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헝가리
때는 1991년 7월 25일, 이 날은 헝가리의 왕국 활동에 있어서 기뻐할 만한 날이었습니다. 이 날은 워치 타워 협회에서 훈련받고 헝가리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된 첫 선교인이 도착한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라슬로 샤르쾨지와 그의 아내 커렌은 오후 1시 3분에 부다페스트 남쪽의 페리헤지 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샤르쾨지는 봉사 훈련 학교를 졸업한 뒤 토론토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샤르쾨지 형제로서는 27년이 넘어서 고향에 돌아온 것입니다.
오늘날 헝가리는 유럽 중남부에 있는, 인구 1000만이 넘는 나라입니다. 인구의 95퍼센트 이상이 마자르족(헝가리인)의 후손이며, 이들 중 약 3분의 2가 로마 가톨릭교인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가톨릭교가 뿌리를 내리게 된 시기는 천여 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로마 가톨릭교가 들어오고 나서 오래지 않아, 교황 실베스테르 2세에 의해 이슈트반(스티븐)이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그 후 헝가리는 레그눔 마리아눔([동정녀] 마리아의 왕국)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헝가리 사람들이 모두 로마 가톨릭교인은 아닙니다. 1590년에 헝가리어로 출간된 최초의 완역본 성서는
프로테스탄트교인인 가슈파르 카롤리가 번역한 것입니다. 여러 차례 개정된 이 번역판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들어 있으며, 이 번역판은 현재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헝가리어 성서입니다. 정부는 가톨릭교인이 아닌 사람도 있다는 사실과 그들의 영향력을 인정하여 1868년에 종교 교육과 관련하여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용하는 법을 시행하였습니다. 1989년에 헝가리 정부는 여호와의 증인에게까지 이 권리를 확대 적용하였습니다. 이제 여호와의 증인 선교인이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헝가리 사람들에게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헝가리에서 성서 진리가 퍼지다
라슬로 샤르쾨지와 커렌 샤르쾨지가 도착하기 93년 전에, 「시온의 파수대」(1898년 5월 15일 호[영문])에는 캐나다의 한 형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렸습니다. “우리는 자기 동포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고국인 헝가리로 떠나는 친애하는 한 형제의 안녕을 빕니다. 고국에 있는 대학에서 여러 해 동안 교수로 일한 그는 헝가리어뿐 아니라 라틴어와 독일어에도 능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주님의 도구가 되어, 선택된 일부 사람들을 발견하여 인장을 찍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의 활동은 분명히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5년 뒤 찰스 테이즈 러셀과 그의 여행 동반자들이 취리히를 방문하였을 때, 그들은 다른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헝가리에서 온 동료인 믿는 사람 두 명을 만났습니다. 그에 더해, 1905년의 독일어판 「시온의 파수대」에 헝가리 형제들이 보낸 여러 통의 편지가 실린 것을 보면, 일부 사람들이 독일을 통해 성서 서적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08년에는, 언드라슈네 베네데크—당시 성경 연구생으로 알려졌던 여호와의 증인이 된 겸손한 헝가리인 여성—가 하느님의 말씀에서 배워 알게 된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기 위해 헝가리 동부의 허이두뵈쇠르메니로 돌아왔습니다. 4년 뒤에는
또 다른 성경 연구생 두 명이 미국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러셀 형제의 일부 공개 강연에 참석하여 하느님과 그분의 목적에 관한 진리를 배워 알게 되었습니다. 러셀 형제는 그러한 강연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면, 청중 가운데서 전에 몇 차례 참석한 것을 본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으레 다가갔습니다. 그는 이렇게 묻곤 하였습니다. “어디 출신이십니까? 국적은 어디신가요? 친족에게로 돌아가 그들에게 진리를 전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이 두 성경 연구생 가운데 한 사람인 카로이 서보는 당시 헝가리에 속하였던 머로시바샤르헤이(현재는 루마니아의 트르구무레슈) 시로 돌아왔습니다. 요제프 키시라는 다른 한 형제는 그 도시 근처에서 서보 형제와 함께 활동하면서 서적을 배부하다가, 후에 고향인 어버러(현재는 슬로바키아의 오보린)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의 활동은 성과가 있었습니다. 서보 형제의 가족이 진리를 받았으며, 후에는 그 지역에 사는 더 많은 사람이 진리의 편에 서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가담하였기 때문입니다.
북아메리카의 헝가리인 밭
언드라슈네 베네데크, 카로이 서보, 요제프 키시 그리고 캐나다에서 온 교수는, 북아메리카에서 진리를 배운 다음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헝가리로 돌아온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헝가리인 밭이 잘 개간되고 있었음을 여실히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1909년 8월 15일 호 「파수대」(영문)는 미국 “중동부 주(州)들의 모든 주요 도시에 마자르어를 읽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형제들에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따라서 형제들에게 헝가리어 「만민의 설교단」(Peoples Pulpit) 전도지를 주문하여 무가로 배부하도록 격려가 베풀어졌습니다. 이듬해 말까지 약 3만 8000부가 미국, 캐나다, 멕시코에서 배포되었습니다. 그 이후 여러 해에 걸쳐 발행된 그 밖의 헝가리어 서적 가운데는 「성경
연구」, 「창조 사진극 시나리오」(Scenario of the Photo-Drama of Creation), 「파수대」, 「황금 시대」가 있었으며, 소책자로는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가 있었습니다. 후에 협회는 헝가리어로 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좋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1930년에는 다섯 개의 방송국에서 27개의 헝가리어 프로그램을 내보냈습니다.헝가리에서 장애를 극복함
1911년에 유럽에서 강연 여행을 하면서 적어도 십 개 국을 방문한 러셀 형제는, 부다페스트에 들렀을 때 “예언 속의 시오니즘”이라는 강연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러셀 형제가 수행하는 일을 결사 반대하던 뉴욕에 사는 한 유대인 라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있는 자기 동료들을 부추겨 그 모임 계획을 방해하였습니다.
후에 카로이 서보는 러셀 형제에게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헝가리에서의 활동은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활동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소수를 제외하고는 동료들이 몹시 가난한데다가 전파 활동도 훨씬 소규모적으로 수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현재는 여러 주(州)에 42개의 작은 반(班)이 있습니다. ··· 5월 11일과 12일에는 소규모 대회를 열었는데, 약 10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
여러 교파의 교역자들과 사제들이 우리의 활동을 법적으로 중단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법정에 소환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행로에 대해 잘 변호할 수 있었습니다.”
진리가 수도에 이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 부다페스트에서 한 환경 미화원이 쓰레기를 치우다가 그 속에서 성경 연구생의 책자 한 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책자에는 머로시바샤르헤이 시의 주소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책자를 아내에게 보여 주었고 아내는 무척 즐겁고 흥미 있게 읽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즉시 편지를 써서
서적을 좀더 요청하였습니다. 서적이 왔고 후에는 어떤 사람이 개인적으로 그의 아내를 방문하였습니다.그 결과, 얼마 안 되어 작은 연구 집단이 형성되었으며, 이 호르바트흐 부인은 자기 집을 그 연구 집단의 모임 장소로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이 곳은 티서칼만 광장(현재는 쾨즈타르셔샤그 광장)에 있었는데, 부다페스트에 있는 성경 연구생들의 최초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1923년에 호르바트흐 자매가 사망한 후에도, 그가 살던 아파트 1층은 계속 형제들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임시 사무실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키시 형제와 서보 형제가 투옥되다
여호와께서 키시 형제와 서보 형제 그리고 다른 형제들의 열심을 축복하신 결과,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질 무렵에는 수도 외곽의 여러 읍—헝가리 동부의 허이두뵈쇠르메니, 버거메르, 벌머주이바로시 그리고 헝가리 북부의 너지비슈뇨—에 연구 집단이 있었습니다. 머로시바샤르헤이에 집단이 하나 있었고 콜로주바르(클루지)에도 집단이 하나 있었는데, 이 두 도시 모두 현재는 루마니아에 속해 있습니다.
키시 형제와 서보 형제의 열렬한 활동으로 인해 화가 난 교직자들은 정부를 부추겨 그 형제들을 탄압하게 하였습니다. 두 사람 다 체포되어 5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1919년의 혁명 기간에 그들은 석방되었으며, 즉시 회중간의 연락망을 구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연락망을 구축하는 일은 더 힘들어지게 되었는데, 1920년에 트리아농 조약이 체결되는 바람에 헝가리의 많은 영토가 강탈당하여 주변 국가들의 손으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클루지에서 전후에 활동이 조직되다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미국에서 성서 진리를 배워 알게 된 더 많은 사람들이 헝가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친형제간인
요제프 쇼오시와 발린트 쇼오시가 있었는데, 그들은 1918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1919년에 고국에 돌아온 즉시, 그들은 협회 출판물들을 사용하여 좋은 소식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노력을 축복하셨음이 분명하였습니다. 티서에슬라르에 회중이 하나 형성되었으며, 그 후 이웃 마을들에서도 회중이 속속 생겨났습니다.쇼오시 형제들이 헝가리에 도착한 이듬해에 협회는 여초브 B. 시머를 루마니아로 파견하였습니다. 클루지에 도착한 지 며칠 뒤에 그는 카로이 서보를, 그 다음에는 요제프 키시를 만났습니다. 헝가리와 루마니아 두 나라에서의 활동을 재조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사무실로 사용할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였습니다.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및 알바니아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이 이 사무실의 감독을 받게 되었습니다.
