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바로 가기

차례 바로 가기

트리니다드 토바고

트리니다드 토바고

트리니다드 토바고

1498년 7월 31일, 콜럼버스트리니다드를 발견하였을 때, 그는 이 섬 남동쪽에 있는 세개의 봉우리를 보았다. 이것을 보고 삼위일체 교리(트리니티)를 연상하게 되었고, 그 후로 그 섬은 트리니다드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콜럼버스보다 수세기 전에 아라와크카리브 인디오가 이 섬을 발견했었으며 그들에게 있어 이 섬은 “벌새의 땅”이었다.

콜럼버스는 이 섬을 발견한 그해에 자매 섬인 토바고도 발견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이 섬이 디포의 소설 무대라고 생각하여 “로빈슨 크루소섬”이라고도 부른다. 토바고란 이름은 인디오가 널리 재배하며 활용하였던 타바코 또는 토바코(Tobacco)란 식물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 같다.

이 섬들은 푸에르토리코에서 시작하여 남 아메리카 쪽으로 뻗쳐 있는 열도의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 실상 트리니다드베네수엘라오리노코강 너머에 인접해 있다. 토바고트리니다드에서 북동쪽으로 약 32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자그마한 이 두 열대 섬은 연중 대부분 쾌적한 푸르름을 지니고 있다. 또한 대조적인 지형을 보이는 곳이 많이 있는데, 아름다운 계곡을 끼고 있는 험준한 산악 지대를 비롯하여 비옥한 평야에 모래 많은 해변도 있다. 토바고는 모래톱과 매혹적인 산호 지대로 잘 알려져 있다.

실로 다국적 주민

원래 담배가 광범위하게 재배되었으나 차츰 카카오 재배가 담배 경작을 앞지르게 되었다. 그 다음엔 스페인, 프랑스 및 영국의 설탕 상인이 대단위 설탕 경작지를 소유하게 되자, 중요성은 카카오에서 설탕으로 바뀌었다. 그 농장주들은 경작하기 위해 수천명의 아프리카 노예를 사들였다. 마침내 노예 해방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농장주들이 노예를 해방시키게 되자, 이번에는 수많은 동인도인들이 도제(徒弟)살이를 하게 되었다. 오늘날 백만명 이상의 트리니다드 인구층을 보면, 극소수의 유럽인과 중국인 및 중동인을 제외하고는 아프리카인과 동인도인이 거의 비슷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들은 결혼을 통해 상당히 복잡한 혼혈층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 결과 참으로 다국적인 인구층이 생겨났다. 결국 영국이 지배권을 획득하여 이 섬들을 식민지로 지배하다가 1962년이 되어서야 독립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힌두교와 회교 및 주요 그리스도교 종파를 포함하여 많은 종교가 있다. 주민들은 우정적이고 인정이 많다. 그러나 이곳 역시 마지막 날의 공통점인 폭력이 있다.

진리의 씨가 뿌려지다

이렇게 여러 민족의 혈통이 섞인 사람들에게 ‘왕국’의 좋은 소식이 선포되기 시작한 것은 1912년이었다. 선포자는 미국인인 이밴더 J. 코워드였다. 당시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회장인 찰스 테이즈 러셀이 이 섬에 성서 진리가 전파되게 하려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코워드 형제를 파견함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다. 코워드는 여러 해 동안 자신의 사명을 이행하는 데, 그리고 현재 ‘여호와의 증인’으로 알려져 있는 당시의 ‘성경 연구생’반을 만드는 데 매우 활동적으로 일했으며 진리를 들으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 및 그들을 위한 정기적인 집회를 조직하였다.

현재 E. J. 코워드로부터 진리를 직접 들은 사람 가운데 생존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1986년초에 사망한 랙비어 볼랜드 가우리는 이렇게 회상했다. “코워드 형제는 ‘이방인의 때’의 끝에 관하여 말했읍니다. 그의 강연은 구두로 그리고 배부된 커다란 전도지로 광고되었읍니다. 그는 늘씬하고 건장한 체격의 사람이었읍니다. 또한 남성적인 목소리로 강조와 변조를 상당히 사용하였읍니다. 그는 요점을 강조할 때면 오른 손을 들어 손가락을 ‘탁’하고 튀기는 습관이 있었읍니다.” 지금은 고인인 또 다른 형제는 이렇게 기억하였다. “그는 퀘이커 오트밀 통에 그려져 있는 남자 같이 생겼었읍니다. 그의 긴 머리는 등을 덮었었지요.”

코워드트리니다드의 모든 주요 도시에서 연설하였다. 강연장은 지옥이라든가 영혼불멸 및 지구의 장래와 기타 제목에 관해 그가 제공하는 성서 진리를 듣기 위해 참석한 군중으로 메워졌다. 「미러」지는 그 형제의 몇몇 강연 또는 그 일부를 실었다. 반면에 「포트오브스페인 신문」은 그를 호되게 공박하였다. 그러나 코워드 형제는 꿋꿋했다. 단순히 호기심을 가진 사람과 진지한 진리 탐구자가 구별되게 되었으며, 곧이어 포트오브스페인에 있는 길버트 L. 탈마의 집에서 정기적인 성경 연구반이 조직되었다. 오래지 않아 장소가 너무 비좁게 되어 1912년에는 필립가(街)에 있는 포리스터 로지를 세내었다. 이 집회 장소는 근 62년간이나 ‘여호와의 증인’에 의해 사용되었다.

“바이블” 브라운이 E.J. 코워드와 함께 일하다

같은 해인 1912년에 자메이카 사람인 윌리엄 R. 브라운이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돕기 위하여 트리니다드에 왔다. 그는 10년 가량을 아내와 함께, 그리고 한동안은 코워드 형제와 함께 일하면서 트리니다드, 토바고 및 이웃 섬의 많은 구역을 돌았다. 이 무렵은 지부의 조직화된 감독이 없을 때였지만 코워드브라운 부부는 생겨나는 작은 집단들을 방문하며 힘을 더해 주었다. 그후 1923년, 브라운 형제는 아내와 함께 감격스럽게도 서아프리카로의 새로운 임명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그는 “바이블브라운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코워드 형제는 여러 곳에서 강연을 하였는데, 그 중 하나는 투나푸나였다. 그곳 ‘성공회’ 신학교 교장인 윌리엄 A. 조던코워드가 가르치는 것이 거짓이라는 점을 찾아내려고 코워드의 강연에 참석하였다. 그는 코워드를 논박할 성귀를 준비했다. 그런데 코워드계시록 21:8을 사용하여 강연을 시작하자 대경 실색하고 말았다. 그 성귀는 조던이 지옥불 교리를 지지하기 위해 준비한 성귀였기 때문이었다. 조던은 솔직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으므로 코워드가 제공하는 성서 진리가 탁월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연설이 끝나자, 코워드에게 직접 찾아가서 그 점을 시인하였다.

조던은 자신이 진리 안에서 발전함에 따라, ‘성공회’ 교회에서 예배를 주재하거나 그 학교 교장으로 있는 것이 바람 직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결정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즈음하여 시력 상실증에 걸려 병 휴가를 얻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이 다시 시력을 되찾아 일하게 된다면 직장에 다시 나가는 그날 사표를 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1915년 3월에 바로 그렇게 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투나푸나에 새로 형성된 ‘성경 연구생’반을 돌볼 수 있었다.

나병 요양소로

아서 가이란 청년은 「미러」지에 실린 코워드의 강연을 읽어 보고 진실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즉시 C. T. 러셀 형제에게 편지하기로 결심하였읍니다. 러셀 형제는 내 편지를 E. J. 코워드 형제에게 보냈는데, 바로 이 사람의 강연을 내가 읽었던 겁니다. 당시 코워드바베이도스에 있었읍니다. 내 편지를 받았던 코워드는 내가 헌신한 것을 확신한다는 내용의 글을 보냈읍니다. 탈마페레이라 형제가 나를 방문할 것이었읍니다. 나는 흥분했읍니다.” 1, 2일 만에 그 약속이 이행되었다.

