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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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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세기 전에 키가 크고 건장한 체구의 매부리 코의 한 남자가 배의 갑판 위에 서서 인도양으로 통하는 뱃길을 찾기 위하여 중앙 아메리카 대륙의 해안선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뱃길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1502년에 발견한 것은 “부(富)의 해안”이란 뜻의 코스타리카라고 이름한 나라였다.

그 남자는, 스페인 기를 나부끼며 신세계로의 네번째이자 마지막인 항해를 하고 있던, 이탈리아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물론 그와 그의 탐험가 일행은 코스타리카에서 황금이 발견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지역에는 바라는 귀금속이 거의 나지 않았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몰랐어도, 그곳의 최대의 부는 주민들, 특히 여호와께서 귀중하게 여기시는 특성을 소유한 사람들이 될 것이었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그 땅에는 인디오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적어도 1000년부터 이미 북미와 남미를 연결하는 그 지협에 정주해 있었다. 오늘날 그 땅의 상태는 어떠한가?

동쪽에는 대서양(카리브 해), 서쪽에는 태평양이 접해 있는 코스타리카는 북쪽의 니카라과 국경으로부터 동남쪽의 파나마 국경에 이르기까지 뻗쳐 있는 높고 험준한 하나의 산맥선을 가지고 있다. 가장 높은 일부 산봉우리는 활화산들이다. 저지대인 해안 주변은 기후가 무덥고 열대림이 무성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나라 최대의 도시이자 수도인 산호세 주변의 서늘하고 높은 중앙 고원을 따라 살고 있으며, 그 도시를 에워싼 언덕에는 커피나무 일색이다.

오늘날 2,600,000명으로 추산되는 그 나라의 인구 중 97퍼센트는 주로 스페인계 후손인 혼혈인과 백인이며, 인디오의 인구는 약 5,000명이다. 공용어는 스페인어이며 국교는 로마 가톨릭이다. 그러나 가톨릭 외의 종교들도 자유로이 활동한다.

1800년대 후기에 자메이카, 트리니다드, 바베이도스로부터 많은 사람이 코스타리카로 이주하였다. 그 강인한 사람들은 대서양 해안을 따라 무성하게 펼쳐져 있는 연합 과일 회사의 바나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온 것이다. 물론, 그와 더불어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종교 및 그 관습도 들어왔다. 의지가 강하고 근면한 그들 대부분은 성서 애호가들이다.

성서 진리가 발견되다

그리하여 코스타리카에서는 콜럼버스에 의해 그 나라가 발견되었던 것보다 더 중요한 발견이 20세기로 접어들기 전에 있었다. 그것은 성서 진리였다. 코스타리카에 최초로 왕국 소식이 들어 온 경위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자메이카의 여호와의 증인의 보고에 의하면, 코스타리카로 이주했던 두명의 자메이카인, H. P. 클라크와 루이스 페이시가 그곳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좋은 소식을 고국 자메이카로 가져왔다고 한다.

1904년, 열렬한 성경 연구생인 애너 레이놀즈가 자메이카로부터 코스타리카에 왔다. 그 자매의 도착 직후, 협회는 순례자인 콘델 형제를 파견하여 전 시간 봉사, 즉 콜포처 일을 그와 함께 하도록 하였다. 콘델 형제는 자메이카로 돌아온 즉시 발견한 관심자들에 대해 보고하였으며, 협회는 또 다른 콜포처인 프랭크 허드슨을 코스타리카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1906년에 도착한 그는 영어를 사용하는 흑인들 사이에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파수대」 1907년 1월 1일호(영문)의 보고에 의하면, 1906년 중의 코스타리카는 성서 서적 배부를 위한 비옥한 땅으로 알려졌다.

소식이 퍼져 나가다

1914년 무렵에는 이미 진리가 대서양 해안 지대 전역으로 스며들어갔다. 그해에 헨리 애덤슨은 번창하는 영농 지역의 상업 중심지인 푸에르토리몬에서 약 8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조그만 도시, 과시모에 최초의 에클레시아 즉 회중을 설립하였다. 그 당시, 푸에르토리몬에서 16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수도, 산호세에 이미 소식이 도달했다. 적어도 영어를 사용하는 두명의 형제가 그곳에 살고 있었지만, 산호세의 인구는 스페인어 사용층이었고 서적은 영어로 출판된 것이었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발전이 거의 없었다. 집회는 가정 집에서 열렸지만, 그것은 광고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의 다른 지역에서도 사업이 상당한 범위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현지의 형제 한 사람을 순례자(순회 감독자)로 임명하여, 산호세를 포함한 코스타리카 전역의 형제들을 방문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순례자로서 빅토르 사무엘스가 선택되었다.

초창기 대회

1914년에 푸에르토리몬 시에서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11명이 침례를 받았다. 그 무렵에 윌리암 구딘과 그의 아내 클라우디아, 헨리 스테엘레와 그의 아내 마틸데, 윌손 가족 그리고 윌리암스 가족 모두 침례를 받았다. 이 초창기 봉사자들의 자녀, 손자녀 그리고 증손자녀가 오늘날 코스타리카에서의 증거 사업에 한몫을 맡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나중에 더 설명하기로 한다.

초창기 대회에서, 협회는 연설 골자를 마련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임명된 연사들은 스스로 주제를 선택하여 골자를 만들었고, 심지어 어떤 연사는 원고도 없이 연설하기도 했다. 식사를 위해 돈과 식품류가 관대하게 기부됨으로써, 한 형제의 집에서 식사가 무료로 제공되었다. 진한 양념을 해서 끓인 닭고기와 밥 그리고 코코넛 유액으로 조리한 콩과 바나나 튀김은 매 행사에 빠지지 않았다.

대회가 폐막되면, 사랑의 연회라고 알려진, 행사를 축하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 행사에서 형제들은 종교적인 노래도 부르며, 참석자 전원에게 소다 비스킷을 돌리곤 하였다. 노래는 굵직하고 아름다운 음성의 4중창이었다.

특징

흰옷의 복장을 하고 형제들은 서로 축하를 하면서, 심각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연례 기념식을 가졌다. 어린이들은 보통 초대받지 않았다. 어린이들이 방해하여 식사의 심각성을 손상시킬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전원이 표상물인 떡과 포도주를 취한 후에는 서로가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침례식은 기념식이 거행되기 직전에 특별히 마련되었다. 그 행사를 위해서 형제와 자매들에게는 흰색의 양복과 드레스를 입도록 권했다. 호기심 많은 구경꾼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동트기 전 일찍 일어나 해변으로 가서, 이웃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기 전에 침례를 베풀곤 하였다. 침례를 받는 사람들이 바닷물 속으로 서서히 잠기는 동안, 나머지 일행은 주위에서 합창을 하곤 하였다.

공개 강연은 마치 정원에서 연설하는 식이었다. 모든 여호와의 증인이 미리 정해진 옥외 장소에 모이게 되면, 연사는 자신을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앉아 있거나 서 있는 사람들에게 성서 강연을 하곤 하였다. 일반인도 참석하여 노래가 시작되면 같이 불렀다.

형제들에게 노인들의 교회란 이름이 붙여졌는데, 그 이유는 자녀를 영적으로 돕기 위한 노력이 거의 또는 전혀 기울여지지 않은데다가, 조직에 속한 그들 대부분은 연로하였기 때문이었다. 후에, 형제들은 자녀를 위한 자체 주일 학교를 조직하였으며, 마침내는 자녀 훈련이 부모 자신의 책임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마틸데 스테엘레는 그전에 이미 그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마틸데의 일곱번째 아이, 호세피네는 1918년에 태어났다. 호세피네가 생후 단지 40일이 되었을 때, 마틸데는 그를 푸에르토리몬의 해안 도시, 카위타에서 개최된 대회에 데리고 갔다. 후덥지근한 날씨 속에서 기차로, 배로 그리고 노새를 타고 온종일 여행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힘든 여행이었지만, 젖먹이 호세피네는 아무 탈도 없었다. 호세피네는 열 일곱살이 되자 침례를 받았고, 자신의 가족과 함께 이 날까지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

불화의 씨가 뿌려지다

조직이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사단은 시기, 교만, 질투, 이기적 야망 등으로 형제들 사이에 불화의 씨를 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서로 회중의 탁월한 직책을 놓고 경합을 벌이자, 경쟁의 영이 표면화되었다. 그 마련은 민주적 방식으로 관리되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선거를 하여, 거수 표결로 다수의 지지를 받은 장로들이 직책에 임명되었다. 투표로 선출되어 직책에 임명된 장로들보다도 자기 자신이 진리를 더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 야심에 찬 형제들은 책임 맡은 형제들에 대한 회중의 신뢰도를 약화시키려고 애썼다.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하였는가? 집회 도중에 질문을 하고 또 반대적 질문을 함으로써 그렇게 하였다. 형제들은 편을 들었고, 그 결과 두 집단으로 나뉘어진 회중 성원들은 푸에르토리몬의 각기 다른 장소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사악한 영향

1916년에 워치 타워 협회의 초대 회장인 찰스 T. 러셀이 사망하자, 소규모이긴하나 분열된 이 그리스도인 집단에게 더 많은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뉴욕, 브루클린 세계 본부에서는 이기적인 형제들이 다음 협회장인 조셉 F. 러더퍼드와 그외의 임명된 사람들로부터 협회의 감독권을 탈취하기 위한 악한 음모가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조직이 그러한 불충실한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반대파의 한 주모자는 협회의 설명에 반대되는 견해를 가진 폴 존슨으로서, 그는 예수의 대속이 아담과 하와에게도 적용된다고 믿었다. 그는 코스타리카의 형제들에게 편지를 띄우거나 자기가 쓴 자료를 보내어 러더퍼드 형제를 지지하지 말라고 했다. 몇몇 사람은 존슨의 가르침을 성서의 가르침보다 더 좋아하였고, 끝내는 조직과 결별하였다.

본부로부터의 최초의 방문

1917년에 코스타리카는 최초로 브루클린의 협회 본부에서 파견한 대표자의 방문을 맞이하는 특권을 가졌다. 그 대표자는 아내를 동반하고 온 월터 번디였다. 그러면 협회는 왜 그 먼 코스타리카에까지 많은 비용을 들여 대표자를 파견하게 되었는가? 성서 연구생의 수가 증가하고 있었다. 1918년에 코스타리카의 성서 연구생 수는 73명이었는데, 이것은 그 나라가 세계에서 네번째로 많은 여호와의 증인이 있음을 의미하였다. 영국, 미국, 오스트레일리아만이 코스타리카보다 많은 수의 여호와의 증인이 있었다. 당시 코스타리카의 인구는 50만명이 채 못되었다.

