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와 이웃 섬들
피지와 이웃 섬들
수많은 섬 나라들이 광대한 남 태평양 속에 묻혀 거의 잊혀져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과 남‘아메리카’ 사이에, 수백개의 작은 섬들이 대양의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다. 떨어져 있고 평화스럽고 따뜻하고 매혹적이면서, 항시 푸른 야자수를 포함한 무성한 초목으로 옷입고 있는 남 태평양의 섬들은 흔히 방문객들에 의해 “작은 낙원”으로 묘사되어 왔다.
이들 섬들 중 얼마는 해면에서 불과 몇 ‘미터’ 정도 솟아 있는 산호섬에 불과하다. 화산 폭발이나 지진으로 인하여 대양의 바닥으로부터 솟아오른 보다 큰 섬들에는, 높이가 1,800‘미터’ 이상인 산들이 있는가 하면 상당히 큰 강들도 흐르고 있다. 해안
주거 지역 주변에는 규모가 몇개 가족에서 수백명에 이르는 거민들이 사는 작은 원주민 마을들이 보통 강변이나 시냇가에 흩어져 있으며, 좀더 큰 마을과 도시들도 있다.종교 면으로는 감리교, ‘런던’ 선교회, ‘로마 가톨릭’ 그리고 성공회 조직들이 이들 섬에서 우세하다. 그리스도교국의 선교인들이 1800년대에 도착하였고, 최근에 와서는 보다 작은 여러 ‘프로테스탄트’ 단체들이 이곳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남 태평양 섬 사람들
얼마 전에는 섬들이 나머지 세상과는 아주 격리되어 있었다. 그때 이곳에는 비행기 운행도 없었다! 바깥 세상과의 연락은 아마 한달에 한번이나 있을까 하는 여객선과 화물선이 드물게 찾아오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섬 사람들은 ‘멜라네시아’인, ‘미크로네시아’인 및 ‘폴리네시아’인 등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기본적인 태도가 비슷하다. 그들은 우정적이고, 태평이고 되는대로의 생활 방식으로 매일매일을 즐기면서, 이 세상의 물질적인 이기가 그리 없어도 만족해 한다. 원주민들이 인생을 보는 방식은 흔히, 물질적으로 앞서려고 하는 대부분의 ‘유럽’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실망을 안겨 준다.
광범위한 밭에서의 사업을 조절함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오스트레일리아’ 지부는 1904년에 설립된 이래 남 태평양 전반에 걸쳐 사업을 지도해 왔으며, 이 감독은 ‘피지’의 수도 ‘수바’에 지부 사무실이 설립된 1958년까지 계속되었다.
새로운 지부의 감독하에 들어온 나라들은 ‘피지’, ‘뉴우칼레도니아’ 섬, ‘바누아투’(이전의 ‘뉴우헤브리디이즈’ 제도), 서 ‘사모아’, ‘아메리칸 사모아’, ‘통가’, ‘니우에’, ‘타히티’, ‘투발루’(이전의 ‘엘리스’ 제도), ‘키리바티’(이전의 ‘길버어트’ 제도), ‘토켈라우’ 제도 그리고 ‘쿡’ 제도였다.
남 태평양에서의 왕국 사업 발전에 방해가 된 한 가지는 여러 섬 구역들이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지부 구역의 다른 섬들과 관련하여 중앙에 위치한 ‘피지’는, 다른 섬들이 마치 거대한 바퀴의 살처럼 바깥으로 뻗어나간 바퀴통의 중심과 같다.
그래서 ‘피지’에서 동쪽으로 약 700‘킬로미터’ 여행하면 ‘통가’, 960‘킬로미터’ 가면 ‘니우에’ 그리고 3,540‘킬로미터’ 가면 ‘타히티’에 이르게 될 것이다.‘피지’에서 동북으로 1,350‘킬로미터’ 나아가면, ‘사모아’ 제도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피지’에서 북으로 약 1,100‘킬로미터’ 가면 ‘투발루’ 제도가 자리잡고 있고, ‘투발루’에서 또 북으로 그 정도의 거리를 가면 ‘키리바티’ 섬들의 주요 집단이 있다. ‘피지’에서 서쪽으로 960‘킬로미터’ 이상 가면 ‘바누아투’에 이르게 되고, 1,120‘킬로미터’ 가면 ‘뉴우칼레도니아’에 도착하게 된다. 구역은 동에서 서로 약 4,800‘킬로미터’가 넘는 대양 위에 널려 있다! 날짜 변경선 때문에, ‘피지’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의 죽음의 기념식을 매년 제일 먼저 지키게 되고, ‘사모아’의 ‘증인’들은 약 23시간 후인 맨 나중에 지키게 된다.
‘피지’ 지부는 한때 12개 나라의 왕국 사업을 감독하여, 한 지부로서 가장 많은 나라를 감독하였다. 이곳 지부 사무실은 13개 주요 언어를 취급하였다. 순회 및 지역 감독자들은 끊임없이 이민 법규에 대처하며 무려 4,800‘킬로미터’나 되는 구역의 양끝 사이를 여행하였다.
이러한 제도들에서의 좋은 소식 전파 사업에 대한 얼마의 통찰력을 얻기 위하여, 각 제도의 배경을 얼마간 살펴보기로 하자. 그러면 우리는 좋은 소식의 전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여호와의 인도의 손길 아래 오늘날까지 발전해 온 경위를 알게 될 것이다. 가장 큰 섬인 ‘피지’로부터 시작하겠다.
‘피지’ 제도
‘피지’ 제도에는 섬이 300개 이상 있으며, 이 중에 3분지 1정도의 섬에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 이 제도의 총 대지 면적은 18,275평방 ‘킬로미터’이다. 한때 영국의 직할 식민지였던 이 제도는 1970년부터 자치국이 되었다. 이 제도는 아름다우며 산들도 있고 토양이 비옥하다.
‘피지’인들이라고 불리는 원주민이 인구의 약 40‘퍼센트’를 차지한다. 이들은 피부색이 검은 ‘멜라네시아’인 후손이다. 이전에는 몹시 사납고 전쟁을 좋아하는 식인종(한때 ‘피지’는 식인종 제도로 알려졌음)이었던, 이들이 이제는 개화되었으며,
대부분이 개종하여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인구의 약 50‘퍼센트’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도록 인도에서 데려온 노동자들의 후손이다. 많은 ‘인디언’들이 아직도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긴 하지만, 다수는 이제 상점을 운영하거나 사업을 하고 있다. 소수의 중국인들뿐 아니라 그 수가 줄고 있는 ‘유럽’인들이 있으며, 거의 모두가 남태평양의 다른 섬들에서 온 집단들이 있다. 그래서 ‘피지’는 실로 혼합 인종의 나라가 되었다.
수도인 ‘수바’는 신속히 발전하고 있는 도시로서 인구는 100,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피지’의 현재 총 인구는 600,000명이 넘는다. 거민의 절반 가량은 ‘힌두’교인이거나 회교도이며, 그 나머지는 그리스도교국의 20개 분파에 속해 있다.
‘피지’가 좋은 소식을 듣다
좋은 소식이 어떻게 하여 이 제도에 이르게 되었는가? ‘워치 타워 협회’의 출판물 중 얼마가 일찌기 금세기의 첫 10년이 되기 전에 ‘피지’에 들어간 것 같다. 최초의 활동적인 ‘여호와의 증인’이 1913년에 도착하였다. 그의 고용주가 그를 ‘스리랑카’에서 이곳으로 파견한 것이다. 휴가 때, 이 형제는 미국으로 가서 성경 연구생들의 한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창조 사진극」을 가지고 와서, ‘피지’에서 만원을 이룬 관중들에게 그것을 보여 주었다. 강연들이 ‘피지’어로 번역되었고, 도시와 시골 지역에서 영화를 상영하였다.
그러한 한 상영에 관해, 「피지 타임즈」는 1915년 6월 28일자에서 이렇게 논평하였다. “이 일련의 종교 영화의 제 2부가 어젯밤 ‘유우니버어설’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오후 6시 30분경부터 수백명이 우체국 입구와 포장 도로 위에 장사진을 치거나, ‘이비’ 나무(이곳 토산의 밤나무) 아래 무리를 지어 서 있었다. 극장 문은 오후 7시 30분에 열렸고, 5분 만에 ‘호올’은 만원이 되었다.” 이 후에 거의 15년 동안은 전파에 대한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다.
두 ‘파이오니아’가 많은 서적을 배포하다
1930년에 ‘앤디 오크터로니’와 ‘A. L. 맥그리고’가 이 제도에 도착하였다. ‘수바’에서 호별 방문 봉사를 한 후, 그들은 배를
타고 ‘수바’에서 해안을 돌아 주도(主島)인 ‘비티 레부’(‘빅 피지’)의 서쪽 부분으로 여행하였다. 그들은 이 섬 전역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성서 서적을 다량 전하였고, 대화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였다.한 ‘피지’인 안내자와 통나무 배의 도움으로, 그들은 ‘비티 레부’의 내륙으로 여행하였고 ‘피지’어판 소책자를 수백부 전하였다. 그들은 또한 ‘피지’ 제도에서 두번째로 큰 ‘바누아 레부’(‘빅 랜드’) 섬에서도 전파 활동을 수행하였다. 배를 이용하여, 그들은 그곳에서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서적을 배포하였다.
결실을 보다
열매를 맺은 한번의 접촉은 ‘레오나드 히이틀리’의 가족을 만난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나의 아버지 ‘에드워드’는 부모의 한쪽이 ‘피지’인이었기 때문에, 영어와 ‘피지’어 두 가지를 아주 잘 하였고, 여러 기관을 위해 번역을 해 주고 있었다. 그는 「지옥」 소책자를 번역해 달라는 현금 지불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소책자의 번역을 끝마쳤을 때 나의 아버지는 이미 진리를 받아들인 때였으므로, 그 일로 돈 한푼 받지 않았다! 그는 ‘가톨릭’ 교회에서 탈퇴하였고, 1959년 죽는 날까지 왕국 사업의 충실한 지원자로 봉사하였다.
“그는 6권의 소책자와 「구출」 책 그리고 ‘러더포오드’ 형제의 여러 녹음된 ‘레코오드’ 성서 강연을 ‘피지’어로 번역하였다. 이 강연들을 ‘피지’어 ‘레코오드’로 만들어, 축음기를 사용하여 수십개의 마을에서 수천명의 ‘피지’인들에게 들려 주었다.” ‘레오나드 히이틀리’는 ‘피지’ 최초의 ‘길르앗’ 졸업생이 되었다.
‘해리’와 ‘루이자 스코트’(둘 다 사망하였음)가 좋은 소식을 받아들여, 더 많은 결실을 보게 되었다. ‘스코트’ 자매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저녁에 나의 남편의 친구인 ‘테드 히이틀리’가 우리를 방문하여, ‘러더포오드’ 형제의 녹음된 성서 강연 하나를 들려 주었다. 소식의 간결성과 명료성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그것이 진리임을 인정하였다.” 같은 때에 진리를 받아들인 세번째 가족은 ‘매리오트’ 가족이었다. 이 세 가족(‘히이틀리’ 가족, ‘스코트’ 가족 그리고 ‘매리오트’ 가족)은 모두 초창기의 그 두 ‘파이오니아’가 맺은 열매였다.
다른 ‘파이오니아’들이 ‘피지’로 오다
‘오크터로니’ 형제와 ‘맥그리고’ 형제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오스트레일리아’ 지부는 다른 ‘파이오니아’들을 ‘피지’에서 봉사하도록 임명하였다. 1933년 무렵에 한 ‘파이오니아’ 형제가 ‘피지’의 거의 전역을 걷거나 자전거나 자동차 혹은 배를 타고 다니면서 수천부의 서적을 전하였다. 애석하게도 이 형제는 나중에 진리를 떠났지만, 진리의 씨들은 널리 뿌려졌다.
‘에릭 에윈즈’ 형제는 그 ‘파이오니아’로부터 진리의 소식을 처음으로 듣게 된 것을 이와 같이 말한다. “그때는 내 생애에서 가장 어려운 때였다. 바로 얼마 전에 아내가 사망했고, 돌봐야 할 12개월 난 아들이 하나 있었다. 한 교직자에게 가서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질문한 일이 생각난다. 그는 하나님께서 내 아내가 하늘에 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를 데리고 가셨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상황은 너무나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나를 죽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삶에 대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며칠이 지난 후, 한 낯선 사람이 나의 사무실로 들어와서, 자기를 소개한 다음, 이와 같이 말문을 여는 것이었다. ‘1914년에 하늘에서 전쟁이 있었읍니다. 그리고 ‘사단’과 그의 악귀들이 땅으로 내어 쫓겼읍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아마겟돈’ 전쟁에서 하나님과 싸우려고 모든 나라들을 준비시켜 왔읍니다. 그 전쟁에서 그들은 멸망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하나님의 왕국이 땅을 영원히 통치할 것입니다.’ 나는 즉시, 교회에서 말해 준 것과는 너무나 다른 이 소식의 생동감 넘치는 특성에 감동되었다.
“나는 그 ‘증인’을 나와 함께 며칠간 머물자고 초대하였다. 그는 그 초대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우리는 새벽이 되기까지 그 소식에 대해 토론하였다. 이것이 진리라는 것과 이것이 절망에 빠진 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데는 여러 날이 걸리지 않았다.” ‘에윈즈’ 형제는 최초의 세 지방 ‘증인’ 가족과 연합하였다.
확성차가 사용되다
1937년 중에 확성차가 이 제도에 소개되어 ‘비티 레부’ 섬에서 약 6개월 동안 사용되었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도, 형제들은 그
확성차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1950년대에 한 원주민 마을 원로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은 용감했읍니다. 그들은 자동차를 몰고 와서 강둑에 세워 놓고, 그 소식이 마을 전역에 울려퍼지게 하였지요. ‘마귀가 모든 세상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읍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거짓을 가르치고 있읍니다. 성서는 진리를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왕국이 인간의 희망입니다. 지옥불은 없읍니다’는 등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들었어요. 그래요. 영어와 ‘피지’어 두개 언어로 들었읍니다!”‘J. F. 러더포오드’가 ‘피지’를 방문하다
1938년 5월에 당시 ‘협회’장 ‘J. F. 러더포오드’가 ‘오스트레일리아’, ‘뉴우지일랜드’ 및 태평양을 방문하던 중에 ‘피지’에서도 하루를 보냈다. 이미 수주일 전에 ‘수바’의 공회당을 예약하여 두었고, ‘러더포오드’ 형제가 행할 공개 강연을 널리 광고하였다. 그러나 그가 도착하는 그 날에, 당국은 공회당을 형제들에게 빌려 주지 않기로 결정하고 문을 닫아 버렸다. 공회당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러더포오드’ 형제는 몇몇 지방 형제들과 모임을 가졌고, 개인 집에서 행한 그의 연설에는 약 40명이 참석하였다. 그 날 경찰은 ‘러더포오드’ 형제가 가는 곳마다 가까이 따라 다녔지만, 그는 ‘피지’의 형제들을 크게 격려하는 데 성공하였다.
성서 서적에 대해 금지령이 내려지다
1936년에 ‘피지’는 ‘협회’의 성서 서적 중 얼마의 수입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후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식민지 정부는 ‘협회’의 모든 서적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다. 그 금지령으로 얼마의 책들은 파기 처분당했다. 예로서, 1939년 1월에 세관 검사관은 발송되어 온 ‘피지’어 「구출」 책을 전부 파기 처분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은 여전히 어떻게 해서든지 얼마의 서적을 이 나라로 들여 왔으며, 계속 영적 양식을 잘 공급받았다. ‘스코트’ 자매는 그렇게 한 한 가지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애쉬크로프트’ 형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를 왕래하는 여객선의 한 의사 보조원으로 일하였다. 그는 ‘시드니’에서 공급받은 서적을 가져오곤 하였으며, 배가 ‘수바’에 정박하였을 때 몇몇 형제들이 웃옷을 입고 승선하여, 안 주머니에 소책자들을 채워 넣고는 현문으로 내려와서 대기하고 있는 자동차로 가곤하였다. 잠시 후에 형제들은 다시 현문으로 갔으며 ‘애쉬크로프트’ 형제가 가져온 서적을 다 가져올 때까지 그렇게 하였다.
“한번은 ‘애쉬크로프트’ 형제가 많은 서적을 갖고 오긴 했는데, 보통하던 방법으로는 육지로 가져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튜프 매리오트’ 자매가 중국인인 어느 야채 과수원 경영자의 노로 젓는 배를 빌려서, 밤에 노를 저어 항구를 건너 ‘나이아가라’호가 정박하고 있는 부두로 갔다. 이 자매는 고기를 잡는 척 하였고, 같이 있는 어린 아들에게 큰 소리로 ‘이쪽으로 가자(부두에서 멀리), 이 쪽에 고기가 더 많은 것 같구나’ 하고 말했다. 이것은 ‘애쉬크로프트’ 형제가 배 측면으로 여러 상자의 서적을 내려 주어야 할 신호였다. ‘매리오트’ 자매는 ‘물고기’를 가득 채워 가지고 노를 저어 항구를 건너왔다.”
‘오스트레일리아’ 지부 사무실은 제한을 해제시키려고 거듭된 노력을 하였다. 1940년에 ‘해롤드 E. 길’이 ‘피지’로 파견되었고, 그는 총독에게 솔직한 호소를 하였다. 하지만, 당시 영연방 대부분의 지역에서와 같이 사업은 곧 완전 금지를 당하게 되었다.
제한이 해지되다
1945년에, 형제들이 정부에 탄원한 결과 전파 활동에 대한 금지령이 해제되었고, 출판물이 총독의 사전 검열과 재가를 받아 ‘피지’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후 1959년에, 제한을 더 완화하는 조처가 취해졌다. 이 제도에 반입되는 새로운 출판물의
사본을 하나 경찰 국장에게 보내는 조건으로, 서적의 반입이 허락되었다. 1970년에 국무총리는 모든 제한을 해제하였다.‘길르앗’ 졸업생들의 도착
제 2차 세계 대전의 발발까지 수년 동안 사업이 다소 진행되었으나, 전시에는 사업이 사실상 정지되었다. 1946년에 협회장 ‘N. H. 노워’와 그의 비서인 ‘M. G. 헨첼’이 ‘피지’에 들러, 각각 작은 집단의 형제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노워’ 형제는 ‘협회’가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로부터 선교인들을 파견할 것이라고 밝혔다. 1947년 4월 5일에, 건장한 영국인 형제 ‘윌리엄 체크스피일드’와 ‘오스트레일리아’인 ‘세실 브룬’이 둘다 ‘길르앗’ 제 8기 졸업생으로서 ‘피지’에 도착하였다. ‘브룬’ 형제는 이와 같이 회고한다. “이 제도에서 유일한 ‘증인’들인 세 가족 성원들이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지금은 재혼하여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에윈즈’ 형제 역시 이곳을 떠난 지 8년 만에 다시 ‘피지’로 돌아왔었다.
최초의 회중이 형성되다
1947년 9월에, ‘피지’ 최초의 회중이 ‘수바’에서 공식적으로 형성되었다. 이 회중은 두 선교인, ‘코니 클라크’ 자매 그리고 ‘에윈즈’, ‘히이틀리’, ‘매리오트’ 및 ‘스코트’ 가족 성원들로 구성되었다.
선교인들의 도움으로, 회중은 그후 5년 동안 전도인 9명에서 37명으로 점차 증가하였다. 새로운 사람들 중 하나는 ‘투발루’ 출신인 ‘포우아 토핑가’였는데, 그는 진리를 받아들였고 침례를 받은 최초의 ‘투발루’인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기고 있으며, 지금은 ‘피지’ 지부 위원회의 3명의 위원 중 한 사람으로 일하고 있다.
‘브룬’ 형제는, 당시에 선교인들이 다른 섬들에 가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지만, ‘해리 스코트’ 형제가 그 필요를 충족시켜 주었고 소식을 멀리 그리고 널리 전했다고 회고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였는가? ‘스코트’ 자매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의 남편은 ‘피지’ 총독들의 관용 ‘요트’인 ‘아디 베티’호의
선장이었다. 그래서 ‘요트’가 가는 곳마다 성서 서적도 가지고 갔던 것이다! 널리 흩어져 있는 ‘피지’ 제도의 많은 섬들에서 사람들이 진리와 접촉한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렇게 전해진 서적을 통해서였다.”불행하게도 ‘브룬’ 형제는 1949년에 건강 문제로 인하여 ‘오스트레일리아’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체크스피일드’ 형제는 계속 남아 있었고, 그래서 본 섬인 ‘비티 레부’ 전역에서 아주 잘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청소년들인 ‘랜 히이틀리’와 선교인들이 도착하였을 때 12살에 불과했던 ‘유우니스 매리오트’를 포함한 형제 자매들을 돕고 훈련시킬 수 있었다.
