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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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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와 발트 해 사이에 튀어나온 나라 덴마크는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 중 가장 작지만 가장 오래 된 왕국이다. 가장 큰 지역은 북쪽을 향하여 긴 엄지손가락 모양을 하고 있는 유틀란트 반도로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483개의 섬을 거느리고 있다. 이 나라는 풍요로운 들판과 푸른 초원, 상쾌한 숲과 고요한 은빛 호수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경관을 갖고 있다.

국민성도 이러한 부드러운 자연의 정취를 반영한다. 이 나라에는 험준한 바위산이나 삭막한 황무지, 변덕을 부리는 화산이나 격렬히 흐르는 강이 없다. 덴마크인들이 쉽사리 격한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부분 회의적이고 매사를 조용히 지켜보는 태도를 갖고 있는 덴마크인들은 매우 관용적이면서 한편 검소하다. 아무 것도 덴마크인들의 기를 꺾지 못한다!

이러한 차분한 기질은, 덴마크인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종교적 변화에 대해 보여 온,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태도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기원 800년 직후,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는 선교인들이 이교국인 덴마크의 바이킹들에게 나타났으며, 기원 1000년까지는 대부분의 덴마크인들이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고유의 다신교로부터 가톨릭교로 개종했다.

루터교는 약 500년 후 국왕 크레스디안 3세가 이 새로운 종교로 개종하여 왕국의 다른 모든 사람들도 개종하도록 명령하였을 때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처음 소개되었다. 의무적으로 가입해야하는 이 새 국교에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개의 경우, 가톨릭 사제들은 이전의 교구에 그대로 머물도록 허용되었으며, 다만 이제는 루터교 교역자로 일하기만 하면 되었다. 보통 사람들은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했으며, 루터교로의 개혁은 성서를 만인의 책으로 만들지 못했다.

드디어 1849년에 이 나라는 민주주의 헌법과 숭배의 자유를 받아들였다. 국교회는 국립 교회로 탈바꿈하였지만 여전히 국왕이 수장이었다. 이제 교회에 가입하는 것이 자유가 되었지만 탈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14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인구의 90퍼센트는 이 국립 교회에 속해 있다.

종교 부흥

1800년대 중반에 종교 부흥이 수차례 이 나라를 휩쓸고 지나갔다. 신학자이자 시인인 N. F. 그룬트비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다수가 각기 회중을 형성했으나, 대개는 국립 교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그룬트비교인들은 성서에 대해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성서를 읽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중 계몽에 관심이 있었으며, 청소년과 성인층이 역사와 문학 지식을 함양하도록 고등 공민 학교들을 세웠다.

곧 이를 반대하는 부흥 운동이 내국 선교라는 형태로 일어났는데, 이것은 교회 성원들에게 “지각 있고 살아 있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일깨우려는 평신도 운동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룬트비교인들과는 달리 내국 선교에서는 성서 읽기를 강력히 권장하면서도 죄와 지옥불 교리를 특히 강조했으며, 춤과 술과 카드놀이는 “세속적인 것”으로 엄히 정죄했다.

그리스도의 돌아오심에 관한 관심

종교적 관심이 최고조일 때, 무신론과 진화론도 덴마크에 침투했다. 이 종교적 격변기에, 일부 사람들은 성서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교회가 말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성서를 읽는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돌아오심에 관한 예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워치 타워 협회 초대 회장 찰스 테이즈 러셀이 1891년에 유럽을 처음 방문할 때, 덴마크도 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보고했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스위스 그리고 특히 영국, 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는 추수할 때가 다 되어 기다리고 있는 밭이다. 이 밭들은 마치 ‘이리 와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외치는 듯하며, 낫을 들어 추수할 더 희망적인 밭은 없을 것이다. ·⁠·⁠· 스웨덴어 번역본[「천년기 새벽」 책]이 절실히 필요하며 덴마크와 노르웨이 공용 번역본도 마찬가지다.”

최초의 왕국 전도인

소푸스 윈테르라는 25세 된 덴마크계 미국인 제화공이 1894년에 미국에서 건너와서 수도 코펜하겐에 정착했다. 그 때에는 러셀이 쓴 「천년기 새벽」 제1권과 전도지 몇 가지가 번역되어 있었다. 그 해 말쯤 윈테르 형제는 당시 미국 펜실베이니아, 앨러게이니 소재 협회 본부에, 자신이 가져왔던 책을 모두 전했다고 알릴 수 있었다.

덴마크-노르웨이 표준어로 「천년기 새벽」 제2권이 1895년에 발행되었고, 1897년 1월부터는 윈테르 형제가 「투시노르스-리게츠 부드베레르」(천년기 사자)라는 월간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관심이 불붙기 시작하여, 1899년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코펜하겐에서 15명이, 오데르 읍에서 12명이 참석했다.

이듬해에 성서 진리는 셸란 섬 북서쪽 맨 끝으로 철도역이 있는 마을인 포레베일레 주변 지역에서도 기반을 잡을 수 있었다. 한스 페테르 라르센이라는 신앙심 깊은 사람이 처음에는 내국 선교에, 나중에는 침례교에 연합하다가 윈테르 형제에게 진리를 배우고는 곧 침례 교회를 탈퇴했다. 열 명 정도의 작은 집단이 개인 집에서 집회를 갖기 시작했다. 그가 한 동료 신자와 함께 전신주에 벽보를 붙여 그리스도의 돌아오심에 관해 전파한 일을 그 지방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그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아서, 1902년에 알베르티네 한센 닐센이라는 젊은 여자가 세예뢰비크트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는 66년 후인 1968년에 사망할 때까지 활동적인 증인이었다.

새로운 동료 전도인

이 초기 전도인들 중 일부는 친구와 친척들에게 전파했다. 다른 이들은 교회 밖에서 전도지를 배부했다. 몇몇은 콜포처(전 시간 전파자)였다. 그중에 카를 뤼티카우는 1899년 여름에 몇 주일간 셸란 섬 전역을 다니면서 로스킬레, 홀베크 등 몇몇 읍에서 계속 서적을 전했다.

뤼티카우 형제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사고로 심한 부상을 입어 막 돌아와 있었다. 만일 살아난다면 여생을 하나님의 봉사에 바치겠다고 결심한 그는 그 약속에 고착해서 곧 소푸스 윈테르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1900년부터 그들은 공동으로 「시온의 파수대」를 「시온 바크트-토른」이라는 덴마크어 명칭으로 발행했다.

그러나 소푸스 윈테르는 진리로부터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1901년 가을에 「시온 바크트-토른」의 발행을 중단하고, 1902-3년에 걸쳐 거짓 종교의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래서 1903년에는 카를 뤼티카우 형제가 인도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유틀란트 반도의 빙에고르에서 태어났다. 그 곳은 수년간 덴마크 정부에서 재무 장관을 지낸 그의 부친 소유지인 첼레의 일부였다. 철학을 전공하고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한 그는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대학교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다가 1896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떠났다. 이러한 배경과 품위 있는 태도로 인해 그는 사람들의 호감을 샀고, 앞으로 수행할 활동에도 적격이었다.

그가 책임을 맡은 후 치른 첫 주요 행사는 1903년 4월 찰스 테이즈 러셀의 방문이었다. 이 방문 기간에 여러 번 집회가 열렸는데, 가장 큰 집회에는 200명이 참석했다. 10월에 카를 형제는 덴마크어 「파수대」를 다시 발행하기 위해 솔선하였으며, 1904년 7월부터 매월 정기적으로 발행하였다.

간판공이 진리를 발견하다

코펜하겐에서 집회에 5-6명이 모였는데, 그중에는 두 명의 가난한 여자 재봉사도 있었다. 그러나 그 집단은 곧 강화되었다.

코펜하겐의 북쪽 끝에 있는 브뢴쇼이에 노르웨이 출신 간판공 욘 레인세트가 살고 있었다. 그는 아내 아우구스타와 함께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양육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했다. 욘은 자주 가족에게 성서를 읽어 주고 자녀들도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여러 종교 집회에 나가 보았지만, 아무 만족을 얻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온 가족이 무릎을 꿇은 가운데 아버지 욘은 하나님께 진리에 대해 눈을 뜨게 해달라고 진심으로 기도를 드렸다. 다음날 아침 한 콜포처가 문 앞에 「천년기 새벽」 제1권을 들고 서 있었다! 이 전파자는 누구였는가? 가난한 두 여자 재봉사 중 하나인 안나 한센이었다.

카를 뤼티카우 형제가 뒤이어 이 가정을 방문하여 성서를 가르쳤다. 긴 토론을 몇 번 한 후 욘은 협회의 덴마크 지부가 있는 올레 쉬르스 가데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매 집회가 끝나면 그는 집으로 달려가서 아내에게 그가 들은 놀라운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곤 했다. 그의 아내는 비록 여러 해 병상에 누워 있었지만, 기력을 되찾자 즉시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열심히 집회에 왔다.

이 가족은 그야말로 진리를 붙잡았다. 욘은 잠시만 틈이 나도 호별 봉사를 했다. 종종 그는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서 집회 준비를 했다. 오후 늦게 피곤해지면, 안락 의자에 앉아 눈을 붙이곤 하였는데, 그 때마다 열쇠 고리를 손에 느슨히 쥐고 있었다. 깜박 잠에 빠져서 열쇠 고리를 떨어뜨리게 되면, 자신이 고안한 이 자명종에 놀라 깨어나곤 했다. 그렇게 쉬고 나면, 다시 봉사하러 나갈 준비가 된 것이다.

그의 아내는 몸이 쇠약한데도 자신의 출생지인 셸란 북부 헬레베크 지역에서 진리를 전파하려는 열망을 가졌다. 그래서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커다란 트렁크에 서적을 가득 채워서 기차 편으로 엘시노에까지 부쳤다. 핸드백에는 겨우 두세 권의 서적밖에 가지고 다닐 수 없었으므로, 크고 납작한 주머니들을 꿰맨 특이한 허리띠를 맸다. 이렇게 준비해서, 한 손에는 핸드백을, 다른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허리띠에는 여러 권의 서적을 넣어 헐렁한 외투로 가린 채, 다부지게 마음먹은 아우구스타 자매는 북부 해안을 따라 집집으로 걸어가면서 전파했다. 1925년에 숨을 거두기 전 그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셸란 북부 그 곳에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아서 나는 그 일이 너무나도 하고 싶었어요.”

그들의 세 자녀도 좋은 소식의 열렬한 전도인이 되었으며, 아들 포울은 한동안 지부 감독자로 봉사하는 특권을 누렸다.

올보르그의 “수요 형제들”

1910년 유틀란트 북부의 올보르그에는, 교회에서 영적 양식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교회에서 탈퇴한 사람들이 작은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수요일마다 그들은 개인 집에 모여서 그들끼리 성서를 읽고 토론했다. 그중에는 페테르 옌센과 요한네 옌센 부부도 있었다. 아들인 아르투르도 가끔 이 모임에 참석했으나, 그는 자유 사상가였다.

안나 한센—레인세트 가족을 방문했던 재봉사—이 찾아와 「천년기 새벽」 제1권을 권하자, 요한네 옌센은 그 서적을 받았다. 아르투르는 만족할 줄 모르는 허기를 채우듯 밤새 그 책을 읽었다. 그렇지만 그는 영적 굶주림을 더 채우기 위해 기다려야만 했다. 더 알아볼 여유도 없이 그는 코펜하겐으로 여행을 해야만 했는데, 거기 있는 동안 갑자기 장티푸스에 걸렸다. 그로 인해 입원을 하게 되어 영적 양식을 공급받을 시간이 생겼다. 그는 올레 쉬르스 가데에 있는 지부로 편지를 썼다. 협회 출판물을 있는 대로 다 구하기 원했다. 퇴원 후에는 모든 집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영적 허기가 채워지지 않았다. 집회 후에 그는 자주 포울 레인세트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는데, 그리고 나면 포울이 다시 아르투르를 그의 하숙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종종 그들은 진리를 열띠게 토론하느라 양쪽 집을 오가며 꼬박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들은 평생 친구가 되었다.

아르투르는 이제 올보르그에 있는 어머니와 활발히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수요 형제들”에게는 그가 발견한 성서 진리를 알려 줄 생각으로 즐거워하였다. 크리스마스에 부모 집으로 갈 때, 포울도 함께 갔다. 그 곳에서 아르투르는 수요 집회 사회를 요청받았는데, 그가 1914년에 주의를 돌려 그 해가 이방인의 때의 끝이라고 하자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수요 형제들” 모두가 아르투르의 토론 그룹에 남아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충실한 핵심 성원들은 진리에 고착해서, 1912년에 올보르그에 회중이 형성되었다. 그 그룹에 속했던 튀라 라르센은 콜포처가 되었고 그의 두 친자매 요한네와 다그마르는 계속 회중의 충실한 지원자였다.

러셀 형제의 방문

이방인의 때가 끝나고 발생할 일에 대한 기대가 성경 연구생들 가운데 고조되기 시작했다. 아마겟돈이 곧 뒤따를 것인가? 회중은 아마겟돈 전에 데려감을 입을 것인가? 이 모든 생각들에 형제들은 몰두해 있었다. 물론 그들은 마태 복음 24:14에 언급된 바와 같이 왕국의 좋은 소식이 먼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 생각에 이것은 이미 성취된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모든 민족은 미국에 다 모여 있는데 그 곳에서 러셀 형제의 설교가 신문에 실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바심 속에서도, 활동은 증가되었고 미국에 있는 세계 본부로부터 형제들의 방문을 맞아 더욱 촉진되었다. 1909년 5월 24일에 러셀 형제가 코펜하겐에 도착했다. 백 명 가량의 청중이 “계약”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들었다. 저녁에는 또 다른 600명의 청중이 “사단 제국의 전복”이라는 그의 연설을 경청했다. 2년 후에는 “크고 흰 보좌의 심판”이라는 그의 공개 강연에 800명의 청중이 참석했다.

러셀 형제의 다음 방문은 1912년 8월에 있었다. 이 때부터 형제들은 1600석의 오드 펠로브스 홀 강당을 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같은 건물의 작은 홀에 별도의 장소를 즉석으로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무덤의 저쪽”이라는 연설이 두 장소에서 동시에 제공되었다. 두 홀이 입추의 여지 없이 들어찼기 때문에 수백 명은 실망하여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호별 전파 활동이 더 큰 열정으로 진전되었다. 코펜하겐 출신인 루이스 카를손은 1913년 당시에 관해 이와 같이 이야기한다. “그 해 전체가 전도지 배부의 해였지요. 일요일 아침 아홉 시면 욘 레인세트 형제는 봉사하러 나온 동료들에게 구역을 배당해 주기 위해 거리 모퉁이에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문에 있는 편지함에다 전도지를 넣었지요. 코펜하겐의 베스테르브로 구역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한 아파트 현관문 유리창에 성에가 끼어 있었지요. 안에 사람의 윤곽이 보였습니다. ‘바벨론’이라는 전도지를 넣자, 집어들더니 도로 밀어내더군요. 그래서 ‘성서에서는 지옥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라는 다른 전도지를 넣었지요. 집어들고 보더니 놀랍게도 이번에는 받아두는 것이었어요!”

사람들이 더 모여들어 새로운 회중들이 구성되어, 1914년 봄 무렵에는 코펜하겐 회중 외에도 12개 마을에 작은 회중들이 세워졌다.

세계 대전의 발발

1914년 여름, 조셉 F. 러더퍼드는 러셀 형제를 대표하여 유럽에 다시 와 있었다.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며칠 전에, 그는 독일에서 영국으로 여행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1910년과 1913년에 이미 방문한 바 있는 덴마크 형제들에 대한 사랑에 못 이겨, 우회하여 코펜하겐에 들러서 8월 1일부터 4일까지 열리는 대회의 처음 이틀간을 참석하게 되었다. 그 일요일 오후의 짤막한 고별 연설에서 러더퍼드 형제는 형제들이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겸손히 행하고 그 어려운 때의 모든 상황에서 그분께 온전한 확신을 두도록 격려했다.

그러나 이제 전쟁이 가까워지자 러더퍼드 형제 자신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영국에 도착해야 하는데 덴마크의 에스비에르그에서 영국의 항구들로 가는 정기 여객선이 벌써 전면 중단되었고, 아무도 내일 일을 내다볼 수 없었다. 그는 어선을 타고 영국을 향해 바다를 곧바로 가로질러 항해했는데, 바로 그 바다에서 2년 후에 1차 세계 대전의 대해전 중 하나인 유틀란트 해전이 벌어졌다.

