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바로 가기

차례 바로 가기

마다가스카르

마다가스카르

마다가스카르

아프리카 동해안에서 바다 너머에 위치한 마다가스카르는 때로는 ‘붉은 큰 섬’이라고 불립니다. 이 섬은 참으로 커서 지구상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인데다 그 흙이 붉은색입니다.

한 프랑스 과학자는 마다가스카르의 풍부하고 다양한 동식물계 때문에 이 섬을 ‘박물학자의 약속의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1만 종에 달하는 이 섬의 개화(開花) 식물 가운데 약 80퍼센트는 지구상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난초만 해도 거의 1000가지에 달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주요 수출 작물인 바닐라를 산출합니다. 이 섬에는 또 꼬리에 고리 무늬가 있는 여우원숭이와 여러 종류의 카멜레온을 포함하여 매혹적인 동물들이 많습니다. 카멜레온은 물건을 잡기에 적합한 꼬리와 손처럼 거머쥐는 발들을 가진 동물입니다. 이 섬의 400종에 달하는 양서류와 파충류 가운데 열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 섬에서만 서식합니다.

그렇지만 여호와의 종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존재는 사람들입니다. 마다가스카르에는 1400만 명이 넘는 주민이 있어 약 20개의 종족을 구성합니다. 섬 중앙의 고원 지대 주민은 아시아계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피부색이 연하고 머리털은 곧고 검습니다. 그들은 원래 지금의 인도네시아라는 곳에서 건너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해안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아랍인과 아프리카인의 혼혈의 특징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특징들이 섞여 있는 사람들은 그 나이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부모가 그들의 10대 자녀처럼 젊어 보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말라가시족 즉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의 출생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부류에 속하며, 국민의 80퍼센트가 생계를 토지에 의존합니다. 그로 인해 ‘약속의 땅’이 크게 손상되고 있습니다. 마다가스카르의 한때 울창하던 삼림은 절반 이상이 벗겨져 나가거나 훼손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다가스카르는 ‘약속의 땅’으로 계속 번성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으로 그러합니까? 마음 속에서 왕국의 진리의 씨가 번성하는 인식 깊은 사람들이 풍부하다는 면에서 그러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왕이 되셨다!”는 좋은 소식을 듣고 감사히 여깁니다. 그들은 어느 인간 정부도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을 그분의 통치가 인류를 위해서 하게 될 것임을 알고 기뻐합니다.—시 97:1.

여호와의 왕 되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큰 섬의 주민들이 인식하도록 실제로 도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인구의 40퍼센트가량이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에 속하지만, 그 선교인들은 말라가시인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인 생활 방식을 심어 주지 못하였습니다. 한 말라가시 원주민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 말 좀 들어 보시오, 선생. 우리 말라가시인들은 그저 그리스도교로 예방 접종 맞은 것에 불과해요. 말라가시 사람 가운데 집을 지으려는데 점쟁이한테 가서 일을 시작할 길일을 물어 보지 않고 지을 생각을 할 사람은 하나도, 아무렴, 한 사람도 없다고요. 심지어 깬 [서구화된] 사람 가운데도 없지요. 옛날부터 믿던 것이 그대로 살아 있는 걸요.” 아직도 높은 곳이나 산꼭대기에서는 동물 희생을 바치고 있습니다. 조상 숭배는 당연한 일이고, 주술사는 사람들을 단단히 장악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일상 생활은 산 자보다 죽은 자에 의해 더 지배를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이 잘 알려지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길을 따르도록 돕는 데는 거의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그리스도교국의 선교인들은 성서 번역을 통해서 어떤 의미로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알려지게 하였습니다. 이미 1830년에 ‘신약’이 발행되었고, 1835년까지는 성경 전서가 말라가시어로 나와, 말라가시어 성서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 된 자국어 번역판 성서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말라가시어 성서 가운데 프로테스탄트 번역본에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심지어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도 사용하고 있고, 가톨릭 번역본에서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아베’라는 형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 83:16, 18 17, 19; 마태 4:7, 10) 그 결과 여호와라는 이름이 일상 생활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택시를 타고 가다 보면, 말라가시어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와 같은 성구를 눈에 잘 띄게 걸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 23:1) 또 여자들이 몸에 두르는 ‘람바’라고 하는 천에 날염(捺染)된, 하느님의 이름이 나오는 성구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누가 이곳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이름을 알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를 그들의 생활에서 주권자로 인정하도록 도왔습니까?

좋은 소식이 붉은 큰 섬에 이르다

1925년에, 여호와의 증인의 당시 명칭인 성경 연구생들이 마다가스카르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돕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1933년 9월에 이 섬에서 보다 광범위한 증거가 행해졌습니다. 선교의 열정을 가진 용감한 두 사람 로버트 니즈벗과 버트 맥루키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부터 모리셔스를 거쳐 해안 도시 토아마시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습니다. 그 당시 아프리카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수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짧은 기간에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왕국의 좋은 소식을 알리고자 애썼습니다. 로버트 니즈벗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가 가진 프랑스어 서적이 신속히 전해졌지요. 우리는 그저 왕국에 관해 증거하고 서적을 전한 다음에는 봉사되지 않은 다른 구역으로 이동했습니다.”

토아마시나를 다 돌고 난 다음, 니즈벗 형제와 맥루키 형제는 내륙으로 향하여 수도인 타나나리브로 갔습니다. 타나나리브는 ‘천(千)의 도시’를 의미하는 안타나나리보의 프랑스식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왕 안드리안자카가 1607년에 이 도시를 왕국의 수도로 선포할 당시, 도시를 방어하기 위하여 그 주위에 1000명의 군사로 포진하던 사실로부터 유래하였습니다. 버트 맥루키는 이 수도에서 받은 인상을 이렇게 말합니다. “타나나리브는 말편자 모양을 하고 있었고, 곡면을 그리는 그 구릉 지대의 뚫린 부분에 철도역이 있었습니다. 그 ‘편자’ 내부에 주요 번화가가 있고, 그 주위를 주택 지구가 둘러싸고 있었지요. 말 그대로 언덕길을 수백 계단 올라가야만 주민들은 자기 집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수도의 주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로버트 니즈벗의 소감은 이러합니다. “그들은 프랑스어 서적을 잘 받았고, 일부 주민은 프랑스어 「황금 시대」(지금의 「깨어라!」)를 예약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상당수의 사람들을 다시 찾아가서 설명을 더 해 주었습니다.” 자신들의 경험을 회상하면서 니즈벗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상류 지식층 원주민에게 대단히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렇지만 두 형제에게는 의사 소통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영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극소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지고 있는 서적이 바닥날 때까지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접근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이 한 달가량 방문해 있는 동안 집단이나 회중이 설립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여호와에 관해 이야기하는 데 185시간을 바치고, 214부의 서적과 828부의 소책자를 전하였으며, 21건의 예약을 맡았습니다. 진리의 씨가 뿌려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22년이 더 지나서야 비로소 이 사람들은 성장하고 번성할 만큼 돌봄을 받게 되었습니다.