1951년 3월에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가 다시 ‘수바’를 방문하여
형제들을 격려하였다. 바로 그 달에 30명이 야외 봉사에 참여하였다.—새로운 전도인 신기록이었다.‘피지’의 첫 번째 정규 ‘파이오니아’
‘유우니스 매리오트’는 이 방문으로 크게 영향을 받았고, ‘피지’의 첫 번째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그 자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들에 의해 진리 안에서 양육을 받은 많은 젊은이들도 종종 그들로 진리가 의미하는 바에 따라 호응하도록 움직이게 하는 인상적인 경험을 할 필요가 있다. 1951년에 나는 세속 고등 교육을 받는 데 매우 관심이 있었고, 이곳의 많은 사람들처럼 이 작은 섬 나라에서 더 큰 나라로 이사하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뉴우지일랜드’에 있는 나의 언니와 형부는 내가 그곳에 가서 더 많은 고등 학문을 연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여행 준비를 마무리짓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때,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가 ‘피지’를 방문하였다.
“‘노워’ 형제는 담대한 성서 인물 ‘다니엘’에 관한 연설을 하였는데, ‘다니엘’의 생애는 실로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어렸기 때문에, 나는 위엄있는 태도와 꿰뚫어 보는 시선(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을 한 ‘노워’ 형제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자꾸 의자 속으로 몸을 낮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연설이 끝난 후 ‘헨첼’ 형제는 ‘파이오니아’와 선교인 봉사에 관해 직접 나와 격려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헨첼’ 형제, 만약 내가 ‘길르앗’ 학교에 가더라도 ‘피지’와 같은 작은 섬에는 임명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는 벽에 붙어 있는 세계
지도가 있는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수천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브라질’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격려를 받고서 나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생애의 목표로 삼았고, ‘뉴우지일랜드’로 가려는 계획을 취소하고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다.“‘피지’에 ‘파이오니아’들이 필요했고 또 아직도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길르앗 학교’에 가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내가 봉사한 순간순간을 즐겨왔다. 27년 동안 ‘파이오니아’ 봉사를 한 후, 나는 1978년에 나의 남편[‘돈 클래어’]이 지부 위원들을 위한 특별 ‘길르앗’ 과정에 참석하는 동안 남편과 함께 ‘브루클린’에 가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 아내들은 매일 두 시간 동안 성서 토론에 참석하도록 허락되어 몹시 기뻤다.”
다른 사람들도 그의 본을 따랐고, 그 이듬 해(1952년)에는 ‘리디아 페드로’와 ‘렌 히이틀리’가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이 세명의 젊은 ‘파이오니아’, ‘리디아’, ‘렌’ 그리고 ‘유우니스’는 ‘체크스피일드’ 형제 곁에서 ‘수바’ 회중을 세우는 데 열심히 일하였다. 이 3명으로 시작한 ‘파이오니아’ 대열이, 지금은 ‘피지’에만도 ‘파이오니아’가 90명 그리고 지부 전체 구역에 130명이 될 때까지 증가해 왔다. 그 최초의 3명의 ‘파이오니아’들 중 두명은 지금도 계속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다. 나머지 한 사람, ‘리디아 페드로’ 자매는 1969년에 ‘뉴우지일랜드’에서 사망하였다.
더 많은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현 지부 위원회 조정 위원인 ‘돈 클래어’가 1952년에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다른 16명의 학생들과 같이 배를 타고 ‘길르앗 학교’로 가던 도중에 처음으로 ‘피지’를 보았다. ‘클래어’ 형제는 이와 같이 말했다. “한 해양 여객선 갑판 위에 서서, 아름다운 언덕에 둘러싸여, 짙은 다양한 빛깔의 녹색 옷을 입고 있는 ‘수바’ 항구를 난생 처음 구경한 것이 기억난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선교인 봉사하기에 딱 좋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로군!’ 우리는 약 20명의 작은 지방 전도인 집단 및 혼자 외롭게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있는 ‘빌 체크스피일드’ 형제와 함께 그 날을 보냈다. 참으로 즐거운 하루였다. 우리 17명 모두는 ‘피지’가 선교인 임지로서 아주 멋진 곳이라는 생각을 피력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클래어’ 형제는 계속 이와 같이 말한다. “1952년 7월에 우리의 연구 과정이 끝날 때, 우리는 선교인 임명지 발표를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우리 네 사람 ‘해롤드’와 ‘리나 케이터’, ‘클라이브 테일러’ 그리고 나는, 우리가 ‘피지’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알고서 무척 놀라면서 기뻐하였다! 그리고 ‘피지’ 식민지에 들어가기 위해 세속 일을 가지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우리는 더욱 크게 놀랬다.”
왜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는가? 여러 해 동안 ‘협회’는 선교인들의 ‘피지’ 입국을 신청했었다. 그곳 정부는 계속 그것을 거절하였다. 그래서 이들 네명의 ‘길르앗’ 졸업생을 ‘피지’에 입국시키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관광객으로 들어가서, 세속 일을 구해야 했다. 그들은 1953년 3월에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몇달 동안은 집회에 참석하지 않고, 주의를 끄는 일을 피하기 위하여 시외로 가서만 증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신권 활동을 증가시키기 시작하였고, 한명뿐인 선교인 ‘체크스피일드’ 형제를 도울 수 있었다.
‘클래어’ 형제는 이와 같이 회고한다. “나는 ‘협회’가 우리를 그때 ‘피지’로 파견한 것이 여호와의 인도에 따라 된 것이라는 확신을 항상 해왔다. 선교 봉사를 할 수 있도록 거주권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5년 동안 오직 ‘피지’에 머물면서 전 시간 세속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후에도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및 영국으로부터 형제들이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피지’에 왔지만, 그들 모두는 일단 ‘증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이민청과 문제를 가졌다. 그 결과 그들은 체류 허가 기간이 만료되면 이 식민지를 떠나야 했다.”
‘피지’에서 증거하는 일
‘케이터’ 형제는 당시의 사업을 이렇게 묘사한다. “사람들은 우정적이었고, ‘말루아’ 즉 ‘내일 해도 된다’는 분명치 않은 섬 사람의 생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년 중 대부분, 기후는 후덥지근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시골 지역에는 거의 주의가 기울여지지 않았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시골 지역에서부터 전파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곳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영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피지’어 수업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나는 ‘피지’어로 짤막한 연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을들에서 공개 집회를 갖는 일이 잦아졌다. 우리는, ‘피지’인 형제 한 사람이 우리와 같이 가도록 격려할 수 있었다. 절차는 마을 추장을 만나서, 그에게 증거하고 그를 통하여 공개 강연을 할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강연이 끝난 다음에는, 초가 오두막에서 초가 오두막으로 봉사를 하였다. 이곳에는 초인종이 없다! 의자 대신, 바닥에 ‘매트’를 깔아 주었다.”선교인들이 거주권을 얻다
1953년에 도착한 네명의 ‘길르앗’ 졸업생들은 5년 동안 세속 일을 한 후에 거주권을 얻었고, ‘클래어’ 형제와 ‘테일러’ 형제는 다시 전 시간 전파 사업을 시작했다. ‘케이터’ 부부는 몇년 동안 계속 머물면서, 형제들이 장성하도록 도왔다. 그런데 그들은 첫 아들을 가진 후, 1960년에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함
1950년대 초에,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인 섬들에 가서 봉사 하도록 형제들을 초대하는 일이 있었다. 그후 몇년 동안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여러 형제들이 이 초대에 응하였다. 그들은 사업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때는 ‘피지’에 그러한 형제 자매들이 약 120명이나 있었다. 사람들에게 가능한 최대의 도움을 주고자, 그들 중 다수는 ‘피지’어를 배웠다. 그리하여 그러한 가정들이 핵심이 되어 회중이 여럿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56년에 두번째 회중이 ‘라우토카’에 형성되었다. 그후 ‘나부아’에 회중이 하나 형성되었고, 1958년에는 ‘므바’(‘바’)에 또 하나의 회중이 형성되었다. 현재 ‘피지’ 전역에는 24개 회중이 있고, 뿐만 아니라 먼 거리에 있는 몇몇 섬에는 격지 전도인들이 있다.
이들 형제들이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새로운 땅으로 이사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이민 당국은 그들이 ‘증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추방하곤 하였다. 그래서 형제들은 몇달 동안은 눈에 띄지 않게 증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세속 일에 정착이 되면, 그들은 점차적으로 그 지방 ‘증인’들과 연합하여, 결국 온전히 증거 활동 계획에 참여하기 시작하곤 하였다.
섬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또 하나의 도전이 되었다. 이곳 사람들의 생활은 안일하다. 성서 연구생이 연구 약속을 해놓고도 지키지 않는 일이 흔하다.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섬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로 현재를 위해서 살며, 과거는 잊어버리고 미래는 낙천적으로 무시해 버린다. 현재의 순간에 발생하는 일은 무엇이든, 관련된 중요성에 관계없이 주의를 기울인다.
섬 사람들의 공손함 역시 외부 사람들에게 문제가 될 수 있다.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 아직도 섬 사람들의 기본 생활 방식이다. 그래서, 때때로 섬 사람은 자기의 느낌이 아니라 상대방이 듣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 말을 해준다. 이것은 가르치는 자가 통찰력과 분별력을 잘 사용하는 훌륭한 선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회 감독자들이 시골 구역에서 봉사할 때, “다음 마을까지는 얼마나 걸어야 합니까?” 하고 질문할지 모른다. 섬 형제는 그 거리가 8‘킬로미터’나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유럽’인 순회 감독자는 피곤해 있다. 그래서, 형제의 얼굴에서 낙담한 표정을 보지 않고자 하는 아주 선한 마음의 동기로 그리고 진정으로 도움과 격려가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섬 형제는 “일 ‘마일’[1.5‘킬로미터’] 정도 가면 됩니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이 때문에 자기 생애에서 가장 긴 거리의 “마일”을 걸은 외국인 형제들이 많이 있다.
최초의 순회 방문
1955년에 ‘오스트레일리아’ 지부는 ‘렌 헬버어그’를 ‘피지’ 최초의 순회 감독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또한 서 ‘사모아’, ‘아메리칸 사모아’ 및 ‘뉴우칼레도니아’의 형제들을 방문하였으며, ‘통가’와 ‘타히티’에서 사업이 진행되게 할 수 있었다.
섬에서 순회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잡동사니 화물을 싣기 때문에 때때로 돼지와 닭 화물선이라고 불리는 소형 선박을 타고 많은 여행을 해야 했다. 승객들은 가축, 목재 및 식품 사이 어디든 틈만 있으면 자리를 잡았다. 보다 나은 배들이 있었지만, 계획대로 운행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순회 감독자는 어떤 섬에 갇혀 다음 배가 올 때까지 한달이나 그 이상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
도시에서 봉사할 때, 이 순회 감독자는 냉온수 수도, 수세식 화장실 그리고 침대 등 각종 편의 시설을 갖춘 현대식 주택에서 묵을 수 있었다. 그 다음 주가 되면, 그는 마루 바닥에 깐 ‘매트’ 위에서 잠을 자야 하고, 개천이나 옥외에서 물통으로 물을 몸에 끼얹어 목욕을 해야 하는 마을에서 봉사해야 했다.
‘피지’ 최초의 지역 대회
‘피지’ 최초의 지역 대회는 1956년 ‘수바’에서 열린 ‘승리의 왕국’ 대회였다. 그 대회가 있기 이틀 전에 ‘수바’에서는 ‘사이클론’ 경고가 내려졌다. 주택이며 건물은 받침 나무들로 받쳐졌고, 거리에는 물이 범람하여 통행이 불가능하였고, ‘사이클론’이 임박해짐에 따라 모든 항공 운행은 정지되었다. 그러나 대회 전날 밤이 되자 ‘사이클론’은 ‘수바’를 떠났고, 온화한 날씨가 그 다음 날 아침을 맞이하였다.
‘협회’ 본부로부터 ‘돈 아담스’ 형제를 태워다 줄 비행기가 악천후로 인하여 지연되었다. 비행기가 도착하자, 형제들은 그를 4륜 자동차에 태워 ‘수바’로 간 다음 가슴 높이의 범람한 강물을 건너서, 공개 강연을 할 시간이 되기 꼭 한 시간 전에 그를 대회장에 데려다 주었다!
그때부터, 형제들은 거의 정기적으로 대회를 가졌고, 그러한 대회들은 사업의 발전과 여호와의 백성을 영적으로 세워 주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집회에서 ‘피지’어를 사용함
이 때까지만 해도, 모든 집회에서 영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일부 형제들은 영어로 연설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1957년에 지구 감독자는 회중에서 ‘피지’어를 사용하도록 추천하였고, 그 이듬 해 그렇게 하였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어판 「우리의 왕국 봉사」의 ‘피지’어 부록이 매달 발행되었다. 이것은 대단히 도움이 되었다.
새로운 지부가 조직되다
1958년 9월 1일에 남 태평양에서의 왕국 권익에 대한 감독권이 ‘피지’, ‘수바’에 있는 새로운 지부에 이양되었다. ‘길르앗’ 제 31기생인 ‘렌 헬버어그’가 초대 지부 감독자가 되었다. 그
지방 최초의 ‘길르앗’ 졸업생이 된 ‘렌 히이틀리’가 그와 협력하여 여행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우선 지부 사무실을 ‘수바’에 있는 ‘에릭 에윈즈’ 형제의 집에다 정하였다. 후에 ‘수바’에 침실이 두개인 조그만 집을 한채 세얻었다.1954년에 ‘피지’ 최초의 지방 ‘파이오니아’인 ‘유우니스 매리오트’와 결혼한 ‘돈 클래어’가, 1960년에 지부 감독자가 되었고 지금 지부 위원회 조정 위원으로 계속 봉사하고 있다. ‘렌 헬버어그’는 ‘오스트레일리아’로 되돌아 가야 했으며, ‘렌 히이틀리’는 지금까지 여러 분야에서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해 오고 있다.
새로운 지부 사무실이 직면한 문제들
새로운 지부 사무실이 직면한 문제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상상해 보라. 그 당시 관할해야 할 서로 다른 섬 구역이 8개나 되었다. 그 구역들은 서로 다른 화폐를 사용하였고, 여러 가지 다른 언어들을 사용하였으며 날짜 변경선에 의해 나누어져 있었다. 더우기, 각 섬 집단은 다른 정부 아래 있었다. 또한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우편 배달 속도가 느린 것이었다. 지부 구역의 어떤 지역으로부터 편지 회신을 받는 데 10주일까지 걸리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섬 밭을 여호와의 성령이 지도하는 영향력 아래 새로운 지부가 직접 관할하는 것은 사업을 크게 촉진시켰다. 지부 운영의 첫해에, ‘피지’에서만도 전도인 수가 111명에서 176명으로 늘어났다.
진리가 악귀 숭배를 이기다
‘피지’ 주민의 대부분이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 중 하나에 속해 있긴 하지만, 일부는 여전히 불 가운데를 걸어다니는 종교 의식과 같은 악귀 숭배와 관련된 옛날 방식을 따르고 있다.
‘세레마이아 라이베’는 학교를 졸업한 후, ‘부케아’(돕는 자)로 알려진 한 집단에 가담하여 악귀 숭배에 빠지게 되었다. 이 집단은 그들이 죽음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악귀들과 접촉하여 죽음을 이길 힘을 받기 위해 이른 아침까지 ‘카바’(정신과 신체를 마비시키는 원주민 술)를 마시는 일에 참여하곤 하였다.
1957년의 어느 날, ‘체크스피일드’ 형제가 그를 방문하였다. 이 선교인은 성서를 사용하여 위험한 세계 상태들의 이유를 설명해 요한 복음 5:28에서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읽었을 때, 그는 ‘부케아’의 가르침이 잘못임을 깨달았다. 그 분파의 두목이 사망하였을 때—‘세레마이아’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그는 그 집단을 떠났으며 악귀 숭배를 버렸다. 그는 1958년에 침례를 받았고,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으며 ‘니우에’에서의 사업을 시작하는 일을 도왔다. 현재 그는 ‘뉴우지일랜드’에서 장로의 한 사람으로 봉사하고 있다.
주었다. ‘세레마이아’는 매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부케아’가 성서를 불신케 하려고 애썼지만 성서를 읽기 시작하였다.‘피지’어의 사용으로 거두어들이는 일이 도움을 받다
집회에서 ‘피지’어를 사용한 결과, 더 많은 ‘피지’인들이 진리 안으로 들어왔다. 「파수대」가 1961년 7월에 ‘피지’어로 월간으로 발행되기 시작하였다. 지방어로 된 많은 소책자들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번역하는 일을 인도한 사람은 ‘아미니아시 카카우’ 형제였다. 그는 가족 성원이 많았지만, 이른 아침까지 번역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는 1980년 12월에 사망할 때까지 생애의 마지막 몇년 동안을 지부 위원회 위원으로 봉사하였다.
현재 지부 위원회 위원으로 봉사하는 ‘에모시 라우칼라’ 형제는 고모로부터 진리를 배웠다. 그 ‘피지’인 여인은 1960년에 ‘수바’에 있는 동안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그후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그는 새로운 신앙 때문에 그리고 죽은 자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한테 약간의 영적 시험을 받았다. 그의 믿음을 관찰하던
다른 여러 사람들도, 그가 성서로부터 말해 주는 것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사람들 중 하나가 제 7일 안식교인이었던 그의 조카 ‘에모시’였다. 그는 고모가 돌아간 후, ‘수바’까지 가서 고모의 “교회”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그는 시내에 있은 그 주 동안 매일 성서 연구를 하였으며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고, 그후 출판물들을 가지고 집으로 갔다. 그는 1962년에 침례를 받았다.‘피지’ 최초의 선교인을 잃음
1962년에 ‘라우토카’에서의 지역 대회 중에, ‘피지’ 최초의 선교인이었던 ‘체크스피일드’ 형제가 사망하였다. 그는 ‘피지’ 밭에서 15년 동안 충실하게 봉사하였고, 여호와께서 그의 노력을 축복하시는 것을 보았었다. 때때로, 그가 매주 사회하는 성서 연구는 20건이 넘기도 하였다.
수년간에 걸쳐 ‘피지’ 형제들은 ‘체크스피일드’ 형제가 영국으로 돌아갈까봐 염려했었지만, 그는 항상 그에게는 지구상에서 ‘피지’보다 더 좋은 곳이 없기 때문에 돌아갈 마음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자기 임명에 고착한 한 선교인의 얼마나 훌륭한 본보기인가!
대회들이 형제들을 함께 모으다
이따금씩 섬 간의 대회가 개최되어, 남 태평양 전역으로부터 형제들이 함께 모였다. 1963년에 ‘수바’에서 최초의 큰 국제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곳 ‘피지’는 “영원한 기쁜 소식”이란 주제로 연쇄적으로 세계 곳곳에서 열린 대회들을 대표하는 24개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지부 산하의 다른 나라들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와서 ‘피지’의 형제들과 합세하였다. 서로에 대해 이야기만 많이 듣다가,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고 만났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가!
섬 형제들은 5일간의 대회 기간 동안 우정적인 교제를 즐겼다. ‘F. W. 프랜즈’ 형제와 ‘그랜트 수우터’ 형제를 포함하여 ‘협회’ 본부에서 온 형제들과 교제하게 되어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프랜즈’ 형제가 행한 공개 강연에는 1,080명이 참석하였는데, 이것은 ‘피지’에서의 이전 대회 최고 참석자의 거의 두배가 되는 수였다. 서로 다른 여러 나라에서 맺어진 봉사의 직무의 열매로,
25명이 침례를 받았다. 회기는 영어, ‘피지’어, 불어 그리고 ‘사모아’어의 4개 언어로 진행되었다. 이 대회는 ‘피지’에서의 신권 발전의 초기에 있은 두드러진 행사였다.추장 가족 성원들이 진리를 받아들이다
‘피지’ 사회에서 일부 가족들은 추장 가문 출신이며, 전쟁에서의 공적을 통해 여러 해 전에 그러한 영예를 얻은 것이다. 남자들은 ‘라투’와 ‘로’ 그리고 여자들은 ‘아디’와 ‘불로’ 등의 칭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칭호는 아버지 계통을 통하여 부모로부터 자녀들에게 전수된다. 그러한 칭호를 가진 사람들은 크게 존경을 받는다.
그러한 추장 가족 성원들이 진리를 배우면,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과 일치 조화되게 생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변화를 하게 된다. (마태 23:8) 다음과 같은 ‘알리시 드라니달로’ 자매의 경험이 알려 주는 바와 같이, 그러한 사람들은 흔히 많은 반대를 직면하게 된다.
