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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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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제도

태평양의 아롱대는 청록색 바다를 가로질러 두 개의 귀중한 진주 목걸이처럼 늘어서 있는 멜라네시아인의 나라 솔로몬 제도는 “행복의 제도”라고 다정스레 불린다. 두 줄로 늘어선 이 화산 섬들과 환초들은 적도 바로 남쪽에 있는 온통자바 환초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서쪽으로 파푸아뉴기니와 경계를 이루면서 저 멀리 남동쪽으로 산타크루즈 제도에 이르기까지 약 1500킬로미터나 뻗어 있다. 산타크루즈 제도는 남쪽에 있는 이웃 나라인 바누아투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리프 제도를 포함하고 있다. 빽빽하고 울창한 숲이 솔로몬 제도 대부분의 섬들을 덮고 있으며, 연이어 있는 깎아지른 듯한 산등성이와 가파른 지맥이 어우러져 산악 지대를 이룬다. 그 사이로 깊고 좁은 계곡이 나 있다. 국토의 총면적이 약 2만 7500평방 킬로미터인 이 고립된 나라는 남태평양의 섬 나라들 중에서 파푸아뉴기니 다음으로 국토가 넓다.

이곳 백사장을 밟은 최초의 유럽인 탐험가는 스페인 선원 알바로 데 멘다냐였는데, 그때는 1568년이었다. 그는 전설상의 솔로몬 왕의 잃어버린 금광을 찾고 있었다. 그는 금광 대신에 자신이 솔로몬 제도라고 부른 섬들을 발견하였으나, 과달카날 섬의 강에 있는 사금 외에는 금이라곤 없었다.

서로 결속된 다양한 국민

솔로몬 제도는 피부 색이 검푸른 색으로부터 엷은 갈색에 이르는 아주 다양한 30여만 명의 삶의 터전이다. 많은 멜라네시아인의 머리털은 숱이 많고 빛나는 금발의 고수머리로부터 밝은 적색의 머리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데, 이것은 폴리네시아인들의 윤기 있고 곧은 검은 머리털과 썩 잘 대조를 이룬다. 솔로몬 제도에는 90개가 넘는 지방 언어와 방언이 사용되기 때문에 의사 소통을 하려면 여러 언어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섬과 부족 출신의 이웃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영어나 영어와 멜라네시아어가 혼합된 피진어를 사용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섬들인 온통자바, 레늘, 벨로나, 스튜어트 제도의 시카이아나, 산타크루즈 제도의 티코피아와 아누타에는 폴리네시아인들이 살고 있다. 키리바티에서 온 미크로네시아인들이 큰 집단들을 이루어 솔로몬 제도 서부의 와기나 섬과 기조 섬 그리고 과달카날 섬에 있는 수도 호니아라에 정착하여 살고 있다.

이 다양한 주민들을 서로 결속시켜 주는 것으로서 솔로몬 제도의 시민권 외에도 성서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다. 매우 종교적인 이 사람들은 즐거이 마을 교회에서 열정적으로 찬송가를 부른다. 그들은 매주 수차례씩 교회에 나가는데, 심지어 매일 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성서의 예언, 특히 다니엘서와 계시록에 온통 매료되어 있다. 그들은 우리가 실제로 이 낡은 제도의 마지막 날에 살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그들에게는 하늘 왕국을 통해 지속적인 평화와 행복을 가져오시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에 관해 이야기하기가 매우 수월하다.

행복의 제도가 “행복하신 하나님”에 관해 듣다

‘행복하신 하나님의 좋은 소식’이 1953년 이래 여섯 개의 주요 섬 전역과 수십 개의 보다 작은 섬들 사이에서 활기차게 전파되어 왔다. (디모데 전 1:11, 「신세」) 그 초기 여러 해 동안 솔로몬 제도에서의 복음 전파 활동을 감독하는 일은 워치 타워 협회 오스트레일리아 지부에 의해 그리고 그후 파푸아뉴기니 지부에 의해 돌보아졌다. * 존 컷포스, R. L. (딕) 스티븐스, 레스 카르니, 레이 패터슨과 도러시 패터슨 같은, 파푸아뉴기니에서 온 두려움을 모르는 증인들은 미개척지에 있는 점증하는 수의 형제 자매들을 방문하였다. 흔히 그들은 긴 칼날 같은 야자나무 잎으로 지붕과 벽을 만든 집에서 형제 자매들과 함께 생활했다. 1977년 4월 18일에, 여호와의 증인 솔로몬 제도 트러스트 위원회라는 단체가 법인으로 조직되어 더 큰 확장과 전파 활동의 수월한 조직을 위한 길이 열렸다.

1978년 7월에 솔로몬 제도는 정치적 독립을 이룩하였다. 형제들은 정부가 바뀌기 전에 그들의 지방 법인체인 사단 법인 여호와의 증인 솔로몬 제도 트러스트 위원회가 등록된 것에 대해 기뻐하였다. 그후에 그 지역으로 새로운 종교를 도입하는 것에 제한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행복의 제도”의 훨씬 많은 지역으로 전파 활동을 확장하기 위하여, 솔로몬 제도에 자체 지부 사무실을 둘 것이 결정되었다. 그 결정이 내려진 후 얼마 안 되어, 그 일을 조정하기 위해 파푸아뉴기니 지부로부터 글렌 핀레이가 아내 멀린과 함께 그곳에 도착하였다.

핀레이 형제가 솔로몬 제도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여러 차례 순회 및 지역 감독자로 봉사했을 뿐 아니라, 1965년에 파푸아뉴기니 지부의 임명에 따라 말라이타 북부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3개월 동안 봉사한 적이 있었다.

최초의 지부 사무실

“우리의 최초의 지부 사무실이 호니아라의 렝가키키리지에 있는 보브 시컴의 집 지하실에 개설되었다”고 1978년에 있었던 일에 관해 핀레이 형제는 기술한다. 그 작은 지하실 방은 이미 신권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 방은 과달카날 섬에서 최초의 왕국회관으로 사용되다가 후에는 솔로몬 제도를 위한 최초의 서적 보관소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시컴 형제가 그 건물의 뒷면에 침실 하나가 딸린 조그만 아파트를 마련하고부터, 그의 집은 또한 최초의 벧엘로 사용되었다.

핀레이 형제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단지 수동 타자기 한 대와 수동 복사기 한 대를 갖추고 시작하였다. 그러나 짙푸른 내포(内浦)의 바닷물 위로 펼쳐지는 극히 아름다운 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거의 50년 전인 1942년 11월 13일에, 그 작은 만에서 해군 역사상 가장 격렬한 것에 속하는 전투가 벌어졌다. 미국인들은 그곳을 아이언보텀(Ironbottom) 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수많은 전함이 수면 밑에서 녹슬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별칭을 붙인 것이다.

30년 동안 봉사를 한 후에, 시컴 형제와 아내 존은 건강상의 이유로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갔다. 그들은 친자녀가 한 명도 없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영적 자녀와 손자녀들이 그들의 인자한 노고를 가슴속 깊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핀레이 형제의 보고로 돌아가 보자. “덴턴 홉킨슨과 그의 아내가 1978년에 필리핀으로부터 도착하였다. 그는 대부분의 형제들이 처음으로 맞이하는 지구 감독자였다. 이후 몇 년 동안에, 이층 지부 사무실과 벧엘 숙소가 건축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훌륭한 건축 공사였다! 호니아라의 형제와 자매들은 단지 손 연장만으로 매우 날카로운 엄청난 크기의 산호 덩어리들을 파냈다. 지부 건축은 거의 3년이 걸렸을 정도로 길고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그리스도인 사랑의 커다란 전시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가외의 유익으로서, 현장에 왔던 건축 봉사자들 중 일부는 후에 특별한 방법으로 여호와를 위해 일하게 되었다.

열 명의 젊은 형제가 와서 지부 위원이며 건축가이기도 한 오스트레일리아인 로드니 프레이저의 감독 아래 현장에서 전 시간 일하였다. 그 자원 봉사자들은 대부분 미개척지 회중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전에 건축 연장들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프레이저 형제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다른 많은 형제들과 함께 3년 간 일하고 난 후, 그들은 건축 기술을 착실히 익혔을 뿐 아니라 여호와의 지상 조직의 활동에 대한 큰 인식과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에서 더 나은 기술을 얻게 되었다.

이 젊은 남자들 중 일곱 명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호와께 대한 자신들의 봉사를 계속 증가시켰다. 오메가 누누는 고향인 타바아 마을로 돌아갔는데, 그 마을은 말라이타 섬의 크와라아에 지방의 높은 산악 지대에 있었다. 그는 그 회중에서 유일한 장로가 되었다. 릴리오 리오파시는 벧엘 가족의 최초의 성원 중 일원으로서 8년 동안 벧엘에서 일하였다. 그는 현재 필리핀 출신의 아내 프러실라와 함께 다른 형태의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다. 친형제로서 목수가 된 조 크와수이와 데이비드 키리테에도 마찬가지로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솔로몬 제도 동부에 있는 산타크루즈 제도에 진리를 전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숙련된 타일공이 된 빌리 크왈로빌리는 산타크루즈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인 엔데니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하였으며, 현재는 고립된 리프 제도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다. 말라이타 북부에 있는 말루우 출신의 강하고 정력적인 형제 페드로 카나피올로는 현재 산크리스토발 섬의 비교적 새로운 구역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고 있다. 목수로서 지부 건축 공사에 참여하다가 떠난 사이먼 마에덜레아는 후에 말라이타 동부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다. 부지런하고 정력적인 이 형제들은 흩어져 있는 “행복의 제도”에서 전파하는 일의 선봉에 서 왔다.