클루지에서 지부 사무실로 사용할 적당한 시설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1924년에 협회는 그 곳에 사무실과 인쇄 공장을 건축하는 일에 착수하였습니다. 그 해 말, 「파수대」에서는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클루지에 있는 협회 인쇄 공장에서 올해 22만 6075부의 서적이 생산되었으며, 12만 9952부가 이미 배부되었습니다. 그에 더해 「파수대」와 「황금 시대」도 두 가지 언어[루마니아어와 헝가리어]로 각각 17만 5000부 이상 배부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어즈 우트」(길)라는 잡지는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1924년] 현재 루마니아에는 그와 같이 현대식 장비를 갖춘 다른 인쇄 공장은 없다. ··· [성경 연구생]에 비하면 우리의 배부 활동은 ··· 정말 보잘것없다.”
사랑이 많고 용기가 있었지만 미움을 받다
그러나 헝가리 내에서 왕국 소식을 전하는 일은 루마니아에 인쇄 공장을 가동할 준비를 갖출 때까지 발전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1922년에 헝가리에서 주의 죽음의 기념식에 모인 사람은 160명이었습니다. 같은 해에, 협회의 지시 아래 「세계 지도자들에 대한 도전」(A Challenge to World Leaders) 결의문을 20만 부 인쇄하는 마련이 있었으며, 형제들은 공식 인가를 받아 특정한 날에 그 결의문을 배포하였습니다. 그 결의문은 많은 관공서와 고위 관리들에게 우편으로 전해졌습니다.이 기간에 헝가리 형제들에게 훌륭한 모범을 세운 한 형제는 죄르지 키시였습니다. 그는 몸집이 크고 사랑이 많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그는 중립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그는 종신형으로 감형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더해진 생명의 날들을 선용하여, 많은 회중을 세우도록 도왔습니다. 또한 순례자 즉 성경 연구생들을 위한 여행하는 연사로 봉사하였습니다.
키시 형제는 두려움 없이 성공적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교직자들뿐 아니라 국가 경찰들도 키시 형제를 특히 미워하였습니다. 체포되어 학대를 당하는 때도 많았지만, 그에게 형을 선고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키시 형제는 법을 잘 알고 있었으며, 제기된 고발에 대하여 스스로 능숙하게 변호하였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은 그에게 좀더 조심하라고 간곡히 권하였지만, 그는 계속 전국을 여행하면서 회중들을 방문하여 다른 형제들을 영적으로 강화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에 잘 어울리는 좋은 모범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부드럽고, 가르칠 자격을 갖추고, ··· 호의적인 성향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들을 온화하게 교훈해야 합니다.”—디모데 둘째 2:24, 25.
1931년 7월 20일, 형제들은 키시 형제가 루마니아 국경 근처에 있는 데브레첸의 번창하는 회중을 방문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는 영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은 그가 적들에게 살해되어 하늘의 상을 받으러 ‘집으로 갔’다고 결론지었습니다.—요한 14:2.
더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서 오다
1920년대 전반에 걸쳐, 미국에서 성경 연구생이 된 사람들이 복음 전파의 영을 가지고 계속해서 헝가리로 돌아왔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최초로 헝가리 동부의 허이두소보슬로로 가서 후에 순례자로 봉사한
야노시 버르거가 있었으며, 헝가리 북부의 너지비슈뇨로 가서 거기서 열심히 복음 전파에 참여한 요제프 톨디도 있었습니다.1910년에 러셀 형제의 강연에 참석하여 진리를 배워 알게 된 야노시 도베르는, 헝가리 서부의 절러우드버르노크로 가서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전파 활동에 착수하였습니다. 아주 짧은 기간 내에 집단이 하나 형성되었으며, 이 집단은 그의 열심 있는 인도 아래 주위의 모든 크고 작은 마을에서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야노시는 종종 심한 반대에 직면하였으며, 때로는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의 아내는 이렇게 묻곤 하였습니다. “여보. 우리가 왜 고국인 헝가리로 돌아왔나요? 전파하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그런 말을 들으면 야노시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곤 하였습니다.
안팎에서 반대가 일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활동이 더 많은 지역으로 퍼지면서 열심을 더해 감에 따라, 반대 역시 격렬해졌습니다. 1925년에 정부는 협회 서적의 배부 인가를 취소하였습니다. 형제들에게 영적 양식을 계속 공급하기 위해 클루지에서 발행하는 「파수대」지의 제목을 「그리스도인 순례자」(Christian Pilgrim), 「복음」(Gospel) 등으로 주기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을 반대하는 교직자들의 행동 역시 격렬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 사제인 졸탄 니스토르는 「천년기파 즉 성경 연구생」(Millennialists or Bible Students)이라는 소책자를 편집하였는데, 그 책자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러셀주의는 붉은 공산주의보다 더 악랄하고 혐오스럽다. ··· 러셀주의는 무정부 상태를 요구하는 외침을 종교라는 옷으로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셀주의는 혁명, 교회에 대한 박해 그리고 교직자를 탄압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하느님의 의도라고 설명한다.”
종종 교회들은 경찰이 형제들을 잔혹하게 다루도록 선동하였습니다.
그러한 잔혹성은 카로이 서보가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에게 남아 있던 흉터에서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이러한 박해에 더하여, 사탄과 그의 악귀들은 내부의 어려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클루지에 있는 여초브 B. 시머가 이기적인 목표를 추구하고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의 중요성을 망각하기 시작하였으며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끌고 싶어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커다란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얼마 후, 워치 타워 협회의 마그데부르크 사무실(독일)이 헝가리에서의 활동을 감독하게 되었으며, 협회는 러요시 서보에게 부다페스트로 가서 전파 활동과 「파수대」 번역 일을 조직하도록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후 헝가리어 「파수대」가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을 위한 잡지」(A Magazine for Those Who Believe in the Blood of Christ)라는 제목으로 마그데부르크에서 인쇄되었습니다.
독일 형제들의 도움
1931년에 세계 전역의 성경 연구생들은, 하느님의 말씀 가운데 명시된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여호와의 증인으로 알려지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43:10) 헝가리에서 발행된 「천국—세계의 희망」 소책자와 「설명」(Explanation) 소책자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을 채택한 이유에 대해 논하였으며, 그 이름과 일치하게 여호와께 그리고 그분의 왕국과 관련된 그분의 목적에 주의를 집중시켰습니다.
「1933 연감」(영문)에서는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천국」 소책자가 나오자, 헝가리의 수도에서 대대적인 증거를 하기 위한 특별한 기회가 마련되었습니다. 독일에 사는 90명의 동료들이 시간에 맞춰 그 곳에 도착하였으며, 5일간의 일정에 따라 「천국」 소책자 12만 5000부와 전도지 20만 부를 전하였습니다.”
「천국」 소책자를 배부한 일은 독일 증인들이 헝가리 형제들을 도운 많은 경우 중 하나입니다.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나서 여호와의 증인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많은 형제 자매가 독일을 떠나야만 하였으며 일부는 헝가리로 이주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불가리아에서 이미 일 년간 생활하였으며 나중에 통치체 성원이 된 마르틴 포에칭거와 그의 아내가 된 게르트루트 멘데가 있었습니다.게르하르트 체니그 역시 독일어를 사용하는 증인이었는데, 당시 서보 형제와 함께 일하였습니다. 체니그 형제는 체력이 강하지도 않았는데, 특히 벌라주라고 불리던 형사들에게 잔혹한 취급을 당하였습니다. 하인리히 드벵거는 독일 지부에서 직접 파견한 형제였는데, 그 역시 부다페스트의 형제들에게 애정 어린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온화함과 선함과 장성된 교훈으로 그는 헝가리 형제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독일의 파이오니아들은 그를 가리켜 “파이오니아의 아버지”라고 입을 모으는데, 그가 파이오니아들에게 사랑 넘친 돌봄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에 파시즘이 헝가리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독일 형제들은 강압에 못이겨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헝가리 형제들에 대한 박해는 점점 더해 갔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경찰들에게 잔혹한 취급을 받은 다음 장기형에 처해졌습니다.
조심스럽게 열린 모임들
1930년대 말에는 비밀리에 작은 집단으로만 모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대개 구할 수 있는 서적이라고 해야 회중당 「파수대」 한 부가 전부였으며 형제들은 이것을 돌려 가며 읽었습니다.
티서버슈바리 출신인 페렌츠 너지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 당시의 「파수대」 연구는 오늘날과 달랐습니다. 참석할 예정이었던 사람들이 다 오면 문을 잠갔습니다. 때로는 기사 하나를 고려하는 데 여섯 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저는 다섯 살가량 되었고 동생은 저보다 한 살 어렸지만, 우리는 작은 의자에 앉아서 그 장시간의 연구에 귀기울이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정말 즐거웠습니다. 예언에
관해 연구한 내용 가운데 어떤 것은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부모가 우리를 양육한 방식이 정말 효과가 있었던거지요.”현재 80대이며 부다페스트에서 여전히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는 에텔 케치케메티네 자매는, 티서커라드에서 형제들이 점심 휴식 시간에 밭에서 모임을 가지곤 하였다고 회상합니다. 형제들은 번갈아 가면서 증인들의 밭에서 함께 일하였기 때문에 관리들은 그러한 모임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가을과 겨울에는 자매들이 종종 함께 모여 앉아 실을 자았으며, 형제들이 그들과 함께하였습니다. 경찰이 그들의 활동을 조사하였지만,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함께 모일 기회를 마련할 수 없을 때에는, 아침 일찍 혹은 밤늦게 다른 곳에서 모이곤 하였습니다.
