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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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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76년 4월이었습니다. 자동 화기를 든 군인들이 벧엘 집의 문을 쾅쾅 두드렸습니다. “나와서 기 게양식에 참여하시오!” 지휘관이 요구하였습니다. 성난 군중은 정치 구호를 외쳤습니다.

안에서는, 선교인들이 늘 하던 대로 당일의 성구를 계속 토의하였습니다.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입니다.” 이것이 고려하고 있던 성구였습니다. (마태 24:29) 이 성구는 그 날 아침 선교인들에게 참으로 힘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밖에서는, 군인들이 지부 사무실 구내에 기를 게양하였습니다. 그들이 이 곳을 점거한 것입니다!

군인들은 곧 모든 선교인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들이 가져가도록 허락받은 것은, 여행 가방에 넣어 휴대할 수 있는 개인 물품뿐이었습니다. 지체 없이, 선교인들은 협회 승합차에 실려 국외로 호송되었습니다.

승합차가 벧엘 구내를 떠나는데, 한 젊은 형제가 자전거를 타고 옆으로 따라붙었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여러분을 어디로 데려가려는거죠?” 하고 그가 물었습니다. 선교인들은 그도 체포될까 봐 염려되어 손짓을 해서 그를 돌려보냈습니다.

무엇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이 베냉에서 금지된 것입니까? 현지 증인들은 그 어려웠던 14년 동안 어떻게 강한 영성을 유지하였습니까? 선교인들은 돌아왔습니까? 그리고 마침내 제한이 해제되자, 베냉에 있던 여호와의 증인은 되찾은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였습니까?

이 곳이 베냉

서아프리카의 해안에서 토고와 나이지리아 사이에 끼여 있는 열쇠 구멍처럼 생긴 나라, 이 곳이 베냉입니다. 여러분은 이 나라를 이전 이름인 다호메이로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곳 사람들은 다정하고 우호적이며, 기후도 좋습니다. 50여 개의 지방 언어를 약 60개 부족이 사용하고 있지만, 프랑스어가 공식어입니다.

베냉은 소형 성채와 고대 아프리카 왕권의 본고장입니다. 푸른 석호에 간비에가 자리잡고 있는데, 간비에는 수상(水上) 마을로서 아프리카의 베네치아라고도 불립니다. 이 곳의 길은 강이고, 택시는 색상이 다채로운 피로그, 즉 통나무 배입니다. 이 나라 북부에는 펜자리와 “W”라는 두 개의 국립 공원이 있어, 사자·코끼리·원숭이·하마와 그 밖의 동물들이 대초원에서 자유롭게 활보합니다. 남쪽에서는, 야자나무들이 바닷바람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춥니다.

하지만 이 나라 사람들에게 삶은 때때로 매우 비참하였습니다. 17세기 초에, 위다 왕국의 통치자 캅세는 프랑스·영국·포르투갈의 노예 무역상들과 통상 관계를 맺었습니다. 자질구레한 물품들과 무기를 얻으려고, 이 몰인정한 왕은 동족을 팔았습니다. 그들은 현재는 위다로 불리는 겔웨에서 배에 실려 아이티,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제도, 미국으로 운송되었습니다. 노예 무역은 17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계속되다가 마침내 많은 나라에서 폐지되었습니다.

하지만 베냉 사람들이 훨씬 더 잔인한 형태의 노예 사슬에서 자유롭게 될 기회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였습니다. 그 노예 사슬이란 온갖 잔인한 형태의 거짓 종교에 속박된 상태를 말합니다. 베냉에서는 그러한 종교에 부두교가 포함됩니다.

부두교 발상지

정령(精靈) 숭배가 토속 종교인데, 이 곳 정령 숭배자들이 최고 신으로 여기는 신은 마우입니다. 마우를 대표하는 많은 수의 부차적인 신 즉 부두가 있는데, 이 신들에게는 특정한 축제일에 제물을 바칩니다. 예를 들어, 에비오소는 천둥의 신이며 장비토 신은 밤에 농부들의 밭을 보호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두들 아래에는 하급 신들이 있는데, 이들은 죽은 사람의 영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상 숭배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가정에서 아셍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불에 달군 쇠를 두드려 일종의 작은 우산을 만든 다음, 그것을 사망한 사랑하는 사람을 기리는 상징물로 장식한 것입니다.

이 신들과 관계를 맺으려면 매개자가 있어야 하는데, 주물(呪物)을 숭배하는 사제나 여사제가 그런 역할을 합니다. 사제는 주물 숭배회에서 3년을 보내고 나서야 신들 및 그 밖의 영들과 교신할 자격이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 막강한 계층은 그들을 따르는 베냉 사람들의 생활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러한 형태의 숭배를 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죽고 나서도 영의 형태로 돌아와 가족의 다른 성원들을 죽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소유물을 팔거나 많은 빚더미에 올라앉으면서도 동물 희생과 화려한 의식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여 죽은 친족들을 달래려고 합니다. 그 결과, 가족은 궁핍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으로 미신적인 두려움이 생겨 사람들은 속박을 당하게 됩니다.

소위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들도 이 곳에 있는데, 흔히 정령 숭배와 병행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 두 가지 형태의 숭배를 혼합하는 것은 이의를 제기할 만한 것으로 보지 않지만, 정령 숭배 전통에 참여하기를 그만두는 것은 심각한 죄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많은 사람이 그러한 전통에 참여하기를 그만두었습니다.

초기

사람들을 미신적인 두려움에서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성서 진리가 다호메이에 이른 것은 1929년의 일입니다. 군족(族) 출신의 야나다 형제가 나이지리아, 이바단에서 성경 연구생(여호와의 증인의 당시 명칭)으로부터 그러한 진리를 배우고 돌아와서 같은 부족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고향인 수도 포르토노보에서 여섯 사람을 모아 놓고 성서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 중에서, 원래 나이지리아 출신인 다니엘 아페니이는 진리에 굳게 고착하여 1935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야나다 형제는 그 고장 교직자들의 박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이지리아로 돌아갔으며, 새로 침례받은 다니엘 아페니이도 하는 수 없이 자기 마을인 다하그비로 돌아갔습니다. 다른 네 명의 나이지리아 증인이 포르토노보에서 전파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그 즉시 체포되어 추방되었습니다.

1938년에, 나이지리아에 있는 이보족 출신의 형제 열두 명이 포르토노보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교직자들에게는 분하게도, 증인들이 가르치는 성서 내용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였습니다. 요루바족 출신의 상인인 모이즈 아키노코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때까지 감리교 신자이면서도 조상 숭배를 하였습니다. 교직자들이 현지 당국에 압력을 가하자, 여호와의 증인들은 또다시 포르토노보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보족 형제들에 대한 박해의 불길이 거세어지자, 아키노코 형제는 그들 편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국이 여호와의 증인을 모두 죽일 생각이라면, 나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1950년에 사망할 때까지 믿음을 계속 굳게 지켰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이지리아 증인들이 더는 베냉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진리의 씨앗은 이미 뿌려졌고, 나중에 약간 물을 주고 경작하자 금방 싹이 텄습니다. 그렇게 할 기회가 전쟁 직후에 왔습니다. 누루 아키툰데라는 베냉 사람이 나이지리아에 있는 동안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1948년에 파이오니아로서 고국으로 돌아가,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여호와 하느님에 관해 그리고 성서에 밝혀져 있는 그분의 목적에 관해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였습니다. 그 결과,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1948년 5월 야외 봉사 보고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새로운 나라의 보고를 보내게 되어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복음이 프랑스령 다호메이[베냉]로 들어가자 선의자들이 ‘열방을 향한 기호’로 몰려들고 있습니다.”—이사야 11:12.

그 달에, 협회에 대한 공식 인가 신청서를 다호메이 통치자에게 제출하였습니다. 이 신청서는 세네갈, 다카르의 고등 판무관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1년 이상 처리가 지연되다가, 인가가 거부되었습니다. 이 일에 상관없이, 활동은 계속 확장되었습니다. 당시 나이지리아 지부 감독자였던 윌프레드 구치는 후에 이렇게 썼습니다. “얼마나 많은 관심이 그 곳에 잠재해 있었던지, 6주도 채 안 되어 105명이 파이오니아[아키툰데 형제]를 따라 야외 봉사에 가담하였습니다. 그 후 몇 달 동안, 이 파이오니아가 인근 소도시에 계속 좋은 소식을 전파하자, 훌륭한 증가가 계속되어 1948년 7월에는 왕국 전도인 수가 신기록인 301명에 달하였습니다.”

좋은 소식 전파의 확산

좋은 소식의 전파는 포르토노보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소도시와 마을들로 확산되었습니다. 아키툰데 형제는 새로운 관심자 몇 명을 데리고 로콩보와 코토누 같은 곳에서 증거하였습니다. 그들은 며칠씩 마을에 머무르면서, 새로운 관심자들의 환영과 환대를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관심자들이 첫 방문을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방문하는 형제와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키툰데 형제가 베냉으로 돌아온 지 4개월도 안 되어, 사흘간의 대회가 포르토노보에서 열렸습니다.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는 나이지리아 지부에서 온 W. R. (성서) 브라운, 앤소니 애트우드, 어니스트 모턴이 있었습니다. 30명이 이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는데, 이 일로 인해 프로테스탄트 선교인들은 몹시 기분이 상하였습니다. 그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새로운 관심자들을 설득시키려고 했지만, 관심자들은 확고함을 유지하였습니다. 이 대회에서 침례를 받은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모든 걸 다 조사해 보고 나서 뭔가 좋지 않은 게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건 본인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제 경우에는 이 가르침이 매우 훌륭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이 여호와의 증인의 가르침을 조사해 보고 나서 “매우 훌륭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949년 1월에, 베냉에는 세 개의 회중—포르토노보, 로콩보, 코토누—이 있었습니다.

일부다처가가 진리를 발견하다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이 나라에서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는데도, 1949년 1월에 우리가 코토누에서 대회를 열도록 허가가 나왔습니다. 확성차를 이용하여 프로그램을 광고하였으며, 1000여 명이 “평화의 정부”라는 공개 강연에 참석하였습니다.