말라가시가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다

1955년 10월, 파리에서 있었던 “승리의 왕국” 대회가 끝나고 프랑스로부터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해안 도시 토아마시나를 거쳐 타나나리브에 도착하였습니다. 열차에서 내려, 그들은 한동안 역전에 서 있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니까 그 ‘말편자’가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수많은 집들이 마치 벽에 걸린 층층 선반에 얹혀 있기라도 하듯이 구릉 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폴란드계 출신으로 탄광 광부였던 아담 리시아크가 봉사 짝인 에두아르 마를로에게 “이봐, 에두아르, 이게 모두 우리 구역이야!” 하고 말하였습니다. 에두아르가 대꾸하였습니다. “아담, 우리가 여기서 뭘 해야 하지? 여기 사람들은 유식한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거든. 어떡하지, 아담?” 그런데도 그들은 이 섬에서 훌륭한 일을 많이 수행하였습니다.

당시 마다가스카르는 프랑스 식민지였습니다. 「파수대」가 프랑스 국내와 그 영토에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약으로만 구할 수 있는 프랑스어판 「깨어라!」를 제공하였습니다. 처음 6개월간 1047건의 예약을 맡았습니다. 리시아크 형제는 그들이 같은 「깨어라!」 잡지를 견본으로 반복해서 사용하는 바람에 잡지가 휴지 뭉치처럼 되어 더 이상 읽어 보기가 힘들게 되었다는 점을 이야기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휴지 뭉치를 보여 주기만 하면 사람들은 예약을 하였습니다.

리시아크 형제와 마를로 형제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구역을 돌고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한 초등 학교가 증인들에게 집회를 여는 데 교실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긴 의자들은 나무로 되어 있고 모든 것이 아동용으로 되어 있어 성인들에게는 다소 불편하였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6개월이 지난 뒤, 말라가시의 첫 번째 전도인 라베아시 노엘이 야외 봉사 보고를 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전도인들이 야외 봉사 활동에 가담하였습니다. 1956 봉사년 말에는 여덟 명으로 된 집단이 여호와의 증인의 타나나리브 회중을 구성하기 위해 신청서를 냈습니다. (이하, 말라가시어에서는 성 다음에 이름이 나옴.)

마다가스카르에서 관심을 나타낸 최초의 사람들 가운데 말라가시의 젊은 여성 라자나부아니 나르시스가 있었습니다. 1956년에 나르시스는 자기가 일하는 가게 앞으로 두 남자가 정기적으로 지나다니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하루는 그 중 한 사람이 가게에 들어와서 햄 몇 조각을 샀습니다. 그가 나갈 때 거기서 일하는 사람은 모두 말라가시어로 된 작은 전도지 「신세계에서의 생활」을 받았습니다. 나르시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 소식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내가 독서를 좋아하는 걸 아시는 어머니가 프랑스어판 「깨어라!」 잡지를 예약하시고 나를 위해 성서 연구까지 약속해 놓으셨지 뭐예요. 나한테는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말이죠.” 나르시스는 증인들과 연구를 시작하였는데, 자기가 정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일단 그들이 알아차리고서는 내버려 두게 되기만 바랐습니다. 그런데 그는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서가 영혼에 관하여 말하는 바를 연구하고 조상 숭배가 그릇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서, 자신이 진리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959년이 되자, 라자나부아니 나르시스는 여호와에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물침례를 받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전 시간 봉사의 직무에 등록하였습니다. 나중에 그는 에두아르 마를로와 결혼하였습니다. 전 시간 봉사자로서 나르시스는 봉사에서 꾸준함의 훌륭한 본을 세워 놓았습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수행한 특별 봉사를 마칠 때까지 리시아크 형제의 구역은 안타나나리보였습니다. 그는 재방문과 연구가 사방 여기저기에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머리털 없는 바자(백인)였습니다. 종종 집주인들이 자신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대면, 사람들은 아담이 거기 왔다 갔다는 뜻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안타나나리보의 프랑스어 회중에 있는 형제 라사우나 제르베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아담 형제는 참을성이 많으면서도 확고하였지요. 나는 연구할 때 다른 사람에게, 그가 오면 내가 집에 없다고 말해 달라고 부탁하곤 했는데, 그래도 아담은 다시 찾아오곤 하였습니다. 맨 처음부터 집회에 참석하도록 권해서, 그대로 했지요. 그는 여호와의 조직에 충실했고, 나도 동일한 영을 배양하도록 가르쳤습니다.”

1970년에 리시아크 형제와 마를로 형제는 인근의 프랑스령 레위니옹 섬으로 임명되어 갔습니다. 리시아크 형제는 그 후 프랑스로 돌아가, 1988년 1월에 마르세유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에두아르 마를로는 가족과 함께 레위니옹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파이오니아들이 활동을 지원하다

왕국 소식을 마다가스카르 주민들에게 계속 제공하기 위해서 많은 일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온 부부인 앙투안 브랑카와 질베르 브랑카는 1957년에 도착하여, 그 이후 안타나나리보에서 봉사하였습니다. 질베르는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 제24기 졸업생이었고, 그의 남편 역시 나중에 길르앗에 다녀왔습니다. 1961년에 딸 안나가 태어난 후에도 그들은 바로 그 임지에 머물렀습니다. 질베르가 스위스에서 연구를 사회한 시몬 베르클라도 마다가스카르로 이주하여 활동을 지원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 플로랑 샤보와 앙리에트 샤보 부부가 1960년에 프랑스로부터 마다가스카르로 와서 마다가스카르 북부의 디에고수아레스(현재 명칭 안트시라나나)에서 봉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샤보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 당시에는 파이오니아가 먼 나라로 가기 위해 집과 가족을 떠날 때,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아마겟돈 전에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가족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우리 심경이 바로 그러했지요.”

샤보 형제가 연구를 사회한 한 남자는 설탕을 사다가 진리를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깨어라!」지를 예약한 한 중국 상인이 그 잡지 종이를 사용해서 물건을 싸 주었습니다. 그 잡지가 낭비된 것입니까? 라침바자피 샤를은 그 사람에게서 설탕을 샀습니다. 설탕은 잡지 한 호의 마지막 장으로 만든 원추형 봉지에 들어 있었습니다. 샤를은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책을 광고하는 내용을 읽고는 그 책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 지부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샤보 형제가 그를 만나 책을 전하고 성서 연구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신속히 발전하여 집회에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샤를은 자신의 가정 생활을 정리해야 하였습니다. 그는 아내와 갈라선 후 다른 여자와 살고 있었는데, 자녀까지 딸려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침례를 받을 수 있으려면 법적으로 합당하게 결혼해야 하였습니다. (히브리 13:4) 1960년에 법적 수속을 밟기 시작하였는데, 196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모든 서류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디에고수아레스 읍사무소가 불에 타버렸고, 샤를의 신상에 관한 문서는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전도 9:11) 모든 일을 다시 해야만 하였는데, 이번에는 단지 1년이 걸렸습니다. 당국자들은 하느님의 표준을 따르려는 그의 결의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드디어 그가 왕국 전도인이 되고 침례를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그의 아내 역시 침례를 받았습니다. 샤를은 디에고수아레스에서 그리고 안타나나리보에서 장로로 일해 오고 있습니다.

