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바로 가기

차례 바로 가기

자메이카와 카이만 제도

자메이카와 카이만 제도

자메이카와 카이만 제도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자메이카 섬이다. 쿠바의 남쪽에서 불과 150 킬로미터 지점, 그리고 미국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로부터 약 770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230만명이 넘는 주민을 가진 이 섬은 일년 내내 기후가 따뜻하고 온화하다. 크리스토퍼 콜룸부스가 1494년에 이곳에 도착했을 때, 아라와크인디언들이 이 섬에 살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이 섬을 자이마카라고 이름지었다. 이것은 “나무와 물의 나라”라는 뜻이다. 이 섬은 확실히, 사철 푸른 산과 계곡, 무성한 열대성 식물, 쏟아지고 있는 폭포 그리고 고요한 파란 바다의 가장자리를 에워싸고 있는 아름다운 하얀 모래밭 해변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 섬은, ‘낙원의 섬’이라고 불려지는 것처럼 방문객들은 이 섬의 절경에 경탄하여, 오로지 찬사를 연발한다.

성서 진리가 이 섬에 들어가다

1897년에 더 아름다운 것이 자메이카에 들어왔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이다. (이사야 52:7) 그 경위는 이러하다. 코스타리카로 이민을 갔던 두명의 자메이카인이 그 나라에서 진리를 배우고, 이 훌륭한 좋은 소식을 자기의 고국으로 가져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H.P. 클라아크루이 파시자메이카에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한 최초의 사람들이 되었다.

보고에 의하면, 그들은 세인트 메어리 교구 내의, 산속에 있는 마을 캠버웰로 갔다고 알려 준다. 거기서 패트릭 데이빗슨과 그의 동생에게 전파했다. 그 두 사람은 모두 성서의 진리를 받아들였고, 즉시 전파 사업에 합세했다. 그 소식에 대한 반응은 고무적이어서, 2년 후인 1899년 3월 26일에는 대회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에 300명이 참석하였다.

협회에서 대표자를 파견하다

관심자들은 곧 연구 집단별로 조직되었다.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진리의 빛이 이 나라에 처음으로 도달한 지 6년 후, ‘협회’는 자메이카에서의 사업을 감독하도록 한 사람의 대표자, 즉 J.A. 브라운을 파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해에 성취한 사업에 대해, 「파수대」 1904년 12월 15일호 (영문) 373면에서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지난 해[1903년]에 자메이카는 좋은 사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관심자는 거의 모두가 흑인이었고, 브라운 형제는 ·⁠·⁠· 분명히 이곳에서 훌륭한 봉사를 해오고 있다.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보다는 이미 일으켜진 관심을 굳게 하고 실제로 지도하고 다지는 봉사를 하였던 것이다.”

확실히, 자메이카인들은 과거나 지금이나 성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좋은 발전이 있었다. 학교 시절부터 그들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경하도록 배운다. 성귀 암송을 배우는 것은 교육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왕국’에 관해 가르치기 위해 먼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명할 필요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교직자의 반대가 시작되다

1905년 킹스턴에서 열린 3일간의 대회에 모인 참석자의 최고수는 600명이었다. 그때까지 24명의 콜포처(현재의 파이오니아에 해당함)가 부지런히 봉사하였으며, 이 섬 전역을 찾아다니면서 서적을 배포하였다. 여덟명의 순례자(‘워치 타워 협회’의 여행하는 대표자)의 성서 강연 및 그들과의 건전한 교제를 통해 성서 연구 집단들은 격려를 받고 있었다. 그러한 활동은 이내 교직자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 교직자들은 ‘성경 연구생’들이 수행하는 전파 사업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회 최종일의 마지막 프로그램은 질의 응답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마침 그때에, ‘성경 연구생’들에 대해 상스러운 글을 쓰기도 하고 폭언을 일삼기도 한 교직자가 나타났다! 그는 사태를 혼란시키려고 애썼지만, 형세는 역전되었다. 그리고 이 반대자는 사실 거짓 목자임이 폭로되었다. 「파수대」지 1905년 11월 1일호 (영문) 326면에 이렇게 보고된 바와 같다. “반대자의 질문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허락되고, 방문자들을 계몽하고, 그 결과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위한 친구가 되었다고 여기게 되어 우리는 기쁘다.”

역경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전파하다

초창기에 시골 지역으로 소식을 가지고 가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 믿음 그리고 결의가 필요하였다. 자동차도, 지방의 교통 수단도, 포장된 도로도 없었다. 「파수대」지 1907년 1월 1일호(영문) 7면에서 브라운 형제가 보고한 바와 같다.

“특히, 콜포처 형제들에 대하여 언급해야겠다. 이곳에서의 사업은 극히 힘이 들고,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이 일에 생명을 내걸게 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사랑뿐이라고 확신한다.

“여행을 하거나, 서적을 운반할 시설은 어디에도 없다. 봉사는 줄곧 산속에서 해야 하고, 형제들은 15-30권의 책을 어깨에 메고 30 킬로미터에서 100 킬로미터의 길을 걸어다녀야 한다.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는 여행은 힘들다. 여행중에 비를 맞기도 하고, 머물 장소를 찾을 수 없어서 야숙하는 일도 여러 번 있다. 배달을 갔다가 여러 차례 실망을 하고 운반한 책들을 가지고 먼 길을 다시 걸어서 돌아와야 하는 일도 있다. 하지만, 이 일을 해볼 만한 즐거운 특권이라고 말하는 형제들도 있다. 그들의 인식은, 다른 사람들이 그 대열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아모스 윌킨슨 형제는 어느날 밤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어느 마을에서 그날 밤 그가 투숙할 수 있는 유일한 집이라고는 한 교직자의 집뿐이었다. 방문하는 전도인이라는 말을 듣고, 그 교직자는 하룻밤을 묵게 해달라는 이 형제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윌킨슨 형제가 ‘성경 연구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즉시 환대의 제의를 취소하고 자기 집에서 나가라고 명하였다.

교직자의 집을 나온 후, 윌킨슨 형제는 그 교직자의 교회를 지나치면서 문을 한번 열어 보았다. 문이 잠겨 있지 않음을 알고, 안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그는 떠나기 전에, ‘협회’의 책자 몇권을 설교단 위에 놓인 성경 가운데에 넣어두었다. 후에 형제가 그 마을로 돌아와보니, 바로 그 교직자가 그 책자들을 사용하여 설교를 하고, 다음에 교회 성원들에게 책자를 나누어 주었음을 알게 되었다.

문제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1906년 한해 동안에만도 책자를 포함하여 120만부의 서적이 배포되었다. 바로 그 해에, ‘협회’는 킹스턴 시에다 지부 사무실을 설립하였다. 그 후 9년 동안에 걸쳐 왕국 전파 사업은 매우 확장되어, 자메이카 지부는 코스타리카에서의 사업도 감독하는 책임을 임명받았다. 최초의 두 자메이카여호와의 증인은 바로 이 코스타리카에서 진리를 가지고 자메이카로 왔다.

대지진이 자메이카를 강타하다

1907년 1월 14일에 대지진이 킹스턴 시를 강타하여 거의 완전히 붕괴시켜 버렸다. 브라운 형제는 ‘협회’에 이렇게 편지했다. “현재까지 들은 바로는, 주의 백성은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음을 보고하게 되어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집회에 꾸준히 참석하던 한 관심자 친구는 사망하였읍니다. ·⁠·⁠·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은, 이 도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종교적 숭배 장소는 우리의 집회 장소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2층의 두개 방을 제외하고는 이 건물은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벽돌로 지어졌읍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방은, 밑 건물의 옥상에 무거운 목조로 올린 것이기 때문에 더 위험한 것입니다. 이 경험으로 우리의 믿음은 크게 강화되었읍니다.”—「파수대」지, 1907년 2월 15일호(영문), 53면.

증거 사업을 확장하다

1908년에 최초로 킹스턴 이외의 장소에서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자메이카에서의 왕국 전파 사업의 발상지인 캠버웰에서 8 킬로미터 떨어진 해변의 작은 도시 아노토베이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의 최고 참석자 수는 약 350명이었다.

