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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와 인근 나라들

케냐와 인근 나라들

케냐와 인근 나라들

백사십사 년 전 런던은 흥분에 휩싸여 떠들썩했다. 독일인 탐험가, 요하네스 레프만이 동아프리카에 있는 거대한 산, 너무 높기에 꼭대기가 항상 눈으로 덮여 있는 산을 보았다고 보고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흥분케 하는 이 소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지만, 지리 전문가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도에 눈이 있다고? 그건 레프만의 상상일 뿐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였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후 다른 유럽 탐험가들이 백인들이 그때까지 본 적이 없는 사람들, 숲속에 사는 원시 난쟁이족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와서 전했다. 이 때에도 전문가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런 이야기는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 언급된 두 가지 경우, 전문가들의 견해가 옳지 않았다. 더 탐험한 결과 일년 내내 눈으로 단장하고 우뚝 솟아 있는 산, 킬리만자로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피그미족, 즉 평균 신장이 137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동아프리카, 이 얼마나 경이로운 땅인가! 지구 전역에서, 아프리카의 이 지역처럼 흥분을 자아내는 것과 색채와 아름다움과 매력을 지닌 곳도 드물다. 이 지역에는 만년설의 모자를 쓰고 있는 산들뿐만 아니라, 작열하는 사막들도 있다. 이 지역에는 세상에서 키가 가장 작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키가 가장 큰 사람들인 투시족과 딩카족도 살고 있다. 이들 키다리 종족 중에서는 키가 213센티미터인 사람이 드물지 않다.

사람들과 언어

실로 엄청난 다양함을 지닌 땅이다. 이곳에 사는 1억 5천만 명의 사람들은 350개가 넘는 인종 집단으로 나누어져 있다. 탄자니아 한 나라에만 해도 그러한 인종 집단이 125개 정도나 된다. 케냐에는 나이로비의 현대적 상업 지역에 많이 있는 키쿠유족을 비롯하여, 가축의 젖과 피를 주식으로 삼는 유목민, 마사이족에 이르기까지 약 40개나 되는 종족이 있다.

동부 아프리카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여러 가지인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는 여러 가지 주요 어족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거기에서 갈라진 아족(亞族)과 지방어로 분류하면 그 수는 수백 가지로 늘어난다. 에티오피아에서 사용되는 언어만 해도 백 가지가 넘는다. 물론, 이 수에는 동부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연합시킬 “순결한 언어”도 포함된다.—스바냐 3:9, 「신세」.

산, 호수 그리고 동물

동부 아프리카는 대부분이 열대 지역이지만, 고원으로 이루어진 내륙 지방은 무더운 해안 지역에 비하면 서늘하다. 이 지역을 북에서 남으로 갈라놓고 있는 것은, 길이가 6400킬로미터나 되는 그레이트리프트밸리 지구대이다. 이 지구대를 따라 사화산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한 산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킬리만자로 산이다. 거의 6000미터나 되는 이 산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북쪽으로 더 가면 케냐 산이 있다. 이 산맥의 기슭은 태양이 작열하는 적도에 있지만 두 봉우리는 만년설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실로 지형상의 모순 아닌 모순이다.

산등성이들 사이에 자리잡은 호수들에는 각양 각색의 많은 물새들이 서식하고 있다. 그중 몇 가지만 이름을 대 보면, 사다새, 물총새, 거위, 두루미, 백로, 황새, 따오기 그리고 노랑부리저어새 등이 있다. 그러한 호수들에 들어 있는 고농도 탄산나트륨은 홍학이 좋아하는 갑각류의 일종인 브라인 슈림프와 남조(藍藻)류가 잘 자라게 해준다. 동아프리카에는 우아함을 자랑하는 이러한 새들이 근 이백만 마리나 서식하고 있다. 이 대륙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감동적인 장면들 중 하나는 파란 아치형의 넓은 하늘에 핑크색 물을 들이면서 거대하게 떼지어 날아가는 홍학들의 모습이다.

어디를 보든 이국적이고 흥분을 자아내는 예쁜 새들이 있다. 무지개 빛깔의 태양새는 꽃에서 단물을 홀짝홀짝 빨아먹는다. 연노랑멋쟁이새는 파피루스에다 정교하게 보금자리를 짓는다. 독수리는 구름 사이를 힘들이지 않고 미끄러지듯 날아다닌다.

물론, 큰 짐승들도 있다. 초원에 가면 코끼리, 얼룩말, 코뿔소, 물소, 기린, 사자, 표범 그리고 60종이 넘는 영양을 구경할 수 있다. 무려 만 마리나 되는 아프리카산 영양인 누의 떼가 우레 같은 소리를 일으키면서 질주하는 것이나, 베르베트 원숭이가 아카시아 나무 위에서 노려보는 것이나, 호리호리한 타조가 먹이를 찾아 헤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 지구상에서 가장 무더운 곳 중 하나인 다나킬 평야에서든, 고릴라가 서식하는 달의 산에서든, 백 살이 넘은 거북이들이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흰 모래 해변에서든, 동부 아프리카는 다른 어느 곳과도 다른 곳임을 알게 될 것이다.

종교적 양상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동부 아프리카 사람들은 에티오피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종족의 종교를 따랐다. 그 나라에서만은 에티오피아 정교회가 기원 4세기부터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러나 홍해 바로 건너 메카가 있고, 계절 따라 부는 무역풍을 타고 아랍 돛배들이 페르시아 만에서 동아프리카 해안으로 드나듦으로 인해 곧 회교 추종자들이 생겨났다. 18세기와 19세기중에는 아프리카의 대호수들과 잔지바르 항구 사이에 주요 공급처가 있는, 돈벌이 좋은 노예 무역을 통해 회교도들은 더 멀리 남쪽으로, 그리고 내륙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오늘날 우간다, 케냐, 르완다, 세이셸 등 일부 나라에서는 비율이 좀 낮기는 하지만 동아프리카 인구의 근 40퍼센트가 회교를 따르고 있다.

19세기에는 또한 유럽 탐험가들과 선교인들이 들어와, 식민 정책의 기초를 놓았다. 대영제국은 영국과 이집트의 공동 관리국인 수단과 영령 동아프리카로 알려진 곳에다 말뚝을 박고 그 권리를 주장했다. 소말릴랜드는 영국인과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에 의해 나눠졌다. 벨기에는 르완다와 우룬디(오늘날의 부룬디)를 관리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를, 독일은 지금의 탄자니아인 독령 동아프리카를 다스렸다. * 그리스도교국의 선교인들은 각 교회가 권익을 행사하는 범위에 따라 이 지역들을 나누어, 특정 “교회”가 특정 지역에서 독점권 같은 것을 갖게 용납했다. 학교를 짓고, 병원을 세우고, 여러 가지 언어로 성서를 번역하였다.

현재 케냐의 인구 중 3분의 2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며, 한편 동부 아프리카 전역에서 그리스도인의 수는 그 인구의 절반이 좀 못 된다. 일부 종족은 정령 숭배를 지속하고 있으며, 오늘날 이러한 전통을 좇는 숭배자들은 인구의 4분의 1 내지 5분의 1에 이른다. 아시아에서 이민 온 사람들은 동양 종교에 고착하고 있다.

보다 최근에 와서는 아프리카 국가주의가 득세하여, 1960년대에는 나라들이 잇따라 독립을 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로 인해 숭배의 자유가 더 많이 허용되었다. 국가주의는 또한 많은 자칭 예언자들이 생겨나도록 문을 열어 주었고, 그들은 그리스도교국의 종교들을 아프리카식으로 바꾸었으며, 수백 가지 종파가 새로 생겨나, 그들 사이에 경쟁과 혼란이 심해졌다. 신앙의 차이가 증오로 변하여, 일부 종교인들에 대한 격렬한 박해가 일어났다.

식민지 정치와 투기적 사업에 관여해 온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본을 세우지 못하였고, 또한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지속적인 도덕적 변화도 가져다 주지 못했다. 이제 동부 아프리카에서 성서 진리가 빛을 발할 때가 온 것이다.

초창기 파이오니아들이 횃불을 밝히다

이름난 탐험가, 리빙스턴과 스탠리가 탕가니카 호숫가에서 만난 지 약 60년이 지난 후, 나일 강의 남단 수원이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을 때, 성서 진리의 빛을 아프리카의 이 지역에 비추기 위한 최초의 노력이 기울여졌다. 이 무렵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성경 연구생들이 이미 아주 활동적이 되어 종교적 거짓을 폭로하고, 현시대 사건들의 의미에 대해 사람들을 일깨우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서해안과 대륙의 남단에 위치한 케이프에서 시작했다.

만국 성경 연구생이 여호와의 증인이란 새로운 성경적 이름을 채택한 해인 1931년에, 케이프타운에 있던 워치 타워 협회 지부는 대륙의 동부 해안 지역과 가능하다면 내륙 지방에서도 성서 진리의 씨를 뿌릴 방법들을 강구하였다. 케이프타운 출신의 담대한 파이오니아 봉사자 두 사람, 그레이 스미스와 그의 형인 프랭크가 좋은 소식을 전파할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영령 동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들은 이동 주택차로 개조한 데소토 자동차를 가져갔으며, 그것을 40상자의 책과 함께 배에 싣고서 케냐의 항구 도시, 몸바사로 떠났다. 최근에 건설된 철길은 몸바사를, 케냐의 고원 지대를 지나 우간다와 연결해 놓았다. 그래서 몸바사에서 두 파이오니아는 가져간 값진 책들을 기차편으로 나이로비에 보냈다. 나이로비는 1.6킬로미터의 고도에 자리잡은 수도로서, 약 20년 전에는 단지 날림 공사로 지어 놓은 몇 채의 철도 보급 창고만이 있던 곳이었다.

당시 두 스미스 형제는 나이로비까지 장장 580킬로미터의 여행길을 나섰다. 오늘날 여행자들이 포장된 현대식 도로로 이 거리를 지나가는 데는 약 일곱 시간 걸리지만, 그 당시에 짐을 가득 실은 이동 주택차를 타고 이 거리를 여행하는 것은 실로 아슬아슬한 모험이었다. 이 일은 당시 워치 타워 협회장, 조셉 F. 러더퍼드에게 보고되었고, 1931년 8월 1일 호 「파수대」(영문)지에 실려, 이들의 여행과 나이로비에서의 증거 사업이 약간 알려졌다.

“사랑하는 러더퍼드 형제께:

“형과 저는 남아프리카로부터, 왕국의 좋은 소식이 닿지 않은 이 지역으로 와서 일할 수 있는 특권에 대해 여러 번 감사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증기선 람테퍼를 타고 케이프타운에서 몸바사까지 우리의 이동 주택차를 운반하였고, 즐거운 바다 항해를 한 후, 이전에 경험해 본 일이 없는 가장 험난한 자동차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몸바사에서 나이로비까지 580킬로미터를 여행하는 데 온종일 달려서 나흘이 걸렸습니다. 잠은 주위 사방에 야수들이 우글거리는 황야에서 잤습니다.

“나는 조금 가다, 차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차에서 내려 삽으로 튀어 나온 곳을 평평하게 고르고, 구덩이를 메우고, 네피어 목초를 잘라 늪지를 메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우리는 증거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낮에는 물론 밤 시간에도 얼마간 그런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은 적도 부근이며 중앙 아프리카 지역에서 가깝습니다. 경애하는 주께서 우리의 노력을 축복하시어 세계 기록이 될 만한 일을 경험하게 해주셨습니다. 우리 둘은 일요일과 토요일을 모두 포함하여 21일 간 봉사하였으며, 이 짧은 기간에 소책자 600부와 9권이 한 질인 서책을 120질이나 전했습니다. 사람들은 경찰을 부르겠다고 위협하였으며, 우리를 거짓말쟁이라고 불렀고, 욕설을 하였으며, 일부 사무실에서는 우리를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하였으며, 우리의 일은 거의 완료되었습니다. 캄캄한 아프리카를 밝게 비출 횃불이 타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들은 바로 판단하건대, 우리의 봉사는 종교성이 대단한 나이로비 도시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나는 케이프타운으로 돌아갑니다만, 형은 콩고와 북로디지아로 가서 소식을 전하고, 케이프타운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다시 만나 다음 특권을 받을 준비를 하겠습니다.

주의 봉사에서 함께 일하는,

콜포처 F. W. 스미스.”

식민지 통치하에서 아프리카인들과 만나는 일은 제한을 받았다. 그래서 이들 스미스 형제는 서적을 대부분 철로 건설을 하기 위해 인도 서해안의 고아 지방에서 온 가톨릭 신자들에게 전했다. 그러나 성서 서적에 설명된 진리를 보고 분개한 가톨릭 사제들은 입수할 수 있는 책은 다 모아서 불태워 버렸다.

후에, 이들 스미스 형제는 많은 여행자들의 생명을 앗아간 질병, 말라리아에 걸렸다. 그레이는 병원에 입원하여 4개월 후에 완쾌되었지만, 그의 형 프랭크는 케이프타운에 이르기 전에 사망하였다.

용기 있게 계속 추구함

그러는 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파이오니아인 로버트 니즈벗과 데이비드 노먼이 그 첫 번째 모험을 뒤따를 준비를 하였다. 로버트 니즈벗은, 스코틀랜드를 떠나 케이프타운 지부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동아프리카로 보낼 200상자의 서적을 보았던 것을 회상한다. 이것은 스미스 형제들이 가져간 서적의 다섯 배나 되는 분량이었다!

그들은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기 위해 모기장 안에서 잠을 자고 또 매일 키니네를 복용했으며, 1931년 8월 31일에 탕가니카의 수도 다르에스살람에서 전파 활동을 시작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임명이 아니었다. 니즈벗 형제는 이렇게 말한다. “포장 도로에서 반사되는 눈부신 햇빛, 후덥지근한 무더위, 방문하는 곳마다 가지고 다녀야 하는 무거운 서적 꾸러미,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겪어야 했던 어려움들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젊고 힘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즐겁게 하였습니다.”

이들 두 파이오니아는 상점, 사무실, 가정집을 방문하여 두 주 안에 서책과 소책자를 거의 천 부나 전했다. 이 서적들 중에는 다채로운 색깔의 9권으로 된 이른바 무지개 전집과 성서를 설명하는 11가지 소책자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래지 않아 가톨릭 교회에서는 모든 가톨릭교인들에게 그러한 서적을 집에 두는 것이 금지되었음을 알리는 통지문을 보냈다.

이들 두 파이오니아는 다르에스살람에서 시작하여 잔지바르로 이동해 갔다. 이곳은 한때 노예 무역의 주요 도시로 해안에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섬이다. 옛 이름을 그대로 지녀 온 이 옛 도시는 좁고 꼬불꼬불한 길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끊임없이 풍겨 나오는 정향(丁香)나무의 향기에 감싸여 있었다. 그 이유는 잔지바르가 그 향료의 주요 수출지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약 이십오만의 인구는 주로 스와힐리어를 사용하는 회교도들이었다. 서적은 영문판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영어를 사용하는 인도인과 아랍인에게 전했다.

잔지바르에서 열흘을 보낸 후, 이 파이오니아들은 케냐 고원 지대로 가기 위해 케냐의 몸바사로 가는 배를 탔다. 그들은 몸바사에서는 기차를 타고 적도 바로 남쪽에 위치한 빅토리아호까지 여행하면서 철길 주변 구역에서 전파하였다.

그 다음에 그들은 배를 타고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로 갔으며, 그곳에서 서적을 많이 전하였고, 「황금 시대」(지금의 「깰 때이다」) 예약도 여러 건 맡았다. 한 남자는 친구가 「정부」(Government)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것을 보고서 80킬로미터를 여행하여 이 형제들을 찾아냈으며, 구할 수 있는 책들은 다 구하였고, 「황금 시대」도 예약하였다.

그 다음에 이 두 파이오니아는 빅토리아 호숫가에 있는 진자와 키수무를 거쳐 몸바사로 되돌아갔다. 거기서 그들은 또다시 많은 서적을 전했으며, 두 차례 성서 강연을 하였다. 그 강연에는 많은 고아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거기에서 그들은 배를 타고 케이프타운으로 돌아갔는데, 이것은 5000킬로미터나 되는 긴 여행길이었다. 니즈벗 형제와 노먼 형제가 전한 서책과 소책자는 모두 합쳐 5000부나 되었고, 예약도 많이 맡았다.

육로로 아프리카의 절반을 횡단하다

점진적인 성서 이해로 지상 낙원에서 살 큰 무리를 모으는 일이 밝혀진 해인 1935년에, 네 명의 증인이 한 조가 되어 동아프리카로 세 번째 전파 운동을 개시했다. 이 네 사람은 첫 번째 전파 운동의 생존자, 그레이 스미스와 그의 아내인 올거 그리고 두 명의 니즈벗 형제들 즉 로버트와 조지였다. 조지는 3월에 케이프타운에 도착했다. *

이번에는 준비를 단단히 하고 떠났다. 4분지 3톤짜리 운송용 밴 2대에다 침대, 주방, 식수, 예비용 가솔린 탱크, 조립식 모기장을 갖춘 숙소를 구비하고 떠났다. 도로는 곳곳에 3미터까지 자란 잡초로 덮여 있었지만, 이제 여러 마을들을 더 방문할 수 있었다. 이 파이오니아들은 종종 들판에서 잠을 잤기 때문에, 광활한 지평선, 밤에 포효하는 사자들, 그리고 낮에 평화스럽게 풀을 뜯는 얼룩말과 가젤 영양과 기린, 겁이 덜컥 나게 불쑥 나타나는 코뿔소와 코끼리 등 실로 야생 동물들이 풍부한 아프리카를 보고 듣고, 그 심장의 활기찬 고동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케이프와 카이로 사이의 여로를 따라 차를 몰았다. 이 도로는 그 근사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실은, 먼지 나는 비포장 도로가 간간이 길게 뻗어 있는 적적한 길인데다, 도로상에 군데군데 돌이 깔려 있고, 이따금 진흙 구덩이며, 부드러운 모래밭이며, 건너야 할 강이 있었다. 탕가니카에 도착하자, 이 네 사람은 짝을 지어 헤어졌다. 니즈벗 형제들은 나이로비 방향으로 갔고, 스미스 형제 부부는 당시 영국 통치하에 있던 탕가니카에 주력했다.

얼마 안 있어 경찰이 스미스 부부를 체포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되돌아가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니즈벗 형제들을 따라 북쪽의 나이로비로 향했다. 거기서 그들은 환급이 가능한 공탁금을 지방 경찰에 160달러 내고서야 머물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 이 파이오니아들은 열심히 봉사하여, 서책을 3000권 이상, 소책자를 약 7000부 가량 전했으며, 「황금 시대」 잡지 예약도 많이 맡았다. 결국, 종교적 반대가 심해졌기 때문에, 추방령이 내려지고 말았다. 추방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세 명의 파이오니아는 로버트 니즈벗을 남겨 두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되돌아가는 여행을 시작하였다. 니즈벗은 장티푸스를 앓게 되어, 그곳에 남아 나이로비의 한 병원에 입원하였다. 감사하게도, 그는 회복되었고 역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후에, 로버트 니즈벗과 조지 니즈벗은 워치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 참석하는 특권을 받았고, 1951년에 인도양에 있는 섬, 모리셔스에 선교인으로 임명되었다. 현재 로버트 니즈벗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있고, 그의 형, 조지는 1989년에 사망할 때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였다.

사도 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1세기 선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파이오니아들은 고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여호와와 그들의 동료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실천하였다. 동아프리카에 온 여섯 명의 파이오니아들 중에서 넷은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했었고, 한 사람은 사망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증거가 행해졌고, 서적은 열매를 맺었다. 예로서, 약 삼십 년이 지난 후, 케냐의 외진 시골 구역에서 봉사를 하고 있던 한 증인은 1935년에 받은 「화목」 책을 한 권 갖고 있는 남자를 만났다. 이 사람도 이제 증인이 되었다.

또 한 사람의 파이오니아—숨겨진 제국에

거의 같은 무렵에, 또 한 사람의 용감한 파이오니아, 크리코르 하차코르치안이 그리스어와 프랑스어는 물론 그의 본토어인 아르메니아어로 영적 계몽을 주기 위해 에티오피아에 들어왔다. 그는 과감하게 여러 면으로 특이한 나라에 들어온 것이다. 이 나라의 상당 부분은 평균 고도가 2000미터나 되는 거대한 삼각형 모양의 고원이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들과 평평하게 자른 원추형의 벌거숭이 산들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 비옥한 밭들이 있고 그 주위에 계곡들이 있다. 청나일 강은 수원(水源)이 이곳에 있으며 장관을 이루는 협곡 사이를 흘러내린다. 이와 비슷하게, 테케제 강이, 일부 여행자들에게 북미의 그랜드캐년을 연상케 하는 협곡 사이를 흐르고 있다. 이 산악 지형이 에티오피아를 서쪽에 있는 수단의 저지대와 동쪽에 있는 다나킬 사막과 오가덴 사막으로 갈라놓는다.

에티오피아는 역사 초기부터 독립된 제국이었다. 에자나 황제는 4세기 니케아 공의회가 열릴 무렵에, 이 나라가 그리스도교국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했다. 마리아와 십자가 숭배를 중요시하고 고대 유대교와 관련이 있는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에티오피아 역사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으며, 에티오피아를 숨겨진 “그리스도교” 제국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저지대로부터 회교가 침투하는 것을 막았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이름이 “삼위일체의 능력”을 의미하였는데, “만왕의 왕”, “유다의 사자”,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와 같은 여러 칭호를 지녔다. 더욱이, 그는 헌법상으로 교회의 권익을 옹호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백성은 영적 암흑에 갇혀 있으므로, 쉽게 자극을 받아 광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다.

1935년의 이런 상황 속에서, 하차코르치안 형제는 파이오니아 짝을 구할 수 없었지만, 여호와를 온전히 의뢰하였다. 1935년 11월 1일 호 「파수대」(영문)지에 그의 활동에 대해 보고한 편지가 게재되었는데, 그 편지의 일부는 그가 무슨 일을 직면하고 있었는지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박해가 더 있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과거에 저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분은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정오에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인데, 사단의 앞잡이들 중 한 사람이 숨어 있던 곳에서 불쑥 나타나 커다란 막대기로 내 머리를 두 번 내리쳤습니다. 너무 세게 쳤기 때문에 친 막대기가 동강 나버렸습니다. 그러나 주의 도움으로, 이웃 사람들이 보기에 놀랍게도 내가 입은 상처는 그리 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이틀 동안 누워 있었습니다. 또 한번은 적의 대행자들이 칼을 들고 나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찌르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끌려, 그들은 칼을 팽개치고 나를 혼자 둔 채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박해를 계속했습니다. 이번에 그들은 나에 대해 거짓 고발을 하였고, 황제 앞에 서도록 하기 위해 나를 수도(아디스아바바)로 보냈습니다. 수도에서 (4개월) 머무르는 동안, 나는 호텔과 카페에서는 물론, 어디든지 가서 집집으로 증거하였습니다. 마침내 나는 황제 앞으로 소환되었습니다. 그는 나의 변호를 들은 후 아무런 혐의가 없음을 알고서 석방시켜 주었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 승리에 대해 주께 찬양을 드립니다!”

“사람들은 두려움과 당혹 속에 살고 있지만, 저는 주 안에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풍성한 축복을 주시고, 여러분이 맡은 일을 완수할 수 있도록 힘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

K. 하차코르치안.”

제2차 세계 대전의 혼란중에 하차코르치안 형제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하지만, 길르앗 훈련을 받은 선교인들은 1950년대 초에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했을 때, 디레다와에 “여러분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헤이우드 워드가 동부에 있는 그 도시에 도착하여, 영어를 모르는 한 노인을 찾아냈다. 이 선교인이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자, 그 노인은 왈칵 눈물을 흘리고 하늘을 쳐다보았으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르메니아어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 사람이 바로 하차코르치안 형제였다. 그가 고대하던 그날이 온 것이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는 워드 형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나서 하차코르치안 형제는 자랑스럽게 낡은 상자들을 꺼내고서는, 모서리가 닳고 닳은 「파수대」와 책들을 보여 주면서, 줄곧 방문객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흐뭇하게 이야기를 해 나갔다.

워드 형제는 이 만남이 기이하다고 느꼈고, 다시 방문할 것을 기대하였다. 하지만 그 일은 이뤄지지 않았다. 다른 선교인들이 그를 만나러 갔을 때, 그들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차코르치안 형제가 이미 사망한 것이었다.

그 선교인들에게 그는 “멜기세덱”과 같았다. (히브리 7:1-3) 답을 얻지 못한 의문들이 많았다. 그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진리를 어디서 배워 알았는가? 2차 세계 대전의 그 곤란한 시기에 어떻게 지냈는가? 어쨌든, 그는 에티오피아에서 초창기에 활동한 용감한 파이오니아였다.

드디어 케냐에 새로운 기초가 놓이다

1949년 11월에, 메리 휘팅턴이, 나이로비의 동아프리카 철도 공사에 근무하는 남편과 같이 살기 위해, 어린 세 자녀를 데리고 영국으로부터 케냐로 이민했다. 침례받은 지 겨우 일년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그는 곧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강한 파이오니아 정신을 가진, 교양을 갖춘, 날씬한 여성으로서 그는 자기의 고국 영국보다 큰 나라에서 외로움에 젖어 있기보다는, 이 큰 밭을 성서 진리를 전파할 적절한 곳으로 받아들였다.

당시는 인종 차별이 시행되던 식민지 시대였기 때문에, 휘팅턴 자매는 근처 구역에서 집집으로 전파하기 시작할 때 듣는 사람들을 유럽인들로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집주인들은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집안으로 초대하여 성서 서적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는 자주 “여러분은 어디서 모임을 갖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자기가 알기로는 그 나라 전체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자기 혼자뿐이라고 대답했다!

얼마 안 있어 충절의 시험이 시작되었다. 석 달이 못 되어 그 자매의 남편은, 직장 상사들로부터 아내의 전파 활동이 허락되지 않는 일이라고 경찰에서 알려 왔다는 말을 들었다. 만약 계속한다면, 그 식민지에서 추방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자매 남편은 휘팅턴 자매에게 친구들에게만 전도를 하라고 타일렀다. 그러자 그 자매는 케냐에는 친구가 없다고, 그리고 그리스도인 충실성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봉사를 계속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자매 남편은 만약 아내가 추방된다면, 자녀들을 데리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경찰의 특별 부서 직원들이 휘팅턴 씨 사무실을 찾아와 그의 아내가 배포하고 있는 서적을 한 가지씩 견본으로 달라고 요구했다. 휘팅턴 자매는 기꺼이 꽤 여러 가지 서적을 주었다. 가져간 서적을 돌려주려고 온 경찰관은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휘팅턴 자매가 전파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지만, 아프리카인들에게 전파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이로비에 사는 아프리카인이 아닌 주민들 가운데서도 할 일이 넘치도록 많았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휘팅턴 자매에게 전혀 예기치 않게, 한 동료가 나타났다. 워치 타워 협회의 북로디지아 지부에서 부틀레르라는 부인이 성서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세이셸 제도 출신인 올거 부틀레르는 10여 년 전에 탕가니카에서 협회 서적을 받았고, 최근에 남편이 사망한 후 나이로비로 왔던 것이다. 우편으로 연락을 하였다. 이들은 나이로비 시내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곧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공원에서 하였다. 그 이유는 인종이 다른 사람들끼리 교제하는 일이 아직도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년이 지난 후 올거 부틀레르는 휘팅턴의 집 욕실에서 침례를 받았다.

도우려는 노력

이 방대한 밭을 개척하고 또한 격리되어 있는 휘팅턴 자매를 돕기 위해 선교인들을 파견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식민지 정부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952년에 워치 타워 협회장 네이선 H. 노어와 그의 비서, 밀턴 G. 헨첼이 나이로비를 방문하여, 케냐와 우간다에서 온 소집단의 형제 자매들과 하루 저녁을 같이 보냈다. 선교인들의 입국 신청을 다시 냈으나, 이번에도 거절당했다.

다른 면으로 어려움이 또 가중되었다. 마우마우 봉기가 발생하여 비상 사태가 초래되었으며, 사전에 정부의 인가를 받지 않으면 열 명 이상이 모이는 집회는 어떤 것이든 불법 집회로 간주되었다. 1956년에 그리스도인 집회의 인가 신청이 거절당했다. 그러한 여러 해 동안 외국에서 케냐에 온 많은 증인들은 잠깐 머물다 떠났지만, 메리 휘팅턴과 그의 자녀들, 그리고 올거 부틀레르는 계속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길르앗 졸업생들이 도착하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1956년에 길르앗 졸업생, 스코틀랜드 출신인 윌리엄 니즈벗과 뮤리얼 니즈벗이 나이로비에 도착했다. 윌리엄 니즈벗은 1930년대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케냐로 왔던 두 명의 초창기 파이오니아와 형제간이었다. 체류하기 위해 니즈벗은 일자리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그 작은 성서 연구 집단을 감독할 수 있었다. 그때 니즈벗 자매는 휘팅턴 자매와 함께 매일 아침에 조용히 호별 방문 봉사를 하였다.

니즈벗 부부에게 나이로비는 아름다운 임명지였다. 그 도시는 잘 정리된 현대식 대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따스한 기후와 도시 외곽의 응공(Ngong) 구릉지들은 고향 스코틀랜드를 생각나게 해주었다. 청명한 날에 동남쪽을 바라보면, 아프리카의 최고봉, 킬리만자로를 덮고 있는 눈이 태양 빛에 번쩍거리는 것이 보였다. 북쪽을 보면 케냐 산맥이 들쭉날쭉한 모습을 나타냈다. 이 나라의 이름은 바로 이 산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리고 이 나라로 들어가는 바로 입구에는 사자, 치타, 코뿔소, 물소, 기린, 얼룩말, 영양 등이 서식하는, 동물 애호가들의 낙원—나이로비 국립 공원이 있었다.

하지만, 니즈벗 부부의 주된 관심사는 성서 연구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특별 부서에 근무하는 한 경찰관의 가족과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니즈벗 부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 경찰관은 여호와의 증인을 조사하라는 임무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조사는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에 이르렀다. 그 경찰관은 우리의 활동에 대해 유리한 보고를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물인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때가 되어 이 가족 네 사람은 모두 침례받은 증인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연구를 하였다. 유감스럽게도, 비상 조치법이 아직도 발효중이었고, 열 명 이상이 모인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누구나 추방을 당하거나 최고 3년 감옥형을 받을 수도 있었다. 형제들은 어쩔 수 없이 작은 집단으로 집회를 갖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58년—잊지 못할 해

이해 초에 네 명의 길르앗 졸업생, 클라크 부부와 재넛 부부가 또 나이로비로 임명되었다. 니즈벗 형제와 마찬가지로, 이 두 남자는 세속 직업을 갖지 않으면 안 되었고, 아내들은 파이오니아를 하였다. 전도인 35명의 신기록에 달했다. 전도인은 대부분 외국인이었다.

이 해에 또한 뉴욕에서 성의 국제 대회가 열렸고, 전세계에서 25만 명 이상이 참석하였다. 메리 휘팅턴이 이 대회에 참석하여, 케냐에서 수행되는 왕국 봉사에 대해 간략한 보고를 한 것은 감격적인 일이었다. 이 해에는 기쁜 일이 또 있었다. 로디지아에서 증인들을 가득 태운 전세기가 뉴욕으로 가는 도중에 나이로비에 멈추어, 함께 만나 영적으로 세워 주는 기회가 있게 되었다.

이 뉴욕 대회에서, 유능한 증인들이 왕국 전파자들을 더 크게 필요로 하는 나라들로 이사하도록 호소하는 일이 있었다. 케냐도 그 명단에 들어 있었다. 그리하여 1958년 12월과 1959년 9월 사이에 캐나다, 미국, 영국에서 30명이 넘는 형제 자매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케냐로 이사하였다. 새로 도착한 사람들 중에서 일부는 아름다운 해변이 있는 케냐 해안의 몸바사로 갔다. 또 일부는 리프트밸리의 소도시인 나쿠루에서 전파를 시작했다. 이 도시는 백만을 헤아리는 홍학의 서식지로 곧 그 도시와 같은 이름을 가진 호수로 유명하다.

