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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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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 제국은 그 절정기에 전세계에 뻗쳐 있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1837-1901년)에는 그 영역에서 “결코 해가 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는 그 거대한 제국이 영연방으로 대치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영연방은 얼마나 광범위합니까? 영연방은 지구 육지 표면의 4분의 1을 차지하며,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망라합니다. 정치적으로 독립되어 있기는 하지만, 영연방 53개 회원국은 영국 여왕을 그들의 문화적·경제적 연합의 상징적 수장으로 인정합니다.

지난 50년 동안, 이 나라들과 그 외의 나라들에서 온 이민들이 영국 자체를 변모시켜 왔습니다. 이 나라는 이제 인구 약 5800만의 다민족 국제화 사회가 되었습니다.

다민족, 다종교

1948년 6월 22일, 군수송선을 개조한 엠파이어 윈드러시호가 런던에서 가까운 틸버리에 정박하자 492명의 자메이카인들이 부두에 발을 내디뎠고, 이로써 25만 명에 달하는 카리브인의 이민이 시작되었습니다. 낙천적이고 활달한 이들 서인도 제도 사람들은 성서에 대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중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많은 영국 사람들이 더 이상 하느님에 대한 깊은 믿음을 실천하고 있지 않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무엇이 그러한 변화를 가져왔습니까? 사람들은 종교가 두 번의 세계 대전에서 무모한 살육에 관여하는 것을 보고서 염증을 느꼈습니다. 더구나, 성서에 대한 믿음은, 과학과 종교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비평가들에 의하여 심각하게 침식당하고 있었습니다.

1960년대 이래,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좀더 근년에는 방글라데시로부터 사람들이 영국 땅으로 쇄도하였습니다. 1970년대는 동아프리카에 살던 많은 아시아인들이 이곳에서 안식처를 찾은 시기였습니다. 영연방 밖으로부터도, 그리스계 및 터키계 키프로스 사람들이 도착하였고,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56년에 헝가리에서 일어난 혁명에 뒤이어, 2만 명의 난민이 그 나라로부터 영국으로 피난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베트남, 쿠르드족, 중국, 에리트리아, 이라크, 이란, 브라질, 콜롬비아 그리고 여타 나라의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하였습니다. 1990년대 중반쯤에는, 영국의 주민 100명 가운데 6명이 소수 민족 집단에 속하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가장 두드러진 곳이 바로 영국의 수도 런던입니다. 방문객들이 거리를 걷거나, 이층 버스를 타고 가거나, 지하철을 타 보면 이 도시의 주민이 다인종으로 혼합되어 있음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실로 런던 인구의 거의 4분의 1이 해외에서 왔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을 반영하여, 지금 각 학교에서는 아동들에게 다양한 종교적 성향—이를테면 그리스도교·이슬람교·힌두교—에 맞추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이 특별히 종교적인 나라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역사상 현시점에서 영국인의 대다수는 주로 세속적·물질주의적 인생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영국에는 12만 6000명이 넘는 여호와의 증인이 있습니다. 그들 역시 다양한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느님—이름 없는 신이 아니라 여호와를 굳게 믿습니다. 그분은 모든 민족적 배경의 사람들이 그분의 길을 걷고 그분의 사랑에 찬 교훈을 적용함으로써 유익을 받도록 따뜻하게 권하시는 분입니다. (탈출 34:6; 이사야 48:17, 18; 사도 10:34, 35; 계시 7:9, 10) 여호와의 증인은 성서가 하느님의 영감받은 말씀임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의 마련에 깊은 믿음을 두고 있습니다. 장래에 대한 그들의 희망은 하느님의 왕국에, 그리고 하느님의 목적은 이 땅이 낙원이 되는 것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에 그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창세 1:28; 2:8, 9; 마태 6:10; 누가 23:43) 그들은 이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열심히 선포합니다. 그들의 열망은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좋은 소식을 위하여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고린도 첫째 9:23; 마태 24:14.

세계의 이 지역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다

19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영국은 한창 도시화 과정을 겪고 있었습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웨일스에서 사람들은 시골 마을로부터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전통적인 장인들이, 기술이 없거나, 있어도 한정된 많은 근로자들과 뒤섞이게 되었습니다. 1870년 이후의 학교 의무 교육은 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이 쉽게 보급되는 시대를 예고하였습니다.

1881년에 J. C. 선덜린과 J. J. 벤더—당시 워치 타워 협회의 활동을 인도하고 있던 찰스 T. 러셀의 가까운 두 동료—가 미국으로부터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소식은 수많은 영국 사람들의 삶을 개선해 왔습니다. 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에서, 또 한 사람은 잉글랜드에서 시작해서, 마음에 생기를 주는 출판물 「생각 있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양식」을 배부하였습니다. 런던에서, 전철원(轉轍員)인 톰 하트가 어느 이른 아침 퇴근하다가 그 소책자를 받았습니다. 그는 읽은 내용에 관심이 생겨,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하여 많은 토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톰은 자기가 배운 내용에 감동되어 새로 발견한 지식을 아내와 직장 동료들에게 열정적으로 알려 주었습니다. 머지않아 ‘성경 연구생’으로 알려지게 된 이 작은 집단은 그 지역을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와 비슷한 집단들이 영국 전역에 걸쳐 다른 도시들에서도 속속 생겨났습니다. 그들 모두는 성서 진리를 전하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1891년 C. T. 러셀이 직접 영국을 처음 방문하였을 때, 성서의 소식에 대한 관심으로 런던에서 약 150명, 그리고 리버풀에서 비슷한 수의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여 “나의 백성들아, 그에게서 나오너라.”—다시 말해서, 고대 바빌론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종교들에서 나오라—는 강연에 참석하였습니다. (계시 18:4, 제임스 왕역) “영국과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이미 익어서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 밭입니다”라고 러셀 형제는 보고하였습니다.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활동은 성과가 있었으며, 새로운 세기로 접어들 무렵에는 작은 그리스도인 회중 열 개가 형성되었습니다. 영적 양식을 성서 출판물 형태로 좀더 쉽게 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워치 타워 협회는 런던에 사무소를 개설하였습니다.

첫 번째 지부 사무실

1900년, C. T. 러셀의 가까운 동료 중 또 한 사람인 E. C. 헤닝스가 영국 북서쪽에 있는 리버풀 항에 도착하여, 서적 보관소로 사용할 임대 건물을 물색하기 위해 런던으로 여행을 하였습니다. 4월 23일, 그는 남부 런던의 포리스트 게이트, 집시 레인 131번지에 있는 건물을 확보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첫 번째 지부 사무실이 운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은 전세계 주요 지역에 100개가 넘는 그러한 지부 사무실이 있습니다.

