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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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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하면 화려한 멕시코 무용수, 낭만적인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기타 연주자, 하얗게 칠한 벽에 빨간 기와 지붕을 얹은 집들이 있는 조용한 작은 도시들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멕시코 시, 과달라하라, 몬테레이 같은 대도시의 교통 체증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악수를 청하는 겸손하고 후대하는 주민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 모든 것이 멕시코의 특징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멕시코의 전부는 아니다.

이 나라는 영적으로 번영하는 땅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230개 이상의 나라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1987년 이래 증인의 전세계 가정 성서 연구 중 10퍼센트가 훨씬 넘는 수가 멕시코에서 사회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성서 교육 프로그램은 좋은 결과를 거두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멕시코에서 15만 4420명이 자신을 제공하여 여호와께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았다.

그러나 멕시코 전역에 철저한 증거를 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 총인구는 8700만 명이 넘는다. 공식 언어는 스페인어이다. 하지만 다른 언어들과 방언들도 사용된다. 멕시코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철저한 증거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여호와께서는 이 나라를 구성하는 온갖 집단의 사람들이 자신을 섬기도록 모으고 계시다.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에 대한 답으로, 독자가 우리와 함께 멕시코의 여호와의 증인의 전체 역사를 답사하는 여행 길에 오르도록 초대하는 바이다.

하지만 먼저 멕시코인 자체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의 견해를 틀잡은 사건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아보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멕시코인의 배경

멕시코인은 어디에서 왔는가? 가장 널리 퍼진 학설에 의하면, 멕시코에 정착한 최초의 부족들은 조상이 아시아계이며 그들은 베링 해협을 경유해서 우리가 지금 아메리카로 알고 있는 곳으로 건너왔다. 그들은 통용 기원 훨씬 전에 멕시코에서 안정된 기반을 잡고 있었다.

여러 인디언족이 멕시코 역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올멕족, 마야족, 사포텍족, 톨텍족이 있었다. 1490년대에 스페인이 서인도 제도를 점령하기 시작할 당시, 아스텍족은 지금 멕시코의 중남부 지역 대부분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들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에는 일부 사람들이 25만 명으로 추산하는 인구가 있었다. 그러나 1521년에 아스텍족의 마지막 황제가 에르난 코르테스에게 굴복하면서 이 땅은 스페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아스텍족은 태양 숭배자들이었으며, 비나 불과 같은 자연의 힘도 숭배하였다. 그들은 그것들이 생명을 보존한다고 여겼다.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하면서 문화적 충돌이 있었다. 스페인 통치하에서 인디언들은 국법에 의해 로마 가톨릭교를 강요당하였다. 시간이 지나자 그들의 이전 숭배와 관련된 인간 희생은 중단되었지만, 그 밖의 신앙과 관습은 그들의 새 종교와 융합되었다.

유럽 통치자들에 의한 착취에 더하여, 새 종교에 근거한 교묘한 압제가 있었다. 어떻게 그러하였는가? 교회가 교육을 장악하여 단지 부유한 특권층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반면, 일반 대중은 무지 몽매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쉽사리 종교적 광신의 노예가 되었다.

거의 삼 세기가 흘러가는 동안, 로마 가톨릭 신앙과 관습이 주민 생활의 바탕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다가 1810년, 스페인 통치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라는 사제가 반란을 주도하였는데, 이것이 독립을 가져올 전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새 국가와 로마 가톨릭 교회 간의 밀접한 동맹은 계속되었고, 국민들도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공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가면서 정부는 종교가 득보다는 해가 된다고 확신하게 되어, 레이에스 데 레포르마(개혁법) 가운데 교회와 국가를 분리시키는 1859년에 제정된 법이 포함되었다. 이 법은 또한 모든 교회 재산의 압수를 명령하였다.

1910년말 이 나라는 또다시 혁명으로 격동을 겪었다. 이번에는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 혁명의 성공으로 1917년에, 개혁법을 시행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가 있게 되었다. 이번에는 종교의 자유가 멕시코에서 법으로 확립되면서, 특히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제한하려는 의도하에 특정 규정이 포함되었다. 혁명의 열기가 가라앉으면서 더 큰 자유를 가져올 다른 일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그 일은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목적에 대한 좋은 소식의 전파였다.

영적 사건들의 앨범

멕시코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 기록은 마치 사진을 모아 놓은 것 즉 귀중한 역사적 앨범과 같다. 우리 앨범의 첫 페이지는 18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에 스테펜손이라는 멕시코 사람이 성서 진리를 연구하는 것은 물론 그 진리를 멕시코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에도 관심을 표명하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앨러게이니에 있는 워치 타워 협회 사무실로 보낸 것으로 내용은 이러하였다. “5달러를 동봉합니다. 나에게 「시온의 파수대」의 일 년 예약을 해주시고, 남은 돈으로는 세 권으로 된 「천년기 새벽」을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여러 질 보내 주십시오. 그것들을 이 곳과 유럽에 있는 몇몇 친구에게 보내고 싶습니다. 스페인어로 번역 및 출판할 경우, 「파수대」에 이 나라에 도움이 될 만한 기사가 나오기를 바라겠습니다. 나에게 발행할 기금만 있다면 「새벽」 책을 번역하는 일도 착수할 수도 있습니다.”

이 일은 포르피리오 디아스 시대, 즉 극단적인 종교적 귀족 계급과 극빈한 노동 계급이 멕시코에서 공존하던 시절에 있었다. 그 노동 계급은 신앙심이 깊었으며 가톨릭 교직자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1910-11년에, 광범위한 폭력과 유혈 사태로 통치에 변화가 일어났다. 디아스가 권좌에서 물러난 것이다.

혁명으로 말미암은 동요의 여파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라가 전쟁 때문에 물질적·경제적으로 황폐되자, 일부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기 시작하였다. 북쪽의 미국으로 피해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하였으며, 일부 사람들이 가져온 것 가운데는 성서를 설명하는, 책의 형태로 된 보물이 있었다. 또한 미국에서 온 성경 연구생들이 북부 멕시코로 거듭거듭 여행하여 그 곳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기도 하였다. 그 결과, 멕시코 내의 몇몇 사람이 각기 별도로 진리를 알게 되었고, 그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활동을 조직하려는 최초의 시도

의학 공부에 열중하던 아벨 오르테가라는 젊은이가 1917년에 텍사스 주 산안토니오로 여행을 하였다. 거기서 그는 모레이라라는 형제로부터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목적에 대해 배웠다. 아벨은 계획을 바꾸었다. 멕시코로 돌아왔을 때, 그는 더 좋은 계획인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 즉 하느님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의학 교육을 받도록 마련해 준 그의 큰아버지는 달가워하지도 않았고, 조카의 새로운 신앙에 좋은 인상을 받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 아벨은 집을 나가야 하였다. 그는 멕시코 시 교외의 산타훌리아라고 하는 부락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그는 잎이 무성한 커다란 나무 아래서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2년 만에 그 집단의 구성원은 30명쯤 되었다.

수가 증가함에 따라, 적절한 모임 장소가 필요함이 분명해졌다. 그들은 멕시코 시 한복판에서 그러한 곳을 발견하였다. 1919년에는 멕시코에서 성경 연구생들의 대회도 나흘간 소규모로 열렸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아벨 오르테가는 프랑스의 새로운 종교 집단에 매료되었다. 그는 이전의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동행하는 일을 중단하였다. 분열이 생겼고, 여호와의 뜻을 행하기 위해 남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협회의 스페인어 사무실이 로스앤젤레스에

이 시기에 우리의 역사 앨범에는 키 크고 여윈 콜롬비아 사람 로베르토 몬테로가 등장한다. 그는 1914년에 미국에서 진리를 배우고 침례를 받았다. 초기의 열심으로 그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일을 하고자 애썼다. C. T. 러셀이 아직 워치 타워 협회의 회장이었을 때, 그는 한동안 브루클린 벧엘 집에서 일하였다. 그의 딸 마리아 루이사 몬테로(데 보르디에르)의 말에 의하면 이러하다. “러더퍼드 형제[워치 타워 협회의 제2대 회장]는 분명히 1917년에서 1918년 사이에 아버지를 로스앤젤레스로 보내, 그 곳에 형성된 스페인어 집단을 돌보고 또한 스페인어로 지금은 「라 아탈라야」[「파수대」]인 「라 토레 델 비히아」의 생산을 책임지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로베르토 몬테로는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 사무실을 개설하게 되었고, 거기서 협회의 출판물을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그것을 요청하는 스페인어권 사람들에게 보내기 시작하였다.

그 곳으로부터 「라 토레 델 비히아」 잡지는 멕시코로 갔다. 어떤 때는 한 달에 한 번, 어떤 때는 두 달에 한 번 보내졌다. 로스앤젤레스의 이 동일한 사무실에서 패스터 러셀이 저술한 책들도 배포하였다.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과 창조 사진극 각본은 멕시코에 꽤 널리 알려졌다.

지부 사무실이 멕시코에

멕시코 시에서 전에 아벨 오르테가와 연합한 집단이 겪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는 진리에 굶주려서 워치 타워 출판물의 도움으로 성서 연구를 계속한 올바른 마음을 가진 멕시코 사람들이 있었다. 이 공화국 각처로부터 출판물을 요청하는 편지가 왔다. 그 결과 1920년 말에 로베르토 몬테로는 멕시코로 여행하여 관심을 나타낸 사람들 중 일부를 방문하였다. 그는 멕시코 시에 있는 집단—당시 약 열세 사람—을 비롯하여 몬테레이, 과달라하라, 푸에블라, 베라크루스에서 발전 중인 집단들도 만났다.

1925년에는 몇 개의 반 즉 회중이 형성되었다. 그 후 몇 년 내에 그러한 반의 수가 아홉 개로 늘어났다. 그러나 1929년에 와서는 단지 네 개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929년 말, 러더퍼드 형제는 멕시코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멕시코 시에 지부를 설립하였다. 미국 출신의 젊은 형제인 다비드 오소리오 모랄레스에게 그 일에 대한 책임이 맡겨졌다. 지역적인 더 훌륭한 조직 마련과 함께 좋은 소식의 전파는 더 크게 발전하였다.

당시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정부와의 관계는 긴장 상태이었다. 일부 가톨릭 교회들은 이미 폐쇄되었다. 1926년에 멕시코 대주교, 돈 호세 모라 이 델 리오는 헌법의 규정들을 공공연히 비난하다가 투옥되었다. 이 모든 일이 크리스테로스 전쟁 발발의 도화선이 되었다. 다시 한 번 군인들과 무장 반군이 공화국 한복판에서 전투를 개시하였다. 약 4년에 걸친 전투 끝에 합의가 이루어져, 교회에서 예배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 사이는 단지 상호 관용의 관계였다. 종교를 제한하는 1917년의 헌법은 계속 시행되었다. 멕시코 사람들 가운데는 의에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정부 당국에 등록함

1930년 5월 23일, 협회 지부는 정부 총무처에 만국 성경 연구회의 등록을 신청하였다. 명시된 기본 목적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만국 성경 연구회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모든 사회 계급, 특히 경제적으로는 물론 도덕적·정신적·신체적으로 지위 향상을 추구하는 하층 계급의 개선에 이바지할 원칙과 진리를 전할 목적을 가진다.”

신청서에는, 그 목표를 추구함에 있어 본 연구회가 인쇄물 배포를 비롯하여 다른 통신 수단을 사용하였다는 것, 공개 강연을 마련하고 그 주제를 성서에 비추어 검토하였다는 것, 그리고 연구를 위한 반을 조직하였다는 사실이 언급되었다. 당시 멕시코 정부는 종교적 광신을 그 온상이 되는 무지와 함께 종식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 신청서는 우리 활동의 교육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본 연구회의 종교 활동의 성격에 관해서 제2조 “e”항에 이렇게 밝혔다.

“그 성원들은 깊은 숭상심을 가지고 있어 말과 행위로 하늘과 땅의 창조주 여호와 하느님을 찬양하고, 제식이나 의식 등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마음에 확신과 만족을 주는 논증과 추리에 의해서만 그들의 생각을 표현하며, 타협의 여지 없이 교권에 반대하고, 양심을 지배하고 이성을 억압하는 일에도 반대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종교적 분파를 형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그 뒷받침으로 열한 가지 점을 예로 들었다.

1930년 6월 2일, 우리는 총무처로부터 다음과 같은 회신을 받았다. “본 총무처는 만국 성경 연구회가 종교적 숭배 및 외적 규율 문제를 규정하는 법에 공포된 사항을 범하지 않는 한, 간청한 연구회의 운영을 인가하는 바이다. ·⁠·⁠·”

그 후 1932년 12월 14일, 이미 천명된 운영 방침은 바꾸지 않고 명칭만 만국 성경 연구회에서 소시에다드 데 라 토레 델 비히아(워치 타워 협회)로 바꾸기 위해 새로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부가적인 해명 조항이 첨가되었는데, 그 일부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정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며], 성서가 인류를 위한 목적을 밝혀 주는 그분의 말씀임을 믿는다. 그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 아래 땅을 다스릴 정부와 권위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우리는 이미 그 정부가 설립된 때에 살고 있고, 이것이 세상의 모든 나라에 행복이 될 것이다.”

다른 조항에서는 협회의 중립적 입장을 더욱 천명하였다. 총무처는 1932년 12월 20일자로 신청서의 접수를 통지하였다. 그리하여 60여 년 전에, 여호와의 증인이 사용하는 법적 기구가 멕시코 당국에 등록되었다. 그 초창기에 천명된 목적과 일치하게 좋은 소식의 전파는 이 나라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좋은 소식이 치아파스 주에 이르다

그 등록을 하기 전에도 좋은 소식은 이 나라 남쪽의 치아파스 주에 이르렀는데, 그 소식을 그 곳에 가지고 간 사람은 성경 연구생 즉 당시의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었다. 그 지역에서 델 피노라는 부유한 사람이 유럽에 의학 공부를 하러 갔다. 유럽에 있는 동안 그는 성서 연구생들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멕시코로 돌아오자, 그는 강당을 하나 마련해서 몬트세라트 농장에 있던 자신의 일꾼들은 물론 그 지방의 복음주의 교역자들도 초대하곤 하였다. 그는 성서 내용을 찾는 법을 알고 있었고, 모인 사람들에게 교리적 진리를 설명하는 데서 상당한 즐거움을 얻었다.

감수성이 풍부한 정신과 마음으로 이 설명을 경청하던 호세 말도나도라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는 1924년에 그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의 고용주인 의사 델 피노는 워치 타워 출판물을 받기는 했지만 여호와의 증인과 활동적으로 연합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젊은 호세가 들은 성서 진리는 그의 마음속에 성서 진리의 전파에 참여하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1927년에 호세는 툭스틀라구트헤레스에 자리를 잡고, 그 곳에서 치아파스 주 전역에 좋은 소식을 전하며 성서 출판물을 배포하였는데—조직으로부터 아무 훈련도 받은 적이 없었는데도 그렇게 하였다. 과테말라 국경에 인접한 다른 도시 타파출라에서 호세피나 로드리게스가 성서의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였다.

몇 년 후, 카레온이라는 형제가 호세 말도나도와 호세피나 로드리게스를 둘 다 방문하였다. 그는 말도나도 형제의 집을 활동 중심지로 사용하였고, 태평양 연안을 따라 아리아가와 타파출라 사이의 전 지역을 돌면서 출판물을 공급받기 위해 사오일에 한 번씩 그 곳에 돌아왔다. 그 곳 경치는 아름다웠지만 산길이 좋지 않아서 여행을 대부분 도보로 하였다. 저녁이면 카레온 형제는 연설을 하고 나서 협회 출판물을 제공하곤 하였다. 많은 출판물을 그런 식으로 전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파 활동과 상품 판매를 겸해서 하였다.

1931년 멕시코 시 대회에서, 콜포처들은 성서 출판물 배포에만 집중하고 다른 물건은 팔지 말라는 교훈을 받았다. 카레온 형제는 이에 분개하여 조직을 떠났다. 그리고는 베라크루스에서 페레스라는 사람과 연합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에스투디안테스 나시오날레스 데 라 비블리아(전국 성경 연구생)라고 불리는 단체를 만들었다.

호세 말도나도의 경우, 그는 여호와의 조직이 국제적이라는 사실에 맨 처음부터 감명받았다. 그는 멕시코 시의 그 대회에서 들은 내용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프로그램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과 그 이름을 지니는 데서 오는 책임을 강조하였다. 대회가 끝나기 전에, 말도나도 형제는 콜포처로서 전 시간을 바쳐 전파하기로 결심하였다. 사실, 좋은 소식의 전파자가 몹시 필요하였다. 당시에 증인은 전국에 82명뿐이었다.

“멕시코에는 구역이 많습니다”

이듬해에, 말도나도 형제는 봉사를 확장할 생각으로 치아파스 주와 인접해 있는 과테말라에서 전파하겠다는 열망을 표현하였다. 협회의 멕시코 지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친애하는 말도나도 형제. 멕시코에는 구역이 많습니다. 멕시코의 구역은 처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멕시코 주민은 1천 5백만 명쯤 됩니다. 최소한 700만 번의 증언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겨우 20만 번밖에 못했습니다. ·⁠·⁠· 아직도, 약 100명의 콜포처가 앞으로 5년은 해야 할 일이 충분히 있습니다. 현재 야외에 겨우 33명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증언”이란 여호와와 그분의 목적에 대한 구두 증거로서, 가능한 경우 출판물을 전하는 일이 수반되었다.)

