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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니크

마르티니크

마르티니크

지구상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마르티니크라는 지명을 들으면 생각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마 태양과 백사장과 푸른 바다가 떠오를지 모릅니다. 사탕수수나 바나나와 같이 생활에 감미로움을 주는 것들이나, 또는 럼주를 연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피부가 검거나 갈색인 원주민들이 함박 웃음을 지으며, 환영의 표시로 방문객들에게 쟁반에 담긴 이국적인 과일들을 내미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할 것입니다. 마르티니크라는 말을 들으면, 1902년에 있었던 펠레 산의 화산 폭발, 그리고 당시 그 지역의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생피에르 시의 완전한 파괴를 연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섬들에 비하면, 이 섬은 보잘것없는 한 점의 먼지에 불과합니다. 이 섬은 길이가 약 80킬로미터, 너비가 약 35킬로미터밖에 안 됩니다. 하지만 마르티니크는 그 크기에 걸맞지 않게 국제 문제에서 커다란 역할을 해 왔습니다. 17세기와 19세기 사이에 식민 제국들은 아메리카 대륙과 카리브 해에서 패권을 잡기 위해 이 곳에서 무자비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생도맹그(아이티), 과들루프, 마르티니크 및 서인도 제도의 그 밖의 섬들은 전쟁의 결과에 따라 그 종주국이 바뀌었습니다.

마르티니크는 아주 작은 섬에 불과하지만, 한동안 카리브 해 노예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마르티니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노예 제도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그 노예 제도는 이 섬의 과거를 특징지으며, 이 곳 사람들의 현재 상태에 관해 많은 점을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종살이를 해왔고 지금은 자유민이 된 긍지를 지닌 한 종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들은 모순처럼 보이는 묘한 양면을 지닌 종족입니다. 그들은 얻은 자유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 사실을 알리기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식민 정책에 의해 들어오게 된 프랑스 문화에 순응하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거의 모든 면에서 프랑스 문화의 가치와 자산을 소중히 여깁니다. 주민들은 압제적인 지배자들이 그들에게 로마 가톨릭교를 강요하였는데도, 자신들의 종교로 가톨릭교를 내세웁니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점은, 그들이 거의 알지도 못하는 하느님을 숭배하도록 가르침받아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하느님이 흑인 노예 제도를 옹호하는 분으로 보이는데, 그분이 흑인종을 저주하였다고들 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느님에게 사랑과 공의라는 속성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러한 특성들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근본적으로 의식과 전통에 근거를 두고 있어, 명확한 신념과 신학적인 분석은 거의 중요시되지 않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이웃 섬인 바베이도스는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 곳 주민들도 자기들의 종교로 영국 국교회를 내세우는 것에 유의해 볼 수 있음.)

금세기가 저물어 가는 이 때, 마르티니크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들을 자유민으로 여기고 싶겠지만, 실은 강압적인 두 주인에게 예속되어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당면한 영적 굶주림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의식과 전통으로 이루어진 종교 제도에 짓눌려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 문명의 물질주의적인 생활 방식의 과도한 영향으로 부추겨진 한없는 욕망을 채우려고 무익하게 애쓰고 있습니다.—전도 5:10.

더없이 소중한 자유에 관한 소식

바로 이 곳 열대 섬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자유에 관한 소식이 점점 더 강하게 선포되어 왔습니다. 이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 가운데서 언급하신 자유입니다.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요한 8:32) 이 자유는 거짓의 종살이로부터의 자유, 사람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경제 제도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이 진리의 씨가 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46년에 과들루프에서 온 조르지 무스타시가 2주 동안 포르드프랑스와 생피에르에서 증거할 때부터였습니다. 3년 뒤인 1949년 8월 9일에는 워치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 졸업생인 네 명의 선교인(한 부부와 두 명의 젊은 자매)이 이 섬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데이비드 호머와 실리아 호머 그리고 매리 롤로와 프랜시스 베일리였습니다. 그들은 미국 출신이었으며, 프랑스어를 사용하였지만 썩 잘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애를 써서 1년 반 만에, 성서에 대해 설명하는 서적 631부와 소책자 200여 부를 전하였으며, 개인이나 가족들과 32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가톨릭 교직자들은 당시에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자기들의 권위가 의문시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1951년 1월에 선교인들이 이 섬에서 추방되게 하였습니다. 3년이 넘게 마르티니크에서의 좋은 소식 전파 활동은 완전히 중단되었습니다.

전파 활동을 재개하다

1954년 7월 10일에, 그자비에 놀과 사라 놀이 프랑스의 마르세유에서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전 시간 봉사자였으며, 그자비에는 마르세유에서 회중 감독자로서 섬겨 왔습니다.

그들은 모국에서 약 7000킬로미터나 떨어진, 그들로서는 세상 저편 끝과도 같은 이 섬에 도착하였던 때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몹시 무덥고 습한 이 섬에 대한 첫인상을 잊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주민들의 쾌활함과 후대와 온순한 태도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초기부터, 그들은 편의 시설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생활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에게 호감을 나타내는 한 남자의 집에서 며칠간 묵은 뒤, 나무로 만든 새집을 발견하였는데, 그 집은 단지 나무로 만든 벽과 바닥으로 된 구조물이었습니다. 지붕은 여러 개의 골함석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천장도 화장실도 없었습니다. 해질녘이면 골짜기에 가서 변기통을 비우는 것이 놀 형제의 허드렛일이었습니다. 처음 그 통을 들고 나간 날은 프랑스 국경일인 7월 14일이었습니다. 그는 스탈린그라드라고 불리는 시민 광장을 지나가야 하였는데, 그 곳은 국경일과 관련된 행사 때문에 떠들썩하였습니다. 그가 그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가자, 휴식을 취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러 나온 여러 무리의 사람들은 그가 변기통을 들고 가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보고는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처음 보는 장면이었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백인이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었습니다!

놀라운 환영

그 날 일찍 놀 형제는 선교인들이 추방되면서 남겨 놓은 서책과 소책자를 정리하며 여러 시간을 보냈습니다. 상당수의 책이 벌레 때문에 손상되어 있었지만, 놀 부부가 다음날 아침에 공개 증거 활동을 시작할 때 사용하기에 상태가 괜찮은 책들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봉사 첫날에 있었던 일들 중 몇 가지에 대해 놀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이 곳에서 처음으로 전파 활동하러 나설 때, 우리 부부는 사람들을 얼른 만나보고 싶었고, 그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 우리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매우 궁금하였습니다. 실제 경험은 우리가 기대한 것 이상이었습니다. 우리는 도심지에서 증거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그 도시의 인구는 6만 명가량이었습니다. 그 날 아침, 아내와 나는 증거 가방에 배부용 서적을 다시 채워 넣으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두 번이나 만났습니다. 그 때 전한 서적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The Truth Shall Make You Free)와 「왕국이 가까웠다」(The Kingdom Is at Hand) 서책 그리고 「평화의 군왕」(The Prince of Peace)과 같은 소책자였습니다.”

집주인들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여기에 들른 기념으로 책을 받겠습니다.” 혹은 “하느님에 대해 알려 주는 책이라면 받아 보겠습니다.” 처음 2주 동안 거의 200부의 서적과 수백 부의 소책자를 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호기심이 많고 낯선 사람들을 기꺼이 환영하기 때문에, 대화를 시작하기가 쉬웠습니다. 그처럼 후대를 받게 되어 참으로 격려가 되었습니다!

놀 형제와 자매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성서 연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관습상 후대를 보이는 사람들과 하느님에게서 나온 진리를 알아보고 실천에 옮기기를 진정 원하는 사람들을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게 되었습니다. 얼마의 사람들은 배워 알기를 원하였습니다. 놀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가 마르티니크에 도착하였을 때 만난 사람은, 장롱을 만드는 자기의 공장에서 일하는 몇몇 일꾼과 견습공을 우리에게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날 저녁에 한 건의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그 첫 주에 두 건의 연구를 더 시작하였습니다.”

그 중 한 건은 젊은 부부인 폴 자클랭과 니콜 자클랭과의 연구였습니다. 그들은 일 주일에 세 번이나 연구를 하였으며, 잘 발전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그들은 놀 부부와 함께 호별 방문 증거 활동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전도인들이 가담하자 전파 활동은 향토색을 띠기 시작하였습니다.

“토-토-토”

한 집에 이르게 되면, “토-토-토, 계세요?” 하고 큰 소리로 말해야 하였습니다. 집 안에서는 대개 “어떻게 오셨지요?” 하고 대답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전도인이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자신을 소개하고 나면, 집주인은 “들어와 앉으세요” 하고 대답하곤 하였습니다. 흥미 있는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기꺼이 대화에 응하였습니다. 당시에 마르티니크에서는 스트레스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끊임없이 듣고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끝에 가서는 종종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부모님과 조부모님이 믿던 종교를 버리지는 못합니다.” 심지어 관심을 약간 보이는 것 같아서, 전도인이 “얼마 후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하고 물으면, 종종 “하느님의 뜻이라면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곳 사람들은 성서를 깊이 존중하였습니다. 하지만 성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습니다. 가톨릭 교직자들은 사람들이 성서와 전혀 접하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루이 스공역 프로테스탄트 프랑스어판 성서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성서를 행상인에게서 구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웃에 사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에게서 구한 사람들도 있었으며, 매우 드물게는 복음주의 전파자들에게서 구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교직자가 경계심을 나타내다

여호와의 증인이 포르드프랑스에서 전파 활동을 다시 시작한 지 5개월 뒤에, 가톨릭 교회에서 발행하는 한 신문은 “여호와의 증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그 기사는 사제와 한 교구민과의 대화를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신부님, 여호와를 아십니까?” “물론이죠! 당신은 지금 히브리어를 말하고 있지요?” 그런 다음 여호와의 증인을 중상하는 장황한 이야기와 증인들의 가르침에 대한 악의적이고도 그릇된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놀 자매를 풍자하는 만화가 교회 팜플렛에 실리기도 하였습니다.