그 후 4년간은, 인쇄물과 공개 강연으로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기 때문에 주목할 만한 해가 되었다. 교직자들은 또한, 사람들이 ‘협회’의 서적을 읽지 못하게 하려고 한층더 압력을 가했다. 그 결과 주문을 취소하고, 이미 구입한 서적의 대금의 환불을 요구하는 사례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심지어 외국의 밭으로까지 전진해 나갔다. 회중을 조직하기 위해 두명의 순례자가 코스타리카바아베이도즈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자메이카 지부는 파나마에서의 사업도 감독하게 되었다.

러셀 형제의 방문

1913년 2월,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초대회장 차알스 테이즈 러셀자메이카를 3일간 방문하였다. 이 방문에 맞추어 대회가 계획되었다. 첫날에, 이 섬 전역으로부터 약 600명의 형제 자매들과 관심자들이 모여 러셀 형제의 연설을 들었다. 「파수대」지는 이 모임에 대하여 보고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사랑하는 벗들 가운데는 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전재산을 거의 다 사용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주와 진리에 대해 아주 열심이 있고 관심이 대단히 많았다.”

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캠버웰로부터 57 킬로미터의 먼지 덮인 길을 걸어서 여행한 에벌린 프렌더가스트 자매의 예는 ‘성경 연구생’들의 열심과 결의를 나타내 주는 전형적인 것이다. 그러한 열심은 또한 분명히 자메이카 형제들의 활기찬 노래에서도 나타났다. 협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의 노래는 탁월하였읍니다.”

이 대회의 공개 강연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모였기 때문에, 두개의 강당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나는 일반 사람을 위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경 연구생들을 위해 사용되었다. 일반 사람을 위한 건물은 1,800명의 사람들이 꽉 메웠고, 입장을 못한 사람은 2,000명이 넘었다! 청중 가운데는 상당한 수의 교직자들이 참석해 있었고, 그들 중에는 사람들이 열심히 연설을 경청하는 태도를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다. 영국 성공회의 한 교직자는, 증인들의 소식이 관심을 끈 비결은 그 강연의 내용이 “희망의 복음”이라는 사실에 있다고 말했다.

신문도 이 대회를 호의적으로 보도해 주었다. 「파수대」지 1913년 3월 15일호(영문) 94, 95면에서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신문들은 대회에 모인 사람들에 대해 논평하면서, 청결함이나 질서 등에 대해 호평하였으며, 증인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않았고 경찰의 주의를 받을 필요도 없었다고 칭찬하였다. ·⁠·⁠· 신문은 이 대회에 관하여 돈과 연보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사실도 지적하였다.” 1913년의 이 대회는 그곳에 참석할 특권을 가졌던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제 1차 세계 대전중의 시험과 시련

각처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자메이카의 형제들 역시 1914년과 “이방인의 때”의 끝을 열렬히 고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단의 제도가 일찍 끝나리라는 자신들의 기대가 실현되지 않자, 역시 실망하였다. 1916년 10월에 러셀 형제가 사망한 후, 그들에게는 참된 믿음의 시련이 닥쳤다. 많은 사람이 조직을 버렸고, 충실한 자들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 압력은 미국으로부터 포올 S.L. 존슨이 방문하므로 한층더 가중되었다. 그는 진리를 떠나, 불충실한 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왔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자신이 사용해 오신 기관—워치 타워 협회—을 계속 사용하실 것이라고 믿은 사람들은 확고하게 남아서 그 시련 기간에도 계속 진리의 빛을 불태웠다.

그 당시, 까부르는 일로 인하여 조직과의 연합을 중지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결국, 그들은 작은 집단으로 분산되었고, 지금은 그 존재조차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나무에서 잘려 나간 가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잠깐 동안 파릇하게 보이다가, 결국 시들어 죽는다.

제 1차 세계 대전중에 ‘성경 연구생’에 가해지는 외부의 압력은 없었다. 당시 자메이카는 영국의 식민지였고, 영국이 전쟁을 하고 있었지만, 강제 징용이나 징병은 없었다. 그러므로 중립에 관한 문제는 조금도 어려움이 없었다. 형제들을 혹독하게 시험하고 복음 전도 사업을 지연시킨 것은 다름아닌 내부의 압력이었다. 그러나 성서에 관한 천연색 슬라이드나 영화를 축음기 음반과 연결해서 상영하는 「창조 사진극」은, 그 시험 기간에 왕국 소식에 대한 관심을 계속 살아 있게 하는 일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 상영에는 많은 관중이 모여들었다.

「수백만」 소책자가 널리 배포되다

1920년에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소책자가 널리 배포되었다. 이 책명은 표어가 되었고, 많은 자메이카인들은 아직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해에 이 섬의 전 지역에서의 ‘기념식’ 참석자 수는 44명밖에 되지 않아, ‘이방인의 때’의 끝에 뒤이어 발생한 단련하는 기간에 사람들이 진리로부터 떨어져 나간 일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확고하게 남은 사람들은 실망하지 않고 주의 일에서 계속 많은 일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1921년에는 ‘기념식’의 참석자 수가 132명으로 증가하였다.—고린도 전 15:58.

믿음을 강화시키는 순례자의 방문

순례자 조오지 영의 방문은 충성스러운 자들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아름다운 북부 해안 도시 포오트 안토니오를 방문한 일로 강력한 증거를 하게 되었다. 형제의 강연을 들은 후, 저명한 가톨릭 신자로 있는 하원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누가 듣든 상관없읍니다. 나는 오늘 밤에 성서에 들어 있는, 내가 전혀 모르고 있는 소식을 들었읍니다. 저는 그 소식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형제가 이 섬의 중앙에 위치한 피서지 멘더빌을 방문했을 때, 365명이 그의 연설을 들으러 왔다. 그 청중 가운데 참석한 또 다른 하원의원은 형제를 환영하고 청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설교단에 선 것을 보고 여러분은 놀라실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가 결코 성서적인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를 떠나게 된 것은 다름아닌 지옥불 고초의 교리입니다!” 이 도시로 시작하여 다른 여러 도시를 방문하여, 모임을 가짐으로써 후년의 증가를 위한 기초를 놓았다.

정부의 반대는 없었다

이 나라에 진리가 전파되기 시작한 19세기 후기부터 전파 사업에 대한 정부의 방해는 없었다. 하지만, 1924년 7월 20일부터 28일까지 오하이오, 콜룸부스 대회에서 채택된 「고발」 결의문이 자메이카에서 널리 배포되었을 때, 교직자들이 “‘성경 연구생’들의 사업을 중지시키기 위해” 암암리에 정부에다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애썼다는 보고가 있다. 그 작은 집단의 증인들은 겁을 내고 도망하거나 중단하기는커녕, 왕국 전파 사업을 계속 수행하였다. 그들은 시골 사람들에게 소식을 가지고 가기 위해 수 킬로미터를 걷기도 하고, 당나귀나 노새나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했다. 한 형제는 자전거를 타고 시골 구역으로 가기 위해 아침 6시에 집을 출발하곤 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는 서적을 갖고 넓은 지역으로 가서 배포한 다음, 거의 12시간 후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버스를 이용하여 집단으로 증거하다

1920년대 후기에 킹스턴의 회중은 버스를 한대 구입하여, 일요일에는 한 집단으로 조직하여 시골 구역으로 가서 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방법으로 가까운 구역뿐만 아니라 먼 구역에도 대단한 양의 왕국의 씨가 뿌려졌다. 이를테면, 1929년에 이 섬의 전 지역에 이 작은 집단의 충성스러운 증인들에 의하여 23,447부의 서책과 소책자가 배포되었다. 그 버스를 타고 여행한 형제 자매들 중 얼마는 아직도 살아 있고, 활동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들은 여행하면서 증거하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차알스 크로포드 형제는 그 당시를 추억하여 일요일에 형제 자매들은 일찍 새벽 3시경에 일어나야 했다고 말한다. 버스는 오전 4시에 출발하여 130 킬로미터까지 여행하곤 하였다. 전도인들은 도로변에 있는 마을에서 하차하였다. 어떤 전도인들은 임명을 받은 구역에 해가 뜨기도 전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집에 있는 사람들이 일어날 때까지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가지고 간 서적을 전부 전한 적도 있었다”고 크로포드 형제는 회고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버스는 시골 지역에서 아주 낯익은 것이 되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연합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렇게 부른 것은 아마 그것을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의 연합된 정신과 노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크로포드 형제는 그 버스의 도움으로 왕국의 씨를 뿌리러 찾아가곤 했던 여러 마을에 지금은 회중들이 번창하고 있는 것을 살아서 보게 된 것에 대해 깊은 만족을 표명하였다. 그는 지금 82세이며, 작은 시골 지역에서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다.

