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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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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비옥한 평야와 급성장하는 도시들이 있는 나라. 동쪽은 독립 국가 연합과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슬로바키아와 체코 공화국, 서쪽은 독일, 북서쪽은 발트 해와 접해 있는 나라. 3800만이 넘는 사람들의 보금자리. 이 나라가 바로 폴란드다.

하지만 음악 애호가들의 경우, 폴란드라고 하면 뭔가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프레데릭 쇼팽 같은 작곡가라든가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과 같은 피아니스트가 연상되는 곳이다. 과학자들에게 있어서, 폴란드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출생지다. 그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면서 동시에 하루에 한 번씩 자전한다는 학설을 세운 사람이다. 라듐을 발견한 퀴리 부인 (마리아 스쿼도프스카-퀴리) 역시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한편, 폴란드의 역사에는 한이 맺혀 있다. 한때는 발트 해로부터 아래로 흑해에 이르기까지 유럽을 가로지르며 뻗어 있던 제국이었지만, 이 나라는 백 년이란 세월 동안 사실상 지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1차 세계 대전에 뒤이어 잠시 공화국의 형태로 존재했다가, 2차 세계 대전중 다시 분할되어 외국의 지배를 받았다. 폴란드인들이 그 전쟁의 잔해를 딛고 막 일어서려던 때에 “철의 장막”은 그들을, 중·동부 유럽의 다른 국가들처럼, 나머지 세계와 차단시켜 놓았다. 그러나 최근에 그 장벽이 무너졌다.

1985년, 세계 전역의 여호와의 증인은 폴란드에 있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가진 대규모 국제 대회에 관한 보고를 듣기 시작하였다. 그 후, 그들은 1991년에 폴란드에 있는 증인 수가 10만 명을 넘어섰고 그 수의 두 배나 되는 사람들이 주의 만찬 기념식에 참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에 넘쳤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폴란드에서 증인이 1만 8116명뿐이었던 1950년 이래로 줄곧 그들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예언자 이사야가 기록한 이런 말씀을 되새긴다. “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무기”, 「공동번역」]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라 ·⁠·⁠·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니라.]”—이사야 54:17.

성서가 폴란드에 이르게 되기까지

폴란드는 대공 미에슈코 1세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의식에 따라 세례를 받은 해인 기원 966년 이래 “그리스도교” 국가로 간주되어 왔다. 그의 신하들 역시 대규모로 세례를 받는 일이 있었는데,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갑자기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국민들은 수백 년 동안 계속 슬라브 민족의 이교 전통과 미신을 지켜 왔으며, 아직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톨릭 국가가 된 이후 여러 세기 동안, 폴란드의 평민은 물론 교직자들까지도 성서를 입수할 수가 없었다. 14세기에 나온 「프사우테시 플로리안스키」(플로리안스키 시편)와 15세기 말에 나온 「비블리아 크룰로베이 조피」(조피아 여왕 성서)가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폴란드어 번역판이다. 그러나 이런 성서 사본들은 각각 한 권씩만 제작되었으므로,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만 접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16세기에, 폴란드를 포함한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종교적 견해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가톨릭 교리가 문제시되었다. 갈수록 더 성경이 유일한 기준으로 간주되었다. 그 결과, 번역자들은 대중이 읽을 수 있도록 일상 용어로 된 성서 번역판을 더 자주 내놓게 되었다.

1574년에 나온 폴란드어 “신약”에는 창조주의 이름, 예호바(여호와)가 몇몇 구절에 사용되었다. 그 성서는 시몬 부드니가 발행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고착하기를 원하고 단지 그리스도인 혹은 형제들이라고 스스로 칭하는 사람들의 작은 그룹에 속해 있었다. 나중에 그들은 폴란드 형제단이라는 이름을 채택하였다. 그들은 배운 내용에 따라 삼위일체 교리를 배척하였다.

하지만 1658년에 폴란드의 국회 즉 세임은, 위반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조건으로 3년 기간 내에—나중에 그 기간에서 1년이 삭감되었음—가톨릭교인이 되든지 그 나라를 떠나든지 하라고 폴란드 형제단에게 포고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게 되었는가?

그 나라에 현저한 변화가 있었다. 여러 해 동안, 폴란드는 종교적 관용을 베푸는 나라로 알려져 왔다. 다른 나라에서 종교적 박해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폴란드에서 은신처를 찾곤 하였다. 1573년 이래로 폴란드 왕이 하게 되어 있는 선서에는 이런 보증이 들어 있었다. “짐은 ·⁠·⁠·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하고 엄숙히 맹세하노니 ·⁠·⁠· 종교에 관하여 의견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 평화와 평온을 보존하고 유지할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도 ·⁠·⁠· 아무든지 자기 종교의 이유로 영향을 받거나 탄압받게 하지 않겠노라.” 실은, 재위 기간에 폴란드 형제단을 추방한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자도 그런 선서를 하였다. 하지만 그가 왕이 되기 전에 받은 예수회 사제직 훈련이 종교적 자유에 관한 그의 태도에 영향을 미친 것임에 틀림없다.

예수회는 얀 카지미에시가 즉위하기 약 84년 전인 1564년에 폴란드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궁정을 향해 교활하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동시에, 학교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함으로써 대중의 생각을 틀 잡으려고 하였다. 종교적 자유에 대한 보증은 점차 사라졌다. 예수회가 관할하는 학교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편협한 정신을 주입받았으며, 그 사실은 다른 신앙을 신봉하는 사람들 및 그들의 집과 숭배 장소에 대한 난폭한 공격 행위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성서는 금지된 책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 기간에, 폴란드는 영토를 많이 잃었다. 주변 국가들이 야금야금 이 나라를 침범하기 시작하여 급기야 1795년에는 독립 국가로서의 폴란드가 유럽 지도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폴란드에서 종교의 자유가 법적으로 확립되었다. 법은 이제 더 이상, 1791년의 폴란드 헌법처럼 로마 가톨릭교인이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다. 1993년 현재, 헌법은 이렇게 선언한다. “폴란드 공화국은 국민에게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더 많은 폴란드인이 그 자유를 이용하여 성서에서 인도를 구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사람들이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던 방침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래로, 훌륭한 폴란드어 성서 번역판 몇 가지가 발행되었고, 여호와의 증인은 그것을 잘 활용하고 있다. 증인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할 때, 많은 사람은 성서 사도 행전 17:11에 언급된 신사적인 사람들처럼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열심히 살펴본다.

이민 간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이 비취다

폴란드가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자 때때로 국민들은 생활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많은 폴란드인들이 자진해서든 마지못해서든 외국으로, 더러는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들 부모의 종교이며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종교는 로마 가톨릭이었다. 상당수의 폴란드인들이 그 신앙을 실천함으로써 국가적 주체성을 보존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폴란드인은 가톨릭교인”이라는 통념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환경에서 벗어나 사고 방식을 바꾸기 시작한 사람들도 있었다. 예로서, C. 안토체프스키(당시 미국 시카고에 거주했음)는 1891년에 워치 타워 협회로 보낸 편지에서, 자기는 분할된 폴란드의 러시아 점령 지역에서 가톨릭 교인인 부모의 양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진리를 찾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워치 타워 서적 몇 권을 손에 넣었을 때, 찾고 있던 것을 발견했다는 확신이 그에게 생겼다. 그는 거의 매일 저녁, 역시 영적 진리에 굶주리고 있던 폴란드 출신인 또 한 사람을 위해 그 책들의 내용을 번역하였다. 예수께서 충고하신 바와 같이, 그들은 ‘이 영적 빛을 말 아래 감추지’ 않았다. 둘이 함께 다른 폴란드인 가정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마태 5:3, 14-16.

이민 온 폴란드인 중에는 귀중한 성서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고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진리를 전해 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 더러는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소식을 널리 알리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시온의 파수대」(Zion’s Watch Tower) 1895년 6월 15일 호는 “해외 활동의 진전”이라는 제목 아래 이렇게 보도하였다. “약 3년 전에 선하고 정직한 마음에 진리를 받아들인 폴란드인, 올레신스키 형제는 성별된 자들을 찾아내어 대속과 회복 및 위에서 부르신 부름에 관한 웅대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모국으로 갔다.”

처음에 그들은 영어나 독일어로 구할 수 있는 서적이면 아무 거나 사용해야 하였다. 그러나 1909년에 워치 타워 협회가 무료 배부용 폴란드어 전도지를 발행했을 때, 그것은 동료 폴란드인들에게 성서 진리를 전하는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해에는 「성경 연구」(Studies in the Scriptures)의 내용을 요약한 폴란드어판도 나왔다. 그리고 1915년에는 이미 「파수대」가 폴란드어로 매월 정기적으로 인쇄되었다.

진리의 씨가 싹트기 시작하다

1905년 가을, 바르샤바의 한 레이스 공장의 경영을 스위스에서 온 새로운 책임자인 벤테 씨가 인수했는데, 그는 성경 연구생이었다. 그는 통역자를 통해 직원들과 의사 소통을 해야 했는데도 신임을 얻었으며, 그의 집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형제애에 관해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얼마 안 있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과 성서 서적의 도움으로 시사 문제를 고려하면서 정기적인 토의를 갖게 되었다.

이 때는 러시아에서 항의와 소요가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러시아 지배 아래 있는 폴란드 영토도 영향받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06년에 러시아 황제가 내린 칙령은 모든 종파에게 평화로운 종교 활동에 종사할 권리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성서 진리의 빛은 가까스로 어둠 속을 뚫고 들어왔으며, 이미 성서에 관심이 있던 가까운 친지들의 경우 외에는 대체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빛은 바르샤바 밖으로도 퍼져 나갔고 그 결과 다른 도시에 작은 집단들이 형성되었다. 그 집단들에 서적을 공급하던 독일, 바르멘엘버펠트의 협회 사무실에서 H. 헤르켄델 형제가 여러 차례 이 집단들을 방문하였다.

새로운 자극제

1910년 5월, 워치 타워 협회 초대 회장인 찰스 테이즈 러셀이 바르샤바를 잠시 방문하였다. 그의 연설을 듣고자 모인 약 20명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참으로 기쁨에 넘쳤다! 그들 중 세 명은 대단한 열심이 생긴 나머지, 당시에 콜포처 활동이라고 부르던 파이오니아 봉사를 신청하였다. 그들은 많은 서적을 전할 수 있었고, 다가오는 “이방인의 때”의 끝에 관해 배우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찾았다. (누가 21:24) 1913년에,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보인 이런 사람들이 모여 우치에 한 집단이 형성되었고, 다른 곳에도 집단들이 생겼다.

하지만 공개적 모임과 관련하여 바르샤바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러시아 경찰은 폭동을 준비하는 듯싶기만 하면 무조건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된 한 군대 장교가 성경 연구생들을 위해 개입함으로써, 그들에게 법적 인가를 부여하는 포고가 있게 되었다. 폴란드가 1차 세계 대전 후 다시 독립했을 때, 1913년에 당시 바르샤바를 통치하던 군 장성이 내린 그 포고는 형제들의 활동을 위한 법적 근거가 되었다.

얼마 동안 성경 연구생들의 활동은 정상적으로 수행되었다. 진리를 위해 오랫동안 투쟁해 온 사람들 중 일부는 1914년 이전에 바르샤바 회중에서 활동하던 형제들에 관해, 부모한테서 들은 내용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런 형제들 가운데는 콩츠키, 코코신스키, 바르치코프스키, 루다시, 크레메르가 있다. 도이치만 형제와 마론 자매는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914년에 전쟁이 발발하자, 생활 여건이—특히 도시에서—어려워져서 바르샤바와 우치 집단의 가족들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성경 연구생의 활동이 정체되지는 않았다. 작은 집단이 바르샤바의 아파트에서 여전히 집회를 가졌다. 이윽고 이 작은 집단은 세계 사건에 관한 성서적 설명을 찾고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발견하였다. 예를 들어, 볼레스와프 우흐만은 1916년에 침례를 받고 그 후 반 세기가 넘도록 바르샤바 회중의 기둥 역할을 하였다. 1918년에는 5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공개 강연에 참석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폴란드계 미국인 형제들이 도우러 오자, 활동은 그 기세를 더하였다.

미국에서 번창한 폴란드어 회중

당시 미국에 있던 성경 연구생의 모든 외국어 그룹 가운데서 폴란드 출신들이 가장 크고 가장 활동적인 편에 속하였다.

미국에 있던 성경 연구생들이 특히 1918-19년에 심한 박해를 받긴 했지만, 폴란드어 그룹은 조직적인 방법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면에서 진취성을 보였다. 1919년 초에, 그들은 특히 폴란드어 회중들의 필요를 돌보기 위해 하나의 법인 단체를 설립하고, 미시간 주의 디트로이트에 등록하였다. 그 법인의 명칭은 폴란드어로 스트라주니차—토바지스트보 비블리네 이 브로슈르였으며, “워치타워 성서 소책자 협회”라는 뜻이다. 모체 법인인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와 경쟁하려고 그 법인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디트로이트 사무실은 단순히 협회의 폴란드어 지부로 간주되었다. 그 법인의 목적은 조직에서 나오는 영적 양식을 회중에 공급하고 어려운 시기에 충실하도록 격려를 베풂과 동시에 성서 진리를 폴란드에 전파하는 일을 돕는 것이었다.

일찍이 1920년에, 이 법인은 폴란드 회중들을 두루 방문할, 순례자라고 하는 여행하는 대표자 열 명을 마련하였다. 그들이 연설한 622차례의 공개 강연에 21만 1692명이 참석하였다. 폴란드인 콜포처는 36명이었다. 폴란드어 「파수대」는 한 달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나왔다. 회중들은 소책자와 여러 권으로 발행된 「성경 연구」를 폴란드어로 공급받을 수 있었다. 1921년에는 새로운 노래책인 「천년기 새벽의 찬송가」(Hymns of the Millennial Dawn)가 나왔다.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Millions Now Living Will Never Die)라는 소책자의 번역판이 나오자 반응이 열렬했고, 1년도 채 못 되어 4만 5545부가 배부되었다. 뿐만 아니라, 얼마 후에는 「성경 연구」 제7권과 「하나님의 거문고」 책도 발행되었다.

폴란드 형제들은 영어권 형제들로부터 독립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1921년 1월에 디트로이트 법인 이사들은 당시 모체 법인의 협회장인 J. F. 러더퍼드를 그들 법인의 협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그 후 7월, 그 법인 총회에서는 협회의 펜실베이니아 법인과 병합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 때 이래로, 디트로이트 사무실이 워치 타워 협회의 지부 역할을 한다는 점이 더욱더 분명해졌다. 그 지부는 1922년 5월에 브루클린으로 이전했는데, 그 곳은 1919년 10월 이래로 다시 협회의 활동 중심지가 된 곳이었다. 그 때부터는 폴란드어 「파수대」와 서책 및 소책자가 브루클린에서 출판되었다.

폴란드 형제들이 나타낸 열심과 여호와께서 사용하고 계신 조직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노력을 축복하셨다. 예를 들면, 1921년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이 미국 내 65개 장소에서 폴란드어로 열렸고, 총 참석자 수가 2942명이었다. 1년 뒤에는 73개 폴란드어 회중과 집단이 기념식을 가졌다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1923년에는 시카고 폴란드어 회중에 675명이 참석했는데, 전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참석자 수였다. 어떤 언어로든지 참석자 수가 더 많은 곳은 뉴욕시(906명)와 런던(1029명)과 로스앤젤레스(850명)뿐이었다.

이 영향을 폴란드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이전 어느 때보다도 많은 수의 폴란드 형제들이 고국에 있는 가족을 방문하기 시작하여, 성서 진리를 설명해 주고 때로는 계속 머물러 회중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폴란드가 민주주의 헌법을 채택한 때인 1921년부터는 이 일이 더 용이해졌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게 특혜가 주어지긴 했지만, 양심과 종교의 자유가 모두에게 보장되었다.

폴란드에 보내는 워치 타워 출판물은 갈수록 더 많아졌다. 그 곳의 활동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 바르샤바에 지부 사무실을 설립할 계획이라는 발표가 1919년에 있었다. 지부 사무실은 1921년에 집무를 시작하였다.

믿음을 파괴하려는 거짓 형제들

1차 세계 대전중, 폴란드의 러시아 점령 지역에 있던 형제들은 외부 세계와 접촉이 두절된 상태에 있었다. 예를 들면, 바르샤바 회중은 러셀 형제의 사망 소식도 사건 발생 2년 뒤인 1919년에 가서야 비로소—그것도 단지 개인을 통해서—들었다. 미국 형제들 사이의 분열에 관한 불안한 소문마저 그 곳에서 나돌아 어려움을 초래했으며, 미국에서 한 반대 그룹의 대표자가 바르샤바까지 와서 그 곳의 그룹에 영향을 주려고 했을 때 특히 어려웠다. 반대자들은 형제들 대부분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당시 폴란드 형제들이 사용하고 있던 법인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되자, 무엇보다도 바르샤바 회중의 집회 장소를 잃게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미국에 있는 충성스러운 폴란드 형제들 역시 파견단을 폴란드에 보낼 마련을 하였다. 그 파견단은 협회의 미시간 법인 이사장이며 순례자 즉 여행하는 연사인 W. 코워미스키와 C. 카스프시코프스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20년에 그들이 폴란드에 도착하자, 바르샤바의 형제들은 기쁘게 맞아들였다.

변함없이 남아 있던 그 형제들은 정기적인 집회 장소를 잃었기 때문에 회중 연구와 공개 강연을 위해 영화관을 빌렸다. 일요일 공개 강연은 신문을 통해, 그리고 길에서 전단을 배부함으로써 광고하였다. 형제들이 직면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발전의 전망은 밝아 보였다.

