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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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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나는 호수의 나라이며 온통 푸른 빛의 숲으로 덮인 핀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생활 표준을 가진 나라에 속한다. 하지만 수많은 진실한 주민들은 총살형의 위협을 무릅쓰면서도 더 만족스러운 표준을 추구하였으며 그것을 찾았다.

동쪽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스웨덴 국왕 함대가 그 목적지에 다가가고 있다. 숨막힐 정도로 멋진 다도해를 통과할 때, 한없이 펼쳐진 숲에, 수정같이 맑은 호수가 점점이 흩어져 있으며, 수천개의 섬이 해안을 수놓고 있는 나라—핀란드—가 수병들 앞에 나타난다. 당시 12세기만 해도 이 나라는 이교도가 사는, 유럽의 모퉁이지만, 함대에 탄 십자군 전사들이 그 상황을 바꾸려고 한다. 로마 교황은 자신의 교회 세력을 확장하려는 욕망에서 스웨덴 국왕에게 핀란드를 침입하여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북극권 너머로 뻗어 있는 이 북쪽 지역의 주민들을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시키도록 촉구한 것이다. 교황의 권세가, 러시아를 이용해서 이 백야의 나라로 지배권을 확장해 가고 있는 동방 정교회(그리스 가톨릭교)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십자군 전사들은 이 고장 사람들에게 폭넓은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즉 가톨릭 교인으로 영세를 받지 않으면 참수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차례의 십자군 전쟁이 있은 후에, 여전히 동방 정교회의 휘하에 있는 일부 동부 지역을 제외하고, 핀란드는 로마 가톨릭교의 나라가 되었다. 16세기가 되기까지 가톨릭교가 지배하였지만, 그 무렵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자기 영토의 종교를 루터교로 바꾸었다. 1809년에 핀란드는 러시아 황제 통치하에서의 자치권을 가진 대공국이 되었다. 그로부터 거의 백년 후에, 성서 진리의 밝은 빛이 아름다운 호수와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진 이 나라 안으로 비추기 시작하였다.

핀란드는 사람이 거주하는 나라들 중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나라에 속한다. 핀란드는 동쪽과 남동쪽으로는 소련과 서쪽으로는 스웨덴과 그리고 북쪽으로는 노르웨이와 접해 있다.

핀란드는 알래스카만큼 북쪽에 위치해 있지만, 남서쪽의 만류의 온화하게 하는 영향으로 인해서 여름에는 매우 쾌적하다. 하지만 여름 기간은 짧다. 연중 여러 달 동안 눈이 지면을 덮고 얼음이 호수를 덮는다. 여름에는 기온이 섭씨 20도이며 낮 길이가 거의 24시간이지만, 겨울에는 섭씨 영하 40도까지 떨어질 수 있고 몇개월 간은 해를 거의 볼 수 없다. 해상 교통을 연중 내내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선체를 보강시킨 쇄빙선이 얼어붙은 물을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소나무 숲, 가문비나무 숲 및 자작나무 숲이 국토의 대부분을 덮고 있어, 이러한 나무에서 나오는 원료를 이용하여 제지업이 번창한다. 이 나라는 매우 편평하며, 라플란드에 있는 산들 중 가장 높은 봉우리라 할지라도 1,300미터에 불과하다.

핀란드의 오백만명의 주민 중 대부분이 핀란드어를 사용한다. 해안을 따라 사는 사람들 중에는 스웨덴어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북쪽에는 작은 집단을 이루는 라플란드인이 사는데, 그들은 핀란드어와 같은 어족에 속하는 라프어를 사용한다. 주민의 식자율(識字率)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좋은 소식이 핀란드에 이르다

기록상 핀란드에서 성서 진리를 최초로 전파한 일은 스웨덴에서 성경 연구생의 활동을 감독했던 아우구스트 룬드보리의 아내가 핀란드를 방문한 해인, 1906년에 있었다. 룬드보리 형제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룬드보리 자매가 핀란드에서의 활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머지않아 다시 그곳으로 갈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에바 룬드보리와 스웨덴 출신의 다른 콜포처(전 시간 전파자)들은 핀란드 남서부의 해안 지역에서 스웨덴어 서적을 전하였다. 그 당시에 그곳 주민들은 대부분 스웨덴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마침내 워치 타워 협회의 초대 회장, 찰스 T. 러셀이 쓴 몇권의 책이 에밀 외스테르만의 어머니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업가가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다

에밀 외스테르만은 투르쿠 지방 출신으로, 수염을 기른 정력적인 41세의 사업가였는데, 인생의 목적을 찾기 위해서 세계 일주 여행을 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책들을 읽어 보았을 때, 추구하는 것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1909년 하반기에, 그가 첫 번째로 들른 곳은 스웨덴이었다. 거기에서 아우구스트 룬드보리로부터 성서 서적을 더 구입하였다. 하지만 배를 타고 런던에 가서야 비로소 스웨덴에서 받은 서적을 읽고 나서 세계 여행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찾고 있었던 것을 발견했음을 즉시 알게 되었다. 세계 여행의 포부가 갑자기 사라져 집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인 1909년 말경에 그는 다시 스웨덴에 가서 침례를 받았다. 그후에 그는 아우구스트 룬드보리가 핀란드로 와서 전파할 수 있는 마련을 하였다.

스웨덴 지부 사무실의 보고는 에밀을 친애하는 형제로 언급하면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약 열명의 정규 콜포처가 그 해에 활동하였다. ·⁠·⁠· 육칠명의 새로운 사람이 그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그중 한 사람은 핀란드에 사는 친애하는 형제로서, 틀림없이 그 나라에 사는 주의 백성을 섬기도록 선택된, 그분의 손에 있는 도구일 것이다. ·⁠·⁠· 그 나라에 사는 또 다른 형제 역시 지금 자기 농장을 팔고서 콜포처로 나서려고 하는 것 같다.”

또 다른 형제란 누구였는가?

자기 농장을 팔고자 했던 또 다른 형제란 1882년에 출생한 카를로 하르테바였다. 루터교 교역자의 딸로 자란, 그의 어머니는 그를 종교적으로 엄하게 양육하였다. 카를로는 열성적이고, 진실하고, 여러 언어에 능통하였다. 그는 공학을 연구하였지만,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어 종교적 관심에 끌려 기독교 청년회에 가입하였는데, 거기서 간사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단체가 운영하는, 헬싱키에 있는 호스피츠 호텔의 지배인이 되었다.

외스테르만은 용무상 헬싱키에 가 있을 때인 1909년 여름에, 카를로 하르테바를 만나 스웨덴어로 된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을 한부 전해 주었다. 하르테바는 그 책을 진지하게 읽었다. 그는 자신도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태 24:14, 신세) 그래서 1910년 4월에, 하르테바는 외스테르만과 함께 스웨덴, 외레브로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하여, 거기에서 침례를 받았다. 연사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새로운 두 형제는 그 대회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의 조직에 유용하게 자신들을 사용한 것이다!

‘우리와 함께 하지. 그러면 세 사람이 되겠지’

그 무렵 하르테바는 이전 학교 친구였던 라우리 크리스티안 렐란데르를 열차에서 만나 그에게 새로 찾은 진리를 열심히 증거하였다. “그러면 자네와 같은 사람이 몇이나 되나?”하고 친구가 물었다. “현재로서는 외스테르만이라는 사람과 나, 두 사람이야. 하지만 자네가 우리와 함께 하면, 세 사람이 되겠지”라고 하르테바는 대답하였다. 그러나 렐란데르는 함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정치에 관여하였고 1925년부터 1931년까지 핀란드의 대통령이 되었다.

하르테바 형제와 외스테르만 형제 앞에는 참으로 광대한 밭이 놓여 있었다. 삼백만명의 사람이 인구 밀도가 낮은 이 나라에 퍼져 있었다. 두 형제의 첫 번째 목표는 협회 서적을 핀란드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부지런히, 하르테바는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과 여러 가지 전도지를 스웨덴어에서 핀란드어로 번역하는 데 진력하였고, 외스테르만은 1910년 가을에 그러한 출판물을 인쇄할 자금을 조달하였다. 그들이 왕국 활동을 위한 보다 효과적인 도구를 갖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가슴 뿌듯하였겠는가! 이 두 형제는 여호와의 영의 도움을 신뢰하면서, 새로 번역된 핀란드어 서적을 가지고 담대하게 활동을 시작하였다.

“지옥행 표”

외스테르만 형제는 투르쿠에서 자신이 소유한 양화점에 서적 공급품을 보관하는 일 외에, 상점 창문에 책들을 진열해 놓기도 하였다. 그는 시장에 서적 진열대를 차려 놓기도 했다. 간결한 문구를 외침으로써, 그는 즉시 사람들의 주의를 모으곤 하였다.

그는 “지옥행 표입니다—들어가는 데 한 마르카요, 나올 때도 한 마르카입니다!”라고 외치면서 「지옥」 소책자를 2마르카(핀란드 화폐)에 제공하곤 하였다.

공개 강연에 무리가 모여들다

다음에, 그 충실한 두 친구는 공개 강연을 할 목적으로 여행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핀란드의 산업 중심지인 탐페레로 가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집회장을 빌렸다. 그 다음에 그들은 “크나큰 상”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위해 광고지를 주문하였고, 일간지에도 연설 광고를 하였다. 하르테바 형제가 연설을 하였고 외스테르만은 보조자로 일하였다. 외스테르만 형제는 그가 쓴 여러 통의 편지 중 하나에서 그 결과에 대해 이렇게 알려 준다.

“한 핀란드 자매가 자신을 온전히 성별하고 그 상징으로 퓌헤예르비 호수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후 그 자매는 뷔보르그로 가서 현재 그곳에서 콜포처로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탐페레에서 아주 관심이 많은 대여섯 사람으로 구성된 성서 반(班)이 조직되었고, 그후에 우리는 그곳을 하나님의 돌보심에 맡기고 떠났습니다. 현재 우리는 투르쿠에 있으며, 이곳에서 첫 공개 집회가 1,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소방서 건물 강당에서 핀란드어로 열렸습니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많은 사람이 밖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 두 콜포처는 그처럼 좋은 결과로 인해 격려를 받고서, 수도 헬싱키로 여행하였으며, 1910년 11월 22일에 대중의 집(현재는 노동자의 집) 강당에서 공개 강연을 마련하였다. 하르테바 형제는 헬싱키의 종교계에 잘 알려져 있었기에, 여러 종교 조직의 많은 교역자와 성원들이 호기심에서 그의 연설을 들으러 왔다. 하르테바는 연설 도중에 청중에게, 누구든지 영혼이 불멸임을 알려 주는 성구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성구를 공개적으로 보여달라고 도전적인 말을 하였다. 모든 시선이 집회장 앞줄에 있는 교역자들에게로 향했다. 침묵이 실내 전체에 깔리었다. 그 다음 그는 에스겔 18:4을 읽고, 주먹으로 연대를 치면서 “영혼은 그와 같이 죽습니다!”라고 외치었다. 핀란드의 종교 지도자들과 성서 진리의 옹호자들 사이에 전선이 생기고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그와 같이, 수도를 포함하여 그 나라에서 가장 큰 세개의 도시에 진리가 뿌려졌다.

