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를 구경하다 보면, 세계 일주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 것입니다. 무엇을 보게 됩니까? 아마, 밀림에서 창을 가지고 사냥하고 있는 인디언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잘 차려 입은 부인이 고급 여성복 전문점에서 쇼핑을 하는 모습도 눈에 띌 것입니다. 야간 축제에서 아프리카풍의 북소리에 맞춰 춤추고 있는 방문객들도 보일 것입니다. 어린 목동이 몸에 두른 판초를 차가운 산바람에 휘날리면서, 양들을 몰며 달리는 모습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7만 1000명이 넘는, 나이와 배경이 다양한 여호와의 증인이 참 하느님과 그분의 왕국에 관해 다른 사람들에게 분주하게 이야기하는 광경을 보게 될 것입니다.
베네수엘라인의 대부분은 인디언계와 스페인계, 아프리카계의 혼혈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래로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에서 이민 온 많은 유럽인들이 국민의 상당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의 방문객에게는, 어디를 가나 청소년층이 많다는 사실이 인상적입니다.
남아메리카의 북쪽 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베네수엘라는 그야말로 현격한 대조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2800킬로미터에 달하는 카리브 해안은 열대성 바람이 불어, 눈 덮인 산들이나 울창한 밀림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야노스라고 하는
광활한 평원들이 있는가 하면, 기막히게 아름다운 폭포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폭포의 물줄기 하나가 600미터나 되는 쿠케난 폭포와, 높은 바위 절벽인 메사에서 발원하여 땅속으로 흐르는 강에서 979미터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폭포인 상토 앙헬 즉 천사 폭포가 있습니다. 수도 카라카스는 주민이 약 400만 명으로, 고급 쇼핑 센터를 갖춘 현대적인 대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편리한 도로망으로 내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카라카스의 이 번영을, 산비탈에서는 무허가촌에 사는 수십만 명이 내려다보고 있습니다.베네수엘라의 종교적인 풍토
베네수엘라 국민의 대다수는 로마 가톨릭교인입니다. 하지만 그 교회는 더는 국민에 대해 이전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원주민 인디언들은 흔히 명목상 가톨릭교인이면서도 그들 고유의 의식과 미신을 지키고 있으며, 아프리카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곳에서는 마술과 영매술이 성행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악마의 눈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부적을 지니고 다닙니다. 부두교와 비슷한 마리아 리온사 교단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또한 프로테스탄트 종교 단체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성인”과 “성처녀”는 베네수엘라의 가톨릭교인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전국 각지에는 그 고장 고유의 “성인”이나 “성처녀”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집에는 종교적인 그림이 있습니다. 어떤 집에서는 악령들을 막기 위해 현관 문 위에 나뭇가지를 달아 놓거나, 집주인에게 확실한 보호가 된다는 신앙에서 탁자 위에 성서 시편 91편을 펴 놓습니다.
흔히, 자기들이 좋아하는 “성인”의 그림 옆에 시몬 볼리바르의 그림을 놓아 둡니다. 시몬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와 남아메리카의 다른 네 나라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킨 사람입니다. 그가 받고 있는 경의를 입증하는 예로서, 이 곳 베네수엘라에는 시몬 볼리바르 국제 공항, 시몬 볼리바르 대학교, 시몬볼리바르 가, 볼리바르
시, 볼리바르 주가 있습니다. 또 화폐 단위도 볼리바르입니다. 베네수엘라의 모든 마을에는 중앙 광장이 있는데, 거의 언제나 볼리바르 광장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말했다는 격언이 공공 건물의 벽에 정성껏 쓰여 있는 것이 자주 눈에 띕니다.하지만 이러한 것과 더불어, 베네수엘라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깊은 존경심과 성서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누구든 영적인 문제에 관해 말하고 싶어한다고 조롱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수용하는 태도 덕분에, 여호와 하느님과 그분의 목적에 관한 진리의 씨를 뿌릴 비옥한 토양이 형성되었습니다.
진정한 선교인 영을 가진 여자들
세계의 대부분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에서 벗어나려고 아직 허우적거리고 있고 유럽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을 때, 미국 텍사스에 살고 있던 두 명의 여호와의 증인, 즉 케이트 고아스라는 여자와 그의 딸 매리언은 성서에 담겨 있는 평화의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들은 뉴욕 브루클린의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본부로 편지하여, 자기들이 어디에서 가장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지 문의하면서,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들의 임명지는 어디였습니까? 베네수엘라였습니다.
그들은 1936년에 배 편으로 도착하였고, 당시 인구가 20만 명이던 수도 카라카스에 셋방을 얻었습니다. 이미 10여 년 전에 몇몇 성경 연구생이—여호와의 증인이 당시에는 성경 연구생으로 알려져 있었음—베네수엘라를 방문하여 주요 도시들에서 성서 전도지를 많이 배부했지만, 그 나라에 계속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케이트 고아스와 그의 딸은 베네수엘라를 잠시 방문하러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케이트는 우아하고 연약해 보였지만, 서적이 든 커다란 가방과 축음기를 들고 다니며 호별 방문을 하였습니다. 그 모녀는 조직적으로 카라카스 전체를 돌았습니다. 일단 이 일이
끝나자, 그들은 이 나라의 내륙으로 이동하여, 먼지 나는 비포장 도로로 버스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키리키레, 엘티그레, 동쪽의 시우다드볼리바르, 서쪽의 마라카이보와 같은 곳에서 전파하였습니다.그러나 매리언이 말라리아에 걸리는 바람에 1944년 7월에 그들은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였습니다. 케이트 고아스는 협회에 보낸 1944년 8월 2일자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서적을 많이 전했습니다. ··· 이 공화국의 거의 모든 곳에서 증거를 한 뒤, 우리는 우리 서적을 좋아해서 다시 찾아갈 때마다 서적을 받아 보는 사람들을 계속 찾아내고 있습니다. ··· 카라카스에서 2년 동안 줄곧 증거하고 난 지금, 일곱 명 즉 자매 여섯 명과 형제 한 명이 의의 편에 서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 이 형제 자매들은 여호와와 그분의 왕국에 관한 그리스도교 지식을 갖게 되어 대단히 행복해합니다. ··· 참으로 카라카스 전역에 훌륭한 증거가 반복적으로 행해졌으며, 서적의 내용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 신권 통치에 순응하는, 케이트 고아스.” 여기 언급된 ‘한 형제’는 루벤 아라우호라는 젊은이였는데 그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고아스 자매에게 침례받은 일곱 사람은 1946년에 한 형제에게 재침례를 받았으며, 이것은 여호와와 승인받은 관계를 맺고 있는 남자들에 의해서만 침례가 베풀어졌음을 알려 주는 성서의 본과 일치한 마련이었습니다.)
증거의 확장을 위한 기초를 놓음
케이트 고아스가 협회에 편지를 보냈을 때, 브루클린에서는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서 훈련받은 선교인들을 베네수엘라에 파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당시 워치 타워 협회장과 부협회장인 네이선 노어와 프레더릭 프랜즈는, 라틴 아메리카에 선교 활동의 확장을 위한 토대를 놓기 위해 그 곳으로 여러 차례 여행하였습니다. 그들은 1946년에 베네수엘라를 방문할 예정이었습니다.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선교인 세 명이 이미 베네수엘라로 임명되었으나, 그때까지 비자를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1946년 4월
9-12일에 있을 협회장의 방문을 위해 누가 일을 조직할 것이었습니까?세 선교인 중 한 사람이 관광 비자로 먼저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항공편으로 도착하여, 자네트 아트킨스의 집에서 유숙하였습니다. 케이트 고아스에게서 진리를 배운 자네트는 후대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인은 도착한 지 삼 주 만에 참 이상하게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집주인과 친구들이 경찰과 항공사를 통해 조사해 본 끝에, 그가 향수에 시달리다 못해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노어 형제와 프랜즈 형제는 베네수엘라의 이 집단을 방문하여 대단히 큰 유익을 주었습니다. 루벤 아라우호는, 그들이 도착한 바로 그 날에 자네트 아트킨스의 집 뜰에서 모임이 있었고 방문한 그 형제들의 연설을 22명이 들었다고 회상합니다.
그 때 참석자들 가운데 페드로 모랄레스가 있었는데, 그는 좋은 소식에 대해 불타는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1930년대 말엽에 케이트 고아스 모녀가 마라카이보 장터에서 「부」(Riches) 책을 전해 주었습니다. 몇 년 뒤에 그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성서에 눈을 뜨게 되더군요. 합당한 자들의 이마에 표하는 대목을 읽을 때는 마치 속에서 불이 확 붙는 것 같았습니다! (에스겔 9:4) 그래서 이 서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아 나섰지요. 어떤 트리니다드 사람으로부터 책들을 받아보고 있던 네 사람을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각 집을 번갈아 모임 장소로 사용하면서, 매일 밤 함께 모여 「부」 책을 연구하였습니다.”
페드로가 노어 형제의 방문 기간에 열릴 모임에 참석하러 카라카스(약 700킬로미터 거리)에 가자는 초대를 받았을 때, 페드로와 그의 친구는 그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페드로는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임신한 아내에게 진통이 시작되었고, 사업에도 신경을 써야 했지요.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아내와 함께 있어 줄 조산사를 구해 놓고,
사탕 제조업을 열네 살, 열두 살, 열 살 된 우리 세 아이에게 맡겼지요. 그리고 나서 우리는 버스를 타고 카라카스로 떠났는데, 비포장 도로로 이틀이나 걸리는 힘든 여행이었습니다.” 페드로는 카라카스에서 증인들을 만나게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 곳에 있는 동안, 마라카이보에서 이런 전보가 왔습니다. “아내 무사. 아기 양호. 사업은 내가 돌봄. 후스토 모랄레스.” 뜻밖에도 그의 친형이 콜롬비아에서 도착하여 모든 일을 보살펴 준 것입니다.카라카스에서 열린 그 특별 모임의 첫날에, 프랜즈 형제는 “시련 속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에 관해 연설하였습니다. 이어서 동일한 주제로 노어 형제가 연설하고 프레더릭 프랜즈가 통역하였습니다. 이 토의는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으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을 것으로 기대해야 하는지에 관해 성서가 말하는 점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여호와의 증인들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유럽에서 겪은 혹독한 박해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이튿날, 로스초로스에 있는 폭포 밑의 못에서 침례가 베풀어졌습니다. 그 날 열 사람이 침례를 받았는데, 그들 가운데는 윈스턴 블랙우드(키리키레에서 고아스 자매가 만난 사람)와 그의 아들 에두아르도, 오라시오 미에르 이 테란과 그의 남동생 에프라인, 페드로 모랄레스, 수리남에서 온 헤라르도 헤수룬, 이스라엘 프란시스, 호세 마테우스가 있습니다.
이 나라 서부에서 온 페드로 모랄레스와 다른 두 형제는, 협회가 정부의 허가가 나는 즉시 마라카이보에 선교인들을 파견할 것이라는 노어 형제의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뻤습니다. 페드로도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으며, 사망할 때까지 그 봉사를 계속하였습니다.
성서 진리에 대한 사랑이 그들을 활동적이 되게 하였다
선교인들이 도착하기 전, 브루클린의 협회 본부 사무실은 고아스 자매가 형성한 조그마한 집단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집단에는 전도인이 단지 몇 명뿐이었고, 서적도 거의 없어서 흔히
관심자들에게 책을 빌려 줘야 하였습니다. 1946년 3월에 받은 보고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에 좋은 소식의 선포자들이 아홉 명이 있었고, 호세피나 로페스가 그 집단을 돌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가장 활동적이었기 때문입니다.루벤 아라우호는 로페스 자매의 훌륭한 본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 나는 십대 소년이었습니다. ··· 호세피나 로페스는 아들 넷에 딸 둘을 둔 어머니였는데, 고아스 자매에게서 배우는 내용에 무척 열의가 있었지요. 나는 거의 매일 방과후면 그 집으로 가서, 그분이 진리에 관해 새로이 배우고 있는 점들을 함께 토의하곤 했습니다. 로페스 자매는 바쁜 가정 주부였는데도, 날마다 점심 시간이 지나 남편과 다 큰 아들들이 다시 오후 일을 하러 간 다음에는,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호별 방문 전파를 하고 성서 연구를 사회하러 나갔지요. 그 자매는 우리 모두에게 좋은 본이었고 정말 파이오니아 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도인으로서 매달 평균 60 내지 70시간을 봉사했거든요.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카라카스에는 그 자매의 살아 있는 추천서들이 있습니다.”
최초의 집단에 속해 있던 또 한 사람은 과부인 도미틸라 미에르 이 테란입니다. 도미틸라는 항상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성서를 즐겨 읽었으며, 아버지가 사망하자 성서를 찾으려고 아버지의 집을 뒤졌습니다. 그가 받고 싶은 유산은 아버지의 성서뿐이었습니다. 막상 찾고 보니, 마구 사용한 탓으로 많이 찢어지고 성서의 일부분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도 남은 부분이나마 소중히 여기며 사용하다가, 나중에 새 개인용 성경 전서를 살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화목」이라는 협회의 책을 받은 친구가 오더니, 도미틸라는 열렬한 성서 독자이니까 더 고맙게 읽어 보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그 책을 주고 갔습니다. 도미틸라는 그 책의 발행인을 찾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재림교 및 기타 프로테스탄트 단체들도 방문하였습니다. 마침내 기쁘게도, 케이트 고아스가 그의 집에 찾아왔으며 도미틸라는 즉시 그와 성서를 연구하기로 동의하였습니다. 도미틸라의 두 아들은 노어
형제와 프랜즈 형제의 첫 방문 기간에 침례를 받고 나중에 순회 감독자들로서 봉사하였고, 셋째 아들 곤살로는 회중 장로로 봉사하였습니다. 또 다른 아들인 기예르모는 케이트 고아스가 처음 그들의 집에 찾아왔을 때 그 자리에 있었지만, 1986년에 가서야 침례를 받았습니다.“그런데 두 분은 얼마나 오래 머무실 겁니까?”
1946년 6월 2일, 노어 형제의 방문 직후에, 베네수엘라로 임명되었던 그룹의 남은 두 선교인이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도널드 백스터와 월터 웬이었습니다. 청소년, 루벤 아라우호가 카라카스로 가서 그들을 만났습니다. 틀림없이 전에 왔던 선교인의 경험이 아직 머리에 생생했을 루벤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들을 보면서, 서투른 영어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은 얼마나 오래 머무실 겁니까?”
