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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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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는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의 교차로에 위치해 있다. 이 나라의 역사는 이들 나라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곳은 여러 차례 이들 나라들의 정치-종교적 차이점들이 타결을 본 곳이기도 하다. 열강들—‘스페인’, ‘오스트리아’, ‘프랑스’ 및 ‘네덜란드’인들—이 지배할 때, ‘로마 가톨릭 교회’는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역사가 설명해 주듯이, ‘로마 가톨릭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다고 주장한 그 가공할 종교 재판중에 수천의 인명을 야만적으로 살륙함으로써 그 이름을 떨쳤다.

1830년에 ‘벨기에’는 독립을 선언하였지만, 그렇다고 그 짙은 영적 암흑이 걷힌 것은 아니었다. ‘벨기에’를 방문한 첫 ‘여호와의 증인’은 ‘차알스 테이즈 러셀’이었다. 그는 1891년에 ‘안트베르프’와 ‘브뤼셀’을 방문하여, 이 영적 암흑을 간파하였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곳 사람들도 배교한 그리스도교국에게 압제를 받으며 성서 진리를 박탈당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교직자들과 그들의 비 성경적인 지옥불 교리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사람들은 성서를 펴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우리에겐 성서를 읽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 이 책은 금지되어 있읍니다. ·⁠·⁠· 그건 읽어서는 안 되는 책입니다.” 작은 마을의 일부 연로한 사람들은, ‘가톨릭’ 교회가 성서 읽는 것을 금한 그 사악한 금지령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벨기에’가 ‘가톨릭’ 국가라는 주장이,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러셀’ 형제가 전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왕국 소식은, ‘네델란드’어나 불어 혹은 독일어를 하는 이 나라의 진실한 ‘가톨릭’교인들의 마음에 이를 것이었다.

인구의 거의 60‘퍼센트’를 차지하는 ‘플랑드르’ 사람들은 ‘벨기에’ 북부(‘플랑드르’라고 함)에 살고 있으며, ‘네덜란드’어를 사용한다. 인구의 약 40‘퍼센트’를 차지하는 ‘왈룬’ 사람들은 ‘벨기에’ 남부에 살고 있으며, 불어를 사용한다. 서로 다른 두 인종 집단이 이 나라의 수도 ‘브뤼셀’에 함께 살고 있다. 그 밖에, 약 60,000명의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독일 국경 근처 ‘벨기에’ 동부에 살고 있다.

최초의 씨들이 심어지다

1901년의 어느 날, ‘샤를레르와’의 외곽에 위치한 작은 탄광 도시, ‘쥬메-고이싸르’의 ‘쟝-밥티스트 틸망 시니어’가 한 신문에서 「천년기 새벽」 * 책의 광고문을 읽게 되었다. 그는 즉시 처음 두권을 주문하였고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참으로 놀라운 위안이 담겨 있었다! 복음의 진리가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참으로 감격하였다! 그러한 것을 자기 친구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은 충동을 어찌 억제할 수 있었겠는가? 그 이듬해인 1902년에, 그는 성경을 연구하기 위하여 친구들을 자기 집으로 모았다. 그리하여 그후 일요일마다, 이 작은 집단은 그러한 집회를 계속 가졌다.

그 당시 진리의 빛은 이미 ‘유럽’의 다른 나라들, 특히 ‘스위스’로 침투해 들어가 있었다. ‘스위스’에서는, ‘아돌프 웨버’ 형제가 ‘유럽’ 일부의 왕국의 권익을 돌보고 있었다. ‘틸망’ 형제는 진리에 대한 심한 갈구로 인하여, 이 형제에게 더 많은 지식을 요구하는 편지를 썼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웨버’ 형제는 이 작은 집단의 믿음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샤를레르와’까지 그의 선교 여행을 연장하였다.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영어로 제공해 온 영적 양식이 이제 불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도 공급되게 되었다. 1903년에 「시온의 파수대」가 처음으로 불어로 발간되었다. 진리의 빛은 이 탄광 지역에서 유난히 밝게 빛나게 되었다. 그래서, 일요일마다 정기적으로 성경 연구생(당시에는 이렇게 불리웠음)들의 이 작은 집단은 “밭”으로 들어가, 그 잡지 여덟 면에 담겨 있는 진리의 씨들을 뿌리곤 하였다. 일요일 오전에는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에서 나오는 사람들에게 잡지를 제공하였다. 이렇게하여, 불어판 「시온의 파수대」 첫 두호가 널리 배포되었다.

확장이 시작되다

‘쥬메-고이싸르’의 그 작은 집단은 조금씩 전파 활동을 이 나라의 다른 지방으로, 특히 불어를 사용하는 남부 지방으로 확장해 갔다. ‘벨기에’의 ‘네델란드’어를 사용하는 지역에는 좀더 뒤에 가서야 하나님의 왕국 진리가 이르게 되었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10년 전인 1904년 8월에는, 이들 담대한 좋은 소식의 사자들이 ‘프랑스’의 ‘디낭’에서까지 그들의 활동을 수행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곳의 어느 침례 교회 앞에서, 그들은 그 교회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들에게 또 다시 잡지를 제공하였다. 어떤 결과가 있었는가? 그로부터 2년 후인 1906년에, ‘디낭’에서 회중이 하나 형성되었다.

‘쟝-밥티스트 틸망’과 그의 동료 일군들이 담대하게 성서 진리를 전함에 따라, 다른 연구 집단들이 형성되었다. 그러한 확장으로 인해 서적 보관소의 개설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것은 ‘쥬메-고이싸르’의 ‘틸망’ 형제의 집에 마련되었다.

‘프랑스’에서 ‘벨기에’로

물론 ‘벨기에’는 ‘프랑스’의 바로 이웃 나라이며, 이제부터는 ‘벨기에’의 형제들이 ‘프랑스’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될 것이었다. ‘프랑스’에 형성된 집단들이 성장하여, 1913년에 ‘디낭’에서는 ‘J. F. 러더포오드’ 형제의 강연을 듣기 위하여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프랑스’에서 진리를 배운 ‘프랑쑤와 카레’가 1910년경에 ‘에두아르 베르디에르’란 ‘프로테스탄트’교인인 친구를 방문하기 위하여 ‘리에지’로 왔다. ‘카레’ 형제는 진리의 이 타오르는 불길을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어, 그의 친구가 거짓 종교에서 나오도록 돕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베르디에르’ 씨의 반응은 반대였다. 그래서 ‘카레’ 형제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자네와는 이 문제에 관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네.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지 않겠네.” 이 말을 하고, ‘카레’ 형제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 날 밤에 ‘베르디에르’ 씨는 그 말을 계속 곰곰히 되새겨 보았으며, 다음날 아침에 ‘카레’ 형제에게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카레’ 형제는 그가 “진주”를 받지 않을 것이 분명하므로, 더 이상 진리를 말하지 않겠노라고 대답하였다. 그 사람은 좀 회유가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로 돌아온 후, ‘카레’ 형제는 탄광에서 일하고 있는 그의 친구에게 정기적으로 잡지를 보내 주기 시작하였다. 그는 또한 「성경 연구」 책을 여러 권 보내 주기도 했다. 그의 친구 ‘베르디에르’는 신속하게 진리를 받아들였으며, 공개 강연을 하기 시작하였다. 사실인즉, 그는 1911년 ‘쟝-밥티스트 틸망’ 형제의 장례식에서 연설한 형제들 중에 하나였다.

그리하여 ‘벨기에’의 또 하나의 지방, ‘리에지’에서 진리의 빛은 영적 흑암을 뚫고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교직자의 반대

‘에두아르 베르디에르’가 일하는 같은 탄광에는, ‘레오나르 스메’란 이름을 가진 또 한 사람의 진실한 진리 탐구자가 있었다. ‘레오나르 스메’는 대단히 독실한 ‘가톨릭’교인으로서, 자기 가족과 함께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교회에 가는 길에서도, 그는 묵주를 사용하여 기도를 하곤 하였다. ‘플랑드르’인 후손인 그는 ‘리에지’와 ‘비베그니스’에서 멀지 않은 ‘외르-르-로맹’에 정착하였다. 그런데 1900년에, 한 ‘프로테스탄트’교인이 “나는 하나님의 책을 가지고 있오” 하고 말하면서 그에게 성서를 한권 주었다.

어느 날 고해 성사에서 ‘레오나르 스메’는 사제에게 자기가 성서를 읽고 있다고 고해하였다. 그 사제는, 그가 죄를 용서받기 원한다면 먼저 그 성서를 그 사제에게 가져와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 날부터 ‘레오나르 스메’는 ‘가톨릭’ 교회에 나가는 일을 중단하였고, 혼자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들이 참으로 진실하다면,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일이 그들의 의무일테니까 나를 찾으러 오겠지.’ 그러나 그 사제는 결코 오지 않았다. 그래서 ‘레오나르 스메’는 ‘프로테스탄트’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탄광에서 일을 하는 동안, ‘스메’는 자기의 신약 성서를 읽곤 하였다. ‘베르디에르’가 하루는 이것을 목격하고서, 그가 어느 종교에 속하는지 알아보려고, ‘프로테스탄트’의 찬송가를 한곡 불렀다. 이것은 ‘스메’의 주의를 끌었고, 그는 ‘베르디에르’에게 ‘프로테스탄트’교인이냐고 질문하였다. ‘베르디에르’는 이렇게 대답했다. “과거에는 그랬지요. 그러나 당신에게 알려 줄 더 좋은 것이 있읍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스메’에게 「시온의 파수대」 한부를 건네 주었고, 그에게 철저한 증거를 하였다. 그때가 1912년이었다.

한편 ‘레오나르 스메’는 이 좋은 소식을 자기만 간직하지 않고, 일곱 자녀를 가진 아버지이자 ‘플랑드르’인인 그의 동료 ‘죠셉 포엘망’에게 전했다. ‘가톨릭’교의 가르침을 역겨워하던 이 사람 역시 ‘프로테스탄트’교로 돌아섰었다. 하지만, ‘스메’가 그에게 준 잡지를 읽고서 그 역시 그것이 진리임을 인정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이 세 광부 ‘베르디에르’와 ‘스메’ 그리고 ‘포엘망’은 ‘리에지’, ‘에르스탈’의 ‘프로테스탄트’ 교직자에게 가서 인간 영혼불멸, 삼위일체 및 지옥불 교리에 관해 질문하기로 결정하였다. 도움을 주기는커녕, 그 목사는 몹시 화를 내며 그들을 쫓아버렸다! 그들은 그 역시 ‘가톨릭’ 사제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세 사람은 그들이 ‘프랑스’로부터 받은 잡지들을 사용하여 정기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가족의 반대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스메’ 형제의 아내가 진리에 대한 남편의 입장을 반대하여 여덟 자녀를 데리고 그와 헤어질 준비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어느 날 남편이 일터에서 돌아오기 전에, 그는 자기의 의도를 자녀들에게 알리기 위해 그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나중에 ‘증인’이 된 열 다섯살된 장남 ‘마르셀’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아빠가 엄마를 때리나요? 아빠가 술주정꾼인가요? 아빠는 자기 봉급을 자기만 쓰고 안 주는가요?” ‘스메’ 부인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마르셀’은 어머니에게 자기는 떠나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바로 그 순간에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와서 가족에게 아주 침착하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떠나더라도, 나는 정원을 가꾸고 장작을 패면서 너희들을 계속 도울꺼란다.” 이러한 애정어린 표현을 듣고서, 이 가족은 계속 연합하였다.

1912년까지의 성장

1912년까지 연구와 봉사를 위해 모이는 집단이 일곱개 있었다. 그 집단들은 ‘애느 생 폴’, ‘프레말르-오트’, ‘앙기스’, ‘아마이’, ‘앙프생’과 ‘리에지’에 그리고 1902년에 첫 번째 집단이 형성되었던 ‘쥬메-고이싸르’에 있었다. 이들 연구 집단은 한달에 한 차례 모였으며, ‘스위스’ 사무실로부터 ‘웨버’ 형제가 주기적으로 그들을 방문하였다.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킨 최초의 대회

그 이듬해 초 무렵, ‘벨기에’ 형제들은 ‘J. F. 러더포오드’ 형제의 방문을 받고 ‘쥬메-고이싸르’에서 최초의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는 당시에 임박한 메시야 왕국의 설립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참으로 크게 강화시켜 주었다!

최초의 국제 대회

몇달 후인 1913년 8월 31일에, 이들 동일한 형제들은 이번에는 ‘벨기에’에서가 아니라, ‘프랑스 파리’에서 다른 한 대회에 참석하는 특권을 누렸다. 그들은 ‘스위스’, 독일 그리고 ‘프랑스’로부터 ‘워치 타워 협회’장 ‘C. T. 러셀’의 강연을 듣기 위해 온 다른 성경 연구생들과 함께 하루간의 국제 대회를 위해 그 곳에 모였다. ‘러셀’ 형제는 영국 ‘사우드포오트’에서 개최된 좀 더 큰 대회에 참석한 후 막 도착했었지만, 먼 거리를 여행하여 서로 다른 네개의 나라에서 온 70명의 열성적인 형제 자매들이 참석한 것을 보고 크게 감격하였다. 그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는 그들의 얼굴 표정에 나타난 진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감지할 수 있었다. 통역인의 도움으로, 그들은 1914년이 획기적인 해가 될 것이라는 발표를 듣고서 힘을 얻었다. 그 날은 실로 잊지 못할 날임이 증명되었다!

1914—획기적인 해

이 획기적인 해가 시작되기 전, 1913년 후반에 연구 집단들의 평균 참석자 수는 70명이었다. 그후 1914년이 도래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충실한 전도인들이 그 해에 대해 예언한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형제들이 밭에서 감자를 부지런히 캐고 있는 동안, 사람들은 1913년에 형제들이 1914년이 도래하면 포탄 소리를 들으면서 감자를 캐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조롱하곤 하였다. 그후 곧, ‘유럽’에서 제 1차 세계 대전이 터져 ‘벨기에’를 전쟁터로 바꾸어 놓았다. 이방인의 때가 끝났다는 증거는 실로, 이들 성경 연구생들에게 그들의 전파 임명을 계속 수행하도록 격려가 되었다.—누가 21:24-26.

전쟁의 와중에서도, 이들 겸손한 광부들은 또한 열심히 대회에 참석하였다. 대회장에 도착하기 위하여, 그들은 ‘리에지’에서 ‘샤를레르와’까지 철길을 따라 99‘킬로미터’를 여행해야 했다.

1914년 이후 여러 해 동안 각자는 극단적으로 믿음을 시험받을 것이었다. (계시 2:10) 1914년은 성서에 언급된 획기적인 해임이 증명되었지만, 아직 그리스도인 회중이 많은 형제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하늘로 끌어 올려갈 때는 아니었다. 아직도 완수해야 할 전례없는 증거 사업이 남아 있었다. 끝이 오기 전에 누가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자신이 순종하고 있음을 증명할 것인가? (마태 24:14, 신세) 하나님의 왕국을 공개적으로 전파할 의욕과 열심이 부족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들과의 관계를 끊었다. 하나님의 밝혀진 진리보다는 개인적인 견해를 더 강조하는 ‘팜플렛’들이 작은 집단들 가운데 배포되기 시작했다.

정결케 하는 일이 발생하다

1918년에 정결케 하는 일 측 추수 사업을 반대하는 자들인 가라지를 뽑아 내는 일이 있은 후에는, 겨우 다섯명의 충실한 여호와의 종들만이 남아서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틸망’ 가족, ‘애느 생 폴’의 ‘폰태느’ 형제, 그리고 ‘리에지’의 ‘스메’ 형제와 ‘포엘망’ 형제가 끼여 있었다. 공개 강연을 하고 「창조 사진극」을 보여 주는 일에 아주 열심이었던 ‘에두아르 베르디에르’까지도, 더는 그들 가운데 없었다. 그렇게 많은 형제들이 여호와의 조직으로부터 떠나가는 것을 보고서, ‘포엘망’ 형제의 두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약 30년 후인 1950년경에, ‘에두아르 베르디에르’는 여호와의 조직으로 복귀하였고, 죽을 때까지 형제들과 계속 연합하였다.

“악한 종”이 인쇄한 ‘팜플렛’들이 연구 집단들 가운데 계속 배포되었다. 충실한 형제들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자들과 대항하여 맞서기 위해서는, 여호와와 그분의 보이는 조직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필수적이었다. 어느 집회에서 ‘포엘망’ 형제는 여호와의 조직에 대한 형제들의 확신을 세워 주기 위해 준비한 명백하고도 열정적인 연설을 하였다. 하지만, 그 다음 연사는 ‘포엘망’ 형제의 연설과는 완전히 다른 연설을 준비하였었기 때문에 기권해 버렸다.

계속 충실하게 남은 사람들은 담대함을 잃지 않았다. 이전 어느 때보다도 그리고 열심을 더하여, 그들은 이 나라 방방곡곡에 메시야 왕국을 선포하면서,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임을 알렸다. 그 결과 2년 후인 1920년에, ‘기념식’ 참석자가 ‘쥬메-고이싸르’와 ‘샤를레르와’에서는 총 14명이었고, ‘리에지’에서는 총 40명이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든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과 협조하기를 거절하기 때문이든, 1918년에 여호와의 백성과의 연합을 중지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잊혀져 버렸다.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을 축복하시다

‘벨기에’의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지방이 오랫동안 왕국 소식을 박탈당하지는 않았다. ‘J. 포엘망’ 형제는 ‘벨기에’ 최대 도시의 그곳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리에지’에서 ‘안트베르프’까지 자전거를 타고 120‘킬로미터’를 여행하였다.

하지만, ‘포엘망’ 형제의 활동은 ‘안트베르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와 ‘L. 스메’ 형제는 단 두 사람이지만, ‘리에지’에서 호별 방문 전파를 하였다. 이들은 둘 다 글을 잘 쓸 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의 야외 봉사 보고를 작성하는 일을 호별 봉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탁하였다. 그들의 봉사 보고는 ‘스위스’ 지부로 보내졌는데, ‘스위스’ 지부는 1929년까지 ‘벨기에’에서의 사업을 돌보았다. 하지만, ‘스위스’ 사무실의 형제들은, 이들 두 형제 자신이 최선을 다해 그들의 보고를 작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스메’ 형제는 성서에 대한 놀랄만한 이해를 얻었다. 1931년에 그는 탄광에서의 일자리를 그만두고, 현재 우리가 일컫는 보조 즉 보조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사도 ‘바울’을 본받아, 그는 아무에게도 짐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가족을 부양하고 돌보기 위해 구두 수선공으로 일했다. 구두를 수선하는 동안에도,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앞에 성서를 펴놓고 읽으려고 했다. 그는 1964년에 95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두드러지게 청결한 마음을 지켰다.

왕국을 광고하시오!

1922년에, ‘포엘망’ 형제는 ‘프랑스 디낭’에서 개최된 한 대회에 참석할 기회를 가졌다. 그곳에서 그는, 한 형제가 커다란 표지판을 들고 큰 소리로 “왕이 가까이 계십니다. 왕과 그분의 왕국을 광고하시오” 하고 외치는 것을 보았다고 설명한다. 그날 오전에 참석한 모두는 집집으로 다니면서 하나님의 왕국의 설립을 알렸다.