재치 있는 선포자들
문 앞에서 전파하는 일이 금지되자 증인들은 성서 진리를 전하기 위한 다른 방법을 모색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휴대용 축음기를 사용하는 것은 비교적 생소한 일이었고 이 축음기를 틀어 주는 것을 금하는 법도 없었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형제들은 집주인에게 소식을 녹음한 음반을 틀어도 괜찮겠는지 물어보곤 하였습니다. 허락을 받으면 러더퍼드 형제의 강연 음반 중 하나를 들려 주었습니다.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 형제들은 러더퍼드 형제의 강연이 들어 있는 헝가리어 음반을 제작하였으며, 휴대용 축음기와 큰 스피커가 딸린 녹음 재생기를 모두 활용하였습니다.
이렇게 녹음된 강력한 성서 소식에 대하여, 후에 케치케메티네 자매의 딸과 결혼한 야노시 러코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저는 샤토럴려우이헤이에서 음반을 하나 듣는 행복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 음반의 이러한 문구가 제 뇌리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군주 정치, 민주 정치, 귀족 정치, 파시즘, 공산주의, 나치즘 및 그와 같은 지배를 위한 모든 노력은 아마겟돈에서 사라질 것이며 이내 잊혀질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 진리를 강력하게 제공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1945년 당시, 제게 매우 인상적이었던 그 강연은 마치 예언처럼 들렸습니다.”어려움이 계속되다
박해가 점점 더 맹렬해졌습니다. 한 가톨릭 사제가 협회의 부다페스트 사무실을 방문하여 자기가 얻을 수 있었던 정보를 모두 가져간 뒤부터, 신문에서 비방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설교단과 라디오에서는 경고가 흘러나왔습니다. 헝가리 전역에서 서적이 압수되었고 증인들은 잔인하게 구타당하였습니다. 키슈바르더에서는 상당수의 증인들이 마을 회관으로 끌려갔습니다. 한 사람씩 별도의 방으로 끌려가 잔혹하게 구타와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보고하면서 「1938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영문)에서는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큰 행렬을 벌이는 일요일인
‘부활절’. 이 부활의 날에 그들은 무엇을 기념한 것입니까? 로마 가톨릭의 종교 재판의 부활을 기념한 것입니까?”교직자들은 자기들의 요구를 들어 주도록 관리들을 설득하지 못하자, 다른 방법을 동원하였습니다. 「1939 연감」(영문)은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동료들은 무자비한 사람들에게 종종 심하게 구타당하거나 학대당하였는데, 그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하도록 강요당하였으며 그런 일을 한 것에 대해 흔히 보수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일부 지역에서 지방 교직자들이 하느님의 자녀들을 거짓 고발하는 대가로 이런 사람들에게 각각 담배 10킬로그램씩을 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금지령이 내려지다
1938년, 독일 마그데부르크의 협회 사무실에서 5년간 일한 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에서 봉사해 온 언드라시 버르트허는, 체코슬로바키아와 카르파토우크라이나가 헝가리에 합병되는 바람에 헝가리 구역에 있게 되었습니다. 버르트허 형제는 즉시 헝가리의 협회 일을 돌보도록 임명되었습니다. 독일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이미 나치 정부 아래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집회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 후 1939년 12월 13일에는 헝가리에서도 증인들의 활동이 금지되었습니다.
그 해, 헝가리에 두 개의 수용소가 세워졌는데, 하나는 부다페스트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다른 하나는 유고슬라비아 국경에서 26킬로미터 떨어진 헝가리 남서부의 너지커니저 읍에 세워졌습니다. 얼마 안 있어, 이 수용소는 당국이 믿을 수 없는 자로 낙인찍은 사람들, 즉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로 비난받던 범죄자, 공산주의자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부다페스트의 중앙 경찰국장은 수사반을 조직하여 여호와의 증인의 “지도부”를 파헤쳐 이 불법 단체의 운영과 외국과의 관계를 밝혀 내려고 하였습니다. 체포와 신체적·정신적 학대와 투옥이 잇따랐습니다.
마태 10:16) 「1940 연감」(영문)에서는 한 파이오니아 자매가 어떻게 조심성을 나타냈는지에 대한 하나의 예를 알려 줍니다. 그 자매는 검은색 스카프를 하나는 머리에 쓰고 하나는 어깨에 둘렀습니다. 마을 한편에서 전파 활동을 마치고 난 뒤였는데, 한 집주인 남자가 두 명의 헌병을 데리고 자기를 향해 오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자매는 골목으로 몸을 피한 다음 검은색 스카프 대신 다른 색 스카프를 하고는 침착하게 두 헌병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헌병들은 자매에게 검은색 스카프 차림의 여자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으며, 자매는 한 사람을 보았는데 아주 황급히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헌병과 밀고자는 그 여자를 잡으러 서둘러 달려갔으며, 그 동안 이 증인은 유유히 집으로 갔습니다.
이 모든 일들로 인해 헝가리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중단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은 모든 전도인에게 “뱀과 같이 조심스럽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하라고 하신 예수의 교훈에 유의할 필요가 있음을 분명히 일깨워 주었습니다. (충실한 한 파이오니아 자매는 교직자들의 압력을 받은 당국자들이 어떻게 자기를 체포하였는지 후에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습니다. 한동안 그 자매는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으며 한 달에 두 번 경찰에 보고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매는 경찰서를 나오자마자 전파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구역으로 달려가곤 하였습니다. 그 자매가 꾸준히 증거를 계속하자, 경찰은 그 자매를—처음에는 5일 동안 다음에는 10일, 15일, 30일 동안 그리고 40일 동안 두 번, 그 다음에는 60일 동안, 그리고 100일 동안 두 번, 결국엔 8년 동안—가두었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에게 성서를 가르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처럼 그 자매는 사람들보다 통치자로서 하느님께 순종하였습니다.—사도 5:29.
버르트허 형제가 전적으로 번역 일에 종사하게 되자, 1940년에
협회는 지구의 종(순회 감독자)으로 일하던 야노시 콘라드에게 헝가리에서의 활동을 인도하도록 맡겼습니다.늘어난 수용소
1940년 8월, 트란실바니아(루마니아)의 일부를 헝가리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에 이 지역에서 박해가 격렬해졌습니다. 트란실바니아의 클루지에 또 하나의 수용소가 세워졌으며, 노소를 막론하고 수백 명의 형제 자매가 이 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얼마 뒤, 그 곳에 있던 증인들은 믿음을 버리고 이전의 종교로 복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매우 잔혹한 취급을 당하였습니다. 이런 소식이 수용소 밖에 있는 증인들에게 전해지자, 전국에 있는 충실한 증인들은 연합하여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 클루지 수용소에 대한 공식 감사 결과 부패가 드러났으며, 따라서 지휘관과 경비병 대다수가 전출되었고 일부는 투옥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형제들의 고통이 다소 덜어졌으며, 이에 대해 형제들은 여호와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한편, 헝가리 남서부의 너지커니저 근처에 있는 한 수용소에는
부부들이 함께 수용되었기 때문에, 집에 남아 있는 증인들이 그들의 자녀들을 돌봐 주었습니다. 이 모든 수용소에서 여호와의 백성은 압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버릴 것을 선언하는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과 모든 관계를 끊고 국가에서 승인한 이전의 신앙으로 복귀할 것을 약속하는 문서에 서명하기만 하면 석방될 것이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1941년 6월 27일에 헝가리가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자, 여호와의 증인들은 한층 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군복무를 거부하는 일과 관련하여 많은 시련이 뒤따랐습니다.
전국의 종이 체포되다
여호와의 증인을 다루는 수사반이 점점 더 활동적이 되면서 많은 형제들이 가택 수색을 당하였습니다. 콘라드 형제는 자주 소환되었고, 가택 수색을 당하였으며, 일 주일에 두 번 중앙 경찰국에 출두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1941년 11월에 그는 모든 지구의 종(순회 감독자)을 모아 놓고 자기가 머지않아 체포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였으며, 따라서 자기가 체포될 경우 지구의 종 가운데 한 사람인 요제프 클리녜츠즈가 활동을 감독하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바로 다음 달인 12월 15일에 콘라드 형제는 체포되었습니다. 며칠 동안 그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야만적인 방법으로 잔혹한 취급을 당하였는데, 지구의 종들과 파이오니아의 명단을 털어놓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고문하던 자들은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침내 콘라드 형제는 지방 검사에게 넘겨졌습니다. 이런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지 2개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형기를 다 마쳤음에도 그는 석방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라는 명목으로 키슈터르처에 있는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두 명의 전국의 종
한편, 1942년에 스위스에 있던 중부 유럽 사무실에서는 헝가리의 전파 활동을 감독하도록 데네시 펄루베기를 정식으로 임명하였습니다. 펄루베기 형제는 본래 기질이 온화하고 양보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진리에 대해 몸소 열심을 나타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는 트란실바니아에서 교사로 일한 적이 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루마니아에서 활동을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콘라드 형제가 체포될 경우 당분간 활동을 책임지도록 위임을 맡은 지구의 종, 클리녜츠즈 형제는 펄루베기 형제에게 그 임명이 주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클리녜츠즈 형제는 펄루베기 형제가 이 어려운 직무에 대처해 나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클리녜츠즈 형제는 언제나 열심과 용기가 있는 형제였으며, 기질이 온화하다기보다는 본래 단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야외 봉사에 열심이었으며, 전국에 있는 형제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형제들은 두 편으로—펄루베기 형제에 대한 협회의 임명을 인정하는 편과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감독할 책임은 단호한 사람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는 클리녜츠즈 형제의 의견에 동조하는 편으로—나뉘게 되었습니다.
