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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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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국제 활동의 한 중심지입니다. 매년 평균 약 15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광객들은 바바리아 알프스, 삼림 지대인 슈바르츠발트, 아름다운 라인 강변에서 휴가를 보내기도 하고, 여러 도시의 문화 센터를 방문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업상의 이유로 독일에 오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독일은 세계의 주요 무역국들 중 하나로서, 세계 도처에 거래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이 나라가 경제적으로 번영하자 다른 나라들의 수많은 근로자들이 이 나라로 모여드는 바람에 대도시들의 주민 구성이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또한 독일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봉사의 직무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그리고 종전시에 있었던 일들은 이 나라 증인들의 봉사의 직무에 한층 더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독재 정권 아래, 증인들은 잔인하고도 지속적인 공격의 대상이었습니다. 가톨릭교와 프로테스탄트 교직자들의 축복 속에, 히틀러는 에른스테 비벨포르셔(진지한 성경 연구생)를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고 맹세하였는데, 독일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그 당시에 성경 연구생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은 믿음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증인들은 무자비한 공격에 직면해서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에서 증인들에게 금지령이 내려진 지 12년 후에 히틀러와 그의 정당은 사라졌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은 하느님의 왕국과 그 왕국이 인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알리고 있었습니다. 증인들이 나치 시대에 겪은 일과 그 일에 어떻게 대처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지금 전세계에 계속 증거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증인들이 승리를 거두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증인들이 총명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분명히, 그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독일 전역의 증인 수는 2만 명도 채 안 되었는데, 그 수는 거대한 나치 정권과는 대조가 되는 적은 수였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현명한 교사인 가말리엘이 오래 전에 한 말에 들어 있는데, 성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계획이나 이 일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무너질 것이지만,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면 여러분이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5:34-39)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심지어 죽음의 위협 아래서도 하느님께 충성을 증명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그 성도[“충성스러운 자들”]를 버리지 아니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셨습니다.—시 37:28, 「신세」 참조.

종전 후의 기회를 잘 활용함

여러 해에 걸친 전쟁을 겪고 살아 남은 증인들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임재 및 사물의 제도의 종결의 표징을 이룰 것이라고 예언하신 일들의 어김없는 성취 가운데 일부를 막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로 일어난 전쟁의 와중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환난에 넘겨지고, 배반당하고, 나라들의 미움의 대상이 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언된 식량 부족이 한창 극심했던 때를 겪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러한 일들의 의미를 설명해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강제 수용소에서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결코 전파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이렇게 예언하셨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이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에 전파될 것입니다.” (마태 24:3-14) 해야 할 일이 한층 더 많았으며, 그들은 전파 활동을 계속하기를 열망하였습니다.

독일의 증인들은 전쟁이 끝나자 신속히 왕국 선포 활동을 재조직하였습니다. 9년 만에 석방된 에리히 프로스트는 즉시 장성한 형제들이 회중들을 방문하여 재조직하고 강화하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일부 증인들은 굶주렸던 탓으로 몹시 허약해져서 집회 도중에 졸도하기도 하였지만, 영적 양식으로부터 유익을 얻기 위하여 참석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게르트루트 포에칭거는 석방된 첫날, 남편을 만날 것을 기대하면서 뮌헨을 향해 온종일 걸었습니다. 하지만 저녁에 친절한 사람들이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해 주자, 게르트루트는 자정이 지나도록 자지 않고 여호와의 목적에 관해 그들에게 증거하였습니다. 콘라트 프랑케는 자유롭게 되었을 때, 파이오니아 봉사를 즉시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가진 것이라곤 입고 있던 줄무늬 죄수복뿐이었는데도 그러하였습니다.

1947년에 독일에서 다시 야외 봉사에 공개적으로 참여한 증인들은 1만 5856명이었는데, 이들은 담대하게 하느님의 왕국이 지속적인 평화와 안전을 위한 유일한 희망임을 알렸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들의 열정적인 봉사의 직무를 축복하셨으며, 전쟁이 종결된 지 30년이 지난 1975년 5월에는, 서독에서 10만 351명의 왕국 선포자가 부지런히 활동하였습니다.

그 기간에 증거를 받은 지역은 독일 밭뿐이 아니었습니다. 독일의 열심 있는 증인들은 자기들의 봉사의 직무가 많은 나라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러하였습니까?

국내에 있는 선교 밭

번영하는 경제의 필요에 부응하여, 독일은 1950년대 중반에 다른 나라들로부터 가스타르바이터 즉 “외국인 근로자”를 모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리스, 스페인, 당시의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터키, 포르투갈로부터 이 나라로 들어왔습니다. 1972년 무렵에는 외국인 노동 인구가 증가하여 210만 명을 훨씬 넘어섰습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밀려들더니, 1980년대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난민들이 독일로 밀려들어 왔습니다. 1990년대에는 동유럽과 발칸의 여러 나라 난민들이 그들과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정치적 망명을 허용하는 관대한 법이 시행된 결과로, 독일은 유럽의 모든 국가 중에서 가장 많은 수의 외국 태생 주민을 갖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상황을 국내에 생긴 훌륭한 선교 구역으로 보았습니다. “하느님은 편파적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리고 고국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만이 줄 수 있는 위로를 꼭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파해야 할 의무를 예리하게 느꼈습니다. (사도 10:34, 35; 고린도 둘째 1:3, 4) 하지만 독일에 있는 750만 명의 외국인에게 그들의 모국어를 사용하여 접근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외국인들에게 성서 진리를 좀더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많은 독일 증인들은 새로운 언어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추종자들에게 가르치신 것과 일치하게 그들이 진실로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는 매우 훌륭한 증거였습니다! (마태 22:39) 이 증인들 대부분은 외국에서 선교인으로 활동할 수는 없지만, 국내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온전히 이용하고자 열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98년 8월에는 371개 외국어 회중과 219개 전도인 집단에 속한 2만 3600명이 넘는 전도인이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습니다. 물론, 외국어 회중들을 구성하는 목적은, 인종 차별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독일어 지식이 불충분한 사람들이 모국어로 진리를 좀더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전도인들은 제2의 언어가 정신에 이를 수는 있지만 마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흔히 모국어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일부 계층에서는 외국인들을 적대하며 학대하기도 하지만, 여호와의 백성 가운데서는 그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인 사랑으로 환영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 나라에서 현재 집회를 갖는 데 사용하는 언어는 독일어 외에도, 루마니아어, 베트남어, 아라비아어, 알바니아어, 암하라어, 일본어, 중국어, 타밀어, 티그리냐어, 페르시아어, 헝가리어, 힌디어를 비롯하여 24개 언어나 됩니다. 독일에서 열린 1993년 “하느님의 가르침” 지역 대회에 참석한 19만 4751명 중에서 10퍼센트가량은 외국어 대회들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회에서 침례받은 사람들의 수는 침례받은 총수의 거의 14퍼센트였습니다.

왕국 소식에 인식 깊은 반응을 나타낸 사람들 가운데는 전쟁을 피해서 1983년에 스리랑카를 떠나 온 한 힌두인 가족이 있는데, 이들은 여섯 살 난 아들이 치료받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슬프게도, 그 사내아이는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족은 죽은 사람들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영원히 살 기회를 주실 여호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24:15) 또한 십대 소녀 시절에 비아프라 내전에 가담한 적이 있는 나이지리아 사람이 있습니다. 그 여자는 독일로 이주한 후에, 평화롭게 함께 사는 일에 대해 여호와께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는 진리를 배워 알게 되었을 때 생활이 변화되었습니다.—이사야 2:3, 4.

독일에 있는 동안 여호와의 증인이 된 이탈리아 사람들 가운데서 이러한 격언을 듣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논 투티 이 말리 벵고노 페르 누오체레”(“불행이 언제나 불이익이 되지는 않는다”). 얼마나 적절한 말입니까! 이탈리아 사람들을 비롯해서 다른 나라 출신의 사람들은 경제적인 문제를 피하기 위해 독일로 왔다가, 마침내 물질적인 부보다 더 가치 있는 것 즉 하느님과 그분의 목적에 관한 진리를 알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증인들이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서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할베르스타트 회중은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곳은 망명 요청자들을 위한 중앙 수용소인데, 통상적으로 40여 개국에서 온 사람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이 사람들은 가족과 고국과 언어와 전통을 등지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흔히 충격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인데, 장래가 암담합니다. ·⁠·⁠· 그러한 이유로 그들 가운데는 의지할 만한 대상과 희망을 찾기 위하여 종교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보내 준 관대한 선물[여러 언어로 된 성서들]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 덕택에 이 사람들은 모국어로 된 성서를 읽음으로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몇몇 외국어 집단

영어: 나이지리아, 가나, 스리랑카, 인도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 온 난민들은 영어 회중들의 활동을 통해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유익을 얻은 사람들 가운데 가나에서 온 스테벤 콰치가 있습니다. 독일에서 방글라데시 출신의 한 젊은이가 스테벤에게 자기는 증인들을 피하려 하고 있다는 말을 하자, 스테벤은 그 증인들을 자기에게 보내 달라고 하였습니다. 스테벤은 젊은 시절에 가나의 한 증인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친족들의 압력을 받지 않게 된 스테벤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현재 그는 그리스도인 장로이며, 그의 가족도 함께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터키어: 라짐의 아내와 아들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라짐만은 여전히 이슬람교를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라짐은 이슬람교 사원마다 코란에 대한 해석이 매우 달라서 일부 모슬렘들은 소속된 사원 외에 다른 사원에는 전혀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짐은 터키를 방문하였을 때 이슬람교 사원과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 장소 두 군데를 다 가 보았습니다. 이슬람교 사원에서 그는 독일에서 배운 것과는 다른 이슬람교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통일성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독일로 돌아오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터키의 왕국회관에 갔을 때처럼 이곳의 왕국회관에서도 동일한 사랑과 동일한 프로그램을 볼 수 있군요. 진리란 이래야지요.”

힌디어: 1985년에 두 증인이 샤르다 아가르발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그 여자는 자기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신을 찾게 해 달라고 방금 기도를 마친 뒤였습니다. 그의 남편은 폐암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힌두교의 신들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낙심해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그 증인들에게 예수가 하느님이냐고 물었습니다. 증인들의 설명을 듣고 나자 그 여자는 자기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같은 신이라면 자신이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힌두교의 신들을 불쾌하게 하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그러한 신들에게서 돌아서기를 주저하였지만, 얼마 안 있어 그 여자는 힌두교 신들에 관한 그림들을 내다 버리고 여호와를 참 하느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여자는 1987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현재 그 여자는 정규 파이오니아로서,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인격체이신 하느님을 섬기게 되어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그의 남편과 아들은 모두 봉사의 종입니다.—시 62:8.

폴란드어: 1992년에 한 폴란드어 회중이 베를린에 형성되었고, 같은 해에 특별 대회일을 폴란드어로 가졌습니다. 폴란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는 독일의 한 구획에서 대회가 열리긴 하였지만, 대회 회관과 인근 왕국회관과 식당까지 가득 차는 광경을 보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도합 2523명이나 되는 거의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왔던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독일어 회중과 연합하고 있는 폴란드인 증인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왕국 전파 활동이 폴란드어 밭에서도 시작된 것을 알고는 기뻐하였으며 모국어로 설명되는 성서 진리를 들을 수 있어서 고마워하였습니다.

러시아어, 세르보-크로아트어, 중국어까지도!

러시아어: 러시아에서 성장해서 러시아어를 사용하지만 조상이 독일인이었던 많은 사람들이 냉전이 끝난 후에 선조가 살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또한 당시 동독 지역에서 근무하던 소련 군대와 그들의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영적 필요를 지니고 태어나는데, 이 사람들의 영적 필요는 충족된 적이 없었습니다.

슐레겔 가족은 독일계 사람들인데, 1992년에 우크라이나의 크리미아 반도에서 선조의 땅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곳에서 그 가족은 한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증인은 본래 우즈베키스탄 출신으로 독일에서 증인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성서를 연구한 뒤, 그 가족은 모두 침례를 받았습니다.

세르게이와 그의 아내인 제니아는 무신론자였습니다. 하지만 자기들이 가졌던 질문들, 특히 장래에 관한 질문에 대해 성서로부터 대답을 듣게 되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겸손하게, 그들은 여호와에 대한 믿음을 발전시켰으며 자기들의 생활을 조정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세르게이가 직장을 바꾸고, 얼마 후면 받게 될 연금에 대한 권리마저 포기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육군 병원 간호사였던 마리나는 인생의 의미를 찾고 있었습니다. 마리나는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을 받자마자, 즉시 읽었고 이내, 자신이 찾고 있던 진리를 발견하였음을 깨달았습니다. 러시아에 돌아온 후 마리나는 독일에서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한 적이 있는 사람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마리나는 파이오니아로서 삶의 목적을 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98년 8월 현재, 31개의 러시아어 회중과 63개의 작은 집단이 있으며 전도인 총수는 2119명으로, 전년에 비해 27퍼센트 증가하였습니다.

세르보-크로아트어: 세르보-크로아트어 밭에서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하는 요한 스트레커는 구유고슬라비아 지역에 적어도 16개국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진리가 그들을 어떻게 연합시키고 있는지를 보면 놀랍습니다.” 유고슬라비아 군대에서 8년 동안 복무했던 모슬렘인 무니브는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초대되었을 때,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그리고 모슬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평화롭게 함께 모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습니다! 한 달 동안 그는 단지 관찰만 하였습니다. 증인들 사이의 평화와 연합이 진정한 것임을 확신하게 되자, 그는 성서 연구를 시작하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1994년에 그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수녀원에서 여러 해를 보낸 로마 가톨릭교인인 크로아티아 출신 로산다는 독일에서 증인이 된 친척들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신권 전도 학교와 봉사회에 참석한 뒤, 로산다는 이 점을 인정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 진리가 있군요. 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파했는지 늘 궁금해하였습니다. 연단에서 두 자매가 보여 주는, 한 사람이 상대에게 전파하는 방식을 보았을 때, 이런 생각이 문뜩 머리 속에 떠올랐습니다. ‘틀림없이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꼭 저런 식으로 전파했을 거야.’” 현재 로산다는 파이오니아로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을 따르고 있습니다.

일부 독일 증인들은 증거할 목적으로 구유고슬라비아 지역의 언어들을 배웠는데, 후에 여건이 허락되었을 때 그러한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들로 실제로 이주하여 봉사하였습니다.

중국어: 독일의 중국어 밭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한때 타이완의 선교인이었던 에기디우스 륄레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중국 출신의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가 전하는 소식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으며, 성서를 읽어 본 적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여 말합니다. “중국 사람들은 대부분 몹시 배우고 싶어하기 때문에 마치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 듯 지식을 흡수합니다.”

봉사 훈련 학교의 제12기 학급이 1996년 10월에 젤터스 벧엘 가족에게 소개되었을 때, 독일에서 열린 그 학교에 참석한 최초의 중국인 학생을 만나게 된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독일에서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나서 중국인 지질학 교수에게 증거하였으며 「생명—그 기원은 무엇인가? 진화인가, 창조인가?」 책을 제공하였습니다. 그 여교수는 일 주일도 채 안 되어 그 책을 전부 읽었습니다. 이제 여교수는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는데, 1996년 말에는 16건을 사회하고 있었습니다.

