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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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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 나라가 바로 ‘유럽’ 대륙의 맨 서쪽에 위치한 ‘포르투갈’이다. 이 이름은 ‘오포르토’란 도시 이름에서 유래하였는데, 그 도시는 ‘도루’ 강 하구 부근에 자리잡은 ‘로마’의 한 무역 사회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포르투칼레’ 즉 배를 부르는 항구를 의미하였다.

‘이베리아’ 반도의 이 서쪽 모퉁이에는, 구문과 어휘는 ‘스페인’어와 비슷하지만 발성과 발음이 아주 독특한 ‘로망’어 계통의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9백 50만의 인구가 살고 있다. ‘포르투갈’의 국토는 동쪽과 북쪽으로 둘러싸고 있는 이웃 나라 ‘스페인’의 5분지 1도 못된다. 그러나 이곳에는, 풍경이 참으로 다양하다!

남부 시골에는, 아름다운 과수원이며 편도나무며 무화과나무뿐 아니라 ‘캐럽’ 상록수도 있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밀을 재배하는 평야와 목축을 하는 ‘리바테조’의 풀이 무성한 목초지를 통과하게 되고, 다음에는 포도원들과 우산 소나무며 ‘유우칼리’나무가 뒤섞여 있는 ‘올리브’나무 숲을 통과하게 된다. 이 나라의 중앙부에 자리한 ‘베이라’ 도(道)의 산맥에는 만년설이 있어, 그 장관을 더해 주고 있다. 북쪽 지방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포오트 와인’의 원산지인 ‘도루’ 강의 심심 계곡에 있는 아름다운 계단식 포도 밭이 특색이다.

좋은 소식이 ‘포르투갈’에 이르다

‘포르투갈’은 항해 국가로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나라의 항해사들과 탐험가들이 ‘인도’에 이르는 항로뿐 아니라 ‘브라질’, ‘마데이라’ 섬, ‘아조레스’, ‘베르데’ 갑, ‘사웅 토메이’ 및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을 발견했을 때인 기원 제15세기가 이 나라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1925년에야 비로소, 이 나라는 마태 24:14의 의미를 알기 시작했다. ‘브라질’에서 봉사하고 있던 ‘캐나다’인 ‘조오지 영’이 ‘포르투갈’을 탐사하여 왕국의 권익을 증진시킨 것이 바로 이 때였다. 그는, ‘워치타워 협회’장 ‘J. F. 러더포오드’가 1925년 5월 13일에 ‘리스본’에서 “땅에서 영원히 사는 길”이란 공개 강연을 하도록 주선하였다.

‘가톨릭’ 사제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천 명 이상이 한 고등학교 체육관을 꽉 메웠고 자리가 없어 다른 이천 명은 돌려 보내야 했을 만큼 이 행사는 대성공이었다. 목격 증인이었던 ‘프랜시스코 울란’은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가톨릭’ 사제들이 이 모임을 해산시키려고 시도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야유를 퍼붓고 의자들을 부수었다. 다행히도, ‘러더포오드’ 형제가 그 상황을 재치있게 통제할 수 있었다.”

이 강연 결론에서는,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과 주소를 안내인들에게 알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 ‘프랜시스코 울란’과 ‘안겔 데 카스트로’를 포함하여, 여러 사람이 그렇게 하였다. 그렇다,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였고, 이 나라에서 최초의 여호와의 충실한 종들이 되었다. 이 괄목할 만한 행사가 ‘포르투갈’에서의 왕국 사업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신속히 진행된 잇단 사건들은, 여호와의 영이 강력히 인도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첫해에 ‘포르투갈’어 「파수대」지의 창간호가 ‘리스본’에서 발행되었다. 앞 표지 이면에 편집인으로 ‘조오지 영’의 이름이 박힌 이 창간호는 1925년 9월에 발행되었다. 1925년 말에는 예약과 통신문을 취급하는 사무실이 ‘리스본’의 ‘루아 산타 쥬스타’ 95번지에서 문을 열었다. 「파수대」지는 아주 잘 알려져 그 해 안에 여러 지방으로부터, 심지어 멀리 ‘아조레스’로부터도 예약 신청이 들어왔다.

공화국 시대

전통적으로 초보수적인 ‘가톨릭’ 국가에서,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가능하였는가? 정치적인 환경 덕분에, 커다란 자유의 풍토가 허용되었다. 1908년 2월 1일에 국왕 ‘돔 카를로스’와 후계자인 왕자 ‘돔 루이스 필립’이 암살당함으로, 이 군주 국가는 심한 타격을 입었다. 그후 1910년 10월 5일에, 공화 혁명이 일어나 ‘돔 마누엘’ 2세의 통치가 막을 내림으로써, ‘포르투갈’의 군주 통치는 종식되었다. 이제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교직자들에 대한 반대를 노출시킴에 따라, ‘가톨릭’ 교회의 힘은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군중은 ‘바티칸 시티’에 ‘포르투갈’의 대표자를 주재시키는 일을 중지하도록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리스본’ 거리에서 시위행진을 하였다. 신문들은 반교직적인 태도를 표명하는 공화주의 지도자들의 연설문을 실었다. 군대가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성인” 축제일이 더는 국경일로 지켜지지 않게 되었다. 종교적 선서는 법적인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정부는 학교 종교 수업을 폐지하였고, 대학 신학 강의도 폐지하였다. 1911년 4월에 제정된 ‘분리법’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격하된 지위를 약술해 준 것이었다. 공화국 창설자들은 국왕의 보좌와 ‘교회’를 거의 무가치한 제도로 간주하였다.

그 동안, ‘리스본’에서 작은 집단의 사람들이 진리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1926년이 되어서야 정규적인 성경 연구 집회를 갖게 되었다. 「파수대」 1926년 4월호에는 편집인으로 ‘비르길리오 페르구손’이 명기되었다. ‘조오지 영’은 잠간 동안만 사업을 조직하는 일을 계속하였었다. ‘페르구손’ 형제는 이제 자기 아내와 더불어 이 나라에서의 왕국의 권익을 돌보도록 임명되었다.

1926년 5월 ‘런던’의 ‘알렉산드라 팰리스’에서 ‘J. F. 러더포오드’가 행한 특별 공개 강연은 ‘리스본’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이 강연에서는 “세상의 통치자들에 대한 증언”이란 제목의 결의문이 제시되었다. 이 결의문을 ‘포르투갈’어로 번역하고 커다란 책자로 인쇄하여, 무료로 배포하였다.

다른 정부하에서

1926년 5월 28일에 ‘가톨릭’ 교직층의 후원을 받는 보수당들의 부추김으로 한발의 총성도 없이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였다. 이것으로 인해,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것은 ‘오우 에스타도 노보’(신생 국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새 정권의 지배자는 재무부 장관 ‘안토니오 데 올리 베이라 살라자르’였다. 1932년에 그는 위원회의 회장(수상)이 되었다.

1926년에 이 신생국가의 독재정권이 수립됨으로써 이제 언론의 자유는 크게 제약을 받게 되었다. 「파수대」지는 1926년 11월호로부터 시작하여 매호마다 정부의 검열을 받아야 하였고, 표지에는 “검열 위원회의 승인필”이라는 표시가 있어야 했다.

1927년에 발행된 첫 번째 「연감」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포르투갈’에서의 사업은 ‘리스본’에 소재한 ‘협회’의 지부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포르투갈’어판 「파수대」의 예약자는 현재 450명이다. 한해 동안 발행된 서책과 소책은 총764부였다. 서신을 통한 진리에 대한 문의가 많았으며, 그러한 문의에 주의가 기울여졌다. 지방 관리인이었던 ‘페르쿠손’ 형제의 보고를 여기 인용한다.

“이곳 사람들에게 증거해야 할 일이 아직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진리의 소식을 청종할 때가 온 것 같다.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관심을 보일 것이다.” 과연 그의 생각은 옳았다!

바로 그의 그러한 말이 ‘아조레스’의 ‘플로레스’ 섬에서 성취되고 있었다. 이 무렵 「파수대」지에 관심을 가졌던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의 딸과 아들이 아버지의 사무실을 청소하다가, 오래된 이 잡지를 몇부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 ‘아빌리오 카를로스 플로레스’는 특히 그 잡지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파수대」지는 성경을 아주 명확히 해설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즉시 ‘비르길리오 페르구손’에게 편지를 띄워 예약을 신청하였다.” 진리의 씨가 열매를 결실하였다. 1974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플로레스’ 형제는 활동적인 여호와의 종으로 봉사했다.

1927년 5월 무렵, ‘포르투갈’어판 「파수대」지는 ‘스위스’의 ‘베른’에서 인쇄되어 정부의 엄격한 검열하에서 배포되고 있었다. 그 정치적인 신생국가는 언론을 점점 더 통제하고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사업의 확장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1927년에 형제들은 3,920부의 서책과 소책 그리고 61,000부의 「파수대」 잡지를 배포하였다.

첫 번째의 침례식

1927년 여름에는 참으로 행복한 행사 즉 첫 번째의 침례식이 있었다. 새로 침례받은 14명 가운데 두 사람은 ‘스페인’인 ‘프랜시스코 울란’과 ‘안겔 데 카스트로’였다. 그들은 새로 발견한 믿음에 대한 열심으로 불타 왕국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그들의 고국으로 갔다. 1927년 8월 15일에 그들은 각각 자기 고향 마을로 갔다. 자기 고향에서 ‘프랜시스코 울란’은 곧 ‘스페인’ 교직자들의 반대를 직면하게 되었고, 15일 이내에 그 나라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안겔 데 카스트로’도 그의 고향에서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그가 성서 책자를 배포하자 소동이 일어났다. ‘카스트로’ 형제가 지방 사제에게 책자를 하나 보냈는데, 그 사제는 사절 편으로 다음과 같은 응답을 보냈다. “‘스페인’에서 종교 재판 제도가 없어지지 않았다면 내가 그를 처치해 버리겠는데, 그 제도가 없어진 것을 유감스러워한다고 그에게 전하시오.”

해외로부터 온 도움

1929년 1월 4일에, ‘조아웅 펠리치아노’는 그가 배운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뜻을 품고 미국으로부터 ‘포르투갈’로 돌아왔다. 그는 ‘페르구손’ 형제와 접촉하였고, ‘리스본’의 다른 지역에서 성서 연구 집회들을 시작하였다. 그는 집집으로 방문하면서 성서 서적을 열심히 전했다. 그는 여러 사람들을 도왔으며, 출판물을 가지고 다니는 데 큰 과일 바구니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바구니를 든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961년에 사망할 때까지, 충실한 여호와의 종으로 봉사하였다.

1931년 11월에는 ‘여호와의 증인’이란 새로운 명칭을 채택하였다. “하나님의 왕국—세상의 유일한 희망”이란 ‘러더포오드’ 형제의 연설 전문이 담긴 「빛과 진리」 책이 엄청나게도 260,000부나 배포되었다.

최초의 ‘콜포오처’

이 무렵, ‘마누엘 다 실바 조르다웅’이 ‘콜포오처’로 봉사하고 있었으며, 그는 이 나라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여행하면서 모든 예약자들을 방문하여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다. 이 나라의 북부 지방에서 많은 예약자들이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그는 ‘브라가’로 갔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한 사람이 그에게로 달려와서 이와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선생님을 만나서 참으로 기쁩니다. 저는 선생님한테 성서에 대해 뭘 좀 배우고자 왔읍니다.” ‘조르다웅’ 형제는, 그가 성서에 대해 좀 아는지 질문해 봤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럼요, 저는 「파수대」를 예약하여 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리스본’에 있는 ‘비르길리오 페르구손’이란 사람과 서신으로 공부도 하고 있읍니다. 당신이 이 도시에 도착한 때부터, 나는 당신을 계속 찾고 있었읍니다.”

‘브라가’에 있는 이 관심자의 집에서 7명 정도의 작은 집단이 성서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이 도시는 “‘포르투갈’의 ‘바티칸’”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곧 ‘가톨릭’ 교회의 반대가 노출되었다. 교직자들이 ‘조르다웅’ 형제를 경찰에 고발하여, 경찰은 한밤중에 급습하여 그를 감방에 넣었다.

이튿날 그가 풀려난 후에, 한 지방 사제는 법원 서기 주임으로 하여금 이 도시의 대 광장에서 그와의 대결을 계획하도록 주선하였다. 그들은, ‘조르다웅’이 고등교육도 받지 못한 거짓 그리스도인이라고 폭로할 계교를 꾸미고 있었다. 이 “뜻밖의 모임”에 50명 가량이 참석하였다. 그 사제가 등장하였고, 누가 그리스도인들이며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열띤 토론이 뒤따랐다. 마침내, 그 법원 서기는 그 사제에게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나는 당신이 ‘가톨릭’ 교회를 변호하기 위해 온 줄로 생각했읍니다. 그런데 당신은 성경으로부터 한 구절도 보여주지 못했읍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당황한 그 사제는 황급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고 한다.

지부 사무실이 문을 닫게 되다

1933년 말 경에, ‘페르구손’ 형제와 자매가 ‘포르투갈’을 떠나게 되었고, 「빛과 진리」 책이 정간되었다. 실용적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부 사무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단절되었다. 지부 사무실은 폐쇄되었고, 그래서 이 나라에서는 영적 양식의 공급이 두절되었다. ‘포르투갈’에서 새로운 정치적인 헌법이 채택된 그 해에, 그러한 일이 발생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 신 헌법은 국가의 권력을 확대하여, 절대적인 권위와 언론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국가에 부여하였다.

그 후 1940년 5월에, ‘포르투갈’은 ‘바티칸’과 정교 조약을 체결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에 큰 특혜를 부여하였다. 국립 학교에서 종교 수업이 부활되었는가 하면, 그 교회가 1910년 이전에 소유했었던 재산은 다시 그 교회에 환속 조치되었다.

시련기를 맞다

사업은 이제 ‘마누엘 다 실바 조르다웅’이 돌봐야 했다. 뒤이어 계속된 어려운 시기에, 그는 가까스로 ‘스페인’에 있는 몇몇 형제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허어버어트 F. 가블러’가 ‘포르투갈’에 있는 형제들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다. 1938년경에 미국 시민인 ‘O. E. 로절리’ 형제가 ‘포르투갈’을 방문하여, 이른바 ‘증거 ‘카아드’’를 사용하여 호별 방문을 하도록 격려하였다. 얼마 안가, 조직적인 모든 전파 활동은 점차 중지되었고, 무활동의 기간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출발

1940년에 ‘안겔 데 카스트로’는 자기와 종종 성서를 토론하던, ‘리스본’에 있는 한 친구를 방문하였다. 이 친구의 아들인, 열 네살 쯤 된 ‘엘리세우 가르리도’가 그들의 대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카스트로’는 그에게 읽어 보라고 묵은 「파수대」 잡지를 몇부 주었다. 나중에 그는 여러 교리에 관한 성귀들을 정리하여 손으로 베껴 만든 책 한권을 그 소년에게 보여주었다. 이 소년은 300‘페이지’에 달하는 그 참고서의 가치를 인식하고 자기도 복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창조의 사진극」의 사진들이 들어 있는 책도 읽었다. 이 책은 그의 마음에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는 ‘카스트로’의 참고서를 복사하는 일을 마치자마자 곧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리스본’에는 이러한 것들을 믿는 다른 사람은 없나요?”

며칠 안에 ‘마누엘 다 실바 조르다웅’은 그를 더 돕고자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조르다웅’ 형제는 ‘엘리세우’로 하여금 자기 집을 ‘성서 연구생’들의 여러 가지 집회 장소로 제공하면서 구두방을 경영하는 ‘조아킴 카르발호’와 접촉하게 했다.

‘조아킴 카르발호’는 1930년대 초기에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이었다. 1933년에 지부가 폐쇄되었을 때 재고로 있던 모든 서적은 ‘리스본’에 있는 그의 구둣방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러한 연구가 더욱 자주 행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출판물의 내용에서 빗나가 사사로운 해석을 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마침내, 젊은 ‘가르리도’가 입을 열었다. “다른 지식을 개입시키지 말고, 잡지에 나와 있는 내용에 고착하는 게 어떨까요? 어쨌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협회’가 제공해 주지 않습니까? 우리가 여호와의 조직에 온전한 확신을 둘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 확인한 바 있읍니다. 우리의 연구를 질문을 읽고 성귀들을 찾아보고 다음에 잡지의 모든 항목을 낭독하는 것으로 제한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대로만 하지 않도록 제안합니다.”

다시 깨어나는 이 기간에, 형제들은 「창조의 사진극」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조아킴 카르발호’는 ‘프로테스탄트’의 작은 집단들, 주로 그리스도의 재림교파의 집단들과 여러 가지 관련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사진극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것을 그들의 집회 장소에서 상영해 줄 것을 형제들에게 요청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성서를 연구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 우리의 서적을 원하기도 했다. 한 재림교 집단은 아예 ‘협회’의 출판물에서 발행자의 이름이 있는 앞 ‘페이지’를 뜯어내기까지 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그들의 집회 시간 및 집회 장소의 주소를 새긴 도장을 찍어 사용하곤 하였다!

‘조아킴 카르발호’가 이들 ‘프로테스탄트’ 집단의 지도자들과 계속 접촉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게 되었다. 그들의 잦은 토론으로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이 ‘성서 연구생’들과의 어떤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끈덕진 욕망이 노출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자, ‘성서 연구생’들은 그들이 여호와의 축복을 받으려면 보다 철저히 분리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모든 관계를 단절하였다.

전파하는 일이 중요시되다

이 때까지 공개적인 증거는 주로 책자를 배포하는 일로 행해졌다. 그러나 1944년 무렵, 이 집단은 봉사의 직무에서 더 많은 일을 하고자 하는 진실한 욕망을 나타냈다. 그들은 조직의 출판물에 밀접히 고착할 필요성을 감지하였다. ‘브라질’에 있는 형제들과의 서신 왕래를 통해, 그들은 이제 「통지자(Informant)」지를 정규적으로 받아 보게 되었고, 이것은 야외 봉사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촉진시켰다.

그래서 형제들은 호별 방문을 하여, 집주인에게 인쇄된 「증거 카아드」를 제공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그 「증거 카아드」를 읽은 후에, 그들은 집주인에게 서적을 제공하곤 하였다.

두 형제가 일요일에 봉사 나가, 호별 방문에서 「증거 카아드」를 사용하여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봉사 활동을 보고하는 일은 아직 미래사였다.

또 이 때에, 이 작은 집단은 확성기와 축음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대단히 기뻐했다. ‘브라질’의 형제들이 ‘포르투갈’어로 된 음반 10장과 축음기 한대를 이 집단에게 보내 주었다. 형제들은 이 새로운 증거 도구를 갖게 된 것을 대단히 기뻐하였다. 음반에서는 연옥이며 영혼이며 왕국의 열쇠들 등등의 제목들에 대한 진리를 설명하고 있었다.

대담하게도 이 집단은 이 장비를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엘리세우 가르리도’는 초기의 한 경우를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는 ‘리스본’의 ‘캄폴리대’ 지역에 있는, 집들이 운집해 있는 한 조그만 뜰로 갔다. 여기서 우리는 축음기를 설치하고, 집주인들에게 그 뜰로 나와 흥미진진한 성서 소식을 듣도록 초대하였다. 30명 가량이 와서 열심히 들었다. 끝날 때 우리는 그들에게 성서 서적을 즐거이 제공하였다.”

전파 활동이 연합을 촉진하다

이 때부터 형제들은 밀접한 연합의 필요성을 점점 더 의식하게 되었다. 일요일의 성서 연구 집회에 정규적으로 참석하는 관심자들의 집단이 15명 가량으로 불어났다. 참석자 수가 계속 증가하자 그들은 조그만 방을 하나 세내어 집회 장소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집회에서 사용된 주요 출판물은 「파수대」였다. 점차적으로 형제들은 여호와의 백성의 세계 조직과 더욱 긴밀하게 연합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조아킴 카르발호’와 ‘엘리세우 가르리도’가 ‘브루클린’의 ‘협회’ 본부와 통신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을 때인 1946년 10월에, 실로 역사적인 결정이 내려졌다. 그들은 서신에서 ‘협회’가 선교인을 ‘포르투갈’에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진리의 다른 씨들이 싹트기 시작하다

‘리스본’에 있는 ‘성서 연구생’들이 모르는 사이에, 이 나라의 다른 지역에서 흥미있는 사태가 진전되고 있었다. 바로 ‘타구스’ 강 건너 ‘알마다’에서, ‘델미라 마리아나 도스 산토스 피게이레도’는, 자기의 16세된 아들이 사망한 일로 크나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나의 아들에 대해, 그리고 그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또 하나님께서 그의 죽음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매일 공동 묘지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아버지가 성경으로부터 나에게 말해 주었던 것들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나의 아버지는 과거 1927년에 ‘비르길리오 페르구손’을 알았었고 집회에 참석했었다.”

어느 날 공동 묘지에서 돌아온 후, ‘델미라’는 자기 아버지가 간직했던 오래된 책들을 찾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서,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발견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945년에 ‘브루클린’으로 편지를 썼다. 회신이 왔을 때, 그의 뺨에는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접촉을 하게 된 것이다.

그 회답은 ‘브루클린 벧엘’ 가족의 일원이었던, ‘아조레스’ 태생인 ‘죤 페리’가 쓴 것이었다. ‘죤’은 그에게 성서가 없다면, 한권 사서 부활의 희망과 새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관해 말하는, 자기가 적어준 성귀들을 찾아 읽어 보라고 제안하였다. ‘죤 페리’를 통하여 ‘협회’는 ‘델미라’에게 서책과 소책자들을 소포로 보내어, 그것을 무료로 배포하도록 격려하였다. 그는 즉시 그렇게 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한 곳이 공동 묘지였기 때문에, 그곳이 그의 주요 구역이 되었다. 그의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은, 아들이 죽더니 그가 정신이 돌았다고 생각하였다. 한 주일에 여러 차례, 그는 혼자서 공동 묘지로 가서 비탄에 잠긴 사람들에게 부활의 희망에 관해 이야기해 주곤 하였다. 새로이 “미친 여자”란 평판을 받게 되었지만, 그 때문에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그의 열심이 꺾이지는 않았으며, 전파를 많이 할수록 그의 믿음은 그 만큼 더 커져 갔다.

‘델미라’는 이렇게 회고한다. “공동 묘지에서 어느 날, 나는 여러 날을 계속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한 부인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말을 걸었으며, 그 여자는 22살된 자기 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부활과 낙원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관해 듣자, 이 여인 ‘데올린다 핀토 코스타’는 더 알고 싶은 열망이 강렬해진 나머지 주간 성서 연구를 하기 위해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얼마 안 가서, 우리 두 사람은 통곡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놀라운 희망을 전하기 위해 공동 묘지를 찾아가게 되었다.”

진리에 대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 이들 열정적인 여인들은 여러 관심자들을 위한 성서 연구를 조직하였다. 매주 수요일 오후마다 ‘데올린다 핀토 코스타’의 집에서 여섯이 넘는 여자들로 된 한 집단이 ‘협회’의 출판물을 사용하여 성서를 연구하기 위해 모였다. ‘브루클린’의 ‘죤 페리’와의 서신 왕래를 통하여, 관심가진 이 여인들의 집단은 ‘리스본’에 형제들의 핵심 집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리스본’에 있던 형제들은 ‘알마다’에 관심자들이 있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들은 만날 마련을 하였다. 그렇게 하여 형제들은 모두 여자들로 구성된, 여덟 명으로 된 집단이 주간 성서 연구를 하고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즉시 ‘리스본’의 형제들이 참석하는 가운데 ‘데올린다’의 집에서 정규 집회들이 조직되었다. 이 ‘알마다’ 집단의 최초의 자매들이 오늘날까지 그들의 성실을 지키고 왕국 봉사에서 계속 활동적인 것을 보는 것은 실로 기쁜 일이다!

진리가 멀리 북쪽으로 전파되다

이 무렵, ‘포르투갈’의 가장 멀리 떨어진, ‘트라소-오스-몬테스’ 도(道)에서 흥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1945년 11월에, 미국에서 진리를 배운 ‘푸리피 카카웅 데 제수스 바르보사’가 자기 친척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자기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여자의 고향 ‘로우사’는 ‘리스본’에서 400‘킬로미터’ 이상이나 떨어진 곳이다. 그의 친척들 대부분이 진리를 배척하고 그를 경멸하였지만, 젊은 두 조카만은 관심을 보였다. ‘푸리피 카카웅’은 22살된 ‘마리아 코르데이로’에게 한권의 성서와 여러 소책자들을 선물로 주었다. 나이가 좀 어린 13살된 그의 조카 ‘안토니오 마누엘 코르데이로’는 생전 처음으로 성서를 자기 손에 넣게 되어 감격스러워했다. 그는 사촌 누이와 성서에 관해 가진 첫 대화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사촌 누나는 나에게 「창세기」의 첫장을 읽어준 다음, 아름다운 지구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신 이 하나님의 이름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날부터, 나는 나의 웅대하신 창조주에 대한 깊은 사랑과 인식이 자라가기 시작했다.”

일년이 넘도록 이들 남매는 들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을 매일매일 애타게 기다렸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도박을 하고 술을 마시러 나간 후에는, 그들이 살그머니 빠져 나가 그들의 사촌 누나 집으로 가서 성경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여호와」, 「구원」 및 「자녀」 책들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기본 진리를 많이 배우게 되었다. 일년 남짓 지난 후에, 방문객으로 왔던 이 사촌 누나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풍성한 축복을 가져왔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된 두 사촌 조카와 한 여자를 두고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입장을 고수함

성실의 시험이 ‘마리아’와 ‘안토니오 코르데이로’에게 일찍 닥쳐, 그들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들은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끊었다. 사제가 그들의 부모님 집을 방문하여, ‘안토니오’와 ‘마리아’가 십자가에 입 맞추기를 거절한다고 비난하였다. 종교 휴일이 되면, 문제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일찍 집을 나가 숲속으로 가서 성서와 ‘협회’의 출판물을 읽으면서 온 종일을 보내곤 하였다.

