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
스위스라는 단어를 들을 때,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산이나 시계 또는 치즈나 맛있는 초콜렛 바가 생각나는가?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런 것보다 훨씬 더 귀중한 것이
스위스에 있다. 하지만 우선 이 나라 자체에 관해 알아 보기로 하자.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서 공개적인 봉사를 수행하시기 전 세기, 헬베티아인으로 불린 켈트인들은 그들이 있던 중앙 유럽보다 기후가 온화한 남쪽 지대로 진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줄리어스 시저 휘하의 로마 군대가 그들의 진출을 막았다. 기원전 58년, 대규모의 혈전 끝에 살아 남은 헬베티아인은 부득이 발길을 돌려 라인강과 레만호 사이에 있는 저지대에 정착하게 되었다. 수세기가 흐르면서 이곳에 ‘헬베티아 연방’ 또는 단순히 헬베티아라고 불리게 된 연방국이 결성되었다. 의심할 바 없이, 이 나라가 바로 현대의 이름, 스위스로 알려진 나라이다.
스위스는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한 작은—국토 면적은 단지 41,293 평방 킬로미터—나라이다. 북쪽에는 독일, 서쪽에는 프랑스, 남쪽에는 이탈리아가 있으며, 오스트리아와 리히텐슈타인은 동쪽에 위치해 있다. 국토는 자그마하지만 그러한 지역에서 그처럼 볼만한 것이 많은 나라도 드물다. 봉우리마다 눈이 덮여 있는 높은 산은 풍경화의 한 부분 같다. 남부 지방의 소나무 가로수 길도 볼 만하다. 약 650만명에 달하는 주민은 저마다 네 가지 문화와 언어 집단, 즉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및 로만시어 중 하나에 속해 있다. 로만시어 사용자는 대개가 독일어나 이탈리아어도 안다. 그 외에도 직업상으로나 또는 체재중인 외국인도 많이 있으며 이들도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종교 실태
스위스 주민 대다수는 프로테스탄트 또는 로마 가톨릭에 속해 있다. 오늘날에는 이 두 종파의 종교인이 도시 내에 서로 이웃하여 살고 있지만 아직도 각 종교의 우세 지역이 있다. 예로써, 역사적으로 제네바와 취리히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자인 칼빈과 츠빙글리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베른, 바젤, 로잔도 프로테스탄트가 우세한 반면 장크트갈렌, 루체른, 루가노는 주로 가톨릭이 우세하며, 고도 프리부르에는 가톨릭 대학교와 여러 신학교가 있기 때문에 로마 교회의 요새라 할 수 있다.
켄턴(주 또는 군에 해당됨)을 표시하는 경계선도 종교의 우세 지역으로 나누어진 경우가 흔하다. 왜냐하면 어떤 켄턴의 주민은 대개가 가톨릭 교인이든지, 아니면 프로테스탄트 교인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스위스 중부라든가, 밸레이나 티치노에 관해 말하면 스위스인은 가톨릭을 떠올린다. 그러나 베른, 뇌샤텔, 또는 취리히—몇 가지만 열거해 보면—켄턴 출신의 스위스인은 대개가 프로테스탄트 교인이다.
물론 ‘그리스도 가톨릭’이라든가, 유대교, 감리교, 그외 기타 종교도 많이 있다. 그리고 사실상 수십가지 종교가 어우러져 있는 마을도 있다.
이처럼 종교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왕국’ 소식을 환영할 것인가? 살펴보도록 하자.
성서 진리가 스위스에 이르다
1891년에 ‘워치 타워 협회’의 초대 회장, 찰스 T. 러셀은 유럽과 중동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였다. 그가 들른 곳
중에는 스위스의 베른도 있었다. 러셀은 자신의 여행 목적을 설명하면서, “고대 유적과 성채 따위에는 관심이 별로 없”지만 “사람들을 만나 보고 그들의 생활 양식과 사고 방식 및 경향을 판별하기” 원한다고 말했다. 그 후 「시온의 파수대」 1891년 11월호(영문)에 게재된 보고에서, 그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스위스에서도 “무르익어 추수되기를 기다리는” 밭을 발견했다고 언급하였다.이 때문에 아돌프 베버에게 스위스에 있는 “주의 포도원으로” 가도록 제안했다. 베버 형제는 미국에서 진리를 알고 러셀 형제 집에서 시간제 정원사로서 일을 한 스위스 시민이었다. 베버 형제는 주저하지 않고 그 사명을 받아들였다. 그가 이 일에 적임자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스위스의 공용어 중 2개어를 구사하기 때문이었다. 1900년 1월, 베버 형제는 쥐라 산맥의 자기 출생지, 레콩베르스에 정착하였다.
베버 형제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정원사겸 삼림 감독원 일을 했지만, 주된 관심사는 진리의 씨를 뿌리는 일이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씨를 뿌리기 시작하여, 다른 마을과 도시로 걸어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이야기하여 구역을 넓혀 갔다. 겨울에는 걸어서 프랑스와 남쪽 이탈리아 부근에 이르기까지 전파하고 나서 이듬해 봄에 레콩베르스로 돌아오곤 했다. 배낭에는 여행에 꼭 필요한 물건을 제외하고는 짊어질 수 있을 만큼의 서적을 최대한 담았다.
어느 날, 베버 형제는 베른주 하그넥 운하의 다리를 건너가다가 증거할 만한 남자를 만났다. 그런데 배낭을
내려 놓다가 책 한권이 빠져 나와 그 운하의 수문 가장자리에 있는 쇠그물 바로 앞 얕은 물에 빠지고 말았다. 얼마 후, 그 수문 관리인이 쇠그물을 청소하러 왔다가 그 책을 발견하고 건져내어 말린 뒤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은 러셀 형제의 「성경 연구」 제 1권이었다. 수문 관리인과 그의 아내는 알게 된 내용에 놀랐으며 진리를 발견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광고가 관심을 일으키다
베버 형제는 시작한 일을 이루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직접 증거하는 일 외에도 여러 신문에다 「성경 연구」 책을 광고하였는데, 이런 식의 광고는 대체로 비용이 적잖이 들었다. 또한 일부 서점에다가도 「성경 연구」를 진열하도록 마련했다. 얼마 안 있어 여러 지방으로부터 사람들이 그 책을 주문했다.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 연락하여 함께 모임을 갖고 그 책을 연구하도록 제안받았다. 그 당시에는 오락 종류가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에, 친지나 친구를 그 모임에 초대하면 그들은 기꺼이 참석하였다. 또한 그 연구를 사회할 사람을 자기들 중에서 마련하는 일이 일반적이었으며, 흔히 교대로 사회하였다.
초창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전도지였다. 얼마 되지 않는 헌신한 형제들은 용기를 한껏 발휘하여 교회 앞에서 전도지를 배포하거나, 수천부를 스위스의 독일어 사용 지역의 가정들로 우송하기도 하였다. 미국에 있는 형제도 「시온의 파수대」 독일어판을 스위스의 친구나 친척에게 우송해 줌으로 이곳에서의 사업이 시작되는 전도 11:1.
데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하여 후에 진리를 받아들이게 된 사람도 있다.—회장이 문에
베버 형제를 통해 진리를 알게 된 최초의 사람들 중에는 바젤에 사는 안나 바히만 부인이 있다. 이 부인은 ‘복음주의 개혁 교회’에 정기적으로 나가고 있었지만, 베버 형제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성서의 기본 진리를 이야기해 주자, 성서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이란 책을 받고 스스로 연구하였다. 그곳에는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일년 후, 베버 형제가 다시 와서 부인의 질문에 차분히 대답해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연구하도록 격려해 주었다.
그 후 1903년 5월, 이 부인은 문 앞에 두 방문객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한 사람은 근처의 뮐하우젠(당시는
독일의 도시였으나 현재는 프랑스에 속해 있음)에서 온 ‘성경 연구생’이었고, 다른 사람은 ‘워치 타워 협회’ 회장인 러셀 형제였다. ‘성경 연구생’의 통역으로 진행된 그 대화는 바히만 부인이 발전하는 데 매우 격려가 되었고 도움이 되었다. 때가 되어 바히만 부인은 여호와께 헌신한 종이 되었고 남편과, 후에는 아들 프리츠도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 밖에 몇몇 사람들도 관심을 나타내어서 1909년 이래로 바젤에는 하나의 연구 집단이 조직되었다. 현재 고령의 프리츠 바히만은 여전히 이 바젤 회중의 성원이다.프랑스어판 출판물의 필요
1897년 이래, 「시온의 파수대」 독일어판은 미국에서 발행되고 있었다. 1903년에는 프랑스어로도 이 잡지가 나오기 시작하자 기뻐한 베버 형제는 성서 이해를 촉진시키기 위해 프랑스어판 「성경 연구」도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수 그 책을 번역하였다. 그는 다른 출판물도 번역하였으며, 1903년에는 서적 저장소가 하나 딸린 ‘협회’의 작은 사무실이 이베르동에 설립되었다.
이 당시 스위스에는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집회라든가 심지어 대회조차 가정에서 개최되었다. 하지만 전망은 밝았고 형제들은 열심이었다. 아돌프 베버는 프랑스 밭에서 사업을 돌보도록 임명되었다. 스위스의 독일어 사용 지역을 위해 출판물과 자료를 위한 작은 사무실이 취리히에 개설되었으며, 독일 바르멘엘베르펠트 지부 사무실의 감독을 받았다.
러셀 형제의 고무적인 방문
이 사업의 초창기에 중대한 역할을 한 것은 “총회”였다. 1910년에 취리히에서 개최된 이 대회에 100명 가량이 참석하였다. 해마다 참석수는 증가하였다. 러셀 형제는 대회 때마다 자주 와주었다.
러셀 형제를 회고해 보면, 누구나 그의 적극적인 정신에 감명받게 된다. 20세기 초엽의 여행이란 지금처럼 안락하거나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러셀 형제는 거의 해마다 유럽에 있는 형제들을 강화시키고 그 사업을 격려하고자 대서양을 건너는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실로 분주했다!
1912년에 러셀은 제네바, 바젤, 취리히, 장크트갈렌을 방문하였다. “무덤의 저쪽”이란 제목의 공개 강연은, 교직자의 행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그림과 더불어 “화 있을찐저 ···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갔느니라]”는 문구의, 커다란 벽보로 광고되었다. (누가 11:52) 그 제목은 실로 눈을 휘둥그렇게 하였고 선풍을 일으켰다. 도시 전역에서 사람들은 지옥의 고초가 없다는 점과 죽은 자가 무의식이며 다시 살아날 희망이 있다는 근거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곤 하였다. (전도 9:10; 사도 2:22-31; 24:15) 그 소식은 요원의 불길처럼 퍼졌다. 빌은 강연장이 좁게만 보였다. 종종 군중은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에 되돌아 가야만 했다. 이렇게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한 진리를 선포하게 되자 전통 종교의 기둥이 뽑혀지기 시작하였다.
교직자를 당황하게 한 질문
어떤 사람은 교역자를 당황하게 하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클라라 애들러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친척으로부터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소책자를 한부 받고 그것을 흥미 진진하게 읽었다. 죽은 자의 상태와 인류의 희망에 관하여 명확한 설명을 알게 된 클라라는 교역자에게 달려가 자신의 감동을 이야기해야겠다는 충동을 받았다.
‘틀림없이 그는 이렇게 좋은 것을 한번도 읽어 보지 못했을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런! 교역자는 “알아요. 알고 말고요. ··· 하지만 그런 것을 읽지 않는 게 훨씬 나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애들러 자매는 낙심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당시 진리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지만 성서의 말씀은 교역자가 한 말보다 훨씬 더 의미있었읍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목적으로 신학을 연구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깨달았읍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사람에게 추리력을 주셨지요.” 애들러 자매는 자신의 말대로 행했고, 다른 많은 사람도 그렇게 하도록 도와 주었다.
러셀 형제가 가르치는 진리로 인해 매우 화를 낸 교직자가 많았지만, 그 중에는 성서에 대한 정확한 진리를 진척시키려는 러셀의 노력에 공감하는 교직자도 있었다. 루드비히 라인하르트가 그러한 사람이었다. 1877년에 자신이 출판한 독일어판 「신약」에는, 주목할 만하게도, 누가 복음 23:43을 이렇게 번역하였다. “예수께서 [행악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프로테스탄트교 성직자는 1908년에 한 성경 연구생에게 보낸 서신에서, “당신도 아시다시피, 나는 ‘천년기 새벽 운동’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러셀 형제와 그의 모든 동료들이 바치는 활기있고 자기 희생적인 전념에 대해 따뜻한 감사를 전합니다 ··· 나의 번역판에서 부정확한 점을 할 수 있는 한 많이 제거하고 가능한 한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판을 출판하는 데 나 자신 예리한 관심이 있는 만큼, 이 번역판에 이의가 있는 점들을 모두 지적해 준다면 당신과 러셀 형제에게 깊이 감사할 것입니다”라고 썼다.
충실한 자들을 강화시켜 준 “순례자”
“순례자”란 ‘협회’의 여행하는 대표자를 가리키는 말로서, 오늘날의 순회 감독자와 같다. 순례자의 노력에 힘입어 형제들은 연합하여 하나님의 조직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협회’는 「시온의 파수대」지에 순례자 형제의 여행 일정을 게재하였으며 그 여정에 들어 있는 회중과 보다 작은 집단은 방문에 대한 기대를 편지로 알렸다. 순례자는 탁월한 연사였으므로 공개 강연에는 항상 참석자가 많았다. 예를 들면, 1913년에 스위스의 공개 강연 청중 총수는 무려 8,000여명이었다.
독일에서 온 헤르켄델과 부콜츠 형제를 비롯하여, 다른 순례자들의 사랑스런 도움을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순례자는 각 장소에서 단지 하루나 이틀을 머물렀지만 성서 지식을 사용하여 형제들에게 영적인 통찰력을 주며 새로 관심 가진 사람에겐 반대자를 두려워하지 말도록 권면하였다. 벨러스 하우스 형제가 즐겨 다룬
주제는 연대에 관한 것이었다. 도면과 도표를 사용하여 길게 연설하곤 했는데, 당시의 봉사를 언급할 때마다 그 연설을 들었던 사람들은 아직도 그 도표를 떠올린다.1914년에 대한 기대
1876년 이래, ‘성경 연구생’은 역사의 전환점으로서의 1914년이라는 해에 주의를 기울여 왔었다. ‘이방인의 때’로 알려진 2,520년이 그때 끝나게 되어 있었다. (누가 21:24) 베르타 오브리스트 자매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을 가족에게 할 때마다 가족이 비웃던 일을 기억한다. “그 1914년에 대해선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자매의 할머니는 성난 어조로 말하곤 하였다. 하지만 1914년에 전쟁이 실제로 터지자 그 할머니는 참으로 놀라며 감명을 받았다.
샤프하우젠에 사는 어린 훌다의 부모는 아는 사람을 통해 성서로부터 여러 차례 설명을 들었지만 1914년에 세계적으로 큰 이변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참으로 믿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훌다 페테르 자매는 전쟁이 실제로 터지자 어머니가 참으로 당황했었다고 회상한다. 이제 훌다의 어머니는 의문으로 가득차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성서를 갖기 원했다. 진리가 눈앞에 드러나자 온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고 이전에 다니던 교회를 중단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하였다.
다른 사람도 1914년부터 세계 무대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의미에 대해 강한 관심을 보이도록 도움을 받았다. 이러한 목적으로 여호와께서는 훌륭한 도구를 마련해 주셨다. 그것은 환등 및 영화로 구성된 일련의 네 가지 연설이었다.
창조 사진극
「창조 사진극」 상영은 대성공이었다. 이것이 베른에서 최초로 상영될 때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인해 스위스 군대 총동원령이 내린 지 불과 몇주 후였지만 2주일 남짓 상영되는 동안 총 참석수는 12,000명이 넘었다. 그 후에도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 인식 깊은 많은 사람에게 더 상영되었다.
더 많은 내용을 알고자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낸 3,000명 중의 한 사람인 하인리히 호이베르거는 자펜빌이란 마을에서 이 사진극을 보았었다. 나흘간의 저녁마다 계속된 이 연설 프로그램을 그는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주 감동적이었읍니다. 나는 더 알고 싶었기 때문에 그러한 취지를 카드에 적어 그날 저녁에 우편으로 보냈읍니다. 얼마 안 있어, ‘성경 연구생’의 전도지를 한부 받았읍니다. 그 후 언제인가 공개 강연 초대를 받고, 그곳에 가서 「성경 연구」 제 1권을 얻게 되었읍니다.” 그의 고용주이자 매부는 프로테스탄트 교직자였는데, 그 책을 승인하지 않음을 언명하였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예리한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한가한 시간만 있으면 숲에 가서 마음놓고 그 책을 읽었다.
1915년, 브루그라는 작은 도시의 “춤 로텐 하우스” 여관에서 「사진극」이 상영될 예정이었다. 상영 예정 시간보다 훨씬 전에 강연장이 꽉 메워지자, 경찰은 문을 닫고 나중에 오는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하지만 이 「사진극」을 꼭 보아야겠다고 결심한 몇몇의 대담한 청년들은, 그 건물의
다른 쪽에 사다리를 대놓고 일층의 열려진 창문을 입구로 하여 들어갔다.프랑스어 사용 구역에서의 발전
1914년 이전의 기간에 스위스 내의 독일어 사용 구역에서의 사업은 좋은 증가를 이룩했지만 프랑스어 사용 구역에서의 사업은 기대에 못미쳤다. 그래서 공개 강연과 「창조 사진극」의 상영을 이용하여 이 구역에 특별한 주의가 기울여졌다. 이 일은 모두 훌륭한 열매를 맺었다.
1912년, 이베르동에서 운영되던 서적 저장소가 제네바로 옮겨지면서 하나의 지부 사무실로서 개설되었다. 이제 이곳에서 스위스 내의 프랑스어 사용 구역만 아니라 유럽 전역의 프랑스어 사용 구역을 감독하게 되었다. 그 후 이 사무실은 같은 거리의 다른 장소로 다시 옮겼다. 당시 이 지부는 23개 회중을 돌보았고 1916년 ‘기념식’에는 스위스 내 프랑스어 사용 구역에서 총 256명,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108명이 참석하였다. 「사진극」 상영의 경우, 1917년의 총 참석자 수는 56,550명이었다.
충실성의 시험이 연단을 가져오다
1918년에 충실성과 연단의 시험이 닥쳐 불순물은 제거되고 여호와의 길을 진실로 사랑하는 자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말라기 3:1-3) 전쟁으로 인해 제한 조치가 취해졌다. 특히, 연료에 있어서 그러하였다. 이 결과, 일부 집회가 취소되었다. 그 외에도 미국, 브루클린에 있는 ‘협회’ 본부에서 발생한 사태는 이곳 스위스의 형제들의 활동에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 어떤 사람은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 사업이 끝날 때가 다 되었으며, 아마겟돈이 조만간 닥칠 것으로 기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책임맡은 형제로부터의 격려도 별로 없었다. 이것이 1918년 11월 11일 전쟁이 끝났을 당시의 상황이었다.
더욱 심각한 어려움은, 제네바 사무실 책임자인, L. A. 프레이타가 일으킨 것이었다. 그는 영어판 「파수대」와 「성경 연구」를 프랑스어로 번역, 발행할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직권을 남용하여 자기 견해를 게재하였다. ‘협회’ 회장인 러더퍼드 형제는 이 사실을 알고, 그를 즉각 해임시켰고, 제네바 사무실은 폐쇄되었다. 그렇지만 프레이타는 제네바의 ‘협회’ 자산을 관리하기를 원했으므로 재정 기록을 양도하지 않았다. 게다가 「파수대」(La Tour de Garde)란 제명으로 직접 잡지를 발행하려고 했다. 또한 사실을 대단히 왜곡하여 ‘협회’가 자신의 소유를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프레이타에 관하여 법적 조처를 취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프레이타는 세 가지 소송에서 모두 패소하였으며, 마침내 ‘협회’의 기물과 서적 및 「창조 사진극」 필름을 되돌려 주어야 했고, 재정 기록도 양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관계가 끊어진 후에도 프레이타는 자기 방식대로 줄곧 행했다.
