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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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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세기에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은 키프로스에서 전파하였을 때,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바르-예수라는 거짓 예언자이자 주술사가 속주 총독을 충동하여 바울 일행의 봉사를 방해하려 든 것이다. 주술사의 술책을 간파한 바울은 직선적으로 그를 가리켜 ‘온갖 사기와 온갖 극악 무도한 것으로 가득 찬 사람, 마귀의 자식, 모든 의로운 것의 적, 여호와의 바른 길을 왜곡하는 자’라고 말하였다. (사도 13:6-12) 현대에도 키프로스의 일부 교직자들은 그와 비슷한 술책을 써서, 사람들로 하여금 지상의 모든 가족을 축복하려는 여호와의 웅대한 목적에 관해 배우지 못하게 하려고 애써 왔다.

그러나 이 곳 키프로스의 모든 사람들이 이 교직자들의 언행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키프로스인들은 후대를 잘하기로 유명하다. 방문객들은 으레 설탕에 절인 과일을 대접받는다. 그런가 하면, 더운 여름날에는 포도가 주렁주렁 열린 포도나무 그늘 아래 앉아 쉬면서 마시도록 시원한 레모네이드 한잔을 건네 받기도 한다.

이 곳의 기후는 온화한 편이다. 지중해 동부에 있는 키프로스는 시리아 해안에서 서쪽으로 100킬로미터 그리고 터키에서 남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이 섬은 그 자체가 참으로 아름답다. 해변의 백사장이 지중해의 따뜻한 바닷물 쪽으로 펼쳐져 있다. 이 섬의 남서부를 가로질러 뻗어 있는 트로도스 산맥은 한여름의 열기를 피하려는 사람들에게 소나무 향이 물씬 풍기는, 시원한 피서지를 제공해 준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여기저기 눈에 띄고, 올리브와 구주콩나무도 눈에 띈다. 아몬드나무의 꽃이 활짝 필 때면, 세상이 마치 흰 눈으로 뒤덮인 듯하다. 그리고 감귤나무 꽃이 필 때는, 진한 향기가 그윽하다. 시골에서는 목자가 양과 염소 떼를 풀밭으로 몰고 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많은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통용 기원이 시작되기 오래 전부터 이어져 왔다.

키프로스의 역사

이 섬은 길이가 206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여러 모로 성서 역사상 7대 강국 모두의 영향을 받았으며, 사실상 그 중 여섯 나라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았다. 여덟 번째 세계 강국인 국제 연합 역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공동체와 터키어를 사용하는 공동체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 그 존재가 피부로 느껴진다.

그리스도교가 키프로스에 소개된 것은 기원 1세기 초였다.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이 순교한 뒤에 밀려 온 박해의 물결이 가라앉자, 흩어진 제자들 중 일부가 키프로스로 가서 당시 이 섬에 살고 있던 많은 유대인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사도 11:19) 그 후 키프로스는 기원 47-48년경 바울의 첫 번째 선교 여행에 포함되었다. 바울의 일행 중에는 키프로스 태생으로 기원 33년에 성령이 부어지는 일이 있고 난 뒤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교제를 즐긴 사람이 있었다. 사도들은 그에게 바르나바(위로의 아들)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사도 4:34-37) 키프로스에서 봉사하는 동안, 바울과 바르나바는 동해안의 살라미스에서 처음으로 증거하였으며 후에는 섬을 가로질러 가며 증거하여 서쪽의 파포스에 이르렀다. 살라미스와 파포스의 폐허는 바울과 그의 일행이 이 곳에서 봉사의 직무를 수행할 당시 그 도시들이 누렸던 영화를 증언하고 있다.

로마의 속주 총독 세르기오 바울로가 주술사 바르-예수의 선동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곳이 바로 파포스였다. 속주 총독은, 성서가 말하듯이, “여호와의 가르침에 크게 놀”랐다.—사도 13:12.

약 이 년 후, 바르나바는 조카인 마가와 함께 키프로스로 돌아와 복음을 더 전파하였다.—사도 15:36-41.

‘성경 연구생은 대학교이다’

현대에도 광범위한 복음 전파가 키프로스에서 수행되어 왔다. 진실한 사람들은 인간의 전통과 대조되는 성서 자체의 가르침을 배우게 된 데 대해 감사를 나타내 왔다. 이러한 가르침이 키프로스에 전해졌음을 알리는 초기 기록이 「파수대」(영문) 1922년 10월 1일 호에 나온다. 그 호에 실린 한 편지에 의하면, 어느 아르메니아인 교직자가 영혼은 죽으며, 불멸이 아님을 설명하는 전도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읽은 내용에 대해 고마워하였다. 하지만 그는 키프로스에 있는 교회들의 영적 상태 때문에 심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 교회들에 관해 그는 이렇게 썼다. “이 곳에는 많은 ·⁠·⁠· 교회 건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생명은 없습니다. 이미 죽은 지 오래 되었지요. 교직자들은 일반 대중보다 훨씬 더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예레미야처럼 애곡하고 울부짖는 것밖에 없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서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터키인 그리고 유대인에게 진리의 젖을 먹이려고 노력할 따름입니다.” 키프로스 밖에 있던 다른 아르메니아인들 역시 성서 진리를 키프로스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1924년 9월에 사이러스 카랄람부스가 미국에서 고국인 키프로스로 돌아왔다. 성경 연구생인 그는 상당량의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 전도지를 포함하여 많은 전도지를 가지고 왔다. 그는 수도인 니코시아의 중앙 우체국에 가서 모든 도시와 마을의 촌장들과 교사들 앞으로 출판물을 한 부씩 보냈다. 당시 우편물은 나귀의 등에 실어, 일 주일에 한 번씩 마을에 배달되었다.

「만민의 설교단」이란 제목의 전도지 한 부가 키프로스 섬 남동부 감자 재배 지역의 크실로파구라는 마을에 사는 어느 학교 교사에게 전해졌다. 같은 마을에 사는 안토니스 스페치오티스라는 농부가 이 교사를 방문하였다. 공부를 좋아하는 안토니스는 읽을 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 전도지를 보고는 곧 그 내용에 몰두하였다. 그는 읽은 내용을 가지고 같은 마을 사람인 안드레아스 크리스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곧 그들은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출판물을 더 구해서 읽었다. 그들은 또한 자기들이 읽은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으며, 그들 중 일부는 그들과 함께 성서 연구에 참여하였다.

관심을 보인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 정교회의 신학자인 클레오파스가 있었다. 그는 여호와의 백성과 친분을 누리기는 하였지만, 결코 진리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가톨릭은 유치원이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국민 학교이지만, 성경 연구생은 대학교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성경 연구생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안토니스 스페치오티스와 안드레아스 크리스투는 비공식 증거를 하여 마을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이 소식을 들은 키프로스의 대주교는 두 형제의 영향에 맞서기 위해 신학자들을 파견하였다. 그 후 2년간 한 신학자와 스페치오티스 형제 사이에 수많은 토론이 벌어졌다. 이 일을 위해 강당을 빌리지 않고도, 그 마을 커피 숍으로 충분하였다. 그 곳이 사람들이 모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결국 두 형제 모두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였고, 결혼과 매장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하였다. 실제로, 안드레아스 크리스투의 자녀가 죽었을 때, 지방 사제는 안드레아스가 일요일 아침 교회 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면, 자녀를 마을 공동 묘지에 매장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아이는 결국 매장되었지만, 안드레아스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한편, 니코시아 지구의 한 마을 출신인 위생 검사관 트리폰 칼로기루가 진리를 배우고 있었다. 그는 업무 관계로 여러 마을을 방문하면서, 성서를 잘 사용하여 지옥불과 삼위일체의 가르침을 폭로하였다. 하지만 트리폰이 질병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가 종교를 바꿨기 때문에 하느님이 벌을 내리신 것이라며 조롱하였다. 욥의 친구들의 왜곡된 주장이 욥의 슬픔을 더한 것처럼, 이것은 트리폰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비교 욥 4:7, 8; 12:4) 하지만 트리폰은 1960년에 사망할 때까지 충실한 형제로 있었다.