대회들—즐거운 이정표

대회들은 즐거운 이정표였으며, 각 대회에는 상당한 준비가 필요하였다. 모든 연설과 드라마는 솔로몬 제도의 피진어로 번역되어야 하였다. 그 다음에 드라마는, 영어 테이프로부터 음악과 음향 효과를 더빙하면서 호니아라 증인들의 목소리를 사용해서 테이프에 재녹음해야 하였다. 여러 시간 작업하고 나서, 테이프는 연습에 사용할 수 있도록 카세트 형태로 보내졌다. 건전지로 작동되는 소형 녹음기를 사용하여, 형제 자매들은 지붕을 짚으로 이은 작은 왕국회관에서 희미한 램프 불빛 아래 연습하였다. 일부 대회들은 너무 소규모이기 때문에 드라마 연기자가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일부 드라마를 위하여, 유럽에서 보내 온 슬라이드를 테이프와 결합하여 상연하였다. 이들 외딴 곳에 있는 형제들은 이 극화된 성서 사건들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느꼈다!

1979년 말경에, 산타크루즈 제도에서의 한 작은 대회를 위하여 두 개의 섬이 사용되었다. 참석자들이 드라마의 슬라이드 상영을 볼 수 있도록, 전체 청중이 대부분의 회기가 열린 작은 섬으로부터 환등기를 돌리기에 충분한 전력이 있는 더 큰 섬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명랑하고 마음이 들떠 있는 무리가 통나무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홀을 가득 채우는 동안, 관심이 있는 구경꾼들이 창문마다 떼지어 모여 있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이어서 그들은 그토록 반짝반짝 빛나고 수정같이 맑은 바다를 행복에 넘쳐 다시 노를 저어 건너면서 휘영청 밝은 달빛을 받으며 드라마를 회상하였다.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좋은 소식이 퍼지다

여러 해 동안 전파 활동은 두 개의 섬 즉 말라이타와 과달카날에만 집중되었는데, 그곳에는 회중이 단 하나씩밖에 없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관심자들의 작은 집단들이 솔로몬 제도 서부에 있는 문다와 기조에 형성되었다. 그러나 발전은 느렸다. 마침내, 파이오니아들이 서쪽에 있는 쇼와즐 섬과 동쪽 변경에 무리 지어 있는 섬들 중 산타크루즈 제도로 이동함에 따라 관심이 다른 지역들로 퍼졌다.

말라이타는 두 가지 것으로 유명하다. 하나는, 일찍이 신부 값을 지불하는 데 사용되었던 유명한 패화(貝貨)가 기원한 곳으로서이고, 둘째는 여행을 동경하는 소박한 사람들의 고향으로서다. 말라이타인들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참으로 큰 규모의 산지 정원을 관리한다. 그들의 방랑성 기질 때문에, 솔로몬 제도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볼 수 있다. 심지어 50년 이상을 자기 부족 지역 밖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므로 파푸아뉴기니 지부에서 온 노먼 샤레인이 1962년에 말라이타 북부에 가서 그들 중 수백 명을 만났을 때, 많은 사람이 성서 진리를 기꺼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도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많은 말라이타인은 영국 통치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애쓰다가 실패한, 마아시나 루우(형제애)라는 정치 운동에 가담했었다. 그들은 기성 교회들로부터 소외당한다고 느끼자, 보보아(기초)라는 그들 자신의 종교를 설립하였다. 그런데 그 명칭은 예언적임이 판명되었다. 그들 중 다수가 성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침례받은 증인이 된 다음, 계속하여 용감한 전파자와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그들은 말라이타의 자기 부족 지역에 있는 수십 개의 고립된 산악 마을에서뿐만 아니라, 구역이 아무리 멀고 고립되어 있다 해도 솔로몬 제도의 어느 곳에서나 봉사하여 왔다.

좋은 소식이 웨스턴 주에 도달하다

웨스턴 주에서의 지방 선교 사업에 사용된 최초의 증인들 중 한 사람은 말라이타 동부 출신의 파니두아 키리테에였다. 그는 1967년 당시에는 가정을 가진 젊은 사람이었다. 그와 다른 형제는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자원하여 웨스턴 주로 가서, 먼저 기조 섬에서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파니두아 형제는 기조 읍에 2주간 머무르는 동안, 그 지방 경찰서장으로부터 전파 활동을 계속하라는 격려를 받았다. 그 경찰서장은 또한 파니두아 형제와 그의 짝에게 만일 뉴조지아 제도를 망라하는 자신의 관할구에서 무슨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자기에게 연락하라고 말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 파이오니아들은 뉴조지아 섬의 로비아나 초호에 있는 한 정착지인 문다에 도착하였다.

문다는 사실상 일본군이 1940년대 초에 건축한 활주로 주변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일련의 작은 마을들이다. 미국 공군이 후에 그 활주로를 점령하여 확장한 다음 제2차 세계 대전의 남은 기간 내내 사용하였다. 이 지역의 부족들은 모권 사회를 이루고 있다. 파니두아 형제는 이렇게 회상한다. “정부 우편선을 타고 문다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어디에서 그리고 누구의 집에서 묵을 것인지 그리고 이 새로운 지역에서 진리가 어떤 식의 대우를 받을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초호 가에 나 있는 길을 따라 걷다가 곧 말라이타인인 타우데 케나즈의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타우데 씨가 같은 크와라아에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를 환영할 줄 알았습니다만, 우리가 문다에 있는 동안 그의 집에 머무를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그의 장모이자 지주이면서 미망인이 된 미리엄이 어떻게 맞이하는가에 크게 달려 있었습니다.”

미리엄은 뉴조지아 섬의 로비아나 부족 사이에서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미리엄은 지주로서 권력을 행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합 교회에서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작고한 그의 남편은 그 종교를 그 지역에 도입하는 데 힘이 되었었다. 미리엄은 일찍이 어떤 예사롭지 않은 방문객들을 맞이할 것이라는 꿈을 꾼 적이 있었기 때문에, 손에 가방과 성서를 들고서 문에 서 있는 두 명의 파이오니아를 보고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 파이오니아들이 무척 놀랍게도, 그는 즉시 그들을 자신의 집에 머무르도록 초대하였다. 그가 나타낸 후대는 그의 전 가족에게 축복이 되었음이 판명되었다. 그 파이오니아들은 그러한 친절을 나타낸 모든 사람과 매일 저녁 연구하는 일에 집중하였다. 이들 세 사람 즉 미리엄과 딸 에스터 그리고 에스터의 남편인 타우데는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속하였다.

이 무렵인 1970년에, 여행하는 감독자인 존 컷포스와 짐 스미스가 파푸아뉴기니로 돌아가는 길에 문다를 방문하였다. 문다에서의 잠재적인 관심을 즉각 알아차리고서, 스미스 형제는 그 파이오니아들에게 회중이 설립될 때까지 머무를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이 두 감독자는 집회를 조직하도록 그 파이오니아들을 열심히 도왔다. 처음으로, 여호와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가 뉴조지아 섬에 울려퍼질 수 있었다! 양 떼를 돌보도록 그 파이오니아들을 문다에 남겨놓고서, 그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다른 구역으로 떠나갔다.

어느 날 저녁 갑자기, 그 파이오니아들은 성난 무리의 무례한 행동으로 인해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폭도를 인솔하고 온 비번 경찰관 한 사람이 그 형제들에게 즉시 그 지역을 떠나라고 엄하게 명령하였다. 파니두아 형제는 그 무리를 돌아보면서 경찰서장이 이전에 기조에서 “만일 내 관할구 내의 어느 지역에서든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내게 꼭 연락하십시오”하고 그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자마자, 그 경찰관은 겁에 질렸고 무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지만 이 불온한 일에 대한 뉴스는 신속히 퍼졌고 기조에 있는 경찰서장 자신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그 경찰서장은 즉시 문다행 비행기를 탔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파니두아 형제에게 지방 경찰서로 출두하라고 요청했다. 경찰서에 들어가고 나서, 파니두아 형제는 두 명의 고위급 지방 경찰 관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상황을 알아차렸다. 경찰서장과의 면담은 그 두 명의 지방 경찰 관리를 위한 것이었다. 파니두아 형제가 자신과 짝이 문다에 오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나자, 경찰서장은 청취하는 일을 이러한 말로 매듭지었다. “나도 종교가 있고, [한 관리를 가리키면서] 앨버트 자네도 종교가 있네. [다른 관리를 가리키면서] 앨릭스 자네도 종교가 있고 말이야. 솔로몬 제도의 법률은 만인에게 숭배의 자유를 보장한다네. 증인들은 미리엄이 초대해서 그 여자의 집에서 묵었던 것일세. 그 여자는 관습상의 지주여서 어느 종교인이든 자신의 집으로 초대할 법률·부족상의 온전한 권리를 가지고 있네. 따라서 법을 집행하는 관리로서 당신들은 근무중이든 비번중이든 미리엄이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지 못하도록 막을 권리가 전혀 없네.” 그는 두 파이오니아를 지방 경찰 관리들의 특별한 배려와 보호 속에 둠으로 사건을 결말지었다.

타우데 형제가 비록 몇 년 전에 사망하였지만, 문다에 있는 작은 회중은 계속 번창하고 있으며 노래와 전파 활동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정기적으로 찬양하고 있다. 그리고 파니두아 형제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여전히 좋은 소식의 충실한 선포자다.