필요한 곳에 자원한 봉사자들”이 크게 기여하다

이들 “더 필요한 곳에 자원한 봉사자들”은 그리스도인 장성의 높은 표준에 달한, 열성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친구와 생업과 생활의 안락함에서 떠났지만, 풍성한 축복을 받았다. 그들에게 케냐는 현대의 마게도냐와 같은 곳이었다.사도 16:9.

영국 출신 론 에드워즈는 여러 사람을 대변하여 이와 같이 말했다. “이 기간의 바로 시초부터, 더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온 우리들 사이에는 아주 강한 사랑과 애정의 유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목적이 일치하고 환경이 비슷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같은 연령층(30 내지 40세)이었고, 기혼자들이었고, 이곳에 오기 전에 안정된 가정 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향을 떠났고, 협회의 부름에 응하여 미지의 장래로 들어섰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건강, 취업 허가 및 기타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여러 명이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앨리스 스펜서와 같은 일부 사람들은 오랜 기간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 자매는 25년 이상이나 몸바사의 더위를 잘 견뎠다. 그리고 80세가 넘은 마가렛 스티븐슨은 케냐에서 30년 이상이나 살아왔고, 아직도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다. * 선교인과 같은 열심으로 일하면서, 이들 형제 자매들은 참 숭배의 기초를 놓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많은 케냐인들은 그 기초 위에 참 숭배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쌓아 가고 있다.

하지만, “더 필요한 곳에 자원한 봉사자들”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왕국 사업은 아직까지 순조롭지 못했다. 전파는 주로 외국에서 온 백인 유럽인들과 아시아인들에게 하였다. 외국인 증인들 가운데 몇몇이 스와힐리어를 공부했지만, 증거하는 일은 주로 집안 일을 하는 고용인들에게 한정되었다.

큰 확장을 위한 마련들

1959년에 노어 형제가 다시 나이로비를 방문하였다. 그 무렵 아홉 명이었던 작은 집단은 전도인이 54명으로 늘어나, 두 집단으로 구성된 한 회중이 되어 있었다. 이제 인도할 수 있는 형제들이 더 많아졌기 때문에, 노어 형제는 그 두 집단을 네 집단으로 나누는 마련을 하였다. 니즈벗 형제가 세속 직업을 가지고, 이들 집단을 방문하는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게 되었다. 이 기간에 외국인들 사이에서 놀랄 만큼 많은 관심자들이 발견되었다.

식민 통치가 막바지에 이름에 따라, 다음의 경험담이 보여 주듯이, 맨 먼저 원주민들과 접촉한 사람들은 바로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유럽인 자매가 시내에서 신발을 사면서, 가게 점원에게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다. 그 점원은 “제리코”에 산다고 대답했다. 우리 자매는 “제리코는 내가 잘 아는 곳이에요. 거기 자주 가거든요”하고 말했다. 그 점원은 즉시 “아, 그렇다면 여호와의 증인이시겠군요!”하고 소리쳤다.

케냐에서 왕국 사업은 이제 발전 단계에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에, 잠깐 멈춰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역시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인근의 몇 나라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간다—“아프리카의 진주”

케냐의 서쪽에 위치한 이웃, 우간다는 풍요로운 나라이다. 이 나라에서는 빅토리아 호의 푸른 호숫가를 거닐거나, 봉우리가 눈으로 덮인 루웬조리 산들(전설적인 달의 산으로 생각됨)을 오르거나, 배를 타고 나일 강을 돌아다니거나, 웅장한 우림 속을 차를 타고 여행할 수 있다. 비가 많이 내리기 때문에, 질이 좋은 채소와 과일은 물론이고, 목화와 커피 수확이 풍성했다. 더위는 참을 수 있을 정도였고, 사철 계속되는 여름은 아시아계 사업가들은 물론, 영국 관리자들도 좋아했다. 그들은 클럽, 골프장, 수영장, 경마장, 크리켓 경기장 등에서 옥외 운동을 즐겼다. 사람들이 우간다를 “아프리카의 진주”라고 부른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50년 4월, 젊은 증인 부부가 성서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열망을 품고서, 영국에서 우간다로 왔을 때 평온하고 유쾌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일년도 안 되어 희랍인 한 가족과 이탈리아인 한 가족이 진리를 인식하도록 도울 수 있었다.

로마와 같이 일곱 개의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 캄팔라에서 작은 회중이 하나 형성되었다. 전파 활동이 아프리카의 밭에서 점진적으로 확대되었다. 이 일은 확실히 우간다에서 영어가 공용어가 되는 데 한몫을 하였다. 최초로 국내어를 사용한 것은 아프리카인 청중 50명에게 루간다어 통역을 통해 제공된 공개 강연이었다. 1953년까지 6명의 전도인이 활동하고 있었다.

2년 후, 우간다 최초의 침례가 엔테베 부근 빅토리아 호에서 있었다. 침례받은 다섯 사람 가운데는 아주 열성적인 조지 카두가 있었는데, 그는 아직도 캄팔라에서 충실한 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몇 사람의 나쁜 행실로 인해 제명, 출국,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초래되는 위험한 고비가 있었다. 그리하여, 1957년 말 무렵, 우간다에서 전도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카두 형제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음을 알았고, 여호와를 사랑하였다.

1958년에 루간다어판 「이 천국의 기쁜 소식」 소책자가 발표된 것과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 영화가 상영된 것은 왕국 사업에 새로운 추진력을 가했다. 또한 “더 필요한 곳에 자원한 봉사자들”이 도움을 주기 위하여 캐나다와 영국에서 우간다로 이사왔다. 3년 후인 1961년 무렵에는 19명의 전도인이 보고를 냈다. 이 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더하기로 하겠다.

수단—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

지구상에서 가장 긴 강의 지류인, 백나일 강이 우간다에서 발원하여 목초지, 수풀, 늪 그리고 사막과 초림지가 섞인 지역을 거쳐 수단으로 흘러들어간다. 키가 큰 목축업자들이 이 강둑을 따라 살고 있다. 이 강은 약 2000킬로미터를 흘러간 다음, 동쪽 에티오피아의 고원 지대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청나일 강과 만난다. 이 지점에, 강 주변을 따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사는 세 개의 대도시 즉 카르툼과 옴두르만과 카르툼노스가 자리잡고 있다.

하류로 더 내려가면서 나일 강은 일련의 폭포를 따라 흘러내린 다음, 유서 깊은 지역으로 흘러들어간다. 이곳은 한때 구스 제국이 서 있던 곳으로, 사하라 사막에서 아직도 그 폐허를 볼 수 있다. 이곳은 성서 시대의 에티오피아이며, 제자 빌립에게 침례를 받은 궁정 관리뿐 아니라, 에벳멜렉도 바로 이곳 출신이다.—예레미야 38:7-16; 사도 8:25-38.

한때 영국과 이집트의 공동 관리국이었던 수단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로, 면적은 미합중국의 4분의 1이 넘는다. 아랍어가 주요 언어이다. 북부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회교도이고, 남부에는 정령 숭배자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다. 대개 수단인들은 후대와 친절을 베푸는 면에서 탁월하다.

이집트 출신의 길르앗 졸업생, 데메트리우스 아체미스가 처음으로 수단에 온 때는 1949년이었다. 이집트에서와 같이 오이, 부추, 파를 재배하는 밭들이 카르툼 지역의 강둑들을 초록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강 옆에 나 있는 어떤 길들에는 커다란 반얀 나무들의 그늘이 있어 반가이 찾는 오아시스가 되었다. 그러나 녹색이 무성한 이 좁은 곳은 황량한 사막으로 연결되었다. 모든 것이 온통 갈색이었다. 하늘도 갈색이었다. 땅도 갈색이었다. 흙벽돌 집도 갈색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의복도 대부분 갈색으로 물들였다.

그때 날씨는 찌는 듯이 무더웠다. 밤 기온은 섭씨 39도나 올라갔다. 뙤약볕 아래에는 기온이 섭씨 60도까지 올라갔다. 수도관이 햇볕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먼저 물을 좀 빼내지 않고 “냉수” 샤워를 한다면 그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아체미스 형제는 바빴다. 그는 주로 옴두르만에서 전파했는데, 예약을 600건 맡았다. 그 다음에 그는 이집트로 돌아가기 전에 와드메다니라는 보다 작은 공업 도시로 갔다. 후에 식구가 셋인 한 가족이 카이로에서 카르툼으로 이사하였다. 양모 상인인 이 형제는 고객들과 거래를 하기 전에 그들에게 증거를 하고 예약과 서적을 제공하였다.

곧 조그만 회중이 하나 형성되었다. 전도인 수는 달마다 신기록에 달하여, 1951년 8월 말에는 16명에 달했다. 그 이듬해의 두드러진 일은 32명에게 행한 공개 강연이었다. 청중 가운데 있는 외국인들을 위하여 강연을 세 가지 언어로 통역하였다.

1953년에 아체미스 형제가 카이로에서 돌아왔다. 이번에는 5개월 간 체류하면서 카르툼 구역을 체계적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조직하였다. 세 명의 오르파니데스 형제들이 진리 안에 들어왔을 때, 그는 그 보람을 얻었다. 접촉이 있은 지 단 한 달 뒤, 조지 오르파니데스 형제는 자기 집의 널찍한 곳을 집회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 형제는 마침내 회중의 감독자가 되었으며, 친형제간인 디미트리와 함께 다른 사람들에게 열성적으로 왕국 소식을 전파하였다. 조지는 아주 확고하고 끈기 있는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양들을 돌보는 일에서 극히 후대를 잘하였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봉사하다가, 1970년에 이 나라를 떠나야 했다. 디미트리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 안에 들어오도록 도울 수 있었다. 극심한 무더위와 주기적으로 이는 모래 폭풍에도 불구하고, 이 형제들은 끈기 있게 훌륭한 태도를 나타냈다. 조지는 한때 이와 같이 말했다. “세상적으로는 인정을 못 받지만, 위로부터 받는 인정과 여호와의 영의 도움으로 우리는 매일매일 삶을 즐겼으며, 디모데 후서 4:2-5에 있는 바울의 말에 따라 우리의 봉사의 직무를 완수하려고 힘썼습니다.”

아체미스 형제는 여전히 주기적으로 다시 방문하였다. 1955년에 협회는 또 한 사람의 선교인 엠마누엘 파테라키스를 카르툼에 보낼 수 있었다. 그는 10개월 간 체류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여러 명의 전도인들이 이 나라를 떠났다. 1956년 6월에 법적 등록 신청을 하였지만, 콥트교의 사제들과 회교 지도자들의 영향력 때문에, 거절당했다. 증인들은 얼마간 감시를 받았지만, 심한 박해는 없었고, 전파 사업은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충실한 자매들

1세기에 경건한 여자들은 회중의 영적 기둥이 되었다. 20세기에 수단에서도 그러했다. (사도 16:14, 15; 17:34; 18:2; 디모데 후 1:5) 1952년에는 레바논에서 수단인과 결혼한 열성적인 그리스인 자매가 남편의 고국으로 와서 전파 사업을 고무하였다. 잉길리지 칼리오피란 이 자매는 곧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고, 나중에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이 자매는 생기로 가득 차고, 활동적이고, 끈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특성은, 대단히 감정적이고 화를 잘 내고 사제와 친척들을 겁내는 정통파 콥트교인들에게 전파할 때 필요하였다.

진리를 알도록 그가 도울 수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메리 기르기스가 있는데, 그도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으며, 그의 체험담은 1977년 2월 15일 호 「파수대」(영문)지에 실렸다. 메리는 수단의 옛 수도였던, 역사적인 도시 옴두르만에 살았다. 1958년에 칼리오피 자매가 처음으로 그를 방문했을 때, 그는 마침 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칼리오피 자매는 계시록에 묘사되어 있는 무시무시한 짐승들에 대해 이것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고 매우 궁금해 하는 여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또한 “지옥불”의 공포 때문에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을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가진 더 큰 의문은,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였다.

칼리오피 자매는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메리는, 예수께서 이제 왕이 되셨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의 남편, 이브라힘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여자 말을 듣지 말아요. 나쁜 사람임에 틀림없소. 일전에 그 여자가 버스에서 내리는데, 사람들이 하는 말이 ‘종교를 바꿨으니 저 모양이지’ 하더구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브라힘은 두 권의 책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와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책을 받았다. 그후 얼마 안 있어, 콥트 교회에 참석했을 때, 이브라힘은 아내로 하여금 다른 종교를 연구하고 전파하게 내버려두는 남자들이 있다고 호되게 꾸짖는 사제의 말을 듣는 동안 마음을 졸였다. 그 사제가 누구를 가리켜 하는 말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브라힘은 그 교회에 다니는 것을 중지했다. 이제 그와 그의 가족은 박해의 표적이 되었다. 하루는 담 너머에서 돌멩이가 날아와, 그가 돌에 맞고 안경이 땅에 떨어졌지만, 다행히도 그는 물론, 안고 있던 어린 아들도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다!

1959년에 경찰은 메리 기르기스를 도둑질하려고 남의 집으로 다닌다고 고발했다. 그 문제는 법정으로 넘어갔다. 두 검사가 그에게 불리한 말을 늘어놓았지만, 물론 아무런 증거도 내세울 수 없었다. 그 사건은 기각되었다.

또 한번의 법정 사건에서 사제들은 시온주의라고 고발했다. 법정에서 우리 자매는 네 명의 판사들 앞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돋보이게 했다. 재판장은 이와 같이 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아주머니, 수단의 어디든지 가서, 원하는 대로 전파를 하십시오. 아주머니는 이 나라의 법에 따라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기르기스 자매 그리고 사망할 때까지 칼리오피 자매는 그들보다 젊은 사람들에게 탁월한 본이 되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열정적인 이 두 자매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도왔다. 이브라힘 기르기스 또한 진리를 위해 확고한 입장을 취하였으며, 사망할 때까지 충실한 증인으로 봉사했다.

법적 인가를 얻으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실패하였다. 그래서 왕국 사업은 인가받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되었고, 가끔 박해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증가하여, 1960년에는 27명, 1962년에는 37명이 보고하였다. 1965년에는 왕국 사업이 새로 설립된 케냐 지부의 감독을 받게 되었고, 일년에 한 번씩 순회 대회가 마련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81명이 참석하였다. 이 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들어보기로 하겠다.

에티오피아—“까맣게 탄 얼굴의 땅”

케냐의 북쪽 이웃 나라인 에티오피아는 수단과 홍해 사이에 위치하며, 국토의 크기가 수단의 절반만하다. 그리스어로 그 이름은 “까맣게 탄 얼굴의 땅”이란 뜻이며, 고대에는 이집트 남쪽에 있는 아프리카 지역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에 언급된 에티오피아는 주로 북부 수단과 오늘날의 북부 에티오피아의 끝부분을 뜻하였다. 하차코르치안 형제가 이미 1930년대에 알게 된 바와 같이, 이 나라는 고유한 문화를 갖고 있었고, 에티오피아 정교회 교세가 강한 곳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하였다. 이곳이 바로 1950년 9월 14일에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한 세 명의 독신 선교인들의 임명지였다.

익숙해져야 할 생소한 것들이 많았다. 우선 아디스아바바의 고도였다. 이 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수도들 중 하나로 해발 2400미터에 위치하고 있다. 그 다음은 암하라어였는데, 이 언어는 파열음 ㅍ, ㅌ 그리고 ㅅ과 33개의 에티오피아어 자모와 250개가 넘는 변형 문자로 되어 있다. 게다가 70가지가 넘는 종족어와 그 외 약 200가지나 되는 언어와 이보다는 좀 적지만 수많은 방언들이 있다. 더욱이, 사제들은 일부 유럽 학자들이 라틴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과 흡사하게도, 게에스라고 불리는 거의 사어가 되버린 언어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얼굴이 검게 타고 매력적이며, 머리 손질이 특이하고, 의복이 독특하며, 축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마에 십자가 문신이 새겨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흥미로웠다. 남자들은 “십자가의 노예”란 뜻인 게브레 메스칼, “마리아의 종”이란 뜻인 하브테마리암 혹은 “종교의 초목”이란 뜻인 테클레 하이마놋 등으로 불리었다. 여자들은 “빛의 노예”란 뜻인 레테베르한 혹은 “당신은 아름답습니다”란 뜻인 아마레쉬 등으로 불리었다.

학교 선생들-쿰-전파자들

첫 번째 선교인 집인, 아디스아바바의 카제 포폴라리 구획의 한 아파트에서 선교인들은 콜로부스속(屬) 원숭이의 정기적인 방문을 받고 놀랐다. 이 장난꾸러기 원숭이는 쉴 새 없이 무엇이든 파고 들어가서 하나씩하나씩 엉망으로 헝클어 놓았다. 토마토 반죽 통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그것을 온 집안으로 끌고 다니면서 벽에다 묻혀 놓았다! 물론, 사람들도 방문하였으며, 선교인 집의 현관에서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다.

에티오피아 교회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개종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단지 회교도들과 “이교도”들만 개종을 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인들은 다만 영어, 타자, 부기와 같은 과목을 가르치기 위해 학교를 설립한다는 조건으로만 입국이 허락되었다.

아디스아바바에서 성인 야간 학급들이 적절히 확보되었을 때, 선교인들은 수도의 중심가, 처칠로드의 더 큰 집으로 이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형제들은 학과와 종교적인 가르침은 구별하기로 결정하였지만, 학생들이 원한다면 회중 집회에 참석하도록 초대되었다. 집회 시간이 되면 교실 중 하나는 왕국회관으로 사용되었다.

1952년에 길르앗 학교 제18기생 선교인 여덟 명이 추가로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했다. 이들 가운데는 해럴드 지머먼과 애니 지머먼이 있었는데, 이들은 수도에서 야간 학급을 돕도록 임명되었다. 제12기생인 두 부부, 브럼리 부부와 룩 부부는 동부의 소말리아 국경 부근에 있는 역사적인 도시 하라르에서 학교를 개설하였다. 이곳은 이전에 외국인들에게는 출입이 금지되었던 곳으로, 아직도 하이에나가 자주 나타나는 곳이었다. 사실, 이른바 하이에나 목동들이 관광객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이 힘센 짐승들에게 먹이를 주는 밤이면 멋진 광경이 벌어진다.—1986년 2월 15일 호 「깰 때이다」 참조.

길르앗 선교인 딘 홉트와 레이먼드 이걸슨은 하라르에서 멀지 않은 상업 중심지인 디레다와에 그와 비슷한 학교를 설립했다. 이곳은 지부티 항구에서 아디스아바바까지를 잇는 에티오피아의 유일한 철도 노선상에 위치한 전략적인 곳이다. 하차코르치안 형제가 사망한 곳이 바로 여기다.

생활은 무척 불편했다. 홉트 형제는 이렇게 설명한다. “첫날 밤의 경험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직 가구가 없었기 때문에, 상자를 식탁으로 사용하였고, 가방 위에 앉아 식사를 하였습니다. 아직 침대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았습니다. 이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전등불을 끄자, 우리를 한입 맛보려고 빈대들이 벽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얼마간 비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싱싱한 피를 빨아먹으려고 빈대들이 기어 나왔습니다! 그날 밤 한잠도 못 잤습니다.”

조그만 지부 사무실

해충에도 불구하고 왕국 사업이 얼마나 즐거웠던지 한 선교인은 이렇게 설명한다. “어느 날 길을 걸어가다 한 젊은 에티오피아인 남자를 만나, 그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내가 선교인임을 알게 되자, 그는 ‘선생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알려 주십시오’하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 이튿날 우리 집에 오도록 초대하였고, 그가 도착한 지 10분도 못 되어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으로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는 그 이튿날에도 연구를 하러 왔는데, 이번에는 다른 젊은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 두 사람은 최초의 에티오피아인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관심자들이 선교인 집으로 찾아와 성서 연구를 부탁하는 일이 계속 있었기 때문에, 선교인 한 사람은 항상 집에 남아 있어야 했다. 어떤 사람들은 여러 시간을 걸어서 그곳에 왔고, 한 번에 두세 시간씩 연구하기를 원했다. 얼마 안 있어 전도인 수는 83명에 달했다.

1953년에 아디스아바바에 조그만 지부 사무실이 개설되었다. 집회 자료를 에티오피아어로 번역하여 손으로 썼으며, 그것을 수동식 복사기로 복사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진리 안에서 더 튼튼한 기초를 쌓는 데 도움이 되었다. 지방 형제들은 호별 봉사를 하고,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교훈적인 집회를 마련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들의 열심으로 인하여, 좋은 소식은 이 나라의 내륙에 있는 13개 구역으로 전파되었다. 1954년경에는 이 지방들로부터 약 20명의 전도인이 보고를 하였다.

신학생이 손에 쟁기를 잡다

왕국 소식에 좋은 반응을 보인 사람들 중에는 영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한 신학생이 있었다. 그는 통역인을 통해 우리 선교인들 중 한 사람과 첫 토론을 하였다. 논쟁점들이 제기되자, 그 신학생은 고어인 게에스어로 된 자기 성경에서 확인하곤 하였다. 그가 삼위일체를 지지하기 위해 잘 사용하는 요한 1서 5:7이 자기 성경에 없다는 것을 알고서 충격을 받았다. 다른 거짓 교리들도 곧 이 성경에 의해 폭로되었다.

그는 일주일에 서너번씩 연구를 하러 왔는데,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그가 증인이 되기 위해 신학교를 떠났을 때, 그 학교 직원은 경찰을 데리고 와서 그 신학생을 끌고갔다. 나중에, 그는 나흘 동안 그 신학교에 감금되어 있을 때, 여호와를 위해 감금된 것을 기뻐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걱정하지 말 것을 알리는 이런 쪽지를 형제들에게 보냈다. “제가 그들을 따라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은 뒤를 돌아다보지 않습니다.” 풀려난 후, 그는 수도로 이사하였고 거기서 집회에 참석하였으며 여호와의 증인으로 침례를 받은 최초의 에티오피아인들 가운데 포함되었다.

암하라어판 서적—마침내 발표되다!

1955년에 특별 강연이 있은 후, 처음으로 암하라어판 출판물, 「하나님의 길—사랑」 소책자가 발표되어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기뻐하였다. 그후 곧, 책자가 또 발표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암하라어판으로 연구용 소책자 「이 천국의 기쁜 소식」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해인 1956년은 에티오피아의 신권 역사상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형제들은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라는 영화 상영을 위해 조직하였다. 이 영화를 광고하는 전단을 영어와 암하라어로 만들어 돌렸다. 이 영화는 바로 아디스아바바의 주 광장에 있는,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큰 극장에서 상영될 것이었다. 시내의 모든 번화가에 포스터를 붙였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많은 군중이 그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극장에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렸기 때문에, 상영을 두 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날 저녁에 그 영화를 본 사람은 1600명이나 되었다. 참석한 사람 모두에게 소책자를 한 권씩 무료로 주었다. 에티오피아의 북부에 있는 세 주요 도시, 아스마라, 곤다르, 데세에서도 영화를 상영하였다. 총 3775명이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대한 이 교육적인 영화를 관람하였다.

특별 파이오니아가 더 많이 임명되었고, 지방 순회 감독자가 회중을 격려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형제들은 인간의 기본권, 즉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를 보장하는 개정된 헌법에 힘입어 담대하게 전파하였다. 전도인 수는 최고 103명에 달했다.

박해! 선교인들이 추방되다!

이 모든 활동과 영적 번영은 그리스도교국 교직자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아디스아바바에서 북서쪽으로 약 28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주도(州都) 데브레마르코스에서는 사람들이 아직도 에티오피아 교회에 대단히 충성스러웠다.

그곳에 특별 파이오니아가 도착했을 때, 즉시 폭력이 발생하였다.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폭도를 주(主) 광장에 모았으며, 그들은 이 새로 온 사람들이 마리아 상을 발로 짓밟고, 개고기와 고양이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라고 고함을 쳐댔다! 경찰이 와서 형제들이 맞아 죽지 않도록 구출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경찰서로 밀고 들어갈 태세를 보이는 군중을 총으로 위협하여 제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와중에 두 파이오니아는 소지품을 전부 잃어버렸다.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국가의 평화와 안전에 위협이 된다고 선포하였다. 정부는 선교인 집과 지부 사무실을 폐쇄하고, 1957년 5월 30일에 선교인들에게 이 나라를 떠나라고 명령하였다. 일부 관리들이 사적으로 동정을 나타내고 그 문제에 교직자들이 관여한 것을 지적하고, 심지어 황제에게 호소하였지만, 허사였다.

항의하는 수많은 편지가 세계 각처에서 보내 왔지만, 선교인들은 강제로 추방당하였다. 체포와 심문이 뒤따랐다. 이제 시험하고 체질하는 기간이 왔다. 어떤 이들은 겁을 먹고 진리를 떠났다. 몇몇은 배반자로 변했다.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는 중지되었고, 이전에 파이오니아를 했던 여러 사람을 제명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그 외 다른 사람들은 계속 충실을 지켰다. 한 형제는 족쇄를 차고 42일 간 고통을 당하였고, 그 다음에 전파하는 일을 중지하라는 엄한 경고를 받고 풀려났다.

그렇기 때문에, 왕국 사업은 지하로 들어갔다. 먼 곳에서, 1958년 성의 국제 대회에서 최초의 암하라어판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가 발표되었지만, 단지 몇 권만 간신히 에티오피아로 반입되었다. 반대를 직면하여 충성과 용기에 대한 시험을 당하자 몇몇 사람들은 곁길로 가버렸다. 그래서 1962년 무렵에는 계속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76명으로 뚝 떨어졌다.

아프리카의 뿔—소말리아로 들어감

선교인 딘 홉트는 아디스아바바에서 추방을 당한 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로 들어가라는 협회의 지시를 받았다. 모가디슈는 천년 동안 교역 중심지가 되어 온 곳이다. 이 도시는 한때 솔로몬 왕에게로 품질이 좋은 금을 가져갔던, 오빌의 일부였는가? 아라비아를 공급처로 지적하는 견해가 많지만, 이 도시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홉트 형제가 1957년에 도착했을 때, 소말리아어는 아직 문자 언어가 아니었다. 그 대신 이탈리아어와 아랍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홉트 형제는 먼저 그 도시 중 유럽인들이 사는 지역에서 봉사하기로 결정하였다. 갖고 있는 잡지가 몇 부 안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전하지는 않고 견본으로 보여 주면서 예약을 제공하였다. 그런 방법으로 하여 그는 3개월 만에 예약을 90건 이상 맡았다. 그리고 나서 그의 비자가 만료되었고, 갱신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홉트 형제는 그곳을 떠나 이탈리아로 가서 봉사를 계속하였다.

힘든 임명

홉트 형제가 떠난 후, 협회는 4명의 선교인을 소말리아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1959년 3월에 도착하였지만, 전파는 기본적으로 외국인들에게 증거하는 것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길르앗 제12기생들 중 비토 프라에세와 페른 프라에세만 남게 되었다.

곧 가톨릭 교직자들이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 사업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사제의 방문을 받은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교회 나가기를 중지한 지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이제 와서 나에게 이렇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내가 성경을 연구하고 있기 때문인가요?”

1959년 9월에 프라에세 부부는 11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다. 방문을 받은 이탈리아인 가족들 중에는, 신문에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일은 있어도, 성경도 없고 여호와가 누군지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성서 소식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형제들이 방문하는 한 집에서 한 시간 이상을 보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1961년에 두 명의 성서 연구생이 전파를 시작했다. 그 이듬해에는 또 한 사람이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하게 되어, 선교인 외에 총 전도인은 세 사람이 되었다.

소말리아에서 4년을 보낸 후, 프라에세 부부는 다른 임명을 받았다. 국내 회교도들을 방문할 기회가 아주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좋은 인상을 남겼다. 한 관찰자가 이와 같이 말한 바와 같다. “평신도 전도인들과 교직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유럽인 그룹들 중에서 여러분 여호와의 증인만이 도덕적인 사람들입니다!” 남은 세 전도인들 중에서 두 명은 나중에 다른 나라로 갔고, 남은 한 사람은 활동을 중지하고 말았다. 하지만, 프라에세 부부는 아직도 이탈리아에서 전 시간 여행하는 봉사를 하고 있다.

탄자니아—아프리카의 전형

소말리아에서 해안을 따라 내려가면 현재 탄자니아라고 불리는 탕가니카가 있다. 탄자니아는 북쪽 이웃 나라인 케냐보다 큰, 아름다운 나라이다. 이 나라는—흔히 아프리카의 전형이라고 불리는—세렝게티 평원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는, 이백만 마리가 넘는 커다란 동물들이 대초원과 수림 지대를 돌아다니는 실로 천연의 환경에서 벌어지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야생 생물이 우글거리는 260평방 킬로미터의 오목한 지대인 응고롱고로 분화구가 있는 곳이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부로서 사이잘마(麻), 정향(丁香), 커피와 목화를 생산한다.

1930년대에 왕국의 좋은 소식이 탕가니카에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1948년경에는 이 나라의 서남부 지역에서 얼마의 전도인들이 봉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누구였는가? 그리고 진리를 어디서 배워 알게 되었는가?

그들은 니아키우사 종족에 속한 사람들로서, 그레이트리프트밸리의 두 분기(分岐)가 만나는 곳, 말라위 호의 북단 부근 고원 지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곳의 남자들은 로디지아의 구리 광산에 일하러 다녔다. 본성이 우호적이고 온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이 취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1901년에 투쿠유에서 출생한 호세아 은자불라는 모라비아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신앙심이 대단하였다. 그는 집사가 되었고, 여러 마을의 주일 학교에서 가르쳤다. 그에게 배운 학생들 중에 느헤미아 칼릴레가 있었다. 바와에서 유럽인 정착자들의 요리사로 일하고 있을 때인, 1930년 어느 날 느헤미아는 우연히 다른 요리사와 깊이 있는 성서 토론을 하게 되었다.

느헤미아는 그 사람이 성서에 들어 있는 놀라운 점들을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진리였다! 그후 곧 그는 침례를 받기 위해 국경을 넘어 음웬조로 갔다. 여기서 그는 처음으로 7권으로 된 「성경 연구」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느헤미아 칼릴레는 열의로 가득 찼다. 그는 새로이 알게 된 점을 이전 주일 학교 선생에게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 그 다음해에 연상의 친구, 호세아 은자불라를 다시 만나, 진리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60여 년 후, 호세아는 그날을 회고하여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매우 심하게 논쟁을 하였지만, 그가 안식일에 대한 성구들을 보여 주었을 때, 그것이 진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조브 키본데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세 사람은 내 집에서 집회를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나 역시 다른 주일 학교 학생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집회에 초대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응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조람 카줌바와 오베트 므와이사빌라가 있었습니다.”

도보로 고원 지대 전역을 다니다

은자불라 형제가 1932년에 침례를 받은 후, 이 형제들은 파이오니아 봉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파이오니아들처럼 전파 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말라위 호 방향으로 60킬로미터를 걸어가서 키엘라 지역에서 증거하였다. 이곳에서 호세아 은자불라와 오베트 므와이사빌라는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들은 수영을 할 줄도 몰랐는데, 그만 붙들려 악어들이 우글대는 강에 던져졌다. 아무튼, 아마 여호와의 도움으로, 그들은 간신히 살아 남았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있어, 그들은 자기들이 베들레헴이라고 부르는 곳, 부예시 마을 근처에 처음으로 왕국회관을 지었다.

그러는 동안, 바와에서는 더 많은 관심자들이 생겨났다. 이곳은 느헤미아 칼릴레가 진리에 대해 들은 곳이며, 솔로몬 므와이바코, 예사야 물라와, 요하니 므왐보네케와 같은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인 곳이기도 하다. 부예시에 있는 형제들은 이들 새로운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한 달에 한 사람씩 바와 근처에 있는 은돌레지 마을로 보내는 사랑에 찬 마련을 하였다. 이것은 편도 100킬로미터를 걷는 것을 의미하였다. 때때로 그들은 보고서를 북로디지아의 이소카에 있는 회중에 전하여 지부 사무실로 보내기 위해 이소카까지 200킬로미터 이상을 걷기도 하였다.

