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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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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에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하였을 때, ‘알래스카’는 ‘슈우어드’의 얼음 상자라고 불리웠다. 미국의 국무장관 ‘윌리엄 H. 슈우어드’가 그 거래를 주선하였으며, 반대자들은 또한 그것을 가리켜 ‘슈우어드’의 우행(愚行)이란 별명을 붙였다. 눈과 추위는 지구의 이 외딴 구석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고, 한번에 육개월씩 칠흑에 싸여 있다는 그릇된 믿음에서 그러한 불평이 나왔다. 극단에 위치한 땅이지만, ‘알래스카’는 거주자들로 하여금 지구의 이 부분을 낙원이라고 생각하게 할 만큼 매혹적인 풍물들을 충분히 갖고 있다.

사실인즉, 얼음과 눈은 7개월 동안의 겨울 풍경에 한 몫을 톡톡히 담당하며 그때 기온은 섭씨 영하 62도까지 떨어진다. 그러나 여름철이 되면 ‘페어뱅크스’의 기온은 이따금씩 섭씨 38도까지 치솟았다. 여름의 태양이 하루에 20시간 비칠 때에도, 이곳 지방의 사람들은 하루 일과를 마치기 위해 더한층 활기와 열심을 낸다. 면적이 1,525,000평방 ‘킬로미터’가 넘고 표준 시간대가 4개나 되는, ‘알래스카’는 그 크기가 ‘텍사스’의 두배가 넘는 미국에서 가장 큰 주이다. 면적이 미국의 나머지 부분의 거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가장 큰 주이지만, 인구는 가장 적은 주로서 약 425,000명밖에 되지 않는다. 수많은 산과 빙하들이 손가락처럼 생긴 얼음 사이에다 세계의 담수를 다량 가두어 놓고 있으며, 2백만 개나 되는 ‘알래스카’의 호수는 그 면적을 합치면 8만 평방 ‘미터’가 넘는다. ‘세인트 일라이애스’ 산맥에는 자랑거리인, 폭이 80‘킬로미터’나 되는 대빙원인, 북반구의 최대 빙하 ‘말라스피나’ 빙하가 있다.

이 땅을 가리켜 “다섯 가지 얼굴”을 가졌다고 묘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항시 부는 바람과 더불어, 수목이 없는 ‘툰드라’가 ‘알류산’ 열도의 특색이다. ‘팬’ 손잡이처럼 생긴 동남부에는 거대한 ‘시트카’ 가문비 나무들로 이루어진 다우림(多雨林)이 있으며, 상업적인 어업으로도 유명하다. ‘앵커리지’, ‘마타누스카’ 계곡 그리고 ‘케나이’ 반도를 포함하는 ‘알래스카’ 남부 중앙에는 이 주의 인구 대다수가 살고 있으며, 기후는 온화하다. ‘마타누스카’ 계곡에 위치한 ‘파머’ 부근에는 쇠고기, 우유, 가금 및 얼마의 야채를 생산할 수 있는 비옥한 농토가 있다. 무게가 30‘킬로그램’ 이상되는 양배추와 14‘킬로그램’도 더 나가는 순무는 특이한 것이 못된다.

“북부의 가장 심장부”인 ‘페어뱅크스’는 기온의 차가 극심하여, 여름에는 가장 덥고 겨울에는 가장 추운 때가 더러 있다. 이곳은 푹신한 북극 ‘툰드라’의 시발점이다. 마지막으로, 북부와 서부, 해안 지역은 ‘에스키모’와 ‘인디언’ 마을들로 점점이 수 놓아져 있다. 이곳의 여름은 단지 겨울의 극한 추위보다 약간 따뜻할 뿐이다.

북미의 최고봉으로 구름 위로 우뚝 솟아 높이가 6,194‘미터’나 되는 웅장한 ‘맥킨리’ 산은 물론, 13개의 활화산은 이 북부 낙원의 경이를 더해 준다. 시골에는 야생동물, 광물, 목재 그리고 기름이 풍부하다. 초기 ‘알류산’ 열도 사람들이 이곳을 가리켜 “거대한 땅”이란 뜻인 ‘알예스카’라고 부른 것이 이상하게 들리는가?

자연의 부요가 풍부한 이 땅, “슈우어드의 얼음 상자”를 ‘헥타아르’당 약 5‘센트’(한화로 약 40원)인 겨우 7,200,000‘달러’(한화로 57억 6천만원)를 주고 1867년에 ‘러시아’로부터 매입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러시아’인들은 모피 동물로부터 얻는 부를 추구하였다. 1897-98년에 고참 개척자들은 이곳에 모여, ‘클론다이크’ 오솔길을 따라 횡재를 꿈꾸며 금을 찾아 나섰다. 후에는, 상업적인 어부들이 바다로부터 얻는 부를 찾아서, 조수가 이는 53,000‘킬로미터’의 해안선을 오르내렸다. 지금은, 유전 노무자들이 지하에 묻힌 값진 검은 황금(석유)을 캐기 위해 땅에 구멍을 뚫는다. 그러나, ‘알래스카’는 이 모든 것보다 훨씬 더 값진 보물을 자랑하고 있다.

참다운 부가 부유한 땅에 이르다

부활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제자들이 “땅끝까지 이르러” 자기의 증인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1:8) 지구의 꼭대기에 자리잡은 ‘알래스카’는 확실히 “땅끝”에 해당한다. ‘알래스카’는 물질적 자원을 쉽게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아무런 저항없이 좋은 소식의 부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여호와의 대담한 종들은 굳은 결의로 그분의 성령의 후원을 받아, 이 냉담하고 험한 환경 속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진리의 씨들이 1910년에 고래잡이 어선의 선장 ‘캡틴 비임즈’에 의해 해안선을 따라 처음으로 뿌려졌다. 그의 활동의 세세한 점에 대해선, 그가 진리를 전파했고 여러 항구를 방문하여 서적을 전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192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온 기름부음받은 ‘증인’ ‘프랭크 데이’에 의해 보다 집중적인 노력이 개시되었다. 12년 이상이나 여름마다, 그는 구역을 다니면서 전파하고 서적을 전하였다. 생계 유지를 위해 마을에서 마을로 여행하면서 그는 안경을 팔았고, 그러면서도 전파하는 일을 맨 앞자리에 두었다. 혼자서 일하였기 때문에, 그는 여호와의 인도에 크게 의존하였다.

내륙 도시 ‘페어뱅크스’로부터 온 ‘위니 페어슨’ 자매는 1930년에 어느 집으로 이사 가서, ‘데이’ 형제가 전한 「성경 연구」를 여러 권 발견하였다고 회상한다. 이 형제는 ‘케치캔’에서 ‘노움’까지 약 1,900‘킬로미터’의 길에다 선한 사업의 자취를 남겼다. 그가 목발을 딛고 절뚝거리면서 구역을 돌아야 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결코 작은 업적이 아니었다!

