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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브웨

짐바브웨

짐바브웨

이 「연감」의 표지 안쪽을 펴보라. 손가락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 부분을 짚어 내려가게 되면, 그곳에서 독자는 짐바브웨(이전에는 남로디지아로디지아)로 알려져 있는 내륙의 작은 나라를 보게 될 것이다. 그 나라는 림포포강과 잠베지강 사이에 놓여 있다. 북쪽으로는 잠비아, 동쪽에는 모잠비크가 있고, 남아프리카보츠와나가 남쪽과 서쪽에 경계를 접하고 있다.

“짐바브웨”라는 이름은, 그 나라에 있는 여러 곳의 고대 석조 유적군(群)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그 대부분의 유적들은 원래 모르타르를 사용하지 않고 쌓아올린 참으로 정교한 건축물이다. 짐바브웨라고 하는 것은 “돌의 장소” 혹은 “숭배의 집들”을 의미하는 말로 풀이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추장의 저택 혹은 멋진 장소”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 정확한 의미야 어떠하든, 그 이름은 한때 번영했던 사회의 증거를 말해주는 인상적인 특징의 석조 건축물들을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그 나라 전체를 일컫는 공식 명칭이 되었다.

대체로 이 나라는 정치적 안정을 유지해 왔다. 이에 대한 분명한 예외적인 일은, 1970년대 거의 10년간이나 계속됐던 무력 분쟁이었다. 이 전쟁은 다수 지배 실현을 위한 전쟁이었다. 1920년대 초부터 1965년까지 소수파로 있는 백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던, 영국의 식민지였다. 그러자 1965년에, 영국이 다수 지배에 의거하지 않는 독립의 승인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그 정부는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불만의 씨가 싹트고, 자라나서, 마침내 소수파 통치에 대한 반란은 전면 전쟁의 양상으로 폭발하였다. 그것은 1980년까지 끝나지 않았다. 비로소 이 해에 다수 지배의 실현을 위한 첫 선거를 실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새로운 이름 “짐바브웨”가 등장하게 되었다.

천연 자원

짐바브웨의 기후는 사람이 원하는 이상으로 모든 것을 제공해 준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상쾌한 비가 내리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화창한 날이 계속된다. 그리고 기온은 어떤가? 대부분의 지역이 이상적이다. 수도 하라레(전에는 소울즈버리로 불리었다)의 여름 평균 최고 온도는 섭씨 영상 28도이며 겨울에는 섭씨 영상 18도이다. 이 고른 기후가 이 나라의 농작물 성장에 크게 기여하기 때문에, 이 나라에는 거의 모든 것이 있다. 독자의 입맛을 가장 나게하는 과일은 무엇인가? 바나나라든가 파파이야 혹은 맹고와 같은 즙이 많은 말랑하고 부드러운 열대성 과일들인가? 그런 것들이 있다. 혹은 사과라든가, 배나 복숭아나 승도복숭아와 같은 더 상큼한 과일들을 더 좋아하는가? 그렇다면, 짐바브웨에는 그런 과일들도 있다.

경치에 관하여 말하자면, 서쪽에는 현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그 유명한 빅토리아 폭포가 있다. 동쪽에는 동부 고원 지대로 알려진 아름다운 산악 지대가 있다. 그 나라의 다양한 지대에는 야생 동물이 많이 모여 있는 자연 동물 보호 구역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눈을 매혹시키는 것들이 많이 있으나, 우리는 가장 매력적인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예언자 학개(2:7)를 통하여, “만국의 보배”라고 말씀하신 사람들을 말한다. 그렇다. 짐바브웨에도 이 “보배”들인 참 숭배를 택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들이 이 나라에 있게 되었는가?

초기 관심의 증거

하나님의 왕국 소식이 처음으로 이 나라에 도달한 정확한 때를 확인하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1910년까지는 협회의 많은 영문 서적들이 북쪽의 말라위(당시는 니아사랜드)와 남아프리카에서 배포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적어도 1920년대 초까지는, 이 서적에 들어 있는 소식이 떠돌이 일군들을 통하여 짐바브웨(당시 남로디지아)로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이렇게 작게 시작하여, 성서 연구 집단이 모잠비크 접경의 무타레에서부터 서쪽의 빅토리아 폭포 근처의 큰 광산 마을인 황게까지 여러 중심지에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초창기에 진리를 배운 사람들 중 한 사람은 해밀튼 K. 마세코로서, 그는 지금껏 남아프리카프레토리아에서 장로로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1924년에 내가 니아사랜드에서 불라와요까지 여행하였는데, 그곳에서 성경 연구생들과 연합하게 되었다. 그들이 연구한 것은 이치적이었으며 나에게 성서의 약속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그는 2년 동안 머무른 후에 남아프리카로 갔다.

짐바브웨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처음으로 전파한 사람들 중에는 네이슨 무카론다가 있다. 사실, 그가 이 나라에서 침례받은 최초의 사람인 것 같다. 그때는 1924년이었다. 그는 1947년에 전 시간 봉사에 참여하여, 1948년에 순회 감독자가 되었고 82세의 나이에도 지금까지 계속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힘차게 일하고 있다.

별개의 발전

이 나라의 환경 때문에, 왕국 소식에 대한 관심의 발전은 부족에 따라 두가지 계열로 진척되었다. 먼저, 아프리카어를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행된 초기 발전을 고려해 보자.

진리가 제대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해는 1924년인 것 같다. 나단 무칭구리가 동부 지역에서 진리를 처음으로 배운 것은 그 때였다. 그는 말한다. “우리에게 진리를 가져온 사람들은 니아사랜드에서 온 두 남자였다. 그들은 교리적인 면에서의 진리를 가르쳐 주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한다면 마음과 행동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해에 침례받았으며 후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쇼나어로 성서 서적들을 번역하는 최초의 번역자로서 협회에서 일하였다.

그 당시에 탁월한 역할을 한 또 다른 두 사람은 윌슨 스티마로빈 마뇨치였다. 스티마 형제는 1925년에 말라위에서 처음으로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음에 짐바브웨에 와서 무타레에 정착하였으며 그곳에서 그는 새로 생긴 집단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후에 불라와요로 이사하여 1948년에는 초창기 파이오니아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현재 76세인 스티마 형제는 1955년이래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하고 있다.

다른 형제인 로빈 마뇨치는 1929년에 최초의 신권적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짐바브웨의 제 2의 도시인 불라와요에서였다. 하지만, 1932년에 소울즈버리(현재 하라레로 불림)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가 하라레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어 그 지역에서 유일한 회중을 형성하고 있는 윌리 쿠초차와 소수의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였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회중 성원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여호와의 순수한 증인들은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마뇨치 형제의 말을 들어보자.

“1932년에 케이프 타운의 지부 사무실로부터, 우리가 호별 방문 전파를 시작해야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때까지 우리는 이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회중의 모든 사람 중에서 단지 카운다 부부, 윌리 쿠초차, 나만이 그 교훈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우리는 회중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후에 다른 사람들도 호별 방문 사업이 성경적임을 깨달았으며, 우리와 연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이 전도 방법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얼마 안 되어 1933년에, 활동이 증가함으로 당혹해진 당국자들은 이전의 회중의 종과 부회중의 종을 아직도 회중의 ‘인도자’로 생각하고 그들을 국외로 추방해 버렸다.”

마뇨치 형제는 초창기 진리 생활에서 다채로운 많은 경험을 하였다. 한번은, 전파 사업 때문에 그 지역의 지방 판무관 앞에 나오게 되었다. 이런 일들을 어디에서 배웠는지 질문받자, 마뇨치는 지방 판무관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판무관께서 이곳 아프리카의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이 책, 성서에서요. 저는 단지 성서에서 배운 바를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있읍니다.”

현재 로빈 마뇨치는 85세이다. 그는 아내 로지와 함께 여러 해 동안 순회 사업을 한 후, 지금까지도 특별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다. 마뇨치 형제에 관한 순회 감독자의 최근 보고는 흥미롭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할아버지는 훌륭히 일을 하고 있다. 많은 성서 연구가 있으며 전도인들 대부분은 그를 신뢰하고 있다.”

영어 사용자들 사이의 초창기

이제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진기하게도, 진리의 씨는, 비록 다른 근원이기는 하지만 아프리카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와 거의 동시에 뿌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케이프 타운의 남아프리카 지부에서 헨리 앙케틸, P. J. 데자거, P. 윌리암스, 이 세 형제가 이 나라로 잠시 여행하여 불라와요소울즈버리에서 강연하였을 때인 1921년에 시작되었다. 이들에 뒤이어 1924년과 1925년에 다른 사람들이 도착하여 주로 사업을 합법적으로 설립하기 위하여 애썼지만 이렇다할 결과는 없었다.

영어를 사용하는 이 증인들은 모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에 아주 심한 제약을 받았는데, 왜냐하면 인구의 절대 다수인 아프리카인들과의 교류를 법적으로 금지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리의 씨는 뿌려지고 있었다.

왕국 진리의 이 씨들이 실제로 뿌리를 내린 한 곳은 그 나라의 벽지에 있는 610,000헥타아르의 드넓은 목장에서였다. 그곳에서는 잭 맥러키가 일하고 있었다. 때는 1928년이었다. 당시 의 아내 도렐은 남아프리카에 있었는데, 거기서 그는 시동생 버트로부터 왕국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은 일곱 권으로 된 「성경 연구」를 받게 되었다.

은 이 책들이 어찌나 재미있었는지 즉시 이 좋은 소식을 친구들에게 전해주고픈 욕망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장 가까운 우체국은 약 9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으며, 이웃이란 거의 없었고 그나마도 거리가 멀었다. 교통 수단은 기껏해야 노새나 달구지뿐이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은 배부할 소책자들을 주문하였다. 농장의 사교 모임에서 그는 왕국에 관해 증거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사실, 과 그의 동생 버트(애칭으로 “아저씨”와 “버트 아저씨”로 알려짐)와 그들의 가족들이 참으로 열심이었기 때문에 그 나라의 남부 전역에서는 진리가 “맥러키 종교”로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1930년대로 접어듦

왕국 소식을 모든 부족간에 확고히 세우고자 결심한 남아프리카 지부는 1932년에 네명의 파이오니아들을 파견하였는데, 그 중 한명은 로버트 니스베트였으며, 지금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다. 이 여행이 문제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파이오니아들이 그 나라에 머무른 지 겨우 10일이 되자 범죄 수사부로부터 호출받았다. 며칠후 그들은 48시간 이내에 출국하라는 통고를 받았으며 상소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상소하였으며 니스베트 형제가 이렇게 보고한 것처럼 되었다.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 일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우리는 6개월간의 체류가 허가되었다.” 이 일은 그 당시의 당국자들에게 큰 두려움이 되었던 것 같았다.

1932년의 방문에서 얻은 결과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1938년에 다시 여행하였으며 더 많은 열매를 맺게되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첫 영어 회중을 형성하기에 충분한 전도인들이 있게 되었다.

별개의 발전의 장애를 제거함

이렇게 진행되고 있는 동안, 사업을 더 확고히 세우는데 많은 공헌을 한 사람이 등장하였다. 특히 불라와요 지역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윌리 맥그리거였으며, 현재 80의 고령으로 불라와요의 한 회중에서 장로로 일하고 있다. 맥그리거 형제는 1924년에 스코틀랜드에서 침례를 받았으며, 1929년에 젊은 은행원으로서 짐바브웨에 왔다. 1933년에 불라와요에 정착한 그는 아주 어려운 여러 해 동안에 형제들에게 매우 유용한 일군임이 증명되었다.

이 모든 시기에 정부는 증인들 특히 아프리카 형제들과 관련하여 아주 비협조적이었음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로버트 니스베트가 이렇게 표현한 것과 같다. “정부와 많은 백인 로디지아인들로부터 받은 반대는 인간적으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였다.” 반대자들은 원주민계 사이에 왕국 소식이 퍼져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계속 획책하였다.

이에 관하여, 그 나라에서 처음으로 인종을 초월하여 조직된 「파수대」 연구에 관해서 알아보는 것은 재미있다. 그것은 두 통역자들을 통하여 사회되었다. 그러면 윌리 맥그리거의 말을 들어보자.

“그 연구가 30분 가량 진행되었을 때 12명에서 15명 되는 기마 경찰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 일로 어떤 초조감이 일어났다. 나는 형제들에게 이제까지 해온 그대로 연구를 계속할 것을 청하였다. 도착한 경찰은, 목소리가 들리는 가까운 거리에서 말머리를 우리에게로 향하고 연구 집회(옥외의 나무 아래에서 가졌음)를 에워쌌다. 경찰은 마지막 기도가 끝날 때까지 남아 있다가 신호가 있자 말머리를 돌려 떠나갔다.” 체포도, 방해도 없었다. 이것이 별개의 발전의 장벽을 허물어뜨렸는가? 작기는 하였지만 참으로 그러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이었다.

법적 투쟁에 의한 좋은 소식의 확립

진리가 짐바브웨에서 뿌리를 잘 내리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관리들은 방향을 새로이 하여 반대를 하였다. 사실상, 1936년에 이 나라의 사업 사상 가장 혹독한 공식적 박해였음이 입증된 10년 기간이 시작되었다.

그 해에 정부는 국가 보안법을 제정하였으며 14종의 협회 출판물이 선동적이라고 선언하였다. 1937년에 이 결과로 판례가 될 소송 사건이 법정에서 청취되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윌리 맥그리거는 이렇게 설명한다.

“출판물들이 선동적이라는 불라와요 행정장관의 결정은 상소되었으며, 불라와요의 고등 법원은 국가 보안법에 비추어 선동적인 서적들이 아니라고 하였다.” 당시 정부가 우리의 성서 서적의 배부를 중지시키기 위하여 단호하게 결심했음을 알려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때 정부는 이 판결을 남아프리카블로엠폰테인의 항소 재판소에 상소하였다. 1938년 3월에 그 법원은 그 서적이 반정부적이 아니라는 불라와요의 고등 법원의 판결을 지지하여 그 상소를 기각하고 배상하게 하였다.”

이 소송은 훌륭한 증거를 가져왔다. 「불라와요 크로니클」지는 법원의 판결을 전문 게재하였다. 케이프 타운의 협회 사무실에서 파견된 조지 필립스가 법정에서 협회가 의뢰한 변호사 옆에 앉아서 적절한 성귀를 찾도록 도와주고 선동적이라고 선언된 출판물의 발췌문들을 설명할 수 있도록 그를 거들었다. 협회의 변호인은 우연히도, 후일에 로디지아(짐바브웨) 대법원장이 된 휴 비들씨였다.

반대가 격화되다

1939년에 반대자들은 막 성장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작은 집단인 증인들의 열성적인 활동에 제동을 걸기 위하여 더욱 격화된 운동을 개시하였다. 이 때까지 이 나라에는 477명의 전도인이 있었으며 그중 16명 가량은 백인이었다. 특히 이들 후자에게 반대가 돌려졌다.

그 같은 해에 한 가족이 짐바브웨로 이사해왔는데, 이 일은 다음 수년간의 왕국 사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었다. 이 가족은 잭 맥러키의 동생인 버트, 아내 카르멘과 그리고 자녀들이었다. 85세인 지금도 버트 맥러키는 그의 불타는 듯한 열정적인 강연들과 여호와께 대한 지칠줄 모르는 열심으로 소문나 있다. 이제 알게 되겠지만, 이 열심으로 그와 그의 가족은 흥미있고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

1940년 중에는, 여호와의 백성의 활동이 특히 교직자들간에 대단한 관심과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신문에는 여호와의 사업의 평판을 떨어뜨리고자 의도된 편지가 게재되었다. 이에 맞서 케이프 타운의 협회 사무실은 「남로디지아에서의 종교적 편협」이라는 제목의 전도지를 인쇄하였다. 그것은 “모든 질서를 애호하는 로디지아인들” 앞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이 전도지는 불라와요와 그 지역의 각 가정, 사무실, 사업소에 배포되었다.

그러자 1940년 11월에 정부는 전쟁의 광적인 흥분 상태를 이용하여 협회의 모든 서적의 수입과 배부를 금지시켰다. 몇명 안 되는 형제들은 그토록 열심있는 버트 맥러키 그리고 윌리 맥그리거 등과 더불어 이 제한 조처의 합법성을 시험해 보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서적을 가지고 나갔다. 불꽃튀듯 격렬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경찰에 체포되었다! 소송이 뒤이어 제기되었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소송이 심리되지도 않고 기각되었다. 그러나 이내 상황이 변하였다.

버트잭 맥러키가 법정에 출두하였을 때 재미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은 법적 근거를 이용하여 석방되기를 싫어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는 오히려 교도소로 가기를 원하였다. 무슨 일이 발생하였는지에 대하여 버트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 통쾌할 것이다.

“나는 을 고발한 증인에게 질문할 허가를 받았다. 우리 형제는 서로 매우 닮았음으로 증인들에게, 다가갔었던 사람이 내가 아니라 이라고 맹세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들이 우물우물 확실치가 않다고 시인하자, 그 소송은 기각되었다. 에게는 유감스럽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 상당한 수의 형제들이 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금지된 서적을 배부하다가,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 중립 문제 때문이었다. 이들중에는 윌리 맥그리거도 있었다. 맥그리거 형제는 이 때까지는 은행원이었으나 파면당하였다. 그는 자기의 감옥살이를 이렇게 말한다. “유럽인 감옥에서 중노동을 겪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은 살인, 강도와 다른 종류의 폭행 때문에 선고받았지만, 그들은 서양 장기를 두거나 도미노 놀이를 하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나는 건물 밖의 파이프와 목재 구조물에 칠 작업을 하였다.”

1940년대에 분 변화의 바람

이 10년간의 초창기에는 왕국 사업에 대한 공식적 태도에 거의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1942년(이 해에 버트 맥러키는 다시 4개월 반을 복역했다)에 형제들은 「연감」에서 발췌문을 취하여 「여호와의 증인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의 사업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인쇄하였다. 더 많은 체포 사례가 뒤따랐다! 그 소책자에 발행인의 이름이 없다는 사실은 아무 상관도 없었다. 체포된 사람들 중에는 윌리 맥그리거소울즈버리(현재 하라레로 불림)에서 갓 침례받은 희랍 형제 게리 아스니스가 있었다.

하지만, 차츰 차츰 상황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완화되고 있는 증거가 저절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한 부인은 「불라와요 크로니클」지에 보낸 긴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맥러키는 직접 우리 집에 왔다. 그는 아주 조용히 왔으며 성서를 꼭 쥐고 있었고, 내가 문을 열자, ‘당신을 위한 소식을 가지고 있읍니다. 들어보시겠읍니까?’ 라고 정중히 말했다. 나는 흥분하여, ‘당신네들은 아직도 교훈을 못 배웠군요’라고 쏘아 붙였더니, ‘무슨 뜻이지요? 우리가 형무소에 들어갔었던 일 말입니까?’라고 말했다. 나는 ‘맞아요’하고는 남편을 불러 그를 상대하라고 했다.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대단히 정중하였고, 성서를 쥐고 있었다. 제 남편도 그를 문앞 계단에서 쫓아버린다거나 경찰을 부를 수도 없었다. 그의 태도에는 우리가 불평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는, 왔을 때처럼 조용히 갔다.”

제 2차 세계 대전중, 전도인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으며, 1943년에는 1,090명에 이르렀다. 그 다음해에는 사업에 대한 제한 조처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대회가 아프리카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을 위하여 마련되었으며 영어 회중을 위한 하나의 작은 대회가 마련되었다. 이 세 개의 대회의 총 참석자 수인 1,101명은, 백인 형제들이 그러한 어려움을 직면하고 있는 동안에 아프리카인 증인들은 여전히 아주 활동적이었음을 알도록 도와 준다.

제한 조처들이 해제되다

1946년에 정부는, 협회 서적의 수입과 배부에 대한 제한 조처들을 해제하기로 결정하였다. 형제들은 이에 대하여 뛸듯이 기뻐했다. 하지만, 호별 방문 봉사 분야에서는 많은 훈련을 필요로 하였다. 또한 이 때까지 야외에서도 더 많은 인도를 필요로 하였다. 이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1947년 7월 1일에 중요한 조치가 취하여졌는데, 그때 버트 맥러키는, 남아프리카 지부의 감독하에, 불라와요에 협회 서적의 저장소를 개설하도록 임명되었다.

파이오니아 봉사의 시작

지금까지는 파이오니아 봉사에 관하여 거의 말하지 않았다. 이 부면은 1947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전에는 단지 2, 3명의 파이오니아들이 야외에서 일하였으며 몇해 동안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자, 1947년에 세명의 파이오니아들이 있게 되었는데, 그 중 두명은 네이슨 무카론다로빈 마뇨치였다.

그 이후로 파이오니아 봉사는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에 평균 114명의 파이오니아가 있었으나, 1950년에 그 수는 156퍼센트가 증가한 292명으로 급증하였다. 또한 1949년에는 최초의 특별 파이오니아자카리아 노아도 보게되었다. 드디어 봉사가 태동하고 있었다.