좋은 소식을 널리 전파한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들

1934년에 그리스로부터 두 명의 파이오니아, 마세이아키스 형제와 트리안다필로풀로스 형제가 도착함으로써 키프로스의 전파 활동이 가속화되었다. 뉴욕 브루클린의 협회 본부는 그들이 사용하도록 그리스어와 터키어 그리고 그 밖의 언어로 된 서적 43상자를 보내왔다. 이 형제들은 열심이 있었으나 처음에는 많은 무관심과 싸워야 하였다. 교직자들에 의해 잘못 인도된 사람들은 형제들을 공산주의자 혹은 프로테스탄트교인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사람들을 개종시키려 한다는 경고를 받았다. 하지만 큰 도시에 사는 사람들, 특히 사업가들은 호기심을 갖고 이 “새 종교”가 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였다.

이 파이오니아 형제들은 브루클린으로부터 협회 잡지의 구독자 명단을 받았다. 구독자 중에는 클레오파스라는 신학자가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 협회 출판물을 입수하였으며, 형제들을 집으로 몇 번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마세이아키스 형제를 라르나카에 있는 사교 클럽인 헬레닉 클럽에 데리고 가서, 그 형제를 ‘성서를 해설하는 유익한 서적들을 출판하는 조직을 대표해 아테네에서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그 날 저녁 마세이아키스 형제는 제본 서적을 84부, 소책자를 120부 전하고, 「황금 시대」(The Golden Age) 예약을 10건 맡았다.

두 명의 파이오니아가 남동부 해안에 있는 라르나카에서 크실로파구까지 약 26킬로미터를 여행해서 안토니스 스페치오티스와 안드레아스 크리스투를 방문하였다. 이 두 형제는 최선을 다해 자기들이 배운 것을 전해 왔지만, 성서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참으로 행복하였다! 키프로스 최초의 여호와의 증인 회중이 이 형제들의 마을에 설립되었다.

그리고 나서 파이오니아들은 파마구스타로 갔다. 이 곳은 고대 살라미스의 폐허 부근에 위치한 오렌지 과수원과 풍차가 있는 곳이었다. 파이오니아들이 그 곳에서 전파하고 있는 동안 협회로부터 편지 한 통이 도착하였다. 전파 활동을 돕기 위해 그리스어를 하는 라가코스 부부가 이집트에서 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얼마나 반가운 소식이었겠는가! 이 부부가 도착한 후, 그들은 라가코스 형제와 자매는 도시들을 중점적으로 봉사하고, 다른 파이오니아 형제들은 시골 지역에서 증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오래지 않아 회중이 하나 더 형성되었다. 이번에는 니코시아에서였다. 도시의 오래 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역 안에는 터키계 키프로스 주민이 상당히 많이 살고 있었으며, 형제들은 어느 회교도 소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사용하였다.

차츰 더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었다. 일부 그리스계 키프로스 형제들이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들 중에는 작은 키에 반짝이는 푸른 눈을 가진 크리스토스 쿠르텔리데스 형제가 있었다. 그 형제는 용기와 충성의 참으로 뛰어난 모범을 세웠다! 17년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면서 그는 섬의 650개 마을을 거의 다 돌았다. 이것은 편안한 생활이 아니었다. 아무도 호의를 베풀지 않을 때는 흔히 노숙을 해야 하였다. 그의 죽음까지도 훌륭한 증거의 기회를 열었다. 그의 고향 마을 사제는 그를 마을 공동 묘지에 매장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 지역의 행정관에게 탄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의 시신을 장사 지내게 되었을 때, 150명이 참석하여 장례 연설을 들었다.

트리안다필로풀로스 형제가 그리스로 돌아가고 라가코스 부부가 시리아로 떠남에 따라 최초의 파이오니아 세대는 이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1938년에 이 곳에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파이오니아가 네 명, 회중 전도인이 일곱 명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는 40명이 참석하였다.

같은 해에 파나기오티스 가브리엘리데스는 이웃 가족과 함께 진리에 접하였다. 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 가족의 어머니와 세 딸은 파나기오티스와 함께 성서 연구와 봉사를 위한 작은 집단을 폴레미디야 마을에 형성하였다. 마을 사람들의 반응에 관해 파나기오티스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작은 집단이 함께 모일 때면, 으레 문과 창문을 “쾅” 닫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 남자는 어찌나 적대감이 심하였던지 자매들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들을 마구 때렸습니다. 나도 치료받으러 병원에 가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며칠 후에, 그 사람은 일을 마친 후 트럭 뒤에 타고 귀가하던 중 다리를 지날 때 강물에 빠져 숨졌습니다.’

전시 검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가 발행한 서적을 압류하기 위한 근거로 검열 규정이 발효되었다. 키프로스로 보낸 성서 연구용 잡지들이 형제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 대신 수도에 있는 중앙 우체국에 그 잡지들이 쌓이게 되었다.

증인들은 출판물도 없는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였는가? 형제들은 협회의 이전 출판물에서 발췌한 내용을 종이에 인쇄하여 야외 봉사에서 배포하였다. 때때로 「파수대」 한 부가 입수되면 그들은 재빨리 번역하여 연구용으로 사용하였다. 이 기간에 대회도 열렸다. 그리고 전도인 수가 늘어남에 따라 새로운 회중이 형성되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기 몇 개월 전, 3000부의 잡지와 17상자의 서적 및 소책자가 압류 해제되었다. 물론 그에 앞서 우체국 직원들은 쌓여 가는 출판물을 지켜 보았으며, 일부 직원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 결과 그들에게 45부의 서적을 전할 수 있었다.

결혼할 있을 것인가?

여호와의 증인이 관련된 또 다른 상황이 관리들로 하여금 증인의 존재를 의식하게 만들었다. 1939년에 마세이아키스 형제는 결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키프로스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에게는 결혼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유가 무엇인가? 당국이 여호와의 증인을 종교 단체로 인정하지 않아서 민법상의 결혼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시이기 때문에 브루클린 본부 형제들에게 연락하여 조언을 구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마침내 런던 지부 사무실에서, 키프로스의 여호와의 증인은 영국의 만국 성경 연구회와 관련이 있음을 증명하는 증명서를 발행하였다. 이 증명서를 근거로 키프로스에 있는 영국 당국이 마세이아키스 형제의 민법상의 결혼에 동의하였다.

여러 해 동안 이 충실한 부부는 후대를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들의 가정은 형제들에게 항상 개방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들로 기억되고 있다.

길르앗 졸업생들의 도착

키프로스에 도착한 최초의 길르앗 졸업생은 미국에 거주하던 그리스인인 안토니오스 카란디노스였다. 그는 1947년에 왔는데, 당시 이 곳에는 왕국 전도인이 단지 33명뿐이었다. 그는 선원 생활을 한 적이 있었고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진리의 확고한 옹호자였는데, 이것은 키프로스에서 봉사하는 동안 그가 직면한 거친 반대에 대처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형제들이 가두 증거에서 잡지를 제공하기 시작하면서, 반대가 특히 거세졌다. 파마구스타에서, 교회의 하수인으로 일하던 한 남자가 계속 그들을 괴롭혔다. 그는 증인을 대적하도록 사람들을 선동하곤 하였다. 그 결과 어느 날 카란디노스 형제가 폭도들에게 포위되는 일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교통이 막혔다. 카란디노스 형제와 말썽을 일으킨 선동자들이 법정에 소환되었으며, 양측 모두에게 벌금이 부과되었다. 이 밖에 다른 사건들이 뒤따라 일어났다. 때때로 형제들은 폭도들로부터 전도인을 구해 내기 위해 경찰을 불러야만 하였다.

1948년에 그리스를 떠나야 했던 두 선교인이 키프로스에 추가로 도착한 날은 형제들에게 행복한 날이었다. 그 해 5월에는 또한 길르앗 제8기 졸업생인 돈 렌델이 도착하였다. 그는 이집트를 떠나야 했었다. 그 해에 협회는 안소니 시데리스를 감독자로 하여, 키프로스에 지부 사무실을 개설하였다. 여러 해에 걸쳐 길르앗 졸업생들이 키프로스로 더 임명됨에 따라 선교인 집이 일부 주요 도시들에 생기게 되었다. 이 형제들은 회중을 신권적인 방법으로 조직하고 야외 봉사에서 전도인들을 훈련시키는 데 앞장서는 면에서 큰 일꾼들이었다.