루벤은 「파수대」 연구를 준비해 놓았는데, 선교인들이 도착한 바로 그 날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프랜즈 형제가 전에 지시한 사항들을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그것은 혼자서 하는 연구였습니다. 루벤이 질문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루벤이 대답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루벤이 항을 낭독하였습니다. 그는 연구가 한 시간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시간이 되자 전체 내용 중에서 17항밖에 다루지 못했는데도, 이에 순종하여 연구를 중단하였습니다! 경험을 쌓는 데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였습니다.현재, 루벤 아라우호는 첫 선교인이 갑자기 떠났던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덧붙여 말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가 남기고 간 공백을 두 명의 새로운 길르앗 졸업생들이 채워 주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마케도니아와 같은 곳에 있는 우리를 돕도록 여호와의 조직이 보내 주신, 이 선교인으로 된 선물을 받고 우리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비교 사도 16:9, 10) 사전에, 노어 형제는 백스터 형제에게 이렇게 말해 두었습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임명지에 머무십시오!” 그런데 백스터 형제는 죽지 않았으며, 거의 50년이 지난 뒤에도 베네수엘라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함
카라카스의 첫 선교인 집은 엘세멘테리오 구(區) 부카레스 가(街) 32번지에 있었습니다. 또한 이 곳에 도널드 백스터를 지부의 종으로 하여 1946년 9월 1일에 지부 사무실이 개설되었습니다. 생활 환경은 이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도로는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았고, 수돗물도 없었습니다. 1949년에 지부와 선교인 집을 엘세멘테리오(공동 묘지)로부터 수도 시설이 있는 곳인 엘파라이소(낙원)로 옮겼을 때, 선교인들이 무척 안도감을 느낀 것도 이해할 만합니다.
백스터 형제는 선교인들이 언어 장벽과 좌절감의 “관문”을 통과하느라 겪은 어려움을 머리에 떠올립니다. 그들은 길르앗에서 받은 훈련을 사용하여 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막상 도착하고 보니 의사 소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시적인 어려움은 야외에서 얻은 호의적인 결과에 의해 상쇄되고도 남았습니다. 백스터 형제는 그들의 첫 가두 봉사를 이렇게 상기합니다. “우리는 엘실렌시오라고 알려진 시내 중심지에 가서 어떻게 되는지 보기로
했습니다. 내 짝인 월터 웬이 한쪽 모퉁이에 서 있고, 나는 다른 쪽 모퉁이에 서 있었지요. 사람들은 호기심이 대단했습니다. 도대체 이런 걸 본 적이 없었던 겁니다. 우리는 거의 한마디도 할 필요가 없었지요. 사람들이 잡지를 받으려고 실제로 줄을 섰고, 우리는 10분 내지 15분 만에 가지고 있던 잡지를 다 전했습니다. 미국에서 익숙해 있던 상황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월터 웬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남은 서적을 계산해 보니, 놀랍게도, 예수와 사도들처럼 거리와 장터에서 여호와를 찬양한 그 흥미로운 나흘 동안에 내가 전한 서적과 성서가 178부나 되더군요.”베네수엘라 지부가 뉴욕 브루클린의 본부 사무실에 보낸 첫 보고에는 총 전도인이 19명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며, 여기에는 선교인 두 명과 정규 파이오니아 네 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파이오니아들은 에두아르도 블랙우드, 루벤 아라우호, 에프라인 미에르 이 테란, 헤라르도 헤수룬이었습니다. 에두아르도 블랙우드는 노어 형제가 방문한 달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고, 다른 세 사람도 그 뒤로 곧 등록하였습니다. 아홉 사람이 이 나라 내륙 지방에서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엘티그레에 사는 윈스턴 블랙우드와 에두아르도 블랙우드는 남쪽으로는 시우다르볼리바르까지, 동쪽으로는 푼타데마타와 마두린 근처의 유전(油田) 마을들까지 다니며 증거하였습니다. 페드로 모랄레스와 몇몇 사람은 마라카이보에서 전파하였습니다. 마라카이보 호(湖)의 동쪽, 유전 마을인 카비마스와 라구니야스에서는 헤라르도 헤수룬, 너새니얼 월콧, 데이비드 스콧이 전파하였습니다. 나중에 휴고 테일러가 합세하였으며, 그는 1995년에도 여전히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협력하여 이 나라의 광대한 지역을 돌고 있었습니다. 백스터 형제와 웬 형제는 곧 실제 상황을 직접 보고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집단을 방문하기 시작함
1947년 10월과 11월에, 이 두 선교인은 작은 집단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이 나라 서쪽 끝으로 그리고 동부 지역으로
여행하였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이 집단들을 회중들로 조직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버스로 여행했는데, 정말 베네수엘라에서 한 잊지 못할 경험이었지요”라고 회상하면서, 백스터 형제는 그 잊지 못할 장거리 여행을 생각하며 미소 지었습니다. “베네수엘라인들은 체구가 작아서, 버스의 좌석들이 비좁고 바짝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두 북아메리카인들은 제대로 다리를 넣을 수가 없었지요. 버스 지붕에는 침대, 재봉틀, 탁자, 닭, 칠면조, 바나나 등이 승객들의 보따리와 함께 얹혀 있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짧은 거리를 가는 승객이라면, 닭이나 작은 짐을 굳이 버스 지붕에 얹을 것도 없이 버스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좌석들 사이의 통로에 쌓아 놓곤 했지요. 버스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다른 버스가 올 때까지 여러 시간 동안, 선인장과 염소밖에 살지 않는 황야에서 발이 묶여 있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버스의 연료가 떨어져 버리더군요.”방문한 네 곳에는, 개인 집 거실에서 모이고 있는 열 명가량으로 된 집단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선교인들은 집회를 사회하는 방법, 활동을 정기적으로 지부 사무실에 보고하는 방법, 전파 활동용 서적을 구하는 방법을 그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백스터 형제는 엘티그레에 머무는 동안, 그 곳의 새로운 형제인 알레한드로 미첼이 옥상에서 전파하라는 마태 10:27의 권고를 아주 문자적으로 적용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집 옥상에 확성기를 설치해 놓고, 「어린이들」(Children) 혹은 「신세계」(The New World) 책과 다른 워치 타워 출판물에서 선택한 내용을 날마다 반시간 정도씩 큰 소리로 읽곤 하였습니다. 확성기의 음량을 어찌나 크게 해 놓았던지 그 소리가 여러 구획 떨어진 곳에서도 다 들렸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화가 난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확성기를 치우고 호별 방문을 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여러 작은 집단들을 방문한 그 여행은 대단히 유익하였습니다. 두 달 동안 여행하면서, 이 형제들은 16명에게 침례를 베풀 수 있었습니다.
선교인들이 마라카이보에 도착하다
이 나라 북서쪽에 있는 마라카이보는 베네수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이 도시의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덥고 습도가 높다는 것입니다. 이 곳은 베네수엘라의 유전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도시의 신시가지는, 부두에 가까운 구시가지와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길이 좁고 식민지풍의 벽돌집이 있는 구시가지는 지난 세기 이래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선교인 여섯 사람이 화물선을 타고 1948년 12월 25일에 마라카이보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추운 뉴욕에서 방금 도착했기 때문에 무거운 겨울 옷을 잔뜩 들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1918년에 침례를 받고 지금도 캘리포니아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는 랑나 잉월드슨, 버니스 그리슨(현재는 “번” 헨첼, 세계 본부의 벧엘 가족 성원임), 찰스 베일과 메일 베일, 에스더 라이델(랑나의 이부 자매), 조이스 매컬리입니다. 증인들과 새로 연합한 한 부부가 자기들의 작은 집으로 이 선교인들을 맞아들였습니다. 그 집에서 선교인들은 트렁크 15개와 서적 40상자를 요령껏 정리해 놓느라고 진땀을 뺐습니다. 선교인 집으로 사용할 셋집을 구할 때까지, 네 사람은 그물 침대에서, 두 사람은 책 상자로 꾸민 침대에서 잠을 잤습니다.
랑나는 자기들 여섯 사람이 마라쿠초스—마라카이보의 주민들을 흔히 부르는 말—에게는 이상야릇하게 보였던 일을 회상합니다. 선교인 몇 사람은 키가 크고 금발이었습니다. “흔히 호별 방문을 할 때면, 벌거벗은 꼬마들이 때로는 열 명씩이나 우리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우리가 자기네 말을 이상하게 하는 것을 듣곤 했어요. 우리 여섯 명은 스페인어를 몇 마디밖에 할 줄 몰랐지요. 하지만 그 애들이 우리를 보고 웃으면 우리도 따라서 웃음을 터뜨리곤 했답니다.” 나중에 랑나가 한 말입니다. 이 선교인들이 도착했을 때, 마라카이보에는 전도인이 네 명뿐이었습니다. 1995년 초에는 51개 회중에 총 전도인이 4271명이 되었습니다.
그의 기도를 듣고
선교인 여섯 명을 친절하게 집으로 맞이한 부부는 베니토 리베로와 빅토리아 리베로였습니다. 베니토는 이전에, 카라카스에서 온 파이오니아 후안 말도나도에게서 「“왕국은 다가왔다”」(“The Kingdom Is at Hand”) 책을 받았습니다. 그 후 페드로 모랄레스가 베니토를 방문하여 연구를 제안하자, 베니토는 열렬한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연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작은 집단의 모임에도 당장 참석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아내에게도—아내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였으므로—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매우 아름답다고 말하면서 참석하라고 권하였습니다. 아내는 그와 함께 가곤 했지만, 듣는 내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만 잠들어 버릴 때가 많았습니다.
어느 날 밤, 베니토는 아내가 잠든 줄 알고 집에서 소리를 내어 여호와께 기도하면서 아내를 깨우쳐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아내는 이 기도를 우연히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1955년에 베니토가 사망한 뒤, 빅토리아는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고 나중에는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마라카이보 주변의 시골에서 전파함
마라카이보 지역에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는 레베카(지금은 레베카 바레토)의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헤라르도 헤수룬이 아버지와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레베카는 겨우 다섯 살이었으며, 아버지는 발전하여 1954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바레토 자매는 어린 시절에 전파 활동에 참여한 멋진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버스를 빌려서, 회중 전체가 시골로 가곤 했어요. 시골 사람들은 돈이 거의 없었지만 서적을 좋아했지요. ··· 하루가 끝날 무렵이면, 형제 자매들이 서적과 교환하여 받아 온 달걀, 호박, 옥수수, 살아 있는 닭 등을 버스 안에 쌓아 놓는 것이 아주 볼 만했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들을 반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레토 자매는 메네데마우로아 마을에서 있었던 사건을 머리에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호별 방문을 하고 있는데, 그 지방 가톨릭 사제가 우리 뒤를 따라다니면서 사람들이 받은 서적을 찢고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증인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하더군요. 사제는 많은 청소년을 포함한 폭도를 선동하여 어떻게 부추겼는지 그들이 몹시 격분하여 우리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었어요. 몇몇 형제 자매가 돌에 맞았지요.” 증인들은 그 읍의 프레펙토(읍장)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증인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싶었던 그 읍장은, 사제에게 ‘이 전파자들로부터 사제를 보호해야 하니까’ 두 시간 동안 그의 사무실에 있어 줘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제 지도자를 잃은 무리는 흩어져 버렸고, 증인들은 다음 두 시간 동안 즐겁게 아무 방해 없이 그 읍에서 철저한 증거를 하였습니다.
더 많은 도움이 오다
구역이 광대하였으므로, 돌보기 위해서는 도움이 더 필요하였습니다. 길르앗 학교를 최근에 졸업한 일꾼들이 영적 추수에 참여하기 위해 1949년 9월에 더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아니 하루빨리 그 일에서 한몫을 하고 싶었지만, 만사가 그렇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산타 로사호의 선실 창문으로 항구의 불빛이 보이자, 레이철 버넘은 이렇게 안도감을 주는 것을 보기는 생전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배가 뉴욕을 떠난 이래 줄곧 뱃멀미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새벽 세 시였는데도, 레이철은 들뜬 나머지 다른 세 처녀 자매를 깨웠습니다. 그의 언니 아이네즈와 다른 두 처녀 자매, 즉 친자매간인 딕시 도드와 루비 도드(지금은 백스터)는 여행이 즐거웠지만 자기들의 새로운 임지에 도착하게 되어 기뻤습니다.
마중 나온 사람들 가운데는 도널드 백스터, 빌 해나와 엘사 해나(그 전해에 도착한 선교인들), 곤살로 미에르 이 테란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자매들을 카라카스로 데리고 가기 위해 항구에서 버스를 탔습니다. 운전 기사는 이 새로 온 사람들에게 머리끝이 쭈뼛쭈뼛해지는 여행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던 모양인데,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급커브 길을 돌고 돌아, 흔히 벼랑 끄트머리로, 그것도 너무나도 빠르게 느껴지는 속도로 차를 몰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이 자매들은 아직도 그 날의 버스 여행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엘 파라이소의 지부 및 선교인 집에 임명되었습니다. 레이철은 1981년에 사망할 때까지, 아이네즈는 1991년에 사망할 때까지 선교 분야에서 충실하게 봉사하였습니다. 이 그룹의 나머지 사람들은 아직도 충성스럽게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딕시 도드는 임지에서 보낸 처음 몇 개월을 돌이켜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고향 생각이 간절했어요. 그런데 설령 돌아가고 싶었더라도 공항까지도 갈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만한 돈이 없었거든요!”
그런 생각을 하는 대신, 그들은 여호와의 조직이 외국에서 선교인으로서 일하는 임명을 그들에게 맡겼다는 사실에 주의를 집중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고향에 돌아갈 꿈을 버리고 일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오해
새로운 선교인 대부분에게는 언어가—적어도 당분간은—문제였습니다.
딕시 도드는, 그들이 처음에 들은 것 중 하나가 누군가를 소개받을 때마다 “무쵸 구스토”라고 말하라는 것이었다고 회상합니다. 바로 그 날 그들은 회중 서적 연구에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는 도중에 버스 안에서 그 표현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였습니다. “무쵸 구스토. 무쵸 구스토.” “그런데 정작 소개를 받을 때에는 그 말을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답니다!” 딕시의 말입니다. 하지만 이윽고 그들은 그 표현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1948년부터 1954년까지 선교인으로 봉사한 빌 해나와 엘사 해나 부부는 자기들이 한 실수가 기억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한번은 해나 형제가 흰 달걀을 한 줄 사려고 했는데, 우에보스 블랑코스(흰 달걀)를 달라고 말한다는 것이 그만 우에소스 블랑코스(흰 뼈)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한번은 빗자루를 사러 갔습니다. 그는 자기 말을 못 알아들었나 싶어서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해 보았습니다. “‘엘 시엘로’(하늘)를 쓸기 위한 겁니다”라고 말했는데, 엘 수엘로(바닥)를 잘못 말한 것입니다. 점원은 유머감 있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포부가 정말 대단하시군요, 손님.”
