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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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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연감 보고

프랭크 듀어는 뉴질랜드 사람으로 역경을 많이 겪었다. 결국에는 라이트베어러 호라는 길이 16미터의 쌍돛 범선을 타고 1930년대 중반에 남태평양을 항해한 일곱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그보다 앞서 6년 동안은 타오르는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뉴질랜드 전역으로 힘든 여행을 하며 다녔고, 바다 건너 오스트레일리아, 타히티 섬 그리고 쿡 제도의 라로통가 섬으로 갔었다. 그에게는 전파할 소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왕국에 관해 열심히 전파하였다! 그는 남태평양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목표를 혹한의 시베리아로 정하였다. 그러면, 1936년 7월—계절풍으로 비가 많고 푹푹 찌는 달—에 그는 27세의 나이로 방콕이라는 낯선 도시,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고 그 언어조차 할 줄 모르는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프랭크는 동료인 여섯 명의 파이오니아 즉 전 시간 전파자들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의 워치 타워 협회 지부로부터 그들의 증거 구역으로 극동에 있는 한 나라를 선택하라는 요청을 받았었다. 프랭크는 지금은 타이라고 불리는 샴을 선택하였는데, 그곳이 소련에 가장 가까운 지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일곱 명의 용감한 파이오니아를 태운 라이트베어러 호는 싱가포르를 향하여 출범하였다. 얼마 동안 싱가포르와 말라야(지금은 말레이시아의 일부)의 콸라룸푸르에서 전파한 후, 프랭크는 소지품을 꾸리고 표를 사서, 주머니에 5달러만을 남긴 채 방콕행 열차를 탔고, 1936년 7월 22일에 그곳에 도착하였다.

방콕으로 가는 열차 여행은 길고 지루하였으며, 무더워서 땀을 비오듯 쏟았다. 객실은 빈틈이 없었으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젊은 프랭크를 앞에 놓인 큰 일을 위해서 돌보고 계셨다. 그렇지만, 프랭크가 샴에 좋은 소식을 가져온 첫 번째 사람은 아니었다. 첫 사람은 클로드 굿먼이었다.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이 타이에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931년에 영국으로부터 클로드 굿먼이 수도 방콕을 방문하였을 때였다. 그는 1929년에 인도에서 파이오니아 활동을 시작하였다. 실론(지금의 스리랑카), 버마(지금의 미안마) 및 말라야에서 활동한 후, 그는 페낭에서 인도의 캘커타행 배를 기다려야 했다. 이 절호한 시간을 사서 클로드는 방콕행 열차를 탔고, 방콕에서 약 일 주일 동안 집집으로 전파하여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들의 손에 영어로 된 성서 출판물을 많이 남겨 놓았다. 클로드는 타이 사람 가운데서 관심을 지속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거의 알지 못했다. 타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그 나라는 어떠한가?

“미소의 나라”

“미소의 나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혹시 샴 고양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아마 샴 쌍둥이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름들은 동남 아시아의 이국적인 나라 타이 왕국과 관련이 있다.

서쪽으로는 미안마, 북쪽과 북동쪽으로는 라오스, 동쪽으로는 캄보디아(캄푸치아) 그리고 남쪽으로는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타이는 크기가 프랑스와 비슷하다. 이 나라의 5600만 주민은 일 년 내내 열대 기후를 즐긴다. 특히 중부 평원에 끝없이 펼쳐진 비옥한 땅과 이상적인 성장 조건은 이 나라를 천연의 미작(米作) 지대로 만든다. 타이 만과 인도양의 후미인 안다만 해의 2600킬로미터가 넘는 연안 수역에는 해양 생물이 풍부하다.

인도 그리고 특히 중국이 이 나라에 큰 영향을 끼쳐 왔다. 인도는 자국의 상인을 통하여 이 “미소의 나라” 온 땅에 힌두교와 불교 신앙을 퍼뜨렸다. 그러나 천여 년 전에, 타이 민족은 중국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많은 타이 사람의 혈통을 추적해 보면 중국 남부로부터 이주한 사람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9년 이후로 이 나라의 공식 명칭이 된 타일랜드는, 이 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어떻게 그러한가? “타일랜드”는 “자유인의 나라”를 의미하며, 대부분의 이웃 나라들이 이전 몇 세기 동안 식민지였던 반면 타이는 정치적 독립을 유지해 올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자유는 굿먼, 그리고 이어서 듀어가 도착할 때까지 오랫동안 이 나라에 알려지지 않았다. “땅끝”에서 발견되는 나라에 사는 비그리스도교 주민 사이에서 그 자유가 어떻게 자라났는지 살펴보자.—사도 1:8.

종교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

13세기에 하나의 나라로서 출현한 이래, 타이는 불교 국가였다. 인구의 약 95퍼센트가 불교인이고 4퍼센트가 이슬람교인이며 1퍼센트 미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한다. 타이 불교는 테라바다 즉 히나야나 유파로 매우 관용적이다. 모든 종교가 다 선하다고 일반적으로 믿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불교와 유교를 동시에 실천한다. 정령 숭배가 여전히 깊이 뿌리박혀 있다. 또한 브라만교가 불교 관행에 많이 첨가되었다.

불교에서는 과거 행위의 결과 즉 카르마가 현생의 신분을 초래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실상 불교 철학은 초인간적인 존재에 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더 높은 존재자 앞에 책임이 있다는 의식이 없다. 불교인은 지식이나 계몽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 의지한다. 타이 사람이 경의를 표하여 부르는 “부처님”은 하나님에 관해 가르치지도 않았고 그의 존재를 부인하지도 않았다.

이런 종교적 환경을 볼 때, 타이는 참으로 성서 진리와 관련해서는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리스도교국의 선교인들이 16세기와 17세기에 타이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성서를 알리기 위해 애를 쓰기는 했지만, ‘사람을 자유케 하는 진리를 알’도록 돕지는 못했다. (요한 8:32) 그 때문에 타이 사람들은 20세기에 들어서서 상당한 기간이 흐를 때까지—프랭크 듀어 같은 사람을—기다려야만 했다.

자유의 소식이 타이에 이르다

콸라룸푸르에서 방콕으로 가는 1500킬로미터의 열차 여행이 듀어 형제에게는 기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로 36시간 동안, 붐비는 3등칸에 꼼짝도 할 수 없이 앉아 있었다. “몇 달 전 콸라룸푸르에서의 사고로 입은 상처 때문에 안정이 덜 되었었지요.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천사를 통하여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라고 그는 말하였다.

같은 열차 승객 중에 영국, 성(聖) 제임스 궁정의 전 타이 대사의 아들인 우호적인 타이 젊은이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프랭크 듀어가 타이에 가는 목적 그리고 프랭크의 총 재산이 약 5달러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친절하게도 얼마 동안 프랭크를 돌보아 주었다. 그렇게 하여, 프랭크는 새로운 나라에서 일을 해나갈 수 있었다.

프랭크는 즉시 성서에 기초를 둔 영적 자유의 소식을 널리 알리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 첫해의 남은 기간에는 영어와 중국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집중하여 그 도시의 사업 지역과 주거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전파하였다. 타이어로는 아직 성서 출판물을 구할 수 없었다.

외국인 파이오니아들이 합세하다

후에, 말라야 여행중 프랭크는 당시 독일의 일부였던 동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온 키가 크고 쾌활한 독일인 파이오니아 빌리 웅글라우베를 만났다. 열정적이고 모험심이 강한 파이오니아인 빌리는 이미 프랑스, 알제리, 스페인을 포함하여 여러 나라에서 그리고 코르시카 섬에서 전파했었다. 1936년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대회에서, 당시 워치 타워 협회장 조셉 F. 러더퍼드 형제는 스페인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내란을 볼 때 빌리와 그의 동료인 쿠르트 그루버가 다른 곳에서 전파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들은 파이오니아를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보기 위해 「연감」을 살펴보고서 싱가포르와 말라야 그리고 타이를 택하였다. 그래서 프랭크 듀어가 1937년 초에 타이로 돌아왔을 때, 그는 빌리 웅글라우베를 동반하게 되었다. 그러나 쿠르트 그루버는 말라야에 계속 남았다.

1938년에 타이에서 열심히 일하던 이 두 명의 파이오니아에게 젊은 오스트레일리아인 파이오니아 존 에드워드(테드) 수얼이 합세하였다. 테드는 진리 안에서 비교적 새로운 사람으로 침례받은 지 2년밖에 안 되었다. 그러나 1938년 시드니 대회에서 러더퍼드 형제가 형제들에게 극동에 있는 나라들에서 봉사하도록 요청하였을 때 테드는 주저하지 않고 결정하였다. 매우 많은 초기의 파이오니아들처럼 그는 즉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이사야 6:8.

1939년 9월, 말라야의 페낭에서 전파하고 있을 때, 쿠르트 그루버는 한 친절한 경찰관으로부터 영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였고 영국 영토 내에서 발견되는 모든 독일인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억류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그루버 형제에게 즉시 말라야를 떠나라고 권하였다. 그루버 형제는 자기 차에 뛰어 올라 타고 거처로 질주하여 개인 짐을 챙겨 가지고는 그 경찰관의 도움으로 아무 문제 없이 검문소를 빠져 나갔다. 그루버 형제는 방콕으로 가는 중국 정크선 표를 예약하는 데 성공하였고, 차는 코코넛 더미 밑에 숨겨 두었다. 이제 매우 즐겁게도 타이의 커다란 밭에 네 명의 파이오니아가 있게 되었다!

파이오니아 활동과 빈대

좋은 소식의 전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타이 사람들은 대체로 매우 친절하고 호의적이지만, 관광 여행이란 없던 그 시대에는 외부 사람과 직접 접촉해 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외국인에게 개방적이 되고자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파이오니아들이 타이 말을 거의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언어 장벽은 문제를 가중시켰다. 그들이 제공하는 출판물들 또한 내용에 있어서 뿐 아니라 언어에 있어서도 낯설었다.

설상가상으로, 종교적 환경과 사람들의 사고 방식에서 오는 장애는 도전을 가중시켰다. 그들 자신의 관용적이고 편의적인 종교에 만족하였기 때문에, 타이 사람들은 대개 더 나은 것을 찾지도 않고 메시야가 그들에게 구출을 가져다 주기를 갈망하지도 않는다.

그곳의 여건은 또한 파이오니아들이 적은 물질로 만족하고 전보다 불편하게 지낼 것을 요구하였다. 이 돌아다니는 파이오니아들은 자신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에 그곳에 사업차 와 있는 다른 외국인들이 즐기는 종류의 숙박 시설을 이용할 여유가 없었다. 새로운 읍에 도착하면 파이오니아는 대부분의 경우 중국인이 운영하는 싸구려 여관에 머무르곤 하였다. 프랭크 듀어는 이렇게 기억한다.

“철도역이나 버스 터미널 또는 부두에 내리면, 인력거를 부르는데 하나는 내가 타고, 또 하나는 여러 개의 서적 상자를 싣곤 했지요. 아마 25사탕(당시 약 70원)인가에 그들이 나를 작은 여관으로 데려다 주면 객실 담당을 만나고는 안으로 들어가죠. 객실 담당은 내게 조그만 등유 램프를 주고 객실 안내원을 불러 나를 안내하게 합니다. 안내원은 내게 방을 보여 주고 조그만 수건을 건네 주며 욕실과 화장실이 있는 곳을 알려 줍니다. 안내원이 가버리면, 나는 빈대떼가 몰려들지 못하도록 램프에 든 등유를 침대에 쏟고 램프에 등유를 다시 채운 후에 목욕과 식사를 하고 책을 조금 읽고는 마침내 모기장 안으로 들어가 매우 작고 숨막힐 듯한 그 방에서 온통 땀을 흘리며 잠을 자곤 했지요.”

그 당시의 여행에는 또한 그 나름의 특징이 있었다. 방콕으로부터 치앙마이라는 북부 도시까지의 열차 여행을 묘사하면서 한 파이오니아는 이렇게 말하였다. “앉을 자리라고는 한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밤새 [그 찻간의] 승강대에 서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열차] 통로는 보따리와 바구니로 가득 찼고 그 속에는 오리와 닭이 들어 있는 것도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 위에도 쭈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열차가 훨씬 북쪽으로 가면서 우리는 각 역에서 물벼락을 맞았는데, 그때가 샴 사람들이 크게 즐기는 물 뿌리는 축제 기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건기에는 버스로 시골 지역을 여행합니다. 알고 보니 이 버스 또한 항상 사람과 가축으로 꽉 차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쌀 가마를 싣는 동안 우리 모두 내려야만 했고, 그 다음에는 기를 쓰고 올라타 그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야만 했습니다.”