2년쯤 지났을 무렵, 당시 15세가 된 이 소년은 병으로 앓게 되어 어느 ‘가톨릭’ 병원에 감금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수술을 받기 전에, 그는 고해와 “축복의 기도”를 거절하여, 사제와 수녀들의 분노를 샀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왔을 때, 그들은 그의 행동에 대해 일러 바쳤다. 집에 와서 그의 아버지는 ‘안토니오’에게, 가서 고해를 하고 그가 저지른 모든 “악한 행동”에 대해 사죄를 구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안토니오’는 마지 못해 가게 되었다. 사제와 단둘이만 있을 때 그는, 성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알려 주므로 자기가 거절한 것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고해와는 판이한 것이었으며, 그 젊은이는 그 사제에게 성서에 기초한 그의 믿음에 대해 철저한 증거를 하였다.

어린 ‘안토니오’는 자기가 법적인 성년이 될 때까지는 집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모의 소원에 따라, 그는 매일 들에서 순종적으로 일을 하였지만, 밤이 되면 자기 누이 동생과 성서를 연구하였으며,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가 배우고 있는 좋은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수년 후에 이 두 젊은이는 이 나라에서 최초의 정규 ‘파이오니아’들 가운데 끼게 되어, ‘인내를 온전히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다. ‘안토니오’는 나중에 결혼을 하였고 여러 해 동안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파이오니아’로 일하고 있다.—야고보 1:4.

조직하는 일을 배움

의심의 여지없이, 왕국 사업을 보다 더 잘 조직할 때가 되었다. ‘카르발호’와 ‘가르리도’의 서신에 대한 회답으로, ‘협회’는 1947년 5월에 두명의 대표자를 ‘포르투갈’로 파견하였다. ‘F. W. 프랜즈’ 형제와 ‘H. C. 코빙톤’ 형제는 5월 5일에 ‘리스본’ 공항에서 여덟 명의 행복해 하는 형제들의 영접을 받았다. 수년 동안 계속 충실을 지킨 몇명 안 되는 이들 여호와의 헌신한 종들에게 있어서 이 만남은 독특한 순간이었다. 형제들은 ‘프랜즈’ 형제가 “조직의 지시”란 제목의 연설을 ‘포르투갈’어로 하는 것을 듣고 기쁨에 벅찼다. 이 때에 ‘리스본’에서의 최초의 회중을 돌보도록 임시로 네명의 종이 임명되었다.

이 방문 중에 ‘코빙톤’, ‘프랜즈’, ‘카르발호’ 및 ‘가르리도’ 형제들은 왕국 사업을 합법화하고 또 선교인들을 파견할 허락을 받을 수 있는지의 가능성을 타진하였으나 그들의 요청은 완강히 거절당했다.

그 해 12월 13일에는, 또한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가 ‘포르투갈’을 처음으로 방문하였으며 이것은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워치타워 길리아드 성서학교’의 제8기생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봉사하도록 임명을 받은 ‘죤 쿠우케’ 형제도 그들과 동행하였다. 악천후로 인하여 비행기가 상당히 연착하였기 때문에, 그 이틀간의 방문은 단지 몇 시간으로 단축되고 말았다. 그들은 자정에 도착하여 밤샘을 하면서 질문들에 대답하고 왕국 사업의 발전에 관해 논의하였으며 다음 날 아침 8시 15분에 떠났다.

이 작은 집단이 완전히 연합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 참석한 사람들 중 몇몇은 조직과 진리 자체를 비난함으로써 완고한 사람들임을 스스로 드러냈다. 이러한 부패한 영으로 인하여 발전이 거의 없었다. 한 가지 밝은 희망이 되는 것은 ‘알마다’에 있는 자매들의 집단이었다.

하지만, 형제들은 필요한 훈계를 받아들였으며, 그리하여 사업은 진전을 보였다. 「조직의 지시」란 소책자뿐 아니라 ‘브라질’로부터 「통지자(Informant)」지를 더 많이 받게 된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쿠우케’ 형제가 도착하기 전에, ‘리스본’ 집단은 전도인 네명의 첫 봉사 보고를 ‘브루클린’에 보냈다. 호별 방문 봉사를 조직적으로 시작하라는 지시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들이 증거를 시작한 바로 첫 번째 구역에서, 그들은 소책자를 400부 전하였고, 그 결과 많은 성서 연구가 생겼다!

선교인 활동이 시작되다

1948년 8월에 두번째로 ‘스페인’으로부터 ‘리스본’에 도착했을 때, ‘쿠우케’ 형제는 신권적인 전파 방법을 알고자 열망하는 한 집단의 영접을 받았다. 하지만, 오래된 사람들 중 한두 사람은 조직의 지시와 보조를 맞추기를 꺼려하였다. 이 선교인을 위한 첫 번째 모임은 대단한 행사가 되었다. ‘쿠우케’ 형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나는 ‘알마다’ 집단에게 ‘스페인’어로 나의 첫 번째 연설을 하였으며, 그것을 ‘엘리세우 가르리도’가 ‘포르투갈’어로 통역하였다. 사회자인 ‘카르발호’ 형제가 결론을 맺은 그 집회의 끝에 가서, 그는 그 집단 앞에 일어서서 경건한 자세를 취하여 청중 앞에 그의 두 팔을 펼치고서 회중을 축복하는 것이었다. 수년 동안에 걸쳐 ‘카르발호’는 큰 ‘바벨론’의 관습과 사상을 다수 계속 가지고 있었으므로, 다루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1948년 9월 27일에, ‘쿠우케’ 형제가 도착한 후 최초의 침례식이 거행되었으며, ‘엘리세우 가르리도’를 포함하여 총 여덟 명이 침례를 받았다. 이들 중에 여섯 사람은 모두 ‘알마다’에서 온 자매들이었다. 하지만, ‘리스본’의 그 집단은 “남자들 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그 특징이었다. 자매들은 따뜻한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이제 조직적인 방법이 도입됨에 따라 ‘리스본’의 보다 오래된 형제들 가운데 몇몇은 새로운 선교인을 열정적으로는 지지하지 않았다. 집회 참석자 수가 떨어졌다. 하지만, ‘알마다’의 그 자매들은 열심히 그리고 기꺼이 호별 방문 봉사를 지지하였다. ‘쿠우케’ 형제는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내가 ‘알마다’에서 처음으로 자매들과 봉사 나간 일 중 한 번만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그들 여섯 사람이 모두 한집에 들어갔던 것이다. 여섯 사람의 여자가 문전에서 있고, 그 중 한 사람이 호별 방문 연설을 하는 것이 어떠했겠는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들이 조금씩 틀잡아지면서 진전되기 시작하였다.”

선교인이 도착한 것은 참으로 축복이 되었다. 형제들은 개인적인 견해를 멀리하고 조직의 지시에 보조를 맞추도록 도움을 받았다. 신권 전도 학교와 봉사회 집회가 조직되었다. ‘델미라 마리아나 도스 산토스 피게이레도’는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쿠우케’ 형제가 도착한 후부터 우리는 문답식으로 「파수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는 한 형제가 낭독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듣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인쇄된 「증거 카아드」를 사용하지 않고, 호별 방문 봉사에서 사용할 간단한 연설을 준비할 때가 오게 되었다. ‘쿠우케’ 형제는 형제들에게 문전에서 책자뿐만 아니라 「파수대」도 제공하도록 준비시켰다.

최초의 왕국회관

선교인의 도착과 더불어, 집회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프라카 일하 도 페이알’에 조그만 방을 하나 세 내었다. 사업이 번창해 감에 따라, 보다 넓은 장소가 필요해질 것임이 분명해졌다.

1949년의 ‘기념식’은 ‘알마다’의 어느 개인 집에서 가졌다. 116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 형제들은 가슴뭉클했다! 보통 크기의 그 거실에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남은 사람들은 옆방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연사는 문에 서서 동시에 두 청중에게 연설을 하였다. 오래지 않아, 이 ‘리스본’ 집단은 ‘루아 파소스 마누엘’ 20번지에 소재한 한 ‘어파아트’의 일층에 한간을 세내었는데, 이것은 ‘포르투갈’에서의 ‘여호와의 증인’의 최초의 비공식 왕국회관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수년 동안 이곳이 순결한 숭배의 중심지로 사용되었다.

‘어파아트’에 사는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형제들은 그 ‘리스본’ ‘회관’에서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강을 건너 ‘알마다’의 집단을 방문하였을 때에는 개인 집에서 마음 놓고 오랫 동안 즐겁게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접촉하는 일

이 무렵에 ‘트라스-오스-몬테스’, ‘로우사’에 동떨어져 있던 사람들은 미국에 있는 사촌으로부터 ‘리스본’에 있는 형제들의 주소를 입수하게 되었다. 여러 차례, 반대가 자심한 가족에게 구타를 당한 일이 있는 ‘마리아 코르데이로’는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사람을 보내어 우리를 도와 주고 격려해 주시지 않겠읍니까?” ‘죤 쿠우케’는 400 ‘킬로미터’의 여행길에 올랐다. 그것은 아주 흥미있는 경험이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로우사’ 마을에 이르기 위해, 나는 가장 가까운 기차 역에서 산을 타고 올라가는 데 세 시간을 소비하였다. 이 지역은 ‘트라스-오스-몬테스’라고 불리는데 이 말은 ‘산 너머’란 뜻이다. 나는, 그 마을 사람들이 그 이름의 뜻과 일치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지역은 험준한 산길이 있을 뿐 도로도, ‘버스’도, 자동차도, 의사도, 약방도, 경찰도 그리고 전화도 한대조차 없는 곳이었다. 집들은 석조 건물이었고, 지붕은 조야한 ‘타일’로 덮여 있었으며, 굴뚝도 없었다. 사람들은 마루에 불을 피워 요리를 하였으며, 연기는 지붕이나 문틈으로 빠져 나가게 하였다. 그들은 대단히 미신적이었으며, ‘가톨릭’ 교회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고 있었다.

“가족으로부터의 반대 때문에, ‘마리아 코르데이로’나 그의 동생 ‘안토니오’를 방문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웠다. 나는, 미국에서 이 지역으로 진리를 가져 들어온 ‘증인’의 어머니 집에 겨우 숙소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몇 차례 우리는 함께 만나 격려적인 토론을 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나는 호별 방문 봉사를 시작하였다. 사제는 지체없이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경고하였다. 내가 묵고 있는 집을 습격하여 불태우겠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고 이웃 사람들이 경고하였을 때, 나는 재방문을 하고 있었다. 내가 방문한 그 가족은 그 소문을 확인하고서, 어두울 때 집에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밤을 그들의 집에서 지내라고 나를 설득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그 마을은 소문과 긴장으로 고조되었다.

“내가 아직 그 관심자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그 마을 행정관이 나에게 와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직접 조사하였다. 간단한 설명을 듣고 난 그는 만족한 기분으로 돌아갔다. 그런 다음에 사제가 왔다. 그가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바깥 거리에 서서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대화를 듣기 위해 많은 군중이 모여 들었다. 그 사제는 젊지만 격정에 사로잡히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토론을 차분하고 우정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교리와 관련하여 난처한 처지를 모면하기 위해서, 그는 자기가 ‘우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마을 사람들에게 주려고 ‘라틴’어를 자주 인용하였다. 그는 성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시인하였고 또 내가 그에게 한권 구해다 줄 수 있느냐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가버렸다. 이 일로 긴장된 분위기는 완화되었다. 나는 즉흥 연설을 하였고, 책자를 여러 권 전하였으며, 그렇게 하여 나의 방문을 평화스럽게 끝마쳤다.”

영매술에도 불구하고 발전하다

자기가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의 영의 지도를 받고 있다고 믿고, 악귀의 영향을 받아 불어로 시를 쓰고 있는 한 미망인과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부활에 대한 자세한 토론을 통해, 그는 진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았고, 영매술을 버리고 침례를 받았다. ‘리스본’에서 이름난 한 영매술사와 또 다른 연구가 사회되었다. 이 여인은 악귀의 영향을 떨쳐버리기 위해 정신적으로 고투를 하였지만, 결국 그 여자도 침례를 받았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지도적 입장에 있는 영매술사들 여러 명이 왕국회관으로 와서 토론을 원했다. 선교인은, ‘여호와의 증인’들은 공개적인 토론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이들 집단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주된 목적은 종교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듣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적인 토론을 하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왕국회관에 와서, 성서에 기초한 토론을 하기로 동의하였다.

토론회가 있는 날 밤에, 영매술 집단의 성원 약 50명이 참석하였다. 연단에는 각 집단의 대변자로 두명의 대표자가 자리했다. 영매술 지도자가 제기한 첫 번째 질문은 마태 복음 10:28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질문을 하였다. “성서는 영혼이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어째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영혼이 죽는다고 믿을 수가 있소?” ‘쿠우케’ 형제는 침착한 태도로, 그것은 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같은 성귀의 마지막 부분을 읽기만 한다면 될 것이었다. 그 부분은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게헨나, 신세)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이 지식인 집단의 논박은 분쇄되고 말았다. 성서에 기초한 토론이 그들로서는 너무 벅차다는 것을 간파한 그들은 ‘쿠우케’ 형제에게 우리의 믿음의 요지를 말하는 성서 강연을 하라고 요청하였다. 그 결과 훌륭한 증거가 행해졌다.

‘아조레스’에서 사업이 시작되다

그러는 동안 ‘아조레스’에서는 흥미있는 사태가 진전되고 있었다. ‘산타마리아’ 섬을 제외하고 ‘아조레스’ 군도를 형성하고 있는 아홉 개의 섬에는 화산이 있다. 온천이 있고, 비도 많이 오고, 여름에 햇볕이 잘 들므로, 식물이 무성하게 자란다. ‘오렌지’며 ‘아프리코트’며 ‘레몬’이며 ‘바나나’며 무화과 등의 과목들이 많다. 풍부한 물고기는 이들 섬에 사는 사람들에게 양식이 된다.

‘아조레스’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수세기 동안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해 왔다. 또한 사람들은 서로를 빤히 알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로운 성향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성서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보였다. 좋은 소식이 이들 섬에 이르기 여러 해 전, 1902년에 ‘피코’ 섬에서 놀라운 일이 하나 발생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조레스’인 여섯 사람이 다섯 살난 어느 남자 아이의 장례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그들은 사제가 참석하지 않은 장례식을 가졌고, 사람들은 복음 전도 찬송가를 불렀다. 그러한 대담한 일은 지방 사제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으며, 그 사제는 그들을 법원으로 데리고 가서 그 나라의 종교는 물론이거니와 하나님 자신을 모독했다고 고발하였다! 그 사건은 1903년에 ‘아조레스’ 상소원이 심의하게 되었고, 결국 ‘리스본’의 대법원으로 보내졌으며, 여기서 그것은 증거 부족으로 기각되었다.

이 사건이 심의되기 전, 이들 여섯 사람 중에 한 사람인 ‘조아웅 알베스 페레이라’(‘죤 페리’)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여호와의 백성과 접촉하게 되었으며,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브루클린 벧엘’ 가족의 일원이 되었고, 1965년에 사망할 때까지 계속 ‘벧엘’ 성원으로 봉사하였다. 그가 ‘피코’ 섬에 있는 자기 가족과 친구들에게 우편으로 보낸 첫 번째 출판물 가운데는 「하나님의 거문고」와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책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후에, 1902년에 그 장례식에 참석했던 다른 두 사람의 아들들 역시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둘다 진리를 배우게 되었다. 이들 중 하나인 ‘아이작 아빌라 폰테스’는 자기 아버지 ‘조세 실베이라 폰테스’에게 서적을 보내주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혼자서 공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에 관해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그 장례식에 참석했던 또 한 사람의 아들인 ‘아니발 누네스’는 1940년에 ‘증인’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아니발’과 그의 아내는 그들의 동료 고향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열심과 결의에 가득차, 그들의 고향 ‘피코’ 섬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1947년에 미국을 떠났다. 그들과 대화를 나눈 최초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은 기혼자인 젊은 이웃 ‘마리아 아빌라 레알’이었다. ‘아니발’이 그 여자에게 증거를 하고 있을 때, 교회의 종이 세번 울렸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아베마리아’(‘마리아’를 찬양하라)라고 외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누네스’ 형제는 그에게 이 지구의 창조주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질문했다. “그럼요, 물론 하나님이시죠.” 그는 재차 질문했다. “정말이예요?” 그의 대답을 확인하고 나서, 그는 이러한 질문을 했다. “그분이 이 땅을 만드실 때 그분의 어머니는 어디계셨읍니까?” 그는 재빨리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께는 어머니가 없읍니다.” 그래서 이제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가르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삼위일체 교리가 온전히 거짓이라는 사실이 즉각 그에게 심한 충격을 주었다.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그는,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며,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육적 어머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도착한 지 10일도 못되어, ‘누네스’ 형제는 여러 사람을 설득하여 진리를 듣게 하였다. 그는 자기 형의 집에 공개 집회를 마련하였는데, 82명이 참석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문과 창문 옆 밖에 서서 연설을 들었다. 이 강연은 밤에 촛불을 켜 놓고 행해졌다. 이 강연은 ‘마리아 아빌라 레알’이 교회에 다니는 일을 그만 둔 사실과 더불어, 수백 가구가 살아가는 이 조그만 지역에 일대의 파문을 일으켰다. 면적이 461평방 ‘킬로미터’인 이 섬에는 한 집단의 촌락에서 이웃 촌락까지를 잇는 길에 다만 수레가 다니는 정도였지만, 교회가 가장 열성적인 신자들 중 한 사람을 잃었다는 소식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감정이 격화된 사제는 젊은 ‘마리아’의 마음에 공포를 불어넣고자 결사적으로 시도했다. 그는 ‘마리아’에 대해 사실 무근한 온갖 말을 말했다. 그의 이웃들은 그를 따돌려 경멸하고 폐인 취급하였다. 그러한 모든 일도 소용이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는 좋은 토양에 떨어졌고, ‘마리아’는 아주 열정적이고 두려움을 모르는 전도인이 되어, 수년 동안 정규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했다.

1949년에 23살인 ‘마리아’의 오빠는, ‘마리아’가 이 새로운 종교를 따르지 못하게 하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는 오빠에게 「종교가 돌풍을 거두다」라는 소책자를 주었다. 그 소책자를 만지고 싶지도 않을 정도의 편견이 있었지만, 그는 아뭏든 그것을 받았다. ‘증인’의 서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발각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그는 그것을 언덕에 있는 한 동굴에 가지고 가서, 거기서 조심스레 앞 표지부터 뒷 표지까지 통독하였다. 그 소책자에 담긴 소식은 ‘마누엘 아빌라 레알’에게 즉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증인’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이 한권의 소책자에 담긴 소식이 그를 뼈저리게 강타한 그 온전한 위력을, 그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대해 나에게 확신을 준 것은 이 잊을 수 없는 소책자에 담긴, 거짓 종교를 그토록 분명하고도 대담하게 공격한 강력한 성서 진리였다.”

1902년에 사제가 없이 장례식을 가졌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게 되었던 그 여섯 사람 중 또 다른 한 사람인 ‘조세 실베이라 폰테스’가 이 무렵에 ‘사웅 미구엘’ 섬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 섬은 아홉 개의 섬 중에서 가장 큰 것이며, 한때 활동하던 두 개의 화산이었던 것이 용암과 재를 아주 많이 분출해 내어 결국에는 하나가 되었다. 난초와 차나무 덤불이 많은 이 섬에서, 그는 자기가 「파수대」에서 배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가 주요 도시 ‘폰타 델가다’에서 행한 비공식 증거의 결과로 네명의 원주민이 최초로 ‘증인’이 되었다. 두 자매 ‘마리아 로사’와 ‘마리아 레이트’는 지금도 여호와의 이름을 변함없이 열정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다른 섬 ‘그라시오사’에서는, 부두에서 일하던 한 사람이 동료의 호주머니에서 ‘팜플렛’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고서 자기가 읽어도 좋으냐고 질문했다. 그의 동료는 기꺼이 동의하였으며, 어느 배에서 승객 한 사람이 그것을 자기에게 준 것이지만 자기는 그것을 읽을 줄 모른다고 말했다. 부두 노동자인 ‘마누엘 모니즈 베텐코오트’는 「신세계」란 제목으로 된 그 책자를 읽었다. 그는 더 보내달라고 ‘협회’에 편지하였고, 그 책자를 섬 전체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진리의 씨가 ‘그라시오사’ 섬에 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 사람의 ‘증인’의 전도 봉사가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많은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두명의 ‘길리아드’ 졸업생 ‘포올 베이커’와 ‘케넷스 윌리엄즈’가 ‘피코’ 섬에 도착함으로써, 1950년에 ‘아조레스’에서의 봉사 사업은 새로운 기간에 돌입하였다. 초보수적이고 ‘가톨릭’이 지배하는 이 섬에서의 봉사 사업은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는 교직자들의 압력을 받아 선교인들을 추방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업은 수행되어 전도인 21명의 신기록을 가져왔다. ‘포올 베이커’는 여권을 재신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공산주의 활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그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이 그의 숙소로 찾아왔다. 그는 ‘리스본’으로 떠나는 첫 배에까지 호송되어 갔으며, 거기서 그는 일주일 간을 감옥에서 지냈다. 그 날조된 고발은 거기서 기각되었지만, 그는 이 나라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러는 동안, ‘포르투갈’에서의 사업은 꾸준히 발전하고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자립으로 3년을 보낸 후 1951년에, ‘죤 쿠우케’는 두명의 선교인 ‘머어빈 파슬로우’와 ‘버어나아드 백하우스’가 자기와 합세하게 되어 기뻐하였다.

1951년의 ‘F. W. 프랜즈’의 방문

‘리스본’에서는 ‘F. W. 프랜즈’ 형제의 방문을 기대하는 가운데 흥분이 고조되고 있었다. 바쁜 일주간 중 절정은 우산처럼 생긴 커다란 수목 밑에서 하루 동안 대회를 가진 것이었다. 90명이 참석하였고, 11명이 침례를 받았다. ‘포르투갈’에서의 사업의 초창기에는, 통치체 성원들의 잦은 방문은 우리 형제들이 전파 사업을 돌보는 본부와의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방문의 마지막 날 밤에, ‘프랜즈’ 형제는 선교인 집에서 작별 연설을 하였다. 그 흥미 진진한 연설 제목은 “불의 침례”였다. 연설이 끝난 후에, 평소보다 많은 군중이 주위에 모여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찌기 비밀 경찰이 조사하기 위해 나타난 것을 보면, 누군가 이웃 사람이 고발을 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만족해 하는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선교인들이 그 비밀 경찰을 만난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값진 교훈을 배웠다. 그 후부터 그들은 그처럼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가 없게 되었다.

‘쿠우케’ 형제는 ‘프랜즈’ 형제를 따라서 ‘스페인’에 있는 회중들을 방문하기 위해 ‘리스본’을 떠났으며, 그 다음에 그는 영국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에 참석하였다. ‘백하우스’ 형제의 여권이 만료되었으나, 당국은 그에게 ‘비자’를 재발급해 주기를 거절하였다. 그래서 그는 곧 ‘스페인’으로 떠나야 했다. ‘쿠우케’ 형제는 병이 나서 돌아올 수가 없게 되었다. 남아서 사업을 돌볼 수 있는 유일한 선교인은 ‘파슬로우’ 형제뿐이었는데, 그마저 중병을 앓았다. 후에 그는 아직 비교적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그의 전생을 ‘오스트레일리아’와 ‘포르투갈’에서 헌신적인 봉사에 바쳤었다.

조직을 정결하게 하는 일

심각한 문제들이 앞에 놓여 있었다. 일부 개개인들이 불평을 하고 험담을 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두 형제가 사업 지도 방법에 불만을 품었다. 그 중 한 사람인 시계 수리공 ‘산토스’는 ‘우리의 목사’란 글귀를 박은 ‘죤 쿠우케’의 사진들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의지가 강한 이 사람은 몇몇 연로한 형제들을 동요시켜 자기를 따르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산토스’는, 자기가 종으로 임명되지 못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브루클린’으로 장황한 편지들을 써 보냈다. ‘브루클린’에 보낸 한 편지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그의 마음 상태를 간파할 수 있다. “실은 내가 선교인들에게 왕국회관에 걸도록 시계를 하나 주었는데도, 그들은 나를 종으로 임명하지 않았읍니다.”

그는, 여러 달 동안 어느 집회에도 참석하지 않던 ‘조아킴 카르발호’에게 그의 불평을 점점 더 많이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선교인들은 ‘포르투갈’인이 아니므로 이 나라 말을 잘 몰라 실제로 지방적 상황을 그들 만큼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넌지시 말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은 불만의 씨를 뿌렸다. 이것은 대다수의 전도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집회 참석자 수가 떨어졌다. 심지어 어떤이들은 조직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별도의 집회를 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충실한 그 선교인은, 여호와께서 사태를 수습해 주실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인내하였다.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1952년 2월에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가 방문하였고, 건강해진 ‘쿠우케’ 형제가 돌아왔다. 불평자들, 종들 및 선교인들이 모임을 가졌다.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행사였다. 불평자들과 종들은 타자한 장황한 진술서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노워’ 형제는 그 모든 서류들을 단번에 제쳐 놓고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뇨, 나는 서류는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여러분의 형제들이 있읍니다. 그들에게 불평이 있으면 말해 보십시오.” 그 문제에 대한 이러한 간단하고 단도직입적인 성서적 처리 방법은 말썽을 빚고 있는 그러한 사람들을 완전히 당황하게 만들었다. 상당한 시간 동안 그들은 정확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렸다.

그러자 ‘노워’ 형제는 이와 같이 말했다. “글세요, 내가 한 시간 동안 여기 앉아 있었고, 또 여러분이 실제 불평한 것이라곤 여러분 중 한 사람이 모임에서 말한 것을 듣고 이 자매(통역을 하고 있던)가 미소를 지은 것 뿐이었읍니다.” 그러자 여럿은 그들이 등한시 되었다고 느끼는 점들을 말하였다. 주요 불평자들인 두 형제 ‘산토스’와 ‘카르발호’는 분명히 불량한 영을 나타내어 책망을 받았다. 물론, 참석한 모두는 개인적인 차이들은 제쳐 놓고 좋은 소식을 전파해야 하는 참으로 중요한 사업을 계속 추진해 나가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훌륭한 충고를 받았다.