빌의 아내 엘사가 대사관에 갔을 때의 일인데, 여권을 레노바르(갱신)해 달라고 말한다는 것이 그만 레모베르(제거)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가요, 아주머니, 그걸 삼키기라도 하셨습니까?”라고 그 사무관이 물었습니다.
1967년에 도착한 선교인인 기니 로저스는 처음에는 조금 낙심하였습니다. 정성껏 연습하여 제공 연설을 하기만 하면, 집주인은
옆에 있는 자매에게 고개를 돌리며 “케 디호?”(이분이 뭐라고 말했어요?)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로저스 자매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으며, 선교인으로서 지낸 약 28년 동안에 40명이 진리를 배우고 발전하여 물침례를 받도록 도왔습니다.아내, 일레인과 함께 길르앗을 졸업하고 1965년 11월에 도착한 윌워드 앤더슨은 자기는 워낙 언어에 소질이 없다고 솔직히 시인합니다. 자기가 실수할 때마다 늘 서슴없이 웃어 넘기는 윌워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중학교에서 스페인어를 6개월쯤 배우고 나니까, 선생님이 저보고 그 후로는 자기 수업을 절대로 받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하시지 뭡니까!”
하지만 여호와의 영과 끈기와 훌륭한 유머감 덕분에, 이 선교인들은 곧 그들의 새로운 언어에 익숙해지게 되었습니다.
집에도 이름이 있다
선교인들에게 생소한 것은 언어만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방문하려는 집을 기록하는 데도 색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하였습니다. 초창기에 카라카스의 많은 집에는 번지수가 매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각 집의 주인이 자기 집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고급 주택은 킨타라고 알려져 있는데, 흔히 안주인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붙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집주소는 킨타 클라라입니다. 아이들의 이름을 혼합하여 만든 이름도 흔한데, 킨타 카로시(카르멘, 로사, 시몬)가 그 예입니다. 협회가 임차한 첫 지부 및 선교인 집은 주인이 이미 킨타 사브테파울(생 뱅상 드 폴)로 이름을 지어 놓았는데, 그 집은 큰길에 있어서 곧 여호와의 증인이 모이는 장소로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1954년에 지부 사무실 및 선교인 집으로 사용하려고 새 건물을 구입했을 때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적당한 이름을 짓는 일이 형제들의 재량에 맡겨졌습니다. “여러분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라는 예수의 권고를 염두에 두고, 그 집의 이름으로 루스(빛)를 선택하였습니다. (마태 5:16) 나중에 지부 사무실은 더 넓은 건물로 이전하였지만, 1995년 초에 여전히 킨타 루스는 11명의 선교인들의 집이었습니다.
카라카스의 도심에서 사용하는 주소는 방식이 특이하였습니다. 어떤 상가나 아파트 건물의 주소를 물으면, “라 페 아 에스페란사”와 같은 식의 대답을 듣게 됩니다. ‘“믿음에서 희망으로”라니? 도대체 주소 같지가 않은걸!’ 하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카라카스의 도심에는 교차로마다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찾고 있는 주소는 ‘믿음’이라는 교차로와 ‘희망’이라는 교차로 사이의 구획에 있는 지점인 것입니다.
베네수엘라에서 길르앗에 갔다 오다
여러 해 동안, 봉사 훈련 학교 과정에서 유익을 얻은 7명을 포함하여, 길르앗에서 훈련받은 136명의 선교인이 베네수엘라에 왔습니다. 그들은 외국—미국, 캐나다, 독일, 스웨덴, 뉴질랜드, 영국, 푸에르토리코, 덴마크, 우루과이, 이탈리아—에서 왔습니다. 1969년에서 1984년 사이에는, 비자를 받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길르앗에서 베네수엘라로 온 새로운 선교인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1984년에 두 부부의 입국 허가를 얻으려고 총력을 기울인 것이 성공하였고, 1988년에는 두 선교인이 더 도착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증인 여섯 명도 길르앗 훈련으로부터 유익을 얻었습니다.
노어 형제가 1946년에 방문했을 때, 청소년 루벤 아라우호는 자기가 언젠가 길르앗에 갈 자격이 있겠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있지, 영어 실력이 좋아진다면 말이다”라는 것이 대답이었습니다. 루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저는 매우 행복했지요. 삼 년 뒤인 1949년 10월에, 1950년 초의 겨울에 시작될 예정인 15기 학급에 참석하라는 초대장을 노어 형제로부터 받았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 길르앗에 참석한 다른 다섯 형제는 에두아르도 블랙우드와 오라시오 미에르 이 테란(두 사람 다 1946년에 노어 형제의 첫 방문 때 침례를 받았음), 테오도로 그리싱거(앞으로 더
언급될 것임), 카시미로 시토(프랑스에서 이민 와서 귀화한 베네수엘라인), 그리고 최근에 졸업한 라파엘 롱가(순회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음)입니다.진리를 찾고 있던 사람들, 그렇지 않은 사람들
1948년 당시, 카라카스에 살던 빅토르 메히아스는 더 나은 세상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노력으로 그런 세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자기도 그 일에 기여할 각오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 해에, 아주 쾌활한 증인인 호세피나 로페스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The Truth Shall Make You Free”) 책을 빅토르의 아내, 딜리아에게 남기고 갔습니다. 빅토르는 그 제목에 흥미를 느껴 그 책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참으로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곧 그와 아내는 증인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빅토르는 나중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참석한 이들은 낯선 사람들인데도, 얼굴 표정이 어찌나 다정스러운지 이 사람들은 과연 다르다는 확신이 들더군요. 또 카라카스의 클루브 라스 푸엔테스에서 열린 대회에서 협회장 노어 형제를 보고 감명을 받은 일이 기억납니다. 노어 형제는, 모두 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어하는 종교 지도자나 영웅이나 유명한 예술가들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그분의 겸손과 소박한 태도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얼마 안 있어, 빅토르도 사람들을 자유롭게—그야말로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할 수 있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에, 빅토르 메히아스 형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성서 진리를 전하는 데 바친 수십 년을 돌이켜 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제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빅토르 메히아스가 침례받은 해인 1950년에, 카르카스에 사는 또 다른 젊은이 테오도로 그리싱거가, 선교 봉사를 갓 시작한 로널드 피어스에게 이렇게 요청하였습니다. “계시의 책에 있는 666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설명해 주십시오.” 테오도로는 아버지로부터 커다란 독일어 성서를 물려 받았고, 수시로 그것을 읽어 보곤 했습니다. 테오도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과거에 대해서 그다지 흥미가 없었지만, 계시록에 언급되어 있는 장래 즉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는 관심이 있었습니다.” 피어스 형제의 설명에 만족한 그는,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연구하자는 피어스 형제의 제안에 동의하였습니다. 그 책은 스페인어로 되어 있었고, 테오도로의 성서는 독일어였으며,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은 다 영어로 말하였습니다. 발전은 매우 빨랐습니다. 1951년이 되자 테오도로는 파이오니아로 등록하였고, 이듬해에는 푸에르토라크루스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일하는 임명을 받아들였고, 1954년에는 길르앗 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베네수엘라에서 순회 감독자로서 봉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로널드 피어스가 테오도로 그리싱거와 연구를 시작할 무렵, 네메시오 로사노라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엘티그레 교외의 인디언 마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폭력배로서 칼부림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인디언 추장은 그를 두려워하여 그가 하자는 대로 했으므로, 사실상 로사노가 추장인 셈이었습니다. 증인들은 로사노를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었지만, 어쨌든 그에게도 전파를 하였습니다. 그는 말을 가로막으며 퉁명스럽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봐요! 내게 이러쿵저러쿵 설명하는
건 싫단 말이오. 내가 직접 읽어 보겠소.” 그런데 마침 남은 서적이 한 부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형제의 개인용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책을—그것도 한 페이지라도 빠진 게 없나 확인해 본 다음에야—자기가 가지겠다고 고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과연 그 책이 유익할 수 있을 것입니까?로사노는 일주일도 못 되어 책을 다 읽고는, 배부할 소책자를 구해 가지고 혼자서 전파하러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로사노를 만나러 다시 찾아간 증인들은 염려가 되어,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소책자를 단돈 메디오 한푼으로 볼 수 있습니다.” (메디오는 이 나라 동전임) 증인들은 의사 표현을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재치 있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로사노는 30킬로미터나 떨어진 엘티그레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말을 타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때로는 걷기도 하였습니다. 점차, 그는 이전 생활 방식을 그리스도인 성품으로 바꾸었습니다. 곧 그가 아주 많은 시간을 전파 활동에 바치자, 순회 감독자는 파이오니아로 등록하라고 격려하였습니다. 1955년에 그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파견되었으며, 아내 오마이라와 함께 아직도 그 자격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영적 순결을 유지함
초창기에는 하느님의 말씀의 빛이 언제 어디서나 밝게 빛나지는 않았습니다. 엘티그레의 연구 집단과 연합하고 있던 일부 사람들은 세상에서 들여온 견해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1947년에 진리를 접한 라파엘 에르난데스와 그의 아내는, 엘티그레에서 모이던 집단 가운데 자기 꿈에 의미를 부여하곤 하던 형제가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그리고 한동안 일부 사람들은, 부부가 서로 충실하기만 하면 법적으로 혼인 신고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건전한 성서 교훈을 받은 결과, 점진적으로 이런 견해들은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1940년대 말에, 1946년 노어 형제의 베네수엘라 방문
기간에 침례를 받은 열 명 중 한 명이, 개인적인 추종을 받으려고 자기 자신의 가르침을 조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재 시우다드과야나의 장로인, 레오폴도 파레라스가 그 때 일어난 일을 기억합니다. 레오폴도는 이전에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으뜸가는 복사(모나기요)였으나, 교직자들의 뻔뻔스러운 부도덕 때문에 20세에 교회를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어떤 사람이 부당하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당시 경험이 없고 나이도 젊었지만, 레오폴도는 엘티그레의 험난한 시기를 꾸준히 견디어 내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였습니다.몇 년 뒤에, 현재는 엘티그레의 장로인, 레너드 컴버배치의 아내가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내 반응은 아주 좋지 않았지요”라고 레너드는 시인합니다. “우린 늘 사이 좋고 다정하게 어울려 살고 있었는데, 일단 아내가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자 내가 빈정거리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내가 차를 위험하게 빨리 몬다고 아내가 잔소리를 하더군요. 나는 당신의 하느님, 여호와가 살려 줄 텐데 무슨 걱정이냐고—결국, 어찌 됐든 간에 당신은 영원히 살게 될 거 아니냐고 했지요. 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증인들이 아내를 이용하고 있고, 내가 그들보다는 성서를 더 잘 알고 있으니, 한번 만나서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아내에게 말했지요. 그들은 내 도전을 받아들이더군요. 그런데 결국은 기분 좋은 대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들이 가르치는 것이 거짓임을 증명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들과 성서를 연구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연구를 시작한 지 다섯 달 만에 침례를 받았지요. 나에게는 자동차가 있었으므로, 아나코에 있는 집단의 연구 사회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집단을 섬기기 위해 왕복 160킬로미터를 다녀야 했지요. 그 다음에는 3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또 다른 집단을 돌보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현재는 이 곳들에 회중이 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동쪽에 있는 엘티그레 시는 원래 중요한 상업 중심지입니다. 이 도시는 또한 참 숭배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995년 초에, 엘티그레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이 7개 있었고, 좋은 소식의 전도인도 총 730명이 넘었습니다.보석상이 형상 만들기를 중단하다
엘티그레의 남동쪽, 오리노코 강의 남쪽 기슭에 시우다드볼리바르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수상 교통량이 많은 번화한 곳입니다. 1947년에, 이 도시에 사는 마리아 찰스에게 여호와의 증인이 찾아왔습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보석 장사를 하는 사람인데, 하루는 제가 가게에 앉아 일하고 있는데 알레한드로 미첼이 자루 하나를 어깨에 메고 들렀습니다. ‘그 안에 뭐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네, 특별한 보물이지요’라는 대답이었어요. 저는 ‘갖고 계신 게 금이라면 사겠어요. 제 사업이니까요’ 하고 말했지요.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금보다 더 좋은 것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알기로 금보다 더 좋은 것은 성서뿐인데요’라고 했더니, 알레한드로는 제 말이 맞다고 하면서 성서와 다른 서적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읽기는 좋아했지만 이제껏 성서의 내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에게 ‘그걸 다 사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날 잡지 11부, 「“왕국은 다가왔다”」와 「구원」(Salvation) 책, 새 성서 한 권을 그에게서 받았지요. 읽다 보니 그 내용에 어찌나 매료되던지, 일 주일 동안 보석상 일을 중지하고 독서에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왕국은 다가왔다”」 책을 읽으면서, 침례자 요한의 모범에 감동된 저는 ‘나도 그처럼 두려움을 모르는 전파자가 되고 싶다’고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마리아는 증인들의 집회 장소를 수소문해 보았으나, 시우다드볼리바르에는 그런 곳이 없다고들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장소가 약 120킬로미터 떨어진 엘티그레에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그렇다고 기가 꺾이지 않고 그리로 가서 장소를 찾아내어 집회에 참석하였고, 알레한드로 미첼에게 시우다드볼리바르로 자기를 좀 방문해 달라는 쪽지를 남겨 놓았습니다.
그러던 중, 마리아는 근처에 사는 한 재봉사도 「“왕국은 다가왔다”」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재봉사는 작은 집단이 「파수대」를 읽기 위해 모이는 장소를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그 재봉사를 따라갔으며, 거기서 레오폴도 파레라스와 그의 어머니, 그의 누이 및 다른 몇 사람을 만났습니다. 마리아는 모임을 즐겼으며, 그 내용에 얼마나 열중했던지 질문에 매번 손을 들었습니다!연구가 끝나자, 레오폴도 파레라스가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디 계신 분입니까?”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전 보석상을 하고 있지요. 하지만 더 이상 형상을 만들지 않겠어요.” 파레라스는 그 직선적인 말에 빙그레 웃으면서, “왜요?” 하고 물었습니다. “시편 115:4-8에 나오는 말씀 때문이지요.” 마리아의 대답이었습니다.