언어와 씨름하다

1961년, 캐나다의 프랑스어권 지역에서 순회 활동을 하던 라발 카르보노와 이렌 카르보노 부부가 선교인으로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말라가시식 가옥의 1층에 입주하였습니다. 그 집에는 하나의 작은 침실, 작은 식당, 작은 부엌, 작은 냉수 욕실 그리고 벽면 내부로 들어가 있는 작은 베란다가 있었습니다. 카르보노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쥐, 생쥐, 바퀴벌레가 마음대로 드나들었지요. 아내는 꼬리가 반쯤 잘려나간 쥐 한 마리를 알아볼 정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눈에 띌 때마다 아내는 그 쥐더러 ‘왕자님’이라고 부르면서 지나가 줄 것을 정중히 요청하곤 했지요.”

라발은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고 그의 아내도 배우고 있는 중이라서, 주민들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이모 쿠오카넨과 베라 쿠오카넨 부부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1962년 1월 말에 핀란드에서 왔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올 때 그들을 알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추운 겨울에 핀란드를 떠난지라, 털모자를 비롯하여 두꺼운 방한복을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열대 무더위에서 분명히 변화가 필요할 것이었습니다. 라이모는 영어는 하였지만 프랑스어는 하지 못했습니다. 베라는 둘 다 못 했습니다. 이렌 카르보노가 영어를 사용하여 그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면, 라이모는 아내를 위하여 한 마디 한 마디를 영어에서 핀란드어로 통역해야 하였습니다. 그런데다 베라는 학교 교육을 스웨덴어로 받았기 때문에 문법적인 점은 스웨덴어로 설명해 주어야 하였습니다. 다행히도 라이모는 스웨덴어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복잡하게 들립니까?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달가량 지나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프랑스어를 어느 정도 알아듣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프랑스어를 익힌 다음에는 또 말라가시어를 배워야 하였습니다.

이삼 년이 지나 그의 어학 강사가 더 이상 곁에 없게 되었을 때, 방문한 지구 감독자 맬컴 비고를 위해서 이번에는 쿠오카넨 형제 자신이 프랑스어로 통역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쿠오카넨 형제는 누가 9:62을 인용하면서 ‘쟁기’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단어를 몰랐던 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설명하려고 애를 쓰고 있을 때, 청중은 놀라서 눈들이 휘둥그래졌습니다. 그의 설명이 마다가스카르에서 제뷰라는 동물 수컷을 사용하여 쟁기질하는 방식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한번은, 말라위에서 형제들이 망고나무 아래서 집회를 본다는 것을 프랑스어로 표현하려다가 그만 회중 전체를 나무 위에 올려 놓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청중과 함께 웃어 버리는 법도 배워야 하였습니다.

또 다른 선교인 부부인 새뮤얼 길먼과 셀마 길먼이 1962년 4월에 미국에서 왔습니다. 새뮤얼은 자신이 직면했던 의사 소통 문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 입주한 집에서 살려면 벽장에 사용할 긴 파이프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쿠오카넨 형제와 나는 6미터짜리 파이프를 구하려고 모퉁이에 있는 철물점에 갔습니다. 몸에 지니고 다니던 작은 사전에서 그 단어를 찾아서 사용했지요. 우리가 가게에 있는 사람들에게 6미터짜리 파이프—담뱃대—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의 얼굴 표정이 어떠했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본부로부터의 방문

해외에서 온 봉사자들의 지원으로 마다가스카르에서 “여호와께서 왕이 되셨다”고 선포하는 사람의 수가 더욱 증가하였습니다. 1959 봉사 연도에는 최고 전도인 수가 41명이었습니다. 그 해, 당시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회장인 N. H. 노어가 직접 마다가스카르를 방문하여 형제들을 격려하였습니다.

4년 후 노어 형제의 비서 밀턴 헨첼이 아프리카 나라들을 방문할 때, 마다가스카르도 다시 그 여행 일정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이곳의 선교인들과 특별 파이오니아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참석한 모두는 매우 격려받았습니다. 헨첼 형제는 자신의 파이오니아 시절의 경험담을 그들에게 들려 주었습니다. 그 봉사 연도가 끝나기 전에 마다가스카르는 전도인 100명 선을 넘어섰습니다.

헨첼 형제의 방문에 이어, 이 나라 출신 형제 자매들이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도록 권유받았습니다. 그 고장 원주민이라서 그들은 새로운 구역을 개척하는 활동에 가장 효과적으로 앞장설 수 있었습니다. 안드리무아라 페일릭스는 그 그룹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965년에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래 여행하는 감독자로, 그리고 여러 해 동안 마다가스카르에서 베델 가족 성원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 오노린에게 가족이 생긴 이후에도 그는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지부 번역부에서 시간제로 일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봉사에 대한 그들의 열심은 자녀들에게도 유익을 주었습니까? 딸 뮤라는 현재 결혼해서 남편과 함께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아직 집에 있는 아들 티모테이는 때때로 보조 파이오니아로 봉사합니다.

마다가스카르를 위한 지부 사무실

1955년에 마다가스카르에서 좋은 소식의 전파 활동이 정기적으로 수행되면서, 이곳의 활동은 모리셔스 지부의 감독을 받게 되었습니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는 프랑스 지부의 감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963년을 기점으로, 마다가스카르는 자체 지부를 갖게 되었습니다. 라이모 쿠오카넨이 지부의 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초기에는 혼자서 일상 업무를 대부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무실이 단지 셋집인데다 선교인 집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은 이상적인 집은 아니었습니다. 선교인들이 입주한 뒤, 귀신 나오는 집에서 사는 것이 무섭지 않느냐고 어떤 주민이 물었습니다. 과연, 이상한 일들이 그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면, 문 손잡이가 돌아가는 것이 보여서 선교인 부부가 누가 거기 있나 보려고 문을 열었는데, 분명히 문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선교인들은 그 방에 영매술자가 살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영물들이 매개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남겨져 있지 않은지 알아 보려고 주의 깊이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들의 방 문지방에 동전 하나가 못으로 꽉 박혀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아주 힘들게 그것을 빼냈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현상은 사라졌습니다.

자초지종을 묻자, 집주인은 이렇게 털어놓는 것이었습니다. “맞아요, 귀신 나오는 집이지요. 그렇지만 여러분은 선교인이고 하느님의 백성이니까 두려워할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말라가시어로 서적을 생산하다

전파 활동이 진전되면서, 말라가시어로 서적이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1963년까지는 「신세계에서의 생활」이나 「지옥불—성서의 진리인가, 이교의 공포 교리인가?」와 같은 전도지가 몇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1959년에 발행된 「이 천국의 기쁜 소식」소책자도 있었습니다.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말하고 읽었으므로, 전도인들은 그 언어로 된 서적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자신의 모국어로 읽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파수대」를 말라가시어로 출판하도록 승인이 나자, 지부에는 도움이 더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말라가시인 자매 라수말라라 루이즈가 프랑스어로부터 번역을 하였습니다. 그 자매는 자기 집에서 번역을 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썼습니다. 지부에서는 베라 쿠오카넨이 번역된 원고를 등사 원지에 타자하고, 형제들이 등사기를 돌렸습니다.