‘리에지’에서의 증가된 활동

‘리에지’ 지역에서 사업에 최대의 박차가 가해졌는데, 이곳에서 ‘스메’ 형제와 ‘포엘망’ 형제는 모든 기회를 다 이용하여 증거를 하였다. ‘포엘망’ 형제가 ‘플랑드르’인 후손임을 알고서, 사람들은 그에게 “작은 ‘플랑드르’인”이란 별명을 붙여 주었다. 심지어 1925년에 있은, 당시 ‘벨기에’의 국왕 ‘알베르트’ 1세를 축하하기 위한 ‘퍼레이드’중에서도, ‘스메’ 형제와 ‘포엘망’ 형제는 그 기회를 잘 이용해 볼 궁리를 하였다. ‘퍼레이드’의 행진하는 군중 속에 섞여, 그들은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쓴 커다란 팻말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방해받지 않고, 마칠 때까지 그 행렬을 따라다녔다.

‘리에지’의 13명으로 구성된 작은 집단은 계속 성장하여, 1928년에 또 한 사람의 용감한 왕국 전도인이 합세하였다. 그 사람은 ‘에르네스 외즈 시니어’이었는데, 그는 지금도 82세의 나이로 ‘파이오니아’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는 그의 세 자녀와 그들의 배우자들은 물론 그의 세 손자녀와, 결혼한 두 손자녀의 배우자들, 다시 말해 총 12명의 가족 모두가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다. 1982년 말까지 그들이 전 시간 봉사에 바친 햇수는 모두 합쳐 244년이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특별 ‘파이오니아’들이고 일부는 순회 사업과 지역 사업을 하고 있으며, 한 사람은 지부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포엘망’ 형제와 ‘스메’ 형제 그리고 ‘외즈’ 형제가 하나님의 왕국을 알리면서 부지런히 호별 방문을 하고 있는 동안, 다른 형제들은 그들이 그러한 일을 할 능력이 없다고 비난하였다. 이들 비난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을 망각하였던 것이다. (고린도 전 1:27) 발전하지도 않고 거짓 종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과거의 생활 방식에 계속 고착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새로운 성품을 옷입기를 거절하였다. 그러한 한 가지 예를 ‘리에지’의 작은 집단의 집회를 사회하던 사람의 태도에서 볼 수 있었다. 그는 종교 지도자들이 하는 바와 같이, 야외 봉사를 나가기는커녕 선출된 장로로서의 자기 자신에 주의를 이끄는 것을 좋아했다. 사회자였기 때문에 「파수대」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그는 차 한잔과 과자 하나를 받아서 거기 앉아서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 앞에서 먹었다. 그런 다음 집회를 시작하였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낮에는 출판물을 가지고 호별 방문을 하지 못하고,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어두워진 다음에야, 그들은 몇부의 소책자를 문 밑으로 밀어 넣거나 심지어 퇴직하여 연금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돈을 주어 그들 대신에 그 일을 하게 하곤 하였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진정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백주에도 그분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플랑드르’ 구역에서의 확장

‘포엘망’ 형제는 ‘플랑드르’ 구역을 방문하는 일을 계속하였으며, 1928년에 그는 ‘겡크-빈테르슬라그’로 찾아가 한때 광부로 일했던 ‘폴란드’인을 재방문하였다. ‘앙드레 워즈니아크’를 재방문한 결과, 그가 진리 안으로 들어왔다. 왕국 소식이 이 나라의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지방에서 실제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바로 이 해부터였다. 그때까지만해도, 연구 집단들은 다만 ‘벨기에’의 불어를 사용하는 지방에만 있었다.

2년 뒤인 1930년에 ‘워즈니아크’ 형제는 ‘콜포처’ 봉사 즉 오늘날 우리가 일컫는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는 ‘플랑드르’ 구역에서 좋은 소식의 가장 담대한 ‘콜포처’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활동적이고, 진실하며 하나님의 왕국 권익에 온전히 헌신한 사람이었다. 그는 순회 활동과 특별 ‘파이오니아’ 활동을 포함하여 전 시간 봉사에 43년간을 보낸 후, 74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충실하게 봉사하였다.

지부 사무실이 개설되다

1929년에 들어와서 ‘벨기에’에 지부 사무실을 개설하는 것이 적절하게 되었다. ‘브뤼셀’이 가장 적합한 장소로 선정되었다. ‘네덜란드’의 ‘밴 에익’ 형제가 지부 감독자로 봉사하였다. 이 지부는 여전히 ‘마르틴 하르벡’ 형제의 책임하에 있는 ‘베른’ 사무실의 직접 감독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벨기에’ 지부는 ‘브루클린’에 있는 ‘협회’의 본부로부터 직접 감독을 받게 되었다.

처음으로 총괄적인 봉사 활동 기록이 보존되었고, 1929년에 28명의 전도인이 종교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도록 부지런히 다른 사람들을 도왔음이 나타났다. 이 수치에는 전도인들(당시에는 반 사역자라고 불리웠음)과 함께 그 해에 41,358부의 서책과 소책자를 배포한 아홉명의 ‘콜포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확장이 계속되다

1930년에 ‘벨기에’에서 추수할 것은 많았으나, 주의 일군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46명의 형제들 가운데서 단지 27명만이 집집으로 방문하여, 이 나라의 당시 7,000,000명의 주민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과 특히 새로 형성된 ‘브뤼셀’ 집단은 그 해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대회에서 크게 세움을 받았다. 참석한 100명 중 20명은 ‘프랑스’, ‘스위스’ 및 영국으로부터 왔다. 12개의 다른 언어를 사용하였지만, 형제들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연합을 감지할 수 있었다. ‘워즈니아크’ 형제가 ‘파이오니아’ 봉사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이 대회에서였다. 그는 서적을 많이 입수하였으므로, ‘벨기에’의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또 다른 지역인 ‘림부르그’에서 증거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그 해에 여러 명의 영국인 ‘파이오니아’들이 ‘플랑드르’에 정착하였다. 그들 중 한 사람인 ‘루이 베리’ 자매는 이사야 60:22의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룰 것이라는 말을 토론하기 위해, 13명의 성경 연구생들이 부엌에 함께 모인 ‘브뤼셀’에서의 집회에 참석하는 특권을 누렸다. 이 예언이 ‘벨기에’에서도 확실히 성취될 것이었다.

23개의 나라에서 온 3,000명의 형제들이 ‘파리’에 함께 모인, 1931년 5월에 개최된 최초의 큰 국제 대회는 ‘벨기에’의 형제들에게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사업에 최선을 다해 전진하는 데 필요한 동기와 결의를 주었다.

하지만, 전도인이 27명밖에 안 되는 그 작은 집단은 ‘가톨릭’ 교회가 끊임없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그들을 대항하게 하고 외국인 ‘파이오니아’들을 추방하라고 경찰에 압력을 가하는 거듭되는 공격을 직면하여, 어떻게 이 나라 전국에 좋은 소식을 전할 것인가?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이 두려움을 모르는 전도인들은 그들을 보호하는 여호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이사야 51:16; 마태 24:14, 신세.

‘파이오니아’들의 확고 부동함

‘벨기에’의 대다수의 ‘파이오니아’들은 영국, ‘프랑스’ 그리고 ‘스위스’로부터 왔었다. ‘네덜란드’어나 불어 사용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은 증거 ‘카아드’를 사용하여 증거하였다. 이들 외국인 형제들은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를테면, 1931년에 어느 ‘폴란드’인 형제는 서책 2,110부와 소책자 10,338부를 전하였고, 한 영국인 ‘파이오니아’는 소책자를 15,000부나 전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대없이 이런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파이오니아’들이 어느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가톨릭’ 사제들은 체포를 선동하기 위하여 황급히 경찰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파이오니아’들은 끈기있게 전파를 계속하였고, 그들 자신이 그 작은 집단들의 참된 기둥과 격려임을 증명하였다.

법적 기구가 형성되다

의심의 여지없이 진리의 반대자들은 기뻐하지 않았으며, 전도인들을 체포하고 외국인 ‘파이오니아’들을 추방시키기 위하여 줄기찬 노력을 기울였다. 조직을 법적으로 대표하기 위하여,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란 명칭으로 비영리 법인이 설립되었으며, 1932년 5월 7일자로 ‘벨기에’의 공문서 「르 모니퇴르 벨게」에 법인 정관과 함께 등록되었다.

‘벨기에’ 형제들이 한해 전의 두배가 넘는 196,000부 이상의 서책과 소책자를 배포한 것은, 바로 교황 ‘비오’ 11세가 1933년을 “성년”(聖年)으로 선포하고 독일의 ‘나찌’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기 직전의 같은 해인 1932년이었다.

공포에 가득찬 ‘가톨릭’ 교인들

원수들은 중단없이 반대를 계속하였다. 외국인 ‘파이오니아’들을 추방하고 전도인들을 체포하겠다는 협박에 장단 맞추어 ‘가톨릭’ 사제들은 하나님의 왕국 선포자들을 적대하도록 그들의 양떼를 선동하는 설교를 하였다.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가톨릭’ 지방인 ‘림부르그’의 시골 사람들은 심지어 ‘워즈니아크’ 형제를 악마 자신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는가 하면, 그를 만나면 항상 십자가 표시를 하곤 하였다. 이 장애를 극복하기 위하여 ‘워즈니아크’ 형제는 까만 중산모를 사서 쓰고 다녔는데, 이 차림으로 그의 모습은 아주 고귀하게 보였다. 이제 사람들은 그를 존경할 만한 신사로 보게 되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그후 그는 매일 평균 서책 10부와 소책자 100부를 전하게 되었다.

반대가 증가하다

‘벨기에’의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방에서, ‘나찌’ 집단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오이펜’ 시에서 잡지를 배포하고 있는 ‘벨플라메’ 형제와 ‘노박’ 형제를 공격하였다. 12명의 젊은 ‘나찌’ 당원들로 구성된 한 집단은 형제들의 잡지 가방을 빼앗아 사납게 찢어 버렸다. 그 공격이 너무나 무자비하고 굴욕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경찰이 개입하여 형제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른 곳에서는 당국이 외국인 ‘파이오니아’들의 왕국 전파를 금지시켰는가 하면, 여러 ‘파이오니아’들이 이 나라로부터 추방당하기까지 하였다. 이 나라에는 1933년에 보고한 26명의 ‘파이오니아’들 중에서 단지 6명만이 남았다. 1934년 중에 국왕 ‘레오폴드’ 3세와 국무총리 그리고 법무부 장관에게 호소하였으나, 모두 허사였다. 경찰의 추적을 받았지만, ‘워즈니아크’ 형제는 추방을 면할 수 있었다. 정부에 변화가 있은 후, 법무부 장관은 ‘워즈니아크’ 형제를 ‘벨기에’에 남아 있도록 허락해 주는 보다 온건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대치되었다.

‘아르덴’에서

1934년 어느 날, ‘룩셈부르크’의 ‘그랜드 두치’에 있는 한 마을에서 모두 ‘가톨릭’교인인 두명의 친 형제가 종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사제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 외에 다른 것이 더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게 될거야.” 그러다가 그들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에게 성서만이라도 한권 있다면 좋겠는데!” 며칠이 지난 뒤, ‘여호와의 증인’ 한 사람이 그들의 문을 두드렸을 때, 그들의 소원은 성취되었다. 이들 두명의 진실한 진리 탐구자들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후 얼마 안있어 그들 중 한명은 사망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명은 ‘브뤼셀’로 이사하여 ‘벨기에’에서의 왕국 사업의 또 하나의 기둥이 되었다. 이 형제 ‘에밀레 슈란츠’는 1936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참을성있고 겸손하였지만, 그는 ‘벨기에’의 ‘네덜란드’어와 불어를 사용하는 지방 전역에서 박력있게 천직으로 삼은 전도 봉사를 추진하였다. 제 2차 세계 대전중 형제들이 지하로 들어가야 했을 때, 그는 현재의 순회 감독자에 해당하는 지구의 종으로 봉사하였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고 또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지금 노령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다.

그는 ‘아르덴’이라고 알려진 ‘벨기에’의 한 지방에서 여행하는 ‘파이오니아’ 사업을 시작했다. 그 지방에서 그는 나무가 우거진 언덕의 중턱에 흩어져 자리잡은 마을과 촌락의 인구가 드문 땅을 자전거로 여행하였고, 그 지방 사람들은 사제들에 대한 미신적인 두려움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툭하면 경찰이 그를 제지하였으나, 그는 왕국 전파 사업을 중지하라는 그들의 명령에 순복하지 않았다. ‘바스토뉴’에서 한 주일에 여러 차례 제지를 당한 후, 그는 마침내 경찰서로 연행되었으며 경찰 서장으로부터 그가 하는 전파 사업을 즉시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슈란츠’ 형제는 딱 잘라서 “그럴 수는 없읍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교직자의 반대를 반영하는 숱한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전파하는 일을 중지하지 않았다.

격려를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어보려고 집안으로 초대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그의 주된 격려의 근원이 되셨다. 그가 형제들과 가진 유일한 접촉이라곤 예언자들의 본을 따르라고 그에게 조언해 주는 편지를 ‘협회’로부터 받는 것뿐이었다. 실망을 느낄 때면, 그는 숲 가장자리로 가서 예언자들의 처지에 대한 「황금 시대」의 한 기사를 다시 읽고 나서 다시 길을 걷곤 하였다.

그가 성서를 가르쳐 준 덕분에, ‘아르덴’의 몇몇 온유한 시골 사람들이 여호와와 그분의 진리를 알게 되었다. 오늘날 이 지역에는 참 하나님을 섬기는 회중이 일곱개 있다.

“큰 무리”가 나타나다

1935년부터 “큰 무리”가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벨기에’에서 이들 새로 연합한 사람들은 여호와의 봉사에서 기름부음받은 자들과 동일한 열심을 나타냈다. 그들은 특권들을 받고 행복해 하였다. 이렇게 하여, 1935년 ‘워싱턴 D. C.’ 대회에서 ‘J. F. 러더포오드’ 형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배정해 주시는 위치는 의심의 여지없이 최상의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정부”라는 연설이 ‘브뤼셀’로 전송되었고, ‘워싱턴’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계속 보내는 박수 갈채는 심지어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브뤼셀’에 있는 형제들까지도 중요한 소식이 땅 끝까지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당시 ‘벨기에’에 있던 13개 회중 가운데는 ‘리에지’와 ‘샤를레르와’ 그리고 ‘베링겐’에 위치한 3개의 ‘폴란드’어 회중과 또 독일 형제들로 구성된 ‘겡크’와 ‘아이즈덴’ 그리고 ‘루욱스’에 위치한 3개의 회중이 포함되어 있었다. 십명의 전도인들로 구성된 또 다른 회중이 제 1차 세계 대전중에 완파된 ‘플랑드르’의 한 도시, ‘이에페르’(‘이프레스’)에서 형성되었다. 이 ‘가톨릭’ 도시에서 1936년에 대회가 열렸다. 함께 모인 50명의 형제들은, ‘프랑스’로부터 55명의 형제들이 호별 봉사에서 그들과 합세하기 위해 도착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스위스’로부터 온 ‘하르벡’ 형제와 ‘게르츠’ 형제도 참석한 연사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한때 ‘이에페르’ 회중의 처음 10명의 ‘증인’들이 일했던 그 구역에 지금은 회중이 15개나 있다.

1935년 ‘브뤼셀’ 세계 박람회

1935년의 ‘브뤼셀’ 세계 박람회는 왕국 사업에 대한 ‘벨기에’ 당국자들의 태도를 부드럽게 만드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세계 박람회를 이용하여, 형제들은 서적 진열대를 세웠다.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와 “여호와의 증인”이란 글씨를 쓴 커다란 간판은 수천명의 방문객들의 주의를 이끌었다. 많은 사람들은 서적을 구입하기 위해 다시 찾아 왔으며, 한편 다른 사람들은 일련의 서적을 모두 구입하기 위하여 지부 사무실로 직접 찾아오기도 하였다. 행인들에게 수천부의 서적 안내문이 배포되었으며, 그들 중 얼마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이 박람회 전체에서 우리가 발견한 가장 좋은 것입니다!”

사제들은 세계 박람회장에 ‘협회’의 서적 진열대가 있는 것을 보고는 격분하였다. 사제들 중 한 사람은 형제들에게 다가와서, 여기서 책을 팔 허가증이 있느냐고 물었다. 다른 한 사제는 양 손으로 책들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그는 갑자기 책들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35개 언어로 된 책들이 또한 인쇄 예술 부문의 두개의 큰 진열장에 전시되어 있었다. ‘협회’는 이 부문에서 은상을 타기도 했다. 그러나 형제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은 좋은 소식을 전파할 법적 권리를 획득한 일이었다. 다시 한번 외국인 ‘파이오니아’들이 이 나라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의 수는 14명으로 늘어났다.

두려움을 모르는 ‘폴란드’ 형제들

‘샤를레르와’에서 용감한 ‘폴란드’ 형제들은 탄광에서 일하여 생계를 꾸려 나가면서도, 사업의 진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이들 형제, ‘프랑쑤와 브르조스카’, ‘프랑쑤와 앙쿠스’, ‘알빈 글로박스’ 그리고 ‘쟝 라도 제브스키’는 어느 독일인 ‘파이오니아’의 도움을 받아, 불어가 서툴렀지만 왕국을 알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여러 명의 용감한 영국인 ‘파이오니아’들 특히, ‘모나 프랫’과 ‘루이’ 및 ‘낸시 베리’ 자매 그리고 ‘어어니스트 시니어’ 형제와 ‘트린더’ 부부는 이 가장 중대한 왕국 사업을 완수하는 데 그들의 곁에서 일하였다.

교직자들의 영향력이 그 힘을 상실하다

교직자들의 영향을 받은 경찰과 4년 동안 법적 투쟁을 한 후, 형제들은 당국자들이 보다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예를 들어, 허가없이 호별 방문을 한다고 한 ‘가톨릭’교인인 시장에게 고발당한 한 ‘파이오니아’는 판사 앞에 출두해야 했다. 판사와 시장 사이에 활발한 토론이 벌어졌다. 판사가 격분하며 탁자를 탕탕 치고 그 토론을 끝내면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여기서 재판관은 본인입니다. 이 사람이 하는 일은 선하므로, 그를 석방합니다. 호별 방문을 하는 수녀들에게도, 본인이 반대 조치를 취해 주기를 원하십니까?”

녹음기를 세발 자전거에 싣고서

형제들이 두대의 휴대용 녹음기를 조립하였다. ‘리에지’에서 ‘스메’ 형제와 ‘포엘망’ 형제가 저축한 돈으로 산 두대 중 하나를 세발 자전거에 실었는데, 이것은 모든 부속품과 ‘배터리’를 합쳐 무게가 55‘킬로그램’이나 나갔다. 그들은 시장을 돌아다니거나 교회 앞에 서 있곤 하였다. 녹음된 연설은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그 무게 때문에, 두 형제는 세발 자전거에다 이따금씩 그들의 자녀 하나나 둘을 태워 끌고 다녔다. ‘비제’에서는 ‘가톨릭’ 청년들이 녹음기를 에워싸고, 넘어뜨리려고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항시 녹음기를 지켜보아야 했다. 1935년에 형제들은 이 일에 각각 하루 10시간씩, 27일을 보냈다. 그들은 3,595명의 듣는 사람들에게 소책자 369부, 「황금 시대」 79부, 서책 7부 그리고 성서 한권을 전하였다.