1941년 8월에, ‘데이’ 형제는 ‘브루클린’의 ‘협회’ 사무실에 편지하여, ‘앵커리지’에다 회중을 하나 세울 것을 추천하였다. 그는 ‘카알 리이보오’ 형제를 인도자로 추천하였다. ‘리이보오’ 형제와 같이 증거할 다른 사람이 몇명이나 있는지 묻는 신청서의 질문란에다, 그는 “한명”이라고 썼다. 그 “한명”은 ‘O. P. 리이즈’ 형제였다. 그렇게 하여, ‘알래스카’의 최대 도시에서 최초의 회중이 두명의 헌신한 종들로 구성되었다.

당시에는 ‘슈우어드’ 항구 도시를 ‘앵커리지’와 연결하는 도로가 없었다. ‘리이보오’ 형제는, 그 두 도시를 잇는 철길 주변의 보선구(保線區) 주택에 증거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는 걷는 여행을 시작했다! 각 보선구 주택에서 한 두 사람에게 증거하고, 하룻밤을 묵은 다음, 철길을 따라 그 다음 집으로 출발하곤 하였다. 그는 160‘킬로미터’가 넘는 전체 거리를 길을 따라 걸어 다니면서 증거하였다. ‘리이보오’ 형제는 1969년에 사망할 때까지 계속 충실을 지켰다.

‘알래스카’ 광야로 더 멀리 돌진해 들어가고자 하는 노력이 항상 즉각적인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위니 페어슨’은, ‘데이’ 형제가 1942년에 ‘알래스카’로 그의 마지막 여행을 하던 중 ‘페어뱅크스’를 통과한 것을 회고했다. ‘카누우’에 식품, 서적 그리고 삐죽 나온 나팔이 달린 대형 목조 축음기를 싣고서, 그는 ‘유콘’ 강을 따라 힘든 여행을 하기 위해 해안을 떠났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그는 흠뻑 젖은 서적과 축음기를 갖고서, ‘페어슨’ 자매 집 문간에 나타났다. 그의 ‘카누우’가 뒤집혔던 것이다! 이 일로 ‘알래스카’로 가는 그의 여행은 끝나고 말았다.

‘캐나다’로부터의 도움

이러한 여러 해 동안 ‘터론토’에 소재한 ‘협회’의 ‘캐나다’ 지부 사무실의 지도 아래 일한 여러 명의 ‘캐나다’ 형제들이 ‘알래스카’ 밭으로 가서 도울 것을 자원하였다. ‘협회’가 좋은 소식 전파에 사용하려고 소유한 어선 한척을 이용하여, 그들은 ‘주노’, ‘스캐그웨이’, ‘후네이’, ‘싯카’ 등 해안 도시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프랭코 프랜스크’ 형제가 포함된 이 네명의 봉사단은 북쪽으로 더 깊숙이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거대한 파도를 만나 26시간 동안이나 심한 악천후와 싸운 끝에, 결국 ‘케치캔’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안나 호그우드’ 자매를 발견하였을 때, 되돌아와야 했던 그들의 실망감은 누그러졌다. ‘안나 호그우드’ 자매는 1911년에 왕국 봉사를 시작하였다. 이 자매는 1949년에 76세의 나이로 ‘케치캔’에서 사망할 때까지 계속 충성을 유지하였다.

이들 용감한 형제들은, 그들의 말에 따르면 서적을 “‘톤’으로” 배포함으로써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들은 ‘알래스카’인들에게 매혹되었다. ‘프랜스크’ 형제는 그들을 가리켜 “난폭한 기질의 사람들; 어부, 벌목꾼, 덫으로 잡는 사냥꾼 및 광부들; 모두는 풍부한 ‘유우머’감과 더불어 후대하며 관대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묘사한다.

마치 초기 고참 광부들이 황금덩이를 찾기 위해 숱한 자갈을 걸러내야 했듯이, 이들 초창기 그리스도인 “탐광자”들도 몇명의 양같은 사람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38년에 ‘알래스카’에서 왕국 봉사를 보고한 전도인은 5명이었다. 이 수가 1942년에는 7명으로 늘어났지만, 1943년과 1944년에는 2, 3명으로 다시 떨어졌다. 성서 서적으로 씨가 많이 심어졌지만, ‘알래스카’에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하였다.

‘길르앗’의 유향처럼

성서 시대에 치료용으로 값비싼 유향이 사용되었듯이, 여호와의 조직은 ‘알래스카’ 구역에서 영적 치료를 베풀기 위한 선물로 여덟 명의 남녀를 파견하였다. (비교 예레미야 46:11) ‘길르앗’ 훈련을 받은 ‘파이오니아’들이 1944년에 왕국의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파견되었으니, 100,000명 정도의 그 작은 인구라도 소홀히 취급되지 않았다.

‘해롤드’와 ‘클라우디아 호프만’, ‘랠프 바크만’ 그리고 ‘체스터 시에라드스키’가 수도인 ‘주노’에 파견되었다. ‘존 에리체티’와 ‘고오든 로저스’가 ‘팬’의 손잡이처럼 생긴 ‘알래스카’의 해안선을 껴안듯이 하고 있는 여러 섬 도시들 중 하나인 ‘케치캔’에서, 그들의 봉사를 시작했다. 최대 변경 지역인 ‘앵커리지’와 ‘페어뱅크스’는 ‘제임스 E. 오드햄’과 ‘허어몬 우다아드’가 돌보게 되었다. 후에, ‘에리체티’ 형제와 ‘우다아드’ 형제가 짝이 되었다. ‘알래스카’ 형제들에게 “사내들”이란 애칭을 받은 이 ‘티임’은 ‘알래스카’에서의 장래 성장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 후 1945년에 또 한 사람의 ‘길르앗’ 졸업생 ‘차알스 곤트’가 ‘주노’에서 봉사하기 위해 도착하였다. 1948년에 그는 ‘길르앗’ 졸업생인 ‘아다 앤더슨’ 자매와 결혼하였고, 그들은 1954년 10월까지 ‘알래스카’에서 계속 봉사하였다. ‘곤트’의 두 아들인 ‘차알스’와 ‘톰’은 지금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는데, ‘차알스’는 ‘칠레’에서 그리고 ‘톰’은 ‘브루클린 벧엘’에서 봉사하고 있다. 1946년에는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서 파견된 그 집단에 네명의 선교인이 더 합세하였다.

그리 따뜻한 환영을 받지 못함

‘알래스카’로 가서 전파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당신이라면, 어떠한 반응을 보이겠는가? 의심의 여지없이 당신은 착잡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여덟 명의 강인한 ‘파이오니아’들은 이 특이한 임명을 수행할 것을 자원하였다.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선교인들 대다수는 중앙 및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으로 가서, 그곳의 열기와 습기를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 임명은 다른 종류의 도전을 가져다 주었다. 그들은 북쪽을 향해 여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친 기후로 인하여, 따뜻한 환영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임명의 역경에 대처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신뢰를 둘 것인가?

두 선교인 형제는 ‘앵커리지’에 도착하여, 방 한간짜리 ‘어파아트’를 월세 35‘달러’(한화로 28,000원)로 얻었다. 그것은 비둘기 통같은 비좁은 방이었다. 화장실은 바깥 길 모퉁이에 있었다. 이용할 수 있는 상수도 시설이라고는 수도 꼭지 하나와 그 옆에 있는 물통 하나가 전부였다. 이곳이 그들의 선교인 집이었고 구역을 찾아가 봉사하는 본거지였다. 이 기점으로부터 그들은 약 32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변경 구역인 ‘탈키트나’, ‘파머’ 그리고 ‘슈우어드’까지 가곤 하였다!