탈선한 일부 사람들

사단은 진리를 말살하기 위해 또다시 바쁘게 되었으며, 형제들이 여호와의 이름의 고수라는 주된 목적에서 빗나가도록 혼란을 시도했다. 대서양 지구의 흑인들 가운데 만국 흑인 향상 협회(UNIA)라고 알려진 새로운 조직이 등장했다.

그 조직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흑인의 상태를 향상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 협회가 벌인 운동 중에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라는 것이 있었으며, 흑인층에서는 그 운동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 운동과 흡사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형제들은 그 조직에 관심을 보였을 뿐 아니라, 특정한 성귀들을 그 조직의 목적을 지지하기 위하여 잘못 적용하기까지 하였다. 어떠한 결과가 나타났는가? 일부 형제들은 왕국의 좋은 소식을 인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전파하는 일에서 탈선하게 되었다. 심지어 순례자인 빅토르 사무엘스마저 동요되었다. 그는 UNIA의 주임 설교자로 임명되어, 회중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모임에서 설교하곤 하였다. 그 일이 형제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쳤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1924년경에 빅토르 사무엘스는 아프리카인을 돕기 위해 아프리카를 여행하였다. 그는 나이지리아의 라고스에서 코스타리카의 한 형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의 거문고」 책 2,500부를 전하였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나이지리아에서 왕국 소식이 아주 널리 전해졌다.

연합하기 위한 통로

빅토르 사무엘스가 코스타리카를 떠난 후에 협회는 과시모의 원래 회중에 있던 헨리 애덤슨을 1924년에 순례자로 임명하여 일을 돌볼 책임을 맡겼다. 푸에르토리몬의 일부 형제들은 애덤슨 형제의 문제 처리 방법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역하였다. 약 2년 후에 협회는 브루클린으로부터 또 다른 대표자, 조지 영을 파견하였다. 그에게 주어진 임명은 푸에르토리몬의 형제들을 연합시키고, 전파 사업을 적절한 기반 위에 다시 올려놓는 것이었다. 우선, 그는 푸에르토리몬의 아라스티 극장에서 손전등의 불빛 아래 슬라이드를 사용한 성서 강연을 하였다. 그후에, 산호세의 형제들을 방문하여 그 수도에 있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일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푸에르토리몬의 두 집단을 연합시키기 위한 영 형제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해서 그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1927년 초기에 애덤슨 형제는 코스타리카에서 파나마로 옮겼다. 그 두 사람이 떠난 후에 협회는 그후 10년간, 1937년까지 일을 감독할 다른 순례자를 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코스타리카의 형제들은 낙담하지 않았다. 그들은 집단적으로 모이는 네댓 군데의 장소에서 계속 전파하였고, 야외 봉사 보고는 브루클린의 협회로 직접 보냈다.

1931년에 협회가 모든 회중에게 협회와 연합해 있는 사람들이 새 이름, 여호와의 증인을 채택할 것을 권고하는 서신을 보냈을 때, 연합을 위해 기도해 온 충실한 사람들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이 결의는 반역과 무명의 집단에게 조종을 울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멸되었고, 그리하여 푸에르토리몬에서의 회중 분열 사태는 종지부를 찍었다. 1938년에 종들을 신권적으로 임명하자 형제들은 더욱 연합되었다.

일이 다시 불붙다

애덤슨 형제는 파나마로 떠나기 전에 대서양 지구의 소읍, 리오온도에 한 집단을 조직하였다. 1926년 11월 17일에 침례를 받은 사람들 중에는 알베르트 에스라 필레가 있었다. 그는 스물 아홉살의 나이로 1918년, 바베이도스에서 도착한 날에 처음으로 진리에 대해 들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자신이 앞으로의 기간에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에서 큰 역할을 맡게 될 줄은 알지 못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집주인에게 읽을 것을 부탁하였으며, 그때 받은 책이 「성경 연구」 제 1권이었다. 그 밤에 성서 진리의 불씨가 여호와께 대한 사랑에 불을 붙였다. 그래서 곧 파이오니아가 되었고, 현재는 99세의 노령으로 시퀴레스 회중과 연합하고 있다. 그러면 그는 증거하는 일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1927년에 필레 형제는 소도시, 시퀴레스로 이사하였다. 거기서 그는 일을 시작하기 위해 1906년에 코스타리카에 온 콜포처, 프랭크 허드슨을 만났다. 그러나 그때쯤에는 실망으로 인해 허드슨 형제의 봉사의 열심이 식어 있었다. 그래서 필레 형제와 허드슨 형제는 함께 결속하여 일을 보다 조직적인 방법으로 다시 점화시키기로 결심하였다.

1937년, 전운이 유럽을 뒤덮고 있을 때, 필레 형제는 전쟁의 위협 때문에 코스타리카로 공급되는 본부로부터의 서적이 중단될 것을 우려하였다. 그래서 브루클린에 편지를 보내서 자신의 집에 협회의 서적을 비축하고 관리하는 일을 제의하였다. 협회의 동의하에 서적은 푸에르토리몬에서 시퀴레스로 옮겨졌다. 필레 형제는 보관소의 종이 되어, 여호와의 증인이 거주하는 그 나라 지역에는 모두 서적을 보냈다.

새로운 밭이 열리다

지금까지 대서양 해안 지대의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건만을 말했다. 그러나 동일한 지대에 거주하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왕국 소식을 전하기 위한 실질적 노력은 아직 없었다.

시퀴레스는 대서양 지구에 열려져 있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참으로 드넓은 밭이다. 그곳에서 니카라과인인 플로렌시오 페레스는 특이한 방법으로 프랭크 허드슨 형제로부터 진리를 듣게 되었다. 그 해는 1932년이었다. 허드슨 형제가 가지고 있던 한 조상(彫像)이 진리를 찾는 플로렌시오의 욕망을 부채질했다. 허드슨 형제는 느부갓네살이 꿈에 본 형상과 동일하게, 머리는 금, 가슴은 은, 다리는 철로 된 진짜 형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형상을 자신의 집 현관에 놓아 두었는데, 행인들이 그것을 보고 멈추면, 그 의미를 설명해 주곤 했다. 때때로, 그는 장터에 흑판을 세워 놓고, 모인 사람들에게 성서 예언을 설명해 주곤 하였다.

프랭크 허드슨은 스페인어를 거의 못했다. 그리고 플로렌시오는 영어가 대단히 서투렀다. 그렇지만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그는 허드슨의 성서 설명에 관심을 보였고, 심지어 독학으로 읽고 쓰는 법을 익혔다.

플로렌시오는 「가정과 행복」이란 소책자를 읽고 나서, 그것이 진리라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브루클린의 협회에 편지하기를, 자신은 여호와의 증인과 함께 일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협회는 격려의 말이 담긴 답장과 함께 스페인어 성서를 한권 보내 주었다. 그때 이후 플로렌시오는 자신의 전 시간을 허드슨 형제로부터 받은 성서 서적을 사용하여 왕국 소식을 퍼뜨리는 데 바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38년, 플로렌시오는 시퀴레스에서 개최된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최초의 스페인 인 파이오니아

플로렌시오 페레스가 침례를 받기 1년 전(헌신은 그 전에 했지만), 그는 파이오니아 봉사에 들어서기 위한 신청을 협회에 냈다. 그는 1937년 6월 1일자로 임명되어 코스타리카 최초의 스페인 인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첫 임명지는 대서양 지구의 스페인어 사용 지역이었다. 또한 산호세의 작은 스페인어 회중과 함께 일하는 것도 임명에 포함되었다.

페레스 형제는 왕국 소식을 퍼뜨리는 데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때때로 행인이 지나가다가 볼 수 있도록 길 옆 나뭇가지에 소책자를 매달아 놓곤 하였다. 또는 산호세의 공항에 가서 외국 승객들에게 서적을 전한 다음,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곤 하였다. 밀림 속을 도보로 다니며, 밤이 되면 어느 곳에서나 잠을 자기도 하였으며 때때로 별빛을 모포삼아 자다가 온통 모기에게 물린 적도 있었다. 언제나 가지고 다니며 퉁기는 기타 소리가 밤의 고요를 자주 깨뜨리곤 하였다. 방랑하며 복음 전파하는 정신은 그를 니카라과로 여행하게 했다. 그곳에서도 그는 오랫동안 파이오니아 봉사를 계속하였다.

산호세 회중

산호세의 스페인어 회중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로 영어 집회는 윌리암스 형제의 집에서 열렸다. 그는 1912년에 진리를 배웠으며 후에 주임 감독자가 된 사람이다. 이전에는 복음주의 교회에서 평신도 설교자로 일했으며, 그의 아내는 오르간을 연주했었다. 그 당시 산호세에는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었으므로, 회중의 성장 속도는 느렸다.

하지만, 스페인어판 서적을 구할 수 있게 되자, 전파하는 일은 더욱 수월해졌다. 1931년에는 10-12명의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개인 집에서 함께 모였다. 펠리페 살메론은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태평양 해안의 푼타레나스 항구에서 증거하였다. 드디어 30년 이상이 지난 후에, 진리는 대서양 해안에서 태평양 해안으로 전파된 것이었다.

1941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시퀴레스에서 산호세로 파견된 필레 형제가 윌리암스 형제를 대신하여 감독자가 되었다. 회중은 이제 플라비오 로메로의 집에서 집회를 갖게 되었고, 협회는 회중과의 통신을 파이오니아인 플로렌시오 페레스를 통하여 주고받았다.

길르앗 졸업생들이 힘을 더하다

필레 형제는 산호세의 회중 상태에 대해 협회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신권적 방법에 확고한 형제 한 사람을 코스타리카로 파견하여 일을 감독하게 하도록 제안하였다. 1943년 12월 23일에 시오도어 시벤리스트가 아내인 허미너와 함께 길르앗 제 1기 학급을 마치고 코스타리카에 도착했기 때문에, 형제들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이로써 코스타리카는 세계에서 최초로 길르앗 졸업생을 받아들인 4개국 중 하나가 되었다.

시벤리스트 형제가 가진, 조직 내에서의 배경은 믿음직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1913년, 시오도어가 태어나기 이틀 전에 침례를 받았으며, 그의 부모의 집은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고, 그는 부모와 함께 전도지 배부에 참여하였다. 그는 1935년 워싱턴 D. C.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1937년의 어떤 대회에서 허미너 데인즈를 만나 그 이듬해에 허미너와 결혼하였다.

유럽에서 여전히 맹렬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던 제 2차 세계 대전의 영향은 코스타리카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시벤리스트가 산호세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어디서든지 긴축 생활의 흔적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한달간의 물색 끝에 아파트 이층에 왕국회관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방이 하나 딸린 적합한 숙소를 찾아냈다. 그 아파트는 간선 도로에서 반구획 정도 떨어진, 편리한 곳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낯익은 곳이었다. 그 방은 1956년에 왕국회관이 딸린 지부 사무실을 건축할 때까지 계속 왕국회관으로 사용되었다.