말도나도 형제와 그의 아내는 멕시코 시 남쪽에 있는 모렐로스 주에서 증거하라는 임명을 받아들였으며, 그 후 다시 치아파스 주에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치아파스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게레로에서 일하였다. ‘게레로 주에 도착하자 우리는 볼칸이라고 불리는 당나귀를 한 필 샀는데, 제 아내가 그 녀석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도나도 형제는 말한다. ‘아르셀리아 부근에는 교통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죠. 우리는 당나귀의 한쪽에는 출판물을, 다른 한쪽에는 우리의 옷이 든 가방을 실었습니다.’

1933년 말에 말도나도 형제는 동해안의 베라크루스 주에 나타났다. 그 곳에 있는 동안 그는 멕시코 시에서 보낸, 전파 사업에 사용할 새로운 장비 즉 녹음 재생기를 받았다. 그것을 확성기와 함께 사용하자 많은 청중이 녹음된 성서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말도나도 형제는 공개 증거를 하기 위해 이 장비를 회중 집회와 기타 장소에서도 사용하였다. 그와 아내는 증거하기 위해 격지로 여행할 때 그 기계를 당나귀 등에 싣고 갔다. (이 당나귀는 볼칸이 아니다. 볼칸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이미 팔았기 때문이다.)

말도나도 형제는 자기가 한 일을 이렇게 요약하여 설명한다. “나는 1931년부터 1941년까지 파이오니아였습니다. 나는 여행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파이오니아는 한곳에만 정착하지 않고 모든 주(州)에서 일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 해 동안 그들은 어린 자녀 하나를 데리고 다녔다. 때로는 권총이나 엽총으로 협박을 당하였다. 말도나도 형제는 투옥되기도 하였고, 한번은 구타당하였다. 딸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멕시코 시에 정착하는 것이 현명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그들은 계속 봉사에 참여하였다. 나중에 그는 잠시 조직을 떠났지만, 얼마 안 되어 다시 돌아와 사망할 때까지 여호와를 계속 섬겼다.

북부의 주들이 증거를 받다

한편 이 나라 북부 지역에서는, 서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미국 국경을 넘어 와 멕시코 사람들에게 왕국 소식을 전해 주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키 크고 여윈 청년 마누엘 아마야 벨리스가 있었는데, 그는 1922년 텍사스 주, 엘패소에서 직장 동료로부터 진리를 들었다. 당시 그는 개혁을 선동하는 집단에서 활동하던 중이었다. 그는 자기가 처했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는 좀 반미치광이 같은 이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직자나 자본주의, 정치를 공격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대단히 좋아했거든요.” 직장 동료의 권유로 그는 로베르토 몬테로가 하는 강연을 들으러 갔다. 처음에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지만 마누엘은 1928년에 왕국 전도인으로 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931년에 자기의 헌신을 침례로 상징하였고, 엘패소에서 “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진리를 널리 전하는 데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었다.

“나는 여호와께 멕시코로 가서 왕국 사업을 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라고 그는 나중에 말하였다. 그가 일하던 직장에 대대적인 인사 이동이 있게 되자, 퇴직금이 나와 이사하는 데 필요한 돈이 마련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침례받은 바로 그 해에, 아내와 함께 1926년식 T형 포드 자동차와 조그만 트레일러에 팔 수 없는 소유물을 전부 싣고서, 남쪽으로 치우아우아 주 중심부에 있는 시우다드카마르고로 향하였다.

마누엘은 돈을 좀 마련하기 위해, 가지고 온 얼마의 물건을 시장 바닥에 펼쳐 놓았다. “몇 센타보의 돈을 모으자마자 나는 멕시코 시로 가서 지부 사무실에 나타났습니다”라고 그는 회상하였다. 시우다드카마르고를 기점으로 그가 전파 운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마련되었다.

아마야 형제의 전파 운동

“내 나름대로 일을 시작했지만, 언제나 조직과 보조를 맞추어 일했습니다”라고 아마야 형제는 말하였다. 그는 스페인어로 된 협회 서적—「구출」, 「화해」, 「창조」, 「정부」, 「예언」, 「생명」, 「빛」—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그는 증거하면서 가능한 한 많은 출판물을 남겨 놓았다.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야 형제는 여러 차례 여행을 반복하여 결국 치우아우아 주와 두랑고 주—멕시코 북부 중앙의 큰 지역—를 다 돌았다. 사용할 수 있는 출판물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그는 협회에 요청하여 자기가 도착할 때 찾아갈 수 있도록 자기가 거쳐 가는 여러 마을로 화물을 보내게 하였다. 출판물을 전할 때 그는 종종 식품과 맞바꾸었다. 많은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 헌금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코아우일라 주, 라라구나라고 하는 지역에서 그는 “나도 증인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플로렌티노 반다로서 1933년에 텍사스에서 남쪽으로 이주해 왔던 것이다. 그들은 그 지역에서 함께 일하였으며, 반다 형제는 아마야 형제가 시우다드카마르고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자 그 지역의 권익을 계속 돌보았다. 나중에 반다 형제는 아내를 동반하며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하였다.

아마야 형제는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고 여호와의 열심 있는 종이 되도록 돕는 데 매우 성공적이었다. 바예데아옌데에서는 로돌포 마이네스가 아마야 형제의 도움으로 진리를 배웠다. 마이네스 형제는 여러 차례 당국자들 앞에서 진리를 변호하였고, 한번은 그 지방 사제에게 도전하여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아마야 형제는 또한 그 곳 바예데아옌데에서 보르디에르 가족을 도왔다. 힐다르도 보르디에르는 나중에 멕시코 협회 사무실에서 일하였다. 그리고 그는 로베르토 몬테로의 딸 마리아 루이사와 결혼하였다. 이 두 사람은 지금까지 계속 충실하게 일해 왔다.

마누엘 아마야는 1974년에 사망할 때까지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겼다. 때가 되어 그의 아내 안헬리타도 그에게 가담하여 여호와를 섬겼다. 안헬리타는 1990년에 사망할 때까지 50년 이상 충실하게 봉사하였다.

멕시코 시에서의 활동은 어떠하였는가?

1929년에 멕시코 시에 지부 사무실이 설치된 후, 좋은 소식의 전파 활동은 더욱 크게 진전되었다. 이듬해에는 수도에 세 개의 반이 활동하고 있었고, 이 나라의 다른 지역에 열아홉 개의 반이 있었다.

영적 굶주림을 나타낸 사람들 가운데 한 청년이 멕시코 시에 있었는데, 그는 그리스 정교회에 속해 있었다. 다른 그리스 사람과 함께 그는 사업장에서 자주 성경을 조사하였다. 1929년 어느 날, 그의 친구가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 책을 가지고 가게에 들어왔다. 그들은 그 내용을 읽고 기뻐하였다. 그들은 출판물—책과 소책자—을 더 구하였다. 에르쿨레스 다코스는 자기가 받은 첫인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소책자들과 「구출」 책은 정말 감명 깊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바로 그 주에 에르쿨레스는 처음으로 초대받아 「라 토레 델 비히아」 연구 집회에 참석하였다. 그 날 그는 책과 소책자 한 상자—자기 것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줄 것—를 집으로 가지고 갔다. 그는 곧 하느님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을 친구들과 손님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해, 1929년에 그는 침례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친척들에게 진리를 전해 주고 싶은 열망에서 가방을 꾸려서 그리스를 방문하였다.

일 년 반 후 에르쿨레스는 이전보다 더 열정에 차서 멕시코로 돌아왔다. 그는 자기가 연합해 있던 회중의 성원이 두 배로 늘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멕시코 시에 있는 중앙 광장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정부 청사에서, 그는 기꺼이 귀기울여 듣는 사람을 많이 발견하였다. 대통령에게 접근하기 위해 에르쿨레스는 편지를 한 통 썼다. 대통령 비서가 보낸 답장은, 부디 출판물을 좀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다코스 형제가 그리스에서 돌아온 지 몇 달 후, 멕시코의 활동에 자극이 더해졌다.

러더퍼드 형제가 멕시코를 방문하다

1932년 11월 26일부터 28일까지 전국 대회가 멕시코 시에서 열렸다. 뉴욕 브루클린 협회 본부에서 러더퍼드 형제와 에두아르도(에드윈) 켈러가 참석하였다. 그 방문 중 러더퍼드 형제는 다섯 개의 라디오 방송국을 통하여 강연하였다. 그 프로그램은 전국에서 들을 수 있었고,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멕시코에 있는 동안, 러더퍼드 형제는 지부 감독자를 교체하는 마련을 하였다. 지부 감독자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하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로베르토 몬테로가 멕시코로 이사하여 지부를 맡도록 초대되었다. 그러나 그가 즉시 올 수 없었기 때문에 켈러 형제가 남아서 임시로 일을 감독하였다.

몬테로 형제는 1933년 4월에 도착하였다. 최근에 있었던 감독상의 문제가 야외 봉사에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 영적으로 많이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1933년 11월 호 「볼레틴」(「회보」, 지금의 「우리의 왕국 봉사」)에 실린 보고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봉사자들의 수는 1932년에 최고 253명이었던 것이 1933년에는 최고 105명으로 떨어졌다. ·⁠·⁠· 그 수가 2월에는 48명으로까지 내려갔다.”

몬테로 가족이 벧엘 가족이 되다

몬테로 가족이 멕시코에 도착하였을 때 지부는 어떻게 조직되었는가? 현재 캘리포니아 주(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아들 로베르토 2세는 이렇게 알려 준다.

“나는 다섯 살 때 가족과 함께 멕시코 시에 도착하였습니다. 우리는 삼층집(지하실 포함)에서 살았는데, 협회가 나중에 그 집을 사서 최초의 라 토레 델 비히아 지부가 되었습니다. ·⁠·⁠·

아버지는 곧 사무엘 캄포스 형제를 초대해 지부에서 회계를 맡아보도록 하였습니다. 그 형제는 두 가지 언어를 하였기 때문에 아버지를 도와 서적을 스페인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야외 봉사 보고와 서류를 관리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저와 누나가 사무실 일을 거들 수 있도록 수년간 타자와 속기를 가르쳤습니다.

이 일에 숙달된 후, 우리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무엇보다도 특히 번역 원고의 깨끗한 사본을 만들었으며 서신과 관련된 일을 도왔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큰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다른 형제들이 지부에 와서 일을 했는데, [마리오] 마르와 그의 아내 콘치타, 호세 퀸타닐라와 그의 아내 세베라, 카를로스 비예가스, 그리고 짧은 기간 다니엘 멘도사가 있었습니다. ·⁠·⁠·

마르 형제가 맡은 여러 책임 가운데는 인쇄기를 감독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 인쇄기는 「엘 인포르마도르」 즉 현재의 「우리의 왕국 봉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광고지, 초대장, 기타 사무실용 서식들을 인쇄하기 위해 사들인 것이었습니다. 벧엘에서 봉사하던 다른 형제인 알폰소 가르시아 형제와 나는 마르 형제의 감독하에 일하면서, 활자를 손으로 짜고, 인쇄기를 돌리고, 서식을 최종 크기로 자르는 데 사용하는 종이 재단기를 가동시켰습니다. 이 일을 시작하였을 당시 우리 나이는 열서너 살이었습니다. 우리는 성인이 되었을 때 유용하게 된 아주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날 젊은 형제들이 다른 벧엘 집에서 봉사할 때 그렇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공화국 전체가 그의 구역이었다

국경 남쪽에서 크게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국에서 온 형제들이 또 있었다. 1925년에 침례받은 페드로 데 안다가 그러한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멕시코에서 얼마 동안을 보낸 미국 형제가 그에게 성서 진리를 받아들일 멕시코의 비옥한 밭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데 안다 형제는 주저하지 않고 멕시코로 이주하였다. “나는 봉사에 대한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누에보]라레도 시로 들어갔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그 국경 도시에서 남쪽 몬테레이로, 이어서 사카테카스 주로 가서 일하였다.

축음기를 갖추고서 그는 사카테카스 주의 콘셉시온델오로 읍에 도착한 다음, 읍 광장으로 가서 레코드 판을 틀어 놓았다. 어떤 반응이 있었는가? 그는 이렇게 알려 준다.

“강연 도중에 아주 부유하고 광신적인 사람이 나타나서 모인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하였는데, 우리가 동정녀와 가톨릭 교회의 적이라고 하였습니다. ·⁠·⁠· 사람들은 우리를 죽이려고 막대기와 돌멩이를 집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였습니다. ‘읍민 여러분, 잠깐만! 우리는 짐승이 아닙니다. 우리를 짐승 취급하려 들지 마십시오. 우리는 인간이며,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여러분에게 생명의 소식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전하는 소식을 혹시라도 누구에게 강제로 믿게 한 적이 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이 잘 들어 준 데 대해 감사를 표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서적과 축음기를 챙겨 걸어 나갔습니다.”

그 후, 데 안다 형제가 묵고 있는 집에 중무장한 무리가 모여들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인가? 그들은 그 읍의 침례교인들이었다. 자기들이 페드로 데 안다의 “형제”라고 생각하여 그를 보호해 주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는 그들의 행동에 대해 감사를 표하였지만, 자기에게는 여호와께서 보호자로 계시기 때문에 이런 일은 필요하지 않다고 설명해 주었다.

데 안다 형제는 점차적으로 구역을 넓혀 나가 공화국 전체를 돌았다. 북부 지역만 아니라 두랑고, 프에블라, 베라크루스, 치아파스 주에서도 일하였다.

‘전도인을 보내 주십시오’

마리오 마르는 1934년에 진리를 배울 때 여호와의 증인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전도인이 되었는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번은 가족 중에 앓는 사람이 있어서 이웃집에 갔습니다. 「창조」 책과 「화해」 책을 발견하였는데, 내가 처해 있던 고통스러운 상황 때문에 그 책들을 읽기 시작하였지요.’ 후에 미국에서 타마울리파스 주의 산미겔데카마르고로 이주한 다음, 그는 협회에 편지를 썼다. “당시 가뭄 때문에 많은 종교 행사가 읍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라고 그는 회상한다. “그래서 협회에, 사람들이 아주 광신적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야기할 전도인을 보내 달라고 하였습니다. 라 토레 델 비히아의 대답은, 내 요청이 아주 훌륭하다고 하면서 그래서 그 곳에서 전파 사업을 시작하도록 나를 임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협회는 내게 스페인어로 된 75부의 소책자를 보내 주었는데, 「세계 재난—이유와 구제책」, 「의로운 통치자」, 「사람들을 분리함」과 같은 소책자들이었습니다.”

마리오는 소책자를 사용하여 처음에는 산미겔데카마르고에서, 다음에는 주변 읍들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 일을 좋아해서 협회에 편지를 보내 다른 곳에서도 일할 수 있는지 문의하였다. 협회는 즉시 누에보레온 주의 북부 지역이 그의 구역이 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주저하지 않고 마리오는 일하러 갔다. “나는 침례도 받지 않은 채 파이오니아로 돌아다녔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더구나 훈련도 받지 않았지만 여호와께서 도와 주셨다. 마리오의 아내도 그를 따라다니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아내가 아프게 되자, 마리오는 협회에 지도를 구하는 편지를 다시 써서 자기들이 잠시 정착할 곳으로 어디가 가장 좋겠는지 문의하였다. 협회는 그 부부에게 몬테레이 시에 사는 로만 모레노의 주소를 보내 주었다. 마침내 그 부부는 동료 여호와의 증인을 만났다. 이제 마리오와 그의 아내는 집회에 참석할 수 있었고, 머지않아 침례를 받았다.

1935년 몬테레이에서 열린 대회에서 마르 형제는 지부에서 일하도록 초대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지구의 종 즉 순회 감독자로 자주 보냄을 받았다.

멕시코 전국에 있는 많은 형제는 자기들에게 진리를 알려 준 최초의 형제 중 한 사람으로 마르 형제를 기억한다. 마르 형제는 1988년에 사망할 때까지 충실하게 일하였다. 그의 아내는 여전히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종이다.

성서의 진리가 북서 지역에 퍼지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북부와 서부 지역—바하칼리포르니아, 소노라, 시날로아 주—에도 여호와의 증인 집단들이 1930년대에 속속 등장하였다.

30년대 초에 시날로아 주 쿨리아칸에 살던 루시아노 차이데스는, 종교를 항상 나쁘게 말하면서 종교는 모두 멸망당할 것이라고 말하는 한 부인을 만났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였지만, 그 부인은 단지 미국에 사는 여동생이 보내 준 책에서 알게 된 것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루시아노는 그 부인에게서 그 책 중 하나—「하나님의 거문고」 스페인어판—를 얻어서 세 번이나 읽었다. 그는 그 내용이 참됨을 확신하고는 협회에 편지를 썼다. 협회는 회답으로, 그에게 서적을 보내 주어 그 지역에서 콜포처 활동을 시작하게 하였다. 그는 후에 1934년 대회에 참석하였을 때 침례를 받았다.