그 집단은 아직 공개 증거를 위한 조직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전파하라는 성서의 명령에 순종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사실 이 가장 새로운 성원, 마리아 찰스였습니다. 그들은 증거 카드와 서적을 갖추고, 시우다드볼리바르의 주민들에게 좋은 소식을 조직적인 방법으로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주민들이 교직자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몹시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 있는 집단이 기울인 충실한 노력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1995년 시점에서, 시우다드볼리바르에는 9개의 회중에 총 869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선교인이 더 도착하다
1950년에 카라카스의 지부 사무실에는 흥미 있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베네수엘라에 선교인 열네 명이 더 파견되어, 세 곳에—바르키시메토와 발렌시아와 마라카이에—선교인 집이 개설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선교인들이 이 나라에 입국할 수가 있을 것입니까? 바로 얼마 전에 대통령이 암살당하였고, 오후 6시 통행 금지가 시행되고 있었으며, 통신이 잘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암살 사건이 있은 뒤 이 나라에 들어온 첫 비행기가 카라카스 근처의 공항에 착륙하였습니다. 새로운 선교인 열네 명이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마중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이 그러했으므로, 선교인들이 오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4명 가운데 한 선교인인 랠핀(페니) 개베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지부 주소만 믿고 택시 세 대에 올라탔지요. 카라카스 시에서 그 거리 즉 아베니다파에스 가를 찾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는데, 그 거리가 대단히 길어서 집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고 통행 금지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택시 운전 기사들은 점점 신경이 곤두섰지요. 마침내, 선교인 중에서 빈 채프먼이 택시 기사에게 차를 멈추라고 하고는, 스페인어가 아주 서투른데도 불구하고 아무 집에나 가서 문을 두드려 길을 묻곤 하더군요. 그가 두드리자, 지부 감독자인 도널드 백스터가 마침 문을 열었습니다. 얼마나 안심이 되었겠습니까!”
선교인들은 카라카스에서 남서쪽으로 약 270킬로미터 떨어진 바르키시메토에 임명되어 갔는데, 그 곳이 대단히 종교적인 도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1950년대에 그 곳 사람들은 전통에 젖어 있어 변화를 싫어하였습니다.
하지만 누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반응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선교인들이 가두 증거를 하러 나갔던 첫 토요일을 떠올리며, 채프먼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다섯 사람은 시내 사업 지구의 큰길 모퉁이들에 서 있었지요. 우리는 일대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바르키시메토에는 미국인이 아주 드물었고 젊은 미국 여자는 정말 없었지요. 나는 잡지를 하나도 못 전할 것 같았는데, 젊은 자매들은 순식간에 잡지를 많이 전하더군요!” 하지만 하루는 그들이 식품을 사러 시장에 갈 때, 네 자매가 청바지를 입기로 하였습니다. 몇 분 내에, 백 명에 가까운 여자들이 그들을 에워싸더니 손가락질을 하며 “미라! 미라!”(봐라! 봐라!) 하고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자가 그런 차림으로 거리에 나오는 것이 몹시 눈에 설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자매들은 곧장 집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이 고장 사람들 대부분은 성서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가톨릭 성서를 보여 줘도, 그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성서에서 한 구절도 읽지 않으려 하면서, 성서를 읽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인 양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첫해에는 바르키시메토에서 발전이 거의 없었습니다.
마침내, 참 종교
하지만 모든 사람이 여러 해에 걸친 로마 가톨릭의 전통 때문에 눈먼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루나 데 알바라도가 있는데, 그는 매우 연로한 부인으로서 오랫동안 로마 가톨릭교인이었습니다. 개베트 자매가 그의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 부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가씨, 나는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아가씨가 방금 이야기해 준 것을 설명해 주기를 기다렸어요. 사실, 어렸을 때 나는 사제의 집을 청소해 주곤 하였는데, 사제의 서재에는 성서가 한 권 있었지요. 성서를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이유를 알고 싶어 몹시 궁금해하던 차에, 어느 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성서를 집으로 가지고 와서 몰래 읽어 보았지요. 읽어 본 내용으로 인해 가톨릭 교회가 진리를 가르치지 않았으며 따라서 참 종교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어요. 겁이 나서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참 종교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올 것이라고 믿었지요. 프로테스탄트 종교가 들어왔을 때 처음에는 그들이야말로 참 종교를 가르치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곧 그들도 가톨릭 교회에서 가르친 것과 동일한 거짓 사상들을 많이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아가씨가 방금 이야기해 준 것이야말로 참으로 여러 해 전에 내가 그 성서에서 읽은 바로 그 내용이로군요.” 즉시 연구가 마련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루나는 여호와께 대한 헌신을 표상하였습니다. 가족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나는 사망할 때까지 여호와를 충실하게 섬겼습니다.
에우프로시나 만사나레스 역시 마음이 감동되어 하느님의 말씀에 반응을 나타낸 사람입니다. 랑나 잉월드슨이 처음 방문했을
때, 에우프로시나는 이전에 성서를 본 적이 없었지만 랑나와 연구하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랑나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는 의식을 따르는 면에서 종교심이 깊은 여인이었어요. 일요일마다 미사에 참석하고, 벽에 오목하게 파 놓은 곳에 있는 ‘성인’의 형상 앞에 항상 등불을 켜 놓았지요. 등불이 꺼지는 일이 없도록, 그 특별한 용도로 기름을 다량 비치해 두었답니다!” 그러나 에우프로시나는 성서에서 배운 것을 적용하였습니다. 어떤 것들은 여호와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자, 그는 생활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형상을 처분하고, 담배를 끊고, 혼인 신고를 하였습니다. 나중에 그의 어머니도 연구에 가담하였습니다. 에우프로시나는 커다란 엽궐련을 끊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가 겨우 두 살배기였을 때 어머니는 조용히 있게 하려고 그의 입에 궐련을 물리곤 했는데, 그 이래로 담배를 피워 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려고 에우프로시나는 담배를 끊고 침례를 받았으며, 열심이 대단한 전도인이 되었습니다.바르키시메토에 처음으로 선교인들이 파견된 지 6년이 지났는데도, 그 곳은 아직도 전도인이 약 50명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양 같은 사람들을 찾으려는 끈질긴 노력을 축복하셨습니다. 1995년의 시점에서, 바르키시메토에 있는 28개의 회중은 총 2443명의 전도인을 보고하였습니다.
발렌시아, 비옥한 밭
바르키시메토와 카라카스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 이 공화국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인 발렌시아 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의 오래 된 좁은 거리들은 옛 스페인의 정취가 나며, 같은 이름의 스페인 도시처럼 발렌시아는 오렌지로 유명합니다.
베네수엘라에 1950년에 도착한 선교인들 가운데 여덟 명이 발렌시아로 파견되었습니다. 에블런 시버트(지금은 워드)는 제공 연설을 암기해 가지고 발렌시아에서 활동을 시작한 때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스페인어를 잘하지 못했는데도 성서 연구가 많이
생겼어요”라고 그 자매는 상기합니다. 그 때 연구를 시작한 사람으로 폴라 루이스가 있습니다. 폴라는 가톨릭교인이었고 형상, 특히 “예수의 성심(聖心)”에 많은 정성을 바치면서 정기적으로 은총을 빌었습니다. 이 여인은 매주 교회에 나가 3볼리바르를 헌금하면서, 남편이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살게 해달라고 그 형상에게 기도하곤 했습니다. 남편이 여전히 그들과 떨어져 살았으므로, 폴라는 형상에게 좀더 강력하게 말하기로 했습니다. ‘주님, 이번에도 제게 아무 효험이 없으면, 지금 드리는 것이 마지막 헌금이 될 것이옵니다.’ 폴라는 3볼리바르를 남긴 이후로, 다시는 그 곳에 가지 않았습니다.그 다음 달에, 에블런 시버트가 그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폴라는 기꺼이 잘 듣고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글을 읽을 줄 몰랐는데도) 받았으며, 에블런의 도움으로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폴라와 그의 딸 한 명은 발렌시아에서 최초로 침례받은 사람들 가운데 들게 되었습니다. 폴라의 남편 스티븐은 처음에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바보 같은 짓”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으나, 다시 생각해 보고 나서 가족과 함께 살려고 돌아왔고, 그도 역시 여호와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게 된 것은 예수의 성심으로 알려진 형상에 바친 정성의 효험이 아니라 스티븐이 성서를 연구한 결과였습니다.
레스터 백스터(도널드 백스터의 형)와 그의 아내 낸시는 다른 선교인들이 발렌시아에 도착한 지 2년 만에 그들과 합세하였습니다. 레스터는 스페인어를 잘 구사하기 위해 특히 열심히 공부해야 하였습니다. 그것은 야외 봉사에 필요했을 뿐 아니라, 그가 선교인 집단의 한 형제로서 모든 집회를 사회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중적인 훈련은 보람이 있었습니다. 2년 뒤에 베네수엘라에서 첫 지역구가 형성되었을 때, 레스터가 지역 감독자로 임명된 것입니다. 그 이래로, 그는 여행하는 활동에서 30년 동안 봉사하였습니다.
발렌시아에서 봉사한 선교인들 중에는 독일 출신의 키가 작고
금발인 로타르 캐머와, 영국 출신의 푸른 눈에 볼이 발그레한 허버트 허드슨이 있었습니다. 한동안 같은 방을 쓴 두 사람은 성서 진리가 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 주는 산 증거였습니다. 사실인즉, 로타르는 청소년 시절에 독일 히틀러 유겐트(소년단)의 대원이었고 허버트는 영국 공군에서 복무했으므로, 전시에 서로의 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그들의 인생관을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그들은 선교인으로서, 사람들에게 평화롭게—우선 하느님과, 또한 서로간에—사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손잡고 일하였습니다.담을 넘을까, 확고한 태도를 취할까?
1953년에 발렌시아의 선교인 앨리스 팰러스키는 18세 된 글라디스 카스티요를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글라디스는 듣고 있는 소식이 좋았지만 앨리스가 가톨릭 성서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좀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글라디스는 발렌시아의 대성당으로 가서 주교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글라디스는, 자기가 “프로테스탄트”와—그는 증인들을 그렇게 생각하였으므로—공부를 하고 있는데 모든 성구를 확인해 보기 위해 가톨릭 성서가 필요하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발렌시아에 증인들이 수가 비교적 적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주교는 글라디스의 생각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아서 성서를 한 권 주었습니다. 글라디스는 성서를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가톨릭교인들이 성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실천하고 있지 않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아가씨는 교회를 떠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55년에 침례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글라디스에게 믿음의 시험이 닥쳤습니다. 글라디스는 교사가 되려고 공부하는 중이었고, 졸업을 겨우 1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가 다니는 대학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행사를 계획하였고, 모두가 특별 미사에 참석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글라디스는 그 때의 일을 이렇게 말합니다. “당시는 독재자 페레스 히메네스의 시대였기 때문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면 퇴학당하는 게 보통이었어요. 미사에 참석하지 않는 학생은 누구라도 퇴학을 당해 다른 곳에서도 공부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지요. 이것은 저에게 정말 시험이 되었습니다. 미사 시간이 다가오자 화장실에 숨을까, 담을 넘어 집에 갈까 궁리했지요. 결국, 확고한 태도를 취하기로 했습니다. 대학 학장에게 가서, 저는 더 이상 자신을 가톨릭교인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미사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설명했지요. 학장은 몹시 화를 내긴 했지만, 집에 가게 해주더군요. 저는 퇴학당하지 않았어요. 여호와를 온전히 신뢰했기 때문에 행복했습니다.”교직자들이 증거를 받은 때
여러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교직자들도 증거를 받았습니다. 발렌시아에서 최초로 증인이 된 사람들 중 한 사람인 마리나 실바는, 증인이 되기 전에 다니던 교회의 사제가 자기 집을 방문한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리나는 사제와 긴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가장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으로, 마리나가 사제에게 몇몇 성구를 찾아 읽어 보라고 했더니 사제는 그 성구들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는 ‘신학교에서 성서만 빼고는 다 공부했다’고 시인하였습니다. 사제는 여러 가지 점에서 마리나의 말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나가 사제직을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라고 권하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누가 내게 아레파를 주겠습니까?” (아레파는 그 곳의 옥수수 빵임)
마리나 자신도 전에는 “예수의 성심”에게 정성을 바치던—매주 금요일을 이 형상에 바치던—사람이지만, 성서 진리가 이 여인의 생활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1953년에 침례를 받고 1968년에는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으며, 그 특별한 봉사를 아직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참여하면서, 마리나는 산카를로스를 비롯하여 테메를라, 베후마, 치르과, 타보르다, 니르과, 티나키요에서 활동을 개척하는 일을 돕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발렌시아의 바로 남서쪽에 있는 티나키요에 처음으로 진리의 소식이 이르렀을 때, 사람들은 처음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마리나는, 몇 사람이 그 읍에서 봉사를 시작하자 그 곳의 사제인 “몬시뇨르” 그라나디요가 사람들에게 경고하려고 확성기를 설치한 일을 기억합니다. 사제는 “황열병이 티나키요에 들어왔습니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우리 고장과 우리의 종교를 지키십시오!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옹호하십시오!” 마리나는 사제를 방문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제의 집에 찾아가서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마리나는 사제를 맞이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오전에 불평하신 그 ‘황열병’에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저희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희는 하느님의 왕국에 관한 중요한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이 소식은 교회가 마땅히 전파해야 하지만 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리나는 담대하게 사제에게 성서를 가져오라고 요청하여 사도 15:14을 보여 주었는데, 여호와께서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 이름을 위한 백성”을 취하실 것이 예언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사제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 줄 미처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였습니다. 모두를 놀라게 한 일이 있었는데, 사제가 그 자매의 초대를 받고 공개 강연에 참석한 것입니다. 그 후로 그는 여러 차례 중앙 광장에서 잡지를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 광경을 목격하고 격려를 받아 잡지를 받았습니다. 1995년 현재, 티나키요에는 4개의 회중에 총 385명의 전도인이 있습니다.
마라카이에서 성서 진리의 씨가 잘 자라다
1950년에 도착한 선교인들 중에, 바르키시메토와 발렌시아에 파견된 선교인들 외에도, 마라카이를 돌보게 된 선교인들이 있었던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마라카이는 베네수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로, 카라카스의 바로 남서쪽 120킬로미터 지점에 있습니다.