일부 회중은 동시에 두 명의 지구의 종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은 펄루베기 형제가 보낸 사람이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클리녜츠즈 형제가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애석하게도 그러한 상황에서,
두 지구의 종은 형제들을 격려한 것이 아니라, 종종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 때문에 충실한 형제들이 몹시 마음 아파한 것도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얼러그의 경주마 마구간
1942년 8월에 당국자들은 헝가리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근절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한 목적으로 당국자들은 열 군데의 집합소를 준비하여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증인들을 모두 모아 놓았습니다. 심지어 아직 침례받지 않았지만 여호와의 증인과 접촉하였다고 알려진 사람들도 이 곳으로 끌려 왔습니다.
부다페스트와 그 인근의 증인들은 얼러그에 있는 경주마 마구간으로 끌려갔습니다. 형제 자매들은 마구간 벽을 따라 양편에 짚을 깔고 그 위에서 밤잠을 잤습니다. 밤에 단지 몸을 돌려 눕고 싶을 때에도 경비병들에게 정식으로 허락을 받아야 하였습니다. 낮에는 기다란 나무 의자에 한 줄로 앉아 벽을 마주보고 있어야 하였고 그 동안 경비병들은 총검을 들고 마구간을 왔다갔다하였습니다.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마구간 옆에는 좀더 작은 방이 있었는데, 거기서 형사들은 친형제간인 이슈트반 유하스와 언털 유하스의 지시 아래 “심문”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형제들을 고문하였는데, 어떤 것은 입에 담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몹시 상스러웠습니다.
자매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한 자매의 경우, 비명을 지르지 못하도록 그 자매의 양말로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그런 다음 자매를 바닥에 엎어 놓고는, 한 형사가 그 위에 앉아 자매의 다리를 꽉 붙잡고 있는 동안 다른 한 형사가 발바닥을 무자비하게 때렸습니다. 내리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를 형제들이 있는 방에서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얼러그 “법정”
“심문”은 11월 말경에 끝났습니다. 그 달에 얼러그의 한 식당 댄스 홀에서 임시 법정이 열렸는데, 그 곳에서 하인리히 베르트
사령관의 일반 참모들로 이루어진 법정이 여호와의 증인 64명과 관련된 재판을 다루었습니다. 이 법정에 들어섰을 때, 증인들은 가택 수색에서 압수된 서적, 성서, 타자기, 축음기, 음반 등을 보았습니다.기소된 64명 중 어느 누구도 군(軍) 검사의 심문을 받거나 심지어 그들을 변호하도록 법정에서 선임한 변호인단과 한마디 말도 나누지 못한 채 재판이 열렸습니다. 모든 피고에 대한 심문이 단 몇 시간 만에 끝났으며, 사실상 증인들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한 자매는 무기를 들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자매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여자이기 때문에 무기를 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자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남자라면 무기를 들겠는가?” 그 자매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남자가 되면, 그 때 대답하겠습니다!”
얼마 뒤에 형이 선고되었습니다. 버르트허 형제, 펄루베기 형제 그리고 콘라드 형제에게는 교수형이 내려졌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그 외 형제들은 2년에서 15년간 감화원에 수감되도록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 날 오후 형제들은 부다페스트, 머르기트 거리에 있는 육군 교도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세 형제는 즉시 처형될 것으로 예상하였지만, 수감된 지 꼭 한 달 만에 변호사가 찾아와 그들의 사형 선고가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다른 아홉 군데의 집합소에서도 얼러그 마구간에서 했던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심리가 진행되었습니다. 유죄 판결을 받은 형제들은 마침내 헝가리 북부의 바츠에 있는 감화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교도관으로 일하는 수녀들과 함께
자매들은 대개 부다페스트의 콘티 가(街)에 있는 정보부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3년 형 이상을 선고받은 자매들은, 슬로바키아 국경 근처에 있는 마을인 마리어노스트러(우리의 성모 마리아)의
여자 교도소로 이송되어, 거기서 수녀들의 감시를 받게 되었는데, 수녀들은 우리 자매들을 정말 혹독하게 다루었습니다. 다른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증인들도 이 곳으로 이감되었습니다.수녀들이 세워 놓은 교도소 규칙에 순응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지하 감옥에 감금되었습니다. 이러한 규칙들 가운데는 의무적으로 교회에 참석하고 가톨릭식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찬양을” 하고 인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를 받을 경우 수감자들은, “하느님이 보답해 주시기를” 하고 감사를 표해야 하였습니다.
물론 우리의 충실한 자매들은 이러한 규칙들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가기를 거절할 때마다 자매들은 24시간 동안 지하 감옥에 감금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경우에 우리 자매들은 “하느님이 보답해 주시기를” 하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증인들은 또한 소포를 받는 일, 친족들과의 서신 왕래, 면회와 같은 일상적인 권리도 모두 박탈당하였습니다. 좀더 심한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타협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충실한 증인들을 학대하는 일이 중단되었습니다.
보르 강제 수용소
1943년 여름, 헝가리의 모든 교도소에 있는 49세 이하의 형제들은 한 시골 마을로 모아지게 되었고 군복무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또다시 잔혹한 취급을 받았지만 충실한 형제들은 계속 확고한 태도로 거부하였으며, 그들에게 제공된 제복도 거절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중 아홉 명은 군인 서약을 하고 제복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타협하였다고 해서 그들이 구제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아홉 명의 타협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거기 모인 160명은 모두 보르(세르비아)에 있는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2년 뒤, 그 타협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은 손에 소총을 든 채 새파랗게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형 집행조로 선발되었는데,
사형수들 가운데 충성스러운 증인인 자기 친동생이 있었던 것입니다.수용소로 가는 도중이든, 수용소 내에서든 형제들은 몹시 가혹한 취급을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수용소장은 형제들에게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도록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한번은 일부 군인들이 강제로 형제들로 하여금 양심을 범하는 일을 하게 하려고 고문을 가하였을 때, 소장이 사과하기까지 하였습니다.
70대의 나이에 여전히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형제인 카로이 아프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깨뜨리려는 얼마의 시도가 있었지만, 우리는 확고함을 유지하였습니다. 한번은 콘크리트로 총 받침대를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그 작업을 위해 형제 두 명이 선택되었습니다. 형제들은 거절하면서 자기들이 수감된 이유는 전쟁과 어떠한 관련도 맺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장교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처형시키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중 한 형제가 어느 병사에게 끌려 산 뒤편으로 갔고, 단발의 총성이 들렸습니다. 장교는 남은 형제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 네 형제는 죽었다. 그러나 너에게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주겠다.’
그 형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제 형제가 믿음을 위해 죽을 수 있었다면, 저라고 왜 못하겠습니까?’ 장교는 다른 병사에게 ‘총살한’ 형제를 데려오라고 명령하고는 그 형제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이렇게 용감한 사람은 살 자격이 있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형제들을 놓아 주었습니다.”
형제들은 자기들이 살아 있는 이유가 여호와의 증인으로 봉사하기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보르의 수용소에는 다른 재소자들도 수천 명이나 있었으며, 증인들은 많은 재소자들에게 여호와와 그분의 왕국에 대하여 철저히 증거하였습니다. 이 어려웠던 여러 해 동안 여호와의 증인은 이 나라 전역에서—교도소, 강제 수용소 또는 그 밖의 어느 곳에서든—기회를 선용하여 증거하였습니다. 증인들은 어디서든 친절한 성품을 소유한 사람들을
만났으며, 심지어 저명한 관리들 가운데도 증인들이 용감하게 인내하는 것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부 관리들은 증인들을 이렇게 격려해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부디 믿음 안에서 계속 인내하기를 바라오.”증인들이 보르의 위험하고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이미 11개월을 보냈을 무렵, 게릴라들이 이 마을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수용소를 옮길 것이라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계획에 따라 출발하기 이틀 전, 도보로 여행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증인들은 즉시 두 바퀴 수레와 네 바퀴 수레를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출발할 즈음에는 꽤 많은 수레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장교들과 군인들과 다른 수감자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한 일을 보고 경탄하였습니다.
형제들은 (3000명의 유대인 수감자들과 함께) 길을 나서기 전에, 각각 빵 0.7킬로그램과 생선 통조림 다섯 통을 받았습니다. 이 여행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습니다. 하지만 관리들이 주지 않은 것을 여호와께서 공급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형제들이 지나가던 지역에 살던 세르비아 주민들과 헝가리 주민들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들은 형제들에게 기꺼이 자기들이 줄 수 있는 여분의 빵을 주었습니다. 형제들은 이 빵을 모두 모아 휴식 시간에, 한 사람 앞에 한입밖에 돌아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 조각씩 똑같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수백 명의 수감자들이 도중에 독일군에게 넘겨져 처형당하였지만, 여호와의 보호의 손길은 그분의 증인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충절이 시험받다
1944년 말엽, 소련군이 가까이 다가오자, 수용소에 있던 증인들은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으로 이동하도록 요구되었습니다. 건강한 남자들이 모두 전쟁터에 나가 있음을 알게 된 증인 형제들은 그 지역에 사는 여자들을 위해 힘든 농사일을 도와 주었습니다. 형제들은 머물게 된 곳에서 증거할 기회를 포착하였습니다.