장래의 사업을 위한 조직

그때까지 이 나라의 사업은 남아프리카 지부의 감독하에 있었다. 그러나 1948년에 광범위한 영향을 가져올 변화가 일어났다. 「연감」 가운데 “길르앗으로부터의 선물이라고 언급된 것처럼, 그 해 1월에 처음으로 길르앗 학교 졸업생이 도착하였다. 이 사람은 에릭 쿠크였다. 그의 도착 바로 직후에 두 방문객인, N. H. 노워M. G. 헨첼 형제가 왔다. 그들의 방문의 결과로, 회중들의 향상된 인도와 조직의 방향에서 또 다른 훌륭한 조치가 취해졌다. 바로 1948년 9월 1일에 에릭 쿠크를 지부 감독자로 하는 지부 사무실이 설립되었던 것이다.

야외에서 좀더 밀접히 감독을 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하였다. 이 때까지 전도인은 3,500명을 넘어섰으며, 이들은 117개 회중들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1948년에 이 회중들은 다섯 개의 순회구로 나뉘었다. 독자는 다섯 명의 순회 감독자가 약 640평방 킬로미터 되는 나라에서 해야할 사업을 가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지역을 버스나 기차로 여행하였지만 대부분은 자전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시작이었다.

길르앗으로부터 도움이 되는 사람들의 도착

유럽인 형제들이 아프리카 지역에서 일할 수 없었던 사실 때문에 사업이 내내 방해를 받아 왔음을 기억할 것이다. 사실, 그 당시 백인 형제들은 감독 목적으로라도 소위 원주민 지정 거주지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길르앗 제 10기생 네명이 1949년 2월에 등장한 것은 이런 상황하의 장소였던 것이다. 이들은 조지 브래들리와 아내 루비, 머어틀 테일러필리스 카이트였다. 후에 에릭 쿠크머어틀 테일러는 결혼하여 현재 남아프리카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있다.

네명의 새로운 선교인들은 그 나라의 체류 허가는 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험 기간이라는 조건에서였다. 왜냐하면, 출입국 관리국장에 따르면, ‘여호와의 증인’은 여전히 “의문 투성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라와요의 백인을 대상으로 수개월간 일한 후에 에릭 쿠크는 출입국 관리국에 불리어 시험 기간이 끝났다는 통고를 받았다. 영주권이 네명 전원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다른 길르앗 졸업생들이 앞으로 이 나라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승리였다!

그 이후 뒤따른 증가

이 승리가, 아프리카인들의 지정된 지역에서 백인들이 활동하는 데 대한 제한들이 그 승리에 의하여 제거되지는 않았지만, 영어 사용 지역에서의 왕국 사업을 더욱 굳게 확립하는 데 그 승리는 대단한 공헌을 하였다. 예를 들어, 지부와 선교인 집이 최초로 운영된 불라와요에서는 영어 회중의 전도인이 1949년에 54퍼센트 증가하였다.

이 나라에서 길르앗 학교에 간, 최초의 파이오니아 중의 한 사람인 도린 킬고어는 이 회중 출신이다. 이 자매는 1956년에 졸업하여 이곳 짐바브웨에서 여러 해 봉사하다가 남아프리카로 임명이 바뀌어 그곳에서 1983년 2월까지 선교 봉사를 하였다. 그 이후 연로한 어머니를 돌보기 위하여 짐바브웨로 돌아왔다. 이 자매는 계속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좋은 본을 보이고 있다.

이 기간 중에 증가는 급속히 계속되었다. 1948년에서 1951년까지 3년간에, 전도인의 최고 수는 4,232명에서 9,088명으로 증가하였고, 회중 수는 117개에서 191개로, 순회구는 다섯개에서 일곱개로 증가하였다. 1951 봉사년도에서는 평균 전도인 수가 37퍼센트 증가되었다.

예기치 않은 도움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반감 즉 그들이 어떤 동기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하여 불안감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에 관하여 잠간 동안 이야기하기로 하자.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이 수도로 이사를 한 후인, 1950년 6월, 소울즈버리에서 조지 브래들리가 겪은 경험은 이것을 설명해 주는 예이다.

브래들리 형제가 가두 봉사중에 「파수대」와 「깨어라!」를 너무나 공개적으로 게시해 놓은 것을 보고 오히려 충격을 받은 듯이 보이는 잘 차려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이거 공산주의 서적이 아니오?”하고 물었다. 그렇지 않음을 납득하자, “나는 국회의원인 댄디 영입니다. 나는 당신들이 하는 일에 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라고 말했다. 그는 두부의 잡지를 받고 다음날 자기 사무실을 방문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다음날 방문에서 댄디 영씨는 잡지에는 조금도 해로운 점이 없으며 여호와의 증인의 사업의 동기와 목적을 명백히 기술한 서한을 요청했다. 왜 이러한 요청을 하였는가? 국회에서 파괴 활동 법안이 토의될 예정이었으므로 댄디 영씨는 그와 관련된 여호와의 증인의 일도 토의되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을 알려주는 서한을 국회에서 읽어주고자 하였다. 자신의 약속대로 서한 전문이 낭독되었다.

그 법안은 통과되어 하나의 법률이 되었지만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그 법률이 적용된 적은 결코 없었다.

수입 문제들

1950년대 초기의 큰 투쟁 중의 하나는 이 나라로 성서 서적을 수입하는 문제도 들어 있었다. 1947년에 서적 저장소가 설립된 이래, 수입 허가는 1년마다 미국 달러의 제한된 할당액을 근거로 허용되었다. 그래서 1950년 초에 신청하였을 때 허가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런데 웬일인가! 신청이 거부되었다. 지부 사무실에서 무상의 선물로 배부하는 마련을 택하여 신청하였을 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이란, 관리들의 태도가 누그러져서 서적 수입이 허가되기를 바라며 계속 신청하는 것뿐이었다. 드디어 1951년 8월, 무상의 선물 방식으로 하여 서적을 수입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았다. 이것은 외화의 국외 유출을 막고, 정부의 외화 준비에 영향이 없도록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마련하에서 최초로 받은 면장에 의하면, 11,200 달러에 상당하는 서적을 수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뭔가가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또 다른 면장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하여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이 점을 생각하여 전액을 주문하였는데 그 중에는 32,000권의 「종교는 인류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책도 들어 있었다. 이 책이 성서 연구에서 훌륭한 보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기쁘다. 그도 그럴 것이 최초로 주문하여 수입한 서적을 무려 24년 후인 1975년까지 계속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훌륭한 조직

1948년에 지부 사무실의 설립 이후 수년간은 아주 급속히 성장한 시절이었다. 수자란 따분한 것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진실을 전해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1949년에 열린 다섯 개의 순회 대회의 총 참석자는 7,415명이었고, 647명이 침례받았다. 그 다음 3년간에 여호와께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은 수는 5,186명이었다. 그것은 지부가 설립된 해의 전국의 전도인 평균 수보다도 1,587명이 많은 수였다.

그러자 이런 일이 일어났다. 1952년 12월에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가 다시 방문하였다. 이번에는 장마가 가장 심한 시기에 열린 옥외 대회에서 방문객들은 15,000명의 참석자에게 연설하였는데, 그것은 1949년 방문시의 모임의 두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점은 더욱 훌륭한 조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방문 주간에 수도의 중심부에 한채의 가옥을 구입하였다. 이 결과, 이 집은 다음 20년간에 걸쳐 선교인 집과 지부 사무실의 소재지로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지역 사업이 유익을 가져오다

지역 감독자의 사업은 1953년까지 지부 사무실에서 다루어졌다. 그러나 전임 지역 감독자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제는 명백해졌다. 제일 먼저, 순회구의 수가 13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므로 이 때 이후로, 전임 지역 감독자들이 있게 되었다. 처음 수년간은 주로 길르앗 졸업생들이 지역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지역 감독자들의 출입이 여전히 금지되어 있었지만, 그들의 활동은 확실히 유익하였다. 한 가지 점은, 지역 감독자들의 활동은 농부들과 광부들이 가지고 있던 여호와의 증인의 사업에 관한 그릇된 인상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 가지 예는 이 나라 남부, 유럽인이 농업과 광업을 경영하는 넓은 지역에 있는 작은 마을인 무베렝구와에서 순회 대회를 개최하기로 마련하였을 때의 일이다. 대회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루비 브래들리는 증거 사업을 하다가 어떤 광산에 사는 은퇴한 신사를 방문하였다. 이 남자는 증인의 활동에 대하여 편견에 가득찬 태도를 나타냈다. 그는 그것이 아프리카인들에게 끼칠 영향에 관해서 깊이 우려하였다.

그가 자기의 느낌을 토로한 후, 브래들리 자매는 이렇게 질문하였다. “대체 우리 사업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설명할 기회를 주시겠읍니까?” 그는 이에 동의하였다. 그래서 자매는 수분간 왕국 사업의 성격과 목적을 설명하였다. 또한 그에게 큰 광산 회사의 경영자들(이 남자는 그들 중 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이 아프리카인 증인들의 정직성과 신뢰성에 관해서 말한 바도 말해 주었다. 그 남자는 자기가 들은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아 네권의 서적을 구입하고, 「파수대」와 「깨어라!」를 둘다 예약하였다.

그 방문은 대단히 유익하였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대회에 대한 반대는 거세었고, 대회를 저지시키기 위한 노력이 일어날 것임을 증인들은 알고 있었다. 이 성실한 사람은 자진하여 그 오해를 시정하기 위하여 나섰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그 마을의 호텔에 가서 자기가 배운 것을 알려 주었다. 그 일 이후, 대회와 관련하여 그 지역에서 더 이상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당시 이러한 벽지에서의 왕국 소식에 대한 관심이 발전하는 것은 놀라울 정도였다. 지역 감독자와 그의 아내는 종종 서적이 달리곤 하였다. 그래서 예약을 제공하곤 하였다.

지역 사업이 가져온 또 다른 유익은, 1954년에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의 제목으로 시작된, 협회가 제작한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상영은 한 순회 대회에서 였다. 그 순회구의 총 전도인 수는 약 700명이었는데, 참석자는 3,378명에 달했다. 흥분이 어떠했겠는가! 그 이후 상영된 다른 영화들도 계속 많은 참석자들을 동원하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호와의 조직의 세계적인 규모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깨끗케 하는 일의 시작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50년대 초에는 아주 급속한 성장을 하였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잘못된 관습과 습관으로부터 실제로 자신을 조금도 깨끗하게 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침례를 받고 있음이 명백해졌다. 하나의 예로서, 순회 대회에 단지 참석만 하고, 여호와께 온전히 헌신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침례를 받은 사람이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단지 즉흥적인 생각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침례받는 것이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더하여, 정당하게 결혼 생활을 합법화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백인이 이 나라에 들어오기 전, 결혼은 중매자나 신부값 등과 같은 아프리카의 관습에 따라 거행되었다. 그런 관습은 심지어 결혼을 민사 당국에 등록하도록 정부에서 요구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는 1951년 1월 1일 이전에 거행된 부족간의 모든 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모든 결혼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합법적으로 등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물론, 관습이라는 것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옛 풍습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정부가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 때인 1951년 1월 1일 이후에 행해진 부족의 결혼을 협회는 용인할 수가 없었다. (로마 13:1, 2; 누가 2:1-5) 이 문제 전체는 주의깊이 조사되어, 성경적 요구 사항들이 회중들에게 알려졌다. 1951년 1월 이후에 결혼하고 그 결혼을 합법화하지 않은 사람들은, 6개월 이내에 등록하도록 지시받았다. 만일, 그 기간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이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으며 참작할 만한 사정도 없었다면, 취할 수 있는 조치로서 그들을 제명 처분해야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께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들의 결혼을 올바른 성경적 기초 위에 두기 위하여 즉시 조처를 취하는 것을 보게 되어 격려가 되었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흔히 그것은 주변의 나라들에 가거나 그 나라들에서 친척들을 데리고 와야 비로소 증인이 자기들의 결혼을 등록할 허가가 주어졌다.

그러나, 자기들의 생활을 여호와의 뜻에 일치시키기를 참으로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래서 1955년 초에는 여호와의 의로운 표준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수백명 제명 처분을 당하였다. 그 당시 제명되었던 사람들 중 일부가 여러 해가 지나서 자기들의 결혼을 최근에 합법적으로 등록하고 복귀되어 지금은 행복하게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것을 보게 되어 아주 격려를 받고 있다.

파이오니아 봉사의 후퇴

1949년에 파이오니아 봉사는 전진하기 시작하였다. 그 해에 114명이 있었다. 꼭 3년 후인 1952년에는 평균 파이오니아는 949명이었고 6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있었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보고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당수의 파이오니아들이 정확한 보고를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대부분의 경우는 야외 봉사에서 실제로 사용한 시간을 보고하기 보다는 오히려 목표인 100시간을 보고하곤 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으므로, 자신의 야외 봉사 기록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없는 파이오니아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1955년에 이 문제를 협회 본부에서 다루었으며, 그 결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만 파이오니아 명단에 올려야 한다는 조언을 지부 사무실은 받았다. 그러므로 파이오니아 수는 감소되었다. 물론, 이 마련은, 순회 감독자들이 그러한 파이오니아들이 일하고 있는 회중들을 방문할 때 점진적으로 시행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까지 회중의 읽기 쓰기 학급의 결과로 이들 중 얼마가 파이오니아 대열에 다시 가담하게 되었음을 알리게 된 것을 기뻐한다.

인가를 받기 위한 투쟁

공동 마을에 있는 회중들을 더욱 훌륭히 감독하기 위한 문제를 여기에서 재론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이 때까지 유럽인 지역 감독자들은 여전히 이러한 지역에 들어갈 허가를 받지 못하였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국토의 절반이 지역 감독자들의 영역 밖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순회 감독자와 함께 봉사할 수 있었고 순회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으나, 그것은 이 지역 밖에서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은 공동 마을 내의 회중들을 강화하려는 협회의 노력을 대단히 저해하였다.

어떻게 해야 하였는가? 근본적인 문제는 여호와의 증인이 인가받은 종교 단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질문은, 어떻게 하면 인가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1954년에 길르앗 학교를 졸업하고 당시의 지부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었던 레스터 데이비는 결혼식을 거행할 권리를 갖는 것이야말로 인가를 받는 데 커다란 발전을 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전 1949년까지 되돌아가서 여호와의 증인의 결혼식 주례자가 가질 권리를 요구하는 신청을 했었으나, 이것은 끊임없이 기각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의 결혼식 주례자를 갖는 데 있어 장애가 된 문제 중 하나는 여호와의 증인들 모두가 봉사자라는 점이었다. 당국이 반대하는 주장은 이렇다. 즉 그리스도인 결혼 법에 의하면 인가받은 종교의 성직자는 누구든지 결혼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은 누구라도 결혼식을 거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협회의 특별한 대표자들로서 봉사하는 자, 특별한 서임 증명서(叙任證明書)를 가지고 있는 자에 한해서 이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보증을 받아냈다.

드디어, 성공이다! 1956년 5월에, 7명의 길르앗 졸업생들과 벧엘 형제들이 결혼식 주례자로 임명되었다. 전적인 인가를 향한 비약적인 전진이었다!

승리가 계속되다

이 때쯤인 1956년 6월에, 미국인 부부 버드 밀러와 부인 조안을 영접할 수가 있었다. 길르앗 졸업 후, 밀러 형제는 지부 감독자가 되도록 파견된 것이다. 그의 지도 아래 원주민 지정 거주지로 유럽인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드나들 권리를 획득하고자 하는 투쟁은 계속되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결혼식 주례자로 일하게 할 결정권은 하나님의 뜻이었음이 그때에 입증되었다. 원주민부 장관 사무실과의 편지가 계속되었다. 다음의 인용문들은 그 사무실에서 온 편지의 일부이다.

1956년 9월 27일: “원주민 지정 거주지로의 유럽인 감독자들의 출입에 관한 건. 그 문제는 목하 검토중에 있음.”

1956년 12월 8일: “법무 내무부에 결혼식 주례자로 등록된 귀 협회의 유럽인 감독자들에 한하여 원주민 지정 거주지와 원주민 지역의 출입을 허가할 것임.”

1957년 1월 14일: “본인은 이제 열거된 사람들에게 원주민 지정 거주지와 원주민 지역의 출입 허가증을 발부함.”

그때까지 출입이 허가되지 않았던 광막한 지역에 있는 회중들을, 드디어 지역 감독자들은 순회 감독자들과 함께 방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참으로 여호와께서는 이 나라의 모든 장소에서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일들을 인도하고 계셨다.

감소의 이유

앞에서 언급한 것 외에도, 이 나라의 증가율이 얼마 동안 크게 낮아진 이유가 이밖에도 또 있었다. 참으로 자격이 있는 사람만 침례를 받도록 하였기 때문에 침례 지원자들 모두는 먼저 현재 「우리의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조직됨」 책에 약술되어 있는 내용과 유사한 과정을 마쳐야 한다는 요구 조건이 만들어졌다. 이것을 마쳤다면, 지원자 각 사람은 회중의 감독자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더 나아가 순회 대회에서는 지역 감독자와 회견을 하고 지역 대회에서는 협회의 특별한 대표자와 회견을 해야 하였다.

그 결과가 어떠했겠는지 독자는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예상대로, 침례받는 사람의 수가 감소되었다. 예를 들어, 1957년에 16,000명이 참석한 큰 대회에서 겨우 100명이 침례받았다. 그것은 이전까지의 수에 비해 상당히 감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의 최종적인 결과는 영적으로 강한 회중들이었으며, 정확한 지식으로 새로운 성품을 참으로 입은 사람들로 구성된 회중들이 되었다.—골로새 3:10.

전도인의 증가율이 둔화된 또 다른 이유는 보고를 정확하게 하지 않는 점이었다. 파이오니아들과 관련하여 이 문제가 다루어졌었으나, 전도인들 가운데에도 정확하지 않게 보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한 일들의 영향은 1957년부터 1962년까지의 5년간에 나타났다. 그 기간에 3,600명의 새로운 사람들이 침례받았으나, 전도인은 전혀 증가되지 않았다. 사실, 1962년에서 1967년까지 계속 감소하였다. 196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전도인 수가 다시 증가되기 시작하였다.

완전한 인가는 아직도 앞으로

이상하게 생각될지는 몰라도, 정부의 일개 부서에서 여호와의 백성이 인가를 받는다면, 다른 부서에서도 인가를 해줄 수 있었다. 따라서, 법무 내무부와 원주민부는 마침내 여호와의 증인을 인가해 주었으나, 문교부는 여전히 거절하였다. 이것 때문에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있게 되었다. 어떤 면으로?

그 당시, 대도시에서 떨어져 있던 대부분의 학교는 종교 조직이 관리하고 있었다. 정부의 법령에 의하면, 학생은 평등하게 학교에 등록되어야 하고, 부모의 의사에 반대되는 종교 교육을 받지 못하도록 요구하였다.

어떤 종교 단체들은 정부의 법령을 따랐으나, 그렇게 하지 않은 종교 단체들도 있었다. 이 후자의 종교 단체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자녀가 주일 학교와 학교 수업 외의 종교 수업에도 참석하지 않는 한, 자기들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지 못하도록 결정하였다.

길르앗 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에 아내 마지와 함께 이 나라에 와서 지역 봉사를 하고 있던 돈 모리슨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종교 단체들은 학칙에 불응하는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을 퇴학시키고 이듬해에도 재입학을 허가하지 않겠다고 공언하였다.” 하지만 이 문제가 문교부에 제출되었을 때, 학교측은 시설 부족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입학시키는 학생의 수에는 제한이 있었으나, 그 중에 여호와의 증인의 자녀는 전혀 들어 있지 못하게 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자녀를 퇴학시킨 이유가 “불순종”하기 때문이라고 문교부에 보고한 학교도 있었다. 이 “불순종”이란 주일 학교에 참석하기를 거부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문교부가 학생들에게 요구하지 않도록 한 법령이었다.

그러므로 다른 문제와 더불어, 이 문제로 보아서도 한 종교 단체로 인가받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19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문교부는 여호와의 증인 성인들이 종교 교육을 베풀기 위한 목적으로 학교에 출입하도록 허가되어서는 안 되며, 비록 증인들의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것이더라도 불허해야 할 것을 모든 학교에 통고하였다. 1956년에도 동일한 회답으로서,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펜실베이니아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를 학교에서 학생에게 종교 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인가된 종파의 하나로 인정해 줄 용의가 장관으로서는 없음을 알린다”라고 하였다. 1957년에도 비슷한 회답이 왔다.

문교부가 마침내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바꾼 것은 여러 해가 지난 후이다. 그러나 그 일은 뒷부분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하자.

경험이 있는 형제들이 야외를 강화하다

여기에서, 이 나라에 파견된 대부분의 선교인들이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가졌는지 독자에게 알려 주기 위하여 두 부부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좋겠다.