번역자를 구하는 기도가 응답되다

그 처음 몇 해 동안, 왕국 진리의 씨는 타이 밭에, 수도에서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많이 뿌려졌다. 북부의 여러 읍에서 약 넉 달 간 활동하는 동안 듀어 형제는 2491부의 서적과 소책자를 전할 수 있었다. 1939봉사년도중 거기에 있던 세 명의 파이오니아는 모두 합하여 4067권의 양장본 서적과 1만 4592부의 소책자를 전하였고 113건의 예약을 맡았다. 그러나 이 출판물들은 모두 영어나 중국어 또는 일본어로 되어 있었다. 「보호」 소책자 외에는 어떠한 출판물도 아직 그 나라 언어로 볼 수가 없었는데, 그 소책자는 영어 서적 한 질을 주는 대가로 한 학생에 의해 타이어로 번역된 것이었다.

파이오니아들은 번역자가 절실히 필요함을 느꼈다. 번역자는 여호와께 헌신한 종으로서 타이 사람들에게 그분과 그분의 왕국에 관한 귀중한 진리를 제공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을 가진 사람이어야 했다. 웅글라우베 형제는 러더퍼드 형제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에게 번역자가 없다고 하였다. 러더퍼드 형제는 이렇게 답장하였다. “나는 타이에 없고 여러분은 거기 있습니다. 여호와께 믿음을 두고 부지런히 일하십시오. 그러면 번역자를 발견할 것입니다.” 파이오니아들은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인내하였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셨다.

1939년 12월, 쿠르트 그루버와 빌리 웅글라우베는 북쪽 치앙마이로 여행하였는데, 거기서 그들이 기도해 온 번역자를 찾아냈다. 바로 촘차이 인타판이었다. 당시 그 여자는 장로교 여학교의 교장이었다. 필리핀의 마닐라 대학에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타이어와 영어 교육을 잘 받았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 대한 깊은 사랑이 있고 그분을 섬기는 데 열심이었기 때문에 그 두 파이오니아가 전파하는 것이 진리임을 곧 깨달았다.

장로교 선교인들로부터의 반대와 학교로부터의 유혹적인 제의에도 불구하고, 촘차이는 사표를 제출하고 교회를 떠날 것임을 통고하였다. * 학년말까지 계속해서 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촘차이는 「구원」 책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후에, 지부 사무실이 방콕에 설립되었을 때 촘차이는 벧엘 가족의 첫 성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촘차이는 번역을 도맡아 해냈다. 고양이 종류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샴 고양이도 벧엘로 데려왔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십 년 동안은 여러 가지 질병으로 인해 다리 불구가 되어 고생하였지만, 1981년 73세로 사망할 때까지 헌신적인 봉사에 계속 충실하였다.

최초의 현지 전도인들

1939년 12월에 치앙마이에 도착하기 전, 그루버와 웅글라우베 형제는 북부의 읍들인 프래와 난에서 활동한 것 같다. 프래의 한 간호사는 「가정과 행복」 소책자와 「보호」 소책자를 얻어, 난에서 간호사인 친구 부아키에오 난타에게 주면서 두 명의 외국인이 곧 난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부아키에오는 비록 불교인으로 양육받았지만, 장로교 기숙 학교에서 공부하고 치앙마이에 있는 한 교회 병원에서 간호사 훈련을 받고 난 후, 이 년 전에 장로교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대단한 관심을 갖고 소책자를 읽었다. 그래서 두 파이오니아가 난에 왔을 즈음에는, 성서를 연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부아키에오는 훈련을 더 받기 위해 치앙마이로 가게 되었을 때 쿠르트와 빌리를 다시 만났는데, 그때쯤에는 그들이 일단의 관심자들과 정기 집회를 열고 있었다. 그전에 촘차이는 이 파이오니아들을 장로교 신학교의 교장인 캄-아이 차이완에게 소개하였었다. 삼위일체, 지옥 및 영혼을 주제로 토론을 한 후에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 자기가 찾고 있던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쿠르트와 빌리를 동정하여 여관을 나와 자기 집으로 오도록 요청하였다. 그는 진리 안에서 잘 발전하였다. 그는 고용주로부터 성서 원칙을 타협하라는 압력을 받았을 때, 비록 그로 인해 직업을 잃고 약속된 연금을 받지 못하게 되었는데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4년 동안 열심히 활동한 후, 이 네 명의 외국인 파이오니아들의 노력은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1940년에 부아키에오 난타, 촘차이 인타판, 촘차이의 친자매 캐오말룬 그리고 캄-아이 차이완과 그의 아내 부아키에오는 타이에서 그 나라 사람으로는 최초의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침례를 받았다.

친척에게서 친척에게로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이 메시야를 발견한 것에 대해 친척에게 몹시 말해 주고 싶어하였던 것처럼, 이 새로운 제자들도 좋은 소식을 가족과 벗들에게 전해 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비교 요한 1:41) 캄-아이 형제에게는 캄 락사트라는 친척이 있었는데, 그는 치앙마이에서 멀지 않은 산캄팽의 교회 장로였고, 사실상 그 교회를 건립한 사람이었다. 캄-아이처럼 캄도 성실한 사람으로서 진리를 찾고 있었다. 그는 쿠르트와 촘차이 그리고 촘차이의 친자매 캐오말룬을 자기 교회로 초대하여 성서에 대해 설교하고 설명하도록 했다. 이 일에 몹시 화가 난 장로교 선교인들은 학교 선생 몇몇을 시켜 증인들을 쫓아내게 했다. 그러나 그러한 비그리스도인 행위는 캄으로 하여금 이전 어느 때보다 더욱 증인과 성서 연구를 계속할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몇 해 후, 산캄팽에는 회중이 설립되었다. 캄은 주임 감독자가 되었고 자기 집에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이라는 간판을 자랑스럽게 붙였다. 그후 몇 해 동안에 차이완과 락사트 가족의 많은 성원이 진리 안으로 들어왔다.

오랫동안 깊이 토론하고 나서야 촘차이와 캐오말룬은 어머니에게 진리를 확신시킬 수 있었다. 그 어머니도 타이의 다른 모든 초기의 증인과 마찬가지로 이전에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치앙마이 남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되는 반팬 지방의 교회에서 매우 활동적이었다. 그가 교회를 떠나자 마을에서는 커다란 동요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의 단호함과 용기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 마을의 몇몇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였고, 때가 되자 회중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촘차이의 어머니로부터 진리는 치앙마이 주 지역인 촘통에 사는 촘차이의 사촌 가족에게 전해졌는데, 나중에 또 하나의 증인 집단이 그곳에도 형성되었다.

이와 같이 타이에서, 특히 몇몇 읍과 마을에 프로테스탄트 집단이 존재하던 그 나라 북부 지역에서, 좋은 소식의 전파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최초의 사람들은 명목상의 그리스도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불교인이 처음으로 성서 진리를 받아들이기까지는 아직도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도 불구하고 활동이 계속되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반기에 타이는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외국인 파이오니아들과 이 나라 전도인들은 방해받지 않고 전파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쿠르트 그루버와 빌리 웅글라우베가 북부 지방에서 그러한 감동적인 경험을 하고 있는 동안 테드 수얼은 수도에 남아 있었는데, 그곳에서 관심 가진 한 스리랑카인 가족이 증거 활동에 함께하게 되었다. 1941년에 촘차이 자매가 방콕으로 이사하였을 때 이 가족은 친절하게 그 자매를 자기 집으로 맞아들였다. 점차, 다른 사람들, 주로 중국인이 관심을 나타냈고 회중이 조직되었다.

이제 80대인 에디트 뭉신 자매는 방콕 회중과 처음 접촉하던 때를 지금도 이렇게 기억한다. “나는 프로테스탄트 학교에서 성서를 접하게 되었어요. 제1차 세계 대전중에 영국인인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세 자매와 나는 치앙마이에 있는 한 프로테스탄트 기숙 학교에 보내졌는데 거기서도 성서를 배우게 되었어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해 배웠고, 그리하여 그분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존경심이 마음속에 뿌리박혔지요. 그러나 성서에 관한 꽤 많은 의문이 대답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습니다. 너무 소심해서 아무에게도 물어보지 못했고, 또 우리 학생들은 선생님을 무서워하였기 때문이었어요. 그 후, 잠시 싱가포르에 살다가 1941년에 타이로 돌아왔지요. 치앙마이 여행중에 캄-아이 차이완도 방문하였는데, 그를 그곳 장로교 사회에서 지도자로 기억하고 있었던 터였죠. 내가 그날 방콕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서둘렀기 때문에 그는 내게 거의 증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세 부의 소책자를 주면서 읽어 보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이었어요.

“기차에서, 나는 얼른 그 소책자들을 꺼내어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습니다. 성서의 가르침에 대한 설명에 감동을 받았고, 동시에 이 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것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깜짝 놀랐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방콕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을 찾았습니다. 증인의 집회 장소를 찾아냈을 때, 그들은 마침 성서 연구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앉아서 그들과 함께하였죠. 거기 모인 열두 명 중 한 사람은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촘차이, 내가 다닌 학교의 선생님이었어요. 우리는 다시 만나서 몹시 기뻤지요.

“성서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증가되면서 교회에 나가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십자가 목걸이도 떼어냈습니다. 교회 장로 두 사람이 나의 집을 방문하여 나를 교회로 돌아오게 하려고 애를 쓰며 ‘그 거짓 증인들을 믿지 마시오!’라고 말하더군요. 나는 그들에게, ‘우선 성서를 연구하고 확인하게 해주세요. 만일 여호와의 증인이 틀렸으면 교회로 돌아가겠어요’하고 말하였지요. 그들은 결코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침략이 고난을 가져오다

제2차 세계 대전이 계속 맹위를 떨치고 일본이 그 영향력을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서 확장함에 따라, 결국 타이도 전쟁의 쓰라림을 맛보았다. 조지 파월은 오스트레일리아인으로 싱가포르에서 활동이 금지되기 전에 그곳에서 협회의 출판물 보관소를 돌보다가 금지되자 타이로 이사하였는데, 1941년 12월 어느 날 아침 촘차이 자매가 “터졌어요!”하고 소리치며 계단을 뛰어내려 오던 일을 기억한다. 그렇다. 일본이 타이로 진격을 시작했다는 방송이 막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다. 일본군은 이 나라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그다지 많이 간섭하지는 않았지만 경제 상황이 악화되었다. (악명 높은 콰이[쾌노이] 강의 다리와 “죽음의 철도”가 외국인 전쟁 포로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리고 나치 독일의 동맹국인 외세에 의한 점령은 증인의 전파 활동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1941년, 네덜란드령 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에서 봉사해 오던 두 명의 독일인 파이오니아 한스 토마스와 볼프헬름 푹스가 아직은 중립국인 타이에 다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 시작된 후, 모든 외국인 파이오니아들은 일본이나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과 교전중인 나라의 국민이거나 아니면 여호와의 증인을 몹시 반대하는 일본의 동맹국의 국민이기 때문에 전파 활동에 방해를 받았다. 일본 본토에서 증인은 이미 몇 년째 금지된 상태였다.

침략한 지 며칠 안 되어, 일본 당국은 타이 경찰로 하여금 조지 파월과 테드 수얼을 체포하여 남아 있는 삼 년 팔 개월의 전쟁 동안 방콕에 있는 포로 수용소에 가두게 하였다. 1942년에는 독일인인 쿠르트 그루버, 한스 토마스, 볼프헬름 푹스가 체포되었고 보관소에 있던 출판물은 압수되었다. 빌리 웅글라우베는 그때 오지에 가 있었기 때문에 체포를 면했다. 일본 당국이 그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으나 그는 전쟁 기간 내내 붙잡히는 것을 면하였다.

지방 전도인들은 대부분 무사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이 집집으로 전파하였을 때, 특히 방콕에서, 일본 사복 형사들이 그들을 뒤쫓곤 하였다. 종종, 전도인이 한 집에서 나오고 나면, 그 사복 형사들은 그 집에 들어가서 집주인을 심문하고 때로는 협박하기까지 하였다.

촘차이 자매와 부아키에오 자매가 북부의 읍인 난에서 전파하고 있을 때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찰이 가방을 수색하고 자매들을 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심지어, 자매들과 몇 번 토론한 적이 있는 지방 교회 장로 두앙캐오 자리티온판까지 체포되었다. 촘차이와 부아키에오는 그 사건이 해결되기까지 경찰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들은 증거 활동을 싫어하는 한 로마 가톨릭 사제에 의해 스파이로 거짓 고발되었던 것임이 분명하다. 한편, 교회 장로인 두앙캐오는 결국 진리 안으로 들어왔다.

단절되었지만 돌봄을 받다

체포된 후, 세 명의 독일인 파이오니아는 일본군에 의해 감금되었다. 잔인한 매질과 함께 끊임없는 심문이 사흘 낮, 사흘 밤 계속되었다. 장교들은 형제들에게 일본어로 된 서류에 내용을 해석해 주지도 않고서 서명하라고 말하였다. 형제들이 거절하자 한 장교는 화가 나서 이렇게 소리질렀다. “우리는 너희들이 하늘 왕국에 관해 뭐라고 말하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땅에서는 일본인이 그 왕국을 다스릴 것이다!”