배워 안 것을 몹시 전하고 싶어하다

문자 그대로 많은 외국인 거주자가 독일에서 여러 해에 걸쳐 진리를 배운 다음 고국으로 돌아가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장로나 봉사의 종으로 또는 다른 책임 있는 위치에서 섬기고 있습니다. 베트로스 카라카리스는 그리스 벧엘 가족의 한 성원으로 섬기고 있으며, 마마두 케이타는 말리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며, 폴랭 캉갈라—많은 사람들에게 페페로 알려져 있음—는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아내인 앙케와 함께 선교인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초부터 1500여 명의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전도인이 그리스로 돌아갔는데, 그들 가운데는 자격 있는 장로들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스웨덴, 벨기에, 영국, 캐나다로 이주하여 그곳에 사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주민들 가운데서 전파 활동을 증진시키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마 그리스를 제외하면 세계의 다른 어느 나라에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전도인이 독일만큼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동독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의 군대가 독일을 점령하였습니다. 패배한 이 나라는 네 개의 점령 지구로 분할되었으며, 승리한 네 강국은 각각 한 점령 지구에 대한 관할권을 받았습니다. (수도인 베를린 역시 네 개의 점령 지역으로 분할되었습니다.) 소련 점령 지구가 이 나라의 동부라서, 이내 이곳은 동쪽 지구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949년에 독일의 이 동부 지역에 주권이 회복되었으며, 이곳은 독일 민주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쪽 지구”라는 명칭 대신에 사실상 단지 동독이란 명칭이 사용되었습니다. 그 후 1955년에 나머지 세 개 점령 지구가 독일 연방 공화국이 되었을 때, 이곳은 민간에서 사용하는 명칭과 일치하게 서독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나치 국가가 무너진 후에, 동쪽 지구에 살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신속히 그 기회를 이용하여 공개적으로 집회를 열고 야외 봉사를 열심히 수행하였습니다. 1949년 중반에 동독에서 야외 봉사 보고를 내는 사람은 1만 7000명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나치 정권이 무너진 뒤 그들이 맛본 안도감은 오래 가지 못하였습니다. 또다시 회중 집회가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습니다. 출판물이 압수되었습니다. 증인들이 대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도로들이 차단되었습니다. 형제들이 구속되었습니다. 1950년 8월 31일에 공식 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또다시 동독 증인들은 이번에는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지하 활동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 후 거의 40년이 지나기까지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금지령이 내려진 시초에 동독의 박해는 매우 혹독하였습니다. 1990년에 독일 신문 「베를리너 모르겐포스트」는 이렇게 보도하였습니다. “1950년에서 1961년[장벽이 세워진 해] 사이에 동독 관리들은 2891명의 여호와의 증인을 체포하였으며, 그들 중 674명의 여자를 포함하여 2202명은 재판에 회부되어, 총 1만 2013년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투옥 기간에 37명의 남자와 13명의 여자가 학대나 질병이나 영양 실조로, 또는 노령으로 사망하였다. 법정은 12명의 남자에게 종신형을 선고하였지만 후에 15년으로 감형하였다.”

물론,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였습니다. 금지령은 40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증인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일이 중단된 것처럼 보이는 기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가택 침입을 하여 더 많은 증인들을 체포하기도 하였습니다. 정확한 수치로 보기에는 불확실한 면이 있긴 하지만, 협회의 자체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 금지령 기간에 4940명의 동독 증인이 231개 장소에서 투옥되었습니다.

슬기롭게 모임을 가짐

그처럼 어려운 여건 아래서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연구용 성서 출판물을 입수할 길을 대개 찾아냈습니다. 용기 있는 수많은 형제 자매들은 영적인 필요를 돌보기 위해 자유를 빼앗길 위험을 무릅쓰기도 하고 때로는 생명을 잃을 위험까지도 무릅썼습니다. 종종 자매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1961년에 세워지기 전, 그들은 서부 지역의 베를린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협회 사무실에서 출판물을 입수하여 가져오곤 하였습니다. 동독 스파이가 사무실을 염탐하기 시작하여 누가 출판물을 가져가는지를 알게 되자, 배달원들 중 일부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책이 사용되었습니다. 배달원 역할을 하는 자매들이 베를린에 있는 다른 증인들의 집에 들러 출판물을 입수하여 자기들의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체포되어, 법정으로 끌려가서 금고형을 받는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영적 공급품의 흐름이 완전히 끊긴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 집회를 갖는 것이 가능하였습니까? 처음에는 매우 염려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강건함을 유지하려면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모이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히브리 10:23-25) 그들은 슬기롭게, 작은 집단으로 함께 모이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안전을 기하려는 이유로, 그들은 서로를 성을 빼고 단지 이름으로만 불렀습니다. 집회는 대개 해진 뒤에, 매번 다른 장소에서, 다른 요일에 가졌습니다. 여름에는 밤 10시 이전에 집회를 시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형제들은 그 모든 일에 능숙하게 대처하였습니다.

왕국회관을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작센의 한 우호적인 농부가 자기 헛간을 사용하도록 제공하였습니다. 그 헛간 뒷문은 관목에 싸여 보이지 않는 오솔길로 통해 있었습니다. 한겨울 내내 그 헛간에 약 20명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모였는데, 이들은 촛불을 밝힌 채 집회를 가졌습니다. 얼마 안 있어 그 농부 역시 증인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만프레트 타메는 일부 투옥된 형제들에게 기념식 표상물을 공급해 주었던 일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발모제(發毛劑) 병에 포도주를 채워 어느 수감된 형제에게 전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교도관은 병뚜껑을 열고 내용물의 냄새를 맡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건 머리털이 빠지지 않게 해 주는 것이지요?’ ‘글쎄요. 아무튼 그렇게 쓰여 있군요’라고 나는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도로 뚜껑을 닫고는 의도된 대로 그 형제에게 그 병을 전해 주었습니다!”

금지령 아래서 증거하는 법을 배움

하느님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활동은 동독에서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성서는 금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형제들은 종종 단지 성서를 언급함으로써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제공할 출판물이 거의 또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다양한 제목에 대해 준비한 일련의 성구에 근거하여 성서 대화를 전개하였습니다. 물론, 전파 활동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봉사하는 그 날이 자유를 누리는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증인들은 기도를 그들의 “영원한 친구”로 삼았다고, 한 증인은 표현하면서 이렇게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기도를 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침착해집니다. 우리는 혼자라는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깨어 살피는 태도가 꼭 필요하였습니다.”

무척 조심하는데도, 그들이 경찰과 정면으로 마주치는 일이 가끔 있었습니다. 한번은 헤르만 라우베와 마르기트 라우베가 이미 잘 아는 사람들이 권하는 집들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문을 열어 주는 집주인 남자 뒤 외투걸이에 걸린 경찰관 제복이 눈에 띄었습니다. 마르기트의 안색이 창백해졌고, 헤르만의 심장은 두근거렸습니다. 이 부부는 조용히 기도하였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감옥행을 의미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요” 하고 그 남자가 간명하게 물었습니다. 마르기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댁을 어디선가 꼭 뵌 것 같은데, 어디서 뵈었는지 통 생각나지 않는군요. 아 알겠어요. 경찰관이시죠. 틀림없이 근무 중에 뵈었을 거예요.” 다소 우호적인 어조로,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여호와에 속한 사람들인가요?” 헤르만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댁의 문을 두드린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임을 인정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귀하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부부는 집 안으로 초대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그를 방문한 끝에,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그는 그리스도인 형제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바로 교도소 안에서도 증거가 행해졌습니다. 볼프강 마이제는 발트하임 교도소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내에게서 “베를린에 있으면서 크노르 수프(Knorr soup)를 맛있게 먹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크노르는 독일에서 이름난 수프의 상표명임.) 볼프강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동료 수감자에게 그 말은 베를린에서 대회가 있었으며 워치 타워 협회장인 N. H. 노어(Knorr)가 그곳에서 연설하였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볼프강이 아내의 편지 내용을 설명해 줄 때 그가 느끼는 기쁨을 반영하는 그의 반짝이는 눈을 그 남자는 결코 잊지 못하였습니다. 약 14년 후, 서독으로 이주하고 나서, 그 남자는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2년 뒤에 뷔르츠부르크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힐데가르트 젤리거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이미 여러 해를 보낸 적이 있는데, 라이프치히에 있는 공산주의 법정에서 또다시 10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 후 할레 교도소의 한 여교도관은 힐데가르트에게 그 자매가 ‘온종일 성서에 관해 이야기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었다는 점을 알려 주었습니다.

금지령 아래서도 끊임없이 증가함

형제들이 나타낸 열심은 좋은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호르스트 슈람은 1950년대 초에 쾨니그스 부스터하우젠 회중에 25명의 전도인이 있었지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에는 161명이 있었다고 보고합니다. 43명의 전도인이 이미 서독으로 이주하였고 여러 명이 사망하였는데도 말입니다. 사실, 일부 회중에서는 현재 활동적인 증인들의 70퍼센트 이상이 금지령 아래서 진리를 배운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켐니츠 가족을 생각해 봅시다. 베른트와 발트라우트는 금지령이 내려진 초기에 아직 매우 젊었을 때 진리를 배워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결혼해서 자녀를 갖게 된 뒤,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을 여호와의 종이 되도록 양육하였습니다. 1980년대에 전파 활동이 여전히 금지되어 있을 때 안드레아, 가브리엘라, 루벤, 에스터는 부모의 인도에 따르면서, 여호와께 헌신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막내인 마티아스만이 금지령이 해제된 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반대에 맞서 이 부부가 나타낸 단호한 태도를 풍부히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 부부에게는 다섯 자녀가 모두 현재 젤터스 벧엘 가족 성원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매우 큰 상입니다!

협회의 월 야외 봉사 보고를 집계하는 일을 도와 준 한 장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금지령이 내려진 40년간 내내, 침례받은 사람이 보고되지 않은 달은 단 한 달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침례 마련은 대개 규모가 작았으며 개인 집에서 베풀어졌습니다. 연설이 있은 뒤, 침례 지원자들은 욕조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을 물 속에 온전히 잠그는 것이 종종 문제가 되었지요. 그러한 사소한 어려움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들 모두는 자신이 침례받은 날을 회상하면서 여전히 기뻐합니다.”

또다시 동독에 대한 야외 봉사 보고를 발표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지역에 1980년대에 2만 704명이나 되는 활동적인 전도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매우 기뻤습니다! 물론, 지금은 더는 별도로 보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통합된 독일의 전도인 수는 1990년에 15만 4108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형제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재조직함

공산주의 통치자들이 세계의 이 지역 증인들을 다른 나라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서 단절시키려고 애쓰고 있던 기간에, 여호와의 증인 조직 자체 내에서 의미심장한 변화가 세계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 회중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에 더 밀접히 따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있게 된 이 변화는, 국제적인 형제 관계를 강화하며 조직을 장래의 급속한 성장에 대비시키는 데 기여하였습니다.—비교 사도 20:17, 28.

그리하여, 1972년 10월부터는 회중들이 회중의 종으로 알려진 단 한 사람의 감독을 받는 일이 더는 없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회중의 종이 보조자들의 도움을 받아 필요한 일을 돌보았지만, 이제는 장로의 회가 각 회중을 감독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1975년 무렵에는, 이 변화로 인한 훌륭한 결과가 이미 분명히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한 에르빈 헤르치히는 모두가 그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지는 않았음을 기억합니다. 그 변화는 “일부 회중의 종들의 마음 상태”를 드러나게 하였다고 그는 말합니다. 대다수가 충성스러운 마음을 가졌었지만, 형제들을 섬기기보다는 오히려 “최고가 되려는” 욕망을 가졌던 야심적인 소수의 사람들은 그 변화로 인해 제거되었습니다.

그 후 더 많은 변화들이 있을 것이었습니다. 1970년대에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가 확대되어 재조직되었으며, 통치체의 활동이 여섯 개의 위원회에 분할되면서 그 위원회들이 1976년 1월 1일부터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달 후인 1976년 2월 1일자로 세계 전역의 지부 사무실을 감독하는 일이 조정되었습니다. 지부가 지부의 종 한 사람의 관할 아래 운영되는 일이 더는 없게 되었습니다. 그와는 달리, 각 지부는 통치체가 임명한 지부 위원회의 감독을 받게 되었습니다.

프로스트 형제, 프랑케 형제, 켈시 형제는 이전에 독일에서 각기 얼마 동안 지부의 종으로 섬겨 왔었습니다. 프로스트 형제는 건강상의 이유로 벧엘을 떠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1987년에 8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체험담은 「파수대」[영] 1961년 4월 15일호에 실려 있습니다.) 1976년에 다섯 명의 위원으로 이루어진 지부 위원회가 독일에 마련되었을 때, 이 위원회에는 (나치 시대에 거듭 투옥된 적이 있는) 콘라트 프랑케와 (길르앗 졸업생으로 그때까지 독일에서 25년 동안 섬겨 왔던) 리차드 켈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나치 강제 수용소 생존자로서 길르앗 제15기 학급에 참석했던) 빌리 폴과 (길르앗 제37기 졸업생) 귄터 퀸츠와 (이전의 여행하는 감독자) 베르너 루트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83년에 사망한 프랑케 형제를 제외하고, 처음에 임명된 이 위원들은 여전히 지부 위원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콘라트 프랑케의 체험담은 「파수대」[영] 1963년 3월 15일호에 실려 있습니다.) 그 밖에도 두 형제가 사망하기 전 한동안 지부 위원으로 섬겼는데, 에곤 페터는 1978년부터 1989년까지, 볼프강 크롤로프는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섬겼습니다.

현재 지부 위원회는 8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형제들 외에도, 위원들 가운데는 에드문트 안슈타트(1978년 이래)와 페터 미트레가(1989년 이래), 또한 에버하르트 파비안과 래먼 템플턴(1992년 이래)이 있습니다.

지부 감독에 대한 조정된 마련이 1976년에 실시되기 시작하였을 때, 서독, 비스바덴의 벧엘 가족은 187명뿐이었습니다. 그때 이래로 지부 성원은 30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포함하여, 1134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것은 이 지부가 수행할 특권을 누리고 있는 활동의 국제적인 면모를 어느 정도 반영해 줍니다.

점증하는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인쇄 시설

1970년대 중반에 독일의 지부 시설은 콜헤크라고 알려진 비스바덴의 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곳은 한때 숲 가장자리에 있던 조용한 변두리였지만 이제는 비스바덴 도시 중에서 급속히 성장해 가는 지역입니다. 협회는 이미 이 지역에서 13차례나 소유지를 증대시켜 왔었습니다. 하지만 서독의 왕국 선포자의 수가 약 10만 명 선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야외 활동을 감독하기 위해 더 큰 사무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서 출판물을 마련하기 위해 더 증설된 인쇄 시설이 필요하였습니다. 확장을 위해 추가로 대지를 구입하는 일이 매우 어려워지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었습니까? 지부 위원회는 여호와의 지도를 기도로 구하였습니다.

1977년 말에, 새로 임명된 지부 위원회의 위원들은 다른 장소에 새로운 벧엘 숙소를 건축할 가능성을 고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낡은 제도의 끝이 틀림없이 매우 가까웠다는 것이 전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요소를 또 고려해야 하였습니다. 인쇄 방식이 바뀌고 있었으며, 협회는 낡은 제도에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가 되든 간에 대규모로 인쇄하는 일을 지속하려면 새로운 인쇄 방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동독에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금지령 기간에 그 상황에 대처하는 데서 얻은 경험은, 일단 변화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 비스바덴의 형제들이 변화를 가져오는 일을 훨씬 수월하게 해 주었습니다. 어떻게 그러하였습니까?