첫 부부인 테드 버킹햄과 아내 조이스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후 1959년 6월에 이 나라에 도착하였다. 그때부터 1970년대의 중반에 시에라리온으로 임명이 변경될 때까지 그들은 주로 영어 사용 지역에서, 순회 봉사를 하였다. 10년 이상 이 두 사람은 거의 매주 회중에서 회중으로 여행하였다. 그들의 임명 구역은 전국이었으며, 그것이 한 순회구였다. 버킹햄 형제가 시에라리온에서 일하는 동안에 중병에 걸리게 되어, 그들은 영국 런던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떠났다. 짐바브웨 형제들은 지금도 버킹햄 부부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다른 부부는 존 마일스와 아내 이다. 이 미국인 부부는 지역 감독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1960년 6월에 잠비아에서 이 나라로 임명이 변경되었다. 틀림없이 그들은 자기들의 경험을 책으로 엮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만 싣는다. 간선 도로에 가까이 있는 한 작은 회중을 방문하고 있었을 때였다. 마일스 형제는 이렇게 말한다.

“그 주간에 우리는 회중에서 가까운 간선 도로변의 아름다운 장소에 천막을 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그 지방 형제들은 좀더 가까운 다른 장소에 천막을 쳐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자신이 택한 장소를 더 좋아하기는 하였지만, 편리한 이점 때문에 더 가까운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그 주중에,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총성과 비슷한 소리를 들었으나, 우리는 트럭 배기구의 폭음이려니 생각하고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다음날 점심 식사를 하다가, 우리가 천막을 치려고 생각한 대피소에서 경찰과 ‘자유의 투사’ 사이에 총격전이 있었다는 보도를 라디오에서 들었다. 그 전투에서 세명의 ‘자유의 투사’들이 사망하고, 경관 수명이 부상당하였다. 나중에 천막용 탁자와 나무 의자들과 주위의 나무들에서 총알 구멍을 보았을 때의 우리의 기분을 가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천막칠 곳을 바꾸도록 우리의 기분을 움직이게 해주신 여호와께 참으로 감사하였다!” 마일스 형제와 자매는 현재 레소토에서 충성스럽게 봉사하고 있다.

지역 봉사에서의 경험들

몇몇 지역 감독자들과 그들의 아내들이 겪었던 진기한 경험들을 좀더 듣고 싶은가? 우리는 돈 모리슨마지의 경우는 이미 말한 바 있다. 이 나라의 서부인 카리바라고 하는 곳에서 일어난 한 사건인데, 어느날 저녁에 모리슨 형제는 천막 밖에서 앉아 타이프를 치고 있었다. 자매는 이렇게 들려 주었다. “침대에 누워 있었을 때 나는 쉬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을 불렀지만 그는 내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이번에는 이 있는 곳으로 나가서 그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모리슨 형제가 말을 받는다. “그래서 나는 회중 전등을 들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의 가장 자리와 쌓아 놓은 서적 더미 사이에서 사람 주먹보다 굵은 뱀의 몸뚱이를 볼 수가 있었다. 재빨리 밖으로 나가 쇠 파이프를 들고 천막 뒤로 돌아갔다. 뱀의 꼬리 부분이 뻗쳐 나와 있었다. 나는 그것을 파이프로 후려쳤다. 돌연 뱀이 나타나 머리를 빳빳이 쳐들고는 나를 향하여 쉬이 소리를 냈다. 그것은 퍼프아다라고 하는 독사였다. 이미 힘을 못쓰게 해놨기 때문에 쇠 파이프로 완전히 잠잠하게 해버렸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날 밤 모리슨 자매는 잠을 설쳤다.

루비 브래들리는 이러한 경험을 들려 준다. “처음으로 전갈과 만난 것은 지역 봉사에서 처음 천막을 쳤을 때였다.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천막 밑으로 무언가가 기어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전갈이었다. 즉시 그것을 죽여 버렸다. 그러나 그때 또 한 마리, 또 한 마리가 들어왔다. 우리가 네 마리를 죽인 후에야, 천막의 등불이 그것들을 이끌어 들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등불을 끄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결정하였다.”

1962년 3월에 또 다른 선교인 부부, 존 맥브라인과 아내 아이린이 이 나라에 도착하였다. 맥브라인 형제는 길르앗 학교의 10개월 과정을 마치고, 지부 감독의 임무를 인계받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그러나 우선 야외에 익숙하도록 하기 위하여 얼마간 지역 봉사를 하였다. 그는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부 사무실에서 온 조지 브래들리아이린과 나를 가장 가까운 도시에서 약 88 킬로미터 떨어진 숲속에서 열리고 있는 작은 순회 대회에 데리고 갔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거의 끝나가는 폭풍권에 말려 들었다. 그래서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대회 장소는 그때까지 작은 시내였던 곳을 건너야 하는 장소에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급류가 흐르는 강으로 변하였다. 그날 밤에 대회를 열 수 없음은 너무 명백해졌으므로 아프리카인 형제들은 그들이 구할 수 있는 대피 장소를 찾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실제로 기다리는 수밖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도착한 즉시 천막을 쳤었다. 그러나 심한 폭우 때문에 천막이 샐 것으로 우려되어 우리 세 사람은 자동차에서 자기로 하였다. 조지는 앞 좌석에 가로로 눕고, 아이린과 나는 뒷부분에 있었다. 실로 대단한 밤이었다. 밖의 폭풍우는 풍속이 증가하면서 격렬하게 더욱더 맹위를 떨쳤다. 한번은 천막 안을 들여다 보았다. 무엇을 보았겠는가? 바닥에 12 센티미터 정도로 물이 올라와 있었다. 우리는 자동차에서 자기로 한 데 대해 혹은 자기로 노력한 데 대해 감사했다.

“다음날 아침은 일이 좀 잘 될 것 같았다. 비도 뜸해졌다. 곧 지방 형제들은 대회 프로를 제공할 수 있는 학교 교실을 찾아냈다. 우리보다도 훨씬 많이 견디어 낸 형제들이 보여준 따뜻함은 우리가 겪었던 일 전부를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불안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다

196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불안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때까지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야수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회중에서 다른 회중으로 여행하는 도중, 어슬렁거리며 배회하는 짐승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한밤중에 높은 나뭇가지에 몸을 묶어놓기까지 한 감독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쪽, 즉 인간들로부터 위험이 다가왔다. (비교 고린도 후 11:23-27) 정치적 협박이 차츰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영향을 처음 느낀 형제들 중 한 사람은 수도에서 회중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던 아리몬 무링가였다. 그는 1965년 1월 12일에 체포되었다. 이유는? 그가 “과거에 폭행죄를 저지른 적이 있는 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거짓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죄가 입증되기 전까지, 일개월 동안 가장 혹독한 경험들을 겪어야 했다.

재판도 없이 90일간의 형을 선고받자, 무링가 형제는 항소를 신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항소심이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지부 사무실을 대표하는 존 맥브라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법질서 장관에게 직접 호소하였다. 이에 더하여 무링가 형제의 고용주의 아주 훌륭한 추천도 있어서 이 형제는 투옥된 지 한달 후에 마침내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형무소 내에서 어떠한 취급을 받았는가? 무링가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형무소 당국자들은 나를 잘 대해 주었으나, 어떤 죄수들은 나를 야만적으로 대하였다. 두번이나 심하게 구타당하여 두번다 의식 불명이 되었다. 이것은 강제로 나를 자기들 정당에 가입시키기 위하여 저지른 일이었다. 그들은 나의 등을 벌거벗기고 두꺼운 혁대로 내려쳐 고통을 가했으며 그리고는 적어도 아홉명의 남자들이 과격하게 손으로 내 얼굴을 후려쳤다.”

그러한 고통 중에서도 무링가 형제는 매우 훌륭한 그리스도인 행실을 유지하였으므로 마지막에 가서는 그에게 고통을 주던 자들 중 몇명은 그를 감싸주기 시작하였다. 무링가 형제가 타협을 하지 않고 보여준 꿋꿋한 태도는 후일에 다른 사람들에게 큰 격려의 근원이 되었다.

아프리카인 지역 감독자들

여러 해 동안 선교인들이 방대한 감독 사업을 행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아프리카인 형제들을 사용하는 것이 현명하게 보였다. 이 조치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이 입증되었다.

지역 감독자로서 봉사한 최초의 아프리카인 형제는 아이삭 치앗즈와였는데, 아내 아이비와 함께 1962년 12월에 이 봉사에 들어섰다. 다음, 1966년에 경험이 풍부한 또 한명의 아프리카인 형제인 시즈루 쿠말로가 지역 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장차 닥치게 될 극도의 어려움과 시련 기간에 형제들에게 매우 훌륭한 도움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지역 봉사에서 그러한 아프리카인 형제들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이었다. 우선적으로 지방 언어와 관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전도인들의 근본 문제의 본질을 훨씬 더 잘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형제들과,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 원주민이기 때문에 선교인들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가 있었다.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였으며 낯선 사람들은 곧 의심을 받았다. 그후 모든 일의 결과를 보면, 아프리카인 형제들이 사용되고 있었던 것은 확실히 여호와의 인도였음을 확신한다.

비상 사태 법령으로 인해 순회 대회가 영향을 받다

1965년 11월 11일에 로디지아 정부가 독립을 선포했을 때, 비상 사태 법령이 제정되었다. 이것들은 우리의 활동에 영향을 주었다. 일례로서, 잡지의 매호를 포함하여 이 나라에 들어오는 모든 출판물의 견본을 검열 위원회에 제출하라고 정부가 요구해 온 것이다.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불편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나라에 들어오는 서적들을 금지시킬 만한 점을 출판물에서 단 하나도 찾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더욱 영향을 준 것은, 공개 집회에 관하여 엄격히 통제하는 것이었다. 규제 감리국의 허가없이는 수명 이상의 모임은 금지되었다.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순수한 종교 모임에 적용되지 않았으나, 문제가 있는 일부 지역에서는 그러한 모임도 금지되었다.

대단히 실망하였다. 지부 사무실은 규제 감리국에 순회 대회를 개최하기 위한 허가를 신청하였으나 매번 취소되었다. 그래서 결국, 순회 대회를 열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대신, 우리는 아주 안전한 장소들에서 가질 지역 대회에 전력을 쏟기로 하였다.

1969년 어느날, 우리가 불라와요 지역의 여러 회중이 보낸 한통의 편지와, 그 속에 들어있는 순회 대회의 프로그램을 받았을 때, 우리가 얼마나 놀랐었는지 상상해 보라! 그렇다. 형제들은 자신들이 프로그램을 만들고, 임명을 하고, 간이 식당을 마련하여 그들 스스로 독자적인 대회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물론 자신들의 방식으로 앞질러 행하지 않았으면 좋을 수도 있었지만, 결국은 성공하였다. 그 대회에 수많은 형제들이 함께 모였다.

이 일로 인하여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협회가 규제 감리국에 순회 대회를 신청하는 대신, 지방 형제들이 그 지방 당국에 신청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그래서 다시 순회 대회를 마련하였다. 순회 감독자는 지방에서 저명한 형제들을 선택하여 신청을 하게 하였다. 비록 비상 사태 법령이 계속 발효중에 있었지만, 매번 그렇게 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이 나라 전역에서 순회 대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분명히 이것은 여호와의 인도였다.

장기간 끌어온 문제가 결정되다

여기에서, 종교 조직으로서 완전히 인가를 받기 위한 투쟁으로 다시 돌아가자. 여호와의 백성은 이미 정부의 두 부서 즉 원주민부와 법무 내무부에서 인가를 받았으나, 문교부에서는 받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1966년 2월, 지부 사무실은, 종교 조직으로서 인가받기를 원한다는 요청을 자세히 진술한 서신을 보내므로 다시 한번 이 문제를 표면화시켰다. 3월 8일에, “고려해 본 결과 귀 협회 요청에 동의할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라는 회답이 왔다.

즉시 우리는 전화를 걸어 많은 토론을 한 후에, 장관과의 회견을 마련하였다. 이 회견은 3월 23일에 있었다. 회견을 한 지 4개월이 지나갔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의 요청을 무시해 버릴 것인가?

그러자 7월 21일에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서신을 받았다. “이 문제를 지금까지 철저히 검토하여, 문교부가 인가한 종교 단체들의 공식 명단에 여호와의 증인을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16년간의 투쟁 끝에 승리를 얻었다! 이것은 비단 여호와의 증인들이 종교 교육을 하기 위하여 학교에 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증인 자녀들이 학교에서 퇴학당하는 문제도 해결해 준 것이다. 이 승리를 얻게 된 데 대하여 우리는 여호와께 감사하였다.

말라위에서 온 선교인들

1968년에 이 나라 지부에 또 하나의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말라위에서의 왕국 관심사를 감독하게 된 것이었다. 이에 대한 주된 이유로서, 1967년 10월에 말라위는 증인들에게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1967년 11월에 선교인들이 말라위에서 추방되었다. 이들 중 두쌍의 선교인 부부가 결국 짐바브웨로 임명되었는데, 그들은 케이스 이튼과 아내 헐 벤틀리와 아내 조이스였다.

특이한 임명

벤틀리 부부는 특이한 임명을 받았다. 그것은, 금지령이 내려졌을 때까지 말라위 지부의 감독을 받고 있던 모잠비크에서 봉사하는 것이었다. 아프리카의 지도를 조사해 보면, 모잠비크아프리카의 동해안에 있는 좁고 긴 나라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나라는 남아프리카의 북쪽에서 말라위의 양편 짐바브웨의 동쪽 경계선을 따라 뻗어 올라와 말라위의 양편 경계선으로 올라간다. 모잠비크 정부는 지금까지 여호와의 증인의 조직을 결코 인가하지 않고 있다. 이제까지의 법적 인가를 받기 위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벤틀리 형제가 말하는, 자신의 맡은 임명에 관해 귀를 기울여 보자.

조이스와 내가 처음으로 모잠비크에 임명된 때는 1962년 2월경이었다. 우리의 최초의 여행은 비행기로 말라위블랜타이르에서 모잠비크의 수도 로렌소 마르케스(지금의 마푸토)로 갔다. 그곳에서 육군 영내에 거주하는 육군 상사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있는 관심자들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두 세번 여행한 후, 야영 장비를 가지고 육로를 통하여 여행자처럼 그 나라에 입국해야겠다고 결정하였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폭스바겐 밴을 사용하였다. 베이라를 통과하는 해안선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대부분이 매우 울퉁불퉁한 자갈길이었다. 거리는 약 1,600 킬로미터였다.”

모잠비크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기 때문에, 벤틀리 부부는 베이라에서 로렌소 마르케스로 가기 위하여는 소울즈버리를 경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것은 편도 2,080 킬로이상의 여행을 의미하였다. 그들은 6개월마다 한번씩 이 여행을 하였다. 참으로 대단한 육로 여행이었다! 그러나, 이 부부는 회중이 성장하는 것을 보는 축복을 받았다.

이, 삼년이 지난 후, 벤틀리 부부는 모잠비크의 북부 지역에 한해서 여행하였다. “이 변경이 여호와의 의도였을 것임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로렌소 마르케스의 비밀 경찰이 우리가 다음에 그곳을 방문할 때 체포하려고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벤틀리 형제는 말하였다.

벤틀리 부부는 체포당하기도 하고, 체포될 뻔도 하고, 강제로 그 나라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기도 하는 등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경험들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훌륭한 사업을 수행할 수 있었고, 많은 새로운 전도인들과 관심자들을 강화하였다. 벤틀리 자매는 베이라에서 겪은 일을 이렇게 말한다.

포르투갈에서 연구하던 젊은 여성이 모잠비크로 이사해 왔다. 그는 협회에 편지를 해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지 없는지 물었다. 우리는 그 이름과 주소를 받았다. 어파아트를 방문하였을 때, 여자가 나왔다. ‘당신이 클로틸드 드 고메스입니까?’라고 묻자 ‘나도 클로틸드이지만, 드 고메스는 아닙니다. 클로틸드 드 알메이다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증거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우리는 그 다른 여인을 찾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 여자는 즉시 이웃 사람을 부르러 갔다. 후에, 처음의 클로틸드도 연락이 닿았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벤틀리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만나려고 하였던 원래의 부인은 지금은 헌신한 증인이 되었으며, 그 자매의 남편은 장로이고, 다섯 자녀들, 시부모, 시동생 모두가 증인이 되었다. 두번째 부인도 침례를 받았고, 그가 불러온 이웃의 부인과 그의 남편, 아들도 침례를 받았다.”

그 임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하여 질문을 받고, 벤틀리 형제는 요약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무덥고 습기찬 곳에서 그리고 언제 체포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해방된 곳에 있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때때로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 볼 때, 우리는 이 임명지에서 봉사하는 것은 훌륭한 특권이었으며 여호와의 축복과 보호가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벤틀리 부부는 후에 보츠와나로 임명이 변경되어, 그곳에서 선교인으로서 계속 좋은 본을 세우고 있다.

말라위에서의 박해

그러나 이제 1967년 10월에 금지령하에 놓이게 된 말라위여호와의 증인들에게로 이야기를 돌려 보자. 이 금지령에 뒤이어, “현 이십세기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가장 야만적이며 비인간적인 박해”라고 어떤 잡지에서 묘사한 박해의 파도가 있었다. 그 잡지의 같은 기사는 이렇게 공언하였다. “그 고통과 잔인함과 성적 폭행의 처참한 기록과 견주려면, 15세기와 16세기의 프랑스의 남동부와 이탈리아에서 자행된 초기 프로테스탄트 왈도파의 멸절에 관한 기록을 찾아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잔학 행위가 저질러진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여호와의 백성들이 정치 문제에 있어서 확고하게 엄정 중립을 유지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 참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대우를 왜 받아야 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자, 증인의 한 사람인 저스틴 자쿠루카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들이 당원증 사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전세계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경우처럼, 이 그리스도인들도 가장 잔혹한 처우를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을지라도 그리스도인 중립을 범하기를 거절하였다. 사실, 생명을 잃은 증인들도 있었다.

모든 충성스러운 사람들의 태도는 연로한 삼손 쿰바니와 형제의 말에 잘 요약되어 있다. 집, 가구, 의복, 기타 그가 가지고 있던 소유물 모두를 잃었던 형제는 “나는 자신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보호해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시편 필자가 말하였듯이 그것은 사실이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 34:19.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호

격심한 박해 때문에, 말라위에 있는 수천명의 증인들은 그 나라에서 도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부는 잠비아로 갔으나, 결국 말라위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다른 수천명은 말라위 국경 너머에 있는 모잠비크밀랑게로 피하였다. 이곳에서 1970년경까지 머물렀으며, 그 이후 고향 땅으로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모잠비크에서의 형제들은 박해자들의 손으로부터 벗어나 안전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 다른 문제들을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은 의식주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뒤에 남겨둔 채 도망하였던 것이다. 자, 형제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다행히도, 모잠비크에서 비록 증인들은 법적 인가를 결코 받아본 적은 없었으나 이 정부는 피난민들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모잠비크 당국은, 말라위 국경에서 약 160 킬로미터 떨어진 모쿠바라고 하는 장소로 형제들을 수송하기 위하여 트럭을 마련해 주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형제들에게 땅을 주었으며 집, 도끼, 괭이, 종자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식량으로서 빻은 옥수수 가루를 넣은, 90 킬로그램의 부대를 매일 공급해 주었다. 이것은 형제들에게 큰 구호품이 되었으며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시는 방법임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더 많은 구호가 필요하였다. 모잠비크 정부가 공급해 주는 것에 더하여, 식량, 옷, 담요와 의약품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이 필요한 물품들이 어떻게 충족될 것인가? 그것은 짐바브웨로부터 공급받는 것인데, 이런 구호품들을 수송하는 유일한 방법은 육로로서 그것도 말라위를 통과해야 하는 것이었다! 말라위에서 발생한 최근의 사태로 보아, 그 필요한 구호품들을 가지고 말라위를 통과할 어떤 계기가 있게 될 것인가?

조마조마한 여행

이러한 불안감을 가지고 존 맥브라인은, 선교인 짐 먼델과 함께 기증받은 의류와 담요를 폭스바겐 밴에 가득 싣고 1968년 2월 22일에 소울즈버리를 출발하였다. 짐 먼델은, 아내 캐시와 함께 잠비아에서 막 추방되어, 짐바브웨에 일시적으로 와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그들은 여러 곳의 국경 검문소에서 화물을 통과할 수 있도록 세관 통과증을 얻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일을 다 했다. 하지만, 여러 법규와 제한 때문에 이 일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서 이제 남아 있는 길이란 전적으로 여호와께 인도와 지도를 의뢰하는 것뿐이었다. 국경 검문소를 지날 때마다 염려가 되었으나, 어려움없이 모든 검문소를 통과하였다. 그것은 마치 천사들이 모든 길을 내내 함께 하는 것 같았다.

이 여행은 쉽지 않았다. 소울즈버리에서 말라위 동부에 있는 모잠비크의 국경선까지의 거리는 약 640 킬로미터이었다. 대부분의 길은 대단히 험하였으며, 모쿠바에 이르는 남은 약 160 킬로미터의 도로는 한층더 하였다.