차이데스 형제는 콜포처(파이오니아)로서 항구 도시 마사틀란에 갔을 때, 그 곳에서 모임을 갖는 증인의 작은 집단과 연합하고 있는 힐베르토 코바루비아스를 만나게 되었다. 격려를 받자 힐베르토는 잘 발전하였다. 그는 자기가 침례받을 때 있었던 일을 잘 기억한다. 형제들이 그를 바다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에게 물 밑으로 들어가 가능한 한 오래 숨을 멈추라고 말하였다. 그가 올라왔을 때 그들은 그가 침례받았다고 선언하였다. 물론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침례받는 방식과는 다르다. 그러나 힐베르토는 여호와의 봉사에 열심이 있음을 증명하였고, 그 지방 증인들이 마사틀란 주변의 모든 읍에서 전파할 때 야외 봉사를 인도함으로 좋은 소식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같은 지역에서, 페드로 살디바르는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범죄로 고소되어 투옥되어 있었다. 삼 개월이 넘는 구금 기간에 그에게 소일거리를 마련해 주려고, 그의 딸이 읽을 책과 잡지를 갖다 주었다. 하루는 딸이 가져온 것 중에 J. F. 러더퍼드가 쓴 소책자가 들어 있었다. 그 소책자에 들어 있는, 의로운 신세계를 설립하시겠다는 하느님의 목적에 대한 소식은 페드로에게 커다란 위안을 주었다. 얼마 안 있어 진범을 찾아냈고, 페드로는 석방되었다. 그는 즉시 자기가 읽은 소책자와 같은 서적을 더 구하려고 찾아다녔고, 얼마를 얻었다. 머지않아 한 증인 이웃이 그를 힐베르토 코바루비아스가 인도하는 집회에 데리고 갔다. 힐베르토가 한 것처럼 그도 전파 운동을 개시하였다. 그는 북쪽으로 시날로아 주를 점차 지나, 소노라 주 북부 지역까지 가서 봉사하였다. 그 곳에서는 지금도 그를 그 지역에 왕국 소식을 보급한 최초의 콜포처 중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전파 운동을 위해 때로는 그들이 매우 멀리까지 간 것이 사실이지만, 증인 수는 적었고 구역은 광대하였다. 1938년에 시날로아 주의 마사틀란 회중이 공식적으로 형성되었을 때, 시날로아 주 전체가 회중 구역으로 임명되었다.

보물과 죽은 당나귀

소노라 주 서쪽으로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가 멕시코 본토 북서 해안과 나란히 놓여 있다. 1934년에 그 반도 아래쪽으로 3분의 2쯤 되는 곳에서 한 젊은 증인이 사람들에게 성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활동으로 좋은 결과가 있었지만, 그 자신은 어떻게 되었는가?

에스테르 페레스는 이렇게 알려 준다. “1934년이었는데 한 청년이 바하칼리포르니아 주 라푸리시마에 와서 성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 나의 아버지는 ·⁠·⁠· 공무원이었는데, 협회로부터 그 청년에 대해 문의하는 서신들을 받았다는 말씀을 우리에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당국은 그 청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 청년은 실종되었다. “당국에서는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조사하였지만, 묶여 있는 당나귀의 해골 외에는 아무 것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 그 해골을 발견한 사람들은 또한 색표지로 된 책이 가득 들어 있는 가방도 발견하였습니다. ·⁠·⁠· 그들은 가방을 읍내로 가져와 그 책들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비록 그 내용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들은 그 책들이 다른 책—성서—을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습니다.”

그 젊은 증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가져온 서적을 읽고 있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성서를 이해하는 데 예리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읍에 사는 한 프로테스탄트교인은 자기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였다. 그는 그 책들을 읽는 데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한 집단으로 조직하였다. 그 후 그들은 「라 아탈라야」를 예약하여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페레스 자매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렇게 알려 준다.

“프로테스탄트교인이 그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어느 누구도 협회와 연락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협회로부터 서신이 한 통 왔는데, 협회에서 방문할 대표자를 파견하는 데 어떤 교통 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지 문의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후안 아르세 씨(그 프로테스탄트교인)는 우리 아버지에게 협회에 답장을 보내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프란시스코라는 사람이 협회에 몰래 편지를 보내, 교통편이 있으며 협회 대표자가 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 저도 마침 읍에 있을 때 그 형제, 테란 파르도라는 젊은이가 도착하였습니다. ·⁠·⁠·

이튿날 그 형제가 일어나기도 전에, 집단 성원 전체가 그에게 인사하고 질문을 하려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오후에 모임을 계획하였고 우리 모두가 참석하였는데, 전부 25명쯤 되었습니다. 강연을 한 다음 그 형제는 ‘나가서 여호와를 섬기고 싶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모두가 손을 들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일 아침 아홉 시에 오십시오. 그러면 그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방식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는 모두 그 곳에 모였습니다. 그 형제는 우리에게 카드를 주면서, 그 카드를 제시한 다음 소책자를 제공하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함께 가라고 임명받은 기억이 납니다. 돌아올 때 우리는 매우 행복하였는데, 사람들에게 소책자를 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프로테스탄트교인은 물러났고, 모임에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동남부 지역에서 장애를 극복하다

한편, 동남부 지역에서는 전파 활동이 아주 어렵게 행해지고 있었다. 치아파스 주와 타바스코 주에는 가난이 심하였으며, 특히 산간 벽지가 그러하였다. 왕국 소식이 어떻게 이 사람들에게 이를 것인가?

다니엘 오르티스는 1932년에 치아파스 주 툭스틀라구트헤레스에 살고 있다가 진리를 배웠다. 그와 그의 가족은 즉시 그 소식을 받아들였다. 집회를 사회하는 방법에 대해 교훈받은 적이 없지만 그의 가족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모두 12명의 집단—협회 출판물을 사용해서 함께 연구하였다. 나중에, 오르티스 형제가 멕시코 시로 여행하여 지부 사무실에 갔을 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출판물을 얻었다. 그는 열정이 솟구쳐 집(지금은 신타라파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 집단이 야외 봉사에 참여할 때면, 서적을 배낭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사람, 종이에 싸서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는 상자를 통째로 끈으로 막대에 매달아 두 명의 전도인이 가지고 다니게 하였다. 그는 출판물을 많이 전하기를 기대하였고, 사실 그렇게 전하였다.

1934년에 대회 참석 중, 오르티스 가족은 파이오니아 대열에 가담하도록 권유받았다. 그들의 구역은 타바스코 주가 될 것이었다. 오르티스 형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말 두 필을 샀습니다. 하나는 짐을 싣기 위해서, 또 하나는 열두 살 된 딸 에스텔라를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섯 명이었어요. 열다섯 살 된 딸, 결혼한 딸, 그리고 다른 열다섯 살 된 형제가 우리와 같이 다녔지요.”

그들은 타바스코 주에서 여러 읍을 돌며 서적을 많이 전하였다. 그러나 타피할라파에서는 체포되어 군 본부로 끌려갔다. “읍장이 대령이었습니다”라고 오르티스 형제가 후에 이야기하였다. “그는 나에게 이러한 서적이 주에서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느냐고 거칠게 물었습니다. 나는 대답하기를, 우리는 멕시코 공화국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며 나에게는 총무처가 발행한 신임장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신임장이란 그것이 씌어 있는 종잇장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모든 귀중품은 물론, 우리가 가방에 가지고 있던 서적까지도 모두 빼앗았습니다.”

그렇지만 오르티스 형제가 더욱 염려한 것은 일행 중 다른 읍에 있는 두 사람이 무사한가 하는 것이었다. 오르티스 형제의 딸과 또 한 자매가 그 곳에서 함께 증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은 일행 중 두 사람이 빠졌다는 것을 알고서 그들을 찾으러 사람들을 보냈다. “그 때가 저녁 6시경이었습니다”라고 오르티스 형제는 말한다. “그리고 그 읍은 산악 지역 너머로 2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고,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자정쯤 거기 도착하리라고 예상했습니다. 이 자매들, 열여섯 살과 스무 살의 두 처녀가 그들에게 붙들리면 무슨 일이 생길지는 생각하기도 싫었습니다. 그 처녀 중 하나가 내 딸이었으니 내게 무슨 생각이 엄습해 왔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마침내 졸리게 되기까지 진지하게 기도하였다. 다음날 아침, 그는 여호와께서 자기 기도에 응답하시어 두 처녀가 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안심이 되었겠는가!

충분한 음식이나 위생 시설도 없는 상태에서 일행을 며칠 동안 억류한 후에, 군 호위병 한 사람이 임명을 받고 그들을 주 밖으로 내보냈다. 풀려나자마자 그들이 맨 처음 한 일은, 비누를 좀 얻어 강을 찾아가서 몸을 씻고 옷을 빠는 것이었다. 다시 자유롭게 되자 그들은 곧바로 좋은 소식을 전파하러 갔다. 다만 이번에는 치아파스 주에서 하였다. 장애에 관계없이, 그들은 여호와의 소중한 양을 찾아 그 땅을 답사하는 일에 결코 싫증을 내지 않았다. 그들은 정말로 파이오니아였다.

당시 멕시코 지부에서는 과테말라도 돌보고 있었다. 오르티스 형제는 협회로부터 자주, 그 지역에 들어가서 양 같은 사람들을 찾아 먹이는 일을 도우라는 요청을 받았다.

1972년에 80세의 나이에도 오르티스 형제는 여전히 파이오니아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40년이 넘도록 참여한 활동에 대한 즐거운 추억도 많이 있지만,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하는 것에도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이 때문에 쇠약해지긴 하였지만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내 힘을 새롭게 해주시며, 그분의 이름을 지닌 사람들이 증가하는 것을 보는 일이 내게는 행복입니다. 이 일로 기쁨이 충만하여 활동을 더 많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감사하지만 감사를 표현할 말이 부족하며, 그 때문에 일을 계속하는 데 없는 힘이나마 집중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전에 여호와의 종들이 한 경험 중 몇 가지에 불과하다. 이 기록에 모든 것을 다 포함시킬 수는 없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멕시코에서 왕국 소식을 전하는 일에 그렇게도 열심히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지금 사망하고 없다. 그렇지만 여호와를 계속해서 충실하게 섬긴 사람들은 모두, 그 일이 뛰어나게 드러났든지 그저 한 지방에서만 알려져 있든지 간에 본받을 만한 모범을 남겼다.

먼저 왈츠, 다음에 열정적인 강연

1938년부터 1943년까지, 확성차는 세계의 이 지역에서 성서 진리를 전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기여를 하였다. 지붕에 확성기를 달고 안에 녹음 재생기를 설치한 차량 일곱 대가 멕시코에서 사용되었다. 원래 러더퍼드 형제가 한 강연에 에두아르도 켈러의 목소리가 스페인어로 덧붙여 녹음된 활기 찬 성서 강연이 방송되었다.

확성차 활동에 참여한 형제들 가운데는 호세 퀸타닐라(나중에 지부 사무실에서 불린 애칭은 “할아버지”), 다니엘 멘도사, 빅토르 루이스가 있었다. 호세 퀸타닐라와 그의 아내가 벧엘 봉사에 참여한 것은 그들이 워치 타워 출판물을 처음으로 몇 부 받은 지 1년쯤 후였다. “나는 우리의 활동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일을 익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세속 교육도 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이지요”라고 퀸타닐라 형제는 회상한다. 그런데도 그는 성서 진리를 전하는 데 사용할 자동차의 정비를 도우라는 초대를 즉시 받아들였다. 호세가 그 일에 참여한 지 몇 달 후에서야 형제들은 그가 아직 침례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벧엘 봉사를 계속하려면 침례를 받아야 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즉시 그는 1938년 8월에 그러한 성서적 요구 조건에 따랐다.

이 확성차 활동은 어떻게 수행되었는가? 보통 다섯 명의 형제가 함께 여행하였다. 부락에 도착하면, 그들은 유익한 성서 강연을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방송하였다. 그런 다음 두 명의 형제는 길 한쪽에서, 다른 두 명의 형제는 길 맞은쪽에서 집집으로 전도를 하는 한편, 운전사는 차에 남아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곤 하였다. 퀸타닐라 형제는 겸허하게 이렇게 알려 준다. “내가 한 일은 그저 사람들이 다가오면 이야기하고 그들에게 서적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강연 전에 왈츠 음반을 틀었다. 음악에 귀를 기울이다가 거짓 종교를 폭로하는 활기 찬 강연이 들려 오자 놀라는 사람들의 모습을 좀 상상해 보라!

이 활동에 참여하였던 다니엘 멘도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열광하곤 하였습니다. ·⁠·⁠· 그러다가 살그머니 빠져 나가 사제에게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곧 온 동네에서 소동이 나고,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쫓아내려고 몽둥이와 돌을 들고 오곤 하였습니다.”

한 읍에서는, 키가 크고 건장한 사람이 퀸타닐라 형제의 확성차를 전복시키려고 하였다. 차 한쪽을 공중으로 막 들어 올린 순간, 그 사람은 갑자기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놀라고 공포에 질린 그 사람은 도망 가며 이렇게 소리 질렀다. “가까이 가지 말아요. 저 차는 귀신이 들렸어요!” 어떻게 된 일인가? 그 사람이 갑자기 강한 전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짐작할 수 있겠지만, 퀸타닐라 형제가 전기 계통을 차 섀시에 결선해 놓았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그런 방법을 추천하지 않지만, 그는 몹시 난폭한 사람들에게서 자신과 장비를 보호하기 위해 그런 방법을 사용하였다.

확성차 사용이 점차 폐지된 다음에도, 휴대용 축음기는 증인 개개인이 사용하였다. 이 축음기를 300대 가량 지부에서 만들었다. 다시 한 번, 퀸타닐라 “할아버지”가 이 계획의 추진에 유능한 참여자였다. 그는 축음기 케이스를 만든 다음 스피커와 모터를 끼워 넣던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작동이 잘되는지 그리고 계속 성능을 유지할 것인지 확인 시험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형제들에게 보내어 집집에서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물론 얼마 후에는, 신권 전도 학교에서 받는 훈련과 함께 「인포르마도르」(「통보」, 지금은 「우리의 왕국 봉사」)에 실려 나오는 제공 연설과 교훈의 도움으로, 전도인들이 사람들과 대화하고 성서를 인용하여 질문에 대답하는 법을 많이 배웠다.

길르앗 졸업생들이 도착하다!

1940년대 초부터 여호와의 증인에게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소개되었는데, 그 프로그램은 세계적인 왕국 선포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프로그램 중 일부에는, 지부 요원들이 뉴욕 브루클린의 세계 본부와 동일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도록 훈련시키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일은 1942년에 워치 타워 협회의 회장이 된 네이선 H. 노어가 지휘하였다. 멕시코 지부는 노어 형제가 1943년 2월에 멕시코를 처음 방문하였을 때 이 마련으로부터 매우 직접적인 혜택을 받았다. 노어 형제는 방문 기간 중 전국에서 온 전도인들과 가진 특별 모임에서, 매우 오랫동안 로마 가톨릭교의 영향을 받아 온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는 문맹의 유산을 전도인들이 극복할 것을 촉구하였다. 노어 형제는 또한 지부 요원들과 함께 많은 일을 하여, 그가 떠날 즈음에는 지부 사무실과 벧엘 집이 필요한 것을 훌륭하게 갖추게 되었고 훨씬 더 잘 조직되었다.

멕시코에는 아직도 할 일이 많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래 멕시코에서 여호와의 찬양자 수가 점차 증가해 오긴 하였지만, 증가 속도가 느렸다. 1943년에 매달 활동을 보고한 전도인은 1565명이었고,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회중 전도인들은 각기 매달 평균 28시간을 증거에 바치고 있었다. 정규 파이오니아의 매달 평균 시간은 137시간이었다.

그 해에 협회는 왕국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활동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학교를 개설하였다.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대학이 설립된 것이다. (나중에 그 명칭은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로 바뀌었다.) 그 목적은 경험이 없는 파이오니아 봉사자들을 준비시켜 전세계의 밭 가운데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봉사하게 하는 것이었다. 2월 1일에 첫 학급이 시작되었다. 졸업생 일부를 멕시코로 보낼 계획이 세워졌다.

처음에는, 형제들이 길르앗 졸업생을 위한 비자 신청을 하면서 법적 장애물에 부딪혔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아직 진행 중이었다. 게다가 타마울리파스 주의 누에보라레도(미국과의 국경 지대)에서는 증인들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몇 사람이 투옥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비자 발급을 위한 사무 절차가 지연되고 있었다. 당시 지부 감독자인 후안 부르즈와는 1945년 보고서에서 이렇게 서술한다.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대학과 그 목적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이 곳 멕시코에 있는 우리들은 첫 졸업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외국에서의 신권 봉사를 위해 특별히 훈련받은 졸업생의 상당수가 사실상 처녀지나 다름없는 멕시코 구역에서 일하도록 파견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적대자가 광분해서 우리 형제들의 입국을 극단적으로 방해할 것도 예상하였습니다. 1943년 8월, 협회는 우리가 멕시코 입국 허가를 얻을 수 있다면 이 교사들(길르앗 졸업생들) 약 30명이 멕시코에서 일하도록 임명될 것이라고 통보해 왔습니다.

