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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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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산맥은 음악 소리로 생기가 넘쳐 있다.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 슈트라우스 등이 작곡한 뛰어난 음악 작품으로 명성이 높은 오스트리아는 빼어난 자연 경관으로도 유명하다. 해발 3,797미터에 달할 만큼 하늘 높이 웅장하게 솟아 있는, 눈 덮인 산봉우리들 사이의 곳곳에는 울창한 숲, 맑은 호수, 광활한 계곡이 가로 놓여 있다. 마침내 그 산봉우리들은 동쪽으로 완만한 구릉과 곡창 지대인 낮은 평원으로 점차 이어진다. 이처럼 웅장한 주변 환경의 아름다움은 1900년대 초기에 오스트리아에 등장한 성서 진리의 영적 아름다움으로 인해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오스트리아의 고봉들과 푸른 계곡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영”이 메아리치고 있다.—시 149:6.

오스트리아는 여러 세기 동안 게르만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 있었다. 그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에는 헝가리와 제휴하였다. 따라서 인구의 98퍼센트가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민족 가운데 마자르인(헝가리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빈이 대제국의 수도였던 때는 물론이고 양차 세계 대전 이후의 기간에도, 많은 사람이 다뉴브 강이 흐르는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살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 결과, 빈의 주민은 현재 약 7,555,000명인 오스트리아의 인구 중 20퍼센트 이상에 달한다.

오스트리아의 공식 종교는 여러 세기 동안 합스부르크가(家) 군주들의 명령에 따라, 로마 가톨릭교였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인구의 84퍼센트는 로마 가톨릭 교인이라고 공언하며, 오스트리아와 교황청간에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정부의 재정 지원을 확약하는 정교 조약이 맺어져 있다. 그외 6퍼센트는 프로테스탄트 교인으로 등록되어 있다. 하지만 종교 제도에 대한 열의가 대부분 사그라졌기 때문에, 그 수자를 가지고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진정한 태도를 알 수는 없다. 그러한 종교인 중 상당수는 전통적 종교 유대를 공공연히 단절하기를 주저한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인은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를 염려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그들에게 여호와의 길을 가르치는 데는 많은 노력과 여호와의 영의 축복이 필요하였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에는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실 것인가?’를 더 염려하고 있음을 나타낸 사람이 현재 17,700명 이상이 있다. 그들이 246개에 달하는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을 구성한다.

증거하기 위한 최초의 시도

20세기초에, 오스트리아의 종교 생활은 주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정하는 바에 장단을 맞추어 영위되었다.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에게는 1781년에 이른바 종교 관용령에 의거하여 부여된 바 있는 특정한 권리가 있었지만, 그 외의 사람들 대부분은 개인적으로만 종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치 타워 협회의 초대 회장인 찰스 테이즈 러셀은 유대인 주민에게 우선 관심을 기울이기 위하여 1911년에 빈을 방문하기로 결정하였다.

기차를 타고 빈에 도착한 러셀은 콘티넨탈 호텔의 대형 강연장을 3월 22일에 사용하기 위해 임대하였다. 진실한 유대인의 관심을 이끌 목적으로 “예언 속의 시오니즘”이라는 연설이 예정되었다. 빈의 유대인 주민들은 성서 예언에 관한 러셀의 설명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나타낼 것인가? 뉴욕(미국)에 사는 유대인 랍비는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으로 알려져 있는 당시의 성경 연구생에 대해 유대인에게 경고하는 그릇된 내용의 긴 전문을 보낸 바 있었다. 그 결과, 러셀 형제가 연단으로 올라갔을 때에 강연장은 가득 찼지만, 그는 청중의 삼분의 일 가량이 연설을 방해하기로 결의하였음을 이내 알아차렸다.

후에 러셀은 이렇게 보고하였다. “연설을 막 시작했을 때부터 강연장 곳곳에서 그들은 떠들어 대면서 고함을 질렀으며 그들 중에는 악귀 들린 듯이 보인 사람들도 있었다. ·⁠·⁠· 청중의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두 마디를 애써 이야기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 여러 사람이 우리에게 손찌검을 하고 싶어하는 듯했지만, 비교적 지각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줄지어 서서 강력히 막아 주었다. 우리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으나, 반대자들을 잘 아는 사람들은 우리를 매우 걱정하는 것 같았다. 성과가 전혀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강연을 포기하겠다는 뜻으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나서 연단을 떠났다. 지각있는 그 유대인들은 우리 앞에서 길을 터주었고 반대자가 조금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우리가 강연장을 빠져 나가도록 안내하였다. ·⁠·⁠· 다음날, 열댓 사람이 와서 하나님의 계획에 관해 좀더 물어 보았다.”

또한, 진실한 진리 탐구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노이에스 비너 주르날」(뉴 빈 저널) 신문에 러셀의 강연 전문을 게재하도록 마련했다.

하지만 러셀 형제가 빈을 최초로 방문한 것은 그때가 아니었다. 그보다 20년 전인 1891년에 러셀은 독일의 드레스덴을 출발하여 빈을 지나 러시아의 키시네프까지 여행했다. 러셀은 자신이 이해한 대로 당시의 상황을 논평하면서, 「시온의 파수대」 1891년 11월호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러시아에서 진리가 들어갈 수 있는 어떠한 틈이나 여건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 이탈리아나 터키나 오스트리아나 독일에도 추수를 조금이나마 바랄 만한 격려적인 요소가 없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오스트리아의 일부 사람을 돕기 위한 또 다른 시도가 있었다. 1914년초에 맥스웰 G. 프렌드(유대인 부모에게서 출생하였으므로 당시에는 프레셸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음)는 유대인 가운데 메시야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을 퍼뜨릴 목적으로 독일의 벧엘을 떠나 오스트리아-헝가리로 갈 것인가 라는 질문을 받았다. 맥스웰은 빈에서 두명의 「시온의 파수대」 예약자와 함께 정기적인 가정 성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보고했다. “유대인들은 우리를 그리스도교국의 선교인과 혼동하였기 때문에 좋은 소식에 좀처럼 호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교국이 여러 세기에 걸쳐 유대인을 모든 나라에서 몰아냈고 전쟁에서 무자비하게 살해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국에 대한 사랑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로부터 수개월도 안 되어 제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한 모든 노력은 그 전쟁으로 인해 끝나고 말 것인가?

전쟁 후, 추수의 시작

세계 대전의 공포 속에서도 영적인 것을 생각하고 이야기한 사람들이 있었다. 요한 브로츠게는 청년이었지만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도른비른 시에 있는 자기 직장에서 화로 책임자인 데겐하르트라는 남자에게 석탄을 배달해 주었다. 1917년 초가을에 데겐하르트는 석탄을 배달하던 요한에게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서 젊은 요한은 징집되어 군복무를 하였다. 그가 들은 진리의 씨는 뿌리를 내릴 것인가?

전쟁의 공포를 겪은 후에 요한은 집으로 돌아왔다.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말씀은 깊은 인상을 남겼었기에 그의 머리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데겐하르트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참으로 애석하게도, 데겐하르트는 전시에 사망하였다. 하지만, 1919년 봄에 요한 브로츠게는 오토 마티스와 당시에 이미 성경 연구생이었던 크사버 클린을 만났다. 그는 오랫동안 바라던 성서 서적을 오토에게서 얻었다. 그 사람들은 오스트리아 서부에 살던 최초의 성경 연구생들이었다.

그곳에서 대략 680킬로미터 떨어진 오스트리아 동쪽 끝에서도 진리는 호의적인 또 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19년과 1920년에 젊은 요하네스 엠은 마르흐펠트 평원의 마을, 도이치바그람에서 음악 교사로 재직했다. 요하네스의 친구인 한 부부의 집에는 독일에서 온 기술자가 하숙하였다. 그 부부는 요하네스에게 골러라는 그 기술자가 아주 새롭고 이상한 것을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골러는 세상 끝이 가까왔으며, 지옥불은 없고, 대부분의 신자가 하늘에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 모든 점을 성서로 증명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고 했다. “한번 그 토의에 참석해 보겠어요?”라고, 그 부부는 젊은 음악 교사에게 권했다.

요하네스는 그 토의에서 난생 처음 성서를 보았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골러는 평온한 인상을 풍겼으며 내가 묻는 것을—몇 가지만이 아니라—모두 침착하게 대답해 주었읍니다!” 요하네스는 C. T. 러셀이 저술한, 여섯권으로 된 「성경 연구」를 즉시 주문했으며, 그 책을 열심히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편, 오스트리아 남부의 클라겐푸르트에서 젊은 부기원인 프란츠 간스터는 에그라는 스위스 남자와 편지로 사귀었다. 두 사람의 편지 왕래에는 우표 수집이나 그림 엽서 교환보다도 더 의미있는 것이 있었다. 에그는 이미 성경 연구생이었기 때문에, 부기원인 그 오스트리아 청년은 에그로부터 성서의 소식을 들었다. 간스터는 당시에 스위스에서 구할 수 있는 워치 타워 서적을 모두 주문하였는데, 레오폴트 쾨니히라는 이름의 통 제조업자가 1921년에 스위스에서 오스트리아로 돌아와서 그것을 직접 전해 주었다. 그것을 계기로 일어난 일은 후에 더 살펴보기로 하자.

그와 거의 같은 때에, 독일에서 온 한 성경 연구생이 오스트리아의 북부 지방인 린츠에 살던 한 부부에게 소책자 한부를 남겨 주었다. 그것은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제목의 소책자였다. 그 부부는 소책자를 읽고 나서 친구인 지몬 리틀러라는 농부에게 “깜짝 놀랄 만한 문체로 씌어진 책자”라고 하면서 주었다. 그래서 지몬 리틀러는 약간 편견을 가진 생각으로 대충 훑어 보았다. ‘아마도 황당 무계한 것에 불과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몬은 그 소책자를 두번 읽은 다음, 한번 더 읽었다. 드디어 그는 이 소책자에 들어 있는 보석 같은 진리를 인식할 것인가? 그렇다. 그는 원래 가졌던 편견을 부끄러워할 정도까지 되었다.

그 소식을 좀더 철저히 조사해 보려는 간절한 마음에서, 지몬은 소책자의 뒤에 나온 주소로 빈에 편지를 썼다. 얼마나 오랫동안 성서를 갖고자 원했던가! 따라서 지몬은, 스위스에서 돌아와서 이제 콜포처로 봉사하고 있던 통 제조업자인 레오폴트 쾨니히와 접촉했다. 쾨니히 형제는 소형 「루터역」 성서를 그 농부에게 보내 주었을 때, 그것이 큰 즐거움을 주리라고는 아마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드디어 지몬 리틀러는 자기 성서를 갖게 되었다! 그는 성서와 함께, 「시온의 파수대」와 「생각있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양식」을 읽었다. 가족과 친척, 이웃 사람들은 그를 대단히 조롱했다. 그러나 지몬 리틀러는 진리를 발견했는데, 중요한 것은 그 점뿐이었다. 후에 그가 이렇게 말한 대로였다. “가슴이 벅차, 입이 벌어질 정도였읍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연설에 귀기울인 사람들

1921년 늦가을에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놀라운 주제의 강연이 그림 같은 빈 시의 넓은 소피엔젤레에서 있었다. 소식에 대한 반응은 십년 전에 러셀 형제가 대했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그 모임에 관한 보고서는 이렇게 알려 준다. “소식은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광고는 큰 파문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모임이 시작되기도 전에 거리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강연장은 가득 찼으며, 강연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문들을 닫아야 했으며, 한편 수백명의 사람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청중은 하나님의 왕국의 설립에 대한 놀라운 소식과 현재 살아있는 수백만명의 사람이 죽을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위안을 주는 성서의 약속을 숨을 죽이고 잘 들었다.” 그날 저녁에 2,100부의 「수백만」 소책자가 전해 졌고, 1,200명의 사람이 다시 방문해 달라고 주소를 제출했다.

그 연설로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 중에는 한스 로노프스키가 있다. 그는 소피엔젤레에서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주일 후에 빈의 어떤 상가를 지나다가,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있게 될 동일한 강연의 광고 포스터에 관심이 쏠렸다. 그는 슈트라우스 왈츠나 모차르트 협주곡을 즐길 목적으로가 아니라 성서 진리의 매혹적인 선율을 잘 듣기 위해 그곳에 갔다. 그곳에서 들은 것은 한스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다.

여러 지방에서의 활동

그러면 오스트리아 전역의 다른 인구 중심지들로 주의를 돌려 보자. 어느 날, 프란츠 간스터는 빈으로부터 엽서를 받았다. 오스트리아의 활동을 감독하도록 독일, 드레스덴으로부터 파견된 에밀 베첼 형제가 연설을 할 수 있도록 클라겐푸르트에서 가장 넓은 강연장을 찾아서 임대해 놓으라는 엽서였다. ‘잔트비르트 호텔의 홀이 가장 크겠지’ 하고 생각한 간스터는 즉시 호텔 주인을 찾아 나섰다.

“제 생각으로는 좀더 가득 차게 보이게 하기 위해 탁자와 의자를 홀에 들여 놓았으면 합니다. 그다지 많이 오지 않을 게 뻔하니까요”라고, 호텔 지배인은 말했다.

간스터는 단호하게 “앉을 수 있는 홀만을 빌리도록 지시받았읍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제 그 많은 강연 초대장을 누가 배부할 것인가? 노동자인 간스터는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그는 두명의 남자를 고용하여 클라겐푸르트 시에서 3,000장의 강연 쪽지를 배포하게 했다. 후에 나타난 참석자의 수로 볼 때, 그들이 잘 일했음이 분명했다. 호텔 지배인은 2,000명이 강연에 참석한 것으로 추산했다. 실내뿐 아니라 발코니에도 사람이 가득 찼다.

참석자 중에는 20세의 학생, 리하르트 하이데가 있었다.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강연의 광고 포스터를 본 후에 리하르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누가 뭐라 하든 그 연설을 들으러 가겠어요. 허풍에 불과한지, 진리가 조금이라도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여 리하르트는 실제로 갔으며, 아버지와 누이인 테레제도 따라가기로 했다.

연설이 끝나자, 청중 가운데 많은 사람이 서적 신청과 함께 주소를 남기고 떠났다. 그 신청을 돌보기 위하여 프란츠 간스터는 충분한 양의 「성경 연구」를 주문했다. 프란츠가 대단히 많은 책을 받았기 때문에 하숙집 여주인은 그가 모든 꾸러미를 어디에 둘 것인지 궁금히 여겼다. 프란츠의 방은 바닥에서 천장까지 서적으로 가득 차서 프란츠가 몸 둘 만한 공간도 없을 정도였다.

강연을 듣고 감격한 하이데도 일곱권으로 된 「성경 연구」를 주문하여 열심히 읽었다. 오래지 않아 그의 아파트에서 집회가 열렸다. 그의 거실에서 30명에 달하는 사람이 가득 모일 때도 자주 있었다.

일찌기 1922년 봄에, 그라츠에서도 집회가 열렸다. 그 밖의 지방 도시에서도 연설이 행해 졌다. 그처럼 여호와의 일은 여러 지방에서 열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클라겐푸르트의 그 소규모 집단에 속한 전도인들은 대단히 열심이었다! 아직 침례를 받지 않았는데도 그러하였다. 1922년 7월 5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빈에서 침례가 있었고, 다음주에는 케른텐 주에서 침례가 있었는데, 그 지역의 첫 열매들이 아름다운 뵈르터 해에서 침례받았다. 침례받은 사람 중에는 프란츠 간스터, 하이데 부부(부모)와, 두 자녀인 리하르트와 테레제 그리고 코파트슈 씨가 포함되었다. 코파트슈 씨는 열심과 기탄없이 말하는 것으로 후에 잘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빈에서는 단지 하나님의 백성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까지도 떠들썩하게 한 일이 발생했다.