1945년 1월, 수용소장은 증인들에게 일할 수 있는 남자들은 모두 야노슈하저 마을 회관에 보고하라고 알렸습니다. 거기서 한 독일 장교가 참호를 파기 위해 그들을 마을 외곽으로 인솔하였습니다. 처음에 선택된 여섯 명의 형제가 그 일을 거부하자 장교는 즉시 “이들을 처형시켜!” 하고 명령하였습니다. 여섯 명의 형제가 나란히 서 있는 가운데, 헝가리 군인들은 소총을 들고 서서 발사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머지 76명의 형제는 그 광경을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한 헝가리 군인이 지켜 보고 있던 형제들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이렇게 강력히 권하였습니다. “저리로 가서 당신들도 연장을 던져 버리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이 쏠거요.” 형제들은 즉시 그의 조언에 따랐습니다. 독일군 장교는 너무 당황하여 처음에는 어이없다는 듯이 그냥 쳐다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이들도 일하기를 원치 않는건가?” 버르트허 형제는 독일어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 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과 반대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양심적으로 그리고 능률적으로 모든 일을 수행해 왔으며,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음을 여기 있는 중사님은 보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장교님이 시키려고 하는 이 작업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곳에 있던 한 형제는 후에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장교는 우리 모두를 체포한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정말이지 우스웠어요. 아무튼 우리 모두는 이미 기결수였으니까 말입니다.”
다른 충절 고수자들
위에서 언급한 이 형제들처럼, 전국에 걸쳐 수백 명의 다른 형제 자매들도 다른 많은 강제 수용소와 교도소에서 믿음을 위해 동일한 싸움을 하였습니다.
1944년 봄, 많은 유대인이 너지커니저에 있는 수용소에서 독일의 수용소들로 이송되어 갔을 때, 그들 가운데 에버 바스와 올거
슬레진게르라고 하는 두 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있었는데, 각각 20세와 45세로서 유대계 태생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열심 있고 마음이 순결한, 여호와 하느님의 숭배자였습니다. 바스 자매는 몹시 가냘픈 아가씨였는데, 체포되기 전에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두너베체에서 야외 봉사를 하던 중, 경찰에게 체포되어 마을 회관으로 끌려갔습니다.마을 이장의 선동으로 바스 자매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였습니다. 바스 자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머리카락을 모두 깎이고, 벌거벗긴 채로 십여 명 되는 경찰관 앞에 서 있어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심문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은 헝가리에서 우리의 지도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하였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에게 지도자가 없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경찰봉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스 자매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배신하지 않기로 단단히 마음먹었습니다.
이어서 바스 자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 짐승 같은 사람들이 내 손과 발을 등 뒤로 함께 묶어 놓고는, 한 경찰관만 제외하고 모두 나를 겁탈하여 욕보였습니다. 어찌나 단단히 묶었던지 3년 뒤에 스웨덴으로 갔을 때에도 손목에 여전히 흉터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몹시 학대하였기 때문에 아주 심한 상처들이 나을 때까지 2주 동안 지하실에 숨겨 놓았습니다. 제 몰골이 말이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저히 보일 수 없었던 거지요.” 바스 자매는 너지커니저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거기서 슬레진게르 자매와 함께 아우슈비츠로 보내졌습니다.
바스 자매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올거와 함께 있으면 안심이 되었습니다. 올거는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도 유머감을 잃지 않았어요. 멩겔레 박사는 새로 도착한 사람들 가운데서, 건강한 사람과 일하기에 부적합한 사람을 선별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앞에 있던 사람들은 가스실로 보내졌습니다. 우리 차례가 되자 멩겔레는 올거에게 ‘몇 살이오?’ 하고 물었습니다. 올거는
대담하고도 유머감 넘치는 눈빛으로 ‘스무 살입니다’라고 대답하였지요. 실제로는 그 나이의 배는 되었습니다. 하지만 멩겔레는 웃으면서 오른편으로 가게 하였고 올거는 살게 되었답니다.”그들의 옷에 유대인임을 표시하는 노란색 별 표시가 달려 있자,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주장하면서 항의하였습니다. 노란색 별 표시를 떼어 내고는 여호와의 증인임을 표시하는 보라색 삼각 표시를 달아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비록 심하게 매를 맞긴 하였지만, 그들은 이런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우리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그래도 우리는 언제까지나 여호와의 증인으로 남아 있을 테다.”
나중에 그들은 베르겐벨센 강제 수용소로 옮겨졌습니다. 바로 이 무렵 수용소 내에서 발진티푸스가 유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슬레진게르 자매는 병이 깊어져 다른 많은 환자들과 함께 수용소에서 옮겨졌으며 다시는 영영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이 지역은 영국군에 의해 해방되었습니다. 바스 자매는 병원으로 실려 갔고, 그 후 스웨덴으로 이주하여 거기서 신속하게 형제들과 연락을 취하였습니다.
헝가리에서 투옥되었던 많은 형제들이 나중에 독일로 강제 이송되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전쟁이 끝난 뒤에 헝가리로 돌아왔지만, 모두가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데네시 펄루베기의 경우, 그는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에서 다하우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던 중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30년 이상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죽기까지 충실을 유지한 증인들
1944년 가을에 너지커니저 수용소가 해체되자, 아직 독일로 강제 이송당하지 않은 증인들은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선이 가로막고 있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였으므로 증인들은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주변 농장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던 중 1944년 10월 15일, 독일 나치당의 지원을
받은 닐러슈케레스테시 파르트(십자 화살당[黨])가 정권을 잡자, 즉시 젊은이들을 징집하기 시작하였습니다.얼마 안 있어 형제들은 중립 문제로 또다시 체포되었습니다. 젊은 형제 다섯 명은 체포되어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쾨르멘드로 가게 되었는데, 그 지방 학교 관사에서 군법 회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맨 먼저 재판을 받은 사람은 베르털런 서보였으며, 그에게는 총살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처형되기 전에 그는 가슴 뭉클하게 하는 고별 편지를 썼는데, 「여호와의 증인—하나님의 왕국 선포자」 책 662면에서 그 내용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른 두 명의 형제 즉 야노시 존도르와 언털 회니시가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들 역시 확고함을 유지하였으며, 또한 처형당하였습니다.
샨도르 헬메츠지도 같은 곳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그 날 정해진 시간에 마당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처형 장면을 지켜 보도록 일과표를 조정하였던 것이지요. 그렇게 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제 너희들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겠지.’ 사랑하는 우리 형제들이 생명을 잃고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 보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다시 감방으로 끌려갔습니다.
10분쯤 후에 우리는 밖으로 불려 나왔으며, 형제들의 피를 닦아 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들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야노시 존도르의 얼굴은 평상시와 전혀 다름이 없었습니다. 미소 짓는 다정하고 온화한 그의 얼굴에서 두려움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또 다른 형제인 20세의 러요시 델리는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샤르바르의 장터에서 공개적으로 교수형을 당하였습니다. 1954년에, 전직 장교였던 한 목격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그 곳에는 서쪽으로 피난 가고 있던 민간인과 군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샤르바르를 지날 때, 우리는 장터에 교수대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수대 밑에는 매우 밝고 평화로운 얼굴을 한 앳된 청년이 서 있었습니다. 한 구경꾼에게 저 청년이 무슨 짓을 했느냐고 묻자, 그 청년이 무기나 삽을 들기를 거부하였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위에는 십자 화살당의 신당원 여러 명이 기관총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듣는 가운데 당원 중 한 명이 청년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게 마지막 기회다. 총을 잡으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매달테다!’ 그 청년은 꿈쩍도 하지 않았으며,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확고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를 매달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나는 사람보다는 나의 하느님 여호와께 순종할 것입니다.’ 이윽고 그는 교수형을 당하였습니다.”「1946 연감」(영문)에 따르면, 1940년에서 1945년 사이에 16명의 증인이 양심적인 병역 거부자라는 이유로 처형당하였으며, 가혹한 취급을 당한 결과 사망한 사람은 26명이 넘습니다. 그들의 주께서 그러하셨듯이, 그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전후의 새로운 출발
1945년 상반기에, 고향으로 돌아온 대부분의 형제들도 그와 같이 세상을 이겼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증거하는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1942년 이후에는 조직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1945년 말에는 다시 보고를 내는 사람이 590명이었습니다. 이듬해에 그 수는 최고 837명으로 증가하였는데, 전쟁 전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수였습니다.
전후의 극히 불안정한 경제 상황으로 모든 사람이 몹시 힘겨워하였습니다. 때로는 물가가 한 시간 만에 배로 올랐습니다. 식품을 근거로 값을 매겨야 하였는데, 기준이 되는 것은 달걀이었습니다. 따라서 형제들이 협회 사무실에 서적 대금을 보낼 경우, 달걀, 식용유, 밀가루와 같은 식품을 대신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식품들을 저장해 두었다가 팔아야 하였습니다. 종이 및 인쇄 대금도
종종 식품으로 지불하였습니다. 1946년 8월 20일에 새로운 화폐가 발행되자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격려가 된 것은, 다른 나라에 사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많은 의복 꾸러미와 다량의 식료품을 선물로 보내 준 일이었습니다.얼마 후에는 바로 헝가리에서 공개적으로 큰 모임을 여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1945년에 샤로슈퍼터크에서 행해진 공개 강연에 500명 이상이 참석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1946년 10월에는 니레지하저에서 열린 전국 대회에 60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1947년에 또 하나의 전국 대회가 열렸는데, 이번에는 수도인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되었습니다. 헝가리 국철에서는 임시 전용 열차를 타고 대회를 보러 가는 사람들에게 요금의 50퍼센트를 할인해 주기까지 하였는데, 그 열차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참석자가 1200명에 달하였습니다. 그 해에, 워치 타워 협회의 지부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해 부다페스트에 단독 주택 한 채를 매입하였습니다.