우리는 허가를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 교사들의 멕시코 입국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수없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사실상 포기 상태에 있었는데 그 해 2월 노어 형제가 이 곳에 왔습니다. 그는 ‘안 되겠군요’라고 대답하려 하지 않고 어떤 특별한 마련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불가능’이 이루어졌습니다! 3월에 장애가 제거되어 앤더슨 형제와 자매가 입국하였고, 곧 이어 4월에는 추가로 일곱 명의 신권 교사 즉 길르앗 제1기 졸업생이 입국하였습니다.”

프레드 앤더슨과 블랜치 앤더슨

프레드 앤더슨과 블랜치 앤더슨은 사랑스런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로서 그들의 생애 대부분을 멕시코에서 전 시간 봉사에 바쳤다. 앤더슨 형제는 젊어서 당한 사고 때문에 멕시코에 있을 때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만 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목발을 사용해서 멕시코 시 구역에서 꾸준히 일하였다. 프레드 앤더슨은 온순하고 쾌활하였다. 앤더슨 형제와 그의 매력적인 아내(그리스도인 자매들이 부른 애칭은 블랑키타)와 함께 있으면 많은 멕시코 사람의 마음은 사랑과 감사로 가득 찼다.

앤더슨 형제 자신의 표현을 들어보면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기꺼이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생활을 조정하고 우리 자신을 [외국에서의 봉사]에 맞게 훈련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길르앗 훈련은 우리가 그렇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섯 달 반 동안 머리 속에 가능한 한 많은 것을 꼭꼭 집어 넣느라고 땀 흘려 공부하며 무척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 여러 달은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졸업식 날이 되었습니다. 길르앗에서 우리는 기쁨이 충만하였다고, 그 이상 행복하거나 하느님과 가까워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 많았는데, 그 일은 외국 임지에서 하였습니다.”

그 임명을 받고 여러 해를 보낸 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이 겸손한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도와서 여호와의 영광스러운 진리의 빛으로 들어오게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선하심에 참여하면서 우리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는 압니다.” 앤더슨 부부는 여러 해 동안 멕시코에서 순회 활동을 하고 나중에는 멕시코 벧엘에서 일하다가 형제는 1973년에, 자매는 1987년에 지상 행로를 마쳤다.

반세기 동안의 짝

다른 길르앗 졸업생인 로자 메이 드라이어는 멕시코에서 첫 10년을 보낸 후, 원래 멕시코에 임명된 21명 중에서 11명이 남을 수 있었다고 썼다. 그는 이렇게 부언하였다. “이 열한 사람은 ‘스스로 선택하라 해도 다른 곳에는 가지 않겠다’고 나처럼 말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입국하는 데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로자 메이 드라이어와 셜리 헨드릭슨은 텍사스와 멕시코 국경 근처에서 2년 동안 일하였다. 그 동안 그들은 스페인어를 어느 정도 배웠다. 셜리는 쾌활한 성격이긴 해도 그 곳이 힘든 구역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래서 그는 멕시코 시에서 발견하게 된 밭을 기뻐하였다. 처음에는,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 지역 전도인들이 그들과 함께 봉사하도록 임명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런 현장 적응 훈련도 없이 누군가가 그들을 한구석으로 데리고 가더니 “여기가 당신들 구역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더구나 그들의 스페인어 지식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낙심하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일을 수행하였다. 셜리는 그 당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약간 떨면서 들어가던 첫 건물이 기억납니다. 처음 네 집 문간에서 내가 가지고 간 네 부의 서적을 다 전하고는 서적을 더 가지러 집으로 돌아와야 하였습니다. 그 일로 용기가 생긴 뒤로는 더 이상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었습니다.” 몇 년 전에 셜리는 멕시코에서 초창기에 자기가 성서 연구를 사회했던 부인의 손녀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그 집안의 자손 50명이 여호와를 섬긴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가 얼마나 기뻤겠는가! 한 사람은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했었고, 또 한 사람은 벧엘 가족 성원이었다.

셜리와 로자 메이는 1937년(길르앗에 같이 가기 전)부터 “로시타”(로자의 애칭)가 멕시코 임지에서 사망한 1991년까지 봉사의 짝이었다. 54년간의 봉사—그 모든 해를 거의 함께 보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오다

전부 합해서 56명의 길르앗 졸업생이 다른 나라에서 멕시코로 와, 이 곳에서 수행되는 웅대한 신권 교육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미 언급한 사람들 외에도 길르앗 학교 제1기 출신으로, 루벤 아기레, 샬럿 보윈, 맥신 브래드쇼, 제럴딘 처치, 줄리아 클로그스턴, 베티 쿤스, 러셀 코넬리어스, 도러시아 가드너, 벌러 가페인, 프랜시스 구치, 엘바 그리브스, 서스턴 힐드링과 마리 힐드링, 펀 밀러, 맥신 밀러, 파블로 페레스가 있었다. 최근 1988년까지도 졸업생이 더 도착하였다. 이들 모두가 야외에서 행한 봉사는 그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또한 예상하지 못하였던 행복한 일도 발생하였다.

예를 들면, 샬럿 보윈은 멕시코에서 2년을 보낸 뒤 엘살바도르로 임명되었다. 그 후 1956년에 앨버트 슈로더의 아내가 되었다. 이전에 이 자매의 길르앗 강사 중 한 사람이었던 앨버트 슈로더는 후에 통치체 성원이 되었다.

1949년에, 맥신 밀러는 사무엘 가르시아와 결혼하였다. 가르시아는 멕시코 출신의 길르앗 졸업생으로 당시 멕시코 지부에서 협회 법률 대표로 일하고 있었다. 밀러가 1946년에 멕시코 시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부회”가 단지 네 개뿐이었다. 1961년에는 70개가 되었다. 그리고 1994년 초에는 멕시코 시와 인근의 회중 수가 1514개로 늘었다. 그는 참으로 놀라운 확장을 보았다! 그의 전 시간 봉사는 오로지 기쁨뿐이었고 다른 일은 없었는가? “아니에요, 그렇지는 않아요”라고 그 자매는 말한 적이 있다. “견디기 어려운 순간들과 힘든 경험들도 있었지만 슬픔보다 기쁨이 훨씬 더 컸습니다. 그리고 내가 여호와 하느님의 종으로서 인생의 목적을 추구하며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볼 때 두드러진 것은 바로 이런 기쁨이었어요.” 밀러 자매는 자신의 임명을 충실하게 수행하다가 1992년에 사망하였다.

에스더 바태니언은 멕시코에서 약 8년간 봉사한 후인 1955년에, 멕시코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길르앗 졸업생 로돌포 로사노와 결혼하였다. 바태니언은 지부에 살면서 멕시코 시에서 증거하여 많은 사람이 여호와를 알도록 도왔다. 그는 가족 전체를 돕는 데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처음에는 남편이 연구를 거부할지 모르지만, 그는 언제나 그 남편을 끝내 포함시키고 만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그의 특별히 친절한 방식 때문에 많은 사람이 소식에 반응을 보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는 외국인 억양이 섞인 스페인어로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저 좀 보실까요. 키에로 아블라르테 데 알고 무이 임포르탄테[대단히 중요한 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그러면 그들은 귀기울여 들었다. 현재 로사노 자매와 그의 남편은 멕시코 벧엘 가족 성원으로 일하고 있다.

지부의 인자한 그리스도인 감독자들

물론, 멕시코에 파견된 길르앗 졸업생 중 일부는 지부에서 책임을 돌보도록 임명되었으며, 그들은 일을 훌륭히 해냈다. 그들 이전에는, 후안 부르즈와가 로베르토 몬테로에 뒤이어 지부 감독자가 되어 1943년부터 1947년까지 그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그 해에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였다. 그 다음에는, 길르앗 제1기 졸업생인 파블로 페레스가 3년 반 동안 지부 감독자로 일하였다.

그 후로 다른 사람들이 그 책임을 지고 인자한 감독을 베풀어 왔다. 그들 가운데 로돌포 로사노가 4년 반 동안, 헤오르헤 파파뎀이 2년 동안, 새뮤얼 프렌드가 7년 반 동안 일하였다. 윌리엄 심프킨스는 1965년에 지부 감독 일을 맡기 시작하였고, 지부 위원회 마련이 1976년에 시작되었을 때에도 멕시코 지부 위원회의 일원으로 계속 1986년까지 일하였다. 이들 각자는 이 곳 멕시코에서 왕국 활동에 귀중한 기여를 하였다. 로버트 트레이시는 콜롬비아에서 여러 해 동안 일한 다음 1982년에 멕시코에 왔으며, 그 이후로 지부 조정 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부회들”과 접촉을 유지하는 일

지역 및 지구의(순회의) 종들은 1940 봉사 연도 중에 멕시코 전역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을 방문하여 세워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 후, 여행하는 감독자들의 활동이 잠시 중단되었다가 다시 생겼다. 이번에는 형제들을 파견하기 전에 전문적인 훈련을 베풀었다.

“부회들”을 방문하는 일에는 버스나 기차표를 사서 여행하는 것 이상의 훨씬 더 많은 일이 포함되었다. 대다수의 부회들은 소규모인데다 간선 도로나 철도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형제들을 파견하기 전에 지부 사무실에서는 각 집단에 편지를 띄워 부회가 있는 곳에 가는 방법(버스나 기차 노선)을 문의하였다. 한 부회는 이러한 답장을 보내왔다. “이 근처를 지나가는 유일한 선(노선)은 전화선밖에 없습니다.” 지부는 브루클린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일부 부회들에 가는 종은 노새를 타거나 걸어가야 하며, 때로는 한 번 가는 데 여러 날이 걸리기도 합니다. 전도인들은 방문을 받고 몹시 기뻐하며, 이 종이 도착하면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인근 수킬로미터에서까지 모두 모입니다.”

형제들을 강화하는 일을 돕기 위해서, 1940년대 중반에 일부 벧엘 가족은 자기 휴가를 이용해서 사무실에서 임명하는 부회를 방문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사무엘 가르시아와 알폰소 가르시아는 오악사카 주의 실라카이오아판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버스로 하룻길을 간 다음, 말을 이용할 마련을 하느라 이틀을 보내고, 그리고 나서 말을 타고 목적지까지 계속 이틀을 더 갔다. 그들은 행복하게 닷새를 바쳐 지방 증인들과 함께 야외 봉사를 하였고, 또 침례도 베풀었다. 그리고 나서 멕시코 시로 돌아올 채비를 하였다. 그런데 그 지방 가톨릭 사제가 그들의 활동 때문에 화가 나 엘 프레시덴테 즉 시장을 선동해 놓았다. 그 날 밤, 남자 25명쯤 되는 폭도가 이 형제들이 묵고 있는 증인 집으로 쳐들어 왔다. 사무엘 가르시아는 그 일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폭도들은 벌채 칼, 긴 칼, 식칼, 몽둥이,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형제들을 붙잡아 밖으로 끌고 나가서는 무자비하게 구타하였다. 그들이 묵고 있는 집의 그리스도인 자매가 말리려고 하다가 그와 그의 한 아들까지 구타당하였다. 한 형제는 왼팔과 손가락이 뼈가 보일 정도로 베어졌다. 그들은 계속 구타당하고 협박을 받으며 도시 밖으로 끌려나갔다. 그러면 어디로 끌려가고 있었는가? 사무엘 가르시아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들은 우리를 나무에 매달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움을 보이지 않고 여호와를 온전히 신뢰하자, 그들은 우리를 풀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간선 도로에 도달하기 위해 이틀 동안 걸어서 산악 지대를 통과해야 하였습니다.”

한편, 사고 소식이 지부 사무실에 전해졌다. 협회는 오악사카 주 지사에게 긴급 항의를 보냈다. 마침내 두 형제가 벧엘에 다시 돌아왔을 때, 경비를 보고 있던 형제는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문을 열어 주기를 꺼렸다. 그들은 그 정도로 심한 학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가르시아 형제가 그 때 있었던 일을 회상해 볼 때 기억나는 것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묵었던 집의 자매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사무실에 편지를 보내 증거를 계속할 수 있도록 서적을 더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한 대회에서 다음 대회로

이러한 일들이 있기 몇 해 전, 아둘포 모데스토 살리나스라는 활기 찬 젊은이가 그로서는 처음으로 전국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 대회는 1941년에 멕시코 시의 민중 극장에서 있었다. 당시에 그는 자기가 언젠가 여행하는 감독자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였다.

형제들의 종(순회 감독자의 그 당시 명칭)인 곤살로 로드리게스는 아둘포에게 벧엘 봉사를 격려하였다. 그 결과 1947년 12월, 아둘포는 멕시코 시에서 벧엘 봉사에 임하였다. 바로 그 해 멕시코에서 순회 대회들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벧엘 형제들이 대회를 조직하고 프로그램을 다루었다. 그러다가 1951년에, 아둘포 살리나스가 이 나라 최초의 지역 감독자로 임명되어 순회 감독자들을 도왔으며 순회 대회에서 붕사하였다. 그가 맡은 최초의 대회들에서 로돌포 로사노와 사무엘 가르시아가 그에게 도움이 되는 훈련을 베풀었다. 그리고는 아둘포 혼자서 자기가 맡은 일을 진행하게 하였다. 그 해에 전국적으로 18개의 순회 대회가 열렸다.

처음에는, 지역 감독자의 임무는 물론, 대회 마련도 뚜렷이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일부 대회는 순회 감독자가 없어서 지방 형제들이 능력껏 일을 조직하였다. 지역 감독자는 만물 박사가 되어야 하였다. 대회장에 도착하면 그는 형제들이 부서를 설치하는 일을 돕곤 하였다. 음향 장비를 나르는 일은 물론, 식당에 사용할 풍로 등 주방 기구들도 날랐다. 레오노르 살리나스는 남편을 거들어 대회를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하였다. 하루 종일 그들은 밖에서 야외 봉사를 하고 나서, 저녁이면 대회 준비를 돕곤 하였다.

살리나스 형제는 초기의 순회 대회들에서는 진행할 상세한 프로그램이 없었음을 기억한다. 형제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고는 자기가 그 질문에 대답하고자 애를 쓰곤 하였다. 그들은 “반지나 팔찌를 껴도 됩니까?” “동물을 죽이면 범죄가 됩니까?” “666이란 숫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와 같은 질문을 하였다. 신빙성 있는 대답을 해주기 위해 그는 많은 협회 출판물을 가지고 다녀야 하였다.

점차 순회 대회에 관한 세부 사항이 마련되었다. 모든 일이 보다 원활히 운영되었다.

살리나스 형제는 약 13년간 지역 감독자로 일한 후, 1964년에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도록 초대되었다. 준비 단계에서 그는 영어를 배워야 하였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과정으로부터 유익을 얻고 다시 멕시코로 파견되어 지역 활동을 계속하였다. 어느 정도 건강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지금도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다. 1955년부터 함께한 그의 아내 레오노르는 훌륭한 후원자였다. 살리나스 형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진리를 배운 1941년을 회고해 볼 때, [50년 남짓한] 세월이 벌써 지나가 버린 것이 사실이지만 그 기간 내내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놀라운 것들을 배웠습니다. 1941년에는 20세도 채 안 되었습니다.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이 내 인생을 미래가 없는 인생에서 목적 있는 인생으로 바꾸어 주신 데 대해 감사 드립니다.”

많은 노력을 들여 대회에 참석하다

해마다 전국 대회가 멕시코 시에서 열렸고 대다수의 멕시코 형제들이 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일부 형제들은 돈이 부족해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대회가 소규모일 때는 수도 밖에서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벧엘에서 묵었다. 그 후 1940년대 초에는 여러 형제의 집에 숙박 마련을 하였다. 우리는 많은 우리 형제들의 가난 때문에 가슴이 아팠고, 그들이 지방에서 영적 양식을 즐기기 위해 멕시코 시로 오느라고 바친 노력에 깊이 감동되었다.

그들의 집에서 좀더 가까운 곳에서 대회가 열릴 수 있는 마련이 생겼을 때, 우리는 참으로 기뻤다! 이제 그들은 그렇게 멀리까지 여행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도 일부 형제들은 참석하기 위해 여전히 커다란 희생을 치러야 하였다. 일례로, 1949년에 타바스코 주에 사는 20명의 대표자들—남자 18명과 여자 2명—은 베라크루스 주에서 열리는 대회에 오기 위해 32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여행하였다. 그들은 계속 15일간을 여행하였다! 전부 합해서 왕복 여행에 35일 가량 걸렸다.

라 토레 델 비히아 데 메히코—문화 단체

일찍이 1932년에 라 토레 델 비히아 데 메히코가 정부로부터 인가받은 사실이 기억날 것이다. 그러나 법이 모든 종교에 부과한 제한 규정 때문에 장애가 있었다. 증인들의 호별 활동에 이의가 제기되었다. ‘모든 종교적 공공 숭배 행위는 종교 건물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법에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일한 이유로, 공공 장소에서 갖는 우리의 대회에 대해서도 이의가 제기되었다. 이 대회들의 규모가 계속 더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였다. 부동산을 소유하는 것 또한 문제가 되었는데,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모든 건물은 연방 정부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고 법에서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협회는 우리 활동의 교육적 성격을 좀더 크게 강조하는 방향으로 조직을 재편하는 것이 현명하겠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1943년 6월 10일, 외무부에 라 토레 델 비히아를 (비종교적) 일반 시민 단체로 등록하기 위한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1943년 6월 15일에 승인되었다.