‘페어 뱅크스’에서는, 침목 위에 지은 조그만 오두막 ‘워니간’이 선교인 집으로 사용되었다. 벽에는 절연 시설을 거의 아니 전혀 하지 않았으므로, 그리 이상적인 숙소는 되지 못했다. 형제들이 옷장의 옷을 꺼내려 하였을 때 그 옷이 벽에 꽁꽁 얼어붙은 것을 보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바깥 기온이 온도계로 섭씨 영하 45도를 기록하였으므로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낮에 “밤” 증거를 함

선교인들은 ‘알래스카’에서 추울 것이라고는 기대하였다. 그러나 겨울철에 햇빛이 부족할 것이라고는 온전히 예상하지 못했고, 또 그것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우다아드’ 형제는 첫해를 이렇게 회고한다. “‘앵커리지’에서 긴 겨울을 보냈다. 햇빛을 받는 시간은 세 시간 정도밖에 안 되었으며, 여러 날 동안은 ‘칠흑’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했을 것이다.”

겨울철에는 낮이 더욱더 짧기 때문에, ‘페어뱅크스’에서 문제는 더 심각하였다. 태양이 거의 오전의 중간쯤에 떠서 겨우 몇 시간 만에 질 때, 그것은 ‘알래스카’에 처음 온 사람에게 해로운 영향을 줄 수 있다. 겨울철의 빙무(氷霧)현상은 거리의 가시 거리를 단지 몇 ‘미터’로 단축시키는 어두움 즉 암흑을 더욱 가중시킨다. 이런 음산한 겨울 환경은 흔히 심리적인 갈등을 일으킨다. ‘페어뱅크스’에서는 11시가 되어서야 일상적인 호별 방문 증거를 제대로 시작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12월이 되면, 그 시간에도 거의 햇빛이 비취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해가 뜰 때까지 잠을 자므로, 집주인이 잠자는 것을 깨우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선교인들은 낮에 “밤” 증거를 해야 했다. 사람들이 잠자는 것을 깨우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형제들은 불이 켜져 있는 집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다소 도움이 되었지만, 많은 집주인들이 단순히 전날 밤에 불을 끄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그들의 잠을 깨워 놀라게 하였다. 불굴의 의지로, 선교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잘 이용하였다.

겨울에는 북쪽으로 감

그들은 곧, 겨울이 실제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최상의 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기계에 사용할 질 좋은 윤활유와 연료를 구할 수 없었으므로, 주민들이 겨울에는 자동차를 그냥 보관해 두었다. 왜냐하면 운전을 하면 자동차가 얼어 붙어 버릴 뿐이기 때문이었다. 겨울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발이 집안에 묶여 있기 때문에, 이것은 형제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기본적인 허드렛일을 끝내고 나면, 갈 곳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집주인들은 용감하게도 그들의 집을 찾아오는 방문객은 누구든 보통 환영해 주는 편이었다. 섭씨 영하 51도의 추위 속에서 방문하는 것은 참으로 도전이 아니겠는가!

이 점을 염두에 두고서, 선교인들은 증거를 위한 최상의 전략은 겨울에는 북쪽으로 가고 여름에는 남쪽으로 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북반구에서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그러나 ‘알래스카’에서 왕국 소식을 전하는 일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실용적이었다. 그 당시에는 겨울 몇달 동안 세속 일이 거의 휴지 상태가 되므로, 우리의 형제들은 사람들과 더 많은 성서 연구를 사회할 수 있었다. 그들의 여름철 구역인 ‘알래스카’ 동남부에서 배를 타고 외딴 마을들을 방문하는 것 역시 도전이 따랐다.

오두막 열병

자주 당하는, 차가운 기후로 초래되는 또 한 가지의 문제는 오두막 열병이다. 캄캄함과 극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의 하루종일 집안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사람의 기질에도 영향을 주어, 신경이 예민해지고 성급하게 될 수 있다. 사소한 불편이나 방해라도 눈에 띄게 나타나게 되고, 벽이 자기를 공격해 오는 것 같이 보일 수 있다. 이런 질환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들이 진료소를 여러 개 차렸다. 하지만, 우리 형제들은 그들의 임명에 신속하게 적응하였다. 여호와의 자진적인 종들은 오두막 열병에 대한 최상의 약—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되는 희망에 관해 배우도록 돕는 만족을 주는 활동—을 찾아냈다. 집을 나와서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는 일이 최상의 치료제이다.

한 신부가 ‘알래스카’에 오다

1947년에 ‘제임스 오드햄’ 형제는 결혼을 준비하기 위해 세속 일을 하였다. 그는 그의 신부 ‘스텔라’가 ‘앵커리지’로 오도록 주선하였다. 이전의 선교인 집이었던 그들의 원시적인 “신혼 오두막”에는 배관 시설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목욕을 하는 것이 하나의 도전이 되었다. ‘오드햄’ 부부는 어느 통신 판매점을 통해 휴대용의, 안이 고무로 된 욕조를 하나 구입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물을 ‘스토우브’에다 데웠고, 작지만 따뜻한 자기 집에서 호화스런 목욕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욕조의 물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바깥은 기온이 섭씨 영하 40도였다! 오두막에는 배수 시설이 전혀 없었으므로, 그들은 욕조를 문으로 끌어 내어 바깥에다 그냥 부어 버리기로 결정하였다. 깜짝 놀랄 일이 곧이어 일어났다. 물이 욕조에서 떨어지자마자 즉시 문앞 계단에서 얼음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이 얼음 연못은 그후 겨울 내내 문앞 계단에 있게 되었고, 방문객들이 오면 ‘오드햄’ 형제는 “거기 제 아내의 목욕물을 조심하세요!”라고 주의를 주곤 하였다. 그 당시에는 ‘유우머’감이 확실히 변을 당하지 않게 해주었다.

5‘미터’가 넘는 강우량!

눈 및 영하의 기온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이 주의 동남부 지방에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어하는 새로운 이주자들 역시 뜻밖의 일을 당해야 했다. 연일 그치지 않고 계속되는 장마를 견디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들은 몰랐던 것이다.

‘알래스카’에 도착하기 전 1944년에, ‘에리체티’ 형제는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충실한 ‘데이’ 형제를 만났다. 자기는 알고 있다는 듯이 싱긋 웃으면서, ‘알래스카’에서의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그는 ‘에리체티’ 형제에게 “‘케치캔’에서는 이것이 필요할 겁니다!”라는 주의를 주면서 고무로 만든 ‘레인 코우트’를 주었다. ‘에리체티’ 형제는 ‘케치캔’에 도착하여, 그 말의 온전한 뜻을 알게 되었다. 바람이 연달아 며칠이고 몇 주일이고 비를 수평으로 몰아치는 폭풍우가 얼마나 거센지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1946년에 ‘버어노 데이비스’ 형제와 그의 아내가 ‘케치캔’에 임명되었다. 그들이 6월 13일 화창한 날에 도착했을 때는 태양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홍수가 나서 그 미소를 씻어가 버렸다. 그들은 폭풍우를 어떻게 대처해야 했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3월 중에 비가 내리지 않은 기간은 20분도 못되었다. 우산을 쓰는 것은 어떤가? 지방 관습에 따르면, 남자들은 우산을 쓰지 않는다. 그냥 비를 맞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물론 우리는 ‘레인 코우트’를 입었고, 문앞 계단에서는 머리가 앞으로 기울지 않도록 즉 모자에 고인 물이 전도 가방 속으로 쏟아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종종 우리는 전도 가방을 거꾸로 들고 다녔다. 그리고는 비를 맞지 않는 곳에서 바로 세우곤 하였다.”