1914년 6월 30일, 영국에서 여호와의 조직을 위한 새로운 법적인 종—만국 성경 연구생—이 런던에서 법인체로 발족하였습니다. 그 당시 영국 지부에서는 아일랜드를 포함하여 영국 제도 전체에 대한 왕국 활동을 관장하였습니다. 그러나 1966년 이후에는 아일랜드 전체가 처음엔 더블린에, 지금은 그 남쪽에 소재하는 별도의 지부의 감독을 받고 있습니다.

국제적인 추진 운동

영국에서 형제들의 관심사는 영국이라는 밭에 한정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끝이 오기 전에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이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에 전파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태 24:14) 1920년대와 1930년대 초에, 영국에서 많은 형제들은 다른 나라에 가서 선교 활동에 종사함으로써 자신의 전파의 밭을 확장하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추진 운동이었으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자기 희생 정신을 축복하셨습니다.

1926년, 에드윈 스키너는 인도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영국 북부의 셰필드를 떠났습니다. 그는 겸손하여 1990년에 사망하기까지 64년 동안 임지에서 꾸준히 일하였습니다. 기억에 남아 있는 다정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윌리엄 데이는 세무 조사관으로 상당한 부자였는데, 자신의 지위와 연금을 포기하고서, 덴마크, 코펜하겐에 자리잡은 신설된 협회의 북유럽 사무소의 지부 감독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머지않아, 프레드 게이블러가 데이의 초청을 받아들여 리투아니아로 여행하여 그곳에서 퍼시 던험과 합류하였는데, 던험은 나중에 라트비아로 가서 봉사를 계속하였습니다. 월리스 백스터는 에스토니아에서 활동을 감독하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클로드 굿맨, 론 티핀, 랜들 호플리, 제럴드 개라드, 클래런스 테일러와 그 외 다수의 영국 출신들이 아시아에서 활동을 개척하였습니다. 역시 스코틀랜드 사람인 조지 필립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초기에는 남아프리카 연방)에서 여러 해 봉사하였습니다. 로버트 니즈벗과 조지 니즈벗 역시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습니다.

불굴의 신념으로 대륙에 가서 지원하다

1930년대에, 영국의 많은 파이오니아들은 벨기에,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좋은 소식의 전파를 지원하라는 부름에 응하였습니다. 존 쿡과 에릭 쿡도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아서 크리진과 애니 크리진 부부는 프랑스 남부에 회중이 없던 곳에서 활동하던 때를 회고합니다. 한번은, 대단한 열정과 후대를 나타내는 폴란드 형제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애니는 그 형제들을 알비 읍의 르 그랑 토텔 드 뢰로프 호텔에 있는 자기들 숙소로 초대하던 때를 기억합니다. “그 건물이 나폴레옹 시대에는 으리으리했겠지만,” 그 영광은 이미 시들어 버렸다고 나중에 썼습니다. 애니는 이렇게 이어 갑니다. “그 일행이 일요일 오후에 도착해서, 우리는 멋진 「파수대」 연구를 했습니다. 다섯 가지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각각 자기 나라 말로 된 잡지를 가지고 했는데, 공통되는 의사 소통 수단은 ‘엉터리 프랑스어’였습니다. 우리는 번갈아 가며 자신의 잡지를 보고서 항들을 읽고는, 읽은 내용을 서투른 프랑스 말로 설명했습니다. 그래도 그때 우리 모두는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유감스럽게도, 외국에서 봉사하면서 그처럼 행복하던 시기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존 쿡은 당시 프랑스 남부에서 가능한 한 오래 머물렀습니다. 결국 그는 독일 탱크가 밀려 들어오기 직전에 자전거를 타고 빠져 나가 영국으로 철수해야 하였습니다.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영국과 독일 간의 무력 충돌로 이어졌고, 그리하여 영국이나 다른 나라에 있던 여호와의 증인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나라들이 서로 간에 전면전으로 돌입하자, 여호와의 증인은 중립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확고한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증인들은 개인의 생활에서 하느님에 대한 순종이 우선 순위를 차지해야 함을 명백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5:29) 그들은 하느님의 왕국이 오기를 진심으로 기도하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통치자의 정체에 대해 말씀하신 바를 알고 있었으므로, 세상 파벌 간의 무력 충돌에서 이편이나 저편을 선호하는 일은 잘못된 일임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마태 6:10; 요한 14:30; 17:14) 여호와의 증인들은 개인적으로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않’을 것에 대해 성서가 알려 주는 바를 마음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이사야 2:2-4) 처음에는, 그들 중 일부가 영국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서 군복무를 면제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판사들이나 보도 매체에서 사람들이 입대를 피하기 위해서 증인이 된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약 4300명이 투옥되었습니다. 이 수에는 군사 활동을 지원하는 일을 거부한 자매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전 후 증인들은 그들을 움직이는 힘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왕국을 인류의 유일한 희망으로 광고하고자 하는 열망이라는 것을 계속 실증해 나갔습니다. (그 초창기에 영국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수행한 활동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1973 연감」(영어)에서 찾아볼 수 있음.)

잉글랜드에서 두 개 언어로 열린 대회

여러 해에 걸쳐서 대회는 여호와의 백성의 생활 가운데 중요한 행사가 되어 왔습니다. 한번은, 워치 타워 협회 회장이 행한 대회의 주요 연설들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런던의 대회장으로부터 여러 나라로 중계되었습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50개국이 넘는 외국으로부터 대표자들이 런던의 대회장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프로그램은 모두가 영어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태가 1971년에 바뀌었습니다.

그 해 런던의 트위크넘에서 열릴 “하나님의 이름” 지역 대회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유럽 대륙에서는 증인들이 같은 주제로 열리는 대회들에 참석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에서는 왕국 활동이 당시까지만 해도 금지령 아래 있었지만, 수천 명이 스페인을 경유해서 프랑스의 툴루즈로 여행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들의 영은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스페인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였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콜레라 예방 접종을 한 사람들만 그 나라를 통과하여 여행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포르투갈로부터 그 대회에 참석하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맞을 백신이 부족하였습니다. 의사(擬似) 콜레라 환자가 바로 툴루즈 현지에서 발견되자, 그 정부 당국은 강경한 입국 허가 취소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제 포르투갈 형제들은 어떻게 해야 하였습니까? 한 형제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하간에 런던이 있지 않습니까.”