같은 해에 사단은 또 다른 타격을 가해 왔다. 소비에트 연방과 폴란드 사이에 전쟁이 터져 이전에 볼 수 없던 규모의 인플레가 초래되었다. 이런 상황은 활동에 큰 지장을 주었다. 게다가 그 위급한 시기에 코워미스키 형제가 장티푸스에 걸렸다. 그는 회복된 후 미국으로 돌아가 순례자로서 계속 봉사하였다.

바르샤바 형제들의 요청에 따라, 협회는 카스프시코프스키 형제를 협회의 대표자로 폴란드에 남겨 두었다. 그는 대단한 진취성을 발휘하였는데, 성경 연구회 제2단체의 등록을 해낸 것이 그 예이다. 이 제2단체는 협회에 충성스러운 형제들로 구성된 것으로서, 반대자들의 손에 넘어간 이전 법인을 대체하였다. 다시 한번 법적 인가를 얻은 성경 연구생들은 더 큰 규모로 공개 강연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21년중 이런 강연에 때로는 무려 700명이나 참석하기도 하였다. 또한 형제들은 새로운 회관으로 사용할 건물을 찾았는데, 개조하고 나니 4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었다.

첫 전국 대회에는 (1921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폴란드의 여러 지역에서 온 500명이 참석했고, 14명이 침례받았다. 이듬해에 전국 32곳에서 열린 기념식에는 참석자 수가 657명에 달하였다! 같은 해에 여러 차례 대회가 열렸으며, 108명이 각각 물 침례를 받으려고 자신을 제공하였다. 전파 활동은 상당한 속도로 진척되고 있었다.

그가 교황의 명예를 훼손했다니?

얀 쿠시나는 1920년에 미국을 떠나 이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에 있는 대도시, 크라쿠프로 돌아왔다. 그 자신도 진리 안에 있은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그는 용케도 한 작은 집단의 진실한 사람들 사이에 금방 관심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가 체포되어 교황에 대한 명예 훼손 혐의로 고발된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성서 진리를 전한 것밖에 아무 죄도 없었다. 그는 법정에서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 데 성서에 의존하였다. 판사는 공정한 사람이어서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그 무렵, 미국에서 온 순례자 형제로서 바르샤바와 크라쿠프를 방문한 유제프 크레트는 어린 학생들이 교리 문답서의 기도문을 수정하여 이렇게 기도하도록 가르침받고 있다는 보고를 하였다. “오 주여, 갑작스러운 죽음과 굶주림과 화재와 전쟁과 미국 이단의 해악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옵소서.”

신학자들이 성경 연구생의 평판을 떨어뜨리려고 시도하다

본국으로 돌아온 또 다른 형제로서 비니아시가 있었는데, 부유하면서도 자기 희생적인 사람이었던 그는 크라쿠프에 집회 장소로 사용할 주택 하나를 구입하였다. 1922년에 그 주택이 세 형제와 세 가톨릭 신학자 사이의 논쟁 장소로도 사용된 일이 있었다.

한 해 전, 미국에서 돌아온 프란치셰크 푸하와가 교회의 교리 13개를 열거한 전단을 개인적으로 발행하였다. 그는 누구든지 이런 교리가 성경에 근거해 있음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각 교리당 1만 폴란드 마르크를 주겠다고 하였다. 그 교리들 가운데는 인간 영혼의 불멸, 지옥불, 연옥, 미사 성제, 교직자의 독신제, 사제에게 하는 고해, 묵주의 사용 등이 있었다. 나중에 푸하와 형제는 “꼬챙이로 개미탑을 쑤신 셈이었다”라고 썼다.

교직자들은 가톨릭 신문을 통하여, 그 전단을 공개적으로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프란치셰크 푸하와를 교회에 대한 명예 훼손죄로 고소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이에 움츠러들지 않고 공개 토론을 요청하였다.

교직자들은 로마 교황청에 문의한 후에 토론에 동의하였다. 단,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관련된 내용의 신성함 때문에’ 비공개로 한다는 조건이었다. 푸하와 형제는 그 조건에 동의하였다. 교직자들은 자기들의 승리를 확신한 나머지 변호사를 그 자리에 동석시켰는데, 형제들이 패배하자마자 그를 통해 법적 행동을 개시할 작정이었다. 교회 신문은 오만하게도 이렇게 선언하였다. “누가 옳은지—여러 세기를 거쳐 온 로마 가톨릭 교회인지, 아니면 성경을 정확하게 읽지도 못하는, 소수의 오도된 이 한심스러운 작자들인지—두고 보면 알 것이다.”

저명한 예수회 신학자, 얀 로스트보로프스키가 주도한 가톨릭 대표단에는 그 외에 다른 두 사제가 있었다. 프란치셰크 푸하와와 다른 두 형제가 성경 연구생을 대표하였다. 속기사들 그리고 증인 역할을 할 몇몇 사람도 참석하였다. 예수회측은 책을 가득 넣은 커다란 가방을 둘씩이나 준비해 가지고 왔다. 형제들은 성서와 그리스어 및 히브리어 사전만 가지고 있었다.

교직자들은 전단의 13번째 교리(영혼불멸)를 먼저 고려하자고 요청하였다. 두 시간 남짓 지나자, 신학자들은 더 이상 시간이 없다고 핑계를 대고는 떠나 버렸다. 그들은 결코 공개적으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한 신문 기사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우리는 성경 연구생들이 ·⁠·⁠· 완전히 무식하지는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토론 내용 전체를 「비트바 나 니에비에」(하늘에서의 전쟁)라는 제목의 소책자에 실어 발행하였는데, 초판 인쇄가 1만 부였고 여러 번 재인쇄하였다. 전통적인 종교 사회인 크라쿠프와 그 주변 지역은 흠칫하여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1923년에는 크라쿠프의 기념식에 69명이 참석하였다.

물론, 교직자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공개적으로 손상시킨 푸하와 형제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그들은 갖은 방법을 다 써가며 그의 생활을 괴롭히려 하였다. 경찰을 파견하여 그의 집에서 열리는 집회 내용을 기록했으며, 그 후 그는 여러 차례 법정에 끌려갔다. 살인 청부업자가 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여호와께서 보호해 주셨다.

바브젠치체 마을에서 한 사제는 설교중에, 푸하와 형제가 연설하러 오면 몽둥이를 가지고 공격하라고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열심이 지나친 한 무리의 여자들은 사제가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발벗고 나섰다.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푸하와 형제를 기다렸다. 그는 도착하자 침착하게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분이 먼저 자기 몽둥이로 나를 치셔야 합니다.” 마침내 여자들은 물러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던 중, 푸하와 형제를 때리려고 가지고 갔던 바로 그 몽둥이로 남편들한테 얻어 맞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가? 저녁상을 기다리다 지친 남편들이 화가 났던 것이다!

상점 주인이 교사에게 진리를 전하다

1919년에 우치의 직물 센터에 있는 큰 구두 가게 주인이 치료를 받으러 그단스크에 갔다. 사업가인 이 만도바 부인은 처음으로 그 곳에서 성경으로부터의 진리를 듣게 되었다. 그 부인은 정직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였다. 협회 서적을 산더미처럼 가지고 집에 돌아온 후, 읽은 내용을 친구와 친지들에게 열정적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부인의 설득력 있는 말에 한 젊은 교사가 깊은 감명을 받았고, 친구의 권유에 따라 부인과 함께 집회에 참석하였다.

1920년, 빌헬름 샤이데르라는 그 교사는 우치에 있는 관심 가진 사람들의 작은 집단과 더 밀접히 접촉하기 위해 시골 지역에서 우치로 전근되도록 조정하였다. 만도바 부인은 나중에 성경 연구생이 되었고, 그와 함께 모이는 집단은 이따금 390킬로미터 떨어진 그단스크에서 기차를 타고 온 형제들의 지원을 받았다. 협회 출판물과 아울러 성서를 연구한 결과, 샤이데르 씨는 진리를 발견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시련과 환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1971년에 지상 생애를 마칠 때까지 충실하게 진리를 중심으로 생활을 영위하였다.

우치에서 행한 대담한 공개 증거

처음에는 우치 집단의 활동이 공개 증거에 있어서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1922년에 만도바 자매가 사망한 뒤, 자매의 장례식과 관련된 문제가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교직자들은 공동 묘지에 매장할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이 일 때문에 대중 매체에서는 한바탕 떠들썩한 보도가 있었다. 사흘 동안 옥신각신하며 경찰까지 개입한 끝에, 작은 회교 묘지 내에 매장지를 얻었다. 천 명 정도나 되는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성경 연구생들이 실제로 무엇을 믿는지 알고 싶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단스크에서 온 형제가 제공한, 성경에 근거한 연설은 우치에서 행한 첫 공개 증거였다.

그 때부터, 공개 강연을 더 자주 마련하고 신문에 광고하였다. 공개 집회를 위해 영화관을 빌렸다. 처음에는 그런 장소로 크기가 충분했으나, 얼마 안 있어 50만 인구의 그 도시에서 가장 큰 영화관조차 너무 비좁게 되었다. 한편, 작은 집단들은 개인 집에 모여서 성서 및 성서에 근거한 서적들을 연구하였다. 우치의 많은 주민이 독일계와 유대인계였으므로, 공개 강연 및 더 작은 집회들이 폴란드어와 독일어로 진행되었다.

우치에서 이런 공개 강연에 참석한, 수천까지는 못 되어도 수백 명은 족히 되는 사람들은 제자 야고보가 표현한 대로 “도를 행하는 자”가 아니라 “듣기만” 하는 자들이었다. (야고보 1:22)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념식 참석자 수가 1922년에는 25명이었던 것이 1924년에는 92명으로 껑충 뛰었다. 그리고 1924년에 그 도시 중심지에 있는 폐쇄된 공장을 개조함으로써, 우치의 형제들은 첫 대회를 위해 사용할 아름다운 회관을 갖게 되었다. 그 모임에 약 200명이 참석하였다.

이 무렵, 형제들은 “창조 사진극”을 관람하도록 사람들을 초대하는 새로운 활동에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것은 1920년대 초에 폴란드에서 상영이 막 시작된 영화였다. 전체 프로그램은 두 시간짜리 영화 네 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려고 어찌나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던지, 형제들은 가장 넓은 장소를 계약했는데도 상영을 여러 번 되풀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공개 집회 덕분에 포즈난이 발전하다

1910년에 18세의 테오필 슈미트는 라돔스코 부근의 자기 집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독일로 갔다. 그 곳에서 1914년에 성경 연구생에 관해 듣고는 “창조 사진극”을 보러 갔다. 오랫동안 그의 관심사였던 두 가지 문제, 즉 그리스도의 돌아오심과 세상 끝에 관해 흡족한 정보를 얻었다.

그 후, 당시 프러시아 지배를 받던 폴란드의 한 지역으로 다시 돌아간 그는 포즈난에서 C. T. 러셀의 저서를 읽고 있던 한 집단을 만났다. 그는 아직 침례를 받지 않았지만 그 곳의 연구 모임을 이끌어 가면서 계속 진보하였다. 1918년, 쿠야트 형제가 베를린에서 방문 왔을 때, 테오필 슈미트는 침례를 받고 포즈난의 첫 회중의 종이 되었다. 그는 그 후 몇 해 동안 공개 집회를 조직하는 데 열심이었다. 그가 1922년에 포즈난을 떠날 당시, 그 회중은 이미 20명 가량의 정규 성원이 있을 정도로 증가하였다.

그러자 콩츠키 형제가 포즈난의 회중을 돌보기 위해 바르샤바에서 이사왔다. 그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 조각가로서 파리에 가서 대학교 훈련 과정을 밟으려던 시절인 1914년 이전에 진리를 배웠다. 그는 그렇게 하는 대신 여호와께 대한 봉사에 전념하였다. 열심을 가지고 그는 포즈난에서 강당을 자기 비용으로 빌려 격려적인 성서 강연을 하였다. 그 결과, 1924년에는 포즈난의 기념식 참석자 수가 91명으로 증가하였다. 같은 해에 바르샤바에는 281명이 참석하였으며, 적어도 20명 이상 참석한 집단만을 계수하더라도 폴란드의 다른 13개 시와 읍에서 625명이 참석하였다. 장래의 성장은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믿음의 심한 시련이 앞에 놓여 있었다.

1925년—분열의 때

카스프시코프스키 형제는 1차 세계 대전 이후 형제들을 위해 가치 있는 봉사를 했지만, 나중에 교만이 그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충고를 불쾌하게 여기는 그의 태도는 교만이 싹튼 증거였으며, 급기야 그는 그의 이전 형제들의 철저한 반대자가 되고 말았다. 「파수대」가 좋은 소식의 전파에 참여할 각자의 책임을 더욱더 예리하게 강조하기 시작하자, 그는 단지 듣기만 하려는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에게 기꺼이 동조할 무리를 발견하였다.

바르샤바 회중은 얼마 동안 함께 모임으로써 계속 연합되어 있는 체했지만, 실은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그런 상태는 1925년 기념식 때 막바지에 이르렀다. 약 300명의 형제 중에서 30명만이 계속 협회에 충성스러웠다.

얼마 안 있어 다른 회중들도 휩쓸리게 되었다. 우치에 있던 약 150명 중에서 단지 3명의 형제와 6명의 자매만이 충성스럽게 계속 모여, 워치 타워 출판물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또한 야외 봉사에도 참여하면서, 1925년에 폴란드어로 발행되기 시작한 「황금 시대」(Golden Age)(현재의 「깰 때이다」)지를 잘 활용하였다.

우물쭈물하거나 어리둥절해 하던 많은 사람은 우치의 이 작은 집단의 영성과 열심을 보고 조직으로 돌아왔다. 그 해 여름에 우치 회중은 먼 구역에 증거하기 위해 “선교” 그룹을 마련하라는 협회의 지시를 따르는 면에서 앞장을 섰다. 그들은 15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도 공개 강연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문제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늦어도 1925년에는 하늘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동기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중 다수는 그 해가 지나가자 영적으로 약해지거나 떨어져 나갔다. 그 기간에, 다양한 반대 그룹들은 회중을 장악하거나 적어도 약화시키려고 활발하게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반대 그룹들 가운데 세 그룹은 오늘날까지 존재한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누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으며 성경에 약술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있는지가 명백해졌다.—마태 24:14, 「신세」.

이런 위기를 거친 후,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의 인도 아래 수행되고 있는 활동은 거의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였다. 장애물이 더 있었지만, 긍정적인 결과도 있었다.—마태 24:45-47.

활동이 훨씬 안정되다

바르샤바의 상태는 빠른 시일 내에 정상으로 돌아올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브노로프스키 형제가 폴란드로 파견되었지만, 일 년 남짓 후 그 상태에 지쳐 버린 그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슈베트 형제가 바르샤바 사무실의 책임을 맡았고, 일 년 후에는 바츠와프 나로도비치가 슈베트 대신 일을 맡게 되었다. 나로도비치는 훌륭한 연사였지만, 사무실 일을 좋아하지 않아서 일 년 후에 야외로 돌아가는 쪽을 택하였다.

이 어려운 기간에, 협회에 충성스러운 형제들이 사용할 법적 대행 기관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대회는 고사하고 공개 강연도 마련할 수가 없었다. 원래의 법인은 반대자들의 손에 넘어갔고, 성경 연구회 제2단체마저 배교자들인 카스프시코프스키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미 장악하고 있었다. 당국에서는 제3단체를 인가해 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막다른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충성스러운 종들의 기도에 귀기울이시고 해결책을 마련해 주셨다. 1차 세계 대전 이전에 진리를 배운 차우카라는 겸허한 남자가 원래의 성경 연구생 법인 회원으로 바르샤바에 등록되어 있었다. 그는 한때 영적으로 비틀거렸지만, 이 결정적인 순간에 와서는 솔선하여 회중과 다시 연합하였다. 그는 또한 자기가 위임받은 전권을 빌헬름 샤이데르에게 양도하기로 동의하였다. 이 일은 형제들이 “좋은 소식을 변호하고 법적으로 확립”함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빌립보 1:7, 「신세」.

1927년에 협회는 순례자로서 미국과 프랑스에서 회중들을 방문하던, 상냥하고 유능한 형제를 폴란드에 보냈다. 루드비크 쿠지마라는 이 형제는 열심히 활동하도록 많은 사람을 격려하였다. 그러나 그는 미국으로 돌아올 무렵, 협회 본부와 더 긴밀한 접촉을 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였다. 따라서, 러더퍼드 형제는 조직 면에서 조정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나로도비치 형제가 바르샤바 사무실을 떠났기 때문에, 폴란드에 있는 여호와의 종들을 돌보는 데 있어서 독일의 사무실과 함께 일할 인물을 폴란드에서 찾기 위해, 독일의 협회 사무실에서 파울 발체라이트가 파견되었다. 그 무렵 우치 회중이 야외 봉사에서 훌륭하게 앞장서고 있었으므로, 발체라이트 형제는 우치의 빌헬름 샤이데르에게 그 임명을 받아들이겠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겸손하게도 샤이데르 형제는 당시 「황금 시대」의 번역자이던 에드바르트 뤼디게르가 어떠냐고 제안했고, 그리하여 뤼디게르 형제는 거의 일 년 동안 그 책임을 맡아 일하였다.

여행이 제한을 받게 되어 독일의 형제들이 더 이상 폴란드에 도움을 줄 수 없게 되자, 폴란드의 신권 활동의 전반적인 감독은 스위스 베른에 소재한 협회의 중앙 유럽 사무실이 관할하게 되었다. 1928년에 그 곳의 마르틴 하르베크는 폴란드 밭을 위한 감독자로 일할 자격을 갖춘 인물을 다시 한번 찾기 위해 폴란드로 왔다. 또 한번, 샤이데르 형제는 그 임명을 받아들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이번에는 수락하였다.

꾸준한 증가가 이제 분명하게 나타났다. 1927년에는 기념식 참석자 수가 1101명이었다. 하지만 좋은 소식의 전파에 조금이라도 참여했다고 보고한 사람은 이들 중 76명뿐이었다. 1928년 말에는 봉사를 위해 조직된 회중이 24개였으며, 256명의 전도인이 정기적으로 활동을 보고하고 있었다. 1929년에는 왕국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조직된 회중 수가 40개에 달했고, 1930년에는 55개가 되었다.