그러나 선교인들이 도움을 베풀 수 있으려면, 우선 그리스어를 말할 줄 알아야 하였는데, 그로 인해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한 형제는 계시 12:7을 인용하면서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이라고 읽지 않고 ‘미가엘과 영국이 용과 싸웠다’라고 읽었다. 그리스어로 “천사들”과 “영국”은 발음이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집주인들은 자기 나라말로 말하려고 하는 외국인에게 주의를 기울여 잘 들어 주곤 하였다. 한번은 어느 새로운 형제가 침례를 받은 후, 한 선교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저를 방문하였을 때 제가 감명받은 것은 외국인이면서도 우리 말을 배우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제게 가지고 온 것에 관해 조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증인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다

1948년에 키프로스에는 여호와의 왕국 전도인이 평균 50명밖에 없었는데도, 정교회는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이단을 없애 버리려고’ 안달을 하였다. 그들은 어떤 계략을 썼는가? 우리를 비난하는 회칙(回敕)을 발행하여 많은 일간 신문에 실었고 섬 전체의 교회에서 낭독하였다. 아이들을 보내 집집에 한 부씩 돌렸으며 벽과 전신주에 붙였다. 우리에게 매국노, 적그리스도, 시온주의의 앞잡이라는 누명을 씌웠다.

여호와의 백성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이제 사람들은 증인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왜 교회가 우리를 그렇게 심하게 반대하는지 알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4개월간의 운동을 감행하여 그 기간에 7만 2000부의 소책자를 사람들의 손에 전해 주었다. 이 숫자는 지난해 전체에 걸쳐 배부한 출판물의 총수보다도 일곱 배나 많은 것이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직접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우리의 출판물을 호기심에서 읽어 본 사람이 많았다. 반면에, 구타당하고 돌에 맞은 형제들도 있었다. 리마솔에서 한 형제와 자매는 개종 권유와 말썽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법원에 소환되어 금고 1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대주교 관저에서의 토론

이 시기에, 돈 렌델은 니코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한 인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정교회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경험에 관해 렌델 형제는 후에 이렇게 말하였다. ‘흥미로운 대화를 나눈 후에, 나는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남겼으며, 재방문을 하였을 때 그는 더 알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잘 아는 그리스 정교회의 대주교와 내가 토론하는 것을 듣고 싶다며,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지부 감독자인 시데리스 형제가 대주교 관저에 동행하기로 동의하였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대주교가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대신 교회 재판소 소속의 신학자와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긴 토론 후에, 나는 그 신학자에게 성서와 교회의 전통이 상충될 경우 그리스 정교회는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질문하였습니다. 그는, 정교회는 교회의 전통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 그렇게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창조물 가운데 처음 나신 분”이라고 언급된 골로새 1장 15절을 인용하자, 그는 즉시 “그것은 아리우스의 이단이오!”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누가 성서의 진정한 옹호자인지 분명하였습니다.’

풍부한 무료 광고의 기회

계속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균 전도인 수는 1949년의 141명에서 1950년에는 204명으로 증가하였으며, 1950년의 기념식에는 241명이 참석하였다. 그 해에는 과거 사도 바울이 전파하였던 곳인 파포스에서 순회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극장 하나를 임대하였는데, 그 지방 주교와 그 도시의 다른 유지들은 극장주에게 압력을 넣어 우리와의 계약을 파기시키려고 애썼다. 지방 의회는 극장에 입장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제한하고, 건물 사용에 대해 터무니없는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순회 대회를 취소시키려고 하였다.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그 지역의 영국 행정관을 만나려고 시도하였으나 그것도 방해를 받았다. 그래서 영국인인 지부 감독자가 행정관의 사택을 개인적으로 방문하여, 여호와의 증인이 지방 관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우리는 행정관이 우리를 돕기 위해 한 일에 대해 깊이 감사하였다. 극장과 인접한 넓은 뜰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로써 극장 안에 앉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넓은 공간이 확보되었다.

파포스의 주교는 격분하였다. 고대의 주술사 바르-예수가 로마의 속주 총독 세르기오 바울로로 하여금 바울의 전파를 외면하게 하려고 했던 것처럼, 이 주교도 이상할 정도로 잘 듣는 “교회의 마력”을 이용하였다. (비교 사도 13:6-12) 그는 전단을 배포하여 파포스 지구에 사는 두 명의 파이오니아 증인이 파문당하였음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곧바로 전단을 하나 더 만들어, 여호와의 증인을 “천년 왕국파로 알려진 이단”이라고 비난하였으며 그것은, 전단의 말을 빌리자면, “마지막 세기에 관한 불건전한 상상에서 나온 사탄의 발명품”이었다. 교회를 지지하여 전단을 배포하는 젊은이들이 가두에서 증거하는 전도인들 옆에 따라붙었다. 누구든지 증인이 하는 일에 관심을 보이기만 하면 이 젊은이들이 반대 전단을 내밀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신문이 여호와의 백성을 공격하는 데 가담하였다. 1950년에 파포스의 「뉴 폴리티컬 리뷰」지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여호와의 추종자는 우리 지역에서 이미 수백 명을 헤아린다. 그들은 내일이면 수천이 될 것이며, 우리 교회의 존재 자체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정교회 성의회와 주교들은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즉각 행동에 들어가 이 무시무시한 문제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 다른 신문인 「파포스」는 1950년 5월 4일자에 교회를 조롱하는 것임이 분명한 이러한 글을 실었다. “일부 마을을 휩쓸고 있는 가난과 참상, 수도원과 교회가 소유한 광대한 토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천년 왕국파의 믿음이 성장하기에 알맞은 환경이 조성되었다. 에피스코피라는 마을을 예로 들면, 그 곳 토지는 거의 전부가 교회 소유로 되어 있어서, 주민들은 땅을 세내거나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노예같이 일하고 있다. ·⁠·⁠· 그러므로 이 마을 주민의 절반이 여호와의 증인이 되더라도 놀랄 것이 하나도 없다. ·⁠·⁠·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키프로스의 교회는 종이를 가지고 하는 싸움으로는 승산이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천년 왕국파는 교직자들의 약점을 잡았다. ·⁠·⁠· 그들과 전단으로 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알려지면서, 여호와의 증인은 마을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이 고조되어, 많은 사람들이 공개 강연을 들으러 극장에 왔다. 최소한 500명이 참석하였다.

협회장의 첫 방문

키프로스 형제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 준 일은 1951년 12월에 있었던, 밀턴 헨첼이 수행한 노어 형제의 방문이었다. 왕립 극장이 사흘간 대회를 볼 장소였다. 그 극장은 현대식 건물로서, 노어 형제는 ‘뉴욕에도 순회 대회를 볼 이런 훌륭한 장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평하였다. 사흘간의 순회 대회를 계획하였으나, 왕립 극장이 구도시의 주택 지구에 있었기 때문에, 일요일 아침 노어 형제의 공개 강연을 위해서는 니코시아 중심부의 팔라스 극장을 예약하였다. 이 강연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마련을 하였다. 네 개의 대형 현수막을 그리스어와 영어로 준비하여 왕립 극장 측면에 설치하였다. 수도 전역에 200장의 포스터가 나붙었다. 큰 극장들의 화면에 광고를 내보냈다. 그리스어, 영어, 터키어 신문에 “종교가 세계 위기를 해결할 것인가?”라는 공개 강연의 광고를 실었다. 놀랄 일은 아니지만, 주요 공산주의 계열 신문사 직원은 ‘당의 노선에 어긋나기’ 때문에 강연 광고를 실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 주요 국가주의 계열 신문사 직원은 ‘먼저 대주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형제들은 이 모든 홍보에 대하여 종교적 반대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였는데, 곧 그 궁금증이 풀렸다. 어느 날 밤 왕립 극장에 달아 놓은 현수막들이 찢겨졌다. 형제들은 경찰에 신고하였다. 대주교는 “주의! 천년 왕국파를 멀리하라”고 촉구하는 전단을 인쇄하였다. 그 내용의 일부는 이러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을 지지하게 하려고 모르는 사람들도 초대한 사실을 아는가? ·⁠·⁠· 그들은 그리스도의 분별 있는 양들을 삼키려고 다가오는, 양의 가죽을 쓴 이리들이다. ·⁠·⁠· 그들에게 접근하지 말라. 그들에게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말라. 그들을 무시하면, 혹시 그들이 제 정신을 차려서 잘못을 바로잡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거룩한 대주교로부터.’