60년이 지난 오늘날, 90세가 된 호세아 은자불라는 아직도 “집사”이다. 하지만 지금은 은돌레지 회중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집사 즉 봉사의 종으로 섬기고 있다. 은자불라 형제는 여러 손자녀들이 열심히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며 충실한 아내 레야 은실레가 그와 함께 확고함을 유지하는 것을 보고 흐뭇해 한다.

다른 사람들도 여러 해 동안 열정적으로 전파하였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좋은 소식 때문에 겪게 된 수감 생활을 잘 견뎌 낸 지무 므와이콰바, 나중에 순회 감독자로 봉사한 조엘 므완뎀보, 자전거를 타고 노래를 부르면서 전파를 한 세무 므와사쿠나 그리고 아나니아 므와키시시아와 티모티 카푸코가 있었다.

왕국 증거 사업을 증진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된 또 다른 형제는 데이비드 키펭게레인데, 그는 1922년에 태어나 1935년에 음베야에서 진리를 배워 알게 되었다. 그는 멀리까지 두루 다니며 전파하였으며, 나중에는 다르에스살람에서 왕국 봉사를 시작하도록 파견되었다. 그는 1983년에 사망할 때까지 생애의 마지막 18년 동안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했다. 그는 종종 체포되었지만, 실망하지 않았으며, “감옥에는 여호와께서 제가 하기를 원하시는 일이 많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와 함께 진리를 배워 알게 된 동생, 바르나바스 므와카하발라는 오늘날까지 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이 형제들은 고립된 환경에서, 자신들의 언어로 된 서적도 없이, 읽는 능력도 제한된 가운데서 최선을 다했다.

케이프타운에 있는 지부 사무실과의 연락은 정기적이 아니었고, 보고들은 완전치 못했다. 「1943 연감」(영문)은 이 지역에서 158명이 전파 사업에 참여하였음을 알려 준다. 1946년에는 7개 회중에서 227명이 보고하였다. 이전의 여러 해 동안 탕가니카에서의 증인들의 활동은 분명히 북로디지아의 이소카 회중의 보고에 포함되었으며, 일부 보고는 누락되었을 것이다. 남부 탕가니카에서의 모아들이는 일을 더 잘 감독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아직도 여러 해가 더 지나야 했다.

북로디지아의 감독을 받다

증인들이 거짓 종교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고, 동시에 일부다처, 흡연 및 기타 비그리스도인 관습과 투쟁함에 따라, 확실히 도움이 필요하였다.

1948년에 북로디지아, 루사카에 새로운 지부 사무실이 개설되었다. 이 지부 사무실은 북로디지아뿐 아니라 동아프리카의 대부분을 감독하게 되었다. 오랜 멈춤이 있은 후 케냐와 우간다에서 새로운 출발의 움직임이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 마련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이 분명했다. 지부 사무실은 아직도 나이로비로부터 험한 길로 240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이 거리의 두 배가 넘는 곳에 있는 케이프타운보다는 상당히 가까웠다.

그리하여 1948년에 북로디지아 지부 사무실은 형제들을 돕기 위해 톰슨 캉갈레를 파견하였다. 그가 그해 3월에 음베야에 도착했을 때, 가르치고 바로잡을 것이 많았다.

캉갈레 형제는 참을성 있게 가르쳤고, 우리 형제들은 신속하게 필요한 조정을 하였다. 그중 한 가지는, 그들은 더는 워치타워 사람들이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으로 자기들의 신분을 밝히는 법을 배웠다.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을 그 이전에 알고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 이름을 공개적으로 돋보이게 하지는 않았었다. 또한 베드로 전서 3:15의 교훈과 일치하게, 우리 형제들은 왕국 소식을 제공할 때 보다 더 재치 있게 제공하는 법을 배웠다. 이제 그들은 단지 거짓 종교의 가르침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소식을 두드러지게 하였다. 그리고 야외 봉사에 바친 시간을 정확히 보고하는 방법에 대한 그릇된 이해도 바로잡았다. 그에 더하여, 형제들은 자기들이 사는 집 외관을 깨끗이 하였다. 그들은 또한 개인 외모도 개선하였다. 텁수룩한 수염을 깎은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집회에서 모두는 보다 질서 있고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법을 배웠고, 종교적인 목적으로 종을 사용하는 등 바벨론적인 자취를 없앴다. 신권 전도 학교에서는, 필기 복습에서 점수가 높은 사람들의 이름을 발표하지 않는 일의 가치도 인식하게 되었다. 일부 증인들은 죽은 사람을 영예롭게 하는 일과 관련된 특정한 관습을 버릴 필요가 있었다. 또 일부는 이제 흡연 습관을 끊어야 했다. 그러나 아마 가장 어려운 조정은 결혼을 법적으로 등록하여 모든 사람들 앞에서 결혼을 영예롭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히브리 13:4.

공식 인가를 받기 위한 법적 시도

북로디지아의 지부 사무실은 탕가니카의 영국 식민 정부가 선교인들의 입국을 허락하고 우리의 전파 사업을 공식적으로 인가하도록 여러 차례 시도를 하였다. 1950년에, “탕가니카의 상황은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신청이 거절되었다. 1951년에 또 신청을 하였지만,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한 지방 행정관은 전파 사업을 지방적으로 금지시키려고 시도했다. 1951년 9월에 형제들은 종교 조직들과 애국적 행사에 대한 여호와의 증인의 입장을 설명하는 서류를 갖고 다르에스살람의 정부 당국자들을 방문하였다. 이 일에 기대를 걸었지만, 그 이듬해에 또 부정적인 회답을 받았다. 1956년에도 그리고 그후에도 방문을 하였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정부의 이러한 비우호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좋은 소식의 전도인들의 숭배에 실제 방해가 되는 것은 없었다. 특별 파이오니아들과 순회 감독자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북로디지아로부터의 도움을 계속 베풀었다.

훈련시키는 노력이 계속되다

1952년에, 북로디지아에서 지역 감독자로 봉사하던 길르앗 졸업생 부스터 마요 홀콤은 탕가니카로 들어가 투쿠유 부근에서 개최된 순회 대회에서 섬길 수 있었다. 그는 이와 같이 말했다. “우리는 오후 늦게 대회장 가까운 곳에 도착하였으므로, 해질 무렵에 대회장에 도착할 가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길이 보이지 않아서, 계속해서 가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기는커녕 폭우가 더 심해지는 것 같았기 때문에, 우리는 차를 멈추고 가능한 한 편히 그 밤을 거기서 보낼 준비를 하였습니다. 다행히 다음날 아침에 비가 그쳤습니다. 물을 헤치면서 좀 걸어 들어가, 마침내 대회장에 도착하여 몇몇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매우 놀랍게도, 대회가 열리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듣고서 형제들은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틀림없이 형제들이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악천후 속에서 2, 3일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도 얼마 있었지만, 형제들은 왔습니다. 일요일 오후 참석자가 419명에 달했습니다. 그날 오전에 61명이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형제들은 교훈을 잘 따랐으며, 관심자들은 생활을 빨리 변화시켰다. 예로서, 성서는 배우자를 여럿 두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성서는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그리고 그리스도인 감독자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고 알려 준다. (고린도 전 7:2; 디모데 전 3:2) 그렇기 때문에 아내를 여럿 두고 있던 한 족장은 제일 먼저 맞아들인 아내를 제외하고는 모두 내보냈으며, 그후에 침례를 받았다. 그는 때가 되어 회중의 장로가 되었다. 아내를 둘 두었던 한 남자는 늦게 맞이한 아내를 동생에게 주었으며, 이기심 때문에 자신과 두 아내가 죽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역시 침례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딸을 시집보낼 때 신부값을 요구하는 전통적인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비이기적인 사랑을 나타낸 증인들도 있었다. 그러한 신부값은 젊은 증인들, 특히 파이오니아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많은 아버지들은 딸이 “주 안에서” 결혼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고린도 전 7:39) 또한 신부값의 부담이 없어져서 결혼하는 남녀에게는 결혼 생활의 출발이 훨씬 수월해지게 되었다. 이 일은 처음에는 놀라움을 자아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처럼 사랑에 찬 염려를 나타내는 일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존중하게 되었다.

탕가니카에서도 교직자들은 문제를 야기시키려고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캉갈레 형제는 음베야에서 경찰에 체포되자, 다만 영적 형제들을 방문하는 중이라고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자 경찰은 협조적이 되어, 그의 회중 방문 일정표를 요구하였는데, 그것은 다른 경찰서에도 그의 도착 사실을 알려 그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캉갈레 형제는 탕가니카 일대를 수년 동안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었다. 북로디지아와 니아살랜드에서 온 다른 특별 파이오니아들과 여행하는 감독자들도 양들을 세워 주는 일에 그와 합세하였다. 그들 중 몇 사람의 이름을 들면, 프랭크 카니앙가, 제임스 므왕고, 워싱턴 므웨니아, 버나드 무싱가 그리고 윌리엄 람프 치셍가 등이 있었다. 흥미롭게도, 치셍가 형제는 1957년에 음베야 시에서 노벗 카왈라를 만났다. 그는 진리를 갈구하고 있었으며, 일주일에 두 번씩 성서 연구를 하여 침례받을 자격을 갖추게 되었고, 그후 케냐 나이로비의 지부 사무실에서 번역 일을 하게 되었다.

영화 상영과 북쪽으로 확장

한편 1956년 이후로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란 협회 영화를 탕가니카에서도 상영하였다.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관람하였다. 또한 왕국 전파자들이 더 많이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해외의 증인들이 도착하기 시작하였을 때인 1959년에 또 한번 박차가 가해졌다. 탕가니카의 전도인 수는 다시 불어나기 시작하여 1960봉사년도에는 507명이 되었다.

하지만 발전이 항상 순조롭지는 않았다. 여러 도시에는 회교도들이 상당히 많아서 전도인의 전파 기술이 도전을 받았다. 무덥고 습한 기후 또한 외국 형제들에게는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사야의 정신을 갖고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자원하였으며, 그 일에 대해 축복을 받았다.—이사야 6:8.

킬리만자로의 경사지

1961년에 탕가니카는 독립을 하였고, 1964년에는 잔지바르 섬과 합병하여 탄자니아 연합 공화국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지난 1961년에 웅장한 킬리만자로의 경사지에 위치한 새로운 지역에서 좋은 소식의 꽃이 활짝 피어났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은 만년설로 덮인 웅장한 사화산이다. 경사면들은 완만하며 동쪽과 남쪽으로부터 비를 풍족히 받는다.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강우량 때문에 이 경사지는 농사 짓기에 좋은 곳이라서 사람들이 많이 산다. 북로디지아 출신인 한 특별 파이오니아가 이곳에서 다섯 명의 관심자로 이루어진 한 집단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인 1962년 8월에, 그 장엄한 산을 마주보고 있는, 마랑구 인근의 키보 호텔에서 순회 대회가 개최되었다. 케냐의 증인들이, 나이로비에서 여러 대의 자동차로 400킬로미터를 여행하여 이 행사를 지원하였다. 차가운 계곡의 시내에서 침례가 베풀어졌다. 이 지역에서는 최초로, 유럽인 헬게 린크가 아프리카 형제에게 침례를 받았다.

헬게 린크는 어린 시절에 덴마크에서 진리를 알게 되었지만, 진리를 계속 탐구하지 않았다. 그가 탕가니카에 온 것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서였다. 1959년에 캐나다에 사는 친형제가 동아프리카를 방문하여 진리에 대한 그의 관심에 다시 불을 붙였다. 1961년에 한 특별 파이오니아가 전파한다는 이유로 투옥되었을 때, 헬게는 그가 석방되도록 주선해 주었다. 헬게는 키보 순회 대회 때 이 목가적인 배경에서 침례를 받은 후,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고, 나중에 전파한다는 이유로 이 나라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면 이제 본토를 떠나 정향의 섬이자 아프리카 근해에서 가장 큰 산호섬인 잔지바르로 잠깐 주의를 돌려 보자.

정향의 섬—잔지바르

본토에서 불과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잔지바르는 유럽인들뿐만 아니라 아랍인들이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거민들은 거의 전부가 회교도들이며 아프리카인과 아랍인 혼혈 후손들이다. 이곳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스와힐리어로, 노예 교역을 따라 서부 아프리카의 앙골라 국경까지 보급된 언어다. 19세기에 잔지바르는 노예 교역의 주요 시장으로 사용되었다.

1932년에 남부 아프리카 출신인 두 파이오니아가 이 정향의 섬을 잠깐 방문하였다. 그로부터 29년이 지난 1961년에는 새로 침례받은 좋은 소식의 전도인이 된 로스톤 맥피와 조안 맥피가 케냐에서 이 섬으로 이사하였다. 그들은 곧장 왕국 사업에 착수하여 성서 서적을 많이 전했다. 그들은 곧 두 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게 되었다. 다르에스살람의 인근 회중이 서로 격려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 주말에 잔지바르를 방문하는 마련을 하였다.

맥피 부부가 케냐로 돌아간 지 얼마 안 되어 다른 그리스도인 가족, 벅 부부가 미국으로부터 잔지바르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기존의 관심자들을 잘 돌보았으며, 이에 더하여 새로운 관심자와도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1963년 말에 폭동이 일어나 이 섬을 휩쓸었다. 그래서 벅 가족은 소유물을 대부분 남겨 둔 채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벅 부부가 떠나자 이 섬에서 왕국에 대한 관심은 곧 식어 버렸다. 그런데 1986년에 관심자들이 잔지바르로 이사함으로 새로운 출발이 있게 되었다. 곧 작은 전도인 집단이 형성되었다. 열심이 뛰어난 한 관심자는 여가 시간을 전부 사용하여 성서 연구를 최고 30명까지 사회하였다. 세속 일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참으로 벅찬 일이었다! 집회 시간에 참석하는 사람이 45명이나 되었다. 그들 중 다섯 명이 1987년 12월에 다르에스살람 지역 대회에서 침례를 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이 역사적인 섬에 회중을 세울 기초가 놓였다.

정향의 섬을 떠나 이제 아프리카 본토로 주의를 돌려 보기로 하자.

즐거운 일과 난문제

탕가니카에서 30년 간 전파하는 동안 우리 형제들은 당국과 문제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경찰은 대단히 존경을 나타내고 아주 협조적이었으며, 때때로 우리 대회에 사용하도록 확성 시설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1963년 5월에 브루클린의 협회 세계 본부에서 밀턴 G. 헨첼이 다르에스살람을 방문했을 때, 이 나라에서 가장 좋은 강당인 카림지 홀에서 대회가 마련되었다. 수도의 시장을 포함하여 274명이 참석하였고, 16명이 침례를 받았다. 이웃 케냐에 지부 사무실이 바로 그 무렵에 개설되었기 때문에, 지금의 탄자니아인 탕가니카에서의 왕국 관심사에 주의를 더 잘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스와힐리어로 「파수대」를 발행하는 마련이 있게 되었다. 1963년 12월 1일 호가 그 첫 호로 발행되었다. 그해에는 또 천국 전도 강습이 열려 탄자니아의 25개 회중의 감독자들에게 필요한 지침과 지도가 베풀어졌다. 1964년 9월과 10월에는 지역 대회가 개최되어 최고 참석자 수는 총 1033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문제들이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의 선교인 입국이 허락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법적 인가를 받고자 여러 번 시도하였지만 번번이 거절되었다.

악화됨

1963년과 1964년에는 대체로 상황이 평온했지만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금지되었으니 그들을 체포하라는 공문이 모든 경찰관들에게 하달되었다. 1965년 1월 25일에는 또 하나의 타격이 가해졌다. 워치 타워 협회가 불법 단체라고 알리는 신문 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부의 공식 발표인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65년 4월 2-4일에 탕가에서 순회 대회를 갖기로 마련하였다.

대회장을 계약하였고, 숙박 마련도 하였으며, 많은 증인들이 기차편으로 사이잘마 농장에서 왔다. 도중에 그들은 함께 탄 승객들에게 전도를 하였는데, 그중에 경찰관이 한 명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증인들을 모두 체포하여 경찰서로 압송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곧 풀려 났다.

4월 3일, 즉 대회 둘째 날에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정부가 여호와의 증인 및 모든 관련 기관의 활동을 금지시켰다는 발표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회는 아무런 사고 없이 끝났다. 금지령의 선포가 정부의 관보에는 실리지 않았다. 금지령이 발표되었다가 취소되었다는 소식이 이웃 말라위(이전의 니아살랜드)와 잠비아(이전의 북로디지아)로부터 들려 왔다. 이 소식은 로이터 통신에 의해 확인되었다. 결국 예상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1965년 6월 11일 정부 관보에 워치 타워 협회 및 모든 관련 기관은 불법적인 단체라고 발표하는 공고가 실렸다.

이제 경찰은 경계를 한층 더 강화하게 되었고, 이 나라의 남부에서 순회 대회를 갖고자 하는 시도는 여러 차례 실패하였다. 여기저기서 몇 사람이 체포되는 일이 있었다. 때때로 서적이 압수되었지만, 이따금 반환되기도 했다. 형제들은 작은 집단으로 모이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교국의 선교인들이 경찰을 부추기는 곳곳에서는 상황이 더욱 긴장되었다.

오래 지속되는 오해

금지령이 내려지기 바로 전에, 케냐에서 온 윌리엄 니즈벗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인가를 받기 위해 다르에스살람의 관계자들과 만나려고 8주일 동안 매우 애썼다. 그는 내무부 장관 보좌관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거짓 정보를 퍼뜨리는 그리스도교국 선교인들의 운동 때문에, 많은 정부 관리들이 여호와의 증인을 잠비아와 말라위의 불법 급진 종교들과 관련시키고 있음이 분명했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근거 없는 두려움이 관리들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한 두려움은 마치 빗방울이 전혀 없는 먹구름에 대한 두려움과도 같은 것이었다. 관리들은 여호와의 증인을 증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지역 단체인 “워치타워” 혹은 키타왈라 등과 혼동하고 있었다. * 이 종파들은 간음과 마술을 행하였고, 종종 기존 정부를 대항하였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이름과 우리 출판물 중 일부를 오용하고 있었다.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평화를 사랑하는 참다운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라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니즈벗 형제가 방문하고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가 마련한 증거 서류로 인하여 일부 관리들의 그러한 오해가 말끔히 씻겨졌다.

니즈벗 형제는 다르에스살람을 떠나기 전에 만국 성경 연구생 협회의 등록 신청을 하였다. 공식 금지령이 내려진 지 6개월 후에, 다르에스살람의 형제들로부터 만국 성경 연구생 협회가 1966년 1월 6일에 회사법에 따라 등록되었다는 소식을 알리는 전보를 받은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과 워치 타워 협회는 여전히 금지되어 있었다. 1966년 11월 24일자 정부 공고에서는 만국 성경 연구생 협회는 그 회중들이 사단 법인법에 따라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체되었다고 발표하였다.

탄자니아에 도움을 주기 위해 왔던 잠비아와 말라위 형제들은 이제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의 실망은 컸지만, 탄자니아에서의 참 숭배는 결코 침체되지 않았다. 1966년에는 1720명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참석하였고, 836명이 활동적으로 왕국 전파에 참여하였다.

세이셸 제도—“낙원의 섬”

“일천육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비길 데 없는 명소.” 이 말은 동아프리카 해안에서 약 16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으로, 사람이 타고 다닐 수 있을 만큼 큰 대형 거북들의 서식지, 세이셸 제도를 선전하는 문구이다. 세이셸 제도는 약 100개의 섬으로 되어 있으며, 마다가스카르 부근까지 뻗어 있다. 주요 섬인 마헤처럼 화강암으로 된 섬들도 있고, 산호로 된 섬들도 있다. 이 섬들에는 열대 섬을 매력적인 곳이 되게 해주는 모든 요소 즉 산, 그림같이 아름다운 바위, 은빛 모래 해변, 옥색의 물, 화사한 암초, 멋진 초목, 천연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공기 속을 훨훨 날아다니는 이국적인 새들이 있다. 그리고 열대성 질병이 없는 곳이다.

주민들은—마헤에 90퍼센트가 살고 있는데—크레올이라는 프랑스 방언을 사용한다. 그들은 주로 아프리카인,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 주민, 인도인 그리고 중국인의 후손이다.

1961년에 여호와의 증인이 설명하는 성서 가르침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동아프리카에서 이곳으로 왔다. 그 이듬해에, 남로디지아로부터 온 맥루키 가족 네 식구를 포함하여, 여러 증인들이 도착하여 비공식 증거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교세가 강한 곳이라 성서 공개 강연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1962년 4월에 처음으로 마련된 집회에는 12명이 참석하였고, 그 무렵 8명이 야외 봉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반대가 역효과를 내다

그러나 곧 그리스도교국 교회들의 전형적인 반대가 고개를 들었다. 이민국에서는 맥루키 가족에게 1962년 7월 25일까지 떠나라고 요구했다. 경찰은 또 다른 외국인 형제에게 전파를 하지 말 것이며, 그의 방문 허가를 연장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통지하였다. 가톨릭 사제들은 일반 대중에게 증인들에 대해 경고하는 설교를 하고 지방 신문들에 긴 기사를 기고하였다.

이 일은 역효과를 냈다.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들어본 일이 없었는데 이제 호기심이 생겨 알아보기 시작했다. 세이셸 제도에서 성서 진리가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1962년 7월 15일, 맥루키 가족이 떠나기 일주일 전에, 세이셸 제도 태생의 노먼 가르드네르와 리세 가르드네르 부부가 원주민으로서 최초로 침례를 받았다. 떠나는 그 가족은 이 일을, 그 먼 섬들에서 왕국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바친 돈과 노력에 대한 훌륭한 보상으로 생각하였다.

다섯 달 후에 퇴직자인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두 증인이 마헤에 정착하여 전파 사업을 돕기 위해 그곳으로 왔다. 얼마 안 있어, 그들은 성서 연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들에게 연락하라는 광고를 지방 신문에 냈다. 바로 그 이튿날 그들은 비자가 취소됨을 알리는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세이셸 제도에 머무르는 4개월 동안 그들은 성서 서적을 많이 전했으며, 훌륭한 증거를 하였다. 하지만, 가르드네르 부부가 이미 떠나고 없었기 때문에, 이 섬들에는 증인이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다.

단지 몇 개월의 공백이 있은 뒤, 가르드네르 부부가 일자리가 바뀌어 수단, 카르툼에서 잠깐 머물다가 돌아오게 되자, 왕국 사업이 재개되었다. 그들은 그곳에 가 있는 동안 케냐와 남로디지아 그리고 수단의 충실한 형제들과 좋은 교제를 즐겼다. 그들은 세르프 섬에 정착하였는데, 이 섬은 마헤에서 배로 반 시간 가량 가는 거리에 있었다. 이 섬에는 열두세 가족만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고립된 환경은 그들의 전파 활동에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이셸 제도에서 유일한 전도인으로서 그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야외 봉사에서 매월 평균 30시간씩 바쳤다.

1965년에 순회 감독자 방문이 처음으로 마련되었다. 그해에는 다른 좋은 일들도 있었다. 성서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총 75명이 관람하였다. 세 명의 관심자가 가르드네르 부부에게 가담하여 전파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그해에 침례를 받았다. 정규 집회를 갖기 위한 적절한 마련이 있게 되었다.

세르프 섬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었지만, 이웃에 대한 사랑이 더 강했기 때문에, 가르드네르 부부는 1966년에 참 숭배를 증진시키기 위한 중심지를 마련하기 위해 주요 섬인 마헤로 이사하였다. 자기들의 집에 왕국회관을 붙여 지어, 확장을 위한 길을 열었다.

우간다에서 봉사하던 영국 출신 선교인, 스티븐 하디와 아내, 바바라가 세이셸 제도를 계속 순회 방문하였다. 1968년 12월 6일, 그곳을 방문했을 때 6명의 활동적인 전도인이 있었으며, 새 왕국회관 봉헌식에는 23명이 참석하였다.

1969년에 왕국 사업을 등록하고 선교인들의 입국을 신청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두 가지 신청이 모두 거절되었다. 이유는 설명되지 않았다.

일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민을 갔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주민이 비교적 적은 곳에서 아주 보편적인 일로서, 사람을 두려워하여 주춤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장은 느렸다. 또한 문맹, 일반적인 무관심한 태도, 만연된 부도덕은 많은 사람들에게 실로 장애가 되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이를테면 점심 휴게 시간을 이용하여 매일 성서 연구를 한, 대가족을 둔 공무원은 빨리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1971년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40명이 참석하였고, 11명이 야외 봉사에서 활동하였다. 다가오는 지상 낙원에 대한 소식은 이 아름다운 세이셸 제도에서 계속 울려 퍼졌다.

부룬디의 초창기

하디 부부는 우간다에서 봉사하고 세이셸 제도를 방문하기 전에, 아름다운 나라 부룬디에 임명되었다. 수많은 언덕이 있는 자그마하고 그림 같은 이 나라는 탄자니아와 자이르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주로 계단식 언덕에 일종의 바나나인 플랜틴을 재배하는 근면한 농부들이 조밀하게 살고 있다.

벨기에의 식민 통치 기간에, 워치 타워 협회는 우숨부라 즉 부룬디의 수도인 현재의 부줌부라에 선교인을 파견하고자 신청을 하였지만, 인가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1962년에 독립을 하게 되자 정치적 상황이 달라졌다. 그래서 1963년 10월에 두 명의 북로디지아 특별 파이오니아가 3개월 체류 비자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이 비자는 어려움 없이 갱신되었다. 꼭 3개월 후인 1964년 1월에 4명의 길르앗 졸업생이 무기한 비자를 받고 입국하였다.

종교적인 압력

바로 처음부터 사람들은 왕국의 좋은 소식에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선교인들이 부룬디에 도착했을 때,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이미 여러 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었고, 아홉 명의 전도인이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 달에 선교인들은 사업 허가를 받기 위해 조직을 등록해야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형제들은 등록이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후로 수주일 동안 이민 수석 관리와 다른 관리들은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그 배후에서 종교적인 압력이 그 관리들에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5월 초에 선교인들은 10일 안에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선교인들이 연구를 사회하던 70명을 남겨 두고 떠나야만 했을 때 그들의 실망이 얼마나 컸겠는지 상상해 보라!

5월 말까지 특별 파이오니아들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일로 인해 한 탄자니아 형제는 성서를 연구하던 30명 가량의 사람들을 돌봐야 하는 벅찬 일을 떠맡게 되었다. 파이오니아들과 선교인들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 전도인들은 전파 활동을 계속하였다. 1967년에는 최고 17명의 전도인이 보고를 냈고, 32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유감스럽게도, 그 이듬해에는 몇몇 형제들이 임명된 감독자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들이 생겼다. 그 결과 전도인 수는 그 봉사년도의 최저 기록인 8명으로 감소했다. 영적 충고가 치유책으로 베풀어졌다. 결국 형제들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리하여 1969년에는 25명이 야외 봉사에서 활동적으로 일하였고, 58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새로운 사람들이 고통을 견뎌 내다

이 증인들의 부지런함은 교직자들의 분노를 일으켰으며, 그들은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1969년 8월에 일곱 명의 증인들이 체포되었으며, 이틀 동안 허리까지 차는 물 속에 서 있는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초기 사도들처럼 그들은 단념하지 않았다. 두 달 후에 아홉 명의 새로운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다. 그후 두 번이나, 관리들은 형제들에게 종교를 등록하라고 요구하였다. 하지만, 두 번 다 신청이 거절되었다. 그후 해마다 46, 56, 69, 70, 98명의 전도인 신기록을 달성하였으며, 1969년에는 부줌부라에 회중이 형성되었다.

1972년에 투시족과 후투족 사이에 심각한 종족 싸움이 발생하였다. 이 분쟁중에 최소한 4명의 증인을 포함하여 10만 명 이상의 후투족 사람들이 살해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투옥된 증인들도 있었으며, 일부는 8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이 와중에서도, 형제들은 부지런히 야외 봉사를 하였으며, 전도인당 매월 평균 17시간 이상 봉사하였다.

10년 동안 성장한 후에도, 적절한 신권적 감독을 하는 일이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었다. 대다수의 형제들은 확고하긴 했지만, 깊이와 분별력이 부족하여, 영적으로 어린 상태를 나타내는 부면들이 있었다. 인근 지역들로부터 스며드는 키타왈라의 영향, 즉 거짓 “위치타워 운동”이 일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한 문제는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이곳 형제들에게는 지구 감독자의 방문이나 협회의 영화나 회중 감독자들을 위한 특별 강습이나 대회나 그들의 언어로 된 출판물 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76년에 이 지역을 감독하는 일은 자이르 지부로 넘겨졌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어와 스와힐리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은 부룬디에 있는 증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종족간의 살상이 벌어지고 있는 때에, 축출된 부룬디 지도자가 망명 생활중 죽기 전에 철저한 증거를 받았다. 방문중인 한 선교인이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이 사람을 만난 것이다. 많은 질문이 있었고 긴 토의가 여러 차례 계속된 결과 한때 통치자였던 이 사람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선교인은 그가 증거한 사람이 누군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우간다에서의 선교인들의 황금 시기

부룬디로부터 선교인들이 추방됨으로 인하여 우간다가 덕을 보게 되었다. 1964년에 단단한 핵심이 되는 전도인들이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마침내, 30여 년 간의 노력이 기울여진 후, 첫 선교인 부부가 도착하였고, 장성된 형제 자매들이 더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왔다. 그후 더 많은 선교인들이 왔다.

캄팔라에 첫 선교인 집이 세워진 후, 두 번째 선교인 집이 산업 도시인 진자에 개설되었는데, 이곳에서 나일 강은 빅토리아 호수의 북쪽으로 흘러간다. 발전은 빨랐으며, 얼마 안 있어 회중이 형성되었다.

그 동안 왕국 소식은 우간다 전역의 보다 작은 도시로 전파되었다. 1967년에는 전도인이 53명이 되었다. 그 이듬해에 또 하나의 선교인 집이 케냐 국경 근처인 엘곤 산의 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성장하는 도시, 음발레에 개설되었다. 1969년에는 전도인이 75명이었고, 그 이듬해에는 97명에 달했으며, 1971년에는 128명이 되었다.

1965년 8월 12일부터, 왕국 사업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1972년은 만사가 순조로운 듯이 보였다. 162명의 전도인 신기록에 달하였으며, 다섯 명의 새로운 선교인들이 그 무렵에 입국 허가를 받았다. 캄팔라의 루고고 스타디움에서 우간다의 여호와의 증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대회를 개최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웃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심지어 멀리 에티오피아에서도 증인들이 왔다. 65명의 에티오피아 형제들이 전세 버스를 타고 여행하였으며, 그들 중 일부는 2주일 동안 거의 3200킬로미터를 여행하였다.

우간다에서의 소요

우간다를 입국하는 그 방문객들은 외국인 교사들과 아시아계 가족들이 줄줄이 떼를 지어 황급히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쿠데타가 일어난 후, 정치적 상황이 변하여, 사람들은 장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증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빠져 나가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상황은 긴장되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캄팔라의 중심가에서는 18미터나 되는 플래카드가 대회의 공개 강연을 꿋꿋이 광고하였다. 형제들은 “하나님의 통치권” 지역 대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된 것에 대해 감사하였다. 공개 강연에는 최고 참석 수인 937명이 참석했다. 동아프리카 전역에 있는 오래 된 사람들은 이 캄팔라 대회에 대한 즐거운 추억을 아직도 갖고 있다.

성서 진리에 대한 관심이 많고 서적이 대량으로 전해지고 있었지만, 지평선상에는 먹구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두 선교인 부부의 사업 허가 연기 신청이 거절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석 달 안에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후 1973년 6월 8일에 정부는 사전 통지도 없이 여호와의 증인을 포함한 12개 종교 단체에 금지령을 내렸다. 남아 있던 12명의 선교인들은 1973년 7월 17일까지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사건은 모든 외국 지원자들에게 슬픈 일이었다. 이 일은 케냐에서도 숭배의 자유에 어려움이 있을 때 발생하였다.

