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바로 가기

차례 바로 가기

파라과이

파라과이

파라과이

남아메리카의 중심부에 파라과이라고 하는, 육지로 둘러싸인 나라가 있습니다. 파라과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상이한 견해가 있지만, “바다에서 시작되는 강”을 의미한다는 것이 그 곳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 곳에 사는 인디오들은 파라과이 강의 발원지인, 브라질의 습지에 있는 어떤 연못들이 바다만큼 광활하다고 믿었습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파라과이 강은 국토를 종단하면서 그 나라를 양분하고 있습니다. 강의 동쪽에는 완만하게 기복을 이루는 구릉들과 붉은 흙으로 된 비옥한 평야 그리고 울창한 숲이 있습니다. 서쪽은 차코라고 하는데, 주민이 별로 많지 않은 이 지역에는 메마른 초원 지대와 관목 숲과 광대한 습지가 있으며, 습지에는 떼를 이룬 곤충들과 매우 다양하고 다채로운 열대 새들이 살고 있습니다.

파라과이는 땅을 경작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좀더 단순한 생활 방식과 현대의 과학 기술이 대조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제트기와 통신 위성은 세계가 갖고 있는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고층 빌딩들이 수도 아순시온의 스카이라인을 뚜렷이 형성하고 있습니다. 동쪽 국경을 따라 흐르는 파라나 강에는 이타이푸라는 수력 발전 시설이 있는데, 이것은 세계의 다른 어떤 수력 발전 시설과도 견줄 수 없는 발전 용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라과이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나라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초기 주민들은 과라니 인디오들이었습니다. 이 나라에 온 최초의 백인들은 1520년경에 알레호 가르시아의 통솔 아래 들어온 포르투갈 탐험가들이었습니다. 그 후 10년 동안 스페인 사람들이 현재의 아순시온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파라과이는 1811년까지 스페인의 속국이었지만, 과라니어는 결코 정복자들의 언어로 대치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음악적인 특성이 있는 아름다운 언어인 과라니어는 오늘날 파라과이 사람 대다수의 모국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스페인어와 더불어 공용어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유럽의 탐험가들이 도착한 지 몇십 년 후에 예수회 수사들이 와서 과라니족을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시켰습니다. 그 당시 과라니족은 형상이나 사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회 수사들은 과라니 인디오들을 공동 거주 부락에 모아 놓고는 그 곳에서 그들에게 가톨릭 의식과 찬송가를 가르치는 한편 공예와 기술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수회 수사들은 인디오들의 노동력으로 벌어들인 수익의 일부를 인디오들에게 기본적인 생활 필수품을 제공하는 데 사용하였지만, 자신들의 부와 세력을 얻기 위해 그 마련을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스페인 지주들은 이 점을 시기하였습니다. 그들은 스페인 왕 카를로스 3세에게 예수회 수사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하였습니다. 과라니족이 아니라 가톨릭 이주민들이 터뜨린 이러한 불만이, 1767년에 스페인이 예수회 수사들을 스페인 제국에서 추방하게 만든 주된 요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회 수사들이 가르쳐 놓은 가톨릭교는 과라니족의 생활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과라니족은 가톨릭교의 외적인 형식을 받아들이는 한편, 많은 경우 일부 토착 신앙에 고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미신이 번성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또한 가톨릭교를 받아들임으로 그들의 생활은 가톨릭 교직자들의 강력한 영향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종교적 유산은 이 나라에 평화를 가져오지 못하였습니다. 전쟁은 파라과이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이 나라 사람들의 생활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1864년부터 1870년까지 파라과이는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의 지휘 아래 브라질, 아르헨티나 및 우루과이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결과는 끔찍하였습니다. 입수할 수 있는 기록에 의하면, 전쟁 초기에 이 나라 인구는 대략 100만 명이 넘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인구가 22만 명 정도였으며, 그 중 적어도 19만 명은 여자와 아이들이었다고 합니다. 뒤이어 다른 전쟁들도 벌어졌습니다. 한 전쟁은 차코에 대한 소유권 문제로 볼리비아와 벌였던 분쟁이었고, 다른 전쟁들은 정치적인 불안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파라과이에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종종 무력에 호소한다고 해도 아마 별로 놀랄 일이 못 될 것입니다.

바로 이 나라에 여호와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이 전해졌는데, 우선 1914년 이전에는 우편으로 보낸 성서 전도지를 통해서, 그리고 1925년과 그 이후에는 직접 사람을 통해서 전해졌습니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 또 다른 강, 즉 파라과이 강이나 파라나 강이 아닌 “생명수의 강”으로부터 나온 물을 지상 전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곳에서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계시 22:1.

왕국 진리의 도착

후안 무니스는 당시 워치 타워 협회 회장인 J. F. 러더퍼드로부터, 스페인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여 지구상의 그 지역에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조직하고 확장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1924년 9월 12일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였는데, 그 후 얼마 안 있어 왕국 소식을 전하기 위해 우루과이로 그리고 파라과이로도 혼자 여행을 하였습니다. 성서 진리의 씨는 뿌려졌지만 발전은 거의 없었습니다.

1932년에 파라과이는 또다시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볼리비아와의 전쟁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나라의 인적 자원이 크게 감소하였습니다. 이 나라의 경제에 그리고 왕국의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외국에서 올지도 모를 사람들의 안전에 좋지 않은 영향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면전이 벌어지고 있던 1934년에 아르헨티나 지부는 세 명의 여호와의 증인을 파라과이로 보내어, 그 곳에 있는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에게 “생명수”를 거저 마시라는 초대를 발하게 하였습니다. 이 세 명의 형제들은 마르톤피, 코로스, 레박스였습니다.계시 22:17.

교직자들의 열띤 반대

레박스 형제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 해 10월에 우리는 더 내륙에 있는 벽지로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적 두 상자와 각자의 옷가방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순시온에서 파라과리까지는 기차를 타고 여행하였지만, 그 곳에서부터는 교통편이 없었기 때문에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우리의 첫 목적지 카라페과까지는 걸어서 갔습니다. 그 날 밤 우리는 서적을 머리맡에 두고 땅바닥에서 잠을 잤습니다. 이튿날 우리가 증거를 시작하자, 그 마을 사제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우리가 하는 말을 듣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사제와 교인 한 사람은 말을 타고 이웃 마을로 가서 그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는 말을 듣지 말고 우리를 마을에서 쫓아 버리라고 하였는데, 일부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사제가 가하는 이러한 압력 때문에 성서 서적은 거의 전하지 못하였고 심지어는 전한 서적 중 일부를 돌려받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증인들은 카라페과를 기점으로 해서 크고 작은 마을들—키인디, 카아푸쿠, 비야플로리다, 산미겔—을 차례차례 걸어서 방문하였습니다. 그 형제들은 산후안바우티스타에 도착하기 위해 하루 종일 걷고, 한밤중이 될 때까지 계속 걸었으며, 들에서 잠을 잔 후에 다음날 아침부터 또 계속 걸었습니다. 그 마을에 도착하자 그들은 먼저 경찰서를 방문하여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경찰관들은 그 증인들을 존경심을 가지고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형제들은 온종일 공개 봉사를 하면서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아침, 형제들이 세를 내어 묵고 있던 오두막집 밖으로 마르톤피 형제가 걸어 나왔을 때 놀라운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 집 안에 있던 레박스 형제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늘은 새로운 일이 생겼네.” 그 전날 그들이 전했던 출판물이 갈기갈기 찢겨진 채 오두막집 주변에 널려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조각들에는 욕설과 추잡한 표현들이 쓰여 있었을 뿐 아니라 형제들이 그 마을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하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 경찰관이 와서 그들을 체포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바뀌게 되었습니까? 레박스 형제는 후에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유를 묻자 그들은 우리에게 신문을 보여 주었는데, 그 신문에는 우리가 복음 전파자로 가장한 볼리비아 스파이라고 고발하는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 신문사의 국장은 그 지역의 유력한 사제였습니다.”