축음기와 녹음 재생기를 사용하여 증거하다

1933년에 휴대용 축음기, 녹음 재생기 및 확성차가 등장함으로써 왕국 사업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이러한 도구들은 이 나라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주문 제작한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음악을 들려 주면 속히 모이기 때문에,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여러 사람들을 이웃집 문전으로 모여 왕국 소식을 듣게 하는 신호가 되었다. 더 강력한 녹음 재생기 소리에 이끌리어 사람들은 수풀 지역으로부터 몰려 나와 큰 도로에 모여 그것을 구경하고 들었다.

그러한 축음기와 확성차가 세대 사용되었다. 확성차 한대는 스패니시타운스페인의 통치하의 자메이카의 최초의 수도였다—에 사는 에이미 푸우트 자매가 관리하였다. 푸우트 자매가 사망하기 직전에 그가 회상한 바에 의하면, 당시 ‘워치 타워 협회’ 회장인 J.F.러더포오드 형제에게 여자가 확성차를 관리하는 것이 허락될 수 있는지 문의하는 편지를 하였다고 한다. 이 자매는 계속 그렇게 하라는 회답을 받았으며, 자기가 직접 그 낡은 포오드제 자동차를 운전하여, 도시와 마을로 열심히 다니면서 좋은 소식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였다. 푸우트 자매는 힘에 벅찬 이 일을 마다하지 않고 더욱더 씨뿌리고 추수하는 일을 위하여 그 밭을 경작한 것이다!

또 한대의 확성차는 로버어트 로간이 관리하였다. 그는 의사이기도 한 열정적인 형제였다. 킹스턴과 다른 여러 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그가 공개적으로 전파하고 축음기를 사용한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의 열심은 대단한 것이었기 때문에, 환자들은 누구나 다 진찰을 받기 전에 철저한 증거를 들어야만 했다. 심지어 증인들까지도 진단을 받기 전에, 그들이 믿는 바를 상기하게 하는 점을 받았다.

세번째의 확성차는 지부 감독자 P.H.데이빗슨이 관리하였다. 축음기들의 쨍쨍 울리는 소리는 교직자들의 분노를 샀기 때문에, 1936년에 교직자들의 권유를 받은 정부는 공공 장소에서 그것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이 금지령은 1938년에 해제되었고, 또다시 왕국 소식은 언덕을 넘고 계곡에 메아리쳐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큰 무리”의 신분이 밝혀짐에 따라 열심이 북돋워지다

1935년에 여호와의 백성의 역사상 또 하나의 이정표가 세워졌다. 워싱턴 D.C. 대회에서, 계시록 7장에 나오는 “큰 무리”의 신분이 아마겟돈 전에 모아져야 하는 지상 반열이라는 것이 확정적으로 밝혀졌다. 이 새로운 이해는 더 큰 활동으로 이끄는 자극제가 되었다. 기록을 보면 자메이카에서 여호와의 찬양자들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 수는 1914년의 100명에서 1938년에는 390명으로 증가하였다. 1939년에는 여호와의 찬양자가 되도록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543명에 달했다.

분명히 사업은 더 잘 조직되고 있었으며, 가정 성서 연구 마련은 틀이 잡혀가고 있었다. “큰 무리”를 모으는 일이 시작되었고, 이 반열은 왕국 전파 사업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었다. 사실상, 그들은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 만큼 열심과 담대함을 보였다.

토마스 뱅크스의 방문에 의해 격려를 받다

1936년에 미국에서 토마스 E. 뱅크스가 순례자로 자메이카를 방문하였다. 그 방문에 관해, 데이빗슨 형제는 러더포오드 형제에게 1936년 5월 4일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형제가 협회장으로서 뱅크스 형제를 자메이카로 파견한 일에 대해 개인적으로 감사를 드려야 하겠읍니다. 그의 방문은, 브루클린을 그대로 자메이카로 옮겨왔고, 이곳에서도 일이 브루클린과 똑같은 방법으로 수행되기를 보고자하는 오랫동안의 염원을 채워 주었읍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우리의 벧엘 숙소, 연구, 봉사, 반(班) 방문, 대회 및 공개 증거가 모두 뱅크스 형제의 본과 제안에 의해 개선되었기 때문입니다.”

뱅크스 형제의 방문과 관련하여 킹스턴에서 대회가 마련되었고, 최고 참석자 수는 2,000명이었다.

교황이 서한을 받다

그러한 열심의 대표적인 것은 로날드 퓨우타도 형제였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가족 출신이며, 자신도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다. 진리를 깨달았을 때, 그는 교황에게 증거하고 가톨릭 계급의 거짓 가르침을 폭로하는 것이 자기의 책임이라고 느꼈다. 그는 편지를 써서 실행하였다. 로마 교황청은 그 편지를 자메이카반송하여 그곳의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에게로 보냈다. 그랬더니 그 지도자는 그 사건을 자메이카의 총독에게 보고했다. 왜냐하면, 퓨우타도 형제는 공무원이었기 때문이다. 총독은 퓨우타도 형제를 소환하여, 교황에게 사죄의 편지를 낼 것을 요구하였다. 형제는 공손하게 그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자신이 쓴 것은 진리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퓨우타도 형제는 징계를 받아 승진의 혜택을 못받게 되었지만, 교황과 총독에게 증거할 수 있었던 일에 대해 행복해 하였고 죽을 때까지 충실하였다.

새로운 지부 감독자

1939년에 ‘협회’는 지부 사무실을 감독하도록 토마스 E. 뱅크스 형제를 다시 자메이카로 파견하였다. 뱅크스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초창기에 ‘협회’의 이곳 지부에는 사무적 일이 지금 만큼 많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의 일은, 주로 확성차를 타고 섬 전 지역을 다니면서 녹음된 성서 강연을 방송하고, 저녁에는 성서 강연을 하는 것이었다.”

뱅크스 형제는 자메이카에서 형제들을 격려하고 왕국의 관심사를 증진시키기 위해 많은 일을 수행하였다. 그는 1946년까지 지부 감독자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 해에 75세의 나이로 건강과 체력이 쇠약해져, 보다 젊고 강건한 사람이 지부 감독자의 책임을 인수받을 필요가 있게 되었다. 뱅크스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미국으로 돌아가서 나의 자녀들과 함께 살든지 자메이카 협회의 지부에 남아서 건강이 허락하는 대로 무슨 일이든 하든지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자메이카는 나의 임지이기 때문에, 이곳에 남기로 선택하였다.”

뱅크스 형제는 93세가 되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모든 기회를 다 이용하여 방문객에게 여호와의 목적과 그분의 말씀의 진리를 이야기하며, 또 서신으로도 그렇게 한다. 외국 임지에서 여호와의 전 시간 봉사로 지상의 나날을 마칠 수 있게 되어 대단히 행복하다. 여호와의 봉사에서 전 시간을 바치는 일은 인생의 즐거움이 되어 왔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빛 가운데서 성도’들과 연합하여 영원히 계속 여호와를 섬길 것을 나는 학수고대하고 있다.” (골로새 1:12) 그는 96세의 나이로 지상의 행로를 마친 1967년까지, 자기 임명에 충실하게 고착하였다.

지구 봉사가 조직되다

1939년에 지구 봉사가 조직되었다. 이 섬은 4개의 지구로 나뉘어졌다. 형제들이 지구의 종으로 임명되어, 각 회중에서 일주일씩을 보내면서 회중을 강화하고 야외 증거 활동을 돕도록 지시받았다. 차알스 로렌트 형제는 동부 지구, 콘라드 앤더슨 형제는 서부 지구, 헤들리 그래함 형제는 북부 지구 그리고 에드가 카터 형제는 남부 지구에 임명되었다.