얼마 후에는, 그 섬에 증인들이 아주 소수밖에 없었는데도, 한 사제는 분명 이 왕국 전파자들의 열심 때문에 괴로워한 나머지 이렇게 밝혔습니다. “수천 명의 선한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현재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 가고 있다.” 마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시하신 바와 같았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부유한 교직자의 식탁에서 영적인 부스러기가 나오기를 갈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누가 16:19-31 참조.

노트르 담 뒤 그랑 레투르의 방문

몇 년 전인 1948년에, 많은 가톨릭교인의 믿음이 흔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주교측에서 엄청난 사기 행각을 꾸몄던 것입니다. 성대한 의식이 거행되는 가운데 마리아 형상이 프랑스에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형상은 마르티니크 전역으로 옮겨지면서 심지어 오늘날까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습니다. “동정녀” 형상은 바퀴가 달린 작은 배에 실려 여러 거리로 운반되었습니다. 길을 따라 늘어서 있는 사람들은 “성모 마리아”를 위해 그 배에 돈과 보석을 가득 채웠습니다. 당시 마르티니크 사람들은 부유하건 가난하건 모두 금장신구로만 치장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아진 것은 거금에 상당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당시의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여호와의 증인이 된 마르트 로랑은 “성모 마리아상”의 도착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948년 3월 초 어느 토요일 저녁에, 초원으로 둘러싸인 포르드프랑스의 시민 광장에서 그 일이 있었습니다. 그 광장은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때 갑자기 라푸앵트데네그레 끝 부근에 있는 바다 위로 작은 불빛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흥분에 휩싸여 있었는데, ‘동정녀’가 배를 타고 도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피에레트 앙토니는 거리를 통과하는 그 작은 배에 예물을 넣으러 간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남편과 함께 자기 집을 꽃으로 단장하고 셰 누 수아에 렌(여왕이여, 우리 집에 머무소서)이라고 쓴 깃발을 걸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에 푹 빠져 매우 관대해졌으며, “동정녀”가 기적을 행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한 예로, 어떤 사람은 딸이 근장애(筋障礙)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동정녀”가 자기 딸을 고쳐 줄 것을 기대하면서, 무릎을 꿇고 바퀴 달린 그 작은 배를 따라다녔습니다.

얼마 후에, 그 마리아상이 프랑스로 돌아갔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것은 속임수였습니다. 그 형상이 창고에 숨겨져 있음이 후에 밝혀졌습니다. 그 지방의 풍문에 따르면, 얼마 후에 바다에 추락한 한 비행기는, 그 사기 행각을 꾸몄던 사람들뿐 아니라 그 동안 모은 돈과 그 밖의 귀중품들을 운송하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그 사건 이야기를 하면,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 기회에 그들에게 우상 숭배에 관해 성서에서 알려 주는 점을 보여 줍니다.—출애굽 20:4, 5; 시 115:4-8; 요한 첫째 5:21.

결혼단지 동거하는 것만이 아니다

일부 아프리카 관습은 노예 제도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되었으며, 그런 관습을 따르면서도 가톨릭교 의식을 지키기만 한다면,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런 관습을 용인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은 채 동거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놀 자매가 봉사를 하고 있노라면, 사람들은 “자녀가 있습니까?” 하고 묻곤 하였습니다. 놀 자매가 “아니오”라고 대답하면, 그들은 “그러면 당신 남편에겐 자녀가 있나요?” 하고 묻곤 하였습니다. 법적인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자녀를 둔 남자를 보게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비성경적인 관습을 버려야 하였습니다.—히브리 13:4.

마르티니크에서 이처럼 변화해야 할 필요를 직면한 첫 사람은, 세 명의 남자에게서 여섯 자녀를 둔 한 여자인데, 성서 연구를 시작할 무렵에는 막내아이의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마르게리트 릴레는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려면 커다란 변화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즉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첫째 6:9-11) 그는 동거하던 남편에게 헤어지자고 요청하였으며, 건강 문제가 있는데도 여섯 자녀를 돌보기 위해 재정적인 어려움을 과감히 견디어 냈습니다. 그는 1956년에 침례를 받았으며, 얼마 후에는 최초의 마르티니크 출신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동거하는 남편 사이에서 자녀를 낳은 잔 막시맹 역시 침례를 받기 원하였습니다. 그 남편은, 다음 대회 전에는 그들의 관계를 합법화하겠다고 여러 번 약속하였지만, 한 번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959년에 또 다른 대회가 다가올 무렵, 막시맹은 남편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그 집에서 나와 거처를 옮겼습니다. 남편은 집으로 돌아오자, 막시맹이 온데간데없고 가재 도구도 많이 없어진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막시맹이 어디에 있는지를 기꺼이 알려 주었습니다. 그 남편은 집으로 돌아오라고 강권하면서, 2주 동안 필요한 준비를 하고 나서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막시맹은 “결혼하는 날 돌아가겠어요. 그 전에는 안 돼요” 하고 단호히 대답하였습니다. 필요한 준비가 다 되고 나서 열흘 만에 그들은 합법적인 결혼을 하였습니다. 우리 자매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결혼을 하느님의 마련으로 여기는 종교를 실천하고 있다는 평판을 받아 왔습니다. 르보클랭 마을의 한 여자 공무원은, 그 지방 특별 파이오니아인 자크 넬송과 피에레트 넬송 부부가 혼례를 치르지 않고 여러 해 동안 동거해 온 두 쌍의 결혼식에서 연이어 증인을 서는 것을 보고는 놀랐습니다. 그 공무원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길」 책을 이미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그 책을 다시 읽어 보겠노라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도 방금 자기가 결혼을 인가해 준 두 부부의 경우와 동일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화를 끝마치면서, 그는 두 증인에게 느긋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메 되 상 트루아”(“둘 다음엔 셋이 되게 마련이지요”). 이 경우에 그 말은 옳았습니다. 얼마 안 되어 그 파이오니아 부부는 함께 연구한 세 번째 부부의 증인을 서 주기 위해 또 여자 공무원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알코올 남용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다

마르티니크는 럼주로 유명한 곳입니다. 사탕수수로 만드는 이 알코올 음료는 이 섬 어디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럼주를 즐기지만, 과도하게 사용하면 매우 해로울 수 있습니다. 1950년대에는 술집에 가서 단돈 50상팀(약 90원)만 내면 럼주를 한 잔 가득 마실 수 있었습니다. 단골 손님에게는 럼주 한 병과 시럽 한 병 그리고 그 지방의 싱싱한 레몬 몇 조각이 제공되었으며, 손님은 원하는 대로 섞어 마실 수 있었습니다.

일상적으로 럼주에 탐닉하는 사람들에게 성서 진리가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까? 물론, 그러하였습니다! (베드로 첫째 4:3) 그 첫 번째 사람은 어느 여자인데, 그 여자는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몹시 불쾌할 정도로 늘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게다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자기만큼이나 술에 중독되어 있는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가정 성서 연구에서 배워 알게 된 지식으로 인해, 몇 개월 만에 술을 끊고, 동거하던 남편과 헤어졌습니다. 그 여자를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변화에 주목하였습니다. 그는 건강이 더 좋아졌습니다. 직장 생활도 개선되었으며, 공무원직도 영구직이 되었습니다. 그는 상당액의 급여를 소급하여 받게 되자, 그 돈을 사용하여 1958년 뉴욕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성의 국제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엘리사 라핀은 90세이긴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훌륭한 그리스도인 행실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참으로 술에 노예가 된 상태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습니다.

섬의 중심부에서 거둔 열매

마르티니크 지도를 보면, 섬들은 포르드프랑스 만을 중심으로 마치 나선 모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의문의 여지 없이, 바로 이 곳에 증거 구역의 중심부가 위치해 있습니다. 만의 북쪽을 따라, 세 개의 도시—포르드프랑스, 쇨셰르, 르라망탱—가 연이어 모여 있습니다. 마르티니크 인구의 거의 절반이 이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농업을 제외하고는, 섬 주민의 대부분의 활동은 이 곳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활동이 처음으로 수행된 곳도 바로 이 지역이며, 단지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초창기 전도인들도 바로 이 곳 출신입니다.

일찍이 1955년에 놀 형제와 자매는 왕국 소식을 전하기 위해 수도 외곽 지역을 여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온종일 전파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한 주에는 금요일에 르라망탱으로 가고, 그 다음 주에는 동쪽 해변 근처에 있는 르프랑수아 마을로 가곤 하였습니다. 점차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르라망탱에서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는 장 마리-아나이, 쉬잔 기토, 릴리안 네랄, 폴레트 장-루이가 있었습니다. 르프랑수아에서는 고다르 가족과 카다스 가족 그리고 피에르 루아소가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르라망탱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 파이오니아들 가운데는 발랑탱 카렐과 니콜라 레넬이 있었습니다. (카렐 형제는 후에 지부 위원이 되었음) 현재 그 지역과 그 인근의 남쪽 지역에는 일곱 개의 회중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출발은 좋아 보였지만, 나중에는 좁은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생활의 염려와 물질주의와 부도덕 때문에 빗나갔습니다.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은 왕국의 말씀을 좋은 흙과도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여러 해 동안 열매를 맺었습니다. (마태 13:18-23) 초창기에 참 숭배를 받아들인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충성스럽게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마르티니크에서 30여 년 전에 침례를 받은 형제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는 레옹 벨레와 크리스티앙 벨레, 쥘 뉘뷜, 제르맹 베르톨로, 뱅상 뮐레르, 로제 로사몽, 알베르 넬송, 뱅상 제보, 필리프 도르돈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여호와에 대한 봉사에 젊음을 바침으로 그분에 대한 큰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이제 이들은 더 이상 젊지는 않지만, 모두 계속해서 회중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미 사망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 중 투생 라다는 연륜이 오래 된 사람들에게 조용한 성품과 따뜻한 미소를 지닌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과거에 믿음과 열심의 훌륭한 모범이 되었거나 현재에도 그러한 모범이 되는, 오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열거할 수 있습니다. 젊은 세대는 현재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으며, 그것은 연로한 사람들에게 큰 기쁨의 근원이 됩니다.