아순시온으로 돌아옴

두 명의 증인은 죄수가 되어 아순시온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것은 걸어서 가야 하는 긴 여행이었습니다. 한 경찰서에서 다음 경찰서로 갈 때마다 항상 무장한 호위병이 그들과 동행하였습니다. 길을 갈 때 어떤 사람들은 큰 소리로 욕을 하면서 그들에게 돌멩이를 집어 던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경찰관들은 형제들을 존경하는 태도로 대하였고, 심지어 스파이라는 고발은 어처구니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말을 탄 경찰관이 형제들의 짐을 운반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한 경찰관은 심지어 마르톤피 형제를 자기 말에 타게 하고는, 자신은 걸어가면서 레박스 형제가 하느님의 왕국에 관해 해주는 말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키인디에서 형제들이 군에 넘겨지자 대우가 가혹해졌습니다. 형제들은 14일 동안 영창에 갇혀 있었는데, 눕거나 서는 것이 금지된 채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모욕을 당하고 말채찍으로 맞았습니다. 후에 파라과리에서는 총검으로 무장한 12명의 군인의 감시 아래 수갑이 채워진 채 기차역으로 보내졌습니다. 그 곳에서 그들은 아순시온까지 가는 남은 여정을 위해 다시 경찰에 넘겨졌습니다.

그 수도에서 투옥되어 있던 환경도 역시 가혹하였지만, 형제들은 개인 소지품으로 여전히 가지고 있던 성서를 사용하여 다른 수감자들에게 증거를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수도에서 일 주일간 감금된 후에 마침내 경찰 서장실로 보내졌습니다. 내무부 장관인 리바롤라 대령도 거기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리바롤라 대령은 산후안바우티스타의 신문에서 우리 형제들이 고발되었다는 소식을 읽고는 군 지휘관들에게 급히 전보를 쳐서 형제들을 죽이지 말고 반드시 수도로 돌려 보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레박스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발생한 일에 대해 유감을 표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나라가 비록 가톨릭 국가이지만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우리에게는 지금까지 해 온 대로 집집으로 전파하는 일을 계속할 권한이 있지만 우리 자신의 안전을 위해 수도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던 무니스 형제는 그 이야기를 듣자 그 형제들에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있으라는 지시를 하였습니다. 전쟁은 그 이듬해에 끝났습니다. 하지만 체포된 두 형제와 함께 있지 않았던 코로스 형제는 아순시온에 남아 있었습니다.

파라과이의 첫 열매

이 무렵, 한 파이오니아가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그 남자는 레바논 출신의 이주민인 자기 장인을 위해 아랍어로 된 출판물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남자의 장인인 훌리안 하다드는 자신이 보물처럼 여기게 된 책을 한 권 받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발견하였다고 확신한 그는 그 진리를 자녀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협회에 편지하여 이웃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출판물을 요청하였습니다. 몇 해 후에 한 파이오니아가 산후안네포무세노에 있는 훌리안을 발견하여 더 많은 영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1940년에 하다드 가족은 침례를 받아, 파라과이에서는 처음으로 그 지역 출신의 침례받은 전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 훌리안과 그의 아들 한 명 그리고 여러 명의 손자녀들은 파이오니아 봉사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렸으며, 훌리안은 77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계속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습니다.

한편, 후안 호세 브리수엘라는 차코 전쟁으로 인해 인생에 관해 어느 정도 진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상을 당하여 볼리비아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전쟁 포로로 있으면서 그는 과부들이 아버지를 잃은 자기 자녀들 때문에 우는 것을 보았고, 가톨릭 사제들이 볼리비아 군인들을 축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비롯한 다른 군인들이 파라과이 군인으로서 그와 비슷한 축복을 받았던 일을 회상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만일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럴 리가 없지. 그렇지만 하느님이 정말 계시다면 그분을 만날 때까지 계속 찾아봐야지.”

전쟁이 끝난 뒤에 훌리안 하다드는 카르멘델파라나에서 후안 호세를 만났습니다. 훌리안은 성서를 가지고, 호세가 자신의 의문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을 찾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오래 전에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느님은 “그분을 더듬어 찾”는 사람들이 “그분을 실제로 발견”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사도 17:27) 얼마 안 있어 후안 호세는 자신이 참 하느님 여호와를 발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명 4:35, 「신세」 참조; 시 83:18) 호세는 1945년에 침례를 받았고, 그의 아내 호비타는 1946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또한, 성서 진리는 산로렌소의 어느 시장에 있는 한 야채 판매대에서도 토의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전파를 하고 있던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라 단지 증인들이 가르치는 내용에 관심을 나타냈던 한 여자였습니다. 세바스티아나 바스케스는, 글은 몰랐지만 관심을 가지고 잘 들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읽는 법을 배웠고, 1942년에 침례를 받아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작은 집단에 대한 믿음의 시험

당시에는 부회라고 알려졌던 최초의 회중이 1939년에 파라과이에 조직되었습니다. 전도인은 단 두 명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열심 있는 복음 전파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봉사 연도에 야외 봉사를 도합 847시간 했다고 보고하였으며 1740부의 서적과 소책자를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개인 집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그 집은 아순시온의 안테케라 가와 타콰리 가 사이에, 지금은 가스파르로드리게스데프란시아 가(이전에는 아맘바이)라고 불리는 곳에 있었습니다. 단지 대여섯 명가량이 가로 세로 4미터 정도 되는 방에서 열린 그러한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이 장소는 1944년까지 잘 사용되었습니다.

그 이듬해에 형제들은 두 대의 전기 축음기를 사용하여 여러 가지 성서 주제에 관해 녹음한 짧은 연설들을 들려주고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교직자들은 몹시 분노하여, 여호와의 증인이 더는 아무 활동도 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켜 줄 것을 정부에 탄원하였습니다. 하지만 증인들은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녹음된 그러한 분명하고도 성경적인 강연이 효과가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 후 몇 해 동안, 여러 언어로 녹음된 그러한 강연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파라과이의 남부 지역에 정착한 폴란드, 러시아, 독일 및 우크라이나계 이주민 사회에 전파하였습니다.

이러한 지역에서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는 엥카르나시온 근처에 있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부락에 살고 있던 골라시크 가족이 있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로베르토 골라시크는 축음기와 출판물을 준비한 다음 말을 타고 여러 부락으로 가서 증거를 하였습니다. 이 곳에서는 처음에 집회가 한 달에 한 번 열렸고, 그 다음에는 한 달에 두 번, 그리고 나중에는 일 주일에 한 번씩 열렸습니다. 어떤 때는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언어 집단 출신 사람들이 참석하기도 하였지만, 모두가 서서히 성서 진리의 순결한 언어를 익혀 나가고 있었습니다.—스바냐 3:9, 「신세」 참조.

안타깝게도, 당시에 증거하는 일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에 계속 머무르지는 못하였습니다. 아순시온에 있던 협회 서적 보관소의 감독자가 개인적인 견해를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여호와의 조직에서 이탈하자 다른 사람들도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왕국 선포자들의 수는 1943년에 33명이던 것이 1944년에는 8명으로 감소하였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호와께서는 충성스러운 증인임을 나타낸 사람들을 축복하셨으며, 그리하여 조직은 또다시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시 37:28, 「신세」 참조.

선교인들이 이 곳의 생활 방식을 배우다

파라과이에 있는 양 무리들의 복지에 대해 사랑에 찬 관심을 가지고 있던 아르헨티나의 지부 사무실에서는 그웨니드 휴스를 보내 활동을 감독하게 하였습니다. 그가 1945년에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자, 유안 데이비스와 그의 아내 델리아 데이비스를 파견하는 마련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필요한 여행 서류를 받는 일이 지체되는 바람에, 길르앗 학교 졸업생인 할러스 스미스가 먼저 도착하여, 데이비스 형제와 자매가 1945년 후반에 강을 왕래하는 배를 타고 아순시온에 도착하였을 때 오히려 그들을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며칠 후에, 역시 길르앗 졸업생인 앨버트 랭과 앤절라인 랭 부부가 비행기로 도착하였습니다. 이어서 더 많은 선교인들이 도착하였습니다. 선교인들의 숙소로, 또한 그 곳 회중의 집회 장소로도 사용할 수 있는 집을 하나 세내었습니다. 선교인들은 모두 봉사하려는 열망이 간절하였지만, 물론 이 곳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익숙해질 필요도 있었습니다.

