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바로 가기

차례 바로 가기

일본

일본

일본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의 잿더미 속에서 일어나 세계적인 산업 대국이라는 현대의 역할을 맡게 된 데 밑거름이 된 특성들 가운데는, 억척스럽게 열심히 일하고 같은 목적으로 단결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오늘날, 인구가 1억 2500만 명이나 되는 이 나라는 벚꽃과 철쭉꽃과 해발 3776미터의 눈 덮인 후지 산뿐만 아니라, 카메라와 자동차와 가전 제품의 상표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 후의 신권적인 진보는 훨씬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1951년에 도쿄에서 열린 대회에는, 워치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 졸업생인 선교인 약 40명과 이 나라 태생의 일본인 전도인 약 20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당시에 워치 타워 협회장인 N. H. 노어는, 언젠가 이 나라의 일본인 왕국 선포자가 아주 많아져 그들 사이에서 선교인들을 찾기가 힘들게 될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 날은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하느님의 동료 일꾼으로서 선교인들이 처음으로 일본인 전도인 1000명을 모으는 데는 십 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1992년에는 매달 평균 1000명의 새로운 전도인이 추가되었습니다. (비교 고린도 첫째 3:9-11) 일본을 구성하는 섬들에 있는 하느님의 왕국 봉사자들의 총수는 18년 이상 매달 신기록을 세워 왔으며, 이제 최고 22만 663명에 이르렀습니다. 일본에서 일어난 일들은 이사야 60:8, 9에 있는 이러한 말씀이 흥미진진하게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저 구름 같이,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 오는 것 같이 날아 오는 자들이 누구뇨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리라].”

「1973 연감」(영문)에는 이러한 일본의 초기 역사의 일부가 1972년까지 나와 있으며, 그 해에는 급속히 확장하는 파이오니아 봉사에 참여한 3000여 명을 포함하여 약 1만 4000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이제 이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후 25년의 역사도 살펴봅시다.

초창기에 뿌려진 왕국 진리의 씨

전통적으로 불교와 신도를 믿는 이 나라에서, 그토록 풍성한 영적 소출을 낸 씨들은 어떻게 뿌려졌습니까? 1911년에, 당시 워치 타워 협회장인 C. T. 러셀은 일본으로 답사 여행을 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국의 선교인들이 상당히 낙심해 있고 일반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서는 진정한 관심을 별로 나타내지 않는다고 보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왕국 복음”이라고 느꼈습니다. 미국인 R. R. 홀리스터가 협회의 대표자로 동양에 임명되었습니다. 전도지와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을 비롯한 책들이 번역되었고, 주로 일본인 근로자들을 고용하여 수백만 부를 배포하였습니다. 1926년에 일본계 미국인 아카시 준조가 협회의 대표자로서 일본에 파견되었습니다. 지부 사무실이 1927년 초에 고베에 개설되었으며, 같은 해에 도쿄로 이전되었습니다. 1938년에는 잡지와 책을 배포하는 콜포처의 수가 110명으로 늘었습니다. 그러나 광신적인 국가주의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치솟고 있었고, 그 직접적인 결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1939년 6월 21일, 도다이샤(“등대사”라는 뜻으로, 당시에 이 나라의 여호와의 증인 조직을 일컫던 말)의 성원 130명이 한꺼번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그리하여 사실상 전시의 여러 해 동안 조직적인 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지부 감독자는 압력을 받자 배교하였습니다. 이시이 가족과 미우라 가족과 같이 예외가 되는 충성스러운 사람들도 몇몇 있었지만, 도다이샤의 거의 모든 성원이 그를 좇아 여호와를 섬기기를 그만두었습니다. 이 집단이 실패한 원인은 그들이 아카시 준조라는 한 인간을 추종했다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아내가 있는데도, 일본의 전통인 일부다처 관습을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뉴욕에서 40년 이상 계속 충실하게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으며, 웨스트맨해튼 회중의 일부 성원들은 아직도 그를 오가와치 자매로 애틋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길르앗 선교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일본에 들어갔을 때, 오사카에서 도다이샤의 큰 집단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집단은 침례를 받게 해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였고, 더욱 나쁜 일로서, 아카시를 좇아 매우 부도덕한 생활 방식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생활 방식을 청산하기를 거절하였고, 그 결과 회중의 정결함을 위해 그들 중 약 30명이 제명 처분되어야 하였습니다.

충실하게 남은 사람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 최초의 콜포처들 가운데 포함되는 이시이 지조와 이시이 마쓰에 부부를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1929년부터 1939년까지 전국을 돌며 전파하였습니다. 1939년 6월에 그들은 센다이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마쓰에는 더럽고 벼룩이 들끓는 작은 독방에서 지낸 첫해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샤워나 목욕이 허락되지 않았고, 온 몸은 빈대에 뜯겼습니다. 몸무게가 30킬로그램으로 줄어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하였고, 죽기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마쓰에는 다른 교도소로 이감되면서 건강을 어느 정도 되찾았으며, 1944년 말에 석방되었습니다. 마쓰에의 남편도 비슷한 학대를 받았는데, 그는 나중에 수혈을 거부했을 때도 충절을 나타냈습니다. (사도 21:25) 그는 71세에 사망하였습니다. 마쓰에는 지금까지 계속 충실한 증인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마쓰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 전에 능력과 지성이 뛰어났던 사람들 대부분은 큰 압력을 받게 되자 하느님의 조직을 떠났어요. ·⁠·⁠· 충실하게 남은 사람들은 특별한 능력도 없고 두각을 나타내지 않던 사람들이었지요. 참으로 우리 모두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잠언 3:5, 「신세」 참조.

또 다른 충실한 부부로 미우라 가쓰오와 미우라 하기노가 있는데, 그들은 1931년에 콜포처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들 역시 1939년에 히로시마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은 천황을 숭배하거나 일본의 군국주의를 지지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가쓰오는 심하게 구타당했으며, 1945년 8월에 원자 폭탄 투하로 그 교도소가 붕괴될 때까지 감금된 채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38세밖에 안 되었지만 그 동안 건강이 몹시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석방되었을 때는 노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먼저 석방된 아내가 어린 아들 쓰토무를 기르고 있는 북쪽의 이시노모리로 돌아갔습니다.

가쓰오는 어떻게 여호와의 조직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까? 일본의 주요 일간지 「아사히」 신문사는 워치 타워 선교인들인 아가씨 다섯 명이 오사카에 와서 일본식 집에서 일본식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자들이 그들을 방문하여 멋진 삽화가 들어 있는 기사를 작성했는데, 그 기사에서는 다섯 명의 자매를 벚꽃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에 비하였습니다. 그 기사는 선교인 집의 주소도 게재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북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가쓰오가 마침 그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조직과 다시 접촉하였고 파이오니아로 등록하였습니다. 가쓰오는 1957년에 사망할 때까지 충실하게 봉사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 일본 고베에서 봉사하고 있는 사람으로, 지금 92세인 이데이 미요가 있습니다. 이 자매는 진리 안에 머문 65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견뎠습니다. 이 자매의 감동적인 체험담이 「파수대」 1991년 9월 1일 호에 실려 있습니다.

“49년도 동기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로는 전파 활동을 하기 위한 여건이 훨씬 더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1947년에, 아카시 준조가 자기는 더 이상 성서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워치 타워 협회 사무실에 통보하였습니다. 노어 형제는 즉시 하와이에 연락하여, 선교인 훈련을 받기 위해 길르앗 학교 제11기 학급에 참석하겠다고 자원하는 일본계 하와이인들이 있는지 알아 봐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1920년대 초에 J. F. 러더퍼드의 비서로 일했던 하와이 지부 감독자는 이렇게 간청하였습니다. “하지만 노어 형제, 해슬릿 부부는 어떻습니까?” 그래서 50세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돈 해슬릿과 그의 아내 메이벌 역시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길르앗 학교에서 시니치 도하라와 엘시 다니가와가 20여 명에게 일본어를 가르쳤습니다.

1949년에 “하와이인들”은—돈 해슬릿과 메이벌 해슬릿, 제리 도마와 요시 도마, 시니치 도하라와 마사코 도하라 및 그들의 세 자녀, 엘시 다니가와는—폭격으로 쑥밭이 된 도시 도쿄에 임명되어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같은 해에, 이들의 뒤를 이어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선교인들이 도착했는데, 그 그룹은 에이드리언 톰프슨, 퍼시 이즐롭과 일마 이즐롭, 로이드 배리와 멜바 배리로 구성되어 있었고 전쟁으로 황폐된 도시인 고베에 임명되었습니다. 일본의 이 첫 선교인들은 “49년도 동기들”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여섯 명은 영어 속담의 표현처럼 “구두를 신은 채”, 즉 임명지에서 일을 수행하는 중에 사망하였고, 다른 여덟 명은 일본과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직도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1949년에, 현지 전도인 여덟 명도 왕국 봉사에 바친 시간을 보고하였습니다.

도쿄에서 이루어진 성장

하와이인들의 그룹은 도쿄에서 놀라운 진보를 이루어 냈습니다. 요시 도마는 전후의 그 해에 자기들은 “이 굴에서 저 굴로” 다니며 구역에서 봉사했다고 회상합니다. 그 자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가난했고 전쟁의 여파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어요. 식량은 배급제였는데, 돈 해슬릿이 할당된 양배추 한 포기를 받으려고 이웃들과 함께 줄을 서곤 했지요.” 하지만 집주인들은 상냥하고 친절해서, 이 선교인들이 일본어로 제공 연설을 하느라고 쩔쩔매고 있는 동안 참을성 있게 잘 들어 주었습니다. 선교인들은 집 안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어야 한다는 점을 배워야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이어져 있는 방으로 올라서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천장이 낮아서, 키가 큰 돈 해슬릿은 머리가 부딪혀 상처가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일이 년 만에, “하와이인들”은 도쿄에 탄탄한 기초를 놓았으며, 현재 이 도시에는 회중이 139개나 있습니다.

“49년도 동기들” 가운데, 기름부음받은 증인들인 돈 해슬릿과 메이벌 해슬릿은 나이가 많이 들었을 때도 야외 활동에서 매우 뛰어난 모범을 보였습니다. 돈이 1966년에 사망하자, 장례식을 위해 그의 관을 왕국회관으로 운반한 형제 여섯 명은, 모두 그가 진리 안으로 인도한 청년들로서 당시 성원이 19명이던 도쿄의 일본 벧엘 가족으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메이벌은 돈보다 8년을 더 살았습니다. 70세가 넘어서, 메이벌은 결장암에 걸렸습니다. 도라노몬에 있는 도쿄의 한 일류 병원에서는, 2주일 전에 미리 입원한다는 조건으로 사려 깊게도 수혈 없이 수술해 주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입원 첫날, 한 젊은 의사가 메이벌이 수혈을 거부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병실로 찾아왔습니다. 그 결과로 훌륭한 성서 토의가 벌어져 날마다 계속되던 중 수술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심각한 수술이었기 때문에, 네 명의 의사가 참여하였습니다. 메이벌은 의식을 회복하고 나서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옛날의 그 아담이 저주스러워요!” 참으로 적절한 말이었습니다! 메이벌은 중환자실에 단 하루만 있었는데, 그 날 같은 수술을 받았지만 수혈을 한 다른 네 명의 환자는 중환자실에 여러 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 의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중에, 그는 메이벌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잘 모르셨겠지만, 실은 그 수술실에 다섯 명의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수혈을 하지나 않는지 단단히 지키기 위해서 저도 그 곳에 갔었거든요.’ 의사인 도미나가 씨는 요코하마에서 성서 연구를 계속하였습니다. 현재, 그와 그의 아내, 의사인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회중의 활동적인 성원입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산출한 훌륭한 열매입니다!

메이벌은 도쿄 미타 선교인 집에서 선교 봉사를 계속하였습니다. 78세가 되었을 때, 암이 재발하여 몸져눕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저녁에 선교인들이 집에 돌아와, 「왕국 소식」 배부 운동을 하면서 겪은 훌륭한 경험담을 이야기하자, 메이벌은 자기에게 옷을 입혀 데리고 나가 「왕국 소식」을 배부하게 해 달라고 고집하였습니다. 메이벌은 기운이 없어서 근처에서 겨우 세 집만을 방문할 수 있었는데, 일본에 도착했을 때 그가 처음으로 증거했던 바로 그 세 집이었습니다. 몇 주 후에 메이벌은 지상 생애를 마치고 사망하여 하늘의 임명을 받게 되었습니다.—비교 누가 22:28, 29.

고베에서 이루어진 발전

고베에서도 곧 성장이 뚜렷이 나타났습니다. 일본에서 참으로 신권적인 첫 대회는 널찍한 고베 선교인 집의 마당에서 1949년 12월 30일부터 1950년 1월 1일까지 열렸습니다. 고베의 다루미 학교 강당에서 열린 일요일 공개 집회에서는 참석자 수가 101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넓은 다루미 공중 목욕탕에서 세 사람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고베 선교인 그룹의 한 사람인 에이드리언 톰프슨은 일본어 실력이 대단히 좋아져서, 1951년에 일본에서는 최초로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최초로 지역 감독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앞으로 있게 될 성장을 위한 튼튼한 기초를 놓는 데 기여를 많이 하였습니다. 뉴질랜드에서 오랫동안 충실하게 일해 온 파이오니아 자매의 아들인 그는, 이전에 최고 수준의 럭비 선수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각광받던 스포츠계를 떠나서 침례받은 증인이 되었고, 그 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1977년에 사망하였지만, “토미”는 그의 무한한 활력과 여호와께 바치는 ‘전적인 정성에 대한 집요함’으로 인해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민수 25:11, 「신세」 참조.

선교인들이 일본식 주택, 문화, 언어에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지만, 그들의 주된 관심은 성서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 출신의 외향적인 사람이었던 “호랑이”(퍼시) 이즐롭은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우리는 많은 성서 연구를 사회했지요. 나는 36건이었고, 아내와 다른 선교인들도 그만큼 있었습니다. 연구생들이 선교인 집으로 연구하러 오곤 했는데, 매일 오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매일 저녁 집 안의 모든 방에서 세 건 혹은 그 이상의 연구가 사회되었습니다. 우리는 연구 교재를 영어와 일본어 두 가지 다 펴 놓았습니다. 연구생들을 돕기 위해, 우리는 함께 답이 있는 곳까지 여러 줄을 세어 내려가곤 했지요. 진도가 느리긴 했지만, 그들이 단지 성경 구절을 읽고 그 내용을 출판물과 비교하는 것만으로 어떻게 그렇게 이해하는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현재 진리 안에 있습니다!”

초창기에, 선교인들에게는 전파에 사용할 왕국 서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전쟁 전에 출판된 일본어판 「빛」(Light) 제2권 한 상자를 고베에서 입수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제1권을 먼저 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베에서 진리 안으로 들어온 최초의 일본인들 중 한 사람은 제2권을 읽고 관심을 갖게 되어 장성하였고 이윽고 순회 감독자가 되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의 내용이 사용되었습니다. 성서 연구를 하고 있던 몇몇 사람이 그 책의 내용 몇 장을 자기들끼리 번역하였는데, 이것을 등사하여 다른 성서 연구들을 사회할 때 임시로 사용하도록 선교인들에게 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번역된 이런 내용들 가운데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일마 이즐롭 자매는 그렇게 번역된 내용 가운데서, 지면의 각주에 ‘일마 이즐롭 여사의 해석’이 삽입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십 년쯤 뒤에, 퍼시는 후쿠오카 시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하였습니다. 과거에 두 남자를 청부 살인한, 난폭한 사형수 나카타 기미히로가 성서 연구를 요청해 왔는데, 퍼시가 그 사회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기미히로는 “옛 인간성”을 완전히 버렸습니다. 그는 교도소에서 침례를 받았으며, 퍼시는 그를 “내가 알고 있던 사람 중 가장 열심인 왕국 전도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묘사하였습니다. (에베소 4:22-24) 기미히로는 브라유 점자법을 공부하여,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과 「“이 천국의 기쁜 소식”」 소책자 및 「파수대」와 「깨어라!」 기사들을 점자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출판물들은 맹인 학교를 포함하여 일본의 여러 지역에 배포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959년 6월 10일 아침에, 경찰차가 선교인 집 앞에서 멈췄습니다. 기미히로가 그 날 오전 자기가 처형되는 자리에 퍼시가 참석해 줄 것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퍼시는 이에 응하였습니다. 처형장에서, 두 사람은 간단히 대화를 나누었고, 마지막으로 그들은 함께 왕국 노래를 불렀습니다. 기미히로는 퍼시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퍼시 형제, 왜 떨고 계십니까? 정작 긴장해야 할 사람은 접니다.” 교수형을 당하기 전에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러하였습니다. “오늘 저는 여호와와 대속 희생과 부활 희망에 대해 굳게 확신합니다. 저는 잠시 동안 잠들어 있겠지만, 여호와의 뜻이라면 낙원에서 여러분 모두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전세계 형제들에게 따뜻한 작별 인사를 전하였습니다. 기미히로는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 공의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습범으로서가 아니라, 헌신하고 침례받은, 여호와의 충실한 종으로서 사망하였습니다.—비교 사도 25:11.

일마 이즐롭은 암으로 약 10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88년 1월 29일에 일본 에비나에 있는 벧엘 집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 후로, 퍼시는 펜실베이니아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회원으로서 협회의 연례 총회에 여러 번 참석하였고, 최근의 한 총회에서는 일본에 관해 훌륭한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 후 그 형제 역시 1996년에 사망하였습니다.

1949년 말에 멜바 배리는 언어 장벽에도 불구하고 고베에서 야외 봉사 첫날에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연구의 결과로 새로운 전도인이 두 명 생겼고, 그 중 한 사람인 다카기 미요는 수십 년 동안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습니다. 그는 나중에 멜바에게, 두 선교인 자매가 질퍽거리는 들판을 걸어서 자기 집에 찾아오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48년이 지난 지금, 미요는 휠체어를 타고 호별 방문을 하면서 봉사를 계속합니다. 멜바는 도쿄에서 선교 봉사를 하도록 임명이 바뀌기 전에, 3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일곱 명가량이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도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인내해 왔으며, 다행히도 1995년 고베 대지진 때에도 살아 남았습니다.

많은 선교인들이 밭으로

1950년 초에, 길르앗 제11기 학급을 졸업한 다섯 자매는 뉴칼레도니아 입국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는 바람에 일본의 고베로 임명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지금까지 67년 동안 파이오니아 봉사를 해 온 로이스 다이어와 몰리 헤런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지난 49년 동안 짝으로 일해 왔으며, 현재 도쿄 미타 선교인 집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로이스의 체험담은 「파수대」 1980년 12월 호에 실렸습니다.

몰리 헤런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고베의 그 집은 널찍했는데, 우리는 첫 선교인들이 도착하고 나서 6개월 후에 기념식을 가졌어요. 180명가량이 참석하여 식당과 복도를 가득 메웠고, 심지어 통역되는 연설을 창 밖에서 잘 듣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그 모임에서 야외 봉사에 대한 광고를 듣고, 다음날(일요일) 오전에 약 35명이 참여하려고 나왔습니다. 배리 형제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선교인 각자는 새로운 관심자들을 서너 명씩 데리고 호별 방문을 해야 했는데, 선교인들이 아직 언어가 유창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주인들은 우리와 동행한 일본인들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곤 했습니다. 이 새로운 관심자들이 집주인들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우리는 알 도리가 없었지요.”

1950년 6월 하순에, 한국 전쟁이 갑자기 발발하였습니다. 물론, 일본의 선교인들은 한국에서 봉사하고 있던 동기생 여덟 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그 다음날, 마침 고베 선교인 몇몇이 통근 열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맞은편에서 열차 한 대가 같은 시각에 그 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열차 두 대가 떠나고 나니,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고베 선교인들이 보니, 맞은편 승강장에 여덟 명의 한국 선교인 그룹이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반가운 재회였습니다! 한국에 있던 선교인들은 민간인을 태우는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그 나라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고베 집에는 선교인이 10명에서 18명으로 늘었습니다. 대부분이 쑥밭이 된 그 도시의 구역은 매우 철저한 증거를 받았습니다.