충성스럽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여자들

그 초창기에, 교육부 소속 교사였던 여러 자매들이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훌륭하게 일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스텔라 넬지가 있었는데, 그는 그들 중에서 가장 먼저 침례를 받았으며, 연로한 어머니를 돌보면서도 계속해서 열심히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102세에 사망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교장이면서도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옹호한 앙드레 조조르, 그리고 가족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확고함을 유지한 빅토르 푸스(현재는 라시망) 자매가 있었습니다. 푸스 자매의 훌륭한 모범은 그의 자녀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결과, 한 아들은 여러 해 동안 장로로 섬기고 있으며, 딸 마를렌은 말리에서 선교인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노령이나 질병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의 경주를 끝마쳤습니다. 레오니드 포팽쿠르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데, 그는 일찍 퇴직하여 16년 동안 파이오니아 봉사를 수행하였습니다. 1990년에 포팽쿠르 자매가 사망하였지만, 딸 자클린은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에마 위르쉴레 역시 성서 진리를 옹호하는 일에서 훌륭한 모범을 세웠으며, 특히 자녀들이 여호와의 길로 걷도록 열심히 도왔습니다. 세 딸은 파이오니아 봉사에 가담하였으며, 아들 앙리는 마르티니크의 지부 위원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43년 전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마르티니크에 온 사라 놀은, 82세의 나이로 여전히 열심히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구역을 자주 돌고 있기는 하지만, 놀 자매는 계속해서 매우 성공적으로 「파수대」와 「깨어라!」를 배부하고 있습니다. 사업 구역에서 봉사하는 방법에 관한 협회의 제안들을 적용하여, 그는 대부분의 관공서를 출입할 수 있었는데, 그의 잡지 통로에는 시청, 경찰서, 공공 사업부 및 그 밖의 여러 곳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가 500부가량의 잡지를 전한 달도 여러 번 있습니다. 마르티니크에서 봉사해 온 동안, 그는 11만 1000부 이상의 잡지를 전하였습니다.

물이 산 위로 흐르다

마르티니크에는 산이 많습니다. 영국의 한 해군 장성은 왕 조지 2세에게 이 나라의 지형이 어떠한지를 알려 주고 싶어, 종이 한 장을 가져다가 구깃구깃 뭉친 다음 탁자 위에 던지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전하, 이게 바로 마르티니크입니다.” 크리올 속담 가운데는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들로 파 카 몬테 모른”(“물은 산 위로 흐르지 못한다”). 하지만 마르티니크에는 산 위로 흐르는 물이 있습니다. 오래 된 도시인 포르드프랑스는 해수면과 같은 높이에 위치해 있지만, 많은 언덕들의 기슭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서 진리의 물이 바로 이 언덕들 위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계시 22:17.

1956년에는 이 섬에 겨우 일곱 명의 전도인과 세 명의 파이오니아가 있었지만, 5000부의 서적과 9000여 부의 잡지 그리고 많은 소책자가 전해졌습니다. 그 출판물 가운데 상당량은 버스 터미널에서 섬의 모든 지역으로 오가는 승객들에게 배부되었습니다. 놀 형제와 자매는 또한 농수산물 시장에 가서 잡지를 제공하곤 하였으며, 시장 근처에 있는 많은 선술집에서도 전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귀중한 성서 출판물을 자루에 넣어 가지고 언덕과 언덕 너머에 있는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함께 모이는 일을 그만두지 않음’

마르티니크에 도착하고 나서 불과 몇 주일 뒤에, 놀 형제와 자매는 연구생들에게 집회에 참석하도록 격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히브리 10:23-25) 그 결과, 그들 중 몇몇이 포르드프랑스의 모른피셰뱅에 있는 목재로 지은 간소한 집의 거실에서 모였습니다. 그 방에는 열 명가량밖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놀 부부가 봉사에 참여할 때면, 종종 사람들은 자기들이 참석할 수 있는 모임 장소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 선교인들은 좀더 적합한 장소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던 중, 포르드프랑스에 있는 한 호텔 지배인이 일요일에는 식당을 열지 않으므로 오후에 식당의 큰 홀을 사용하라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는 (잠시 동안 그의 여관에 머물렀던) 최초의 증인 선교인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식당은 프랑스 정치인의 이름을 딴 쇨셰르 거리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 정치인은 1848년 4월 27일에 발표된 노예 제도 폐지에 관한 조항들을 규정하는 법령을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건물도 같은 거리에 있었습니다. 이제 좀더 나은 집회 장소를 얻게 되었기 때문에, 증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오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동안은 1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그 홀에 겨우 다섯 명에서 열 명정도만 모였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을 집회에 나오도록 초대하면, 대개 “가 보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요”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점과 관련하여 성서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실제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거의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은퇴한 교사인 마르소 부인은, 처음에는 교회에서 열리는 예배에 참석하였지만, 후에는 성서 소식을 듣기 위해 집회에 정기적으로 나왔습니다. 교회에서 청소하는 일을 하던 알리스 라쉬도 이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곳의 증인들에게는 집단의 규모에 좀더 알맞은 집회 장소가 필요하였습니다.

몇 달 뒤에, 증인들은 집회 장소를 포르드프랑스의 클레리에르에 있는 빌라 마 플뢰르 드 메(나의 메이플라워 빌라)로 옮겼는데, 이 곳은 당시 선교인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한 스텔라 넬지는, 어느 날 그 곳에서 들은 한마디 말에 매우 놀랐습니다. 그는 후에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사회자는 ‘이 집이야말로 마르티니크 전역에서 가장 중요한 집입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넬지는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서 그의 말이 옳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은 초라해 보였고 집 안에는 나무 상자에 이전에 쓰였던 널빤지로 만든 긴 의자들이 놓여 있었으며, 의자 위에는 판지로 만든 깔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집에서 사람들은 여호와 하느님의 놀라운 목적과 뜻과 비할 데 없는 성품에 대해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배워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집이야말로 실로 가장 중요한 집이었습니다!”

1960년에는 전도인 수가 47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또다시 충분한 자리가 있는 다른 집회 장소를 찾을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아드리엔 뤼디에가 벨뷔에 있는 자기 집 1층에 있는 방 두 개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2년 뒤에, 뤼디에는 집회 장소를 넓히도록 나머지 벽도 헐고 자기는 2층으로 올라가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단지 이 년 만에 전도인의 수가 배로 증가한 것입니다. 이제 94명의 전도인이 있게 되었고 177건의 가정 성서 연구가 사회되었습니다. 포르드프랑스의 맞은편 지역에서도 얼마의 전도인이 나오게 되자, 두 번째 집단을 구성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 같았습니다. 이 집단은 포르드프랑스 남쪽의 작은 지역인 생트테레스에 있는 이노에르 푸이시의 집에서 모였습니다.

확장은 계속되었습니다. 1964년 무렵에는 평균 157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포르드프랑스의 벨뷔 지역에 있는 한 집을 매입하여 왕국회관으로 개조하였습니다. 5년 뒤에는 그 도시의 다른 지역에 새로운 왕국회관이 건축되었습니다. 친절하게도, 세세르 카시마와 엘비르 카시마가 콘크리트로 된 평평한 자기들의 집 옥상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어서, 그 곳에 왕국회관을 짓게 된 것입니다.

대회의 규모가 작았을 당시

1955년에 첫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대회는 놀 형제와 자매 집에서 개최되었습니다. 마르티니크에 있는 5명의 증인을 격려해 주려고, 과들루프에서 27명이나 되는 증인이 왔습니다. 총 참석자 수는 40명이 채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회 프로그램은 영적 양식을 풍부히 제공해 주었습니다. 영적이고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함께 모이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집회를 정시에 시작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이 늦게 도착할 때면, 때때로 우스운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1956년에 열린 한 대회에서는, 한 사제가 전형적인 제복을 입고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여호와의 증인의 출판물을 읽지 못하게 하는 장면을 실연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당시 평소에 턱수염이 있는 한 형제가 사제의 겉옷을 입고 사제 역할을 하였습니다. 늦게 도착한 한 관심자는 그것이 단지 실연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집회가 끝난 뒤에 그는 약간 흥분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 사제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듭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교회에 가서 소란을 피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제도 이 곳에 와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요!’

자유의 소식이 북동 해안에 이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섬 가운데서 수도에서 떨어져 있는 지역들에도 좀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마르티니크의 서해안은 카리브 해에 둘러싸여 있으며, 동해안은 대서양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따라서 동해안은 무역풍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강우량이 많고 습도가 높습니다. 물이 풍부한 그 지역의 구릉과 고원에는 온갖 식물—사탕수수와 채소와 바나나와 그 밖의 과일—이 자라고 있습니다. 대부분 해안을 따라 자리잡은 큰 마을들은 어업에도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또한 노예 무역과 노예 해방에 관해 알려 주는 역사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르로랭 마을에 있는 특정 지역들의 이름, 예를 들어 퐁장리브르(자유민의 계곡)와 퐁마사크르(대학살 계곡) 등은 그 시대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는데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느님의 왕국 소식을 이 지역으로 가져갔을 때, 사람들에게 여전히 자유가 필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거짓 종교와 미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필요가 있었는데, 이 자유는 오로지 성서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만 누릴 수 있는 자유입니다.