사무실이 헬싱키에 개설되다

1911년 3월말에 러셀 형제가 스웨덴의 스톡홀름을 방문하였을 때, 일단의 핀란드인이 그곳으로 가서 그를 만나보았다. 이들은 여행을 계속하여 외레브로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하였는데, 그 대회에서 카를로 하르테바는 어머니와 이모가 침례를 받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또한 요한네스 홀메루스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이 침례를 받았는데, 후에 그는 소중한 신권적 자산이 되었다.

하르테바 형제는 헬싱키로 돌아와서 신권적 활동을 돌보기 위한 사무실을 개설하였다. 그는 이렇게 기술한다. ‘미콘카투 27번지에서 다섯개의 방을 간신히 빌렸다. 의자로 쓰려고 몇장의 판자와 톱질용 모탕을 구입하였다. 농촌인 멘티하류로부터 사람들이 간이 침대와 침구류를 보내 주었다. 큰 방에는 타자기, 책상 및 몇개의 의자와 벤치가 놓였다. 세개의 간이 침대가 한 방에 놓였고 또 다른 방에 한개가 놓였다. 방 두개는 비어 있었다.’ 그리하여 1911년 6월에 사무실이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헬싱키 중심부에 위치한 사무실 근처에 카이사니에미 공원이 있었다. 이곳의 작은 언덕에서, 하르테바 형제는 그해 여름에 일요일마다 공개 강연을 하였다. 눈에 활기가 넘치는 그는 익살스럽게 그러한 강연을 “산상 수훈”이라고 부르곤 하였다. 강연이 끝날 때, 성서 제목들에 관하여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누구든지 근처에 있는 사무실로 초대하였다. 매주 오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성경 연구생의 작은 그룹이 헬싱키에서 발전하였다.

최초의 전도지와 대회

바로 시초부터, 하르테바 형제는 인쇄된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 「사르노야 칸살레」(만인의 설교단)는 최초로 편집된 전도지의 이름이었다. 이듬해에 그 이름이 「푸헤이타 칸살레」(만인에 대한 연설)로 바뀌었다. 그러한 전도지에는 핀란드어로 번역된 러셀 형제의 연설문뿐 아니라, 영문 「파수대」에서 발췌한 기사도 담겨 있었다. 집회 및 구입할 수 있는 출판물에 대한 광고도 들어 있었다.

1912년 1월, 「푸헤이타 칸살레」에 이러한 보도가 있었다.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이 핀란드어로 발행되었을 때, 처음에는 콜포처를 통해서, 신문 기사를 통해서 그리고 서적 판매원에 의해서 매우 많이 배포되었다. 그러나 1910년의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얼마 안 되어 큰 변화가 일어났다. 최초의 열정에 이어 모든 것을 거의 질식시킬 정도로 강한 반대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러한 상황은 약 6개월 이상 지속되지는 않았다. 신문과 서적 판매원들의 도움이 완전히 끊기는 것처럼 보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일꾼이 추수를 하도록 초대하기 시작하셨다.” 계속해서 그 보고는, 헬싱키에서 약 30명의 핀란드어를 하는 형제들과 10명의 스웨덴어를 하는 형제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기 위하여 매주 두세번씩 정기적으로 함께 모였음을 알려 주었다.

첫 대회가 마련되어 1912년 3월 29일부터 4월 1일까지 헬싱키의 한 강당에서 열렸을 때, 약 60명이 참석하였다. 그들 중에는 투르쿠, 탐페레, 포리, 바사, 이살미, 쿠오피오 및 파리칼라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은 진리가 핀란드 남부의 널리 분산된 지역들에 이미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러셀 형제가 핀란드를 방문하다

러셀 형제가 세계 일주 여행을 할 계획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카를로 하르테바는 그에게 편지를 띄워 핀란드 방문도 계획에 포함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러셀 형제는 그 초대를 받아들여, 자신이 1912년 8월말에 가게 될 것이라고 하르테바에게 알렸다.

러셀 형제의 방문은 이 조그마한 무리의 형제들에게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행사였다. 공개 강연을 광고하는 데 엄청난 준비를 하였으며, 그 모임은 헬싱키에서 가장 좋은 집회장인 소방서 건물 강당에서 열렸다. 당시 열살 된 소년이었고, 1981년에 사망할 때까지 여호와를 충실하게 섬긴 엘리스 살미넨은, 형제들이 높이가 일층 이상 되는 러셀 형제의 초상화들을 어떻게 전시하였는지에 대해 말하였다. “그후에, 그 인물이 바로 종교를 광고하는 미국인이라고 학교 친구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하고 살미넨은 알려 주었다.

러셀 형제는 직접 「파수대」(영문) 1912년 10월 1일호에서 자신의 방문에 관하여 이렇게 자세히 말하였다. “두명의 핀란드 형제가 진리에 굶주린 모든 사람에게 진리를 제공하기 위하여 이년 동안 특히 활동적으로 일해 왔다. 그들은 「성경 연구」 세권과 무료 배부용 「만인보」(萬人報)를 자비를 들여 번역하였다. 현재 약 열 다섯명의 콜포처가 그 나라 구석구석으로 진리를 전하고 있다. 공개 집회는 집회장의 수용 인원—1,000명—이 차고도 많은 사람이 서 있을 정도로 붐비었고, 일부 사람은 들어갈 수 없어 눈물을 글썽거렸다. ·⁠·⁠· 이것은 하나님의 추수 소식을 현재 들어야 할 그분의 참다운 자녀들이 핀란드에 있다는 증거다.”

러셀 형제는 방문 기간에 하르테바 형제에게, 「파수대」를 1912년 11월호부터 핀란드어로 발행하도록 인가해 주었다. 새 잡지는 가족 및 친척과 친지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도록 권해졌다.

증거가 널리 행해지다

외스테르만 형제와 하르테바 형제에게는 길이가 1,000여 킬로미터이고 폭이 약 500킬로미터나 되는 광대한 구역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효과적인 증거를 하기 위해 어떻게 하기로 하였는가? 외스테르만 형제는 한 가지 해결책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자비를 들여 여러 신문에 협회 서적에 대한 광고를 실었다. 한편 하르테바는 매우 성공적임이 증명된 공개 강연을 하는 데 주의를 집중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는 공개 강연의 모임을 어떻게 준비하려 하였는가? 그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일단 한개의 읍을 대상지로 선택하면, 가장 잘 알려진 신문의 편집인에게 편지를 띄워서, 그 지역에서 공개 강연을 하기에 가장 좋은 어떤 집회장이 있는지 그리고 그곳을 빌리고자 한다면 누구와 계약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았지요. 그러한 점이 명백해지면, 신청서를 써보냈으며, 긍정적인 회답을 받고 난 후에 광고 문안을 작성하여 신문사에 보내면서, 비슷한 형태의 광고지를 인쇄하여 그것을 신문 지면 사이에 끼워달라고 부탁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공개 강연에 관하여 알리도록 했습니다. 그런 다음 얼마의 책을 가지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집회 장소는 대개 만원을 이루었습니다. ·⁠·⁠· 한번은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것은 헛수고일 뿐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내가 연사라고 설명하자 그제서야 들어갈 수 있었지요. 또 한번은 들어가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같은 날 저녁에 집회장이 세번이나 만원을 이루었고 청중은 자기 차례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성공담은 그 당시 핀란드에서 진리에 대한 굶주림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해 준다. 1913년에 가진 기념식 후에, 보고는 핀란드 전역에서 235명이 참석하였음을 알려 주었다.

러더퍼드 형제의 방문

1913년의 여름은 흥분을 자아내는 활동으로 가득찼다. 나중에 이대 협회장이 된, 조셉 F. 러더퍼드와 A. N. 피어슨이 세계 본부 요원으로서 핀란드를 방문하였다. 러더퍼드 형제는 “죽은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법률가의 관점에서”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러더퍼드가 판사였기 때문에 그 법률가란 바로 그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법률가란 실은 사도 바울을 가리킨 것이었다. 공개 강연은 성공적이었다. 추산된 참석자 수는 2,500명이 넘었으며, 33명의 새로운 사람이 침례를 받았다.

뒤이어, 하르테바 형제가 이전에 사용한 적이 있던 카이사니에미 공원에서 또 한번 공개 강연이 마련되었다. 러더퍼드 형제는 그 강연이 옥외에서 처음으로 한 연설이었다고 말하였으며, 그것을 흥미있는 경험으로 생각하였다.

진리의 멜로디를 발견함

오랫동안 기다렸던 해인 1914년이 시작되었다. 오년 동안 그 해에 주의가 집중되어 왔기 때문에 흥분에 찬 기대감이 충만하였다. 그 당시에 여섯 가지 신문에 러셀 형제의 연설이 정기적으로 실렸기 때문에 증거의 효과는 현저히 높아졌다.

1914년에 대회가 개최되었다. 형제들은 ‘이것이 마지막 대회일까?’하고 궁금히 생각하였다. 즐겁게도, 39명이 침례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에는 에로 니로넨이라는, 음악을 연구하는 젊은이가 있었다. 타고난 재능을 가진 피아니스트이자 시인이자 여러 언어에 능통한 이 젊은이는 2년 후에 번역자로서 지부 사무실에 들어와서 1982년 5월 7일에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충실하게 봉사하였다.

「창조 사진극」

1914년 상반기에 카를로 하르테바는 런던으로 가서 러셀 형제가 주요 연사로 나오는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창조 사진극」에 관한 자료를 구하고 싶어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협회가 마련한 것으로서, 거기에는 슬라이드 사진뿐 아니라 축음기 음반과 동시에 움직이는 활동 사진도 들어 있었다. 핀란드용으로 한벌을 주문하였다. 그 다음 그는 얼른 받고 싶은 열망에서 「사진극」의 축음기 음반을 핀란드어로 제작하기 위하여 독일, 베를린으로 갔다.

형제들은 조마조마하며 기다렸다. 제 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선박 교통이 일체 중지되기 전, 독일에서 온 맨 마지막 상선 편으로 드디어 「사진극」이 도착하였다. 1914년 8월 9일에 헬싱키 아폴로 극장에서 첫 상영이 있었을 때 이 조그마한 그룹은 감개 무량하였다. 그해가 끝나기 전에 약 80,500명의 관객이 핀란드에서 「사진극」을 보았다. 그것은 성서 진리를 참으로 엄청나게 뒷받침해 주었다!

「아라라트」 잡지

1914년이 지나자, 경제 문제가 악화되었다. 즉시 하늘 영광에 이르리라는 전망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았고, 어떻게 계속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무지의 영향으로 형제들의 열정적인 영이 침체되었다. 그리하여 하르테바 형제는 러셀 형제에게 편지를 띄워, 추수가 끝난 후에 회중이 무슨 일을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물어 보았다. 하르테바는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인도에 깨어 있으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때에 하르테바는 다른 형제들과 더불어, 아라라트라는 협동 조합을 설립하였고, 영리 사업에 천년 통치에 관한 원칙들을 적용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형제들이 세속 직장에서 세속 일을 하는 것을 면하게 해주었다. 「파수대」 핀란드어판의 독자들은 이 단체에 가입하도록 권유를 받았다. 하르테바는 만연하고 있는 경제 문제로 인해서 「파수대」가 불원간 더 이상 발행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라라트」지가 대신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에 하르테바 형제는 노르웨이에 있는 린크비스트 형제와 접촉을 가졌는데, 거기에서도 비슷한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 형제들은 진실한 사람들이었지만, 「아라라트」를 발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가 아니었다는 점이 곧 명백해졌다.

하지만 하르테바 형제가 아라라트 단체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티 리에시가 핀란드의 협회 대표자가 되었다. 「파수대」는 많은 형제들의 헌금으로 계속 발행되었다.