아서는 진리 안에서 잘 발전하였다. 곧 집회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그때 호된 시험이 닥쳤다. 그는 나병 환자로 진단되어 나병 요양소로 들어가야 했다. 일, 이주일 정도가 아니라 여러 해를 지내야 하였다. 아서는 즉시 자기가 새로 발견한 신앙에 관하여 환자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라는 가톨릭 신자와 토론을 갖게 되었다. 은 교리서를 사용하였으나 성귀는 단 하나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제 아서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떠올린다.

“먼저 나는 청중에게, 이 토론은 우리가 배운 것이나 믿어 온 것, 또는 교리서에서 말하는 것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성서에 기초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켰읍니다. 그리고는 ‘자, 이 문제에 관해 성서가 말하는 바를 들어 봅시다’라고 말하고 창세기 2:7을 인용하였읍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예를 사용하였읍니다. ‘브라운 씨가 의학 공부하러 영국에 가서 시험에 합격하고 자격증을 얻었다면, 그는 의사가 된 것일 겁니다. 브라운 씨가 죽는다면 그 의사도 죽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산 영혼이 되었다면,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영혼도 죽은 것입니다.’” 청중은 큰 소리로 동의하였고, 사회자는 아서가 이 토론에서 이겼음을 인정하였다. 그로 인해 환자들은 아서를 “바이블”이라고 불렀다.

다른 자진자들에게 책임이 부여되다

이 섬에서 코워드 형제의 활동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인데다 당국은 그를 위험 인물로 간주하였다. 1917년경 섬을 떠나라는 요청을 받고 코워드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의 봉사의 직무가 성공적이 되도록 축복하셨다. 진리의 씨가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코워드 형제가 떠난 지 불과 5년 후의 기념식에는 포트오브스페인에서 68명이, 바베이도스브리지타운에서 90명이, 그레나다세인트조지스에서 21명이 참석하였다. 그 사업의 속도는 느렸지만 확실하게 꾸준히 성장하였다.

G. L. 탈마는 ‘협회’의 대표자로서의 책임을 기쁘게 수락하였다. 윌리엄 페레이라여호와의 참 숭배자라는 신분을 밝히 나타냈다. 이 두 사람은 진리를 전파하며 작은 ‘성경 연구생’반을 방문하기 위하여 상당한 거리를 여행하였다. 탈마는 자기 고향인 바베이도스 외에도 그레나다, 영국령 기아나(지금의 가이아나) 및 네덜란드기아나(지금의 수리남)에서도 얼마간 봉사하였다. 페레이라포르투갈인 후손이었기 때문에 유럽인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봉사할 수 있었다.

많은 군중이 「사진극」을 보다

제 1차 세계 대전의 결과, 미국인이 이 섬의 형제들을 섬기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협회’는 1922년에 캐나다 사람인 조지 영을 보내어 형제들을 강화시켜 주었다. 그는 러더퍼드 형제에게 이렇게 보고하였다.

“이 달 14일 아침에 트리니다드의 땅을 밟았읍니다. ·⁠·⁠· 짧은 동안이나마 이곳의 많은 일로 분주했읍니다. 진리는 트리니다드에서 아주 신속히 퍼지고 있읍니다. 이곳의 형제들은 훌륭하게 일하고 있읍니다. 어떤 면에서는 트리니다드가 ‘서인도 제도’ 내에서 진리를 선포하는 데는 최상의 밭으로 여겨집니다.”

트리니다드를 두루 여행하며 「창조 사진극」을 사용하여 대중의 관심을 자극하였다. W. R. 브라운은 그 사진극 중 한편만으로 어느 정도 봉사했지만, 이제는 활동 사진 부분을 모두 갖춘 완전한 상영이었다. 많은 군중은 「사진극」을 보며 해설을 들었다. 이 사업에 관하여 형제는 이렇게 보고한다.

포트오브스페인에서 친구들은 한 극장을 평일의 이틀 밤 동안 빌었지요. 신문에 광고는 전혀 하지 않고 강연 초대장만 5,000매 인쇄하였읍니다. 보통이라면 10,000장입니다. 극장에는 사람이 가득 찼으며 많은 사람이 발길을 돌려야 했읍니다. 이튿날 밤, 이 건물은 인파로 장사진을 이루었는데, 문이 닫히자 그들은 옆에서라도 서서 보기 위하여 극장의 옆문 출입구를 밀어 열었읍니다. 베이얼 사제의 경고도 소용이 없었읍니다. 진리는 트리니다드에서 점차 자리를 굳혀가고 있읍니다.”

형제는 카리브해에서 약 6개월간 머물렀다.

당시의 집회

그 당시의 집회는 현재의 방식과는 달랐다. 1981년에 사망할 때까지 충실하게 일한 윌리엄 A. 더글러스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최초로 참석한 집회는 화요일 밤이었읍니다. 우리는 「그림자인 성막」 책의 한 과를 연구하였읍니다. 그 후 벽에 도표를 하나 걸어 놓고 어떤 형제가 손에 막대기를 들고 무언가를 설명하더군요. 나는 그 형제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읍니다.

“수요일 밤 집회는 기도 모임이었지요. 한 형제가 기도한 뒤 노래를 부르고, 또 다른 형제가 기도한 뒤 노래를 부르곤 하였읍니다. 참석한 모두가 기도를 하였지요. 차례로 일어서서 증언을 하기도 하였읍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얼마나 선한 일을 많이 해주셨는지를 말하였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유혹을 물리치도록 어떻게 도와 주셨는지를 말한 사람도 있었고, 사고를 모면하도록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와주셨는지를 말하는 사람도 있었읍니다. 내 차례가 되었지만 나는 증언할 게 아무 것도 없었읍니다. ·⁠·⁠·

“어머니와 함께 「파수대」 집회에 최초로 참석했을 때의 일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사회자가 질문을 하면 한 형제는 ‘내 생각에는 이러저러 합니다’라는 식으로 대답하곤 했읍니다. 또 다른 사람은, ‘내 생각은 그렇지 않은데, 왜냐하면 이런저런 점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읍니다. 이런 식으로 한 시간이 경과해 버려 끝내 그 연구에서 첫 항도 마무리 짓지 못했읍니다. 이제 우리는 여호와께서 ‘협회’를 통하여 주신 커다란 발전에 대해 그분께 진심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담대하나 슬기가 부족함

1920년대의 형제들은 신권적 슬기로움에 대해 잘 몰랐다. 그들은 사람들의 가정에서 성서 소식을 전할 때 아주 직선적인 언사를 사용하였고 때때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W. A. 더글러스포트오브스페인에서의 한 대회 중에 있었던 경험을 이렇게 기억한다.

“내 기억으론 형제들이 함께 호별 방문하도록 마련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고 여겨집니다. 당시 어리고 미숙한 형제였던 나는 나이든 전도인과 함께 봉사하도록 임명되었읍니다. ·⁠·⁠· 그날은 일요일 아침이었읍니다. 한 집을 방문하여 그 형제는 복도에 있는 남자들에게 서적을 건네 주었지요. 논쟁이 시작되었읍니다. 그 형제는 그 남자에게, ‘당신이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당신 아버지가 사단 마귀이기 때문이오’라고 내뱉듯 말했읍니다. 그러자 그 중 한 사람이 형제에게 다가와서 ‘당신이 내 집에 들어와서 내 아버지가 사단이라고 말하는거요?’라고 하더니 그 형제의 입을 때려 이 두개가 부러지고 말았읍니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거리로 나오면서 그 형제는, 만일 자기가 하나님께 헌신하지만 않았다면 그 젊은이를 혼내 주었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 당시에 자신이 진리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좋은 영을 유지하였읍니다.”