충실한 본

1936년에 새로운 ‘파이오니아’들이 몇명 ‘벨기에’에 도착하였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은 ‘스위스’에서 온 ‘베르너 슈츠’였다. 그는 ‘프랑스’에 임명되어, 1935년에 ‘바르-르-둑’ 경찰이 그를 추방할 때까지 거기서 계속 봉사했었다. 그가 ‘브뤼셀’ 사무실에 도착한 것은 1936년 1월이었다. ‘플랑드르’ 도시 ‘안트베르프’에서 봉사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새로운 언어인 ‘네덜란드’어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당시 ‘슈츠’ 형제는, ‘포엘망’ 형제와 영국인 자매 ‘낸시 베리’와 ‘제시 휘트모어’가 이미 이 구역을 부분적으로 봉사하긴 했었지만 주민 300,000명이 넘는 이 도시에서 유일한 ‘증인’이었다.

1936년은 ‘스위스 루세르네’에서의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벨기에’ 형제들에게는 주목할 만한 해였다. 그 대회에서 ‘러더포오드’ 형제는, 경찰이 보호하는 가운데 한 강당에서 공개 강연을 하였다. ‘슈츠’ 형제는 ‘안트베르프’에서 ‘루세르네’까지 자전거로 장장 700여 ‘킬로미터’를 여행한 후에야 비로소 그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슈츠’ 형제는 전 시간 봉사에 47년을 바친 후, 1972년에 죽을 때까지 신권 통치를 위한 용감한 투사로 봉사하였다. 심지어 ‘나찌’ 점령 중에도, 그는 전파 활동을 수행하였으며, ‘워즈니아크’ 형제와 ‘슈란츠’ 형제 그리고 ‘하르츠탕’ 형제와 더불어 그 기간에 사업을 확장하는 데 기여한 주요 기둥들 중 하나가 되었다.

전운이 감돌다

1937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위협이 더욱 불길해졌다. ‘가톨릭’교가 이용한 분통터지게 하는 국가주의는 또 다시 경찰에게 압력을 가하여 형제들을 체포하게 하였다. 하지만, 진리의 씨들은 ‘안트베르프’에서 뿐만 아니라, ‘플랑드르’ 구역 구석구석에서도 싹이 트고 있었다. ‘스페인’ 황제 ‘차알스’ 5세의 출생지인 ‘헨트’에서, ‘파이오니아’들은 왕국 진리에 대해 들어 보지도 못한 이 도시의 160,000명 이상의 주민에게 왕국 “표지판”을 흔들고 다니면서 증거하는 일에 바빴다. 1937 봉사년도 말까지는, 이 나라에서의 활동을 촉진하기 위해 조직된 회중이 16개 있었다.

신권 질서가 회복되다

그리스도인 회중의 신권 질서가 회복된 1938년에 크나큰 즐거움이 있었다. 하지만, 탁월한 공개 연사들인 몇몇 선출된 장로들은 이 하나님의 마련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림부르그’ 지방의 한 회중에서, 여러 형제들은 여전히 장로들을 선출하는 민주주의적인 방식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워즈니아크’ 형제는 올바른 견해를 갖도록 그들을 도와 주었다. 세 순회 감독자의 방문을 받아, 20개의 회중은 번창하였다. 당시 봉사하던 22명의 ‘파이오니아’들은 왕국 서적을 가지고 이 나라를 누볐고, 그들과 함께 일한 135명의 전도인들은 더 잘 조직되었다.

국가주의의 재연(再燃)

‘벨기에’는 절박한 ‘나찌’의 침략을 대항하여 모든 군대를 다 동원하였다. 또 다시 교직자들은 왕국의 좋은 소식의 선포를 저지하기 위해 치솟는 국가주의의 열기를 이용하였다. 군 당국이나 ‘벨기에’ 경찰의 심문을 받기 위해 형제들이 호출되는 일이 더욱더 잦아졌다.

어느 날 ‘브랭-르-콩트’에서, 한 자매는 남편이 군인인 한 부인에게 「위안」지를 전했다. 표지의 그림은, ‘히틀러’가 짐승을 타고 인간을 짓밟고 있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귀가한 그의 남편은 ‘히틀러’의 그림을 보고서, 그 잡지를 빼앗아 ‘여호와의 증인’들이 다녀갔다는 것을 장교들에게 경고해 주기 위해 막사로 돌아갔다. 그 날 저녁에 세명의 장교가 형제들을 체포하여, ‘히틀러’의 간첩으로 일한 혐의로 고발하였다. 형제들이 문제를 명확히 설명하였지만, 이들 군장교들은 ‘사단’에 의해 눈이 먼 나머지, 그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간첩 혐의로 그들이 군법 회의에 소환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의 발발로 이들 군 당국자들은 그들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교직자들의 사주를 받은 경찰의 협박에도 아랑곳없이, 사업은 ‘슈란츠’ 형제와 ‘워즈니아크’ 형제가 최초의 회중의 기초를 놓은 곳인 항구 도시 ‘안트베르프’에서 계속 잘 발전하였다. ‘슈란츠’ 형제는 경찰 서장들의 다음과 같은 말에도 겁먹지 않았다. “당신이 순교자가 되기를 바란다면, ‘베긴느’ 가(街)[‘안트베르프’ 감옥]에서 봉사를 끝마치게 될 것이오.” 그러나 ‘슈란츠’ 형제는 ‘베긴느’ 가에서도 그의 그리스도인 천직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가 ‘파이오니아’ 짝인 ‘워즈니아크’ 형제의 주소를 ‘나찌’ 당원들에게 알려 주기를 거절한다고 하여 1940년에 그들이 그를 이 감옥에 투옥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인도와 보호 덕분에 그는 지금도 ‘파이오니아’ 봉사를 계속하고 있다.

‘림부르그’ 지방에서, 형제들은 한 ‘가톨릭’ 사제가 ‘증인’들이 좋은 소식을 바쁘게 전하고 있는 구획을 경찰관에게 알려주는 것을 보았다. ‘빈센트 골릭’ 형제와 그의 동료들은 제지당하였고, 호별 방문 전파를 계속하면, 장기 감옥형을 살게 될 것이라는 협박을 받았다.

‘벨기에’의 불어를 사용하는 지방에서도 사제들로부터 직접적으로 반대가 왔는데, 그들은 ‘파이오니아’들에게 자기들의 “목장”을 침범했다고 분개하였다. 양떼에게 경고하는 일, ‘파이오니아’들에게 협박하는 일, 주 경찰을 부르는 일, 어린이들을 보내어 형제들을 괴롭히는 일, 투석이나 형제들의 자전거 ‘타이어’를 빵꾸내는 일, 그리고 형제들을 따라 다니면서 그들이 전한 서적을 거두어들이는 일 등, 그들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파이오니아’들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소책자를 여러 권 주세요. 사제가 오면, 한권 주어 만족하게 해주고 나머지는 두고 읽을 수 있으니까요!”

‘시니’에서 백의(白依) 선교회 교단의 한 ‘가톨릭’ 수도사는 ‘모나프랫’과 그의 짝을 심하게 반대하여, 그들의 활동을 즉시 중지하라고 명령조로 말했다. 두 ‘증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왕국 사업에 임명했노라고 답변하였다. 그 수도사는 이렇게 논박하였다. “나는 성직자란 말이요.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성직 임명에서 여러분을 해임시킬 수 있단 말이오.”

이 두 ‘파이오니아’ 자매는 자전거를 타고 계속 그 다음 마을로 용감하게 나아가, 사람들에게 「우주적 전쟁이 가까왔다」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배포하였다. 그 사제는 그들을 따라 다니며 모든 시골 사람에게 받은 소책자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였다. 소책자를 두부 남겨 준 많은 곳에서는, 사람들이 그에게 한부의 소책자만 돌려 주었기 때문에, 그는 몇부밖에 거두어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가 회수한 소책자 몇 부를 들고 그 자매들한테 다가가서, 이제 커다란 모닥불을 피워 태워 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진리가 뿌리를 내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들 영국인 ‘파이오니아’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전파한 ‘디낭’과 ‘나뮈르’ 그리고 ‘시니’에서 회중들이 번창하고 있다.

전례없는 전쟁 전의 증거

‘나찌’가 ‘벨기에’를 침공하기 전에, 전례없는 증거가 행해졌다. 1939년 무렵, 왕국 봉사에서 점진적으로 훈련받은 최고 전도인 수와 ‘파이오니아’ 수는 각각 218명과 33명이나 되었고, 신권적인 봉사 마련이 회복되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 11년 동안, 그들은 이 나라의 상당 부분을 돌 수 있었고, 거의 1,500,000부의 서적을 배포하였다. 1939년에는 새로운 회중이 열 한개 형성되었으며, 회중 수는 총 31개가 되었다. 그러나 ‘나찌’ 점령 중의 여러 해 동안 진리의 씨가 잘 심겨진 이 밭은 어떻게 될 것인가?

금지령 ·⁠·⁠· 전쟁!

‘히틀러’의 군대들이 당도하기도 전에, 왕국 사업에 대한 첫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1940년 3월 30일에 내무부 장관은, ‘협회’의 모든 서적을 금지한다고 선언하였다. 금지시키는 구실로는, 그것이 군인과 민간인들의 정신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달도 안 되어 ‘나찌’들이 당도하였기 때문에, ‘벨기에’ 정부는 그 법을 시행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찌’들이 그 법령을 시행하였다.

1940년 5월 10일에, ‘벨기에’는 다시 한번 전쟁터로 변모하였다. 영국인 ‘파이오니아’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하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지부 사무실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수소문을 해본 후, 그들은 새 지부 감독자가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사의 조언에 따라, 그들은 영국으로 돌아갔고, ‘프랫’ 자매만 남았다. 그 자매는, ‘플랑드르’인 후손으로서 나중에 그의 남편이 된 ‘프랑쑤와 브르조스카’ 형제가 한 것처럼, 지하에서 전파 사업을 계속 수행하였다.

전쟁의 와중에서 증거를 계속하다가, ‘브르조스카’ 자매가 한번은 아무런 의심없이 어느 ‘나찌’ 형사의 상점에 들어가게 되었다. 커다란 ‘히틀러’의 초상화가 눈에 띄었을 때 그 자매는 비로소 자기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나찌’ 당원이 그 자매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이제 돌아서기는 너무 늦었다. 그 자매는 그에게 신약 성서를 한권 제공하면서, 평화와 영원한 생명이 왕 노릇할 새로운 사물의 질서에 대한 희망이 그 책에 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 그럼요. 나는 새로운 사물의 질서를 믿습니다.” 그리고는 ‘히틀러’의 사진을 가리키면서, 그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저분은 일천년 동안 계속될 그 질서를 설립하느라고 바쁘십니다. 물론, 그것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완전히 박멸해야만 할 한 종족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릅니다.”

‘브르조스카’ 자매는, 그가 분명히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라고 대꾸했다. 그러자 그는 “아뇨, 영국인들이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는 영국인들에게 강렬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영국인 후손으로 억양이 비슷한 그 자매를 관찰하다가, 그는 “당신은 국적이 어디요?” 하고 질문하였다.

‘브르조스카’ 자매는 “‘폴란드’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결혼으로 분명히 ‘폴란드’ 국적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러나 영국인들이 모두 멸절되기까지는 성공할 수 없읍니다. 영국인을 붙들기만 하면, 전 인류의 유익을 위하여 기꺼이 내 손으로 직접 처치해 버리겠오.” 우리 자매의 두 무릎이 얼마나 떨렸겠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신약 성서를 한권이 아니라 두권을 받았을 때는, 참으로 안심이 되었다. 한권은 그 사람의 친구에게 줄 것이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어느 때보다도 ‘영국인 종족’의 한 사람을 처치할 기회에 가장 가깝게 있었음을 결코 깨닫지 못했다.

1940년—‘나찌’의 압제 아래서

여호와께서는 “북방 왕”인 ‘나찌’의 잔혹한 압제를 직면하도록 자기 백성을 준비시키고 계셨다. (다니엘 11:40) 그리하여 형제들은 1940년 1월호 「파수대」(불어판)에 실린 중립에 대한 기사를 연구함으로써, 여호와께 대한 전적 헌신이 강화되었다. 이 일은 ‘나찌’ 침공이 있기 바로 전, 아슬아슬한 순간에 있었다. 「파시즘 혹은 자유」란 소책자가 회중들로 막 발송된 때였다.

‘히틀러’의 군대들이 도착하자마자, 형제들은 ‘아마겟돈’ 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들 소책자를 소지하고 있다가 ‘나찌’들에게 발각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일부 형제들은 소책자들을 배포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샤를레르와’ 지방에서 ‘알빈 글로박스’ 형제는 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15일 전에, 20상자의 소책자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그 소책자들을 우편함에 넣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프랑스’로 가는 피난민들에게 배포하였고, 한편 ‘리에지’에서는 거리에서 행인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브뤼셀’의 ‘협회’ 사무실로부터 아무 지시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워즈니아크’ 형제는 사업을 지속시킬 대책을 세웠다. 그는 형제들과 접촉하여 ‘아마겟돈’이 아직 시작된 것이 아님을 확신시켰고, 그들을 설득하여 출판물을 무료로 배포하는 일을 중지하게 하였다. 그는 “출판물을 가지고 있으시오. 필요하게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형제들에게 아직 해야 할 사업을 위해 서적을 감춰두라고 격려하였다.

지부 사무실에서는 출판물을 벽 속에다 넣어 봉해 버리거나, 마루 바닥 밑에 감추었다. 아주 감쪽같이 숨겨두었기 때문에 1940년 10월에 ‘히틀러’의 군인들이 사무실을 수색하러 왔지만,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후에, 출판물을 보다 더 안전한 장소로 옮겼다. 예를 들어, ‘코에 낭’ 부부는 손수레를 사용하여 아주 조심스럽게 여섯 차례나 날라 도중에 들키지 않고 그 출판물 대부분을 운반하였다. ‘미시엘’ 형제는 ‘플로리앵’ 형제가 서책 500부와 소책자 4,000부를 창고로 쓰던 자기 집 1층에 숨기는 것을 도왔는데, 책들은 모두 선반 뒤에 감춰져 눈에 띄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게시타포’는 이 숨겨 놓은 것을 찾아내는 데 성공하였고 ‘플로리앵’ 형제를 1941년 6월에 체포하였다. 그는 그후 ‘나찌’ 집단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서적이 부족한 것을 감안하여, 출판물을 더는 헌금을 받고 전하지 않고, 빌려 주었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출판물로부터 유익을 얻게 할 수 있었다.

‘벨기에’에서는 ‘사단’이 왕국 사업을 상당히 약화시킨 것처럼 보였다. ‘사단’은, 1940년에 34명의 ‘파이오니아’를 포함하여 신기록인 전도인 275명이 왕국을 선포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분명히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지부가 폐쇄되는 것을 이용하여 그리고 그의 전체주의적 군대를 사용하여, ‘사단’은 회중들 가운데 두려움과 공포를 퍼뜨렸다. 이를테면, ‘브뤼셀’에서는 형제들의 50‘퍼센트’ 이상이 무활동이 되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도 오직 적은 수의 핵심적인 전도인들만은 그들의 생활에서 왕국을 계속 첫째 자리에 두고 있었다. 1941년에도 불과 86명의 전도인들만이 여전히 활동하였고, 14개 회중이 더는 기능을 발휘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사단’이 쾌재를 부른 기간은 짧게 되어 있었다.

지하 활동의 재조직

여호와의 영은 형제들을 움직여, 지하에서 전파 사업을 진행시켜 나아가기 위해 재조직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하였다. 순회 감독자였던 ‘워즈니아크’ 형제는, ‘게시타포’의 경고를 받은 후 감시를 받고 있다고 느껴 솔선하지 않는 지부 감독자에게 그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가 계획했던 감독자들의 비밀 회의가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워즈니아크’ 형제는 ‘네덜란드’에서의 지하 사업을 감독하고 있는 형제에게 ‘벨기에’에서도 그 일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때, ‘네덜란드’에서 사업을 감독하고 있던 사람은 ‘윙클러’ 형제였다. 그는 지하 사업에 경험이 풍부한 ‘하르츠탕’ 형제를 1941년 7월에 ‘벨기에’로 가서 사업을 재조직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도록 임명하였다.

「파수대」지를 입수하고 복사하는 일

하지만, ‘벨기에’의 형제들은 영적 양식을 공급받는 마련을 하는 일을 ‘하르츠탕’ 형제가 도착하기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먼저, 번역하여 형제들에게 공급해 줄 매호의 「파수대」를 입수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한 형제가 「파수대」 한부를 입수하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네덜란드’로 가겠다고 자원하였다. 그는 자전거의 안장을 떼어내고 「파수대」를 말아서 그 안의 공간에 넣고서는, 안장을 다시 제자리에 덮은 다음 국경을 넘었다.

일단 원고를 입수하면, ‘워즈니아크’ 형제는 그것을 ‘폴란드’어, 독일어 및 불어로 번역하게 했다. 충분한 부수의 「파수대」지를 생산하기 위해, 등사 장비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심지어 타자기도 귀했다. 타자기는 정말 값진 것이었다. ‘안트베르프’에 있는 영적으로 약한 한 형제가 한때 얼마간 편지와 사업의 재조직에 관한 기타 지시들을 타자하는 데 썼던 타자기를 한대 갖고 있었다. 이 형제가 “악한 종” 반열에서 파생된 한 분파와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을 피할 필요는 있었지만, 타자기가 필요하였다.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

‘플로리앵’ 형제와 ‘워즈니아크’ 형제가 이 형제한테 가서 그 타자기를 사겠다고 제의하였지만, 그는 거절하였다. 그가 그것을 팔도록 어떻게 설득할 수 있었는가?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을 위해 온 영혼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그분의 충실한 종들이 갖는 담대함과 용감함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플로리앵’ 형제는, 그 타자기는 이미 지하 문서들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고, 또 각 타자기마다 활자가 독특하기 때문에, 그러한 문서들을 쓰는 데 사용된 타자기를 ‘게시타포’가 식별해 내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항상 위험한 입장에 있을 것이었다. 이제 그는 그 타자기를 사겠다는 형제들의 제의를 수락하였고, 그것을 처치하게 되어 기뻐하였다!

지하에서 서적을 생산하는 일

‘림부르그’의 탄광 지역에 외국인 형제들의 작은 집단이 하나 있었다. 그 집단은 인쇄물을 지하에서 생산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골릭’ 가족과 ‘파즈크’ 가족이 그들의 집을 그러한 목적에 사용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파수대」지를 독일어, ‘네덜란드’어, ‘이탈리아’어, ‘폴란드’어, 그리고 ‘슬로베니아’어로 번역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은 낡은 타자기를 사용하여 ‘카아본’지로 복사하였다. 타자기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파즈크’ 가족은 창문에다 두꺼운 담요를 쳤고, ‘골릭’ 가족은 이중 창문을 만들었다. 형제들이 서적을 가지러 자주 왔기 때문에, 그렇게 해 놓아도 거기서 어떤 지하 활동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이웃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벨기에’ 사람들은 지하 활동은 모두 그들이 증오하는 ‘나찌’ 정권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밀고하지 않았다. 이들 형제들은 ‘슬로베니아’어로 「어린이들」 책을 인쇄하기까지 하였다.