이 새로운 마련으로, 우리 집회에서 노래 부르는 일이 중단되었고, 집회 장소들은 문화 연구 회관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무도 집회에서 기도를 들리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마음속으로 조용히 하는 열렬한 기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예배로 보이는 것은 모두 피하였고, 참으로 우리 집회들은 교육을 위한 것으로 꾸며졌다. 다른 나라에 있는 증인들이 지방에 있는 집단을 “회중”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을 때에도, 멕시코에 있는 증인들은 계속해서 “부회”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증인들의 호별 방문은 계속되었고 한층 더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문전에서 성서를 직접 사용하는 일은 피하였다. 대신, 전도인들은 성구를 암기해서 인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그들은 여러 가지 제목으로 성경을 인용하여 모아 놓은 「‘범사에 헤아리라’」 책을 잘 활용하였다. 재방문과 연구(“성서” 연구 대신 “문화” 연구라고 했음)를 할 때에만 성서 자체를 사용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주된 활동 즉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는 변함이 없었다.

문맹 퇴치반

라 토레 델 비히아의 설립 인허장과 일치하게, 우리는 사람들을 성서의 가르침으로 교육시키는 일뿐 아니라 문맹 퇴치 운동도 벌였다. 그래서 1946년 5월 17일, 라 토레 델 비히아는 멕시코 시에 설치한 문맹 퇴치반 센터를 정부에 등록하였다. 이 반들은 호세 말도나도가 운영하였다.

정부에서도 문맹 퇴치의 추진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 반에서 사용할 초보자용 교과서를 제공하였다. 후에 워치 타워 협회에서 「읽고 쓰기 교본」 소책자를 스페인어로 인쇄하자 그것이 사용되었다. 정부에서는 수행되고 있는 일에 대해 감사를 표하였다. 1966년 1월 25일자 서신에서 정부는 이렇게 말하였다. “장관의 동의하에 본인은 여러분의 단체가 공화국 내의 문맹인들에게 애국적인 협조를 베풀어 온 데 대하여 기쁘게 치하하는 바입니다. ·⁠·⁠· 본인은 모든 선량한 멕시코인이 참여하고 있는 문맹 퇴치를 위한 이 꾸준한 투쟁을 계속함에 있어 여러분의 열정이 식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반들이 개설된 때부터 1966년까지 읽고 쓰기를 배운 사람은 3만 3842명이었다. 그리고 1993년 현재까지는 그 수가 총 12만 7766명이다. 그 외에도, 3만 7201명이 읽고 쓰기 능력을 향상시키도록 도움을 받았다. 이 사람들은 읽고 쓰기를 배우면서 또한 영적인 마련—부회 집회와 함께 협회가 출판한 성서 연구 서적들—을 인식하는 법도 배웠다.

여호와의 조직의 도덕적 깨끗함

순회 대회 마련이 추진될 무렵, 여호와의 조직을 더욱 깨끗하게 하는 기간도 시작되었다. 당시 멕시코에 아주 깊이 뿌리 박혀 있던 관습은, 젊은 남자가 젊은 여자를 “훔쳐 가”서 결혼도 하지 않고 같이 사는 것이었다. 거짓 종교에서 허용되는 옛 방식에 익숙해 있던 부부들은 일반적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합의 관계에 의해서 동거하였다. 이것이 많은 사람이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하기 시작할 때 처한 상황이었다.

살리나스 형제는 도덕에 관한 성서 원칙을 인식하고서 형제들이 그 점을 이해하도록 도와 주었다. (마태 19:3-9; 히브리 13:4) 어디에 가든지 그는 형제들이 결혼을 합법화할 것을 격려하였다.

이것은 여호와의 증인에게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일찍이 1924년 9-10월 호에서 「라 토레 델 비히아」는 이러한 질문을 다루었다. “자기 배우자와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형제를 반의 장로로 선출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까?” 대답은 “전혀 합당치 않을 것입니다”였다. 이에 대한 성경적 이유들이 제시되었다. 또한 혼인 문제를 아직 바르게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침례를 주지 말도록 권고하였다. 그런데도 멕시코에는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부회의 종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1952년에, 전세계의 여호와의 증인의 유익을 위해, 계속 여호와의 조직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면 자신의 생활을 바로잡을 것에 관하여 구체적인 교훈이 주어졌다. 남자가 결혼하였다가 헤어져서 다른 여자와 살기 시작하였는데, 첫 번째 여자와 이혼하지도 않았고 두 번째 여자와 결혼하지도 않은 경우들이 있었다. 이전 아내와 이혼하지 않고서 재혼한 사람들도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형제들로서는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서 자신의 생활을 정리하는 데 대단한 노력이 요구되었다.

형제들이 자신의 결혼을 합법화하기 위해 필요한 조정을 함으로써 호응하는 것을 보게 되어 기뻤다. 어떤 부회들에서는 20쌍 이상이 동시에 결혼을 하였다. 하지만 여호와의 의로운 표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활 방식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 중 일부는 떠났고, 일부는 제명되었다.

한 형제는 자기 반려자와 함께 조직의 교훈에 따라 결혼하러 갔을 때 자녀들이 따라간 일을 기억한다. 판사가 “당신은 이 여자와 결합해서 죽음이 당신들을 갈라 놓을 때까지 이 여자를 받아들여 아내로 삼을 것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우물거리느라 미처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어린 딸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디 케 시, 파파시토![아빠, 어서 네라고 말하세요!]” 하고 격려하는 바람에 그는 판사에게 얼른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시간과 인내가 요구되다

일부 사람들이 여호와의 조직의 높은 도덕 표준, 특히 결혼 및 음주와 관련하여 조정을 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형제들은 점차 여호와의 길에 순응하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베드로 첫째 4:3.

1953 봉사 연도 보고에서 지부 사무실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작년에 시작한 일, 즉 조직에 머무르기에 합당치 않은 사람들을 조직에서 내보내는 일을 완수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봉사 연도 초의 다섯 달 동안은 전도인 수가 상당히 떨어졌습니다. 작년 평균보다 7퍼센트까지 떨어졌지만, 2월부터는 계속 증가 추세를 보여 봉사 연도 말에 와서는 작년 평균보다 9퍼센트의 증가에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올바로 깨끗하게 되자 멕시코의 여호와의 조직은 영적 번영의 시기로 들어설 준비가 되었고, 그 번영은 현재까지 계속되었다.

결코 잊지 못할 대회들

참석한 사람들이 결코 잊지 못할 대회들이 몇 번 있었다. 그 중 하나가 1945년 4월 13-15일에 멕시코 시에서 열렸다. 개인 소유의 자동차를 타고 온 대표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200명 이상이 몬테레이에서 기차로 왔다. 한 객차 바깥쪽에 붙은 표지판은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리고 있었고, 대표자들은 가면서 정거장에 설 때마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증거하였다. 어린 아기가 있는 한 가족은 대회에 가기 위해 치우아우아에 있는 집에서 7일 동안을 걸어온 다음에야 기차를 탔다. N. H. 노어와 F. W. 프랜즈도 뉴욕의 세계 본부로부터 참석하였다. 대회 첫날 1107명의 참석자 중 717명이 야외 봉사에 참여하여, 노어 형제가 아레나 메히코에서 하게 될 공개 강연 “한 세계, 한 정부”를 광고하였다. 그리고 그 강연은 모임을 해산시키려는 가톨릭 방해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 중 일부는 멕시코 증인들이 다른 나라의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가까워지게 된 때였다. 그 중 두드러진 경우가 1958년에 뉴욕에서 개최된 ‘하나님의 성의 국제 대회’였다. 123개 국에서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는데, 그 가운데 503명은 멕시코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지구 전역에서 온 동료 증인들의 말을 듣고 그들과 만나고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처럼 흐뭇한 대회가 다시 1966년에 멕시코 시에서 열렸다. 그 때는 약 12개 국에서 수백 명의 대표자들이 멕시코로 여행하여, 그 때까지 멕시코의 라 토레 델 비히아가 후원한 것 중 가장 큰 대회에서 그 곳 형제들과 합류하였다. 이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의 수는 1945년의 멕시코 시 대회 참석 수의 30배가 넘었다.

협회의 활동 사진

1950년대 중반쯤, 협회는 교육 프로그램에 또 하나의 특색 있는 방법을 도입하였다. 살리나스 형제는 이렇게 회상한다. “활동에 크게 기여한 협회의 16밀리 영화로서,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 신세계 사회의 행복, 여호와의 증인의 하나님의 성의 국제 대회, 전세계에 ‘영원한 기쁜 소식’을 선포함,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없다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들이 우리의 활동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우리는 볼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영화는 협회 사무실의 운영을 소개하였다. 다음 세 편의 영화는 세계 여러 곳에서 열린 대회들을 보여 주었다. 마지막 영화는 관객이 성서의 주요 사건들을 생생하게 그려 보고 그것들이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영화들은 종종 가정 집 안뜰이나 세낸 강당에서 상영되었다. 초대장이 배포되었고,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참석하였다. 상영 후에는 더 알아보기 원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해 두었다.

1958년, 게레로 주의 테넥스파에서는 증인들이 협회의 최신 영화를 집회 장소 옆 부지에서 상영할 마련을 하고 있었다. 형제들이 그 부지를 청소하고 있는데 한 경찰관이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바람에, 과연 상영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었다. 경찰은 부회의 종에게, 가서 시장을 만나봐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형제가 가니까, 시장은 “영화를 어디서 상영할 것입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대답을 듣더니 시장은 “여기 광장에 있는 야외 음악당에서 상영하지 그러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야 물론, 이의가 없으시다면 ·⁠·⁠·” 시장은 전기도 공급되게 해주었다. 벤치는 영화관에서 가져왔다. 그런데 좌석이 900명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의자를 가져오기까지 하였다. 2000명 가량이 왔으며, 사람들은 그 행사를 축제로 바꾸어 모두가 즐길 수 있게 먹을 것을 내놓기까지 하였다. 실로, 살리나스 형제가 공화국 북부의 주들에서 협회 영화를 상영할 때마다 참석자 수는 500명, 800명, 혹은 1000명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협회 시설이 활동에 보조를 맞추다

로베르토 몬테로와 그의 가족이 멕시코 벧엘 가족을 구성하고 있었을 때에는 그들이 입주한, 멕시코 시 멜코르오캄포 가 71번지의 집이 숙소와 지부 사무실로 충분한 공간을 제공하였다. 당시 멕시코에서 활동하던 왕국 전도인은 100명가량밖에 없었다. 그러나 1946년에 와서는 활동하는 증인의 수가 3732명으로 증가하여 부회가 223개로 구성되었다. 증인들이 멕시코 전역에서 수행하고 있던 광범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돌보기 위해서는 시설 확장이 필요하였다. 적절하게도 그 해에, 새 지부 사무실과 벧엘 집이 이전 건물의 옆에 완성되어 사용되었다.

1962년이 되자 그 시설의 이용도 한계에 달하여, 다른 5층짜리 지부 증축 건물을 준공하였다. 여기에는 조그만 인쇄 공장이 포함되어, 스페인어 「통보」(현재 「우리의 왕국 봉사」)를 생산하고 지부 사무실에서 그리고 당시 멕시코에서 신권 교육 활동에 종사하던 2만 7000명이 사용할 서식도 인쇄하였다. 또한 그 지부 사무실 감독하에 천국 전도 강습에서는 전국에 산재한 부회 감독자들과 특별 파이오니아들에게 계속 교훈을 베풀었다.

끊이지 않는 종교적 광신 행위

정부에서 수십 년간 종교적 광신 행위를 종식시키고자 노력하여 왔고, 더구나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전국적으로 잘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교육하는 면에서 증인이 이루고 있는 발전 때문에 교직자들은 분노하였다. 1960년대 중에 일부 지역의 반대는 과거 어느 때보다 격심해졌다.

일례로, 멕시코 주 로스레이에스데라파스 읍에서는 1963년 8월 4일과 5일에 순회 대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대회가 시작되자 그 지방 사제는 확성기들을 대회장 쪽으로 직접 향하게 교회 벽에 설치해서 프로그램을 못 듣게 하려고 하였다. 그는 감정을 자극하는 연설을 하며 증인들에게 모욕을 퍼부어, 교회 사람들을 광분으로 몰고 갔다. 평상시에는 차분하고 상냥하던 수백 명의 가톨릭교인이 자극을 받아 난폭해졌다. 그들은 교회를 뛰쳐나와 막대기, 몽둥이, 돌을 움켜잡았다. 이제 통제 불능이 된 폭도가 대회에 모여 있던 증인들에게 덤벼들었다. 30명 이상의 증인이 다쳤다. 증인의 집 두 채에 돌을 던져 벽이 부서졌다.

그러나 때마침 연방 경찰 도로 순찰대가 개입하는 바람에, 시를 빠져 나온 형제들은 안전하게 떠날 수 있었다. 마침내 월요일에, 성난 군중은 군대에 의해 해산되었다.

일간지 「엑셀시오르」는 1963년 8월 6일자에 이런 보도를 실었다. “사법 당국에 의해 폭동 선동자로 지목받은, 로스레이에스 교구의 사제 헤수스 메자는 돌, 몽둥이, 벌채 칼 등으로 무장한 수백 명의 교구민의 호위를 받으며 자동차를 타고 시에서 도주하였다.”

그러나 폭도의 그러한 행동으로 일부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은 눈을 뜨게 되었다. 얼마 후 증인들이 다시 그 읍에서 전파하자 매우 좋은 결과가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며 점차 듣기 시작하였다. 난동이 있었을 때 그 지역에는 부회가 두 개 있었다. 이로부터 약 50개가 더 생겨났다.

사와이오의 종교적 편협

1964년 8월, 수치스런 박해가 또 다른 도시인 미코아칸 주의 사와이오에서 발생하였다. 그 곳에서는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열정적으로 전파하고 있었다. 그들은 작은 집단의 관심자들과 이미 집회를 갖고 있었다. 한편 그들은 그 지방 사제가 모은 폭도에게서 협박과 모욕을 받고 있었다. 사와이오 사람들뿐 아니라 근처 히킬판에서 온 사람들도 이 학대에 가담하였다. 한 번만 아니라 여러 번 형제들은 이삼백 명으로 구성된 폭도와 맞서야 하였다.

8월 13일,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파이오니아의 집을 에워쌌을 때는 매우 긴장된 상황이었다. 그들은 그 집에 불을 질러 집 안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태워 버리려고 휘발유를 가지고 왔다. 그 집에는 형제 한 명과 자매 다섯 명 그리고 여섯 살 된 여자아이가 하나 있었다. 몇 명의 경찰관이 광포한 군중을 제지하려 하였지만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뜻밖에도 군인들이 세 대의 트럭을 타고 사건 현장에 나타났다. 증인들은 신속히 구출되었고 폭도들은 강제로 해산되었다. 그 상황에 대해 논평하면서, 신문들은 문제를 야기시킨 교직자의 편협한 행동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하였다.

상황이 매우 위험하였기 때문에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그 지역에서 옮기는 것이 현명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협회는 시간이 좀 지난 뒤 파이오니아들을 이웃 도시들로 파견하였고, 그들은 신중하게 사와이오와 히킬판으로 봉사해 나갔다. 그들은 크게 성공을 거두어, 그 박해가 있은 지 십 년 후인 1974년에는 히킬판에 부회가 설립되었고, 1990년에는 사와이오에 다른 부회가 설립되었다.

그 사람은 뒷주머니에 손이 가 있었다

난폭한 박해가 있었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따금 증인들이 어느 정도 불안해한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호세 모라는 할리스코 주에서 겪었던 그러한 경험을 기억한다. 그가 지금은 웃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자신에 차 있지 못하였다.

그가 한 남자에게 시편 115:16의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인생에게 주셨도다”라는 구절을 막 인용하던 순간이었다. 그 남자가 재빨리 손을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모라 형제는 그가 무기에 손이 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꺼낸 것이 신약과 시편이 든 책이었을 때 얼마나 안심이 되었겠는가! 그 남자는 자기 성경으로 성구를 조사해 본 다음 소식을 받아들였다. 매우 빨리 그 남자와 그의 가족은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도 내가 좀 긴장하였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어쩌다 눈이 마주칠 때면 우리는 그 일이 생각나서 웃습니다”라고 모라 형제는 말한다.

근년의 만족스러운 반응

박해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찬양자 수는 전국에서 계속 증가하였다. 성서적인 그리고 조직적인 문제에 대한 형제들의 이해가 자라감에 따라, 좋은 소식의 전파도 더욱 효과적이 되었다. 점차 전도인들은 나타낸 관심을 끝까지 보살펴서 양들을 돌보아야 할 필요를 더욱 의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성서 연구 수가 증가하였다. 1970년에는 매달 평균 4만 3961건의 연구를 사회하였는데, 십 년 후에는 그 수가 9만 508건으로 증가하였다. 그 중 일부 연구생은 매우 신속히 발전하였다.