트위크넘 대회 감독자인 W. J. (빌) 불은 차분하고 친절한 태도로 잘 알려진 형제인데, 그는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약 팔구백 명이 영국에 왔는데, 112명은 비행기로, 나머지는 버스로 도착했습니다. 이들이 밀어닥치는 데 우리는 준비할 시간이 1주일도 없었습니다. 형제들이 도버로 나가 연락선편으로 도착하는 포르투갈 대표단을 맞아들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영어를 거의 또는 전혀 못했습니다.” 그들 모두를 위해 숙소를 구해 놓았는데, 주로 런던 형제들의 집이었습니다. 식당용 대형 천막 하나를 개조해서 포르투갈어 회기 장소로 쓸 만하게 만들었으며, 포르투갈 형제들은 영국 형제들과 유쾌하게 어울려서 “여호와께서는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축복하신다” 그리고 “여호와의 목적을 자신의 생활 방식으로 삼으라” 같은 대회 드라마를 보고, 또 다른 프로들을 들었습니다. 「미들섹스 크로니클」이라는 지방 신문은 1971년 8월 13일자에서, “그들이 도착함으로써 이번 대회가 이 나라 사상 최초의 2개국어 증인 대회가 되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포르투갈 형제들은 그 나라에서의 왕국 활동의 진전 상황을 기쁘게 보고하였으며, 그 다음 포르투갈에서 활동을 감독하는 한 형제는 대회 청중에게 영국 형제들의 후대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여러분의 시간, 여러분의 집, 여러분의 관심, 여러분의 친절, 이 거대한 도시에서 여러분의 자상한 보살핌,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사랑을 주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틀림없이 런던은 언제까지나 가장 유쾌한 추억을 상기시킬 것입니다.” 포르투갈 형제들이 감사하는 마음을 노래로 표현하자, 청중석 어디에서나 눈시울을 적시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표현으로 인해 참석한 모두가 그처럼 감동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을 여호와의 사랑의 가족으로 인도하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에게 관심이 필요한 것은 대회 때만이 아니었습니다. 영국으로 들어오는 이민의 수가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좋은 소식의 전파와 관련하여 도전이 제기되었습니다. 어떻게 할 것입니까?

영어를 하는 전도인들은 다른 나라로부터 와서 자국어밖에 못하는 사람들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가능한 경우, 증인들은 집주인에게 자국어로 읽을 수 있는 것을 제공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의사 소통이 문제였습니다. 그렇긴 해도, 외국에서 온 사람들 가운데는 여호와의 증인도 더러 있어서, 언어의 간격을 메우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1960년대에, 키프로스에서 온 그리스계 증인들은 영국에 사는 그리스어를 하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진리를 전하였습니다. 이탈리아인 증인들은 런던으로 이주해 온 그들의 동포들에게 성서 진리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카라는 젊은 독일 증인은 1968년 봄에 ‘오페어’ 즉 기거하면서 그 가정의 언어를 배울 기회를 얻는 대가로 집안일을 해 주는 젊은 여자로 일하려고 영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해에 “모든 민족을 위한 좋은 소식” 지역 대회에 참석한 후, 그 자매는 열정적으로 야외 봉사 참여를 증가시키려고 새로 발표된 책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를 근처에 사는 다른 오페어 아가씨들에게 제공하였습니다. 그 결과 네 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학생들 중 한 사람은 스위스 여자여서, 프란치스카는 그 여자와 독일어로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회중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면서 여호와의 집안에서 사랑을 직접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요한 13:35) 그 다음해, 이 관심자 아가씨는 매우 훌륭하게 진보하여 여호와께 헌신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나중에 파이오니아가 되었고, 자기 어머니도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프란치스카가 오페어 아가씨들에게 증거하고자 하는 노력의 시작에 불과하였습니다.

프란치스카는 열정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호별 방문을 하다가 오페어 아가씨를 만날 때면 언제나, 나도 한때 오페어 아가씨였다고 말해 준답니다. 그 즉시 우리 사이엔 유대가 형성되지요. 내가 항상 강조하는 것은, 내가 영국에 왔을 때는 한 자매 외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죠. 그런데도 회중에서 환영받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래서 나는 언제나 그들이 속히 회중과 어울려서 우리가 하나의 커다란 가족이란 걸 느낄 수 있게 만들려고 애를 쓴답니다.”

1974년에 프란치스카는 필립 해리스와 결혼하였으며, 지금은 함께 런던 베델에서 일하면서 노스우드 회중과 함께 봉사합니다. 프란치스카는 그 구역에 있는 한 집을 13년이 넘도록 방문하고 있습니다. 사연은 이러합니다. “한 프랑스 오페어 아가씨로부터 증인이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가 베델에 왔더군요. 프랑스에서 증인들이 그에게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을 주었는데, 그는 더 알아보기를 원하였던 거죠. 영어는 아직 서툴렀지만, 나탈리가 진리를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진보가 빨랐고 곧 집회에 참석했지요.” 프랑스로 돌아가기 전에 나탈리는 왕국 전도인이 되었고, 지금은 남편과 함께 그곳의 아랍어 밭에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 오페어 아가씨들을 고용한 그 가정에는 한 가지 관례가 있었습니다. 한 오페어 아가씨가 떠나기 전에, 다음 사람이 도착하곤 하였습니다. 며칠 동안은, 선임 오페어 아가씨가 후임자에게 그 집에서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탈리가 떠날 무렵, 프란치스카는 이렇게 권하였습니다. “자매가 프랑스로 돌아가기 전에, 다음 번 오페어 아가씨에게 성서 연구가 자매에게 어떻게 참으로 도움이 되었는지 말해 주고, 그가 관심을 나타내는지 살펴봐 줘요.” 다음 번 오페어 아가씨 이사벨도 역시 프랑스에서 왔는데, 그 역시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프란치스카는 그 여자와도 연구를 하였습니다. 이사벨의 뒤를 또 한 사람의 나탈리가 따랐고, 머지않아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에 돌아가서는 이사벨 역시 침례를 받았습니다.