거주 허가를 받은 선교인들

1980년에 길르앗에서 훈련받은 선교인들에게 솔로몬 제도 입국 비자가 나왔다. 처음으로 도착한 사람은 67기생으로 뉴질랜드 토박이인 로저 앨런과 쇼나 앨런이었다. 이전에는 선교인들과 파푸아뉴기니에서 온 순회 및 지역 감독자들에게 임시 입국만 허용되었었다. 1982년 4월에 더 많은 선교인이 왔다. 아르투로 빌랴신과 페피토 파갈이 필리핀으로부터 온 것이다. 핀레이 형제와 자매가 가족 책임 때문에 1985년에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였다. 바로 그해에 두 명의 경험 많은 선교인 즉 인도네시아에서 10년 간 그리고 파푸아뉴기니에서 8년 간 봉사한 길르앗 45기생인 요제프 노이하르트와 아내 헤라와티가 도착하였다. 그는 지부 위원회 조정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다음에 로레토 디마사카가 필리핀으로부터 왔으며, 그후에는 길르앗 70기생인 더글러스 로비니와 아내 루아나가 파푸아뉴기니에서 여러 해 동안 지낸 후에 그 나라에 입국하도록 허가되었다. 그는 지부 위원회의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테모투 주에서 십자가가 내려지다

호니아라에서 남동쪽으로 9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산타크루즈 제도를 포함하여 솔로몬 제도의 동쪽 변경의 섬들을 포함하고 있는 테모투 주가 있다. 테모투 주는 예외적인 곳이었다. 단 하나의 종교 즉 성공회만이 그 지방을 대표하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 다른 어느 종교도 그 섬들의 신중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에게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그러나 1976년에 성공회의 평신도 전도자인 존 메알루에를 지방 언어들의 번역자로 훈련시키기 위해 그가 몸담고 있던 교회에서 그를 파푸아뉴기니로 보냈다. 그 지방의 종교적 아성이 바야흐로 흔들릴 참이었다.

파푸아뉴기니에 거하는 동안, 존은 어느 날 아침 여호와의 증인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존은 난생 처음 왕국의 좋은 소식을 맛보았다. 몇 차례 토론한 후에, 존은 자신이 듣고 있는 소식이 성서 진리임을 신속히 인정하였다. 그는 산타크루즈 제도의 성공회 차기 주교로 선택되었지만, 언어 연구 과정을 그만두고 솔로몬 제도로 돌아갔다. 산타크루즈 제도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호니아라에 있는 지부 사무실에 들러서 회중을 설립할 목적으로 누군가 그의 섬을 방문할 수는 없는지 물어 보았다. 지부는 즉시 여러 가지 마련을 하기 시작하였다.

존은 고향에 돌아가자 친형제이면서 둘 다 교사인 제임스 소피와 드로맨 알릴보에게 증거하기 시작하였으나, 그들은 그가 전하는 소식을 반대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존의 형제들도 존이 되돌아온 이유를 알고 싶어하였다. 존은 그들에게 솔직하게 대답하였으며 그가 교직자들에 대해 실망한 점을 말해 주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하고 말하면서 그는 여러 가지 실례를 보여 주었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존은 그때까지 재치 있게 증거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존은 손에 도끼를 들고 말로 마을의 한복판으로 나아가서는 그곳에 있는 거대한 십자가를 찍어 넘어뜨린 다음 질질 끌고 가서 바다에 던져 버렸다. 감히 나서서 그를 만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존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법정에 서야 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거룩한 상징물을 쓰러뜨린 대가로 8일 안에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듣기도 하였다.

8일이 지나서도 존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것은 양 같은 사람들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이 일에 대한 소식이 삽시간에 퍼져나가서, 존이 법정에 섰을 때 지방 법원은 만원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테모투 주의 주도인 라타스테이션 일대에 사람들이 떼지어 모여들었다.

존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섰을 때 법정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릴 정도로 조용하였다. 그는 십자가의 기원과 그리스도교국의 위선 그리고 교직자들이 자신과 사람들을 어떻게 영적으로 암흑 시대에 가두어 놓았는가에 대해 자세히 말하면서 청중의 양심에 호소하였다. 재판관은 그에게 판결을 언도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소송은 기각한다. 그러나 사유 재산 파괴죄로 벌금 20달러에 처한다.”

교직자들은 패소하였다. 그들은 존이 교도소에서의 중노동 형을 언도받기를 원했었다. 그의 형제들인 제임스와 드로맨을 포함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법정에서 들은 내용에 감동을 받았으며 후에 진리 안으로 들어왔다.

평화로운 방법으로 전파함

1981년에 지부 건축에 2년 간 일하고 난 빌리 크왈로빌리와 조 크와수이가 테모투 주의 라타 공항에 새로 도착하였다. 그들은 이 새로운 구역에서 진리가 자라도록 돕기를 고대하였다. 새로 자격을 갖춘 전도인들은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참’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디모데 후 2:24) 예를 들어, 하루는 한 전도인 집단이 야외에서 증거를 하고 있는데, 교직자들의 부추김을 받은 성난 성공회 신자들이 폭도가 되어 전도인 한 명을 습격하고는 나머지 전도인들에게 자기네 마을에서 전파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새로운 전도인들은 증거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힘으로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폭도 전원을 마구 때렸으며, 반대자들 중 한 명의 다리를 부러뜨리기까지 하였다! 다행히도, 협회의 교훈과 그 파이오니아들이 본을 보인 결과 염려스러웠던 순간들은 다 지나가고, 새로운 전도인들은 결국 평화롭게 전파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빌리와 조는 다른 도전들도 직면하였다. 순회 감독자와 지역 감독자가 산타크루즈 제도에서 최초의 순회 대회를 열기 위해 3주 후면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큰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순회 대회를 열 장소가 없었던 것이다. 왕국회관을 위한 부지를 얻기 위해 즉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어디에서 얻는단 말인가? 넴바에 관심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성공회로부터 강한 반대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전통적인 지주들이 모두 교회 신자들이었으며 그 부근에 왕국회관을 짓지 못하도록 결사 반대하였다. 그래서 넴바에서 카누를 타고 세 시간 걸리는 말로 섬의 존 메알루에의 고향 마을에 짓기로 결정하였다.

파이오니아들이 존에게 접근해서 이러한 제안을 말하자, 존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원했던 일입니다.” 따라서 바로 그날에, 건축이 신속한 속도로 시작되었다. 건축 공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순회 감독자가 그 회중에 대한 정기적인 방문을 위해 도착하였으며, 그 또한 건축하는 일에 가담하였다. 지붕과 연단이 있고 삼면이 트이고 나뭇잎으로 만든 말끔하게 잘 건축된 회관이 순회 대회 프로그램을 고대하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때맞추어 세워졌다.

이윽고 존과 제임스와 드로맨이 그들의 아내들과 함께 침례를 받았다. 이 세 명의 친형제들은 성공회에서 높이 존중을 받던 사람들이었으나, 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나자 교직자들은 교육 관료들에게 압력을 넣었고 제임스와 드로맨은 해직되었다. 이 일에도 불구하고 두 형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땅과 바다를 생계 수단으로 삼고서 자신들의 시간을 사용하여 집집으로 다니면서 참다운 보물인 놀라운 왕국 진리에 관해 전파하기로 결심하였다. 곧이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가담하였다. 마침내 왕국회관이 넴바에 세워졌다. 회중이 후에 벨람나라는 마을로 이전하였다.

특별 파이오니아인 페스터스 푸누수이와 그의 아내 오바투레가 전파 활동을 더 잘 조직하기 위해 1988년에 벨람나로 임명되었다. 가두와 시장 증거가 라타스테이션에 도입되었다. 최근에는 벨람나에서 있은 순회 대회에 거의 200명이 참석하였다. 장래 성장의 전망은 밝다. 그들은 바로 라타스테이션 한복판에 500석 규모의 순회 대회 회관을 지을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확실히, 여호와께서는 성장을 축복해 오셨다.

리프 제도에서 “디퍼런트”의 무는 일

존 메알루에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나서 얼마 후에, 동쪽 변경에 있는 섬들의 무리, 리프 제도에 있는 가와의 마이클 폴레시가 호니아라 사범 대학교에 참석하고 있었다. 마이클은 성공회 신자였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증인들이 가두 증거를 하면서 나무 그늘에 서 있는 시장 옆을 지나가다가 어린아이들이 몇몇 연로한 전도인들을 놀리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들은 한쪽 다리의 일부가 절단된 증인인 벤저민 루우에게 듣기 싫은 말을 자주 퍼부었다. 마이클은 벤저민이 무릎 관절에 끈으로 묶은 나무 의족의 도움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가엾게 생각하여 그에게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을 받았다. 그는 국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산타크루즈 제도의 말로로 그 책을 가지고 갔다.