가끔, 이 회중들은 협회 지시와 일치하게 활동 확장 주간을 마련하였다. 1929년에는 처음으로 폴란드 남동쪽에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왕국 진리를 전하기 위해 일부 콜포처들이 그 곳으로 이동하였다. 「1930 연감」은 이렇게 알려 준다. “형제들은 포도원에서 주님 곁에 앉아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과 함께 일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을 점점 더 깨닫는다.”

가려내는 시기

한편, 바르샤바의 사무실로 빌려 쓰고 있던 공간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 그 도시 내에서 다른 장소를 물색했으나, 하나같이 너무 비싸서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사무실을 우치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곳의 회중 모임 장소에 임시 사무실이 개설되었다. 마침내 1932년에 주고프스카 가 24번지에서 적당한 건물을 찾았다. 그 건물을 사기 위해서 자금이 얼마나 필요할 것인지가 회중들에게 언급되었으나, 전에는 그렇게 기꺼이 희생하던 형제들이 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살 사람이 나섰는데도 불구하고, 건물 주인은 지불을 연기하는 데 동의해 주었다. 다시 한번 형제들에게 그 상황을 알렸다. 역시 도무지 반응이 없었다. 어찌 된 일인가?

그 대답이 밝혀지기 전, 여호와께서는 다른 곳을 통해 도움을 베푸셨다. 샤이데르 자매는 지불 마감 날짜를 사흘 앞두고 비교적 부유한 이복 자매에게서, 비록 그가 진리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필요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회중들이 우치에 있는 건물을 구입할 자금 마련을 망설였던 이유가 밝혀졌다. 순례자로 봉사하고 있던 바츠와프 나로도비치가 폴란드 전역을 여행하면서, 사무실이 바르샤바에 남아 있어야 하고 자기가 다시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바르샤바에서 사무실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돈을 모으면서 자기에게 그 돈을 내라고 하였다. 나로도비치는 자기 목적을 이루지 못했지만, 많은 형제를 참으로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나중에 배교하였다.

그 때는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에 고착하지 않고 사람을 따르는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가려내는 시기였다. (베드로 후 2:14, 15) 가려내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인에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 채택과 관련된 활동이 포함되었다. 누구나 다 증거하고 싶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직에 남은 사람들은 여호와께 대한 사랑이 순수함을 증명하였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1930년대는—그리고 그 후 여러 해는—폴란드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했던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는 이사야 54:17의 참됨이 거듭 확실하게 나타난 시기였다. 그렇다. 여호와의 종들을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많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참 숭배를 근절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공격과 반격

로마 가톨릭 교직자들은 갈수록 더 자주, 특히 신문 지상을 통해 여호와의 종들을 비방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성경 연구생한테서 받은 서적은 모조리 공개적으로 불태울 수 있도록 내놓으라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한 가지 사례로, 호이니체에서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끈 사건이 있었다. 그 곳의 검사 사무실에서는 그 지방 파이오니아인 시미에슈코 형제를 인쇄물을 통한 모독죄로 기소하였다. 1933년에 열린 그 재판에는 대단히 많은 방청객이 참석하였다. 얀케라는 가톨릭 사제가 증언을 위해 소환되었다. 그는 박사 학위 소지자로서 그 지방 고등 학교의 종교 교사였다. 샤이데르 형제는 협회를 대표하였다. 토의된 제목 가운데는 영혼불멸, 영원한 고초, 연옥 등이 있었다. 나중에 얀케 씨는 패배를 인정하면서 샤이데르 형제에게 다가와 악수를 하고, 다시는 결코 그런 소송 사건에 말려들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크라쿠프의 신문인 「일루스트로바니 쿠리에르 초지엔니」(삽화 일간지)는 증인에 대한 공격에 합세하여, 증인들은 공산당 노래를 부르는 비밀 공산주의자들로서 소련에서 훈련을 받았고 보수도 거기서 받고 있다는 거짓 비난을 하였다. 이 경우에는 형제들이 신문사의 책임자들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였고, 편집인이 처벌되었다.

예수회에 속한 미에치스와프 스크루들리크가 증인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소책자를 개인적으로 발행하였다. 그러나 법정에 소환되자, 그는 병중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세 번이나 재판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동안, 그는 여러 차례 거처를 옮겨 다니다가 마침내 종적을 감추었다.

하지만 교직자들한테서 구두 공격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과 추종자들은 폭력도 휘둘렀으며,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증인들은 호별 방문 봉사에 참여하고 있을 때 반대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반대자들은 주먹, 발, 막대기, 돌을 사용하여, 성서 서적을 파손하고 증인들이 피투성이가 되거나 의식을 잃은 채 쓰러지게 만들었다. 전파하기 위해 먼 구역으로 여행하는 증인들은 도중에 붙잡혀 구타당하고 물에 처박혔으며, 자전거와 오토바이는 박살이 나고, 서적은 몰수당하여 파기되었다.

오랫동안 파이오니아를 한 볼레스와프 자바츠키는 회고록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썼다. 한번은 키엘체에 있는 그의 부모 집에서 집회가 진행되고 있을 때,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는 2000명의 폭도가 그 집을 에워싸고 돌을 던졌다고 한다. 던질 돌을 나르기 위해 손수레까지 동원되었다. 이 “게임”은 자정이 훨씬 지나서야 끝났다. 지붕으로 날아 들어온 돌들을 모았더니 2륜 마차로 여섯 대분이나 되었다! 이러한 박해의 물결을 막으려는 노력으로, 형제들은 실제 가해자들이 처벌받게 하는 데 때때로 성공하였다. 진짜 선동자인 교직자들을 재판에 회부할 수 있었던 경우도 드물지만 있었다.

합당한 조직에 내린 축복

특히 1920년대 말 이후로, 야외 봉사와 관련하여 회중들에게 더 큰 도움이 베풀어졌다. 회중들은 일정한 야외 봉사 구역을 임명받았다. 각 회중을 방문하도록 파견된 지방 봉사 지휘자들은 연설만 한 것이 아니라 야외 봉사에서 형제들을 훈련시키는 일도 하였다. 이 마련은 유익했으며 힘을 돋우어 주었다. 열심히 자기 희생적으로 일한 그런 형제 중 하나인 루드비크 키니츠키는 아직도 많은 오래 된 형제 자매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파이오니아들—당시 약 30 내지 50명—역시 자기 희생 정신을 나타냈다. 그들은 심지어 회중이 없는 먼 구역에서도 기꺼이 전파했으며, 자전거를 가진 사람이 드물어서 상당한 거리를 걸어 다녔다. 그들은 서적을 전하고 받은 헌금 중 얼마를 갖도록 허락받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가외 수입이 거의 없었다. 겨울에는 건초 더미 속이나, 바닥에 짚을 깐 헛간에서 코트를 이불삼아 잘 때가 많았다.

그들이 만난 사람들은 마음씨는 좋았지만, 흔히 성서나 세속 역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스테판 밀레프스키는 한 무리의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예수가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말을 했던 일을 떠올린다. 사람들이 분개하는 바람에 그는 하마터면 몰매를 맞을 뻔했다. 그들은 화를 내며 이렇게 소리쳤다. “주님 예수는 폴란드인이고 가톨릭교인이었단 말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인들은 양 같은 사람들을 찾는 데 계속 열심을 나타냈다. 1932년에 봉사의 직무에 10만 3323시간을 사용하고, 17만 7505부의 서책 및 소책자, 2101권의 성서 그리고 8만 7455부의 「황금 시대」를 전하였다. 그 결과, 바르샤바의 한 신문은 이렇게 논평하였다. “폴란드에 있는 성경 연구생들은 기껏해야 60만 명을 넘지 못할텐데, 이렇게 적은 수의 사람들에 대해 다른 종교의 경우에는 볼 수 없는 큰 소요가 일고 있는 것 같다.” 사실상, 그 당시 활동하던 증인의 수는 겨우 600명 정도였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의 눈에는 작은 자가 이미 천을 이루었던 것이다.—비교 이사야 60:22.

싸움이 치열해지다

가톨릭 교직자들은 증인들의 활동을 중단시키라고 당국에 계속 압력을 가했다. 그들이 증인들에게 씌우는 죄명은 늘 같은 것으로, 공산주의 선전을 퍼뜨리는 행위, 면허 없는 강매 행위, 일요 안식일 위반, 교회 및 교리에 대한 모독이었다. 1933년에는 경찰이 전도인의 활동을 제지한 사례가 약 100건 보고되었다. 광적인 폭도들의 손에 심하게 구타당한 경우도 41건 있었다. 2년 후, 교직자들이 증인을 경찰에 고발한 사건이 3000번이나 있었다. 교직자들은 한 가지 법 조항에 근거한 죄명이 효과가 없으면, 또 다른 법 조항을 연달아 들이대며 물고늘어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송은 허황된 내용으로서 재판에 회부되기도 전에 기각되었고, 더러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형제들은 체포될 때마다 변호사를 고용할 재력이 없었다. 그러나 협회 사무실이 그들에게 법적 조언을 베풀어 주었다. 상소, 유리한 판결, 가치 있는 판례를 남긴 사건들에 관한 정보가 담긴 많은 서류를 보내 주었다. 베풀어진 지시와 일치하게, 형제들은 법정에서 전문적인 법 해석에 역점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심각한 몇몇 사건에서는 형제들을 변호해 줄 수 있는 변호사들이 있었다.

행상 혐의에 맞서기 위해, 협회는 양심과 종교의 자유에 근거하여 그 개인이 전파할 권한을 부여받았음을 명시하는 신분증을 발급하였다. 공립 학교에 다니면서 의무적인 종교 수업을 거절한 이유로 종종 진급을 못하는 증인 자녀들을 위해서는, 협회가 특별한 증명서를 발급하였다. 그것은 그 어린이가 자기가 속한 종교 사회에서 종교 수업 과정을 밟았으며 이러이러한 점수를 받았음을 확증하는 증명서였다. 따라서 많은 회중에서 여러 해 동안 “주일 학교”를 운영하였다. 형제들이 무척 애를 쓴 끝에, 교육 종무부는 학교 당국이 그런 증명서를 받아들일 것을 의무화하는 법령을 제정하였다. 일단 그 점수가 학교 기록부에 오르면, 그 어린이는 진급할 수가 있었다.

일부 관리들은 종교적 편협이 동기가 되어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고발이 들어온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토룬에 있는 항소 법원 검사는 증인과 관련된 소송에서 모독죄를 기각하고 무죄 방면을 요구하였으며, 여호와의 증인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똑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또 한 사건에서, 포즈난의 항소 법원 검사는 교직자들을 가리켜 “사단의 조직”의 일부라고 했다고 고발된 증인에 대한 기소를 거부하였다. (비교 요한 8:44) 그 검사는 만연된 몹시 부도덕한 정신의 온상이었던 것으로 유명한 교황 알렉산더 6세의 궁정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 정신과 여호와의 증인의 훌륭한 행실 및 여호와를 섬기는 열심을 대조하였다.

서적의 유입을 막으려는 시도

거듭거듭, 교직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활동할 때 사용하고 있는 서적의 유입을 차단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가능할 때마다, 교직자들은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도록 정부 관리들을 조종하였다. 이를테면, 그들은 1930년에 내무 장관을 설득하여, 종교적 위선을 용감하게 폭로하는 잡지인 「황금 시대」에 대한 우리의 우편 권리를 취소하게 하였다. 그러나 단 수주일 후, 그 장관이 물러나게 되었고, 그의 후임자는 「황금 시대」가 수입되어 우편으로 유포될 수 있도록 다시 허가해 주었다.

증인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스위스로부터의 「황금 시대」 수입을 전면 금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므로 1933년에 형제들은 우치에서 그 잡지를 인쇄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교직자들이 인쇄업자에게 압력을 가해 형제들을 위해 더 이상 일하지 못하게 할 때마다, 형제들은 그 일을 기꺼이 해 줄 다른 사람을 발견하곤 하였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어 오다가, 검열 사무소의 지시에 따른 압류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한 끝에 잡지 자체에 대한 금지령이 내렸다. 형제들은 이 판결에 대해 상소한 후, 그 금지령이 확정되고 잡지 편집인인 아우구스틴 라체크가 1년 형을 선고받을 때까지 쉬지 않고 「황금 시대」를 계속 발행하였다.

반대자들 눈에는 그들의 목표를 달성한 것같이 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형제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발행된 「황금 시대」는 1936년 9월 1일 호였다. 같은 해 10월 1일, 바르샤바에서 인쇄한 새로운 잡지가 그 잡지를 대치하였다. 「노비 지엔」(새 날)이라는 이름으로, 이 잡지는 부패와 종교적 위선을 폭로하고 성서 진리를 옹호하는 기사를 계속 발행하였다. 이 잡지는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바르샤바에서 인쇄되었다.

한편, 1937년에 내무 장관은 「파수대」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다. 그 잡지를 여호와의 증인이 회중 집회에서 성서와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파수대」에는 체제 전복을 꾀하는 내용이 전혀 없었으나, 가톨릭 교직자들은 자기들의 영토라고 여기는 곳에 그 잡지가 유포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려고 결심한 우리 형제들은 등사판으로 그 잡지를 복사하기 시작하였다.—사도 5:29.

이 무렵, 우치 출신의 야신스키라는 주교가 가톨릭 신도 운동의 지원을 받아, * “소수 종파 반대 사무소”를 설립하였다. 그 다음 이 기관은 체계적으로 자체 성원들을 조종하여 정부 고위층에 침투시켰다. 그들의 한 가지 목표는 모든 워치 타워 출판물을 몰수하는 것이었다. 증인들은 붙잡힐 위험도 무릅쓰고 일을 계속하면서 새로운 두 종류의 팜플렛을 발행하였다. 당국은 처벌을 내렸다. 그러나 그 조치 배후에는 누가 있었는가? 흔히 죄명을 덮어 씌우기 위해 세속 법 대신 가톨릭의 교회법이 사용되었다. 전체적인 작전이 가톨릭 교직 계층의 지도 아래 수행되었음을 알리는,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1937년에, 가톨릭 신도 운동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증인에 대한 폭력 사건은 75건이었으며, 그중 2건에서 형제들이 살해되었다. 263건의 법적 소송 사건에서는 99건이 무죄로 판명되고, 71건이 형을 선고받았다. 나머지는 연기되었다. 129건에서 서적이 몰수되었으나, 형제들이 투쟁하여 99건의 경우 돌려 받는 데 성공하였다. 「1938 연감」은 이렇게 지적하였다. “이 나라에 있는 주님의 모든 백성은 사람을 기쁘게 하든지 않든지 간에 증거 활동을 수행하기로 결심하였으며, ·⁠·⁠·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점을 기억하였다.”

봉사 지향적인 121개 회중에 있는 전도인들이 그런 마음이었음은 확실하였다. 월 평균 약 800명의 전도인이 보고를 하였으며, 기념식 달에는 1040명이 보고하였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려고 작정하였다. 틀림없이 그들은 1938년 3월 22일에 당국이 우리의 우치 사무실 문을 폐쇄했을 때 그 일을 해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출판물을 더 이상 우편이나 철도편으로 보낼 수 없었으며, 발송인과 수신인 모두 처벌받게 되었다. 증인들은 상급 법원에 상소하려고 했으나, 호의적인 한 고위 관리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넌지시 알려 주었다. 그의 말은 “시대 정신”이 바뀌었으며, 설사 증인측이 재판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내무 장관은 증인의 활동이 전국에서 철저히 제한을 받게 만들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문제를 더 이상 법정에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여호와를 신뢰하면서 다른 방법으로 추진해 나가기로 결정을 보았다.

실은, 경찰이 우리 사무실을 폐쇄했을 때 서적 창고에 있는 비상구를 하나 빠뜨렸다. 그래서 벧엘 봉사자들은 날마다 성서 서적을 꺼내 와서, 결국은 여러 톤의 서적을 빼내 회중에 나누어 주었다. 거기에는 폴란드어 서적뿐 아니라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독일어, 이디시어 출판물도 있었다.

야외에서 일하는 형제들은 앞으로 다가올 어려운 시기에 사용할 다량의 서적을 비축해 놓는 면에서 온 마음을 다해 협조하였다. 예를 들면, 루블린 지역에서 온 유제프 붜다르치크는 소책자 1만 2000부와 많은 서책, 성서 500권, “신약” 500권, 노래책 500권, 축음기 음반 250장을 받아서 주의 깊이 숨겨 놓았다. 다른 형제들도 그렇게 했는데, 이렇게 비축해 놓은 것은 새로운 공급이 아예 끊어졌던 전시에 매우 유용하였다.

1938년에 내려진 금지령은 2차 세계 대전중의 어려운 시기에 수행할 지하 활동을 위해 일 년이 넘는 준비 기간을 형제들에게 제공한 셈이었다. 형제들은 전국을 몇 개의 지구로 나누고, 각 지구에 여러 회중을 포함시켰다. 가장 열심 있는 지방 형제들이 각 지구를 돌보았고, 각 지구는 회중들을 위한 서적, 특히 「파수대」의 등사에 대한 책임을 맡았다. 회중들이 받는 “신선한 양식”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이 조직 체계로, 나중에 전시의 혼란이 몰고 온 도전이 되는 상황을 성공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었다.

전쟁이 터지다!

2차 세계 대전이 1939년 9월 1일에 일어났다. 폴란드에서 들어온 마지막 보고가 시사하는 바로는, 당시 1039명의 전도인이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폴란드는 점령 기간중, 세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서부는 독일에 합병되었다. 바르샤바, 크라쿠프, 루블린 그리고 나중에 르비프 시까지 포함하게 된 중앙 부분은 제네랄 구베르네망이라고 불리었으며, 독일 정권의 지배를 받았다. 동부는 소련에 합병되었다. 상황은 지역에 따라 달랐다.