얼마 안 있어, 스콧 카운츠와 앨리스 카운츠 부부가 도쿄 선교인 집으로 갔는데, 10월에는 한국 선교인 여덟 명 모두가 나고야에 개설된 새로운 집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나아지자, 한국에서 온 그룹 중에서 단지 돈 스틸과 그의 아내 얼린만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무르익어 수확하게 된 밭

나고야 선교인 집의 개설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그레이스 그레고리와 글래디스 그레고리가 있습니다. 그들이 보니, 그 구역은 무르익어 수확하게 되었습니다. 1951년 4월에, 그레이스는 18세 된 스기우라 이사무를 만났는데, 그는 피아노 판매점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글래디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이사무의 어머니는 그를 신도 신앙으로 양육했고, 그는 일본이 신슈(신의 나라: 神州)이며 가미카제(신의 바람:神風)가 일본을 보호하여 전쟁에서 이기게 도와 줄 것이라는 말을 들어 왔지요. 그런데 일본이 항복을 하고 또 이어서 전쟁으로 인한 비참한 경제 상태와 식량 부족을 겪게 되자, 일본 신들에 대한 그의 믿음은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이듬해에 영양 실조로 사망했지요. 젊은 이사무는 지상 낙원에 대한 희망에 반응을 보였고 1951년 10월에 순회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 대회에는 선교인 약 50명과 일본인 약 25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이사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6년밖에 안 되었는데도 선교인들이 일본인들과 편견 없이 자유롭게 어울리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길르앗 학교와 순회 및 지역 활동을 포함하여 45년 동안 영혼을 다한 봉사를 한 뒤, 스기우라 형제는 지금 에비나에 있는 벧엘에서 지부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글래디스 그레고리는 한 여자를 방문한 일을 기억합니다. 그 여자는 명목상 불교인이었는데, 나중에 그리스도교국의 여러 교회에 다니다가 환멸을 느껴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목회자들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그리고 그 여자의 성서(「분고타이」, 문어체 번역판)에는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이 거의 7000번이나 나오는데 그들이 왜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자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많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교직자는 “그냥 믿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파수대」(1951년 5월 이래 일본어로 매월 발행된 잡지)를 한 부 얻었는데, 이 잡지는 글래디스가 그 여자의 옆집에 사는 이웃에게 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읽은 내용에 감명을 받고, 글래디스를 찾았습니다. 이 경험에 관해, 글래디스는 나중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성서에서 보게 되자, 마음이 감동되었어요. 즉시 회중 서적 연구에 나왔지요. 거기서 다음날 있을 봉사에 대한 광고를 듣더니, 자기도 나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먼저 연구를 좀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서 속도를 늦춰 보려고 했지요. 그분은 ‘좋아요, 연구를 하겠지만, 봉사에도 나가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결국은 봉사에 참여했고, 그 첫 달에 50시간 이상을 했답니다! 일 년이 채 못 되어 침례를 받은 다음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고, 나중에는 생산적인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했지요. 이 분은 80세의 고령에, 아직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라게 하셨다

1951년에 오사카에 임명된 다섯 명의 선교인 자매는,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하러 선교인 집으로 직접 와 주어서 기뻤습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선교인들은 일본인들을 누가 누군지 분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스위스 출신인 레나 빈텔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오면, 우리 다섯이 모두 우루루 나가 서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사회자를 정확히 가려내게 했지요.” 선교인들은 일본 관습을 따르기 위해, 집에 오는 손님들이 사용하도록 슬리퍼를 가지런히 늘어놓곤 했지만, 손님용 슬리퍼와 욕실용 슬리퍼의 차이를 알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루는 한 성서 연구생이 레나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더니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는 화장실용 슬리퍼를 손님에게 내놓지 않아요.” 선교인들은 차차 배워 나갔습니다.

때때로, 고베에 있는 선교인 형제들이 오사카를 방문하여 그 곳에 있는 다섯 명의 독신 자매에게 도움을 베풀곤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오사카 전체에 전도인이 얼마 없었습니다. 한번은, 로이드 배리가 오사카 선교인 몇 명과 함께 고시엔에 있는 커다란 야구장에서 열린 옥외 오페라 연주회에 갔습니다. 그 때 이런 얘기가 나왔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대회를 열어 이 야구장을 가득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1994년이 끝나갈 무렵, 현재는 브루클린의 통치체 성원인 배리 형제는 고베 지역의 52개 회중이 사용할 새로 지은 효고 대회 회관 봉헌사를 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초창기에 그 곳에 있던 일본인 전도인들도 더러 참석한 즐거운 모임이었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훨씬 더 큰 규모의 대회가 계획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회는 어디서 열릴 것입니까? 바로 고시엔 야구장이었습니다. 4만 명 이상이 참석하였는데, 참으로 질서 정연한 모임이었습니다! 또한 이 곳 외에 전화선으로 연결된 일본 전역 40개 장소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습니다. 따라서 참석자 총수는 무려 25만 4000명에 이르렀는데, 1958년에 열린 거대한 뉴욕 대회의 참석자 수보다도 많은 수였습니다. 과연 여호와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일본에서 “자라게 하셨”습니다!—고린도 첫째 3:6, 7.

1951년 초에 요코하마에 선교인 집이 개설되었습니다. 이 도시도 매우 생산적인 밭이었습니다. 최초의 가정의 종이었던 고든 던은 이제 아내와 사별했지만 에비나에 있는 도쿄 지부에서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현재 요코하마에는 114개의 회중이 있으며, 선교인들이 하던 일을 지방 형제들이 이어받으면서 확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1952년에 교토 시에도 선교인 집이 개설되었습니다. 오사카와 고베의 선교인들이 교토로 옮겨 가서 그 곳의 열심 있는 새로운 선교인들과 합류하였습니다. 1954년 4월, 로이스 다이어와 몰리 헤런도 고베에서 교토로 임명이 바뀌었습니다.

교토에는 사찰이 약 1000개나 있어서, 길모퉁이마다 하나씩 있다시피 합니다. 전쟁 때 이 도시는 폭격을 하지 않았는데, 사찰들을 보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로이스는 이런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곳에 있는 동안, 우리는 식료품 도매상인 미마 쇼조를 만났는데, 그는 병을 오래 앓다가 집에서 회복되고 있는 중이었지요. 열심히 불교를 믿고 있었지만, 그는 참 하느님에 관해 알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그와 성서 연구를 시작하는 건 아주 쉬웠습니다. 나중에 부인과 딸들도 연구하여, 온 가족이 진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남들과 잘 어울리는 쇼조는 교토 회중의 영적 기둥이 되었습니다.”

스위스 출신인 마그릿 빈텔러가 교토에 있는 언니 레나와 합류하였습니다. 마그릿은 이 새로운 임명지에서는 사람들의 말뿐 아니라 몸짓에도 익숙해져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서적을 받을 것인지의 여부를 아내가 결정하기를 바라는 남자라면, 아내가 집에 없다는 표시로 그저 새끼손가락을 흔들기만 할 것입니다. 반면에, 아내의 경우에는 남편을 상징하는 엄지손가락을 위로 올리고 그가 집에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마그릿은, 교토 주민들이 제공받은 잡지를 조심스럽게 한 장씩 넘기며 계속 만지작거리기만 할 때, 실제로는 몸짓으로 거절하면서 싫다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려 주기를 바라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말이든 몸짓이든, 그들의 대답이 모두 부정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현재 교토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번창하는 회중이 39개 있습니다.

추운 겨울과 새로운 언어에 대처함

1953년에 애들라인 나코와 그의 짝 릴리언 샘슨을 포함하여 더 많은 선교인들이 하와이를 떠나 일본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북쪽의 추운 도시인 센다이에 임명되었습니다. 밤에는 기온이 섭씨 영하 5도까지 내려가곤 하였습니다. 돈 해슬릿과 메이벌 해슬릿 부부가 한 해 전 10월에 그 곳에 새로운 선교인 집을 개설하였고, 시니치 도하라와 마사코 도하라 부부도 그 곳에서 함께 일하고 있었습니다. 열대 기후에서 자란 이 하와이인들에게는 센다이의 추운 겨울이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급속 냉동된 하와이인들”이라고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릴리언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난생 처음으로, 화덕에 땔 장작 패는 법을 배웠지요. 부엌에만 열기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금속으로 된 일본식 보온 기구인 유탄포(유담포)로 잠자리를 따뜻하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낮에는, 이시-야키이모(돌에 구운 고구마)를 사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손을 녹이다가, 나중에 점심으로 먹곤 했어요.”

하지만 문제는 추위뿐이 아니었습니다. 선교인들이 일본 글자 읽는 법을 배우기 전에는 난처한 상황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애들라인에게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날이 있는데, 일본어를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빨간색 초인종인 줄 알고 그만 비상 화재 경보 버튼을 눌렀던 것입니다. 무슨 일이 났나 하고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뛰쳐나왔습니다. 애들라인은 그 실수 때문에 호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이 선교인들의 기억에는 일본에 와서 초창기에 겪은 개인적인 경험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 선교인들에게는, 수천 명의 일본 형제 자매들 그리고 함께 겪은 사건들이 모두 그들의 추억 속에 있는 “가족 앨범”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이제 일본 신권 사회의 성장에 기여한 그 밖의 사건들을 돌아보면서 우리와 함께 그 앨범을 한장한장 넘겨 보시기 바랍니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새로운 밭을 개척하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의 활동은 이 나라 구석구석에 왕국 소식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선교인들에게 개인적으로 훈련을 받았고, 여호와에 대해 선교인들 못지 않은 열심을 나타냈습니다. 선교인들의 활동과 병행하여, 이 일본인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더 작은 도시와 읍에 파견되었습니다. 초창기의 많은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침례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임명을 받았지만, 보기 드문 정성과 인내를 나타내 왔습니다.

와쿠이 히사코는 침례받은 지 1년 4개월밖에 되지 않았을 때 이 임명을 받았습니다. 히사코와 그의 짝인 사토 다카코는 1957년 이래 함께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해 왔습니다. 이 두 자매는 아홉 군데의 임명지에서 이제까지 80명 이상을 침례받은 증인이 되도록 도왔습니다.

히사코는 자신이 사회한 첫 성서 연구생들 중 한 사람이 여호와로부터 받은 축복의 결과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 부인은 열성적인 교인이었지만, ‘성서 연구라면 매일 할 수 있다’고 말하더군요. 하느님의 이름이 여호와이며 그분이 예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배우자, 그 부인은 교회를 그만두고 곧 야외 봉사에 나왔지요.” 그 부인은 회중이 하나도 없는 몹시 추운 지방으로 이사했을 때에도 열심이 식지 않았습니다. 현재, 그 부인의 남편과 네 자녀가 모두 진리 안에 있습니다. 세 아들은 장로로 봉사하고 있으며, 딸은 특별 파이오니아입니다.

야마나시 현(縣)의 쓰루에 있었을 때, 히사코와 다카코가 보니 그 도시는 성장이 무척 더뎠습니다. 겨우 네다섯 사람이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순회 감독자는 아무래도 좀더 생산적인 구역으로 임명지를 바꿔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 자매들은 쓰루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쓰루에 보내 주셨으니까 쓰루에는 분명히 양들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순회 감독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이번 주말 공개 강연에 18명이 온다면, 이 임명지에 머물고 싶어하는 자매들의 뜻을 협회에 전하겠습니다.” 이 파이오니아들은 일요일 집회에 사람들이 참석하도록 그들이 성경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하였습니다. 놀랍게도, 19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그 다음주에는 참석자 수가 다시 네다섯 명이 되었지만, 이 파이오니아들은 그 구역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쓰루 회중은 훌륭한 전도인들의 무리와 아울러 아름다운 왕국회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바야시 가즈코도 새로운 구역을 개척하기 위해 40년 동안 봉사해 온 특별 파이오니아입니다. 교토에 있던 선교인 폴린 글린이 가즈코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인생의 목적을 알기 위해 애쓰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폴린이 전도서 12:13을 보여 주었고, 가즈코는 그 내용에 만족해하였습니다. 가즈코는 선교인의 생활 방식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야 할 방식에 가장 잘 부합된다고 결론짓고, 그 생활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된 것은 침례받은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하지만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면서 곧 여호와의 사랑에 찬 보호의 손길을 느끼기 시작했고, 훌륭한 결과를 얻었습니다. 가즈코는 또 시골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를—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두려움이 그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이해하였습니다. 그 사실에 어떻게 대처하였습니까? 가즈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벗이 되려고 노력을 기울였어요. 사람들을 사랑하고,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도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점을 기억하려고 노력했지요. 그렇게 하니까 그들의 벗이 되기가 쉬워지더군요.”

1971년 3월, 지부 사무실은 격지 구역에서 전파하도록 새로운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더 파견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십대를 갓 벗어난 젊은 두 자매, 이데이 미요의 수양딸인 이데이(현재는 오하라) 아케미와 요시오카(현재는 도쿠모리) 가즈코가 있는데, 이들은 일본 중부에 있는 가가에 임명되었습니다. 이 자매들은 그 때까지는 부모와 회중의 보호의 “울타리” 속에서 봉사해 왔습니다. “이제, 상황이 달라졌지요. 임명된 그 구역에서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거든요” 하고 가즈코는 회상합니다. 낯선 사람을 수상히 여기는 주민들의 마음의 벽을 허물기 위해, 자매들은 주민과 아주 똑같은 억양을 사용하여 그 지방 사투리로 자기 소개하는 법을 연습하였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는 육상 경기 팀에 속해 있던 세 청년이 있었습니다. 가즈코는 그 세 사람이 야외 봉사에 나오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걸음을 따라 가느라고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장거리 달리기 선수들이었던 그들은, 한 농가에서 그 다음 농가까지 문자 그대로 달려가곤 하였습니다.

열성적인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전에는 임명되지 않았던 구역들에서 증거함에 따라, 회중과 격지 집단의 수가 증가하여 1976년 1월에는 1000개를 돌파하였습니다.

오키나와에서 이루어진 발전

오키나와의 섬들에서도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인구가 120만 명인 이 섬들은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미국의 관할 아래 들게 되었습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천성이 조용하고 참을성 있으며 다정하고 우정적입니다. 오키나와의 우리 형제 자매들은 인내와 진리에 대한 열심이라는 훌륭한 특성도 나타냅니다.

오키나와는 일본 지부가 돌보도록 임명되었으며, 그 무렵 도쿄에서 지부 감독자로 일하던 로이드 배리는 1953년에 처음으로 그 곳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형제 네 사람을 만났는데, 모두 재건 작업을 위해 필리핀에서 온 노무자들인 그들은 즉시 그를 데리고 미군 교도소로 갔습니다. 그 곳에는 세 명의 군인이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이 젊은이들은 성서 진리를 옹호하는 확고한 태도를 취하기는 했지만 좀 융통성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극단적으로 행동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밤늦게까지 왕국 노래를 큰 소리로 불러 구내에 있는 모든 사람의 수면을 방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좀더 균형을 잡도록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덧붙이자면, 교도소의 군목은 자기가 볼 때 그리스도의 왕국은 천 년 후에나 올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젊은이들 중 한 사람은 나중에 브루클린 벧엘 가족 성원으로 봉사하였으며, 이들 세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인 회중의 책임 있는 종이 되었습니다. 그 방문 기간에 퀀셋(길쭉한 반원형 간이 건물)에서 가진 모임에 섬사람들이 100명 이상 모였습니다.

오키나와 태생인 히가 요시도 그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오키나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입구가 자궁처럼 생긴 커다란 동굴 안에 죽은 사람의 유해를 갖다 놓아 처분하는 관습이 있는데, 이 관습은 죽은 사람들이 그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요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처참했던 오키나와 전투 때 그러한 동굴 속에 피신해 있었습니다. 그 곳에 있는 유해를 보고, 요시는 죽은 사람들은 실제로 죽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성서를 공부하게 되자, 요시는 죽은 사람의 상태와 놀라운 부활 희망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요시는 최초의 오키나와인 전도인이 되었고 또 최초의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그 곳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성서 토의를 방송으로 내보내기를 몹시 원했지만,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이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면에서 미온적인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요시가 아주 선뜻 그 공백을 메워 주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시는 여러 달 동안 「파수대」 잡지의 기사를 낭독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오키나와의 새로운 전도인 12명을 위해 순회 대회를 마련하는 일이 가능해졌는데, 프로그램의 내용은 에이드리언 톰프슨과 로이드 배리가 교대로 일본어로 다루었습니다. 활동이 빠른 속도로 확장되면서, 전도인과 파이오니아의 수가 계속 큰 폭으로 증가하였습니다.

히가 요시는 1954년 5월에 파이오니아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43년에 걸친 충실한 파이오니아 봉사를 통해, 50명 이상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왔는데, 그의 첫 “추천서” 가운데 다수는 그 곳 슈리 교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린도 둘째 3:1-3) 요시는 기노완에서 파이오니아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열성적인 또 다른 증인으로 도모요리 미쓰코가 있는데, 과부인 그는 1957년에 오키나와의 옛 수도인 슈리에서 딸 마사코와 함께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습니다. 미쓰코가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면서 즐긴 지난 40년에 관해 그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도와 준 많은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그의 눈은 아직도 초롱초롱 빛납니다.

1965년에, 워치 타워 협회는 오키나와에 지부를 개설했는데, 지부 감독자는 하와이 출신 선교인인 시니치 도하라였습니다. (그는 오키나와 혈통임) 이 마련은 1972년에 그 섬들이 다시 일본 정부의 지배를 받게 된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1976년 2월에 지부 위원회 마련이 시행되었을 때, 시니치 도하라, 제임스 린턴(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선교인), 우네 주키치(오키나와 태생으로 길르앗 졸업생)가 위원들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끈기가 필요하였다

1976 봉사 연도에, 좋은 소식의 전파를 확장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오키나와 지부의 관할 아래 있는 더 많은 섬들에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임명되었습니다. 어떤 섬들에서는 좋은 반응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은 섬들에서는 관습과 미신과 가족간의 강한 유대를 극복하는 데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그 곳에서 일하도록 임명된 특별 파이오니아들에게는 대단한 끈기가 필요하였습니다. 외지인에 대한 그 지방 사람들의 불신감으로 말미암아, 빈집이 많았는데도 숙소를 구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때가 많았습니다. 때때로 구할 수 있는 집이라고는 누군가 자살한 집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지방의 미신 때문에, 그런 집은 집회 장소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상당한 끈기를 나타낸 끝에, 파이오니아들은 결실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도쿠노시마라는 섬에서, 한 가족이 순회 감독자의 방문 기간에 공개 강연에 참석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그 지방에서 인기가 높은 투우 경기(황소들을 맞붙게 하여 어느 쪽이 미는 힘이 더 센지 판가름하는 시합)에 관심이 대단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시합에 내보내기 위해 훈련을 시켜 놓은 우수한 황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본 본토에서 여호와의 증인한테 이야기를 들은 딸을 통해서 성서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가족은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고, 그와 그의 아내, 딸, 세 아들이 헌신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웃에 있는 두 가족도 진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집단은 참으로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지금 이 작은 섬에는 전도인 49명과 파이오니아 16명이 있는 회중이 하나 있습니다.

남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이시가키 섬에서는, 유명한 권투 선수인 한 청년이 찾아와 성서 연구를 요청하는 바람에 전도인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이전에 요코하마에서 연구를 했었는데, 성서 진리가 지적하는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이리오모테 섬으로 이사한 그는, 인구가 희박한 곳인 그 섬에는 보나마나 여호와의 증인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워치 타워 출판물 몇 부를 우연히 보게 되었고 여호와의 증인이 거기서도 전파했다는 사실에 몹시 놀랐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피해 도망할 도리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비교 요나 1:3) 출판물 중 하나에 어느 전도인의 주소가 적혀 있기에, 그 주소를 사용하여 가까운 이시가키 섬에서 증인들을 찾았습니다. 짧은 시일 내에, 그는 헌신한 증인이 되고 열정적인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1980년 9월에 밀턴 헨첼이 지구 방문을 한 뒤, 오키나와는 다시 일본 지부의 관할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도하라 형제 부부와 우네 형제 부부는 오키나와에서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였고, 린턴 부부는 일본의 더 큰 섬들에서 다시 지역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행하는 형제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다

여행하는 감독자들과 그 아내들의 자기 희생적인 정신은 일본 회중들의 증가와 장성에 여러 모로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봉사는 회중에 건설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형제들은 이 감독자들과 그 아내들이 ‘좋은 소식을 위하여 집과 어머니와 아버지’를 버렸음을 알고 있습니다.—마가 10:29.