한스 토마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나치 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독일 대사관에서는 우리를 위해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우리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독일에서라면 당신네들이 어떻게 됐을지 당신들 알지 않소!’ 여러 주일 계속하여 군에 감금되어 있다가, 마침내 우리는 타이 당국에 우리를 위해 제발 무엇인가를 좀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여하튼 우리는 정부의 허가를 받고 선교 활동을 수행하러 합법적으로 타이에 이주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타이 정부에 반대하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군 당국에 감금당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타이는 자유로운 사람들의 나라로 알려져 있고 법적으로 일본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과의 우호 조약 안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타이 당국에 인도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마침내 우리의 요청은 수락되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방콕에 있는 중앙 조사국 사무실로 이송되어 거기에 감금되었다. 그 지방 형제들은 그들을 방문하여 매일의 생활 필수품을 공급할 수 있었다. 그들이 중앙 조사국에 있는 동안, 난에서의 자매들 체포 건에 관한 보고가 접수되었다. 담당 관리는 독일 형제들 건도 다루고 있었다. 그는 난으로부터의 보고를 읽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 촘차이! 「파수대」! 나는 이 사람들을 알아. 위험한 인물들이 아니야.” 증인들을 풀어주고 사건을 취하하라는 지시가 난으로 갔다. 그 후 오래지 않아, 쿠르트, 한스, 볼프헬름도 석방되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관리는 전에 방콕에 있는 형제들의 집에 와서 성서를 연구한 적이 있었다.

독일인 파이오니아들은 또한 다른 방법으로 돌봄을 받았다. 외국에 있는 여호와의 조직과의 모든 통신이 두절되어, 말하자면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남게 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일본 당국에 붙잡히지 않도록 매우 용의 주도해야 했다. 일본이 침략하기 몇 달 전에, 이 파이오니아들은 한 스위스 수출입 상사의 지사장에게 성서 연구를 사회했었다. 이제 이 우호적인 사람이 파이오니아들을 돕는 입장이 되어, 수수료제로 그들을 문구 판매원으로 고용하였다. 이런 종류의 직업은 그들에게 매우 적합하였다. 매일의 필수품을 사기에 충분하였을 뿐 아니라 감소되고 있는 출판물 공급을 보충하기 위해 현지에서 소책자를 인쇄하는 데 충분한 돈을 저축할 수도 있었다. 더구나 구역에서 문제가 생길 것 같아 보이면, 그들은 항상 커다란 가방의 밑바닥에서 문구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포로 수용소에 있는 두 명의 오스트레일리아인 파이오니아 역시 “버린바 되지” 않았다. (고린도 후 4:9) 조지 파월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충실한 독일 형제들과 타이 자매들은 그 불확실한 때에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과일은 매우 고마웠으나 그들과 격려를 주고 받는 것은 한층 더 새 힘을 주는 것이어서 우리의 생활이 좀더 견디기 쉽고 희망찬 것이 되게 해주었습니다.”

일본의 점령으로 영적 양식이 모두 단절된 후 형제들은 어떻게 하였는가? 그들은 주간 「파수대」 연구를 포함하여 계속 정기적인 집회를 가졌다. 더 이상 새로운 호를 구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지난 호들을 역순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마귀의 통치가 끝나다’ 기사가 실린 1941년 11월 호 「파수대」가 우리가 받은 마지막 호였습니다”라고 토마스 형제는 회상한다. “우리는 언젠가 전쟁이 끝나서 협회와 접촉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이 호부터 한 해씩 거슬러 올라가면서 연구하였습니다. 4년 이상의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잡지의 새로운 호가 도착하기 시작하였을 때 우리는 1936년 「파수대」를 연구하던 중이었습니다.”

전후 활동을 위해 강화되다

연락이 두절된 지 거의 4년이 되어가는 1945년 11월 24일, 미국 브루클린의 협회장 사무실로부터 전보가 도착하였다. 그것은 이제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큰 세계적인 증거 활동이 있다는 것을 형제들에게 알리는 내용이었다. 8월에 일본이 항복하고 그 결과 파월 형제와 수얼 형제가 석방된 후, 서적 보관소를 그곳에서 집회도 볼 수 있을 만큼 넓은 좀더 적합한 장소로 옮기는 마련이 이루어졌다. 타이 관리들의 도움으로 실롬가(街)에서 떨어진 소이데초에 부동산을 세내게 되었다.

전쟁 전과 전쟁중에, 파이오니아들은 진리의 씨를 뿌리느라 바빴고 그래서 이제는 관심자들의 핵심체가 생겼다. 그리하여 1946년중에 형제들이 「왕국 전도인들을 위한 신권적 도움」, 「연감」 및 「조직의 지침」을 포함한 출판물을 배편으로 받게 된 것은 참으로 시기 적절하였다. 파이오니아들은 뒤진 것을 “따라잡”기 위하여 그리고 또한 관심 가진 연합자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해 주기 위하여 그 귀중한 보조물들을 탐독하였다. 몇몇 새로운 사람이 전도는 시작하였지만 아직도 신권 조직에 대한 보다 온전한 인식을 얻어야만 했던 것이다.

파이오니아들은 새로 공급된 이 출판물을 가지고 부지런히 좋은 소식을 전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리하여 1946봉사년도에는, 14명의 전도인과 파이오니아로 이루어진 집단이 1만 4183부의 서적과 소책자를 전하였고 47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조그마한 팀이 이룩한 것으로는 참으로 놀라운 성과였다!

1947년 1월 1일 호부터 「파수대」지를 샴(타이)어로 발행하게 됨으로써 중대한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것은 200부씩 월간으로 발행되는 등사판 인쇄였다. 이제 타이 형제들은 그들 자신의 언어로 단단한 영적 양식을 정기적으로 받게 되어 기쁨에 넘쳤다. 「파수대」 연구에 더 이상 통역자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협회장의 첫 방문

1947년 4월에 당시 워치 타워 협회장이던 네이선 H. 노어는 그의 비서인 밀턴 G. 헨첼을 동반하여 처음으로 타이를 방문하였다. 이 기회에 타이 최초의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만민의 환희”라는 제목의 공개 강연이 방콕의 출랄롱코른 대학교 강당에서 275명의 청중에게 행해졌다.

강연은 그 지방 언론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았다. 그러나 두 신문은 노어 형제가 연설 가운데서 불교를 비방하였다고 비난하였다. 그러한 민감한 문제는 즉시 중앙 조사국 관리들의 조사 대상이 되었다. 감정을 상하게 할 만한 발언이나 논평을 한 적이 없음이 드러났다. 두 신문의 편집자들은 방콕 시민들에게 오보한 점에 대해 그리고 N. H. 노어와 워치 타워 협회에 대한 부당한 처사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하였다. 몇몇 다른 신문들은 그러한 비난에 대한 협회의 반응을 보도하였고, 그리하여 강연 자체보다도 진리를 더욱 널리 증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지부가 되다

노어 형제의 방문중에 활동을 더 잘 조직하기 위한 마련이 이루어졌다. 방콕 서적 보관소의 형제 자매들에게 참으로 즐거운 일로서, 노어 형제는 조지 파월 형제가 그 해의 제8기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지부 감독자로서 타이로 돌아올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타이는 1947년 9월 1일에 지부가 되었다.

그 후 조금 있다가 쿠르트 그루버는 북부의 네 회중과 방콕의 한 회중을 방문하도록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방문은 전파에 바친 시간을 보고하는 일의 중요성을 포함하여 신권적인 마련과 절차에 대한 형제들의 인식을 향상시켰다. 그 결과, 1948봉사년도에 전도인 총수는 31명에서 65명으로 껑충 뛰었다.

1948년 4월에는 치앙마이에서 최초의 순회 대회가 열려 활동에 한층 더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그 대회에서 형제들이 난생 처음으로 신권 전도 학교에 참석하였을 때 그들의 놀라움과 기쁨을 상상하여 보라! 그들 중 다수가 시골 출신이고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였으나, 이제부터는 모든 곳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에게 그분의 조직이 베푸는 신권적 교육과 훈련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많은 나라에서는 이미 3년 전에 시작된 공개 집회 마련이 이제 타이에도 소개되었다. 특히 방콕에서는 전단과 확성차로 공개 강연을 광고하였다. 사람들은 그 지방 왕국회관이나 공립 학교에서 열리는 이 집회에 참석하였다. 한번은 방콕의 불교 협회에서 공개 강연이 행하여졌다. 125명의 승려가 그들의 노란 승복을 입고 질서 정연하게 줄지어 앉아 성서의 확실성에 관한 연설에 주의 깊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진기한 광경이었다. 연설이 끝나자 그들은 많은 질문을 하였다. 「1949 연감」은 이 모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이 승려들 중 다수는 교육이 잘되어 있었고, 가톨릭 교계 제도에 속한 사제들과는 달리 관용을 나타내며 예의바르고 공손하였다.”

길르앗 선교인들이 새로운 장을 열다

이 나라의 조직을 강화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협회는 그루버 형제와 토마스 형제를 제15기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도록 초대하였다. 그들의 졸업식은 1950년 7월 30일 뉴욕, 양키 스타디움의 신권 통치 증가 대회에서 있었다. 그들은 돌아오자 그 동안에 도착해 있던 다섯 명의 다른 길르앗 선교인(조지 파월 제외)과 합세하였다. 그 다섯 명은 제7기의 알프레드 라악소, 그리고는 모두 제12기인 조지프 E. 바빈스키, 도널드 버크하트, 제럴드(제리) 로스 그리고 대로 스털라드였다.

1951년과 1952년에 길르앗 졸업생이 더 도착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영국에서 온 가이 모팻과 뉴질랜드에서 온 닐 크로켓(이들 두 사람은 처음에 말레이시아로 임명되었었다), 핀란드로부터 온 에스코 파야살미와 안냐 파야살미, 엘론 하르테바와 헬비 하르테바, 그리고 캐나다로부터 온 이버 히버트와 마거리트 루드가 있었다. 1952봉사년도 말경에는 도합 약 20명의, 길르앗에서 훈련받은 선교인들이 타이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선교인이 활동을 지원할 태세가 되자 선교인 집들이 북부의 치앙마이, 난, 람팡, 중부 타이의 나콘라차시마 그리고 남부의 나콘시탐마라트, 송클라를 포함하여 이 나라 여러 곳에 세워졌다. (최근에는 선교인들이 콘캔, 우본라차타니, 우돈타니 및 나콘사완에도 얼마 동안 임명되었다.) 이 선교인 집은 대단히 필요한 영적 지원과 격려를 위한 지방 중심지로서 형제들을 위한 신권적 요새가 되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도전

효과적인 선교인이 되는 기본 요건은 사람들과 그들의 언어로 의사 소통을 하는 능력인데, 이는 타이에 있는 많은 선교인에게는 굉장한 도전이다. 타이어가 지닌 문제는 문법이 복잡하고 까다로워서가 아니다. 사실상, 타이어 문법은 관사나 접미사, 성, 동사 변화, 어형 변화 및 복수형을 염려할 필요가 없어서 단순하다.

중국어의 상형 문자와는 달리 타이어에는 44개의 자음과 32개의 모음으로 구성된 음표 문자가 있어서 이들이 결합하여 음절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 언어를 서양 언어와 아주 다르게 만드는 것은 그 음조의 특성인데, 그것은 중국어와 비슷하다. 타이어는 다섯 가지 다른 음조를 가진다. 음의 높낮이 변화에 따라 한 단어 혹은 음절이 몇 가지, 때로는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카오”를 말 끝을 낮추는 음조로 말하면 “쌀”을 의미하지만, 낮은 음조로 말하면 “소식”을 의미한다. 만일 이 똑같은 단어를 억양을 올리면서 발음하면 “흰색”을 의미하고, 보통의 즉 높낮이가 없는 음조로는 “악취”가 된다. 그래서 새로운 선교인은 그가 “좋은 소식”이 아니라 “좋은 쌀,” “좋은 흰색” 혹은 “좋은 악취”를 가져왔다고 말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한 (대부분의 서양 언어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른 일부 유성음을 포함하는) 특수성을 터득하려면 연습과 인내와 끈기가 요구된다. 그래서, 다른 언어에서도 그렇겠지만 초심자는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 한 선교인은 여호와의 증인과 그리스도교국의 종교들과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집주인에게 우리는 십자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 여선교인이 실제로 말한 것은 우리가 “바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럼 남자들도요?” 집주인이 의아해서 질문하였다. “네, 아무도요”하고 그 자매는 힘주어 대답하였다.