선교인들은 이 곳 사람들이 성서 지식은 부족하지만 종교심은 매우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시마다 그 도시의 수호 “성인”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주로 “동정녀 마리아”였습니다.

선교인들은 이 곳 사람들의 관습을 알게 됨에 따라, 그러한 관습 중 많은 부분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시장에는, 과일과 야채가 많이 쌓여 있었고, 여자들은 물건을 잔뜩 담은 넓은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았습니다. 상점에는 냔두티라고 알려진 손으로 뜬 레이스가 있었는데, 매우 정교하고 올이 가늘어서 마치 거미줄처럼 보였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일찍 일을 시작한다는 것과 한낮에는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시간에 낮잠을 자기 위해 모든 일을 중단한다는 것도 이내 알게 되었습니다. 선교인들이 왕국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사람들의 집을 방문할 경우, 문 앞에 서서 손뼉을 쳐야 한다는 것과 초대를 받아야 마당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도 배워 알게 되었습니다. 선교인들은 사람들에게서 친절함과 소박함과 따뜻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선교인들은 또한 그들의 언어로—스페인어뿐 아니라 과라니어로도—그들과 대화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1946년 4월, 선교인들이 온 지 얼마 안 되어 데이비스 부부는 다시 아르헨티나로 임명되었습니다. 집회에 참석한 지 겨우 몇 개월밖에 안 된 파블로 오소리오 레이에스가 아직 침례를 받지 않았는데도 「파수대」 연구를 사회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그렇게 빨리 임명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나라 말을 할 수 있었고 영적으로 잘 발전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어려운 일들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오소리오 형제는 후에 이렇게 썼습니다. “「파수대」 연구 사회자로 임명되자마자 나는 틀린 대답을 바로잡아 주어야 했지요. 대답을 한 어떤 사람은 몹시 화가 나서 바로 그 자리에서 내게 싸움을 걸어 왔습니다. 당연히 나는 거절하였고, 한 선교인이 도와 주어 사태를 진정시켰습니다. 책임을 조금씩 맡는 것보다 장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없더군요.” 안타깝게도, 성질이 불 같은 그 사람은 후에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조직을 강화함

1946년이 다 가기 전에 신권 활동의 중심지로서 사용될 더 큰 시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여섯 명의 선교인—윌리엄 쉴링거와 펀 쉴링거 부부 및 다른 네 명의 선교인—이 더 도착하였습니다. 마리스칼로페스 가에 있는 마당이 넓은 집을 하나 세내었습니다. 그 집은 국방부 건물 바로 맞은편에 있었습니다. “왕국회관”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정문에 눈에 띄게 걸려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군사 업무와 관련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 간판을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해 9월 1일에 협회는 파라과이에 지부를 설립하였고, 임대한 지 얼마 안 된 그 건물은 지부 사무실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조직이 발전함에 따라 증거하는 일에 한층 더 박차가 가해졌지만, 반대도 더욱 거세어졌습니다. 교직자들이 고해실을 이용하여 정보를 얻고, 가톨릭교인인 우편 집배원들이 워치 타워 출판물을 배달하지 못하도록 겁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11월에는 휴스 형제가 아르헨티나에서 와서, 당시에 활동하고 있던 네 개의 조그만 회중을 방문하여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는 길르앗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국제 대회인 즐거운 백성 신권 대회에 참석하였는데, 그 대회의 회기는 20개 언어로 진행되었고 마지막 날에는 8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강연을 듣기 위해 스타디움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형제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형제들은 역경에 직면해서도 계속 봉사하기 위해 그러한 격려가 필요하였습니다.

혁명의 와중에서

1947년 초에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정부군은 선교인 집 앞의 보도 위에 기관총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하루 동안 전투가 벌어진 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다가 3월 7일에 상황이 다시 심각해졌습니다. 거리에서 공공연하게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아순시온 시내에 있던 경찰 본서는 반란군에게 습격당하였습니다.

사령관은 군사령부 역시 공격을 당할까 봐, 선교인 집을 군사용으로 사용하겠다고 요구하였고 형제들에게 사흘 안에 비우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들이 간청을 하여 그 기간은 열흘로 연장되었습니다. 혁명의 와중에서 그리고 주택이 몹시 부족한 시기에, 형제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활동 즉 주택 물색 작전을 펼쳤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파라과이의 고위 당국자들이 자신의 증인들의 존재를 계속 의식하고 있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구할 수 있는 적당한 집은 대통령 관저 바로 인근에 있는, 대사관 거리에 있는 건물 뿐이었습니다.

그 혁명에 관하여 지부의 종은 1947년 3월 26일자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 곳의 사태는 날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비행기 한 대가 상공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비행장에 폭격을 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비행기는 지금 고사포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수백 명의 군인이 대통령 관저를 에워싸고 있으며, 그들이 발사하는 총소리가 몹시 시끄럽습니다. 대기는 화약 연기로 푸르스름하고, 그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혁명군은 이 도시의 매우 가까운 곳까지 와 있습니다. 우리는 연이어 계속되는 총소리와 폭탄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 식량 사정도 날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혁명군이 선교인 집에서 열 구획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진입해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정부군은 그들을 퇴각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기간 내내 형제들은 최선을 다해 증거를 수행하였습니다. 혁명은 약 여섯 달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 기간은 참으로 시련이 되었으며, 특히 이 지역 출신의 형제들에게 그러하였습니다. 당국자들은 형제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는데, 형제들이 그리스도인 중립을 유지하였기 때문입니다.

함께 모이는 일을 그만두지 않음

혁명이 끝나자 이 나라는 정상 상태로 회복되기 시작하였으며, 아르헨티나로 피난 갔던 일부 사람들도 돌아왔습니다. 대회를 열 계획을 세웠으며, 파라과이에서는 처음으로 1948년 6월 4-6일에 대회가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소란을 일으키기 위해 분주히 활동하였습니다. 6월 3일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대통령과 각료들은 투옥되었습니다. 수도에 일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대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적절한 대회 장소를 빌리려는 노력은 좌절되었지만, 여호와께서는 다른 마련을 해놓으셨습니다. 군사령부 맞은편에 있던 이전 선교인 집이 비어 있었습니다. 그 집 주인은 형제들이 대회를 열 수 있도록 그 집을 빌려 주겠다고 승낙하였습니다. 이 곳은 소란이 일고 있던 시내 중심가에서 떨어져 있었습니다. 마당은 대회 회기를 위해 사용할 수 있었고, 건물은 다른 도시에서 온 대표자들의 숙소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대회에 온 사람들은 파라과이 관습대로 모든 사람과 악수를 하며 서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해서 “조만간 모든 인류가 경험하게 될 기쁨”이라는 강연을 들었습니다. 파라과이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시기 적절한 강연이었습니다!

경찰이 폭도를 저지하다

여호와의 증인이 파라과이에서 성서 교육 활동을 수행하기 시작한 처음부터 교직자들의 반대가 자주 있었습니다. 1948년에, 이 나라 남부 지역에 있는 작은 도시인 유티에서 순회 감독자는 도심지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공개 강연을 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공원은 가톨릭 교회 바로 맞은편에 있었습니다. 그 지역의 사제는, 증인들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가톨릭교인들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에게 그 강연을 못하게 하라고 강력히 촉구하였습니다. 강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교회 앞에 사람들이 모여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길 맞은편 공원에 여호와의 증인—여덟 명—이 있는 것을 보자, “프로테스탄트는 물러가라! 프로테스탄트는 물러가라!” 하고 소리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강연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꽤 많은 사람들은 그 폭도가 무서워 공원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경찰은 그 폭도 앞에 기관총을 설치해 놓고, 누구든지 경계선을 넘어오면 발포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형제들이 그 지역에서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을 때까지 폭도를 저지하였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그 강연에 대해 일 주일 내내 광고해 왔기 때문에, 관심 가진 사람들에게 그 강연을 들을 기회를 꼭 주고 싶었습니다. 그 지역에 사는 한 증인이 자기 집을 사용하도록 제공하였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또 다른 사람들이 와서 자기들도 그 강연을 듣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순회 감독자는 그 날 그 강연을 두 번 하였습니다. 이 곳 유티에서, 두 가지 형태의 숭배 즉 참 숭배와 거짓 숭배가 뚜렷이 대조되는 열매를 맺고 있음이 매우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추방당할 위기에 처한 선교인들

1992년까지 정부에서 승인한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였지만, 파라과이는 공식적으로 역사 전반에 걸쳐 종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유지해 왔습니다. 어려움을 겪은 곳은 대개 시골 지역으로, 그 지역 사제나 광신적인 추종자들이 사람들을 선동하였을 때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1950년 초에는, 워치 타워 선교인들을 파라과이에서 추방하려는 공식적인 시도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법에서는 모든 이민자가 국토 관리부에 등록을 하고 직업이 있다는 증거를 제시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선교인들이 등록을 하려고 하자, 선교인들은 등록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선교인들의 파라과이 체류는 사실상 불법이라서 체포 사유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선교인들이 하는 일의 성격에 대해 당국에 거짓 보고가 들어간 것 같았습니다.