다른 아가씨 가브리엘라는 폴란드에서 왔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과 의미 있는 접촉을 해 본 적이 없었고, 독일이 폴란드에서 악명을 떨쳤기 때문에 독일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프란치스카에게 말하였습니다. 프란치스카는 여호와의 증인은 결코 전쟁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추리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여호와의 증인 가운데 아무도 군복무하는 것을 보지 못했을 거예요. 우리가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나요? 우리는 히틀러 만세를 외치고 나치 정권을 지지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답니다.” 가브리엘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그의 반독일 감정은 사라졌습니다. 프란치스카와 정기적으로 성서 연구를 한 다음 가브리엘라는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이 되었고, 나중에는 트위크넘에서 열린 대회에서 여호와에 대한 헌신을 표상하였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서 프란치스카는 10개국에서 온 25명의 오페어 아가씨들과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으며, 그들을 여호와의 사랑의 가족으로 인도하는 즐거움을 누려 왔습니다.

모국어로 열리는 집회들

물론, 모든 사람이 영어로 성서 연구를 하거나 자신에게 외국어일 수도 있는 언어로 진행되는 집회에 참석함으로써 진리 안에서 급속히 진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었습니까?

키프로스 출신의 그리스어계 증인들이 영국에 온 그들의 동포 가운데서 관심자들을 발견하기 시작하자, 런던에서는 일부 집회를 그리스어로 여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1966년경 그들은 자국어로 갖는 정기적인 회중 서적 연구로부터 유익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월 1회 공개 강연이 더 생기게 되었습니다. 1967년에는 런던에서 첫 그리스어 회중이 형성되었고, 그와 다른 그리스어 집단이 버밍엄에서 집회를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1967년에 런던의 이즐링턴 왕국회관에서 공개 강연과 「파수대」연구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곳에서도 이탈리아어 집회들이 더 생겨났습니다. 일이 어떻게 진전되었는지 한 가지 실례가 있습니다. 비라 (비) 영은 런던 북부의 엔필드에서 한 이탈리아 부인과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인식이 자라 가면서, 그 여자는 “내 친구들 몇 사람을 위한 이탈리아어 모임 같은 것이 없다는 게 유감이로군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비의 남편 제프는 한 순회 감독자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이탈리아에서 파이오니아로 일한 바 있는 그리스어권 형제를 찾아냈습니다. 제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영어로 연설을 하면, 그 그리스 형제는 이탈리아어로 통역을 했습니다.” 약 30명이 참석하였고, 그들 중 일부는 영적으로 잘 발전하였습니다. 때가 되자, 이탈리아어계 증인들은 회중을 형성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평균 5년마다 새로운 이탈리아어 회중이 하나씩 생겨났습니다.

증가는 그리스어 밭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1975년에는 그들이 대회를 즐길 마련이 생겼습니다. 그 당시 제프 영과 비 영 부부는 40대 후반의 파이오니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두 자녀는 성장하여 둘 다 “주 안에서” 결혼하였습니다. (고린도 첫째 7:39) 제프와 비는 더 이상 돌볼 노부모가 없었으므로, 다른 봉사의 특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제프는 영국에 거주하는 모든 그리스어권 형제들을 위한 대회를 조직하라는 임명을 받았습니다. 제프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대회 장소에 도착해 보니까, 내 낯선 눈으로 보기에는 무슨 내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보수적인 영국인의 눈에는 원기 왕성한 그리스인들이 그렇게 비추어졌을 것입니다. 그 그리스 형제들은 일을 가장 잘하는 방법을 두고 단지 서로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400명 이상이 그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다른 언어 집단도 생겨났습니다. 1975년에는 스페인어 회중이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런던에서 첫 구자라트어 공개 강연은 1977년에 행해졌습니다. 2년 후에는 작은 구자라트어 대회가 열렸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펀자브어 순회 대회가 열려 250명가량이 참석하였습니다.

“훌륭한 집단의 사람들”

초창기에는 큰 대회들이 종종 런던에서 열렸습니다. 1960년경에 와서는 연례 대회들이 전국에 걸쳐 크고 작은 여러 도시에서 열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해에는 단지 네 곳뿐이었고, 다른 해에는 작은 시설들을 이용해서 대회의 수가 17개까지 달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 축구 경기장과 강당, 그리고 한 번은 실내 스케이트장도 빌렸습니다. 1975년에는 웨일스의 카디프 암스 파크 경기장에서 대회 개최를 추진하기도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훌륭한 평판이 영국 대부분의 지역에 잘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운동 경기장 책임자로서 그처럼 큰 증인의 모임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관리들로서는 시설을 증인들에게 빌려 주는 일이 처음에는 매우 조심스러울 수 있습니다. 카디프 암스 파크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웨일스에서 럭비 동맹 이사회측과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전(全)영국 럭비 동맹 이사장인 웨이크필드 경은 우리 형제들에게 카디프의 이사회 모임에서 협상이 난항을 겪게 될 경우, 그 이사들에게 이사장과 통화해 줄 것을 요청해 보라고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한 지원을 받고서 형제들이 얼마나 감사하였겠습니까! 협상이 한계점에 이르렀을 때, 웨이크필드 경에게 건 한 번의 통화가 그 난관을 타개하는 데 주효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1955년 이래 런던의 트위크넘에서 대회를 개최해 왔는데, 웨이크필드 경은 증인들이 여름마다 트위크넘 시설을 사용하게 한 일을 자기 자신이나 이사진이 얼마나 높이 평가해 오고 있는지를 웨일스에 있는 그의 동료들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들이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음을 확신시키고 나서는 “증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집단의 사람들입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협상은 속히 마무리되었고, 그 후 여러 해 동안 증인들은 카디프 암스 파크를 웨일스 지방의 대회장으로 정기적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자체 대회 회관들

연례 대규모 대회에 더하여, 우리는 연중 작은 대회도 개최합니다. 1969년에 영국에서 왕국 선포자들의 수는 5만 5876명이었으나, 4년도 못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은 6만 5348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때까지는 우리의 순회 대회를 열기 위하여 집회 장소를 빌려 왔었지만, 적당한 가격으로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우리에게 자체 대회 회관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책임 있는 형제들의 모임이 열리고,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는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기존 건물을 개축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1975년 초에 그들은 잉글랜드 북부, 맨체스터에 있는 빈 영화관의 매입을 협상하였습니다. 여러 달에 걸쳐 개축한 다음, 8월 31일에 영국 최초의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 회관이 봉헌되었습니다. 그 회관은 9월에 시작되는 새로운 순회 대회 프로그램에 맞추어 적시에 준비되었습니다.