요제프 클리녜츠즈가 뉘우치다
이제 다시 요제프 클리녜츠즈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는 야외 봉사에 열심이긴 하였지만, 완고한 태도를 나타냄으로 1942년에 형제들 사이에 심각한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브루클린에 있는 협회 본부에 콘라드 형제와 버르트허 형제를 고소하는 8면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시 워치 타워 협회장인 노어 형제는, 그에 대한 회신에서 클리녜츠즈에게 헝가리에서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이 다시 발전하고 있으므로, 형제들을 고소하는 편지를 쓰는 대신 그 시간에 차라리 전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더 낫다는 점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노어 형제는 로마 14:4을 인용하여 “당신이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판단합니까?” 하고 질문하였습니다.
읽은 내용을 숙고한 뒤에, 요제프 클리녜츠즈는 콘라드 형제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노어 형제의 편지를 받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제 행로를 검토해 보고 제 인생 전체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여호와께 기도로 용서를 구하였으며, 이제 형제가 용서해 줄 수 있다면 형제의 용서 또한 구하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콘라드 형제는 이와 같은 사랑 넘친 대답을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용서해 주셨다면 우리가 누구이기에 형제를 용서하지 않겠습니까?”그러자 클리녜츠즈 형제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이 일이 있기 전에는 이미 자기의 마음이 완고해져서, 지금 자기가 형제들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듯 자기에게 용서를 구하러 오는 형제가 있었다면 그를 집 밖으로 내쫓았을 것이라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그와는 다른, 그야말로 새 힘을 주는 환대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 클리녜츠즈 형제는 즉시 야외 봉사를 다시 시작하였으며, 그 후 파이오니아 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회개하고 그분에게로 돌아와 그분의 길로 행하는 사람들을 참으로 친절하고 자비롭게 대하십니다!—이사야 55:6, 7.
정세의 변화
1948년에 헝가리에서 공산당이 점차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에도 증인들은 여전히 순회 대회를 열 수는 있었지만, 종종 어려운 상황에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샤토럴려우이헤이 극장에서 열린 대회와 관련하여 무슨 일이 발생하였는지 고려해 봅시다.
형제들은 대회 프로그램을 극장 안에만이 아니라 건물 앞 광장으로도 내보낼 계획이었습니다. 외부 스피커를 시험하면서, 형제들은 공개 강연을 광고하였습니다. 그 즉시 대회 조직을 책임 맡은 형제가 경찰서 대기실로 불려갔습니다. 야노시 러코는 그들에게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는 순회 대회를 열려고 합니다. 그래서 공개 강연을 광고하였던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경찰서에
와서 이미 여러분에게 알린 바 있습니다.” 경찰관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때 당신은 스피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소. 즉시 철거하도록 하시오!”러코 형제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에 대해 다른 형제들에게 이야기하자 그들은 이렇게 조언을 하였습니다. “형제에게 금지하였으니, 형제는 아무 일도 하지 마세요.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겁니다. 한 경찰관은 금지하였지만, 다른 경찰관이 허락해 줄지 누가 압니까.”
그리하여 형제들은 외부 스피커 사용과 관련된 의뢰서를 두 통 작성하여 경찰서에 제출하였습니다. 근무 중인 경찰관이 상관에게 전화로 연락하려 하였지만, 통화가 안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그 경찰관에게 한 통은 철해 두고 형제들이 가진 사본에는 도장을 찍어 주면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경찰관은 그렇게 해주었습니다.
예상하였던 대로, 공개 강연 도중에 경찰관들이 나타나서는 형제들에게 스피커 연결을 차단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왜 그러시죠? 우린 허가증이 있습니다.”
“어디 있소?” 하고 경찰관이 물었습니다.
“조직 책임자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를 불러오시오.”
그 책임자를 찾아 경찰관들에게 허가증을 보여 주었습니다. 경찰관들은 한동안 그 곳에 서서 강연을 들었습니다. 극장 안은 만원이었고, 그 외에도 다른 많은 사람이 밖에서 스피커를 통해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 날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들이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또 다른 호칭이 붙다
전쟁이 터지기 전, 신문들은 거듭거듭 여호와의 증인을 “공산주의자”라거나 “공산주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들이라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이 정권을 잡자 그러한 호칭은 반대자들의 목적에 더 이상 기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1949년의
신문에는, 증인들을 미국으로부터 자금을 조달받는 “미제국주의의 하수인”이라고 비난하는 기사가 거의 매주 실렸습니다.1950년에는 공산주의자들, 교직자들 그리고 언론 매체가 여호와의 증인을 상대로 연합 전선을 폈습니다. 형제들이 관심자들에게서 종종 들은 바에 의하면, 관심자들이 정식으로 교회를 탈퇴하겠다고 사제에게 이야기하였을 때 교직자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여호와의 증인은 제국주의의 앞잡이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가담하기를 원한단 말입니까?” 체포되는 일이 빈번해졌으며, 그 해에 302명이 체포되었습니다. 공개 강연은 장례식에서만 가능하였지만, 그 해에 강연이 72회나 행해졌습니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1910명의 전도인 신기록을 보고하였습니다.
주요 감독자들이 다시 체포되다
그러던 중, 1950년 11월 13일에 형사들이 협회의 부다페스트 지부 사무실로 들이닥쳐 수색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어찌나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던지 사무실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습니다. 지부의 종인 야노시 콘라드와 번역자인 언드라시 버르트허 그리고 순회의 종인 야노시 러코가 다른 네 명의 형제와 함께 체포되어 언드라시 가(街) 60번지에 있는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야노시 콘라드는 그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그 곳에서 심문받을 때는 경찰서에서처럼 많은 심문을 하거나 신체적으로 고통스런 고문을 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밤중에 있었던 세뇌와 정신적인 고문은 때때로 신체적인 고문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우리에 대한 재판은 1951년 2월 2일에 열렸습니다. 죄목은 ‘국가와 사회 전복에 목적을 둔 조직체를 공동 지휘한 죄 및 반역죄’였습니다. 수석 재판관인 요나시 판사(그는 5년 뒤 반혁명 기간 중에 공포에 질린 나머지 자살하였다)는 우리 일곱 명에게 5년에서 10년 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이 선고는 미리 결정되어 있었음이
분명하였는데, 잠시도 심의되지 않았으며, 한 형제가 한번은 심문 도중에 자기를 심문하던 사람에게서 이미 이런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희들을 10년간 가둬 둘 것이다. 10년이 지나면 우리 인민 공화국은 지금보다 더 강해질 것이며, 인민들은 사상으로 잘 훈련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인민들에게 성서로 영향을 주려 해도 동요되지 않을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너희들을 풀어 줘도 괜찮겠지.’”콘라드 형제는 계속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부다페스트 북쪽의 바츠에 있는 교도소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기쁘게도 우리는 모두 같은 방에 수감되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경험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일과표에 따라 생활하였는데, 당일의 성구를 검토함으로 하루를 시작하였으며, 성구는 서로 돌아가면서 준비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단 한 권의 성서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할 수 있는 구절들을 읊어 가면서 처음부터 성서를 ‘낭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일한 방법으로 「파수대」 기사도 ‘낭독’하였습니다. 또한 우리는 밖에 있는 형제들이 확고함을 유지하도록 도와 달라고 여호와께 날마다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모여 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당국자들이 우리를 갈라서 일반 재소자들과 함께 수감했기 때문인데, 그들은 우리가 함께 모여 있으면 서로의 신념을 강화시켜 절대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는 다시 연합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당국자들이 우리가 한방에 있는 일반 재소자들을 하느님의 진리로 설득시킬까 봐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의 투옥 기간 내내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새로운 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다
1953년 봄에는 책임을 맡은 장성된 형제들이 거의 모두 체포되었습니다. 형제들의 집을 수색하는 일과 더불어 갑작스럽게, 예기치 않은 때에 체포된 것입니다. 헝가리에서의 활동을 완전히 재조직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세 명의 순회 감독자 즉 졸탄 후비차크, 요제프 초반, 죄르지 포들로비치가 새로운 위원회로 섬겨야 하였습니다.1953년 11월에 이 위원회의 위원 세 명이 모두 체포되어 베케슈처버의 국가 보안부 교도소로 끌려갔습니다. 매우 이상하게도 10일 뒤에 그들은 모두 풀려 났습니다. 얼마가 지나서야, 요제프 초반이 압력에 굴복하여 당국을 위해 일하기로 동의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위원회는 요제프 초반 대신 미하이 퍼울리니로 대치됨으로 재조직되었으며, 미하이 퍼울리니는 지역의 종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 위원회의 주된 책임 가운데 하나는 「파수대」 연구 기사를 번역하여 틀림없이 순회구마다 한 부씩 전달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순회 감독자들은 그것을 복사하여 각 회중에 한 부씩 전해 주었습니다.
그에 더하여, 영적 양식은 강제 노동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형제들에게도 전달되어야 하였습니다. 아마 가장 잘 알려진 강제 노동 수용소는 헝가리 북부의 톨라퍼 탄광이었을 것입니다. 당국이 그 곳으로 보내 일하게 한 형제가 최고 265명에 달한 적도 있습니다. 탄광에서 형제들은 정식 광부들과 함께 일하였는데, 광부들 가운데 상당수가 여호와의 증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광부들은 증인들을 위해 몰래 서적을 반입하고 몰래 보고를 반출하였습니다.
당시 적들이 추구하던 목표는 두 가지였는데, 강제로 증인들이 군복무를 받아들이게 하고 자유 교회 연맹에 가담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적들은 이 두 가지 목표를 모두 이루지 못하자, 다른 계획을 시도하였습니다.