그 당시 형제들이 ‘협회’ 본부에서 온 대표자들로부터 도움을 얻은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함에 따라 생활을 조정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여호와의 영은 형제들이 생각과 표현 및 행동에 있어서 아주 훌륭히 연합을 유지하도록 도와 주었다.

트리니다드 지부의 등록

1932년 5월은 트리니다드에 있어서 중요한 달이었다. 포트오브스페인프레데릭 64번가에 있는 지부 사무실이 정부에 등록되었으며, 탈마 형제에게는 트리니다드토바고의 ‘협회’ 대표자라는 합법적인 신분이 주어졌다. 영국령 서인도 제도의 다른 많은 섬들은 이 사무실로 보고를 보냈다.

증거 사업은 휴대용 축음기 및 보다 강력한 녹음 재생기를 사용함으로써 그 열기를 더해갔다. 1934년엔 6대의 녹음 재생기가 사용되었는데, 이 중 두대는 그레나다도미니카에서, 그리고 네대는 트리니다드에서 였다. 사람들은 그 연설을 듣기 위해 언제나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열려진 창문으로 듣기도 했다. 마음이 정직한 사람은 자신이 들은 바를 인식했다. 다음과 같은 말들이 오갔다. “이것만이 위안을 준다. 같이 가까이 가보자.” “그렇군. 가서 들어보자. 앞으로는 벨몬트로 가지 말고 그 사람[교직자]에게 속지 말자.” 형제들에 의해 많은 휴대용 축음기도 수입되어, 행해지고 있는 증거의 소리를 더 크게 하였다.

성서마저 금지시킨 금지령

정부는 경고도 하지 않고 ‘협회’ 출판물을 수입 금지시켰다. 트리니다드토바고의 대리 총독, 알프레드 월래스 시모는 행정 위원회에서 「황금 시대」를 비롯한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출판물이 선동적 요소가 있다고 규정했다. 1936년 8월 20일자 정령 제 49호에 따라 ‘워치 타워 협회’와 ‘황금 시대 발행사’에서 출판된 모든 서적은 금지되었다. 거기에는 성서마저 포함되었다!

성서가 수입 금지되었다는 점을 총독 아서 플레처 경이 알게 되자 수입 허가서가 발부된 출판물은 어느 것이든 국내로 들여올 수 있도록 하는 또 하나의 정령이 1936년 12월 3일자 제 60호로 위원회에서 발표되었다. 그 후 성서, 「하나님의 거문고」 및 3종의 소책자가 허용되었다. 트리니다드에서는 이러한 상태가 9년간 지속되었다.

그 배후에는 누가 있었는가? 수년 후인 1946년 봄에 당시 경시청장인 콜로넬뮬러는 지부의 종과의 비공식 회견에서 그 금지령이 내려진 사실상의 이유는 ‘협회’ 출판물이 로마 가톨릭 교회를 공격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교직자들이 격분했던 것이다.

1944년 3월 20일에 정부는 압수한 모든 ‘워치 타워’ 출판물을 트리니다드 북쪽, 세인트 킷츠의 한 설탕 공장 화로에서 태워 없애 버렸다. 그래도 ‘증인’은 그들이 갖고 있던 서적을 가지고 분주히 일했으며, 녹음 재생기와 축음기의 사용이 가능한 경우라면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 기기들을 사용하였다. 그러자 경찰은 확성 장치 중 일부도 압수하였다.

금지령이 지속됨에 따라 그 영향으로 인해 전도인 수는 1936년의 293명에서 1940년에는 229명으로 감소되었다. 그렇지만 형제들의 활동은 생산적이었다. 왜냐하면 재방문과 성서 연구 사회를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투옥된 교사

이 박해 기간 중, 투옥당한 트리니다드의 ‘증인’ 중에는 W. A. 더글러스가 있다. 1939년 4월, 자신이 운영한 사립 학교이기도 한 그의 집을 두명의 경찰이 수색하여 「사실을 보라」 소책자를 찾아냈다. 3개월 후에 그는 법정으로부터 소환장을 받았다. 재판은 10월 12일에 열리게 되었다. 그는 ‘전(全) 영 제국 경축일’에 참여하기를 거절하며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비애국 교사라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더글러스는 자기가 운영하는 학교는 사립 학교인데다 그곳에서는 아무런 노래도 부르지 않는다고 자신을 변호하였다. 그리고 사도 행전 5:27-32(신세)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처럼 자신도 “사람보다 통치자로서 하나님께 순종해야”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치안 판사는 더글러스를 유죄인으로서 2개월의 중노동을 선고했다. 더글러스는 상소하였다.

빈센트 브라운 판사가 상소심을 주재하였다. 그는 신경질적이 되어 법정 결의안을 낭독하면서 물을 세 이나 마셨다. 그의 첫 마디는 이러하였다. “이 사람은 사회 생활 하기엔 부적합합니다. 이런 사람이 교사라는 입장에 있다면 그는 아이들이 여왕 폐하에게 충성하도록 가르치지도 않을 것이므로 자유가 허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본 법정은 고명한 치안 판사의 선고를 지지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1940년에 더글러스 형제는 투옥되었다. 투옥되어 있는 동안, 그는 훌륭한 기회를 활용하여 많은 증거를 하였다. 그래서 “사실을 보라”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일요일 아침이면 재소자들 중에는 교도소 교회에서 열리는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더글러스는 재소자들과 함께 문답식 모임을 열었다. 그는 이렇게 보고한다. “교도소에서 지낸 일곱번의 일요일 중 한번은 200명 이상의 재소자에게 말할 특권을 누렸다는 것을 알리게 되어 기쁩니다. 또한 교도소 내의 모든 곳을 다닐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 ‘그리스도의 왕국’이라는 점을 알려 주었읍니다.”

금지령 해제

금지령 기간에 트리니다드에는 한 미군 기지가 설치되었다. 그 기지에 있는 어떤 미국인에게는 미국 본토에서 진리 생활을 하는 친척이 있었다. 그 친척이 「파수대」지를 보내 주기만 하면 그는 그것을 형제들에게 주곤하였다. 형제들은 그것을 타이프로 찍어서 ‘파수대’란 이름은 빼고 회중들로 보내 주었다. 이렇게 하여 금지령하에서도 형제들은 영적 양식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해결책을 강구하려고 1940년 12월 22일에 프린시즈 빌딩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금지령 해제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런던의 ‘식민지 국무상’ 앞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연기되었다. 1945년 9월 11일에 20,851명의 서명을 담은 또 하나의 탄원서가 런던의 ‘식민지 국무상’ 앞으로 보내졌다. 11월 초에 금지령이 해제되었다는 좋은 소식이 들렸다. 출판물은 다시 자유롭게 수입될 수 있었다. 그 봉사년도 중에 지부 사무실은 애타게 기다리는 형제들에게 30,988권의 서적과 77,226부의 소책자를 보내 주었다.

전파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

‘협회’는 전후의 시기를 신권적 활동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로 만들고자 여러 가지 마련을 하였다. 1943년에 ‘신권 전도 학교’가 마련되므로 지방 형제들은 유능한 연사이자 낭독자가 되도록 훈련받게 되었다. 선교인을 훈련시키기 위한 ‘워치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가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므로, 많은 나라에서는 왕국 사업의 문이 열리고 강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1945년에는 각 회중에서 공개 강연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과 아울러 권장된 문전에서의 간단한 성서 제공 연설로 인해 더 이상 축음기와 녹음 재생기의 사용이 불필요하게 되었다. 또한 최초로 ‘워치 타워 협회’ 회장이 카리브해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설레었다. 그처럼 온갖 방면으로부터 마련된 도움은 앞으로의 괄목할 만한 증가에 기여할 것이었다.