이보다 앞서 2년 전에, 이 나라의 남동 지방에서 대회 감독자들은 런던에 대회 회관을 구하는 문제를 고려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위원회의 한 성원으로서, 적합한 건물을 물색하는 일에 임명된 데니스 케이브는 그때 모인 형제들이 하나가 아니라 둘을—하나는 템스 강 북쪽에, 또 하나는 강 남쪽에—물색하기로, 그것도 그 지역의 비싼 부동산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기로 만장일치로 합의하였을 때 자신이 놀라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런던에서 남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도킹 읍에 사용하지 않는 영화관이 가능성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리나 부동산 투기업자들이 개입하여 그 건물에 대해 높은 가격을 제시하였습니다. 처음에 낙심해 있던 데니스에게 그 읍의 행정 책임자가 전화를 걸어, 그와 다른 증인 한 사람이 한 회의에 참석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건물을 숭배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건축 규제를 푸는 데 더하여, 당국에서 그 영화관을 매입한 다음 그것을 형제들에게 무기한 임대로 제공하면서 3년마다 계약을 갱신하기로 동의한 것입니다.

그 회관은 10년이 넘도록 활용되다가, 마침내 읍에서 그 건물의 용도를 변경하였습니다. 그 회관을 대치하기 위해서, 형제들은 런던의 개트윅 공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 28에이커의 용지를 구했습니다. 그곳에는 하나의 훌륭한 대회 회관 구조물로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 새 건물에 몇 개의 좁은 시골 도로를 통해 진입하는 문제를 두고 그 고장에서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이해할 만하게도, 인근 주민들은 자신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가능한 한 방해받지 않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증인들이 대회 회관으로 진입할 때 주의 깊이 지정된 통행로와 속도를 따르라는 지시를 존중할 것입니까? 그 지역 건축 기획 위원회에 관한 한 뉴스 보도는 이러하였습니다. “그 위원회가 생각하기로 정상적인 경우로는 그러한 조건을 이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은 달랐습니다.” 그 위원회의 위원장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다른 많은 단체나 조직들도 그 성원들이 그렇게 순응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조직은 실제로 그렇게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헤이스브리지에 있는 이 새로운 ‘서리 대회 회관’은 1986년 5월 17, 18일에, 그러니까 용지를 구입한지 정확히 1년 후에 한 순회 대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문을 열었습니다.

1975년의 ‘도킹 대회 회관’ 공사와 동시에, 런던 북부의 증인들은 뉴사우스게이트에 있는 리츠 영화관 자리를 개수하였습니다. 1930년대 중반의 이 건물은 1974년 봄에 영화관 문을 닫았던 것입니다. 그 건물은 잠시 유대교 회당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증인들이 구입할 당시 그 건물은 “극심한 파손 상태”에 있었다고, 건축가 로저 딕슨은 말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 구조물은 기본적으로는 튼튼하지만 방수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헐어 빠진 상태를 감추려고 회당 내부는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개축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아득해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2000명의 숙련 내지 반숙련된 자원 봉사자들이 그 일을 단지 4개월 반 만에 해냈습니다.

그와 같은 시기에, 웨스트미들랜드의 대회 회관에서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974년에 형제들이 한 영화관 자리를 더들리에 힘들여 매입했던 것입니다. 이 시설의 개축은 오래 걸렸지만, 1976년 9월에는 그 시설 역시 사용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대회 회관들의 건축

왕국 전도인의 증가는 계속되어, 1974년에 7만 1944명으로부터 1984년에는 9만 2616명이 되었습니다. 많은 전도인들이 영국 북부의 밀집된 도시 공업 지대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사우스요크셔에 대회 회관을 건축하는 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건축 공사는 1985년 9월에 시작되었고, 드디어 ‘이스트피닌 대회 회관’이라고 명명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철골 구조물로서 1642명이 앉을 수 있으며, 부속 건물로 지방 회중을 위한 350석의 왕국회관이 있습니다. 이 건물은 지붕 스팬 즉 지붕을 받치는 기둥 사이가 42미터나 되도록 설계되어, 대단히 멋집니다. 「구조 공학」지는 이 특이한 설계를 “8각형 해법”이라고 칭하였습니다. 로더럼 자치구 의회는 이 대회 회관에 최고 설계상을 수여하였습니다.

노블 바우어는 그 건축 위원회의 한 위원으로 처음부터 현장에서 일하였으며, 후에는 그 회관의 첫 번째 감독자로 봉사하였습니다. 그의 쾌활하지만 경박하지 않은 행동은 14개월의 공사 기간 일을 지원한 1만 2500명이 넘는 형제 자매들에게 격려가 되었습니다. 몹시 차가운 안개와 영하의 기온 그리고 눈이 오는 가운데 공사 진척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형제들은 공사 구역 주위에 비계 틀을 세우고 거기에 보호용 비닐 종이를 덮었습니다. 그 속으로 공업용 가열기로 더운 공기를 불어넣었습니다. 그 어느 것도 이 중대한 건축 공사를 막지 못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먼 곳에서 자원 봉사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왔습니다.

노블과 그의 아내 루이에게 가장 잊지 못할 날은 대회 회관이 여호와께 봉헌되던 때인 1986년 11월 15일로서, 그때는 통치체 성원 시어도어 재라스의 방문 중이었습니다.

대회 회관들이 잉글랜드의 북부와 중부 그리고 남동부에 생기면서, 잉글랜드 서부와 웨일스에 있는 형제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무슨 마련을 할 수 있었습니까? 1987년 10월, 적합한 대지를 브리스틀 시 북쪽의 아먼스베리에서 찾아냈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토지 이용법상의 허가를 쉽게 받지 못하였습니다. 수고를 거듭한 뒤, 드디어 1993년 2월에 최종 허가가 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건축 공사는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95년 8월 5일 이 건물 즉 영국에서 여섯 번째 대회 회관의 봉헌식 날이 도래하였을 때, 얼마나 기뻐하였겠습니까! 통치체의 존 바 형제가 ‘여호와의 지식으로 온 땅을 채움’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습니다. 참석한 모두는 그가 친절하게 상기시키는 이러한 조언에 대해 감사하였습니다. “여러분의 구역은 여호와의 발판의 단지 작은 부분을 구성한다는 점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그분은 여러분의 지역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지역에 대해서도 똑같이 관심을 가지고 계시므로, 세계적인 규모의 왕국 활동에 유념하십시오.”