한편, 코펜하겐에서는 대회가 계속되었다. 대회 마지막 날, 시외에 사는 참석자들은 다음날까지 기다리지 말고 그 밤으로 즉시 귀가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기차를 비롯한 대중 교통 수단이 끊길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아무도 그 전쟁이 어느 정도로 확대될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덴마크는 중립을 지켰기 때문에 전파 사업에 심각한 제한은 가해지지 않았다.

“창조 사진극”

그 해 가을에 활동 사진과 환등으로 제공되는 “창조 사진극”이 덴마크에 도착했다. 첫 상영이 코펜하겐의 오드 펠로브스 홀에서 있었고, 1915년중에는 사실상 모든 지방에서 그것도 항상 최고급 홀에서 상영되었으며, 그 때마다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후에 코펜하겐 출신의 루이스 카를손과 결혼한 올보르그 출신의 다그마르 라르센 자매는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초대장을 돌리느라 바빴어요. 한 번에 500장 뭉치를 받아서는 있는 시간을 다 바쳐 그 일을 했지요. 언니 요한네와 나는 ‘여자 집사’ 같은 복장을 하고서 일을 돕도록 요청받았어요. 우리는 하얀 칼라를 댄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벨벳 머리 덮개를 썼지요. ·⁠·⁠· 하루 3회 상영을 했는데, 말할 수 없이 많은 청중이 몰렸지요. 온 도시가 떠들썩했었죠. 천연색 영화는 새로운 발명품인데다 무료로 상영했으니까요! 관객들에게는 더 알기를 원한다면 이름과 주소를 적을 수 있도록 카드를 주었고, 두 명의 콜포처가 마을에 한동안 남아 관심자들을 돌보았지요.”

결의에 찬 교사

1915년에 또 다른 일이 주의를 끌게 되었다. 그전 해에 진리가 이 나라 북단의 어촌 스카겐에 전해졌다. 한 미술상과 그의 아내가 진리를 받아들였다. 학교 교사인 마리에 두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때 막 침례를 받은 다그마르 라르센이 유모로 일하기 위해 스카겐에 도착했다. 그는 마리에 두에를 만나 성서 주제들에 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해 가을 마리에 두에는 교회에서 탈퇴했고 더 이상 종교 과목을 가르치기를 거부했다. 전국 신문들이 이 기사를 실었다. 그는 결국 45세의 나이로 해임되어 연금을 받게 되자, 흡족해 하면서 이 연금으로 비용을 충당해 가며 전 시간 봉사를 시작했다. 그는 여러 해를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에서 충실하게 봉사했다. 사망할 때까지 그는 그야말로 꺾이지 않는 사람, 인내의 훌륭한 본이었다.

어려웠던 시기

1916년에 러셀 형제의 사망으로 어려운 시기가 찾아왔으며, 특히 코펜하겐 회중이 그러했다. 일부 자매들은 거짓 사상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심지어 일부 장로들에게 영향을 미치기까지 했다. 1917년에 올레 쉬르스 가데에서 있던 한 집회에서 한 자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자, 이제 떠납시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참석자의 25퍼센트 가량 되는 16명의 성원이 따라나갔다.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나간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집회들이 평화롭게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떨어져 나간 사람 중 일부는 대략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 진리를 떠난 폴 S. L. 존슨과 제휴했다. 그들은 비방과 팜플렛 우송 등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꾀어 내려고 애썼다. 부패시키는 배교가 다른 회중들로 퍼졌다. 충실한 인내와 확고 부동함이 요구되는 시기였다.

세계 대전 후의 활동 재개

1919년 7월 호 덴마크어 「파수대」지는 오랫동안 기다리던 「종말을 고한 비밀」(「성경 연구」 제7권)이 이제 덴마크-노르웨이 표준어로 발행될 것임을 발표했다. 형제들은 대규모 전파 활동이 시작될 것을 기대했다. 형제들에게 사람들을 방문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코펜하겐에서 콜포처 과정이 이미 실시되었다. 이 때 처음으로 콜포처가 아닌 사람도 서적을 사용하여 호별 방문 증거를 하도록 격려받았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지칠 줄 모르는 꾸준한 소수의 콜포처들은 왕국 씨를 뿌리고 새로운 땅을 일구는 거대한 일을 해냈다. 니엘스 에베센 달은 그러한 열정의 본이었다. 1918년에 이 덴마크계 미국인은 자신의 출생지인 유틀란트 북부의 모르스 섬으로 돌아왔다. 미국에 있을 때 그는 호텔 방에서 발견한 「시대들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 책을 통해 진리를 배웠다. 덴마크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즉시 콜포처로 활동하여 모르스 섬에서 친척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활발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달 형제의 가족은 이름난 그룬트비교도였고 그 섬에서 매우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이 달이 돌아와서는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형 프로데가 즉시 관심을 갖게 되더니, 갓 졸업해서 학교 교사가 된 프로데의 아들 크리스티안도 관심을 나타냈다. 크리스티안은 1920년에 콜포처를 시작했는데, 후에 남동생 크누드도 이에 가담했다.

마음을 사로잡는 새로운 소식

미국에서는 워치 타워 협회의 2대 협회장이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고 난 참이었다. 이제는 유럽이 그 연설을 들을 차례였다. 1920년 8월 12일 조셉 F. 러더퍼드가 동료 일꾼 몇 명과 함께 배를 타고 영국에 왔으며, 러더퍼드 형제가 유럽의 일부 지역을 순방하는 동안 A. H. 맥밀란 형제는 덴마크에서 같은 연설을 했다.

맥밀란 형제는 1920년 10월 21일 목요일 에스비에르그에 상륙하여 그 날 저녁으로 팔라세 호텔에서 연설했다. 다음에는 오덴세에서 연설했다. 코펜하겐에서는 오드 펠로브스 홀에서 연설하도록 되어 있었다. 연설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에 이미 홀 밖에 사람들이 몰려와 있다가 문이 일제히 열리자 수분 만에 좌석이 다 차버렸다! 즐거운 얼굴로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미소를 잃은 얼굴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청중은 매우 진지하였으며 집회 후 약 300부의 「수백만」 소책자가 배부되었다.

맥밀란의 연설에 대한 반응

분명히, 이 “새로운” 소식에 대해 큰 관심이 일어났다. 맥밀란 형제의 공개 집회는 5000명 이상의 청중을 매료시켰다! 그들 중 일부는 성경 연구생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의 열정적인 전파자가 되었다. 그 때 에스비에르그의 청중석에 앉아 있던 사람 중에 감리교인인 젊은 부부 요한네스 담과 토라 담이 있었다. 남편이 교회 관리인이었으므로 그들의 숙소는 교회 건물 안에 있었다. 강연 후에 그들은 「수백만」 소책자를 주문했고, 약 3개월 후에 한 콜포처가 그들을 방문했다.

그 콜포처는 그 집에 얼마간 머물면서 그들이 새롭게 발견한 진리의 기초를 다질 수 있도록 가르쳤다. 물론 감리교 교직자가 이를 좋아할 리 없었다. 어느 날 그는 콜포처를 교회 밖에서 만나자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누가 당신에게 내 고기 바구니에서 낚도록 허가했소?” 형제는 재빨리 이렇게 대답했다. “누가 당신에게 고기를 바구니에 넣도록 허가했소?”

요한네스 담은 참 교회를 발견했다! 총 18명의 감리교인이 탈퇴했으며, 이렇게 해서 에스비에르그에 회중이 설립되었다.

맥밀란 형제가 코펜하겐에서 한 “수백만” 연설에 몰려든 군중 때문에 되돌아간 사람 중에 젊고 열렬한 사회 민주주의자이며 담배 일을 하는 앙엘로 한센이 있었다. 비록 강연은 듣지 못해 실망했지만, 성서 진리에 대한 관심은 고취되었다. 두어 달 후, 실직중인 상태에서 노동 조합 사무소에 등록하러 갔다. 거기서 실직중인 동료를 만났는데 놀랍게도 그는 성경 연구생이었다. 교회에게는 정말 안된 일이었다! 곧 앙엘로 한센도 성경 연구생이 되었다.

1922년 러더퍼드의 방문

1922년에 러더퍼드 형제는 다시 코펜하겐 대회에 참석하였다.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오드 펠로브스 홀에서 “수백만” 연설을 하였다. 일년 반 전에 맥밀란 형제가 연설했던 바로 그 장소였다.

그 연설은 어떤 반응을 가져왔는가? 일간 신문 「폴리티켄」은 제1면에 이러한 기사를 실었다. “러더퍼드 판사는 어젯밤 콘서트 홀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연설을 시작하기 한참 전에 큰 홀이 한 자리도 남김없이 찼으며, 새로운 청중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수백 명이 되돌아가야 했다. 더 이상 자리가 없었다.”

이 대회에서 침례받은 사람 중에 크리스티안 뢰메르라는 젊은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고향인 보른홀름 섬에서 성경 연구생들을 처음 접했었다. 1차 세계 대전 전에 그의 아버지가 「파수대」를 선물 예약으로 받았었는데, 1919년 어느 날, 당시 20세였던 크리스티안이 한 부를 보게 되었다. “그 날 제게 일어난 일은 너무나 엄청난 경험이라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성서에 들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진리였습니다. 이제 그것을 드디어 얻었습니다.”

코펜하겐 대회에서 그는 콜포처 모임에 참석했다. 거기서 크리스티안 달을 만났고 그의 인생 행로가 정해졌다. 그는 1922년 6월에 보른홀름에서 콜포처 봉사를 시작했다.

코펜하겐에서의 증가

1921-22년 겨울 앙엘로 한센은 여느 때와 같이 조합 사무소 등록 창구에서 기다리는 동네 실업자들에게 증거를 하고 있었다. 머리 위로 「수백만」 소책자를 치켜들고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외치고 있는데, 진리를 찾는 한 젊은이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크리스티안 방스홀트였다. 하룻밤에 소책자를 통독한 그는 올레 쉬르스 가데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 곳에서 들은 것은 그가 이전에 구세군이나 오순절 교회, 감리교를 비롯하여, 진리를 찾았으나 허사였던 모든 곳에서 들은 것과는 아주 달랐다. 그는 도저히 이 소식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이야기해준 친구들 여러 명이 집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헤를뢰브 라르센과 베튀 라르센이 있었다. 헤를뢰브와 크리스티안은 어릴 적 친구로 함께 악기를 연주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이제 그들은 성서 진리의 멜로디를 주고받게 되었다.

같은 해 봄에 또 다른 청년 한스 크리스티안 욘센이 성경 연구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무신론자로서 투철한 반종교주의자인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는데, “수백만” 강연에 초대하는 포스터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강당으로 가는 길에 그는 연설이 지루할 경우 읽을 거리로 신문을 샀다. 그는 실제로 신문을 사용했는데—메모지로 사용했으며—손이 성구들을 미처 따라 적을 수 없었다! 연설이 논리적이고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에 그의 무신론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한 번의 연설 참석이 여러 번이 되었고, 9월에는 그의 아내도 동참했다. 왕국 소식이 집집으로 전파되어야 함이 두 사람 모두에게 명백했다.

1925년 어느 날 한스 크리스티안은 협회 서적을 몇 권 읽은 적이 있는 에이네르 벵고르라는 청년을 방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일단 만나자, 에이네르는 믿음이 빨리 발전해서 역시 전파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1920년대에, 젊고 열정적인 전도인들의 작은 핵심체—전파 활동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형제 자매들—가 형성되었다. 오늘날까지 코펜하겐에서의 증가를 거슬러올라가 보면 이들 충성스러웠던 소수의 활동에 크게 기인한다.

유틀란트에서의 파이오니아 봉사

이제 좀더 집중적인 활동이 시골 구역에서 전개되었다. 1924년 1월에 세 명의 콜포처, 크누드 달과 크리스티안 달과 크리스티안 뢰메르는 “콜포처 분대”를 구성하여 유틀란트로 파견되었는데, 그 첫 번째 거점은 스키베 읍이었다. 뤼티카우 형제가 읍에서 가장 큰 홀에서 공개 강연을 함으로써 전파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다음에는 그 지역 전체를 돌아가며 선술집과 마을 회관에서 집회를 갖고 크리스티안 달이 연설을 했다. 신문 광고와 광고지로 연설을 알렸다. 강연 후에 콜포처들은 서적과 소책자를 전하면서 구역을 돌았다.

1924년 봄에, 이 삼총사는 유틀란트 남부의 하데르슬레브에 도착했다. 그 곳은 한때 독일 영토였으나 1920년에 주민 투표에 의해 덴마크로 재합병된 지역이었다. 그 지역의 청년들은 ‘서부 전선’에서 싸우도록 징집되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프랑스 전선의 참호 속에 묻어 버리고 말았다.

크리스티안 뢰메르는 이 곳 주민에게 전파하던 때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봉사하는 데 다소 특이하지만 흥미있는 구역이었습니다. 정치적 분쟁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접근하기 쉬워졌더군요.”

콜포처들이 구역을 처음 돌 때 만난 사람 중에 오베르 예르스탈에서 나막신을 만드는 안톤 한센이 있었다. 그 역시 ‘서부 전선’에서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두세 명의 전쟁 동료와 함께 그는 “성경은 지옥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라는 강연에 참석했다. 다음날, 그는 크누드 달의 방문을 받고, 세 시간에 걸친 열띤 논쟁 끝에 「하나님의 거문고」 책을 받았다. 그 책으로 믿음에 다시 불이 붙은 나머지, 그는 아내 카트리네와 함께 유틀란트 남부에서 전파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25년 가을까지 “달 분대”의 세 콜포처는 교통 수단으로 자전거나 기차를 이용해 왔으나, 이제 한 형제가 그들에게 자동차를 마련해 주었다. 크리스티안 뢰메르가 코펜하겐에 가서 차를 가져왔다. “대단한 일이 생긴 겁니다. 접을 수 있는 지붕에다 모든 것을 갖추고 있어 마음에 드는 낡은 양철 자동차였죠”라고 그는 즐겁게 회상한다. “그리고 유일한 면허증 소지자로서 내가 운전 기사가 됐지요. 그 차로 1년간 버티다가 당시의 고급 차종인 1923년형 포드 세단으로 바꾸었습니다. 지붕이 있어 겨울에 따뜻했죠. 꽤 멋진 차였습니다!”

이 콜포처들은 점진적으로 유틀란트 반도와 핀 섬 전역을 돌면서, 이 특별 활동을 위한 자금이 다 떨어진 1929년 3월까지 활동하였다.

많은 콜포처들이 전파 사업에 가담하다

한편, 코펜하겐 출신의 엘라 크뢰예르와 그룬트비교 배경을 가진 학교 교사 크리스티네 포울센이 셸란 남부를 돌며 이미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 곳 역시 전파되지 않은 구역이었다. 1926년 가을에는 이 자매들이 보르딩보르그 읍 주변에서 전파하고 있었다. 포울센 자매는 이렇게 회상한다. “사탕무 철이었어요. 길에는 아스팔트가 없었고, 밤새 비가 내린 길을 낮에 사탕무를 실은 짐차들이 다니면서 진흙탕 도로에 깊은 바퀴 자국을 파놓았지요. 도로를 도저히 통과할 수가 없어서 때로는 농장이나 집 한 군데 방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진흙탕 정복에 필요한 바로 그것이 자매들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목이 긴 고무 장화였다! 즉시 하나씩 샀다. 그러나 고무 장화는 그 당시 귀한 물건이어서, 이 자매들은 가는 곳마다 눈길을 많이 끌었다. 잠시 쉬러 코펜하겐에 갔을 때 이 장화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올레 쉬르스 가데 지부에 있는 한 자매는 그들의 새 신발에 매우 감탄한 나머지, 입구에 세워 둔 장화를 집어들고는 사무실 안을 활보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 콜포처들의 장비가 얼마나 훌륭한지 보여 주었다.

세 번째 콜포처 조(組)인 안나 페테르센과 토라 스벤센 역시 핀 섬과 유틀란트 반도에서 구역을 돌았다. 페테르센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파이오니아들은 대개 회중이 없는 지역으로 파견되었지요. 우리는 보통 잡화점을 찾아가서 마을에서 누가 세줄 방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우리 부엌에는 작은 석유 곤로가 있었고 냄비 두어 개가 낡은 탁자 혹은 가게 주인에게서 얻은 나무 상자 위에 놓여 있었죠.”

때때로 두 자매는 “달 분대”에 합세하기도 했다. 결과가 어떠했는가? 페테르센 자매와 뢰메르 형제는 보다 영구적인 연합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1933년에 결혼했으며, 비록 현재 뢰메르 자매는 요양소에 있지만 뢰메르 형제는 아직도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다.