이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수루 우에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공증인 겸 판사일 뿐만 아니라 조상 숭배와 관련이 있는 ‘망령’이라는 단체의 회장이었습니다. 그는 아내가 네 명이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 필요한 변화를 할 수 있을 것입니까? 그는 조상 숭배 및 그 숭배와 관련된 영매술 행위를 그만두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예수의 이러한 선언과 일치한 일이었습니다. “여호와 너의 하느님을 숭배해야 하고, 오직 그분에게만 신성한 봉사를 드려야 한다.” (누가 4:8) 그는 또한 결혼 문제도 그리스도인 표준과 일치하게 조정하였습니다. 현 제도에서 명망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도 바울이 되기 전의 타르수스의 사울이 한 것처럼, 그 모든 것을 “많은 쓰레기처럼” 여기고 버렸습니다. (빌립보 3:8) 자유롭게 왕국 권익을 추구하기 위해, 그는 공증인 겸 판사로서의 지위를 버리고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코토누 회중은 그 도시 미세보 지역에 있던 우에누 형제 집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가졌습니다. 한번은, 가톨릭 지도자들이 일단의 아이들을 부추겨서 집회를 방해하려고 하였습니다. 담으로 둘러싸인 우에누 형제 집 마당에서 공개 강연이 진행되고 있는데, 한 아이가 나무 위로 올라가더니 담 너머로 연사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돌을 잘 던지지 못하는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 아이가 던진 돌 중에 연사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돌 하나는 목표물에서 빗나가 방해 집단에 속한 한 아이를 어찌나 세게 맞혔던지 입원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아이들은 이것을 하느님께 벌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두려워서 도망하였습니다. 집회는 더 이상 아무 일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부두 대 여호와

동보탱데 오구디나는 멀리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옷감 장수였는데, 그의 가게는 우에누 형제 집 건너편에 있었습니다. 그는 포르토노보에 있는 주물 숭배회의 간사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에 직면해서 증인들이 나타낸 행실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그는 왕국 소식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곧 이 여자 자신이 주물 숭배 사제들의 격렬한 반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주물 숭배 사제장은 이 여자가 증인들에 대해 그러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7일 안에 죽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 사제장은 마법을 걸어 자신의 예언을 성취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악한 영들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도 있지만, 오구디나 자매는 기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물신(物神)이 여호와를 만들었다면 내가 죽겠지만, 여호와가 최고 신이라면 그분이 물신을 물리치실 겁니다.” 6일째 되던 날 밤, 사제들은 그들의 물신 게블로코에게 염소를 제물로 바치고 주문을 외웠습니다. 그들은 오구디나의 죽음에 대한 상징으로 바나나 나무를 베어다가 하얀 옷을 입혀서 질질 끌고 다녔습니다. 그러더니, 결과를 확신한 나머지 이제 오구디나 자매가 죽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오구디나 자매는 거의 매일 아침 그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시장 안에서 옷감을 팔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기는커녕, 멀쩡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즉시, 포르토노보에 있는 사제장에게 사람들이 파견되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렸습니다. 그는 자기의 주문이 효과가 없었다는 것을 알고 몹시 화가 났습니다. 이 일로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이 약해질 것임을 안 그는, 한 가지 목적을 염두에 두고 포르토노보를 떠나 코토누로 갔습니다. 그 목적이란 오구디나 자매를 찾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지방 형제들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오구디나 자매를 도와 조그만 가게의 문을 닫고 그를 안전한 장소로 데려갔습니다.

오구디나 자매를 숨긴 지 일 주일이 지나자, 우에누 형제는 차를 하나 빌려서 오구디나 자매를 태우고는 포르토노보 전역을 누비면서 모든 사람이 그가 살아 있는 것을 보게 하였습니다. 1949년에는 아프리카에 자동차가 아직 귀했기 때문에, 눈여겨보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우에누 형제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오구디나 자매를 보게 하고는, 이전에 오구디나 자매가 속해 있었던 주물 숭배회 문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오구디나 자매는 차에서 나오더니, 주물 숭배 사제장이 자기에게 죽음의 주문을 걸었지만 자기의 하느님 여호와가 승리하였다고 모든 사람에게 들리도록 공개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 그분은 오구디나 자매에게 “견고한 망대”이심이 증명되었습니다. (잠언 18:10) 좋지 않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오구디나 자매는 생을 마치는 날까지 계속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자매의 용감한 태도에 힘입어, 다른 주물 숭배자들도 영매술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반대가 심해지다

1949년에 기념식을 앞두고, 포르토노보에서 특별 연설 마련이 있었습니다. 1500여 명의 관심자가 참석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직자들은 이 소식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그들은 당국을 부추겨서 형제들을 반대하게 하였고, 열 명이 체포되었습니다.

한 형제는 후에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며칠 동안 구류되어 있다가 ‘그 이름으로 가르치거나 전파’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경고를 받고 나서 풀려났습니다. 그러한 반대로 인해 형제들은 ‘왕들과 통치자들’ 앞에서 증거하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희망에 관해 설명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비교 사도 4:17.

그 해에 기념식은 비밀리에 열렸는데, 참석자 수는 표상물을 취한 다섯 명을 포함해서 134명이었습니다. 침례는 밤중에 포르토노보 석호에서 베풀어졌습니다. 집회 장소는 계속 바뀌었고, 형제 한 사람이 항상 망을 보았습니다. 매번 집회 전에 식탁에 음식을 차려 놓고는, 누가 다가오면 형제들은 재빨리 식탁에 앉아 함께 식사를 즐기는 척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실제로 식사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훌륭한 영적 음식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형제들은 언제나 조심스러워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뱀과 같이 조심스럽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마태 10:16) 당국에서는 아키툰데 형제를 증인들의 주모자라고 생각하여 그를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한 경찰관을 보내 그를 찾게 하였습니다. 아키툰데 형제가 어디 사는지 모르는 이 경찰관은 한 신사에게 아키툰데 씨의 집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인심 좋은 베냉 사람들의 관습대로, 그 남자는 집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집을 가르쳐 주고 있는 그 남자가 바로 아키툰데 형제였습니다! 경찰관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 집에 도착하였을 때, 아키툰데 형제에게는 자신이 집에 없다는 것이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1949년 6월에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마침내 공식적으로 금지되자, 아키툰데 형제는 자기가 살던 나이지리아로 돌아갔습니다.

1949년 8월에 정부는 워치 타워 출판물에 대한 경고를 발표하면서, 누구든지 그러한 출판물을 어느 언어로든 배포하다가 적발되면 징역 2년에 벌금 50만 CFA프랑(한화로 약 80만 원) 형에 처하겠다고 못박았습니다. 「파수대」지와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이 특히 표적이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이러한 상황 변화에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말씀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합니다]. ·⁠·⁠·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다면 여러분도 박해할 것[입니다].”—요한 15:20.

그러한 시기에,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인 코폐 알란댕크포비는 베냉 남자들의 전통 의상을 봉사의 직무에 잘 이용하였습니다. 그들이 입는 소매가 긴 겉옷은 뵈뵈라고 하는데, 상당히 큰 속주머니가 있습니다. 알란댕크포비 형제는 정말로 관심이 있는 사람을 찾았다는 확신이 서면 겉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 큰 주머니에 감춰 둔 책이나 소책자를 꺼내곤 하였습니다. 그는 항상 그것이 마지막으로 남은 책인 양하였지만, 진리에 굶주린 사람을 또 찾으면 책은 항상 더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흩어졌지만 계속 증거하였다

“말씀을 전파하십시오. 순조로운 시기에도 곤란한 시기에도 긴급하게 그 일을 하십시오.” (디모데 둘째 4:2) 사도 바울이 기록한 이 교훈이 베냉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마음에 새겨져, 증거 활동은 “곤란한 시기”에도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1949년 하반기에, 베냉 사람으로서 새로 임명된 파이오니아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알베르 예데누 리강이 코토누 북쪽에 있는 쟁비에라는 작은 마을로 갔습니다. 그 곳으로 간 바로 첫날, 그는 조쥐에 마울리크퐁토와 마리 마울리크퐁토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성서의 가르침을 듣고 그것이 진리임을 곧 깨달았습니다. 조쥐에는 프로테스탄트교인이면서도 조상 숭배를 했고, 아내가 둘이었으며, 장비토 신의 주물 숭배 사제장이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알게 된 바로 그 달에, 이 모든 습관을 버렸습니다. 집안 사람들은 그들이 새로 알게 된 진리가 달갑지 않아, 심하게 반대하였고 심지어 그들을 집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밭을 못쓰게 만들어 놓기까지 하였습니다.

마울리크퐁토 부부는 마을에서 도망쳐 나와 목숨을 건졌고, 호숫가 마을인 드캥에 정착하였습니다. 이 이사로 인해 진리가 새로운 지역에 전파되었습니다. 드캥 마을의 추장이 그 곳에서는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2년도 채 안 되어, 16명이 그 지역에서 참 숭배를 받아들였는데, 당국이 그들을 체포하여 구타하였고 성서를 포함한 모든 출판물이 폐기되었는데도 그러하였습니다.

한 파이오니아가 1950년에 어느 마을에서 증거하다가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이 파이오니아와 동일한 것을 성서에서 가르치는 노신사가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노신사는 알고 보니 아페니이 형제였는데, 그는 이 나라에서 최초로 진리를 배운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1935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아페니이 형제는 고립되어 있었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를 잊지 않으셨으며, 그도 전에 속해 있던 프로테스탄트교의 비성경적인 신앙에서 자유로워지면서 느꼈던 기쁨을 잊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끝까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가 전파하던 마을에는 부두교가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지만, 아페니이 형제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해 동안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충실하게 성서를 가르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80세에 사망하였으므로, 42년 이상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긴 셈이었습니다.

1950년 초에도, 박해의 물결은 증인들에게 계속 밀려왔습니다. 쿠티 지역에서, 한 경찰관은 형제들이 모여서 당일의 성구를 고려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몇 사람이 체포되어 포승으로 결박당한 채 사령관 즉 지방 관리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풀려나면서, 더는 전파하지도 집회를 열지도 말라는 엄중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의 백성은 계속 정기적으로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필요할 때는 비밀리에 모였습니다. 그 지역의 한 장로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제 우리 형제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연구를 위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길뿐입니다. 자전거가 있는 사람들은 멀리까지 가서 증거합니다. ·⁠·⁠· 심지어 성서를 소지하는 것조차 위험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는 끝까지 계속 말씀을 전파할 것입니다.” 1950년 3월에, 그들은 충실하게도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을 위해 모였습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뒤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10:38) 1951년이 시작되었을 때, 보고를 내는 회중은 7개였으며 보고를 내는 전도인 247명 가운데 36명은 파이오니아로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종교 용품을 반납한 남자

1950년대 초에, 많은 우리 형제들은 잘 읽지 못하였지만 최선을 다해 증거하였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노력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루는, 형제 두 명이 어떤 사람에게 성서 진리를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사뮈엘 오궁베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후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 남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이었는데, 가지고 있던 군어(語) 성서를 읽을 줄 몰라 서로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대화에 끼어들어 그들을 도와 줄 수 있었죠. 저는 군어 성서를 읽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사뮈엘 오궁베는 그룹 스랍 교회의 재무 담당이자 위원이었습니다. 이 종파의 신자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믿기 때문에 흰 겉옷을 입고 흰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뮈엘 오궁베는 자신이 특정 교파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호와의 증인들과 나눈 대화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약속을 해서 불과 나흘 후인 토요일에 대화를 계속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날이 되기 전에 그를 두렵게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점을 치거나 운수를 봐 주는 등 마법을 행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과 처음 만나고 난 다음날, 저는 늘 하던 대로 교회에 갔습니다. 가자마자, 영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던 동료 교회 신자한테서 두 가지 이유로 몸조심해야 한다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첫째는 제가 교회에서 높은 위치에 있지만 ‘탈퇴’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제가 영들의 충고를 따르지 않으면 곧 심한 복통을 일으켜 죽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제가 양초 7개와 유향과 몰약을 사서 7일 동안 큰 소리로 기도하고 단식하는 특별한 의식을 행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저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솔직히 이렇게 시인하였습니다. “목요일 밤 집에 가니까, 겁이 났습니다. 금요일 아침부터 기도와 단식을 시작했지만, 증인들과 대화를 계속 나눌 것인지의 여부를 곧 결정해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들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 뻔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지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점들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고, 그들은 저를 일요일 집회에 초대했습니다.” 빠른 변화가 뒤따랐습니다. 사뮈엘 오궁베가 다니던 교회의 신자들이 설득하려고 시도했지만, 그는 진리를 찾았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종교 용품을 모두 반납하고, 그 달부터 야외 봉사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6개월도 채 안 되어 여호와께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오궁베 형제는 새로 찾은 신앙을 가졌어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40여 년 동안 여호와를 충실하게 섬기다가 1996년에 사망하였습니다.

문맹 퇴치반이 강조되다

문맹이라도 증거는 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 것은 어려운 상황에서 견딜 힘을 얻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읽을 줄 아는 것은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데 중요한 요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거 여러 해 동안 우리 형제들을 포함하여 많은 베냉 사람들은 읽을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협회는 형제들에게 문맹 퇴치반을 조직하도록 권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러한 교육이 개인적으로, 즉 일대일 방식으로 베풀어졌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는 문맹 퇴치반이 회중 내에 설립되었습니다.