서부에서는, 독일의 게슈타포가 여호와의 증인으로 알려진 사람은 누구든지 체포하였다. 전체주의 나치 체제는 전적으로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잔인하게 다루었다. 하나님의 왕국의 옹호자인 증인들은 적으로 간주되었다. 「파수대」를 한 부라도 가지고 있다가 발각되거나 증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 발견될 경우, 그것은 범죄자라는 증거가 되었다. 영적 형제 자매들의 이름과 주소를 누설하라고 증인들에게 강요하기 위해 잔인한 방법들이 사용되었다. 형제들을 배반하거나 믿음을 포기한다는 선언서에 서명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다. 타협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박해자들까지도 이 여호와의 종들의 충성심에 경탄하였다.

우치에서 게슈타포는 샤이데르 형제를 비롯한 여러 사람을 체포하여 수용소로 보냈다. 포즈난에서는 형제 자매 69명이 독일 수용소로 끌려갔고, 22명이 살해되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시에 포즈난에서 진리를 배운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그 후 튼튼한 회중이 출현하였다. 그 회중의 열심은 이웃 구역에도 전달되어 폴란드 서쪽에서 조직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물론, 다른 여러 도시와 작은 읍에서도 형제들이 고통을 겪었다. 예를 들면, 당시 약 6000명이 거주하던 산악 휴양지인 비스와에서 51명의 형제 자매들이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다. 돌아온 사람은 13명뿐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저버리지 않으셨다

이 극심한 박해 기간에 창조주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셨음이 분명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승리는 생존이 아니라—필요하다면 죽기까지—충실을 유지하는 데 달려 있었다. (계시 2:10) 한 형제는 여러 시간 동안 무참하게, 특히 등과 신장 부위를 구타당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을 밀고하고 조직과 관련된 문제들을 누설하도록 강요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내하였다. 이런 학대가 이튿날에도 되풀이되었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훨씬 더 심해졌다. 사흘째 되는 날, 맞아서 퉁퉁 부어 오른 그의 몸에 매질이 가해지자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형제는 여호와께 고통에서 구제해 달라고, 심지어는 죽게 해 달라고까지 기도하였다. 갑자기, 그를 채찍질하던 게슈타포 대원은 욕설을 내뱉더니 채찍을 내려놓고 가버렸다. 어찌 된 일인가?

며칠 후에 그 형제는 복도에서 그 남자를 보았는데,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동료 수감자가 그 형제에게 한 말에 의하면, 그 대원의 집게손가락이 부러졌다는 것이다. 채찍질할 때 부러진 게 분명하였다.

체포되지 않고 겨우 남은 증인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작은 집단별로 모여서 성서와 「파수대」를 연구하였다. 그들이 받는 잡지는 대개 독일 형제들이 보내 준 것이었다. 그들은 받은 그 잡지를 등사하거나 손으로 베꼈다. 프리츠 오토는 이 점령 기간 내내 우치에서의 지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포즈난, 비드고슈치, 그단스크와 계속 연락을 취하였다. 적들에 의해 통신선이 이따금 차단되기도 했지만, 장기간 통신이 두절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네랄 구베르네망에서

폴란드 중·남부의 상황은 달랐다. 그 곳에서는 관리들이 그렇게 혈안이 되어 여호와의 증인을 색출하고 박해하지 않았으므로, 형제들은 항상 예방 조처를 취해 가면서 활발하게 일하였다. 그들이 바르샤바에서 「파수대」를 위한 등사 원지를 준비하면, 그 다음에 각 지구의 책임자들이 당시 이용 가능했던 원시적인 복제 장치로 그것을 등사하였다. 복사를 위한 서적 원본을 밀반입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었다. 심지어 때로는 가족이 진리 안에 있는 독일 군인들이 집에 와서 휴가를 보내고 동부 전선으로 돌아갈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배달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가슴 아픈 경험도 많이 있었다. 1942년 12월, 바르샤바의 독일 경찰은 등사판으로 인쇄하고 있던 스테판 밀레프스키와 얀 곤트키에비치를 붙잡았다. 그들은 즉시 마이다네크에 있는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다시 부헨발트로 이송되었다. 그러자, 제네랄 구베르네망으로 알려진 지역 전체의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돌보고 있던 루드비크 키니츠키가 이어서 그 책임을 맡았다. 그는 2년 뒤인 1944년에 체포되었고, 그 해 말에 오스트리아 구젠의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적들이 승리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 형제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흔들리지 않고 여호와께 충성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반대자들에게는 하늘의 심판관 앞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자기 태도를 뚜렷이 밝힐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욥 31:14; 로마 14:12.

이 공포의 시기에 사람들은 쉽게 겁을 냈다. 모든 사람이 서로 의심하였다. 불필요한 말썽을 방지하고자, 형제들은 사람들을 집회에 초대하거나 다른 관심자들에게 소개할 때 무척 조심하였다. 그러나 증인들이 열심히 일하고 여호와께서 축복해 주신 결과로, 새로운 집단이 우후 죽순처럼 생겨났다.

때로는 증거할 기회가 예기치 않게 생겼다. 1940년 늦가을, 카토비체 지역의 보이코비체코모르네에서 한 관심자가 사망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이 자기의 장례를 맡아 주기 바란다는 뜻을 그가 사전에 밝혔으므로, 한 형제가 유족의 집에서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하려고 준비하였다. 그런데 매장지에 많은 무리가 모여들었다. 그 광경을 본 우리 형제는 도저히 그냥 물러설 수가 없어서, 죽은 자에 대한 성경의 희망에 관해 한 시간이 넘도록 연설하였다. 그 때 이래로, 증인들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성서 소식을 들을 수 있게끔 장례식을 언제나 일요일에 가졌다.

도시에서는 대개 비공식으로 전파했지만, 시골 지역, 특히 루블린 부근에서는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전도인들이 다시 호별 방문 활동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지나친 이목을 끌지 않으려고, 뭔가를, 이를테면 어떤 물건을 살 수 있는지를 물어봄으로써 대화를 시작하곤 하였다. 그 대답이 영적 문제를 논의할 길을 열어 줄 때가 많았다.

일부 회중들은 외딴 마을로 가서 증거하기 위한 짧은 여행을 마련하였다. 그들은 그런 마을 주민들의 태도가 전쟁을 겪으면서 전과 달라졌음을 발견하였다. 이제는 청소년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형제들이 아직도 가지고 있던 서적이 유용하게 사용되었고, 새로운 회중들이 형성되었다.

물론, 사단은 순결한 숭배의 이런 확장을 중단시키려고 애썼다. 그가 사용한 방법 한 가지는 게릴라 부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가톨릭 사제의 부추김을 받은 일부 게릴라들은 독일 점령군과만 아니라 증인하고도 싸우기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믿음의 새로운 시련이 닥치게 되었다. 밤중에 형제들의 집이 습격을 당하였다.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구타하면서, 십자를 긋고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벽에 “성상”을 걸라고 명령하였다. 침입자들은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였다. 그런 공격을 몇 번이고 당한 가족들도 있었다. 많은 형제는 살아 남기 위해 숨어야만 했다.

소련 점령 지역에서의 “혁신 정책”

폴란드 동쪽의 많은 부분은 1939년 9월에 소련에 합병되었다. 따라서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그리고 얼마의 러시아인과 유대인 증인을 포함하여, 우리 전도인의 절반 가량이 조직의 나머지 사람들과 단절되었다. 그들에게 열심이 있긴 했지만, 신선한 영적 양식이 결핍되자 영성이 위태로워졌다. 그들은 슬로바키아를 통하여 조직과 접촉할 방도를 찾았으나, 도무지 찾을 길이 막연하였다.

그러던 차에, 여러 회중이 “혁신 정책”에 말려들게 되었다. 원래 그 정책의 목표는 형제들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다. 세상에서 분리되어 있고 “거룩한 옷을 입고” 생활할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시 110:3) 이 “혁신 정책”은 르비프에서 시작되어 루블린을 거쳐 멀리 바르샤바까지 퍼졌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명시된 바를 주의 깊이 적용하도록 교훈받은 것이 아니라, 얼마 안 가서 한 개인의 생각에 불과한 활동에 참여하도록 강요받았다.

예를 들면, 어리둥절해 있던 일단의 전도인들이 이 영향을 받고는 독일 점령지인 비아위스토크에 있는 군사 본부를 급습하여, 나치스의 기를 지붕에서 내리고 대신 백기를 달았다. 그들은 사건 당일에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이런 일들은 한 개인이 너무 주제넘게 되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의 지도에 의지하지 않고, 성경에 기록된 바를 넘어서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세워 놓은 본을 넘어설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상기시켜 주었다.—마태 24:45.

전후 시대를 앞둔 마지막 시험

전쟁이 끝나기 직전, 형제들에게 새로운 도전이 닥쳤다. 동부 전선이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사람들에게 대전차용 참호를 파라는 지시가 내렸다. 중립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여호와의 증인은 양심적으로 참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죽음의 위협까지 받으면서도 그 일을 거부하였다. 진리 안에 새로운 사람들을 포함하여 수십 명이, 만인이 보는 앞에서 총살당하였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들이 하나님을 버리느니 차라리 죽기를 택할 만큼 강한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 일 역시 증거가 되었다.

마침내 점령 기간이 끝났다. 폴란드의 여호와의 증인은 극심한 시험을 성공적으로 견뎌 냈다. 이제 전쟁 전보다 훨씬 더 수가 많아진 그들은 앞에 놓인 과업에 착수하였다.

주의 일에서 전진함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여호와의 증인들은 1945년 봄에 돌아와, 하나님의 왕국의 공개적인 선포 활동을 추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 가운데 빌헬름 샤이데르가 있었다.

이윽고 그는 우치의 주고프스카 가 24번지에 있는 건물을 다시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마련을 할 수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대중 우편 제도가 아직 운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 외국에서 개인적으로 갖고 올 수 있는 경우에만 새로운 서적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서적이 도착하기만 하면, 가능한 한 빨리 번역하여 등사 원지를 각 지구에 급송하였다. 즉시 그 일을 도우려는 자진 봉사자들이 또 나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물질적인 기부로 그 일을 지원하도록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여호와의 종들과 다른 주민들 사이의 차이는 대조적이었다. (요한 13:35) 우리 형제들 수백 명을 포함한 대부분의 우크라이나인들은 동쪽, 즉 소련의 새로운 국경선 안으로 이주하였다. 하지만 이런 이동이 있기 전에는, 제네랄 구베르네망의 동부와 남부에 사는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 증오심이 폭발하는 일이 잦았다. 반면에, 폴란드인 증인들과 우크라이나인 증인들은 평화스러웠다. 한번은 폴란드인 형제가 집회를 보고 우크라이나인 자매 셋과 함께 걸어서 집에 가다가 우크라이나인 게릴라와 마주쳤다. 게릴라 대원들은 그 형제를 붙잡아 총을 쏘려고 했으나, 자매들이 반항하면서 몸으로 그를 막아 주었다. 몸 싸움이 두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마침내 게릴라 대원들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들은 먼저 형제의 옷을 찢어서 불에 태워 버렸다. 형제는 속옷 바람으로, 눈 덮인 길을 2킬로미터나 맨발로 뛰어서 어느 우크라이나 형제 집에 도착하였다.

전시의 제한 규정들이 해제되었으므로, 증인들은 열정적으로 야외 봉사에 참여하였다. 전후 첫 보고는 약 2500명의 전도인이 있음을 밝혀 주었다. 1939년에는 단지 1039명이었다. 하지만 이 중 절반 가량이 이제는 소련에 합병된 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쟁과 점령의 세월 6년 동안, 폴란드에 남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실제로 400퍼센트의 증가가 있었던 셈이다! 예언자 다니엘의 이런 영감받은 말은 참으로 진실임이 입증되었다!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백성 중에 지혜로운 자가 많은 사람을 가르칠 것이[라.]”—다니엘 11:32, 33.

왕국 소식에 대한 관심의 증가가 일부 지역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났다. 포즈난의 얀 봉시코프스키는 이렇게 보고한다. “1945년에 수용소에서 돌아온 형제들은, 증인들의 작은 무리가 총 600명 가량 되는 격려적인 숫자의 왕국 전도인들로 성장한 것을 보게 되어 말할 수 없이 기뻤다! 활동적인 도시 회중 하나에서 세 회중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발전은 나라의 동쪽에서 있었다. 생활 여건은 아주 비참하였다. 한 순회 감독자는 자기가 1947년에 그 곳에 도착해 보니 단지 집들만 불타 버린 것이 아니라 온 동네가 쑥밭이 되어 있더라고 설명한다. 형제들은 대피호와 지하실에서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중들은 놀라운 속도로 증가하였다. 1945년과 1946년중에, 테레신 회중은 새로운 전도인이 매월 15 내지 20명씩 증가할 때가 많았고, 한 달에 42명이나 증가한 때도 있었다! 1947년에는 그 회중의 전도인이 이미 240명이었다. 알로이주프에 있는 회중은 전도인이 190명이었다.

그들의 영적 허기를 채워 줌

형제들은 물질적 소유가 거의 없으면서도, 자기들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성서와 성서 연구 보조물이라고 느꼈다. 개인용으로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한 권 갖고 있다면 복에 겨운 일이었다. 일부 전도인들은 야외 봉사에서 사용할 한 가지 복음서만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신속한 도움이 베풀어졌다.

1946년에 워치 타워 협회는 전쟁에 짓밟힌 나라에 있는 동료 신자들에게 의류를 헌물하자고 미국, 캐나다, 스위스, 스웨덴에 있는 증인들에게 청하였다. 그들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의류뿐만 아니라 성서도 몇 상자씩 보내 주었다! 얼마 안 있어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The Truth Shall Make You Free”) 책 수천 권과 「광풍을 거두는 종교」(Religion Reaps the Whirlwind)라는 소책자 25만 부가 도착하였다. 형제들이 얼마나 고마워했겠는가!

전쟁을 겪은 폴란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허기는 대단하였다. 1946년에는 6000명이 넘는 왕국 전도인이 그 필요를 채우는 일을 도우려고 나섰다. 지부 사무실은 최선을 다해 서적을 공급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지부에 중앙 인쇄 시설이 없었으므로, 「파수대」나 소책자 및 기타 인쇄물은 전국을 몇 지구로 나눈 각 지구별로 계속 복제해야 하였다. 장비가 시원찮았지만, 형제들은 얼마 안 가서 기본 영적 양식을 잘 공급받게 되었다.

활동할 새로운 밭

많은 수의 증인이—개인적으로 또는 가족 전체가—여러 해 동안 독일인들의 거주지였다가 전쟁 후에 폴란드의 서부가 된 곳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하였다. 전쟁 전에 폴란드의 동부였다가 이제는 소련에 합병된 곳에 살던 많은 폴란드인도 이 서부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 새로운 구역에 사는 사람들은 진리에 호응하였다.

이 지역에서 봉사하던 열성적인 자진 봉사자들 가운데 스타니스와프 코치에니에프스키가 있는데, 나중에 순회 감독자가 된 사람이다. 그가 전시에 갇혀 있던 독일의 노동 수용소에서 돌아왔을 때는 완전히 기진 맥진해 있었다. 하지만 회복 기간을 거치자, 다시 바쁘게 일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옐레니아구라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그 곳에 정착한 최초의 증인 가족이었다. 그 후 다른 사람들이 가담하여, 이내 회중이 형성되었다. 현재 그 도시에는 아홉 개의 회중이 있다.

마찬가지로, 얀 피에니에프스키와 그의 아내는 고슈프비엘코폴스키에서 봉사하려고 이주하였다. 피에니에프스키 형제는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는 1946년 2월에 호별 방문 봉사를 시작하면서 우리 이웃을 먼저 방문했지요. 처음 세 집은 함께 했지만, 나중에는 각자 따로 전파했습니다. 아내가 ‘이 도시 전체를 도대체 우리가 언제 다 돌 수 있겠어요?’ 하고 묻더군요. ·⁠·⁠· 우린 단 한 권의 성서와 소 한 마리를 기꺼이 바꾸겠다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에게 성서를 갖다 주었지만, 물론, 소를 받는 건 사양했지요.”

폴란드에 살고 있던 독일계 증인 모두가 전후에 독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지는 않았다. 남은 일부 사람들에게 있어서 폴란드어를 배운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협회는 왕국 소식을 폴란드어와 독일어로 제공하는 전단을 준비함으로써 그들이 야외 봉사를 하는 데 도움을 베풀었다. 그런가 하면, 한 폴란드 자매가 가족과 함께 프랑스에서 돌아와 바우브지흐 근처에 자리잡았을 때, 그 지역에 독일어를 하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마치 자기가 외국인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자매는 솔선하여 증거함으로써 금방 독일 형제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자매는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요! 우린 함께 호별 방문 봉사를 하고, 관심자들을 정기적으로 찾아가고, 성서 연구를 사회했답니다.”

그 지역의 많은 전도인은 그 곳에 좋은 소식의 전파자가 필요한 것을 보고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조피아 쿠시미에시는 이렇게 기술한다. “그 곳에는 증인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전 시간 봉사를 시작했어요. 구역에서 일 주일에 닷새를 봉사했습니다. ·⁠·⁠· 사람들은 예리한 관심을 나타냈지요. 때로는 한 해에 20명이 진리를 받게 도울 수 있었어요.”

구역은 광활하였다. 이용할 수 있는 교통 수단은 아직 없었다. 하지만 얀 스키바는 이런 기억을 떠올린다. “우리는 여러 읍을 가는 데만 30 내지 40킬로미터를 걷곤 했습니다. 새벽 다섯 시에 집을 떠나 해질녘까지 봉사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올 때가 많았지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 데고 짚 속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전에 아무도 좋은 소식을 전파한 적이 없는 곳까지 찾아갔다. 전쟁이 끝난 지 일 년도 채 못 되어, 증인들은 전국의 모든 곳에서 전파하고 있었다. 1946년 3월, 폴란드는 6783명의 왕국 전도인을 보고하였다!