초창기에는 순회 감독자가 회중을 방문했을 때, 진정한 사생활이 조금이라도 가능한 숙소는 거의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구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쾌히 받아들임으로 형제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요시다 게이이치는 불과 얼마 전인 1983년에 아내와 함께 혼슈 북부의 큰 농가에서 한 독신 형제 및 그의 믿지 않는 가족과 함께 지낸 기억을 떠올리며, 유머감 있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 가족의 따뜻한 인사를 받고 숙소로 안내를 받았는데, 커다란 불교 제단이 있는 방이었지요. 우리가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할아버지가 잠옷 바람으로 미닫이 문을 열더니, 우리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제단 종을 치고 향에 불을 붙이고는 기도를 하고 나서 방의 반대쪽으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다른 식구들도 그렇게 하더군요. 우리는 언제 어느 쪽에서 제단을 찾아 들어올지 몰라서 그 주간 내내 조마조마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이 친절하고 후대하는 가족과 함께 유쾌한 일 주일을 보냈지요.”

현재 209명에 달하는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평균 약 20년 동안 전 시간 봉사를 하였습니다. 그들 대다수는 이전에 특별 파이오니아였습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그들은 호별 방문 증거에서 훌륭한 훈련을 베풀 수 있습니다. 야외 봉사에 대한 그들의 열정은 일본의 탁월한 파이오니아 영에 많은 기여를 해 왔습니다.

일부 순회 감독자들은 왕국 증인이 더 크게 필요한 지역으로 이사하고자 하는 동기를 갖도록 개인과 가족들을 도와 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믿지 않는 배우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온 순회 감독자들도 있는데, 그 결과로 더러 침례받은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청소년들도 여행하는 형제들이 나타낸 특별한 개인적인 관심과 그들이 보인 모범의 결과로, 영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힘쓰도록 도움을 받아 왔습니다.

선교인들이 계속 함께 일하다

1970년대에는 선교인들이 더 작은 도시들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러한 곳들에서는 주민들이 좀더 보수적이고 전통에 매여 있어서, 제자를 삼는 활동이 더 서서히 진전되었습니다. 회중이 있는 곳에서는, 선교인들은 지방 형제들로 하여금 앞장서게 함으로써 그 형제들이 경험을 쌓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선교인들이 봉사한 도시들 가운데는 아키타, 기후, 고후, 가와구치, 고치, 나가노, 와카야마, 야마가타가 있습니다.

선교인들은 지방 증인들이 성서 진리의 모든 부면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로움을 인식하도록 돕기 위해 참을성 있게 노력하였습니다. (히브리 6:1) 고후에 있는 한 회중의 주임 감독자인 후지마키 마사오는 회중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길」 책을 연구하고 있을 때의 일을 회상합니다. 나이가 지긋한 한 형제가 남편들은 아내들에게 공개적으로 애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교훈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전쟁 전에 교육받은 우리들에게 이건 정말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회중의 한 선교인인 리처드 베일리가 개인적으로 친절하게 그 형제를 도우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연구하는 진리는 국가적인 배경이나 세대를 초월해야 합니다. 성서 진리는 늘 적용되고 늘 유익하지요. 만일 우리가 진리의 어떤 부분을 과소 평가한다면, 우리는 대담해져서 진리의 더 중요한 부면까지도 거부하게 될지 모릅니다.’ (누가 16:10) 그 형제는 요점을 이해하였고, 그 후로는 그가 다정하게 아내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다른 면에서도, 지방 증인들은 선교인들과 교제함으로 유익을 얻었습니다. 한 자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쾌활했고, 기쁨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을 알고 계셨어요. 저도 규칙을 만드는 것보다는 사랑에 근거한 원칙에 고착하는 것의 중요성을 그분들에게서 배웠지요.”—신명 10:12; 사도 13:52.

선교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세계적인 형제 관계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느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도쿄에서 멜바 배리와 처음으로 연구를 했던 사토 가즈코는, 종교적인 적의가 심한 시골 지역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는 동안 어떻게 힘을 얻었는지를 기억합니다. 외로움을 느낀 그는, 전에 있었던 회중에서 함께 교제하던 선교인들에게 “저는 외로이 혼자서 전파하고 있어요”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여러 선교인들의 글이 담긴 답장이 왔는데, 그 가운데는 일본어 글자로 이렇게 힘들여 적은 부분도 있었습니다. “가즈코, 자매는 혼자가 아닙니다! 잘 들어 보면, 사과나무 밭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릴 거예요. 전세계에 있는 열심 있고 충실한 형제들의 발소리가요.”—비교 계시 7:9, 10.

현재, 41명의 선교인이 일본에 있는 다섯 개—야마가타, 이와키, 도야마 그리고 도쿄의 두 개—선교인 집에서 여전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교인 아홉 명은 여행하는 활동을 하며 봉사하고 있고, 또 아홉 명은 에비나에 있는 벧엘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 선교인들은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에 대한 충성이라는 면에서 훌륭한 모범을 보여 왔습니다. 말과 행동으로, 그들은 일본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견해를 ‘넓히고’ 진리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데 기여해 왔습니다.—고린도 둘째 6:13; 에베소 3:18.

임명되지 않은 구역을 돌기 위한 여름철 활동

다른 사람들도 외딴 도시와 읍에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1971년에, 정규 파이오니아들에게 여름철 몇 달 동안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서 봉사하라는 초대가 있었습니다. 그 뒤 1974년에는, 여름철 석 달 동안 하게 되는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 마련이 실시되었습니다. 해마다,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 50명이 25개 지역에 임명되었고, 많은 양의 출판물이 배부되었습니다.

1980년에는, 일본에서 어느 회중에도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 살고 있는 주민 수가 약 780만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임명하는 대신에, 지부 사무실은 회중들과 정규 파이오니아 그룹들과 가족들을 여름철 몇 달 동안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서 봉사하도록 초대하였습니다. 일본인 증인들은 여럿이 함께 일하기를 더 좋아하므로, 이것은 기대되는 즐거운 활동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감동적이었습니다. 1986년에,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서 일하고 있던 한 전도인은, 이바라키 현의 미와 마을에서 산 위에 있는 집에 다가갔다가,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길」 책과 「나의 성서 이야기 책」을 양손에 든 가정 주부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 주부는 이전에 그 책들을 받아 이미 여러 번 읽어 보았습니다. 서점에서 성서를 구하려고 했으나 구하지 못한 그 주부는 마을에 어떤 그리스도인 가족이 이사 온다는 말을 듣고 기뻤던 것입니다. 성서 연구가 즉시 시작되었고, 지금은 온 가족이 진리 안에 있습니다.

점차 나머지 읍과 마을들도 그 인근 회중들에 임명되었습니다.

장로들을 위한 특별한 교훈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이 확산됨에 따라, 회중들의 수와 규모도 증가하였습니다. 회중에서 앞장서서 일할 자격 있는 형제가 단 한 명, 혹은 두 명밖에 없는 경우가 흔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서도 회중 문제를 처리하는 훈련을 많이 받은 형제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1972년 10월 1일에 장로 마련이 시행되고 나서, 새로 임명된 장로들은 누마즈에 있는 지부 사무실에 초대되어 2주일 동안 특별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이 강습은 참으로 획기적인 마련이었습니다. 강사들은 형제들이 진정한 사랑을 나타내는 일의 중요성과 동료 증인들을 대할 때 균형 잡히고 합리적이 되는 일의 중요성을 이해하도록 도우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고린도 둘째 1:24) 강사들은 또한 자기 가족을 영적으로 돌보는 일의 중요성도 강조하였습니다. (디모데 첫째 3:4; 5:8) 이것은 일반적으로 동양의 가정에서는 강조되지 않는 점이었습니다.

형제들은 가능한 한 강습에서 얻은 모든 교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형제들은 학창 시절에 하던 식으로 기계적으로 외우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강사들 중 한 사람이었던 아베 다카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학생들은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그 날의 토의 내용을 다시 또박또박 힘들여 필기하곤 했지요. 우리는 그들이 많은 내용을 필기하고 규칙을 만드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하면서, 그와는 반대로 사고 능력을 사용하고 성서 원칙을 적용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로마 12:1; 히브리 5:14.

많은 형제들은 개인적으로 큰 희생을 치르고 이 강습에 참석하였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북쪽으로 1300킬로미터나 떨어진 눈 덮인 홋카이도에서 긴 여행을 해서 왔고, 또 어떤 형제들은 남쪽으로 1800킬로미터나 떨어진 아열대 지방인 오키나와에서 왔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가족에게 돌아가자마자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야 할 처지에 놓인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1977년에는 이틀 동안의 강습이 전국 여러 곳에서 열렸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훨씬 쉽게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가족의 반대에 대처함

일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도전이 되는 일입니다. “특히 시골 구역에서, 새로운 사람들은 그 지역 사회에 살고 있는 친족으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지요”라고 하면서, 37년 동안 파이오니아 봉사를 해온 에토 히로코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친족들은 가문에 그 지역 사회에 사는 사람들과 판이하게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대단히 큽니다.”

히로코의 어머니인 에토 유리코는,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기 전에도 성서를 사랑하였습니다. 하지만 1954년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적은 무리를 하늘에 데려가실 뿐 아니라 이 땅을 여호와의 행복한 종들로 가득 찬 낙원으로 만드실 하느님의 목적을 인식하도록 도와 주자, 유리코는 이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유리코와 그의 자녀들은, 여호와의 승인을 얻기 위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많은 사람들을 참을성 있게 도와 왔습니다.

히로코는 한 진실한 여자를 도우려고 노력하면서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연구를 시작한 한 가정 주부는 함께 사는 시어머니의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던 그 주부는 연구를 중단하였습니다. 히로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길에서 그 부인을 기다리고 있다가, 부인에게 시어머니를 친절하게 대하면서 성서 연구가 미치는 좋은 영향을 본으로 보이라고 격려하곤 했지요. 부인은 자기가 연구하고 있는 내용에 관해 남편에게 재치 있게 질문을 던졌고 차츰 남편이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남편이 ‘이런 시골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게 불가능해’라고 부인에게 말했답니다. 하지만 여호와에 대한 사랑에 힘입어 그들은 많은 반대를 극복했습니다.” 지금 그 부부와 큰아들은 침례를 받았습니다. 봉사의 종인 남편은 자기 집에서 회중 서적 연구를 사회하며,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첫 공개 강연을 할 때 집회에 참석하여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흔히 배우자한테서 반대가 옵니다. 일부 남편들은 질투 때문에 또는 남성 우월주의가 일반화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반대를 합니다. 갓 결혼한 이치마루 게이코가 1970년대 초에 성서 연구를 시작했을 때, 그의 남편 히로유키는 완강히 반대하면서 아내에게 집회에 참석하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종교의 뒷전으로 밀린다는 생각은 정말 참을 수가 없더군요”라고 히로유키는 나중에 설명하였습니다. 게이코는 남편을 사랑하였으므로, 자기가 공부하고 있는 내용이 좋은 것인지 확인해 달라고 남편에게 재치 있게 요청하였습니다. 남편은 스스로 성서를 연구하기로 결심했으나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아내가 연구할 때 함께 앉아 있어도 좋으냐고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두 사람 다 침례받은 증인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히로유키는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고 지금은 장로입니다.

왕국 선포 활동이 지쿠고에서 1971년에 시작된 뒤, 사카모토 마유키는 그 곳에서 성서 소식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 중 한 사람입니다. 그의 남편인 도요타는 아내와 어린 아들이 이웃 도시로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자 반대하였습니다. 아내를 중단시켜야겠다고 결심한 도요타는 더욱 심하게 반대를 하였습니다. 14년 동안이나, 심지어 마유키가 1973년에 침례를 받은 뒤에도 반대를 계속하였습니다. 한번은 아내에게 총을 겨누더니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그만두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어!” 아내의 침착한 반응에 그는 몹시 놀랐습니다. 아내가 그렇게 확고한 것이 무엇 때문인지 궁금하였습니다.

그 모든 일을 겪으면서도, 마유키는 남편에게 사랑을 나타내려고 애썼습니다. 진리를 배우도록 남편을 도우려는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첫째 3:1, 2) 어느 날, 자기가 세속 일을 하는 동안 아내와 아들은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치민 도요타는, 그 날로 나가서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일반적으로 자기 직장을 거의 신성하게 여기므로, 이 일은 그로서는 보통 결단이 아니었습니다. 도요타는 아내와 아들이 몹시 미안해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무슨 일을 했는지 이야기하자, 그들은 오히려 손뼉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도요타는 곰곰이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곧 그는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윽고 그는 아내와 아들이 하고 있는 파이오니아 활동에 가담하였고, 지금은 그리스도인 장로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 초에는, 우리 집회에 처음 참석해 본 남자들은 흔히 참석자가 여자들과 아이들뿐이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래로, 수만 명의 남자들이 영적으로 훌륭한 진보를 하였습니다. 현재 이 조직은 조직의 모든 필요를 돌보고 있는 영적으로 장성한 남자들로 든든하게 기반이 잡혀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과거 1970년대에 반대하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이 강습을 받다

1970년대에 각 회중의 파이오니아 봉사자 비율(25 내지 30퍼센트)이 높았기 때문에, 일본에서 1978년 1월부터 시작된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에 등록한 사람 수도 많았습니다. 이 강습은 회중들의 장성에 크게 기여해 왔습니다.

강습에 처음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은 특별 파이오니아, 선교인, 여행하는 감독자와 그들의 아내들이었습니다. 최초의 강사들 중 한 사람인 요시오카 시게루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초기 학급들에 이런 경험 있는 파이오니아들이 참석해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장성한 봉사자들의 발표와 경험을 통해 배운 내용을 다음 학급들에 전해 줄 수 있었으니까요.”

1980년 2월부터는,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이 각 순회구에서 열렸습니다. 그 강습에 참석했던 순회 감독자들과 그 밖의 장성한 형제들이 강사로 일하였습니다. 강습 마련이 시작된 이래 8년 동안, 해마다 전도인 수는 평균 12퍼센트 증가한 데 비해, 정규 파이오니아 수는 22퍼센트나 증가하였습니다. 이제, 대부분의 순회구에는 해마다 정기적으로 25명에서 30명으로 이루어진 파이오니아 학급이 두 개 이상 구성됩니다.

이 강습에 참석하는 파이오니아들 대부분은 아직 진리 안에서 연륜이 그리 길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강습의 결과로 봉사의 직무에 대한 확신과 기술을 얻고 그리스도인 생활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배웁니다. 한 파이오니아는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봉사, 자녀 훈련, 그리스도인 성품, 성서 지식 등이 제 머리 속에서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열흘간의 강습을 통해서, 그 모든 걸 제자리에 차곡차곡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1997년 9월까지, 3650개의 학급이 열렸고 8만 7158명의 파이오니아가 참석하였습니다.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반응을 나타내다

배경이 매우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일본의 신권 조직은 그 짜임새가 다채롭습니다. 니와 도시아키는 요코하마 회중의 태도가 온순한 장로입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만 해도, 그는 미국 군함을 향해 가미카제 자살 공격을 감행하기 위한 오카 즉 로켓 글라이더의 조종사로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임무는 천황에 대한 정성의 증거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가 오기 전에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 후, 그의 아내가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를 연구하였습니다. 도시아키도 증인들이 전쟁 중에 엄정 중립을 유지했다는 것을 알고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977년에 그는 아내의 뒤를 따라 평화에 관한 성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에 가담하였습니다.

연예계에서도, 여호와의 찬양자가 되기 위해 기꺼이 자기 생활 방식을 바꾼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나가사키 요시히로는 몇몇 대학 친구들과 함께 딕실랜드 재즈 악단을 구성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재즈를 가르쳐 준 남자에게 악단의 리더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일본에서 손꼽히는 재즈 음악가인 가사이 요시마사라는 이 남자는, 그러는 동안 하와이에서 방문한 트럼펫 연주자인 “트러미” 영과 접촉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첫날부터, 교습이 시작되었는데, 음악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교습이었습니다”라고 하면서, 현재 지부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는 요시히로는 추억에 잠기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관심이 없었어요. 정말 조금도 관심이 없었지만, 그가 하도 열정적으로 나오는 바람에 우리는 악단의 리더를 잃고 싶지 않아서 귀를 기울였던 겁니다.” 그들은 심지어 연구를 하는 데도 동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시히로가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은 1966년 4월에 순회 대회에 참석한 때였습니다. 그 대회에서, 전에 만난 적이 있는 한 여고생이 야외 봉사에 함께 나가자고 요시히로를 초대하였습니다. 그 여고생은 성서를 사용해서 증거하고, 요시히로는 집주인에게 광고지를 건네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실제로 진리가 뭔가 의미를 갖기 시작하더군요”라고 그는 회상합니다. 그 대회에 참석한 이후, 그는 날마다 야외 봉사에 나갔고 빠른 속도로 진보하였습니다. 그 악단의 단원 여섯 명 중에서 네 사람이 현재 활동적인 증인입니다.

사토 신지는 시마네 현에 있는 유명한 이즈모 신사의 사제였는데, 이즈모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신도(神道) 신사 중 하나입니다. 그는 또한 이즈모 오야시로교의 교법을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거의 20년 동안이나 신도 사제로 일했지만, 사제들 사이에서 불공정과 사랑의 결핍을 보고 환멸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도의 신들이 구원을 베풀지 못한다는 점을 깨닫고는 참 하느님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성서를 읽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의문이 많았습니다.

그 무렵, 사토 신지는 여호와의 증인으로 알고 지내던 한 사람을 길에서 만났습니다. 그래서 참 종교를 식별하게 해준다고 생각되는 이러한 질문들을 그에게 던져 보았습니다. “자네 종교는 정치와 관련이 없는가? 그 단체는 비영리 조직인가? 자네 종교의 가르침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인가? 본부에 있는 사람들은 포교하는 내용대로 실천하는가?” 그리고 나서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의 조직이 이런 조건에 들어맞는다면, 내게 친절을 베풀어 성서를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가?” 마침내 그가 큰 바빌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을 때 얼마나 위안을 얻었겠습니까! (계시 18:4)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참 하느님의 길을 가르치면서 제가 느끼는 심정은,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고 잠언에 기록되어 있는 말 그대로입니다.”—잠언 10:22.

유명한 미술가들과 음악가들, 만화가, 스모 선수, 프로 사이클 선수들이 모두 이전에 누리던 영예를 버렸습니다. 또한 의사들, 저명한 서예가, 법률가들과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이 진리의 빛을 보고 자기 재능을 왕국 권익을 증진시키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조직 폭력배, 깡패, 경찰관, 정치인이던 사람들이 영적 형제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고 있습니다. (이사야 11:6-9) 불교의 승려들과 신도의 사제들 그리고 자신의 종교를 창시한 한 교주도 큰 바빌론에서 나왔습니다. (계시 18:2) 학교 교사, 일본의 탁월한 사업가들, 여러 가지 기술을 가진 기능공들이 신권 계획에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조직은 성장하여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포함하기에 이르렀으며, 그들은 “참된 의와 충성 가운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성을 입”도록 도움을 받아 왔습니다.—에베소 4:24.

열정적인 파이오니아 영

구역이 줄어들고 종교적인 냉담이 증가하는데도, 파이오니아 봉사에 대한 열정은 계속 대단합니다. 많은 수의 보조 파이오니아들이 파이오니아 대열에 가담하는 봄철에는, 파이오니아 총수가 전도인 수의 50퍼센트 이상으로 늘어납니다. 1997년 3월에는, 10만 8737명이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습니다.

“일본에는 파이오니아가 왜 그렇게 많습니까?”라는 질문을 흔히들 합니다. 몇 가지 요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후 일본의 성장을 위한 기초는 열심 있는 선교인들이 놓았고, 인식 깊은 연구생들은 자기를 가르치는 사람을 본받으려고 애씁니다. (누가 6:40) 그 결과, 봉사에 대한 열심이라는 유산이 다음 세대의 제자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일본의 가정은 살림이 상당히 조촐해서 꾸려 나가는 데 시간이 그리 많이 들지 않고, 대부분의 경우 생활이 전통적으로 단순하게 유지됩니다. 그래서 주부들이 영적인 관심사를 우선 순위에 두기가 더 쉽습니다. (마태 6:22, 33) 게다가, 일본은 기후가 대체로 온화하며, 국내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이제까지 순조로웠습니다.