선교인들이 ‘케치캔’에 있은 첫해에, 강우량은 523‘센티미터’에 달했다. 이것은 무려 5‘미터’가 넘는 양이다! 이것은 연평균 강우량인 381‘센티미터’ 즉 3.8‘미터’를 능가한 것이다. 전파 사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마른 옷으로 갈아 입으려고 하루에도 여러 번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런 끈기는 비가 몇 방울 떨어진다고 해서 야외 봉사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우리로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만들 수 있다.

배를 이용한 또 한번의 시도

수년간에 걸쳐, 배를 이용하여 증거하는 일은 형제들이 외딴 여러 해안 지역 사회의 사람들에게 이를 기회를 주었다. 이 일에는 바다에서의 위험들이 뒤따랐고, 또 배를 조종하는 데도 꾸준한 경계심과 노련한 기술이 요구되었다.

1948년 가을에는 진리에 관심을 가진 ‘케치캔’의 어부 ‘아바 (니크) 니클즈’가 ‘에리체티’ 형제와 ‘우다아드’ 형제를 아직 왕국 희망이 이르지 않은 마을들로 태워다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12.8‘미터’인 그의 어선 ‘이렌느 D’호를 타고서, 그들은 여러 항구로 갔다. 한번은 폭이 40‘킬로미터’가량 되는 바다를 건너려고 하는데, ‘엔진’이 멈춰 버린 일이 있었다. 바람은 세차게 불고 있었고, 바다는 파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조사를 해보니, ‘배터리’가 충격으로 흔들려 배전기 뚜껑에 산을 쏟아 ‘엔진’이 멈춰 버린 것을 알아냈다. 그 다음에, 시동 장치의 ‘스프링’이 부러진 것이다. ‘에리체티’ 형제는 그날 저녁을 생생하게 이렇게 회고한다.

“뱃전에 거대한 파도가 부딪쳐 꽝꽝 소리를 냈으며 우리는 표류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조종 기능을 상실했다. 우리 모두는 배 멀미를 하게 되었고, 배는 바람 불고 물결치는 대로 표류하고 있었다. 오후 4시경에 표류하기 시작하여 해안 경비정의 탐조등이 우리를 발견할 때까지, 우리는 26‘킬로미터’를 바다에서 표류했던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여호와께 상달되어, 그분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다.” 형제들은 중단하지 않고 계속 증거하였으니, 바다에서의 이러한 위험들도 이들을 중단시키지 못했다.

93세의 노령인 ‘니클즈’ 형제는 현재 고기잡이에서는 은퇴하였지만, 사람을 낚는 일은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가능한 매주 호별 방문 증거를 계속하고 있으며, ‘케치캔’ 회중에서 봉사의 종으로 봉사하고 있다.

황금같은 마음들을 찾는 일

여호와를 섬기는 이들 초창기 “탐광자”들이 “보물”을 찾았을 때 경험한 즐거움이 어떠했겠는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진 이 사람들은 보물과도 같았다. 그들이 여호와의 메시야 왕국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을 때, 그들은 진실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값진 것이 되었다.

‘아네트’ 섬에는 조그만 ‘메틀라카틀라’ 마을이 있다. 단지 ‘침시’족 ‘인디언’ 수백명이 거기에 살고 있을 따름이다. 이들 ‘인디언’ 여인들 가운데 ‘미니 부우드’가 있었다. 그 여인은 친절하고, 온정있고, 말씨가 고운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여호와의 도움으로, 그는 동족의 압력을 담대하게 뿌리치고 나왔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자기 마을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외로운 증인으로서의 입장을 고수했다. ‘부우드’ 자매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진리를 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기쁘게도, ‘부우드’의 가족의 한 친구인 ‘루이스 포셋’이 진실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오늘날까지 계속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다. 하지만, 1971년에 ‘부우드’ 자매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가족 중에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봉사를 계속 축복하셨다. 수년 후, 진리의 씨가 그의 손녀의 마음에서 싹튼 것이다. 그는 그 마을에 있는 가족에게 진리를 다시 가지고 갔다. 오늘날 ‘메틀라카틀라’에는, 15 내지 20명의 행복한 ‘증인’들로 구성된 회중이 하나 있으며, 이 회중은 일부 ‘침시’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집단의 핵심체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은 결과는, 여호와께서 충실한 종들의 초창기 활동을 어떻게 축복해 오셨는지 보여 주는 것이다. ‘부우드’ 자매가 지상에서 부활되어 마침내 그의 사랑의 수고로부터 유익을 얻은 그의 후손들이 그를 맞이할 때 갖게 될 즐거움을 상상해 보라!

최초의 ‘알래스카’ 대회

선교 사업 사상 하나의 이정표가 된 1948년에 ‘알래스카’에서의 최초의 대회를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을 때,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흥분한 사람은 아마 ‘주노’의 ‘비이 부캐논’이었을 것이다. ‘주노’에서 진리를 받아들인 최초의 사람들 가운데 끼여 있었고 물침례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 대회 날은 ‘부캐논’ 자매의 생애에 있어서 특별한 날이었다. ‘부캐논’ 자매는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 다섯 사람은 ‘멘덴호올’ 빙하 바로 앞의 한 웅덩이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가 싸늘한 빙하 물 속에 잠겼던 때를 잊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즐거운 행사를 위해 ‘나단 노워’ 형제와 ‘라이만 스윙글’ 형제가 참석해 있었다. ‘로우즈 해밀턴’ 자매는 이와 같이 회고한다. “어머니들이 침례를 받고 있는 동안, ‘노워’ 형제는 자기 ‘코우트’를 벗어 몇몇 어린이들을 감싸 주었다. 그가 한 일은, 내가 알던 그리스도교국의 종교 지도자들과는 너무나 판이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주에서 방문한 몇 사람을 포함하여 참석한 총 63명과 함께, 형제들은 하나의 새로운 시대—‘알래스카’ 구역 내에서의 대회들—의 시작을 목격한 것이다.