그 날 오후 ‘알마다’에서 개최된 한 집회에서 ‘노워’ 형제는 참석한 122명의 형제들에게 강력한 충고를 하였다. 그는, 모두가 여호와의 조직에 대해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를 설명하였다. 그 때에 ‘쿠우케’ 형제가 두 집단으로 구성된 한 회중의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신속한 반응이 있었다. ‘산토스’ 형제는 그 임명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였고, 자기 집에서 모이고 있는 연구 집단은 자기 집에서 집회를 보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조직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누구든지 마음대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헌물한 시계를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다. ‘쿠우케’ 형제는, ‘카르발호’ 형제가 사회하고 있던 서적 연구 집단에 참석하려고 갔지만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얼마 안가서 이들 독립적인 집단들의 활동은 정지되었고, 결국 ‘산토스’와 ‘카르발호’는 제명 처분당하였다.

‘사단’은 ‘포르투갈’에서의 신권 조직을 파괴시키려 했음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노워’ 형제의 방문 후에, 전반적인 상황은 급속히 개선되었다. 그해 봉사년도는 62명의 전도인이 보고를 한 것으로 끝났고, ‘기념식’에 207명이 참석하여 신기록을 냈으며, 새로운 관심이 싹트고 있었다.

그 상황은 「1954년 연감」 보고에 다음과 같이 요약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이 관련되는 한, 1952년에 과감한 정화 작업이 있었다. 눈부신 증가가 있었음을 고려해 볼 때, 이 나라에 대한 이 해의 보고는 신세계 조직을 깨끗이 보존하는 일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 행동을 하지 않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속 가르치시는 훌륭한 원칙들을 따르지 않는 그러한 전도인들을 잃게 되는 것을 회중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조직을 돌보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쿠우케’ 형제가 강제로 떠나게 되다

‘포르투갈’의 이 두 회중은 이제 규모도 커지고 또 성숙해지고 있었다. 1월에 ‘엘리세우 가르리도’가 ‘오포르토’로 이사하여, ‘포르투갈’에서 두번째로 큰 이 도시에서 왕국 봉사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뜻밖의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국은 ‘쿠우케’ 형제의 여권을 갱신해 주기를 거절하였다. ‘포르투갈’에서의 그의 선교 봉사는 끝난 것이다. 그는 ‘포르투갈’에 작별을 고하고—‘앙골라’로 갔다! 그는 지금 남‘아프리카’ 지부에서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다.

‘마데이라’ 섬

이제 왕국 사업이 ‘마데이라’ 섬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마데이라’란 ‘포르투갈’ 말은 “수풀”을 뜻한다. 1420년 경 산이 많은 이 섬이 발견되었을 때, 이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고, 울창한 수풀이 이 섬을 덮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이름이 생긴 것이다. 골짜기 입구와 낮은 경사지에 위치한 도시들과 마을들에는 대략 257,000명의 인구가 보금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있다. ‘뉴우요오크’에서 온 ‘파이오니아’ ‘프레이터스’ 형제가 이 섬에서 몇달을 보내면서 좋은 소식 전파를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 그의 노력은 풍성한 축복을 받아 곧 네명의 전도인이 보고를 하였다. 1954년에 거행된 최초의 ‘기념식’에는 21명이라는 좋은 참석자 수를 기록하였다.

‘코르데이로’가 좋은 소식을 퍼뜨리다

그러는 동안 ‘포르투갈’에서는, ‘트라스-오스-몬테스’ 출신인 젊은 ‘안토니오 마누엘 코르데이로’가 이 나라에서의 최초의 보조 ‘파이오니아’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리스본’으로 왔었고, 거기서 그는 형제들과 교제하고 야외 봉사를 하는 데 시간을 사용하였다. 그의 사촌 누나가 두번째로 미국으로부터 왔으며, 이번에 그는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왔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1954년 여름에, 나의 사촌 누나의 아들과 나는 6개월 동안 격지 구역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는 ‘브라강카’와 ‘구아르다’의 먼 지역의 수십개 마을에서 증거하였으며, 한 사제가 고발을 하는 바람에 ‘산딤’ 마을에서 우리는 체포되었다. 우리는 ‘구아르다’ 시로 연행되어 가서 토굴에 갇혔으며, 그곳에서 그 날 밤을 지냈다. 긴 심문을 한 후, 그들은 우리의 지문을 채취한 다음 풀어주었다.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교통 수단이란 걷는 것과 이따금씩 소가 끄는 달구지를 타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식품을 꾸러미로 묶어 운반하였으며, 도중에서 빵과 ‘치이즈’를 구입하였다. 가끔 우리는 하숙집에서 따끈한 좋은 식사를 하기도 하였다.”

‘세익쏘 데 카르라제다 데 안시아에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하숙집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행히도 ‘안토니오’가 증거한 첫 번째 가족들 가운데 한 가족이 그들에게 식사와 숙소를 제공해 주어, 그들은 그 마을의 모든 가족에게 증거할 수 있었다. 다른 마을에 늦게 도착했을 때, 그들이 잠을 잘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는 당나귀 옆의 건초 더미였다.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안토니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우리는 실망하지도 않았고 또 불만스럽게 생각지도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좋은 소식을 이러한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특권에 대한 행복감으로 충만하였다.”

폭풍우의 먹구름이 보이다

1954년 11월에 ‘길리아드’ 출신 선교인 ‘에릭 브리튼’이 자기 아내 ‘크리스틴’과 더불어 지부를 돌보기 위해, ‘브라질’로부터 도착하였다. 정기적으로 해변 근처의 숲속으로 ‘피크닉’을 가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나중에 이들 수풀 지역은 “녹색 왕국회관”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기회들은 커다란 영적인 청량제임이 증명되었다. 1955년 5월에 ‘코바 데 바포르’ 지역에서 하루 동안 특별 ‘피크닉’을 갖기로 마련하였다. 형제들은 ‘타구스’ 강을 건너 해변 지역으로 가기 위해 나룻배를 하나 세내었다. 그들은 이윽고 자기들 가운데 불청객이 끼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두명의 사복 경찰관이 온종일 그들을 따라 다녔던 것이다. 이 ‘피크닉’에 230명이 참석하여 기록을 세웠다.

이튿날 아침에 비밀 경찰들이 몇몇 형제들의 집을 방문하였다. 형제들은 이러한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어떤 종류의 조직에 속해 있는가? 연사들은 누구인가? 그들 중 일부는 외국인들이 아닌가? 어제 해변에서 당신들이 집회를 가졌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러한 ‘피크닉’을 얼마나 자주 갖는가? 이러한 일은, 경찰이 ‘증인’들을 면밀히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최초의 사건들 중 하나였다.

1956년에는 ‘P. I. D. E.’로 알려진 비밀 경찰이 더욱 빈번히 집회에 나타났다. 7월에 한 우정적인 이웃은, 경찰이 선교인 ‘머어빈 파슬로우’와 그의 아내를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 안 되어, 이 부부는 ‘포르투갈’로부터 추방되었다. 아내는 ‘포르투갈’ 태생의 시민이었는데도 그러하였다. 경찰의 간섭으로 또한 ‘리스본’에 있는 두 개의 집회 장소가 폐쇄되었다.

‘오포르토’에서의 발전

‘오포르토’에서 사업은 이제 훌륭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1955년에 첫 번째 회중이 형성되었다. 1956년에는 첫 번째 왕국회관을 세 얻었고, 1957년에는 ‘F. W. 프랜즈’ 형제가 그곳에 모인 30명 가량의 행복해 하는 청중에게 연설하였다. 그 후 곧 연구를 하기 시작한 사람들 가운데는 이 역사적인 도시에서 왕국의 권익을 증진시킨 열정적인 부부 ‘아르만도’와 ‘루이자 몬테이로’가 포함되어 있었다. ‘오포르토’는 이제 새로운 축복을 받게 되었는데, ‘스페인’에서 추방되었던 두 선교인 ‘도메니크 A. 픽코네’와 그의 아내 ‘엘자’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1959년에는 ‘로버어츠’와 ‘베버리지’ 부부들이 도착함으로써, ‘포르투갈’은 제33기 ‘길리아드’ 학급 출신들로부터 더 많은 선교인 도움을 받게 되었다.

비공식 증거

‘포르투갈’의 ‘오포르토’ 또는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 형제들은, 비공식 증거가 다른 사람들로 진리를 배우도록 돕는 훌륭한 방법임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의 최초의 전도인들 중의 한 사람인 ‘알피나 멘데스’는 ‘칼델라스’의 어느 약물 온천에서 치료를 하고 있었다. 거기 있는 동안, 그는 잡지 기자인 ‘조세 마리아 랑카웅’에게 증거를 하였다. 그 다음 15일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에 관해 매일 이야기하였다. ‘랑카웅’은 그동안에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책을 두번 읽었다. 그가 ‘리스본’에 돌아왔을 때, 그와의 성서 연구가 한건 시작되었으며 그는 곧 집회에 참석하였다. 넉달 후에 그는 침례를 받았고, 현재는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다.

‘리스본’의 공원들과 정원들은 회복된 낙원에 관해 이야기해 주기에 안성마춤인 배경이다. 지금은 장로로 봉사하고 있는 ‘아르만도 로우렌코’는, 1956년에 자기가 진리를 배운 경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느 화창한 일요일 오후 내가 ‘리스본 캠포 그란데’ 공원에 앉아 성경을 읽고 있을 때, ‘조수에 구일헤르미노’가 옆에 앉더니 ‘빌립’이 ‘이디오피아’인에게 ‘읽는 것을 깨닫겠읍니까?’라고 한 그 질문을 하였다. 나는 그 ‘이디오피아’인이 ‘빌립’에게 한 똑같은 질문으로 대꾸하였다.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겠읍니까?’” (사도 8:30, 31) ‘로우렌코’ 형제는 넉달 뒤에 침례를 받았으며, 결국에는 ‘길리아드 학교’를 졸업하고 ‘포르투갈’로 돌아와서, 이 나라의 여러 다른 지역에서 수년 동안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다.

‘베르데’ 갑 제도가 진리를 받다

‘베르데’ 갑 제도에는, 왕국 진리의 씨가 1958년에 처음으로 뿌려졌다. 10개의 섬들로 이뤄진 이 제도는 ‘아프리카’의 서해안에서 약 440‘킬로미터’ 떨어진 대서양상에 위치하고 있다. 미국으로 이민갔었던 한 원주민이 1958년에 방문차 돌아와서, 상당한 양의 서적을 전하였고, 「파수대」 예약도 여러 건 맡았다.

1958년 말 경, ‘사웅 티아고’ 섬에서 ‘협회’의 서적 얼마가 열정적인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진 기사인 친구를 방문하고 있는 동안, ‘루이스 알베스 안드라데’는 「이 천국의 기쁜 소식」과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소책자 두 부를 보고서, 그 소책자들을 읽고 싶다고 말했다. 이 사람은 각 소책자를 주의깊이 연구하였고, 헌 성경책을 가지고 참조된 성귀를 일일이 찾아보았다. 일주일 후에 그는 그의 친구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책을 발견하고 감격스러워했다. 그는 기쁘게 그것을 받았고, 그것을 혼자서 첫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연구하였다. 이제 그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의 여지없이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두 잡지를 예약하였고, 이 두 잡지는 그가 수년 동안 영적 양식을 받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확장의 때

관심은 증가하고 있었고, 왕국회관은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포르투갈’에 확장의 시기가 온 것이었다. 그래서 ‘피코네’ 형제가 처음으로 전 시간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고, 그는 이 나라 방방곡곡을 순회하면서 격지 집단들과 관심자들을 방문하였다. 북단에 위치한 ‘민호’ 도(道)의 ‘몬카웅’의 어느 관심자 부인 집에 도착했을 때, 외국인이 마을에 와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가 그 부인에게 증거를 하자마자, 이웃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부인의 집은 계속 좋은 소식을 듣고자 열망하는 사람들로 가득차게 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방문하기 위해 그 집을 떠날 필요가 없었다.

1959년 가을에 ‘피코네’ 형제는 ‘아조레스’를 방문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아홉 개의 섬 중에서 단지 두개의 섬에만 선창이 있었기 때문에, ‘아조레스’를 방문하는 것은 대단한 경험이었다. 대서양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섬의 주위 바다에는 거센 파도가 자주 인다. 우리가 도착할 때도 그랬다. 증기선에서 사다리를 타고, 기다리고 있는 ‘보우트’로 내려가는 일은 하나의 큰 도전이었다. 파도가 ‘보우트’를 움직여 사다리 높이와 꼭 맞는 위치가 되게 해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요행을 바라고 적시에 뛰어 내려야 했다! ‘협회’의 영화 상영 장비며 짐이며 서적을 안전하게 배에서 옮기는 일은 대단히 힘들었다. 거기서부터는 노젓는 기술이 노련한 사람들이 파도를 타면서, 배가 뒤집히지 않고 해변가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그들의 도착 시간을 조절하였다.

“‘피코’ 섬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데는 장애물이 더 많았다. 형제들이 전기가 없는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어떤 준비를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웃 도시로 가는 데 약 8‘킬로미터’를 걸어야 하였다. 우리가 시내로 들어가고 있을 때 포도를 따고 있던 한 남자는 내가 나그네인 것을 알고서, 우리를 자기의 포도주 창고로 초대하여 한잔 대접해 주었다. 대화는 영화 상영에 관한 것으로 바뀌었다. 놀랍게도 포도주 틀을 밟고 있던 그의 동생이 그 지방에서 영화관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튿날 밤에 거기서 ‘협회’의 영화를 상영하기로 마련하였다. 그 이튿날 우리가 영화관으로 다가가고 있을 때, 우리를 놀라게 하는 즐거운 일이 있었다. 영화가 상영된다는 것을 모든 이웃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신호탄을 쏘아 올리고 있었다. 150명 가량이 그 영화를 보러 왔다.”

진리는 ‘아조레스’ 전역에 계속 전파되었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항공 여행자들에게 잘 알려진 ‘산타 마리아’ 섬에는, 1960년에 진리가 들어갔다. 비행기 보수 작업이 계속되는 동안 공항에서 지체하게 된 한 형제는 그 시간을 이용하여 한 남자에게 증거를 하였는데, 그 사람은 「파수대」지를 예약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도록 격려를 받았다. 그는, 만약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 잡지를 예약하도록 주선한다면, 성서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하여 ‘협회’의 대표자 한 사람이 그를 방문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사람은 자기 친구들에게 돌아다니면서 여러 건의 예약을 맡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협회’에 편지하여 누군가가 그들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여행하는 감독자는 ‘협회’의 영화를 보기 위해 19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 놀랐다.

1961년에는 실로 흥분을 자극하는 일이 있었다! 여러 해 동안 ‘포르투갈’ 전도인들은 왕국 전파자가 1,000명 선에 도달하기를 몹시 고대하였다. 이 의미 심장한 일은 전년도 평균보다 30‘퍼센트’가 증가함으로써, 1월에 발생하게 되었다!

성서 배포

1940년대만해도 성서를 구입하기가 수월치 않은 때였기 때문에 ‘엘리세우 가르리도’는 헌책방으로 다니면서, 헌 성경 책을 여러 권 구입하였다. 한번은, 권당 5‘에스쿠도’(미화로 17‘센트’)의 싼 값으로 스물 다섯 권이나 샀다.

‘마누엘 알메이다’ 형제는 1960년에 어느 유명한 성서 협회와 관련된 흥미있는 경험을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설명한다. “나는 ‘리스본’에 있는 모든 ‘증인’들을 위해 계속 성서를 더 많이 구입하여 20‘퍼센트’ 할인한 값으로 공급해 주고 있었다. 어느 날, 그 협회의 책임자는, 그 성서 협회가 수입할 양을 정할 수 있도록 정규적인 고정 주문량을 말해 달라고 하였다. ‘증인’들은 한달에 적어도 125권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그 이유는, 그 성서 협회의 한달 총 주문량이 250권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성서 협회가 받는 성서 총 권수의 절반을 ‘여호와의 증인’들이 배포하고 있었다니 실로 고무적인 일이 아닌가! 1960년 후반에 그들이 ‘증인’들에게 성서를 다량 공급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통지를 ‘알메이다’ 형제가 받은 것을 보면, 이들 “성서 애호자”들의 마음이 종교적 편견에 사로잡힌 것이 분명하였다.

‘마카오’가 좋은 소식을 받다

1961년에 왕국 사업은 ‘칸톤’과 ‘퍼얼’ 강 삼각주의 중국 남부에 위치한 ‘포르투갈’령 ‘마카오’ 도에서도 시작되었다. ‘마카오’는 중국 본토와 교역을 하는 ‘유럽’의 가장 오래된 전초 기지로 특색있으며, 그 교역은 기원 1557년까지 소급한다. 한 자매가 군인인 남편을 따라서 그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 자매는 자기가 사용하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을 거의 만날 수 없었지만, 왕국 진리의 씨를 심었다. 그 이듬해 그가 ‘포르투갈’로 돌아갔기 때문에, 몇몇의 관심자들과 예약자들은 ‘홍콩’ 지부가 돌보게 되었다.

‘앙골라’에서의 어려운 시기

보다 나은 통신 연락을 취하기 위해 ‘앙골라’에서의 사업을 감독하는 일은 1960년에 남‘아프리카’로부터 ‘포르투갈’로 이양되었다. ‘앙골라’의 경찰은 ‘증인’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였다. 1959년 2월에 ‘P. I. D. E.’는 지구 감독자 ‘아르놋트’ 형제의 이 나라 입국을 거절하였다. 그런 다음 경찰은 집회는 물론이거니와 ‘유럽’의 ‘증인’들과 ‘아프리카’의 우리 형제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엄중한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이 때부터 두 집단은 별도로 지하 집회를 가졌다.

1961년 3월에 ‘콩고’ 국경으로부터 온 공포, 폭력 및 파괴의 물결이 ‘앙골라’를 휩쓸었다. 모든 마을들이 송두리채 불태워졌으며, 동강나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흑인들과 백인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남자들은 매달리어 개처럼 살해당하였고, 여자들은 할복을 당하였고, 어린 아이들은 학살되었다. 이러한 무자비한 학살이 있은 뒤 곧,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 폭력 행위에 대한 혐의를 받기 시작했다. 이런 터무니없는 엄청난 모함을 하는 데 ‘로마 가톨릭’ 교회가 앞장을 섰다. ‘가톨릭’계 의 ‘프로빈씨아 데 앙골라’(A Provincia de Angola)지는 ‘증인’들의 출판물이 파괴를 선동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폭력주의에 대한 항쟁이 전면적인 규모의 대결로 확산되자 정부가 발행하는 여러 출판물에서는 ‘앙골라’에서의 폭력주의를 조장하는 데 대한 책임을 ‘증인’들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애썼다. 그러한 출판물 중 하나인 「울트라마르」는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실바 쿤하’ 교수는, 폭력이 발생하기 전에 이 종파가, 특히 ‘루안다’와 ‘목시코’ 지역에서 ‘앙골라’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 역시 그의 짐작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다고 믿는다. ·⁠·⁠· ‘워치타워’ 운동은 미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막강한 것이다. 미합중국이 어떤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없을지라도, 최소한 그들은 커다란 명성으로부터 직접 유익을 얻을 것이다. ·⁠·⁠· 백악관이 ‘아프리카’에서 이 운동을 다소 보호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1964년 제5권, 제17번, 54면.

이러한 왜곡된 생각은 우리 형제들을 면밀히 감시하는 일과 더불어 맹렬한 국가주의적인 영이 날뛰게 하였다고 쉬이 상상할 수 있다. ‘아프리카’인들이 세명 이상 함께 모이는 것을 금지하는 엄격한 조처가 취해졌다. 그래서 ‘루안다’의 우리 형제들은 집회를 재조직하여, 보다 작은 단위로 집회를 가졌다. 긴장이 크게 고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1961년 3월의 ‘기념식’에 130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 감격스러워하였다.

축복이 된 중립적 입장

폭력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은 ‘증인’들이 참으로 그러한 행동에 책임이 있을 수 있는지의 여부에 관해 엇갈린 생각을 가졌다. ‘카를로스 아고스틴호 카디’는 ‘콩고’ 국경 근처의 ‘앙골라’ 북부 지방에 위치한 한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생명을 잃을 위험성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그 농장 주인은 농장을 ‘카디’ 형제에게 돌보도록 맡기고 ‘콩고’로 피신하였다. 그 주인이 떠나자마자 진군해 오던 ‘포르투갈’ 군대가 도착하여, ‘아프리카’인 노동자들을 모두 한데 모았다. 그들을 폭력분자들로 의심한 ‘포르투갈’ 군인들은 그들 모두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살려달라는 간청은 막무가내였다. 그때 ‘카를로스 카디’는 그 군인들에게, 자기는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며 따라서 폭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명서를 보여 주었다. 이것으로 처형을 중단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지휘관이 도착하여 그 증명 서류를 살펴보고는, ‘카디’를 ‘P. I. D. E.’에 넘겨 조사를 의뢰하였다. 그는 이렇게 하여 생명을 건졌다.

믿음의 사람

과거 1943년에 ‘협회’의 출판물을 접했던 ‘아프리카’인 ‘조아웅 만코카’가 이 무렵 ‘루안다’에 있었다. 1961년 6월 25일에, 그가 ‘루안다’에서 「파수대」 연구를 사회하고 있는데, 총검으로 무장한 헌병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헌병들은 자매들과 자녀들은 집으로 돌려 보냈으나 형제들은 가혹하게 대하였다. ‘만코카’ 자신은 이와 같이 말한다.

“우리가 받은 대우는 이루 형언할 수 없다. 그 군인들의 인솔자인 하사관은, 우리를 때려 죽이겠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하였다. 잔인하게 구타하여 고기덩이처럼 만든 후에도, 그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수갑을 차고 바닥에 누워 있는 동안, 나는 나무 몽둥이로 심하게 맞아 그 후에 90일 동안 피를 토하였다. 나는 나무 몽둥이로 짐승처럼 무자비하게 구타당한 동료들의 생명이 몹시 염려되었다. 나는 여호와께 당신의 양들인 이들 동료들의 생명을 돌봐달라고 기도로 간청하였다. 우리들 가운데서 몇명이 죽을 것이라고 확신하고서, 군인들은 밤중에 약 30분마다 돌아와서 혹시 누군가가 죽었는지 확인하였다. 우리가 그러한 비인간적인 고문을 살아남은 것을 보고 그들은 크게 당황하는 것 같았으며, 우리가 생존한 것으로 보아 우리의 하나님은 참 하나님임이 틀림없다고 말하는 것도 들었다.”

다섯 달 동안 형제들은 ‘루안다’에 있는 ‘사웅 파울로’ 형무소에서 지냈다. 600명 가량이 있는 큰 수용소로 이송되어 갔을 때, 그들은 기회들을 이용하여 증거하였고, ‘만코카’ 형제는 세 차례나 300명이 넘는 동료 수감자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그들 가운데 여러 명이 후에 형무소에서 석방된 뒤에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들 중 일부는 현재 ‘루안다’에서 장로들로서 봉사하고 있다. 여호와의 종들을 협박하여 잠잠케 하려던 형무소 당국의 계획은 역효과를 거두었다.

그 다음에 형제들은 ‘앙골라’의 남부로 이송되어가, ‘모사메데스’의 비밀 경찰 감옥에서 또 5개월 동안 억류되어 있었다. 엄한 감시를 받았지만, 그들은 비공식 증거를 할 수 있었고, 심지어 정규적인 서적 연구도 가졌다. 여기서 또 한번의 훌륭한 증거가 행해졌다. 불법 정치 활동을 한 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일부 수감자들은 얼마 안가서, 하나님의 왕국이 인간의 유일한 희망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다음 형제들은 유형지인 ‘바이아 도스 티그레스’ 섬으로 옮겨졌고, “주거 제한” 즉 정부의 노동 수용소에서 행동의 제약을 받는 형을 받았다.

한 노동 수용소에 있는 형제들에게 보내진 서적은 중간에서 압수되었다. 분개한 수용소 감독관은 우리 형제들을 ‘세르파핀토’ 부근의 먼 내륙 지방의 노동 수용소로 보냄으로써 그들을 처벌하였다. ‘조아웅 만코카’와 다른 세명의 형제들과 더불어 ‘살라라모스 필레몬’은 석달 후에 130명의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가축 수송차에 실려 이 수용소로 이감되었다. 그들이 받는 대우는 앞에 놓인 살벌한 일의 예고편 그것이었다.

자동차에서 마치 짐승처럼 끌려 나와, 우리 형제들은 잔인하게 구타당하고 난타당하였다. 또 한번 너무 야만적인 구타를 당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이 임박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수용소는 가시 철조망으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다. 중노동과 그리고 거의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압제적인 상황이 일과가 되었다. 우리 형제들은 건어물, 질이 좋지 않은 옥수수 가루와 굳센 믿음으로 연명해 갔다. 비인간적인 대우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네명의 정치범들은 탈옥을 시도하였지만, 체포되어 경고 조치로서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포르투갈’에서 반대가 시작되다

1961년에 ‘앙골라’에서 폭력 사태가 발발한 일은 ‘포르투갈’에서의 봉사 사업에 즉각적인 영향을 끼쳤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일반 대중을 반역하도록 선동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거짓 선전이 이 나라에서 홍수처럼 쇄도하자, ‘포르투갈’ 경찰은 ‘증인’들의 전파 활동을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리스본’에서 동쪽으로 약 130‘킬로미터’ 떨어진 ‘에보라’ 읍에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던 ‘호레이시오 아로날도 두아르테’는 심문을 받기 위해 ‘P. I. D. E.’ 본부로 소환되었다. 거기서 경찰은 그에게 사지가 잘린 ‘포르투갈’ 군인들을 보여 주고, ‘증인’들이 그 일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였다.

1961년 여름에 특별 ‘파이오니아’ ‘아르투르 캐나베이라’는 여러 주일 동안 ‘P. I. D. E.’ 경찰의 미행을 당하였다. 그리고 나서 9월에, 그들은 그를 체포하였다. 그는 당시 일어난 일을 이와 같이 기술한다. “나는 전복 활동 및 공산주의자들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공산주의자임을 강제로 자백하게 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석달 동안 나를 심문하고 구타하였다. 나를 혼란시키려고 형사들 너댓명이 한번에, 질문 공세를 펴기도 하였다. 그들은 나의 저항력이 가장 약할 때인 밤에 항상 심문을 하였으며,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려고 ‘라디오’를 틀어 놓았다.”

그는 ‘리스본’의 교외인 ‘포르트 칵시아스’의 ‘P. I. D. E.’ 감옥으로 이송되어 갈 때까지 줄곧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 후 1962년 1월 22일에, 그는 석방되었다.