전파하기 위해 조직하다

그 동안 덴마크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1922년에 “왕과 왕국을 광고하십시오”라는 역사적인 요청이 미국 오하이오 주 시더포인트에서 울려 퍼졌다. 이제 콜포처뿐 아니라 회중에 연합한 모든 사람이 정기적으로 전파하게 되었다. 이러한 소식이 덴마크 해안에 상륙하자 형제들은 모두 전파에 참여할 수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전파자들을 부르는 소리가 덴마크어 「파수대」를 통해 울려 퍼졌지만, 전파 활동은 아직 조직되지 않았다. 왜 그런가? 회중의 탁월한 자들—선출된 장로들—이 망설였기 때문이다. 어떤 조치가 필요했다.

1925년 5월 후반에 러더퍼드 형제는 스웨덴 외레브로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할 계획을 세웠다. 그 직전에 그와 R. J. 마틴은 스위스에 있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그들은 취리히에서 코펜하겐까지 비행기를 탔다. 하지만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독일 북부와 덴마크 상공을 지나갈 때, 폭풍이 일어나 비행기가 물에 뜬 코르크 마개처럼 요동했던 것이다. 코펜하겐에 착륙하자, 100여 명의 환영객이 몹시 기뻐하였다. 아무도 비행기가 그 폭풍 속을 통과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맥밀란 형제가 기다리고 있는 부두까지는 자동차로 반 시간 거리였다. 맥밀란은 선장과 부두 책임자를 설득해 말뫼행 연락선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모두가 연락선에 승선하여 다음날 외레브로 대회장에 도착했다.

대회 마지막 날 러더퍼드 형제는 북유럽 사무소가 코펜하겐에 설치되며 스코틀랜드 사람 윌리엄 데이가 책임자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사무소는 스칸디나비아와 발트 제국에서의 협회 활동을 감독하고, “특히 왕국 소식의 공개 전파를 격려하고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독신인 데이 형제는 1913년 이래로 성경 연구생이었다. 그는 그 직무에 적격자였다. 그는 북유럽 사무소를 감독하기 위해 런던의 세무 국장 직위를 그만두고 왔다. 그는 활력이 넘치며 끈기 있고 진리에 대한 큰 사랑으로 움직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회중의 콜포처 활동이 이미 수년간 조직되어 온 영국에서 일해 본 좋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형제들은 그를 좋아했고, 곧 그는 ‘큰 스코틀랜드 사람’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데이 형제는 전파 사업을 조직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포울 레인세트가 코펜하겐의 봉사 지휘자로 임명되어 수도에서의 증거 활동을 감독했다. 수도를 6개 구역으로 나누어, 각각 지역 봉사 인도자에게 책임을 맡겼다. 서적 저장소를 개인 집에 설치해서 전도인들이 서적 공급품을 받으러 지부까지 올 필요가 없게 했다. 증거 활동은 이제 활기를 띠게 되었다.

대회중의 봉사일

1925년 대회는 덴마크 신권 역사상 중대한 시점이었다. 덴마크어 「파수대」에서는 이렇게 발표하였다. “9월 1일 화요일은 특별 봉사일이 될 것이며, 가능한 모든 사람이 코펜하겐 지역에서 서적 제공 봉사를 함으로써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노력에 참여할 것을 기대한다.” 그 날은 전파의 중요성에 대한 포울 레인세트의 연설로 시작되었다. 이어 대회 참석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서적 제공 호별 봉사를 나갔다.

후에 덴마크어 「파수대」는 이러한 격려문을 실었다. “대회 이후로, 소식을 전파하려는 열정과 열의가 여러 반[회중]으로 확산되었으며, 우리는 이것이 전파 활동의 진정한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기를 희망한다.”

많은 회중이 활동에 가담하다

데이 형제는 계속 바빴다. 감독자로서 보낸 처음 3개월 반 동안, 그는 스칸디나비아와 발트 제국 내의 1만 4000킬로미터를 여행하며, 복음 전도 활동을 조직했다. 에이네르 벵고르는 이 활동중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이렇게 말한다. “유틀란트 북부의 한 회중에서 우리는 형제 자매들의 호별 봉사를 조직하고자 작은 대회를 마련했습니다. 데이 형제의 연설에 이어 전도를 하는 방법, 사람들에게 말해야 될 내용 등에 관한 지침을 받았습니다. 구역과 서적이 배정되고 문밖을 나서는데 대부분 떨고 있었습니다. 데이 형제와 내가 중심가로 들어가다가 보니까 두 자매가 한 출입구에 서서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동행하자, 곧 표정이 다시 밝아졌습니다!”

그 해가 갔을 때, 전년도보다 두 배가 넘는 서적이 전해졌다. 1925봉사년도 보고에서 이 사무소는 이렇게 기록했다. “공개 연사와 콜포처만이 아니라 실제로 주께 온전히 헌신한 사람은 누구나 전파 활동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더 많은 벗들이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순례자 방문

스웨덴 출신의 요한 에네로트나 노르웨이 출신의 테오도르 시몬센과 같은 여행하는 순례자들이 전파 활동의 증진을 격려해 왔었다. 그러나 이제 셸란 북부 출신의 크리스티안 옌센이 영구 순례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미국에 몇 년간 있었으며, “창조 사진극”을 가지고 덴마크 여행도 했었다.

“순례자”란 용어는 후에 “지역 봉사 지휘자”로 개칭되었고, 더 많은 지역 봉사 지휘자가 임명되었다. 그 가운데 크리스티안 뢰메르, 크리스티안 달 그리고 요한네스 담도 있었다.

“적절한” 벧엘 집

얼마 안 있어 마그데부르크와 베른에 있는 협회 공장으로부터 서책과 소책자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였으므로, 두 개의 수송용 상자를 옆으로 세워 포개 놓아 그 속에 겨우 이삼백 권의 서적밖에 보관할 수 없는, 올레 쉬르스 가데의 저장 공간으로는 너무 협소하게 되었다. 시몬 페테르센(콜포처인 안나 페테르센의 오빠)이라는 젊은 형제가 이전의 집회 장소에 새로 마련된 큰 창고를 관리하도록 임명되었다.

낡은 아파트 건물에 있는 사무실과 서적 저장소에서 일하는 몇몇 형제 자매들은 코펜하겐 주변에 흩어져 기거하고 있었다. 데이 형제는 모두가 한 장소에서 숙식할 수 있는 “적절한” 벧엘 집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까래 바로 밑에 있는 6층 꼭대기의 작은 창고 방들을 비워, 바닥에 니스를 칠하고 벽을 도배하고 가구를 들여놓았다. 그 일이 끝났을 때, 에이네르 벵고르와 시몬 페테르센과 또 한 형제가 다소 투박하기는 해도 아담한 침실을 각자 가지게 되었다.

새로운 중대 시점

1927년 가을은 두 번째 중대 시점을 이루었다. 러더퍼드 형제의 또 한 번의 방문으로 대회를 다시 개최하였고, 스칸디나비아와 에스토니아 그리고 라트비아에서 온 650명의 대회 참석자들은 러더퍼드 형제의 “만민을 위한 자유”라는 연설에 몰두하여 경청했다. 일간지 「폴리티켄」은 이렇게 보도했다.

“오드 펠로브스 홀은 7시 30분에 문을 열었는데 15분 만에 좌석이 꽉 차고 ·⁠·⁠· 문이 닫혔다. 이어서 15분간 수백 명의 군중이 타일이 깔린 넓은 현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닫힌 문들을 계속 쾅쾅 두드렸고, 이 연설을 들을 일념으로 먼 길을 온 한 남자는 좌석을 주면 500크라운(약 8만 원)을 내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모두 허사였다. 현관에 모인 군중은 점점 더 밀렸다. 천 명에 가까운 군중이 밀고 들어가려 했으나 허사였다.”

특별 운동과 대회들

모두가 증거 사업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기 위해 세계적인 특별 운동이 대개 9일간의 일정으로 조직되었다. 덴마크 최초의 특별 운동에서 「만민을 위한 자유」 소책자가 특히 소개되어, 1928년 3월에 대중에게 배포되었다. 또 하나의 특별 활동은 소규모 일요 대회로서 후에는 봉사 대회라고 불렸다.

북해에 가까운, 유틀란트 북부의 작은 어촌 토루프 스트란에 있는 홀게르 닐센의 집은 일요 대회의 전형적인 일면을 보여 준다. 올보르그와 모르스 섬에 있는 형제들과 그 중간 마을들에 사는 형제들이 도착하게 되어 있다. 모두는 점심 도시락을 지참하고 전파하면서 온다. 그 동안 토루프 스트란에 있는 형제들은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닐센 형제의 헛간을 비워 청소와 단장을 하고서 긴 의자들을 마을 회관에서 마차로 옮겨 놓는다. 정오쯤 되면 형제들이 도착한다. 함께 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한 뒤, 깨끗한 헛간에 모여 연설을 듣고, 이어 바다로 직접 나가서 침례를 행한다. 이번에는 19명이 물에 잠겼다. 대단한 날이었다!

잘 조직됨

덴마크의 성경 연구생들은 1925년부터 1930년에 걸쳐 완전히 재조직되었다. 예를 들면, 더 잘 마련된 집회가 1928년에 시작되었다. 「파수대」는 이미 정기적으로 연구되고 있었고, 이제 주간 증거 집회 직전에 봉사회를 갖고 「게시판」(후에 「우리의 왕국 봉사」로 됨)에 실린 제안들을 고려하도록 권고받았다. 다음해에 협회는 “조직 계획”을 보내왔다. 각 회중들은 전파 활동을 감독하기 위해 세 명의 형제로 구성된 봉사 위원회를 두어야 했고, 한편 선출된 장로들은 회중에서 열리는 연구 집회들을 돌보았다.

이러한 종류의 변화는 까부르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신들의 믿음을 행동으로 나타내기를 원치 않은 사람들은 점점 더 그러한 태도를 드러냈고, 결국 성경 연구생 대열에서 떠났다. 이런 이유로 기념식 참석자 수는 1927년의 909명에서 1931년에는 605명으로 감소했다.

신권적 재조정은 결국 지부 감독자인 카를 뤼티카우에게 감당키 어려운 일임이 증명되었다. 그는 모든 거짓 종교에 대한 협회의 단호한 반대 입장에 대해서조차 동의하지 않았다. 여러 형제들이 그를 도와 변화가 필요한 이유를 깨닫게 하려고 애썼고, 스웨덴 출신의 에네로트 형제도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허사였다. 뤼티카우는 협회의 지부 대표자 직책을 버렸고, 1930년 1월 포울 레인세트가 그를 대신했다.

새로운 도구와 이름과 집

「황금 시대」가 「뉘 베르덴」(신세계)이란 이름으로 1930년 1월에 덴마크어로 발행되었다. 이 새로운 잡지가 최대한 널리 배부되도록 하기 위하여, 독자를 증가시키기 위한 호별 방문 운동이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또한 잡지 판매대에서도 판매되었으며, 잡지 내용을 소개하는 포스터를 게시하기도 하였다. 예약 부수가 치솟기 시작했다. 1930년에 우편으로나 전도인을 통해 잡지를 정기적으로 구독하는 사람 수가 5825명이던 것이,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인 1943년에는 2만 5921명에 달했다.

부지런히 전파하도록 격려한 다른 일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의 채택이었다. 1931년 미국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 대회에서 그 이름을 채택한 데 이어, 지방 회중들에서도 채택하도록 결의문이 전달되었다. 이 새로운 이름에 대한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마리에 두에는 노르웨이에서 이와 같이 편지했다. “기쁨으로 나는 새 이름을 받아들이며,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 된 것이 즐겁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썼다. “이것은 우리에게 여호와를 끝까지 충성스럽게 섬기겠다는 결의를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 결의문은 러더퍼드 형제의 대회 연설과 함께 「천국, 세계의 희망」이라는 소책자로 인쇄되어 1932년 3월에 대량 배포되었다. 특별 운동 마지막 주간에, 모든 정치인, 교직자, 정부 관리 그리고 기업인들에게 소책자를 가지고 개인적으로 방문하는 노력이 행해졌다. 또한 국회 의사당의 의원들 책상에도 한 부씩 놓였다. 덴마크 국왕인 크리스티안 10세도 한 부를 받았다.

올레 쉬르스 가데에 있는 협회 시설은 갈수록 비좁아졌다. 그래서 코펜하겐 교외인 발뷔의 쇤드레 파산베이 56번지에 있는 큰 저택을 구입하여, 1932년 10월 18일 벧엘 가족은 새 집으로 이사했다.

비록 협회는 여러 해 동안 “바크토르네츠 비벨-오그 트라크탓셀스카브”(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수행해 왔지만, 법적 단체를 구성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이제는 단체가 구성되어 1932년 5월 21일에 등록되었다. 쇤드레 파산베이의 건물은 협회의 지부 사무실, 서적 저장소 그리고 벧엘 집으로 그 후 25년간 사용되었다.

서적을 배포할 있는 법적 권리가 확립되다

1930년대 초기에, 당국은 상법과 공휴일법을 우리의 서적 배부 호별 방문 전파 활동에 잘못 적용하려 했다. 만일 당국의 계획이 성공했더라면, 증거 활동은 진척되기 어려울 뻔했다. 반대로 1932년 10월에 그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다. 코펜하겐의 증인 다섯 명이 전파하러 차를 타고 로스킬레로 갔다. 그들은 차를 주차시킨 광장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만나 보니 일행 중 한 사람인 아우구스트 레만이 안 보였다.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레만 형제는 상법을 어기고 인쇄물을 행상 면허 없이 그리고 허가된 영업 시간 외에 판매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지방 법원은 레만 형제를 무죄 판결했고, 상고심에서 고등 법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검찰은 그 사건을 대법원에 상고하여 1933년 10월에 사건 심리가 있었다. 대법원은 여호와의 증인이 서적과 잡지를 사용하는 전파 활동은 상거래와는 다르며 따라서 상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이제 협회는 모든 전도인들에게, 협회의 전도인은 서적 배부로 아무런 이윤도 취하지 않는 무보수, 자원 봉사자들이며, 행상 면허 없이 전파할 수 있는 권리가 대법원에 의해 확립되었음을 알리는 내용을 담은 신분증을 소지할 것을 지시했다. 문제는 해결되었으며, 전파 활동은 더 이상 법적 방해 없이 진행되었다.

“큰 무리”가 나타나다

이제까지 증인들의 주된 관심은 택함을 받은 자, 즉 하늘 희망을 가진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모아들이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종종 형제 자매들은 그들이 하늘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마음 깊이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중 일부는 몹시 우울하여, 지부 사무실을 찾아오곤 했다. 따라서 그들이 기념식 표상물을 취하는 것은 잘못된 것 같았다. 당시 그러한 사람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예후와 요나답에 관한 성서 기록과 일치하게 요나답의 친구들로 알려져 있었다.—열왕 하 10:15, 16.

1935년 8월에 영문 「파수대」의 두 기사에서는 계시록 7장의 “큰 무리”가 아마겟돈 전에 모아질 땅 반열임을 설명하였다. 사무실의 형제들은 열광하였다. 전국 대회가 같은 달에 코펜하겐에서 열릴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러더퍼드 형제에게 이 두 기사에 근거한 연설을 제공해도 되는지 문의하는 전문을 보냈다. 러더퍼드 형제는 데이 형제에게 이 신기원을 여는 연설을 해도 좋다는 청신호를 보내왔다.

“그것은 잊지 못할 시간이었습니다”라고 벵고르 형제는 이야기한다. “나는 연사 뒤 오케스트라석에 앉아 있어서 청중을 내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 열광하는 모습이란! 그와 같은 열광의 물결이 청중석에 넘실거리는 것은 결코 본 적이 없습니다! ‘큰 무리’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섬광이었고, 이제 모두는 ‘큰 무리’가 누군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요나답의 친구들”을 모아들이는 일이 참으로 시작되었다. 나라 전역에서 큰 무리의 일부가 될 수도 있는 모든 사람과 접촉할 목적으로 공개 집회가 열렸다.