지부가 설립되다

선교인들이 도착한 지 약 석달 후에, 워치 타워 협회의 3대 회장인 네이선 H. 노어 형제와 그의 보좌역인 밀턴 헨첼이 방문하였다. 코스타리카 사상 최초로 협회장이 이 나라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서적 보관소는 이미 1944년 1월에 시퀴레스에서 산호세로 이전되었고, 이제 3월에 노어 형제는 지부를 설립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증거하는 일의 방향이 감독을 받게 되었다. 노어 형제는 방문중에 도움을 더 많이 줄 사람들이 도착할 것이므로 선교부를 위한 더 큰 집을 찾도록 마련하였다. 산호세의 북서부 구획에서 한 집이 발견되었다.

그후 2년 동안 찰스 파머와 로라 리어, 우드로우(“우디”) 블랙번, 도널드 H. 버트, 윌리엄 유진 컬, 그리고 프랭클린 하딘과 에밀리가 선교인 가족에 합세하였다. 전원이 길르앗 졸업생들이었다. 참으로 크나큰 도움이었다! 도널드 버트는 단기간만 머무른 후, 온두라스에 임명되었다가, 그후에 페루로 임명이 바뀌었으며, 현재 그곳에서 지부 위원회의 조정 위원으로서 봉사하고 있다.

산호세에서의 연합

푸에르토리몬에서 이전에 분열되어 버린 집단 외에, 또 다른 집단이 산호세에 존재하고 있었다. 산호세에 있던 그 집단은 어떻게 되었는가? 시벤리스트 형제는 연합을 격려하였다. 그의 좌우명은, “일을 하려면 제대로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아예 하지 말라”였다.

1944년에 시벤리스트 형제가 협회에 보낸 연례 보고서는 발전에 대한 묘사가 넘쳐 있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코스타리카에 있는 스페인 형제의 수는 현재 약 75명이며, 우리가 12월에 여기 도착해 보니 그들은 분열되어 그 전달까지 산호세에는 두개의 왕국회관이 있었읍니다. 도착한 즉시, 두 집단에게 연합하여 한 왕국회관에서 정기 집회를 갖도록 권고하였읍니다. 첫 집회에 두 집단이 모두 참석하였고, 참석자는 모두 30명이었읍니다. 이제 주의 은혜에 힘입어 이 지방 조직은 매우 순조로운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 집단 성원은 약 60명으로 증가하였읍니다.”

이듬해 4월에 전도인은 신기록인 223명에 달했다! 불과 2년 전에 시벤리스트 부부가 도착할 당시, 약 120명의 전도인이 4개의 영어 회중과 2개의 스페인어 회중을 구성했을 때와 비교해 보면, 참으로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형제들의 종

시벤리스트는 코스타리카에 도착한 그 첫해에, 형제들의 종(순회 감독자)으로서 봉사하였다. 그는 거리가 멀고 여행이 힘들었지만, 이 6개 회중과 격지의 관심자들을 방문하였다. 더 많은 선교인이 도착하자, 그는 회중을 더 자주 방문할 수 있었다.

형제들의 종으로서 3주간의 7개의 영어 회중 방문을 마친 후, 선교인 블랙번 형제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 형제들이 보여준 신권 통치에 대한 열심과 사랑은 경탄할 만합니다. 형제들은 재정적으로 가난하지만, 협회의 종들을 그들의 집으로 초대하여 가장 좋은 것으로 대접하는 일에 아주 관대합니다. 그들은 온유하고, 교훈을 열망하고 있읍니다. 재방문과 성서 연구를 하기 위해 무더위와 진흙 속에서도 수킬로미터를 걸어 다니는데도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블랙번 형제는 그 보고를 보낸 지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고 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니카라과, 온두라스, 멕시코에서 봉사하였다.

회중뿐만 아니라 현지 주민들도 형제들의 종의 방문을 감사히 여겼다. 1946년에 프랭클린 하딘(척추 조정 요법사였기 때문에 “의사”라고 더 잘 알려졌음)은 아내 에밀리와 함께 푸에르토리몬을 방문하였다. 현지 신문은 이와 같이 논평하였다. “이 귀한 방문객은 아주 쾌활한 자기 아내를 동반하여 이 도시에 왔다. 이들은 우리가 이전에 결코 만나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과 잠깐 동안이라도 함께 있으면, 매력적이고 추억에 남을 만한 인상을 쉽게 받는다. 그들의 연설의 속성은, 마치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것처럼 우리를 흐뭇하고 즐겁게 해준다. 우리는 그가 전하는 소식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하는 여러 성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최초의 원주민 순회 감독자

초창기의 순회 봉사에 대한 보고에서, 푸에르토리몬 출신인 아르놀드 윌리암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이 보고를 마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연합 과일 회사의 구내 매점을 운영하였지만, 여건이 되자 곧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이 일에 있어서 그는 보다 젊은 사람들이 왕국의 권익를 먼저 구하도록 아주 훌륭한 본을 세웠다. 그는 열심과 결의가 대단했기 때문에 산호세에서 순회 감독자로 일할 훈련을 받고, 1948년에 순회 봉사를 시작했다. 그는 밀드레드 굼브스(현재는 오르테가)와 결혼하여, 그들은 1959년까지 순회 봉사를 계속 함께 하였다. 아르놀드는 영어와 스페인어를 둘 다 배웠기 때문에, 노어 형제의 첫 방문시, 통역을 하였다. 그가 “추천장”(새번역)을 많이 남겨 놓고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모든 사람에게 큰 슬픔을 주었다.—고린도 후 3:1.

파이오니아 봉사에 힘입어 소식이 퍼져나가다

선교인과 순회 감독자들의 귀중한 도움 외에도, 소식이 새로운 지역으로 퍼져나가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파이오니아들이었다. 1944년 초에는 두명의 파이오니아가 있었지만, 8월에는 그 수가 아홉명으로 늘어났다.

그레시아에는 13명의 전도인이 모이고 있었고, 그곳에 코스타리카 최초의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에벨린 페르구손(현재는 타일로르)과 밀드레드 굼브스가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945년에 유헤니아 딜론도 특별 파이오니아 대열에 가담하였다.

산호세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던 연로한 미망인, 베르타 솔레라는 고향인 과나카스테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돈이 없었으므로 유일한 생계 수단인 소형 재봉틀을 팔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아니타 타일로르와 함께 1947년에 그곳에서 전파 여행을 하여 리베리아와 필라델피아에서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발견하였으며, 그 관심자들은 기꺼이 파이오니아들을 집으로 환영하였다. 1949년경에 베르타는 리베리아에서 일하도록 특별 파이오니아의 임명을 받고 딸을 데리고 갔다. 거기에서 그에게 두명의 스와비 소녀가 합세하였다. 스와비 소녀란 누구인가?

파이오니아 자매들

자메이카에서 태어난 클라우디아 구딘은 큰 키에 흰 피부의 여자로서 그에게는 호이와 페 라는 이름의 두딸이 있었다. 그 당시, 클라우디아는 푸에르토리몬에서 친자매인 아렐민타 스와비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아렐민타에겐 네명의 딸, 도렐, 칼비에, 릴라와 카셀이 있었다. 그 스와비 소녀들 중에서 파이오니아로 일할 용기를 낸 첫 번째 소녀는 도렐이었다. 그와 코리나 오소리오(현재는 노보아)는 서해안 지대의 포인트퀘포스에 임명되었다. 도렐의 세 자매도 나중에 파이오니아 대열에 가담하였다.

클라우디아 구딘의 두딸, 페와 호이는 1948년에 이미 회중이 설립되어 있던 알라후엘라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다. 도라 아르헨티나 바르가스(현재는 컬)도 파이오니아 대열에 합세하였다. 1950년에 도렐 스와비와 페 구딘, 호이 구딘은 길르앗 학교에 참석한 후, 파나마로 임명되었다. 릴라 스와비와 에벨린 페르구손은 1953년 봄에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였으며, 아르헨티나는 그 다음 학급에 가담하였다. 1940년대 이후로, 근면한 이 자매들은 왕국 진리의 씨를 무수히 뿌리는 일에 분주한 생활을 하고 있다.

말과 이발사

산호세에 지부가 설립중에 있던 1944년경에 산카를로스에서 한 로마 가톨릭 교인이 우편으로 「아마겟돈」 소책자를 받아서 그걸 복음주의 교인인 나프탈리 살라사르에게 주었다. 나프탈리는 그 소책자를 읽고 매우 놀란 나머지 그의 교직자에게 보여주었다. 그 교직자는 격분하며 “러셀주의 독”을 주의하라고 나프탈리에게 경고하였다.

하지만, 나프탈리는 그 소책자의 발행소인 워치 타워 협회로부터 나온 사람을 만나 보고 싶었다. 그는 한 이탈리아인 이발사도 그런 서적을 받아 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이발사는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그레시아에 살고 있었다. 나프탈리는 그 이발사를 방문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3일간의 소몰이꾼으로서 계약하여 그레시아로 여행을 한다면 돌아오는 길에 그레시아에 잠깐 들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레시아에 도착하자, 안내자는 나프탈리를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는 한 연로한 부부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나프탈리는 소중히 여기는 소책자를 꺼내서 그 부부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오로지 “비블레(성서), 비블레” 하고 말하며 즉시 길 아래의 어떤 언덕을 가리킬 뿐이었다. 실망한 그는 말에 올라 그 방향으로 달렸다. 언덕 위에서 나프탈리는 큰길을 벗어나 좁은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어떤 문 옆에 멈췄다. 나프탈리는 문을 열고 나서 말을 돌려 문을 닫았다. 이제 그는 누군가의 농장에 들어선 것이다. 나프탈리는 말을 몰아 밭을 가로질러 또 다른 문으로 갔다. 그 문 앞에는 조그만 오두막이 있었고, 한 남자가 아내, 두명의 어린 아이와 함께 오두막 밖에 앉아 있었다.

“뭘 원하시죠?” 하고 그 남자가 질문하였다.

“실례합니다만, 제 말이 저를 이곳으로 데려왔읍니다. 저는 이탈리아인 이발사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그 사람인데요. 댁은 누구신가요?”

“전 산카를로스에서 온 나프탈리 살라사르라고 합니다.”

나프탈리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들은 것이 분명한 그 이발사는 두손을 들며, “여호와를 찬양합시다. 그분이 당신을 여기로 오게 하였읍니다” 하고 말했다. 그날은 나프탈리에게 실로 행복한 날이었다!