현재까지, 문맹 퇴치반이 베냉의 많은 회중에서 계속 열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도움을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나은 공립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면서, 그러한 도움의 필요성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일단 개인이 글을 읽고 그 의미를 파악할 줄 알게 되면, 그것을 개인적으로 자기 생활에 더 온전히 적용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더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에베소 6:14-17.

가톨릭 사제와 주물 숭배 사제가 합세하다

교직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성서에서 가르치는 진리를 논박할 수 없으면, 흔히 세속 당국을 이용하여 여호와의 백성의 활동을 중단시키려고 하였습니다. 한번은, 가톨릭 사제와 주물 숭배 사제가 합세하여 드캥 지역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당국에 고발하는 가운데, 일부만 사실인 말과 명백한 거짓말을 섞어 가면서, 증인들은 사람들이 정부에 대항하도록 유혹하고 있고, 세계 대전을 예언하고 있으며, 세상의 종말을 전파하고 있고, 납세를 거부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주물 숭배 사제는 지방 사령관에게 말하기를, 증인들 때문에 영들이 비를 내려 주려고 하지 않으며, 그런 이유로 이 땅에 기근이 들 우려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가톨릭 사제는 자기의 기도와 미사를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지 않는 것은 증인들 책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은 그러한 공격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하였습니다. 그것은 종교 지도자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사람들 가운데서 기반이 잡힐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한 공격은 여호와께 대한 형제들의 확신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었습니다. 당시 작성된 한 보고서에는 이러한 말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실로 ‘한 영으로 굳건히 서 있고 한 영혼으로 좋은 소식에 대한 믿음을 위하여 나란히 힘써 싸우’고 있으며, 여호와께서는 증가를 가져다 주심으로써 그들의 노력을 축복하고 계십니다. (빌립보 1:27) 우리는 그분이 계속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결연한 노력을 계속 축복하셨습니까? 확실히 그렇게 하셨습니다! 혹독한 반대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이름과 왕국을 증거하는 일에 참여한 사람의 수는 1948년에 301명이던 것이 1958년에는 1426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증거는 교도소 안에서 행해졌습니다.

교도소에서 철저히 증거함

포르토노보 출신의 다비드 드농은, 여호와 섬기기를 그만두려고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자, 교도소를 자기의 구역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꼼짝없이 들을 수밖에 없는 청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도소장은 그가 전파하는 것을 싫어하여 그를 다른 교도소로 이송시켰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 그는 더 나은 대우를 받았으며 방해받지 않고 다른 수감자에게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곳 교도소장이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다른 두 재소자는 진리를 받아들여 드농 형제와 함께 그들의 구역에서, 즉 교도소 담장 안에서 전파하였습니다.

드농 형제는, 높은 신임을 받고 있던 터라, 일과 중에 교도소 밖으로 나가 치안 본부장 집에서 목수 일을 하였습니다. 이 사람도 성서의 소식에 관심을 갖게 되어, 심지어 드농 형제가 집에 가서 얼마의 출판물들을 가져다 주는 것까지 허락하였는데, 드농 형제가 투옥되어 있던 것은 바로 그 출판물들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특이한 구역을 돌보는 일을 도와 줄 사람들이 곧 더 도착하였습니다. 1955년에, 좋은 소식을 이 나라 오지에 전하는 일을 도와 주려고 50명의 나이지리아 전도인이 베냉으로 더 건너왔습니다. 이들은 전원 체포되어 그 지방에 있는 유치장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런데 유치장이 모두를 수용할 만큼 크지 않아, 자매 모두와 형제 일부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27명의 형제는 “금지된 서적”을 배포한 혐의를 받고 그 나라 내륙에 있는 구치소로 이송되어 재판을 기다렸습니다. 그 곳에 있는 동안, 그들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나이지리아에서 올 때는, 이러한 구역을 돌볼 생각은 없었지만, 그 곳에도 좋은 소식을 들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활동한 결과, 교도관들과 교도소 의무관을 포함해서 적어도 18명이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8월 말에, 이 증인들은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 소식이 사방으로 퍼졌고 1600여 명이 방청하였습니다. 가톨릭 사제들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와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형제들이 각각 12년 형을 받을 것이라고—그것도 심리가 시작되기 전에—말하였습니다!

하지만 판사는 우호적이어서 형제들이 법정에서 훌륭한 증거를 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는 증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 비하였습니다. 예수는 죄를 지은 적이 결코 없었는데도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판사는 대부분의 형제에게 3개월 형을 선고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유감을 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형기는 체포된 날부터 계산할 것이었는데, 그들이 체포된 지는 이미 3개월이 다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남은 형기를 잘 활용하였습니다. 8월 중에, 그들은 교도소 담장 안에서 각각 100시간 이상 왕국 소식을 전파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이 사건의 전말을 통해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대중의 눈에 인상적으로 비쳤습니다.

군어(語) 성서 출판물

일반 사람들의 언어로 된 출판물이 있으면, 그들에게 성서 진리를 가르치는 데 매우 도움이 됩니다. 군어는 이 나라 전역에서 널리 사용됩니다. 형제들이 1955년에 군어로 「여호와의 증인은 무엇을 믿는가?」 전도지를 받았을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 전도지에 이어 1957년에 「왕국 봉사」가 나와서 형제들이 봉사회와 야외 봉사 활동을 더 효과적으로 조직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 성서 공회는 또한 군어 성경 전서를 재인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이 천국의 기쁜 소식」 소책자가 나왔습니다. 이 소책자를 처음으로 받았을 때, 모든 회중 서적 연구에서 연구할 마련을 하였습니다. 이듬해 초에는 이 소책자를 대중에게 배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참으로 주목할 만하였습니다. 이 나라의 겸손한 사람들은 이 소책자에 들어 있는 성서 진리에 대한 명료한 설명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1958년 4월에는 전도인 수가 1426명으로 신기록에 달하였는데, 이것은 전년도 평균보다 84퍼센트나 많은 수였습니다.

이 군어 출판물들이 널리 받아들여진 데 격려를 받아, 곧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의 번역 작업이 착수되었습니다. 등사판 군어 「파수대」도 1960년 12월 1일 호부터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출판물은 형제들이 진리에 대한 인식을 자라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 거짓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부류에 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거짓을 가르침받아 왔음을 알게 되면, 그는 속히 이전 종교를 버리고 여호와를 숭배하기 시작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순결한 숭배를 계속 실천하려면, 겸손과 여호와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있어야 하며, 기꺼이 그리스도인 장성으로 매진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생활의 모든 부면에 적용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토록 열정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한 베냉 사람들이 다 그러한 행로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부류에 들지 않”았습니다.—요한 첫째 2:19.

그부크부타 회중에서 한 감독자가 진리에서 돌아서더니, 쿠아디누 토비우지도 돌아서게 하려고 설득하려 하였습니다. 토비우지 형제는 그 사람에게 그가 여호와의 종이었을 때 진리에 대한 사랑이 식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 적이 있음을 재치 있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마태 24:12) 토비우지 형제는 그 감독자 자신의 사랑이 식었으므로 이제 성서의 말씀이 참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토비우지 형제는 현명하게도 그 사람을 따르지 않고 여호와께 충실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형제가 다 하느님의 의로운 원칙을 더 이상 따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하였습니다. 1959년에, 티아필루스 이도우라는 나이지리아의 순회 감독자가 형제들을 세워 주도록 포르토노보 시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도우 형제를 만나게 되어 기뻤지만, 그가 자기들의 언어를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약간 실망하였습니다. 이도우 형제가 연설을 하고 장로들과 토의를 하기 위해서는 통역자가 있어야 하였습니다. 이도우 형제는 이 회중에 처리할 필요가 있는 문제들이 있음을 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를 몰랐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답답해서 그는 군어를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급속도로 발전하여 곧 형제들의 어려운 상황까지 도와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점차, 문제들이 해결되어, 도덕적으로 불결한 생활 방식을 택하고 그것을 고집한 사람들은 회중에서 제명되었습니다.

여전히, 읽고 쓸 줄 모르는 새로운 사람들의 이해 부족이 주요 약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진리를 명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마음에 새긴 사람들은 생활에서 철저한 변화를 하였습니다. 제르맹 아도마우도 그러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일부다처가가 나은 길을 찾다

제르맹 아도마우의 아버지는 아내가 열두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증인이 되기도 전에, 제르맹은 한 여자와만 결혼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아내가 많은 것이 부와 영향력의 상징이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아내들 사이에 심한 다툼과 질투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르맹이 결혼하고 나서 아내에게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일부 아프리카 사람들 사이에서는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처음에 가졌던 생각은 좋았지만, 그는 곧 아내를 두 명 더 얻었습니다. 후에, 다시 두 명을 더 얻어서 총 다섯 명이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가정에서도 심한 경쟁과 질투가 자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잊으려고, 그는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들을 만났습니다. 그의 가정은 그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아버지의 가정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주물 숭배자였으면서도 가톨릭 사제에게 위로와 조언을 구했는데, 사제는 그에게 하늘에 가려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주물 숭배나 다섯 아내, 배우자가 아닌 여자들과 관계를 갖는 일에 관해 성서에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르맹은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서도 여전히 주물을 숭배하고 여러 명의 아내를 데리고 살았습니다. 실제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47년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책을 읽고 나서, 가톨릭 교회와 주물 숭배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여러 명인 점과 부도덕한 생활 방식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이 되려면 이러한 것들을 그만두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아보미 회중의 몇몇 성원이 체포되어 수감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온 마을에 퍼졌습니다. 제르맹은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취급당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 성서의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박해를 기꺼이 인내하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 참 그리스도인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디모데 둘째 3:12) 그는 결심하였습니다. 일부다처 생활 방식을 청산하였고, 성서의 가르침에 순응하였으며, 여호와 하느님께 헌신하였습니다.

하지만 새로 갖게 된 믿음 때문에, 그는 아내였던 여자들을 그냥 내보내기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더는 같이 살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들이 결혼할 때까지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필요를 돌봐 주었습니다. 그의 아내였던 여자들 가운데 둘은 나중에 여호와의 헌신한 종이 되었는데, 그 중 나이가 더 적은 여자는 전 시간 봉사자와 결혼하여 결국 남편과 함께 순회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일부다처 결혼 생활에서 태어난 자녀들 가운데 다수가 진리를 배웠습니다.

죽어 가던 한 남자의 소원

다른 사람들 역시 진리를 갈구하였습니다. 아모스 제굉은 킬리보라는 베냉 북부 지방에 있는 한 마을의 감리교회 지도자였으며, 실라스 파그보훈은 그 교회의 탁월한 성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여호와의 증인이 실라스 파그보훈의 집을 방문하자, 그는 자기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교회 내의 혼란 상태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들 가운데 그릇된 행위가 허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솔직히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자신부터 아내가 두 명인데다 내연의 처도 여러 명 있었는데, 그 내연의 처 가운데에는 그가 다니는 교회의 주요 평신도 전도사들 중 한 사람의 아내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모스 제굉은 증인들의 방문을 받은 후, 진리를 갈구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많은 교회 성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당시 방문 중이던 순회 감독자가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과 「이 천국의 기쁜 소식」 소책자를 가지고 성서를 연구하는 법을 그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 순회 감독자는 일용할 성구를 활용하는 법도 알려 주었습니다. 아모스 제굉과 실라스 파그보훈을 포함하여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배운 것을 크게 기뻐하며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실라스 파그보훈은 아내와 자녀들도 자기가 새로 갖게 된 믿음을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반응이 거의 없는 것 같았습니다. 실라스는 1963년 6월, 사망하기 전날 밤에 장남인 조제프를 침대 옆으로 부르더니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직까지 네가 참 종교에 대해 확고한 태도를 취하지 않다니 유감이구나. 넌 지금 네가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라는 걸 알아야 한다. 내가 네게 맡기는 이 어려운 일에 여호와께서 함께하시길 기도하마. 이제부터는 네가 동생들을 모두 책임져야 한다. 그 애들을 물질적으로, 특히 영적으로 보살피거라.” 파그보훈 형제의 마지막 소원은 이루어질 것입니까?