노어 형제가 팔라스 극장에서 방해받지 않고 공개 강연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광경을 목격한 증인의 설명을 들어보자. 돈 렌델은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오전 10시가 막 지났을 때 극장으로 갔습니다. 입구 밖에는 경찰이 있었고, 젊은이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서 극장 안으로 들어가 소동을 일으키려고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말썽꾼들을 많이 아는 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경찰을 도와 폭도들이 입구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저지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폭도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야 하였습니다. 10시 30분에 노어 형제는 420명이 참석한 가운데 강연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밖에 있던 종교인인 체하는 불량배들이 문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경찰이 즉시 저지시켰습니다. 하지만 이제 문제는, “프로가 끝난 후 우리가 어떻게 극장을 빠져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은 경찰의 도움을 받아 폭도들을 극장 정문에 계속 붙들어 놓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우리는 후문을 통해 건물을 빠져 나가라는 요청을 받았고, 슬며시 빠져 나가 충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 종이 또 다른 공격을 알리다

1952년 당시, 파마구스타는 오렌지와 레몬 과수원 그리고 백사장이 길게 뻗은 운치 있는 도시였다. 섬의 동해안에 있는 이 도시는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이 전파하였던 고대 도시 살라미스의 폐허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1974년에 터키의 침공이 있은 후, 오늘날의 파마구스타는 주민이 거의 없는 유령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1952년에 여호와의 증인은 이 도시의 한 극장에서 순회 대회를 계획하였다. 그리스 정교회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서 전면 전쟁을 선언하였음을 익히 알고 있었고 이전 대회들에서 발생하였던 사건들도 있고 해서 형제들은 경찰을 배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화창한 일요일 아침에, 형제들은 오전의 중반에 계획된 공개 강연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연 시작 10분 전에 350명이 이미 극장에 앉아 있었는데, 말썽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도시의 선교인인 안토니오스 카란디노스는 극장 정문에서 안내를 보고 있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렇게 묘사한다.

“공개 강연이 시작되기 10분 전에, 인근의 한 정교회에서 종이 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종소리는 사제들과 중고등 학생들의 무리가 극장을 향해 행진을 시작하는 신호였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광경이더군요! 사제들이 청소년 폭도들을 이끌고 극장 안으로 들어오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우리는 난동에 대비해 정신을 바짝 차렸습니다. 극장 문은 닫혀 있었지만 그들이 강제로 밀고 들어오려 하였을 때 한 사제가 나를 밀어젖혔으며 그 바람에 내 옷이 찢어졌습니다.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경찰에 증원을 요청하였고 그들이 곧 도착하였습니다. 집회를 방해하려던 시도가 좌절되자, 폭도들은 극장 밖에서 고함 치며 날뛰었습니다.”

자기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사제들은 폭도들을 이끌고 교회로 돌아갔다. 여호와께서 형제들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다.

법정으로 소환된 범법자들

예전에, 교회에서 주교들과 사제들과 신학자들이 섬 전체의 도시와 마을에 파견되어,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증인이 여러분의 마을이나 도시를 방문하면 쫓아내십시오!”라고 권유했었다. 모든 사람이 교직자의 권고를 따른 것은 아니었다. 형제들은 계속해서 양 같은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그런 선동에는 여파가 있게 마련이다. 갈라티아 마세이아키스 자매는 자신이 관련되었던 한 사건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어느 일요일 아침 일찍, 이십 명의 형제 자매들이 야외 봉사를 하려고 모였습니다. 세 마을을 선택하였습니다. 구역까지 가는 데 약 두 시간이 걸렸습니다. 형제 열 명은 가장 큰 마을에서 호별 방문을 하였고, 나머지 열 명은 둘로 나누어 다른 두 마을을 봉사하였습니다. 10시 30분경에 작은 마을들 중 한 마을에서 형제들이 쫓겨났습니다. 가장 큰 마을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며 거의 다 끝나갈 무렵, 폭도들의 맹렬한 폭력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두 형제가 마을 중심부를 봉사하다가 의자로 머리를 얻어맞았고, 마을을 떠날 때 사람들이 돌을 던졌습니다. 마을 사제는 우리를 잡으려고 폭도를 200명쯤 동원하였습니다. 이들은 묵직한 몽둥이를 들고 양철 깡통을 치면서 우리를 찾아나섰습니다. 먼저 한 형제와 자매가 발견되었습니다. 몽둥이로 형제의 등을 구타하였고, 자매에게는 돌을 던졌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비슷한 일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온 마을로 끌려 다녔습니다. 몇몇 형제들이 국립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갔을 때, 그 때 구타당해 생긴 상처들이 이 마을 사람들에게 불리한 증거로 작용하였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법원에 고소장을 제출하였다. 사흘간 증언을 청취한 후에 판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본인은 원고가 제시한 증거를 전적으로 믿게 되었으며, 피고가 모든 부면에서 유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 본인은 원고들이 그리스도를 사생아라고 가르쳤다는 등의 주장을 믿지 않습니다. ·⁠·⁠· 원고들은 자기들의 신조를 가르치기 위해 피고들의 마을로 갔습니다. 그들은 평화롭게 그 일을 하였으며, 피고들은 그들을 공격할 권리가 없습니다.”

1952년부터 1953년 사이에 두 명의 선교인, 안토니오스 카란디노스와 엠마누엘 파테라키스가 키프로스를 떠나야 하였다. 이 형제들은 키프로스에 있는 동안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웠으며, 형제들은 애정 어린 마음으로 그들을 기억한다.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의 상영

1955년에 형제들은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라는 협회가 제작한 영화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러 왔다. 형제들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까지도 여호와의 조직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경험이 많았는데, 그 중에 이러한 경험이 있었다. 인구 1500명의 크실로파구 마을에서 그 마을에 있는 극장의 소유주가 자기 극장을 무료로 사용하게 해주었다. 영화가 상영되던 날 저녁, 마을의 사제는 마을 사람 한 명을 보내 참석한 사람 모두의 이름을 적어 오도록 하였다. 어떤 결과가 있었는가? 사제가 명단을 요구하자, 그 마을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마을 사람이 거의 다 모였는데, 어떻게 그 이름을 다 적습니까?”

변화의 시대

1878년 이래로 키프로스는 영국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은 언어 및 종교와 같은 상호 연관성을 근거로 하여, 마카리오스 대주교의 지도 아래 에노시스(ENOSIS) 즉 그리스 복귀 운동을 전개하였다. 터키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은 이에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55년부터 1960년까지 EOKA라는 한 조직은 영국에 대하여 게릴라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독립을 추진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은 그러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 엄정 중립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전투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분쟁 중 하나가 협회 지부 사무실에서 아주 가까운 파마구스타에서 있었다. 인근의 영국군 막사가 공격을 받았다. 지부에 살던 다섯 명의 선교인은 모두 영국 국민이었으므로, 이해할 만하게도 그들은 상당한 압력을 느꼈다.

또 다른 경우에, 두 명의 선교인 데니스 매튜스와 그의 아내 마비스가 숙소에 막 도착하여 뒷문을 여는 순간, 영국 군인이 사는 이웃집에서 폭탄이 폭발하였다. 선교인 숙소 맞은편에 있는 오렌지 과수원 속으로 도망하는 폭탄 설치범을 추적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곧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선교인들은 문을 열어 주기가 겁이 나서, 밖에 있는 사람에게 누구냐고 소리 쳤다. 주민들이 무사한지 확인하려고 찾아온 영국 군인들이었다.

한번은 렌델 형제와 가브리엘리데스 형제가 순회 대회 준비를 돕기 위해 크실로파구에 있었을 때, 회중이 주간 「파수대」 연구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영국 군인들이 입구에 나타나더니, 마을 외곽에서 영국군 병사 한 명이 피살되었으며 다른 한 명은 중상을 입었다고 알려 주었다. 그 결과, 당시 마을 전체에는 통행 금지령이 내려졌으며, 그들은 렌델 형제에게 회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즉시 집으로 돌아가도록 말할 것을 요구하였다. 다음날 그 지역의 남자들은, 영국인인 렌델 형제까지 모두 집합하여, 철조망 울타리 안에서 심문을 받았다. 물론 여호와의 증인은 살인에 연루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풀려나 다가오는 순회 대회 준비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EOKA와 영국군 사이의 대치 상황으로 말미암아 통행 금지령이 내려지고 다른 제한들이 가해지는 바람에, 갑작스레 신권적 활동을 축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였다. 해가 진 후에는 아무도 거리에 나갈 수 없었으므로, 집회를 낮에 봐야 하였다. 나흘 동안이나 집안에서 꼼짝하지 못한 때도 있었다. 모두가 이웃을 의심하였으며, 의사 표현하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이 가해졌음에도 여호와의 증인은 계속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식민 통치의 종식

영국 통치에 대항하는 키프로스의 투쟁은 1960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8월 16일 자정을 기해 키프로스는 공화국이 되었으며, 마침내 국제 연합의 회원국이 되었다. 축제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은 마침내 외세의 통치로부터 자유를 만끽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자유였는가? 새 공화국 아래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떻게 지냈는가? 실제 발생한 사건들을 통해서 그 점을 알아보자.