축음기 증거

전파 활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든 다음 단계는 축음기의 도입이었다. 이제 문전에서 덴마크어로 번역된 러더퍼드 형제의 짤막한 성서 강연을 담은 녹음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곧 전도인들이 휴대용 축음기를 들고 다니는 것을 구역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휴대용이기는 해도, 축음기를 자전거에 싣고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뢰메르 자매는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는 자전거를 밀고 언덕을 오르거나 때로는 붙들고 내려가야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언덕이 너무 경사지고 길이 울퉁불퉁해서 만일 급히 내리막길을 달리면 축음기를 잡아맨 스프링이 뚝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장애가 그들의 열심을 식게 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축음기를 자전거에 안전하게 부착시킬 절묘한 장치들을 연이어 고안해서 설치함으로써 이 도전을 극복했다. 한 형제는 그가 여호와의 세계적인 전파하는 조직 안으로 들어오도록 돕는 즐거움을 누렸던 135명 중에서 약 40명이 축음기 활동의 결과라고 회고한다.

이 외에도 큰 축음기에서 울려 나오는 연설을 들을 수 있는 곳에서는 소위 축음기 집회라는 것을 열었다. 칼룬보르그에 있는 일부 형제들은 다니엘 닐센(1902년에 세예뢰비크트에서 침례받은 알베르티네의 아들)의 낡은 차에 확성 장치를 설치했다. 그가 차를 팔고 난 다음에는, 자전거로 끄는 작은 짐수레를 동원했다. “우리는 먼 여행을 떠났습니다. 우리가 축음기 연설을 사용하여 전파했던 마을들로 말입니다”라고 닐센 형제는 말한다.

파이오니아들이 회중을 설립하다

1930년대에, 지금은 파이오니아라고 불리는 콜포처 활동의 성격에 변화가 일어났다. 1920년대에는 파이오니아들이 가능한 많은 구역을 돌기 위하여 계속해서 다른 곳으로 여행을 다녔지만, 이제는 회중을 설립하기 위해 한곳에 머물렀다. 이 일이 어떻게 수행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모르텐센 부부 즉 에이네르와 엘세를 따라가 보기로 하자.

에이네르와 엘세는 작은 농장을 판 후 1934년 3월, 전 시간 봉사에 나섰다. 당시는 불황기였으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첫 구역 중 하나는 쇤데르보르그 읍이었다. 임대한 홀에서 그들은 협회에서 보낸 연사가 제공하는 네 번의 공개 강연을 마련했다. 그리고 다음 순서로 모르텐센 형제가 연설을 했다. 이것은 그에게는 첫 연설이었다. 매우 긴장하기는 했지만 잘했으며, 얼마 지나서 약 30명 정도가 정기적으로 집회에 참석했다. 후에는, 축음기 연설을 했고 질문과 대답이 뒤따랐다. 그 후, 협회 서적을 연구 보조서로 사용하는 정기적인 연구 모임이 시작됐다. 새 회중이 구성되어 가고 있었고, 1936년 초에 실현되었다.

여름이 올 무렵, 모르텐센 부부는 뉘보르그 읍으로 이동하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여기서도 같은 방법으로 일을 진행했다. 즉, 처음에는 협회에서 보낸 형제들의 공개 강연, 다음에는 모르텐센 형제의 연설, 그리고는 축음기 연설, 최종적으로 성서 연구 모임으로 이어졌다. 1937년 8월 말경 그들의 활동은 많은 열매를 맺어서 약 10명의 전도인으로 이루어진 회중이 뉘보르그에 형성되었다.

나치의 점령

1940년 4월 9일은 덴마크에 암흑의 날이었다. 나치 독일 군대가 이 나라에 진군해 왔다. 나치가 이미 지배하고 있는 모든 곳에서 증인들이 혹독한 박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최악의 사태에 대비했다. 따라서 조심스럽게 일을 진행하는 것이 최선으로 여겨졌다.

그 달에 「도피자들」 소책자의 광범위한 배부 운동이 있을 예정이었으나 그 소책자에는 나치 정권을 맹렬히 폭로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계획을 변경하였다. 형제들은 어느 일요일 새벽 소책자를 사람들 집 편지함에 집어넣는 번개 배부 작전을 수행했다. 4월 28일 약 35만 부의 소책자가 나라 전역에 무료로 배부되었다. 비용이 들었으나, 데이 형제는 이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감사하게도 박해는 오지 않았다. 정치적인 이유로 점령군은 덴마크를 “시범 보호국”으로 정하고, 덴마크인에게 상당한 개인의 자유를 허용했다. 주의 깊게 행동함으로써 형제들은 전파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윌리엄 데이가 억류당하다

독일의 점령으로 인해, 영국 시민인 윌리엄 데이는 베일레 읍 근처의 적국인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비록 그 곳에 억류된 자들이 수용소 내에서 인간적인 대우와 제한된 자유를 누리기는 하였지만, 이 활동적인 사람이 그의 일상적인 활동을 못한다는 것은 시험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나태하지 않았다. 그는 같은 처지의 억류된 자들은 물론 간수들에게도 끊임없이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왕국 편에 서라고 거듭거듭 말했는데, 실로 어찌나 자주 그랬는지 그들은 그에게 ‘서시오 데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데이 형제가 1934년에 포울 레인세트에게서 넘겨 받은 지부 감독자 임무는 알베르트 베스트가 돌봤다. 그는 에스토니아에서 1920년대 후반에 수년간 지부 감독자로 봉사한 바 있었다. 미국에 있는 협회 본부와의 직접 연락이 차단되었다. 유일한 통신 가능성은 전쟁이라는 폭풍의 바다에서 중립의 고도로 남은 스웨덴을 통하는 것이었다. 북유럽 사무소의 기능은 정지되었고, 스웨덴에 있는 에네로트 형제가 이제 북구 나라들의 소식과 보고를 수집하여 미국 브루클린으로 보내는 임무를 맡았다.

영적 양식을 계속 받다

덴마크는 최근호 잡지와 서적 출판물을 계속 공급받아 왔으나, 덴마크와 독일 간의 정치 관계가 점점 더 긴장되어 감에 따라 신권적 전략이 필요해졌다. 한 젊은 덴마크 자매가 코펜하겐에 있는 스페인 외교관 가족을 위해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 외교관은 스웨덴에서 자매의 선물 꾸러미를 가져다 주는 일을 아주 기꺼이 해주었다. 물론 그는 포장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따라서 영적 양식이 부족한 적은 결코 없었다. 전시에 시종 일관 다른 출판물은 물론 「파수대」와 「위안」지를 인쇄하고 배포하는 일이 가능했다. 심지어 1941년 말 영문 「파수대」에 다니엘의 예언을 해설하는 연재 기사가 실려 독일을 북방 왕으로 지적했을 때에도, 형제들은 그 내용을 계속 받았다. 이 기사는 덴마크어 「파수대」에 싣는 것은 적절하지 못했으므로 등사하여, 순회 감독자가 회중들로 여행해서 신분증을 소지한 형제 자매들로만 이루어진 청중에게 낭독했다. 짐작할 수 있듯이, 이러한 연설을 할 때는 집회 장소를 항상 봉쇄했다.

나치당과 교직자들의 박해

독일 점령군에게서는 이렇다 할 반대가 없었지만, 덴마크의 나치당은 증오로 들끓었다. 거듭거듭 그들은 기관지를 통해 독일인들의 주의를 증인에게 돌리려고 애썼다.

또한 덴마크 국립 교회의 교직자들도 악랄한 계략을 짜느라 바빴다. 신문 지상을 통한 그들의 공격으로 인해서 사설면에서는 서면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 일은 한 교직자가 라디오 예배 방송을 마치면서, 증인은 예수를 구세주로도 하나님의 아들로도 믿지 않는다고 증인에 대해 경고를 발할 때 절정에 달했다.

라디오 방송국이 정정 방송을 내보내기를 거절했으므로, 협회는 가능한 최선의 방법—전파 활동—을 통해 문제를 밝히기로 결정했다. 사상 유례 없는 광범위한 증거 운동을 준비하였다. 기록적인 짧은 시간 내에 「둘 중에 판정을 바람」이라는 제목의 소책자가 준비되었다. 그 내용은 여호와의 증인과 교직자의 차이점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 거대한 특별 운동에 “여호와의 전쟁”이란 이름이 붙었다. 실로 여호와의 백성 사이에는 전투의 영이 편만했다. 모두가 협력했으며, 지정된 날인 1943년 2월 21일에 약 70만 부의 소책자를 무료로 배부하였다. 도시건 시골이건 소책자로 넘쳤다. 가장 작은 섬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약 62개의 작은 섬에 있는 모든 집에는 소책자를 우편으로 발송했다. 덴마크 전체 가정의 3분의 2 이상이 문간에서 소책자를 받았다. 그 직후 소책자를 모든 교직자들과 교회 서기들과 지도급 교회 성원들에게 보냈다.

신문들은 증인들의 특별 운동을 못 보고 넘어간 그 누구도 그것을 알아보게 만들었다. 전국적으로 교직자들은 신문 지상이나 교구 잡지, 설교단에서 전투에 가담하느라 바빴다. 증인의 특별 운동은 반대자들의 신경을 극도로 건드렸다. 덴마크 나치당은 증인이 비밀리에 유대인의 자금 지원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악의적으로 공격하였다. 그러나 수백 명의 사람들은 지부에 편지를 보내 우리의 소식에 관한 더 많은 지식을 요청하였다.

특별 운동은 수개월간 지속되었다. 어느 교구 목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거나 그분의 종들을 반대하기만 하면, 형제들은 그 지역에서 공개 연설을 마련하고 광고지로 그 교구 전체를 뒤덮었다. 아마예르 섬에서 활동이 특히 대단해서, 여호와의 증인과 덴마크 국립 교회 교직자 간에 공개 토론이 벌어졌다. 아르투르 옌센과 헤를뢰브 라르센 두 형제가 증인을 대변했다. 그들은 빠르고 논리적인 사고를 가진 능숙한 연사들이었다.

한 신학자가 그 토론을 아주 잘 요약했다. 그는 4월 15일자 「아마예르 블라데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체적으로, 증인의 논증이 훨씬 훌륭하고 분명했으며 가장 객관적이었다. 교회측은, 아마 그 자리에 앉아 있기가 부끄러웠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자 교직자들의 공격은 시들해졌다. 증인과 싸우면 싸울수록 자기 교구민들에 대한 증인의 증언은 더 강력해져서, 교직자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대전중의 대회

대전중에 몇 번의 대회를 여는 것이 가능했다. 기억할 만한 대회가 1943년 8월 28, 29일에 코펜하겐의 오드 펠로브스 홀에서 열렸다. 대회 첫날은 계획된 대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덴마크의 정치 상황은 점령군이 덴마크 정부에게 점점 더 무리한 요구를 해옴에 따라 한계점에 도달하여, 마침내 8월 28일—오드 펠로브스 홀에서 대회가 시작한 바로 그날—정부는 더 이상의 협조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일요일 아침 독일군은 행동을 개시했다. 덴마크 주둔 독일군 총사령관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덴마크 육군과 해군은 무장 해제되었고 수명의 저명한 시민이 체포되었으며 정부는 해산되었다. 거리에 집단적으로 모이는 일과 같은 집회가 금지되었다. 그 날 아침 형제들은 개인 집들에 모였다. 상황을 토의하고서 대회가 이제 취소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 가지 집회만은 금지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 예배였다. 오후에 오드 펠로브스 홀에서 “교회 예배”로서 모일 수 있다는 전갈이 속히 전달되었다. 벧엘에서 나온 형제들이 택시를 타고 여러 집으로 갔고, 그 곳들로부터 소식은 타오르는 불길처럼 형제들 사이로 신속히 퍼져 나갔다. 불필요한 주목을 받지 않으려고 형제들은 두세 명씩 도착했다. 그들은 옆문을 통해 홀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1284명의 형제 자매들이 모였다.

한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홀 안에 들어갔을 때, 그 곳에 사실상 모든 형제들이 다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조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진정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아주 짧은 내용의 전갈을 받고 모였으며, 여호와의 증인 외에는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거리의 소란스럽고 분노한 군중 속을 빠져 나와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구세계와 신세계 사이에 문이 나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집회 후에 형제들은 작은 집단으로 빠져 나갔으며 즉시 그 지역을 떠나도록 지시받았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 모든 일이 독일인들의 바로 코앞에서 수행되었다! 독일 해군 사령부가 바로 집회 장소 길 건너에 있었던 것이다! 바깥 인도에는 모래 자루 더미 뒤에 독일군 경비대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랑엘란의 성서 학교

1943년에, 미국과 영국에 있는 증인들이 자체 성서 학교를 열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전쟁으로 세계 본부와의 직접적인 접촉이 끊겼으므로, 덴마크의 형제들은 좋은 의도로 학교를 세울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랑엘란 섬의 로할스에 매력적인 주변 경관을 가진 집을 매입하였다. 바다가 내다보이는 그 곳에 자체 성서 학교를 세웠다. 학교 관리자로 벧엘의 시몬 페테르센이 선정되었다. 다른 두 형제가 강사가 되었는데, 그중에 한 사람인 필리프 호프만 역시 벧엘 출신이었다.

1944년 6월 5일 월요일에 첫 학급이 시작되었다. 각 과정은 2주간이었다. 수업은 오전 9시에서 정오까지였고, 과목은 성서 가르침, 조직, 전파 활동, 산수 그리고 덴마크어였다. 오후 시간은 학생이 임의로 사용할 수 있었다. 공부하거나 수영을 하러 가거나 아름다운 학교 주변을 산책할 수 있었다. 주말은 야외 봉사에 바쳤다.

학교는 단지 그 해 여름 동안만 지속되었지만, 등록한 형제 자매의 총수는 450명에 달했다. 사실 그 학교는 잘못 알고 시작된 것이었다. 학교가 개설될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개설될 것은 아니었다. 다음해에 신권 전도 과정(지금의 신권 전도 학교)이 모든 회중에 도입되었다.

대전의 끝

대전이 끝나가면서 종이를 비롯한 대부분의 물자가 부족하여 잡지 크기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종이가 없으면, 서적도 나올 수 없다. 그러나 형제들은 한동안 「파수대」와 「위안」지의 면수를 점차 줄이면서 정상적인 발행 부수는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으로도 충분치 않았다. 1945년 4월이 되자 더 이상의 신규 예약 접수를 중단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덴마크의 회중들은 그 몇 해 동안에 증가하여 회중 수가 거의 두 배가 되었다. 1940년에 75개 회중에 최고 전도인 수가 1373명이던 것이, 1945년에는 127개 회중에 2620명의 증인이 있게 되었다.

강제 수용소에서 나온 사람들을 도움

1945년 5월 5일, 덴마크는 기뻐했다. 해방이었다! 바로 그날, 지금의 폴란드 북부에 있는 스투트호프의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에서 나온 수백 명의 수감자들이 빽빽이 탄 바지선이 묀 섬에 좌초되었다. 포로들 중에는 다섯 나라 국적의 여호와의 증인 15명도 있었다. 두세 시간 내로 덴마크 형제들이 식품을 가지고 찾아왔다. 안타깝게도, 몇몇 사람에게는 그 구조도 너무 늦은 것이었다. 질병과 기아로 허덕인 탓으로, 두 명의 증인은 형제들이 도착한 직후에 숨을 거두었다. 분명히, 생존자들에게는 친절한 돌봄이 절실히 필요했다. 지부는 그들의 보호에 나섰다.

랑엘란에 있는 협회 소유의 건물에 그들을 묵게 했다. 시몬 페테르센 부부가 정성스럽게 돌보아 주어 세 명의 형제와 열 명의 자매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소생했다. 때가 되자 이들은 힘을 되찾아 각자 자신들의 나라로 되돌아가 자신들의 언어—독일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라트비아어, 리투아니아어—로 전파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본부로부터의 방문

1945년 초여름,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협회 사무실과 연락이 재개되었다. 그 해 말, 1942년 이래 협회장인 네이선 H. 노어가 비서인 밀턴 G. 헨첼과 함께 코펜하겐을 방문하게 되자, 유대는 더욱 강화되었다. 1927년 이래 협회장이 덴마크를 방문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주목할 만한 행사였다.

방문중에 13명의 형제가 새로운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의 선교인 훈련에 지원했다. 다음해 여름 그중 처음 다섯 명이 미국으로 떠났다.

2년 후인 1947년에 노어 형제와 헨첼 형제는 세계 봉사 여행중에 덴마크를 다시 방문했다. 이 때 노어 형제는 덴마크에 전혀 새로운 것을 소개했는데, 바로 가두 잡지 증거였다. 「파수대」와 「깰 때이다」를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미국에서 효과적인 전파 방법임이 증명되었다. 덴마크에서도 성공적이었는데, 특히 금요일의 붐비는 시간대에 그러했다.