말라가시어로 처음 인쇄된 「파수대」가 1963년 9월에 발간되었는데, 총 부수는 600부가량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월간이었고 연구 기사만 실었습니다. 전도인들은 기뻐하였습니다. 말라가시어판을 사용하게 되었을 때 전도인들은 첫 예약 운동 기간에 수백 건의 예약을 맡았습니다. 몇 개월 안 되어, 지부에서는 매달 3000부를 등사판으로 인쇄하게 되었습니다. 세 형제가 교대해 가며 등사판을 거의 밤낮으로 돌렸습니다.

그 중 한 형제가 이렇게 회상합니다. “「파수대」 한 호에 적어도 밀랍 등사 원지 열여섯 장이 들어갔습니다. 한 잡지를 만드는 데 양면으로 인쇄된 종이 여덟 장을 모았지요. 그러니까 「파수대」 3000부를 생산하자면 2만 4000장이 넘는 종이에 등사를 하는 셈이죠. 우리는 탁자 위에 인쇄된 종이를 여덟 더미 또는 그 이상 벌여 놓고서, 그 주위를 3000번 돌면서 한 장 한 장 일일이 모았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모아진 종이들을 중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일을 손으로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협회는 스위스 지부에서 말라가시어 「파수대」를 인쇄하도록 마련하였습니다. 지금은 영국에서 월 2회 인쇄하며, 발행 부수는 2만 6000부입니다. 이 잡지를 사용해서 마다가스카르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전세계의 동료 신자들과 동시에 동일한 영적 양식을 섭취할 수 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번역 작업은 진보해 갔습니다. 말라가시어로 「파수대」를 발행한 지 석 달 후 이곳 증인들은 성서 연구 서적인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도 자국어로 받았습니다. 그 책을 받자,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도록 돕는 일을 많이 하고 있던 특별 파이오니아 라쿠투마루 쥐스탕은 말없이 그 책을 오랫동안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아, 여호와께서는 얼마나 선하십니까! 그분은 이 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그 책을 영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의 손에 전해 주기 위하여 여러 상자씩 받아갔습니다.

순회 감독자와 함께 길을 나서 봄

처음에는 섬 전체에 한 회중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선교인 집이 개설되고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여러 지역으로 파견됨에 따라, 회중이 더 형성되었습니다. 1964 봉사 연도 중 두 개의 새로운 회중이 설립되었습니다. 당시 운영되고 있던 세 개의 회중을 지원하기 위하여, 지부에서는 순회 감독자 라발 카르보노가 그의 아내 이렌과 함께 방문하도록 마련하였습니다. 그들은 철도편으로 여행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모험—즐거운 모험—이었습니다. 예컨대, 한번은 무언가가 그들의 다리를 쪼아 대는 것을 느꼈습니다. 벤치 밑으로 지나가던 거위 한 마리가 자기를 좀 쳐다봐 달라고 한 짓이었습니다.

카르보노가 가족 책임을 돌보기 위하여 마다가스카르를 떠나야 했을 때, 라이모 쿠오카넨이 순회 활동을 인계받았습니다. 가능한 한 언제나 그와 그의 아내 베라는 기차로 여행을 하였습니다. 해안 도시들 사이는 여객선을 이용하였습니다. 때로는 정원이 15명이지만 항상 초만원인 택시-브루스 즉 ‘밀림 택시’를 타고 여행해야만 하였습니다.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걸리는 여행들이었습니다. 우기에는 밀림 택시로 통과할 수 없어서, 쿠오카넨 부부는 항공 여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멋진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국내 항공사는 낡은 DC-3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활주로는 풀밭에 불과하였습니다. 다양한 집단을 방문하는 일은 따뜻한 영적 격려를 주고받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한동안 쿠오카넨 형제는 순회 감독자 겸 지역 감독자로 일하였습니다. 또한 필요에 의하여 지부에서 순회 및 지역구 우편물을 취급해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나라 형제들을 열심히 훈련시켰습니다. 시간이 지나, 원주민 특별 파이오니아인 라자우벨리나 세일레스탕이 최초의 말라가시인 순회 감독자로 자격을 구비하였습니다.

힌두교인들이 여호와의 숭배로 향하다

전파 활동이 진전되면서, 모든 부류의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디모데 첫째 2:4) 선교인들은 수도에서 사업을 하는 아시아 사람들에게 서적과 잡지를 많이 전하였습니다. 디루로 알려진 젊은 힌두교인 디라일랄 바그반지가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선교인이 잡지를 가지고 자기 가게에 올 때면, 그는 기꺼이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1963년에 삼촌이 사망하자, 디루는 ‘왜 사람이 죽는가, 그리고 죽은 자의 상태는 어떠한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그처럼 선한 사람이 죽게 하시는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또 죽은 자를 다시 볼 희망은 없는지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직후 시몬 베르클라 자매가 집집으로 증거를 하다가 그를 만났습니다. 한번은 재방문에서 성서를 사용해서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한 그의 질문에 대답해 주고 부활의 놀라운 희망에 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전도 9:5; 사도 24:15) 처음에 그는 혼란을 느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힌두교의 윤회 신앙에 맞추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신앙은 사랑하는 죽은 사람을 다시 볼 희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일단 생각을 정리하자, 디루는 부활에 대한 성서의 희망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요한 5:28, 29.

몇 주간의 성서 연구 후에, 디루는 모든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반대가 일어났는데, 특히 아버지와 친구들이 반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디루는 “성서는 논리적이고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다음해에 그는 여호와께 헌신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디루의 아버지는 계속 반대하여, 두 명의 프로테스탄트 교역자를 보내 디루가 부모의 종교로 돌아와야 한다고 설득하려 하였습니다. 디루가 그들은 왜 아버지에게 죄와 사망과 대속에 관한 진리를 가르치지 않느냐고 묻자, 교역자들은 다섯 번째 계명을 보면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할 것을 가르친다고 반박하였습니다. 디루는 그가 다섯 번째 계명에 순종해서—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서—그 결과 하느님의 첫 번째 계명—어느 다른 신도 숭배하지 말라는 말씀—에 불순종한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교역자들은 대답할 수가 없어서 떠나 버렸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지부 사무실에 찾아가, 증인들이 디루를 설득해서 자기 아버지의 종교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런 위선을 보고 나니까 믿음이 오히려 강해지더군요.” 디루의 말입니다.

이제 그의 아버지는 마술사들과 정치가들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였으며, 그 후에는 현지 신문에 증인들을 거짓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고 디루와 대화를 단절하였습니다. 디루의 부모에게는 아들 다섯과 딸 셋이 있었는데, 그 가족은 하나같이 디루의 종교는 가족 관계를 와해시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루는 자신의 첫째 가는 의무는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임을 확신하였습니다.—마가 12:28-31.