소란스러웠던 빈에서의 집회

1922년, 워치 타워 협회의 제 2대 회장인 러더퍼드 형제는 지부 순방 여행에 5월 30일부터 6월 1일까지의 빈 방문을 포함시켰다. 넓은 카타리넨할레에서 강연할 계획을 세웠다. 사람들은 11년 전에 러셀 형제가 빈에서 연설하려고 했을 때보다 호의적으로 맞이할 것인가?

러더퍼드 형제가 통역을 맡은 (스위스에서 온) 콘라드 빈켈레 형제와 함께 연단에 올라섰을 때, 강연장은 통로를 포함해서 앉을 수 있는 곳은 모두 사람으로 가득 찼다. 심지어 연단 위에서 연사에 아주 가까이 앉은 사람도 있었다. 또한 들어오려고 애쓰는 사람도 여전히 있었다. 하지만 수천명의 참석자 중에는 조용히 연설을 잘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해할 목적으로 온 사람도 수백명이 있었다. 성서 소식의 반대자들은 하수인들을 청중 곳곳에, 특히 강당 뒤쪽에 배치시켰다.

연설의 처음 40분 가량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러더퍼드 형제는 집회를 중지시킬 시도가 있을 것을 경고받은 바 있었다. 그래서 세부점은 나중에 말할 의도로 연설의 주요점을 우선 다루어 나갔다. 그러나 주요점을 다루고 나자마자, 소란이 벌어졌다. 200명 내지 300명 정도의 소란꾼이 고함치면서 마치 들소 떼처럼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젊은 남녀들이 의자 위로 뛰어올라 사방으로 신호를 보냈다. 소란꾼들이 한바탕 과격하게 난동을 부리자, 연설은 중단되었다.

러더퍼드 형제는 청중에게 조용하고 올바로 행동하도록 애써 호소하였지만, 소용없었다. 다시 한번 그는 통역을 통해 청중을 향해 “여기 계신 청중에게 가부를 물어 본 강연을 끝까지 듣기 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라고 애써 말했다. 대부분의 청중이 찬성하는 뜻으로 손을 들었다. 그러나 난동자들은 큰 소리로 반대 의사를 말했다. 그러자 러더퍼드 형제는 단호한 어조로 “듣고 싶지 않은 사람은 즉시 홀에서 나가고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듣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 말에 극도로 성이 난 방해자들은 이성을 잃어버렸다. 소동의 주동자들은 통로의 사람들을 헤치며 나아갔다. 말썽을 부리는 사람들은 연단에서 5미터도 안 되는 곳까지 와서 “인터나초날레”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행동이 대단히 광적이어서 악귀 들린 사람처럼 보였다.

강연장의 관리인이 도착해서 연사에게 즉시 연단을 떠나라고 요구했다. 러더퍼드 형제는 폭풍과도 같은 소란이 지나가고 자신이 강연을 계속할 수 있도록 경찰이 군중을 진압시켜 줄 것을 바랐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관리인이 일부 전등을 껐지만, 반대자들은 다시 켰다. 불안이 점점 더 심해 졌기 때문에, 관리인은 두세명의 보조원을 데리고 연대로 달려가 러더퍼드 형제의 팔을 붙잡고 청중의 눈에 보이지 않는 뒤편으로 잡아 끌었다.

폭도들은 계속 노래를 부르며 연단 앞으로 왔다. 그중 일부가 “그 자가 어디로 갔지? 어디 있어? 공산당을 지지하자!”라고 소리쳤다. 폭도들은 러더퍼드 형제를 찾을 수 없었으므로 출구마다 감시인을 세웠다. 그러나 그들은 연단 뒤의 문을 보지 못했음이 분명하였다. 평상시에는 잠겨 있고 빗장을 질러 놓은 그 문이 곧 열렸다. 러더퍼드 형제와, 뉴욕에서 함께 온 아서 구 형제는 그 문으로 급히 빠져 나갔고, 문은 이내 닫히고 다시 잠겨 졌다.

「노이에스 비너 주르날」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성서 강연회에서 벌어진 추태”—“공산주의자로 인한 모임 해산.”

당시 오스트리아에서의 협회 활동의 감독자였던 에밀 베첼은 후에 편지하기를 자신이 임명된 후 처음 육 개월간에 가졌던 우리의 거의 모든 공개 집회가 방해받았다고 했다. 반면에, 참석자 중에는 진리에 굶주린 사람이 많이 있었으므로 그들을 돌보기 위한 마련이 취해 졌다. 원활하게 돌보기 위하여, 협회는 1923년에 오스트리아, 빈, 푸톤가세 12번지에 최초의 사무소를 개설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1924년에 최초로 만국 성경 연구회의 전체 집회가 빈에서 개최되었다. 이듬해, 빈에서 다시 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참석자 중에는 드레스덴에서 온 요하네스 신틀러가 있었다. 그 대회는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어떻게 그러하였는가? 한 연설의 절정에서 이러한 요청이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보조 선교인으로서 봉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보조 선교인은 현재의 파이오니아에 해당함.) 그 자리에서 호응한 여섯명의 형제 중에는 요하네스 신틀러도 들어 있었다.

신틀러 형제는 우선 드레스덴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떠나게 되었음을 고용주에게 알렸다. 당시 그는 유명한 에르네만-차이스-이콘-보르크스 사의 정밀 광학 기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틀러 형제는 직업도 없이 어떻게 물질적 필요를 돌볼 것인가? 그는 기부받는 서적 대금의 정해진 일부를 개인적으로 사용하도록 허락받았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어떠한 서적도 호별 판매가 금지되었으며, 우리의 활동은 그 법에 저촉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집주인에게 “만일 이 선교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기부하고자 하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실 수 있읍니다”라고 친절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환경에서 그 임명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여호와에 대한 온전한 확신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종들에게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시지 않았는가?—히브리 13:5.

신틀러 형제는 24세에 이미 좋은 소식의 선포자로서 고향 독일에서 2년간 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호주머니에 100라이히스마르크를 넣고 오스트리아에 온 신틀러 형제는 벨스 읍과 그 근교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때가 1925년 10월 17일이었다.

그는 가능한 한 절약 생활을 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첫 달도 넘기기 전에 가지고 있던 돈에 의존해야 하였다. 석달이 지날 무렵에는 자금을 다 써버렸다. 그때부터 여호와에 대한 그의 믿음과 신뢰심은 참으로 시험받게 되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분만의 방법으로 신틀러 형제의 필요를 확실히 돌보아 주셨다.

이러한 일이 있었다. 어느 토요일 저녁, 신틀러 형제는 마지막 남은 돈으로 파이오니아 짝과 함께 하룻밤을 지낼 방세를 지불하고 나서 다음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짝과 함께 기도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나아갔다. 일요일 아침에 우선 신틀러 형제는 일요일에 한 시간만 영업하는 우체국에 가서 우편물이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는 소포 하나를 받고서 참으로 놀랐다! 무엇이 들어 있었는가? 500부의 소책자와 함께 그것이 무료임을 밝힌 내역서가 들어 있었다.

그 지방의 교회에서 예배가 막 끝났고, 남자들은 늘 하던 대로 일요일마다 갖는 술마시기와 카드 놀이를 하기 위해 술집으로 몰려들었다. 신틀러 형제는 술집 주인에게 가서 소책자를 한부 제공하고, 탁자에 있는 손님들에게도 말해도 되는지 물었다. 요청은 받아들여 졌다.

신틀러 형제는 한 탁자로 다가가서 탁자 주위의 각 사람 앞에 소책자를 한부씩 놓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성경 예언은 곧 성취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책자를 팔지는 않습니다만, 누구든지 우리의 선교 활동에 무엇인가 기부하기를 원하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실 수 있읍니다.” 한 남자가 약간의 잔돈을 탁자 위에 놓자, 즉시 다른 사람도 지갑을 꺼내더니 똑같이 했다. 그래서 신틀러 형제는 담대하게 각 탁자로 다니면서 소책자를 배부하였다.

그 마을에는 여러 술집이 있었다. 한 시간 반도 안 되어 서적 가방은 텅 비었다. 이렇게 하여 신틀러 형제와 그의 짝은 또다시 식품을 사고 숙박료를 지불하는 데 필요한 돈을 갖게 되었다. 여호와께 확신을 두면서, 그들은 다음날을 기대하였다.

요하네스 신틀러는 그후 독일 연방 공화국에서 여전히 파이오니아로 일하다가 1986년 12월 23일에 사망했다.

주의를 끈 장례식

신틀러 형제가 오스트리아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한 그 해에 게오르크 게르츠가 독일에서 빈 지부로 파견되었다. 그는 탁월한 연사로서 오스트리아 전역의 대도시에서 잘 알려지게 되었다.

클라겐푸르트의 하이데 형제가 사망하였을 때, 게르츠 형제가 장례사를 하도록 임명되었다. 하이데 형제는 전파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주소록을 이용하여 견본 잡지 그리고 「교직자들을 고발함」과 「바벨론의 무너짐」 등의 여러 전도지를 케른텐 주의 곳곳으로 우송했다. 우편 봉투가 목적지에 따라 분류되고 나면, 그의 자녀는 발송품을 세탁물 바구니에 담아 우체국으로 운반하는 일을 거들곤 했다. 하이데 형제는 케른텐 주의 여러 도시와 마을에 사는 관심있는 사람들로부터 거듭 편지를 받았으며, 그들을 어떻게든 직접 방문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곤 했다.

따라서 하이데 형제가 사망하였을 때, 장례 마련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장례식은 오스트리아의 농촌 주민들에게 큰 의미가 있다. 한편으로 고인을 대단히 칭송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인에 대한 강한 불만을 나타내는 수도 있다. 오스트리아 여호와의 증인을 위하여 최초로 행해 진 이 장례식에 2,000명 가량이 참석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인은 장례식에 관해 말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심지어 10년이 지난 후에도 이 장례식에 관해 여전히 이야기했다.

시작은 미미했지만, 꾸준히 노력을 기울이다

현재, 오버외스터라이히 주의 린츠 시와 그 주변에는 16개의 회중이 있다. 그러나 성서 진리가 그곳에 정착하기까지의 속도는 상당히 느렸다. 종교적으로 말해 린츠는 가톨릭 교회의 요새였으므로 그 구역에서 왕국 소식을 선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겸손한 농부인 지몬 리틀러는 자신이 배운 값진 성서 진리에 대해 그 구역 사람들에게 열렬히 말했다. 1930년 즈음에 독일 뮌헨에서 온 나즐 형제가 그를 도왔으며, 그들은 여러 명의 관심자를 마침내 찾게 되었다. 리틀러 형제는 그 그룹에게 연설을 하기도 하고 협회 출판물을 낭독해 주기도 하였다. 그 집회에는 보통 30명에서 35명의 사람이 모였다. 하지만 압력으로 인해 관심은 약해 졌고, 보고에 의하면, 얼마 후인 1940년에는 린츠에 단 한명의 충성스러운 자매만 남을 정도에 이르렀다.

일찌기 1922년에 오스트리아의 서쪽에 있는 펠트키르히 시의 리히텐슈타인 국경 근처에서 빌헬름 코레트라는 이름의 세관원이 동료 직원에게 증거를 했다. 그 당시 라우테라히 마을에 살던 아가테 탈러와 그의 어머니가 좋은 소식을 들었다. 아가테의 부모 집에서 그곳의 사제가 참석한 가운데 토론이 마련되었다. 20명에서 25명 정도의 사람이 동석했다. 그 사제는 제기된 어떠한 주장도 성서를 사용하여 논박할 수 없었다.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그 가족 전체가 진리를 받아들였다. 1925년에 도른비른 읍은 집회 중심지가 되었으며, 가까운 스위스에서 형제들이 와서 연설하였다. 앞서 1917년에 진리를 최초로 들은 요한 브로츠게도 연설할 정도로 진보했다.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음은 기념식 참석자 수에서 나타났다. 1926년에 빈에서는 312명, 그라츠에서는 43명, 클라겐푸르트에서는 26명, 그 외의 장소에서는 총 52명의 참석자가 보고되었다.

같은 해, 오스트리아의 왕국 활동에 대한 감독권이 독일 지부로 넘어갔다. 한 유능한 형제가 필요한 현지 감독을 위해 오스트리아로 파견되었다.

압력에 맞서 밀고 나아감

당시의 전파 활동은 어려운 상황 아래서 수행되었다.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준 사람은 누구나 이내 경찰대에 알려졌는데, 특히 농촌 지역의 경우 그러하였다.

어느 날, 한 그룹의 형제들이 세낸 버스를 타고 빈의 북부, 농촌 지역인 발트비르텔의 여러 마을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전파하기로 했다. 주민들은 형제들이 도착할 때를 이미 예상했다.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그곳의 사제가 선동하여 모여 있는 적대적인 마을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무리 중에는 철모를 쓰고 소총을 든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농촌의 일부 경찰로부터 지원받는 민병대인 이른바 하임베르 대원들이었다. 그들은 버스에서 내리는 형제들을 즉시 공격하고 모든 서적 공급품을 강제로 빼앗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사건이 발생한 후부터, 형제들은 농촌 지역에서 봉사할 때 마을 밖에서 버스를 내려 우회로를 통해 마을로 들어갔다. 하지만 진리의 적들은 형제들의 새로운 방법에 즉시 대처했다. 사제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지역도 있었으며, 경찰대는 형제들을 반대하는 조처를 취하는 면에서 사제에게 전폭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형제들이 직면해야 했던 적의는 모든 생활 부면에 걸친 것이었으며 심지어 사망한다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셰르딩이라는 소읍 근처에 사는 가이스베르거 부부는 1923년에 진리를 받아들이고 가톨릭 교회를 탈퇴했다. 그 일로 인해, 오래지 않아 가이스베르거 자매는 재봉 교사직을 잃게 되었다. 다음에 남편이 사망하자, 마을 사제는 가이스베르거 형제를 위한 어떠한 장례도 마을 묘역에서 치르지 못하도록 방해하려고 했다. 물론 법적으로는 매장이 불허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형제들은 그 문제를 지방 행정관에게 제기했다. 성서를 믿고 그와 일치하게 생활하기 위해 노력한 가이스베르거 형제를 매장하기 위해 무슨 마련을 취할 수 있었는가? 묘역 가운데 자살자의 무덤으로 사용하도록 정해 진 부분에서 매장할 수 있었다. 빈에서 온 베첼 형제가 장례사를 하도록 겨우 허가받았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박해받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요한 15:20, 21) 그 기간에 오스트리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일을 경험했다. 예수께서 경고하셨듯이, 반대는 가족으로부터 올 때도 있었다. (마태 10:32-39) 그러나 그러한 반대는 오스트리아의 형제들이 하나님의 왕국 편에 서는 일을 좌절시키지 못했다.

