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
우루과이
스페인 사람들이 처음으로 우루과이에 왔을 때인 1516년에는 금이나 은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며, 자기들이 찾고 있던 동양으로 가는 길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완만하게 기복을 이룬 지형과 온화한 기후가 가축을 기르기에 이상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도 돈을 벌 기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식민 강국들의 특유한 방식을 종종 사용하던 스페인은 침략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여 원주민인 차루아 인디오를 몰살하고 이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17세기와 18세기에는 스페인 사람들이 사실상 인디오 대신 이곳의 주민이 되었습니다. 그 후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도 이주민들이 많이 왔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루과이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의 후손이며, 공식 언어는 스페인어입니다.
300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주로 유럽인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그 중 약 10퍼센트는 조상이 인디오 원주민이며, 3퍼센트 미만은 아프리카에서 끌려 온 노예들의 후손입니다. 우루과이 사람들 대다수에게 주요 관심사는 종교가 아닙니다. 남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의 경우와는 달리, 가톨릭 교회가 주민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20세기 초부터 교회와 국가가 뚜렷이 분리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자유 사상가나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가 많기는 하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다. 흔히 듣게 되는 이러한 말을 통해 그들의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믿고 있어요. 종교를 믿지 않을 뿐이지요.”
그러한 사람들이 그리스도교국의 교리를 가르침받는 것이 아니라, 참 하느님—그분의 사랑에 찬 목적과 그분이 인류를 친절하게 대하신 일이 성서에 명시되어 있음—에 대해 배우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나타낼 것입니까? 그들은 하느님께서 영적인 그분의 숭배의 전으로 맞이해 들이시는 “보배” 가운데 속할 것입니까?—자그마한 시작
1924년에 후안 무니스라는 남자가 여호와의 숭배자들이 될 만한,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찾기 위해 스페인에서 왔습니다. 그는 당시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장인 J. F. 러더퍼드에게서 남아메리카로 이주하여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 파라과이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감독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후 얼마 안 있어 배를 타고 라플라타 강을 건너 우루과이 사람들에게 전파하러 갔습니다.
그 후 후안 무니스는 1967년에 사망할 때까지 43년 동안 하느님의 말씀을 두려움 없이 가르쳤으며, 우루과이를 포함하여 남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그 시절의 여호와의 증인들 가운데는 그가 전혀 원고를 보지 않고 성서만을 사용하여 두세 시간 동안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 많은 일꾼을 보내 달라는 요청이 응답되다
후안 무니스는 남아메리카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제자를 삼을 수 있는 잠재력이 크다는 점을 인식하고, 일꾼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틀림없이 그의 심정은 예수께서 이렇게 느끼셨던 바와 같았을 것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습니다. 그러므로 수확하는 주인에게 수확하는 일에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십시오.” (마태 9:37, 38) 따라서 무니스 형제는 “수확하는 주인”이신 여호와께 드린 기도와 일치하게, 러더퍼드 형제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렸습니다.
무니스 형제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러더퍼드 형제는 독일 마그데부르크에서 열린 1925년 대회 중에 한 독일인 파이오니아에게 남아메리카로 가서 기꺼이 도와 줄 수 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카를 오트였습니다. 오트 형제는 임명을 받아들였는데, 스페인어를 말하는 형제들 사이에서는 카를로스 오트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얼마 동안 아르헨티나에서 봉사한 후에 카를로스는 1928년에 우루과이의 수도인 몬테비데오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그 후 10년 동안 우루과이에서 봉사하였습니다.
카를로스는 이 나라에 오자마자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부지런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속히 리오네그로 거리에 있는 한 장소를 마련하여, 그곳에서 살면서 몇몇 관심자들과 정기적으로 성서 연구 모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성서 강연을 라디오로 방송하는 마련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한 라디오 방송국은 그러한 강연을 무료로 방송해 주겠다고 동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카를로스는 때때로 음식점에 들어가 식탁에서 식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하였습니다. 하루는 이렇게 식탁을 옮겨 가며 증거하던 중에 호세 가예크를 만났는데, 그는 상점을 운영하는 독일인으로 성서 진리를 신속히 받아들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호세는 카를로스와 합류하여, 우루과이 최초의 좋은 소식 선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전 시간 참여할 결심을 한 호세는 식품점을 팔고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카를로스와 함께 이 나라의 상당히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도시와 읍에서 집집으로 전파하고 성서 강연을 하였습니다. 호세는 1953년에 사망할 때까지 수많은 우루과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씨를 많이 뿌렸습니다. 그와 연구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회중의 성원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충실을 유지하고 있습니다.러시아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러시아인 여러 가족이 우루과이로 이주하여 북쪽 지역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번영하는 영농 부락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또한 대대로 성서를 존중히 여기면서 정기적으로 읽어 왔습니다. 열심히 일하며 성격이 내성적인 그들은 우루과이 사람들의 사회와는 거의 접촉하지 않는 엄격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우루과이의 초창기 좋은 소식 전도인 중 한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니키포르 카쳉코였습니다.
카쳉코 형제는 고향인 베사라비아에 있을 때는 확고한 공산주의자였습니다. 하지만 브라질로 이주한 후에 워치 타워 협회에서 발행한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진리의 소리를 식별하였고 열렬한 성서 연구생이 되었습니다. 그는 곧 브라질의 상파울루 지역에서 러시아어를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루과이에 사는 동족에게 모국어로 전파하고 싶은 열망에서 그는 약 2000킬로미터를 여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38년에 카쳉코 형제는 우루과이 북부에 있는 러시아인 공동체인 콜로니아팔마에 도착하였는데,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였던지 가지고 간 러시아어 성서 출판물을 얼마 안 있어 다 전할 정도였습니다.