1967년 2월에 디루는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고, 다음해에는 시몬과 결혼하였습니다. 1970년 6월에 마다가스카르를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된 후, 그들은 케냐에 가서 3년간, 그리고 인도에 가서 거의 20년간 봉사하였습니다. 인도에서 그는 지부 위원으로 일하였습니다.

디루의 가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아버지는 성서와 성서 출판물을 읽기 시작하였고, 어머니도 성서 진리를 환영하게 되었으며, 형제 자매들은 물론 조카와 조카딸까지 침례받은 증인이 되었습니다. 모두 합쳐, 그의 가족 가운데 16명이 여호와의 숭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마다가스카르 지부에서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국제 건축 공사를 지원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그반지 가족은 영적 열매가 풍성한 이 ‘붉은 큰 섬’에서 훌륭한 결실의 본입니다.

선교인들이 기초를 놓다

워치 타워 협회는 마다가스카르에서 좋은 소식의 전파 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선교인들을 계속 파견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마르가리타 쾨니거와 기젤라 호프만은 독일 자매들로서 1966년 3월에 왔습니다. 호프만 자매는 자신이 받은 인상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다가스카르에는 평화스러운 분위기가 있어요. 유럽이나 미국의 바쁘게 허둥대는 생활과는 거리가 멉니다. 내가 맨 처음 감탄한 것 가운데는 거대한 알로에 식물이 있지요. 이전에 고향에서 화분에 키워 봤는데, 그 키가 15센티미터나 자랐을 때 기분이 으쓱했었거든요. 그런데 여기 와서는 집채만한 것도 보았습니다! 첫 저녁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별들이 과거 어느 때 본 것보다도 가까워 보이더군요. 여기서 우리는 복잡하지 않은 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 두 자매는 이곳 주민들이 매우 온화하고 후대를 잘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쾨니거 자매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상당히 교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골 마을에 사는 할머니들까지도 성서와 성서 서적을 읽기 좋아하지요. 책을 받기 위하여 물건을 대신 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아이들도 우리 뒤를 좇아와서는 쌀을 주고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를 받아 갑니다.” 이들 두 자매는 브랑카 부부와 함께 피아나랑초아에서 전파 활동을 개척하고, 암보시트라에서는 작은 집단을 강화하였습니다. 두 도시는 다 안타나나리보 남쪽에 있습니다.

새로운 구역을 개척한 용기 있는 선교인들이 더 있었습니다. 휴 헤이즐리와 토머스 베인즈는 마다가스카르 남부의 해안 도시 톨리아라에서 봉사하였습니다. 캐나다에서 온 메리 돌린스키 자매는 에두아르 마를로와 나르시스 마를로 부부와 함께 톨라나로에서 봉사하였습니다.

마다가스카르에 첫 선교인들이 파견되던 1961년에는 보고하는 전도인이 75명을 막 넘어섰습니다. 제자를 삼는 일이 거의 10년이 되는 1970년에, 이 선교인들은 469명의 전도인 신기록을 보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이것은 525퍼센트의 증가였습니다. 그러나 먹구름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미 1967년 이래 새로운 선교인은 아무도 마다가스카르 입국이 허용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1970년 6월 5일 오후 네 시에, 폭풍은 들이닥쳤습니다. 공안 경찰이 지부에 찾아와 새뮤얼 길먼에게 모든 선교인은 다음날 공안 경찰에 출두할 것을 전하고 갔습니다. 그 시기에 수도에 있던 선교인들—길먼, 쿠오카넨, 리시아크 형제—은 공안 경찰 국장 앞에 출두하였습니다. 몇 마디 끝에, 여호와의 증인의 모든 선교인들은 즉시, 그날 밤 비행기로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유는 알려고 하지 마시오. 결코 알 수 없을 테니까. 지금 당장 떠나시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부 선교인은 며칠 전에 3년짜리 비자를 새로 받은 바 있었습니다. 그들이 비자가 아직 유효하다는 점을 지적하자, 국장은 여권을 제시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더니 그들의 비자에 ‘무효’ 도장을 찍었고, 이제 형제들은 이 나라에 불법으로 체류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선교인들은 그날 밤에 떠날 수 없었습니다. 월요일 아침 일찍 그들은 출신국 영사관 또는 대사관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 6월 20일 토요일까지는 선교인 20명 모두가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케냐로 갔습니다. 프랑스 시민권자들은 프랑스령인 레위니옹 섬으로 떠났습니다. 그들에게 작별을 고하기 위해 마다가스카르 전역에서 형제 자매들이 왔습니다. 이 나라 증인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선교인들도 울었습니다. 일부 선교인은 마다가스카르에 여러 해 동안 있어서, 이곳이 그들의 고향이었습니다.

마다가스카르에 있는 동안 선교인들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 위에 믿음을 세우고, 여호와께 확신을 두며, 하느님의 목적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인식하도록 가르치고자 심혈을 기울여 왔습니다. (고린도 첫째 3:5-14) 적절하게도, 이 나라를 떠나기 전 마지막 모임에서 플로랑 샤보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선교인들의 추종자가 되었다면, 그들이 떠난 뒤에도 계속 여호와의 증인으로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여호와 하느님의 증인이 되었다면, 선교인들이 떠난 뒤에도 계속 여호와의 증인으로 있을 것입니다.”

금지령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금지령은 1970년 8월 8일 「말라가시 공화국 관보」(Official Journal of the Malagasy Republic)에 공표되었습니다. 말라가시 증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었습니까? 그 질문을 받자 내무부 장관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염려하지 마시오. 선교인들이 떠난 다음에는 우리가 그들을 돌볼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손으로 무엇을 짓누르는 시늉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국내 증인들에 대한 심한 박해는 없었습니다. 아무튼, 선교인들이 추방될 당시 이 나라 형제 자매들은 어떤 심정이었습니까? 소녀 시절부터 선교인들을 알고 있던 라벨루자우나 라안타말랄라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교인들이 떠나야 했기 때문에 이곳의 많은 형제들은 실망했습니다. 더 이상 여호와의 증인으로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971 봉사 연도 보고는 전도인 수가 12퍼센트 감소하였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분명히 일부 증인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굴복하여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일을 중단한 것입니다. (잠언 29:25) 그렇지만 대다수는 그들의 믿음이 강하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3년째 되는 해에는 마다가스카르에서 다시 증가를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집회가 여러 곳에 있는 형제들의 집에서 열렸고, 서너 가족이 참석하였습니다. 집회 참석자 수는 점차 증가하였습니다. 안타나나리보 시내 마나캄바이니 지역에서 라벨루자우나 자매는 자기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하였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게도, 시민 소요 시기에도 아무런 심각한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라벨루자우나 자매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작은 마나캄바이니 집단으로부터 적어도 열 개의 회중이 형성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여러 해 동안의 금지 기간 내내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우리의 노력을 축복하셨지요.”