얼마간의 실망

존 맥브라인짐 먼델이 우선 하고자 한 일 중 하나는, 물론 형제들이 거주하는 두개의 수용소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2월 24일 아침에 먼저 이에 관하여 수용소 관리자를 만나러 갔다. 방문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관리자가 말하였을 때, 그들은 매우 실망하였다! 왜 만날 수 없는가? 모잠비크 정부는 여호와의 증인을 인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관리자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정부 당국과 이 문제를 알아볼 때까지 기다려 보라고 그는 제안했다. 두 형제는 제안한 대로 하여 삼일간을 기다렸다. 마침내 회답이 이렇게 왔다. “모잠비크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없으며, 있다면 정부가 인도주의적인 이유로서 도와 주는 피난민들뿐이다. 만일 수용소 관리자를 신뢰한다면 그에게 의류를 맡겨 둘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가지고 돌아가도록 하라.” 기대가 무너졌다! 그 먼 길을 왔는데, 그토록 인내해 온 충실한 형제들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니!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의류와 담요를 어떻게 할 것인가 결정해야 하였다. 그 관리자를 신뢰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지 않는가? 그들은 그렇게 하였다.

물론, 에 싣고 온 의류와 담요가지고는 말라위 형제들의 필요를 채우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두 형제는 말라위 형제들이 장래의 필요성을 채우도록 헌금받은 기금도 가지고 있었다. 두 형제, 정부의 관리자, 그리고 인도 상인이 약정서를 작성하여 서명하였다. 헌금받은 기금은 관리자에게 주고, 이 금액에 해당하는 만큼의 물품 주문서를 상인에게 주었다. 상인은 부녀복이나 바지, 많은 담요를 공급하기로 하였다. 그 다음 그 관리자는 그에게 돈을 지불하고, 형제들이 있는 수용소에 물품을 가져다 줄 것이다.

즐거운 결말

이 이야기의 속편은 여행의 결과를 알려 준다. 짐바브웨로 돌아오는 중이었지만 아직 모잠비크에 있을 때에, 두 형제는, 차곡차곡 접은 많은 담요를 자전거에 싣고 길 옆에 있는 아프리카인들을 몇 사람 만났다. 그렇다. 그들은 분명히 형제들이었다! 이 물품들을 관리자로부터 받았던 것이다. 그 관리자가 자신의 약속을 어기지 않고 신속히 행동한 것을 알고 두 여행자가 기뻐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가장 큰 즐거움은 그들이 적어도 수용소에서 온 몇몇 증인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상하였던 대로, 이것은 여행한 형제들과 수용소의 형제들 서로간에 큰 격려가 되었다.

그때로부터 말라위모잠비크 두 나라는 짐바브웨 지부의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다. 말라위는 수년간 짐바브웨 지부의 감독하에 있었으며, 모잠비크는 계속 그 나라 지부의 책임 아래 있다.

마법—직면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

이 때를 즈음하여 짐바브웨의 많은 형제들은 또 다른 문제를 직면하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여러 세기 동안 마법의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두드러지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69년경이었다. 마법이 형제들에게 가져온 문제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하여 그 문제의 배경을 좀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적은 비율의 회교도를 제외한 짐바브웨의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은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이지만, 미신과 마법이 아직까지도 널리 퍼져 있다. 뼈와 동물 가죽이나 깃털로 만든 장식을 머리에 쓰고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들이 있다.

마법은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마술을 하거나 악마의 힘을 비는 요술사인 무로이와, 점술사 혹은 신앙 치료자인 낭가가 있다. 무로이는 살인을 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주문을 걸며, 불시의 죽음이나 변사체의 책임에 대한 의혹을 받기도 한다고 한다. 무로이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이것을 하다가 발각되면 체포되어 기소될 수도 있다.

한편 낭가는 반드시 살인을 하지는 않는다. 때때로 다른 사람들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마법을 걸도록 이용되기도 하지만, 낭가는 신앙 요법사이다. 그는 무로이의 주문을 풀 수도 있다고 한다. 낭가는 정부에 합법적으로 등록할 수가 있다.

1969년까지만 하더라도 낭가는 마법을 행하는 자들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으로서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것은 비단 공동 마을(이전 지정 거주지)에서 뿐 아니라 흔히 수백명의 일꾼들이 자기 가족들과 함께 사는 농장들과 광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이 행해진다는 보고가 있을 때는 언제나 그 마을은 낭가를 불렀다. 그러면 그 마을 사람 모두가 그의 앞에 출두하곤 하였다.

주문을 외우고는, 자기 노래꾼들의 도움을 받아 낭가는 영들을 불러 마법을 행하는 자에 관한 정보를 묻는다. 만일 그 피의자가 “판명되”었다면, 추장이 그를 법정에 회부하며, 그곳에서 마법 금지법에 의하여 재판을 받게 된다. 물론, 그는 아직도 일반 법 절차에 따라 유죄임이 증명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형제들이 시험받다

그러나 이것이 형제들에게 왜 문제가 되었는가? 비록 낭가가 신앙 요법사이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었으나, 여전히 강신술과 관련되어 있다. 바로 이 점이 형제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낭가 앞으로 불리어 모일 때, 당연히 형제들은 가기를 거절하곤 하였다. 그러면 추장, 광산이나 농장주 등 누구든간에 강제로 형제들을 데려오곤 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형제들은 확고한 태도를 유지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환경하에서 타협한 사람들도 있었다. 후에 이들 중 얼마는 진심으로 회개하여 현재 다시 한번 행복하게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

형제들이 취한 일반적인 태도는 폴 느드로부의 경험에서 잘 예시되어 있는데, 그는 당시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하고 있었다. 이 형제는 67세의 나이였으며 뇌일혈로 몸이 부자유하였다. 강제로 추장 앞으로 끌려왔을 때, “당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무릎을 꿇는 것(낭가를 인정하는 표시)이 좋을 걸”하고 추장은 말했다. 느드로부 형제의 답은 명백했다. “이것이 거짓 숭배임으로 나는 어떤 사람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겠읍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봉사자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 명령을 따를 수가 없읍니다.”

이 형제가 확고한 입장을 보이자 추장은 매우 화가 났다. 그는 네명의 경관을 불러서 형제에게 수갑을 채우고 그 낭가가 있는 방에 강제로 넣었다. 느드로부 형제는 그것을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나를 방으로 밀어넣었다. 방에는 노래꾼들이 관습대로 나를 맞이하기 위해 의식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 형제는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하였는가? “나는 악귀 숭배에 참여하지 않겠오. 여호와의 증인이기 때문에 결코 당신들에게 무릎을 굽히지 않겠오.”

그 형제가 확고한 입장을 나타내자, 낭가는 「진리」 책 값을 헌금하고, 그 책을 한부 받았다. 그 형제의 확고한 입장은 보답을 받았다.

참 숭배의 승리

오래지 않아 이 습관은 전국 각처로 퍼지게 되어,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자들은 많은 시험을 겪게 되었다. 북부의 광산에 있었던 한 회중의 경험은 하나님의 백성의 충절을 깨뜨리기 위하여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 하였는가를 보여 준다. 마법이 행해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고참 종업원들은 낭가를 불러달라고 요구하였다. 이 사건에 관한 경찰의 보고서는 그때 무슨 일이 발생하였는지를 이렇게 말한다.

“광산의 경영자에게 이 제안이 제출되었으며, 그는 낭가의 자격을 조사하고 그것이 적절한지를 확인하고나서 갱내의 모든 사람(고딕체는 본서에서)이 참여한다는 조건으로 허락하였다. 고참 종업원들은 이것에 동의하였다.

낭가가 의식을 수행하던 날, 여호와의 증인을 제외하고 갱내의 모든 사람들은, 낭가 앞에 나갔다. 고참 종업원들이 그 담당 부서의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하였으나 ·⁠·⁠· 여전히 그들은 거절하였다. 광산 경영자에게 데려갔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증인들은, 낭가 앞에 나가느니 차라리 직장을 그만 두는 것이 좋겠다고 그에게 말하였다.”

이 일은 정확히 그대로 되었다. 모든 형제들은 해고되었다. 그러나 그 후 어떤 일이 발생하였는가?

그 회중의 모든 사람이 다른 광산으로 이사하였으며, 그곳에서 형제들은 모두가 직장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회중은, 책임을 맡은 형제들과 한명의 파이오니아가 있는 그냥 그대로 존재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 광산은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 있었는데, 갑자기 온전히 조직된 회중에 의하여 돌보아지게 된 지역이 된 것이다. 사실, 크롬이라는 회중명조차도 바꿀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형제들은 한 크롬 광산에서 다른 크롬 광산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증인 종업원을 모두 해고한 광산 경영자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일을 제일 잘 하는 일꾼들을 해고했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대단히 섭섭하게 생각하였다. 사실 얼마 후에 그는 형제들 중 몇 사람을 재고용하였다. 그 지방의 지역 감독자에게 광산 경영자는 “나는 내가 데리고 있었던, 일을 제일 잘 하는 일꾼들을 내보냈어요”라고 말했다. 형제들의 충실함 때문에 참으로 훌륭한 증거가 되었던 것이다!

1970년대로 들어가다

1960년은 전도인 수의 평균은 12,487명으로서 사상 최고의 수였다. 전도인의 최고 수는 13,493명이었다. 그때부터 1967년까지 전도인 수는 하향 추세였다. 사실 평균 전도인 수는 9,384명까지 감소되었는데, 그것은 1952년이래 가장 적은 수였다. 이렇게 된 이유 중 주된 것은, 실제로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아닌 자들을 조직에서 일소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1967년부터 다시 상향 추세가 시작되어, 1971년에는 평균 전도인 수는 11,430명, 최고 전도인 수는 12,456명이 되었다. 이 추세는 1976년까지 계속되다가 그해부터 다시 한번 전도인 수가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해부터 1970년대 말까지 이 나라는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암흑기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형제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그것을 알기 위하여 1970년대 초엽으로 되돌아가자.

이 십년간은 여호와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많은 시련과 시험의 시대가 되었다. 이 중에는 직장이나 중립 문제와 관련된 시험, 전쟁 때문에 가옥이나 가축, 농경지를 상실하기도 하고 신체적 학대와 심지어 살해당하기까지 하는 피해를 입었다. 반대자들이 왕국 사업을 금지시키기 위하여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시도도 있었다. 이 일은, 사도 바울이 돌에 맞고 죽었다고 생각하여 루스드라 밖으로 버려진 후에, 그가 한 말을 생각나게 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사도 14:22.

여호와께서 도움을 마련하시다

여호와의 백성들이 앞에 놓인 시련들을 직면할 수 있도록 어떻게 하여 준비를 갖출 수 있었는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이것은 두 가지 방법으로 행하여졌다. 이 중 한 가지는 통치체로 하여금 장로들과 봉사의 종들을 회중에 임명하게 하는 마련을 통해서였다. 이 마련이 시작된 것은 1972년이었으며, 이보다 더 적절한 때는 없었을 것이다.

장로와 봉사의 종의 임명에 관하여 성경적으로 근거를 둔 통치체의 지시에 대한 형제들의 반응을 보는 것은 가슴뿌듯한 일이었다. 성경적 자격을 검토함으로써, 몇몇 회중들은 장로나 봉사의 종의 자격을 갖춘 자가 회중내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회중은 이렇게 편지를 보내왔다. “순회 감독자와 함께 자격을 검토한 후, 장로나 봉사의 종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없음을 알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해에는 요구 조건에 달하기 위하여 노력하겠읍니다.”

지부 위원 중의 한 사람으로서 1966년 이래로 지부에서 일해 온, 제임스 무바타는 장로 마련을 실시한 후 거의 즉시 회중에 나타난 효과에 관해서 최근에 이렇게 말하였다. “가르치는 자격을 갖추고 회중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게 된 형제들이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자들로서 이미 사용되던 형제들도 자신들에게 적용시킴으로 향상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더하여, 회중을 정결하게 하는 일에 더 많은 주의가 기울여지게 되었다. 1972년 이전까지는 많은 회중에서 종들이 불결함과 관련된 문제를 신속히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장로의 회가 설립된 후에는 지체하지 않고 즉시 이런 문제들에 주의를 돌렸다. 한동안 이런 문제들을 다루느라고 우리는 그 이전 어느 때보다도 바빴다.”

이 전체 마련은 회중들에게 대단한 영적 향상을 가져왔다. 가족의 영적 성장에 대한 적절한 감독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에 자격을 상실한 형제들은 성경적 교훈을 적용할 필요를 의식하게 되었다. 기술과 능력과 영적인 진보를 가장 잘 사용할 기회를 그때까지 받지 못했던 다른 형제들은 회중의 유익을 위하여 이러한 기술이나 능력을 사용하고 있다.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훨씬 더 강력한 조직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조직은 수년 후에 닥치게 될 일들을 직면하도록 형제들을 도울 수 있는 더 나은 입장에 있음이 명백하였다.

지부의 새로운 시설

여호와로부터 온 적절한 또 다른 마련은, 삼층 건물로 된 훌륭한 새 숙소였다. 노아 형제가 1971년에 방문하였을 때, 그는 더 넓은 숙소와 지부 사무실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많은 시간 동안 주의를 기울였다. 노아 형제가 방문할 당시에는 벧엘 가족 중에 몇 사람은 근처의 어파아트에 살고 있었으며, 사무실과 발송 시설은 심히 불충분하였다. 1953년 이래, 벧엘 가족은 침실이 다섯개 밖에 없는 단층 가옥에서 살고 있었다. 사실, 노아 형제의 방문시, 이들 침실들 중 세개는 사무실로 개조되어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시설을 구하기로 결정하였다.

적당한 장소에 우리가 원하는 건물을 짓기 위한 건축 허가를 얻기 위하여 여러 차례 시도하였지만, 아무런 결과가 없자, 옛 숙소를 헐고 그 자리에 새로운 시설을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건축 공사는 1972년 12월에 시작되었다. 10개월 후에 입주하였다. 참으로 기쁜 날이었다!

이 공사가, 근래의 왕국회관 건축 공사에서 보는 “이틀간의 기적”은 아니었지만, 이웃 사람들에게는 화제거리였음이 분명하였다. 참으로, 이 건축은 지방 관리들과 주변 지역 사람들에게 좋은 증거가 되었다. 수백명의 남녀 노소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 공사를 돕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화제를 낳은 이유가 되었다.

호의적으로 말한 사람은 시 건축 검사관이었다. 처음에는 그는 상당히 쌀쌀했으나 점차적으로 모든 사람의 우정적인 태도를 보고 누그러졌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공사가 잘 진행되고 있읍니다. 이곳에는 훌륭한 일들을 합니다. 돈을 줘도 저런 훌륭한 일꾼들은 못 구할 겁니다.” 길 건너에서 일하는 건축 청부업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저런 일을 할 정도로 무엇인가를 강력히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좋습니다.” 실제로 이 훌륭한 건물은 거의 100% 자진적인 노동이나 그러한 자진 봉사자의 지휘하에서 건축되었다.

그러한 자진성과 자기 희생을 나타낸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두드러진 몇 사람의 예는 말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 중 한 사람인 피터 드리웨트의 경우를 들어 보자. 그는 자기 세속 일을 그만 두고, 아내와 딸을 데리고 도시로 와서, 건축 공사의 전 기간 동안 이동 주택에서 생활하였다. 다음에 노엘 엘러맨도 아내와 두 자녀와 함께 그들의 자그마한 이동 주택을, 바로 먼지 투성이인 건축 현장으로 옮겨서는, 건축 자재들이 있는 한 복판에서 8개월 남짓 생활하였다. 사업가인 에릭 카길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필요한 건축 기재들과 자기 회사의 노동력의 일부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건축 공사가 완료될 때까지 자기 시간의 절반을 이 사업에 바쳤다.

담배 문제

앞에서도 설명하였던 것처럼, 1970년대 초엽에는 몇 가지 문제들이 나타났다. 그 중 하나는 담배를 재배하는 문제, 즉 담배 생산 혹은 담배 가공과 관련된 회사나 농장에서 일하는 문제였다. 짐바브웨에서 이것은 대단히 큰 문제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담배는 이 나라의 주요한 수입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요 수출품으로서 대단히 필요로 하는 외화를 벌어다 준다.

다시 1972년으로 돌아가자. 당시, 그런 곳에서 일하던 형제들은 자기들의 직업이 성경적으로 합당한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사실, 형제들이 처음으로 장로와 봉사의 종으로 추천받게 되었을 때, 몇몇 형제들은 양심상의 이유로 거절하였다. 한 여행하는 감독자는 이렇게 말한다. “훌륭한 기록 때문에 장로로서 자격을 갖출 수도 있었던 형제들이 많이 있었다. 형제들 스스로가, 담배를 재배하고 포장하는 농장에서 일하기 때문에 장로나 봉사의 종으로 추전받고 싶지 않다고 부탁하였다. 그리스도인 양심 때문에 그들은 추천되지 않도록 부탁하였다.”

담배를 재배하고 있었던 일부 형제들은 곧 그 일을 그만 두었으며, 다른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계획을 하였다.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중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첩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첩과 헤어졌다. 그렇다면 담배 재배를 중지하는 것도 틀림없이 쉬울 것이다.”

형제들은 굳게 서다

형제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이미 추리하고 있었던 것은 좋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방법은, 그로부터 바로 2년 후의 일을 훨씬 쉽게 받아들이도록 해줄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직장을 ‘이웃 사랑’에 조화시킴”이라는 제목의 특별한 삽입물이 「왕국 봉사」에 들어있게 된 것은 1974년 초엽이었다. 이 삽입물은 담배 문제에 관한 성경적 견해를 명백하게 제공하였다. 흡연은 육체를 더럽히는 행위로서 그로 말미암아 제명당하는 죄가 된다. 그 문제가 이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담배를 재배하거나 그것을 가공하여 남에게 판매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안 된다라고 대답한다. 그렇게 하면서 이웃에게 사랑을 나타낼 수는 없었다. 그 삽입물의 추론은 이러한 식이었다.—누가 10:27; 고린도 후 7:1.

형제들의 반응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여러분 자신이 이러한 형제들의 입장에 있다고 가정해 보라. 어떤 담배 생산 농장에서 아주 책임있는 직책을 맡고 있다. 이와 더불어 주택과 자신의 가축을 얼마 정도 방목할 수 있는 약간의 땅도 주어진다. 그런데 갑자기 중대한 결정을 직면하게 된다. 고용주는 만일 당신이 담배 생산하는 데서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곳에서 직업을 찾으라고 말한다. 당신은 몇명의 어린 자녀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데, 형제들은 그 일을 해냈다! 그렇다. 여호와의 조직에서 제하여지기보다는 이 모든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대단한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께 대한 은총을 누렸다. 제명당해야 했던 사람의 수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그처럼 굳게 선 사랑하는 형제들을 보면 마음이 뭉클해진다.

엇갈린 반응

물론, 형제들이 보인 이러한 입장은 사회의 각처에서 여러 가지 반응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대부분은 이러한 입장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신문 기사들, 그리고 편집자 앞으로 오는 편지들은 매번 실리는 일이 되었다. 국회의원들도 국회 내외에서 비판의 소리를 높였으며, 그 중에는 격렬하게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미쳤는지는, 한 월간 잡지에 게재된 기자의 이러한 말에 나타나 있다. “여호와의 증인은 국회 내외에서 격렬히 비판을 받아왔다. ·⁠·⁠· 새로운 법령하에서는, 이제 그들의 시민권을 박탈당할 수도 있고, 국외 추방 면제권을 상실당할 수도 있다.” 이 기자는 그것을 “찻잔 속의 태풍”이라고 불렀다.

농장주들도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그 중에는 악의를 품은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쓴 편지를 협회에 보내기도 하였으며, 전화를 건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농장주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농장의 책임있는 지위에 여호와의 증인을 사용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편의를 도모해주려고 아주 애쓴 농장주들도 여럿 있었다. 착하고 신뢰할 수 있는 일꾼들을 잃기보다는 담배 생산과는 관련이 없는 직업을 형제들에게 기꺼이 주었던 것이다. 물론 형제들은 이것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담배 판매원으로 채용되었던 한 형제의 경험담이 있다. 이런 종류의 일에 남아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형제는 사직서를 제출하였으나 고용주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래서 형제는 출근을 하지 않았다. 출근하지 않은 이유를 알아보기 위하여 고용주가 형제의 집에 왔을 때, 그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그랬더니 고용주는 형제의 정직성을 칭찬하고 고용자인 그를 절대로 잃고 싶지 않다고 다짐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형제는 그 직장에 계속 남아 있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담배와 관련된 작업을 전혀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집회 시간도 얻기를 원하였다. 이 조건에 고용주는 허락하였으나, 대신 형제는 월급이 적어지게 되었다.

“세속 직장에서 문제를 직면할 때 견디는 한,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나의 경험에서 배웠다. 또한 여호와의 조직과 더불어 전진함에 따라, 자신의 영적 성장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할 중요성도 배웠다”고 그 형제는 결론지었다. 이 형제는 지금 장로로서 봉사하고 있다.

역경중에도 좋은 소식이 퍼지다

실제로, 형제들의 이번 이동은 왕국의 좋은 소식을 퍼뜨리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그때까지는 격지로 되어 있던 구역에 새로운 회중들이 조직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는 격지 구역에 광산을 가지고 있었다. 형제들은 그가 일꾼들을 필요로 하며 게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기꺼이 돕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시 그 형제는 자기를 위하여 일하는 20명의 형제들을 가지게 되었다. 이 형제들과 가족들이 합쳐져서 한 회중이 형성되었는데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곳에서는 지체없이 도움을 베풀었다.