리노 모랄레스와 그의 아내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리노는 친구와 함께 과테말라의 한 도시에 있는 마리아상을 보러 순례 여행을 갔었다. (그는 멕시코, 치아파스 주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따로 들어가서 형상 앞에서 기도하자고 합의하였다. 리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기에 나는 매우 존경심 가득한 마음으로 예배당 문 안을 살짝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모독적인 짓입니까! 내 친구가 마리아의 치맛자락을 들추어 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뭐 하고 있는거야?’ 하고 내가 소리 지르자, 그는 얼른 기도하는 척하였습니다. 나는 밖으로 나오라고 호통을 친 다음 그가 나오자 주먹으로 후려쳤습니다. 그가 나한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설득시키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내가 진정하고 나자, 그는 자기가 그 형상에 환멸을 느꼈노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무릎을 꿇고 형상의 발에 입을 맞추다가, 발과 얼굴만 매끄럽게 광이 나 있고 옷 속 부분은 작은 나뭇조각들로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어린 아들의 죽음과 더불어 리노의 사고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의 아내는 이렇게 회상한다. “두 여자가 우리 집 문으로 다가오더니 내게 성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곧 그들의 말이 진리라는 확신을 내게 심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내게 책을 한 권 남겨 주면서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비가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비가 계속 오자 비 피할 곳을 찾아 그 두 여자가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남편들과 함께였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후 내내 그치지 않아서 그들은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자야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이용하였습니다—그들은 성서 진리를 전하였고, 나는 배웠습니다. 그들은 이튿날 일찍 떠나면서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대화를 이끌어 간 사람은 정규 파이오니아였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는 그 주의 남부 지방에서 왔고, 그들의 짝은 라트리니타리아 읍에서 온 카랄람피오였습니다. 그런데 매우 놀랍게도, 바로 그 날 오후에 남편이 집에 왔습니다. (리노는 멀리 떨어진 시골 학교에서 일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 후 나는 남편에게 어떤 전도인들이 나를 찾아와 책을 한 권 남겨 주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내게 해준 설명을 생각해 가면서 그 책을 함께 고려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밤은 다 지나가고 날이 새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꼬박 잠을 자지 않은 것입니다.”

리노의 아내가 아침 식사 준비를 시작할 때 리노는 말에 안장을 얹고 있었다. 그 날 오전에 그는 라트리니타리아까지 줄곧 20킬로미터를 여행하여 카랄람피오를 찾아갔다. 집은 찾았는데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랄람피오가 전파하러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리노는 바로 이웃 사람에게 전갈을 남겨 놓았다. “나는 좀 낙담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라고 리노는 상기한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다음날 아침 일찍 누군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나가 보니 그 전도인들이 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녁 일곱 시쯤 우리가 자기들을 찾고 있다는 통보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즉시 준비해 가지고 밤새도록 도보로 여행해서 동이 틀 때 우리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책을 남겨 놓은 지 48시간도 채 못 돼서, 그리고 그 먼 거리에다 밤 시간이었는데도 그 전도인들은 벌써 재방문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재방문은 사흘간 계속되었다! 그 동안 그들은 리노와 그의 아내에게 하느님의 말씀의 기본 진리를 가르쳤다. 나흘째 되던 날 그 부부는 증인들을 따라다니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한 대가족이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하였다.

‘내 아들을 다시 살려 내지 않으면, 당신들을 밖으로 내던져 버리겠소’

오악사카 주에 사는 에딜베르토 후아레스도 진리를 신속히 받아들였다. “나는 내 동생의 죽음과, 같은 날 자살한 내 아들의 죽음으로 애통해 하고 있었습니다” 하고 그는 회상하였다. “이런 불상사를 당하게 되자, 나는 즉시 우리 집의 한쪽 벽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내 신들(우상들)을 향해 말하기를, 그들이 내 아들을 다시 살려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들을 밖으로 내던져 버리고 말겠다고 하였습니다. 8일이 지난 다음, 그 신들이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나는 그것들을 우리 집에서 깨끗이 치워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고서 나는 비탄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학교 교사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와 나를 위로해 주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내게 신약 성서를 주면서 읽어 보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성서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흥미가 없어서 한쪽에 치워 두었습니다. 그 즈음 한 오순절교인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가방을 든 한 남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오순절교인은 그가 여호와의 증인임을 알아차리고는 그가 성경에 대해 더 많이 알 테니까 그를 불러들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 증인은 들어왔고 내가 상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알고서, 나에게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내 관심을 크게 끌었습니다.”

이 증인은 에딜베르토를 정기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방문하려면 도보로 긴 여행을 할 필요가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였다. “그 때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새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라고 에딜베르토는 말하였다. “그 중 세 사람이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어 우리 집에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전도인이 우리를 방문하였을 때는 우리 네 사람이 함께 성서 연구를 하였습니다.”

단기 과정의 “문화” 연구

당시 ‘청색 폭탄’이라고 불리던 책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가 1968년에 발행되어, 그 책을 가지고 사람들과 6개월간 연구하도록 격려받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만큼 걸린 것은 아니었다. 한 경우는 연구 사회가 2주도 안 걸렸다. 지부는 그 일에 대해 이렇게 보고하였다.

“어떤 부인이 「파수대」 선물 예약을 통해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역의 종과 그의 아내가 이웃 도시를 방문하였을 때 마침 그 부인은 순회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형제와 아내는 그 부인과 대화를 나누다가, 부인에게 여호와를 섬기며 자기가 사는 고장 사람들을 돕고 싶어하는 진지한 열망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과 「진리」 책 연구 마련을 하였습니다. 문제는 협회의 지침대로 연구를 할 만한 충분한 시일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인이 대회 도시에 2주만 머무른 후에 소형 비행기로 산악 지대에 있는 자기 고장으로 돌아갈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역의 종의 아내는 2주 동안 집중적인 연구 사회를 하였습니다. 사실상 그 연구는 금요일부터 금요일까지 30시간 사회되어, 「진리」 책 전체를 마쳤습니다. 이 부인이 시간을 가능한 한 활용하기를 바랐으므로, 지역의 종과 그의 아내는 때때로 오후와 저녁에 두세 시간을 내어 부인의 많은 질문에 대답해 주었습니다. 2주 끝에 가서 부인은 자기 책에서 모든 대답에 밑줄을 그어 놓았고, 자기가 사는 외딴 고장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돕고 싶은 강한 열정으로 차 있었습니다.”

두 번째 주의 끝에 그 도시를 떠나기 전 부인은 침례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가서 부인은 곧 8건의 연구를 직접 사회하였고, 15명의 참석자와 함께 「파수대」 연구를 사회하였으며, 그리하여 격지 집단이 형성되었다. 지금은 그 부인이 사는 지역에 회중이 하나 있다.

장로 마련으로 “부회들”이 유익을 얻다

충실하고 분별 있는 종으로부터 온 성경적 교훈과 일치하게, “부회들”을 감독하는 새로운 마련이 1972년에 실시되었다. 모든 일을 감독하던 한 사람의 “부회의 종”이 장로의 회로 대치되었다. 가능한 한 그대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현재처럼 당시에도, 여러 부회에서 전도인들은 자기들 가운데 장로 자격을 갖춘 형제가 한 사람 혹은 어쩌다 두 사람만 있어도 감사하게 여겼다. 많은 경우 부회의 종이던 사람이 새로운 마련에서도 장로가 되었지만, 참으로 성경적 요구 조건에 달하지는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과거의 어떤 사람들처럼 양들을 거칠게 다루는 사람은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될 수 없었다. (베드로 첫째 5:2, 3) 성경적 자격을 갖춘 둘 이상의 남자들이 장로의 회로 일함에 따라 조직은 더욱 동정심 있게 양들의 필요를 돌보게 되었고, 그리하여 훌륭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밀접히 본받게 되었다.

바로 지금까지도, 장로로 일할 자격을 갖춘 남자들은 더 있을 필요가 있다. 증인 수의 신속한 증가 때문에, 여러 회중(1989년까지의 명칭은 “부회”)은 단지 한 명의 장로와 여러 명의 봉사의 종에 의해 돌보아지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봉사의 종들이 모든 책임을 맡고 있다. 베라크루스 주의 탄토유카에는 회중이 둘인데 장로는 한 명뿐이었다. 엔리케 에르난데스 몬테스(장로이며 파이오니아)는 도움을 주기 위해 가족과 함께 그 지역으로 이사하였다. 그가 임명된 회중에는 관심자들이 너무 많아서 왕국회관에 모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전체를 둘로 나누어 두 번째 집단을 위해 집회를 반복할 필요가 있었다. 시날로아 주 팔미야스에서는 몇 년 전에 한 명의 장로가, 다음 대회에서 침례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21명이나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침례 지원자를 위한 질문을 그들 모두와 검토하기 위해 그는 최선을 다하였다.

자격을 갖춘 형제들의 수가 극히 제한되어 있는 곳에서도, 책임을 분담하는 마련은 양들에게 더 나은 주의를 기울이는 결과를 낳고 있다.

체질하는 시기가 오다

1975년에 대하여 그리고 그 해가 여호와의 목적 성취에 있어서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강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 때를 옛 제도가 멸망되고 하느님의 신세계가 설립되는 때로 마음에 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한 기대가 실현되지 않자 일부는 하느님 섬기기를 중단하였다. 얼마의 사람들은 배교자가 되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여호와의 증인은 여호와께 대한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1975-76년 중에 전세계 조직은 여호와에 대한 온전한 확신을 가지고 더 큰 성장을 위하여 준비하였다. 그 이후 우리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멕시코는 지금까지의 확장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한 확장에 기여한 요인이 무엇인가?

대가족들이 연합하여 여호와를 섬기다

멕시코는 대가족제이다. 따라서 일단 성서 연구가 시작되면 서너 명 이상이 참여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가족이 함께 모여 살기 때문에 자녀들은 부모를 매우 존경한다. 이로 말미암은 한 가지 결과는, 부모가 진리를 받아들이면 자녀들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서의 교훈이 적용되면 가족의 유대는 한층 더 강화되고, 종종 전 가족이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함께 참여한다.

청소년들은 자신이 회중 마련에서 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느끼게 된다. 집회에서는 모두가 따뜻한 악수로 참석한 다른 사람들을—젊은 사람들을 포함하여—맞이한다. 자녀들이 집회에서 냉담한 태도를 나타내는 일은 드물다. 그들 모두는 참여하고 싶어하며, 회관과 관련된 다른 활동도 열심히 거든다.

전 가족이 야외 봉사에 함께 참여하는 모습이 흔히 눈에 띈다. 가족 대다수가 파이오니아 봉사에 참여하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모렐로스 주 자파타에 있는 오리엔테 회중의 길레발도 에르난데스 부부는 세 딸이 특별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고 다른 셋은 정규 파이오니아를 (격지 구역에서) 하고 있다. 두 아들은 전도인으로 봉사의 종이고, 다른 두 딸(11세와 12세)은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이다. 이 열두 명으로 된 가족에 여섯 명의 회중 전도인과 여섯 명의 파이오니아가 있는 것이다!

아과스칼리엔테스 주 아과스칼리엔테스 시의 에스트레야 회중에서 사비노 마르티네스 두란은 장로이면서 정규 파이오니아로 일하고 있다. 그의 아내와 딸 역시 정규 파이오니아이다. 아들도 같은 회중에서 정규 파이오니아이며 봉사의 종이다. 다른 아들은 멕시코 벧엘 가족 성원이며, 또 다른 아들은 지부 건축 일에 참여하고 있다.

부모 공경이 좋은 결과를 낳다

틀림없이, 멕시코 가족 성원들이 서로간에 가지고 있는 존경심이 왕국 소식의 전파에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예를 치우아우아 주의 한 경험에서도 볼 수 있다.

소노라 주 나보호아의 장로들은 치우아우아 주 산악 지대에 있는 엘트리고데루소에, 「진리」 책과 같은 협회 서적의 도움으로 성서 연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장로 한 사람과 봉사의 종 한 사람이, 그 소식이 사실인지 알아보고 그 새로운 관심자들을 돕기 위해 하루 종일 힘든 여행을 하였다. 그들은 증인이 아닌, 한 학교 교사와 그의 아내가 사람들과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한 주에 두 번 모임을 가졌고, 참석 수는 25명 내지 30명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게 되었는가?

그 교사의 어머니가 여호와의 증인인데 아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어머니는 그 곳에 있는 동안 그 지역에 사는 일부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그들에게 「진리」 책을 전하였다. 이 사람들이 나타내는 관심을 보고서 어머니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그들을 도와 줄 것을 당부하였다. 아들 부부는 여호와의 증인은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어릴 때 아들을 여호와의 길로 교훈하였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공경 때문에 아들은 사람들과 연구하기로 동의하였고, 며느리도 물론 기꺼이 협조하였다. 그 집단과 연구하면서 그들 자신의 관심도 다시 불러일으켜졌다. 넉 달 만에 그들은 「진리」 책을 다 끝냈다. 나보호아에서 온 두 형제는 장로들과 다른 전도인들이 그 곳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도록 마련하였다. 그 집단에서 최초로 전도인이 된 사람은 그 교사와 아내였다. 이들은 1989년 지역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1990년 6월에는 10명의 전도인이 있는 회중이 엘트리고데루소에 형성되었고, 그 지역에 살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성서 연구를 하고 있다.

길르앗 문화 학교가 필요를 충족시키다

멕시코의 많은 젊은 파이오니아 봉사자들은 더 크게 필요한 다른 나라에서 일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어 왔다. 그러나 이미 이 곳 멕시코 밭에서도 크게 필요하기 때문에 외국으로 가는 일은 권장되지 않았고,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도록 초대된 사람은 극소수였다. 게다가,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려면 영어를 배워야 하였는데, 그것이 일부 사람들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1980-81년 중에 72명의 젊은 멕시코 파이오니아들은 그들을 필요로 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봉사하기 위해 멕시코 길르앗 문화 학교에서 특수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언어로 말미암은 어려움도 없을 것이고 멕시코와 매우 유사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로 갈 것이기 때문에, 이 졸업생들은 자기들이 임명된 나라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새 지부 시설이 봉헌되다

조직의 성장이 계속됨에 따라, 멜초르오캄포 가 71번지에 있는 사무실은 그 곳에서 수행되고 있던 업무를 감당하기에 너무 협소해졌다. 라 토레 델 비히아는 1973년에 멕시코 시 외곽으로 엘테호코테라고 하는 부락에 땅을 사서, 그 곳에 백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널찍한 새 벧엘 집을 건축하였다. 벧엘 가족은 그리로 이사하였고, 그 건물은 1974년 4월에 봉헌되었다. 그 건물은 우리가 여러 해 동안 일을 돌볼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제공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증인 수의 증가 속도가 빨라지자 확장할 필요가 생겼고, 그래서 1985년에, 그리고 다시 1989년에 증축 시설이 봉헌되었다.

사무 시설과 벧엘 가족 성원을 수용할 공간을 마련하는 것 외에도, 멕시코 밭에서 사용할 많은 양의 성서 서적을 생산할 마련 또한 필요하였다. 국외로부터 잡지를 공급받는 일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었다. 우리 자신의 것은 우리가 인쇄하고 싶었는데, 민간 단체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법으로 허락되지 않았다. 상황에 적응하기 위하여, 우리는 1983년에 한 지방 영리 회사가 「라 아탈라야」와 「데스페르타드!」를 인쇄하도록 마련하였다. 우리는 또한 서적의 인쇄 및 제본을 여러 출판사에 맡겨 시험해 보았다. 그러나 합리적인 가격으로 제작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종이 표지판의 인쇄물뿐이었다. 질이 나쁘고 배달이 늦은 것이 항상 문제였다.

이 시점에서 별도로 출판을 위한 또 하나의 단체를 구성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 운영 방침은 그러한 운영에 관한 이 나라의 제반 법적 요건에 맞게 하였다. 벧엘에서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한 공장을 매입하여 개조해서, 그 곳에 새 인쇄 시설을 설치하였다. 워치타워 협회가 브루클린에서 두 대의 M.A.N. 윤전 인쇄기를 멕시코행 선박에 실었다는 소식이 발표되었을 때 참으로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 배가 항해 도중 심한 폭풍우를 만나 그 인쇄기들이 부서진거나 다름없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몹시 실망하였다! 지부 위원회 성원인 로베르토 가마가 그 인쇄기—즉 부서지고 남은 것—를 받으러 베라크루스 항구로 갔다. 그는 인쇄기를 보고는 그만 울고 말았다.

그 인쇄기들을 재조립하는 일은 가능할 것인가? 아마 다른 때 다른 상황이었더라면, 그 인쇄기들은 폐기 처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 인쇄기들이 기능을 발휘해야만 하였고, 더욱이 생활 필수품을 마련하는 데 무엇이든 임시 변통해서 활용하는 법을 익힌 바 있는 형제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협회는 브루클린에서 두 명의 형제를 파견하여 멕시코 형제들을 돕게 하였고, 참을성과 끈기를 가지고 애써 노력한 끝에 부서진 부분을 수리하거나 대치하여, 첫 번째 인쇄기를 설치하였다. 여호와께 감사하게도, 그 인쇄기는 제대로 작동하였다! 나중에 두 번째 인쇄기도 작동하였다.