그곳에 사는 농부들은 열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온가족이 연구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진리를 받아들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전으로 초대받은 “보배” 가운데 속하게 되었습니다. 카쳉코, 스탕코, 코틀레아렝코, 고르뎅코, 세클레노프, 시칼로를 비롯한 여러 가족들이 있는데, 그들의 손자녀와 증손자녀들은 베야우니온과 살토와 파이산두와 같은 북부 지역 회중들의 기초를 이루어 왔습니다. 이러한 가족에 속한 얼마의 사람들은 특별 파이오니아,
장로, 순회 감독자,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카쳉코 형제는 1974년에 사망할 때까지 충실을 유지하였습니다.여섯 명의 독일인
나치 독일에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격렬한 박해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독일인 파이오니아들이 남아메리카에서 봉사하기 위해 고국을 떠났습니다. 1939년 초에 이러한 파이오니아들 중 여섯 명이, 무일푼으로 소지품도 거의 없이 몬테비데오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카를로스 오트를 만나서 기뻤는데, 카를로스가 그들을 마중나와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이 여섯 사람은 구스타보 벤더와 베티 벤더, 아돌포 포스와 카를로타 포스, 쿠르트 니켈과 오토 헬레였습니다. 그들은 도착한 지 사흘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집집으로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스페인어로 인쇄된 증거 카드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이 스페인어로 할 수 있는 말은 “포르 파보르, 레아 에스토”(“이것을 읽어 보세요”)가 고작이었습니다. 카를로스가 아르헨티나로 다시 임명되었을 때, 이 독일인 파이오니아들은 언어의 제약이 있었는데도 우루과이에서 왕국 활동을 돌보도록 이 나라에 남게 되었습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언어를 배우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레우니오네(집회)에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리뇨네(콩팥)에 초대하기가 드문 일이 아니었으며, 오베하(양)를 가리켜 아베하(벌)라고 말하고, 아리나(밀가루)가 아니라 아레나(모래)를 달라고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언어를 모르면서 집집으로 전파하고 성서 연구와 집회를 사회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재정적인 도움도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는 출판물을 전하고 나서 받은 헌금을 생활비와 교통비에 충당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1939년 말까지, 우리는 55건의 잡지 예약을 맡았고 1000부가 넘는 서적과 1만 9000부나 되는 소책자를 전하였습니다.”
자전거와 텐트
이 여섯 명의 독일인 파이오니아는 쉽게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얼마 안 있어, 이용할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인, 자전거 여섯 대를 구입하여, 이 나라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좋은 소식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토 헬레와 쿠르트 니켈은 카쳉코 형제를 지원하기 위해 여러 날 동안 자전거를 타고 615킬로미터를 여행하여 콜로니아팔마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카쳉코 형제는 스페인어나 독일어를 전혀 모르고, 그들은 러시아어를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이 얼마나 놀랐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바벨 탑에서 일어났던 일이 미친 영향을 절감하면서, 제한된 실력으로나마 스페인어로 인근의 작은 도시인 살토에서 전파하기로 하였고, 카쳉코 형제는 계속 러시아 사람들을 상대로 활동하였습니다.—창세 11:1-9.
한편, 벤더 부부는 성서의 소식을 남부 지역의 크고 작은 도시들에 가서 전파하기 위해, 자갈과 먼지로 덮인 길을 수백 킬로미터 여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벤더 부부는 그들의 자전거에다 몇 달 동안 필요한 옷은 물론, 텐트, 작은 요리용 스토브, 주방 기구, 서적, 성서 강연이 녹음된 음반과 축음기를 싣고 다녔습니다. 각 자전거에
실린 장비는 한 사람이 더 탔을 때만큼 무게가 나갔습니다! 이처럼 제한된 장비를 가지고 그들은 추위나 더위 또는 비와 싸워야 하였습니다. 때로는 범람하는 하천을 건너면서, 서적과 축음기를 젖지 않게 하려고 모든 것을 어깨에 올려놓고 운반해야 하였습니다.꼭 필요한 장비 중 하나는 텐트였습니다. 벤더 부부는 텐트의 천에 직접 방수 처리를 하였는데, 나방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기름과 마늘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텐트 위쪽에 뚫린 수십 개의 구멍 사이로 하늘이 보였을 때, 그 부부는 자기들의 눈을 거의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밤새 개미들이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맛있는 식사인 기름과 마늘을 입힌 텐트의 천을 갉아먹은 것입니다! 그 독일인 부부는 개미들의 물릴 줄 모르는 식욕을 과소 평가했던 것입니다.
“나치 스파이”?
이 나라의 내륙에서 전파하는 동안 구스타보 벤더와 베티 벤더 부부에게 가장 큰 문제들 중 하나는 그들이 독일 국적을 가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 진행중이었고, 우루과이 라디오와 신문들은 유럽에서 벌어지는 독일의 진격 상황에 대해 떠들썩하게 보도하였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벤더 부부가 한 작은 도시의 외곽에 텐트를 치고 있을 때, 라디오에서 독일군이 자전거를 갖춘 무장 낙하산병들을 적진 후방에 투하했다는 방송을 하였습니다. 공포에 휩싸인 시민들은 즉시, 그 도시 바깥 쪽에 텐트를 친 그 독일인 부부가 나치 스파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지방 경찰은 많은 수의 무장한 남자들의 지원을 받으며 상황을 조사하러 신속히 벤더 부부의 텐트로 향하였습니다.
구스타보와 베티는 심문을 받았습니다. 경찰은 어떤 물건들이 텐트용 천으로 덮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경질적으로 “저 천으로 덮어 씌운 것은 뭐요?” 하고 물었습니다. 구스타보는 “우리 자전거 두 대와 성서 출판물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한 경찰관이 구스타보에게 그 천을 벗겨 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기관총들이 아니었습니다. 두 대의
자전거와 여러 부의 서적이 나오자 경찰관들은 매우 안심하였습니다. 경찰관들은 벤더 부부에게, 그들이 그 도시에서 전파하는 동안에는 환경이 더 나은 장소—경찰서—에 머무르라는 친절한 초대를 하였습니다!독일 출신의 이 여섯 사람은 수십 년 동안 우루과이에서 충실하게 전파하였습니다. 구스타보 벤더의 아내는 남편이 1961년에 사망한 후 독일로 돌아가, 그곳에서 계속 파이오니아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 자매는 1995년에 사망하였습니다. 아돌포 포스와 카를로타 포스는 우루과이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다가, 1993년과 1960년에 각각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쿠르트 니켈 역시 1984년에 사망할 때까지 우루과이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 기사를 쓰고 있는 때인 지금도 오토 헬레는 92세의 나이로 여전히 우루과이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씨들이 열매를 산출하다
우루과이에서 초창기에 활동한 이 좋은 소식의 선포자들은 하느님의 왕국의 신민이 될 만한 사람들을 열심히 찾았습니다. 1944년에는 우루과이에서 활동을 보고한 전도인이 20명이었고, 파이오니아가 8명이었습니다. 자그마한 시작이었습니다. 다른 “보배”들은 앞으로 찾게 될 것이었습니다.