증가를 촉진시킨 마련들

2차 세계 대전중, 폴란드의 형제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와 직접적인 접촉을 전혀 갖지 못했다. 여러 유럽 국가들을 돌보던 스위스 지부 사무실조차 독일 점령 구역에 사는 증인들에 관하여는 제한된 정보밖에 입수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폴란드 증인들이 세계 다른 곳에 이미 도입된 조직상의 변경에 관해 어두웠던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전후의 여러 장애에도 불구하고, 우치 사무실이 필요한 정보를 입수하는 대로, 그 변경은 신속히 이행되었다. 이 일이 있기 전에는, 주로 서적 배부를 강조했었다. 그러나 1946년 5월 호 폴란드어 「인포르만트」(현재의 「우리의 왕국 봉사」)는 효과적인 재방문을 하는 방법, 관심 있는 사람들과 성서 서적을 연구하는 방법, 정확하게 보고하는 방법을 설명하였다. 회중 집회에도 변경이 있었다. 지금은 신권 전도 학교라고 부르는, 신권 전도 과정이라는 것이 소개되었다. 형제들의 종(지금은 순회 감독자로 알려짐)의 방문 마련도 그 윤곽이 잡혔다.

이런 조직상의 변경이 이루어지면서 활동이 증가하였다. 그리고 1세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회중들이 통치체의 지시를 적용하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였다.—사도 16:5.

우리의 처음 왕국회관들

종전 후 빠른 시일 내에, 형제들은 왕국회관 용도로 개조하기 적합한 건물들을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포즈난에서는 60명을 수용하는 장소를 1945년 말에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건축 자재를 구하기가 어려웠지만, 형제들은 임기 응변을 잘했다. 심지어 협회가 발송할 때 쓴 상자의 나무까지 재활용하였다.

필요할 때는 클럽의 회의실이나 영화관, 혹은 다른 공공 시설을 빌렸다. 이런 장소를 구하기가 어려울 때는 개인 집이나 아파트에서 집회를 가졌다.

우리 형제들은 음악을 사랑하였고, 여호와를 찬양하기 위해 그 재능을 사용하는 데서 즐거움을 누렸다. 전후 처음 몇 년 동안, 일부 형제들은 아마추어 합창단과 관현악단을 조직하였다. 공개 강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그들이 공연을 했을 때는, 마을 전체가 강연을 들으러 오기도 했다.

대회—공식으로 그리고 비공식으로

전후에 처음으로 폴란드에서 열린 두 대회는 잊을 수 없는 행사였다. 그중, 1946년 6월에 있었던 대회는 루블린 부근의 보루베크 마을에서 열렸다. 약 1500명이 참석하였다. 형제들이 갖고 있던 지식에 입각하여 조직한 이틀간의 그 대회는 비공식으로 열린 셈이었다. 과거에 하던 식으로, 일정한 형제들이 자기가 선택한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경험담을 하였다. 260명이 여호와의 뜻을 행하기 위한 헌신의 상징으로 물 침례를 받는 것을 보게 된 참석자들은 참으로 기뻤다!

그 후, 같은 해 9월에 협회가 마련한 전국 대회가 카토비체에서 열렸다. 참석자는 5300명이었다. 그 프로그램은 열심히 연합된 활동을 하고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방법으로 봉사를 수행하도록 형제들을 격려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되었다.

길르앗 훈련을 받은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1947년 3월 19일,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의 졸업생 두 사람, 스테판 베후니크와 파베우 무할루크가 유틀란디아 호를 타고 와서 그디니아의 해변에 발을 디뎠다. 둘 다 폴란드어를 비교적 잘 했으며, 그들에게 특별히 맡겨진 임무 수행에 신속히 착수하였다.

그들의 더욱 중요한 임무 중 한 가지는 순회와 지역 활동을 조직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자면 여행하는 감독자들을—회중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지방 증인들과 함께 전파 활동을 하고, 유익하고 격려적인 강연을 할 형제들을—훈련시킬 필요가 있었다. 지역 활동 역시 개시되어, 각 순회구에서 정기적인 대회를 여는 마련이 생겼다. 이어진 몇 해 동안, 전국에서 이런 대회가 수십 회나 열렸다. 어떤 경우에는 공공 건물을 구할 수 있었으나, 여의치 않을 때는 증인들의 소유지 내에서 대회를 열었다.

첫 지역구에는 나라 전체가 포함되었다. 지역 감독자, 에드바르트 크비아토시는 1992년에 지상 생애를 마칠 때까지 폴란드 지부 사무실에서 여호와를 충실하게 섬겼다.

다양한 필요에 걸맞게 형제들을 훈련시키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1947년에 특별 과정을 위해 파이오니아들이 우치에 초대되었다. 참석했던 한 사람은 나중에 이렇게 썼다. “지부 사무실에서 보낸 두 주일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날마다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받았다.” 그 그룹 중 네 명은 여행하는 감독자로서 회중들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다.

선교인들은 조직과 관련된 문제에 관한 교훈만 한 것이 아니라, 야외에서도 형제들과 계속 바쁘게 일하였다. 그들은 가능한 대로 순회구를 방문하여 실용적인 도움을 베풀었다. 감독자와 전도인 모두가 그들의 도움을 소중히 여겼으며, 많은 사람은 오늘날까지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우치 사무실이 당한 습격

조직이 확장함에 따라, 증인들은 성서로부터 유익을 얻도록 사람들을 돕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사회주의 통치 아래 살고 있었는데도 그들의 활동에 대한 반대는 그칠 줄 몰랐다.

일찍이 1946년 2월에 우치에 있는 사무실이 습격을 당하였고, 그 곳에서 일하던 형제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자매만 몇 명 남았다. 그 건물은 24시간 내내 UB 우종트 베즈피에첸스트바(보안국) 경비원의 감시를 받았다. 하지만 그중 한 자매가 스위스 지부 사무실에 전보를 칠 수 있었다. 스위스 사무실을 통해 베른의 폴란드 대사관에 탄원이 들어갔다. 당시, 당국이 다른 나라에 좋은 인상을 주려고 애쓸 때였으므로, 일 주일도 채 못 되어 우치의 형제들이 석방되었다.

한편, UB(보안국)는 가톨릭 교직자들이 마치 “공동 적”이나 되는 것처럼, 교직자들을 계속 감시하는 일에 형제들을 가담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중립의 원칙을 너무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듬해에 증인들이 크라쿠프에서 전국적인 대회를 열었을 때, 7000명의 참석자는 강제 수용소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구별시키던 보라색 삼각 표시와 비슷한 모양의 가슴표를 달았다. 그들은 나치 통치하에서 얼마나 심한 박해를 받았는지를 잊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잊지 않게 해주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1946년, 나라 곳곳에서 여호와의 증인에게 저지른 극악 무도한 행위에 관한 보고가 지부 사무실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나로도베 시위 즈브로이네(국군)의 게릴라가 잔인하게 박해하였다. 그들은 공산주의 정부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도 공격 활동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그것은 로마 가톨릭 교직자들의 영향을 받은 탓이었다. 그들이 강요한 것은 사단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원한 것과 놀라우리만큼 비슷하였다. 사단은 ‘내게 단 한 번의 숭배 행위를 하라’고 다그쳤다. (마태 4:9, 10, 「신세」) 이들 가톨릭 게릴라 부대는 ‘가톨릭교인임을 나타내는 단 한 번의 숭배 행위를 하라’고 강요하였다.

이를테면, 3월 1일에 헤움 근처에 사는 15세의 헨리카 주르는 자기 회중의 형제와 함께 이웃 마을에 있는 관심자들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 소녀의 마지막 재방문이 되고 말았다. 두 전도인 모두 그 날 마을에 묵고 있던 나로도베 시위 즈브로이네 대원들 손에 붙잡힌 것이다. 형제는 심하게 구타당했으나 도망하여 생명을 건졌다. 자매는 장시간 끔찍한 고문을 당하였다. 고문자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제안하였다. “속으로는 네 마음대로 생각하더라도, 가톨릭식으로 십자를 긋기만 해라. 그렇지 않으면 총알이 날아갈 테니까!” 결국, 충절이 꺾이지 않자, 이 어린 자매는 부근의 숲 속으로 끌려가 총살당하였다.

그 후 3주일도 채 못 된 3월 18일 저녁, 폭도 30명이 폴란드 동부에 있는 얀 지엠초프의 집을 습격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강제로 그 가족으로 하여금 지방 가톨릭 사제에게 가서 고해를 하고 그렇게 했다는 증명서를 받아 오게 하려고 하였다. 성서 진리에 대한 설명이 나오자, 폭도는 광분하였다. 그들은 무자비하게 몽둥이로 지엠초프 형제를 치면서 십자가에 입맞추라고 거듭 명령하였다. 그들은 성서를 버리고 가톨릭 교회로 돌아오도록 강압하기 위해, 그를 때려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찬물을 끼얹어 그가 정신을 차리자, 문자 그대로 그를 때려죽였다. 이런 살인을 저지른 후, 그들은 천연덕스럽게 앉아서 저녁을 먹은 다음 나머지 가족도 때려서 정신을 잃게 하였다.

6월 12일에 살인 사건이 또 일어났다. 포들라시에 지방의 알렉산데르 쿨레샤가 그 전날 밤에 공격을 당한 카드지엘라 형제 가족을 보살피러 갔다. 그야말로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피해자를 분간하기조차 힘들었다! 쿨레샤 형제와 그의 가족은 도움을 베푼 후, 자기들이 이미 다음 표적이 된 줄도 모르고 집에 돌아왔다.

그 날 저녁, 폭력배들이 그들의 집을 에워쌌다. 그 곳 본당 사제의 충동을 받은 그들은 그 가족을 여섯 시간 동안 학대하였다. 그 폭도는 쿨레샤 형제를 가톨릭 교회로 돌아오게 하려고 작정한 나머지 그를 때리다 못해 죽이고 말았다. 그의 아들 예시는 이 때 몹시 맞았지만, 2년 후에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여 현재까지 계속하고 있다.

1947년에, 폴란드에서 가톨릭교로 개종시키려고 여호와의 증인에게 자행된 행위를 재검토한 결과, 4000명이 학대당하고 그중 60명이 살해되었음이 밝혀졌다. 나로도베 시위 즈브로이네는 약 800번이나 여호와의 증인의 집들을 공격하였다. 여호와의 고대 증인들의 경우와 같이 현대의 이 여호와의 증인들에 관해서도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였다고 진실로 말할 수 있다.—히브리 11:38.

“‘중세’를 연상케 하는 끔찍한 9월”

가톨릭 교직자들은 신자들에게 가톨릭 종교와 일치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용납하지 않는 광적인 편협심을 주입하였다. 폴란드의 지배적인 종교를 대표하는 그들은 종종 학생들과 어른들을 부당하게 이용하여, 집단 폭행을 저지르게 하였다.

1948년에 여호와의 증인이 루블린에서 지역 대회를 열었을 때, 교직자들은 증인들이 그 곳 가톨릭 성당을 파괴하려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다고 주장하면서 신자들을 선동하였다. 신자들은 자기 교회와 도시를 지키라는 요청을 받았다. 한 떼의 광신자들이 공격해 왔다. 이 경우에는, 대회의 보안을 임명받은 무장 경찰이 기승을 부리는 주모자들을 차에 싣고 도시 밖으로 30킬로미터나 달린 다음, 찻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풀어 놓았다.

1948년 9월 5일의 상황은 좀 달랐다. 바르샤바에서 약 120킬로미터 떨어진 읍인 피오트르쿠프트리부날스키에서 증인들이 순회 대회에 참석해 있을 때였다. 선교인들인 베후니크 형제와 무할루크 형제도 참석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 기세 등등한 큰 떼가 근처에 모여들어, 그들이 “주교”라고 부르는 선교인들을 잡으려고 프로그램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증인들이 대회장을 떠날 때, 수백 명의 폭도가 달려들어 선교인들을 포함한 일부 증인들을 구타하여 의식을 잃게 하였다. 부상자들은 성삼위일체 병원으로 옮겨져 상처를 치료받았다. 그러나 병원측은 그 곳 수녀들의 영향을 받고, 그들이 계속 입원해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신문에 이 사건에 관한 보도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바르샤바 주재 미국 대사관이 발생한 사건의 상세한 경위를 접수하게 되자, 미국의 통신사들이 그 집단 폭행을 보도하였다.

그 후 3주도 못 되어—한 잡지가 “‘중세’를 연상케 하는 끔찍한 9월”이라고 부른 이 상황에서의 제2막이 펼쳐지기라도 하듯이—여론을 들끓게 만든 또 다른 사건이 동일한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피오트르쿠프트리부날스키 부근에 있는 건축물 유적과 조각품 및 그림에 대한 목록을 작성하라는 문화 예술부의 요청에 한 대학생 그룹이 응하였다. 문화 예술부가 교회 당국의 허락을 받았으므로, 학생들은 그 지방의 한 교회 안에서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가까운 카미엔스크 읍의 한 본당 사제 집에서 일하는, 열심이 지나친 가정부가 그 교회에 뛰어들더니, 학생들에게 욕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그 가정부는 그들이 학생들이기는커녕, 십자가를 부수고, 교회를 더럽히고, 무덤을 훼손하려는 여호와의 증인들이라고 우기는 것이었다. 그 학생들은 아무도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었는데도, 사제는 당장 교회에서 나가라고 명령하였다. 소문이 순식간에 인근 마을들로 퍼졌다. 설명을 해도 소용 없었다. 광분한 군중은 몽둥이와 쇠스랑과 돌을 가지고 몰려와서 이 젊은이들을 잔인하게 구타하였고, 여섯 명이 입원하였다.

이번에는 당국이 신속한 반응을 보였다. 본당 사제와 가정부를 포함하여 선동자들이 체포되어 장기 형을 선고받았다. 어쨌든 이 사건은 교직자들이 여호와의 증인을 반대하는 하나의 도구로 집단 폭행을 사용하려는 시도를 약화시켜 주었다.

공식적인 괴롭힘

하지만 또다시, 폴란드의 정치 풍토에 극적인 변화가 있었다.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종교를 국가에 부속시키려고 하였다.

이미 지적했듯이, 1946년 2월에 우치의 지방 보안 사무실의 한 관리가 증인들을 가톨릭 교회에 대한 첩보원으로 등록시키려고 애썼지만 증인들이 거절했었다. 넉 달 후에 비밀 경찰 대원이 지부 사무실을 다시 찾아와, 형제들에게 경찰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다시 고집하였다. 협조하면 여호와의 증인 모임을 위해 최상의 장소를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협조하지 않을 경우에는 심상치 않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는 떠나면서 “아무도 우리를 막을 수는 없다”고 협박하였다.

그 후, 어떤 대회들은 허가가 취소되었고, 다른 경우에는 경찰이 참석한 사람들을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1949년 5월에 헤움 근처에서 순회 대회를 보고 있는 도중, 경찰이 프로그램을 중지하라고 명령하였다. 책임 맡은 형제들은 계속 진행하다가 체포되었다. 증인들은 마지막 날에 다시 모였고, 체포된 형제 대신 한 형제가 침례 연설을 하였다. 그 날 오후 공개 강연에 약 천 명이 참석하였다. 경찰은 연사를 한 사람씩 연달아 체포하였다. 한 사람이 잡혀 가자마자, 또 다른 사람이 그를 대신하여 서곤 하였다. 그 날 끝날 때까지, 연설한 형제들은 무려 27명이었다!

선교인들이 추방되다

폴란드에 도착한 지 2년 4개월 만인 1949년 7월 24일에, 스테판 베후니크와 파베우 무할루크는 이 나라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베후니크 형제는 그 기간의 봉사에 관해 사적인 기록에 이렇게 썼다. “이제 1949년에는 지부의 일이 이미 더 잘 조직되어 있다. 회중들간에 협동이 훨씬 더 잘 이루어진다. 이미 지역구가 셋이며, 6월에는 우리[선교인들]가 1947년에 도착했을 때의 두 배인 1만 3699명의 전도인이 있었다. 활동적인 회중이 710개이며, 45명이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의 활동이 묵인되고 있어서, 호별 방문 전파가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1949년까지 증인들의 활동은 예상보다 오랫동안 묵인되어 왔다. 한 해 전인 1948년에, 법무 장관은 “소련 내의 종교적 자유”라는 제목으로 연설한 적이 있다. 우치의 지방 법원에서 한 그 연설 가운데, 장관은 소련의 소수 종파들이 일방적으로 자진적인 해체를 하고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교회와 합쳤다고 밝혔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소련 내 소수 종파들의 이 “자진적인 해체”라는 말을 폴란드에서도 곧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지하 활동의 준비에 들어갔다.

동시에, 증인들은 단체에 관한 새로운 법에 따라, 워치 타워 협회의 활동을 설명하는 설립 허가 신청을 위해 정관을 당국에 제출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법적 상황에 일치하게 그것을 법적으로 등록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동안에, 더 많은 사람이 조직으로 모여들었다. 연속 10차 전도인 신기록을 수립하여, 1950년 3월에 864개 회중에서 1만 8116명의 전도인이 보고하였다. 그 해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는 2만 8918명이 참석하였다. 폴란드에 여호와의 숭배자가 될 사람이 아직도 많다는 참으로 확실한 증거였다!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으리

그러던 중, 1950년 4월 21일 밤에 UB 대원 한 떼가 우치의 지부 사무실을 습격하여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벧엘 봉사자들이 소련을 위해 첩보 활동을 하면서 “폴란드 인민 공화국 정부를 무력으로 전복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UB 대원들은 증거를 찾으려고 지부 구내를 샅샅이 뒤졌다. 물론,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증인의 종교 활동을 다루는 서류들이 압수되었다. 그 다음날, 협회의 이사들이 구속되었다.