형상들을 부숴 길거리로 내던지다

선교인들이 포르드프랑스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북쪽 해안에 있는 바스푸앵트로 처음 여행한 때는, 1954년 11월 1일이었습니다. 어업과 농업이 생업인 이 마을로 가는 길은 매우 험준하였습니다. 특히 우기가 끝난 후라서, 도로 상태가 좋지 못하였으며, 선교인들은 어떤 곳에서는 소형 오토바이에서 내려 오토바이를 끌고 가야 하였습니다.

선교인들은 그 마을에 있는 한 여교장을 만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일찍이 그 여교장은 프랑스에서 여호와의 증인과 만나, 「깨어라!」를 예약하였는데, 이제 그 예약이 이미 만기가 된 것입니다. 그 방문은 매우 유익하였습니다. 여교장은 자기가 전에 교리 문답 교사이긴 하였지만, 사제가 결혼 제도에 대해 불경스럽게 말한 이후로는 더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영혼 및 지상 낙원에서의 영원한 생명에 관한 성서의 말씀에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그는 프랑스로 돌아갔으며, 그 곳에서 여호와께 헌신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여교장은 마르티니크에 있었을 때 그 지역 사회에서 저명 인사로 여겨졌으며, 독실한 가톨릭교인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르티니크로 다시 돌아온 뒤, 자기에게 있던 크고 작은 모든 우상을 부수어 그 조각들을, 쓰레기를 수거하는 사람이 실어 가도록 집 앞에 쏟아 놓았을 때, 어떠한 동요가 있었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비교 신명 9:16, 21) 사제는 격분하여 과격한 설교를 준비하여, 이전에 가톨릭교인이었던 그 여교장의 행동을 맹렬히 비난하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일명 크레상 부인의 종교라고 하는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88세인 가브리엘 크레상은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현재까지 42년 동안 다음과 같은 가장 간절한 소원을 이루기 위해 전념해 왔습니다. “내 심장 박동 하나하나가 여호와께 찬양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다른 가톨릭교인인 이웃 사람은, 사제가 크레상 자매에 대해 그토록 신랄하게 비난하는 말을 듣고는, 크레상 자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어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여자는 레오니 뒤크텔이었는데, 열한 자녀의 어머니였으며, 남편은 그 지방 우편 집배원이었습니다. 크레상 자매에게서 배워 알게 된 내용이 실로 진리임을 확신하게 된 그는, 자녀들과 함께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여러 해에 걸쳐, 뒤크텔뿐 아니라 아홉 자녀가 헌신하고 침례받은 증인이 되었습니다. 여러 해 후에, 딸들 중에 하나인 에드가르는 제라르 트리비니와 결혼을 하였는데, 그 사위는 나중에 지부 위원이 되었습니다.

레오니 뒤크텔이 크레상 자매의 도움으로 진리를 알게 된 시기보다 10년 전에, 이웃에 사는 조르제트 조세프는 예수 재림교회에서 예배 도중 부른 어느 찬송가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조세프는 그 후로 여호와라는 이름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마침내 이웃에 사는 뒤크텔 부인을 통해 어떤 부인이 방금 여호와의 말씀을 설명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조세프는 당장 더 알아보기를 원하였습니다. 조세프와 그의 여덟 자녀 그리고 나중에는 남편까지도 모두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 몇 가족은, 이 섬 중 대서양 방면의 북쪽 해안에 사는 참 숭배자들의 토대를 이루었습니다. 뒤이어 여러 해 동안 진리의 씨가 바스푸앵트로부터 대서양 연안에 있는 도시와 마을 전역에 뿌려졌습니다. 이 진리의 씨는 자라서 르로랭, 마리고, 생트마리, 트리니테, 르로베르에서뿐 아니라 섬의 내륙 지방인 아주파부용, 베르프레, 그로모른에서도 꽃을 피웠습니다.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들은 동해안을 따라 진리를 전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과부인 오스만 레앙드르는 1965년에 생트마리로 이사하여 자기 집을 집회 장소로 이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과들루프에서 온 특별 파이오니아들인 아르카드 벨뷔와 마리스 망수엘라는 1967년 12월에 르로베르에 도착하였으며, 그 지방 가톨릭 사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잘 견디어 냈습니다. 1970년에 알린 아델라이드와 자클린 포팽쿠르는 르로랭에서 증거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곳에서 알린은 성경을 사용하여 이전에 마술을 행하던 사람이 악귀 들린 상태로부터 자유롭게 되도록 도울 수 있었습니다. 3년 뒤에는 또 다른 세 명의 파이오니아인 미셸 위르쉴레와 잔 위르쉴레 그리고 조세트 메린이 그들과 합류하였습니다. 르로랭에 사는 이 파이오니아들은 교사직을 그만두고 훨씬 더 중요한 교육 사업—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를 가르치는 일—에 가담한 것입니다.

사제는 왜 「진리」 책을 원하였는가?

잔 위르쉴레는 이렇게 말합니다. “1974년에 협회는 우리에게 르로랭에 사는 어떤 사람이 쓴 편지를 한 통 보내 주었습니다. 그 남자는 여호와의 증인의 출판물, 특히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을 몹시 받고 싶어하였는데, 그 책을 어느 집에서 보았던 것입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그 남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의 이름이 우리에게는 생소하였으므로, 우편 집배원에게 그가 누구인지 물어 보아야 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우리는 교구 사제가 협회에 편지를 보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대우를 받게 될 것인지 궁금해하면서, 우리는 사제관으로 갔습니다. 그 남자는 자기를 소개하고는, 우리와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며, 단지 그 출판물에만 관심이 있다고 냉랭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당황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방문이 있고 나서 얼마 뒤에, 종종 그 지역 사람들은 특정한 점들에 대해 사제가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설명해 주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틀림없이 그 사제가 우리의 서적을 사용하여 설교를 준비하고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하느님을 더듬어 찾으면 그분을 실제로 발견하게 된다

1967년에는 또 다른 네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인 옥타브 텔리스와 그의 아내 알비나 그리고 엘리 레갈라드와 그의 아내 뤼세트가 트리니테 회중의 기초를 놓기 시작하였습니다. 엘리 레갈라드는 도착한 바로 다음날부터 전파 활동에 나섰습니다. 그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까? 레갈라드는 좌우에 있는 집들을 지나쳐 곧장 무투사미 부인의 집으로 걸어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레갈라드는 이전에 그 부인을 만난 적도 없었으며, 아무도 그에게 부인의 이름을 알려 준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무투사미 부인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가톨릭교에 대한 애착이 아주 대단하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사제들이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위선에 실망하였습니다. 교회에 대한 애착은 점차 약해졌습니다. 아들들 중에서 위로 두 아이를 가톨릭 교육을 받도록 등록해야 할 시기가 되자, 나는 가톨릭교인인 친척의 강요와 공산당원인 남편의 반대 그리고 예수 재림교인인 언니의 영향으로 갈피를 못 잡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밤이 깊도록 오랜 시간, 해결책을 찾도록 도와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튿날 아침 레갈라드 형제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리고는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곧바로 우리 집으로 왔던 것입니다. 레갈라드 형제가 트리니테에서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 바로 나였습니다.”

리세트 무투사미와, 이전에 공산당원이었던 그의 남편이 8개월 뒤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그 부부는 온 가족과 함께 여호와를 계속 섬기고 있습니다. 아들들 중 셋은 현재 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말한 그대로, 실로 참 하느님을 진지하게 더듬어 찾는 사람들은 그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사도 17:26, 27.

그 구역은 생산적이었으며, 여러 회중이 생겨 났습니다. 트리니테에 있던 한 회중이 여섯 회중—르로베르에 두 회중, 생트마리에 한 회중, 그로모른에 한 회중, 베르프레에 한 회중, 트리니테에 한 회중—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 회중들은 모두 계속 잘 성장하고 있으며, 여호와께 영예를 돌리고 있습니다.

교직자들의 계속되는 공격

마르티니크 전역에서, 주민들을 무지 속에 가두어 둔 교직자들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교직자들은 주민들에게 화를 냈습니다. 1956년에 바스푸앵트에서 한 교구 사제는, 사망한 이웃 사람의 친족을 방문하러 가던 두 소녀를 우연히 만났을 때, 분노를 나타냈습니다. 그 소녀들이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 교직자는 배교자라고 비난하면서, 소녀들이 더 이상 미사에 참석하지 않기 때문에 지옥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위협하였습니다. 한 소녀가 매우 단호하게 대답하자, 교직자는 있는 힘을 다해 그 소녀의 뺨을 때리고 버럭 화를 내면서 자기 지프차에 올라타고는 떠나버렸습니다.

르로베르에서는 1967년에 두 명의 파이오니아 자매가 도착한 이후, 사제는 그들에게 절대로 문을 열어 주지 말라고 자기 교구민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어느 날,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인 그 사제는 자기 차로 파이오니아들을 거의 칠 뻔하였습니다. 그 교구의 전단에는 분노에 찬 통렬한 경고문이 많아졌고 설교단에서 사제들은 그 파이오니아들을 ‘로마 가톨릭교의 평화를 교란하러 온 사탄의 하수인들’이라고 하면서 신랄하게 비난하였습니다.