오프셋 인쇄를 하기로 결정함

동독의 여호와의 증인에게 출판물을 공급하는 일은 1961년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이후로 점차 어려워졌습니다. 그 일을 좀더 수월하게 하기 위하여, 축소된 형태의 「파수대」 특별판이 동독 형제들을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이 특별판에는 단지 연구 기사들만 실려 있었습니다. 이 특별판을 생산하려면 기사들을 또다시 조판해야 하였습니다. 특별히 얇은 종이에 인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인쇄된 지면을 접는 것 역시 힘든 일이었습니다. 형제들은 그 작업을 해낼 수 있는 자동 접지기를 찾아냈는데, 알고 보니 그 기계는 동독의 라이프치히에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실로 묘한 일이었습니다. 그곳에선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고, 그리고 눈에 덜 띄는 이 축소판 「파수대」는 바로 그 나라를 위해 고안된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그 일을 간소화하기 위하여, 벧엘에 들어오기 전에 오프셋 인쇄를 하는 법을 배운 한 형제는 그 잡지를 그 인쇄 방법으로 재생산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연구 기사를 사진으로 찍고, 크기를 줄인 다음, 그것을 오프셋판에 노출시킬 수 있었습니다. 작은 매엽식 오프셋 인쇄기가 지부에 선물로 들어와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연구 기사뿐 아니라 잡지 전체를, 처음에는 흑백으로 마침내 천연색으로 발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작은 크기의 서적들까지도 발행되었습니다.

당시 워치 타워 협회장인 네이선 노어가 1975년에 비스바덴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그 인쇄 작업 과정을 흥미 있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인쇄물을 살펴본 뒤 “상당히 좋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인쇄물이 동독을 위한 특별판이며 우리가 새로운 인쇄 방식을 좋아한다는 설명을 듣자, 노어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토록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제들은 우리가 베풀 수 있는 최상의 것을 받을 만합니다.” 그는 즉시 그 작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가외의 기계를 구입하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통치체 성원인 그랜트 수터가 1977년에 독일을 방문하여, 협회는 오프셋 인쇄로 전환하는 문제를 오랫동안 신중히 고려해 왔고 이제 대규모로 오프셋 인쇄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하였을 때, 비스바덴의 형제들은 이미 그 인쇄 작업에 얼마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간접적으로, 동독의 금지령이 그들을 이러한 변화에 대비시켜 준 것입니다.

하지만 인쇄 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단지 받아들이는 것 외에도 관련된 일이 더 있었습니다. 수터 형제는 더 규모가 크고 육중한 인쇄기가 필요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대형 인쇄기를 어디에 설치할 수 있을 것입니까? 오프셋 윤전 인쇄기가 천연색으로 인쇄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는 것과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콜헤크에서 더 확장할 가능성을 여러 각도로 조사해 보았지만, 모두 문제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였습니까?

새로운 지부 복합 건물

다른 장소에서 부지를 물색하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1978년 7월 30일에, 뒤셀도르프 대회에 모인 약 5만 명의 증인과 뮌헨 대회에 모인 거의 6만 명의 무리는, 깜짝 놀라게도, 완전히 새로운 지부 복합 건물을 건축하는 데 필요한 부지를 매입할 계획이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의 일 년에 걸쳐 123개 장소를 조사하였습니다. 마침내, 젤터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한 언덕에 자리잡은 부지가 선정되었습니다. 통치체의 승인을 받아, 1979년 3월 9일에 그 부지를 매입하였습니다. 더욱이 18명의 토지 소유주와 교섭함으로 부지에 인접해 있는 또 다른 65개 구획의 땅을 매입하여, 확장을 위한 30헥타르의 부지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스바덴에서 북쪽으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젤터스는 트럭이 통행하기가 쉬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65킬로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에 프랑크푸르트의 라인마인 국제 공항이 있습니다.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상 가장 큰 건축 공사가 이제 착수된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까? 건축 위원회의 한 위원인 롤프 노이페르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건축 기사인 한 형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러한 대규모 공사를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공사가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는 상상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보통, 그처럼 복잡한 대규모 건축 공사는 다년간의 경험이 있고 모든 필요한 전문가를 갖춘 사무소에서만 떠맡곤 하였거든요.” 하지만 형제들은, 여호와께서 형제들이 건축하기를 원하신다면 그 결과도 축복해 주시리라고 추리하였습니다.

40가지 건축 허가 서류를 받아야 하였지만, 지방 관리들이 기꺼이 협조해 주었으며 그 점은 매우 고마웠습니다. 처음에는 얼마의 반대가 있었는데, 주로 교직자들로부터 있었습니다. 그들은 반대를 선동하기 위한 집회를 마련하였지만 헛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국의 증인들은 자원해서 건축 공사를 도왔습니다. 그들이 나타낸 영은 주목할 만하였습니다. 매일 건축 현장에는 평균 400명의 정규 봉사자가 있었으며, 언제든지 거의 200명의 “휴가” 봉사자, 즉 휴가 때 와서 일하는 봉사자가 있었습니다. 4년간의 건축 기간에 적어도 1만 5000명의 증인이 각기 자원해서 봉사하였습니다.

한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기후에 상관없이, 갖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따뜻하든 서늘하든 심지어 꽁꽁 얼어붙는 추운 날씨에도, 일이 진척되었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라면 작업을 중단했을 때에도, 우리는 그저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나라들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미국, 오리건 주에서 온 잭 스미스와 노라 스미스 그리고 15세 된 딸 베키에게는, 도움을 주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하는 것조차도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나 봅니다. 그 가족이 뮌헨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 참석해 있을 때, 협회가 독일에 새로운 지부 시설을 건축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벧엘 건축에 참여할 수 있다면 매우 큰 특권일 것입니다!”라고 그들은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참여할 수 있음을 알렸습니다. 잭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1979년 대회를 위한 자원 봉사를 하고 있는 중에 신청서와 함께 가능한 한 속히 오라는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몹시 설레어 우리가 하던 일이나 대회에 통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건축 봉사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부지의 기존 건물을 개조해야 하였습니다. 1979/80년 겨울에 첫 번째 숙소 건물이 완공되었습니다. 1980년 9월에는 새로운 벧엘 숙소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인쇄 공장의 건축 공사 역시 가까스로 계획된 때에 시작되었습니다. 1978년 1월에 주문한, 길이가 27미터나 되는 오프셋 윤전 인쇄기를 1982년 초에 들여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인쇄 공장의 적어도 일부분이라도 완성되어 있어야 하였습니다.

우리 스스로 대부분의 일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한 형제는 지금도 놀라워하는 어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중 아무도 끊임없이 바뀌는 작업조를 이끌고 그러한 대규모 공사장에서 일해 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특정한 작업에 필요한 전문가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부면에서 더는 진척시킬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차례 마지막 순간에 가서 자격 있는 형제로부터 갑자기 신청서를 받곤 하였습니다. 특정한 기술을 가진 형제들이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인도와 축복에 대해 그분에게 감사하였습니다.

젤터스로 이전

작업에 필요한 모든 기계와 장비는 말할 것도 없고, 약 200명의 벧엘 성원의 가구와 개인 소유물을 옮기는 데도 할 일이 많았습니다. 한꺼번에 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일이었습니다. 점차 한 부서씩 이전하였으며, 건축 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벧엘 가족이 젤터스로 이사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이사한 사람들 가운데는 인쇄 공장에서 일하는 형제들이 있었는데, 이 부서가 복합 건물 중 완공된 첫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비스바덴의 기계들이 일부분씩 해체되어 젤터스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1982년 2월 19일에 젤터스의 새로운 윤전 오프셋 인쇄기로 천연색 인쇄가 시작되었습니다. 참으로 크게 축하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5월 무렵에 비스바덴 인쇄 공장은 조용해졌습니다. 34년 만에 비스바덴의 인쇄 공장이 폐쇄된 것입니다.

새로운 오프셋 인쇄기의 첫 번째 큰 작업은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을 인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출판물은 1982년 지역 대회에서 발표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으며, 독일은 7개 언어로 생산하도록 요청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제본 시설이 아직도 비스바덴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제본 시설은 그 후 1년 이상 지날 때까지 젤터스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책의 접지들이 젤터스의 인쇄기에서 인쇄되어 나오면, 협회 트럭으로 접지들을 신속히 비스바덴으로 옮겨 제본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가외의 일이 따랐지만, 형제들은 처음으로 인쇄한 134만 8582부 중 48만 5365부를 완성하는 데 성공함으로, 여러 나라의 대회에 참석한 국제적인 무리가 새로운 발표물을 받고 기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할 때 만감이 교차하였으리라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일부 벧엘 가족 성원들에게는 비스바덴이 거의 35년 동안 그들의 집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비스바덴의 벧엘 복합 건물은 분할되어 여러 사람에게 매각되었습니다. 이전에 제본 시설이 있던 한 작은 구획만을 계속 소유하여 왕국회관으로 개조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의 국제적인 연합을 상징하는 이 회관은 현재 네 개 회중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두 개는 독일어 회중이고 한 개는 영어 회중이며 다른 하나는 러시아어 회중입니다.

봉헌식 날

젤터스 벧엘 복합 건물에 마지막 손질을 한 후, 1984년 4월 21일에 봉헌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건축 공사에 참여했던 모두는 여호와의 손이 내내 그들과 함께 하였음을 깊이 느꼈습니다. 그들은 지도를 받기 위해 여호와를 바라보았으며, 극복할 수 없어 보이는 장애물들이 제거될 때마다 그분에게 감사하였습니다. 그들은 참 숭배를 증진하는 데 이미 사용되고 있는 이 완성된 시설을 통해 그분이 축복하신 실제적인 증거를 이제 보게 된 것입니다. (시 127:1) 참으로, 이 날은 특별히 기뻐할 만한 때였습니다.

봉헌식이 있기 앞서 주초부터 복합 건물이 방문객들에게 개방되었습니다. 협회와 관계가 있었던 여러 관리들이 시설을 견학하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이웃 사람들도 환대를 받았습니다. 한 방문객은 자기 목회자 덕분에 오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목회자가 근년에 와서 전체 회중이 듣기에 싫증이 날 정도로 자주 증인들에 대해 불평을 하였습니다. 봉헌식이 있기 전 일요일에, 목회자는 건물을 개방하여 환대를 베푸는 증인들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양 무리에게 경고하면서 또다시 증인들을 비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방문객은 이렇게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초대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날짜는 잊고 있었습니다. 목회자가 지난 일요일에 그 날짜를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이 날을 무심코 지나쳐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한 견학 마련이 먼저 있은 후에 마침내 봉헌식 날이 되었습니다. 봉헌식이 오전 9시 20분에 음악으로 시작되었을 때, 당시 14명의 통치체 성원 중 13명이 초대를 받아들여 참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매우 기뻤습니다! 성공적인 건축 공사에 이러저러한 면으로 기여한 모두가 직접 참석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화로 전국에 있는 11개의 다른 장소와 연결하는 마련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9만 7562명의 무리가 훌륭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잊지 못할 그 날에 젤터스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 강제 수용소에 투옥되어 있는 동안 믿음을 증명했던 여러 사람과 동독에서 투옥되었다가 비교적 최근에 석방된 몇몇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에른스트 젤리거와 힐데가르트 젤리거도 있었습니다. 젤리거 형제는 전 시간 봉사의 천직을 꼭 60년 전에 시작하였으며, 이 부부는 나치 및 공산주의 정권 아래 교도소와 강제 수용소에서 도합 40여 년을 보냈습니다. 봉헌식에 참석하고 나서, 그 부부는 이렇게 썼습니다. “영적 낙원에서 열린 놀라운 영적 잔치에 참석할 기회를 갖게 되어 우리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놀라운 프로그램에 귀기울이는 것은 신권적인 연합과 조화를 이룬 하느님의 교향곡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겪은 믿음의 시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기 원한다면, 「파수대」[영] 1975년 7월 15일호 참조)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집들’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왕국회관을 몇 주 내에 또는 불과 며칠 만에 건축하고, 대규모 대회 회관을 자원 봉사로 건축하며, 벧엘 복합 건물에 드는 수백만 달러의 건축 기금을 자진적인 기부로 조달하는 것을 보고는 종종 깜짝 놀랍니다. 독일 주민들은 이 모든 활동을 직접 볼 많은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서독의 첫 대회 회관이 1970년대 초에 서베를린에서 봉헌되었습니다. 다른 대회 회관들도 뒤이어 봉헌됨에 따라 1986년에는 서독의 모든 순회 대회가 증인이 소유하는 회관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이 이러한 건축 공사에 참여함에 따라 여호와의 축복을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뮌헨에서는 시 관리들의 협조로, 대회 회관 부지를 매우 적절한 가격으로 구입하였는데, 그 부지는 경관을 아름답게 꾸민 올림픽 공원 주변에 있는 거대한 올림픽 스타디움의 간선 도로 건너편에 있었습니다.

장비와 건축 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한 발전소가 이전 중이라서 배전반과 전화 교환기를 팔려고 내놓았기 때문에, 형제들은 원래 가격의 5퍼센트도 채 안 되는 값으로 그것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때마침 한 복합 건물을 헐어 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세면기, 화장실 설비, 문, 창문, 수백 미터의 수도관과 가스관과 통풍관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의자와 탁자를 직접 만듦으로 비용이 더 절약되었습니다. 도시의 조경 방침에 따라, 형제들은 대회 회관 부지에 27그루의 보리수를 심어야 하였습니다. 사업을 그만두려고 하는 종묘원에 보리수가 꼭 필요한 수만큼 있었는데, 크기도 저마다 정확히 규정에 알맞았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들을 원가의 십분의 일 값으로 매입하였습니다. 뮌헨 시에서 자갈로 꾸미는 거리들을 대부분 깔고 난 뒤,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몇 톤의 자갈을 구할 수 있었으며, 이 자갈을 사용하여 대회 회관 주변과 인접한 주차장 주변의 보도에 깔았습니다.

독일의 다른 대회 회관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데, 각 대회 회관은 독특하게 설계되어 저마다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대회 회관 하나하나는 실로, 솔로몬 왕이 3000여 년 전에 예루살렘 전을 묘사한 바와 같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집’입니다.—열왕 상 5:5, 「신세」 참조.

또한 왕국회관 건축이 속속 진행되어 독일의 2083개 회중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고 있습니다. 현재 17개의 지역 건축 위원회가 있습니다. 1984년에 첫 지역 건축 위원회가 마련되기 전에, 증인들은 독일 전역에 단지 230채의 왕국회관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래로 1998년 8월까지 해마다 평균 58채의 새로운 회관이 건축되었는데, 이것은 지난 12년 동안 매주 한 채 이상이 건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건축과 관련해서도,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은 국경 너머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계적인 가족의 일부입니다. 독일 출신으로 국제 종으로 섬겨 온 사람들이 40명이 넘으며, 이들은 협회가 어느 곳으로 보내든지 필요한 기간만큼 건축 활동에 기꺼이 참여해 왔습니다. 또 다른 242명은 여러 나라의 그러한 건축 공사에서 각기 다양한 기간 섬겨 왔습니다.