알렉산더 타프는 1944년 7월 31일에 제 3기 길르앗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트리니다드로 임명되어 당시 영국령 서인도 제도로 알려진 지부에서 사업을 돌보게 되었다. 그 무렵 길버트 탈마는 고령인데다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타프 형제는 ‘협회’가 임명한 날짜보다 며칠 전인 1946년 3월 24일에 도착하였다.

타프 형제는 노어 형제와 프랜즈 형제가 묵고 있던 호텔 방에서 일어난 일로 감명받아 그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타프 형제가 그들의 방으로 올라가 보니 프랜즈 형제가 자기 구두를 닦고 있었다. 프랜즈 형제는 아무런 말도 없이 웅크리고 앉아 타프 형제의 구두도 닦아 주었다. 이것은 자진적인 행동이었으며 타프 형제는 사도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의 행동을 생각하게 되었다.—요한 13:3-17.

그 대회는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며, “열방들아 기뻐하라”라는 제목의 노어 회장의 공개 강연에 1,611명이 참석하였다. N. H. 노어 형제는 트리니다드에 있는 동안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으로 구입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때까지는 프레데릭 64번가에 있는 뒤쪽 사무실을 사용했었다. 1946년 5월 30일, 포트오브스페인우드브룩에 있는 테일러 21번가의 건물을 구입하였으며, 이것은 26년 동안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으로 사용될 것이었다.

선교인이 성장에 기여하다

10월 4일에 여덟명의 선교인이 더 왔다. 신권 조직이 개선되며 급속히 증가하던 여러 해 동안, 이 지부가 관할하고 있는 여러 섬으로 선교인들이 꾸준히 파견되었다. 포트오브스페인 내의 전도인 수는 1946년에 60명에서 1947년에는 159명으로 급증하였다. 도시의 어떤 지역에서는 그곳의 모든 사람이 선교인과 성서 연구를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때때로 한 선교인은 한달에 30건에 달하는 연구를 사회하기도 하였다.

일부 성서 연구는 참다운 제자를 생산하였다. 최근에 테리서 베리는 이렇게 썼다. “내가 시작했던 가장 뛰어난 연구 중 하나는 매블 긴 및 그의 가족과의 연구였지요. 나와 짤막한 대화를 한 후, 매블 긴이 한 이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읍니다. ‘우리 가족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늘 궁금히 여겨 왔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아주 많은 일을 하셨기 때문이지요.’ 그가 나와 연구를 시작하자, 곧 집회에 참석하고 봉사도 참여했읍니다. 그 가족 열명 모두가 진리에 들어왔읍니다. 나는 지금도 매블과 서신 연락을 하고 있는데, 근 37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아주 활동적인 ‘증인’이랍니다.”

선교인들은 이내 유명하게 되었다. 어느 날, 피터 브라운은 야외 봉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중 지름길을 택해 공동 묘지를 지나게 되었을 때 한 장례 행렬이 묘지로 들어 왔다. 사람들은 피터가 선교인이라는 것을 알아 보고 그중 한 사람이 다가와서 “장례사를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당신이 좀 해주시지 않겠읍니까?”하고 물었다. 피터는 기쁘게 해주었다.

새로운 선교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재조정해 나가야 했고 아울러 지방 형제들도 필요한 조정을 하도록 도와 주었다. ‘왕국회관’에서 그 지방 형제들은 모두 짙은 감색 또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한쪽에 앉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매들은 흰옷을 입고 다른 쪽에 앉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교인들은 여러 가지 색깔의 옷을 입으며 양쪽에 다 앉았다. 오래지 않아 구습은 사라졌다.

이 당시 트리니다드 사무실은 자메이카를 제외한 영국령 서인도 제도의 모든 섬에 있는 작은 집단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순회 감독자들

1946년 후반기에, 길르앗을 졸업하고 쿠바에 있던 조슈워 스틸맨은 ‘회장 집무실’의 대표자로서 트리니다드 지부에서 일하는 한편 형제들의 종(순회 감독자)으로 모든 섬에서 일하도록 임명되었다. 그는 전도인들이 야외 봉사를 나가도록 격려하는 일을 아주 잘하였다. 실제로 그가 섬긴 모든 회중은 전도인 신기록을 달성했다.

이듬해에 바베이도스에 있는 선교인 집은 문을 닫았고, 남아 있던 선교인인 베넷 베리는 형제들의 종으로 일하도록 임명되었다. 그의 경험은 책으로 엮을 정도이다. 교통 수단이란 거의 없었다. 버스가 한대 다녔지만 앉을 자리란 거의 없었다. 닭이나 생선, 염소도 어엿한 승객이었으며 그러한 버스에 탄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느낌을 주었다. 승객들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좁고 꾸불꾸불한 도로는 특히 산악 지대에서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도미니카섬에서 베리 형제는 어떤 회중엘 가려고 산길과 개펄을 29킬로미터나 걸었다. 말을 탄 적도 있었지만 그 말이 넘어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겸손한 형제들이 여호와, 그분의 아들 그리고 여호와의 조직과 그들의 관계를 보다 잘 인식하게 되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 베리 형제는 형제들의 필요에 따라 비이기적으로 봉사해 줌으로 자신의 영성도 자랐다.

대회 광고에 대한 반응

1948년 5월 21일부터 23일까지 포트오브스페인에서 지역 대회를 열기로 하였다. 광범위한 광고를 할 예정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왔다. 그래서, 통례적인 통보 행진과 초대장 및 창문 표식 외에, 이번에는 모든 자전거에 플래카드를 부착한 자전거 행렬대를 구성하였다. 과연 이것은 주의를 사로 잡았다.

대회장이 좁았기 때문에 공개 강연은 그 지역 상업 구획의 중심부인 우드포드스퀘어 야외 음악당에서 저녁 8시에 열렸다. 열대 지방 특유의 보름달이 비추고 있었다. “온 인류에게 다가오는 기쁨”이란 강연을 듣기 위해 3,623명이 야외 음악당에 모인 것을 보고 형제들은 즐거움에 넘쳤다.

야외에서 행한 공개 강연

많은 지방 형제들은 아주 유능한 공개 연사들이 되었고 그들은 순회 감독자들과 더불어 종종 야외에서 강연을 하였다. 그런 식의 강연을 마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상점 주인의 허락을 얻어 그 가게의 길게 뻗어 나온 처마 아래에서 연설이 행해지곤 했다. 전기가 없다면 석유등이나 카바이드 불을 지붕 들보에 매달아 사용하곤 하였다. 그리고 성서와 노트를 위한 탁자를 비롯하여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지역에서 연설이 있게 되는 날짜나 주일을 구두 또는 초대장으로 광고하면 100여명 정도는 모이곤 하였다. 통행인이나 벌레 외에는 방해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범죄와 왁자지껄한 상태 때문에 야외 강연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그러한 야외 강연은 어떤 양 같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알게 하였다. 그같은 강연이 카과나에서 있은 후에 한 젊은 힌두교인은 연사로부터 두 가지 성서 번역판을 얻었다. 그 젊은이는 전 시간 봉사에 가담하였고, 사망할 때까지 여호와를 충실하게 섬겼다.