1984년 10월 1일 호 「라 아탈라야」가 인쇄되어 나왔을 때 정말로 기뻤다. 「데스페르타드!」도 1985년 5월 22일 호부터 인쇄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세속 인쇄소와 결별하게 되어 정말 한시름 놓게 되었다!

1987년에는 두 대의 새로운 4색 한쵸 두루마리 오프셋 인쇄기가 도착하게 되어 있어서, 그 설치 공간을 만드느라 공장을 확장하였다. 1988년 9월, 「“미라! 에스토이 아시엔도 누에바스 토다스 라스 코사스”」(「“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팜플렛)가 천연색으로 인쇄되었다! 그 이후로 멕시코뿐 아니라 중앙 아메리카의 많은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책과 잡지도 이 곳에서 인쇄되어 왔다. 두 대의 4색 인쇄기가 매달 4백만 부의 잡지를 인쇄한다.

멕시코의 여호와의 증인 회중

여호와의 증인 조직은 전세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멕시코에서도 언제나 동일한 기본 원칙에 따라 운영되어 왔다. 또한 1931년 이래 형제들은 각자 자신의 신분을 여호와의 증인으로 밝혀 왔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멕시코에서 조직은 여러 해 동안 민간 교육 단체 기능을 수행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가 지나는 동안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정부 대표자들이 누차 우리의 일부 집회 장소에 찾아와, 그 곳을 종교 집회 장소로 정부에 등록하고 연방 정부 재산으로 귀속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공공 장소에서 종교 집회를 갖는 일은 법으로 금지한다고 당국에서 주장하는 바람에, 우리의 지역 대회와 순회 대회를 위해 공공 장소를 빌리는 일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었다.

이 문제로 1988년에 정부 대표자들과 모임을 갖게 되었다. 당국은 행실과 관련해서는 우리 조직에 아무런 불만이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 조직에 관해 그리고 국가 상징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관해 한 말 때문에 상당한 불신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집회 장소를 쉽게 알아볼 수 없으니까 그들은 우리 조직이 지하 활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국자들은 우리와 가진 모임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신앙에 대해 충분한 증거를 얻게 되었다. 그리스도인 중립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분명히 밝혀졌고, 또한 정부 권위에 대한 우리의 존경심과 우리 입장에서 우상 숭배에 해당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으려는 일이 균형을 이루고 있음도 밝혀졌다. 이 면담을 통해 내려진 결론은, 우리의 모든 집회 장소가 정부 소유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더라도, 우리 조직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로 공개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당국이 우리 활동을 보다 잘 알게 될 것이고, 이것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였다. 그렇다 할지라도 어떻게 큰 대회들을 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해결 방도가 없었다.

1989년에, 통치체의 승인하에 모든 “부회”에 서신을 띄워, 우리가 4월 1일자로 멕시코에서 종교 조직으로 운영될 것임을 알렸다. 후에, 「인포르마도르 데 라 토레 델 비히아」(「통보」)의 변경된 명칭인 「누에스트로 미니스테리오 델 레이노」(「우리의 왕국 봉사」) 6월 호에서 더 자세한 설명을 하였다. 그 이후로는 문전에서 성서를 사용하였고, 집회에서 기도를 하였다. 나중에는 집회에서 노래도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 때문에 회중들이 얼마나 기뻐하였겠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 연구 회관 혹은 연구 회관(지금은 왕국회관이 되었음), 그리고 지역 대회와 순회 대회에서 집단적인 기도와 노래가 시작되었을 때 형제들의 얼굴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뿐만 아니라, 호별 증거에서 성서를 직접 사용하게 되자 형제들은 열정이 더욱 고취되었고, 활동은 더욱 효과적이 되었으며, 커다란 만족을 느꼈다.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 모르면서도, 우리는 또한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 방식을 법적으로 변호할 수 있는 재단도 설립하였다.

증인 자녀들이 심한 압력을 받다

여호와의 증인 자녀들은 기에—어떤 기에도—경배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심한 압력을 받아 왔다. 자녀들은 혼자서 혹은 부모를 동반하여 자신의 입장을 교사에게 설명하였다. 어떤 때는 그들의 설명이 받아들여졌지만, 대다수의 경우 퇴학을 당하였다. 자녀가 퇴학당하면, 부모는 교사가 좀더 관용적이어서 자녀가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는 학교를 찾았다. 그러나 당국자들 앞에서 자녀의 권리를 변호할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전도인 수가 증가함에 따라 증인 자녀들에 대한 압력도 증가하였다. 신문 기사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취하는 입장을 비평하였다. 우리는 이제 멕시코에서 종교 조직으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 다니는 증인 자녀들의 그리스도인 양심을 변호하는 운동을 벌일 때가 된 것이다.

학교에서 양심의 자유를 위한 투쟁

1989년에, 자녀들이 이 나라 헌법이 보장하는 바에 따라 교육받을 권리가 있음을 연방 당국에 강력히 호소하였다. 전국의 증인 변호사들은, 지부 법률부의 지도하에 이 사건들을 다루는 일을 조정하도록 설립된 위원회와 협조하였다. 소송을 당하자, 많은 학교 당국자들은 자기들의 조치를 철회하였다. 100건 이상을 법정으로 가져갔다. 49건은 여호와의 증인에게 유리한 판결이 났고, 28건은 아직 계류 중이다. 28건은 마히스트라도스 데 로스 코레히아도스 데 시르퀴토(연방 법원의 상급 법원)에 상소되었는데, 이 중 14건은 호의적인 판결이 나와 하급 법원에 판례가 되었다. 자녀들에게 면제 조치는 없었지만, 법과 일치하게 판사들은 어떠한 이유로도 자녀에게서 교육을 박탈할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 교육 공무원들이 임의로 행동한 여러 경우, 연방 당국에서는 중재를 해주었다. 일부 공립 교육 공무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좀더 합리적이 되어 다소 호의적인 훈령을 내보냈다.

증인들이 이 나라 전역의 학교 당국자들을 방문해서 국민 의례에 대한 여호와의 증인의 입장을 직접 밝히는 프로그램이 구성되었다. 성서적인 그리고 법적인 내용을 그들과 논의하였다. 많은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관리들은, 증인 자녀들이 특정 의식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종교 원칙에 근거한 양심적 입장 때문이라는 것과, 그렇지만 증인 자녀들은 국가의 상징물을 존중하며 당국자들도 존중한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출애굽 20:4; 로마 13:1)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판사들, 학교 당국자들, 교사들에게 훌륭한 증거가 행해졌고, 그 결과 일부 사람들은 진리에 관심을 보였다.—마태 10:18-20.

호의적인 판결을 내린 치우아우아 주 시우다드화레스의 한 연방 판사는 현재 형제들의 방문을 받고 있다. 그는 최근에 형제들에게 「생명—그 기원은 무엇인가? 진화인가, 창조인가?」 책을 거의 다 읽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그는 자기 책상 서랍을 열면서 “여러분이 남겨 놓고 간 성서는 여기 두었습니다. 이 책들이야말로 나의 가장 훌륭한 벗이지요”라고 말하였다.

호의적인 판결을 내린 게레로 주 칠판싱고의 또 다른 연방 여성 판사는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인 중립에 관한 우리의 입장을 자기에게 분명히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는 그 설명에 대해 고마워하면서, 자기가 전에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법에 따라 우리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린 것이 기쁘다고 말하였다. 그 판사 역시 얼마의 성서 서적을 받았다.

지역 대회와 순회 대회—큰 증거가 되다

우리 조직이 이제 단순한 문화 단체가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로 알려지게 된 것이 지역 대회와 순회 대회를 갖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1988년에 이러한 상황이 당국에 처음 제시되었을 때, 그들은 정상적인 집회 장소 밖에서는 종교가 공공 집회를 갖지 못하도록 규정한 법만 지적할 따름이었다. 그러면서, 공공 장소를 사용하는 대신 지역 대회와 순회 대회를 위한 큰 시설을 우리가 직접 소유할 것을 제안하였다. 우리는 끈질기게 공공 장소에서 큰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특별 허가를 받을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들은 우리가 신청서를 제출하면 고려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큰 모임을 갖는 것을 금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늘 그러한 모임을 가져왔으며, 다른 종교들 역시 공개적인 종교 활동을 수행해 왔기 때문이다. 협회의 책임 있는 형제 중 한 사람은 그 모임의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가 떠나올 때 나는 ‘그러면 다른 어떤 마련이 있을 때까지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온 그대로 하면 되는 걸로 이해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동의하였고, 우리는 아주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따라서 협회는 지역 대회와 순회 대회를 계속 마련하였는데, 오히려 전세계 다른 지역의 증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가슴표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대회에서 노래와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널리 알려지는 것을 회피하려 하지 않고, 우리는 기자들을 친절히 맞아들였다. 정부에서 파견한 조사관들은 여러 장소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해 보고 호의적인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여호와의 축복으로, 대회들은 그분의 이름에 커다란 증거가 되어 왔다.

1993년의 마지막 몇 달 동안, 161개의 “하느님의 가르침” 지역 대회가 74개 도시에서 열렸고, 참석자 수는 83만 40명이었으며, 침례받은 자의 수는 1만 5662명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초기의 시작과는 대조되는 일이었다.

‘가톨릭 교회에게는 일깨우는 경고’

이 나라의 수많은 신문들은 최근에 열린 우리의 일부 대회에 관해 매우 긍정적인 발언을 해 왔으며, 이것은 나름대로 여호와의 이름을 잘 반영하는 증거가 되고 있다. 누에보레온 주 몬테레이의 「엘 노르테」지는 1991년 10월 27일자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의 증인 2만 5000명이 몬테레이 야구 경기장에 모였지만, 그 안에는 쓰레기도, 밀치는 일도, 고함 지르는 일도 없었고, 경찰의 순찰까지도 필요 없었다. ·⁠·⁠· 모인 사람들은 어린이, 청소년, 성인 할 것 없이 모두 정장 차림으로 이 행사에 왔다. 남자들은 넥타이를 매고, 여자들은 차분한 색조의 긴 스커트를 입은 것이 눈에 띄었다. 거의 모든 사람의 손에는 「신세계역 성경」이라고 하는 증인들 자신이 번역한 성서가 한 권씩 들려 있었고, 연사가 그 성서에서 어느 장을 언급할 때마다 그들은 모두 그 성서를 사용하였다.” 같은 도시의 다른 보도는 한 가톨릭 고위 교직자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연례 모임이 남긴 소식은, 가톨릭 교회에게는 믿음을 강화하도록 일깨우는 경고였습니다.”

아레나메히코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 대회에 참석한 한 여기자는,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기술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떠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는 우리 교구, 우리 지역 사회를 둘러보고 내 자신을 들여다보고서, 내가 공언하고 또 확고히 믿고 있는 신앙에 대해 내가 얼마나 빈약한 증거를 해 왔는지 부끄러움을 느낀다. ·⁠·⁠·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과 작별 인사를 하면서, 내 양심을 검토해 보고 참된 신앙을 위한 참된 증인이 되기 위해 힘을 요청해 본다.” 코아우일라 주 북부 몽클로바 시의 신문 「라 보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증인들이 이루고 있는 일이 진실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얼마 전에 동일한 장소에서 가톨릭교인들이 모임을 가졌는데, 이 주(州)의 가톨릭 교회 지도자까지 참석해 있었지만 경기장이 결코 지금처럼 깨끗해 보이지 않았다. ·⁠·⁠· 사흘간의 모임이 끝난 뒤에도 그리고 그들이 경기장을 아주 떠나기 전까지도 그들은 이 곳을 깨끗이 유지할 것이다. ·⁠·⁠· 우리는 이 공원이 멋있고 ‘유용’해 보이는 유일한 때는 여호와의 증인이 그 곳에서 모임을 가질 때라고 감히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피의 적절한 사용에 관한 문제

현재 멕시코에서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신분을 가지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피에 관한 성서에 근거한 우리의 입장을 변호할 수 있는 더 나은 위치에 있게 되었다. 우리 형제들은 늘 병원에서 치료받기가 힘들었다. 멕시코 의사들은 병원 환자의 치료에 관한 자기들의 지식과 권위가 의문시되는 일에 익숙해 있지 않다. 수술받을 필요가 있는 형제들이 자신의 종교적 입장을 의사들에게 설명하곤 했지만, 그들의 양심이 존중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들은 피를 사용하지 않고 치료해 줄 의사를 찾아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옮겨가야 하였다.

상황을 개선할 목적으로, 1991년 1월 25일부터 27일까지 멕시코에서 의료 세미나가 열렸다. 브루클린에서 온 형제들이 세미나를 주도하였다. 그 후 지부 사무실에 병원 안내부가 설치되었고, 전국적으로 병원 교섭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 이후 이 나라 의료 기관들은 피에 대한 여호와의 증인의 입장에 관한 방대한 증거 자료를 받고 있다.

1991년 4월, 교섭 위원회에서 일하는 일부 형제들이 게레로 주 아카풀코에서 개최되는 제1회 라틴 아메리카 수혈 의학 및 혈액 은행 회의에 초대되었다. 중앙 및 남아메리카의 12개 국에서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조직, 표준화 및 법 구성”이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종교적 신념 때문에 피의 사용을 거부하는 단체이므로 대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언급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발표한 의사는 병원 교섭 위원회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였다. 사전에 이 의사와 면담을 했었기 때문에 그는 우리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 알았다. 질의 시간이 있었고, 일부에서 생명은 종교적 신념과 상관없이 구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자 그 의사는 간단히 이렇게 말하였다. “법적인 문제를 피하고자 한다면 이 종교 단체를 존중심을 가지고 치료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일반 보건법에 따르면 피를 사용하기 전에 반드시 환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부언하였다.

다른 일련의 강연회가 고등 법원 강당에서 열렸다. 그 중 한 강연에서 한 변호사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하였다. 즉 “여호와의 증인이 헌혈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에게 의료 제공을 거부하는 것이 합법적인가?” 그리고 “증인 환자에게 강제로 수혈을 하는 것이 옳고 합법적인 일인가?” 하는 것이었다. 보건성 법률 국장은, 법에는 의료의 대가로 환자에게 헌혈을 요구하는 규정이 전혀 없음을 알려 주었다. 그는 이렇게 천명하였다. “의료는 공화국 헌법 총칙에서 모든 기관에 부과하는 의무 사항이며, 그것을 베푸는 데 어떠한 제한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의료를 거부하는 것은 범죄입니다.” 이런 연설들로 말미암아 보건성 관리들과 매우 긍정적인 면담을 몇 차례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병원 안내부의 보고를 보면 이러하다. “멕시코 보건성 법률 국장과 면담하였습니다. 병원 교섭 위원회의 마련을 설명하자 그는 그것을 아주 이례적인 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서로부터 직접 우리의 종교적 입장에 관한 근거를 설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아주 잘 이해하는 것 같았으며, 다른 의료 당국자들도 우리의 입장과 우리가 한 마련에 대해 들을 수 있도록 그들과 접촉하게 해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뒤이어 있게 된 면담 중에는 이식 전문의 등록 협회 회장이며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매우 성공적으로 신장 이식 수술을 해 온 의사와의 면담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면담들의 결과는 매우 흥미로웠는데, 그것은 우리가 증인 환자와 병원 의료진 사이에 더 나은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세계적인 규모로 조직된 것을 보고 의사들이 감명받기 때문입니다.”

수효가 말한다

이 모든 일이 진행되는 동안, 전도인들은 계속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서 매우 활동적으로 일하였다. 1931년에 82명이 야외 봉사에 참여한 것으로 보고된 이래 괄목할 만한 성장이 있어 왔다. 1961년에는 전도인 최고 수가 2만 5171명이었다. 성서 연구 활동이 향상되었지만, 연구를 사회하도록 훈련받은 형제가 그 때까지도 그리 많지 않았다. 서서히 전도인들은 교육을 받아 왔으며, 그 결과 호별 활동, 재방문 그리고 성서 연구 사회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1년에는 5만 명이 넘는 전도인 신기록이 있었다. 8년 중 7년 동안 10퍼센트를 넘는 증가가 있었고, 때로는 14퍼센트까지 증가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는 거의 매년 5000명 이상이 침례를 받았다. 1971년 이후 거의 5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전도인 대열에 추가되는 데 겨우 1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1981년에는 최고 수가 10만 1171명이었다. 이 때쯤에는 성서 연구 수가 전도인 최고 수와 거의 비슷하였고, 그 이후로는 전도인당 가정 성서 연구 수가 평균 한 건 이상이었다.

야외 봉사에 대한 형제들의 열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1994 봉사 연도는 전도인 최고 수 40만 4593명으로 마감되었다. 성서 연구 수는 현재 평균 53만 5천 건이 넘는다. 1994년 기념식 참석자 수는 137만 9160명이었으며, 이것은 이 나라 사람 63명당 한 명꼴로 참석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래에 있는 표는 이 나라 여호와의 종들의 활동이 1931년 이래 어떻게 증가되어 왔는지를 보여 준다.

이 표가 보여 주는 바와 같이, 1981년 이후 십 년 동안 가정 성서 연구 수가 1981년의 평균 10만 636건에서 1991년의 47만 2389건으로 급증하여 10년 만에 369퍼센트가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멈추지 않고 있다!