지하 활동 본부

지하에서 서적을 생산하는 가장 중요한 중심지들 중 하나는 ‘리에지’에서 가까운 ‘우그레’에 있는 ‘도이앙’ 가족의 가정집에 있었다. 그곳이 지하 ‘벧엘’이었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장비로는 타자기 2대와 한대의 복사기가 구비되어 있었다. 그 장소에서는 활동이 활발했다. ‘하르츠탕’ 부부는 대부분의 시간을 거기서 일하고 생활하면서 보냈다.

독일 국적을 가진 ‘프리츠 슈나이더’ 형제도 있었는데, 그는 인쇄를 하였다. 가끔 ‘베르너 슈츠’ 형제도 거기 있었는데, 그는 독일어를 불어로 혹은 ‘네덜란드’어를 불어로 번역하였다. 이들 두 형제는 가까운 곳에 기거하였다. 「통보」(지금의 「우리의 왕국 봉사」)와 심지어 「어린이들」 책이 이곳 ‘도이앙’ 가정집에서 ‘폴란드’어로 인쇄되기도 하였다.

‘도이앙’ 가족과 관련하여 언급할 가치가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아버지는 진리 안에 있지 않았고 한 아들은 전쟁 포로였다는 것이다. 다른 두 아들은 강제 노동자로 독일로 이송되도록 지명되었다. 만약 그들이 이송되기를 거절하고 숨어 버렸다면, 그 집은 계속 독일 군인들의 감시를 받았을 것이며 더는 성서 서적을 생산하는 지하 본부로 사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 진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단지 한 사람뿐이었는데도, 그 두 아들은 자기 집이 계속 그 사업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이송되어 가겠다고 하였다.

그 집에는 사람들이 붐볐는데도, 그러한 활발한 활동이 어찌 이웃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진행될 수 있었는지 궁금하게 여길 사람이 있을 것이다. 때때로 형제들은 옷가방이나 꾸러미를 4개씩이나 들고 들어오거나 나갔다. 하지만, ‘림부르그’의 다른 중심지에서와 같이, 이웃 사람들은 완전 침묵을 지켰다. 그 이웃 사람들 역시 그 활동을 ‘나찌’ 침략자들에 대한 한 가지 저항으로 생각한 것이다.

반대자들을 따돌리는 일

추적하지 못하게 적을 따돌리기 위하여 ‘하르츠탕’ 형제는 때때로 여기저기를 돌아 다니면서 형제들을 방문하거나, 심지어 ‘프랑스’까지 가기도 하였다. 사실인즉 한때, ‘하르츠탕’ 형제는 ‘스위스’를 거쳐 ‘프랑스’에 도착한 영문판 「파수대」지를 가지러 2주일마다 몰래 ‘프랑스’ 국경을 넘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자기 남편이 못 돌아오게 될는지도 알 수 없는 ‘하르츠탕’ 자매에게 이 때는 시련의 시기였다.

세속 인쇄업자들이 협력하다

때때로 ‘하르츠탕’ 형제는 ‘브뤼셀’에 있는 ‘이스타’ 형제의 집에 머물렀다. 형제들에게 영적 양식을 공급해 주는 데 이 형제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는 ‘브뤼셀’의 인쇄업자인 ‘에라스므’ 인쇄소의 ‘드 프랭스’ 씨와 접촉을 하게 되었고, ‘나찌’ 점령이 끝날 무렵 이 사람은 우리를 위해 지하 인쇄를 해주겠다고 하였다. 「파수대」지가 인쇄되었을 뿐 아니라, 「어린이들」 책도 6,000부나 인쇄되었다.

‘플랑드르’ 구역에서의 전파 사업이 ‘왈룬’ 구역에서 보다 덜 발전하였기 때문에, ‘네덜란드’어판 서적은 드물었다. ‘워즈니아크’ 형제도 「택함」 소책자 10,000부를 ‘샤를레르와’의 한 인쇄업자를 통해 ‘네덜란드’어로 인쇄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그 인쇄업자가 그 일을 해준 것은 ‘증인’들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독일인들을 심히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한 작업

비밀리에 ‘네덜란드’에서 ‘벨기에’까지 선박편으로 출판물을 보내기까지 했다. ‘네덜란드’의 한 형제가 ‘리히트드라게르’라고 불리는 배를 한척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서적을 자기 배에 숨겼다가 ‘림부르그’의 ‘브리’와 ‘코르트리직’ 지역으로 가서 내려놓았다. 형제들이 자전거를 타고 서적을 내려 놓는 곳으로 가서 서적 상자들을 자기들의 집으로 가져갔다.

물론, 이 모든 일을 하는 데 커다란 위험이 따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어린이들」 책 한 상자를 운반해 가다가, 암시장의 밀수꾼들을 추적하고 있는 독일인 순찰병에게 제지를 당했다. 상자의 내용물을 보더니, 그 군인은 “아, 어린 아이들 것이로군요!” 하고 소리 치고는 그 형제를 통과시켰다.

‘돌피진’이란 또 다른 배가 또한 사용되었는데, 이 배는 출판물을 싣고서 ‘벨기에’—‘네덜란드’ 국경선을 다섯 차례나 넘었다.

서적을 수송하는 일

지하에서 서적을 출판하는 일이 문제를 야기하였지만, 그 서적을 그 나라 방방곡곡으로 가져가는 일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였다. 철도나 우편은 모두 군인들의 통제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런 것을 이용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우기, ‘가솔린’이 귀했기 때문에 형제들은 자동차를 이용할 수가 없었다. 자전거가 있었지만, 심지어 그 당시에는 ‘타이어’도 문제가 되었다. ‘타이어’를 전혀 구할 수가 없었다. ‘림부르그’의 형제들은 낡은 자동차 ‘타이어’를 가지고, 자전거 ‘타이어’를 만드는 전문가들이 되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유연성이 그리 좋지가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서적을 운반하던 형제들은 짐을 너무 무겁게 실었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게 가는 것이 어려웠다. 더우기, 그들은 암시장 밀수꾼들로 오인될 위험까지 무릅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용감하게 수행하였다. 특히, ‘워즈니아크’, ‘슈란츠’, ‘플로리앵’ 그리고 ‘슈츠’ 형제가 이 봉사에 사용되었다.

여호와의 보호

어느 날 ‘메셀린’ 부근에서, ‘슈란츠’ 형제는 자전거에 서적을 너무 무겁게 실었기 때문에 그만 균형을 잃고 한 독일 군인 바로 앞에다 그것들을 쏟아 놓고 말았다. 그 군인은 형제를 도와 일어서게 해주었고, 서적을 자전거에 실어 주기까지 하였으며, 그리고는 조심해서 잘 가라고 인사까지 하였다. 형제들에게 출판물을 공급해 주기 위해, 이들 형제들은 흔히 무겁게 짐을 싣고 잘 먹지도 못하면서 110 내지 160 ‘킬로미터’를, 여행하였다.

한번은 ‘슈츠’ 형제가 ‘샤를레르와’로 서적을 운반하는 여행을 하였는데,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여러 날 후, ‘E. 외즈 시니어’ 형제와 ‘슈란츠’ 형제는 걱정이 되어 그를 찾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들은 ‘리에지’의 한 진료소에서 그를 찾아냈다. 그는 ‘발 생 랑베르’ 부근에서의 폭격에 부상을 당한 것이었다. 그는 그런 경험으로 영향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그리 잘 먹지 못했는데도 그렇지가 않았다! 그에게 걱정이 되는 단 한 가지는, 서적을 실은 그의 자전거가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형제들은 그것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한 ‘가톨릭’ 기관에서 그 자전거와 그 귀중한 짐을 찾아 냈다. 수녀들이 모든 것을 잘 간수하고 있었고, 그들은 그 짐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의심하지 않고 그것을 모두 돌려 주었다!

때때로 날씨가 너무 사나와서, 기차로 여행할 필요가 있었다. ‘휄트장다르메’(독일 헌병)와 ‘게시타포’의 검문을 받을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 어느 날 ‘슈츠’ 형제는 기차 안에서 검문을 받게 되었다. 그는 무거운 옷가방 2개를 운반하고 있었다. 한쪽 가방에는 서적이 가득 들어 있었고, 나머지 하나에는 탄광에서 일하는 형제들이 그에게 준 석탄이 가득 들어 있었다. 군인들이 석탄이 들어 있는 옷가방을 조사하기로 하였을 때, 이 형제는 얼마나 안심이 되었겠는가! 내용물을 보자 그들은 웃음을 터뜨리고는 가버렸다. 또 한번은 ‘게시타포’ 형사가 그에게 서적이 든 가방을 열어보게 하였다. 내용물을 흘끗 본 후, “‘아담’과 ‘하와’”란 표현을 보고서, 그 ‘게시타포’는 “그 쓰레기는 가지고 가시오!” 하고 소리쳤다. 그는 그렇게 했다. ‘슈츠’ 형제는 국적이 ‘스위스’였기 때문에 독일인들에게 의심을 덜 받는 것 같았다.

자매들 역시 형제들보다는 의심을 덜 받는 것 같았다. 이러한 이유로, ‘마리 스메’ 자매는 항상 무거운 짐을 싣고 날씨에 따라 자전거나 기차로 ‘리에지’와 ‘나뮈르’ 사이의 연락 책임자로 봉사하였다. 어느 날 이 자매는 무거운 옷 가방들을 들고, 목에는 자전거 ‘타이어’를 걸치고서 기차역으로 갔는데—기차가 오지 않았다. 2시간을 기다린 후에 독일 군용 열차가 도착한다는 발표가 있었고, 민간인들도 타도록 허락되었다. 이렇게하여, 이 자매는 금지된 지하 서적을 가지고 군용 열차로 여행하여 아무런 사고 없이 새벽 5시에 ‘나뮈르’에 있는 ‘훼브리에르’ 형제 집에 도착하였다.

두려움을 모르는 젊은 형제들

서적을 운반하는 데 젊은 형제들도 사용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담대함을 나타냈다. ‘에르네스 외즈 쥬니어’ 형제는 16세 정도의 나이로 ‘리에지’에서 ‘베르비에르’까지 기차 여행을 하였다. 그는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출발한 지 몇분 후, ‘휄트장다르메’들이 기차에 올라 탔다. 그들은 여섯 명이었다. 그들은 ‘손 들어!’ 하고 소리쳤다. 모두는 시키는 대로 했다. 그들은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첫 번째 헌병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들은 나에게 일어서라고 명령하였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밀고했다고 생각했다. 그들 중 한 헌병이 뒤에서 권총을 내 등에 대고 있었고, 또 한 헌병은 내 앞에 그리고 다른 한 헌병은 내 옆에 섰다. 그들은 나에게 신분증을 제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내가 호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려고 움직이자, 그들 중 하나가 내 손을 치고는 자기가 지갑을 꺼냈다. 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 수색을 하였다. 그들이 떠날 때, 나는 그들이 무언가 잊고 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맞은 편에 앉아 있는 한 연로한 남자가 헌병이 내 짐을 조사할 것을 잊고 갔다고 말해 주었다. 그제서야 나는 짐이 곁에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들이 나의 몸 수색을 하고 있는 동안 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나는 초조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남방 왕과 북방 왕에 관한 ‘다니엘’의 예언을 다룬 「파수대」지 복사판 몇부와 「파시즘 혹은 자유」란 제목의 소책자도 몇부 운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연로한 남자는, 짐을 모조리 조사하던 세명은 나의 신분증을 조사하고 있던 세명이 이미 그렇게 한 줄로 생각하고 내 짐을 조사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그것은 여호와의 보호였다고 생각하였다.”

지부 사무실과의 접촉

출판물들이 어떻게 회중에 공급되었는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중심지 중 하나인 ‘훼브리에르’ 형제의 집에서 그런 일이 어떻게 행해졌는지 알아보자. 그는 번호 외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는 작은 꾸러미에 포장된 서적을 받았다. 그 꾸러미를 받을 회중은 그것을 가져갈 사람을 보내게 되어 있었는데, 이 일은 종종 밤에 행하여졌다. 심부름을 온 사람은 단지 “22번 소포를 주시오”라고 말하였다. 일단 꾸러미를 소지하게 되면, 그 심부름꾼은 다른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급히 떠났다.

야외 봉사 보고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수집되었다. 각 회중은 편지에 의해 확인되었고, 한편 전도인 개개인에게는 번호가 있었다. 회중은 여덟 내지 열명으로 구성된 연구 집단들로 세분되었고, 집단 성원들은 그 연구 집단 책임자의 얼굴만 알았고 흔히 그의 이름이나 주소조차도 몰랐다. 이 형제는 보고들을 모아서, 연구 집단의 책임자들에게만 알려진 그 회중의 주임 감독자에게 전해 주었다.

일단 보고 집계가 끝나면, 그 다음 일은 회중들과 지하 ‘벧엘’ 사이의 연락 책임자인 순회 감독자가 하였다. 순회 감독자는, 회중이 필요로 하는 「파수대」지와 「통보」(지금의 「우리의 왕국 봉사」)의 부수 기록과 보고들을 수집하였다. 그는 봉사 보고를 암호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수색을 받는다 하더라도 외부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점령중의 집회들

각자는 상호 격려를 위해 함께 모이는 일의 중요성을 이해하였다. 형제들은 개인 집에서 작은 집단으로 모였다. 여러 가지 면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 형제들은 함께 도착하지 않아야 했고, 도착과 출발은 주의를 끌지 않도록 간격을 두고 하게 하였다. (2) 매주 집회 장소를 바꾸었으며, 가능하다면 요일과 시간도 바꾸었다. 결과적으로 다음 집회가 어디서 열릴 것인지 알기 위하여, 매 집회에 참석할 필요가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아무도 어떤 사람을 처음부터 집회에 동반할 수 없었다. 먼저 그 사람의 성실성을 시험해 보아야 하였다. (3) 위험성이 클 때는, 집회를 가족 모임인 것처럼 보이게 열었다. 예를 들어, 가족의 식사를 위한 식탁을 차렸다. 만약, 예기치 않던 일이 발생할 경우에는, 연구 재료를 보이지 않게 치우고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면 되었다. 이 마련은 10명이 모인 것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게 해주었다.

연구 재료는 시기에 적절한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예언적인 중요성을 지닌 성서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다. 그러한 것들 가운데는 ‘예후’, ‘바락’, ‘드보라’, ‘입다’ 및 ‘다니엘’에 관한 이야기를 들 수 있다. 때때로 ‘미가’의 예언에 대한 것과 같은 이러한 연구들은 여러 달 동안 계속되었다. 이러한 풍부한 영적 양식은, 이들 역사적 및 예언적 이야기들로 예언된 바와 같이 형제들을 멸절시키려는 정치-종교적 요소들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형제들을 준비시키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게시타포’가 ‘워즈니아크’ 형제를 찾다

1940년이 되기 오래 전부터, ‘나찌’ 정권은 ‘여호와의 증인’들을 없애기 위한 노력으로 ‘증인’들에 대한 맹렬한 반대를 해왔었다. 그러므로 이들 죽음의 사자들이 ‘벨기에’에 들어오자마자, 왜 ‘증인’들의 사업을 파괴하기 시작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기는 쉽다. 그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대단히 활동적인 사람들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그들이 특히 제거하고자 한 사람은 그 당시 ‘안트베르프’에서 ‘슈란츠’ 형제와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던 ‘앙드레 워즈니아크’ 형제였다.

어느 날 ‘워즈니아크’ 형제가 멀리 회중들을 방문하여, 강화시키고 조직하도록 돕고 있는 동안, ‘게시타포’가 그의 방을 수색하러 들이닥쳤다. ‘슈란츠’ 형제는 연행되어 가서 심문을 받았다. 그는 심문을 받는 동안 자기의 짝을 배반하지 않으려고 극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를 테면 심문을 받던 중, 그에게 형제들의 명단이 제시되었고 그들을 아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몇 사람을 안다고 대답하여, 이미 사망하였거나 이 나라를 떠난 사람들의 이름을 댔다. 그의 친구는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서,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는 자기 친척들을 방문하러 갔읍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일에 대해선 관심이 없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친구들 사이에 문제들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게시타포’ 형사는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점에 동의하였다. 이 형제는 40일을 감옥에서 보낸 후 석방되었다. 형사들은 아마, 그가 결국 그들을 ‘워즈니아크’ 형제한테로 인도해 주기를 바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따돌리기 위해, ‘슈란츠’ 형제는 그의 구역을 바꿔서 ‘아르덴’으로 가버렸다.

‘게시타포’의 덫에 걸리다

그후 얼마 안 되어, ‘워즈니아크’ 형제는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때는 1941년 6월 초였다. ‘샤를레르와’ 부근에 살고 있는 형제들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나는 자전거를 타고 거기로 가서 그날 밤을 묵으려고 ‘쿠이예’에 있는 ‘앙쿠스’ 형제 집에 도착하였다. 위험이 발생할 경우에는,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거기서 지붕으로 나가 한 집씩 건너 피신하기로 작전을 짜 놓았다.

“이튿날 아침 7시에, ‘문 열어!’ 하고 외치는 소리에 나는 잠을 깼다. 창밖으로 내다보니, 사복 차림을 한 사람 셋이 보였다. ‘게시타포’였다! 옷은 반 정도만 입은 채 바지와 웃옷을 팔에다 안고서, 황급히 다락방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최선을 다해 지붕과 다락방의 위장 천정 사이에 몸을 숨겼다. ‘게시타포’ 형사들이 곧 다락방으로 올라와, 아슬아슬한 순간이 되었다. 아무도 없으니까, 그들은 아랫층으로 내려가서, ‘앙쿠스’ 형제에게 내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들은 그를 때리기 시작하였다. 나의 심장이 너무 심하게 뛰어서, 그 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해달라고, 나는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그들이 ‘앙쿠스’ 형제를 앞세우고 지하실로부터 다락방까지, 집안을 온통 다 뒤졌지만, 나를 찾지 못한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실이었다! 그들은 결국 나의 자전거와 가방을 발견하고서는, ‘앙쿠스’ 형제를 무참하게 구타하였다. 하지만, 그는 계속 강하게 버텼고 내가 있는 곳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자, 두명의 형사가 그 형제를 감옥으로 데리고 갔다.

“다른 한 형사는 집에 남아서, 연발 권총을 장전하고 ‘앙쿠스’ 자매를 감시하였다. 두 시간마다 경비를 교대하였다. 나는 기와 밑에 있었다. 덥고 배가 고팠으며, 특히 목이 말랐다. 정오쯤 되어, 나직한 목소리로 ‘이제 내려오세요. 그 자들이 갔어요!’ 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랫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나의 은신처를 막 떠나려고 하는데, 주위가 너무나 조용하여, 그대로 있기로 결정하였다. 나중에 자매는, 그것은 나를 속여 모습을 들어내게 하려는 형사의 목소리였다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드디어 탈출하다

어두움이 깔렸고, ‘워즈니아크’ 형제는 극도로 목이 말랐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또한 매우 지쳐 있었다. 그리고 깊은 잠이 들면 흔히 큰 소리로 코를 골기 때문에, 잠이 들까봐 걱정이 되었다. 불편한 위치에서, 잠이 들어 코를 골게 되면 발각되었을 것이다. 깨어 있기 위하여, 나는 ‘핀’으로 피가 나도록 몸을 찔렀다. 그러나 결국 나는 기력이 다한 것을 느꼈고, 모든 것이 다 틀렸다고 생각하였다.