대부분의 초기 외국인 파이오니아들과 최초의 길르앗 선교인들은 그 언어를 스스로 터득하였다. 후에, 협회는 선교인들이 임지에서 사용할 언어를 배우도록 돕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였다. 언어 공부를 하느라 첫째 달에는 하루에 11시간씩, 둘째 달에는 하루에 5시간씩 애쓰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교인들은 이 마련을 대단히 고맙게 여겼다. 왜냐하면 이 마련은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을 더 효과적으로 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파랑보다 눈에 덜 띄다

1951년 4월 노어 형제의 두 번째 방문에서 중요한 대목은 특별 파이오니아 활동의 소개였다. 유능한 형제 자매들이 전파 활동에 있어서 회중을 돕고 새로운 구역을 개척하도록 임명되었다. 이 나라 언어와 씨름해야 할 필요가 없고 흰 살결의 파랑 즉 외국인보다 눈에 덜 띄는 자국인 파이오니아들은 소식을 전파하고 새로운 사람을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현재는 약 70명의 특별 파이오니아(총전도인의 6퍼센트 이상)가 있다.

부아키에오 난타 자매와 솜스리 판투프라윤 (지금은 다라완) 자매는 최초의 특별 파이오니아로 남부 도시인 나콘시탐마라트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다. 또 다른 특별 파이오니아인 사-응가트 뭉신 형제는 미안마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최북단 주 치앙라이로 보내졌다. 초기의 파이오니아들이 그러한 곳들에서 많은 출판물을 전하였었는데, 이제 이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그러한 곳들을 다시 찾아가는 일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나콘시탐마라트의 두 특별 파이오니아는 불교도인 젊은 여자 크루아마트를 만났는데 그 여자는 의상실을 소유하고 있었다. 크루아마트는 종교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바느질하는 것으로부터 시간을 조금 내어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 몇 항을 토론하게 되기까지는 여러 차례 방문하여 부드럽게 설득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일단 관심이 생기자 크루아마트는 열렬한 성서 연구생이 되었고, 가족과 친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증인들과 연합하기 시작하였으며 좋은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침례를 받은 후에는 곧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크루아마트 자매는 나중에 선교인 닐 크로켓과 결혼하였으며, 그들은 몇 년 동안 순회 활동을 하였다. 현재 크루아마트는 닐이 장로로 섬기고 있는 방콕의 한 회중의 특별 파이오니아다.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도움을 베풀다

사-응아트 형제가 미안마 국경에 인접한 읍인 매사이에서 전파하던 때, 고립이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리와 의에 굶주린 양 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발견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한 가지 경험을 하였다. 1951년 10월 그는 카룬 추티앙트롱이라는 젊은 여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는 중국 전통에 따라 조상 숭배를 행하는 불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카룬은 자기의 배경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십대 소녀 시절에, 나는 종종 할머니께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지 묻곤 하였어요. 그러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들은 신화와 우화로는 만족하지 못했지요. 내가 열아홉 살이던 1945년, 치앙마이에 사는 친척이 타이어 신약 성서 한 권을 가족에게 보내 주었습니다. 나는 그 성서를 읽기 시작했고 성서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관하여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관하여 말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친척이 우리에게 보낸 출판물 가운데 워치타워 협회의 소책자 두부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교가 한 가지 종류만 있는 줄 알고 있었죠.

“1946년, 장로 교회에서 침례를 받았어요.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해 주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서, 전도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몇 차례나, 타이와 이웃 미안마에 있는 교직자 양성 학교에 양쪽으로 입학 신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응아트 형제가 카룬을 방문하여 그의 질문에 명확하고도 이치적으로 대답해 주자, 카룬은 「하나님는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받았다. 좋은 소식에서 진리의 소리가 울리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가 시작되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카룬은 이렇게 계속한다. “성서 토론을 하고 있는데 우리 집으로 돌멩이가 계속 날아들고 사람들이 우리를 방해하기 위해 문 밖에 와서 매우 소란을 피우는 일이 잦았습니다. 하루는 교회 장로가 자기 동생인 경찰관을 데리고 와서, 만일 여호와의 증인과 어울리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면 체포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겁을 주려 하더군요. 사-응아트 형제는 검은 손으로 알려진 집단으로부터 계속 암살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협회는 그를 타이 남부의 송클라로 재임명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알았지요.” 그 후 오래지 않아서, 사-응아트 형제는 1953년 어느 날 저녁 피살되었다. 그 사건은 결코 해결되지 않았다.

한편, 카룬은 좋은 소식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카룬은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더구나 가장 가까운 왕국회관으로부터 32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순회 감독자의 방문과 지부 사무실에서 정기적으로 보내 주는 출판물에 의해 강화되어 계속 용감하게 전파하였다. 1952년 11월에 침례를 받은 후, 카룬 자매는 20년 이상 전 시간 봉사를 하였으며, 역경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진정한 자유의 소식을 충실하게 전파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

초기의 파이오니아들은 타이에서 활동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비록 수는 적었지만, 그 광대한 구역에서 지칠 줄 모르고 전파하였다. 그들이 눈에 보이는 결과인 새로운 제자들을 얻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다. 그러나 그들은 인내하였다. ‘손에 쟁기를 잡’고, 중단 없이 계속하였다.—누가 9:62.

마침내, 그들 대부분은 다른 밭에서 봉사하기 위해 타이를 떠났다. 식지 않는 열심과 여호와와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은 바로 이 순간까지 전 시간 활동을 하면서 인내하였다. 50년 이상 파이오니아 봉사를 해온 빌리 웅글라우베는 이렇게 말했다. “되돌아보면 참으로 짧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되는 것은 인간이 지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봉사입니다. 물론,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믿음, 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항상 잠언 18:10을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내가 파이오니아 봉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의지하는 종들을 어떻게 돌보시는지 경험할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사야 2:2의 예언을 생각할 때,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음을 느끼며 여호와께서 다 되었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이 일에 계속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웅글라우베 형제는 몇 해 전 지상 행로를 마칠 때까지 독일에서 계속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다. 구역에서 한 남자는, “웅글라우베”(독일어로 “믿음이 없음”을 의미)는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 처음에 타이에 머물면서 좋은 소식을 전파한 프랭크 듀어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버마, 중국, 인도를 포함하여 아시아 대륙의 여러 나라로 임명되어 다녔다. 1966년에 타이로 돌아와서는 버마인 아내 릴리와 함께 북부 읍인 치앙라이에서 지금까지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다. 그의 아들 도널드는 미안마에서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고, 지금은 양곤(랑군)에 있는 벧엘에서 일하고 있다.

선교인들이 시험을 받다

“자유인의 나라”로서, 타이는 항상 국민에게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타이 불교도들은 천성이 관용적이다. 따라서 정부의 적의나 노골적인 박해를 받은 적이 없다. 좋은 소식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방해받지 않고 전파할 수 있는 이 자유가 활동을 수월하게 하고 가속화할 것으로 기대할 수도 있다.

1950년대중에 전도인 수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많은 외국인 선교인은 특별한 종류의 시험에 직면하였는데, 그들 중 일부는 성공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엘론 하르테바의 남동생인 카를레 하르테바는 제20기 길르앗 졸업생으로 그 기간중에 선교인이었는데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의 우호적인 태도가 일들을 즐겁게 해준 반면, 얼마 후에는 그것이 많은 선교인에게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 우호적인 태도는, 지금도 그렇지만, 문화의 일부분으로서 종종 극복하기 어려운 부드러운 저항의 벽을 형성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진지하고 깊이 있는 토론은 극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또한, 불교 배경 때문에 새로운 사람들을 도와 성서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고 생활을 여호와의 표준과 일치시키도록 하는 데는 많은 인내가 요구되었다. “우리의 신세계 방식은 너무 달랐습니다”라고 말하고는 하르테바 형제는 이렇게 계속한다. “그러나 한편, 몹시 관용적인 종교에 뿌리박힌 그 사람들의 배경 또한 매우 달랐지요. 그 시절에는 나이 든 자매 다수가 빈랑을 계속 씹어 치아가 흑단처럼 새까맣게 물들었지요. 다른 자매들은 심지어 호별 방문중에도 집에서 마른 바나나 잎에 싸서 만든 25센티미터 길이의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마을에서 그들을 ‘담배 연기 신호’로 찾아낼 수 있을 정도였지요. 나는 또한 순회 대회에서 형제들이 담배를 피우던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물론, 때가 되자 그들은 이 비성경적인 습관을 버렸다.

상당수의 선교인은 가르치고 연설을 할 수 있을 만큼 그 언어를 충분히 구사하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게 되자, 활동에 전념하고 인내하는 면에서 시험을 받았다. 그리고 후에, 증가가 둔화되고 새로운 제자를 단 한 명도 삼지 못한 채 여러 해가 지나가자 실망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선교인들은 그 임지를 자기 고향으로 삼았다. 20년, 30년 혹은 그 이상이 지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선교인으로서 의무를 다하며 훌륭한 본을 세우고 있다.

일부 결혼한 선교인들은 후에 가족이 생겼고, 그 때문에 선교인으로서 일하지 못하게 되었다. 칭찬할 만하게도, 그러한 부부 중 상당수는 장성한 봉사자들을 몹시 필요로 하는 타이에 계속 머물기로 결정하였다.

협회의 영화, 놀라운 경험

인구 거의 10만 명당 전도인 1명의 비율이던 1950년대에 여호와의 증인은 이 나라에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라는 활동 사진은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관해 사람들을 계몽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증인들 자신 역시 크게 유익을 받았다. 이 영화는 여호와의 조직의 세계적인 활동 범위에 대해 그들을 눈뜨게 하였고 그리하여 조직에 더 친근감을 갖도록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보이는 조직이 참으로 얼마나 크고 광범위하며 또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에스코 파야살미는 타이 북부와 방콕에서 그 영화를 상영하였다. 그는 보통 어떻게 그 영화를 광고하였는가? “아침 일찍, 우리는 마을 사람 모두가 쉽게 볼 수 있는 곳인 마을 운동장에다 영사막을 설치하곤 했죠”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리고는 학교를 방문하여 각 교실에 들어가서 교사와 학생들에게 짤막한 광고를 했을 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마을 전체가 소식을 듣게 되었죠. 해가 지면, 그들 고유의 진미—땅콩과 튀기거나 달리 요리한 혹은 구운 바나나는 물론 다른 간이 식사—를 파는 노점상이 하나씩 둘씩 운동장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제각기 조그만 가게를 차리고 빈 우유 깡통으로 만든 조그만 등유 등으로 불을 밝혔지요. 곧, 사방에서 마치 개똥벌레 떼 같은 것이 우리에게로 몰려들었습니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 조그만 등유 등을 들고 오는 우리의 관중이었답니다. 수백 명이, 때로는 수천 명이 우리 영화를 보러 왔습니다.”

이 영화는 종종 색다른 곳에서 상영되었다. 북부 타이에서 지도적인 불교 학자 중 한 사람인 쿤 마하 폰은 얼마 동안 에스코와 성서를 연구하였는데, 불교 승려와 신도들에게 신세계 사회가 어떤 것인지 보여 주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노란 승복을 입은 많은 승려가 참석한 자리에서 몇 번 상영을 했습니다”라고 파야살미 형제는 회상한다. “때때로 우리는 바로 와트[절] 안에서 영화를 보여 주었습니다. 나는 높이가 6 내지 8미터 되는 불상 앞에 앉아 장비를 작동시켰고, 영사막은 주 출입구를 가로질러 펼쳐졌으며, 사람들은 마루에 앉아 영화를 보았습니다. 절 안에서 여호와와 그분의 왕국에 관해 전도한 것은 희귀한 일이었지요.”

치앙마이에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가장 훌륭한 공개적 찬사 중 하나가 바로 이 불교 학자 쿤 마하 폰으로부터 나왔다. 파야살미 형제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불교 연합회 강당에서 연설과 영화 상영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우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불교 신자인 내가 왜 이들 여호와의 증인에게 이 강당에서 그들의 영화를 상영하고 연설을 하도록 요청했는지 의아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나는 이들 중 한 사람과 여러 달 동안 연구하였고 그래서 이들은 우리가 여기서 이제껏 보아 온 다른 모든 그리스도교와 다르다는 점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열심히 전파 활동을 하며 또 그들이 전파하는 것을 실천합니다. 심지어 이들은 선교인 집에서 자기 일을 자기가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라도,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여호와의 증인이 전하는 소식에서 평화를 발견하게 된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따름입니다.’” 이와 같이, 소위 동료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을 공격하는 데 바빴던 반면에 소위 이교도인 불교인들은 훨씬 더 개방적인 정신을 나타내었다.

카를레 하르테바는 같은 영화를 북동의 주요 읍들에서 보여 주는 데 전념하였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때때로 우리가 일을 처리한 방법은 놀랄 만합니다. 한번은, 우리 발전기가 상영 도중에 고장이 났습니다. 천 명 이상되는 참석자가 다 가버리지는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다른 발전기를 구하기 위해 3륜 택시(3륜 자전거)를 불러 타고 서둘러 읍으로 달려갔지요. 놀랍게도, 돌아왔을 때는 처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영화를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상영 후에, 동료와 나는 그처럼 거대한 군중 가운데서 개개인 모두에게 전도지를 일일이 나누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지를 그냥 공중에다 뿌렸습니다. 단 한 장도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이 없더군요.”