회중들에게 강력한 경고와 친절한 권면이 주어졌지만, 많은 사람이 프레이타를 따랐다. 애석하게도, 1919년의 ‘기념식’에 참석한 프랑스어 집단 성원 304명 중에서 75명만이 ‘협회’에 머물렀으며, 이 중에서도 상당수가 나중에 세상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영은 충실한 자들을 시편 103편을 외우며,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는 말에 깊이 감명받았다. 이 여성은 자기가 나가는 교회 교역자의 속을 태웠다. 앨리스 베르너는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나가지 않자 소동이 일어났지요. 두 전도자가 양떼에 머물러 있으라고 종용했어요. 하지만 그런 토론을 할수록 나는 성서 진리에 온전히 근거를 두지 않은 체제로부터 내가 분리해 있어야 하는 것이 참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었읍니다.” 몇해 안 되어 베르너 자매는 전 시간을 바쳐 여호와의 봉사를 수행하게 되었다. 현재 85세인 이 자매는 여전히 즐겁고 활동적인 벧엘 봉사자(지금은 독일에서)라는 사실은 자신의 결정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음을 증명해 준다.
계속 강화시켰다. 그 나라 전역에서 관심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나왔으며 앞에 놓인 ‘왕국’ 사업의 즐거움에 가담하였다. 그 중에 앨리스 베르너가 있다. 이 젊은 여성은앨리스 베르너가 진리를 처음 알게 된 바로 그 해인 1919년 봄, 해외로부터 좋은 소식이 들려 왔다. 즉 1919년 3월 25일, 협회장 J. F. 러더퍼드를 포함하여 브루클린 본부의 형제들이 부당한 투옥으로부터 석방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곧이어 여호와의 백성은 「파수대」 지면을 통해 아직도 수행되어야 할 위대한 사업을 인식하도록 필요한 교훈을 받았다. 증거 사업이 끝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례없이 박차를 가해야 하였다!
‘중앙 유럽 사무소’가 설립되다
이듬해에 러더퍼드 형제는 일을 진척시키고자 스위스를 방문하였다. 전쟁으로 찢긴 유럽에서의 사업을 재조직하기 위해서는 ‘중앙 유럽 사무소’를 설립하는 것이 최선일 것으로 보였고 그를 위해서는 스위스가 바람 직한 장소로 여겨졌다. 이 나라는 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스위스 지부 사무실과 ‘중앙 유럽 사무소’가 함께 취리히의 우스테리가 19번지에 들어섰다. 1924년엔 그곳에서 열명의 직원이 근무하였다. 책임자는 콘라드 빙켈이었고 함께 일한 사람 중에는 막스 프레셸이 있는데 후에 막스는 브루클린 본부에서 봉사하였고 맥스웰 프랜드란 애칭으로 알려졌다.
‘중앙 유럽 사무소’는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폴란드에서의 사업을 감독하였으며, 한동안은 독일까지도 감독하였다. 일부 나라는 자체 책임자를 두었지만, 그들은 매월 보고를 ‘중앙 유럽 사무소’로 보내면서 긴밀한 연락을 취했다. 한편, 그 사무소는 보고를 수집하여 브루클린으로 우송하였다. 또한 관할 구역 내의 나라들에 해당 언어 출판물을 공급해 주는 일도 이 사무소가 해야 할 일이었다.
이 무렵, 프랑스어 사용 구역에서 사업을 책임맡고 있던 E. 조그 형제는 베른에 사무실을 갖고 있었다. 베른에서도 얼마의 형제는 솔선하여 인쇄소를 차려서 ‘협회’의 출판물을 저렴한 가격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모든 직원이 헌신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때가 되어 ‘협회’는 그러한 인쇄 시설을 인수하고, 인쇄 공장을 확장하고, 윤전기를 설치하여 1922년 10월에는 독일어판 「황금 시대」 잡지를 인쇄하였다. 상당량의 소책자와 전도지가 십여 가지 언어로 발행되었다.그러나 1924년 러더퍼드 형제의 방문 중, 전후 유럽에서의 엄청난 서적 수요량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시설을 넓힐 필요가 있음이 명백해졌다. 길 건너 토지를 구입하여 새로운 “성서관”을 짓기 시작했다. 이 건물은 1925년 봄에 완공되었다. 새로운 인쇄실 안에 벌써 또 한대의 윤전기가 설치되었다. 해를 거듭하면서 이 인쇄 공장의 능률성이 계속 개선되어 마침내 연간 50만권의 양장본 서적과 백만부의 소책자를 생산하는 것에 더하여 최소 16개 이상의 언어로 잡지와 전도지를 생산하게 되었다.
장소와 감독의 변경
1925년 4월 1일에 ‘중앙 유럽 사무소’가 알멘드가 39번지에 있는 새로운 건물로 이사하게 되자 큰 문제가 생겼다.
장소 이전과 관련된 이 상황에 대해 요제프 A. 빅은 잘 기억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시설은 우리가 고대한 바였지만 모든 성원은 한 가지 중요한 의문을 품게 되었읍니다. 누가 책임자로 임명될 것인가 하는 점이었읍니다. 세 형제가 대등한 입장에 있었읍니다. 즉 그 당시까지 취리히 사무실의 책임자인 C. C. 빙켈 형제, 베른과 프랑스어 사용 구역의 사업 책임자인 E. 조그 형제, 그리고 콜포처와 전파 사업을 돌보던 자콥 베버 형제가 있었읍니다.”
이 세 형제는 참 숭배의 관심사를 진척시키는 데 역점을 두었는가? 아니면 개인적 자존심이나 지위에 대한 관심으로 겸손히 봉사하는 그들의 능력에 영향을 받았는가? “당시는 긴장의 나날이었읍니다. 그러나 회장은 그 상태를 잘 알고 있었읍니다”하고, 빅 형제는 말한다. 빙켈 형제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미국으로 치료받으러 가도록 제안받았다. 그를 대신하여 조그 형제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빙켈과 조그, 두 사람 모두 참 숭배를 버렸다.
1925년중의 호된 시험
1925년은 베른의 새로운 벧엘 숙소와 공장으로 희망찬 출발을 하였다. 형제들은 행복했으며 사업을 추진시키도록
격려받았다. 그런데 1925년에 관하여 개인적인 확신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파수대」 1925년 1월 1일호의 교훈을 따를 것인가? 그 잡지는 이렇게 주의를 주었다.“금년은 1925년이다. 그리스도인은 큰 기대를 갖고 이 해를 고대해 왔다. 많은 사람들은 금년 중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모든 성원이 하늘 영광으로 변화될 것을 확신을 가지고 기대해 왔다. 이 일은 이루어질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자신의 백성과 관련된 목적을 이루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금년 중에 어떠한 일이 발생할 것인지에 관하여 지나치게 관심을 쏟은 나머지, 주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즐겁게 행하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중에서 벧엘의 ‘봉사부’를 책임맡고 있던 자콥 베버는 그러한 주의에 유의하지 않았다. 그는 기름부음받은 자들 모두가 1925년 말까지는 하늘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으로 확신하였기 때문에 “마감 정리”를 추진하였다. 그래서 주문이 없었는데도 막대한 양의 서적을 회중으로 보내고, 1925년말 전에 구역에서 서적을 무료로 배부하도록 지시했다.
베버를 설득하려고 애쓴 모든 벧엘 형제의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마침내 베버는 벧엘과 진리를 떠났으며, 스위스 전역의 형제들을 비탄에 젖게 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을 데리고 진리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성원의 수가 이전의 절반도 안 될 정도로 줄어든 회중도 있었다.
또 다른 슬픈 상황이 벧엘 가족 내에서 드러나 밝혀졌다.
어떤 사람이 부도덕한 행위를 저질렀던 것이다. 협회장의 사무실로부터 즉각적인 조처가 뒤따랐다. 이제 1926년 2월, 브루클린으로부터 마틴 C. 하벡이 도착하여 베른 사무실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스위스의 전도인이 리히텐슈타인을 관리하다
여기서 리히텐슈타인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리히텐슈타인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중 하나로서, 라인강 건너편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위치해 있다. 리히텐슈타인 사람들은 자기네 나라를 랜틀(‘작은 땅’이라는 의미)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데, 이 명칭은 길이가 단지 27킬로미터이고 폭은 평균 6킬로미터가 채 안 되는 이 작은 나라에 아주 적합하다. 총인구 27,076명 중 대다수는 도시 생활의 압력을 받지 않는 전원 생활을 즐긴다. 아름다운 산들로 둘러싸인 수도 파두츠에는 단지 4,927명의 주민이 있다.
가톨릭 성채와도 같은 이 나라에 성서 진리의 빛을 비추는 일은 스위스의 전도인들의 책임이었다. 1920년대에 로르샤하에 있는 얼마의 형제들이 리히텐슈타인에서 전파하다가 폭력적인 반대를 만났다. 체포된 형제들은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렇지만 마가 복음 13:10에 있는 예수의 예언과 일치하게, 1923년에 진리를 받아들인 이전 ‘구세군’ 사관이었던 루이스 메이어는, 리히텐슈타인에 사는, 양 같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들을 기회를 갖게 해야겠다는 책임을 절실히 느꼈다. 메이어는, “한번은, 우리가 각 가정에 이르기 위한 노력으로 소책자를 우송했읍니다. 리히텐슈타인 당국은 ‘익명의 발신인’에게 조처를 취하려 했지만 스위스 우체국이 발신인의 이름을 밝히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무위로 끝나고 말았읍니다”라고 회상한다.
메이어 형제는 지부 사무실과 상의한 후, 리히텐슈타인 국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라가즈의 로젠가르텐 호텔에서 1일간 대회를 조직하였다. 오전엔 호별 방문 전파를 하기로 예정되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벧엘의 ‘봉사부’와 ‘법률부’에서 책임을 맡은 형제들이 왔다. 봉사에 대한 지시 사항은 명료했다. 즉 ‘간단히 증거하고 출판물을 건네준 뒤 흥미있는 점을 지적하고 떠날 것. 경찰이 나타나면 즉시 호텔로 전화할 것’이었다.
메이어 형제는 이렇게 보고한다. “시초엔 모든 것이 잘 되어 가는 것 같았읍니다. 그런데 점심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 리히텐슈타인에서 전파하던 전도인들이 보이질 않더군요! 그때 이러한 전화가 걸려 왔읍니다. ‘모두 체포되었는데 상당한 보석금이 필요합니다.’ 관청 앞에서 전도인들은 그들이 타고 온 버스 안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시온의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읍니다. 당국은 이것을 금지시킬 수 없었는데, 이로 인해 주위 사람의 시선을 끌게 되어 관리들의 신경을 건드렸읍니다.”
‘협회’의 ‘법률부’에서 온 형제의 중재로 마침내 모든 전도인은 보석금 없이 석방되었다. 전도인들은 노래를 부른 것도 석방되는 데 한 몫을 했다고 생각했다.
잊지 못할 소식을 전달함
해를 거듭하면서 오래된 ‘여호와의 증인’은 스위스의 대중에게 여러 가지 잊지 못할 소식을 전달하는 특권을 누렸다. 그러한 소식 중 한 가지는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강연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그 강연을 들었다. 심지어 요즘에도 증거하다 보면 이 연제를 기억하고 있는 노인들을 만나게 된다! 우스꽝스럽게도, 이 강연의 독일어 제목에서 sterben(“죽다”)의 st를 빼고 이 제목을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대를 잇지(독일어 erben) 못할 것이다”로 바꾼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이 소식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잊지 못할 소식이 담긴 것은 「고발당한 교역자들」이란 전도지였다. 1920년대 중엽에 그 전도지를 배포하는 일은 흥분에 찬 일이었다. 취리히 회중은 가톨릭 지역인 슈비츠주에서 전도하도록 임명되었다. 곳프리트 호네거라는 대담한 형제는 미사가 끝날 때 성당 앞에서
이 전도지를 배부하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다른 형제들은 “정신이 있는 건가? 그렇게 앞뒤를 가리지 않고 그 사람들을 분개시키다간 큰 변을 당할 걸세”라고 설득했다.그래서 호네거 형제는 그 계획을 취소하였지만, 그래도 담대한 조처를 취할 생각을 했다. 예배가 끝나자, 모든 남자들은 일요일에 하는 습관대로 술을 마시려고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는 선술집마다 다니면서 테이블을 하나도 빠뜨림 없이 모든 남자에게 전도지를 건네 주었다. 남자들이 전도지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을 때 대소동이 벌어졌다. 그래서 호네거 형제는 소동이 가라앉을 때까지 지혜롭게 역 대합실로 빠져 나왔다.
쥘 펠러는 그 전도지를 배부하는 데 들인 노력을 이렇게 회상한다. “벧엘 가족 중 우리 형제 다섯명은 그 전도지로 산악 지대인 곰스를 봉사하기로 했읍니다. 일행은 자전거를
잘 탔기 때문에 자전거로 가기로 했는데, 곰스까지는 이틀이 걸릴 예정이었지요. 그래서 5월의 마지막 토요일 이른 아침에 출발했읍니다. 아직도 많은 눈에 덮여 있던 산길에 도달하기 전까진 모든 것이 순조로왔읍니다. 그 눈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애물이었읍니다!”그래서 어떻게 하였는가? 되돌아 왔는가? 그렇지 않았다. 펠러는 이렇게 말한다. “짐 실은 자전거를 용기 있게 어깨에 메고 앞에 있는 가파른 언덕을 ‘지그자그’ 식으로 오르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그것은 생각보단 훨씬 힘들었고 위험하기도 했읍니다. 게다가 어떤 형제는 신발이 좋지 않아서 얼어 붙은 눈 위에서 계속 미끌어지며 앞으로 가기보단 뒤로 가곤 했읍니다. 그는 매우 낙심하여 포기하려고 했읍니다.”
네명의 형제는 그 형제가 짐을 나르는 데 도움을 주었다. 뇌우를 흠씬 맞으며 세시간 동안 올라간 끝에 마침내 언덕 너머에 있는 첫 번째 마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몇 시간 잠을 자면서 힘을 얻었다. 펠러 형제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다음 날 새벽 3시부터 전도지를 문 아래에 밀어 넣거나 우편함에 넣기 시작했읍니다. 얼마 후에 사람들이 일어나자 직접 건네 주었읍니다. 어떤 사람은 화를 몹시 내며 전도지를 찢더군요. 하지만 우리는 차분하게 이 완고한 가톨릭 구역에 있는 20개 마을을 계속 봉사했읍니다.”
국제 연맹 본부에서 증거함
지부 감독자 마틴 C. 하벡은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유쾌한 방식으로 진리를 전할 줄 아는 행동가였다.
그는 제네바의 ‘국제 연맹’ 특정 회기에 입장할 수 있는 기자 신분증을 얻었다. 회의 참석자들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모색한 끝에, 영국의 앤소니 이든과 독일 정치가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그리고 러시아의 막심 리트비노프—이들은 자기 나라를 대표하여 ‘국제 연맹’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출판물을 건네 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전 인류가 평화와 정의로 연합되는 진정한 수단, 즉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의 왕국’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1932년 제네바에서 ‘군축 회의’가 열렸을 때, 영향력 있는 사람과 국가 지도자에게 진리를 알리려는 또 다른 노력이 행해졌다. 오래 전, 시편 2:10-12에 기록된 내용을 담은, 「왕국, 세상의 희망」이란 소책자를 그 회의 참석자들과 지도급 교직자들에게 우송하였다. 동시에 그 소식에 지대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촉구하는 카드도 동봉하였다. 이렇게 하여 막강한 세계의 정치인들, 292명에게 증거가 주어졌다.
러시아를 위해 윤전기를?
1933년에,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자 ‘여호와의 증인’의 사업은 그곳에서 곧 금지당했다. 하벡 형제는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협회’의 자산을 찾으려고 갔다. 하지만 체포되었고, 즉시 독일을 떠난다는 조건으로 열흘 후에 풀려 나왔다.
그때 뉴욕 브루클린에서 파견된 한 형제가 독일에 왔다. 그 형제는 압수된 윤전기를 찾아 독일 외부로 운반하여
러시아로 보내려고 하였다. ‘협회’의 의도는 ‘왕국’의 좋은 소식을 러시아에서 더욱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의 견해는 국민에겐 성서보다 신발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그데부르크 윤전기는 결국 베른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잘 사용되다가, 종전 후 몇해 뒤에 다시 독일로 올 수 있었다.축음기를 가지고 봉사함
1934년 이후부터의 ‘왕국’ 전파 사업은 축음기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면모를 갖게 되었다. 전도인은 집주인에게 틀어 주고 싶은 5분간의 성서 연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곤 하였다. 그러면 집주인은 대개 “아, 그렇지만 우리는 축음기가 없는데요!”라고 대답하였다. 전도인이 직접 갖고 온 것을 가리키면 대부분의 집주인은 호기심이 동하여 듣기를 청한다. 이런 식으로 많은 관심이 일으켜졌고, 수많은 서적이 제공되었다.
축음기를 가지고 봉사하는 일은 비교적 쉬웠다. 심지어 학생도 할 수 있었다. 루스 보샤드(현재 벧엘에 있음)는 십대초에, 수업이 없는 오후에는 임명된 구역으로 가서 반갑게 맞이해 주는 부인들에게 축음기를 틀어 주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 부인들 중 적어도 한명이 마침내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어 이 ‘증인’ 소녀는 크게 즐거웠다.
때로는 뜻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하인리히 호이베르거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한번은, 여섯 식구가 있는 한 가족이 녹음된 성서 연설을 틀도록 허락해 주었지요. 그들 모두 거실에 있었는데, 그 축음기가 돌아가는
도중 차례차례 조용히 자리를 떠나버려 5분간의 연설이 끝날 무렵에는 나 혼자만 남게 되었읍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되었을까요? 축음기를 챙기고는, ‘다시 만날 때까지!’(Auf Wiedersehen!)하고 외친 뒤 다른 집으로 떠났읍니다.”전통에 얽매인 사람의 정신에 새로운 생각을 주입하기 위하여는 끈기와 반복적인 접촉이 필요했다.
‘우리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예요’
바젤에 사는 에르빈 사너는 학생이 회중 주일 학교에 지각할 때마다 시계를 가리키며 이 말을 하곤 하였다.—고린도 전 14:33, 신세 참조.
주일 학교가 있었는가? 그렇다. 사실, 한동안 「낙원으로 가는 길」(1924년에 W. E. 판 앰부르그가 편집하여 “성경을 연구하는 청소년에게 증정”된 것)에 근거하여 13세에서 25세까지의 청소년반과 그보다 어린 사람을 위한 주일 학교를 별도로 마련했었다. 회중의 성인이 교대로 일요일 아침에 어린이를 가르쳤다. 탈빌에서 온 울리히 엥글러는, “부모는 일요일에 전파하러 나갔는데, 당시는 그런 일에 자녀를 동반하거나 또 저녁에 함께 집회로 가는 것이 관례가 아니었지요. 그래서 취리히에 청소년반이 개설되어 탈빌 회중의 어린이들도 초대받게 되자 기뻤읍니다”라고 설명한다.
심지어 “여호와의 청소년”회가 베른에 자체 서기 사무소를 두었다. 「여호와의 청소년」이란 제목의 특별 잡지가 그곳에서 편집되어 ‘협회’의 인쇄기로 인쇄되었다. 그 잡지 신명 31:12) 이 점을 보다 온전히 인식하게 되자, 청소년을 위한 그 특별 마련은 해산되었다. 1936년, 러더퍼드 형제가 방문하였을 때에 그 일이 있었다.