마리아 데 베루에타와 그 여자의 네 자녀—리라, 셀바, 헤르미날, 리베르—는 1944년에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리라와 셀바는 전파 활동을 시작하였고, 몇 달 후에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아이다 라리에라를 따라 다녔는데, 그는 우루과이의 대단히 열심 있는 초창기 전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루에타 가족은 헌신의 상징으로 물침례를 아직 받지 않았습니다. 후안 무니스는 아르헨티나에서 이 나라를 몇 차례 방문하던 중에, 이러한 이례적인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미 여섯 달 동안 전 시간 봉사를 한 리라와 셀바는 남동생 리베르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에 힘입어서, 한 번도 헌신의 서약을 저버린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리라는 말합니다. 리라는 1950년에 길르앗 학교에 초대되었습니다. 리라는 선교인으로 아르헨티나에 임명되어 그곳에서 26년간 봉사한 다음, 1976년에 우루과이로 돌아왔습니다. 셀바 역시 1953년에 남편과 함께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루과이로 임명되었고, 셀바의 남편은 우루과이에서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습니다. 셀바는 1973년에 사망할 때까지 충실을 유지하였습니다. 리베르는 결혼을 하여 자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역시 봉사의 특권을 많이 누렸습니다. 리베르는 1975년에 사망할 때까지 우루과이의 여호와의 증인이 사용하는 법인체인 소시에다드 라 토레 델 비히아의 회장으로 일하였습니다. 헤르미날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여호와의 백성과 연합하기를 중단하였습니다. 하지만 25년가량 지난 후에 진리의 씨가 그의 마음속에서 다시 자라났습니다. 현재 그는 몬테비데오에 있는 한 회중의 장로입니다.
길르앗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1945년 3월에 협회의 세계 본부에서 네이선 H. 노어와 프레더릭 W. 프랜즈가 처음으로 우루과이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격려가 되었습니다. 또한 러셀 코넬리어스라는 형제가 있었는데, 그도 거의 같은 시기에 우루과이에 왔습니다. 코넬리어스 형제는 단지 방문차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곳 형제들에게 기쁘게도, 그는 우루과이에 임명된 최초의 길르앗 졸업생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스페인어를 몇 마디밖에 할 줄 몰랐지만 스페인어를 배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6주 만에 스페인어로 첫 공개 강연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우루과이의 왕국 활동에 더없이 귀중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해에 협회는 16명의 선교인을 더 보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젊은 자매들이었습니다. 몬테비데오에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즉시 알려지게 되어, 한 신문에서는 “분장을 한 금발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몬테비데오로 내려왔다고 보도하였습니다! 그 자매들은
즉시, 열심히 열정적으로 전파 활동에 착수하였습니다. 그들이 봉사한 결과는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기념식 참석자 수가 1945년의 31명에서 그 이듬해에는 204명으로 껑충 뛰었습니다. 나중에는 이들 선교인 중 몇 사람이 이 나라 내륙에 있는 도시들로 파견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이전에 한 번도 좋은 소식이 전해진 적이 없던 구역에서 전파하는 동안 그들의 노력을 축복해 주셨습니다.여러 해에 걸쳐 80명이 넘는 선교인이 우루과이에서 봉사하였습니다. 아직도 자신의 임지에 있는 선교인들 가운데는 에델 포스, 버딘 홉스테터, 토베 하겐센, 귄터 쇤하르트, 리라 베루에타, 플로런스 래티머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임지에서 20년 이상 일해 왔습니다. 래티머 자매의 남편인 윌리엄은 32년간 선교 봉사를 한 후, 자신의 임지에서 사망하였는데, 그 기간 중 다년간을 여행하는 봉사를 하면서 보냈습니다.
경비가 철저했던 집회
길르앗 제1기 졸업생인 잭 파워스는 1945년 5월 1일부터 우루과이에서 봉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잭과 그의 아내 제인은 1978년까지 우루과이에서 왕국 권익을 증진시키면서 지칠 줄 모르게 일하다가, 그 해에 미국에 있는 쇠약해진 부모를 돌보기 위해 이 나라를 떠나야 했습니다. 잭은 우루과이에서 있었던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잭은 1947년에 리베라에 도착하였는데, 그 도시는 브라질 국경에서 가까운, 우루과이 북부 지역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 지방 전도인은 한 사람도 없었지만, 그는 브라질에서 온 한 형제의 도움을 받아 그 도시 전역에서 전파하면서 한 달을 보냈는데, 스페인어로 된 「한 세계, 한 정부」(One World, One Government)라는 소책자를 1000부가 넘게 전하였습니다.
잭은 그 달의 활동의 대단원을 장식하기 위해, 플라사 인테르나시오날(Plaza Internacional)에서 공개 집회를 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플라사는 브라질과 우루과이, 두 나라 사이의 경계 바로 중앙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며칠 동안 그 집회에 대해 광고한 후에 그 두 형제는 플라사에 자리를 잡고,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많은 사람이 강연을 듣기 위해 몰려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50명의 무장 경찰이 집회 중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도착하였습니다. 참석자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모두 합해 53명이었는데, 바로 그들은 두 형제와 강연 주제에 관심이 있어 참석한 한 사람과 50명의 경찰관이었습니다. 그 집회는 참으로 질서 있었으며, 경비가 매우 철저하였습니다!그 이듬해에 협회는 리베라로 다섯 명의 선교인을 임명하였습니다. 그 선교인들이 도착한 지 얼마 안 있어, 협회 본부에서 온 네이선 H. 노어와 밀턴 G. 헨첼은 리베라에서 380명의 청중이 참석한 가운데 집회를 가졌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왕국 소식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리베라에서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지역에서 두 회중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호기심 많은 두 이웃 사람
우루과이 내륙에 있는 매우 큰 도시 중 하나는 우루과이 강 동편 기슭에 있는 살토입니다. 이곳은 비옥한 농업 지역으로 오렌지를 비롯한 감귤류로 유명합니다. 살토는 영적인 의미에서도 생산적인 곳인데, 이 지역에 회중이 다섯 개나 있습니다. 하지만 선교인들은 1947년에야 비로소 살토에서 여호와의 “보배”를 찾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해에, 1945년에 도착한 16명의 선교인 자매 중 한 사람인 메이블 존스는 다른 선교인들과 함께 살토에 가서 몇 주 동안 머물면서,
그곳에서 열릴 예정이던 대회에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웃에 사는 두 사람인, 카롤라 벨트라멜리와 그 여자의 친구인 카탈리나 폼포니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메이블을 지켜 보았습니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메이블이 야외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호기심 많은 두 이웃 사람이 메이블에게 접근하여 성서 질문들을 하였습니다. 카탈리나 폼포니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항상 종교적인 의문이 많았지요. 그래서 혼자 성서를 읽기 시작했어요. 많은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하느님께 기도할 때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밀히 해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종종, 무릎을 꿇고 궁금한 점을 이해하게 도와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메이블 존스가 처음으로 우리에게 이야기하였을 때, 우리의 눈에서 베일이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지요. 그 이튿날 카롤라와 함께 대회에서 열리는 공개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메이블이 만난 두 이웃 사람 모두 남편에게서 반대를 받았지만 신속히 발전하여 침례를 받았습니다. 얼마 후에 카탈리나 폼포니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습니다. 카탈리나는 40년이 넘게 생산적인 전 시간 봉사 활동을 하면서 110명이나 되는 사람을 여호와의 침례받은 증인이 되도록 도왔습니다. 카롤라 벨트라멜리 역시 열심 있는 왕국 선포자이며, 30여 명이 침례를 받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카롤라의 두 아들은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큰 아들인 델포스는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는 특권을 받았으며, 1970년 이래 지부에서 감독하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
마테차(茶)의 지역에서
선교인들은 시골 구역을 돌면서 에스탄시아를 몇 군데 방문하였는데, 에스탄시아란 소와 양을 기르는 큰 촌락입니다. 에스탄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소박하고 후대를 잘합니다. 그 사람들이 증인들을 맞아들여 전통 음료인 마테를 대접하는 것은 매우 흔히 있는 일입니다. 마테는 뜨거운 차로, 호리병박으로 만든 컵에서 봄빌라로
조금씩 빨아 마시는데, 봄빌라는 한 쪽 끝에 체가 달린 금속으로 된 관입니다. 우루과이 사람들에게는 마테를 준비하고 대접하는 일이 하나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가 준비되면 한 개의 컵을 사람들에게 차례로 돌려가며 모두가 동일한 봄빌라를 사용합니다.선교인들이 그렇게 여럿이 어울려 마테를 함께 마시자고 처음 초대를 받았을 때 어떤 반응을 나타냈겠는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 녹색의 쓴 차를 마시면서 선교인들의 얼굴이 여러 모양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집주인들은 재미있어하였습니다. 어떤 선교인들은 처음 마셔 본 후로는 두 번 다시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 후로는 마테를 마시자는 초대를 받으면 정중히 거절하였습니다.