감독을 위한 훈련

이 나라의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지원하고 통치체와 접촉을 유지하기 위하여, 한 위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왕국 전파 활동에 대한 책임은 이 나라 증인들의 어깨 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금지 기간 중 형제들은 협회를 언급할 때 ‘엄마’를 의미하는 이네니라는 별명을 사용하였습니다. 금지령이 내려진 직후, 이네니는 필요한 도움을 마련하였습니다. 어떻게 한 것입니까?

세계 본부로부터 밀턴 헨첼이 지구 감독자로 마다가스카르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말라가시 형제들의 영적 필요를 돌볼 구체적인 마련을 하였습니다. 책임 있는 두 형제가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의 세계 본부로 가서 훈련을 받도록 초대되었습니다. 그들은 언어 문제에도 불구하고 크게 유익을 받아, 앞에 놓인 활동을 위해 더 나은 자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헨첼 형제는 또한 말라가시의 한 특별 파이오니아가 길르앗 학교에 가도록 추천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왕국 전파 활동에서 앞장서는 데 더 많은 일을 할 자격을 구비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영어를 하고 서신 번역 일을 하던 청년 안드리아마시 테이오도르가 선정되었습니다. 그는 길르앗에서 받은 훈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 교육은 5개월간의 집중적인 성서 훈련으로서, 나에게 좋은 연구 습관을 키워 주었습니다. 한나절씩은 여러 베델 부서에서 일한 것이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살펴보는 많은 기회가 되었지요. 기름부음받은 형제 자매들과의 사귐은 내가 길르앗에서 얻은 가장 값진 경험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들의 관대함, 후대 그리고 겸손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안드리아마시 형제는 길르앗에서 돌아온 뒤 그가 배운 것을 활용하기 위하여 야외로 임명되었습니다. 그가 받은 훈련은 그 자신의 믿음을 강화하였으며, 그로 인해 이번에는 그가 그 어려웠던 시절에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격려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지부에서 여러가지 업무를 시간제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근래에는 새로 온 선교인들에게 말라가시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봉사를 계속하다

여호와의 증인은 금지령 기간에 삼가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참 숭배를 계속 행하였습니다. 「파수대」는 매호 빠짐없이 번역되었습니다. (이사야 65:13) 서로 격려하기 위하여 개인 집에서 모였습니다. (히브리 10:23-25) 순회 감독자들은 회중들을 방문하였고, 지역 대회와 순회 대회가 조직되었으며, 대규모의 모임도 숲 속에서 열렸습니다. 도회지를 벗어난 그러한 곳에서 참석자는 때때로 1500명이나 되는 많은 수에 이르기도 하였습니다. 1972년에는 서적 보관소를 갖춘 사무실이 임대 아파트에 개설되었습니다. 당시 존재하던 11개 회중 각각으로부터 책임 있는 한 형제가 보관소에 와서 서적을 찾아가곤 하였습니다. 잠시 동안 보관소를 관리하던 안드리무아라 형제는 그 형제들이 서적 상자를, 바로 이웃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내놓고 가져갔다고 회상합니다

금지령하에서 처음 몇 년 동안 증인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하였습니다. 때로는 자신들이 경찰의 감시하에 있으면서 미행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대부분의 증거 활동은 비공식적으로 행하여졌습니다. 호별 방문을 할 때에는 한 구획에서 한 집을 방문하고 난 다음에는 다른 구획에 있는 집으로 갔습니다. 가방에 서적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대신 자루나 바구니를 들고 다녀서, 마치 장보러 가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아무튼 대개의 경우 방해받지 않고 성서 연구를 사회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내 리아와 함께 지부에서 봉사하는 라쿠투자우나 형제는 1972년에 자신이 연구를 시작하던 때에는 연구를 숨기려는 아무런 특별한 노력도 하지 않고 연구하였다고 회상합니다.

지나치게 조심한 것인가?

이네니는 지구 감독자의 방문을 계속 마련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랑에 찬 마련은 형제 자매들을 격려하여 그들이 처한 상황에 건설적으로 대처하도록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1973년에 앙드레이 람세이에가 마다가스카르를 방문하여 보니, 형제들이 지나치게 조심하고 있었습니다. 안드리무아라 형제는 람세이에 형제가 이렇게 추리하던 일을 회상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유로 투옥되었던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른 난관이라도 겪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여러분은 지나치게 조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조심성이 과장된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무서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 방문은 참으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이 나라의 증인들은 좀더 개방적으로 그리고 담대하게 전파하였습니다. 그 결과 1974 봉사 연도 중에 613명이라는 전도인 신기록을 보고하여, 금지령 전의 최고 기록을 30퍼센트나 초과하였습니다.

법적 지위를 되찾다

1983년 말경 형제들은—이 나라의 한 문화 협회의 이름으로—그들의 활동에 대한 법적 인가를 신청하였습니다. 1984년 2월 24일에 그 인가가 나왔는데, 그렇다고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금지 조치가 해제된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이 새로운 진전은 형제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야외 봉사가 증가하여 4월에는 두 가지 두드러진 신기록—야외 봉사를 보고한 전도인 1708명과 기념식 참석자 8977명—을 달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전도인 수는 264퍼센트 증가하고, 기념식 참석자 수는 606퍼센트로 상승한 것입니다.

문화 단체로는 법적 인가를 받았지만, 1993년에 형제들은 여호와의 증인을 법적으로 종교 단체로 승인 요청하는 신청서를 제출하였습니다. 몇 개월이 지나 1994년 10월 4일에 그 법적 지위가 부여되었습니다. 참으로 기뻤습니다! 이제 그들은 또다시 여호와의 증인으로 공개적으로 알려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많은 국제적인 도움을 받다

그렇지만 그 전인 1987년부터는 선교인들이 마다가스카르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핀란드, 헬싱키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던 쿠오카넨 부부가 1991년 9월에 다시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하였고, 쿠오카넨 형제는 지부 위원회 조정 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쿠오카넨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다가스카르가 변해 있더군요. 우리가 초기에 알던 형제 자매들 가운데 일부는 아직 그대로 있었지만 많은 분들이 살아 있지 않았습니다. 대다수는 진리 안에서 새로운 전도인들이었습니다.” 처리해야 할 사무실 업무가 산적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1991년 8월에 4005명이라는 전도인 신기록을 보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1970년에 추방되었던 디라일랄 바그반지와 그의 아내 시몬 역시 마다가스카르로 돌아오도록 초청되었습니다. 교섭 수완이 뛰어난 바그반지 형제는 지부에서 인허가, 통관 서류 등의 공식 문서를 취득하는 일에 기여합니다. 그는 1992년 이래 마다가스카르 지부 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종종 관리들은 과거에 힌두교인이던 인도 사람이 여호와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느님의 왕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새로운 지부 복합 건물

1963년 9월에 지부가 설립된 이래 줄곧, 여기저기에 있는 시설들을 사용해 왔습니다. 1972년부터 1987년까지는 사무실과 서적 보관소를 마련하는 데 하나의 아파트로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큰 독채에 세를 들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돌볼 가족이 있는 지부 위원들이 대부분의 일을 자기 집에서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마다가스카르에서 성서 교육이 확장해 감에 따라, 지부 활동에 적합한 시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이바투 국제 공항에서 약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부지를 매입하였습니다. 3년 후인 1993년 4월에 해외에서 온 형제들의 지원으로 건축 공사가 착수되었습니다. 그 분야에 경험이 많은 캐나다의 월터 엘코가 30개월로 계획된 이 공사를 감독하기 위해 왔습니다. 다른 국제 건축의 종들이 그 뒤를 이었고, 많은 국제 건축 자원 봉사자들이 자비를 들여 3개월 또는 더 오래 건축 공사를 지원하였습니다. 한창때에는 건축 팀이 국제 및 국내 봉사자 110명으로 구성되기도 하였습니다. 주말이면, 지방 회중들로부터 형제 자매들이 돕고자 가세하여 자원 봉사자 수가 불어났습니다.