다른 종파들도 그 공격에 가담하였습니다. 복음주의 종파는 특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고 거짓 비난을 하였습니다. 예수 재림교는 자기들은 대부분 단지 말로만 안식일을 지키면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습니다. 한동안, 형제들은 그러한 종파의 목회자들과 끝도 없는 토론에 말려들어갔습니다. 종종 토론은 밤늦게야 끝났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차츰 충실하고 분별 있는 종의 도움으로, 훌륭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 데서 진정 즐거움을 얻는 양 같은 사람들을 찾아내는 데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토론은 얼마의 양 같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포르드프랑스에 사는 쥘 뉘뷜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뉘뷜은 목회자가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을 뒷받침하려고 단지 성서를 인용하는 척만 하고 실제로는 성구를 지어낸다는 점에 유의하였습니다. (비교 로마 10:4; 골로새 2:13-16) 현재 뉘뷜 형제는 여호와의 증인 가운데서 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트리니테에 사는 게르트뤼드 뷔발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이었는데, 옥타브 텔리스와의 토론에서 자기 목회자가 부정직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텔리스는 그 곳에서 아내 알비나와 함께 특별 파이오니아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지금, 고령인데다가 건강도 좋지 않은데도 뷔발 자매는 여호와의 조직에 여전히 충성스럽게 고착하고 있습니다.

화산 기슭에 사는 사람들—과연 그들이 귀를 기울일 것인가?

섬의 북서부 지역에 있는 도시들인 생피에르, 르프레쇠르, 르카르베, 르모른루지는 모두 펠레 산 바로 주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산은 1902년에 생피에르와 그 곳 주민 3만 명을 파멸시킨 비통한 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해 5월 8일에 발생한 화산 폭발과 관련하여, 우선 사람들은 생피에르 주민들이 경고를 무시하고 도피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 달 동안 그 화산은 연기와 재와 암석 조각을 내뿜었습니다. 생피에르는 재로 뒤덮였습니다. 스물다섯 명은 화산 이류(泥流)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불안해 하긴 하였지만, 그래도 도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원인의 일부는 그들의 운명론적인 태도 때문이거나, 교직자들을 포함한 그들의 지도자들이 머물러 있으라고 강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일한 요인들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임박한 여호와의 날에 관한 경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나타내는 반응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요엘 2:31, 32.

상당수의 마르티니크 사람들은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므로,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양쪽 어깨를 으쓱하면서 “이건 하느님의 뜻이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 점에 대해 그들이 추리하도록 돕기 위해 펠레 산 폭발 당시에 있었던 일들에 관해 대화를 나누곤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묻습니다. “만일 그러한 사건들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이 대참사에서 교도소 지하 감방에 홀로 갇혀 있던 상습범만 유일하게 생존한 반면,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그 ‘성인’들과 함께 파멸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1960년대 초에, 포르드프랑스 출신의 전도인들은 그 화산 주변 지역으로 상당히 정기적으로 여행하면서, 그 지역 주민들에게 왕국 소식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이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뭐라고 말할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웃 사람들에게 따돌림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아무도 여호와의 증인과 관련을 맺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1962년에는 샤르팡티에 가족이 프랑스에서 이주해 와, 바로 생피에르 북동쪽의 르모른루지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인 마들렌은 특별 파이오니아였습니다. 마들렌과 그의 남편 레네는 여러 해 동안 이 지역에서 왕국 진리의 씨를 뿌렸습니다.

하지만 섬 북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교회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합니다. 그 곳에는 초창기 정착민의 후손인 부유한 지주들이 경영하는 대규모 농장이 몇 군데 있는데, 지주들은 가톨릭 교직자들과 협력하며 살아갑니다. 마르티니크 전역에서 이 지방 백인들 가운데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의 수는 손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되다

일반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과 관련을 맺기를 꺼렸지만, 1960년대 중반에 여호와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욜랑 오르탕스와 베르나데트 오르탕스 부부의 마음을 깊이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믿음의 시험에 직면하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최초로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였을 때,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동안 시련을 겪었습니다. 한 해 사이에, 사고로 두 아이를 잃게 되자, 사람들은 우리가 가톨릭교를 버려서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여호와에 대해 배워 알게 된 지식이 확고함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욜란드의 고용주인 한 베케(지방의 백인)는 사제의 영향을 받아, 욜란드가 교회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해고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하지만 욜란드는 확고한 태도를 유지하였으며, 고용주는 우리 형제가 양심적인 일꾼이었으므로 위협한 대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르탕스 부부는 또 다른 어려운 시기들을 겪어 왔지만, 계속해서 충성스럽게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1968년에 팔베르 가족이 포르드프랑스에서 르모른루지로 이사 왔습니다. 점차 다른 사람들도 참 숭배를 받아들였습니다. 현재 르모른루지에는 60명의 전도인으로 이루어진 회중이 하나 있습니다.

화산 인근 지역에 대한 또 다른 지원

1972년부터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 자매인 안-마리 비르바와 아를레트 지롱댕이 용기 있게 활동하면서 생피에르, 르카르베, 르프레쇠르에 사는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두 자매가 평화의 소식을 가져갔는데도, 사람들은 그들에게 돌을 던지고 빗자루로 때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지역에서 진리를 받아들인 많은 여자들은 남편에게서 몹시 반대를 받았지만, 아내들이 보인 선한 행실의 결과로, 차츰 그 남편들도 대개는 훨씬 더 관대해졌습니다.—베드로 첫째 3:1, 2.

연로한 증인인 쥘 마르티농은 꾸준함의 모범이 되는 사람으로서, 생피에르에서 20년 이상 봉사하였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 지역에서는 간신히 모임을 가질 만한 시설에서 집회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장 샤비니와 같은 헌신적인 형제들과, 후에는 레무안 가족과 파파야 가족이 생피에르에 있는 훌륭한 회중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아름다운 왕국회관은, 화산 기슭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는 증거입니다.

망고나무 위에서 하룻밤을

왕국 소식이 르라망탱에 이른 때는 일찍이 1955년이었지만, 그 곳에서 여호와 하느님을 숭배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혹독한 시험에 직면하였습니다. 언제나 교직자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마르티니크 남자들은 대개 남자다움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기 아내에 대하여 대단히 지배적인 남자들이 많습니다. 여자들이 여호와를 섬기기를 원할 경우, 종종 남편이 휘두르는 폭력에 과감히 맞서야 하였습니다.

르라망탱에 있는 한 자매는 이렇게 말합니다. “1972년에 왕국 소식이 우리 집에 전해진 것은 내가 간절히 바라던 것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연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비밀리에 연구를 계속하였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내 성서와 연구용 서적을 불태워 버리고 나를 구타하였습니다. 남편은 이사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이사 가면 성서에 대한 내 관심이 사그라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내가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자, 남편은 내가 집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가 버리곤 하였습니다. 나는 종종 베란다 밑에서 잠을 자야 하였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내가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은 무엇이든 심지어 닭장까지 부숴 버렸습니다. 나는 남편에게 종종 구타당하였으며, 음식을 먹지 못한 채 지내야 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한번은 남편이 한밤중에 칼을 들고 나를 쫓아오기도 하였습니다! 남편에게서 도망하기 위해, 나는 관목 숲을 지나 가능한 한 빨리 망고나무 위로 올라가야 하였습니다. 남편의 손전등이 작동되지 않는 바람에 간신히 피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나를 오랜 시간 찾다가, 내가 숨어 있던 곳 근처를 지나가더군요. 나는 그 나무에 웅크리고 앉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 밤을 꼬박 그 망고나무에서 지새웠습니다.” 그러한 일을 겪으면서도 이 자매는 1977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후에는 그의 딸 역시 여호와에 대한 확고한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미신과 캥부아로부터의 자유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를 연구하고 배워 알게 된 것을 적용함에 따라, 사람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마르티니크 사람들의 신앙과 관습 가운데는, 아프리카에서 들어온 의식과 미신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으며, 그러한 의식과 미신은 나중에 그것을 용인해 준 로마 가톨릭교 토양에 심어졌습니다. 여러 해 전에 여호와의 증인이 된 사람들은, 그들이 벗어나게 된 미신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억에 따르면, 성금요일에는 아무 일도 하기 전에 누구나 십자가에 입을 맞출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그 날에는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못이나 망치를 사용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또한 삽이나 쇠스랑으로 흙을 파는 것도 금지되었는데, 그들이 가르침받은 바로는 “땅이 피를 흘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튿날인 토요일 아침에 울리는 가톨릭 교회의 종소리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축복을 받기 위해, 사람들은 종이 울린 다음, 물—강이나 바다—속으로 뛰어들어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병든 자녀들을 목욕시키고 구루병에 걸린 사람들을 흔들곤 하였는데, 이들도 혜택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누군가 죽었을 때 참여하는 관습인 “장례식 모임”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관습은 매우 요란한 밤샘이었는데, 사람들은 드럼을 치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그에 더해 크리올의 전설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해야만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그 집에 머물면서 떠돌아다니지 않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이 성서를 별로 읽지는 않았지만, 성서를 신성한 물건으로 여긴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들은 성서의 특정한 시편을 집에다 펴놓고, 그 위에 가위를 올려 놓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면 악령으로부터 집을 보호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잊지 못할 것은, 주술사들이 혼합해서 만든 약입니다. 캥부아는 크리올어로서, 일설에 따르면, 프랑스어의 “티앙, 부아!”(“자, 이것을 마시라!”)라는 표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주술사가 종종 의뢰인에게 마술 약을 주어 마시게 하는 일을 암시합니다. 그러한 약은 마술 효능이 전혀 없는데도, 많은 주술사들은 그런 약을 만들어 부자가 됩니다. 참 숭배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러한 온갖 미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섬의 남쪽에 주의를 기울임

섬의 남단에는 해변을 따라 르마랭, 생트안, 르보클랭과 같은 마을이 있으며, 내륙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리비에르필로트가 있습니다. 방문객들은 바로 이러한 곳을 보고서, 마르티니크를 백사장과 푸른 산호 바다가 있는 섬으로 여겨 왔습니다. 이 마을들은 또한 여호와의 찬양자들을 산출해 온 곳이기도 합니다.