양 무리를 치는 여행하는 감독자들

조직의 영적 상태에 기여하는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수행하는 활동입니다. 그러한 남자들은 참으로 하느님의 양 무리의 목자들입니다. (베드로 첫째 5:1-3) 그들은 사도 바울이 묘사한 바와 같이, “사람들로 된 선물”입니다.—에베소 4:8.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회중을 방문하여, 그들을 세워 주고, 함께 야외 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여행하는 감독자들 가운데 게르하르트 올트만스, 요제프 샤르너, 파울 브로벨과 같은 형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1925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오토 불레와 막스 잔트너도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은 1930년대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필요가 커짐에 따라, 다른 형제들이 여행하는 감독자 명단에 더 오르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때부터 현재까지, 290명이 넘는 형제들이 서독에서 여행하는 활동에 참여해 왔으며, 동독에서는 40여 명이 참여해 왔습니다. 그들은 왕국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진실로 자신을 바쳐 왔습니다. 일부 형제들의 경우, 이것은 성장한 자녀나 손자녀를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맡은 임무를 수행하면서, 시간을 내어 연로하거나 병약한 부모를 정기적으로 돌봐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이 여행하는 봉사자들 가운데는 활기차면서도 보람 있는 이 활동에서 수십 년 동안 섬겨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호르스트 크레트슈머와 게르트루트 크레트슈머는 1950년대 중반 이래로 독일 전역에서 여행하는 활동을 해 왔습니다. 크레트슈머 형제는 비스바덴 벧엘에 잠시 머물러 있을 때인 1950년에 에리히 프로스트가 인자하게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한 이러한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호르스트, 결코 염려하지 마십시오. 형제가 여호와께 계속 충실하다면 그분은 형제를 돌봐 주실 것입니다. 내가 그러한 경험을 했으니까, 형제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계속 충실하기만 하십시오.”

1998년 현재, 독일에서 125명의 형제가 순회 혹은 지역 감독자로서 섬기고 있습니다. 이들은 장성한 남자들로서, 평균 30년 동안 전 시간 여호와를 섬겨 왔습니다. 그들의 아내들도 봉사의 직무에 열심이며 그들이 방문하는 회중의 자매들에게 특히 격려가 되어 왔습니다.

여행하는 감독자가 브루클린으로 가다

마르틴 포에칭거와 게르트루트 포에칭거는 독일의 여호와의 백성 가운데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히틀러의 제삼 제국 시대 이전, 도중, 이후에 여호와를 충실히 섬겨 왔습니다. 나치의 속박에서 해방된 후에, 이 부부는 즉시 전 시간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30여 년 동안 그 부부는 독일 전역의 순회구를 섬기면서 여행하는 활동을 해 왔습니다. 수많은 증인들이 그 부부를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1959년에 포에칭거 형제는 길르앗 제32기 학급에 참석하였습니다. 영어를 모르는 게르트루트는 남편과 함께 하지 못했지만 남편이 받은 특권으로 인해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남편과 떨어져 있는 것은 전혀 생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치의 박해는 그 부부를 9년 동안이나 강제로 떼어놓았으며, 결혼한 지 불과 몇 개월밖에 안 되었을 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제, 여호와의 조직이 그들에게 신권 활동을 위하여 자진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을 것을 요청하자,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여호와를 섬긴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기꺼이 신권 임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977년에 그들은 미국 뉴욕 브루클린 세계 본부의 벧엘 가족 성원이 되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포에칭거 형제는 통치체 성원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미국 영주권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비스바덴 벧엘에 머물러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기다리는 기간은 예상보다 길어져서, 여러 달이 걸렸습니다. 마르틴이 영어를 사용하는 능력을 갈고 닦는 동안, 활력이 넘치는 그의 아내 게르트루트 역시 영어를 공부하였습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60대 중반의 여자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호와의 봉사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하였습니다!

비스바덴 벧엘 가족 중 영어를 할 줄 아는 여러 명의 성원은 마르틴과 게르트루트가 영어를 배우도록 돕는 일을 매우 즐거워하였습니다. 영어를 공부하는 동안 게르트루트가 매우 속상해할 때마다, 남편은 친절하게 이렇게 충고해 주었습니다. “여보, 무리하지 말고 느긋하게 해요.” 하지만 게르트루트에게는 ‘느긋하게 하는’ 성향이 도무지 없었습니다. 여호와를 섬긴 그의 전 생애는 영혼을 다한 전념과 결단력이 특징을 이루었습니다. 게르트루트는 그와 동일한 정신으로 영어를 배우는 데도 열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78년 11월, 영구 입국 비자를 받자마자, 그는 남편과 함께 브루클린으로 갔습니다.

그들이 떠나던 날 만감이 교차하였지만, 독일 형제들은 그들이 받은 새로운 봉사의 특권에 대해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약 10년 후인 1988년 6월 16일에 마르틴이 83세의 나이로 지상 행로를 마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깊이 애도하였습니다.

남편이 사망한 후에 게르트루트는 독일로 돌아와서 벧엘 가족 성원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게르트루트는 여전히 ‘느긋하게 하’지를 못합니다. 그는 앞으로도 결코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게르트루트는 벧엘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더하여, 종종 휴가를 사용하여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포에칭거 부부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원한다면, 「파수대」[영] 1969년 12월 1일호와 1984년 8월 1일호, 「파수대」 1988년 9월 15일호 참조)

국제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도움이 된 특별한 강습들

포에칭거 부부가 브루클린으로 떠나기 얼마 전인 1978년 이래로, 열흘간의 실용적인 훈련 과정인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이 독일의 파이오니아들을 강화시키는 데 기여해 왔습니다. 해마다 강습이 전국에서 순회구별로 열리고 있습니다. 적어도 1년 동안 파이오니아 명단에 들어 있으면서 이전에 강습에 참석한 적이 없는 모든 파이오니아들이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1998년 초까지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에 참석한 사람은 1만 6812명이었습니다. 독일어 외에도, 그리스어, 러시아어, 세르보-크로아트어, 스페인어, 영어, 이탈리아어, 터키어, 포르투갈어, 폴란드어, 프랑스어로도 강습이 열리고 있습니다.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도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에 참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크리스티네 아모스는 강습에 참석하기 1주일 남짓 전에, 그의 아들이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자동차 사고로 죽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자매는 강습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까? 그의 남편은 이 기간에 집에 혼자 있게 되면 어떻게 지낼 것입니까? 이 부부는 아내가 강습에 참석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아내가 영적인 일에 정신을 몰두하는 것이 축복이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기간에 남편은 벧엘에서 일하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그 부부는 모두 젤터스로 와서 건축 공사에 참여하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공사가 완공되고 나서, 그들은 그리스와 스페인과 짐바브웨의 건축 공사에 참여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현재 그들은 다시 독일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천직으로 삼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파이오니아 봉사가 끊임없이 도전이 되긴 하지만 깊은 만족감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1958년 이래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해 온 잉게 코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 시간 봉사는 여호와에 대한 깊은 사랑과 감사를 날마다 나타낼 특별한 기회를 줍니다.” 1959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한 발트라우트 간은 이렇게 덧붙여 말합니다. “이 악한 제도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는 보호책이 되지요. 여호와의 돕는 손길을 느끼는 것은 진정한 행복과 내적인 만족감을 가져다 주거든요. 물질의 가치는 그것에 비할 바 못 됩니다.” 남편과 함께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는 마르티나 샤크스는 이렇게 부언합니다. “파이오니아 봉사는 ‘인생 학교’입니다. 자제와 참을성과 같은 특성들을 배양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요. 파이오니아로서 나는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에 매우 친밀감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파이오니아 봉사가 벧엘 봉사, 선교 활동, 순회 활동의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더 많은 선교인을 원하는 절실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도움이 되도록, 1981년에 독일에 길르앗 분교가 설립되어 독일어를 사용하는 파이오니아들이 이 훌륭한 과정을 밟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젤터스의 새로운 벧엘 복합 건물이 아직 완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 두 학급은 비스바덴에서 사회되었습니다. 젤터스로 이전한 뒤, 세 개의 학급이 그곳에서 열렸습니다. 독일 출신의 100명의 학생 외에도, 룩셈부르크와 스위스와 네덜란드 출신의 독일어를 사용하는 학생들이 이 다섯 학급에 참석하였습니다. 졸업한 후, 이 학생들은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동유럽, 태평양 지역을 포함하여 총 24개 나라와 지역으로 널리 파견되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까지는 독일의 전 시간 종들 중 183명이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 참석하였습니다. 1996년 말까지는, 부분적으로는 길르앗 분교 덕분에 그 수가 368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1997년 1월 현재 그 학생들 중 약 절반이 여전히 외국 임지에서 선교인으로 섬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이 선교인들 가운데는 1954년 이래로 타이에서 섬겨온 파울 엥글러, 1962년부터 스페인에서 섬기다가 1980년에 오스트리아로 임명된 귄터 부슈벡, 인도네시아와 중동에서 섬기다가 케냐로 옮기게 된 카를 죄미시, 케냐에서 섬긴 후에 에티오피아 지부에서 필요한 일을 지원하도록 요청받은 만프레트 토나크, 지난 32년 동안 선교 봉사를 하면서 마다가스카르, 케냐, 베냉, 부르키나파소에서 섬겨 온 마르가리타 쾨니거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학교인 봉사 훈련 학교는 미혼인 장로와 봉사의 종들에게 교훈을 베푸는데, 1991년 이래로 독일에서 정기적으로 운영되어 왔습니다. 네덜란드, 덴마크, 룩셈부르크, 벨기에, 스위스, 오스트리아, 체코 공화국, 헝가리 출신의 독일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은 독일 출신의 형제들과 함께 이 학교에서 제공하는 탁월한 훈련을 받아 왔습니다. 일부 학생들은 졸업한 뒤 가외의 책임을 맡고, 아프리카와 동유럽, 그 밖의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지역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젤터스의 벧엘 숙소와 인쇄 공장은 또한 그 자체가 사실상 “학교” 역할을 해 왔는데, 이곳에서 형제들은 동유럽에서 전파 활동의 길이 열렸을 때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준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벧엘 생활을 통해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웠으며 여호와께서 인간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사용하여 자신의 일을 완수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봉사부에서 일한 형제들은 끊임없이 성서 원칙을 적용하고 통치체의 지침을 주의 깊이 따름으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가르쳐 준 사람들은 큰 압력을 받았을 때에도 계속 영의 열매를 명백히 나타내고, 균형 잡힌 태도를 보이며, 여호와를 절대적으로 신뢰한 형제들이었습니다. 다른 지부에서 온 형제들과도 참으로 값진 교훈을 주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교육과 사랑으로 장벽을 극복함

지난 10년 동안, 피의 사용을 금하는 성서의 교훈에 순종하기로 결심한 여호와의 증인의 입장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세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해 왔습니다. (사도 15:28, 29) 여기에는 편견과 그릇된 정보라는 장벽을 극복하는 일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1990년에 병원 안내 봉사부가 독일에 도입되었습니다. 그 해 11월에 독일에서 열린 세미나에 427명의 형제가 참석하였는데, 그 중 많은 수가 독일 형제들이고 그 나머지는 아홉 개 나라에서 온 형제들이었습니다. 이 마련은 국제적인 유대를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그 장로들은 자기들이 받은 도움에 대해 매우 감사하였습니다. 만하임에서 온 한 장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고 확고하면서도 적절한 존경심을 가지고 우리의 견해를 명백히 밝힐 준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 참석한 한 장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토록 광범위한 분야의 지식을 그처럼 간단하고도 쉽게 다루는 세미나에 참석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때 이래로 세미나를 여러 차례 열어, 그동안 독일에서 구성된 55개 병원 교섭 위원회에게 교육을 베풀어서 무혈 치료와 관련하여 증인들의 필요를 돌보게 해 왔습니다. 이 위원회들이 수행해 온 일은 좋은 결실을 거두어 왔습니다. 1998년 8월까지 독일 전역에서 3560여 명의 의사가 증인들에 대한 무혈 치료에 기꺼이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이 숫자에는 「포커스」지가 몇 년 전에 “독일에서 가장 우수한 1000명의 의사”로 지정했던 의사들 가운데 사분의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96년 1월에 병원 교섭 위원회는 특별히 마련된 「가족 보호—여호와의 증인을 위한 의료 관리」라는 편람을 배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훌륭한 편람은 의료 요원과 관리들만 사용하도록 마련된 것인데, 이용할 수 있는 무혈 대체 요법에 관한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이 편람이 판사, 사회 사업가, 신생아학자, 소아과 의사들의 수중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판사들 대다수가 이 편람의 수준 높은 질과 실용성에 대해 자주 언급함으로 감사를 표하였습니다. 수혈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무혈 대체 요법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워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뇌르틀링겐의 한 판사는 “이건 내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자르란트 대학교의 한 교수는 민법에 관한 상급 과정을 밟는 한 그룹의 토의 및 필기 시험의 근거로 편람의 내용을 사용하였습니다.

병원 교섭 위원회가 현재 세계 도처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위급한 상황에서 국제적인 협조가 가능합니다. 한 의사가 처방한 특정한 약품을 환자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었던 경우, 우리의 국제적인 통신망은 독일에서 그 약품을 구입해서 우송해 주는 일을 용이하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독일의 협조적인 의사들이 베풀 수 있는 치료를 받는 마련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10여 개 나라의 형제 자매들이 그러한 의사들을 만나게 하는 마련을 해 주었습니다.

물론, 독일에 살고 있는 형제들 역시 이 국제적인 협조로부터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1995년에 한 자매가 노르웨이로 여행하던 중에 사고를 당해서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에 있는 그의 아들은 그 소식을 듣자 즉시 병원 안내 봉사부에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독일의 병원 안내 봉사부는 노르웨이 지부 사무실에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 다음날 그 자매는 한 노르웨이 증인의 방문을 받았는데, 이 증인은 도움을 더 잘 베풀기 위해 독일어를 할 줄 아는 관심자를 데려오려고 차로 약 130킬로미터나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후에 그 아들은 편지 가운데서 이렇게 감사를 표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조직입니다! 대단한 사랑입니다! ·⁠·⁠· 우리의 느낌을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 같은 일은 참으로 특이합니다.”

이처럼 교육과 사랑을 통해, 한때 만만찮은 장애로 여겨졌던 일을 극복하는 면에서 큰 발전을 해 왔습니다. 이보다 바로 앞서, 또 다른 장애 역시 제거되었습니다.

갑자기—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다!

갑자기 발생한 일로 전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세계 전역의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지켜 보았습니다. 베를린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그 일을 축하하였습니다. 동서를 가로막던 장벽이 제거된 것입니다. 그 날은 1989년 11월 9일이었습니다.