조제프는 주관이 뚜렷한 듯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는 코토누에 있는 프로테스탄트계 중등 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그는 학급의 학생 80명 앞에서 교목과 성경에 관해 토의하게 되었습니다. 교목은 대부분의 질문에 대해, “그건 신성한 신비로 남아 있단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 덕분에, 조제프는 많은 성서 질문에 대해 만족스러운 대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이 귓전에 맴돌아, 조제프는 학급 전체와 교목 앞에서 프로테스탄트교인 명부에서 자기 이름을 삭제해 줄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하였습니다. 그는 자유의 몸이 된 것입니다! 1964년 7월에 침례를 받았고, 1969년에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파그보훈 형제의 아내 리디는 매우 친절하고 마음씨 좋은 사람이기는 하였지만, 종교를 바꿀 필요를 느끼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교인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다니고 있던 교회의 나이 든 목회자가 과부인 그를 “위안”해 주겠다며 성관계를 갖자고 하였을 때 그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는 두 번 다시 그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권고와 한 특별 파이오니아의 도움으로, 그는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리디만 침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들도 거의 모두가 진리를 자기 것으로 삼았습니다.

길르앗 훈련을 받은 선교인들의 도착

1963년 2월 3일,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선교인들이 처음으로 도착하자, 형제들은 참으로 기뻤습니다! 키스 로빈스와 캐럴 로빈스는 길르앗 제37기 학급 졸업생이었습니다. 그들은 선교인 집을 정하고 곧 군어를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이 백인 동료 증인들이 함께 있음으로 인해 대단히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세계적인 형제 연합의 증거였던 것입니다. 선교인들은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면서 오지에 있는 회중들을 방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을 하도록 임명된 사람들을 훈련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고향인 캐나다로 돌아가 가족 책임을 돌볼 필요가 있게 되자, 이 곳 형제들은 매우 아쉬워하였습니다.

몇 달 후에 캐나다에서 선교인 두 명이 베냉으로 더 임명되었는데, 루이 카르보노와 엘레노르 카르보노였습니다. 그들은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이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코토누에 프랑스어 회중이 설립되었습니다. 프랑스어로는 연구할 수 있는 출판물이 많아, 그 회중이 영적으로 급속히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카르보노 형제는 1964년 11월에 아보메이에서 열린 “성령의 열매” 지역 대회의 사회자였습니다. 대규모 모임이 있으면 으레 그렇듯이, 경찰이 투입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무랄 만한 일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경찰들은 형제들에게 매우 우호적이었으며 성서 연설들을 잘 들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 곳에 모인 1442명 가운데는 북부에서 온 사람도 있고 남부에서 온 사람도 있는데 모두가 형제로 함께 어울리는 것을 보고 감탄하였습니다. 이것이 돋보였던 이유는, 당시 폭동이 일어나서 이들을 제외하고는 북부 사람들과 남부 사람들이 서로 대항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 외에도 베냉에서 봉사한 선교인들이 또 있었습니다. 얼마 동안만 봉사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곳을 고향으로 삼고 싶은 마음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돈 워드와 버지니아 워드, 칼로스 프로서와 메리 프로서는 베냉의 정치적 혼란으로 약간 늦어져, 1966년 초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1966년 3월 코토누에 지부 사무실이 설립되어 이 나라의 좋은 소식 전파 활동을 감독하였습니다.

1948년 이후로, 여호와의 증인은 베냉에서 성서 교육 활동에 대한 공식 인가를 얻으려고 애썼지만, 계속 거부당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베냉 기관지에서 펜실베이니아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라는 이름과, 아울러 여호와의 증인이 이 나라 전역에서 집집으로 성서를 가르칠 수 있으며 선교인들이 방해받지 않고 그들의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 허용될 것이라는 공고를 보았을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결혼할 때

1966년 이전에는, 정부가 제정한 법적 혼인 신고 마련이 없었습니다. 모든 결혼은 전통 혼례로 치러졌지만, 형제들은 또한 서약서에 서명해서 그것을 지부 사무실로 보내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66년에 정부가 법적 혼인 신고 마련을 제정했는데, 의무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교인들은 지방 증인들에게 이 법적 마련과 일치하게 혼인 신고를 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것은 형제들에게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였습니다. 첫째, 혼인 신고를 하는 데는 돈이 드는데, 돈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둘째로, 새로 결혼하는 사람들은 생년월일이 확인되어야 하였습니다. 생년월일을 다들 알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정확한 기록을 남기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백성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존중”할 만한 결혼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히브리 13:4.

집들이 대부분 받침 기둥 위에 지어진 에탱이라는 마을에 사는 증인들은, 혼인 신고 담당관을 오게 하는 편이 25쌍의 부부를 그에게 보내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이 워낙 많았으므로, 그 담당관도 동의하였습니다. 마침내 그가 도착해 보니, 60쌍의 부부가 결혼을 합법화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이 합동 결혼식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교회 지도자들이 혼인 신고를 하도록 아무 도움도 주지 않자, 자기들도 행정 담당관이 오면 그 기회에 혼인 신고를 할 수 있겠는지 여호와의 증인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약 4개월 만에, 회중의 규모가 전도인 69명에서 90명으로 부쩍 커졌습니다.

적합한 지부 시설을 마련함

지부 사무실이 제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적합한 시설이 필요하였습니다. 돈 워드는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기 전에 건축 일을 했었습니다. 1968년에 그는 그 경험을 이용하여 코토누에 지부 사무실 겸 선교인 집을 건축하는 일에 관여하였습니다. 16명의 파이오니아와 그 외의 많은 현지 증인들의 도움으로, 실제 공사는 8개월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1층에는 훌륭한 왕국회관이 있었고 지부 사무실과 식당, 발송실도 있었습니다. 위층에는 침실이 여섯 개 있었는데, 야자나무로 가득한 넓은 정원이 내려다보였습니다. 정원 담장 너머로는 반짝이는 석호 여기저기에 통나무배를 타고 있는 어부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1969년 1월 12일은 베냉 신권 역사에 특별한 날로 남을 것입니다. 그 날, 새로운 지부와 선교인 집 시설이 여호와께 봉헌된 것입니다. 형제들은 그러한 훌륭한 건물이 실로 여호와께서 그들의 활동을 축복하신다는 증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건물보다 훨씬 더 가치 있었던 것은, 경건한 특성들로 건축되고 있는 그리스도인 인간성이었습니다.

정직성—옳은 길

한 고급 호텔에서 일하는 다니엘 아이나두는 어느 날 그리스도인 인간성의 질을 시험받게 되었습니다. 한 투숙객의 바지를 세탁소에 맡기려다가, 한쪽 주머니에서 미화 1600달러 상당의 돈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 액수는 그의 2년치 봉급보다 많은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할 것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거액을 손에 쥐고 있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이 형제는 침례받은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최근에 「파수대」에서 정직성에 관한 기사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부정 이득을 취함으로 하느님을 불쾌하시게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접수처에 있는 접수계원에게 돈에 관해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접수계원은 그 많은 돈을 보고는, 우리 형제를 한쪽으로 데려가더니 “우리 이 돈을 갖고 비밀로 합시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할 순 없습니다. 전 그리스도인이자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우리 형제가 말하였습니다. “나도 그리스도인이에요. 성당에 정기적으로 나갑니다. 이 돈을 가지면 좀 어때요. 어차피, 그 사람은 잃어버린 건데. 안 그래요?” 그 접수계원이 항변하였습니다. 이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 형제는 그 돈을 호텔 주인에게 가져갔고, 주인은 그 돈을 호텔 금고에 넣었습니다.

얼마 후에, 그 투숙객은 방으로 돌아와서 정신없이 자기 돈을 찾았습니다. 침대 밑도, 옷장 안도, 의자 뒤도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돈은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몹시 걱정이 된 나머지 호텔 주인에게 갔더니 그는 돈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호텔 금고에 있다고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호텔 종업원 중 한 사람이 돈을 돌려준 것을 알고, 그 투숙객은 이 정직한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깊은 감명을 받은 그 투숙객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좋은 사람들이군요. 프랑스로 돌아가면 그들을 꼭 만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에 대해 더 알고 싶으니까요.” 호텔 지배인도 전에는 여호와의 증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증인들을 종업원으로 두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일은 금방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후에, 다른 투숙객이 얼마 되지 않은 돈을 잃어버렸다며 아이나두 형제가 그 돈을 훔쳐갔다고 비난하였습니다. 호텔 주인은 이 일에 관해 듣고, 얼른 나서서 우리 형제를 두둔하며 위의 경험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베냉에서는 활동적인 증인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1971년에는, 22명의 선교인이 이 곳의 야외와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였습니다. 1975년에는, 2381명의 전도인이 야외 봉사에서 활동하였는데, 과거 1950년에 최고 기록이 290명뿐이었던 것과 비교가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확실히 거짓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있는,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을 축복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증가를 모든 사람이 다 기뻐한 것은 아닙니다. 더 어두운 박해의 먹구름이 지평선상에 드리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부의 변화

“푸르 라 레볼뤼숑?”(혁명 준비가 되었습니까?) “프레!”(준비되었습니다!) 이 말은 1975년 초에 베냉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 체제가 정권을 잡으면서 이 나라 거리에서 흔히 들리는 인사말이 되었습니다. 정부 각 부처에서 발신하는 서신 끝에는 “혁명을 준비하라, 투쟁은 계속되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은 세계 전역에서 정치 문제에 관해 중립을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들은 성서로 훈련받은 양심상 그러한 구호를 외칠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 15:19; 18:36) 이로 인해 그들은 많은 적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975년 11월—체포 사건 발생

피에르 보루는 1975년 11월에 봉사를 하다가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가 정치 구호로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루 형제가 긍정적으로 대답하지 않자, 그는 곧바로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경찰은 보루 형제에게 구호를 외치게 하려고 하였지만, 그는 거부하였습니다. 보루 형제는 몇 시간 동안 무릎과 팔꿈치로 기어다녀야만 하였습니다. 보루 형제는 확고함을 유지하였습니다.

마침내 일부 형제들이 담당 경찰관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일요일이라 결국 그 날 늦게 풀어 주기로 동의하였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형제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의 귀추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1975년 12월—라디오·신문 경고

12월에는 국영 라디오 방송인 “혁명의 소리”에서 종교 조직 전반에 대해 호되게 비판하였습니다. 청소년들이 무리지어 어떤 교회들을 약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혁명가들이 증인들에게 전파 활동을 중단하도록 경고하였습니다. 1976년 1월 14일이 되었을 때는 이미 공개 증거가 당국에 의해 여러 곳에서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 때까지 여섯 군데의 왕국회관이 폐쇄되었고, 세 군데의 개인 집에서 집회가 중단되었습니다. 에탱에서는 왕국회관이 점거되어 정치 집회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몇몇 더 큰 중심지에서는, 파이오니아와 선교인들이 그다지 방해받지 않고 여전히 봉사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1976년 3월—제한의 증가

1976년 3월 24일에 베냉 지부는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에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이 나라 여러 지방 당국은 다양한 방법으로 종교 활동을 계속 제한하고 있습니다. 많은 물신 숭배 의식과 그 밖의 종교 의식이 이 나라 여러 지역에서 금지되었습니다. 또한, 집집으로 또는 소도시와 마을의 여러 지역에서 전파하는 일이 금지되었습니다.”