‘당신들에게 형상이 있으면, 다음부터는 가지 않을 겁니다’
일단의 선교인들은 우루과이 북부 지방에 있는 도시 타쿠아렘보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도시는 주위에 대규모 에스탄시아와 그 밖의 영농 단지들이 있었습니다. 1949년에, 인간의 삶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은 한 젊은 농부 헤라르도 에스크리바노는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공개 강연에 참석해 보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한 가지 단서를 달고 초대에 응하였습니다. “당신들에게 형상이 있거나 나더러 기도문을 반복하게 하면, 다음부터는 가지 않을 겁니다.”
헤라르도는 왕국회관에 형상이 전혀 없고 종교 의식도 전혀 없는 것을 알고 기뻐하였습니다. 오히려, 그가 즐긴 성경 강연으로 인해 성서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는 계속 집회에 참석하였고, 얼마 후에는 여호와의 헌신하고 침례받은 종이 되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그는 특별 파이오니아, 순회 활동, 지역 활동과 같은 많은 봉사의 특권을 누렸습니다. 헤라르도 에스크리바노 형제와 그의 아내 라모나는 두 사람이 합해서 83년이 넘게 전 시간 봉사를 해 오고 있습니다. 1976년 이후로 에스크리바노 형제는 델포스 벨트라멜리와 귄터 쇤하르트와 더불어 지부 위원회의 한 성원으로 일해
오고 있는데, 귄터 쇤하르트는 독일 출신의 선교인으로 여러 해 동안 지부 근처의 회중들을 영적으로 세워 주는 데 많은 기여를 해 왔습니다.수확물이 증가하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습니다”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9:37, 38) 이 말씀은 우루과이 선교인들의 생활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는데, 그들은 매우 넓은 구역을 돌아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여호와께서 자신의 일꾼들의 노력을 지원하시고 축복하신다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1949년에 노어 형제와 헨첼 형제가 두 번째로 방문하였을 때, “때는 당신의 생각보다 늦다!”라는 노어 형제의 강연을 듣기 위해 592명이 몬테비데오에 모였습니다. 그 모임에서 73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이 나라에 11개의 회중이 있었습니다. 10년 후에 네 번째로 방문하였을 때 노어 형제는 몬테비데오에서 2000명이 넘는 청중에게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때는 우루과이에 1415명의 전도인과 41개의 회중이 있었습니다.
1950년대의 10년간은 나라 전역에서 회중 수가 증가하는 일이 두드러졌습니다. 하지만 많은 회중이 개인 집에서 집회를 보아야 하였습니다. 한 경우는 집주인이 재치를 발휘하여 자기 집 거실의 모든 가구에 바퀴를 달았습니다. 그리하여 회중 집회를 보기 위한 장소를 마련할 시간이 되면, 가구를 밀어서 치워 놓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또 한 경우는 회중이 어떤 개인 집의 앞면에 있는 한 작은 방에서 모였습니다. 회중이 커짐에 따라, 더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 위해 벽들을 없앴습니다. 마침내 벽이 대부분 없어졌고, 그 가족은 집 뒷면의 협소해진 한쪽 공간에서 살기로 하였습니다.
우루과이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알리는 데 유용했던 한 가지 뛰어난 도구는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라는 활동 사진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1955년에 우루과이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해에 리베르 베루에타는 이 나라의 내륙으로 여행하면서 45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그 영화를 상영해 주었습니다. 전에는 우리의
활동에 조금밖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많은 사람이 그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아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새로운 지부 사무실
전도인 수가 계속 신속히 증가함에 따라,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을 수용할 만한 적절한 시설들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각종 건물들을 세내어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켜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땅을 구입해서 협회 자체 시설들을 건축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도인 몬테비데오 중심가의 땅은 너무 비쌌습니다. 몬테비데오 외곽 쪽으로 좀더 멀리 떨어진 땅을 구입하는 방법밖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1955년에 꽤 큰 부지를 구입하였습니다. 건축 도면의 승인이 났고, 일할 사람들은 그곳에서 일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제들은 지방 당국이 한 간선 도로를 연장시켜, 최근에 구입한 바로 그 부지를 관통하게 하는 공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하였습니까? 당국과 협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관리들은 한 가지 해결책으로, 협회의 부지를 자기들이 사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불하려고 하는 액수는 형제들이 원래 지불하였던 액수보다 적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부지를 구입하려면 그 돈으로는 부족하였습니다.
잭 파워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한때, 아마 건축할 여호와의 때가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 안 있어, 로마 11:34에서 바울이 ‘누가 여호와의 생각을 알게 되었고,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되었습니까?’라고 한 말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관리 중 한 사람이, 사용하고 있지 않은 정부 부지 중 하나와 우리 부지를 교환할 수 있겠느냐고 제안한 것입니다. 그가 제안한 부지는 크기도 비슷하고, 몬테비데오 바로 중심가인 프란시스코 바우사 거리에 있어서 위치도 이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따져 보니, 그 부지는 우리가 전에 구입한 부지보다 값도 몇 배나 비쌌는데, 우리는 한푼도 더 지불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여호와의 손이 자신의 백성을 위해 일들을 조종해 주셨습니다!”