25년 이상 전인 1961년 8월 13일 오전, 동베를린 관리들이 공산주의 관할 지역과 베를린의 나머지 지역을 분리시키는 장벽을 세우는 것을 보고 베를린 시민들은 어안이 벙벙했었습니다. 베를린은 물리적으로 동과 서로 분할됨으로 동독·서독 양국의 상황을 반영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다른 어느 것보다 더 극적으로, 베를린 장벽은 냉전 시대에 두 초강국 사이에 벌어진 투쟁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89년의 그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2년 남짓 전인 1987년 6월 12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브란덴부르크 문이 보이는 곳에서 베를린 장벽을 등지고 연설하면서 이렇게 요구하였습니다. “고르바초프 각하. 이 문을 개방하십시오. 고르바초프 각하. 이 장벽을 무너뜨리십시오.” 그러면 그의 요청이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어떤 암시라도 있었습니까? 그것은 냉전 시대의 미사여구 이상의 훨씬 의미심장한 요청이었습니까?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느지막이 1989년 초에 동독 정권의 수뇌인 에리히 호네커는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양, 장벽이 “50년간 아니 100년간 계속 서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예기치 않게 갑자기 브란덴부르크 문이 열리고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졌습니다. 젤터스 벧엘 가족의 한 성원은 11월 9일, 목요일 저녁 회중 집회에 참석한 다음 집으로 돌아와서 늦은 시간의 저녁 뉴스를 시청하려고 TV를 켰을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아서, 그는 동·서 베를린 사이의 국경선이 개방되었다는 보도를 면밀히 주시하였습니다. 동베를린 시민들이 27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로이 서베를린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차량들은 그 일을 축하하여 경적을 울리면서 국경선을 넘어오고 있었고, 점점 더 많은 서베를린 주민들이—어떤 이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나—국경 쪽으로 가, 길을 따라 줄지어 서서, 예기치 않은 방문객들을 팔을 뻗어 포옹하였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장벽이 문자 그대로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 후 24시간 동안, 전세계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한발짝도 물러서기가 어려웠습니다. 장래에 영향을 미칠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에게 무엇을 의미할 것입니까? 전세계 증인들에게는 무엇을 의미할 것입니까?

트라비가 찾아오다

이튿날 토요일 오전 8시가 조금 못 되어, 한 벧엘 형제가 젤터스의 작업장으로 가다가 동료 벧엘 가족인, 지금은 헝가리에서 섬기고 있는, 카를하인츠 하르트콥프를 만났습니다. 흥분 어린 어조로, 그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틀림없이 조금만 있으면 동독에서 온 첫 번째 형제들이 여기 젤터스에 나타날 거야!” 하르트콥프 형제는 평소처럼 침착하고도 덤덤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형제들은 벌써 여기에 와 있네.” 사실, 그 날 이른 아침에 두 형제가 동독제 2행정 사이클 엔진을 갖춘 트라비 차로 도착한 다음, 일과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면서 벧엘 정문 밖에 주차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은 삽시간에 벧엘 전체에 퍼졌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예기치 않은 반가운 방문객들을 만나서 인사를 나눌 기회를 갖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출판물을 차에 가득 싣고 동독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여전히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물론 출판물 역시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그 순간의 흥분이 이 형제들에게 용기를 새로이 불어넣어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 오전 집회를 위해 돌아가야 합니다”라고 그들은 설명하였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그토록 공급이 부족했던 출판물을 그 형제들이 몇 상자 싣고서 나타났을 때 그 회중이 얼마나 기뻐했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 후 몇 주 동안 수많은 동독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밀려들어 왔는데, 그들 중에는 생전 처음 와 본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오랫동안 맛보지 못했던 이주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국경에서 그들은 손을 흔들어 환영하는 서독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 역시 방문객들을 맞이하면서 그곳에 있었는데,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 외에도 더 실질적인 것을 베풀었습니다. 증인들은 동독에서 넘어오는 이 방문객들에게 성서 출판물을 자유로이 배부하였습니다.

몇몇 국경 도시에 있는 회중들은 방문하는 동독 사람들과 만나려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출판물이 수십 년 동안 금지되어 왔었기 때문에, 그 출판물에 대해 거의 혹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호별 방문 활동 대신에 “트라비에서 트라비로” 방문하는 봉사가 유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종교를 비롯해서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하였습니다. 어떤 경우 전도인들은 단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마 이 두 잡지를 한번도 읽어 보신 적이 없을 겁니다. 동독에서는 거의 40년 동안 금지되어 왔으니까요.” 흔히 이러한 대답을 듣곤 하였습니다. “금지된 잡지라면, 틀림없이 좋은 것이겠군요. 받아보겠습니다.” 국경 도시 호프에 사는 두 전도인은 각각 한 달에 1000부에 달하는 잡지를 제공하였습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곳 회중과 인근 회중에서는 얼마 안 있어 여분의 잡지를 모두 전하였습니다.

한편, 동독 형제들은 새로이 얻은 자유를 누리기는 하였지만, 처음에는 다소 조심스러워하였습니다. 금지령 아래 있던 1972년에 진리를 배운 빌프리트 슈뢰터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장벽이 무너진 후 처음 며칠 동안은 모든 것이 갑자기 뒤바뀌지 않을까 하여 자연히 약간 염려하였습니다.” 그 후 두 달이 채 안 되어, 그는 베를린 대회 회관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대회에 대해 그는 후에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그토록 많은 형제들과 함께 교제할 수 있어서 가슴이 몹시 벅찼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였듯이, 나 역시 왕국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생동감이 넘치는 대회’를 즐기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와 비슷한 감사의 표현을 만프레트 타메에게서도 듣게 됩니다. 금지령 기간에는 집회들이 작은 규모라서 확성 장비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30여 년 동안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해 왔지만, 난생 처음으로 이제야 마이크를 사용해서 말하게 되었습니다. 확성기에서 나오는 내 목소리를 듣고 얼마나 겁이 났는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갑자기 회중 성원 전체가 함께 임대한 홀에 앉아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만프레트가 몇 개월 후에 들은 경우처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은 흐뭇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1990년 1월에 나는 치료차 사우나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이전 국립 경찰대 책임자를 만났습니다. 우정적인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프레트 씨, 이제야 우리가 엉뚱한 사람들과 싸우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풍부한 영적 양식!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전세계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인용하신 그 기본적인 진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마태 4:4; 신명 8:3) 국제적인 형제 관계의 사랑에 찬 도움으로, 금지령 기간에도 동독의 증인들은 제한된 양이긴 하였지만 영적 양식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에 사는 형제들이 누리는 영적인 풍부함을 맛볼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마자, 증인들 개개인은 출판물 공급품을 휴대하고 동쪽 지역으로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약 4개월 후인 1990년 3월 14일에, 독일 민주 공화국의 여호와의 증인은 공식 인가를 받았습니다. 이제 협회에서 출판물을 직접 발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월 30일에 25톤의 영적 양식을 실은 트럭 한 대가 젤터스 복합 건물을 떠나서 동쪽으로 갔습니다. 「1991 브리태니카 연감」은 후에 이렇게 지적하였습니다. “단지 2개월 동안, 워치타워 협회 서독 지부 사무실은 동독에만 11만 5000부의 성서를 포함하여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을 275톤 발송하였다.”

그 무렵에 라이프치히에 사는 한 형제가 서독의 동료 증인에게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일 주일 전에 우리는 여전히 양식을 적은 분량 은밀하게 수입하였습니다. 머지않아 우리는 트럭에서 4톤의 양식을 부리게 될 것입니다!”

켐니츠에 사는 하인츠 괴를라흐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첫 번째 출판물 발송품이 어찌나 빨리 도착했던지 우리는 받을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첫 발송품이 도착하고 난 뒤 나는 침대에 겨우 가까스로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침실 전체가 온통 상자로 가득 찼었거든요. 마치 보물 보관실에서 잠자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젤터스의 형제들 역시, 자유를 누리는 증인들에게는 흔히 당연시되는 것들로부터 매우 오랫동안 단절되어 온 형제들에게 새로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소나마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인쇄 공장의 한 감독자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단정하게 차려 입은 연로한 형제가 인쇄기 한 대를 지켜 보며 서 있었습니다. 그의 견학 그룹이 이미 앞으로 갔는데도, 그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최고 속도로 돌아가는 인쇄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잡지를 지켜 보면서 떠나기를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면서 그는 한 형제에게 다가갔는데, 마음이 깊이 감동된 것 같았습니다. 서투른 독일어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면서 그는 우물거렸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미소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였습니다. 그는 양복 상의 안쪽 호주머니에서 종이 몇 장을 꺼내어 우리에게 건네 주고는 얼른 가버렸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학생용 연습장 몇 매에 베껴 쓴,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러시아어 「파수대」였습니다. 그 잡지 사본을 만드는 데 얼마나 걸렸을 것입니까? 우리로선 알 길이 없지만, 분명히, 인쇄기로 잡지 한 부를 생산하는 데 드는 극히 짧은 시간에 비하면 수백 배 이상의 더 긴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각 연구 집단의 증인들은 작은 활자로 인쇄되었거나 손으로 쓴 몇 부의 잡지를 겨우 며칠간만 간직하는 것으로 만족할 필요가 더는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개인용 잡지를, 그것도 천연색 삽화가 들어 있는 잡지를 가질 수 있고, 더욱이 야외 봉사에서 사용하도록 가외의 잡지도 몇 부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개적인 숭배 활동에 적응함

더 큰 자유를 갖게 되자, 그로 인해 도전이 제기되었습니다. 정부의 금지령 아래 전파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였습니다. 또한 그렇게 한 사람들은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금지령이 해제된 후에, 림바흐오버프로나의 그리스도인 장로인 랄프 슈바르츠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물질주의와 생활의 염려로 인해 곁길로 빠지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동독이 1990년 10월에 연방 공화국에 통합된 후에, 어떤 경우, 동쪽 지역의 증인 가족들은 좀더 수수한 거처로 이사함으로 가외의 시간에 일하지 않고서도 집세를 낼 수 있었으며 집세가 오를 때에도 집회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마태 6:22, 24.

공산주의 통치 아래 어려웠던 기간에도, 형제들은 야외 봉사에 계속 참여해 왔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호별 방문도 슬기롭게 하였는데, 아마 한 구획에서 한 집을 방문한 다음 다른 구획으로 가서 또 다른 집을 방문하였을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투옥될 위험성이 가장 클 때에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금지령이 내려졌을 때 겨우 열한 살이었던 마르틴 얀은 그들이 이제 당면하게 된 몇 가지 변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지금은 전도인들이 구획 전체의 집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구역을 전부 새로 돌아야 하였습니다. 우리는 특정한 번지의 집이나 특정한 층만을 방문하는 이전 방식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매우 오랫동안 이러한 통상적인 방식으로 봉사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조정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참을성을 나타내야 하였습니다. 출판물을 더는 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제공하는 일은 전도인과 관심자 모두에게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이전 방식으로 봉사하는 데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전도인들은 야외 봉사를 마치고 나면 시작한 때보다 가방에 출판물이 더 많은 경우도 가끔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금지령 기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을 칭송의 대상으로 여겼는데, 증인들에게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용기는 증인들을 존경하게 해 주었습니다. 자유를 더 누리게 되자 증인들을 상당히 적극적으로 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몇 해 지나지 않아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시장 경제에 맞는 생활 방식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증인들의 방문을 평화롭고 평온한 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심지어 귀찮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금지령 아래서 증거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었습니다.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데는 그에 못지 않게 결단력이 요구되었습니다. 사실, 많은 증인들은 활동이 오랫동안 금지되었던 서유럽 어느 나라의 한 감독자의 이러한 말에 동감하고 있습니다. “금지령 아래서 활동하는 것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반대가 활동을 둔화시키지 못하다

좋은 소식의 전파 활동이 동독에서 새로이 활기차게 시작되었지만,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처음에는 그다지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의 소식에 실제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지자, 교직자들은 점차 불안해졌습니다. 「도이쳬스 알게마이네스 존타그스블라트」지에 따르면, 종교 전문가로 자처하는 드레스덴의 한 교직자는 “여호와의 증인은 공산당과도 같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교직자들은 이제는, 1950년대의 경우처럼 증인들을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미국의 스파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없지만, 증인들을 공산주의자와 관련지으려고 애썼습니다. 물론, 공산주의 정부가 증인의 활동을 40년 동안 금지해 왔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 주장이 심각한 허위 선전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허위 선전을 하는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교직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나치 시대에 그리고 공산주의 통치 아래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활동이 금지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종교적 요소들이 배교 세력의 지원을 받아 여호와의 증인이 헌법상 보장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려고 애썼지만, 증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로 증거할 기회를 온전히 이용하였습니다.—마가 13:10.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

왕국 소식에 호응한 사람들 중에는 구체제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에곤은 38년 동안 동독 경찰로 일해 왔습니다. 그는 아내가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를 시작하였을 때 매우 싫어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증인들이 종종 자기 집으로 가져다 준 시기 적절한 「깨어라!」 기사들과, 그들의 우정적이고 사랑에 찬, 예절 바른 행실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내와 함께 어느 특별 대회일에 참석하였을 때, 그는 전에 자신이 검거했던 한 형제와 대면하게 되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가 불편함을 느꼈으리라고, 심지어 죄책감을 가졌으리라고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이 자라갔습니다. 지금은 에곤과 그의 아내 모두 침례받은 증인들입니다.

귄터는 19년 동안 국가 보안대의 일원으로 일해 왔으며, 소령으로 진급했었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몸담고 일해 왔던 체제가 무너진 후 괴로워하고 환멸을 느끼던 그는 1991년에 처음으로 증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는 증인들의 행실을 보고, 또한 자신과 자신의 문제에 대해 증인들이 보여 준 이해심으로 인해 감명을 받았습니다.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무신론자였지만 그는 마침내 하느님이 참으로 계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1993년에는 침례받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현재 그는 하느님의 왕국을 지지하면서 행복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고 공산주의가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온전히 확신하였는데, 그는 국가 보안대에 증인들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전할 목적으로 여호와의 조직에 침투하는 일에 대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1978년에 “침례”를 받은 후에, 그는 10년 동안 이중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이렇게 시인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행실이 어떠한지를 직접 경험해 보기도 하고, 「창조」 책과 「계시록 절정」 책을 연구하고 나니까 증인에 대한 적들의 비난 가운데는 허위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창조주가 계시다는 증거가 놀랄 만큼 매우 많더군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얼마 전에, 그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으로부터 탈퇴할 구실을 찾은 다음 더는 믿을 수 없는 체제를 계속 지지할 것인지, 아니면 배반자임을 밝힌 다음 여호와의 진정한 종이 되려고 노력할 것인지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하였습니다. 그는 후자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회개하고 성서 연구를 한 다음 재침례를 받았습니다. 이번의 침례는 정확한 지식과 진정한 헌신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서 들을 있게 된 이야기

금지령이 해제된 후에 동독의 증인들은 공산주의 치하에서 겪었던 일을 좀더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1996년 12월 7일에 베를린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운영 본부 건물 봉헌식에서, 동독의 양 무리를 영적으로 강하게 유지하는 일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여러 명의 장로가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하였습니다.

증인이 된 지 50년이 된 볼프강 마이제는 나이가 20세였을 때인 1951년 6월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였습니다. 여론을 조작하기 위한 널리 광고된 공개 재판에서 그는 4년 금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볼프강과 유죄 판결을 받은 여러 명의 형제들이 법정에서 끌려나왔을 때, 역시 그 공개 재판에 참석했던 약 150명의 증인이 그 형제들을 에워싸고 악수를 나눈 다음 왕국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법원 청사 창문마다 사람들은 머리를 내밀고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하였습니다. 당국은 일반 대중의 정신에 그러한 유의 인상을 남기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증인들에 대한 그러한 여론 조작을 위한 공개 재판이 더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에곤 링크는 금지령 기간 초기에 각 「파수대」 기사를 타이프로 쳐서 여섯 장 내지 아홉 장의 묵지 사본을 만들었던 일을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서베를린과 동독 사이를 차로 왕래하던 트럭 운전자인 서베를린 형제는 회중들에게 영적 양식을 공급하기 위하여 우리의 요청에 언제나 응해 주었습니다. ‘양식’은 신속히—불과 삼사 초 만에—옮겨졌는데, 그 짧은 시간에 크기가 같은 두 개의 큰 장난감 곰도 한 차량에서 다른 차량으로 옮겨졌습니다. 집에 도착한 후에, 장난감 곰들의 배에 있는 것을 다 꺼내서 중요한 소식과 새로운 임명에 관한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비교 에스겔 3:3.