문화적 배경과 민족성도 요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일본 사람들은 지시에 순종적이며, 집단의 권고에 반응을 잘 나타내며, 열심히 일합니다. 이 점에 관해, 전후에 처음으로 일본에 온 선교인들 중 한 사람인 일본계 미국인 시니치 도하라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가미카제 조종사들은 적의 군함을 향해 돌진함으로써 천황을 위해 죽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인간 주(主)들에게도 그토록 충실하다면, 참되신 주 여호와를 알게 될 때는 어떠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려는 간절한 욕망이 모든 파이오니아들이 신청을 하게 된 원동력이었습니다.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는 부모들

파이오니아들은 누구입니까? 대다수가 자매들인데, 그들 대부분은 기혼자이며 자녀가 있습니다. 많은 자매들은 믿지 않는 남편과 친족에게서 영적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도 파이오니아를 합니다.

20년이 넘게 파이오니아 봉사를 해온, 후지사와 시에 사는 무쓰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파이오니아를 시작한 것은 막내딸이 생후 몇 개월밖에 안 되었을 때였어요. 은행에서 근무하는 남편은, 대개 우리가 저녁 집회에서 돌아올 때까지도 퇴근을 하지 않았지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긴 했지만, 저는 파이오니아를 계속하고 싶었어요.” 무쓰코는 세 자녀가 모두 고등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어머니를 따라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을 때 보람을 느꼈습니다. 여러 해 동안 반대를 하고 그 다음에는 무관심하던 남편도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회중에서, 공개 강연의 전반부는 아들이 하고 이어서 남편이 후반부를 하는 것을 들었을 때, 무쓰코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는 아버지들도 훌륭한 영향을 미칩니다. 히사타카는 아버지가 파이오니아를 하기 위해 정보 처리 교사직을 그만두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히사타카가 초등 학교 여름 방학을 맞았을 때, 아버지는 새벽에 우유 배달을 하는 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하였습니다. 히사타카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동쪽 하늘이 찬란한 노을로 붉게 물들 무렵, 아버지는 영혼을 다해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인지에 관해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제게 표현하셨어요. 아버지가 여호와를 위해 즐겁게 수고하시는 모습을 보고, 어떤 말에서 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히사타카는 현재 에비나 벧엘 가족 성원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가로시에서 구조되다

“일하고 싶어 죽겠으면, 일본 회사에 들어가라”는 농담을 더러 합니다. 이런 말이 나온 것은, 전형적인 일본인 가장이 자기 직업에 극도로 헌신적이며 직장에서 흔히 장시간을 보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때 가로시[과로로 인한 사망: 過勞死]의 지경에 이르도록 일하던 많은 가장들이, 이제는 세속 회사가 아니라 여호와 하느님께 헌신하고 가족들을 따라 파이오니아 봉사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건설업체에서 일했던 고베 지역의 슨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살아가는 데 추진력이 된 것은 사업에 대한 애착심과 성공하려는 욕망이었습니다. 건설 현장이 집에서 먼 때는, 기껏해야 주말에만 잠깐 가족에게 돌아왔지요.” 모든 것이 어떻게 해서 달라지게 되었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죽음이 두려웠고, 내가 죽기라도 하면 가족이 어떻게 될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아내와 아들은 전파하러 나가는 게 뭐가 그렇게 늘 즐거운지 알 수가 없더군요.” 슨지가 그 지방 회중에 왕국회관 건축과 관련된 기술적인 세부 사항에 관해 도움을 베풀 때, 한 장로가 그에게 성서 연구를 권하였습니다. 슨지는 그에 응하였고, 지금은 가족과 함께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지역 건축 위원회에서 봉사하는 즐거움도 누리고 있습니다.

가장들이 파이오니아 봉사에 필요한 시간을 얻기 위해, 평생 보장된 직장으로 여겨 온 회사를 그만두고 좀 불안정한 시간제 직업을 갖는 데는 진정한 믿음과 자기 희생 정신이 요구됩니다. 지바 현에 사는 미쓰노부의 아버지는 직업을 바꿨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큰 회사에서 사무실마다 다니며 재활용할 휴지 모으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회사는 바로 아버지가 근무하던 곳으로서 이전 동료 직원들이 이제는 경영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미쓰노부는 진정한 인식에서 우러나와 이렇게 말합니다. “파이오니아 봉사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법을 개인적으로 가르쳐 주시고, 그렇게 해서 그것을 저 자신의 천직으로 삼게 도와 주신 부모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생활에서 그러한 조정을 하는 사람들은, 재정적인 보상은 일시적일 뿐이며 영적 보물이 훨씬 더 가치 있다는 점을 확신합니다.—마태 6:19-21.

좀더 오래 살도록 조심하십시오!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서 최선을 다하기를 갈망하는 일부 사람들은 심각한 건강 문제도 극복하였습니다. “기껏해야, 아들이 자라는 걸 살아서 보실 정도일 겁니다. 절대 과로하지 마시고, 좀더 오래 살도록 조심하십시오.” 오노 야에코의 심장과 관련된 건강 문제를 진단한 의사의 말이었습니다. 야에코의 아들은 그 때 세 살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여생을 후회 없이 보낼 수 있을까?” 야에코는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자문해 보았습니다. 집에 도착할 때는 이미 파이오니아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친족들이 이것을 알고 염려했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야에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1978년 9월에 파이오니아를 시작했지요. 그 당시에는 임신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몹시 편찮으셨고, 제 건강 상태도 악화되었습니다. 하지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을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에 용기를 얻었어요. (마태 17:20) 저는 최선을 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7년이 흐른 뒤, 야에코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위로의 팔로 저를 감싸 오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문제들이 야에코를 짓누르다시피 했지만, 그는 여호와의 축복을 하나하나 손꼽아 보곤 하면서 견딜 힘을 얻었습니다. 그의 열심에 영향을 받아, 남편도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야에코의 열렬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남편이 그의 파이오니아 짝이 되었을 때, 그 기쁨은 절정에 달하였습니다!

일본에 있는 파이오니아들은 이 정도로 열심입니다. 사실 더 많은 사람들을 언급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목 아래의 신체가 마비되었으면서도 주로 편지를 통해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격려의 원천이 된 형제, 금세기에 접어들 때 태어나 눈으로 고립된 지역에서 1994년까지 생애의 마지막 13년을 파이오니아로서 보낸 자매, 또 파이오니아를 하면서 작은 회중을 도우려고 읍으로 이사한 맹인 장로가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예전의 충실한 증인들처럼, 신체적 약점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도록 그분에 의해 “강력해”졌습니다.—히브리 11:32-34.

일본어 「신세계역」

세계적으로, 공개 봉사에서 성서를 직접 사용하는 것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신분을 알려 주는 표가 되어 왔습니다. 일본의 전도인들은 현대 일본어로 된, 정확하고 읽기 쉬운 성서를 갖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래의 문어체 번역판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번역판은 표현이 아름답고 하느님의 신성한 이름을 일관성 있게 사용했지만, 전쟁 후에 교육받은 사람들에게는 고어체 구문이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1970년 1월에, 「신세계역」의 그리스어 부분을 일본어로 번역하도록 승인하는 편지를 본부로부터 받자 지부에 있는 형제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3년 뒤, 오사카에서 열린 “하느님의 승리” 국제 대회에서, 통치체의 라이먼 스윙글이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의 일본어판을 발표했을 때 3만 1263명의 기쁨에 넘친 군중으로부터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습니다. 「신세계역」은 발표된 이래 9년 동안 114만 권이 배포되었는데, 이것은 처음 발행되었을 당시 전도인 수의 약 75배나 되는 수였습니다. 그 성서는 미국에서 인쇄되었지만, 일본에 있는 자체 시설에서 그러한 인쇄와 제본이 이루어질 날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집회 장소가 좋아질 있을 것인가?

일본 전역에서 회중의 수가 계속 늘어남에 따라, 적절한 집회 장소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이 점점 명백해졌습니다. 1970년대 이전에는, 집회 장소를 소유하고 있는 회중이 매우 적었습니다. 사실, 1960년대 전체 10년 동안에 봉헌된 왕국회관은 아홉 개뿐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회중들은 돈을 내고 빌린 공공 회관에서 모이거나 개인 집에서 모였습니다.

그러한 “이동식 집회”의 불편을 회상하면서, 히로사키에 사는 나카무라 아이 자매는 이렇게 말합니다. “1963년경, 우리는 주말마다 시 교육 회관을 빌렸고, 그 회관을 사용할 수 없는 날은 15명쯤 되는 회중 성원이 우리 집에 와서 집회를 봤습니다. 매번 집회를 볼 때마다, 우리 모두는 잡지, 서적, 이동식 연대 등의 운반을 도와야 했습니다.” 빌린 회관은 담배 냄새가 심하게 나거나 정치적, 종교적 선전 문구와 물건이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증인들이 보는 집회의 영적인 내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몰리 헤런과 로이스 다이어는 그들이 교토에서 집회를 보기 위해 빌렸던 회관을 기억합니다. 그 곳은 짚과 돗자리로 만든 다다미를 깐 방이었는데, 가게 위층에 있었습니다. 양 옆에는 다른 방들이 있었습니다. 한쪽 방에서는 일본 고유의 현악기인 사미센을 교습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 방에서는 남자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 소란스러운 와중에서, 우리는 「파수대」 연구를 사회하느라고 애를 썼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그런 장소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로이스 다이어의 말입니다. 다른 종교 단체들처럼 일정한 집회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가 그저 시시하고 일시적인 종파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에는, 새로운 회중의 수가 급증함에 따라 형제들은 왕국회관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들을 물색하게 되었습니다. 1974년 7월에는 전국적으로 646개 회중이 거의 200개의 왕국회관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134개 왕국회관은 1974 봉사 연도 한 해 동안에 봉헌된 것입니다.

우리 형제들은 재정적인 능력이 제한되어 있었지만 창의력은 무한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규슈 섬의 기타큐슈 와카마쓰 회중은 그 지방 전도인이 제공한 대지에 건평 130제곱 미터의 왕국회관을 건축하였습니다. 그 회중은 헐리고 있는 집 다섯 채에서 나온 재목과 기와를 무료로 얻었습니다. 또 더 이상 영업을 하지 않는 공중 목욕탕에서 목재를 거저 얻었습니다. 그들이 구입한 건축 자재라고는 회관이 완공되었을 때 눈에 보이게 될 부분에 사용할 것뿐이었습니다. 영업을 중지한 가까운 영화관에서 의자를 거저 얻어다가, 칠을 다시 한 다음에 회관에 들여놓았습니다. 여섯 달 동안 수고한 끝에, 형제들은 훌륭한 왕국회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땅값이 엄청나게 비쌌기 때문에, 도회지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일부 증인들은 자기 집을 헐고 다시 지으면서 건물 일층에는 왕국회관을, 위층에는 자기가 살 곳을 마련하였습니다.

계속 보조를 맞출 필요가 있었던 지부 건축

마치 어린아이가 자라면서 옷이 계속 작아지듯이, 일본 지부가 사용하는 시설도 국내 증인 수의 증가에 맞추어 거듭 확장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1971년에, 아름다운 후지 산이 또렷이 보이는 누마즈에 3층짜리 공장과 5층짜리 벧엘 집을 짓기 위한 설계도가 작성되었습니다.

원래, 공장 건물들은 주로 일본어 「파수대」와 「깨어라!」를 인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새로 설치된 40톤짜리 도쿄 기카이 윤전기로 「깨어라!」 1972년 10월 8일 특별호를 인쇄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그 잡지는 형제들이 누마즈에 있는 우리 인쇄 공장에서 생산한 최초의 잡지였습니다. 하지만 인쇄실 형제들은 배워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때때로 형제들은 자기들이 그 윤전기를 제대로 작동할 날이 올 것인지 의문스러웠습니다. 인쇄실의 한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어떤 글자들은 잉크가 어찌나 두껍게 찍혀 나왔는지 만져 보고도 읽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글자들은 흐리거나 번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이 경험을 쌓아 감에 따라, 인쇄의 질은 꾸준히 향상되었고 야외 봉사에서 전하는 잡지의 수도 증가하였습니다.

1973년에 노어 형제가 누마즈의 이 지부 시설을 위한 봉헌식 프로그램에서 연설할 때, 손님들은 새로운 공장 3층의 빈 공간에 모였습니다. 그 3층이 무엇에 사용될 것인지에 관해, 노어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빈 공간은 여러분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이 공간이 한두 해 안에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느님의 조직은 전진하고 있으며,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전진하고 있습니다.”

노어 형제가 예견한 대로, 그 공간은 곧 사용되었습니다. 1974년에는 건물이 두 개 더 필요하게 되었는데, 하나는 물품 보관용으로 또 하나는 봉사자들의 숙소로 필요하였습니다. 혼마 도시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일본에서는 최초로 증인들끼리만 해낸 건축이었습니다. 우리는 경험 있는 봉사자들이 충분할 것인지 좀 걱정이 되었지요. 하느님께서는 후카야마 다다조와 같은 사람들을 보내 주심으로써 우리를 축복하셨는데, 그는 주요 건설 청부업체에서 30년 이상 경험을 쌓은 건축 현장 감독이었습니다.”

다다조는 여러 해 동안 집을 떠나 일을 해오다가, 가족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직장을 막 그만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벧엘 확장 공사를 감독하러 누마즈로 올 것을 생각해 보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마음이 복잡하였습니다. 또다시 가족을 두고 떠나야 할 것입니까? “아닙니다!”라는 응답이 지부로부터 왔습니다. 그의 아내와 각각 18세와 20세인 두 아들도 함께 초대받은 것입니다.

그 때 지은 건물들은 나중 것들보다 비교적 작았지만, 그 공사를 통해 형제들은 경험을 쌓았고 여호와의 도움으로 더 큰 공사도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일본인 형제들이 무거운 책임을 맡다

1975년 4월에, 1952년 이래 지부 감독자로 일해 오던 로이드 배리가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 성원으로 봉사하기 위해 일본을 떠났습니다. 그는 신권 조직이 1949년의 전도인 8명에서 출발하여 열심 있는 왕국 선포자가 3만여 명이나 되는 규모로 성장할 때까지 열심히 활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그가 떠나게 되자, 지부를 감독하는 일은 당시 공장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던 일본 태생 형제인 혼마 도시오에게 맡겨졌습니다.

혼마 형제의 능력에 관해, 공장에서 그의 일을 보조하던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혼마 형제는 뒤로 물러나 앉아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누군가가 일일이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뭔가 맡기면서 ‘우리가 이런 방향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하기만 하면, 척 알아듣고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는 조직을 잘했고, 사람들에게 의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또 다른 조직상의 변화가 1976년 2월에 있었습니다. 세계 전역의 다른 지부들과 일치하게, 일본 지부를 감독하는 일이 한 사람의 지부 감독자가 아니라 형제들로 이루어진 위원회에게 맡겨졌습니다. 처음에 임명된 다섯 사람은 조정 위원인 혼마 도시오 및 오다 마사타로, 이케하타 시게오, 다나카 기이치로, 제임스 맨츠였습니다. 일본 형제들은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집단적으로 논의하고 합의를 보는 개념에 아주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이 새로운 마련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위원 한 사람은 나중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부 위원회 마련이 있으니까, 형제들이 장성한 형제들로 이루어진 집단을 조직의 대표자들로 바라봅니다. 이것은 형제들의 관심을 일개인에게가 아니라 하느님의 조직으로 이끄는 효과가 있지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이 마련을 통해 배경과 능력이 다양한 영적인 남자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문제를 고려하고 성령과 하느님의 말씀의 인도를 구하게 됩니다.

1983년 1월에, 1960년 2월 이래 벧엘에서 봉사해 온 오다 마사타로가 조정 위원이 되었습니다. 그 무렵 부양해야 할 두 살배기 아들이 있었던 혼마 형제의 자리를 그가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래로 다양한 기간 지부 위원회에서 봉사한 형제들 가운데는 후지모토 료스케, 퍼시 이즐롭, 스기우라 이사무, 나가사키 요시히로, 나카지마 마코토, 미무라 겐지, 리처드 베일리가 있습니다. 현재 지부 위원회에서는 일곱 명의 형제가 봉사하고 있습니다. 일의 규모가 확장됨에 따라, 이 형제들 각자는 세계적인 밭의 이 지역에서 하느님의 왕국의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겸손하게 자기 재능을 바쳐 왔습니다.

오다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위원회 마련에 나타나 있는 하느님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위원회 마련이 시작된 1976년 이래, 일은 계속 확장되어 이제는 어느 한 사람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지요. 여호와께서는 여러 형제들에게 책임을 위임하도록 통치체에 지혜를 주셨고, 이렇게 하여 일의 원활한 흐름이 방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일본인 형제들이 대회를 조직하다

이와 비슷하게, 1970년대에 대회 조직과 관련된 책임도 일본인 증인들에게 넘겨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대회 감독자로 봉사한 최초의 일본인 지역 감독자들 중 한 사람은 아베 다카시였습니다. 그는 퍼시 이즐롭과 같은 선교인들과 함께 일하면서 귀중한 경험을 얻었습니다. 퍼시는 1969년에 도쿄 고라쿠엔 자전거 경기장에서 열린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의 대회 감독자였습니다. 2년 뒤에, 아베 형제는 같은 경기장에서 열린 전국 대회의 대회 감독자로 봉사하였습니다. 1969년 대회에서 얻은 경험으로, 대회 운영이 원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에는 더 무거운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1973년에, 아베 형제는 오사카에서 열릴 닷새간의 “하느님의 승리” 국제 대회의 대회 감독자로 일하도록 협회로부터 임명을 받았습니다. 외국인 대표자 400명을 포함하여 3만 명가량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그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 임명 편지를 받고, 나는 그만 병이 나서 며칠 동안 앓아 누웠는데, 일어나 앉지도 못했지요. 그 모든 대회 부서를 조직하는 어려운 일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회를 몇 달 앞두고 「대회 조직」(Convention Organization)이라는 책자를 협회로부터 받았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성서에 근거한 절차를 따름으로써,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당면한 어려운 문제 중 하나는 모든 참석자를 위한 충분한 좌석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회는 오사카의 엑스포(1970년) 기념 공원에 있는 축제 광장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는데, 그 광장에는 좌석도 연단도 없었습니다. 대회 때 사용할 접는 의자를 빌리는 문제에 관한 정보를 주위에 있는 회중들에 문의하였습니다. 한 도시에서는 그 도시에 있는 모든 교장들에게 연락을 취하였습니다. 또한, 일본 최대의 전기 기구 제조 회사의 사장에게도 대회에서 사용하도록 의자를 대여해 줄 의향이 있는지 문의하였습니다. 회사의 한 대표자가 이 요청과 관련하여 대회 감독자를 만났습니다. 그 회사는 대여해 줄 수 있는 접는 의자의 여분이 없었지만, 의자 5000개를 빌릴 비용을 기꺼이 기부하였습니다. 그래도 좌석이 더 필요하였습니다. 해결책이 있었습니까? 건설 회사에서 빌려 온 비계로 벤치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대회 며칠 전에 벤치들이 완성되었고, 3만 1263명의 청중이 공개 강연을 경청하였습니다. 수가 계속 증가하였기 때문에,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 모두 함께 한 대회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브루클린에 있는 세계 본부에서 통치체 성원 다섯 명과 공장 감독자가 이 대회에 참석하여 청중을 격려하였습니다. 또 과테말라, 나이지리아, 뉴질랜드, 독일,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파푸아뉴기니, 하와이에서도 대표자들이 참석하여, 이 대회는 진정한 국제 대회가 되었습니다.

오사카 대회 이후로, 더 많은 일본인 형제들이 대회 조직의 책임을 떠맡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대회 준비 작업과 다른 책임들 사이에 균형을 잡기가 쉬워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이제 대회 때마다 몇 달 전부터 대회 일에 매달리는 대신, 자기 임명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78년 “승리의 믿음” 국제 대회

일본에서 열리게 된 네 번째 국제 대회는 1978년에 닷새에 걸쳐 열린 “승리의 믿음” 대회였습니다. 이번에는, 모든 사람을 수용하기 위해 네 군데의 대회장이 사용되었습니다. 오사카에서 열린 주대회는 미국, 캐나다, 독일, 스위스 및 유럽과 아시아와 남아메리카 국가들에서 온 대표자 200여 명을 포함하여 최고 참석자 수가 3만 1785명이었습니다. 통치체 성원 세 명도 참석하여 대회 프로그램에 참여하였습니다.