한 건축가가 결정을 내리다
지부 사무실을 건축하는 일은 유명한 건축가인 후스티노 아폴로의 감독 아래 진행되었습니다. 후스티노는 당시 한 선교인과 성서 연구를 막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후스티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항상 하느님에 관한 진리를 발견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가톨릭교인으로 성장하였지만, 해가 갈수록 실망만 깊어갔지요.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 교회를 찾아갔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사제가 이렇게 묻더군요.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교회 안에 등을 몇 개나 켜기를 원하십니까? 등을 많이 켤수록 비용도 많이 들겠지만, 분명히 친구들한테는 깊은 인상을 심어 줄 수 있지요.’ 물론, 나는 멋진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지요. 그래서 등을 많이 켜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사제가 이렇게 묻더군요. ‘붉은 카펫을 깔아 드릴까요, 흰 카펫을 깔아 드릴까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물론, 붉은 카펫을 깔면 신부의 드레스가 더 돋보이게 되지요. 하지만 비용은 배나 더 들게 됩니다’ 하고 사제가 설명하더군요. 그 다음에는 ‘아베 마리아’라는 찬송가 문제가 대두되더군요. ‘한 사람이 불러 주기를 원하십니까, 합창단이 불러 주기를 원하십니까?’ 사제는 계속해서 나에게 결혼식에 따르는 의식들을 하나씩 판매하였습니다.
나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종교 내의 그 모든 상업주의적인 행동 때문에 몹시 화가 났지요.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를 시작했을 때는 차이가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나는 진리를 발견했음을 즉시 깨달았지요.”
벧엘 건축 공사를 하고 증인들과 교제하면서 여러 달 성서 연구를 한 후에, 후스티노는 결정을 내려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961년 말경에 건축 공사가 끝나자, 이 건축가는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후스티노는 현재 장로로 일하고 있으며, 우루과이에 60개가 넘는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지부 확장이 계속되다
1961년 10월 28일에 기쁨에 넘치는, 아름다운 새 건물의 봉헌식이 있었습니다. 1층에는 사무실, 서적 보관소, 안락한 왕국회관을 위한 널찍한 시설이 들어섰습니다. 2층에는 선교인과 사무실 요원들을 위한 숙소로 9개의 침실이 마련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전국에 1570명의 전도인이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신축된 벧엘이 앞으로 여러 해 동안 예상되는 어떠한 성장도 능히 돌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성장 속도는 예상보다 빨랐습니다. 1985년에 2층 건물을 증축하자 지부의 규모가 두 배로 커졌습니다.
좀더 최근에 협회는 몬테비데오 외곽에 훌륭한 부지를 또 하나 구입하였습니다. 대회 회관이 딸린 새 지부 시설을 건축하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국제 봉사자 팀의 도움으로 공사가 1999년에 완공될 예정입니다.
감독자들을 훈련시키다
우루과이의 증가하는 “보배”들을 돌보기 위해서는, 지부 시설뿐 아니라 돌보는 목자들도 필요하였습니다. 1956년에서 1961년 사이에 전도인 수가 배로 늘어 13개 회중이 새로 형성되었습니다. 천국 전도 강습은 참으로 시기 적절한 사랑에 찬 마련이었습니다! 1961년에 천국 전도 강습이 시작되자, 회중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많은 형제들은 한 달간의 이 강습 과정에 참석하기 위한 마련들을 하였습니다. 많은 형제들은 장거리 여행을 해야 하였으며, 어떤 형제들은 강습의 전과정에 참석하기 위해 직장을 잃을 위험도 감수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호라시오 레기사몬은 천국 전도 강습이 열리는 몬테비데오에서 300킬로미터 떨어진 도시인 돌로레스에 살고 있었습니다. 고용주에게 한 달 휴가를 요청하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레기사몬 형제는 이 훈련이 자기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설명한 후, 설령 직장을 잃는다 하더라도
꼭 참석하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며칠 후, 고용주가 예외를 인정해서 직장을 잃지 않고 강습에 참석할 수 있게 해 주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놀랐습니다.그 강습은 이 모든 어려운 일을 겪을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까? 그 강습을 받은 최초의 학생들 중 한 사람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전국에서 온 장성한 형제들과 함께 있으니까 마치 한 달 동안 신세계에서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강습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의 사랑에 찬 지원을 통해, 양 무리를 효과적으로 치는 도전에 직면할 적절한 자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천국 전도 강습은 수백 명의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이 자격을 더 잘 갖추게 도와 주었고, 그 결과 회중들을 강화시켜 주었는데, 특히 낡은 사물의 제도의 문제들이 심각해지고 있는 때에 그렇게 해 주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영적으로는 부유하다
우루과이 역사가들에 의하면, 60년대의 10년 동안은 유난히도 이 나라의 경제가 쇠퇴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국제 시장에서 쇠고기, 가죽, 양모와 같은 종전의 수출품들의 가격이 점차 하락하였습니다. 여러 은행과 주요 제조 업체들이 도산하여 많은 실업자가 생겼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 통화의 갑작스런 평가 절하, 세금 증가, 그리고 식품을 비롯한 생활 필수품 구입이 어려워지는 일 등으로 인해 사람들은 염려하였습니다.
경제 위기는 사회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큰 비중을 차지하던 중산층이 가난하게 되자 범죄가 상당히 증가하였습니다. 불만족으로 인해 당국에 대한 시위가 자주 발생하였고 때로는 난폭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우루과이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급속하게 악화되고 있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다른 나라로 떠났습니다.
한편, 여호와의 조직에서는 그 60년대의 10년 동안 영적 성장이 이루어져, 이사야 35:1, 2의 이러한 말씀이 생각나게 하였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리로다].” 1961년에서 1969년까지 15개의 새로운 회중이 형성되었고, 이 나라의 전도인 총수는 2940명으로 신기록에 달하였습니다.