그곳에서 그는 존 메알루에의 형제 드로맨을 만났는데, 드로맨은 당시에는 아직도 국민 학교 교사였다. 마이클은 성서를 이해하도록 그를 도와줄 사람이 있어서 기뻤다. 안타깝게도, 학년이 끝나가고 있었으므로 마이클은 곧 리프 제도에 있는 자기 고향과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무렵, 그는 「진리」 책을 고작 세 장(章)밖에 읽지 못했었다. 하지만 성경에 대해 그처럼 제한된 이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마이클이 진리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는 일을 중단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직자들은 후에 제임스와 드로맨을 해직시킨 것처럼 라타스테이션에 있는 교육 관료들에게 마이클을 해직시키도록 압력을 넣었다. 마이클은 땅을 경작하여 먹고 살기로 결심하였다. 그와 아내 네이오미는 자녀들과 함께 마침내 마을에서 추방당하였다. 그들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새 집을 지었고 후에 왕국회관도 지었다. 그들은 마을을 떠날 때 “다른”이라는 뜻의 디퍼런트라고 부르는 강아지를 데리고 갔는데, 그렇게 부른 이유는 마이클이 말했듯이 “이것은 우리가 세상과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였기 때문이다. 마이클에 의하면, 디퍼런트는 오늘날까지 “여호와의 증인이나 관심자들이 아닌 사람들만의 엉덩이를 무는” 것으로 보아 역시 다른 점을 아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후에 제임스 소피와 빌리 크왈로빌리 그리고 조 크와수이가 7일 동안 마이클에게 영적인 격려를 베풀고 관심자들을 돌보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산타크루즈 제도로부터 배를 타고 도착하였다. 마이클은 열정적인 전도인이 되었으며 후에 호니아라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리프 제도에서 전도인으로 마이클에게 가담하는 사람들의 수가 계속 증가하였다. 따라서 1984년에 데이비드 키리테에와 벤 라모가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도착하였다. 그러나 상황이 그들에게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나뭇잎이 외치다

데이비드와 벤이 경험한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일부 리프 제도인들과 말라이타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감에 어느 정도 그 원인이 있었다. 이러한 적대적인 태도는 그 파이오니아들이 도착할 무렵 호니아라에서 경쟁 관계에 있는 성공회 파벌들 사이의 다툼이 있은 후에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말라이타인인 이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전파하기 위해 마음대로 아무 곳이나 가기가 어렵게 되었다. 설상 가상으로, 사람들은 주교와 사제들을 두려워하면서 살고 있다. 교직자들은 종종 협회 출판물이 사람들의 집에 있지는 않나 살펴보기 위해 사람들을 방문하곤 하였다. 만일 무엇인가 발견되기라도 하면, 집주인은 어김없이 아주 호된 질책을 당하기 마련이었고 사제가 그 출판물을 없애버릴 수 있도록 그것을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전파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증인이 오는 것을 보기만 해도 즉시 도망가 버리곤 하였다.

파이오니아들은 전파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나뭇잎을 사용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숲속의 오솔길이 만나는 곳으로 간 다음, 근처의 나무에서 큰 나뭇잎을 따다가 그 위에 큰 글씨로는 한 가지 성구를, 그리고 작은 글씨로는 그 성구에 대한 해설을 쓰곤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아주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곤 했습니다. ‘이 성구에 대해 더 이해하고 싶으시면, 솔로몬 제도의 여호와의 증인에게 편지하거나 부근에 있는 증인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데이비드와 벤은 그들의 나뭇잎 증거의 또 다른 실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한 가지 주제를 쓴 다음, 그 밑에다 ‘우리는 이것에 관해 전파해야 한다’라는 말과 함께 첫째 성구로 마태 복음 24:14을 쓰곤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 밑에다 ‘이 하나님의 왕국은 무슨 일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쓴 다음 마지막 성구로 계시록 21:4을 쓰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진리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곳에서 증거할 때면, 그 파이오니아들은 나뭇잎에 마지막 성구로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라는 시편 37:9을 사용하곤 하였다. 그들은 이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숲속의 오솔길 복판에 그 나뭇잎을 두고 떠나곤 하였다. 이 전파 방법이 좋은 결과를 낳았는가?

어느 날 한 파이오니아가 볼펜으로 나뭇잎 위에 한 가지 교훈을 기록한 다음 그것을 사람들이 잘 다니는 길 한복판에 주의 깊게 놓았다. 그는 저만치 걸어가서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기고 서 있었다. 그는 혹시 누가 그 나뭇잎을 줍지는 않나 보려고 호기심을 품고서 기다렸다. 놀랍게도, 개 한 마리가 길을 따라 어슬렁거리며 오더니 나뭇잎을 보고는 멈추어 서서 냄새를 맡는 것이었다. 그 파이오니아는 익살스럽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 개가 나뭇잎을 보고 짖기 시작하길래 글을 읽을 줄 아는가보다 생각했지요.” 그 개가 흥분해서 몹시 요란하게 짖어대는 통에 근처 숲속에 있던 사냥꾼은 개가 주머니쥐나 도마뱀을 나무 위에 가두어 놓은 줄로 생각하였다. 사냥꾼이 그 장소로 달려와 보니 그 개는 나뭇잎을 보고 짖어대면서 발로 긁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개를 옆으로 밀어내고 그 나뭇잎을 조심스럽게 집었다. 그는 잠시 나뭇잎에 적힌 교훈을 읽은 다음 소식이 적힌 나뭇잎을 조심스럽게 도로 길 복판에다 놓았다.

그 파이오니아는 이렇게 이야기를 끝맺는다. “그후에 그 사냥꾼의 집을 지나가는데, 그가 나를 큰소리로 부르더니, ‘길 위에다 무언가를 놓은 사람이 당신이오?’하고 묻더군요. 우리는 성경 토의를 시작하였고 곧이어 정기적인 성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그 남자와 그의 전 가족은 좋은 소식의 전도인입니다.”

맹인이 보다

빌리 크왈로빌리는 1986년에 결혼하였으며, 그는 신부 리나와 함께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리프 제도에 임명되었다. 그들이 좋아하는 성서 연구생들 중에 에리키라는 젊은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맹인이다. 에리키는 새와 곤충의 소리에 매료되어 있었으며 그 소리를 완벽하게 흉내낼 수 있었다. 크왈로빌리 부부와의 성서 연구를 통해, 그는 이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분에 관해 알게 되었다. 그는 또한 사람들이 아픈 이유와 자신이 맹인인 이유에 관해 알게 되었다. 연구할 장의 모든 항을 빌리가 큰소리로 낭독하였고, 에리키는 열심히 귀기울여 들은 다음 자신의 말로 그 모든 항의 질문들을 대답하곤 하였다. 에리키가 기억하는 성구는 30개가 넘게 되었다.

한 여행하는 감독자는 에리키를 방문하고 나서 이렇게 권하였다. “그를 말리지 마십시오. 그로 전파하게 하십시오.” 바로 그 주말에 에리키는 여덟 명의 전도인과 합류하여 울창한 숲을 헤치며 구역으로 걸어갔다. 그 여행하는 감독자가 우산의 한쪽 끝을 잡고 에리키는 다른 쪽 끝을 잡고서 빠르게 대열을 따라갔다. 이따금 “통나무가 길을 막고 있어요!” 혹은 “왼쪽에 바위가 있으니 조심하세요!”라는 외침소리가 들렸고, 그러면 에리키는 다리를 높이 들어 통나무를 타고 넘어가거나 바위를 피해서 옆으로 비켜 가곤 하였다. 에리키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희망에 관해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이 귀기울여 들었으며, 에리키가 암기한 성구들을 인용할 때면 자신들의 성서를 따라서 보다가 머리를 끄떡이며 놀라워하였다.

그 방문이 끝나갈 즈음에, 에리키는 여행하는 감독자에게 “가질 수만 있다면 꼭 갖고 싶은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성서와 노래책과 증거용 가방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왜 필요한 겁니까, 에리키 씨?”하고 여행하는 감독자가 물었다. 에리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가 왕국회관에 가거나 야외에 나갈 때, 저도 형제 자매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증거할 때 사람들은 제가 하는 말은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성서를 열어 그러한 말을 보여 주면 따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서와 노래책을 가지고 다니기 위해서는 가방이 필요합니다.” 얼마 후, 에리키는 두 가지 선물—새 성서와 노래책—을 받았다. 형제들은 가죽 가방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쌀자루를 반으로 자른 다음 그것에다 어깨에 메는 끈을 꿰매어 붙였다. 에리키는 자신의 증거용 ‘쌀 가방’도 선물로 받았다. 꿈 같은 것이 에리키에게 실현된 것이다. 온 회중이 그와 함께 즐거워하였다!

얼마 후, 마이클 폴레시는 다시 교사로 복직했다. 이제 그는 그러한 신분으로 리프 제도에 있는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할 수 있었다. 리프 제도에서 여자로서는 최초로 두 명의 여자가 산타크루즈 제도에서 열린 순회 대회에서 1990년에 침례를 받았을 때 한층 더 큰 즐거움이 있었다. 틀림없이, 테모투 주에서 앞으로 더 훌륭한 일들이 많이 있게 될 것이다.

좋은 소식이 마키라 주에 이르다

이전에는 증인들이 아무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구역의 문이 1984년에 열리게 되었다. 그곳은 산크리스토발 섬으로서, 부족 마을 지역들이 여전히 우세하였다. 그 섬에 전파할 목적으로 파이오니아들을 임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부족의 생활 방식이 방문객들을 맞을 채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장비 기계 운전자인 한 형제가 회사 일로 산크리스토발에 파견되었을 때 전파할 수 있는 전망이 더 밝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지부는 신속히 이 기회를 이용하여 현재 지부 위원인 특별 파이오니아 제임스 로노마엘라나를 산크리스토발로 파견하여 활동 개시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제임스는 그 섬에서 증거하는 동안 처음에는 많은 반대를 인내하였다. 어느 날 그는 “여호와의 사람들! 무단 침입 금지”라고 쓰여 있는 경고판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처럼 실망케 하는 많은 순간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열심은 식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감동적인 경험을 하는 축복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 마을에서 어느 큰 집에 가게 되었지요. 집주인은 코코넛 농장과 소들을 소유하고 있었고 분명히 이웃 사람들보다 훨씬 부유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진리를 들을 시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떠나가면서 자신의 소심한 행동을 비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왜 이곳에서 발길을 돌리고 있는가?’하고 준엄하게 자문한 다음 용감하게 이렇게 자답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가서 그 사람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그 집에 도착해서 집주인 부부 오즈월드 올리와 레이철 올리를 만났다. 제임스는 하나님께서 이름을 가지고 계시며 땅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지적함으로써 대화를 열정적으로 시작하였다. 그 부부는 하나님께서 땅을 낙원으로 회복시키실 것임을 알게 되자 관심이 고조되었다. 두 번째 방문에서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오즈월드와 레이철은 신속히 그들의 생활을 여호와의 의로운 원칙에 순응시키기 시작하였다. 오즈월드는 교회에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성공회로부터 그에게 격렬한 반대가 쏟아진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그 무렵에 그 구역의 문을 활짝 열도록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임명되자, 지방 교역자들은 더욱더 화가 나서 심지어 신자들에게 그 파이오니아들이 잠잠하도록 폭력을 사용하라고 지시하였다.