“자정 무렵, 그 자매는 취침하러 가도록 허락되었다. 그 자매는 간신히 나에게 빵과 물을 좀 가져다 주었다. 나는 탈출 계획을 그 자매에게 말했다. 그 자매의 침실 창문을 통해, 나는 평평한 지붕으로 올라가서, 배수관을 타고 내려왔다. 마침내, 약 3.6‘미터’ 높이에서 정원으로 뛰어내렸다. 순찰병에게 제지를 당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나는 동이 틀 때까지 숨어서 기다렸다.

“아침이 되어, 나는 한 여자가 정원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자, 그의 얼굴이 온통 두려움에 질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나에게 약간의 물과 비누와 면도칼을 가져다 주었다. 맨발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슬리퍼’를 한 켤레 사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후, 한 관심자가 와서, 그 ‘게시타포’는 결국 그 날 아침 7시에 나의 자전거를 가지고 떠났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나는 내 것 대신 ‘앙쿠스’ 형제의 자전거를 타고, 총알같이 ‘브르조스카’ 형제의 집으로 가서, 거기서 책 가방과 성서를 한권 받았다. 하루 밤낮을 잔 후에, 나는 다음 회중으로 갔다.”

갑작스런 계획의 변경

‘워즈니아크’ 형제는 거기 도착하여, 방문중에 머물 ‘알빈 글로박스’ 형제의 집으로 갔다. ‘워즈니아크’ 형제는 이와 같이 말했다. “그와 함께 한 주일을 머물도록 계획하였지만, 나는 그날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새 엎치락뒤치락 하였다.” 계획을 변경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이와 같이 설명한다. “아침 식사 때에, 나는 그 형제에게 그 날 다음 방문 회중인 ‘카르니에르’ 회중으로 떠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밀가루 빵이며 ‘버터’ 등, 당시로서는 아주 구미를 돋우는 좋은 음식을 들먹이면서, 나의 생각을 바꾸게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 것도 나의 생각을 바꾸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카르니에르’로 떠났다.

“그 다음 날 나는 ‘게시타포’가 바로 그 날 오전에 ‘글로박스’ 형제 집으로 와서, 최종 목적지인 집단 수용소로 보내기 위해 그를 감옥으로 데리고 갔다는 것을 알고서 소름이 끼쳤다! 좋은 빵과 ‘버터’에 유혹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르겠다! 한 가지는 분명하였다. ‘게시타포’ 형사들이 내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을 따돌리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였다.

“‘안트베르프’로 돌아왔지만, 나는 거기서 우리 방이 봉해져 있고, 진리에 관심을 가졌던 집주인의 아내는 ‘게시타포’에게 연행되어 갔으며 또 집주인은 내가 도착하면 즉시 ‘게시타포’에 고발하게 되어 있는 상황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도 사태는 악화되고 있었다. 나는 ‘안트베르프’를 당장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회중들을 방문하기 위하여, ‘림부르그’로 떠났다. 내가 머물던 ‘바테르쉐이’에서 출발한 지 2시간 후에, ‘게시타포’가 집을 부수고 들어와 샅샅이 수색하였다.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악귀들의 인도를 받아 나를 체포하기 위해 나선 것 같았다.”

‘플로리앵’ 형제가 덫에 걸리다

‘워즈니아크’ 형제가 떠난 바로 그 날 ‘앙쿠스’ 형제가 체포된 후에, 연락 책임자인 ‘플로리앵’ 형제가 자전거에 소책자 400부와 서책 24부를 싣고 ‘앙쿠스’ 형제의 집에 도착하였다. 그 날은 1941년 6월 7일이었다. 자기 남편이 방금 체포되어 갔기 때문에, ‘앙쿠스’ 자매는 그 형제에게 가능한 빨리 떠나라고 간청하였다. 그는 다른 곳에 남겨 놓기 위하여 ‘워즈니아크’ 형제의 신발을 가지고 떠났다. 그는 계속 ‘글로박스’ 형제의 집으로 가야했지만, 그러한 사태를 감안하여, 그 날은 지쳐서 ‘브뤼셀’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게시타포’가 집안을 수색하여 숨겨둔 출판물들, 즉 20권의 성서, 500부의 서책 그리고 4,000부의 소책자를 몽땅 가져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아내와 장인 그리고 장모는 온종일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가 덫에 걸린 것이었다. 그 다음 날 새벽 5시에, ‘게시타포’가 나타나 그에게 수갑을 채워 데리고 갔다. 그는 감옥으로 가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의 집단 수용소에 가 있었다. 1년 후에는, 그의 아내도 두 어린 자녀를 부모한테 맡겨 두고,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더욱더 격해진 ‘게시타포’ 활동

독일에서 많은 ‘증인’들을 체포한 바 있는 어느 ‘게시타포’ 대장이 ‘벨기에’에 와서 근무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때였다. 이러한 체포가 행해지고 ‘워즈니아크’ 형제에 대한 수배가 강화된 것도, 바로 그가 ‘브뤼셀’에 도착한 후였다.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는 ‘미디’, ‘쇼카에르트’, ‘미시엘’, ‘코에낭’과 ‘마르틴’(이전 지부 감독자) 형제들 그리고 ‘미시엘’과 ‘코에낭’ 자매들이 끼여 있었다.

‘워즈니아크’ 형제를 자기 집에 숨겨 두었다는 이유로 ‘게시타포’에게 체포된 후, ‘앙쿠스’ 형제는 형제들의 이름을 밝히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히틀러’의 형사들에게 구타당하여 의식을 잃고 말았다. 1941년 7월 6일에 그는 ‘브뤼셀’의 ‘생 길레’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고문을 인내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앙쿠스’ 형제는 형제들의 이름을 밝히기를 거절한 것이다. 그는 그후에 ‘루바인 센트럴’ 감옥으로 옮겨졌고, 또 거기서 ‘나찌’들은 그를 그들의 죽음의 수용소로 데리고 갔다. 전쟁이 끝난 후 집단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그는 여러 해 동안 회중 감독자로 봉사하였다.

위험에도 불구하고 단행된 지부의 재조직

일련의 체포가 있은 지 한달 후에, ‘하르츠탕’ 형제가 전파 사업을 재조직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네덜란드’로부터 도착하였다. ‘안트베르프’의 한 자매 집에서, 그는 세명의 순회 감독자 그리고 연락 책임을 맡고 있는 두 형제와 비밀 회의를 가졌다. 그 자매는 혼자 일층에 살고 있었다. 이 때 이들 여섯 형제들은 ‘게시타포’에게 체포될 위기 일발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어떻게 그러했는가?

회의가 진행중인데, ‘벨’이 울렸다. 문간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였는가? 세명의 ‘게시타포’ 형사였다. 그들은 이층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 어느 ‘유대’인과 그의 아들에 대해 질문하였다. 자매는 그 ‘유대’인들은 전쟁이 터지자 피신하였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한명의 형사가 이제 문간에 서서 감시하는 동안, 다른 두명은 이층과 다락방을 구석구석 다 수색하였다.

그러는 동안, 형제들은 적들의 눈을 가려달라고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만약 그들이 발각되었더라면, 그것은 ‘벨기에’의 주요 감독자들이 일격에 몽땅 체포되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게시타포’는 떠났다. 형제들도 한 사람씩 그 집을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는 그 집으로 가지 않았다. 두 주일 후에, ‘게시타포’가 예기치 않게 다시 그 집을 찾아왔으며, 이번에 그들은 온 집을 샅샅이 수색하였다.

‘하르츠탕’ 형제를 체포하기 위한 적들의 노력

‘벨기에’에 머물기 위해 처음 올 때, ‘하르츠탕’ 형제는 혼자 왔지만, 육개월 후에 그의 아내도 그와 합세하였다. 그의 아내도 같은 방법, 즉 ‘벨기에’와 ‘네덜란드’ 국경선의 사람들이 다녀 다져지지 않은 시골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왔다. 남편이 특별히 위험한 여행을 할 때를 제외하고, 그는 전시에 내내 자기 남편 곁에 있었다.

순식간에, ‘게시타포’는 ‘하르츠탕’ 형제가 ‘벨기에’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서, 그를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적들은 압수한 편지를 통해, 이 형제와 그의 아내의 대체적인 행방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 부부의 커다란 사진을 갖고 다니면서, ‘게시타포’는 마치 위험한 범인을 체포할 때 애쓰듯이 구석구석을 다 찾아 나섰다. 그러나 이 형제와 그의 아내는 항상 그들을 위해 쳐 놓은 덫을 피하였으며, 때로는 아주 아슬아슬하게 피하기도 하였다. 그렇다. 어쨌든 그들은 안전하게 보호되었다.

흥미롭게도, ‘증인’들에 대한 심한 박해를 시작한 것으로 앞에서 언급되었고 또 ‘하르츠탕’ 형제를 덫에 걸리게 하려고 단단히 결심한 그 ‘게시타포’ 대장이 어느 날 자기 사무실 창문 곁에 앉아 있다가, 비행기 ‘엔진’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것이 독일 비행기라고 생각한 그는 조심하지 않았다. 갑자기 비행기의 기관총이 발포를 시작하여, 그 ‘게시타포’ 대장은 총탄에 맞아 죽었다. 그 비행기는 ‘벨기에’인이 조종한 영국기였다.

적들의 눈을 멀게 하다

숱한 경험은, 여호와의 천사들이 적의 눈을 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미셀릭’과 ‘골릭’ 자매는 ‘네덜란드’에서의 사업을 책임맡고 있는 형제에게 보내는 편지를 ‘림부르그’에서 ‘네덜란드’까지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이 일은 비밀리에 행해져야 하였다. 그 편지를 ‘골릭’ 자매의 손가방에 넣고, 그들은 시골 길을 이용하여 ‘네덜란드’로 떠났다. 그들은 세관 직원들에게 저지를 당하였고 몸 수색을 받았다. 그들은 먼저 ‘미셀릭’ 자매의 몸을 수색하였고, 무엇보다도 그의 손가방을 들여다 보았다. 우연히도 ‘골릭’ 자매와 ‘미셀릭’ 자매의 손가방은 모양이 똑같았다. ‘골릭’ 자매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 직원은 그 자매의 손가방을 집어들었다. 즉시 그것을 그에게 돌려 주면서, 그는 “아, 이건 이미 보았읍니다” 하고 말했다. 이렇게 하여, 이 자매는 귀중한 편지가 들어 있는 그의 손가방을 돌려 받았다!

또 다른 경우, ‘나뮈르’에서 ‘훼브리에르’ 형제는 ‘슈츠’ 형제가 무거운 짐을 역으로 운반하는 일을 돕고 있었다. ‘몽타뉴-생트-바르브’에서, 그들은 독일 검문소의 제지를 당하였다. 돌아서기는 불가능하였다. ‘슈츠’ 형제가 ‘훼브리에르’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일행이 아닌 것처럼 하시오. 아마 둘 중 한 사람은 피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훼브리에르’ 형제는 뒤에 처졌다. ‘슈츠’ 형제는 아마 ‘스위스’ 여권을 가졌기 때문에, 무사히 검문소를 통과하였다. 다음에는 ‘훼브리에르’ 형제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신분증을 제시하였다. 그는, 점령군이 철도 직원에게 교부해 주는 ‘아우스바이스’(일몰 후의 자유 통행증)를 소지하고 있었다. 검문병은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 형제에게 ‘다니엘’의 예언에 나오는 ‘나찌’ 북방 왕과 민주주의 남방 왕 사이의 전쟁에 관한 「파수대」 연구 기사가 든 그의 짐을 풀어보라고 하였다. ‘느헤미야’가 한 것처럼, 그 형제는 묵묵히 기도하였다. (느헤미야 2:4) 그는 짐을 풀기 위해 몸을 숙였다. 바로 그 순간, ‘트럭’이 한대 도착하였다. 그 군인은 그 형제를 잊고서, 그 ‘트럭’의 통행을 막기 위해 황급히 가버렸다. 이렇게 하여, 그 형제는 조용히 빠져 나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그레’에서, ‘아르망 에브랑’ 형제는 ‘외즈’ 형제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의 호주머니에는 가명으로 된 세개의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 신분증 중 하나는 지하 활동을 하고 있는 ‘하르츠탕’ 형제를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순회 감독자 ‘슈란츠’ 형제를 위한 것이었다. ‘에브랑’ 형제는 ‘뮈즈’ 강을 건너는 다리에서 순찰병의 제지를 당하였다. 거기서 그는 심지어 양말까지 철저한 몸 수색을 당하였다.

그의 외투의 안 호주머니는 물론, 웃옷의 호주머니도 모두 검색을 당하였다. 신분증들이 들어 있는 쪽을 만질 때마다, 그 군인은 실수로 웃옷과 외투를 한꺼번에 잡았고, 그의 손을 웃옷의 안 호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그 군인이 이 형제의 외투 바깥을 조사할 때, 이 형제는 매우 분명히 그 문서들을 감촉할 수 있었다. 그 군인이 같은 동작을 여러 번 되풀이 하였지만, 매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그 호주머니를 잊어버렸다. 그 세 신분증에는, 이름은 물론 가명으로 되어 있지만 세 형제의 사진이 붙어 있었고, 또 이 형제는 자기가 그러한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략도 사용하다

‘게이’ 형제는 적들에게 선수를 치기 위하여 어떤 전략을 사용했는지를 설명한다. 몇명의 관심가진 사람들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밤에 독일 순찰병에게 제지를 당했다. 한 군인이 총을 형제의 등에 들이대고 있는 동안, 다른 한 군인은 그의 얼굴에다 ‘플래시’를 비췄다. 그들은 신분증을 내 놓으라고 요구하였다. 신분증을 꺼내기 위해, 그는 서류 가방을 두 무릎 사이에 끼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그의 몸을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을 수월하게 해주기 위해 그러나 또한 전략으로써, 그는 두 팔을 높이 들고서 한손에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 군인은 그의 의복은 세심하게 조사했지만, 서적이 든 그의 서류 가방을 들여다 보는 것은 잊어버렸던 것이다!

천사의 날개 아래

때때로 형제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건들이 조종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어느 날 ‘하르츠탕’ 형제는 전차로 ‘우그레’에 있는 그의 비밀 숙소로 돌아오고 있었다. 보통 그는 전차를 종점까지 타고 다녔다. 갑자기 그는, 종종 방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다리 운동 좀 할겸 종점까지 가기 전에 내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그는 모두가 새파랗게 질려 있는 것을 보았다. 독일 군인들이 종점에서 삼엄한 검문 검색을 조직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족은 이 형제에게 최악의 상태가 발생할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부지불식 간에, 그는 그 덫을 피하게 된 것이다.

그의 숙소에서는, 비밀 인쇄 자재는 물론 출판물이 인쇄되고 있었다. 같은 뜰 안에는 한 이웃이 살고 있었다. 그는 연로하여 귀가 먹었으며 8시나 9시 전에는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새벽 4시경에 일어났다.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뭏든, 그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뜰로 나갔다. 그 시간에 독일 순찰대가 연발 권총을 휘두르면서 찾아왔다.

‘코커릴’ 공장의 직공들이 갑작스럽게 파업을 한 후, 그들이 기습을 한 것이다. 그 파업은 500명의 직공을 해고시킨 일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독일인들은 그 파업의 주동자들 중 한 사람의 주소를 갖고서, 그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그 노인에게 그가 사는 곳을 물었다. 믿어지지 않을지 몰라도, 이 귀먹은 노인은 군인들이 질문하는 것을 이해하고서 그 다음 길의 추적을 받고 있는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을 가리켜 주었다. 만일에 그 노인이 그 특이한 시간에 그 장소에 있지 않았더라면, 군인들은 뜰 안쪽으로 더 들어와서 평소에 하듯이 문을 마구 두들겼을 것이다. 그 시간에 안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었는지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며, 군인들은 수색을 감행하여 이 비밀 “성업(盛業)”을 알아 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지켜보고 계셨다.

출판물을 인쇄하는 데 사용된 장소는 ‘하르츠탕’ 부부의 침실이기도 하였다. 이전에 그곳은 돼지 우리였었고, 외부에서 보면 여전히 돼지 우리처럼 보였다. 보통 ‘하르츠탕’ 부부는 6시 30분에서 7시 사이에 일어나 일용할 성귀를 토론하였다. 그러나 특히 어느 날 하루는, 잠을 깨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그것이 그들한테 보호가 되었다.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이른 아침에 독일 군인들이 전 지역을 포위하고서, 아마 ‘하르츠탕’ 형제를 찾으면서 모든 집을 철저하게 수색하고 있었다. 이 두번째 경우에도, 그들은 앞에서 언급한 그 귀먹은 노인의 집 문을 두들겼으며 그것도 ‘하르츠탕’ 부부가 있는 곳으로부터 불과 2‘미터’ 정도의 거리에서, 보통 때 하는 것처럼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군인들은 그 “돼지 우리”의 문을 두들기지 않았고, 밖에서 그런 소란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이 부부는 잠을 깨지도 않았다. 그들이 만약 잠을 깨었더라면, 아마 그들은 체포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본능적인 반응이 어떠했을 것인가를 상상하기란 쉽다. 그들은 다른 문을 통해 피신하려고 했을 것이며, 덫에 걸렸을 것이다. 다행히도 여호와의 천사들은 그들이 계속 깊이 잠들게 하였으며, 그리하여 즉각적이고도 아마 재난이 따르는 결과를 피하였던 것이다. 군인들이 떠난 후에야 그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담대함이 필요하였다

‘슈츠’ 형제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경험을 하였다. ‘투르내’에서 그는 ‘왈룬 경비대’ 즉 ‘게시타포’를 위해 일하는 ‘벨기에’ 사람들에게 체포되었다. 신분증이 잘 기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조사를 받기 위하여 본부로 연행되어 갔고, 그 다음에는 ‘투르내’ 감옥으로 보내졌다. 심문을 받은 후,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지방 당국에서 그의 신분증을 바로 기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파시즘 혹은 자유」란 소책자가 많이 든, 그의 옷 가방을 그 본부에 남겨 두고 가야 하였다.

그는 ‘코르트리직’으로 가서, 신분증을 바로 기재한 다음에 그것을 보여 주고 그의 옷 가방을 받기 위해 ‘투르내’로 돌아갔다. 옷 가방 속에 들어 있는 것 때문에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볼 때, 그렇게 하는 데는 담대함이 필요하였다. 모든 일이 잘 되었고 그는 가방을 돌려 받았다. 적들이 그 옷 가방을 열어보지 않게 된 일에는 확실히 천사의 간섭이 있었던 것 같다.

끝까지 인내함

모든 형제들이 다 ‘나찌’들의 독수(毒手)를 피한 것은 아니었다. 열 네명의 형제 자매들이 체포되었으며 진짜 ‘게시타포’식의 심문을 받는 동안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 일부는 몇 주일 혹은 몇 개월 후에 풀려났다. 두 자매를 포함하여 일곱명은 추방되어 집단 수용소나 감옥으로 보내졌다. ‘알폰스 미디’ 형제는 옥사하였고, ‘로데위즈크 쇼카에르트’는 살해되었다.