카터 형제는, 젊었을 적에 거의 지칠 줄 모르는 힘으로써, 열정적이었던 파이오니아 시절을 돌이켜 보곤 하였다. 그는 세인트 캐더린, 클레렌돈 맨체스터 교구에서 회중들을 조직하는 데 훌륭히 일을 하였다. 지구 봉사를 위한 그의 교통 수단은 자신의 소지품을 실을 운반대를 부착한 자전거였다. 언덕과 먼 거리가 그 형제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지구 봉사가 중지되었을 때, 그는 자전거를 타고 섬의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면서 형제들의 종(순회 감독자)으로 회중들을 섬겼다. 1945년에 자메이카인으로서는 최초로 ‘워치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946년 1월에 졸업을 한 후, 계속 자메이카의 회중들을 섬겼지만, 얼마 안 가서 중병을 앓게 되어 전 시간 봉사를 그만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1983년 8월에 사망할 때까지 여호와의 봉사에서 계속 활동적이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문제가 생기다

1939년에 제 2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증인들은 “이것은 자메이카에서의 전파 사업에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이번에는 징병이 있을 것인가?”란 질문을 생각하게 되었다. 점점 더 많은 나라들이 전면 전쟁에 얽히게 되자 곧 대답이 나왔다.

형제들은 증거하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고, 중단없이 계속 왕국을 인류의 희망으로 선포하였다. 강제 징병은 없었다. 자메이카는 영국의 식민지였고, 징병은 요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중립 문제에 대한 시험은 없었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자들에게 다른 시험이 닥쳤다. 전쟁이 발발한 직후, 식민지의 총독은 불온 서적 금지법에 의거하여 워치 타워의 출판물 4 종류를 금지시켰다. 「적」 및 「빛」 서책(1권과 2권)과 「모범 연구 제 2호」 소책자가 금지되었다.

어떤 형제들은, 금지된 책자들이 즉시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이 일로 말미암아 그 책들의 내용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이 크게 자극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콘라드 앤더슨 형제는 자신의 서적을 상자에 포장하여 “몬티고 베이 경찰서 귀중”이라고 써붙였다. 책들이 금지된 이유를 묻는 사람들마다 모두 한권씩 주었다. 결국, 한 상자 전부를 전했다. 그래서 경찰이 압수할 책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전체적인 금지가 가해지다

1941년까지는 부분적인 금지가 전체적인 금지로 바뀌었다. ‘워치 타워 협회’ 혹은 ‘만국 성경 연구회’의 모든 출판물의 반입이 금지되었다. 이 금지는 1941년 10월 19일자 정부 기관지 「자메이카 가젯트」에 발표되었다. 하지만, 조직이 비합법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여전히 집회의 자유는 있었다.

형제들은 사람들에게 전할 서적이 없었기 때문에, 전파하는 일을 중지하였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오로지 성경만으로 무장하여, 형제들은 집집을 다니면서 전파 사업을 계속하였다.

영적 양식이 부족한 일은 없었다

금지령 때문에, 증인들은 영적 양식이 없어서 영적으로 굶주렸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매호 「파수대」지를 포함하여 출판물들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 섬에 전달되었다. 지부 사무실에서는 그러한 출판물을 복사하여 회중들로 보내주었기 때문에, 단 한번의 「파수대」 연구도 놓치지 않았다. 표지에 제목만 쓰인 「파수대」 잡지가 아무런 문제없이 우편으로 도착하였다. 「신권 전도 코오스」 등 다른 출판물도 받았으며, 금지령하에서도 신권 전도 학교가 모든 회중에 조직되었다.

때때로 서적이 이 나라에 들어간 경위가 다음의 경험으로 밝혀졌다. 세관 직원들은, 미국에서 귀국하는 계약 고용인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파수대」지들을 압수하였다. 그들은 압수한 잡지들을 고용인들이 도착하는 공항 청사 바닥에 으례 던져 버렸다. 공항에서 일하는 한 형제는 세관 직원들이 떠난 후, 압수된 서적을 처분하기 전에 몰래 몇 부를 주어 모았다. 확실히,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영적으로 계속 먹이기 위하여 사용하신 방법과 수단은 여러 가지였다!

금지령을 해제시키기 위해 노력하다

금지령을 해제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41년 10월 23일자의 탄원서도, 당시의 총독에게 지방 형제들의 대표단과 그 문제를 토의할 것도 거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기가 꺾이지 않고 계속 왕국 전파 사업을 추진하였고, 전쟁이 끝날 무렵 전도인 수는 1939년의 543명에서 1945년의 884명으로 증가하였다. 1943년의 “활동으로의 부름 대회”도 조직되었다. 공개 연사들의 수가 제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도 미국과 동시에 공개 집회 운동이 시작되었다.

금지령이 해제되다

1945년 6월 23일에, 지부 사무실은 영국과 영연방의 많은 나라에서 증인의 사업에 대한 제한이 해제되었다는 사실에 정부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1946년에 가서야 정부는 서적에 대한 자메이카의 금지령을 해제하였고 수입을 다시 허락하였다는 것을 지부 사무실에 통지하였다. 증인들의 반응은 열정적인 것이었다. 「1947년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영문)에 다음과 같이 보고된 바와 같다. “정부가 압수했던 소량의 책들이 되돌려져 배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거의 한달 안에 그 책들은 모두 진리에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많은 사람들은, 특히 「적」 책을 대단히 갖고 싶어했다. 이 책은 자메이카에서 금지된 ‘협회’의 책들 중에서 첫 번째 것으로서 잘 알려져 있었다.

전후 확장이 시작되다

1945년 11월에 윌리엄 존슨길르앗 학교에서 훈련받은 최초의 선교인으로서 자메이카에 임명되었다. 그는 킹스턴에 하나밖에 없는 회중에 대하여 몇 가지 작은 변경을 제의하였다. 예를 들어, 형제 자매들은 집회에서 해설할 때마다 일어섰고, 회중의 종은 항상 봉사회의 사회자로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연단 위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존슨 형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였고, 형제들은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1946년은 자메이카의 왕국 전파 사업에 있어서 하나의 전기를 이룬 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해에 이 섬에서의 왕국 사업의 역사상, 왕국 전파자의 수를 가장 꾸준히 그리고 급속도로 증가시키는 계획들이 시작되었다. 이 계획을 위한 발판은 N.H.노워 형제와 F.W.프랜즈 형제의 방문으로 놓여졌다.

노워 형제와 프랜즈 형제의 방문 직전에, 또 두명의 길르앗 선교인—리이 딜런알렉 뱅글—이 도착하였다. 그들은 즉시 수도 킹스턴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고, 사람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킹스턴에서의 확장

도착한 즉시 노워 형제는 당시 백명이 넘는 전도인이 있는 킹스턴 회중과의 모임을 가졌고, 그는 킹스턴에서의 사업의 확장을 위한 제안을 대략 설명하였다. 즉 킹스턴 회중을 세개의 회중으로 분회할 것과 왕국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던 지부 건물의 2층을 선교인 집으로 개조할 것을 제안하였다. 형제들은 기꺼이 그 제안에 동의하였다. 곧 세개의 회중이 조직되었고, 이 도시를 차지하고 있는 장소에 따라 동부, 서부 및 중앙 회중으로 각각 명명되었다.

이 방문 기간 중에 노워 형제는 왕국 사업을 즉시 재활성화시킬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이 섬에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도입할 희망을 표명하였다.

급속한 증가

선교인 알렉 뱅글이 회중의 종으로 섬기는 동부 회중의 전도인은 1946년 4월에는 26명이었는데, 그 해 8월 말에 이르러서는 67명으로 증가하였다. 다른 두 회중에서도 비슷한 증가가 있었다. 그 결과 킹스턴의 전도인 수는 6개월 안에 265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이 섬 전역에서의 전도인 수는 처음으로 1,000명에 도달하였고, 35명은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다.

곧 세 회중은 모두 대지를 구입하여 자체 왕국회관을 건축하였다. 수년 동안 증가는 계속되었다—처음에는 급속히 성장하였고,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현재 킹스턴과 그 교외에는 12개의 왕국회관과 22개의 회중이 있고, 총전도인은 2,156명이다.