결혼과 복권

왕국 봉사가 확장되어 나감에 따라, 또한 도덕적 정결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46년에 노어 형제는 F. W. 프랜즈 형제를 동반하여 두번째로 방문하였으며, 그 방문은 크게 도움이 되었다. 결혼의 법적 등록화에 관한 문제는 현지 형제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그 당시, 동거중인 여자와 법적으로 결혼을 등록하지 않았던 레오나르드 후르스트는 노어 형제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을 회고한다. “오늘 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 여자와 동거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결혼을 법적으로 등록하지 않은 사람들 모두에게 조언합니다. 가톨릭 교회로 가서 이름을 교인 명부에 기재하십시오. 거기에서는 동거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하나님의 조직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기서는 그런 생활을 할 수 없읍니다.”

레오나르드는 노어 형제가 직접 자기에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달 이내에 이전 아내에게서 이혼장을 받고 동거해 온 여자와의 결혼을 법적으로 등록하였다.

복권을 사는 문제 역시 조정이 필요하였다. 에벨린 페르구손은 항상 특정한 행운의 번호를 고르고, 심지어 그 번호가 당첨되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하였다. 왜 그렇게 하였는가? 파이오니아 봉사를 할 수 있기 위해서였다. 복권 구입이 성서적으로 옳지 않음을 깨닫고서, 그는 복권을 구입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에벨린에게 복권을 판 남자는 여느 때와 같이 찾아와 행운의 번호를 다시 걸도록 자꾸 권하였다. 하지만, 에벨린의 확고한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바로 그날에 그 번호가 당첨이 되었지만,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후 곧 에벨린은 파이오니아가 되었다—‘운수 신’의 도움이 전혀 없이.—이사야 65:11, 난외주.

“흙은 흙으로”

여호와의 증인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미심쩍은 종교적 의식을 따르는 일도 중지하였다. 예로서, 한 증인의 장례식에서 그 식을 담당한 형제는 장지에서 짤막한 기도로 식을 끝냈다. 그가 “재는 재로, 흙은 흙으로”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한줌의 흙을 관 위로 뿌리는 종교적 관습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참석한 종교인들은 크게 화를 내었고 자기들이 그 관습을 행하였다.

얼마 후에, 한 연로한 자매가 사망하였다. 그의 묘지에서, 하관을 하기 바로 전에, 장례 연설을 하고 있던 형제는 성서를 펴서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라는 성귀를 읽었다. (창세 3:19) 그리고는 멈추지 않고 즉시 동일한 종교인들도 포함된 참석자들을 향해 “여기에는 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읍니다. 형제들, 하관하십시오” 하고 말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반대자들은 장례식의 전통인 한줌의 흙을 던지지 않았다.

순회 감독자의 방문, 선교인의 쇄도, 성경 법에의 고착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연합과 성장이었다. 심지어 1950년대가 시작되기 전에도, 전도인이 천명선을 넘어섰고, 850건 이상의 성서 연구가 매달 보고되었으며, 설립된 회중의 수는 32개에 달했다.

시골 지역에서의 대회

1950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대회는 푸에르토리몬과 산호세에서만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제, 아르헨티나데틸라란 이라는 작은 촌락에서도 대회를 개최할 수 있을 만큼 관심이 커졌다.

시벤리스트 형제와 자매가 아르헨티나데틸라란에 닿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들은 먼저 비행기로 여행하고, 그 다음에는 낡은 버스를 타고 울퉁불퉁한 길을 가야 했다. 그 도로가 끝나는 분기점에서 형제들이 말을 준비하여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머지 여행은 말을 타고 하였다. 대회장 주변에는 농장들이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형제들은 그것이 그 지역에서의 최초의 대회였으므로 대단히 흥분하였다. 어떤 형제들은 아홉 시간이나 산길을 걸어서 여행하였다. 일요일에 세어 본 참석자의 수는 약 300명이었다. 서서 회기를 즐긴 사람들도 있었고, 나무 판을 쌀 부대 위에 얹어 놓아 만든 즉석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회중에, 갓 임명된 신권 전도 학교 감독자가 학교를 사회하였다. 시작하기 전에, 순회 감독자는 그에게 연사인 학생들에게 충고하는 방법에 대한 자세한 지시를 하였다. 그가 받은 지시란, 예를 들면, 각 학생에게 좋은 점 두 가지와 약한 점 두 가지에 관해 충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순회 감독자는 그 형제가 잘 이해하였으므로 학교가 원만하게 진행될 것으로 확신하였다. 순회 감독자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첫 번째 학생의 연설이 끝난 후, 그 학교 감독자는 일어나서 긴장은 했지만 진지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형제는 잘한 점이 두 가지가 있고, 못한 점도 두 가지가 있읍니다. 다음에는 더 잘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 아무런 충고도 하지 않고, 다음 학생을 소개하였다.

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1940년에 호세피네 스테엘레는 푸에르토리몬의 바로 북쪽에 위치한 모인으로 여행을 하였다. 증거를 시작하기 위해, 그는 모인 역에 축음기를 설치했다. 그리고 여러 차례 크랭크를 힘겹게 돌려 축음기의 모터를 감고는, 러더퍼드 판사의 연설 녹음판의 첫 홈에 바늘을 조심스럽게 올려 놓고, 시동 스위치를 켰다. 축음기에서 “종교는 올무이며 속임수”라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빈센테 산휘네티도 있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친구인 어부, 실베르트 스펜체를 불렀다. 바지의 허리춤을 말아 쥔 채, 실베르트는 청중에게로 다가가서, 두손을 허리에 대고 친구인 빈센테를 쳐다보며 “연설하는 저 사람은 누구지?” 하고 물었다.

빈센테는 “몰라서 묻니? 저분은 판사야!” 하고 대답했는데, 그것은 당시 워치 타워 협회의 제 2대 회장인 조셉 F. 러더퍼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빈센테는 이미 러더퍼드 형제의 저서 여러 권을 읽었기 때문에, 그 두 남자는 온종일 호세피네에게 성서 질문을 하면서 그를 바쁘게 하였다. 빈센테는 자기가 어느 날 바다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 도와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였고, 살아나기만 하면 그분을 섬기기로 약속했다고 스테엘레 자매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아직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하지만, 두 가지 “문제”—여자와 마약—가 그를 괴롭혔다. 그 두 남자와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그후 얼마 안 되어 1940년 9월 21일에 실베르트의 아내 발미나와 같이 그들은 침례를 받았다.

실베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하신 말씀이 나에게도 성취되는 걸 깨닫게 되자 나의 기쁨은 커지기 시작하였읍니다. 나는 이제 사람을 낚고 있읍니다.” 협회의 특별 대표자로서 방문한 조수아 스틸맨은 실베르트에게 “아마겟돈이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언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할 계획입니까?” 하고 질문했다. 실베르트는 때의 긴급성을 깨달았다. 그와 발미나는 1948년 11월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다.

실베르트는 스페인어를 말하는 데 어려운 시기가 있었지만, 스페인어 순회구의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처음에 그는 모든 연설을 영어로 하고, 누군가가 통역을 하곤 했다. 어느 날,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한 형제는 “실베르트 형제, 스페인어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제가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동시에 형제에게 진리를 배우면, 더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하고 실베르트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렇다. 사랑에는 언어의 장벽이 없다.

실베르트의 아내는 1974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와 순회 봉사에서 충실하게 일했다. 실베르트도 1985년 5월에 사망할 때까지 지부 위원으로서 충실하게 봉사했다.

최초의 대회 회관

여호와의 증인의 수적 증가는 전국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회 기관에 압력을 가하여, 푸에르토리몬에서의 순회 대회를 위한 장소의 예약을 점점 더 어렵게 했다. 그리하여 현지의 증인들은 순회 대회장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왕국회관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중앙 시장에서 불과 세 구획 밖의 한 부지에 2층 구조의 건물이 세워졌다. 왕국회관은 위층에 있었고, 아래층에는 주방과 대회용 간이 식당뿐아니라, 순회 감독자의 숙소가 있었다. 1954년 8월 19일, 목요일에 이 건물은 봉헌되었다. 1972년에 이 건물은 개축되었으며, 현재 세개의 회중과 비교적 소규모의 영어 대회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왕국회관이 불타다

반대쪽의 태평양 해안에 있는 형제들은 그들의 왕국회관과 관련하여 그런 기쁨을 경험하지 못했다. 전도인이 약 45명 되는 한 회중의 집회 장소는 만사닐로데아리오란 조그만 촌락에 있었다. 증인에 대한 반대가 커지면서 자라난 폭력적 위협은 마침내 추한 결과를 낳았다.

어느 날 밤, 자정쯤 그곳의 왕국회관이 갑자기 화염에 싸였다. 순식간에 타버려 아무 것도 건질 수가 없었다.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그 화재는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크나큰 재산의 손실이었다. 그 비열한 방화 사건은 왕국 봉사를 무력하게 하였는가? 아니다! 무활동 상태에 있던 전도인들은 영적 생명을 되찾았다. 새로운 사람들이 증인들과 연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집회 장소를 한 형제의 가정으로 옮겨서 기념식 준비를 계속했다.

그 무법 행위는 기념식 참석에 영향을 미쳤는가? 그렇다. 좋은 영향을 미쳤다. 과거의 수년 동안에 비해 참석자 수가 거의 300퍼센트 증가하였다. 반대자들은 참 믿음을 동요시킬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놀랍게 나타낸 바와 같이, 금세기에도 시험 아래서 믿음의 질을 증명하고 있는 수천명의 증인들이 그런 믿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베드로 전 1:6, 7.

폭도들의 행동이 중지되다

대부분의 반대는 교직자들이 선동한 것이었다. 예로서, 여호와의 증인이 이웃에 나타날 때마다 사제들은 자기들의 양에게 경고하기 위해 교회의 종탑에 확성기를 설치했다. 그들은 “우리는 가톨릭 신자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어떠한 선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는 벽보를 인쇄하였다. 그런 다음 교직자들은 그 벽보를 교구민에게 판매하였고, 교구민은 그것을 집 창문에 붙여 놓았다. 물론, 증인들은 그러한 벽보를 무시했다.

유헤니아 딜론은, 모든 사람이 다 교직자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님을 알았다. 어느 날 야외 봉사를 하고 있는데, 일단의 폭도가 모이더니 그를 따라다니면서 이렇게 외쳤다. “이곳은 천사들의 동정녀가 다스리시는 곳이다. 교황이시여 만수 무강하소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프로테스탄트의 선전을 받아들이지 말자.” 유헤니아는 재빨리 여호와께 도움을 기도로 구하였다. 그가 방문한 바로 그 다음 집의 한 남자는 폭도들을 보더니, “이자들이 당신을 따라다니는가요? 안으로 들어오시오. 내가 이 야만인같은 무리를 막아 주겠소” 하고 말했다.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믿은 딜론 자매가 일단 집안으로 들어가자, 그 남자는 다른 방으로 급히 달려가, 권총을 집어 들어 장전을 하고 문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권총을 휘두르면서, 폭도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이 아가씨는 내가 믿는 종교인이 아니오. 그러나 나는 그를 보호해야겠소. 여러분이 죽고 싶지 않거든 해산하시오.”