‘미디’ 형제는 「파시즘 혹은 자유」란 소책자들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 발각되어, 이른바 독일을 반대하는 선전을 했다는 이유로 55개월의 감옥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두었다가 생긴 탈저로 인하여, 1943년에 ‘하겐’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간수들이 아무런 치료 혜택을 베풀지 않고 버려둔 채 독방에서 죽었다.

‘쇼카에르트’ 형제는 진리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공산주의자였었다. ‘나찌’들이 그를 체포하여, 공산주의자라고 고발하였다. 독일의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도착하자, 즉시 그는 자기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친위대 수용소 사령관에게 갔다. 그는 수용소 내에서의 ‘여호와의 증인’의 식별 표시인 붉은 삼각형 표시를 받았다. 1943년에 다른 수용소로 이송되던 중, 이 형제는 친위대 군인들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앙쿠스’ 형제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는 전시에 받은 좋지 못한 대우로 인하여 1954년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아내는 충실하게 인내하였으며, 그 전시 기간 전체와 그후 1982년 5월 16일에 사망할 때까지 계속 활동적이었다.

그리스도인 성실을 깨뜨리려는 친위대의 노력

‘증인’ 한 사람이 체포되면, 각본은 항상 똑같았다. 무엇보다도 먼저 친위대식 심문이 시작되었다. 유혹하기도 하고, 계략을 쓰기도 하고, 잔혹하게 대하기도 하여 친위대는 ‘증인’으로 하여금 다른 ‘증인’들의 이름을 누설하게 하고, 그 다음에는 그의 신앙을 부인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글로박스’ 형제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였다. 체포된 후, 그는 친위대 사무실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의 앞 탁자 위에는 맛있는 한 조각의 흰 빵과 약간의 ‘소시지’와 배들이 있었다. 이 ‘증인’은 입을 열기만 하면,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가장 혹심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이었다. ‘글로박스’ 형제가 심문자에게, 자기는 사도 행전 5:29에 있는 사도 ‘베드로’가 천명한 원칙, 즉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한 원칙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 ‘나찌’ 당원은 격분한 나머지 얼굴이 창백하게 되어 “좋아, 네 수염이 사도 ‘베드로’의 수염처럼 길어질 때까지 감옥살이를 좀 해야겠어!” 하고 외쳤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이 형제는 면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채 9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집단 수용소에서의 생활

‘앙쿠스’, ‘미시엘’, ‘플로리앵’ 그리고 ‘글로박스’ 형제들은 각기 다른 감옥과 집단 수용소로 붙들려갔다. 그러한 것들 중 하나는 ‘스트라스부르’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거기서 그들은 아주 사소한 일로 끊임없이 막대기나 채찍으로 구타당하였다. 친위대는 ‘증인’들을 하늘에서 내려온 개들이라고 불렀다. 식사량을 엄격하게 최소 한도로 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가장 원시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도로를 확장하는 고된 일을 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그런 일에는 작은 수레에 돌을 실어서 요구된 장소까지 철길을 따라 수레를 밀고 가는 것이 포함되었다. 때때로 수레가 탈선을 하면 ‘코만도-휘러르’(파견 분대장)는 다른 수감자들은 떨어져 있게 하고, 네명뿐인 형제들로 그 수레를 다시 궤도에 올려 놓게 강요하였다.—그 무게가 1‘톤’이 더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였다!

어느 날 한 형제는 한 하사가 ‘코만도-휘러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저 ‘비벨포르셀’[성경 연구생]들은 정말로 이상한 사람들이죠. 다른 수감자들은 신체적으로 더 강한데도 파리처럼 죽어가는데, 힘차게 계속 살아가니 말입니다. 여호와가 그들을 돕는 모양입니다!”

수용소 내에서까지도 중립에 대한 시험을 받다

‘글로박스’ 형제는 ‘부켄발트’에 있는 동안 겪은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증인’들에 대한 시험으로서, 우리는 무기를 제조하는 일에 배치받도록 무기 공장 ‘코만도’(작업단)에 가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 이튿날 아침에 점호가 있은 후, 모든 형제들은 그 ‘코만도’에 가담하기를 거부하였다. 수용소 사령관 앞에 출두하여, 한 형제는 그들이 무기 만드는 일을 제외한 수용소 내의 어떤 다른 일이라도 받아들일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사령관은 노발대발하여 친위대에게 우리 모두를 처형장으로 데리고 가고 기관총들을 발포 위치에 배치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나서 사령관은 이와 같이 말했다. ‘잘 생각해 본 다음에, 그 일을 받아들일 것인지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대답해. 만약 거절하면, 모두를 총살시키라고 명령하겠어.’ 그는 협박을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꼼짝도 하지 않으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그런 협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서, 그는 책략을 바꿔서 이렇게 말했다. ‘‘히틀러’는 대단히 인자하신 어른이시지. 그분은 너희들이 총살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단 말이야. 너희 각자는 전에 하던 일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점령 기간 중에 서로 협력함

성서 출판물들을 생산하는 지하 활동을 감독하는 형제들은 한푼의 봉급도, 심지어 식품 구입에 필요한 배급표도 한장 받지 못했다. 종이와 같은 자재 구입은 암시장에서 해야 했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수행될 수 있었는가?

각 회중에서는 형제들이 이미 구차한 처지에서 희생적으로 기부한 선물과 배급표들을 모아서, 봉사 보고와 함께 순회 감독자에게 주었다. 이렇게 하여 추적당하던 형제들이 필요한 공급품을 조달받아, 필요한 영적 양식을 계속 공급할 수 있었다.

어린이들까지도 제 몫을 하였다. 이를테면, 어느 날 저녁에 두 형제가 예기치 않게 ‘골릭’ 가족의 가정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하르츠탕’ 형제와 그의 한 동료였다. 저녁 식사를 위해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두 어린이 ‘앙뚜와느’와 ‘안-마리’는 이미 식사를 한듯 하면서 취침하러 가 버렸다. 전쟁이 끝난 후에야 ‘하르츠탕’ 형제는 자기들이 그 두 어린이의 저녁 식사를 먹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집안에는 다른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어린이들은 그 형제들에게 자기들의 저녁 식사를 주기로 즉시 자원하여, 식사를 하지도 않고 잠자리에 든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신권 조직에 사려깊음을 나타내는 훌륭한 본을 세워 놓았다.

전파 사업이 수행된 방법

증거 사업이 지하에서 시작되자마자, 형제들은 비공식 증거를 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단히 조심스럽지만, 한층더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성서만을 사용하여 호별 방문을 하였다. 형제들은 또한 ‘프로테스탄트’의 서점에서 구입이 가능한 출판물에 따라, 신약이나 복음서들을 제공하였다. 이 일을 하는 데도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진정으로,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은 ‘증인’들의 활동 때문에 이를 갈고 있었으며 성서가 사용되는 목적을 알자 성서를 공급해 주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 교인들로부터 성서를 입수하기 위해 전략을 사용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노력이 항상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줄레 이스타’ 형제는 어느 날 몇권의 신약 성서를 구하기 위하여 ‘브뤼셀’에 있는 ‘복음 전도 선교부’로 갔다고 설명한다. 그곳 책임자는 이 형제에게 성서를 어떤 교회를 위해 쓸 것인지 질문하였다. 이 형제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회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목사는 이 형제가 누구인지를 알자,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를 가리켜 더러운 ‘성경 연구생’이라고 부르고는 책들을 팔기를 거절하였다.

「폭로함」과 「도피자들」 소책자 등, ‘협회’의 출판물 중 얼마를 형제들이 입수할 수 있었다. 그러한 출판물은 아주 조심스럽게 사용되었다. 빌려 주는 봉사가 조직되었고, 한권의 출판물이 다른 여러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되었다. 더 나아가, 형제들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서적을 받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방문하여 출판물을 읽도록 격려하였고, 그렇게 하여 그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만약 사람들이 관심을 전혀 보이지 않으면, 형제들은 다른 사람이 그 출판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을 되돌려 줄 것도 제안하였다. 때때로 어떤 사람은 서적을 돌려 주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집주인이 그 책을 돌려 주기를 거절하고 호기심이 생긴 나머지 그것을 읽기 시작하여, 왕국 소식에 관심을 갖게 된 일도 있었다. 이런 방법으로 진리 안에 들어오기까지 한 사람들도 있었다.

호별 방문—조심성있게

다시 호별 방문 봉사가 재개됨에 따라, 극히 조심성있게 봉사에 임하라는 지시가 주어졌다. 예를 들어, 여기 한 집에서 그리고 다음에는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하여 길을 따라 멀리 가서 거기 한집에서 전파하면서, 혼자 봉사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어떤 집이 수상쩍어 보이면, 형제들은 그러한 집은 그냥 지나치곤 하였다. 집안에 제복이 있는 것이 보이면, 전도인은 증거를 하지 않고 다만 일상적인 질문을 해야 하였다.

어느 날 한 형제는 그만 부주의로 ‘게시타포’ 형사가 살고 있는 한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형사는 그를 집안으로 초대하여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고는 문을 잠가 버리고서, 그 ‘증인’을 붙잡아 가라고 전화를 걸러 가 버렸다. 그 사이에, 그 형사의 아내가 들어와서 그에게 얼른 피하라고 말했다. 그 형제는 물론 지체하지 않고 그렇게 하였다!

재방문

어떤 사람이 관심을 갖게 되면, 성서의 기본 교리에 대한 토론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준비된 제목들의 도움을 받아 연속적인 방문을 하였다. 「폭로함」 및 「도피자들」과 같은 소책자들이 현대 가정 성서 연구의 선구자 역할을 하는데 사용되었다.

그 당시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즉시 집회에 초대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사람이 밀고자일 수도 있기 때문에, 전파를 시작한 후에야 비로소 그를 연구 집단에 초대하였다.

가정에서의 침례

침례는 가정에서 비밀리에 행해졌다. 한번은 ‘리에지’ 부근의 ‘스클레신’에서 40명 가량의 사람들이 아주 조그만 집인 ‘외즈’ 형제의 집에서 침례를 받았다. 또 다른 경우에는 27명이 ‘바테르쉐이’의 ‘블라데크’ 형제의 집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러한 활동이 항상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밖에서 놀고 있던 어린이들이 “저건 ‘프로테스탄트’의 ‘미사’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증가된 축복

1941년에는 적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전도인 수가 275명에서 86명으로 감소되었다. 그러나 1942년까지는 왕국 전사들의 수가 8명의 ‘파이오니아’를 포함하여 다시 253명으로 증가하였다. 전쟁으로 찢긴 그 해 중에, 그들은 ‘네덜란드’어판 「선택하는 일, 부 혹은 파멸?」 소책자를 10,000부 그리고 「파수대」지를 7,455부 인쇄하였다. 1943년에 여호와께서는 ‘벨기에’에서의 왕국 전파자들의 수를 396명으로 증가시키셨다. 이들 전파자들은 46,000시간 이상을 봉사하였으며 서책 7,868부, 소책자 17,106부 그리고 잡지 2,234부를 배포하였다. 회중 수는 19개로 늘어났다. 지하 인쇄 공장은 소책자 11,000부와 잡지 14,500부를 생산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더욱더 축복을 받았다. 이제 봉사자 수는 545명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거짓 종교와 그의 포악한 동맹자들에 대한 참으로 놀라운 여호와의 승리였다! 기념식 참석자 수는 609명이었고, ‘브뤼셀’에 있는 한 인쇄업자의 협조로 「어린이들」 책을 6,000부 인쇄하였다.

1942년에서 1944년까지 형제들은 엄청난 사업을 성취하였다. 그들은 서책과 소책자 그리고 잡지를 64,000부 이상 인쇄하였다. 이것은 ‘나찌’ 침공 때 감춰 두었던 재고까지 합쳐 그들이 전시에 107,587부의 서적을 배포할 수 있게 하였다. ‘나찌’들은 사업을 분쇄하는 일에 결코 성공하지 못하였고, 또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다섯 명의 성원들이 일하고 있는 ‘벧엘’을 찾아내지도 못했다.

지시들을 빈틈없이 따르다

형제들은 ‘협회’에서 나오는 지시들을 빈틈없이 따랐고 필요한 것 이상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린이들까지도 지시에 주의깊게 순종하였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슈란츠’ 형제가 ‘바테르쉐이’에 도착하여 ‘골릭’ 형제의 집에 출판물을 한 상자 남겨 놓았다. 집에는 아홉살된 꼬마 ‘안-마리’가 혼자 있었다. ‘슈란츠’ 형제는 그 여자 아이에게 그 상자를 주면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그는 침대 밑에다 그 상자를 숨겼다. 어머니가 집에 왔을 때에도, 그는 ‘슈란츠’ 형제가 방문한 것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취침 시간이 되었는데도, 그는 취침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는 오로지 기다려서 아버지를 만나야 했다. ‘골릭’ 자매는, 모든 것이 매우 신기하다고 생각하였다. ‘안-마리’는 아버지가 집에 올 때까지, 자지 않고 기다렸다. 아버지가 왔을 때 그때 비로소 아버지에게만, 그는 그 방문에 대해서 말하고 침대 밑에 서적이 한 상자 있다는 것을 밝혔다.

1944년—전쟁이 끝나가다

연합군이 독일을 자기 나라로 점차 후퇴시킬 때, 이 나라는 환성을 질렀다. ‘게시타포’와 그 형사들도 가 버렸다! 그래서 형제들은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하였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대회를 가져 함께 모이자는 것이었다. 집회들이 신속히 조직되었고, 함께 모이고자 하는 욕망은 강렬했다. 1944년 12월 23일에 ‘바테르쉐이’에 있는 창문도 없고 난방도 안된 강당에서 대회를 개최하였고, 70명이 참석하였다.

동시에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때,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는 ‘리에지’의 한 강당에서 다른 대회가 조직되었다. 그후에 ‘브뤼셀’에서 다음에는 ‘샤를레르와’에서 대회들이 조직되었다. ‘하르츠탕’ 형제는 이제 자기의 실제 이름을 사용하여 각 대회에 참석하였다.

폭명탄의 위협

그러나 ‘히틀러’는 패배를 시인하기를 거부하였다. 1944년에 그는, 독일인들이 ‘복수의 무기 1호’라고 부른 신예 무기인 폭명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군대들이 밀려 후퇴한 후, 그는 이 무기를 처음에 영국 그리고 다음에는 ‘벨기에’에다 사용하였다. V-1으로 알려진 이 유도 ‘미사일’은 1‘톤’ 가량의 폭약을 운반하였다. V-1은 ‘리에지’와 ‘안트베르프’의 산업 중심지와 항구들에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대량 파괴와 인명 손실을 초래하였다. 1945년 초기에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보다 널리 광고된 대회가 ‘리에지’의 ‘옴므데 앵발리데 호올’에서 조직되었다. V-1 ‘미사일’의 위협이 그 도시에서도 날카롭게 느껴졌다.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그 ‘호올’은 만원이었다. 대회가 진행되고 있는데, 폭명탄이 접근해 오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시끄럽게 덜덜거리는 ‘모우터’ 소리가 특징이었다. ‘엔진’ 소리가 들리는 동안은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만약 ‘모우터’ 소리가 멈추면, 그 폭탄은 더 이상 가지 않고 땅에 떨어질 것이었다. 이 특이한 폭탄이 이제 그 도시 위에서 날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모우터’ 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그 폭탄이 땅에 떨어졌다. 어디에 떨어졌는가?

마침 ‘호올’ 안에서 형제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자리를 떠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 ‘호올’의 소장을 포함한 모든 직원들은 방공호로 대피하였다. V-1은 그 ‘호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폭발하였다. 그 다음 날 ‘E. 외즈 시니어’ 형제와 ‘M. 스메’ 형제가 사용료를 지불하기 위해 돌아왔을 때, 그 소장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여러분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어제 V-1이 떨어질 때, ‘호올’에서는 한 사람도 움직이지 않더군요!” 그에게 좋은 증거를 할 기회가 되었다.

지하 활동에서 나옴

독일군이 떠나자마자, 곧 ‘벧엘’이 ‘브뤼셀’의 ‘노트바에르’ 형제의 집에 개설되었다. 그때 ‘하르츠탕’ 형제는 ‘샤에르비이크’의 ‘루벤즈’ 가에 방을 두개 세 얻어, 하나는 침실과 사무실로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부엌과 발송부로 사용하였다. 때는 겨울이었고, 석탄은 부족하여 배급제로 공급되고 있었다. 기온이 너무 차가와서, ‘하르츠탕’ 부부는 침대에 앉아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때 ‘라 쿠르 드 틸몽’에서 대회가 개최되었다. ‘림부르그’와 ‘리에지’의 탄광 지역에서 온 형제들이 무거운 가방과 짐을 가지고 도착하는 것이 보였고, 그들은 대회장까지 여행을 계속하기 전에 ‘벧엘’ 집을 방문하였다. 그들이 운반한, 그렇게 무거운 것은 무엇이었는가? 석탄이었는가? 그렇다. 이들 석탄을 채굴하는 형제들은 연료에 관한 한 혜택을 더 많이 받고 있었고, 그들은 혜택을 덜 받고 있는 ‘벧엘’ 형제들이 그들이 가져간 석탄을 사용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벧엘’의 석탄 창고는 가득차게 되었다.

‘벧엘’을 재조직하기 위해 일꾼들이 필요하였다. 요청을 받고서, 젊은 형제 ‘조세 니콜라스 미네’ 형제가 ‘벧엘’로 들어왔다. ‘루벤즈’ 가에서는 그가 기거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낮에는 거기서 일하고 잠은 ‘노트바에르’ 형제의 집에서 잤다. 더 넓은 장소를 찾을 필요가 있었지만, 그 도시에는 숙소가 부족하였다. 많이 찾아본 결과, 마침내 ‘익셀레즈’의 ‘바옌베르그’ 47번가에서 집을 한채 세 얻게 되었다. 하지만, 직원 수가 늘어났기 때문에, ‘하르츠탕’ 부부는 이 주소에서 기거할 수가 없었다.

사업의 재조직

형제들은 마치, 어둠 속에 오랫동안 있다가 나온 후 밝은 곳에 다시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가진 사람과도 같았다. 회중들은 이제 그들의 보고를 특별히 마련된 우편 엽서에 적어, 제출하도록 요구되었다. 엽서가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내용을 비밀로 하기 위하여 봉투 안에 넣었다! 발송자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계속 약자가 사용되었고, 회중은 이제 권장되고 있는 지역 이름으로가 아니라, 전시에 사용된 암호로 식별되었다.

‘나찌’ 비밀 경찰 활동의 여파가 형제들에게 계속 영향을 끼쳐 심지어 친위대가 떠난 지 1년 반 가량이 지났는데도, ‘협회’는 형제들에게 더는 지하에서 활동하고 있지 않으며 공개적으로 다시 봉사할 수 있음을 상기시켜야 하였다.

새로운 상황에 대한 적응이 이렇게 느린 한 가지 이유는, ‘벨기에’ 형제들 대다수가 자유로히 전파할 수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몰랐다는 것이다. 전쟁 초기에 86명이었던 전도인이 1945년 8월에는 이제 747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들은, 사업이 금지되지 않았던 다른 나라의 형제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전파와 조직적인 방법에 관해 많이 배워야 하였다.