꼭 나흘 후인 1962년 1월 26일에, 모두 선교인들인 당시 지부 감독자 ‘에릭 브리튼’ 형제와 ‘도메니크 피코네’ 형제, ‘에릭 베베리쥐’ 형제 및 그들의 아내들이 ‘P. I. D. E.’ 본부로 소환되어 30일 이내에 이 나라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그들이 추방되는 이유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종교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중립을 가르친다는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베베리쥐’ 형제 부부와의 회견에서 ‘P. I. D. E.’ 국장은 한 ‘포르투갈’ 청년이 군복무를 거절한 최근의 사건을 예로 들면서, ‘증인’들이 그의 행동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양심적인 병역 거부가 ‘포르투갈’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고, 그는 부언하였다.

선교인들이 출국하는 것을 보는 것은 커다란 타격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진실로 스스로 온 영혼을 다하였으며, 그들의 열심과 훌륭한 본으로 인하여 뜨거운 사랑을 받았었다. ‘브리튼’ 부부는 결국 ‘브라질’로 돌아갔으며, 그들은 여전히 순회 사업에서 전 시간 봉사하고 있다. ‘피코네’ 부부의 경우는, 이번으로 선교인 임명지에서 두 번째로 추방당하는 셈이었다. 그들은 ‘모로코’로 갔다가, 지금은 ‘엘살바도르’에서 봉사하고 있다. ‘베베리쥐’ 부부는 ‘스페인’으로 임명되었으며, ‘브루클린 벧엘’로 옮기기까지 19년 동안 그들은 거기서 봉사하였다.

천국 전도 강습

선교인들이 추방되기 바로 전에, 그들이 최초의 ‘천국 전도 강습’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실로 절호의 기회였다! 이것은 20명의 회중의 종들 앞에 놓여 있는 시련기를 대비하도록 준비시키는 대단히 시기에 적절한 마련이었다. 이들 형제들의 대다수가 아직도 충실히 봉사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기뻐한다. 수년 동안에 걸쳐 계속된 과정들은 값진 교훈을 베풀어 주어, 복음 전파의 영이 살아있도록 해주었을 뿐 아니라 그 사업에서 연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파이오니아’들이 사업의 선봉에서 일하다

선교인들이 떠나버리자, 지방 형제들이 도전에 직면하면서 전파 사업을 수행해 나갔다. 당시를 회고하여 순회 감독자 ‘길베르토 세퀘이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협회’가 1958년에 선교인들을 ‘포르투갈’에 파견했을 당시에, 나는 우리도 여호와께 최선을 다해야 하고, 가능하다면 ‘파이오니아’ 대열에 가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딸이 하나 있었지만, 나는 1959년에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받은 축복들을 다른 어떤 인생과도 결코 바꾸지 않을 것이다. 나의 첫 임명지는 ‘리스본’ 외곽 ‘모스카비데’ 회중이었다. 나는 여러 지역에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가진 돈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서적을 전하고 계란이며 ‘오렌지’며 ‘레몬’이며 떡 등을 받았다. 나와 연구를 한 몇몇 사람들이 지금은, 내가 방문하는 특권을 즐기고 있는 회중들에서 장로로 봉사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실로 가슴 뿌듯한 일이다! 전 시간 봉사 및 우리가 발전시키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귀중한 관계와 견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때에 마음이 감동되어 ‘파이오니아’ 대열에 가담한 또 한 사람의 전도인은 ‘헨리퀘 아르퀘스’ 형제였다. 자기 아내와 함께 20년 이상을 전 시간 봉사를 한 후에, 그는 이와 같이 말한다. “‘파이오니아’들이 더 필요하다는 말을 듣자, 나는 기꺼이 자진했다. 작은 시작의 날을 결코 멸시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마데이라’, ‘아조레스’ 및 ‘베르데’ 갑 제도를 포함하여 이 나라 방방 곡곡으로 들어가서 봉사하는 것은 나의 특권이었다. 수입이 좋은 일자리도 여러 번 제의받았지만, 그것은 여호와께서 제공해 주시는 것과는 결코 비길 만한 것이 못되었다.”

지부 사무실이 지하 활동에 들어가다

경찰의 감시가 심해졌기 때문에, 지부는 이제 지하 활동을 위해 재조직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부는 ‘리스본’에서 양복점을 경영하는 ‘안토니오 마티아스’의 뒷뜰의 눈에 잘 띄지 않는 헛간으로 이사하였다. 1960년에 ‘스페인’에서 추방되어 ‘포르투갈’에 와 있던 ‘길리아드’ 선교인 ‘포올 헌더어트 마아크’와 그의 아내 ‘에벨린’이 ‘포르투갈’어를 배우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갑자기 ‘포올’은 자기가 지하 활동을 해야 하는 지부를 돌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실로 대단한 도전이 될 것이었다!

박해가 강화되다

1962년에 선교인들을 추방한 데 이어, 당국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였다. 그들은 우리의 성서 서적을 “해독물”로 분류하여, 그것의 배포를 금지하는 통신문을 모든 우체국에 보냈다. 그들은 ‘워치타워 협회’가 발행한 성서와 서적을 다량으로 압수하여 찢어 없애거나 불태워 버렸다. 수천명의 「파수대」와 「깨어라!」 구독자들은 그들의 잡지를 받을 권리를 거부당하였다.

곧 바로 경찰은 수십명의 형제들의 집을 수색하여 서적을 압수하였다. 경찰은, 형제들이 계속 집회에 참석하면 그들을 투옥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경찰의 첫 방문을 받은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은 ‘마누엘 알메이다’였는데, 그는 지금 지부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경찰은 가택 수색 영장도 없이 ‘협회’가 발행한 모든 출판물을 압수해 갔다. 박해의 물결이 잠잠해지기 전까지 이 형제는 가택 수색을 일곱번이나 당하였을 뿐 아니라, 일곱 차례나 ‘P. I. D. E.’에 소환되어 가 장시간 심문을 받았다. 그런 다음 경찰은 ‘리스본’에 있는 왕국회관을 습격하기 시작하였고, 1962년 초에 경찰 명령에 따라 처음으로 하나가 폐쇄되었다.

최초의 법정 사건

1962년에 12명으로 구성된 한 집단의 형제들이 집회를 가졌다는 이유로 경찰에 고발되었다. 이 형제들은 경찰 본부로 소환되어 심문을 받았으며, 그들이 성서 연구를 위해 계속 모인다면 투옥하겠다고 협박하였다. 1963년 1월에 몇몇 형제들은 ‘칼다스 다 라인하’의 공안 경찰 서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았다.

“본인은 권한 대리인을 통하여 ‘칼다스 다 라인하’의 ‘보로우’, ‘칼다스 다 라인하’ 읍(주소)에 거주하고 있는(형제의 이름)에게 합법적인 모든 절차를 거쳐 다음과 같이 명하는 바이다. 그는 성서 낭독 활동이나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 또는 기타 다른 종교적 성격을 띤 활동뿐 아니라, 그가 지금 소속되어 있는 것과 유사한 국제적인 성격의 협회를 장려, 설립, 조직 및 지도하는 일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

공안부는, 형제들이 허가도 없이 종교적인 집회를 갖고 있다고 고발하였다. 1963년 3월 21일에 재판이 시작될 때, 판사는 법정이 방청객으로 만원이 된 것을 보고 놀랐다. 통상, 국가가 원고인 이러한 종류의 소송 사건은 몇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공명정대한 정신을 가진 그 판사는 정의를 행사하는 데 관심이 컸으므로, 그 재판은 거의 세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는 피고를 위하여 세명의 증인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고, 성서 주제와 관련된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다. 판결은 참 숭배에 유리하게 내려졌으며, 그 결과 피고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순회 대회가 취소되다

1963년 7월에, ‘포르투갈’의 남부 해안의 ‘파로’에서 순회 대회를 열기로 계획하였다. 형제들은 ‘협회’의 영화들 중 하나를 보여 주기 위하여 넓은 창고를 하나 세 얻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경찰에 고발을 하였다. 마지막 순간에 가서, 형제들은 그 마련을 취소하였다. 그것은 지혜로운 결정이었다. 경찰은 “정치적 집회”가 있다는 신고를 받았었다. 그래서 한밤중쯤 되어 폭동 진압 경찰대가 그 창고를 포위하였다. 그들은 무기 저항이 있으리라는 짐작하에 기관총을 들고 대비하고 있었다. 창고가 텅 빈 것을 보고 그들은 얼마나 놀랐겠는가! 순회 감독자 ‘케사리오 고메스’는 나중에 긴 심문을 받았다. 그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말한다.

“나의 자동차 안에 있던 모든 물건은 압수되어, 경찰 서장의 책상 위에 옮겨졌다. 나에게 가장 염려되었던 것은 전체 순회구 내의 감독자들의 명단과 주소록이었다. 나는 그 서류가 분명히 발각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시편 118:6-8의 내용과 일치하게, 나는 여호와께 나의 형제들을 보호해 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였다. 그 때, 경찰 서장이 물건을 하나하나 조사하면서 설명서를 작성하고 있는 동안, 나는 팔꿈치를 책상 한 모통이에 올려 놓을 수 있었다. 그가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는 순간, 나는 그 명단이 적힌 서류를 눈치껏 치울 수가 있었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갈 허락을 받아, 그 명단을 잽싸게 변기에 집어 넣어 흘러내려 보냈다.”

‘베르데’ 갑 제도에 선교인이 파견되다

‘베르데’ 갑 제도에서의 왕국 사업 사상 괄목할 만한 해는 1962년이었는데, 이 해에 ‘길리아드’ 졸업생 ‘조오지 아마도’가 도착하였다. 그 후 즉시 특별 ‘파이오니아’ ‘잭 피나’가 ‘브라바’ 섬에서 이 선교인과 함께 일하기 위해 도착하였다. 두달도 못되어 그 선교인은 14건의 성서 연구를 보고하였고, 얼마 안 되어 20명 가량이 주간 성서 연구 집회에 참석하였다. 1963년 ‘기념식’에는 45명이 참석하여 훌륭한 참석자 수를 기록하였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이 두 ‘파이오니아’는 이 제도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진리의 씨들이 뿌려져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모험적인 여행

1963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있은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이것은 ‘포르투갈’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최초의 국제 대회였고, 전체 ‘프로그램’을 ‘포르투갈’ 형제들이 자국어로 제공하였다. 4,000‘킬로미터’의 왕복 여행 또한 잊을 수 없었다. 대다수의 형제들에게는 이 여행이 최초의 해외 여행이었다. 그 여행을 하기 위해 일부 형제들은 운전 교습을 받은 후 처음으로 자동차를 샀다. 한 형제의 차는 ‘클러치’와 ‘기어 박스’에 고장이 생겼는데, 각 ‘기어’가 연쇄적으로 고장이 났다. 단 한개의 ‘기어’만을 작동하여, 그가 마침내 후진으로 차를 몰고 시내로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은 실로 특이한 광경이었다.

‘알마다’ 출신인 ‘아메리코 캄포스’ 형제는 그들의 세대의 자동차 행렬에서 있은 일을 이와 같이 기술한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형제 두 사람은 통행증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진 돈을 전부 강탈당하였다. 귀로의 여행길 중에 우리는, ‘프랑스’의 도둑들은 ‘스페인’의 도둑들보다 경험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곤히 잠자고 있는 동안, 그들이 우리의 자동차에 침입하여 모든 것을 가지고 가버렸다. 그들은 우리의 천막 안까지 들어와서, 우리의 돈이며 기념품들을 훔쳐갔다. 물질적으로는 우리가 알몸이 되었지만, 그 대회에서 영적으로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마태 복음 6:19에 있는 예수의 말씀이 참됨에 대하여 실감있게 이야기하였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교회가 선동한 박해가 계속되다

신문 지상에는, ‘증인’들에 관한 악선전이 더욱 자주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63년 여름 중에 ‘리스본’에서는, ‘증인’들에 관한 일련의 다섯 개의 ‘텔레비젼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로마 가톨릭’ 사제 한 사람이 그 토론을 사회하였는데, 그는 여호와의 백성을 터무니없이 헐뜯기를 즐겨했다.

1963년 8월 22일 저녁에 공안 경찰들이 손에 권총을 들고 북부의 해안 도시 ‘아베이로’의 한 개인 집을 습격하여 그곳에서 열리고 있던 집회를 방해하였다. 모두는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되어 갔다. 새벽 4시가 되어 어린이들은 풀려났다. 다른 사람들은 그 다음 날 저녁 7시 30분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들은 불법 집회를 가졌다는 이유로 정식으로 고발되었다. 이렇게 하여 ‘포르투갈’에서, ‘증인’들의 두번째 법정 사건이 시작된 것이다. 증거는, 개인 집의 사생활이 침해당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판사는 거의 한달 간이나 지연한 후 10명의 ‘증인’ 모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안토니오 베이라오’ 형제와 그의 아내가 그 집회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혐의로, 두명의 어린 자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달 간의 투옥형을 선고받았다.

‘앙골라’에서 수감자들이 증거하다

그러는 동안, ‘앙골라’에서는, 유형 노동 수용소가 1963년에 ‘가톨릭’ 전기독교 위원회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스도교국 여러 종파 대표자들이 수용소 감독관에게 연합 신앙 기도회를 갖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기도회에는 각 종교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 수감자들이 참여하도록 초대되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을 대표하도록 ‘만코카’ 형제가 초대되었지만, 그는 그것을 거절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연합 신앙 모임에 참여하지 않는 ‘증인’들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스도교국의 소위 우호적인 지도자들은 ‘만코카’ 형제를 가장 담대한 자로 간주하여 보복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 수용소 감독관을 이용하여, 그들은 그를 잠잠하게 하려고 시도했다. 수용소 당국은, 그가 동료 수감자들과 종교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나 어떤 종교적인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공공연하게 금지하였고, 어기면 사형에 처하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그가 만약 명령을 어긴다면 그의 ‘추종자들을 ‘베르데’ 갑 제도에 있는 유형 식민지로 추방할 것’이라고 말했다. ‘만코카’ 형제는 수용소 감독관에게 편지하여, 자기는 그러한 명령을 따를 수 없으며, 사실상 그 명령들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포르투갈’의 헌법에 위배된다고 정중하게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의 편지에 대한 반응은 신속했다. 그들은 ‘만코카’를 다른 모든 수감자로부터 분리시켜 약 60‘미터’ 가량 떨어져 있게 하였기 때문에, 그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가 종교를 실천하지 못하게 하고,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려고 수용소 간수들은 감시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만코카’는 「이 천국의 기쁜 소식」 소책자를 ‘움분두’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루안다’에 있는 격지 집단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1963년 3월에 ‘마누엘 다 실바’, 그의 아내 및 두 자녀가 ‘협회’의 초청으로 ‘앙골라’로 이사하였다. 그들은 둘 다 특별 ‘파이오니아’였기 때문에, 사업은 신속하게 조직되었고 훌륭한 결과를 산출하였다. 그러던 중 1963년 10월 14일에, ‘루안다’에서 ‘마누엘 다 실바’와 ‘마누엘 아카시오 산토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 다음 달에 ‘P. I. D. E.’는 ‘루안다’에서의 사업을 돌보던 형제 ‘마누엘 공칼베스 비에이라’를 체포하였다. 경찰 서장은 그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의 사업은 ‘앙골라’ 전역에서 금지되었소”라고 말하였다.

경찰은 ‘비에이라’에게 최후 통첩을 하였다. 즉 ‘여호와의 증인’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포기할 것을 약속하는 선언서에 서명을 하든지 아니면 감옥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협박에 순응하기를 거부하자, 그는 며칠 후면 자기 아내가 세번째 아이를 출산할 상황이었는데도, 두달 동안이나 독방에 감금되고 말았다. 이 무렵, ‘마누엘 다 실바’ 역시 동료 수감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했다는 이유로 독방에 감금되었다.

마침내, 1964년 1월 23일에, 이 세명의 형제들은 그들이 ‘포르투갈’로 추방될 것이라는 통지를 받았다.

경찰 활동

그러는 동안, 1939년 이래로 충실하게 ‘증인’으로 생활해 오던 ‘조아킴 마르틴’ 형제가 ‘리스본’에서 여러 개의 세탁소를 경영하여 사업에서 성공하고 있었다. 1964년 2월에, 그는 예기치 않은 방문객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P. I. D. E.’ 경찰들이, ‘협회’가 발행한 출판물들을 찾아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그의 집과 가게에 있는 것을 모조리 뒤졌다. 그들은 지난 1925년까지 소급하는 그의 귀중한 장서를 포함하여 그의 서적을 압수해 갔다.

한 가게에다 그는 비밀리에 침례를 주기 위해 사용할 커다란 ‘탱크’를 하나 보관하였는데, 수년 동안에 걸쳐 수십명의 형제들이 거기서 침례를 받았다. 나중에 ‘마르틴’ 형제는 자기 사업을 처분하고 ‘파이오니아’가 되었으며, 1979년에 사망할 때까지 충실하게 봉사했다.

1964년 중에 전세계로부터 보내온 편지는 물론, 여러 호의 「깨어라!」 잡지는 ‘포르투갈’의 지도적인 입장에 있는 시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나라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의 진상을 정확하게 간파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아조레스’에서 ‘마누엘 레알’ 형제는 지방 당국자들이 「깨어라!」지를 받아보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도지사, 경찰 간부 등에게 「깨어라!」지를 보냈다. 여러 날이 지난 후, 공안 경찰은 그를 소환하여 심문하였다. 심하게 심문을 한 후에 경찰은, 그가 잡지를 전한 사람들의 이름과 주소를 말하라고 했다. 그는 무죄한 사람들이 박해의 대상이 되게 할 정보는 말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심문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던 경찰 부서장은 ‘레알’이 이름과 주소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이유가 경찰이 그러한 사람들을 박해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술해야 하게 되자 당황하였다. 실망한 그는 그 보고서를 찢어버리고 방을 나가 버렸다.

그 일은 결국 부서장을 보좌하는 비서에게 넘겨졌다. 그들은 둘 다 난처하게 되었다. 드디어 보고서가 작성되었지만, ‘레알’ 형제는 그 진술서가 사실과는 다르기 때문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레알’은 이렇게 보고한다. “내가 우리의 믿음을 설명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했을 때, 부서장은 ‘그 이름은 사용하지 마시오! 그것을 또 말하면 당신을 감옥에 넣으라고 명령하겠소!’ 하고 소리쳤다. 나는 자신을 변호하는 데 그 이름을 사용해야 하며 그리고 바로 그 이름은 ‘가톨릭 미사’ 책에도 나온다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그것을 그들에게 즉각 보여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분하여 어찌할 줄 몰라했다. 훌륭한 증거가 주어졌다.”

정부의 반대가 강화되다

당국자들의 마음은 굳어지고 있었다. 1964년 10월에 내무상은 극도로 편견적인 내용의 공문서를 배포하였다. 그 공문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호와의 증인’은 종파가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적은 순전히 유물적인 것 즉 우주적인 신권 통치의 설립을 위한 길을 예비하기 위해 정부, 권위, 교회 및 현존하는 종파들을 멸절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서를 사용하는 것은, 당국자들 앞에서 야심적인 정치적 목적을 지닌 운동을 선전하고 변호하는 단순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고딕’체로는 그들의 공문서에서]”

이러한 정부의 공문서를 무기로 사용하여, 경찰은 매일 같이 전국적으로 형제들의 가정을 습격하는 일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리고 미국무성의 도움을 받아, 세명의 ‘증인’으로 구성된 외국인 대표단과 당시 외무상이었던 ‘프란코 노궤이라’ 박사와의 면담을 주선하였다. ‘필립 리이즈’ 형제, ‘리처어드 에이브라함슨’ 형제 및 ‘도메니크 피코네’ 형제로 구성된 그 외국인 대표단은 ‘리스본’으로 여행하여, 1965년 2월 25일에 우리의 엄정 중립적인 입장을 설명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종교 활동을 거부할 뚜렷한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서, ‘노궤이라’ 박사는 진상을 조사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대답이라곤 고작 경찰의 간섭이 계속 심해져 가는 그것이었다.

그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조직은 성장하고 있었다. 1965년 4월에는 전도인이 2,839명으로 신기록에 달하였으며, 새로 생겨난 여러 회중들을 돌보기 위해 네개의 순회구가 조직되었다.

경찰의 수단

많은 사람들이 ‘포르투갈’을 경찰 국가라고 생각한 이유를 이 나라의 법률 집행 기관들의 다양한 구조에서 엿볼 수 있다. 공안 경찰(P. S. P.), 국가 경비대(G. N. R.), 헌병(P. M.), 고속도로 순찰대(P. V. T.), 사법 경찰(P. J.) 및 보통 비밀 경찰로 알려진 국제 경찰 및 국방대(P. I. D. E.)가 그것이다. 우리 형제들은 ‘G. N. R.’과 ‘P. I. D. E.’로부터 학대를 받았다. 일반 대중은 밀고자 보상 제도에 크게 의존한 ‘P. I. D. E.’를 특히 두려워했다. 보고에 의하면, 그것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게쉬타포’의 도움으로 ‘나찌’의 ‘게쉬타포’를 본딴 것이었다고 한다.

‘증인’들의 중립적 입장 때문에, 많은 젊은 형제들은 ‘P. I. D. E.’의 손에 잔인한 처우를 받았다. ‘알마다’, ‘라라제이로’의 ‘루이스 안토니오 데 실바’는 그가 1965년 7월 9일에 두 시간 동안 심문을 받은 후에 당한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창문과 문들을 모두 닫은 다음, 그들은 닥치는 대로 나의 온몸을 구타하기 시작하였다. 복부를 한대 맞고서, 나는 그만 바닥에 나딩굴어졌다. 또 한 사람이 나의 눈을 수건으로 가리웠다. 한쪽 다리가 절뚝거렸기 때문에, 나는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나의 두 귀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또 다시 나를 때리기 시작하였다. 나를 개처럼 취급할 때는, 그들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연로한 사람들에게도 모욕적인 대우를 했다. 72세의 노령인 ‘리스본’의 한 감독자 ‘마누엘 바즈’는 7월에 ‘P. I. D. E.’ 본부로 소환되어가 심문을 받았다. 다섯 시간 동안이나 그는 무례하게 모욕을 당하고 심문을 받았다. 한 ‘P. I. D. E.’ 경찰은 ‘바즈’ 형제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참 종교는 ‘가톨릭’이요. ‘가톨릭’ 교회는 성서를 보존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본받고 있소. 성서를 가르치는 일은 당신같은 무식자가 할 일이 아니요. 그 일은 다만 자격이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단 말이요.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종교가 자유로운 상태에 있기를 바라지요?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요! 아니, 불가능한 일이요!”

1965년 여름이 다가옴에 따라, 약 400명 가량의 형제들은 ‘스위스’의 ‘바셀’에서 열리는 “진리의 말씀” 대회에 참석하기 위한 긴 여행을 준비하였다. 마지막 순간에 가서 ‘P. I. D. E.’는 대회 계획을 방해하기로 결정했다. 출발 날짜 바로 하루 전에, 경찰은 여행 허가를 받은 50명의 형제들에게 그 허가가 취소되었다고 통지하였다. ‘버스’ 한대분의 형제들이 이미 떠났음을 알게 된 경찰은 분하여 어찌할 줄 몰라했다. 국경에 긴급 전화를 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버스’는 ‘스페인’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1965년 11월에 ‘로시오 아오 술 도 테조’에서, 세명의 경찰이 「파수대」 연구에 참석한 17명의 형제들의 집단으로 와서 집회를 방해하고 성서와 서적을 모두 압수해 갔다. 그 경찰관들은 형제들의 몸수색을 하였고 또 그들을 폭도분자들이라고 오해하고 호기심에 찬 구경군들이 야유와 욕설을 하는 가운데 그들을 경찰서로 연행해 갔다.

그 날 저녁에 형제들은 각각 2,000‘에스쿠도’(미화 70‘달러’)의 보석금을 내면 석방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7명만이 그만한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경찰은 그 집회의 조직자들이라고 생각한 ‘안토니오 마누엘 코르데이로’와 ‘티아고 제수스 다 실바’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방해 주었다. 그들을 위한 보석금은 각각 20,000‘에스쿠도’(미화 700‘달러’)였는데, 일반 시민의 한달 급료가 1,700‘에스쿠도’(미화 60‘달러’)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 금액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들은 여러 날 동안 독방에 갇혀 있었고, 그 벌금을 결국 다 공제할 때까지 석달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

경찰이 ‘로시오 아오 술 도 테조’에서 열리고 있던 집회를 방해한 그 날에, ‘코임브라’의 대학 도시에서 ‘P. I. D. E.’ 경찰관들이 그 지방 왕국회관을 찾아왔다. 약 20분 동안 들은 다음, 그들은 그 집회를 중단시켰다. 그런 다음 그들은, ‘협회’가 발행한 성서와 서적을 모두 압수하였다. 개인용 성서는 가지도록 허락해 달라고 감독자가 요청했을 때, 경찰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안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허락할 수 없어요. 여러분의 성서에는 밑줄이 처져 있고, 그러한 특별한 부분은 달리 해석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성서를 압수해 가야 하겠읍니다.”