2주 후, 베냉 지부는 통치체에 이렇게 더 보고하였습니다. “북부에 있는 한 지역(구카)에서는, (자매를 제외한) 회중의 모든 형제가 체포되어 72시간 동안 구금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파 활동을 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형제들에게 강제로 정치 구호를 외치게 하려고 하였지만, 형제들은 거부하였습니다. ·⁠·⁠· 형제들은 왕국회관 앞에 기를 게양할 경우에만 집회를 볼 수 있으며, 매 집회 전후로 정치 가요를 부르고 정치 구호를 외치는 시간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형제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회를 계속 형제들의 집에서 보았습니다.”

1976년 4월—코토누의 형제들이 체포되다

정치적 긴장이 전국에 걸쳐 계속 고조되었습니다. 4월 초에는, 대부분의 직장에 매주 정치 구호, 기 게양식, 국가(國歌), “사상” 교육을 위한 학습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 모임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는 당국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임이 코토누의 한 지역에서 소집되었는데, 그 직장에는 형제 세 명과 자매 한 명이 다니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모임에 참석하기를 거부하였으며, 자매는 가기는 했지만 참여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다음 월요일에 출근을 했더니, 처음에는 자매, 그 다음에는 세 형제로 하여금 뒤따라오는 경찰차에 앞서서 줄곧 거리를 달려 경찰 본서까지 가게 하였는데, 그 거리는 약 5킬로미터나 되었습니다. 당시 자매는 임신 4개월이었습니다. 경찰서에서도 그들은 입장을 바꾸지 않고 정치 구호 외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심한 구타를 당하면서도, 그들은 확고함을 유지하였습니다. 신체적인 구타로도 그들의 믿음을 꺾지 못한 것입니다.

칼로스 프로서는 베냉 지부 위원회를 대표하여 1976년 4월 7일 통치체에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막 이 편지를 쓰려고 하는데, 지방 장관이 수행원과 비서를 대동하고 저를 방문하였습니다. 구호와 기 경례 등에 대해 질문을 하기에, 그 중 몇 가지 점에 관해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우리 사람 몇 명이 이러한 일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다가 체포되었다는 말을 하였고, 또 명단을 준비 중이라는 말도 하였습니다. 방문은 상당히 우호적이었지만, 그는 몇 가지 점에서 매우 확고하였는데, 이를테면 우리가 더는 사람들의 가정에서 전파해서는 안 되며 단지 우리 ‘사원’ 안에서만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당국자들이 어떻게 하기로 결정했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이전 어느 때보다도 잘 알려지고 있다는 점인데, 이 모든 일이 증거가 되기를 우리는 기도합니다. 선교인들은 모두 우리가 이 곳에 얼마나 더 있게 될는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박해가 한층 심해지다

1976년 4월 16일, 모든 국민에게 알리는 라디오 방송에서 내무부 장관은 여호와의 증인을 강력히 비난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여호와의 증인이 사상 교육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며 정치 구호를 외쳐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격한 말로, 장관은 여호와의 증인이 이 달 말까지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C.I.A. 정식 요원’—선교인들의 역할을 왜곡해서 말한 것—인 모든 대표자들은 국외로 추방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발표는 약 2주 동안 베냉 전역에 방송되었습니다. 전에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 많은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누구이기에 그렇게도 말들이 많은걸까?’ 하고 궁금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방송은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으며, 여호와의 이름은 증인들 자신이 당시 제한된 공개 활동으로는 이룰 수 없었을 정도로 전국에 울려퍼졌습니다.

지방 장관실에서 또 다른 대표자가 지부로 오더니 모든 사람의 이름과 신상에 관한 세부 사항들을 알아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 일행은 전국에 있는 모든 책임 있는 형제들의 이름을 원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지부 겸 선교인 집에 사는 선교인들의 이름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들이 떠나자, 협회의 모든 기록과 서류철을 건물 밖으로 옮겨 찾기 힘든 곳에 숨겼습니다.

다음날인 4월 17일에는, 관리 두 명이 다시 오더니 책임자를 보자고 하였습니다. 두 사람 다 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프로서 형제는 들어오기 전에 담배를 꺼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요구에 응했고 사무실로 안내되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전국에 있는 책임 있는 형제들 전원의 이름을 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때에는, 협회의 중요한 서류철은 아무 데도 없었으며, 수색을 하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찾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선교인들의 마지막 시간

1976년 4월 26일, 몇몇 형제들은 코토누 악팍파에 있는 지방 장관을 만나서 상황을 더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이 현명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부에서 그들의 의도를 알았더라면,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몇몇 지방 장로가 의도는 좋았던 이 대표자 파견을 말려 보았지만, 그들은 고집스럽게 밀고 나갔습니다. 결과는 비참하였습니다. 지방 장관은 대표자들에게 얼마쯤 이야기하다가, 어떤 정치 구호를 외쳤고, 그들이 대답하지 않자 체포해 버렸습니다.

이 시점에서, 13명의 선교인 가운데 10명이 아직도 이 나라에 있었습니다. 머혼 형제와 자매는 출산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몇 주 있다가 영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려되는 상황을 고려해서, 협회에서는 그들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속히 떠나도록 권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포르토노보 선교인 집에 사는 메리안 데이비스는 어머니의 병환으로 캐나다에 가 있었습니다.

4월 26일 저녁, 남아 있는 선교인들은 벧엘 집에 갇힌 “수감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다른 사람들도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전화도 없었습니다. 선교인들은 추방당할 경우에 대비해 짐을 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1976년 4월 27일—지부 위원회 조정 위원의 연행

이튿날 아침, 한 무장 경찰이 프로서 형제를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그는 프로서 형제를 협회 승합차에 타게 하더니 운전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내내, 그 경찰은 프로서 형제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었습니다. 프로서 형제는 악팍파에 있는 경찰서로 연행되어 심문당하였습니다. 신체적인 학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욕설로 위협하려고 하였습니다.

“주요 인물의 이름을 모두 대란 말야!” 경찰이 소리쳤습니다. 프로서 형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난 형제들의 이름을 말할 수 없습니다. 원한다면, 왕국회관에 가서 직접 적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프로서 형제는 왕국회관에서 꽤 오랫동안 집회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위험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 집회는 회중 서적 연구 집단별로 개인 집에서 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뮈엘 안스모에비는 어떻소? 그 사람을 알고 있지 않소? 그 사람도 당신들과 한 통속 아니오?” 이 질문을 듣고 프로서 형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바로 안스모에비 형제의 집에, 협회 기록을 두 개의 오래 된 낡은 여행 가방에 넣어 숨겨 놓았던 것입니다. 이 기록에는 많은 형제들의 이름이 들어 있었습니다. 경찰이 이미 이 기록을 찾은 것입니까? 프로서 형제는 애써 침착한 모습을 보였지만, 마음속 깊이 여호와께 기도로 인도를 구하였습니다.

마침내 심문이 끝났습니다. 아무 이름도 말해 주지 않았고, 프로서 형제도 전혀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풀려났는데, 그것도 혼자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 후, 그 순간을 돌이켜 보면서, 프로서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제가 처음에 생각한 것은, ‘내가 형제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심해야지! 함정일지도 몰라. 내가 형제들한테 가기를 바라면서 나를 미행하려는 계획일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로서 형제는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곧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다리를 건너 시내로 들어가 우체국에 우편물이 있는지 보았습니다. 형제들에게 누를 끼칠 일은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형제들을 만나서 우리가 무사하다고 안심시켜 주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집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가는 동안 내내 어떻게 하면 형제들을 만날 수 있을까 궁리했습니다. 느닷없이, 매우 강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신호도 없이, 두 사람이 탄 오토바이가 제 차 옆으로 따라붙었습니다. 누구일지 궁금했습니다. 좁은 다리를 지나가는 것은 그런 폭우가 내릴 때 특히 위험했으니까요. 오토바이가 이제는 내 앞으로 달리면서, 뒤에 탄 남자가 고개를 돌리더니 헬멧을 벗어서 자기를 알아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지부 위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운전자도 지부 위원이었습니다! 그들을 본 지가 며칠 됐었습니다. 우리는 벧엘 겸 선교인 집에 연금된 상태였으니까요.

비가 계속 쏟아져 내려, 대부분의 사람은 비를 피해 달려갔습니다. 나는 계속 차를 몰고 다리를 건너서, 집으로 가는 길을 지나친 다음, 길가에서 기다렸습니다. ·⁠·⁠· 기도하고 ·⁠·⁠· 기다리면서 ·⁠·⁠· 우리 형제들을 만나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지만.

오래 걸리는 것 같더니, 두 형제가 탄 오토바이가 마침내 내 옆으로 와서 멈췄습니다. 이야기할 시간으로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폭우가 내려 주위에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나는 심문 중에 경찰이 한 말을 고려해서 형제들에게 협회 기록을 다른 장소로 옮길 필요에 관해 말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특별 파이오니아들과 관련된 문제들과, 순회 감독자들로 하여금 모든 회중을 신속히 방문하게 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리는 마련, 그리고 개인 집에서 작은 집단으로 계속 집회를 볼 계획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제 곧 금지령이 내려지리라는 건 거의 확실해 보였습니다.”

벧엘 겸 선교인 집에 대한 수색

4월 27일 화요일 오후, 군인들이 벧엘 겸 선교인 집을 에워쌌습니다. 그들은 자동 무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정문에 군인 한 명이 배치되었고, 후문에도 한 명이 있었으며, 다른 군인들은 정원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선교인들에게 모두 식당으로 내려가라고 명령하고는, 총부리를 계속 겨누었습니다. 한 사람씩, 각자의 방으로 가게 하더니 군인들이 수색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선교인들이 미국 첩보원이거나 외국 혁명가임을 증명하는 정보를 반드시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군인들이 마르가리타 쾨니거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수색을 시작했습니다. 아! 그들이 이제 죄를 입증하는 문서를 손에 넣었나 봅니다. 아니, 사실은 그렇다고 그들이 착각한 것입니다. 군인들은 독일어로 된, 쾨니거 자매 아버지의 사후 재산 처리 유언장 사본을 압수하였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암호 전문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페터 폼플의 방에서는, 그들 생각에 비밀 지령 같은 것을 발견했지만, 실은 발톱 무좀에 대한 처방전이었습니다.

칼로스 프로서와 메리 프로서의 방은 마지막으로 수색하였습니다. 한 여행 가방에서, 군인들이 거액의 돈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돈은 이틀 전에 협회의 은행 계좌에서 인출한 것이었습니다. 혹시 계좌가 동결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선교인들이 모두 얼마 동안 가택 연금 상태였으므로, 돈을 집 밖으로 옮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군인들은 그 돈을 발견했을 때, 만지기를 두려워하며 재빨리 도로 가방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나중에 전액이 고스란히 나이지리아 라고스에 있는 지부에 전달되었습니다.

프로서 자매는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군인 한 명이 저한테 ‘여기 있은 지 오래 됐으니까, 분명히 회중 책임자 몇 명의 이름쯤은 알고 있겠죠’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글쎄요, 여기 사정을 잘 알잖아요, 아무도 정식으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걸. 우리는 모든 사람을 에마뉘엘 아버지나 외제니 어머니 같은 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두가 어떻게 서명을 하는지도 잘 모른다니까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질문을 한 그 군인은 웃으면서 ‘여기 있은 지 정말 오래 됐군요!’ 하고 말했습니다.”