칼라신에 있는 주 청사 앞에서 행해진 야외 상영은 4200명이 넘는 참석 기록을 세웠다. 방콕의 룸피니 공원에서 일주일에 걸친 헌법 제정일 박람회 기간중에 매일 상영되었을 때 역시 수천 명이 그 영화를 보았다.

‘우리는 자정이 지나도록 이야기하였다’

1952년, 엘론 하르테바와 그의 아내 헬비는 중부 타이의 가장 큰 읍인 나콘라차시마에 임명된 최초의 선교인 집단 가운데 속해 있었다. 나콘라차시마를 거점으로 하여, 엘론은 이 나라에서 강우량이 적은 그 지역에서 여러 읍들을 방문하였다. 콘캔에서 그는 그리스도교 선교 연맹의 그 지방 전도사인 셍 부아위차이 씨를 만났다.

이미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상당히 의문을 품고 있었던 셍 씨는 그 주제로 토론하는 것을 환영하였다. 엘론 하르테바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우리는 자정이 지나도록 계속 이야기하였지요. 그리고 다음날 새벽 네 시에, 셍 씨는 나를 깨우더니 더 질문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 집에 아직 전기가 없었지요. 우리는 마루에 쭈그리고 앉아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성서를 읽었습니다.

“다음번에 방문하였을 때는, 셍 씨가 다른 몇몇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을 초대하여 자기 집에서 공개 강연을 마련해 놓고 있었습니다. 참석한 사람 중 일부는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왔더군요. 이 관심자 중 한 사람을 방문했는데 논과 밀림을 지나 11킬로미터를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 마을에 도착하자 장대를 여러 개 세워 지은 조그만 살라[오두막]가 꼭 작은 파수대처럼 생긴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남자는 성서뿐 아니라 「파수대」 잡지도 몇 부 가지고 있었는데, 다른 마을로 가는 도중 잠시 그 오두막에서 쉬기 위해 멈춘 방문객에게 그는 그 잡지들을 사용하여 성서를 설명하곤 했습니다.”

셍 씨와 이 마을의 또 한 남자는 후에 침례를 받았다.

인도차이나로 뚫고 들어가다

1956년 4월, 노어 형제의 세 번째 타이 방문에 뒤이어, 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나라들 즉 베트남, 캄보디아 그리고 라오스에 선교인을 파견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들은 타이 지부의 감독하에 있게 되었다. 좋은 소식이 처음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의 그 지역에 도달한 것은 1936년에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두 명의 파이오니아가 사이공 시(지금은 호치민 시라고 불림)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들 중 한 사람인 프랭크 라이스는 1943년 일본 군인들에 의해 체포될 때까지 용감하게 활동을 수행하였으며, 그 후에는 그 나라를 떠나야만 하였다. 1953년과 1954년중에는 한 관심자가 약간의 전파를 행하여 프랑스 지부 사무실에 보고를 보냈다.

1955년 말 남베트남이 공화국이 된 후, 노어 형제는 당시 타이 지부 감독자 바빈스키 형제에게 워치 타워 선교인들이 베트남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가를 얻기 위해 사이공 당국과 교섭해 볼 것을 요청하였다. 1957년 6월 27일, 5명의 길르앗 졸업생이 처음으로 사이공에 도착하였고 선교인 집은 타이 지부의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도 불구하고, 활동이 진척되다

선교인들은 사이공에서 집집으로 전파하는 것이 대단히 즐거운 일임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그들을 친절하게 맞이하였으며 많은 출판물이 전해졌다. 온전한 첫 봉사년도에, 「파수대」와 「깰 때이다」 잡지 예약을 약 1200건 맡았다. 그러나 제자를 삼는 일은 비교적 더디게 발전하였다.

처음에는 프랑스어로 전파하였고 모든 집회도 프랑스어로 진행되었다. 프랑스어는 “지식”층의 언어였다. 예수 당시에도 그러했듯이, 이 부류의 사람들 중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따라서 협회는 선교인들이 그 나라 언어인 베트남어를 배워 사용하도록 권하였다. 이것은 여러 해가 걸리는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일단 선교인들이 그 나라 언어에 숙달하여 보통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선교인들이 말하는 것을 듣게 되자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사도 2:6.

「“이 천국의 기쁜 소식”」, 「“보라—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의로운 새질서의 소망 가운데서 생활함」 소책자들이 베트남어로 번역되어 성서 연구 활동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1966년경에는 8명의 선교인에게 11명의 전도인이 합세하였는데, 그중 3명은 침례받은 전도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여러 해 동안 베트남에서 맹위를 떨치던 소름끼치는 전쟁은 어떠하였는가? 당시 사이공에서 봉사하고 있던 한 선교인은, “사이공에 무슨 일이 닥칠지 지나치게 염려하는 대신에, 우리는 희망의 소식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 도시로 밀어닥치는 수많은 사람에게 계속 부지런히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렇다. 선교인들과 그 지방 형제들은 전도서 11:4의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였다.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하지 않고, 그들은 계속 ‘그들의 식물을 물 위에 던지’었고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았다. (전도 11:1) 1974년 당시 사이공에 있던 세 회중의 113명의 전도인은 두려움없이 그렇지만 조심스럽게 봉사를 하고 있었다.

종종, 분명히 천사의 인도와 보호가 있었는데, 1968년 베트콩의 구정 공세중 유혈 전투가 개시되기 직전과 같은 경우가 그러하였다. 선교인들은 주거 지역의 안락한 집에서 사이공 시내 중국인 구역의 초라한 집으로 옮겼다. 선교인의 한 사람인 로버트 새비지는 이렇게 썼다. “베트콩군이 사이공 전역을 총공격하였다. 상황은 참으로 험악하지만 아직 우리에게 위기는 닥치지 않았다. 형제들은 훌륭하였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니기 위험한 거리를 지나 우리를 도와주러 왔다.”

구정 공세가 지나자, 선교인들과 그곳의 형제들은 일을 계속하였다. 1970년에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이 베트남어로 발행되어 그 결과 새로운 성서 연구가 많이 생겼다. 1971년에 베트남어로 「파수대」지가 발행된 것은 또 하나의 커다란 활동 촉진 요인이 되었다. 발행된 첫 해 내에, 베트남어판으로 천 건 이상의 예약을 맡았다. 1973년에 베트남은 지부가 되었고, 1975년 정권이 바뀔 때까지 그곳 활동을 관장하였다.

캄보디아가 증거를 받아들이다

1956년 6월, 바빈스키 형제는 사이공에서 돌아가는 길에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 들렀다. 사이공에서 했던 것처럼, 그는 그 나라에 선교인을 파견하는 허가를 얻기 위해 정부 관리들과 교섭하였다. 지난 1930년대 후반에 이미, 사이공에서 온 파이오니아들이 프놈펜에서 약간의 증거를 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 주일 후, 경찰은 그들에게 그 불교 왕국에서 왕의 특별한 허락 없이는 어떠한 종교 활동도 허가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왕은 허가를 내리지 않았다.

바빈스키 형제는 캄보디아 왕립 정부의 내무 장관을 만났다. 이 관리는 매우 관심이 있어 보였으며 바빈스키 형제에게 자기는 자기 나라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활동을 수행하지 못할 이유를 찾을 수 없노라고 말하였다. 여러 달을 기다린 끝에, 협회는 요청 비자의 발급건에 관하여 정부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래서 1958년 4월, 바빈스키 형제는 노로돔 시아누크공과의 알현을 요청하였다. 바빈스키 형제는 단지 시아누크공의 개인 비서와만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에게 전해 달라고 성서 출판물을 몇 부 남겨 놓았는데, 전파 허가가 났고 그리하여 1958년 12월, 마침내 네 명의 선교인이 처음으로 캄보디아에 들어갔으며 프놈펜에서 복음 전파 활동을 시작하게 되어 기뻐하였다.

프놈펜의 거대한 중국 인구 가운데 다수가 중국어에 더하여 영어를 어느 정도 하였고, 상당수의 베트남계 주민은 프랑스어와 베트남어를 둘 다 하였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 대부분은 캄보디아어만 할 수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언어 문제가 있었다. 처음에는 집회를 영어로 보았는데, 중국인이 꽤 왔다. 그 후, 집회가 프랑스어로 마련되자 베트남 사람들이 얼마쯤 참석하였다. 선교인들은 캄보디아어를 배우려고 노력하였으며, 그 나라 사람들에게 왕국 소식이 이르게 하기 위해 출판물 몇 가지를 캄보디아어로 발행하였다. 그러나 선교인들의 이동이 심해서 그 언어를 정말 유창하게 할 수 있게 될 만큼 오래 머무른 선교인이 없었다. 일부 캄보디아인은 연구를 하였고 선교인들과 연합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리하여 한 해 동안 야외 봉사에 최고 13명의 전도인이 있었다. 나중에 그들 대부분이 흘러 떠내려간 것을 보아 진리가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감동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정부의 정치 노선 변경 때문에, 1965년 초에 서양 사람들은 캄보디아에서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1964년에 길르앗을 졸업한 파나요티스 콕키니디스는 비자 신청이 거절되었다. (그 결과 그는 사이공에 재임명되었다.) 마지막 남아 있던 두 선교인 조지 크로퍼드와 캐럴린 크로퍼드는 1965년 5월 27일자로 그들의 비자 시효가 만기되면 갱신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흥미롭게도, 공개 전파 활동을 중단할 것을 알리는 공문이 4년 전에 이미 선교인들에게 발송되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도착한 적이 없었고 비밀 경찰에서도 그 사본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크로퍼드 부부는 캄보디아를 떠나야만 하였다. 단 한 사람의 베트남 증인만 남게 되었다. 그는 롱 형제였다. 그러나 1965년 후반에 나이 지긋한 한 캄보디아 남자가 롱 형제와 함께하게 되었다. 그는 순회 감독자의 정기 방문중 침례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 형제는 2년 후에 충실한 가운데 사망하였다. 캄보디아에서 여호와를 증거하는 유일한 국내 증인으로 계속 일을 수행하던 롱 형제는 캄보디아 정권이 1975년에 바뀌기 전에 프랑스로 갔다.

라오스에서 신권적 방식이 성공적임이 증명되다

타이 지부하에 있던 이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세 번째 나라는 라오스이다. 민족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타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타이 북동쪽의 이 불교 왕국 사람들은 1958년에 처음으로 좋은 소식을 들었다. 12월에 두 명의 선교인이 수도 비엔티안에 도착하였다. 1959년 3월, 잇따라 네 명이 더 왔다. 1960년 말에는 여섯 명의 새로운 길르앗 졸업생이 라오스에 파견되었으며 그리하여 두 번째 선교인 집이 사반나케트에서 문을 열었다.

1960년에 도착한 사람들이 정착할 무렵에는 그 이전의 선교인들은 모두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 나라를 떠난 상태였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장기간 그 유효성이 증명된 협회의 방법을 따르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생각을 따르기 원했던 것 같았다. 1965년 1월, 순회 감독자는 그 집단이 일 주일에 단 한 번, 한 시간의 집회를 본다고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진전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크로퍼드 부부가 1965년 5월 캄보디아를 떠나야만 했을 때 비엔티안에 재임명된 일은 시기 적절하였다. 조지 크로퍼드는 이렇게 기억하였다. “비엔티안에 온 지 단지 며칠 후, 우리는 집회에 대해 그리고 집회가 진행되어야 할 방법에 대해 이상한 태도가 존재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단 가운데 일부는 사람을 추종하였고 물질적 이득을 위해 연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조직에 대한 합당한 견해와 인식을, 그리고 방콕 지부 사무실과 밀접하게 함께 활동할 필요성을 심어주고자 노력하였습니다. 티모티 보르츠 형제의 도움으로, 집회 진행 방법이 협회가 제안하는 방법과 계획에 일치하게 변경되었습니다. 라오스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지요. 사람을 따르던 이들은 영적으로 세워주려는 집중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흘러 떠내려갔습니다.”