베아트리체 로즈다는 사회주의 운동을 대변하는 여성으로서 나초날라트 (하원인 국민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했었다. 베아트리체가 정치 활동으로 알게 되었던 한 친구—그의 이름은 브레트슈나이더였다—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으며 당연히도 베아트리체에게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이야기했다. 베아트리체는 빈의 콘티넨탈 호텔에서 강연을 듣도록 초대받았다. 그곳은 1911년에 러셀 형제가 연설을 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호텔이었다. 베아트리체는 신을 믿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신이 먼저 자기 소개를 해야지!”라고 말하면서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친구를 기쁘게 해주려는 마음에서 연설에 참석했다. 가지고 있었던 느낌과는 달리, 그는 연설 도중에도 여러 번이나 “이것은 진리야! 정말 진리야!”라고 브레트슈나이더 자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지 않아 베아트리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말씀에 따라 정치 생활을 청산했다. (요한 15:19) 즉시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남편은 베아트리체가 ‘이성을 찾’지 않는다면 이혼하겠다고 위협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믿음에 고착했으며, 사망할 때까지 변함없이 그렇게 했다.

잘츠부르크에 사는 프란츠 몬프레다는 열성적인 가톨릭 교인이었지만, 진리가 그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1927년 3월 12일에 가톨릭 교회를 탈퇴한 후,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했다. 가족은 그 행동을 조금도 달가와하지 않았기에 많은 비난과 반대를 가했다. 프란츠는 집과 직업을 상실하기까지 했다. 다른 직장을 찾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그의 믿음은 호되게 시험받았다. 그러나 여호와께 충실함을 잃지 않았다. 당시에 대해 그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 기간을 극복하고 진리에 고착할 수 있어서 현재 행복합니다. 여호와의 팔은 결코 짧지 않았읍니다.”—비교 이사야 59:1.

자전거는 한대밖에 없었다

부르겐란트 주의 리틀링스도르프 지역에 있는 형제들은 주의 일에 뛰어난 열심을 보였다. 구역은 넓었으며, 교통 수단이라곤 거의 없었다. 자동차는 고사하고, 오토바이 한대라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전거마저 없는 형제가 많았다. 그래서 일부 형제들은 야외 봉사를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이용했다.

한 형제가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집집을 방문하기 시작한다. 두번째 형제가 미리 지정해 둔 지점까지 자전거를 타고 앞서 가서는 그곳에 자전거를 둔다. 그 다음 걸어서 전파 활동을 계속한다. 처음의 형제는 자전거가 놓여진 지점에 도착하면 미리 약속한 다음 장소까지 타고 간다. 그 자전거에 주행 거리계가 부착되었다면, 그 계기에는 왕국 전파 주행 거리에 있어서 필시 엄청난 기록이 표시되었을 것이다!

형제들은 일요일에만 야외 봉사를 자유로이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최대한으로 사용했다. 새벽 3시에 집을 떠나 저녁 늦게 돌아오는 때도 있었다. 온 마음을 다한 노력이 그들의 봉사의 특징이었다.

법적 권리를 위해 투쟁함

전파 활동의 범위가 더욱 넓어지면서, 형제들은 전파 활동 때문에 지방 당국으로 출두하도록 소환되는 일이 빈번해 졌다. 형제들은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한 그렇게 했다. 법적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법적 수단이 언제나 형제들의 편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처벌을 피하는 일보다도 워치 타워 협회의 오스트리아 지부를 등록하는 일이 훨씬 더 어려웠다. 하나의 조직된 종교로서 법적 인가를 받는 일이 당시에는 전혀 불가능했다. 형제들은 하나의 임의 단체로라도 등록하려고 하였지만, 관청에서는 이렇게 주장하면서 거부했다. ‘여러분의 의도는 하나의 종교 조직을 결성하려는 것이며, 그러한 형태의 조직은 오스트리아의 법률상 설립될 수 없읍니다.’

형제들은 헌법 재판소에 제소하여, 단체를 결성할 수 있는 법적 권리가 부인되고 있다고 호소했다. 오스트리아 헌법 재판소의 위원들로부터 나온 즉각적인 반응은 1929년 12월 7일자로 제소를 기각한다는 것이었다. 다음 방법으로, 형제들은 종교 기능과는 전혀 무관하게 성서와 성서 서적의 배부를 위한 단체로 등록하고자 했다. 그 신청은 거부당하지 않았다. 따라서 1930년 5월 24일에 형제들을 위한 법적 도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지방 단체가 결성되었다.

바흐투름-게젤샤프트의 법적 인증이 형제들의 싸워야 했던 어려움을 끝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종들은 성경적 책임에 고착했다. 관리들에게도 증거를 해야 한다는 점을 형제들은 인식했다.—마가 13:11.

새로운 회중들, 증가하는 참석자 수

형제들은 논쟁을 지나치게 많이 일으키지 않기 위하여, 큰 규모로는 대회를 열지 않기로 결정했다. 1922년에 최초로 빈에서 상영되었던 「창조 사진극」만은 보다 작은 지방 도시에서도 상영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일부 지역에서의 회중 집회 참석자 수는 상당히 많았다. 에두아르트 파이어가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던 레오벤 읍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가 오기 전에는 아무도 성경 연구생에 대해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열심히 전파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집회에는 200명 가량이 참석하게 되었다. 1932년경에 그는 슈타이어마르크 주의 주도(州都), 그라츠에서 봉사했다. 그곳에서도 수백명의 사람이 집회에 참석했다. 참석자 중에는 프랑스 외인 부대 일원이었던 레오폴트 피테로프가 있었는데, 그는 후에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어서도 충실함을 유지했다. 오스트리아에는 조직된 성서 연구 그룹(당시에는 반으로 불리었음)의 수가 이미 30개로 증가했다.

반대가 증가하다

그 다음에 일어난 정치계의 변화는 형제들의 최대의 반대자인 교직자로부터 대환영을 받았다. 1932년 5월 20일, 크리스천 사회당의 엥겔베르트 돌푸스 박사가 연방 수상으로 취임하였으며, 그는 교황청 국무원 장관인 파첼리 추기경으로부터 축전을 받았다. 시민 자유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제한 조치가 돌푸스 박사의 임기중에 취해 졌다. 그는 1933년의 비상 상태를 교묘히 이용하여, 국회를 해산했다. 다음, 모든 정치 수단을 장악한 그는 소위 “유럽 최초의 모범적 가톨릭 정부”를 설립했다. 교직자 사회에서는 돌푸스를 이상적인 가톨릭 정치가로 묘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그리스도인 집회를 금지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해서 놀랄 것이 있겠는가? 집회 참석자가 수백명에 달하던 그라츠에 그러한 금지령이 곧 발효되었다. 형제들은 위축되지 않았다. 즉시 소송을 제기했다. 형제들측에는 어떠한 위법도 없었기 때문에 소송은 받아들여져야 했다. 하지만 관청은 일부 파이오니아에 대한 거주 허가를 취소하여 그들을 강제로 도시에서 떠나게 했다. 형제들에 대한 거짓 고발이 거의 매주 있었다. 한 가톨릭 교지는 형제들의 그리스도인 활동을 중지시킬 것을 정부에 요청하였는데, 그러한 조치의 배후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드러내는 행동이었다.

바로 그 시기에 여호와의 조직은 격려적인 도움을 주었다. 1933년에 러더퍼드 형제는 계획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이 방문할 수는 없었지만, N. H. 노어와 M. C. 하벡을 파견했으며, 두 사람은 빈에 있는 빔베르거의 에타블리세멘트에서 형제들과 모임을 가졌다. 그 모임은 형제들을 크게 강화시켜 주었다.

서적 검열과 압수

인간 통치는 하늘의 하나님의 왕국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성서의 예언과 일치하게, 협회 출판물은 인간에 의한 통치권의 서글픈 결말을 거리낌없이 강조했다. (다니엘 2:44; 7:13, 14, 27) 집권 당국은 그러한 진술이 그들을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한다고 생각하여 화가 났다. 결과적으로, 1930년대초에 일련의 서적 압수 조처가 있었다.

1933년과 1934년 중에 형제들은 거의 매주 관청에 소환되어 온갖 반론을 들어야 했다. 종종 당국은 출판물의 특정한 항들을 불분명한 것이 되게 하도록 요구했다. 문제가 되는 모든 항을 실제로 지우는가를 꼭 확인하기 위해 바로 협회 사무소에 경찰관 한명이 머물렀다. 그러한 일이 오랜 시간, 심지어 자정까지 계속되는 날도 있었다. 그리고 경관의 눈도 때때로 피곤해 지므로, 결국 출판물의 특정한 문구들이 읽기 쉬운 상태로 남게 되었다.

정치 소요로 인해 제한이 가해 지다

여러 정당간의 차이점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사회민주방어동맹(사회당의 군대)이 저항을 시작했다. 1934년 2월에는 노동자 계급에 의한 반대가 가차없이 분쇄되었다. 사회민주당이 금지되었다. 개인 자유에 대한 부가적 제한 조처가 뒤따랐다.

마치 신기원이 시작되었음을 단언이라도 하듯이, 오스트리아는 1934년 5월에 신헌법을 제정했다. 신헌법의 서문은 종교 신경처럼 들린다. “모든 법의 근원이시며 전능하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오스트리아 국민은 이로써 영원한 크리스천 독일 연방 국가를 위해 이 헌법을 채택하는 바이다.” 그러나 인접한 독일에서는, 역시 가톨릭 교인이긴 하지만 다른 정치 이념을 신봉하는 히틀러가 이미 정권을 확고하게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7월에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당 지지자가 오스트리아의 수상인 돌푸스 박사를 암살했다.

뒤이어 쿠르트 슈슈니크 수상이 이끄는 정부하에서 여러 달이 지나면서도, “전능하신 하느님”을 참으로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상태가 전혀 완화되지 않았다. 형제들은 성서 서적을 여전히 압류당했고, 계속 재판소로 끌려갔다. 성서 공개 집회가 금지된 경우도 많았다.

당국에 의해 지방 단체가 해체되다

드디어, 1934년 9월 10일에 발부된 명령서에 의거하여 빈의 연방 치안부장은 여호와의 증인이 사용하던 법적 단체인 바흐투름-게젤샤프트를 해체시켰다. 하지만 형제들이 제기한 상소에 따라, 공중 치안에 대한 집행부로서의 기능을 가진 연방 수상 집무실은 그 명령을 취소했다.

그러나 형제들의 활동을 억압하는 데 특히 열심이었던 당국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35년 6월 17일과 7월 17일에, 이번에는 연방 치안 행정관에 의해 “뉴욕, 브루클린,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지부, 바흐투름-게젤샤프트”를 해체하라는 명령이 다시 내려졌다. 형제들은 다시 이 명령에 대해 상소했으나, 이번에는 소용이 없었다.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왕국을 첫째 자리에 둠

형제들은 호별 봉사를 계속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심했다. 그러나 용의 주도함에도 불구하고 종종 체포되어 교도소에 가거나 벌금을 물어야 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교도소에 가면 여러 주 동안 옥살이를 하게 될 수 있었음에도, 형제들은 벌금형보다는 교도소를 택했다. 교도소에서 증거할 기회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불안정하고 경제적으로 불확실한 그 당시에, 레오폴트 엥글라이트너는 전 시간 봉사를 시작했다. 1934년 1월에 그는 임명된 구역인 오버슈타이어마르크로 이사하였는데, 그곳은 그때까지 거의 증거되지 않았던 곳이었다.

국가사회주의는 이미 그곳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로 인해, 계엄령이 이미 선포된 지역도 있었다. 나치의 소요 사태로 인해 민병대가 점령해 버린 슐라트밍 지역이 그러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엥글라이트너 형제는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웃옷의 주머니에 소량의 서적만을 넣었다. 우선 도시의 맨 변두리에서 봉사하면서,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만 서적을 제공했다.

어느 날 그는 체포되었는데, 경찰대는 삼엄한 정치 상황으로 인해 어떤 무기든지 소지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형제는 소지하고 있다고 대답하면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성서를 꺼내어 그들 앞의 탁자 위에 놓았다. (에베소 6:17) 경관들은 한참 동안 웃고 난 다음, 그를 풀어 주었다.

하지만 교직자는 이 여호와의 종에 대해 분개했다. 형제가 좀 큰 마을에서 전파 활동을 시작할 때마다 교직자는 경찰대를 포함해서 전 주민에게 알렸다. 엥글라이트너 형제는 그때마다 체포되었다. 곧 구류형이 따랐다. 처음에는 한번에 단지 48시간의 구류였으나 형량은 점점 더 길어졌다. 결국 형제는 활동 장소를 다른 곳으로 변경해야 했다.

산악 지대에 있는 외딴 계곡의 새로운 구역에서, 그는 한집도 빼놓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에도 읽을 거리를 남겨 놓았다.

한번은 한 농장 일꾼이 맨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전도지가 눈에 띄어 주의 깊이 읽고 나서 가외의 서적을 주문했으며, 충실한 형제가 되었다. 32년이 지난 뒤에야 그는 어떤 지역 대회에서 뜻밖에 엥글라이트너 형제를 만났다.

그들이 왜 그곳에 있었는가?

리틀링스도르프 마을에서 일어난 한 사건은 당시에 존재했던 긴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선명하게 나타내 준다. 그 마을에서 장례식이 예정되어 있었고, 빈의 로노프스키 형제가 장례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많이 모인 사람에게 증거할 기회란 장례식밖에 없었다. 하지만 로노프스키 형제는 묘지로 다가가다가 주위가 이상하여 깜짝 놀랐다. 철모를 쓰고 소총을 겨드랑이에 낀 민병대원과 경찰대원 50명이 만반의 태세를 갖춘 모습으로 형제를 향해 서 있었다. 전부해서 100명 가량의 사람이 참석했는데, 그 중에는 마을 사제도 있었다. 형제는 최선을 다해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그리고 부활 희망에 대해 증거했다. 그러면 무장한 남자들이 왜 그곳에 있었는가?

오래지 않아 로노프스키 형제는 그 조마조마했던 일을 당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얼마 후, 그 마을의 형제들은 경찰대원과 민병대원들이 로노프스키가 성서를 사용하여 설명하는 것을 듣고 놀라더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마을 사제가 증인은 정부를 전복하려고 하는 공산주의자라는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었다.

집회에 가해진 제한령

1935년부터 더 이상 공개적으로 집회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파수대」 연구는 가정에서조차 전면 금지되었다. 당국은 공중 치안이 위태롭게 된다고 주장할 때도 있었고, 가톨릭 교인들이 그러한 모임에 대해 성을 낸다고 말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명했다.—히브리 10:25.

형제들은 모이기를 계속했지만, 여덟명 내지 열명 정도의 작은 집단으로 가정에서만 모였다. 모임 장소는 끊임없이 변경되었다. 따라서 지나친 주의를 끌지 않았다. 집회에서는 「파수대」와 「하나님의 거문고」, 「창조」, 「예언」, 「정부」, 「빛」 등의 출판물을 보조물로 사용하여 성경을 토의했다. 또한 사용할 수 있을 때에는 녹음된 성서 연설을 듣기도 했다. 정부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수는 꾸준히 증가했다.

성실한 노력이 요구되는 경우라 해도, 형제들은 반드시 동료 신자와 정기적으로 교제했다. 빈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 즉 프레스부르크 시가 멀지 않기 때문에, 형제들은 버스를 세내어 한주 걸러 주말마다 「파수대」 연구 집회를 갖기 위해 빈에서 브라티슬라바로 특별히 여행했다. 1935년 6월 9일에 오스트리아 형제들은 유고슬라비아의 마리보르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 참석했으며, 1936년에는 스위스의 루체른 지역 대회에 갔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국내에서는 긴장이 계속 높아져 갔다.