프로서 자매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한 군인이 우리 방을 수색하다 말고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휘관도 이것을 보더니 그에게 일을 계속하라고 말했습니다. 지휘관을 올려다보며 한 그의 이러한 대답은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습니다. ‘저는 프로서 씨 부부를 안 지 여러 해 되었고 그분들은 종종 제 집에서 저와 성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여기 와서 그분들의 방을 수색할 수가 있겠습니까?’”

군인들은 프로서 부부 방 수색을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습니다. 죄가 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선교인들은 어쩌다 아직까지도 지부에 남아 있는 서류철이 있으면 거기서 이름을 오려내느라 이미 상당히 오랜 밤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려낸 것들은 변기로 흘려 보내거나 태워 버렸습니다. 수색 도중에, 한 감시병이 정원에서 연기가 나고 있는 더미를 보더니 그에 대해 물었습니다. “아, 그거요, 거긴 우리가 쓰레기를 태우는 곳입니다” 하고 프로서 형제가 대답하였습니다. 감시병과 프로서 형제 모두 중요한 문서를 태운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봐, 이것 좀 봐!” 발송실을 수색하던 군인들 중 한 사람이 외쳤습니다. 군인들은 오픈 릴 테이프들과 함께 지역 대회 성서 드라마 각본을 발견한 것입니다. 군인들은 드라마 등장 인물들의 이름이 조직의 주요 인물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테이프와 각본을 증거물로 수집하였습니다.

쉬르테 나시오날

군인들은 선교인들에게 여권을 챙기라고 명령하고는, 쉬르테 나시오날 즉 내무부의 한 분과로 데려갔습니다. 추방 명령서가 낭독되었는데, 선교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서 자기 물건을 챙기게 하지도 않은 채 국경으로 태우고 가서 당장 내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늦은 시간이어서 경찰들이 대부분 퇴근하고 없었습니다. 선교인들을 국경까지 호송할 사람이 아무도 없자, 집으로 돌아가서 오전 7시에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프로서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는 저녁 8시가 훨씬 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밤이 힘든 밤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수천 명의 혁명론자들이 우리의 집을 에워싸고는 정치 구호를 외치고, 담장에 소변을 보고, 선교인들에게 경멸적인 욕을 해댔습니다. 그런 행동은 밤새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바깥에 있는 성난 군중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잠을 잤다고 해도 제대로 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날 밤 어떤 변을 당하게 될지, 다음날까지 살아 남게 될지 말없이 궁금해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매들도 울음을 터뜨리지 않고 계속 바쁘게 짐을 싸면서 서로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게도, 혁명론자들은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감정적인 압박과 정신적인 고통은, 선교인들이 기도를 통해 여호와로부터 받는 지원과 서로 주고받는 격려로써만 인내할 수 있었던 시련이었습니다.” 서로 돕고 여호와께 의지하는 것은 앞으로도 매우 중요할 것이었습니다!

베냉에서 보낸 마지막 날

아침 햇살이 오전 6시경에 처음으로 구름 사이로 새어 나와, 새 날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4월 28일, 쉽게 잊지 못할 날이었습니다. 늘 하던 대로, 선교인들은 오전 7시에 아침 식탁에 모여 그 날 아침의 성구를 토의하였습니다. 그 날은 분명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할 날이 아니었습니다! 선교인들은 모두 그 날을 지내기 위해서는 가외의 힘이 더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나이지리아 사람으로서 여러 해 전에 군어를 배운 티아필루스 이도우는 지부에서 번역자로 봉사하였지만, 벧엘에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바깥에서 전체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안으로 들어가거나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으므로, 선교인들이 아침으로 먹을 빵이 없었습니다. 이도우 형제는 그것을 알았으며, 그래서 제과점에 가서 빵을 좀 사고는 벧엘 정문에 있는 군인에게 자신을 빵 배달원으로 소개하였습니다. 낡아빠진 옷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밖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던 군중 가운데 그를 알아볼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키고 있던 군인이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선교인들은 사랑하는 이도우 형제의 미소짓는 얼굴을 한번 더 보게 되어 참으로 격려를 받았습니다! 이 간단한 행동으로 인해 “오늘 우리에게 이 날을 위한 빵을 주십시오”라는 기도는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었습니다. (마태 6:11) 그렇습니다. 선교인들은 여호와의 손길이 미치는 것을 보고 힘을 얻었습니다.

“쾅! 쾅! 쾅!” 누군가가 정문을 세게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당일의 성구 토의를 시작하는데, 바깥에서 몹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지방 장관과 혁명론자들이 지부 시설 바깥에 깃대를 세웠는데, 그것은 건물이 이제 “인민의” 것이라는 표시였습니다. 선교인들은 밖으로 나와 기 게양식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강제로 끌려 나가게 될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참여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폴 바이런이라는 한 선교인이 “저 사람들은 나를 질질 끌고 가야 할걸”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선교인의 말은 나머지 선교인들의 결심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가—아마도 여호와의 개입으로—군인들은 선교인들을 바깥으로 나오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일의 성구를 끝마칠 시간이 몇 분 더 생기게 되었습니다.

기 게양식이 끝나자, 군 장교들은 선교인들에게 개인 소지품을 아래층으로 가지고 내려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소지품들을 철저하게 수색하였습니다. 여행 가방에 있는 것만 가져가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 외의 모든 소유물은 남겨 두었습니다. 군인들은 프로서 형제를 벧엘 방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문을 잠그게 하고는 열쇠를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지부가 점거당한 것입니다! 착잡한 마음으로, 몇몇 현지 형제들은 사랑하는 선교인들이 집에서 끌려나와 무장 감시를 받으며 범죄자처럼 호송당하는 광경을 벧엘 담장 너머 좀 떨어진 곳에서 죽 지켜보았습니다.

추방되다!

선교인들은 다시 쉬르테 나시오날로 끌려가서 추방 명령서를 각각 한 장씩 받았습니다. 마르가리타 쾨니거와 기젤라 호프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협회 승합차에 도로 태우더니 나이지리아 국경으로 데려갔습니다. 쾨니거 자매와 호프만 자매는 나중에 토고 국경으로 데려갔습니다.

대부분의 선교인들과 차에 함께 타고 있던 무장 호송병은 바짝 긴장해 있었습니다. 위험한 범죄자들을 국경으로 호송하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 호송병은 기름을 넣기 위해 차를 멈춰도 좋다고 허락하였습니다. 젊은 주유소 직원은 협회 차를 알아보고는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선교인들인데, 성서에 대해 전파했다고 추방되고 있는 겁니다.” 선교인이 유감인 듯 대답하였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언젠가 돌아오게 될 겁니다.” 그 직원이 대답하였습니다. 그 젊은이의 말이 맞았습니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었습니다.

금지령 아래서

베냉 신문인 「에우주」 1976년 4월 30일자에는 이러한 표제가 실렸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종파, 베냉 인민 공화국에서 금지.” 박해는 이 나라 여호와의 백성에게 새로운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시초부터, 사탄은 이 거짓 종교의 거점에 진리의 물이 흐르지 않게 하려고 몹시 애를 써 왔습니다.

선교인들이 추방당하자 얼마 안 되어 곧 많은 형제들—600여 명—이 국외로 도피하였는데, 그들은 가진 것이 물질적으로는 별로 없었지만 영적으로는 많았습니다. 남아 있던 많은 사람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무자비하게 구타당하였습니다. 또, 모든 소유물과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직장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형제들이 가장 심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서신을 끝맺거나, 전화를 받거나, 사람들에게 인사할 때, “혁명 준비가 되었습니까?” 또는 “투쟁은 계속되리!”와 같은 정치 구호를 사용할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아폴리네르 아무수게누는 코토누 지역에서 한 진료소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느님의 왕국만을 지지하였기에 그러한 행동을 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친족들은 빈말로라도 구호를 외치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애들을 생각해 보세요.” 젊은 조카가 상기시켰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그는 베냉을 떠나 나이지리아로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나이지리아에서 그는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비교적 짧은 시일에, 저는 집과 자동차, 직장 등 물질적으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지금은 이 곳 나이지리아에서 건축 중인 집에 살고 있습니다. 창문도 없고 문도 없고 바닥이 콘크리트로 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저는 아홉 자녀와 함께 사는데, 다행히 첫째와 둘째가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벌레와 모기, 비, 추위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한 형제가 우리에게 작은 침대를 주어서 생후 3개월 된 우리 아기의 요람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으로 만족하면서 사랑 많으신 우리 하느님 여호와께 계속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 그분은 머지않아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금지령이 내려지자, 많은 형제들이 이와 유사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뱀과 같이 조심스럽고”

그러한 상황이 참 종교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종교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었습니다. 순회 감독자들이 계속 회중을 방문하였지만, 한 번에 이삼 일 동안만 방문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제 형제들은 체포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선견지명을 발휘해야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순회 감독자들은 지저분한 낡은 옷을 입고, 대개 날이 새기 전이나 해가 진 후에 마을로 들어왔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의 도착을 눈치채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누군지 의심받을 경우, 다른 옷으로 재빨리 갈아입을 준비가 항상 되어 있었습니다. 현재 베냉 지부 위원인 자카리 엘레그베는 그 당시 순회 감독자로 회중을 방문하던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한번은 당국자들이 나를 찾고 있는 동안, 하루 종일 진흙으로 지은 옥수수 창고 속에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를 창고에서 찾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더군요. 그 날이 끝날 쯤에 제 갈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큰 모임을 열려면, 관할 시청의 허가를 받아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종들은 “뱀과 같이 조심스럽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함”을 증명하였습니다. (마태 10:16) 결혼하기를 원하는 남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지방 당국에 피로연 허가를 요청하였습니다. 이러한 허가는 대개 아무 문제 없이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회자는 “이틀간의 피로연”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설명함으로 프로그램을 시작하곤 하였습니다. 이틀간의 피로연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사실, 피로연은 실제로는 축소된 지역 대회였던 것입니다! 신혼 부부를 연사 정면 맨 앞줄에 앉혀 놓고, 신혼 부부와 행복한 청중의 유익을 위해 성서에 근거한 연설을 하곤 하였습니다. 에탱 마을에서 있었던 그러한 한 행사에서는, 600여 명이 “피로연”에 참석해서 13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많은 마을 사람들은, 특히 침례에 관해 듣게 될 때, 여호와의 증인은 결혼 피로연도 참 이상하게 한다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장례식 역시 대회를 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성서 출판물을 국내로 들여오는 방법도 다양해서, 카누나 자전거로, 배낭으로, 숲길로 들여오거나, 그 밖에 당시 상황에 적합해 보이는 방법으로 들여왔습니다. 당국자들 모두가 우리의 활동을 맹렬하게 반대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1984년에 젊은 형제 두 사람이 카누에 출판물을 싣고 나이지리아 쪽에서 건너편으로 강을 건너다가, 베냉 쪽에 세관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출판물은 압수당할 것입니까, 아니면 형제들은 구타당하고 투옥될 것입니까? “그 가방들 안에 뭐가 있소?” 한 세관원이 캐물었습니다. “성서 출판물인데요.” 형제들이 대답하였습니다. “봅시다.” 형제들이 그들에게 「땅에서 영원히 사는 길」 팜플렛을 각각 한 부씩 제공하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받았습니다. “아직도 여호와의 증인을 위해 출판물을 들여오고 있습니까?” 형제들은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었습니다. “가시오.” 세관원이 말하였습니다. 두 형제는 속으로 여호와께 감사드렸습니다. 이러한 예들은, 형제들에게 “적절한 때에” 영적 양식을 공급하려는 노력을 여호와께서 축복하고 계시다는 형제들의 확신을 강화시켜 주었습니다.—마태 24:45.