보르츠 부부가 건강상의 이유로 라오스에서의 선교 봉사를 그만두지 않을 수 없게 되자, 크로퍼드 부부만 선교인으로 남게 되었다. 크로퍼드 형제는 계속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그 집단에 존재하는 그릇된 태도를 물리치고 새 출발을 하고자 애쓰면서 승산 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곧 네 명의 새로운 선교인이 도착하였는데, 캐나다에서 온 존 갤리셰프와 캐슬린 갤리셰프, 영국에서 온 마거릿 로버츠와 실비아 스트래트퍼드였습니다. 이들은 퀘벡과 아일랜드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해 온 노련한 일꾼들이었지요. 1967년 후반에는 캐나다로부터 온 테런스 올선과 영국에서 온 브라이언 마크스가 우리 집단에 합세하였습니다. 이러한 지원의 증가는 그릇된 태도를 물리치는 데 효과가 있었지요. 이제 새로운 관심자들을 많이 찾아 진리 안에서 발전하도록 돕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 라오스 여자인 시판 라오가 있었다. 그는 라오스에서 성서 연구를 한 후 캐나다와 미국으로 여행하였는데 그곳에서 보수는 좋지만 미심쩍은 직업을 제안받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인 중립을 깨뜨리게 할 수도 있는 ·⁠·⁠· 보수 좋은 직업을 받아들이는 일로 인해 사단이 나를 세상으로 되돌리지 못하게 하였어요.” 그와는 달리, 그는 라오스로 돌아가 침례를 받기로 결심하였다. 실로, 시판은 비엔티안에서 라오스인 불교도로는 처음으로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그전에는 구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당신네 종교에는 라오스인은 한 사람도 없을거요”라고 말하곤 했다. 이제 그 말은 바뀌었다. 시판의 남동생인 분호엥은 진리 안에서 매우 빨리 발전하여 1972년에는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크로퍼드 자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1965년과 1966년에는 집회에 단지 우리 여섯 명만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의 첫 순회 대회에서 토요일 오후 프로는 참석자수 아홉 명으로 끝났는데 그들 대부분도 실연을 하기 위해 연단에 나왔어요. 그와는 대조적으로, 1971년 순회 대회에는 75명이 참석하였고, 1974년 기념식에는 99명이 참석하였지요.”

1975년 후반, 라오스에 새 정부가 들어섰을 때에는 신권적으로 운영되는 두 개의 훌륭한 회중이, 하나는 비엔티안에, 다른 하나는 사반나케트에 있었다. 훨씬 남쪽의 읍인 팍세에서도 어느 정도 전파가 행해졌었다. 이제, 모든 선교인은 라오스를 떠나야만 하였다. 그러나 크로퍼드 부부와 갤리셰프 부부는 충성스럽게 타이에서 봉사를 계속하였다.

프랜즈 형제가 타이에 오다

이제 타이에서의 활동으로 되돌아가 보자. 당시 협회의 부협회장이던 프레더릭 W. 프랜즈가 1957년 1월 처음으로 타이를 방문하였다. 그 일은 이곳 형제들에게 큰 행사였다. 그들은 그에 관해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의 방문과 때를 맞춰 방콕에서 삼 일 간의 대회가 마련되었다.

선교인들과의 특별 모임중에, 비그리스도교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적절한 출판물을 마련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이 지난 1949년에 타이어로 발행된 이래 성서 연구 활동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책은 그리스도교국의 잘못된 가르침을 논박하는 데 중점을 둔 것으로서 대부분의 불교인에게는 생소하였다. 그리하여 성경적 배경이 거의 없는 사람들에게 명료하게 성서의 참 가르침을 설명해 주는 책을 마련하는 일이 바람직하였다.

그 당시 프랜즈 형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러나 1958년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 책이 발행되자, 형제들은 여호와의 조직의 이 시기 적절한 공급에 참으로 감사하였다! 그 책이 1961년에 타이어로 나오자, 야외에서 5만 부 이상 배부되었다. 아름다운 삽화가 들어 있는 대형판으로, 거의 노동자 하루 임금에 해당되는 기부를 해야 하였지만 사람들은 그 책을 받았다.

좋은 소식을 타이어로 인쇄하다

타이어판 서적과 잡지는 인쇄 부수가 비교적 적었어도 타이 형제들은 항상 적절한 시기에 그들 자신의 언어로 영적 양식을 공급받았다. 협회의 주요 양장본 서적은 대부분이 타이어로 발행되었다. 1952년에는, 「파수대」지의 발행 부수가 500부에 이르자, 방콕에서 한 인쇄 회사를 통하여 인쇄하기 시작하였다. (1947년 1월 1일 이래, 그 잡지는 형제들이 등사해 왔었다.) 그 후, 1971년 10월 1일 호부터 「파수대」지는 월 2회 간행물이 되었다. 그리고 1978년 이후, 「깰 때이다」지가 월간으로 발행되었다. 이로써 형제들에게 보다 다채로운 영적 식사가 제공될 뿐 아니라 불교 독자층에게는 「깰 때이다」지가 더 큰 호소력이 있게 되었다.

서적이나 잡지는 몇 천 부 발행하든 몇 백만 부 발행하든, 번역, 조판, 교정 그리고 도판(圖版)에 드는 시간은 어느 언어로든 대략 같다. 그래서 참으로 많은 일이 지부 사무실에서 수행되는데, 그곳에서는 현재 16명의 정규 벧엘 가족과 지부 보조 작업자 몇 명이 나라 전체의 형제들과 관심자들의 필요를 돌보고 있다.

현지 파이오니아들이 길르앗에서 훈련받다

1958년 뉴욕 양키 스타디움의 기억할 만한 성의 국제 대회중에 졸업식을 거행한 제31기 길르앗 학교 103명의 학생 가운데는 타이에서 온 두 명의 파이오니아 반토엥 찬트라분 형제와 부아키에오 난타 자매가 있었다. 반토엥 형제는 1956년에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었다. 그는 지금까지도 타이 북부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다. 부아키에오 자매는 타이 최초의 두 특별 파이오니아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자매는 1986년 사망할 때까지 열심히 특별 파이오니아 활동을 계속하였다. 부아키에오의 특별 파이오니아 짝이던 솜스리 다라완 자매는 1953년에 제20기 길르앗 학교를 졸업하였다. 여러 해 동안 그 자매는 지부에서 번역 일을 전 시간 지원해 오고 있다.

이곳 출신의 다른 전 시간 봉사자 몇 명이 길르앗 학교에서 훈련을 받고는 왕국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1979년에 도착한 최근의 그룹에는 현재 지부 위원인 아사윈 우라이라트와 그의 아내 치완뿐 아니라, 대리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는 삭다 다라완(솜스리의 아들), 그리고 톤부리 선교인 집에서 선교인으로 있는 스리수파프 베스고시트 자매가 포함되어 있다.

새로운 지부 소재지와 감독

제2차 세계 대전 말부터 협회는 많은 방콕 주민에게 잘 알려진 곳인 소이데초 122번지에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으로 사용할 건물을 임차했었다. 1957년에 주인이 임대료를 터무니없이 올려 달라고 하자, 노어 형제는 얼마의 땅을 사서 지부 건물을 지어야 할 때라고 생각하였다. 1959년, 시내의 사업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수쿰위트가(街), 소이파수크 69-1번지의 훌륭한 주거지에 적절한 부지를 구하였다.

1961년 10월경에는 청부업자가 건축을 시작할 수 있었다. 6개월 후 완성되었을 때, 그 이층 건물에는 커다란 왕국회관 하나와 침실 여섯 개가 포함되었다. 당시 세 명의 벧엘 봉사자는 여섯 명의 선교인과 함께 소이랑수안의 임시 시설에서 안락한 새로운 숙소로 옮기게 되어 기뻤다.

1961년 건축이 시작되기 직전, 지부 감독 직분에 변동이 생겼다. 1950년 조지 파월을 대신하여 그 직책을 맡았던 조지프 바빈스키가 이제 가족 책임 때문에 선교 봉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1961년 9월 1일, 파울 엥글러가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독일 태생인 엥글러 형제는 제20기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후 타이에 왔다. 그는 1959년 벧엘에 오기 전 거의 6년 동안 북부 도시 치앙마이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였다. 세 명의 지부 감독자—파월, 바빈스키 그리고 엥글러 형제—모두 타이에서 왕국 활동에 훌륭한 지도를 베풀었다.

가려내는 시기

1945년에서 1960년까지의 기간중, 전도인 수는 꾸준히 증가하였으며 20퍼센트 이상 증가한 해도 더러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숫자가 하락하였다. 1961봉사년도는 1퍼센트 감소로 끝났다. 계속되는 삼 년 동안에는 각각 4퍼센트, 5퍼센트 그리고 12퍼센트로 감소가 더욱 심해졌고 그 후에는 1965년에 3퍼센트, 1966년에 1퍼센트로 감소가 둔화되었다. 이 때쯤에는 전도인 수가 1960년의 최고 382명에서 265명으로 감소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돌이켜보면, 1961년에 열린 천국 전도 학교로 인해 가려내는 시기의 문이 열렸던 것 같다. 당시 여러 해 동안 순회 감독자로 봉사해 온 대로 스털라드는 치앙마이에서 이 학교의 한 학급 그리고 방콕에서 또 한 학급을 사회하였다. 그 과정에서, 왕국 전도인의 자격이 재검토되었다. 특별 파이오니아 및 선교인 몇 명과 함께 그 과정에 참석한 감독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성경적 요구 조건과 일치한 생활을 해야 함을 배워 깨닫게 되었다. 이 점이 때때로 간과되어 왔던 것이다. 일부 새로운 관심자는 성경적인 자격을 갖추기 전에 야외 봉사를 시작하였다. 심지어 결혼 문제를 바로잡기도 전에 침례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 학교에서 받은 충고가 시행되자, 많은 전도인이 더 이상 전파할 자격이 없음이 드러났다. 일부 사람은 심지어 필요한 변화를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따라서 1962년중에 모두 9명이 제명되었고, 그 다음 4년 동안에는 25명—타이로서는 이례적으로 많은 수—이 더 제명되었다. 약한 자들은 실망하여 일부가 무활동이 되는 시기였다. 그러나 1963년의 한 행사는 충실한 사람들이 활기를 되찾게 하였다.

가장 큰 대회

1963년 “영원한 기쁜 소식” 세계 일주 대회에 방콕이 포함되리라는 발표를 들었을 때 즐거움은 대단하였다. 이제 타이 형제들은 자신들의 대회에서 여호와의 조직의 국제적인 규모를 직접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대회를 준비하고 거의 600명이나 되는 대표자를 위해 필요한 마련을 하는 것은 대단한 과제였는데, 방문객 수가 그 나라 전도인에 비해 2대 1로 많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온 땅의 왕이 되실 때”라는 주제의 공개 강연에 961명이 참석하여, 타이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 중 가장 큰 대회가 되었다.

이 대회 전에는 그렇게 거대한 여행자 무리가 이 나라를 방문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이 행사가 신문, 라디오 그리고 텔레비전에 광범위하게 보도된 것도 당연하였다! 노어 형제의 도착 실황은 TV로 중계되었다. 여섯 개의 라디오 방송국이 미리 준비된 15분짜리 프로를 방송하였다. 적어도 열 가지 신문이 그 대회와 세계 여행자들의 움직임을 보도하였다. 한 신문은 “미군 이래 가장 많은 비행 인원”이라는 표제 아래 대대적으로 다루었다.

필리핀으로부터의 도움

1963년 12월, 덴턴 홉킨슨이 지구 감독자로서 마닐라 필리핀 지부로부터 타이를 방문하였을 때, 그는 야외 봉사에서 이 나라의 형제들을 격려하기 위해 경험있는 일꾼들이 필요함을 파악하였다. 당시 길르앗 학교는 감독자 훈련에 역점을 두고 있었고, 타이를 떠난 선교인들은 대부분 보충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홉킨슨 형제는 활동을 돕기 위해 필리핀으로부터 특별 파이오니아를 타이로 보내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는 지부 감독자에게, “그러나 자매들만 보낼 수 있습니다. 형제들은 모두 우리가 필요하거든요”라고 말하였다. 후에, 필리핀 형제들도 몇 명 파견되었다.

그 제안은 협회에 의해 승인되었고, 그리하여 1964년 중반에 최초로 두 자매 로소라(로즈) 카궁가오와 클래라 델라 크루즈가 도착하였다. 그들은 방콕에서 차오프라야 강 건너편 톤부리 주의 거대한 구역에서 활동하도록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다. 일 년 후에, 그들은 길르앗에서 공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마련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카궁가오 자매가 지부 감독자인 파울 엥글러와 결혼하고 델라 크루즈 자매가 타이에 온 같은 필리핀 선교인 디에고 엘로리아의 아내가 됨으로 경사가 잇달았다.

사실상, 필리핀에서 온 선교인들은 동남 아시아 구역에 매우 잘 어울렸는데, 현지 사람들과 매우 흡사하게 보여서 유럽인이나 미국인 선교인들보다 이목을 덜 끌면서 구역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해에 걸쳐 필리핀으로부터 선교인이 추가로 타이뿐 아니라 남베트남, 라오스 및 그 외 아시아 국가들로도 파견되었다.

기 경배 문제

활동이 다시 막 가속화되기 시작하였을 때인 1966년 10월, 기 경배 문제가 표면화되었다. 그보다 앞서 1965년 11월에, 격지의 한 전도인의 아들이 양심상의 이유로 기 의식에 참여하기를 거절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그 문제에 대해 다소 서툰 방법으로 설명하자, 그 지역의 장(長)과 지방 교육 관리는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 한 권을 동봉하여 문교부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지부에 배달된 1966년 10월 31일자 긴급 서신에 응하여, 지부 감독자 파울 엥글러와 그의 보조자 가이 모팻은 문교부 종무국으로 갔다.