“‘오발라우’ 섬의 ‘로보니’ 마을 출신인 나의 가족은 나를 반대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추장 칭호를 가지고 있었고 마을의 종교 생활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반대하였다. 1962년에 내가 ‘엘리스’ 제도(지금의 ‘투발루’)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기 위해 세속 일을 그만두었을 때, 아버지는 나를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거의 8년 동안이나, 아버지는 내가 보낸 편지를 뜯어 보지도 않았다. 한번은 휴가중에 집에 갔지만 머무는 2주일 동안 내내 나는 그의 딸이 아니라 나그네 대접을 받았고, 모든 일을 깊은 존경심을 갖고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그네가 이렇게 하는 것은 ‘피지’의 관습이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께 증거한 것 때문이 아니라 나의 그리스도인 행실로 인하여, 곧 나의 아버지는 나를 불러서 가족과 함께 연구를 하자고 하였다. 남매들 가운데 형제 하나와 자매 하나가 현재 진리 안에 있으며, 나의 아버지도 매우 좋게 생각하고 있다. 그는 교회와의 유대를 끊었고, 집회와 대회에 참석한다.”
‘알리시 드라니달로’ 자매는 현재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하고 있으며, 야외에서 그리고 번역하는 일에서 훌륭한 봉사를 많이 하고 있다.
새로운 지부 시설
1965년에 ‘노워’ 형제가 ‘피지’를 방문하여 “성령의 열매” 지역 대회에서 봉사하였다. 그때, ‘노워’ 형제는 새로운 지부 사무실과 왕국회관을 건축할 목적으로 ‘수바’에서 얼마의 부동산을 매입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사업을 법적으로 등록하기 위한 절차들을 밟았고, 그리하여 1966년에 ‘만국 성경 연구회’란 이름으로 등록하였다.
적합한 부동산을 찾기가 어려웠지만, 결국 ‘수바’의 상업 지역 부근에서 대지를 매입하게 되었다. 1969년 5월에 건물이 완공되었을 때, 그것은 모두에게 훌륭한 증거가 되었다. 봉헌식에 632명이 참석하여, 단지 250명만 수용하도록 설계된 그 왕국회관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지방 형제들은 대지 매입 비용은 ‘뉴우지일랜드’의 형제들이, 건축 자금은 ‘오스트레일리아’의 형제들이 보내 주었다는 것을 알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지부 건물은 ‘스플리트—레블’식 3층 건물이다. 상층은 사무실과 ‘벧엘’ 집이며, 그 밑에 왕국회관이 있었다. 1층은 서적 저장실과 차고였다.
대회 시설물을 설치하는 일
수년 동안 대회들은 여러 공공 건물에서 개최되었지만, 많은 경우 형제들이 전체 대회 시설물을 설치해야 했다. 예로서, 1970년에 있은 “선의자” 지역 대회 때, ‘피지’ 서부 지역의 형제들은 ‘므바’ 시에서 전체 대회 시설물을 설치하였다. 주로 주말에 일하면서, 형제들은 대나무 좌석을 갖춘 2개의 대형 초가 지붕 강당과 6개의 다른 작은 건물을 지었다. 그렇게 하는 데 3개월이 걸렸지만, 842명이 공개 강연에 참석하고 22명이 침례를 받았을 때 형제들은 보람을 느꼈다.
‘피지’의 독립
‘피지’는 96년 동안 영국의 직할 식민지로 있은 후, 1970년 10월 10일자로 독립 국가가 되었다. 이 사건은 ‘피지’에서의 사업에 영향을 주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정부의 목표가 외국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세속 일자리들을 지방 사람들이 차지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이곳에 와서 세속 일을 가졌던 형제들
중 다수는, 지방 사람들이 그들의 일자리를 인수받았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수년 동안 ‘피지’에서 봉사해 왔던 형제들 중 일부는, 그들이 ‘피지’의 시민이 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해야 하였다. 일부 형제들은 ‘피지’의 시민이 되었다. 그렇게 한 사람들 가운데는 ‘길르앗’ 졸업생인 ‘클래어’ 형제가 있는데, 그는 지부 사무실에서 계속 봉사하고 있다.
근년에 와서의 성장
1970년의 기념식 참석자 수는 1,226명이었지만, 1983년에는 그 수가 3,061명으로 증가하였다. 1970년대 초에 ‘수바’와 보다 큰 도시들에서 형성된 회중의 수는 약 10개나 되었다. 그러나 더 많은 ‘피지’ 원주민들이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그후 10년 동안에 또 11개의 회중이 형성되었다.
1977년에는 사업이 봉사되지 않은 더 많은 마을과 섬들로 확대되었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4개의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여 3개의 회중을 세웠다. 그러나 사람이 거주하는 ‘피지’의 106개 섬들 전반에 사업을 확장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일단 ‘피지’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자기 고향 마을을 떠나면, 다른 마을에서는 누군가가 그들을 초대해 주지 않는 한 보통 환영을 받지 못한다.
한번은, 한 노인이 지부 사무실을 방문하여, 자기가 사는 섬에 ‘여호와의 증인’의 봉사자를 한 사람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사람은 이전에 감리교 교직자였지만, 그의 종교와 그가 접한 다른 종교들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주도(主島)에서 ‘증인’들과 접촉을 가진 후, 그는 자기가 여태껏 발견한 것 중에서 ‘증인’들이 가장 훌륭한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숙소를 제공하였기 때문에, 한 특별 ‘파이오니아’ 부부가 그 섬을 방문하도록 임명되었다. 그들은 8개 마을에서 증거하였고, 거기서 2주간을 보냈다. 그 노인은 그 섬에서 으뜸가는 추장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그는 주민들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의 말을 잘 들어보라고 하였다.충실한 입장이 결실을 맺다
마을의 공동 사회 제도가 ‘피지’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마을에서 이사를 나가지 않는 한, 어떤 사람이 ‘증인’이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상황은 이제 변하고 있다. 과거에 사람들은 ‘증인’들이 마을로 접근해 오는 것을 보면, 수풀 속으로 뛰어 들어가 숨곤 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의 높은 도덕 표준과 깨끗한 생활 습관 그리고 끈질긴 전파로 인하여, 이제 많은 사람들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로자바티 로코마라마’ 자매의 경험이 그 점을 설명해 준다. 그는 ‘수바’에서 진리를 배웠다. 그의 남편은 아내의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후 곧 그는 ‘느가우’ 섬의 자기 마을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 가족은 그 섬의 가장 큰 마을에서 살고 있다.
그후 여러 해 동안 ‘로자바티’는 믿음을 굳게 지켰으며, 비공식 증거를 통하여 계속 좋은 소식을 전하였다. 매달 그 자매는 지부 사무실에 봉사 보고를 우편으로 보냈다. 일요일마다 그는 모두 감리교회에 나가는 나머지 마을 사람들의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자녀들과 「파수대」를 연구하였다. 시간이 지나자, 그의 남편도 「파수대」 연구에 참석하였고 서서히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후, 그의 비공식 증거를 통해서 그의 시동생과 올케도 교회를 떠났으며, 이들 네 사람은 자녀들과 함께 매주 모여 연구를 하였다.
한때 두명의 특별 ‘파이오니아’ 형제들이 그 지역에 임명되어, ‘로자바티 로코마라마’ 자매와 그의 남편과 함께 머물렀다. 그들이 열정적으로 증거한 결과, 그 마을은 그들을 대항하여 소동을 벌였고, 교직자는 교회에서 마을 사람들의 전체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 교직자는 새로 관심가진 ‘로코마라마’ 자매의 남편에게 그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그의 집에서 나가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였고, 그들 모두에게 그
‘파이오니아’들은 자기가 초청한 것이며 계속 자기와 함께 머물게 할 것이라고 용감하게 말하였다!특별 ‘파이오니아’들이 더는 그 섬에 임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작은 집단은 계속 정규적으로 집회를 갖고 있으며 여섯 명이 매달 야외 봉사를 보고하고 있다.
한 외곽 섬을 돌보는 일
세명의 격지 전도인들이 주도 ‘비티 레부’에서 약 120‘킬로미터’ 떨어진 한 큰 섬에 살고 있다. 순회 감독자들은 그곳에 가는 데 하루 이상이 걸리지만 이 전도인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한다. 이 섬에 가려면 순회 감독자는 소형 화물선을 타야 한다. 이 섬에는 사실상 도로와 전기가 전혀 없다. 이 섬의 한쪽 끝에 도착하면, 그는 배가 해안을 따라 여러 만(灣)에 들러 농산물과 사람들을 내리고 싣는 동안 여러 시간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물가로 실어다 줄 소형 ‘보우트’를 타야 한다. 그리고 그는 짐을 들고 진흙 바닥을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관목을 헤치며 거의 10‘킬로미터’를 걸은 다음, 그는 드디어 형제들 중 한 사람의 집에 도착하게 된다.
하지만, 형제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증거 사업에 참여하고 집회를 가질 때 형제들이 나타내는 감사와 기쁨을 보면, 그러한 노력에 대해 충분한 보람을 느끼게 된다. 한 순회 감독자는, 그 섬을 떠날 때 한 ‘증인’ 가족이 물이 허리까지 차는 바다 속에 서서 자기가 탄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잘 가라고 손을 흔든 일을 흐뭇한 마음을 가지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필요로 하는 모든 곳에 ‘파이오니아’들을 임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환경이지만, 여러 가지 수단을 통해 섬들 전역에서 멀리 그리고 널리 좋은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사이클론’이 형제들에게 영향을 주다
대개 매년 11월경부터 4월 사이에, ‘피지’는 지방적으로 ‘사이클론’으로 알려진 열대성 폭풍(‘허리케인’)의 표적이 된다. 수년 동안에 걸쳐, 이들 폭풍은 많은 손상과 인명 손실을 초래하였다. 그래서 형제들도 당연히 영향을 받아 왔다.
홍수와 산사태로 인하여, 집과 곡식을 잃은 형제들에게 구호품이 공급된 일이 여러 번 있다. 지방 형제들은 그러한 재난중에 서로를 돌보는 방법을 배웠다.
1947년 이래 처음으로 선교인의 입국이 허락되다
작은 규모의 지부에게 있어서 1978년은 중대한 해였다. 몇가지 변화와 순회 감독자들 중 한 사람인 ‘마노아 바로’ 형제의 사망으로 인하여,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크게 필요하게 되었다. 이 사업을 위하여 훈련받은 지방 형제들이 없었다. 그래서 해외로부터 경험있는 순회 감독자 한 사람의 입국을 허락해 줄 것을 정부에 신청하기로 하였다. 지부는 그 전에도 여러 번 신청했었지만, 30년 이상이나 선교인의 입국 허락이 나지 않았었다!
‘바우간 구이’ 형제가 그의 아내 ‘지인’과 함께 여행하는 감독자로 3년 동안 봉사하도록 ‘피지’에 입국하는 것이 허락되었다는 것을 알고 모두는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였다. 이제 지방 형제들이 많은 훈련을 받았고, 몇몇 새로운 순회 감독자들이 순회 사업을 맡았다.
‘인디언’들에게 증거함
‘피지’에 노동자로 온 많은 ‘인디언’들이 여기에 남아서 대가족을 부양하게 되었다. 그들 대다수는 ‘힌두’교인이고, 나머지는 회교도였다. ‘피지’ 전역에서 ‘인디언’들이 대부분의 사업을 경영하고 있고, 그들 중 다수는 대지를 빌려 사탕수수를 재배한다. 비교적 소수의 ‘인디언’들만이 진리를 받아들였으며, 전도인들은 거의 전부가 ‘피지’ 원주민들과 이웃 섬들에서 온 사람들이다.
하지만, ‘인디언’은 대단히 우호적이다. 특히 시골 지역에서 ‘인디언’에게 증거하면, 전도인은 집안으로 초대를 받는다. 거의 어김없이 초대받은 전도인은 시원한 음료수나 따끈하고 우유가 섞인 달콤한 차를 대접받는다. ‘인디언’ 집주인은, 누구든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무례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에, 거의 언제나 서적을 받는다. ‘인디언’ 가장은 근실하게 일하고 포부가 있으며 보통 밀착된 가족 유대를 유지한다. 그래서 이 이유 때문에도, ‘인디언’ 젊은이들은 진리를 받기가 매우 어렵다.
대부분의 ‘인디언’들이 속해 있는 ‘힌두’교 역시 진리를 배우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흔히 “종교는 다 좋은 것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래도, 지금 장로의 한 사람으로 일하고 있는 ‘하리 나라인’처럼, 그런 배경에서 나온
얼마의 사람들도 진리를 배웠고 회중에서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다.‘타부아’ 시의 서부 지역에서, 한때 회교도였던 한 형제와 그의 아내는 ‘인디언’들과 즐거운 연구를 하고 있다. 1980년 ‘라우토카’에서 가진 지역 대회에서, 한때는 둘 다 ‘힌두’교인이었던 한 기혼 부부가 침례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인디언’ 주민에게 이르는 일이 발전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영어와 ‘피지’어 외에 ‘힌두’어가 지난 두 지역 대회 ‘프로그램’에서 특징을 이루었다. “왕국 진리” 지역 대회에서 ‘힌두’어로 제공된 공개 강연에 255명이 참석하였다.
여호와의 축복이 분명히 나타나다
지난 수년 동안에 걸쳐 전파하고 가르치는 사업을 여호와께서 축복하셨다는 증거가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최초의 ‘길르앗’ 졸업생들이 도착한 1947년에 전도인이 12명이었는데, 진리가 전파됨으로 인하여 1983년 6월에는 최고 신기록인 819명에 달하였다. “왕국 진리” 지역 대회는 사상 최대 규모의 대회였고, 2,905명이 참석하였고 47명이 침례를 받았으며, 그것은 1982년 봉사년도 전체 기간에 침례를 받은 50명과 견줄 만한 것이었다. 1983년 기념식 참석자 수가 최고 전도인 수의 세배 반이 넘는 3,061명이었다는 사실을 보아, 발전할 잠재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확장과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수바’ 지부 사무실의 왕국회관을 사용하던 회중들이 이사를 나갔으며, 그 회관은 1983년에 세개의 개인 사무실과 서적 및 발송부로 개조되었다. 이전의 발송부는 지금 응접실과 번역실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훌륭한 증가와 발전은 말씀을 전파하도록 파견된 사람들에게 힘과 담대함을 불어 넣어 주신, 우리의 천적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의 덕택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주의를 남 태평양의 또 한 부분인 ‘사모아’의 섬들로 돌려보자.
서 ‘사모아’
‘사모아’ 섬들은 남 태평양의 가장 아름다운 풍물에 속한다. 하지만, 지난 두 세기 동안 세계 강국들이 이 섬들을 차지하기 위하여 경쟁을 벌이면서 이 섬들은 함께 문제를 당해 왔다. 이
때문에 이 섬들은 참다운 낙원에서 기대되는 것과는 다른 경제 및 사회적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서 ‘사모아’가 ‘아메리칸 사모아’에서 불과 수십 ‘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주민들은 동족간이지만, 이 두 섬은 독립된 정부의 관할하에 있다. 1962년 이래 서 ‘사모아’는 독립 국가 즉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두개의 큰 섬(‘우폴리’와 ‘사바이’)은 면적이 단지 2,934평방 ‘킬로미터’밖에 안 되지만, 인구는 약 160,000명이다. 이들 두개의 섬은 산이 많지만, 매우 비옥하며 식품 재배 농장과 ‘코코’ 야자나무 숲이 군데군데 있는 밀림으로 덮여 있다. 마을들은 한폭의 그림같고, ‘팔레’라고 알려진 집들은 둥근 초가 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기후가 따뜻한 탓으로 집에 벽이 없다. 비가 오면, 사람들은 종려 잎으로 만든 차양을 내린다. 수도 ‘아피아’에는 약 35,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곳에서의 두드러진 종교는 ‘조합 그리스도 교회’(‘런던 선교회’에서 파생된 것), 감리교, ‘로마 가톨릭’교, ‘몰몬’교, 제 7일 안식교 그리고 오순절교 집단들이다.
‘사모아’인들은 ‘폴리네시아’인들이다. 그들은 우정적이고 손대접을 잘한다. 그들의 피부색은 연한 갈색이고, 용모는 ‘코카서스’인들과 거의 같다. 그들의 촌락 생활 방식은 여러 가족이 한 가문을 형성하는 사회 제도인데, 그 가문의 우두머리는 ‘마타이’라고 불린다. 각 촌락에는 여러 명의 ‘마타이’가 있다. 그들의 지위는 중요성과 권위가 서로 다르다. 연사와 추장인 ‘마타이’들이 고위직이며, 보통 마을에서 최종 권위를 가진 최고 추장이 한명 있다.
상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한 가문의 모든 성원이 하나의 종교 신앙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이 큰 ‘바벨론’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는 사람을 아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
서 ‘사모아’에서 증거하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문객들이 가면 거의 어느 ‘사모아’ 마을에서든지 우정적인 환영을 받는다. 전도인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집으로 접근할 때는 경의의 표시로 ‘팔레’를 둘러싼 낮은 석조 대 위에 멈춰 서서, 환영의 신호를 기다린다. 한 소녀가 나타나서 집 안에다 ‘매트’를 깔아 준다. 그러면 전도인은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벗은 다음, 말없이 들어간다. 그리고는 ‘매트’ 위에 편안한 자세로 책상 다리를 하고서 앉아, 정중하게 기다린다.이번에는 집주인의 차례가 된다. 여자 집주인은 그 전도인이 방문해 주어 대단히 기쁘다고, 그리고 그 전도인이 하는 일에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고, 또 자기 집은 초라하지만 햇빛은 따뜻하다는 등의 말을 한다. 그리고는 방문해 주신 것을 환영한다는 말로 인사를 끝맺는다. 그 다음에 전도인은 주인에게 감사의 말을 하고 가족의 건강에 대한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 나서야 전도인은 계속해서 왕국 소식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다.
초창기의 왕국 사업
여호와의 왕국의 좋은 소식이 서 ‘사모아’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1952년이었다. 영국에서 온 ‘존 크록스포오드’가 관심자들로 구성된 조그만 연구 집단을 조직하였다. 그는 T. E. A. L 항공사(지금의 ‘에어 뉴우지일랜드’)에 고용되어 있었고, ‘아피아’의 ‘비이치로우드’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근무하였다. 거기서 그는 ‘푸아이우폴루 펠레’란 사무원을 만나게 되었다.
‘펠레’는, ‘크록스포오드’ 형제는 “내가 여태껏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우정적인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일요일이 되면 사람들이 모두 흰옷 차림을 하고 손에 성서를 들고 교회에 가는 것을 보고서, ‘크록스포오드’ 형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나중에 말하더라고 ‘펠레’는 말했다! 그러나 그는 시작하였고, 훌륭한 결과를 가져왔다. ‘펠레’는 그때의 느낌이 어떠했는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크록스포오드’ 형제]가 나와 이야기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렇게 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그를 피하였다. 공립 학교의 동창회 회장으로서 나는 매우 분주하였다. 하지만, 어느 토요일 저녁에 그가 나의 집에 와서 식사를 같이 하였고, 우리는 일요일 새벽까지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그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고, 그는 성경을 사용하여 나의 질문에 모두 대답해 주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나는 이것이 내가 찾고 있던 진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진리를 알게 되어 기뻤지만, ‘펠레’는 결과에 대해 불안해 하였다. 그와 그의 가족은 교회 내에서 탁월한 신분이었고, 몇몇은
목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학교, ‘스포오츠’ 및 교회 활동으로 아주 잘 알려져 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동창회가 그가 받아들인 이 새 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또 ‘동창회 후원자들과 고위직에 있는 ‘말리에토아 타누마필리 2세’ 그리고 ‘투푸아 타마세스 3세’가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다.‘사모아’의 관습에서는, 높은 칭호를 가진 ‘마타이’들이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사모아’인, 특히 칭호나 높은 지위를 갖지 않은 사람이 자기 조상의 관습과 종교를 반대한다는 것은 거의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진리를 받아들였을 때, ‘펠레’의 입장이 바로 그러하였다.
‘펠레’가 지위 높은 사람들을 만나다
‘펠레’는 있었던 일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호와께 내가 가야 할 길로 나를 인도해 달라고 이전에는 결코 해본 적이 없는 기도를 하였다. 그후 몇 개월 동안 나는 끊임없이 그리고 밤 늦게까지 연구하였다. 어느 날 나는 우리 가문의 최고 높은 어른으로부터 이 ‘새 교회’에 대해 토의하기 위해 ‘팔레아시우’에서 갖는 저녁 문중 회의에 참석하라고 부르는 편지를 받았다. 진리에 관심을 가진 또 다른 가족 성원인 ‘타이메 솔로모나’도 거기 참석하였다. 내가 거기에 도착하자마자, 그 최고 높은 어른은 회의를 시작했다. 문중 회의에는 여섯 명의 문중 어른, 세명의 연사, 열명의 목사, 두명의 신학 선생, 사회하는 최고 높은 어른 그리고 그 가문의 노인들과 여자들이 참석하였다. 그들은 가문의 이름과 우리 조상의 교회를 망신시켰다는 이유로 우리를 저주하고 정죄하였다.