1965년 12월 9일에 정부는 소시에다드 라 토레 델 비히아로 알려진 법인체의 정관을 승인하였습니다. 이 법적 도구 덕분에 성서와 성서 관련 출판물을 인쇄하고 수입하고 배부하는 일에 대해 특별한 허가들을 받아 내고 세금을 면제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법적 지위 덕분에 부지를 확보하여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큰 대회”
1967년은 “큰 대회”가 열린 해로 늘 기억될 것입니다. F. W. 프랜즈와 M. G. 헨첼을 포함하여 미국과 유럽에서 약 400명의 증인 대표자들이 그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왔습니다. 3958명의 청중은 처음으로 고대 의상을 입고 공연하는 성서 드라마를 즐겼습니다. 또한 형제들은 처음으로, 팔라시오 페냐롤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곳은 몬테비데오의 사회, 예술 및 스포츠에 관한 중요한 행사가 열리는 넓은 실내 경기장입니다.
많은 우루과이 형제들은 여행 및 숙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한 자매는 여행에 필요한 충분한 비용을 모으기 위해 여섯 달 동안 사람들의 옷을 손빨래 해 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다른 한 자매는 여호와의 증인으로 활동하는 것을 남편이 반대하였지만,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냉동 식품을 만들어 이웃 사람들에게 팔아 필요한 비용을 모았습니다.이 대회는 경기장 관리인들에게 어떤 인상을 남겼습니까? 관리인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팔라시오 페냐롤이 이처럼 깨끗하고, 불쾌한 냄새가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관리인들은 증인들이 질서를 잘 지키고 훌륭하게 조직되어 있는 것에 매우 감명을 받아, 자기들의 개인 사무실을 대회 본부 형제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 후로, 그 경기장은 1977년까지 지역 대회를 위해 여러 번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1977년에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달라지게 되었고, 그 후 여러 해 동안 증인들은 대회를 개최하는 데 제한을 받았습니다.
“뱀과 같이 조심”스럽게
1970년대 초에 우루과이의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시민 저항 운동이 더욱 빈번해졌습니다.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시위는 매우 과격해져 난폭하고 파괴적이 되었습니다. 무장한 도시 게릴라 집단들이 대도시에 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집단들이 강탈과 폭파와 습격과 납치를 자행함에 따라 공포 분위기가 확산되었습니다.
혼란의 와중에서 군대는 세력이 커져, 1973년에는 정부를 장악하였습니다.군은 엄하게 다스렸습니다. 모든 정치 활동과 노동 조합의 활동이 금지되었습니다. 엄격한 언론 검열 제도가 실시되었습니다. 공개 집회는 사전에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는 개최될 수가 없었습니다. 개인의 자유도 심하게 제한되었습니다. 이처럼 곤란한 시기인데도, 형제들은 어떻게 “말씀을 전파”할 수 있었습니까?—비교 디모데 둘째 4:2.
에스크리바노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당시 우리는 이전 어느 때보다도 마태 10:16에 있는 예수의 이러한 말씀을 적용해야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을 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뱀과 같이 조심스럽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함을 증명하십시오.’ 이 말씀에 따라, 협회는 즉시 모든 장로들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하여, 전도인들이 계속 열심히 전파 활동을 하도록—하지만 이제는 조심스럽게 훌륭한 판단력을 사용해서 그렇게 하도록—필요한 훈련을 받게 하였습니다.”
일부 교직자들과 종교 단체 성원들은 반란군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새로 들어선 군사 정부는 여호와의 증인을 비롯하여 모든 종교 단체들의 활동을 매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호별 봉사를 하는 도중에 체포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성서 출판물을 보여 주고 자기들의 활동의 성격을 설명하면 즉시 석방되었습니다. 처음에 이처럼 대거 체포하는 사태가 있은 후로, 형제들은 좀더 작은 집단으로 나누어 나감으로 자기들의 활동이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게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군인들이 증인들의 호별 방문 활동을 묵인해 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자기들 방식대로이긴 하지만, 도와 주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일단의 군인들이 어떤 자매가 전파하고 있던 지역을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한 집에서 그 자매가 초인종을 누르자
집주인은 이층 창문에서 내다보더니 자매에게 몹시 무례한 태도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광경을 본 한 군인이 즉시 반응을 나타내어, 집주인에게 기관총을 겨누고는, 내려와서 그 자매를 예의 바르게 맞아들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집주인 여자는 그 명령대로 하였습니다.대회장
1974년 6월에 지부 사무실은 정부로부터 통지를 받았는데, 책임 있는 형제들에게 대법원 서기관 앞에 출두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벨트라멜리 형제도 그 가운데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긴장하였지요. 군사 정부가 자기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우리 활동을 즉각 금지시킬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서기관이 왕국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을 정부가 매입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점을 설명했을 때 우리는 참으로 안심이 되었습니다! 당국은 심지어 왕국회관으로 적합한 장소를 구하도록 우리를 도와 주겠다고 제안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몬테비데오에 있는 루테시아 극장을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 극장은 이상적이게도 주요 도로상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부로부터 받은 돈은 극장을 새로운 왕국회관으로 개조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금액이었습니다.”
벨트라멜리 형제는 또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그 일에 개입하셨다고 확신하였지요. 그 극장의 대규모 객석에는 거의 1000명이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 극장은 그 지역의 왕국회관으로뿐 아니라 대회 회관으로도 사용되곤 하였는데, 크고 작은 대회들에 대한 새로운 제한 조처들 때문에 대회 회관이 절실히 필요하던 터였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해 동안, 한때 극장이었던 그 건물은 공식적으로는 지방 회중의 왕국회관이었지만 실제로는 주 단위로 순회 대회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이러한 대규모 모임을 위해
조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그 건물에 드나들 때 가능한 한 눈길을 끌지 않게 하였고 차를 인근 지역의 여기저기에 분산시켜 주차하였습니다.세울 때
이처럼 소란스러운 시기에도 왕국 전도인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또한 새로운 회중들이 더 생겨나는 것은 매우 큰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1976년에는 전도인 수가 10년도 채 안 되어 100퍼센트가 넘게 증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증가는 또한 도전이 되는 커다란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기존의 왕국회관들이 대부분 세를 내어 빌린 것인데, 그렇게 많은 새로운 사람들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범사가 기한[“지정된 때”]이 있[다]”고 솔로몬 왕은 영감을 받아 말하였습니다. 85개의 회중에 왕국회관은 42개밖에 안 되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왕국회관을 “세울 [즉 건축할] 때”가 온 것 같았습니다.—전도 3:1-3, 「신세」 참조.