일부 관리들은 호의적인 태도를 나타냈지만, 그들의 노력은 물론 미국 대사관의 노력도 달걀로 바위를 깨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많은 경우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누구를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번 경우에는, 형제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한 사람이 마침 대통령 집무실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형제들은 그 사람과 친분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그 사람을 통해서 대통령의 개인 비서에게 선교인 집에서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고 초대하였습니다. 그 초대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일로 인해, 선교인들이 하는 일의 진정한 성격과 그 일이 국가에 미치는 유익한 영향에 대해 토의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등록 문제도 거론되었으며, 대통령의 비서는 상당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1950년 6월 15일에, 선교인들 가운데 한 명이 처음으로 이민자로 등록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그는 파라과이에 머물러서 성서 교육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법적인 권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시골 지역에서 고달팠던 하루

그 당시 순회 감독자의 활동에는 특별한 어려움이 뒤따랐습니다. 그러한 어려움 가운데에는 여러 시간 동안 여행하는 일이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폭력적인 반대를 인내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길르앗 졸업생인 로이드 거머슨은 1952년에 순회 감독자로 전 시간 봉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유티 북쪽에 있는 한 회중에서 시간을 보낸 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고하였습니다. 인근에 있는 구역은 봉사한 지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먼 곳에 있는 마을에서 증거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여섯 명의 형제와 네 명의 자매로 이루어진 집단이 새벽 4시에 출발하였습니다. 한 살배기 아기를 데리고 온 자매를 제외하고 모두 걸어서 갔습니다. 오전 11시에 구역에 도착해서 두 집단으로 나누어 봉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거머슨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봉사를 시작한 지 정확히 한 시간 후인 정오 12시에 초가 지붕을 한 어떤 집에 앉아서 관심을 나타내는 한 가족에게 증거를 하고 있었는데, 보안관과 16세 된 군인이 들어와서 우리에게 총구를 겨누었습니다. 보안관은 그 가족에게 출판물을 우리에게 돌려주라고 단호하게 말한 다음, 우리에게 경찰서까지 같이 가자고 명령하였습니다. 경찰서에 도착해 보니, 이미 다른 전도인들도 붙들려 와 있었습니다. 나는 보안관과 이야기해 보려고 노력하였지만, 그가 과라니어만 하고 스페인어는 할 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분노로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우리 모두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명령하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1킬로미터쯤 걸은 후에 우리는 나무 밑에 앉아서 점심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형제 자매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도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 보안관이 군인 한 명과 함께 긴 채찍을 들고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형제 자매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생각하여 나도 도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냇물을 건너뛰다가 선글라스를 땅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선글라스를 주우려고 몸을 굽히는데 날카로운 채찍 소리가 들리면서 채찍이 내 등을 때렸습니다. 그런 다음 보안관은 말발굽으로 나를 밟고 지나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에 대해서 좀 알고 있던 나는 말 앞에서 봉사 가방을 앞뒤로 흔들어 댔습니다. 그러자 말은 나에게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보안관은 다른 형제 세 명을 채찍으로 거듭 내려친 다음, 70세 된 한 파이오니아 자매를 말발굽으로 밟고 지나가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보안관과 군인은 말머리를 돌려 마을로 돌아갔고, 우리는 우리 길을 계속 갔습니다. 심하게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몇 사람의 등에는 검붉은 채찍 자국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통증을 느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저녁 8시였습니다. 16시간이나 걸어 다닌 것입니다.’

몇몇 작은 마을과 촌락에서 이러한 일들이 있었지만, 왕국 선포 활동은 계속 활기차게 진행되었습니다.

정부의 변화에 따라 대응하다

1954년은 파라과이의 정치사에서 중대한 시기였습니다. 페데리코 차베스 씨가 이끄는 정부가 전복되었습니다. 7월 11일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장군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로써 34년 이상 지속된 군사 통치 기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일은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그 해 11월 25-28일에 나흘간의 지역 대회가 마련되었습니다. 파라과이는 계엄령하에 있었으므로, 어떤 모임이든지 개최하려면 경찰의 허가가 있어야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문제가 생길 것이었습니까? 형제들은 이미 한 강당을 빌릴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회를 위해 경찰의 허가를 얻으려고 갔을 때 대회를 열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한 경찰관은 사제들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여러 차례 방문을 하여 수없이 설득을 한 끝에 마침내, 허가는 해주지 않겠지만 대회를 여는 동안 경찰이 간섭은 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형제들은 슬기롭게도, 강연 초대장이나 신문을 통해 대회를 광고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초대는 구두로 하였습니다. 대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종교적 반대가 계속되다

가톨릭 교직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막으려는 노력을 잠시도 멈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1955년 말경에, 수도에서 동쪽으로 7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피리베뷔에서 소규모 순회 대회를 열 마련을 하였습니다. 대회가 열리던 첫날 저녁 해가 진 후에, 그 교구 사제가 모임을 해체시키기 위해 몽둥이와 벌채용 칼로 무장을 한 폭도를 이끌고 왔습니다. 그 지역의 한 학교 교사가 중재를 하여, 폭도는 거리로 물러갔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저녁 내내 소리를 지르고 돌을 던지며 폭죽을 터뜨렸습니다.

1957년 3월 1일에는, 수도의 동남쪽에 있는 도시 이타에서 또다시 종교적 반대가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순회 대회가 열리기 오래 전에 이 도시에서 대회를 열기 위한 법적인 조처를 취해 놓았습니다. 이타 시 당국은 물론 수도의 경찰로부터도 대회를 열기 위한 법적 허가를 받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타에 도착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뭔가 잘못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타는 마치 유령 도시 같았습니다. 거리는 텅 비었고, 창문과 문들은 닫혀 있거나 셔터가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교구 사제는 이 대회가 열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맹세하였고,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온갖 조처를 다 취해 놓았습니다. 심지어 비행기를 한 대 마련하여 그 지역에 수많은 전단을 뿌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전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1957년 3월 1일 금요일 오후 5시 30분에, 이타 시와 여러 지역에 사는 가톨릭교인은 모두 교회 앞에 큰 무리를 지어 모일 것이다. ·⁠·⁠· 6시 30분에는 ‘여호와의 (거짓) 증인’을 거부하는 가톨릭교인들의 의지를 분명히 천명할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이단에 속한 자들은 이타에서 어떠한 대회도 가질 권리가 없다.”

형제들은 사제 아얄라의 계획에 관해 알고서, 대회 장소를 이미 빌린 다소 개방된 시설에서 한 형제의 집으로 옮기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집은 만일의 경우 공격을 받아도 더 안전할 것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평화를 사랑하는 약 6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형제의 집에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두 구획 떨어진 곳에서는 시시각각 늘어나는 1000명도 더 되는 군중이 사제의 비난 섞인 장황하고 신랄한 연설과 폭력을 선동하는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군중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사제의 행동에 동조하지는 않았습니다. 파라과이의 한 공군 소위인 솔라노 가마라는 사제를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는 또한 사제의 동료들에게도 말을 걸어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아얄라의 동료 사제 한 사람은 몹시 격분하여 그 소위를 때려 입술 언저리를 크게 찢어 놓았습니다. 이를 본 군중은 이리 떼처럼 그 소위에게 달려들어 그를 때려서 머리에도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폭도들은 그의 셔츠를 찢어서 장대 끝에 달아 불태웠습니다. 가마라는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도망하였습니다.