“하느님의 말씀은 갇혀 있지 않습니다”

여전히 베냉에 있던 증인들은 마음속에 있는 귀중한 진리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리스 코도의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코토누에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칼라비라는 마을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선한 사람이면 하늘에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게 되었을 때, 하느님의 승인을 받기 원한다면 그 이상이 필요함을 성서에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촌이 모리스를 이웃에 사는 증인에게 소개시켜 주었는데, 그 증인은 모리스가 성서에 관심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 즉시 무료 가정 성서 연구를 제안하였습니다. 모리스와 그의 아내는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고 신속히 진보하였습니다. 모리스는 얼마 되지 않아 전파 활동에 참여하기를 원하였는데, 진리를 발견했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형제들은 그의 진실성을 확인해야 하였습니다. 관심이 있는 척했다가, 배신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모리스 코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기회를 포착해서 친족과 친구들 그리고 직장 동료들에게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82년 2월 11일, 코도 형제 부부는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연구를 사회해 준 형제 및 코도 형제와 연구를 하고 있던 새로운 관심자와 함께 투옥되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이웃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왕국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증인들의 가르침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국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칼라비 마을은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의 본거지”가 되고 있었습니다. 당국은 그렇게 되는 것이 몹시 싫었던 것입니다.

코도 형제의 아내를 포함해서 체포된 네 사람은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자들과 함께 가장 비인간적인 상태의 감방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들은 간단한 일 하나만 하면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간단한 일이란 자신이 더는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라는 공식 문서에 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그렇게 하기를 한마디로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의 하느님 여호와를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헌신은 무조건적인 것이었으며 협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태도에 관리들은 노발대발하였으며, 형제들이 감방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성서 출판물을 압수하였습니다.

코도 형제 자매의 두 자녀, (각각 여섯 살과 세 살인) 나딘과 지미가 병이 나게 되었습니다. 코도 자매는 집으로 돌아가서 병이 난 자녀들을 돌볼 수 있겠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이 요청은 거절당하였지만, 그 자녀들을 교도소에서 돌보는 것은 허락되었습니다. 이제 교도소에는 자녀들을 포함하여 여섯 명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가오는 기념식을 어떻게 치를 것입니까? 현지 형제들이 효모가 들어 있지 않은 빵과 포도주를 기념식용으로 몰래 들여보낼 수 있었습니다. 코도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는 동안에는, 교도소에 정적이 감돌아 기념식이 방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들을 투옥시킨 장본인인 지방 관리는 이 나라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의 후임으로 온 사람은 좀더 호의적이었고, 그래서 5월 26일, 투옥된 지 석 달 반 만에 그들은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4년 후, 코도 형제는 다시 수감되었는데, 이번에는 정치 구호 외치기를 거부하였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후에 자신이 그 기간을 어떻게 현명하게 이용하였는지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교도소에 있는 동안 보조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제 개인 구역’에서 사용할 출판물을 충분히 확보해 놓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수감자들과 교도관들 그리고 경찰들에게 전파해서, 많은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습니다.” 비록 그는 교도소에 있었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디모데 둘째 2:9.

과거를 회고하면서, 형제들은 칼라비 마을이 실제로 여호와의 백성의 “활동의 본거지”가 되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합니다. 1982년에는 전도인이 4명이었는데, 그 수가 늘어 이제 이 곳에는 두 개의 회중이 크게 번성하고 있으며 전도인도 160명이 넘습니다. 침례받은 이후로, 코도 형제는 30여 명을 교도소의 속박에서가 아니라 큰 바빌론 즉 거짓 종교 세계 제국에서 자유를 얻도록 돕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 정부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무도 결과가 어떠할지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백성에 대한 박해의 열풍이 식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지어 집회를 공개적으로 열 수 있는 지역들도 있었는데, 모든 지역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단지 선구자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시기에, 베냉에는 아직도 하느님의 말씀의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감사히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음을 알려 주는 경험이 있었습니다. 피에르 아반토는 자기가 속해 있던 에글리즈 뒤 크리스티아니즘 셀레스트(천상 그리스도교 교회)의 종교적 위선과 돈에 대한 사랑과 부도덕을 보고 낙담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신앙 요법을 실시하고 있었지만, 신앙 요법은 그의 자녀를 죽음으로부터 구해 주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하늘로 부르셨습니다.’ 목회자가 피에르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한 설명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교회에서 허용되는 행위에 당혹감을 느낀 그는 1973년에 자기 자신의 종교를 세울 의도로 교회를 떠났습니다. 피에르는 여러 종교에서 보아 온 위선과 악한 행위가 없는 종교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피에르는 스스로 아이비베(신성한 마음) 교회의 창시자이자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1964년에 여호와의 증인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피에르는 증인들을 존경하였습니다. 피에르는 자기 자신의 종교를 세우면, 자기 역시 여호와의 증인과 마찬가지로 탐욕과 부도덕이 없는 종교를 갖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피에르의 교회는 21개 회중에 추종자가 2700여 명이나 되는 규모로 성장하였습니다. 피에르는 영향력과 부를 누렸습니다.

하루는 한 남자가 피에르에게 치료를 받으려고 왔습니다. 그 남자에게는 피부병이 있었는데, 상당히 오래 된 병이었습니다. 피에르 아반토는 그의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 남자는 어찌나 기뻤던지 그 보답으로 피에르에게 집을 한 채 주었습니다!

하지만 부도덕과 탐욕, 즉 피에르 아반토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종교를 세우고자 하는 동기를 갖게 하였던 바로 그 행위들이 이제 그의 교회로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피에르는 만일 자신이 순결한 숭배를 원한다면 여호와의 백성을 모방할 것이 아니라 그 백성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점진적으로, 피에르는 증인들과 성서 연구를 하면서 배운 것을 설교단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는 종종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말로 설교를 끝마쳤습니다. “나는 단지 선구자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진리를 가진 사람들은 나중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하였습니다.

피에르는 증인들과 연구하는 횟수를 일 주일에 두 번으로 늘리고 난 후에,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회의를 하려고 자기 교회 목회자를 전부 불러 모았습니다. 부름을 받은 사람 가운데 28명이 참석하였습니다. 피에르는 성경을 사용해서 참 종교와 거짓 종교의 차이점을 설명하였습니다. 그 회의에서, 교회들에서 형상을 전부 없애고 교직자들이 더는 특별한 겉옷을 입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목회자들은 자기 지역에서 증인에게 연락해 가정 성서 연구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많은 교회의 목회자들이 피에르 아반토의 행동을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수요일에는 성서 연구를 하고, 일요일에는 배운 것을 근거로 설교를 하곤 하였습니다. 후에, 수요일 마련은 회중 서적 연구가 되었고, 일요일 설교는 공개 강연이 되었습니다.

1989년에, 피에르 아반토는 자신의 추종자 전원이 참석하는 모임을 소집하였습니다. 1000여 명이 포르토노보에서 그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이 모임에서 피에르는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나는 단지 선구자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진리를 가진 사람들은 나중에 나타날 것입니다’라는 말로 설교를 끝마치곤 하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마침내 그들이 왔습니다. 바로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그러한 발표를 하자 질의 응답이 시작되더니, 약 7시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발표를 좋은 소식으로 여긴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생활 방식을 더 좋아하였는데, 그러한 생활 방식에는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일이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베냉에서만도, 아이비베 교회 성원이었던 사람 75명 이상이 침례를 받았고, 그 외에도 약 200명이 연구를 하면서 그 동일한 목표를 향해 진보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다수는 읽기와 쓰기도 배우고 있습니다.

피에르 아반토는 1991년 6월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전에 속해 있던 종교와의 모든 관계를 법적으로 끊어 버렸습니다. 전에 그의 교회였던 건물 가운데 여덟 군데가 왕국회관으로 개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떤 남자의 병을 고쳐 주고 선물로 받은 집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반토 형제는 그 집을 그 남자에게 돌려 주었습니다. 당연히, 그 남자는 매우 놀랐습니다. 하지만 우리 형제는 이제 진리를 발견하고 나니, 예전에 자신이 무슨 병을 치료할 수 있었든지 간에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악귀들에게서 온 권능의 결과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사람들이—그것도 그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종교적인 오류에서 벗어나 “진리의 정확한 지식”에 이르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격려가 됩니다! (디모데 첫째 2:4) 게다가 그들이 자유롭게 모여 하느님의 말씀으로 교훈받을 수 있는 때가 왔습니다.

결코 잊지 못할 날

1990년 1월 24일, 두 명의 형제가 중요한 문서를 가지고 베냉에서 나이지리아의 라고스로 갔습니다. 이 형제들은 그 어려웠던 시기에 베냉의 활동을 돌보고 있던 나이지리아 지부에, 1990년 1월 23일자 제004호 법령에 의해, 베냉 공화국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금지하고 있던 이전 법령(1976년 4월 27일자 제111호)이 그 날부터 효력을 잃는다고 공표되었음을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마침내 공개적으로 전파하고 그리스도인 집회를 열 공식적인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을 지방 증인들에게는 어떻게 알릴 것입니까?

코토누에서 모임을 가질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 모임을 조직하는 형제들은 모이는 이유를 사전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지방 증인들은 자기들이 코토누 중심부에 있는 공공 건물에 모이도록 초대를 받은 이유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착해서,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을 환영하는 대형 현수막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우리는 금지령 아래 있는데’ 하고 많은 형제들은 생각하였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이거 함정 아냐?’ 하고 수상하게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모임은 오전 10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오전 9시에 모든 자리가 다 찼습니다. 건물 안에는 대형 현수막이 두 개 있었습니다. 한 현수막에는 계시 4:11의 “여호와 우리 하느님, 당신은 영광과 영예와 권세를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라는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다른 한 현수막에는 시편 144:15의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는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모임이 시작되자, 사회자는 자기 손에 들고 있는 문서에 의하면 “정부가 우리 활동에 대한 금지령을 해제하였습니다!”라고 발표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해 있던 나이지리아의 지부 위원인 올리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발표에 이어 터져 나온 박수 갈채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건물이 부실하게 지어졌더라면 계속되는 그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에 무너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참석한 사람들은 무슨 말이 있었는지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 일제히 박수를 멈췄습니다. 그랬다가 다시 박수를 치기 시작하더니 몇 분 동안 계속 쳤습니다. 사회자는 시편 126편을 읽어 보자고 했지만 박수 소리 때문에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회자를 포함해서 우리 중 상당수는 눈에 눈물이 글썽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부활 장면을 목격하는 것과도 같아, 형제들은 감사와 기쁨에 넘쳐 서로 둘러보며 손을 마주 잡았습니다.”

이어지는 연설들에서, 형제들은 14년 동안 금지령 아래서 인내한 데 대해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비통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재건할 때이며, 환경이 허락한다면 되찾은 자유를 현명하게 사용하여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할 때이며, 회중 내에서 그 밖의 봉사의 특권을 얻으려고 힘쓸 때였습니다. 지금 자기 백성에게 승리를 안겨 주신 여호와를 계속 의지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었습니다! 이 모임은 휴식 없이 네 시간이나 계속되었지만, 참석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단지 몇 분 같았습니다.

마지막 연사는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형제들은 길에서 만나면 서로 탄로나지 않게 하려고 조심했다고 언급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모임에서 그들은 형제들끼리 자유롭게 인사함으로 잃어버린 세월을 만회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마지막 기도가 끝난 지 두 시간 가량 지났는데도, 많은 증인들은 여전히 건물 앞에서 서로 껴안고 입맞추며 옛정을 새로이 하였습니다. 종교의 자유에는 달콤한 향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이제 이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것이었습니까?