지부에 남은 사람들은 가능한 대로 많은 잡지를 인쇄하여 회중들에 분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재고로 있는 종이 약 20톤을 모두 사용해서 출판물을 인쇄하여 발송하였다. 그리고 나서 등사기와 다른 기계 및 서류철은 숨겨 놓았다. 이런 상황 아래 지부에서 계속 일하는 데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였다. 이 시기에, 그 형제들은 관심자로 생각되는 사람들로부터 그 도시의 특정 장소에서 만나자고 요청하는 편지를 받았다. 하지만 실제 속셈은 단지 형제들을 밖으로 꾀어내려는 것이었으며, 거기서 일부 벧엘 형제들이 사실상 납치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남은 형제들은 반드시 더 많은 수로 무리를 지어 외출하였다.

6월 21일 저녁, 벧엘이 또 습격당하였다. 이번에는 거의 모두가 체포되었다. 그들은 형제들을 무개 트럭에 싣고 우치 시를 누비며 달렸다. 호송원들은 휴가 여행을 떠나는 셈이라고 놀렸다. “그렇다면, 우리 노래를 부릅시다” 하고 한 형제가 제안하였다. 그리고는 호송원들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용감한 이 여호와의 종들은 갑자기 이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충실한 자는, 충성스러운 자는 결코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으리.”

같은 날 저녁, 전국에서 증인들 수백 가정이 수색당하였다. 많은 형제가 체포되었다. 하나님의 왕국의 적들은 조직을 해체시키고 여호와의 증인을 잠잠케 만들고 싶어하였다.

이런 모든 일이 있은 후, 1950년 7월 2일에 가서야 종무국은 보도 매체를 통해 폴란드 내 여호와의 증인 연합회 등록 신청을 거부한다고 발표하였다. 그 독단적인 발표는 당시 그 조직이 해체되었으며 그 재산은 국가에 수용되었음을 명시하는 것이었다.

UB 고문실

많은 증인에게 있어서, 이런 구속과 취조 파동은 한동안 지속될 고문과 고통 기간의 시작에 불과하였다. 취조자들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를, 특히 다른 나라의 정보 기관을 위한 첩보 활동을 강제로 고백시키려고 하였다. 형제들을 UB 정보 제공자가 되도록 설득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공개되지 않은 UB 통계에 의하면, 그 자료에서 “그 분파의 성원”이라고 언급된 사람들 중 90퍼센트가 탄압을 받았다. 그 결과, 야외 봉사에 참여했음을 보고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일시적으로 반감되었다.

빌헬름 샤이데르는 8일 동안 밤낮으로 쉴 새 없이 심문을 받았다. 심문자들은 심하게 구타하면서, 그들이 꾸며 댄 혐의에 대해 유죄를 시인하도록 강요하려고 하였다. 그가 의식을 잃으면,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찬물을 끼얹었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전혀 주지 않았으며, 한번은 72시간 동안 내리 강제로 무릎을 꿇고 있게 하였다. 그 후, 그는 우치에서 바르샤바로 이송되어 발가벗긴 채로 24일 동안 비좁은 지하 감방에 투옥되었다. 그 안에서는 앉아 있을 수도, 누울 수도, 똑바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그가 타협하도록 더 강압하려는 시도로, UB는 그의 아내와 딸을 체포하여 학대하였다. 그렇지만 아무 것도 그의 충절을 꺾지 못하였다.

지부의 총무였던 하랄트 압트도 동일한 학대를 받았다. UB는 엿새 동안 쉬지 않고 심문을 하면서, 계속해서 머리를 때리고 주먹으로 배를 후려쳤다. “네가 나치즘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수용소에서 5년을 보냈다 해도, 우리는 네가 게슈타포 대원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을 그는 들었다.

에드바르트 크비아토시는 사흘 동안 무참하게 매를 맞고 음식은 구경도 못하였다. 무자비한 심문자들은 그를 목매달아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두 주일 동안 잠도 못 자게 하였다. 그는 고무 몽둥이로 발뒤꿈치를 얻어맞았다. 그의 갈비뼈와 코가 부러지고, 두개골이 움푹 패고, 고막이 터졌다. 모두 합쳐 32일 동안 학대를 당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겁을 내거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형제들을 거짓으로 고발하지 않았다.—비교 욥 2:4.

다른 형제들도 비슷한 학대를 받았다. 그들 중에는 고문자들에게 심문받을 때, 앉는 부분의 중앙에 대못이 박힌 의자에 앉아야 했던 형제들도 있었다. 그 고문을 “로마식 대우”라고 불렀다. 그들은 단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유로, 거짓말 투성이인 성명서에 서명하기를 거절한다는 이유로, 또한 동료 그리스도인 형제들에 대한 거짓 증언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이 모든 고통을 겪었다.

1950년에 일부 형제들은 정치성을 띤 스톡홀름 평화 서명 운동에 서명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자비에르치에에 있는 교도소로 끌려갔다. 거기에 처음 투옥된 형제는 포렝바에 살던 브와디스와프 드라베크였다. 그는 무릎까지 물이 차는 어두운 지하 감방에 감금되었다. 구석에 있는 목재 위에서 무릎을 구부리고 앉으면 조금이나마 쉴 수 있었다. 이틀 후에 그 방은 형제들로 꽉 차게 되었다. 모두 그 운동에 서명하기를 거절한 것이다. 이따금 교도관들이 수감자들에게 변을 볼 수 있도록 들통을 주었다. 들통을 받았을 때 사용하지 않으면, 두번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며칠 후에는 물에서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났다.

1950년에 대규모로 체포되는 일이 있은 이래 여호와의 증인들이 겪은 학대를 일일이 설명하자면 평생을 두고 해도 못다 할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의 충절이 심하게 시험받았으며, 그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은 끝에 사망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죽기까지 충실함

J. 슐라우에르형제는 1950년 8월, 치에신에 있는 UB 막사로 불려가 심문받았을 때 겨우 20세였다. 그는 동료 신자들을 고발하기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목적이 좌절되자, 심문자들은 문초 도중에 그에게 총을 두 번이나 쏘았고, 한 시간 뒤에 여호와의 이 젊은 종은 죽었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에 의사에게 간신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내가 여호와께 충실하기 때문에 UB 대원이 날 쏜 겁니다.”

다른 증인들은 여러 해 동안, 결국 죽음이 그들을 해방시켜 줄 때까지 고통을 당하였다. 크라쿠프 출신의 여행하는 감독자인 알로이지 프로스타크는 1952년 5월에 슈체친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바르샤바와 우치에서 2년간 수감되어 있다가, 어찌나 심하게 두들겨 맞고 탈진했던지 입원해야 하였다. 그의 아내가 변호사의 제안대로 하여 1954년에 그를 석방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그는 일 주일 후에 사망하고 말았다. 약 2000명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한 형제가 매장지에서 용감하게 장례 연설을 하면서 그 기회를 이용하여, UB 대원들이 증인들을 심문할 때 사용한 잔학한 방법에 항의하였다. 나중에 그 형제 자신도 체포되지 않으려면 숨어 지내야 하였다.

보고에 의하면, 1956년까지 폴란드 전역에서 16명의 형제가 UB 고문 때문에 혹은 치료를 거절당했기 때문에 죽었다. (나중에 또 다른 경우들이 밝혀졌다.) 이런 형제들의 시체는 대개 뚜껑이 닫힌 관에 넣어 유족에게 보내졌는데, 그 관을 열어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여러 달이 지난 다음에야 사랑하는 가족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비밀 재판

이 비인간적인 학대 가운데서도 생존한 사람들은 협회 이사들에 대해 불리한 증언을 강제로 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두 형제가 고문을 견디다 못해 굴복하고 억지로 거짓 증언을 하였다. 하지만 UB는 그들 나름대로의 “증거”도 조작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사용하여 1951년 3월 16일부터 22일까지 바르샤바에서 공개되지 않은 상태로 비밀 재판을 열었다. 나머지 여호와의 증인들은 신변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와 있다는 것이 형제들이 충실하게 인내하는 데 격려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커다란 무리를 이루어 법정 앞에 모였다.

구급차를 이용하여 안마당까지 들어간 관리들은 눈에 띄지 않게 피고들을 법정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수감자들이 차에서 내릴 때, 안마당의 담 가까이에 접근할 수 있었던 형제들의 자녀들이 목청껏 격려의 말을 외쳤다. 피고들에게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생각나게 해주는 행동이었다.

일곱 명의 형제가 피고석에 앉았다. 폴란드 내 협회 법인의 이사 네 사람과 여러 이유로 조직에 중요하다고 간주된 다른 형제 세 사람이었다. 검사가 빌헬름 샤이데르에게 사형을 구형하였고, 법관은 그에게 종신형을 선고하였다. 다른 세 명의 이사에게는 각각 15년형이 선고되고, 나머지 형제들에게는 더 짧은 기간의 형이 선고되었다. 모두 빈틈 없는 탈주 방지 시설을 갖춘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 다음에는?

용케도 구금되지 않고 있던 두 명의 지역의 종은, 모든 회중에 대한 사랑에 찬 염려에서 우러나와, 다른 경험 있는 형제 몇몇과 함께 형제들에게 영적 양식을 공급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통신 시스템을 고안해 냈는데, 그것은 거의 40년 동안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순회 감독자들이 투옥된 형제들이 전에 하던 일을 수행하도록 임명되었고, 끊임없는 방해에도 불구하고 1952년 말에는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왕국에 관해 전파하는 사람의 수가 1만 9991명으로 증가하였다!

이것은 보안대가 기대한 바가 아니었다. 그들은 2년 내에 폴란드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근절시킬 계획이었다. 실패에 분개한 그들은 자기들이 최종적인 치명타로 여기는 일을 꾸몄다. 다시금 잇따라 체포되는 파동이 일어났다. 전국 위원회의 네 위원과 그 외의 열성적인 형제 자매들이 붙잡혔다. 우치에서 여론 조작을 위한 재판을 열 계획이 세워졌다.

그 재판이 열리기 전 여러 달 동안, 한 형제는 죽고, 몇몇은 신경 쇠약에 걸렸는가 하면, 지그프리트 아다흐라는 또 한 형제는 교도소에서 중병에 걸려 석방되었다. 2년이 넘는 준비 끝에, 5일간의 재판이 1955년 3월 10일에 시작되었다. 그 결과로 바르샤바 재판이 있은 이래 가장 무거운 평결이 내려졌다. 전국 위원회의 세 위원인 얀 로레크, 타데우시 호다라, 브와디스와프 슈클라제비츠는 각각 12년 형을 선고받았다.

다른 증인들은 그 일을 보고 겁에 질려 잠잠케 되었는가?

청소년들이 믿음과 용기를 나타내다

학교에 다니는 어린 증인들도 믿음을 굳게 지켰다. 사실, 그들은 학교에서 무신론적 사상을 끊임없이 주입받았다. 그 사상을 배격하는 아이들은 웃음거리가 되었다. 흔히 정치 문제가 교과 과정에 포함되었으며, 행진이나 시위에 참여하는 것도 의무적이었다. 군사 훈련 수업을 도입한 학교도 있었다. 양심상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은 대개 퇴학당하였다.

그러나 이 어린 증인들 중 상당수는 낙심하지 않고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함으로써 왕국 소식을 퍼뜨리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1954년, 적절히 조심하면서 파이오니아들과 며칠씩 갖는 특별 모임이 여러 차례 열렸다. 그들은 1953년 뉴욕에서 열린 신세계 사회 국제 대회에서 제공된 일부 연설의 내용을 들었다. 얼마나 영적인 힘을 새롭게 해주는 기회였는가! 사랑에 찬 여호와의 백성의 세계적 형제 관계에 속해 있음을 이렇듯 일깨움받다니 얼마나 격려적이었겠는가!

그러면 교도소에 있는 형제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가?

교도소—복음 전파를 위한 밭

1952년부터 1956년까지 처음으로 수감되었고 1969년에 네 번째로 풀려 나온 브와디스와프 프시비시는 이렇게 회상한다. “감금 형을 선고받으면 남들이 갈 수 없는 구역에서 봉사하라는 임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교도소 창살 안에서 전파한 결과로 많은 수감자가 여호와와 그분의 놀라운 목적에 관해 듣게 되었다. 투옥된 형제들은 또한 작은 집단들을 조직하여 날마다 짧은 시간의 집회를 마련하였다. 심지어 교도소 창살 안에서도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다.—사도 6:7.

증인들의 본이 되는 행실 덕분에, 교도소 직원들의 태도도 차차 바뀌기 시작하였다. 로무알트 스타프스키는 한 교도소에서 증인들이 피가 섞인 음식을 받음으로써 시험받는 일이 더 이상 없도록 식단이 바뀌었던 일을 기억한다. 하루는 감방에 음식이 담긴 커다란 통 두 개가 놓였는데, 한 통에는 피가 든 소시지가 가득 들어 있었고 다른 통에는 야채 수프가 들어 있었다. “이것[수프]은 단지 증인들을 위한 것이야”라고 교도관은 강조하였다.

교도소에서 풀려 나오다

하지만 1956년에는 이미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관리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 해 봄에 크라쿠프 출신의 지역 감독자가 교도소에서 석방되면서, 당국이 증인들과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문제를 숙고한 후, 종무국에 찾아가도록 공식 대표단을 구성할 세 형제를 뽑았다.

세 형제는 자기들은 소식을 전달받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며, 협상할 권한을 가진 사람들은 오로지 수감되어 있는 협회 이사들뿐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종무국은 기결수들을 상대할 마음이 없음을 밝혔다. 두 번째 모임에서 세 형제는 증인들이 생각하는 바로는 투옥된 이사들에게 죄가 없음을 강조했으나, 역시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모임이 끝났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서 1950년 이래 수감된 사람들 일부를 비롯하여 많은 형제 자매가 석방되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는 세 명의 이사와 나중에 형을 선고받은 전국 위원회의 위원들도 들어 있었다. 마침내 1956년 8월에 빌헬름 샤이데르도 풀려 나왔다. 어떻게 된 일인가?

정치적 변화상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거짓 증언을 한 사람들로 앞에서 언급한 두 형제가 증언을 철회했으며, 이 일을 근거로 이사들은 공식적으로 혐의를 벗게 되었다. 그런데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관리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수적으로, 매우 빠르게 증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3년도 채 못 되는 사이에, 왕국 전도인 수는 3만 7411명에 도달하여 87퍼센트의 증가를 보였던 것이다! 그 후 1972년에, 정보에 밝은 한 보안 기관원은 이렇게 시인하였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의 법정 재판과 그들이 선전하는 주장에 관해 발표하는 것이 그 조직을 약화시키기는커녕 정반대 효과를 가져왔음을 본다.” 여호와께 대한 충성은 승리를 거두었다!

법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증가된 활동

일단 석방되자, 형제들은 즉시 회중의 영적 필요와 좋은 소식의 공개적 전파에 관심을 기울였다. 전파하는 방법과 제자를 삼는 방법에 관해 훌륭한 교훈을 베푼 「왕국 봉사」가 형제들을 위해 마련되었다.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는데도, 회중들은 여행하는 감독자의 정기적인 방문을 받았고 신권적 활동에 열심이었다.

폴란드의 헌법은 종교를 실천할 자유를 공식적으로 보장하였고,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 보장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호별 방문 전파가 자신들의 숭배의 일부이므로, 그 일에 참여하였다. 그런데도, 형제들이 야외 봉사를 하고 있을 때, 경찰은 “존재, 구성 및 목적이 비밀에 싸인 채 국가에게 숨겨져 있는 협회”라고 표현된 단체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을 체포하였다. 종교적 자유를 위한 법정 투쟁의 새로운 국면이 펼쳐 질 참이었다.

형제들은 법정에서 그리고 직접 혹은 법적 대표자들을 통해 당국에 편지를 써서 자신들의 입장을 참을성 있게 거듭 밝혔다. 마침내 1963년 5월, 대법원의 판사 일곱 명은 이런 판정을 내렸다. “이 종교 협회의 해체는 논리적으로 모든 형태의 조직적 활동의 금지를 의미하지만, 개인적이거나 사적인 숭배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며 그런 숭배는 처벌 대상이 아니다.” 형제들은 그 말을 개인적 호별 방문 전파는 불법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이제 증인들은 영적 추수 활동에서 훨씬 더 힘차게 전진하였다. (마태 9:37) 활동적인 전도인 수가, 특히 대도시에서 급속히 증가하였다. 한편,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에서는 상태가 비교적 부진하였다. 그래서 폴란드 남부의 형제들은 더 크게 필요한 구역에 보낼 보조 파이오니아 그룹들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이 그룹들은 파이오니아 센터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대개 십여 명으로 구성된 각 그룹은 형제들이 소유한 농장 내 건물에 유숙하기도 하고, 흔히 텐트에서 유숙하기도 했다.

많은 전도인이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씩 파이오니아 센터에 가담하여 봉사함에 따라 이 활동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새로 시작된 성서 연구는 가장 가까운 회중에서 온 전도인에게 인계하였다. 이 방법은 오늘날에도 때때로 사용된다. 이 방법으로 수행한 활동을 여호와께서 축복하셨음이 분명하다.

영적 양식을 공급하는 일의 진전

여호와께서는 자애로우신 아버지로서 백성들에게 영적 양식 또한 공급하시며, 역경에 처해 있을 때에도 그렇게 하신다. 박해가 있었는데도 서적이 매우 정기적으로 회중들에 배달되었다.

처음에는 성서 서적을 복제하는 데 아주 구식인 수동 등사기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한 형제는 이렇게 회상한다. “인쇄의 질이 형편없었고 복사한 양도 적었습니다. 등사하는 데는 종이가 많이 들었지요. 종이를 작업장으로 운반하고 그 다음엔 완성된 잡지를 분배해야 했는데, 물론, 어둠을 타고 이 모든 일을 해내야 했습니다. 작업장이 경찰에 적발되기만 하면, 집주인과 작업자들은 여러 해 동안 수감되어 지내야 했거든요.”