첫호의 서문은 러더퍼드 형제가 기술하였다. 이 청소년들은 모임을 사회하고 활동적인 증거 사업을 하였다. 또한 좀더 큰 규모로 조직된 청소년을 위한 집회에서는 성서 드라마도 제공되었다. 그러나 실상 이것은 조직 안에 형성된 또 하나의 조직이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의 여호와의 마련은 어른과 아이가 함께 모여 교훈을 듣는 것임을 성서는 알려 준다. (이탈리아에서 빛을 비추기 위한 노력
‘중앙 유럽 사무소’는 이탈리아에 대해 염려하였다. 독재자 무솔리니가 권좌에 오르자 여호와의 종의 사업은 금지되었다. 이탈리아에는 형제의 수가 극소수인데다 파시스트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렇지만, 「왕국, 세상의 희망」이란 소책자가 밀라노에서 비밀리에 50만부 인쇄됨에 따라, 형제들은 배부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몇명의 스위스 형제들은 위험을 기꺼이 무릅쓰고 이탈리아 북부로 여행하여 그 소책자를 신속하게 배포함으로 어두움에 처한 사람에게 빛을 비출 계획을 하였다. 바젤에 사는 알프레트 갈만도 그 일에 기쁘게 동참하였다. 그는 이렇게 보고한다.
“몇명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밀라노로 여행하여, 그곳에서 지시를 받았읍니다. 그 운동은 잘 조직되었읍니다.
우리는 둘씩 조를 지어, 각 조마다 배부할 소책자를 5만부씩 받았는데, 그 소책자들은 이미 각 도시로 운반되어 있었읍니다. 내 짝과 나는 베로나, 비첸차, 베네치아시를 맡게 되었읍니다. 이 일은 교직자의 불평을 피하고 경찰에 의해 소책자가 압수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신속히 수행되어야 했읍니다.“도착하자마자, 우리에게 지정된 크고 작은 도로 구획을 알려 줄 소년들을 찾았어요. 수고비를 좀 주자 그 아이들은 자진하여 우편함에 소책자를 넣는 일을 도와 주었읍니다. 그들은 이상스런 이 활동이 무엇인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즐겁게 그 일을 했읍니다.”
그 운동은 아무런 사고 없이 수행되었는가? 거의가 그러했다. 경찰로부터 제지를 받은 형제도 있었지만, 서투른 이탈리아어로 약간의 설명을 하자 계속할 수 있었다. 그 주말에 모두는 밀라노에서 재회하여 수행된 일에 대해 기뻐했다. 이탈리아의 수많은 사람 중에 적어도 일부분이나마 자유와 의의 유일한 희망인 ‘하나님의 왕국’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다.
영적 양식을 나치 독일로 들여 보냄
‘중앙 유럽 사무소’의 임무 중 한 가지는 박해받는 형제들과 계속 연락을 취하는 일이었다. 독일이 이 사무소의 관할하에 있지는 않았지만, 베른에 있는 형제들은 독일에 있는 형제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영적 양식을 공급해 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목적으로, 그 사무소는 「파수대」 기사를 타자하여
바젤의 감독자인 칼 칼트에게 보냈다. 칼트 형제는 이렇게 회상한다. “나의 책임은, 신뢰할 만한 형제 자매에게 그 기사를 얇은 종이에 타자하여 30부 정도를 만들어 특정한 날짜에 맞게 마련하는 일이었읍니다. 우리는 매일 밤 자정까지 그 일을 하곤 했읍니다.”그 다음, 이 자료가 독일에 있는 형제에게 어떻게 전달되었는가? 바젤은 독일과의 국경에 접한 도시였으므로 거리가 그리 먼 편이 아닌데다가, 전쟁이 벌어지기 전이라 국경을 오가는 차량이 여전히 많았다. 하지만 가끔 여행자를 철저히 검색하는 일이 있었다. 칼트 형제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독일에서 신임이 두터운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와서 그 잡지를 집어 신발의 이중 바닥 사이나 품속에 감추어 국경을 건너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운반했읍니다. 그들은 종종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면서 그 일을 했읍니다.” 그같은 영적 양식은 자유롭게 이동하는 ‘증인’만 아니라 집단 수용소에 있는 ‘증인’에게도 전달되었다.
독일 ‘증인’과의 단결
독일 형제는 극도의 압박을 받았다. 전세계에 있는 동료 종들도 그것을 느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는다고 한 사도 바울의 말과 같았다. (고린도 전 12:26) 1934년 10월 7일 일요일 오전 9시에 모든 회중의 특별 모임에서 일어난 일로 이 점은 확연해 졌다. 그때에 어떤 봉투가 개봉될 예정이었다. 그것은 히틀러 정부에게 보내게 될 전보였다. 그 전문을 읽어 보면 다음과 같다.
“독일, 베를린의 히틀러 정부에게. 귀 정부가 자행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학대는 전세계 모든 선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하나님의 이름에 불명예를 돌리고 있읍니다. 더 이상 ‘여호와의 증인’을 박해하는 일을 중단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귀 정부와 귀 정당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바로 그날, 독일 내의 회중을 포함하여, 50개국의 회중들은 이 전보를 베를린으로 띄웠다. 그날에 베를린에 물밀듯이 쏟아진 전보를 생각해 보라! 이 일은 히틀러와 그의 정당에게 경고를 발한 것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여호와의 증인’의 연합과 단결을 전시한 것이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히틀러와 그의 정당의 최후는 잘 알려진 바이다.
“그리스도교와 싸우는 십자군”
일반 대중의 주의를, 나치의 테러를 저항하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이끌기 위해, 브루클린의 ‘협회’ 사무실은 「그리스도교와 싸우는 십자군」(Kreuzzug gegen das Christentum)이란 책의 발행을 승인하였다. 이 책은 나치 독일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걷는 가시밭길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백여명에 달하는 형제 자매들의 경험담을 담고 있는 이 책은 특히, 나치 독일하에서 믿음 때문에 고투를 치르면서 고통을 받으며 죽어간 남녀가 있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었다. 취리히의 오이로파 페를라크라는 세속 출판사에서 발행된 이 책은, 서점이나 신문 판매대에 진열되었다. 그것은 프랑스어와 폴란드어로 번역되었으나 영어로는 번역되지 않았다.
저명한 작가인 토마스 만 박사는 ‘협회’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 책을 공개적으로 발행함으로써, 여러분은 할 일을 하였읍니다. 그리고 이 출판물보다 더 크게 세계의 양심에 호소한 것은 없다고 봅니다.” 프로테스탄트교의 교역자인 시오도어 브루패처는 1938년 8월 19일자 스위스의 한 신문에 이렇게 논평하였다. “미래의 교회 역사가가 언젠가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사실은, 나치 도당의 광란에 가장 앞장서서 저항하며 신앙과 일치하게 과감히 반대한 것은, 유명한 교회들이 아니라 사람들이 중상하고 경멸했던 몇몇 교파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증인’이자 ‘그리스도 왕국’의 지망자들은 히틀러와 만자기 숭배를 거절하고 독일식 인사와 선거에의 강제 참여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고통과 피흘림을 당하고 있다.”
파이오니아에게 피신처가 된 장소
1936년, ‘협회’는 벧엘 가족에게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건강에 좋은 식품을 공급하기 위하여 툰시의 슈테피스부르크 근처에 있는 바렌메스 농장을 구입하였다. 2년 후에는 뇌샤텔 부근의 샹네라즈라고 하는 농장도 구입하였다. 이 두 농장은 외국 임지에서 추방당했으나 고향으로는 갈 수 없는 파이오니아에게 피신처가 되었다. 특히 발칸 반도에서 봉사하던 독일 파이오니아에게 그러하였다. 30여명의 형제 자매가 이 두 농장에서 농부처럼 일했는데, 실상 스위스 당국이 체류 허가를 해주는 일이라곤 이런 종류의 일뿐이었다.
하인리히 드벵거 형제도 바렌메스에서 봉사하던 형제였다. 1887년에 독일에서 태어나 1909년에 바르멘에서 침례를 받은 그는 그해에 그곳에 있는 지부 사무실을 방문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드벵거 형제는 전 시간 봉사에 초대되었다. 그 결정이 쉽지 않았던 이유는, 진리 안에 있지 않은 부모가 아들의 직업에 큰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10년 10월에 전 시간 봉사에 나선 그는, 처음엔 바르멘에서, 그리고 후엔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였다. 후에 폴란드와 헝가리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어려운 임명을 완수하였다. 독일 게슈타포로부터 추적을 받게 되자, ‘협회’의 지시대로, 결국 스위스로 오게 되었다. 그는 바렌메스 농부로서 즐겁게 돼지를 사육했다. 수년 후, 형제는 스위스 지부 사무실의 ‘예약부’에서 봉사하였다.
드벵거 형제는 여호와를 섬긴 생활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라는 성경적 책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이 기쁘기만 합니다. 여러 나라의 벧엘에서 오랜 기간 봉사해 왔읍니다만, 이러한 곳에서 나의 본분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임명된 일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임명을 충실하게 이행함으로 지상의 조직을 통한 여호와의 인도를 언제나 따르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할 따름입니다! 사실상 이러한 순종이야말로 부요한 축복의 원천이었읍니다.”
1983년 1월 30일에 드벵거 형제는 96세를 일기로 지상 행로를 마쳤다. 스위스는 물론 외국의 수많은 형제 자매들의 기억 속에는 하인리히 드벵거 형제가 신중함과 겸손 및 순종의 본—따라야 할 본—으로 남아 있다.
오스카 호프만과 아내 애니는 샹네라즈 농장에서 당분간 일하는 동안, 1900년 당시 스위스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한, 아돌프 베버와의 교제를 특히 즐겼다. 베버는, 여호와의 봉사를 시작한 장래가 유망한 사람들이 뒤에 남겨 둔 것으로 돌아서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중요시하는 감정에 빠져 버린 사람도 있었으나 베버 형제는 충성스럽고 겸손하게 여호와를 계속 섬겼다. 고령에 이르러 병을 앓게 되자 그는 겨울을 농장에서 지냈다. 겸손함과 강한 믿음, 그리고 열정적인 봉사는 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마침내 아돌프 베버 형제는 1948년 2월, 85세를 일기로 지상 행로를 마쳤다.
가톨릭 성채를 상대로
1922년, 러더퍼드 형제의 방문과 관련하여, 가톨릭의 요새라 할 만한 도시인 루체른에서 공개 강연을 마련하기로 결정하였다. 형제들은 850석을 갖춘 장소를 마침내 물색하였고, 좌석은 빈자리 없이 전부 채워졌다. 강연은 청중의 주의를 완전히 사로잡았으며, 도중에 강연장을 떠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청중이 박수를 계속 치며 공감의 뜻을 표시하자, 러더퍼드 형제는 다시 연단에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서 그는 “또 만납시다!”라는 말로 청중에게 작별을 고했다.
러더퍼드 형제는 약속을 지켰다. 1936년 9월 4일부터 7일까지, 루체른에서 국제 대회를 열기로 하였다. 사실상, 유럽 전역에서 형제들이 참석하였으며, 심지어는 생명과 자유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나치 독일에서 온 형제들도 있었다. 사실, 나치 첩자는 독일인 참석자의 사진을 비밀리에 찍어 가서 독일 형제들이 집으로 돌아온 즉시 체포하였다.
널리 광고된 러더퍼드 형제의 강연은, “아마겟돈—전능하신 하나님의 전쟁”이었다. 그런데 그 강연이 행해질 무렵에 루체른주 당국은 일반인에게 그 강연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형제들은 그 강연을 들을 수 있었지만 약 2,000명의 군중은 경찰의 제지로 강연장 내로 들어올 수 없었다. 이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일반 사람도 그 소식을 받게 해주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들은 그 강연 내용을 여섯 시간 내에 기꺼이 인쇄해 줄 인쇄소를 발견했다. 그 결과, 입수하게 된 강연 원고는 강연장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제지를 받고 있던 모든 사람에게 배부되었다.
그로 인해 루체른시에서는 더욱 지속적이고도 장기적인 증거가 행해졌고, 입장 금지를 배후에서 조장한 교직자들은 몹시 당황하였다.집회의 자유를 억압한 사실이 대중에게 알려지자, 스위스 언론은 많은 분노를 표명하었다. 바젤의 「내치오날 차이퉁」지는 장문의 사설을 게재하고, 그 결론에서 이렇게 질문하였다.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자유는 어디로 사라져 가고 있는가?”
자업자득의 교직자의 노력
담대하며 솔직한 성격인 러더퍼드 형제는 다음날, 대회 참석자 모두에게 하나의 결의문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의 일부는 이러하다. “이제 독일의 통치자와 로마 가톨릭의 모든 교직 정체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참되고 충실한 추종자를 잔인하게 박해하는 모든 조직은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완전한 멸망을 받게 될 운명에 처해 있음을 우리는 시 145:20)” 이 결의문은 등기부 서신으로 교황과 히틀러에게 우송되었다.
경고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대회 마지막 날에는 약 천명의 ‘증인’이, 「선택하는 일, 부 혹은 파멸?」이란 소책자 10,000여부를 루체른 시내와 교외에 배부하였다. 체포되어 서적을 압수당한 전도인도 있었다. 여러 신문에서는 당국의 조처를 비판하였지만, 사실상 이 때문에 더욱 광범위하게 증거되기도 하였다. 그에 더하여 「황금 시대」 특별호는 이 대회에 관한 모든 사실을 기재하였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이 특별호 표지에는 루체른시를 배경으로 장대 위에 사제의 검은 모자가 그려 있었다. 그리고 그림 아래에는 “새로운 게슬러 모자”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게슬러란 누구인가? 프리드리히 실러의 희곡 「빌헬름 텔」에서 게슬러는, 13세기경 루체른 호수 주변에 사는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을 탄압한 압제적 관리로 묘사된 극중 인물이다. 게슬러는 장대 위에 자기 모자를 매어 달고, 사람들에게 복종과 경의의 뜻으로 모자에 절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래서 폭정의 상징물인 게슬러의 모자를 「황금 시대」 특별호 표지에 그려 놓으므로 그 대회에서 교직자의 충동으로 말미암은 언론의 자유에 대한 억압을 암시하였던 것이다.
이 특별호는 10만부가 인쇄되었으며 그 중 2만부는 루체른시와 그 위성 도시의 모든 가정에 무료로 우송되었다. 18,000부가 재인쇄될 필요가 있었으며 이것 또한 며칠 내에 다 배부되었다. 지금까지도 1936년도 루체른 대회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황금 시대」 특별호로 인해 관심을 갖게 된 사람 중에는
베른에 살던 에두아르 지세가 있다. 그는 ‘협회’의 사무실로 찾아와 편집 책임자인 취르체어 형제와 활발한 토론을 한 후, 출판물을 한꾸러미 갖고 갔다. 4년 뒤인 1940년에 그는 아내 이본느와 함께 침례를 받았다. 그때 이후로 이 부부는, 특히 출판물을 교정하고 프랑스어 성서 색인 발간을 돕고 프랑스어 회중을 강화시켜 줌으로써 ‘협회’에 대단히 기여하였다. 그들은 두 차례에 걸쳐 벧엘 가족으로서 봉사하였다.1930년대의 법정 투쟁
스위스는 가장 오래된 민주 국가 중 하나로 세계에 알려져 있다. 역사가라면 연방 창설자가 외세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수호하고자 투쟁한 사실을 칭송하며, 스위스 국민이라면 무엇보다도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스위스 헌법에 관해 긍지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호별 방문을 통해 구두로나 문서로 전파할 ‘증인’의 권리를 “변호하고 법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법정에서 격렬한 투쟁을 벌여야 했던 점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빌립보 1:7, 신세) 이 투쟁은 거의 30년이나 지속되었다. 1935년에만도 111건의 법적인 난제를 다루어야 했고 그 중 절반 가량은 ‘증인’에게 유리하게 판결되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 선포자에게 그 모든 어려움이 야기되었으며 그 배후에는 누가 있었는가?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증가하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은 “큰 바벨론”의 주요 대표자들이었다. 「요엘」과 「계시록」의 예언 가운데 묘사된 상징적인 메뚜기 재앙이 그들에게 임했으며, 그 결과 심판의 소식으로 인해 몹시 고통을 느꼈다.
예로써 「왕국으로 도피하라」는 소책자를 읽고 한 가톨릭 사제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이 출판물은 성서적으로 왜곡되고, 불합리하며, 야비한 중상을 많이 담고 있으며, 사람을 오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인간의 감각적 성향에 저열하게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가톨릭 교인이 그 같은 술책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물론 이 비열한 선동자들을 감싸주는 법적 마련이 있다. 우리는 강권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가? 우리는 이 사악한 ‘성경 연구생’을 엄히 다룰 것과 응분의 처벌을 내려 줄 것을 관할 당국에 긴급히 요청하는 바이다.”
마침내 강권을 사용하다
교직자들이 당국에 끊임없이 압력을 가함에 따라 그 영향을 점차 느끼게 되었다. 지방 사제들이 경찰을 선동한 결과, 야외 봉사에 참여하는 전도인이 체포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체포 사유는, 우리 출판물에 들어 있는 강력한 표현이나 삽화가 종교적 감정을 해친다는 것을 비롯하여 신앙 고백의 평화를 저해한다든가 주일 안식법을 범한다는 것 등 다양하였다. ‘증인’은 허가증 없는 행상인이라는 비난도 흔히 받았다.
「빛」 출판물 제 1권은 그 안에 들어 있는 그림 때문에 루체른주에서 금지되었다. 또 다른 가톨릭 주, 프리부르에서 어떤 전도인은 「구출」 책을 배부한 것이 가톨릭 교회를 터무니없게 비난했다는 사유로 법정에 기소되었으며, 우리는 그 소송에서 패소하였다. 그라우분덴주는 ‘협회’ 출판물을 모두 배부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추크라는
가톨릭 주는 ‘여호와의 증인’의 “평화 저해 활동”을 금지시켰다. 뒤이어 루체른주 당국도 그렇게 하였다.이상의 사례를 비롯하여 기타 수십건의 사례에 있어 ‘여호와의 증인’에게 취해진 조처의 합법성에 이의를 제기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법정 투쟁이 필요하였고 때로 연방 대법원에까지 가기도 하였다. 패배의 고통을 당하기도 했지만, 승리의 기쁨도 맛보았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후원해 주셨으며, 진리를 전파할 자유의 투쟁에 전도인이 어떻게 참여하였는가를 관찰하는 것은 믿음을 강화시켜 주었다. 필시 체포될 구역이 어디인가를 알면서도 전도인들은 야외 봉사에 계속 참여하였다.
적의 목표:전면 금지
“지금이야말로 일명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하는 ‘성경 연구생’의 활동을 종식시킬 가장 적절한 때이다”라는 표현은 특히 가톨릭계 신문 지상에 자주 오르내렸다. 스위스 내의 적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나치 독일에서 금지당했다는 것을 알고 힘을 얻어 똑같은 목표를 추구하려고 생각했다. 중상과 허위 보도가 적들의 무기였다.
그들이 사용한 강력한 수단 중 하나는, 모든 당국자와 신문 편집인에게 송달되는 「스위스 보도 통신」(Swiss Press Correspondence)이라는 월간 정보지였다. 그것은 1931년에 장크트 갈렌에 설립된 “교회 교황 협회”와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 그 월간지는 ‘여호와의 증인’이 가장 수상한 조직이며 국가에 위해하고 유태인 세계 정부에 관한 사상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몹시 애를 썼다. ‘증인’의 사업과 서적의 배부를 억압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 월간지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스위스에 있는 우리 가톨릭 교도에게는 베른에서 흘러오며, 유럽 전 국가에서 범람하고 있는 이 흙탕물의 [스위스] 본거지를 해체시킬 의무가 있다. 아름다운 이 나라가 교활한 볼셰비키적 선동의 시점으로 오용되는 것을 우리는 묵과할 수 없다.” 이것은 참으로 가당치 않은 또 다른 주장이었다.이 월간지의 책임자인 퇴트리 씨는 “종교의 명예 훼손”이라는 것을 근거로 하여 ‘협회’의 대표자인 마틴 C. 하벡과 프란츠 취르체어를 상대로 법적 소송을 제기하였다. 바로 그 소송에서 ‘협회’의 출판물이 “저질 서적”인지 아닌지가 명확히 밝혀질 것이었다. 퇴트리 씨의 소송 사유는 ‘국민 전선’ 회원이자, 독일 에어푸르트에 있는 ‘반유태인 및 국가 사회당 선전 센터’의 이사인 플레이슈 하우어 씨의 장황한 의견에 근거한 것이었다. 플레이슈 하우어 씨는 ‘성경 연구생’이 “그리스도교 사회를 무너뜨리고 그 위에 유태인 제국을 건설할 목적으로 프리메이슨 및 유태인과 함께 결탁하여 모든 그리스도교 정부를 폭력적으로 전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위장된 공산주의자라고 허위 주장을 하였다.