반대자들의 책략을 이김

경찰의 활동이 강화되면, 그처럼 까다로운 상황에 대처하는 형제들의 묘안 역시 그러했다. 이것은 17세된 한 전도인의 경험으로 실증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가피한 문제 때문에, 나는 15분 늦게 ‘회관’에 도착하였다. 즉시 나는 무슨 일이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한 남자가 ‘회관’ 앞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나는 당장, 그가 틀림없이 ‘P. I. D. E.’ 경찰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도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반대 방향에서 그렇게 했다. 우리는 여러 번 서로 지나쳤다. 마침내 15분 후에, 그 사람은 나에게 접근하여 이렇게 귓속말로 말했다. ‘나는 당신도 그들 중 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읍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읍니다. 당신은 내가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지요?’ 나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럼요. 늦게 도착해서 미안합니다.’ 그는 대답했다. ‘문제 없어요. 괜찮으시다면, 내가 가서 저녁을 먹고 올 동안 이곳을 잘 감시해 주세요. 빨리 갔다 올께요!’ 나는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내가 맡겠습니다.’ 몇분 동안 기다렸다가, 나는 ‘회관’으로 들어갔다. 있었던 일을 형제들에게 설명하였고, 우리는 모두 급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마데이라’ 섬에서의 성장

형제들이 ‘마데이라’ 섬에서도 반대를 경험하고 있었지만, 왕국 사업은 잘 발전되고 있었다. 1966년에 ‘마데이라’에서 한 형제는 경찰을 동반하고 호별 방문을 하는 특이한 경험을 하였다. 그는 호별 방문 봉사를 하다가 체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경찰 본부에서는 그의 호별 방문 사명이 순수하게 성서적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경찰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최상의 방법은, 그가 방문했던 집을 재방문하여 알아보는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형제는 경찰을 동반한 채 간 것이었다. 각 집의 문전에서 그가 한 말을 확인하게 됨에 따라 그것은 부가적인 증거가 되었다. 첫 방문 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많은 집주인들이 그 형제와 함께 경찰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으며, 이번에는 주의깊이 들었다! 그 경찰은 잠시 후에 중단하기를 원했지만, 이 형제는 그가 방문했던 집을 모두 다 확인해 보자고 주장하였다. 마침내 그 경찰은 몹시 지치게 되었고, 성서 소식을 설명하는 우리의 형제의 참을성과 능력에 대해 좋은 보고를 하겠다고 말했다!

왕국회관들이 폐쇄되다

‘포르투갈’ 전국에서, 왕국회관은 점점 더 경찰 기습의 표적이 되었다. 값진 시설물을 계속 잃어가고 있었다. 조직을 합법화하려는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결과는 없었다. 그래서 1966년에 와서 우리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평가해 볼 때가 되었다. 여러 가지 요인들은, 우리의 왕국 사업이 개인 집에서 소규모 집단으로 모인다면 보다 잘 수행될 수 있음을 지적해 주었다. 정부가 우리를 법적으로 인정해 주기를 거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실재를 부인할 수는 없었다. ‘증인’들은 참석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고,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었다.

“충실하고 사려깊은 종”의 인도를 온전히 신뢰하였지만, 이 때는 많은 형제들에게 시련의 시기였다. 조직이 어떻게 전진할 것인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약 20명으로 구성되는 작은 서적 연구 집단으로, 한 회중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지 의심을 품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각 집단이 다섯 가지 주간 집회의 전체 ‘프로그램’을 다 맡아야 하였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없이, 이것은 일을 더 많이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매주 많은 형제 자매들이 봉사회나 신권 전도 학교나 또는 이 두 집회의 ‘프로그램’ 임명을 맡았다! 하지만, 더 많은 일로 인하여 영성이 더 좋아지고 더 큰 성장을 이룩하였으니, 그들의 염려는 무근한 것임이 증명되었다.

중요한 재판

1966년 6월에 ‘리스본’의 합의 재판부에서 재판이 열렸다. ‘페이조’ 회중 성원 49명이 관련된 그 재판은 모든 ‘포르투갈’인의 주의를 이끌었다. 그 소송 사건은, 경찰이 ‘아폰소 멘데스’의 집에서 70명 가량이 참석한 집회를 방해하여 감독자 ‘아르리아가 카르도스’와 ‘조세 페르난데스 로우렌코’를 체포했을 때인 약 1년 전에 시작된 것이었다.

넉달 20일 동안 옥살이를 한 후, 이 두 형제는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들에게는 성서를 포함하여 독서물은 무엇이든 읽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여러 시간 동안 심문을 받아야 했다. 국가 당국은 두명의 감독자와 다른 회중 성원 47명에 대한 소송을 준비하였다. 보석금은 각각 2,000‘에스쿠도’(미화 70‘달러’)로 정해졌다. 정부는 416‘페이지’에 달하는 소송 사건 적요 문서를 작성하였다. ‘증인’들은 “국가 보안법 위반 죄”로 고발되었다. 다음과 같은 고발 내용이 추가되었다. “그들은 일반 대중, 특히 입영 연령층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불순종하게 하고, 소요케 하고, 전복케 할 목적으로 여러 나라에서 온 자들로서 정치 운동을 조성한다.”

재판 일자가 다가왔을 때, 전국으로부터 모여든 형제들은 도덕적인 지원을 하기 위해 참석하였다. 심지어 북쪽의 ‘오포르토’로부터는, ‘버스’를 전세 내어 타고 왔다. 법정에 그토록 수백명의 ‘증인’들이 모여드는 것을, 경찰은 일찌기 본 일이 없었다.

‘리스본’의 「오 세쿨로」지는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어제 ‘라르고 다 보아 호라’[법원 광장]에 온 사람은 누구나 놀랄 만한 구경을 했을 것이다. ·⁠·⁠· 이층과 삼층의 창문뿐만 아니라, 많은 복도에도 사람들로 가득했다. 뜰에도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 ·⁠·⁠· 방해하는 일은 없었다. 건물 안팎에 모인 사람들은 이천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곳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피고인들과 그들의 종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었다.”

재판관 ‘안토니오 데 알메이다 모우라’는 지체하지 않고, 첫 번째의 피고 ‘아르리아가 카르도스’에게 헌법상의 숭배의 자유의 보장은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종교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리스본’의 「디아리오 포퓰러」지는 1966년 6월 24일자에서 그의 말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종교를 창안하여,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하는 사람을 위한 자유는 없다. 그는 지상의 사물을 관장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 피고는 국가 법률에 대한 통상적인 불순종으로 고발되었다.”

하나님의 법과 상충하지 않는 한, (사도 5:29) 우리는 지상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로마서 13:1을 읽어줄 생각으로 ‘카르도스’ 형제가 성서를 집어들려고 하자, 그 재판관은 재빨리 저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그 신문은 보도하였다.

“성서를 사용하지 마시오! 피고에게는 성서가 중요하지만, 법정에서 중요한 것은 법률이요. 성서가 시민의 활동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오. 그것에 의지하지 마시오. 각자는 성서를 자기 나름대로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해석한단 말이오. 성서가 국가의 헌법은 아니오. 어떤 미국인이 해석하듯이, 법정이 성서를 ‘포르투갈’ 공화국의 정치적 헌법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오.”

재판의 이틀째 날에 변호인측은, ‘증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어느 정부의 법률을 어기도록 권하거나 고무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상당한 증거를 제시했다. 1966년 7월 7일에 있은 마지막 심리에서 변호인 ‘바스코 데 알메이다 에 실바’ 박사는, 정부의 소송 사건 적요 내용은 사실성이 없는 것이라고 대담하게 폭로하였다. 그는, ‘증인’들이 “정치적 운동을 조성”하고 “일반 민중의 소요와 전복”을 고무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한 가닥의 증거도 제시된 바가 없다고 강력하게 지적하였다.

그는, 제1세기의 율법사 ‘가말리엘’의 충고를 숙고해 줄 것을 정중히 호소하는 말로써 그의 용감한 변호를 결론지었다. 그가 재판관들을 바라보면서 정중하게 간청한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 두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계획이나 일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여러분이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사도 5:38, 39, 참조.

검찰관은 재판이 삼일 계속되는 동안 하나의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으며, 변호를 위해 피고나 증인을 반대 심문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사실상, 그는 재판 중 딱 한번 말을 했었고, 결론에 가서 “공정한 판결을 요청하는 바입니다”라고 말하였을 뿐이다.

이틀 후에 합의 재판부는 49명의 ‘증인’ 모두에게 45일에서 5개월 반에 이르는 금고형을 언도하였다. ‘포르투갈’의 변호사들은 그 재판을 일컬어 “사기”, “망신” 및 “오판”이라고 불렀다. 그 판결을 즉시 대법원에 상소하였지만, 참 숭배를 위한 투쟁이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이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욱 분명한 것 같았다.

조심성이 요구되다

재판이 끝나자마자, “하나님의 자유의 아들” 지역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날 시간이 되었다. ‘증인’들에 대해 품고 있는 당국자들의 적대 감정이 또 한번 표면화되었다. 이번에는, 약 150명의 형제들이 막 여행 채비를 하고 있을 때에 단체 여권 신청을 거절당하였다.

1966년 ‘프랑스’에서의 대회와 관련된 흥미있는 경험은, 때때로 보호가 어떻게 놀라운 방법으로 오는가를 보여준다. 지부 감독자 ‘포올 헌더어트 마아크’는 ‘파리’ 지부에 간단한 익명의 서신을 보내어, 그의 항공 여행 계획을 설명했었다. 그는 약간의 중요한 서류를 지참하고 출국할 계획이었다. 지부의 주소를 비밀로 해야 하였기 때문에, 그는 발신자의 주소로 ‘마누엘 알메이다’의 주소를 사용하였다. 그 후 즉시 ‘P. I. D. E.’는 ‘마누엘’의 집을 습격하여, 서적을 찾기 위해 수색을 하였지만 허사였다. 경찰 경감은 ‘마누엘’에게 서적을 숨겨둔 곳을 알려주지 않으면 직장을 잃게 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경감은 그의 고용주의 주소를 말하게 하여 자기 손에 쥐고 있던 종이에 적었다. 수색을 하는 동안 그 경감은 그 종이를 탁자 위에 놓아두었다. 나중에 집을 떠날 때, 그는 그 종이 쪽지를 잊고 가 버렸다. 그가 재빨리 그것을 집어다가 뒷면을 보니 “‘파리’, ‘L. 폰테’ 서신”이란 이상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며칠 후에 ‘헌더어트 마아크’ 형제가 그를 방문하게 되었고, ‘마누엘’은 그 종이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즉시 알아차렸다! ‘P. I. D. E.’가 ‘파리’ 지부 감독자 ‘L. 존테’(그들은 철자를 잘못 썼다.)에게 보낸 그의 익명의 서신을 중간에서 가로챘었고, 그들이 그의 ‘파리’ 여행 계획을 전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그의 대회 참석 여행을 취소하였다. 그래서 지부 감독자와 기밀 서류는 또 한번 안전하게 되었다.

‘리스본’의 신문 「디아리오 다 만하」지는 1966년 7월 14일자에서 형제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전면 기사를 실어 값진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 어쨌든, ‘프랑스’에서 개최되는 지역 대회에 참석하기 위한 여행에 관한 소식을 알리는 비밀 서신이 당국자들의 손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 전문이 그 신문에 게재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 형제들은 “뱀같이 지혜롭고[조심성있고, 신세]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예수의 충고에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었다. (마태 10:16) 하지만, 약 430명 가량의 형제들이 그 지역 대회에 참석하는 데 성공하였고, 그들은 ‘애굽’에서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친 내용과 같은 그 처음 성서 ‘드라마’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시기에 적절한 그러한 ‘드라마’의 가치는 ‘앙골라’에서 한 형제의 경험으로 실증되었다. 큰 농장에서 ‘트럭’ 운전사로 일하던 그는, 피가 섞인 음식을 먹는 것을 거절하고 매춘부들과 놀아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종 조롱을 당하였다. 어느 날 특별 정찬을 먹은 후, 그는 일군들이 참석한 가운데 마술이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것임을 폭로하는 훌륭한 증거를 하였다. 이것은 한 영매술자를 크게 화나게 하였다. 그래서 화가 난 그는 성욕에 대한 그 형제의 저항력을 시험해 보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밤일을 하러 떠난 후, 그 사람은 그를 유혹하기 위해 매춘부를 한 사람 고용하였다. 숙소로 돌아와서, 그 형제는 한 여자가 자기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가 그녀에게 자기 방에서 나가라고 소리쳤을 때, 옆방에서 폭소가 터졌다. 그들의 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박해하에서도 진리가 파급되다

하지만, ‘앙골라’에서는 격렬한 박해의 주요 시험이 계속되었다. ‘세르파 핀토’ 부근의 유형지에서, ‘만코카’ 형제는 자기 믿음을 포기할 것을 약속하는 서류에 서명하도록 거듭거듭 강요당하였다. 그는 입수한 얼마 안 되는 서적을 또 다시 압수당했다. 그러나 수용소 감독관은 그에게 두개의 선물—‘증인’들의 반대자들이 쓴 책들—을 주었다. ‘만코카’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에게 그러한 책을 주고 나서 그들은, ‘증인’들을 반박하는 글을 쓴 그러한 사람들의 행로를 따르도록 거듭 나에게 촉구하였다. 내가 당국자들과 협력한다면, 나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겠다고 그들은 약속하였다. 내가 5년을 복역한 후에 석방되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석방해 주기를 거절하였다.”

그 결과, ‘만코카’는 1966년에 ‘모사메데스’ 도의 외딴 ‘사웅 니콜라우’ 노동 수용소로 이송되어 갔다. 그곳에서 새로운 수용소 감독관의 얼굴을 본 순간 그는 온 몸이 떨렸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1961년에 ‘루안다’에서 그가 처음 체포되었을 때 그를 때려 거의 죽게 만들었던 바로 그 하사관이었던 것이다. 그는 ‘만코카’에게 ‘증인’들과 국가 중 어느 쪽이 옳은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를 회상하면서, ‘만코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마음을 고쳐 먹도록 강요하는 심문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나는 가만히 앉아서 자유를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았다. 나는, 무활동은 죽음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음으로 계속 나의 생명의 호흡을 사용하여 여호와를 찬양하곤 하였다.”

‘만코카’는 아주 조심성있게, 수감자들에게 비공식 증거를 할 기회를 찾았다. 12명의 관심자들의 집단이 발전한 것을 보면, 이 충실한 형제의 전도 봉사는 풍성한 축복을 받은 것이다. 때때로 이들 가운데 얼마 즉 보다 믿음직한 수감자들은 임무를 띠고 ‘모사메데스’로 파견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귀중한 잡지들을 그들의 신발에 숨겨, 그 수용소 안으로 반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형제들은 경찰의 냉혹한 감시가 있는 극심한 역경하에서도, ‘앙골라’에서의 사업을 수행하였다. 1967년 ‘모사메데스’에서 ‘조아웅 페드로 긴가’ 형제와 ‘안토니오 세퀘이라’ 형제가 일상 생활 문제를 돌보면서 거리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 그들을 체포하였다. 그들은 어느 행정 위원회에 넘겨져, 재판도 받지 않고 2년 간의 강제 노동을 하게 되었다. 이 두 형제는 모두, 이전에 3년 간의 옥살이를 한 바 있었다.

형제들이 왕국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한 결과, 각 범죄자 노동 수용소에서 여러 집단의 수감자들이 진리를 배우게 되었다. 수감자들은 ‘리스본’에 편지를 보내어 도움을 청하곤 하였다. ‘모사메데스’로부터 받은 그러한 편지 중 하나의 일부를 여기 인용 소개한다. “우리는 자격있는 형제를 보내어 우리를 도와 달라고, 여호와께 간청하였읍니다. 우리들 중 상당수가 우리의 헌신을 상징할 준비가 되어 있읍니다. 반대가 심했지만, 우리는 더욱 보호를 받았읍니다. 한 우정적인 경찰관의 도움으로, 이곳 항구에서 얼마의 서적을 받기도 하였읍니다. 우리의 믿음을 살아있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참으로 큽니다.”

다른 방법

참 숭배의 적들은 결코 지치지 않고, 여호와의 종들을 중상 모략하거나 그들에게 덫을 놓는다. 1966년 10월에 ‘포르투갈’ 당국은, ‘여호와의 증인’들로 하여금 정부에 대항하는 대규모 시위를 하도록 자극하는 대담한 계획을 한 가지 창안해 냈다. 그 달 초에 ‘리스본’의 여러 감독자들은 한 지방 감독자의 서명이 있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서신을 받았다.

“여호와 형제 귀하:

“미국의 회중들이 정부에 대한 우리의 대항 운동을 지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이달 15일[토요일] 오후 1시에 ‘프라카도 코메르시오’[‘리스본’의 한 광장]에 있는 내무성 앞에 침묵의 항의 표시로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이 집결하도록 가능한 모두에게 알리시기를 요망하는 바입니다.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실베이로 실바’”

지부는 즉시 1966년 10월 12일자로 ‘리스본’의 모든 회중에게 통지문을 보내어 이 덫에 관해 통고하였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양의 탈을 쓴 이들 이리들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단 한 사람도 시위를 하기 위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상황을 확인하도록 파견된 두 형제는, 군경 폭력 진압대들이 물대포와 푸른 물감을 준비하여 항의자들인듯 싶은 사람 누구에게나 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조레스’에서 압력이 가중되다

그러는 동안, ‘아조레스’에서 ‘파이오니아’를 하던 ‘마누엘 레알’이 1966년 10월 12일에 그의 이웃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때 ‘P. I. D. E.’ 경찰이 그를 체포한 일이 있었다. 자동차를 타고 경찰 본부로 가는 동안, 그 경찰은 ‘마누엘’에게 그가 증거한 개개인들의 이름과 주소를 알려 주도록 여러 번 요구하였다. “당신의 아버지에게도요!”라는 이 ‘파이오니아’의 대답을 듣고, 그 경찰은 대경실색하였다. 사실, ‘레알’은 그 경찰의 아버지에게도 여러 번 이야기한 바 있었다. ‘레알’은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글쎄, 내가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말하자, 그는 몹시 화를 내면서 ‘나의 아버지의 이름은 두번 다시 언급하지 마시오!’ 하고 말했다. 그 후부터 그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경찰 본부에서 ‘P. I. D. E.’ 경찰관들은 ‘레알’에게 가장 심한 욕설을 하였다. 그들은 그에게 ‘테르세이라’ 섬을 떠나라고 명하였다. 그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나는, 내가 이 섬에서 16년 이상이나 살아온 것과 나의 자녀들이 이곳에서 태어난 사실과 그리고 나는 이사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내가 다시 전파하다가 발각되면 80일간 옥살이를 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들은, 내가 이 섬에서 계속 살고자 한다면 나를 보증하고 나의 주거에 대해 책임을 질 신분이 좋은 지방 주민을 한 사람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한 후에, 그들은 나를 집으로 돌려 보냈다. 그들이 돈을 포함하여 나의 소지품을 모조리 압수했기 때문에, 나는 적어도 집까지 19‘킬로미터’ 거리를 여행하는 데 필요한 여비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경찰 서장은 나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그 거리를 걸어서 가라고 말하였다.”

‘레알’ 형제는 다행히도, 경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의 거주를 보증하고 책임을 지겠다고 나선 영향력있는 한 주민을 발견하였다. 이제 경찰의 묵인하에, 교직자들은 ‘가톨릭’ 행동 대원에게 ‘증인’들을 괴롭히도록 선동하기 시작하였다. 1966년에는 폭도들이 여러 번 형제들에게 투석질을 하였다. 그들에게 사나운 개들을 풀어 놓기도 하였다. 몇몇 ‘증인’들을 떠밀고 지분거리는가 하면, 추격자들은 괭이들을 무기로 하여 다른 ‘증인’들을 추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우리의 형제들은 슬퍼하거나 비관하지 않았다. 그들의 태도는 어떠하였는가? ‘레알’은 이와 같이 보고한다. “우리는 고린도 후서 6:10에 기록되어 있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와 같은 영을 지니고 있었다.”

대법원이 판결을 내리다

1967년 2월 22일에 대법원은, 우리가 ‘페이조’의 사건으로 상소한 데 대한 판결을 내렸다. 그것은 합의 재판부가 49명의 회중 성원들에게 금고형을 언도한 결정을 지지하였다. 49명 모두는 4년 간 정치적 권리를 정지당하였다. 침례를 받지 않았던 10명의 관심자들은 집행 유예 선고를 받았다. 형기는 최소 1년 6개월로부터 5년 6개월까지였다. 법원은 또한 각 ‘증인’을 1,350‘에스쿠도’(미화 47‘달러’)에서 5,000‘에스쿠도’(미화 175‘달러’)에 달하는 벌금형에 처했고, 그리고 각자에게 1,000‘에스쿠도’(미화 35‘달러’)의 재판 비용을 청구하였다.

상당수의 남편들이 진리 안에 있지 않으면서도 자기 아내들이 감옥에서 풀려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돈을 지불하기 원했기 때문에, 결국 옥살이를 하게 된 ‘증인’은 총 24명이었다.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은 20살이었고,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70살이었다. 어떤 경우는 남편과 아내가 둘 다 투옥되어, 그들의 자녀들이 문제가 되었다. 나이가 15개월로부터 16살에 이르는 20명의 어린이들이 그리스도인 부모들과 떨어져 있어야 했다. 하지만, 다른 형제 자매들은 그러한 어린이들을 돌봄으로써 사랑을 나타냈다. 실제 필요한 것 이상으로 많은 가정들이 도움을 베풀어 주었다! 이들 어린이들을 돌보도록 보낸 헌금도 관대하였다. 미국에서만도 130,000‘에스쿠도’(미화 4,600‘달러’)에 상당한 헌금이 들어 왔다. 사랑에 찬 염려와 보호에 대한 참으로 놀라운 증거가 아닌가!

1967년 5월 18일에, 유죄 판결을 받은 ‘증인’들은 투옥되기 위하여 합의 재판부로 출정하였다. 자매들은 ‘모니카스’ 형무소로, 형제들은 ‘리모에이로’ 형무소로 배정되었는데, 이 두 형무소 모두 법정으로부터 걸어서 약 20분 거리에 있었다. 실로 전례없는 광경이 뒤따랐다. 형제들은 호위도 받지 않고 형무소까지 걸어가서, 그들 스스로 형무소에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국가의 안보”에 위험하다는 이유로 투옥형을 받은—이들 “위험한 시민”, 남편과 아내들이 완전히 자유롭게 형무소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우리의 형제들의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 ‘바스코 데 알매이다 에 실바’ 박사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고함을 치거나 소리치는 일은 없었다. 자매들도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경탄할 만큼 침착하고 품위가 있었으며, 지존하신 하나님의 참 ‘증인’들이라면 의당 그래야만 할 것이라고 내가 생각한 대로 그들은 스스로 행동하였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그러한 감옥에서 많은 증거가 행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 말은 실로 참되었다!

행실로 증거하다

여자 죄수 감독관은 55세인 특별 ‘파이오니아’ ‘알다 비달 안투네스’를 특별히 다루기로 점찍었다. 그 여 감독관은 그에게 ‘가톨릭’ 교회의 제단에 쓸 탁상보를 짜라고 지시했다. 그때 ‘안투네스’ 자매는 거절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다른 일은 기꺼이 하겠다고 말했다. 이 일 때문에, 이 자매는 여러 시간 동안 예배당에 갇혀 있게 되었다. 결국 그는 ‘티레스’ 형무소로 이감되어, ‘가톨릭’ 수녀들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이 ‘증인’이 도착했을 때, 수녀 원장은 강제로 그를 ‘미사’에 참석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 후 수녀들은 그를 차가운 ‘시멘트’ 바닥의 독방에 한달 이상이나 감금시켜 놓았다. 우리 자매의 그리스도인 행동은 다른 수감자들에게 점차 영향을 주어, 그들의 행실이 개선되게 하였다. 그래서 고함을 치는 일도 감방 문을 꽝꽝 치는 일도 훨씬 적어졌다. 그 수녀원장은 ‘여호와의 증인’들에 관하여 마침내 이와 같이 시인하였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사람들은 성서를 참으로 믿습니다. 그들은 전반적인 인격이 다른 것 같아요. 믿는 종교에 속한 사람들을 살펴볼 때, 그러한 대조를 보게 됩니다.”

네 자녀를 둔 ‘아폰소 코스타 멘데스’ 형제가 투옥되어 있는 동안, ‘증인’들을 아주 싫어하던 이 형제의 직장 상사는 그의 일에 관해 나쁜 보고를 함으로써 그를 해고시킬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멘데스’ 형제는 그 사람보다 거의 30년이나 선배인데다, 그의 퇴직 혜택마저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여호와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형무소 당국은 이 형제의 훌륭한 행실을 관찰한 한 사회 지도자와 함께 일하도록 그를 임명하였다. 그래서 그의 형기가 끝나가는 어느 날, 그 사회 지도자는 그를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그 곳에서 이 형제는 자기 공장의 인사 부장을 만났는데, 그는 이 형제가 일을 탁월하게 잘 할 뿐더러 어느 고용주에게나 가장 좋은 신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이야말로,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 사회 지도자는 그에게 혜택을 온전히 받게 하고, 그의 이전 일자리에 복직시켜 주도록 추천해 주었다. 그는 그대로 되었다.

계속 괴롭힘을 당하다

형제들이 감옥에서 복역하고 있는 동안, ‘포르투갈’과 ‘앙골라’ 전역에서 체포는 계속되었다. 1967년 2월 28일에 ‘앙골라’, ‘루안다’에서 7명의 형제들로 구성된 한 집단은 개인 집에서 집회를 보는 도중에 권총과 기관총을 든 7명의 공안 경찰관에게 포위되었다. 그들은 성서를 포함하여 모든 서적을 압수했으며, 심문을 하기 위해 형제들을 경찰 본부로 연행해 갔다. 심문은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다. 경찰 서장은 이 집단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는 것으로 그 사건을 매듭지었다. “경고하지만, 어린 소녀들이나 유혹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과 같은, 이러한 성서 연구를 중단하고 여러분의 시간을 더욱 지혜롭게 사용하시오. 참으로 성서에 관해 알고자 한다면, 제대로 알고 있는 사제에게나 가서 배우시오.”

1959년부터 ‘포르투갈’의 북부 지방에서 선교 봉사를 시작한 ‘윌리엄 로버어츠’와 그의 아내 ‘도로디’는 이 기간에도 봉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경찰은 드디어 1967년 4월에 순회 방문을 하고 있는 그를, 이 나라에서 ‘가톨릭’ 신자가 가장 많은 ‘브라가’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당국은 그들의 거류증을 압수하였고, 그 후 곧바로 이 열정적인 전도 봉사자 부부는 ‘에이레’에서 봉사하기 위해 ‘포르투갈’을 떠나게 되었다.