길르앗 졸업생들이 힘이 되다

길르앗에서 훈련받은 형제들이 덴마크로 돌아와 야외 봉사에 큰 촉진제가 되었다. 최초의 두 졸업생인 요한네스 라스무센과 크리스티안 라스무센은 돌아와서 1947년 초부터 형제들의 종(현재 용어는 “순회 감독자”)으로 섬기기 시작했다. 크리스티안은 후에 스웨덴으로 전임하였으며, 그 곳에서 지금도 벧엘 봉사를 하고 있다.

필리프 호프만이 그 다음 길르앗 졸업생으로 덴마크로 돌아왔다. 길르앗 교육 외에도, 그는 브루클린의 사무실과 공장에서 특별 훈련을 받았다. 따라서 그가 돌아오자 덴마크 지부 사무실에 절차상의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후에 호프만 형제는 독일로 임명되어 그 나라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했다.

알베르트 베스트와 마르가레트 베스트가 1949년 1월에 길르앗에서 덴마크로 돌아왔다. 베스트 형제는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어, 이제 69세가 된 데이 형제의 책임을 면하게 해주었다. 데이 형제는 1950년 가을까지 사무실에서 계속 일하다가, 영국으로 돌아가 1963년 사망하기까지 파이오니아로서 충실하게 봉사하였다.

성장—수적으로, 영적으로

그 후 여러 해 동안, 형제들의 영적 시야가 넓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동일한 감독하에 있는 국제적인 협회의 일부임을 더욱더 깨달을 수 있었다. 1950년대에 뉴욕 시에서 열린 대규모 국제 대회들에 덴마크도 대표단을 파견한 일이 그러한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눈으로 직접 여호와의 증인의 본부 사무실과 인쇄 공장을 보았고, 귀로 직접 본부 성원들이 하는 연설을 들었다. 이 모든 일은 그들이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훌륭한 영적 기초가 되었다.

전도인 수가 계속 증가해서 1954년 대회를 준비할 때는 그전까지 여러 번 사용해 온 대회장—K.B. 할렌—이 더 이상 적합지 않음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형제들은 덴마크에서 가장 큰 홀인, 코펜하겐 중심부 근처의 포룸을 빌렸다. 이것은 화제가 되었다. 당시 지역 감독자이던 요한네스 라스무센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8000명을 K.B. 홀에 모은다 해도 그것은 얘깃거리가 못 됩니다. 그러나 5000명만 포룸에 모이면, 그건 뉴스거리죠.”

그 때까지 덴마크에서 열린 대회 중 최대의 대회가 준비되었다. 포룸 내에 7000석의 자리가 있었으나, 수천 명의 초과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많은 텐트가 설치되었다. 그럼에도 대회 나흘 내내 대만원이었다. 형제들은 참석자 수로 인해 즐거워했으며, 8월 8일 일요일 오후에는 1만 2097명이 공개 강연에 참석하자 감격하여 어쩔 줄 몰랐다!

새 지부 감독자

그 다음날 미국인 형제 리처드 E. 에이브러햄슨이 덴마크에서 활동의 책임을 맡기 위해 도착했다. 그는 수년 내에 다섯 번째 지부 감독자가 되었다. 베스트 형제는 1951년 여름에 중병에 걸려, 그 직책을 길르앗에서 훈련받은 오게 하우에게 넘겼었다. 1년 후 그 직책은 캐나다 사람 노먼 하퍼에게 넘겨졌다. 2년쯤 지나, 하퍼 부부는 가족이 늘어나 캐나다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에이브러햄슨 형제는 영국에서 지역 활동을 하다 왔다. 아내 줄리아와 함께 1953년에 길르앗을 졸업하였으며 그전에는 여러 해 동안 브루클린 본부에서 봉사했었다. 지부 감독자가 되었을 때 그는 31세였으며, 지부 일을 26년 이상 감독하게 되었다.

페로스 제도에서 전파하다

같은 해인 1954년 5월에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 형제가 아이슬란드와 셰틀랜드 제도 사이, 북대서양에 있는 작은 군도인 페로스 제도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제도에서 최초의 전도인은 아니었다. 오래 전인 1935년 여름에 두 파이오니아 자매가 그 곳에 여행했었다. 석 달간 머물면서, 그들은 많은 수의 서적과 소책자를 배포했다. 그러나 교직자들은 그 파이오니아들이 추방당하게 만들었다. 1948년부터 그 제도에 전파 활동이 어느 정도 다시 수행되었으나, 여러 가지 난관으로 활동이 제한을 받았다.

이제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 스벤 오게 닐센과 에드문 온스타트는 일을 더 잘 조직해야 했다. 그들은 곧 페로스 제도에서 가장 큰 스트뢰뫼 섬의 주읍인 토르스하운에서 아파트를 얻고, 방 하나를 왕국회관으로 꾸몄다. 읍 전체에 전파한 후에 작은 촌락들을 다음 목표로 삼았다.

전반적으로 페로스 주민들은 섬사람 근성이 강해서 마음을 잘 털어놓지 않고 결단력이 없으며 낯선 사람을 불신하려 드는 편이었기 때문에, 파이오니아들이 그들과 가까워지기까지는 시간과 인내가 요구되었다. 파이오니아들이 오면 종종 문을 잠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들이 구역에서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전도하기 시작해야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래야 사람들은 “위험”이 사라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대단했다. 제공한 서적이 자주 되돌아왔다. 때로 파이오니아들이 토르스하운 읍내로 돌아와 보면 우체국에서 그 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 다른 문제는 마을들에서 묵을 곳을 찾기가 불가능하다는 데 있었다. 토르스하운에서 마을들까지 당일 여행밖에 할 수 없었으므로 이것은 배를 더 많이 타야 함을 의미했다. 그리고 닐센 형제만 뱃멀미를 안 했다. 그러나 한 가지 해결책이 나왔다. 덴마크에서 와서 파이오니아 봉사에 가담한 한 형제가 양복점을 차렸는데, 함께 재원과 노력을 모은 끝에 텐트를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배낭과 침낭과 전도 가방과 텐트를 가지고 다니게 되어, 이제는 언덕을 넘어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녀도 밤에 거처를 찾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클라크스비크에서 어려웠던 일들

그 해 말 닐센 형제는 클라크스비크 읍으로 이동하였다. 우연의 일치로, 그가 도착하자마자 오래 끌어오던 분쟁이 그 절정에 도달했다. 지역 주민들은 덴마크 당국이 선정한 읍 병원의 원장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했다. 폭동이 터졌다! 저녁에는 쇠사슬을 전선에 던져서 읍내 전기가 모두 나갔다. 그래서 어두워진 후 감히 집 밖을 나서는 덴마크 사람은 화를 당할 판이었다!

그러나 닐센 형제는 온 마을이 벌집 쑤셔 놓은 것 같은 때에 어떻게 호별 봉사를 할 수 있었는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봉사 나가는 첫날 묘안이 떠올랐는데, 그 전이나 후에는 결코 써 보지 않은 방법이었습니다. 나는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집에 돌아올 때까지 다만 성서를 보이게 손에 들고 다닌 겁니다. 이런 식으로 나는 항상 사람들과 오랜 토론을 시작할 수 있었죠. 물론 그래도 사람들이 나를 안으로 초대할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요. 한 주부는 이런 말을 했죠.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당신이 항상 성서를 손에 들고 다니기 때문에 아무도 당신을 해칠 수 없다는 거에요.’”

많은 파이오니아들이 야외로 나서다

1957년 여름, 안데르스 안데르센이 페로스 제도로 파견되어 클라크스비크 구역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했다. 그는 또한 토르스하운에 새로 설립된 회중과, 남쪽에 있는 섬 수데뢰에서 전파하고 있던 온스타트 형제를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다음해에 스벤 몰베크와 루트 몰베크 부부가 도착했다. 이제 자매들도 야외에서 좋은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관심을 나타낸 그 고장 여자들도 더 잘 돌볼 수 있게 되었다. 독신 형제가 부인들을 정기적으로 재방문하는 것은 난처한 일이었던 것이다. 특히 남편이 장기간 고기잡이를 나갔을 때는 더욱 그러했다.

협회 영화로 증거함

협회 영화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와 「신세계 사회의 행복」은 작은 촌락들에서 좋은 소식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들은 증인이 한 지역 종파가 아닌 전세계적인 형제 관계임을 보여 주었다.

스트뢰뫼의 베스트만나에서 영화 상영이 예정되었다. 모두 80명이 넘는 성인과 어린이들이 상영 시간 오래 전에 장내를 가득 채웠다. 페로스 사람들에겐 기다리는 시간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엄격한 시간표란 없다. 단지 고깃배가 돌아올 때만 모두가 번개처럼 부두로 몰려간다. 이런 일이 협회 영화를 상영하던 도중에 일어났다. 한참 상영중인데 고동 소리가 귓전을 울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형제가 바다에서 돌아왔음을 알렸다. 그 순간 집회는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다. 모두 어느 배가 돌아왔는지 보려고 창가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모두 뛰어나갔다! 순식간에 홀은 텅 비고, 단지 영화 돌리는 사람과 노인 서너 명이 남아서 나머지를 보았다.

페로스 사람이 확고한 태도를 취하다

안데르센 형제는 북부의 섬들에서 증거하다가 관심을 나타낸 페로스 남자 욘 믹켈센을 만났다. 그러나 페로스 사람의 느긋한 기질 때문에 욘은 빨리 변화하지는 못했다. 두 자매 파이오니아가 이 관심자를 계속 돌보았고, 그들의 친절한 노력의 결과로 욘의 아내 소냐도 관심을 갖고 성서 연구에 가담했다. 때가 되자 남편과 아내 모두가 진리 편에 섰으며, 욘은 마침내 페로스 사람으로서는 최초의 장로로 임명되었다.

오래지 않아, 외로운 파이오니아들은 더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덴마크에서 이사 온 가족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는데, 왜냐하면 구역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이 선교인들만을 위한 것이지 가정을 가진 “일반인”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가운데서 일하며 생활하는 가족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최초로 이사 온 가족은 앙케르 뉘고르와 도라 뉘고르 그리고 네 자녀였다. 그들은 1959년에 도착해서 페로스 제도에서 증가에 훌륭한 기여를 했다.

처음 찾아온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말하자면, 페로스 구역에서 토양을 일구는 데 8년 내지 10년의 인내를 요구하는 고된 노력이 들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정면으로 반대를 받으며 진실한 사람들을 찾는 데 앞장섰다. 이제 이처럼 토양을 일군 사람들을 덜 고립된 덴마크의 구역으로 돌아가게 하고, 다른 파이오니아들이 그 일을 물려받게 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여겨졌다.

얼음과 눈의 땅, 그린란드로

1950년대 중반에, 두께가 3킬로미터나 되기도 하는 얼음으로 덮인 혹한의 거대한 섬, 얼음과 눈의 땅, 그린란드에도 좋은 소식을 소개할 때가 왔다. 여러 해 동안 그린란드는 덴마크의 식민지 상태에 있었고, 활동이 허락된 종교는 1900년에 철수한 모라비아 형제단과 덴마크 국립 교회뿐이었다. 그러나 1953년에 채택된 덴마크 신헌법으로 증인이 그 곳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955년 1월에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 크리스텐 라우리첸과 아르네 옐름이 배로 수도인 고트호프(누크)에 도착했다. 방대한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도를 출발점으로 하여 그들은 200개의 읍과 마을과 촌락에 흩어져 당시 2만 5000명의 주민 대부분이 살고 있는 1600킬로미터의 서해안을 따라 봉사했다.

주읍에서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들었다. 그러다 반응이 달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린란드의 교회장(이 나라의 고위 교직자)이 증인에 반대하는 팜플렛을 인쇄해서 주민들에게 배포했던 것이다. 그는 증인의 활동에 대해 강한 반감을 유발시켜 시초부터 막으려 했던 것이다.

해안을 따라 오르내리다

형제들은 흔들리지 않고 계속 전파하였다. 기념식을 행한 후, 여름철 장거리 전파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4월 말경, 계속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연안 여객선이 도착했다. 파이오니아들은 텐트를 구입하여 배에 올랐다.

그들은 홀스테인보르그, 에게데스민데, 야코프스하운, 탄광촌인 크브틀리그사트, 움만나크, 그리고 이 여정의 최북단으로서 출발점에서 1000킬로미터가 넘는 곳에 있는 우페르나비크 같은 읍들로 가게 되었다. 가는 곳마다 그린란드어 전도지 두어 가지를 한꺼번에 전하면서 좋은 소식을 전파했다.

다음 장거리 전파 여행은 고트호프에서 남쪽으로 500킬로미터가 넘는 곳에 있는 율리아네호프였다. 그 곳은 날씨도 더 온화했고, 모든 것이 더 푸르고 정감 있었다. 나르사크와 나노르달리크 그리고 쉬드프뢰벤을 거쳐, 형제들은 고트호프로 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그린란드에서의 첫 여름 장거리 전파 여행을 마쳤다. 서해안 전체가 여호와의 목적에 관해 증거를 받은 것이다.

초기의 이러한 여행은 분명히 형제들의 체험을 풍부히 해주었다. 따뜻한 침대에서 자는 것이 더 좋지만, 텐트 생활도 해보니까 나름대로 멋이 있었다. 그러나 텐트 생활의 한 가지 문제점은 홀스테인보르그 이북의 그린란드인들이 사용하는 그린란드의 썰매 끄는 개와 관련된 일이었다. 개들이 텐트의 끈 밑으로 뛰어다니며, 끈을 물어뜯곤 했다. 형제들은 식품을 단단히 포장하지 않고서는 절대 텐트 안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개들이 들어와 전부 먹어 치웠다. 따라서 그들은 보통 식품을 헛간 지붕 위에 두거나 가방에 넣어서 개가 접근하지 못하게 기둥에 높이 매달았다. 그러나 움만나크에서는 이것도 안 통했다. 개들이 뛰어올라 식품 가방에 구멍을 내었다. 그러자 안에 들어 있던 소세지, 치즈, 버터 등이 튀어나와 개들이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때때로 형제들은 교직자들의 반대를 직면했으나 전반적인 경험으로는, 그린란드인은 친절하고 접근하기 쉬우며 후대하는 사람들이었다. 종종 여러 사람이 저녁에 찾아와서는 질문을 하곤 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 구역은 많은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얼마나 여러 해를 인내하고 나서야 증가가 나타날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린란드에 대한 지원의 증가

증인의 활동을 설명해 주는 훌륭한 도구는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 영화였다. 겨울에 고트호프에서 세 번 상영했는데 항상 만원이었다. 1957년이 되자 「신세계 사회의 행복」이라는 영화가 들어왔는데, 그린란드어 해설이 테이프에 녹음되어 있어 필름과 함께 틀었다. 여러 해 후, 그린란드의 종교적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린란드의 교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의 증인이 가장 적극적이다. 그들은 해안을 따라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천년기의 영광에 대한 영화를 보여 주는데, 이 다채로운 화면은 분명히 깊은 인상을 준다.”

1958년에 파이오니아가 두 배로 보강되어 4명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봄에 한 사람이 더 도착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게 되었는가? 라우리첸 형제가 뉴욕 시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 참석하러 갔다가 영국인 파이오니아 자매 조안 브램험을 만났다. 그래서 사연이 생긴 것이다. 그 자매는 그의 아내이자 동역자가 되었다. 그 자매는 덴마크어와 그린란드어를 둘 다 배우는 놀라운 일을 해냈다. 이제 라우리첸 부부가 그린란드의 남부 구역을 맡고, 다른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계속 중부와 북부 구역을 맡았다.

덴마크에서—발전과 까부르는 일

덴마크에서 발전은 계속되어 1955년 4월에는 9207명의 전도인이 「그리스도교국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세상의 빛”은 어느 쪽인가?」 소책자를 배포했다. 다음 큰 행사는 여름 대회였다. 거의 6000명의 덴마크인이 “승리의 왕국”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으로 여행하였다. 덴마크 형제 대부분이 국제 대회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회 프로그램을 통해, 그리고 수많은 노르웨이 및 스웨덴 형제들은 물론 다른 여러 나라 대표자들과의 교제를 통해 그들은 더욱 열심히 봉사하는 데 필요한 영적 활력소를 얻었다.

그러나 모두가 즐거움에 동참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전도인은 세계 본부에서 온 새로운 지침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였다. 불만을 가진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생활, 깨끗한 도덕관, 회개하지 않는 범죄자의 제명 처분에 관해 「파수대」지에서 그렇게 많이 강조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질주의와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빠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계속 충실했으며, 조직은 내적으로 강화되었다.