러더퍼드 형제가 법정에서 변론하다
1936년 8월 16일에 베른의 한 재판소에서 이 사건이 심리될 때, 러더퍼드 형제도 스위스에 와 있었다. 그는 법정에 나타나 문제 서적의 저자로서 증언하였다. “만일 고소된 이 출판물이 고소 사유처럼 ‘저질 서적’이라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도 ‘저질 서적’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문제가 된 비유나 그림이 성서의 「에스겔」과 요한 17:17)” 러더퍼드 형제는 그러한 말로 결론내렸다.
「예레미야」 및 「계시록」에 나오는 내용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입법자는 성경의 배포나 그와 동일한 해설서의 발행을 금지시키려고 하지 않았음이 자명합니다. 이 출판물은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진리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다섯 시간에 걸친 주장과 반론 끝에, 재판장인 레만 씨는, ‘워치 타워 협회’ 임원인 마틴 C. 하벡과 프란츠 취르체어는 “저질 서적”에 관한 법률을 위반하거나 베른에 있는 ‘협회’의 인쇄 공장에서 발간한 출판물로 종교의 명예를 훼손시킨 혐의가 없다고 판정했다. 피고측은 무죄가 되었고 원고측은 각 피고인에게 변호 비용 부과금으로 150프랑(31,150원)을 지불하라는 판결이 내렸다.
사건이 상소되다
전국의 가톨릭계 언론은 그 재판을 극렬히 비난하고 그 판결이 “믿을 수 없는 오판”이라고 보도하였다. 퇴트리는 그 사건을 상소하였고 1937년 5월 28일에 ‘베른 고등 법원’에서 그 사건은 다시 심리되었다. 원래의 판결이 번복되었고, 이제는 ‘협회’의 대표자들이 “종교의 명예 훼손” 죄로 100프랑(20,470원)의 벌과금을 물게 되었다. 그렇지만 법정은 “저질 서적”에 관한 법률 위반은 하지 않았다는 견해를 견지하였다.
일년 후, 퇴트리 배후 선동자의 정체가 발각되자 퇴트리는 재판에 회부되었고, 나치 독일을 위해 간첩 활동을
한 죄가 드러나 3개월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도주한 뒤였기에 궐석 재판으로 형 선고가 있었다.공식 금지된 소책자
1939년, 유럽은 긴장된 상태가 되었다. 스위스는 전체주의의 열강에 의해 거의 둘러싸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나라의 이념을 배척하긴 했지만 스위스 당국은 이 위험한 이웃 나라를 자극하는 일은 피하려고 애썼다. 나치 독일군이 스위스를 사방으로 에워싸게 되자 사태는 더욱더 급박해졌다. 나치군은 서쪽의 프랑스, 동쪽의 오스트리아, 남쪽의 이탈리아에 있었다.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은 흉용하는 바다 가운데 있는 섬처럼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여호와의 백성은 담대하게도 「파시즘 혹은 자유」라는 소책자를 배부하였다. 이 소책자는 다음과 같은 쟁점을 제기하였다. “세계는 즉위하신 여호와의 왕 그리스도의 의로운 다스림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이기적이고 방자한 독재자의 지배를 받을 것인가?” 이 소책자는 또한 히틀러를 ‘사단의 대리자’로 칭했으며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은 “파시스트와 손잡고 일한다”고 폭로하였다!
이 소책자는 ‘중앙 유럽 사무소’ 관할하에 있는 여러 나라에서 수백만부가 배포되었다. 그리고 ‘스위스 연방 의회’의 결정에 따라 ‘스위스 주 검찰청’이 그 소책자를 금지시킨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조처에 관해 많은 지상 논쟁이 있었다. ‘협회’는 대응책으로 스위스 전역에 40만부의 전도지를 배부했다. 종종 ‘증인’이 공산주의를 선전한다고 고발받고 있기 때문에 많은 반대가 유다 3.
뒤따랐다. 가톨릭 지역에서의 집회가 많이 저지당하거나 방해받았다. 하지만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회중 내에는 최상의 영이 감돌았다고 말할 수 있지요”라고, 루체른에 사는 요제프 드보락은 말한다. 여호와의 영의 후원이 없었던들 형제들은 적으로부터의 끊임없는 공격을 저항해 나가는 데 지치고 느슨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형제들은 기꺼이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웠으며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신뢰는 보상을 받았다.—그러한 자진성의 예가 장크트갈렌에 있는 부흐스 회중에서 있었다. 이 회중은 스위스 내에서 금지되어 있는 「파시즘 혹은 자유」 소책자를 상당량 갖고 있었다. 형제들은 이 소책자를 외국, 즉 이웃의 리히텐슈타인에서 배부하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결정했다. 스위스와의 관세 협약으로 인해 국경 통과 때 검색이 없었다. 카를 당겔마이어도 다른 형제와 더불어 저녁을 이용해서 리히텐슈타인에서 소책자를 배부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술렁거리는 사람들의 동요, 특히 히틀러와 무솔리니 옆에 있는 교황의 그림 때문에 일어난 동요를 상상해 보십시오! 신문에는 분노를 표하는 기사가 게재되었고, 가톨릭 청년단은 우리를 공격하려고 별렀지만, 우리는 조심스럽게 하면서 절대 가방을 갖고 다니지 않았지요. 그렇게 하여 발각되는 일 없이 활동을 다 마쳤으며 소책자를 사람들에게 전했읍니다.”
1939년: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체주의 세력이 나라마다 짓밟고 있는 판국에 스위스 정부가 국가를 운용해 나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사야 2:2-4; 로마 6:12-14; 12:1, 2) 상당수의 ‘증인’이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선고된 징역형은 수개월 형에서부터 5년 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흔히, 한번 형기를 마친 뒤에도 다시금 징집 영장이 발부되었고 재판 절차가 재개되었다. 2차 형기가 1차 형기보다 항상 길었다.
국경 수비를 위해 군대가 소집되었다. 병역이 의무제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남자들에겐 커다란 시험이 되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 형을 선고받은 모든 ‘증인’ 가운데 최장기 형을 치른 형제는, 제네바의 페르난트 리바롤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직장을 잃었고, 짐작할 수 있듯이, 아내와 어린 딸에겐 문제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당시 이미 진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던 한 교도관을 사용하여 형제를 격려해 주셨다. 그 교도관은 자기 근무 때에는 언제나 모든 기회를 포착하여 리바롤 형제 및 함께 투옥된 두 형제를 영육으로 위로하려고 애썼다. 이 하나님의 종의 확고한 태도로 말미암아 에밀 볼로메이라는 그 교도관은 열성스런 형제가 되었다.
형제들이 취하는 태도를 보고 당국은 ‘협회’의 활동이 국가의 이익에 배치되며 반군국주의적 활동을 조장했다고 그릇된 결론을 내렸다. 더우기 당국은 참으로 부당하게도 ‘협회’가 정부 전복 활동을 했다고 비난하였다!
‘중앙 유럽 사무소’가 문을 닫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나라마다 차례로 전체주의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중앙 유럽 사무소’의
활동도 지장을 대단히 받았다. 형제들과의 연락이 매우 어렵게 되거나 완전히 두절되었다. ‘중앙 유럽 사무소’의 역할이 무용하게 되자, 하벡 형제 부부는 1940년 초여름에 미국으로 돌아가서 지구 봉사와 순회 봉사에 임명되었다.이제 스위스에서의 사업은, 1923년에 벧엘 봉사를 시작한 프란츠 취르체어가 책임 맡게 되었다. 그는 「창조 사진극」을 상영하러 다녔었는데 스위스 전역은 물론 벨기에, 자를란트, 나에강 유역, 라인란트 및 알사스로렌을 누볐다. 후에 「황금 시대」의 독일어판 편집도 맡았다. 또 ‘봉사부’와 관계하면서 ‘중앙 유럽 사무소’ 관할 내의 나라에 있는 100명에 달하는 파이오니아를 돌보는 즐거움도 누렸다.
취르체어 형제가 스위스 지부를 책임 맡게 된 때는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그는 여호와의 인도를 전적으로 신뢰해야 하였다. 적의 목표는 오로지 ‘여호와의 증인’의 사업을 전면 금지시키려는 것이었다. 가톨릭 신문은 ‘여호와의 증인’이 정치 목표를 추구하며 국가에 해로운 활동을
한다는 비난조의 기사를 실었다. 그런 기사가 내걸은 표제는 “진지한 ‘성경 연구생’—볼셰비즘의 개척자”라든가 “모스크바의 앞잡이—‘성경 연구생’”이라는 것 등이었다.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군 당국은 조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940년 7월 5일 이른 오후에 군인을 가득 태운 트럭 한대가 베른의 ‘협회’ 지부 사무실과 공장을 점거하였다. 벧엘 가족은 식당에 모여서 철저한 수색이 마칠 때까지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들은 일부 방을 폐쇄시키면서 상당량의 출판물을 압수해 갔다. 당국이 찾고 있었던 것은 ‘협회’가 직접 군 복무 거부를 조장했다는 증거 자료였다. 조사가 시작되었다.
형제들의 집을 수색하다
얼마 안 있어 스위스 전역의 수많은 감독자와 전도인 집이 정일 정시에 가택 수색을 당했다. 서적이 압수당했으며 관리로부터의 심문이 기록되었다.
에밀 발더는 이렇게 말한다. “아침 일곱시경에 취리히-볼리소펜시 마흐바르트가 37번지에 있는 우리 아파트의 초인종이 울렸읍니다. 건장한 두명의 주 경찰서 형사가 수색 영장을 내밀며 불쑥 들어왔어요. 그들은 모든 것을 뒤지다가 내 가방을 찾아냈는데, 당시 나는 회계의 종이었기 때문에 가방 안에는 서류와 헌금이 들어 있었읍니다. 그들은 그것을 검사하고 모두 압수해 갔읍니다. 나도 경찰서로 연행되었읍니다. 경찰서에서 그들은 나를 어느 정도 세뇌시켜 형제들의 이름과 주소를 더 알아내려고 하였읍니다. 하지만 알아낼 수 없었읍니다. 후에 또 다른 형사가 나의 직장인 은행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협회’가
내 개인 예금 구좌와 관련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조사했읍니다. 하지만 그것도 소용 없는 일이었읍니다.”검열
스위스 군부는 조사 결과를 기다리지도 않고 「파수대」지를 사전 검열토록 했다. ‘협회’는 이 조치에 따를 수 없었다. 어떻게 여호와로부터 오는 영적 양식이 이 사물의 제도의 군인에 의해 검열될 수 있단 말인가? 공식적으로 「파수대」지는 폐간되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당시 천여명이나 되던—형제들이 영적인 궁핍을 당해 고통받지는 않았다. 형제들은 타자하였거나 등사한 기사를 개인 연구용으로 받았으며 회중 내에서 서로 돌려가며 보았다. 이렇게 하여 형제들은 끊임없이 전진하는 빛에 보조를 맞추었다.
그러나 야외 배부용 출판물을 갖기 위하여 검열 당국으로부터 「위안」(이전의 「황금 시대」)지와 소책자의 인쇄
허가를 얻었다. 당국은 세계 정세를 묘사하는 표현을 주의 깊이 선별하도록 끊임없이 종용함으로 힘센 이웃에 대한 두려움을 표명하였다.현재 60여년 동안 벧엘 봉사를 하고 있는 쥘 펠러 형제는 당시 검열국에 원고를 가져가는 일을 맡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러한 일을 기억한다. “보통 그들은 원고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읍니다. 때때로, 너무 직선적인 표현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다른 방법으로 명확하게 표현하도록 요청하더군요. 물론 진리에 물을 타지 않고도 사상을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주 적의에 찬 태도로 나를 맞이 하더군요. 관리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국가를 이용하기만 하고 국가를 위해서는 군 복무와 같은 일을 전혀 이행하려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읍니다. 그야말로 맹렬히 비난하였읍니다.
“긴 토론이 진행되었읍니다. 그날 함께 한 네 사람이 두 시간 동안이나 내리 질문을 퍼붓더군요. 나는 마태 복음 10:18, 19(새번역)에 있는 예수의 말씀이 참됨을 실제로 경험하였읍니다. ‘너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 앞에 끌려가서 그들과 이방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 어떻게 말할까 또는 무슨 말을 할까 걱정하지 말라. 네가 해야 할 말을 그때에 일러 주실 것이다.’ 그 대화는 진리의 승리로 끝났읍니다. 그 후부터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우리를 협조적으로 대해 주었읍니다.”
1942년, 브루클린과의 연락이 두절되다
적대가 시작된 바로 그때부터 ‘협회’로 송달되는 모든 편지는 검열을 받았는데,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브루클린의 ‘협회’ 본부와의 모든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 결과, 「파수대」 영어판은 “유일한 빛”이라는 기사가 실린 1942년 10월 1일호를 끝으로 더 이상 받지 못했다. 더 이상 영어판 잡지를 받을 수 없게 되자 스위스 지부는 관할하의 형제들을 위한 영적 양식을 어떻게 구할 수 있었는가?
여호와께서는 이 전쟁에 연루되지 않은 유럽의 몇 나라 중 하나인 스웨덴 지부와 접촉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셨다. 스웨덴 지부로부터 「파수대」의 최근호를 얻을 수 있긴 했는데, 그것은 스웨덴어였다. 스위스 형제 중에는 스웨덴어를 잘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만, 스웨덴어와 독일어 사이에는 특정한 유사점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 힘입어 앨리스 베르너는 스웨덴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앨리스는 지금은 독일 지부에 있지만, 당시는 베른의 벧엘 가족 성원이었다. 비교적 짧은 기간이 지난 후, 이 자매는 스웨덴어 「파수대」를 독일어로 번역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그 뒤 2년간 형제들에게 영적 양식이 공급될 수 있었다. 모두 42 가지의 「파수대」 기사와 두 종류의 소책자가 이런 식으로 마련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브루클린 본부는 두절된 기간 중의 영어판 「파수대」의 기사를 모두 모아 보내 주었다. 전쟁 중에 스위스 형제들은 얼마나 되는 기사를 읽지 못하였는가? 읽지 못한 기사는 단 하나도 없었다! 위대한 공급자이신 창세 22:14.
여호와께 형제들이 얼마나 감사했겠는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비교재정 문제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보살펴 주셨다. 그렇지만 재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유는 무엇인가? 이 사업은 자진적인 헌금으로 지원받고 있는데다, 전쟁 기간 중에 많은 형제가 경제적인 심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또한 「파수대」 인쇄를 중단하였고 아무 출판물도 여타 유럽 나라들에 발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외국으로부터의 대금 회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벧엘 가족 모두가 할 만한 일양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형제 자매들은 한결같이 벧엘에서의 생활을 행복해 하였지만 자진적으로 떠나야만 했다.
그런데도 심각한 재정상의 문제는 계속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무엇보다도 벧엘과 농장에서 일하는 봉사자의 수당을 월 10프랑(약 2,000원)으로 줄일 필요가 있었으며, 형제들은 이러한 경제 조처를 아무 불평없이 받아들였다.
원하는 색깔의 책을
전쟁중인 1942년에 감동적인 대회가 취리히에서 개최되었다. 일요일 아침, 대회장에 모인 청중의 앞줄은 발그레한 얼굴의 어린이들로 가득 찼다! 이 대회는 그들에게 특별한 행사였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주어지는 연설을 통해 부지런하고 솔선적이 되며, 유용하고 친절하며, 무엇보다도
성서의 교훈에 따라 부모에게 순종할 것을 상기시켰다. 그 연설의 결론에서 「어린이들」 책이 발표되었으며, 모든 어린이는 무료로 한권씩 받을 수 있었다.형제들은 아홉 가지 색깔의 책이 담긴 상자를 갖고 연단으로 나왔다. 그 다음 모든 어린이에게 연단으로 나와 원하는 색깔의 책을 선택하여 가지도록 권하였다. 그것은 어린이에게 있어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이렇게 하여 400여권의 책이 미래의 ‘증인’에게 나누어 졌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열정적인 봉사자가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여호와의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다.
축음기의 연설을 대체한 신권 전도 학교
1944년에 새로운 마련에 대한 지시, 즉 ‘신권 전도 학교’가 스위스 회중에 첫 선을 보였다. 그해 초에 베른의 벧엘에서부터 이 훈련을 채택하였다. 그 이후부터의 달에는 집주인에게 왕국 소식을 제공하는 방법에 관해 도움이 되는 교훈과 아울러 공개 연설 과정이 전국에 있는 회중에게 실시되었다. 형제들이 좋은 소식을 보다 능숙하게 설명하게 됨에 따라 축음기의 녹음 연설을 트는 대신 전도인들이 직접 간단한 연설을 하였다.
대부분의 ‘증인’은 전파 방식에 있어서의 이러한 변경을 매우 환영하였다. 왜냐하면 야외 봉사를 위해 무거운 축음기와 많은 서적이 담긴 가방을 갖고 다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더우기 이러한 변경은 봉사의 질에 있어서 진보를 가져왔다.
전쟁의 말기 상태를 살펴봄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진군하기 시작했고 8월 15일에는 프랑스 지중해 해안에 상륙하였다. 나치가 붕괴되어 가고 연합군이 승리할 것이라는 증거가 늘어나자, 스위스 당국은 ‘여호와의 증인’과 ‘협회’에 취했던 조처를 다소 완화하기 시작했다. 이 점은 계시록 12:16에 예언된 바와 같다. “땅[보다 안정된 민주 세력]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전체주의적 억압 세력의] 강물을 삼키니[라.]”
지부 사무실의 책임있는 형제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러더퍼드 형제는 될 수 있으면, 스위스 내에서 사업이 전면 금지되는 일이나 지부 사무실이 폐쇄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형제들에게 강권하였었다. 형제들은 위태로운 상황을 많이 겪었지만 그 어려움이 이제는 보탬이 되었다. 지부 사무실은 여전히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사업은 활동적이었다! 형제들은 다윗이 시편 34:19에서 말한 것처럼 느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곧, 1940년 7월에 스위스 군부에 의해 압수됐던 서적이 ‘협회’로 반환되었다. 군인들이 출판물의 수량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만도 며칠이 걸렸다. 이 모든 출판물은 나중에 야외에서 잘 사용되었다.
두절된 지 4년 후에 인쇄된 「파수대」지를 다시 손에 쥐게 되었을 때 그 느낌이 어떠했겠는가?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말하는 형제들은 그 잡지를 1944년 10월 1일호부터, 월 1회이긴 하지만 다시금 정기적으로 발행하게
되어 즐거움에 넘쳤다. 약 1년 후에 그 잡지는 다시 월 2회씩 발행되었다.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는데도 계속된 투쟁
1945년 5월 8일에 서방 나라들은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축하하였지만, 스위스에서는 숭배의 자유와 전파할 권리를 위한 투쟁이 계속되었다. 이 나라 대부분의 지역에서 ‘증인’은 전시보다는 활동의 자유를 더 많이 누렸지만, 가톨릭 지역에서는 아직도 억압이 심했다.
예로써, 1946년 1월에 추크시에서 “인간이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가?”라는 공개 강연이 행해지고 있을 때 갑자기 경찰이 강연장에 나타나 연설을 중단시켰다. ‘협회’는 소송을 제기했고, 이 사건은 로잔에 있는 연방 대법원에서 다루어졌다. 그 결과, 추크시 당국이 취한 위헌적 금지 조처가 패소하였고, 신문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권리를 마침내 획득하다”라든가 “숭배의 자유는 유지되어야 한다”라는 표제를 실었다. 그러나 기대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가톨릭 신문은 이러한 평결을 그처럼 긍정적인 방식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독일의 형제를 위한 도움
집단 수용소에서 석방된 충실한 형제들의 비참한 형편이 알려지게 되자, 스위스 형제들은 “도와 줄 마음을 막”지 않았다. (요한 1서 3:17) 형제들은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 사회에 있었던 영을 갖고 분주하게 구제 운동을 벌였다. (사도 11:29, 30; 고린도 후 8:1-4) 많은 양의 의류와 가정용품이 기증되었으며 일부 자매들은 모든 물품이 쓸만한 상태로 되도록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마침내 실 중량 25,000킬로그램의 물품을 담은 444개의 상자가 1946년과 1947년에 독일로 운송되었다. 이러한 구호 마련에 기증된 물품의 총 값어치는 262,000프랑(그 당시로 약 54,290,000원)이 넘었다. “독일에 있는 형제 자매로부터 즐거움과 감사의 말을 듣고는 아주 기뻤으며 그 운동을 하기 위해 우리가 치른 부가적인 일에 대해 큰 보람을 느낍니다”라고, 돕는 일에 동참했던 한 자매는 돌이킨다.