시비아호와 ‘빛’호

‘협회’가 범선(시비아호)을 구입하게 되자, 보다 작은 섬에 좋은 소식을 가져다 주기 위한 새롭고 흥분된 방법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승무원은 S. J. 카터, G. 메키, R. 파킨 A. 워슬리였다. 그들은 푸에르토리코트리니다드 사이를 일주하면서 모든 작은 섬에 철저한 증거를 하였다. 또한 보급품을 장만하기 위해 들르는 보다 큰 섬들에도 짧게나마 일정 기간 머물면서 대회에 참석하여 즐거움을 나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섬에는 해안을 따라 여기저기 작은 어촌이 흩어져 있었다. 육로상으로는 이러한 마을을 이어주는 도로가 늘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시비아호를 사용하여 이들 고립된 지역에 좋은 소식을 가져다 주는 것은 퍽 실용적이었다.

1953년에 ‘협회’는 시비아호 대신 더 큰 쌍발 모터 선박인 ‘검은 말’(Le Cheval Noir)호를 마련하였다. 이 배는 후에 ‘빛’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1953년 11월 9일부로 그 배의 모항(母港)은 트리니다드로 등록되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에 노어 형제가 우드포드스퀘어에 모인 3,269명의 청중에게 연설할 때 ‘식민지 장관’인 모리스 도먼도 참석해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7월 6일, 당시 대리 총독이던 도먼 씨는 ‘빛’호의 승무원들은 바람 직하지 못한 방문객이라고 생각한다는 ‘행정 위원회’의 각서에 서명하였다. 1954년 9월 25일에 ‘빛’호가 바베이도스에서의 대회 일을 마치고 항구로 돌아오자 이민국 관리들은 그 승무원들을 상륙 허가하지 않는다는 통지를 송달했다. 관리들과의 협상과 면담도 소용이 없었고, 그 배는 10월 5일 이전에 떠나야 한다는 명령이 주어졌다. 그 몇해 사이에 카리브해에 몰아닥친 태풍 중 최악의 태풍을 맞이하면서도 ‘빛’호는 떠나야 하였다.

본토 형제들이 봉사함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할 수 있었던 본토 형제들은 이제 더욱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미 원주민 출신의 순회 감독자들이 외국 선교인들을 상당히 대체한 상태였으며, 때가 되면 완전히 대체할 것이었다. 1950년과 1951년에 토바고스카보러에 마련된 선교인 집이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대중에게 있어 백인을 싫어하는 일부 사람들의 태도는 선교 봉사의 효율성을 방해하였다. 그 결과 1954년에 두명의 본토 특별 파이오니아에드워드 해리올리버 스미스토바고에서 ‘왕국’ 사업을 확장시키도록 임명되었다. 이것은 성공적이었으며, 적어도 일부 지역에서는 자격있는 본토 형제들이 외국 선교인보다도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실증해 주었다.

그때 이후로 일부 본고장 특별 파이오니아들 중에는 ‘워치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 참석하고 트리니다드로 돌아온 사람들이 있다. 그중 두명은 테레사 친 치팟실비아 퍼멜이었다. 이 두 사람은 충실하고도 열정적으로 봉사하였고 여호와께서는 이들의 제자 삼는 사업을 축복해 주셨다. 테레사는 46명의 영적인 “자녀”를 두는 축복을 누렸고 실비아는 59명이 여호와께 헌신하고 침례받도록 도왔다.

성장으로 인해 새 지부가 필요해 짐

1954년 1월에 노어 형제의 방문에서 리워드 제도에서의 ‘왕국’ 사업이 충분히 성장하여 별도의 지부 사무실을 가져도 되겠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리워드 제도 지부는 아홉개의 섬, 트리니다드 지부는 일곱개의 섬을 관할하게 되었다. 1966년에 바베이도스 지부가 설립되자 또 한번 분할하게 되었다. 이제 트리니다드 지부는 트리니다드토바고섬만을 돌보게 되었다. 밭이 점점 줄어들긴 했지만 그것은 ‘왕국’ 사업이 확장되어 가기 때문이었다.

1950년대와 그후로 전도인의 수자는 별로 늘지 않았고 어떤 해에는 줄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경작될 만한 관심의 밭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렇게 되는 주 요인은 경제 상태 때문이었다. 실업률이 높았고, 임금은 적었고, 가족은 많았다. 이 점은 ‘증인’이나 다른 사람에게나 매 한 가지였다. 따라서 그 기간 중에 영국과 캐나다 및 미국으로 이민가는 ‘증인’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영적인 성장은 확연하였다.

적합한 왕국회관의 마련

1959년말, 트리니다드의 한 형제는 일부 회중의 ‘왕국회관’을 건축하기 위해 회중들에게 권하여 그들의 자금을 함께 내놓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당시 지부의 종인 로버트 D. 뉴턴과 논의하였다. 그 당시만해도 트리니다드에는 ‘왕국회관’이라곤 자그마한 것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1940년도에 산페르난도에 건축된 것이다. 마침내 ‘왕국회관 기금’이란 것이 마련되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산후안에 아주 커다란 ‘왕국회관’의 건축이 시작됐다. 거의 모든 인력은 자진 봉사였다. 모두가 ‘증인’인 일단의 남녀가 콘크리트를 혼합하고 그 콘크리트를 붓기 위해 양동이 조가 편성되어 있는 모습은 대단했다. 1961년초에 그 회관은 완공되었다. 그곳은 바로 그 해부터 시작된 ‘천국 전도 학교’ 학급을 위한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때를 같이 하여 또 하나의 ‘왕국회관’이 지어지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포트오브스페인에 있는 라벤틸 회중을 위한 것이었다. 자금이 곧 부족해지긴 했지만 회관 건축용으로 ‘협회’가 마련해 놓은 대부금을 받을 수 있었다. 더 많은 회중이 훌륭한 ‘왕국회관’을 건축하기 위하여 이 마련을 활용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27개의 ‘왕국회관’이 있으며, 가까운 시일 내에 더 건립될 계획이다.

1985년 5월에는 ‘왕국회관’ 건축에 있어서 새로운 일이 생겼다. 형제들은 다른 나라에서 속성으로 ‘왕국회관’을 건축한다는 소식을 듣고 흥분하였다. 그 일이 트리니다드에서도 가능할 것인가?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하여 건축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활발한 토론이 있은 뒤에 시패리아 회중에서 한번의 주말이 아니라 두번의 주말에 걸쳐 회관을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다. 형제들의 호응은 열렬하였다. 과연 두 주말에 그 일을 해냈으며 시패리아의 형제들은 현재 새로운 회관을 즐거이 사용하고 있다. 이 모든 건축 활동은 틀림없이 이 섬들에서의 왕국 전파 사업의 확장에 기여하고 있다.

지방 협회 설립

성장을 돌보기 위해 새로운 지부 시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1963년에 타프 형제가 다시 지부 감독자로서의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간 15년의 공백 기간 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그 책임을 맡았었다. 런던의 ‘만국 성경 연구회’의 이름으로 토지 임대 신청서가 제출되었다. 허가가 거부되었다. 당시 좋은 장소가 세 곳 있었고, 세 곳 모두 시의회로부터 건축 허가가 나올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만국 성경 연구회’란 이름하에 그 권리의 보증을 얻을 목적으로 ‘수상 집무실’에 허가증을 요청하자 거절당했다. 한 토지 소유주는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여러분이 지방 협회를 설립하는 것입니다.”

법적인 자문을 구한 뒤, ‘여호와의 증인’의 지방 협회를 설립하기 위해 필요한 단계를 밟았다. 1968년 8월 18일에 회중의 종들과 지부 사무실 임원과의 모임이 그 협회를 설립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협회’의 정관 초안이 작성되고 ‘자문회’가 발족되었다. 마침내 국회의 상하 양원에서 사법률안(私法律案)이 발기된 후에 한 가지 법안이 확립되어 1969년 8월 7일자로 승인되었다. 이제 형제들은 법적 ‘협회’를 소유하게 되어 토지의 소유와 구입 및 매각에 있어서 정부의 허가증이 필요없게 되었다.