훌륭한 협조의 영이 여러 해에 걸쳐 배양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여호와의 도움이 있다면 중요한 신권 임명도 수행할 수 있다는 온전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볼링장이 대회장으로

왕국회관을 갖는 일뿐 아니라, 형제들이 대회를 위한 더 큰 시설을 마음 놓고 쓸 필요도 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1970년대 초에는, 많은 경우 공공 시설을 종교 단체에는 빌려 주지 않으려고 하였고, 지방 스포츠 경기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경기장 계약이 취소될 수도 있었습니다. 도쿄 지역에서 여러 해 동안 대회 감독자로 봉사한 모로하시 히로후미는, 형제들이 자체 대회 회관을 찾아 나서는 계기가 된 특정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1974년에 우리는 오야마 시의 유원지에 있는 한 회관에서 순회 대회를 보기 위해 20만 엔[약 160만 원]을 선금으로 냈습니다. 나중에, 그 유원지측이 파산해 버리고 말았어요. 우리는 선금으로 낸 돈을 되돌려 받으려고 애쓰랴, 다른 대회 장소를 물색하랴, 무척 고생했습니다.” 그 때, 퍼시 이즐롭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오래 된 직조 공장을 개조해서 만든 아름다운 대회 회관의 사진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도쿄의 형제들은 이 때야말로 자기들도 그와 같은 일을 시도할 때라고 느꼈습니다.

그들은 사용되지 않고 있는 볼링장을 찾아냈습니다. 그 볼링장은 도쿄 외곽의 히가시-마쓰야마에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누군지 전혀 모르는 그 건물 주인은, 자기가 미국에서 함께 지내던 한 가족에게 편지를 써서 여호와의 증인에 관해 물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 미국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종교 단체라는 매우 호의적인 답장을 받았습니다. 그 때부터 일이 아주 잘 풀렸고,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1976년 12월에 일본 최초의 대회 회관이 완공되었습니다. 한편, 또 다른 중요한 건축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설 이전을 인도하시다

확장된 누마즈 시설이 1977년에 봉헌되었을 때는, 4만 명 이상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지부는 누마즈 부지의 세 배나 되는 땅을 찾아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한 낡은 방직 공장이 누마즈와 도쿄 중간쯤인 에비나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 부지는 약 7헥타르였습니다. 이것은 누마즈 부지의 16배나 되는 크기였습니다. 하지만 땅값이 엄청나게 비싼 나라에서 그렇게 이전하는 것을 통치체가 승인할 것입니까? 이 부지의 가격은 과거 1867년에 미국이 알래스카를 매입할 때 러시아에 지불한 액수의 두 배가 넘을 것이었습니다. 얼마 동안, 본부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뉴욕에서 배리 형제가 협회의 브루클린 공장 감독자인 맥스 라슨과 함께 그 부지를 보러 왔고, 우리는 승인을 받게 되었지요.” 혼마 도시오의 말입니다. “지금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증가해 온 것을 돌이켜 보면, 우리는 여호와께서 그 넓은 땅을 매입하도록 인도해 주신 것이 고맙기만 합니다.”

1979년 1월에, 2층짜리 공장, 사무실 건물, 161개의 벧엘 방이 있는 세 개의 숙소 건물, 왕국회관, 두 개의 작은 작업장 건물의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일은 그 때까지 세계 전역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벌인 가장 큰 건축 공사 중 하나였습니다.

이 건축 공사에 참여하기 위해, 건축 기술이 있는 많은 가장들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에비나나 주변 도시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니시오 요시아키가 있습니다. 그가 배관공으로 이 공사에 참여하라는 첫 번째 초대를 받았을 때는,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려고 시코쿠 섬의 작은 읍으로 이사한 직후였습니다. 그에게는 어린 세 자녀가 있었고, 당시에 직장도 없고 돈도 얼마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정중히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속달 우편으로 세 번째 초대를 받았을 때는, 그에게 가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여호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와 그 문제를 상의했더니, 아내는 그가 없는 동안 가족을 부양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벧엘에 도착하고 나서야, 우리 다섯 식구가 모두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지 뭡니까!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지요!”라고 요시아키는 회상합니다. 세 자녀는 자라서 파이오니아가 되었는데, 한 아들은 현재 에비나에서 벧엘 가족 성원으로 봉사합니다.

“우리는 거듭거듭 여호와께서 그 건축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시는 걸 보았습니다”라고 하면서 건축 위원회의 사회자인 제임스 맨츠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우리 앞에는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가나가와 현 당국은 국내에서 가장 엄격한 오염 방지법 중 일부를 시행하고 있었거든요. 우리는 그 부지를 통과하는 도랑에 폐수를 한 방울도 흘려 보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길을 열어 주셨지요. 전에 그 부지에 있었던 공장은 세 개의 우물에서 나오는 물로 공장의 기계를 냉각시키곤 했습니다. 그 물은 도랑으로 흘러나가 이웃 사람들의 농작물을 위한 관개 용수로 사용되었지요. 이 물 공급이 끊어지게 되었다는 말이 이웃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자, 그들은 시청으로 가서 ‘우리는 이 부지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농사를 짓고 있단 말입니다’라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서 시 관리들은 결정을 번복하여, 우리가 농부들에게 공급하기 위해 매일 도랑으로 내보내야 할 물의 최소량을 정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정화된 폐수만 도랑으로 내보낸 것이 아니라, 농부들에게 필요한 양을 채우기 위해 우리 우물에서 물을 더 퍼올려야 하였습니다.”

완공된 건물은 당시 워치 타워 협회장인 프레더릭 프랜즈가 참석한 가운데 1982년 5월 15일에 여호와께 봉헌되었습니다. 로이드 배리와 그의 아내 멜바도 참석하여 봉헌식 프로그램에 참여하였습니다. 배리 형제가 제11기 학급에서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그의 동료 길르앗 졸업생들 14명과 회견을 하는 동안, 청중은 일본인 형제들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양과 질의 발전

전도인 수는 계속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서적의 수요도 증가하였습니다. 에비나의 시설이 봉헌되기도 전인 1979년 10월, 지부는 처음으로 웨브 오프셋 윤전 인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인쇄기는 무게가 75톤에 길이가 20미터였으며, 잡지를 총천연색으로 1분에 300부나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필요가 충당되었습니까?

맨츠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981년에 재라스 형제의 지구 방문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인쇄기로 2교대 작업을 하는 걸 보시더니, 한 대를 더 구입하도록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해 보라고 권하시더군요. 우리는 그냥 한 대로 지내는 게 더 경제적이라는 생각에서, 두 번째 인쇄기를 요청하기를 주저하였습니다. 하지만 한 달도 채 못 되어 브루클린으로부터 두 번째 오프셋 윤전 인쇄기를 주문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깨닫지 못했어요. 그러나 한 해 뒤 5월에 인쇄기가 배달되었을 때, 우리는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지역 대회 때 발표할 일본어 「신세계역」 전서를 즉시 생산하기 시작해야 하였습니다. 이 대회에서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도 발표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우리는 일을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대의 인쇄기로 잡지와 성서와 책을 모두 생산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세 번째 인쇄기로 고성능 미쓰비시 인쇄기가 1984년에 설치되었습니다. 이 인쇄기에는 두루마리 종이를 두 개씩 걸어 사용하게 되어 있고, 천연색용 인쇄 유닛 네 개에 흑백용 인쇄 유닛이 하나 더 있었는데, 1분에 1000부의 잡지를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이 기계는 국내에서 가장 빠른 인쇄기였으므로 세속 인쇄업자들의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인쇄기 작동을 위해 특별 훈련을 받은 마쓰나가 이치키는 이 기계가 최대 속도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감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인쇄된 소식이 퍼져 나가게 될 엄청난 속도를 생각하면 더욱 가슴이 설렙니다” 하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어떻게 한 시간에 6만 부의 잡지를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습니까? 마침내, 기계 공작실의 형제들은 인쇄기에서 나온 잡지가 유압식 압축 장치와 삼면 재단기를 통과하여 포장대에까지 이르게 되는 전기 콘베이어 시스템을 고안하여 설치하였습니다. 그 시스템의 작동 책임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20분마다 0.5톤짜리 종이 두루마리가 인쇄기에 들어가는데, 그 라인의 반대쪽 끝에서는 이 잡지가 곧바로 발송 전표가 붙은 상자에 담겨 포장되어 발송을 기다리게 됩니다.” 5분도 채 못 되어, 종이는 두루마리에서 풀려 나와 인쇄기와 재단기를 거쳐 상자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인라인 시스템 덕분에 필요한 작업 인원의 수가 줄었고 보관 장소도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장비로 가능해진 질 높은 인쇄와 삽화 및 종이 질의 향상으로, 잡지가 한결 돋보이게 되었습니다. 전도인들은 야외 봉사에서 잡지를 열정적으로 제공하였습니다.

“전문가들이 줄줄이 늘어서다”

협회는 오프셋 인쇄로의 전환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인쇄 전의 작업도 컴퓨터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변화를 가져오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적 배경이 있는 일본인 증인들이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일본 컴퓨터 과학 분야의 기술 개척자 중 한 사람인 이시이 야스오가 여호와의 헌신한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동료들에게도 자기 믿음에 관해 알려 주었습니다. 그 결과, 컴퓨터 시스템 기술자들과 전문 프로그래머들인 여섯 사람이 침례받은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협회의 계획 사업에 참여하라는 초대를 받아들여, 일부는 벧엘 봉사자로 일부는 출퇴근자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지부 조정 위원인 혼마 도시오는 일어났던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전문가들이 줄줄이 늘어서게 하셨지요.”

사용할 컴퓨터에 관하여, 브루클린 사무실은 곧 시판될 IBM사의 4341형 본체를 임차하도록 추천하였습니다. 협회의 일본 지부는 추첨 결과, 이 최신형 컴퓨터 본체 중 하나를 받게 될 순위가 2위로 낙찰되었습니다. 하지만 IBM사의 일본 지사측에서는 프로그래밍을 할 재력이 있는 한 정기 고객에게 그 컴퓨터를 주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계획 사업에 참여하고 있던 다섯 형제와 한 자매는 재빨리 협회의 독특한 필요에 대한 상세한 설명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자세히 기록한 이 설명서를 본 뒤, 그 회사는 이 신형 컴퓨터의 첫 발송 목록에 우리의 주문을 기꺼이 포함시켜 주었습니다.

이 전문가들의 능숙한 지도 아래, 40여 명의 자진하는 젊은 형제 자매들이 프로그래머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목표는 협회의 일본어 출판물을 위한 완전히 자동화된 식자 조판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스템을 SCRIPT(사진 식자가 결합된 문자 재생 시스템)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2년이 채 못 되어, 이 방법을 시험해 볼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 시스템으로 생산한 첫 출판물은 「“당신의 왕국이 임하게 하옵소서”」라는 192면 서적이었습니다.

1987년에는 일반 개인용 컴퓨터가 용량이 커져서, 일본 문자의 특수한 필요에 부응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SCRIPT 시스템과 연결된 사진 식자기가 고장났을 때, 비용이 덜 드는 협회의 식자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복잡한 일본어 문자 약 8000개로 된 일련의 일본어 “알파벳”을 포함하여, 우리 형제들이 SCRIPT 시스템을 위해 특별히 개발한 특징들은 이제 MEPS 시스템에 도입되었습니다. 국내에서 일본어 시스템을 위한 작업을 하던 여러 명의 프로그래머들이 지금은 협회의 전세계 출판 시스템을 지원하기 위해 다른 나라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부서가 생기다

거의 30년 동안, 브루클린의 협회 인쇄 공장은 야외에서 배부하는 데 필요한 서적을 일본에 공급해 왔습니다. 그러나 1978년에 에비나에서 새로운 공장의 건축 공사가 진행되자, 일본 지부로 하여금 자체적으로 서적 생산을 시작하게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우리의 계획에 관해 듣고, 큰 접착제 회사의 사장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우리가 접착제를 직접 만들 생각임을 알게 되자, 필요한 원료와 장비를 대 주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혹은 우리가 원한다면, 자기가 기꺼이 비용을 좀 부담하여 우리를 위해 접착제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몇 년 전에, 그는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제본 및 인쇄 기계 전시회에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거기서 그의 일행은 브루클린 벧엘에서 온 형제들을 만났는데, 그 형제들의 초대로 뉴욕에 있는 워치타워 협회의 인쇄 공장을 견학하였습니다. 그 일행은 전체적인 작업 과정, 특히 형제들의 친절과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대단히 감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제 그는 할 수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를 돕고 싶어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우리가 접착제를 직접 만드는 것보다 그를 통해 구하는 쪽이 더 저렴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소개로, 다른 자재 공급자들과도 접촉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상당한 절약을 하였습니다.

여러 기계 제조업체들도 비슷한 협조를 하였습니다. 삼면 재단기와 정합기를 제조하는 한 업체의 대표자들이 계약을 체결하러 에비나에 왔을 때, 그들은 건축 현장에서 본 모든 광경, 특히 열심히 일하는 자원 봉사자들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기계의 가격을 100만 엔(약 800만 원)이나 깎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형제들을 훈련시킬 있었는가?

공장에는 제본일에 실제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로버트 포부다가 브루클린에 초대되어, 약 6주 동안 훈련을 받고 일본에 있는 형제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자료를 받았습니다. 그 자료가 번역되어 제본에 대한 강습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여러 회사에서 전문가들이 와서 제본 재료들의 사용법을 형제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작업 과정을 관찰하기 위해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제본소 몇 군데를 견학하는 마련도 하였습니다.

한번은 그런 제본소의 견학을 마친 뒤, 형제들이 사장실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왜 여러분을 이 곳에 오게 했는지 아십니까?” 하고 물으며, 사장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통 우리는 외부의 제본 관계자들에게 우리 공장을 보게 허락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견학 허가를 요청하기 일 주일 전에, 한 증인이 나를 찾아와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를 제공하더군요. 나는 그분의 태도에, 그리고 잡지에서 읽은 내용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출판물을 더 받고 「파수대」와 「깨어라!」를 예약했으며, 형제 여러 명을 한 달 동안 자기 공장에서 훈련시켜 주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그 이래로 여러 해 동안, 제본부 형제들은 계속하여 기술을 향상시키고 지식을 넓혀 왔습니다. 제본 회사들은 우리 공장을 견학시키려고 직원들을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세부적인 데까지 청결하게 유지되고 주의가 기울여지는 것을 관찰하고 감명을 받습니다. 이전에 공장 감독자였던 제임스 맨츠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한 제본 회사에게는 대표자들이 정기 견학 코스를 돌면서 비디오로 녹화해도 좋다는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비디오를 자기 공장 직원들을 훈련시키는 데 사용할 계획이었지요. 그들이 같은 장비로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도 우리 벧엘 형제들을 본으로 사용하고 싶어한 것은, 일하는 동안 행복한 얼굴에 역력히 드러나는 형제들의 태도 때문이었고 또 형제들이 매우 효율적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맨츠 형제는 협회의 제본실을 견학하던 한 사업체 간부가 깜짝 놀라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 간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자기들이 3‘기’라고 부르는 것, 즉 기켄, 기타나이, 기쓰이라면 질색을 합니다.” 그 단어들은 위험하고, 더럽고, 힘들다는 뜻입니다. 이 중 하나라도 관련된 일이라면,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비나 공장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디럭스판 제본은 특별한 관심을 모아 왔습니다. 우리 에비나 시설에 있는 제본실은 일본에서 디럭스판 제본에 관한 최고의 정보 출처로 손꼽히게 되었습니다. 이 제본실에서는 표지가 가죽으로 된 성서가 대량 생산됩니다.

「신세계역」 전서의 생산

오프셋 인쇄로 바뀌고, 제본실이 생기고, SCRIPT 시스템이 개발되는 등 이 모든 일로 「신세계역」 전서를 생산하기 위한 기초가 놓였습니다.

「신세계역」의 히브리어 성경 부분을 번역하기 시작하라는 허락이 내려진 것은 1975년이었습니다. 이 번역은 팀의 협동 작업으로 수행될 것이었습니다. 번역자 세 명이 그 작업에 참여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여러 작업자들이 고도의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할 수 있었습니까? 번역어의 광범위하고 상세한 목록과 아울러 고유 명사, 동물, 식물, 광물, 색깔, 질병에 관한 그리고 도구, 의복, 음식, 희생 제물 등의 물품에 관한 자료를 준비하였고, 번역자들이 그것을 함께 사용하였습니다. 수많은 동의어 그룹과 중요한 어구들도 주의 깊이 연구하여 목록에 추가하였습니다. 나중에 일본의 성서 번역자들은, 세계 본부에서 성서 번역 지원 시스템을 고안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험을 전수할 목적으로 초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포함되었습니다. 전세계 성서 번역자들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방법들 가운데는 그들이 제안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어 「신세계역」 전서는 에비나에 있는 우리 시설에서 인쇄하고 제본하였습니다. 1982년에 17개의 “왕국 진리” 지역 대회에서 발표하는 데 필요한 13만 6000권의 성서를 생산하기 위해, 그래픽부와 인쇄실과 제본실은 하루 24시간 작업을 하였습니다. 형제들 일부는 12시간 내지 16시간씩 교대로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고대에 ‘하느님의 율법의 노련한 복사자’였던 에스라가 수행한 것과 같은 종류의 일을 진척시키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힘을 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손으로 작업을 한 반면에, 그들은 그 일을 일본어로 완수하는 데 고속 웨브 오프셋 윤전 인쇄기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숙련된 복사자를 본받도록 일깨우는 뜻에서, 그들은 에스라 7:6의 말씀을 인쇄기 옆면에 붙여 놓았습니다.

그 해에 제본실 형제들은 모두 후쿠시마에서 열린 마지막 지역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대회 전의 마지막 작업일이 끝나기 꼭 8분 전에, 발표에 필요한 마지막 성서를 완성하였습니다. 그 때 제본실에 있었던 요시오카 시게루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지쳐서 녹초가 되었지만, 학수 고대하던 「신세계역」 전서를 받는 형제들의 얼굴에서 기쁨의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 모두는 정말 애를 쓴 보람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일본어로 번역한 성서의 내용이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기 때문에, 다양한 크기의 번역판을 생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982년에 완성된 이후, 일본어 「신세계역」은 여러 해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300만 권 가까이 생산되었습니다.

성장에 부응하기 위한 그 후의 증축

쑥쑥 자라는 사춘기 청소년처럼, 일본의 신권 조직은 급속히 성장하여 지부 시설이 비좁게 되었습니다. 1984년 2월에 추가 확장에 관한 광고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6층짜리 공장 건물 증축과 8층짜리 숙소 건물이 포함되었고 두 건물 다 지하실이 있었습니다. 새 공장 건물의 바닥 면적은 거의 2만 2500제곱 미터가 될 것이었는데, 원래의 에비나 공장 면적의 두 배였습니다. 새로운 숙소 건물에는 벧엘 자원 봉사자들을 수용할 방이 128개 마련될 것이었습니다.

증축 공사는 1984년 9월에 시작되어 1988년 2월에 완공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일본의 전도인 수는 10만 명 선을 돌파하고 계속하여 증가해 왔습니다. 이 공사의 결과로, 일본 지부는 국내의 야외에서 증가하는 필요를 돌볼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을 위해 필요한 인쇄 작업을 지원할 능력도 갖추게 될 것이었습니다. 1989년 5월 13일, 이 새로운 건물들은 여호와께 봉헌되었는데, 그분이야말로 이 시설이 필요하게 될 정도로 증가하게 해주신 분입니다.