그 해가 지나가기 전에 증인에 대한 폭탄 공격이 두 번 있었다. 누구의 소행인가? 첫 번째 공격은 크실로파구에서 일어났다. 왕국회관의 베란다에 폭탄 두 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종교 집단으로서의 여호와의 증인을 겨냥한 공격임이 분명하였다. 자정이 지나서 폭탄이 터졌기 때문에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왕국회관이 파손되었다.

두 번째 사건으로, 네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살던 펜타야에 있는 숙소에 폭탄이 던져졌다. 다행히 그 때 그들은 야외 봉사에 나가고 없었다. 누구의 소행인지를 아는 집주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교를 만나서 피해를 변상하라고 요구하겠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추종자를 얻고 싶으면, 폭력을 써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처럼 전파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교에게 말할 겁니다.’

리오페트리 마을로 이사하여 그 곳에 있는 작은 회중을 돕던 한 형제와 그의 가족 역시 배타심의 표적이 되었다. ‘산 채로 불태워 버리겠다’라거나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협박을 심심치 않게 받았다. 자정이 지난 시간에 복면을 한 다수의 광신자들이 형제의 집을 포위하고는, 다음날까지 떠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고함치며, 총을 쏘아대기 시작하였다. 경찰이 형제와 그 가족을 보호해 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마을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리오페트리의 형제들을 위협하려는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마을에는 회중이 있으며 최근에 형제들은 훌륭한 새 왕국회관을 지을 수 있었다.

1962년 9월 11일 저녁에 야비한 사건이 일어났다. 안드레아스 프살티스와 그의 아내 니나가 유니스 맥레이와 함께 파마구스타의 선교인 숙소에 있는데, 복면을 한 남자들이 창문을 통해 침입하였다. 그들은 프살티스 형제를 구타하고는, 두 자매를 묶어 놓고 머리를 삭발하는 모욕을 주었다. (비교 고린도 첫째 11:6) 그들은 집을 약탈한 후에 떠났다.

마침내 1963년 12월에 이 섬의 두 주요 민족 집단간의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폭력 사태가 돌발한 것이다. 그리스계와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이 섞여 사는 니코시아 근교의 트라코나스라는 마을에서 특히 맹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트라코나스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며 그 곳에는 큰 왕국회관이 건축되어 있었다. 그 지역 바깥에 사는 형제들은 목숨을 걸고 분쟁 지역에 있는 동료 신자들에게 식량을 전해 주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안드로니코스 미카엘리디스라는 한 형제는 출근하다가 칼에 찔려 사망하였다.

충절의 시험

1964년에 특히 젊은 남자 증인들에게 충절의 시험이 닥쳤다. 그리스계와 터키계 키프로스인 공동체 간의 분쟁이 지속되자, 키프로스 정부가 징집법을 승인했던 것이다. 군 복무에 징집된 연령층의 증인들은 심각한 결정을 내려야 하였다. 그들은 압력하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고착할 것인가? 그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 진정한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킬 것인가? (마태 26:52; 요한 17:15, 16) 그들은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계속 신뢰할 것인가?—잠언 3:5, 「신세」 참조, 6; 이사야 2:2-4.

많은 사람들은 그런 믿음을 나타냈다. 하지만 일부는 타협하였고 중립을 유지하는 그리스도인 회중의 일부가 되기를 그만두었다. 이 섬을 떠나기로 결정한 젊은 증인들도 있었으며, 그 결과 평균 전도인 수가 1963년의 516명에서 1966년에는 394명으로 떨어졌다. 회중은 다소 침체되었다.

형제들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한 조처가 취해졌다. 이를 위해 1일 대회가 마련되어 시기 적절한 성경적 교훈이 베풀어졌다. 결과는 격려적이었다. 그러나 시험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법을 이용해서 흉계를 꾸밈

1966년 6월에, 여호와의 조직에 일격을 가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국무 회의는 여호와의 증인의 전파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였다. 그것은 개종 권유를 금지하는 법안으로서, 개종을 목적으로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거나 종교 서적을 배포하는 사람에게는 2년 이하의 징역 및 벌금을 부과한다고 규정하였다.

키프로스 하원에 항의가 빗발쳤으며, 많은 사람이 영국 정부와 미국 정부 주재 대표부를 방문하였다. 협회에서는 국제 연합 사무총장에게 서신을 보냈다. 도처에서 호소한 결과, 그 법안은 현재까지도 의결을 위해 제출되지 않았다.

건축 계획의 착수

왕국 선포 사업이 확장함에 따라, 적절한 집회 장소를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점점 커졌다. 이 곳의 전도인 수가 431명에 불과할 때인 1967년에, 키프로스의 협회 지부는 건축 기금을 모으기 시작하였으며, 형제들은 그 전망에 대해 열의에 차 있었다.

우리는 1968년 4월에 있었던, 헨첼 형제의 지구 감독자 방문을 통해 대단히 큰 격려를 받았다. 그 때 새로운 선교인 부부, 루이스 콥시스와 그의 아내 스텔라가 이 섬에 도착하였다. 콥시스 형제는 작업을 조직하는 일을 돕고 몸소 모범을 보임으로써 건축 계획에 귀중한 보탬이 되었다.

1960년 3월에 (키프로스)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이라는 지방 법인이 설립됨으로써 건축 계획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를 밟게 되었다. 정관에는 무엇보다도 자산 등록 명의에 관한 조항이 들어 있었다.

첫 번째 사업은 파마구스타에 23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널찍한 왕국회관을 짓는 일이었다. 이 시설은 지방 회중이 사용할 뿐 아니라, 큼직한 포도 덩굴로 덮여 있는 인접한 뜰을 이용하면 순회 대회를 열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다음 대상은 협회의 지부 사무실이었다. 약 20년간 우리는 임대 건물을 사용해 왔었다. 이제 협회는 수도 근교의 아요스 도미티오스에 대지를 매입하였다. 형제들은 이 곳에 새로운 4층 건물을 건축하였으며, 1층은 왕국회관이었다. 이 건물은 1969년에 당시 워치 타워 협회의 부협회장인 F. W. 프랜즈에 의해 봉헌되었다.

한편 크실로파구에도 아름다운 왕국회관이 건축되었다. 그 곳은 1930년대 초에 키프로스 최초의 여호와의 증인 회중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이 마을에서는 최초로 진리에 관심을 나타냈던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했을 때 많은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형제 자매들이 3주일 동안 하루에 15시간 이상씩 일해 가며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것을 지켜 보면서, 일부 마을 사람들은 좋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450석의 왕국회관이 이 마을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왕국회관의 내부와 주변 공간을 합하면, 순회 대회와 지역 대회를 열 만큼 충분한 공간이 있게 되었다.

자체 회관을 건립할 다음 도시는, 키프로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남해안의 해변 휴양지인 리마솔이었다. 왕국회관에 더해서, 이층에 선교인 숙소를 마련하였다. 1974년에 니코시아에 있던 협회 임대 건물을 비워야 하였을 때, 이층의 일부 공간을 개조해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성서에 나오는 도시인 파포스에도 관심이 기울여졌다. 이 곳은 처음에는 증가가 매우 더디었지만, 좀더 최근에는 파포스 지역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이 있었다. 처음에 건축하였던 왕국회관은 확장을 해야 하였고, 지금은 두 회중이 사용하고 있다.

훌륭한 왕국회관이 라르나카라는 도시에 건축되었다. 이전에는 리오페트리 마을에 있던 조립식 회관에서 집회를 보았는데, 이제는 붉은 흙 색깔 때문에 코키나 코랴 즉 적토(赤土) 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의 사람들에게 더 적합한 새로운 왕국회관으로 집회 장소가 옮겨졌다.

또한 열성적인 전도인들과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아름답지만 험한 이 섬의 북서부 오지에서 바쁘게 활동해 왔다. 이 곳은 관광객에게는 소위 아프로디테의 목욕탕으로 유명하다. 왕국 소식에 대한 반응 때문에 폴리스 크리소쿠스에 있는 대지를 구입하였다. 이제 70석을 갖춘 왕국회관이 건축되어 그 지역에서 하느님의 교육을 위한 중심지로 사용되고 있다.

