로 섬겼다

[47면 삽화]

15년 동안, ‘오스트레일리아’의 일부 격지 구역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한 ‘차알즈 버언하아트’

[49면 삽화]

벽지 구역으로 다니면서 봉사하기 위해 ‘파이오니아’ 집단들이 사용한 차량

[51면 삽화]

신권 역사상 가장 탁월한 ‘파이오니아’들 중 한 사람이었던 ‘벤 브리켈’

[56면 삽화]

‘시드니’의 ‘라이치하아트 스타디움’에서 대회 참석자들에게 연설한 ‘J. F. 러더포오드’와 1930년부터 1942년에 사망할 때까지 지부 감독자로 섬겼던 ‘A. 맥길리브레이’

[58면 삽화]

머리 색깔이 붉은 ‘버어트 호오턴’의 아내 ‘비’와 빨간색 자동차는 두 “빨간색 공포”란 애칭으로 알려졌다

[63면 삽화]

1940년 경 N. S. W., ‘두보’에서 선전 행진을 나가기 직전의 한 ‘증인’ 집단

[70면 삽화]

목탄 ‘가스’ 생산 장치를 한 수송차들. 1941년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시드니’까지 기나긴 달구지 여행을 했다

[76면 삽화]

‘맥길리브레이’ 형제가 사망한 후 지부 감독자로서 유능하게 일한 ‘필립 리이즈’와 그와 나중에 결혼한 ‘맥길리브레이’의 딸 ‘마우디’

[86면 삽화]

‘‘길리아드’ 학교’ 제1기생으로 졸업한 후, ‘노워’ 형제가 1947년에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했을 때 지부 감독자로 임명된 ‘플로이드 가아렛’

[89면 삽화]

‘데오드로 재랙스’는 1951년에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어 형제들을 크게 격려했다

1956년에서 1963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왕국 사업을 감독했던 ‘도우그 헬드’와 그의 아내 ‘헬렌’

[95면 삽화]

1964년부터 17년 동안 지부 감독자로 섬긴 ‘죤 윌슨’과 그의 아내 ‘베버얼리’

[99면 삽화]

‘시드니’ 지역에 있는, 공장을 대회장으로 개조한 것임

1982년에 완공된 ‘멜버른’ 지역에 있는 큰 대회장

[105면 삽화]

‘시드니’의 ‘스트라스피일드’에 있는 원래 ‘벧엘’의 최근 모습

1972년에 증축한 모습

그리고 ‘잉글레버언’의 ‘덴햄 코오트’에 있는 현재의 ‘벧엘’

[106면 삽화]

새로운 ‘벧엘’의 ‘로비’에 서 있는 오래된 봉사자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월레이스 박스터’, ‘비 호오턴’, ‘마우드 죤스턴’ 그리고 ‘조오지 깁’

[107면 삽화]

1981년 이래로 지부 조정 위원으로 섬겨온 ‘해롤드 V. (‘빕’) 모우리츠’와 그의 아내 ‘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