가족을 돌보는 일을 다른 관심사보다 앞자리에 둠

이 나라의 대중 매체는 때때로 여호와의 증인에 관해 집중적으로 보도하였습니다. 1986년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내용은 여호와의 증인이 얼마나 자녀에게 관심이 많은지에 관해 인식을 새롭게 해주었습니다. 「마이니치 데일리 뉴스」지에는 이러한 표제가 실렸습니다. “일본 국철 고위 간부가 가족과 함께 있기 위해 사임하다.” 일본에서 십대 자녀를 둔 아버지는 전근 지시를 받으면, 설사 그것이 승진이라 하더라도 진퇴 양난에 놓이게 됩니다. 전근은 가족이 처해 있는 상황과는 관계없이 결정됩니다. 자녀가 고등 학교에 다니는 경우, 흔히 부모들은 가족이 다 이사한다는 생각은 접어 두게 됩니다. 대개 아버지가 전근을 받아들여 가족을 남긴 채 떠납니다. 일본어로 이것을 단신후닌[單身赴任]이라고 합니다. 그 신문 기사는, 여호와의 증인인 다무라 다케시가 일본 국유 철도(JNR)의 규슈 국장으로 임명되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명성 있는 직위에 올라 가족을 남겨 두고 떠나느니 차라리 사임하는 쪽을 택하였습니다. “국장직은 누구나 맡을 수 있지요. 그러나 저는 아이들의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입니다.” 한 신문에 인용된 다무라 형제의 말입니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하였습니다. 이전에는 대중 매체가, 여호와의 증인을 자녀가 죽도록 내버려 두는 일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보도하면서 잔인한 모습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가족과 함께 있고 싶기 때문에, 국철 직원이라면 대부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르고 싶어할 직위에서 사임할 만큼 용기 있는 남자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텔레비전 기자들은 집집을 방문해 보았습니다. 또한 가족과 함께 주말을 보내려고 기차에서 내리는 단신후닌 직장인들과도 회견을 하였습니다. 기자들은 다무라 형제의 결정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일반적인 반응은 이러하였습니다. ‘그의 결정에 탄복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할 만한 용기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다무라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이니치」 신문이 어떻게 정보를 입수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그런 정보가 새어 나가면, 일본 국철은 단지 보도된 내용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의도적으로 전체 인사 계획을 바꿔 버리거든요. 하지만 이번에는 대중 매체가 보도한 그대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모든 일 배후에 여호와께서 계셨던 게 틀림없습니다. 대중 매체를 통해, 일본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가족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으니까요.” 현재, 다무라 형제와 그의 가족은 모두 전 시간 복음 전파자로 봉사합니다. 그는 회중의 주임 감독자이며, 그의 아들은 임시 벧엘 자원 봉사자입니다.

오키나와에서 이루어진 진전

오키나와가 통합되어 일본 지부의 관할 아래 있게 된 이후로, 옛 전통이 아직도 사람들의 생활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그 곳의 구역에서 더 많은 진전이 있었습니다. 70세인 스나가와 기쿠에게는 파이오니아 활동을 시작하는 데 나이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그 지방의 유타 즉 영매에게 매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참 하느님은 이름을 갖고 계시며 마음을 읽으실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유타와 관련된 자기의 모든 물건을 즉시 없애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느님의 뜻에 관한 더 온전한 지식을 얻기 위해 읽는 법을 배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연구 사회자는 참을성 있게 필요한 도움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는 1981년에 침례를 받고, 이듬해에 파이오니아로 등록하였습니다.

전에는 문맹이었던 그가 이제는, 연로한 한 성서 연구생 부부가 함께 진보하여 침례를 받을 수 있도록 연구생의 남편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고마움을 느낀 그 부부는 훌륭한 새 왕국회관을 짓기에 적합한 부지를 아카미치 회중에 희사하였습니다. 기쿠의 두 여동생도 참 하느님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유타의 영향력에서 자유롭게 되었을 때, 기쿠는 기울인 노력에 대한 축복을 또 받았습니다.

1989년에 하마마쓰에 사는 한 연로한 부부는 오키나와 해안에서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아구니지마라는 작은 섬에서 증거하라는 임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결혼 반지를 팔아서 이 외딴 섬에 가는 데 필요한 여비를 어렵사리 마련하였습니다. 이 섬에 있는 600가구를 방문하는 데 20일이 소요되었습니다. 하루는 그들이 여름철 뙤약볕 아래 돌담을 따라 걷고 있는데, 어린 여자 아이 둘이 자기들 물통에 있는 물을 마시게 해주었습니다. 이 아이들의 친절에 감동된 부부는 아이들의 부모를 방문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이 부부가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하자, 그 부모는 다정하게 이 부부를 껴안았습니다. 그들은 8개월 전에 오키나와에서 이사온 뒤로 여호와의 증인을 전혀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편지로 하는 성서 연구가 마련되었고, 나중에 그 연구는 오키나와의 나하에 있는 회중에 인계되었습니다. 그 부모는 큰딸과 함께 1993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외딴 섬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도록 돕고 있습니다.

오키나와가 다시 일본 지부의 관할 아래 있게 된 1980년에는, 오키나와와 이웃 섬들의 전도인 수가 22개 회중에 958명이었습니다. 지금 오키나와 현에서는 활동적으로 봉사하고 있는 왕국 선포자의 수가 2600명을 웃돕니다.

지역 건축 위원회가 돕다

수십 년 동안, 회중들은 자체적인 경험과 자원을 동원하여 왕국회관을 지어 왔었지만, 구조상으로, 법적으로 또 그 밖의 면으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회중이 색상의 조화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숙련되지 않은 자원 봉사자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공사가 완공되는 데 시일도 오래 걸렸습니다. 일부 건축 공사는 수개월, 심지어 수년이 걸리는 바람에, 회중의 영성 특히 건축과 관련된 사람들의 영성이 위태로워졌습니다. 이제, 미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속성 건축의 원칙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 고려해 볼 적절한 때가 되었습니다.

첫 지역 건축 위원회가 1990년 9월에 도쿄 지역에 구성되었습니다. 이어서 7개의 위원회가 차례로 더 생겨 이 나라 다른 지역들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1991년 3월에는 일본 최초로 속성 건축 방식을 사용한 왕국회관이 이바라키 현의 나카미나토에 건축되었습니다. 둘째 날에 강한 폭풍이 몰아쳐서 잠시 지연되기는 했지만, 단지 나흘 만에 120석의 회관이 완공되었습니다.

그 이래로, 일본 전역에 원래 8개였던 지역 건축 위원회가 11개로 늘어서, 해마다 80 내지 100개의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일을 지원해 왔습니다. 그 가운데는 땅값이 비싼 관계로 한 건물에 왕국회관을 두 개씩 지은 구조와 1층을 주차장으로 마련한 회관들도 있습니다. 오키나와에서는 이 섬에 자주 몰아치는 태풍에 대처하기 위해 지역 건축 위원회가 설계를 일부 변경해야 하였습니다.

오키나와에 있는 고친다 회중의 속성 건축 공사가 시작되기 바로 전 날, 그 땅을 희사한 형제가 사망하였습니다. 장례식은 그 주 일요일 오후 4시에 그 때까지는 건축될 예정인 왕국회관에서 거행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그 형제는 그 지방에서 이름이 나 있었으므로, 대중 매체를 통해 그의 장례식에 대한 광고가 있었습니다. 건축 현장에 겨우 콘크리트 기초만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정말 장례식 때에 맞춰 건물을 세울 겁니까?” 그렇습니다. 회관은 때맞춰 완공되었고, 법조계와 정치계 인사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 모여 장례사를 들었습니다.

현재, 일본과 오키나와 전역에는 1796개의 왕국회관이 있으며, 그 중에서 511개는 속성 건축 방식으로 짓거나 개수한 것입니다. 이 왕국회관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존재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으며 그들이 숭배하는 하느님께 합당한 찬양을 돌리고 있습니다.

전국 곳곳의 대회 회관들

순회 대회와 특별 대회일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대회 회관에 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부터—간사이, 에비나, 지바, 도카이, 효고, 구마, 홋카이도, 도치기에—대회 회관이 하나 둘 차례로 건축되었습니다. 규슈에 건축된 아홉 번째 대회 회관은 1997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형제들의 모범적인 행실은 종종, 처음에는 우호적인 성향을 보이지 않던 이웃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 놓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나고야 근처에서 도카이 대회 회관이 건축되고 있을 때, 한 이웃 사람은 공사를 몹시 반대하면서 공사를 중단시키기 위한 운동을 벌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현장에 날마다 나와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관찰하였습니다. 하루는 그가 손에 톱을 들고 왔습니다. 공사를 책임 맡은 형제가 그에게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제껏 여러분이 하는 일을 줄곧 지켜 봤습니다. 그런데 저 대나무 숲이 당신네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군요. 나도 오늘 자원 봉사 좀 해봅시다.” 그도 도우려고 끼어 들었습니다.

1995년에 형제들이 최북단의 섬에 홋카이도 대회 회관을 지을 때는 자금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2000개의 의자를 무료로 얻게 되자 무척 기뻤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건축이 진행되고 있을 때, 대지진이 고베와 인근 도시들을 강타하여 많은 건물이 못쓰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콘서트 홀이 있는 고베 고쿠사이 가이칸도 그렇게 된 건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 건물을 헐기로 결정이 난 뒤, 한 텔레비전 뉴스 보도에서는 음악가들이 그 홀에 작별을 고하는 장면을 내보냈습니다. 그 뉴스 방송을 보고, 고베에서 구조 작업을 하고 있던 증인들은 그 건물의 책임자들과 연락을 취하여, 그 곳에 있는 의자들을 들어내어 홋카이도 대회 회관으로 보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의자 2000개 중 3분의 1은 아주 새것이었고, 나머지 의자들도 천을 갈면 쓸 만하였습니다. 그 콘서트 홀을 허는 일을 맡은 회사는 의자들이 이미 처분되어서 좋아하였습니다.

1995년 도치기와 홋카이도 대회 회관 건축 때부터는, 지역 건축 위원회의 감독 아래 왕국회관 건축을 위해 봉사할 자격을 갖춘 형제 자매들이 대회 회관의 건축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대회 회관들을, 그리고 대회 중에 함께 교제할 기회를 대단히 소중히 여깁니다. 그들은 이 훌륭한 건물들을 보면서, 여호와께서 가치 있는 찬양의 희생을 드리려는 그들의 노력을 풍성하게 축복해 주셨다는 또 하나의 증거를 분별합니다.

적절한 지역 대회장들

1980년대에는 큰 지역 대회들이 대부분 옥외 스타디움에서 열렸습니다. 그래서 여름철의 극심한 무더위와 태풍에 대처해야 했는데, 태풍은 여름 대회를 열 때쯤 일본을 강타하기 시작합니다.

1983년에 2만여 명을 위한 지역 대회를 8월 18일에서 21일까지 오사카의 엑스포 기념 공원에 있는 녹색 광장에서 열기로 계획하였습니다. 준비 작업으로, 자원 봉사자들은 8월 14일 일요일에 두 개의 거대한 천막을 쳤습니다. 하지만 시속 160킬로미터의 강풍을 동반한 태풍이 곧바로 오사카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천막을 걷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형제들이 태풍의 진로를 주의 깊이 지켜 보고 있어서, 대회 본부는 마치 기상대처럼 보였지요”라고 대회 감독자였던 나카가와 쇼고는 말합니다.

“16일은 기도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대회가 제 시간에 열리려면, 형제들이 늦어도 8월 17일 새벽 5시부터는 천막을 치기 시작해야만 했거든요. 8월 16일 석간 신문에는 ‘오사카 지역에 폭풍우 예상’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계획대로 천막을 치려면, 태풍이 더 빨리 움직이면서 오른쪽으로 진로를 꺾어야 했고 서쪽의 구름이 걷혀야만 했지요. 그런데 바로 그런 일이 정확하게 발생하였습니다. 17일 새벽 4시에, 오사카 남부에는 비가 몹시 내리고 있었지만 대회장 주변에는 내리지 않았지요. 18일 목요일 오후 1시 20분에 시작되는 대회에 때맞춰, 계획했던 그대로 천막을 다시 세웠습니다.”

하지만 점차, 1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실내 경기장과 홀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에, 여호와의 증인은 이러한 냉방 시설이 된 장소를 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실내 모임 가운데 가장 큰 대회 하나가 1992년에 도쿄 돔 스타디움에서 열렸습니다. 모두 합하여 3만 9905명이 이 “빛 비추는 자” 지역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스타디움이 도쿄 중심부에 있었기 때문에, 그 대회는 보는 이들에게 훌륭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스타디움 근처에서 일하는 한 남자는 자기 집을 방문한 파이오니아에게, 자기와 직장 동료들이 증인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대회 참석자들을 관찰해 본 그는 사과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제는 견해가 달라졌습니다. 이 잡지를 아내와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환영받은 대피자들

1980년대에 또 다른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지 형제들의 능력이 시험을 받았습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에 사는 궁핍한 동료 신자들에게 도움을 베풂으로써 사랑의 깊이를 보일 기회가 있었던 것처럼, 일본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도 근년에 재해가 있었을 때 이러한 그리스도인 특성을 나타낼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도 11:28, 29; 로마 15:26) 그들이 행동한 방식은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를 제시하였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사랑이 있다면, 모든 사람이 이것으로 여러분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5.

광범위한 구호 활동을 벌인 첫 사례는 1986년 11월 21일에 이즈오시마 섬의 미하라 산이 분화한 뒤에 있었습니다. 오후 4시 17분에, 그 섬에 하나밖에 없는 회중의 장로인 니시무라 지로는 큰 폭발을 감지하였습니다. “밖으로 나가 보니, 원자 폭탄이 폭발할 때 생기는 것과 같은 버섯 구름이 미하라 산 위로 피어오르더군요.” 니시무라 형제의 말입니다. 한 시간 내에, 80회의 지진이 이 섬을 뒤흔들었습니다. 밤새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섬 밖으로 대피하였습니다.

폭발이 있은 지 몇 시간도 채 안 되어, 대피한 증인들을 돌보도록 이즈 반도와 도쿄에 구호 위원회들이 구성되었습니다. 대피 명령이 있은 뒤, 나카무라 요시오는 이즈오시마 회중의 성원들을 돕기 위해 도쿄에 있는 회중들의 형제들과 함께 새벽 2시에 부두로 달려갔습니다. 그 대피자들 중 한 사람은 나중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배에서 내리면서,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표지판을 보았습니다. ·⁠·⁠· 아내는 형제들이 우리를 만나러 부두에 나와 있는 걸 보고 안도감에 휩싸여 눈에 눈물이 글썽였지요.”

시마바라에서 있은 화산 폭발

그 일이 있은 지 5년도 채 안 된 1991년 6월에, 나가사키에서 가까운 시마바라 반도의 후겐 산이 분화하였습니다. 40명 이상이 사망하였습니다. 뜨거운 가스와 재가 지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집에 살던 한 증인과 그의 자녀들은 그야말로 구사 일생으로 빠져 나왔습니다. 시마바라 회중에 연합하고 있던 전도인 42명 가운데 30명이 대피해야 하였습니다. 그 회중의 왕국회관은 위험 지대 안에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국에 있는 회중들에 재해 지역 형제들의 필요에 관한 소식이 전달되었고, 구호 기금을 위한 은행 계좌가 개설되었습니다. 즉시 반응이 나타났으며, 어찌나 송금이 쇄도하는지 그 곳 은행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은행측에서는 송금 처리를 끝내는 동안 잠시만 송금을 보류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한 달이 채 못 되어, 그 지방 구호 위원회는 회중들에게 송금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이미 그들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보내 온 기부금으로는 일자리와 살 집을 잃은 사람들을 돌보는 데 더하여, 시마바라 회중과 새로 형성된 아리에 회중을 위해 각각 훌륭한 새 왕국회관을 마련할 수 있었는데, 대피자들의 절반 이상이 그 때는 아리에 회중과 연합하고 있었습니다.

구호 활동 그리고 접수된 3000통 이상의 편지에 표현된 사랑에 찬 관심에, 재해 지역에 있는 증인들의 마음은 깊이 감동되었습니다. 그 결과, 재해가 있은 이듬해 4월에는 시마바라 회중의 전도인 28명과 아리에 회중의 침례받은 성원 20명이 모두 그 달에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에 등록하였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습니다.

필요한 법적 도움

물론, 사탄은 여호와의 종들의 연합된 활동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나라에서와 같이, 그는 여호와의 백성의 전진을 방해할 장애물을 놓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갈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비교 사도 25:11.

법적 조언이 필요한 상황을 다루기 위해, 1980년대 초에 지부 사무실에 법률 부서가 생겼습니다. 1991년에 젊은 변호사와 그의 아내가 지부에서 전 시간으로 봉사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그는 법조계에 종사하는 다른 형제들과 상의한 끝에, 장로의 회를 위한 매우 유용한 자료를 마련하였는데, 이를테면 왕국회관을 빌리고 소유하는 일, 여호와의 백성에 대한 폭력에 합당하게 대처하는 일, 이혼과 자녀 양육권 다툼에서 취할 현명한 조처 등의 문제에 관한 자료입니다. 그뿐 아니라, 지부는 성서 서적의 발행과 수출 및 그와 유사한 문제와 관련된 법률상의 변화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조언을 받았습니다.

종교적 양심 때문에 법정에 서다

주목할 만한 한 법정 소송은 16세인 고바야시 구니히토와 관련된 사건이었는데, 구니히토는 고베 시립 공업 고등 전문 학교에 입학한 학생이었습니다. (일본에서 고등 전문 학교는 의무 교육이 아닌 5년 과정으로 고등 학교 3년 과정이 포함된다.) 어떤 학교들의 경우, 무술 훈련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을 낙제시키거나 퇴학시키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런 학생들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박탈당하였습니다. 1986년 12월에 로이드 배리가 지구 감독자로서 지부를 방문했을 때, 이 문제에 직면해 있는 모범적인 형제, 되도록이면 장로의 아들을 한 사람 선택하여 그의 퇴학 처분에 대해 법원에 청원해 보라는 권고가 있었습니다.

1990년에, 고바야시 구니히토와 다른 학생 네 명은 이사야 2:4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말라’는 명령과 일치하게 검도(일본 검술) 훈련을 거부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유급되었습니다. 구니히토는 자기 반에서 성적이 수석이었는데도, 2년간 연이어 체육 과목에서 낙제하는 바람에 이어서 퇴학을 당하였습니다. 구니히토와 다른 네 학생은 학교의 처분에 대해 청원을 제출하면서, 숭배의 자유와 교육에 대한 헌법상의 권리가 침해되었음을 주장하였습니다. 여러 차례의 소송 끝에, 마침내 대법원까지 올라간 것은 구니히토의 사건이었습니다. 1996년 3월 8일에 대법원의 소법정 제2부의 판사들은 만장 일치로 구니히토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면서, 전문 학교측은 그에게 자기 종교와 교육 중에서 양자 택일을 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잘못을 범했다고 선고하였습니다. 이것은 종교의 자유를 교과 과정에 대한 학교의 권위와 저울질한 사건에 대해, 법원이 처음으로 판결을 내린 사례였습니다. 새로 부임한 교장은 전교생을 모아 놓고, 그 사건에서 학교측이 좋은 판단력을 나타내지 못했음을 시인하면서 학생들에게 “고바야시 군을 같은 학우로 따뜻하게 환영하라”고 권하였습니다. 퇴학당한 지 4년 뒤인 1996년 4월, 당시 21세가 된 고바야시 형제는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판결은 전국으로 널리 보도되었으며, 여호와의 증인은 여호와의 이름과 의로운 방식에 다시 한 번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고 훌륭한 증거가 행해진 데 대해 기뻐하였습니다.—마태 10:18.

피에 관한 하느님의 법을 존중함

동료 인간의 생명에 대해 여호와의 증인들이 나타내는 관심은 잘 알려져 있지만, 피의 신성함에 대한 증인들의 존중심에 관해서는 깊이 뿌리 박힌 편견이 있어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창세 9:4; 사도 15:28, 29) 1980년대 이전에, 지부 사무실은 무혈 수술을 해준 병원 및 의사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협조적인 의사들의 명단이 아니었습니다. 일부 의사들이 그저 마지못해서 무혈 수술을 해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꺼이 무혈 수술을 해줄 의사들의 이름을 필요로 하는 증인들을 돕기 위해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습니까? 이러한 필요에 부응하는 일에 직접 관여하게 된 우오타니 아키히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좌절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기꺼이 무혈 수술을 해줄 의사들의 이름을 알려 달라고 협회에 다급하게 전화한 사람들에게 뭐라고 답변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인 1989년 초에, 미국에서 병원 교섭 위원회(HLC)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는 소문이 일본에 들려 왔습니다. 관심이 생긴 일본 지부는 브루클린 본부에 문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뒤 같은 해 11월에, 일본 지부는 일본에서 1990년 3월에 HLC 세미나를 열도록 출판 위원회가 승인하였다는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브루클린의 병원 안내 봉사부로부터 받았습니다. 그 모임은 미국 밖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세미나 중 하나가 될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새로 임명된 HLC 위원 91명, 순회 감독자 111명, 일본의 증인 의사 25명, 한국 형제 44명, 브루클린에서 파견한 강사 3명이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미나는 영어로 진행하고 한국어와 일본어로 통역하게 되었습니다.