대부분의 선교인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우간다의 더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던 일부 부부들은 케냐에 정착하여 지원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지원한 사람들 중에는 래리 패터슨과 도리스 패터슨 그리고 브라이언 월리스와 마리온 월리스가 있었다. 하디 부부는 코트디부아르로 가서 봉사하였으며, 그리고 1983년에는 런던 벧엘에서 봉사하였다. *

우간다는 사실상 법과 질서가 없는 곳이 되었다. 예로서, 한 파이오니아 형제는 체포되어 군 부대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그의 죄명은 무엇이었는가? 유럽인 “간첩”으로부터 돈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가 선교인 집을 방문하던 것을 그들이 목격한 것이다. 그의 자진적인 전파 활동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타당하였고 자기 무덤을 파도록 삽을 받았다. 그가 무덤을 다 파자, 유럽인 “간첩” 즉 선교인들을 묻을 무덤을 두 개 더 파라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무덤을 다 팠을 때, 총을 가진 세 군인이 그를 내리치고서 그에게 총을 쐈다. 총탄은 빗나갔다! 한 발은 한 군인의 구두 발등 부분을 스쳐 갔다. 그래서 군인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그들의 주의가 산만해졌다. 그 형제는 얼마간 그곳에 누워 있었으며, 그 다음날에 풀려 났다.

회중들은 이제 비밀리에 집회를 갖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반적으로 생명은 파리 목숨처럼 취급되었으며, 금지된 종교 활동에는 부가적인 위험이 따랐다.

남부 수단이 개척되다

1960년대 후반에, 수단에도 긴장이 고조되었는데, 주로 북부 사람들과 남부 사람들 사이에서 그러했다. 카르툼 회중은 나이로비 지부 사무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다른 곳의 형제들로부터 매우 격리된 곳에 있었지만 담대하게 활동을 계속하였다. 1970년 8월, 경험이 가장 많은 회중의 장로, 조지 오퍼니데스가 이 나라를 떠나기 직전에 최고 전도인 54명에 도달했다.

바로 그때 여러 명의 증인들이 시온주의자들이라고 고발을 당하여 만 이틀 동안 관리들에게 심문을 받았다. 또한, 두 파이오니아 자매는 관심 있는 부인에게 증거를 하다가 콥트교 사제로 인해 뜻밖의 일을 당했다. 그는 경찰을 불러 자매들이 이스라엘 스파이들이라고 신고를 한 것이다. 경찰 본부에서 이 자매들은 훌륭한 증거를 할 수 있었고, 곧 풀려 났다. 그러한 경험들로 인하여 일부 증인들은 두려워하게 되었지만, 다른 증인들은 믿음이 강화되었다.

지금까지 수단에서의 모든 일은 카르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 개척되지 않은 넓은 밭인 남부 지역이 있었다. 이곳에는 명목상 그리스도인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진리가 어떻게 이 방대한 지역으로 확산될 것인가? 1970년에, 남부 출신이며 어느 가톨릭 잡지의 편집자로 일하는 한 젊은이가 증인들과 접촉하게 되었을 때,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그는 성서 연구에서 신속히 발전하여 얼마 안 있어 친구와 친척들과 연구를 시작하였다. 친구들 중 한 사람은 그가 다니는 학교에 왕국 소식을 반대하는 팜플렛이 배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내에서 담대하게 왕국 소식을 전파하였다.

1973년에 이 나라의 남부 지역에는 관심자들의 작은 집단이 여러 개 있었으며, 이 지역에서 16명의 성서 연구생이 침례를 받았다. 이 남부 사람들은 명료하게 울리는 성서 진리 외에도, 위선적이 아닌 사랑 즉 종족과 인종의 장벽을 뛰어넘는 진실한 형제애가 담긴 사랑을 실천하는 종교를 보고 매혹되었다.

1970년대 초에 수단의 남부는, 아마 외따로 동떨어져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고유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기차와 배를 타고 카르툼에서 주바까지 여행하는 데 일주일 이상 걸렸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 사건에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은 뛰어나게 친절하고 후대를 잘했다. 일부 호텔은 투숙객들의 방에 자물쇠를 달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지나가는 행인들을 안내하고, 먹을 것을 주고, 숙소를 제공하곤 하였지만, 그 대가를 바라지는 않았다. 사실상, 대부분의 경우, 대가를 지불하면 완강히 사양하였다. 이 친절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 여호와의 목적에 관한 진리를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남부 지역이 개척되고 성서 출판물이 더욱 잘 전해짐에 따라, 꾸준한 증가가 있었으며, 1974년에는 수단에서 최고 전도인 100명 선에 달했다.

박해의 불이 붙은 에리트레아!

수단의 동쪽 국경 바로 너머에 에리트레아가 있다. 1960년대 초에—선교인들이 추방된 후—라디오 방송, 신문 및 기타 매체들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악선전을 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다. “거짓 예언자들”, “참된 신앙을 부인하는 종교적 속임수를 경계하라” 등의 표제하에 증인들은, 황제와 교회를 미워하는 자들로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와 동정녀 마리아를 배척하는 사람들로 묘사되었다. 증인들은 또한 외적의 앞잡이로, 조국을 위해 싸우지 않는 부도덕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이 나라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제거하기 위한 극적인 조처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말이 들렸다.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사제들이 증오심을 선동하는 주요 인물들이었다. 2만 명 이상이 참석한 한 세례식에서, 수석 사제는 여호와의 증인과 절교하는 결의문을 선포하였고, 사람들에게 증인들을 접대하거나 고용하거나 심지어 그 시체를 매장하는 일도 하지 말도록 요구했다.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노골적인 사냥 시기”가 왔다는—증인들은 이제 어느 누가 죽여도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지주들은 소작인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면 추방해야 했다. 부모들은 자녀 중에 증인이 있으면 그를 집에서 내쫓고 저주하고 상속권을 박탈해야 했다. 한 대가족에서는 18명의 젊은이들이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를 한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어느 도시에서는 폭도들이 잘 알려진 한 형제를 구타하려고 나섰으나, 그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경찰은 형제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에게 믿음을 부인한다는 각서에 서명을 하고 정부의 치안을 해치는 일을 하고 있음을 시인하라고 강요하였다. 몇몇 형제들은 잘 모르고 서명을 하였다가, 잘못한 것을 깨닫고는 결과에 개의치 않고 즉시 서면으로 그들의 서명을 취소하였다.

“마음으로는 믿어도 돼요. 다만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라고 말만 하면 됩니다”하고 관리들이 간절히 부탁하는, 부드러운 설득의 덫에 직면한 형제들도 있었다. 또는 젊은 증인 수감자들에게는 관리들이 보다 악랄하게 교활한 유혹을 하였다. 날을 하루 잡아, 수감자 중 젊은 증인 한 사람을 뽑아 내어, 나이 많은 여러 친척과 만나게 하였다. 친척들은 도착하여 처음에는 말 없이 그를 유심히 바라본 다음에, 갑자기 눈물을 쏟으면서 무릎을 꿇고 여호와께 대한 믿음을 버리라고 애원하곤 하였다. 이런 압력을 받은 형제들은 그것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험이었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강한 박해와 압력은 수년 동안 계속되었다.

에티오피아에서의 소강 상태와 단결

같은 기간에 아디스아바바와 에티오피아 남부의 증인들은 에리트레아와는 정도에 차이가 있지만 박해를 톡톡히 받았다. 1962년에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는 한 나라로 통합되었다. 그 결과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분쟁은 계속되었다.

1964년에 에티오피아에 있는 모든 회중을 감독하는 일을 새로 설립된 케냐 지부로 옮기는 것이 실용적임이 자명해졌다. 나이로비 지부 대표자들이 에티오피아에서 순회 사업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회중을 방문하여 임명된 회중 장로들 사이에 빚어진 얼마의 심각한 불화들을 해결하도록 도움을 베풀었다. 여러 회중에서 「파수대」 연구가 논쟁식으로 진행되었다. 한 지방 순회 감독자는 성서의 견해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권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한 문제들이 1964년과 1966년 사이 수년 동안 증가를 저하시키고 있었다. 그 당시 전도인 수는 200명선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진리는 널리 전파되었다. 무더운 홍해의 항구 도시, 마사와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던 한 증인은 우체국에서 관심자를 만나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관심 가진 다른 에티오피아인들도 연구에 함께 참여하여 얼마 안 있어 회중이 하나 세워졌다. 이 무렵 좀더 남쪽에 위치한 에티오피아의 다른 항구 도시, 아세브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회중이 생겨났다.

1957년 이래로 출판물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증인들은 지방 언어로 영적 양식을 공급하는 방법들을 알아냈다. 1966년에 수도에서 두 주일 간의 천국 전도 강습 과정이 마련되어 신권 조직과 성서적인 문제에 대해 임명된 감독자들이 교육을 받았다. 그리하여 형제들은 보다 신권적이고 진보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고, 1967봉사년도에는 21퍼센트 증가하여 총전도인은 253명이 되었다.

종교적 압력이 완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증인들은 이 나라의 정치적 긴장 때문에 계속 작은 집단으로 집회를 갖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국 정부의 관보(官報)에서는 모든 사람의 숭배의 자유를 보장하였고, 그러한 권리가 허용된 종교들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도 포함시킨 반면, 등록 신청은 모두 거절되고 말았다.

사제들이 여호와에 관해 배우다

제1세기에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일과 유사하게도, 정직한 마음을 가진 여러 명의 사제들이 성서 진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사도 6:7) 편견이 없는 한 사제는 증인에게 “당신은 정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당신의 방문은 사제인 나의 직책에 정말로 일격을 가한 것입니다”하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또 다른 한 사제가 여호와의 증인의 가르침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였으며, 성서 질문들에 대해 만족스러운 답을 얻었다. 토의가 12시간씩 지속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그는 결혼을 법적으로 등록하였고, 진리를 위해 열성적이 되었으며, 한 수녀에게 증거를 하였다. 그 수녀는 자기 아들(교회의 장로)과 증인과의 토론을 주선하면서, 증인이 “이긴다”면 자신도 성서 연구를 시작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런데, 그 아들이 토론에서 “졌다.” 후에 그 아들은 여행하는 그 순회 감독자를 몰아붙이면서, 단지 4시간만 낮잠을 자고, 20시간 동안 질문 공세를 하였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그 가족 전체가 연구를 하였으며, 15명이 진리 안에서 잘 발전하였다. 그 수녀까지도 침례를 받았으며, 아들은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자가 되었다.

짧은 기간의 좋은 시기

1971년 초에 에티오피아 형제들에게는 즐거워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통치체 성원인 헨첼 형제가 아디스아바바와 아스마라를 방문하여, 912명의 청중에게 연설하였다. 이 나라의 전도인 수는 약 500명에 달해 있었다. 그리고 이 나라에 많은 서적이 반입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앞에 놓여 있었다. 그해가 경과하면서, 라디오 방송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20명이 넘는 배교자들이 교직자들에게 협조하여 비방 기사를 쓰는 일을 도운 것이다.

한 지역에서는 경찰이 모임중인 회관에 들어가, 성서 70권을 압수하였고, 몇몇 증인들을 데려가 잠깐 동안 구금하였다. 그후 아스마라의 왕국회관이 폐쇄되어, 회중은 다시 작은 집단으로 집회를 갖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왕국 사업은 침체되지 않았다. 1971년에 새로 침례받은 사람들의 수는 총 142명에 달했고,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는 2302명이 참석하였다.

격지에서 새로운 집단들이 형성되고 있었고, 25개 회중과 집단 및 격지의 관심자들을 돌보기 위해 두 명의 순회 감독자가 주기적으로 방문하였다. 얼마 안 있어 전도인 1000명선을 돌파하였으며, 1974년에는 신기록인 1844명에 달하였다.

박해를 받으나 버림받지는 않다

반대는 멈추지 않았다. 1972년에 경찰은 여러 형제들을 소환하여 심문하였고, 활동을 중지하지 않으면 조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후 1972년 8월 27일에 일요일 정규 집회를 보고 있는 여러 곳에 커다란 트럭들이 들이닥쳤다. 경찰은 208명의 증인들과 관심자들을 체포하였다. 한 회중에서는 연사가 곡(사단)의 공격에 관한 에스겔의 예언을 설명하면서 “경찰이 여기 와서 우리를 체포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하고 질문하였다. 묘하게도 바로 그 일이 몇 분 후에 일어났다!

경찰은 59명의 형제들을 사방 3미터 정도 되는, 벌레가 우글거리는 방에 몰아넣었다. 46명의 자매들은 비슷한 크기의 다른 방에 밀어 넣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추운 바깥에서 잠을 자게 했다. 보석 신청은 거절되었다. 변호인 신청도 거절되었다. 형제들이 구치소 관리들에게 훌륭한 증거를 하였지만, 96명이 6개월 금고형을 받았다. 며칠 후 그리고 머리가 빡빡 깎인 후, 그들은 보석으로 풀려 났다.

그 외의 112명은 불법적인 종교 단체를 세웠다는 이유로 고발되어 6개월 금고형을 받았다. 한 달 후에 이 형제들도 보석으로 풀려 났다. 후에 그들은 또 법정에 소환되어 다시 수감되었으며, 12일 후에 보석으로 풀려 났다. 첫 번째 투옥이 있은 지 거의 1년 후에, 고등 법원은 항고에 대한 심리를 한 후, 하급 법원의 결정을 지지하였지만, 집행 유예를 선고하면서 엄히 경고하였다. 증인들은 박해를 받았지만 버림받지는 않았다. (고린도 후 4:9) 감옥에 있는 동안 형제들은 두려움 없이 전파하였으며, 무기수 두 사람을 헌신에 이르도록 도왔다.

도움이 된 방문과 많은 영적 양식

나이로비 지부 사무실의 윌리엄 니즈벗이 아디스아바바를 방문하였으며,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잘 발전하고 있던 한 집단의 젊고 감정적인 형제들이 기름부음을 받았고 하늘 희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야외 봉사에 참여할 때만 서로 함께하였고, 기름부음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서 충고를 들으면 화를 내면서 듣지 않았다. 그들의 집회는 “성령”의 소란스러운 현시라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서 어떤 사람은 표상물을 돌리는 사람에게서 표상물을 잡아채면서 소리를 지르고 일어나서 표상물을 먹음으로써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시켰다.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후 여러 해 동안, 아주 말이 많고 고집이 센, 표상물을 취하던 여러 사람들은 충실한 증인으로 남지 않았다.

1973년에 크게 필요로 한 몇 가지 출판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출판물 가운데는 암하라어판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과 「참다운 평화와 안전—그 근원은 무엇인가?」 책, 그리고 티그리냐어판 「왕국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기 위한 조직」 책이 포함되었다. 이 훌륭한 영적 양식은 총 1352명이 참석한 일련의 작은 규모의 순회 대회와 더불어 형제들에게 믿음을 강화시키는 영향을 주었다.

또 에티오피아 증인들의 한 무리는 나이로비에서 개최된 “하나님의 승리” 국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그 대회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 성원인 헨첼 형제와 수터 형제가 프로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려 하였고, 곧 혁명이 발생하여 에티오피아에서의 신권적 상황을 바꿀 판이었다.

케냐에서의 법적 인가와 지부 사무실

그러면 이제 다시 케냐로 주의를 돌려 그곳에서의 발전 상황을 알아보자. 이 나라가 영국의 통치로부터 막 독립을 하였을 무렵, 1962년 2월에 열린 마지막 야유회식 순회 대회에서 지구 감독자로 방문한 해리 아넛은 참석한 184명에게 역사적인 발표를 하였다. 그 대회가 케냐에서 마지막으로 갖는 비공식적인 대회가 될 것이라는 발표였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법적 인가가 얼마 전에 난 것이었다! 다섯 개의 작은 규모의 나이로비 회중은 이제 도심 부근의 쾌적한 한 장소에서 연합될 수 있게 되었다. 형제들은 전도인 80명의 회중으로 커진 것을 알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자유롭게 가진 첫 집회인 기념식에는 192명이 참석하였다.

일은 하나씩 신속하게 진척되었다. 잠비아 지부의 피터 팰리서와 비러 팰리서가 케냐에서 도움을 주도록 임명되었다. 팰리서 부부와 길르앗을 막 졸업한 맥클레인 부부가 나이로비 남부에 있던 첫 번째 선교인 집으로 이사하였다. 또한 1963년 2월 1일에는 지부 사무실이 개설되었다. 그 당시 케냐와 우간다에는 전도인이 150명 정도 있었기 때문에, 지부 사무실에서는 할 일이 적었다. 아마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도 일하면 되었을 것이다. 폭이 2.5미터 길이가 3미터 정도의 작은 아파트 방 하나가 사무실로 충분하였다.

그러나 곧 탄자니아와 에티오피아와 같은 다른 나라들이 케냐 지부의 감독을 받게 됨에 따라, 일의 분량은 두 배가 넘게 되었다. 형제들 중에서 결혼을 법적으로 등록하게 하는 마련을 하였다. 공공 건물이나 학교에서 순회 대회를 개최하였고, 헨첼 형제가 방문하여 새로운 지부 사무실을 운영하는 방법에 대한 필요한 지도를 베풀었다.

인종 차별이 있던 밭이 개척되다

식민지 시대의 잔존물인 인종 차별을 극복하는 데 많은 노력이 들었다. 아프리카 원주민이 사는 지역에 들어가는 것은, 심지어 대낮이라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돌았다. 그러나 새로운 선교인들과 더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는 형제들은 그들의 활동을 확장하고자 열망하였다. 철도 근로자들이 사는 한 지역을 첫 구역으로 선정하였다.

장마철이라서, 커다란 진흙 덩어리들이 열성적인 전파자들의 신발에 더덕더덕 달라붙었다. 이 시도는 세심하게 준비하여 스와힐리어 성서를 사용하여 제공 연설을 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무슨 반응이 있었는가? 여자들은 영어를 모른다는 몸짓을 하고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많았다. 영어를 할 줄 아는 남편들이 일터에서 집에 돌아왔을 때, 그들의 아내들이 스와힐리어도 그리 잘 아는 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전도인들은 실로 안심이 되었다!

외국인 형제들이 스와힐리어를 배우는 것은 상당히 힘든 경험이었다. 낱말이 유럽의 어느 언어와도 비슷한 것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법이 논리적이므로, 얼마 안 있어 이해하게 되었다. 발음은 쉽고, 어휘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언어보다 많다.

물론 배우는 동안, 실수가 있었다. 한 자매는 “세리칼리 야 뭉구”(하나님의 정부)라고 말하고자 하였지만, “수루알리 야 뭉구”(하나님의 바지)라고 발음을 하고 말았다. 한 형제는 일반적인 인사말, “하바리 가니?”(어떻게 지내십니까?)를 “하타리 가니?”(무슨 위험이 있습니까?)로 혼동하여 잘못 말하여 난처해진 일이 있었다. 한 선교인 자매는 닭을 죽일 수가 없어, 특별 파이오니아에게 “닭을 좀 죽여 주시겠습니까?” 하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그만 “쿠우아”(죽이다)를 “쿠오아”로 발음하여 “이 닭하고 결혼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해 버렸다. 문답식 프로를 다루던 한 선교인은 형제들을 일컬으면서 “은두구”(형제)라고 말하지 않고, 그만 “두두”(곤충)라고 말했다.

물론 이 외국인들은 많은 어린이들에게 신기하게 보였다. 일부 어린이들은 흰 피부색이 벗겨지는지 보기 위해 형제들의 손을 만져보곤 하였다. 수십 명의 어린이들이 전도인들을 둘러싸고 집집으로 따라다니곤 하였다. 외국인들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다. 그와는 반대로, 많은 사람들은 성서 진리를 진정으로 갈구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방문객들은 안으로 초대되어 앉을 자리를 제공받았고, 때때로 차나 식사를 제공받기도 하였다. 이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우리 외국인 전도인들은 또한 성서 연구를 제의하는 데 선택적이 되어야 함을 배우게 되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선뜻 제의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모두와 연구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해가 끝나기 전에 나이로비의 생산적인 구역, 이스트랜즈에서 두 번째 회중이 형성되었다. 증인들은 봉사 구역에 “예루살렘”, “여리고” 등의 지역이 포함되었을 때 아주 친밀감을 갖게 되었다. 형제들은 곧 할 수 있는 한 모든 연구를 사회하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그때 진리를 배우고 나이로비의 두 개의 원래 회중과 연합하였던 12명 가량은 약 30년이 지난 지금도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다.

1963년 6월에는 첫 스와힐리어판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 책이 발표되었다. 이 책은 진리를 탐구하는 온갖 교육 수준의 사람들에게 적합한 도구였다. 그후에는 「왕국 봉사」지가 스와힐리어로 인쇄되었고, 스와힐리어판 「파수대」지가 잠비아에서 발행되었다.

한편 앨런 맥도널드와 대프니 맥도널드가 길르앗 학교를 졸업하고 케냐 해안에 있는 몸바사 섬으로 새로운 임명을 받고 이사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첫 선교인으로 임명되었던 맥클레인 부부는 우간다 캄팔라로 이미 전임되고 없었다. 그래서 윌리엄 니즈벗과 뮤리얼 니즈벗이 지부 사무실로 들어갈 자리가 생겼다. 그들은 자유롭게 다시 전 시간 봉사에 함께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행복했다. 니즈벗 형제는 이 나라에 체류하기 위해 칠 년 동안 세속 직장에서 일했었다. 니즈벗 부부는 이제 케냐에서는 순회 사업을 그리고 이웃 탄자니아에서는 일부 지역 사업을 하게 되었다.

케냐의 여러 도시로 확장함

몸바사에서 맥도널드 부부는 더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와 있던 외국인 증인들로 구성된 작은 회중과 탄자니아에서 몸바사로 직장 따라 와 있던 아프리카인 증인들의 작은 집단을 찾아냈다. 전파 활동이 자유롭게 되었으므로, 이 형제들은 지체 없이 첫 집회를 마련하였다. 이들은 30명의 열심있는 증인들이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아프리카인 형제들은 결혼을 법적으로 등록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일요일에 협회의 결혼 주례 중 한 사람이 14쌍을 결혼시켰다. 그 다음 일요일에는 모두 재침례를 받았다.

몸바사 구역은 형제들에게 상당히 도전이 되었는데, 그것은 종교가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조로아스터 교도들은 불을 숭배하는 사람들로 그들의 종교가 니므롯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힌두교의 여러 종파들 중에는 터반을 둘러쓴 시크교뿐 아니라 개미를 밟거나 파리를 죽이지 않는 자이나교가 있었다. 그리고 회교도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도 많이 있었다. 몸바사는 신전과 회교 사원과 커다란 교회로 뒤덮여 있었다. 영원한 좋은 소식을 제공하는 데는 융통성과 기술이 상당히 필요하였다.

때가 되어 선교인들이 더 많이 파견되었으며, 나쿠루, 키수무, 키탈레, 엘도레트, 케리코, 키시, 티카, 니에리 등 지역의 중심 도시에 임명되었다. 1960년대 말에 여러 명의 케냐인들이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고, 자격을 잘 갖추고서 인구가 비교적 적은 도시에서 전파하였다.

작은 자가 천을 이루다

이제 모든 것이 정말로 잘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왕국 사업을 법적으로 등록할 때, 케냐에는 약 130명의 전도인이 있었다. 이 년이 지난 후에 그 수는 거의 두 배가 되었고, 1970년에는 그 작은 자가 문자적으로 천을 이루었다.—이사야 60:22.

진리를 배우는 사람들은 많은 변화를 해야 했다. 그들은 부도덕, 술취함, 마술, 문맹 등을 극복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은 또한 땅, 가축, 교육, 돈을 지나치게 추구하도록 양육받았다. 자존심과 체면치레 역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관심이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 헌신할 정도로 그리스도인 새 인간성을 입을 때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다.

일반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글을 읽을 줄 알고 전통에 그리 깊이 젖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이 많은 사람들보다 더 빨리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경우로, 십대인 사무엘 은담부키가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교국의 종교에서 보게 된 위선 때문에 혼란에 빠졌으며, 그것을 혐오하게 되었다. 그는 열세 살의 나이에 흡연, 도둑질, 거짓말, 부도덕, 마약 중독에 빠지는 방탕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8년 후인 1967년에 이전 급우였던 두 사람이 성서의 좋은 소식을 그에게 전해 주었다. 그는 친구인 두 젊은 사람이 성서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깨끗한 행실을 강조하는 여호와의 증인은 너무나 달라보였던 것이다! 사무엘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극적인 변화를 하였으며, 이웃 사람들은 그 변화를 목격하였다. 그는 도덕적으로 좋은 변화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발견한 믿음에 대한 커다란 반대를 직면하였다. 그러나 그는 계속 발전하여 그해 말에 침례를 받았다. 그 이듬해에 그는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고, 그 다음에는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 벧엘 봉사, 순회 사업을 하였다. 현재 그는 가장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알도록 돕고 있으며, 우캄바니에 있는 한 성장하는 회중의 기초를 놓는 일도 하고 있다.

또 다른 예로는 나이로비의 레이몬드 카부에가 있는데, 그는 친형제와 다른 젊은이들의 그룹과 함께 진리를 배웠다. 그는 열심이 가득하여 아베르다레 산맥에 있는 고향으로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전파하였다. 그 결과 한 회중이 생겨났으며, 여러 명의 정규 및 특별 파이오니아가 산출되었다. 그의 자녀들 중 한 사람은 파이오니아가 되었고, 다른 한 자녀는 벧엘 봉사자가 되었다.

그의 친형제, 레오나르드는 룻 니암부라라는 여자를 도왔다. 그 여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지 못한 채 성서 전체를 다 읽은 사람이었다. 그가 방문했을 때 그 여자는 질문을 조목조목 적어 놓은 것을 갖고 있었다. 카부에 형제는 해외에서 온 한 형제의 도움을 받아, 계시록 13:18에 나오는 666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포함하여 그 질문들에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이 진실한 여자는 진리를 받아들인, 스와힐리어를 사용하는 최초의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때가 1965년이었다. 남편이 신자가 아닌 이 자매는 케냐의 다른 여러 충실한 자매들의 귀감이다. 케냐에는 다른 아프리카 나라들과는 달리, 흔히 회중 내에 여자들의 수가 남자들보다 많다. 그는 일곱 자녀를 진리 안에서 양육하였고, 한때는 정규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하였으며, 지금도 전도인으로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다.

그의 딸들 중 하나인 마가렛 마켄지에는 남편이 1974년에 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일을 견뎌 냈다. 그에게는 어린 세 자녀가 남게 되었다. 남편의 믿지 않는 친척들은 종족 관습에 따라 그를 장례식 때 납치하여 그의 시동생과 “결혼”시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사전에 주의를 받고, 그 상황을 피했다. 그리하여 그는 애써 지은 집과 개간한 전답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다. 친척들은 어린 아들을 그에게서 빼앗아 갔으며, 어린 두 딸만 남게 되었다. 자녀들을 양육하고 충분한 영적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여호와의 도움으로 마켄지에 자매는 성공적으로 해냈다. 그는 가족 연구와 야외 봉사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1987년에 그는 열네 살과 열다섯 살인 두 딸이 순회 대회에서 침례받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렸다. 또한 그의 아들은 11년 간 떨어져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여호와를 섬길 정도까지 발전하였다.

왕국 사업의 범위를 확장하다

지부 사무실은 왕국 사업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해 진정한 노력을 기울였다. 책자와 서적을 키캄바어, 키쿠유어, 루오어로 번역하였다. 그에 더하여 스와힐리어판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사실」,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니이다」 책 등을 발표하였다. 스와힐리어판 「파수대」는 24면으로 증면하였다. 그리하여 서적이 많이 전해졌다.

출판물은 아시아계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들은 보통 유럽계 증인들을 환영하고 서적을 잘 받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의 종교에 계속 고착하였다. 하지만 예외는 있었다. 한 십대 소녀는 가족의 심한 반대와 시크 사회로부터 오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고착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집에서 내쫓았으며, 심지어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는 한 증인 가족에게로 이사하였으며, 열심히 성서를 연구한 후에 여호와께 헌신하고,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으며, 나중에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제 기혼자가 된 구디 폴센은 아직도 열렬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으며, 특히 아시아인 밭에서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결혼 문제가 해결되다

케냐 전역에 걸쳐 많은 사람들은 결혼을 법적으로 등록하지 않고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종족의 관습에 따라 결혼을 하고, 툭하면 마음대로 이혼하였고, 합의에 따라 동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한 행위는 여호와의 높은 요구 조건에 달하지 못하는 일이었다.—히브리 13:4.

그래서 더 많은 형제들이 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 결혼법 아래서의 결혼 주례로 등록되었다. 이 형제들은 관심자들이 참 숭배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결혼을 합법화하기를 원하는 정도까지 발전함에 따라, 결혼을 주례하기 위해 많은 지역을 여행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그처럼 결혼을 합법화하는 일이 좋은 소식의 전도인으로 자격을 갖추기 위해 꼭 필요하였다. 그러한 일은 또한 더 나은 가족 생활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그 이유는 자녀를 못 낳거나 신부값을 다 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결혼이 파탄에 이를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후 여러 해에 걸쳐 이 마련으로 유익을 받은 부부는 2000쌍이 족히 넘었다.

새로운 지부

1970년 지역 대회에서, 협회는 나이로비의 우드랜즈 가에 새로운 지부 시설을 매입하였다는 발표가 있었다. 나이로비 남부에 있던 단칸방 사무실이 그 이웃의 한 아파트로 이전하였지만, 이제 이 지부의 관할 구역인 8개 나라에서 보고하는 전도인은 약 3000명이 되었다. 그래서 발송, 번역, 통신 업무를 더 많이 필요로 하였다.

도심에 가까우면서도 조용한 환경에 자리잡은, 6000평방 미터의 대지에 서 있는 새 건물은 더 큰 확장을 위해 안성맞춤이었다. 여러 색깔의 꽃과 산울타리로 에워싸인 잔디밭과 많은 나무들은 이곳을 작은 낙원으로 만들어 주었다.

1971년 6월 26일, 토요일에 봉헌식이 있었다. 후에, 사무실과 숙소 용도에 더 적합하게 건물을 개축하였다. 침실도 더 만들었다. 대지의 낮은 부분에 있는 좋은 공간을 사용하여—나이로비에서 최초의—커다란 왕국회관을 지었다. 이 왕국회관은 두 회중이 사용할 것이었다. 아직도 훗날의 증축에 사용할 만한 커다란 잔디밭이 있었다. 이 왕국회관은 몸바사, 키수무, 나쿠루의 왕국회관과 거의 같은 시기에 완공되었다.

증가로 인해 불붙은 교직자들의 질투

점점 더 많은 관심자들이 교회에서 탈퇴를 하자, 교직자들은 더욱 분개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평판을 손상시키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허위 정보를 받은 한 국회 의원은 국회에서 증인들은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도 않고 병원 치료도 받게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증인과 관련이 있던 관리로부터 이미 정확한 정보를 받은 바 있는 국회 의장이 시정을 하자 그 의원은 곧 낯뜨거워 보였다.

그리하여 민주적이고 자유를 애호하는 태도가 계속 지배적이었다. 1972년 초엽에 노워 형제는 또 한번 나이로비를 방문하였다. 그해 후반기에 몸바사에서 큰 대회가 열렸고, 공개 강연에는 2161명이 참석하였다. 전망은 밝았고, 만사는 평온하고 평화스러워 보였다.

1973년의 금지령—충격적인 일

1973년 4월 18일에 여호와의 증인은 선한 정부에 위험 요소로 간주되므로 케냐에서 금지되었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약간의 동요가 있었고, 여기저기서 좋지 못한 소문이 좀 돌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공식적인 고발이나 경찰의 조처는 어디서도 없었다. 뜻밖에도 참다운 성서 교육을 불법화한 것이었다!