담배 문제로 직장을 그만 둔 얼마의 형제들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흔히 그런 곳에는 회중이 없었다. 그 결과, 그때까지 전파되지 않는 지역에 여호와의 말씀이 전파되게 되었다.

그러면, 이 문제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상한 일이지만, 최종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담배 협회 자체였다. 그 협회가 담배 재배업자들에게 발행하는 월간 회보 중 하나에, 협회장이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간단히 해결되었던 것이다. 이 성명에서는 그것은 증인들의 종교적인 문제이므로 문제삼지 말라고 하였다. 「로디지아 타바코 포룸」 1974년 6월 호에는 흥미있는 논평이 실렸다. 그 잡지 27면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에 관하여 이렇게 쓰여 있다. “같은 기사[어떤 신문 기사]에서, 농산부 장관은 ·⁠·⁠· ‘경제에 혼란을 일으키려는 분명히 의도적이며 악의적인 시도’로서 그 운동을 묘사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그러나 관련된 사람의 수는 그러한 억측을 확증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로디지아 담배 협회 자체의 이 논평에 의하여, 문제가 가라앉게 되어 형제들도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되었다. 사실, 여호와의 백성의 충성에 관해 훌륭한 증거가 행하여졌다.

중립 문제가 등장하다

아프리카 형제들이 담배 문제로 영향을 받고 있는 동안에, 1972년에 또 다른 문제가 등장하였다. 처음에는 단지 백인 형제들만 관련되었다. 이것은 국가간의 문제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인 중립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 문제는, “해방 투쟁” 혹은 다른 사람들이 일컬어 알려지게 된 “테러 분자 전쟁”이 시작됨으로써 비로소 널리 퍼졌다. 물론 이 문제는 백인 남자들이 의무적으로 군 복무를 하게 된 결과 빚어지게 되었다.

특히 국경선에서 전투가 격화됨에 따라, 국가 방위에 전국민을 포함시키고자 하는 더 많은 노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징병은 처음에 백인 남자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다. 여기에 상당히 많은 젊은 증인들이 관련되었으며, 그들 중 다수가 양심적으로 그리스도인 중립의 길을 유지하기 때문에 징역형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중에는 한번 이상 투옥된 사람들도 있었다.

징병의 형식은, 일년 중 일정한 기간에 남자들이 소집받았으며, 그 후에 그들은 세속 직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형제가 소집에 응하기를 양심적으로 거부할 때마다 재판에 회부될 수 있었으며, 따라서 한번 형기를 마친 후에도 또 다음의 형기를 받아 계속 투옥될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하였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옥중에 있는데 소집 영장을 받기까지 하였다.

가족이 있는 젊은 기혼 남자들은 특히 어려웠었는데, 왜냐하면 투옥될 때 가족을 뒤에 남겨두지 않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직업 때문이었다. 흔히 이 형제들은, 투옥되면 직업을 잃곤 하여 석방되었을 때에는 다른 직업을 찾을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럴 때면, 반드시 그들은 병역에 관한 상황을 질문받곤 하였다. 사실을 알게 되면 채용할 가능성이 있는 고용주도 이렇게 대답하곤 하였다. “미안합니다. 당신을 고용하고 싶지만, 군사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은 고용할 수가 없어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아주 큰 문제가 되었다.

초기의 본

봅 헉스는 이러한 시련을 최초로 견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군사 훈련을 받았었다. 연구를 시작한 지 단지 6개월이 되던 1973년 1월, 임무를 위하여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헉스 형제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성서 연구에서 배운 것 때문에, 나는 가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아내 몰리는 임신 2개월쯤 되었다.”

그가 소집에 불응하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법정에 소환되어 30일간의 금고형에 3개월의 집행 유예 선고를 받았다.”

그가 겪기에 그것은 어려운 시련이었는가?

“아주 어려웠다. 침례를 받지 않았던 때에 철창 신세가 된 것이다. 처음 보는 세계에 혼자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이 아주 혼미한 상태였다. 그때 몰리는 화가 나서 헤어지자는 투의 편지를 보내왔다. 게다가 아버지께서 증인을 비난하는 서적들을 많이 가지고 나를 만나 보려고 오셨다. 나는,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나의 양심적인 입장을 고수하겠다는 결심을 아버지께 알려 드렸다. 여호와께 기도하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고난이 가중되다

석방된 봅 헉스는 고난이 해결되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알았다. 집에서는 아내 몰리가 그에게 군대 장비를 내어 주면서 “숲” 즉 전쟁터로 가도록 권했다. 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강제로 가도록 해서는 안 되며, 두번 다시 그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그리고 나서 이 자기 원래 직장으로 가보니 당장 해고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은 이렇게 말한다. “해고당했다고 몰리에게 말하였는데도, 그는 나를 떠나지 않았다. 여전히 진리에 대하여 냉담한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 후 즉시, 은 침례를 받았다. 그리고 재투옥되었는데, 이번에는 지난번의 3개월의 유예 기간이 더해진, 6개월의 형기였다. 그는 전부 세번 투옥되었는데, 마지막 투옥 때는 8개월간이었다.

그리고 몰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렇게 물어보고 싶을 것이다. “몰리, 지금 들은 이 모든 일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설명할 것이 있읍니까?”

“우리가 진리를 함께 배우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었읍니다. 은 달랐지요. 그이는 무엇을 배우기만 하면 즉시 변화하였어요. 결국 흡연과 파티와 다른 일들도 그만 두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때에 나는 임신중이었고, 수혈 문제가 나를 괴롭혔지요. 우리의 생활 전체가 영향을 받고 있었어요.

“그러자 이 투옥되었지요. 나는 지독하다고 생각하였어요. 그이가 우리 가족에게 어쩌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때 나는 최후 통첩을 하기로 하였어요. 편지를 써서 헤어지겠다고 위협했지요.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것이 본심이 아니며, 나는 헤어지는 일을 결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무엇 때문에 몰리가 변화하여 진리를 받아들였는가?

“주로, 자매들이 나타낸 친절 때문이었지요. 식료품이나 고기나 빵의 꾸러미와 기타 다른 물질적 도움이 있었지요. 그러나 이에 더하여 형제 자매들은 사랑의 염려를 나타내어 나를 영적으로 세워주곤 하였어요. 점점 이런 일들이 나에게 영향을 주었지요. 나는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침례를 향하여 노력하기 시작했지요. 이 마지막으로 출감한 직후에 나는 침례를 받았어요.”

헉스 형제는 그후에 다시 한번 소집당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가 다른 나라에 취직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투옥되지 않았다.

이 경험은 몇몇 형제들이 겪은 것 중에서 전형적인 것이다. 사실, 징집 연령이 50세까지였다가 결국에는 60세까지 올라갔기 때문에 상당한 수의 형제들이 관련되었다. 그러나 그에 관해서는 후에 더 말하기로 하자.

정치적 반대가 나타나기 시작하다

담배라든가 그리스도인 중립과 같은 그러한 문제들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이 뉴스거리가 되었다는 점은 쉽게 상상할 것이다. 확실히, 증인들의 중립적 입장을 귀찮아 하던 화난 세상 사람 일부의 선동을 받고, 국회의원들 몇몇이 정부가 전파 사업을 억제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들먹이기 시작하였다.

보도 기관의 비판과 공격의 대상이 되는 데 더하여, 증인들은 국회 토의에서의 인기있는 의제가 되기도 하였다. 국회에서 방위법과 시민권법의 수정안이 토의된 1973년 12월 4일에 특히 그러하였다. 다음은 이들 토의의 일부이다.

“이 종파[여호와의 증인]의 신조는 정평있는 기성 교회와 뚜렷한 대조가 된다.”—국방장관.

“요약하자면, 종교적 양심상의 이유로 명령에 복종을 하지 않는 일과 관련된 위반에 대하여 벌금을 내는 일 없이 6개월이나 그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은 여호와의 증인은 시민권을 박탈하고, 시민권이 없는 사람에 대하여는 국외로 추방하는 규정이 ·⁠·⁠· 의도되고 있다.”—국방장관.

“[일반적인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의] 이러한 신념은 대체로 인간의 생명을 취하는 문제와 관계가 있으며 비전투직에 배치함으로써 조절될 수 있다. ·⁠·⁠· 예외는 ·⁠·⁠· 여호와의 증인으로 알려진 집단 혹은 종파이다. 그것은 유해한 조직체라고 나는 생각한다. 병역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는 아무런 근거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다.”—국회의원.

“우리가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점은, 여호와의 증인이, 병역 의무가 있고 복무하고 있는 젊은 남자들에게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국방장관.

형제들이 취한 담대한 입장은 한 가지 아닌 여러 가지 면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긴장이 고조되다

1974년이 끝나갈 무렵에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이 짐바브웨 지부 사무실에서 협회 본부로 보낸 1974년 10월 8일자 서신에 나타나 있다. 그 서신은, 우리 조직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의 소문을 일부 언급한 후 이렇게 기술하였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까지, 우리는 이 이상 아무 말도 듣지 못하고 있으며 당국자들과도 아직 접촉이 없었다. 12월까지는 어떤 행동이 취해질 것이라는 소문이 들리고 있으나 우리는 이들 중 아무 것도 확인할 수가 없다.

“전국적으로 인구의 상당 수가 우리의 활동 특히 호별 방문 전도에 대하여 매우 분명하게 ‘강력한 반대를 표시’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 사절” 표지가 도처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사실, 장사속 있는 어떤 사람은 집집으로 그 표지판을 팔기 시작하였다. 한동안 그는 재미를 톡톡이 보았다.

제안받은 행동

1975년 2월 초에 지부 사무실은 매우 중요한 회의의 의사록을 입수하게 되었다. 그 회의는 당시의 집권당인 로디지아 전선의 국가 집행부의 회의였다. 1975년 1월 31일에 개최된 이 회의에서는 주로 여호와의 증인에 관해 다루었다. 그들이 여호와의 증인에 대하여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느끼는 이유에 관하여 여러 가지 점들이 제출되었다.

그 당시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여호와의 증인은 금지당할 것인가? 선교인들은 국외로 추방될 것인가? 발생할 일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였다.

정부에 이러한 제안을 낸 사람들은 집권당원들이었지만 사실 그들 중의 몇은 국회의원들이어서, 정부 자체가 더 이성적인 견해를 가진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당시도 그랬지만 후에도 전파 사업이나 조직에 대하여 어떤 공식 행동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 매우 감사한다.

“전투” 지역에서의 중립

형제들이 이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된 입장을 확고히 취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문제는, 단지 병역 문제만이 아니었다. 다른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하였다. (요한 15:19) 예를 들어 윌 보슬루 형제의 농장은 전쟁중에 대단한 “전투” 지역이 되었다. 이 농장은 그 형제가 장로로 섬기던 회중에서 약 62 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바로 그 너머에는 “자유의 투사”들의 요새가 있었다. 이들과 정부 치안 유지군 사이에 많은 전투가 있었다.

침례를 받은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보슬루 형제와 아내 기셀라가 집에서 함께 앉아 성서 시편 112:7을 읽고 있었다. 그 성귀는 이러하였다.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한 시간이 채 못되어 한 경찰관이 나타나서 그 지역에 “테러 분자들”이 있다고 사람들에게 경고하였다. 경찰관은 농장주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무장하라고 주장했다. 보슬루 형제는 거절하였다.

이 형제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때부터, 마을을 자체 방어하는 데 참가하라는 압력이 점점 더 나에게 가해졌다. 이웃들은 나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나는 겁장이였다. 어느 날 야외 봉사를 하는데, 한 남자가 ‘전투가 정말 격렬해지면 당신이 제일 먼저 도망칠꺼요’하고 나에게 말했다. 그는 틀렸다. 나는 지금도 농장에 있지만, 그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다.”

중립적 태도는 한 가지 보호책

비록 이웃 농장주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였지만, 보슬루 형제와 가족은 예기치 않던 곳으로부터 위안을 받았다. 어느 날, 순회 감독자가 그를 만나러 와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움푸리 강 건너에서 온 당신의 형제요. 걱정할 필요가 없오. 저 지역 사람들은 형제의 중립적 입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오. 당신은 안전할 것이오.” 이 말은 사실이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보슬루 형제의 트랙터 운전수들이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한 무리의 게릴라들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그들은, “우리는 저 남자를 알지. 그의 트랙터들을 불태우고 싶지 않아”라고 말했다. 그 말 그대로, 이웃 사람들의 트랙터들은 불타버렸으며 펌프 시설물도 파괴되었으나 보슬루 형제의 장비들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았다. 후에, 보슬루 형제와 가족이 휴가차 떠나있는 동안에도 그 지역에 있는 여러 채의 농장 가옥들이 파괴되었으나, 보슬루의 집은 그냥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모든 일은, 정치적 문제에 대하여 그들의 중립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당히 여러 해 동안, 사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심지어는 마을 대표자들이 보슬루 가족을 방문하여,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보호해 주기 위하여 무장하도록 압력을 가하며 “부끄럽게” 하려고 애를 쓰곤 하였다. 그 지역의 주민들은 모두 다, 중무장을 하고 여행을 하였다. 그러나 보슬루 형제는 기셀라가 “권총이나 엽총없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던 것으로 전한다.

사태는 갈수록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지방의 상점들은 불타버리고 있었으며 도로에는 지뢰가 매설되었다. 야간 통행금지 시간은 어린이들이 통학하는 길을 극히 어렵게 만들었다. 그래서 마침내 보슬루 형제는 자기가 농장에서 일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도시에 집을 세내어 자기 가족이 생활할 수 있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겪으면서도, 참다운 보호는 중립과 여호와께 대한 완전한 신뢰에서 비롯되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렇게 기록된 바와 같다.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 너는 창졸간의 두려움(을) ·⁠·⁠· 두려워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는 너의 의지할 자이시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잠언 3:24-26.

모순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젊은 백인 형제들을 감옥으로 보낸 바로 그 입장이, 아프리카인 형제들에게는 다른 종교 조직이나 기타 조직들이 흔히 누리지 못한 자유를 주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지역에서 게릴라 활동이 증가함으로써 치안 조처가 강화되었다. 집회가 금지되었으며, 학교와 상점들도 폐쇄되었다. 형제들은 야외 봉사에서와 그리스도인 숭배를 위하여 함께 모이는 방법에 있어서 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73년 2월에 순회 대회가 이런 지역 중 한 곳에서 계획되었다. 대회 개최 허가를 받을 것인가? 지방 형제들은, 여호와의 인도에 온전한 믿음을 두고, 지역 사무관에게 가져갈 서신을 받기 위하여 추장에게 접근하였다. 그는 당장에 서신을 주지는 않았지만, 추장은 형제들에게 준비를 시작하도록 허락하였다.

그후, 지역 감독자 아이삭 치앗즈와가 그 지역에 와서, 자기가 왔다는 것과 순회 대회를 위하여 그 지역에 들어갈 허락을 얻기 위해 그 지역 사무관 사무실에 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도티토 지역에 들어갈 허가를 청하자, 지역 사무관 사무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웃고는 내가 미친 줄로 생각하였다. 후에 관리 중의 한 사람이 ‘우리는 여러분을 알고 있오, 현 상태에 관한 여러분의 입장을 알고 있오’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들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대회의 허가가 나왔다! 유일한 제한이란 저녁에는 아무런 회기도 가지지 말라는 것이었다. 추장도 놀랐으며 감탄하였다!

치앗즈와 형제는 그 당시 지역 봉사를 할 때 노상 검문소를 많이 거쳤다고 말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언제나 통과할 수 있었다.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노상 검문소에서는, 조사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은 자기 차에서 짐을 내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내가 자동차에서 뛰어내리자, 경관은 즉시 나의 서류 가방을 보았다. 그것을 열어본 후, 나의 이름과 직업을 물었다.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말하자, 그는 차에서 짐을 내리지 말라고 하였다. 마침, 내 차는 서적들과 모든 기구들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다른 경관이 이 말을 듣고 내 차에서 짐을 내리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알고자 하였다. 먼저 경관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란 말일세. 저 사람들과는 문제가 없단 말이야.’”

그 지역의 모든 형제들은 밭에서 일하고 있을 때에도 협회 서적을 가지고 있다고 지역 감독자는 말하였다. 이 때문에 구타당하거나 기타 부당한 처우를 받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었다. 동일한 집단의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는 당국으로부터 증오에 찬 미움을 받기도 하고 다른 경우에는 대단히 호의적인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후에 이 점에 관하여 더 말할 것이 있지만, 여기에서 말라위로 이야기를 돌려 보기로 하자.

말라위에서의 박해

말라위의 형제들에 관해서는, 고국을 떠나 말라위 동편에 있는 모잠비크밀랑게로 도피하였음을 앞서 말하였다. 1970년경에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고향으로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하여, 원래의 생활에 다시 정착해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상태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1972년에 잔인한 박해의 파도가 형제들을 또다시 강타하였다.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지는 그것을 “종교 전쟁”이라고 불렀으며, “그것은 믿음에 무력으로 맞서는 너무나 일방적 전쟁이다”라고 보도하였다. 그 형태는 1967년에 있었던 박해의 파도와 아주 흡사하게 일치한 것으로서, 이번에는 훨씬 더 격렬해졌다는 점뿐이다.

청년 동맹과 청년 개척자 운동이 이 “전쟁”의 선두에 나섰다. “그들은 열명 정도에서 많을 때는 100명 정도 배치된 집단을 조직하였다. 그리고는 몽둥이나 투봉(投棒), 혹은 수렵용 칼이나 도끼로 무장하고 마을에서 마을로 다니며 여호와의 증인과 그들의 재산을 찾아내서 공격하였다.”—「깨어라!」 1972년 12월 8일호(영문).

자매들은 강간당하였고, 못이 있는 두꺼운 판자로 잔인하게 구타당하였다. 그들은 한 형제의 몸에 건초를 묶어 놓은 다음, 거기에 불을 질렀다. 그는 문자 그대로 불에 타 죽었다.

마이클 야당가 형제와 그의 가족은, 주변에 야수들이 있는 야생동물 지정 수렵장 한복판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그들은 버스를 타기 위하여 수 킬로미터를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집에 돌아오자, 당원증을 사도록 설득하는 위협을 다시 받았다. 야당가 형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당원증 사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치아를 잃었오. 당원증 사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직장을 잃었오. 잔혹하게 구타당하였고, 소유물은 파괴되었고, 강제로 잠비아로 도망하지 않으면 안 되었오. 이 모든 것이 당원증을 사지 않았기 때문이오. 이제 와서 그것을 사지는 않겠오.” 후에, 우정적인 청년 동맹원이 그를 잡으러 온다고 경고해 주어서, 이 형제와 가족은 모잠비크로 도피하였다.

구타와 다른 신체적 학대 외에, 사업의 폐쇄, 은행 예금의 동결, 재산의 압수, 농작물의 파괴와 절도, 증인들을 강제 해고하는 일들이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은 어떻게 하였는가? 그들이 단지 할 수 있었던 일, 즉 그 나라에서 도망하였던 것이다.

이번에, 그들의 대부분은 잠비아로 도망하였다. 19,000명 이상이 신다 미살레에 피난민 수용소를 세웠다.

전세계 형제들로부터의 도움

오래지 않아 이 형제들에게 도움이 오기 시작하였다. 전세계로부터 돈, 의류, 식량, 기타 물품이 답지하였다. 잠비아의 형제들은 즉시 수천 파운드의 식량이나 담요와 침구, 원예 용구들과 다른 물품을 마련해 주었다. 여러 대의 트럭에 실리어서 방수(防水)천, 담요, 비닐 요, 삽, 도끼와 다른 물품이 남아프리카에서 왔는데, 형제들은 신다 미살레까지 약 2,400 킬로미터를 운전하여 배달한 것이다. 형제들은 많은 어려움들을 겪기는 하였지만, 여호와의 사랑의 인도로 그 물품을 운반하였다. 전부해서 수많은, 수 의 식량, 의복, 의약품 그외에 다른 물품들이 신다 미살레의 형제들에게 공급되었다.

다시 이동하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 휴식 기간은 단지 일시적이었다. 이 형제들을 다른 장소로 옮긴다는 구실 아래 잠비아 정부는 사실상 그들을 말라위로 되돌려 보냈다. 박해가 다시 한번 일제히 시작되었다. 그래서 형제들은 또다시 고향 땅에서 도망하여 이번에는 말라위 서쪽에 있는 모잠비크믈랑게니로 갔다.

지체하지 않고 12개의 피난민 수용소가 모잠비크에 세워졌는데, 이 수용소에서 생활한 사람의 수는 최고 34,000명 이상이었다. 그후, 1975년에, 모잠비크정부는 형제들을 믈랑게니 지역에서 말라위로 강제 송환시켜 버렸다. 그곳에서 대부분은 동쪽 모잠비크로 다시 피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그대로 있다.

여기에서, 독자는 시릴 롱과 아내 이나가 자세히 말하는 경험담에 대단한 관심이 있을 것이다. 1972년에 박해가 다시 일어났을 때 이 부부는 말라위, 블랜타이어에 살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였다.