러셀 형제로부터의 책망

「파수대」 핀란드어판 4월호에, 다음과 같이 기술한 목회자 편지가 2면에 걸쳐 실렸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형제들에게 보내는 러셀 형제의 편지. 린크비스트 형제와 하르테바 형제. 나는 방금 사랑하는 이 두 형제가 배교하였으며, 그들이 ‘아라라트’라는 새로운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 그들이, 내가 알기로는, 복음의 전체 계획에 등을 돌리는 것으로 보여 대단히 유감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고의로 그러한 행동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복음 시대에 자주 있었던 일이 다시 한번 일어난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착한 사람들이 대적에게 기만당하여 중요한 복음 활동에서 빗나간 것 같습니다.”

그 다음 그는 그 형제들에게 이렇게 호소하였다.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러한 생각이 성서적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여러분의 현재의 생각과 현재의 계획이 완전히 그릇된—비성서적인—것임을 나타내 주기 때문에 그것을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라라트’ 단체는 적은 무리 및 적은 무리를 선택하기 위한 복음 시대의 활동과 전혀 관련이 없으면서도, 오히려 회복 활동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은 아직 그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 믿음 안에 있는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여러분 모두에게, 진리로 그리고 이 시대에 속한 활동으로 돌아오도록 권하는 바입니다.”

러셀 형제의 편지를 받고 나서, 카를로 하르테바는 처음에는 그의 잡지에서 자신을 변호하면서 자신은 단지 복음 활동을 증진시키기를 바랐을 뿐이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어서 다음과 같이 한 말은 자신의 겸손함을 나타내 준다. “아마도 나의 열망과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주께서 몹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끼친 것 같습니다. 만일 문제를 시정할 수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은 나에게 아주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라라트 단체는 곧 해체되었으며, 하르테바는 「파수대」를 편집하는 일을 도우면서, 다시금 공개 강연을 하기 시작하였다.

혁명과 내란

핀란드가 아직도 러시아의 일부로서, 러시아 황제의 정부에 예속되어 있을 때인 1917년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황제가 퇴위되었다. 이제 핀란드는 그 기회를 포착해서 1917년 12월 6일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1918년 겨울에, 핀란드 내부에서는 “과격파”와 “보수파” 곧 사회주의자와 비사회주의자 사이에 유혈전이 벌어졌다.

에로 니로넨은 그 당시에 지부 사무실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 준다. ‘핀란드의 상황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종말을 고한 비밀」은 시급히 번역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좀더 평화로운 곳, 멘티하류에 있는 나의 집으로 보냄을 받았다. 그곳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근처의 철교가 폭파되었다. ·⁠·⁠· “보수파”는 군복무를 시키기 위한 징병 제도를 마련하였는데, 나는 근시였기 때문에 면제되었다. 나는 공개 강연을 하였고 번역 일을 계속하였다. ·⁠·⁠· 남쪽과의 연락이 두절되었을 때, 형제들 모두가 위로 올라가 영광을 받고 남은 사람은 나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안 있어 니로넨 형제는 다시 군복무 문제를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광범위한 징집 제도가 실시되었으며, 자격 조건의 수준이 전만큼 높지 않았지요. 그래서 약한 시력은 나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나는 1918년 9월 25일에 헬싱키의 카타야노카 항구에 있는 해병대 병영으로 배치되었습니다. 나는 성서와 「성경 연구」 제 6권에서 배운 것과 일치하게 전략을 세웠습니다. 일년 동안 나는 신념 때문에 참으로 ‘싸우고’ 있었지요. 부대장의 허락을 받아, 나는 부대원들에게 네 차례의 일요일에 공개적으로 연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 그는 복무 면제를 받았으며 다시 번역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새로운 희망이 솟아나다

1919년초에, 형제들의 영적 전망은 낙관적이었다. 일부 형제들은 콜포처로 봉사하기를 원하였다. 그중 한 사람이 미카엘 아우라였는데, 그는 부유한 농부로서, 언젠가 지부 사무실에 상당한 재정적 지원을 한 적이 있었다. “주께서 나를 그분의 일을 할 만한 사람으로 간주해 주신다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하겠습니다. 내 체력이라면 많은 책을 옮길 수 있습니다”라고 아우라 형제는 말하였다. 그는 지부 사무실에서 여러 해 동안 충성스럽게 봉사하였다.

감사할 만하게도, 카를로 하르테바는 영적 건강을 되찾은 후에, 다시금 더 큰 책임을 받아들였다. 8월에 탐페레에서 대회가 열렸을 때, 그는 주요 연설을 하였다. 그는 다시 일을 인도하도록 임명받았다. 따라서 그 이듬해초에, 그는 하나님의 조직을 떠난 마르티 리에시를 대신하였다. 일년 안에, 「파수대」 예약자의 수가 2,763명으로 증가하였고 61,000부 이상의 출판물이 배부되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회중들 사이에서는 즐거운 영이 고조되었다.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1920년 11월에 세계 본부로부터 알렉산더 H. 맥밀런이 방문하여,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강연을 여덟 군데의 지방에서 하였다. 그 당시에 행해진 많은 강연의 제목은 그 잊을 수 없는 주제였다.

에로 니로넨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같은 날에 이 주제로 네 차례의 연설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소식이 좀 대담하다고 생각하였지만, 여호와의 조직으로부터 부여받은 소식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매우 확신있게 전하였고, 지금에 와서는 그 소식이 점점 빠른 속도로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제목이 아주 대단한 흥미를 일으켰기 때문에,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소책자가 같은 해에 번역되자, 족히 50,000부는 인쇄되었다.

그 무렵에 포리에서 잘 알려진 사업가인 카를로 베산토가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후에, 그는 자기 집을 짓게 되었을 때, 페인트공들을 고용하여 자기 집 바깥 벽의 한쪽 면에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주제를 큰 글씨로 쓰게 하였다. 그 일을 한 페인트공 중 한 사람인 안티 살로넨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 일은 내가 해본 일 중에서 가장 특이한 페인트 일이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지요.” 그는 깨닫고 난 후에, 침례를 받았고 그후 여러 해 동안 순회 활동을 하면서 봉사하였다. 지금도 전과 다름없이 밝은 기질을 지닌 그는 포리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고 있다.

내부로부터 생기는 분열의 위협

1920년대초에 불안정한 영이 발전하였다. 여호와께서 성서 진리를 베풀기 위하여 어느 통로를 사용하시는지에 대한 의문이 갑자기 생기기 시작하였다. 헬싱키 회중에서, 일부 형제들은 남자들만이 회원이 될 수 있는 “형제들의 서클”을 만들었다. 그 목적은 진리를 아주 깊이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그 고상한 목적은 의심에 찬 눈으로 협회의 가르침에서 오류를 찾기 위한 목적으로 바뀌었다. 전파 활동이 완료되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야외 봉사에 참여하라는 협회의 제안을 트집잡았다. 인도하는 순례자 형제들 가운데, 성서 진리의 통로가 러셀 형제의 죽음과 더불어 끝났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기까지 한 사람도 있었다.

그 문제는 헬싱키에서 가장 심각하였다. 거기에서는 한 그룹이 협회와의 관계를 끊고, 독자적으로 잡지를 발행하고, 자체적으로 집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이 그룹은 쇠퇴하였다. 그들이 여호와의 지지를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이 아주 분명해진 것이다.

보고에서는 헬싱키에서만 해도 164명이 진리를 떠났음을 알려 준다. 「파수대」 1922년 4월호에서 이러한 화해 조치가 취하여졌다. “우리를 떠남으로 고통을 겪는 친애하는 벗들에게 우리는 형제 관계의 손을 내민다. 부디 다시 우리와 함께 하자!” 이탈한 사람들 중에는 혼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마침내 진보하는 조직에 대한 필요성을 이해하였을 때, 그들 중 대부분이 돌아왔다.

경주자가 경주 코스를 바꾸다

1919년에 오토 메켈레라는 핀란드 청년이 3,000미터 경주에서 전국 신기록을 세웠다. 그후 같은 해에 그는 자기 고향에서 순례자 빌료 타비트사이넨의 연설을 들었다. 작지만 강인한 이 경주자에게 진리는 아주 호소력이 있었다! 오토는 자신의 경주 코스를 바꾸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침례를 받고 난 후 1921년 3월에 순례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후에 그는 수십년 동안 순회 감독자로서 봉사하였으며, 1985년에 지상 행로를 마칠 때까지 훌륭하게 가르치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

오토 메켈레의 경험담은 여러 권의 책을 채울 만하다. 이살미에서 케르세메키까지 약 100킬로미터에 달하는 여행을 그와 함께 해보자. “오후 7시에 있을 공개 강연을 위하여 늦지 않게 목적지에 도착하려고 아침 7시쯤에 출발하였습니다. 내내 여행을 하였지만, 오후 9시가 되서야 도착하였습니다. 길을 따라 군데군데 여인숙이 있었고, 마부들마다 다음 여인숙까지만 나를 태워다 주었습니다. 다음 장소까지 급히 태워다 달라고 부탁하면, 마부들이 숲에서 말을 붙잡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나선 말에게 먹이를 주고 물을 먹여야 했으며, 마부도 식사를 해야 하였습니다. 내가 아주 지위가 높거나 중요한 여행자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둘지 않은 것입니다.”

라플란드에서 지옥불이 꺼지다

또 다른 순례자인 얄마리 니에멜레는 북극권 이북에서의 자신의 활동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로바니에미를 떠날 때 비가 몹시 내렸습니다. 나는 자전거로 여행을 시작하였는데, 그날 70킬로미터밖에 가지 못했습니다. 어느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묵은 다음 그 이튿날 자전거로 20킬로미터쯤 달렸습니다. 마을이 하나 있기에, 멈추어서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날 그 마을에서 활동한 다음 저녁에는 공개 강연을 하였습니다. ·⁠·⁠· 여러 권의 「지옥」 소책자를 가지고 다녔고, 모임 때마다 지옥이 어떤 곳인지를 설명하기로 하였습니다.”

소단킬레에서 이발로로 가는 도중에, 그는 라플란드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내가 「지옥」 소책자와 「고난」 소책자를 전하자, 한 노인이, ‘남부 사람들은 이미 지옥불을 끌 만큼 현명해졌나요?’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활동이 증가한 그 초창기에 「황금 시대」지가 형제들에게 새 힘을 듬뿍 주었다. 하지만 핀란드어로 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 친절한 형제는 그 잡지를 인쇄할 수 있도록 자금을 기부하였다. 그 잡지는 1922년부터 발행되었다. 그 잡지의 인기는 그해말에 잡지의 예약자 수가 6,233명이었다는 사실로 반영되었다. 같은 시기에 「파수대」의 예약자 수는 2,244명이었다.