바로 그 다음주, 바 형제는 런던 북쪽의 에즈웨어에 신축한 왕국회관 복합 건물의 봉헌식에서 연설하였습니다. 여기에 형제들은 특색 있는 구조물을 건축하였는데, 그것은 세 개의 왕국회관을 칸막이로 구분하여 그 칸막이를 접어 제치면 전체 공간이 하나의 대회 회관으로 트여 외국어 회중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때쯤에는 외국어 밭의 반응이 영국의 왕국 전파 활동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항상 일하기 원하였습니다”

일부 증인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는 일에는 자신의 봉사를 확장할 방도를 모색하는 일도 포함되었습니다. 칭찬할 만하게도, 영국의 많은 형제 자매들은 솔선하여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는 단계를 밟았습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열심인 많은 파이오니아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그것은 종종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해외 이주로 인해서 이들 형제 자매들은 새로운 고향에서 왕국의 열매를 산출하는 동시에 그 나라 형제들에게 격려가 되었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서 영국의 가족들은 중남미,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로 이주하였습니다.

57세의 비라 불은 두 딸이 성장하여 결혼하자 와이트 섬에 있는 집을 팔고, 런던의 일링 회중의 젊은 파이오니아 일행과 함께 콜롬비아로 갔습니다. 이 자매는 신속히 스페인어를 배우고 얼마 안 되어 18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습니다. 그는 약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곳에서 봉사하면서, 많은 영적 자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톰 쿡과 앤 쿡 부부는 두 딸 새라와 레이철을 데리고 우간다에서 이미 여러 해 동안 봉사하다가, 1974년에 그곳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해, 그들은 다시 이주하여, 이번에는 파푸아뉴기니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새라는 특별 파이오니아와 결혼하였습니다. 나중에 이 가족은 오스트레일리아로 옮겨 갔는데, 거기서 레이철은 동료 증인과 결혼하였습니다. 1991년, 톰과 앤은 솔로몬 제도에서의 새로운 임명을 받아들여, 그곳에서 톰은 지부 조정 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해외 이주 기간은 보다 제한된 기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 생활에서 얻은 경험은 무엇이든 그들에게 매우 값진 것이었습니다. 배리 러시비와 자네트 러시비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진리 안에 들어온 이후, 나는 항상 더 일하기 원하였습니다”라고 배리가 말하였습니다. 그가 파이오니아 자매인 자네트와 결혼하였을 때, 그들 두 사람은 형제들이 파푸아뉴기니에 가서 봉사하라는 「우리의 왕국 봉사」에 나온 호소에 응하였습니다. “그건 우리가 드린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라고 두 사람 다 인정하였습니다. 포트모르즈비의 지부 형제들은 그들이 그 나라의 중심부에 있는 고로카에 가서 봉사하기를 원하였지만, 배리의 취업 허가증은 부건빌 섬에서만 유효하였습니다. 정작 파푸아뉴기니에 도착해서, 당국이 이미 배리의 취업 허가를 변경하여 고로카로 임명해 놓았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배리는 학교 교사직을 맡았고, 자네트는 전도인 18명의 회중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습니다. 배리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내가 배운 것 한 가지는, 회중 집회에 참석할 시간이 되면 아무것도, 심지어 장마철의 지독한 날씨도 형제들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차가 없어서, 종종 집회 장소까지 한두 시간을 걸었고, 왕국회관에 들어설 때면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죠! 그래도 형제들은 항상 그곳에 와 있었습니다.”

배리와 자네트가 파푸아뉴기니에서 행복한 6년을 보낸 뒤, 외국인에 대한 체류 조건이 달라졌습니다. 배리는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해외 경험을 해 본 결과, 이제는 그들 두 사람이 다 전 시간 봉사를 할 때라는 결심이 섰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가서 봉사할 것입니까? 그들은 특별한 필요가 있는 곳에서 봉사하고 싶었습니다. 협회와 그리고 순회 감독자와 상의한 뒤, 그들은 링컨셔에 있는 보스턴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살 곳은 곧 찾았는데, 배리가 자네트와 파이오니아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시간제 일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국을 첫째 자리에 두면 여호와께서 도우신다는 약속을 믿고서 그들은 9월 1일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배리가 직업을 구하든 못 구하든 말입니다! 9월 1일, 그들이 외투를 걸치고 막 야외 봉사를 나가려던 참인데, 전화 벨이 울렸습니다. 우체국 직원이 묻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제 직업을 원하십니까?” 배리가 대답하였습니다. “좋습니다. 언제 시작할까요?” 그 직원이 대답하였습니다. “내일 어떻습니까?” 여호와께서 그분의 봉사를 첫째 자리에 두려는 그들의 노력을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마태 6:33) 4년 후, 또 하나의 예기치 않은 전화가 배리와 자네트에게 왔습니다. 이스트페닌 대회 회관의 관리를 맡아 달라는 임명이었습니다.

자신들을 기꺼이 바치다

봉사에 자진하는 영은 여호와의 백성의 특징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여호와께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당신의 군대의 날에 당신의 백성이 자신들을 기꺼이 바치리니, 당신에게는 ·⁠·⁠· 이슬방울 같은 청년들의 무리가 있습니다.” (시 110:3) 그처럼 자진하는 영은 참 숭배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일에 온전히 참여하고자 자신을 제공해 온 많은 영국 형제들에 의해 발휘되어 왔습니다.

노소를 막론하고 전 시간 봉사에 자신을 바쳐 오던 사람들 모두는 1977년 “즐거운 봉사자” 지역 대회에서 나온 한 가지 발표에 크게 격려받았습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웨일스 전역에 걸친 일곱 개의 대회장에서 총 11만 명의 참석자는 연사가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 마련을 발표하였을 때 기쁘게 박수하였습니다. 이 강습은 2주간의 성서 연구 과정과 함께 야외 봉사에서 이를 적용해 보는 기회도 제공합니다. 이 강습은 이미 파이오니아 봉사에 적어도 1년간 경험 있는 사람들에게 고도의 훈련을 제공합니다. 이 훈련을 받은 다음에는, 일부 파이오니아들은 거의 또는 전혀 증거되지 않은 구역을 개척하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이 강습이 영국에서는 1978년 3월에 북부 도시 리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첫 강습에 참석한 파이오니아 가운데 앤 하디는 그때 얼마나 행복하였는지 기억합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린 정말 영적으로 강화되었지요. 그 강습은 우리가 야외 봉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성에 대해 새로운 안목이 생기게 해 주었답니다.” 남편과 함께 그는 지금 베델 가족 성원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네 자녀의 어머니로서 웨일즈의 폰티프리드에서 강습에 참석한 앤드리아 빅스는 이렇게 환호합니다. “그 마련이 다가올 일들을 예고하는 것이라면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정말로 기뻐할 일을 예비하고 계신 것이고, 그래서 나는 지금 그 새로운 제도를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고대한답니다.” 약 740개 학급이 지금까지 열렸는데, 강습에 참석한 2만 명의 파이오니아들은 그 소감에 동의합니다. 강습에 참석한 후, 적지 않은 수가 파이오니아 봉사를 자신의 천직으로 삼을 결심을 하였습니다.