피에 굶주린 폭도들은 이제 대회 장소를 향하여 “여호와를 타도하자!” “여호와는 죽어라!” 하고 소리쳤습니다. 폭도들이 대회가 열리고 있는 집으로 다가가자 미약하나마 있었던 경찰의 보호마저 사라져 버렸습니다. 형제들은 집 문 안쪽에다 바리케이드를 쳤습니다. 일부 폭도는 이웃집을 통하여 뒤뜰로 진입하려고 하였지만, 그 이웃 사람은 단호한 태도로 그들이 자기 집을 통과하게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웃 사람은 자기가 아팠을 때 지금 공격을 받고 있는 집에 사는 증인이 자기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일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형제들은 여호와를 신뢰하면서 최선을 다해 대회를 진행해 나갔습니다. 형제들 모두는 안전을 위해 그 집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다음날, 아순시온에 있는 경찰 본서에서, 증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 지역의 경찰력으로는 폭도들에 대처할 수 없으므로 대회 허가를 취소한다는 통지가 왔습니다. 대표자들은 버스를 한 대 세내어서, 대회를 마저 끝마치기 위하여 아순시온에 있는 지부 시설 겸 선교인 집을 향해 행복한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며 출발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믿음의 시험에 직면하였지만, 그 일로 인해 더욱 강해졌습니다.

법적 인가

이타에서 폭도들의 난폭한 행동이 있은 뒤에 지부 사무실에서는, 사도 바울이 취한 행로를 본받아 파라과이에서 ‘좋은 소식을 법적으로 확립’하기 위한 조처를 취하였습니다. (빌립보 1:7; 사도 16:35-39) 그로 인해 좋은 결과가 있었습니다. 파라과이에서 요구하는 모든 법적 요구 조건이 충족되자, 1957년 10월 14일에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는 법인으로 인가를 받았고, 파라과이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대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대통령령으로 여러 신문에 공표되었습니다. 이 일은 필요한 부동산을 구입하는 데 매우 유리하게 작용하였고, 선교인들을 위한 영구 숙소를 구하는 일도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처음 보는 영화

1954년부터 1961년까지는, 대중에게 여호와의 조직을 알리는 데 있어서 영화를 사용하여 매우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파라과이 동부의 여러 지역에서 협회의 영화를 상영할 마련을 하였습니다. 5년 동안의 관람자 수를 계수해 보니,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참석한 사람은 7만 명이 넘었습니다.

영화를 상영하는 데 필요한 다른 모든 장비와 더불어 발전기를 시골 지역으로 운반하는 일은 참으로 모험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영화 상영 장소로는 대개, 비어 있는 축구장을 선택하였습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장비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확성기로 대중을 초대하는 광고를 하였습니다. 기물을 파손하려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이따금 있었습니다. 관람자 수는 때에 따라 달랐습니다. 헤네랄아르티가스에서는 하루 저녁에 영화를 본 사람이 약 1300명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는 시내에서 8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집회를 보던, 전도인이 20명도 채 안 되는 한 회중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고 장면이 바뀔 때면 사람들이 들떠서 웃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려 왔습니다. 어쨌든, 시골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많은 경우 처음 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영화로 인해 그 지역의 증인들과 일반인들이 세계 전역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어느 정도의 규모로 활동하고 있는지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아낌없이 바친 선교인들

전도인 수가 증가함에 따라, 선교인들은 전도인들이 장성을 향하여 발전하도록 돕기 위해 일치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선교인들이 1953년에 뉴욕 시에서 열린 신세계 사회 대회에 참석하는 특권을 갖게 되었을 때, 그로 인한 좋은 결과가 뚜렷이 나타났습니다. 선교인들이 없는 동안 파라과이 형제들이 아순시온 회중을 감독하는 책임을 돌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야외 봉사 활동에서 여러 가지 신기록을 달성하였습니다. 파라과이 형제들이 책임을 아주 잘 돌보았기 때문에, 선교인들이 돌아왔을 때에도 파라과이 형제들에게 임명된 일을 계속 돌보도록 요청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선교인들은 다른 지역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교인들에게는 할 일이 많았습니다. 베르너 아펜젤러는 파라과이에 온 지 넉 달쯤 되어 스페인어를 약간이나마 할 수 있게 되자, 엥카르나시온 지역에서 순회구를 돌보도록 임명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도로는 아직 포장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행은 대개 걸어서 혹은 말을 타고 하였습니다. 순회구 전체에 전도인이 100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격려와 훈련이 전도인들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몇 년 후에, 로베르트 골라시크의 아들이며 이 지역 출신인 라디슬라오 골라시크가 순회 활동을 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1961년 말에는, 길르앗 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선교인들이 파라과이에서 활동한 지 15년이 되었습니다. 당시 파라과이에는 411명의 증인이 22개 회중으로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파라과이에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59만 4000시간 이상이 바쳐졌습니다. 당시에 선교인들은 5개의 선교인 집을 기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이 선교인 집들은 아순시온, 엥카르나시온, 비야리카, 코로넬오비에도, 페드로후안카바예로에 있었습니다. 선교인들은 또한 인구가 많은 이 중심 도시들뿐 아니라 주변 지역에도 나가 전파하였습니다. 1961년까지 50명의 선교인이 파라과이에서의 활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건강 악화나 그 밖의 여러 가지 이유로 29명의 선교인은 어쩔 수 없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파라과이에서 왕국 권익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1961년 12월에는, 길르앗 10개월 과정의 첫 졸업생인 엘머 피시와 메리 피시가 파라과이에 도착하였습니다.

자체 모임 장소들을 건축함

이 무렵에, 아순시온의 형제들은 왕국회관을 지어 봉헌하였는데, 파라과이에서 형제들이 소유하게 된 첫 번째 왕국회관이었습니다. 벽돌과 시멘트로 지은 훌륭한 건물로서, 200명 이상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땅을 파고, 콘크리트를 비비고, 벽돌을 문질러 닦고, 페인트칠을 하고, 청소를 하는 일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참여하는 모습은 그 지역 사회에 훌륭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관찰자들은 이들이 부지런한 일꾼들임을 분명히 보게 되었습니다.

파라과이 남부 지방의 시골 지역에 있는 바카이에서, 아직 회중이 되지 않은 작은 집단의 증인들은 집회에 매우 많은 사람들이 오는 것을 보고서 자기들에게도 왕국회관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한 벌목업자와 계약을 맺어, 자기들에게 건축 자재와 약간의 돈을 주면 자기들이 한 팀을 이루어 벌목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왕국회관이 다 지어지자, 멀리 떨어진 곳에 살던 관심을 가진 네 가족이 집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자기들의 농장을 팔고 왕국회관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였습니다.

후에, 순회 대회와 지역 대회를 위한 시설들도 건축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여러 번, 마르틴 페스카도르 클럽의 모임 장소를 사용하였고, 또한 파라과이 국립 대학이나 아메리칸 스쿨의 시설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 초에 토지를 기증받아 그 곳에 자체 대회 회관을 건축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대회 회관은 여러 해에 걸쳐 단계적으로 건축되었습니다.

적절한 지부 시설이 마련되다

활동이 증가되고 그에 따라 여호와께서 축복을 하시자, 좀더 적절한 지부 시설을 마련할 필요도 생겼습니다. 여러 해 동안 여러 집을 임대하여 지부 시설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1962년에, 당시 워치 타워 협회 회장인 네이선 노어는 왕국회관도 포함된 지부 시설 겸 선교인 집을 지을 목적으로 아순시온에서 좀더 좋은 주거지에 부동산을 구입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 부동산은 파라과이의 주경기장에서 두 구획 떨어진, 수도의 주요 거리 중 하나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설계도가 완성되고 시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에, 1965년 1월에 건축이 시작되어 10개월 이내에 공사가 완공되었습니다. 1966년 초에 노어 형제가 지구 감독자로 방문하던 중에 형제들과 함께 그 새로운 시설을 봉헌하는 데 참석하게 되어 형제들은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 건물의 위치 때문에, 아순시온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이 있다는 것을 매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운동 경기를 보러 가기 위해 이 거리를 지나가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도 여호와께서 파라과이에 그분의 증인들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관리 체제

1976년 2월 1일에는, 세계 전역에 있는 협회의 지부 사무실들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지부 감독자를 두는 마련 대신 지부 위원회가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앨버트 랭, 윌리엄 쉴링거, 맥스 로이드, 로이드 거머슨, 해리 케이스, 엘머 피시가 지부 감독자로서 다양한 기간 봉사해 왔습니다. 이들 모두는 왕국 활동에 훌륭하게 기여하였습니다. 이제 새로운 마련이 시행되어, 장성한 남자들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전국의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감독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엘머 피시가 지부 위원회의 조정 위원으로 지명되었고, 찰스 밀러와 이사아크 가빌란이 지부 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피시 형제와 밀러 형제는 둘 다 길르앗 졸업생이었습니다. 파라과이 사람인 가빌란 형제는 파라과이에서 13년간 전 시간 봉사를 해 왔습니다.