형제들을 강화시키고 전후 활동을 좋게 시작하도록 해주는 데는 물질적인 도움이 필요했던 것 만큼이나 영적인 양식도 크게 필요하였다. 그래서 스위스 지부는 성서 출판물도 독일로 보냈으며, 그렇게 하여 독일의 영적 재건 사업에 미약하나마 기여할 수 있게 된 것을 큰 특권으로 여겼다.
오랜 기간 기대해 온 노어 형제의 방문
형제들은 ‘협회장’의 전후 첫 방문을 학수 고대하였다. 다사 다난했던 8년이 경과한 후 회장이 된 사람은 네이선 H. 노어였다. 1945년에 베른을 잠시 들른 노어 형제는 1947년 5월에 다시 왔다. 이번에는 그의 방문을 대규모 행사로 만들기 원했기 때문에 취리히에 있는 아름다운 콘벤션 홀에서 대회를 마련하였다.
그 대회의 금요일 저녁에 “만민의 환희”란 주제의 공개
강연이 있었다. 전도인들은 10만장의 강연 초대장을 배부하고, 벽보를 붙여 놓고, 플래카드를 들고 시가지를 행진하면서 참으로 즐거워하였다. 형제들은 취리히 시민 모두에게 이 행사를 알리기 원했다!마침내 1,540명이 공개 강연에 참석하였다. 이 모임이 끝날 때 ‘증인’이 아닌 사람들 모두에게 소책자를 한부씩 주었다. 소책자가 800부나 배부된 것으로 보아 참석자들 중 많은 수가 강연 초대에 호응한 관심가진 사람들임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참으로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강조된 파이오니아 봉사
초창기 콜포처 시대로부터 독일어와 프랑스어 사용 구역에서 봉사하는 충실한 전 시간 전파자들은 늘 있어 왔다. 하지만 아는 바와 같이 그 수자는 극소수였다. 예로써, 1945년에는 1,462명의 전도인 가운데 단지 세명만이 파이오니아였다! 노어 형제는 이러한 수자가 스위스에서의 풍부한 기회와는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파이오니아 수가 적은 한 가지 요인은, 전도인이 ‘행상 규제법’에 저촉되지 않으려고 많은 출판물을 무료로 배부하는 터라 전파 사업에 있어서 이 모든 비용과 경비를 자신이 지불해야 되기 때문일거라고 노어 형제는 판단했다.
그의 관찰은 정확했다. 그 비용을 충당할 수 없어서 전 시간 전파 사업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던 형제도 있었다. 파이오니아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을 돕기 위하여 자진적인 기부금을 요청하는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하였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
노어 형제와 동행하여 여행한 사람은 헤이든 코빙턴이었는데, 그는 당시 브루클린 ‘협회’의 변호사였다. 대회에서, 코빙턴 형제는 복음 전파용 출판물에 있어서는 행상 허가증 없이도 자진적인 기부금을 받을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미국 법정에 갔던 사례를 설명하였다. 스위스 지부는 이 문제가 명확해질 때까지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를 위한 권리와 특권을 위해 재판소를 통해 모든 면으로 투쟁을 해야만 했다. 그 일은 스위스 내의 모든 전도인의 연합된 행동이 되어야 했다. 형제들은 협조하려는 자진성을 열렬한 박수로 나타냈다. 이 취리히 대회는 스위스 내의 왕국 사업 역사에 있어서 이정표가 되었다.
행상 허가증 없이 활동하는 문제
앞서 1930년대에 형제들은 “허가증 없이 행상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고 벌금을 물었었다. 이제 취리히 대회 때 받은 격려에 힘입어 그 문제는 해결되어야 했다. 사도 바울이 고대 빌립보에서 그러했듯, 형제들은 “좋은 소식을 변호하고 법적으로 확립”하고자 하였다.—빌립보 1:7.
전도인들은 야외 봉사에서 전한 서적에 대해 집주인이 자진적으로 내는 기부금을 다시 받았다. 즉시 전국에서 경찰에 고발하는 일이 쇄도하였다. 그러나 ‘협회’는 그 문제를 밀고 나가기로 결정하였다.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예로써, 프로테스탄트가 우세한 베른주의 고등 법원은
자진적인 기부금 마련에 입각하여 출판물을 배부하는 일도 행상 법령에 규제를 받아야 된다는 주장을 오랫동안 견지해 왔다. 수십년 동안 이 법정은 우리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려 왔다. 이제 1948년에 한 형제가 하급 법원에서 20프랑(4,450원)의 벌과금을 선고받자 고등 법원에 상소하였다. 이번에는 돌파구가 있게 되었다! 판결문에서 베른 고등 법원은 이렇게 말했다.“이윤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활동에 있어서 직업적 특성을 나타내는 점이 피고의 행위에는 없었다. 자발적이든 ‘여호와의 증인’의 사업 때문이든—행상이라는 수단으로써 이윤을 추구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러한 상황으로 얻게 되는 결론은, 피고는 이기적인 성향을 배제하고 전적으로 고상하고도 비이기적인 목적으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소책자는 최소한의 생산 비용이라도 충당하려는 의도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다. 피고에게 있어 최상의 보람은 필시 그 교파 성원 수의 증가와 복음화에 따른 호응일 것이다. 만일 행상에 관한 규제법이 대중을 괴롭히려는 자들로부터 대중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상품 거래법을 적용하여 집집으로 다니며 포교하는 종교 활동을 방해하여 헌법에 의해 보장된 의사 표시의 자유를 범하는 것은 지나친 일일 것이다.”
이렇게 무죄 선고를 내림으로써 베른 고등 법원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40년간 고수해온 사법적 정책을 바꾼 것이다. 비록 이 결정이 다른 주에는 구속력이 없었지만 다른 주에 있는 많은 법정의 예리한 관심사가 되었다.
가장 힘겨웠던 보 주와의 투쟁
행상 문제에 있어서 가장 오래 끌고도 지속적인 투쟁을 벌인 주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보주였다. 이 주에서는 1935년에 이미 행상 법률 수정안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 수정안은 정찰제 표시 상품이 아니라 구매자의 결정에 달려 있는 상품 제의는 행상과 동일하다는 점이 명시되었다. 로잔의 주 검사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소송의 근거로 이 수정안을 자유로이 사용하였다.
1948년에 파이에른의 지방 법원은 파이오니아인 장 시겐탈러 형제에게 무허가 행상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고등 법원에 상소되었으며, 고등 법원에서는 하급 법원의 선고를 확정하였다. 말하자면, 상소인의 활동은 의당 법에 저촉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판결의 결과, 권리와 자유에 대한 ‘증인’의 투쟁은 5년 이상 계속되게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하급 지방 법원은 무죄를 선고함으로 ‘증인’의 권리를 옹호해 주었다. 하지만 그 주 검사는 몹시 적개심을 품고 이 사건을 고등 법원에 상소하였으며, 고등 법원에서는 하급 법원의 판결을 번복하였다. ‘협회’는 최고 사법 기관인 ‘연방 대법원’에 이 사건을 가져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부당하게도 상고는 기각당하였다.
대담하게 견해를 달리한 어떤 판사
그런데 1951년 9월 3일, 한 사건이 로잔의 지방 법원에 제기되었다. 그 사건은 길베르트 슈니버거가 관련된 사건이었다.
그 사건에서 별 승산이 없었기에 ‘협회’는 변호사를 대지 않기로 하였다. 법정에 홀로 앉아 있는 이 젊은 파이오니아 자매의 느낌이 어떠하였을까를 상상해 보라.판사인 츠바이펠 씨가 입장하였다. 재판이 시작되자 그는 아버지 같은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친애하는 숙녀, 숙녀의 경우는 ‘연방 대법원’에서 불리하게 판결받은 사건과 동일한 경우입니다. 나는 그 판례를 따라야 하며 그것을 변경시킬 수 없읍니다.”
그러자 자매는 일어서서 스스로 자신을 위한 변호가 가능한지를 물었다.
“물론 숙녀는 그렇게 할 권리를 가지고 있읍니다. 들어보겠읍니다.” 판사는 의자에 몸을 비스듬히 하고 이 젊은 숙녀의 진술에 귀를 기울였다. 자매는 ‘협회’의 ‘법률부’가 마련한 각서를 낭독했다.
그 논증은 츠바이펠 씨에게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참으로 의심(자신의 독일어 이름 츠바이펠의 의미가 지적하는 바)하기 시작했고 선고를 연기하였다. 이틀 뒤에 속개된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참으로 놀랄 만한 일이었다! 츠바이펠 씨가 그렇게 하는 데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했다. 게다가 대담하게도 그는 고등 법원와 연방 대법원의 판결이 미심쩍고도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평하였다. 이제 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인가?
호의적으로 증언한 진실한 어떤 교역자
얼마 후, 아이글 지방 법원에서 또 다른 사건이 다루어졌다. 재판이 열리자, 법정의 방청객 중에서 한 프로테스탄트 교역자가 증인석으로 불려 나왔다. 그는 전도인에게서 두권의 책을 받고 자진적으로 4프랑(890원)의 기부금을 낸 일이 있었다. 이 교역자는, 그 ‘여호와의 증인’이 온 목적은 책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적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고, 법정에서 명확히 밝혔다. 교역자는 그 ‘증인’ 청년을 행상인이 아니라 복음 전도자로 간주하였다. 그 전도인은 무죄 석방되었다.
한편, 파이에른의 충실한 파이오니아인 카를 마우러는 벌금을 납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1일간의 구류 처분을 받아야 했다.
완악한 주 검사가 끝내 패소하다
1953년, 드디어 이 충돌의 결정적인 대결이 있게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에게 승소하는 데 몰두한 이 주 검사는, 거부 방침을 취한 상급 법원의 판시를 하급 법원이 무시했다는 점에 흥분하여 하급 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그 사건을 반복적으로 상소하였다. 그 때문에 1948년 이래 보주의 고등 법원은 동일 사건을 네 차례나 다루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예상 외의 일이 일어났다. 새로운 판사로 구성된 법정은 그 사건을 근원적으로 검토한 뒤,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행상 행위로 간주할 수 없음을 1953년 1월 26일에 만장 일치로 판결하였다. 주 검사의 상고는 기각되었다. 마침내 보주의 고등 법원은 상업 정신의 법조문과
일치하게 건전하고 자유로운 정책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이 승리로써 스위스의 ‘여호와의 증인’ 사업에 있어서 흥미 진진했던 역사의 한 장이 닫혀졌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전도인의 두려움 없는 태도와 여러 판사의 자유에 대한 사랑이 증명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일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권리와 숭배의 자유를 위한 여호와의 종들의 열렬한 투쟁을 여호와께서 축복하셨음을 증거해 준다.
여전히 도전이 된 중립 문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중립적 입장을 고수한 형제의 형편이 어떠했었는지는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스위스는 전쟁에 적극 참전한 것도 아니고 자국의 중립성을 엄정히 선언했으면서도, 이율 배반적이게도, 종교적 사유로 국가의 취지와 동일한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들은 강력히 비난하며 투옥시켰다.
종전된 뒤라 형량은 가벼웠지만 ‘증인’ 형제에 대한 거듭된 유죄 판결은 여전히 유행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고, 언론은 그 문제를 대대적으로 다루었다. 이 때 즈음하여 군 복무 거부자에 관한 법정 사건에 대해, 전 스위스 군 참모 총장 죄르크 춤 스타인은 흥미있는 논평을 하였다. 1984년 2월에 다음과 같은 그의 논평이 한 신문에 게재되었다.
“나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고 싶어서 법정에 참석했읍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관련된 재판에서 ‘증인’들은 특정 부류의 피고인으로 구분되었읍니다. 피고가 된
그들과 그들의 가족은 매우 점잖은 옷을 입고 출정하였읍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유를 품위있게 변호하였읍니다. 판사는 ‘증인’의 입장을 알고 관행대로 5, 6개월의 형을 선고하였읍니다. 어쨌든 ‘여호와의 증인’은 국가의 요구에 불응하는 사람에게 국가가 선고하는 형벌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현재 군 법정에 출두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국가를 경멸적으로 보지 않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려는 운동은 군 법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현재 형기는 다양하여 3개월에서 5개월 사이이며 보통 그러한 판결로 더 이상의 병역 의무로부터는 면제된다. 형제들은 흔히 그 복역 기간 중에 낮에는 병원이나 양로원에서 일하다가 밤을 보내기 위해서만 교도소로 들어온다. 그러나 해마다 군 법정에는 60 내지 70건의 재판이 열리게 되며 특히 중립을 지키려는 젊은 형제들이 관련되어 있다.
이 젊은 형제들은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키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받’는다. (디모데 후 2:3)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봉사를 수행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친다. 아델 라이헨바히 자매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이 자매는, 앞서 언급된 바 있는 그스타드 산악 지대로 임명된 최초의 ‘증인’ 중 하나였다. 자매는 한 장교의 아내를 재방문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 대령이 문을 열고 아내가 받았던 서적을 되돌려 주면서, “이 쓸데없는 책을 갖고 썩 꺼져 버리시오, 군 복무를 거부하는 사람들!” 하며 경멸적으로 말했다. 라이헨바히 자매는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 우리는 댁에서 거부하는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 이르기 위한 노력
1952년 이후로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서 전파하려는 특별한 노력이 기울여 졌다. 이러한 구역들은 대부분 인적이 드문 계곡과 농장 지대 및 대형 교회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길가에 십자가가 거창하게 세워진 마을들이다. 이런 데서 사는 완고한 가톨릭 교인들이 이전에 전도지를 받았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외떨어진 지역이 철저하게 증거된 적은 없었다.
어떤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서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성서를 본 적도 없으며,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었다. 이곳은 처녀지였다! 전도인들은 담대하고 열정적으로 “임명되지 않은 구역”의 활동에 참여하였다. 많은 곳에서 ‘증인’은 자신들이 거둔 성과에 놀랐다. 아울러 교직자도 놀랐다. 자기들이 목초지로 여긴 곳에 이러한 침입이 있으리라곤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양떼에게 경고하기를, 어떠한 출판물도 받지 말며 받은 것은 불태워 버리고 ‘증인’을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말했다. 한 마을에서는 50명 가량의 젊은 가톨릭 교인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증인’이 남기고 간 출판물을 수거했다. 위협과 신체적 가해도 있었다.
일례로, 한 형제가 마을 사람에게 증거하고 가자, 그 남자는 재빨리 경찰에 전화로 신고하였다. 그런데 경찰로부터 예상 밖의 대답을 듣게 되었다. “그 사람들이 그 일을 하도록 조용히 내버려 두십시오. 그들은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법을 잘 알며 그들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읍니다.” 숭배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
“교회 회보”가 관심을 자극하다
진리가 교구민에게 이르지 못하게 하려는 교직자들의 노력이 역효과를 가져 온 적도 때때로 있었다. 다음과 같은 부부의 경우에 특히 그러하였다. 두명의 젊은 파이오니아가 이 부부를 방문하자, 주의 깊이 전도를 들은 아내는 파이오니아들을 집안으로 초대하였다. “이 이야기는 남편도 관심이 있을 거예요”라고 아내는 말했다. 이 부부는 새 제도를 하나님께서 설립하실 것이라는 성경적 설명을 파이오니아들이 해주자 지대한 관심을 갖고 한 시간 가량 들었다. 성서 출판물을 받고 다음 방문을 약속했다. 곧이어 성서 연구를 열심히 했다.
세번째 방문 후, 그 남편은 자신이 처음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나는 「교회 회보」에서 ‘여호와의 증인’에 관한 짤막한 기사를 읽었읍니다. 그 내용은, 말쑥하게 차려 입고 구변 좋은 두 젊은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들 종교에 관해 성서로 설명한다면 그 말을 듣지 말고 그들에게 교회에 나가며 우리 교직자가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고 한 뒤 문을 닫으라는 것이었읍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나는 자유인이며 내가 직접 검토해 보고 싶었읍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말을 듣게 된 이유입니다.”
이 젊은 부부는 잘 발전하여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곧 야외 봉사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여호와께 헌신을 표상하였다. 이 부부가 진리에 관심을 갖도록 이끈 것은 「교회 회보」였다!
교직자 중에서도 자신의 양떼에게 도움이 필요하며 ‘여호와의 증인’의 방문이 양떼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한 예외적인 사람도 있었다. 예로써 한 교역자는 자기 교회의 신문에다 이러한 글을 실었다.
“친애하는 ‘여호와의 증인’:
“여러분이 우리 마을에서 그처럼 담대하게 집집으로 다니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모든 곳에서 환영을 받지는 않겠지만 어쩌면—추측일뿐이나—주민들에게 이러한 점을 생각나게 해줄 것입니다. 즉,
“빵이나 유흥 외에도, 즐거움과 슬픔, 성공과 실패 외에도, 생존 경쟁과 직업, 일과 오락 외에도, 종교, 믿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앙도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여러분이 방문하는 사실 자체만도 강력한 전도인 것입니다! ··· 아마도 이러한 대답을 듣게 될지 모릅니다. ‘고맙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도 교회에 나갑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교회에 나간다고 답변을 할 때 이런 질문을 그들에게 더 해볼 것을 권합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무엇을 믿으십니까?’
“아시겠지만 이렇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에게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저기서 여러분은 우리 교인을 일깨우는 데 성공할 것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나 자신도 일깨움을 받기 위해 우리 교인 못지 않게 여러분의 방문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용기 ··· 그토록 헌신적인 온갖 활동 및 선한 뜻을 높이 치하하며 칭찬드리는 바입니다! 우리 모두가 여러분의 방문으로부터 많이 배워야 할 것입니다.”
선교인 집이 설립되다
길르앗 선교 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1947년에 스위스에 온 최초의 선교인들은 원래 스위스 지부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세명의 형제와 한명의 자매로서, 이들은 길르앗
8기에 초대되어 갔다가 스위스로 다시 임명된 것이다. 그들이 받은 훈련은 지부 사무실과 야외 활동을 확장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40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 중 세명은 아직도 벧엘 가족 성원으로서, 프레트 보리스와 빌리 딜은 스위스에 있고 앨리스 베르너는 1956년 이후로 독일에 있다.1948년에 다른 선교인들이 왔다. 찰스 레니에와 레이먼드 레스티코우는 순회 사업에 임명되었고, 그들은 자신의 임명을 수행할 수 있기 위하여 독일어를 부지런히 배웠다. 미국에서 온 두쌍의 부부, 즉 로버트 호니와 일레인 호니 그리고 윌리엄 스트리지와 아이온 스트리지는, 1950년에 문을 연 최초의 선교인 집이 있는 제네바로 임명되었다. 이 부부들은 그 지방 형제들과 함께 일하기 위해 프랑스어를 익히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길르앗 15기생인 프랜지스카 트랙코바는 현재 로잔에서 충실하게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있다. 이 선교인들의 규합된 노력으로 제네바 회중은 그 증가가 알려 주듯이 유익한 결과를 맛보았다.
1951년에 로잔에 선교인 집이 설립되고, 길르앗 17기생인 네명의 자매가 로잔에 도착하자 로잔의 회중은 실로 활기를 띠었다. 이 쾌활한 자매들은 특히 다른 자매들이 주제를 사용하여 호별 제공 연설을 하는 법을 발전시키도록 도와 주었다.
새로운 지부 감독자
오랜 세월 동안 충실한 여러 형제가 지부 감독자로서 스위스에서의 사업에 가치있는 인도력을 발휘하였다. 1953년까지는 프란츠 취르체어가 그 임명을 수행하였다.