그 이전에는, 대회에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랫 지역의 48개 주 가운데 하나나, ‘캐나다’로 여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이제는 바로 우리 자신의 뒷뜰에서 대회들을 즐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거리가 멀고, 지형이 험준하고, 도로가 부족하고, 섬 지역 사회들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장애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러한 모든 불리한 여건 속에서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만일 4인 가족이 제때에 ‘알래스카’ 내에서 열리는 대회로 여행할 경우, 아버지는 한 대회를 위한 여행 비용만도 최소한 500‘달러’(한화로 40만원)를 부담해야 했다. (오늘날, 그 비용은 훨씬 더 많이 든다.) 한편, 해안 고속도로나 연락선을 이용하기로 한다면 비용이 좀 적게 들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여행하는 데 여러 날이 더 소요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장은 세속 직장을 쉬는 가외의 날들 때문에 비용을 부가적으로 더 부담하게 될 것이었다. 대회 참석자 수는 형제들이 대회를 감사히 여기고 있으며 또 기꺼이 희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러 해 동안, 함께 모인 사람들의 수는 회중과 연합한 전도인들의 수를 훨씬 능가하였다.

‘유콘’ 지방

‘캐나다’의 ‘유콘’ 지방은 지금 ‘알래스카’ 지부 사무실이 돌보고 있다. 이 방대한 ‘노오드랜드’ 지역은 면적이 518,000평방 ‘킬로미터’가 넘으며, ‘알래스카’의 3분의 1 정도이다. 25,000명이 좀 못되는 인구는 주로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교인들이다. ‘유콘’의 지리적인 특징은, 만년설이 덮인 산들이며 풍부한 야생동물 등으로 ‘알래스카’ 내륙 지방과 비슷하다. 이 이웃 땅에서의 영적 계몽은 ‘알래스카’에서의 계몽 활동과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사실상 1897-98년에는, 온 세계가 ‘유콘’ 강 일대에서 금이 발견됨으로 인하여 눈을 번쩍 뜨게 되었다. 당시 ‘클론다이크’ 금광지로의 쇄도가 절정을 이루었을 때, 수만명의 사람들이 ‘유콘’ 지방으로 몰려들었다. 몇몇 금을 찾는 사람들이 ‘협회’의 성서 서적을 몇권 가지고 왔다. 그 기간 중에 북쪽으로 갔던 한 변호사는 형제들에게 그가 좋은 사람이며 개인적으로 친구인 ‘J. F. 러더포오드’에게서 서적을 선물로 받았다고 말했다.

한 두 차례의 산발적인 비공식 증거를 한것 외에, 이 구역은 ‘터론토’ 지부가 ‘유콘’에 ‘파이오니아’들을 파견한 1951년까지 사실상 손대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앨런크리치’ 형제와 그의 짝인 ‘조셉 호오리룩’은 이 방대한 광야의 구석구석을 여행하였다. ‘크리치’ 형제는 단지 말린 생선과 오얏으로만 식사를 했던 외딴 구역에서 보낸 날들을 회고한다.

‘시드 드레빗’ 형제는 ‘화이트호오스’ 회중의 첫해를 회상한다. 그때 그는 옥외 천연 웅덩이에서 침례를 받았고, 기온은 섭씨 영하 29도였다. 하지만 그 웅덩이는 ‘화이트호오스’ 근처에 있는 천연 온천이었기 때문에, 따스하고 기분이 좋았다고 싱글거리면서 그는 덧붙였다. 그의 침례가 ‘유콘’ 지방에서의 최초의 침례였다는 점에서, 이것은 이정표가 되는 사건이었다. 한때 열심히 교회에 나갔던 ‘드레빗’ 형제의 어머니와 한때 공산주의 강사였던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누이 동생이 모두 진리를 받아들였고, 여호와께 그들의 헌신을 상징하였다.

‘드레빗’ 형제의 다음과 같은 말은 형제들이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압력들 가운데 몇 가지를 알려 준다. “가두 봉사를 하고 있는데, 자동차 ‘갱’단이 차를 몰고 가까이 와서는 저주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물건들을 집어 던지곤 하였다. 거리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구타하겠다고 협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확고함을 유지하면서 계속 충실히 봉사하였고, 이전 어느 때보다 더욱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격리되어 있는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드레빗’ 형제는 이와같이 계속 말한다. “그 당시 우리는 순회 감독자를 1년에 한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버스’ 운행이나 다른 교통 수단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항공편이라야 주로 군용이었다. 가장 가까운 회중이 1,477‘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으니, 우리는 스스로 열심히 연구하고 봉사를 계속 진행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편물이 우리에게 도착하는 데는 이따금씩 수개월이 걸리곤 하였다.” 이러한 격리로 초래된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선, 여호와와의 강력한 관계가 필요하였다.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함

‘알래스카’는 이제 막 여호와의 조직의 또 다른 자원으로부터 개인적인 주의를 받으려 하고 있었다.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는 일은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할 수 없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파이오니아’들을 위한 봉사의 대로가 되었다. 1959년에 여러 가족과 개인들이 ‘알래스카’에 정착하라는 초대에 응하였다. 이제 영적 발전을 위한 길에 불이 붙게 되었으니, 여호와의 이들 헌신한 찬양자들은 새로 침례받은 형제들을 위해 필요한 안정과 꾸준한 훈련을 베풀어 왔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들 가족들 중 여러 가족은 형제들을 계속 강화시키고 있으며, ‘알래스카’를 그들의 고향으로 삼았다.

지부 사무실이 개설되다

1960년대의 10년 동안, ‘알래스카’와 ‘유콘’에서의 선교인들의 역할은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영적 정신을 가진 형제 자매들의 강력한 집단들이 조직되었다. 1961년에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은 이들 멀리 떨어져 있는 집단들을 더욱 가까이 함께 모을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앵커리지’의 지부 사무실이 이 일을 수행할 것이었다. ‘밀튼 헨첼’ 형제가 방문하였을 때 마련들이 계획되었고, 1961년 9월에는 ‘앤드류 K. 와그너’가 지부 감독자로서 새로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도착하였다. ‘캐나다’의 ‘유콘’ 지방은 ‘알래스카’ 지부 사무실이 돌보게 되었고, 두 나라에서 온 형제 자매들이 함께 모이므로, 국제적인 냄새를 풍기는 순회 대회들이 마련되었다. ‘캐나다’로부터 온 순회 감독자 ‘톰 디두어’ 형제는 여러 해 동안 ‘앨버어타’ 북부, ‘브리티시 컬럼비아’, ‘유콘’ 및 ‘알래스카’ 북부 전역에서 봉사하였다. 새로 형성된 지부 감독하에 그의 임명은 ‘알래스카’와 ‘유콘’에 집중되었다.

‘알래스카’ 지부의 즉각적인 유익은 ‘협회’에 보낸 ‘와그너’ 형제의 다음과 같은 보고서에 설명되어 있다. “금년[1962년]에 있은 증가의 상당 부분은, 지방 지부가 제공할 수 있는 사업을 보다 가까이서 감독함으로 가능하게 된 양치는 일의 개선 결과로 이룩되었다. 또한 격리된 탓으로 약하다고 느꼈던 다수의 사람들이 크게 장성했다는 증거도 있다.” 한 감독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까지 우리는 다른 회중들과 본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소 고아처럼 느꼈읍니다.”