문제를 규명하려고 고위 관리들을 만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5월 8일에는 공식 호소문을 제출하였지만, 엿새 후에 거절되었다. 한편 등기소장이 여호와의 증인 협회의 등록을 취소했다. 그후 협회장과의 회견이 거절되었다. 5월 30일에 등록 취소에 대해 항소하였다. 뉴욕 브루클린의 여호와의 증인 본부에서는 후속 조처로 워치 타워 협회장의 친서를 보냈다.

7월 5일에 여호와의 증인에 관한 문제가 케냐 국회에서 주요 의제로 상정되었다. 증인들을 여전히 작은 정치 집단과 혼동하고 있었으며, 세속 정부를 무시하고 병원 치료를 거부하는 사람들로 묘사하였다. 심지어 악마의 증인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이 모든 일은, 거짓 정보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발한 사람들처럼 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마가 3:22; 누가 23:2.

그 다음에 정부는 36명의 선교인들을 추방하기 위해 신속한 조처를 취했다. 1973년 7월 11일에 선교인들은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말로 케냐의 신권 역사상 슬픈 순간이었다. 전국의 10개 선교인 집에 있는 장비를 황급히 처분하고, 개인 소지품들을 다른 여러 임지로 보내기 위해 싸서 보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부 사무실에선 계속 집무가 수행되었다. 금지령은 숭배의 자유를 보장하는 케냐의 헌법에 위배된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법적 소송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금지령이 철회되다!

그 전반적인 문제가, 케냐가 온건 노선을 걷고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며,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있고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로 인정되기를 바라는 소망과 조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합리적인 생각을 가진 관리들은 곧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1973년 8월에 정부는 그 금지령을 철회하는 대담한 조처를 취했다. 그런 금지령은 결코 내려진 적이 없다는 취지의 정부 공고가 발표되었다. 형제들은 기쁨에 넘쳤다!

지부 사무실에 남은 증인들에게는 일이 벅찼다. 헬게 린크, 스탠리 마쿰바와 버나드 무싱가를 포함하여 벧엘 가족이 아닌 여러 형제들이 와서 도움을 베풀었다. 그들 중 겨우 몇 사람만이 사무 절차와 필요한 일에 익숙해 있었다. 그들은 기재하는 일뿐 아니라 서신을 취급하는 일과 회계를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합당하게도 그런 환경에서 대회를 우선 순위에 놓았다. 10월에 개최된 일련의 순회 대회는 야외에서 일하는 형제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고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또한 12월 26-30일에 나이로비에서 개최할 국제적인 규모의 지역 대회 계획을 재정립하였다. 금지령이 철회된 후, “하나님의 승리” 대회 주제는 시기적으로 아주 적합하였다. 급히 해야 할 힘든 일이 많았지만, 외국의 여행자들이 도착하여 지방 형제들에게 가외의 격려를 베푸는 것을 보는 것은 실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최고 참석자 수는 4588명이었고, 209명이 침례를 받았다.

브루클린의 워치 타워 본부 임원으로 방문한 그랜트 수터의 회견이 텔레비전으로 28분 동안 방영되었으며 신문 지상에도 호의적인 보도가 실렸다. 이 모든 일은 여호와의 증인이 아직도 건재하며 활동하고 있음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그후 순회 대회가 더 개최되었고, 장로들은 천국 전도 강습에서 받은 훈련으로 힘을 얻었다.

증인들에게는 그 갑작스런 금지령이 충격적인 경험이자 믿음의 시험이 되었다. 한편 그것은, 인자하신 창조주와 친밀한 관계를 갖지 않았고 참된 기초 곧 우리의 본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믿음을 세우지 않은 사람들을 체질하여 걸러내는 건전한 효과가 있었다. (고린도 전 3:11) 케냐의 형제들이 더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온 선교인들과 다른 나라의 형제들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더 많은 일과 책임을 맡아 수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개인 성서 연구와 열렬한 기도에 더 힘써야 할 필요도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다른 선교인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케냐로 왔는데, 그들 가운데는 존 제이슨과 케이 제이슨이 있었다. 이들은 이미 26년 동안 잠비아에서 선교 봉사, 순회 봉사, 벧엘 봉사를 한 경험이 있었다. 여호와께서는 아직도 케냐에 할 일이 아주 많이 있음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이제 증인들은 왕국 사업을 계속하려는 각오로 일에 착수하였다.

새로운 추진력을 갖고 확장함

영성도 더 좋아졌다. 그때까지, 전도인들은 주로 잡지를 사용하여 증거를 하였다. 이제 「왕국 봉사」지에 제안된 대로 성경을 사용하는 일이 특별히 강조되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야외 봉사에서 성서를 펴서 증거하는 것을 보는 일은 참으로 마음을 뜨겁게 해주었으며, 집주인과 나이 든 전도인들을 매우 놀라게 했다.

처음으로, 「왕국 봉사」지에서는 비그리스도인 관습들에 관해서도 다루었다. 좋고 유익한 관습도 있는 반면, 그리스도인들을 거짓 종교에 연루시킬 수 있는 영혼불멸 등 거짓 가르침에 기초한 관습들도 있다는 것이 지적되었다. 그리하여 형제 자매들은 죽은 자를 위해 밤샘을 하는 일, 장례 의식, 매서운 눈초리에 대한 두려움, 부적을 지니고 다니는 일, 종족 입문식, 할례 의식 등과 관련이 있는 불결한 행위로부터 점차 벗어나게 되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진보는 도시의 각 회중에서 스와힐리어든 영어든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도록 조정하는 일이었다. 이전에는 회중 집회에서 두 가지 언어가 다 사용되어, 다른 언어로 늘 통역해야 하였기 때문에 내용을 절반 정도밖에 다룰 수 없었다. 이제 형제들은 어느 한 언어로 집회 프로그램을 전부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마케도니아”가 익숙한 말이 되다

한편 런던 지부 사무실의 윌프레드 구치가 지구 감독자로 방문하여 케냐에서 일들을 재조직하고, 처음으로 동아프리카의 격지 구역으로 체계적인 전파 활동을 확장하기 위한 기초를 놓는 데 도움을 베풀었다. 이를테면, 케냐에는 인구의 사분의 삼이 격지 구역에 살고 있었다.

전도인들은 아주 열렬한 반응을 보였으며, 사도 행전 16:9에 나오는 마케도니아에 관한 말이 1975년 이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증인이 아닌 사람들도 “오늘은 증인들이 마케도니아에서 집회를 갖는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매년 석 달은 현대의 마케도니아에서 봉사하도록 떼어놓는다.

그에 더하여 지부 사무실에서는 모든 전도인들에게 세속 직장의 연례 휴가를 고향인 시골 지역에서 봉사하는 데 사용하도록 격려하였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한 자매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왔다. “고향 집에 도착한 후,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으며, 곧 여러 건의 성서 연구를 갖게 되었습니다. 연구를 시작한 사람들 가운데서 여덟 명은 친척입니다. 그들 중 여섯 명은 1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모든 증거 활동으로 인하여 관심자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게 되었다. 매달 출판물이나 성서 연구를 요청하는 수백 통의 편지가 쇄도하여 지부 사무실의 서신 담당 요원을 늘려야 하였다.

이 해의 중요하고도 새로운 또 한 가지 일은 동부 아프리카의 일곱 나라의 장로들을 교육하는 천국 전도 강습이었다. 영적 교훈이 많이 제공되었을 뿐만 아니라, 깜짝 놀라게 하는 일도 있었다. 많은 형제들은 관습적으로 온전히 여자들에게 맡기던 일—설거지를 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청소를 하는 일 등—허드렛일을 생전 처음으로 도왔다. 그러나 장로들은 겸손하게 그리고 기꺼이 순응하였다. 일부 감독자들에게는, 아버지가 자녀들과 함께 놀아 주는 일도 해야 된다는 것 또한 새로운 지식이었다. 한 장로가 이렇게 말한 바와 같다. “지난 여러 해 동안은 하지 않았는데, 내가 집에 돌아가서 자녀들과 함께 놀아 주면 그들은 놀랄 것입니다.”

그리하여 케냐에서 1975년 말에는 1709명의 전도인 신기록에 달했다.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다. 하지만, 남쪽의 이웃 나라인 탄자니아에서는 왕국 사업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었는가?

탄자니아의 상황이 변하다

케냐와는 달리, 1965년 4월 3일 이래로 시행된 증인들에 대한 금지령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다 가정 및 경제 사정이 달라짐에 따라 또 다른 일이 있게 되었다. 더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왔던 외국인 형제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잠비아의 특별 파이오니아들도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흔히 가족 성원이 급격히 늘어난 것이 경제 사정과 연관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1961년에 임명될 때는 자녀가 둘이었던 한 특별 파이오니아 가족은 1967년에는 자녀가 일곱으로 늘어났다.

여러 파이오니아들이 떠났지만 라몬드 칸다마는 예외였다. 그는 1932년에 잠비아에서 진리를 받았고, 1940년과 1941년에는 믿음 때문에 그곳에서 체포되어 투옥당했었다. 1959년에 그는 47세의 나이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여 탄자니아로 파견되었다. 그는 거기서도 체포되었다. 결국, 그는 케냐로 다시 임명되어, 그곳의 여러 임지에서 봉사하였다. 지금은 나이가 80이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으며,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참으로 충실한 인내의 좋은 본이다!

법정에 선 “양”

탄자니아 전역에서 그후 이십 년 동안 수십 건의 체포 사건과 법정 사건이 발생하였다. 증인들은 그런 일에 놀라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라.]” (요한 15:18, 20) 그러므로 그들은 그러한 일에 과민 반응을 보이지 않고 기꺼이 인내하였다.

형제들의 평화적이고 협조적인 특성이 증오에 찬 고발자들에게 이용되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반대자들은 우정적이고 관심이 있는 척하였으며, 증인들은 순진하게 그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신권 도서실을 자랑스럽게 보여 주곤 하였다. 이따금 증인들은 그 사람들에게 성서 연구 보조서들 중 몇 권을 빌려 주기도 하였는데, 그런 서적이 나중에 법정에서 증인들에게 불리한 증거물로 제시되었다. 형제들은 자기가 여호와의 증인 협회의 성원이라고 쾌히 인정하였는데, 법에 따르면 이것은 불법적인 협회를 지원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부 형제들은 경찰서에서 법적으로 유죄가 되는 일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법원에서 증언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또 협조적인 성향 때문에, 그들은 심지어 영장을 받지 않고서도, 가택 수색을 허용하거나 체포에 응하기도 하였다. 일부 형제들은 조사를 받을 때 모든 질문에 다 답변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즉석에서 자신이 죄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증인들은 단지 성서 연구 집회에 참석하거나 좋은 소식을 전파하거나 성서 출판물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법적인 협회의 성원인 것으로 고발되었다. 법원에서는 벌과금을 부과하고 3개월에서 9개월까지 금고형을 선고하였다.

예를 들어 보자. 탄자니아의 증인들은 수가 많지 않아, 1973봉사년도에 이 나라 인구 1만 명 중 약 1명꼴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열심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1974년 9월 7일에 다르에스살람의 이삭 시울루타의 집에서 그리스도인 집회가 진행되고 있을 때 경찰이 시울루타 집을 포위하였다. 참석한 사람들 중에 46명이 체포되었으며, 그들 가운데는 두 명의 파이오니아 자매가 있었다. 경찰은 다른 여자들은 집으로 돌려보냈다. 참석자들의 가방에 들어 있거나 손에 쥐고 있던 성서 연구 보조서들은 그후에 진행된 재판에서 증거물로 제시되었다.

법정은 그 사건을 11월 29일에 심리하였다. 제시된 증거에 의하면 증인들은 평화적이고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판사는 “이들의 종교적 외양은 겉치레에 불과”하다면서 모두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증인들은 성서 연구 보조서를 소지했거나 불법적인 협회의 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벌금형이나 육 개월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 증인들은 “날마다 여호와를 우리의 기쁨으로 삼음” 등의 주제로 성서 연구를 하고 성서 이야기를 함으로써 서로 격려하였다. 탄자니아에서의 왕국 사업은 중단되지 않았다. 1975봉사년도에는 전도인 신기록인 1609명이 보고되었다.

처음에 케냐 지부 사무실에서 이 경험 없는 형제들이 당하는 법적 어려움을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일단 파악이 되자, 체포 및 소송 사건과 관련된 법적 권리에 관한 조언을 모든 회중으로 전달하였다. 그러한 조언이 담긴 인쇄물이 알기 쉬운 스와힐리어로 발행되었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후 여러 해에 걸쳐 발생한 여러 건의 소송에서 형제들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일부 판사들은 검사측 증언에 대해 “금지된 협회와 관련된 전파 행위”에 대한 증거가 없다고, 또는 “단순히 책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법적인 협회의 성원이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 이 모든 일은 여호와의 대적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가 되었다.—잠언 27:11.

여호와께서 힘을 공급해 주시다

이웃 나라, 말라위의 동료 증인들에 대한 박해의 물결은 나쁜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투쿠유 인근 지역에서 그러했다. 그 일은 반대자들을 부추겼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통찰력을 주었다. 한 교도관은 이와 같이 말했다. “말라위에서 그들은 이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였지만 헛수고를 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들은 결코 타협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들의 수는 늘어날 뿐입니다.”

하지만 박해가 전국에서 일률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새로운 왕국회관을 건축하고 공개 집회를 갖고, 심지어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회중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출판물은 우편으로 증인들에게 안전하게 배달되었다. 케냐 지부는 그들을 세워 주기 위해 여행하는 감독자들을 계속 파견하였고, 장로들과 일부 회중을 만나도록 지부 대표자들을 보냈다. 스와힐리어로 된 더 많은 출판물은 탄자니아 형제들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었다. 여러 명의 증인들이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고, 심지어 잠비아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대신할 수 있을 만큼 자격을 갖추었다.

많은 탄자니아 형제들에게 가장 즐거웠던 일들 중 하나는 일년에 한 번 케냐에서 개최되는 지역 대회에 참석하러 가는 것이었다. 보통 버스를 타고 케냐에 가는 것은 어렵지가 않았다. 사실, 1968년 10월에 그리고 그후 여러 해 동안, 약 80명의 형제들로 형성된 큰 그룹이 전세 버스로 남부 탄자니아에서 케냐까지 약 1500킬로미터를 여행하곤 하였다. 연중 이 큰 행사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여러 달 저축을 해야 하였으니, 실로 대단한 희생이었다. 일부 탄자니아 국경 관리들은 이치적이었고 심지어 형제들에게 “가서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오” 하고 말했다. 1970년에 네 대의 버스가 350명의 승객을 태우고 남부 탄자니아에서 나이로비 대회장까지 달렸다.

일하면서 증거하다

탄자니아 형제들은 두려움 없이 재치 있는 방법으로 전파하였다. 노동자의 대다수가 증인이 아닌 집단 농장에서 일하는 증인들은 그들 가운데서 한 형제가 관심자인 체하여 큰소리로 성서 질문을 하면 다른 증인들이 기꺼이 대답해 주는 마련을 하곤 하였다. 큰소리로 질문하고 대답하자, 곧 다른 노동자들도 가담하여 여러 시간 동안, 물론 일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성서적 증거를 할 수 있었다.

스와힐리어판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이 발표되었을 때, 그 책은 대단히 알려져서 얼마 안 가서 좋은 소식의 적들까지도 파란색 표지만 보고도 그 책을 알아볼 정도가 되었다. 그 때문에 협회에서는 스와힐리어판 「진리」 책의 표지를 눈에 덜 띄는 색깔로 바꾸어 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진리가 자유케 하다

이 나라의 일부 지역에서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킬리만자로의 바로 서쪽, 메루 산 경사 지역에서 여섯 사람으로 이루어진 그룹이 열심히 성서 진리를 연구하였다. 하루는 연구가 끝나가고 있었는데, 한 루터교 사제가 폭도를 몰고 와서 연구하고 있는 장소의 바깥에서 소란을 피우게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 이 관심자들은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열린 회중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문제가 생겼다. 한 연구생의 아버지가 그의 집에서 도끼를 휘두르면서 그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다른 한 연구생은 집에 와 보니 집이 파손되었고 염소와 아이가 없어졌다. 또 한 연구생은 구타당하고 가축을 강탈당했다. 이 관심자들은 실망하여 성서 진리를 추구하는 일을 중지하였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교회에 탈퇴서를 냈다.

곧 이들 모두는 한 가지만 제외하고는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이 될 정도까지 발전하였다. 그 한 가지는 결혼 증명서를 제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증명서는 사제들의 수중에 있었고, 사제들은 증명서를 내주기를 거절하였다. 그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제들은 이 사람들이 불법적인 협회에 소속되어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치안 판사는 화가 나서 사제들에게 벌금을 부과하였고, 결혼 증명서들을 그 주인들에게 넘겨주었다.

세이셸 제도를 지원함

아프리카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세이셸 제도에 살고 있는 11명의 격지 전도인을 기억하는가? 그들은 긴급히 외부의 도움을 받기 원했다. 1974년 초에 랠프 밸러드와 오드리 밸러드가 더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자녀를 데리고 영국을 떠나 이곳으로 와서 영주권을 얻었다. 그들이 야외 봉사에서 열정을 갖고 열심히 일한 결과 새로운 연구가 여러 건 생겼다. 선교인 입국이 1969년과 1972년에 거절되었지만, 만국 성경 연구생 협회는 1974년 8월 29일에 법적 승인을 얻었으며, 그 일은 왕국 사업에 추진력을 더해 주었다.

그 무렵에 보고한 전도인은 32명이었고, 이듬해에 그 수는 51명으로 늘어났다. 지역 주민들이 여호와의 편에 서기가 쉽지 않았는데 가톨릭 사제들이 일자리와 집을 잃게 될 것이라고 그들을 협박하였기 때문이다. 여러 해가 지남에 따라, 교직자들의 영향은 줄어들었고, 진리 애호자들은 용감하게 조처를 취했다.

또한 좋은 소식이 주요 섬인 마헤 전역에 전파된 후인 1974년에 증인들은 두 번째로 큰 섬, 프라랭으로 3시간 동안 항해를 하였다. 이곳은 부채꼴잎야자나무가 있는 발리드메이 때문에 유명한 섬이다. 이 야자나무에는 소위 두 배짜리 코코넛 즉 코코데멜이 열리는데, 아마 씨의 무게(14-18킬로그램)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나갈 것이다. 그 모양이 특이하여 많은 수집가들이 탐을 내기도 한다. 인구는 5000명도 못 되기 때문에, 모두가 서로를 잘 알았다. 사람들이 그러한 같은 마을 사람들의 압력을 견디면서 진리를 위해 굳게 서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였다. 그렇지만 일부 사람들은 그렇게 해냈다. 단순히 우상 숭배를 공격하거나 아마겟돈에서 악한 사람들이 멸망될 것이라고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소식을 재치 있게 전파하도록 훈련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결국 1976년에 한 선교인 부부가 마헤의 빅토리아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회중이 영적으로 안정되도록 도왔으며, 증인 가정의 많은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걷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만사 태평인 생활 방식, 즉 도덕 관념이 거의 없는 생활 방식에 젖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 증인들 중에서 소수만이 개인 연구와 야외 봉사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부는 세상의 온갖 새로운 풍조에 쉽게 영향을 받아 흔들렸으며, 그러한 사람들은 상당수 떨어져 나갔다. 또한 회중과 연합하고 있던 여러 사람들은 영원한 장래를 내다보며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악한 세상이 끝나는 시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은 영적 발전을 저해하고 있었다.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굳게 섬

1977년 6월 5일에 쿠데타가 일어나 새 정부가 들어서자 한때 조용했던 이 섬들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새 의회는 여호와의 증인과 지상의 모든 정부에 대한 증인의 중립적 입장에 대해 토의하였다. 한 의원은 증인들에게 금지령을 내리자고 제의하였지만, 다른 의원들은 현명하게도 종교의 자유에 대한 헌법상의 보장을 지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8년에 선교인 집이 폐쇄되었으며, 선교인들은 케냐로 임명지가 변경되었다. 밸러드 가족도 이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 지방 형제들은 스스로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왕국 사업을 돌볼 자격을 더욱 잘 구비하고 있었다. 진리 안에서 경험이 많은 형제들과 천국 전도 강습에 참석했던 장로들과 교제함으로 유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문맹과 영매술 행위가 만연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 같은 사람들은 계속 발견되었다. 1982년에는 세이셸 제도에 전도인이 또다시 50명이 되었으며, 일부는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리세 가르드네르였다. 마침내 세이셸 제도에서도 여호와의 증인 협회의 등록이 1987년 1월에 승인되었다. 그러나 선교인들의 입국 신청은 여전히 허락되지 않았다.

섬들에서의 추수

첫 번째 지역 대회가 1987년 1월 16-18일에 개최되었다. 그때까지 모든 집회와 순회 대회는 왕국회관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왕국회관이 아닌 장소에서 열린 최초의 대회가 되었다.

대회 장소는 어디였는가? 그곳은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은, 큰 관광 호텔의 별관이었다. 초가 지붕이고, 반쯤 개방된 이 건물은 바위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고, 마헤의 가장 아름다운 항만 중 하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참석자들은 영적 프로그램을 즐겼을 뿐 아니라 청중석을 지나는,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대양의 파도 소리와 상쾌하고 부드러운 바닷 바람을 만끽하였다.

첫째 날 참석자 수는 가슴 설레게도 173명이었다. 일요일에는 그 장소에 256명이 참석하여 만원을 이루었다. 전도인은 80명뿐이었으므로 이 섬들에서 성장의 가능성은 참으로 컸다!

이 대회에서 침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이전에 반대자였던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가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때서야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생활에서 얼마의 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생계를 위해 도로변에 조그만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단골에게 파는 물품들 중에는 담배도 있었다. 담배 파는 일을 중지하면 장사가 망한다는 주의를 들었다. 하지만 용기 있게도 그는 여호와를 신뢰하고서 더는 담배를 취급하지 않았다. 장사는 타격을 받지 않았다. 사실, 중요한 왕국 전파 사업을 할 시간을 더 많이 내기 위해, 그는 가게에다 개점 시간과 폐점 시간을 붙여 두었다. 그와 같이 하루 중 좋은 시간을 전파 사업에 사용할 수 있도록 시간을 계획하였다.

전파 활동에 바친 전도인들의 노력은 많은 수확을 거두었다. 1990년에 프라랭 섬에서 왕국회관 하나를 봉헌하였다. 세 번째로 큰 섬, 러디그에서는 여러 건의 성서 연구가 사회되고 있다. 또한 1990년 9월부터 세이셸 제도를 감독하는 일은 비슷한 크리올어를 사용하는 모리셔스 지부에서 맡게 되었다.

르완다—아프리카에 숨겨져 있는 스위스

다시 본토로 주의를 돌려 보기로 하자. 부룬디의 북쪽에, 구릉지가 많고 아름다우며, 탄자니아와 우간다와 자이르 사이에 자리잡은, 아프리카에서 인구가 가장 조밀한 나라, 르완다가 있다. 동서로 그리고 남북으로 길이가 160킬로미터 남짓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인구는 삼백만에서 칠백만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르완다에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차(茶) 중 몇 가지와 세계의 마운틴 고릴라들 중 상당수가 있다. 이 나라는 산들과 호수들과 1만 개가 넘는 언덕들로 이루어진 땅이며, 나일 강의 가장 먼 수원이 있는 곳이다.

이웃 나라 부룬디에서와 같이 르완다에서도 후투족이 다수를 차지하며, 키 큰 투시족은 소수이다. ‘아프리카의 숨겨져 있는 스위스’인 이곳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나나 나무들로 둘러싸인 외딴 시골 농가에서 산다. (1976년 8월 8일 호 「깨어라!」 참조) 모든 거민들은 키니아르완다어를 사용한다. 교육을 비교적 많이 받은 사람들은 프랑스어도 할 줄 안다.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을 주는 진리가 어떻게 하여 이 멀고먼 산악의 나라에 이르게 되었는가? 1969년에 통치체는 네 명의 길르앗 졸업생을 르완다에 임명하였지만, 그들의 입국 신청은 거절되었다. 지금도 여전한 가톨릭 교회의 강한 영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듬해에 탄자니아에서 온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 오덴 므와이소바와 에네아 므와이소바가 수도, 키갈리에 정착하여,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키니아르완다어를 몰랐기 때문에, 주로 자이르와 탄자니아에서 온 스와힐리어를 아는 사람들을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1971년 2월에 네 명의 회중 전도인이 야외 봉사를 보고하였다. 정부에 변화가 생겨 종교적 관용이 더 많이 베풀어졌지만, 언어 문제가 성장을 지연시켰다. 키니아르완다어로 된 출판물이 아직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이르와 탄자니아로부터 다른 파이오니아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왔다. 1974년에 활동하는 전도인은 19명이었다. 1975년에 그들은 서책을 천 부 이상 전했다. 그해에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일들이 발생하였다. 나이로비 지부에서 한 형제가 방문하였고, 여섯 사람이 침례를 받았으며, 일곱 명의 르완다 형제들이 천국 전도 강습에 참석하여 유익을 얻었다. 진정으로 확장을 위한 좋은 기초가 놓여지고 있었다. 키갈리 밖에서 조그만 성서 연구 그룹들이 구성되기 시작했다.

한 이주민이 돌아오다

그 동안 르완다 사람인 가스파르드 르와카 부부가 남부 자이르의 콜웨지에 있는 구리 광산에서 일하다가 진리를 배워 알게 되었다. 그는 한 지방 회중을 감독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유용한 영적 경험을 쌓았다. 그렇지만 그는 종종, 좋은 소식을 들은 사람이 거의 없을 고국 르완다에 대해 생각하고 기도하곤 하였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기로 하였는가? 가스파르드는 천국 전도 강습에 강사로 온 선교인에게 그 점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그 강사는 “전 시간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고 르완다로 돌아가는 게 어떻습니까?” 하고 제안하였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서 무척 즐거워했다. 직장에서의 승진 제의도 친척들의 만류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여호와께서 돕고 계시다는 것이 또한 분명하였다. 필요한 서류 수속을 최대한 빨리 끝마쳤을 뿐만 아니라 그가 근무하던 광산 회사에서는 르완다로 돌아가는 비행기표까지 제공해 주었다. 그는 1975년 6월에 키갈리에 도착하였다. 르와카 부부 형제에게 그렇게 이사하는 일은 상당한 물질적 희생을 의미하였다. 그는 이제 더는 회사가 제공하는 커다란 사택에서 살 수 없었으며, 다만 아도비 벽돌로 지은 간소한 숙소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의 열정과 더불어 르완다인의 성품에 대한 그의 충분한 이해는 신권적 발전을 가속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르와카 부부 형제처럼 활력 있는 기질을 가진 다른 르완다인들도 진리 안으로 들어왔다. 키갈리에서 집회 참석자 수는 부쩍부쩍 늘어나, 전도인 수는 1975년의 29명에서 1976년에는 46명으로, 그리고 1977년에는 76명으로 증가하였다. 그의 거실에서 가진 첫 번째 순회 대회에 40명이 참석하였다.

1976년에 키니아르완다어로는 최초의 출판물인 소책자 「이 천국의 기쁜 소식」이 출판되었다. 그후 1977년에 키갈리에 선교인들을 들어오게 하려는 또 한 차례의 시도를 하였다. 두 부부가 잠정 비자로 입국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들은 애써 찾은 끝에 적절한 선교인 집을 하나 찾았다. 그런데 저런, 집은 너무 큰데다 수도가 아직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선교인들은 빗물을 받아 목욕을 해야 했다. 소나기가 올 때마다, 그들은 황급히 달려가 빈 용기는 모조리 내다 놓고 빗물을 받아 두어야 했다. 한번은 아주 힘들여 욕조에 물을 채워 놓았는데, 나중에 보니 배수 마개를 꽉 틀어막지 않은 바람에 그 귀한 물이 배수구로 다 빠져 나가 버린 일이 있었다!

지방어를 사용함

선교인들은 좋은 소식으로 원주민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원주민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선교인들은 즉시 키니아르완다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언어를 배우는 일에서 잘 발전하였다. 심지어 지방 관리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주게 되었고, 관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왕국 소식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거짓 종교인들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었다. 선교인들의 체류 허가를 연장해 주지 않았다. 그로 인해 선교인들은 그 나라에 있은 지 만 석 달 후에 자이르로 떠나게 되었다.

외국에서 온 특별 파이오니아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르완다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 르완다 형제들이 스스로 필요를 돌보고,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고, 전파 활동을 이 나라 전역으로 확장하였다.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증인들은 왕국 소식을 백 개가 넘는 시골 장터에서 전파하였다. 그처럼 늦게 시작하였는데도, 이렇게 발전한 것을 보는 것은 실로 감격적이다!

진리를 위한 열심으로 불붙어 르완다 증인들은 다른 곳의 형제들과 교제하는 즐거움을 맛보고자 갈망하였다. 그리하여 1978년에 르완다에서 30명이 “승리의 믿음”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나이로비까지 1200킬로미터를 여행하였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힘든 여행이었다. 믿을 수 없는 교통 수단이 한 가지 문제였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우간다를 통과하려면 검문소에서 총부리로 위협당하며 수십 차례 검문을 받아야 하고, 심지어 체포되거나 처형될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그에 더하여 잦은 차량 고장과 국경을 넘는 문제들이 있었다. 이 모든 걸 무릅쓰고, 나이로비까지 여행하는 데는 나흘이 걸렸다. 그렇지만, 이 형제들은 여러 나라에서 온 수천 명의 동료 증인들이 나이로비 대회에서 평화스럽게 연합해 있는 것을 보고 무척 즐거워하였다!

우간다에서 여러 해 동안 계속된 소요 사태

1970년대 중반에 이웃 우간다에서는 즐거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긴장 상태가 지배하였다. 모든 선교인들과 외국 형제들이 출국을 강요당했을 뿐 아니라 날마다 전국민은 목숨을 잃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살았다. 경제 사정의 악화와 1975년에 여호와의 증인에게 다시 내린 금지령은 형제들에게 괴로움을 더해 주었다. 금지령을 해제시키려고 호소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정부가 이미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공약까지 했는데도 그랬다.

여러 해 동안, 법에 위반되면 재판을 받지 않고, 고문과 처형을 당하였다. 마음이 나약한 사람들은 적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참 하나님의 증인으로 남기 위해서는 강철 같은 의지가 필요하였다. 그리고 경제가 악화됨으로 인해, 물질에 대한 염려는 사람들의 정신에서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부도덕한 경향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증인들은 여러 가지 문제와 맞서 싸워야 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 물질주의, 부도덕, 영매술—이러한 일은 직면한 문제들 중 몇 가지에 불과했다. 그 결과 전도인 수가 줄어들었는데, 1976년에는 166명이었는데 1979년에는 137명으로 줄었다. 물론, 이렇게 수가 줄어든 이유들 중 한 가지는 많은 전도인들이 다른 나라로 피난한 것이다. 전도인 4명 중 1명 이상이 이 나라를 떠났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높이 존경하고 증인들에게 우호적인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에 남아 있었다.

그때는 우간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시련의 시기였고, 특히 증인들에게는 금지령 때문에 더욱 심한 시련의 시기였다. 다행스럽게도 금지령은 모든 곳에서 엄격하게 시행되고 있지 않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계속할 수 있었고, 사실상 그 봉사를 확장하기까지 하였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이 나라 북부 지방의 도시들에 임명되었고, 곧 회중들이 더 형성되었다. 동북 지방에 있는 도시, 소로티에서는 그 지역 행정관이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시내의 가장 좋은 학교들 중 하나를 회중 집회 장소로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캄팔라에서 두 형제는 전파를 하다가 붙잡혀 이 나라에서 가장 악명 높은 감옥에 투옥되었다. 친구들은 다시 그들을 못 보지는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들은 일주일 후에 풀려났다. 리라에서 세 명의 증인들은 전파한다는 이유로 석 달 동안 수감 생활을 하였다.