하지만 나라 전체가 경제 위기의 와중에 있었으므로 회중들은 건축할 기금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기금이 어디에서 나올 것입니까? 지부 조정 위원인 델포스 벨트라멜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 기간에 우리는 여호와의 손길을 느꼈고 그분의 백성의 사랑이 작용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세계 전역의 형제들이 관대하게 기부한 덕분에 지부는 우루과이의 회중들에게 필요한 기금을 빌려 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자격을 갖춘 일꾼들도 필요하였는데, 우루과이의 증인들은 그러한 필요에 응하였습니다. 많은 증인들이 왕국회관을 이곳저곳에 연이어 건축하는 일에 자신을 바쳐 계속 도왔습니다. 아벨리노 필리포니는 그러한 지칠 줄 모르는 자원 봉사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1961년에 지부 건축 공사에 참여한 후에 필리포니 형제와 그의 아내 엘다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으며, 1968년 이후로 필리포니 형제는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여러 해 동안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일을 도와 주도록 임명되어, 건축 공사를 전문적으로 지원하고 감독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엘 플로미토”
필리포니 형제는 왕국회관 건축과 관련된 몇 가지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왕국회관을 짓는 곳마다, 이웃 사람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은 증인 봉사자들이 나타내는 열의와 열심에 언제나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한 건축 현장에서는 증인이 아닌, 이웃에 사는 여섯 살 된 한 소년이 매일 찾아와서 건축 일을 하게 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 소년은 너무나 끈덕져서, 우루과이식 표현으로 ‘꼬마 골칫덩이’를 의미하는 엘 플로미토로 알려지게 되었지요. 그리고는 세월이 흘렀고, 우리는 그 소년에 대한 소식을 다시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 대회에서 어떤 형제가 다가오더니 ‘필리포니 형제시죠! “엘 플로미토”를 기억하세요? 그게 바로 접니다! 2년 전에 침례를 받았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동안 필시 진리의 씨가 이 어린 소년의 마음속에 심어졌을 것입니다.
지금은 왕국회관이 전도인 129명당 한 채씩 있는데, 모두 합해 81채의 왕국회관이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여호와께서는 우루과이에 있는 자신의 백성을 위해 적절한 숭배 장소를 건축하는 일을 축복해 오셨습니다.
이웃 나라의 형제들을 돕기 위한 대회들
군사 정권은 또한 서쪽에 있는 이웃 나라인 아르헨티나에도 들어섰습니다. 그 나라의 정부는 협회의 지부 사무실과 왕국회관들을 폐쇄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형제들은 작은 집단으로 집회를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에 형제들은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공개적으로 대회를 열 수 있었습니다.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하였습니까? 국경 너머 우루과이에서 대회를 엶으로 가능하였습니다! 이 대규모 모임을 조직하는 일은 우루과이 형제들이 하였지만, 프로그램의 많은 부분은 아르헨티나 형제들이 다루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수천 명의 형제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일은 대단히 큰 특권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믿음을 로마 1:12.
강화시켜 주는, “격려를 주고받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잊을 수 없는 한 대회가 1977년 1월 13일부터 16일까지 팔라시오 페냐롤에서 열렸습니다.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의 형제 자매들이 한데 섞인 청중이 7000명 정도 되었습니다. 대회를 마치면서, 참석한 모두는 함께 여호와께 찬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청중석에 있는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노래를 불렀는데, 아르헨티나 형제들이 한 절을 부르는 동안 우루과이 형제들은 가만히 있었고, 다음 절은 그 반대로 하였습니다. 끝으로 마지막 절은 모두가 함께 불렀습니다. 함께 대회를 보게 된 기쁜 감정과 사랑하는 형제들과 작별해야 하는 슬픈 감정이 뒤섞여,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1977년 1월 13일에 그 대규모 대회가 팔라시오 페냐롤에서 열리고 있는 동안, 가톨릭 교회에 호의적인 경향이 있는 한 유명한 신문에 “여호와의 증인: 그들에 대한 인가를 면밀히 검토중”이라는 표제 아래 일면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기사에서는 국가 상징물에 대한 증인들의 태도를 비난하였습니다. 그 기사는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우리의 활동을 금지시킨 일과 동일한 일이 우루과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그 기사가 발행되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정부는 우리의 크고 작은 대회들에 대해 허가를 해 주는 일을 중단하였습니다.
제재가 강화되다
1975년에 군사 정부는 애국심과 국가주의를 고취하기 위해 고안해 낸 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국가주의에 도취된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많은 형제들이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들이 그리스도인 중립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리”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마가 12:17) 청소년 증인들 가운데는 양심에 따라 국가 상징물에 경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에서 퇴학당한 사람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직장에서 수많은 조롱과 모욕을 인내한 형제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증인들은 중립 입장 때문에 직장을 잃기까지 하였습니다.
내륙의 작은 도시와 읍에서는 지방 당국자들이 증인들을 매우 면밀히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정부에서 보낸 첩자들이 관심자로 가장하여 왕국회관을 찾아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형제들은 더욱더 조심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집회에서 형제들은 중립을 주제로 한 토의를 하지 않음으로, 당국과 어떠한 마찰도 생기는 일이 없게 하였습니다.
한 번은, 그러한 첩자 중 한 사람이 집회 시작 직전에 왕국회관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한 형제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회중에서는 오늘 몇 시에 임노를 부를 것입니까?” 스페인어 단어 임노는 국가를 의미할 수도 있고 찬송가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첩자인 것을 알고 그 형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세 번 부르지요. 집회를 시작할 때와 중간에 그리고 끝날 때에요.” 물론, 그 형제는 왕국 노래를 가리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 첩자는 형제들이 집회 중에 국가를 세 번 부를 것이라고 짐작하고는 매우 흡족해하며 즉시 떠났습니다.
체포되었지만 행복하다
때로는 집회를 보는 도중에 경찰이 왕국회관을 급습하여 참석한 사람을 모두 체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형제 자매가 심문을 받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오히려 형제들이 많은 상급 경찰관들에게 증거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에 대한 심문—보통 여러 시간 지속되는 과정—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모두 석방되곤 하였습니다.—비교 사도 5:41.
몬테비데오 북쪽에 있는 플로리다 회중에서는 셀리 아산드리 데 누녜스 자매가 신권 전도 학교에서 학생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이웃에 사는 마벨에게 집회에 와서 자신의 연설을 들어 보라고 초대하였습니다. 마벨은 전에 한 번도 왕국회관에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날 밤 집회를 보는데 경찰이 급습하여 마벨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체포하였습니다. 마벨이 구금된 지 여러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마벨의 남편은 아내를 석방시키기 위해 손을 쓸 수 있었습니다. 이런 깜짝 놀랄 만한 경험으로 인해 마벨의 마음속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가르침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생겨났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마벨은 성서 연구를 하고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재 마벨은 헌신하고 침례받은 여호와의 증인입니다.거의 12년 동안 군사 정권의 제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꾸준히 여호와의 조직으로 계속 모여들었습니다. 1973년에는 이 나라에 3791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가 끝났을 때인 1985년에는 그 수가 40퍼센트가 넘게 증가한 5329명에 달하였습니다! 분명히 여호와께서는 그 어려운 시기에 자신의 백성을 축복해 오신 것입니다.