우오타니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세미나 중에, 강사들은 ‘의사들을 교육’할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의사들을 교육할 목적으로 의사들을 만나 보고 병원들을 찾아가는 일이 과연 일본에서 받아들여질 것인지 강한 의구심을 나타냈지요. 일본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의사가 무슨 치료를 해주든 두말 없이 받아들이고 또 의사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시술에 관해 비전문가들과는 이야기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특히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세미나가 끝난 뒤에 세 강사는 병원 교섭 위원들과 팀을 이뤄 도쿄 지역의 병원들을 방문했는데,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보도 매체와 의사들을 교육함

편견에 찬 보도와 부정확한 정보가 신문 지상에 나오기 때문에, 피에 관한 우리의 입장과 관련하여 보도 매체와 의사들을 교육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피—어떻게 생명을 구할 수 있는가?」 소책자가 발표된 이후, 1990년 9월부터 지부는 전국 신문이나 지방 신문에 의학 기사를 쓰고 있는 기자들을 만나 보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이 일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일부 기자들은 자기들이 본 내용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무혈 수술을 하는 의사들에 관한 기사를 쓰겠다는 제의까지 하였습니다.

이 운동의 또 한 가지 훌륭한 결과는 주요 전국 일간지에 과학 기사를 쓰는 기자들이 오사카 HLC에게, 국립 순환계 질병 센터의 윤리 위원회가 증인들을 대하는 방법을 논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 일이었습니다. 즉시, 그 센터의 책임자와 회견을 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책임자와 윤리 위원회의 부위원장이 이 모임에 나왔습니다. 그 결과, 1991년 4월 22일에 수혈을 거부할 증인들의 권리를 존중하기로 하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이 훌륭한 출발에 이어서, 다른 병원의 윤리 위원회들과도 접촉을 가졌고 비슷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도쿄 메트로폴리탄 병원 및 산부인과 병원의 윤리 위원회가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는 경우를 다루는 방법에 관한 지침을 마련할 때, 지부의 병원 안내 봉사부 대표자와 도쿄의 HLC 위원들이 참여하도록 초청을 받았습니다. 13명으로 구성된 그 윤리 위원회는, 도쿄 시 정부가 운영하는 16개의 모든 병원에게 의사들이 피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에도 무혈 치료를 원하는 성인 환자들의 요청을 존중해 줄 것을 권하였습니다. “무의식 상태로 병원에 실려 왔더라도 수혈을 원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문서를 소지하고 있는 경우에, 의사들은 그 요청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마이니치 신문」은 보도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동 신문은 “고등 학교에 재학 중인 자녀들도 성인들처럼 수혈에 관한 그들의 요청이 존중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전에 “여호와의 증인 사절”이라는 표지를 붙여 놓았던 병원들까지도 태도를 바꿔, 기꺼이 증인들을 치료하면서 무혈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협조적인 의사들의 명단에 1만 5000명 이상의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일부 의사들은 그 지방의 HLC가 자기 이름을 빠뜨릴 경우 소홀히 취급되었다고 느꼈습니다. 1995년 10월에 마쓰도의 신도쿄 병원은 피에 관한 증인들의 입장을 전적으로 존중하는 무혈 치료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 중요한 문제에서 훌륭한 진전을 보아 왔습니다.

조직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사랑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대로, 이 마지막 날에는 곳곳에서 큰 지진이 계속 일어납니다. (마태 24:3, 7) 그러한 큰 지진이 1995년 1월 17일 화요일에 고베 지역을 강타하였습니다. 리히터 지진계로 7.2를 기록한 이 지진은 50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 갔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집을 잃었습니다. 재해 지역에 살고 있던 9000명의 증인들 가운데, 침례받은 증인 13명과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 2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니시노미야 중앙 회중에서 봉사하던 특별 파이오니아 부부, 가네코 히로시와 가네코 가즈가 낡은 아파트가 무너져 내린 잡석더미 밑에 깔려 있는 것이 그 날 아침에 발견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가네코 형제를 꺼내는 데 네 시간 이상이 걸렸지만, 그의 아내 가즈는 이미 압사해 있었습니다. 가네코 히로시는 잡석더미에 장시간 깔려 있었기 때문에, 신장이 기능을 멈춰서 여러 날 동안 위독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물질적 소유물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반면에, 믿음과 희망 같은 내적 특성의 중요성을 깨달았지요. 이런 특성들은 우리가 직면할지 모르는 최악의 상황도 견뎌 내게 도와 줍니다.”

형제들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우러나와, 증인들은 도움을 베풀기 위해 재빨리 행동하였습니다. 다행히도, 고베 주변의 순회구들은 그 도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경계선에 따라 분할되어 있었습니다. 지진이 동서로 뻗은 해안 지방에 타격을 주었기 때문에, 각 순회구에는 피해가 없는 회중들도 있어서 어려움을 당한 회중들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피해가 없는 가까운 회중들의 장로들은 구호 활동을 조직하는 데 솔선하였습니다. 첫 지진이 있은 다음날, 오토바이 16대로 이루어진 수송대가 고베 시내에 있는 회중들에 식품과 물을 배달하였습니다.

순회 감독자들은 즉시 재해 지역에 있는 증인들을 돌보기 위한 임시 구호 센터를 설립하였습니다. 지부는 파괴되지 않은 여섯 채의 왕국회관을 구호품 보관소로 지정하였습니다. 동료 증인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재해 지역으로 달려간, 지부 위원 나가사키 요시히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다섯 시간도 채 못 되어, 이 회관들은 구호품으로 가득 차 버렸지요. 우리는 형제들에게 방향을 돌려 근처의 대회 회관으로 구호품을 가져가라고 부탁해야 했습니다.” 공급 센터가 마련되어 지방 회중의 대표자들이 그 곳에 와서 필요한 물품을 받아 갈 수 있었고, 그 다음에 각 회중의 장로들은 그 공급품을 성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되, 특히 믿음으로 친족이 된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격려합니다. (갈라디아 6:10) 증인들은 받은 것들을 기꺼이 이웃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고베 지진이 난 지 이틀 뒤, 한 증인 장로는 구호품이 증인들에게는 충분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소형 트럭 두 대에 식품을 가득 실어 그 지방 난민 센터에 보냈습니다.

지원이 베풀어지다

감정적·영적 필요에도 주의가 기울여졌습니다. 회중 집회를 계속 열도록 신속히 마련하였습니다. 한 회중은 지진이 일어난 바로 그 날에도 공원에서 집회를 보았습니다. 지진이 있은 주의 일요일에는 그 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회중이 정규 「파수대」 연구를 가졌습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감정적·영적 필요를 돌보기 위해, 재해 지역의 다섯 개 순회구에는 원래 그 곳을 맡고 있는 순회 감독자들 외에도 일곱 명의 순회 감독자들을 더 파견하였습니다. 그들은 특별 방문을 하여, 형제들을 강하게 해주고 또 재해에도 불구하고 왕국 권익을 생활에서 첫째 자리에 두도록 도왔습니다.

왕국회관 열 채가 못쓰게 되었습니다. 많은 형제들의 집이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파괴되었습니다. 일본에 있는 11개 지역 건축 위원회는 손상된 집들을 보수하도록 각기 약 21명으로 이루어진 팀들을 조직하였습니다. 미국에서 건너 온 증인들로 이루어진 한 구호 팀은 그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자기 비용을 들여서 왔습니다. 이 팀들은 작업이 끝날 때까지, 집 1023채를 수리하고 붕괴된 집 4채를 치웠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자기 희생적인 형제들의 힘으로 다섯 채의 왕국회관이 다시 건축되었고, 네 채가 수리되었습니다.

재해를 당한 가정의 믿지 않는 가족 성원들도 믿는 성원들과 똑같이 친절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과 네 자녀가 있는 어떤 자매가 지진으로 둘째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 가족은 다른 증인 70명과 함께 일 주일 동안 왕국회관에서 지냈습니다. 형제들이 얼마나 관심을 나타내고 실용적인 도움을 베푸는지를 관찰한 그 남편은 여호와의 조직을 인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루는 그가 스이타에 있는 구호 본부를 방문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는 많은 형제들이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진 그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 날, 그는 성서 연구를 하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변화에 건설적으로 대처함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일본 내의 상황은 변하였습니다. 1949년에 첫 선교인 그룹이 도착한 지 43년이 지난 1992년 3월 말에는, 일본 지부가 임명받은 모든 구역에 왕국의 좋은 소식이 정기적으로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태도와 환경도 변했으므로, 여호와의 증인들에게는 융통성이 필요하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 여행하는 활동을 해 온 선교인 로드니 키알로하는 이렇게 말합니다. “25년 전[1970년대]에는 일본 사람들이 아주 예의 바르고 호의적이었지요. 증인들이 찾아가면, 관심이 없더라도 잘 들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을 내어 출판물을 읽었고 대체로 도덕과 사회 질서를 매우 존중하였습니다. 하지만 차츰 물질적으로 번영하게 되면서 점점 더 물질에 관심이 쏠리게 되었습니다. 주부들도 직업 전선에 뛰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낮에 집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적어졌습니다. 집에 있는 사람들도 흔히 너무 바빠서 종교에 관해 길게 대화를 나눌 수가 없고, 출판물도 읽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여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경비가 철저한 아파트 건물과 인터폰이 있는 주택들도 건축되었습니다. 이런 지역의 전도인들은 인터폰을 통해 제공 연설을 하는 일에 적응해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친절하고 호감이 가는 태도를 나타낸 사람들도 재방문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삿포로에서 봉사하는 파이오니아인 히로코는 인터폰으로 한 여자한테 거절을 당했는데, 그 여자는 신도를 믿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여자의 명랑한 목소리와 예의 바른 태도로 볼 때 분명히 마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확신한 히로코는 재방문을 하였습니다. 인터폰을 통해 이야기하면서 차차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열 달 동안 그런 식으로 방문한 뒤, 마침내 그 여자는 “잠깐 기다리세요”라는 말로 히로코를 맞더니 대문에 나와 집 안으로 초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정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했더니 곧 성서 연구를 하게 되었고, 어느덧 침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현재 파이오니아인 그 새로운 자매는 과연 마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낮에는 거의 집에 없기 때문에, 「우리의 왕국 봉사」에서는 저녁 증거와 가두 증거를 증가시키라고 권장하였습니다. 전도인들은 즉시 열정적인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곧, 일본 전역, 특히 사람들이 붐비는 열차역 주변에서 전도인들이 길에서 「파수대」와 「깨어라!」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코하마 근처에 사는 한 자매가 그 전형적인 예였습니다. 자매는 전 시간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보조 파이오니아가 되고 싶었습니다. 한 장로는 날마다 출근하기 전에 오전 6시부터 8시까지 열차역 근처에서 가두 증거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였습니다. 수줍음과 처음에 일부 통근자들에게서 받은 조롱을 극복하고 나서, 그 자매는 기꺼이 잡지를 받는 약 40명의 잡지 통로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통근자들, 역무원들, 부근의 상점 주인들이 있었습니다. 자매가 전하는 잡지는 한 달에 평균 235부였는데, 그 구역에서 파이오니아들은 보통 30부 정도를 전하였습니다. 날마다 단지 몇 분 동안 사람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요점을 알려 줌으로써, 이 자매는 여섯 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으며 그 중 한 사람은 경찰관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경비가 철저한 건물에 사는 사람들과 접촉하려고 전화 증거에 관한 제안을 적용한 전도인들도 있었습니다. 끈기를 나타내고 호소력 있는 주제를 부각시킴으로 많은 성서 연구를 시작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한 자매는 전화를 통하여 어떤 여자에게 자신과 가족 앞에 어떤 장래가 놓여 있는지 생각을 많이 해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해 봤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베풀지 못하는 데 대해 실망한 나머지 건강이 나빠졌던 것입니다. 그 결과 집에만 틀어박혀 살고 있었습니다. 증인이 나타낸 진정한 관심에 감동된 그 여자는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만나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가정」 책의 내용을 보여 주자, 그 여자는 기꺼이 성서 연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왕성한 야외 활동과 아울러 회중들이 장성한 결과, 꾸준하고 지속적인 증가가 나타났습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연속적인 전도인 신기록은 1979년 1월에 시작되어 18년이 넘도록 중단 없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1980년대 후반기와 1990년대 초에, 일본의 전도인은 해마다 평균 1만 명 이상씩 증가하였습니다. 1995년 3월에는 이 나라에 20만 명의 왕국 선포자가 있었습니다. 1972년 8월에 1만 4199명의 전도인이 320개 회중에 있었는 데 비해, 1997년 8월에는 22만 663명의 전도인이 3785개의 회중과 연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서는 모국어가 일본어가 아닌 전도인들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외국어 집단을 위한 도움

일본의 경제가 번영하다 보니, 일본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는 많은 근로자들이 이 나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여호와의 증인들도 있습니다. 일본은 이제 거의 모든 주민이 일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외국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은 어떻게 영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1980년대 전에는 외국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비교적 적었습니다. 미국 군인들의 부양 가족인 아내와 자녀들이나 다른 관심자들의 유익을 위해 미사와, 다치카와, 오키나와에 작은 집단들이나 회중들이 산발적으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중 가장 큰 규모는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기지를 위한 회중이었습니다. 1968년에, 이전에 한국에서 선교인이던 칼 에머슨과 에벌린 에머슨이 오키나와에 있는 영어권 주민들을 돕기 위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이주해 왔습니다. 나중에 이 비옥한 밭에서 그들과 함께 일하러 온 사람들로, 길르앗 제40기와 제52기 졸업생들인 빌 아이브스와 메리 아이브스, 웨인 프라지와 페니 프라지가 있습니다. 웨인은 360cc짜리 작은 고물 차를 몰고 불규칙하게 뻗어 있는 가데나 공군 기지 일대를 다녔는데, 그는 과거에 군대 생활을 한 경력이 있어서 군인들을 상대로 봉사하는 데 특히 효과적이었습니다. 웨인과 페니는 오키나와에서 봉사한 15년 동안 둘이 합하여 약 100명을 침례받게 도울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봉사가 어찌나 효과적이었던지 그 기지의 사령관이 그들에게 다른 곳에서 전파하라고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당신들은 가장 훌륭한 군인들을 빼내 가고 있단 말입니다”라고 그는 불평하였습니다.

다른 군기지로 전임됨에 따라 사람들이 회중을 들락날락하면서 계속 뒤섞이는 일이 있었지만, 문자적으로 수천 명이 집회에 참석하였고 수백 명이 여호와 편에 서도록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미국으로 돌아가서 계속 여호와를 섬겨 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장로와 봉사의 종이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 가운데 닉 사이머넬리가 있는데, 그는 자기 연구 사회자의 발자취를 따라 나중에 길르앗 제93기에 참석하였습니다. 지금은 에콰도르에서 아내와 함께 봉사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영어 구역

1970년대 말엽에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일본의 영어 집단들은 차차 해체되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초에, 벧엘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밖에 안 되는 미국 아츠기 해군 항공 기지 일대에 영어권 주민의 수가 많은 것을 보고, 제임스 맨츠 2세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자기 부모에게 동양으로 건너와 도와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비교 사도 16:9) 그래서 1981년 3월에, 제임스 맨츠 1세와 그의 아내 루스는 62세와 5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츠기 기지 근처의 사가미하라로 이주하였습니다. “어디든지 영어를 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으면 그 곳이 우리 구역이었어요”라고 루스는 회상합니다. 에비나 벧엘 가족의 한 성원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가두 봉사를 하는 동안, 맨츠 자매는 흔히 양손을 뻗어 잡지를 보여 주면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젊은 미군들을 멈춰 세우곤 했습니다.” 슬프게도, 제임스 맨츠 1세는 일본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했지만, 루스는 그 지역에 거주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진리 안에 들어오도록 도왔습니다. 규모가 작았던 사가미하라 영어 집단은 1985년 10월에 회중이 되었습니다.

1980년대에 일본의 경제가 점점 막강해지자, 외국인들의 수가 급증하였습니다. 수많은 필리핀인, 남아메리카인, 아프리카인, 중국인, 한국인들이 외국인 근로자로 이 나라에 줄지어 들어왔습니다. 협회는 이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영적 도움을 베풀 조처를 취하였습니다. 벧엘에서 봉사하는 여러 사람들을 포함하여 영어를 하는 일본인 파이오니아들이 도움을 베풀도록 임명되었습니다. “협회가 이 일에서 앞장을 서기 시작하자, 즉시 증가가 있었지요”라고 여러 해 동안 영어 회중에 연합했던 한 형제가 말하였습니다. 1997년 9월 1일에는 영어 회중이 18개나 있어서 별도의 순회구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브라질인들을 위한 도움

부모나 조부모가 브라질로 이민을 가서 그 곳에 살던 많은 일본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그들은 일본어도 영어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1986년에, 이전에 브라질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한 기리타니 가즈유키와 기리타니 나나코 부부가 요코하마로 이주하였는데, 그 곳에는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몇몇 자매들과 성서 연구생들이 있었습니다. 이 작은 집단은 「파수대」 연구와 단축된 신권 전도 학교를 한 달에 한 번씩 포르투갈어로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1991년 봄에, 협회는 도쿄와 나고야와 도요하시에 살고 있는 브라질인 장로 세 사람과 기리타니 형제를 초청하여, 포르투갈어 밭의 개척에 관해 논의하였습니다. 1991년 8월에 네 개의 포르투갈어 집단이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부는 자진하는 벧엘 봉사자들을 모집하여 벧엘에서 포르투갈어 강습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언어를 열심히 배워서 포르투갈어 집단들의 기반을 놓는 데 참여하였습니다. 새로 형성된 집단들은 곧 회중들이 되었고, 6년이 채 못 되어 포르투갈어 회중이 21개나 있게 되어 자체 순회구를 구성하였습니다.

스페인어 밭이 생기다

1987년 9월, 그 때까지 포르투갈어 집단에 연합해 왔던 여덟 명의 자매를 돕기 위해 스페인어로 첫 집회가 열렸습니다. 페루 출신의 독신 형제인 루이스 델가도가 앞장섰습니다. 그 당시에 일부 자매들은 스페인어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여섯 시간이나 여행을 하였지만, 그들이 받은 영적 도움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경제적 안정을 위해 일본 국민과 결혼한 어떤 스페인 여자들은 언어 장벽 때문에 결혼 생활에서 문제를 겪고 있었고 일본어 회중의 장로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스페인어 집단은 야외 봉사를 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구역을 조직하기 위해, 그들은 도쿄 중심부의 환상 궤도인 야마노테 노선에 있는 29개 열차역을 모두 다니며, 대문에 스페인어 이름이 있는 집을 찾아보았습니다. 피곤하고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렇게 한 덕분에 봉사 구역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낮에는 자매들 여럿이 콜롬비아 여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을 방문하곤 하였습니다. 이 여자들은 대개 일본의 마피아인 야쿠자가 운영하는 술집에서 일하였습니다. 여자가 영적으로 진보하고 있는 듯이 보이면, 야쿠자가 개입하여 그 여자를 다른 곳으로 보내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한 성서 연구생은 잘 진보하여,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려면 직업을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하자면 야쿠자에게서 도망해 숨어야 하였습니다. 연구 사회자의 도움으로, 그는 결국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1990년대 초에 많은 수의 근로자들이 페루,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및 그 밖의 나라에서 일본으로 왔을 때, 여호와께서는 작은 스페인어 집단이 준비를 갖추고 그들의 영적 필요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1991년에 도우려고 자진하는 벧엘 봉사자들을 위해 스페인어 강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일 년이 채 못 되어, 일부 형제들은 어느새 공개 강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1993년에 첫 스페인어 회중이 도쿄 지역에 형성되었습니다. 1997년에는 잘 발전하는 스페인어 회중이 13개나 있게 되었습니다. 이 회중들은 별도의 외국어 순회구를 구성하였습니다.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을 도움

상당수의 중국인들도 일본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많은 학생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 중국에 남겨진 일본인 자녀들도 있었습니다. 일본에 30만 명 이상의 중국인들이 살고 있다고 추산되었는데, 그 중 20만 명은 도쿄도(都) 지역에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눈을 들어 중국어 밭을 보니, 희어져 수확하게 되었지만 “일꾼이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마태 9:37; 요한 4:35.