파이오니아 봉사에서 경험을 쌓은 뒤, 수백 명이 영국 지부에서 베델 가족 성원으로 봉사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현재 이곳 베델 가족은 393명이며, 그들 가운데 38명은 베델에서 20년 이상 봉사해 오고 있습니다.

베델 봉사자 가운데 크리스토퍼 힐이 있습니다. 그는 왜 이 봉사를 지원하였습니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1989년에 파이오니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전 시간 봉사를 하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단지 내 어머니 아버지가 파이오니아라서가 아니라는 점을 여호와와 내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진리가 내 인생의 전체이지 일부가 아니기를 원하였습니다. 나는 베델 봉사가 도전이 되는 한편 나를 그렇게 만들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게린트 왓킨도 베델 가족 성원입니다. 1980년대 초에 그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위하여 대학 교육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시간제 일을 하여 자신을 부양하였습니다. 그는 파이오니아 활동을 즐기면서 언젠가는 선교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면 왜 베델 봉사를 신청하였습니까? 1989년에 나온 「파수대」의 한 기사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기사에서 그는 미국 베델 가족 성원인 맥스 라슨의 체험담을 읽었습니다. 라슨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베델이 다가오는 지상 낙원의 이편에서는 지상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게린트는, 베델 봉사 신청서를 요청하고 나서 라슨 형제가 그 문제를 계속 여호와께 기도의 주제로 삼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게린트는 즉시 그 본을 따랐습니다. 10일 정도가 지난 뒤, 그는 영국 베델 가족 성원이 될 것을 권하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베델 봉사에서 그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얻은 경험을 사용해서 런던의 베델 가족에게 식품을 공급하는 한 농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농사일이 그가 파이오니아 활동을 하면서 자신을 부양하는 수단에 불과하였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농사일은 “여호와로부터 받은 베델 임명”으로 여깁니다.

신권적인 건축 공사에 마음이 끌린 증인들도 있었습니다. 더니즈 (테디) 맥닐은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는 한편, 남편 개리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세속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87년에 두 사람은 함께 런던의 베델 건축 공사 일을 자원하였습니다. 그때에는 권유를 받지 않았지만, 1989년에 그들은 베델 가족 성원이 되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여호와로부터 오는 임명을 결코 거절해선 안 됩니다”라는 순회 감독자의 조언이 귓전을 울려 그들은 받아들였습니다. 그곳에서 개리의 전자 기술과 테디의 치과 간호사 경력은 대단한 가치를 발휘하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런던의 폴란드어 및 벵골어 밭에서 관심을 발전시키는 데에도 참여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하였지만 윌리 스튜어트와 베티 스튜어트 부부는 국제 자원 봉사자로서 건축 일을 하는 데 자신을 제공하였습니다. 배관공이자 난방 기술자인 윌리는 55세에 조기 퇴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스튜어트 부부는 그리스에서, 다음에는 스페인, 짐바브웨, 몰타에서 건축 공사에 참여하였습니다. 베티는 숙소 청소, 세탁, 심지어는 배관 일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였으며 영적으로 풍부한 보람을 느꼈습니다. 윌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전세계에서 노소를 막론하고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자격 있는 형제들을 위한 특별 훈련

또 하나의 확장된 봉사의 기회의 문이 영국에서 1990년에 봉사 훈련 학교가 개교하면서 열렸습니다. 여기서, 장로나 봉사의 종으로 일하는 독신 형제들이 전세계 밭에서 그들을 필요로 하는 어느 곳에서든지 봉사할 목적으로 전문 교육을 받을 기회가 더 열린 것입니다. 8주간의 학과 과정은 성서의 가르침과 조직에 관한 문제에 대한 교훈을 받는 데 훌륭한 균형을 이룹니다. 영국에서 첫 학급은 이스트 페닌 대회 회관에서 열렸습니다. 미국에서 온 두 명의 지역 감독자 제임스 힌더러와 랜들 데이비스가 강사로 일하였습니다. 경험이 많은 세 명의 영국 순회 감독자—피터 니콜스, 레이 포플, 마이클 스퍼—도 앞으로 있을 학급에서 가르치기 위한 훈련을 받기 위해서 그 학급에 참석하였습니다. 1990년 6월 17일에 졸업하는 학급에서 연설한 통치체의 앨버트 D. 슈로더는 영국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받을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훌륭한 젊은이 여러분은 이곳에서 활동을 증진시키는 데 필요합니다. 이번 임명이 영국 밭에 참으로 활력소가 될 것입니다.”

봉사 훈련 학교 졸업생 가운데 바랏 람은 힌두계(系)입니다. 그는 지금은 결혼해서 아내와 함께, 그들이 도울 구자라트어권 사람들이 많은 잉글랜드 북서부에서 봉사합니다. 웨일스 출신인 존 윌리엄스는 잠비아 지부에서 일하라는 임명을 받고 놀랐는데, 그가 가진 기술이 그곳에서 필요했던 것입니다. 나중에는 잠비아의 키트웨에서 선교 봉사를 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가나에서 태어난 고든 사코디는 열두 살 때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아직 십대 소년일 때, 그의 아버지에게 「파수대」와 「깨어라!」를 전해 준 증인으로 인하여 고든은 성서 진리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성서 연구 결과 그는 1985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보조 파이오니아로서 성서 연구를 매우 많이 사회하였기 때문에 그의 파이오니아 친구들은 그가 정규 파이오니아로 등록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전 시간 봉사의 첫해가 끝나면서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에 참석하였을 때, 순회 감독자는 그에게 봉사 훈련 학교에 신청하라고 격려하였습니다. 회중 청소년들을 더 잘 도울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는 그대로 신청을 하였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제7기 학급에 참석하였습니다. 졸업 후 그는 런던에서 2년간 봉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잠비아의 선교인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고든은 여호와의 인도에 따라 어떻게 사용되든지 자신을 기꺼이 제공하였으므로, 훈련받은 뒤에 점차 부가적 특권을 받게 되었습니다. 12주간 그 고장 언어 중 하나인 시벰바어 교육을 받은 후, 고든은 코퍼벨트 도에서 순회 감독자로 일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순회 활동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특권도 받아 왔습니다.