“그리고 나서 사회자 어른이 이렇게 말했다. ‘토론을 해보는 것이 좋겠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교리와 신앙을 이야기하고, 우리는 우리의 교리와 신앙을 설명하기로 하자. 그러면 누가 옳은지 알게 될 거다.’ 나는 ‘예레미야’처럼, 말하고 싶어 속에서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소리 지르기도 했다. ‘그 성서는 집어 치워! 그 성서 이야기는 그만 두란 말야!’ 나는 그들의 모든 질문을 성서로부터 대답하였고, 그들의 주장이 잘못임을 증명하였다. 이전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 왔던 것을 나는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토론은 밤을 새워, 그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계속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말 한 마디도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자, 최고 높은 어른이 힘이 없는 목소리로 ‘‘펠레’야, 네가 이겼다’ 하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용서하십시오, 어르신. 내가 이긴 것이 아닙니다. 어르신이 오늘 밤에 들으신 것은 왕국에 관한 소식이었읍니다. 어르신이 이 소식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라는 것이 저의 진정한 소망입니다.’ 헤어진 후에, 우리는 집으로 돌아갈 ‘버스’를 찾았다. 피곤하였지만, 하나님의 진리가 승리하게 되어 기뻤다. 진리의 씨가 ‘우폴루’에서 뿌리를 내린 것이다.”
연구 집단이 커지다
7월의 어느 날 오후, ‘마아투시 레아우아나에’란 젊은이는 두 사람이 “새로운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마아투시’는 “그 새 진리가 어디 있읍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병원에서 매주 모이는 성서 연구 집단이 있다고, 그리고 바로 그날 모임이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마아투시’는 이 “새로운 진리”에 관해 듣는 일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병원으로 가서 안을 들여다 보았다. 큰 집단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수줍어한 나머지 떠나려고 돌아섰다. 대문에서 그는 연구를 사회하기 위해 막 도착하는 ‘존 크록스포오드’를 만났다. ‘크록스포오드’ 형제는 그에게 연구에 참석하자고 권유하였고, 그는 그렇게 하였다. 거기서 그는 ‘푸아이우폴루 펠레’와 다른 여러 사람들, 두 세명의 의사들, 한명의 세관 직원, 여러 명의 사무원 그리고 농무성에서 온 한 사람에게
소개되었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으로 한 시간의 연구가 시작되었다.1952년에 ‘펠레’와 그의 아내 ‘아일루아’는 물침례로 여호와께 그들의 헌신을 상징하였다. ‘마아투시 레아우아나에’는 배우고 있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였지만, 몇달 동안은 비정규적으로 참석하였다. 그가 정규적으로 연구에 참석했을 때, 그 집단이 그에게 보인 사랑과 관심은 그가 들은 진리와 더불어 그에게 참 종교를 발견했다는 확신을 주었다. 또 한 사람의 젊은 공무원 ‘시에무 타아세’가 곧 그 집단에 합세하였다. 그와 ‘마아투시’는 1956년에 침례를 받았다.
‘존 크록스포오드’는 1953년에 서 ‘사모아’를 떠났지만, 진리의 씨들을 좋은 토양에 심어 놓았다. 앞에서 언급한 여러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여호와의 사업에서 충성스럽게 봉사하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올 것이었다.
최초의 회중이 설립되다
‘협회’는 1953년 초에 서 ‘사모아’에서의 최초의 회중 설립을 승인하였다. 1953년 5월에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특별 ‘파이오니아’ 부부, ‘로널드’와 ‘올리브(‘돌리’) 셀러즈’가 도착하였다. 그들은 이 회중을 조직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당국이 이 나라에서의 그들의 거주 기간을 연장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1954년 1월에 ‘아메리칸 사모아’로 이사하였다.
‘펠레’ 형제는 이와 같이 이야기한다. “‘크록스포오드’ 형제가 떠날 때, 모두는 그것이 ‘새 교회’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참석자 수는 40명이 넘었다. 1953년에 ‘테드 재라스’ 형제가 ‘뉴우요오크’ 대회에 참석했다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에게 들렀다. 우리는 저녁에 나의 집에 모였고, 그는 몇가지 연설을 하였으며 그 연설을 내가 통역하였다.”
그후 얼마 안 되어, ‘펠레’ 형제는 서 ‘사모아’에 왔던 세 형제 ‘존 크록스포오드’, ‘론 셀러즈’ 그리고 ‘테드 재라스’의 이름을 따서 갓 태어난 자기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그의 아들의 이름은 ‘사모아’어로 ‘우이티네세시오네로니테테’이고, 영어로 ‘증인-존-론-테드’(Witness-John-Ron-Ted)이다.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함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많은 ‘증인’들이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서 ‘사모아’로 왔다. ‘리처드’와 ‘글로리아 젠킨즈’, ‘빌’과 “거얼리” ‘모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훌륭한 일을 많이 수행하였다. 재삼 재사 선교인들을 이 나라에 입국시키려는 ‘협회’의 신청은 거부당하였다. 그래서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는 형제들은 당시에 지방 형제들에게 부족하였던 안정과 장성된 감독을 보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뉴우지일랜드’에서 진리를 배운 서 ‘사모아’의 한 원주민 형제는 얼마 동안 “고향” 형제들을 돕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1960년에 ‘차알스 프릿처드’와 그의 아내 ‘쥬디’는 두 자녀를 데리고 서 ‘사모아’로 이사하였다. 그들은 5년 동안 머물면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사모아’인이었고, 형제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또 그것을 그들의 언어로 전달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후 그들은 ‘뉴우지일랜드’로 돌아가 15년 동안 살았다. 1981년 4월 이래로 ‘차알스’와 ‘쥬디 프릿처드’는 그들의 아들 ‘포올’과 함께 서 ‘사모아’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있다.
‘길르앗’ 졸업생이 입국 허가를 받다
‘뉴우지일랜드’에서 살고 있던 서 ‘사모아’ 원주민 ‘티아 알루니’ 자매가 1958년에 ‘길르앗 학교’를 졸업하고서, 인근의 ‘아메리칸 사모아’에 임명되었다. 그가 서 ‘사모아’의 입국 허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협회’는 그에게 ‘아메리칸 사모아’에 가서 선교 봉사를 하는 것과 서 ‘사모아’로 가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였다. 그는 후자를 선택하여, 가장 큰 섬 ‘사바이’에서 한 지방 특별 ‘파이오니아’와 함께 3년(1961-64년) 동안 봉사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바이’에서의 사업이 개시된 것이다.
한 선교인 부부가 ‘포가포아’에서 그곳의 한 작은 회중과 봉사하였었지만, 지금은 ‘우폴리’ 섬에서 한달에 한번 그 회중을 방문한다. 풍습과 전통 그리고 종교 신앙 때문에, 또한 사람들이 옛날 방식을 버리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사업의 발전은 느렸다. 이 지방 전도인들은 매달 충실하게 보고하고 있다.
모으는 일이 계속되다
시력이 나쁘고 다리를 저는 ‘파갈리마 투아타갈로아’가 진리를 인정하였다. 그는 1953년에 침례를 받았고, 즉시 임시 ‘파이오니아’(현재의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는 진리를 아주 잘 배웠기 때문에, 성귀들을 많이 암기하고 있었다. 그와 호별 봉사를 하던 한 순회 감독자는, 그가 안경을 쓰지도 않고 성귀들을 정확하게 낭독하는 것을 보고, 그의 시력이 좋아지고 있는지 질문하였다. ‘파갈리마’는 안경을 잃어 버렸으며 그저 성서를 읽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대답하였다. 사실상, 그는 암기한 것을 인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갈리마’는 전 시간 봉사에 들어갔으며, 여러 해 동안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하였다. 오랫동안 그는 ‘펠레’ 형제의 가족과 함께 지냈다. 그가 1977년에 암에 걸려 심하게 앓게 되었을 때부터 1979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들은 그를 돌봐 주었다.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순회 방문을 하다
1957년에 ‘피지’ 최초의 순회 감독자였던 ‘렌 헬버어그’가 ‘길르앗 학교’로 떠났을 때, ‘포올 에반스’가 순회 사업을 인수 맡았다. 당시 순회구의 범위는 동쪽의 ‘타히티’로부터 시작하여 두 ‘사모아’, ‘니우에’, ‘통가’ 그리고 ‘피지’를 거쳐, 서쪽의 ‘뉴우 칼레도니아’까지였다. 두번째 순회구는 1958년에 생겨났고, ‘돈 클래어’가 순회 감독자가 되었다. 1960년에 세번째 순회구가 또 형성되었다. ‘피지’ 지부 아래 있는 12개 나라들이 이들 순회구에 속해 있다. 13년 동안 ‘에반스’ 형제는 아내와
함께 이들 나라들 중 몇몇 나라에서 순회 사업을 하였다. 그들은 여행을 하지 않을 때는 ‘아메리칸 사모아’에서 선교인으로 일하였다.서 ‘사모아’는 잠간 동안의 순회 방문을 위해 들어가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에반스’ 형제는 이렇게 회고한다. “배를 타고 통과하면서 우리는 그 회중을 두번 섬겼다. 첫 번째 여행에서는 형제들과 겨우 세 밤과 이틀 낮을 지냈다. 그 다음 번에는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 우리는 ‘피지’에서 한 소형 섬 화물선에 승선하여, 화요일 아침 일찌기 서 ‘사모아’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타고 여행하던 배를 서 ‘사모아’ 정부가 다른 섬들로 여행하기 위해 7일 동안 전세를 내어 우리가 승선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아피아’에서 7일 동안 육지에서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리는’ 동안 회중을 섬기면서 영적으로 유익을 즐겼다.” ‘에반스’ 형제는 1959년에 서 ‘사모아’의 입국 허가를 받을 때까지 세차례나 입국 허가 신청을 시도해야 했다.
발전이 느린 요인들
야외 봉사에서 ‘사모아’인들에게 증거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결과를 얻기가 어렵다. 성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지만, 정기적으로 연구를 사회하고 발전하게 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이다. 하지만, 형제들은 여러 해 동안 선교인들의 도움을 받지 못한 점을 감안할 때 잘해 왔다. 발전이 느린 또 하나의 요인은 그들의 언어로 된 출판물의 수가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회중을 정결하게 하는 일
초창기 수년 동안 발전을 방해한 한 가지 점은 일부 형제들이 아마 교만 때문에 신권적인 마련을 잘 받아들이지 않은 사실이었다.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1958년에 까부르는 일이 시작되었다. 얼마 동안 소수의 반역적인 사람들은 회중을 분열시키고, 작은 자신들의 조직을 세우려고 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초래한 수년 동안의 끊임없는 소란으로 절정을 이루었고, 심히 교만하게 된 나머지 그들은 회중을 떠나 버렸다.
정결 조치 결과 전도인의 4분지 1을 잃게 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제명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어김없이 자기 조직을 지원하신다는 것을 증명하셨고, 개인적인 교만보다는 성실을 앞세운 사람들을 축복하셨다. 사랑과 협조의 실로 따뜻한 영이 지배적이 됨에 따라, 회중은 계속 성장하였고, 1959년에는 35‘퍼센트’의 증가를 즐겼다. ‘펠레’ 형제는 그의 아내 및 여러 명의 가족 성원들과 더불어 충성스러운 입장을 고수하였고, 지금도 변함없이 나이와 건강이 허락하는 한 힘차게 성실을 지키고 있다. 그 가족은 지금 ‘하와이’에 있는 ‘사모아’어 회중과 연합하고 있다.하지만, 회중을 정결하게 하는 일에는 더 많은 것이 관련되었다. 많은 형제 자매들이 성적 부도덕 때문에 제명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서 ‘사모아’에서는 그러한 부도덕이 자유로이 행해지고 있다. 여러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들과 종들도 그러한 비행으로 인하여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온 마음을 다한 봉사
서 ‘사모아’ 사람들은 물질적인 양식이 풍부하지만, 경제적으로는 가난하다. 그러나 이곳 형제들은 왕국 사업을 추진해 나가는 일에 그들이 가진 물질을 사용해 왔으며, 여호와께서는 그에 따라 그들을 축복해 주셨다. 예로서, ‘파갈리마 투아타갈로아’ 형제가 ‘피지’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바친 노력을 생각해 보자. 그는 젊은이가 아니라 노인이었다. 몸은 튼튼하지 않았고 허약하였다. 다리도 정상이 아니라, 만곡족(彎曲足)이었다. 시력이 좋지 않아, 한쪽 눈은 실명 상태였다. 대회에 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였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코코넛’을 모아들여야 했다. 그는 한번에 약 15개의 ‘코코넛’을 약 3‘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옮겨서는, 그곳에서 껍질을 벗기고 과육을 잘라내서, 널어 놓아 말리곤 하였다. 그 다음에는 ‘코코넛’ 과육, 즉 ‘코프라’를 내다 팔았다.
4주일 동안 그는 그 섬의 외딴 곳에서 혼자 일했다. 그리고는 배삯을 지불하러 갔다. 하지만 배삯이 이미 인상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불평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시 일터로 가서, 더 많은 ‘코프라’를 생산하였으며, 더 필요한 돈을 벌었다. 그는 이해하지도 못하는 2개 언어로 진행될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도착했을 때, 그는 ‘협회’가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그가 사용하는 언어로도 제공되도록 마련한 것을 알고 얼마나 기뻤겠는가!그러한 온 영혼을 다한 봉사와 여호와의 축복으로 인하여, 전도인 수는 1958년의 37명에서 1971년에는 신기록인 109명까지 증가하였다. 1983년 3월에는 사상 최고 신기록인 161명에 도달하였다. 확실히 서 ‘사모아’는 아직도 앞으로 크게 증가할 것이다. 1983년 기념식에 594명이 참석한 것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선교인들이 입국 허가를 받다
여러 해 동안 서 ‘사모아’의 외부에서 선교인들이 이 나라에 거주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에는 정부 요원들 가운데 얼마의 변화가 있었다. 그래서 ‘아피아’ 회중은 이민청을 관할하는 국무총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포올’과 ‘프랜시스 에반스’ 부부를 선교인으로 서 ‘사모아’에 입국시켜 3년 동안 체류하고 그 기간이 만료되면 다시 연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19년간이나 노력한 후에 드디어 그 신청서가 승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형제들은 얼마나 감격했겠는가!
‘에반스’ 형제는 바로 그때 서 ‘사모아’에서 순회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순회 사업을 그만 두고, 아내와 함께 선교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지금도 서 ‘사모아’에 있으며, 현재는 출판물을 ‘사모아’어로 번역하면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이것으로 선교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1977년 1월에 통치체의 ‘M. G. 헨첼’ 형제가 서 ‘사모아’를 방문하여, 상황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더 많은 선교인들이 ‘사모아’ 밭으로 파견되었다.
부동산을 매입하다
1977년 11월에 ‘하와이’의 ‘로버트 가와사키’가 지구 감독자로 서 ‘사모아’를 섬겼다. 그는 ‘협회’가 건물을 지을 수 있는 팔려고 내 놓은 땅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였고, 주요 도시인 ‘아피아’에서 내륙으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시나모가’ 지역에 그런 땅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집 세채와 낡은 ‘시멘트’ 건물이 한채 있는 넓이가 일 ‘에이커’쯤 되는 땅이었으며, 그는 ‘협회’가 그것을 매입할 것을 통치체에 추천하였다. 1978년 10월까지 매입이 완료되었고, 선교인들은 집들 중 한채의 임시 숙소로 이사하였다. 1979년에 2개의 건물을 철거하였고, 하나의 큰 2층 건물을 개수하여 선교인 숙소로 사용하게 하였다. 1981년에는 ‘아피아’에서 19‘킬로미터’ 떨어진 ‘팔레아시우’에 있는, 한 형제에게서 임대한 대지에 새로운 선교인 숙소를 건축하였다. 형제들이 ‘오스트레일리아’, ‘하와이’, ‘뉴우지일랜드’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이 선교인 집들을 건축하는 일에 지방 형제들과 함께 참여하기 위하여 자비로 여행하였다.
‘사모아’어로 된 서적
1957년 12월에 ‘필리핀’ 지부의 ‘어얼 스튜어트’ 형제가 지구 감독자로 ‘사모아’를 섬겼다. 그는 「파수대」를 ‘사모아’어로 발행할 것을 ‘협회’에 추천하였다. ‘펠레’ 형제가 번역하는 일을 인도하였고, 1958년 5월에 첫 호가 등사판으로 나왔다.
그보다 앞서, 몇몇 책자들과 「이 천국의 기쁜 소식」 소책자가 ‘사모아’어로 번역되었다. 다른 소책자들도 뒤이어 번역되었다. 그후 1972년 초에 ‘사모아’어판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이 도착하였다. 수년 동안에 걸쳐 「진리」 책은 수천부 배포되어, ‘사모아’인들이 있는 어디서든 성서를 연구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을 ‘사모아’어로 번역하는 일은 잘 진행되고 있으며, 이것은 ‘사모아’ 밭에서 사용할 훌륭한 도구가 될 것이다.
여러 해 동안 ‘사모아’어 「파수대」는 16면판으로 ‘뉴우요오크’, ‘브루클린’에서 인쇄되었다. 1981년 1월부터 그 「파수대」는 24면으로 증면되었다. ‘사모아’어 「파수대」는 ‘사모아’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뉴우지일랜드’, ‘하와이’ 그리고 미국의 서부 해안 지역 회중들로 보내지고 있다.
수년 동안의 발전
서 ‘사모아’에서의 여호와의 백성의 사업은 발전이 느렸지만, 그분의 인도 아래 진행되어 온 것이 분명하다. 전도인 수는 1952년의 1명에서 지금의 161명으로 증가해 왔다. 지금은 회중 전도인들과 5명의 정규 및 특별 ‘파이오니아’ 그리고 10명의 선교인들이 이 밭에서 일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왕국 소식을 듣고 있다. 약 270명이 정기적으로 집회에 참석하고 있으며, 이것은 여호와의 새로운 종들이 탄생할 잠재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지만, ‘사모아’를 완전히 떠나지 말고, ‘아메리칸 사모아’로 건너가서 그곳에서의 왕국 사업의 발전을 알아보기로 하자.
‘아메리칸 사모아’
두 ‘사모아’를 갈라 놓고 있는 거리는 불과 80‘킬로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아메리칸 사모아’는 식민 제국들이 1899년에 ‘사모아’를 갈라 놓은 이래, 미국의 영토가 되어 왔다. 이곳의 인구는 약 32,000명 정도 되는데, 6개의 작은 섬에 살고 있다. 가장 큰 섬인 ‘투투일라’에 거의 30,000명이 살고 있다.
‘파고파고’라고 알려진 ‘투투일라’의 항구는 ‘아메리칸 사모아’의 대명사이다. 그 항구는 깊이가 122‘미터’까지 이르는 사화산의 분화구 속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경치가 아름다우며, 녹색으로 장식된 사면은 푸른 바닷물 위로 550‘미터’쯤 되는 정상들을 향해 가파르게 솟아 있다. 50년 동안, 이 항구의 강우량은 매년 평균 5‘미터’가 넘었다! 습도는 높아 평균 84‘퍼센트’ 가량되지만, 기온은 보통 섭씨 32도를 넘지 않는다.
서 ‘사모아’와 마찬가지로, 이곳 사람들도 교회에 나가며, 그리스도교국의 여러 분파 중 하나를 신봉한다. 저녁이 되면 그 마을 ‘마타이’들이 보통 종을 울려, 마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기도하러 집 안으로 들어가라는 신호를 한다. 이 시간에는, 아무에게도 밖에서 걸어다니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10분 내지 15분이 지나면, 종을 다시 울려 기도 시간이 끝났다는 신호를 한다.
진리가 ‘투투일라’ 섬에 이르다
1938년에, ‘워치 타워 협회’의 협회장 ‘J. F. 러더포오드’와 그의 일행이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협회’의 서적을
얼마 갖고서 ‘아메리칸 사모아’에 입항하였다. 하지만 그때 어떤 사람이 왕국 소식을 받아들였다는 기록은 없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남 태평양의 이 밭에서의 사업은 진척되었다.1952년에 ‘리디아 페드로’ 자매는 ‘아메리칸 사모아’에 있는 친척들을 방문하러 와서, 그들에게 좋은 소식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이 여행의 결과로, 그의 사촌 ‘우아에알레시(‘월리스’) 페드로’가 진리를 배웠다.