서로 격려를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많은 국제 건축 봉사자들이 이 나라 말을 할 줄 몰랐지만, 이들 장성한 형제 자매들은 야외 봉사에서 훌륭한 모범을 세웠습니다. 예컨대, 2년가량 중장비 기사로 지원한 데이비드 스미스는 말라가시어는 할 줄 몰랐지만 말라가시어 「파수대」와 「깨어라!」가 좋은 증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정적인 미소를 띠고, 한 손에는 잡지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제안된 헌금액을 보여 주면서 가두에 서 있곤 하였습니다. 그는 하루에 80부나 전하곤 하였습니다.

훌륭한 새 지부 시설은 참으로 여호와로부터 온 선물입니다! 1996년 12월 7일 지부가 봉헌될 때, 668명의 오래 된 증인들이 참석하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행사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길레아다라고 부르는 탁 트인 땅에서 실시된 특별 연설에 7785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왜 하필 그곳이었습니까? 지부에서 약 6킬로미터 떨어진 그 땅을 대회 회관 건립용으로 매입해 두었던 것입니다. 가장 좋은 옷들을 입고 햇볕을 가리기 위해 울긋불긋한 양산을 펼쳐 든 형제 자매들로 가득 메운 구릉 지대—참으로 멋진 광경이었습니다!

전 시간 종들의 대열이 늘어나다

1960년대에 최초의 말라가시 파이오니아들이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한 이래, 이들 부지런한 일꾼들의 대열은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증가하였습니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왕국 선포자 대략 여섯 명당 한 명이 지금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 형제 자매들은 이 일을 그들의 천직으로 삼았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을 강화하기 위하여,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이 마다가스카르에서도 1979년에 개설되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전 시간 봉사를 해온 안드리아마시 테이오도르와 안드리무아라 페일릭스가 강사였습니다. 그때 이래 수백 명의 파이오니아가 이 교육적인 과정으로부터 유익을 받아 왔습니다.

이 강습에서 상세히 논의하는 분야 가운데 하나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개인적 관심을 나타내는 일을 다룹니다. 많은 파이오니아가 그 교훈을 참으로 마음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예로서, 1998년에 동해안에 있는 소네라니붕구라는 작은 읍에 임명된 란드리아맘피아니나 니아이나와 그의 아내 베로니아이나는 그러한 개인적 관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기거한 집의 여자 주인에게는 소아마비로 불구가 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시간을 내어 이 소년에게 하느님의 신세계에서의 생활에 관한 성서의 귀중한 약속을 들려 주었습니다. 젊은이는 기꺼이 니아이나와 베로니아이나와 함께 성서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이를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심지어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자기 아들에게 그와 연구할 시간이 없다고 이야기해 달라고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와 그분의 길에 대한 이 젊은이의 사랑은 속속 자라갔습니다. 8개월 만에 그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이 파이오니아들은 그 집에서 나가 달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이 젊은이에게 나타낸 개인적 관심은 이제 끝이 났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휠체어는 형편없는 모양이 되다 못해 이제는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그를 위해 새 휠체어가 도착해 있었지만, 그가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그가 종교를 바꾸었기 때문에 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회중의 형제들이 이 신체 장애인 형제를 도와 집회에 다니게 하였습니다.

최근에 협회는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를 보내 더 많은 사람들이 왕국 소식으로부터 유익을 받을 기회를 얻게 하고 있습니다. 1997년 11월에 두 형제가 전도인 한 명밖에 살지 않는 작은 읍 마아디트라에 파견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다음해 10월에는 전도인 14명의 회중이 설립되었습니다. 그 두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는 그곳에서 더 이상 임시가 아니라 영구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1996년 6월에는 다른 두 형제가 개척되지 않은 구역인 작은 읍 마아수베에 들어갔습니다. 예정대로 3개월 후에 그들은 그 구역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머물러 달라고 주민들이 간청하였던 것입니다. 6개월 후 격지 집단이 설립되고, 3개월이 더 지나서는 그 집단이 전도인 다섯 명에 정규 파이오니아가 두 명인 회중이 되었습니다. 원래의 그 두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는 아직도 그 회중과 함께 있으면서 회중을 잘 돌보고 있습니다. 임명되지 않은 구역 수십 군데에서 그와 비슷한 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선교인들이 속속 들어오다

마다가스카르는 열매가 풍성한 밭입니다. 2만 건이 넘는 가정 성서 연구가 사회되고 있어, 전도인 당 두 건이 넘습니다. 독일에 있는 길르앗 분교로부터 1993년에 여섯 명의 선교인이 마다가스카르에 파견되어 활동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다가스카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서 동해안에 있는 토아마시나에 선교인 집을 개설하였습니다. 세이셸에서 봉사하던 경험 많은 선교인들인 다니엘 크미타와 엘렌 크미타 부부도 ‘붉은 큰 섬’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캐나다의 프랑스어권 지역에서 정규 파이오니아 부부 다섯 쌍도 이곳에서 봉사할 것을 자원하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 파라과이에서 봉사해 온 프랑스 선교인 이방 테시에는 지부 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왔습니다. 지부 건축 기간에 국제 건축의 종으로 마다가스카르에 와 있었던 단테 보네티와 크리스티나 보네티 부부도 선교인으로 다시 오도록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들 새로 온 사람들은 이 나라 전도인들에게 파이오니아의 영을 고취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말라가시어를 유창하게 배워, 말라가시어 회중들에서 순회 감독자로 일하는 자격을 갖추기도 하였습니다.

회중들을 격려하기 위한 여행

순회 활동이 이곳에서 1963년에 시작되던 때에는 전국에서 순회 감독자가 방문할 회중이 세 군데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17명의 여행하는 감독자가 253개 회중과 집단을 섬기고 있습니다. 시골 지역을 여행하는 일은 아직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기에는 여러 곳에서 흙탕길이 끊겨 순회 감독자는 먼 거리를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떤 회중들은 찾아가는 데 질척거리는 길을 여러 날—그것도 가는 데만—걸어야만 하기도 합니다. (비교 고린도 둘째 11:23-27) 때로는 한 회중의 형제들이 순회 감독자를 수행하여 다음 회중으로 짐을 날라다 주기도 합니다. 강을 건널 때는 종종 다리가 없어서 그들은 젖지 않게 모든 것을 비닐 봉지에 싸서 머리에 이고 갑니다. 우기에는 강물이 겨드랑이까지 차오르기도 합니다.