친척이나 이웃이 행방 불명이 되거나, 밤에 총격전이 벌어지거나, 가게가 다 도둑맞거나, 세 자리 수의 통화 팽창이나, 교통 수단의 부족은 지방 사람들에게 예삿일이 되어 버렸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렸다가, 좌석이 여덟 개밖에 없는 차 안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은 예사였다. 정부가 지정한 운송 요금은 거의 무시되었다. 으레 차가 한적한 길에 서면 “표”값을 내야 하는데, 승객은 누구나 운전사가 요구하는 대로 차비를 내야 했다.

나이로비에서 보내는 서적과 그곳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는 형제들의 방문은 우간다 증인들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와도 같았다. 즉 적시에 공급되는 영적 양식이자 새 힘을 주는 격려의 원천이 되었다. 일부는 그 모든 장애물을 무릅쓰고 케냐에서 개최되는 지역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또한 작은 지방 대회를 계속 가졌다. 그러한 작은 모임에서 한 여인은 출산한 지 단 하루 만에 침례를 받았다.

여호와께서 지원해 주시다

그런 소란스런 환경에서 계속 전 시간 전파자로 일한 증인들은 믿음의 탁월한 본이 되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마사카 출신의 연로한 자매, 안나 나불리아가 있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즐거웠던 일 중 하나는 케냐에서 있은 파이오니아 강습에 참석한 것이었다. 그는 큰 꽃무늬로 장식된 우간다 스타일의 긴 의상을 입고 강습에 참석하였으며, 제공되는 깊이 있는 영적 양식과 실용적인 지식에 감동되어 마냥 기쁨에 넘쳐 있었다.

나불리아 자매의 친척은 그에게 우간다에 돌아가지 말고 케냐에서 함께 살자고 압력을 가했다. 그래야 경제적 어려움과 위험과 불편함을 겪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위로의 좋은 소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우간다로 돌아가 전파하기를 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이 많고 쇠약하지만, 내 미력한 힘이나마 동료 인간들이 여호와와 좋은 관계를 갖도록 돕는 데 사용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간다로 돌아가서 사망할 때까지 충실하게 그곳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였으며 하나님을 섬겼다.

또 다른 믿음의 본으로는 격리된 임지에서 모든 군인 장교들과 경찰관들에게 용감하게 전파한 파이오니아 형제가 있었다. 그는 요리용 땔감을 살 돈이 바닥나면, 돈이 생길 때까지 그리고 필요한 성서 서적 공급품이 도착할 때까지 못 쓰게 된 의자나 가구를 땔감으로 사용하곤 하였다. 그의 봉사 구역에 사는 사람들은 영적 양식을 아주 갈구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루에 40 내지 50권의 서책을 쉽게 전할 수 있었다.

증인들은 계속 괴롭힘을 당하고, 체포되고 심문을 당하였지만, 끈기 있게 인내하였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학자의 혀”를 주셨고, 그들은 당국자들에게 담대하게 증거하였다.—이사야 50:4.

남편을 잃은 자매들은 캄팔라의 많은 증인들에게 격려가 되었다. 그들은 남편을 잃는 고통을 겪었을 뿐 아니라, 물질적 소유를 잃는 고통을 당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호와의 관심사를 첫째로 두고, 전도 봉사에서 열심히 일하였으며, 그들의 자녀들에게 경건한 가치관을 심어 주었다. 그들은 이웃 사람들도 진리를 배우도록 도왔으며, 나중에는 성서 연구생들의 자녀들이 파이오니아 봉사자들이 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렸다. (참조 「파」[영문] 1985년 2월 15일 호 27-31면)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충실한 사람들의 열성적인 활동을 축복해 주셨으며, 왕국 전도인들의 수는 증가하였다.

지부티—덥고 건조한 나라

아라비아 반도 서남단의 맞은편,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 사이에는, 한때 프랑스령 소말릴랜드로 불리던 지부티란 작은 나라가 있다. 이곳에는 프랑스 해군의 중요 군사 기지가 있다. 나라 이름과 명칭이 같은 수도 지부티는 일부 역서에 세계에서 가장 더운 도시로 열기되어 있다. 사막의 조건인데도 이 작은 땅에는 아름다운 곳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 특히 해안은 매혹적이다. 여기에는 해양 생물이 우글거리는 화려한 산호초들이 있다.

레바논에서 시작하여 홍해를 거쳐 내려온 그레이트리프트밸리 지구대가 아프리카 대륙으로 진입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아살 호와 아베 호를 둘러싸고—돌소금과 석고로 된 형성물, 울퉁불퉁한 석회석, 온천, 다채로운 색깔의 물 등—진기한 자연 경관들이 펼쳐져 있다.

이 나라 인구의 절반 이상은 아파르족이며,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은 에티오피아의 다나킬 사막까지 이른다. 또 다른 종족인 이사족은 소말리아인으로 소말리아에 가까운 수도에 산다. 푹푹 찌는 더위는 사람들을 기진하게 만들어, 사람들은 때때로 90미터를 가는데도 버스를 탄다. 많은 사람들은 예멘, 에티오피아, 케냐의 고원 지대에서 자라는 나무의 잎에서 나오는 자극성이 약한 마약의 일종인 카트에 중독되어 있다. 사실, 오후가 되면 사람들은 보통 카트를 씹거나 끓여 마신다. 그때가 되면 대부분의 다른 활동은 중지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회교도이며 프랑스어, 아랍어, 소말리아어와 아파르어를 사용한다.

지부티에 처음으로 좋은 소식을 전한 사람은 군인과 결혼한 프랑스 자매 클로딘 보방이었다. 이 회교국에서는 백인 여자가 혼자 공공연히 나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보방 자매의 활동이 그로 인해 위축되지는 않았다. 그는 계속 야외 봉사를 하였으며, 지부티에서 사는 3년 동안 2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다. 그로부터 약 2년 후인 1977년 말에 프랑스에서 진리를 연구한 젊은 지부티인 한 사람이 도착하였다. 하지만, 그는 영적인 문제를 일으켜 나중에 제명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78년에 에티오피아 난민인 한 자매가 지부티로 이사하였다. 그는 후에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다른 증인들로부터 오랫동안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는데도 계속 충실을 유지하였다. 프랑스와 에티오피아로부터 방문한 형제들이 그에게 영적 격려를 베풀었다. 하지만 그런 방문이 간간이 있다가, 1981년에는 프랑스 출신인 젊은 봉사의 종, 쟝 가브리엘 마송이 아내 실비와 함께 더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이곳에 도착하였다. 고립, 진리에 미숙함, 맞지 않는 기후, 그리고 높은 생활비를 고려하면, 마송 부부가 그렇게 한 것은 용감한 조처였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의 조직적인 전파 사업은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온 여러 난민이 지부티를 떠나 다른 나라로 가기 전에 진리를 받았다. 1982년에는 활동하는 전도인은 6명이었고 기념식에는 12명이 참석하였다. 두 달이 지난 후, 프랑스로부터 순회 감독자가 방문했을 때 세 사람이 침례를 받았다.

그 당시 집회는 마송 형제가 거하는 아담한 집 마당에서, 이따금 아주 특이한 환경에서 열렸다. 한번은 나이로비에서 방문한 한 형제가 성서 강연을 하고 있는데, 덩굴식물을 받치는, 마당에 세워둔 격자 모양의 시렁에서 고양이들이 서로 성을 내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싸우고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는 귀를 먹먹하게 하였으며, 물론 주위를 아주 산만케 하였다. 그러다가 싸우던 두 마리의 고양이가 시렁으로부터 연사 바로 앞에 떨어졌다! 그 직후, 정전이 되어 사건은 절정에 달했다. 모두는 칠흑같이 깜깜한 가운데 앉아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집회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참석자 수는 18명으로 늘어났다. 참석자 수가 그렇게 적은데, 집회는 네 가지 언어, 즉 영어, 프랑스어, 암하라어와 소말리아어로 열려 보기에 신기했다.

한 수도사가 분명한 태도를 취하다

마송 형제가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교사직을 구했다. 그는 학교에서 루이 페르노를 만났는데, 가톨릭 수도사이자 그 학교 교장으로 그곳에서 거의 20년 동안 살아온 사람이었다. 루이가 성서 진리에 예리한 관심을 보였을 때, 마송 형제는 그를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초대하였다. 루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이곳 지부티에서는 모든 사람이 나를 알고 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압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참석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마송 형제는 멋진 착상을 해냈다. 그는 루이에게 오후 낮잠 시간에 모든 지부티 사람들이 타는 듯한 태양 아래서 낮잠자고 있을 때 자기 집으로 오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였다. 그런 다음에 그는 커튼 뒤 침실에 앉아서 집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참석한 것을 아무도 모를 것이며, 그는 집회가 끝난 후에 어둠 속에서 안전하게 살그머니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와 같이 하였다. 루이는 커튼 뒤 마송 부부의 침실에 앉아서 첫 집회를 즐긴 것이다! 그는 성서 지식을 많이는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성서 지식이 깊이 토의되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

집회가 끝난 후, 마송 형제는 책들 중 한 권을 골라 집에 가져가서 읽어 보라고 그에게 권하였다. 루이는 교육자였기 때문에, 「청소년기—보람있게 사용해야 할 시기」 책을 골랐다. 그는 종종 자신의 종교는 왜 오늘날의 세상에서 젊은이들에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명확한 지침을 제공하지 않는지 궁금하게 생각해 왔었다. 그는 하나님의 참 종교라면 그분의 말씀을 굽히지 않고 사람들에게 건전한 지침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루이는 그날 저녁에 「청소년」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날 그는 마송 형제에게 자기가 진리를 찾았다고 말했다. 바로 그 주간에 그는 수도사직을 사임했을 뿐 아니라 가톨릭교에서 탈퇴하였다!

물론, 이 일은 상당한 동요를 일으켰으며, 그후 얼마 안 되어 마송 형제와 자매는 그 작은 공화국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지방 증인들에게는 뜻밖의 충격이었다. 44명이 기념식에 참석했었기 때문이다. 마송 형제는 정부에 호소하였고, 한 달의 체류 연장을 얻었다. 그후 그는 인도양에 있는 프랑스령 마요트로 떠났다.

마송 부부가 떠날 때까지 매일 루이와의 성서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마송 부부가 떠날 무렵, 이제 루이는 스스로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송 부부가 떠난 후, 한 파이오니아 봉사자가 지부티로 가서 루이를 영적으로 도울 수 있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증인들은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그리하여 새로 침례받은 루이는 여러 해 동안 비교적 영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굳게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당국에 소환되었으며, 심문을 받고, 전파 활동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으며,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 믿음 때문에 일자리를 박탈당하였다. 루이는 문제들을 여호와의 손에 맡겼으며, 다른 생계 수단을 찾을 때까지 착실히 발전하였다.

오늘날 지부티에서 작은 집단의 전도인들이 사람들에게 성서 진리를 계속 전하고 있다. 최근에 외국에 사는 증인들이 지부티로 이사하여, 새로운 자극을 주고 있다.

소말리아에서 재기의 노력을 기울임

선교인 비토 프라에세와 페른 프라에세가 1963년에 다른 임지로 떠난 후 여러 해 동안, 소말리아에서는 왕국 증거가 뚜렷하게 행해지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소말리아 출생인 한 유럽인 형제가 1980년 말에 이 나라 해안에서 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 그는 좋은 소식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찾았다. 그가 찾아낸 양 같은 사람들은 그후 이 나라를 주기적으로 방문한 여러 증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후에 한 이탈리아인 형제가 건축 공사 계약으로 항구 도시이자 수도인 모가디슈에 일하러 오게 되었다. 그는 경험이 부족하였지만, 열정은 부족한 면을 채워 주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회교도들을 포함하여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전했다. 회교도들 중에 한 중년 남자가 주의 깊게 들었다. 그는 진리의 빛을 식별하였다.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이라, 생각이 개방적이었고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다. 그후 이탈리아 형제는 근로 계약이 끝나,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다른 한 이탈리아인 가족이 소말리아로 이사하여 그 관심자에게 계속 도움을 주었다.

그후에, 한때 유럽에서 사는 동안 진리에 관심을 보였던 한 여자가 남편과 같이 소말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증인들을 찾았다. 그리하여 작은 집단이 하나 형성되었다. 집회도 개최되었고, 심지어 순회 감독자의 방문도 마련되었다. 드디어 1987년에 이 여자는 침례를 받았다. 그는 기쁨에 넘쳤다. 이 정도에 이르는 데 그에게는 여러 해가 걸린 것이다. 여러 나라로 자주 이사하여 새로운 언어들을 배워야 했으니, 그의 영적 발전이 느린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아무 것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곧 그는 다른 사람들과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으며, 한 부부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가담하였을 때는 감격하였다. 이 부인이 소말리아 태생으로서는 첫 증인이 되었다.

불행히도 이 나라의 경제와 치안이 너무 악화되어 많은 외국인들과 내국인들까지도 이 나라를 떠나 버렸다. 1990년 말에는 전도인들도 모두 떠나고 말았다. 1991년에 내란으로 이 나라가 엉망이 되고, 무차별 살상으로 모가디슈가 공포 가운데 있게 되었기 때문에 전도인들이 떠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는지도 모른다.

혁명으로 뒤흔들리는 나라는 소말리아만이 아니었다. 거의 20년 전부터 내란의 폭풍이 에티오피아 전역을 뒤흔들고 있었다.

에티오피아의 혁명

1974년에 유서 깊은 에티오피아 제국이 몰락했다. 새로운 이념을 세우려는 열의에 가득 찬 군인들은 노령인 황제로부터 권력을 장악하여 대대적인 혁신을 시작하였다. 젊은 혁명가들은 난생 처음으로 사람을 당장 죽일 수도 있는 무기의 위력을 느꼈다. 통행 금지가 실시되었고, “먼저 에티오피아를 위하여!”란 슬로건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어떠한 정치적 보수주의자도 용납되지 않았다.

이 시기는 에티오피아에서 여호와의 백성의 앞날이 밝아 보이는 때였다. 1974년에 최고 전도인 수는 1844명에 달하였으며, 「진리」 책이 암하라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기념식 참석자 수는 3136명으로 불어났다. 새로 임명된 특별 파이오니아들의 도움으로 증거 사업은 처음으로 에티오피아의 모든 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안정되지 못한 때였다. 어떤 회중은 공개적으로 집회를 가질 수 있었던 반면, 어떤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투옥되었다.

북부의 주, 에리트레아에서 게릴라전이 계속되었다. 케렌시의 회중은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었다. 마실 물도, 먹을 식품도, 전기도 없었다. 해질 때부터 동틀 때까지 통행이 금지된 상황에서, 해진 후에야 시작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는가? 모든 증인들이 해가 지기 전에 일찍 도착한 다음, 새벽에 통행 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집회 장소에서 밤을 세울 각오를 하였기 때문에, 엄숙한 기념 행사가 아주 특이한 일이 되었다. 그 밤은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실로 아름다운 밤이 되었다!

증인들에게는 다른 돋보이는 발전도 있었다. 1975년에 9년 만에 처음으로 천국 전도 강습이 마련되어 에티오피아의 장로들에게 유익을 주었다. 순회 대회도 개최되어 2000명이 훨씬 넘는 청중에게 유익을 주었다. 우리의 서적에 대한 수입 허가가 났다. 4만 권의 책을 포함하여 7톤 분량의 발송품이 해외로부터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하였다. 그 이듬해인 1976년에 아스마라 시에는 이상할 정도로 게릴라 활동이 잠잠한 때가 있었다. 그래서 천국 전도 강습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강습이 끝난 직후부터 총격전과 로켓탄 폭발이 다시 시작하였다고 지방 증인들은 보고하였다.

적색 공포

계속 악화되는 상황의 변화는 증인들에게 나쁜 조짐이었다. 1976년 초에 당국은 여호와의 증인에게 불리한 회람을 돌렸다. 그 해 중간쯤에 적색 공포 운동이 시작되어 혁명의 적들에게 맹공격을 가하였다. 여호와의 숭배자들도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증인들도 적으로 오인되어 고발되었다. 체포가 잇따랐다.

에티오피아 정교회가 실로 고소하게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그들은 그 상황을 이용하여 증인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수도의 남쪽, 작은 도시 모조에서 사제들은 600명이 넘는 폭도를 조직해서 증인들을 공격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경찰이 그들을 차단하여 심각한 해는 입지 않았다. 그와 비슷한 폭도 사건이 청나일 강의 수원에 자리잡은 바히르다르에서도 발생하였다.

전국에서 이전 어느 때보다 더욱 철두철미하게 가택 수색이 잇따랐다. 성서 출판물, 타자기 등 관련된 물건을 찾기 위해 심지어 정원까지 파헤쳤고, 마루의 널빤지까지 들어냈다.

아스마라에서는, 경찰이 게릴라가 많은 시골 지역에서 올라온 한 특별 파이오니아를 불심 검문하였다. 그들은 그를 검색하였고, 야외 봉사 보고 용지를 발견하였다. 그 보고 용지에 쓰인 여러 가지 약자를 보고 그들은 수상하게 여겼다. 그런 다음, 그들은 이 파이오니아로 하여금 도시 감독자, 게브레그지아브헤르 월데트느사에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게 했다. 게릴라 지도자를 잡을 것으로 생각하고 여러 트럭에 무장한 군인들을 가득 싣고 재빨리 게브레그지아브헤르 * 형제의 일터로 갔다. 그들은 그의 사무실을 포위하였고, 총을 겨누고서 돌진해 들어갔다. 그들은 게브레그지아브헤르 형제의 이름을 외쳐, 그를 체포하고는 멀리 호송해 갔다. 직장 동료들은 다시는 그를 못 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군대 본부에서 군인들은 게브레그지아브헤르 형제를 심문하였다. 그는 모든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는 우리의 전파 활동과 관련된 증거를 하고 잡지, 재방문, 성서 연구 등 수상히 여기는 약자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그러한 약자는 그 특별 파이오니아가 그 달에 야외 봉사에서 이룩한 실적, 즉 전한 잡지 부수, 재방문 건수, 사회한 성서 연구 건수 등을 적어 놓은 표시로 불순한 뜻은 전혀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질문을 퍼부었다. “뭐라고요! 이것이 무기, 화약과 관계가 없단 말이오? 우리가 어떻게 그걸 믿을 수 있겠소? 왜 이런 암호를 사용합니까?”

게브레그지아브헤르 형제의 진실하고 협조적인 태도는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지만, 아직도 의심은 풀리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고위 장교가 “당신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걸 우리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이 형제는 소지품을 뒤져 보았지만,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잠깐만!—그의 또 다른 소지품들 속에 “수혈 사절” 카드가 끼여 있었다. 그 고위 장교는 그것을 보자, “네, 이것이면 됐습니다. 가도 좋습니다” 하고 말했다. 우리 형제가 사무실로 돌아오자, 직장 동료들은 그가 부활되어 살아왔다고 생각하였다!

예기치 않은 역전

아스마라에서 여러 명의 형제들이 한 집에 모여 있었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이 장소를 염탐하여 즉시 경찰에게 이 집회에 대해 신고하였다. 그들은 두 채의 빌라가 있는데, 집 앞에 어린 여자 아이가 놀고 있는 집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증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그 집안이었다!

경찰은 증인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는 사이에 그 여자 아이는 노는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는 다른 빌라 앞에서 놀기 시작했다. 경찰은 그 집을 습격해 들어갔지만, 한 가족에 딸린 식구들 몇 사람밖에 없었다. 경찰은 당황하였고, 그 젊은이들에 대해 화를 내면서 경찰서로 돌아갔다. 자기들을 놀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치와 사회적 상황은 증인들에게 불리하였다. 사람들은 정치적 슬로건을 외치도록, 선거에 참여하도록, 전쟁을 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 돈이며 식품이며 장비들을 기증하도록 강요받았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서도 담대한 형제들의 도움으로 해외로부터 귀중한 성서 서적이 에티오피아로 반입되었다.

자기 희생적인 목자들

에리트레아에서 게릴라들은 여러 회중을 외부 세계와 고립시켰다. 그러나 이곳에서 사랑이 많은 목자들은 형제들을 격려하였다. 한 순회 감독자는 무장 호송을 받는 수송 차량을 타고 케렌까지 92킬로미터를 여행하기로 하였다. 5대의 탱크와 30대의 무장 차량의 호위를 받으면서 100대의 트럭과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일을 상상해 보라.

도중에 게릴라들이 호송대를 둘러싸자, 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공격자들은 과거에도 툭하면 그랬듯이, 모든 공급품을 뺏으려 하였다. 30분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후, 호송대가 전선을 뚫고 빠져 나갔다. 그리하여 순회 감독자는 격지 회중을 방문하여 형제들을 세워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순회 감독자가 돌아갈 때는 호송대도 다른 교통 수단도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한 가지 방법은 그 길을 전부 걸어서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위험했다. 그는 사흘 길을 걸었으며, 밤에는 줄곧 긴 행진을 하였다.

이 공포와 불안의 시기에 잘 알려진 몇몇 사람들을 포함하여 일부 전도인들은 이탈하였다. 일부는 무활동이 되었다. 또 일부는 외국으로 피난하였다. 전도인 수가 뚝 떨어졌다.

1979년에는 중립을 고수하기 때문에 수감된 형제들이 80명이었다. 그 해 4월에 아스마라의 도시 감독자인 게브레그지아브헤르 월데트느사에는 포위된 시골의 형제들을 방문하러 가는 도중에 슬프게도 사고를 당하여 사망하였다. 이 모든 슬픈 소식에도 불구하고, 충실하게 인내한 사람들은 분명히 여호와의 인자하신 후원을 경험하였다.

걸러내고 믿음을 시험하는 일이 계속되다

혁명의 첫 단계가 끝나고 전국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자, 시민들은 마치 영적인 공백 상태에 있었던 것처럼 느꼈다. 시민들은 목전에서 교회들이 타협하는 것과 교회들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증인들 중에서도 일부는 영적으로 불안정하게 되었다. 1981년에 23명의 장로들과 봉사의 종들이 봉사의 특권을 상실하는 것을 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조처는 필요한 것이었다. 그들은 야외 봉사에서 비정규가 되었었다. 그들은 회중을 위해 돌이키기 시작하였으며,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형제들 중 대부분이 그후 이전의 회중적인 특권을 다시 얻었다.

심각한 식량 부족의 시기 등 다른 시험들이 잇따랐다. 사실, 시험을 받는 여러 해 동안 에티오피아 형제들은 시험받은 단단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베드로 전 1:6, 7.

수단—고난 가운데서 성장함

수단에서 전도인 101명의 신기록에 달하는 데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 2년이 걸렸다. 이 기간에는 긴장된 순간들이 많았다. 쿠데타가 잦았으며, 정치적인 혐의를 받는 일이 잦았다. 때때로 전도인들과 장로들이 경찰의 심문을 받았다. 물가 폭등과 품귀 현상과 더불어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물질에 대한 염려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전도인 수의 증가가 느렸다. 1981년 4월에 겨우 102명으로 최고 기록에 달했다.

남부 지역에서는 순회 감독자가 회중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데 두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게릴라전이나 연료 부족이 있기만 하면 교통이 마비되었다. 그리고 여행 수단에도 문제가 있었다. 사람들로 꽉 찬 트럭 뒤 칸에 비집고 들어가서 하루 종일 덜커덩덜커덩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여행하거나, 아니면 한 좌석에 두 사람씩 앉고 무임 승객들이 화차 지붕에까지 탄, 들어설 틈도 없이 꽉 찬 기차 속에서 시속 10킬로미터로 천천히 여행해야 하였다. 항공 여행도 쉽지 않았다. 꼬박 일주일 동안 대기했다가 비행기가 도착하면 출발하기까지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에 출발 통지를 받았다. 그러나 회중은 순회 감독자의 방문을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그들이 얻은 기쁨과 베푼 후대는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82년에 파이오니아 영이 불붙었다. 그 결과 넘치는 축복이 있었다. 5년 만에 파이오니아 수가 7명에서 86명으로 증가하였다. 어느 달에는 총 전도인의 39퍼센트가 전 시간 봉사를 하였는데, 그 달은 정오의 평균 기온이 섭씨 40도가 넘는, 연중 가장 무더운 달들 중 하나였다. 1987년에는 300명이 넘는 전도인들이 활동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는 약 1000명이 참석하였다. 회중 전도인은 야외 봉사에서 매달 평균 20시간을 바쳤다.

많은 젊은이들이 영적으로 빨리 발전하여 봉사의 종으로 임명받을 자격을 갖추었으며, 때가 되자 장로가 되었고, 그리하여 회중들을 더욱 강화시켰다. 1987년에는 마침내 나일 강 건너편 역사적인 도시 옴둘만에 회중이 하나 형성되었다. 이 회중 구역에는 백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또한 포트수단 시에서도 증인들의 그룹이 하나 구성되었다.

하지만, 성장의 대부분은 키가 크고 피부가 까만 남부 사람들 가운데서 있었다. 그들은 흔히 얼굴이나 몸에 많은 문신을 하거나 치장을 하는 건장한 체격을 가진 사람들이다. 북부 수단인들이나 이집트계 혈통을 가진 사람들도 진리를 받아들였으며, 많은 난민들도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희망의 빛을 보게 되었다. 모든 그룹들은 여호와의 봉사에서 열심과 인내를 나타냈다. 아직도 증거 사업을 하는 데는 타는 듯한 뙤약볕 아래서 흔히 오랫동안 걷는 일이 필요하다. 왕국 사업이 아직 법적으로 승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집회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창의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나님의 생명의 떡을 맛봄

1983년에 회교 근본주의자들이 회교의 법, 즉 샤리아를 수단에 도입하였다. 여호와의 백성의 적들은 종교적으로 흥분된 이 상황을 이용하여 증인들에게 주의를 돌리려 하였다. 증인들은 이제 회중 집회를 보다 작은 규모로 가져야 하였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최근 여러 해 동안에 심한 가뭄이 수단을 포함하여 아프리카의 사막 주변 초원 지역의 대부분을 휩쓸었다. 이 가뭄은 내란이 다시 일어난 때에 발생하여, 굶주림과 고통은 한층 더 심해졌다. 하지만, 흥미있는 부수적 효과가 있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수단의 가장 먼 지역들에서 수도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먼 지역에 그대로 있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생명의 떡을 맛보게 되었다. (요한 6:35) 그리하여 빠른 증가가 있었다.

물질적인 기근, 그러나 영적인 풍부함

1988년에는 이상 기온이 닥쳐 카르툼 지역에 전례 없이 폭우가 쏟아져, 수천 명이 집을 잃었고 얼마의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다. 수십 명의 증인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피해를 입었다. 한 아버지는 폭우가 쏟아지는 동안 공터에서 칠흑같이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어린 자녀를 안고 있었는데, 물이 그의 허리까지 차 올랐다. 전봇대가 넘어졌고, 아도비 벽돌로 지은 집들이 무너졌고, 바깥 화장실들이 부서졌고, 물이 불어나자 지면에는 커다란 구덩이들이 파졌고, 물은 오염되었다. 도로가 물로 범람하여, 도시 전체가 마비되었다. 자동차들은 질척거리는 진흙 구덩이에 박혀 빠져 나올 가망은 거의 없어 보였다. 새로 생긴 “호수들”의 물이 다 빠지기까지는 여러 날이 걸렸다.

염려하는 장로들은 이러한 위험에 용감히 맞섰다. 그들은 신속하게 나서서 고통당하는 양들과 접촉하였다. 곧 구제 조처를 취했다. 통치체는 물론 추가 조처를 취하였다. 놀랍게도, 이런 모든 일을 겪으면서도 야외 봉사는 차질 없이 계속되었다.

또한 다른 종류의 폭풍이 수단 전역을 강타하였다. 쿠데타가 일어나 정부가 바뀌었고, 회교도 사회의 세력이 다시 커졌다. 계속된 내란과 가뭄과 수입 제한은 경제를 심하게 죄었다. 굶주림은 아직도 대도시들에 만연하여 희생자를 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전쟁으로 인해 피난함에 따라, 남부의 주요 도시인 주바에는 인구가 이십오만 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하지만, 게릴라들은 주바를 엄하게 통제하였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이 도시는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되었다. 우리 형제들을 위한 구호품은 재고가 바닥나기 전 적시에 계속 도착하였다.

한편 증가하는 파이오니아들을 위한 교육이 계속되었다. 정규적인 영적 교제도 즐겼다. 영적 양식의 공급은 중단되지 않았다. 진리가 남부 지역에서 점점 더 멀리 전파됨에 따라, 새로운 집단과 회중이 여러 도시에서 잇달아 생겨났다.

이 모든 압력을 받는 가운데, 1990년에 놀라운 일이 몇 가지 발생하였다. 한 가지는, 남부의 한 주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법적으로 인가한 일이다.

증인이 아닌 사람에 의한 증거

그후 11월 2일에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한 회교도 강사가 세미나에 참석한 많은 정부 관리들에게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대단히 호의적인 말을 하였다. 그는 정부 관리들에게 증인들의 믿음과 정치적인 일에 대한 중립 그리고 공개적 교육 사업 및 전체 지역 사회를 위한 유익한 사업 등에 대해 설명하였다. 게다가 그의 연설 전체가 그 다음 일요일에 전국 텔레비전 방송으로 방영되었다. 그렇게 하여 각계 각층의 사람들에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로 증거가 되었다. 이 훌륭한 증거는 무슨 결과를 가져왔는가? 호의적인 말을 많이 듣고 오해가 해소되었으며 진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실, 정부 관리들은 여호와의 증인에게서 볼 수 있는 자기 희생적인 정신을 본받도록 격려받았다.

수단의 증인들은 진실로 계속 하나님의 왕국을 첫째로 구하고 있으며, 야외 봉사에서 전도인당 매달 약 20시간을 즐거이 바치고 있다. 그러므로 기근의 재난을 포함한 많은 환난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문제들에 대한 유일하고 영속적인 해결책으로서 하나님의 왕국 진리가 수단에서도 전례 없이 전파되고 있다.

예멘—유향의 무역로

근년에 들어와서 수단 출신의 한 독실한 자매가 아라비아 반도 남서쪽 모퉁이의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예멘에서 그가 가진 빛을 비출 특이한 기회를 가졌다. 현명한 왕 솔로몬 시대에 유향의 무역로는 여기서 시작되어, 시바 여왕의 영토를 통과하였을 것이다. 이제 수단인 자매뿐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에서 온 몇 명의 증인들도 고용 계약에 따라 예멘에 머물게 되었다. 여호와의 도움으로 그들은 함께 만났다. 지혜로운 방법으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믿음에 대해 전파하였으며, 성서 연구를 원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오래 된 전통이 지배하는 이 산악의 나라에서 여전히 회교 세력이 강하다. 대부분의 여인들은 베일로 완전히 가리고 다니며, 남자들은 당당하게 장검을 허리띠에 차고 다닌다. 슬프게도, 아프리카 출신의 건장한 한 중년 형제가 어느 날 저녁에 갑자기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전파 사업은 계속되고 있다.

1986년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15명이 참석하였다. 그후에 그들 중 몇 사람은 다른 나라로 이사하였다. 그로 인하여 야외 봉사와 집회 보고는 대략적인 것이지만, 집회는 계속 열리고 있다. 또 다른 나라에서 온 한 자매는 다른 전도인들과는 격리되어 있지만, 여러 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마태 복음 24:14의 성취로 이 나라에서도 약간의 증거가 행해지고 있다.

예멘에서 홍해를 건너가면, 1970년대 후반기에 증거 활동이 생사 문제가 되었던 나라가 있다.

에티오피아의 충절 고수자들

에티오피아, 어느 주에서 반대가 심해졌다. 당국자들은 두 명의 증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지만, 형제들은 처형당하지 않았다. 증인들은 양심을 범하도록 압력을 받았으며, 박해자들은 형제들의 관자놀이에다 총구를 대고 누르면서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경제적 압력은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는 계시록의 예언의 말씀을 거의 문자적으로 성취시켰다. (계시 13:17) 성서는 구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 주에서는 사람들의 생활을 점차 더 통제하였다. 내륙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여행증을 요구하였다.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정당에 가입시켰다.