확고한 기반을 얻음
1954년 1월 5일에 ‘오스트레일리아’ 태생인 ‘로널드’와 ‘올리브(‘돌리’) 셀러즈’ 부부가 이 섬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들은 선교인으로서 한달 간의 시험 입국 ‘비자’를 받았다. 그들이 서 ‘사모아’에서 체류 허가를 거부당한 것을 알고, 법무 장관은 “‘아메리칸 사모아’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있오. 당신도 다른 종교와 똑같이 이 자유의 혜택을 받도록 해드리겠오”라고 말했다.
마침내 그 법무 장관의 사무실에서는 ‘워치 타워 협회’가 ‘아메리칸 사모아’에서 어떤 조직을 설립하는 것에 아무 이의가 없음을 천명하는 공한을 보냈다. ‘셀러즈’ 부부는 무기한 체류 ‘비자’를 받았다. 나중에, 다른 선교인들도 그 제도의 입국을 허락 받았다. 다년간, ‘피지’ 지부의 감독 아래 있는 모든 구역 중에서 이 나라는 새로운 선교인들의 입국이 자유로이 허락된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한 젊은이가 진리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다
선교인들의 도착은 ‘월리스 페드로’가 진리 안에서 발전하도록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그는 그의 경험을 이와 같이 말한다. “선교인들이 도착했을 때, 나는 여호와의 백성과 연합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선교인 집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모두 7명뿐이었다. 1955년 4월 30일에, 나는 ‘아메리칸 사모아’에서 침례받은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나의 가족은 그것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특히 내가 전파 사업에서 매우 활동적이 되자 더욱 그러했다.
“어느 날 회중 서적 연구에서 돌아와서, 나는 가족이 회의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내 앞에 선택이 제시되었다. ‘여호와의 증인’들과 연합하는 것을 중단하든지 아니면 집을 나가라는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는 1년이 더 남았고, 재정적인 부양 수단이 전혀 없었지만, 진리를 위한 나의 결심은 확고 하였다. 그러나 나의 가족은 나와 의절하였고, 입고 있는 옷 외에는 아무 것도 주지 않고 나를 내쫓았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시게도, 내가 머물 곳—선교인 집—을 마련해 주셨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형제들이 나에게 의복을 보내 주었다.”‘월리스’는 얼마 동안 선교인들과 함께 있으면서 학교 공부를 마쳤다. 그후 그는 ‘파이오니아’가 되었고, 후에는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그는 미국으로 이민가기 전인 1960년경까지 이곳에서 봉사하였다. 1979년에 ‘페드로’ 형제와 그의 아내 및 네 자녀는 ‘아메리칸 사모아’로 돌아왔다. 그러면 그와 의절한 그의 가족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의 형제 하나와 자매 하나가 그리고 조카딸 하나가 ‘증인’이 되었다. 그리고 1980년에는 72세인 그의 어머니가 침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도 사망하기 전까지 성서를 연구하였다. 이 젊은이가 여호와와 진리를 위해 취한 입장은 확실히 그와 그의 가족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었다.
최초의 순회 감독자 방문
1955년에 ‘렌 헬버어그’ 형제가 최초의 순회 감독자로 ‘아메리칸 사모아’에 도착하여, 그 작은 집단에게 훌륭한 도움이 베풀어졌다. 그의 방문 중에 ‘협회’의 영화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가 이 섬 전역에서 상영되었다. 그 영화 상영을 관람한 사람은 총 3,227명이었다. 이것은 훌륭한 증거가 되었다. 그 영화가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이 세계적인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 상영이 있은 지 두달 후에, 하나의 회중이 공식적으로 전도인 세명과 선교인 여섯 명으로 시작되었다.
영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서 ‘사모아’보다 ‘아메리칸 사모아’에 더 많지만, 그래도 기본 언어로는 ‘사모아’어가 사용된다. 그러므로 그 신설 회중은 ‘사모아’어 「이 천국의 기쁜 소식」 소책자를 16,000부 받았을 때 크게 도움을 받았다.
더 많은 ‘파이오니아’와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많은 전도인, ‘파이오니아’, 선교인들이 이들 섬에서 봉사하였고, 형제들을 세워 주기 위해 충실하고 사랑에 찬 도움을 베풀었다.
한때는, 작은 섬 ‘투투일라’에 아홉 명의 선교인과 세명의 정규 ‘파이오니아’가 있었다. 그 결과, 1960년 기념식에 118명이 참석하였다.지역 대회들에 충실하게 참석하다
1960년에 형제들은 주인으로서 서 ‘사모아’ 형제들은 물론, ‘피지’에서 온 몇몇 ‘증인’들을 맞이하는 감격을 누렸다. 이 일은 평화를 좇는 지역 대회에서 있었다. 1966년의 또 다른 지역 대회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우지일랜드’로부터는 물론, 이 나라 지부의 감독 아래 있는 8개의 나라에서 온 거의 300명이나 되는 대표자들을 맞이하였다. 그 당시 ‘아메리칸 사모아’ 전도인이 전부 26명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러한 많은 군중을 보는 것은 얼마나 큰 증거가 되었겠는가!
‘아메리칸 사모아’ 형제들은 ‘피지’와 서 ‘사모아’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도 더러 참석하였다. 보통 얼마간 여행을 해야 하지만, 20년 이상이나 대회들이 꾸준히 개최되어 온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리고 형제들은 항상 참석하여 영적 양식을 감사함으로 받았다.
건강이 나쁜 것이 장벽이 되지 않음
1962년에 당시 66세의 나이로 ‘타피아 풀라’가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는 팔과 다리에 영향을 주는 ‘필라리아’병을 앓고 있어 거의 집안에서 생활해야 하였지만, 여호와의 봉사에서 여러 시간을 바쳤다. 팔 다리가 너무 붓고 무거워서 지팡이를 짚고서도 거의 걸을 수 없었지만, 여호와께 대한 열심으로 그는 더 젊은 어떤 사람들보다도 전파를 더 많이 하였다.
그는 침례를 받기 원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그가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 빠져 죽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그는 가족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침례를 받다가 죽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다 죽는 것이 될테니 나는 행복할 것입니다.” 그는 침례를 받았고, 죽지 않았다!
그의 인생의 마지막 해인 1972년에, 그는 형제 한 사람과 같이 봉사를 나가서 이렇게 말했다. “형제는 계속하십시오. 지장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픽업’으로 돌아가서, 지나 다니는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됩니다.” 그 형제가 뒤돌아 보았을 때, ‘타피아 풀라’ 형제는 행인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전해 줄 소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끝까지 그 소식을 전하였다. 그의 인생의 마지막 이틀간 병원에 있을 때, 그는 자기 딸을 불러 증거 가방을 가져오게 하였고, 언제든지 사용하기 위해 그것을 그의 침대 곁에 두었다.
발전에 영향을 준 요인들
1960년대에는 사업의 진전이 느렸고, 평균 전도인 수는 1961년의 22명에서 1970년에 44명으로 증가했을 뿐이다. 심지어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포함하여 얼마의 사람들이 부도덕에 희생되어 회중으로부터 제거되어야 했기 때문에, 여러 번 침체 상태가 있었다. 세계의 다른 많은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것이 섬들에서 계속 문제가 되고 있다.
성장이 느려 보인 또 하나의 이유는, ‘사모아’ 사람들이 미국에 쉽게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새로운 사람들이 전파 사업을 시작하면, 미국으로 이사한다. 그러한 많은 사람들은 ‘하와이’와 미국 서해안에 있는 ‘사모아’어 회중과 연합해 왔으며, 거기서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
좋은 소식은 전파되었다
‘아메리칸 사모아’의 주도(主島)에 회중이 하나 확고히 세워짐에 따라, 왕국 사업은 이 구역의 거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이르게 되었다. 서 ‘사모아’에서는 좋은 소식 전도인 대 인구 비율이 아직 1 대 1,000 정도이지만, 그와는 달리 면적이 더 적은 ‘아메리칸 사모아’에서는 그 비율이 1대 400 정도이다.
‘마누아’ 제도로 알려진 세 섬들의 집단인 ‘타우’, ‘오푸’, ‘올로세가’ 섬들도 소식을 들었다. 예를 들어, 1980년에 순회 감독자 ‘존 로우디스’와 그의 아내 ‘헬렌’ 그리고 다른 다섯 명의 전도인들이 이 작은 섬 집단에서 5일 동안 증거하였다. 그들은 모든 마을을 다 봉사하였고, 서책 159부, 소책자 126부, 잡지 268부를 전하였고, 66건의 예약을 맡았다. 지금은 ‘투투일라’에 있는 회중이 1년에 두번씩 이 외딴 섬들을 방문한다.
지난 봉사년도 중에는 81명의 전도인 신기록을 내고 공개 강연의 평균 집회 참석자 수가 167명이 됨으로써, 앞으로 더 발전할 좋은 전망이 보인다. 남 태평양의 이 아름다운 섬들에 참 그리스도인 회중을 세우는 활동을 축복해 주신 것에 대해 모두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지부 구역의 동쪽 끝에서, 적도를 향하여 북으로 올라가 ‘키리바티’와 ‘투발루’(이전의 ‘길버어트’와 ‘엘리스’ 제도)로 가서, 그곳에서의 왕국 사업의 발전에 대해 알아보자.
‘키리바티’와 ‘투발루’
이 두 섬 집단은 원래 제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래, ‘길버어트’ 제도의 ‘타라와’에 본부를 둔 식민 정부의 관할하에 있었다. 섬 주민들이 두가지 다른 인종에서 유래하였고,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 두 섬 집단은 1975년과 1976년 사이에 분리되었다. 이들 섬 집단은 그후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길버어트’ 제도는 ‘키리바티’ 공화국이 되었고, ‘엘리스’ 제도는 ‘투발루’ 국이 되었다.이 두 섬 나라 중에서 큰 쪽인 ‘키리바티’는 약 500만 평방 ‘킬로미터’ 위에 흩어져 있는 33개의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는 16개의 섬들로 된 ‘길버어트’ 제도, 8개의 섬들로 된 ‘피닉스’ 제도, ‘라인’ 제도의 8개 섬 및 ‘오션’ 섬이 포함된다. ‘투발루’의 9개 섬을 합쳐도, 면적은 불과 약 745평방 ‘킬로미터’밖에 안 된다. ‘투발루’ 섬들의 대부분은 개펄을 둘러싸고 있는 고리 모양의 산호초로 되어 있다.
섬들은 보통 아주 작으며, 바다로부터 약간 솟아 있을 따름이다. ‘투발루’에는 해발 4.6‘미터’ 이상 솟아 있는 땅이 한 군데도 없다. 토질이 좋지 않기 때문에, ‘코코’ 야자, ‘팬다누스’ 그리고 빵나무와 더불어 ‘풀라카’와 ‘타로’라고 알려진 주산물인 근채 작물 외에는 식량이 되는 식물이 거의 자라지 않는다.
태평양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섬에 속하는 이들 섬의 총 인구는 60,000명이 넘는다. ‘투발루’의 인구는 8,000명이고 2,300명 가량은 이 나라의 수도인 ‘후나후치’ 섬에 살고 있다. ‘투발루’ 사람들의 대부분은 ‘폴리네시아’인이고 ‘투발루’어를 사용하며, 영어를 아는 사람도 많이 있다. ‘키리바티’ 주민의 대다수는 ‘미크로네시아’인이고 ‘길버어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들 중 다수도 영어를 사용한다.
종교와 관습
1850년대 중반까지는 ‘프로테스탄트’ 선교부들이 얼마 설립되었고, 후에 ‘가톨릭’ 선교부도 생겨났다. 처음에는 그리 사람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선교인들은 의복과 담배를 선물하여 그들의 환심을 사기 시작하였다.
결국 교회들이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었고, 대지도 얻게 되었다. 「키리바티-역사적인 면들」(Kiribati, Aspects of History)이란 책은 이렇게 보고한다. “담배를 원하는 일부 사람들은 선교인들에게 땅을 주고 몇 개비의 담배를 샀다. 이런 방법으로 ‘노노우티’의 ‘가톨릭’ 선교부는 선교부 근거지를 지을 땅을 구하였다.” LMS(‘런던 선교회’)와 ‘가톨릭’ 선교부는 ‘키리바티’의 서로 다른 지역들을 지배하였지만, ‘투발루’는 전적으로 LMS 집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선교부들이 섬 주민들을 지배한 사실은 ‘투발루’에서 발생한 일로 알 수 있다. ‘사모아’인 목사들이 도착하여 사람들에게 ‘사모아’어를 사용하고 그 관습을 따르게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대 중반까지는 교회들이 섬 생활의 대부분의 부면을 강하게 통제하였다. 인상적인 교회 건물 주위에다 모든 초가 오두막 촌을 조성하였다. 일부 목사들은 아주 큰 권력을 장악하여, ‘알코올’ 소비를 금지하고 일요일에 자전거 타는 것을 법으로 금지할 수 있었다.
‘키리바티’와 ‘투발루’에서 왕국 사업이 시작되다
‘빌 체크스피일드’는 ‘피지’의 ‘수바’에서 증거하면서, ‘포우아 토핑가’란 ‘투발루’인을 재방문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거의 깨닫지 못하였다. 4년 동안 성서를 연구한 후, ‘토핑가’는 1951년에 침례를 받아—진리 안으로 들어온 최초의 ‘투발루’인이 되었다. 그의 아내 ‘셀레파’는 1957년에 침례를 받았다. 마침내 ‘토핑가’는 ‘수바’ 회중의 한 장로가 되었고, 지금은 ‘피지’ 지부 위원회의 한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토핑가’가 ‘투발루’로 돌아갈 수는 없었지만, 바로 ‘수바’에 있는 그의 집으로부터 진리가 ‘키리바티’와 ‘투발루’로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토핑가’의 아버지와 장인은 모두 LMS 교회 목사였다. 그래서 ‘토핑가’와 그의 아내가 진리를 받아들였을 때, 그 일은 ‘투발루’ 사회에 상당한 동요를 초래하였다.
섬 관습에 따라, ‘피지’로 오는 ‘투발루’인은 거의 모두 ‘토핑가’ 형제 가족도 방문하였다. 자연히, 이 때문에 그들이 ‘투발루’인들에게 증거할 기회가 많이 생겼다. 그렇게 하여 왕국 소식이 점점 더 ‘키리바티’와 ‘투발루’로 침투하여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실례를 ‘투발루’인 ‘사울로 테아시’의 경험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사울로’는 배에서 일하던 중, 1940년대 말에 ‘피지’로 갔으며 ‘수바’에서 한 주간을 보낼 여유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 무렵 진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토핑가’ 자매의 어머니를 방문하였다. ‘체크스피일드’ 형제도 이 집을 방문하였을 때, ‘사울로’는 성서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뒤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는 ‘체크스피일드’ 형제가 무슨 질문이든 받으면 대답하는 데 항상 성서를 사용하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 ‘사울로’는 이 선교인이 며칠 후에 돌아갈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거기에 있기로 하였다. 두번째 토론이 끝난 후, ‘사울로’는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한권 가지고 떠났고 참 종교를 발견했다는 확신을 하였다.그러는 동안, ‘토핑가’ 자매의 누이동생인 ‘리세’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이 진리에 관심을 보였다. 이 무렵 이 관심자들이 ‘키리바티’의 ‘타라와’로 이사하였고, 곧 10명 가량으로 된 작은 연구 집단이 ‘타라와’에서 시작되었다. 그들 중 침례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끊임없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키리바티’와 ‘투발루’에서의 사업의 시작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1950년대 중엽에, 고용 계약이 끝난 후 ‘사울로’는 ‘타라와’에 도착하였고, ‘투발루’로 가는 교통편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리세’의 집에 머물렀다. 그와 그의 가족은 ‘리세’에게 성서와 관련된 문제들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를 많이 가졌으며, 그는 곧 ‘타라와’에 머물러서 그곳에서 일하기로 결정하였다. ‘사울로’는 자기가 배우고 있는 것이 그가 ‘피지’에서 ‘체크스피일드’ 형제한테서 들은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 기뻐하였다. 얼마 안가서, ‘사울로’와 그의 아내 ‘우토’는 그 작은 집단과 연합하였다.
‘키리바티’ 집단이 도움을 받다
이 집단은 1961년에 ‘뉴우지일랜드’로부터 네 사람으로 된 한 가족이 도착하였을 때, 큰 도움을 받았다. ‘후이아 팍스톤’ 형제가 ‘키리바티’ 정부에 의해 약제사로 고용된 것이다. 3년 동안 그와 그의 가족은 이 지방 형제들에게 크게 격려가 되었다. 그들은 ‘길버어트’어를 공부하기까지 하였고, 유창하게 말하는 법도 배웠다. 그들은 ‘오션’ 섬에 있는 얼마의 사람들을 포함한 관심자들과 편지로 연구를 했을 뿐 아니라, 인근 섬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방문하기 위하여 소형 ‘요트’도 한척 샀다. 1965년 중에 순회 감독자 ‘프레드 웨게너’가 그들을 방문하였을 때, 관심자들의 네 가족 즉 성인 15명과 그들의 자녀들이 그들과 연합하고 있었다.
그의 고용 계약이 1967년에 끝나자, ‘팍스톤’ 형제와 그의 가족은 ‘뉴우지일랜드’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그들이 타고 가던 배가 ‘오션’ 섬에 들르게 되어, 그들은 그 섬에 있는 편지로
연구하던 몇몇 사람들을 만나서 격려할 수 있었다. 6개월 후 순회 감독자가 ‘타라와’를 방문하였을 때, 그는 그 집단의 성원 수가 늘어났고 영어 「확인」 책을 사용하여 정기적으로 함께 모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길버어트’어로 된 출판물이 전혀 없었다.이 형제들은 선교인이나 ‘파이오니아’들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지만, 여호와의 백성의 이 작은 회중은 수도 ‘타라와’에서부터 좋은 소식을 계속 전하고 있다. 1980년 9월 1일부터, ‘키리바티’는 새로 설립된 ‘구암’ 지부의 감독 아래 있으며, ‘구암’ 지부는 ‘미크로네시아’ 전역에서의 왕국 사업을 감독하고 있다.
‘투발루’에서의 발전
‘사울로 테아시’는 1960년대 초에 ‘투발루’의 수도 ‘후나후치’로 돌아와서, 작은 집단이 함께 모여 「파수대」를 연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이 집단은 한때 의사였던 ‘우일리 오페타이아’(‘윌리 오브리엔’)가 돌보고 있었다. 의대에 다닐 때 ‘수바’에서 진리를 들었던 ‘우일리’는 ‘사모아’에서 침례를 받았으며 당시는 그가 배운 것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안 되어, 이 집단에 ‘아펠루 테아가이’와 그의 아내 ‘루메파’가 합세하였다. ‘사울로’와 마찬가지로, ‘아펠루’도 ‘수바’에 있을 때 진리를 배웠었다.
처음에는 관심을 보였던 ‘사울로’의 아내 ‘우토’가 이 때 남편을 강력히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사울로’가 그와 함께 교회 예배에 나가지 않으려 하자, 일요일마다 다툼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예기치 못했던 축복이 곧 있을 것이었다.
1962년 5월에, ‘피지’에서 온 특별 ‘파이오니아’ 자매들인 ‘리디아 페드로’와 ‘알리시 드라니달로’가 ‘투발루’에 임명되었을 때, 그러한 축복이 있었던 것이다. ‘페드로’ 자매는 ‘투발루’ 태생이었고 ‘드라니달로’ 자매는 ‘피지’ 원주민이었다. 지방 정부는 이 두 자매가 거주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래서 1963년 1월에 그들은 ‘투발루’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머무는 동안 호별 방문 전파를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이들 자매는 성서 연구는 여러 건 사회하였다. 특히 이 두 특별 ‘파이오니아’는 ‘사울로’의 아내 ‘우토’가 진리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도록 도와 주었다. 그들이 봉사한 결과, 1964년에 순회 감독자는 ‘투발루’를 방문하여, ‘사울로’와 ‘아펠루’가 침례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그 이듬 해에, ‘우토’는 ‘우일리’의 아내 ‘멜라파’와 함께 침례를 받았다.순회 감독자들이 ‘투발루’를 방문하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이 작은 회중은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되었다. 얼마 안 되어, 이 나라에 순회 감독자를 입국시키는 것이 좀더 쉬워지게 되었다. 여호와로부터 온 이 마련을 형제들은 크게 감사하였다.