교도소에서의 감언 이설
1955년에 야노시 러코는 야노시 콘라드와 같은 방으로 옮겨졌습니다. 서보라는 사람이 러코 형제에게 다가와서는 몇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서보 씨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콘라드는 너무 고집이 세서 대화가 안 통하오. 당신이 좀더 이지적이오. 우리는 당신을 석방시키고 당신의 활동을 허가해 줄 준비가 되어 있소. 콘라드는 여기에 남게 되겠지만, 회중은 함께 모일 수 있소. 당신은 여호와의 증인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고, 마음껏 기도 드릴 수도 있소. 다만 다른 사람들을 선동해서는 안 돼오.”“그러니까 일종의 증거하지 않는 증인이 되라는 말이군요. 그건 약속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러코 형제는 응답하였습니다.
“자, 잘 생각해 보시오. 내 다시 찾아오리다.” 그는 다시 와서, 여러 질문을 하였는데, 이런 질문도 하였습니다. “콘라드는 어떻게 지내고 있소?”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최근에 그를 본 것이 언제요?”
“방금 전입니다. 우리는 같은 방에 있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나눈 이야기에 대해 그에게 말했소?”
“물론이죠. 그는 내 형제니까요!” 그 정부 하수인은 화를 내며 가버리더니 다시는 러코 형제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해에 공산주의자들은, 「파수대」지 두 면에다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내용을 싣기만 하면 헝가리에서 「파수대」를 발행하도록
인가해 주겠다고 제의하였습니다. 물론 형제들은 그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속이려는 또 다른 시도
1955년 여름에는 약 100명의 형제가 톨라퍼에 있는 수용소에서 풀려 났습니다. 다시 정상적인 가정 생활을 누린 지 겨우 6주 만에, 그들은 부다페스트 근처의 센텐드레 마을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센텐드레에 도착하자, 형제들은 큰 강당으로 인도되었습니다. 한 장교는 정부에서 형제들이 감사할 만한 특별한 마련을 해 놓았기 때문에 무기를 들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무기를 나르거나 탄약을 운반하는 대신 도로, 교량, 철로 또는 그와 같은 것들을 건설하는 데 협력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몇 달 뒤에는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경험이 부족한 많은 형제들에게 처음에는 그 마련이 좋게 들렸지만, 일부 장성된 형제들은 덫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즉시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군 건축 계획에도 협력해야 합니까?” 직접적인 대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형제들은 군복을 입어야 하는지 질문하였습니다. 그 장교는 모자가 지급될 것이며 원한다면 옷이 해지지 않도록 군복을 입을 수도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합리적인 것처럼 들렸습니다. 마침내 이러한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두세 달간 일을 하고 가족에게로 돌아갈 의향이 있는 사람은 병참부로 가서 민간인복을 군복과 장화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의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5년에서 10년 형이 선고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형제들에게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여러 형제가 교도소나 강제 수용소에서 이미 4년을 보냈습니다. 이제 자유를 맛본 지 6주 만에, 그들은 알지도 못하는 오지의 광산이나 채석장으로 보내질 것이었으며, 그렇게 되면 그들이 겪었던 모든
일들이 전부 다시 시작될 것이었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단지 몇 달만 지나면, 가족에게로 돌아가 자유롭게 여호와를 섬길 수 있을 것이라고 추리하였습니다. 100명 가운데 약 40명이 군복을 받으러 천천히 움직였습니다.나머지 형제들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린 결론은, 제안받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야외 군복무이며 그들은 육군 노동대에 속하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중립을 유지하기 원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 제의를 거절하였습니다.
이제 강당 한편에는 군복을 입은 형제들이, 다른 한편에는 군복을 입지 않은 형제들이 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한 하사가 강당 안으로 들어오면서 곁에 있던 한 증인에게 “경례 안 하나?”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 형제는 자기는 민간인이지 군인이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제서야 하사는 형제들이 두 부류로, 즉 군복 차림을 한 부류와 민간인 복장을 한 부류로 나뉘어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을 향해 명령하는 자세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봐! 차려! 너희들은 야외 군복무를 받아들였다. 오늘부터는 상급자가 내무반에 들어오면 경례를 하고 차려 자세로 보고해야 한다. 오늘부터 너희들은 군인으로서 모든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강당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더니, 이어서 군복을 입은 형제들이 크게 분개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는 군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떠한 군복무에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일하는 데만 동의했을 뿐입니다!”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자, 처음에 형제들에게 이야기하였던 장교가 다시 강당 안으로 들어와 보고는 하사가 일을 망쳐 놓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장교는 즉시 형제들을 설득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형제가 이미 군복을 벗고 민간인복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병참부 담당 군인은 옷을 돌려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의 끈질긴 노력 끝에,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옷을 돌려 받았습니다.
얼마 뒤, 고위 장교 몇 명이 들어왔습니다. 형제들은 줄을 맞춰
섰습니다. 한 장교가 이렇게 요구하였습니다. “야외 복무를 수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한걸음 앞으로 나오시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제 이렇게 요구하였습니다. “야외 복무를 수행할 의향이 없는 사람은 한걸음 앞으로 나오시오!” 이번에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한걸음 앞으로 나갔습니다.수감자들을 위한 양식
1956년의 혁명 기간에 우리 형제들이 석방되었지만, 잠시뿐이었습니다. 2주 뒤에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정권을 잡았던 것입니다. 그 후 여러 달 동안, 당국은 혁명이 시작될 때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던 사람들을—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들도—모두 다시 체포하려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형제들은 영적 양식을 계속 섭취하였습니다. 산도르 뵐제시는 투옥되자 자기 아내에게 빵을 구워 그 속에 「파수대」 기사를 넣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한 자매가 두 장의 얇은 종이 양면에 「파수대」 연구 기사 전체를 베꼈습니다. 그러나 뵐제시 형제는 빵을 받아도 즉시 “먹”을 수가 없었는데, 일반 재소자들과 한 방을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음날 작업장 화장실에서 빵을 갈라 열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화장지를 겹쳐서 그 위에 좀더 큰 글씨로 여러 장을 베꼈습니다. 대개 이 일은 교도소 전체가 비교적 평화롭고 조용한 때인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 수행되었습니다.
감금되었던 사람들이 풀려 나다
1960년 3월, 버르트허 형제가 9년 동안 복역한 뒤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기다가 1979년에 사망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형제들은 그를 지칠 줄 모르는 번역자이자 유머감이 풍부한 진실한 벗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점차 모든 형제들이 석방되었습니다. 하지만 당국은 수시로 형제들과 접촉하였습니다. 분명해진 사실은, 그들이 경찰봉 대신 감언
이설과 설득을 통해 여호와의 증인의 결심을 약화시키려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라디오를 통한 “증거”
1960년대 말, 일반 신문과 잡지들에서는 종종 여호와의 증인을 공박하였습니다. 때로는 증인들을 비난하는 보도가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경고하려는 의도가 내포된 한 시간짜리 드라마가 실제로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다음 보고는 그 점에 대해 알려 줍니다.
“그 이야기는 한 젊은 여성의 체험담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 젊은 여인은 시골 지역의 교사였는데, 공산당으로부터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일례로, 생활할 만한 방 하나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였습니다. 이 여인이 맡고 있던 학급에는 여호와의 증인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이 여인에게 방을 제공해 주었으며, 이 젊은 교사는 그러한 친절과 형제들의 가정에 감도는 사랑 넘친 분위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품고 있던 모든 편견이 무너져 버렸고, 이 여인은 진리 안에서 자매가 되었습니다.
이 라디오 드라마의 목적은 공산당이 인민을 보살펴야 이러한 개종을 막을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이 이야기는 헝가리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 전직 교사는 현재 한 형제의 행복한 아내입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이 라디오 드라마는 우리의 신조를 증거해 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형제들은 이 드라마가 방송되던 중 시편 83:18에 나오는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라는 성구가 읽혀질 때 그 점을 각별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숲 속 집회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함께 모이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은 숲 속에서 집회를 열었습니다. (히브리 ) 숲 속 집회는 봄부터 가을까지 헝가리 전역에서 열렸습니다. 부다페스트의 회중들은 대부분 수도 주위의 구릉에서 모였습니다. 10:24, 25
뵐제시 형제는 이렇게 기억을 떠올립니다. “구릉들 사이에 있는 숲 속에 지름이 30미터 가량 되는 둥근 공터가 하나 있었는데, 형제들은 거기서 함께 모였습니다. 주위 경관은 아름다웠으며 새들의 노랫소리가 적막한 분위기를 행복하게 바꾸어 주었습니다. 하늘은 맑았고, 공기는 풀냄새로 가득하였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위대한 창조주에 대한 찬양이 분명히 드러나 있는 이상적인 장소였습니다.
신권 전도 학교와 봉사회가 이 곳에서 정기적으로 사회되었습니다. 비가 올 때는 비닐 우비로 몸을 가렸습니다. 회중 집회뿐 아니라 대회 역시 이 곳에서 열렸습니다.
조심하기 위해, 형제들을 임명하여 수상한 사람이 다가오면 경고하도록 망을 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1984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의 어느 날, 이러한 예방책을 마련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경고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사복 경찰들이 나타났습니다.