뒤이어 보다 젊은 사람이 그 막중한 책임을 떠맡아야 할 때가 도래하였다고 판단되었다. 필립 호프만이 독일에서 파견되었다. 1957년에는 쥘 펠러가 호프만 형제와 교체되었으며 호프만 형제는 현재 덴마크 지부에서 봉사하고 있다. 1963년에는 군터 쿨셰브스키에게 스위스 지부의 감독 임무가 맡겨졌다. 그리고 1965년 11월 1일, 빌리 딜이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딜 형제는 1931년에 베른의 벧엘에서 소형 인쇄기를 다룸으로써 전 시간 봉사를 시작했다. 15년 후에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도록 초대되었다. 결혼 후, 아내와 함께 2년간 파이오니아를 하였으며, 순회 및 지역 감독자로서도 봉사하였다. 1964년에 아내와 함께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도록 다시 초대받아, 이번에는 보다 장기의 과정으로부터 유익을 얻었다. 이 모든 것은 지부 감독자로서의 그의 봉사에 훌륭한 터전이 되었다.
다른 나라의 ‘협회’ 지부들 모두가 그러했듯, 스위스도 1976년 이래로 ‘지부 위원회’를 갖게 되었다. 빌리 딜이 지부 조정 위원이고 다른 위원은 아르민 비트셴, 장-쥘 기우드, 라스 요한슨 및 한스 클렌크이다.
티치노 주에 주의를 기울이다
스위스 남부에 있는 따뜻한 지방, 티치노주는 알프스 산맥과 이탈리아 국경 사이에 있다. 이 지방의 공용어는 이탈리아어이며 주민의 절대 다수는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다. 이곳에다 ‘왕국’ 소식의 터전을 닦기란 쉽지 않았지만 ‘협회’는 이곳에서의 미약한 관심이나마 찾아 돌보도록 임명하였다. 형제들 중 이곳에서 실로 풍성한 수확이 있으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독일-스위스 혈통이지만 이탈리아어를 말하는 안드레아스 스가랴 4:10.
몬스테인은 1944년에 루가노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 구역에서 봉사하면서 관심 가진 작은 집단을 돌보고 공개 강연을 하였다. 그것은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시작이었다.—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파이오니아들도 티치노주의 여러 곳에서 진리의 씨를 뿌리는 일을 도왔다. 이 일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주민들은 성서에 대해 전혀 몰랐고 미신에 빠져 있거나 교직자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적은 수의 전도인들은 인내를 나타냈으며 마침내 기대치 않은 곳에서 도움이 왔다.
이탈리아에서 온 선교인들
길르앗에서 훈련받은 여러 명의 선교인이 갑자기 이탈리아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티치노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중 대부분은 이탈리아로 돌아가거나 기타의 이유로 떠나게 되었지만 그 동안에 몇몇 회중이 세워질 수 있는 토대가 놓였다. 형제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한 선교인은 앙젤로 프래세이다. 그는 루가노 선교인 집에서 약 20년간 생활했으며 때때로 “루가노 회중의 천사”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티치노주에서 최초의 증거가 행해진 지도 여러 해가 지났고, 훨씬 많은 전파가 행해졌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오늘날 그곳에서 번성하고 있는 회중은 11개나 되며 약 950명의 전도인이 있다. 루가노에만도 네개의 활동적인 회중이 있으며 최종 결과는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외국인 근로자에게 전파함
전후 스위스의 경기는 호황으로 접어 들었다. 스위스인의 노동력이 최상의 직업으로 간주되는 자리를 점유하게
되자, 비천한 일은 누가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전쟁으로 폐해를 입은 나라에는 기쁘게 그러한 일을 하려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이주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1968년 말에는 외국인 거주자가 전 인구의 15퍼센트나 되는 933,000명을 헤아렸다. 외국인 근로자 대다수는 이탈리아에서 왔다. 형제들은 봉사를 할 때 아주 자주 이탈리아인을 전국 어디서나 만나게 되었다. 많은 이탈리아인이 진리에 관심을 보였다.루돌프 비데르케어의 경험은 그러한 전형적인 예이다. 그는 훈첸슈빌의 낡은 집에 사는 한 이탈리아 근로자를 만났다. 두 사람이 서로의 언어를 잘 몰랐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 형제는 이탈리아어 「파수대」 한부를 그에게 남겨주기만 하였다. 언어 문제에도 불구하고 비데르케어 형제는 재방문을 하였다. 그 형제를 보자마자 이탈리아인은 안으로 들어가서 이탈리아어판 「파수대」를 가져오면서 반짝이는 눈으로 “Questo é la verita!”(“이것은 진리입니다!”)라고 외쳤다. 이러한 반응에 용기를 얻은
형제는 이탈리아어판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 세권을 구해다 주고 그 펠라가티 씨와 그의 아내, 열 두살된 아들 지아니와 함께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가족은 이탈리아어 책을 읽고 비데르케어 형제는 독일어판을 읽었다. 말로 잘 안 될 때는 몸짓을 다양하게 사용했다! 학교에서 독일어를 배우는 그 소년이 통역을 할 때도 있었다.펠라가티 가족과의 연구에 큰딸과 사위인 트롬비 씨도 합세했다. 다섯명 모두가 잘 발전하였다. 그 책이 끝나갈 무렵 전 가족이 가톨릭 교회에서 자진 탈퇴를 선언하고 여호와께 헌신을 표하였다. 이들은 열정적인 ‘증인’이 됨으로써 많은 이탈리아 가족이 진리를 배우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장로이던 펠라가티 형제는 지금 죽음의 잠을 자고 있지만 지아니와 그의 가족은 라이나히에 있는 이탈리아어 회중에서 충실한 ‘증인’으로 계속 일하며 트롬비 가족도 이탈리아 파르마에서 활동하고 있다. 비데르케어 형제는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이러한 경험으로 내가 지금도 누리고 있는 즐거움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라고 그는 외친다.
광범위한 결과를 낳은 비공식 증거
루체른에서 이레네 프렌첼(이 지역에서 여러 해 파이오니아를 했음)은 이탈리아인 미용사에게 무심코 1953년도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미국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여호와의 증인’에 관해 들어본 적이 전혀 없었던 그 미용사는 ‘증인’에 관하여 모든 점을 질문하였다. 근무 후에 토론을 계속하기로 하였고, 이탈리아어를 하는 자매의 도움으로 연구가 시작되었다.
미용사인 브루노 쿨리치는 아주 열심히 배우기는 했지만, 동시에 가톨릭 신앙도 고수했다. 지옥불에 관한 열띤 토론이 오갔다. “우리는 지옥이 있다고 배웠읍니다”라고 고함을 거듭 지르며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나 끝내 성서가 거짓 교리를 제압했으며 쿨리치 씨는 성서에 몰두하게 되어 일주일에 두번 연구하길 원했다. 이러는 동안에도 그는 여전히 교회에서 찬송가를 불렀다. 하지만 때가 되자 거짓 숭배의 사슬에서 풀려 나와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께 헌신하였다. 이제 그같은 노력의 결과에 대해 그가 하는 말을 들어 보자.
“우선 독일-스위스 혈통인 아내와 함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 매우 기쁩니다. 그로 인해 두 자녀를 성서 원칙대로 양육할 수 있었지요. 아르가우주로 이사하고 보니 그 지역에서 이탈리아인 전도인은 우리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이것이 모든 이탈리아인 근로자에게 널리 전파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읍니다. 노력 끝에 수많은 이탈리아인 가족이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는 축복을 맛보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생겨난 일곱개의 이탈리아어 회중을 생각해 볼 때, 이 가슴벅찬 즐거움을 안겨 주신 여호와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쿨리치 형제는 자신과 가까운 이웃들로부터 맺은 결과에만 만족하였는가? 그렇지 않았다. 이탈리아에 있는 가족도 생각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탈리아로 가서 가족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지요. 그 일은 헛되지 않았읍니다. 두명의 누이와 그들의 가족이 루카 지역에서는 최초로 ‘증인’이 되었읍니다. 현재 루카에는 번성하고 있는 회중이 다섯개나 있읍니다.”
그동안 쿨리치 형제는 세속 직장에서 은퇴하여 딸과
함께 정규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다. 아들과 며느리도 여호와를 전 시간 섬기고 있다.믿을 수 없이 빠른 성장
스위스 전도인들은 이탈리아인 사이에서의 신속한 반응과 급속한 성장에 놀라고 말았다. 스위스인과 연구할 때면 스위스 형제들은 수년씩 끌곤 했지만, 이탈리아인은 그렇지 않았다! 이탈리아인은 성서에서 가르치는 요점을 이해하자마자 즉각 실천하였다. 집회 초대에 대한 말을 두번 이상 할 필요도 없었으며 게다가 혼자 나오는 예는 거의 없었다. 친척과 친구를 동반하였으며 이웃이 어떻게 생각할까는 개의치 않았다. 가족의 반대를 극복해야 할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이 가족을 떠나 있고, 스위스 인구층과는 다소 격리된 상태가 오히려 그들의 마음에 뿌려진 ‘왕국’의 씨가 급속히 성장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아르투로 레베리스에 따르면, 그가 이탈리아인 지역에서 순회 사업을 할 무렵인 1960년대 초에 아홉개의 이탈리아어 회중과 몇몇 작은 집단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곧 이탈리아어 회중이 전국적으로 우후 죽순처럼 생겨났읍니다. 이러한 사실은 독일어나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도 이탈리아계 사람들 사이에서의 관심을 돌보기 위해 이탈리아어 회중이 생겨난 것을 의미합니다.” 때가 되어, 다섯개의 이탈리아어 순회구가 형성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순회 대회에 참석하여 이탈리아인 내에서의 사업에 가일층 박차를 더해 주었다.
장로의 훌륭한 특성
이탈리아인들은 가족간의 유대가 긴밀하다. 자녀에 대한 사랑이 극진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일반적으로
연로한 부모를 지극히 존경하며 그들에게 효도한다. 이러한 부드러운 애정은 더 큰 그리스도인 가족인 회중 내에서 훌륭한 장로가 되도록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친절하고 사려 깊으면서도 확고한 장로들의 태도는 이탈리아인 밭이 확장하는 데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그들은 가족 전체를 집회에 정기적으로 동반하여 훌륭한 본을 세움으로 히브리서 10:25과 신명기 31:12의 교훈을 실천한다. 새로이 진리에 들어오는 사람도 그같은 좋은 습관을 본받아 자신의 자녀를 데리고 집회에 온다. 집회에서 가르치는 교훈을 파악하기가 어려운 나이의 어린 아이들이 ‘왕국회관’에서 소란을 피우고 울 때가 이따금 있다. 그렇다 해도 집에 남겨 두고 오는 것보다는 집회에 동반하는 것이 낫다. 때가 되면 그들도 배우고 지혜가 자라게 된다.
종종 사람들이 꽉 들어차면 ‘왕국회관’의 공기가 짜증스럽게 더워진다. 하지만 형제들은 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참고 견딘다. 많은 프랑스어 및 독일어 회중은 자체 회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왕국회관’ 건물을 사용하는 이탈리아어 회중을 위해 더 큰 회관을 물색해야 했다.
이같은 전형적인 상황이 뇌샤텔에 있는 회중에서 발생하였다. 이곳의 ‘왕국회관’은 프랑스어 회중과 독일어 회중이 사용하고 있었다. 후에 이탈리아어 회중과 스페인어 회중도 하나씩 생겨나게 되었고 이어서 스위스 최초의 포르투갈어 회중이 그곳에 설립되었다. 따라서 외국어 밭에서의 증가로 인해 형제들은 더 적합한 집회 장소를 물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아파트를 구입하여 두개의 ‘왕국회관’으로 분할하였다. 이곳에서 현재 다섯 회중이 같이 사용하고 있다!
이탈리아인 다음에 스페인인
또 다른 외국인 근로자 집단은 스페인인들로서, 그 수는 이탈리아인보다는 적었다. 깨어 있는 전도인들은 스페인 근로자 중 많은 사람이 왕국 소식을 알도록 도와 주었다. 이 점을 바젤에 있는 한스 보덴만 자매는 이렇게 설명한다.
“어느날, 별 성과 없는 재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길가에서 두 청년을 보게 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성서처럼 보이는 책을 읽고 있었읍니다. 인사를 하고 보니 그들은 스페인 사람이었어요. 그가 읽고 있던 책은 바로 성서였읍니다. 의사 소통이 다소 어려웠지만 다음날 저녁, 스페인어를 하는 사람과 함께 이 장소로 다시 오겠다는 것을 이해시킬 수 있었읍니다.
“다음날 저녁에 스페인에서 여러 해를 살았던 시겐탈러 형제를 동반하여 그곳에 갔더니 네명의 스페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그들은 이전에 ‘여호와의 증인’을 만난 적이 전혀 없었지만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가정에서 성서 연구를 하자는 데 즉시 동의했읍니다.
“첫 모임에는 여섯명이 모였고 두번째는 여덟명이 모였읍니다. 또한 그들에게 ‘협회’의 영화 한편을 보여 주었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훌륭한 인상을 남겨 주었읍니다. 첫해에는 기복이 심했읍니다. 그만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페인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지만, 새로운 사람이 합세했읍니다. 길가에서 처음에 이야기했던 사람 중 하나인 후안 페레스와 그의 아내가 아주 활동적인 전도인이 된 것이 무척 기쁩니다.”
마침내 1969년 12월에 이 스페인어 연구 집단은 바젤-스페인 회중으로 조직되어 스위스 내에서 두번째의 스페인어
회중이 되었다. (최초의 회중은 1965년에 루체른에 설립되었다.) 후안 페레스는 회중 감독자가 되었다. 그 후 1970년 5월에 그와 아내는 스페인으로 돌아가서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게 되었다.더 많은 스페인어 회중이 조직되어 1972년 이후로는 스페인어 회중만으로 자체 순회구가 형성되었다. 최초의 스페인어 순회 대회 참석자는 185명에 불과했지만 그 이후로 그 순회구는 16개 회중과 1,200명에 달하는 전도인으로 성장하였다.
이 나라에 있는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 밭과 관련하여 ‘협회’가 감사하게 생각하는 점은 스위스에서 사용하는 공용어 외에도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를 말할 줄 아는 형제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예로써, 독일계 스위스 태생이자 언어의 천부적 재능을 지닌 막스 보른하르트는 가족을 부양하면서도 지부 사무실에서 시간제로 근무하며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 순회구를 위해 지역 감독자로서 봉사했다.
가치를 높이 평가받은 ‘협회’ 영화
‘협회’의 영화 상영을 보고 유익을 얻은 사람은 스페인계 외국인 근로자만이 아니었다. ‘증인’ 모두가 그것에 감동받았다. 많은 형제가 농촌 지역의 작은 회중과 연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세계적인 규모로 행해지는 여호와의 사업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인종과 국적에 속한 형제들을 보여 주는 여러 가지 영화는 ‘증인’들에게나 일반 대중에게나 퍽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작고 미미한 집단이 아니라 범세계적인 조직을 본 것이다.
흑인 형제가 ‘왕국’ 사업에 참여하는 장면을 보고 호평이
많았다. 어떤 부인은 아프리카의 침례 지원자들이 옷을 다 입은 채로 물에 잠기는 것을 보고 걱정을 했다. 그 사람들이 침례를 받은 후 젖은 옷으로 걸어 다니게 되면 감기에 걸리게 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기온은 스위스와는 달랐다!이러한 영화는 사람들을 ‘왕국회관’에 참석하게 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에 전파될 것”이라는 점이 성취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하는 데 탁월한 수단이 되었다.—마태 24:14.
파이오니아가 리히텐슈타인에서 길을 열다
「파시즘 혹은 자유」 소책자의 배부에 관한 이야기를 끝으로 리히텐슈타인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 그 이후로 이 깜찍한 리히텐슈타인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파이오니아 자매인 헬렌 크네크틀리는 1956년에 리히텐슈타인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다. 자매는 스위스 쪽으로 흐르는 라인강 유역, 부흐스에 머물면서, 다리를 건너 날마다 리히텐슈타인으로 갔다. 단지 성서만을 사용하여 집집으로 전파하였지만, 관심가진 사람을 만나면 재방문에서 출판물을 남겨 주었다. 크네크틀리 자매는 아주 우정적이고 끈기있는 성품의 여성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호감을 샀다. 그 결과 여러 건의 가정 성서 연구를 가질 수 있었다. 마침내 진리가 랜틀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2년 후,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였던 블란카 헤르텐스타인 자매가 오스트리아로부터 스위스로 이동되었다가 리히텐슈타인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다. 이 자매는 자기 활동을 마태 10:16) 또한 형제들이 관대하게 마련해 준 자동차를 즐겁게 자유로이 사용하여, 아침부터 이 나라 한쪽 경계에서 봉사를 시작하여 마을마다 차례로 전도하다가 다른 쪽 경계까지 봉사하며 하루를 마쳤다. 그랬기 때문에 신고를 받은 경찰이 그를 찾아 나설 때마다 블란카는 땅속으로 사라진 양 보이질 않았다.
매우 기민하게 조직하였기 때문에 경찰은—총면적 160평방 킬로미터에 불과한 이 나라에서—1년 반을 허비하고서야 그와 마주쳤다! 헤르텐스타인 자매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적용하여 한 구역에서 몇 사람을 방문하고는 다른 구역으로 떠났다. (경찰이 자매에게 호별 방문 전도를 금지시켰지만 자매는 벌써 진리에 진지한 관심을 나타낸 사람을 여러 명 찾아냈으며 그들을 계속 돌보고 있었다. 그런 개인적인 방문만은 경찰도 금지시킬 수 없었다.
리히텐슈타인에서 맺어지기 시작한 열매
1961년에 리히텐슈타인에서 온 자매가 함부르크 대회에서 최초로 침례를 받았다. 일년 후, 일곱명의 왕국 전도인이 이 나라에서 보고되었고, 매주 「파수대」 연구가 가정 집에서 열렸다.
그 기간 중에 가톨릭 교회가 전 주민을 장악하면서 정치 세력을 이용하여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대응 조처를 교묘하게 취했지만, ‘왕국’ 사업은 진척되었다. 1965년엔 11명의 전도인이 활동하였다. 후에 그 중 일부는 이사갔고,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려고 독일에서 왔던 두 형제는 이 나라를 떠나야만 했다. 무활동이 된 전도인도 있었다.
그렇지만 진리의 빛은 리히텐슈타인에서 계속 비취고 있었다.편견을 없애준 「깨어라!」 기사
「깨어라!」 1966년 8월 8일호(국문 1966년 8월 22일호)에는 “리히텐슈타인—알프스산의 보석”이란 매력적인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잡지는 전국적으로 배부되었으며, 스위스에서 온 전도인과 리히텐슈타인의 전도인 모두가 이 특별한 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기사는 대단히 좋은 인상을 낳았다. 사람들에게 가까이 하기도 쉬웠고 또 그들은 기쁘게 그 잡지를 받았다. 사람들은 전세계적으로 26개 언어 (당시 「깨어라!」의 발행 언어 수) 사용권의 사람들에 의해 자기 나라 이야기가 읽혀지게 된다는 점을 좋아 했다. ‘협회’는 그 정부의 보도 기관으로부터 훌륭한 기사에 대해 감사의 서신을 받았다.
이 운동 이후로 ‘여호와의 증인’ 사업에 대한 편견이 줄어든 것을 형제들은 느꼈다. 결국 1966년 이래로 전파 사업에 있어서의 난관은 전보다 덜했다.
성에서 근무하는 한 여직원
리히텐슈타인의 수도인 파두츠에 가게 되면, 그곳의 아담한 가옥들 너머로 솟아 있는 성을 멀리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성은 수세기 묵은 유적이 아니라 이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가 실제로 살고 있는 곳이다. 실상 리히텐슈타인의 주권은 민주적 의회제에 근거한 입헌 세습의 군주제이다.