국경선에서의 영접

‘포르투갈’ 형제들을 위한, “제자를 삼음” 지역 대회가 1967년 여름에 ‘프랑스’의 ‘마르세이유’에서 개최되었다. 9대의 전세 ‘버스’를 타고 ‘포르투갈’로 돌아오는 길에, 형제들은 뜻하지 않게 특별 영접 위원회를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P. I. D. E.’ 경찰과 세관원들로서 그들은, ‘엘바스’ 근처의 국경선에 먼저 도착한 여섯 대의 ‘버스’에 실었던 약 40상자의 서적을 압수하였다. 관광객들이 수십 상자를 압수하여 더미로 쌓아 올리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였을 때 “성서와 성서 서적”이라는 대답을 들은 그들은 자기들의 귀를 거의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첩한 한 형제는 ‘스페인’으로 가는 한 관광객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똑같은 것을 싣고 이곳으로 오고 있는 ‘버스’가 세대나 더 있읍니다.” 그러자 금시 초면인 이 사람은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내가 이곳을 빠져 나가겠읍니다. 내가 아마 그 다른 세대의 ‘버스’를 멈춰서 이 상황을 그들에게 알려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는 그의 말대로 하였다. 그 귀중한 서적은 ‘스페인’의 ‘바다조즈’에서 셋집에 임시로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형제들이 ‘프랑스’에서 서적을 가지고 오는 것을 누군가가 당국에 밀고했다는 증거가 있었다.

성품이 좋고 몸집이 큰 ‘리스본’ 출신인 ‘이사벨 바르가스’ 자매는, 다른 한 경우에 그가 서적의 일부를 어떻게 간신히 간직할 수 있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찰이 우리가 탄 ‘버스’에 올라와서 성서 서적을 전부 내 놓으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서적을 바로 내 앞 자리에 쌓아 놓았다. 수년에 걸쳐 내가 주석을 달아 놓은 나의 개인용 성서가 맨 위에 있었다.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얼굴을 돌렸을 때, 나는 심호흡을 하고서 재빨리 그것을 나의 치마 앞 부분에 떨어뜨렸다. 다른 책들도 여러 권 떨어졌다. 이 일은 발각되지 않았으며, 나는 갑자기 더 무겁게 되었다!”

‘리스본’의 ‘에밀리아 아폰소 곤칼베스’ 자매는 거치른 대우를 받았다. 그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스페인’ 사람과 결혼하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포르투갈’인이었다. 그는 ‘리스본’에서 40년 동안 살아왔다. 52세된 이 가엾은 미망인은 단지 48시간 안에 이 나라를 떠나라는 통지를 받은 것이다. ‘리스본’ 주재 ‘스페인’ 영사는 이 짧은 기간을 연장할 수 없었고, 그가 “‘여호와의 증인’ 종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추방된다는 것을 명시한 ‘P. I. D. E.’의 공문서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는 1967년 9월 16일에 ‘스페인’으로 떠났다.

담대한 태도

여호와의 백성은 당국자들 앞에 호출되어도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겁이 나 비굴하게 행동하거나 떨기는커녕, 그들은 히브리서 13:6에 언급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태도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여호와]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 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조아킴 프레이타스’ 형제의 경험은 이것을 실증해 준다. 그는 이전에 ‘가톨릭’ 신자였으며, 여러 사람을 고용하여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가 ‘P. I. D. E.’ 본부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을 때, 당국은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때 있은 일을 ‘프레이타스’ 형제는 이렇게 기술한다.

“그들은 아주 공손하게 나를 대하였고, 나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아 나를 소환하게 되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들이 나를 만나보기 원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을 난처해 하는 듯 하기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나의 시간은 귀중합니다. 물론 여러분의 시간 역시 귀중합니다. 여러분은 확실히 뭔가 알고 싶은 것이 있을 겁니다. 아마 여러분은 내가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인지 알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요, 나는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알고 싶은 것이 또 있읍니까?’

“이런 솔직한 태도는, 말하자면 해빙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그 조직이 얼마나 나쁜지 그리고 내가 왜 그 조직을 떠나 다시 선량한 ‘가톨릭’ 신자가 되어야 하는지 나에게 설명하였다. 나는 그 때 말할 허락을 받고 그들에게, 나는 ‘가톨릭’교인으로 양육받았으며 심지어 술에 만취하는 사제 친구도 있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부도덕하게 살아왔었지만, ‘증인’들과 성서를 연구한 이래 나의 생활을 깨끗하게 하였고, 지금은 그리스도인 남편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바와 같이—한 아내와 살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하겠읍니다. 내가 ‘가톨릭’교인으로 돌아가야 하겠읍니까, 아니면 ‘여호와의 증인’으로 남아 있어야 하겠읍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당장 쫓겨났다.

‘베르데’ 갑에서의 발전

1963년에 선교인이 추방된 이래, ‘베르데’ 갑에서는 사업의 진전이 느렸다. 그러나 1966년에 특별한 방문객을 맞이하였다. 미국에서 살던 한 형제가 자기 고향인 이곳 제도로 돌아와서 서적을 많이 전하였고, 또 ‘사웅 비센테’ 섬과 ‘산토 안타웅’ 섬에서 왕국을 증거하였다.

사진업을 하고 있는 자기 친구 집에서 얻은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책을 읽고 1958년에 스스로 진리를 배운, ‘사웅 피아고’ 섬의 그 격지 관심자는 ‘리스본’ 지부와 계속 서신 연락을 하였다. 1965년에 그는 ‘기념식’을 기념하기 위해 여덟 사람을 모았다. 이 즐거운 행사를 지부에 알리는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참석한 여덟 사람 중 단지 여섯 사람만이 표상물을 취했음을 알리게 되어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다른 두 사람은 아직 장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하였다. 1968년에 그들이 여행하는 감독자를 맞이하게 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기념식’ 때에 전도인은 세명 보고되었고, 참석한 사람은 모두 31명이었다. 이번에는 표상물을 취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아슬아슬한 사건들

1968년 여름에 ‘프랑스’에서 지역 대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드라마’를 포함하여 전체 ‘프로그램’을 번역하고 연습하고 녹음해야 하였기 때문에, 이 대회를 위해 여러 달을 준비해야 하였다. ‘루이스’ 가족은 이 준비와 관련하여 한 가지 경험을 하였다. ‘셀레스테’는 그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입다’의 딸에 관한 ‘드라마’의 녹음을 마침내 완성하여, 다음 연습에 사용하기 위해 그것을 우리 집에 보관하였다. 아침 7시에 초인종이 울렸다. 우리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P. I. D. E.’ 경찰이라고 신분을 밝혔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옷을 입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했다. 경찰의 방문을 이미 여러 번 받았던 터인지라, 우리 집에는 서적은 거의 두지 않았지만, 녹음해 둔 그 ‘테이프’가 선뜻 머리에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황급히 부엌으로 가져가서, ‘가스 스토우브’의 뚜껑을 열고서, 그 ‘테이프’를 그 안에 집어 넣고 뚜껑을 닫아버렸다.

“경찰이 들어와서, 지붕에서 바닥까지 뒤지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부엌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수색을 막 끝내려고 하는데, 우리 딸 ‘디나’가 들어오면서 ‘엄마, ‘코오피’를 좀 끓일래요’ 하고는 ‘스토우브’를 켜기 위해 가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내가 무슨 말을 하기만 하면, 그 ‘테이프’는 발각되어 압수되고 말 것이었다. 여러 시간 준비한 것이 타서 재가 되어 버리는 것을 상상했다. 다행히도, 우리 딸은 반대편의 ‘버어너’를 켰다! ‘코오피’를 끓였고, 경찰은 그 ‘테이프’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여러 날 후에, 100명의 대회 대표자들의 여행 서류를 ‘P. I. D. E.’ 경찰에게 압수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디아만티노 페르난데스’ 형제는 그 때의 일을 이렇게 말한다.

“나의 아내 및 지역 감독자와 같이, 우리는 완전히 구비된 서류와 두대의 전세 ‘버스’ 대금을 전해주기 위해 ‘알메이다’ 형제의 집으로 갔다. 우리가 수위가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현관 탁자 위에 봉투를 두었는데, 그때 세명의 ‘P. I. D. E.’ 경찰이 ‘알메이다’ 형제의 ‘어파아트’를 수색하기 위해 느닷없이 나타났다. 경찰 두 사람은 ‘알메이다’ 형제와 같이 아래층에 있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 탁자 위에 있는 봉투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숨을 죽이면서, 그의 눈이 보지 못하게 해달라고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그는 그 봉투들을 탁자 위에 다시 놓고는 그의 동료 경찰이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우리는 그 귀중한 서류들을 가지고 그곳을 빠져 나왔다. 또 한번 여호와의 보호가 확실히 나타났다.”

마태 복음 10:17에 있는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하고,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교훈이 지혜로운 충고임을 다음의 경험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는, 공휴일인 어머니날은 ‘모산토’ 숲에서 모임을 가질 좋은 기회이기 때문에, 그 날에 회중적으로 야유회를 갖기로 계획하였다. 우리는 요소요소에 경비원을 배치하였고, 형제들은 점심 도시락이며 축구 공이며 축음기를 가지고 갔다. 점심 시간이 가까와지고 있었다. 공개 강연을 끝냈고, 「파수대」의 마지막 항을 연구하고 있는데, 경비를 하고 있던 형제들이 위험 신호를 보냈다. 모두는 행동을 개시했다. 삽시간에 점심 도시락을 열고, 포도주를 마시고, 축음기를 틀고, 어린이들은 주위에서 축구를 하였다. 그 때 경찰관이 한 사람 나타났다. 상황을 가늠해 보고서, 그는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읍니까? 이것은 종교 모임 같은 것이 아닙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이러한 경우에 대변자로 나서도록 임명된 형제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직접 보실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야유회를 즐기고 있읍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 경찰은 두말없이 가버렸다.

“예방 조치로서, 서적과 성서를 모두 모아서, 멀리 갈가에 있는 자동차 중의 하나에 갖다 놓으라는 발표가 있었다. 그 일을 마치자마자, 그 경찰관은 손에 소총을 든 15명의 ‘G. N. R.’ 군인들을 데리고 다시 왔다. 그들은 점심 도시락을 조심스럽게 뒤졌지만, 서적이나 성서는 단 한권도 찾을 수 없었다. 상사와 그의 부하들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빈손으로 떠나면서 이같이 말했다. ‘좋아요, 이번에 여러분은 우리를 속였읍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읍니다!’”

시대의 변화

1968년 9월 초에 국무총리 ‘살라자르’가 뇌일혈로 쓰러지게 되었다. 새로운 정부가 형성되었고, ‘마르셀로 카에타노’ 교수가 위원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살라자르’는, 1970년에 그가 죽을 때까지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계속 모르고 있었다. 정권이 이양되는 과도기는,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평화스러웠다.

1969년 초 무렵 우리는, 경찰의 간섭이 분명히 완화되는 것을 관찰하였다. 경찰이 형제들을 체포했을 때, 그들은 형제들을 이전보다 눈에 띄게 공손하고 정중하게 대하였다. 한 형제는, ‘P. I. D. E.’ 경찰이 이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여러분이 얼마나 친절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를 보고 계시지요? 학대를 받는다고 생각되는 점이 있읍니까? 여러분은 안락의자에 앉아 계시지 않습니까?” 보다 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이었다. 경찰의 학대가 아니라 도리어 보호를 받고 있음을 알려 주는 보고가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한 한 가지 보고는, 두명의 경찰관이 저녁 10시 경에 초인종을 울렸을 때 ‘리스본’의 한 집회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 준다. 자매가 문간에 나갔을 때, 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는 집회를 열고 있다는 신고를 확인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그 자매는 지혜롭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글쎄요, 여러분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나의 남편은, 자기가 집에 없을 때 낯선 사람들을 결코 집 안으로 들여서는 안 된다고 엄히 이르셨어요. 그러므로 여러분이 저의 입장을 이해해 주실 줄 믿습니다. 원하신다면, 무엇보다 먼저 내일 아침에 경찰서에 출두하여 무슨 질문이든지 대답해 드리겠읍니다.” 경찰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음 날 아침에, 그는 그 경찰관들의 즐거운 영접을 받았다.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 갔다.

“안녕하십니까? 지난 밤의 집회는 어떠했읍니까?”

“아주 좋았읍니다. 감사합니다.” 그 자매의 대답이었다.

“몇명이나 참석하셨읍니까?”

“저, 잘은 모르겠읍니다만, 약 25명 가량 참석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더 많았읍니다.—32명이 정확할 것입니다. 그들이 건물에서 나올 때, 우리가 세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그 경찰관은 말했다. 그는 또 이렇게 부언하였다. “알고 계시는 것처럼, 그 건물에는 아주 나쁜 이웃이 좀 있읍니다. 그들은 항상 문제를 일으키고, 무엇인가에 대해 불평을 합니다. 지난 밤의 우리의 방문은, 고발이 있었기 때문에 취해진 의례적인 것이었읍니다. 거기서 집회를 갖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 전부터 알고 있었읍니다. 당신의 교인들에게 그 건물에 들어갈 때 가급적 조용히 하도록 하여, 아무도 불평할 이유가 없게 할 것을 제안합니다. 가끔 다른 집을 사용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오포르토’의 강 건너 편, ‘빌라 노바 데 가이아’에서는 또 하나의 전례없는 사건이 발전하였다. 두 자매가 점심 식사 전에 마지막 방문을 하고 있던 중, 한 가정 주부가 「진리」 책을 받았다. 자기가 돈을 가지고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그 두 자매에게 말하고 나서, 그는 즉시 경찰에 전화를 하였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그 여자도 경찰서로 가야 한다는 전혀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자기는 곧 도착할 남편의 식사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못 가겠다고 말했지만, 경찰은 가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경찰서에서 그 사건에 대한 완전한 조서를 작성하게 되자, 그 집 주인은 점점 더 걱정이 되었다. 경찰은, 그 여자에게 그 사건이 법원으로 넘겨지면 시간을 더 많이 소비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이제 시작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 부인은 그만 정신이 아찔하여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 맙소사! 내가 전화를 건 이유는 단지, 우리 사제가 ‘여호와의 증인’을 다루는 최상의 방법은 즉시 경찰에 전화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예요. 내가 이런 일을 당할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경찰의 제안에 따라, 그 여자는 기꺼이 그 고발을 취소하였다.

‘파리’—1969년 대회

1969년의 큰 행사는 8월 5일부터 10일까지 ‘프랑스’, ‘파리’의 ‘콜롬베스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였다. ‘포르투갈’어로 진행된 회기에 총 2,731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 모두가 감격스러워했다. 이 참석자 수는 만 1년 전 ‘툴루스’에서 참석했던 사람 수의 세배가 넘는 것이었다. ‘마데이라’, ‘아조레스’, ‘베르데’ 갑 제도 및 멀리 ‘앙골라’에서 대표자들이 참석하게 되어 우리는 특히 기뻤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대회는 그들이 처음 참석하는 대회였다.

지부 감독자는 이 대회에서 흥미있는 경험을 하였다. 보안상의 이유로, ‘포르투갈’어로 진행된 회기는 별도로 분리하였다. 특별 입장권을 가진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지부 감독자가 연설을 할 ‘노워’ 형제와 같이 도착했을 때, 경비는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의 입장을 거절하였다. 어쨌든, 적어도 보안 조치는 취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가 정치에 간섭하다

‘가톨릭’ 교회의 일부 파벌이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1970년 9월 27일에, 국무총리 ‘마르셀로 카에타노’는 전국 ‘라디오’와 ‘TV’ 방송을 통해, 소란을 피우는 교직자들을 강력히 견책하였다. ‘리스본’의 신문 「오세쿨로」 1970년 9월 28일자에 보도된 그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가톨릭’ 교회의 일부 파벌은 민간 당국을 교란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경향을 나타낸다. ·⁠·⁠· 일부 교직자들이 반사회적이고 반애국적인 정치 활동에 가담하기 위하여, 그들이 누리고 있는 숭배 및 교화의 자유는 물론, 사제직의 독특성과 그들이 고무하는 전통적인 권위를 구실로 이용하고 있는 사실에 행정 당국은 계속 무관심할 수만은 없다.”

“종교의 자유” 법이 제의되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특별한 관심을 끈 것은, 정부가 1970년 10월 6일에 “종교의 자유”란 제목의 법안을 입법 위원회에 제출한 것이었다. 그 법률이 제정되면, 종교의 자유의 범위가 확대될 것이었다. 제의된 이 법안에 대한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가톨릭’ 교회가 비판적이라는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들의 유리한 입장을 상실할까 봐 염려가 된 나머지, ‘가톨릭’ 사제들은 그 법안에 대한 반대 의사를 공공연하게 표명하였다.

‘가톨릭’ 교회를 특히 당황하게 만든 것은 그 법안의 제 4조였다.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 국가는 특정한 종교를 가지지 않으며, 각기 다른 종교 집단을 대표하는 조직들과의 국가의 관계는 분리의 원칙에 입각한다. (2) 모든 종교적 주장에는 동등한 권리가 부여된다.”

전체주의 방식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다

하지만, 경찰 국가 정신은 계속되었으며, 그 점은 “극비” 표시가 있고 내무상의 서명이 든, ‘여호와의 증인’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급송 공문서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1) 1970년 10월 21일자, 총 사령부의 제 2국/제 1과의 예방조치 21088 회람 번호 70/981-S. I. 에 준하여 불법으로 사료되는 종파와 특히 그 종파의 선전에 관하여 설명되어 왔다.

“(2) 신문에는 최근에 ‘종교의 자유’에 관한 법안을 공개하였다. 이것은 그 성질상, 특히 자기들이 군복무를 면제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젊은이들이 그 목적을 달리 해석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3) 제 2항에 규정된 내용을 고려하여, 이러한 사실들을 내무부 장관께 보고하였고 장관께서는 적절하다고 판단하시어 다음과 같은 급송 공문서를 작성하셨다.

“‘종교의 자유 법안은, 국가의 최대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증인’에게 부여한 조건들을 변경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활동은 계속 금지되어야 한다.’”

‘앙골라’에서 박해가 계속되다

그러는 동안 ‘앙골라’에서는 새로운 박해의 물결이 조성되고 있었다. 1970년 3월 16일에 ‘노바 리스보아’에서, 일곱 명의 관심자들이 성서를 공부한다는 이유로 ‘협회’의 출판물을 소지한 채로 체포되었다. 일곱 명은 모두 2년에서 5년까지의 형을 선고받았다. 그 일곱 사람 중 한명이 보낸 편지는, 그들이 어떠한 대우를 받았는가를 설명해 준다. “6월 10일에 우리는 ‘사 다 반데이라’, ‘후일라’ 지역으로 이동되었읍니다. 여기서 우리는 4일 간을 지냈는데, 담요도 없이 판자 위에서 잠을 잤고, 전등도 없는 독방에 갇혀 있었읍니다. 우리가 받은 음식이라고는 매일 오후 4시에 받는 한 숟가락의 국뿐이었읍니다.”

‘앙골라’ 식민지 당국이 이 때, ‘여호와의 증인’의 사업을 “중단시키고 근절시키”기로 결의했다고 믿을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범죄자 노동 수용소에서 9년 이상을 복역한 후 1970년 8월에 마침내 자유를 얻은 ‘조아웅 만코카’ 형제는, 1971년 4월에 30명이 넘는 다른 충실한 ‘증인’들과 함께 다시 투옥되었다.

박해가 발전을 고무하다

‘앙골라’의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새로운 공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왕국 소식은 계속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합당한 사람들의 마음에 이르고 있었다. 이 방대한 땅—‘프랑스’, 독일 및 ‘이탈리아’를 합친 것보다 더 넓은—의 5백만 이상의 거민들 가운데서 수백명의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려 속속 나오고 있었다. 1971년에 최고 전도인은 487명이었는데, 이것은 한해 전보다 평균 88‘퍼센트’가 증가한 것이며, 1,311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1961년에 어려움이 시작되었을 때, ‘포르투갈’에는 전도인이 약 일천명 정도 있었다. 10년 후에는, 전도인이 9,086명으로 사상 최고 수준에 달하였다! 같은 해에 ‘기념식’에는 20,824명이 참석하여 신기록을 내었다!

변화의 바람

1971년 6월 15일에, 120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된 의회는 종교의 자유 법안을 토의하기 위해 회의를 가졌다. 신문들과 잡지들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검열을 통과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사설들을 게재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 나라의 주요 주간지인 「비다 문디알」지는 1971년 3월 26일자에서 “‘가톨릭’교와 국적”이란 제목하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가톨릭’ 교회를 위한 것이란] 미명 아래, 종교 생활에 있어서 ‘포르투갈’ 국민의 현실과는 전혀 조화되지 않는 특권들을 획득하려는 의도로 최근에 많은 주장들이 나왔다. 우리는 ‘가톨릭’교 국민이 아니다. 우리는 다수가 ‘가톨릭’교인이라고 말하는 국민이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다민족과 다종교로 이뤄진 국민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 특정한 어느 종교가 아무리 미혹적으로 보일지라도, 국가 당국이 그러한 종교에게 특혜를 베푸는 것은, 온당치 않다. ·⁠·⁠· 만일 어느 한 종교가 인정된다면, 모든 종교도 건전한 자유의 원칙하에 인정되어야 한다.”

대의원들이 증거를 받다

국민의 입법 의원들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에 관해 알려야 할 때가 왔다.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으로 알려진 14명의 국회 의원들과 면담을 주선하였다. 처음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나라의 최고 입법부 성원들과 대화를 하는 데 성공하였다. 어떤 경우에 ‘증인’들은 그러한 의원들의 집으로 초대되었고, 여러 시간 계속되는 우정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우리의 믿음을 설명하는 12‘페이지’에 달하는 진술서를 여러 권의 서적과 함께 각 의원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포르토’에서 ‘아르만도 몬테이로’ 형제는 고등학교 동창인 국회의원 ‘사 카르 네이로’ 박사와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당시 이 나라 국민의 자유를 위한 대변자로 명성이 나 있었다. 그는 ‘몬테이로’ 형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들은, 특히 ‘앙골라’에서의 전쟁 때문에 또 당신들이 그러한 분쟁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인정을 받으려면 고된 투쟁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므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안이 통과되도록 나의 권한으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읍니다.” 흥미롭게도, 이 사람은 후에 이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어, 1980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 직책에서 일하였다.

종교의 자유 법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71/4 법률이 채택된 1971년 8월 21일에, ‘포르투갈’은 시민의 자유에 관한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에 이른 것이었다. 이 법률은, 인정을 받고자 하는 종교는 500명의 성원이 서명한 정식 청원서를 작성하여, 믿음, 집회, 출판물 등에 관한 보다 자세한 설명과 더불어 제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놀랍게도, 청원서의 모든 서명은 공증을 할 것을 요구하는 또 하나의 법안이 발표되었다. 1972년 11월에 두께가 2‘인치’나 되는 문서가 법무성에 제출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은 이렇게 하여 법률에 따라 법적인 인정을 얻고자 하는 최초의 종교 집단이 되었다. 관리들이 하는 말로 판단해 볼 때, 조속한 대답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1971년 지역 대회가 취소되다

‘포르투갈’에서는 대회가 계속 금지되었기 때문에, 연례적으로 ‘프랑스’로 여행하는 일은 그 해의 큰 행사였다. ‘툴루스’에서 개최될 예정인 “하나님의 이름” 지역 대회를 열렬히 고대하고 있던 삼천 오백명의 형제들은 출발 시간 꼭 일주일 전에, 전염병 ‘콜레라’의 위험 때문에 그 대회가 취소되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리스본’의 형제들은 영국 ‘런던’에서 같은 날에 대회가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황급히 ‘버스’ 회사들과의 계약을 재조정하였다. 정부가 등록된 시간 안에 전세낸 10대의 ‘버스’에 여행 허가를 해주어, 마지막 장벽을 통과하게 되었다!

긴 여행 끝에, 형제들은 ‘런던’의 규모를 보고서 그리고 ‘튁켄햄’ 대회장을 찾으려면 한없이 배회해야 할 것 같이 보이는 광경에 위압감을 느꼈다. 길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 몇몇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엉터리 영어로 간청할 도리밖에 없었다. “나 ‘여호와의 증인’ (Me Jehovah’s Witness). ‘튁켄햄’은 어디? (Where Twickenham?)” 영국의 경찰관들은 아주 협조적이었다. 몇몇 형제들을 대회장까지 안내해 주기까지 했다. 여러 대의 ‘버스’가 마침내 꼭두 새벽에 ‘밀힐 벧엘’에 도착하였다. 형제들은, 그들이 받은 뜨거운 환대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런던 벧엘’ 왕국회관은 갑자기 숙소로 변모하였다.

농아 형제들이 체포되다

1971년 10월에 열정적인 농아 형제들의 한 집단이 ‘리스본’에서 정규적으로 집회를 보고 있었다. 그들이 회중 서적 연구 집회를 보고 있을 때, 갑자기 경찰이 나타났다. 그들은 ‘노크’ 소리를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노크’ 소리에 대답하지 않은 것이다. 당황한 경찰은 집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형제들이 그 집을 떠날 때 그들을 체포하였다.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그리고 단 한 마디도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경찰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형제들이 묵묵히 몸짓과 손짓으로, 그들은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리자 경찰은 점점 더 수상쩍어 했다. 경찰관들이 당황을 하고 또 그들 중 일부는 그것이 속임수라고 생각하는 장면은 보기에 아주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그 집 주인도 근처에서 발견되어, 17명의 농아 형제들과 같이 경찰 본부로 연행되어 갔다. 경찰은, 체포된 사람들이 실제 농아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시험을 하였다. 당국자들은 농아들임을 확신하게 되자 고발을 취하하였다.

은밀히 진행된 일들

종교의 자유로 향하는 추세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들리지만, 1972년 봄에는 압제적인 조처가 부활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공화국 국가 경비대’ 고시(告示)가 진리에 관심을 보이는 한 경찰관을 통해 우리의 손에 들어왔다. 그것은 1972년 3월 9일자 “공화국 총사령부. 고시 번호 3ㄱ/1441”로서, 제목은 “여호와의 증인 파의 활동”이었다. 그 고시의 일부를 여기 소개한다.

“상기 제목에 관하여, 총 사령관은 그들의 활동과 그에 따른 행동을 알아내기 위한 노력을 강화하라는 통지를 하도록 나에게 지시하셨다. 이 파가 전복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현행 법률로써 그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므로 1972년 3월 29일 ‘기념식’ 저녁에, 경찰이 ‘리스본’에서 집회 장소 세 곳을 급습하여, 모두를 경찰서로 연행해 간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보석금을 요구하지 않았고, 곧 형제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보고된 것으로는 이 외의 다른 사건들은 없었는데, 이것은 곧 이 특수 경찰대가 ‘여호와의 증인’을 대항하는 전국적인 운동을 개시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협조적인 경찰 서장들

진정으로, 많은 경찰관들은 ‘증인’들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두 자매는 그러한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호별 방문 봉사를 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화를 내면서 잠옷 바람으로 문간에 나왔다. 우리는 정중하게 그곳을 떠나, 증거를 계속하고 있었다. 우리가 건물을 떠나려고 하는데, 잠옷 입은 그 남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경찰관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자기와 같이 가자고 했다. 우리는 그에게 겉옷을 입고 오라고 제안하였고, 우리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고 그를 안심시켰다. 그가 겉옷을 입으러 간 몇분 사이에, 우리는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에 우리가 가진 서적을 숨겼다.