멕시코에서는 성서 연구를 시작하기가 매우 쉽다. 예를 들면, 누에보레온 주 몬테레이에서 한 전도인은 문 앞에서 한 부인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 바로 그 순간에 성서 연구를 제안하였다. 부인은 즉시 받아들였다. 나중에 형제는 집에서 하는 성서 연구에 왜 그렇게 즉시 동의했는지 물어 보았다. 부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에게 성서 연구를 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당신이 생전 처음이었거든요.”

‘전도인들은 열정에 넘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질문한다. “지난 10년 동안 멕시코에서 괄목할 만한 증가를 이룬 비결이 무엇입니까?”

지부 위원회의 한 성원은 이렇게 대답한다. “이 나라 어디를 가든지 전도인들은 열정에 넘치고 있으며, 나라 전체가 진리로 타오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형제들의 입에서는 야외 봉사 경험담이 그칠 줄 모르며, 여러분의 경험담도 듣고자 합니다. 진리가 형제들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들의 생활은 진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전도인들은 대단히 열심이어서 어디를 가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노력을 축복해 오셨습니다. 잠언 10:22은 그것을 이러한 말로 멋지게 요약합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신다.’ 또한 사람들이 성서 연구를 시작함과 동시에 집회 참석을 시작하는 것도 매우 흔한 일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진리에서 신속히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봉사 훈련 학교

현재는 멕시코 형제들이 생산적인 밭을 돌보도록 자격을 더 잘 갖추게 도와 주는 마련—봉사 훈련 학교—이 부가되었다. 멕시코에서는 제1기 학급이 1991년 11월에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 열두 학급이 열렸다. 이 학교는 교습 위원회가 준비한 8주 과정이다. 내용은, 장로와 봉사의 종들이 신권 조직에서 긴급한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특별히 고안되었다. 통치체의 봉사 위원회의 감독하에, 멕시코의 자격 있는 독신 형제들이 더 크게 필요한 지역에서 증가된 책임을 맡을 목적으로 훈련받기 위해 참석하도록 초대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훈련을 받는 것이 다른 나라에서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형제들은 열정적인 반응을 보여 왔다. 이 학교에 대한 광고가 처음 있었을 때 600명이 예비 신청서를 써 냈다! 매우 많은 젊은 형제들이 계속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일 년에 한 번 이상 두 학급이 동시에 열리고 있다. 그 결과, 세계의 이 지역에 있는 하느님의 양 무리가 더 잘 돌보아지고 있다.

파이오니아들이 계속 격지 구역을 개척하다

전국에 9800개가 넘는 회중이 있어, 현재 모든 도시와 읍은 회중 구역으로 임명되어 있다. 하지만 격지 구역은 수없이 많다. 많은 파이오니아들이 그러한 곳에 가고자 자원하고 있다. 그들은 그러한 지역에서 봉사하기 위해, 시간제 일을 구하거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족의 도움을 받는다.

이들 외에도, 671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현재 대부분 조그만 회중이나 이전에 좋은 소식이 이르지 못했던 외딴 곳에서 봉사하고 있다. 그들은 일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특별 파이오니아 중에는 이동 파이오니아라고 부를 만한 봉사를 해 온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주어진 구역 내에서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구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기 위해 이 장소 저 장소로 이동한다. 이 형제들은 다량의 서적을 운반하며 잠도 잘 수 있게 되어 있는 조그만 유개 픽업 트럭을 사용한다. 그래서 그들은 땅거미가 지면 잠잘 곳이 있다. 그러나 산악 지역에서는 종종 길이 끝나는 곳에 트럭을 놔두고, 식량과 기타 물품을 배낭에 넣어 등에 짊어진 다음 걷기 시작해야 한다. 지난 5년 동안 형제들 몇 집단이 이 활동을 하도록 협회로부터 임명되었으며, 훌륭한 결과를 낳았다.

다음의 예는 이 열심 있는 형제들이 즐긴 여러 가지 흥미 있는 경험담 중 하나이다. “게레로 주의 알타미라노 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의 진리에 관심이 있는 많은 사람을 찾았습니다. 단 한 달 만에, 우리는 관심 가진 사람들의 집에서 40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한 연구는 가톨릭교인과 했는데 그 집에는 형상이 가득하였습니다. 그 남자는 우상 숭배가 여호와 보시기에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에서 그 점에 대해 읽고 나자 모든 형상을 부숴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를 1991년 지역 대회에 초대하였는데, 그는 다른 여섯 사람을 데리고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집회에 가려면 45킬로미터를 여행해야 하였지만 그렇게 하였습니다. 지금은 훌륭한 전도인이 되기 위한 요구 조건에 달해 가는 중입니다.”

이 파이오니아들이 수고한 결과, 성서 서적이 많이 배부되었고, 이전에 증인이 없던 곳에 작은 회중들이 설립되었다. 한 파이오니아는 이 활동에 대한 소감을 표현하여 이렇게 썼다. “우리는 아름다운 곳들과 기꺼이 듣고자 하는 훌륭한 사람들을 방문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들과 함께 좀더 머물러 달라고 울면서 부탁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정말 그 곳의 필요 때문에 그들과 함께 머물고 싶어졌습니다. ·⁠·⁠· 또한 가난하고 겸손하면서 그처럼 외딴 구역에 사는 이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가지고 가도록 자신의 종들을 사용하고 계신 여호와께서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분인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많은, 좋은 회관’

멕시코에서는 필요로 하는 모든 일을 다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건축 계획이 확대되어 왕국회관과 대회 회관도 포함되어 왔다. 우리의 표어는 “더 많은, 더 좋은, 더 큰 왕국회관”이 되었고, 전국에서 형제들은 열정적으로 더 좋은 집회 장소를 건축하고 있다. 지역 대회에 80만 명이 넘게 참석하기 때문에 적절한 시설을 빌리기가 힘들어졌다. 순회 대회만 아니라 소규모 지역 대회도 볼 수 있는 대회 회관을 건축하는 일에 주의가 기울여지고 있다. 현행 법 아래서, 그리고 여호와의 축복으로, 이 부면의 전망이 아주 밝다.

타마울리파스 주의 국경 도시 레이노사에서는 괄목할 만한 건축 공사가 완수되었다. 그 곳에서 한 관대한 사람이 대회 회관 건축 부지로 약 4헥타르의 땅을 기증하였다. 주변의 8개 순회구에서 온 형제들이 열정적으로 건축 공사를 하여, 3600명을 수용하는 대회 회관을 건축하고자 커다란 개인적 희생을 하였다. 이것은 이 나라의 다른 지역에서도 따를 만한 본이 된다. 1992년 11월, 레이노사의 이 대회 회관은 통치체의 앨버트 D. 슈로더에 의해 봉헌되었다.

여러 해 동안 멕시코 시에는 조그만 대회 회관이 두 개밖에 없었다. 이들은 각기 천 명 정도를 수용한다. 그러나 1993년 5월 9일, 툴티틀란 교외에 3000명을 수용할 아름다운 회관이 통치체의 존 E. 바에 의해 봉헌되었다. 단 일 년 만에, 멕시코 시의 열정적인 형제들이 건축한 것이다. 이 훌륭한 대회 회관은 참으로 여호와께 영예가 된다.

이전 어느 때보다 큰 규모의 건축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폭발적인 속도로 확장해 왔다. 단지 지난 10년 만에, 증인 수는 약 15만 명에서 40만 명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개인 및 가족과 사회되는 가정 성서 연구 수는 약 18만 건에서 53만 5000건 이상으로 급증하였다. 대량의 성서 연구 서적이 필요하다. 작년에, 성서를 설명하는 3000만 부가 넘는 서책·소책자·잡지가 수백만 부의 팜플렛과 함께 멕시코의 여호와의 증인들에 의해 배부되었다. 새로운 지부 건축 계획이 진행 중인데, 이는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큰 규모이다. 약 800명의 벧엘 봉사자를 더 수용할 수 있는 숙소가 마련될 것이다. 공장의 크기는 네 배로 될 것이다. 이 건축 공사는 약 5년이 소요되며 많은 국제적 협조를 필요로 할 것이다.

우리는 성서·서책·소책자·잡지 등의 서적을 멕시코뿐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에 있는 진지한 사람들의 영적 굶주림도 충족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갖기를 고대하고 있다.

하느님의 양 무리를 위한 영적 목자들

지부 위원회를 구성하는 형제들은 지부 사무실 및 다른 곳의 여러 분야의 활동을 감독하며, 순회 대회와 지역 대회에서 일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여행한다. 이것은 그들이 이 곳 멕시코에서 수행되고 있는 모든 분야의 활동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들의 아내들은 그들이 무거운 책임을 돌보도록 충성스럽게 지원하고 있다. 전체로 볼 때, 이 형제들은 침례받은 후 평균 41년간 봉사하였으며 37년간 전 시간 봉사를 해 왔다. 모두 벧엘 가족 성원이다.

34명의 지역 감독자와 446명의 순회 감독자가 야외에서 일하고 있다. 회중 수는 9810개인데, 매달 평균 20개의 새로운 회중이 형성되고 있다. 따라서 이 순회 감독자들은 회중의 장로들 및 봉사의 종들과 더불어 양 무리를 돌보느라 매우 바쁘다. 회중마다 평균 1.7명의 장로와 2.8명의 봉사의 종이 있다. 따라서 많은 회중은 자격 있는 형제들을 긴급히 더 필요로 한다. 게다가, 전도인들의 끊임없는 증가로 회중이 더 형성되고 있고, 이러한 회중들은 모두 자격 있는 장로와 봉사의 종을 필요로 한다. 각 회중에서 일하고 있는 그들 소수는 여호와의 어린 양들을 치는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요한 21:15-17.

종교 단체 및 공공 숭배에 관한 새로운 법

지난 135년 동안 멕시코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정책을 실시해 왔다. 1865년, 상황이 긴장된 나머지 멕시코와 교황청 간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종교에 대한 과거의 경험을 고려하여 정부는 모든 종교에 영향을 미치는 제한 규정을 부과하였다. 그러나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가 1988년 12월에 공화국 대통령으로 임기를 시작하였을 때, 종교에 관한 정책에 변화가 있을 것과 교황청과의 관계 회복이 있을 것을 예견할 수 있었다. 대통령의 취임 연설 때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고위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자연히, 그러한 일이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가톨릭 교회에 이처럼 호의를 표명하는 일이 있자 가톨릭 교직자들은, 헌법을 개정하여 종교 조직에 더 많은 자유를 주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이 문제를 놓고 2년간 계속해서 언론에서 토론을 벌인 결과, 종교 조직이 멕시코에서 법적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길이 예비되었다. 그 때까지 종교는 단지 명목상의 존재였을 뿐 법적 지위나 권리는 없었다. 교직자들은 법적 승인뿐 아니라 정치·교육과 관련된 특권도 구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게다가 일부 가톨릭 사제들은 그들의 선언문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제한해야 하며 법적 신분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하였다. 마침내 1992년 1월, 의회는 헌법 가운데서 종교에 대해 언급한 내용의 일부를 수정하였다. 그 후 7월에는 변경 내용을 시행하는 세칙이 작성되었다. 이것을 ‘종교 단체 및 공공 숭배에 관한 법’이라고 칭하였다.

이 법의 취지는 종교 단체에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 법은, 종교 조직이 이제 재산을 소유할 수 있음을 허용한다. 또한 성당 밖에서 종교 집회와 시위를 가지는 것을 허락한다. 한 조항에서 애국적 상징물에 대해 언급하고 있어, 이는 혹시 여호와의 증인을 염두에 두고 공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었다. 그러나 1993년 5월 7일, 정부 총무처는 라 토레 델 비히아와 로스 테스티고스 데 헤오바 엔 메히코를 승인하였다. 우리는 새 법이 멕시코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의 진전을 허용하며, 이전에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법적 권리와 특권을 십분 활용하여 우리가 충분한 자유를 가지고 활동을 계속하게 할 것임을 확신한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몰랐으면서도, 멕시코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법이 통과되기 전부터 이 자유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멕시코에 대해 할 이야기가 훨씬 많다

멕시코의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여기에 다 포함시키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본 것은 단지 우리의 역사 앨범을 간단히 훑어본 것에 불과하다. 초기의 몇 장면은 색 바랜 흑백 사진과 다소 비슷하다. 보다 최근의 사건들은 비디오테이프에 잘 포착된 화면과 같은 움직임과 박진감이 있다.

최근에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한 사람들에게는, 멕시코에서 활동을 개척하는 일에 참여한 사람들이 직면한 시련이 놀랍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들은 영적 양식이 풍부하고, 수십만에 달하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동료들이 있으며, 하느님께 드리는 숭배가 잘 조직된 방법으로 수행되고 있는 영적 낙원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멕시코의 여러 지역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아직도 집회에 가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용할 수 있는 영적 마련으로부터 유익을 얻기 위해 아직도 읽는 일에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또한, 아직도 어떤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그들이 섬기는 회중에 가기 위해 강을 건너고 산을 올라야만 한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생활이 물질적으로 더 넉넉해 보일지 모르지만, 또한 유혹도 더 많다. 멕시코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기들이 겪고 있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섬기는 일—그들에게 참다운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 주는 활동—에 전세계의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과 연합해 있는 것을 기쁘게 여긴다.

이제 독자가 멕시코의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 곳의 형제 자매를 모두 알게 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이야기할 수 있는 흥미 있는 경험담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이르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그들 역시 여호와를 자기 하느님이자 아버지로 바라보는, 신속히 확장하는 가족의 일부가 되는 것이 우리의 진지한 소망이다. 그리고 우리가 최근의 확장에도 감명을 받았다면, 아마겟돈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무덤 속에 있는 수많은 멕시코 사람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기 시작하셔서 그들에게 여호와와 그분의 의로운 길에 대해 배울 기회를 주실 때, 우리는 무슨 말을 하게 될 것인가? 그러므로 이 보고에는 결코 멕시코의 모든 소식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감격적인 사건들 일부가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축복으로 할 이야기가 훨씬 더 많게 될 것이다.

[242면 도표]

해 전도인 최고 평균 전도인 성서 연구 수

1931 82

1941 859

1951 10,335 8,366 5,409

1961 25,171 22,235 18,198

1971 54,384 51,256 50,270

1981 101,171 98,610 100,636

1991 335,965 319,634 472,389

1994 404,593 388,623 535,912

[168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멕시코

몬테레이

과달라하라

멕시코 시

베라크루스

[170면 삽화]

아스텍 종교의 어떤 부면은 가톨릭 신앙으로 흡수되었다

[175면 삽화]

멕시코 시의 성경 연구생 집단, 1920년경

[177면 삽화]

멕시코에서 협회가 등록되었음을 알리는 「회보」의 내용. 전도인 신분증과 함께

[178면 삽화]

호세 말도나도, 멕시코의 초기 파이오니아들 중 한 사람

[184면 삽화]

마누엘 아마야 그리고 그가 파이오니아를 하면서 사용하던 교통 수단

[188면 삽화]

페드로 데 안다는 전국을 다니며 전파하였다

[191면 삽화]

협회 서적을 읽은 후에, 마리오 마르는 증인을 만나보기도 전에 전파 임명을 받아들였다

[192면 삽화]

멕시코 시의 증인(테스티고스) 대회, 1934년

[198면 삽화]

베라크루스 주의 초기 파이오니아들과 그들의 교통 수단

[200면 삽화]

프레드 앤더슨과 블랜치 앤더슨은 길르앗 졸업생들로서 생애의 아주 많은 부분을 멕시코에서 봉사하는 데 바쳤다

[202면 삽화]

셜리 헨드릭슨(왼쪽)과 로자 메이 드라이어—50년 넘은 봉사 짝

[207면 삽화]

다른 길르앗 졸업생들도 멕시코 밭에서 봉사해 왔다: (1) 엘리자베스 트레이시, (2) 진 프렌드, (3) 에스더 로페스, (4) 루벤 아기레, (5) 러셀 코넬리어스, (6) 에스더 바태니언 (로사노), (7) 밀드레드 심프킨스, (8) 맥신 밀러 (가르시아)

[209면 삽화]

지부 감독에 기여한 사람들

(1) 로돌포 로사노, (2) 헤오르헤 파파뎀, (3) 새뮤얼 프렌드, (4) 윌리엄 심프킨스, (5) 로버트 트레이시

[210면 삽화]

아둘포 살리나스와 레오노르 살리나스—아둘포가 지역 감독자로 임명받아 이 부부는 여러 해 동안 여행하였다

[223면 삽화]

멕시코에서 1985년 이래 사용해 온 지부 시설

[236, 237면 삽화]

현재 멕시코의 행복한 왕국 선포자들

[244, 245면 삽화]

(왼쪽) 1993년의 멕시코 벧엘 가족—아직도 증가 중! (아래) 멕시코에서 급속히 확장하고 있는 회중들의 필요를 돌보기 위하여 새로운 지부 시설이 건립 중이다

[252면 삽화]

현재의 멕시코 지부 위원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로버트 트레이시, 로베르토 가마, 카를로스 카사레스, 산토스 에스트라다, 후안 앙헬 에르난데스, 로돌포 로사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