폭도들은 즉시 흩어졌다. 그 남자는 미소를 지으면서 집으로 돌아와서, 그들을 정말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악마같은 야만적 깡패들에게는 총을 갖다 대야 통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경우에, 필레 형제는 축음기를 가지고 많은 수의 전도인과 같이 시퀴레스의 서쪽, 후안비나스로 봉사하러 갔다. 그 지방 사제는 교회의 종을 쳐서 교인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또한 몇몇 지지자들에게는 각 집을 방문하여 여호와의 증인이 오면 듣지 말 것을 일러 주도록 지시했다.

시장 겸 보안관급인 행정관이 형제들과 다른 경찰관들을 자기 사무실로 불러들였을 때만 하더라도 그 사제는 자기가 성공했다는 생각에 의기 양양했었으리라. 그런데, 그 행정관은 필레 형제에게 그 축음기의 소식을 틀어 줄 것을 요청했다. 왕국 녹음판을 들은 후, 경찰관들은 서적을 받았다. 그 보안관은 형제들의 증거하는 일에 대해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걸 알고서 형제들에게 전파를 계속하라고 말했다.

존 크라독이 산라몬의 공원 야외 음악당에서 공개 강연을 했을 때에도 승리가 있었다. 몇몇 주민과 산라몬의 파이오니아들 및 크라독 형제와 동행하여 산호세에서 온 여섯명 가량의 형제가 참석하였다. (존과 그의 아내 에머 머리는 길르앗 제 10기 졸업생으로서 1949년에 선교인 가족에 가담하였다. 1년 반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반대의 맛을 보려는 직전이었다.) 일단의 어린이를 이끌고 한 사제가 그 음악당을 올라가더니 크라독 형제의 뒤로 가서 야유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전에 준비된 한 무리의 성인들이 시 광장의 한쪽 끝에서 몰려나와서는 “죽여 버려! 죽여 버려!” 하고 소리쳤다.

그 폭도들이 크라독 형제에게 손을 대지 않고 그냥 지나간 것을 보아 그에게 협박만 하려는 것이 분명하였다. 존은 연설을 다 마치지 못하고 머리와 산호세에서 온 다른 사람들과 같이 버스 정류장으로 갔는데, 시장이 그곳에 오더니 연설을 중단하게 되어 대단히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시장은 존이 다시 와서 연설을 해줄 것을 요청하고 그때에는 경찰의 보호 조치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삼주 후에, 일단의 전도인들은 산라몬으로 돌아와서, 강연 쪽지를 사용하여 시 전역에 그 강연을 알렸다. 연설할 시간이 되자, 광장에는 경찰이 줄을 서 있었다. 이번에는 아무런 소란이 없었다.

내란

1948년 선거는 혁명을 가져왔다. 이로 인해 야외에서 돌아다니면서 봉사하는 일이 어렵게 되었다. 유헤니아 딜론은 동료와 함께 어떤 시골 구역에서 봉사하다가 군인들에게 제지당했다. 군인들은 그들에게 총을 겨누면서, “거기 가는 사람은 누구냐, 멈춰!” 하고 고함을 쳤다. “어느 정당 소속이냐?”

자매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우리는 인류에게 참다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정부인,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고 있읍니다.”

군인들이 자매들의 가방을 검색하는 동안, 그 파이오니아들은 그들에게 증거했다. 그 자매들은 풀려 났으며, 전쟁으로 인해 번민하고 있는 이웃 사람들에게 계속 전파하였다.

내란중에 많은 거짓 목자와 교직자들은 양들을 버리고 자기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도망했다. 그로 인해 여호와의 증인은 버려진 양같은 사람들에게 전파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교직자인 목자들이 양들을 먹이지 않고 다만 털만 깎아 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거짓 목자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양들 중 상당수가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교통 수단인 노새 차

교통 수단은 전파하는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코스타리카에서는 여러 가지 수단이 사용되고 있다. 기차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기차라고 해서 모두 엔진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노새 차는 협궤 철도를 다니는 독특한 것으로서, 노새의 힘으로 움직인다. 이것을 타보면 롤러 코스터보다도 더 아슬아슬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 차는 바퀴 위에 판을 올려 놓은 것이다. 판 위에는 20명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가 있다. 노새 차가 철로를 따라 달릴 때, 유일한 브레이크란 바닥에 뚫린 구멍에 끼워 놓은 나무 막대기이다. 그 막대기를 지렛대처럼 회전하여 바퀴를 누른다. 그러므로, 내리막 길을 달릴 때 운전수가 그 판이 노새에게 부딪히지 않도록 하지 못한다면, 그 동물에게 위험이 일어난다. 또한, 승객들은 노새의 발굽에서 튀는 흙먼지를 뒤집어쓰기는 하지만, 그건 사소한 문제다. 탈선이라도 하게 되면, 승객들은 공중으로 퉁겨 올랐다가 땅에 떨어질 때 팔다리가 부러지기도 한다.

강을 다닐 때는 선체 밖에 모터를 장치한 소형 보트나 나무 노로 저어 가는 커누를 이용한다. 예로서, 솔레라 자매는 과나카스테에서 전파를 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푼타레나스에 간 다음, 배를 타고 니코야 만을 건넌 후, 소달구지를 타는 15시간의 여행 끝에 그곳에 도착했다. 60대의 여성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부의 변화

시오도어 시벤리스트는 1944년 3월에 지부가 설립된 때부터 1952년 6월에 아내와 함께 딸 제닛의 출생을 준비하기 위해 떠날 때까지 지부 감독자로 봉사했다.

길르앗 제 3기 졸업생으로서 1946년에 니카라과 지부를 돌보기 위해 코스타리카에서 파견된 윌리엄 컬이 지부 감독자로서 일하기 위해 코스타리카로 돌아왔다. 그의 봉사는 1954년까지 계속되었으며, 그해에 과테말라 태생인 길르앗 졸업생, 도라 아르헨티나 바르가스와 결혼하였다. 그들의 아들 로버트는 지금 브루클린 벧엘에서 봉사하고 있다. 과테말라에서 온 윌리암 오브리 비벤스가 그의 후임으로 지부 감독자가 되었다. 그는 아내 베르타와 함께 길르앗 제 5기를 졸업한 이래 코스타리카에서 봉사하였다. 후에 브라질로 재임명되어 그는 1969년에 사망할 때까지 브라질의 지부 감독자로서 봉사했다.

비벤스 형제가 브라질로 다시 임명되었기 때문에, 찰스 셀돈은 1964년 3월에 조지 젠킨스와 그의 아내가 도착할 때까지 지부 감독자 대리로서 일했다. 건강 문제로 젠킨스 형제와 자매는 1966년에 코스타리카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음의 지부 감독자, 로렌스 A. 세프는 그때 니카라과에 있었다. 그러면 로렌스가 코스타리카로 오게 된 경위를 살펴보자.

1958년 이래 전 시간 봉사를 한 로렌스는 캐나다와 알래스카에서 순회 봉사를 하였다. 특별한 천국 전도 강습을 위해 순회 감독자들을 브루클린 본부로 초대하였을 때, 노어 형제는 길르앗 학교를 참석하지 않고 외국에서의 선교인 임명을 기꺼이 받아들일 사람이 있는지를 질문했다. 세프 형제가 그 초대를 받아들였다. 그는 1961년에 니카라과에 임명되었으며, 거기서 길르앗 제 22기 졸업생이며 쿠바인인 후아나 올림피아 기우나르트와 결혼하였다. 니카라과는 올림피아의 세번째 임명지로서, 그는 온두라스와 멕시코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한 바 있었다.

열달간의 길르앗 학교를 참석한 후, 세프 형제는 올림피아와 함께 새로운 임명지인 엘살바도르로 가기 위해 짐을 쌌다. 먼저 그들은 코스타리카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결정했으며, 즉시 그곳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들은 임명지가 코스타리카로 변경되었음을 알리는 편지가 이미 띄워졌다는 것은 까맣게 몰랐다.

세프 부부는 1966년 9월에 도착하였으며, 그해 12월의 국제 대회에서 노어 형제는 세프가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고 발표하였다. 현재 세프는 지부 조정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확장을 위한 자극제

1954년 12월에 노어 형제는 코스타리카를 또 방문하여 새로운 지부 숙소동과 왕국회관 건축을 발표하였다. 열심이 고조되었다. 산호세의 중심부에 있는 부지를 매입하기 위한 마련이 취해졌다. 그후 1월 초, 형제들이 건축을 시작할 즈음에 무장한 군대가 북쪽에서 침공해 왔다. 전투기의 기관총 사격이 도시와 촌락에 가해졌지만, 형제들은 하나님의 왕국 소식을 가지고 호별 방문을 계속하여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1월의 야외 봉사 보고는 전년도의 신기록을 능가하였다. 그러나 4월의 신기록은 훨씬 더 많았다! 전도인의 수가 무려 30퍼센트 증가한 2,078명이었다.

새로운 지부 시설은 어떻게 되었는가? 지연되었는가? 지부 건물은 1956년 1월 25일, 노어 형제가 아내 오드리와 함께 예기치 않은 방문을 하기 바로 이틀 전에 완공되었다. 봉헌식은 1956년 1월 27일에 거행되었다.

기 경배 문제

1959년 9월에 푸에르토리몬의 학교에서 기 경배 문제가 대두되었다. 모두 여호와의 증인인 13명의 학생들은 자신의 그리스도인 양심을 범하는 그 의식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이 불경스러운 행위에 조금도 가담하지 않았고, 비난받을 행실을 하지 않았음에도, 증인 자녀들은 반역과 불복종 행동을 이유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지방 법원은 그 학생들이 기 경배를 거부하는 한 복학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코스타리카 대법원에 상소되었다. 대법원에서 코스타리카 헌법상의 숭배의 자유와 국립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는 것이 지적되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하급 법원의 판결을 지지하여, 숭배의 자유에 관한 법이 위배되지 않았다고 판시했다.

그 다음 학기 초에, 그 학생들 대부분이 복교되었으나, 다른 기 경배 의식에 참여하지 않자, 또다시 퇴학당했다. 그래서 교육 고등 위원회에 탄원서를 냈으나, 1960년 7월 5일에 그 탄원서도 기각되었다.