에스페란토어로 증거함

핀란드에서 전파 활동이 시작되면서부터, 하르테바 형제의 여러 언어에 대한 능통한 지식은 도움이 되었다. 그는 에스페란토어를 배웠는데, 그 언어는 국제적인 의사 소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19세기 말경에 생겨난 것으로 지구상의 여러 지역에 사는 백만명이 넘는 사람이 사용한 언어였다. 하르테바 형제는 러더퍼드 형제의 허락을 받아서 「수백만」 책을 에스페란토어로 번역하였다. 1922년에 헬싱키에서 에스페란토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회의를 개최하기 직전에 그 책이 발표되었다. 그 회의에서 그는 에스페란토어로 “수백만”이란 주제의 연설을 하였다. 이제 진리가 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제공될 수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미국, 중국, 일본, 알제리, 오스트레일리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및 그 밖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

하르테바는 유럽 전역의 12개 도시에서 에스페란토어로 연설을 하였다. 부다페스트에서 그는 경찰서장의 허락을 받아 성서 강연을 하였는데, 그 강연은 헝가리어로 통역되었다. 그후 러더퍼드 형제는 세계 본부로부터 한 형제를 보내 하르테바 형제와 함께 모스크바로 파견하여, 그곳에서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것이 가능한지의 여부를 알아보게 하였다. 모스크바 주민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하르테바 형제는 그 고장의 에스페란토어 사용자들과 접촉을 가진 후, 신권 출판물을 그들에게 남겼다.

자체 지부 사무실

십여 년 동안 지부 사무실은 비좁은 시설에 자리잡고 있었다. 「파수대」(영문) 1923년 5월호에는 이러한 좋은 소식이 실렸다. “일부 형제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주의 제단에 바쳤을 때 주께서 그들의 열심을 축복하심으로써, 방이 부족한 현 시점에서 사무실을 위한 새로운 아파트를 구입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전 사무실은 너무 비좁아서 거의 모든 사무실 봉사자들이 도시 이곳 저곳에 흩어져 살아야 하였다.” 새 주소는 템펠리카투 14번지였다. 1층에는 서점이 있었는데, 집회가 열릴 만한 곳이었고, 위층에는 숙소가 있었다. 자금이 마련되자 그 건물을 매입할 수 있었다.

러더퍼드 형제는 1925년 5월에 스웨덴에서 열린 외레브로 대회에 참석하였을 때, 덴마크 코펜하겐에 북 유럽을 위한 사무실이 개설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 사무실에서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및 핀란드에서 행해지는 활동을 감독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핀란드에 있는 지부 사무실은 전과 다름없이 계속 있을 것이었다. 「파수대」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런던의 데이 형제는 협회의 대표자이자 북 유럽 사무실의 총 관리인으로서의 직책을 받아들이도록 요청을 받았다. ·⁠·⁠· 데이 형제는 런던에서의 중요한 관직을 사임하고 만왕의 왕을 위한 봉사를 시작하게 된다.” 데이 형제의 정기적인 방문으로 근년의 지구 감독자 방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핀란드에서의 활동이 강화되었다.

북 유럽 사무실은 국제적인 규모로 증인들 사이의 의사 소통을 증진시켰다. 그리하여 1927년 6월에 열린 헬싱키 대회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최초로 북 유럽 전체 대회가 열린 것이다! 북 유럽 사무실이 돌보는 일곱 나라에서 온 인도자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영어, 스웨덴어 및 핀란드어로 연설이 제공되었다.

진리가 에스토니아에서 방송되다

1927년 헬싱키 대회에서, 데이 형제는 선교인들이 핀란드에서 에스토니아로 갈 필요성에 대해 말하였다. 에스토니아어가 핀란드어와 밀접히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핀란드 사람들은 그 언어를 속히 배워서 에스토니아에 사는 관심자들을 도울 수 있었다. 젊은 콜포처 자매인 이르야 메켈레와 예뉘 펠트는 그 부름에 응답하여 탈린으로 여행하였다. 얼마 안 있어 다른 여러 명의 핀란드 사람이 그들에게 가담하였다. 그중 한 사람이 케르투 아호카스다. 그 자매는 1919년에 침례를 받았으며, 후에 지부에서 충실히 일하다가 1989년에 사망하였다.

그 당시에 러더퍼드 형제의 공개 강연은 전세계로 무선 송신되고 있었다. 협회는 핀란드에서 자체 라디오 방송국을 소유할 수 있었는가? 허가 신청이 거부되었다. 하지만 1929년에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대회가 열렸을 때, 데이 형제의 공개 강연이 탈린의 라디오 방송국을 통하여 멀리 떨어진 핀란드에도 방송되었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그후 탈린의 라디오 방송국측은 일요일마다 핀란드어로 그리고 때때로 영어, 에스토니아어, 러시아어 및 스웨덴어로 연설을 방송하는 데 합의하였다. 1930년 가을부터, 탈린의 라디오 방송국과 핀란드의 지부 사무실을 이어 주는 전화선 연결로 인하여, 바로 지부 사무실에서 연설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것은 1934년 9월에 이러한 소식이 보도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교직자들의 편협과 그들이 탈린의 신문들을 통하여 가하는 치열한 중상 때문에, 이제 에스토니아 정부는 탈린 라디오 방송국을, 그간 운영해 온 민간 업체로부터 인수하였으며, 러더퍼드 판사의 강연을 더 이상 방송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30년대 초반부에 에스토니아에서 영구 비자를 발급받는 데에는 얼마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일부 증인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까지 그곳에 머물 수 있었다. 이들 중 한 사람은 미나 홀로파이넨인데, 그 자매는 1931년에 에스토니아로 가서 13년 동안 거기에서 봉사하였다. 소련과 독일 사이에 전선이 그어지자, 그는 시베리아행 열차에 실리게 되었다. 그런데 폭탄이 객차에 명중하면서, 그 폭발로 인해 그는 철로에서 꽤 멀리 내동댕이쳐졌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곧장 다시 열차에 실렸다. 하지만 미나는 열차가 출발한 후까지 장작더미 뒤에 눈에 띄지 않게 누워 있었다. 그때 그는 다리를 몹시 다쳤기 때문에, 에스토니아, 타르투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그는 여호와께 다시 야외 봉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게 도와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는 실제로 회복되어서 핀란드로 돌아가, 여러 해 동안 파이오니아로 계속 봉사하였다.

새로운 이름, 새로운 인쇄기 그리고 새로운 지부

여러 해 동안 우리는 “하르테바파”니, “러셀파”니 하는 명칭으로 잘못 불리었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성경 연구생”이 아니었다. 우리는 무엇으로 불리어야 하는가? 미카엘 올루스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방법으로 그 점을 알게 되었다. “1931년에 에로 니로넨과 함께 앉아서 오하이오, 컬럼버스 대회에 관한 최근 소식이 실린 「사자」(使者)지를 연구하고 있을 때 감동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란 새로운 이름을 우리 형제들이 채택한 이유들이 열거된 기사를 보게 되었을 때, 놀라움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드디어 우리는 우리의 신분을 명확히 밝혀 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핀란드에서 새로운 이름은 열렬히 받아들여졌다.

같은 해에, 핀란드에서는 또한 처음으로 인쇄기를 받아, 지부 사무실 지하실에 설치하였다. 하르테바 형제는 그 점에 관하여 이렇게 기술하였다. “우리의 귀에는 유쾌한 음악과도 같은 인쇄기 소리가 대적의 귀에는 몹시 거슬렸을 것이며, 대적은 우리의 인쇄기와 우리를 그 건물에서 몰아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작은 인쇄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작동하면서, 1932년에 인쇄물을 700,000부 발행하였는데, 그것은 전도인당 대략 1,000부꼴이었다.

이제 더 큰 시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형제들은 아름다운 공원 바로 옆에 있는 적절한 부지를 발견하고서, 1933년 봄에 그곳에 새로운 지부 사무실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1층에는 인쇄실, 조판실, 왕국회관 및 서적을 비축하기 위한 저장소가 있었다. 사무실, 주방 및 식당은 2층에 자리잡았고 숙소는 3층에 있게 되었다. 이 새로운 지부 사무실의 주소는 베이네뫼이센카투 27번지로서, 그후 삼십년 동안 형제들에게 잘 알려지게 되었다.

“돌들이 소리지릅니다”

’30년대 말경에, 하르테바 형제는 러더퍼드 형제의 연설을 핀란드어로 축음기 음반에 녹음하였다. 녹음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주 새로운 발명품인 휴대용 축음기 때문이었다. 축음기는 재방문과 호별 방문 활동에서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부 사무실에서 형제들이 만든 휴대용 케이스에 축음기의 기계 부분들이 설치되었다. “돌들이 소리지릅니다”라는 말은, 증인들이 “말하는” 기계를 가지고 야외 봉사에 나갔을 때 사용하던 구호였다.

새로운 확성기를 공급받았는데, 어찌나 성능이 센지 형제들은 “오디오 유닛 대포”라고 불렀다. 레오 칼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해변에 갈 계획을 세웠었지요. 그날 우체부에게서 엽서를 받고서 해변에서 대형 확성기를 사용하여 음반을 틀기로 한 계획이 생각났습니다. 그곳에서 200명 이상의 사람이 이교 풍습인 한여름의 모닥불을 구경할 것으로 예상되었지요. 그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 육신이 그것을 강하게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문제를 여호와께 가져가서, 만일 만원 버스에 확성기를 싣기 위한, 불가능하게 보이는 시도가 잘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나의 노력이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증거가 될 것이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불평하는 승객이 있긴 하였지만, 그 시도는 성공을 거두었지요.

“교차로에 커다란 판자더미가 있어 확성기를 그 뒤에 숨겨 두었는데, 그 무렵 사람들이 도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근처에는 댄스홀이 있었는데, 모닥불이 피어오르자 모든 사람이 춤을 추다 말고 해변으로 오더군요. 모두가 불가에 모였을 때, 나는 음악 음반을 틀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모닥불 구경을 잊을 정도로 깜짝 놀라면서, 모두가 돌아서서 소리나는 곳인 판자더미를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춤추는 것을 감독하러 왔던 경관이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나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그에게 설명해 주었지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기에, 나는 강연 음반을 틀 수 있었습니다. 음반에는 거짓 종교를 매우 심하게 강타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청중 가운데선 상당한 소동이 일어났지요.

“여호와라는 이름이 울려 퍼질 때, 일단의 청년이 내 주위로 모이더니, ‘저 확성기를 호수 속에 처넣자’라고 중얼대더군요. 하지만 경관이 그들을 매섭게 노려보았습니다. 그때쯤에 이미 누군가가 관할 파출소장에게 이곳에 가보도록 전화 연락을 했었나 봅니다. 나는 얼른 음악 음반을 틀었지요. 파출소장은 한여름의 축제중에 누가 자기를 귀찮게 했는지를 의아히 생각하다가, 웃음을 짓는 경관을 보고 나선, 언짢은 기분으로 떠나더군요. 우리는 경관의 도움으로, 확성기를 손상되지 않은 채로 무난히 버스 안에 실을 수 있었습니다.”

축음기 활동은 1938년에 절정에 달하여, 그 당시 309대가 사용되었는데, 보고에 의하면, 72,626회의 강연을 151,879명의 청중에게 들려 주었다. ‘돌들이 과연 소리지른’ 것이다!

협회가 해체되다

1939년 11월 30일에, 소련군이 핀란드에 진격하였을 때 “겨울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투는 삼 개월 이상 계속되었다. 그 다음 1941년 6월에 핀란드는 독일의 비공식 동맹국으로서 “지구전”에 이끌려 들어갔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영적 양식을 생산해서 분배하는 데 문제가 있게 되었다. 본부와의 접촉은 두절되었다. 하지만 중립국인 스웨덴을 통하여, 5년간의 전시중에 얼마의 영적 양식을 받는 것은 가능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우리의 평화로운 활동에 대한 당국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전쟁의 흥분 상태와 고조되는 국가주의 영을 이용하여, 교직자의 부추김을 받은 왕국 반대자들은 증인의 활동을 말살시키도록 정부에 압력을 가하였다. 1940년 1월 18일에, 법무장관은 소책자 「정부와 평화」와 「만민을 위한 자유」를 압수하기로 했다고 발표하였다. 법적 투쟁이 계속되다가 사 개월 후인 1940년 5월 28일에 법정은 현지 워치 타워 협회를 해체시키라고 판결하였다.