형제들은 국장에게, 여호와의 증인은 어느 나라에 살든 그 나라의 기를 존중한다는 점과 이러한 존중심을 나라 법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낸다는 점, 그러나 형상에 대한 숭배 행위는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한다는 점을 설명하였다. 그러한 숭배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법에 위배된다는 점도 설명하였다. (마태 4:10) 그러나 그 관리는 나라가 종교에 우선한다고 강경하게 말하면서 기 경배는 종교적인 숭배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다섯 달 후에, 엥글러 형제는 중앙 조사국에 불려가 심문을 받았다. 그 문제가 내무부로 이관되었던 것이다. 삼 일에 걸쳐 8시간 동안, 엥글러 형제는 조사하는 경찰 지대장에게 기 경배 문제에 대한 우리의 종교적 입장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또한, 많은 나라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언제든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관대하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엥글러 형제의 설명에 주의 깊이 귀를 기울인 후, 경찰 지대장은 타이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자녀들은 다른 학생들이 기 경배 의식을 행하는 동안 조용히 서 있기만 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상부에 보고서를 제출하여 고려하게 했다.

어떻게 결정되었는가? 과거에, 정부 관리들은 여호와의 증인에게 항상 우호적이며 친절했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여 제한받지 않고 활동을 계속 수행하게 되도록 “모든 사람을 위하여 ·⁠·⁠·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를 많이 드렸다. (디모데 전 2:1, 2) 응답은 약 1년 후에 간접적인 방법으로 나타났다.

엥글러 형제가 중앙 조사국에서 면담을 끝마친 지 단 하루인가 이틀 후, 다섯 명의 새로운 선교인이 필리핀으로부터 도착하였다. 그들의 이민 자격 신청이 중앙 조사국에 의해 승인되어야 하였다. 일 년이 지나도록, 응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1968년 4월, 선교인들은 신청이 승인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 일은 당국에서 기 경배 사건을 어떻게 결정하였는지를 알리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식 답변은 없었다.

두 출판물이 금지되다

오지의 한 주에 사는 한 전도인은 공공 건물에 게시된 한 가지 공고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것은 타이어판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과 「“이 천국의 기쁜 소식”」 소책자가 타이 왕국에서 금지되었다는 경찰 국장의 명령이었다.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 명령은 1968년 3월 29일에 공포되었으나 협회는 통고를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때쯤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은 이미 품절이었다. 사용된 지 16년 동안 1만 3000부 이상이 이미 배부되었다. 「기쁜 소식」 소책자는 왜 금지되어야 했는가? 거슬린다고 여겨질 만한 어떤 점이라도 있었는가? 더군다나, 그 소책자의 간결하며 직접적인 논조 때문에 형제들은 이 소책자를 사용하여 성서 연구를 시작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는데 말이다.

만나 본 관리는 문제가 된 구절이 “숭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그릇된 일입니다”라는 문장이었다고 지적하며 몹시 미안해 하였다. 불교인들은 불상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부 사람에게 이러한 말은 거슬릴 수 있다고 그는 설명하였다. 엥글러 형제가 그 소책자는 결코 붓다에 관해서가 아니라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자, 그 관리는 “그러면 그렇게 말해야지요”라고 대답하였다. 만일 그 단어 “하나님”을 “창조주”로 바꾼다면 반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제목은 지금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그 소책자의 제목도 바꿔야 할 것입니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리하여, 그때 이후로 「기쁜 소식」 타이어 소책자의 제목은 「이 기쁜 소식은 전파되어야 한다」가 되었다.

열매가 풍성한 난민 수용소 구역

1975년에 남베트남, 캄보디아 및 라오스에서 정권이 바뀌자—고향을 떠날 필요가 있었던 라오스 형제 다수를 포함하여—피난민들이 타이로 쏟아져 들어왔다. 메콩 강 기슭의 농카이 근처에 위치한 라오스인 난민 센터에는 20명 이상의 전도인이 보고를 하는 한 회중이 얼마 동안 운영되고 있었다. 형제들은 다른 피난민들에게 증거함으로 시간을 선용하였는데, 그중 많은 사람이 자기 나라에서는 좋은 소식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상당수의 관심자가 전도를 시작하였고 몇 명은 수용소 안에서 침례를 받았다.

불교 신자인 한 연로한 라오스 여자는 그리스도교국의 한 선교인으로부터 수용소 내 교회에 참석하도록 초대를 받았다. 그 여자는 빈랑에 중독되어 그 습관을 끊으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문제를 꺼내자 그 선교인은, “걱정 마세요. 빈랑을 씹고 담배를 피워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올 때 타구(唾具)만 갖고 오시면 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연로한 여자는 빈랑을 씹는 것이 도덕적으로 잘못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빈랑을 씹거나 담배 피우는 것을 용납한다면 아마 거짓말하거나 도적질하는 것도 용납할거야”라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교회에 가지 않았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우리 자매 한 사람이 야외 봉사중에 그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즉시 그 연로한 여자는 이렇게 질문하였다. “당신 종교에서는 빈랑을 씹을 수 있소?” 씹을 수 없다고 대답하자, 증인은 다르다는 점을 깨닫고는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 여자는 배우고 있는 것에 관해 65세 된 친구에게 말하였다. 그 부인 역시 빈랑에 중독되어 있었는데, 글을 읽을 줄도 몰랐다. 그래서 우리 자매와 그 연로한 여자는 그 여자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쳐 주었다. 관심 가진 두 부인 모두 정기적으로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빈랑 씹는 문제를 극복해야 하는 커다란 어려움이 있었다. 「참다운 평화와 안전」 책에서 마약 사용에 관한 장을 배우고 나서야 그들은 그 습관을 끊을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순회 감독자가 수용소 내의 회중을 방문하였을 때, 그들은 이제 참으로 깨끗함을 느낀다고 말하고는 더 이상 까맣지 않은 이를 순회 감독자에게 보여 주기 위해 자랑스럽게 입을 벌리고 크게 웃었다. 두 사람 다 수용소에서 침례를 받았다.

이 회중에서 장로와 봉사의 종으로 섬기고 있는 세 명의 형제는 천국 전도 학교에 참석하기 위해 그 수용소를 떠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학교가 수용소 안에서 열렸다. 순회 감독자가 그들을 방문하여 전과정을 다루었다.

결국에는, 수용소 내의 형제 모두가 다른 나라들에 다시 정착하였다. 몇 군데에서, 라오스어를 하는 집단과 회중들이 이 작지만 탄탄한 난민 증인 집단으로부터 발전하였다.

피 문제로 충절이 시험받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서에 기초한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한다. (사도 15:28, 29) 피를 의료 목적으로 사용하는 일이 아직도 일반적인 관행이고 타이에서 의사들의 견해는 대개 의문의 여지 없이 환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많은 형제가 혹독한 충절의 시험에 직면하였다.

예를 들어, 임신한 특별 파이오니아 아라야 탄차쿤은 갑자기 출혈이 시작되었다. 서둘러 병원에 갔는데, 전치 태반—태반이 내려 앉아 산도를 막고 있는 상태—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식염수를 투여하였으나, 의사들은 출혈이 더 있으면 수혈을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 자매는 회진 오는 의사 모두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미국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알았었다는 한 의사는 비밀리에 즉 ‘조직에 알리지 않고’ 수혈할 것을 제안하였다. 아라야 자매는 그러한 결정은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와 자신과의 문제임을 강조하였다. 다른 의사는, 보통은 여자와 접촉해서는 안 되는 승려의 경우를 언급하였다. 그러나 병이 나 입원해 있을 경우, 그들은 여자 간호사들의 간호를 받을 수 있다. “당신 종교에는 비슷한 예외가 없습니까?”라고 그 의사는 질문하였다. 수혈에 관해서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자, 그는 타이에서 의사들이 수혈할 수 있는 법원 명령을 받아낼 수 없음을 유감으로 여겼다. 그는, 특히 출산이 다가오고 있는 점으로 보아 자매에 대하여 그다지 낙관하지 않았다. 며칠 후 자매가 퇴원할 때, 의료진은 자매가 수혈에 동의해야만 다시 받아들이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 자매의 시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회중의 자매인 폰티파 테에라피뇨가, 피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을 한번 도와준 적이 있는 의사와 아라야가 만나게 해주었다. 약 1주일 후에 아라야는 진통 시기가 되었고 출혈이 다시 시작되었다. 두 번째 병원의 의사는 아라야가 몹시 허약한 상태임을 깨닫고, 불안해져서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아라야와 그의 남편에게 그러한 상태로는 마취만 해도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확고함을 유지하였다. 자매의 남편은 피 없이 진행시켜 달라고 요청하면서 설사 아내가 죽게 된다 해도 그의 노고에 감사하겠노라고 말하였다. 그 의사는 또한 약 30명의 증인이 병원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자, 감명을 받고는 수혈 없이 제왕 절개 수술을 해주는 데 동의하였다.

아라야가 여덟째 아이인 건강한 딸을 출산하고 아라야 자신도 무사하자, 모두는 즐거워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부부가 여러 해 동안 전 시간 전파자였다는 점을 알고 또 이처럼 믿음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은 의사는 심지어 치료비도 받기를 거절하였다.

‘내가 죽더라도 울지 마세요’

아라야가 병원을 떠난 지 몇 주 후, 아라야에게 도움을 준 의사를 소개하였던 폰티파 자매는 우리의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여 피 없이 수술해 준 점에 대해 감사를 표하려고 그를 방문하였다. 그 의사는 폰티파의 아홉 살 된 아들 세리가 매우 창백함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피 검사를 한 결과, 백혈병임이 드러났다. 이 병에 알려진 유일한 치료법은 수혈이라고 그 의사는 말하였다.

세리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오늘 죽든 내일 죽든, 피는 단 한 방울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라고 세리는 의사에게 말하였다. 세리는 피에 관한 하나님의 법을 알았을 뿐 아니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몇몇 의사가 피에 관한 세리 어머니의 신념이 비이치적이라고 하는 말을 귓결에 듣게 되자, 세리는 어머니를 변호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엄마를 비난하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를 비난만 하는 거예요.”

진단이 내려진 지 약 6주 후, 세리는 입원하게 되었다. 세리는 의사들의 권유 압력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피를 거절하였다. 점점 약해졌고, 통증을 덜기 위해 모르핀이 투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을 통하여 세리는 탁월한 믿음을 전시하였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지상 낙원에서의 삶의 희망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한번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엄마, 내가 죽더라도 아빠에게 울지 말라고 하세요. 그리고 엄마도 울지 말고, 우리가 사단의 시험을 이겨낼 수 있었음을 기쁘게 여기세요.” 세리는 시험 아래 충절을 고수하는 면에서 다른 청소년에게 훌륭한 본을 남겨 놓고 충실한 가운데 죽었다.—잠언 22:6.

청소년이 진리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다

타이에서 많은 청소년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전도인이 될 준비를 하는 것은 전통에 깊이 젖어 있는 나이든 사람 대부분의 무관심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젊은 세대의 보다 개방적인 정신은 그들 중 일부가 성서 연구를 받아들이고 여호와를 위한 증인이 되는 데 기여하였다. 부모나 다른 친척들이 반대하기 때문에, 다수가 진리를 위해 싸워야만 한다. 이러한 인내로 인해서 보통 그들은 영적으로 더 강해지게 된다.

많은 청소년 전도인이 훌륭한 행실과 참 숭배를 위한 타협하지 않는 태도로 학교에서 훌륭한 증거를 하고 있다. 일 년에 한 번, 와이 크루 날, 모든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교사에게 경의를 표하는, 종교적 의식이 수반된 특별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어떤 학교에서, 세 명의 소년 형제는 그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없는 이유를 사전에 교장에게 설명하고 제외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석하도록 요구되었으나, 종교 의식에 참가하지 않고 교사에게 존경을 표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와이 크루 날, 이 세 명은 행사가 끝난 후에 불려 나갔다. 약 칠팔십 명의 교사가 천 명 이상 되는 학생들 앞, 단상에 앉아 있었다. 우리 형제들은 짤막하게 발언하는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은 교사에게 합당한 존경을 나타내는 문제를 숭배와는 구별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학교 밖에서도 존경을 표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지만, 숭배는 전적으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만 드린다고 말하였다. 교사들과 동료 학생들은 그들이 들은 내용을 좋아하였다. 형제들이 끝마치자, 강당에는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가 울려 퍼졌다.