예상되는 박해에 대비함

오스트리아의 전도인들은 독일로부터의 보고를 통해 독일 형제들이 어떻게 인내하고 있는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전율했다. 형제들은 필요할 경우 그러한 아픔과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그리고 충실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필요한 힘을 여호와께 기도로 청했다. 그러나 아직은 그 정도로 사태가 악화된 것은 아니었다.

1937년 여름에, 모든 사람은 가능한 한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하도록 강력한 권고를 받았다. 빈에서 프라하까지 여행하기로 신청한 사람을 태우기 위해서 세대의 버스가 필요했다. 여행은 하루가 꼬박 걸렸다. 하지만 모두가 버스를 타고 갈 수는 없었다. 엥글라이트너 형제 그리고 바트이슐과 그 부근에서 온 다섯명의 형제는 자전거를 타고 360킬로미터 이상이나 여행했다.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그 대회가 자신들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대규모 모임으로는 필시 마지막일 것이라고 느꼈다. 연설 제목들은 형제들이 앞에 놓인 위험한 시기를 대비하게 하는 목적에 잘 부합되었다. 그 대회에서는 형제들에게 가혹한 시련의 시기가 급속히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 거듭 지적되었다. 형제들은 박해를 받을 때의 행실에 관한 특별한 교훈으로 강화되었다. 가택 수색을 받을 경우에 다른 사람을 위태롭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동료 증인들의 어떠한 명단도 가지지 말도록 주의받기도 했다. (마태 10:16) 따라야 할 훌륭한 본으로서 독일 형제들의 꾸준한 인내가 강조되었다. 대회 참석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여호와를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충실하게 순종적으로 인내하라는 강력한 권고를 받았다.—잠언 3:5, 6.

그렇게 해서 대회는 끝이 났다. 형제들은 무거운 마음으로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하소서”를 노래한 다음, 동료 형제들과 인정 많은 프라하 시에 작별을 고했다. 이제 형제들은 그 대회에 참석하라는 강력한 권고가 주어진 이유를 깨닫게 되어 헤어지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

독일 군대가 국경을 넘다

모든 점으로 보아 독일 군대가 오스트리아로 곧 진격해 들어올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국민 중에는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는 즉시 경기가 갑자기 좋아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이념에 찬성하지 않은 사람들은 보복당할 것을 염려했다. 형제들은 여호와에 대한 충성심의 시험이 불가피하게 닥칠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우려했던 그대로, 히틀러의 군대는 이동하여 1938년 3월 12일에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넘었다.

그보다 약 일주일 전, 협회의 책임자 형제는 조만간 발생할 일을 예상하여 빈의 협회 자산을 매각한 다음, 아내를 데리고 오스트리아를 떠나 스위스로 갔다. 그 사실을 안 오스트리아의 형제들은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어떻게 활동을 이어갈 것인가?’ ‘어디에서 영적 양식을 구할 것인가?’라고 의아하게 여겼다.

협회 사무소에서 일했던 아우구스트 크라프트(크라프치히로도 알려졌음) 형제에게도 오스트리아를 떠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양과 함께 머무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인자하게 형제들을 격려하고 강화시키며 돌보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형제였으며 독일 비밀 경찰이 추적하는 사람의 명단에 이미 이름이 올라 있는 상황에서도 형제들을 부드럽게 돌본 목자인 크라프트에 대해 형제들은 참으로 감사했다! 크라프트 형제는 인스브루크, 클라겐푸르트 등의 국내 지역을 수시로 이동하면서 형제들을 방문했다. 대단히 신중하게, 늦은 저녁에 형제들의 집을 방문하고는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났다.

새로운 집권 세력의 요구

4월 10일은 온종일 긴장이 맴돌았다. 오스트리아 국민은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는 것에 대한 찬반 투표를 해야 했다. 하지만 합병은 사실상 오래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어디에나 “히틀러에게 찬성을!”이라고 씌어진 벽보가 나붙었으며, 그것에 실린, 대중에 대한 열렬한 호소를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형제들은 어떻게 하였는가? 형제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행동을 취하더라도, 선거 위원회는 개개인의 투표자가 어떻게 결정했는지를 알아낼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투표일에, 빈의 요한 피레클은 아침 일찍 숲으로 가서 어둠이 덮인 밤중에야 돌아왔다. 이웃 사람이 후에 요한에게 들려 준 바로는 선거 위원회의 관리들이 다섯번이나 요한의 집에 왔었다고 한다. 다른 형제들도 중립을 지키기 위해 요한이 취한 것과 똑같은 행동을 사전 약속 없이 취했다. 이제 형제들에게 한 가지 점이 분명해 졌다. 즉 새로운 지배층이 형제들을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권과의 결속을 나타내는 뜻에서, 사람들은 스바스티카 기를 창문에 달도록 요구받았다. 크니텔펠트라는 작은 도시에 살고 있던 알텐부흐너 자매의 아파트는 도로에 인접해 있었다. 그곳의 정권 대표자들은 여러 차례 자매에게 다가와서 스바스티카 기를 창문에 걸도록 요구했다. 그들은 자매가 그렇게 하기를 거부한다면, 이웃의 모든 사람에게 적의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분명히, 자매는 적의에 찬, 연합된 대항에 직면했다. 그래도 양심적 이유 때문에 기를 달지 않기로 했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자매는 도로에 인접한 아파트를 비우고 기를 달 필요가 없는, 집 뒤편의 지정된 곳으로 이사하라는 법원 명령서를 받았다. 그것은 자매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해결책이었다.

필요한 양식의 공급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장악한 후에도 한동안 형제들은 빈에서 소규모 모임을 그럭저럭—하지만 신중하게—가질 수 있었다. 빈의 지역구마다 한명의 형제가 연구 그룹들을 영적으로 돌볼 책임을 맡았다.

크라프트 형제는 먼저 포라를베르크로 가서 스위스 형제들이 국경으로 밀반입해 준 여러 부의 「파수대」를 받아 가지고 왔다. 그는 빈으로 오는 도중에 인스브루크에 들러 데프너 형제와 제츠 형제를 만나, 티롤 지역을 위한 잡지를 주었다. 제츠 형제는 그 귀중한 재료를 집 뒤에 쌓아 둔 장작더미 밑에 보관했다. 그 모든 일이 아주 쉬운 것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비밀 경찰과 밀고자들은 어디에나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중대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활약한 담대한 자매들

지체하지 않고, 크라프트 형제는 형제들을 위한 영적 양식이 자신이 체포된 후에도 계속 공급될 수 있도록 마련했다. 담대한 자매들은 영적 양식을 공급하는 일에 기꺼이 응했다. 그 중에는 빈에 사는 테레제 슈라이버가 있다. 크라프트 형제는 그 자매에게 간단한 기계를 사용하여 「파수대」를 등사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테레제는 지하 활동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지만, 그러나 그는 시간제 세속 직장을 구해서 자신과 어머니의 재정적인 필요를 충당할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이미 적지 않은 수의 형제가 체포되었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는 중한 심장 장애로 고통받고 있었으므로, 딸이 체포된다면 어머니는 어떻게 살아 나가겠는가? 테레제는 여호와께서 어머니를 결코 궁지에 버려두시지 않을 것임을 항상 확신시켜 줌으로써 어머니를 위로했다.

담대한 다른 자매들도 여호와의 권익을 돌보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방법으로 봉사할 태세를 갖추었다. 벨즈 출신의 슈타트테거 자매는 연구 재료를 티롤의 형제들에게 배달하기 위해 서부로 여행하는 데 자원했다. 그는 비밀 경찰의 손에 잡힐 때까지 그 일을 계속했다.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자매는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로 보내 졌다. 그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후에 그의 남편도 투옥되었다.

사단이 승리한 것인가?

1939년 5월에 형제들을 다시 방문하여 강화시킨 후, 크라프트 형제는 빈의 검소한 자기 집에서 잠깐 머물다가 비밀 경찰의 잔혹한 기습을 받았다. 그는 5월 25일에 체포되었다. 마우타우젠 강제 수용소의 사형실의 문이 열렸고, 그곳에서 크라프트 형제는 목숨을 잃었다. 형제들은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는 여호와와 형제들에 대해 나타낸 특출한 사랑으로 인해 애정을 느끼는 가운데 기억되고 있다.

사단과 그의 부하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종들을 체포하고 투옥시키며 그중 일부를 죽임으로써 과연 승리하였는가? 오히려 그 반대였다! 욥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사단의 주장은 인간이란 만사가 자신에게 순조롭게 되어가는 것 같을 때에만 여호와를 섬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난중에서도 충실함을 증명한 모든 증인은 마귀가 지독한 거짓말장이며, 여호와는 그들이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참 하나님이라는 증거를 산같이 쌓았다.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충성스러운 자들 모두에게 풍부한 상을 주실 것이다.—욥 1:6-12; 2:1-5; 야고보 5:11.

두 종류의 식품 봉지

이제 전파 활동의 책임을 맡은 형제는 협회 사무소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아내의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 작은 야채 가게를 운영했다. 그는 페터 괼레스였다. 그의 말대로, “조직의 아무런 지침도 없이” 압제적 상황에서 가능한 한 하나님의 백성의 활동을 계속 유지시키라는 요청이 주어졌다.

형제들과 함께 하던 크라프트 형제가 이제는 없기 때문에, 괼레스 형제가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사용되는 성서 연구 재료의 복사와 배부를 감독했다. 밤에는 추운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작업했고, 낮에는 식품점에 나타났다. 우편을 이용하여 서적을 보내는 것은 안전하지 않았으므로, 급사(急使)가 배달했다. 들어오는 헌금으로는 여비를 충당하기에 불충분하였으므로, 괼레스 형제는 자신의 개인 돈을 사용했다. 손님들이 흔히 야채 등의 식료품을 종이 봉지에 넣어 갔기 때문에, 선발된 사람들이, 다소 다른 내용물이 들어 있는 종이 봉지를 들고 상점을 나가는 것은 주목받지 않았다. 한동안, 빈의 급사들과 형제들은 이런 식으로 괼레스 형제의 상점에서 영적 양식을 얻을 수 있었다.

책임 맡은 형제를 위한 도움

1938년부터는 겨우 몇부의 「파수대」나마 국내로 들여오기 위해 스위스 및 네덜란드와 연락을 유지하는 일도 점점 어려워져 갔다. 체포됨으로 인해 연락이 끊기는 경우가 많이 있었으며, 외국으로부터 영적 양식을 얻기 위해 일 주일 혹은 그 이상의 기차 여행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괼레스 형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레스부르크를 통해 영적 공급품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며, 카트너 자매가 그곳에서 연구 재료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 통로도 곧 끊어졌다.

당시에 에른스트 보야노브스키가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독일에서 왔지만, 이미 오스트리아의 형제와 접촉하고 있었다. 보야노브스키는 괼레스 형제를 도와주었으며, 슈라이버 자매와 함께 연구 재료를 등사했다. 보야노브스키는 대단히 솔선적으로 담대하게 일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서적을 운반하기 위해 여행 길에 나서기도 했다. 세번의 경우에 그는 새로운 형제 자매들에게 침례를 주기까지 했다.

도움이 된 또 다른 것은 빈의 어떤 정원사의 집, 지하실에 설치한 등사기였다. 기계를 사용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왜냐하면 사용할 때마다 그것을 감추어 둔 장소에서 파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집의 주인은 이민을 가버렸고, 형제인 정원사만 집을 관리하도록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쪽으로 이탈리아 국경 근방에서는 다른 증인들이 돕고 있었다. 겔미 자매는 나르치조 리트가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파수대」 기사의 슬라이드 필름을 확대하는 일을 했다. 그런 다음, 등사판 원지에 타자하였으며, 완성된 잡지를 산의 높은 곳으로 가져갔다. 거기에서 분배를 했다. 인스브루크에서 온 타멀 자매와 슈바츠에서 온 두명의 엔타허 자매(모녀)가 동료 신자에게 연구 재료를 나누어 주는 일에 참여했다. 그들은 붙잡힐 경우에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알고 있었으며, 필요하다면 직면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적의 수중으로

갑자기, 체포의 새로운 물결이 일기 시작했는데, 1939년 9월과 10월에 특히 심했다. 증인 가운데는 한 형제가 당국자에게 명단을 폭로했다는 말이 나돌았다. 지금은 열람이 가능해 진 비밀 경찰 문서에 자세히 작성된 내용을 누구나가 직접 읽어 볼 수 있다. 비밀 경찰의 1939년 11월 2일자 빈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1939년 10월 31일자 일일 보고서에 언급된 쿠데르나는 아주 최근까지도 I.B.V[만국 성경 연구회]의 불법 활동에 관여했다고 진술했다. 그 외에 쿠데르나는 빈의 거의 전역에 있는, I.B.V. 주요 형제들의 명단도 실토했다.”

요한 쿠데르나는 1924년 이후 동료 신자가 된 사람이었다. 더 이상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적의 수중에서 농락당한 것이 분명했다.

또한 자매들이 잡지를 분배할 때 사용하는 암호가 당국의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한층 더 타격을 받았다. 이제 당국이 “‘레지’에게 20부”라는 문구의 의미를 이해하기란 쉬웠다. 왜냐하면 슈라이버 자매의 이름은 테레제였고, 줄여서 레지라고 불리었기 때문이었다. 슈라이버 자매는 체포되어 아무런 소송 절차없이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면 자매의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는가? 어머니는 앞서 두달 전에 사망했다.

법정에서 담대하게 증언함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 슈라이버 자매는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에서 빈으로 돌아왔다. 당국은 무슨 의도로 그렇게 하였는가? 자매는 이내 알게 될 것이었다. 빈의 지방 법원에서 소송 절차가 진행되는 중에, 그는 책상 위에서 히틀러의 이름이 게재된 여러 부의 「파수대」 잡지를 보았다. 지하에서 생산된 잡지들이었다. 슈라이버 자매는 당국에서 잡지의 복사와 배부에 자신이 참여했음을 알았다고 단정했다.

“이 복사물을 만들었오?”라고 판사가 힘주어 물었다. 슈라이버 자매는 체포되기 전에 이미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할 말을 주셔서 그분을 위해 훌륭히 증거할 수 있게 해주실 것을 기도했었다. 단호하게, “예, 그렇습니다”라고 자매는 책임을 시인했다.

슈라이버 자매는 명랑한 모습이었으며 남달리 품위있게 행동했다. 감명받았음이 분명한 판사는 자매를 석방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비밀 경찰은 자매를 계속 감금시키고 다시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 후에, 오년 반 동안 억류 생활을 인내해야 했지만, 자매는 다른 노동 수용소로 이송되어 살아 남았다.

서적 등사

그 당시는 충성스러운 동료 일꾼이 차례로 체포되었기 때문에 괼레스 형제에게 어려운 시기였다. 그는 영적 양식을 계속 나누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누가 도와줄 것인가? 형제는 수개월 전에 자신에게 와서 “괼레스 형제, 저도 주님의 일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어요”라고 말한 자매를 기억했다. 그는 1931년에 침례받은 한시 흐론(지금은 부흐너)이었다. 흐론 자매는 외국에서 수년간 생활했었다. 자매는 이 위험한 시기에 오스트리아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급사로서의 어려운 봉사를 맡을 각오를 하였다.