1945년 12월에 ‘협회’장 ‘N. H. 노워’가 ‘M. G. 헨첼’ 형제를 동반하고서, 증거 사업의 재조직을 촉진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브뤼셀’에 들렀다. 그렇게하여 1946년 1월 15일에, ‘길르앗’에서 훈련을 받은 첫 번째 선교인이 ‘벨기에’에 도착하였다. 그는 ‘캘빈 홀므즈’ 형제였으며, 사업을 재조직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는 ‘오스텐’에 상륙하여, ‘브뤼셀’ 기차역에서 전체 ‘벧엘’ 가족의 영접을 받았다. 그것은 대단한 행사였다!

‘홀므즈’ 형제가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그 어려운 전쟁 기간 중에 자기의 능력껏 최선을 다했었던 ‘하르츠탕’ 형제는 이러한 새로운 마련들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하르츠탕’ 형제는 매우 겸손한 사람으로 그리고 또한 여호와의 봉사에서 열정적이고 결단력이 있는 일군으로 알려졌다. 그는 1964년 4월 5일에 죽음으로 잠들 때까지 충실하게 봉사하였다. 지금 81세의 노령인 ‘하르츠탕’ 자매는 여전히 여호와를 섬기고 있으며, ‘네덜란드 벧엘’에서 봉사하고 있다.

회중을 정결하게 함

몇몇 회중에서 정결케 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홀므즈’ 형제는 그 일에 착수하였다. 그는 불어나 ‘네덜란드’어를 몰랐던 터라, 그에게 그 일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었다. ‘브뤼셀’과 ‘이에페르’에서와 같은 몇몇 경우에, 이 정결케 하는 일은 불안과 불화를 야기하고 있는 부도덕한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아주 엄격하게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홀므즈’ 형제는 매 주말에 한 회중씩 방문하였고, 이런 방법으로 ‘협회’와 보다 가까운 유대 관계를 세워 나갔다.

‘벧엘’ 집의 매입

‘벧엘’ 집으로 사용해 오던 그 셋집이 너무 비좁게 되었다. 많이 찾아본 후, 뒷편에 커다란 작업장이 하나 딸린 집을 한채 매입하게 되었다. 그것은 ‘브뤼셀’의 교외 ‘샤에르비이크’의 ‘제너럴 아이젠하워’ 28번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벧엘’ 가족이 알고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 집은 궁전과 같았다. 계속 증가하는 필요를 돌보기 위해 이곳에 출판물을 다량 보관해 둘 수 있었다. 가구가 부족하였다. 다행히도, ‘스위스’ 지부가 오래된 농장을 막 팔아, 가구를 ‘벨기에’에 선물로 보내 주었으며, 그것은 대단히 감사하게 여겨졌다.

‘파이오니아’ 봉사

1945년에 ‘파이오니아’를 위한 부름이 있었고, 그 해 10월까지 ‘벨기에’에 18명의 ‘파이오니아’가 있었다. 12월까지 그 수는 24명으로 증가하였고, 3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임명되었다. 당시에는 ‘파이오니아’ 생활이 쉽지가 않았다. ‘파이오니아’들 중 한 사람은 마루 바닥에 깐 ‘매트리스’ 위에서 잠을 잤다고 설명한다. 그가 가진 취사도구라고는 다용도로 쓰는 남비 한개와 ‘팬’ 한개가 고작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식사는 간단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결코 자기의 종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미국 형제들로부터의 도움

양친은 ‘증인’이 아닌 한 형제는 ‘파이오니아’를 하기 위하여, 수입이 좋은 일자리를 그만 두었다. 그가 떠날 때, 그의 어머니는 흐느끼면서 “누가 너를 돌봐주겠니? 옷은 어떻게 사 입을 수 있겠니?” 하고 그에게 물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새들은 씨를 뿌리지 않는데도 필요한 먹이를 먹고 살아가지요!”

몇 개월이 지난 후, 이 ‘파이오니아’는 ‘브뤼셀 벧엘’을 방문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미국의 형제들이 의복을 많이 모았고, ‘협회’는 전쟁으로 인하여 고생하는 형제들을 돕기 위하여 의복 얼마를 ‘벨기에’로 보내 주었던 것이다. 그 의복 선물을 받을 첫 번째 사람들은 ‘파이오니아’들이었다. 그래서 이 형제는 양복 두벌과 외투 하나 그리고 ‘셔어츠’ 몇개와 신발 두 켤레를 받았다. 그 후 곧장 그는 어머니를 방문하러 갔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보자, 이렇게 외쳤다. “정말 멋지게 차려 입었구나! 그 좋은 옷은 다 어디서 난거냐?” 이 형제는 미소를 지으면서 “하늘로부터요!” 하고 대답하였다.

1946년과 1947년에 미국 형제들이 신발 1,550‘킬로그램’ 외에도, 총 10,500‘킬로그램’의 의복을 보내 주었다. 그것은 1,431명의 형제들에게 분배되었고, 그리하여 그들은 깔끔하게 차려 입고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할 수 있었다.

전후의 큰 대회가 열린 것도 이 때였다. 그 대회는 1946년 10월 4-6일에 ‘브뤼셀’의 ‘서어크 로오열’에서 개최되었으며, ‘프로그램’은 두 가지 언어로 제공되었다. “평화의 군왕”이란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하여 약 2,000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국가주의적 압제가 다시 밀어 닥치다

‘나찌’ 정권이 패배하였지만, 국가주의적인 영은 이전 어느 때 보다도 더욱 독성을 띠게 되었다. ‘사단’은 하나님의 왕국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대항하여 이것을 신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더는 지하 활동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나찌’들의 추적을 받아 피해 다니던 외국인 형제들은 ‘벨기에’와 미국 당국에 그들의 존재를 알렸다. ‘하르츠탕’ 부부는 당국에 거주 허가를 신청하였다. 그들은 허가를 거부 당했을 뿐 아니라, 1947년 6월 4일에 법무부 장관은 그들에게 8일 안에 이 나라를 떠나라고 명령하였다! 이 부당한 결정에 대한 어떤 호소도 소용이 없었다.

‘파이오니아’들인 ‘프리츠 슈나이더’, ‘에르빈 크로제’ 그리고 ‘빌리 크로퍼’는 투옥되어 ‘나찌’의 첩자였다는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것은 실로 ‘게시타포’에게 짐승처럼 추적을 당한 이들 형제들에게 최후의 부담이 되었다! ‘슈나이더’ 형제는 투옥된 후, 폐병을 앓는 환자의 몸으로 독일로 돌아갔다. 몇년이 지난 후 그는 사망하였다. ‘크로제’ 형제는 수백명의 형제들과 심지어 지방 당국까지 탄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1개월 동안 ‘나찌’ 첩자들과 함께 감옥생활을 하였다. 미국과 영국 군 당국은 그가 ‘나찌’ 첩자임을 증명하려고 애썼지만 무위로 끝났다.

‘브루클린’ 본부로부터의 방문객들

국가주의적인 요소들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최초로 전도인 수는 일천명 선을 돌파하였다. ‘파이오니아’는 57명이었다. 1947년 6월에 ‘F. W. 프랜즈’ 형제와 ‘그랜트 수우터’ 형제가 ‘벨기에’를 방문하였다. 이 때에 두개의 대회가, 하나는 ‘네덜란드’어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불어로 동시에 개최되었다. ‘협회’의 본부로부터 온 방문객들은 지부가 더욱 능률적으로 조직되도록 도왔으며, 그 조직을 신권적인 체제로 강화시켰다.

몇달이 지난 후, 전후의 첫 번째 순회 대회가 ‘라 루비에르’에서 개최되었다. 그 순회구에는 295명의 전도인이 있었지만, 485명의 열정적인 군중이 공개 강연을 들었다. 한해 전의 1,099명에 비하여 그 해 기념식에는 1,525명이 참석하였다.

많은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협회’는 형제들을 돕기 위하여 더 많은 선교인들을 파견하려고 하였지만, 국가주의적인 요소들의 반대로 인하여 그들의 도착이 지연되었다. 1947년 말 무렵에, ‘뷔셋’ 부부가 도착하여, 여러 해 동안 선교인으로서 ‘벨기에’에 머물렀다. 그들에 뒤이어 1948년에는 다섯 명의 선교인들이 또 왔으며, 그들 가운데는 1972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의 선교 임명에 충실하게 고착하여 봉사한 ‘엘머 존 스톤’이 포함되어 있었다.

1949년에는 ‘앨런 코빌’과 ‘기즈스베르투스 반 데르 비즐’을 포함하여 10명의 선교인들이 또 도착하였으며, 뒤이어 1955년에는 ‘마르쿠스 하르틀리에프’가 그리고 1965년에는 ‘알젠 비게르즈마’가 도착하였고, 이들 넷 모두는 아직도 이곳에 있으며, 여행하는 감독자들로 봉사하고 있다.

사제들이 압력을 가하다

여호와란 이름이 대중에게 더욱 친근해지자, 교직자들은 무수한 방법으로 ‘증인’들을 반대하였다. 예를 들어, 사제의 선동을 받아 반대자들은 폭죽을 쏴대면서 형제들을 ‘랑탱’에서 쫓아냈다. ‘에르브’ 근처의 조그마한 마을 ‘볼랑’에서, 사제는 그의 교구민들에게 ‘팜플렛’을 배포하였다. 그 ‘팜플렛’은 ‘증인’들이 방문할 경우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1) 이들 마귀의 책장사들이 오면, 문을 닫을 것. (2) 모르는 사이에 들어왔을 경우에는, ‘라디오’를 큰 소리로 틀거나 또는 할 수 있다면 두개의 ‘소오스 팬’ 뚜껑을 맞부딛쳐 시끄러운 소리를 내어 목적을 달성할 것.”

교직자들의 압력 때문에 강연을 할 강당을 빌리는 것이 아주 어려웠다. ‘테르부에렌’에서 사제는 한 강당 주인에게, ‘이 새로운 신의 선전자들에게 빌려 주느니 차라리 공산주의자들에게 빌려 주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한 마을에서 사제는 어린이들을 모두 동원하여, 강당으로 보냈다. 거기서 그들이 ‘소오스 팬’ 뚜껑으로 너무 시끄럽게 소란을 피워 강연을 할 수가 없었다. 또 다른 경우에 사제는 한 강당 주인에게, 만약 그가 강당을 ‘증인’들에게 빌려 주기만 하면 사업을 망치게 될 것이라고 협박을 하였다. 그 사제는, 자기 교구민들 중에 아무도 그 사람의 가게의 단골 손님이 되지 않게 할 것이었다.

당시 ‘증인’들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정신 태도는 다음의 경험으로 잘 예증된다. ‘슈란츠’ 형제가 한 형제를 방문해야 했지만, 그의 주소를 몰랐다. 그래서 그는 그 마을에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에게 간단히 이렇게 질문하였다. “이상한 종교를 가진 사람이 어디에 사는지 아십니까?” 그의 이름을 말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는 즉시 그의 집으로 안내되었다!

성서 서적의 수송 금지령

1950년에 ‘벨기에’는 왕 ‘레오폴드 3세’의 귀국으로 혼란 상태가 야기되었다. 그 왕이 망명 생활을 끝내고 귀국하자 시위, 파업 및 내란의 위협이 왕위 문제에 대해 ‘벨기에’ 국민들을 분열시켰다. 이제 2,462명에 달한 ‘증인’ 봉사자들은 그러한 불안정 속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와 같은 국가적인 격동의 시기에 그리고 새로운 ‘가톨릭’ 정부가 권력을 잡은 지 단 이틀 후에, ‘사단’은 또 다시 왕국 사업을 해치려고 하였다.

1950년 6월 6일, 교통부 장관은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이 ‘협회’의 출판물을 ‘벨기에’의 철도와 우편 제도를 통해 수송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정부는 지부가 그 문제와 관련하여 보낸 모든 서신을 무시하였다. 이제 형제들과 예약자들은 영적 양식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협회’는 ‘트럭’으로 잡지와 서적을 모든 회중에 배달하는 일을 조직하였다. 그런 다음, 전도인들이 예약자들에게 잡지를 배달해 주었다. 여호와께서는 이 마련을 풍성히 축복하셨으며, 형제들은 예약자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31년 동안 반복적으로 요청한 결과, 비로소 1981년 10월 30일에 와서야 ‘벨기에’ 정부는 ‘협회’ 서적에 대한 수송 금지령을 해제하였다!

‘아르덴’과 ‘플랑드르’ 구역에서

1951년에 전도인 수는 삼천명 선을 돌파하였다. 80개의 회중이 번창하는 것은 교직자들을 크게 불안하게 하였고, 그들은 ‘증인’들의 회중이 ‘아르덴’의 ‘가톨릭’이 절대 우세한 여러 마을들에서까지 생기고 있는 것을 개탄하였다. ‘벨기에’의 ‘가톨릭’지 「라 브니르 뒤 룩셈부르크」(‘벨기에’의 ‘룩셈부르크’ 지방)는 1950년 12월 2일자에서 이와 같은 말로 염려를 표명하였다.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 그러나 ‘뇌프샤토’와 ‘베르트리’ 부근의 여러 마을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뿌리를 내렸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한다.”

보다 큰 도시와 마을에서는 사람들에 대한 교직자들의 영향력이 줄어들었지만, 사제들은 아직도 작은 마을에서는 강한 지배력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에르프스 퀘르프스’(‘플랑드르’ 구역)에서 한 사제가 한 ‘파이오니아’에게 그 마을을 떠나라고 명령조로 말하였지만, 그 형제는 떠나기를 거부하였다. 이튿날 그 사제는 다시 그 형제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명령하였다. 그 형제가 여전히 거절하였기 때문에, 그 사제는 집집으로 그를 따라 다니면서, 그가 ‘프로테스탄트’ 교인이며 성서를 팔고 다닌다고 비난하였다. 사람들이 성서를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매 집 문간에서 그 ‘파이오니아’는 그 사제의 비난을 논박하였다. 이런 일이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그 사제는 문간으로 따라 다니는 일을 중단하였다. 그는 길 한 복판에 서서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하면서 그 형제를 따라다녔다. 제 삼일에 그 사제는 또 다시 그 ‘파이오니아’를 따라다녔지만, 이번에 그 형제는 경찰을 불렀다. 그러자 그 사제는 자취를 감춰 버렸다. 경찰은 더는 교직자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

당국이 불신을 표명하다

‘증인’들의 그리스도인 중립 입장 때문에, 당국은 조직의 평화 교육 사업을 신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거의 모든 공개 강연에는 두명의 사복 경찰관이 참석하였다. 그들은 강연 중에 필기를 하곤 하였다. 공개 강연이 광고되면, 곧 두명의 경찰관이 심지어 전도인이 약 15명밖에 안 되는 작은 회중에까지 와서 청중 가운데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경찰관들은 흔히 왕국회관으로 개조한 한 형제의 조그만 주방에까지 와서 앉아 있곤 하였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여행하는 감독자들을 포함하여 외국인 형제들은 공개 강연을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사제들이 이전의 방법들을 재개하다

형제들은 이제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다. 1952년 중에 전도인들은, ‘증인’들이 적어도 그렇게 먼 구역까지는 결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제들로부터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591개 읍과 마을에서 봉사하였다. 이 때에 사제들은 일을 처리하는 이전의 방법들을 재개하였지만 경찰의 후원은 없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증인’들을 읍밖으로 쫓아 내게 하였다. ‘바스토뉴’에서의 한 순회 대회 중에, 사제는 한 자매가 증거 사업에 사용하고 있던 ‘가톨릭’ 성서의 책장을 한 웅큼 찢어 버렸는가 하면, 다른 한 자매는 그 사제의 부추김을 받은 한 광신적인 여자에게 구타를 당하였다.

‘안트베르프’에서는 다른 거짓 목자들이 불구자인 한 자매가 가두 봉사하는 것을 못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그 자매는 어느 상점 근처에서 ‘휘일체어’를 타고서 봉사를 하고 있었다. 상점 주인은 그 자매를 쫓아 버리려고 하였다. 먼저 그는 경찰을 불렀다. 그러나 경찰관은 그 여인은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두명의 사제의 도움을 받아 그 자매를 설득하여 그곳을 떠나게 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래서 그 사제들은 그 자매의 ‘휘일체어’를 길 아래로 밀어 버리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에,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길 건너에서 지켜보고 있던 몇명의 ‘택시’ 운전사들이 급히 달려와서, 만약 문제를 당하고 싶지 않거든 그냥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그 사제들에게 말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허둥지둥 달아나 버렸다.

선교인들의 도움으로 발전하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도인 수는 3,623명으로 늘어났다. ‘길르앗’ 졸업생들이 형제들을 계속 강화시켰으며, 형제들이 부가된 책임들을 맡도록 도와 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 곧 ‘벨기에’는 더는 선교인의 밭으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선교인들은 감독 직책에 사용되었으며, ‘벧엘’에서나 여행하는 감독자들로 봉사하게 되었다. 당시 지역 및 순회 감독자들은 모두 외국인들이었고, 지부 사무실에는 ‘벨기에’ 형제가 세 명밖에 없었다.

지부 감독자가 추방당하다

다시 한번 ‘가톨릭’ 정부의 대표자들은 인도하는 형제들을 공격함으로써 그들의 증오심을 표출하였다. 1953년 4월 11일에, 지부 감독자 ‘캘빈 홀므즈’ 형제는 ‘벨기에’ 자매와 결혼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서 추방된다는 통지를 받았다. ‘G 반 데르 비즐’ 형제가 그 대신에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게시타포’가 붙잡지 못했고 또 이전의 ‘가톨릭’ 정부가 1934년에 추방하려고 했지만 실패한 ‘앙드레 워즈니아크’ 형제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 형제는 한 위원회 앞에 출두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 위원회는 그를 이 나라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추방하는 일이 있기 전에, 정부에 변화가 생겼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신임 법무부 장관은 ‘워즈니아크’ 형제를 추방하기로 한 그 결정을 시행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1934년의 경우처럼, 그는 다시 한번 박해자들에게서 벗어났다.

이전 정부보다 좀더 온건한 그 새 정부는 왕국 사업에 대해 다소 호의적이었다. 사실 1954년 7월 28일에, 정부 장관들 중 한 사람은 ‘협회’에 편지를 보내어, 성서와 성서 서적을 전하는 것은 행상이 아니라 비영리 자선 사업으로 간주될 것임을 알렸다.

대회 때

‘벨기에’는 ‘런던’, ‘뉴렘베르크’, ‘파리’, ‘헤이그’ 사이의 교차로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벨기에’ 형제들은 1955년의 ‘승리의 왕국’ 국제 대회에 참석하는 것이 용이하였다. 두대의 특별 열차가 사용되었다. ‘프랑스’ 당국은 두대 중 한대의 열차가 ‘프랑스’ 국경에 도착하자, 그것을 제지하였다. 확성기를 사용하여, ‘프랑스 국가 경찰’은 여러 명의 형제들의 이름을 불러, “보안상의 이유”로 그들의 ‘프랑스’ 입국을 금지한다고 말했다! 호명을 받은 형제들은 그 열차에서 내렸지만, ‘룩셈부르크’의 ‘그랜드 두치’로 돌아간 다음, 정규 열차를 타고 대회장에 도착하였다.