또 다른 공식적인 반대의 물결

여호와의 증인은 전세계적으로 정치 문제에 대해 중립을 유지합니다. 증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일부가 아[닙니다].” (요한 15:19) 증인들은 또한 “여러분 자신을 지켜 우상을 멀리하”라는 성서의 교훈을 염두에 두고, 우상 숭배라고 여겨지는 국가주의 의식에는 참여하지 않습니다. (요한 첫째 5:21) 정부 관리들은 자신들의 생활 자체가 정치 제도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고 또한 국가주의를 국민을 연합시키는 수단으로 여기므로, 여호와의 증인이 취하는 입장을 이해하기가 처음에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 단체들은 심지어 교직자들까지도 주저함 없이 정치 및 국가주의 의식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교직자들은 자주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정부 관리들에게 여호와의 증인과 관련하여 의심의 씨를 뿌려 놓습니다.

1974년 10월 31일자 서신에서, 당시의 종무국 총책임자인 만프레도 라미레스 루소 박사는 여호와의 증인의 신앙과 조직에 대해 알려 달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1976년 2월 25일에는, “모든 교육 기관”에서 “매일 국기 게양식과 국가 제창”을 할 것을 요구하는 정부의 포고령이 내려졌습니다. 흥미 위주의 잡지인 「오솔길」(El Sendero)이라는 종교 출판물 9월 3-17일자판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제목의 비방 기사를 한 면 가득히 실었습니다. 그에 뒤이어 집권 여당의 관보인 「조국」(Patria)에서도 1977년 3월 14일에 “광신”이라는 제목의 유사한 비방 기사를 실었습니다.

한편, 여호와의 증인의 지부 사무실의 대표자들은 소환되어 종무국 총책임자와 면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면담에 뒤이어 여호와의 증인의 가르침을 요약하여 작성해 두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특히 국기와 국가 그리고 군 복무와 관련된 여호와의 증인의 입장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며칠 후에, 오브둘리오 아르게요 브리테스라는 경찰관이 아순시온에 있는 협회 사무실로 찾아와서 여호와의 증인이 1월 6일부터 9일에 열었던 대회에 관한 정보를 요구하였습니다. 그 직후, 파라과이 법무 장관인 클로틸데 히메네스 베니테스 박사가 이전에 종무국에서 고려했던 동일한 주제를 놓고 협회 대표자들을 불러 면담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있은 뒤인 1978년에는, 국가를 부르지 않는 여호와의 증인 자녀들이 학교에서 퇴학당하기 시작하였는데, 다른 학교에 등록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권 박탈—그것이 의미하는 것

1979년 1월 3일에 마침내 “폭탄”이 터졌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을 대표하는 워치 타워 협회의 법적 지위를 박탈한다는 포고령이 발표되었습니다.

그 포고령을 발표하는 신문 표제들로 인해 증인들뿐만 아니라 증인이 아닌 사람들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거의 모든 보도 매체에서 이 사건에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그러한 조처를 찬성하는 보도 매체들도 있었지만 비난하는 보도 매체들도 있었습니다. 「ABC」 신문에서는 그러한 포고령은 “세계 인권 선언 제18조에서 신성한 것으로 규정한 기본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단언하였습니다.

지부 위원회는 금지령에 대한 소식을 듣자마자, 금지령이 어느 정도의 제한을 가하는 것인지는 아직 몰랐지만 지부의 업무를 다른 곳에서 돌볼 수 있도록 일들을 조직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조처를 종교적 박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라고 교육·종교부 장관인 라울 페냐 박사는 선언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은 집회를 개인 집에서 소규모로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다수 형제들의 열심과 용기는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그들의 전파 활동은 제한을 받았습니다. 형제들은 그리스도인 대회로부터 유익을 얻기 위해, 당분간 다른 나라에서 열리는 그리스도인 대회에 참석할 마련을 해야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시작된 경위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만프레도 라미레스 루소 박사가 행정권을 이용하여 독자적으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입니까? 흥미롭게도, 아순시온의 신문 「마지막 시간」(Ultima Hora) 1981년 8월 25일자에서는 만프레도 라미레스 루소와 “몬시뇨르” 호세 메에스가 우정 어린 표정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사진을 크게 실었습니다. 그 사진 밑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로마 교황의 사도 대사인 몬시뇨르 호세 메에스가 교육부의 종무국 책임자인 만프레도 라미레스 루소에게 가톨릭 교회를 위해 봉사한 공로를 인정하여 ‘성 그레고리’ 훈장을 수여하였다.”

금지령이 내려지자, 여기저기서 여호와의 증인을 체포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개인 집에서 소규모 집회를 보거나 다른 사람들의 집에 가서 성서에 들어 있는 희망의 소식을 전하거나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집에서 그들에게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것이 발견되면 체포되어 감금되었습니다.

1981년 10월 8일에서 11일 사이에, 엥카르나시온에 있는 형제 9명이 투옥되었습니다. 아직 체포되지 않았던, 그 지역에 사는 장로인 안토니오 페레이라가 교도소에 있는 형제들이 잘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경찰서장인 율리오 안토니오 마르티네스와의 면담을 요청하자, 경찰서장은 페레이라를 체포하여 경비가 가장 삼엄한 감방에 감금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한편, 이웃 회중에서 온 호세프 시이네르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첫 번째로 투옥된 형제의 어머니 집에 가 보았습니다. 누군가가 그 사실을 경찰에 알려 준 게 틀림없었습니다. 10분도 채 안 되어, 경찰이 나타나서 그를 엥카르나시온 교도소로 호송해 갔습니다!

박해의 불길에 부채질을 하다

금지령이 내려진 후로 몇 년이 지나가자 체포되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형제들은 점차 왕국회관을 사용하며 소규모로 대회를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1984년 한 지방 신문에, 아순시온의 직업 기술 학교에 다니던 네 명의 여호와의 증인 학생이 국가를 부르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일이 보도되면서 그 모든 일이 갑자기 중단되었습니다. 그 일이 도화선이 되어 여호와의 증인을 반대하는 운동의 불길이 한층 더 거세게 타올랐습니다. 그러한 보도에 뒤이어, 학교에 다니던 거의 모든 여호와의 증인 자녀들이 퇴학을 당하였습니다. 이 어린 학생들 중 다수는 다시는 복학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해 5월 2일부터 5일까지 「오늘」(Hoy)이라는 신문에서는 가톨릭 사제 안토니오 콜론이 쓴 증인을 비방하는 일련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 해 말에 새 교육·종교부 장관이 선서를 하고 취임했는데, 그는 전임자의 정책을 계속 따랐습니다. 그가 강력한 국가주의적 사상을 공표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여호와의 증인 자녀들이 이듬해를 위한 취학 등록을 거부당하였습니다. 퇴학당한 여섯 명의 학생과 취학 등록을 거부당한 네 명의 학생을 합하여, 전부 10명으로 이루어진 일단의 학생들을 위해 증인들은 법원에 상소하였는데, 자녀가 믿음을 포기하거나 양심의 지시를 저버리는 일이 없이 자녀를 학교 제도를 통해 교육시킬 여호와의 증인의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법원은 증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교육·종교부에서는 그 사건을 대법원에 상소하였습니다.