흥미롭게도, 성서 진리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한 유고슬라비아인 여인인 아말리야가 군주의 집인 이 성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아말리야는 고향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알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조금 배웠다. 관례에 따르면 성안의 예배당에서 갖는 기도회에 참석해야 했지만 성서에서 배운 것 때문에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 “예배에 우리와 함께 참여하지 않으면 전하께서 노하실거요”라고 고참 직원이 말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노하실 것입니다”라고 아말리야는 대답하였다. 그 때문에 별 문제 없이 있게 되었다.그런데 그는 언어 장벽 때문에 더욱 난처해진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란, 어떻게 하면 ‘여호와의 증인’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 책을 들고 스위스 부흐스역 근처로 갔다.
행인들에게 그 책을 보이며 각종 손짓을 해가면서 이러한 서적을 전하는 사람을 어디 가면 만날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실망한 아말리야는 본국에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써서 마침내 지부 사무실을 통하여 형제들과 만나게 되었다.이 젊은 여인은 착하고도 믿음직스런 직원이었으므로 군주의 집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 중에서 각별한 인정을 받았다. 그 덕분에 1969년에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에 가도록 허락을 받아, 그곳에서 대단한 감동으로 유고슬라비아어 회기에 참석하였다. 아말리야는 그 대회에서 침례받은 5,095명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회중이 설립되다
1967년 이래, 리히텐슈타인의 자그마한 ‘왕국’ 선포자 집단은 특별 파이오니아 부부인 오스카 호프만과 애니 호프만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그 밭을 충실하고도 끈기있게 일구어 ‘왕국’ 진리의 씨를 뿌렸다. 자라나는 새싹을 경작하며 보살폈다. 그 결과 대단한 수확은 아니지만, 현재 샨에는 약 45명의 활동적인 ‘증인’으로 설립된 한 회중이 아름다운 ‘왕국회관’에서 집회를 갖고 있다. 스위스에서 온 일부 전도인들은 유능한 장로의 필요성을 채워줌으로써 그 회중을 돕고 있다.
리히텐슈타인 공국에서의 사업을 요약하면서, 호프만 형제는 이렇게 보고한다. “우리는 교직자의 반대와 경찰의 방해를 견디어 냈다. 그러한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우리가 견디어 내야 할 문제는 물질주의적 사고 방식과 영적인 문제에 대한 무관심이다. 하지만 리히텐슈타인에 있는 충실한
우리 형제들은 이 도전 역시 직면하기로 결심하고 있다.” 분명히 형제들은 여호와의 도움으로 그 일을 해낼 것이다.라디오 방송으로—드문 기회
스위스의 주요 종교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이기 때문에 소규모 교파는 라디오로 방송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 1956년에 그런 기회가 있게 되었다.
의견이 다른 몇몇 종교적 운동 조직이 ‘복음주의 개혁 교회’ 대표자와 함께 라디오 토론을 갖도록 초대되었다. 그러나 그 초대에 응한 것은 ‘여호와의 증인’뿐이었다. 그 교회 대표자로는 베른 대학교의 신학 교수 한 사람, 고등 학교 남교사와 그리고 여교사가 출연했고, ‘협회’는 지부 직원인 알프레트 루티만과 프레트 보리스를 파견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에 관한 간략한 보고로 그 토론은 시작되었고, 이어서 교수의 간단한 연설이 있었다. 그 다음 여러 가지 제목에 관해 토론이 전개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청취율이 높은 시간대인 토요일 저녁에 방송되었다. 이 방송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자발적이고도 솔직한 반응이 일어났다. 그 내용을 주의 깊이, 열렬하게 청취한 사람은 형제들만이 아니었음이 분명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변호하는 태도를 격찬하는 수십통의 편지가 지부 사무실에 우송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 대표자들의 모욕적인 태도에 반감을 나타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토론 전반에 걸쳐 형제들이 시종일관 성서를 근거로서 참조한 반면, 교회 대표자들은 성서를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여호와의 증인’에게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한 남자는 그 방송이 끝나자마자 지부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큰 소리로 말했다. 방송에서 들은 것 때문에 교회에 탈퇴서를 낸 뒤 그 사본을 보낸 사람도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동안 찾고 있던 것을 마침내 발견했읍니다.”
일간지 「오베를란더」는 이렇게 요약했다. “성서 해석에 관한 토론은 참여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진실되고 실제적인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종교인들을 대하는 그들의 인간적 역량에 대해서 많은 것을 요구한다. ‘복음주의 개혁 교회’는 그러한 과제를 헤쳐나갈 수 없음을 스스로 드러냈다. 유감스러운 말이지만 이 토론에서의 승자와 패자를 결정해야 한다면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의 대표자를 승자로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프랑스어 라디오 방송국에서도 방송
당연하게도,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은 프랑스어 라디오 방송으로도 좋은 증거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했다. 1970년 12월 20일 일요일 저녁에 바로 그렇게 되었다. 이미 수주 전에 프랑스어 스위스 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 소텐스 사무소는 프릴리 회중의 감독자인 앙드레 에셀과 만났다. 그 나라에 존재하는 여러 종류의 사회 및 종교 단체를 다루는 방송 시리즈에서 ‘여호와의 증인’과도 회견을 갖도록 예정되었다.
에셀 형제는 두명의 형제 및 한명의 자매와 함께 그 토론회에 참여하였다. 사회자가 제기한 하나님, 동료 인간 및 전반적 인류 사회와 ‘증인’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 대해 답변이 있었다. 그때가 크리스마스 직전이었기 때문에 이교의
사상이나 관습에 물들지 않은 순결한 숭배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에셀 형제는 이렇게 말한다. “그 토론회가 있은 지 이틀 만에, 또다시 만나자는 제의가 있었읍니다. 사회자는, 성서 원칙에 입각한 그리스도인 중립적 입장으로 인한 개인적 인상과 내적 갈등에 대해 또 한번 방송할 것을 제의하더군요. 나는 수락하였고 그 대담은 1971년 1월 8일 금요일 밤 10시부터 10시 35분까지 방송되었읍니다.” 인식 깊은 평이 많이 따랐고, 특히 진리를 반대하는 남편을 둔 자매들이 그러했다. 이러한 남편들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더 나은 인상을 갖게 되어 아내가 집회에 가거나 봉사에 참여하는 것을 더는 단호하게 금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으로도
‘스위스 텔레비전 협회’는 화면에 ‘여호와의 증인’을 방영할 만큼 편견이 없는 자세를 나타낼 것인가? 1965년 바젤에서 개최된 국제 대회에서 그같은 비약적 발전이 있었다. 이 대회에 관하여 매일 뉴스 시간에 짧지만 호의적 보도가 있었다. 그때 후로 지역 대회에 관한 회견이나 짤막한 보도가 독일어와 프랑스어 방송국에서 방영되었다. 단지 수분에 불과한 방영이었지만 이러한 보도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텔레비전 방송으로써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가장 훌륭하고 세부적으로 보도한 것은 1979년 1월 26일에 이탈리아어 방송국이었다. 40분에 걸쳐서 ‘증인’의 그리스도인 생활 방식에 대해 많은 점이 방영되었다. 벨린초나에 사는 솔다티 형제의 가족 성서 연구가 시청자들에게 소개되었다. 요한 5:28, 29.
이탈리아 밀라노의 대회도 보여 주었고, 툰에 있는 ‘협회’의 지부 사무실과 인쇄 시설의 견학에서는 조직의 활동이 방영되었다. 한 가지 흥미있던 점은, 루가노에 사는 테레사 메디치와의 회견이었는데, 80세에 침례를 받은 그 자매는 당시 98세의 나이로도 자신의 확신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소중한 이 자매는 그후 102세의 나이로 사망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부활의 성취를 확고히 기대하고 있었다.—최대 규모의 모임
스위스 사상 최대 규모의 모임은, 1965년에 주민 20만명 가량의 도시 바젤에서 개최된 “진리의 말씀” 국제 대회였다. 그 대회에는 독일 남부와 프랑스 그리고 여타의 유럽 국가에서 온 수천명의 형제들이 포함되었다. 30,000 내지 40,000명 가량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스위스의 입장으로 볼 때 이것은 거대한 대회였고 준비하는 일도 하나의 도전이었다.
“‘그 많은 사람을 어디에 숙박시킬 것인가?’라는 것이 제일 먼저 떠오른 의문”이었다고 한스 클렌크는 회상한다. 스위스 지역 감독자인 한스 클렌크는 독일에서 온 지역 감독자, 카를 하겔레와 함께 대회를 조직할 책임을 맡고 있었다.
프로그램은 5개국어, 곧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로 진행되었다. 그렇다. 이 대회는 사업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위스로의 여행 허가를 희망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온 2,000명 가량의 형제들에겐 큰 행사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대회에 참석할
수 없었던 형제들도 있었다. 왜냐하면, 형제들이 그리스도인 대회에 참석하려는 것을 관리들이 알고 여권 발급을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바젤에서의 모임을 개최할 즈음, 대회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가까운 독일에서 온 형제들을 포함하여 약 800명의 전도인은 호텔과 학교 기숙사, 야영 장소 및 도시와 인근 마을에 있는 민가에 어떻게 숙소를 배치할 것인지를 지시받았다. 그들은 이 활동을 위해 18,000시간을 바쳤다. 형제에 대한 사랑과 열정에 힘입어 그 임무를 수행해 낸 결과, 참석자들이 물밀듯 들어 왔을 때도 별이 총총한 밤하늘 아래 자야 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우리의 선의에 놀람
커다란 운동장을 대회 장소로 만들기 위하여는 많은 건축 작업이 필요했다. 5개국어 회기를 위한 다섯 개의 연단을 비롯하여 기타의 부대 시설도 필요했다. 77명의 형제 자매가 시간과 힘과 전문 기술을 동원했다. 예로써, 프리타 헤미히 자매는 65세가 되는 날에 가외의 화장실 설치를 위해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이 자매는 아직도 그 일을 “형제들의 총 연합체”에 대한 사랑의 노동에 참여한 특권으로 생각한다.—베드로 전 2:17, 신세.
그 장소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바젤시 소방서장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어떻게 그 일을 합니까? 도시에는 보수를 많이 준다 해도 일꾼이 몹시 부족한데 이곳에는 무보수 일꾼이 이렇게도 많군요.”
독일의 순회 감독자 롤레더 형제는 이 대회 ‘자진 봉사부’의 책임자였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이 대회장에 오려고
4주일이나 여행한 형제의 경우를 언급하여 설명하였다. 그 형제는 바젤에 도착하자마자 ‘자진 봉사부’로 와서는 배관공으로 봉사할 것을 신청했다. 소방서장은 믿어지지 않는 듯 머리를 흔들면서 “참으로 놀라운 일이군요.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어떤 일이건 무보수로 일해 주는 사람은 없읍니다”라고 했다. 물론, 하나님에 의해 기꺼이 사용되려는 사람들을 통해서 여호와의 영이 이룩할 수 있는 실제 일들을 그는 몰랐던 것이다.대회 마지막 날인 1965년 7월 18일에는, “평화의 군왕의 어깨 위에 있는 세계 정부”라는 노어 형제의 공개 강연에 총 36,785명이 참석하였다. ‘여호와의 증인’ 자체 내에서 연합과 평화를 이미 실현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대회 자체가 여실히 전시해 주었다. 참석 수는 독일어 회기에 29,827명, 프랑스어 회기에 3,385명, 이탈리아어 회기에 1,340명, 스페인어 회기에 1,886명 및 포르투갈어 회기에 347명이었다.
새 지부 건물의 필요성
1968년에 노어 형제가 방문하자 중대한 결정이 내려졌다. 협회장은 5월 29일 베른에서의 특별 모임에서 그 결정 사항을 직접 발표하였다. 즉 스위스 지부는 새로운 벧엘 숙소와 공장 건물을 갖게 될 것이었다. 더 나은 시설의 확장이 급박하였으므로 그 소식을 듣고 형제들은 대단히 즐거워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노력을 축복하셨다는 표시였다. 베른의 구벧엘 건물에서 약 32킬로미터 떨어진 툰이라는 곳에 적합한 대지를 찾게 되었다. 이곳은 툰 호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장관의 알프스산이 보이는 아름다운 지역이다. 벧엘 가족은 감격스러워했다!
1969년 2월 11일에 굴착 작업이 시작되었고 3월말에는 콘크리트를 부었다. 이어서 건축 작업은 신속히 진행되었다. 이 건물은 구건물보다 두배나 크게 지어질 예정이었다. 5층으로 된 이 건물에는 가족을 위한 53개의 방 외에도 공장, 창고 및 사무실을 위한 공간이 충분했다. 바닥깔기나 목공 작업 등의 내부 공사의 대부분은 형제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본 바닥을 보강할 목적으로 80톤의 철근을 사용하였는데 그 중 50톤은 오로지 공장 콘크리트 바닥에 쓰여졌다. 공장 바닥을 그처럼 견고하게 지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수년 후에 알게 되었다.
새로운 윤전기도 필요해짐
출판물이 날로 더 필요해지자, 두번째 인쇄기가 새로운 공장에 설치되어야 했다. 그것은 35톤 중량의 만(M.A.N.) 윤전기로서, 브루클린에서 온 밀란 밀러 형제가 이 기계의 설치 작업을 도와 주었다. 물론, ‘협회’가 1924년에 구입한 오래된 윤전기도 있었다. 라인하르트 플레체어 형제는 오랜 동안 그 기계로 일했다. 그는 기계 관리를 위해 자기 개인 시간을 사용하면서까지 “그의” 기계를 닦고 손질했다. 이렇게 애지중지하였기에 일부 벧엘 가족은 그 검은 인쇄기를 가리켜 “라인하르트의 흑인 아내”라고 불렀다! 플레체어 자매는 그 말을 개의치 않고 다른 가족과 더불어 웃어 넘기곤 했다. 그런데 그처럼 관리를 잘하고 정비를 철저히 한 덕분에 그 기계는 툰으로 이사한 뒤에도 장기간 사용되었다. 심지어 플레체어 형제가 1973년에 지상 생애를 마친 후에도 남아 있었다.
새로운 시설에 대한 감사
1970년 5월 16일 그 건물의 봉헌식에서 노어 형제는 고대에 이스라엘의 장막이라든지 솔로몬이 세운 웅대한 성전과 같은 건물이 여호와의 숭배와 관련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상기시켰다. “이 새로운 벧엘 건물이 참 숭배를 위해 봉헌되긴 하였지만 이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지상에서의 여호와의 사업의 권익을 위해 온 마음으로 일하지 않는다면 이 건물은 무가치하게 될 것이다”고 말하였다.
이 새로운 숙소와 작업장에 대해 깊이 감사한 사람은 벧엘 가족만이 아니라 4,000여명의 형제 및 그해 10월의 두 주말에 그 새 벧엘을 공개적으로 개방하였을 때 관심을 갖고 방문한 사람들도 그러했다. 한 자매는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운 건물과 널찍한 공장이 퍽 인상적이더군요.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스위스에 있는 우리 전도인만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의 형제도 영적 양식을 얻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 참으로 기쁩니다.”
이 새로운 건축과 관련하여 재정적인 부담에 직면했을 때 활기찬 관심과 관대한 영을 나타낸 전형적인 예를 다음의 한 젊은 자매의 편지에서 볼 수 있었다.
“친애하는 형제들,
“저는 얼마 전에 견습 기간을 마쳤읍니다. 저의 작업 평가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약간의 상금을 받게 되어 기뻤읍니다. 툰의 새 벧엘 건물을 위해 여러분의 뜻대로 이 돈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좋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므로 80프랑(17,800원)을 동봉합니다.
“여호와의 봉사에서 여러분과 함께 연합하고 있는 자매가 진심어린 사랑과 인사를 전하며,
마리 루이스.”
끈기가 요구됨
스위스인은 대체로 성서 연구를 하면서도 즉각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증인’들은 참을성과 끈기를 많이 나타내야 한다. 경험이 증명해 주듯이 대부분의 성서 연구는 그 사람이 전도인에 대해 신임을 갖게 된 후에야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개인적 복지에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을 확신해야만 한다. 오래된 특별 파이오니아인 그레테 슈미트는 이 점을 예시해 주는 이러한 경험을 말한다.
“여러 해 전에 남편과 나는 루체른에 살고 있는 우정적인 크제히 가족을 알게 되었지요. 그 집 부인은 교사였고 남편은 우수한 보트 선수였읍니다. 둘다 무신론자로 성장했지만 토론은 즐겼읍니다. 그러다가도 하나님이라든가 성서에 관한 제목을 언급하면 그들은 그저 웃기만 하였읍니다. ··· 마침내 그들을 방문하지 않기로 했읍니다.”
그로부터 이, 삼년이 흘렀다. 그때 「파수대」 1976년 10월 15일호(국문은 1977년 8월 1일호)에 동경 올림픽 육상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형제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슈미트 자매는 이렇게 계속 말한다. “나는 이 기사를 읽고 크제히 부부를 생각하였읍니다. 크제히 씨가 바로 그 올림픽 경기에서 은메달을 땄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그 잡지를 가지고 그 가족을 다시 방문했읍니다. 처음에 그들이 스포츠에 관해 이야기하였고 나는 듣기만 하였지요. 그 다음 방문에서 나는 성서에 관해 거듭 이야기하였읍니다.”
그 부부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슈미트 부인, 저희가 무신론자라는 것을 잊으셨군요.”
“그렇지만 이 친절한 가족을 계속 방문하였읍니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다소 석연치 않은 점을 느꼈읍니다. 알고 보니 그 가정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읍니다. 그들은 이미 이혼하자는 말까지 오가는 정도였읍니다.”
슈미트 자매는 성서에서 그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을 보여 주었다. 성서에 들어 있는 실용적 교훈에 감탄한 그 부부는 성서 연구에 동의하였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갈수록 강화되었다. 결국 그 부부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1979년 봄에 침례를 받았다. 이제 지리 런다크 형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전엔 ‘거룩하다’라든가 ‘천사’라는 말을 들으면 귀에 거슬려 듣고 있을 수가 없었읍니다. 집회에 관해서는 듣고 싶지도 않았읍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것이 바뀌었읍니다. 내 개인 시간을 하나님과 가족을 위해 바치고 있읍니다. 또한 친구에 관해서도 달리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제 집회가 매우 중요함을 알고 있읍니다.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이행하는 것도 배웠으며, 행복한 가족 생활을 꾸려가고 있읍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는 법을 알게 해주시고 우리가 그분을 찾기 전에 우리에게 손건네 주신 여호와께 다시금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확실히 끈기는 좋은 결과를 거둔다.
주목할 만하게 많은 청소년 침례 지원자의 수
1975년에 4개 언어로 개최된 순회 및 지역 대회에서 침례받은 총수는 신기록인 1,138명이었다. 그 후로는 그 수가 줄어들긴 하였지만 해마다 평균 560여명이 침례를
받으며, 그 중에 청소년이 많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그들 중에는 가족적 인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겨운 투쟁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들의 열성은 보는 이의 믿음을 강화시켜 준다. 예로써, 한 소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한 독일인 여행자가 와서 내 옆자리가 비었는지 묻더군요. 그렇다고 하자, 그 부인은 앉아서 곧 대화를 나누게 되었지요. 그는 자신이 독일 콘스탄츠 대학교에 근무할 때 청소년을 상대할 기회가 많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청소년에게 가장 가치있는 생활 방식을 제시해 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했읍니다. 나는 그저 수긍할 수밖에 없었읍니다. 내 또래의 많은 아이들이 알콜이나 마약으로 고생하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지요. 끝으로 그 부인은 청소년을 위한 「청소년기—보람있게 사용해야 할 시기」라는 제목의 흥미있는 책에 관해 말해 주었읍니다. 하지만 부인은 그 책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에 갖다 주기로 약속하였읍니다. 그 부인은 실제로 갖다 주었어요. 그런데 그때 내가 몹시 바빴기 때문에 책만 남겨 주면서 말하기를, 자신은 독일로 다시 가야 하지만, 이 책을 갖고 함께 이야기해 줄 사람이 올거라고 하였읍니다.