이들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섬 생활 방식에 정착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후나후치’를 방문중이던 형제들 중 한 사람은 한차례의 ‘뎅그’ 열병에서 회복되자, 아름다운 개펄에 가서 수영을 하기로 하였다. 잠시 후에 그는 어떤 이물질이 떠 내려 가는 것을 보고서, ‘아니, 그럴리야 없겠지!’ 하고 혼잣말을 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러한 것들이 더 많이 있는 것을 보고서는, 물위에 당당히 떠 내려 가고 있는 것이 배설물 덩이임을 알게 되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개펄에서의 수영은 그에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른 부부는, ‘키리바티’에서 머무는 동안, 모기장을 치고 그 안의 자갈 바닥 위에 잠을 자다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 형제가 ‘플래쉬’를 켜서 보니, 게들이 모기장 속으로 침입하려 하고 있었다! 후에, ‘투발루’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대부분의 집들이 ‘허리케인’ ‘베베’에 의해 파괴된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형제의 가족과 함께 조그만 오두막에 머물렀다. 여기서는 임시로 만든 지붕 위에서 뛰노는 쥐들 때문에,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들 형제들은 여러 가지 상이한 환경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다. 이를테면, ‘키리바티’에서 물이 부족하던 중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 적이 있었다. 한 순회 감독자가 새는 낙수 홈통 밑에서 목욕 옷을 입고 ‘샤워’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소나기를 잘 이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들 섬에 있는 회중들을 섬기기 위해 온 형제들에게 그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노력은 확실히 축복을 받았다.
성실과 순결을 고수하는 일
어느 나라에서 진리가 참으로 확고한 뿌리를 박았는지는 형제들이 가장 격렬한 반대 속에서도 진리에 확고히 고착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1970년 3월에 사망한 ‘루메파’ 자매의 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2년 동안 내출혈로 고생을 해왔고 수술이 필요하였지만, 수혈을 하지 않고는 수술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2년 동안이나 의사들이며 병원 직원들이며 친구들이며 가까운 친척들은 그를 설득하여 수혈을 하게 하려고 하였지만, 그는 여호와의 법에 계속 확고히 고착하였고, 충실한 ‘증인’으로 죽었다. 외딴 섬에서도, 여호와의 영은 그분께 믿음을 두는 사람들을 강화시켜 준다.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국의 여러 선교부들은 이들 섬에서 흡연을 보편화시키는 데 기여하여, 섬 주민들 거의 모두가 담배 습관의 노예가 되게 하였다. 여호와의 요구 조건들을 배우고서, 즉시 그 습관을 중지한 사람들의 훌륭한 본들이 있었다.—고린도 후 7:1.
해외로부터 형제들이 도착하다
1978년 10월은 ‘투발루’에서의 여호와의 백성의 활동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었다. 두 가지 중요한 일이 발생하였다. 한 가지는 ‘파푸아 뉴우기니아’에서 봉사하던, ‘오스트레일리아’인 형제 ‘론 바우먼’ 형제가 ‘투발루’에서 세속 직업을 갖게 된 일이다. 또 한 가지는, ‘투발루’ 정부가 두명의 ‘오스트레일리아’ 선교인이 2년간 ‘투발루’에서 거주하도록 허락해 준 일이다. 그들은 지금도 거기서 봉사하고 있다.
‘바우먼’ 형제는 형제들이 집회와 성서 연구 봉사를 규칙적으로 더 잘 수행하도록 도와 주었다. 몇달 후, 선교인 ‘지오프리이’와
‘쟈네트 잭슨’이 도착하여, 그 작은 회중이 규모있게 운영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곧 이 형제 자매들의 작은 집단은 성서 연구를 40건 이상이나 사회하게 되었다. ‘바우먼’ 형제와 그의 가족이 떠날 무렵, 좋은 소식의 전도인은 12명이었다. 1982년에 전도인 수는 22명의 신기록에 도달하였다.
대회에 참석하는 일
고립되어 있고 또 여행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여호와의 백성의 대회에 참석할 수 있는 ‘투발루’ 형제들은 극소수였다. 하지만, 1979년에 형제 자매들은 ‘피지’에서 열리는 지역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초컬릿’을 만들어 파는 일을 비롯하여 수레로 모래를 운반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일을 하였으며, 해외의 영적 형제들로부터 얼마의 도움을 받아 여덟 명의 형제 자매들로 이루어진 대표단이 그 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그들 중에는 1965년에 침례를 받았지만 대회에는 한번도 참석해 보지 못한 ‘우토 테아시’ 자매가 끼여 있었다. 그 자매는 영어도 할줄 모르고 ‘피지’어도 몰랐지만(‘프로그램’은 이 두개 언어로 제공되었다), 그 대회에 모인 1,300명이 넘는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격해 하였다. 그에게 기쁨이 된 또 한 가지는, 그가 1962년에 진리를 배우도록 도와 준 ‘알리시 드라니달로’ 자매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다른 섬들에 이르는 일
지난 몇년 동안, 수도 ‘후나후치’가 철저한 증거를 받았을 뿐 아니라, 선교인들은 회중의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투발루’ 제도의 외곽 섬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였다. 현재 외곽 섬들에 있는 여러 관심자들이 서신으로 성서 연구를 하고 있다.
‘후나후치’ 회중이 ‘투발루’ 제도의 모든 섬에서 들을 수 있는 15분짜리 ‘라디오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때도 있다. 선교인들은 외곽 섬들을 방문하여,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배우고 있는 성서 진리에 대해 감사하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교직자들은 이 ‘프로그램’을 중지시키기 위하여 정부에 압력을 가하였다. ‘라디오’ 방송국장의 초대를 받고, ‘잭슨’
형제는 한 모임에 참석하여, 거기서 목사들 중 하나가 다음과 같이 성난 소리로 외치는 것을 들었다. “이 ‘프로그램’을 듣고 나서 사람들이 질문을 너무 많이 합니다. 우리는 그런 ‘프로그램’을 원치 않습니다!” 목사들은, 교회 위원회가 모든 ‘프로그램’을 방송하기 전에 검토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후에, 새로운 국장과 새로운 ‘프로그램’ 편성자가 임명되었고, 그들은 교직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좋은 소식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하여, 외곽 섬들에 계속 이르고 있다.‘투발루’어 서적의 도움으로 발전함
오랫동안 ‘후나후치’ 형제들은 그들의 집회에서 ‘사모아’어 서적을 사용해 왔다. 나이 많은 사람들 중 일부는 ‘사모아’어를 알지만, 회중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어려운 언어였다. 그래서 출판물의 일부를 그 지방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번역하는 데 일치된 노력을 기울였고, 통치체는 그러한 서적을 ‘투발루’어로 인쇄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섬에 있는 ‘증인’들은 계속하여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앞으로 더 증가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특히 1983년 기념식에 155명이 참석하였으며, 그 중 68명이 ‘후나후치’ 섬에서 참석한 것을 고려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이 수치는 수도 ‘후나후치’ 섬 전체 인구의 34명 중 약 한명에 해당한다.
그러면 남 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섬들에 남은 유일한 왕국—‘통가’에 우리의 주의를 돌려 보기로 하자.
‘통가’
‘통가’ 왕국은 200개 가량의 작은 섬들로 구성된 나라이며, 이들 섬들 가운데 사람이 거주하는 곳은 단지 몇개 섬뿐이다. ‘통가타푸’, ‘하아파이’(낮은 산호초 군들) 그리고 산이 많은 ‘바바우’란 세개의 주요 섬 집단이 있다. 육지 면적은 670평방 ‘킬로미터’이다. 수도는 ‘누쿠알로파’로서, ‘피지’의 ‘수바’ 동남방 약 70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가장 큰 섬인 ‘통가타푸’에 있다.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 1773년에 이들 섬을 방문하였고,
이들 섬을 ‘우정의 제도’라고 명명하였다. 대부분이 ‘폴리네시아’인들인 이곳 사람들은 정말로 우정적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통가’어이지만, 현재 대부분의 학생들은 영어도 배운다. 90,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들 섬에 살고 있으며, 대부분은 종교심이 아주 많다.‘통가’는 1970년에 완전히 독립을 할 때까지는 대영제국의 보호령이었다. 이 나라의 정부는 입헌 군주국이며, 왕은 내각, 의회 및 추밀원의 자문을 받아 통치한다.
진리에 대한 반응
진리가 ‘통가’에 들어간 것은, ‘오스트레일리아’ 지부가 파견한 초창기 ‘파이오니아’들 중 한 사람을 통해서였다. ‘피지’에서 봉사하던 그 ‘파이오니아’는, 그가 만난 모든 사람에게 소책자들을 전했다. 출항하는 쾌속 범선의 선장인 어느 ‘통가’인이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 소책자를 받았다. ‘통가’로 돌아와서, 그는 그 소책자를 전기 통신부에 근무하는 ‘차알스 베테’란 친구에게 주었다. ‘차알스’가 그 소책자를 읽고 진리를 발견했다고 확신한 것은 1932년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감리교회의 한 성원이었으며, 그때부터 ‘여호와의 증인’들과 연합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교회에서 탈퇴하여 성서의 소식을 선포하였다.
‘차알스’는 ‘브루클린’에 있는 ‘협회’ 본부에 편지하여, 더 많은 것을 알려 줄 것을 부탁하였다. 여러 질의 서적이 도착하였다. 더우기, 당시 협회장이었던 ‘J. F. 러더포오드’는 ‘차알스’에게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 소책자를 ‘통가’어로 번역할 수 있겠는지 질문하였다. 그는 그 임명을 수락하였다. 그리고 때가 되자 그 소책자 1,000부가 도착하였다. ‘차알스’는 감동을 받아 그 책자에 대한 헌금을 보냈고, 그 책자들을 배포하기 시작하였다. 그와 함께 일하던 많은 공무원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진리를 듣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1933년에 최초의 증거 사업이 ‘통가’ 왕국에서 시작되었다.
약 25년 동안 ‘차알스 베테’는 ‘통가’에서 혼자 좋은 소식을 선포하였다. 그는 수도 ‘누쿠알로파’가 있는 주도(主島) ‘통가타푸’에서 북으로, ‘바바우’와 ‘니우아토푸타푸’의 섬들로 옮겨가면서 봉사하였다. 그는 이들 섬에서 소책자를 많이 배포하였다.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많았지만, 연합할 회중이 없어 큰
발전은 없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 소책자는 널리 배포되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전도인이 호별 방문을 하다가 이 소책자와 ‘차알스 베테’가 그것을 전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다년간 전파한 일로 인하여, 그는 1964년에야 침례를 받았지만, 그 이전에도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1955년 3월부터 순회 감독자들이 이들 섬을 잠간 방문하였으나, 감리교와 ‘로마 가톨릭’교의 강한 영향력 때문에, ‘증인’ 선교인들이 이 나라에 입국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부터 형제들이 이곳 지방 형제들을 돕기 위하여 이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통가’의 ‘증인’들은 주로 혼자 힘으로 발전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솔선력을 발휘함
솔선력을 발휘함으로써, 형제들은 발전해 왔다. 여기에 그들의 열심의 한가지 예를 소개한다. 1964년에 특별 공개 강연의 원고가 그들에게 보내졌다. 이 집단을 돌보고 있던 형제는 강연을 해본 경험이 없었지만, 준비하여 강연을 하였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실한 노력을 축복해 주시어, 22명이 참석하였다.
형제들이 진리에서 발전하고자 하는 열망의 또 한 가지 증거는 「파수대」 연구 기사들의 번역에 바치는 그들의 노력이었다. ‘차알스 베테’ 형제가 「파수대」 연구 기사들을 ‘통가’어로 번역하였다. 이 집단은 그것을 손으로 베껴서 그들의 연구 재료로 사용하였다.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 책도 그렇게 하였다.
1965년에 순회 감독자 ‘프레드 웨게너’와 지역 감독자 ‘도널드 클래어’가 ‘누쿠알로파’를 방문하였을 때, 그들은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조직을 계속 운영하기 위해 바치는 근면한 노력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1년 후, 그곳 형제들은 ‘오사이아시 토비’ 형제가 자기에게 분할 대여된 농지 가운데서 제공한 대지 위에 왕국회관을 막 건축했다는 소식을 편지로 ‘협회’에 알리게 되었을 때, 감격스러워했다. 이 왕국회관은 30명까지는 족히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이다.
외부로부터의 도움
세월이 지나면서, 일부 정부 관리들이 ‘증인’들에 대해 보다 호의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로 대치되었다. 그리하여 거의 14년이 지난 후, ‘통가’의 이민청 관리들은 1969년에 ‘협회’의 여행하는 대표자들이 6개월 간의 체류 허가를 받을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래서 ‘협회’는 순회 감독자 ‘렌 헬버어그’와 그의 아내 ‘리타’를 2달간 체류하도록 파견하였고, 그것은 훈련받을 참으로 즐거운 때였다!
한주에 여러 날을, 형제들은 회중 조직에 대하여 배우기 위하여 ‘베테’ 형제의 집에 모였다. 그 방문은 53명이 참석한 기념식 그리고 사랑과 연합의 영을 보다 강하게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 순회 대회로 절정을 이루었다. 형제들은 그 날의 음식을 흙 화덕에 묻은 뜨거운 돌 위에 요리하여, 왕국회관 뒤에 있는 나무들에 매단 커다란 방수포 밑에서 먹었다. ‘토비’ 형제가 자가용 운전 기사로 일해 주는 ‘통가’의 국왕이 ‘토비’ 형제에게 빌려 준 낮은 연회용 식탁을 땅 위에 깐 ‘매트’ 위에 펴 놓았다. 그 달에 ‘통가’는 전도인 18명의 새로운 신기록에 달하였다.
회중이 형성되다
1970년에 보고한 20명의 전도인 신기록으로, ‘누쿠알로파’ 회중이 형성되었다. 그때부터 각 순회 감독자는 야외에서 형제들과 같이 봉사하는 것은 물론, 신권적인 절차에 대해 그들을 훈련시켰다. 성장하여, 1983년 4월에는 전도인 수가 41명의 신기록에 달하였다.
지금도, 선교인들이 ‘통가’에 입국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들 섬에서 생소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일부 정부 관리들은 진리의 성장을 고무하는 일에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왕국 소식이 사람들에게 이르다
‘통가’ 주민의 대다수가 ‘누쿠알로파’ 회중이 있는 주도(主島) ‘통가타푸’에 살기 때문에, 왕국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르고 있다. 최초로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한 이곳의 한 지방 자매는 1978년에 이 봉사를 시작하였고, 지금은 네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있다. 북쪽의 ‘하아파이’에서도, 작은 한 집단이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있다. 그곳 형제 자매들은 순회 감독자의 방문을 위해 ‘누쿠알로파’까지 내려오는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이어서 하나의 회중으로 된 순회 대회가 열린다.
1970년대에 몇몇 형제들이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통가’로 왔다. ‘뉴우지일랜드’로부터 온 ‘데이빗 월프그람’과 그의 가족은 몇년 동안 여기서 회중과 함께 봉사하였다. 그는 ‘통가’ 시민이었기 때문에, 이 나라에 입국할 수 있었다. ‘통가’ 제도에는 ‘증인’ 대 인구 비율이 1 대 2,198이므로, 실로 도움이 크게 필요하다.
하지만 여호와의 뜻이라면, “큰 환난”이 여호와의 “구원의 날”에 끝을 가져오기 전에 더 많은 일이 수행될 것이다. (마태 24:21, 29; 고린도 후 6:1, 2) 새로운 사람들이 왕국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1983년의 기념식 참석자 수가 164명이었던 것을 보면, 증가할 전망은 밝다. 1983년 5월에 ‘데이빗 월프그람’ 부부가 돌아와서, 사업을 개시하기 위하여 ‘바바우’에 정착하였다. 그들과 함께 일하도록 2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임명되었다. 선교인들의 ‘통가’ 입국을 가능케 하기 위해 재개한 노력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이 이 나라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열망이다. 그 일이 성공을 하든 않든 간에, 이 충실한 집단의 형제 자매들은 ‘통가’ 왕국의 우정적인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알리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통가’ 동북으로 약 480‘킬로미터’가면, ‘니우에’란 아주 특이한 섬이 하나 있다.
‘니우에’
이 나라는 길이가 약 19‘킬로미터’, 폭이 약 16‘킬로미터’이고, 총 면적이 겨우 259평방 ‘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단 한개의 작은 섬이다. 남 태평양 전역에서, ‘니우에’는 독특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 섬은 석회석으로 되어 있다. 이 섬의 어디를 가든지, 조가비와 산호로 된 석회석 바위 속에서 이 섬이 한때 물속에 잠겨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를 볼 수 있다. 다른 섬들과는 달리, 이 섬에는 해변이 전혀 없다. 대양으로부터 높은 절벽이 갑작스럽게 솟아나 있고, 지면은 거의가 평평한 고원이다. 동굴들로 벌집 모양을 하고 있어, ‘니우에’는 ‘아마튜어’ 탐험가의 낙원이기도 하다.
1974년에 ‘니우에’는 ‘뉴우지일랜드’로부터 자치를 허락받았지만, 국민은 아직 ‘뉴우지일랜드’의 시민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 헌법은 ‘뉴우지일랜드’와의 자유로운 연합과 20명으로 구성되는 입법 의회를 규정하고 있으며, 그 20명 중 14명은 마을 선거구에서 선출되고 나머지 6명은 공동 명부 가운데서 지명된다. 이 섬의 감독과 관리는 4명으로 구성된 내각의 수중에 있다. 지방 정부는 14명으로 구성된 마을 의회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의원들은 선출되고 임기는 3년이다. 각 지역 사회의 연로자들은 각 마을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대한 발언권이 있다.
‘니우에’인들은 ‘사모아’인, ‘통가’인 그리고 수백년 전에 이곳으로 이주해 온 ‘쿡’ 제도의 사람들로 혼합되어 있다. 이들은 융합되어 하나의 소수 민족이 되었다. 이들의 언어는 ‘사모아’어와 ‘통가’어를 혼합한 것이다. 대부분의 다른 태평양의 섬 사람들과는 달리, ‘니우에’인들은 상속을 받는 추장들이 없으며, 각 가문의 머리가 지시를 내린다.
약 9,000명의 ‘니우에’인들이 근년에 ‘뉴우지일랜드’로 옮겨갔다. 그래서 마을에 가면, 비어 있는 집들이 많이 있다. 지배적인 종교 집단은 ‘에칼레시아 니우에’인데, 이것은 ‘런던 선교회’로부터 파생한 것이다.
진리가 ‘니우에’에 이르다
1960년 2월에 ‘니우에’에서 신권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그때 ‘아메리칸 사모아’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던 ‘티아 알루니’ 자매와 ‘이비 카우헤’ 자매가 ‘니우에’로 가서 한달간 머물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시는 섬과 섬 사이를 운항하는 배가 한달에 한번만 방문하기 때문에, 누구든 일단 배에서 내리면 다음 배가 올 때까지 한달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증인’ 선교인들이 ‘니우에’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자매들은 친척들을 방문하기 위한 입국 신청을 하였다. ‘알루니’ 자매의 이모가 이 섬에 살고 있었고, 그들은 이모의 집에 머물렀다.이 자매들은 자기들이 임명지 구역에서 꼬박 한해 동안 전한 것보다 더 많은 서적을 한달 동안에 전하였다! 반대와 함께 상당한 관심이 일어났다. 이들의 증거를 받은 사람들 중에 ‘사무엘 마카톤기아’가 있었다. 그는 LMS 교회의 성원이었지만, 진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몇년 동안 그는 「파수대」를 예약하여 보고 있었다. 자매들은 그를 만나기 위해 약 20‘킬로미터’의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그만한 보람이 있었다. 이 형제가 이곳에서의 사업의 기둥이 되어 왔고 지방 회중의 주임 감독자로 일하고 있으니, 이 일은 ‘니우에’에서의 사업에 크나큰 축복이 되지 않았는가!
한 ‘피지’ ‘파이오니아’가 도움을 주다
이 자매들이 이 섬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지부 사무실은 ‘피지’ 원주민 ‘파이오니아’인 ‘세레마이아 라이베’가 근로청과 근로 계약을 맺고 이곳으로 가도록 주선하였다. 그는 저녁과 주말을 이용하여 지방 형제들을 도왔다.