대회가 옥외로 옮겨지다

여러 해 동안 학교 교실이나 음악당 혹은 체육관에서 대회를 보다가, 이제 많은 대회 참석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옥외로 옮기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1956년에, 조경이 공원과 같이 아름다운 오르후스 스타디움을 임대하였다. 오늘날에도 즐겨 사용하는 대회 숙박의 한 형태인 캠프장이 준비되어 약 3000명의 형제 자매가 사용하였다.

공개 강연은 1만 명 이상이 들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대회의 정점은 당시 소련 내의 증인들의 처우에 대해 항의하여 소련 수상 니콜라이 A. 불가닌에게 보내는 결의문의 채택이었다. 이 결의문의 주요점이 28개 신문에 게재되었다. 이것은 덴마크같이 작은 나라로서는 상당히 폭넓은 여론의 반응이었다.

전파의 법적 장애를 극복하다

수개월 후, 복음 전도 활동과 관련된 소송 사건이 극에 달했다. 상무부는 워치 타워 협회의 활동이 잡지와 서적을 생산하여 여호와의 증인에 의해 대중에게 배포하는 일을 포함하기 때문에 사실상 상업적이라고 주장해 왔었다. 따라서 여호와의 증인의 호별 전파 활동은 엄격히 통제되는 폐점 시간을 포함하여 상법의 규제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파 사업의 비영리적 성격을 확증하기 위하여 그 사안을 대법원까지 올렸으나, 판결은 증인에게 불리하게 내려졌다.

그 결과 별도의 상업적 출판 및 인쇄 법인이 설립되어, 잡지와 다른 성서 출판물들을 회중들이 비상업적 성서 교육 사업에 사용하도록 공급하는 일을 관리했다. 덴마크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는 비상업적 성격을 유지하며 호별 봉사를 포함한 증인의 영적 활동을 계속 지도하였고, 호별 봉사는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수년 후 정부는 이번에는 증인 개개인이 면허 없이 영업 시간 외에 호별에서 잡지를 배부하는 권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 왔다. 다시 대법원은 증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형제들은 성서 출판물을 읽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무료로 배부함으로써 그 활동이 비상업적 성격임을 확증하였고, 자신들의 헌금으로 그 모든 활동을 지원하였다.

새 지부—인쇄소를 갖추다

쇤드레 파산베이의 벧엘 집이 너무 비좁아지자, 새 지부 건물의 건축 계획이 수립되었다. 세속 인쇄소의 임금 상승과 파업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는 「파수대」와 「깰 때이다」의 모든 인쇄를 지부에서 하는 것이 실용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1947년에는 그러한 파업으로 잡지 인쇄가 3개월간 중단되기도 했다.)

따라서 비룸 교외에 수목이 우거진 쾌적한 지역에서 적당한 부지를 찾아냈으며, 1956년 말 노어 형제가 건축 공사 검사차 방문했을 때는 콘크리트를 붓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하필이면 모든 건축 자진 봉사자들이 중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바로 그 때 노어 형제가 현장에 도착하긴 했지만!

온화한 겨울 날씨와 많은 자진 봉사자들에 힘입어 콘크리트 작업은 1957년 2월에 완료되었고, 8월 31일에는 새 지부 건물의 봉헌 준비가 되었다. 24명의 벧엘 가족은 이미 한 달간 생활하면서, 세속 인쇄소에서 인쇄하지 않은 최초의 잡지인 덴마크어 「파수대」와 「깰 때이다」 10월 1일 호와 8일 호를 그 때 인쇄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내내 「깰 때이다」는 「파수대」와 같이 월 2회 발행되었으며, 두 잡지 모두 간편하게 작아지면서 지면은 16면에서 24면으로 늘었다.

국제 대회를 주최하다

1961년에 최초로 덴마크 형제들은 국제 대회의 주최자로 일하게 되었다. 전국 축구 대회가 많이 열리는 대형 축구 경기장인 코펜하겐 이드레츠파르크를 임대하였다. 당국으로부터 수없이 허가를 받는 일, 1만 5000여 개소의 민박과 800개의 호텔 객실을 확보하는 일, 그리고 5천여 명을 수용하는 캠프장을 준비하는 일 등 광범위한 준비 작업이 끝나고 마침내 30여 개 국에서 오는 많은 손님을 맞을 준비가 완료되었다.

마지막 순간에 심각한 문제가 튀어나왔다. 덴마크 항공 이사회는 미국에서 2691명의 대회 참석자가 탑승하고 올 27대의 비행기 착륙 허가를 거부했다. 당혹스런 시간이 뒤따랐고 휴가중이던 수상에게 직접 청원을 한 후에야 착륙 허가가 나서 미국에 있는 항공사에 급전을 쳤다. 코펜하겐으로 떠날 첫 비행기의 이륙 예정 시간 겨우 한두 시간 전이었다.

그 대회는 가슴 벅찬 경험이었다. 참석자들은 많은 국적과 인종으로 구성되었지만 대회 주제처럼 “연합된 숭배자들”임을 보여 주었다. 프로그램은 다섯 개 언어로 동시 진행되었으므로 덴마크어,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핀란드어 그리고 영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대회를 들을 수 있었다. 일요일 오후에 대회장은 만원이었다. 인근 공원에까지 사람이 넘쳐 흘러서, 그 곳에서도 확성기를 통해 수천 명이 공개 강연을 들었다. 노어 형제의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소식이 3만 3513명에게 전달되었다.

지도급 교직자들의 논평에서 그들의 우려가 드러났다. 그들은 이렇게 시인했다. “증인들은 바쁘다.” “이 종파는 증거를 한다—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사람들의 자기 희생 정신은 보기 드문 일이다.” 교직자들은 이렇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바쁜가?” “우리는 무엇에 관해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증거하고 있는가?” “우리의 마음은 냉담해지고 회의에 빠졌는가?” 이러한 공개 발언은 대회와 관련하여 엄청난 증거가 행해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사상 최대의 대회

1969년에 덴마크 형제들은 또다시 스칸디나비아 역사상 최대의 대회인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를 주최하는 특권을 가졌다. 여러 면에서 이 대회는 1961년에 열렸던 대회와 유사한 방식으로 열렸는데 단지 모든 면에서 규모가 더 컸다. 그리고 4만 2073명이 노어 형제의 공개 강연에 참석하여 참으로 즐거웠다!

덴마크 신문들은 대회 기사에 8000칼럼 센티미터가 넘는 지면을 할애했다. 코펜하겐 최대 일간지 중 하나인 「베를링스케 티덴데」지는 다음과 같은 사설을 실었다. “이 곳 덴마크에서 진정한 대중 집회는 드물다. ·⁠·⁠· 그러므로 이번 주에 코펜하겐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국제 대회에 많은 관심이 쏠린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 여호와의 증인은 국립 교회에게 하나의 도전이다. ·⁠·⁠· 교회가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데 있어서, 여호와의 증인이 자신들의 천년기 꿈을 전파하기 위해 방방곡곡에서 행하는 그 열심의 반만이라도 따라가기를 사람들은 바랄 것이다.”

사진을 교육 보조물로

성서 드라마는 지역 대회에서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절정이다. 덴마크에서는 1970년 초 이래 이 마련과 관련하여 특이한 점이 있다. 드라마의 많은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 슬라이드물로 제작한다. 왜 그렇게 하는가?

우선 그것은 페로스 제도와 그린란드의 지역 대회에서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 곳에서는 모든 드라마의 배역을 맡을 형제들이 충분치 않아서, 드라마를 소리로밖에 들려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영화 회사의 간부였던 한 형제가 아이디어를 냈다. 드라마 장면들의 슬라이드를 음성에 맞춰서 보여 주면 되지 않을까?

시범적으로 실시해 보니까 결과가 좋았다. 그 후로 질적인 향상이 꾸준히 있었다. 자연스런 무대 장치를 만들기 위해 지역 대회에서 사용하는 것보다 더 많은 소도구들이 사용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대형 무대 장치가 제작되는데, 이를테면 바벨론의 시장, 로마의 집, 예루살렘의 성문 등이 모두 목재와 폴리스티렌으로 만들어진다. 그 결과 슬라이드로 보여 줄 때 매우 설득력 있고 생동감 있는 드라마가 된다. 이 슬라이드는 이제 페로스 제도와 그린란드뿐 아니라 드라마를 직접 보여 주는 것이 실제적이 못 되는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페로스 제도에서 기반이 튼튼해지다

1960년대 말 무렵에는 페로스 제도에서 진리의 기반이 튼튼해졌다. 덴마크에서 이사 온 가족들은 야외에서 훌륭히 지원하고 회중 강화에도 기여했다. 일부 지역에서 그들은 지방 회중과 협력하여 왕국회관이 딸린 집을 지었다. 1967년 10월에 토르스하운에서는 라스무스 뉘고르의 집에 있는 왕국회관이 봉헌되었다. 다음해 비슷한 회관이 클라크스비크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지역 주민들에게 증인이 거기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인상을 더욱 깊이 심어 주었다.

더 많은 페로스 주민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어서 사람들은 또한 좋은 인상을 받았다. 예를 들면, 안나 놀쇠는 1961년에 코펜하겐에서 진리를 배우고 고향인 페로스 제도로 돌아와 전파하였으며 곧 동기간 13명 중 3명이 침례를 받았다. 그 후로 그 자매의 가족 가운데서 진리는 물에 파문이 일듯 퍼져 나가 3대에 걸쳐 증인이 있게 되었다. 다른 가족들에게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큰” 대회가 토르스하운에서

토르스하운에서 최초의 지역 대회가 1971년에 계획되었다. 라스무스 뉘고르의 집은 대회 본부가 되어 활동으로 분주하게 됐다. 그리고 처음으로 전도인들이 샌드위치 광고판을 매고 토르스하운의 거리에 나와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그 대회는 461명이 공개 강연에 참석하는 놀라운 대회였다. 이 대회는 또한 덴마크에서 온 몇몇 전도인들로 하여금 이제 더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이 곳으로 이사하도록 결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린란드에서의 발전

그린란드에서 소수의 파이오니아들은, 1961년 이래로 덴마크에서 이주해 온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꾸준히 전파했다. 많은 전파가 이루어지고 그린란드 사람들은 유순하게 듣기는 하였으나 가시적인 성과는 거의 없었다. 한 가지 큰 문제는 언어였다. 일부 그린란드인이 덴마크어를 약간 했으나 깊은 영적 대화를 나눌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전도인들이 비록 그린란드어로 전파하느라고 애쓰고는 있었지만 성서를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잘 배운 경우는 드물었다. 종종 그들은 간단한 말을 외워서 서론으로 겨우 사용하고는 집주인에게 성서를 읽어 주었다. 얼마 동안은 증거 카드와 녹음된 설교를 사용하였다.

그린란드어로 진리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더 많은 출판물이 명백히 필요했다. 그러나 누가 번역을 할 수 있는가? 그 때까지 세속 번역자가 사용되었으나, 아주 만족스런 해결책은 못 되었다. 1965년에 지부로부터 방문한 이외르겐 라르센은 라우리첸 자매에게 그린란드어 번역자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을 격려하였다. 그 자매는 도전을 받아들였다. 소책자 한 가지와 전도지 몇 가지가 처음에 나왔고, 이어 1973년 1월부터는 「파수대」지가 「나파술리아크 알라페르노르수이피크」라는 그린란드어 명칭으로 16면의 월간지로 발행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대한 진일보였다. 이제 그 고장 언어로 철저히 증거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같은 해에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이 발행되어 성서 연구 활동에 또 하나의 훌륭한 도움이 되었다.

또한 고트호프의 전도인들은 보다 적절한 집회 장소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그 읍 자체가 주택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어서, 왕국회관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나 시내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 형제가 고트호프 협만이 내려다보이는 바위 위에 지은 작은 통나무집을 구입했다. 그래서 1970년에 덴마크 회중들의 재정 지원과 특별 파이오니아들로부터 건축 기술의 도움을 받아 그 집을 증축하여 왕국회관과 두 파이오니아 부부를 위한 방들을 마련할 수 있었다.

더 많은 파이오니아들이 임명되었으며 다음 서너 해 동안 전도인들과 가족들이 해안을 따라 몇 개 읍에 정착하였다. 1973-74년쯤에 8개 읍에 이미 작은 집단 내지 회중이 있게 되었다. 마침내 1973년에 한 여자가 진리의 편에 서게 되어 그린란드에서 침례받은 첫 그린란드인이 되었다. 1976년에는 다른 그린란드 자매가 가담했다. 그러나 언제 진정한 의미의 추수가 시작될 것인가?

덴마크 최초의 대회 회관

한편, 덴마크 역시 적절한 순회 대회 회관을 찾는 데 어려움을 갖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미 형제들이 자체 설계로 순회 대회 회관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덴마크에서도 해결책이 될 것인가?

핀 섬과 유틀란트 반도의 일단의 장로들이 가능성을 조사했다. 형제들의 호응이 매우 좋아서 그레이트벨트 해협(셸란 섬과 핀 섬 사이의 해협) 서쪽의 여러 순회구를 위한 대회 회관을 건축하기로 결정했다. 실케보르그 읍 교외로 수목이 울창한 약 2헥타르의 땅을 구입했다. 1978년 3월 18일에 땅을 파기 시작하여 하루 모자라는 일년 뒤, 900석의 강당과 300명 수용 규모의 식당 시설을 비롯하여 필요한 설비를 갖춘 H자 모양의 거대한 붉은 벽돌 건물이 봉헌될 준비가 되었다.

새 지부

한편 다른 신권적 건축 사업이 계획되었다. 비룸의 지부가 비좁아 답답한 상태였다. 넓은 시설이 절실히 필요했다.

코펜하겐 서쪽 72킬로미터 내에 있는 홀베크 읍에서 적당한 부지가 발견되었다. 아름다운 홀베크 협곡이 내다보이는 약 6헥타르의 구릉 지대였다. 계획이 수립되어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측량국에 있는 한 우호적인 관리는 연건평이 1만 4000평방 미터 가량 되는 이 복합 건물이 증인들만으로 건축되리라는 것을 알고는 그런 시도는 하지 말도록 강력히 권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건축 계획 조정자 필리프 호프만은 말했다. “평균 200명에 달하는 건축 현장 가족이 구성되었으며 주말에는 자진 봉사자들의 훌륭한 지원을 받았습니다. 수주일 동안 기온이 영하 10도에서 20도까지 떨어진 금세기 최고의 추운 겨울조차 그들을 중단시킬 수 없었습니다. 단지 100주 만인 1983년 5월 21일 건물은 봉헌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벧엘 가족이 새 집으로 이사하다

벧엘 가족은 1982년 8월에 새 집으로 이사했다. 함께 이사하지 않은 한 부부는 리처드 에이브러햄슨과 줄리아 에이브러햄슨이었다. 여러 해 동안 에이브러햄슨 형제는 덴마크에서 활동을 이끌어 왔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덴마크 증인들의 마음에 새겨졌다. 그러나 1980년 말에 그들은 뉴욕 브루클린의 협회 세계 본부로 임명되어서, 덴마크 벧엘 가족과 1981년 1월 초에 섭섭한 작별을 해야 했다.

지부 조정 위원 직책은 이미 1951년부터 전 시간 봉사를 해왔고 1959년과 1965년 두 차례에 걸쳐 길르앗에서 훈련받고 졸업한 이외르겐 라르센에게 임명되었다. 그는 아내 안나와 함께 여러 해 동안 여행하는 감독자로서 일했었으며 그 후 벧엘 봉사부와 번역부에서 일했었다.

지부 복합 건물 봉헌식

봉헌식이 있기 이삼 일 전, 외부 납품업자와 정부 관리들을 초대한 특별 초청회가 있었다. 건물 견학중 그들은 자재 선택과 정교한 솜씨 그리고 내부 공사의 마무리가 과거 자신들이 어릴 적부터 알고는 있었으나 결코 보지는 못했던 수준임을 보고 칭찬하였다. 선의로 염려했던 측량국의 그 관리는 처음에 그가 우려했던 말을 상기시켜 주자,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그 때는 여러분이 어떤 조직을 갖고 있는지 몰랐었지요.”

봉헌식에 초대된 700명의 형제 자매들은 매혹적인 건물들에 감탄했을 뿐 아니라 복합 건물의 규모 그 자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크리스티안 뢰메르는 이렇게 말했다. “이 건물들을 보고 거기에 들인 그 모든 노력을 생각할 때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모두는 통치체의 대니얼 시들릭이 봉헌 연설 중에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데는 비용이 든다고 지적할 때 공감하였다. 이 건축 계획은 금전과 노력 모두가 들었으나, 그러한 희생은 여호와의 일을 진전시키는 데 기여하기 때문에 행복하게 드릴 수 있었다.