발렌시아 호의 동쪽 연안에 자리잡고 있는 이 도시는 구릉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마라카이에 선교인들이 도착하면서, 이 도시에서도 집회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선교인 그룹이 독신 형제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 태생의 선교인 릴라 프록터가 1958년에 도착할 무렵에는, 집회 참석 수가 12명에서 20명 사이였는데도 마라카이에 침례받은 형제라고는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 형제는 키스 글레싱이었는데, 그는 아내 조이스와 함께 1955년에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습니다. 형제가 부족하였으므로, 여러 가지 면으로 자매들의 도움이 필요하였습니다. 프록터 자매는 그 때 일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 자매들은 봉사회 프로도 맡고, 회계와 서적 및 잡지 일도 도왔지요. 저는 다섯 달 동안 임명받은 일을 한 뒤에, 서적 연구를 사회하도록 임명받았어요. 처음에는 무활동 전도인 한 사람과 저밖에 없었어요. 방바닥이 흙으로 된 집에서 촛불을 켜 놓고 집회를 봤지요. 얼마 있지 않아, 제 스페인어가 형편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참석자 수가 어찌나 많아졌는지 거실, 부엌, 뜰에 가득 차게 되었어요. 여호와의 성령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라카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를 알고 섬기려는 열렬한 욕망을 나타낸 결과, 1995년 초에 그 도시에는 30개의 회중에 총 2839명의 전도인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게 사실이면 총을 쏘아 버리겠소!’
마라카이에서 관심을 나타낸 사람들 가운데는 알프레도 코르테스의 아내, 마리아가 있습니다. 조이스 글레싱이 마리아와 여섯 달째 성서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집에 돌아와, 미국 여자를 일컫는 이 곳 표현을 빌리자면, 이 그링가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아내에게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습니다. 아내는 설명을 하면서 조이스가 남겨 준 잡지를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그 잡지에는 영매술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는데, 장미 십자회의
신비 사상과 영매술을 연관시킨 기사였습니다. 그는 장미 십자회의 신앙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흥미 있게 그 잡지를 읽었습니다.그의 아내가 남편이 잡지에 관심이 있다고 글레싱 자매에게 이야기를 하자, 그 선교인의 남편인 키스가 코르테스 씨를 방문하도록 마련되었습니다. 그 방문이 있은 뒤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겨우 3주가 지났을 때—조금 이른 듯하게—선교인은 코르테스 씨에게 호별 방문을 함께 하자고 권하였습니다. 그는 응하였고, 매우 즐겁게 참여하여 잡지를 16부나 전했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는, 그 날 저녁에 증인이 아닌 친구들과 함께 성공을 자축하러 나갔다가 술에 잔뜩 취하여 새벽 세 시나 되어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튿날, 코르테스 씨는 후회하면서 ‘앞으로 여호와를 제대로 섬기든지 아니면 그냥 내가 살던 방식으로 돌아가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서 연구를 계속하도록 그를 설득하는 데는 힘이 들었습니다. 그는 점진적으로 이전 생활 방식을 버리고 발전하여 1959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2주일 뒤, 코르테스 씨의 딸들 중 하나의 대부(代父)인 대령이 노발대발하여 코르테스 씨를 만나러 와서는, 그의 가슴에 총부리를 대고 이렇게 위협하였습니다. “내가 듣기로는, 당신이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던데 그게 사실이오? 그렇다고 말하면 총을 쏘아 버리겠소!” 코르테스 씨는 침착성을 유지하면서 그것이 사실임을 인정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대령은 넌더리를 내며 총를 치우더니 쾅쾅거리고 걸어가면서, 자기는 더 이상 그 여자 아이의 대부가 아니니 그리 알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영 그리고 그 어느 누구에게나 증거하는 코르테스 형제의 열심 덕분에, 그는 89명이 진리를 알고 여호와께 헌신하도록 돕는 데 유용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현재 바르키시메토 근처의 카부다레에서 장로로 봉사하고 있으며, 그의 한 아들은 특별 파이오니아이고, 그의 딸 카롤리나는 남편과 함께 지부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사육제 때니까 조심하세요!
베네수엘라에서 사육제는 파티가 열리고 이색적인 옷차림이 등장하는 때 그리고 물벼락을 맞는 때입니다! 특히 어린이들은 무심코 지나가는 사람들을 흠뻑 적셔 놓고는 매우 재미있어합니다. 사육제 주간의 월요일과 화요일에 거리에 나가는 모험을 하는 것은 대개 지혜롭지 못합니다.
“저는 그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어요”라고 시인하며 릴라 프록터는 말합니다. “마라카이에 온 첫해에,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야 말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그렇게 하긴 했는데, 그만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한 양동이의 물벼락을 맞고 흠뻑 젖은 몸으로 연구할 첫 번째 집에 도착했습니다. 두 번째 집으로 걸어 갈 때는 어느 정도 말라 있었는데, 가는 길에 두 양동이의 물을 뒤집어쓰고 말았어요.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도착했지요.” 다른 선교인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이야깃거리가 있습니다.
카라카스의 선교인 집인 킨타 루스에 살고 있는 릴라는 지금은 사육제 때 일정을 조금 다르게 잡습니다.
‘그분은 내 진심 어린 기도를 들어 주셨다’
알프레도 아마도르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별이 총총한 하늘을 함께 보면서 별자리 이름을 알려 주곤 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이 모든 걸 만드셨단다”라고 종종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알프레도의 아버지는 아들이 열 살도 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당시 아라과 주의 투르메로에 살고 있던 알프레도는 자기 종교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는, 사제가 돈을 받고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빨리 친척들을 연옥에서 나오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옳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회의에 시달리던 그는 술취함, 성적 부도덕, 폭력, 마약 남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심은 것의 결과를 거두기 시작하게 되자 타개책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문득, 밤이면 아버지와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알프레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느 날 오후, 완전히 자포자기하여 눈물을 글썽이며, 하느님을 알게 해 달라고 그분께 기도드렸지요. 그분은 제 진심 어린 기도를 들어 주신 것 같습니다. 바로 다음날 아침, 여호와의 증인 두 사람이 문을 두드렸으니까요. 흥미로운 토의가 계속되었지만, 저는 성서 연구에는 동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 스스로 성서를 읽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왕국회관에 가는 데는 쾌히 동의했습니다. 저를 방문한 형제는 가까운 카과에서 열린 대회에도 데리고 갔습니다. 여러 연설을 잘 듣고, 이것이 진리임을 깨달았지요. 침례 지원자들이 질문에 대답하려고 일어섰을 때, 저도 일어났습니다!”
알프레도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대회장의 한 구획에 서 있는데 자기만 다른 쪽에 서 있어서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들과 함께 침례받는 줄에 섰습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어느 회중에서 왔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회중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곧 자기는 실제로 침례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그는 동거하던 여자와 결혼을 하였고, 체계적인 성서 연구 덕분에 형제들과 함께 호별 방문 증거를 할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1975년에 아내와 함께 침례를 받았으며, 지금은 마라카이에서 그리스도인 장로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새 제도에서 아버지가 부활되어 돌아올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는 아버지가 여러 해 전에 이야기해 준 그 창조주의 이름이 여호와임을 알려 드리고, 여호와를 잘 알게 되도록 아버지를 격려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라카이의 재해
1987년 9월 6일은 마라카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쉽게 잊혀지지 않을 날입니다. 억수 같은 비로 홍수와 사태가 나서, 가옥 수백 채가 쓸려 내려가거나 완전히 침수되었습니다.
마라카이의 2000명에 가까운 전도인 중 많은 사람은 대참사가
닥쳤을 때 지역 대회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 보니, 집과 소유물이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적어도 160명이 사망하고, 그 밖에 수백 명이 실종되었으며, 3만 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증인들은 아무도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입지 않았지만, 도합 114명의 증인과 성서 연구생들이 집을 잃은 사람들 가운데 들어 있었는데,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몸에 걸친 옷뿐이었습니다.형제들은 신속히 효율적인 구호 위원회를 조직하여, 식품과 의약품, 의류, 침구류 등으로 많은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이러한 구호품들은 다른 읍과 시에서 염려하고 있던 동료 증인들이 보낸 것인데, 더 이상 필요 없을 때까지 트럭 편으로 잇달아 도착하였습니다. 책임 맡은 형제들은 증인들과 성서 연구생들을 충분히 돌보고도 남을 정도임을 보고, 몹시 곤경에 빠져 있는 이웃 사람들도 식품과 의류를 이용할 수 있도록 마련하였습니다. 형제들의 넘치는 관대함과 도우려는 자진성은 참으로 믿음을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함께 모이려는 두드러진 욕망
베네수엘라인들은 천성적으로 아주 사교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여럿이 함께—식사하거나, 파티를 열거나, 해변이나 교외로 나가 즐기기 위해—모이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조직으로 들어와도, 그들의 이러한 성격은 아주 뚜렷하게 계속 나타납니다. 그들은 순회 대회나 지역 대회를 퍽 좋아합니다. 그들 대부분에게는 그들이 함께할 수 있는 한, 시간과 거리와 비용과 불편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1950년 1월에 형제들은 들뜬 마음으로, 마라카이보에서 열리는 이틀간의 대회를 준비했습니다. 세계 본부의 노어 형제와 로버트 모건 형제가 참석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페드로 모랄레스는 교회측이 반대한 결과로 그 곳 신문사가 이 대회를 홍보해 주지 않겠다고 하자 실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형제들이 비행기로 도착할 때가 임박하자 다른 묘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회중의 모든 아이들이 저마다 싱싱한 꽃다발을 들고 공항에 나가도록 마련했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자연히
공항에 나온 신문 기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기자들은 누군가 특별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느냐고 묻게 되었지요. 아이들은 미리 주의 깊이 짤막하게 일러 준 대로 이렇게 대답하곤 했지요. ‘네, 그렇습니다. 그분은 경찰서 옆, 우르다네타 가 6번지의 메이슨 홀에서 연설하실 거예요.’ 방문하는 형제들이 도착하자 기자들은 사진을 찍었고, 대회에 관한 내용이 그 사진과 함께 신문에 나왔습니다. 홍보가 잘되었지요.”또한 그 공개 집회 이틀 전에, 그 곳 라디오 방송국인 온다스 델 라고(호수의 물결)에서는 이 연설이 있을 것이며 라디오로 방송될 것이라고 30분마다 광고하였습니다. 결과는 대단히 좋았습니다. 대회에 132명이 참석했을 뿐 아니라, 라디오로 많은 청취자가 들었습니다. 그 해에 전도인 증가율은 베네수엘라 사상 최고인 146퍼센트를 기록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또 하나의 대회가 1967년 1월 23-27일에 카라카스의 누에보 시르코 투우장에서 열렸습니다. 이 대회는 베네수엘라 최초의 국제 대회였습니다. 워치 타워 협회 이사들을 비롯하여 외국에서 온 515명의 대표자들이 청중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때 성서 드라마가 프로그램에 새로 편성되었습니다. 드라마 한 편을 감독한 디아 야스베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대단히 인상적이었지요. 드라마의 신선함과 그것이 전달하는 메시지 때문만이 아니라, 이 이례적인 장면을 담으려고 방문 대표자들이 500대의 카메라로 열광적으로 사진을 찍어 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국제적인 모임은 주의를 끌었습니다. 당시에 베네수엘라에는 증인이 5000명도 안 되었는데, 참석자 수는 1만 463명에 달하였습니다. 그 뒤로 3년 동안, 이 나라의 활동적인 증인 수의 증가율은 13퍼센트, 14퍼센트, 19퍼센트였습니다.
관심을 가진 사람이 정식으로 성서 연구를 하거나 왕국회관에 참석하기도 전에 순회 대회나 지역 대회에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간혹 듣게 됩니다. 함께 모이려는 이런 욕망이 1988년에 1월에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브루클린 본부의 돈 애덤스가 지구 감독자로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발렌시아의 투우장을 빌려 두 시간짜리 프로그램을
마련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베네수엘라 전역에 4만 1명의 전도인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에 7만 4600명이 모습을 나타냈는데, 이 나라 방방곡곡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참석하려고 버스로 12시간 이상을 여행하였으며, 프로가 끝난 뒤에는 다시 버스를 타고 12시간의 귀향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미소를 띤 얼굴에 쾌활하고 불평할 줄 모르는 베네수엘라 증인들에게는, 한나절 동안 그토록 많은 영적 형제 자매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입니다.안데스 산맥에 다다른 소식
안데스 산맥은 북쪽으로 베네수엘라까지 뻗어 있습니다. 안데스 지역에 있는 세 개의 주요 도시는 메리다, 산크리스토발, 발레라입니다. 이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태도는 해안 도시나 국제적인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는 눈에 띄게 다릅니다.
안데스에서 봉사해 온 지역 감독자인 로드니 프록터는 그 곳 주민들에 관해 이렇게 소견을 말하였습니다. “낯선 사람은, 같은 나라에 사는 경우에도 외국인 취급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가 아직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일반적으로 말해서 왕국 소식이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일부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경험한 바로는, 한 고장에서 일 년은 살아야 거리에서 인사를 해도 사람들이 답례를 한답니다. 2년이 지나야, 성서를 연구하는 일도 생길 수 있지요. 이 나라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웃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염려가 증인들이 방문할 때 귀기울이는 데 방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1950년 초에, 카라카스에서 온 파이오니아인 후안 말도나도가 안데스의 여러 도시를 방문하여 각 도시에서 몇 주씩 머물면서 전파하고 다녔습니다. 산크리스토발에서 처음에는 반응이 썩 좋지 않았습니다. 말도나도 형제는 그의 직선적인 전파 방식 때문에 여러 차례 체포되었습니다.
하지만 진리에 관심을 보인 한 가족이 있었으며, 말도나도 형제는 머물러 있는 동안 일 주일에 여러 번씩 그들과 성서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친척과 그 곳 사제한테 어찌나 박해를 받았는지, 어머니인 앙헬리나 바네가스가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바르키시메토에서 선교인들로 봉사한 뒤, 빈 채프먼과 펄 채프먼은 1953년 12월에 산크리스토발로 임명되었습니다. 앙헬리나 바네가스의 가족은 그들을 여호와께서 주신 훌륭한 마련으로 환영하였고 선교인들과 함께 당장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몇 달 뒤에 어머니인 앙헬리나는 침례받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선교인 집의 욕조가 아주 컸고 앙헬리나의 몸집은 아주 작았으므로, 적절한 침례 시설을 구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낮잠 혹은 구원?