신권 전도인

형제들은 불리한 법정 판결을 예상하여, 1940년 4월 13일에 지혜롭게도 협회의 모든 소유물을 쿠스탄누소사케위티외 바르티오토르니(워치타워 출판사)로 불린 새로 설립된 출판사에 팔았다. 따라서 당국은 협회 재산을 압수하러 갔을 때 놀랍게도 재산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협회에 대한 예상되었던 공격이 있기 전에, 형제들은 또한 1940년 2월 15일에 신권 전도인으로 불리는 미등록 단체를 설립하였다. 법원이 현지 워치 타워 협회를 해체시킨 후에는 그 단체에서 모든 활동을 돌보았다.

하지만 형제들은 분명히 용기를 잃지 않았다. 형제들은 서서히 전진하면서, 헬싱키 올림픽 경기장을 빌려, 하르테바 형제가 그곳에서 1940년 8월 23일에 “움직일 수 없는 왕국”이란 제목으로 연설하도록 계획을 세웠다. 그 강연에 대중을 초대하는 데 약 78,000장의 광고지가 배부되었다! 하지만 이 활동은 반대자들을 자극시켰으며, 당국에서는 강연이 시작되기 직전에 강연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강연 원고가 전국에서 가장 큰 일간 신문사들에 넘겨짐으로써, 백만명 이상의 사람—전국의 인구 중 삼분의 일보다 약간 적은 수—이 그 인쇄된 강연 원고를 읽을 수 있었다!

핀란드의 당국자들 대부분은 우리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지만, 핀란드가 독일에 협력하고 있었으며, 관리들 중에는 나치가 고무하는 태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과격주의적인 요소들은 조직에 대해 거듭하여 거짓 고발을 하였으며, 그 결과로, 신권 전도인 단체도 1941년 4월 17일에 법정 판결로 인하여 해체되었다.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출판물이 사용되다

경찰이 지부에 있는 출판물을 압수할 것임이 분명해지자, 그 대부분을 여러 형제의 집으로 급히 옮겼다. 경찰이 형제들의 소유로 된 출판물은 압수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외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저장품이 상당히 있게 된 것이다.

오토 메켈레는 코트카에 사는 힐마 신코넨 자매와 관련된 일을 이렇게 말해 준다. “이 연로한 자매는 러더퍼드 형제의 책이 금지되어 있는데도, 그 책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국방 시민군 지휘관 집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금지령이 틀림없이 잘 지켜지도록 하는 것이었지요. 지휘관은 자매가 하는 일이 극도로 뻔뻔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소총을 움켜쥐고 자매를 향해 겨누었지요. 그러자 이 연로한 자매는 침착하게 ‘난로 앞쪽으로 갈테니까 잠깐 기다리세요. 그래야 벽에 구멍을 내지 않지요’라고 말하였답니다. 지휘관은 소총을 떨어뜨리고는 놀라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부인, 내 부하들 중에도 부인만큼 담대한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 와 앉아서 부인의 신앙을 들려주시오.’ 그는 진리에 대한 증거를 듣고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곳의 전도인들은 더 이상 방해받지 않았습니다.”

하르테바가 구속되다

카를로 하르테바가 특히 적극적으로 일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당국자들은 바로 그를 고발할 목표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토이보 네르보가, 당시에 금지된 「파수대」를 대신한, 「유말란 발타쿤타」(하나님의 왕국)의 편집인이 되었다. 1941년에 펜티 레이코가 그의 후임자가 되었으며, 한편 미카엘 올루스가 「위안」의 편집인이 되었다.

하지만 당국자들은 카를로 하르테바를 여전히 증인의 주요 인물로 간주하였다. 1942년 6월 12일에 그는 이모인 아우네스 살멜라의 장례식 연설을 하려고 막 가려던 참에 체포되어 삼주 동안 구속되었고, 이어서 연금되었다.

“단단한 식물”이 계속 전달되다

1942년말에 잡지 인쇄가 중단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형제들은 「파수대」의 주요 기사를 등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복사물은 “단단한 식물”로 불리었는데, 그것을 우편으로는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여러 명의 급사(急使)가 그것을 나라 전역으로 날라서 회중들에 전달하였다. 이러한 마련은 전쟁의 남은 기간에 잘 운영되었다.

많은 자매들이 그 일의 상당 부분을 수행하였다. 메리 베크스트룀은 1981년에 사망할 때까지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하였는데, 자신이 맡았던 일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전쟁 기간에 나는 스웨덴 경제학 전문 고등 학교에서 살고 있었고, 우리는 그곳에 트럭 한대분의 협회 출판물을 숨겨 두었습니다. 「파수대」 역시 금지되자, 형제들은 「파수대」를 등사해 보도록 나에게 제안하였어요. 나는 저녁과 밤에 내 아파트에서 그 일을 하였습니다.”

공습 때문에, 건물의 창밖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은 완전히 금지되어 있었다. 메리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어느 날 밤 거실 바닥에는 등사된 종이더미가 가득했어요. 부엌에서 등사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새벽 3시가 조금 넘어서 초인종이 울리는 것이었습니다. 조심스럽게 거실로 통하는 문을 닫고는 나가서 문을 열었습니다. 놀랍게도, 경관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발각된 줄로 생각해서, 이러한 상황에서 도움과 지혜를 달라고 여호와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경관은 블라인드에 빛이 새는 작은 틈이 있다고만 말하는 것이었어요. 나는 안도의 숨을 쉬면서, 즉시 고쳐 놓겠다고 약속했고, 경관은 떠났지요.”

메리는 이어서 등사된 내용의 가치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항상 적절한 때에 지침을 베푸신다는 것을 유의해 왔습니다. 전시중에 내가 등사한 중립에 관한 기사는 그에 대한 좋은 예이지요. 그 기사는, 형제들이 여호와의 교훈과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합당한 태도를 더 명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중위가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다

1942년에, 젊은 중위인 23세의 칼레 살라바라는 수류탄 폭발로 부상을 입었기에 수술을 받도록 병원에 후송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수술이 끝난 후에, 나는 전에 다녔던 바로 그 학교에 세워진 육군 병원에 누워 있었습니다. 침대 곁에는 사카리 카네르바 형제가 있었는데, 그 형제는 전에 여러 번 나에게 진리에 관하여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지요. 이제 나는 결정을 하게 되었고, 따라야 할 몇 가지 실제적인 문제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내일 뫼위센예르비 호수에서 나의 군인 경력이 끝나게 된다’라고 혼자 중얼거렸지요.

“다음날 카네르바 형제는 나에게 침례를 주었습니다. 나는 아직 온 몸이 석고 붕대로 감겨 있었기 때문에, 침례중에 그것은 물론 물에 젖어 흐물흐물해졌지요. 다음날 아침에 군의관인 헤이노넨 대령은 질책하는 시선으로 석고 붕대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묻더군요. ‘어디서 이런 무모한 짓을 했소? 석고 붕대가 완전히 엉망이 되지 않았소!’

“나는 ‘침례를 받았습니다’하고 대답했지요. 그는 돌처럼 묵묵히 서 있더군요. 나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가 잠시 묵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령은 마침내 ‘무어라고 말했소?’라고 묻더군요.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공개적인 증거를 할 수 있었답니다.”

칼레 살라바라는 일단 회복되자, 자신의 자유로운 상태와 군인 신분증을 이용하여, 여기저기 다니면서 여러 회중에 “단단한 식물”을 전달해 주었다. 그가 핀란드 남서부의 여러 회중을 위한 등사물을 가지고 떠나려고 하자, 벧엘에서 일하는 베이뇌 팔라리는 그에게 마트쿠의 경찰을 조심하라고 당부하였다. 여러 번 그들은 베이뇌 팔라리를 경찰서로 데려가 심문한 적이 있었고, 급사가 도착하는 시각을 정확히 아는 것 같아서였다. 칼레는 이렇게 말한다.

“우르얄라를 떠나 열차로 마트쿠에 도착하자, 건장한 경관이 즉시 나에게 다가와서는, 사무적인 어조로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군인 신분증을 보여주었지요. 그러자 그는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매우 다른 음성으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증명서를 보여달라고 하더군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헬싱키 대학교에 정식으로 등록해 놓았었습니다. 그래서 대학교 총장이 서명한 증명서를 경관에게 건네줄 수 있었지요. 증명서에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았지만 대학교에서 일을 맡고 있다는 점은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경관의 뻣뻣한 태도가 꺾이더군요. 내가 대기하고 있는 버스 쪽으로 가방을 끌고 가기 시작하자, 그는 정중하게 옮겨 주겠다고 제안하는 것이었습니다. 금지된 등사물이 들어 있는 크고 무거운 그 가방을 그에게 건네주고 싶은 충동을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경관이 운반하는 것이 매우 안전해 보였거든요.”

많은 경우에, 형제 자매들은 얼마의 금지된 기사를 받기 위하여 밤 늦게 터보건 썰매로, 말이 끄는 썰매로 또는 도보로 기차역에 왔다. 겨울에는 때때로 섭씨 영하 30도까지 내려갔다. 살라바라 형제는 이렇게 회상한다.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행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는 사람들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들은 ‘영적 필요를 의식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는 산상수훈의 빛나는 말씀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와도 같았습니다.”

중립이 시험받다

전시의 상황으로 증인의 중립이 온전히 시험받게 되었다. 코스티 후타키비, 비에노 린테 및 위리외 라이네는 성서로 훈련받은 양심상 군복무를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수감되었다. 그러면 그들의 믿음의 질은 그 결과로 당하게 될 모진 시련을 견딜 만큼 강할 것인가?

후타키비 형제는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는 훔필라 학교에 모이라는 명령을 받았고 총가(銃架) 아래 있는 숙사를 배정받았습니다. 어느날 하사관이 우리를 교정으로 불러내어 깃대쪽으로 오라고 명령하더군요. 그는 총검을 닦으면서 그 날카로움을 과시하고는 코방귀를 뀌며 ‘가자!’고 명령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막사 구실을 해온 학교 측문을 통과하여 끌려갔지요. 우리는 숲가, 능선 쪽으로 좀 걸어 들어가자, 거기에서 멈추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때 손에 소총을 든 일단의 군인들이 대열을 지어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무장한 군인들은 형제들 앞에 서서 형제들의 신분을 확인한 다음 형제들이 총살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알리었다. 사형 선고는 곧 집행될 참이었다.

린테 형제는 그들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계속 말하면서 눈물을 억제하지 못한다. “‘행동 개시!’하고 명령이 떨어지자, 들것 운반병이 우리의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 ‘장전!’하는 명령이 뒤따랐지요. 그러자 찰칵하며 소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 다음 ‘조준!’하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순간 뇌리를 스쳐간 생각은, ‘부활의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중사님! 전화 통보입니다’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뒤이어 ‘중지!’하는 명령이 있은 후, 전화 통보가 큰 소리로 낭독되었습니다. ‘당분간 집행을 유예한다’는 것이었고, 대령이 서명한 것이었습니다. 눈가리개가 걷힌 다음 우리는 다시 숙소로 호송되었습니다.”