“경찰서로 들어가면서, 우리를 붙든 그 사람은 ‘전도하고 있는 이 두 ‘증인’을 내가 잡아 왔읍니다. 이들을 체포하십시오!’ 하고 말했다. 경찰 서장이 이와 같은 말로 그를 책망하였을 때, 그 경찰관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부끄러워할 줄 아시오. 경찰관이 잠옷 바람으로 거리에 나오다니. 집에 가서 옷이나 제대로 입으시오!’ 이와 같이 말한 다음 그는 우리를 내보내 주었고, 우리는 우리가 숨겨둔 서적을 찾으러 돌아갔다.”

또 다른 경우에, 야외 봉사를 하다가 체포된 두 형제가 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그 득의 양양한 경찰관은 “여기에 ‘증인’이 두명 더 있읍니다. 그들을 투옥하십시오!” 하고 말했다. 경찰 서장의 대답은 이러했다. “어찌된 일이요? ‘증인’들을 여기에 더 데리고 오는 것을 나는 원치 않아요. 당신이 다음에는 나의 어머니도 데리고 오겠군!” 이 경찰 서장은 더 이상 번거롭게 하지 않고, 그 형제들을 돌려 보내었다.

다시 법정으로

공화국 국가 경비대(G. N. R.)가 내린 1972년 3월의 고시가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억제하는 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1972년 11월에 하나의 법률을 제정하게 되었고, 그것은 공안 경찰(P. S. P.)이 우리의 집회를 중단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되었다. ‘곤도마르’, ‘토르레스 베드라스’, ‘파레데’ ‘리스본’ 및 ‘마데이라’의 ‘푼칼’ 등지에서 우리 형제들을 잡아들이는 체포의 물결이 일었다. 일련의 법정 사건에서, 담대한 재판관들은, ‘증인’들이 무죄임을 밝히고 종교의 자유를 담대히 옹호하는 판결을 내렸다.

전통적인 ‘가톨릭’ 요새인, 북부 지방의 ‘페소 다 레구아’에서의 법정 사건은 대단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이 격지 구역은 최근에 막 봉사를 시작한 곳이었고, 개인 집에 모여 성서를 연구했다는 이유로 18명의 새로운 관심자 집단이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 집단을 돌보고 있던 특별 ‘파이오니아’ ‘아고스틴호 발렌테’ 형제는 그 사건의 경위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아주 비천한 출신의 두 관심자 부인이 매우 훌륭한 증거를 하였다. 흔히 볼 수 있는 엄숙하고 위압적인 법정 분위기가 그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너무나 태연하면서도 분명하고 힘있게, 그들이 성서로부터 그토록 많은 놀라운 것들을 배움으로써 얻은 즐거움을 설명했기 때문에, 판사 자신도 감명을 받은 것이 확실하였다.” 그는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그리스도인 중립에 대한 믿음이 시험받다

‘오포르토’ 출신인 ‘페르난도 실바’ 형제는, 그리스도인 양심 때문에 군복무를 거부하고 성실을 지키기 위해 그가 직면했던 시련을 생생하게 회고한다. “나는 1972년 12월에 체포되어 15개월 동안 투옥되어 있었다. 그들은 ‘물리적’ 설득을 포함하여 되풀이한 노력으로도 나를 타협시키지 못했다. 나는 ‘리스본’ 근처에 있는 ‘트라파리아’ 형무소로 이감되었고, 내가 받는 ‘대우’에는 매질도 포함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나는 비행기에 실려 ‘앙골라’로 보내졌다.

“내 앞에 불길한 장래가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재빨리 알아차렸다. ‘노바 리스보아’에서 나는 잔인하기로 악명높은 한 군인 대위에게 맡겨졌다. 구타는 이제 나의 일상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그 회수와 정도가 점점 더 가혹해졌다. 그들이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나날이 점점 더 야위어가고 있었다. 끊임없이 나는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그분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고 나는 말할 수 있다. 그들이 구타를 더 많이 할수록 나는 아픔을 적게 느꼈다. 우정적인 군인들은 나에게 빵과 과일을 가져다 주었다.

“어느 날 밤에 그 대위는 몇장의 종이와 ‘펜’을 가지고 나의 감방으로 왔다. 그는, 내가 총살을 당할 것이기 때문에 나의 부모에게 작별을 고하는 유서를 쓰라고 말했다. 견뎌낼 힘을 달라고 여호와께 간청하면서, 필시 죽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나는 유서를 썼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것이 속임수라는 것을 알았다! 마침내 나는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2년 4개월의 금고형을 받았다.”

탁월한 가문 출신인 한 의사는, 아직 침례를 받기 전이었는데도 중립 문제에 있어 굳건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의 형은 식민지 전쟁 때 용맹스러운 업적을 이룩하여 훈장을 받았었다. 그래서 그 역시 의당 동일한 애국 정신을 보일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그는 ‘아프리카’에서의 식민지 전쟁에 가담하지 않기로 결단을 내린 뒤, 적절한 기회를 택하여, 가족이 다시 모일 때 성서에 기초한 그의 입장을 설명하기로 하였다. 아들의 결정에 동조할 수 없던 그의 어머니는 군본부에서 면담을 갖도록 주선하였다. 이 면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조세 마누엘 파이바’ 자신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가장 좋겠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가족 중에서 ‘말썽꾸러기’라고 생각하고서, 시초부터 감정적으로 불안해 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나는, 내가 왜 그러한 결정을 내렸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도 좋으냐고 물었다. 장교가 주의 깊게 듣고 있는 동안, 나의 어머니는 말을 가로 막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한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들입니다. 그들은 나의 아들을 세뇌시켰읍니다. 그들은 미치광이들입니다!’ 놀랍게도 그 장교의 대답은 이러했다. ‘아뇨, 나는 그들이 미친 사람들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나는 댁의 아들이 자기 신앙을 설명하는 것을 들었읍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읍니다. 물론, 군인을 나의 평생 직업으로 택한 나로서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는 없읍니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다른 ‘증인’들도 전쟁에 가담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을 들었읍니다. 미친 사람들은, 그들이 무엇을 믿고 또 왜 믿는지도 모르면서 ‘파티마’[‘포르투갈’에 있는 ‘가톨릭’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의사이지요. 그러면 당신이 어떤 병을 앓고 있다는 진술서를 작성하여, 동료 두 사람의 서명을 받아 제출하는 것이 어떻겠읍니까? 우리는 그것을 당신의 서류에 첨부하겠읍니다. 그러면 당신은 군복무에서 면제받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의 사려 깊음에 사의를 표하면서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 될 것이므로 나는 그런 짓은 할 수 없다고 말했읍니다. 놀랍게도, 그는 나의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것을 들으셨지요? 나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거짓말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말해 보았읍니다. 댁의 아들의 도량은 이 정도입니다. 이런 아들을 두신 것을 자랑으로 여겨야 합니다!’” 이 형제는 현재 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급속한 성장

1972년 봉사년도 말에는 신권 조직이 활기차게 전진하고 있었다. 여섯 차례의 연속적인 전도인 신기록을 내었고, 천명 이상이 침례를 받아 연속 삼년째로 신기록을 올렸다. 만건 이상의 성서 연구가 사회되고 있었고, ‘기념식’에는 총 23,092명이 참석하였다. 현재 ‘리스본’의 ‘증인’ 대 인구 비율은 1대 226이며, 지부는 형제들에게 도움이 더 크게 필요한 곳으로 이사하여 봉사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대도시에서도 도움이 필요하였다. 문제가 된 곳은, 인구가 육만이고 ‘리스본’에서 남쪽으로 단지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세투발’이었다. 1968년에 그곳 회중의 전도인 수는 27명밖에 되지 않았다. 지부는 그곳에 특별 ‘파이오니아’ 다섯 명을 임명하였는데, 1972년 무렵에 이 회중은 최고 전도인이 140명으로 증가하였고, ‘기념식’에는 375명이 참석하였다. 현재 ‘세투발’에는 세개의 회중이 있다.

1973년 국제 대회

성장이 계속됨에 따라, ‘브뤼셀’ 세계 박람회장에서 개최된 “하나님의 승리” 대회의 ‘포르투갈’어 회기에 기록적으로 8,150명의 청중이 참석하였다. ‘스페인’과 ‘벨기에’ 형제들이 수천 명 더 참석하여 총 참석자는 5만명이 넘었다. ‘포르투갈’ 대표자들의 대다수가 여권도 없었고 또 정부가 여권을 발급해 주기를 거절하였는데도, 그토록 많은 ‘포르투갈’ 사람들이 참석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여행자들이 25명씩 단체를 구성하여 ‘포르투갈’로 돌아올 것을 보증하는 ‘증인’들에게는 특별 “단체 여권”을 발급해 주었다. 교통 수단으로는 각각 1,000명을 실은 네대의 특별 기차와 여섯 대의 전세 비행기 그리고 수십 대의 ‘버스’가 사용되었다. 이들 ‘포르투갈’ 형제들이 ‘모잠비크’며 ‘앙골라’며 ‘베르데’ 갑이며 ‘마데이라’며 ‘아조레스’ 등의 먼 지역에서 함께 모인 것은 믿음을 강화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사랑이야말로 만국의 통용 언어인 것이다. 이것은 ‘브뤼셀’ 대회를 위해 숙박 마련을 할 때, 또 한번 실증되었다. 전도인이 50명인 ‘브뤼셀’의 한 회중이, 방문하는 형제 350명을 위한 숙소를 제공한 것을 상상해 보라! 많은 형제들은 방문객들을 위해 자기들의 침대까지 기꺼이 제공하였다. 어떤이들은 자기 집에 25명이나 받아들였다. 15명의 대표자들을 배정 받은 한 형제는 좀더 많이 배정해 줄 것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는 대회장 근처의 한 조그만 ‘호텔’의 방 전부를 전체 대회 기간 동안 빌려서 숙박부를 취급하고 있는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 방들을 배정해 줄 수 있읍니다.”

기차 역에서의 작별 장면은 결코 잊지 못할 광경이었다. 그 기억에 남을 만한 석별의 자리에서 서로는, 꽃과 기념품을 선물하기도 하고 포옹을 하기도 하고 작별 ‘키스’를 주고받기도 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 사랑이 표현되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한 경찰관은 자기도 선물을 하나 하기로 하였다!

이 대회는 우리 형제들에게 참으로 깊은 감명을 주었다! 시내를 통과할 때 경찰 호송대가 한 대표단을 앞서 인도하는 것을 보고 한 형제는 이같이 말하였다. “이렇게 다를 수가! 이곳에서는 경찰이 앞에서 우리를 안내하고, ‘포르투갈’에서는 경찰이 뒤에서 우리를 추격하니.”

‘포르투갈’어 대회에서 ‘노워’ 형제는 다음과 같이 결론적인 연설을 하였다. “계속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기십시오. 여호와께서 무엇을 허락하실지 우리는 알 수 없읍니다. 여러분이 다음 국제 대회는 ‘포르투갈’에서 참석하게 될지 누가 알겠읍니까!”

‘쿠데타’

군부 내에서 갑작스런 혁명이 계획되어, 1974년 4월 25일에 거사되었다. ‘아프리카’에서의 장기간에 걸친 식민지 전쟁으로 인하여, 불만이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앙골라’나 ‘모잠비크’나 ‘기니-비사우’에서의 군사적 승리란 상상할 수 없었다. 식민지에 대한 정부의 확고 부동한 정책을 감안하여, 군인들이 그 전쟁을 종식시킬 때가 되었다고 스스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일반 대중은 무혈 혁명이나 다를 바 없는 그 혁명을 온전히 지지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 나라를 마치 ‘바이스’로 꽉 죄듯이 하룻밤 사이에 붕괴시키는 강력한 체제가 생긴 놀라운 일이 발생한 것이다. 수백명의 ‘P. I. D. E.’ 경찰들이 체포되었다. 군인들이 총뿌리를 겨누고 ‘P. I. D. E.’ 경찰들을 끌고 가는 장면을 보는 것은 실로 커다란 사태 변화였다!

과도기

신 정권은 신속히, 언론의 자유 및 시민 자유의 회복을 선포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법무성은 우리의 변호사에게 미결중인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모든 소송 사건들이 기각되었음을 통고하였다.

우리는 또한, 이전 정부가 우리의 법적 인가 신청을 보류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당국자들과 매주 접촉을 갖게 되었고, 그들은 우리의 사업이 합법화되게 하는 것을 지지하였다.

타국에서 개최된 마지막 대회

1974년 여름에 ‘프랑스’, ‘툴루스’에서 개최된 “하나님의 목적” 지역 대회에 총 12,102명의 ‘포르투갈’인이 참석하였다. 타국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수송된 일은 이 나라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었다. 형제들이 객차 내부를 청소하는 것을 관찰한 어느 철도청 감독관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철도청에 25년 동안 근무하는 동안 이러한 광경을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여러분은 이 기차로 여행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이것은 연례적인 해외 나들이의 절정이었다. 형제들은 지역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온갖 희생을 치렀으며, 처음 환영사로부터 폐회 기도가 끝날 때까지 열심히 주의를 기울였다. 수년 동안에 걸쳐 우리를 접대해 준 모든 사람들의 수고는 두고 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

1974년 12월 18일에, ‘여호와의 증인’은 법적인 인가를 받았다. 바로 3일 뒤에, ‘N. H. 노워’ 형제와 ‘F. W. 프랜즈’ 형제가 참석한 가운데 잊을 수 없는 두개의 집회가 개최되었는데, 하나는 ‘오포르토’에서 개최되어 7,586명이 참석하였고 다른 하나는 ‘리스본’에서 개최되어 39,284명이 참석하였다.

이 행사의 중요성은 ‘리스본’의 신문 「디아리오 포퓰러」지 1974년 12월 26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되었다. “4월 25일까지만 해도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 되는 것은 위험하고, 심지어 선동적이라고까지 생각되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였다. 이제 ‘포르투갈’에서 ‘증인’의 한 사람이 되는 일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집회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일은, 수천명이 자유로이 모인 ‘리스본’의 ‘타파딘하 스타디움’에서 있었다. ·⁠·⁠· ‘하나님에 의한’ 유일한 ‘정부’ 아래 있을 평화란 주제가 확성기를 통해 메아리쳤다. 이 모든 일이, 우리가 훨씬 덜 교훈적인 모임을 가졌던 한 축구 경기장에서 있었던 것이다.”

영적 양식이 공급되다

여러 해의 금지 기간 동안, 여호와께서는 자기 조직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적 양식을 계속 공급해 주셨다. 여러 지부에서 서적 소포 뭉치를 정기적으로 우리에게 우송해 주었다. 그러나 햇수가 지나감에 따라, 그러한 소포 뭉치들이 점점 더 많이 압수당하였다. 수년 동안에 걸쳐, ‘포르투갈’에서 휴가를 보내기 위해 오는 형제들은 값진 많은 출판물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러한 형제들이 그토록 용감한 영을 나타내 준 것을 우리는 깊이 감사하고, 그러한 일에 기꺼이 자진해 준 모두에게 감사하고 있다.—디모데 후 1:7.

금지령하에서의 창고

조직이 성장함에 따라, 우리는 더 많은 작업 장소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 도시에서 편리한 장소들을 발견하였다. 그 중의 한 창고에는 “구멍”을 뚫었다. 햇빛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 벽에다 구멍을 뚫어야 했던 것이다. 한 형제는 이곳에서 8년 동안 충실하게 일했다.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항상 쥐와 모기를 특히 싫어했다. 불행히도, ‘그 구멍’을 통해 쥐와 모기가 들락날락하였다. 처음에 ‘그 구멍’으로 들어갈 때, 나는 쥐들을 뛰어 넘어야 했다. 그러면 그것들은 달아나 숨었다. 그것들이 나와 함께 있는 일에 익숙해지자, 이제는 내가 일하고 있는 동안에 슬그머니 내 옆을 지나가곤 하였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이러한 특수한 환경에서 나는 그것들을 견딜 수가 있었다.”

무역 회사에서 일하는 우리 형제들을 통하여, 우리는 「파수대」 특별판을 입수할 수 있었다. 세관 직원들은, 그들이 통관해 주고 있는 것에 대해 “눈이 먼” 것이 분명했다. 우리의 필요량이 대폭 증가될 때까지, 이 방법은 수년 동안 성공적이었다. 1970년대 초에 종이 위기가 닥친 때에도, 여호와께서는 사태를 조정하시어 수천 ‘톤’의 인쇄 용지가 우리 수중에 들어오게 해주셨다.

수년간에 걸쳐 여러 명의 충실한 장로들은, 하루의 세속 일과를 마친 후, 장시간을 열심히 일하여 긴요한 출판물들이 틀림없이 제 시간에 출판되게 하였다. 기록은 인쇄 업자를 통하여 백 사십 만부 이상의 서책뿐 아니라, 수백만부의 소책과 잡지 및 책자가 발행되었음을 알려 준다. 여호와의 보호와 축복이 너무나 역력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사업이 법적인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서적을 본부로부터 수입할 수 있게 되었다. 1975년에 새로운 출판물인 416면의 「하나님의 천년 왕국은 가까왔다!」 책이 든 14‘톤’짜리 ‘콘테이너’의 첫 발송품을 받고서, 우리는 참으로 감격스러워했다!

확장을 위해 준비하는 일

숭배의 자유를 누리게 된, 우리는 모든 면에서 조직을 능률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조처를 취했다. 우리는 ‘리스본’의 외곽 ‘에스토릴’에서 지부로 사용될 만한 시설을 발견하였다. 그 현대식 삼층 건물의 주인은 ‘증인’들에게 세 주기를 망설였다. 그는 그의 변호사와 상의한 뒤에 모든 의심이 말끔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 변호사는 이같이 말했던 것이다. “그들보다 더 좋은 임차인은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곳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잘 돌볼 것입니다.” 우리는 이 건물을 1976년에 매입하였고, 1977년에는 증축을 하여 서적 창고뿐만 아니라 조그만 ‘오프셋’ 인쇄기를 둘 만한 장소를 더 확보하게 되었다.

즐겁게도 형제들이 갖게 된 하나의 새로운 특권은 순회 대회와 지역 대회를 그들 손으로 직접 조직하는 일이었다. 순회구들이 아무런 장비도—심지어 주전자나 남비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결코 작은 도전이 아니었다. 지부는 12개 순회구에 필요한 모든 장비를 마련하는 데 확실한 표준을 세우기 위해 일련의 모임을 조직하였다. 적합한 ‘카페테리아’와 음향 장비를 공동으로 마련하여 지역 대회에서 원만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포르투갈’에서 처음으로 세개의 대회가 열린 1975년 여름에, 준비된 이 모든 장비를 훌륭하게 사용하였다. 이 세 대회의 공개 강연에 참석한 사람들은 총 34,529명이었다.

왕국회관들이 다시 문을 열다

1975년 1월에 지부는 회중들에게 왕국회관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음을 통지하였다. 그러한 기회를 갖게 된 형제들의 즐거움은 대단히 컸다. 그리고 그 해가 저물기 전에, 100개 이상의 왕국회관이 문을 열었다. 부동산이 비쌌기 때문에, 유일한 해결책은 세를 얻어 왕국회관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많은 왕국회관은 그 지역 사회에서 가장 훌륭한 집회 장소에 해당하였다. 형제들이 자기 집을 가질 여유도 없는데, 많은 경우, 왕국회관에 양탄자를 깔고 ‘커어튼’을 치고 기타 필요한 장치를 한 것은 참으로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임대료가 엄청나게 뛰어 올라, 어떤 경우는 월세가 600‘달러’(미화)가 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네 개 내지 다섯 개의 회중이 같은 회관을 공동으로 사용한다.

‘티모르’

‘티모르’는 ‘오스트레일리아’ 북쪽에 위치한, 동‘인도’의 한 섬이다. 이 섬의 동부 절반은 16세기 초에 ‘포르투갈’의 영토가 되었다. 1975년에 ‘티모르’인들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요구하였다. 이 무렵 ‘협회’ 본부는, ‘티모르’의 수도 ‘딜리’로 가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느 형제가 방문하여 발견하게 된 얼마의 관심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경험있는 한 ‘파이오니아’ 부부를 찾아보도록 ‘포르투갈’ 지부에 부탁하였다.

‘가브리엘 산토스’ 형제와 자매는 선교인 임명을 기쁘게 수락하였다. 그들은 1975년 4월에 ‘딜리’에 도착하였지만, 그곳에서의 그들의 봉사는 잠간 동안이었다. 그 해 8월 초에 경쟁적인 두 정당 사이에 내란이 일어났다. ‘산토스’ 형제는 그 경위를 이렇게 설명한다.

“총격이 시작되기 바로 이틀 전에, 나는 우리가 곧 ‘어파아트’에서 실제 갇혀 있게 될 것을 알지 못하고 2주일 분의 식량을 구입했다. 총탄이 우리가 사는 건물을 강타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걱정만 한다고 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의 생명을 그분의 손에 맡겼다. 약 두 주일 후 식량이 거의 다 떨어졌을 때, 그 건물에는 우리만 남게 되었다. 왜냐하면, 다른 일곱 가족은 피난민 수용소로 가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할지를 몰라하고 있는 바로 그 때에, 한 선박의 선장이 우리 집의 문을 두들겼다. 우리는 그의 아내와 성서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포탄이 심하게 퍼붓는 가운데 우리를 구출해 내기 위하여 왔던 것이다. 어떤 이유 때문에, 우리가 피난민 수용소로 떠날 때, 2주일 만에 처음으로 총격이 멈추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우리가 수용소에 들어가자마자 총격은 다시 시작되었다. 우리가 그 수용소에서 3일을 보낸 후, 이 선장은 우리를 한 ‘노르웨이’의 선박으로 데려다 주었고, 그 배는 우리를 다른 1,157명의 피난민들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의 ‘다아윈’으로 실어다 주었다. 여호와의 보호의 손길을 느낀 우리는 이전 어느 때보다 더욱 열심히 그분을 계속 충실하게 섬기고자 한다.”

이 ‘파이오니아’ 부부는 단 석달 만에 서책을 567부 전하였고, ‘딜리’에서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한 사람들 중의 일부는 마침내 ‘포르투갈’로 돌아온 후에 침례를 받았다. 지금은 ‘인도네시아’가 이 구역을 관리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떠한 발전이 있을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앞으로 있을 큰 일의 조짐

1975년 말에, 종교의 자유가 있은 단 한 해 동안에 두드러진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가를 회고해 보는 것은 흥미있었다. 연속 아홉 달 동안 전도인 수가 신기록이었고, 최고 기록은 16,183명이었다. 이것은 전년도 평균보다 23‘퍼센트’가 증가한 것이다. 총 3,925명이 침례를 받았고, ‘기념식’ 참석자는 41,416명으로 증가하였다! 이 모든 것이 아직 더 큰 확장이 있을 것임을 지적해 주고 있었다.

자유가 새로운 시험을 초래하다

1974년의 혁명은 ‘포르투갈’ 사회에 커다란 변화들을 가져왔다. 불안정의 기간이 뒤따랐고, 과격분자들은 민중을 교란하고 있었다. 인민 재판식으로 툭 하면 직원들을 해고시키는 “공장 위원회”와 더불어, “이웃 세포” 집단이 조직되었다. 거리에는 ‘스탈린’과 ‘레닌’, ‘마르크스’ 및 ‘모택동’의 모습을 담은 ‘포스터’와 대형 화보가 벽들에 나붙었다. 판매되고 있는 공산주의 신문에서 망치와 낫의 그림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축출당한 우익 정권이 자행하여 크게 비난받던 압제가 이제는 좌익 권력층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올레가리오 비르기니오’가 말한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정부는 모든 사람에게 특정한 일요일에 민중의 자진적인 지지의 표시로 일하도록 권장하였다. ‘국군의 승리를 경축하는 노동 축제일’이 되면, 시민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들로, 공장으로, 사무실로 나가도록 요구되었다. 나는 자원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바로 그 일요일에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협박하는 전화를 받았다. 그 다음 날 일터로 나갔을 때, 나는 공장 입구에 있는 큰 나무에 ‘여호와들을 목매달라’고 쓴 글씨와 함께 형상을 목매달아 놓은 것을 보았다.

“그 후 모든 노동자들이 참석하는 전체 회의가 소집되었다. 내가 그 군중 앞에 소환되었을 때, 약 400명 가량이 참석하였고, 위원회의 17명 전원이 심판관으로 앉아 있었다. 내가 혁명 노선에 대한 나의 중립을 변호하기 시작하자, 공산주의자들은 내 말을 중단시키고는 나의 종교적 신앙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은 수혈을 거절하므로 살인자들이라고 비난하였고, 또 우리를 비애국적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나를 해고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한 견해를 갖지 않는 성원들도 있었다. 한 사람은, 그 모임은 한 개인의 종교적 신념을 재판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 아니라, 한 고용인의 적격 여부를 고려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의 작업 기록에 관해 좋은 보고가 제시되었고, 그 회의는 나의 모범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나를 계속 고용인으로 사용한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었다. 흥미롭게도, 그 형상을 만들어 매달아 놓는 책임을 졌던 그 사람은 나중에 자살하였다.”

또 다른 종류의 시험

이 무렵, 5분간 묵념을 올림으로써 ‘살바도르 알렌데’와 같은 고인이 된 혁명 지도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이 사람들 사이에 보편화되어 있었다. 어느 ‘포르투갈’의 군인의 죽음과 관련하여 그러한 일이 있을 때, ‘마리오 네토’에게 다음과 같은 일이 발생하였다.

“내가 그런 의식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주의자 동료 노동자들은 그것을 나를 고발할 기회로 삼았다. 전체 회의가 소집되는 날에, 250명의 고용인들이 강당에 모였다. 긴 탁자에는 사무실의 각 다른 부서를 대표하는 아홉 명의 재판관들이 앉아 있었다. 나는 나의 변호를 위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고, 그것은 수락되었다. (1) 내가 말하는 동안에 말을 가로막지 말 것이며, (2) 내가 변호를 끝내면 누구든지 질문을 할 수 있게 할 것이며, (3) 내가 성서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할 것 등이 내가 내세운 조건이었다.