이 마을들 가운데서 처음으로 증인을 맞이하게 된 곳은 리비에르필로트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게 되었습니까? 의사인 마기 프뤼당이 프랑스에서 의학 연구를 막 끝마쳤을 때였습니다. 프뤼당은 마르티니크로 돌아오기 전에, 여호와의 증인에게서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찬 목적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마르티니크로 돌아오자, 그는 증인들에게 연락하였으며, 사라 놀이 그와의 성서 연구를 하였습니다. 1959년에 그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의료 활동 관계로, 프뤼당 자매는 아주 많은 사람들과 심지어 인근의 여러 마을에 사는 사람들과도 접촉하게 되었으며,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에서 배워 알게 된 진리를 전해 주었습니다.

포르드프랑스에 사는 전도인들 역시 그 지역으로 와서 증거를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차를 가진 증인들이 거의 없었으므로, “드럼통”(작은 버스)을 빌리곤 하였는데, 그렇게 부른 것은 차 모양이 기름통을 연상시켰기 때문입니다. 전도인들은 온종일 여행하면서 처음에는 마을에서 사람들에게 증거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구릉들의 가파른 비탈에 사는 사람들에게로 갔습니다. 하루의 활동은 망고나무 그늘에서 「파수대」를 연구하는 일로 끝을 맺었습니다.

후에,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이 구역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 파이오니아들 가운데는 마리 데마가 있었는데, 그는 70세로 프랑스 본토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담대함과 유머감은 젊은 사람들이 따를 만한 훌륭한 모범이 되었습니다. 1963년에는 특별 파이오니아인 세포라 마르티농과 조르제트 샤를이 얼마 안 되는 이 곳 전도인들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이웃 마을인 르보클랭, 르마랭, 생트안에서 부지런히 일한 데 대한 얼마의 열매를 거두기 시작하였는데, 그런 성과는 그들이 여러 해 동안 씨를 뿌리고 가꾸고 난 후에 있었습니다. 그 파이오니아들 가운데는 르보클랭에서 봉사한 스테파니 빅토르 그리고 모니크 쿠티나르와 외제니 쿠티나르가 있었습니다. 외제니 자매가 보여 준 담대함은 주목할 만한데, 그는 대수술을 받은 후 불구의 몸으로 지내야 하였습니다. 외제니 자매는 목발을 짚고 다녔으며, 말하는 데도 큰 어려움이 있었지만, 계속해서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습니다.

1966년에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인 안마리 비르바와 아를레트 지롱댕이 리비에르필로트로 파견되었고, 2년도 안 되어 한 회중이 생겼습니다. 1970년에는 또 다른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르마랭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들은 엘렌 페라시와 테레스 파드라였습니다. 1975년까지만 해도 이 지역에 있는 여러 마을에 사는 소수의 형제 자매들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리비에르필로트까지 먼 길을 가야 하였습니다. 그 후 여호와께서 전파 활동을 축복하심으로 회중들이 형성되었는데, 1979년에는 르마랭에, 1984년에는 르보클랭에, 1993년에는 생트뤼스에, 1997년에는 생트안에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모든 마을에 사는 형제들은 아름다운 왕국회관에서 모이며, 번성하는 회중들이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돌보고 있습니다.

큰 대회를 열기에 적합한 시설

얼마 안 있어, 순회 대회와 지역 대회를 열기에 좀더 적합한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구할 수 있었던 큰 홀은 파요트(초가집)라는 무도회장이었는데, 야자나무 가지를 엮어 주위를 에워쌌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었던 것입니다. 연륜이 오래 된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지역 대회가 열렸던 케를리와 세르즈루슈에 있는 무도회장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런 형태의 홀은 대회 장소로 더 이상 적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이동식 철재 구조물을 지었으며, 이것을 이용하여 섬 어느 곳에서나 대회를 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을마다 축구장이 있었으므로 여러 해 동안, 순회 대회 시기에는 섬의 여러 경기장에 이동식 대회 회관을 세우곤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회가 열린 마을에 사는 증인들에게는 대단한 격려가 되었습니다!

지역 대회를 위해서는, 포르드프랑스에 있는 실내 종합 체육관인 루이 아셸 스타디움이 사용되었습니다. 1978년에 열린 “승리의 믿음” 국제 대회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그 대회에서는 통치체 성원인 존 C. 부스 형제가 주요 연사였습니다. 부스 형제는 한 연설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조직에 대한 믿음을 저버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라고 확언하고 나서 이렇게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동요되지 않는 우리의 믿음에 대한 상은, 우리가 승리를 거둘 때 받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결코 자신의 충성스러운 종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2886명의 참석자가 그 프로그램을 통해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성서 드라마가 주의를 사로잡다

1966년에 처음으로 공연된 성서 드라마는 잊을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당시에는 드라마 테이프를 재생할 카세트 플레이어가 없었습니다. 출연자들은 자기가 맡은 배역의 대사를 암기하여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하였습니다. 예레미야에 관한 그 드라마는 거의 두 시간이나 공연되었습니다! 여러 등장 인물의 동작은, 각 마이크 스탠드에 있는 여러 마이크를 사용하는 일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당시 마르티니크에는 증인들의 수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부 출연자는 여러 배역을 하면서, 장면이 바뀌는 사이에 등장 인물에 따라 의상을 갈아 입어야 하였습니다.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관중은 드라마에 열중하였습니다.

당시에 음향 효과도 있었습니다. 무대 뒤에서, 한 형제는 골함석판을 두드려 천둥소리를 흉내냈습니다. 무대 위에서는, 다른 형제가 홀의 전등을 끈 상태에서 카메라 플래시를 이용하여 번개 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습니다. 섬에서는 소식이 금방 퍼집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성서 드라마 공연에 대해 알게 되자,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몇 사람을 파견하여 연습 장면을 촬영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이 연습 장면을 방영하자, 대회들에 대해 훌륭한 홍보가 되었습니다.

넘어뜨리면서 건설하기도 함

의문의 여지 없이, 여호와의 말씀의 진리는 마르티니크에서 요새와도 같은 많은 거짓과 미신을 넘어뜨렸습니다.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종들은 예언자 예레미야처럼 하느님으로부터,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고 또한 “건설하며 심”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 1:10) 그러므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서 정죄하는 것을 폭로하는 일에 더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겸손한 사람들이 “참된 의와 충성 가운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성을 입”도록 돕고 있습니다.—에베소 4:24.

하느님의 말씀에 인식 깊은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또 다른 건설 활동 역시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마르티니크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수는—1975년에는 1000명이었는데, 1984년에는 1500명으로 그 후 1986년에는 2000명으로—계속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회중 집회 참석 수는 흔히 전도인 수의 두 배이며, 연례 기념식 참석자 수는 그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더 많은 왕국회관이 필요하였습니다. 20채의 왕국회관이 건축되었는데, 각 회관은 250석 내지 300석을 갖추고 있습니다. 지부 사무실로 쓰기에 적합한 시설 역시 필요하였습니다.

중요한 발판

여러 해 동안 부지런히 물색한 후, 형제들은 포르드프랑스의 도심지가 내려다보이고 만(灣)의 아름다운 광경이 보이는 한 언덕 위에 있는 부지를 발견하였습니다. 마르티니크에서 이제 특별한 일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지방 형제들 가운데는 전 시간 일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일꾼들의 수가 매우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통치체는 해외에 사는 자격을 갖춘 증인들이 돕는 마련을 인가해 주었습니다. 1982년 2월에 처음 도착한 증인은 프랑스 출신의 설계 기사인 로베르 벤제프플렌이었습니다. 며칠 후에는 건축 현장을 감독하기 위해 캐나다에서 실뱅 테베르즈가 왔습니다. 몇 주 후에는, 캐나다에서 도착한 20여 명의 형제 자매와 마르티니크의 몇몇 자원 봉사자들로 이루어진 건축 팀이 구성되었습니다. 지방 형제들은 이 건축 공사를 헌신적인 일로써 뿐만 아니라 각자의 능력에 따라 관대한 기부로도 지원하였는데, 심지어 금으로 된 장신구를 헌물하는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이 건축 공사를 통해 나타낸 열심과 연합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훌륭한 증거가 행해졌습니다!

건축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당시 마르티니크에서 좋은 소식이 공개적으로 전파되는 일이 방해를 받았습니까? 오히려 현저한 증가가 있었습니다. 1982년 3월에는 1267명의 전도인이 야외 봉사에 활동적으로 참여하였는데, 그 중 19명은 정규 파이오니아였고 또 190명은 보조 파이오니아였습니다. 건축 공사가 완공되어 갈 무렵인 1984년에는 전도인 수가 1635명으로 증가하였으며, 4월에는 491명의 보조 파이오니아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우리의 노력을 축복하고 계시다는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하지만 발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984년 8월 22일에 있었던 봉헌식 프로그램에서, 통치체 성원인 존 바 형제는 “여호와의 조직과 함께 전진함”이라는 주제로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는 4층짜리 새로운 이 지부 사무실과 벧엘 집이 “증가에 부응하여 여호와의 양 무리를 더 잘 섬기는 훌륭한 도구”가 될 것이라고 묘사하였습니다. 그 프로그램에 참석한, 여러 나라에서 온 청중 가운데는 거의 34년 전에 추방되었던 네 명의 선교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여호와께서 카리브 해의 이 작은 섬에 있는 그분의 종들을 축복하고 계시다는 증거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영적 남자들이 베푼 가치 있는 도움

물론, 베풀어진 도움은 건축 활동 외에도 더 있었습니다. 사랑에 찬 감독 또한 베풀어졌습니다. 1977년까지 여러 해 동안, 마르티니크에서 수행되는 전파 활동은 과들루프 지부의 감독을 받아 왔습니다. 이 기간에 영적인 목자인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자매 섬인 과들루프에서 파견되었던 것입니다. 오래 된 사람들은 피에르 장크와 니콜라 브리사르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1963년부터 정기적으로 회중을 방문한 사람은 아르망 포스티니였습니다.