“한 형제가 방문하였고, 나는 곧 연구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집회에 참석하였읍니다. 여호와께 대한 사랑이 깊어지게 되었지요. 생활은 목적을 갖게 되었고 뜻밖에도 새 친구를 많이 사귀게 되었읍니다. 또한 ‘큰 바벨론’에서 나와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지요. 1979년 2월에 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하였읍니다. 혼자 객지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결정한 대로 하는 것을 막을 사람은 없었읍니다.“그러나 부모님께 그 사실을 알리자 그분들은 노발 대발하셨읍니다! 전화에 대고는 내가 제정신이냐고 물으셨읍니다. 부모님은 내 생각을 바꾸어 놓으려고 온갖 말씀을 다 하셨지요. 그래서 한분이신 참 하나님을 섬겨야만 한다는 사실과 나의 관점을 고수하겠다는 것을 친절하게 설명드렸읍니다. 이튿날 아버지께서 오셔서는 ‘못된 녀석, 집으로 돌아가자!’고 호통을 치셨읍니다. 제 기분이 어떠했겠는지 상상할 수 있겠읍니까?”
이 소년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그는 아버지에게 이끌려 사제에게 갔는데, 사제는 성서적으로는 아무 이야기도 하려 들지 않고 그 소년의 결정을 바꾸게 하려는 말만 했다. 그런 뒤, 부모는 그를 가톨릭 대학에 보내기로 하였다. 그 소년은 이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가?
“몹시 괴로왔지만 솔로몬이 말한 대로 여호와께 확신을 두었지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언 3:5, 6) 처음에는 아주 어려웠읍니다. 일요일마다 성당에 가야 했지만 사람들이 미사에 참여하는 동안 앉아서 여호와께 기도하였읍니다. 증거할 기회가 많이 있었고 회합 시간이면 학교에서 개인 연구를 하였읍니다. 3개월 정도가 지나니까 사제는 더 이상 나를 억지로 예배에 참석시키는 것이 소용없는 일임을 인정하였읍니다. 그 후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학교를 떠나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읍니다. 내가 간 곳이 어디였는지는 누구나 알 것입니다.”
대수도원장과 수차례 만나면서 수도원장에게 잡지를 제공한 적도 있다. 어느 날 대수도원장은 그에게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주제로 세 학급에서 이야기하도록 권했다. 그래서 90명의 학생에게 증거하면서 서적을 배부할 수 있었다. 두 학급에서는 성서에 대한 질문을 매우 많이 하였기 때문에 그 답변을 하는 데 두 시간을 더 허락받아야 했다.이 젊은 형제는 이러한 말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연말이 되자 선배들은 고맙다고까지 말하면서 나처럼 근면한 학생을 보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현재 나는 목적 있는 생활을 누리고 있으며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분의 지적 조직을 통해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1980년 여름 취리히 지역 대회 때 침례를 받고 지금은 파이오니아로서 즐거운 경험을 한껏 하고 있읍니다. 여호와께서 베풀어 주신 자비와 사랑의 친철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합니다!”
새 벧엘에 증축이 필요하다
새로운 벧엘 건물이 활동을 시작한 지 불과 수년 후, 생산량의 증가로 말미암아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함이 자명하게 되었다. 당시 6개 언어로 잡지를 인쇄하였으며 1975년엔 최고 3,100만부까지 생산하였다. 1970년에 스페인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사업이 법적 인가를 받았고, 전도인들이 야외 봉사를 더욱더 정기적으로 참여함에 따라 상당한 양의 스페인어 잡지가 필요하였다. 잡지를 계속 공급해 주는 일은 특권이었다. 포르투갈도 1974년 12월에 사업이 공식 인가를 받게 되었기 때문에 동일한 상황이 있게 되었다. 이 당시에 이미 스위스 지부는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이탈리아어 잡지를 인쇄하고 있었다. 그런데 1981년 이후로는 그리스어와 터키어가 목록에 추가되어 매달 8개 언어로 총 15개호를 인쇄하기에 이르렀다. 후에 「깨어라!」 터키어판이 계간으로 추가되었다.
현 공장 감독자인 라스 요한슨 형제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모든 일을 하는 데 공간이 필요했읍니다. 그래서 벧엘 단지에 새 건물을 증축하기 위하여 정원 부지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읍니다. 이것은 넓은 종이 저장고와 더 나은 시설을 갖춘 ‘발송부’를 위한 것이었읍니다. 아울러 숙소도 더 필요해질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12명을 위한 방도 새로 지었지요.” 이 증축 부분은 1978년 2월에 봉헌되었다.
새로운 인쇄술의 도입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는 사도 바울의 말은 분명 이 땅의 낡은 사물의 제도에 참으로 적용되지만, 인쇄술과 관련해서도 그러한 것 같다! (고린도 전 7:31) 미국과 기타 나라의 ‘협회’ 인쇄 공장에는 세계적 기술 개발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현대 기술을 도입했다는 말을 듣고 언제쯤 이곳도 그렇게 될 것인지 궁금했다.
그 준비 작업이 1980년 겨울부터 1981년초에 시작되었다. 단계적으로, 새로운 ‘도안부’가 증축된 벧엘 건물에 자리잡았다. 우선, 사진 식자법에 의해 「우리의 왕국 봉사」지가 4개 언어로 생산되었고, 7월에는 새로 구입한 평판 오프셋 인쇄기로 「파수대」와 「깨어라!」지 그리스어판을 인쇄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1982년 6월에는 브루클린에서 최초로 개조된 오프셋 윤전기가 도착하였다. 이 기계를 설치할 공간을 위해, 1924년에 구입한 “옛 전함” 윤전기는 폐기시켰다. “옛 전함” 윤전기는 58년 동안 가동되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잡지를 인쇄해 냈다!
그 후 브루클린에서 개조된 두번째의 윤전기가 스위스 지부로 보내진다는 소식을 받았다. 툰의 지부를 건축할 때 공장 바닥을 대단히 견고하게 한 것이 무척 다행스러웠다! 이 인쇄기는 1983년 12월에 도착하였다. 현재 공장은 거의 100개국에 있는 형제들이 배부용으로나 개인용으로 사용할 잡지를 8개 언어로 생산하는 데 손색이 없다.
자신을 기꺼이 제공하다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을 휩쓸고 있는 파이오니아 영이 스위스의 수많은 형제 자매에게도 이르고 있음은 기쁜 일이다. 오랫동안 이 나라의 파이오니아의 수는 약점 중의 하나였지만, 1980년 이래로 정규 파이오니아 수는 101명에서 고린도 전 7:29.
증가하여 271명의 신기록에 달했으며, 그 외에도 64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리히텐슈타인에 있는 2명과 스위스 내의 선교인 3명 포함)가 있다. 남아 있는 때가 줄어가는 동안 더 많은 사람이 파이오니아 봉사에 가담하도록 감동받게 되기를 바란다.—그같은 전 시간 봉사에 참여하고는 싶지만 하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점을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자가 늘어나는 데서 볼수 있다. 1986년 5월에는 최고 1,117명의 전도인이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에 참여하였는데, 1980년도의 361명에 비해 볼 때 괄목할 만하다. 이 점은 앞으로 이 밭에서의 주목할 만한 도정이라고 보여진다.
이러한 풍성한 발전을 하는 데 장로들의 적극적인 태도가 어느 정도로 기여하는지에 관한 실례를 디팅겐 회중은 알려 준다. 자무엘 후르니는 바젤에서 개최된 1985년 가을 순회 대회 때 15명의 보조 파이오니아를 연단에서 소개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하였다. “우리 회중에는 26명의 침례받은 전도인이 있는데 그 중 57퍼센트인 15명이 5월이나 9월, 혹은 두달 모두 보조 파이오니아를 즐겼읍니다.” 후르니 형제의 설명에 따르면, 장로들이 솔선하여 보조 파이오니아를 하기로 동의하였다. 그 다음 회중 성원들에게 가서, “장로들은 모두 5월에 보조 파이오니아를 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해보시지 않겠읍니까?”라고 말하였다. 어떤 전도인은 장로들이 그러한 봉사를 할 수 있도록 헤아려 주었다는 사실에 기쁜 나머지 그 제안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노력에 공동 참여하게 되자, 커다란 성과가 있었고, 회중 전체가 분발하였다. 모두는 이들 파이오니아의 즐거운 영에 힘입어 기운을 북돋게 되었다.—시 110:3.
다양성 속에서 지속되는 연합
스위스의 여호와의 백성의 조직이 가지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언어와 배경의 다양성이다. 그러기 때문에 ‘지부 위원회’가 추구하는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지속적인 연합과 발전을 함께 이룩하는 것이다.
외국어 회중을 형성하는 데는 많은 노력이 든다. 그러한 회중을 돌보는 데는, 회중 및 순회 감독자와의 서신, 보고 분석, 대회의 조정과 조직, 자료 회신 편지의 우송, 야외 봉사 지시와 출판물의 마련 등의 관리 업무가 포함되며, 더우기 그 모든 업무를 4개 언어, 즉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로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지부 사무실의 형제 모두가 그 언어를 아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번역 작업만도 막대한 업무였다.
야외에서 일하는 전도인들에게는 외국인의 증가가 하나의 도전이 되었다. 그들은 외국인과 의사가 통하지 않을 때는 양해를 구하고 그 집을 그냥 지나칠 것인가? 아니면 국적을 알아내어 그의 모국어로 된 출판물을 구해 줄 것인가? 일부 용의 주도한 전도인은 그 이상의 일을 하였다. 즉 외국인을 돕기 위하여 새로운 언어를 배웠다.—디모데 전 2:4.
따라서 앞서 언급한 언어 집단 외에도, 이곳에 있는 유고슬라비아인, 포르투갈인, 그리스인, 터키인 및 타밀인과 베트남 난민 등도 증거를 받고 있으며, 그 중에는 진지한 관심을 나타내거나 이미 여호와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 확실히, 스위스 내에 살고 있는 여러 국적의 사람으로 인해 바로 이웃에다 선교인 밭을 갖고 있는 느낌이다!
벧엘 가족도 다양성을 반영하다
이곳 벧엘 가족 성원은 약 65명이다. 스위스 지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부 중 하나이기 때문에 가족 중에는 기둥처럼 여겨지는 초창기 벧엘 성원이 있다. 종종 방문객들은 장기간 일해 온 성원이 비교적 많다는 것을 알고 감명받는다. 현재 65세 이상의 형제 자매가 12명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215면 참조.) 이들의 벧엘 봉사 기록 연수를 합치면 552년으로써, 일인당 평균 연수는 46년이다.
이 형제 자매 모두는 여전히 열심히 일한다. 몇 사람의 예를 들자면, 87세인 리디아 비덴만은 날마다 식탁을 정리하며, 86세인 쥘 펠러는 안내부에서 일하고, 86세인 아르놀드 로레어는 많은 자전거를 정비하며, 81세인 파울 오브리스트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75세인 빌리 딜은 지부 위원회의 조정 위원으로 일한다.
최근에 지상 생애를 마친 두명의 소중한 형제는 사진에 나와 있지 않다. 그 두 형제 중, 다비드 비덴만은 82세로 운명할 때까지 ‘지부 위원’으로 봉사하면서 검소하고도 지족하는 본을 남겼고, 88세로 사망한 곳프리트 포이즈는 63년간 전 시간 봉사를 하였다. 그는 만년에 ‘예약부’의 성실한 협력자로 일해 주었으며 그의 친절함은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이러한 형제 자매에게는 분명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잠언 16:31) 벧엘 가족 중 젊은 성원은 풍부한 경험을 지닌 그들을 소중히 여긴다. 확실히 연령의 다양성이 연합을 저해시키지는 않으며 언어의 다양성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벧엘에서도 세 가지 공용어를 사용한다. 일용할 성귀 토론과 「파수대」 가족 연구 때 3개 언어로 해설을 들을 때면 언어의 다양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벧엘의 발전
20세기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여호와의 증인’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현대의 과학 기술의 발전은 눈부시다. 의심할 바 없이 여호와께서는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에 전파”되는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것도 단지 한 세대의 생애 안에 그 일을 행하도록 하는 데 있어서, 그러한 현대식 장비를 사용하도록 돌보고 계신다.—마태 24:14, 신세, 34.
이 점을 생각해 볼 때 ‘협회’가 컴퓨터화된 체제를 최대한 활용하는 이유가 명백해진다. 스위스 지부는 1983년 7월에 MEPS(다언어 전산 사식 시스템)를 갖추고 이 다목적 장치를 활용하여 업무를 능률적으로 하는 법을 계속 연구하고 있다. 특히 ‘예약부’와 관련된 막대한 업무량이 여러 대의 퍼스날 컴퓨터를 사용함으로써 상당히 간소화되었다. ‘발송부’에서도 컴퓨터는 업무를 간단하게 하였다.
한편, 그동안 다른 지부를 위해서 많이 해오던 인쇄 업무도 이제 그러한 지부가 새로운 건물과 오프셋 윤전기를 갖추게 됨에 따라 덜게 되었다. 이처럼 분산시킴으로써 시간과 발송 운임이 절약되는 이점이 있다. 최근 들어 각 외국어 판의 인쇄량이 상당히 감소되긴 했지만 아직도 6개 언어로 12종의 외국어 잡지 판이 정기적으로 인쇄되고 있다.
이러한 발전으로 인해 지부 성원 중에는 야외에서 전 시간
전파 활동에 가담할 수 있게 된 사람이 여러 명 있으며, 그들은 훌륭한 봉사 보고를 보냄으로 즐거움을 주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어떠한 입장으로든 기꺼이 사용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시며 부성애로 그들을 돌보신다는 점이 분명하다.국제적 성격의 지역 대회
‘협회’가 1985년도 대회에 특별한 마련이 있다는 발표를 하였을 때 스위스도 그 계획에 들어 있음을 알고 가슴설레었다. 대회가 다가오자 지시를 받고, 외국에서 오는 방문객을 고려하여 독일어 및 프랑스어 “충절 고수자” 지역 대회를 조직하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영어 사용자가 특히 많았기 때문에 취리히의 독일어 대회와 동시에 8월 1-4일까지 나흘 전부 영어 프로그램을 갖기로 계획했다. 미국과 캐나다 및 영국에서 온 형제를 비롯하여 스위스 내에 영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은 기꺼이 연설 임명을 수락했다. 이 영어 회기 대회에서는 드라마를 제외한 모든 연설이 제공되었으며, 방문객들은 독일어 회기에 참석하여 드라마를 즐기도록 초대되었다. 제네바에서 열린 프랑스어 대회에서는 영어 프로그램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두 대회에서 이곳 스위스 형제들은 여러 나라에서 온 대회 참석자로부터 감동적인 보고를 듣고 즐거워했다.
프로그램 전후에, 특히 식당에서 스위스 형제들과 외국 형제들은 서로 어울려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학창 시절에 배운 영어나 독일어를 새삼 되살려 가며 언어 장벽을 넘어서려고 애쓰는 모습은 마음 흐뭇한 일이었다. 그들은 말로는 안 통할지라도 몸짓이나 포옹 또는 눈으로 골로새 3:14, 새번역.
서로를 이해하였다. 이는 진정한 형제 관계의 전시로써, 하나님의 영의 열매인 사랑만이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완전히 연합하게 묶는 띠”이기 때문이다.—거의 1,800명에 달하는 외국인 참석자 중 많은 사람이 증거 사업에 스위스 형제와 동참함으로 이곳에 있는 형제들의 야외 활동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들 대부분은 벧엘 숙소와 공장을 견학하기도 하여 우리를 격려해 주었다.
제네바 대회에 참석한 형제들로부터 감동적인 작별
인사를 받았는데 그 일부를 읽어 보자. “여러분과 헤어지기 전에 꼭 이야기해야 할 점이 있읍니다. 이곳의 산의 높이나 호수의 깊이 등은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은, 웅대하신 창조주께 대한 여러분의 지극한 사랑과 우리 아버지의 의로운 원칙을 고수하려고 노력하는 여러분의 충실성입니다. 우리는 충절 고수자로 남아 있을 것을 결심한 여러분의 태도에 격려 받았읍니다.“언어 장벽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애쓴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고 환영해 준 여러분의 우정적이고 미소띤 얼굴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참으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세계적 형제 가족에 속해 있음을 참으로 감사합니다!”—시 133:1.
이렇게 하여 총 20,601명이 참석한 1985년 지역 대회는 스위스 형제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많이 남겼다. 이곳의 모든 형제는 전세계에 있는 형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계속 전진하면서 여호와와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충절을 고수하고 그리스도인 동료애를 나눌 또 다른 기회를 기대하도록 격려받았다.
전진하기로 결심함
이제까지 1891년 러셀 형제의 최초의 방문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95년간의 스위스의 신권적 발전을 살펴보았다. 작은 물방울로 시작된 진리의 물은 불어 나면서 모든 계곡에 이르렀고 산악 지대의 외떨어진 오두막에까지
넘쳐 올랐다. 도시의 가정을 방문하다 보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사람들은 흔히 우리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을 안다. 이렇듯 왕국 소식은 울려 퍼지고 있고 사람들은 듣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자신의 현 상황에 안전과 만족을 느끼며 그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 즉 하나님의 왕국에 의한 지상의 항구적 평화에 대해선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그러나 여호와의 종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한동안 여호와를 섬기던 많은 사람이 세상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기쁘게도 1986년 5월에 충성스런 ‘왕국’ 선포자 수는 (리히텐슈타인의 42명을 포함하여) 13,659명의 신기록에 달하였다. 1986년 기념식에는 (리히텐슈타인의 82명을 포함하여) 25,698명이 참석함으로써 여호와께서 참으시는 한, 더 큰 증가가 있을 것임을 알려 준다. 흥미롭게도 다수—아마도 절반 가량—의 전도인들은 물질적 생활을 개선하려고 스위스로 이주하였다가 뜻하지 않게 영적인 부를 발견하였다. 많은 전도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서 고향에서 ‘왕국’ 사업을 진척시키는 일을 도왔다. 그리하여 ‘왕국’의 좋은 소식은 그러한 나라에서 퍼져 나갔으며 스위스 증인은 그에 참여한 것을 특권으로 여긴다.
이사야 56:6은 “큰 무리”를 가리켜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 ··· 는 이방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스위스의 수많은 “큰 무리”는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에 있는 73명의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와 더불어 여호와를 끈기있게 섬기며 듣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왕국’ 희망을 연합하여 선포할 것을 결의한다.
[114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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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베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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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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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
장크트갈렌
탈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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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콩베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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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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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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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에른
슈테피스부르크
이베르동
프리부르
툰
프릴리
로잔
제네바 호
그스타드
아이글
론 강
제네바
베린조나
루가노
리히텐슈타인
샨
파두츠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언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만시어
[119면 삽화]
1900년에 ‘왕국’ 소식을 갖고 고향으로 돌아온 아돌프 베버
[130면 삽화]
취리히에서 “황금 시대” 잡지에 대한 관심을 고무시키기 위해 마차에 “평화의 종”을 달고 다닌 형제들
[135면 삽화]
1925년부터 1970년까지의 스위스 지부와 인쇄 공장
[136면 삽화]
마틴 C. 하벡(아내와 함께 서 있음)과 J. F. 러더퍼드
[145면 삽화]
1910년부터 1983년까지 툰 시의 지부 사무실, 예약부에서 벧엘 봉사한 하인리히 드벵거
[149면 삽화]
잊혀지지 않는 루체른 대회에 관하여 알려 주는 「황금 시대」 특별호 표지
[159면 삽화]
1940년부터 1953년까지 지부 감독자였던 프란츠 취르체어
[161면 삽화]
1924년에 벧엘 봉사를 시작하여 86세로 지금도 활동적인 쥘 펠러
[183면 삽화]
지부 위원회의 조정 위원인 빌리 딜과 아내 마르테
[193면 삽화]
리히텐슈타인의 특색인 성
[208면 삽화]
툰에 있는 벧엘 숙소와 사무실 및 인쇄 시설
[215면 삽화]
전 시간 봉사에서 평균 46년씩을 바친 12명의 오래된 벧엘 가족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리디아 비덴만, 마르테 딜, 쥘 펠러, 빌리 딜, 파울 비글러, 마르타 비글러, 파울 오브리스트, 에른스트 체디, 한스 루센베르거, 아르놀드 로레어, 요하네스 포르스터, 요제핀 포르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