‘우다아드’ 형제가 1963년에 ‘알래스카’를 떠나자, 최초의 선교인들 중에서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1964년에 ‘노워’ 형제는 ‘에리체티’ 형제에게 편지하여, 그를 ‘브루클린 벧엘’로 초대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그 날까지 계속 봉사하고 있었다. 자기 임명에 충실히 고착한 ‘에리체티’ 형제는 이와 같이 말했다. “‘알래스카’는 20년 동안 나의 임명지였고, 나는 그곳을 대단히 좋아했다. ‘우다아드’ 형제와 나는 어려운 때가 좀 있기는 하였지만, 우리의 인자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항상 우리가 헤쳐 나가게 해주셨다.” 과연 그 말은 참되지 않았는가! 이들 두 형제는 ‘알래스카’에서 봉사한 전체 기간에 걸쳐 특히 탁월한 재간이 있음을 나타냈다.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는 것에 대해 그들이 모른 것은 거의 없을 정도였고, 그들은 그 당시의 거칠고 대접이 좋지 않은 구역에 적합한 이상적인 종들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형제들을 격려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형제들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왕국 활동에서의 그들의 열심을 본받았다. 이들 두 사람은 확실히, 이 마지막 날에 자신의 안일을 즐길 시간이 없다는 것을 열정적인 봉사로 증명하였다.

왕국회관들을 건축하는 일

선교인들에 의해 세워진 회중들의 영속성은 이제 ‘알래스카’ 전역에서 솟아나는 새로운 왕국회관들에서 나타났다. ‘페어뱅크스’에서는 염소 우리를, ‘화이트호오스’에서는 조립 막사를, ‘코디액’에서는 오두막을 왕국회관으로 개조한 후에, 집회 장소들은 사람의 마음을 끄는 밝고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왕국회관들은 여호와의 백성들이 계속 있을 것이라는 증거였다! 건축업에 재능이 있는 형제들은 왕국회관들을 건축하는 여러해 동안 특히 분주하였다.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그해(1959년)에 도착한 “59명” 중에 한 사람인 ‘R. C. 데일리’ 형제는 그러한 공사들 중 적어도 여덟 개를 감독하였다. 이 기간은 사무실, ‘어파아트’ 그리고 250명이 앉을 수 있는 왕국회관을 포함한 ‘앵커리지’의 아주 매력적인 지부 시설의 건축 공사로 절정을 이루었다. 오늘날 ‘알래스카’ 지부 구역에는 왕국회관이 13개 있다.

‘알래스카’의 지진

당시 우리 형제들은 구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마지막 날에 살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 부지런히 봉사하였다. 흔히 집주인들은 회의와 의심을 표명하였다. 뜻밖에, “처처에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이곳 북쪽 지방에서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다. (마가 13:8) 1964년 3월 27일에, ‘알래스카’가 전에는 결코 없었던 지진으로 흔들린 것이다! 일부 과학자들에 의해 ‘리히터’ 지진계로 강도 8.6으로 측정된 지진이 이제까지 북미에 기록된 어떤 지진보다도 강한 충격을 주며 강타한 것이다. 그 지진은 알려진 어떤 다른 지진보다 땅을 더 심하게 진동시켰다. ‘앵커리지’, ‘슈우어드’, ‘코르도바’, ‘밸더즈’ 및 ‘코디액’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고, 115명의 ‘알래스카’인들이 사망하였다. ‘코디액’에 있던 왕국회관이 바다로 휩쓸려 들어갔지만, 형제들의 재산에는 약간의 피해가 있었을 뿐이다. 그 사건 후에는, 주민들이 지진이 있으리라고 한 예수의 표징의 일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거의 없었다.

지부 운영의 변화

형제들이 ‘와그너’ 형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슬퍼한 것도 지진이 있은 바로 그해였다. 그의 친절하고 아버지같은 태도는 1965년에 ‘제임스 A. 밀러’ 형제의 활력과 열심으로 대치되었다. ‘밀러’ 부부는 그들이 가족을 부양하기 시작한 1969년까지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였다. ‘협회’는 ‘P. 제럴드 론코’ 형제를 지부 사무실에 임명하였으며, 그는 두명의 다른 지부 위원 ‘랠프 링’과 ‘포올 디이센’의 지원을 받아 지부 위원회 조정 위원으로 계속 봉사하고 있다.

‘론코’ 부부는 ‘알래스카’에서의 왕국 사업 확장에 훌륭한 몫을 담당해 왔다. 그들이 지금까지 그곳에서 약 14년 동안 봉사해 왔으며 새로운 사람들을 돕는 데 매우 효과적이 되어 왔다. 이들 두 사람은 33명이 진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도왔다. 그들의 생활은 여호와의 봉사에서 진실로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있으며, 그들은 누구에게나 큰 관심을 갖는다. ‘론코’ 형제가 나타내는 탁월한 특성 하나는, 문제를 가진 사람은 누구든 항상 그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그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누구든 그의 개인적인 그리고 회중적인 문제들을 듣는 데 수백 시간을 바쳤다. 그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필요할 때 접근할 수 있다고 느끼게 하는 매우 온화하고, 쾌활하며 마음을 끄는 개성을 갖고 있다.

순회 여행

여행하는 감독자들의 꾸준한 도움은 형제들을 세워 주고 훈련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63년에서 1979년까지 ‘로버어트 L. 하아트만’ 형제는 ‘알래스카’와 ‘유콘’ 지방의 회중들을 충실하게 방문하였다. ‘하아트만’ 형제는 이와 같이 회고한다. “내가 1963년 2월에 순회 사업을 시작하였을 때, ‘알래스카’와 ‘유콘’에는 428명의 전도인들이 10개 회중에 흩어져 있었다. 여러 가지 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회중들과 격지 전도인들을 방문하는 일에는 흥미있는 도전이 따랐다. 순회 감독자로부터 세움을 받을 필요가 있는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방문하기 위해, 나는 자동차, 민간 ‘제트’ 여객기, 소형 지방 노선 항공기, 연락선 및 어선 등을 이용하였다.”

그는 ‘알마 로그린’ 자매와 그의 십대 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들은 거센 사람들이 사는 임업 및 어업 도시인 ‘랑겔’에서 유일한 ‘증인’들이었다. 그들을 방문하는 데 지방 노선 항공기를 이용하면 비용이 많이 들었고, 연락선을 타고 가면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리고 낡은 하숙집에서 숙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호별 방문 전파에 그리고 재방문과 성서 연구에 ‘로그린’ 자매와 그의 아들을 동반하였으며, 모두 걸어다녔고 종종 비를 맞아 흠뻑 젖으면서 그렇게 하였다. 하지만 큰 회중들처럼, 이들 두 사람도 방문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한번은 방문할 때, ‘랑겔’행 지방 노선 항공기가 ‘싯카’에서 이륙한 것을 이렇게 회고한다.

“여행을 중간쯤 했을 때 사방에는 험준한 산들과 섬들이 있고 우리 밑에는 ‘인사이드 패시지’의 소금물이 흐르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는 거센 폭풍우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조종사는 180도 급선회를 하여, 우리가 왔던 길로 향하였다. 강풍과 비는 비행기의 꽁무니를 강타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너무 심한 급선회를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괴물같은’ 폭풍우를 만나 추격을 당하고 있는 만화 속의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되었다. 하지만 ‘알래스카’의 지방 노선 조종사들은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서쪽으로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여러 섬 위를 돌면서, 폭풍우가 그리 심하지 않는 통과 지점을 찾고 있었다.