그 파이오니아들도 오즈월드와 그의 가족도 단념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특별 파이오니아인 한크턴 살라탈라우가 관심을 가진 한 남자에게 증거하고 있는 도중에, 성공회의 한 신자가 한크턴에게 욕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한크턴이 정중하게 떠나가자, 그 남자는 악의를 품고 한크턴을 뒤에서 공격하여 날카로운 산호 바위 위에 때려눕히고는 15분 이상 그의 몸을 무자비하게 걷어찼다. 마을 사람들은 공포 가운데 구경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교역자들에 대한 커다란 두려움 때문에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한크턴은 팔로 머리와 몸을 가리면서 속수 무책으로 땅에 쓰러져 있었다. 피범벅이 된 그의 등은 바위들에 베여 마치 한 조각의 날고기같이 보였다. 마침내, 얼마의 마을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끼어들었다. 몹시 구타당한 한크턴이 집을 향해 간신히 발걸음을 떼는 동안에, 그들은 그 공격하는 사람을 붙잡고서 말렸다.

불행하게도, 많은 섬 사람은 아직도 두려움이라는 교회의 사슬에 매여 있다. 그렇지만 일부 사람들은 참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국 사이의 차이점을 알아보기 시작하고 있다. 그 동안의 네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의 인내는 보상을 받았다. 열심히 일하는 두 개의 행복한 회중이 산크리스토발 섬에서 번창하고 있다. 오즈월드와 레이철 및 그들의 자녀들에 더하여 레이철의 친정 가족 역시 현재 좋은 소식의 두려움 없는 전도인들이다.

진기한 관습

말라이타 섬의 접근하기 어려운 많은 지역, 특히 산악 지대와 그 밖의 섬들에는 그리스도교국도 참 그리스도교도 접촉한 적이 거의 없는 부족들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조상 숭배자들이지만, 더러는 정령 숭배자들도 있다.

이전에는 순회 감독자였고 현재는 여덟 명의 자녀를 둔 가장으로서 특별 파이오니아인 엘슨 시테는 이러한 일부 지역들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옷을 거의 입지 않거나 전혀 입지 않는 것이 여러 부족 사이에서의 관습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이 누구든 옷을 입고 있으면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며 종종 그 마을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민감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엘슨은 계속 이렇게 말한다. “한번은 작은 회중의 한 집단이 전파하기 위해 어느 마을에 도착했는데, 추장은 마을에 있는 동안 형제나 자매들이 무슨 옷이든 걸쳐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형제들은 벌거벗고 다니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관습이 아니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중요한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 이렇게 먼 거리를 여행하여 왔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듣지 못하게 하는 이러한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추장은 마을의 연로자들과 한참 의논하더니 마침내 형제들이 당일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방문이 더욱 성공적이 되게 할 마련들을 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경계 바로 밖에다 나뭇잎으로 만든 집을 한 채 지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는데, 그 집을 이용하여 형제 자매들이 성서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그 집에 오고 싶어하는 마을 사람들을 옷을 입은 채로 누구나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지요. 이 방법은 마을 사람들이 영적인 것들에 관해 즐겨 이야기하기 때문에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일부 마을에서 의복과 관련된 제한 규정을 존중해야 했던 것 외에도, 신앙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 사이에서 구속력이 있는 다른 제한 규정들도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현재 순회 감독자인 아르투로 빌랴신은 이렇게 보고한다. “집단 증거를 인도하는 형제들은 마을 사람들이 영들을 노하게 할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매우 강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존중하는 데 매우 주의 깊다. 일부 마을에서는 마을을 지배하는 힘이 있다고 믿는 죽은 조상의 개인 이름을 말하는 등의 특정 단어나 이름들을 언급하는 것은 절대 금기로 되어 있다. 또한 신성시되는 나무들도 있으며, 남자들만 그 그늘에 앉을 수 있다. 한 해변 마을에서는, 특정 색깔의 옷을 입는 것은 무례한 행위가 된다. 즉 붉은 옷이나 검은 옷은 입을 수 없다. 따라서 겉장이 빨갛거나 검은 색깔의 책이나 성서는 증거하는 동안에 사용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

“어떤 마을에서는 여자가 일부 구역에 들어가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남자는 자기 아내가 아닌 여자와 함께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 이러한 관습들 중 하나라도 어기면, 반드시 즉시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들이 성공적으로 증거하려면 각 특정 마을의 규칙, 법, 제한들에 대한 상세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마을에 들어가기 전에, 집단을 인도하는 형제는 집단 성원들 특히 남성 본위의 관습들을 몰라서 어길 가능성이 다분히 있는 자매들이 마을에 있는 동안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해 자세히 토의한다. 마을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들을 공정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여호와의 의로운 원칙을 타협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기꺼이 조정을 한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반응을 보였으며 참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하는 관습들을 기꺼이 버렸다.”

악귀들에 의해 둘러싸이다

말라이타 섬에 있는 크와이오라는 산악 지방에 아이올로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대부분 여호와의 증인의 가족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이올로는 악귀 숭배로 둘러싸여 있지만, 여호와의 백성에게 피난처와 같은 곳이다. 그 마을의 밖을 보게 되면, 성역과 중립 지대 사이를 구별하기 위해 언덕 사면의 나무를 베어내서 언덕 꼭대기에만 숲이 울창한 성역이 있는 지역이 눈에 많이 띈다. 그곳에서 사제가 돼지를 신들에게 제물로 바친다. 제물의 일부는 사제가 먹는데, 때로는 다른 사람들도 먹는다. 그러나 여자는, 비록 자신이 돼지를 기르는 데 주된 역할을 한다 할지라도, 제물을 조금이라도 먹거나 제물을 실제로 바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며 어기면 사형에 해당한다. 제물을 바친 후, 제물을 바친 사제나 다른 사람들은 가족에게로 돌아가기 전에 일정한 날 동안 마을 안에 있는 신성한 집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대나무와 그 밖의 숲속에 있는 재료로 ‘속성으로 건축된’ 집이 아이올로에 세워졌다. 한 증인이 이 새 집을 소위 도피자들에게 제공하였다. 이들은 관심을 가진 개인 혹은 가족들로서 악귀 숭배로부터 도피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이올로에서 피난처를 발견하기 위해 악귀를 숭배하고 있는 자신들의 마을에서 도망쳤다. 한번은, 한 남편과 아내 그리고 그의 형제 자매 몇 명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도피해 왔는데, 그들이 마을의 악귀에게 돼지를 제물로 바치지 않음으로 악귀를 노엽게 했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형벌은 사형이었다!

며칠 후에 여행하는 감독자가 아이올로를 방문하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기울여 보자. “아내와 나는 한 형제의 집에서 베푼 식사에 초대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이 도피한 가족도 앉아 있더군요. 우리는 즉시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겁에 질려서 우리에게 등을 돌리더군요. 그렇지만 식사가 끝나갈 무렵, 그들은 환하게 웃으면서 우리를 마주보고 앉았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여호와를 사랑하고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다른 모든 형제 자매들과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는 입지 않은 긴 바지

그러면 빌랴신 형제에게로 돌아가서 현재 왜 긴 바지 대신 짧은 바지를 입는지 물어 보도록 하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 마을에서 우리는 한 집단의 전도인으로서 그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형제가 촌장에게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 형제가 촌장의 집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촌장이 그에게 나의 긴 바지를 갖고 싶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제 내가 근심 어린 표정을 짓게 되었습니다! 나는 여분의 바지가 없었으며, 순회 감독자가 바지도 입지 않고 돌아다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 형제가 빨리 돌아가서 촌장을 설득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즉 촌장과 마을 사람들은 아무 것도 입지 않아야 온전히 편안하게 느끼지만, 나는 완전히 다른 관습을 가지고 있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며 그러한 관습들 중 하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대중 앞에서는 벌거벗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도 촌장은 나의 바지를 몹시 탐냈습니다. 그러나 장시간 대화를 나눈 끝에, 그 형제는 촌장을 설득하여 내가 바지를 입은 채로 떠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요! 그때 이후로, 나는 어느 마을에서도 긴 바지를 입지 않았습니다. 다른 형제들과 똑같이 짧은 바지를 입습니다!”

또 다른 여행하는 외국인 감독자는 머리털이 쭈뼛해지는 경험을 하였다. 한 마을에서는, 누구든 “위키드”(악한)와 “워”(전쟁)라는 금지된 영어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 두 단어는 그들의 두 악귀의 이름이다. 이 이름들을 입밖에 내는 것은 위법 행위이며 어긴 사람은 반드시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지방 증인들이 전파하러 그곳에 갈 때, 새로 온 여행하는 감독자는 형제들에게 자신은 문에서 듣는 편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형제들은 찬성한 것이 아니라, 여행하는 감독자가 지방 관습에 잘 훈련되어 있으므로 문에서 말해야 한다고 강권하였다. 방문한 형제는 마침내 동의했다. 그는 숲속의 오솔길을 따라 산을 오르내리며 걸어가면서, 계속 혼잣말로 “전쟁이라는 말을 하면 안돼”, “악한이라는 말을 하면 안돼”하고 중얼거렸다.