영적 필요가 채워지다

새 지부 복합 건물에는 충분한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계획을 추진할 수 있도록 더 많은 번역자들을 가지려던 숙원이 충족될 수 있었다. 덴마크어 「파수대」와 「깰 때이다」는 24면에서 32면으로 증면되었고 연감이 덴마크어로 발행되기 시작했으며,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 번역이 시작되었다.

두 가지 출판물은 덴마크 역사에 남을 일이었다. 1985년 4월에 발표된 「신세계역 성경」과 컴퓨터 장비에 의해 편집되어 1988년에 발행된 「대형 컨코던스」가 그것이다. 덴마크 국립 교회 아닌 단체가 성서 전역본을 발행한 것은 이것이 최초였으며, 그렇게 광범위한 성서 컨코던스가 덴마크어로 인쇄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한편 새로운 시설에 여유 공간이 있어서 광범위한 「워치 타워 출판물 색인 1930-1985」의 작업이 가능해졌다. 성서 연구생을 위한 이 가치 있는 도구는 1991년 대회에서 발표되었다. 이 대회에서 또 하나의 최초의 일로서, 덴마크 지부 감독하에 사용되는 3개 언어로 동시 발행된 새로운 서적이 나왔다. 바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책이 덴마크어, 페로스어, 그린란드어로 발표된 것이다.

새로운 음향 스튜디오가 설치되어 양질의 음성 테이프 녹음이 가능해졌다.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 전체와 히브리어 성경 절반 가량이 현재까지 녹음되었으며, 시력이 약하거나 읽는 데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파수대」지 기사들이 녹음되어 월 2회 350명의 예약자들에게 우송되고 있다.

또 다른 진일보는 전산화된 사진 식자와 현대식 오프셋 인쇄로의 전환이다. 공장 감독자 아르네 S. 닐센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도전이자 동시에 축복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모든 인쇄 장비를 교체하고 모든 요원이 새 기계의 사용법을 배우고 새로운 작업 순서를 따라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낱장을 공급하는 매엽식(枚葉式) 윤전기 한 대가 윙윙거리며 덴마크어, 아이슬란드어, 그린란드어로 잡지를 계속 인쇄한다. 그리고 덴마크어 잡지가 4색으로 인쇄되기 시작할 때 또 한 대의 인쇄기가 공장에 추가되었다.

지부 건축 계획이 완성됨에 따라 다음 주요 계획이 시작될 수 있었다. 이 나라 동부의 형제들이 홀베크의 벧엘 남쪽 50킬로미터 근방 헤를루프말레 마을 근처에 있는 빈 공장 건물 하나를 구입했다. 구내에는 네 날개 달린 농장 건물과 2층짜리 주택, 큰 공작실, 넓은 대장간이 들어앉아 건물들이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건축가들과 많은 자원자들이 그 전체가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데 성공하여, 지금은 셸란 섬과 묀 섬, 롤란 섬, 팔스테르 섬을 위한 순회 대회 회관으로 사용된다. 1986년 4월 26일의 봉헌식 이래로 덴마크의 거의 모든 회중은 자체 대회 회관에서 순회 대회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속성 건축 왕국회관

뒤이어 덴마크 신권 건축 역사에 흥분케 하는 또 하나의 장이 열렸다. 전에는 들어보지 못하던 것이 소개되었는데, 바로 속성 건축 왕국회관이었다.

형제들이 지은 최초의 왕국회관은 1949년에 완공되었다. 그리고 1968년에 한 지역의 회중들은 그 지역의 모든 회중의 왕국회관 건축을 재정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종의 공동체인 지역 왕국회관 연합회를 구성했다. (비교 고린도 후 8:14) 이 발상은 나라 전체로 확산되어 거의 모든 회중이 자체 왕국회관을 건축하거나 구입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에는 일부 오래 된 왕국회관들이 부적당하게 되고 많은 경우는 너무 작았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책으로 다른 나라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속성 건축 방식이 제안되었다. 일부에서는 의심했다. 이 방식이, 벽돌로 된 외벽이 하중을 지탱하게 되어 있는 덴마크의 건축 양식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덴마크 주택 당국의 엄격한 요구 사항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1986년에 건축가들과 기술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실현 가능한 접근 방법을 모색했다. 지방 회중이 모든 준비 작업을 마치면, 200명의 숙련공이 삼 일간 집중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1986년 9월 최초의 속성 건축 왕국회관이 성공적으로 세워졌을 때 사기가 충천했다.

그 이후로 당국은 이 속성 방식에 대해 연속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현재, 덴마크에 36개의 속성 건축 왕국회관이 세워졌고, 더 많은 수가 계획중이다. 건축 팀이 1991년 8월에 야코프스하운으로 여행해서 세계 최북단 왕국회관 중 하나를 건축한 것은 특히 감격적인 일이었다.

토르스하운의 새 왕국회관

페로스 제도도 소홀히 여겨지지 않았다. 토르스하운 전도인들의 증가로 인해 새 집회 장소가 필요하였는데, 그 고장 형제들에게는 벅찬 계획이었다. 그러나 1983년 대회 후 10명 내지 15명의 전도인이 덴마크에서 이 제도로 이사했다. 몇 사람은 홀베크의 벧엘 건축 공사에서 익힌 좋은 경험을 가지고 왔다.

공사는 1984년 2월에 많은 착암 작업과 폭파 작업으로 시작했다. 왜냐하면 건물이 문자 그대로 바위 위에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하실은 콘크리트였고 나머지 부분은 나무였으며 지붕은 잔디를 덮는 것으로서, 지금 다시 유행하는 고대 페로스 양식이었다. 속성 건축 왕국회관은 아니었지만 많은 주목을 끌었다. 1985년 6월 10일의 봉헌식 날 텔레비전이 처음으로 뉴스 시간에 여호와의 증인을 언급하였고, 라디오 방송은 한 지방 장로와 인터뷰하였으며, 대부분의 신문들이 새 회관의 기사와 사진을 실었다.

페로스어로 된 새로운 출판물들

대부분의 페로스인들이 덴마크어를 읽고 말하기 때문에 페로스 형제들은 덴마크어 출판물로 일을 잘해 왔다. 그러나 고장 언어로 된 출판물의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안나 놀쇠의 딸 페투르비외르그 뉘고르에게 번역 책임이 맡겨져 1980년대 중반에 협회 서적과 소책자 몇 가지가 페로스어로 발행되었다. 구역 주민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된 매력적인 서적을 보았을 때 훌륭한 증거가 되었다. 그리고 1989년에 노래책이 페로스어로 발표되자 회중은 즐거워하였다. 이제 여호와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문자적 찬양의 노래를 또 하나의 언어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근년에 페로스 제도에서 구역의 새로 나온 사람이나 회중 안에서 자라난 청소년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다. 페로스 제도의 초기 전도인들이 1948년에 꿈꾸던 일이 이제는 현실이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여러 해 동안 수십 명의 형제 자매들이 나타낸 인내를 축복하셔서,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평화의 왕국에 대한 정기적인 증거가 대서양의 이 작은 섬들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마침내—그린란드에서 추수하다!

약 30년간 인내하며 왕국 씨를 뿌리고 물 준 후에, 마침내 그린란드의 밭은 무르익어 추수하게 되었다. 1983년에 고트호프에서 한 그룹의 그린란드 젊은이들이 연구하고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잘 발전했다. 이것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돌파구가 될 것인가? 처음에 그들은 수줍어하고 활발하지 못했다. 덴마크어 회중에 참석하였고 일부만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용기가 자라났고 여호와와 진리에 대한 사랑 역시 커갔다. 고트호프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인 크리스텐 모르텐센과 헬레나 모르텐센 부부는 이렇게 전형적인 경험담을 이야기한다.

“그중에 한 사람은 약 일년간 연구하였으나 이 파티 저 파티에 항상 쫓아다니느라 연구가 비정기적이던 소냐라는 소녀였습니다. 얼마 있다가 그 소녀는 한 남자와 동거에 들어갔는데, 이것은 최소한 연구는 정기적이 될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제 그 소녀에게 진리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졌습니다. 소냐는 흡연을 중단하고, 음주와 떠들썩한 파티에 가는 일을 그만두고 교회에서 탈퇴했습니다. 함께 사는 빅고는 말수가 아주 적은 편이라 전도인들이 그에게 진정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소냐는 자신이 배우는 것을 그에게 말해 주었고 서서히 그의 관심도 자랐습니다. 처음에 그는 너무 수줍어 왕국회관의 정규 집회에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린란드어로 된 슬라이드 제공물을 그에게 개인적으로 보여 주는 마련을 했습니다. 실로, 그는 그 연재물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이윽고 그는 연구에 함께하기로 동의하였으며, 이제 왕국회관에서 더욱 편안함을 느끼게 되어 집회에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두 사람은 결혼하였고 여호와께 헌신하였으며 침례를 받았다. 후에 그들은 전 시간 봉사를 받아들였으며, 지금 빅고 크리스텐센은 최초의 그린란드인 장로로 일하고 있다.

그러한 새로운 왕국 선포자들은 자신들이 배운 모든 좋은 것들에 관해 친구들에게 열렬히 말하였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가정 성서 연구에 초대하였으며, 그 친구들 중 몇몇은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어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회중은 과거의 나쁜 교제를 선한 교제로 대치하는 신권적 분위기를 형성했으며, 그러한 분위기 가운데서 새로운 관심자들은 그들끼리 힘을 북돋울 수 있었다. 그 때 이후로, 고트호프 회중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야코프스하운에서의 증가

유사한 일이 북극권에서 300킬로미터 북쪽에 위치한 야코프스하운에서 일어났다. 1985/86년 겨울에 특별 파이오니아 부부, 보 크리스티안센과 헬렌 크리스티안센은 그 곳에서 그린란드어 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일년간에 걸쳐 약 50명의 사람이 왕국회관에 왔으나, 대부분 단 한 번뿐이었다. 그러나 소수의 충실한 핵심체가 정기적으로 왔다.

진리가 한 작은 가족에게 뿌리를 내리고 그들에게서 퍼져 나가자 진정한 발전이 있기 시작했다. 사라는 처음부터 이것이 진리임을 이해했고, 남편과 세 자녀는 처음에는 호기심을 보였다. 그러나 나중에 남편 닐스는 가까운 마을에 사는 누이 나야에게 증거했다. 나야는 남편이 저인망 어선을 타고 출어중이었으므로, 야코프스하운으로 와서 닐스와 사라의 집에 머물면서 그들과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한편, 나야의 남편 텔레는 저인망 어선을 타고서 “신약”을 읽고 있었다. 아내가 성서를 연구하고 있다는 말을 이미 들은 그는 종교심이 있는 사람인지라 증인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또한 아내에게 이혼하겠다고 위협했고, 실제로 별거 서류는 이미 우송한 상태였다. 어선 일을 마치자 그는 곧장 아내에게 가서 자기 마을로 데려왔다. 그러나 오랜 토론 끝에, 그는 아내가 말해 준 것을 논파할 만큼 자신이 성서를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깨달았다.

결심을 하고 두 사람은 야코프스하운으로 다시 가서 닐스와 사라 부부 집으로 옮겼다. 텔레는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부르고는, 와서 성서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걷고 있음을 인정했다.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흡연을 중단했으며 교회를 탈퇴했다. 한 주 후에는 자신이 전도인이 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충실히 집회에 참석했고, 두 달 뒤 고트호프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그는 “이제는 전도인이 될 수 있나요?” 하고 물었다. 물론 될 수 있었다. 1990년 여름에 그와 나야는 닐스와 함께 침례를 받았다. 약 일년 뒤 나야는 정규 파이오니아 대열에 가담했다. “지금까지 아홉 사람이 침례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며 크리스티안센 형제는 즐거워한다. “여호와께서 진실한 사람들을 부르실 때 일어나는 일을 보면 실로 경탄스럽습니다.”

그린란드 북부의 전망

크리스티안센 형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계속 삼 년간 우리가 즐긴 또 다른 특권은 북부의 격지 구역인 움만나크와 우페르나비크로 전파 여행을 간 일이었습니다. 이 곳은 바다표범 사냥꾼 세상인데, 경관이 기가 막히게 아름답습니다. 작은 벽촌의 생활 양상은 현대화의 물결이 몰려오고 있는 도회지와는 딴판이지만, 이 벽지에도 모든 사람에게 왕국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우호적이고, 많은 사람들이 귀기울여 들으며, 협회의 최근 출판물들이 널리 배포되고 있습니다. 분명히 거두어 들이기를 기다리는 진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1990년 여름, 야코프스하운에서 비교적 새로운 전도인 다섯 명이 주변의 촌락들과 벽지로 2주간의 전파 여행을 나갔다. 그 곳에서 그린란드 토박이 전도인들이 증거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다섯 명의 전도인은 세 대의 소형 고속 모터보트로 2000킬로미터를 여행했다. 배들이 보통 정박하지 않으며 이전에 아무도 전파한 적이 없는 작은 벽촌까지도 좋은 소식을 들었다. 전도인들은 북위 거의 75도에 있는—악마의 엄지손가락이라고 불리는—쿨로르수아크까지 올라갔다.

악마의 엄지손가락 북쪽으로 얼음 덮인 해안이 시작되어, 다음 300킬로미터는 완전히 황무지다. 그 다음 더 북쪽에 사람이 사는 곳들이 있는데, 아직도 사실상 봉사되지 않은 구역이다. 그러나 1989년 1월에 고트호프의 한 자매가 그린란드 최북단 읍인 툴레에서 세속 일로 두어 주일 머물렀다. 그 자매는 그 기회를 이용해 주민들에게 전파했다. 그 이후, 툴레 출신의 한 소녀가 고트호프의 학교에 다닐 때 연구하기 시작했다가 툴레로 돌아갔는데 지금 녹음 테이프로 성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배우고 있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곳 “땅끝까지” 왕국 증거가 행해지고 있다.—사도 1:8.

피와 관련된 문제들

진리를 받아들인 모든 그린란드 사람들은 사실상 젊은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극복해야 했던 문제들은 종교 교리가 아니라 부도덕, 알콜 남용 그리고 친구와 친척의 반대와 관련된 것들이다. 모두가 서로를 빤히 아는 마을에서 전파하는 데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새로운 사람들에게 또 다른 도전은 피에 대한 합당한 성경적 견해였다. 많은 그린란드인들은 그 고장의 음식 즉 바다표범이나, 고래, 조류, 기타 사냥한 고기를 즐긴다. 그러나 증인에게 있어서 성경적 문제는 사냥한 고기가 항상 피를 적절히 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피를 적절히 뺀 고기를 구할 수 있는 그린란드 형제들은 거의 없으며, 따라서 오랫동안 그들은 기꺼이 그러한 고기 없이 생활하고 있다.

야코프스하운의 아네의 경우가 좋은 예다. 1990년 봄에 아네는 자궁외 임신으로 입원하였다. 응급 상황이었다! 자매와 남편 모두가 새로 침례받은 사람들로서 갑자기 피의 의학적 사용에 관한 논쟁에 말려든 것이다. 그들은 의사에게 ‘피를 멀리’하는 그리스도인의 견해에는 수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는 점을 설명하였다. (사도 15:29) 의사는 무혈 수술에 동의했다. 그러나 아네는 수술에서 살아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수술실로 실려 가면서 용기를 내어 남편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우리는 신세계에서 만날 거에요.”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며, 그들은 바로 다음날 서로 얼싸안았다. 그러나 이제 시장기를 느낀 아네는 새로운 각도에서 피 문제를 직면해야 했다. 병원에서는 피를 적절히 제거하지 않은 그린란드식 음식만을 제공했기 때문에, 식사하려면 남편이 집에서 음식을 가져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영적 필요를 채움

그린란드 해안을 따라 사는 주민들은 한결같이 성서를 깊이 존중한다. 그래서 그린란드어로 출판된 「나의 성서 이야기 책」이 많은 가정에 전해졌다. 몇몇 읍에서 20 내지 30퍼센트의 가정이 이 책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벽촌에서는 최소한 절반의 가정이 갖고 있다.