이제 ‘왕국회관’의 모든 소유권은 그 지방 ‘협회’로 귀속되게 되었고 앞으로 모든 토지 구입은 트리니다드 토바고 여호와의 증인의 협회’명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결혼 주례자도 선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여호와의 증인’이 정부의 민원 담당관의 주재하에 결혼식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대회 마련

조직이 성장함에 따라 연례 지역 대회를 위해 보다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는 일이 시급해졌다. 벌써 오래 전부터 극장에서는 볼 수 없었다. 부족하나마 두 장소, 산후안히말라야 클럽포트오브스페인퀸즈 홀을 구할 수 있었다. 해마다 이 장소가 사용되었다.

당시 그 지방의 에릭 그레고리오 형제는 퀸즈 파크 서배너 경마장의 그랜드 스탠드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고 실제로 얻었다! 이 일은 이 훌륭한 장소를 사용하도록 허락받았던 1932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회는 1970년 10월 1일부터 4일까지 열기로 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1970년초에 흑인 세력의 데모가 벌어졌다. 싸우고 방화하고 여러 명이 죽었다. 4월에 비상 사태가 선포되었고 통행 금지령이 내려졌다. 지역 대회는 열리게 될 것인가? 7월에 순회 대회를 열 수는 있을 것인가? 놀랍게도, 경시 총감은 모든 대회를 열도록 허가하였다.

포트오브스페인에서의 가장 큰 대회를 제외하곤, 나머지 순회 대회는 별 문제 없이 열렸다. 이곳의 대회가 열리기 직전에 순회 감독자는 경시 총감으로부터 대회는 열 수 있지만 어떠한 확성 시설도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경시 총감과 면담을 하였지만 성과가 없었다. 다음에 한 참석자가 국가 보안 국장을 만나려고 했으나 할 수 없었다. 경시 총감의 생각을 바꿔 보려고 시도한 두번째의 만남에서도 경시 총감은 안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래서 금요일 프로그램은 확성 시설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1,300여명의 청중에게 제공되었다. 토요일 아침에는 전직 경찰관이었던 한 형제가 경시 총감을 만나려고 했으나 경시 총감은 주말에는 근무하지 않았다. 형제들은 가능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였다.

이윽고 토요일 정오쯤이 되어, 진리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한 젊은 부인이 이 문제에 대해 무언가를 해볼 결심을 하였다. 이 부인은 금요일 밤에 참석했지만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경시 총감을 잘 모르지만 그의 집에 전화하기로 하였다. 우선 여호와께서 경시 총감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시도록 기도하였다.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경시 총감은 아직 ‘여호와의 증인’도 아닌 사람의 요청을 들어 주었다! 그 결과 그 대회의 남은 기간 동안 훌륭히 확성 시설을 사용하였고, 공개 강연에 참석한 2,187명은 명료하게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선의자” 지역 대회가 10월에 그랜드 스탠드에서 개최되었을 때에는 아무 방해가 없었다. 그 넓은 장소가 지붕으로 덮여 있는데다가 그랜드 스탠드 바로 근처에 충분한 주차장도 있어서 참으로 좋았다! 대회의 마지막 날에 비가 퍼붓기는 했지만, 3,239명이 참석하였다. 형제들이 그랜드 스탠드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청결한 상태로 떠나는 선례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 후 순회 대회나 지역 대회를 열기 위해 그랜드 스탠드를 빌리게 될 때에도 더 이상 어려움이 없었다.

죽기까지 충실하게 봉사함

단지 그리스도 예수의 기름부음받은 형제들만 죽기까지 충실하게 봉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양” 역시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심지어 죽음을 직면할지라도 충실함을 증명해야 한다. 선교인들 중에서 참으로 그렇게 한 사람들이 있었다.

에드먼드 찰루드제리 도링은 1949년에 이 나라에 왔다. 곧이어 에드먼드는 순회 사업에 임명되어 트리니다드 지부 관할하의 모든 섬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타오르는 열대 지방의 태양 아래서, 그리고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형제들과 함께 야외 봉사를 하느라 분주했다. 또한 기쁜 마음으로 형제들의 초라한 숙소에서 유숙했으며 빵나무 열매와 소금에 절인 생선만으로 차려진 식사에도 아주 익숙해졌다. 그는 처음에는 순회 감독자로서 그리고 후에는 지역 감독자로서 19년간 여행하였다. 에드먼드가 고령이 되자, 제리에게 그 임명이 주어졌다.

한동안, 제리는 아내와 함께 바베이도스에서 봉사하였다. 그러한 전 시간 봉사의 기간은 그가 지역 감독자로서 효과적으로 일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1971년 2월 중, 아내와 함께 야외 봉사를 하던 제리에게 갑작스레 참극이 발생했다. 큰 길로 들어 오면서 멈추지 않은 자동차가 이 부부를 친 것이다. 도링 형제는 다음날 아침 사망하였다. 그는 트리니다드에 온 이후로 거의 22년간을 충실하게 봉사하였다. 그의 사망은 참으로 큰 타격이었다.

에드먼드 찰루드는 노쇠로 인해 약해져 가면서도 적은 힘으로나마 선교인 집에서 계속 봉사하였다. 결국 1976년 8월에 이 충성스러운 형제는 사망하였다. 그의 미망인 엘시제리의 미망인 앨리스는 계속 선교 봉사를 하고 있다.

시비아호와 ‘빛’호의 승무원 중에는 스탠리 카터가 들어 있었다. 그는 여러 섬에서 다른 형제들과 더불어 좋은 소식을 열심히 선포하였다. 과 결혼하고나서, 이 부부는 그레나다세인트조지스에 선교인 집을 개설하도록 임명되었다. 쉽지 않은 임명이었지만 끈기있게 해내었고 마침내 그들의 노력에 대한 여호와의 축복을 맛보았다. 1965년에 스탠리가 심한 병에 걸려 치료를 받기 위해 그들은 캐나다로 갔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스탠리 형제는 오랜 동안의 충실한 봉사를 마쳤다.

이와 같이 충절을 고수한 선교인들은, 현재 하나님의 기억 속에 있는 그같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불러 내실 때까지 쉬고 있다.—요한 5:28, 29.

놀라운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

이러한 섬에서는 상당한 기간에 걸쳐 보조 파이오니아 활동을 확장시키려고 끊임없는 방법을 강구해 왔다. 1960년대에, 지부 감독자는 지역 및 순회 감독자가 회중 감독자들과 갖는 순회 대회의 모임에 항상 참석하였다. 그는 5분 내지 10분간 연설하면서 회중 감독자들이 4월에 임시(보조)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도록 격려하였다.

그 후 1968년 1월에 히말라야 클럽에서 열린 순회 대회에서, 한 형제는 “파이오니아 봉사—진정한 즐거움”이란 주제로 ‘봉사회’의 한 부분을 맡았다. 그 건물에는 온통 “VPA”란 글자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그것은 무슨 의미였는가? 그 형제가 담당한 시간이 되자, 한 건장한 형제가 자기 몸의 앞 뒤에 간판을 걸치고 연단으로 나왔다. 그 간판에는 “1968년 4월”이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형제의 이름은 “빅 에이프릴”(중요한 4월이라는 의미)이었다. 그제야 청중은 VPA의 의미가 “4월에 임시 파이오니아 봉사를 (Vacation Pioneer in April)”이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형제들은 그 실연을 결코 잊지 못했다.