루트비히 치라네크도 도움을 주었다. 그는 이미 독일에서 이년간 복역한 바 있다. 석방되자마자, 지하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으며, 경험을 살려 빈의 형제들을 도왔다. 형제는 위험한 작업인 「파수대」 복사에 참여했다.

그러나 등사기를 숨긴 장소도 누설되지 않았을까? 그 점이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제들은 등사기를 이곳 저곳으로 옮겼다. 프라하에서 온 요제프 쇤 형제와 빈에서 온 아나 폴 자매가 본문을 불러 주면 치라네크 형제가 등사 원지에 받아썼고, 에른스트 보야노브스키는 다른 형제와 함께 등사했다. 한시 흐론은 또 다른 곳에서 그것을 받아 가지고 형제들에게 배달했다.

등사기는 다시 옮겨야 했고, 쇤 형제는 한 정자에서 그것을 감출 만한 장소를 찾아냈다. 그곳에서 다른 형제와 함께 등사 작업을 했다. 그러한 힘겨운 신권 작업을 끝내면, 쇤 형제는 연구 재료를 형제들에게 배달하곤 했다. 어느 날, 한 배달 지점에서 그는 머물러 유숙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것은 실수였다. 쇤 형제는 곧 체포되었다.

흐론 자매는 그 슬픈 경험을 통해 배웠다. 그는 신속히 배달하고 나서 다시 길을 떠났다. 약 여섯달 후에 그도 체포되었다. 그러나 자매는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어한 간절한 소원을 이루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형제들은 서적과 연구 집합소를 드러내지 않는 일에 점점 능란해 졌다. 따라서 경찰이 기습적으로 가택 수색을 할 때 어떠한 서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집회의 경우, 일부 지역의 형제들은 산이나 숲으로 가서 연구하곤 했다. 옥수수가 다 자라면, 형제들은 밭 한복판에 들어가 줄지어 늘어선 옥수수 대 사이에서 집회를 보곤 했는데, 길에서는 그곳의 형제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파수대」 연구 기사도 참으로 적합했다! 그러한 기사 중에는 “충실한 나라”와 “진리 안에서의 인내” 등의 기사가 있었다. 과연 ‘때를 따른 양식’이었다.—마태 24:45.

적의 등사기 탐색

당국은 새로운 타격을 가할 준비를 했다. 그들은 가능한 한 많은 여호와의 증인을 체포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파수대」를 복사하는 데 사용되는 장비를 색출하는 일에도 혈안이 되었다.

열람이 가능해 진 비밀 경찰 서류 중에는 1940년 6월 8일에 발부된 한 명령서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베를린, RSHA[독일 국가 주 보안청]의 명령에 의해 1940년 6월 12일자로 I.B.V. 신자와 그 운동을 위해 일하는 사람 그리고 성경 연구생으로 알려진 사람을 전원 구속할 예정이다. ·⁠·⁠· 구금시켜야 할 사람 중에는 여자도 포함된다. ·⁠·⁠· 국가 경찰이 행하는 이번 조치는 독일 전역에서 발효되며 1940년 6월 12일에 불시에 실시할 것이다. 체포와 동시에 가택 수색을 해야 하며 성경 연구생의 운동에 사용되는 모든 재료를 압수해야 한다.”

적의 그 공격은 아주 순식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일을 세부적으로 다시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 차례의 소탕에서 급사인 한시 흐론을 포함하여 44명의 형제 자매가 체포된 것으로 안다.

하지만 증거를 보면, 적은 사람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빼앗는 일에 혈안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같은 사실이 1941년 1월 28일자, 빈 법원 판결문에 나타나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철저히 수색한 후에야 인쇄물 제작 장소를 찾아내고 구덩이를 발견하여, 복사기, 타자기, 기타 재료를 찾아 압수할 수 있었다.” 여호와의 백성의 적이 흡족해 하는 모습을 그 글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는 타협했는가?

후에, 관리가 흐론 자매를 심문하다가 취조를 중단하고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간 사이에 흐론 자매는 한 조서 즉 에른스트 보야노브스키의 심문 기록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자매는 내용을 읽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거기에는 매우 많은 형제들의 이름과 기타 세부 사항이 가득 기재되어 있어서, 자매는 보야노브스키가 당국에 협조해 왔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리가 자매의 영을 무너뜨려서 더 많은 정보를 누설하게 할 의도로 그러한 서류를 일부러 그곳에 두었는가? 보야노브스키의 심문 조서는 전시에 보존되었다. 그 서류의 여러 부분을 읽어 보면 1938년부터 1940년 1월까지의 오스트리아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관한 역사를 보는 것 같다. 형제들 중에 “배반당했다!”라는 말이 퍼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보야노브스키는 1939년 12월에 특정한 영적 지하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독일에 갔다. 그는 아나 폴과 함께 드레스덴에서 체포되었다. 나치 정권의 기관지, 「푈키셔 베오바흐터」 1941년 3월 21일자 기사를 보면 상황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3월 20일, 드레스덴 발. 드레스덴에서 열린 특별 법정은 ·⁠·⁠· 루트비히 치라네크에게 ·⁠·⁠·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켰으며, 동시에 협회에 가입하여 군복무를 반대했고, 열성적인 만국 성경 연구회에 대한 금지령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 더 나아가서 베를린의 에른스트 보야노브스키는 동일한 죄목으로 추가 12년의 금고형과 십년간의 명예형을 선고받았다.”

위에 언급된 루트비히 치라네크는 이미 2년간 복역한 후에도 다시 한번 지하 활동을 위해 담대하게 응했던 충실한 형제였다. 보야노브스키는 어떠했는가? 그는 잔인하게 구타당했는가? 자신의 안전을 지나치게 염려한 나머지 형제들에 대한 정보를 누설하였는가? 그 조서의 일부는 거짓이었는가? 확실한 것을 알 수는 없지만, 독일 형제들에 의하면, 보야노브스키는 단기간만 투옥되었다고 한다.

어리지만 충성스러웠다

나치 시대부터 보존된 공문서가 모든 사실을 밝혀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서류는 여호와에 대한 불굴의 충절을 나타낸 많은 사람에 관하여 분명히 알려 준다. 부모 역시 진리 안에 있었던 아우구스테 히르슈만(현재는 벤더)은 17세의 소녀로서 비밀 경찰의 심문을 받았다. 그의 확고 부동함은 다음의 1941년 10월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아우구스테 히르슈만은 부모에 의해 I.B.V.의 교리로 교육받았으며 지금까지도 여호와의 증인임을 공언하고 있다. 상기자는 부모와 함께 반복적으로 성서를 공부하였기 때문에 본인이 인정하듯이, ‘믿음과 충성심이 그만큼 강화’되어 I.B.V.가 주장하는 교리에 강하게 고착할 것이다. ·⁠·⁠· 히르슈만은 동일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말하기를 거부한다. 그를 교도 불능자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엘리자베트 홀레크 역시, 병약한 18세의 소녀이긴 하였지만, 확고했으며 진리를 위해 단호한 입장을 나타냈다. 관리들은 1941년 12월 17일자의 조서에서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베트 홀레크는 여전히 I.B.V.의 사상을 고수하고 있으며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모임을 가진 사실을 시인한다. 하지만 그는 다른 성경 연구생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말하기를 거부하며, 그렇게 하는 것은 배반이며 ‘조직’으로부터 훈련받지 않은 일이라고 단언한다.” 홀레크는 어머니와 함께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로 넘어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러면 히틀러의 군대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이듬해인 1939년으로 되돌아가 보자.

기념식 밤에 체포되다

1939년 4월 4일의 기념식은 많은 형제에게 가혹한 시험의 날이었다. 형제들은 기념식 준비를 하고, 연설의 요점을 다시 한번 검토하고, 표상물도 마련해 두었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 준비를 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트이슐에서 다섯명이 기념식을 갖기 위해 프란츠 로타우어의 아파트에 모였다. 그들은 여호와의 목적을 완수하는 일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상기하고자 모인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죽음에 이를 정도의 가혹한 시험을 당하셨지만, 불굴의 충절을 나타내셨음을 잘 알고 있었다.

엥글라이트너 형제는 그 작은 그룹에게 연설을 할 준비는 충분히 하였지만 기록한 원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막 연설을 시작했을 때 창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집주인이 문을 열자, 다섯명의 남자가 형제들이 있는 방으로 들이닥쳤다. 침입자 중 둘은 무서운 비밀 경찰 요원이었고, 셋은 SS(나치당의 친위대)에서 파견된 자들이었다. 그들은 형제들에게, 수색할 때까지 두손을 들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했다. 아파트 내의 모든 물건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워치 타워 서적이 하나도 나오지 않자, 그들은 화를 냈다.

그들은 형제들에게 지도자(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하는 종파의 신도로서 여호와의 증인과는 아무런 관련도 갖고 싶지 않다는 점을 선언하라고 제안했다. 물론 형제 중 아무도 그렇게 하고자 하지 않았다. 결국, 전원이 체포되었다. 귀가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사람은, 엥글라이트너 형제뿐이었지만, 그도 후에 붙잡혔다. 다른 형제들은 주도(州都)인 린츠에 있는 교도소에 즉시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형제들은 그날 밤에 체포된 다른 많은 증인과 합류했다. 그후 얼마 안 되어 형제들은 다카우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으며, 한편 자매들은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로 보내 졌다.

브라우나우와 그 주변에 사는 알로이스 모저, 요제프 부흐너 등의 형제들도 그날 밤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들도 기념식 도중에 체포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부흐너 형제는 형제들이 다카우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에 수용소장인 그뤼네발트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을 여전히 기억했다. “자, 너희 성경 연구생들, 너희들은 다카우의 ‘살아 있는 재고품’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수용소에서 썩게 될 것이다. 여기서 빠져 나가지는 못한다. 나갈 곳이라곤 저 굴뚝뿐이다.” 그가 말한 의미는 형제들이 화장터에서 태워질 시체가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 형제들은 그들이 모여서 기념하고자 했던 죽음의 주인공이 당했던 것과 똑같이 참 숭배의 적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형제들은 강제 수용소에서 육년간 고통을 인내한 후에 마침내 석방되었다.

그리스도인 중립에 대한 입장

오래 전에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말일에 ·⁠·⁠·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2:2-4) 그와는 달리, 나치 정권은 모든 건장한 남자에게 전술을 훈련받도록 요구했다. 오스트리아의 여호와의 증인은 어떻게 하였는가?

오스트리아가 나치에게 점령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부에서는 제 1차 세계 대전중에 군복무 경력이 있는 사람은 전원 삼일간의 야외 군사 훈련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그 결과, 요한 라이너는 인스브루크의 병영에 신고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대단한 광경이었다! 800명의 남자가 군인 선서를 하기 위해 차려 자세로 서 있었다. 그들 모두 앞에서 라이너 형제는 선서를 거부했다. 그 다음에는 순조로이 취조실로 옮겨 졌다. 취조실을 떠날 때, 그는 클로츠라는 이름의 군목을 만났다. 군목은 군복을 입고 큰 십자가를 목에 걸고 제 1차 세계 대전중에 탔던 많은 훈장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그 사제는 “하일 히틀러!” 하고 경례하고는 취조관에게 다가가 라이너 형제에 대한 소견을 말했다.

그후 때때로 라이너 형제는 여러 관리 앞으로 소환되어 한층 더 심문을 받았다. 그중 한 관리가 말하기를, 사제의 말과 라이너 형제의 말이 일치하지 않다고 했다. 라이너 형제는 예수께서 그러한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 하신 말씀 즉 그들은 위선자라는 점을 마태 복음 23장에서 읽어 볼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른 관리가 “이 사람 말이 맞아!”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너 형제는 수감되었으며, 사건은 지방 법원으로 넘겨 졌다. 그 즈음에 라이너가 고용되어 일했던 식료품 도매점의 주인이 경찰 서장을 만나서 라이너 형제가 하던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형제는 가정과 직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증인은 아니지만 영향력을 가진 친척이나 고용주가 형제들을 위해 개입한 경우는 한번만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흔히 그들이 형제들의 정직성과 근면한 활동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든 경우가 그처럼 순조롭게 되어 가지는 않았다.

실패로 돌아간 나치당원의 노력

히틀러의 군대가 오스트리아에 진주한 지 약 일년 후에도, 후베르트 마티셰크는 여전히 중단하지 않고 전파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9년 3월에 한대의 자동차가 그의 집 근처에서 멈추더니, 두명의 비밀 경찰관이 내렸다. 마티셰크 형제는 그들이 누구를 만나러 왔는지를 추측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태연 자약했다.

한 경찰관이 “불온 서적에 대한 가택 수색을 하겠오”라고 말했다. 마티셰크 형제는 예방책으로 이미 대부분의 서적을 배부하였으며, 나머지는 집 밖에 안전하게 보관해 두었다. 따라서 경찰관은 수색을 하고 나서 실망했다.

“곧 군복무 통지서를 받게 될텐데, 그때는 어떻게 할 셈이오?”라고 한 경찰관이 물었다.

마티셰크 형제는 서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선서하는 일을 비롯해서 전쟁과 관련된 일은 조금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경찰관이 “어떤 결과가 닥칠지 알고 있오?”라고 물었다.

형제는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읍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수주일 후, 마티셰크 형제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가축 운반 차량에 실려 다카우 강제 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마티셰크 형제는 자유의 문이 열리기까지 도합 세곳의 강제 수용소 생활을 인내해야 했다.

형제들이 마우타우젠 강제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악명 높은 지휘관인 스파체네거는 이러한 말로 형제들을 맞이했다. “집시와 성경 연구생은 아무도 이곳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형제들이 그 죽음의 장소를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준 무수한 제안이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있었다. 마우타우젠 강제 수용소에서의 어느 날 이른 아침, 후베르트 마티셰크와 동생 빌리는 수용소 입구로 나오라는 말을 들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이 입구로 걸어갈 때 불안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그들은 수용소장인 치라이스 앞에 서게 되었다. 그의 주위에는 당의 고위 간부들과 SS 요원 몇명이 뺑 둘러 있었다. 오버외스터라이히의 지방 장관(지구당 지도관을 가리키는 명칭)인 아우구스트 아이크루버도 있었다.

치라이스는 대변인으로 자처하여 두 형제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여기 계신 지방 장관께서 너희 두 형제에게 즉시 귀가 조치를 내리실 것이다. 단지 여호와의 증인을 위해 특별히 작성된 이 한장의 종이에 서명만 하면 된다. 그러면 고통의 세월을 면하게 될 것이다.’

관리들은 형제들의 다음과 같은 단호한 대답을 듣고서 잠시 아무 말 없이 당황한 기색을 나타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의 신앙에 대해 불충실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수용소장인 치라이스는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서며, “제가 말한 대로가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단호함에 대해 미리 대화를 나누었음이 분명했다.

국가 근로 봉사 훈련

프란츠 볼파르트는 (독일) 제국 국가 근로 봉사대에 징집되었다. 그러나 훈련 캠프에 도착해 보니 이 기관도 예비 군사 훈련에 목적을 두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제복을 입는 일과 허리에 혁대를 매는 일을 거부했다. 그러자 하루는, 300명의 청년과 100명 가량의 상하급 교관을 연병장에 정렬시켜 놓고, 프란츠 볼파르트에게 히틀러 경례식으로 손을 들고 동시에 스바스티카 기에도 경례를 하면서 행진하라고 명령했다. 볼파르트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고대 바벨론에서 느부갓네살이 세운 형상에 절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에 세명의 젊은 히브리인이 행한 바를 상기했다. (다니엘 3:1-30) 그것은 볼파르트에게 대단한 힘을 주었다! 그는 충실한 세 히브리인의 본을 따랐다.