가진 것은 별로 없지만 이 나라 형제들은 매우 후대를 잘하여, 여행하는 감독자와 그의 아내를 맞이하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서로 격려를 주고받게 됩니다. 최선을 다해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고자 애쓰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흐뭇한 일입니다! (로마 1:11, 12) 그리고 여호와께 소중한 사랑스러운 이들의 믿음을 강화하는 일은 참으로 큰 특권입니다!

사이클론이 닥쳤을 때

지구상의 이 지역에서 생활하는 데는 사이클론 즉 일종의 태풍에 대처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매년 사이클론이 인도양의 섬들에 닥치는 계절이 있습니다. 지부에서는 일기 예보에 면밀히 따라, 피해 지역에 사는 형제들을 도울 준비를 합니다. 1997년에도 여러 차례 사이클론이 마다가스카르에 닥쳤는데, 그 가운데 악명 높은 그레텔호는 동남부 해안을 휩쓸었습니다. 큰 읍 두 곳과 여러 마을이 황폐되었습니다. 약 100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피해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지부에서는 신속히 작은 트럭과 사륜 구동차에 구호품과 함께 건축 연장 및 자재를 실어 보냈습니다. 구호 팀과 함께 의사 한 명도 갔습니다. 자동차로 접근할 수 없는 일부 지역에 이르기 위해서 구호 팀은 작은 배도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인 반가인드라나에 도착하는 데는 이틀이 걸렸습니다. 구호 활동은 즉시 시작되었습니다. 식품과 수용 시설이 제공되었습니다. 의사는 증인 가족들을 일일이 검진하고 필요한 약을 주었습니다. 증인이 아닌 가족들도 혜택을 받았습니다. 복구 요원 대부분이 돌아갈 때, 두 사람은 한 달가량 뒤에 남아 형제들의 가옥을 재건하였습니다. 지부 사무실에서는 협회가 제공한 도움에 대한 감사 편지를 많이 받았습니다. 증인이 아닌 일부 사람들도 “여러분의 종교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교입니다!”라고 단언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계속 자라게 하시다

선교인들과 마다가스카르에서 선교인을 통해 제자가 된 사람들은 왕국 진리의 씨를 심고 물을 주었습니다. 마다가스카르로부터 최초의 보고는 1933년에 로버트 니즈벗과 버트 맥루키가 보냈습니다. 22년 후에 활동이 재개되어 1956 봉사 연도에는 전도인 최고 수가 8명이었습니다. 1970년에 선교인들이 추방될 당시에는 이 나라에 469명의 왕국 선포자가 있었습니다. 선교인들은 더 이상 그전처럼 도움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계속 자라게 하셨습니다.”—고린도 첫째 3:6.

그전에 마다가스카르에서 봉사하다가 나중에 돌아올 기회가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들과 성서 진리를 연구했던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열매를 맺고 있다는 증거를 보았습니다. 한 예로, 이렌 카르보노와 연구할 때 15세였던 라마니트라 엘렌은 소아마비에 걸려 제대로 걷지도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제약에다 가족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렌은 좋은 소식의 전도인이 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카르보노 부부가 고향인 캐나다로 돌아간 후에도, 엘렌은 계속 진보하고 있었습니다. 1995년에 이렌이 잠시 방문하기 위해서 왔을 때, 엘렌은 “아버지를 빼놓고는 가족 모두가 진리를 받아들였어요!” 하고 외쳤습니다.

여호와의 축복으로 1980년에 와서는 마다가스카르에서 그 작은 자가 천이 되어 하느님의 왕국 선포자 최고 수가 1021명이었습니다. (이사야 60:22) 1993년에 전도인 최고 수는 5000명 선을 넘어섰고, 1999년에는 1만 300명이 넘는 주목할 만한 사상 최고 신기록에 달하였습니다.

미래는 어떠한가?

마다가스카르에는 왕국 전파 활동을 위한 밝은 미래가 앞에 놓여 있습니다. 1956년에 이 섬에서 거행된 사상 최초의 기념식에는 일곱 사람이 참석하였습니다. 그 참석자 수는 계속 증가하여 드디어 1999년에는 사상 최고 신기록인 4만 6392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같은 달 이 섬 방방곡곡에는 1만 346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실로, 이 가장 중요한 행사에 전도인당 평균 세 명의 관심자를 동반한 것입니다!

이 ‘붉은 큰 섬’은 여호와와 이웃에 대한 사랑에 이끌려 다른 사람에게 성서 진리를 전하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계속 낙원이 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여호와에 관하여 더 알고 싶어하는 수만 명의 겸손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탁월하지도 않으며 물질적으로 부유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식사는 대개 그저 밥에다 약간의 고기와 채소 몇 가지뿐입니다.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는 전기도 수도도 없이 살아갑니다. 시골 마을에서는 버터나 치즈는 말할 것도 없고 빵도 항상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랑스러운 우리의 형제 자매들은 그 날의 양식을 주신 데 대하여 여호와께 감사하면서 단순한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는 몸에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왕국과 하느님의 의를 계속 첫째로 구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마태 6:31-33) 그들은 우주 주권자이신 여호와를 섬기는 특권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시편 필자와 함께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왕이 되셨다! 땅은 기뻐하고 여러 섬들은 즐거워하여라.”—시 97:1.

말라가시의 한 격언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카멜레온처럼 되어 한 눈은 과거에, 다른 눈은 미래에 고정시키라.” 이전 경험으로부터 배우기 위하여 한 눈을 과거에 고정시키는 것은 현명합니다. 그러나 과거로 되돌아가 살려고 한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열려져 있는 것은 미래입니다. 가장 좋은 때는 앞에 놓여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앞에 생명—영원한 생명—을, 진실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계적인 낙원에 마련해 두셨습니다. 마다가스카르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의 눈을 결연히 그 목표에 고정시키고 있습니다.

[224면 전면 삽화]

[230면 삽화]

(1) 라베아시 노엘, (2) 로버트 니즈벗, (3) 버트 맥루키, (4) 아담 리시아크, (5) 에두아르 마를로, (6) 나르시스 마를로

[233면 삽화]

라이모 쿠오카넨과 베라 쿠오카넨 부부

[235면 삽화]

안드리무아라 페일릭스, 최초의 이 나라 출신 특별 파이오니아 중 한 사람

[236면 삽화]

모든 일을 손으로 하였다

[237면 삽화]

라수말라라 루이즈, 오래 된 번역자

[245면 삽화]

안드리아마시 테이오도르가 새로 온 선교인들에게 말라가시어를 가르치고 있다

[251면 삽화]

완공된 지부 복합 건물과 지부 위원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엘레아, 라이모 쿠오카넨, 디라일랄 바그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