처음엔 점진적으로, 그러다가 신속하게 형제들은 그러한 격려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침례받지 않은 어린이와 어른들도 임시 파이오니아와 함께 봉사하면서 동일한 목표에 달해 보도록 격려받았다. 247면의 도표가 알려 주는 것처럼, 1978년 부터 놀라운 결과가 생겨났다.

포트오브스페인벨몬트 회중에서는 장로들이 형제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그들에게 신청서를 주면서 읽고 임시 파이오니아 봉사에 관해 생각해 보도록 하였다. 주간의 매일의 봉사 시간 계획표를 도표로 만들어서 게시해 놓음으로 주부와 직장인 그리고 학생이 어떻게 시간 목표에 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모두가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를 생각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왕국회관’ 벽에 표어를 걸어 놓았다.

벨몬트 회중의 성공 사례를 안 다른 회중에서도 비슷한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85년경에는 거의 모든 회중에서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에 대한 훌륭한 지지가 있었다. 벨몬트 회중의 경우, 총 전도인의 75퍼센트가 보조 파이오니아였고, 야외 봉사의 평균 시간은 63시간이었다. 아리마이스트 회중은 73퍼센트 그리고 마라발 회중은 63퍼센트 이상이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다. 이상의 회중들은 각기 전도인이 100명이 넘는 큰 회중들이다. 93명의 전도인을 보고하는 코코예 회중의 경우,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의 대열에 참여한 수는 78퍼센트였다.

어떻게 그처럼 많은 사람이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를 할 수 있었는가? 한 자매는 이렇게 설명한다. “장로로부터 연설을 들은 후 그 달의 7일이 지나기 전에 신청서를 제출했어요. 한 젊은 자매에게 같이 하자고 격려하였지요. 그 자매는 동의하였읍니다. 또한 그 자매의 부모에게, 그 자매와 함께 이른 아침에 가두 봉사를 하기 위해 이따금 우리 집에서 같이 자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읍니다. 나의 계획표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6시 30분쯤 거리로 나가 8시까지 봉사한 뒤, 직장에 나가는 것이었읍니다. 오후에도 두 시간 남짓 봉사하였지요. 토요일에는 직장이 쉬기 때문에 같은 시각에 시작해서 점심과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는 저녁 9시까지 봉사함으로 적어도 10시간은 하였지요. 일요일에는 야외 봉사를 1시간만 했어요. 그 자매 외에도 가두 봉사를 하는 다른 형제들을 만나면 몹시 반가왔읍니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나 혼자서 그렇게 늦게까지 봉사할 수 없었을 겁니다. ·⁠·⁠· 봉사 시간은 75시간에다가 재방문은 12건, 그리고 두건의 가정 성서 연구에, 잡지는 716부를 전했읍니다. 내 보고를 보면서 누가 복음 17:10이 생각났읍니다. ‘내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어떤 회중에 있는 70대의 한 자매는 해마다 여러 차례 파이오니아 봉사를 한다. 1985년 4월에 그는 몹시 앓았지만, 4월 15일경에 조금 나아지는 듯하자, 다시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기 원했다. 관절염에 걸린 자신의 몸을 침대에서 가까스로 일으킨 자매는, 자신이 죽어가는 것이라면 파이오니아로서 여호와의 봉사에서 활동하다가 죽고 싶다는 것을 알렸다. 자매는 대단한 노력을 기울여 가두 봉사에 참여하였다. 그러자 그 회중의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 차를 사용하여 도와 주었다. 단지 10일만에 월 목표 시간에 도달하였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자매는 여전히 활동하고 있으며 또다시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를 계획하고 있다.

벧엘의 전 가족도 증가된 이 야외 봉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봉사는 어떤 오래된 벧엘 가족 성원이 이렇게 말한 바와 같다. “몸은 좀 피곤했지만 기분은 정말 상쾌하더군요!”

특별 교육 마련

1961년에 최초의 ‘천국 전도 학교’가 트리니다드에서 열렸다. 모든 특별 파이오니아가 참석할 특권을 받았다. 확실히, 그들은 이 특권을 감사히 여겼으며, 그 과정을 통해 유익을 얻었다. 그러나 후에 정규 파이오니아 형제들도 그 학교 과정을 통해 유익을 얻을 기회가 있었다. 1985년에는 모든 봉사의 종이 특별 과정을 통해 유익을 얻었다. 분명히 전 시간 봉사를 향한 영이 나아지고 있으며,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1977년에 「세상에서 빛을 비추는 자들이 되라」는 제목의 아름다운 책이 2주간의 파이오니아 강습 과정의 기본 교재로 마련되었다. 이제 자매들도 고무적인 격려와 교훈을 많이 얻게 되었다. 이것은 전 시간 봉사, 특히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에 훌륭한 영향을 미쳤다. 파이오니아 영이 회중 전도인들에게 스며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이 점은 특히 1978년 4월에 500명의 보조 파이오니아라는 훌륭한 신기록에 달함으로써 두드러졌다.

감사의 편지가 많이 날아왔다. 그 중 하나를 읽어 보자.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에 대한 감사함을 말씀드리고자 이 편지를 드립니다. 그것은 참으로 제때에 ‘’로부터 온 훌륭한 마련이었읍니다. 강습에 참석하기 몇달 전에, 남편은 순회 사업을 시작했으며 나도 동행하였읍니다. 그 일은 내게 정말 도전이었읍니다. 이처럼 세밀한 과정 덕분에 그러한 도전을 직면하게 되었읍니다. 이제 나의 호별 제공 연설이 보다 효과적이고 흥미있으며 성공적이 됨에 따라, 야외 봉사는 내게 의미를 더해 주게 되었읍니다. 이 점은, 집주인에게 보다 더 개인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점에 관해, 강습을 통해 받은 훌륭한 제안을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인상적인 점 중 하나는,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우리의 사업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동역자이기에, 그분과의 친밀감을 발전시킬 필요성이 있음을 밝혀준 사실이었읍니다. 이 점은, 봉사를 하는 동안 보다 더 자주 기도로 그분을 불러야 할 필요성을 인상 깊게 해주었으며, 그분의 후원을 보다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도록 해주었읍니다.”

확장으로 인해 새로운 시설이 필요해 짐

테일러 21번가에서 26년을 지낸 후, 1972년 5월에 포트오브스페인 바로 외곽에 마련된 새로운 숙소와 지부 사무실로 이전하였다. 그것은 새 건물은 아니었지만 분명 전에 있던 장소보다는 우리의 필요에 더 잘 부합되었다.

이 건물을 매입해야겠다고 결정할 때, 이곳이 마라발강에 인접해 있다는 점을 유의했었다. ‘협회’가 이곳으로 이전하던 시기는 건기였기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에게 조사해 보니 이 지대로 물이 넘칠 염려는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갑자기 밀어 닥친 홍수로 인해 그 강이 난폭한 급류로 되면서 사무실과 좀 낮은 층에는 한자 정도의 흙탕물이 차올랐다.

강둑을 따라 벽돌 담장을 쌓은 후, 여러 해 동안은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1975년에 파괴적인 홍수가 발생하여 그 담장을 무너뜨리고, 1층에 물이 1.2미터나 고이면서 수천부의 서적과 사무실 집기 및 서류를 못쓰게 만들었다. 한 기술자의 제안에 의해, 기초 두께 1.2미터의 돌벽을 첨탑처럼 2미터의 높이로 건물 주변과 강둑을 따라 쌓아올렸다. 펌프도 가설하였다. 그러나 1980년에 또다시 재난이 엄습하였다. 지부 건물과 이웃 집 사이의 이 돌벽이 무너졌으며, 그로 인해 수의 물이 삽시간에 지부 숙소로 밀어 닥쳐 문을 부수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생명을 위태롭게 하였다. 그 후 30일도 못 되어 두 차례의 홍수가 더 닥치자, 보호벽이라곤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많은 형제들이 와서 청소 작업을 도와 주었다. 이웃 사람들은 홍수로 인해 생긴 수에 달하는 퇴적물이 치워지는 것을 보고 자기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다시금 정상화된 것처럼 보였다. 철근 콘크리트로 보강한 새로운 벽을 곧 세웠지만, ‘지부 위원회’는 지부 사무실을 이전할 것을 ‘통치체’에 건의하였다.