길르앗을 나온 선교인들의 역할

왕국 사업의 확장에 길르앗 선교인들이 담당한 역할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1946년부터 1962년까지 총 29명의 선교인이 자메이카에 임명되었다. 이 기간에 왕국 전파자의 수는 899명에서 4,465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선교인이 임명되어 있는 킹스턴의 회중 수는 16년 동안 하나에서 14개로 증가하였다. 현재 시초의 그 선교인 집단에 속하여 아직도 유일하게 선교 봉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그는, 자메이카에서 38년 동안 충실한 봉사를 수행해 온 알렉 뱅글로서, 현재 지부 위원회의 조정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이 나라에는 153명의 정규 및 특별 파이오니아가 훌륭하게 봉사하고 있기 때문에, 선교인 봉사의 필요성이 크게 줄어 들었다. 그러나 기초 작업은 선교인들이 놓았던 것이다. 선교인들 중 얼마는 더 크게 필요로 하는 다른 나라에 전임되었다.

선교인들은 보다 부유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구역과 지방 전도인들이 좀처럼 듣는 귀를 발견하기 어려운 구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이전에는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도 훌륭한 증거가 행해졌다.

영국 수상이 왕국 소식을 듣다

상당히 많은 수의 유명 인사들이, 지금은 고인이 된, 디오도어 누운즈에게서 왕국 소식을 들었다. 그는 양복점의 주인으로서, 고객 중에는 상류 계급층의 사람들이 많았다. 형제는 아주 열정적이어서, 고객들이 양복을 맞추는 동안 그들 모두에게 왕국 소식을 전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많은 서적들이 배부되었다.

지방 일간지 「더 글리너」지 1980년 6월 5일자에는 전파 사업에 대한 누운즈 형제의 열심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는 이 섬을 방문하고 있던 영국의 전 수상(1916-22년) 데이빗 로이드 조오지의 양복을 맞추기 위해, 당시의 식민지 총독인 에드워드 던햄 경에 의해 이 형제가 그를 방문한 일에 관해 보도하였다. 누운즈 형제는 이 기회를 포착하여, 전 수상에게 하나님의 왕국만이 고통받는 인류를 위한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했다. 로이드 조오지누운즈 형제의 말에 동의하였고, 세상은 “결코 다시 평탄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고 덧붙였다. 이전 수상에게 이 말을 한 후, 그런데 영국 국민에게 하나님의 왕국이 인간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형제는 질문하였다. 로이드 조오지는, 국민들이 “그런 말을 듣기 원치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확실히 예언된 대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그 귀를 ·⁠·⁠·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듣기 좋아한다.—디모데 후 4:4.

증가된 활동에 교직자는 반대하다

예견했던 바와 같이, 교직자들은 자기들이 아끼는 목장에 이렇게 진출하는 데 대해 반대하였다. 200년의 역사를 가진 세인트 앤드류 교구 교회는 유서깊은 영국 성공회의 건물로써, 이 나라의 상류 인사들 중 다수가 교회 성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근처의 한 대지 위에 왕국회관을 건축할 계획이 1952년에 킹스턴 시의회에 제출되었을 때, 그들은 반대할 구실을 가지게 되었다.

교직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는 시끄러워 자신들의 예배에 방해가 되고, 그 지역에 교통 혼잡을 초래할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 문제가 시의회 건축 위원회에 상정되었을 때, 증인의 한 사람이자 협회의 변호사인 에노스 핀라슨은 그러한 “근거”들을 재론의 여지도 없이 논박하였다. 그리하여 건축 위원회는 그 신청을 승인하였고, 성공회의 평신도를 대표하는 변호인이 제기한 이의 신청을 기각시켰다. 이 반대가 제기된 때부터 신청의 승인이 날 때까지, 이 사실은 지방 신문들을 통해 계속 널리 알려졌다.

패배하지 않기로 결심한 교직자들과 교회 위원회는 그 판정을 번복시키려고 애썼다. 그들은—그 청사진이 정식 인가를 받고 신청자에게 전달된 후 이미 건축 공사가 진행되고 있을 때—그 문제를 전체 시의회에 상소하였다.

건축 계획이 다시 취소되다

건축 위원회의 한 사람이며 그 신청을 반대했던 시장은 건축 공사를 중지하고 청사진을 반환할 것을 명하였다. 그 청사진은 법률이 요구하는 바 대로 시 기술자와 의회 서기가 직접 서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명에 의한 승인이 올바르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이 계략의 목적은 건축 위원회에서 다시 한번 청문회를 가지게 하고, 청문회가 진행되는 동안 교직자들은 그 위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기들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공정한 사람인 그 위원회의 위원장, 클리브랜드 워커는 다시 한번 청문회를 가지기 전에 그 이의에 대한 법률가의 견해를 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그렇게 하였다. 법률가의 견해는, 그 청사진의 서명은 정당한 것이며, 그것은 신청자에게 반송되어야 하고, 건축 공사는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견해에 따르면, 가령 의회 서기와 기술자가 그 청사진에 직접 서명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건물이 불법적인 것이 된다면, 다른 많은 건물도 청사진에 그런 식으로 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 건축이 되어 철거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또다시 성공회와 자메이카 교회 위원회(8개의 교파를 대표하여 그 조직들의 지도자들이 서명하여 항의서를 보낸)는 여호와의 백성을 대항한 싸움에서 패배하였다.

다음에, 종교적 반대자들은 폭넓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신문 기고가를 포섭하여 증인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서 분명히 종교 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은 정부는, 두 선교인 루이스 우즈와 아내 코라의 국내 체재 기간이 만료되자, 그 기간을 연장해 주기를 거부하였다. 지방 증인들은 이 일을 널리 알렸다. 많은 회중에서는 그 허가의 취소를 반대하는 결의서를 작성하여 정부로 발송하였다. 결국, 당국은 누그러져 그 선교인들의 체재 기간을 연장해 주었다.

다시 서적에 제한이 가해지다

심지어 우즈 부부의 체재 기간이 연장되기 전에도, 자메이카로 수입되는 성서 서적 대금을 지불할 수 없도록 ‘워치 타워 협회’에게 외화를 팔지 말라는 명령이 관계 당국에 시달되었다. 브루클린 본부에서 기꺼이 그 발송품을 선물로 기증한다는 증거 서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착한 서적은 압류되어 통관 항구에 보관되었다가 (성서는 제외하고) 불태워졌다. 항의서와 145,000명(자메이카의 주민 14명 중 1명이 넘는 수이다.)이 서명한 탄원서가 제출된 후, 미국에서가 아니라 영국으로부터 서적을 수입할 수 있는 허가가 났다. 성서만은 미국으로부터 수입할 수 있었다. 국내와 영국으로부터 더 많은 항의서와 호소문이 제출된 후 (이 나라는 아직 영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1954년 7월 19일에 이 나라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서적을 선물로 반입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외화의 부족으로 인하여 이 마련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노워 형제가 다시 방문하다

증인들을 잠잠하게 하고 그들의 전파 활동을 방해하기 위한 이러한 시도가 있기 전에, 형제들은 노워헨첼 형제의 방문으로 강화되어 시험을 직면할 대비가 되어 있었다.

노워 형제의 첫 번째 방문이 있은 지 4년 후, 많은 확장이 있었다. 그래서 더 많은 확장을 위한 계획을 세울 때가 되었다. 킹스턴의 전도인 수는 25 퍼센트 증가했었다. 그래서 로버어트 클라아크 형제를 사회자로 하는 건축 위원회가 임명되어, 대지를 매입하고 두개의 신설 회중을 위한 두개의 새로운 왕국회관을 건축하게 되었다. 두 회중 중 하나는 북부 회중이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교직자들의 분노를 일으킨 것이 바로 이 북부 회중의 왕국회관 건축이었다. 이 왕국회관의 사진이 “논쟁이 건축한 교회”란 표제로 한 신문에 실린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허리케인에 의하여 재해가 닥쳤을 때 사랑이 전시되다

1951년 여름에, 사나운 허리케인자메이카를 강타하여, 168명이 사망하였다.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의 지붕이 완전히 바람에 날려 갔지만, 다친 형제는 아무도 없었다. 여러 형제들을 포함하여 수천명이 집이나 소유물을 잃었다. 미국의 동료 증인들로부터 즉각적이고도 관대한 도움의 응답이 왔다. 재해를 당한 사람들을 위한 구호품으로 수 의 의류가 수송되어 왔다. 이것은 여호와의 백성을 국제적인 형제애로 연합시키는 사랑의 실천이었다. 형제들은 크게 격려를 받아 재해를 당한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고, 세계 재난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설명해 주었다.