1978년 3월에 우비에 아옐레는 성경 원칙에 고착하였기 때문에 구타당하여 죽었다. 그후 여러 달 사이에 파이오니아이자 장로인 아옐레 젤렐레우와 전도인인 하일루 예미루는 살해되었고, 그들의 시체를 하루 종일 아디스아바바의 거리에 방치하여 모든 사람들이 보게 하였다.

압력이 가중되었다. 라디오 방송과 신문과 경찰은 증인들을 공격하였다. 때때로 백 명이 넘는 형제들이 투옥되었다. 일부는 풀려났는데, 그중에는 2년 반 동안 수감되어 있으면서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감옥에서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기도 하였다!

그후 사악한 음모—여호와의 증인을 말살시키려는 음모가 꾸며졌다. 몇몇 증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서,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되어 버렸다. 그에 더하여 경제적 어려움도 있었다. 육류와 양식이 고갈되었고, 자동차 타이어와 연료와 기타 필수품들이 고갈되었다.

백 명이 넘는 증인들은 일자리를 박탈당하면서까지도 충실을 지켰다. 이것은 부양해야 할 대가족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실로 믿음의 시험이었다. 그러나 일자리를 가진 증인들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사랑을 보여, 궁핍한 증인들의 경제적 부담을 짊어지는 일에 협력하는 것은 참으로 가슴을 뜨겁게 하는 일이었다! (사도 4:32) 이 모든 끔찍한 상황에서 증인들은 영적인 지침과 격려를 크게 필요로 하였는데, 여호와의 지도 아래 바로 그러한 도움을 받게 되었다.

언제나 담대함

체포와 시련은 궤양처럼 계속 번져 나갔다. 한 특별 파이오니아는 1972년부터 15차례나 체포되었다. 14살 된 어린이들까지도 투옥되었고, 일부 어린이는 4년 이상 수감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타협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징병이 시작되었다. 젊은 여자들까지 포함되었다. 많은 증인들은 수감 생활을 이용하여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으며, 다른 수감자들이 성서 진리를 배우도록 도왔다. 한 자매는 출산을 하도록 잠깐 석방이 허락되었으나, 그후 다시 감방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용감한 형제는 자동차를 타고 시골로 가던 중 문득 성서 서적 꾸러미를 숨기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그것은 자동차의 계기반 밑 잘 보이는 곳에 놓여 있었다. 그는 감출 마땅한 곳을 알려 달라고 기도하였지만, 그 커다란 짐을 숨길 마땅한 곳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그 짐을 그대로 두고 여호와를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홉 군데에서 검문을 받을 때마다 그의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렸겠는지 상상해 보라! 어떤 곳에서는 자동차를 샅샅이 검색하였는데도, 검사관이 단 한번도 그 짐을 의심하지 않았다!

1982년 12월에 여섯 명의 증인이 그리스도인 중립적 입장 때문에 체포되었다. 그들 역시 담대한 남자들이었으며, 다른 여러 동료 수감자들이 왕국 희망을 갖도록 도왔다. 삼 년 후에 그들은 이송되었는데, 그후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 처형된 것이다.

이 나라의 북부 중심부 데마스암데 주, 데세에서 교사이자 다섯 자녀를 둔 아버지는 5년 이상 고문으로 일관된 수감 생활을 하였다. 처음에는 중노동을 하였으며, 그 다음 육 개월 동안은 사슬에 매여 구부정한 상태로 독방에서 지냈으며, 그후 병에 걸렸는데도 아무런 치료를 받지 못했으며, 다음에는 이가 옮은 알몸으로 이 개월을 보냈으며, 다음에는 다른 수감자들이 장티푸스로 누워 죽어가고 있는 감방으로 옮겨졌다. 결국, 그는 건강을 완전히 잃고 암에 걸려 몸이 쇠잔해진 후, 감옥에서 풀려나 죽게 되었다. 그는 끝까지 충실하였으며 부활에 대한 확고한 희망을 갖고서, 1991년 2월 4일에 사망하였다.—비교 히브리 11:37-40.

다른 증인들은 살아 남았다. 한 형제는 시골로 가던 중에 게릴라 단체의 일원으로 의심을 받고 체포되었다. 그는 침묵을 지킬 수 없었다. 위험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담대하게 자신이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밝혔다.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죄수들이 있는 감방에 투옥되었다.

그는 그날 밤을 어떻게 보냈는가? 자기의 비참해진 상태를 비관하는 대신 그 기회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다. 아침이 되자 뜻밖에도 같은 방의 수감자들이 감방에서 불려 나가 관리들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 관리들은 “어젯밤에 감방에 들어온 사람은 어떤 사람이던가?” 하고 질문하였다.

“아, 거의 밤새도록 전도하여 잠도 못 자게 한 그 사람 말입니까?” 하고 그들은 대답하였다. 관리들은 그 사람이 정말로 여호와의 증인 중 한 사람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가 공개적으로 믿음을 선포한 일이 감옥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석방되었다!

이 나라의 남부에서 한 관심자는 4년이 넘도록 충실하게 수감 생활을 인내하였다. 첫 일년은 다리에 사슬이 매여 있었고, 독방에서 육 개월을 지냈다. 친척들은 그의 개인 소지품을 받았을 때, 그가 처형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적은 식품 배급량으로 연명하였으며, 그후에 그처럼 쇠약해진 상태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이 사형 선고는 고위 관리들에 의해 번복되었다.

그를 유혹하기 위해 창녀를 감방에 넣은 때도 간혹 있었다. 삼 년이 지난 후, 그는 자기와 함께 수감 생활을 하게 된 다른 관심자에게 자신이 믿는 바를 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새 힘을 얻었다. 하지만, 그의 석방은 가망이 없어 보였다. 어느 날 전혀 뜻밖에도, 그는 석방된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 마침내, 그는 여호와께 침례로써 헌신을 상징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여덟 번이나 사형 선고를 받다!

에티오피아 중심부에 가까운 도시, 데브레제이트에서, 파이오니아인 우르쿠 아베베는 중립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바로 그날 밤에 처형하라는 선고가 내려졌다. 하지만, 형이 집행되기 전에 인근 도시에서 20명의 다른 형제 자매들이 체포되었다. 당국자들은 이 20명이, 우르쿠 형제가 처형되는 것을 보면 타협할 것이라고 믿었다. (관리들은 그가 “지도자”라고 추정하였다.) 그래서 이 인근 도시의 관리들은 우르쿠 형제를 인계받아 처형시키고자 하였다.

우르쿠 형제는 이감을 간 다음 300명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설명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연설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지방 관습을 이용하여, 우르쿠 형제는 네 시간 동안 아벨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하였다. 그가 설명을 끝내자, 한 관리는 “이런 사람은 나머지 사람들로부터 따로 떼어놓아야 합니다. 하마터면 그의 말에 설득당할 뻔했소이다!” 하고 말했다.

어느 날 저녁에 교도관들이 그와 다른 증인 수감자들을 처형하려고 어느 강가로 데리고 갔다. 증인들에게 총을 겨누고서 그들은 “신앙을 버리겠어, 안 버리겠어?” 하고 물었다. 증인들은 하나같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결코 여호와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처형되지 않았다. 그 대신 심한 구타가 시작되어 여러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형제들은 “고통이 너무 심해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했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했다.

다음에는 우르쿠 형제만을 선정하여 처형하는 것이었다. 한 방의 총성이 울렸다. 순간 그는 움찔하였다. 그는 넘어지지도, 다치지도 않았다. 이내 제정신이 들었다. 총알을 맞지 않은 것이다. 박해자들은 지체 없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개머리판으로 잔인하게 때렸다.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감방으로 옮겨졌다.

감옥에 돌아온 교도관들은 그날 밤에 모든 증인들을 타협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얼마 안 있어 날카로운 총성이 감방들을 진동시켰다. 증인들은 이런 말을 들었다. “총성을 들었어? 너희 형제들이 죽은거야. 내일 거리에 나가면 시체를 보게 될걸. 너희들도 타협하지 않으면 그처럼 죽게 된단 말이야.”

증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형제들이 마신 잔을 우리도 기꺼이 마실 것입니다.”

밤중에 교도관들은 우르쿠 형제와 다른 형제들을 몽둥이로 때리기 시작했다. 특히 난폭한 한 교도관은 우르쿠 형제의 팔을 몹시 꽉 묶어 여러 손가락의 피부가 찢어져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우르쿠 형제는 형제들이 낙담할까봐 상처난 손가락들을 숨겼다. 잠시 휴식 시간이 있어 증인들은 기도하고 나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새벽 한 시에 성난 박해자들이 몰려와서 새벽 네 시까지 계속 구타하였다. 그후 증인들은 또 기도하였고, 힘을 주신 것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하였고, 계속 그들을 붙들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아침이 되자 다른 불량배들이 감방으로 왔다. 그들은 증인들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오후에 우르쿠 형제는 또 혼자 불려 나가, 20명의 사람들에게 구타당하고 짓밟힘을 당했다. 그래도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또 그를 처형해야 한다는 결정이 났다. 오후 10시에 20명이 넘는 교도관들이 도착하여 새벽 2시까지 그를 때렸다. 한 고문자는 몹시 격분한 나머지 또 다른 증인을 뒤에서 움켜잡고 잔인하게 구타하여, 그 증인에게 없어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증인들은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이 어두운 방에 나흘 동안 갇혀 있었고, 거듭거듭 구타를 당했다. 모두는 갈비뼈며 두개골이 골절되었다. 신체적으로 그들은 몹시 쇠약해졌다.

그 감옥을 방문한 한 고위 관리는 증인들의 상태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들에게 먹을 것을 좀 주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난폭한 한 교도관은 증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다. 그는 음모를 꾸며, 증인들이 탈옥을 시도했다고 고발했다. 그의 간계가 받아들여져, 또 처형이 계획되었다. 형제들은 구출되기를 열렬히 기도했다. 특히 거짓되고 수치스런 고발을 생각하고 더욱 그러했다. 한 고위 관리가 처형을 막아 주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그날 밤새도록 구타당했다.

며칠이 지난 후 다른 한 관리가 와서 우르쿠 형제는 처형되고, 나머지 형제들은 석방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놀랍게도, 그 형제들이 석방되었을 뿐 아니라, 며칠 후 우르쿠 형제도 석방 통지를 받았다.

즉시 그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개인 집에서 형제들을 만나 격려하였다. 그는 자신이 미행당하고 일거 일동이 보고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튿날 다시 체포되었고, 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게다가 그를 교묘하게 타협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에게 우정적인 태도로 접근하여 어떤 구호를 외치라고 친근하게 권유하는 것이었다. 우르쿠 형제는 거절하였다. 그는 참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구들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러자 우호적이던 그 사람들은 추악한 고문자로 돌변하였다.

며칠이 지난 후 교도관들은 그와 이야기하기를 원했다. 토론은 네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에게 중요한 정치적 직책이 제의되었다. 그는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너는 분명히 총살당해 구더기의 밥이 되고 말거야” 하고 말했다.

마침내 공평한 정신을 가진 일부 관리들이 우르쿠 형제의 사건에 관심을 갖고서 그를 석방하도록 의결했다. 그는 자신이 당한 호된 시련을 일종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히브리 12:2) 시련이 시작되기 전에 그는 항상 진지한 태도로 정기적으로 가족 연구와 기도를 해 왔었다. 그렇게 한 것이 그가 인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는, “니고데모”와 같은 그리스도교국의 한 목회자가 자기 종교에 속한 사람들과 혹독한 박해의 시련을 당한 증인들을 비교하여 이와 같이 말한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두려워서 타협하였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실망시켰지만, 여러분은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분을 확고하게 지지하였습니다. 참 잘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르쿠 형제는 모두 합쳐 여덟 번이나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여호와께서 그를 구출하여 살아 남게 해주셨다.

큰 교훈을 배우다

이 불 같은 시련의 시기에 에티오피아 증인들은 사도 바울이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였다’고 한 말이 그들에게도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히브리 11:34) 가정부로 일하면서 글을 배우던 한 겸손한 자매가 교육을 잘 받은 증인들과 함께 투옥되었다. 일부 증인 수감자들은 석방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지만, 그 자매는 주로 계속 충실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였다. 어느 날 박해자들은 펄펄 끓는 기름을 담은 그릇을 가져와, 모든 수감자들의 손가락을 그 속에 집어 넣겠다고 협박하였다. 몇몇 증인들은 겁에 질려 타협하였지만, 그 자매는 계속 확고함을 유지하였다. 그의 손가락은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그후 그 자매는 풀려났다.

이 일은 사회적 지위와 교육을 매우 중요시하는 사람들에게 큰 교훈이 되었다. 그들은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이 충실성임을 알게 되었다.

곤경을 당하나 버림받지 않음

그토록 인내한 이 증인들 가운데서 장성되고 균형 잡힌 태도, 여호와께 대한 신뢰심 및 더 큰 자기 희생 정신이 점점 자라 가는 것을 보는 것은 실로 보람되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곤경을 당했으나 버림받지 않았다. 참 숭배가 승리하였다.

이 기간중에 특이한 방법으로 여호와의 편에 서게 된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한 장로는 직장에서, 동유럽 출신의 한 여자에게 증거하였다. 그 여자가 예리한 관심을 보이기에, 그는 소중하게 여기던 성서 출판물을 빌려 주었다. 실망스럽게도, 그 여자는 그 나라를 떠난 다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여러 해 후 그는 그 여자로부터 편지를 받고 기뻤다. 그 여자가 그 출판물로 인해 생활을 변화시켰고, 이제 침례받은 영적 자매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예로서, 한 소심한 가정부가 있었는데, 그는 고용주인 교사가 성서 연구를 할 때 그 내용을 다른 방에서 엿들었다. 그는 연구할 형편이 못 된다고 느꼈지만, 그러한 놀라운 진리를 몹시 간직하고 싶었다. ‘저런 성서 교습을 받으려면 돈이 많이 들거야’하고 혼자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여자는 그 교사 집의 일을 그만두고, 돈을 더 많이 벌어 그러한 성서 연구에 필요한 비용을 벌 수 있을 일자리를 찾았다. 성서 교습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금액을 저축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곧장 이전 고용주였던 교사에게 성서를 가르치던 증인의 집으로 갔다. 그 여자는 성서 교습이 무료라는 것을 알고는 매우 놀랐다! 그는 연구에서 잘 발전하였으며, 나중에 그 교사와 결혼하였다. 현재 이 두 사람은 모두 여호와의 헌신한 종이 되었다.

이 나라에서 여호와의 증인 젊은이들은 유다른 압력을 받았다. 그들은 중립 문제 때문에 병원 치료, 학교 시험, 취업 등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본적인 것들을 거부당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버림받았다고 느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러한 환난이 일시적인 것임을 확신하고, 여호와께서 공급해 주시는 능력 안에서 잘 발전하였다.—빌립보 4:13.

진정한 해결책

에티오피아를 괴롭히는 문제들은 세계 다른 곳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들과 유사하다. 증인들은 그 치유책을 발견했다고 믿고 있으며, 그들에게 가해졌던 많은 압력들이 1990년 이래로 완화되어 그 해결책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줄 수 있게 되었음을 기뻐하고 있다.

그 예로서, 에리트레아의 주도, 아스마라에서 당국은 여호와의 증인을 차별하는 일을 중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 하나의 예로서, 50명이 넘는 에티오피아 형제들이 필요한 여행 허가증을 발급받아, 케냐 나이로비에서 개최되는 지역 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 두 가지 예를 더 들면,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여러 구역에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다시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일부 회중들은 다시 호별 전파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좋은 결과가 기대된다. 그렇지만 에티오피아에는 아직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다.

전략적인 항구 도시 마사와가 함락됨으로 1990년에 내란이 치열해졌다.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감사하게도 그곳에 살고 있던 증인은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다. 기근이 아스마라와 광범위한 시골 지역을 휩쓸었다. 통치체는 고난을 겪는 이곳으로 신속하게 구호품을 보냈다. 티그레의 주도인 메켈레로 가서 그곳에 사는 증인들에게 필요한 격려를 주기 위해,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생명을 무릅쓰고 간신히 전쟁 지역을 통과하였다. 1991년 5월에 게릴라 전선이 혁명 정부를 권좌에서 축출하고 더 많은 자유를 약속하는 헌장에 서명했다. 이제 에리트레아는 별개의 행정 기관을 두었으며, 외부 세계와 거의 단절되었다. 이 모든 소요 가운데서도 증인들은 엄정 중립을 지켰다. 인간 문제들에 대한 영구적인 해결책은 하나님의 왕국을 통해서만 나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봉사년도 말에, 특별 대회일 모임이 에티오피아의 여러 도시에서 자유롭게 개최되었다. 그리고 나서 순회 대회와 지역 대회, 다량의 서적 발송품 및 법적 등록을 위한 계획들이 진행되었다. 에티오피아에서도, 신속하게 “이 세상의 형적[“장면”, 「신세」]은 지나”가고 있으며, 형제들은 최종적인 거대한 모으는 사업에 대해 열성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린도 전 7:31.

그러면 1970년대 중반 이후로 동아프리카 본토에서는 그 외에도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가? 알아보기로 하자.

탄자니아에서의 인내의 시험

1976년에 탄자니아에서 실시된 대사면으로, 수감된 증인들 중 일부가 석방되었다. 불행하게도, 아직도 우리 형제들을 위험 인물로 보는 정부 관리들이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숨바완가에 있는 키타왈라의 혁명적인 추종자와 여호와의 증인을 혼동하였기 때문이다. 형제들은 면밀한 감시를 받았으며, 많은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마치 로마에서의 사도 바울처럼, ‘죄인과 같이 매여’ 있었다.—디모데 후 2:9.

그 외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1977년 2월에 탄자니아와 케냐 간의 국경이 폐쇄되었다. 그후 육 년이 넘도록 계속 폐쇄되어 있었다. 한동안 우편물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많은 우편물이 도중에 분실되었다. 일부 지역에는 가뭄이 닥쳐 문제가 생겼다. 콜레라가 발생하여 순회 감독자들의 여행이 방해를 받았다. 탄자니아가 1979년의 우간다 전쟁에 참전하여 다른 압력들이 가중되었다. 경제 사정의 악화는 물질에 대한 염려를 초래하였다. 이 모든 고통은 장로들에게 많은 압력을 주었다. 그래서 일부 회중에서는 장로들이 양치는 일을 필요한 만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긍정적인 부면도 있었다. 1979년에 이 나라의 동남부에서 마침내 전파 사업이 개시되었다. 그리하여 증인들은 이제 북부의 킬리만자로에서 남부의 모잠비크 국경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든 활동적으로 일하게 되었다.

치안 판사들은 증인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기 시작했다. 투쿠유의 한 교도관은 증인들의 선한 행실을 보고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어 증인이 되었다. 1981년 7월에는 최고 전도인이 1621명으로 마침내 1975년도의 최고 전도인 수 1609명을 능가하였다!

인내가 보상을 받다

1979년에 그리고 또다시 1981년에, 형제들은 왕국 사업에 대한 법적 인가를 받기 위하여 당국자들에게 접근하였다. 그러한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83년 5월 5일자 통치체의 편지를 전달함으로 법적 인가를 받으려는 노력을 계속 기울였다. 그후 1984년 8월에 파우스틴 루고라 형제와 엘리카나 그렌 형제가 다시 접근하였지만, 정중히 거절되었다.

증인들은 끈기 있게 계속 호소하였다. 1985년에는 내무부에서 공식 회견이 있었지만 또 거절되었다. 이 문제는 가망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회중들이 심사를 받고 있음을 시사하는 일들이 있었다. 아마 공평한 정신을 가진 관리들이 증인들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을 알고자 한 것 같았다.

1986년에 우리 형제들은 인가를 받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형제들은 공정하고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마침내 형제들의 인내는 결실을 맺었다. 철저한 조사를 충분히 한 끝에 오래 된 오해는 시정되어, 1987년 2월 20일에 증인들의 대표자들은 탄자니아에서 여호와의 증인 협회를 법적으로 인가한다는 정부의 공문을 건네 받았다. 22년 동안의 금지령하에서 인내한 결과 이제 즐거워할 때가 된 것이다!

선교인의 낙원

탄자니아 전역으로 환희가 넘쳐 흘렀다. 순회 대회가 조직되었다. 대회에서 침례를 지원한 사람들 중에는 정규 파이오니아만큼 전파 활동을 많이 하고 성서 연구를 아홉 건 혹은 그 이상 사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상, 한 새로운 형제는 그가 도운 성서 연구생과 같이 침례를 받았다!

1987년에 선교인들의 탄자니아 입국 허가를 신청하여 인가를 받았다. 바로 그해에 길르앗 졸업생들이 다르에스살람에 도착하였는데, 그 무렵 이 도시의 인구는 백 오십만 명이 넘었다. 전도인이 도합 200명도 안 되는 두 개 회중이 돌보기에는 너무나 방대한 구역이었다!

전파 구역은 선교인의 낙원이었다. 집주인들은 그들을 집안으로 초대하여 기꺼이 출판물을 받았다. 이 나라의 전도인 절반 이상을 돌볼 요지인 음베야에다 선교인 집을 개설했다. 몇 개월 후, 아루샤와 도도마에도 선교인들이 파견되었다.

더 많은 정직한 마음을 가진 탄자니아인들이 참 하나님을 숭배하도록 돕기 위한 기초를 놓는 데 많은 조직적 훈련이 필요하다. 다음과 같은 비교 수치가 밝혀 주듯이, 전망은 좋고 열의가 대단하다. 1982년에는 파이오니아가 160명이었는데, 1991년에는 866명으로 불어났다. 1982년에는 증인들이 전파 활동에 바친 시간이 37만 4831시간이었는데, 1991년에는 130만 85시간으로 증가하였다. 1982년 기념식 참석자 수는 5499명이었는데, 1991년에는 그 수가 1만 441명으로 늘어났다. 1982년에는 침례받은 사람이 41명이었는데, 1991년에는 458명으로 늘어났다.

1988년에는 또다시 증인들에 대한 법적 문제가 대두되어, 여러 명의 선교인 입국 신청이 지금까지 미결 상태에 있다. 하지만, 처음으로 정부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증인 장로가 주례로 서게 해달라는 신청을 수락하였다.

먼 남부 지방과 빅토리아호 부근에 일련의 홍수와 가뭄이 발생하여 구제 조처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한 구제 조처는 1991년까지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갖가지 어려움과 불안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백성은 긴급성을 갖고 양 같은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일을 계속 추구하고 있다.

케냐에서 정결하게 되다

1975년 이후 여러 해 동안 회중들은 정결하게 되었다. 악한 사물의 제도가 끝나는 때와 관련하여 1975년이란 연대만을 염두에 두고 진리에 머무른 사람들은 그 해에 끝이 오지 않자 떨어져 나갔다. 한 조사에 의하면, 이 기간에 새로운 전도인이 77명 있었고 49명이 무활동이 되었다. 집회 참석과 개인 연구를 소홀히 한 사람들은 부도덕, 술취함, 물질주의적 탐욕과 같은 사단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유감스럽게도, 몇 년 동안에 총 전도인의 3퍼센트 이상이 제명되어야 했다.

물론, 규모가 작고 좋은 지도를 받지 못한 회중들이 많았다. 사실상, 1978년에는 케냐의 90개 회중에서 49개 회중은 전도인이 10명 미만이었고, 전도인이 40명이 넘는 회중은 12개 밖에 안 되었다. 그래서 신권적인 책임은 대개 한두 명의 형제들의 어깨에 놓여 있었다. 천재지변은 장로들의 책임을 가중시켰다. 나이로비 동쪽 지역에는 가뭄이 심하여 구제 마련을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암담하고 침울하지는 않았다. 긍정적인 좋은 일도 많이 있었다. 1977년 기념식 참석자 수는 5584명이었다. 서적이 많이 전해졌다. 통치체 성원인 로이드 배리 형제가 방문하여 모든 전도인에게 왕국에 대한 열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1976년 이래 운영되고 있는 새로운 지부 위원회 마련은 왕국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벧엘의 확장

1979년 2월, 전도인 신기록인 2005명에 달했다. 전도인 수의 증가로 벧엘 가족도 불어나 지부 건물이 협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부 위원회는 벧엘에 방 네 개를 증설하기 위해 통치체의 승인을 요청했다. 커다란 봉투에 든 답장을 받았는데, 위원들에게 놀랍게도 그 속에는 16개의 침실을 추가하는 완전히 새 건물을 증축하기 위한 건축 계획이 들어 있었다!

1978년 12월에 새로운 지부 건물을 위한 땅파기 작업이 시작되었고, 1979년 6월에는 그 아름다운 새 건물의 일부를 이미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 1월에 세계 본부에서 돈 애덤스가 봉헌식을 위해 방문하여, 나이로비 시티 스타디움에서 2205명에게 연설하였다. 그후,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약 일천 명이 새 벧엘 건물을 견학하였고, 그들 중에는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을 처음 본 사람들이 많았다. 그해 말에는 보다 작은 대회들이 열렸는데, 나쿠루에서 개최된 영어 대회에는 전쟁으로 파괴된 우간다에서 온 형제들도 참석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또 하나의 거보를 내딛게 되었다. 최신형 인쇄 장비가 케냐 지부에 도착하였다. 이제 서식, 프로그램, 협회용 편지지, 「왕국 봉사」 그리고 잡지까지도 바로 지부에서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더는 이러한 공급품이 해외로부터 도착할 때까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1980년에 약 12만 부를 인쇄하였지만, 이 년 후에는 총 생산이 93만 5000부로 늘어났으며, 1990년에는 200만 부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1983년에 나이로비는 전도인 1000명 선을 넘어섰으며, 케냐 전체는 3005명에 달했다. 4월에는 총전도인의 28퍼센트가 전 시간 봉사를 하였다. 또한 도움을 베풀 선교인들이 더 많이 이곳으로 파견되었다.

출판물의 도움으로 말씀이 신속하게 전해지다

협회 출판물은 케냐에서 인기가 좋다. 일부 학교에서는 「나의 성서 이야기」 책을 종교 학습에 사용하고 있다. 잡지 외관이 더 아름다워졌다. 그리하여 1984-85년, 2년 사이에 배부 수는 50퍼센트 이상 증가하였으며, 전도인들은 때때로 한 달에 평균 열 부 이상 전하였다. 일부 잡지들은 일반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영향을 주었다. 예로서, 한 남자가 가두 증거를 하고 있는 전도인에게 접근하였다. 그 남자는 표지 기사가 “흡연은 계속될 것인가?”라는 잡지를 가리키면서 “나도 이전엔 담배를 피우던 사람입니다” 하고 말했다. 어떻게 해서 그는 담배를 끊게 되었는가? 며칠 전에 읽은 바로 그 기사에 자극을 받은 것이었다!

1982년의 두드러진 일은 특별히 아프리카 밭에 적응시킨 출판물인 「땅에서 영원히 사는 길」 팜플렛의 도착이었다.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까지도 그 팜플렛을 원하였으며, 일부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전도인의 봉사 가방에서 꺼내가다시피 하였다. 한 증인은 야외 봉사 가방에 귀중한 팜플렛이 단 한 부 남아 있었는데 그런 일을 겪었다. 그 전도인은 그 팜플렛을 새로운 연구생에게 주기 위해 일부러 남겨 두었던 것이다. 한 여행자가 그 팜플렛을 보더니 그것을 원했다. 다른 출판물을 주겠다고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증인은 바로 그 팜플렛은 정기적으로 성서를 연구하기로 약속한 사람에게 주려고 남겨 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갖기로 결심한 그 여행자는 “괜찮습니다. 나에게 줘도 좋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그 전도인에게 새로운 연구가 한 건 생겼다!

이 팜플렛은 여호와와 그분의 목적, 왕국 정부, 그리고 성서의 의로운 표준들에 대해 확실하게 증거한다. 이 훌륭한 도구가 지닌 가능성 때문에, 그 팜플렛은 동아프리카 구역에서 사용되는 또 다른 35개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케냐인들을 위해 14개 언어로 그리고 인근 나라들을 위해 21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 팜플렛은 그러한 언어들 중 일부의 경우에는, 성경을 제외하고는 구입할 수 있는 유일한 출판물이다. 사실, 그리스도교국의 한 선교인은 마사이어로 된 그 팜플렛에 대해 “이것이야말로 지금까지 마사이인들에게 일어난 일 중에서 가장 좋은 일입니다” 하고 말했다.

파이오니아 영

케냐의 밭의 양상을 바꿔 놓은 것이 그 밖에 또 있다. 그것은 증인들 사이에 발전하고 있는 파이오니아 영이다. 파이오니아들이 별난 사람이나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으로 여기던 때는 지나갔다. 여호와께서 파이오니아들을 즐거운 경험과 왕국 열매로써 풍부히 축복하고 계심이 분명해졌다. 심지어 장님으로서 또는 한쪽 다리가 없는 불구로서 파이오니아를 한 사람들도 있었다. 부양하는 자녀가 여덟 명 혹은 그보다 더 많이 있는 부모 중 한편이 파이오니아 대열에 속해 있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1985년 4월에는 총전도인의 약 37퍼센트가 전 시간 봉사를 하였다. 이토록 많은 파이오니아 덕분으로 그해에는 백만 시간 이상을 봉사에 바쳤다.

열정적인 르완다인들이 잃어버린 시간을 보충하다

르완다에서도 일이 진척되고 있었다. 성서 진리가 이곳에는 비교적 늦게 들어갔지만, 많은 사람들은 생명을 주는 소식을 갈구하였다. 1980년 2월에 키니아르완다어 판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이 발표되어 전도인들은 강한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당시 최고 전도인은 165명이었다. 1980년에는 키갈리에서 규모가 크지만 간소한 왕국회관이 건축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집회 참석자 수가 200명을 넘었고, 청중이 마당에까지 넘치게 되었다.

르완다인들이 진리에 관심을 보이자 좋은 소식의 적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1979년 10월에 발표된, 나라의 인가를 받은 종교 명단에 여호와의 증인이 포함되지 않았다. 법적으로 증인을 등록하기 위한 노력을 여러 차례 기울였다. 1980년 3월에, 벨기에 출신이며 자이르에서 봉사한 일이 있던 어니스트 호이스가 당국자들을 만나기 위해 키갈리에 왔다. 증거 서류를 많이 제출하였으나, 법적 인가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왕국 증거 활동은 계속 증진되었다. 1982년에 지역 대회의 참석자 수는 750명이었고, 22명이 침례를 받았으며, 3월에는 302명이 야외 봉사 보고를 하였다. 4차례의 순회 대회에 참석한 사람은 총 1200명이 넘었고, 40명이 침례를 받았다. 천국 전도 강습이 마련되어 작은 회중에서 책임맡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교육이 베풀어졌다. 열심은 식지 않았다. 전도인들은 매달 야외에서 평균 20시간 이상을 바쳤다.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 자매는 새로운 구역을 개척하여, 3개월도 못 되어 20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게 되었고, 그들은 모두 집회에 참석하였다. 르완다는 왕국 소식으로 떠들썩하였다!

성서 진리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정기적으로 라디오 방송에서 낭독되는 「깰 때이다」지의 내용이 많은 질문을 일으켰다. 여러 종교에서 가르치는 거짓을 폭로하는 성서 진리가 전파를 타고 울려 퍼졌다. 르완다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교 신문들이 곧 여호와의 증인을 공격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관심을 나타냈다. 하지만 거의 동시에, 증인들은 제지당하고 조사받기 시작하였으며, 불법적인 협회를 운영하고 있다는 이유로 벌금이 부과되었다.

금지령에 의한 고난

1982년 11월, 이전에 법적 등록을 위한 신청서에 서명했던 3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키갈리로 소환되었고, 도착하자 체포되었으며, 재판이나 법적 절차도 없이 투옥되었다. 왕국회관이 폐쇄되었다. 전파 사업이 지하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법무부 장관은 증인들에게 금지령을 내렸다는 공문을 모든 지방에 보냈다. 체포가 잇따랐다. 대부분의 외국인 파이오니아들은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방 형제들에게 시험의 기간, 즉 정결케 하는 때가 되었다. 바로 적시에 키니아르완다어판 「파수대」가 인쇄되기 시작하여, 영적 양식이 더 공급되었다.