경험담 가운데는 장벽이 세워지기 전에 서베를린에서 출판물을 입수하여 동독으로 몰래 가지고 들어갔던 배달원들이 나타낸 용기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물론 언젠가는 서베를린에 출입하는 일이 단절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 논의할 목적으로 1960년 12월 25일에 여러 명의 동독 형제들이 한 모임에 초대되었습니다. 마이제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모임은 여호와의 인도에 따른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장벽이 갑자기 세워진 날인 1961년 8월 13일에는 우리의 조직이 다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르만 라우베는 전쟁 포로로 스코틀랜드에 있을 때 처음으로 진리에 접하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동독으로 돌아온 다음, 금지령이 내려지자, 그는 형제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영적 양식을 공급할 필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증인들은 임시 변통의 인쇄기를 사용하여 자체적으로 인쇄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라우베 형제는 세 개 호를 더 발행할 종이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던 날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종이가 없으면, 최상의 인쇄기라도 아무 쓸모가 없지요.” 그러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라우베 형제는 이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며칠 후에, 누군가가 지붕의 홈통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우첸에서 온 한 형제였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쇄업자시지요. 바우첸 쓰레기 처리장에 인쇄 용지가 여러 두루마리 널려 있는데, 신문 인쇄 공장에서 쓰고 남은 두루마리들입니다. 땅 속에 파묻을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형제들은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날 밤에 우리는 일단의 사람을 모아서 바우첸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건 단지 두루마리 몇 개가 아니라 거의 두 톤가량이나 되는 종이였습니다! 기우뚱거리는 우리 차량이 그 종이를 운송할 수 있었다는 것은 거의 믿어지지 않습니다. 아무튼 얼마 안 있어 그 모든 종이를 옮겼습니다. 그래서 협회에서 얇은 종이에 작은 활자로 인쇄한 출판물을 공급하는 마련을 해 줄 때까지 우리는 계속 인쇄하는 데 필요한 종이를 충분히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상황으로 인해 양 무리 각 성원의 신분을 비밀로 해 두기 위하여 극히 조심해야 하였습니다. 롤프 힌터마이어는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한 번은 형제들과 만나고 난 뒤, 나는 체포되어 조사를 받으러 어느 건물로 연행되었습니다. 내게는 주소와 그 밖의 정보가 담긴 여러 장의 쪽지가 있었습니다. 건물에 도착하자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가야 하였습니다. 이 때에 쪽지들을 삼킬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쪽지가 아주 많았기 때문에,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계단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관리들은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을 눈치채고는 내 목을 움켜쥐는 것이었습니다. 나 역시 양손으로 내 목을 잡고는 이렇게 더듬거리며 말하였습니다. ‘이제, 결국 다 삼켜 버렸어요.’ 이 소리를 듣고 그들이 나를 놓아주는 바람에, 이제는 입속에서 더 작아지고 눅눅해진 쪽지들을 실제로 다 삼켜 버릴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호르스트 슐로이스너는 박해가 가장 심하였을 때인 1950년대 중반에 진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한 이러한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종들이 금지령 아래 있었던 거의 40년 동안 그들을 인자하게 보호해 오셨습니다.”

베를린에서 열린 승리의 축하 행사

형제들은 공산주의 압제 시대가 지나간 것에 대해 정말 축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여호와를 더 자유롭게 섬기도록 이제 열려진 기회에 대해 그분께 공개적인 대회에서 감사함을 나타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1989년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마자, 통치체는 베를린에서 국제 대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대회 조직은 신속히 마련되었습니다. 1990년 3월 14일 저녁에 그 대회 조직 요원들이 대회 마련을 논의하기 위한 모임을 갖도록 계획되었습니다. 헬무트 마르틴은 임명된 대회 감독자인 디트리히 푀르스터가 한 가지 발표를 하도록 자기에게 요청했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모임에 참석한 형제들에게 그 날 모임이 있기 앞서 동독의 여호와의 증인이 공식 인가를 받았음을 발표하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금지령이 공식적으로 해제된 것입니다!

대회가 그처럼 비교적 늦은 시기에 계획되었기 때문에, 올림픽 경기장을 더는 주말에 이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즉 7월 24일부터 27일까지 대회를 갖도록 계획되었습니다. 경기장에 들어갈 수 있는 때가 되었을 때, 형제들에게는 시설을 준비할 시간이 하루밖에 없었으며, 대회가 끝난 뒤에 모든 것을 해체할 시간도 불과 몇 시간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7월 23일, 월요일에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새벽 5시에 이미 경기장에 와 있었습니다. 젤터스 벧엘 가족의 한 성원인 그레고르 라이하르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동독에서 온 형제들은 마치 여러 해 동안 해 온 것처럼 그 일에 흔쾌히 열중하였습니다.” 후에 경기장 관리 한 사람은 “경기장이 처음으로 철저히 청소되어 있어” 기쁘다고 말하였습니다.

약 9500명의 동독 형제는 전세 낸 13대의 열차편으로 대회장에 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200대의 전세 버스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 장로의 보고에 따르면, 열차 한 대를 전세 내기 위해 예약할 때 그는 철도 직원에게 드레스덴 지역에서만도 열차 3대를 예약할 계획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철도 직원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동독에 여호와의 증인이 그렇게 많이 있단 말입니까?”

전세 낸 열차로 여행한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베를린에 도착하기도 전에 대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림바흐오버프로나의 한 장로인 하랄트 페슬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예약된 열차를 타려고 켐니츠 역에서 만났습니다. 베를린행 여행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지하에서 작은 집단으로 활동했던 기나긴 금지령 기간이 있은 뒤, 갑자기 그토록 많은 형제들을 동시에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행하는 동안 내내, 우리는 여러 열차칸에서 서로 어울리면서, 몇 해 동안, 아니, 심지어 수십 년 동안 보지 못했던 형제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재회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모두가 여러 해 더 늙긴 하였지만 충실히 인내해 왔습니다. 우리는 베를린리히텐베르크 역에서 환영을 받았으며, 확성기의 안내를 받아 각기 다른 모임 장소에 가 보니, 베를린 형제들이 큰 표지판을 들고서 우리를 기다리며 서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벗어나 분명히 나타나게 된, 참으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지 책에서 읽거나 듣기만 했던 점을 직접 경험한 것인데, 우리는 참으로 국제적인 거대한 형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많은 증인들에게는 이번이 바로 첫 번째 대회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초대를 받았을 때 가슴이 설레었습니다”라고 빌프리트 슈뢰터는 회상합니다. 그가 금지령 아래서 1972년에 헌신을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 주 전부터 우리는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나는 이 같은 경험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다른 많은 형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온 형제들이 커다란 경기장에 함께 모여 있는 광경을 보리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동베를린에 사는 형제들은 마을 저편으로 불과 몇 킬로미터 건너가 형제들이 모여 있는 대회장에 참석하기를 얼마나 자주 열망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들은 마침내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입니다.

64개국에서 거의 4만 500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통치체 성원 일곱 명도 있었습니다. 통치체 성원들은 이 중대한 모임에서 동독에서 온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려고 온 것입니다. 이 경기장에서 제삼 제국인 나치 정권은 1936년에 올림픽 경기를 이용하여 전세계에 그들의 업적을 인상 깊게 알리려고 노력했었습니다. 이제 이 경기장에 다시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이번에는 운동 선수를 찬양하기 위해서나 애국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참으로 행복한 여호와의 백성의 국제 가족 성원들이었으며, 여호와께 감사를 나타내기 위해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들어 있는 귀중한 진리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박수를 쳤던 것입니다. 이 모임에서 1018명이 물침례를 받았는데, 그들은 대부분 동독에서 금지령 아래 진리를 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참석자들 중에서 동독 형제들의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동독의 이웃 나라인 폴란드에서 온 약 4500명의 열정적인 대표자였을 것입니다. 그들 역시 금지령 아래서 여러 해를 인내해 왔으며, 여러 해 만에 처음으로 큰 대회를 갖게 된 것도 불과 최근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폴란드 증인은 후에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폴란드 형제들은 서쪽의 이웃 나라 형제들이 희생적인 영을 나타내 준 것에 대해 매우 감사하게 여깁니다. 숙소, 식품, 대회장까지의 왕복 교통편을 모두 무료로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러한 마련이 없었다면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참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서독 형제들에게는 자유롭게 대회를 즐기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었지만, 그들은 이 대회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젤터스 벧엘 가족인 클라우스 파이게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연로한 충실한 형제들을 많이 보게 되어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40년간의 공산주의 통치 아래서뿐 아니라 제삼 제국 아래서도 박해를 받은 분들이 있었는데, 이분들은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하여 나치 주요 인물들이 한때 앉았던 곳인 별도로 마련된 구획에 앉았습니다.” 경기장의 이 특별한 구획은 연로하거나 지체 부자유한 사람들을 위해 사랑으로 따로 마련된 곳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왕국이 최종 승리를 향해 전진하는 것을 막으려고 음모를 꾸며 온 정치 세력들에 대해 지금 승리를 거두고 있는, 하느님의 왕국을 상징하는 참으로 뚜렷한 한 가지 표였습니다!

모임 장소를 마련하는 일

동독에서 금지령이 해제된 직후, 그곳의 형제들 역시 세계 도처에서 여호와의 종들이 즐기고 있는 정기적인 대회 프로그램을 통해 유익을 얻도록 하기 위한 마련이 이루어졌습니다. 순회구들이 온전히 재조직되기 전인데도, 그곳의 회중들이 서독에서 열리는 특별 대회일 및 순회 대회에 참석하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참석하는 전도인들을 서독 전도인과 동독 전도인 반반씩 균등하게 배정하였습니다. 이 마련은 형제 관계의 유대를 강화시켜 주었으며, 또한 동독 형제들에게는 같은 대회에 참석하는 서독 형제들과 함께 일함으로 대회 절차들을 배울 기회가 있게 되었습니다.

순회구들이 구성되었을 때, 동독의 형제들에게 서독에 있는 기존 대회 회관을 사용하도록 권하였습니다. 다섯 군데—베를린, 뮌헨, 뷔헨바흐, 묄베르겐, 트라펜캄프—의 대회 회관은 이전 국경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이용하기가 수월하였습니다. 하지만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동독에서 대회 회관 건축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드레스덴 근처에 있는 글라우하우에 자리잡은 대회 회관은 1994년 8월 13일에 봉헌되었으며, 현재 독일에서 가장 큰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 회관으로, 4000명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왕국회관 건축에도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독일 민주 공화국에서는 왕국회관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지역에 있는 2만 명이 넘는 증인들을 돌보기 위하여 왕국회관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외부 사람들은 건축 공사가 수행되는 방식을 눈여겨보며 경탄해하였습니다.

스타벤하겐의 왕국회관 건축에 관하여 한 신문은 이렇게 보도하였습니다. “호기심이 강한 수많은 구경꾼들은 건물이 세워지고 있는 방식과 속도로 인해 벌써부터 깜짝 놀라고 있다. ·⁠·⁠· 그 건물은 35개 직종에 종사하는 약 240명의 훈련받은 건축자들에 의해 세워졌는데, 그들 모두는 자원 봉사자였고, 그들 모두는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모두가 주말에 무보수로 일하였다.”

또 다른 신문은 발트 해 뤼겐 섬, 자가르트에 세워진 한 왕국회관에 관하여 이렇게 보도하였습니다. “약 50명의 남녀가 벌떼처럼 부지런히 건물의 기초를 놓고 있다. 하지만 상황은 광적이 아니다. 분위기는 특이하게도 편안하고 우호적이다. 일하는 속도가 분명히 빠른데도, 일반 건축 현장과는 달리,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동료 일꾼에게 고함을 지르는 사람도 없다.”

1992년 말까지 일곱 채의 왕국회관이 건축되었으며, 16개 회중에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약 30채의 왕국회관은 건축 계획 단계에 있었습니다. 1998년까지는 이전의 동독 지역에 있는 회중의 70퍼센트 이상이 이미 자체 왕국회관에서 집회를 갖고 있었습니다.

고무적인 국제 대회들

동유럽에서 정부의 제한 조처들이 연달아 해제됨에 따라, 통치체에서는 그러한 나라들에서 대회를 개최할 마련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대회는 영적으로 세워 주는 기회, 즉 하느님께서 자신의 종들에게 하도록 위임하신 일에 명확히 계속 초점을 맞추도록 격려를 받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마태 6:19-24, 31-33; 24:14) 그러한 나라들의 증인들 가운데는 여러 해 동안 단지 작은 집단으로만 모임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러한 대회를 통해서 그들은 동료 증인들을 알게 되었으며 또한 그들의 충실한 인내에 대해 여호와께서 축복하신 증거로 인해 격려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대표자들도 초대되었으므로, 그 형제들은 자기들이 국제적인 형제 관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더욱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대표자들 가운데는 독일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989년에서 1993년 사이에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구소련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 독일 대표자들이 상당히 참석하였습니다.

현재의 체코 공화국, 프라하에서 1991년 “경건한 자유 애호자” 국제 대회가 열리기 전날에, 「리도베 노비니」 신문은 “‘독일 형제들’이 빌려 준 확성 장치”를 설치하기 위하여 약 40명의 증인으로 이루어진 한 팀이 수행한 주목할 만한 일에 대해 보도하였습니다. 독일 형제들은 확성 장치를 빌려 주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설치하는 팀의 일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독일 형제들은 그처럼 체코 형제들과 함께 일하면서 수십 년간의 대회 경험에서 얻은 유익의 일부를 알려 줄 수 있어 행복해하였습니다. 국제 대회에 참석하는 독일 대표자들이 대체로 수백 명 선으로 제한되었지만, 프라하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3만 명의 대표자가 초대되었습니다. 참으로 매우 놀라운 대회가 되었습니다!

1955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지역 감독자로 섬겼고 이 대회에 독일 대표자로 참석한 디터 카부스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지금은 협회 인쇄기로 인쇄되는] 「신세계역」이 발표되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경기장 사방에서 자발적인 박수가 터져 나왔는데, 영영 끝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껴안았으며, 스스럼없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16명의 형제가 단지 성서 한 권만을 갖고 있었던 강제 수용소 시절을 회상하였습니다. 프로그램이 다 끝난 뒤에도 노래를 부르고 훌륭한 교제도 즐기면서 한 시간 동안 혹은 그 이상 머물러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듬해인 1992년에 독일 대표자들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도 참석하였습니다. 일부 대표자들은 모든 일이 원활하게 돌아가지는 않았음을, 적어도 독일 대표자들의 경우 숙소와 관련하여 그러하였음을 기억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까지도 증거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일단의 대표자들이 갑작스레 통지를 받고 한 호텔에서 다른 호텔로 옮겨야 하였을 때, 이 그룹의 50세 된 러시아 통역자는 그 증인들의 행실에 깊은 감명을 받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군요.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이 대표자들의 관심을 더 많이 끈 것은 사랑하는 러시아 형제 자매들이 나타낸 영이었습니다. 대회가 끝난 뒤 한 독일 대표자는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그 형제들이 프로그램에 대해 얼마나 깊은 인식을 나타내는지 말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성서도 노래책도 없이 [그 무렵 그 두 가지 책이 러시아어로 공급된 양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였음]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무슨 말씀을 들려주시고자 하는지 기대하는 태도로 주의 깊이 귀기울여 들었습니다.”