그들에 뒤이어, 다양한 개성과 성품을 지닌 다른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회중들을 영적으로 세워 주는 일에 기여하였습니다. 그자비에 놀은 여러 해 동안 이러한 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장-피에르 비에세크와 그의 아내 자닌도 있었습니다. 또한 다비드 모로와 그의 아내인 마릴렌은 이 곳 회중들을 방문할 뿐 아니라 당시 마르티니크 지부의 감독을 받던 프랑스령 기아나의 회중들도 방문하였습니다. 프랑스령 기아나에 지부가 설립되었을 때, 마르티니크 지부에서 훈련을 받은 모로 형제는 프랑스령 기아나 지부의 조정 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클로드 라비뉴와 그의 아내 로스 마리는 프랑스령 기아나의 쿠루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던 중 마르티니크에서 순회 활동을 하라는 임명을 받았으며, 현재는 기니 공화국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좀더 짧은 기간 순회 활동을 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의 부지런한 활동과 충성스러운 영 때문에, 그들 모두에 대해 즐거운 추억이 남아 있습니다. 결혼한 여행하는 감독자들에게는, 그들의 아내가 소중한 동반자였으며, 회중 내의 자매들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었습니다. 현재는 알랭 카스텔노와 모이스 벨레가 각기 아내와 함께 두 개 순회구 내의 회중들을 방문하고 있는데, 그 순회구의 회중들에는 평균 약 다섯 명의 장로와 일곱 명의 봉사의 종이 있습니다.

마르티니크는 아주 작은 섬에 불과하지만, 통치체 성원들은 이 곳에 있는 여호와의 종들에게 사랑에 찬 감독을 베풀어 왔습니다. 유아르트 C. 치티, 대니얼 시들릭, 칼 클라인, 윌리엄 K. 잭슨, 로이드 배리, 밀턴 헨첼을 비롯하여 다른 지구 감독자들도 다녀갔습니다. 벧엘 집에서 생활하면서 일하는 열두 명의 형제 자매들뿐 아니라, 마르티니크의 다른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도 이러한 방문에 대해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겸손한 사람들을 살피신다’

시편 필자 다윗은 이렇게 썼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겸손한”] 자를 하감하시[나이다].” (시 138:6, 「신세」 참조) 그리고 제자 야고보는 하느님께서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과분한 친절을 베푸신다”고 부언하였습니다. (야고보 4:6) 마르티니크에서 여호와께서 자신에게로 이끄신 사람들 가운데서 그러한 증거를 풍부히 볼 수 있습니다.

당시 포르드프랑스에서 살았던 크리스티앙 벨레와 그의 아내 로레트가 바로 그와 같은 과분한 친절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은 마르티니크에 여러 종교가 있다는 사실에 혼란을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 승인하시는 종교는 어느 것입니까? 크리스티앙 벨레는 계시 22:18, 19을 읽고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 열쇠를 발견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더하지도 않고 그 말씀에서 어느 것도 빼지도 않는 종교는 어느 종교입니까? 제반 사실을 검토해 보고 나서, 크리스티앙은 그 종교가 바로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자신도 생활에서 동일한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하느님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지도 말고, 어떤 말씀도 버리거나 배척하지 말아야 한다는—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까지 그는 합법적인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하고 있었지만, 1956년에 로레트와의 관계를 법적으로 등록하였습니다. 마르티니크에서 증인이 주례사를 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이듬해에 그들은 포르드프랑스의 마담 강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형제인 레옹과 그의 부모 그리고 처남인 알레크상드르 모두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크리스티앙과 로레트의 한 아들인 모이스 벨레는 현재 순회 감독자로 섬기고 있습니다. 실로 그 가족은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을 풍부히 경험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종들에게 친절을 베푼 단순한 행동이, 마음이 친절한 사람들에게 축복을 얻는 길을 열어 줄 수도 있습니다. (마태 10:42) 에르네스트 라쉬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였는데, 그는 포르드프랑스에서 보석 세공업을 하였습니다. 그는 「깨어라!」지를 정기적으로 받았지만,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친절의 표시로 받은 것입니다. 하루는 잡지를 전해 주던 증인이, 오직 평화의 군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이 땅에 공의가 편만하게 하실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에르네스트 라쉬가 알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라쉬는 그 증인이 자기 집을 방문하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라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바라던 것이 다 이루어진 셈이지요. 자녀들 대부분이 진리 안에 있는데, 한 딸은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고, 한 아들은 파이오니아이자 장로입니다. 그리고 더 나이 든 한 아들은 마르티니크 벧엘 가족 성원입니다.”

여호와를 섬기기로 결심함

청소년들이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분의 사랑에 찬 인도에 대해 감사를 나타내는 모습을 보는 것은 격려적인 일입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세상에서 건전한 지침을 찾을 수 없어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그들이 인생의 진정한 목적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전도 12:13) 성서의 내용을 알게 됨에 따라, 그들은 이사야 30:21에 기록된 교훈을 청종함으로 진정한 유익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분별하기 시작합니다. 그 구절은 이러합니다. “네 뒤에서 말 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니라].”

이 청소년들 가운데 클로디아라는 열 살 된 한 소녀는, 자기 가족을 방문하고 있는 증인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병환으로, 클로디아의 어머니와의 연구는 정기적이 아니었지만, 소녀는 계속해서 연구를 하여 배워 알게 된 성서의 교훈을 적용하였습니다. 소녀는 교리 문답서와 기도서를 불태우고, 종교 형상을 없애 버렸습니다. 아버지가 사망하였을 때, 클로디아는 검은 상복을 입기를 거절하였고, 아버지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증거하였습니다. 나아만의 아내의 종이었던 이스라엘 소녀와 같은 영을 나타냄으로써, 클로디아는 어머니가 회중 집회에 참석하도록 격려하였습니다. (열왕 하 5:2-4) 소녀는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신권 전도 학교에 등록하였습니다. 소녀는 곧 야외 봉사에 참여하였으며, 열두 살 되던 해인 1985년에 어머니와 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소녀의 어머니는 자기 딸이 자기의 영적 진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주저함 없이 인정하였습니다.

일부 청소년들은 담대하게도 학교에서 증거할 기회를 포착합니다. 르프랑수아에서 한 프랑스인 교사는 학생들에게 마르티니크에 있는 다양한 종교에 대해 조사해 오라는 과제를 내주었습니다. 당시 열여덟 살이던 로슬렌과 그의 한 급우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인류의 노력」 책을 사용하여 훌륭히 증거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학생들과 교사에게 약 20부의 서적을 전하였습니다.

학교에서 토의되는 문제가 매우 논쟁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이 곳 마르티니크의 청소년 증인들은 여호와의 말씀에 나오는 높은 원칙들을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거리낌없이 이야기해 왔습니다. 마리-쉬종 몽지니는 자기의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루는 인구 과잉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면서, 교사는 현대식 출산 조절을 언급하였습니다. 낙태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즉시 열띤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나는 교사에게 그 주제에 관한 내 견해를 설명하는 얼마의 자료를 이튿날 제출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교사는 허락해 주었으며, 거의 두 시간 동안, 우리는 학급 전체와 토의하였습니다.” 자료는 「깨어라!」지에서 발췌한 것인데, 프랑스어판 1980년 8월 22일 호에 실린 “한 태아의 일기”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토의 결과, 급우들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좀더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르티니크에는 청소년들이 많습니다. 그 청소년들은 대개 암담하게도, 물질적 소유물을 비합리적으로 강조하는 헛된 경제 제도의 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증인 청소년들은 영적인 가치관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마르티니크의 왕국회관이 여호와와 그분의 길을 알기를 원하는 청소년들로 가득 차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 뿌듯한 일입니다.

마약의 노예 생활로부터 자유롭게 되다

물질주의가 영적인 가치관을 압도하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티니크의 많은 청소년들도 크랙이나 그 밖의 중독성 약물을 사용함으로 건강을 몹시 해치고 자기들의 인생을 망쳐 왔습니다. 하지만 참 그리스도교는 얼마의 사람들이 이러한 파멸적인 습관들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있습니다. 포르드프랑스에 사는 폴앙리와 다니엘은 라스타파리 교단에 속해 있었는데, 그 곳에서는 마리화나를 마음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라스타파리 교도들은 ‘여러 나라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한 잎’에 관해 묵시록에서 말하는 점을 그들 나름대로 설명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묵시에 관한 성서책의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대개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폴앙리와 다니엘은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이해하기를 원하였으며, 여호와의 증인이 그들에게 도움을 제의하였습니다.

폴앙리와 다니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참석하기를 꺼리곤 하였는데, 우리의 외모가 다소 반감을 사는 편이라서 냉대를 받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집회에 갔을 때, 그들은 왕국회관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서 친절과 따뜻함과 가식 없는 태도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 다음주에, 그들은 이발을 하고 훨씬 단정한 옷차림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안 되어, 그들은 흡연을 중단하였으며, 곧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도 하였습니다.