그 세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 가스파르드 르와카 부부, 조셉 코로티, 페르디난드 이무가룰라에게는 커다란 키갈리 감옥에서 할 일이 많았다. 그들은 다른 수감자들과 정기적으로 성서 연구를 하였으며, 그들 중 여러 명은 그런 방법으로 진리를 배워 알게 되었다. 재판도 받지 않고 여러 달이 지나갔다. 드디어 1983년 10월에 재판이 열렸다. 이 세 형제는 사람들의 금전 횡령, 정부에 대한 반역 그리고 전혀 근거도 없는 다른 혐의로 고발되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단 한 개의 수치나 재정 문서도 증거로 제시되지 않았으며, 고발 내용을 지지하는 증인을 한 사람도 세우지 않았다.

형제들은 2년 간의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며, 단 하루의 감형도 받지 못했다. (그 동안 살인자들은 사면 혜택을 받았다.) 기세니이에서 다섯 명의 다른 증인들은 재판도 받지 않은 채 거의 2년 간의 수감 생활을 충실하게 인내하였다.

1985년에 잠깐 동안 반대가 시들해진 때에 일부 형제들은 나이로비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 참석하여 통치체의 형제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1986년 3월경에는 이미 전국적으로 체포 사례가 다반사였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체포되었다. 임신한 부인과 어린아이들도 예외 없이 체포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증인들이 수배자 명단에 올라 색출당하였다. 마침내 140명이 넘는 증인이 투옥되었다. 이 수는 이 나라에서 활동하던 전체 증인의 거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였다!

육신의 팔을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전능하신 분을 신뢰할 것인가?

1986년 10월 24일에 증인들의 문제는 드디어 법정에 대두되었다. 이 때까지 일부 증인들은 이미 감옥에서 육 개월 이상 생활해 왔다. 실제로 감옥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으며, 그의 이름을 적절하게도 시카마 호다리(확고함을 유지하다)라고 지어 주었다. 선고된 형량은 5년에서 12년으로 충격적이었고 잔인했다. 아직 전도인이 아닌 관심자인 한 여자는 10년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들은 국제적으로 잘 알려지게 되었으며, 심지어 유럽과 아프리카 국가 수뇌들의 화제 거리가 되기도 했다. 르완다 밖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책임 있는 당국자들에게 항의 편지들을 보냈다. 한 라디오 방송은 여호와의 증인을 위한 편지가 어떤 날에는 500통이나 정부에 도착했다고 발표하였다.

이 모든 일은 감옥에서 증거할 훌륭한 기회를 열어 주었다. 증인들은 연합의 탁월한 본을 보였다. 함께 기도하였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였다. 많은 동료 수감자들은 호기심을 갖고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이전에 범죄자였던 사람들과 한때 창녀였던 사람들이 영생으로 가는 길에서 잘 발전하고 있다.

증인들은 선고된 긴 형기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영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우리는 12년을 받았지만, 사단은 천년을 받습니다!” 하고 말하곤 하였다. 그들은 또한 “우리는 집회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바깥에 있는 형제들은 그럴 수 없으니, 이곳에 있는 우리에게 자유가 더 많습니다” 하고 말하곤 하였다.

즐거움을 안겨 준 갑작스런 일

1987년 7월 1일, 르완다의 독립 제25주년 기념일에 르완다 대통령은 라디오 방송 연설에서 인권을 침해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1986년 10월 24일에 선고받은 모든 사람들은 석방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실로 용기 있고 칭찬받을 만한 결정이었다! 며칠 후에, 선고받은 형제 자매들 49명은 모두 석방되었다.

하지만, 아직 선고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여러 주가 지나, 마침내 그들은 모두 법정으로 소환되었고, 집으로 가서 농사를 짓고 다른 유용한 일을 함으로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더 많이 하라는 말을 들었다.

당연히 이 일은 크게 즐거워할 이유가 되었다. 석방된 후에, 투옥되어 있는 동안 빠른 발전을 하였던 30여 명의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들과 성서 연구생들이 침례를 받았다. 이 감옥 “학교”에서 나온 후, 모두는 신속하게 장성하였다. 침례를 받자 즉시 그들 대부분은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다! 석방된 증인들은 모두 다시 세속 일자리를 찾았다.—참조 시 37:25, 28.

시련을 즐거이 인내한 사람들 중에는 파스카시가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에게 금지령이 내려지자 좌절에 빠진 그의 남편은 그를 경찰서로 데리고 가서 체포되게 하였다. 그는 아직 침례를 받지 않았는데도, 다른 자매들과 같이 투옥되었다. 그는 10년을 선고받았다. 자녀들을 집에 남겨 두고 떠난 것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참 숭배를 위해 고통당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그는 감옥에서 영적으로 발전하여 석방되자마자 침례를 받을 사람들 중에 포함되었다. 더욱이 집에 돌아와서 남편이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를 연구하고자 함을 알게 되었을 때, 실로 대단히 기뻤다! 그의 남편이 영적 형제가 되어 참 숭배 안에서 가족이 연합되었으므로, 그의 확고함은 참으로 보상을 받았다.

1990년 초에 이 나라의 또 다른 지역에서 1985년부터 미결 상태에 있던 고발 사건이 다시 다루어져, 네 명의 형제들이 각각 10년씩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다행히도, 이 일이 다른 지역에는 영향을 주지 않아, 순회 대회와 파이오니아 강습이 열릴 수 있었다. 또한 처음으로 지구 감독자가 방문하였으며, 키니아르완다에서 영적 양식이 증가함으로 인해 영성이 더욱 향상되었다. 더 나아가 그 네 명의 형제들은 육 개월 형을 산 후 대통령령에 의해 석방되었다.

1990년 말에 갑작스런 도발 행위가 있어, 르완다에도 내란이 시작되었다.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는 성서 요한 복음 17:14의 원칙과 일치하게 우리 형제들이 중립적 입장을 고수함에 따라, 이전에 반대했던 사람들도 여호와의 백성은 어느 누구에게도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991년 초에 기근이 닥쳐 염려 거리가 많아졌으며, 르완다, 특히 이 나라의 남부에는 식량 구제 마련이 필요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순회 대회를 여러 차례 자유롭게 가질 수 있었다. 형제들은 언젠가는 르완다에서도 법적 인가와 더불어 완전한 종교적 자유가 허용될 날이 오기를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그 동안 형제들은 르완다의 점증하는 주민들 가운데서 많은 진리 탐구자들에게 계속 도움을 베풀고 있다.

혼란중 우간다에서의 신권적 재기

1979년에 “해방 전쟁”이 일어나 여러 가지 변화를 초래하였다. 약탈, 폭력, 구제 대책을 요하는 고난 그리고 우편과 통신이 방해를 받았다. 그러나 그때 새 정부가 집권하였다. 1979년 11월 19일자 우간다 「타임스」지는 “선교인들이 자유롭게 돌아올 수 있다”는 표제하에 증인들에게 내려진 금지령이 해제되고 숭배의 자유가 보장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우간다에서 곧 일련의 새로운 순회 대회가 조직되었으며 241명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경제가 파탄 지경이었고, 생활은 천박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무기를 소지하였고, 이전에 군인이었던 사람들이 범죄자가 되었다. 거의 매일 밤마다 총성이 울려 퍼졌다. 거리는 다니기에 더는 안전한 곳이 못 되었다.

나이로비 지부 사무실에서는 서적을 우간다로 가져갈 용감한 자원자들을 물색함으로써 형제들을 세워 주고 격려하는 데 예리한 관심을 나타냈다. 사람들이 무장을 하고 있고, 흔히 군인들은 밤에는 악한으로 변하는 이중 생활을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했다. 자원자들은 습격이 빈번한 곳으로 이름난 진자와 캄팔라 사이의 긴 수풀 지대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개 사람들은 주민이 비교적 많은 지역에 도착할 때까지 최고 속도로 운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선교인은 어느 형제와 함께 음발레에서 밤을 보내다가, 사람들이 마당에 세워 둔 그의 자동차에 손을 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도둑들이 아마 무장을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서, 마음대로 훔쳐 가도록 내버려두기로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자동차 두 바퀴가 없어졌다. 예비 바퀴와 자동차 앞쪽의 방풍 유리도 훔쳐 가버렸다. 타이어가 거의 다 닳은 바퀴 두 개를 빌린 다음, 비가 오면 막아 줄 방풍 유리도 없이 그는 240킬로미터를 여행하여 캄팔라에 도착했다. 그는 위험한 긴 숲속을 통과하였다. 그러나 만사는 잘 되었다. 빵꾸는 나지 않았다! 다만 얼굴에 비바람을 많이 맞았을 뿐이었다!

1980년 12월에 175명의 전도인 신기록에 달했다. 그 이듬해 초에는 캄팔라의 루고고 스타디움에서 지역 대회가 개최되어 360명이 참석하였다. 폭력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진리를 배웠으며, 7월까지는 이 나라에서 206명이 전도를 하였고, 한 달에 한 사람당 평균 12.5부의 잡지를 전했다.

우간다의 여덟 개 회중에 장로가 단지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도움이 크게 필요하였다. 그래서 다시 한번 선교인을 요청하기로 결정하였다. 1982년 9월에 소요가 계속되는 가운데, 미혼자인 두 선교인 형제, 아리 팔비아이넨과 제프리 웰치가 캄팔라에 도착하였다. 오후 6시 30분의 통행 금지가 아직도 실시되고 있었고, 밤이면 총성이 났고, 심지어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부 전도인들이 행방 불명이 되어 사망하지 않았을까 염려했는데, 다행히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러나 영영 행방 불명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 1979년에 전쟁이 발발한 후 소요 사태가 계속되는 동안 모두 여덟 명의 우간다 전도인이 생명을 잃었다.

1983년 2월에 선교인들의 입국 허락이 났다. 그해 4월에 상당히 안전한 장소에 선교인 집을 세워 운영하기 시작하였으며, 그곳에서 네 명의 늠름한 길르앗 졸업생이 생활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하인츠 베르톨츠와 마리아네 베르톨츠가 있었다. 우간다인들의 공손함과 성경을 존중하는 태도는 이 선교인들이 경제적 어려움, 나쁜 도로 사정, 치안 부재 및 밤의 소요를 쉽게 잊어버리게 해주었다. 한 선교인이 10 내지 15건의 성서 연구를 갖는 것은 보통이었다. 어느 특정한 달에는 네 명의 선교인이 잡지를 4084부나 전했다!

“저 사람입니다!”

우간다 내륙 지방의 어느 마을에서 「진리」 책이 한 중년 남자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그는 곧 자신이 얼마나 값진 보물을 갖게 되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그 책을 거듭거듭 읽었으며,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그는 증인을 만나 본 일도 없고 그 지역에는 증인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형제들”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캄팔라로 여호와의 증인을 찾아 나섰다. 십자가 있는 교회를 보았을 때, 그곳에서는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물어 본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알고는 있었으나, 정확한 주소를 알려 줄 수 없었다. 실망을 하고서 그는 어느 서점에 들어가서 증인들에 대해 물어 봤다. 점원은 증인들이 잡지를 가지고 이따금 들른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점원은 그들이 어디에 사는지 몰랐다. 그 관심 가진 남자는 “그들이 또다시 오면, 그들에게 내 주소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을 꼭 만나야 합니다” 하고 말했다.

그때 마침 두 선교인이 이전에 관심을 보인 사람들을 재방문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집에 없었다. 그들은 다시 재방문 기록을 훑어보다가 그 점원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그러자 “저, 그 사람을 다시 방문해 봅시다” 하고 말했다.

그 파이오니아들이 그 서점에 도착했을 때, 점원은 그들에게 “여러분을 찾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고 말해 주었다. 그는 문 밖을 바라보고 길 쪽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입니다!” 하고 소리쳤다.

이 유럽인 선교인들은 잠시 후에 그 관심 가진 시골 사람을 만났다. 그는 그들 두 사람을 껴안았다! 물론, 그는 매우 부지런한 성서 연구생이 되었다. 곧 그가 사는 마을에 아담한 왕국회관이 하나 세워졌다. 헌신하고 침례를 받은 후, 그는 이제 온전한 의미에서 형제가 된 것이다.

또다시 전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우간다에서의 생활은 불안했다. 치안 유지가 거의 안 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끌려가서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물가는 치솟았다. 예를 들면, 빵 값이 1974년에서 1984년 사이에 1000퍼센트나 올랐다! 물건을 살 때 일부 사람들은 돈 세는 것은 그만두고 그 대신 자로 돈 뭉치를 재 보기만 하였다!

불만이 고조되어 이 나라에 게릴라전이 유발되었다. 마침내 여러 달 동안 싸움이 벌어진 후, 국민 저항 운동 단체가 정부를 장악하였다. 그때 탈주병들이 재산을 약탈하였고 사람들에게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다.

바로 선교인 집 주위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그 이튿날 선교인들이 그리스도인 집회에 가는 도중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총탄이 머리 위로 쌩쌩 지나갔지만, 아무도 다치지는 않았다. 그후 어느 일요일 오후에 그들은 초대하지 않은 방문객들 즉 약탈하는 탈주병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앞 문이 잠겨 있어 군인들은 성을 냈다. 그러나 그들의 우두머리가 선교인들의 신분증을 보자, 갑자기 태도가 달라져 우호적이 되었으며, 아무 물건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죄스럽다는 태도를 보이면서, 그들은 몇 점의 옷과 침구를 가져갔으나, 그보다 더 값나가는 것은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떠나면서 그들은 선교인들에게 커튼을 내리고, 서랍을 비우고, 물건들을 바닥에 흩어놓아, 집안 전체를 어지럽게 하여 그 집이 이미 약탈당한 것처럼 보이게 해놓으라고 조언해 주었다. 그렇게 해놓은 것은 효과가 있었다. 비교적 거의 도둑을 맞지 않았다. 평온이 회복되기 전 심한 싸움이 그들 주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동안, 선교인들은 자그마한 식품 저장실에서 밤낮으로 꼬박 하루를 지냈다. 그 방은 그 집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그러는 와중에서 그들은 여호와의 보호와 형제들의 사랑의 띠를 느꼈다.

우간다 형제들은 그들을 감싸 주신 여호와의 보호의 손길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다. 벽과 옷을 뚫어 놓은 총알 구멍을 가리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한 특별 파이오니아는 정부군과 반란군들의 교차 사격으로 총탄이 머리 위를 핑핑 날아가고 있는 동안 다섯 시간 이상을 납작하게 엎드려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태가 진정되었을 때 그 주위에는 시체들이 즐비하였다.

치안 확립과 새로운 기쁨

그후 여러 달 동안 치안은 점차 확립되었으며, 놀라운 일들이 발생하였다. 이를테면, 선교인들은 집으로 가는 도중에 고위 관리가 사는 커다란 저택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집은 아주 난폭한 기질을 가진 군인들이 항상 지키고 있어서 사람들은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선교인들은 그곳을 무사히 지나갈 때마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으며, 선교인 집을 찾는 방문객들은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새 정부가 들어서자, 그 집이 갑자기 셋집으로 나왔고, 마침 그때 선교인들은 이사를 해야 했다. 그래서 곧 그들은 지나가기를 두려워했던 바로 그 집에서 살게 되었으며, 저녁에 열대성 산들바람이 부는 커다란 테라스에서 옥외 만찬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누가 일년 전에 그런 제안을 했다면,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캄팔라에서 왕국 사업은 번영하였다. 이 도시의 많은 지역은 십 년이 넘도록 전파가 되지 않아 할 일이 많았다. 우간다 형제들은 활동을 가속화하였으며, 1987년에는 전도인당 매월 평균 14.3시간을 봉사하였다.

증인들 사이에 밀접한 사랑의 띠가 형성되었다. 재물은 아주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희생하려는 자진성은 대단했다. (요한 13:34, 35) 지역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여러 달을 벌어 모아야 했다. 그들은 항상 서로 후대를 잘하였고 무슨 문제가 생기든 선교인들을 잘 도와주었다. 여호와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도와주셨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종종 “기적”으로 대회들이 개최되었는데, 확성 시설이나 앉을 좌석도 없이 열린 때도 있었다.

캄팔라와 진자에서 선교인 집들이 개설된 후, 세 번째 선교인 집이 캄팔라의 반대편에 세워졌다. 이제 우간다에는 18개의 회중이 있으며 최고 전도인은 820명이고 기념식 참석자 수는 3204명이라는 신기록에 달하였으며 정규 및 특별 파이오니아는 140명이 넘었다. 진자, 토로로, 음발레, 캄팔라에서 왕국회관들이 건축되었다. 하지만, 상황은 아직도 증거하기에 용이하지 않으며 장래는 불확실하다.

1989년 이래 반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교직자들이 비평하기 시작하였고, 뒤이어 신문에는 비판적인 기사가 실리고, 승인이 난 건축 허가가 일방적으로 구두 취소되고, 어떤 지역에서는 대회 개최 허가가 나지 않으며, 그 밖에도 거짓 정보를 받은 관리들이 방해하는 일 등이 있었다. 그후 얼마 안 있어 모든 협회는 재등록을 하라는 요청이 있었다. 만국 성경 연구생 협회는 등록이 거절되었다. 대부분의 선교인들은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1990년 12월에 지역 대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 일부 고위 관리들은 대단히 협조적이고 공평하게 대해 주었으며, 모든 선교인들이 곧 우간다로 돌아와서 교육 사업을 계속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해주었다. 이 밭은 거대한 잠재력이 있으므로, 형제들은 더 많은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추수하는 주인에게 간청하고 있다.—마태 9:37, 38.

케냐가 큰 확장을 위해 가속화하다

여호와의 조직이 지상 전역에서 발전하고 동아프리카 전역에서도 꾸준한 증가가 돋보임에 따라, 케냐에서 진보된 기술을 사용할 때가 되었다. 1984년에 처음으로 두 대의 IBM 개인용 컴퓨터가 독일 지부에서 도착했을 때 지부 사무실은 실로 흥분하였다!

처음에는 모두 그 새로운 기계를 보고 당황하였지만, 여호와의 도움과 몇 가지 간단한 지침서로 인하여 오래 걸리지 않아 그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컴퓨터를 사용해서 자료를 입력한 다음 디스켓에 옮겨 그것을 인쇄 시설이 있는 해외 지부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커다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스와힐리어판 「파수대」를 인쇄하기 전에 영국과 케냐간에 교정쇄를 두세 번 주고 받는 일이 더는 필요 없게 되었다. 이제 스와힐리어판 「파수대」는 영문판 「파수대」와 동시에 발행되고 있으므로 케냐의 모든 회중은 같은 주에 똑같은 성서 연구 자료를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전도인이 꾸준히 증가하는 것과 더불어 영성이 점차 강해지는 면도 두드러졌다. 증인들은 봉사에 바치는 시간을 증가시켰으며, 단순한 눈을 유지하여 왕국 관심사에 초점을 맞추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가족 성서 연구를 통하여 많은 자녀들을 돕기 위해 더 큰 노력을 기울였다. 새로운 장로들이 임명되었으며, 점점 더 많은 젊은 형제들이 봉사의 종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중립에 대한 시험을 당할 때 충절을 지키고 있다. 자체 왕국회관을 갖기 위해 기꺼이 물질적으로 희생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1985년 “충절 고수자” 대회

1985년 말에 케냐는 해외 방문객들이 참석하는 특별 국제 대회를 개최하도록 선정된 나라들 가운데 포함되었다. 약 2000명이 해외에서 왔다. 방문중인 대표자들은 케냐의 경치와 야생 생물을 매우 즐겼지만, 방문중 가장 감동적인 것은 지방 형제들과 같이 즐긴 대회와 야외 봉사였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 모든 와중구(백인들 혹은 유럽인들)가 지방 안내인들과 함께 다니는 모습을 나이로비 사람들이 보게 되자, 그 반응은 대단했다. 반면 방문객들은 케냐인들이 성경에 대단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 그리고 그들 주위를 무리 지어 따라다니는 어린아이들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대회장에서 또 방문객들은 수천 명의 어린아이들이 주의 깊이 듣는 것을 보고 매혹되었다. 8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나이로비의 잠후리 공원을 메웠고, 사상 최대의 대회가 되었다. 통치체 성원인 두 형제, 시어도어 재라스와 앨버트 슈로더가 참석하여 청중에게 특별히 유익을 주었다.

그후 여러 해 동안, 지부 사무실 요원이 늘어났고, 선교인이 케냐에 더 파견되었다. 선교인들은 많은 영적 자녀들을 갖게 됨으로 보람을 얻었다. 예를 들면, 선교인의 도움으로 엘도레트 회중은 4년 만에 전도인이 45명에서 129명으로 늘어났다. 파이오니아 영이 강화됨에 따라, 왕국의 권익도 계속 증진되었다. 1987년에 야외 봉사에 150만 시간 이상을 바쳤으며, 4000명 이상의 전도인이 활동하였고, 전도인당 매월 평균 16.4시간을 봉사했다.

기념식 참석자 수는 1만 5683명으로 증가하였고, 466명이 침례를 받았다. 매달 평균 1000명 이상이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으며, 그들 중 정규 파이오니아는 500명이 넘었다. 여러 채의 새로운 왕국회관을 건축하였고, 나이로비 외곽에 새로운 대회 시설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 처음으로, 이곳 지부의 감독 아래 있는 전도인이 1만 명을 넘었으며, 그중에는 1000명의 정규 파이오니아가 있다. 그런데, 충격적인 일이 발생하였다.

또다시 금지령이 내려지다

믿음의 시련을 다루는 순회 대회들이 끝난 후 곧, “여호와를 신뢰함” 지역 대회 준비가 한창일 때, 여호와께 대한 신뢰가 실제 시험을 받게 되었다. 1987년 11월 19일에 11월 9일자로 케냐 「가제테」 신문에, 25년 이상 운영되어 온 동아프리카의 여호와의 증인 협회의 등록을 취소한다는 법적 공고가 실렸다. 그 명령에 의하면 일을 정리하고 자산을 임원들에게 배분해 주도록 21일 간의 여유가 허락되었다. 그날 오후에 그 결정을 확증하는, 등기소장이 보낸 통지서가 도착하였다. 그 이유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아침에 한 신문에서는 1973년의 경우처럼 그 소식을 주요 기사로 다루지 않고, 5면에 짤막한 기사로 보도하였다. 그러나 외국 통신사들은 즉시 전화를 하여 이 충격적인 소식을 공표하였다. 지체 없이 정부 관리들과 접촉하려고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 원수의 방문 때문에 여념이 없어서인지, 그 문제를 토의하기를 꺼려서인지 접촉에 응해 주지 않았다.

법률 조언을 구하였으며, 많은 기도를 한 후 항소문을 제출하였다. 11월 27일에 한 판사는 그 사건을 심리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그 문제가 확정될 때까지 협회는 다시 법적으로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케냐 전역에서 집회와 전파 활동은 공개적으로 계속되어, 당분간 어느 정도 안도감을 갖게 되었다.

대회는 어떻게 되었는가? 계획을 추진하는 데는 믿음이 요구되었지만, 필요한 인가를 받게 되어 정말로 기뻤다! 약간의 어려움이 있은 후, 대회 장소 계약을 하였고, 그리하여 12월에 “여호와를 신뢰함” 지역 대회가 세 군데에서 모두 개최되었다. 전국에서 대회 참석자 수와 침례받은 자 수는 각각 총 1만 177명과 228명이었다.

그후, 상황은 정상적으로 보였다. 증인들은 케냐의 지부 사무실과 왕국 사업의 장래와 관련된 문제는 이제 여호와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온전히 깨달았다.

법원에서 그 소송을 계속 연기함에 따라 법적 상황은 미결 상태로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다. 그로 인해 지방적인 차원에서는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다. 관리들은 우리가 법적 보호를 계속 받고 있는 것을 모르고서 형제들을 체포하였고 허가를 지연시키거나 심지어 대회 개최를 허락해 주지 않았다. 한편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전례 없는 정도로 정치에 간섭하였다.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교직자들과 법을 준수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증인들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왕국 선포자들은 더 많이 증가하였다. 1991년 기념식 무렵에, 이 나라의 전도인 수는 거의 6000명에 달하였으며, 기념식에는 1만 9644명이 참석하였다. 적도에 위치한 나이로비와 나니우키에 대회 회관이 건축되었다. 전도인의 증가는 지부 사무실의 책임을 더 무겁게 하였다. 그래서 벧엘 가족은 38명으로 늘어났으며, 기존 건물을 확장하는 일이 긴급한 과제가 되었다.

여호와를 신뢰하면서 장래에 대처함

동부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이 외의 여러 가지 중요한 사태 진전과 감동적인 경험을 다 이야기하려면 지면이 부족하다. 이 밖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충실한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위하여 자신을 바쳤고, 참 하나님의 종으로서 고통을 견디었다. 많은 사람들은 무거운 책임들을 짊어졌으며, 사도 바울처럼, 여러 해 동안 모든 회중을 위해 염려해 왔다. (고린도 후 11:28) 경제적, 법적, 정치적 어려움들이 계속되고 있다. 여호와의 왕국을 통해서만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영원한 해결책이 나올 것이다. 그 동안 완수해야 할 모아들이는 일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지구상의 이 지역 인구는 과거 20년 동안 배로 늘어났다. 1991년 8월에 이곳 지부의 감독하에 있는 모든 나라들에서는 총 전도인 1만 5970명이라는 신기록에 달했다. 이곳 지부에서는 이와 같이 말한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양을 아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급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끝이 오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달음질하기를’ 그리고 지구상의 이 아름다운 지역이 그 모든 기이한 창조물과 더불어 참다운 지상 낙원의 일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데살로니가 후 3:1, 「신세」 참조.

[각주]

^ 17항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통치가 종식됨에 따라, 위에 언급된 많은 나라들의 이름이 변경되었다. 북로디지아는 잠비아로 바뀌었고, 남로디지아는 짐바브웨로, 탕가니카는 탄자니아로, 우룬디는 부룬디로, 니아살랜드는 말라위로, 벨기에령 콩고는 자이르로 바뀌었다.

^ 44항 조지 니즈벗의 체험담은 1974년 8월 1일 호 「파수대」(영문)지에 소개되었다.

^ 84항 그의 체험담이 1985년 5월 1일 호 「파수대」(영문)지에 실렸다.

^ 208항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원하면, 「1977 약속된 것을 받기 위해 인내함」에 실린 남아프리카의 역사를 참조하라.

^ 245항 바바라 하디는 긴 투병 생활 끝에 1988년 2월에 사망하였다.

^ 443항 에티오피아에서는 대개 개인의 호칭으로 이름을 사용한다.

[206면 도표]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케냐 8,000

1950 3

1960 108

1970 947

1980 2,266

1991 6,300

최고 전도인 수

2,000

1950

1960 5

1970 132

1980 317

1991 1,256

평균 파이오니아 수

[207면 도표]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케냐 지부의 감독을 받고 있는 아홉 나라들

17,000

1950 119

1960 865

1970 2,822

1980 5,263

1991 15,970

최고 전도인 수

4,000

1950 1

1960 49

1970 296

1980 599

1991 3,127

평균 파이오니아 수

[66면 네모 및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홍해

아덴 만

예멘

수단

나일

옴두르만

카르툼

에리트레아

아스마라

지부티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소말리아

모가디슈

케냐

나이로비

몸바사

적도

빅토리아호

우간다

캄팔라

자이르

르완다

부룬디

탄자니아

잔지바르

다르에스살람

음베야

말라위

잠비아

인도양

세이셸

마다가스카르

[네모]

케냐

수도: 나이로비

공용어: 스와힐리어와 영어

주요 종교: 다양한 신앙

인구: 2300만명

지부 사무실: 나이로비

[69면 삽화]

케냐의 목동들

[71면 삽화]

매혹적인 야생 동물의 서식지—케냐

[74면 삽화]

배를 타고 동아프리카로 떠나는 남편 그레이와 그의 형 프랭크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올거 스미스와 두 자녀

나이로비 도심 부근에서의 프랭크 스미스, 1931년

케냐에서 증거하고 있는 그레이 스미스, 1931년

[76면 삽화]

배로 다르에스살람으로 떠나기 직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더반에서의 데이비드 노먼과 로버트 니즈벗, 1931년

[79면 삽화]

림포포 강을 건넌 다음 동아프리카로 가는 도로변에 잠시 서 있는 조지 니즈벗, 그레이 스미스, 올거 스미스, 로버트 니즈벗, 1935년

[88면 삽화]

1985년에 나이로비 근처에서 커피와 차를 마시며 재회를 즐기고 있는 “옛 친구들”: 좌로부터, 뮤리얼 니즈벗, 마가렛 스티븐슨, 베라 팰리서, 메리 휘팅턴과 윌리엄 니즈벗

[93면 삽화]

수단, 카르툼에서 메리 기르기스와 함께 있는 잉길리지 칼리오피

[96면 삽화]

길르앗 선교인들: 아디스아바바에서의 딘 홉트와 헤이우드 워드

[99면 삽화]

1953년 당시 아디스아바바에 있던 에티오피아의 조그만 지부 사무실

[105면 삽화]

탄자니아에서 최초로 좋은 소식을 전파한 사람들 가운데 속했던 호세아 은자불라와 그의 아내, 레야

[107면 삽화]

1930년대에 남부 탄자니아에서 진리를 배운 사람들 중 아홉 명.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안드레 충구, 오베트 므와이사빌라, 티모티 카푸코와 아나 카푸코, 레야 은실레, 조람 카줌바, 지무 므와이콰바, 스텔라 므와사쿠나와 세무 므와사쿠나

[108면 삽화]

동아프리카 형제들을 참을성 있게 가르쳤던 톰슨 캉갈레

[123면 삽화]

35여 년 전에 진리를 들었을 때인, 우간다에서의 초기 시절을 회고하는 조지 카두와 마가렛 니엔데

[131면 삽화]

케냐의 첫 선교인 집과 나이로비 지부 사무실이 1963년 2월 1일에 개설되었다

[139면 삽화]

1965년에 케냐 나이로비의 두 번째 지부 사무실은 아파트의 꼭대기 층에 있었다. 아래 사진은 확장하기 전 1970년의 세 번째 지부 사무실의 뒷모습이다

[141면 삽화]

50여 년 간 잠비아, 탄자니아, 케냐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활동해 온 라몬드 칸다마 그리고 40여 년 간 우간다와 케냐에서 특별 봉사, 주로 여행하는 봉사를 해 온 에시날라 마쿰바와 스탠리 마쿰바

[142면 삽화]

나이로비 벧엘에서 각각 50년 이상 전 시간 봉사를 해온 존 제이슨과 케이 제이슨

[157면 삽화]

침례받은 후 즐거워하고 있는 한 무리의 르완다인들

[158면 삽화]

우간다의 확고 부동한 전파자들 중 한 사람, 안나 나불리아

[169면 삽화]

죽을 때까지 자신을 아낌없이 바친 감독자, 게브레그지아브헤르 월데트느사에

[177면 삽화]

부활 때 만나 보고 싶은 얼굴들. 모두 좋은 소식에 대한 충성 때문에 살해되었다. 왼쪽 위부터: 아옐레 젤렐레우, 하일루 예미루, 우비에 아옐레, 카바 아야나, 게브레요하네스 아드하놈, 아데라 테스호메, 운디무 데메라, 카사 게브레메드힌, 에스헤투 민두

[192면 삽화]

키갈리의 감옥에서 석방된 후, 1985년 나이로비 국제 대회에 참석하게 되어 기뻐하는 가스파르드 르와카 부부, 조셉 코로티 그리고 페르디난드 이무가룰라

[199면 삽화]

1987년에 우간다, 음발레에서 열린 순회 대회

[201면 삽화]

나이로비에 있는, 확장한 후의 케냐의 현재 지부 사무실과 벧엘 집

[202면 삽화]

고국 잠비아로 돌아가기 전 동아프리카에서 20년 간 여행하는 봉사를 하였으며 지부 위원회 일원이었던 버나드 무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