다음해에는, 1200여 명의 독일 증인이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들은 귀국하였을 때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표자들 가운데, 1950년 이래로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하고 있는 티투스 토이브너가 있었는데, 그는 “동유럽에서 언젠가 활동이 시작되면 모스크바에서 처음 열리는 대회에 참석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겠노라고 아내에게 약속한 적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1993년에 실제로 그렇게 하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붉은 광장에서 하느님의 정부에 관한 잡지를 배부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또 다른 대표자는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우리는 러시아 형제들을 격려하러 이 대회에 참석하였고, 틀림없이 우리는 그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거꾸로 우리가 격려를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러시아 형제들은 사랑, 감사함, 충실함, 깊은 인식을 나타내는 모범을 통해 우리를 놀랍게 격려해 주었습니다.”

젤터스 벧엘 가족 성원들은 그처럼 충실한 형제 자매들을 섬기는 특권을 가진 데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다른 나라들에 배달을 마치고 돌아온 벧엘 트럭 운전자들에게서 보고를 듣게 되었을 때 그 특권에 대한 인식은 더 깊어졌습니다. 그 벧엘 운전자들은 자기들이 열렬히 환영받은 일, 저녁 늦은 시간인데도 형제들이 기뻐하면서 공급품을 차에서 내리는 일에 가담한 일, 배달해 준 자기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전에 형제들이 모두 함께 기도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증축—절실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동유럽에서 연달아 금지령이 해제되었습니다. 큰 대회들이 열렸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이 가속화되었습니다. 그 지역의 밭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성서 출판물에 대한 수요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수요를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었습니까? 독일 지부는 더 큰 역할을 하도록 권유를 받았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기 전인 1988년에 이미, 통치체는 독일 지부 시설을 50퍼센트 확장할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처음에 지부 위원회는 그러한 확장이 필요한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워하였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대규모 복합 건물이 봉헌된 지 불과 4년밖에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지방 관리들에게 확장 신청을 하였습니다. 루트케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가 설계도를 제출하자, 젤터스 건축 행정관은 거의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내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되도록이면 큰 규모로 건축할 것을 권합니다. 당국에서 다시는 확장 허가를 결코 내주지 않을 겁니다.’ 이 조언을 듣고 우리는 재고하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몇 달 만에 모든 해당 관청에서 허가를 받았고, 처음에 신청한 50퍼센트 확장 계획은 120퍼센트로 변경되었습니다!

실제 건축은 1991년 1월에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훈련받은 일꾼들이 건축 공사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는 광고에 대한 더딘 반응이나 건축 기금에 대한 소극적인 지원으로 나타난 바와 같이, 형제들 모두가 확장의 필요성을 확신한 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형제들에게 단지 좀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1991년 10월 3일에 독일의 모든 대회 회관에서 선정된 장로들과의 특별한 모임이 열렸습니다. 지난 10년 사이에 독일 지부의 서적 생산량이 거의 세 배나 증가하였음을 설명하였습니다. 폴란드, 헝가리, 동독, 루마니아,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소련에서 금지령이 해제되었습니다. 독일 국경 너머 먼 곳에 있는 나라들에 출판물이 공급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나라의 전도인들은 출판물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젤터스는 출판물을 공급하는 일에서 주된 역할을 하도록 요청을 받았습니다. 일단 형제들이 그 필요성을 분명히 알게 되자, 그들은 관대하게 지원하였습니다.

사실상, 처음에 미흡했던 반응이 결국 축복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러하였습니까? 독일 지부는 오직 이 나라의 자원 봉사자들에게만 의존하지 않고, 1985년에 통치체에서 한 마련을 이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해에 이미 국제 자원 봉사자 건축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독일 지부 공사가 완공되기 전, 19개국에서 온 331명의 자원 봉사자가 벧엘 가족과 함께 봉사하였습니다.

또한 독일의 많은 증인들도 건축 공사를 지원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은 휴가 기간에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구동독에서 온 약 2000명의 전도인이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금지령 아래 있을 때 자기들이 언젠가 벧엘에서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아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봉헌식 주말

노동이나 재정적 지원으로든 기도로든, 독일의 모든 여호와의 증인은 이 건축 공사를 지원하였습니다. 젤터스는 그들의 벧엘이었으며, 이 거대하게 확장된 복합 건물을 그들은 이제 여호와께 봉헌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따라서 건축 공사가 끝나가기 오래 전에, 다른 나라에서 오는 많은 손님들을 비롯해서 독일의 모든 형제들이 축하 행사에 함께 모이게 할 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1994년 5월 14일, 토요일 오전에 “활동으로 인도하는 큰 문”이 동유럽에서 활짝 열렸음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고린도 첫째 16:9) 동유럽의 나라들에서 온 형제들로부터 그들이 이미 누리고 있는 훌륭한 증가와 더욱 성장할 전망에 대해 직접 보고하는 내용을 듣는 것은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일이었습니다. 젤터스에서 3658명이 맛본 그 날의 감격은 일요일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독일의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 행사를 위해 빌린 여섯 군데—겔젠키르헨, 뉘른베르크, 라이프치히, 브레멘, 스투트가르트, 쾰른—의 경기장에 모이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형제들이 기대하는 마음으로 조용해지자, 프로그램이 여섯 개 장소에서 일제히 시작되었습니다. 젤터스에서 가진 토요일 봉헌식 프로그램에 대한 요약이 있은 뒤, 다른 나라 대표자들의 감동적인 보고들이 더 있었습니다. 참석한 통치체 성원이 겔젠키르헨, 라이프치히, 스투트가르트에서 각각 행한 연설은 두드러진 프로였습니다. 다른 세 장소에 참석한 청중도 유익을 얻도록 이 연설들은 전화선으로 연결되어 전달되었습니다. 참석한 17만 7902명 모두는 믿음 안에 확고히 머물러 있도록 그리고 그들을 느슨해지게 하는 어떠한 시도도 물리치도록 격려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행동할 때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동유럽에서 확장시킬 기회의 문을 예기치 않게 열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활동이 성취되지 못하게 막는 어떠한 일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형제들은 여호와께 머리 숙여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 전에, 다음과 같은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수천 수만의 형제/ 내 곁에 서 있네./ 모두 다 충실하고/ 충절을 지키네.” 여호와의 백성의 특징인 연합과 결의를 이보다 더 웅대하게 나타낸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훌륭한 봉헌식 주말이 끝났지만, 확장은 계속되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일찍 건축 봉사자들은 또다시 부지런히 일하였습니다. 일과 비용의 불필요한 중복을 피할 목적으로 협회에서 바로 최근에 정한 새로운 보관소 마련에 따라, 젤터스에 가외의 발송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1975년에 독일 지부에서는 583만 8095부의 서적과 2528만 9120부의 잡지를 생산하였습니다. 20년 후인 1998 봉사 연도에는 생산량이 증가하여 서적 1233만 998부, 잡지 1억 9966만 8630부, 오디오카세트 265만 6184개가 생산되었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증가는 주로 동유럽 나라들의 수요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금지령이 연이어 해제됨에 따라, 젤터스에서 더 많은 동유럽 나라들에 출판물을 발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1989년 5월에서 1998년 8월 사이에 젤터스에서 생산한 출판물의 68퍼센트인 5만 8793톤은 동유럽과 아시아의 21개 나라에 보내졌습니다. 이 분량은 각각 23톤의 출판물을 싣고 일렬로 늘어선 트럭 2529대분에 상당합니다.

건축하면서, 또한 전파함

1975년 이래로 여호와의 증인은 많은 건축을 해 왔습니다. 또한 증인들은, 건축자이면서도 “의의 전파자”였던 노아처럼, 균형 잡히게 자기들의 책임을 이행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베드로 둘째 2:5) 증인들은 건축 활동이 오늘날 참 숭배의 한 가지 중요한 요소임을 인정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의 중요성과 긴급성에 눈의 초점을 계속 명확히 맞춥니다.

실로, 봉사부는 젤터스의 건축 공사와 관련된 가외의 활동으로 인해 사실상 야외 봉사에 바치는 시간이 증가하게 되었음을 지적합니다. 물론, 신권적인 건물을 세우는 것 자체가 하나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속성으로 건축된 왕국회관과 대회 회관은 관찰자들에게는 끊임없는 경탄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열심히 정성을 다해 수행하는 건축 활동은 그들이 전파하는 좋은 소식에 주의를 돌리게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정직한 사람들은 다른 종교 단체에서는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느낍니다.

마그데부르크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이 시기에 봉헌된 왕국회관 중 하나가 마그데부르크에 있었습니다. 1923년 당시 협회는 독일 사무실을 바르멘에서 마그데부르크로 이전하였습니다. 1927/28년에 약 800석을 갖춘 품위 있는 대회 회관이 그곳에 건축되었습니다. 워치 타워 협회 서적인 「하나님의 거문고」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에서 형제들은 그 건물을 거문고 회관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대회 회관의 뒤쪽 벽은 거문고를 연주하는 다윗 왕의 모습을 도드라지게 새겨 아름답게 장식하였습니다.

1933년 6월에 나치는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협회의 재산을 압류하고, 공장을 폐쇄하였으며, 건물 위에 스바스티카 기를 게양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협회 재산이 증인들에게 반환되었지만, 그런 상황이 오래 가지는 못하였습니다. 1950년 8월에 그 재산은 공산주의 관리들에게 몰수당하였습니다.

독일이 재통합된 후 1993년에, 재산의 주요 부분이 협회로 반환되었으며, 그 나머지의 상당 부분에 대해서도 변상을 받았습니다. 반환된 구획 내에는 구거문고 회관도 있었습니다. 그 건물을 몇 개월에 걸쳐 수리하고 나자, 마그데부르크에 꼭 필요하고도 적합한 왕국회관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 건물이 봉헌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처음에는 1920년대에, 그 다음에는 1948년에, 이제 또다시 1995년에 봉헌되었습니다”라고, 봉헌식 때 페터 콘샤크는 설명하였습니다. 빌리 폴이 독일 지부 위원회를 대표하여 봉헌사를 하였습니다. 젊은 시절에 그는 마그데부르크 벧엘에서 봉사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1947년, 세계 본부에서 온 헤이든 커빙턴이 방문하여 바로 이 회관에서 형제들에게 연설하였을 때에 폴 형제는 통역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연설을 하는 내 심정이 어떠한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그는 450명의 초대 손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오늘날, 이전의 거문고 회관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여러 개의 마그데부르크 회중들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종들에게 하신 말씀이 진실하다는 산 증거입니다. 2700여 년 전에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바와 같습니다. “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무기”]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라.” 또는 히스기야 왕이 전에 자기 사람들에게 이렇게 상기시킨 바와 같습니다. “우리와 함께하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이사야 54:17, 「신세」 참조; 역대 하 32:8.

번역 사무실

독일 지부에서 수행하는 일 가운데 한 가지 중요한 부면은 번역과 관련이 있습니다. 독일어 번역부는 스위스 베른에서 1956년에 비스바덴으로 이전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번역부는 단지 네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그룹의 성원이었던 앨리스 베르너와 에리카 수르버는 사망시까지 충실히 일하였습니다. 초창기의 네 사람 중 하나인 아니 수르버는 지금도 번역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번역부는 여러 해에 걸쳐 확장해 왔습니다. 그래서 현재 독일 증인들은 「파수대」와 「깨어라!」지뿐만 아니라 서책까지도, 대부분의 경우, 영어로 발표되는 동시에 독일어로도 받고 있습니다.

독일어 번역 외에도, 상당량의 러시아어와 폴란드어 번역 작업도 1960년대까지는 독일에서 수행되었습니다. 이 일은 외국 봉사부에서 담당해 왔었는데, 이 부서에서는 동독, 폴란드, 소련을 비롯해서 활동이 금지된 여러 나라의 일을 돌보았습니다.

일단 여건이 갖추어지자, 폴란드의 경험 있는 번역자 몇 사람과 번역자로서 가능성이 있는 소련의 몇몇 사람이 젤터스로 초대되었습니다. 필요한 장비와 편안한 환경이 구비되어 있는 이곳에서 그들은 번역 작업에 대한 훈련을 한층더 받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독일어 번역자들의 경험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었는데, 독일어 번역자들은 언어의 종류에 상관없이 모든 번역자에게 흔히 있는 문제들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그 번역자들은 젤터스 벧엘 가족 성원들에게 매우 사랑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훈련 마련은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번역자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폴란드, 바르샤바 근처의 새로운 벧엘 복합 건물이 1992년에 봉헌된 뒤 그리고 번역자들이 주요 교육 과정을 마친 뒤, 독일에 있던 폴란드어 번역자들은 폴란드에 있는 폴란드어 번역팀의 다른 성원들과 합류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떠나기 전에, 번역자로서 가능성 있는 또 다른 번역자들—러시아 사람들과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훈련을 받기 위해 도착하였습니다. 처음에 다섯 사람이 1991년 9월 27일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 후에 젤터스에 도착하였습니다. 도합 30명 이상이 왔습니다.

1994년 1월에 러시아어 번역자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의 솔네치노예에 당시 건축 중인 벧엘에서 거주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한편 우크라이나어 번역자들은 이 기사를 집필할 당시, 우크라이나에 계획 중인 새로운 벧엘 숙소로 가까운 장래에 옮겨 가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다른 번역팀들도 젤터스에서 일한 적이 있으며 베풀어진 도움으로 유익을 얻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유일하신 참 하느님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전념하는 인간 사회의 기초인 “새 땅”을 이룰 목적으로 사람들을 “모든 나라와 부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모으시는 여호와의 목적을 끊임없이 생각나게 해 줍니다.—계시 7:9, 10; 베드로 둘째 3:13.

국제적인 세미나를 위한 장소

독일 지부가 편리한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는 유럽 대륙에서 가장 큰 여행자 관문이라고 하는 라인마인 공항이 있습니다. 젤터스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공항에서 불과 60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많은 증인들은 이곳을 거쳐 다른 목적지로 가는 중에라도, 이곳의 시설을 잠깐 방문하여 견학하고 지부 가족의 후대를 잠시 즐기고 나면 마음이 상쾌해짐을 느낍니다.

또한 젤터스는 여러 지부의 대표자들이 함께 의논할 수 있는 국제적인 세미나를 갖거나 모임을 갖기에 알맞은 장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통치체의 출판 위원회는 유럽의 16개 지부 대표자들이 1992년에 나흘 동안 이곳에서 브루클린의 형제들과 모임을 갖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에 있는 지부들을 포함하여, 유럽의 모든 지부에 틀림없이 영적 양식이 충분히 공급되도록 그들의 활동을 조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이 모임이 있기 전에도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서 출판물을, 그것을 읽는 데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가로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이 마련은 워치 타워 협회에서 영리 활동으로 출판물을 팔고 있다는 반대자들의 비난을 분명히 논파해 줍니다.