하지만 단지 얼마간의 서적을 복제하는 능력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인쇄의 양을 늘리고 인쇄의 질을 개선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1950년대 말에 작은 기계인 로타프린트 오프셋 인쇄기를 하나 구입하였고, 그 후로 다른 기계들을 더 들여왔다. 크라쿠프에서 작은 인쇄소를 경영하는 친절한 사람이 그 기계를 사용하는 방법과 알루미늄 형판을 준비하는 방법을 형제들에게 알려 주었다. 이 형판은 내구성이 훨씬 좋아서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인쇄를 할 수 있었다.

나중에 한 형제가 광화학적으로 판을 제작하는 기술을—폴란드 과학원까지 다니며 배워—익혔다. 그 다음 형제들은 필수 장비를 스스로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그 일은 성공적이었다. 이제 활자의 크기를 사진술로 축소할 수 있었으므로, 그 구하기도 힘든 종이의 동일한 분량에 더 많은 글을 넣을 수 있었다. 잡지뿐 아니라 책도 인쇄했는데, 최초의 책은 폴란드에서 1960년에 발행한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였다.

문제도 많았다. 이를테면, 이제 전력 소모가 더 많아졌다. 형제들은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전기 계량기를 거치지 않고 전류가 흐르게 조작해 놓았다. 그러나 양심을 위해, 그들은 전력 회사에 익명으로 송금하였다. 한번은 “빵집”이라고 불린 증인의 인쇄소들 중 그단스크 근처의 한 곳을 보안대가 발견한 적이 있었다. 작업자들이 법정에 끌려갔으며, 무엇보다도 전력을 도둑질했다고 고발당하였다. 그러나 일단 형제들이 사용한 전력에 대해 실제로 익명으로 지불했음을 증명하자, 그 고발은 더 이상 다룰 필요가 없게 되었다. 훌륭한 증거가 행해졌다.

보안대의 통계에 의하면, 그들은 1956년과 1969년 사이에 증인들의 서적 생산 및 분배소 34곳을 적발하여 운영을 정지시켰다. 비드고슈치의 한 보안 관리는 이렇게 뽐냈다. “정보 기관이 대단히 잘 조직되어 있어서 여호와의 증인들의 비밀 인쇄소쯤은 6개월 이내에 적발해 낼 수 있소.”

이 말은 상당한 허풍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로타프린트 인쇄기 한 대를 압수당해도 그것은 큰 손실이었다. 이 복잡한 기계는 폴란드에서는 제작하는 곳이 없었고, 국가의 통제 때문에 구입하기도 매우 힘들었다. 따라서 우리가 쓰는 인쇄기의 상당량을—약 50대를—여호와의 도움으로 우리 형제들이 직접 생산하였다.

조직이 내부에서 약화될 있었는가?

직접적인 공격이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당국은 증인들의 연합을 내부에서 깨뜨리려고 시도하였다. 적들은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종들을 훼방하는 내용이 담긴 가짜 「파수대」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정체 불명의 “12인 위원회”가 요직의 형제들을 악랄하게 공격하는 내용의 편지를—보안 기관의 서류에서 알아낸 주소를 사용하여—유포하였다. 그러나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았고 참과 거짓을 분별할 줄 알았다.—요한 10:27.

1950년대 말경, 1956년에 시작된 해빙기가 곧 끝날 것임이 분명해졌다. 아직 할 수 있는 동안 가능한 한 최대 규모로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 합당한 일 같았다. 눈에 띄는 증가가 있긴 했지만 일부 사람들 사이에 건전하지 못한 경쟁 정신이 발전되었다. 그 결과, 새로운 전도인들 다수가 성서에서 요구하는 조건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이 하듯이 왕국 희망에 관해 누군가에게 말해 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그 관심자는 전도인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오늘은 관심자, 내일은 전도인”이라는 표어가 나돌게 되었다. 그들 중 다수는 집회에도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1959년 3월에 8만 4061명의 전도인이 보고했을 때, 기념식에조차 그만한 수가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은 조직의 영적 힘을 쉽게 약화시킬 수 있었다.—고린도 전 3:5-7.

시정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서서히 전도인 수가 줄어들더니 마침내 5만 명 선에서 멈추었다. 다시 전도인 신기록에 도달하기까지—1988년 1월까지—거의 29년이 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8만 4559명 모두가 진짜 전도인이었다!

일원화된 법적 행동

증인들이 허다한 법정 소송에 직면하는 실정이었으므로, 형제들은 법적 변호 문제를 일원화하기 위한 조처를 취하였다. 증인들을 기꺼이 대표하려는 재능 있고 용감한 변호사들이 몇 명 있었다. 논리적인 법적 변론이 전개되었지만, 증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믿고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지 강조되었다. 그 결과, 재판이 있을 때마다 판사들과 대중에게 증거가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의 법적 문제를 돌보던 로무알트 스타프스키는 그리스도인 중립 문제에 관한 것은 제외하고도 재판이 30회나 있었던 달을 기억한다. 증인들의 재판 때 방청객이 점점 많아지더니 나중에는 매년 3만 명 정도에 이르렀다.—마태 10:18.

때로는 정부 관리들이 증인에 대한 증오심을 공공연하게 표현하였다. 예를 들어, 포즈난에서 열린 여행하는 감독자 여섯 명에 대한 재판 도중에 한 자매가 증언한 바에 의하면, 히틀러가 아직 살아 있기만 하다면 ‘그가 여호와의 증인 문제를 즉각 처리해 버렸을 것’이라고 검사가 그 자매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 검사는 개인적으로 수천 명의 증인들에게 기꺼이 총을 쏠 용의가 있다고 나중에 덧붙였다.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인가? 여호와의 증인의 종교 활동은 절대로 당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이 사실은 포즈난에서 있었던 또 다른 재판 때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 재판에서 변호사는 1956년에 군중이 교도소를 급습하여 모든 재소자들을 풀어 주었을 때 장기 형을 선고받은 세 명의 증인도 풀려났던 일을 회상하였다. 그러나—수비대 군사 법정 기록에 의하면—증인 세 사람 모두는 “즉시 자진적으로 인민군에게 자수하였다.”

많은 “무기”—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하다

당국은 여호와의 종들의 조직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목표를 달성할 “무기”를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1961년에 그들은 아마 성공한 줄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약한 형제 15명에게 활동의 더 큰 자유를 약속하면서, 국제적인 여호와의 증인의 연합회로부터 독립하여 행동할 한 종파의 등록을 신청하도록 설득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형제들은 그것을 지지하지 않았다. 2년 뒤에는 그 등록 신청 자체가 거절되었다.

그러므로 반대자들은 또 다른 책략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영향력 있는” 사람 중에 협박하여 이용할 만한 대상을 물색하였다. 다시 한번, 성공한 것같이 보였다. 그들은 중요한 위치에서 책임을 맡고 있는 한 형제가 그리스도인 도덕 표준을 범하고 있는 것을 알아냈다. 이 감독자에 대한 고발을 조사하도록 임명받은 형제들이 갑자기 체포되었다. 문제의 그 형제는 자기의 죄를 증명하는 서류들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나서 형제들에게 친구로 생각되는 사람들로부터 편지가 날아오기 시작했는데, 존경받는 형제들의 명성을 떨어뜨리고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형제의 결백을 증명하려는 내용이거나 그 반대의 내용이었다. 당연히, 이로 인해 형제들 사이에 혼란이 일어났으며, 그것이 바로 당국이 노린 상태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알고 계셨다. (히브리 4:13) 이윽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려 주는 확실한 증거가 제시되었고, 반대자들의 앞잡이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던 부도덕한 사람은 제명되었다. 그 올무는 끊어졌다. 이렇게 해서 여호와의 종들을 치려는 또 하나의 무기도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시 124:7.

1972년에 반대자들은 새로운 무기를 찾아낸 줄로 생각하였다. 보안 기관의 한 관리가 여러 해 동안 증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자료를 수집해 왔다. 그는 이제 그 자료를 이용하여 문학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한 논문을 쓰고 있었다. “폴란드 인민 공화국 내 여호와의 증인 분파가 사용하는 선전 내용 및 유형”이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나중에 증인들과 법정 투쟁을 벌일 법관들을 위한 안내서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학위가 수여되기 전에, 그 논문은 공개 토론에서 옹호되어야 했다. 이 절차는 대개 형식이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이 공개 토론의 시간과 장소를 알게 되자마자, 그 문제에 관해 기도하였다. 준비할 시간이 거의 없었지만, 그들은 이 때를 여호와의 이름과 백성을 변호할 기회로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므로 1972년 5월 31일, 헨리크 스키빈스키가 토룬 대학교에서 그의 악의에 찬 논문을 공개했을 때, 여호와의 증인들도 청중 가운데 있었다. 스키빈스키는 여호와의 증인이 국가와 동맹국들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고, 적대적인 초강국의 간첩이며, 무엇보다도 과학과 수혈과 진화론의 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증인들이 양심적이고 정직한 시민으로 알려져 있음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에는 박사 학위를 수여할 교수와 평론가들이 연설하였다. 그 후, 청중의 의견을 발표하라는 요청이 있었다.

비드고슈치에서 온 얀 발데마르 린키에비치 형제가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그 기회를 포착하여, 여호와의 증인이 국가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고 간첩이라는 비난을 철저히 반박하였다. 그는 스키빈스키 씨의 논문의 모순과 논증의 편파성을 지적하였다. (예를 들면, 법정이 많은 증인의 첩보 행위에 대한 고소를 기각하고 혐의를 풀어 준 사실은 완전히 생략되었다.) 뿐만 아니라, 린키에비치 형제는 증인들이 무혈 수술에 공헌한 사실—스키빈스키 씨가 생략한 또 한 가지—에 특별히 주의를 이끌었다. 심사 위원회는 린키에비치 형제가 제출한 서류를 받아들였다. 그 다음 역시 청중 가운데 있던 지그문트 사비츠키 형제와 유제프 라이헬 형제는 그리스도인이 정치와 세상 싸움에 관여하는 문제에 관한 성서의 견해를 용감하게 피력하였다. 청중 모두가 열심히 들었다. 이에 대한 반론을 펴던 스키빈스키 씨가 버럭 화를 내는 바람에, 사회자는 그의 말을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다. 문학 박사 학위는 수여되지 않았다. 꽃을 든 채 축하해 줄 사람도 없이 그대로 서 있던, 스키빈스키의 친척과 친구들에게는 매우 분한 일이었다.

이렇게 하여, 증인들이 크라쿠프에서 예수회 신학자와 유명한 토론을 가진 지 꼭 50년 만에, 또 한 그룹의 증인들이—이번에도 똑같이 필사적이고 무신론적인 적과의—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 일 이후로, 당국은 증인에 대한 박해를 정당화하려는 노력에 그다지 열을 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관리들이 여호와의 증인을 다루는 방법도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숲 속 대회

1960년대 말, 실롱스크 치에신스키 지역의 증인들은 개인 집에서 정기적으로 갖는 회중 집회 외에, 여름철이면 숲 속에서 더 큰 규모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곧 대회 프로그램을 일률적으로 준비하는 마련이 생겼고, 숲 속 대회라고 불린 이런 모임이 전국 곳곳에서 열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당국이 대회를 조직하는 사람들과 참석자들을 고발하였다. 하지만 증인들이 하고 있는 일에 조금이라도 해로운 점이 실제로 있었는가?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논의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관리들은 여호와의 백성들이 갖는 이런 대회에 점점 익숙해졌다. 대회는 갈수록 규모가 커졌다. 처음에는 수십 명의 형제들만 모였으나, 1970년대가 되자 보통 수백 명이 모였다.

1970년대 말에는 프로그램에 성서 드라마가 포함되었고, 종종 침례 마련도 있었다. 마이크, 확성기, 녹음기도 사용되었다. 미리 준비한 확정된 장소에서 모임으로써 좀더 정상적인 대회를 연 곳들도 있었다.

통치체 성원의 방문

1977년 11월 말, 여호와의 증인의 국제 본부에 있는 프레더릭 프랜즈, 시어도어 재라스, 대니얼 시들릭이 폴란드를 방문하기 위한 입국 허가를 받았다. 통치체 성원이 공식적으로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여러 도시에 있는 감독자들과 파이오니아들 및 오래 된 증인들에게 연설하면서, 다른 나라의 신권적인 발전을 알려 주고 많은 질문에 대답하였다. 그 방문에 대한 반응으로, 회중들의 왕국 활동이 증가하였다.

일 년 후에는 밀턴 헨첼과 시어도어 재라스가 폴란드를 방문하였다. 그 기회에 그들은 종무국을 예방하였다. 그 후 이어진 여러 해 동안, 통치체는 폴란드에서의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그 나라 전역의 감독자들과 더 긴밀한 유대를 맺을 수 있었다. 중책을 맡은 폴란드의 형제들은 그런 반가운 신권적 지도와 영향을 더 많이 받은 덕분에, 이제는 조정 사항을 이행하고 다른 여러 나라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과 유사한 지방 조직을 마련할 위치에 있게 되었다. 동시에, 정부 대표자들이 우리와 우리 활동에 대해 좀더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기 시작함에 따라 현저한 변화가 나타났다.

오스트리아의 후대를 즐김

1970년대 말엽에는 일부 형제들이 폴란드 밖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프랑스 릴에, 나중에는 덴마크에 참석하였다. 그러던 중, 1980년 여름에 이례적인 일이 발생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조직이 여전히 금지령 아래 있었는데도, 2000명 가량의 증인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리는 “하나님의 사랑” 지역 대회에 참석할 공식 허가를 받았다. 오스트리아 형제들은 손님을 환대하였다. 폴란드어 회기 참석자를 위해 쳐 놓은 커다란 천막 속에서 폴란드 형제 모두는 감사한 마음으로 프로그램에 주의를 기울였다.

폐회를 위해, 다양한 언어 그룹들은 인접해 있는 스타디움에 모두 모였다. 모든 그룹은 일제히 자기 언어로 “여호와여, 감사합니다” 노래를 불렀다. 마치는 기도를 함께 한 후에도, 떠나려는 사람이 없었다. 주최측인 사랑에 찬 오스트리아 형제들은 폴란드뿐 아니라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 및 다른 나라에서 온 손님들에게도 후대를 나타냈다. 이제 끊일 줄 모르는 박수 갈채 속에서, 그들의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이 사람들은 쓰러져 가는 낡은 세상 특유의 고통스러운 장벽을 제거한 연합을 누리면서 즐거워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듬해에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천국 충성” 대회에는 5000여 명의 폴란드 증인이 참석하였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 형제들이 천막에서 모이고 스타디움 시설을 손님들에게 양보하였다. 뿐만 아니라, 폴란드 손님들은 대회를 조직하는 일을 돕도록 허용되었고, 덕분에 나중에 폴란드에서 큰 대회를 준비할 때 유용할 귀중한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본국에서 역사적인 대회를 연 80년대

오스트리아의 스타디움에서 5000명의 폴란드 증인이 대회 회기를 즐겼던 같은 해에, 그단스크의 관리들은 증인들이 올리비아 홀에서 대회를 갖도록 허락하였다. 1981년 7월 5일, 5751명의 청중이 참석하였다. 그 해에 크라쿠프 지역의 증인들 역시 작은 체육관을 사용할 허락을 받았다. 스카비나에서는 “천국 충성” 대회가 두 차례 열렸다.

모든 일이 참으로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1981년 12월 13일, 폴란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무장 경찰과 군 정찰대가 전국에 배치되었다. 모든 통행 차량은 검문을 받았다. 공개 집회가 금지되었다.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처음 몇 주가 지나면서,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우리 증인들은 어려움 없이 개인 집에서 모일 수 있음이 분명해졌다. 여행에 제한이 있었는데도, 순회 감독자들은 여전히 회중들을 방문할 수 있었다. 서적은 암암리에 발행되긴 했지만 계속 형제들 손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1982년 여름이 급속히 다가오고 있었다. 지역 대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 국경이 봉쇄되었으므로 아무도 다른 나라로 여행할 수 없었다. 계엄령이 강력하게 시행되는 마당에 숲 속 대회는 어림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형제들은 체육관 소유주들에게 접근하여 대회 용도로 빌릴 수 있는지 문의하였다. 허가가 나왔다! 그 소식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나라 곳곳에서 80군데가 넘는 영적 잔치가 열렸다.

1983년에는 주로 빌린 건물에서 더 큰 규모의 지역 대회들이 더 적은 횟수로 열렸다. 처음으로 서부 유럽 나라의 증인들도 참석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모두 11만 4166명이 참석하여 2388명이 침례를 받았다.

폴란드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대규모의 국제 대회를 여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1984년 여름, 형제들은 1985년에 그런 대회를 열 목적으로 네 개의 큰 스타디움을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당국에 요청하였다. 여러 달이 지나도록 응답이 없었다. 1985년 2월 중순까지만 해도 허가가 나올지 여전히 불확실하였다. 마침내 승인을 받았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호주프, 바르샤바, 브로츠와프, 포즈난에서 각각 3일간 네 개의 대회를 열기 위해 관련된 여러 가지 세부 사항을 마무리 짓는 집중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외국에서 온 수백 명의 손님을 포함하여 9만 4000명 이상이 참석하였다. 그들은 여호와의 새로운 종들 3140명이 침례받는 것을 보게 되어 참으로 즐거웠다! 그들은 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귀기울이며 통치체 성원 네 사람의 연설이 포함된 프로그램에 열중하였다.

나중에 폴란드 텔레비전 방송국은 폴란드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생활과 활동에 관한 기록물 두 편을 제작하였다. 이 프로그램에는 대회 장면도 들어 있었다.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과 “충절 고수자”라는 제목의 이 프로그램은 둘 다 전국적인 텔레비전 방송망을 통해 방영되었다.