그후 며칠이 지났다. 이번에는 베를린에서 온 고위 관리, 알멘딩거 박사가 직접 그 젊은 형제의 생각을 돌려 놓으려고 했다. 대화중에 알멘딩거 박사는 “자네는 이 일로 무슨 일을 감수해야 되는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군” 하고 말했다.

20세의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잘 알고 있읍니다. 아버지는 불과 몇 주일 전에 동일한 이유로 참수형을 당했읍니다.” 알멘딩거 박사는 포기했다. 결국, 프란츠에게는 독일의 롤발트 수용소에서 5년의 금고형이 선고되었다.

그리스도인 중립을 위해 처형당함

1939년 9월의 어느 날, 불안한 한 가지 소문이 산기슭의 도시, 잘츠부르크 전역에 퍼졌다. 그 소문은 주민을—심지어 히틀러의 통치로부터 큰 이득을 기대하는 사람들까지도—불안하게 했다. 그들이 서로 귀띔해 준 소문은 무엇이었는가? 잘츠부르크에서 가까운 군사 지역, 글라네그에서 두명의 남자가 총살되었다는 소문이었다.

처음에는 소문으로 여겨 졌던 그 이야기는 냉엄한 사실이었다. 그 두 사람은 형제들인 요한 피힐러와 요제프 베크샤이더였다. 그들은 군복무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군 파견대에 의해 사형당했다. 그러나 사형 집행은 지휘관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두 형제가 눈을 가릴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어쨌든 눈이 가리워지기는 했다. 그후 발포 명령을 내렸을 때에 군인들은 사격하려고 하지 않았다. 복종하지 않으면 징계 처분을 받을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듣고 명령을 재차 받고 나서야 군인들은 아무 죄가 없는 두 형제에게 발포했다. 그러나 관련된 이야기가 더 있다.

잘츠부르크에서의 재판중에, 재판장과 배석 판사들은 두 피고의 생각을 돌려 보려고 했다. 재판장은 피고의 아내들을 법정으로 불러들였다. 아내의 모습을 보면 피고들이 영향을 받아 굴복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한 아내는 “두분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어요”라고, 그들에게 격려적인 말을 했다. 재판장은 이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매우 흥분하여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 치면서 “이 사람들은 죄인이나 반역자가 아니오. 오히려 두, 세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수백명 아니 수천명도 더 되는 신자의 일행이오!”라고 소리쳤다. 그렇지만, 법은 사형 언도를 요구했다.

형이 집행되기 전 날, 감방에 있는 피힐러 형제와 베크샤이더 형제는 방문을 받았으며, 그들의 생각을 바꾸게 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 마지막 소원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들은 성서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재판장이 직접 그들에게 성서를 갖다 주었다. 그는 자정이 될 때까지 감방 안의 두 사람을 지켜보고 나서, 이러한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저 두 사람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군. 정말 거룩한 사람들이야!”

형이 집행된 후, 두개의 관은 개인적으로 매장하도록 내보내 졌다. 300명 가량의 사람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장례식이 경찰의 엄한 감시하에 행해 진 것은 물론이었다. 노래는 금지되었고, 기도는 너무 길다고 생각한 비밀 경찰의 거친 말로써 결국 중단되었다. 비밀 경찰은 여호와라는 이름의 사용도 금지시켰다. 하지만 하관할 때에 한 형제가 “우리 다시 여호와의 왕국에서 만나리라!”고 외치는 것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이 형 집행을 둘러싼 사건이 잘츠부르크에 알려지고 나자, 그 후의 모든 사형 집행의 장소는 독일의 베를린-플뢰첸제로 변경되었다.

사형수 감방에서 보낸 믿음의 말

36세의 프란츠 라이터는 1940년 1월 6일에 베를린-플뢰첸제의 강제 수용소에서 어머니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제가 지금 취하고 있는 행동이 올바르다는 저의 믿음은 확고 부동합니다. 여기 있는 동안은 아직 생각을 바꿀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불충성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곳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영예를 위해 그분에게 충실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향 근처 지역에서 온 다섯명의 형제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참수형을 당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라고 말한 것이다. 프란츠의 편지는 이렇게 계속된다.

“제가 알기로는, 만일 [군인으로서의] 선서를 했다면, 저는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일은 제게 해가 될 것입니다! 부활될 가망이 전혀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저는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고착하고 있읍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어머니 그리고 모든 형제 자매들, 오늘 저에 대한 선고가 있었읍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사형이 선고되었읍니다. 집행일은 내일 아침입니다. 과거의 모든 참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저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가지고 있읍니다. 사도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라고 기록하였읍니다. 그 말씀은 제게도 참됩니다. 저는 그 점을 어머니께 증명해 드렸으며, 어머니는 그러하다는 것을 깨달으셨겠지요. 사랑하는 어머니, 상심하지 마십시오. 모두가 성경을 더 잘 아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견고하게 서 계신다면, 부활하여 다시 만날 것입니다. ·⁠·⁠·

“다시 만날 때까지

“아들 프란츠 올림.”

이러한 종류의 편지를 받은 사람 중에는 기혼자도 있었다. 그라츠에 사는 엔트슈트라서 자매는 아직 젊은 아내였을 때 우체부에게서 1939년 12월 15일자 편지를 받았다. 다음의 편지를 읽어가는 그 자매의 느낌을 잠깐 상상해 보기 바란다.

“사랑하는 에르나에게,

“내가 결심한 대로 되었오. ·⁠·⁠· 울지 마오. 우리가 세상과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기 때문이오. (고린도 전 4:9) 거듭 인사하며 영으로 입맞추오.

“왕국에서 다시 만나리다.

“당신의 다티로부터.”

위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그러한 편지는 아직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충실함을 지키는 데 격려가 되었다. 반면에, 자유로운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어떠한 위험도 무릅쓰고 투옥된 형제들을 격려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한 예로서, 프란츠 차이너는 베를린에 수감되어 있을 당시에 다음과 같은 권고가 담긴 편지를 받았다. “믿음 안에서 강건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며, 하늘에 계신 위대하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검열관은 이 편지를 읽었다. 프란츠 차이너는 1940년 7월 20일에 사형당했다. 그러면 믿음 안에서 강건하도록 프란츠를 격려한 그 편지의 발신인, 빌헬름 블라셰크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발각당하고 체포되어, 1941년 8월 11일에 ‘군대의 사기 저하’라는 혐의로 형무소에서의 중노동 4년형을 선고받았다.

자녀를 빼앗김

자녀와 관련된 시험에 직면한 사람들도 있었다. 리하르트 하이데와 요한 옵베거는 자녀에게 성서에 근거한 여호와의 증인의 신앙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센트 파이트/글란 지방 법원장 앞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그후, 하이데 형제는 자녀를 데려갈 것이라고 판결한 법원 명령서를 받았다. 명령서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기술되어 있었다. “[아들인 게르하르트]를 아버지가 돌보도록 방치하는 것은 위험하다. 성경 연구생인 그는 아들이 히틀러에 대한 경례와 국가 봉창을 하지 못하도록 금하기 때문이다.”

게르하르트는 다른 사람의 돌봄을 받게 되었고 하이데가 아들을 만나는 일은 기껏해야 이따금 한번씩 허용되었다. 후에 게르하르트와 그의 학급생 전원은 티롤 동부의 린츠에 있는 어린이 캠프로 옮겨 졌고, 그곳에서 전쟁이 끝난 1945년까지 머물렀다. 그러나 게르하르트는 부모가 가르쳐 준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38년 이상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다!

어리지만 충실했다

그러면 요한 옵베거의 딸은 어떻게 되었는가? 헤르미네는 겨우 열 한살에 부모와 헤어져서 어떤 감화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이미 기회를 잘 이용하여 딸에게 진리를 심어 주었다.

진리의 반대자들은 여호와에 대한 헤르미네의 충성을 꺾을 수 없었다. 애국적 노래를 부르거나 “하일 히틀러!”라는 경례를 하도록 심한 노력이 가해 졌지만, 조금도 성공하지 못했다. 헤르미네는 어떠한 타협도 완강히 거부했다. 어느 날, 한 교사가 헤르미네에게 독일 소녀 동맹 제복의 웃옷을 강제로 입히려고 했다. 그러나 책임자들이 그 웃옷을 헤르미네에게 입히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팔꿈치까지밖에는 더 이상 입힐 수가 없었으므로, 입히는 일을 중단했다.

헤르미네의 부모는 감화원 당국이 승인하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딸을 방문할 수가 있었다. 당연히,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은 믿음 안에서 견고히 서 있도록 딸을 격려하곤 했다. 또한 헤르미네는 오빠인 한스의 충성으로도 격려를 받았다. 헤르미네는 오빠가 군복무를 거부했기 때문에 교도소에 있다가 강제 수용소로 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오빠가 충실하게 인내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오빠들 중 한명은 실제로 군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감화원 교사들은 헤르미네의 충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노력에 있어서 그 사실을 논증으로서 교묘히 이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헤르미네의 결심을 고려에 넣지 못했다. 헤르미네는 동요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오빠의 추종자가 아니예요. 그리스도 예수의 추종자란 말이예요!”

헤르미네가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데다가 당국이 부모의 방문을 단절하고자 했기 때문에, 당국은 그 어린이를 독일의 뮌헨에 있는 한 수녀원으로 보냈다. 하지만 1944년 5월에 헤르미네는 며칠간 집에 다녀오도록 허가받았다. 집에 돌아온 헤르미네를 보고 부모는 대단히 놀랐다. 그러나 당국은 이제 일어날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집에 있는 동안, 헤르미네는 침례받았으며, 자유로운 형제들에게 여전히 봉사할 수 있었던 간스터 형제가 침례 연설을 했다. 이 일은 나치 정권이 최종적으로 붕괴될 때까지 남은 기간에 여호와께 충성을 유지하도록 헤르미네에게 더 큰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조심! 스파이와 밀고자들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밀고자의 염탐—특히 구획 감시인과 비밀 경찰을 위해 일하는 다른 사람들의 염탐—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형제들의 영적 활동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어느 날, 요한 피레클은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전파 활동의 감독을 책임지고 있던 페터 괼레스를 방문하고자 했다. 피레클 형제는 괼레스 형제의 상점으로 직접 가지 않고 그 옆집에 들러, 전에 진리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였고 괼레스 형제를 아는 여주인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 보았다. 형제는 페터 괼레스가 어떻게 지내는지 그리고 그의 체포 여부를 물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조금도 알려 주지 않았다. 대신에, 길 건너 꽃집으로 가라고 했다. 그곳에서 필요한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피레클 형제는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 그곳에 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후 얼마 안 되어, 피레클은 비밀 경찰이 괼레스 형제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을 도중에서 체포하기 위해 꽃집에서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괼레스 형제 부부는 1940년 6월 12일, 투옥되었으며, 그의 가게는 폐쇄되었다.

이상한 재판

괼레스 형제는 오스트리아의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인도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다. 그는 수개월 동안 감금된 후에, 사형 선고를 내리기로 악명이 높으며 성난 어조로 성경 연구생을 독일 국민의 부스럼 같은 존재라고 부른 한 판사 앞에 섰다. 검찰관은 사형 선고를 요구했다. 괼레스 형제가 공소에 대해 성서적으로 답변하고 변호인의 변론이 있은 후에 재판은 휴정되었다. 재판이 재개되기 전에 사태가 놀랍게 역전되었다.

괼레스 형제는 이른 아침에 감방 문의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교도관은 그에게 따라오라는 몸짓을 하고, 그를 창살로 두른 어떤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 방에는 누가 기다리고 있었는가? 바로 그 판사가 혼자 있었다.

판사는 이렇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당신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게 있소. 판사가 사적으로 피고에게 말하는 것은 취임 선서를 중대하게 위반하는 것이지만, 재판 이후 도저히 쉴 수도, 잠을 이룰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오. 만일 당신에게 사형을 선고한다면, 나는 자신을 살인자로 생각하게 될 것이오.”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마침내 괼레스 형제가 입을 열었다. “이러한 상황을 가져온 자는 사단입니다. 그가 사실상의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판사님은 판례의 사실에 기초하여 형을 선고하는 사람에 불과할 따름이지요.” 긴장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당신이 생명을 잃지 않는 방법으로 소송을 다루어 보겠오”라고 판사는 약속했다. 그리고 나서 자신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다음과 같은 점을 덧붙여 말했다. “사실 나는 국가의 기소인으로서 출정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당신을 죽음의 수렁에서 구출되도록 돕고 싶소.” 말을 마친 판사는 한 손을 형제의 어깨 위에 얹고, 다른 손으로는 형제의 손을 힘주어 쥐었다.

재개된 재판은 좀더 공정한 과정을 밟았으며, 판사는 시종 일관 몸을 떨었다. 법정은 검사가 구형한 사형 선고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감형이 없을 경우 10년간이 될 금고형을 페터 괼레스에게 선고했다. 괼레스 형제는 니더외스터라이히 주, 슈타인의 형무소에서 그후 삼년 반을 독방 생활로 보냈다.

겸손한 종

관청은 여호와께 전적으로 헌신한 평범한 사람인 페터 괼레스가 지하 활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여겼다. 비밀 경찰 기록에 보존되어 있는 조서를 보면 그 점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들의 묘사를 보면, 누구든지 괼레스가 강력하고 활기찬 지도자였을 것으로 상상하리라. 그러나 그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괼레스는 주목의 대상이 되기를 조금도 원하지 않았던 겸허한 사람이었다. 1945년에 나치 정권이 끝난 후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조직을 재건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그후 다시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활동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빈의 벧엘에서 서적 꾸러미의 발송 준비를 도왔다. 친절하고 우정적인 성격의 괼레스와 피곤을 모르며 언제나 그의 곁에서 내조해 준 아내 헬레네는 박해하에서만이 아니라 그후 전후 시기에도 형제들에게 격려의 근원이 되었다.

페터 괼레스는 1975년 9월 2일에 사망할 때까지 충실하게 봉사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공동 후사의 남은 자에 속한다고 공언하지는 않았지만,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에 대한 깊은 인식을 보였으며, 매우 어려운 시기에 오스트리아에서의 활동을 돌보기 위해 종 반열에게 협조한 사람이었다.—마태 24:45.

희귀한 “양식”을 다룸

전쟁의 종반기에 오스트리아의 거의 모든 곳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사실상 마비되었다. 여러 읍과 마을의 형제들은 이따금씩밖에 모일 수가 없었다. 대단한 주의가 요구되었다.