‘라이베’ 형제가 이곳에 몇달 있은 후에, 거주 감독관이 종교 지도자들의 압력을 받아 그를 소환하여 면담하였다. 키가 크고 건장한 ‘피지’인 ‘라이베’ 형제는 그 감독관으로부터, 실제로는 전파를 하기 위하여 왔으면서 “근로자”로 이 섬에 온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라이베’ 형제는, 이 섬 주민 모두가 그가 ‘여호와의 증인’임을 알고 있는 것같다고, 그리고 만일 감독관이 그가 도착한 날 물었다면 ‘증인’임을 인정하였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감독관은 비록 헌법으로는 숭배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만, 이 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호별 방문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이 ‘증인’에게 말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라이베’ 형제의 체류 허가가 취소되어, 그는 ‘피지’로 돌아갔다. 1961년 9월에 ‘니우에’의 입법 의회는 어떤 ‘증인’의 입국도 허락지 않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아직 이 섬에 있는 동안, ‘라이베’ 형제는 정기적인 집회들을 조직하였다. 악마는 협박이라는 케케묵은 술책을 써서, 그 지방 마을 사람들을 선동하여 집회가 열리고 있는 집에 돌을 던지게 하였다. 그러나 돌을 던지던 주동자들이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들 자신이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자, 그러한 책략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더 많은 도움이 도착하다
한편, 기혼자인 ‘니우에’인 형제 ‘윌리엄 로비니’가 진리를 배운 ‘뉴우지일랜드’에서 살고 있었다. 1961년에 ‘로비니’ 형제는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서 봉사하기 위해 ‘니우에’로 돌아갔다. 그는 ‘니우에’ 정부에 고용되었고, 여러 해 동안 회중에서 인도하였다. 전도인 수는 34명으로 증가하였다.
순회 감독자 ‘포올 에반스’는 섬과 섬 사이를 한달에 한번 운항하는 배가 ‘니우에’를 방문하였을 때, 하루 중 얼마를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는 형제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들의 문제들에 대해 토의하였으며, 그들의 활동을 분석하고 제안해 주었다.—이 모든 일을 배가 떠나기 전 약 6시간 동안에 하였다. 그리고 1966년에 ‘에반스’ 형제와 그의 아내 ‘프랜시스’가 6주 동안 ‘니우에’에 입국하는 것이 허락되었다.—단, 그들이 호별 방문 봉사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형제들을 세워줄 수 있는 훌륭한 기회였다.
형제들이 이민을 감에도 불구하고 계속 수행함
1965년부터 전도인 수가 감소되어 최저 9명으로까지 떨어졌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로비니’ 형제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형제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뉴우지일랜드’로 떠났기 때문이다.
뒤에 남은 사람들은 회중 일에 경험이 거의 없었고, 영어도 조금밖에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계속 모였고 정기적으로 야외 봉사를 지부 사무실에 보고하였다. 그후 1967년 2월에 그들은 순회 감독자 ‘렌 히이틀리’의 한달간의 방문을 받았다. 요약된 천국 전도 강습이 사회되었고, 그 방문의 마지막 주말에는 조그만 대회를 가졌다.
1968년에 형제들은 또 한번 한달간의 순회 방문으로 축복을
받았다. 그후 그들은 정기적으로 연례 방문을 받았다. 매 방문 때마다 소규모의 순회 대회로 끝났고, 형제들이 왕국 사업을 계속 추진해 나가도록 격려하였다. 1970년에 순회 감독자가 방문하였을 때, 형제들은 92명이 공개 강연에 참석하고 기념식에 111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서 감격하였다.그때 이후로는 상황이 그리 많이 변하지 않았다. 이 섬에는 약 3,200명의 ‘니우에’인들이 남아 있고, 지방 형제들이 증거를 하고 있으며 비율은 전도인 1명 대 359명이다.
‘니우에’보다 훨씬 더 잘 알려진 곳이 ‘타히티’이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가장 큰 이 섬에 왕국 사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아보자.
‘타히티’
‘타히티’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소시에테’ 제도로 알려진 집단의 섬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섬으로서, ‘피지’에서 동으로 약 3,54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8자 모양의 ‘타히티’는 산이 많고, 정상은 해발 2,237‘미터’나 된다. 비와 시내로 물공급이 잘 되는 이 섬은 경치가 대단히 아름답다. 이 섬의 유일한 큰 도시는 ‘파페테’이고, 흥미롭게도 ‘타히티’어, 불어, 중국어를 사용하는 여러 민족이 섞여 살고 있으며,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종교적으로, 사람들은 주로 ‘로마 가톨릭’과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에 속해 있다.
진리가 ‘타히티’에 들어가다
두명의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타히티’에서 전파 사업을 시작하였다. 첫 번째인 ‘렌 헬버어그’는 1956년-57년에 거기서 두달을 보냈다. 그는 ‘협회’의 잡지들을 편지로 예약한 사람들을 방문하였다. 그는 또한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 영화를 다섯 차례 상영하였고, 총 618명이 참석하였다. 두번째는 ‘포올 에반스’였다. 그는 1957년에 70부 이상의 서적과 성서를 전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 해에 가서야 비로소 회중을 위한 기초가 놓여졌다.
‘타히티’ 시민인 ‘아그네스 셴크’는 남편 및 아들과 함께 미국에서 살고 있다가, 그 가족이 진리 안으로 들어왔다. 1957년 대회중에, 그들은 ‘노워’ 형제가 왕국 사업이 금지되었고 선교인들의 입국이 거부당한 ‘타히티’가 더 크게 필요로 하는 나라들 중 하나라고 발표하는 것을 들었다. ‘어얼’과 ‘아그네스 셴크’는 11살된 아들을 데리고 그곳에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1958년 5월에 ‘캘리포오니아’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이 가족에게 ‘타히티’로 가도록 격려한 형제들 중 하나는 ‘클라이드 네일’이었다. ‘뉴우요오크’에서 1958년 성의 국제 대회가 개최된 후에, ‘데이빗 캐라노’ 및 그의 가족과 함께 ‘클라이드 네일’ 가족은 3개월간의 관광 ‘비자’로 그 해에 ‘타히티’에 입국하였다. 당국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하여, 형제들은 매주 「파수대」 연구 장소를 바꾸었다. 손 대접을 잘 하는 ‘타히티’인들이 연구가 끝난 뒤에 다과를 제공해 주어, 형제들이 관광객이라는 인상을 더해 주었다.
언어 장애가 하나의 문제였지만, 곧 여러 건의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형제들은 두권의 서적, 즉 하나는 불어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영어판을 사용하여 그 문제를 극복하였다. 많은 경우에, ‘셴크’ 자매는 불어와 ‘타히티’어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었다.여러 차례 ‘증인’ 한 사람이 ‘타히티’인 관심자와 함께 걸어가면, 친구나 친척들이 그들을 세우고 이 새로운 종교에 관해 질문하곤 하였다. 한번은 어느 ‘타히티’인의 친구가 자기 친구가 ‘증인’과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하자, 길 한복판에 ‘버스’를 세워 승객들이 앉아서 기다리게 해놓고 차에서 내려 그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자리에서 가정 성서 연구가 마련되었다!
새로운 사람들이 침례를 받다
이들 형제들의 ‘타히티’ 체류의 절정은, 그들이 3개월 동안 영적으로 세워 주고 이 섬을 떠나기 직전에 있었다. 이것은 여덟 명이 침례를 받아, ‘타히티’의 첫 열매를 맺은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네일’ 부부와 ‘캐라노’ 부부는 ‘셴크’ 부부와 새로운 사람들이 왕국 사업을 수행하도록 남겨 두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1959년에 ‘파페테’에 하나의 회중이 형성되었고, 선교인들은 금지되었지만 ‘돈 클래어’가 지역 감독자로서 ‘타히티’에 들어갔으며 매번 방문 중에 순회 대회를 개최하였다. 1960년까지는 28명의 전도인이 있었다.
1960년은, 정부가 ‘여호와의 증인’의 조직된 국내 협회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기억할 만한 해였다. 그렇게 하여 사업은 법적 지위를 갖게 되었고, 협회는 재산을 취득할 수 있게 되었다.
시험의 때
요한 1서 2:19이 지적하듯이,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한 자들이 있다. ‘타히티’ 역시, 1961년에 발생한 사건들로 증명되었듯이, 그 점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인 ‘파이오니아’ ‘크로드 보놈므’는 ‘타히티’에서 봉사하도록 ‘협회’에 의해 임명되었다. 그는 장성되었고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봉사해 오던 지방 형제와 교체되어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그 지방 형제는 시기하게 되었고, 그 결과 회중 내에 분열이 일어났다. 일부는 제명되었고, 또 얼마는 연합을 중지하였다. 이러한 일이 활기를 잃게 하는 영향을 주긴 하였지만, 사업은 결코 중단되지 않았으며, 1963년까지는 전도인 수가 68명으로 껑충 뛰었다.
계속된 확장
1963년에 절정을 이룬 것은 섬 양식의 왕국회관을 완공한 일이었다. 그리고 ‘증인’들은 그 왕국회관에서의 기념식에 198명이 참석한 것을 보는 즐거움을 가졌다. 그 이듬해는 78명의 전도인들이 그 왕국회관에서 순회 대회를 가졌고, 220명이 참석하였다.
이 사랑받을 만한 섬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성서의 요구 조건들에 순응하기 위해 생활에서 커다란 변화를 해야 했다. 예로서, 진리를 발견하기 전에 혼인도 하지 않고 14명의 자녀를 낳은 42세된 한 부인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한 남자와 동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자기 자녀들의 성이 모두 같지 않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는 자기 생활을 정리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가야 하였고, 그런 과정을 거치는 데 1년이 걸렸다.
마침내 결말이 났을 때, 그는 그 남자와 결혼하였다. 한달 뒤에 그와 그의 딸 하나가 침례를 받았다. 지금 그의 다른 자녀들과 손자녀들 역시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있다.
당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전역에서 유일한 회중이 ‘파페테’에 있었고, 그 회중은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협회’는 그 회중을 돕도록 두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를 파견하였다. 그들은 ‘프랑스’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를 하던 ‘이노디’ 부부였다. 오래지 않아, ‘이노디’ 형제는 여행하는 감독자가 되어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뉴우칼레도니아’ 그리고 ‘뉴우헤브리디즈’(지금의 ‘바누아투’)를 방문하였다.
‘타히티’인들은 방문객들이 도착하면 꽃으로 만든 ‘레이’를, 떠날 때는 영원한 기념으로 썩지 않는 조개 껍질로 만든 ‘레이’를 달아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한 관습이 증거할 기회를 갖게 하였다. 예로서, ‘돈 클래어’ 형제는 이렇게 기술한다. “내가 ‘타히티’를 방문할 때마다, 형제들과 관심자들이 100명이나 나와서 도착할 때 우리를 환영해 주었고, 떠날 때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 매번 우리는 백개의 꽃이나 조개 껍질로 만든 ‘레이’를 받았다. 바다 조개 껍질로 만든 ‘레이’가 너무 많아 거의 앞을 못볼 정도가 되어 우리가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을 보고서, ‘레이’를 하나만 단 같은 비행기에 탑승한 관광객들은 혹시 내가 그 섬의 총독이 아니냐고 질문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좋은 토론을 많이 하게 되었다.”
최초의 국제 대회가 미친 영향
1969년 11월에 있은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때 지방 전도인들은 겨우 124명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들이 16개의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210명의 대표자들을 만났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공개 강연에 488명이 참석한 것은 형제들을 감격하게 하였다. 또한 처음으로 그 지방 신문은 ‘여호와의 증인’들을 언급하였다.
‘F. W. 프랜즈’ 형제가 그 대회에 참석한 것은 아주 고무적임이 증명되었다. 그의 연설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사람이 거주하는 62개의 섬에서 앞에 놓여 있는 왕국 사업을 수행해 나가도록 형제들의 마음을 자극하였다. ‘프랜즈’ 형제는 ‘타히티’를 방문한 최초의 통치체 성원이었고, 이 방문과 대회의 유익은 1970년에 전도인이 15‘퍼센트’ 증가한 것에서 볼 수 있다. 1971년에는 새로운 회중이 하나 형성되었다.
더 많은 도움이 도착하다
1971년에 ‘프랑스’의 ‘시카리’ 형제는 ‘피지’ 지부 사무실에 편지하여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는 일에 관하여 문의하였다. 지부 사무실은 그에게 ‘타히티’로 이사할 것을 격려하였다. 여행을 준비하는 데 몇달이 걸렸고, 그 가족은 여비를 장만하기 위하여, 가구와 자동차를 팔았다. 그렇게 하여 1972년 5월에 ‘시카리’ 부부는 두 딸, 아홉 살된 ‘엘리자베드’와 여섯살된 ‘에렌느’를 데리고 ‘타히티’에 도착하였다. 지금 지부 위원으로 봉사하는 ‘시카리’ 형제는 지방 형제들이 발전하도록 돕는 데 기꺼이 자기 몫을 담당하였다. ‘시카리’ 자매는 두 자녀가 있었지만, 다시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이 일로 자극을 받아, 지방 자매들이 그의 본을 따랐다. 그는 지금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으며, 그의 큰 딸 ‘엘리자베드’도 정규 ‘파이오니아’로 어머니의 봉사에 가담하였다.
새로운 왕국회관들과 계속된 발전
지붕이 ‘코코넛’ 잎으로 된 ‘타히티’ 양식으로 건축한 ‘파페테’ 왕국회관은 다시 지을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안이 밀폐된 사면 벽을 하여 이웃의 닭들이 그 속에서 밤을 보내지 못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1973년 2월에 새로운 ‘파페테’ 왕국회관이 봉헌되었다. 그 해 9월에, ‘푸나아우이아’ 회중도
그들의 왕국회관을 봉헌하였다. 장래의 성장을 고려하여, 이 회관은 500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건축되었고, 여기서 순회 대회도 가질 수 있었다.1973년에 ‘프랑스’에서 진리를 배운 두 ‘타히티’인 가족이 ‘타히티’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콜슨 디인’ 형제의 가족은 ‘타히티’에 정착하였고, 한때 ‘프랑스’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를 하였던 ‘쟈메’ 부부는, 회중 전도인이 24명이고 장로가 한 사람뿐인 ‘라이아테아’ 섬으로 갔다. ‘이노디’ 부부가 아기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에, 곧 ‘쟈메’ 형제가 ‘이노디’ 형제를 대신하여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1973년까지 회중 수는 네개로 늘어났고, 1974년에 ‘보라-보라’ 섬으로 이사한 어느 ‘타히티’인 가족의 도움으로 또 하나의 회중이 형성되었다. 1974년 기념식에는 740명이 참석하였고, 이 수는 총 전도인 199명에 비교하면 놀랄 만한 것이었다.
‘노워’ 형제와 ‘프랜즈’ 형제가 ‘타히티’를 방문하다
그리고 형제들은, ‘노워’ 형제와 ‘프랜즈’ 형제가 1975년의 세계 일주 여행의 일부로서 ‘타히티’를 방문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즐거워하였다. 이것은 ‘노워’ 형제의 최초의 ‘타히티’ 방문이었다. 7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격려적인 연설을 듣기 위하여 참석하였다. ‘노워’ 형제와 ‘프랜즈’ 형제는 감독자들을 초대하여 모임을 가졌고, ‘협회’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지부 사무실을 열 것을 고려중임을 그들에게 알렸다! 놀라움을 금치 못한 장로들은, 구역의 범위를 고려하여, 지방 지부 사무실이 크게 필요하다는 것에 만장 일치로 동의하였다. 그 모임에서, ‘알랭 쟈메’ 형제는 1975년 4월 1일에 문을 열게 될 새로운 지부 사무실의 감독자로 봉사하도록 추천되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태평양의 이 지역에서의 사업의 감독권은 ‘피지’ 지부에서 ‘타히티’ 지부로 이양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이 외딴 지역에서의 형제들의 활동을 참으로 축복하시어, 오늘날 ‘타히티’에는 500명 이상의 전도인이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협회’의 별개 지부로서의 ‘타히티’ 지부가 감동적으로 발전한 이야기는 다른 기회에 듣게 될 것이다.
이제 신권 발전의 축복을 받은 불어를 사용하는 다른 구역인 ‘뉴우칼레도니아’를 고려해 보기로 하자.
‘뉴우칼레도니아’
‘프랑스’의 해외 영토인 ‘뉴우칼레도니아’는 약 25개의 섬들로 구성되어 있고,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해안에서 동으로 약 1,12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다. 이 영토의 이름은 태평양에서 가장 큰 섬들 중 하나인 이 영토의 주도(主島)인 ‘뉴우칼레도니아’에서 따온 것이다. 그 섬의 길이는 약 400‘킬로미터’이고 폭은 50‘킬로미터’이다. 인구는 약 145,000명이다. ‘뉴우칼레도니아’인들은 ‘프랑스’ 시민이고, 그들 중 절반이 이 영토의 수도인 현대 ‘프랑스’ 양식의 도시 ‘누메아’에 산다.
‘뉴우칼레도니아’ 원주민들은 ‘멜라네시아’인이지만, 지금은 ‘유럽’인들과 그 수가 거의 같다. 다른 섬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뉴우칼레도니아’에는 여러 섬 사람들이 뒤섞여 있고, 주도(主島)에는 약 35가지의 서로 다른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대화하기 위하여 모두는 불어를 사용한다.
19세기 말까지 식인 행위가 보편적이었다. 1840년 경에 그리스도교국의 선교인들이 도착하였을 때, 원주민들의 반응은 아주 폭력적이었다. 여러 선교인들이 살해되어 잡아 먹혔다. 그러나 ‘프랑스’ 군대의 지원을 받아, ‘가톨릭’ 선교부들이 주도(主島)에 설치되었고, 그런 곳에서는 오늘날에도 그들이 우세하다. ‘런던 선교회’는 ‘마레’와 ‘리포우’ 섬에 선교부들을 설치하였고, ‘가톨릭’교인들이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을 그리고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이 ‘가톨릭’교인들을 몰아내려고 시도하면서 종교 전쟁이 벌어져, 많은 유혈 사건이 발생하였다. 오늘날 약 90,000명이 ‘가톨릭’교에 고착하고 있으며, 약 34,000명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에 속해 있다.
왕국 사업의 조용한 시작
1954년에 ‘존’과 ‘엘렌 허블러’가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도착하였다. ‘허블러’ 형제는 이와 같이 말한다. “우리는 한달 간의 관광 ‘비자’로,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와 주실 것을 전적으로 확신하면서 출발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지부는 ‘허블러’ 형제에게 가능한 속히 일자리를 구할 것을 조언하였고, 그리하여 그의 고용주가 그들이 ‘비자’를 연장하는 데 협조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그는 일자리를 구했다. 하지만 그때쯤 그들의 한달 ‘비자’가 만료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위해 보증을 서준 고용주한테 갔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6개월 연장할 수 있었다. ‘허블러’ 형제는 이렇게 회고한다. “첫 달 말에, 배가 와서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갈 때, 우리는 부두에 서서 크게 즐거워하면서 우리를 태우지 않고 떠나는 배를 바라보았으며, 우리가 받은 지시의 첫 번째 부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을 알고 행복해 하였다.”그들은 사업의 두번째 단계, 즉 섬의 외곽 지역들을 방문하여 사람들에게 진리를 이야기해 주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서적이 없어, 영어 성서들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곧, 그들이 전파하는 것을 사람들이 열렬한 관심을 갖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재방문 계획들을 세웠다.
그들이 관심자들에게 전할 서적이 없었기 때문에, ‘허블러’ 형제는 ‘오스트레일리아’ 지부로부터 얼마의 서적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들은, 어느 화물선의 기관사인 ‘뉴우칼레도니아’인 관심자가 소포를 가지고 가서 그들에게 전해 줄 것이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렇게 하여 불어 서적의 첫 번째 공급품이 도착하였다. 나중에 어느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관광선을 타고 더 많은 서적을 가지고 왔다. 그때 그 배의 ‘오케스트라’는 공회당에서 하루 저녁 연주를 하였다. 그래서 ‘허블러’ 부부는 서적을 받아오기 위하여 그 무도회에 가야 했다. 마침내, ‘허블러’ 형제는 우편을 통해 보내도록 얼마의 서적을 주문하였고, 아무런 문제없이 세관을 통해 주문한 서적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이 도착하여, 하나의 회중이 성장하다
그들 두 사람만 참석한 ‘뉴우칼레도니아’에서의 최초의 기념식을 지킨 후에,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도착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몇 가족은 단지 몇 개월만 머물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몇년간 체류하였다. 이들 열성적인 형제들은 회중을 위한 기초를 놓는 데 놀라운 일을 하였다.
1956년에 지부는, 다른 형제들은 외곽 지역에서 봉사하는 동안 ‘허블러’ 부부에게 ‘누메아’에서 전파를 시작하라고 지시하였다. 곧 ‘누메아’의 관심자들이 그 해 8월에 발족한 회중이 갖는 집회들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그 새 회중은 9명의 전도인으로 시작하였고, 급속히 14명으로 그리고 21명과 26명으로 증가하였으며 그 해 말에는 32명이 되었다.
1957년에 순회 감독자가 처음으로 회중을 방문하여, 한달 동안
머물렀다. 그 방문이 있은 후 얼마 안 되어, 형제들은 ‘누메아’에서 집중적으로 노력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958년 4월에 지방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최초로 야외 봉사를 시작하였고, 그후 침례를 받았다.1958년 9월 1일에, ‘뉴우칼레도니아’에서의 사업은 새로운 ‘피지’ 지부의 감독 아래 들어갔다. 그 해에 형제들은 전도인 신기록이 41명인 작은 집단이었지만, 최초의 순회 대회를 갖게 되어 감격스러워하였다.