“어떤 가족은 홍수로 물이 불어난 시내의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다가와서 당원증을 제시하라고 요구하였다. 부모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자, 그들은 다리의 난간 아래 거세게 흐르는 냇물 속으로 아이들을 던져 떨어뜨렸다. 그 중에는 6개월 된 갓난 아기도 있었다. 다행히도 나이든 자녀가 수영을 할 수 있어서 그 아기를 구해냈다. 여호와의 손이 그들 위에 있어서, 모두는 죽음을 모면할 수가 있었다.

“다른 형제는 맞아서 무의식이 되자 박해자들은 그의 전신에 휘발유를 부었다. 그리고 불을 질러서 형제를 태워 죽였다. 끔찍하게도 임신중인 부인과 여섯 자녀는 잔인한 그 일 전부를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박해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도움을 주다

형제는, 강탈을 당하고 구타당하는 형제들을 돕기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할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도망해 오는 형제 자매들을 태워서 국경까지 수송할 비밀 장소를 만들었다. 첫 수송에서 두대의 폭스바겐 밴 자동차로 약 30명을 실어 날랐다. 대여섯명이 자전거를 가지고 왔으나, 자전거를 가져갈 수 없음을 알자, 도로 옆 수풀 속에 집어 던졌다. 그들은 자전거를 다시는 찾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나는 말한다. “도로를 따라 노상 검문소가 연이어 있었다. 검문소를 지날 때마다, 형제 자매들은 모포를 뒤집어 쓰고는 차 바닥에 납작 엎드리곤 하였다. 시릴은 백인에다가 차내에서는 유일하게 보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사를 하지 않고 그에게 손을 흔들어 통과시켜 주었다. 새벽 3시에 그들은 모잠비크에 있는 피난민 수용소에 안전하게 도착하였다.

“며칠 후, 순회 감독자가 와서, 의약품과 모포가 긴급히 필요하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잠비아의 수용소 밖에서 거의 12,000명이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겨울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감기나 설사나 목이 붓는 등, 그밖의 다른 병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학대를 받았기 때문에 칼로 베이거나, 타박상을 입거나 심한 화상을 입은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을 돕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

여호와께 열렬히 기도를 한 후, 우리는 한 약사에게 가서 의약품을 팔도록 부탁하기로 하였다. 약사가 우리를 당국에 고발하는 일은 쉬웠기 때문에 이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약사에게 가서 사정을 말하였다.

“사실 이 약사는, 자기가 가장 신뢰하는 종업원인 여호와의 증인을 정부가 강제 해고하도록 한 데 대해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를 고발하기는커녕,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매우 기뻐하였다.” 다음날, 주문품을 받으러 가자, 피난민 수용소의 형제들을 위한 무상의 선물로서 의약품이 들어있는 커다란 상자 두개를 받았을 때, 시릴 롱이나가 얼마나 놀라고 기뻐하였는지를 상상해 보라! 그들이 이 물품에 대하여 돈을 지불하려고 하자, 그 약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토록 수치스러운 대우를 받고 있는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후 곧 시릴 롱과 다른 형제는, 이번에 모포를 차에 싣고 야간 여행을 하여 수용소에 갔다.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본 것 때문에, 우리는 눈물을 흘렸다. 일가족 여섯명이 모포 한장 속에서 웅크리고는 서로의 몸에서 온기를 얻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어떤 자매는 심하게 구타당한데다가 달구어진 통나무로 몸을 데었기 때문에 드러 누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건초 다발로 그 자매를 받쳐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매가 참으로 감동한 하나의 경험담을 더 말하고 이 기록을 끝내고자 한다. 정부가 형제들의 은행 예금을 모두 동결시켰기 때문에, 도망치기 위한 대중 교통 수단의 여비를 지불할 돈을 인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자매는 이렇게 말했다. “두명의 형제가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동결되기 직전에 예금을 인출할 수가 있었읍니다. 가족의 버스표를 사고서 이만큼 남았읍니다. 이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주실 수 있겠어요?’ 이 형제들은 자기들의 직업을 잃었지만, 형제 사랑에 감동되어, 남은 것을 다른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형제들은 여호와께서 마련해 주실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시릴 롱이나가 그때를 회상할 때면 여호와의 사랑의 돌보심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더욱더 강화될 것이다.

모잠비크에로의 여행

말라위 서부의 모잠비크에 난민 수용소가 아직도 있었을 때인 1975년에,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경험한 것과 흡사한 한 문제가 일어났다. (사도 6:1-6) 이것은 구호품의 분배에 관한 문제였다. 지부 사무실에서 형제가 직접 방문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결정하였다. 그래서 1975년 2월에 지부 위원인 케이스 이튼이 그 수용소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곳에 간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그 여행은, 항공로로 우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소울즈버리에서 모잠비크 동해안에 있는 베이라로 가서, 그곳에서 몇명의 형제들을 방문하면서 베이라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그리고 잠베지 강 근처의 테테로 가서 빌라 코우틴호(현재 우롱게)로 갔는데, 그곳에는 당시 6개의 난민 수용소가 있었다.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것이 어려웠던 이유 중의 하나는, 모잠비크포르투갈인의 소수 지배에서 흑인의 다수 지배로의 전환이 한창 진행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국경 통과는, 특히 그 지역 사람이 아닌 낯선 자에게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빌라 코우틴호 공항에서 만난 형제들의 도움으로 이튼 형제는 그 수용소를 방문할 수가 있었다. 그곳에서 형제들의 문제를 토의하였으며, 그들의 처지에 관한 비통한 보고를 듣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제안들을 해주었다. 협회의 대표자의 이러한 직접적인 접촉으로써, 형제들이 대단히 격려받았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수용소에서의 배교

말라위 동쪽에 있는 모잠비크 밀랑게에 있는 수용소에 마침내 정착하게 되자, 형제들의 생활은 상당히 안정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하자 다시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1976년에 어떤 사람들이 갑자기, 기름부음받은 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였으며 회중의 집회와는 별도로 특별한 모임들을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비성서적인 가르침들을 주장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자기들은 기름부음을 받았으며 1975년 이래로 여호와께서 더는 장로들을 통하지 않고 자신들을 통하여 회중을 다루신다는 것이었다.

주모자 중 한 사람은, 모잠비크믈랑제 산 근처에서 벌거벗은 채로 경찰에 발견되어 모잠비크 동쪽의 난민 수용소 지역으로 호송되었다. 그는 자기 추종자들에게, 자기는 모세처럼 교훈을 받기 위하여 그 산으로 올라가라는 여호와의 지시에 순종하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기름부음받았다고 자처하는 이 거짓 선생들은 상당한 추종자들을 얻었다. 500명 이상이 제명 처분될 때까지도 그 배교는 중지되지 않았다. 미혹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상당한 수가 결국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의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회중으로 복귀되었다.

모잠비크에서의 사업을 책임맡고 있는 두 형제가 지부 위원을 위한 5주간에 걸친 길르앗 강습에 참석할 수 있게 된 사실은 대단히 기쁜 일이었다. 이것은 그 나라에서의 사업을 신권적으로 훌륭히 감독하는 마련에 있어서 크게 도움이 되었다.

전쟁 때문에 문제들이 가중되다

이제 짐바브웨로 이야기를 돌려 보자. 전쟁이 격화되기 시작하자 형제들이 직면해야 할 문제들도 증가했다. 생활은 매우 혼란해졌다. 많은 지역에서 정상적 생활이란 불가능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다음 날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몰랐다. 협회에 다음과 같이 편지한 이 형제의 가족의 입장에 독자 자신을 놓아 보라.

“저는 저의 가족, 즉 아내와 다섯 자녀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하고자 한다. 그들은 옥수수 밭에서 일하다가 가까스로 도망쳐 살아났다. 군인들은 밭 양편에서 서로 총격전을 시작하였다. 가족은 땅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총알은 그들 머리 위를 스칠듯 지나갔다. 박격포탄들이 겨우 9미터 밖에서 터졌다. 그들은 십자포화에 걸려들었는데도 다치지 않고 도망하였다. 이것이 여호와의 보호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집 주위에 있는 나무들은 바주카포를 맞아서 심하게 상하였으나 내 집은 피해가 없었다.”

이 형제는 발생한 다른 문제에 관해서도 말한다.

“군인들이 저녁에 우리 집에 왔다. 그들은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였으며,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들은 그날 밤 나의 딸들을 데려가기를 원하였다. 딸들은 자의로 거절하면서 가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군인들은 딸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였으나 여전히 딸들은 저항하였다. 딸들은, 이전에 가족 연구에서 토론한 적이 있는 마태 복음 10:28과 계시록 2:10예수의 말씀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마침내, 군인들은 딸들을 그냥 두고 가기로 결정하였다.

“군인들과 함께 가기로 동의한 세상의 여자 아이들은 욕을 당하였다. 이 위험한 때에 우리를 계속 그렇게 돌보아 주신 여호와께 감사한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젊은 자매들 모두가, 이처럼 쉽사리 도망쳤던 것은 아니다. 여행하는 감독자인 마이클 치카라는 어떤 젊은 자매가 겪은 바를 이렇게 말한다. 먼저, 그 자매는 뺨을 맞았다. 그리고는 “자매가 상처에서 회복되고 있는 동안에 한 집단의 남자들이 자매를 누르고 강간하였으며 그 결과, 그 자매에게는 지금 한 아이가 있다.”

치카라 형제는 17세된 자매에게서 들은 경험에 대해서도 말한다. 이것은 그 자매의 슬픈 이야기이다. “나는 네번이나 강제로 군인들에게 끌려가서 구타당하였는데, 두번은 한 편 군인들에게, 다른 두번은 다른 편 군인들에게서 였다.

“처음 맞았을 때, 나는 살아있는지조차 몰랐다. 부상이 채 낫기도 전에 이번에는 다른 편 군인들이 그 지역에 와서, 모든 젊은 여자들을 모으고 강제로 자기들의 모임에 참석시켰다.

“이번 경우에는, 한 남자가 나에게 모포를 바닥에 펴라고 명령하고는 자기와 동침하도록 강요하였다. 나는 울면서 도망쳤지만, 그 남자는 나를 따라왔다. 또 한명의 남자가 가담하여 강제로 나를 추행하려고 하였다. 나는 개머리판으로 얻어 맞아 쓰러졌지만, 쓰러져 있으면서도 비명을 질렀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가버렸다. 그후, 나는 많은 참석자들 속에 섞여 있다가, 나를 불러냈던 사람들 모르게 어두워진 후에야 도움을 받아 집에 돌아왔다.

“수개월 후, 군인들의 다른 부대가 우리 지역에 와서는 나와 다른 아홉명의 소녀들을 데리고 갔다. 그들의 주장은 우리가 적군의 여자 친구 노릇을 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의 경우는 사실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여러 주일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구타당하였다. 나는 모두 네차례 구타당했다.”

훌륭한 이 젊은 자매는, 자기 가족 중에서 혼자만 진리 안에 있으나, 계속 영적인 강함을 유지하고 있다.

유괴—일반적인 일

십대의 어린 자녀들이 유괴당하는 것은 어떤 지역에서는 다반사가 되었다. 일단의 군인들이 작은 마을에 와서 모든 마을 사람들을 공지에 모이라는 명령을 한다. 그리고 어른들에게 강제로 노래를 부르게 하고 그 사이 군인들은 십대 중반의 소년 소녀들을 고르는 것이다. 소년들은 군인으로서 훈련을 시키고, 소녀들은 요리사나 부도덕한 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데리고 가는 일이 행하여졌다. 어떤 부모들은, 다시는 자기 자녀들을 만나지 못하였다.

때때로 형제들까지도 마음을 쓰라리게 하는 이 경험을 겪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파이오니아 형제는 협회에 이렇게 편지하였다. “나의 딸은 다섯명의 다른 자녀들과 함께 유괴되었읍니다. 여섯명 모두 헌신하고 침례받은 증인들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 형제들은 자기의 자녀들이, 증인들로서가 아니라 군사 훈련을 받은 군인들로서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된 슬픈 경험을 하였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어리지만 용감한 증인

한 감동적인 예가 있다. 그것은 동부 지역의 14세된 자매인 캐더린 무보나의 일로서 그 자매는 유괴되었다. 그 자매의 부모(아버지 마이클은 여러 해 동안 파이오니아를 해오고 있다)는 과연 딸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매우 걱정하였다. 며칠 후, 딸이 아무 해도 받지 않고 마을로 돌아왔을 때 그들의 기쁨과 안도의 한숨을 상상해 보라.

“그들이 너에게 어떻게 하던?”하고 부모는 캐더린에게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하고 대답했다.

“그러면 여기서 끌려간 이후에 어떻게 되었니?”

“그들에게 여호와에 관해서 말해 주었어요. 증거를 하였지요.”

며칠 후, 그 부대장이 마을에 와서 소녀의 부모를 찾았다. 부모는 그 사람이 왜 찾아왔을까 하고 대단히 걱정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딸을 훌륭히 양육시킨 부모를 칭찬해 주기 위하여 일부러 찾아왔던 것이다.

보호된 마을

점점 더 많은 마을이 “전투” 지역이 되고, 어떤 마을은 게릴라 부대의 은신처와 요새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그러한 마을의 주민들을 속칭 “보호지”라고 하는 울타리친 지역 혹은 보호된 마을들로 이주시키기 시작하였다. 비록 이 일이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행하여졌지만,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집과 가축과 농작물과 모든 것을 뒤에 남겨 둔 채 몇 가지 물건들만 가져갈 수 있었다.

1973년으로 되돌아가서, 순회 감독자 루벤 므펫자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무쿰부라무상구와치우치 회중들에 관하여, 정부는 이 지역 사람들을, 정부가 정한 특정한 정착지로 이주시키고 있다. 형제들 중에는 그 이주 때문에 현재 집이 없는 사람도 있다.”

자신과 가족이 약간의 소지품을 가진 무일푼의 상태로, 울타리가 쳐진 지역에 갑자기 놓이게 되었을 때, 그 기분이 어떠하였겠는가를 독자는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집이나 위생 시설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드러누울 땅바닥뿐이다. 형제들은 이에 대하여 어떠한 반응을 나타냈는가? 순회 감독자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그래도 이러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이 고난받는 인류를 위한 유일한 희망으로서 여호와의 왕국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도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격려적이다.”

이 “보호지”에 대한 일반 사람들과 여호와의 증인들의 태도의 차이를 알아보는 것은 흥미롭다. 대부분이 물질을 상실하여 슬퍼한 데 반하여, 증인들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하여 바빴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왕국 소식을 가지고 그들을 만나기란 매우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장소에서는, 연로한 자매들이 매우 행복해 하였다. 이전에는 통행 금지 시간과 회중 구역 내의 주민들이 멀리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자매들은 보조 파이오니아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래서 우리가 ‘보조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하기가 쉬워졌어요.”

물론, 사람들이 이주하여 이 보호된 마을로 들어갔기 때문에, 어떤 회중들을 조직적으로 돌보지 못하는 일이 결과적으로 생겨났다. 순회 감독자들이 도착하였을 때 그들이 방문할 예정인 회중이 과연 그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일도 가끔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서 보호된 마을들이 폐쇄되자, 형제들은 점차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서 그들이 두고 떠났던 일들을 하고자 계속 노력하였다. 이 삼년 동안 순회 감독자의 방문을 받지 못했던 어떤 회중들은, 여행하는 감독자의 방문을 다시 받게 되었다.

사태에 대처하기 위하여 조직됨

전쟁중에 다른 환경들을 대처하기 위하여, 변화가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장로들을 돕기 위하여 취해진 하나의 마련은, 지부 사무실에서 마련한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각 순회구에서 순회 감독자와 지역 감독자가 사회하는 특별 모임을 개최하는 것이었다. 이 프로그램에는 그 당시 형제들의 필요가 특히 다루어졌다. 장로들은 이 마련을 대단히 감사하였으며, 그러한 역경중에서 그들이 양치는 사업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느꼈다. 비단 장로들뿐만 아니라, 협회에 편지를 써서 장로들로부터 받은 훈련에서 매우 많은 유익을 받았음을 알려준 형제들도 여럿 있었다.

이 특별한 마련, 천국 전도 학교와 순회 대회에서의 특별한 모임을 통하여 장로들이 받게 된 정규적인 훈련이 어떠하든지간에, 그것은 전쟁의 전 기간에 형제들의 연합된 입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자를 나무에 묶어 죽게 내버려 둬”

나이든 형제인 제레마이아 체사는 이 특별한 장로들의 모임에 참석한 바로 직후에 극적인 경험을 하였다. 체사 형제는 농촌 지역에 살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 무리의 군인들이 밤중에 집에서 나를 데리고 나와 숲속으로 들어가서는, ‘당신, 토요일과 일요일에 어디 갔었어?’하고 묻는 것이었다. 종교 모임에 갔었다고 대답했다. ‘이 늙은이야, 오늘로서 너의 생명은 끝이야, 우리는 너보다 더 중요한 자들도 이미 죽였어. 불쌍한 녀석’ 그리고는 ‘죽여 버려’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군인들 중 하나가, ‘그것보다 그 자의 손발을 나무에 묶어서 제 풀에 죽게 하자’고 말했다. 밧줄을 가지고 온 후에, 그들은 ‘이제 말해 봐, 죽을 것인가 아니면 너의 하나님 숭배하기를 중지할 것인가?’하고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숭배하기를 그만 두겠다고 말을 해서 여러분들을 속이고 싶지 않소. 나는 밤낮으로 하나님을 숭배하고 있소’라고 말했다.

“이에 화가 나서 어떤 자가 소리쳤다. ‘그 자를 나무에 묶어 죽게 내버려 둬!’ 결국, 나는 나무에 묶인 채 그 밤을 샜다.”

다음날 정오쯤에, 한 사냥꾼이 우연히 지나가다가 체사 형제가 나무에 묶여 있는 것을 보았다. 자기가 본 광경에 놀래 좀 무서워하기는 하였지만, 이 사냥꾼은 형제를 풀어 줄 만한 용기가 있었다. 그래서, 체사 형제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 체사 형제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며칠 후, 군인들이 나의 집에 와서는, 내가 어떻게 나무에서 풀려 나왔는지 알고자 하였다. 그들은 나를 숲으로 데리고 가서 누가 풀어 주었는지 물었다. 내 대답은 성서 시편 146:5-7에 있다고 말했다. 그 성귀를 읽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 귀절을 다시 읽으라고 명령받은 다섯 사람은 매를 맞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정확히 읽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재미있었다. ‘누가 정말 저 늙은이를 놔 주었을까?’ ‘저자를 내버려 두고 그냥 집에 가게 하는 게 좋겠어.’ ‘이 늙은이야, 운이 좋았어.’”

이른바, 이 살인자들의 생각을 갑자기 변하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읽은 성귀의 일부는 이러하다.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여호와께서 갇힌 자[묶인 자, 신세]를 해방하시며.체사 형제는 자유의 몸이 되어 집에 돌아왔다.

“여호와는 ·⁠·⁠· 항상 당신과 함께 계신다”

이것은 증인이 아닌 어떤 부인이 충실한 자매 한 사람에게 한 말이다. 그 말을 하게 된 데에는 어떠한 사정이 있었는가? 타우젠 차완다 형제는 동부 지역의 한 다원(茶園)에서 아내와 함께 겪은 한 경험을 통해 그 대답을 이렇게 들려 준다.

“1976년 12월 23일, 일단의 군인들이 농장 내에 있는 나의 집에 왔다. 군인들 몇몇은 모든 집에 가서 사람들을 전부 모았다. 우리는 공장 지역으로 끌려가서 동그랗게 앉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내와 나만이 증인이었다.

“다음에, 그들은, 모든 여자들에게 뒤로 물러나서 남편들이 어떻게 죽임을 당하는가를 보라고 말하였다. 아내와 나는 큰 소리로 여호와께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를 하였다. 아내가 뒤로 걸어가고 있는데, 어떤 부인이 아내에게 ‘당신에게는 잘된 일이겠네. 여호와가 당신의 구주이니까. 그는 항상 당신과 함께 한다며?’라고 말했다.

“일단 여자들이 비켜나자, 군인들은 남자들에게 ‘우리는 너희들에게 일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계속했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두 군인이 남자들을 향해서 기관총을 쏘아댔다. 다음에 군인들은 급히 떠나갔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부인들은, 남편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면서도 그들에게 뛰어 들어왔다. 아내가 나를 일으키려고 하였을 때, 괜찮다고 말하였으나 처음에 아내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다른 모든 부인들은 남편들이 사살되었음을 알고는 농장의 사택으로 돌아갔다. 후에 나도 돌아갔는데, 부인들 모두가 우리 집에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내가 다가가자, 전에 여호와의 보호에 관해서 말하던 여자가 아내에게, ‘내 말이 맞죠—여호와는 당신의 남편과 함께 계셔요. 보세요, 하나님의 보호로 살아 돌아왔지 않아요!’”