하지만 클라겐푸르트에서는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신권 활동이 원활하게 계속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간스터 형제는 출판물을 받으면 그것을 「파수대」의 매호를 복사하던 페터 파이포다에게 주었다. 한번은, 간스터 형제가 여러 호의 「파수대」를 받아 가지고 몸에 잘 숨긴 다음 플라처 가족과 반데러 자매를 방문하기 위해 클라겐푸르트에서 크룸펜도르프로 (약 7킬로미터) 걸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걷고 있던 사람은 누구였는가? 평소에는 간스터 형제를 신문하던, 비밀 경찰관이었다. 하지만 경찰관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으며, 두 사람은 함께 걸어갔다. 그러나 틀림없이, 간스터 형제에게는 함께 걷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빈의 경우, 그곳의 「파수대」 복사 활동은 괼레스 형제가 체포되자 정지되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빈으로 여행해야 하는 세속 직업을 가진 한 스위스 형제를 통해서 가끔 영적 양식을 받았다. 그 스위스 형제는 적절히 경계하면서 「파수대」를 여러 부 가지고 왔다. 형제들은 잡지 중 한부를 받게 되면, 그것을 개인용으로 가질 수 없었다. 다른 형제들에게는 다른 어떤 잡지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즉시 잡지를 읽고 나서 신뢰할 만한 다음 형제에게 넘겨 주었는데, 직접 준 것이 아니라, 시장 바구니나 다른 물건에 감추어서 넘겼다. 그런 식으로 그 귀중한 출판물은 손에서 손으로 계속 옮겨 졌다. 그 영적 양식이야말로 시련의 환경에 처해 있는 형제들에게 대단히 중요했다.

뒷걸음질치는 몇몇 사람

형제들의 저항을 무력하게 하고 여호와의 증인과의 모든 관계를 끊겠다는 서약서에 형제들이 서명하도록 영향을 줄 목적으로, 비밀 경찰은 많은 형제가 이미 서명하여 석방되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과장이었다.

비밀 경찰은 서명한 사람은 누구나 풀려 나서 고통의 세월을 면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 말은 사실상 서명한 사람이 신체적 고통을 오랫동안의 양심의 괴로움과 바꾸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쟁점은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에 대한 충성에 관한 것임이 분명했다. 대다수의 형제들은 충절에 있어 단연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서명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서명했다고 해서 모두가 참으로 자유롭게 된 것은 아니었다. 대개는 끊임없는 감시를 여전히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아그네스 회츨은 진리 때문에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적이 있었던 한 부부를 만났다. 하지만, 회츨 자매는 그들이 석방된 상황을 알지 못했다. 자매는 기쁨에 넘쳐 그들에게 인사했다. 그런데 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마치 아주 낯선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자매를 지나쳤다. 자매는 그제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차렸다. 또 다른 경우에 회츨 자매는 자기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공장의 입구 근처에 있었다. 자매는 자기가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형제라고 생각한 사람의 가슴에 스바스티카기 표시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 남자도 회츨 자매를 모르는 척하면서 불안한 기색으로 지나쳤다. 그러한 서명자는 충실한 사람들에게 대단한 충격을 주었지만, 여호와와 나머지 충성스러운 형제들에 대한 충성스러운 사랑을 둔화시키지는 못했다.

강제 수용소에서의 괴로움을 인내함

1939년, 브라우나우의 알로이스 모저와 란스호펜의 요제프 부흐너는 142명의 형제와 함께 다카우 강제 수용소에서 오버외스터라이히의 마우타우젠 수용소로 옮겨 졌다. 자정 무렵에 형제들은 마우타우젠에 도착하여 가축 운반 화차에서 내렸을 때 이러한 말을 들었다. “마우타우젠은 다카우 같은 요양소가 아니다. 우리는 너희 모두를 없애 버릴 것이다.” 집계에 따르면, 1938년 8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총 206,000명이 마우타우젠 수용소에 수용되었으며, 기록상의 사망자는 35,270명이다.

처음 삼년 동안 형제들은 예외없이 모두가 채석장에서 심한 육체 노동을 해야 하였다. 겨울의 날씨는 대단히 추웠다. 실제로 채석장에서 동사한 수형자가 수백명에 달했다. 밤이 되어 수용소로 돌아올 때, 수형자들은 각자 커다란 돌을 들고 “죽음의 층계”라는 186개의 계단을 올라와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지휘관인 스파체네거는 10킬로그램도 안 되는 돌은 너무 가벼운 것이라고 포고했다. 그는 40킬로그램 이상의 돌을 수형자들에게 부과했으므로, 많은 수형자가 완전히 탈진해서 쓰러졌다. 쓰러진 수형자는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결국, 모저 형제와 부흐너 형제는 수용소의 이곳 저곳에서 나온 알몸의 시체가 실린 썰매를 끄는 임무를 받았다. 시체마다 신원 표지로 이름과 수형자 번호를 적은 꼬리표가 엄지발가락에 달려 있었다. 두 형제가 주로 설사병을 앓는 수형자들이 수용된 막사로 가게 된 것도 그 임무 때문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아우구스트 크라프트를 발견하고 아연 실색했다. 형제들은 이 엄청난 불행과 참상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오히려 크라프트 형제는 여호와의 보살핌으로 누렸던 축복을 생각하고서, “모든 것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다음날, 크라프트 형제도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는 목표를 끝까지 추구한, 꾸준한 행로를 마치고 썰매에 실렸다.—빌립보 3:14.

형제들은 사랑으로써 서로의 복지를 살폈다. 유난히 약한 사람이 있을 때, 형제들은 그가 필요한 힘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그나마 불충분한 자기 음식에서 몇 숟가락을 덜어 주곤 했다.

수용소 내에서의 신권 활동

신권 활동은 바로 수용소 내에서도 극도로 신중하게 계속되었다. 증거가 행해 졌고, 성서 연구가 있었으며, 일부 집회가 진행되었고, 침례받은 사람도 소수 있었다.

프란츠 데슈는 마우타우젠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구젠 강제 수용소로 옮겨 졌다. 거기에서 SS 대원과 성서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로 발전되었는가? 여러 해 후에, 두 사람이 어떤 대회에서 형제로서 재회하였을 때에 얼마나 기뻐했을 것인지 상상해 보라!

많은 나라에서 새로운 수형자들이 들어왔다. 형제들은 그들에게 왕국 진리를 알려 주기 위해서 수형자의 모국어로 기록된 증거 카드를 사용했다. 수형자가 우편물을 받는 것은 허가되었으므로, 막사에 들어온 SS 보초들은 그 사람들이 읽고 있는 것을 수상히 여기지 않고 그것이 우편물이 아니라는 점을 알지 못했다.

카를 크라우제 형제는 구젠 수용소의 자물쇠 작업장을 관리했다. 그런데 그곳은 참으로 독특한 작업장이기도 했다! 구내 자물쇠를 제조하거나 수리했을 뿐만 아니라, 침례용으로 특별히 만든, 그곳의 나무 물통에서 다섯명의 폴란드인을 비밀리에 침례주기도 했다.

형제들은 영적으로 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밤에 작은 집단으로 모여 성구를 논하곤 했다. 그들은 심지어 성서를 한권 입수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 때에는 성서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서로에게 전달해 주었다. 형제들은 침대 밑에 누워, 별로 갖지 못하는 자유 시간에 읽곤 했다.

형제들은 심지어 주의 만찬 기념식을 성공적으로 거행하기도 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표상물을 구하여, 다른 사람이 모두 잠든 시간에 모였다. 구젠의 막사와 막사 사이에는, 막사에서 6미터쯤 떨어진 곳에 세면장과 화장실이 있었다. 형제들은 그러한 세면장에 모여 촛불로 불을 밝혀 기념식을 거행했다. 여호와의 애정어린 보호로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충실성의 기록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지배하던 때에 형제들이 보인 충실성의 예로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경험담은 그 외에도 많이 있다. 이곳에 진술된 경험담들은 고난을 인내하고 불굴의 충성을 나타낸 본으로서 기술되었을 따름이다.

히틀러의 군대가 오스트리아에 들어오기 전에 오스트리아의 전도인 수는 549명이었다. 그후 여러 시기에 투옥된 증인의 수는 총 445명이었다. 그중 48명이 1938년에서 1945년 사이에 처형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자매도 포함되었다. 열 세명은 구타당하거나 독가스에 의해, 혹은 잔인한 의학 실험물이 되어 목숨을 잃었다. 교도소와 강제 수용소에서 질병이나 극도로 혹사당함으로 최소한 81명이 사망했다.

그 슬픈 시대의 희생자를 말할 때면 당연히 통계가 사용된다. 그러나 그들은 냉엄한 수자 이상의 큰 의미를 지닌다. 각 사람은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요, 동시에 남편 또는 아내, 아버지 또는 어머니, 아들 또는 딸이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충실한 증인들이 수천년에 걸쳐 쌓아 올린 기록에, 다음과 같은 자신들의 증언을 덧붙였다. 즉 여호와의 충실한 종들은 그분에 대한 사랑에 감동되어, 자신들의 하나님이자 주권자이신 그분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생명까지도 내던진다는 점이다.

먼저 할 일은 무엇인가?

1945년 봄에 전쟁과 나치의 오스트리아 지배는 끝났다.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형제 자매들은 곧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먼저 생각난 것은 다른 형제들과의 교제였다. 집회를 다시 마련하는 데 많은 노력이 들긴 했어도, 1945년 7월 21일에 전후 최초로 조직된 집회가 클라겐푸르트에서 27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그해 가을에는 빈에서도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충실한 형제들은 계속해서 활동을 재조직해 나갔다. 오스트리아의 가장 서쪽에 있는 포라를베르크 주에서는 여러 명의 형제가 스위스의 베른 지부에서 온 프란츠 취르허, 게오르그 게르츠, 다비드 비덴만과 만나 회중 집회와 전파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취할 필요가 있는 방법을 논의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페터 괼레스, 펠릭스 데프너, 레오폴트 피테로프, 프란츠 간스터가 참석했다. 여러 해에 걸친 전시의 어려운 경험에도 불구하고, 왕국 열매가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37년에 549명이었던 활동적인 전도인 수는 증가하여 1946년 봉사년도말에는 730명의 왕국 선포자가 있게 되었다.

페터 괼레스는 교도소에서 돌아온 후, 전후 최초의 오스트리아 지부 감독자가 되었다. 빈의 플로리아니가세 58번지에 소재한 그의 아파트가 지부 사무소였다. 그후 1947년 4월부터는 사무소의 일이, 폭격으로 대파된 어떤 학교 건물에서 수행되었다. 형제들은 그곳에서 「파수대」와 약 4,000부의 소책자를 등사했다. 성서 서적을 등사하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투옥되었던 테레제 슈라이버가 다시 그 일에 복귀하여 복사 작업에 참여했다. 클라겐푸르트의 형제들은 「어린이들」 책 전체를 등사하여 양장본으로 제본하기까지 했다. 종이와 잉크가 귀하여 구하기가 어려웠지만, 여호와의 도움으로 형제들은 가까스로 필요한 재료를 구했다.

1947년에 형제들은 전후 최초의 대회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대회는 나흘간 지속되었다. 1,700명이라는 참석자 수는 오늘날 개최되는 대회에 비하면 적은 수로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의 오스트리아 형제들에게는 대규모의 군중이었으며, 그것은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증거였다.

같은 달의 얼마 후인 6월 21일 토요일에는 재조직과 관련된 또 다른 중요한 단계를 밟았다. 일곱명의 형제가 한 학교에 모여서 “뉴욕, 브루클린,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지부, 바흐투름-게젤샤프트”라는 단체를 재조직했다. 따라서 서적 발행을 위한 법적 기구의 사용이 다시 가능하게 되었다.

그 다음—시베리아로!

1955년 5월까지, 오스트리아는 연합국(미국, 프랑스, 영국, 소련) 군대가 점령하여 네개의 점령 지구로 분할되었다. 도이치바그람 마을은 소련 지구에 속했다. 프란츠 말리나 형제는 그곳에 살았다. 그는 러시아어를 알았으며, 점령군에게 매우 직접적인 방법으로 증거하여, 몇명의 군인과 성서 연구를 하기도 했다. 또한 러시아어판 성서 서적을 입수하여 군인들에게 배부하기도 했다.

그의 활동은 주목을 끌었다. 1948년초, 말리나에게 호의를 가진 두 사람이 이렇게 주의를 주었다. “프란츠, 이곳을 떠나시오. 군당국에서 당신을 체포하고자 하오. 당신의 서적을 러시아 군인이 가지고 있는 게 발견되었오.” 그러나 말리나 형제는 도망가지 않았다. 그는 병든 아내와 자녀 곁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체포되었다. 팔일간 그곳의 소련군 지휘관실에 붙들려 있다가 결국 소비에트 육군 본부로 이송되었다.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여섯 주일을 보내는 동안, 병사와 장교들에게 숨김없이 전파하면서 여호와의 왕국에 관해 이야기했다. 마침내 프란츠 말리나는 이제 친숙하게 들리는 ‘군대 사기 저하’라는 혐의로 강제 노동 10년형을 선고받고 아득히 먼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이윽고 우랄 산맥 뒤에 있는 광대한 지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주로 도보로 여러 수용소를 전전했다. 탈출은 불가능했다. 거의 모든 수용소에서 그는 소련의 여러 지방에서 온 형제들을 만났다. 새로운 수용소에 도착하면, 으례 형제들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형제들을 발견할 경우, 형제들은 말리나가 정말 여호와의 증인인지를 분간하기 위해 시험했다. “요나답의 집은 어떤가요?” 그리고 “워치 타워 협회장은 누구인가요?” 등의 질문으로 시험했다.

말리나가 정말 형제라고 확신하게 되면, 형제들은 그가 가혹하고 익숙하지 않은 수용소 생활을 견디도록 사랑으로써 도와주었다. 말리나는 나이 때문에 아버지라고 불렸다. 오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30군데의 수용소를 거쳤다. 그후 1953년에 사면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아내는 사망하였고 맏딸이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제 말리나 형제는 낙심하거나 비탄에 젖었는가? 그와는 달리, 불과 며칠 안 되어 그는 벌써 집집으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다시 착수했다. 프란츠 말리나는 1964년에 사망할 때까지 계속하여 그 일을 했다.

파이오니아가 추수에 참여하다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오스트리아에서 여호와의 백성의 활동은 대단한 확장을 가져 왔다. 열렬한 파이오니아, 특별 파이오니아 및 선교인이 그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한 열성적인 봉사자 중에는 한스 로텐슈타이너 부부가 있다. 진리를 처음 접한 지 일년도 되지 않아, 그 부부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다. 1955년에는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임명되었다. 그들의 임명지 중에는 고산 지역의 카프룬이라는 마을을 중심으로 한 구역이 있었다. 한스는 그곳에서 일어난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식깊은 마음으로 주의 양을 찾는 일을 시작했읍니다. 그후, 발헨에서 일부 서적을 이미 받은 한 가족을 찾았읍니다. 즉시 온 가족과 연구가 시작되었읍니다. 그들은 친구들도 함께 하도록 초대하였읍니다. 때로는 12명이나 참석하였읍니다. 연구는 상당히 잘 진전되었읍니다. 가족들이 곧 교회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할 정도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영세 증명서가 필요하였읍니다. 따라서 착한 마음을 가진 그들 중 한 사람인 로이스가 그들 모두의 증명서를 얻기 위해 사제 사택에 갔읍니다. 이 가족들은 자녀가 많았기 때문에 모두 열 일곱장의 증명서가 필요했읍니다.” 로이스와 그곳의 교직자가 나눈 대화는 대강 다음과 같았다.

로이스: 안녕하세요? 영세 증명서가 몇장 필요합니다.

사제: “몇장”이란 도대체 무슨 뜻이지요? 그리고 무엇 때문에 필요한 건가요?

로이스: 교회를 탈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제: 오, 그래요? 그러면 증명서를 몇장이나 원하십니까?

로이스: 목록을 적어 가지고 왔어요. 예, 여기 있군요. 꼭 열 일곱장 필요합니다.