새로운 지부

1954년에 M.G. 헨첼 형제가 지구 감독자로서 방문을 하여, 지부 건물의 구조적 강도를 조사해 보도록 제안하였다. 조사를 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지부 사무실이 필요하다는 것이 확정되었다. 그 이듬해에 노워 형제가 방문하여, 새로운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을 위해 대지를 확보하고 건축 계획을 세우는 일을 추진하게 하였다. 교외에 있는 세인트 앤드류우 교구의 트라팔가르 가(街) 41번지에서 적합한 장소가 발견되었으며, 건축 설계를 작성하여 건축 당국에 제출하였다.

1957년에는, 지부 건축 공사 시공 준비가 완료되었다. 지방 증인들은 대여금과 헌금으로 이 공사를 지원하였다. 이 건물은 1958년 8월 31일에 1,276명의 청중 앞에서 봉헌되었다.

최초의 국제 대회

1966년에 자메이카는 이 해에 계획된 여러 국제 대회 중 하나를 개최할 장소로 선택되었다. 지방 증인들로서, 국제적인 모임을 주최하도록 초대받은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숙박 시설이나 여행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였고, 대규모 대회와 관련된 다른 책임들을 수행하였다. 영국에서 온 246명, 미국에서 온 218명을 포함하여, 18개국에서 온 대표자들을 접대하게 되어 형제들은 감격스러워했다. 공개 강연에는 그때까지 자메이카에서의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9,458명이 참석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도 증가는 계속되었다. 1970년에 주의 ‘만찬’ 참석자 수는 사상 최고인 13,359명이었다. 1970년의 10년 동안 전파 사업은 중단없이 계속되었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집회를 가질 자유는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극복해야 할 문제들—왕국 진리의 적들이 여전히 이곳 자메이카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이 있었다.

또 하나의 왕국회관에 대한 반대

예를 들면, 1978년에 킹스턴 시의 북서쪽에 왕국회관을 건축하기 위한 계획서를 킹스턴의 건축 당국에 제출하였다. 도시 계획국에서는 보다 정교한 건물, 즉 그들의 말을 빌리면 “이 지역을 향상시킬” 건물을 짓도록 설계를 수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렇게 하는 데는 건축비가 훨씬 더 많이 들지만, 그 요구를 받아들였고, 시의 다른 모든 부서가 동의하는 설계를 작성하여 도시 계획자들과 시의회 건축 위원회의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1952년과 1953년에 논란을 일으켰던 왕국회관의 건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회관의 부지는 이 지역의 성공회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그 교회의 목사는 자기 교회에서 그렇게 가까운 곳에다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것을 완강히 반대하였다.

하지만, 그는 건축 공사가 이미 시작된 후에야 건축되고 있는 것이 왕국회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목사는 시의회에 있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과 접촉하였고, 다음에 그들은 건축 법규를 모두 지키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한 법규의 한 가지는 건축 예정 공시 사항 표지를 눈에 잘 띄게 공사장에 붙여 놓아, 건축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특정한 기간 안에 항의서를 제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교직자는 그러한 표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규정을 어겼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교직자에게는 원통한 일이지만, 시의 서기는 문의한 의회 의원들에게 모든 요건이 지켜지고 있다고 통지하였다.

교직자의 거짓 고발

이 반대자의 그 다음 조처는, 왕국회관이 CIA—미국 중앙 정보부—가 제공한 자금으로 건축되고 있다고 비난하는 회람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가 이 근거없는 비난을 한 이유는, 당시에 이 교직자를 포함한 몇몇 정치인들은 미국의 중앙 정보부가 자메이카 정부를 혼란시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회관을 위한 자금의 출처에 관한 비난은 근거없는 것이었다. 한 저술가가 즉시 지방 신문에 그 교직자의 주장을 논박하여 지적한 바와 같다. 그는 이렇게 썼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 의가 거하고 ·⁠·⁠· 사람들끼리 착취하는 일이 없는 ·⁠·⁠·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깨끗해질 미래의 땅을 믿는다 ·⁠·⁠·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들은 순수히 영적인 해결책을 믿으며, 그들은 미국 국기나 다른 어느 국기에도 경례를 하지 않는다. 미국 국가나 다른 어느 나라의 국가도 부르지 않는다. 그들이 중앙 정보부의 교회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기정 사실을 직면하여, 이 건축을 막을 수 없게 되자, 그 교직자는 앞으로 교회 건물의 건축 신청서는 건축 위원회의 승인을 받기 전에 자메이카 교회 협의회로 제출하여 추천을 받게 하도록 제안하는 편지를 시의회로 보냈다. 시의회는 지금까지 지혜롭게 그 제안을 무시해 왔다.

왕국회관의 완공과 봉헌

한편, 왕국회관은 예정대로 완공되었다. 많은 형제 자매들은 기꺼이 그들의 시간과 재능을 바쳐, 특히 주말과 공휴일에 이 건축 공사를 도왔다. 건축 공사 기간에 자재비가 급등하여, 견적의 두배가 들었다. 증액된 비용에 대처하기 위하여, 여러 자매들은 코코넛 빵과 과자를 만들어 판 돈을 기부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청량 음료수 병을 수집하여 판 돈을 건축 자금으로 기부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 왕국회관은 완공되어 1980년 10월 15일에 봉헌되었다. 브루클린 벧엘U.V. 글래스 형제가 봉헌 연설을 하였고, 1,830명의 청중이 참석하여 만원을 이루었다. 이 회관에는 세 회중이 집회를 갖는다. 그리고 또한 순회 대회장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또다시 자기 백성이 반대를 직면하여 승리하도록 도우신 것이다.

집중 호우로 인한 홍수 재해

1979년 6월에 전례없는 집중 호우로 인한 홍수가 발생하여, 이 섬의 서단(西端)에 재해를 가져 왔을 때, 하나님의 백성을 전세계적인 형제 관계로 결합시켜 주는 사랑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홍수로 인하여 집이나 다리가 유실되고, 가축은 익사하고, 농작물은 못쓰게 되었다. 그날 밤, 갑자기 밀어 닥친 급류에 휩쓸리어, 30명이 생명을 잃었다.

이 재해 소식을 듣고, 1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장로이자 도시 감독자인 루이스 로체스터 형제는 신속히 행동을 취했다. 그는 돈을 좀 빌려 식품을 구입하여, 그것을 작은 트럭에 싣고서, 재해를 당한 형제들에게 구호품을 주려고 재해 지역으로 향했다. 여러 도로의 통행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약 320킬로미터를 우회하는 여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로체스터 형제는 그 일을 해냈으며, 형제들은 그의 사랑의 수고에 대해 참으로 감사했다!

로체스터 형제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구호품 40 상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부 사무실에서 보낸 기증된 의류가 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와 함께 두번째 여행을 하여, 고마와하는 형제들에게 필요한 의복을 공급해 주었다. 한 집단의 형제들은 홍수로 생긴 호수로 인하여 고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배를 사용하여 구호품을 전달해야 했다.

순회 감독자의 위험한 여행

순회 감독자 에드가 패터슨사바나-라-마르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한 회중을 섬기고 있었다. 그 회중 역시 재해 지역 내에 있었다. 재해 소식을 듣고, 그는 관대한 형제들로부터 식품을 수집한 다음 자기 자동차에 싣고서, 아내와 함께 사바나-라-마르로 출발하였다. 그는 32 킬로미터 떨어진 해안에 있는 도시 화이트 하우스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도로가 침수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차로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그만 거룻배를 빌려, 나머지 길은 바다로 여행하였다. 바다에는 파도가 거칠게 일어 배는 낙엽처럼 흔들렸다. 배가 당장에라도 뒤집힐까봐 두려워한 패터슨 자매는 계속 왕국 노래를 부르면서 안전한 여행을 위해 마음 속으로 기도하였다. 하지만, 뱃사공은 노련하게 노를 저어, 마침내 그들은 무사히 사바나-라-마르에 도착하였고,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는 형제들과 관심자들에게 그 식품을 나누어 주었다.