스피커는 나무 줄기에 못으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경찰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못을 박아 나무를 상하게 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그들은 몇 가지 환경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말려들지 않도록 한 형제가 그 일에 대해 책임을 졌습니다.우리가 그들에게 이 모임은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였다고 이야기하자, 한 사복 경찰은 왜 당국에 집회를 열도록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허가받지 못할 게 뻔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대답하였습니다. ‘일단 시도해 보시오’ 하고 그 경찰은 제안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금지령이 해제되다
전국 위원회의 위원인 뵐제시 형제와 오러베트즈 형제는 내무부의 고위 관리들과 만났습니다. 그들은 경찰이 찾아왔던 일과 집회를 열기 위한 허가를 신청하라고 제안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일은 1984년 10월 23일에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전국에 있는 회중들은 집회를 보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때때로 집회를 여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그 후 종무국과 교섭을 하였습니다. 1987년에는 통치체 성원인 밀턴 G. 헨첼과 시어도어 재라스가 독일 지부에서 일하는 빌리 폴과 함께 이 문제에 관하여 공식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을 대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1989년 6월 27일에 금지령이 해제되었습니다. 종무국으로서는 여호와의 증인을 인가한 일이 이런 식의 조처를 취한 것으로서는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종무국은 나흘 뒤인 1989년 7월 1일에 문을 닫았기 때문입니다.
공개적인 대회들
1950년대 초에 여호와의 증인이 대규모로 체포된 이후, 증인들은 누구나 큰 대회에 참석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따금 일부 형제들은, 1963년에 열린 일련의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의 경우처럼, 해외에서 열린 큰 모임들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1978년부터 1988년까지 제한된 수의 헝가리 대표자들은, 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어로 열리는 지역 대회 프로그램을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고국의 숲 속에서—처음에는 비공식적으로, 그러다가 1986년 이후로 당국의 양해 아래—대회를 가졌습니다.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은 1989년에 법적 인가를 받은 후로 공개적인 대회들을 신속히 조직하였습니다. 금지령이 해제된 그 다음 달에 부다페스트 스포츠 홀에서 열린 “경건한 정성” 지역 대회에 9073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이듬해에는 부다페스트에서만이 아니라 데브레첸, 미슈콜츠 그리고 페치에서도 대회가 열렸습니다.
1991년에는 헝가리에서 가장 큰 넵슈터디온 스타디움에서 처음으로 국제 대회가 열렸는데, 4만 601명이 참석하여 따뜻한 형제애를 즐겼습니다. 통치체를 대표하여 존 E. 바, 밀턴 G. 헨첼, 시어도어 재라스 그리고 칼 F. 클라인이 세워 주는 연설을 하여 헝가리 형제들과 35개 국에서 온 방문객들을 격려하였습니다.
조직상의 발전
다시 찾은 자유와 함께, 헝가리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다른 나라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하고 있는 것과 일치하게 조직상의 조정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를 들어, 일부 순회 감독자들은 주중에는 세속 직업을 가졌는데, 공산 치하에서는 누구나 직업을 가질 것이 요구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순회 감독자들은 주말에만 회중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93년 1월에, 가족 부양의 책임이 없는, 자격을 갖춘 충분한 수의 형제들이 훈련받은 이후로, 순회 감독자가 회중을 섬기는 날이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로 늘어났습니다.
1980년대에는 제한된 범위로만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이 열렸습니다. 1994년에는 요구 조건에 달하는 모든 파이오니아가 초대되었습니다. 아홉 달 동안 401명의 형제 자매가 이 특별한 강습을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교육 활동이 좋은 반응을 얻음에 따라, 속성
건축법을 이용한 왕국회관 건축 활동을 조직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회중들은 학교, 문화 센터, 빈 막사 심지어 비어 있는 이전 공산당 사무실에서 집회를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1993년에 지역 건축 위원회가 발족하였고, 오스트리아 형제들이 훈련을 베풀었으며, 여러 나라의 증인들이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1994년 5월에 부다페스트 근처의 에르드 읍에 속성 건축 왕국회관이 처음으로 세워졌습니다. 1995 봉사년 말까지 스물세 채의 왕국회관이 건축되었으며, 70채의 왕국회관이 더 건축될 계획입니다.피의 오용을 금하는 하느님의 법을 범하지 않으려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결심을 지원하기 위해 병원 교섭 위원회도 설립되었습니다. 전세계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헝가리에도 피를 사용하지 않는 대체 치료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의사들이 있습니다. 병원 교섭 위원회는—현재 부다페스트, 데브레첸과 미슈콜츠 그리고 세게드와 페치와 터터바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의사들에게 최신 정보를 전해 주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 약 120명의 교수와 고위 의사 및 외과 의사가 이미 이 위원회들에 협조하고 있습니다. 일례로서 최근에 두 살 된 덜머 뵐제시의 경우, 부다페스트의 병원 교섭 위원회는 브루클린의 병원 안내 봉사부와 연락하여 세 시간 만에 무혈 치료법에 관한 필요한 정보를 입수하였고, 이 치료법으로 그 어린 환자는 성공적으로 치료를 받았습니다.
길르앗과 봉사 훈련 학교의 졸업생들
라슬로 샤르쾨지는 워치 타워 협회에서 훈련받고 공식적으로 헝가리에 파견된 최초의 선교인이었습니다. 약 5주 뒤인 1991년 8월 31일에는 독일에서 열린 봉사 훈련 학교 제1기 졸업생 네 명이 도착하였는데, 그들은 악셀 귄터, 우베 융그바우어, 볼프강 마르트 그리고 만프레트 슐츠였습니다. 10월 초에는 길르앗 졸업생인
미국 출신의 마틴 스코컨과 보니 스코컨이 이들에게 합류하였습니다.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나 봉사 훈련 학교에 참석하였던 형제 자매 열네 명이 현재 헝가리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벧엘에서 또는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하거나 혹은 여행하는 활동을 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한편 헝가리 형제로서는 처음으로 그러한 훈련을 받은 이슈트반 미할피는, 우크라이나에서 헝가리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을 섬기도록 순회 감독자로 파견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일부 형제들이 헝가리어에 대해 제한된 지식만 가지고 있었지만, 가지고 있는 지식을 활용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스테판 아우뮐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헝가리어에 대한 지식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 제공 연설은 매우 간단하였습니다. 보통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을 편 다음 집주인에게 성서 연구를 하고 싶지 않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그 결과 여러 건의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전도인들도 이 간단하고 직접적인 방법이 매우 효과적임을 보고는, 가정 성서 연구를 직접 제안하기 시작하였는데, 나와 마찬가지로 좋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 결과 회중이 발전하여 1992년 8월에는 전도인이 25명이었는데 1995년 6월에는 84명이 보고하였습니다.”
자유 애호자들이 전진하다
헝가리는 마자르족의 나라로 불립니다. 헝가리인들 스스로가 자기들을 가리키는 이름인 마자르라는 말은 “말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적절하게도 헝가리어는 이 곳 1만 6907명의 전도인이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말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종들에 관하여 이렇게 이야기한 바와 같습니다. “저희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능을 [이르리이다].”—시 145:11.
219개 회중과 12개 순회구로 구성된 여호와의 증인은 열심히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1995년에 그들은 이웃에게 ‘여호와의 나라의 영광’에 대해 말하는 데 226만 8132시간을 바쳤습니다. 매달 약 1만 4000건의 성서 연구가 사회되었으며 1995년 기념식에는 3만 7536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전도인 수가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헝가리에서 왕국 활동이 다시 공개적으로 수행될 수 있게 된 때인 1989년 6월부터 1995년 8월까지 전도인 수가 9626명에서 1만 6907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 기간에 정규 파이오니아 수는 48명에서 644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솔로몬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을 여호와께 봉헌하였을 때처럼, 헝가리 형제들 역시 1993년 7월 31일에 부다페스트 벧엘의 새로 증축한 숙소와 사무실을 봉헌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하였습니다. (열왕 상 8:66) 그 다음으로 큰 계획은 부다페스트에 첫 순회 대회 회관을 건축하는 일일 것입니다. 현재 부다페스트 지역의 순회구들은 순회 대회와 특별 대회일을 공산당이 대회를 열곤 하였던 에페도스 회의소에서 열고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헝가리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루마니아, 독일, 스위스 그리고 좀더 최근에는 오스트리아와 같은 다른 나라 지부의 감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994년 9월부터 헝가리는, 브루클린에 있는 세계 본부로부터 직접 감독을 받는 지부가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거의 100년 전에 헝가리에서 활동을 시작한 바로 초창기부터 박해와 종교적 편협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은 중단되지 않고, 한층 더 힘차게 전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도움으로, 헝가리에 있는 그분의 증인들은 시편 필자 다윗처럼 이와 같이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성호를 영영히 송축할찌로다.”—시 145:21.
[66면 전면 삽화]
[74면 삽화]
야노시 도베르(위)와 요제프 톨디(오른쪽)는 성서 진리를 가지고 헝가리로 돌아와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였다
[79면 삽화]
부다페스트의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들, 1934/35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어디 보스와 샬로테 보스, 율리우스 리펠, 게르트루트 멘데, 오스카르 호프만, 마르틴 포에칭거
[82면 삽화]
너지커니저 강제 수용소에 있던 증인들
[83면 삽화]
야노시 콘라드는 그리스도인 중립 문제로 12년간 투옥되었다
[90면 삽화]
죽기까지 여호와께 충성을 지킴: (위) 총살당한 베르털런 서보; (오른쪽) 교수형당한 러요시 델리
[102면 삽화]
다른 많은 증인들처럼, 야노시 러코는 박해자들에게 타협하기를 거절하였다
[107면 삽화]
일로너 뵐제시는 영적 양식을 빵 속에 숨겨 수감중인 남편에게 보냈다
[108, 109면 삽화]
1986년의 “숲 속 대회”에서부터 1991년에 수도의 넵슈터디온에서 열린 국제 대회까지
[110면 삽화]
헝가리 최초의 속성 건축 왕국회관, 에르드에 있음
[115면 삽화]
부다페스트의 지부 시설과 벧엘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