다시 전 시간 봉사에 들어가다
‘허블러’ 형제는 ‘뉴우칼레도니아’로 갈 때, ‘파이오니아’ 봉사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전 시간 봉사를 다시 시작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 시간 봉사자로서의 체류 허가를 신청하였다. 그는 진리에 호의적인 총독의 비서를 만나러 갔으며, ‘허블러’ 형제는 계속 체류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1959년에 그는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허블러’ 형제는 이와 같이 회고한다. “어느 날 비서는 나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서, 나의 ‘비자’를 갱신하는 때가 언제냐고 물었다. 나는 5개월 남았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어떤 임무로 출장을 가지만 그때 이전에는 돌아오게 될 것이며, 그 동안 그의 비서보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도움을 주도록 지시해 놓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태는 그의 기대처럼 되지 않았다. 그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직책은 ‘가톨릭’ 행동 대원이 맡게 되었다. 그후 당국은 ‘오스트레일리아’ 형제들에게 ‘비자’를 갱신해 주기를 거절하기 시작하였다.”
‘허블러’ 부부는 ‘비자’를 갱신할 때가 되자 신속한 통지를 받았는데, 갱신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 5년을 보낸 후,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온 31명의 형제 자매들 중 마지막 사람들인 그들은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허블러’ 형제는 지금도 ‘뉴우지일랜드’에서 여행하는 감독자로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고 있다.
반대 계획이 좌절되다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이 가자, 교직자들은 이제 ‘증인’들은 끝장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심지어 설교단에서, 지방 ‘증인’들이
이제 교회로 돌아올 것이라는 발언을 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실망하였다. 오히려, 왕국 사업이 증가하였던 것이다.1960년에 ‘협회’의 모든 출판물이 금지되었지만, 형제들은 성서만을 사용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발행자의 이름을 ‘만국 성경 연구회’라고 밝힌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 책을 인쇄하였고, 그 책은 전파 사업에 사용되었다. 여러 차례 우편 관리들이 잡지를 폐기하였지만, 얼마의 잡지는 여전히 도착하였다. 「파수대」에 대한 금지령을 교묘하게 피하기 위하여, 형제들은 표지가 백지로 인쇄된 잡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아무런 문제없이 배포할 수 있었다.
그 동안, 출판물들에 대한 금지령을 해제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1963년에 ‘협회’는 그 소송에서 이겼다. 그리하여 추밀원은 「파수대」와 「깨어라!」를 제외한 모든 출판물들에 대한 금지령을 해제하였다. 「깨어라!」에 대한 금지령은 1969년에 해제되었지만, 형제들은 「파수대」에 대한 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는 1975년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왕국 사업이 진척되다
1962년에 사업은 진척되었으며, 37명이 전파 사업에 참여하였다고 보고하였다. 1966년에 전도인 수는 104명으로 증가하였고, 지방 형제들 몇몇이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므로 인하여 사업은 섬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75년에 형제들은 그들에게 최초의 ‘길르앗’ 졸업생인 ‘포셋’ 부부를 환영하게 되어 기뻐하였다.
몇년 동안 회중 집회는 제 2차 세계 대전 때 비행기 격납고였던 ‘존 바욱스’ 형제의 차고에서 열렸다. 1975년까지 이곳은 순회 대회장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75년에 ‘누메아’에 있는 ‘안세 바타’ 회중이 대지를 매입하여, 진정한 의미에서의 ‘뉴우칼레도니아’ 최초의 왕국회관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1년 이내에 완공되었고, 1976년 6월에 봉헌되었다.
같은 달에 ‘협회’는 ‘뉴우칼레도니아’에 지부 사무실을 개설하였고, 이 새 지부는 이제 ‘바누아투’와 ‘월리스’ 및 ‘푸투나’ 제도를 감독하게 되었다. ‘뉴우칼레도니아’의 전도인 수는 1954년의 2명의 ‘오스트레일리아’인으로부터 1975년에는 315명으로 늘어났다. 현재 ‘뉴우칼레도니아’에는 전도인이 500명 이상 있으며, 1983년의 기념식 참석자 수는 1,456명에 달했다. 이렇게
하여, 태평양의 또 하나의 지역에서 왕국의 좋은 소식이 활기차게 전파되고 있다.그러나 이제 ‘바누아투’(이전의 ‘뉴우헤브리디즈’)로 우리의 주의를 돌려서, 그곳에서 전파 사업이 시작된 경위를 알아보도록 하자.
‘바누아투’
‘바누아투’는 약 80개의 섬이 Y자 모양으로 연이어져 있으며, 서남 태평양 상에 800‘킬로미터’ 이상 뻗쳐 있다. 하지만, 육지 면적의 90‘퍼센트’는 단지 가장 큰 10개의 섬이 차지한다. ‘바누아투’는 ‘피지’의 서방 약 960‘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섬의 절반은 작은 섬들로서 바위만 위로 나와 있다. 나머지 절반은 산이 많으며, 북쪽과 중심부에 있는 섬들은 무성한 열대성 산림으로 덮여 있다. 강우량이 많고 습한 열대성 기후가 이 나라의 특징이다. 사람들은 ‘멜라네시아’인 후손이며, 그들 대부분이 촌락에서 생활한다.
이 나라의 125,000명의 주민들은 일백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원활한 의사 소통의 필요성으로 ‘비슬라마’라고 불리는 혼합어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이 언어는 주로 영어 단어에다 ‘멜라네시아’어의 문법을 혼합한 것이다. 대부분의 ‘바누아투’인들은 불어 및 영어와 함께 ‘비슬라마’어를 사용한다. ‘뉴우헤브리디즈’가 ‘프랑스’와 영국의 공동 통치를 받은 결과, 영어와 ‘프랑스’어가 소개되었다. ‘뉴우헤브리디즈’가 독립을 선언하여 국명을 ‘바누아투’라고 명명한 때인 1980년 7월 30일에 그 통치는 끝났다.
여러 해에 걸쳐 ‘통가’와 ‘피지’로부터는 물론, ‘말레이지아’, ‘베트남’, 중국, ‘월리스’ 섬 및 ‘키리바티’로부터 근로자들이 왔다. 그래서 두개의 주요 도시, 즉 수도인 ‘빌라’(‘에파테’ 섬에 있음)와 ‘에스피리투 산토’ 섬의 ‘산토’ 거리에서는 여러 인종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관습과 종교
‘니-바누아투’의 생활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여전히 조상 숭배에 집중되어 있다. 사람들은 조상들의 유령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영매술이 그들의 신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것은 심지어 식인 행위로까지 인도하였다.
예를 들어, ‘암브림’ 섬에서 한 영매술 사회에 들어가려면, 신입자는 사람을 잡아 먹어야 했다.그리스도교국의 초기 선교인들 중 얼마가 살해되었지만, 교회들은 점차 영향력과 권력을 장악하였고, 그들끼리 섬들을 분배하여 영국 국교도들은 북쪽을, 장로교인들은 남쪽을 차지하였다. 오늘날 교회들은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으며, 그렇게하여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지배력을 강화시키고 있다. 장로교인들은 수가 약 50,000명 정도이고, ‘로마 가톨릭’교인들은 약 20,000명 그리고 영국 국교도들이 17,500명이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해 보면, 세계의 이 부분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사업이 느리게 발전해 온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진리의 빛이 비취기 시작하다
1930년대에 ‘조오지 윈톤’ 형제가 그 제도를 항해하면서, 진리의 최초의 씨들을 뿌렸다. 그의 배가 ‘파아마’ 섬에서 파선되긴 하였지만, 이것이 그를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좋은 소식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1940년경에 추방당한 것이 분명하다. 또 다른 형제 ‘알프레드 라이스’가 이곳 사람들 가운데서 봉사를 하였지만, 그는 ‘말라리아’에 걸려 ‘파아마’에서 사망하였다.
1958년에 ‘루이스 뉴우톤’과 그의 아내가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도착하였다. “‘빌라’ 항구에 입항하였을 때, 우리는 무성한 수풀 사이에 여기저기 집들이 보이는 이곳 만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고 ‘뉴우톤’ 형제는 기억한다. “사방 어디에나 ‘히비스커스’, ‘부우겐빌리어’ 및 얼룩무늬 잎들의 선명한 색깔이 보였다. 그 작은 도시는 약 열 두개의 작은 상점과 두개의 큰 상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뉴우톤’ 형제는 ‘코프라’ 농장에서 6개월 동안 일할 일자리를 얻었다. 그래서 그와 그의 아내는 이 섬 반대편의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였다. ‘뉴우톤’ 부부는 전파 사업을 시작하려고 노력하면서, 조심스럽게 일하였다. 당시는 알지 못한 일이지만, 그들은 1983년에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올 때까지 그곳에서 약 25년을 보내게 될 것이었다.
1959년에 ‘피지’의 한 대회에 참석한 후 집에 도착한 ‘뉴우톤’
부부는, 농장 주인이 진리 때문에 그들을 등지고 해고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진 돈을 다 써버렸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나라에 머물기 위한 보증금을 지불할 돈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겨우 아는 사이가 된 두 농장 주인이 그들에게 돈을 빌려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뉴우톤’ 형제는 이 섬의 다른 쪽에 있는 ‘프랑스’ 인의 한 농장에서 일자리를 구하였다.순회 감독자 및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려를 받다
이 이사로 이제 그들은 ‘빌라’에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왔다. 그들은 낡은 자동차를 한대 빌려서 타고 다니면서, 그 도시에서 증거도 좀 하였다. ‘뉴우톤’ 형제는 이와 같이 말한다. “순회 감독자 ‘렌 헬버어그’가 1960년 4월에 우리를 방문했을 때, 우리는 매우 격려를 받았읍니다.”
1961년에는 ‘캐나다’인 부부 ‘로버어트 힌쉐’ 형제와 자매가 도착하였고, 그들은 이민청이 그들을 강제로 떠나게 할 때까지 몇달 동안 머물 수 있었다. 그들은 이 섬에 있는 동안 내내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 책을 여러 부 전하였으며, 원주민들은 그 책들을 가지고 그들이 사는 섬들로 돌아갔다. 그런 식으로 진리의 씨들이 심어지고 있었다. 한번은 ‘오드리 뉴우톤’이 자동차 안에서 협박 단체로 보이는 원주민들에게 둘러 싸였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라고는 그 책들뿐이라는 것을 알고 그 자매는 얼마나 안심이 되었겠는가!
1963년에 식구 중 네 사람이 전도인인 ‘베이츠’ 가족 다섯 명이 영국으로부터 도착했을 때, ‘뉴우톤’ 부부는 감격해 하였다. 5년 만에 처음으로 ‘뉴우톤’ 부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념식을 지킬 수 있었다. 지금은 ‘에파테’ 섬에 여섯 명의 전도인이 봉사하고 있다.
최초의 원주민 전도인
어느 날 ‘지인 베이츠’ 자매가 ‘로마 가톨릭’ 선교부 소유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있었다. 거기서 시작된 성서 연구생 중 하나는 원주민 여인 ‘헬렌 피타’였는데, 그는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다. 그 여인과 연구를 하는 데는 많은
참을성과 슬기로움이 요구되었다. 그 이유는 그가 문맹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남편은 술을 마셔 돈을 탕진하였고, 그가 열 자녀를 양육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그는 서서히, 꾸준히 발전하여 최초의 지방 전도인이 되었고, 1967년에 침례를 받았다. 그는 지금도 능력껏 최선을 다하여 충성스럽게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모든 집회를 시내에서 갖도록 조직함으로써 1964년에 확정적인 전진의 일보를 내딛게 되었다. 정기적으로 10명 내지 20명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베이츠’ 형제의 계약을 갱신해 주기를 거절하였다. 그래서 ‘바누아투’에서 3년 동안 있은 후 1966년에, 그 가족은 영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순회 대회들과 성장
‘바누아투’의 작은 집단은 1967년 8월에 최초의 순회 대회를 즐겼다. 이 대회는 ‘뉴우톤’ 부부의 집 앞뜰에서 개최되었다. (그 무렵에 그들은 시내로 이사했었다.) 순회 감독자 ‘렌 헬버어그’는 약 40명의 사람들에게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 영화를 보여 주었다.
1970년에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알렌 테일러’ 형제와 그의 가족이 와서 형제들과 연합하였으며, 1971 봉사년도의 총 전도인 수는 15명이 되었다. 그들은 1975년에 ‘피지’로 이사할 때까지, 계속 머물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충실하게 일하였다. 이 가족이 도착할 무렵, 지부는 불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을 격려하여 그곳으로 이사하게 하였고, 많은 가족들이 ‘프랑스’로부터 왔다.
1971년 3월로 계획된 순회 대회로 인해, 몇몇 지방 형제들은 ‘뉴우칼레도니아’로부터 온 약 40명의 형제들을 환영하게 되어 크게 격려를 받았다. 그들이 집회 장소로 사용하던 차고는 불어와 ‘비슬라마’어로 동시에 해설이 제공되는 ‘협회’의 영화 중 하나를 관람하기 위해 참석한 147명으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1972년에 형제들은 도시 교외에 있는 얼마의 대지를 매입할 수 있어, 왕국회관 건축을 시작하였다.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고 ‘코코넛’ 잎으로 벽을 만든 다음, 그들은 이 건물을 그 다음
순회 대회장으로 사용하였다. 회관의 자금 조달을 돕기 위하여, 지방 형제들은 당시에 관광객들에게 파는 작은 배를 조각하여 돈을 마련하였다.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서적과 선교인들
1976년 6월에 ‘뉴우칼레도니아’에 새로운 지부가 발족하였을 때, ‘바누아투’는 그 지부의 감독하에 들어갔다. 통치체는 선교인들을 ‘바누아투’로 파견하는 것을 승인하였지만, 영국인 선교인들의 입국 허가를 얻으려는 모든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다. 입국이 허락된 최초의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온 ‘카스테랑’ 부부였다. 그때가 1977년이었다. 「파수대」지가 ‘비슬라마’어로 번역된 것도 그해였다. 그때부터 모든 집회는 주로 그 언어로 사회되었다.
‘빌라’에 있는 동안 ‘카스테랑’ 형제는 ‘조나 사크-사크’라고 불리는 한 노인에게 증거하였다. 그 사람은 3개월 동안 연구하고 나서 1978년 지역 대회에 참석하였으며, 그리고는 그가 살던 섬 ‘암브림’으로 돌아갔다. 우편으로 ‘비슬라마’어 「파수대」가 그에게 보내졌다. 후에, 몇몇 형제들이 ‘조나’를 방문하기로 결정하였다. ‘조나’가 자기가 지은 아름다운 왕국회관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은 깜짝 놀랐다! 「파수대」만 읽고서도 그는 정기적으로 집회를 가질 필요성과 전파 사업에서 활동적이 되어야 할 필요성을 이해했던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19명으로 된 한 집단이 그의 마을에서 갖는 「파수대」 연구에 모이고 있으며, 이 섬의 다른 한 부분에서 그가 시작한 또 한 집단이 모이고 있다. 건강이 좋지 않고 아직 침례도 받지 않았지만, ‘조나’는 성서 연구를 40건이나 사회하고 있다.
1975년에 보고한 38명의 전도인은 증가하여 4년 후에 57명이 되었다. 1979년의 한달 동안에 신기록인 64명이 야외 봉사를 보고하였고, 159명이 그해의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독립과 그 영향
형제들은 1980년 초에 ‘비슬라마’어 「진리」 책을 받고서 기뻐하였다. 이것은 확실히 시기에 적절한 마련이었다. 왜 그러한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이 임박함에 따라, 이 나라는 새로운 시대에 돌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7월 30일에 독립을 하였고, 그리하여 여러 형제들을 포함한 많은 ‘유럽’인들이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11월에 정부는 ‘바누아투’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여호와의 증인’ 선교인들에게 ‘비자’ 발급해 주기를 거절하였다. 1981년 1월 말까지 그들은 모두 다른 임명지로 떠났다. 이렇게 하여 ‘니-바누아투’ 형제들은 체류 ‘비자’를 받은 몇명 안 되는 ‘유럽’ 형제들을 제외하고는, 스스로 해 나가야 했다.독립을 한 후에 겨우 34명의 전도인들이 두개의 굳건한 회중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업은 계속 진척되었고, 현재 50명 이상의 전도인들이 있으며, 이들은 1983년 기념식에 211명이 참석하였을 때 즐거워하였다.
남태평양이 좋은 소식을 듣다
외딴 곳으로 세계에서 독특한 곳이긴 하지만, 태평양의 섬들은 하나님의 왕국 소식을 들어왔고 또 계속 듣고 있다. 주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는 형제 자매들이 현재의 영적인 번영에 크게 기여해 왔다. 현재는 6개의 각기 다른 지부들인 ‘오스트레일리아’, ‘피지’, ‘구암’, ‘뉴우칼레도니아’, ‘뉴우지일랜드’ 및 ‘타히티’ 지부가 남 태평양의 밭을 감독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행 및 통신 문제에 더하여 서로 다른 여러 정부들이 관련되어 있고 또 관리들이 사업을 방해하려는 끈질긴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오로지 여호와의 능력을 통해서만 이 왕국 사업이 번영을 이룩해 왔다.
태평양의 광대함 때문에, 형제들과의 접촉이 제한되어 왔다. 형제들이 서로 그리고 하나님의 조직과 접촉하도록 하는 데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한 해 동안 한 지역 감독자는 약 48,000‘킬로미터’를 배로 여행하면서, 흩어져 있는 집단들을 방문해 왔다. 그렇게 하는 데는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 지구의 이 부분에 있는 형제들은 일반적으로 물질적으로 가난하여, 다른 곳에 있는 형제들이 이곳에서의 고린도 후 8:14, 공동 번역.
전파 사업을 가능하게 한 관대한 지원을 해준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공평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이런 활동의 결과는, “큰 무리”가 지금 생명을 구하는 전파하고 가르치는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명백하다. 각기 다른 인종, 여러 언어 및 나라들로부터 나온 각계 각층의 남녀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받아들였다. (계시 7:9, 10)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증인’들도 여호와의 왕국 통치 아래서 각자 위엄있는 자기 야자나무 그늘 밑에 앉아, 남 태평양 섬들의 아름다운 자연을 포함한 왕국 축복들을 풍족히 즐길 때를 열렬히 고대하고 있다.
[160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남태평양
적도 지역 축적
MI 0 300 600
KM 0 500 1000
적도
오션 섬
키리바티
피닉스 제도
투발루
토켈라우 제도
월리스 및 푸투나 제도
서 사모아
아메리칸 사모아
쿡 제도
타히티
니우에
통가
피지
바누아투
뉴우 칼레도니아
[166면 삽화]
1962년에 죽을 때까지 ‘피지’에서 자기 선교인 임명에 고착한 ‘윌리엄 체크스피일드’
[169면 삽화]
‘체크스피일드’ 형제의 초기 성경 연구생들 중 한 사람인 ‘포우아 토핑가’ 그는 지금 ‘피지’ 지부 위원회의 한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피지’의 초기 전도인 집단 (1956년경)
[170면 삽화]
현재 지부 위원회 조정 위원인 ‘도널드 클래어’와 ‘피지’ 최초의 ‘파이오니아’가 된 그의 아내 ‘유우니스’
[177면 삽화]
‘레오나드 히이틀리’와 그의 아내 ‘클라라’. 그는 ‘피지’ 최초의 ‘길르앗’ 졸업생이었고 지금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다
[181면 삽화]
‘수바’, ‘로버어트슨’ 66번가에 있는 ‘피지’ 지부 사무실
[189면 삽화]
서 ‘사모아’에서 최초의 ‘사모아’ 태생 ‘증인’들 가운데 속하는 ‘푸아이우폴루 펠레’와 그의 아내
[192면 삽화]
벽이 없는 ‘아피아’에 있는 왕국회관
[195면 삽화]
형제들을 격려하면서 남 태평양의 광대한 지역에서 자기 아내 ‘프랜시스’와 함께 순회 사업을 한 ‘포올 에반스’
[201면 삽화]
1961년에 ‘아메리칸 사모아’에서 봉사하고 있는 선교인들
[208면 삽화]
‘키리바티’와 ‘투발루’에서 왕국 사업을 시작하는 일을 도운 ‘사울로 테아시’(이 사진에는 그의 아내와 아들이 함께 나와 있다)
[213면 삽화]
‘통가’, ‘누쿠알로파’에 세워진 최초의 왕국회관. 일단의 ‘통가’ 형제들이 그 앞에 서 있다
[219면 삽화]
영적 낙원은 ‘타히티’와 이웃 섬들에서 확장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