기 경배 문제는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 문제는 학교에서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 있지만, 대다수의 교사는 청소년 증인들의 훌륭한 행실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 학생들의 확고하고 양심적인 입장을 문제삼기보다는 다른 면으로 보기 좋아한다. 그들은 이 학생들을 추방한다면,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학급의 우수 학생들을 잃는 것이나 다름 없음을 알고 있다.

시골의 한 학교에서는 등록 학생 50명 중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학생은 단지 6명뿐이었다. 그래서 증인들을 모두 퇴학시키면, 학교는 폐교하고 교사는 실업자가 될 판이었다.

교사들 중에는 퇴학당한 학생들이 정식 교육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성공적인 생활을 해나갈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프란셀라 윌리암스의 손자인 밀톤 힐톤은 그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였다. 그는 퇴학당했지만, 이렇게 말한다. “이건 오히려 축복을 주었읍니다. 나는 먼저 여호와께 대한 충절을 증명할 기회를 가졌고, 그 다음에는 13년 이상 전 시간 봉사를 즐길 기회를 가졌읍니다.” 힐톤 형제는 전 시간 직업을 가질 필요가 있게 되자, 그는 사무원으로 취직하였으며, 나중에 그 회사에서 개인 회계사 직책을 받았다. 그는 신권적인 활동을 소홀히 하지 않고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이라수 화산과 아레날 화산이 깨어나다

1963년 3월 13일에 코스타리카의 많은 화산들 중 하나인 이라수 화산이 20년간의 잠에서 깨어나 2년간의 활동 주기에 접어들었다. 수도에서 약 3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그 화산은 항풍(恒風) 속으로 재를 뿜어 올리고 그 바람은 분화구에서 나오는 그 화산재를 코스타리카 인구의 사분지 일 가량이 살고 있는 산호세 시에 쌓아 놓았다. 그 화산 기슭에 자리잡은 카르타고는 낙진에 비교적 영향을 적게 받는 편이다. 왜냐하면 재를 담은 그 바람이 도시의 고공에서 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르타고에 곧 다른 종류의 참사가 닥쳤다.

1963년 12월 9일 밤에 내린 폭우는 화산의 측면에 두껍게 쌓인 화산재에 스며들었다. 물을 잔뜩 빨아들여 무거워진 화산재는 산을 타고 무너져 내려 강을 재로 메워 버리고, 그로 인해 강물이 강둑 위로 범람하였다. 넘친 강물은 카르타고 시를 휩쓸어, 가축과 야생 동물은 물론, 집과 잠자고 있던 주민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경찰 차들이 확성기를 달고 모든 거리를 순회하면서 재난이 일어날 것을 미리 경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홍수로 인해 생명을 잃었다. 희생자들은 그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아니면 물질적 재산을 버리기를 아까와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경고에 청종하지 않은 대가를 생명으로 지불한 것이다.

오랫동안 카르타고의 시민은 아마겟돈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를 취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은 그들의 도시가 코스타리카의 수호신인 “성녀”의 형상이 있는 그 유명한 성당의 본고장이기 때문에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재난이 닥치고 난 후, 그리고 그 도시에서 30년 이상이나 전파를 한 후, 마침내 1964년 말경에 한 회중이 설립되었다.

죽음과 파괴를 토해 내던 이라수 산의 활동이 잠잠해진 후, 또 하나의 화산인 아레날이 거의 600년간의 활동 중지 상태에서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코스타리카의 북부에 위치한 아레날이 분출하기 시작했을 때, 영향권 내의 지역에는 약 5개 회중이 있었다. 그 지역에 살고 있던 형제들 대부분은 피난할 도리밖에 없었다. 그들 중 생명을 잃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모두가 물질적 재산을 잃었다. 코스타리카 전역의 형제들은 신속하게 식품과 의류, 금전 등을 기부하여 그들을 도왔다.

1960년대의 침체

1964년과 1965년에는 증가가 없었다. 코스타리카의 연례 보고에 의하면, 경제 상황이 원인이었다. 다른 곳에서 직업을 구하기 위해 코스타리카를 떠나야 했던 전도인들이 많았다. 연례 보고서에는 또 다른 이유도 지적되었다. “불행하게도, 많은 수의 사람이 불결한 생활로 인해 제명 처분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모두는 순결한 숭배를 위해 조직을 깨끗하게 보존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일은 아무런 증가 없이 저조했다. 그 기간은 다가올 성장을 위해 필요한, 영적 남자들을 시험하고 장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한 사람 중에 안드레스 가리타가 있다. 그는 20년 동안 순회와 지역 봉사를 하였다. 그의 인내는 어떠한 일에 기여했는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부모는 1946년에 연구를 시작했으며, 온 가족이 항상 충실하게 집회에 참석하였읍니다. 나는 열 네살 때인 1953년에 침례를 받았읍니다. 집회에 참석하고 야외 봉사에 참여함으로써, 순회 감독자들과 밀접한 교제를 하게 되었고, 그들은 항상 나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며, 전 시간 봉사를 하도록 격려를 해주었읍니다.” 1979년 봄에는 지부 위원회의 한 성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내 마이라 및 여섯살 된 딸 안드레아와 함께 순회 및 지역 봉사에서 충실하게 일했으나,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1987년 7월 7일 48세의 나이로 예기치 않게 사망하였다. 코스타리카에 있는 거의 모든 여호와의 증인은 그를 알며 대단히 사랑하였다. 그의 장례식에 4,000명 이상이 참석한 사실로써 그 점을 잘 알 수 있다.

많은 선교인이 일에 박차를 가하다

1960년대에 젊은 “사람으로 된 선물”을 더 많이 받았다. (에베소 4:8) 길르앗 학교는 확실히 코스타리카에 영적 성장과 장성을 가져다 주었다. 코스타리카 사람인 알바로 무노스와 밀톤 힐톤이 길르앗 학교에 초대되었고, 그 후에 다시 그들의 고향으로 임명되었다. 그들이 순회 봉사에 바친 기간은 대단히 감사한 것이었으며, 그들은 고향 회중에서 계속 장로로 봉사함으로써 크나큰 격려의 원천이 되었다.

미국인, 더글러스 리틀과 프레드릭 힐트브랜드가 길르앗 제 45기 졸업생으로서 1968년에 코스타리카에 임명되었다. 그 두 사람은 순회 봉사를 수행했다. 1972년에 더글러스 리틀은 이미 7년 동안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던 사라이 캄포스와 결혼하였다. 그외에 두명의 형제, 존 그리핀과 로사 미행크가 입국함으로써 선교인 가족은 더 늘어났다.

1976년에 프레드릭 힐트브랜드는 길르앗 제 55기생인 선교인, 미사 채퍼와 결혼하였다. 현재 프레드릭은 지부 위원회의 한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마나과에 발생한 지진

코스타리카와 니카라과의 형제들은 서로 인접국이기도 하지만, 신권적 성장에 있어서 서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동안 밀접한 유대가 유지되어 왔다. 1972년 12월에 강력한 지진이 니카라과의 수도인 마나과를 강타했을 때, 그곳의 형제들은 갑자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코스타리카에서는 즉시 마나과의 형제들에게 구호품을 보내기 위한 마련을 하였다. 마나과와 무선 연락이 되지 않았음에도, 약 1톤의 식품을 실은 한대의 차량을 보냈다. 이것은 구호품이 필요하다는 첫 연락이 형제들에게 간 지 단지 60분만에 모아진 것이다. 니카라과 영사관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이 구호품을 가져간다는 말을 듣고 여행하는 형제들에게 비자를 발급해 주었다. 모든 관공서의 창구가 개방되었기 때문에, 형제들에게 직접 구호품을 전달할 수 있었다.

가족의 연합이 성공을 거두다

트리노 로하스와 그의 두 친형제는 과필레스의 부랑자였다. 특별 파이오니아인 마크 타일로르가 트리노의 부모를 방문하기 시작했을 때, 트리노는 그걸 좋아하지 않았다. 한번은 마크의 뒤에서 자기 말 채찍으로 무례하게 딱딱 휘두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마크는 꾸준히 방문하였고, 트리노는 점차 진리를 조금씩이나마 깨달았다. 후에 트리노가 카르멘과 결혼하였을 때, 이웃의 어떤 여자가 그들에게 가톨릭에서 발행한 성서 이야기 책을 한권 주었다. 트리노는 그 성서 이야기들이 마크에게서 들은 것과 일치함을 알았다. 그 점을 가톨릭 교인인 그 여자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불쾌하게 생각하여 그 책을 도로 가져가 버렸다. 성서 지식을 더 갈구하는 마크의 의욕이 식고 말았다. 마침내 트리노와 카르멘은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를 시작하여 1950년에 침례를 받았다.

그들에게는 11명의 자녀가 있었다. 아들인 다비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세운 훌륭한 본을 이렇게 기억한다. “부모가 진리 안에서 꾸준하게 생활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읍니다. 자녀가 11명이나 되고, 곤란한 시기였는데도, 우리는 단 한번도 집회를 빠지지 않았읍니다. 아버지는 록사나의 한 농장을 매입하였고, 우리는 그곳의 관심자 집단을 돕기 위해 이사하였읍니다.”

다비드는 10년 이상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우리에게 준 도움으로써 파이오니아 봉사가 가능하였”다고 말한다. 노에는 다비드의 남동생이다. 그는 이러한 일을 기억한다. “형 다비드는 나에게 본을 보였읍니다. 13세가 되었을 때, 나는 야외 봉사에서 100시간을 바치곤 하였읍니다. 나는 내 자신이 옥수수 밭을 경작하고 옥수수를 팔아, 그 돈을 아버지에게 드리고 나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꿈꾸었읍니다.” 그는 그렇게 했다.

그들의 부모, 트리노와 카르멘은 사망하였지만, 자녀들은 믿음 안에서 계속 확고하다.

확산되는 선교 봉사의 영

코스타리카에는 이전 선교인들의 자녀들이 전 시간 봉사를 하는 훌륭한 집단이 있다. 짝인 존 알렉산더와 함께 1959년에 도착한 로버트 콘로이는 후에 결혼하여 코스타리카에서 순회 봉사를 계속하였다. 그의 아내, 디나가 임신하자, 로버트는 “나와 아내는 이 일 또한 여호와의 축복임을 알고서, 자녀 양육을 지도해 달라고 여호와께 기도하였읍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20년간의 공백이 있은 후, 현재 다시 순회 봉사를 하고 있으며, 두 자녀인 주디와 로드니는 현재 코스타리카의 벧엘에서 봉사하고 있다.