젤터스에서 세미나가 있고 나서, 이 마련은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 마련은 동유럽에 특히 유익하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그 지역에서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영적인 것을 갈구하고 있지만 흔히 경제적으로 심한 압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계적인 왕국 활동을 위한 비용은 어떻게 충당됩니까? 여호와의 증인과 그 밖의 인식 깊은 사람들의 자진적인 기부에 의해 충당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처럼 기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부 사람들은 성서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어떻게 지금 생활을 개선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배울 기회를 가능한 한 모든 사람에게 주는 일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기부합니다. (이사야 48:17; 디모데 첫째 4:8) 그런가 하면 하느님께서 현 악한 사물의 제도에 끝을 가져오시기 전에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을 가능해지게 하는 일에 그런 식으로 참여하고 싶은 욕망이 동기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마태 24:14.

그 후 1992년에 열린 두 번째 세미나에서는, 그때까지 해 오던 마련대로 독일 지부에서 여러 지부 사무실로 출판물을 보내어 재발송하게 할 것이 아니라, 독일 지부에서 유럽의 여러 나라에 있는 각 회중으로 직접 출판물을 발송한다는 안건을 중점적으로 다루었습니다. 1993년 4월에 열린 세 번째 세미나에서는, 이 마련에 중부 유럽의 6개 나라를 포함시킨다는 조처가 취해졌습니다. 1994년 2월, 동유럽 나라들을 위한 세미나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열렸으며, 또 다른 19개 나라의 회중들에게 유익을 주는 마련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마련에 이점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제반 비용이 절감되는데, 각 지부에서 출판물을 보관할 필요가 없으며, 그로 인해 나라마다 별도로 대규모의 발송부가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부 나라에서는 이 마련 덕분에 기존의 벧엘 시설을 확장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벧엘 숙소를 건축할 경우, 더는 그 규모를 그다지 크게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독일에서 출판물 보관, 포장 및 발송 작업을 하기 때문입니다.

독일 지부는 1989년에는 59개 언어의 약 2000가지 품목을 가지고 있었지만, 1998년에는 226개 언어의 8900가지 품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98년 4월 현재, 독일의 젤터스 지부는 32개 나라에 있는 8857개 회중의 74만 2144명의 전도인에게 필요한 출판물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에 대한 미움—모두 과거의 일만은 아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망하시기 전 마지막 저녁에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일부가 아니고 도리어 내가 여러분을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합니다. ·⁠·⁠·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다면 여러분도 박해할 것[입니다].” (요한 15:19, 20) 그러므로 히틀러의 제삼 제국이 무너진 이후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박해가 독일에서 완전히 중단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내려진 금지령이 해제된 곳에서도 대체로 사람들의 개인적인 자유가 많아지긴 하였지만,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박해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다른 양상을 띠었을 뿐입니다.—디모데 둘째 3:12.

이제는, 여호와의 백성의 이전 박해자들을 대신하여, 배교자들이 몽둥이를 들고 때리듯 이전의 그리스도인 동료들을 때리고 있습니다. (마태 24:48-51)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이 배교자들은 말이 더 많아졌으며, 거짓 비난이 더 빈번해지고 악의적이 되었습니다. 일부 TV 좌담 프로의 제작자들은 배교자들을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전문가들”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불만을 품은 이전 성원들의 말을 근거로 증인들을 판단하는 것이 지혜로운지 의문을 품는 정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한 TV 프로를 보고 나서, 어느 젊은 남자는 젤터스의 협회 사무실로 전화하여, 인터뷰에 응한 이전 증인과 몇 년 전에 성서 연구를 한 적이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 젊은 남자는 개인적인 이유로 그와의 연구를 중단하였습니다. 하지만 TV 프로를 보면서 전에 자기를 가르쳐 준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젊은 남자는 기분이 몹시 상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요? 그는 자신이 증인들에 대해 하고 있는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을 텐데요.” 그 결과, 그 젊은 남자는 성서 연구를 다시 시작하였는데, 이번에는 지방 회중의 한 장로와 성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TV를 보거나 신문에서 읽은 내용을 의문시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대중 매체의 공격이 빈번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협회는 특히 이처럼 범람하는 그릇 인도하는 선전에 대응하기 위하여 32면짜리 팜플렛을 마련하였습니다. 그 팜플렛의 제목은 「당신의 이웃인 여호와의 증인—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입니다.

그 팜플렛에는 독일의 약 14만 6000명의 증인이 참여했던 1994년 조사 결과에서 발췌한, 사실에 근거한 자료가 들어 있습니다. 그 조사 결과는 사람들이 증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그릇된 견해를 쉽게 논파해 주었습니다. 연로한 여자들의 종교인가? 독일의 증인 10명당 4명은 남성이며 증인들의 평균 연령은 44세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세뇌당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종교인가? 전체 증인의 52퍼센트는 성인이 된 후에 증인이 되었습니다. 가정을 파괴하는 종교인가? 증인들 중에서 독신은 19퍼센트이고, 기혼자는 68퍼센트이며, 과부는 9퍼센트이고, 단지 4퍼센트만 이혼한 상태인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증인이 되기 전에 이혼한 사람들입니다. 자녀 갖는 것을 반대하는 종교인가? 결혼한 증인들 5분의 4가량은 부모입니다. 평균 지능이 낮은 사람들로 이루어졌는가? 증인들 중 삼분의 일은 적어도 한 개의 외국어를 말할 줄 알며, 69퍼센트는 정기적으로 최근 사건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성원들이 삶을 즐기는 것을 금하는 종교인가? 매주, 증인 각자는 여러 형태의 오락에 14.2시간을 보냅니다. 한편, 영적인 일을 우선 순위에 두면서, 매주 종교 활동에 평균 17.5시간을 보냅니다.

이 팜플렛에서 특별히 주목을 끈 것은 “어린 올리버”를 다룬 논점이었습니다. 1991년에 태어나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의사들은 그 아이의 심장에 작은 구멍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적절한 시기에 올리버의 어머니는 수술할 마련을 하였으며,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일치하게, 기꺼이 무혈 수술을 해 줄 의사를 찾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반대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평판을 떨어뜨리려는 의도로 이야기를 왜곡시켰습니다. 수혈을 전혀 하지 않고 수술이 성공적으로 행해진 후인데도, 한 신문에서는 그 사건을 중대 뉴스로 다루면서, “광신적인”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올리버가 이제 ‘생명을 구해 주는 혈액’을 받음으로 살아났음을 암시하는 보도를 하였습니다. 그 노골적인 거짓 비난이 이 팜플렛에서 논파되었습니다.

처음에 이 팜플렛은 증인들에 대한 거짓 비난에 관해 질문하는 사람들만을 염두에 두고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1996년에 표지 디자인을 바꾸었고, 뒷면에는 무료 가정 성서 연구를 제안하는 내용을 실었습니다. 이 팜플렛은 독일 전역에 180만 부가 배부되었습니다.

대중 매체에 사실에 근거한 정보를 제공함

같은 해에, 대중 매체를 이용하여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왜곡된 인상을 심어 주려는 반대자들의 끈질긴 노력에 대처하기 위해 또 한 가지 조처가 취해졌습니다. 발터 쾨베가 홍보부를 맡은 한 위원회의 사회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반대자들이 대규모 운동을 벌이기 때문에 우리도 조직적으로 대응하여, 정보를 좀더 쉽게 구할 수 있게 해야 하였습니다.” 효과적인 홍보 활동을 할 잠재력이 있는 사람들을 물색하였습니다. 그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세미나도 열었습니다. 전국을 적절히 22개 지역으로 분할하였으며, 1998년에는 수백 명의 훈련받은 홍보부 봉사자들이 이 지역들의 필요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편집자나 신문·잡지 기고가들과의 개인적인 접촉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 부서의 활동과 관련하여, 또한 「나치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은 여호와의 증인들」 비디오를 공개 상영하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독일어판 「굴하지 않음」 비디오를 세계적으로 처음 상영하는 일이 1996년 11월 6일에 라벤스브뤼크의 강제 수용소 기념관에서 있었는데, 그 수용소는 많은 여호와의 증인이 감금되어 있었던 곳입니다. 언론계 종사자들과 탁월한 역사가들이 참석하였습니다.

1998년 9월 1일까지, 총 26만 9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331회에 걸친 이 비디오의 공개 상영에 모였습니다.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는 증인들뿐 아니라 언론계 대표자들, 정부 관리들, 일반 대중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신문에서 이 상영에 대해 논평하였는데, 기사들의 논조는 매우 긍정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실시된 이 비디오 상영 중에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나치의 박해를 다룬 전시회를 포함한 경우도 176회나 있었습니다.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수의 대중 매체 대표자들은 1993년 11월에 「마이스너 차이퉁」지에 실린 기고가의 이러한 견해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맹목적으로 고지식하게 비현실적인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증인들이 자기들의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얼마나 정확하게 설명하여 왔는지를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이 지식을 사용하여 목적 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 깜짝 놀랄 것이다.”

반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확고하게 서 있음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강제 수용소에서 석방된 지도 반세기 이상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충절에 관한 그들의 기록은 잊혀진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충절의 기록을 통해 강력한 증거가 여전히 이 세상에 제공되고 있습니다. 믿음을 타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일부 사람들은 이 기사를 집필할 당시 여전히 살아 있으며, 그때 못지 않게 지금도 열심히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들이 담대하게 서 있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보존하실 수 있음을 증거합니다. 강제 수용소 생존자들 중 일부가 그들과 같은 처지에 있었던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 하는 말에 귀기울여 보십시오. 그리고 괄호 안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의 연령(1998년 초 현재)에도 유의해 보십시오.

하인리히 디크만 (95세):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서 나는 수감자 전원 앞에서 내 동생 아우구스트가 처형되는 광경을 지켜 보도록 강요당하였습니다. 나는 믿음을 포기함으로 즉시 석방될 기회가 있었습니다. 타협하기를 거부하자, 수용소 책임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점을 잘 생각해 보고, 또 자네가 얼마나 더 살아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 봐.’ 5개월 후에 사망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라’는 것이 내 좌우명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애네 디크만(89세): “나는 그[강제 수용소] 경험을, 위대한 창조주이자 생명의 수여자이신 여호와께 충절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훈련으로 여깁니다. 내가 겪은 모든 일은 내 삶을 풍요롭게 해 주었으며 내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해 주었습니다. 내 생애 내내 행동의 동기가 된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억지로 행한 적은 없습니다.”

요제프 레발트(86세): “시험받은 그 어려운 시기를 만족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되는 것은, 압력과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리스도인 믿음과 중립을 유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느님 여호와의 도움으로 살아 남게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내 그리스도인 신념은 그때보다도 지금 훨씬 더 강합니다. 내 소원은 타협하지 않고 하느님 편에 계속 서 있는 것입니다.”

엘프리데 뢰르(87세): “히틀러 치하에서 8년간의 투옥 생활 중에 겪은 일들을 회상해 보면, 예상치 못했던 일은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백한 사실은, 진리의 길이 한편으로는 투쟁과 박해를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쁨과 승리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시간을 허비했다거나 유익이 없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리아 홈바흐(97세): “가장 잔혹했던 상황에서 여호와에 대한 사랑과 감사함을 나타내는 독특한 특권을 가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기쁨을 억누르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강요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우리가 하느님이 아니라 히틀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위협했던 우리의 적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수용소 담 안에 있는 동안에도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행복하였습니다.”

게르트루트 포에칭거(86세): “나는 삼 년 반의 독방 감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교도관은 선고가 내려진 다음 나를 내 감방에 다시 데려다 주고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은 내가 다시금 하느님의 존재를 믿도록 격려해 주었습니다. 지금처럼 계속 담대하십시오. 그러면 삼 년 반을 보내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참으로 맞는 말이었습니다! 독방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나는 특히 여호와의 사랑과 그분이 주시는 힘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강제 수용소 생존자들은 계속 확고하게 서 있습니다. 이제 그 증인들이 석방된 지 반세기 이상이 지났는데도, 그들의 충절의 행로는 여전히 세상에 대해서는 증거의 소리를 그리고 여호와에 대해서는 찬양의 소리를 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모든 종들에게 매우 훌륭한 격려가 됩니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은 독일에서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래로 이 나라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왕국을 알리는 데 8억 시간 이상을 바쳐 왔습니다. 동시에 독일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봉사의 직무는 다른 여러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쳐 왔습니다. 독일의 증인들은 그들 자신이 별개의 국가 집단이 아니라, 여호와의 숭배자들로 이루어진 세계적인 가족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1998년에 독일의 다섯 군데에서 열린 “하느님이 인도하는 생활의 길” 국제 대회에 21만 7472명이 참석하였을 때, 그러한 국제적인 연합의 뚜렷한 증거를 보게 되었습니다. 대표자들이 여러 나라에서 왔는데, 전체 프로그램은 13개 언어로 제공되었습니다. 대회에서는 계속 충실함을 나타내면서 꾸준히 좋은 소식을 전파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여호와의 도움을 받아 계속 충성스럽게 하느님이 인도하는 생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습니다.

[79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서독

함부르크

메켄하임

젤터스

프랑크푸르트

비스바덴

로이틀링겐

뮌헨

동독

베를린

마그데부르크

글라우하우

[66면 전면 삽화]

[69면 삽화]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승리의 왕국” 국제 대회, 1955년

[73면 삽화]

독일 증인들은 이주한 많은 사람들이 성서 진리로부터 유익을 얻도록 도왔다

[88면 삽화]

비스바덴의 벧엘 복합 건물, 1980년

[90면 삽화]

지부 위원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앞줄: 귄터 퀸츠, 에드문트 안슈타트, 래먼 템플턴, 빌리 폴. 뒷줄: 에버하르트 파비안, 리차드 켈시, 베르너 루트케, 페터 미트레가

[95면 삽화]

독일에서 사용되고 있는 10개의 대회 회관 중 일부

1. 글라우하우

2. 로이틀링겐

3. 뮌헨

4. 메켄하임

5. 베를린

[99면 삽화]

마르틴 포에칭거와 게르트루트 포에칭거

[100, 101면 삽화]

젤터스의 지부 시설

[102면 삽화]

외국에서 선교 봉사를 하고 있는 독일 출신의 일부 형제 자매들 (1) 만프레트 토나크, (2) 마르가리타 쾨니거, (3) 파울 엥글러, (4) 카를 죄미시, (5) 귄터 부슈벡

[110면 삽화]

금지령이 해제되자, 많은 출판물이 동유럽으로 신속히 발송되었다

[118면 삽화]

베를린 대회, 1990년

[124면 삽화]

구동독에 건축된 첫 왕국회관

[132, 133면 삽화]

봉헌식 프로그램—(위에 나와 있는) 젤터스에서, 뒤이어 독일 전역의 6개 경기장에서도 모임이 있었다

[139면 삽화]

범람하는 그릇된 정보에 대응하기 위한 도구들

[140, 141면 삽화]

강제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지만 (수용소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보라색 삼각형으로 식별되었음), 이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들은 (1995년에 브란덴부르크에 모였음) 믿음 안에서 확고함을 유지하였다

[147면 삽화]

옆면, 시계 바늘 방향으로: 하인리히 디크만, 애네 디크만, 게르트루트 포에칭거, 마리아 홈바흐, 요제프 레발트, 엘프리데 뢰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