새로운 지부 시설

홍수에 대한 위험성에 더해, 숙소와 사무실은 일하기엔 너무 비좁아졌다. 더는 회중의 필요를 돌볼 만큼의 충분한 공간이 없었다. 1972년 이래 전도인 수가 40퍼센트 가량 증가하였다.

‘통치체’는 ‘지부 위원회’의 제의를 승인하였다. 얼마 안 되어, 포트오브스페인과 공항 사이에 있는 4,000여 평방 미터의 대지가 선정되었다.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하나씩 극복해 갔다. 이곳은 오순절 교회에서 교회 건축 부지로 구입하려고 한 장소였지만, 예배 때 일어날 소음 때문에 이웃들이 반대하였던 곳이었다. 아울러 “신들림”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은 이웃들에게 보증하기를, ‘증인’이 이곳에 집을 지으면 위험스런 일이나 시끄러운 일도 거의 없을 것이라고 하자, 그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81년에 ‘트리니다드 토바고 여호와의 증인 지방 협회’ 명의로 그 대지를 구입하였다.

그로부터 일년 반이 지나서야 건축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형제들은 자진적으로 일해 주었다. 바닥에 콘크리트를 부을 순서가 되자,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갖추어진 장비라곤 고작 시멘트 믹서 두대와 많은 양동이, 그리고 형제들이 양동이를 차례로 전달할 때 올라 서 있을 계단식 발판들이 있을 뿐이었다. 믹서기에서 시멘트를 붓게 되는 곳까지 형제 자매들이 두줄로 늘어섰다. 또 한줄은 빈 양동이를 믹서기로 옮겨 주는 일을 했다. 기술자 형제들은 자주 밤을 새워 일했다. 그로 인해 회중들에는 참으로 연합되고 고무적인 영향이 미쳤다.

1985년 3월 16일의 봉헌식을 위해 통치체 성원인 밀턴 G. 헨첼이 참석하였다. 아울러 트리니다드의 모든 회중에서 전도인들도 참석하였다. 모든 좌석과 잘 보이는 자리들은 2,942명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모두는 즐겁고 생기 넘친 기분으로 그곳을 떠났다.

여호와께서 발전적인 개선을 베푸시다

이사야 60장을 보면, 오래 전에 여호와께서 정한 때에 자신의 지적 조직을 개선시키고 확장시킬 목적을 담은 예언이 들어 있다. 오래된 ‘증인’들은 이 예언이 분명히 이루어져 왔음을 확증할 수 있다. 형제들이 장로로 선출되기 위해 운동을 벌이던 당시보다 지금은 얼마나 더 나은 상태인가! 오늘날 회중들은 영적으로 번영하고 있다.

현재 트리니다드 토바고에는 50개의 회중이 있다. 또한 더욱 고무적인 전망도 있다. 1986년 4월 보고에 따르면, 4,558명의 전도인이 135,000부 이상의 잡지와 11,537부의 서적을 배부했다. 6,990건 이상의 가정 성서 연구가 사회되었다. ‘기념식’ 참석자 수는 고무적이게도 13,961명이었다. 그 후의 달들에서도 새로이 침례를 받은 제자들이 많이 있었다.

1946년에 선교인들이 온 이래로 그처럼 작은 지부에 엄청난 양의 출판물이 공급되었다. 보고를 보면, 160만부 이상의 서책과 150만부가 넘는 소책자 및 수백만부에 달하는 잡지가 배부되었다. 트리니다드를 비롯하여 그 지부 산하의 섬들에 거대한 증거가 행해졌다. 아울러 이 사물의 제도가 끝나기 전에 더욱더 많은 양같은 사람을 모아들일 전망도 있다.

한 순회 감독자의 보고는 이러하다. “지역 감독자 방문 중인 수요일 아침에 봉사를 하면서 어떤 거리에 다다르자, ‘형제, 이곳은 지난 금요일에 봉사한 곳입니다’라고 짝 형제는 말하였읍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봉사하기로 하였읍니다. 한 집을 방문하자, 집안으로 초대받게 되었고, 내 짝은 ‘대화를 위한 제목’에 근거하여 이야기했읍니다.

“자신이 트리니다드인이라고 소개한 그 부인은, 가족과 함께 런던에 살고 있으며 휴가차 고향에 왔다고 말하였읍니다. 런던에 사는 시어머니로부터 성서를 읽도록 권유받은 이 부인은 한동안 그렇게 하였고, 거기에 흥미를 가졌읍니다. 그 점을 시어머니에게 이야기하자,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회에 나가야 된다’는 말을 들었읍니다. 시어머니는 재림교인이었읍니다. 그렇지만 그 부인은 단지 교회에 나가고 싶지 않아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자기 집에 복음을 갖고 오는 최초의 사람이 진리를 갖고 있는’ 표지로 간주하겠다고 하였읍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가 그 부인의 최초의 방문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영국 지부에 편지를 하여 그 부인이 그곳으로 돌아간 후에도 성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하였읍니다. 그 연구는 잘 진행되었읍니다. 현재 트리니다드로 귀국한 그 가족은, 남편과 아내는 침례를 받았고, 자녀와 함께 트리니다드 동부의 한 회중과 연합하고 있읍니다. 흥미있는 점은, 전도인들은 그 구역을 금요일에 봉사했으나, 그 부인이 런던에서 온 날은 토요일이었으며, 우리가 그 다음 수요일에 그곳을 봉사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야외 봉사에서 좋은 결과가 분명히 맺어지고 있으며, 기꺼이 응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즐거움에 참여하고 있다.

각 회중을 위한 개선된 양치는 마련에 병행하여, 사업을 감독하는 일에 있어서 지부 사무실에서도 개선이 이루어졌다. 더는 지부 감독자 혼자서만 지부 활동을 감독할 책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지부 위원회’ 위원들이 그 사업과 책임을 분담함으로 그 사업의 여러 분야에 골고루 면밀한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현제 이곳 위원회의 위원은 얼 데이비드, 제프린 네드, 윈스턴 사이먼, 알렉산더 타프이다.

“벌새의 땅”과 “로빈슨 크루소섬”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위대하신 창조주 여호와를 섬기며 살 만한 즐거운 장소이다. (전도 3:11) 지구상의 더 큰 나라들과 견주어 볼 때, 현재의 트리니다드 지부는 규모면이나 성원 수에 있어서 크지 않다. 하지만 이곳 사업의 역사를 관찰하노라면 흐뭇한 감동에 젖게 된다. 이곳 형제들의 결심은, 호흡하는 만물이 여호와를 찬양하게 될 날을 고대하면서 전세계 형제들과 더불어 왕국의 권익을 돌보는 일에 계속 박차를 가하는 것이다.—시 150:6.

[247면 그래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보조 파이오니아의 증가

1978 1979 1980 1981 1982 1983 1984 1985

4,000

3,500

3,000

2,500

2,000

1,500

1,000

500

16.9 28.8 40.6 39.1 47.9 52.3 54.1 56.7

총 전도인에 대한 보조 파이오니아 비율

[232면 삽화]

트리니다드 지부 위원회의 조정 위원인 알렉산더 타프와 아내 로이스

[239면 삽화]

“시비아”호에 승선한 선교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