길르앗 제 22기 졸업생인 도널드 프라이는 50개의 학급이 마쳐진 후에 아들 데이비드가 그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을 보았다. 데이비드는 길르앗 제 72기에 참석하였고,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코스타리카에 임명되었다. 데이비드가 아버지처럼 선교인이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부모가 준 신권적 지도와 더불어 코스타리카에서 행복하게 생활하는 선교인들과의 교제를 통해 나도 그들과 같은 선교인이 되도록 감동받았읍니다.”

외국에서의 계속적인 생활이 가능하든지 않든지 간에, 확산력을 가지고 있는 그 영은 이전의 선교인 가족으로 스며들고 있다. 컬 부부, 셀돈 부부와 블랙번 부부도 모두 그 건전한 영으로 가족을 키웠다.

선교인들과 동참하는 코스타리카인들

과거에 코스타리카의 일부 선교인들은 다른 나라로 재임명을 받았다. 보다 최근에, 1959년에 길르앗 학교 졸업생으로서 코스타리카에 온 존 알렉산더와 그의 아내 코리나는 1979년에 파나마로 재임명되었다. 그후 1982년 봄에 로더 미행크와 그의 아내 카르멘도 파나마에서 봉사하도록 요청받았다.

이 일로 코스타리카의 전파 활동은 약화되었는가? 지부 위원회의 조정 위원 세프 형제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확실히 충실한 그 형제들이 행한 훌륭한 봉사를 아쉬워하지만, 그들이 남긴 공백은 이곳의 장성한 형제들로 신속히 채워지고 있읍니다. 지역 봉사의 예를 들어 말하자면, 수년전만 해도 지부에서 파견하는 선교인들에게 지역 봉사를 의존하였으나, 현재는 지방 형제들이 그 공백을 채워 훌륭하게 봉사하고 있읍니다. 순회 감독자의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그 책임있는 직책에서 봉사하는 형제 대다수는 코스타리카인 형제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일이 어느 한 개인에 의존하지 않도록 언제나 감독하십니다.”

기차 차장이 순회 감독자로

길레르모 바딜라는 산호세와 푼타레나스 간을 운행하는 기차의 차장으로서 20년 이상 근무하였다. 50세의 나이로 은퇴하자, 그는 곧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였다. 회중으로 형성되는 데 그가 도운 다섯개의 회중 중 하나가 카르타고에 있다. 바딜라가 카르타고에 도착했을 당시, 그곳에는 “마치 얼음 한 조각처럼,” 단 한명의 전도인이 있었다고 바딜라 형제는 회고한다. 하지만, 십개월 후에 아홉명의 전도인이 있는 회중이 설립되었다. 이제 다른 노선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안내하고 있는 그는 90명 이상이 침례를 받도록 도왔다. 70세의 노령에 그는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수혈 문제로 충절이 시험받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경적인 이유로 인하여 수혈을 거부한다. 심지어 생명이 위태로울 때라도 그러하다. (사도 15:29) 그러나 대용 치료법은 기꺼이 받아들인다. 일부 의사들은 그 중대한 의학 문제에 있어서 형제들과 협조하지만, 반대하는 의사들도 있다.

예로서, 윌손 로하스는 큰 폭발 사고를 당하였다. 그때 그는 어떤 창고의 벽을 뚫고 나가 8미터 정도나 날아가 떨어져 의식을 잃었다. 그의 동료는 즉사했다. 팔일이 지나서야 겨우 의식을 회복한 윌손은 한쪽 눈과 한쪽 귀, 한쪽 다리와 한쪽 팔이 불구가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윌손은 수혈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의 아내 클라리사는 로하스의 결심을 후원했다. 불쾌해진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죽도록 내버려 두시오. 5일밖에 못삽니다. 그 이상은 못갑니다.”

비록 로하스 형제가 수혈하지 않고 치료하는 경우의 불상사에 대한 모든 책임에서 그 병원을 면책한다는 병원 서류에 서명을 하였지만, 그 병원측에서는 붕대 갈아 주는 일 외에는 모든 치료를 보류하였다. 하지만, 그후 2주 동안 그의 상태는 거의 기적적으로 서서히 나아졌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위기가 닥쳤다. 그의 왼쪽 다리에 응결된 피가 어느 때라도 터지게 될 상태였다. 한 전문의가 그 일에 예리한 관심을 갖고서, 약으로 그 응결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조금 후 그 전문의는 윌손의 병실을 찾아와, 윌손이 수혈을 거부한 이유를 질문했다. 윌손의 설명을 듣고 난 후, 그 전문의는 이렇게 말하였다. “응결된 피가 터지지 않아서 당신이 죽지 않게 된 것은, 혈액량이 적고 피가 묽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수혈을 했더라면, 당신은 아마 죽었을 것입니다. 축하합니다!”

“사람을 구함”

양같은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 이르는 또 다른 방법은 그리스도인 행실이다. 한 장로가 근무하는 어떤 회사에서는 근로자들이 작업 환경에 대해 항의하며 임금 인상을 요구하였다. 경영진과 근로자들의 회의 도중, 다른 회사의 지배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근로자들의 불만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 지배인은 이렇게 자랑했다. “우리 근로자들에겐 그런 일이 없읍니다. 대부분이 여호와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래지 않아 그 나라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신문에 다음과 같은 구인 광고가 실렸다. “당 회사에서 일할 사람을 구함. 헌신하고 침례받은 여호와의 증인에 한함. 장로나 봉사의 종은 우대함.” 분명히 그 외에 요구된 자격 요건은 없었다.

전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다

1970년대의 10년 동안, 좋은 소식을 가지고 보다 작은 마을로 찾아가는 노력이 기울여졌다. 그리하여 1972년에 시벤리스트 형제와 자매가 미국에서 돌아와 산호세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트레스리오스라는 마을에 정착했다.

이 마을에는 한 10대 소년이 여호와의 숭배자라고 불리는 소규모 분파를 이끌고 있었다. 그 분파는 협회의 서적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의 분열 때문에, 구티에레스 가족은 그 집단과 결별하고 지부로 연락하여 성서 연구를 부탁했다. 그들을 돕기 위해 더글러스 리틀이 임명되었다. 그는 있었던 일을 이와 같이 설명한다.

“즉시 구티에레스 가족, 미구엘, 이네스 및 그의 세 아들을 대상으로 연구가 시작되었읍니다. 그 부모들은 수개월 동안 협회의 출판물을 부지런히 읽어 왔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실용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그들은 그 집단의 ‘12 사도’ 중에 포함되어 있었고 ‘야외 봉사’의 인도자들이었기 때문에, 단지 한 백성만이, 처음에는 다른 성원들이 인식하지 못한 여호와의 축복, 즉 진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구티에레스 가족이 그 분파와 결별을 한 지 얼마 후, 지부는 나머지 성원들로부터도 연락을 받았읍니다. 그들도 연구하기를 원했으므로 나는 그들의 필요도 돌보아 주도록 임명되었읍니다. 내가 그 전체 집단을 방문하여 시범적인 성서 연구를 사회할 약속을 하였읍니다. 놀랍게도, 15명 정도의 사람들이 반원형으로 앉아 있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의 대답에 밑줄을 그어 놓고, 「신세계역」 성서를 펴고서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그들의 친척과 친구들을 제외하고도, 그날 밤에 참석한 성인들 15명 모두가 그들의 생명을 여호와께 헌신하였으며, 현재 여호와의 유일한 지적 조직에서 봉사하고 있읍니다.” 오늘날, 트레스리오스에는 두개의 회중이 있다.

“숭배로 연합됨”

쿠바에서 발생한 박해는 코스타리카의 형제와 쿠바에서 온 영적 형제들을 연합시켜 주었다. 1980년에 쿠바와 미국간의 이민 통로가 폐쇄된 후, 코스타리카는 쿠바인들이 다른 나라로 갈 때 경유지로서 이용하는 중계 국가가 되었다. 자원에 의하여, 또는 정부의 압력 때문에, 또는 쿠바를 떠나면 징역형이 취소된다는 조건 때문에, 쿠바인들은 코스타리카로 왔다.

코스타리카에 입국한 쿠바인 증인은 100명이 넘었다. 그중에 산토도밍고 회중에서 장로로 봉사하던 우발도 페르난데스 형제는 쿠바인 형제를 대표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 도착한 형제들 일동은 자유롭게 된 데 대해 여호와께 감사하며, 모든 면에서 후대와 그리스도인 사랑을 베풀어 준 코스타리카의 형제들에게 진심으로 사의를 표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연합된 한 백성으로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 여호와를 계속 숭배하고자 합니다.”

예상 밖의 선교인들

도움이란 언제나 감사한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와 같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마태 9:37, 38.

도움은 멕시코의 ‘길르앗 분교’에서 파견된 선교인의 형태로 왔다. 후안 레예스와 그의 아내 레베카 및 아르놀드 차베스는 그 분교의 제 1기를 졸업하고 니카라과에 임명되었다. 그 니카라과에의 임명은 잠깐 동안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주 허가를 얻을 수 없었으며 코스타리카로 가서 니카라과 체재 허가를 신청해 보도록 하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 선교인들은 코스타리카에서 순회 봉사를 하였다.

1982년 3월 20일 토요일은 더 많은 뜻밖의 손님들, 즉 니카라과에서 추방된 19명의 선교인들이 온 날이다. 그들 중 9명은 육로를 통해서 코스타리카의 국경 너머로 추방되었다. 나머지 10명은 비행기 편으로 파나마로 보내졌다. 케빈 블록과 그의 아내 루비는 정오에 코스타리카의 국경을 넘었다. 그날 저녁 6시경, 나머지 7명의 선교인은 소지품을 가방에 챙겨, 코스타리카의 국경을 넘어, 별빛을 받으며 한적한 도로 옆에 앉아 있었다. 곧 형제들이 차를 몰고 와서 리베리아 시로 수송하였고, 거기서 호르게 멜렌데스 가족은 그 선교인들에게 따끈한 식사와 숙소를 마련해 주었다. 이튿날 그들은 산호세 지부에 오게 되었다. 화요일에는 파나마로 추방되었던 열명의 선교인도 코스타리카에 도착했다.

뉴스 보도를 통한 증거

토요일 밤에 세계 뉴스의 초점이 추방된 선교인들에게 모아지기 시작했다. 전세계에서 41개 이상의 신문사, 라디오 방송국, 텔레비전 방송국이 지부에 전화를 걸어 선교인들과의 회견을 요청하였다. 수요일 아침에 코스타리카의 저명한 뉴스 해설가, 로드리고 푸우르니에르는 추방된 선교인들과의 이른 아침 원탁 토의를 요청하였다. 라이너 톰슨과 그의 아내 지인, 이언 헌터는 전국적으로 방영된 40분간의 TV 프로그램에서 회견하였다. 그 프로그램에서 강조된 점은, 지상의 모든 정부에 대한 여호와의 증인의 중립적 입장,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여호와의 증인의 관심, 그리고 가족의 연합을 강화시키는 방법에 대한 여호와의 증인의 가르침 등이었다. 그 프로그램은 코스타리카의 화제거리가 되었고, 증거할 기회를 많이 열어 주었다.