채프먼 부부는 아주 가난한 부부인 미사엘 살라스와 에델미라 살라스와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에델미라는 철저한 가톨릭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제 정성이 어느 정도였나 하면, 한번은 임신 중이었는데, 하느님께 한 서약을 지키기 위해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까지 맨발로 순례를 하고, 그 다음에는 교회의 문에서 제단까지 무릎으로 기어갔어요. 그리고 나서 온 길을 맨발로 되돌아왔는데, 그렇게 하느라고 병이 나서 아기가 유산되고 말았지요.”그 다음 아기가 태어났을 때는, 미사엘과 에델미라가 이미 채프먼 부부와 성서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기가 몹시 아파서, 에델미라는 그 딸을 병원에 데리고 가기로 했습니다. 떠나려고 하는데, 이웃 사람들이 아기에게 빨리 세례를 주라고 압력을 가하면서, 만약 아기가 죽으면 매장되지도 못하고 림보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델미라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병원에 가는 길에 교회에 들러서 아기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사제에게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정오쯤 도착했는데, 사제는 낮잠을 자다가 방해받아서 기분이 좋지 않더군요”라고 회상하면서, 에델미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제는 가서 나중에 다시 오라고 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제 아기가 죽어 가고 있어요. 아기를 림보에서 구하는 것하고 낮잠을 계속 주무시는 것하고 어느 쪽이 더 중요합니까?’ 하고 말했지요. 사제는 마지못해서 아기에게 세례를 주기로 했지만, 자기 보좌역인 성물 관리인을 시키더군요.”
아기는 살았지만, 그 사건은 에델미라에게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제 교회에 완전히 환멸을 느낀 그는 증인들과 하는 성서 연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그 부부는 콜론이라는 읍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 곳에는 증인이 없었습니다. 카시미로 시토가 순회 감독자로서 산크리스토발을 방문했을 때, 선교인들은 에델미라를 방문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에델미라는 그 방문을 받고 대단히 고마워하였습니다! 그 기회에 에델미라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초창기에 에델미라가 기울인 노력에 힘입어, 콜론에는 지금 회중이
있습니다. 엘비히아에도 세 개의 회중이 있는데, 에델미라가 가족과 함께 그리로 이사했을 때 전파 활동이 시작되도록 도운 곳입니다. 몇 년 후에는 남편과 세 딸도 침례를 받았습니다.사제가 폭력을 부추기다
안데스의 또 한 작은 마을에서, 루이스 앙굴로가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1985년 어느 날, 앙굴로 형제는 집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기에 내다보았다가 자기 집 대문 앞에 “성인”의 형상을 올려 놓은 탁자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분노한 군중이, 증인들은 이 마을에서 나가라고 부르짖고 있었으며, 집을 불사르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일 주일을 줄 테니 이 마을을 떠나라!”고 그들은 소리 쳤습니다.
앙굴로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저는 그 마을의 프레펙토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는 게 최상책이라고 결정했지요. 프레펙토는 동정심을 보이면서 경찰을 시켜 주동자들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그는 ‘이런 짓을 하도록 일을 꾸민 사람이 누굽니까?’ 하고 그들에게 질문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가톨릭 사제라고 자백하더군요. 사제는 미사 때 설교를 하면서, 우리가 마을의 영적 복지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말을 전제로, 우리를 마을에서 내쫓으라고 교구민들을 부추겼던 것입니다. ‘그 사제라는 사람 머리가 돌았군!’ 하고 소리 치면서, 프레펙토는 이렇게 말했지요. ‘이제 집에 돌아가고 증인들을 건드리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유치장에 들어갈 테니까.’”
그 후 오래지 않아, 그 사제가 사기 행위에 연루된 사실이 밝혀졌고, 그런 경우에 으레 그렇듯이, 그는 단순히 다른 지역으로 전임되었습니다.
변화된 사람
그 옆 마을인 푸에블로야노에서는, 알폰소 세르파라는 사람이 아주 유명하였습니다. 그는 정치와 연계되어 있고, 술고래인데다가, 마약을 사용하고, 담배를 피우고, 여자들 꽁무니를 쫓아다니는가 에베소 4:22-24.
하면, 오토바이를 타고 두 개의 큰길을 마구 질주하면서 굉음을 내어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1984년에 진리의 씨가 그의 마음에 뿌려진 뒤로, 그 씨는 쑥쑥 자랐습니다. 알폰소는 큰 변화를 하고 새로운 인간성을 입어야 할 필요를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알폰소가 공개 집회에 처음 갔을 때, 특별 파이오니아들 외에는 참석한 사람이 자기 혼자였습니다. “다들 어디 있습니까?”라고 그가 물었습니다. 어쩌면 혼자뿐인 것이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그가 어찌나 질문을 많이 하는지 파이오니아들은 자정까지 성서로 대답해 주느라 바빴습니다. 알폰소는 그 후로 결코 집회에 빠지지 않았으며, 그의 아내 파울라도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외모를 깨끗이 하고 생활을 청산하였으며, 마침내 전도인의 자격을 구비하였습니다. 처음으로 봉사한 구역은 푸에블로야노의 바로 그 두 큰길이었습니다! 이제는 신사복에 넥타이를 맨 말쑥한 차림과 예의 바른 태도로, 그는 훌륭한 증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알폰소 그리고 그가 집회에 데려와 둘도 없는 친구라고 소개한 알시데스 파레데스, 이 두 사람은 가족들과 함께 푸에블로야노 회중에서 현재 장로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파울라의 친족 가운데 20여 명이 진리를 인식하도록 도움을 받아 왔습니다.
결국, 넘을 수 없어 보이던 진보의 장애물들이 극복되고, 1995년에는 회중이 산크리스토발에 10개, 메리다에 7개, 발레라에는 4개 있었습니다. 또한 안데스 지역 도처에는 더 작은 집단과 회중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자들이 필요한 쿠마나
수크레 주의 주도, 쿠마나 시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 된 라틴계 도시입니다. 쿠마나의 주민들에게 진리가 조직적인 방법으로 소개된 것은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도착한 1954년이었습니다. 그 후에, 선교인들인 로돌포 비테스와 그의 아내 베시가 도우러 왔습니다. 이윽고, 비테스 형제는 순회 활동에 임명되었지만, 그 임명 전에 그들은 이미 작은 강당을 세내어 청소하고 페인트칠을 한
뒤, 야구장에서 쓰다 버린 낡은 벤치들을 가져다가 들여놓을 수 있었습니다. 모일 장소가 생기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수가 신속하게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두가 여자와 아이들이었습니다.쿠마나의 선교인 그룹에 임명되어 있던 페니 개베트와 골디 로모시언은, 비테스 형제가 순회 활동을 위해 떠난 뒤에는 그 곳에서 인솔할 남자가 전혀 없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남자들은 도무지 연구나 모임에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페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지요. ‘우린 그 종교가 마음에 안 듭니다. 술에 취하거나 딴 여자를 갖지도 못하거든요. 우리 종교는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한단 말입니다.’ 심지어 70명 내지 80명이 참석하던 때에도, 남자는 겨우 대여섯 명뿐이곤 했어요. 그래서 여전히 자매들이 수시로 집회를 사회했지요.”
하지만 점차 남자들도 참석하기 시작하여 회중의 책임을 맡기기에 충분할 정도로 진보하였습니다. 곧 그 작은 왕국회관은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통풍이 잘 안 되고 초만원이라는 사실이 사람들이 오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선교인들은 집회 시간에 왕국회관이 한증탕 같다고 느꼈지만, 참석한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사랑에 감동되어 두 시간 동안 꼬박 앉아 귀기울였습니다. 이윽고, 여호와께서 길을 열어 주셔서 새 왕국회관을 짓게 되었습니다.
쿠마나에서 활동은 계속 성장하였습니다. 1995년에는 잘 발전하는 17개 회중에 좋은 소식의 전도인이 총 1032명 있었습니다.
언니의 발자취
페니 개베트가 1949년에 길르앗 학교에 가기 위해 캘리포니아에 있는 집을 떠났을 때, 여동생 엘로이즈는 겨우 다섯 살이었습니다. 페니가 하고 있는 일은 엘로이즈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엘로이즈는 ‘나도 크면 선교인이 될 테야’ 하고 생각하던 일을 기억합니다. 두 사람은, 1971년에 길르앗 졸업생이 된 엘로이즈가 쿠마나에서 페니의 선교인 짝으로 일하도록 임명되었을 때 참으로 기뻤습니다.
지금은 지역 감독자 로드니 프록터의 아내가 된 엘로이즈는, 언니와 함께 돌본 광대한 구역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쿠마나에서 2년을 일한 뒤, 언니와 나는 작은 읍들에 좀더 관심을 기울이기로 했어요. 우리는 지부의 허락을 받아, 쿠마나코아 읍과 마리기타르 읍에서 하루 종일 혹은 주말을 보내곤 했지요. 날씨가 매우 더웠고, 모든 곳을 걸어다녀야 했어요. 두 곳에 다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국경 지대의 촌락에 좋은 소식이 이르다
이 나라 동쪽에서는, 오리노코 강의 남쪽에 있는 수풀이 우거진 완만한 구릉들에 이어서 브라질과의 국경 북쪽으로 고원 지대가 펼쳐집니다. 이 고원은 사암(砂岩)으로 된 인상적인 메사(mesa)인데, 해발 2700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습니다. 인구가 희박한 이 지역은 베네수엘라에서 금과 다이아몬드가 가장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작은 촌락들에서 다른 종류의 보물을 찾는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 보물, 즉 “만국의 보배”입니다.—학개 2:7.
1958년에 일단의 증인 다섯 명이 소형 비행기를 타고 이 지역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인디언 주민들에게 잡지 수백 부를 전하였습니다. 근 20년 뒤, 여행하는 감독자 알베르토 곤살레스가 푸에르토오르다스에 있는 형제들과 함께 산타엘레나로 가서, 잡지 1000부를 전하였습니다. 당시 그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지만 어떤 남자가 발전기를 빌려 줘서 환등 사진을 보여 줄 수 있었는데, 500명의 관중이 구경하였습니다. 그 후, 1987년에 특별 파이오니아 두 사람, 로드리고 아나야와 아드리아나 아나야가 카라카스에서 왔습니다.
이 지역에 먼저 들어와 있던 종교 단체들이 놓은 기초 위에 증인들이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가톨릭교인들과 재림파 교인들은 인디언들에게 스페인어를 말하고 읽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또 그들은 발레라 성서 번역을 들여왔는데, 그 번역판에서는 한결같이 하느님의 이름 헤오바가 사용됩니다.
하지만 일부 인디언들은 가톨릭 교회가 성서에 있는 내용을 솔직하게 가르쳐 오지 않았음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한 인디언 부인은 형상에 관한 하느님의 견해를 배워 알게 되었을 때, 이렇게 탄성을 질렀습니다. “우리한테는 태양을 숭배하는 게 잘못이고 인디언의 우상이 거짓이라고 말했으면서, 정작 가톨릭 교회 자기네 형상으로 하느님을 불쾌하시게 하고 있다니! 당장 교회로 달려가서 나를 이토록 오랫동안 속여 온 사제를 몽둥이로 때려 주고 싶어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 부인을 설득하여 말리긴 했지만, 그의 말은 이 지역 많은 주민들의 감정을 표명한 것이었습니다.
볼리바르 주의 남쪽에 사는 인디언들은 우리 출판물을 무척 좋아합니다. 자연을 사랑하는 그들은 특히 하느님의 창조물이 나오는 총천연색 그림에 마음이 끌립니다. 출판물을 전하는 광경은 흥미롭습니다. 인디언은 양손으로 책을 받아들고, 만져 보고, 냄새를 맡고는, 책을 펴보는데, 천연색 삽화가 나올 때마다 나직하게 탄성을 내면서, 페몬어로 중얼중얼 찬사를 발합니다. 때때로 그들은 어찌나 열정적인지, 자기들이 파이오니아의 가방에서 서적을 꺼내 가지고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합니다. 그 곳 사람들은 아주 후대를 잘하며, 왕국 소식을 전하러 간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려는 일이 흔합니다.
특별 파이오니아가 도착하고 나서 처음으로 가진 기념식에 8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지금은 이 곳에 회중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뿌리 박힌 인디언의 전통 때문에 진보가 더딥니다.
아마존 강 유역의 신속한 반응
베네수엘라의 아마소나스 지역은 이 나라의 남쪽 중앙에 있습니다. 콜롬비아와의 국경 옆에 푸에르토아야쿠초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매혹적인 야생 동식물과 폭포가 많은 원시림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1970년에, 순회 감독자인 윌러드 앤더슨이 푸에르토아야쿠초를 방문했을 때, 그 곳에는 전도인이 7명뿐이었습니다. 그는 그 구역에서 훌륭한 반응을 얻었고, 어느 날 오전에는 서적 42권을 전하였습니다.
그 집단은 환등 강연을 위해 넉넉잡고 의자를 20개 정도 준비했는데, 뜻밖에 222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얼마나 놀랍고도 기뻤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은 푸에르토아야쿠초에 80여 명의 왕국 선포자로 이루어진 번창하는 회중이 있습니다.술리아 주에 있는 고아히로 인디언들
베네수엘라의 서쪽 끝에 술리아 주가 있습니다. 이 지역의 원주민은 고아히로 인디언들입니다. 라보키타와 같은 곳에서는, 그들은 갈대로 엮은 재료로 긴 받침 기둥 위에 집을 짓고 삽니다. 그들의 관습과 의상은 다채롭습니다. 남자들은 맨발로 말을 타고 다닙니다. 여자들은 여러 가지 색깔로 된 천막 모양의 긴 옷을 입으며, 샌들에는 털실로 만든 커다란 방울 술이 달려 있습니다.
양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이 고아히로 인디언 가운데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성서 소식에 대해 다소 주저하는 반응을 나타내는데, 그들이 그리스도교국의 종교 단체들에게 이용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선교인 프랭크 라슨은 고아히로 지방에 협회의 영화를 들여왔습니다. 그 영화가 오후 7시 정각에 상영된다고 광고했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중 음악인 살사가 담긴 낡은 음반을 틀어 놓은 뒤에는 260명이 나타나 영화를 즐겁게 관람하였습니다. 또 한번은, 순회 감독자인 마리오 야이소의 연설을 들으려고 600명 이상이 모인 적도 있습니다.
이민 온 사람들이 성서 진리를 열심히 전하다
베네수엘라에서 6명 가운데 1명은 외국 태생입니다. 특히 1950년대에는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아랍 국가들에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민 왔습니다. 흔히 그들은 거의 무일푼으로 왔지만, 많은 경우에 해를 거듭하면서 번영하는 사업체를 장만하였습니다. 이들은 매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의 생활은 물질적인 이익에 대한 관심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 결과, 왕국 소식을 그들에게
전하기가 어려운 때가 많습니다. 물론, 이민 온 사람들 가운데는 남아메리카의 여러 나라, 특히 콜롬비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이 곳 베네수엘라에는 매우 오랫동안 신권적인 봉사를 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증인들 가운데 빌리우스 투마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리투아니아에서 1923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유럽에서 히틀러 정권의 암흑기를 생존한 투마스 형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 베네수엘라로 이주하였습니다. 투마스 형제는 1993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가 회중 장로로 봉사한 라빅토리아 시에 있는 형제들에게 충실한 봉사의 훌륭한 모범이 되었습니다.