공식 승인을 얻으려는 노력

1970년대 초반까지는, 타이에 임명된 선교인 대부분에게 영주가 허락되었다. 다른 면에서도 또한, 당국은 관대하였으며 협조적이었다. 그렇기는 하였으나, 형제들이 ‘좋은 소식을 법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협회를 등록하려고 즉 법인체로 만들려고 하자, 관리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빌립보 1:7, 신세) 종무국장은 1974년의 한 서한에서 이렇게 언급하였다. “귀 단체는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 주목적이므로, 단체를 결성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목적에 따라 활동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분간 단체 결성은 삼가십시오.”

일 년 후, 새로운 두 명의 선교인이 이민 비자를 신청하자, 이민과에서는 신청자들이 선교인임을 증명하는 종무국 서한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종무국에서는 워치 타워 협회가 종무국에 등록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러한 서한의 발급을 거부하였다. 또 한번 등록 신청을 했으나 응답은 종전과 동일하였다.

종무국의 증명서가 없기 때문에, 선교인들은 비이민 비자만을 받아 90일 간격으로 잦은 국외 여행을 해야 하였다. 이 곤란한 사정을 가지고 문교부 차관에게 접근했을 때 그는 매우 도움이 되어 주었다. 1980년에 그는 이민과장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문교부는 그 문제를 고려하고서, 타이의 정책은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므로 ·⁠·⁠· 그 선교인들에게 일 년 간의 체류 연장을 해주는 것이 적절하다고 결정하였습니다.”

후임 차관의 도움으로 선교인들은 두 번째로 일 년 간의 체류 연장을 받았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국내법 아래 재단을 구성할 것을 권하였다. 그리하여 1982년, 경험 있는 지방 형제 몇 명을 위원으로 하여 성서 연구 증진 재단이 설립되어 등록되었다.

문화 기구인 이 재단은 왕국회관을 포함하여, 재산 소유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종무국은 그때까지도 이 재단을 종교 조직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한 승인이 있어야만 새로운 선교인들이 이 나라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이었다. 거부 이유가 무엇인가? 종무국의 정책은, 타이에서 그리스도교에 속한 문제에 관하여는 이미 승인된 그리스도교국 조직들의 책임자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의 신청서를 토론하는 모임이 소집되었을 때, (로마 가톨릭, 타이 그리스도 교회, 기독 선교 연맹, 침례교 그리고 안식일 재림파를 포함하는) 그러한 조직의 대표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가르침과 행동이 자기들과 일치하지 않으므로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에 찬성할 수 없다’는 데 전원 일치하였다. 이 난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특별 대회가 활동을 촉진시키다

1985년 방콕에서 열린 “충절 고수자” 대회는 1963년 세계 일주 대회 이래 진정한 국제적 성격을 띤 최초의 대회라는 점에서 특별하였다. 18개 국에서 약 400명의 대표자가 타이에 왔다. 라이먼 스윙글 형제가 통치체를 대표하였다.

두드러진 특징은 금요일 오후의 야외 봉사였다. 다수가 파이오니아인 방문객이 사실상 모두 타이 형제 자매들과 함께 야외로 나갔는데 수적으로는 그들이 더 많을 정도였다. 이 일은 시기 적절한 대회 프로그램과 함께 형제들에게 크게 감명을 주었고 나라 전역에서 활동을 증가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

대회 후 여러 달, 전도인 신기록이 있었다. 1986년 4월에 157명이라는 보조 파이오니아 숫자는 이전 최고 숫자의 80퍼센트 증가를 의미하였다. 전도인 91명의 한 회중은 7명의 장로 중 6명을 포함하여 48명의 보조 파이오니아가 있었다. 나머지 43명의 전도인은 그 달에 평균 20.9시간을 보고하였다.

“작은 자”가 천이 되다

타이에서의 중단 없는 왕국 활동은 1936년에 프랭크 듀어가 홀로 파이오니아로서 방콕에 도착하였을 때 시작되었다. 최초로 현지 전도인들이 침례를 받은 것은 그와 그에게 합세한 다른 외국인 파이오니아들이 4년 간 열심히 활동한 후였다. 1960년까지, 전도인 수는 거의 해마다 10퍼센트 이상의 비율로 꾸준히 증가하여 382명에 이르렀다. 1960년대에 몇 년 동안은 감소되었지만 60년대 말경에는 전도인 수가 바로 1960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나서, 20퍼센트까지 증가하는 해들이 있다가 해마다 3 내지 5퍼센트로 일정해졌다.

해를 거듭하면서, 형제들은 오랫동안 고대하던 일 즉 전도인 1000명 선을 돌파하기를 기대하였다. 이 일이 1988년 4월, 총 1021명이 보고하였을 때 이루어졌다. 1990 봉사년도는 6퍼센트 증가와 사상 최고 신기록인 1148명으로 끝을 맺었다. 매달 1169건의 성서 연구가 사회되고 있고 1990년 기념식 참석자 수는 2692명으로, 더 증가할 훌륭한 가능성이 있다. 여호와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속히 이루”고 계시다.—이사야 60:22.

순회 활동은 이 나라 모든 곳의 34개 회중과 여러 격지 집단의 형제들을 강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지부에서는 길르앗에서 훈련받은 형제들을 부분적으로 순회와 지역 활동에 임명함으로써 자격 있는 여행하는 감독자들의 필요를 충당하였다. 그러나 피세크 통수크 같은 젊고 열정적인 현지 형제들이 현재 여러 해 동안 봉사하였고 형제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타이에 오기 전에 필리핀에서 약 10년 동안 순회 감독자였던 에밀리오 바툴은 22년 동안 이곳에서 여행하는 활동을 해오고 있다.

확장을 위한 준비를 함

지부 사무실이 지난 1962년, 수쿰위트가, 소이파수크 69-1번지의 협회 소유 건물로 이전하였을 때, 시설은 충분하고도 여유가 있었다. 그 이후, 벧엘 봉사자 성원 3명은 16명으로 증가하였다. 1985년에는 주거용 건물과 풀이 무성한 정원이 딸린 인접 장소를 세내어 숙소를 마련함으로써 지부 건물 내에서 사무실 면적을 넓힐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이 추가 공간도 충분치 않게 되었다. 광범위하게 찾은 끝에, 형제들은 새로 개발된 방콕 교외에서 땅을 찾아내어 구입하였다. 기존 시설의 다섯 배가 될 새로운 시설의 건축은 1990년 2월에 시작되었다.

협회의 다른 모든 지부에서 그러하듯이, 타이에도 1976년 이래 지부 위원회가 있게 되었다. 처음에, 위원회는 조정 위원인 파울 엥글러, 엘론 하르테바 그리고 가이 모팻으로 구성되었다. 그 후, 엘론 하르테바는 핀란드로 돌아갔다. 모팻 형제는 45년 간의 전 시간 봉사 중 30년을 타이에서 선교인으로 그리고 벧엘 봉사로 보낸 후 1981년에 사망하였다. 순회 감독자와 지역 감독자의 위치에서도 봉사하였기 때문에 그는 나라 전역의 형제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고 형제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참 숭배에 대한 열심으로 인해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아사윈 우라이라트는 1980년에 길르앗 학교에서 돌아온 후, 이 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지부 위원이 되었다. 현 위원회에는 또한 카를레 하르테바 그리고 1972년에 길르앗을 졸업한 에른스트 피셔가 포함되어 있다.

확신을 가지고 장래를 내다봄

타이는 여러 세기 동안 전통에 깊이 뿌리박혀 왔지만,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참 숭배는 많은 사람을 바벨론 종교의 속박에서 해방시켰다.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진리의 하나님의 증인이 된 사람들은 전에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대다수가 불교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1980년 “산 소망” 지역 대회에서는 침례받은 36명 중 26명이 전에 불교 신자였다. 한 명만 전에 가톨릭교인이었고 아홉 명은 진리 안에 부모를 두었다.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통하여, 이전의 불교 신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나 인간 정부, 심지어 “자유인의 나라”의 정부도 가져다 줄 수 없는 종류의 자유 즉 불완전성과 병 그리고 사망으로부터의 자유 안으로 들어갈 전망을 갖고 있다.—비교 요한 8:32.

여호와의 증인은 모든 곳에서 계속 이 좋은 소식을 전파할 것이다. 그렇다. 타이에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 73개 주의 반 이상이 아직도 임명되지 않은 구역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와께서 의도하시는 정도까지 활동이 수행되리라고 확신한다. 그러면 그 일은 완수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계속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라고 할 것이며,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케 되도록 돕고자 노력할 것이다.—시 96:10.

[각주]

^ 35항 타이에서는 사람을 성 대신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관례임.

[252면 도표]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타이 1,500

1950 89

1960 382

1970 380

1980 735

1990 1,148

최고 전도인 수

300

1950 14

1960 41

1970 69

1980 114

1990 195

평균 파이오니아 수

[186면 네모와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미안마 (버마)

안다만 해

타이

치앙라이

치앙마이

람팡

농카이

우돈타이

콘캔

나콘라차시마

방콕

나콘시탐마라트

송클라

타이 만

말레이시아

라오스

비엔티안

사반나케트

캄보디아 (캄푸치아)

프놈펜

베트남

[네모]

타이

수도: 방콕

공용어: 타이어

주요 종교: 불교 (테라바다)

인구: 5588만 8393명

지부 사무실: 방콕

[188면 삽화]

프랭크 듀어는 길이 16미터의 쌍돛 범선 “라이트베어러 호”를 타고 남태평양을 항해하였다. 그는 1936년 7월에 방콕에 도착하였다

[191면 삽화]

산의 동굴과 해안 경치로 둘러싸인 남쪽의 팡응가 만으로부터, 머리가 3단인 신비적인 거인이 있는 방콕의 에메랄드 불상의 사원 지역에 이르기까지 대조를 이루는 타이의 경치

[193면 삽화]

빌리 웅글라우베(위)와 쿠르트 그루버는 1930년대 후반에 이 나라의 북부 지역에서 전파하였다

[197면 삽화]

촘차이 인타판은 1941년에 번역자가 되어 1947년부터 1981년에 사망할 때까지 벧엘 봉사를 하였다

[199면 삽화]

이 나라 최초의 자국인 증인 중 한 사람인 부아키에오 난타는 제31기 길르앗 학교 졸업생이다

[202면 삽화]

최초의 지부 감독자인 조지 파월과 그의 아내 도나

[207면 삽화]

타이는 1947년 9월 1일 지부가 되었다. 첫 번째 지부 사무실은 방콕, 소이데초 122번지에 있었다

[209면 삽화]

1948년 4월, 치앙마이에서 열린 최초의 순회 대회에서 잡지 증거에 나갈 준비를 갖춘 모습. 뒷줄 오른쪽에 1941년부터 1954년까지 타이에서 파이오니아로 일한 한스 토마스가 있다

[210면 삽화]

제12기 길르앗 선교인들. 조지프 E.(봅) 바빈스키, 제럴드(제리) 로스, 대로 스털라드, 도널드 버크하트

[214면 삽화]

카룬 추티앙트롱. 진리에 대한 그의 갈증은 어떻게 해소되었는가?

[220면 삽화]

셍 부아위차이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224면 삽화]

조지 크로퍼드와 캐럴린 크로퍼드는 1963년 이래 캄보디아, 라오스 그리고 타이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해 왔다

[227면 삽화]

라오스의 초기 전도인 수이 치네시아, 시판의 남동생 분호엥 라오, 그리고 비엔티안에서 라오스인 불교도로는 처음으로 여호와의 증인이 된 시판 라오

[229면 삽화]

방콕의 많은 클롱(운하)에서 배로 전파하는 선교인들, 1956년

[230면 삽화]

1958년 제31기 길르앗 학교 졸업생인 반토엥 찬트라분은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다

[231면 삽화]

타이 최초의 특별 파이오니아 중 한 사람인 솜스리 다라완은 1953년에 길르앗을 졸업하였다

[232면 삽화]

원래의 지부 사무실은 이 선교인들에게뿐 아니라 방콕 주민들도 잘 아는 곳이었다

[233면 삽화]

방콕, 수쿰위트가, 소이파수크 69-1번지에 있는 지부 사무실. 새로운 벧엘은 1991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235면 삽화]

1963년 방콕, 룸피니 공원에서의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에는 당시 이 나라 전도인 수의 두 배나 되는 외국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237면 삽화]

선교인으로 봉사하기 위해 타이에 파견된 최초의 두 필리핀인 로소라 엥글러(카궁가오)와 클래라 엘로리아(델라 크루즈). 왜 필리핀인들이 타이에 임명되었는가?

[238면 삽화]

가이 모팻은 30년 동안 타이에서 선교인으로 그리고 벧엘에서 봉사하였다

[241면 삽화]

난민 수용소에서 전파중인 라오스인 증인들. 방문할 난민이 2만 명 있었다

[249면 삽화]

1985년 방콕 대회에서 통역자와 함께 한 통치체의 라이먼 스윙글

[251면 삽화]

지부 위원들은 전 시간 봉사에 모두 합하여 99년 간 봉사하였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파울 엥글러, 아사윈 우라이라트, 에른스트 피셔 그리고 카를레 하르테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