정치적 폭력 속에서도 보호받다

1962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자메이카는 제 5차 국민 총선거를 1980년에 실시하였다. 이 선거에 앞서 이 나라의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선거 운동이 전개되었다. 밤낮으로 총격전이 벌어져, 수백명의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으며, 일부 지역에서의 하나님의 왕국의 전파 사업은 아주 위험했다. ‘여호와의 증인’의 중립적 입장은 보호가 되었으며, 생명을 잃은 증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다음의 경험은, 여호와께서 어떻게 가장 폭력이 빈발한 지역에 살면서 그곳에서 전파하는 자기 백성을 보호하셨는지 알려 준다.

한 장로가 재방문을 하고 있었을 때, 그 거리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방문을 마치고, 나는 속히 그 지역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였다. 도중에 한 집단의 남자들이 나에게 오더니, ‘당신은 경찰관같은데!’하고 말했다. [이 기간에 많은 경찰관이 살해되고 있었다.] 나는 즉시 가지고 있는 출판물과 몇부의 책자를 사용하여,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라고 신분을 밝혔다. 그것을 보고 그들은 납득하였고, 나는 생명을 구하였다. 나는 각자에게 소책자를 한부씩 주고 돌아왔다.”

한 자매는 집회에 가는 도중에 일단의 남자들에게 제지를 당하고 수색을 당했다. 그들은 이 자매의 책들과 돈을 빼앗았다. 이 자매는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왕국회관에 가는 길입니다. 나에게는 여러분이 뺏은 그 책들이 필요합니다. 그 돈은 헌금할 돈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자매에게 돌려 주었다!

‘뱀처럼 조심성있게’

이와 같은 위험 지역에 사는 증인들은,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롭고[조심성 있고, 신세]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말씀하신 교훈을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태 10:16) 회중 집회에 가는 길을 주기적으로 변경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흔히, 형제들은 돌아올 때는 다른 길로 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집회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 애써들인 신체적 노력은, 어떤 형제들에게는 기운을 다 빠지게 하였지만, 그들의 태도는 한 파이오니아의 다음과 같은 말에 함축되어 있었다. “그러한 폭력의 시기에 집회에 불참한 일은 한번도 없었다.” 다른 한 전도인은 이렇게 말했다. “「연감」에 실린 다른 나라에서의 형제들이 겪은 경험담은 확실히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폭력의 피해가 있는 지역에서는 야외 봉사 계획을 조정해야 했다. 어느 지역에서 총격전이 있으면, 사태가 가라앉을 때까지 며칠 동안 야외 봉사를 중단하곤 하였다. 장로들은 형제들과 봉사하는 일을 인도하였다. 신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형제들은 손에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를 들고 다녔다. 야외 봉사가 끝난 다음에는, 전원이 무사한지를 확인하여 해산하도록 전체 집단이 모이는 특정한 장소와 시간을 정하였다.

중립 입장이 존경을 받다

정치 활동에 대한 ‘여호와의 증인’의 중립은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를테면, 한 지역의 서적 연구 장소는 투석이나 다른 발사체의 공격을 받았다. 공격 도중에 그 집에 사는 증인들은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를 들고 나와 높이 치켜 들고서 반복적으로 “우리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아요!”하고 외쳤다. 공격은 즉시 멈추었다. 그러한 공격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형제들은 집의 벽에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란 글씨를 써붙였고, 창문에는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 표지를 여러 장 붙여 놓았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공격했던 자들이 그 지역으로 다시 왔다. 그들이 돌멩이와 사제 폭탄 그리고 다른 발사체를 가지고 많은 집을 파괴하였지만, 서적 연구 집회 장소로 사용된 그 집은 그대로 놔두었다.

또 다른 경우에, 정치적 폭력 때문에 한 집단의 형제들이, 그들이 사는 지역에서 이사를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14명의 무장한 남자들이 형제들의 소유물을 실은 트럭을 세우고는, 운전하고 있던 형제에게 “안에 탄 사람들은 누구요?—노동당원이요? 사회당원이요?”하고 질문하였다. (이 두 정당은 서로 싸우고 있었다.) 형제들은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무장한 몇 사람이 차에 올라가 조사를 하였다. 그들은 한 형제의 가방을 열어서 성경과 「파수대」와 「깨어라!」지 그리고 ‘워치 타워 협회’의 다른 출판물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것을 보고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여호와의 왕국을 믿고 확신하기 때문에 정치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킨다는 설명을 듣고서, 그들은 납득하였다. 그 무장한 사람들은 “좋소. 모두 가도 좋소”하고 말했다. 형제들은 그렇게 하였고, 여호와께 감사했다.

한 장로와 아내는 선거 날에 투표소로 강제 연행되어 가서, 투표를 하지 않으면 폭행을 당할 것이라는 협박을 받았다. 그들은 신체적으로 폭행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고수하였다. 그 결과 집을 잃어야 했지만, 사랑하는 형제들이 이 두 사람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변함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으며, 여호와의 봉사에서 활동적이다. 중립 때문에 협박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호해 주셨다. 심한 부상을 당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다소 평정을 되찾다

그 이후 이 나라는 다소 평정을 되찾았다. 이 섬의 전 지역에서의 왕국 전파 사업이 중단된 일은 없었지만, 증가율은 1940년대 중엽에서 1960년대 초까지에 비하면 느린 편이었다. 느린 한 가지 이유는, 많은 전도인이 흔히 자메이카의 악화된 경제 상태로 인하여 미국, 캐나다 및 영국으로 이민을 갔기 때문이다.

이민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발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4년 4월에는 7,517명이 전파 사업에 참여하여, 전도인 신기록에 달했다. 같은 달에 6,564건의 가정 성서 연구가 보고되었다. 성서 연구 보조 서적인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책이 이 엄청난 성서 연구의 증가에 기여해 왔다. 이 책은, 발표된 이래 40,000권 이상이 배포되었고, 전파 사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왔다. 한 신문 기고가는 이 책을 선전하는 일을 도왔다. 그는 이 책을 칭찬하여 무엇보다도 이렇게 말했다. “증인들의 말은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증인들이 문간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한다면, 결코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확실히, 이 나라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섬에 거하는 많은 양같은 사람들을 모아들이기 위해 열정적으로 왕국의 좋은 소식을 계속 전파해 왔다. 아직 더 많이 모아져야 한다는 것은 1984년 ‘주의 만찬 기념식’의 참석자 수—23,270명—로 나타났다. 그렇다. 다음의 경험이 알려 주듯이 왕국을 위해 적극적인 입장을 취할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한 남자는 왕국회관에 참석하라는 초대는 여러 번 받았지만 일축해 버리고, 다른 종교 단체들에는 참석하였다. 그후, 이 사람은 수혈 문제를 논한 잡지를 한부 입수하고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왕국회관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강조하는 성서 강연을 듣고 감사했다. 증인들의 우정적인 태도도 감명을 주었다. 이렇게 감동을 받아, 그는 과거에 ‘여호와의 증인’들로부터 받은 책과 잡지를 모두 찾아내어 읽었다. 얼마 안 있어, 가정 성서 연구에 응하였고, 현재 이 사람과 그의 가족 중 두 사람이 여호와께 헌신한 종이 되었다.

이 가족처럼, 더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왕국’을 첫째로 구하며 그 결과, 자메이카로 ‘낙원의 섬’이란 이름을 지니게 한 아름다움을 훨씬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지니는 낙원으로 이 땅을 가꾸는 일을 돕는 특권을 확신하게 되도록 이 나라에 사는 7,000명 이상의 증인들은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자메이카에서의 전파 사업의 역사에는 카이만 제도—자메이카의 북서쪽으로 약 320 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지금도 영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3개의 작은 산호섬—에 대한 보고를 빼놓을 수 없다.