그들이 드디어 구역에 도착했을 때, 한 남자가 여행하는 감독자와 다른 두 형제를 집으로 초대하였다. 그 두 형제는 대화를 시작한 다음 신경이 예민해진 여행하는 감독자를 소개하였다. 그는 간단하게 성경에 근거한 제공 연설을 하였고 만사가 순조로웠다. 집주인은 들은 내용에 대해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여행하는 감독자 역시 매우 만족해 하면서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을 편 다음 낙원에 관한 그림들을 보여 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난데없이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일소하실 것입니다.”

그 남자의 눈동자가 휘둥그래졌으며, 여행하는 감독자의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급히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두 형제에게 보내면서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그들은 마치 “그가 ‘전쟁’이라고 말하지 않았죠?”하고 말하는 듯이 집주인을 쳐다보았다. 집주인도 마치 “그럼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하고 말하는 듯이 그들을 되쳐다보았다. 그렇게 해서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대화가 끝났다. 그러나 여행하는 감독자는 지체 없이 아이올로로 돌아갔다.

솔로몬 제도의 관습과 의복 양식만 서구의 것과 다른 것이 아니라 건축 방법도 다르다. 그렇지만 두 가지 주요 건축 공사는 지방의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그분의 숭배자들 위에 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89년에 말라이타 섬의 아우키 사람들은 60명의 전도인으로 구성된 한 회중이 천 명이 넘는 대회 참석자들이 앉을 수 있는 순회 대회 회관을 건축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후 1991년 6월에, 호니아라 사람들은 1200석의 순회 대회 회관이 단 2주 만에 기초로부터 불쑥 솟아나는 듯이 보였을 때 눈이 휘둥그래졌는데, 속성으로 건축된 이런 규모의 회관은 태평양 지역에서 최초의 것이었다. 먼저 말라이타 섬의 건축 현장을 둘러보기로 하자.

“여호와께서 지으신 회관”

연장인 장도리 두 개와 끌 두 개로 시작한다. 수십 명의 자진 봉사자와 주변 습지의 숲에서 벌목할 수 있는 모든 재목이 더해진다. 이제 솔로몬 제도의 양식으로 1500석의 순회 대회 회관을 지을 자원이 갖추어진 것이다. 이 기적 같은 건축은 말라이타에서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커다란 찬양의 외침을 불러일으켰다. 930평방 미터의 시설을 건축하면서 극복할 수 없을 것같이 보이던 많은 어려움이 극복되었기 때문에 그 건물은 “여호와께서 지으신 회관”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말라이타에 임명된 선교인들은 1982년 6월에 아우키라는 큰 지방 읍에서 집회를 보면서, 65명의 전도인이 있는 지방 회중을 위해서 새 왕국회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로저 앨런과 두 명의 필리핀 선교인인 페피토 파갈과 아르투로 빌랴신이 집회에 참석해 있었다.

구왕국회관에는 흰개미가 들끓고 있었다. 매우 흔들거렸기 때문에 바람이 약하게 불어도 쓰러질 판이었다. 원래 15년 전에 아우키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한 400명에게 태양과 비를 피하는 임시 피난처를 제공하기 위해 건축된 것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 수명이 끝나가고 있었다.

아우키 회중에는 전 시간 직업을 가진 형제가 단지 두 명 밖에 없었으며, 그들의 수입은 매월 50달러(미화) 정도였다. 따라서 회중 성원들은 모두 먼저 건축 공사를 시작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는 일에 노력을 집중하기로 합의하였다. 파갈 형제와 빌랴신 형제가 회중 “조합”—필요한 기금을 얻기 위해 일하기를 원하는 회중 자진 봉사자들의 그룹—을 조직하도록 임명되었다.

회중 성원들은 손수 고구마와 양배추 작물을 재배하였다. 그런 다음 코코넛 잎으로 만든 바구니에 농작물을 포장해서 배로 호니아라에 보냈다. 호니아라에서 연로한 파이오니아 자매인 클레오파스 라우비나는 그 채소들을 최대한 높은 가격으로 판 다음 그 돈을 아우키에 있는 회중에 돌려보내 주었다. 또한 월요일마다, 40내지 50명의 형제 자매들이 도랑을 파고, 코코넛 농장에서 덤불을 제거하고, 손으로 콘크리트를 혼합하는 일을 함으로써 기금을 벌기 위해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였다. 그리하여 일을 시작한 지 3년 반이 지난 1985년에, 회중은 2000달러(미화)의 건축 기금을 적립하였다.

건축 공사를 확장하다

그러는 사이, 말라이타 섬에 있는 23개 회중 모두의 유익을 위해 건축 공사를 현저하게 확장하기로 결정하였다. “최고 70명의 전도인을 위한 왕국회관을 건축할 것이 아니라, 최고 1500명을 위한 순회 대회 회관을 건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하고 지방 증인들은 추리하였다. 그리하여 1500명이 앉을 수 있으며 강렬한 적도의 태양뿐만 아니라 솔로몬 제도의 특징인 빈번한 호우도 피할 수 있는 큰 건축물이 계획되었다.

길이가 30미터, 너비가 32미터 되며, 상승하는 더운 공기가 천장을 따라 배출되도록 점차 위를 향해 솟은 지붕을 갖춘 회관을 묘사하는 대강의 설계도가 그려졌다. 청중의 시선을 방해하지 않도록 회관 중앙에 기둥이 없게 설계되었다. 그 건물은 회중 소유의 2헥타르 부지 위에 세워질 것이었다.

1985년에 회중 건축 위원회는 저리의 융자를 얻었다. 얼마 후에 스웨덴 증인들이 꽤 많은 액수를 기부하였다. 따라서 총 1만 3500달러(미화)의 순회 대회 회관 기금이 건축 공사 착수금으로 마련되었다.

호니아라에 있는 제재소 관리인도 주요 받침 기둥, 툇기둥과 현관 기둥 그리고 중도리와 서까래에 더하여 지붕 트러스를 위해 필요로 하는 300개의 다듬은 통나무를 공급해 주기로 약속하였다. 호니아라에서 트러스를 제작한 다음 분해해서 짐배에 선적하여 아우키로 보내고, 아우키에서 재조립하여 주요 받침 기둥들 위에 세울 예정이었다.

건축 봉사자들은 열심이 있었고 시작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장비라고는 노루발장도리 두 개와 끌 두 개가 전부였다. 물론, 작업을 위해 기꺼이 돕고자 하는 자진적인 일꾼들은 많이 있었다. 그러나 말라이타 섬의 증인들 중에는 전문 건축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형제 자매들은 건축 공사를 감독하도록 나를 지목했지만, 나는 닭장도 만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하고 앨런 형제는 말한다.

증인들은 어떻게 여러 개의 지붕 트러스—각 트러스는 볼트로 죄어진 여덟 개의 큰 통나무로 되어 있으며 무게가 2 내지 5톤 가량 됨—를 땅에서 들어올려 6미터 높이의 받침 기둥들 꼭대기에 올려 놓으려고 했는가? 게다가, 중량이 큰 건축용 기중기도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12미터 가량 되는 높이에 지붕 꼭대기 부분을 올릴 것인가?

“모릅니다”하고 당시에 앨런 형제는 고백했다. “우리는 단지 우리를 도와달라고 여호와를 의지할 뿐입니다.”

반가운 도움

숙련된 도움이 1986년 10월에 멀리 바다 건너에서 왔다. 뉴질랜드 지부 사무실 건축에 참여했던 존 클라크와 마거릿 클라크가 아우키 회중의 곤경을 듣고는 말라이타를 방문할 수 있는 3개월 간의 비자를 얻을 수 있었다.

콘크리트 믹서를 선물로 받았으므로, 회중 성원들은 널찍한 연단과 연단 뒤에 익벽이 달린 콘크리트 블록 벽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삽 대신 맨손으로 깊은 구멍들을 판 다음 콘크리트로 채우면서, 그 속에다 벽과 지붕과 베란다를 위해 18개의 주요 받침 기둥을 고정시켰다.

클라크 형제로부터 훈련을 받은 후에, 원주민 형제들은 직접 강당의 지붕 트러스들과 세 개의 현관 지붕 트러스를 재조립하였다. 그렇지만 이 무거운 트러스들을 제자리에 설치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트러스는 여덟 개의 통나무를 볼트로 연결하여 거대한 삼각형 모양으로 만든 것이므로, 그 일은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것이었다. 형제들의 결단력과 창의력은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다.

통나무의 춤

그처럼 들어올리는 엄청난 일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장비라고는 임시 변통의 기중기 역할을 하는 도르래 장비뿐이었다. 기중기 자체는 8개의 통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무게가 2톤인 첫 번째 트러스를 새로 건축한 콘크리트 블록 벽 위로 들어올려 그 뒤에 있는 두 개의 받침 기둥에 올려놓아야 하였다. 기중기에 트러스 꼭대기 부분을 묶어 수직으로 들어올렸을 때, 형제들은 그 기중기로는 콘크리트 벽을 넘을 수 있을 정도로 트러스를 높이 들어올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낙담하였다. 1미터가 짧았던 것이다! 형제들이 한숨을 지으면서 그 문제를 위해 궁리를 짜내던 이틀 동안, 트러스는 기중기에 매달린 채로 통나무에 받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지나가면서 “여호와가 당신들을 위해 트러스를 들어올려 주실 수 없나 보죠?”하고 비웃곤 하였다.

“잘되어 갑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도와주실 겁니다!”하고 형제들은 외쳤다.