역경하에서도 함께 모이다

이 모든 시련기 중에서도 지역 대회와 순회 대회를 계속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기쁜 일이다. 이 대회들의 대부분의 경우는 이 나라의 보다 안전한 지역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위험한 지역의 순회구의 형제들이 다른 순회구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대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때가 몇번 있었다. 그러나 최소한 그들은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었으며 영적으로 강건함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많은 곳에서의 회중 집회들이 더 문제였다. 이것은 주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의 이동을 제한한 야간 통행 금지 때문이었다. 주의 만찬 기념식은 저녁에 개최되어야 함으로 그것은 때때로 큰 문제가 되었다. 보통 야간 통행 금지 시간은 땅거미가 질 때부터 동이 틀 때까지였으나 일찌기 오후 4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시골의 작은 회중들에서는 기념식 때의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한 가지 좋은 마련을 행하였는데, 그것은 모든 형제들이 한 형제의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 집에서 형제들은 적절한 시각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할 수 있었다. 물론, 식이 끝난 후에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통행 금지령하에서는 그 형제의 집에서 단 1 미터도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왕국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경험담을 하기도 하며 그날 저녁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 이 가장 중요한 행사를 위하여 모이라는 예수의 명령에 복종할 수 있었음을 행복해 하면서 그들의 집으로 돌아갔다.—고린도 전 11:23, 24.

관심자들이 도움을 받다

실제로 기념식을 위한 이런 특별한 마련들은, 다른 회중 집회들과 더불어, 형제 자신들뿐 아니라 그 지역의 관심자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구타나 학대를 당할까 보아 관심자들은 터놓고 집회에 참석하기를 주저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룻밤을 지낸다는 이 생각에서 격려를 받는 듯 하였다.

13명의 증인들로 된 한 회중의 어떤 형제는 기념식에 전도인 수보다도 90명이 넘는 106명이 기념식에 참석하게 되어 얼마나 흥분하였는가를 알리는 편지를 지부 사무실에 보내왔다!

마이클 마파라라는 다른 형제는 당시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하고 있었는데, 그는 통행 금지 문제를 극복하고 관심자들까지 도와 주는 독특한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살고 있는 지역의 통행 금지는 아주 엄했다. 외출이 허락되는 때란 단지 매일 정오에서 오후 2시까지였다. 회중 형제들은 세개의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고 유일한 교통 수단은 걷는 것이었다.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

마파라 형제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집회를 개최할 수 있는 세 집을 지정하였다. 외출할 수 있는 두 시간에, 모든 형제 자매들은 세 집 중 한 집으로 간다. 그곳에서 다음날 정오까지 머물렀다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음 집회 시간에는 모두가 남아 있는 두 집 중 한 집으로 가는 식이었다. 이 일로 인하여 형제들은 집회와 교제를 위하여 많은 시간을 가지게 되었으며 영적으로 서로가 강화받게 되었다.

그 결과에 관해서 마파라 형제는 이렇게 편지하였다. “이 집단들을 방문하였을 때, 관심자들까지도 와서 집회에 참석하여 하룻밤을 머물고 있는 것을 보았읍니다. 회중에는 13명의 전도인만 있었으나, 이 통행 금지 기간에 참석자 수는 21명이나 되어—통행 금지령이 시행되기 전보다 많았읍니다.”

“광풍을 피하는 곳 ·⁠·⁠· 같을 것[이라]”

예언자 이사야는,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 내의 목자들과 감독자들로서 봉사하게 될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기를,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으로 비유하였다. (이사야 32:2) 충성스러운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전쟁의 전 기간을 통하여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음을 입증하였다.

담대하게 그들은 형제들을 위하여 온갖 어려움을 견디곤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삼림 지대를 며칠씩 걷기도 하고, 여러 개의 산을 넘기도 하였으며, 위험한 강을 건너기도 하고, 들에서 밤을 새기도 하였다. 이 모든 일은 격리된 회중들과 전도인들에게 가서 믿음 안에 굳게 머물도록 격려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실례로서, 순회 감독자인 아이제야 마코레의 경험을 말하고자 한다. 오벳 소세라는 다른 형제와 함께, 그는 이 나라의 외지에서 위험한 농촌 지역에 있는 세개의 작은 회중을 방문하기 위하여 자전거로 약 128 킬로미터를 여행하였다. 귀로에 그들은 “자유의 투사들”에게 제지당하였다. 그러면 그때의 사건을 순회 감독자를 통해서 들어 보자.

“14 킬로미터쯤 왔을 때, 갑자기 숲속에서 총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자전거를 세워 그것을 끌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우리는 곧 새 손목 시계와 돈 등을 빼앗겼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돈 중에는, 방금 방문했던 회중들이 그들의 회계를 위하여 협회에 송금하도록 내게 맡긴 돈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금품을 빼앗으면서 그들은 우리가 누구며 무엇하러 그곳에 갔었는가를 질문하였다. 이 남자들은 우리가 정부의 첩자나 고용인들이 아닌가 의심한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기 때문에 나는 여호와께 도움을 위하여 소리 내지 않고 기도를 드렸다. 특히 타협하지 않도록 간구하였다. 나중에 소세 형제도 같은 내용의 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마침내 우리가 여호와의 증인들이며 종교의 봉사자들이라는 것을 그 남자들에게 확신시킬 수가 있었다. 그들이 시계와 한 두 가지 물품은 주지 않았지만 우리에게서 뺏은 돈 전부를 되돌려 주었을 때 나는 상당히 놀랐다.

“그리고 나서 우리에게 가도 좋다고 하여 막 떠나려는 찰나에, 군용 차량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전투가 벌어졌다! 곧 총탄이 사방에서 빗발치는 가운데 우리는 땅바닥에 납작 업드렸다. 용케도 우리는 조그만 상처도 없이 이곳을 빠져 나와서 우리의 기지까지 127 킬로미터를 계속 자전거를 몰았다.”

고문을 견딤

어떤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형제 자매들과 같이, 잔인한 고문을 당하였다. 한 가지 예는 존 훙구카의 경우였다.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의 중립은 알려져 있으며 존중받고 있었다. 하지만 의 경우에는, 여호와의 증인으로서의 확고한 입장 때문에 잔인한 학대를 촉발하여 받은 것 같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다음 회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도중에 동행할 형제와 길에서 만나게 되어 있었다. 우리가 막 만났을 때 갑자기 군인들이 우리를 에워 쌌다. 그들은 적의 진영에 있는 사람들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하여 사람들을 고문하는 데 사용하는 전기 기계를 가지고 있었다.

무캄보 형제가 최초로 이런 종류의 고문을 당하였다. 무캄보 형제가 가지고 있지도 않는 정보를 빼내려고 그들은 그의 몸에 반복적으로 전기 충격을 가하였다. 이런 일이 저질러지는 동안, 나는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앉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진행되는 일을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여호와께 조용히 기도를 드리며 우리 두 사람의 믿음이 굳건히 유지되도록 도와 주실 것을 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무캄보 형제가 마침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번에는 내가 심문을 받았다. 그들은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을 알고, 군인 중 한 사람은 전기 충격을 가하기 시작하여 내가 의식을 잃을 때까지 계속 하였다. 내가 의식을 되찾자 그들은 다시 질문을 시작하였다. 나는 중립적 입장을 되풀이 말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을 언급할 때마다 그들은 더욱 격노해지는 것 같았다.

“다음에 그들은 나를 벗기고, 전기 기계를 국부에 갖다 대고 충격을 다시 가하였다. 그리고 자기들이 한 짓을 고발하기만 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한 후 나를 석방하였다. 무캄보 형제의 도움을 받아 그의 집에 갈 수가 있었다. 다음날 형제들이 무타레로 가는 버스에 태워 주어 나는 그곳에서 치료를 받았다.”

존 훙구카는 이 경험을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이 모든 박해를 받는중에도 여호와의 보호를 의심치 않았다. 오히려, 이전 어느 때보다도 여호와께 더 가깝게 이끌어 주었다.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지역에 사는 형제들을 계속 방문하기로 나는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틀림없이 그대로 하였다. 왜냐하면 바로 그 다음 주에 그는 같은 지역에 돌아가서 순회 사업을 계속하였기 때문이다.

중립 문제로 돌아가다

아프리카인 형제들이, 특히 시골 지역에서 그들의 믿음을 크게 시험받고 있는 동안, 몇몇 백인 형제들은 여전히 자신의 믿음을 법정에서 변호하고 있었다. 사실, 그때까지는 훨씬 많은 형제들이 관련되었는데, 소집 연령이 50세로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확실히 좋은 면도 있었다. 나이많은 형제들 중에는 장로들이 많이 있어서 메시야의 왕국에 대한 자신의 충성에 관하여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더 좋은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훌륭한 증거를 많이 하였다. 예를 들어, 고든 헤인은 병역 면제 위원회 앞에서, 친절하지만 확고하게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께서 저 벽에 나를 세워놓고 총살시킬 수 있지만, 그래도 나는 여호와와 그의 왕국을 위한 입장을 타협하지는 않겠오.”

병역 면제 위원회 앞에서 훌륭한 증거를 할 기회를 가졌던 다른 한 사람은 쿠스 드웻이었다. 이 형제가 자신의 성경적 입장을 아주 명백하고도 적극적으로 설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원회는 형제의 병역 면제 신청을 거절하였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드웻 형제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면제를 허가하지 않기로 결정을 한 후에 보안 요원국 국장이 그들의 결정을 개인적으로 알려 주기 위하여 나에게 왔다. 대화중에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단 한 사람도 이 나라와 싸우고 있는 사람들 중에 끼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국장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는 자기가 그 점을 알고 있다고 말하였다. ‘어떻게 알게 되었읍니까?’하고 묻고, 이렇게 부가하였다. ‘우리 주위에 있는 나라들의 여호와의 증인이, 오늘 당신 앞에서 제가 취한 것과 똑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는, 여호와의 증인을 골칫거리로 보아왔지만, 여러 해를 지나면서 그들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깨닫게 되었음을 시인하였다.”

중립적 입장이 널리 알려지다

그때 즈음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국적으로 명백해지고 있었다. 공동 지역에 사는 형제들이 이 사실을 잘 증명할 수 있다.

다음의 경험은 1978년에 일어난 일이다. “승리의 믿음” 지역 대회에 관한 발표가 있었다. 후룽그웨 지역의 형제들이 그 대회에 참석하기를 원하였다. 참석하기 위하여 그들은 버스 한대를 대절해야 하였다. 그러면 이제 데이빗 무푸후루리르와가 그 일을 말하게 하자. 그는 당시에 지역 감독자였으며, 현재는 아내 베티와 함께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하고 있다.

“‘자유의 투사들’은 이 지역에 출입하는 버스의 사용을 포함하여 특정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자유의 투사들’의 허가없이는 아무도 버스를 빌리거나, 그 지방을 떠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만일 허락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들은 있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도로에 연이어서 정부의 치안 유지군의 노상 검문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군은, 버스게릴라들의 허가를 받아야만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러한 버스들은 의심을 받고 폭탄이나 기타 흉기들을 찾아내기 위하여 수하물과 보따리를 포함해서 철저하게 조사받았다.

“이러한 환경하에서, 증인들이 버스를 빌리려고 한다는 말이 ‘자유의 투사들’의 지휘관에게 전해졌다. 그러자 지휘관은 이것이 사실인가를 알기 위하여 부하 몇을 차주에게 보냈다. 차주는, 버스를 빌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이지만 자기는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이 소식이 그 지휘관에게 보고되었다. 형제들이 들은 바로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 갔다.

“‘지휘관님, 버스를 빌리려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을 아셨읍니까?’ ‘그렇다’가 그 대답이었다. ‘그러면 그것을 왜 우리에게 진작 말씀하지 않으셨읍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을 조사하느라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들은 정치 문제에 있어서 중립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위험하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우리들 중에 있을 때보다는 그들 중에 있을 때 더 안심이 됩니다. 버스를 빌리라고 그들에게 허락하겠읍니다.’

“그후, 형제들과 이야기하면서, 버스 운전사는 ‘여러분들은 여호와의 후원을 받고 있읍니다! 다른 교회들이 버스를 빌리려고 하였지만 ‘자유의 투사들’에게서도, 치안 유지군에게서도 거절당하였답니다.’”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장애물

형제들은 치뇨이로 지역 대회를 향하여 떠났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노상 검문소에 다달았다. 이번에는 치안 유지군이었다. 모든 사람은 버스에서 내려서 각자의 수하물과 보따리를 열어 보라는 명령을 받았다. 형제들이 막 풀기 시작하였을 때, 한 군인이 형제들에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한 형제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이며 종교적인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치뇨이로 가는 중입니다.”

그 군인은 “여러분 모두가 여호와의 증인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렇습니다”라는 답이 나왔다.

“그렇다면 짐을 제자리에 도로 싣고 여러분의 대회로 계속 가시오.”

그들이 버스를 타고 있는데 두 군인들이 서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들렸다.

“이봐, 왜 버스를 그냥 가라고 하는거야?”

“그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이야. 자네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평화로운 사람들이지. 그들에게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어.”

덧붙이자면, 대회와 관련하여 치뇨이의 ‘자유의 투사들’은 형제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였다. 대회는 방해가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대로 되었다.

전쟁중의 가장 어두운 기간

그때 쯤에는 전쟁의 가장 위험한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안전한 곳이라곤 없었다. 더 많은 압력이 정부군에게 가해지면서, 도시나 농촌 할 것없이 나라의 어느 지역도 전쟁터가 될 수 있었다. 1978년 초가 되면서 폭탄이나 수류탄이 도시나 마을에서 터지고 있었다. 수도에서는 울워스사 건물 중 하나의 근방에서 폭탄이 터져 수명의 사상자들이 났다. 무타레에서는 한 여자가 자기 다리에 수류탄을 묶고 백화점 안에 들어 왔다. 그것이 폭발하여 그 여자와 다른 사람들이 죽었다.

이 때문에 엄중한 보안 조치가 시행되었다. 아무도 검색받지 않고는 상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시골의 자갈길에는 지뢰가 매설되었으며 대부분의 도로 여행은 군이 보호하는 호위단에 속하여 대낮에만 통행할 수 있었다.

회중에 영향이 미치다

이 모든 일들이 회중 활동에 크게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여러 지역의 회중들이 방해를 받았다. 순회 감독자들은, 순회구 내의 어떤 회중에는 갈 수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러한 회중들과 최선을 다해서 연락을 취하도록 하기 위하여 신뢰할 수 있는 그 지방 형제들이 임명되었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대부분이 그 지방의 낯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지방 출신의 형제들은 여행하는 감독자들보다 유리하였다.

이러한 마련에도 불구하고, 어떤 회중들은 연락이 완전 두절되어서 2, 3년간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하였다. 회중 사람들 모두가 자기의 집에서 도망하여, 그들이 안심하고 집에 돌아올 수 있게 될 때까지 산속 동굴에서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지부 사무실에 전해졌다.

물론, 그러한 상태의 영향은 협회가 받은 보고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사실, 보고하는 전도인 수는 계속 감소하여, 평균 전도인 수는 1976년의 12,127명에서 1981년에는 10,087명으로 되었다. 이 대부분은 그 당시 있었던 상황 때문이었다.

그들이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되자, 즉시 순회 감독자들은 이 “사라져 버린” 회중들과 연락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매우 격려적인 하나의 보고가 존 훙구카에게서 들어왔다. 그는 이렇게 썼다.

“전쟁 상태 때문에 이곳의 형제와 자매들은 2년간 순회 감독자의 방문을 갖지 못하였다. 그들이 어떻게 문제들을 직면했는가를 듣는 일은 격려가 된다. 위협과 폭행과 무장한 강간범들로부터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부모들은 확고한 태도를 나타냈다. 그들은 성서의 높은 도덕 표준을 수호하였다. 적어도 2년간이나 다른 여호와의 증인들과 격리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행동하고 있었다.”

이어 훙구카 형제는, 그 기간 동안에 어떤 사람들은 무활동이 되었으며, 몇몇은 중립적 입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타협하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형제들의 대다수가 그들이 헌신한 여호와와의 관계를 범하지 않고 이러한 모든 시험들을 견디어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일이다.

그들은 여호와를 의뢰하였다.

가장 위험했던 그러한 시기를 돌이켜 보면, 매우 명백한 점이 하나 있다.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자들은 ‘그들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였으며, 또한 그분께서는 인내하기 위하여 보호와 도움을 그들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잠언 3:5) 몇 가지 경험담들을 회고해 본다면 이 사실을 잘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당시, 대부분의 기간을 영어 회중들을 위한 순회 감독자로서 봉사하였던 에릭 히츠와 아내 제인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특히 전쟁의 말기에는, 대부분의 간선 도로들은 호위대의 엄호를 받아야만 여행할 수 있었으며, 대부분의 길에는 지뢰가 매설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더우기 폭력배들이 언제라도 갑자기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런데, 히츠 형제 자매는 이러한 길을 많이 여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호신용 무기를 가지고 다니라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러한 무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기로 결심하였고 오히려, 여호와를 신뢰하였다. 히츠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길을 여행할 때면, 의례히, 정신이 돌았느니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느니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보호해 주셨다. 이 당시에 우리가 방문하고 있었던 형제들이 보여준 사랑의 염려는 아주 뛰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쓸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히츠 자매는, 그들이 어떤 이유 때문에 예정일보다 하루 늦게 회중을 떠났던 경우를 말한다. 다음날 여행하다가 그들은 공격받아 시꺼멓게 타버린 호위대의 차량들을 보게 되었다. 예정대로라면 이 부부는 전날 그 호송대의 차량에 탔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와 비슷한 경험들 중의 하나에 불과해요,”라고 자매는 덧붙여 말한다.

이 충실한 부부는 후에 길르앗 학교에 갔으며 지금은 스위스에서 선교 봉사를 즐기고 있다.

스테펜 굼포여호와께 전적인 신뢰를 나타낸 또 하나의 본이다. 그는 아내 글라디스와 함께 현재 벧엘에서 봉사하고 있다. 특별 파이오니아 사업을 하던 당시, 굼포 형제는 존 훙구카처럼 전기 기계의 고문을 당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그 기계를 걸게 되면, 도저히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지 않으려고 거짓말이나 타협 등 무슨 일이라도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일 것이다. 나는 오로지 여호와의 힘으로써만, 견딜 수 있었고 그분께 충실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같은 고문을 당하여 죽은 형제들도 있다고 굼포 형제는 말했다.

부활의 희망, 인내하기 위한 도움

명백한 여호와의 기적적인 보호와 구출 때문에 어떤 죽음을 면하게 된 예들은 많이 있지만, 언제나 죽음을 피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때때로, ‘죽기까지 충실함’은 여호와께 대한 충성을 입증하는 수단이며 그리하여 부활을 통해서 “생명의 면류관”을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야고보 1:12.

매우 충실한 형제인 템베 무치이와로부터 온 편지를 읽어 보면 슬픈 일이지만 격려가 된다. 그는 부활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여호와께 신뢰를 나타냈다. 그는 전쟁 때문에 세 아들을 잃었다. 두 아들은 타고 있던 차가 공격을 받아 죽었으며 세번째 아들인 아부테는 순회 봉사를 하고 있던 젊은 형제였는데 한 회중에서 다른 회중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살해당했다. 우리가 알기에는, 이 형제는 전쟁중에 증인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유일한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무치이와 형제는 말하기를, 그의 친구와 친척들 심지어 그 지역의 추장까지도, 무치이와 형제가 조상 숭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재난이 닥쳤다고 주장하면서, 조상을 진정시키라는 압력을 많이 가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 압력을 굳게 저항했으며 부활의 희망에 대한 강한 믿음을 유지하였다. 형제들과 여호와의 조직으로부터 받은 위안이 참고 견디도록 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이 형제는 여전히 파이오니아와 장로로서 봉사하고 있다.

“주께서 ·⁠·⁠· 시험에서 건지시고”

이 말이 참으로 사실이었음이 입증되었다. (베드로 후 2:9) 제레마이아 무폰디는 이 점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다. 그는 젊은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귀가 하나밖에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였는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순회 감독자와 한 집단의 전도인들과 헤어져, [농촌에 있는] 집에 돌아오자 군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우리가 순회 감독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밀고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우리를 체포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다고 말했다.

“대화중에 그들은 ‘전쟁을 계속하자!’ ‘예수를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우리에게 외치게 하려고 하였다. 우리는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철사로 형제들의 손을 등 뒤로 돌려 묶었다. 또한 서적을 빼앗아 불태워 버렸다.

“우리와 함께 한 젊은 자매가 있었다. 그들은 그 자매에게 그가 여호와의 증인이 된 것은 강제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라고 요구하였다. 자매가 거절하자, 군인들은 정신을 잃을 때까지 자매를 구타하였다. 깨어나자, 강제로 증인이 되었음을 고백했다고 군인들이 말하는 소리를 자매는 들었다. 그는 땅에 넘어져 있는 채로, ‘거짓말이예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하고 소리쳤다. 그는 다시 구타당해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른 형제와 나는 강제로 땅에 뉘어졌다. 이 형제는 매우 맞아서 거의 시력을 잃었다. 나에 대하여 그들은 내 귀를 붙잡고 칼을 휘두르면서 구호를 복창하지 않으면 내 귀를 잘라버리겠다고 말하였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들의 위협대로 나의 귀가 떨어졌다. 그때부터 나는 부활의 희망의 힘에 크게 이끌리게 되었다.