카나리아 제도 태생인 레미히오 아폰소는 베네수엘라에서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합니다. 그는 이민 온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았습니다. 그는 가족의 일부 식구들은 관심이 없어도 바로 그 가족의 다른 식구들이 성서 진리를 몹시 듣고 싶어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예로 쿠마나에서, 사업을 운영하는 아랍어를 하는 한 부부는 귀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딸이 잘 들었습니다. 레미히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딸은 성서를 갖다 달라고 부탁했지요. 갖다 주겠다고 했더니, 과연 약속을 지킬까 의아해하더군요. 우리는 날짜와 시간을 정했고, 제가 바로 그 시간에 맞춰 갔더니, 그 딸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성서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을 받았고, 제가 시작한 연구를 한 자매가 계속하도록 마련했지요.
그 후 얼마 안 되어, 구이리아 회중을 방문하고 있을 때, 왕국회관 맞은편에 있는 가게 입구에 앉아서 녹색 표지로 된 책을 읽고 있는 남자를 보았는데, 그리로 오라고 손짓을 하더군요. 아랍어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혹시 자기가 읽고 있는 책이 우리들의 책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아랍어로 쓰여 있긴 했지만, 저는 그 책이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임을 알 수 있었지요. 그 남자는 고국에서 그 책을 선물로 받았다고 설명하면서 아무에게도 빌려 주거나 팔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스페인어도 읽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진리」 책을 제공했더니 기꺼이 받았으며, 우리는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 남자는 그 주에 세 번 집회에 왔고, 「파수대」 연구 때 대답까지 했지요.”2년 뒤에 마라카이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서, 가방을 든 남자가 레미히오 형제에게 인사를 하며 자기를 알아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구이리아의 그 사람입니다”라고 하면서, “침례를 받았고 지금은 저도 성서 연구를 세 건 사회하고 있지요”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콜롬비아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서 레미히오 형제가 연설하고 난 뒤, 한 젊은 여자가 그에게 달려와 기쁨의 눈물을 글썽이며 자기가 쿠마나에서 그의 증거를 받은 소녀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자기도 역시 침례받은 증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참으로 큰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외국에서 와 베네수엘라에 몸담고 살면서 전파 활동의 진보를 목격한 또 다른 예는 디아 야스베크입니다. 그는 레바논에서 부모, 형, 누이들과 함께 촌락과 도시들에서 전파하던 일을 기억하는데, 그의 아버지는 레바논에서 1930년대에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아버지 미첼이 베네수엘라에 도착한 지 두 달 만에 사망한 것은 야스베크 가족에게 심한 타격이었지만, 디아 야스베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은 진리 안에서 생활을 계속하여, 카라카스 북부 회중의 집회에 참석하였지요. 저는 16세에 침례를 받고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가정의 경제적인 파탄으로 겨우 3년 만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중단해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28년간 은행 업계에서 세속일을 한 뒤, 그는 자기가 퇴직하여도 아내와 세 자녀 및 모시고 있는 어머니의 생활에 어려움을 주지 않을 유리한 입장에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파이오니아로 등록하였습니다. 야스베크 형제는 현재 지부 위원으로 봉사합니다. 근 40년을 돌이켜 보면서, 그는 베네수엘라에서 1956년에
열린 지역 대회를 기억합니다. 그 때, 처음으로 참석자 수가 1000명을 넘었습니다. “지금은 지역 대회의 총 참석자 수가 10만 명을 넘습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여행하는 감독자들의 도움
1940년대 말, 도널드 백스터가 지부 사무실의 유일한 성원이고 전국에 회중이 예닐곱 개뿐이었을 때, 백스터 형제는 할 수 있는 대로 이러한 그룹들을 방문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1951년에 21세인 루벤 아라우호가 길르앗에서 돌아오자, 전국 도처의 회중과 외딴 집단들을 방문하도록 그가 임명되었습니다. 그 해에 회중 수는 12개로 늘었습니다. 루벤은 자동차가 없어서 버스나 택시로, 때때로 멀리 떨어진 곳을 방문할 때는 비행기나 작은 배(찰라나스)로 여행하곤 하였습니다.
루벤은 콜롬비아와의 국경에 근접한, 타치라 주의 루비오 부근에 살던 「파수대」 예약 구독자를 방문한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농장 주인은 자기는 스위스 사람이라 스페인어를 읽을 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사람에게 말해 보시구려, 성서를 좋아하니까” 하고 그가 말하였습니다. 루벤은 그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에게 이야기하니까, 자기 친정 어머니를 불러왔는데 81세 된 노인이었습니다. 그분은 내가 가진 책들을 보더니, 혹시 이 활동이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The Divine Plan of the Ages) 책과 관련이 있느냐고 물으셨지요. 그분의 눈빛이 번뜩이더니 흥분하시더군요. ‘그럼, 러더퍼드 씨를 아신다는 말씀이오?’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연로한 부인은 독일어밖에 몰랐으므로, 따님이 스페인어로 통역해 주었지요. 그분은 1920년에 책을 받은 이래로 읽고 또 읽고 하셨다는 겁니다. ‘창조 사진극’도 보셨고,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강연도 들으셨다고 합니다. 12년 전에 스위스에서 베네수엘라로 오면서 증인들과 연락이 끊겼던 것이지요. ‘여러분이 무척이나 그리웠다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분은 독일어로
왕국 노래를 불러 기쁨을 나타내셨고, 저도 쾌히 합세하여 같은 노래를 스페인어로 불렀지요. 우리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노래했습니다.”길르앗 제19기 졸업생인 키스 웨스트와 로이스 웨스트는 15년 동안 순회 활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들이 접한 상황들은 늘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포르투게사 주의 몬테오스쿠로를 방문했을 때가 바로 그러한 예입니다. 키스는 이렇게 상기합니다. “그 전날 밤에 내린 폭우로, 우리는 원하는 만큼 차를 타고 갈 수가 없어서 차에서 내려 강까지 걸어갔지요. 구두를 벗고 강을 거슬러 올라간 다음에는 산을 타야 했는데, 드디어 작은 왕국회관이 나왔습니다. 거기에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더군요. 하지만 우리를 데리고 간 형제는 ‘다들 올 테니 걱정 마세요’라고 하더니, 즉시 타이어의 금속 테를 쾅쾅 두드렸습니다. 마침내, 40명가량이 모였습니다. 나는 흠뻑 젖은 채 진흙투성이 바지 차림으로 연설을 했습니다. 강에서는 추웠다가 회관을 향해 산에 오를 때는 더웠고 또 젖은 바지를 입은 채 연설을 한 탓으로, 심한 근육통이 생긴 모양입니다. 그 후 얼마 동안은 왕국회관의 연단을 오르내릴 때 부축을 받아야 했고 전파할 때도 자주 쉬어야 했지요.”
숙소의 상태도 가지각색이어서 여행하는 감독자들에게 흔히 도전이 됩니다. 많은 경우에 수도 시설이 없습니다. 지붕이 골철판으로 되어 있어, 실내 온도가 섭씨 30도에서 40도를 오르내립니다. 창문과 문에 다는 방충망이 거의 보급되어 있지 않아서, 방에서—때로는 침대에서까지—그 곳의 온갖 벌레와 함께 지내야 합니다. 그리고 베네수엘라 가정들이 즐기는 느긋하고, 개방적이고, 서로 잘 어울리는 생활 방식 때문에, 사생활에 좀더 익숙해 있는 외국인들은 때때로 적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인들의 다정함과 후대는 뛰어나며, 여행하는 감독자가 도착하면 환영하는 표현의 하나로 “우스테드 에스타 엔 수 카사”(마음 푹 놓고 지내세요)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협회의 활동 사진과 환등 사진을 베네수엘라
전국에서 상영하였습니다. 베네수엘라인들은 영화 관람을 대단히 즐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회 감독자는 언제나 많은 관중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닥에도 앉고, 안에 서 있기도 하고, 밖에서 창문을 통해 보기도 합니다. 관심을 가진 한 남자는 기꺼이 자기 집 한쪽 벽면을 하얗게 칠하여 영사막으로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카루파노 근처의 한 산간 마을에서는 친절한 한 상점 주인이 개인 시설의 전기(그 일대에서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전기)와 관람석—그의 투계장—을 쓰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폭죽을 쏘아올려 산지의 주민들이 내려오게 하였습니다. 85명이 내려왔는데, 당나귀를 타고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당나귀를 탄 것이 다르긴 했지만, 그것은 차에 탄 채로 관람하는 드라이브인 야외 극장이었습니다!마라카이보에 사는 글라디스 게레로는 여행하는 감독자와 그 아내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느낍니다. 여행하는 감독자의 아내인 낸시 백스터는 어느 날 젊은 글라디스와 함께 푼토피호 읍에서 야외 봉사를 하다가 그 아가씨에게 언어 장애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글라디스는 아버지 집안의 유전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조롱을 많이 당했지만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백스터 자매가 시간을 바쳐 특정한 단어를 정확하게 발음하고 연습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자, 글라디스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백스터 자매가 인내한 보람이 있었어요. 이제 저는 제대로 발음할 수 있답니다.” 글라디스의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글라디스의 영적 성장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여호와를 신뢰하고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다
현재 베네수엘라에는 1만 1000명이 넘는 파이오니아가 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은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사랑에 찬 격려를 받고 시작하였습니다.
페드로 바레토도 그런 격려를 받았습니다. 1954년에 지부 감독자는 페드로 및 다른 세 소년에게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라고 권하였습니다. 18세인 페드로가 가장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하였습니까? “나는 어리고 경험이 없었고, 빨래나 다림질을 할 줄도 몰랐어요. 실은, 제대로 목욕할 줄도 몰랐습니다!”라고 하며 페드로는 웃습니다. 그는 바로 그 전해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지부 감독자와 한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눈 뒤, 페드로는 결심을 했습니다. 네 소년은 트루히요 주의 주도인 트루히요 시에 임명되었습니다. 그 곳의 주민들은, 특히 그 당시에는, 전통에 얽매여 있었고 매우 종교적이었습니다. 이 네 파이오니아는 거기서 기초를 놓는 활동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들이 전파한 사람들 가운데는 우체국장과 트루히요 법원 판사를 비롯하여 저명한 시민들이 있었습니다.하루는 중앙 광장에서, 네 파이오니아가 가톨릭 사제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 사제는 관영 신문에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통렬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부정확한 기사를 쓰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군중이 모여들자, 사제는 이 소년들이 도시의 평화를 교란하고 모든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러니까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는 군중에게 주민들의 믿음은 가톨릭 교회에 속해 있음을 기억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페드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 복잡하고 시끄러운 틈을 타, 사제는 낮은 목소리로 나를 위협하며 욕설을 퍼붓더군요. 그래서 나는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사제가 방금 한 말을 들으셨습니까? ··· 사제라는 분이 말입니다!’라고 하면서 사제가 한 말을 되풀이해 주곤 했지요. 그러자 사제는 이를 악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썩 꺼지지 않으면 발로 차버리겠다!’ 그래서 나는 사제에게 발을 사용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우리가 떠나겠다고 말했지요.”
이 이야기가 앞서 언급한 판사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 판사는 파이오니아들을 칭찬하면서 그들이 하고 있는 일에 매우 탄복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네 젊은이가 전파한 진리의 소식은 트루히요에서 뿌리를 내려, 1995년에는 이 도시에 회중이 두 개 있었고, 주위의 거의 모든 읍과 마을에도 회중과 집단이 있었습니다.
마태 6:33) 어느 달엔가, 그들의 특별 파이오니아 수당이 예상한 때에 도착하지 않아 돈이 다 떨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찬장은 말 그대로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고픔을 잊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하였습니다. 밤 10시에 누군가 현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그들과 성서 연구를 하는 남자였습니다. 그는 늦은 시간에 죄송하다고 하면서, 방금 여행에서 돌아왔는데 자기 생각에 자매들이 사용할 만한 것이 있어서 가져왔다고 하였습니다. 다름 아닌 과일, 채소 등이 담긴 식료품 한 상자였습니다! 잠잘 생각이 달아나면서, 갑자기 부엌이 떠들썩해졌습니다. 아르민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날 밤 그 남자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에게 오게 한 것은 여호와임에 틀림없어요. 그가 다음날 연구를 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때까지 기다리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테니까요.” 아르민다는, 지금은 카비마스에서 정규 파이오니아로 여전히 봉사합니다.
페드로의 여동생인 아르민다 로페스는, 1950년대 말에 산페르난도데아푸레에서 다른 세 자매들과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는 동안, 여호와께서 왕국을 첫째로 구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대로 그들에게 생활 필수품을 항상 공급해 주신 일을 기억합니다.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들에게 지나치게 큰 문제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나이, 건강 쇠약, 반대하는 가족 등과 같은 문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되지 않습니다. 청소년들이 파이오니아 대열에 많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1995년 초에 12세에서 15세 사이의 정규 파이오니아가 55명이었지만—그들이 이 봉사 분야를 독점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남편이 증인이 아닌 많은 자매들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과 집안일을 돌봄으로써, 주부로서의 책임을 소홀히 하는 일 없이 야외 봉사 모임에 매일 나가고 성서 연구를 사회합니다.
가정을 가진 기혼 형제들도 활동을 간소하게 조절하고 파이오니아 시간표에 성공적으로 맞춰 나갑니다. 다비드 곤살레스는
1968년에 독신 청년으로서 파이오니아 천직에 들어섰습니다. 나중에, 아내 블랑카와 함께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다가 자녀를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부부와 딸 하나가 정규 파이오니아입니다. 그는 세 자녀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 장로로 일하며, 정기적으로 대리 순회 감독자로 봉사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그는 불필요한 물질적인 여유를 희생하고 훌륭한 계획표를 가짐으로써 그렇게 해올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에게는 또한 아내의 전폭적인 협조가 있습니다.그런가 하면, 황혼기에 접어든 분들, 즉 상황이 달라져서 이제 파이오니아 봉사를 고려해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자녀를 다 키운 부모와 세속 일에서 은퇴한 사람이 포함됩니다. 또한 엘리자베트 파스벤더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1914년에 태어난 엘리자베트는 전후의 독일에서 침례를 받고 믿지 않는 남편과 함께 1953년에 베네수엘라로 이민을 왔습니다. 남편이 1982년에 사망한 때까지 32년 동안 심한 반대를 견디었습니다. 72세의 나이에, 여호와를 더 온전히 섬기는 데 아무 방해가 없는 엘리자베트는 정규 파이오니아로 등록함으로써 오랜 염원을 이루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성공적인 파이오니아 영에 분명히 기여하는 것 한 가지는, 일반적으로 형제들 대다수 가운데서 물질주의적인 생활 방식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형제들은, 집에 사치품을 들여 놓거나 비싼 휴가를 보낼 돈을 벌려고 버둥대는 일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이런 가외의 재정적 부담이 없으므로, 여호와의 백성의 더 많은 수가 파이오니아 특권이 손 닿는 곳에 있음을 발견합니다.