봉사자들에게 창조적인 영감이 스쳐 지나갔다. 픽업 트럭의 잭을 트러스의 한쪽 끝 밑으로 밀어넣고서 트러스를 몇 센티미터 들어올렸다. 그런 다음 트러스의 그 끝을 그만큼 높이 받쳐 놓았다. 그리고는 트러스의 다른 쪽 끝을 들어올리기 위해 그 끝쪽으로 잭을 옮겨 그것 역시 더 높이 들어올린 다음 받쳐 놓았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는 나흘 동안의 곡예를 통해 첫 번째 트러스를 조금씩 들어올려 마침내 콘크리트 벽을 넘긴 다음 지정된 받침 기둥 위에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대단한 성공에 고무된 형제들은 현장 주변에서 큰 원을 그리고서 손뼉을 치고 행복한 어조로 노래하면서 춤을 추었다.

건축 공사가 마무리되고 그 잭을 사용하여 세 개의 트러스—하나의 무게가 무려 5톤이나 됨—를 성공적으로 들어올린 후에야, 비로소 형제들은 들어올릴 수 있는 중량을 표시하는, 잭 옆에 찍혀 있는 희미한 글자가 그들이 믿던 대로 “15톤”이 아니라 사실은 “1.5톤”임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형제 자매들이 행한 일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하고 앨런 형제는 말한다. “허공으로 들어올린 그 거대한 트러스들을 보는 것은 마치 통나무의 춤을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여호와는 회관을 지을 없나 보죠?”

1987년 1월에 건축업을 하는 두 명의 원주민 형제가 호니아라에서 아우키를 방문하였다. 그들은 트러스들을 조사해 본 후에 제재소가 모르고서 부적합한 과실수 통나무를 보내왔으며 그러한 통나무는 감쪽같이 내부로부터 썩기가 십상이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통나무가 중심부에서부터 썩기 시작하므로 전부 교체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4개월 후에, 낙담케 하는 그 진단이 옳음이 증명되었다. 공급받은 통나무의 대부분이 썩어 갔으며, 이미 해놓은 어려운 건축 작업의 대부분을 다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클라크 형제와 자매가 오클랜드의 스티븐 브라운과 앨런 브라운을 동반하고 7월에 아우키로 다시 왔다. 그들은 완공된 뉴질랜드 지부 건축 현장에서 기증한 장비를 가지고 왔다. 그 뉴질랜드 사람들은 회관의 지붕 구조물을 완공할 의도로 방문을 계획하였으나, 오히려 그들의 일은 지난해에 세운 구조물들의 많은 부분을 철거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러나 형제들이 견뎌야 했던 가장 큰 어려움은 무개 트럭을 타고 현장 옆을 지나가면서 통행인들이 내지르는 끊임없는 조롱과 아우키의 시장이나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던지는 굴욕적인 말들이었다.

“여호와는 회관을 지을 수 없나 보죠?”하고 그들은 야유하였다. “당신들이 거짓 종교를 믿고 있다는 증거예요”하고 조롱하기도 하였다. “건물을 지은 다음 도로 부수는 것은 미친 사람들만이 하는 짓이라구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건축 현장을 지나가다가, 낙심해 있는 봉사자들 앞에서 고소하다는 듯이 춤추고 노래하였다. 지방 형제들은 매우 낙심한 나머지, 네 명의 선교인에게 “이 일에 여호와의 이름이 관련되어 있지 않다면 지금 당장 이 회관에서 나가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하였다.

단명으로 끝난 조롱

조롱자들의 비웃음은 때때로 단명으로 끝났다. 예를 들어, 1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열리는 특별한 교회 행사를 위해 가고 있던 캐롤 합창단이 트럭을 타고 현장을 지나가다가 큰소리로 모욕적인 말을 하면서 건축 봉사자들을 비웃었다. 건축 현장에서 1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트럭이 고장나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으므로,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었다.

그 차가 고장났다는 소식이 건축 현장에 알려졌을 때,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는 교훈이 베풀어졌다. (로마 12:17) 그러나 공사장 트럭 뒤에 탄 일부 형제들은 잠시 후에 꼼짝 못하게 된 캐롤 합창 단원들 옆을 지나가면서,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원조의 손길을 뻗친 코나 마을

제재소에서 보내준 통나무 중에서 썩지 않은 것은 38개뿐이었다. 그래서 필요로 하는 300개 통나무 중 결손 부분을 어딘가 다른 곳에서 들여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어디에서 들여온단 말인가? 건축 현장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코나 마을의 증인들이 건축 봉사자들에게 와서는 자신들의 땅에 있는 특별히 단단한 재질의 나무를 기증하겠다고 제의하였다. 주요 받침 기둥, 툇기둥과 현관 기둥 그리고 강당의 지붕 트러스가 그 재목으로 대체될 것이었다. 이것은 코나 마을의 그 증인들에게는 큰 희생이었는데, 나무(Namu)라고 하는 사이클론에 의해 말라이타 섬이 황폐되었으므로 파괴된 집들을 다시 짓기 위해 특별히 남겨둔 나무들이었기 때문이다.

통나무를 얻기 위해, 아우키 회중의 자매들은 벌목 반출 장소로부터 간선 도로에 이르기까지 울창한 밀림을 관통하는 길이 0.8킬로미터, 너비 6미터 되는 도로를 만들었다. 그들은 한껏 힘을 모아 새 도로에서 나무들을 잘라내고, 도랑 위에 다리를 놓고, 장애물들을 제거하였다. 그런 다음 정선된 나무들을 베어 넘어뜨리고, 가지들을 치고, 동력 사슬톱으로 켜서 각재를 만들 수 있었다.

“우리는 개미와 같습니다”

새 재목들은 사면이 각각 36센티미터, 길이 6.4미터인 각재로 켜졌다. 그러나 이 거대한 통나무들을 어떻게 0.8킬로미터 떨어진 간선 도로로 옮길 것인가?

회중 성원들은 이렇게 응답하였다. “우리는 개미와 같습니다! 일손이 충분하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라도 옮길 수 있습니다!” (비교 잠언 6:6) 통나무를 옮길 형제 자매들이 더 필요할 때면, 벌목 장소에는 “개미들아! 개미들아! 개미들아!”하고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곤 하였다. 형제 자매들은 거들기 위해 사방에서 모여들곤 하였다. 40명의 형제 자매들이 맨손으로 0.5톤이나 되는 통나무를 들어올려 길을 따라 간선 도로까지 나른 다음, 트럭으로 건축 현장까지 운반하곤 하였다.

기둥들을 제자리에 고정시키는 일은 위험한 작업이었다. 다시 한번, 원주민식 작업 방법이 매우 성공적임이 증명되었다. 각 기둥은 현장에 도착하는 즉시 깊은 구멍에서 3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쌓아졌는데, 그 구멍 안으로 기둥을 내려뜨려 콘크리트로 고정시켜야 하였다.

30명의 형제 자매들이 십자 모양의 받침 위로 기둥의 꼭대기 부분을 들어올렸다. 그 다음에 그 기둥이 지면을 가로질러 나아가도록 빠른 속도로 밀어 기둥의 바닥 부분이 지정된 구멍을 향해 미끄러져 들어가게 하였다. 매우 용감한 두 명의 형제가 구멍 반대편에서 두꺼운 판자 조각들을 붙잡고 서 있었다. 미끄러뜨린 통나무가 그 판자를 맞추게 되면 갑자기 멈추게 되고, 그 결과 전진 운동을 하던 기둥은 그 여세에 의해 똑바로 세워져 기초 구멍 속으로 떨어졌다.

실수가 축복으로 바뀌다

다음으로 회관에 지붕을 얹을 차례였다. 그러나 이 무렵에 건축 기금이 완전히 바닥나서 회중은 건물을 위한 강철 지붕을 살 수가 없었다. 고맙게도,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는 그 형제들이 처한 곤경을 알았을 때, 1만 달러(미화)를 선물하였다. 그 액수는 지붕을 사는 것뿐만 아니라 순회 대회 회관 청중석을 완성하는 데도 충분한 것이었다.

은회색으로 도장된 강철 지붕을 위해 판금 회사에 6000달러의 보증금을 지불하였다. 그 지붕이 비록 색깔도 탐탁치 않고 두께나 품질도 건축 위원회가 원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그들의 능력의 전부였다. 그런데 아찔하게도, 건축 봉사자들이 필요로 하는 강철 지붕이 이미 새 교회를 건축하려고 하는 호니아라의 다른 종교 그룹에게 팔려 버리고 난 뒤였다. 공급 회사측은 혼선을 빚은 데 대해 사과하였으나, 그런 형의 지붕 재료가 더 이상 재고로 남아 있지 않았다.

1주일 후에, 그 회사는 증인들에게 더 나은 품질의 재고품 즉 더 두꺼운 지붕 재료가 도착했다고 알려 왔다. 그러나 회사측의 실수였기 때문에, 회중은 그것을 상당히 할인된 가격—건축 기금의 예산 안에서 충분히 살 수 있는 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은, 새 강철 지붕이 한층 매혹적인 짙은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원래 형제들이 사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사지 못했던 것이다.

1987년 12월에, 지붕 청부업자인 헨리 도널슨 형제가 뉴질랜드로부터 왔다. 아름다운 1100평방 미터의 지붕을 얹음으로 건축 공사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이제, 형제 자매들은 그들에게 괴로움을 주던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승객용 트럭이 건축 현장을 지나갈 때마다, 마침내 거의 완성된 건물을 보란듯이 가리키면서 노래하고 춤출 수 있게 되었다!

며칠 후 그 회관이 처음으로 사용되었을 때, 그들이 느꼈을 즐거움을 상상해 보라. 지구 감독자로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비브 모리츠가 593명의 청중에게 연설했다. 모리츠는 자기 희생과 인내의 영을 가지고 이 거대한 건축 공사에서 매우 열심히 일해 온 모든 자진 봉사자를 칭찬하였다.