숭배를 위해 모일 있어 기뻐함

왕국회관을 청소하고 칠하고 수리해서 사용 가능한 상태로 복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자기의 시간과 자산을 아낌없이 바쳐 이 일을 하였습니다. 또한, 협회는 순회 감독자들이 모든 회중을 신속히 방문하여, 각 회중에서 이삼 일씩 머무르도록 마련하였습니다. 재조직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다시 여러 가족들이 왕국회관으로 모여드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집회 참석자 수는 흔히 전도인 수의 두세 배나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오는데, 오토바이나 통나무 배를 타고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걸어오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몇 킬로미터씩이나 가야 하지만 단념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들은 막내아이를 포대기를 둘러 등에 업습니다. 큰아이들이 동생들을 도와 줍니다. 집회에 필요한 귀중한 책들은 흔히 아버지가 가지고 가는데, 이 책들이 귀중한 이유는 그 책들을 통해 여호와께서 교훈을 베푸시기 때문이며, 또 큰 책 한 권은 하루 임금에 해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자, 금지령 아래 있는 동안 점거하고 있던 전국에 있는 모든 왕국회관과 포르토노보에 있는 선교인 집, 그리고 코토누에 있는 지부 시설은 정당한 소유주에게 반환되었습니다. 지부와 포르토노보 집에 대한 기본적인 수리가 신속히 완료되자, 지부가 반환된 지 한 달도 채 안 되던 1990년 8월에 바로 그 곳 협회 구내에서 대회가 열려 2000명 가량이 참석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이 시설을 다시 성서 교육 활동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습니다.

베냉 지부는 1991년 9월에 또다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함으로써, 형제들과 더 긴밀히 접촉할 수 있게 되었고 형제들의 영적 필요를 돌보는 일을 더 잘 도와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증거하기를 열망함

베냉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은 다른 나라에 있는 형제들이 수행하고 있는 방법으로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싶었습니다. 금지령 아래 있었던 14년 동안에는, 대부분의 증거를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수행하였습니다. 심지어 장로들 가운데에도 호별 방문 증거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격려와 교훈을 받자, 그들은 호별 방문을 시작하였습니다.

베냉에서는 증거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성서를 사랑합니다. 그들은 방문하는 증인에게 흔히 앉으라고 하고는 주의를 기울여 잘 듣습니다. 증인들이 한 집을 방문하고 다음 집으로 가다 보면, 누군가가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최근호 「파수대」와 「깨어라!」를 달라고 소리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종종, 한 가족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이 마당을 사이에 두고 함께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존중하는 마음에서, 증인은 먼저 가장하고 이야기해도 되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나서, 성인인 아들과 그들의 가족을 방문하는데, 이들의 집은 같은 마당을 향해 문이 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해주신 모든 일에 대해 감사를 나타내기 위해, 수백 명의 사람들이 금지령이 해제된 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특별·정규·보조 파이오니아의 수가 1989년에는 162명이었는데, 1996년에는 610명이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어떤 반응을 얻었습니까? 한 특별 파이오니아 부부는 증인이 전혀 없는 소도시로 임명되었습니다. 몇 달 안 되어,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 때가 되었습니다. 그 소도시에 사는 관심자들은 우리가 대개 왕국회관에서 기념식을 갖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곳에는 왕국회관이 없었습니다. 관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는 한 남자에게 접근하여, 그 한 부분을 정리하고 거기에 왕국회관을 지어도 되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 남자는 증인들의 활동에 대해 호의적이었기에 승낙하였습니다. 며칠 만에, 두 특별 파이오니아와 관심자들은 땅을 정리해서 산뜻한 왕국회관을 지었는데, 벽은 야자나무 가지를 엮어서 만들었고 지붕은 풀잎으로 이어 만든 것이었습니다. 정면에는 야자나무 가지로 만들어서 꽃으로 장식한 아치가 두 개 있었습니다. 그 지방 부두교 여사제가 반대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마을 연장자들은 여사제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이 마을에 가지고 있는 땅도 없잖소.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이 계속 있어 주기를 원하오. 그들이 가면, 당신도 가게 될 줄 아시오!” 여사제는 더 이상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기념식에는 110명이 참석했는데, 그 중에 침례받은 증인은 특별 파이오니아들뿐이었습니다.

대회 시설

금지령이 해제된 지 얼마 안 되어, 코토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칼라비 마을에 5헥타르의 땅을 구하였고, 후에 인접한 4헥타르도 매입하였습니다. 이 마을은 당국이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의 본거지”라고 말하는 바람에 몇몇 우리 형제들이 투옥되었던 곳입니다. 그 말은 참으로 맞는 말이 되었습니다! 1990년에, 여호와의 백성은 이 곳에서 자유롭게 그들 소유의 땅에서 대회를 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4000명이 이용하기에 충분한 대회 시설을 어떻게 우리 형제들 형편에 맞는 비용으로 지을 수 있었습니까? 서아프리카 여호와의 증인 특유의 방식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숲으로 들어가서 대나무를 베고 코코야자나무 잎을 땄습니다. 대나무 장대로 의자를 만들었습니다. 대나무 말뚝을 지면 위로 50센티미터 가량 나오게 1.2미터 간격으로 땅에 박았습니다. 이것이 의자의 다리 역할을 하게 됩니다. 좀더 긴 대나무 장대 두 개를 50센티미터 높이의 말뚝들 위에 걸쳐 놓고 동여맸습니다. 자, 보십시오! 15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되었습니다. 좀더 큰 대나무 장대는 지붕을 받치는 데 사용하였고, 잎은 엮어서 지붕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집이 비가 새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에게 아프리카의 뙤약볕을 막아 주었으며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아주 편안하였습니다.

때가 되면, 새로운 지부 시설뿐 아니라 옆이 트인 좀더 튼튼한 순회 대회 회관이 이 곳에 건축될 것입니다.

선교인들이 돌아오다

금지령이 해제된 지 약 3개월 후에, 또 하나의 정부 법령이 선포되었습니다. 이 법령은 1976년에 선교인들의 추방을 야기한 법령을 무효화하였으며, 여호와의 증인이 베냉에서 자유롭게 선교 활동을 할 수 있다고 공표하였습니다.

그러한 공식 조치가 취해지자, 1990년 11월에 선교인들이 다시 베냉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탭 한스버거와 재니스 한스버거가 세네갈의 다카르에서 봉사하다가 베냉으로 재임명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미셸 뮐러와 그의 아내 바베트, 그리고 클로드 뷔케와 마리클레르 뷔케가 베냉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최근에 타히티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한스버거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임지에서 처음으로 호별 방문 전파를 시작했을 때 만난 사람들의 반응에 뜻밖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우리가 베냉으로 돌아온 것을 환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남자는, 여러 해 전에 여호와의 증인 선교인들이 떠나자, 나라가 내리막길에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말하더군요.” 한 젊은 주유소 직원이 한 말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14년 전에 떠나가는 선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언젠가 돌아오게 될 겁니다.” 그의 말대로 되었습니다. 선교인들이 돌아온 것입니다!

뷔케 형제는 베냉을 선교인들의 낙원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많은 베냉 사람들에게 하느님과 성서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베냉에서 봉사하고 있는 50여 명의 선교인 가운데 다수는 길을 가다가, 성서 연구를 요청하고 싶어하거나 깊이 있는 성서 질문에 대한 답을 원하는 사람 때문에 멈춰 선 경험들이 있습니다!

자유를 현명하게 사용함

오래 전에, 베냉 사람들은 노예로 팔려서 외국으로 실려 나갔습니다. 이에 못지 않게 끔찍한 것은 또 다른 종류의 노예 상태, 즉 거짓 종교에 기인한 속박으로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과 정신이 거기에 매여 있으면서도 자신은 자유롭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때때로 이 속박은 노예 주인의 채찍보다도 더 큰 두려움을 자아냅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베냉 사람들이 그러한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어 여호와의 기쁨이 충만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세상의 일부가 되지 않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 세상의 통치자”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데, 예수께서는 그 통치자가 자신에게 아무런 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12:31; 14:30; 15:19) 베냉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여러 해 동안 격렬한 박해를 받았지만, 박해 때문에 속박된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다면 여러분도 박해할 것”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 15:20) 그리고 그들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경건한 정성으로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또한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기록하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디모데 둘째 3:12) 공개적으로 모여서 숭배를 드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증거할 자유를 잠시 박탈당했었지만—심지어 투옥된 사람들도 있었지만—그들은 어느 인간도 빼앗아갈 수 없는 자유를 계속 누렸습니다.

이제 금지령이 해제되고 여호와의 증인이 다시 법적 인가를 받은 지도 어느덧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우리 베냉 형제들은 그 자유를 현명하게 사용하였습니까? 금지령이 내려지기 얼마 전에는, 이 나라에 활동적인 왕국 선포자가 약 2300명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 수의 배가 넘습니다. 전 시간 봉사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 관해 말하자면, 그 수가 세 배 이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생명수를 거저 마시”라는 초대에 응하고 있습니다. (계시 22:17) 회중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모일 때에는, 많은 수의 관심자가 참석하여, 참석자 수가 자그마치 증인 수의 네 배를 넘습니다. 아직도, 예수께서 친히 명령하신 모든 것들을 인식하고 적용하도록 관심자들을 도우려면, 많은 일을 할 필요가 있음이 분명합니다.—마태 28:19, 20.

그런가 하면, 낡은 제도가 계속되는 한 투쟁해 나가야만 할 어려운 상황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베냉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의 회중을 방문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이 곳 사람들에게 이미 가져다 준 자유를 직접 목격하면,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로구 마을에 사는 한 사람은 아내가 여러 명이었는데 여호와의 승인을 받고 싶어서 그 지방의 비성경적인 전통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롭게 되어 현재 한 아내와 살고 있습니다. 토구도고도메이 회중의 한 젊은 남자는, 아버지가 많은 사람이 두말할 나위 없이 꽉 붙잡을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아들이 나중에 부두교 사제가 되면 아버지의 집을 물려주고 여러 아내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대신 여호와를 섬기는 쪽을 택하였습니다. 토리카다준메에 사는 한 자매는 이전에는 부두교 수도원에서 여러 해를 보냈는데, 이제는 정규 파이오니아입니다. 한 젊은 남자는 물건을 훔쳐서 생계를 유지하다가 새 인간성을 입고 이제는 코탕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군인이었던 한 남자는 한때 여호와의 백성을 박해했지만, 이제는 정규 파이오니아이자 봉사의 종입니다. 이 사람들과 그 외에도 이들과 같은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도움을 받은 그대로,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이 종교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방법을 배우도록 바쁘게 돕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음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고린도 둘째 3:17.

[66면 전면 삽화]

[72면 삽화]

누루 아키툰데는 파이오니아로 베냉에 돌아와서 많은 사람이 여호와를 섬기도록 도왔다

[80면 삽화]

세캉지의 문맹 퇴치반 (1996년)

[86면 삽화]

제르맹 아도마우는 일부다처를 포기하고 본처인 비그와 살고 있다

[89면 삽화]

아마사 아이인라, 베냉에서 순회 감독자였을 당시 가족과 함께

[90면 삽화]

선교인인 칼로스 프로서와 메리 프로서, 야외 봉사에 나갈 채비를 갖춘 모습

[95면 삽화]

베냉에 정치적 긴장이 감돌던 시기에 열린 천국 전도 강습, 1975년

[102면 삽화]

페터 폼플 및 메리 프로서와 칼로스 프로서 부부—모두 베냉에서 추방되어 현재 나이지리아와 카메룬에서 봉사하고 있음

[115면 삽화]

피에르 아반토, 이전에 자칭 봉사자였다가 이제는 참 하느님의 성직 임명을 받은 봉사자가 되었다

[116면 삽화]

금지령 해제가 발표된 모임

[118면 삽화]

칼라비의 대회장

[123면 삽화]

베냉 지부와 지난 봉사 연도의 지부 위원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자카리 엘레그베, 탭 한스버거, 수루 훈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