그 드라마는 잘 연출되었다. 그같은 악랄한 전략이 다른 형제들에게도 사용되었다. 현재 지부 조정 위원으로 일하는 에르키 칸칸페도 그러한 경험을 하였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선, 우리는 사형 선고를 받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 험악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시행될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하나의 협박 수단이었지요. 모조 재판이었습니다. 두세 시간 후에 우리는 다시 한번 판사 앞에 소환되어 삼년 반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영적 건강을 위한 협동 조합

1932년에 알 사노라는 협동 조합이 설립되었다. 그 단체는 건강 식품을 수입하여 팔 뿐 아니라, 같은 이름으로 건강 문제를 다루는 잡지와 다른 출판물을 발행하였다. 형제들 중 일부가 이 일에 참여하였으며, 그 일은 협회와 아주 밀접히 관련을 갖게 되었다.

러더퍼드 형제는 1942년에 사망하기 직전에, 협회 출판물이 금지될 경우 그 협동 조합이 진리를 다른 출판물의 형태로 인쇄하도록 허락을 하였다. 그리하여 알 사노사의 건강 서적이 발행되었으며, 그 잡지 「테르베위테 카이킬레」(만인의 건강)에 얼마의 「파수대」 기사가 실렸다.

야외 봉사는 금지령하에서 색다른 방법으로 수행되었다. 칼레 살라바라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의 목적은 그때에도 지금과 같았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이 사람들의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한 실제적인 해결책임을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신권적인 전략과 참을성이 요구되었지요. 사람들은 ‘그 종교 단체의 약국에서 나왔지요?’라고 묻고는, 자기들의 병을 아주 장황하게 묘사하곤 하였습니다. 우리는 몇 가지 추천을 해주고 건강 문제에 대한 팜플렛을 제공한 다음에, 왕국 소식으로 대화를 돌려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물론, 건강 제품이 노쇠와 죽음을 막아 줄 수는 없지요. 그런데 영원히 건강하고 젊게 살 수 있다면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대단히 효과적인 대화일 때가 가끔 있었지요.”

금지령 기간중에 열린 대회

극도의 주의와 창의성을 발휘함으로써, 전시중에도 계속 집회와 대회를 갖는 것이 가능하였다. 예를 들어, “사냥과 낚시 축제”가 하라요키의 어느 농장에서 마련되었는데, 물론, 연설 제목은 동물 사냥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일에 관한 것이었다.

1943년 여름에, “펜티 레이코의 가족 축제”로 불린 큰 모임이 헬싱키 중심부에 있는 한 학생 클럽에서 열렸다. 신뢰할 만한 두명의 증인이 추천하는 사람들만 초대되었다. 500명 이상이 참석하였다.

그 모임에서 당국에 공식 서한을 보낸 후에 있었던 일을 레이코 형제는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 준다.

“얼마 후에 나는 주 경찰로부터 질의에 대해 진술해 달라는 명령서를 받았습니다. 수사관은 우리의 편지를 손에 들고서, 이같은 모임을 가진 장소를 대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두에서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하는 것까지도 거의 모두 아는데, 어떻게 우리도 모르게 헬싱키 복판에서 그같은 모임을 가질 수 있느냐?’하고 그는 물었습니다. 경찰서에서 불과 두 블록 떨어진 곳에서 모임이 실제로 열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방법으로 여러 번 큰 대회를 마련하였지요. 그리고 우리의 모임이 전혀 방해를 받지 않은 것을 보면 여호와의 보호가 있었음이 매우 분명하였습니다. 1943년 12월에 열린 대회에는 참석자 수가 1,260명에 달하였지요.”

새로운 협회장이 지침을 주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당시 워치 타워 협회의 삼대 회장인 네이선 H. 노어 형제는 핀란드에서의 금지령에 대한 정보를 마침내 입수하였다. 그는 하르테바 형제와 타비트사이넨 형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계속 활동적이었으며, 장래에 사용할 수 있도록 협회 재산을 계속 유지시킨 것에 대해 그들에게 감사를 나타냈다.

하지만 왕국에 대한 기사도 함께 싣고 있는 건강 출판물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협회 출판물이 아직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노어 형제는 핀란드 형제들이 대중에게 그 출판물을 계속 전하도록 허용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렇게 당부하였다. “우리는 왕국의 소식을 그 외의 어떤 것과도 섞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들이 당시에 성서나 서적 없이도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다녔듯이, 형제들에게 그와 같이 행하도록 격려하십시오. 만일 주께서 우리가 정신과 입에 가진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적합하게 생각하신다면,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의 영광과 영예를 위하여 그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진리는 진리 그 자체 외에 다른 어떠한 매력물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종전

소련과의 전쟁이 1944년 9월에 끝나게 되었다. 핀란드는 여전히 독립을 유지했지만,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양도된 지역에서 퇴거당한 약 300,000명의 사람은 핀란드의 다른 지역들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르테바 형제는 9월 27일에 연금에서 풀려났고, 모든 형제가 일반 사면에 근거하여 곧 교도소에서 석방되었으며, 그리하여 핀란드에서 전에 결코 경험하지 못한 성장의 기간을 위한 기초가 놓여지게 되었다.

협회에 대한 금지 조치를 해제시킨다는 것은 아주 어렵고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차기 법무 장관인 우르호 케코넨은 증인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우리가 새로운 종교 단체를 조직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루터 교회와 거의 비슷한 권리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형제들은 그의 조언을 따랐으며, 1945년 5월 31일에 국책 회의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의 종교 단체를 승인하였다.

그런 식으로 일이 해결되어 결혼식을 거행하고, 자녀들이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면제받고, 등록된 종교 단체에 베풀어지는 법적 보호를 누리는 것이 가능해졌다.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재등록은 훨씬 더 지나서 1949년 2월 2일에 마침내 실현되었다.

통보 행진

1945년부터 활력있는 공개 활동이 시작되었다. 1월 6일에, 하르테바 형제는 헬싱키의 전시 회관에서 “빛을 향하여”란 주제로 연설을 하였다. 그렇지만 더 큰 시설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공개 강연을 위하여 올림픽 스타디움을 빌렸고, 신문을 통해서 뿐 아니라 거리에서도 공개 강연을 대대적으로 광고하였다.

살라바라 형제의 감독하에 플래카드를 든 증인들의 0.5킬로미터가 넘는 행렬이 조직되었다. 이러한 장면을 머리에 그려보라. 증인들이 손에 든, 판지로 만든 메가폰으로 구호를 외치면서 헬싱키 거리를 대행진하고, 그 뒤에 왕국 소식을 광고하는 확성차의 행렬이 따른다. 그리고 대열의 선두에서는 큰 갈색 말을 탄 엘리스 살미넨이 “여호와의 증인”이란 글이 쓰인 기를 흔들고 있다. 얼마나 장관인가! 얼마나 훌륭한 증거인가!

말이 광고 표지판을 보고 두려워하여 막 뛰려고 했을 때 있었던 일에 대해 살미넨은 이렇게 회상한다. “사진을 찍으려는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이 와서 나의 사진을 찍으면서, ‘이것은 나귀로군요. 예수께서 타셨던 것이잖아요’라고 말하더군요.” 그 행렬은 수도의 주요 도로를 따라 수 킬로미터를 진행한 다음 마침내 기차역에서 멈추었다. 그곳에서 증인들은 단합해서 일제히 공개 강연에 초대하는 소리를 발하였다. 도합 12,000명이 경청하기 위하여 경기장에 도착하였다!

전파를 이용하여 증거함

그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경기장에 모인 만여 명의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국가의 감독하에 있는 핀란드 방송사가 과거에는 우리의 프로그램을 방송하기를 단호히 거절하였지만, 형제들은 여전히 담대하게 방송사측에 접근하여, “온유한 사람이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라는 강연을 라디오로 방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에스토니아 태생의 유명한 저술가인 헬라 부올리요키가 그 방송사의 사장이었는데, 그는 우리에게 허가해 주었다. 그 자신도 전시에 수감되어 있었기에 우리의 입장을 이해해 준 것이다. 따라서 크나큰 증거가 멀리 스웨덴까지 광대한 청중에게 행해졌다. 그곳 지부 사무실에서는, “방송이 훌륭하게 들립니다!”라는 전보를 보내왔다.

「파수대」가 다시 발행되다

「유말란 발타쿤타」지와 「위안」지 모두 1945년초에 다시 발행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7월 1일호로부터 「유말란 발타쿤타」지의 호칭은 다시 「파수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 잡지들을 보기 원하였는가? 전쟁 직후에는 예약으로 제공되는 정기 간행물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전도인들은 기록적인 수인 40,038건의 새로운 예약을 맡았다! 그것은 전도인당 거의 30건에 해당되는 예약이었다. 전례없는 가장 훌륭한 운동이었다. 인쇄기 베어링이 그해에는 식을 틈이 없었다!

워치 타워 협회장은 전쟁으로 황폐된 유럽 지역의 형제들의 복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여행이 가능해지면 곧 그들을 방문해서 필요한 지원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 12월 18일, 연중 가장 어둡고 추운 시기에, 노어 형제는 비서인 밀턴 G. 헨첼과 북 유럽 사무실 대표자인 윌리엄 데이와 함께 스웨덴으로부터 배편으로 도착하였다. 이에 관해 그들의 여행 일지는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스톡홀름을 떠난 지 약 열 일곱 시간 만에 보레 V 호가 핀란드 만의 투르쿠 근처에 있는 수역에 들어서자,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본국의 수역에 들어오게 되어 기뻐하는 듯이 보였다. 이곳에서는 항구를 가득 메운 약 15센티미터 두께의 얼음판을 밀어 제치며 나아갔다.” 헬싱키 벧엘 가족에 속한 일단의 형제들이 환하게 웃으면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노어 형제는 전쟁으로 인해 생긴 문제들을 조사하였다. 협회는 핀란드에 스웨덴으로부터 기증받은 의복류를 보내 주었고, 그것은 궁핍한 파이오니아와 그 외의 사람들에게 분배되었다. 핀란드는 당시에 종이 생산국으로 유명하였지만, 정부 당국은 외화를 핀란드로 끌어 들일 목적으로 종이를 모두 수출하고자 하였다. 그러면 종이를 구입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잡지 인쇄가 중단될 것인가? 물자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노어 형제는 당분간 「위안」지 인쇄를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파수대」용 종이는 본부에서 미화로 매입함으로써, 핀란드는 그것을 수월하게 받았다. 그리하여 영적 양식의 주요 통로인 「파수대」의 인쇄는 계속되었다.

방문중에, 노어 형제는 선교인 훈련을 목적으로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가 최근에 개설된 것에 관한 고무적인 소식을 알려 주었다. 그의 일지는 핀란드 형제들의 반응에 대해 이렇게 알려 준다. “여행 도중에 다른 어느 곳에서도 워치타워 대학에 대한 열의를 더 크게 나타낸 곳은 없었다. ·⁠·⁠· 스물 두명의 전 시간 봉사자가 자기 이름을 기입하였다.”

처음으로 길르앗에 간 사람들

핀란드 형제들이 받은 최초의 길르앗 초대장이 도착한 때는 불과 수개월 후인 1946년이었다. 네명의 형제 에로 니로넨, 칼레 살라바라, 엘라이 타비트사이넨 및 베이코 토르비넨이 제 8기 학급에 참석하였다. 니로넨 형제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우리 네 사람이 1947년초에 핀란드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새로운 사람들 같았습니다. 길르앗에서 처음으로 나는 신권 조직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기 시작하였지요. 우리는 야외 봉사를 개선하는 법을 배웠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단지 로봇처럼 일하지 않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생활을 어떻게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차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1950년에는 에로 무라이넨이 길르앗에 참석하였다. 그는 1966년에 사망할 때까지 지역 감독자로서 여러 해 동안 봉사하였다. 지금까지 여러해에 걸쳐서 적어도 59명의 핀란드인이 선교의 영에 감동되어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였다.