“다음에, 박해자들은 무치니 자매에게 돌아서서, ‘전쟁을 계속하자!’와 ‘예수를 타도하자!’의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면 자매의 5개월된 아기를 조각조각으로 잘라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이 일을 직면하였을 때, 그들이 이미 행한 일을 알고 있었지만 이 충성스러은 자매는 그 구호의 복창을 거절하였다. 군인들은 감동되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 아기는 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우리는 풀려났다. 하지만, 10일 후에 다른 폭력배들이 와서, 똑같은 위협과 구타를 하였다. 우리 다섯명은 모두 계속 충실함을 지켰다.”

이 마지막 경우에서 무폰디 형제는 자신들을 그토록 학대하는 남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전파하는 일과 함께 모이는 일을 그만 두지 않을 것이요. 그것 때문에 죽게 되든지 아니든지 말이요.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죽는 것도 각오했오.” 그때 박해자들이 걸어가면서 그들 중의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들렸다.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야.”

이러한 경험을 한 후, 곧, 무폰디 형제와 그의 형은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다. 그때 이후 그와 그의 짝인 아놀드 참부루카는 특별 파이오니아 사업에서 감동적인 경험을 많이 하였다.

전쟁 후의 부흥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 1980년 초부터 그 해 4월까지 영국인 총독이 단기간 임시로 통치한 후, 이 나라는 처음으로 다수 통치가 실시되었다. 또한 그때에 이 나라는 새로운 국명을 취하였는데, 그것이 짐바브웨이다.

이제 나라 전반에 걸쳐서, 또한 여호와의 백성 가운데에서도 부흥의 기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신 정부가 세운 부흥 계획은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문제들로 가득차 있지만, 여호와의 백성들은 내내 꾸준히 발전해 왔다. 참으로 그것은, 제 1세기의 그리스도인 회중 성원들에게 있었던 상태를 생각나게 한다. 고난과 박해의 기간이 상당히 계속된 후의 일에 대해서 사도 행전 9:31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하여 온 유대갈릴리사마리아 [회중이]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여호와]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신세 참조.

이 나라에서도 그렇게 된 것 같다. 정부의 사면령에 의하여 수감되어 있던 형제들이 석방되어 자신들의 일상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보호를 위하여 전쟁중에 가족들을 도시나 마을에 보냈던 형제들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재연합하게 되었다. 한때 혼란 상태에 있었던 회중들은 이제 다시 안정을 찾게 되었다. 참으로 평화로운 분위기하에서 왕국 증거 사업은 상향 추세를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2년 후에는 다음과 같은 좋은 증가가 있었다.

평균 평균 기념식

전도인수 파이오니아수 참석자수

1981 10,078 560 28,103

1983 11,552 750 33,914

이 수치에서 알 수 있듯이, 형제들이 훌륭하고 건전한 신권적 활동을 시작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실, 개개인 전도인의 평균은 건전한 증가를 보였으며, 형제 자매들은 개인적으로 1981년 이전보다도 훨씬 더 많이 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왕국 소식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다

전후 잠간 동안, 사람들은 왕국 소식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전쟁중에 많은 약속들이 만들어져서 이제는 사람들이 그 약속들이 실현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실제로는 실현되지 않았다.

전쟁의 여파는 곧 명백해졌는데, 전쟁 전에는 이 나라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범죄와 폭력이 증가하였다. 필수품도 부족하여 처음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유괴뿐 아니라 반대 활동 때문에, 어떤 지역에서는 외출하기가 위험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스스로의 문제를 다루는 인간의 능력에 대하여 심각한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전쟁중에 여호와의 증인이 취한 입장, 즉 인간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구제책으로 하나님의 메시야의 왕국을 위하여 굳건함을 유지한 그들의 입장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사람은 협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저는 전쟁중에 여러분이 취한 입장 때문에 여러분에게 대단히 반대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분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달았읍니다.”

사실, 지부 사무실은 전쟁이 끝난 후에 받아온 것처럼, 여호와의 증인의 도움을 요청하는 그토록 많은 편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예를 들어 한 관심자로부터 이렇게 쓰여진 편지를 받았다. “친구로부터 한권의 책을 받을 때까지, 나는 음주와 흡연을 습관적으로 하고 정치에 관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좋은 소식을 읽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늘 속박되어 있는 것처럼 느꼈었는데, 지금은 해방된 기분입니다. 여러분과 성서를 공부할 수 있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성서를 한권 보내 주시고 여호와의 증인과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시겠읍니까?”

모든 회중의 형제들도 비슷한 경험들을 하고 있다. 34년간 전 시간 봉사를 하는 순회 감독자 랍슨 다니엘은 그 상태를 편지하였다. 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어떤 지역에서는 매 월말에 사람들이 잡지를 받으러, 형제들의 집을 찾아오고 있다. 한 파이오니아 자매는 잡지 봉사를 나가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와서 봉사를 나가기도 전에 자기의 모든 잡지를 전하였다.

어떤 학교 교장은 최근에 협회에 편지를 써서 자기가 종교 교육의 기본 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아무 책이나 소책자 45권을 요청하였다. 지부 사무실은 다른 학교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나는 니앙가니 중학교의 교직원과 학생을 대표하여 이 편지를 쓰고 있읍니다. 1981년에 설립된 저의 학교는 발전하는 학교로서, 도서관을 세우기 위하여 지난 수개월 동안 일하고 있읍니다. 당연히 우리는 종교 교육을 교육의 필수적인 면으로 생각합니다. 최근에 귀 협회의 출판물을 몇권 기증받은 바 있는데, 우리는 그 책들이 우리의 필요에 훌륭히 부합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제 더 많은 정보를 원합니다. 예를 들면, 「깨어라!」지는 읽기가 쉽고 광범위한 기사들을 싣고 있읍니다.

“현재의 가격이 적힌 어떤 소책자라도 있으면, 장래에 우리에게 틀림없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문제들은 아직도 있다

물론, 환경이 변화되었다고 하여 하나님의 종들이 이제는 문제가 없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 사람들이 직면해 있던 상태들이 여호와의 증인에게도 닥쳤다. 반정부 활동으로 위험한 지역들과 범죄와 폭탄 소동은 여전히 싸워야 할 것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더하여, 형제들은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가외의 문제들에 계속 대처해야 하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증인들을 억지로 정치에 관련시키기 위하여 지방의 정치 조직들이 노력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 정치에 관련되지 않는 일을 시종일관 거절하였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또한 지방 당국자들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증거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들을 많이 가져오기도 하였다.

순회 감독자인 벤 마푸랑가타우센 브라운이라는 한 형제에 관하여 말한다. 브라운 형제는 정당에 가입하는 일을 거절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도록 400명 이상의 군중 앞에 끌려 나왔었다. 그러나 먼저 브라운 형제는 정치적 구호를 복창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나님의 왕국과 그리스도인 중립을 변호하여 놀라운 증거를 하였다.

설명을 마치자, 의장은 참석한 여호와의 증인 모두에게 일어서도록 요청하였다. 그들이 일어나자, 그는 “여러분도 당원증을 받지 않는 데 동의합니까?”라고 물었다. “네!”하고 그들 모두는 열정적으로 대답했다. 이에 부가하여, “우리도 하나님의 봉사자들이기 때문에 동의합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증인들을 때려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의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을 때리면 안 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죄가 없읍니다. 그들을 집으로 돌려 보냅시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입장을 설명했읍니다.”

증인들에 대한 정부의 태도

전국 각지에서 지방 정치 단체들, 특히 청년 운동은 형제들의 중립을 강제로 타협시키려고 하였으나, 이 문제에 관한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대단히 격려적이었다. 일반적인 정부의 정책은, 여호와의 백성들이 방해받지 않고 왕국 사업을 계속하게 하는 것이었다.

1983년 초, 어떤 마을에서 정치 집회가 열려, 정부 각료 중의 한 사람이 참석했다. 그의 연설이 끝날 즈음에 공개 질의가 행해졌다. 그 중 하나의 질문은, 여호와의 증인이 정치 활동을 지지하기를 거절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 각료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자유 투쟁을 하는 동안에 여호와의 증인은 우리에게 대항하여 싸웠읍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지금 우리에게 대항하여 싸우고 있읍니까?”

다시,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내버려 두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있었고 비슷한 대답이 있었다.

“그들을 석방하여 전도 사업을 계속하게 하라”

지역 감독자 칼렙 만디완자가 보낸 최근의 경험담은, 왕국 사업에 대하여 정부 당국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견해에 대한 통찰력을 더해 준다. 그는 농촌 지역에 사는 두명의 형제에 관하여 말했다. 이 두 형제는 당원증 받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도록 지방의 정당의 간부 앞에 호출되었다. 그들의 설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그 당의 간부는 두 형제를 대도시에 있는 당의 본부에 이송하기로 결정하였다. 형제들은 거기에서 자신의 입장에 대한 성경적 이유를 설명할 또 하나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다시 한번 두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관하여 혼란이 생겼다. 그래서 그 두명의 형제는 경찰 본부로 보내어졌다. 경찰은, 하라레에 있는 정부 본청에 전화해 보기로 하고 그렇게 하였다. 대답은 무엇이었는가? “정부는 그 조직을 알고 있다. 그들을 석방하라. 다시는 그들을 데려오지 말라. 두 사람을 석방하고 전도 사업을 계속하게 하라.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여러분의 [정치] 집회에도 부르지 말라.”

“복음의 진보”가 되다

빌립보 회중에게 편지를 하면서,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하였다. (빌립보 1:12) 이것은 우리 시대에도 사실이다. 방금 말한 그 경험담은 두 형제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아주 훌륭한 증거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 여자는 자신의 종교에서 정식으로 탈퇴하고 여호와의 증인과의 성서 연구를 청하였다. 또 하나의 경험담은 바울의 말을 더욱 증명해 준다.

특별 파이오니아케니아스 체메레는, 교사와 교장 및 다른 사람들과의 연구를 여러 건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여섯 명은 자기들이 진리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지방의 당원직을 사임하였다. 이 때문에 대소동이 일어났다. 그 지방 의원이 그 문제를 다루고 자기 관할 구역에 있는 모든 여호와의 증인은 수주일 내에 떠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지부 사무실의 제안에 따라서, 그 특별 파이오니아와 순회 감독자 스테인 마다크체콰는 지역 행정관에게 그 문제를 가지고 갔다. 그곳에서 경찰이 그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그 결과, 그 지역에서 증인들을 떠나라고 명령한 지방 의원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을 그냥 두라는 경고가 주어졌다. 지방의 정당 위원장도 같은 경고를 받았다. 그 위원장은 체메레 형제에게 “당신들의 문제는 끝났오. 우리는 엄중한 경고를 받았오”라고 말했다.

그 결과는? 분명히 “복음의 진보”였다. 새로운 성서 연구들이 시작되었다. 진리에 이미 관심을 나타낸 사람들은 감동되어 확고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침례를 준비하기까지 하였다. 그 특별 파이오니아는 다른 임명지로 이동할 예정이었으나, 왕국 소식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증가하였기 때문에 순회 감독자는 그 형제가 계속 그 지방에 남아서 일하는 일이 허락되도록 강력히 요청하였다.

최근에 흡사한 경험을 한 다른 두명의 젊은 특별 파이오니아들도 그들의 지역에서 일어난 결과에 관하여 편지를 보내왔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회중의 모든 성원이 중립적 입장을 취하였을 때, 매우 반대한 어떤 남자는, 현재 우리와 성서 연구를 하고 있다. 그는 잘 발전하고 있다. 25년간 담배를 피웠지만 일주일 내에 끊었다. 자신이 다니는 종교가 큰 바벨론의 일부라는 것을 배우자, 그 종교와의 관계를 중단하였다.”

우리 앞에 열린 ‘활동으로 인도하는 큰 문’을 알려 주는 비슷한 경험을 많이 말할 수 있다. (고린도 전 16:9, 신세 참조) 그처럼 결실이 많은 밭을 주신 데 대하여 우리는 여호와께 감사한다. 그러나 바울도 말한 것처럼 “대적하는 자가 많[다.]” 이것은 기대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형제들이 위협당하지 않는 조치를 정부가 취하고 있기 때문에, 상황은 전보다 훨씬 안정되어 있으며 우리는 훨씬 자유롭게 일을 즐기고 있다.

훌륭한 사업을 위한 열심

왕국의 권익을 더욱 확장하기 위하여, 형제들은 현재의 환경을 재빨리 이용하였다. 「나의 성서 이야기 책」이라는 출판물은 학생과 교사들 간에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교사인 세바 마와수 형제는 이렇게 말한다. “교장은 「성서 이야기 책」이 성경 교육의 교수 예정표에 매우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자기 수업에서 지금 이 책을 사용하고 있어서 기쁘다.”

마와수 형제는 이 상황을 이용해서, 「읽고 쓰기 교본」이라는 출판물을 2학년 학생들을 위하여, 「청소년기—보람있게 사용해야 할 시기」라는 출판물은 그 상급 학년들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마련하였다.

매우 진취적인 또 다른 젊은 형제는 학교에서의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이 형제는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정치적인 노래를 부르거나 기도에 참여하기를 거절하였다. 또한 어떤 형태의 오락에 참여하기를 거절하였다.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일이 발생하였다.

“교장 선생님은, 내가 노래와 기도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듣고, 교장 사무실로 나를 불렀다. 참여하지 않는 이유를 질문받고, 그 이유를 이야기했다. 다음에 나는 선생님에게 우리의 노래를 들어보시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교장 선생은 동의하였다. 이윽고 여호와의 증인의 자녀들과 다른 학생들, 그 선생까지도 “청년의 때에 여호와를 숭배하라!”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 젊은 형제인 제라시 느야쿠리타는 재학중에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고, 현재는 정규 파이오니아이다

관심을 고무하다

이 모든 활동은, 「파수대」와 「깨어라!」 및 다른 출판물의 기사와 더불어 왕국 소식에 대한 관심을 대단히 고무하였다. 감사의 편지들이 지부 사무실에 끊임없이 들어온다. 예를 들어, 이것은 어떤 고등학생이 보내온 편지의 인용문이다.

“여러분의 친절에 대하여 대단히 감사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친히 저를 축복하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저를 돕도록 충성스럽고 사랑이 많은 전도인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장 가치있는 생활의 선택」과 같은 유용한 책들의 인쇄를 포함하여,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 일을 계속하시기를 격려하고 싶군요. 여러분의 책 가운데에서는 비판할 수 있는 점이란 아무 것도 없었읍니다.”

심지어, 어떤 관심자들은 현재 증인들이 없는 지역에서 출판물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과 연구하고 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은 「파수대」 예약의 네건에 해당하는 돈을 보내오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편지에 썼다. “우리는 외딴 시골에 살고 있는데, 여기에서 느하리레[쇼나어의 「파수대」]를 읽기 시작했읍니다.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보내 주시도록 곧 요청하겠읍니다. 약 일곱 가족, 대략 12명이 있읍니다.”

지방 당국자들까지도 지금은 증인들을 환영하고 있다. 최근에, 어떤 특별 파이오니아는 격지에 임명되었다. 그 지역에 토지가 있는 치남호라 형제가 지방 당국자를 만나러 가서 그곳에 특별 파이오니아가 있게 되는 것에 관하여 말했다. 지방의 정당의 마을 위원장은 치남호라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좋은 소식이군요. 그를 우리에게 데려 오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집집으로 전도하는 사람을 한 사람 갖게 되었으며 당원들에게 그를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놓겠읍니다.”

그 지방의 부추장은 이렇게 말했다. “좋은 일입니다. 우리 마을은 사랑이 가득찬 고장이 되고, 이 지역은 범죄가 줄어들겁니다.” 독자가 특별 파이오니아라면 그런 곳에 임명받고 싶지 않겠는가?

현재의 문제인 가뭄

지난 3년 동안에 다른 종류의 문제가 일어났다. 남반구의 다른 여러 나라들처럼, 짐바브웨도 가뭄 상태로 심한 타격을 받아 왔다. 사실, 사상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어떤 곳에서는 가축들이 파리처럼 죽어가고 있다. 야생동물들은 단지 수분을 얻기 위하여 나무 껍질을 벗겨 먹고 있다. 물론, 이 가뭄은 형제들을 위시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염려하는 형제 자매들로부터, 자신들보다 불우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필요를 위하여 원조가 즉시 왔다. 이 문제가 지금 해결되고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순회구를 통해서이다. 지역 감독자는 순회 대회에서 장로들과 그 문제를 논의한다. 다음에, 장로들이 기증된 원조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으로 전달하는 책임을 맡는다. 이 마련은, 의류와 식량 등의 구호 물자가 나쁜 우체국원에 의해 도난당하는 일을 예방한다. 받은 원조에 대한 감사의 편지들이 지부 사무실로 답지하고 있다.

이 보고를 끝맺게 됨에 따라서, 큰 기쁨으로 이를 결론 짓고자 한다. 지난 24년간 이 나라에서는 13,493명이라는 지금까지의 전도인 최고 수를 넘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84년 4월에 13,621명의 새로운 기록에 달하였다. 이에 더하여 정규 파이오니아 및 보조 파이오니아의 이전의 최고 수는 1,191명이었으나 4월의 이 수자는 2,114명으로써, 이전 최고 수보다 거의 두배가 되었다. 1984년의 기념식 참석자 수는 38,000명 이상이었다. 이것은 전도인 수의 3배이며 1983년의 최고 참석자 수인 33,914명보다 약 4,000명이 더 많은 수였다! 확실히 여호와께서는 증가를 주고 계시다!

여호와는 우리를 도우시는 분

“과거가 좋았지”라는 말은 전진 지향적인 여호와의 백성의 단어에는 필요가 없다. 과거에 연연하기에는 우리 앞에 너무나 많은 일이 놓여 있다. 하지만, 과거를 돌이켜 보면 대단히 많은 유익을 얻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다윗시편 34:19에서 표현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반드시 이르게 된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짐바브웨에서 이 말씀은 참으로 진실하였다!

이 나라에서 왕국 사업이 걸음마를 막 시작하였을 초창기를 돌이켜 보면, 네이슨 무카론다, 로빈 마뇨치, 윌슨 스티마, 윌리 맥그리거, 맥러키 부부, 그외의 견실하고 튼튼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 모두는 나이가 많지만 여전히 열심이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온갖 시련을 통하여 지탱해 주셔서 현재의 영적 번영의 상태로 그들을 이끌어 오신 그 방법을 보게 되어 그들은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이곳의 사업에 대하여 대단히 좋은 태도를 보여준 정부 당국에 우리는 감사한다. 우리는 그들에 관하여 기도한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디모데 전 2:2) 그러나, 동시에 여호와께서 바로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그들에게 사랑에 찬 관심을 베푸시는 분이시므로, 그분이 자신이 만드시는 의로운 새질서로의 최종적인 구출로 인도해 주실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무슨 일이 발생하든지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 되어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호와를 피난처로 삼기 때문이다.—시편 37:39, 40.

[154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짐바브웨

치뇨이

빅토리아 폭포

하라레

항게

무타레

불러와요

잠비아

보츠와나

모잠비크

우롱구에

테테

밀랑게

모쿠바

베이라

말라위

믈랑제 산

블랜타이르

인도양

[99면 삽화]

1924년에 해밀튼 K. 마세코(왼쪽)는 불라와요에서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네이슨 무카론다는 이 나라에서 최초로 침례받은 사람이 되었다. (1924년)

[102면 삽화]

윌슨 스티마(76세)와 로빈 마뇨치(85세)는 1920년대에 진리를 배웠다. 두 사람 모두 특별 파이오니아이다

[104면 삽화]

짐바브웨와 말라위에서의 초창기 전파 사업에서 탁월하게 일한 맥러키 가족의 일부

[107면 삽화]

윌리 맥그리거는 1929년에 짐바브웨로 가서 불라와요 지역에서의 왕국 사업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11면 삽화]

에릭 쿠크(아내 머어틀과 함께 보임)는 짐바브웨의 최초의 지부 감독자가 되었다

[113면 삽화]

1955년, 헨첼 형제의 방문중에 열린 짐바브웨의 대회

[114면 삽화]

1955년 대회에서의 침례

[125면 삽화]

존 마일스(부인 밸과 함께 사진에 있다)는 1960년부터 1979년까지의 기간에 지역 봉사를 하면서 또한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였다. 1979년에 이들은 선교인으로서 레소토에서 봉사하는 임명을 받았다

[127면 삽화]

현재 짐바브웨에서 봉사하고 있는 길르앗 졸업생들. 이름은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기입되었다. 뒷줄: 조지 브래들리, 아이린 맥브라인, 레스터 데이비, 케이드 이튼, 돈 모리슨; 앞줄: 루비 브래들리, 존 맥브라인, 앤 이튼, 마지 모리슨

[129면 삽화]

길르앗 졸업생인 시주루 쿠말로는 순회 감독자와 지역 감독자로서 아프리카 형제들을 크게 도왔다

[133면 삽화]

할 벤틀리와 아내 조이스는 말라위에서 봉사한 후, 짐바브웨에 임명되었다

[145면 삽화]

1973년에 완공된 짐바브웨 사무실

[173면 삽화]

나무에 묶여져 죽게 내버려졌던 제레마이아 체사

[179면 삽화]

여행하는 감독자들, 존 훙구카(전기 고문을 당하였음)와 마이클 치카라

[187면 삽화]

제레마이아 무폰디는 “예수를 타도하자”와 같은 구호를 외치지 않자, 그의 귀가 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