거리가 멀고 여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모든 회중이 순회 대회나 특별 대회일에 모이는 일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마련은 지방 회중에서 수행되는데, 회중이 함께 모여 덴마크에서 이미 열린 대회의 녹음 테이프를 듣거나 비디오 녹화물을 시청한다. 그러나 일년에 한 번 연례 지역 대회에는 해안을 따라 사는 모든 전도인이 함께 모인다. 많은 새로운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한 번에 많은 동료 신자들과 교제하는 드문 기회가 되며, 작은 회중에 있는 파이오니아들에게는 다른 전 시간 봉사자들과의 귀중한 재회의 기회가 된다.

1990년 2월에 그린란드의 회중들은 충격을 받았다. 51세밖에 안 된 요안 라우리첸 자매가 갑자기 심장 마비로 사망한 것이다. 여러 해 동안 협회 출판물을 그린란드어로 번역하는 데 있어서 자매는 큰 힘이 되었었다. 자매의 남편 크리스텐은 크나큰 개인적 상처를 받았으며, 얼음과 혹한의 나라에 있는 회중들도 그러했다.

라우리첸 형제는 아내의 사망 후에도 약 일년간 그린란드에서 봉사를 계속하다가, 건강 문제로 덴마크로 돌아와야 했다. 여러 해 동안의 선교인 봉사를 되돌아보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35년 전 우리가 그린란드에서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할 때, 그것은 실로 작은 시작의 날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특히 젊은 그린란드인들이 연구하고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을 계속해서 봅니다. 나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사용해서 이 나라에서 이 일을 시작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추수가 시작되기까지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주셔서 진실로 감사합니다.”

크리스티안센 형제는 야코프스하운에서 고트호프로 이사하여 번역 일을 계속했다. 그린란드 형제들의 훌륭한 지원에 힘입어 「파수대」지를 계속 발행할 뿐 아니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책을 번역하고 1992년 7월부터는 「깰 때이다」지를 「이테리치」라는 이름으로 계간 발행할 수 있었다. 그린란드의 형제 자매들은 여호와의 조직에서 인구가 적은 구역을 위해서조차 영적 양식에 그처럼 높은 우선 순위를 두는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다.

덴마크의 외국어 밭

지난 20년 내지 25년간 덴마크의 구역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세계 상태로 인하여 다른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들어오자, 외국인에 대한 차별과 증오와 같은 문제도 함께 들어왔다. 덴마크인들은 자신들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러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에게는 이주자들이 언어와 종교에 있어서 새로운 도전이 되었다. 이주자들 가운데서 활동을 진전시키기 위해 작은 영어 회중이 1975년에 코펜하겐에 구성되었다. 온갖 인종과 국적의 관심자들이 무리지어 집회에 와서 연구를 시작하고 진리를 붙잡았다. 이러한 새로운 사람들 중 일부는 전파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갔으나, 많은 사람들은 남아서 현재 약 25개 국적을 대표하는 다채롭고도 강한 회중에 속해 있다. 진리가 사람들을 연합시킨다는 명백한 증거다.

1989년 1월 이래 코펜하겐에는 작지만 매우 활동적인 유고슬라비아어 회중이 있다. 본국에서 불공정한 일들을 겪고 실망하여 덴마크로 온 전직 여배우가 지금은 보조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학비를 벌려고 덴마크로 온 마케도니아의 한 학생은 대신 영적인 부를 발견하고는 본국으로 돌아가 지금은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 과거 도둑질과 밀수를 밥 먹듯 하던 젊은 집시 부부가 이제는 관대히 영적인 가치관을 주창하고 있다. 그렇다. 덴마크에서 정치적 자유나 물질적 부를 찾으러 왔던 많은 외국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참다운 자유와 진정한 부를 발견했다.

농아들에게 전파하다

여러 해 동안 코펜하겐에 있는 작은 농아 집단은 수도권 지역에서 다른 농아들에게 열정적으로 전파해 왔다. 1980년에 그들은 이 나라 전체 4000명의 농아에게 그들의 언어—수화—로 증거하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들을 수 있으면서 수화를 배운 전도인들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농아 집단에 속한 일단의 형제들이 특정 회중들을 방문하여 그들의 필요를 설명하였다. 이러한 적극성의 결과로 더 많은 전도인들이 수화를 배워, 이제는 이 나라의 거의 모든 농아들이 정기적인 방문을 받는다. 결과는 어떠한가? 6개 회중에 24명의 농아 전도인이 있게 되었다. 코펜하겐에 있는 집단이 가장 큰 집단으로서 농아인 두 명의 봉사의 종과 한 명의 장로가 있다. 정규 집회는 수화로 진행되며, 두 형제가 연설을 덴마크어로 통역하는 일을 한다.

피와 의료

다른 면에서는 관용적인 덴마크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의사들과 당국으로부터 피에 관한 그들의 입장에 대한 존중을 얻어내는 데 오랜 기간 힘든 투쟁을 해 왔다. 여러 해 동안 의사들과 병원들은 과거 1956년에 변호사들과 의사들 그리고 덴마크 국립 교회의 한 루터교 교직자 간에 논의되어 작성된 바 있는 지시서를 사용해 왔다. 의사들은 당연히 환자의 의사와 관계 없이 강제로 수혈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1975년에 코펜하겐의 한 병원에서 세 살 난 남자 아이에게 부모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수혈하고자 했을 때 문제가 극에 달했다. 감사하게도 부모는 협조적인 의사를 발견하여 아이에게 비혈액 요법으로 훌륭한 치료를 받게 했다. 2주 후 아이는 퇴원했으며, 오늘날까지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기간 동안 이 아이의 부모와 다른 증인들은 보도 매체의 집중적인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폭파 위협과 노골적인 폭력 사건까지 발생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의학계에 우리의 입장을 직접 밝힐 기회가 되었다. 이외르겐 라르센 형제는 “수혈—신앙과 의료 윤리”라는 기사를 썼으며, 1976년 7월 19일자 「우예스크리프트 포르 레이예르」(주간 덴마크 의학지)에 게재되었다. 이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간 최초의 중요한 진전이었다.

그 다음 큰 진전은 덴마크의 법과 윤리 분야 대가인 저명한 알프 로스 박사가 1979년 3월 26일자 「우예스크리프트 포르 레이예르」에 종합 기사를 기고한 일이었다. 이것은 신기원을 이루는 일이었다. 덴마크에서 법률 전문가가 입을 열어 당국의 태도를 공격하며 여호와의 증인 성인이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을 포함하여 어느 경우에나 수혈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변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도 법적으로 불분명했다.

윤리 문제가 계속 대두되었다. 1982년에 덴마크 의사들은 의료 당국으로부터 환자의 동의권 원칙에 관해 통보받았으며, 1985년에는 증인의 수혈 거부로 인해 제기된 윤리적 도전 문제를 고찰한 훌륭한 내용을 담은 새 교과서가 발행되었다. 그리고 1989년 9월에 덴마크 의학 협회는 개정된 「의사 윤리 강령」을 채택하였다. 그 문서 중에 설명과 동의에 관한 새로운 항에서는 이렇게 명시한다. “환자는 진단, 예후(豫後) 및 가능한 치료법 등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권리를 가지며, 또한 그러한 설명에 근거하여 특정 치료법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권리를 갖는다.”

윤리적으로는 이제 문제가 해명되었으나, 법적으로는 환자의 자율권이 도움을 베풀어야 하는 의사의 의무보다 우선하는지에 관해 아직도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입법자들은 그 모호한 점을 인지하고 1989년 말에 환자의 의지에 반하는 치료 행위를 처벌 대상 범죄로 규정하는 법안을 상정했다. 그 법안은 1992년 5월 8일에 채택되었고, 5개월 후인 10월 1일부터 발효되었다. 아직도 형제 자매들이 질 높은 도움을 받게 할 필요가 남아 있으며, 1991년 1월에 도입한 병원 교섭 위원회를 포함한 마련들이 이미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전국에서 사용할 지역 대회장

지부 건물이 완공되고 두 개의 대회 회관에서 순회 대회들이 열리게 되자, 이런 질문이 제기되었다. 전국에서 사용할 지역 대회장을 건립하는 것은 어떠한가? 실케보르그의 대회 회관이 이 나라의 지리적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그 근처 부지를 사용하는 것이 어떠한가?

그 계획이 통치체에 제출되어 승인을 얻었다. 실케보르그 시 당국은 순회 대회장으로부터 1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고 자연 경관이 뛰어난 대규모 보호 지역을 포함하는 약 16헥타르의 부지를 할당해 주었다. 기초 공사가 1990년 7월 1일에 시작되었다. 대단한 공사였다! 처음 3개월간 매일 평균 1500톤의 흙을 날랐는데, 이는 가득 채운 트럭 100대분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그러나 땅 파는 일에 경험이 많은 한 형제가 이렇게 모두를 안심시켰다. “저는 30년간 흙을 날랐지만 지구는 아직도 둥급니다.”

실제 대회장은 일부분만 지붕이 있는 원형 극장으로서 청중석의 어느 좌석도 연사로부터 70미터를 넘지 않게 했다. 3500석의 좌석이 있으며, 인근 대회 회관에서 유선 텔레비전을 통해 900명이 더 대회를 볼 수 있다. 이 곳은 이상적인 음향 조건과 훌륭한 주차장, 응급 시설, 서적부 및 화장실을 갖추고 있다. 옥외에는 캠프장이 있어 약 천 명의 형제 자매가 트레일러나 텐트에서 숙박할 수 있다.

1991년 6월 1일에 봉헌식이 있었다. 통치체의 로이드 배리 형제는 매우 믿음을 강화시키는 격려적인 봉헌 연설을 했다. 약 4000명의 형제 자매들이 대회장에서 프로그램에 참석했으며, 700명이 헤를루프말레 대회 회관에서 전화선으로 들었다. 다음 주 모든 회중은 그 행사를 요약한 75분간의 비디오 프로그램을 보았다. 그 해 여름 새로운 지역 대회장은 다섯 번의 “자유 애호자” 지역 대회가 열리는 훌륭한 장소가 되었다.

앞을 내다보며

러셀 형제가 처음 덴마크를 방문한 이래 지난 100년간, 덴마크 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일었다. 기술의 진보는 물질적 번영을 낳아 이 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로 변모시켰으나, 종교적 관심은 전무한 상태로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이러한 요인들은 왕국 사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증가하는 때도 있었으나 또한 정체의 시기도 있었고, 물질주의와 냉담과 기타 요인들로 전도인 수가 줄어든 때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영적 필요를 의식하고 여호와께 헌신하며 그분을 충실하게 섬겨 온 것을 보는 것은 더더욱 즐거운 일이다. 현재 덴마크에는 최고 1만 6407명의 왕국 전도인이 있어, 인구 대 비율이 315 대 1이다. 많은 전도인들이 도움을 더 필요로 하는 다른 나라에서 섬기기 위해 일차적으로 노르웨이나 스웨덴 같은 나라로 이사했을 뿐 아니라, 페로스 제도와 그린란드로도 갔고, 길르앗을 통하여 더 먼 곳으로도 갔다.

세상의 강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전도인들 사이의 영은 건전하다. 지난 10년간 파이오니아 수는 584명에서 1315명으로 급상승했다. 기념식 참석자 수는 올해 2만 4960명에 달했다. 매년 약 500명의 새로운 사람들이 침례를 받는다. 따라서 덴마크 방방곡곡의 사람들이 문전에서 증인을 만나고 있지만,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사실, 흔히 말하듯이, 아무 것도 덴마크인들의 기를 꺾지 못한다. 그러나 종교적 무관심에 개의치 않고, 덴마크의 여호와의 증인은 인내하면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일, 즉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완수할 결의가 되어 있다!—디모데 후 4:5; 히브리 10:36.

[147면 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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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평균 파이오니아 수 도표

1,315

 

 

777

556

 

228

137

1950 1960 1970 1980 1992

최고 전도인 수 도표

16,407

13,228

12,569

9,504

 

4,936

1950 1960 1970 1980 1992

[66면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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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수도: 코펜하겐

공용어: 덴마크어

주요 종교: 루터교

인구: 516만 2126명

지부 사무실: 홀베크

덴마크

스카겐

북해

올보르그

모르스

실케보르그

오데르

유틀란트

에스비에르그

뉘보르그

셸란

엘시노에

홀베크

로스킬레

헤를루프말레

랑엘란

롤란

팔스테르

독일

발트해

스웨덴

코펜하겐

[지도]

그린란드

툴레

우페르나비크

움만나크

크브틀리그사트

고트호프

[지도]

보른홀름

[108, 109면 지도와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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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스 제도

노르웨이 해

스트뢰뫼

베스트만나

클라크스비크

토르스하운

대서양

수데뢰

[72면 삽화]

욘 레인세트는 1907년에 진리를 배웠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전도인이었다. 아내 아우구스타는 건강이 나빴지만 역시 열정적으로 전파하였다

[74면 삽화]

올보르그 출신의 튀라 라르센은 1915년에 콜포처로 봉사했다

[75면 삽화]

1909년 코펜하겐의 올레 쉬르스 가데에 있는 학교 운동장. 둘째 줄 중간이 러셀 형제, 그 오른편이 지부 감독자 카를 뤼티카우

[79면 삽화]

마리에 두에는 1915년에 성경 연구생이 되면서 학교 교사에서 해임되었다

[81면 삽화]

맥밀란 형제의 연설을 광고하는 광고지. 1920년의 그 집회에는 5000명 이상의 청중이 모였다

[82면 삽화]

러더퍼드 형제가 코펜하겐의 중앙역을 떠나고 있다, 1922년

[87면 삽화]

1920년대에 콜포처들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전파했다. 안나 페테르센, 쇠렌 로리드센, 토라 스벤센과 함께 있는 크리스티안 달(왼쪽)과 크리스티안 뢰메르(맨 오른쪽)

[88면 삽화]

카스트루프 공항에서 데이 형제와 러더퍼드 형제, 1927년

[89면 삽화]

북유럽 사무소의 감독자 윌리엄 데이와 1930년까지 에스토니아 지부 감독자였다가 데이의 비서가 된 알베르트 베스트

[95면 삽화]

발뷔 소재 지부 사무실, 1932-1957년

[97면 삽화]

축음기를 자전거에 매단 증거 그룹

[104면 삽화]

1944년에, 랑엘란에 있는 이 건물은 성서 학교로 사용되었다

성서 학교 강사인 필리프 호프만(위 왼쪽) 그리고 학교 관리자 시몬 페테르센(앞 가운데)과 아내 엘세(앞 왼쪽)

[108, 109면 삽화]

페로스 전통 의상을 입은 욘과 소냐 믹켈센이 아들 아브살롬과 함께 있다. 욘은 장로로 임명된 최초의 페로스 사람이다

클라크스비크행 배에 승선해 있는 특별 파이오니아 부부 스벤 몰베크와 루트 몰베크, 1958년

[110면 삽화]

리처드 에이브러햄슨과 줄리아 에이브러햄슨은 덴마크에서 26년 이상 봉사했고, 지금은 브루클린 본부에서 일하고 있다

[111면 삽화]

스벤 오게 닐센과 에드문 온스타트는 페로스 제도에서 산을 넘어 걸어서 여행하였다. 밤에 잠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그들은 텐트를 직접 만들어 쳤다

[115면 삽화]

1955년 이래로 그린란드의 도시와 시골은 좋은 소식을 들어 왔다

[116, 117면 삽화]

마리에 타우센(왼쪽)은 그린란드에서 1973년에 침례받은, 최초의 그린란드인이다. 삼 년 후에 뒤이어 침례받은 데보라 브란트가 전형적인 그린란드 축제 의상을 입고 있다. 위는 그린란드 북부의 움만나크 부근 마을이다

[123면 삽화]

비룸 소재 지부 사무실, 1957년-1982년

[125면 삽화]

슬라이드 드라마용 소도구 제작에는 많은 노력이 든다. 이 세트는 바벨론 장터로서 에스라의 생애에 관한 1991년도 드라마용으로 제작된 것이다

[131면 삽화]

실케보르그의 지역 대회장에는 일부분만 지붕이 있는 3500석의 원형 극장이 있으며, 인근 대회 회관에 900석 이상이 더 있다

[132면 삽화]

스칸디나비아 사상 최대의 대회가 1969년에 코펜하겐에서 열렸다

[133면 삽화]

홀베크의 새 지부 사무실. 통치체의 대니얼 시들릭이 1983년 봉헌식에서 연설했다

[134면 삽화]

토르스하운의 왕국회관—잔디 지붕이다

[142면 삽화]

지부 위원회: 왼쪽으로부터, 에리크 이외르겐센, 헨닝 투스고르, 이외르겐 라르센, 아르네 S. 닐센 및 오를라 란 닐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