1985년 내내 이 문제가 계속 화제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일부 칼럼니스트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입장을 변호해 준 반면,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여호와의 증인을 공격하였습니다. 아직 논쟁의 열기가 한창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을 때인 1985년 7월 23일에,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에서는 파라과이 대통령 앞으로 한 통의 서신을 띄웠습니다.

학령기 아동들과 관련된 소송에서 하급 법원에서 유리한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지부 사무실에서는 회중들에게 왕국회관을 또다시 좀더 공개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당국에서는 우리를 반대하든지 아니면 자유를 더 많이 허용하든지, 좀더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1986년 3월 21일에, 지부 위원회의 조정 위원이 경찰 본서에 소환되었습니다. “당신들은 집회 장소를 다시 사용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아직 그런 허가를 받지 않았소”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가빌란 형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우리가 받은 법적 인가를 취소한 법령이 과연 헌법 정신과 일치한 것인지에 대해 이의가 제기되어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현재 대법원에서 그 소송에 대해 심의 중에 있습니다. 대법원에서는 아직 판결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위헌 소송은 그 법령의 효력을 일시 정지시키므로, 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앞으로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는 우리에게는 활동을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자 경찰관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법률가가 아니라서 그 점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지 못하겠소. 그렇다면 당신네 집회 장소 명단을 내게 가져다 주시오. 그러면 거기서 어떤 일이 진행되는지 살펴보겠소.” 그것으로 면담은 끝났습니다. 요구한 자료를 법적 주장을 담은 관련된 법률 문서와 함께 제출하였습니다. 왕국회관의 문은 다시는 닫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87년 2월 26일에, 대법원은 수석 판사인 루이스 마리아 아르가냐 박사의 주재하에 학령기 아동에 관한 소송에서 여호와의 증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지식층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정치적 판결이라고 생각하였고, 적지 않은 사람이 그 판결에 대해 비난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이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좋은 소식을 계속 전파하다

그 어려운 시기에도 왕국 선포 활동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1984년 1월에, 지부 사무실에서는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를 사용하여 격지 구역을 돌보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첫해에는 30명이 그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75개 읍을 방문하였습니다. 14개 읍에서는 지방 당국에서 형제들이 전파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읍에서는 이 영적인 활동의 가치를 당국자들에게 설명하자 그들은 우리 형제들을 보호해 주었고, 어떤 경우에는 경찰서에서 자도록 숙소까지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많은 관심자를 찾았습니다. 아순시온에서 약 2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한 여자는 이 파이오니아들로부터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을 받은 후에 지부 사무실에 편지를 써서 도움을 더 요청하였습니다. 그 여자의 요청에 응하여 한 증인 부부가 도착하자 그 여자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눈물을 글썽이며 여호와께 감사하였습니다. 친족들이 반대하였지만 그 여자는 여호와의 충실한 종이 되어 이웃과 친지들에게 증거하였습니다.

이전에는 격지 구역이었던 이러한 지역에 전도인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집단과 새로운 회중이 조직되었습니다.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 운동은 연중 행사가 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압력이 줄어들다

공무원 사회에도 여호와의 증인과 그들의 활동이 더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공무원들이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더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노력을 계속한 결과, 마침내 1987년 3월 21과 22일에 여호와의 증인 소유의 대회 회관에서 공개적으로 대회를 열어도 좋다는 구두 승인이 났습니다.

형제들에게는 더 없이 기쁜 날이었습니다! 형제 자매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서로 껴안았습니다. 9년 동안 압력과 긴장과 불확실한 상태와 노골적인 박해를 겪은 후에, 처음으로 파라과이에서 함께 모여서 자유롭게 숭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에서 온 대표자들이 이 특별 행사에 초대되어 참석하였습니다. 이것은 금지령의 효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행사였습니다.

다시 법적 인가를 얻다

파라과이는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긴장감이 조성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1989년 2월 2일 밤에, 아순시온에서 중화기가 내뿜는 굉음이 들렸습니다.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의 군사 정부는 다음날 종말을 고하였습니다.

곧 법적 인가를 얻으려는 노력이 재개되었습니다. 마침내, 1991년 8월 8일에 신청서에 승인이 났습니다. 파라과이의 여호와의 백성에게는 참으로 기쁜 날이었습니다!

1992년 6월 20일에는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었습니다. 이 헌법에는 집회의 자유, 양심적 거부의 자유, 종교와 이념의 자유, 국교 철폐와 같은 인권과 관련된 중요한 조항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발전적인 조처는 기쁨에 찬 안도감을 주었습니다.

힘차게 전진하는 전파 활동!

파라과이에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아직도 할 일이 많았습니다. 1979년에 금지령이 내려졌을 때 파라과이에는 왕국 선포자가 1541명 있었습니다. 법적 인가를 다시 얻은 해에는 3760명이 보고를 냈습니다. 지금은 6200명이 넘습니다. 하지만 인구 대 전도인 비율은 아직도 817대 1입니다. 그 사람들 모두에게 전파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무슨 일이 있습니까?

회중이 없는 읍에 증거하기 위해 매년 정기적으로 특별 파이오니아를 보냅니다. 그런데 인구의 49퍼센트가 시골 지역에 삽니다. 1987년에 지부는 트럭을 한 대 마련하여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이동식 주택으로 사용하기에 알맞도록 기본 필수품을 갖추어 주었습니다. 그 트럭은 지금까지 10년 동안, 회중들이나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돌보지 못하는 시골 구역에 전파하는 데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광대한 이 나라 전역에 생명수가 널리 공급되고 있습니다.

또한 강 유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많은 경우, 이 사람들이 바깥 세상과 접촉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수단은 배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협회에서는 1992년에 네 사람이 지낼 수 있는 방을 갖춘 배를 한 척 건조하였습니다. 이 배를 타고 강 양안을 따라가면서 양 같은 사람들을 찾아내기 위해 조직적인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배에는 적절하게도 파이오니아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 배의 책임자 형제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우리는 파라과이 강을 따라가다가, 아순시온에서 483킬로미터 떨어진 푸에르토폰시에레에 도착하여 호별 방문 전파를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한 연로한 여자와 이야기하다가, 하느님께서 모든 악을 없애시겠다고 말씀하셨으며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하느님께서 그 일을 그분의 왕국을 통해서 하실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연로한 여자는 말을 가로막더니, 손녀를 보고 할아버지를 모시고 오라고 하면서 ‘할아버지의 백성’이 왔다고 알려 드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70대인 할아버지가 곧 나타났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던 터라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하며,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우리가 마침내 도착한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우리가 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약간 당황해하면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페냐에르모사 섬에서 온 어떤 대위가 자기에게 성서와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사실」 책을 주고 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대위는 시편 37:10, 11이나 시편 83:18과 같은 몇 개의 성구를 특별히 지적하면서 언젠가 여호와의 증인이 할아버지의 집에도 와서 여호와의 목적에 관해 더 많이 알려 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즉시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배는 지금까지, 북쪽의 볼리비아 국경에서 남쪽의 아르헨티나 국경까지 총 길이가 약 1260킬로미터나 되는 파라과이 강 양안을 따라 모든 구역을 최소한 두 번은 돌았습니다.

열심 있는 일꾼들이 수확에 참여하다

예수께서는 1세기의 제자들에게 교훈하시면서 이렇게 강력히 권고하셨습니다. “수확하는 주인에게 수확하는 일에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십시오.” (마태 9:38) 여호와의 현대 증인들은 그 말씀을 명심해 왔으며, 주인께서는 참으로 많은 열심 있는 일꾼들을 밭으로 보내 주셔서 파라과이에서 영적으로 수확하는 일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1945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191명의 선교인이 파라과이에서 봉사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길르앗 졸업생은 아니지만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있는 22명을 포함해서) 60명은 이 나라에서 10년 혹은 그 이상 봉사해 왔으며, 현재 84명의 선교인이 이 곳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 선교인들이 집중적으로 활동해 온 파라과이 동부 지역에는 현재 61개의 회중이 잘 발전하고 있습니다.