“우리가 이 에움길을 따라 가는 동안, 폭풍우는 우리를 아래 수면으로 점점 더 가까이 내려가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조종사는 수면의 60‘미터’ 상공을 스쳐 지나면서, 서서히 전진하였다. 몇 ‘미터’ 떨어져 있는 해안선을 이루는 산에 얼마나 가깝게 접근했는지 보기 위해 그가 옆 창문을 열었을 때, 나는 우리가 ‘랑겔’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안 되어 앞의 안개 속으로, 나는 해변에서 자동차를 한대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세 사람의 희미한 모습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로그린’ 자매가 시골 착륙 지점에서 비행기를 마중하기 위해 ‘택시’를 빌려와서 그렇게 적적하게 서 있는 것이었다. 그 주의 나머지 기간에 우리는 빗속을 걸어다니면서 야외 봉사를 하였다. 어쨌든 우리는 무사히 착륙한 것이다.”

‘하아트만’ 형제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조그만 그 도시 사람들은 누구나, ‘로그린’ 자매가 구역을 걸어다니면서 성서 교육 사업을 하는 것을 보곤 하였다. 그 자매는 남편이 마침내 보다 회중에 가까운 곳으로 이사할 때까지, 수년 동안 이 외딴 도시에 살면서 계속 충실하게 봉사하였다. ‘알래스카’에서 그러한 충실한 형제 자매들을 16년 이상 섬길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형언할 수 없는 특권이었다. 여러 번 폭풍우와 섭씨 영하 51도의 기온 속에서 내가 여행한 것은 400,000‘킬로미터’가 넘지만, 순회구의 형제들을 만나고 ‘로그린’ 자매가 가졌던 것과 같은 믿음과 성실을 그들과 함께 나누는 것은 최상의 축복들 중의 하나이다. 내가 1979년에 ‘알래스카’를 떠날 무렵, 좋은 소식의 전도인 수가 23개 회중에서 1,240명이 넘는 것을 보는 것은 실로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 ‘하아트만’ 형제는 미국 지부의 감독 아래 여행하는 감독자로 계속 봉사하고 있다.

멀리 떨어진 구역에 이르는 일

‘유콘’ 지방과 ‘알래스카’ 밭의 80‘퍼센트’가 정기적으로 증거를 받고 있다는 것은 즐거운 보고이다. 지부에 속하는 전 주민의 절반 이상이 ‘앵커리지’와 ‘페어뱅크스’에 거주하며 그 나머지가 다른 수개 도시에 거주하는 가운데, 현재 형성된 26개 회중은 지금 사람들 앞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지키고 있다. 여름이나 겨울에도 증거하는 일은 결코 느슨해지지 않는다. 기온이 섭씨 영하 45도 이하로 떨어질 때에도, 형제들 대부분은 편지 봉사를 하거나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재방문을 한다.

‘알래스카’의 형제들은 멀리 외딴 마을에 사는 인구의 20‘퍼센트’를 차지하는 사람들을 잊지 않고 있으며, 그들의 관심은 그러한 사람들도 왕국 희망과 접하게 해주는 것이다. 주요 도시로 연결되는 도로 시설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든다. 1970년에 지부 사무실은 지방적으로 격지로 갈 마련을 하라는 요청과 함께 임명되지 않은 구역을 회중들에게 분배해 주었다. 이 요청에 호응하여, 1970년 9월에 두명의 근면한 자매가 ‘알래스카’ 내륙의 외딴 주민들에게 가서 자기 본분을 다하기를 원하였다. 이 두 자매 중 한 사람은 이미 ‘베델’의 ‘에스키모’ 마을에서 ‘파이오니아’를 한 경험이 있었다. ‘에스키모’ 언어에 대한 그의 제한된 지식에 의존하고서, 그들은 민간 거룻배를 타고 출발하여 ‘커스코퀴임’ 강을 따라 올라갔다. 도중에 그들은 생선이나 말린 물고기를 서적과 교환하기도 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옥외 ‘텐트’에서 잠을 자기로 하였지만, 추위 때문에 실내 숙소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한 열렬한 노력으로 그들은 15개가 넘는 마을에서 증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거룻배를 타고 800‘킬로미터’ 이상 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봉사를 해야 했다. 그들은 1,6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그렇게 여행하는 동안, 많은 서적을 전하였으며 훌륭한 증거를 하였다.

1973년에 이 자매들 중 한 사람과 그의 남편은 침낭과 ‘텐트’를 준비하여 가서 3주일을 보내면서, 더 많은 ‘에스키모’인들에게 왕국 소식을 전하였다. 그들은 여러 마을 주민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으며, 말린 물고기와 어두(魚頭) ‘수우프’ 그리고 오리고기 ‘수우프’를 대접받기도 했다. 전한 잡지는 500부가 넘었고, 100건이 넘는 예약을 맡았다. 그러한 열심은 본이 되었다. 하지만, 이 자매는 그러한 추진력을 어디서 얻었는가? 그의 가족이 그러한 초창기 선교인들로부터 진리를 배웠던 것이다.

외딴 마을로의 또 다른 진출은 비행기로 하였다. 형제들은 변경 지역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때는 고기잡이를 거의 하지 않는 겨울철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겨울 폭풍 때문에 비행은 위험하다. 그러한 조종사들 중 한 사람은 이렇게 설명한다.

“‘노움’ 부근과 ‘베링’해 주변 지역은 심한 착빙 현상과 ‘화이트아우트’ 상태로 유명하다. ‘화이트아우트’ 상태는 거의 사전 경고 없이 흔히 약간 흐렸다가 눈이 내리는 것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무서운 적이다. 그러나 순식간에 모든 것이 백색으로 변해 버린다. 조종사는 눈을 크게 뜨고, 눈 속을 응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종사는 방향을 잃고, 상하가 어느 쪽인지도 분간할 수 없게 된다. 그 다음에는 현기증이 생기므로, 조종사가 산을 들이받거나 땅에 추락하기가 쉽다. ‘알래스카’의 다른 어느 지역에서보다 이 지역에서 실종되는 조종사가 더 많다.” 이러한 위험에도 아랑곳없이, 형제들은 2년 이상 844,000평방 ‘킬로미터’를 다니면서 200개가 넘는 마을들을 방문한 것이다.

3대의 비행기를 갖고 변경 구역으로 가서 봉사하는 11명의 ‘증인’들의 비용을 충당하도록 돕기 위하여, 지방 형제들이 기부한 금액은 14,000‘달러’(한화로 1,120만원)나 되었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여호와를 섬기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르려는 노력을 지원하는 이 얼마나 관대한 영의 증거인가!