전후의 순회 활동

전쟁이 발발한 해인 1939년에 핀란드에는 865명의 전도인이 있었다. 1945년에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에는 총 1,632명의 전도인이 200여 개 회중에서 보고함으로써 전도인 수가 거의 두배로 되었다.

1945년도의 회중 수는 40여 년 후인 지금과 거의 마찬가지였다. 회중 수가 늘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1940년대에 대부분의 회중은 크기가 작았고 널리 분산되어 있었다. 그 당시에는 한 회중에 평균 5명의 전도인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평균 수가 60명이 넘는다.

사십년 전에, 전쟁이 끝난 후, 시골에서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말이 끄는 짐차나 썰매가 있었지만, 형제들의 유일한 교통 수단은 자전거였다. 하지만, 대개, 형제들의 살림이 변변찮았고, 일하는 시간은 길고 힘들었다. 그러므로 먼 거리를 여행하여 집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많은 지방에서는 단 하나의 가족이 회중을 구성하였으며, 그들은 자기 집에서 가까운 구역에서만 증거하였다.

그러한 환경에서 순회 감독자의 활동은 쉽지 않았다. 에르키 칸칸페는 이렇게 말한다. “회중에서 회중을 가려면 흔히 20킬로미터 이상 되는 여행을 무거운 짐을 들고 걸어서 해야 했지요. 한번은 지독히 추운 2월중에 아내와 함께 전혀 불도 피우지 않은 방에서 잤던 일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옷을 다 껴입은 채로 잠자리에 들어갔지요. 어떤 때는 식구가 많은 가족과 같은 방에서 잠을 자야 했습니다.” 생활 상태가 개선됨에 따라, 순회 감독자의 활동도 보다 효과적이 되었다.

전후의 성장

1947년에 노어 형제와 헨첼 형제가 다시 핀란드를 방문하였다. 그들은 지난번에 방문한 지 불과 일년 반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놀라운 진보가 있었음을 주목하였다. 이년 안에 최고 전도인 수가 1,632명에서 2,696명으로 증가하였다. 핀란드는 분명히 훌륭한 성장의 시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대회는 1947년 6월 13-15일에 헬싱키의 전시 회관에서 개최되었는데, 5,300명이 참석하였으며, 184명이 침례를 받았다.

회중 수가 증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전후에 전도인의 증가는 놀랍다. 1950년 무렵에는, 전도인 수가 4,000명선을 넘었다. 신권 전도 학교는 형제들의 공개 연설 능력과 복음 전파에서의 효율성을 향상시켜 주었다. 따라서 형제들은 전파하는 데 축음기 대신에 입의 말을 사용하여 연설을 하였다.

1950년 2월에 두명의 길르앗 졸업생인 미국 출신의 월리스 엔드리스와 존 브루턴이 핀란드에 도착하였다. 엔드리스 형제는 고령인 하르테바 형제를 대신하여 지부 감독자가 되었다. 하르테바 형제는 1957년에 사망할 때까지 충실히 계속 전 시간 봉사를 수행하였다.

인쇄 활동이 증가하다

종전 후에 마침내 종이를 다시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1951년부터, 핀란드는 다시 「파수대」 외에 또 하나의 잡지를 발행하였는데, 이제 그 잡지는 「깰 때이다」로 불리게 되었다. 1955년 무렵에는 연간 잡지 인쇄 부수가 1,000,000부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전후의 기간에, 핀란드는 모든 협회 서적을 자체 인쇄기로 인쇄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표지 재료를 구입하는 데 문제가 있어 양장본 서적용 표지를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1950년대초에는 단순한 판지로 된 표지를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너무 약하였다. 따라서 노어 형제는 1951년과 1955년에 방문하였을 때 어떻게 서적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지에 대해 조언해 주었다. 핀란드에서는 1945년부터 1955년 사이의 기간에 매우 비좁은 지부 시설에서 해마다 평균 54,000권의 서적이 인쇄되었다.

1955년에 에르키 칸칸페가 공장을 감독하도록 지부 사무실로 초대되었는데, 그는 전에 지부의 인쇄 공장에서 봉사한 바 있다. 그와 그의 아내는 1952년에 길르앗 학교에 참석했었고 후에 순회 봉사와 지역 봉사를 하였다. 그런데 엔드리스 형제가 가족에 대한 의무 때문에 1957년에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칸칸페 형제가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왕국회관이 건축되다

1923년에 구입한 지부 사무실 건물에는 헬싱키 성막으로 불린 작은 집회 장소가 연결되어 있었다. 베이네뫼이센카투에 있는 지부 사무실에도 자체 회관이 있었다. 그러나 1956년이 되어서야 최초의 왕국회관이 세워졌다. 어디에 세워졌는가? 당시 헬싱키 교외였던 케퓔레에 세워졌다. 그 다음 회관이 이년 후에 라티에 세워졌다. 지난 30년 동안에 180채가 넘는 왕국회관이 핀란드에 세워졌으며, 현재에는 자체 왕국회관에서 집회를 보지 않는 회중은 거의 없다.

비비언 모리츠와 앤 모리츠가 길르앗 학교를 졸업하여 1959년 11월에 핀란드에 도착하여, 추운 겨울을 맞이했고, 언어 공부를 열심히 시작하였다. 얼마 후에 그들은 순회 봉사와 지역 봉사를 하다가 마침내 지부 사무실로 초대를 받아, 거기에서 1981년까지 봉사하였다. 그 다음 그들은 본국인 오스트레일리아로 옮겨, 그곳에서 모리츠 형제는 현재 지부 조정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아르네 닐센과 구룬 닐센은 1959년에 핀란드로 임명되었으며, 1965년까지 지부에서 일하다가 그해에 다시 덴마크로 옮겨, 아직도 그곳 지부에서 봉사하고 있다.

지부 사무실이 이전하다

1950년대 중반에는 헬싱키 지부 부지가 매우 비좁게 되었다. 시설을 확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였다. 헬싱키 중심부에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반타에서 부지가 발견되었다. 그 부지에는 또한 장래의 확장을 위한 여유있는 공간이 있었으며, 1957년에 매입되었다.

1960년말경에, 연건평 2,700평방 미터에 달하는 새로운 지부 사무실의 건축이 시작되었다. 1962년초에 벧엘 가족은 이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였으며, 이곳에서 특별 파이오니아와 회중 감독자들을 위한 4주 과정의 천국 전도 강습이 같은 해부터 열렸다. 현 사물의 제도가 끝날 때까지 충분하리라고 생각되었을 정도로 지부에는 많은 공간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코펜하겐으로 떠나다!

역사상 여호와의 증인의 가장 큰 대회가 1958년에 미국 뉴욕에서 개최되었을 때, 핀란드에서는 단지 263명의 증인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 돌아온 대표자들이 들려준 이야기와 그 대회에 대한 협회 영화의 상영은 핀란드 형제들에게 외국 형제들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스칸디나비아의 모든 전도인을 위하여 1961년 여름에 인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대회가 개최된다는 발표가 있자 핀란드 형제들의 영이 고취되었다. 그때까지는 핀란드 국경을 넘어본 경험이 있는 형제들은 소수뿐이었다. 지부 사무실에서는 4,000명의 여행자를 위한 모든 마련을 돌보기 위하여 여행 안내부를 조직하였다.

코펜하겐 경기장에서, 프로그램이 영어,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스웨덴어 및 핀란드어로 울려 퍼졌다. 그 대회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되었고, 국제적인 형제 연합체의 일부가 되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핀란드 형제들이 보고 느끼는 데 도움이 되었다.

카르비아의 특수 노동 수용소

일세기 그리스도인들처럼, 여호와의 증인은 성서로 훈련받은 양심에 따른다. 제 2차 세계 대전 후에 남자 증인의 중립 입장은 당국과의 많은 문제를 초래하였다. 1947년부터, 형제들은 군대의 요새로 이용되는, 항코 근처에 있는 핀란드 만의 어느 섬에 240일 동안 감금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삼 개월에서 육 개월까지의 감옥형도 선고받았다.

1959년에는 그러한 거부자들의 “복역 기간”을 상당히 연장시키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카르비아에 있던 이전의 임시 감옥이 악명 높은 “특수 노동 수용소”로 바뀌었다.

그러한 거부자 중 한 사람인 유카 로포넨은 카르비아를 이렇게 묘사한다. “경찰차를 타고 습지 복판에 있는 그곳에 가까이 가보니, 높다란 가시 철조망 뒤에 전시중에 지은 목재 막사가 있었습니다. 그 막사에는 창살 문이 있더군요. 나치 양식으로 설계된 포로 수용소였는데, 사기를 높여 주는 광경은 아니었지요. 특히 그곳에서 앞으로 적어도 이년을 보내야 할 것임을 아는 사람의 입장이라면 그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쾌활한 형제들이 한방에 여덟명 내지 열명이 있었습니다. 화장실은 방 한구석의 칸막이 안에 있는 통이었습니다.

“일과표에는 간수의 감시하에서 옥외에서 한 시간을 보내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나머지 시간은 갇혀서 보냈지요. 우리에게는 개인 시간이 많았지만, 우리가 세운 훌륭한 영적 프로그램으로 일과를 가득 채웠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한 구절씩 주의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점차 연구에 도움이 되는 좋은 도서실이 마련되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성서 제목에 대한 강연을 하였습니다. 또한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 형제들과의 교제는 각자가 지닌 성격의 모난 면들을 원만하게 해주었습니다.

“야외 봉사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요. 어느 외부인과도 이야기할 수 없었지만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 사는 사람들의 주소를 전화 번호부에서 찾은 후에 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종종 임시[보조]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했지요. 우리 집단에는 아직 여호와께 헌신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진보하였을 때 침례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침례를 줄 만큼 충분한 양의 물을 어디서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이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간수에게 근처에 있는 늪에서 침례를 베풀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거절은 현명한 결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겨울철에는 늪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고, 따라서 아무래도 침례는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어느 날, 방 구석에 있는 작은 장이 시선을 끌었는데, 바로 그거야말로 침례용 풀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어요! 며칠 내로 커다란 비닐을 막사 안으로 몰래 들여왔습니다. 그리고는 간수의 눈에 띄지 않게, 비닐을 두른 새로운 침례용 풀장을 세면실로 끌어다 놓고서, 거기에서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수감 기간에 많은 새로운 사람이 그 풀장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핀란드 대통령이 노동 수용소를 방문하다

증인이 군복무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일반인의 첫 반응은 부정적이었지만, 1960년대 중반에는 그 감정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강제 수용소 상태에서의 장기형이 비인도적인 처사라고 믿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68년 8월에, 당시 핀란드 대통령인 우르호 케코넨은 직접 형무소를 방문하기로 결정하였다.

현재 지역 감독자로 봉사하는 레이마 라이네는 이렇게 회상한다. “전혀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케코넨 대통령은 수용소에서 여러 시간을 보내면서 다른 아무도 참석시키지 않은 채 우리와 면담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는 법률을 더 낫게 바꾸기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이 일은 곧 있었다. 1969년에 그 형무소가 폐지된 것이다.