폴앙리 그로데소르모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어느 날 가두 증거를 하고 있는데, 한 경찰 경위가 깜짝 놀라며 ‘아니, 그로데소르모잖아!’ 하고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내가 마약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 경위와의 사이에 문제가 있었거든요. 내가 가방에서 마약이 아니라 성서와 잡지를 꺼내자, 그는 잡지를 기쁘게 받으며 나를 축하해 주고는 계속하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나는 정말 계속 그렇게 하였습니다. 1984년에 침례를 받고 1985년에는 정규 파이오니아 대열에 가담하였습니다. 지금은 결혼하여 가장이면서 지방 회중의 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친구 다니엘도 진리 안에서 나 못지않게 진보하였습니다.”

인생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알기 원하는 사람들은 비단 젊은이들만이 아닙니다. 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꺼이 배워 알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돕기 위해, 1995년 4월과 5월에, 마르티니크 지부는 “생활이 왜 이토록 문제들로 가득 차 있는가?”라는 제목의 「왕국 소식」 25만 부를 배부하도록 마련하였습니다. 섬의 인구가 단지 33만 명이었으므로, 이것은 모든 성인을 비롯하여 많은 청소년들 역시 그 중요한 소식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임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많은 생산적인 대화의 문이 열렸습니다.

한 순회 감독자의 보고에 따르면, 시골에 사는 한 여자는 그 전도지를 읽고 협회의 마르티니크 지부에 전화를 걸려고 하였습니다. 서두르는 바람에 번호를 잘못 눌렀지만, 그래도 그 전화 번호는 괜찮은 번호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포르드프랑스에 있는 한 왕국회관의 전화벨이 울린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전도인들은 순회 감독자와 함께 봉사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이렇게 요청하였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여호와의 증인 한 사람을 보내 주십시오. 성서를 연구하고 싶습니다.” 그 다음날, 그 여자는 자기가 원하는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자체 대회 회관

우리의 대회를 개최할 만한 시설을 찾는 일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참석자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대회를 위해 사용해 왔던 그 스타디움에 있는 체육관은 더 이상 적합한 장소가 못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였습니까?

그 무렵, 리비에르살레 회중의 한 장로는 왕국회관을 건축할 부지를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가 소개받은 대지는 약 6헥타르였는데, 왕국회관을 한 채 짓는 데 필요한 부지로서는 너무 컸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였는지, 그 대지는 섬의 중심부에 있었습니다. 그 대지에는 철재로 만든 오래 된 창고가 한 채 있었는데, 비록 낡기는 하였지만, 임시 대회 시설로 사용할 수 있어 보였습니다. 1985년에 우리는 그 곳에서 첫 대회를 가졌습니다. 참석자 수가 4653명이나 되었는데, 전년보다 600명이나 많은 수였습니다.

1992년에 새로운 건물을 짓는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많은 형제 자매들이 자비로 이 곳에 와서 건축 공사를 도왔습니다. 지방 증인들도 시간과 기금을 관대하게 바쳤습니다. 그 건축 공사는 이제 완공되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대회 회관에는 5000명이 앉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 건물은 마르티니크에서 가장 큰 강당입니다.

이제는 축구 경기가 연기되는 바람에, 대회를—흔히 마지막 순간에—연기할 필요가 더는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동식 철재 구조물을 세우고, 철거하고, 운반하고, 보관해 두는 수고도 끝났습니다. 꽃과 대왕야자와 봉황목으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의 대회 회관은 여호와께 영예가 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는 조직

여호와께서는 지난 반세기에 걸쳐 마르티니크에서 참 숭배가 뿌리를 내리고 번성하게 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자기의 조직을 통하여, 감독의 직분을 맡은 사람들에게 훈련을 베풀어 오셨습니다. 그자비에 놀은 아내와 함께 길르앗 학교의 제31기생으로 선교인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후 놀 형제는 1964년에 10개월간 길르앗 과정의 추가 훈련을 받았습니다. 1977년 2월에 통치체가 마르티니크에 워치 타워 협회 지부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그러한 훈련이 대단히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지부 위원들은 조정 위원인 그자비에 놀과 발랑탱 카렐과 제라르 트리비니였습니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한 아르망 포스티니가 지부 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트리비니 형제가 사망하고 카렐 형제가 프랑스로 이주한 뒤, 1989년 9월에 앙리 위르쉴레가 세 명의 지부 위원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1954년, 그자비에 놀과 사라 놀이 프랑스에서 도착하여 마르티니크에서 봉사의 직무에 전념하기 시작한 해에 출생하였습니다. 앙리는 사도 바울의 동료였던 디모데의 경우처럼, 유아 때부터 믿음의 모범이 되는 어머니로부터 유익을 얻었습니다.—디모데 둘째 1:5.

1975년에 이 섬에는 1000명의 전도인과 총 15개의 회중이 있었습니다. 1997년에는 4000명이 넘는 전도인 신기록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46개의 회중과 연합하여 섬기고 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해마다 평균 7퍼센트의 증가가 있었습니다.

이미 마르티니크에는 주민 90명당 한 명의 증인이 있습니다. 관심자들과의 성서 연구가 수천 건 사회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활동은 섬 전역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분의 증인들 역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증인들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데, 중상을 하면 언제든지 가까이 있는 누군가가 그 사람을 질책하기 때문입니다. 길거리, 시민 광장, 시장에서 그리고 병원과 큰 쇼핑 센터의 주차장 등에서 증거를 함으로, 왕국 소식이 사람들에게 두드러지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이 누군가가 “토-토-토, 일 리 아 뒤 몽드?”(“여보세요. 집 안에 누가 계십니까?”)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되면,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하느님의 왕국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왔다는 것을 즉시 압니다.

섬의 일부 지역에서는 현재 구역을 매주 한 번씩 도는데, 이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야외 봉사에 나가면, 전도인들은 구역으로 단지 열 집이나 열다섯 집밖에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지역에서는 소식을 자주 들어 온 사람들에게 증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도인들은 집주인과 대화할 서론과 주제를 다양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충실하고 분별 있는 종이 활용할 수 있게 해준 모든 자료와 제안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프랑스어 구역에서는 가두 증거를 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현재는 가두 증거가 흥미 있고 생산적인 봉사 부면이 되고 있습니다.

봉 디에 레”

마르티니크 사람들은 수시로 봉 디에 레”(“하느님의 뜻이라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자기들의 말을 강조합니다. 물론 하느님의 뜻은 성서에 명백하게 나와 있습니다. 시편 97:1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찌어다.” 시편 148:13은 이렇게 부언합니다.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찌어다.” 또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여호와께서는 이와 같이 호소력 있게 초대하십니다. “네가 나의 명령을 ·⁠·⁠· 만일 들었더면[“내 명령에 실제로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네 평강[“평화”]이 강과 같[으리라].” (이사야 48:18, 「신세」 참조) 하느님은 선하신 분으로, 그분의 뜻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정확한 지식에 이르는 것입니다.” (디모데 첫째 2:4) 하느님의 뜻은 또한 자신의 창조물을 자유롭게 해주고, 그 속박의 사슬을 끊어 없애며, 온 땅을 낙원으로 만들어 모든 인종과 피부색에 속한 사람들이 그 곳에 거하면서 함께 연합하여 창조주를 숭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 8:19-21) 그 사랑에 찬 목적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기회가 아직도 마르티니크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지구의 대부분의 지역처럼, 마르티니크도 지난 십 년 동안 크게 변하였습니다. 목가적인 낙원이던 곳이 마약과 물질주의와 도덕의 붕괴로 인해 달라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러한 상태를 초래한 인간성의 변화에 대해 예언하였습니다. (디모데 둘째 3:1-5) 하지만 이러한 상태는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는 계속해서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이 “보배”로 묘사하신 사람들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이 생명을 얻도록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그들은 낙원에 거할 여호와의 백성으로 이루어진 전세계적인 사회의 일부가 되고 있습니다. (학개 2:7) 그들은, 하느님이 뜻이라면 어쨌든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무관심하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성경을 주의 깊이 조사한 다음, 사랑이 동기가 되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열심히 행하는 사람들입니다.—사도 17:11; 디도 2:13, 14.

[192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46개 회중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포르드프랑스 (14)

바스푸앵트

르라망탱 (3)

리비에르필로트

르모른루지

트리니테 (2)

리비에르살레

생트마리

르프랑수아 (2)

생조세프 (2)

생피에르

르로랭

르마랭

레트루아일레

르로베르 (2)

생에스프리

쇨셰르 (2)

르보클랭

그로모른

카스필로트

아주파부용

마리고

베르프레

뒤코

생트뤼스

생트안

[162면 전면 삽화]

[167면 삽화]

그자비에 놀과 사라 놀, 마르티니크에 도착한 해의 모습

[175면 삽화]

여호와를 오랫동안 섬겨 온 충성스러운 종들: (1) 레옹 벨레, (2) 쥘 뉘뷜, (3) 제르맹 베르톨로, (4) 필리프 도르돈, (5) 로제 로사몽, (6) 크리스티앙 벨레, (7) 알베르 넬송, (8) 뱅상 제보, (9) 뱅상 뮐레르

[177면 삽화]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훌륭한 모범을 세운 여자들: (1) 스텔라 넬지, (2) 빅토르 푸스 (현재는 라시망), (3) 레오니드 포팽쿠르, (4) 앙드레 조조르, (5) 에마 위르쉴레

[183면 삽화]

최초의 자체 왕국회관 (포르드프랑스)

[186면 삽화]

무투사미 가족, 모두 그리스도인 회중과 연합해 있다

[191면 삽화]

펠레 산과 해변에 있는 생피에르

[199면 삽화]

마르티니크의 벧엘 가족

[207면 삽화]

마침내 리비에르살레에 세워진 대회 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