사제: 무어라고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많은 사람이 교회를 탈퇴하고자 합니까?

로이스: 사실은, 우리는 성서를 연구해 왔읍니다. 그 일이 전부입니다. 저, 당신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시거나 성서에서 알려 준 적이 전혀 없는 사실 무근한 것을 많이 가르쳤어요!

대화는 잠시 더 계속되었고, 로이스는 증명서를 받지 못한 채 교회를 나왔다. 하지만 나중에, 한스도 동석한 가운데 그 교직자와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이 끝날 때, 로이스는 사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당신은 전혀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었어요. 이제 영세 증명서를 갖고 나오세요. 좀 빨리요.” 교직자는 별 수 없이 따랐다.

현재 그 고산 마을에는 90명의 전도인으로 구성된 회중이 하나 있다.

1978년에, 오스트리아 전역에는 626명이 파이오니아 봉사의 축복을 즐겼는데, 그 중에는 278명의 보조 파이오니아가 있었다. 그러나 1988년 4월에 그 봉사를 보고한 수는 1,102명의 보조 파이오니아를 포함하여 1,925명으로 증가했다.

지부 마련

1965년 8월 1일, 길르앗 학교의 특별한 조직적 훈련 과정을 십개월간 밟고 졸업한 지 얼마 안 되는 로벨 L. 투르너가 지부 감독자의 책임을 맡도록 임명되었다. 투르너 형제는 거의 십년간 감독의 임명을 수행한 후, 룩셈부르크에서의 새로운 임명을 받고 1975년 7월, 오스트리아를 떠났다. 1976년 1월 이후에는 여러 명의 형제로 구성된 위원회가 오스트리아의 지부를 돌보고 있다.

지부 시설의 확장

전세계에 있는 협회 지부들은 끊임없이 수가 증가하는 여호와의 찬양자들의 필요를 돌보기 위해 시설을 계속 확장하고 있다. 오스트리아라고 해서 조금이라도 다를 바가 있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1957년에 빈의 전원 지역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건물은 지부 사무소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비좁게 되었다. 그래서 1970년과 1971년에 시설을 확장하여 발송부와 왕국회관이 들어갈 더 넓은 공간을 마련했다. 그러나 수년 후에는 한층 더 확장할 필요가 분명해 졌다. 이웃의 한 주민이 자기 땅의 일부를 팔려고 내놓았을 때, 그 문제에 대한 여호와의 손길이 느껴졌다. 새 건물의 건축 공사가 진행중이던 1983년에, 인접해 있는 또 다른 부지가 매물로 나와, 지부는 그 부지를 매입할 수 있었다. 1987년 여름에 새로운 시설이 봉헌되어, 기존 면적의 네배가 넘는 5,000 평방미터의 면적을 가외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이 정말 필요하였는가? 이전 건물을 매입한 이후, 오스트리아 지부가 섬기는 증인의 수는 이미 세배로 증가하여, 지부의 형제들은 매우 비좁은 건물에서 일하고 있었다.

공사가 완공되기도 전에 이웃 주민들의 이의에 대처하기 위하여 시설물 설계를 많이 변경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부가적으로 많은 일을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지부는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결과적으로는 필요한 거의 모든 변경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으로 증명되었읍니다. 많은 경우에 형제들은 ‘전에 계획했던 것보다 지금의 상태가 낫다’고 인정하게 되었읍니다.”

여러 언어가 사용되는 구역

오스트리아에 산다고 해서 모두가 오스트리아 국적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산다고 해서 모두가 오스트리아의 주언어인 독일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스트리아에는 유고슬라비아와 터키로부터 온 이주 근로자가 많다. 지부는 1970년대초 이래로 성서의 소식을 그러한 이주 근로자에게 전해 주기 위한 마련을 했다. 씨는 비옥한 토양에 떨어졌고, 이내 연구 그룹이 형성될 수 있었다.

현재 아홉개의 회중에서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유고슬라비아에서 사용되는 주언어 중 하나)로만 집회를 보고 있다. 터키어, 스페인어, 폴란드어, 일본어, 영어, 아라비아어의 연구 그룹도 있다. 아내와 함께 빈 벧엘에서 봉사하고 있으며, 50여 년 전에 신권 활동을 시작한 레토냐 형제는 이주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봉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점을 말한다.

“1971년에 유고슬라비아계 이주 근로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있던 다섯명의 형제에 가담하여 일하도록 임명되었읍니다. 그 목적으로 세르보-크로아티아어 회화를 배웠읍니다. 오늘날, 1988년에 빈과 그 주변 지방에서 세르보-크로아티아어 그룹에 속한 전도인이 320명 이상 됩니다. 그 형제들과 봉사하는 것은 대단히 즐겁습니다. 그들의 기질은 매우 가족적입니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열심은 번지고 있으며, 서로를 격려합니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저녁 늦게까지 하루 종일 계속 봉사합니다. 이주 근로자에게는 어려운 봉사 조건임에도, 정기적으로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여럿 됩니다. 그들은 주로 진리를 중심으로 열정적으로 대화합니다.

“이주 근로자 중에는 집시도 상당수 있는데, 그들에게는 회중이 가정과 같은 곳입니다. 한 집시 가족으로부터 최소한 25명이 이미 침례를 받았고, 친척 중 19명이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러한 형제들과 함께 봉사하는 것은 정말 축복입니다.”

대회 주최국이 됨

과거의 어려웠던 기간에 오스트리아 형제들은 회중 집회와 보다 큰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국경을 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오스트리아 형제들은 그들이 갔던 지역의 형제들이 베풀어 준 애정 어린 후대를 잘 기억한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오스트리아 형제들이 주인이 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사실, 그 일은 그리스에서 1,200명의 벗이 빈의 지역 대회에 참석했던 1965년에 시작되었다. 그들이 대회장에 붙은 별도의 건물에서 전체 프로그램을 그리스어로 즐기도록 마련되었다.

다음에는, 1967년에 유고슬라비아에서 889명의 형제가 오스트리아 남부 도시, 클라겐푸르트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 참석했다. 그들도 모국어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오는 형제들의 수는 증가했다. 1968년, 필라흐에서 마련된 회기에는 2,319명이 참석했다.

1978년 지역 대회에서는 프로그램을 헝가리어로도 제공하는 마련을 하는 특권을 가졌다. 모국어가 헝가리어인 소수의 장로가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기 때문에, 프로를 마련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대회가 열리기 수주일 전에 조직적인 문제를 책임맡은 형제들은 ‘헝가리의 형제들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국경을 넘을 수 있을 것인가?’ 하고 궁금히 여겼다. 헝가리어 프로그램의 참석자가 400명을 넘어서자 형제들은 대단히 감격했다! 그때 이후로 빈 지역에서 개최되는 지역 대회에는 거의 매번 헝가리어 프로그램이 포함되었다. 1986년에 그 회기의 참석자가 1,781명으로 증가하자 모든 사람은 대단히 즐거워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형제들이 후대를 나타낼 다른 사람들도 있었는가?

폴란드에서 온 형제들은 어떠한가?

1980년의 대회 주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폴란드에서 와서 참석한 1,883명의 형제 자매가 빈에서 폴란드어로 프로그램을 들었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그보다 더 잘 강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폴란드어 그룹을 위해 대형 천막이 설치되었고, 헝가리어와 크로아티아어 회기를 위해 강당이 각각 하나씩 예약되었다. 독일어 프로그램을 위해서는 같은 장소의 스타디움을 임대했다.

대회 부사회자는 “일요일에 외국어 그룹의 형제들도 스타디움으로 와서 함께 마지막 노래를 부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읍니까?”라고 제안했다. 대회 본부는 선뜻 동의했다.

대회 끝에 있었던 이러한 광경을 잠시 머리 속에 그려 보라. 스타디움 한쪽에는—연한 초록색 잔디가 덮인 운동장을 내려다보며—5,000명의 오스트리아인이 있었다. 광고가 있자, 스타디움의 반대쪽 좌석이 채워 지기 시작했다. 형제들—유고슬라비아인, 헝가리인, 폴란드인—이 언어 그룹별로 정렬하여 들어와 섰다. 그 다음 4개 언어로 신호가 떨어지자, 거의 8,000명이 일제히 찬양의 노래인 “여호와여, 감사합니다”를 합창했다.

뒤이어, 폐회사를 한 형제는 폴란드에서 온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음번에, 여러분이 독일어 프로그램의 오스트리아 형제보다 많이 참석한다면, 우리는 이 스타디움을 여러분에게 내드리겠읍니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 형제들은 오랫동안 서로 헤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대회는 참으로 마음을 감동시켰고, 국경을 사이에 둔 양쪽 형제들은 두고두고 이야기할 재료를 많이 갖게 되었다. 대회를 마치고 지부는 마음속 깊이 벅찬 행복을 느끼며 통치체에게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

“여러분도 경험했더라면 좋았을 대회였읍니다. 연합시키는 힘인 여호와의 영과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강력히 전시한 대회였읍니다. 노래가 끝난 후에도 형제들은 오랫동안 서로 손을 흔들었읍니다. 아무도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읍니다. 한 형제는 많은 형제들의 느낌을 이러한 말로 표현했읍니다. ‘이 대회는 제가 열번째로 참석한 지역 대회입니다마는, 이렇게 결속된 연합 속에서 이와 같은 따뜻함, 진실함, 부드러운 애정을 경험한 적은 없었읍니다. 이 두 팔을 뻗쳐 모든 형제를 껴안고 싶었읍니다. 영적인 의미로는 그렇게 했지요.’”

이듬해인 1981년, “천국 충성” 지역 대회의 준비가 막바지 단계에 이름에 따라,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 졌다. 즉 이번에는 폴란드에서 오는 5,000명 이상의 형제를 위해 스타디움을 내어 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빈과 주위 지역의 형제들은 관대한 주인임을 증명했다.

그 외에도 대회를 더욱 풍요롭게 한 또 다른 면이 있었다. 통치체의 시어도어 재라스 형제와 대니얼 시들릭 형제가 빈에 왔다. 그들은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온 형제들과 교제하는 참으로 좋은 기회를 가졌다! 두 형제의 격려적인 연설과 모든 언어 그룹의 형제들과의 우정적이고 따뜻한 개인적 만남에 대해 형제들은 대단히 감사하였다. 시들릭 형제는 프로그램 중 자신이 맡은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제자 바나바에 대해 연설했다. 형제들은 열심히 주의를 기울였다. 몇 마디 말이 있자, 연사와 청중은 오스트리아 말에도 있듯이 “혼연 일체”가 되었다.

1982년 이후로 폴란드 형제들은 독자적인 대회를 개최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오스트리아 형제들은 헝가리에서 오는 형제들을 접대하는 일을 계속 즐긴다.

미래를 향해 행진을 계속함

오스트리아에서는 일의 전반적인 진행 속도가, 그들 말대로, “느긋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일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놀랄 만한 성장은 없었지만, 여호와의 찬양자는 수적으로 꾸준히 증가해 왔다. 과거, 1950년대에 한 지역 감독자는 “언젠가는 필시 오스트리아의 전도인 수가 10,000명에 도달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말로 형제들을 격려했다. 멋진 말로 들렸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주민이 750만명에 불과한 작은 나라다. 그리고 당시의 전도인은 전국적으로 5,000명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1971년에 10,000명 선을 넘었으며, 현재 이 나라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무리는 17,0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오스트리아는 산과 음악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끊임없이 증가하는 무리의 생활에서 최대의 중요성을 지닌 것은 드높여진 위치에 있는 참 숭배인, “여호와의 전의 산”이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감미로운 선율은 여호와의 왕국을 찬양하는 노래인 “새 노래”를 부르는 일에 참여하는 17,705명의 전도인으로부터 나온다.—이사야 2:2; 시 98:1, 4-6.

[72, 73면 네모와 지도]

오스트리아의 개요

수도: 빈

공용어: 독일어

주요 종교: 로마 가톨릭교

인구: 7,575,700명

전도인: 17,705명

파이오니아: 1,398명

회중: 246개

기념식 참석자: 30,216명

지부: 빈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오스트리아

콘스탄체 호수(보덴제)

도른비른

포라를베르크

인스브루크

티롤

동부 알프스

잘츠부르크

바트이슐

잘츠부르크

오버외스터라이히

린츠

마우타우젠

다뉴브 강

니더외스터라이히

노이지틀러 호수

부르겐란트

슈타이어마르크

크니텔펠트

그라츠

케른텐

클라겐푸르트

스위스

독일 연방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이탈리아

[66면 전면 삽화]

[69면 삽화]

빈의 콘티넨탈 호텔, 이곳에서 C. T. 러셀은 1911년 3월 22일에, 연설하려고 했다

[자료 제공]

From the Pictorial Archive of the Austrian National Library

[74면 삽화]

지몬 리틀러(왼쪽)와 프란츠 간스터는 1921년에 처음으로 진리를 들었다

[79면 삽화]

1922년에 J. F. 러더퍼드는 빈의 카타리넨할레에서 연설했다

[자료 제공]

From the Pictorial Archive of the Austrian National Library

[81면 삽화]

1924년에 성경 연구생이 빈에서 최초로 개최한 대회의 프로그램. 그 다음 대회는 요하네스 신틀러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83면 삽화]

1924년의 하이데 가족, 오스트리아의 초기 증인들

[87면 삽화]

에밀 베첼은 1922년부터 1926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활동을 감독했다

[95면 삽화]

레오폴트 엥글라이트너, 전파한다는 이유로 1934년에 투옥되었다

[99면 삽화]

1939년 5월 25일, 나치에 체포된 아우구스트 크라프트. 크라프트에 대한 비밀 경찰 서류의 맺음말

[자료 제공]

오스트리아, 빈, 되우

[108면 삽화]

테레제 슈라이버(왼쪽)는 서적을 등사하였으며, 한시 흐론(부흐너)은 급사(急使)였다. 두 사람 모두 체포되었다

[109면 삽화]

비밀 경찰 서류는 등사 작업의 지하 조직망을 광범위하게 알고 있었음을 밝혀 준다

[자료 제공]

오스트리아, 빈, 되우

[115면 삽화]

알로이스 모저(왼쪽)는 일곱 군데의 교도소와 강제 수용소를 거쳤다; 요한 라이너는 군인 선서를 거부했다; 프란츠 볼파르트는 아버지와 형이 사형에 처해 졌음에도 충절을 유지했다

[117면 삽화]

구젠 강제 수용소 입구. 마우타우젠 수용소와 구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증인들, 1945년

[자료 제공]

오스트리아, 빈, 되우

[120면 삽화]

요제프 베크샤이더(왼쪽)와 요한 피힐러는 1939년 9월 26일 잘츠부르크 근처에서 총살당했다

[124면 삽화]

헤르미네 옵베거(왼쪽)는 11세 때에 부모와 헤어졌다. 아우구스테 히르슈만(지금은 벤더)은 17세에 비밀 경찰 앞에서 확고한 입장을 취했다

[126면 삽화]

페터 괼레스는 1940년 6월 12일에 체포되었다. 그가 선고를 받은 재판소 및 투옥되었던 독방 건물

[137면 삽화]

시베리아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 5년간 투옥되었던 프란츠 말리나

[140면 삽화]

1965년부터 1975년까지 지부 감독자로 일한 로벨 L. 투르너와 아내 마르고트

[141면 삽화]

지부 사무소와 벧엘 숙소, 1957년

[142면 삽화]

확장된 지부, 198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