군복무 면제

1969년 이후의 여러 해 동안에는 젊은 형제들이 9개월간의 감옥형을 선고받았는데, 형기를 복역하는 동안에 형제들은 좋은 행실에 대한 평판을 쌓았다. 많은 시민은 그 점을 알게 되어, 지역 사회에 해가 되지 않고 평화를 좋아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징역형을 선고하는 것은 중립국이며 평화를 사랑하는 핀란드의 명성에 오점을 남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유명하고 유력한 인도주의자들 가운데, 증인을 군복무에서 면제시키자는 견해를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985년에 정부는 새로운 법을 채택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1987년 이후 모든 침례받은 활동적인 여호와의 증인은 28세가 될 때까지—한번에 삼년씩—징병 연기를 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따라서 핀란드에서 평화시에 여호와의 증인은 군복무를 면제받게 되었다.

전파의 자유가 시험받다

핀란드의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호별 방문 전도 봉사에 방해가 되는 법률을 공포하려는 시도가 가끔 있었다. 지금까지 법정은 모든 소송에서 전파할 권리를 인정하는 쪽으로 판결을 내렸다.

오울루라는 도시에서는 그 법령을 이렇게 변경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대한 금지 조치는 해제되었다.” 다음과 같은 이유가 언급되었다. “이상적인 종교 조직의 호별 방문 활동은 가정의 평화를 교란시키지 않는다. 그와는 달리, 주민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달성될 수 없는 유익하고도 필요한 의사 소통의 문제인 것이다.”

국경이 연합에 방해가 되지는 못하다

스웨덴 형제들이 핀란드에서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도와 왔다. 근년에는 오히려 핀란드 형제들이 스웨덴에서의 복음 전파 활동을 도와 왔는데, 그곳으로 이주한 핀란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핀란드어 회중들이 1972년 이후 스웨덴에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스웨덴에 사는 핀란드 주민 가운데서의 성장이 활발해져서 요즈음에는 핀란드어를 사용하는 전도인이 스웨덴에 약 1,800명이나 있다.

스칸디나비아의 여행자들에게는 그러한 나라들 사이에서 여권 없이도 국경을 건너는 것이 허락되기 때문에, 그러한 자유는 대회를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거리상으로 핀란드가 스칸디나비아의 다른 나라들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큰 규모의 국제 대회가 1965년까지는 핀란드에서 마련되지 않다가, 그해에 스웨덴과 핀란드 모두를 위한 대회가 헬싱키 올림픽 경기장에서 개최되었다. 그러한 마련이 또다시 1973년에도 있었다. 그리고 1978년과 1983년에는 헬싱키의 전시 센터가 두 차례의 국제 대회를 위해 사용되었다. 이러한 대회는 훌륭한 면으로 핀란드 형제들의 견해를 넓혀 주었을 뿐 아니라, 국경이 그리스도인 연합에 장애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순회 대회는 이전에는 여러 학교 강당에서 열렸었다. 1970년대에 와서는 학교 시설을 계약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그래서 1975년에 핀란드 남부의 헤멘린나 읍에 자체 대회 회관을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다. 반쯤 완성된 공장 건물을 매입하여 1,200석을 갖춘 편리한 대회 회관으로 개조하였다. 그곳에서 1978년 3월부터 대회가 시작되었다. 십년 후인 1988년에는 핀란드 북부에 있는 또 다른 회관을 취득하였고, 1989년 11월에 그곳에서 첫 대회가 열리도록 계획되었다.

「신세계역」과 하나님의 이름

핀란드어는 16세기에 처음으로 문자 언어가 되었으며, 1542년에 핀란드어로 인쇄된 최초의 서적들 가운데에는 “신약 성서”가 들어 있었다. 그때 이후로 성서를 집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 핀란드 사람들의 전통이 되었다. 1975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 신세계역」이 핀란드어로 발행되었다.

하지만 「신세계역」이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한 최초의 핀란드어판 성서는 아니었다. 바로 최초의 핀란드어 성서의 난외주에 그 이름이 나와 있었다. 또한 1776년판 구교회 성서의 색인에도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제들은 “여호와”란 형태는 여호와의 증인이 고안해 낸 것이라고 그릇되게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강한 편견을 나타냈었다.

그러므로 1985년에 쿠흐모이넨의 어느 교회의 제단 위에서, 수리중 페인트를 벗긴 후에 예호바라는 단어가 발견되었을 때 교구의 신자와 사제가 다같이 받았을 충격을 상상해 보라. 하나님의 이름을 보는 일은 교구회로서는 감당 못할 일이었다. 그들은 다시 그 이름을 덮기로 결정하였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17세기 초엽의 핀란드 주화에 박혀 있다. 일부 유명한 핀란드 저술가들도 그들의 저술물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해 왔다. 히브리어 문자로 쓰여진 하나님의 이름이 핀란드에서 가장 이름난 여러 교회에 전시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여호와의 이름의 가장 뛰어난 옹호자는 언제나 그분의 증인이다.

지부 시설의 확장

왕국 선포자의 수가 꾸준히 증가함에 따라 지부 사무실의 시설을 확장하는 일이 여러 번 필요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1962년에 지부를 건축한 지 10년이 지났을 때 가외의 공간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잡지 인쇄는 연간 230만부에서 370만부로 증가하였다. 서적 발행은 연간 40,000권에서 200,000권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요컨대, 핀란드에서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만 해도 562,000권—핀란드인 세 가구당 한권꼴—을 인쇄하였다. 그러므로 1973년에는 2,200평방 미터의 더 많은 공간이 발송부와 저장소 용도로 추가되었다.

벧엘 가족 역시 해마다 늘어나서 1977년에는 20개의 방이 숙소에 추가되었다. 또다시 1984년부터 1986년까지 공장과 숙소가 크게 증축되었다. 또한 300석을 갖춘 왕국회관이 별도로 건축되었다.

새로운 기술이 사용되다

지부 시설의 확장 외에, 인쇄 기술면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공장 감독자인 헤이키 칸칸페는 이렇게 회상한다. “2도 활판 인쇄에서 4도 오프셋 인쇄로 바꾸었을 때 우리는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이지요. 핀란드의 벗들은 5단 오프셋 매엽 인쇄기를 구입하도록 허락해 준 것에 대해 통치체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1981년초부터 우리는 잡지를 4색으로 인쇄할 수 있게 되어, 그렇게 할 수 있는 최초의 지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잡지 배부 수를 크게 증가시켰습니다.

“1985년 봄에, 우리는 워치타워에서 설계한 MEPS 컴퓨터와 사진 식자 장치를 받았습니다. 1988년에는 두번째 5단 매엽 오프셋 인쇄기인 독일제 밀러 요하니스베르크가 설치되었지요. 그로 인해 우리의 인쇄 능력은 배로 증가되었습니다.”

수천개의 호수의 이 나라에서 기대되는 것

여러 해에 걸쳐서 여호와의 증인은 핀란드에서 왕국의 좋은 소식을 분주하게 전파해 왔다. 그리하여 성서 진리의 빛이 수천개의 호수의 이 나라에서 찬란하게 빛을 비추고 있다. 주민에 대한 전도인의 비율은 전 유럽에서 가장 양호한 편에 속한다. 근년에 와서, 증가가 가장 큰 편은 아니지만, 전도인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핀란드에서의 생활 표준은 상당히 향상되고 있다. 하지만 영적인 면에서 주민들의 상황은 여러 모로 악화되고 있다. 물질주의적인 추구에 대한 관심은 많은 사람의 마음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영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밀어내고 있다. 도덕 표준은 떨어지고 있다. 분주한 도시 생활과 더불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세속 오락물은 대체로 사람들의 독서 습관을 침식해 왔다.

아직도 핀란드의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루터 교회에 속해 있지만, 최근에 여러 가지 위기로 그 교회는 흔들리고 있다. 교회 내에서 장기간 투쟁을 벌인 끝에, 여자들이 1986년에 사제로 받아들여졌다. 성서와 그 교리 및 그 도덕 원칙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없음을 공개적으로 나타내는 사제들이 많다. 진실한 사람들은 이러한 사태 발전을 보고 충격을 받고 있다. 반면에, 여호와의 백성은 그리스도인 원칙을 확고하게 옹호해 왔으며, 그로 인해 그들은 다른 종교들 가운데서 두드러진다. 많은 사람은 그 차이를 분간할 수 있다. 그들이 여호와의 증인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다면 진리의 참 빛을 보도록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8세기 전에 과거의 십자군 전사들이 핀란드를 휩쓸었을 때,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과 성서 진리의 빛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현 20세기에 예언들을 성취시키시고, 부지런하고 활력에 넘친 자신의 증인을 사용하여 좋은 소식이 선포되게 하심으로써 승리를 거두어 오셨다. 수천개의 섬이 주위를 수놓고, 수정같이 맑은 호수와 푸르게 우거진 숲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이 나라 전역에서 17,000명이 넘는 평화스런 왕국 전도인에 의해, 현재 진리가 빛을 발하고 있다.

[각주]

^ 79항 오토 메켈레의 체험담을 알기 원한다면, 「파수대」(영문) 1967년 10월 15일호, 630-4면 참조.

[191면 도표]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핀란드

최고 전도인 수

20,000

17,303

 

13,426

10,620

8,290

4,354

 

 

 

1950 1960 1970 1980 1989

평균 파이오니아 수

3,000

2,037

 

 

952

671

 

285

207

 

1950 1960 1970 1980 1989

[139면 네모와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노르웨이

스웨덴

북극권

보스니아 만

이발로

소단킬레

로바니에미

오울루

이살미

바사

쿠오피오

포리

쿠흐모이넨

탐페레

멘티하류

헤멘린나

라흐티

투르쿠

코트카

반타

헬싱키

항코

소련

[네모]

수도: 헬싱키

공용어: 핀란드어와 스웨덴어

주요 종교: 복음주의 루터교

인구: 4,954,000명

지부 사무실: 반타

[141면 삽화]

에밀 외스테르만은 핀란드 최초의 증인이었다

[143면 삽화]

전파 활동이 활기 있게 시작되게 한 카를로 하르테바

[147면 삽화]

최초의 지부 사무실, 헬싱키. 최초의 핀란드어 출판물 중 하나인 「사르노야 칸살레」

[150면 삽화]

1913년에 카이사니에미 공원에서 처음으로 옥외 공개 강연을 한 조셉 F. 러더퍼드

[154면 삽화]

약 60년 동안 번역자로 봉사한 에로 니로넨

[157면 삽화]

수십년간 여행하면서 그리고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한 오토 메켈레

[161면 삽화]

윌리엄 데이, 북 유럽 사무실의 감독자

[164면 삽화]

축음기와 확성기를 사용하여 야외 봉사를 하고 있는 형제들

[170면 삽화]

육군 병원에서 진리를 배운 칼레 살라바라

[176면 삽화]

헬싱키에서 공개 강연을 광고하고 있는 통보 행진, 1945년 4월

[181면 삽화]

1955년의 N.H. 노어와 M.G. 헨첼, 형제들을 격려하기 위한 여러 차례의 방문 중 하나

[185면 삽화]

핀란드 지부 사무실과 벧엘 로비 전경

[186면 삽화]

현재의 지부 위원회, 시계 바늘 방향으로, H. 칸칸페, V. 레이노넨, E. 칸칸페, K. 캉가스, J. 로포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