제자를 삼는 사업에서 모든 ‘알래스카’에 이르기 위한 또 하나의 계획으로, 지부 사무실은 「깨어라!」와 「파수대」 견본을 우편으로 보내는 마련을 하였다. 한해 동안 미국 지부가 ‘알래스카’ 지부를 위해 마을들에 우송한 잡지는 약 18,000부나 되었다. 모든 마을은 우편으로나 개인 방문을 통해 왕국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1983년 초에 ‘알래스카’ 지부는 외딴 변경 마을들에 대한 광범위한 증거 계획을 다시 한번 시도하였다. 10대 이상의 민간 비행기를 이용하여, 좋은 소식을 갖고 63개의 마을에 이르기 위한 계획들을 세웠다. 23,000명 이상의 ‘에스키모’, ‘인디언’ 그리고 ‘알류우트’인들이 하나님의 왕국 아래서 즐길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대해 배울 참으로 훌륭한 기회였다! ‘알래스카’ 구역은 면적이 약 1,525,000평방 ‘킬로미터’이고, 가장 큰 지역이 도로를 이용하여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변경 지역에서 증거한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1983년 5월에는 형제들이 비행기를 타고 7,720‘킬로미터’ 이상을 여행하여 17개 마을로 갔다!

하지만, 수년에 걸쳐 형제들은 인구가 밀집된 도시와 읍들에서 집중적으로 봉사할 때 제자 삼는 일이 아주 생산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 전파 사업에 가담하는 새로운 사람들은, 선배들이 인내해야 했던 원시적인 생활 상태와 더는 싸울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 대신 그들은 이제 증거 사업을 수행하면서 현대 생활 방식의 유익들도 즐길 수 있다.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에서 나오는 “큰 무리”

우리는 적어도 소수의 ‘인디언’과 ‘에스키모’ 원주민들이 진리에 호응해 온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한다. 계시록 7:9과 일치하게 이들은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곧 ‘알래스카’와 ‘유콘’에서도 나오고 있다. 원주민들은 상냥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격이 까다롭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기본적인 생활 필수품으로 만족한다. 지구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은 수천명의 쌀배급 교인들을 산출해 왔다. 교직자들은, ‘에스키모’인들과 ‘인디언’들이 소위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되지 않는 미신과 관습들에 고착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종교심이 강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교리로 만족해 왔다. 다른 많은 거주자들은 단순히 ‘알코올’과 마약 남용의 희생자들이 되었는가 하면, 전혀 종교적인 성향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형제 자매들 가운데서 여러 부족이 모인 것을 보고, 또 그들이 진리를 참으로 인식하고 진리를 위해 열심을 내는 것을 보는 것은 실로 즐거운 일이 아닌가! 이들이 자기 종족의 관습의 사슬을 끊고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실로 여호와의 영이 작용했다는 증거가 아닌가!

우리 형제들이 서적을 많이 전한 것뿐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들이 보인 참 그리스도교의 본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조직 안으로 들어오도록 돕는 데 크게 기여해 왔다. 우리는 서적을 “‘톤’으로” 전한 초창기 ‘파이오니아’들의 사업을 회고해 보며, 계시록 9:16-19의 상징적 “말들”이 어떻게 이 광대한 땅의 구석구석으로 침투해 들어갔는지 인식하게 된다. 지난 10년 동안 250만부의 「파수대」와 「깨어라!」가 이곳에 배포되었는가 하면, 맡은 예약도 14,000건이 넘었다!

1961년에 ‘알래스카’ 지부 사무실을 개설한 이래로, 1983년 4월까지 찬양자들의 수는 4배 이상으로 증가하여 1,574명의 신기록에 달했다. 이들은 2개의 순회구로 나누어진 26개 회중으로 돌보아지고 있다. 1983년 2월의 134명의 정규 및 보조 ‘파이오니아’는 최고 신기록 전도인 수의 9‘퍼센트’에 해당하였다. 여호와를 찬양하는 웅대한 함성은 인구 292명 대 전도인 1명의 비율로 외쳐지고 있다. 1983년의 기념식 참석자 수는 4,033명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더 나은 생활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계속 북쪽의 ‘알래스카’로 이주해 오고 있다. 이 “거대한 땅”이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않을 때 많은 사람들은 실망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부자가 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들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는, 여호와께서 만드신 영적 낙원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지난 10년 동안 ‘알래스카’ 지부 감독하에 이곳 구역에서 여호와께 헌신한 사람은 1,017명이나 된다. 다수는 아랫 지역의 48개 주에 있는 고향으로 되돌아가, 그들이 새로 발견한 영적 축복의 부를 가족이며 벗들과 함께 즐거이 나누었다.

북쪽으로 여행한 다른 사람들처럼, 여호와의 백성들도 보물을 찾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찾고 있는 보물은 땅속에 묻혀 있는 황금이나 검은 황금이 아니다. 그들은, 참된 부는 사람들의 생활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언자 ‘학개’는 여호와께서 참 숭배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만국의 보배”로 보신다는 것을 알려 준다. 지구의 이 끝에 있는 형제들은 이 만국의 보배를 돌보는 특권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하고 있으며, ‘알래스카’와 ‘유콘’ 땅에서도 더 많은 보배가 나와 그분의 성전을 영광으로 충만케 하시기를 기도한다.—학개 2:7.

[133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알래스카

노움

유콘 강

커스코퀴임 강

베델

페어뱅크스

맥킨리 산

탈키트나

파머

앵커리지

밸더즈

코르도바

케나이 반도

슈우어드

말라스피나 빙하

세인트 일라이애스 산맥

스캐그웨이

멘덴호올 빙하

후네이

주노

싯카

랑겔

케치캔

메틀라카틀라

아네트 섬

코디액 섬

코디액

베링 해

알류산 열도

유콘 지방

화이트 호오스

[134면 삽화]

1948년에 ‘노워’ 형제가 ‘알래스카’에서 봉사하는 선교인들을 방문하였다.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메어리 테츨라프’, ‘아베 테츨라프’, ‘허어몬 우다아드’, ‘차알스 곤트’, ‘랠프 바크만’, ‘제임스 오드햄’, ‘존 에리체티’, ‘나단 노워’, ‘스텔라 오드햄’, ‘아다 곤트’, ‘로레인 데이비스’, ‘버어노 데이비스’, ‘글라우디아 호프만’, ‘해롤드 호프만’

[136면 삽화]

‘케치캔’에서의 ‘허어몬 우다아드’와 ‘존 에리체티’. 이들은 “사내들”이란 애칭으로 불리웠다

[143면 삽화]

은퇴한 ‘케치캔’의 어부 ‘아바 (‘니크’) 니클즈’는 93세의 노령에도 사람을 낚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144면 삽화]

‘알래스카’에서의 최초의 침례—1948년에 ‘멘덴호올’ 빙하 앞에서 거행되었다

[149면 삽화]

사무실, ‘어파아트’ 그리고 250명이 앉을 수 있는 왕국회관을 포함한, ‘앵커리지’에 있는 지부 시설

[150면 삽화]

‘알래스카’ 최초의 지부 감독자인 ‘앤드류 K. 와그너’와 그의 아내 ‘베라’

[152면 삽화]

현 지부 위원회 조정 위원인 ‘제럴드 론코’와 그의 아내 ‘루시’

[155면 삽화]

16년 이상 ‘로버어트 L. 하아트만’은 온갖 종류의 일기 속에서 모든 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광범위하게 여행하면서, 순회 감독자로서 ‘알래스카’ 형제들을 섬겼다

[156면 삽화]

비행기로 변경 구역으로 봉사갈 준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