굳게 뭉친 그 선교인 집단을 벧엘 숙소에 머물게 하기 위한 마련이 취해졌다. 수주 후에는 브루클린으로부터 새로운 임명이 와서 톰슨 형제 자매와 에드워드 이리치티 형제를 제외하고, 선교인들은 벨리즈,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로 배치되었다. 제외된 선교인들은 코스타리카에 머물도록 임명되었으며, 톰슨 형제는 지부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빌 로저스와 그의 아내 마비스는 다른 19명의 선교인들과 같이 추방되지 않고 니카라과에 5개월 더 남아 있었다. 그들은 호텔에서 2주간 “가택 연금”을 당한 후, 역시 8월에 코스타리카로 추방되었다. 그들도 TV 회견을 하였다. 무슨 일을 하다가 니카라과에서 추방되었는가 라는 질문을 받고 빌은 TV 시청자에게 “단지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고 설명했다. 그 다음 같은 프로그램에서 코스타리카의 대주교가 회견을 하였다. 그 대주교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이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왕국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로저스 형제와 자매는 결국 새 임명지인 엘살바도르로 떠났다.

벧엘 가족이 증가하다

1977년에 벧엘 가족은 네명이었다. 그러나 전도인 수가 급격히 증가하자, 1982년에는 코스타리카와 그 지부에 임명된 다른 구역에 있는 회중의 필요를 돌보기 위해 여섯명이 벧엘에서 일하게 되었다. 1980년에 전도인의 평균 수가 5,000명 선을 넘어섰고, 1981년에 전도인의 최고 수가 6,183명으로 늘어나는 놀라운 증가가 있었다. 1981년에는 118개 회중에 여섯 순회구가 보고되었고, 그 수는 1982년에 일곱 순회구와 138개 회중으로 급증하였다.

지부 사무실의 달마다 하는 업무에는 각 전도인에게 「우리의 왕국 봉사」를 공급하는 일이 있다. 인쇄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하였지만, 1965년에 코스타리카는 직접 「우리의 왕국 봉사」를 편집하기 시작하였고, 지방적 광고를 더 많이 포함시킬 수 있게 되었다. 1982년 1월에 또 하나의 진보가 있었다. 그해에 코스타리카는 「우리의 왕국 봉사」를 오프셋 인쇄기를 사용하여 자체적으로 인쇄하기 시작하였다. 1983년 여름에는 그 소형 인쇄기를 좀더 다양하게 사용하기 위해 IBM 식자기를 한대 구입하였고, 1984년에 회중의 필요를 돌보기 위해 벧엘에는 열명 이상의 봉사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왜 변화가 있게 되었는가?

오랫동안, 코스타리카의 전 주민 가운데 자기 만족의 태도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교만하여 성서에 대한 대화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성서 예언의 성취로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는 세계 상태가 사람들의 생활에 더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자, 그들의 마음은 이 모든 일의 의미를 궁금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경제 위기, 테러 활동, 난민 등, 그 모든 상태는 호별 봉사에서 더욱 나은 반응이 생기도록 길을 열어 주었고, 그로 인하여 성서 연구가 더 많이 생겼다. 그리하여 1982년부터 1987년 사이에 어떤 결과가 있었는가? 즐거워할 일이 있었다! 전도인의 최고 수는 6,611명에서 10,374명으로 증가했다.

기뻐할 또 다른 이유는 파이오니아의 총수가 792명으로 2배 이상 증가하였기 때문이었다. 1984년 이후로 가정 성서 연구는 전도인 수를 능가하였다.

새로운 지부 시설

1984년 1월에 새로운 지부 시설의 건축을 위하여 전력을 기울인 노력이 시작되었다. 1955년에 산호세 중심부에 지부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1977년에 개축했다. 불과 수년만에 지부 건물은 비좁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도서실은 네개의 사무 책상이 차지해 버렸고, 때때로 사무실 공간이 부족하여 사무 직원들은 자기 방을 사용하기도 했다. 복도는 보관소로 사용되었고, 발송실 작업대는 보조 침대로 둔갑하였다. 회의실은 인쇄실로 개조되었다. 확장할 때가 되었는가?

지부 위원들은 1년 이상 적당한 부지를 물색했다. 마침내, 사업계에 친지가 있는 존 크라독 형제의 도움으로써 이상적인 장소를 찾아냈다. 전원적 배경을 가진 6.5헥타르의 부지로서, 후안 산타마리아 공항과 산호세 사이의 팬 아메리칸 고속 도로 바로 옆에 있는 비옥한 땅이었다. 세개의 대도시 가운데 자리한 이 대지는 장래에 더 확장할 수 있는 넓은 곳이었다. 화산 위로 아름다운 무지개가 매일 서고, 변화 무쌍한 구름이 화산을 내리깔고 있는 평화스러운 경치가 주위에 있었다.

1984년 5월에 그 대지를 매입하였다. 건평을 4,200평방 미터 이상으로 설계하여, 550평방 미터인 이전 지부 건물과는 대조적이었다. 벧엘 봉사자, 전국의 순회 감독자를 비롯하여 많은 수의 특별 파이오니아, 보조 파이오니아, 회중 전도인들이 도움을 주었다.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 독일, 핀란드, 과테말라, 파나마 등지에서 많은 건축 기술자들이 와서 그들과 합세하였다. 외국인 작업자의 수는 총 300명 이상이었으며, 그들의 체재 기간은 수일에서 수년에 이르렀다.

그 건축이 완공될 때까지 거의 모든 회중으로부터 약 5,000명의 전도인이 건축 현장에서 일하였다. 그외의 전도인들은 열렬한 기도와 격려 및 헌금 등으로 참여했다. 여호와의 백성은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그 모든 노력을 바친 것이다.—고린도 전 3:7.

그날이 정해지다

봉헌식 일자, 1987년 1월 4일! 전국적으로 초대를 하였다. 브루클린 벧엘에서 온 스윙글 형제와 언더우드 형제가 격려적인 성서적 연설을 하였고, 역시 브루클린 벧엘에서 온 밀턴 헨첼 형제는 봉헌식의 목적, 즉 이 시설을 여호와와 그분의 권익을 위해 봉헌한다고 선언하였다. 석양녘에, 참석한 13,311명 모두는 이년간의 건축 기간 중에 영을 주시고 지도를 베풀어 주신 여호와께 감사하였다.

건축이 진행되는 중에도, 증가는 계속되었다. 건축이 시작된 이래 24차례의 전도인 신기록이 있었다. 전도인의 최고 수가 10,374명이고 성서 연구가 13,425건인 것으로 보아, 새로운 그 시설은 곧 충분히 사용될 것이다. 새로운 지부 시설은 1987년 기념식에 참석한 30,534명 중에서 나오게 될 미래의 여호와의 증인의 필요를 돌보는 데도 사용될 것이다.

1940년대의 소녀들에게 생긴 일

1940년대에 활동했던 파이오니아 소녀들을 기억하는가?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 자매들은 지쳐 물러났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모두가 여전히 활동적이다. 여섯명의 자매가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였고, 네명은 아직도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있다. 다섯명은 가족을 부양한 후 계획을 조정하여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다.

그들이 왕국 전파에 계속 그렇게 바쁜 이유는 무엇인가? 릴라 스와비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 나이 많은 기름부음받은 자매들과 함께 일한 것이 우리를 세워 주었읍니다. 이제 젊음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본은 계속 격려가 되고 있읍니다.”

과연 부의 해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그 땅을 가리켜 부의 해안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적절하였지만, 그가 상상하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 진리가 그 해안에 도달한 지 80여 년이 경과한 지금, 코스타리카의 보물은 여호와를 그들의 하나님으로 삼은 백성이다. 협회 본부로부터의 노어 형제 및 기타 특별 대표자들의 방문은 그 보물을 정련해 주었다. 선교인들은 전파하는 일의 선두에서 일했을 뿐 아니라, 회중을 안정시키고, 더 많은 보물 즉 여호와의 찬양자를 산출하고 있다. 참으로, 코스타리카는 영적 부의 해안이다!

[199면 지도와 삽화]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카리브 해

산카를로스 구

리베리아

과필레스

그레시아

과시모

푼타레나스

알라후엘라

시퀴레스

푸에르토리몬

산호세

카르타고

카위타

포인트퀘포스

산이시드로

골피토

태평양

파나마

[202면 삽화]

1914년경에 침례를 받은 열정적인 초창기 전파자들: 클라우디아 구딘, 레아 윌손(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나 윌리암스(아래)

[204면 삽화]

1914년경에 침례를 받은 헨리 스테엘레와 그의 아내 마틸데가 가족과 함께 있다. 이 부부의 자녀, 손자녀, 증손자녀들 중 다수가 오늘날 활동적인 여호와의 증인이다

[209면 삽화]

1926년에 침례를 받은 알베르트 에스라 필레는 일에 불을 붙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

[213면 삽화]

최초의 선교인 집단. 앞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찰스 파머, 로라 리어 파머, 허미너 시벤리스트, 1944년부터 1952년까지 지부의 종으로 봉사한 시오도어 시벤리스트

[217면 삽화]

순회 봉사를 한 “의사” 하딘과 에밀리. 기차로 수많은 여행을 하였다

최초의 원주민 순회 감독자, 아르놀드 윌리암스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장래가 촉망되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218면 삽화]

1944년부터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일하는 에벨린 페르구손(현재는 타일로르). 축음기가 보인다

[225면 삽화]

“종교는 올무이며 사기다”라는 러더퍼드 판사의 녹음 연설에 감동되어 1948년에 아내인 발미나와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한 실베르트 스펜체. 1985년 5월에 사망할 때까지 지부 위원으로 봉사했다

[233면 삽화]

1966년 이래 지부 조정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는 로렌스 세프. 옆은 아내 올림피아

[239면 삽화]

이 사진의 프레드릭 힐트브랜드와 그의 아내 미사는 인쇄 시설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250면 삽화]

새로운 지부의 항공 사진. 전면에 원형 응접실이 있고, 왼쪽은 인쇄실, 발송실, 사무실; 오른쪽은 숙소동

[252면 삽화]

여전히 파이오니아 영을 가지고 있는 1940년대의 파이오니아 소녀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헤니 타일로르, 에벨린 타일로르, 미레야 오르테가, 헤니 딜론, 코리나 노보아, 릴라 스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