인구 대 증인 비율이 아직도 817대 1인 이 나라에서 증거하는 일을 돕기 위하여, 이웃 지부들에서는 일부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이 지역에서 봉사하도록 임명하였습니다. 다른 증인들도 여러 나라에서 파라과이로 이주해 왔습니다. 그들은 덴마크, 독일, 룩셈부르크, 미국, 볼리비아, 브라질, 스웨덴, 스위스, 스페인, 아르헨티나, 오스트리아, 영국, 우루과이, 이탈리아, 칠레, 캐나다, 프랑스, 핀란드와 같은 곳에서 왔습니다. 그들은 왕국 선포 활동을 진척시키기 위하여 자기들의 자원과 능력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도시 구역에서 봉사해 온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생활 환경이 매우 원시적인 마을이나 촌락에서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 대다수는 파이오니아들입니다. 왕국회관이나 지부 시설을 건축하는 일을 도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파라과이는 여러 해 동안 국적이 다양한 이민자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독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일본, 폴란드, 한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이 나라의 여러 지역에 정착하였습니다. 이 사람들도 파라과이로 이주해 온 선교인들이나 다른 증인들로부터 증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라니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 사람들이 인구의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파라과이 사람의 37퍼센트는 과라니어밖에 할 줄 모릅니다. 이 사람들 가운데서 전파하는 일은 대부분 이 곳 출신의 증인들이 수행하고 있고, 이 증인들은 그 일을 완수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라니어로 된 팜플렛을 갖게 되어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 곳 출신의 증인들 가운데는 전 시간 봉사에 여러 해를 바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둘피나 데 인데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36년간 일하는 동안, 78명이나 되는 사람이 헌신하고 침례받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에둘피나와 그의 남편은 자기들이 봉사해 온 지역에서 다섯 개의 회중이 잘 발전하고 있어 기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차베스도 39년간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면서 많은 사람을 도와 주었습니다.

파이오니아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도 여전히 열심히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먼 거리를 걸어서 집회도 참석하고 시골 구역에서 철저한 증거도 합니다. 그들은 종종 동이 트기 전에 집을 나와서 구역을 향해 가는데, 흔히 충분한 양의 “파라과이식 수프”(마른 음식)나 혹은 납작하게 구운 옥수수빵이나 유카 뿌리를 가지고 갑니다. 아침 7시쯤 되면 증거하기 시작할 준비가 되며, 해질녘까지 계속 증거합니다. 집에 도착할 때면 지쳐 있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여호와와 그분의 놀라운 목적에 관해 알려 주느라 자신을 바쳐 일한 것을 행복하게 여깁니다.

목마른 사람들이 “생명수를 거저 마시”다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바와 같이, “생명수를 거저 마시”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에게 초대가 발하여지고 있습니다. (계시 22:17) 파라과이에는 그러한 초대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에레니아가 있습니다. 에레니아는 로마 가톨릭교인으로 자랐고, 가톨릭 교회의 전통과 종교적 미신을 열렬히 신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에레니아는 죽은 사람과 지옥불을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 에레니아는 전조(前兆)를 믿었기 때문에, 흉조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거나 들으면 두려움에 휩싸이곤 하였습니다. 20년 동안 그러한 두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985년에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연구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진리의 물은 에레니아에게 강한 새 힘을 얻게 해주었고, 하느님의 말씀에 예언된 낙원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이 에레니아의 마음속에 싹트게 해주었습니다.

1996년에 카라페과 읍에 사는 이사벨이라고 하는 여자도 생명수를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지식」 책에서 본 내용이 이사벨의 믿음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사벨은 증인들에게 다시는 방문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사벨은 그 책을 혼자 읽고서 그 내용에 관해 이웃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벨이 한 증인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에는, 무려 네 가정에 속한 사람들이 지식을 더 많이 알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오순절 교회 전도사의 압력으로 관심이 식었지만, 훌륭한 증거가 행해지자, 이사벨이 처음에 증거한 여자는 물론 한 이웃 여자도 생명을 주는 진리로부터 계속 유익을 얻었습니다.

진리의 물이 처음으로 디오니시오와 아나에게 제공되었을 때, 그들은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고 있었으며, 20년 동안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디오니시오와 그의 큰 딸은 1986년에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나와 다른 두 딸은 반대하였습니다. 아나는 증인에게 디오니시오와 더는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기도 하고, 증인을 죽이겠다고 위협하기도 하고, 경찰을 부르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가톨릭 수녀와 상의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아나는 성서 연구가 큰 딸을 위험에 빠뜨리게 할 것이라는 구실로 소년 법원에 제소하였습니다. 판사는 디오니시오가 사실상 가족을 적절히 부양하고 있음을 알게 되자 아나에게 디오니시오와 함께 성서를 조사해 보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아나는 수녀인 자기 친구가 자기에게 증인들이 집회에서 부도덕한 일을 한다고 경고해 주었다고 항의하였습니다. 그 여판사는 아나를 안심시킨 다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가톨릭교인들은 성서를 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도 모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서를 연구합니다. 당신도 성서를 조사해 볼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그런 다음 판사는 아나에게 디오니시오와 결혼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깜짝 놀란 아나는 또다시 그 수녀를 찾아가서 자기네 식구들과 성서를 연구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수녀는 연구가 필요하지 않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게다가 아나에게 디오니시오와 결혼하지 말라고 강력히 권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과거에 그 수녀는, 디오니시오가 결혼하라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을 때, 아나에게 자주 디오니시오와 결혼해야 한다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아나의 아버지가 몹시 아프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에 사는 증인들이 그 가족에게 많은 도움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 일이 아나에게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아나는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디오니시오와 결혼도 하였습니다. 거의 십 년이 지난 지금, 디오니시오는 장로로 일하며, 온 가족이 열심히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사랑에 찬 인내가 파라과이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산로렌소 지역에는 1982년 당시에 회중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전도인들은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파이오니아 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그 결과, 인근 도시들이 포함되어 있는 그 회중 구역이 정기적으로 돌보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열심을 축복하셨습니다. 지금은 그 지역에 회중이 아홉 개 있습니다. 베르너 아펜젤러와 그의 아내 앨리스는, 파라과이에서 40년간 봉사하는 동안 가장 기뻤던 일은, 자기들이 그 지역에서 봉사하면서 발전을 목격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발전은 단지 한 지역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1996년에는, 아순시온에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새로운 훌륭한 지부 시설이 봉헌되었습니다. 이 나라 도처에 왕국회관이 있으며, 그 곳에서 성서 교육을 베푸는 집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계속해서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며 거리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 “생명수를 거저 마시”라는 초대를 열심히 발하고 있습니다.

[210면 전면 삽화]

[213면 삽화]

파라과이에 왕국 소식을 소개하는 일에 참여한 후안 무니스

[217면 삽화]

훌리안 하다드, 파라과이에서 처음으로 성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 중 한 사람

[218면 삽화]

호비타 브리수엘라, 1946년에 침례를 받았으며 지금도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다

[218면 삽화]

세바스티아나 바스케스, 1942년 이후로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

[222면 삽화]

윌리엄 쉴링거, 사망할 때까지 40년 동안 파라과이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였다

[230면 삽화]

파라과이에서 40년간 선교 봉사를 한 베르너 아펜젤러와 그의 아내 앨리스

[233면 삽화]

파라과이에서 증인들이 직접 지어 소유하게 된 첫 번째 왕국회관(아순시온 소재)—자랑스러워하는 증인들의 모습

[235면 삽화]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 회관

[237면 삽화]

비야리카에서 사탕수수를 수확하고 있는 사람에게 증거하는 모습

[243면 삽화]

페르난도데라모라 (노르테) 왕국회관

[243면 삽화]

아순시온의 비스타알레그레 (노르테) 왕국회관

[244, 245면 삽화]

여러 나라 출신의 열심 있는 봉사자들이 증거하는 일에 참여하기 위해 파라과이로 왔다 (1) 캐나다, (2) 오스트리아, (3) 프랑스, (4) 브라질, (5) 한국, (6) 미국, (7) 벨기에, (8) 일본, (9) 독일

[246면 삽화]

파라과이 강에 떠 있는 “엘피오네로”호

[251면 삽화]

아순시온 근처의 파라과이 벧엘 집과 지부 사무실, 그리고 그 곳에서 봉사하는 사람들

[252면 삽화]

지부 위원회 (위에서 아래로): 찰스 밀러, 빌헬름 카스텐, 이사아크 가빌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