카이만 제도

그랜드 카이만 섬, 리틀 카이만 섬 그리고 카이만 브라크 섬이 이 군도를 구성하며, 약 19,000명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수도 조오지타운은 가장 큰 섬인 그랜드 카이만에 있다. 이곳의 왕국 사업은, 자메이카 지부가 감독한다. 고인이 된 P.H. 데이빗슨 형제가 1929년에 그랜드 카이만을 방문하여 진리의 씨를 뿌렸다. 그는 1937년에 또 한차례 이 섬을 방문하여, 최선을 다해 6,000명의 거민 중 되도록 많은 사람을 찾아가 만나려고 애썼다. 그는 또한 카이만 브라크에서도 전파하였다. 이 제도를 두번째 방문한 것에 대해 데이빗슨 형제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섬 주민들은 가지 각색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 카이만 브라크 섬의 전 판무관 H.W. 루티는 약 25년 동안 진리를 열렬히 믿어 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를 신랄하게 반대하고 있다. 어떤이들은 사람을 보내 자메이카에서 ‘지옥이 없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왔노라고 다른 사람에게 경고하였다. 나는, 보통 사람들 가운데서 그 정도로 반대하는 것을 어디서든지 결코 본 일이 없다. 어떤이들은 폭행을 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태도의 변화

카이만인들의 진리에 대한 태도는 그 후 극적으로 변했다. 그러한 변화가 있게 한 것은 무엇인가? 1950년에 ‘워치 타워 협회’ 회장 N.H. 노워자메이카를 방문하여 자메이카에서 두명의 선교인을 카이만 제도로 파견할 것을 제안하였다. 알렉 뱅글루이스 우즈가 선발되었다.

16상자의 책을 싣고서, 그들은 배를 타고 이틀 후에 조오지타운에 도착했다. 상륙 허락을 받았지만, 서적은 보류되었다. 왜냐하면, 당국은, 당시 카이만이 종속되어 있는 자메이카에서는 아직도 금지령이 발효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기관지 「자메이카 가젯트」를 조사해 본 후, 금지령이 1945년 11월에 해제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서적을 내주었다.

이 선교인들의 목적은 이 섬의 전역에다 왕국 진리의 씨를 뿌리는 것이었다. 뱅글 형제는 자전거 두대를 구입하여 먼저 외곽 지역으로부터 시작하여, 도시와 시골 마을 그 다음 마지막으로 수도에서 봉사하여 그랜드 카이만의 전 지역을 다 봉사했다고 회고한다. 전략을 그렇게 세운 이유는, 수도 조오지타운의 당국이 그러한 봉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혹시라도 반대하여 이 제도에서의 그들의 체재를 취소하기 전에, 이 섬의 나머지 지역에 봉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그는 말했다.

1937년에 데이빗슨 형제가 직면한 상황과는 달리, 선교인들은 사람들이 아주 우호적임을 알게 되었다. 선교인들은 항상 집안으로 초대받아, 가족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전부 들은 다음에야, 마침내 증거를 할 수 있었다. 6주일 후, 서적을 가지고 이 그랜드 카이만 섬 전 지역을 다 봉사했다. 카이만 브라크 섬에 간 루이스 우즈도 그 섬을 다 봉사했다. 두 섬에서 약 2,000부의 서적을 배부했다. 이 선교인들이 섬에서 보낸 7주일의 기간에 비해 참으로 엄청난 양의 씨를 뿌렸다.

뿌려진 씨에 물주는 일

1952년에는 다른 2명의 길르앗 졸업생에 의해 일은 계속되어, 여러 건의 가정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랜드 카이만 섬의 웨스트 베이에 선교부를 설치하여, 집회를 조직하였다. 1956년 7월경, 여덟명이 선교인들과 함께 전파 사업에 가담하였다. 10개월 후, 선교인들이 이 섬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장차 있을 확장을 위한 기반은 놓여졌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의 훌륭한 봉사의 결과로 1959년에 조오지타운에는 전도인 12명으로 구성된 회중이 하나 조직되었다.

이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이 섬을 떠난 후에, 그랜드 카이만 섬에 거주하는 월버트 스털링 형제가 그곳의 왕국 관심사를 돌보도록 임명되었다. 그는 수년 전에 시력을 잃었지만, 여전히 회중에서 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형제는 훌륭한 본이 되며,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공개 강연도 한다.

리차드 더닝과 아내 에이린카이만의 큰 필요성에 부응하여, 이곳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1971년에 영국을 떠났다. 이 부부는 앞서의 증인들이 불러일으킨 관심을 굳게 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더닝 형제는 이제 영주권을 얻어, 조오지타운 회중에서 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더닝 형제와 우정적인 관계를 갖게 된 한 카이만인의 사업가가 기증한 대지 위에 훌륭한 왕국회관을 지었다. 수년 동안 꾸준한 성장이 있었다. 1984년 2월에는 전도인 신기록인 56명에 달했다. 이 그랜드 카이만 섬에서 이제 두번째 회중을 조직하기 위한 계획이 진행중이다.

대회가 관심을 북돋우다

조오지타운의 회중은 자메이카의 제 2 순회구에 속해 있다. 그러나 여행 비용 때문에, 그랜드 카이만 섬에서 순회 대회를 갖는 것은 실용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순회구의 전도인들 대부분이 자메이카에 살고 있어 참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일한 이유 때문에, 카이만 제도의 전도인들도 자메이카에서 열리는 순회 대회에 참석할 수가 없다. 카이만 제도의 형제들이 대회로부터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하여 조오지타운에서 프로그램을 개편한 순회 대회를 개최해 왔다. 전세 비행기를 준비하여, 자메이카의 전 지역에 있는 형제들에게 참석하도록 초대한다.

그러한 최초의 대회가 1970년에 개최되었고, 94명이 참석하였다. 2년 후에 또 한차례의 대회가 열렸다. 2대의 전세 비행기가 200명 이상의 형제들을 수송하였다. 세번째 대회는 1982년 5월 2일과 3일에 개최되었고, 또 자메이카로부터 두대의 전세 비행기가 형제들을 수송했다. 이러한 모임은 카이만의 형제들에게 격려를 주었고, 카이만의 사람들에게 훌륭한 증거를 하는 데 기여해 왔다.

사람들은 대단히 우정적이었고 좋은 반응을 보여왔다. 앞으로 더 증가할 전망이 좋다. 때때로 형제들은 고용 계약으로 일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 이 섬으로 온다. 이것은 회중 조직을 강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카이만 제도는 확실히 시편 97:1의 다음과 같은 초대에 응한 섬들에 포함된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 섬은 기뻐할찌어다.”

[60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자메이카와 카이만 제도

카이만 제도

리틀 카이만

카이만 브라크

웨스트 베이

그랜드 카이만

조오지타운

[지도]

카리브 해

몬티고베이

팔마우드

사바나-라-마르

아노토베이

화이트하우스

포오트 안토니오

멘더빌

스패니쉬타운

킹스턴

[58면 삽화]

자메이카에서 최초로 진리를 받아들인 자메이카인 패트픽 데이빗슨 (카이만 제도에서 증거하고 있는 장면)

[66면 삽화]

킹스턴 회중의 성원들은 이 버스를 이용하여 일요일에 시골에서 증거하였다

[68면 삽화]

에이미 푸우트 자매(오른쪽)는 이 확성차를 관리하였다

[69면 삽화]

자기에게 찾아오는 모든 환자에게 증거를 한 의사, 로버어트 로간

[71면 삽화]

수년동안 지부 감독자로 봉사한 토마스 뱅크스

[73면 삽화]

에드가 카터 형제는 순회 사업에서 이 자전거를 이용하였다

[78면 삽화]

자메이카에 도착한 최초의 길르앗 졸업생들 왼쪽부터: 리이 딜런, 알렉 뱅글, 에드가 카터 및 윌리엄 존슨

[79면 삽화]

디오도어 누운즈는 양복점의 주인으로서, 전 영국 수상 데이빗 로이드 조오지에게 증거하였다

[82면 삽화]

1952년과 1953년에 교직자들의 반대를 일으켰던 왕국회관

[84면 삽화]

현재의 지부 사무실

[89면 삽화]

1980년에 완공되어 순회 대회 회관으로도 사용되고 있는 왕국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