야마모토 마사유키와 그의 아내 마사코는 이전에 타이완에서 선교 봉사를 하며 8년을 지냈습니다. 1992년에, 중국어권 주민들을 도우려고 자진하는 벧엘 봉사자 몇 명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즉시, 마사유키는 중국어를 좀 하는 사람들과 연락을 취하였고, 전도인이 28명인 중국어 집단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거의 다 일본인 파이오니아들로서, 아직도 중국어에 쩔쩔매고 있었지만 그 언어권의 관심자들을 돕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본인 증인들의 그러한 열심은 중국인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한 젊은 여자는 자기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한 형제에게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책을 받았습니다. 그 여자는 그 책을 일 주일 안에 다 읽었습니다. 그 내용에 감동을 받아 모든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일본인들이 단지 중국어권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줄 목적으로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여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여자와 남동생은 신속히 진보하였고, 일 년도 채 안 되어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여자는 침례를 받기 전부터 성서 연구들을 사회하고 있었습니다.

1993년 5월에 첫 중국어 순회 대회가 열렸습니다. 399명이 참석하고 8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얼마 안 있어, 표준 중국어 회중 다섯 개와 일본어 회중에 속한 중국어 서적 연구 집단 하나가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 밖의 언어 집단들

1980년대 말에, 펜 피토레스와 그의 아내 픽상이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캄보디아에서 온 난민으로, 둘 다 고국에서 있었던 대학살에서 부모를 잃었습니다. 캄보디아어로는 연구를 할 출판물이 사실상 전혀 없었으므로 진보가 느렸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은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캄보디아에서 온 동료 난민들의 영적인 필요에 관심을 갖고, 그들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려고 애썼습니다. 곧 소규모의 캄보디아어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1994년에 캄보디아어로 「파수대」가 나오자, 더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벧엘에서 형제 열 명이 그 언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캄보디아어 집회에 참석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은 한국인들이지만, 그들 대부분은 일본어를 알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그들을 위한 별도의 회중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윽고,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모국어로 연구를 한다면 더 빨리 진리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 지적되었습니다. 그 결과, 1996년 4월에 벧엘 근처에 한국어 집단이 형성되었고, 그 후에 효고 현에 있는 이타미 시에도 집단이 하나 생겼습니다.

또한 빠뜨릴 수 없는 것으로 수화 회중들이 있습니다. 기꺼이 나선 많은 자원자들이 전국에 있는 청각 장애인들을 도울 목적으로 일본 수화를 배웠습니다. 1982년 이래, 협회는 일부 지역 대회에서 수화 통역을 마련해 왔습니다. 하지만 청각 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본격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한 것은 1992년에 후쿠오카 시와 구마모토 시에 수화 회중들이 형성되었을 때였습니다. 수화 비디오도 마련되었습니다. 지금은 일본 전역에, 청각 장애인들을 활동적으로 돕고 있는 11개의 회중과 9개의 작은 집단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일본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국내의 여러 언어권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이 가장 잘 이해하는 언어로 좋은 소식에서 유익을 얻도록 돕기 위해 훌륭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새로운 학교에 대한 열의

1993년에 일본에 있는 독신 장로와 봉사의 종들에게 가슴 설레는 새로운 기회가 열렸습니다. 그 마련은 그들이 국내와 국외에서 봉사를 확장할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여행하는 활동을 하면서 수십 년간 경험을 쌓은 두 명의 형제 제임스 힌더러와 데이비드 비글러가 일본의 봉사 훈련 학교 첫 학급의 진행을 맡도록 미국에서 파견되었습니다. 영어로 진행된 이 첫 학급에는 일본과 한국과 필리핀에서 온 7명의 참관자들도 참석하였습니다. 이 참관자들은 각각 자기 나라에서 강사로 봉사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학교에서 받은 유익에 관해 말하면서, 첫 학급의 한 학생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제 생각에는,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스스로 추리하고 관련된 성서 원칙을 적용하여 결정을 내리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규칙을 따르는 걸 더 쉽게 느꼈지요. 그러나 수업 시간에 자주 사용된 ‘왜?’와 ‘어떻게?’라는 두 가지 질문을 통해, 우리는 사실 배후에 있는 원인들과 대답을 곰곰이 생각해 보도록 훈련받았습니다.” 그 학급의 또 다른 학생도 같은 점을 거듭 지적하면서, 강사 한 사람이 한 가지 제안을 했을 때 있었던 일을 회상합니다. 강사는 잡지를 맡고 있는 봉사의 종이 새로 도착한 잡지를 전할 때 사용할 잡지 제공 연설을 준비해서 그것을 전도인들에게 알려 줄 수 있다고 제안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 한 학생이 던진 질문을 계기로, 의와 선함 사이의 차이점에 관해 감명 깊은 명확한 해설이 있게 되었습니다. 강사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의는 기록된 지시를 이행하지만, 선함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요구된 것 이상을 합니다. 우리는 의로울 뿐 아니라 선할 필요가 있는데, 기록된 법조문 없이도 회중 성원들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젊은 독신 형제들은 일반적으로 서둘러 결혼하지 않습니다. 첫 18개 학급에 참석한 형제들은 평균 나이가 29세였고, 진리 안에서 13년, 전 시간 봉사에서 8년이 되었습니다. 1997년 8월에는 이미 790명 이상의 학생이 봉사 훈련 학교의 33개 학급을 졸업하였고, 수천 명이 참석하려고 대기 중이었습니다. 졸업하자마자, 일부는 순회, 특별 파이오니아, 선교인 활동에 임명되었습니다.—시 110:3.

잘 훈련받은 이 장로와 봉사의 종들이 회중과 함께 일하자, 즉시 유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졸업생이 회중에 미치는 좋은 영향에 관해, 한 장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회중이 훨씬 더 생기가 있고 밝아졌습니다. 파이오니아 영이 증가하고, 회중의 모든 성원들이 신권적인 절차에 따라 일을 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더 깊은 인식을 갖게 되었지요. 영적인 일에 대한 청소년들의 열의가 고조되었는데, 신권 전도 학교에 많이들 등록했습니다.” 이처럼, 회중들이 강화되고 세움을 받아 왔습니다.

해외의 대회에 대표자들을 보냄

여러 해에 걸쳐, 일본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국제적인 형제 관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일에서 ‘넓힐’ 기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둘째 6:13) 해외 여행을 하기가 더 쉬워지자, 협회는 일본 지부에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남북 아메리카, 하와이, 뉴질랜드에서 열리는 특별한 국제 대회에 대표자들을 보내도록 초대하였습니다.

초대에 응한 대표자들의 수는 해를 거듭하면서 증가했는데, 그 대표자들 가운데서 많은 수의 파이오니아와 다른 전 시간 봉사자들을 보게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1996년에 특별한 대회들이 체코 공화국과 헝가리에서 열렸을 때, 일본 대표자들 1320명 가운데는 전 시간 봉사자들이 1114명이나 있었습니다.

일본 대표자들은 이 특별한 대회들에서 보고 들은 것을 통해, 시야를 넓히게 되었고 여호와를 마음을 다해 섬기도록 더욱 자극을 받았습니다. 1978년 국제 대회를 보기 위해 한국, 홍콩, 필리핀, 타이완을 방문한 이케하타 시게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외국에 있는 형제 자매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의 유대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순결한 언어로 함께 뭉쳐 있다는 것을 직접 보고 나서, 특히 제 봉사의 특권에 대한 인식이 자라게 되었고 기도 내용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종들이 심한 박해를 견뎌 낸 나라들을 방문해서 그들의 경험을 직접 듣게 되자, 대표자들은 감동을 받아 그들의 믿음을 본받고 싶어졌습니다. 오다 미사코는 1992년에 구소련에서는 처음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이 자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대회 첫날 회기의 첫 노래가 시작되자, 제 옆에 앉아 있는 러시아 자매가 흐느끼기 시작했어요. 고개를 들고 보니, 다른 많은 러시아 자매들도 눈물을 글썽이면서 노래를 끝까지 부르지 못하더군요. 저는 그들이 겪은 종류의 박해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으로서, 여호와와 충실한 형제들의 그 역사적인 승리의 순간을 그들과 한자리에서 맛볼 수 있게 해주신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에 대해 그분께 깊이 감사하였습니다.”

남바(지금은 나카지마) 세이코라는 젊은 파이오니아 자매는, 1990년에 열린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회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자매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사랑과 고마움을 표현하는 방법과 그러한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것의 중요성을 아르헨티나의 형제 자매들한테서 배웠어요. 한 연로한 자매는 우리가 떠날 때 저를 껴안으면서 선물을 주셨어요. 그분은 눈물을 글썽이며 ‘아스타 루에고 엔 엘 파라이소’[낙원에서 만납시다]라고 몇 번이고 말씀하셨지요. 일본에 돌아온 뒤에, 우리 회중과 구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사랑과 친절을 나타내려고 노력했어요.” 일반적으로 수줍어하며 과묵한 편인 다른 일본 대표자들 역시 라틴 아메리카 형제 자매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사랑을 나타내는 면에서 더욱 외향적이 되도록 도움을 받았습니다.

여러 해 동안, 일본 지부는 다른 나라에서 열리는 특별한 대회에 수많은 대표자들을 보내는 특권을 누려 왔습니다. 초대장을 회중에 보냈을 때 나타난 열렬한 반응은, 형제들이 국제적인 그리스도인 가족과 함께 할 이 기회에 대해 대단한 열성과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해 줍니다.

세계적인 필요에 기여함

지금 세계적인 형제 관계에 다양한 방법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특권입니다. 귀중한 인쇄 경험을 쌓게 된 일본 지부는 인쇄를 필요로 하는 이웃 지부들을 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900만 부 이상의 「파수대」와 「깨어라!」가 매달 10개 언어로 에비나 공장에서 현재 생산되고 있습니다.

일본 지부는 현재 라오어, 신할리즈어, 중국어, 타밀어(스리랑카의 언어), 타이어, 11개의 필리핀어를 포함하여 26개 언어로 그리고 모두 총천연색으로 서적, 성서, 소책자, 팜플렛을 인쇄하고 있습니다. 고속 윤전 인쇄기 덕분에 공장은 야외의 수요에 신속히 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1993년 9월에 오랫동안 기다려 온,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이 포함되어 있는 타갈로그어 성서의 특별판을 인쇄하는 데 사용할 재료가 일본에 도착하였습니다. 10월 중순까지 타갈로그어 성서 7만 권을 인쇄하여 발송했는데, 12월에 지역 대회에서 형제들에게 발표하기에 알맞은 시기였습니다. 세부어 성서와 일로코어 성서도 곧 이어서 나왔습니다. 포르투갈어 성서와 스페인어 성서의 디럭스 제본도 지금은 에비나 인쇄 공장에서 취급하고 있습니다.

1989년에 세계 본부에 번역 봉사부가 생긴 이후, 일본 지부는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의 번역자들을 지원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이 지역에 살고 있지만, 그 사람들 중 여러 언어권에 속한 많은 수가 아직 워치 타워 출판물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번역 기술이 있고 컴퓨터 장비에 익숙한 일본 형제들은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 네팔, 레바논, 말레이시아, 타이,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미얀마, 솔로몬 제도, 괌 및 그 밖의 나라를 방문하여, 번역자들을 찾고 훈련하고 팀을 조직하는 일을 돕고 동시에 번역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협회가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설치하는 특권을 누려 왔습니다.

격려를 주고받음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로, 일본에서 봉사하는 선교인들을 본받아, 해외 9개 국에서 왕국의 권익을 증진하라는 임명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인 일본인 형제 자매 76명이 있습니다. 이 무리에는 봉사 훈련 학교의 졸업생 13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임명된 나라들에는 괌(2명), 나이지리아(1명), 말레이시아(2명), 브라질(7명), 솔로몬 제도(5명), 캄보디아(1명), 타이완(39명), 파라과이(8명), 파푸아뉴기니(11명)가 포함됩니다. 임명지에서 보내 온 편지들을 보면, 그들이 새로운 언어와 관습과 음식에 익숙해지고 열대 질병에 대처하는 법을 잘 배워 왔다는 점과, 그들이 때로는 현대 일본의 풍요로움과 대조를 이루는 원시적인 지역에서, 때로는 수돗물이나 가스나 전기도 없이 기꺼이 봉사해 왔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현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길렀고 경건한 만족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왕국의 권익을 증진시킬 수 있어서 무척 기뻐합니다.

일본에서 신권적 확장이 이루어지면서 다시 한 번 지부 시설을 늘릴 필요가 있게 되자, 이번에는 국제적인 협조 가운데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공사에는 쌍둥이처럼 우뚝 서 있게 될 13층짜리 숙소 건물 두 동과 편익을 위한 시설을 갖춘 5층짜리 건물 한 동이 포함됩니다. 1994년에, 미국에서 온 프랭크 리가 건축 감독자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온 국제 건축의 종인 스티브 기번스 역시 건축 위원회에서 봉사합니다. 49명이 넘는 자원 봉사자들이 이 일에 참여하려고, 뉴질랜드, 룩셈부르크,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이탈리아, 캐나다, 코스타리카, 프랑스, 핀란드에서 왔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경험과 기술을 해외에 있는 형제들과 나누고 왕국의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모두들 고국에서 누릴 수 있는 좀더 안정된 생활을 기꺼이 희생하였습니다.

일본 형제들이 나타낸 열렬한 반응도 대단하였습니다. 숙련된 작업자들과 숙련되지 않은 작업자들 4600명 이상이 이 공사에 참여하겠다고 신청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짧은 기간이라도 이 공사에 참여하기 위해 큰 조정을 해야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직장을 그만두고 가족을 떠나 있는 일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노력에 대한 풍부한 상을 받았다고 느낍니다.

노령이지만 열심은 여전하다

일본에 있는 여호와의 찬양자들로 이루어진 이 큰 무리의 성장은, 1949년과 1950년에 길르앗 제11기 학급을 졸업한 선교인들이 도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제7기 학급과 그 후 학급의 졸업생을 포함하여 더 많은 선교인들이 그들에게 가담하였습니다. 그들 중 59명이 여전히 일본에서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제 나이가 70대와 80대인데도 모두들 봉사에 대한 열심이 여전합니다. 64년 동안 흔들림 없이 전 시간 봉사를 해 온 로이스 다이어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확신을 가지고 끊임없이 기도하지요. 다윗이 이렇게 감동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말입니다. ‘내 힘이 쇠약한 때에 ·⁠·⁠·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소서.’” (시 71:9, 18) 여호와께서는 일생의 대부분을 충실한 왕국 봉사에 바쳐 온 이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선교인 가족의 한 성원은 그 점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조직은 마치 우리를 따뜻한 담요에 싸서 꼭 껴안아 주는 어머니 같아요.”

이 고참 선교인들 중 21명은 현재 도쿄 미타 선교인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부가 있었던 도쿄의 원래 건물은 이 연로한 선교인들의 숙소로 완전히 개조되었습니다. 이들은 정말 보기 드문 선교인 가족입니다! 평균 나이가 74세이고 진리 안의 연륜도 평균 50년입니다. 이들 중 여덟 명은 길르앗 제11기 졸업생입니다. 이 선교인 가족은 함께 여러 해 동안 증거의 무더기를 쌓아 오면서, 567명가량의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왔습니다. 이 가족의 몇몇 성원은 이미 80대에 들어서 심각한 건강 문제를 겪고 있지만, 그들은 결코 한가롭게 소일하고 있지 않습니다. 1997 봉사 연도에, 그들은 야외 봉사를 한 달 평균 40시간 이상씩 하였고, 철저하게 돌고 있는 그들의 구역에서 도합 1만 7291부의 잡지와 수백 권의 서적을 전하였습니다. 회중 성원들은 이 고참 선교인들을 귀하게 여기며 이웃 사람들도 그들을 존경합니다.

루스 울리히는 이제 생애 87번째 해를 맞았는데, 그 연수 가운데 68년을 파이오니아와 선교인 활동에 바쳤습니다. 그 자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이교에서 나와 진리 안으로 들어와서 정말 우리 형제 자매가 되는 모습을 보고, 저는 믿음이 강화되어 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일본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현대 역사를 알려 주는 “가족 앨범”을 넘겨 보면서, 이렇듯 열심 있는 여호와의 종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에서 하느님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있는 22만여 명 가운데 단지 소수에 불과합니다. 선교인들은 자기들의 영적 자녀와 손자녀, 그리고 3대, 4대 후손들이 이룬 업적에 깊은 만족을 느낍니다. 또한 그들은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몹시 알고 싶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께서 현 제도의 끝날에 그리고 지금 바로 눈앞에 다가온 그분의 놀라운 신세계에서 그들에게 어떤 역할을 맡기실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66면 전면 삽화]

[71면 삽화]

전쟁 전부터 일해 온 충성스러운 일본인 전도인들: (1) 이시이 지조와 이시이 마쓰에, (2) 이데이 미요, (3) 미우라 가쓰오와 미우라 하기노

[72, 73면 삽화]

1949-50년부터 일본에서 봉사하기 시작한 선교인들 중 일부: (1) 돈 해슬릿과 메이벌 해슬릿, (2) 로이드 배리와 멜바 배리, (3) 제리 도마와 요시 도마, (4) 엘시 다니가와, (5, 6) 퍼시 이즐롭과 일마 이즐롭, (7) 노린 톰프슨 (결혼 전의 성은 밀러), (8) 에이드리언 톰프슨, (9) 로이스 다이어, (10) 몰리 헤런, (11) 시니치 도하라와 마사코 도하라

[79면 삽화]

N. H. 노어(왼쪽)가 고베 선교인 집에서 열린 대회에서 연설하는 모습, 1951년

[81면 삽화]

그레이스 그레고리(뒤쪽)와 글래디스 그레고리, 길르앗 학교 제11기 졸업생들

[82면 삽화]

마그릿 빈텔러(오른쪽, 길르앗 제23기)는 언니 레나(제15기)와 일본에서 합류하였다

[88면 삽화]

돈 해슬릿과 로이드 배리, 1953년에 도쿄 벧엘 집에서

[89면 삽화]

40년 동안 봉사해 온 일본인 특별 파이오니아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사토 다카코, 와쿠이 히사코, 고바야시 가즈코

[90면 삽화]

오키나와 지부, 1979년

[95면 삽화]

홋카이도에서 겨울철 증거 활동을 하기 위해 떠나는 모습

[95면 삽화]

위: 애들라인 나코

아래: 릴리언 샘슨

[99면 삽화]

에토 유리코

[102면 삽화]

야외 봉사를 하기 위해 나가는 행복한 파이오니아 가족

[110면 삽화]

도쿄의 지부 사무실, 1949-62년

도쿄의 지부 사무실, 1963-73년

누마즈의 지부 시설, 1972-82년

[115면 삽화]

혼마 도시오, 1970년대 중반의 지부 감독자

[116면 삽화]

지부 위원회, 1997년(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리처드 베일리, 이케하타 시게오, 스기우라 이사무, 오다 마사타로, 나카지마 마코토, 나가사키 요시히로, 미무라 겐지

[124면 삽화]

공장 감독에 참여한 제임스 맨츠 (아내 사라와 함께)

[132면 삽화]

대회 회관: 효고, 에비나, 간사이

[139면 삽화]

고바야시 구니히토

[142면 삽화]

지진이 일어난 후의 고베, 1995년

[150면 삽화]

야마모토 마사유키와 야마모토 마사코

[156면 삽화]

해외 대회에 참석한 일본 대표자들: (1) 케냐 (2) 남아프리카 공화국 (3) 러시아

[158면 삽화]

에비나의 지부 사무실과 벧엘 집; 삽입 사진에는 1997년에 공사 중인 증축 부분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