제재를 받지 않고 대회를 즐기다
1985년 3월에 민주 정부가 설립되면서 모든 제재가 풀렸습니다. 그 이후로 여호와의 백성은 왕국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이제 자유롭게 순회 대회와 지역 대회를 열 수 있었습니다. 형제 자매들은 이 나라의 먼 지역에서 온 동료 숭배자들을 다시 만날 기회를 갖게 되어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동료 형제들 역시 확고함을 유지하였으며 여전히 여호와를 충실하게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참으로 격려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1만 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청중을 수용할 만한 대회 장소를 어디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까? 이전에 사용했던 장소 중 어느 것도 이제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군사 정부가 다스리던 시절에, 신축 축구 경기장인 에스타디오 차루아가 몬테비데오에서 손꼽는 큰 공원인 파르케 리베라에 건립되었습니다. 그 경기장은 오로지 스포츠
행사를 위해서만 사용되어 왔지만, 우리는 1985년 12월의 전국 대회를 위해 그 경기장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 지방 당국은 매우 협조적이게도 우리가 매년 대회를 열 수 있도록 그 경기장을 사용하게 해 주었는데, 대회에는 종종 1만 3000명이 넘는 청중이 참석하였습니다.1990년 12월에 트레인타이트레스 도시의 경기장에서 열린 한 순회 대회에서는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증거가 행해졌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으로 가득 찬 그 경기장을 한 가톨릭 교회 안에서 훤히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사제는 창문 너머를 가리키며 교구민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모아들이고 있는지 보입니까? 그들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모아들이고 있는 것입니까? 그 사람들은 가톨릭교인 여러분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복음 전파의 영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하는 것처럼 나가서 전파하지 않기 때문에 매일 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도 증인들처럼 복음 전파 활동을 시작하든지, 아니면 우리 교회가 사라지게 하든지 하십시오.”
격지 구역에서 활동함
1980년대에는 이 나라의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에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일단의 형제들은 이 나라 북동부에 있는 한 지역을 연례 방문하던 중에 쿠칠라데카라구아타 마을에서 서적을 여러 권 전하였습니다. 그 이듬해에 증인들은 그곳에 사는 한 남자를 방문하였는데, 그 남자는 진리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하고 그는 단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해에 증인들이 그곳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마을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후에 그는 전해진 서적을 읽고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자기는 이제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현재 그 마을에는 조그만 회중이 하나 있습니다.
베르타 데 헤르비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돌로레스 읍에 살고 있었지만, 정기적으로 집회에 참석하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베르타는 여섯 자녀를 데리고 11킬로미터를 걸어서 왕국회관에 왔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베르타는 집회가 시작되기 약 한 시간 전에 도착하였습니다. 어머니로서 베르타가 나타낸 인내와 결단력의 훌륭한 모범은 자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베르타가 여러 해 동안 충실하게 섬겨 온 후인 지금은 네 자녀가 진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한 아들인 미겔 안헬은 나중에 파이오니아가 되었는데, 라차르케아다세보야티에 있는 격지 집단을 방문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58킬로미터를 가곤 하였습니다. 다른 한 아들인 다니엘은 현재 트레인타이트레스 읍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더 좋은 관계
여러 해 동안 우루과이의 많은 보건 전문가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피의 사용을 멀리하는 것에 관해 증인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증인들을 멸시하였습니다. (사도 15:28, 29) 이 나라의 많은 병원들은 여호와의 증인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수술해 주겠다고 증인을 받아들여 놓고는 수혈을 받지 않으려 하자 수술 직전에 내보내는 병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의료 전문가와 증인들간의 관계가 상당히 개선되었습니다.
1986년에 오스피탈 센트랄 데 라스 푸에르사스 아르마다스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을 위한 대체 치료법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마련하여, 의학 및 수술 분야의 많은 저명 인사들은 물론, 의학 분야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법률가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그러한 병원 관계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이 특별한 모임이 있은 후로, 우루과이의 많은 의사들이 증인들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이제는 기꺼이 증인들을 치료해 주며, 피에 관한 성서에 근거한 증인들의 견해를 존중해 줍니다.
그 후에도 널리 광고가 된 모임이 많이 열렸는데, 처음에는 몬테비데오에서 그 다음에는 여러 다른 도시에서 열렸습니다. 저명한 전문가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도움으로 자기들이 새로운 무혈 치료 기술을 배웠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한 혈액 요법 교수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 덕분에 많은 점을 배웠고 우리의 생각을 조정하였습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증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으로 증인들과 많이 대립하였지요. 이제 우리는 많은 부면에서 증인들이 늘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증인들은 피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 골치 아픈 많은 문제들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활동은 헛되지 않았다
참으로, 192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 우루과이의 열심 있는 왕국 선포자들이 열심히 수행한 일은 헛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 온 소수의 열심 있는 왕국 선포자들은 언덕들이 완만하게 기복을 이루고 있는 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수많은 “보배”를 모으고 가르쳤습니다. (학개 2:7) 우루과이에는 현재 1만 명이 넘는 하느님의 왕국 전도인이 있습니다. 135개가 넘는 회중에는 회중당 평균 다섯 명가량의 장로가 있습니다. 1998년 3월에 열린 최근의 천국 전도 강습에는 656명의 장로와 945명의 봉사의 종이 참석하였습니다. 거의 모든 회중이 자체 왕국회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많은 회관이 협회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형제들에 의해 건축되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전도인 수는 배가 넘게 늘었고, 앞으로도 성장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가오는 큰 환난의 바람이 불지 못하게 하시는 동안, 우루과이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다음과 같이 계속 사람들을 초대할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이사야 2:3; 계시 7:1.
[224면 전면 삽화]
[227면 삽화]
후안 무니스
[229면 삽화]
이들은 손수 만든 텐트에 살면서 자전거를 타고 우루과이 전역을 여행하며 증거하였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쿠르트 니켈, 구스타보 벤더와 베티 벤더, 오토 헬레
[235면 삽화]
초창기의 우루과이 전도인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마리아 데 베루에타, 카롤라 벨트라멜리, 카탈리나 폼포니
[237면 삽화]
우루과이에서 여전히 봉사하고 있는 선교인들: (1) 플로런스 래티머, (2) 에델 포스, (3) 버딘 홉스테터, (4) 리라 베루에타, (5) 토베 하겐센, (6) 귄터 쇤하르트
[243면 삽화]
1998년에 건축 중인 새로운 지부 시설
[245면 삽화]
지부 위원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귄터 쇤하르트, 델포스 벨트라멜리, 헤라르도 에스크리바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