당국이 호의적으로 행동하다

교직자들의 반대가 약화됨에 따라, 당국은 왕국 사업에 대해 더 큰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사실상, 당국자들은 형제들에게 유리한 일방적인 결정을 내려 헌법상의 숭배의 자유를 보증해 주었다. 그렇게 하여 「관보」 1958년 3월 14일자에 발표한 1958년 1월 8일자 국왕의 칙령은, 1957년 6월 8일에 ‘안바잉’ 시의 시장과 시의회 의원들이 취한 옥외에서의 공개 강연을 금지하는 등의 모든 조처를 취소하였다. 그 왕의 칙령은, 시의회가 그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권력을 남용했다고 힐책하였다.

교직자들의 압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이제 오직 ‘오르-르-그랑’과 같은 시골 지역뿐이었다. 1958년 5월 23-25일에 개최된 순회 대회 기간 중에 여러 형제들이 이 도시의 어느 큰 집에서 머물도록 마련되었다. 바로 그 대회 직전에, 그곳 교구 사제가 그 숙박 마련을 모두 취소시켰다. 그는 또한 그 지방 제과업자에게 압력을 넣어 ‘카페테리아’에 사용할 일요일 점심 식사용 빵 공급 계약을 해약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형제들이 필요한 식품과 휴식을 얻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대회장 안에 대형 공동 침실을 세웠고, 짚으로 채운 커다란 부대를 침대로 사용하였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532명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언어 장벽이 없음

1959 봉사년도의 절정은 ‘브뤼셀 스포오츠 팰리스’에서 개최된 ‘깨어 있는 봉사자’ 전국 대회였다. 이 대회에 6,896명이 참석하여 불어와 ‘네덜란드’어로 동시에 제공된 공개 강연을 들었다. 이 5일간의 대회에서, 378명의 새로운 ‘증인’들이 침례를 받았다. 이 대회를 아주 두드러지게 한 것은 ‘플랑드르’ 형제들(‘네덜란드’어 사용)과 ‘왈룬’ 형제들(불어 사용) 사이의 연합이었다. 이들은 동일한 청중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각자 자기 언어로 들을 수 있도록 음향 ‘시스템’을 마련하였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청중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두개의 언어로 청강하는 이 장면은 주목을 끌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모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더우기, 이 대회는, 언어상의 차이가 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분열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벨기에’는 언어 분쟁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다. ‘안트베르프’와 ‘빌부우르데’의 어떤 ‘가톨릭’ 교회에서는, 경찰이 ‘플랑드르’의 ‘가톨릭’교인들과 ‘왈룬’의 ‘가톨릭’교인들을 분리시키기 위하여 개입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이유는? 일부 ‘플랑드르’의 ‘가톨릭’교인들은 그들의 사제들이 ‘미사’에서 불어로 집전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산세 면세

1960년에는, 이 나라에서 좋은 소식을 법적으로 변호하고 확고히 하는 데 중요한 일보의 전진이 있었다. 그해 이 나라에는 전도인이 7,000명 있었고, 기념식에는 10,237명이 참석하였다. 왕국회관들이 너무 비좁게 되었고, 여러 회중들이 회관을 확장하거나 신축하기 시작하였다. 왕국회관을 소유한 회중들은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면세 혜택을 요구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은 종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 요구는 거절당했다. 더우기, 세무소 측은 왕국회관에서는 아무런 공개적인 숭배 행위가 행해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그러한 주장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

‘리에지’의 상소원은 1960년 6월 29일자 판결에서 국가의 주장을 기각시켰다. 이제 왕국회관은 재산세 면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그 법원은, 국가는 형제들이 회관에 대하여 지불한 세금을 상환해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외국인 전도인들

면적이 30,513평방 ‘킬로미터’인 이 조그만 나라에서, 인구의 대부분은 도시와 읍에 살고 있다. 광업이 주요 고용 수단이기 때문에, 이 나라에 외국인 근로자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사실, 인구의 10‘퍼센트’ 가량이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고, 그들의 3분지 1은 ‘이탈리아’인들이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주로 탄광에서 일하였다. 이렇게 하여 ‘샤를레르와’, ‘리에지’ 그리고 ‘림부르그’ 지역에는 다시 한번 진리가 외국인 주민들 가운데 퍼지게 되었다. 즉시 성서 연구들이 시작되었고, 이들 진실한 사람들을 더욱 온전히 돕기 위하여, 일부 ‘벨기에’ 형제들은 ‘이탈리아’어를 배우기까지 하였다.

언어 학교

1962년 보고는 전도인의 약 40‘퍼센트’가 외국인들이고, 자신의 의사를 불어나 ‘네덜란드’어로 분명히 표현할 수 없음이 나타났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1962년 2월호 「왕국 봉사」에는 이들 형제들이 지방 언어를 더 잘 알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새로운 학교가 개설된다는 광고가 있었다. 이들 전도인들은, 신권 전도 학교에 참석하는 대신,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 책을 가지고 지방 언어를 읽고 말하는 법을 배웠다. 이 마련은, 그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이제 잡지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내용을 주제로 한 토론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이들 중 여럿은 회중에서 장로와 봉사의 종으로 봉사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로부터 온 사람들로 구성된 회중들

‘벨기에’에서 그런 종류로서는 최초의 아주 특별한 행사가 1965년 7월 7-11일에 있었다. 큰 국제 대회가 ‘샤를레르와’에서 개최되었고, 이곳은 63년 전에 진리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곳이었다. ‘프랑스’ 북부와 ‘파리’로부터 온 형제들이 ‘벨기에’ 형제들과 함께 참석하였고, 일요일에는 최고 참석자 수가 11,710명에 달하였다.

몇년 동안 그랬듯이, 이 대회에서도 ‘이탈리아’어 회기가 열렸다. ‘이탈리아’ 형제들이 더는 소수가 아니었다. 725명이 “진리의 말씀” 대회에 참석한 것이다. ‘노워’ 형제가 ‘벨기에’에 ‘이탈리아’어 회중이 열개 설립된다고 발표하였을 때 그들은 참으로 감사했다. 그 소식은 대단한 박수 갈채로 환영을 받았다. 큰 증가가 뒤따랐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32개 회중의 ‘이탈리아’인 전도인 수는 2,500명이 넘으며, 3개의 순회구를 형성하고 있다.

희랍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터어키’어 그리고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양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발견되었다. 신설 회중들 가운데는 ‘포르투갈’어 회중이 하나, 영어 회중이 셋, ‘스페인’어 회중이 일곱 그리고 희랍어 회중이 여덟 개 있었다. 다른 나라들로부터 온 이들 형제들은 여호와께 대한 열심이 가득하고, 그들의 인내는 귀감이 된다. ‘브뤼셀’의 희랍어 회중을 생각해 보자. 침례받은 47명의 전도인 모두가 봉사년도 중에 적어도 한번은 보조 ‘파이오니아’를 하였다!

새로운 ‘벧엘’ 집

20여년 동안, ‘샤에르비이크-브뤼셀’, ‘제너럴 아이젠하워’ 28번가에 소재한 ‘벧엘’ 집은 이곳에서 왕국 사업에 필요한 것들을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했었다. 그러나 서적을 보관하거나 ‘벧엘’ 가족 성원 모두가 한 지붕 밑에서 생활하기에는 장소가 충분하지 않았다. 1966년에 당시 지부 감독자로 봉사하였고 지금은 지부 위원회 조정 위원인 ‘마르셀 길렛’ 형제는 ‘노워’ 형제로부터 새로운 ‘벧엘’ 집을 건축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1966년 11월에 건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1968년 2월에, ‘브뤼셀’ 교외의 ‘크라아이넴’에 훌륭하고 넓은 공간의 ‘벧엘’ 집이 준비되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45년에 세 얻었던 그 장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가톨릭’ 교회 내의 혼란

10,000명이 넘는 왕국 전도인들은 ‘벨기에’의 ‘네덜란드’어와 불어를 사용하는 지방에서 다정하게 연합되어 있었지만, ‘가톨릭’ 교회 내에서는 혼란과 증오와 무질서 상태가 발생하였다. 이번에 신문들은 교회를 봐주지 않고, 심지어 조롱하기까지 하였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형제들에게 “우리 교회에서는 올바로 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이제 ‘가톨릭’ 교회는 끝장이예요” 그리고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하고 실토하였다.

바로 교회 내에서 ‘가톨릭’교인들 사이에 폭동이 일어났다. ‘안트베르프’, ‘빌부우르데’ 그리고 그 외의 지역에서 ‘플랑드르’ 출신의 ‘가톨릭’ 신자들이 그러한 도시에 살고 있는 불어를 사용하는 청중을 위하여 불어로 ‘미사’를 집전하였기 때문에, 교회들을 공격한 것이다. 폭동을 해산시키기 위하여, 경찰을 부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톨릭’ 사제가 형제들을 마을에서 쫓아내기 위하여 경찰을 부른 이래, 세월은 참 많이도 변하였다! ‘안트베르프’에서 ‘가톨릭’의 과격분자들은 벽에다 “‘빌부우르데’에서 불어로 ‘미사’를 집전하는 일을 중지하라!”는 글씨를 써 놓았다. 이 도시는 교직자들이 성서 번역자 ‘윌리엄 틴들’을 교살하여 화형시킨 곳이기도 하며, 오늘날 이 도시에는 성서를 사랑하는 70명의 여호와의 왕국 전도인으로 구성된 회중이 하나 있다. ‘가톨릭’계 대학으로 이름난 ‘루바인’에서는, 젊은 사제들이 거리에서 “주교는 물러나라!” 하고 외쳤다. 결국 정부가 개입하여 치안을 유지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인 중립으로 인해 투옥

수년에 걸쳐 수백명의 우리의 젊은 형제들이 중립 문제로 인하여 투옥되었다. 현재까지 우리 형제들은 자기들의 그리스도인 중립을 범하기를 거절하기 때문에 2년의 감옥형을 선고받는다. 거의 40년 동안 투옥된 형제들은, 어느 누구도 함께 모이거나 회중 장로들의 방문을 받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1976년 8월 5일에 와서야, 보다 아량이 넓은 법무부 장관은 자격있는 장로들이 그들을 방문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잊을 없는 하나의 행사

1973년 8월 8-12일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하나님의 승리” 국제 대회는 잊을 수 없는 하나의 행사였다. 이 대회는 기록적인 참석자 수 때문만이 아니라, 이 때 우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형제들이 ‘브뤼셀’에서 우리와 함께 하도록 초대되었기 때문에, 기억할 만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만해도 자국 내에서 자유로이 모이는 권리가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수의 사람들이 왔다. ‘스페인’어 회기의 최고 참석자 수는 19,687명이었고, 불어 회기의 최고 참석자 수는 14,625명이었다. ‘플랑드르’ 형제들은 11,101명이었고, ‘포르투갈’ 형제들은 8,152명이었다. 그렇게 하여 총 참석자 수는 53,565명이었다.

여러 해에 걸쳐 ‘스페인’과 ‘포루투갈’ 형제들이 직면하였던 박해를 의식하고서, ‘벨기에’ 형제들은 그들을 후하게 대접할 준비를 하였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난 사랑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이미 후대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스페인’과 ‘포르투갈’ 형제 자매들 역시 깊은 사랑을 그리고 ‘벨기에’ 형제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가슴 벅찬 감사를 증명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 즐거운 때에 나타낸 사랑의 표현과 선물 교환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외국인 전도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다

이곳 ‘벨기에’는 NATO(북 대서양 조약 기구), EC(‘유럽’ 공동체) 및 SHAPE(‘유럽’ 연합국 최고 사령부) 등, 여러 가지 기구들의 본부가 있는 곳이다. 이로 인하여, 국적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에 온다. 그리하여 이곳 ‘벨기에’에서 진리를 배운 다음 본국으로 돌아가서 ‘여호와의 증인’의 시초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수년 동안, 애초에 탄광에서 일하기 위해 이곳에 온 많은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그리고 희랍인들이 그러하였다. 각기 다른 기간 동안 ‘벨기에’에서 체류한 후,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본국에서의 전파 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고향으로 떠나는 이들의 수는 증가하였다.

현재의 영적 번영

오늘날 “왕국의 좋은 소식”의 내용은 ‘벨기에’의 방방곡곡에 전파되어 왔다. 임명되지 않은 구역이 더는 없다. 이 나라 전체가 288개 회중에 분배되어 있다. 1983년 4월에 ‘벨기에’의 최고 전도인 수는 20,018명에 달했다.

이 나라에서의 현재 상황은 어떠한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전파 사업에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가? ‘가톨릭’교가 한때 행사했던 영향력은 크게 쇠퇴하였다. 아직도 많은 ‘가톨릭’교인들이 종교인이라고 주장은 하지만, 물질적인 안락에 유혹되어 다수가 물질주의적인 견해를 발전시킨 것이 분명하다.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인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과 더불어, 이러한 추세는 사람들 사이에 엄청난 무관심을 초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에 관해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이런 태도는 전도인들에게 하나의 도전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왕국 소식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인상적인 서론을 사용하려고 노력하도록 전도인들에게 자극제가 된다.

대회 회관들

순회 대회를 위해 대회장을 빌리는 일은 흔히 비용이 아주 많이 들었고, 또 많은 경우에 우리의 필요가 충족되지 않았다. 그래서 순회구들은 자체 대회장을 갖기로 하였다. 1980년에 그러한 대회장을 두개, 하나는 ‘비울’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보르넴’에서 매입하게 되었다. 이들 ‘호올’을 대회의 필요에 맞게 개수하기 위해 형제 자매들은 열심히 헌금을 하였고 시간을 바쳤다. 이들 대회 회관들이 항상 청결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형제들은 더는 대회장을 사용하기 전에 대청소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여호와의 사랑의 친절—하나의 면류관

1902년에 ‘틸망’ 형제는, 바로 ‘벨기에’ 최초의 왕국 전도인으로서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하고 자문해 봤을지 모른다. (로마 10:14) 이 충실한 형제가 그때 뿌린 최초의 진리의 씨들이 80년이 지난 후에는 여호와를 섬기는 19,000명 이상의 담대한 증인들을 산출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1918년의 시험 기간이 지난 후에 여호와께 충실했던 다섯 사람이 1952년에는 3,500명 이상으로 불어난 것을 보고, ‘스메’ 형제와 ‘포엘망’ 형제가 얼마나 감격해 하였을 것인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담대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을 생각하고 사망하였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태 5:12) 그들은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공동 후사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의 풍성한 축복이 그분의 백성 위에 임하는 것을 보는 그들의 즐거움이 어떠할 것인지 상상할 수 있다.

사랑의 친절에 대한 찬양은 여호와께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현대에 충실한 ‘증인’들을 그렇게 많이 일으켜 주신 것에 대해 그분께 감사를 드린다. 사실, 이 보고서를 편집하는 동안, 우리는 딱 한 가지를 유감스럽게 생각했는데, 그것은 지면의 부족으로 인하여 좀 덜 알려졌지만 기둥과도 같은 “유명한 사람”들이었으며 또 주의 사업에 충실하게 일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와 같은 수백명의 다른 형제 자매들에 대한 이야기를 싣지 못한 점이었다.—로마 16:7.

여호와께서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을 통하여 이곳 ‘벨기에’에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베푸신 인도는 물론이거니와 이들 충실한 형제들의 탁월한 인내의 본들은, 우리 모두에게 강력한 격려의 원천이 된다. 이러한 것은 여호와께서 그분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그 날이 오기까지,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계속하게 하는 자극제가 된다.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디모데 전 6:12; 마태 25:34.

그 영광의 날이 동틀 때는, ‘벨기에’의 밭과 초장이 1914년 이후 두차례나 그랬듯이, 전쟁터로 변모될 위험이 더는 없을 것이다. 아니, 나머지 ‘유럽’은 물론이거니와 이러한 밭들, 더 나아가서는 온 땅이 전쟁이며 압제가 모두 일소된 세계적인 낙원으로 변모될 것이다. 그때까지 ‘벨기에’와 다른 곳에서, 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한 사도 ‘요한’의 말을 되풀이할 것이다.—계시 22:20.

[각주]

^ 8항 나중에 이 연속 간행물은 「성경 연구」라고 불리웠다.

[59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벨기에

안트베르프

보르넴

메셀렌

빌부우르데

에르프스 퀘르프스

루바인

크라아이넴

샤에르비이크

브뤼셀

익셀레즈

테르부에렌

오르-르-그랑

베링겐

브리

바테르쉐이

아이즈덴

겡크

외르-르-로맹

비베그

비제

에르스탈

랑탱

리에지

볼랑

프레말르-오트

잉기스

앙프생

아마이

스클레신

에르브

우그레

오이팬

베르비에르

발생 랑베르

뮈즈(마아스)

나뮈르

비울

디낭

시니

베르트리

바스토뉴

뇌프샤토

라 루비에르

애느 생 폴

카르니에르

루욱스

줌메

샤를레르와

쿠이예

브랭-르-콩트

투르내

안바잉

코르트리직

이에페르(이프레스)

오스텐

헨트

[67면 삽화]

‘에르네스 외즈 시니어’ 형제와 그의 가족—모두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다

[68면 삽화]

1952년 ‘리에지’에서 있은 한 대회에서, ‘포엘망’ 형제와 ‘스메’ 형제가 5명의 전도인이 증가하여 3,000명 이상이 된 것을 즐거워하고 있다

[73면 삽화]

순회 사업을 할 때, 자기 아내와 같이 있는 ‘에밀레 슈란츠’ 형제 (중앙에 있는 사람이 ‘훼브리에르’ 형제다). 다음 회중을 방문하는 일은 자전거로 수행되었다

[76면 삽화]

신권 통치를 위한 용감한 투사, ‘베르너 슈츠’. 1972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는 47년 동안 전 시간 봉사를 했었다

[94면 삽화]

제2차 세계 대전중에 지하 왕국 사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게시타포’에 의해 주요 인물로 간주된 ‘앙드레 워즈니아크’—그는 체포되지 않았다

[101면 삽화]

‘하르츠탕’ 부부는 비밀리에 ‘네덜란드’로부터 도착하였다. 그는 그 어려운 시기에 지부 감독자로 봉사하였으며, 단단히 결심한 ‘게시타포’ 대장에게 체포되는 것을 교묘히 피하였다

[102면 삽화]

각기 다른 감옥과 독일의 집단 수용소로 끌려간 14명의 형제 자매들 중 한 사람인 ‘프랑쑤와 앙쿠스’

남편이 감금되어 있는 동안 충실하게 인내하였고 계속 활동적이었던 ‘앙쿠스’ 자매 그는 그후 1982년에 사망할 때까지 봉사하였다

[104면 삽화]

집단 수용소에서 돌아온 후의 ‘플로리앵’ 부부

[106면 삽화]

‘부켄발트’에 있는 동안 무기를 제조하는 일을 거절하여 처형될 것이라는 협박을 받은 ‘증인’들 중 한 사람인 ‘글로박스’ 형제

[124면 삽화]

‘브뤼셀’ 교외의 ‘크라아이넴’에 있는 ‘벨기에’ 지부 건물

[129면 삽화]

1980년에 매입한 두개의 건물 중 하나인 ‘비울’ 대회 회관의 전경

‘보르넴’ 대회 회관의 실내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