신권 질서를 고수함

하지만 당국의 모든 압력이 사라졌다고 결론 짓는다면 오산이었다. 회중 성원의 입장에 있는 증인들은 호별 방문하여 전파할 때 방해를 받지 않았지만, 책임 있는 위치의 형제들은 부담이 컸다. 여호와의 증인 조직이 아직 법적 인가를 받지 못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금지령은 결코 공적으로 해제되지 않았던 것이다. 대회는 선택된 형제들이 개인적 차원에서 허가를 얻어 마련해야 하였다. 대회 프로그램 일부를 검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 형제들은 통치체의 승인 없이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을 결심이었다.

1984년에 여행하는 감독자와 관련된 상황이 벌어졌다. 아직도 발효중인 계엄령은 20세에서 45세 사이의 모든 남자에게 세속 근무를 요구하였다. 이 계엄령에 근거하여, 여행하는 감독자들도 정부의 지방 종교 부서로 소환되었다. 거기서 형제들에게 구역 임명이 들어 있는 준비된 증명서가 제시되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들의 활동을 합법화시키는 것같이 보였으나, 그 증명서는 일정 기간마다 갱신해야 하였고 구역이나 임명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있을 때는 보고해야 하였다. 형제들은 그 마련을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양 떼의 목자로서 그들이 받는 임명은 신권적인 것이지, 세속 권위의 승인이나 규제를 받을 문제가 아니었다.

풍부한 영적 양식

오늘날, 폴란드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개인 연구와 공개 봉사에서 사용할 아름다운 출판물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태에 이르기까지 그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여러 해 동안, 그들의 인쇄 장비는 발견되는 족족 몰수당하였다. 당국은 형제들이 “빵집” 즉 인쇄소에서 생산하고 있는 출판물을 적어도 반공식적으로나마 통제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형제들은 책, 팜플렛, 잡지들을 외국에서 수입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렇게 된다면, 법에 따라 다른 종교 출판물의 경우처럼 검열에서 면제될 것이었다. 형제들이 성서에 근거한 그 출판물이 사회에 교육적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지만, 처음에는 그것이 불가능한 목표 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끈기는 결국 보람이 있었다.

1984년에 「나의 성서 이야기 책」을 미국으로부터 6만 부까지 수입할 수 있다는 허가가 나왔다. 나중에는 훨씬 더 많은 양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와 「영원히 존속할 하나님의 이름」 팜플렛을 들여올 수 있다는 승인을 받았다.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을 수입하기까지는 시간이 좀더 걸렸지만, 일단 수입이 시작되자 25만 권이나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 후로, 대개 전보다 어려움 없이 책과 팜플렛이 대부분의 경우 독일 젤터스/타우누스에 있는 협회 지부로부터 공급되었다. 1989년에는 무신론적인 나라들에서 논쟁적이긴 하지만 적절한 제목인 「생명—그 기원은 무엇인가? 진화인가, 창조인가?」 책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1988년 중반—워치 타워 협회가 폴란드 여호와의 증인의 법적 대표 기관이 되기 근 일 년 전—에 「파수대」는 월 2회로, 「깰 때이다」는 월 1회로 4색 인쇄되어 정기적으로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수십만 부를 받고 있으며, 그 양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전국을 통하여, 사람들은 가두에서나 열차 역에서 혹은 전도인이 집에 찾아왔을 때 여호와의 증인이 제공하는 폴란드어판 「파수대」와 「깰 때이다」를 보는 데 익숙해지게 되었다. 1989년 4월 1일 이래, 폴란드어판 「파수대」는 다른 많은 언어의 경우처럼 영어판과 동시에 발행되고 있다.

형태와 내용에 있어서 질이 높은 이 막대한 양의 출판물은 유례 없는 규모로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되어 왔다.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진행되는 성서 연구 수가 8만 건 이상으로 증가하여,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가도록 도움을 받고 있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나라에 기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비교 계시 3:7, 8.

왕국회관이 다시 출현하다

물론, 금지령하의 험난한 시절에는 왕국회관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에 다시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증인이 소유한 건물 안에 비공식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1986년에 이미 회관을 지었거나 짓는 중인 회중의 대표자들을 위한 세미나가 열렸다. 기술적, 법적 문제가 상세히 논의되었다.

1993년 5월에는 형제들이 소유한 왕국회관이 644개였다. 그 밖에 257개는 세들어 있었고, 또 130개가 건축중이었다.

드디어—법적 인가!

과거 1949년에, 여호와의 증인이 제출한 법적 인가 신청을 정부 당국이 거절한 바 있었다. 그 뒤 여러 해 동안, 형제들은 폴란드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권익을 더 잘 대표할 수 있도록 법적 인가를 얻으려고 재삼재사 노력하였다.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가 많았다.

그러던 중, 1985년에 서적의 수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법원의 승인을 받은 한 회사를 스트라주니차—비다브니츠트보 비즈나니아 시비아트쿠프 예호비 브 폴스체(워치타워—폴란드 내 여호와의 증인의 종교 출판사)라는 이름으로 등록하였다. 그것은 우리의 출판 활동을 합법화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조치였다.

1987년 또 한번 설립 허가 신청을 위한 정관을 종무국에 제출하였다. 그 신청서는 통치체의 지도 아래 주의 깊이 준비한 것이었다. 그 뒤 2년에 걸쳐 서한이 오가고 토의가 있었다. 관리들과 대화를 나눈 대표들 가운데는 1949년에 첫 등록 신청서에 서명했던 형제 두 사람도 들어 있었다. 40년이 지난 1989년 5월 12일, 종무국장이 스트라주니차—토바지스트보 비블리이네 이 트라크타토베, 자레예스트로바니 즈비옹제크 비즈나니아 시비아트쿠프 예호비 브 폴스체(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 폴란드 내 여호와의 증인의 공인 종교 연합회) 정관을 승인했을 때 그들의 기쁨이 어떠했겠는지 상상해 보라! 보도 매체가 망라하는 모든 곳에서 이 소식을 보도하였고, 전세계 여호와의 증인들이 기뻐하였다.

이 협회의 원래 이사회를 구성했던 사람들은 하랄트 압트, 지그프리트 아다흐, 스타니스와프 카르디가, 에드바르트 크비아토시, 프란치셰크 미엘차레크, 안토니 토마셰프스키, 아담 보이티니아크였다. 하지만 정관이 승인된 이래 이 중 두 형제—하랄트 압트 * 그리고 에드바르트 크비아토시—가 사망하였는데, 둘 다 죽을 때까지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겼다. 그들 후임으로 비에스와프 야시코 그리고 얀 클라우디우시 스코브론이 일하게 되었다.

폴란드에서 세속 당국으로부터 법적 인가를 얻는 일은 중요하였지만, 물론, 그것은 머지않아 모든 창조물 앞에서 주권을 입증하실 여호와 하나님의 인정과 승인을 받는 일에 비하면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계시 4:11.

유례 없이 큰 규모로

법적 등록이 달성된 지 얼마 후, 1989년 여름철에 국제적인 “경건한 정성” 대회가 바르샤바, 호주프, 포즈난에서 열렸다.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서 참석한 수천 명과 통치체 성원 다섯 명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대륙에서 온 대표자들이 참석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호주프, 포즈난, 바르샤바의 외국인 대표자들을 위해서 프로그램이 여러 언어로 동시 통역되었다. 총 16만 6000명의 참석자 수와 6093명의 침례자 수는 크나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 후, 1990년 8월 9-12일에 바르샤바의 지에시엥치올레치아 스타디움에서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폴란드 수도의 가장 큰 스타디움이 만원을 이루었다. 한 쪽에는 소련에서 온 대표자들이, 또 한 쪽에는 주최측인 폴란드 형제들이 자리잡았다. 각 그룹이 모두 자기 언어로 프로그램을 경청했던 그 대회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그 대회의 성공 여부가 위태로웠다. 소련의 관리들은 자국민의 폴란드 국제 여행에 대한 제한을 예고한 바 있었다. 소련 여행사들은 국경에서 돌려보내 질 것이라고 증인들에게 경고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은 여호와를 신뢰하면서 대회 계획을 추진하였다. 시기 적절하게도, 여행 제한 규정의 실시는 대회 이후로 연기되었다. 즉시, 1만 7000명이 넘는 소련 증인이 물밀듯이 국경을 넘었다. 그들이 즐긴 영적 진미의 기름진 프로그램은 그 곳에 가기 위해 치른 희생에 대한 풍부한 보상이었다.

결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듬해인 1991년, 이번에는 더 많은 도시에서 더 많은 대회가 열렸다. 또 한번, 여호와의 축복이 분명하게 나타났다. 호주프에서 대회가 시작되기 엿새 전에, 유명한 록 그룹 성원들이 그 스타디움에서 앞으로 가질 콘서트를 준비하면서 스타디움 탑에 거대한 선전용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그것은 사단의 형상과 상징물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대회 위원회는 여러 차례 항의하면서 그것을 제거하라고 요구했으나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여호와께 의지하면서 진심으로 기도하였다. 밤중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 닥쳐 플래카드가 여러 조각으로 찢어짐으로써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

같은 해에, 2만 2000명이 넘는 폴란드 대표자들이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우크라이나의 르비프, 현재의 체코 공화국의 프라하에서 열린 대회 참석자들 가운데 들어 있었다. 세계적 형제 관계에 있는 사람들과 영적 우정을 나누는 이런 기회를 갖게 된 그들은 참으로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폴란드에서 회중들과 그들의 좋은 소식 전파를 감독할 적절한 중심지를 마련하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가?

폴란드 지부 사무실

1950년에 우치의 사무실을 잃은 후, 일반적으로 지부 사무실에 있어야 할 부서들이 근 40년 동안 한 지붕 밑이 아니라 여러 장소에 흩어져 있었다. 일단 여호와의 증인의 종교 연합회가 합법화되자, 이 마련이 변경될 수 있었다. 바르샤바에서 가까운 마르키의 프로스타 가 17번지에 있는 집을 임시 사무실로 선택하여 그 곳에서 활동을 관장하였다. 그리고 나서 지부 사무실을 건축할 영구적인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1989년 10월에 바르샤바에서 남서쪽으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나다진이라는 작은 읍에서 문을 닫은 모텔 하나가 포함된 적절한 대지를 구입하였다. 협회의 유럽 지역 설계 사무소는 설계도를 그려 주었고, 건축이 곧 시작되었다. 때로는 무려 600명이나 되는 자진 봉사자들이 건축 현장에서 일하였다. 따라서 1년 8개월이라는 놀랄 정도로 짧은 시일 내에, 벧엘 가족이 유숙하면서 일할 수 있는 복합 건물이 완공되었다. 1992년 11월 28일, 새로운 시설은 정식으로 봉헌되었다.

형제들의 효율성과 작업하는 방법을 관찰한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가제타 스토웨치나」(수도 신문)지에 실린 “하나님의 방법으로”라는 제목의 기사는 이렇게 논평하였다. “작업은 전면 가동되고 있으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작업시에는 안전모를 착용한다. 다음날 바닥에 콘크리트를 부을 예정일 때는, 목수들이 외부 골조 공사를 끝내는 데 필요한 만큼 늦게까지 일한다. 다음날 일하러 올 자진 봉사자들의 작업을 지체시킨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인 것이다. ·⁠·⁠· 증인들의 주된 목표는 원하는 모두에게 좋은 소식을 알려 주는 것이다. 벧엘 집을 짓는 사람들은 결코 그들의 사명을 잊지 않는다. 일을 마친 뒤, 그들 중 일부는 성서와 「파수대」 몇 부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집집에서 전파하기 위해 나선다. 그들은 나다진과 그 주변의 많은 사람과 정기적인 성서 토의를 하고 있다.”

폴란드의 형제들은 이 공사를 끝낼 수 있었음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한다. 그들은 새 지부 사무실이 폴란드의 신권 활동을 촉진시킬 것으로 확신한다. 또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내하도록 기도와 실제적인 지원을 통해, 그토록 여러 방법으로 도움을 베풀어 준 전세계 형제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한다.

계속 인내하려는 결심

여호와의 증인을 말살하려는 종교적·세속적 반대자들의 노력은 실패하였다. 오늘날 증인들은 폴란드에서 세 번째로 큰 종교 집단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국민들 대부분도 증인 친척이나 친지가 있다. 근년에 보도 매체는 증인에 관해 대개 객관적으로, 종종 긍정적으로까지 많은 내용을 방송하고 글을 썼다. 이 점에 있어서 대규모 대회들이 가장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은 보도 매체에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면에서 더욱더 능숙해졌다.

이와 유사하게, 1991년 초에 병원 교섭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 성원들은 폴란드의 여러 대도시에서 의료계 종사자들과 유익한 토의를 가졌다. 이렇게 한 결과로, 여호와의 증인과 수혈에 대한 증인의 입장을 보는 의료계의 시각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게 되었다. 스크비에지나에 있는 병원에 관해, 「지에미아 고조프스카」 신문은 이렇게 보도하였다. “의료진은 그들의 원칙에 익숙해졌다. 아무에게도 더 이상 수혈이 강요되지 않는다.”

몇 해 전만 해도, 수많은 여호와의 증인이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키느라고 교도소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침례받은 전파자이자 임명된 하나님의 봉사자로서, 폴란드의 여호와의 증인은 군 복무에서 면제받고 있다. 그 면제는 협회가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게 발행하는 증명서를 근거로 정부가 승인해 주는 것이다. 현재 중립 때문에 투옥되어 있는 증인은 없지만, 그들은 과거에 하나님의 말씀에 진지한 관심을 나타낸 수감자들을 만난 기억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이 사람들을 계속 방문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도록 돕고 있다.

1993년에 폴란드에서 전도인 수가 11만 3551명이라는 신기록을 달성한 것을 보게 되어 참으로 기쁘다. 십만대에 들어선 이 증인들에게는 여호와께 감사할 이유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들은 진리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져 내려온 결과, 현재 폴란드에서 5대째 진리의 깃발을 날리고 있음을 자부하는 가정들도 보고 있다! 그들은 긴밀한 국제적인 그리스도인 형제 관계의 사랑에 찬 친절을 직접 경험하였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혹심한 시기에 그들 옆에 계시면서 예수 그리스도 휘하의 하나님의 하늘 왕국 편에 머물도록 필요한 힘을 주신 방법을 목격하였다! 그들은 숱한 시련과 박해를 통해 정화되면서, 믿음이 강화되고 창조주께 대한 신뢰가 깊어짐을 경험하였다!—야고보 1:2-4.

그러므로 우쭐대고 뽐내는 정신에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인자하신 보살핌에 대해 겸손하게 감사하는 마음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이 진실이라고 단언한다. “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무기”, 「공동번역」]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라.”—이사야 54:17.

[각주]

^ 112항 가톨릭 신도 운동이란 가톨릭 평신도들의 그룹들로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종교적·사회적·정치적 목표를 촉진하기 위해 주교의 지도나 위임하에 조직된 것이다.

^ 314항 압트 형제 부부의 체험담은 「파수대」 1980년 8월 호 참조.

[252면 도표]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전도인 수

125,000

100,000

75,000

50,000

25,000

0

1981 1983 1985 1987 1989 1993

시간 (100만 단위)

20

16

12

8

4

0

1981 1983 1985 1987 1989 1993

[170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그단스크

호이니체

고슈프비엘코폴스키

비드고슈치

비아위스토크

나다진

포즈난

바르샤바

우치

브로츠와프

루블린

키엘체

카토비체

크라쿠프

[183면 삽화]

이 곳 크라쿠프에서, 프란치셰크 푸하와는 성서를 사용하여 교회의 특정 기본 교리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에게 상당액의 현상금을 걸었다

[191면 삽화]

빌헬름 샤이데르와 아멜리아 샤이데르, 폴란드에서 벧엘 봉사를 시작한 직후

[193면 삽화]

호이니체에 있는 이 법원에서 모독죄로 재판받은 얀 시미에슈코;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사제가 패배를 시인했다

[197면 삽화]

활동할 채비를 갖춘 폴란드 남부의 증인 집단, 1933년

[199면 삽화]

「즈워티 비에크」(황금 시대)가 금지되었을 때, 형제들은 「노비 지엔」(새 날)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202면 삽화]

교도소와 강제 수용소에서 믿음을 증명한 사람들 중 일부: (1) 파울리나 보엘플레, 5년. (2) 얀 오트렝브스키, 4년. (3) 하랄트 압트와 엘사 압트; 남편 14년; 아내 7년. (4) 프란스 시프, 3년

[207면 삽화]

1940년, 얀 사도프스키는(그 당시와 현재의 모습) 이 공동 묘지에서 많은 군중에게 충분히 증거할 기회를 포착하였다

[215면 삽화]

열정적인 폴란드 증인들, 5300명이 1946년에 전후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카토비체에 모였다

[216면 삽화]

1948년, 우치(로지)의 지부 사무실과 거기서 봉사하던 벧엘 가족

[217면 삽화]

헨리카 주르는 이 사진을 찍고 3년 후, 가톨릭식으로 십자를 긋지 않는다는 이유로 순교당하였다

[223면 삽화]

파베우 무할루크(왼쪽)와 스테판 베후니크, 폴란드에서 추방당한 선교인들

[227면 삽화]

바르샤바의 이 법원에서, 1951년에 여호와의 증인에게 무거운 형벌이 선고되었다. 앞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빌헬름 샤이데르, 에드바르트 크비아토시, 하랄트 압트, 브와디스와프 수키엔니크, 교도관

[235면 삽화]

금지령 아래서 성서 서적을 인쇄하려고 증인들이 조립하여 사용한 인쇄기들, 그리고 그 서적을 인쇄하고 배달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목숨과 자유를 빼앗길 위험을 무릅쓴 자매들

[238면 삽화]

이 곳 토룬 대학교에서, 얀 W. 린키에비치와 다른 두 형제는 증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비난을 공개적으로 반박하였다

[240면 삽화]

“숲 속 대회”, 1981년

[251면 삽화]

폴란드 지부 위원회, 199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