임시 변통

말라이타에 있는 이 순회 대회 회관은 어떻게 거대한 일이 현대 건축 장비와 상업용 재료 없이도 수행될 수 있는지에 대한 본보기 역할을 한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어떻게 축복하시는가에 대한 증거로서 서 있다. 보다 부유한 나라들에서는 절대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삽이나 가래 같은 가장 기본적인 연장조차도 없이 작업을 진행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산호질의 흙을 캐내서 자루에 담아 건축 현장으로 나르는 일이 필요했을 때, 자매들은 날카로운 막대기로 사력층에서 산호질의 자갈을 판 다음 맨손으로 날카롭고 들쭉날쭉한 자갈을 집어 자루에 넣었다. 단 하루 만에, 자매들은 3톤짜리 트럭 13대분의 산호를 파서 트럭에 실었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임시 변통한 또 다른 예는 현장에서 하나뿐인 외발 손수레의 바퀴가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고 솔로몬 제도에서는 어디에서도 대체품을 구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인들은 조금도 단념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체용 바퀴가 5주 후에 뉴질랜드로부터 도착할 때까지, 손수레에 콘크리트를 가득 담은 다음 단순히 들어올려 필요한 장소로 날랐다.

여러 가지 부수적인 작업을 한 후, 드디어 이 순회 대회 회관이 1988년 10월에 “하나님의 공의” 지역 대회를 위해 사용되었다.

이어서 과달콰날 섬에 있는 호니아라 건축 현장을 둘러보기로 하자.

2주 만에”

“단 2주 만에!” 이 말이 곧 호니아라 시에 두루 퍼졌다. 반응은 호기심이나 놀람 아니면 회의였다. 어떻게 1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건물이 2주 만에 세워질 수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선진 세계의 기술 장비라고는 없는 한 섬에서 어떻게 바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현대의 과학 기술과 개인의 기술은 이 건축 공사의 성공의 열쇠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이클론을 견디면서도 안락하고 연단과 음향 시설을 갖춘 순회 대회 회관이, 운송 및 토목 공사가 날과 주가 아니라 달과 해의 기한으로 계획되는 이 나라에서 절실히 필요하였다.

기초가 모습을 드러내자, 지방적인 관심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기초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세워질 건물의 규모를 이해하기 시작함에 따라 점점 회의의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들은 “이런 대형 건물을 어떻게 단 2주 만에 지으려고 하는 겁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곧 큼직한 강철 부분품들이 들어 있는 여러 대의 컨테이너가 도착하여 배에서 하역되었다. 호니아라 정부 관리들은 일부러 수입 절차를 설명해 줄 정도로 매우 협조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솔로몬 제도 당국 또한 모두 오스트레일리아의 증인인 약 60명으로 이루어진 자진 봉사자팀이 호니아라에 와서 실제로 2주일의 건축 기간 동안 지방 증인들과 함께 일하도록 허가하였다. 형제들은 관리들의 친절한 배려와 도움에 얼마나 감사하였던가!

1991년 6월 7일에, 형제들은 호니아라 공항에서 미소 띤 검은 얼굴에 보석처럼 빛나는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붉은플루메리아 화환과 이 국제적인 형제 관계를 독특하게 만드는 사랑으로 건축팀을 맞이하였다. 처음의 수줍음은 모든 봉사자가 바로 다음날부터 여호와께 드리는 숭배를 위한 큰 집을 건축하기 시작하자 곧 사라져 버렸다. 각 숙련공은 함께 일하도록 임명된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술을 흔쾌히 전수하였다. 한 지방 물품 공급업자는 강철 구조물을 올려다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이전에 25톤의 강철을 세우는 공사를 하는 데 석 달이 걸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단 이틀 반 만에 30톤을 올린 겁니다!”

속성으로 짓는 순회 대회 회관의 공사가 시작된 지 꼭 15일째 되는 날에, 첫 번째 모임이 열렸다. 방문한 형제와 자매들은 어느덧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공항에서의 광경은 그들이 도착했을 때의 광경과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했다—붉은플루메리아 화환을 건네주고 모든 사람이 지칠 정도로 악수와 포옹을 하였는데, 이번만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오늘날의 “행복의 제도”

행복하신 하나님의 좋은 소식이 최초로 솔로몬 제도에 전해진 이래로 35년 이상이 흘렀건만, 산타이자벨, 쇼틀랜드, 레늘, 벨로나, 티코피아, 시카이아나, 울라와처럼 전체 섬이 아직도 왕국의 좋은 소식이 조직적인 방법으로 전파되고 있지 않는 섬들도 있다. 때는 확실히 무르익어 보다 광범위한 증거를 수행할 때다. 비록 솔로몬 제도 사람들 자신이 그들의 나라를 “행복의 제도”라고 부른다 할지라도, 압력을 가하는 문제들은 여전히 상존한다. 솔로몬 제도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오늘날은 실로 “처신하기 어려운 위험한 때”다. (디모데 후 3:1, 「신세」)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생활을 한다. 보다 많은 사람이 촌락 생활에서 도시 생활로 전환하는 것이 사회적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 있으며,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지혜와 위안의 유일한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에서 올바르고 마음을 평안케 하는 해결책을 지적할 수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많은 지방 사람들은 여호와의 영이 그분의 백성 가운데서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말라이타 섬의 아우키에서, 그들은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거의 없는 60명의 전도인으로 이루어진 한 회중이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영적 형제들로부터의 사랑 넘친 도움과 미국과 스웨덴으로부터의 재정적인 도움으로 1500석의 아름다운 순회 대회 회관을 건축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결과, 그곳의 많은 관심자들이 여호와의 백성과 연합하고 있다.

남태평양 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나 그림을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종종 잘못된 인상을 받는다. 그들은 그 섬들이 낙원이며, 따라서 그곳의 삶에는 힘든 일도 없고 파이오니아 봉사가 마냥 즐겁기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사진에는 모기, 눈에놀이, 사이클론 혹은 약한 지진이 보이지 않는다. 사진에는 또한 옷과 책과 그 밖의 다른 물건에 곰팡이가 슬게 하는 100퍼센트의 습도도 나타나지 않고, 열대 질병과 뱀과 악어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므로 솔로몬 제도의 보배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 보배는 여호와를 숭배하는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이들이 “만국의 보배”임—곧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자신들의 생활을 조정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학개 2:7) 솔로몬 제도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눈에 보배로운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친절과 하나님의 법을 배우고 적용하려는 그들의 자진성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그들의 충성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행복의 제도”의 겸손하고 행복한 여호와의 종들이 영적인 것들을 그들의 생활에서 첫째로 둠으로써 참되고 지속적인 유일한 행복을 추구할 때, 여호와께서 그들의 일을 계속 풍성하게 축복하시기를 기원한다.—마태 5:3; 6:33.

[각주]

^ 9항 더 알아보려면,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참조.

[252면 도표]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솔로몬 제도

1,200

1954 1

1960 135

1970 553

1980 497

1991 851

최고 전도인 수

100

1954

1960 3

1970 57

1980 69

1991 70

평균 파이오니아 수

[208면 네모와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솔로몬 제도

온통자바 환초

남태평양

쇼와즐

쇼틀랜드 제도

기조

뉴조지아 제도

문다

산타이자벨

말라이타

말루우

아우키

과달카날

호니아라

벨로나

레늘

마키라 주

울라와

산크리스토발 (마키라)

테모투 주

리프 제도

산타크루즈 제도

라타

[지도]

적도

파푸아뉴기니

오스트레일리아

[네모]

솔로몬 제도

수도: 과달카날 섬의 호니아라

공용어: 솔로몬 제도 피진어와 영어

주요 종교: 성공회

인구: 32만 8723명

지부 사무실: 호니아라

[210면 삽화]

과달카날 섬의 북부 해안에 있는 호니아라 항구

솔로몬 제도의 어린이들

[212면 삽화]

과달카날 섬의 호니아라에 있는 지부 사무실

[213면 삽화]

최초의 지부 사무실 앞에 서 있는 존 시컴과 보브 시컴

[217면 삽화]

좋은 소식이 여섯 개의 주요 섬 전역과 수십 개의 보다 작은 섬들 사이에서 활기차게 전파되어 왔다

[218면 삽화]

웨스턴 주, 기조에 있는 왕국회관. 숲에서 얻은 재목과 엮거나 꿰맨 야자나무 잎이 일부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데 사용된다

[227면 삽화]

타로토란 잎은 우산으로 사용된다. 이 잎 위에 소식을 기록할 수도 있다

[233면 삽화]

특별 파이오니아인 엘슨 시테와 그의 가족

[243면 삽화]

늪지에서 운반한 다음 동력 사슬톱으로 켜 각재로 만든 통나무들을 트럭에 적재한다. 각재로 만들어진 통나무(벽기둥)를 아우키의 대회 회관을 위해 기초 구멍에 박는다

[244면 삽화]

여덟 개의 통나무를 볼트로 죄어서 무게가 5톤까지 나가는 거대한 지붕 트러스들을 만든다. 트러스들을 건축용 중장비의 도움도 없이 6미터 높이의 받침 기둥들 꼭대기에 올려 놓는다

[245면 삽화]

말라이타 섬 아우키에 있는, 1500석의 완공된 대회 회관

[249면 삽화]

사이클론과 지진을 견디도록 만들어진 골조

과달카날 섬의 호니아라에 있는 1200석의 “대형 건물”

[251면 삽화]

지부 위원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제임스 로노마엘라나, 요제프 노이하르트, 로드니 프레이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