경작되고 있는 비옥한 밭
대체로 베네수엘라인들은 너그러운 사람들이며 성서를 존중하고, 드물게 예외가 있긴 하지만 보통 하느님을 믿는다고 공언합니다. 지난 세월 가톨릭 교회에게 당했던 속박이 약해지면서, 진실하면서도 만족을 얻지 못한 많은 교구민들은 자기들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켜 줄 다른 곳을 찾고 있습니다.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는 일이나 시시때때로 밝혀지는 사제들의 개인적인 비리는, 교회에 대한 신뢰를 조금도 높여 주지 않았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 모든 요인들 덕분에 이 곳에서는 성서 연구를 시작하기가 비교적 쉽습니다. 1995년 8월의 시점에서, 베네수엘라에서 7만 1709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11만 건이 넘는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습니다. 정기적으로 전파하고 성실하게 관심자를 재방문하는 전도인이라면, 발전하는 성서 연구를 시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연구생들은 집회에 참석하면서 여호와의 의로운 요구 조건에 따르려고 빨리 변화합니다.
1936년에는 베네수엘라에서 활동을 보고하는 좋은 소식의 선포자가 2명뿐이었습니다. 1980년에 전도인 수는 1만 5025명이었습니다. 15년 후에는 왕국 선포자가 총 7만 1000명을 넘었습니다. 1980년에는 전국에 단지 186개의 회중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937개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의 수는 계속 늘고 있습니다.
집을 지을 때
최근에 전도인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남에 따라, 많은 왕국회관은 집회에 오는 사람들에 비해 비좁게 되었습니다. 땅 값이 특히 시내에서는 대단히 비쌉니다. 현재 140개의 회중이 있고 땅 값이 매우 비싼 카라카스에서는, 많게는 다섯 개의 큰 회중이 초만원을 이루면서 같은 회관을 사용하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일요일이 되면, 한 회중이 집회를 마치고 나오고 다른 회중이 들어가면서, 형제
자매들이 서로 인사하느라고 쉴 새 없이 악수하고 입맞추는 모습은 이웃들에게 흥미 있는 구경거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회를 보는 동안 서 있어야 하고, 환기가 잘 안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왕국회관을 더 지을 필요가 절박하므로, 베네수엘라의 지부 왕국회관 기금의 도움으로, 이 필요에 부응하려는 노력이 시작되고 있습니다.재력이 제한되어 있음에도, 형제들이 관대한 반응을 보여 마란다 주의 쿠아에 첫 순회 대회 회관을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 건축 위원회에서 봉사한 디아 야스베크는 자세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쿠아의 대회 회관 건축은 첫해가 지난 뒤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골조를 세우고 아직 할 일이 많은데, 충분한 기금을 구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1982년 10월 12일에, 우리는 지방 장로들과 봉사의 종들과 만나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제 가서 회중 형제들의 생각을 타진해 달라고 부탁했지요. 그 결과, 석 달 후에 놀랍게도 150만 볼리바르의 헌금이—그 당시로는 상당한 액수가—들어왔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냉방 장치와 안락한 좌석을 포함하여 그 공사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그 대회 회관은 현재 그 회관을 사용하고 있는 11개의 순회구에게 참으로 축복이 되었습니다.” 베네수엘라에는 지금 대회 회관이 2개 있는데, 다른 하나는 야라쿠이 주의 캄포엘리아스에 있습니다.
더 나은 지부 시설
지부가 돌보는 일을 지금은 6명의 장성한 형제들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테오도로 그리싱거, 키스 웨스트, 스테판 요한슨(현재 지부 조정 위원), 에두아르도 블랙우드(네 명의 지역 감독자들 중 한 사람으로도 봉사함), 디아 야스베크(정규 파이오니아이며 가족이 있음), 라파엘 페레스(순회 감독자)입니다.
야외 활동이 증가함에 따라 지부 시설을 확장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노어 형제와 헨첼 형제가 1953년 11월에 베네수엘라를
방문했을 때, 노어 형제는 선교인 집과 지부 사무실을 위해 협회의 소유지를 매입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카라카스의 조용한 주택지인 라스아카시아스에서 커다란 새 이층 집을 발견하였습니다. 지부와 선교인 가족은 1954년 9월에 킨타 루스로 이사하였고, 지부는 거기서 22년 동안 운영되었습니다.왕국 전도인 수가 1만 3000명 이상으로 늘었을 때 지부는 다시 새 시설로 옮겼는데, 이번에는 근처에 있는 아라과 주의 라빅토리아 시였습니다. 이 멋진 새 복합 건물은 이전 지부에 비해 굉장히 커 보였고, 과연 그 많은 공간을 다 사용하게 될 것인지 상상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1985년에는 새로 증축하여 봉헌했는데, 이전 건물이 벌써 너무 좁아졌기 때문입니다.
몇 년 후 지부가 또 너무 비좁게 되어, 1989년에는 새 지부 시설 건축을 위해 고급 택지 14헥타르를 매입하였습니다. 준비 작업이 이미 끝났고, 가까운 장래에 이 새 시설이 완공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오십시오”
사도 요한이 계시의 책 기록을 끝내 갈 무렵,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포함시키게 하셨습니다. “영과 신부가 ‘오시오!’ 하고 계속 말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듣는 사람은 ‘오시오!’ 하고 말하십시오.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오십시오.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마시십시오.” (계시 22:17) 그 자애로운 초대가 베네수엘라 사람들에게 이제까지 약 70년 동안 발해져 왔습니다. 그 초대는 이전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전국 방방곡곡에 미치고 있으며,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범죄의 증가도 전파 활동을 늦추지는 못하였습니다. 거의 예외 없이, 주택과 아파트의 현관 문에는 쇠창살이 설치되어 있으며, 때로는 굵은 사슬이나 커다란 자물쇠가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대낮에도 길에서 강도를 만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특히 카라케뇨스(카라카스 주민들)는 금 장신구나 비싼 시계를 차고 거리에 나가지 않으려고 조심합니다. 흔히 강도들이 노리는 대상은 방심하고 있는 관광객들입니다. 형제들은 도시 빈민가에서 전파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그룹의 전도인 모두가 총부리 앞에서 시계와 돈과 보석을 털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의 열심은 이런 위험한 지역에서도 조금도 식지 않았고 철저한 증거가 행해지고 있습니다.참을성 있고 끈기 있게 좋은 소식을 선포함으로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유익을 얻었습니다. 마라카이보의 한 공학 기사와 그 가족은, 이웃집의 우호적인 증인들이 그들과 함께 성서를 토의하려고 애쓰는데도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14년 동안 그 두 가족 사이의 대화는 정중한 인사를 넘어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986년 어느 날, 증인의 다섯 살배기 아들이 담 너머로 이웃집의 어린 딸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화가 끝날 때, 남자 아이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아빠가 네 아빠한테 「창조」 책을 드리면, 여호와께서 우릴 만드셨다는 걸 네 아빠도 알게 되실 텐데.” 이튿날 아침, 혹시 여호와께서 다시 이웃에게 접근해 보길 원하시는가 싶어서, 아버지는 옆집으로 가서 아이들이 나눈 이야기를 설명하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제 아들을 대신하여 이 「창조」 책을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놀랍게도, 이틀 후에 이 부부는 증인의 집에 찾아와 이전의 뻣뻣한 태도를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그 책이 훌륭하다고 감사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고, 지금은 이 부부와 큰 아이 둘이 헌신하고 침례받은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바르키시메토에서, 아나는 집에 찾아오는 증인들을 늘 쫓아버리곤 했습니다. 아나는 마리아 리온사 교단의 열성적인 신자였고, 따라서 영매술 행위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기를 속박하는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아나는 자기의 생활 방식을 바꾸게 도와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여호와의 증인인 에스테르 헤르마노스가 그 집에 찾아왔습니다. 아나로서는 자기가 한 기도와 증인의 방문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의아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나는 정기적인 성서 연구를 받아들이고,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으며, 곧 자기 집에 세들어 사는 부도덕한 사람들을 내보내고, 집안에서 영매술과 관련된 모든 물건을 없애버렸으며, 1986년에 여호와께 헌신하였고, 마침내 진리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자유를 맛보았습니다!에르난은, 영매술 의식을 행하고 성적 부도덕을 용납하며,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을 북돋기 위해” 종교 의식 도중에 다량의 술을 사용하는 단체에 속해 있었습니다. 에르난이 처음 왕국회관에 갔을 때는, 제공되는 내용을 잘 듣고 난 다음 곧장 자기 교회로 가서 비슷한 연설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대회에 참석하고 난 뒤로는 배우는 것을 좀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81년 어느 일요일에 교회에 도착해 보니, 그들이 영적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말이, 그 여자가 사탄 마귀에게 사로잡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두 번 다시 그 곳에 가지 않았습니다. 이듬해에 그는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에르난과 그의 아내와 장남은 지금 정규 파이오니아입니다.
마르티네스의 가정은 파탄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항상 이혼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자녀들은 이 상황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였습니다. 아내는 위안을 얻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다가, 전에 성서에 관해 이야기해 주던 여호와의 증인 한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알게 되었고, 남편 몰래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한편, 직장에서는 남편의 비서가 남편에게 증거하였고 장로 한 사람이 그와 연구하도록 마련되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남편은 자기가 성서 연구에서 배운 것들을 아내에게 알려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아내 역시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를 연구하면서 다른 왕국회관의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순간부터,
가족이 함께 성서를 연구하고 집회에 참석하는 일은 그 가정 생활의 정기적인 부분이 되었습니다. 파탄 지경에 이르렀던 그 가정은 지금 행복하게 연합되어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베아트리스는 성서를 이해하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습니다. 결혼을 한 뒤 남편과 함께 카라카스로 이사하였고, 거기서 상류 사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 수도에서 한 노인과 사귀게 되었는데, 그는 교회의 기본 가르침에 동의할 수 없어서 사제직을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그 노인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완전히 잠기는 것만이 유효한 침례지요. 여호와의 증인이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얼마간 세월이 흐른 후, 남편과 이혼한 베아트리스는 개인적인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그는 하느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1984년 12월 26일—에는 특히, 기도하느라고 여러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짜증이 나서 아파트 문의 내다보는 구멍에 눈을 대니, 가방을 든 두 사람이 보였습니다. 방해받아 화가 난 그는, 하녀인 체하며 문에 대고 소리 쳤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안 계셔서 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그 부부는 떠나기 전에 문 밑으로 강연 초대장을 밀어 넣었습니다. 베아트리스가 집어 보니, “당신의 성서를 알아보십시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전직 사제였던 노인의 말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이 방문객들이 그가 말한 사람들, 바로 여호와의 증인들이 아닐까? 그들의 방문이 전날 밤에 한 기도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문을 열어 보았으나 그들은 가고 없었습니다. 베아트리스는 아래층을 향해 소리 쳐서 그들을 불렀으며, 앞서 보인 행동에 대해 사과하고 안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즉시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고, 얼마 후 베아트리스는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평생의 소원을 성취하여 마침내 행복해진 베아트리스는, 지금 다른 사람들이 성서를 알도록 돕는데 생활의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축복으로, 회중들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왕국회관들은 가득 차 초만원입니다. 새로운 회중들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왕국 선포자들의 수가 불어나고 있고 전 시간 봉사자 대열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념식과 대회의 많은 참석자 수는, 이 사물의 제도의 끝이 오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더 가담할 것임을 예고해 줍니다.여호와의 증인들은 베네수엘라의 도시와 촌락, 평지와 산지에서 증거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그 뛰어난 성과를 거두면서, 사도 바울의 이러한 말씀을 생각합니다.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고린도 첫째 3:7.
[186면 전면 삽화]
[194면 삽화]
루벤 아라우호, 처음으로 침례받은 증인이 된 베네수엘라인 중 한 사람
[199면 삽화]
1949년에 뉴욕을 떠나는 아이네즈 버넘, 루비 도드 (현재는 백스터), 딕시 도드, 레이철 버넘. 배가 부두를 떠나기 전, 모두는 원기 왕성하였다!
[200, 201면 삽화]
베네수엘라 밭에서 여러 해 동안 봉사해 온 선교인들 중 일부:
(1) 도널드 백스터와 루비 백스터, (2) 딕시 도드, (3) 페니 개베트, (4) 릴라 프록터, (5) 랑나 잉월드슨, (6) 머빈 워드와 에블런 워드, (7) 빈 채프먼과 펄 채프먼[207면 삽화]
킨타 루스
[208면 삽화]
위: 밀턴 헨첼이 클루브 라스 푸엔테스에서 열린 대회에서 연설하는 모습, 1958년
아래: 네이선 노어(왼쪽)와 통역자인 테오도로 그리싱거, 1962년
[227면 삽화]
1988년에 특별 프로그램을 위해 7만 4600명 이상이 발렌시아의 투우장을 가득 메웠다
[236면 삽화]
순회 및 지역 감독자로 봉사해 온 사람들 중 일부 (아내들 포함):
(1)키스 웨스트와 로이스 웨스트, (2)알베르토 곤살레스와 술라이 곤살레스, (3)카시미로 시토, (4)레스터 백스터와 낸시 백스터, (5)로드니 프록터와 엘로이즈 프록터, (6)레미히오 아폰소[244면 삽화]
파이오니아로 오랫동안 봉사한 기록을 가진 사람들 중 일부:
(1) 딜리아 데 곤살레스, (2) 에밀리오 헤르마노스와 에스테르 헤르마노스, (3) 리타 파이네, (4) 앙헬 마리아 그라나디요, (5) 나이이베 데 리나레스, (6) 이르마 페르난데스, (7) 호세 라몬 고메스[252면 삽화]
위: 라빅토리아에 있는 지부 사무실
지부 위원회(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디아 야스베크, 테오도로 그리싱거, 스테판 요한슨, 키스 웨스트, 에두아르도 블랙우드, 라파엘 페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