결혼과 장례

오랫동안 이 곳 당국은 우리를 하나의 종교로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키프로스의 여호와의 증인에게 있어서 결혼하고 장례를 치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그리스계 키프로스인에게 있어서, 결혼식이나 장례식은 오직 키프로스 교회에 의해서만 치러질 수 있었다. 그러나 1948년에 키프로스의 협회 변호사는, 정부의 승인을 받은 여호와의 증인의 봉사자가 결혼식을 주례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요청하는 신청서를 영국 식민지 당국에 제출하였다. 1949년 정부 관보에 증인 중 한 사람인 사바스 드루쇼티스가 결혼식을 주례할 수 있도록 승인되었음을 알리는 공고가 실렸을 때, 형제들이 얼마나 기뻐하였겠는가! 후에 다른 형제들도 주례할 수 있도록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장례를 치르는 데도 문제가 따랐다. 종종 정교회 사제들이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측이 “거룩한 땅”으로 여기는 곳에 여호와의 증인이나 그들의 자녀를 매장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각 종파가 자체 공동 묘지를 가지고 있는 도시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심각하였다. 마을들에서는 사정이 좀 달랐다. 주민이 내는 세금으로 마을 공동 묘지의 매장 비용을 충당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직자가 이 권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경우도 있었다. 우리 형제들이 가족 성원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면서 이런 문제들을 다루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문제가 해결될 필요가 있었다.

마침내 1950년에 당국이 여호와의 증인에게 자체 묘지 소유권을 부여하였다. 한 형제가 이 목적을 위해 수도 바깥에 대지를 기증하였다. 여러 해 후인 1989년에 제2의 묘지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우리는 현재 협회 지부 사무실이 위치해 있는 니수라는 마을의 대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았다. 이 마련은 여호와의 백성에게 큰 축복이 되어 왔으며, ‘여호와의 증인이 되면 개같이 묻힐 줄 알라’는 정교회 사제들의 주장을 일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에게 결혼식을 주례할 수 있는 법적 권리가 주어지기는 하였지만, 1971년에 이 권리를 침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우리는 니코시아 지구의 관리로부터 결혼식을 거행하기 전에 결혼 당사자들이 더 이상 그리스 정교회 신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증명서를 대주교에게서 발급받아야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예상했던 대로 대주교는 증명서를 발급해 주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실상 여호와의 증인은 결혼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러한 증명서를 요구하는 것이 사제들이 부추겨서 된 일임을 깨달은, 자유를 사랑하는 일부 관리들의 도움으로 이 요구 사항은 삭제되었다.

“하나님의 승리” 국제 대회

1972년 11월에 “하나님의 승리” 국제 대회 계획과 관련해서 노어 형제가 키프로스를 방문하였다. 대회와 함께 ‘성서의 땅 관광’이 마련되었는데, 기쁘게도 키프로스가 포함되었다. 국제 대회는 1973년 7월에 수도인 니코시아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우리는 즉시 스타디움이나 대회를 보기에 알맞은 다른 장소를 확보하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주로 관리들과 경영인들이 교회의 반응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트라코나스에 있는 큰 왕국회관 주위의 대지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협회는 이미 왕국회관 건너편에 대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접한 대지를 임대할 수 있었다. 대표자들이 태양의 열기를 피할 수 있도록 그 일대에 대나무 차양막을 설치하는 것도 꽤 힘든 일이었다. 우리 형제 자매들은 날마다 섭씨 40도가 넘는 열기 속에서 일을 끝마쳤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대회에서 필요한 물을 충분히 확보하는 일이었다. 대회가 열리기 전 겨울에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물을 일 주일에 사흘씩 배급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왕국회관 옆집에 사는 형제의 정원에 우물이 있었다. 그 형제는 기꺼이 우물을 사용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한동안 그 우물에서는 물을 길어 내지 않았었다. 물을 얼마나 길어 낼 수 있을 것인가? 형제들은 우물을 청소하고 펌프를 설치한 후, 숨을 죽이고 결과를 기다렸다. 충분한 양의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식수로 적합할 것인가? 수질 검사를 하였다.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100퍼센트 적합하였다! 마치 현대의 기적과도 같았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신 여호와께 우리가 얼마나 감사하였겠는가!

왕국회관 주변에서 활동이 분주해지자, 반대자들은 즉시 무엇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동이 트기 전에, 왕국회관에 인접한 집에 살던 형제는 침실을 환하게 비추는 불빛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 곳에서 대나무 무더기가 활활 타고 있었다. 방화였다! 적들이 다시 싸움을 걸어 온 것이다. 그 때 이후로 안전을 기하기 위해 더욱 철저한 예방 조처를 취하였다.

협회는 이 섬을 방문하게 될, 그리스어를 모르는 많은 방문객을 위해 지방 관습과 섬 주민들의 생활을 묘사하는 촌극을 준비할 것을 요청하였다. 매일 아침 8시부터 9시 30분까지, 대회의 정규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에, 이 교육적인 촌극을 공연하였는데, 모든 참석자들이 매우 즐거워하였다. 또한 성서 기록과 관련된 역사적인 장소들을 관광하는 마련이 있었다.

키프로스에서 국제 대회를 연 것은 지방 형제들에게 흥미롭고 세워 주는 경험이었다. 그들은 이 대회를 통해 여러 국적을 가진 증인들과 개인적으로 교제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 대회는 그들이 국제적 형제 관계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더욱이 이 대회와 관련된 정교회의 반대 때문에 대중의 이목을 끌게 되어,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더 많은 키프로스 사람들에게 자세히 알려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74년—변화의 해

키프로스는 관광 명소로서, 경제가 호황을 맞고 있었다. 많은 키프로스인들은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1974년 7월 15일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오랜 기간 키프로스인들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리스계 키프로스인 공동체에는 적대적인 두 파벌이 있었다. 한 편은 대통령인 마카리오스 대주교의 지지자들이고, 다른 한 편은 영국 식민 통치에 대항해 반란을 주도한 EOKA의 지도자로 잘 알려진 고(故) 게오르기오스 그리바스 장군의 지지자들이었다. 무장 쿠데타에 의해 마카리오스 대통령이 축출되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은 더 많은 비극적 사건의 전주곡에 불과하였다.

건강이 나빠 14년간 영국에 머무르던 돈 렌델이 1972년에 키프로스로 돌아와 순회 감독자로 섬기고 있었다. 당시 그는 터키의 남해안에서 불과 60킬로미터 떨어진 키프로스 북쪽 해안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짝인 폴 안드레이우와 함께 키레니아 마을에서 동쪽으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카라쿠미 마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7월 20일 새벽 5시경에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습니다. 부엌 창문을 통해 키레니아의 항구 지역에서 연기 기둥이 솟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섬의 터키어 라디오 방송국은 그리스계 키프로스인의 “쿠데타”로 말미암아 발생한 불안정한 상태 때문에, 터키 본토의 군대가 키프로스에 살고 있는 소수 터키계 키프로스인을 보호하기 위해 북부 해안에 도착하는 중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우리는 곧 우리가 전쟁터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머리 위로 날아가는 헬리콥터의 수를 세어 보니 75대였습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 바로 너머로 공수 부대원들이 낙하하고 있었습니다. 해상과 공중으로부터 폭격이 수일간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터키군이 마을로 진군해 오자 우리는 집을 떠나야만 하였습니다.