“고발은 죽은 자에 대한 경의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해 성서가 말하는 바를 설명할 수 있었다. 나는 왕국 희망이 불안과 착취로 허덕이는 인간의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임을 설명하였다. 이 모임은 장장 세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한 공개 강연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회의가 끝난 후, 동료 사무실 직원들이 나에게 와서 호의적인 말을 하였다. 예를 들면, 한 공산주의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항상 죽음을 두려워하였으며, 특히 죽은 자들이 나에게 끼쳐 줄 영향을 두려워하였읍니다. 당신이 설명한 것은 납득이 갑니다. 당신에게 대단히 감사하고 싶습니다.’ 한 ‘가톨릭’교인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축하합니다! 나는 현대의 성 ‘바울’과 같은 참 그리스도인 앞에 있는 것처럼 느꼈읍니다. 당신은 당신의 입장을 훌륭하게 고수하였읍니다. 당신의 연설을 듣게 된 것은 특권이었읍니다.’ 한 주일 후에, 내가 계속 직원으로 일하도록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넓은 문이 열리다

사업은 이제 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975년에서 1977년까지 3년 동안에, 매주 평균 한 회중이 형성된 것이다! 다음과 같은 수치를 생각해 보라. 1976년에서 1977년까지 2년 동안에, 11만부의 성서를 배포하여 ‘여호와의 증인’들이 ‘포르투갈’에서 성서를 가장 많이 배포하는 집단이 된 것이다! 이 동일한 기간에 지부가 여러 회중에 발송한 서책은 백만부가 넘는다! 1977년의 최고 전도인은 20,335명이었고, ‘기념식’ 참석자는 사상 최고로 47,787명에 달하였다.

이 기간에 우리는 좋은 소식을 임명되지 않은 모든 구역에 전파하기 위하여 대규모적인 운동을 계획하였다. 수십명의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자동차 집단으로 편성되어 출발하였다. 지부는 부가적으로 책을 1,000부나 특별 발송해 달라는 전화를 여러 번 받았다! 4명으로 구성된 자동차 집단이 한 달에 책을 2천부 이상 전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실로 커다란 증거가 행해지고 있었다!

‘파이오니아’들이 ‘기니-비사우’로 가다

‘기니-비사우’는 ‘아프리카’의 서해안, ‘세네갈’과 ‘기니’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구는 오백 삼십만이다. 이 나라는 ‘아프리카’의 신생 공화국의 하나이며, 1973년에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지만, 실제 독립국이 된 것은 1974년 ‘포르투갈’의 혁명이 있은 후였다. 인구의 다수는 ‘모슬렘’ 신앙을 가지고 있다.

수년 간에 걸쳐 여러 전도인들이 이 땅을 방문하여, 왕국 진리의 씨를 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다가, 1976년 4월에 ‘포르투갈’에서 파견된 두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마누엘 실베스트레’가 다음과 같이 보고한 대로 그들은 그 후 14개월 동안 실로 놀라운 일을 성취하였다.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 호응하는 태도를 보였고, 나와 나의 짝이 지금 사회하고 있는 성서 연구는 총 67건이다.”

그들은 1977년 5월 순회 감독자의 방문 기간 중에 외곽 도시에서 전파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로드리고 케르레이오’ 형제의 보고는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다만 짧은 기간 동안 자동차를 빌릴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자동차에 가능한 많은 서적을 실었다. 두명의 특별 ‘파이오니아’와 나의 아내와 함께, 우리는 ‘만소아’, ‘바파타’ 및 ‘노바 라메고’로 향하였다. 한 집주인에게 서책을 대여섯 부 전하는 일은 흔히 있는 경험이었다. 꼭 이틀 반 만에, 우리는 서책과 성서를 총 774부나 배포하였다.”

우리가 더 많은 좋은 소식의 전파자들을 파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가톨릭’ 교회는 ‘파이오니아’들이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날 한 사제는 ‘마누엘 실베스트레’ 형제에게 비꼬는 말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네들이 ‘아프리카’에서 싸우기를 거절하므로, 우리는 ‘포르투갈’에서 당신네들을 곤란하게 하였소. 그러므로 여기서도 당신들의 사업이 반대를 당할 것을 대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요!”

그 후 곧바로 그 두 ‘파이오니아’는, 그들의 “활동이 국가의 안보에 영향을 미친다”는 구실로 48시간 안에 그 나라를 떠나라는 통지를 받았다. 1977년 9월에, 우리는 그 추방된 ‘파이오니아’들이 국가의 안보에 영향을 끼치는 어떠한 일을 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리스본’의 대사와 면담을 하였지만, 그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예비하고 계신지는 시간이 말해 줄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일하는 동안, 그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대통령을 포함하여 여러 정부 장관들에게 직접 증거를 한 일도 있다.

‘베르데’ 갑에서의 발전

1968년에 ‘베르데’ 갑에는 전도인이 세명이었다. ‘포르투갈’ 식민지들이 독립을 되찾은 해인 1974년 무렵에는, 총 전도인이 14명 있었다. 이 제도에는 연속 7년째 가뭄이 계속되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영적으로는 커다란 축복이 있게 되었다.

‘포르투갈’로부터 네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다른 두 섬에 임명되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였다. 1976년 봉사년도가 끝날 때는 총 전도인이 60명으로 전년도보다 130‘퍼센트’가 증가하였다. 10명의 ‘파이오니아’를 포함한 열정적인 집단이 그 해에 삼천부 이상의 성서와 서책을 전하였다. ‘기념식’에는 기록적으로 130명이 참석하였다.

실로 두드러진 행사는 1977년, 수도인 ‘프라이아’에서 처음으로 온전한 규모로 개최된 지역 대회였다. 형제들은 그 나흘 간의 대회를 위해 일류 영화관을 빌렸으며, 세편의 성서 ‘드라마’를 제공하였다. 공개 강연에 참석한 사람은 총 284명이었다.

1978년 1월에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그 네 명의 ‘포르투갈’인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환영받지 못한 인물로 추방을 당하게 된 일이었다. 이 조처는 다만, 형제들로 하여금 더 큰 활동을 하도록 자극했을 뿐이었다. 1982년 무렵에, ‘베르데’ 갑 밭에는 총 21명의 ‘파이오니아’들이 일하고 있었으며, 전도인 최고 수는 147명이었다. 1982년의 ‘기념식’ 참석자 수는 470명에 달했다. 지금은 다섯 개 섬에서 왕국 전파가 수행되고 있다. 참으로 아직도 이 구역에서 더 큰 수확이 있을 것이 기대된다.

좋은 소식이 ‘아조레스’ 군도에 전파되다

꾸준히 유입해 들어오는 이주민들이 이 섬 사람들의 최근 역사의 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 동시에 꾸준히 들어오는 양 같은 사람들은 ‘한 우리 안에 있는 양떼처럼’ 연합하여 여호와의 백성의 회중으로 모아졌다. 이들 왕국 찬양자들의 음성은 이제 모든 섬에서 들을 수 있게 되었다.—미가 2:12.

다음의 한 가지 예를 생각해 보자. ‘산타 크루즈 다스 플로레스’ 회중은 1975년에 형성되었다. ‘조세리마’ 형제가 자기 친척들과 고향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할 목적으로 미국으로부터 자기 고향인 섬으로 돌아왔다. 순회 감독자가 그들을 방문했을 때, 공개 강연을 위해 멋진 연회장이 하나 제공되었고, 33명이 참석하였다. 그 집회가 끝난 후, 그 연회장 주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데, 한달에 한번씩 이 연회장을 특별한 모임을 위해 무료로 제공하고자 합니다.”

1981년 12월에는 이 조그만 섬에 최고 전도인이 12명이었고, 그 해에 ‘기념식’에는 50명이 참석하였다. 그들은 최근에, 하나의 아름다운 왕국회관을 완공하였다.

1980년 1월 1일의 지진으로 인해 ‘테르세이라’ 섬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고, 56명이 사망하였으며, 15,000명이 집을 잃었다. 다행히도, 많은 형제들의 집이 파손되기는 하였지만, 생명을 잃은 형제는 한 사람도 없었다. 주요 도시인 ‘앵그라’에 있는 왕국회관은 종교적 건물로서는 파손당하지 않은 유일한 건물이었고, 그것은 우리 형제들을 위한 임시 숙소로 사용되었다. ‘포르투갈’ 지부는, 정부가 보낸 첫 구급품과 함께 다른 비상 물품 및 천 ‘파운드’가 넘는 식량을 보냈다. 그 상황을 조사하도록 파견된 한 지역 감독자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그토록 많은 지진 희생자들이 나타낸 불평과 실망의 영이 우리 형제들 가운데는 없었다. 서로의 형편을 파악하기 위해 다른 섬들로부터 즉시 파견된 형제들이 나타낸 진정한 염려는 커다란 격려의 원천이 되었다.”

대서양 중앙에 자리잡은 이들 섬에서 여호와를 찬미하는 찬양의 노래는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커지고 있으며, 현재 찬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최고 전도인은 303명이다.

‘마데이라’가 전전하다

이 섬에서의 왕국 전도인 100명 선은, 거의 20년 동안 전파를 한 뒤인 1970년대 초반에야 돌파하였다. 수년 후에 좋은 소식의 전파자들이 300명을 초과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현재 최고 전도인 수는 396명이고, 1981년의 ‘기념식’에는 사상 처음으로 1,000명 이상이 참석하였다.

1973년에 한 악단 단장이 ‘마데이라’의 수도 ‘푼칼’의 호화스러운 여러 ‘호텔’에서 공연을 한 일이 있었다. 그는 자기의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세상적으로 극단적인 행로를 걷고 있었으며, 툭 하면 술에 만취되었고, 또 부도덕한 생활을 하였다. 나의 아내가 나를 떠나 버린 뒤, 이전에 나의 악단에서 연주하던 한 악사가 자기가 새로 발견한 성서에 기초한 희망에 관해 나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가 나에게 준 첫 출판물들을 읽는 동안, 나는 그 왕국 희망이 곧 나의 희망임을 알게 되었다. 두번째 성서 연구를 한 다음 왕국회관에 갔지만, 나는 나의 너저분한 머리와 텁수룩한 수염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외모를 깨끗하게 단장하였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더 많은 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내가 배우고 있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조레스’에서 연주하기로 계약이 되어 있었다. 떠나기 전에 나는 공부하기 위하여 지난 호 잡지를 70부 정도 챙겼다. 그 잡지를 모두 읽은 후, 나는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고 싶었다. 그래서 오전 세시까지 연주를 한 다음, 나는 호별 방문을 하여 각 잡지마다 짤막한 개인 서신을 첨부하여 한부씩 각 집 대문 밑에 넣었다. 내가 성서 연구를 시작한 지 두번째 달 말에, 나는 나의 생명을 여호와께 헌신하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나의 어머니는 나의 새로운 생활 방식을 보고 놀랐다. 어느 날 어머니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너를 그 불안정한 생활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나는 하나님께 종종 기도를 했었다. 그 하나님이 여호와이시고 그분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을 보니 참으로 기쁘구나.’ 6개월 연구를 한 후, 73세인 나의 어머니도 침례를 받았다.” 현재 ‘죤 비에이라’ 형제는 장로의 한 사람으로 봉사하고 있다.

1981년 “왕국 충성” 지역 대회장으로 ‘에스타디오 도스 바르레이로스’(‘바르레이로스 스타디움’)이 계약되었다는 소식이 발표되었을 때, 많은 형제들은 그들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푼칼’ 시청은 대회 때 사용하도록 시가 2,000‘달러’에 상당하는 목재를 관대히 선물해 주었다. 신문이며 ‘라디오’며 ‘텔레비젼’에서 선전을 잘해 주었다. 공개 강연에 참석한 사람은 기록적으로 832명이었다.

‘앙골라’에서의 가슴뭉클하게 하는 행사들

1974년 1월에 ‘앙골라’에는 흥미있는 ‘뉴우스’가 전해졌다. 해외부는 ‘포르투갈’에서 채택된 종교의 자유의 법이 식민지에서도 적용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연거푸 일어난 사건들이 왕국 사업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1975년 3월까지 형제들은 법적인 인가를 얻기 위해 500명의 이름 및 주소와 함께 필요한 모든 서류를 제출하였다. 자유롭게 집회를 가질 권리가 복원되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곧 그 기회를 이용하여 최초로 공개 순회 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어디서? ‘루안다’의 가장 멋진 체육관 ‘시다델라 데스포르티바’에서 3월 16일과 23일 주말에 개최하였다.

‘옥타실리오 피궤이레도’는 그 때의 일을 즐겁게 기억하고 있다. “첫 대회는 전도인들과 정규적으로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만 참석하게 하였다. 우리는 공개 강연에 2,888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 감격하였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므로, 우리는 두번째 대회를 추진하였다. 이번에는 모든 관심자들을 초대하였다. 두번째 대회의 공개 강연에 7,713명이 참석한 것을 보았을 때의 우리의 놀라움을 지면으로 전달하기는 어렵다! 참석한 사람들 중 일부는 식민지 형무소와 노동 수용소에서 15년 이상을 보낸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마지막 노래를 부를 때에는, 기쁨의 눈물이 그들의 두 볼 위로 흘러내렸다.” 이들 충실한 형제들의 생애에 있어서 실로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루이 사비노’ 형제는 이 순회 대회에서 있었던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포르투갈’인들을 대항하여 투쟁해 온 세 가지 정치 운동 사이에 이제 심한 대립이 표면화되고 있었으므로, 대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경찰들이 급파되었다. 바로 한 주 전에 이 체육관에서 정치적 시위가 있을 때, 폭동이 일어났었다. 한 경찰관은, 자기가 ‘증인’들에 관해 여러 가지 논쟁적인 점들을 들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기로 하였다. 그는 너무나 감동을 받은 나머지, 급히 자기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왔다. 그 결과, 그와 그의 가족과의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1975년 9월 5일에, 정부의 공식 고시로 ‘여호와의 증인’은 “인가받은 종교”임을 선언하였다. 통신 연락을 통해 모든 도(道)에 수백명의 관심자들이 있음이 알려졌다. 한 순회 감독자가 어느 격지 집단을 방문했을 때, 그는 공개 강연에 583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 참으로 놀랐다!

‘앙골라’에서 사업이 금지되다

결사적으로 독립을 추구하는 이 땅에서 내란이 발발하였다. 1975년 11월 11일에 식민 통치가 정식으로 그 종지부를 찍고 신생 공화국이 창설되어, 어려운 시기가 뒤따랐으며 여러 가지 국내 문제가 발생하였다. 갑자기 1978년 3월 14일에, ‘여호와의 증인’에게 금지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모범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며, 정부 고위층의 사람들이 진상을 조사해 주도록 기도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 자체가, ‘여호와의 증인’은 평화를 사랑하는 백성임을 대변하고 또 충분히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앙골라’의 ‘증인’들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계속할 결심을 굳게 하고 있다.—디모데 전 2:1, 2.

‘포르투갈’의 최초의 국제 대회

그러는 동안, ‘포르투갈’에서는, ‘리스본’에서 1978년 “승리의 믿음” 국제 대회가 열릴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이 발표는 대단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포르투갈’ 형제들은, 다른 나라에서 손님이 되는 대신 최초로 주인이 되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 대회를 위한 이상적인 장소는, ‘타구스’ 강과 ‘유럽’에서 가장 긴 현수교가 내려다 보이는 ‘레스텔로 스타디움’이었다. 대표자들이 12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왔으며, 최고 참석자 수는 37,567명이었고, 총 1,130명이 침례를 받았다. 약 육천 명의 대회 참석자들이 야외 봉사에 참여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은 처음으로 가두 증거를 하였다. 그들은 기차 역이며 ‘버스’ 정류장이며 공원이며 시장으로 가서 250,000부의 전단과, 25,000부의 잡지를 배포하였다.

이 때쯤 한 ‘필리핀’ 형제가 ‘포르투갈’ 땅으로 접근하고 있는 한 유조선을 타고 있었다. 그는 국제 대회에 꼭 참석하고 싶었지만, 항해중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문제에 대해 계속 기도하였다. 그의 유조선이 ‘타구스’ 강을 따라 올라가고 있을 때, 그는 해안선에 쌍안경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리스본’ 국제 대회의 공개 강연을 알리는 거대한 광고 게시판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 유조선은 단지 몇 시간만 항구에 정박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선장은 약간의 고장 때문에 며칠 간을 체류해야 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우리 형제는 행복한 대회 대표자들 가운데 함께 있게 된 것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했다.

이 대회에서 행복한 재회가 있게 되었다. 수년 전에 ‘마리아’와 ‘엘리사’는 서로 친한 벗이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네덜란드’로 이민을 갔었다. 그 동안 ‘엘리사’는 ‘증인’이 되었다. 1974년 7월에 그가 ‘프랑스’에서 열리는 한 지역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문간의 초인종이 울렸다. 문간에 있는 사람은 ‘포르투갈’에서 그와 며칠 간의 휴가를 보내기 위해 ‘네덜란드’로부터 온 ‘마리아’였다. 여행 가방을 보더니 ‘마리아’는 “어디 가니?” 하고 묻는 것이었다.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툴루스’로 떠나는 중이야.”

“뭐라고? 넌 어디고 여행은 잘 다니지 않았는데—아뭏든 그것은 어떤 대회니?”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야.”

“오, 맙소사—어떻게 그런 끔찍한 집단과 연합하게 되었니?”

‘마리아’는 불쾌한 기분으로 황급히 떠나버렸다. 그러나 이제 그는 어디서 휴가를 보낼 것인가? 한 가지는 분명하였다. 즉 ‘증인’의 집에서는 보내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다른 친구를 방문하였다. 초대를 받아 들어가자마자, 또 그는 집안에 온통 옷 가방이 널려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망설이면서 “이 모든 옷 가방을 가지고 어디로 갈 것이니?” 하고 질문하였다.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내일 ‘프랑스’로 떠난다!”

“‘툴루스’는 아니겠지!”

“바로 맞추었어!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에 참석하러 간다. 그런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았니?”

“그건 상관마—놀라운 일이야—나는 지금 당장 가겠어.”

수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 두 자매 중 아무도 ‘마리아’로부터 한 마디의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런데, 그 국제 대회가 있기 바로 전에 ‘엘리사’는 ‘마리아’로부터 그가 심한 말을 한 것과 무례한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한통 받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요청을 하였다. “‘리스본’에서 국제 대회가 열리는 동안 너의 자매에게 너의 집에 잠자리를 하나 마련해 줄 수 있겠니?” 한때 친구였다가—지금은 승리의 믿음 안에서 자매로 연합해 있는 이들의 기쁨을 상상해 보라!

1978년 8월 10일부터 16일까지 계속된 그 대회에 관해, ‘뉴우스’지인 「오프카웅」지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순례 기간중에 ‘파티마’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이것은 실로 대단히 특이한 것이다. ·⁠·⁠· 그 특이한 것은 바로 종교적 분위기이다. 이곳에서는 신비주의적 생각이란 찾아볼 수도 없고, 신자들은 대회에서 일치 연합하여 그들의 당면 문제와 믿음 및 영적인 전망에 대하여 토론한다. 그들 사이의 행동은 사랑에 찬 관계로 뚜렷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

부가적인 축복들

1981년 9월에 지부는, 형제들이 「파수대」와 「깨어라!」지를 개인적으로 다시 예약해 볼 수 있다고 통지하였다. 잡지 예약은 1961년에 박해가 시작된 이래 중지되어 왔었던 것이다.

1982년 2월에 신축된 ‘리스본’ 대회장이 ‘F. W. 프랜즈’ 형제에 의해 봉헌되었다. ‘프랜즈’ 형제는 1947년의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포르투갈’을 방문한 통치체의 최초의 성원이었기 때문에, 이 행사는 마치 가족의 재회와도 같았다. 1,315개의 좌석을 갖춘 이 훌륭한 시설은 형제들의 손으로 건축되었고, 드넓은 ‘리스본’ 지역의 아홉 개의 순회구가 이 대회장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룩된 결실

최초의 야외 봉사 보고를 ‘브루클린’으로 보낸 1947년에는 아무도, ‘포르투갈’에서 신권 조직이 현재와 같이 방대해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이 보고서에서는, 지면 관계상 이름을 다 언급할 수 없는 수많은 열정적인 형제와 자매들이 이 나라 방방 곡곡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그분의 능력으로 담대하게 전진하였다. ‘마데이라’, ‘아조레스’, ‘베르데’ 갑, ‘기니-비사우’, ‘앙골라’, ‘티모르’ 및 ‘마카오’에 ‘파이오니아’들이 파견되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해주셨고, 훌륭한 증거가 행해졌다.—에베소 3:20.

초창기의 ‘파이오니아’들 가운데 몇몇은 지금도 변함없이 그들의 임명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특별 ‘파이오니아’ 대열에 가담한 사람들의 수는 202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20년 이상이나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해 온 ‘마리아 조세 헨리퀘스’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내 나이가 60이 되었으나 변함없이 봉사에서 동일한 즐거움을 얻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동일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내가 새로운 임명을 받기 전에 89명이 침례를 받도록 도왔고 다른 여러 사람들이 헌신의 길에 이르도록 도운 것은 나의 특권이었다. 나는, 여호와께서 돌봐주시고 과분하신 친절을 베풀어 주신 이 모든 일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하고 있다.”

18년 동안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한, ‘그레시에테 안드라데’ 자매는 이렇게 설명한다. “세 회중의 기초를 놓는 일에 더하여, 106명이 진리를 배우도록 돕는 일은 가슴을 뭉클케 하였다. 형제들이 회중에서 장로로서 인도하는 것을 보고 또 내가 그들을 돕는 특권을 가졌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깊은 만족감에 젖는다.”

사업은 계속 성장하고 있으며, 1982 봉사년도에는 393개 회중과 격지 집단에서 왕국 전도인이 최고 22,515명으로 불어났다. ‘증인’ 대 인구의 전반적인 비율은 1 대 413이지만, 인구의 10‘퍼센트’가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할 일이 많다. 최근의 ‘기념식’ 참석자 수는 58,003명이었고, 이것은 앞으로도 크게 성장할 잠재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호와의 조직은 시련기와 급속한 확장의 시기에 ‘포르투갈’에서의 사업을 지도하고 인도해 왔다. 양떼의 위대한 목자이신 여호와께서는 친히, 예레미야 23:3에 기록되어 있는 그분의 웅대한 약속을 참으로 성취시키고 계시다. “내가 내 양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 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라.]” 우리의 ‘포르투갈’ 형제들은 왕국 전파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즐거이 전진하고 있으며, 더 많은 양같은 사람들이 이 구원의 날을 이용하도록 돕고 있다.

[190면 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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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인의 증가

22 *

1982

20

1978

18

16

14

12

10

8

6

1968

4

2

1958

1948

1938

0

[각주]

^ 483항 단위 전도인 1,000명

[111면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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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몬카웅

브라강카

브라가

오포르토

곤도마르

페소 다 레구아

빌라 노바 데 가이아

아베이로

구아르다

코임브라

로우사

칼다스 다 라인하

토르레스 베드라스

에스토릴

파레데

리스본

알마다

세투발

파루

스페인

대서양

아조레스

플로레스

산타 크루즈

그라시오사

피코

테르세이라

앙그라 도 헤로이스모

사웅 미구엘

폰타 델가다

산타 마리아

마데이라 섬

포르토 산토

마데이라

푼칼

대서양

아조레스

마데이라 섬

유럽

아프리카

[144면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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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오

아시아

마카오

오스트레일리아

인도양

중국

마카오

마카오 해

타이파

콜로아네

[146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대서양

아프리카

베르데 갑 섬

기니-비사우

앙골라

인도양

아시아

앙골라

루완다

노바 리스보아

모사메데스

자이레

잠비아

나미비아

대서양

베르데 갑 섬

산토 안타옹

사웅 비센테

산타 루지아

사웅 니콜라우

보아 비스타

마이오

사웅 티아고

프라이아

포고

브라바

기니-비사우

노바 라메고

바파타웅

대서양

세네갈

기니

[195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티모르

티모르

딜리

티모르 해

인도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

인도양

아시아

아프리카

인도양

태평양

티모르

오스트레일리아

[115면 삽화]

1926년에 ‘포르투갈’에서 왕국 관심사를 돌보도록 임명된 ‘바르길리오 페르구손’과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1929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조아웅 펠리치아노’

[119면 삽화]

청년으로서 ‘엘리세우 가르리도’는 진리에 관심을 가졌고, ‘포르투갈’에서의 사업을 선두에서 인도하는 데 협력하였다

[122면 삽화]

‘알마다’ 성서 연구 집단을 조직한 바 있는 열정적인 자매 ‘델미라 M. S. 피게이레도’와 ‘데올린다 P. 코스타’

[125면 삽화]

‘포르투갈’에서 최초의 ‘증인’ 선교인이었던 ‘죤 쿠우케’ 그는 사업을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옆에 있는 사람은 그의 아내 ‘캐들리인’이다

[127면 삽화]

이 ‘리스본’ 건물의 1층 ‘어파아트’는 ‘포르투갈’의 최초의 왕국회관으로 사용되었다

[132면 삽화]

이 집은 ‘A. 누네스’가 고향인 ‘피코’ 섬으로 돌아왔을 때, ‘아조레스’에서 최초로 공개 강연을 한 곳이다

[137면 삽화]

‘포르투갈’에서 최초로 보조 ‘파이오니아’가 된 사람들 중의 하나인 ‘안토니오 마누엘 코르데이로’와 그의 아내 ‘오레데’. 이 두 사람은 지금도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다

[139면 삽화]

영적 새 힘을 얻을 목적으로 갖게 된 “야유회” 중의 한 장면

[156면 삽화]

‘포르투갈’ 최초의 전 시간 순회 감독자 ‘D. 피코네’와 그의 아내 ‘엘사’(왼쪽에 있는 부부). 그리고 좋은 소식의 열정적인 전파자 ‘조아킴 마르틴즈’와 그의 가족

[196면 삽화]

‘에스토릴’의 지부 사무실

[207면 삽화]

‘리스본’ 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