산 속에서 며칠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왔지만 곧 터키군에게 포위되었습니다. 우리는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키레니아의 작은 회중에 있는 우리 형제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였습니다. 마침내 키리아지스 형제의 가족—모두 일곱 명의 증인들—을 발견하였을 때, 서로 만나게 되어 대단히 기뻤습니다. 다음날 우리가 이 집 정원에 있는 나무 아래 앉아서 일용할 성구를 고려하고 있는데, 터키군이 왔습니다. 우리는 집 안으로 들어가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곧 우리는 UN군이 장악한 돔 호텔로 옮겨졌습니다. 폴과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키리아지스 형제와 그의 가족 그리고 다른 약 650명과 함께 키레니아에 있는 호텔에 억류되었습니다. 며칠 후 나는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니코시아로 호송되어 무인 지대를 통과한 후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그리스계 키프로스 형제들은 몇 개월간 호텔에 억류되고 나서야 풀려났습니다. 그 기간에 형제들은 정기적인 집회를 통해 성서를 연구함으로써 영적으로 강한 상태를 유지하였으며, 그 호텔에 갇혀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성서에 들어 있는 위로의 소식을 전해 주느라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러한 군사 행동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터키군이 키프로스의 약 삼분의 일을 점령하게 되었다. 20만 명 이상의 피난민이 생겼으며, 그 중에는 여호와의 백성도 있었다. 300명 이상의 형제들이 모든 물질적 소유물을 잃었다. 네 회중이 뿔뿔이 흩어졌다. 벧엘 숙소는 맹공격을 견디어 냈지만, 총탄 자국이 난 건물 셔터에서 전쟁의 상흔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는 건물보다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임대한 지부 건물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렇지만 전투가 잠잠해지자, 형제들은 협회 사무실에서 일부 서류들을 빼내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형제들은 군인들이 이미 지부 건물을 습격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정문은 강제로 열려 있었으며, 한 군인이 벽에 이런 글을 써 놓았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 곳에서 정말로 가치 있는 것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피난민이 된 우리 형제들의 필요를 돌보기 위해 위원회가 즉시 구성되었다. 분쟁의 직접적인 해를 입지 않은 형제들은 동료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자기들의 집을 개방하였다. 그리스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로부터는 구호품이, 영국 지부로부터는 구호 기금이 곧 도착하였다. 지방 형제들은 어려운 시기에 자기들을 돕기 위해 통치체가 보여 준 관심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였다. 여호와의 종 모두를 결속시켜 주는 이 얼마나 놀라운 연합의 띠인가!

대회 회관의 마련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이 섬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리마솔 시내에 있는 터키인이 운영하는 한 극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형제들은 터키인 주인이 떠나기 전에 그와 계약을 맺었다. 건물은 교전 중에 심하게 손상되었다. 하지만 형제들은 열심히 일해 지붕을 보수하고, 건물을 웬만큼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도시의 한 회중은 이 건물의 일부를 집회 장소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극장은 800석을 갖추고 있었으며 극장 주변에는 대회 부서들이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지역 대회를 보기에 알맞은 장소를 구하는 것이 항상 문제였기 때문에, 이 건물이야말로 우리가 필요로 하던 것이었다.

한편 이전 소유주가 사망한 지 얼마 후에, 우리에게서 극장을 회수하고 싶어하는 당국자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당국과 협상이 이루어져 우리는 극장과 주변 대지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해에 걸쳐 건물을 보수한 결과 마침내 우리 하느님, 여호와를 숭배하기에 적합한 수준에 달하게 되었다.

그 극장은 우리가 소유하게 되었을 당시에는, 키프로스에 있는 모든 증인들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94년에 우리는 참석하게 될 증인들과 관심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세 번의 지역 대회를 이 곳에 계획하였다.

그리스도인 양심 문제

1978년과 1979년에는 군 징집과 관련하여 여호와의 증인이 취해 온 중립 입장을 다루는 여러 신문 보도가 있었다.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아무런 법적 마련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명의 증인들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80년 이래 최소한 130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중립 입장 때문에 투옥되었으며, 두 번, 세 번, 네 번씩이나 재수감된 사람들도 있었다. 28세인 게오르기오스 아나스타시 페트루의 경우는 흥미롭다. 1993년 7월 1일에 그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서 네 번째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형기를 모두 합하면 2년 2개월에 이른다. 이 증인과 관련하여 1993년 9월 9일자 「주간 키프로스」(Cyprus Weekly)지는 국제 사면 위원회의 항의에 관해 이렇게 보도하였다. ‘불행하게도 당국이 그를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을 투옥시킨다 할지라도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 이제는 당국이 그를 그만 괴롭힐 때도 되지 않았는가?’

매주 여러 장로들이 중립 문제로 수감되어 있는 형제들을 방문해 「파수대」와 다른 세워 주는 성경 내용을 그들과 함께 토론한다. 우리는 이 마련을 가능하게 해준 교도소 당국의 협조에 감사한다. 중립 문제에 직면하는 형제들은 이것을 믿음의 시험이면서 동시에 교도소에 있는 동안 개인 성서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바칠 수 있는 기회로 간주한다. 그 중 일부 형제의 이러한 말은 그 점을 잘 나타낸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시는 한, 언제까지라도 감옥에 머무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전에는 연구를 이렇게 많이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정부 각료들은 키프로스 당국이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촉구하는 인권 단체들의 항의 편지를 많이 받고 있다. 그 결과 최근에 많은 신문 기사들은 당국에게 현재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것과 일치하게 법률을 개정하라고 촉구하였다. 예를 들면, 「알리샤」지는 1994년 1월 24일자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이 문제는 유럽 및 UN의 제의와 일치하게 가능한 한 조속히 해결되어야 한다.’

유럽 의회는 유럽 공동체 회원국들에게 양심적 병역 거부를 법적으로 인정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1993년에 「키프로스 법률 트리뷴」지는 심층 분석 기사를 통해 키프로스 당국에게 스웨덴이나 네덜란드 같은 나라가 이 같은 상황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심중히 고려할 것을 촉구하였다.

새로운 지부 건물

1981년에 협회 지부의 운영상에 변화가 있었다. 당시 그리스 벧엘에서 봉사하던 돈 렌델이, 지부의 필요를 돌보기 위해 키프로스로 돌아와, 지부 위원회의 조정 위원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다음 해에는 영국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던 그리스계 키프로스인 부부인 안드레아스 콘토요르기스와 그의 아내 마로가 키프로스 벧엘 가족에 합류하였다. 리마솔에 있는 임대 건물이 너무 비좁았기 때문에 1985년에 통치체가 새로운 지부 시설을 건축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을 때, 벧엘 가족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형제들은 새로운 시설 공사에 착수하고 싶었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었다. 새 건물을 어디에 지을 것인가? 리마솔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 키프로스 법인 소유의 대지를 이 목적을 위해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1987년에 건축 설계도를 시 당국에 제출하였으며 건축 허가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이 건축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마자 그리스 정교회 대표자들이 이웃 사람들을 방문하여 항의서에 서명하도록 부추겼다. 그 결과, 당국은 건축 허가 내주기를 거절하였다. 이유는 “허가를 내줄 경우 위태로워지게 될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보호하기 위해”, 또한 “건축 예정인 건물의 목적”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종교적 편견에 의한 결정임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형제들은 그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갔다. 법정에서 여호와의 증인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졌다. 판결문은, 시 당국에게는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이유로 건축 허가를 거절할 권리가 없다”고 언명하였다. 판결문은 이렇게 이어졌다. “하지만 제시된 다른 이유 즉 ‘건축 예정인 건물의 목적’ 때문이라는 것은 ·⁠·⁠· 신청자의 신청이 거절된 진짜 이유를 분명히 드러내 준다.” 이 문제를 사법적으로 해결한 것은 유익하였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런 판결을 내리기 전에도, 그토록 반대가 극심한 지역에 지부 사무실을 두는 것이 지혜롭지 못하다는 점이 점점 더 명백해졌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때 니코시아에서 몇 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니수 마을에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던 한 형제가 협회에 그것을 팔겠다고 제안하였다. 0.4헥타르의 땅 위에, 네 칸짜리 건물이 있었다. 건물 뒤쪽에는 감귤류를 재배하는 과수원이 있고, 앞쪽에는 꽃이 만발한 관목들과 야자나무들로 둘러싸인 안뜰이 있었다. 바로 옆집은 지방 왕국회관이었다. 그 건물은 지부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리마솔에서 사용할 수 있었을 공간보다 공간이 더 넓었고, 개조할 필요가 거의 없었으며,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고, 이웃 사람들은 우호적이었다. 통치체의 출판 위원회로부터 승인이 난 후, 1988년에 그 부동산을 구입해서 같은 해 6월에 벧엘 가족이 입주하였다.

법적 판결이 일을 지원하다

건축 예정인 지부 건물에 관한 소송 사건 말고도, 키프로스에서 ‘좋은 소식을 법적으로 확립하’기 위한 조처를 취해야 했던 경우가 더 있었다. 때로는 키프로스 대법원에까지 상소해야 했던 경우도 있었다.—빌립보 1:7.

규명할 필요가 있었던 근본적인 점 한 가지는, 여호와의 증인이 법률에 규정된 “알려진 종교”인가 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다른 기존의 종교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키프로스 헌법 제18조는 다음과 같이 언명한다.

“1. 모든 사람은 사상과 양심과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2. 교리나 의식이 은밀하지 않은 종교는 모두 자유다.

3. 모든 종교는 법 앞에 평등하다.”

사법 당국은 “알려진 종교”란 “누구나 ‘알’ 수 있는 종교, 교의와 원칙들이 은밀하지 않은 종교 그리고 숭배가 공개적으로 행해지는 종교”라고 정의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은 이 모든 기준에 부합한다.

그러나 교육 분야에 있어서, 여호와의 증인은 차별을 받고 있다. 학교들은 학적부에 학생의 종교를 기재하는 것이 통례인데도, “여호와의 증인”을 학생의 종교로 기록하기를 거절하였다. 이 문제가 교육 당국에 제출되었다. 교육부 장관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명칭을 가진 종교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을 하나의 운동 혹은 단체로 이해한다.’

법무부 장관은 교육부 장관에게 보낸 1991년 4월 16일자 회보에서, 그 문제를 키프로스 헌법 차원에서 고려하였다. 법무부 장관은 여호와의 증인이 “알려진 종교”이며 따라서 그 학생들의 종교가 학적부에 기록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법무부 장관의 이 같은 견해는 키프로스의 여호와의 종들과 관련된 다른 법적인 진전에 유리한 영향을 미쳤다. 법무부에서 발행한 9페이지로 된 한 회보는, 여호와의 증인의 봉사자들이 키프로스의 주요 종교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언명하였다. 한때 반대자들이 압력을 다시 가해 왔으나, 오히려 당국이 여호와의 증인에 관해 1990년 7월에 내린 결정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 결정에 근거하여 여호와의 증인 회중의 장로와 봉사의 종들은 군 복무를 면제받았다. 종교의 성직자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법무부 장관이 그러한 견해를 피력한 후에 있었던 또 다른 진전은 세금과 관련된 것이었다. 1992년 6월 17일에 상무부 장관은 여호와의 증인 조직이 토지세 부과 대상에서 면제되었으며, 1981년 이래 이미 납부한 세금은 환급할 것임을 알렸다.

말할 필요도 없이, 키프로스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편견을 버리고 모든 종교를 공정하게 대하는 당국자들에게 감사한다.

모아 들이는 일이 계속되다

현대에, 여호와의 왕국의 좋은 소식이 키프로스에 전파된 것은 약 70년 전의 일이다. 그 때 이후로 어떠한 성과가 있어 왔는가?

섬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도시와 마을과 시골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성서 소식을 들을 기회를 거듭 가졌다. 하늘 왕국의 성원이 될 전망을 가진 사람들의 일부가 이 곳에서 나왔다. 현재 더 많은 사람들이 지상 낙원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희망을 가진 여호와의 숭배자로서 모아지고 있다. 1985년 초에 키프로스는 여호와께 찬양의 노래를 공개적으로 부르는 사람의 수가 1000명선을 돌파하였다.

그러나 모아 들이는 일은 그 때 중단되지 않았다. 1994년 3월에 키프로스에는 1544명의 증인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기념식에는 3141명이 참석하였다. 따라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제자를 삼는 일에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배우려는 욕망을 나타내고 있다. 섬 전체에 16개의 회중이 있으며, 이 회중들은 여호와를 섬기려는 열정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 봉사 연도에는 파이오니아 영이 증가하고 있다는 훌륭한 증거가 있었는데, 특히 젊은 증인들 가운데서 그러하였다. 3월 중, 총전도인 수의 19퍼센트에 해당하는 총 295명의 증인이 어떤 형태로든 파이오니아 봉사에 참여하였다.

더 많은 책임을 맡도록 형제들을 훈련시키는 면에서도 진보가 있었다. 특히 회중의 장로 및 지역 대회와 순회 대회를 조직하는 일과 관련하여 그러하였다.

전도인들에게는 구역을 정기적으로 도는 면에서 인내가 요구되었다. 키프로스에서는 아직도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상당하다. 공공 사회 내에 친밀한 유대가 형성되어 있고, 농촌 지역은 특히 더 그러하기 때문이다.

성서 진리에 대한 사랑이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자리 잡힐 때, 다른 가족이 두려움의 장벽을 뛰어넘는 데 어린아이가 도움이 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어느 작은 마을에 사는 여섯 명(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네 명의 자녀)으로 이루어진 한 가족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한 파이오니아가 어머니와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세 번째 연구를 하고 나서 증인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가족이 반대하자 연구를 중단하였다. 그런데 아홉 살 난 딸이 그치지 않고 울어대는 바람에 마침내 어머니는 연구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얼마 안 있어 전 가족이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이 여자는 1994년에 침례를 받았다. 이 여자의 남편은 지금 연구를 하고 있으며 그 딸도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전도인들은 충실하게 봉사에 참여하면서 그러한 겸손한 사람들을 계속 찾고 있다. 그들은 또한 하느님의 영의 열매를 배양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여호와의 주권을 충성스럽게 옹호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마음이 정직한 키프로스인들을 위한 참다운 해방

키프로스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주민들이 외세의 지배를 받아 왔음을 알 수 있다. 많은 키프로스인들이 그들이 이해하기에 자유라는 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왔다. 그러나 결과가 항상 예상한 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 현 세대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잃었으며, 현재로서는 그 곳으로 돌아가리라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 그것은 일부 여호와의 증인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참 자유는 거주지나 재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참 자유는 진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은 결과로 오는 것이다. 성서에 들어 있는 그러한 지식은 미신과 부당한 두려움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 준다. 그것은 종교적 편협을 하느님과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대치하였다. 참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여호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인자한 구원의 마련에 믿음을 두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을 보여 준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바로 이러한 좋은 소식을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알린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그의 동료 바르나바가 키프로스에서 전파할 때와 마찬가지로, 종교 지도자들은 그러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반대한다. 키프로스의 현대 역사 전체에 걸쳐, 여호와의 종들은 주로 그리스 정교회의 반대를 받아 왔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레미야 1:19에 기록된 이러한 말씀에 유념해 왔다.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의 증인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계속 적들로부터 구출하시고 머지않아 큰 환난을 통과하게 하시어 신세계로 구출하실 것을 확신한다. 그 때에는, 미가 4:4의 이러한 기록이 영적인 의미에서만 아니라 문자적인 의미로도 참될 것이다.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지금도 키프로스에 자신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두려움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서가 언급하는 “사람이 거주하는 오게 될 땅”에서는 범죄나 전쟁 심지어 질병과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그러한 상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참다운 해방일 것이다! 그렇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신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그분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히브리 2:5-9; 계시 21:4, 5; 시 37:9-11.

[66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키프로스

파포스

니코시아

리마솔

라르나카

크실로파구

파마구스타

살라미스

[71면 삽화]

크실로파구 최초의 증인들인 안토니스 스페치오티스(오른쪽)와 안드레아스 크리스투

[72, 73면 삽화]

사도 바울은 주술사의 반대를 받으면서도 파포스에서 세르기오 바울로에게 전파하였다(왼쪽: 속주 총독궁의 폐허)

[76면 삽화]

파나기오티스 가브리엘리데스

[79면 삽화]

아낌없이 후대하기로 유명한 열심 있는 증인인 니코스 마세이아키스와 갈라티아 마세이아키스

[80면 삽화]

길르앗에서 훈련받은 초기 선교인들:

1. 돈 렌델

2. 안소니 시데리스

3. 엠마누엘 파테라키스

4. 안토니오스 카란디노스

[81면 삽화]

키프로스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한 몇몇 자매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 베이커, 이본 워모스(스페치오티스), 니나 콘스탄티(프살티스)

[86면 삽화]

키프로스인 형제들 및 선교인들과 함께한 N. H. 노어 (두 번째 줄 오른쪽)

[87면 삽화]

왕립 극장과 팔라스 극장에서 열린 흥미진진한 대회, 1951년

[91면 삽화]

구역으로 떠날 준비를 갖춘 증인들, 1955년

[100면 삽화]

니코시아의 대나무 차양막 아래서 열린 국제 대회, 1973년

[107면 삽화]

리마솔의 순회 대회 회관

[108, 109면 삽화]

키프로스에 있는 현재의 지부 사무실과 벧엘 가족

[115면 삽화]

현재 키프로스에서 섬기고 있는 지부 위원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안드레아스 코스타 에프시미우, 안드레아스 콘토요르기스, 제임스 페트리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