영국 태생인 리처드 프러드는 증인 부모에게서 자랐습니다. 여호와께 자신의 생명을 바치고 나서, 그는 자기가 헌신의 한계가 어디까지라는 조건을 내세울 입장이 결코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제공하였으며, 1982년에 파이오니아로 등록하였습니다. 1990년에는 봉사 훈련 학교에 신청하여 졸업하였습니다. 그 역시 잠비아로 임명되었습니다. 시벰바어를 공부하고 자신의 새로운 임지에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뒤,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고, 또 잠비아 지부에서 열리는 봉사 훈련 학교의 강사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33명의 학생이 영국에서 19개의 봉사 훈련 학교 학급을 졸업하였습니다. 이 수 가운데, 79명은 현재 해외에서 봉사하고, 4명은 순회 감독자로, 12명은 베델 봉사자로 일하고 있으며, 308명은 영국에서 파이오니아로 봉사함으로 그들이 훈련을 통해 받은 유익을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선교 봉사의 밭으로 이주하다

영국의 파이오니아들 가운데서 수백 명이 전세계 밭에서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봉사하고자 자신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뉴욕에 있는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두 합하여, 영국에서 524명이 길르앗을 졸업하였습니다. 그들은 64개 나라, 사실 지상 전역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일부 파이오니아들은 길르앗에 초대받기 전에 이미 외국에서 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존 쿡과 에릭 쿡의 경우가 그러하였는데, 그들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길르앗에 참석한 다음, 에릭은 아프리카로 파견되었고, 존은 처음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그리고는 아프리카에서 봉사하였습니다. 로버트 니즈벗과 조지 니즈벗의 경우도 그러하여, 그들은 15년 이상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봉사하다가 길르앗에 참석하였으며, 그 후 모리셔스에서, 나중에는 다시 아프리카 대륙에서 봉사하였습니다. 클로드 굿맨은 이미 20년 동안 인도, 실론(지금의 스리랑카), 버마(지금의 미얀마), 타이 그리고 말라야(지금은 말레이시아에 포함됨)에서 봉사하고 나서 길르앗에 참석하였으며, 그 후에는 파키스탄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에드윈 스키너는 인도에서 20년간 봉사하고 나서 길르앗에 참석하였고, 그리고는 계속 인도에서 43년을 더 봉사하다가, 1990년에 지상 생애를 마쳤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국제 건축 자원 봉사자로 건축 공사에 참여함으로써 외국 봉사에 대한 예비 경험을 얻었습니다. 리처드 파머와 루시아 파머 부부의 경우가 그러하였는데, 그들은 1989년에서 1994년 사이에 그리스, 타히티, 스페인, 스리랑카에서 여러 다른 기간에 일하였고, 그리고 나서는 스리랑카에 머물며 3년이 넘게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다가 길르앗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길르앗 신청자들은 선교 봉사를 전생애에 걸친 활동으로 여기도록 격려를 받아 오고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그러한 견지에서 자신의 임명을 받아들이며, 일부는 이러한 면에서 훌륭한 본을 보여 왔습니다. 영국에서 밖으로 나가 아직도 선교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적어도 45명은 임지에 20년 이상 머물러 왔습니다. 그들 가운데 9명은 중앙 및 남아메리카에, 11명은 아시아 대륙에, 다른 11명은 아프리카에, 4명은 유럽에, 10명은 여러 섬들에 있습니다.

오래 된 선교인들 가운데는 49년 동안 나이지리아에서 봉사한 앤소니 애트우드가 포함됩니다. 그는 어떤 이민 법규 때문에 1997년에 런던 베델로 임명이 바뀌었지만 마음은 아직도 나이지리아에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이지리아에서 봉사한 일은 놀라운 특권이었습니다. 보람 있는 시절이었죠. 나는 진리로 축복받은 모든 젊은이들에게 자신 앞에 놓인 모든 특권을 붙잡으라고 권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결코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겁니다. 나는 그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올리브 스프링게이트는 1951년에 브라질에 선교인으로 파견되었고, 1959년에 친동생 소냐가 합세하였습니다. 덴턴 홉킨슨과 레이먼드 리치는 1950년대 초에 선교인으로 필리핀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은 여전히 그들의 고향입니다. 말라위에서 선교 봉사를 시작하여 10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추방된 맬컴 비고는 지금은 아내와 함께 나이지리아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더 언급할 수 있지만, 그들 각자는 여호와로부터 오는 축복이 풍성한 삶을 누려 오고 있습니다.

선교 봉사에 발을 디디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 봉사를 계속하기 위해서 심각한 문제들과 씨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브라질에서 몇 년간 선교 봉사를 한 에릭 브리튼과 크리스 브리튼 부부는 병 때문에 잠시 영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후 같은 해 그들은 포르투갈로 임명을 받았는데, 그곳에서는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7년간 봉사하다가 성서 교육 활동을 이유로 포르투갈에서 추방되자, 그들은 영국에서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들은 협회에 편지를 보내, 다른 선교 임명이 가능한지 문의하였습니다. 머지않아 그들은 브라질로 돌아갔으며, 그곳에서 선교 활동과 순회 활동을 겸해서 하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브라질에서 충실하게 봉사하다가 에릭은 1999년 8월에 사망하고, 크리스는 그곳에서 계속 봉사하고 있습니다.

몇 해가 지난 뒤, 가족 성원에 대한 성경적 의무로 인해 자신의 활동에 조정이 필요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이크 포티지와 바버라 포티지 부부의 경우가 그러하였는데, 그들은 자이르에서 26년간 봉사하다가 1991년에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지내고 있는 노부모를 보살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전 시간 봉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 책임을 돌보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습니다. 1996년 그들은 선교 봉사의 밭으로 돌아올 수 있어서, 지금은 콩고 민주 공화국인 나라에서 3년간 더 봉사하였으며, 현재는 영국의 베델 가족 성원입니다. 자이르에서 처음 봉사를 시작한 이래, 그들은 세계의 그 부분에서 하느님의 왕국 선포자 수가 4243명에서 10만 8000명 이상으로 증가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지 1년가량 지난 후 자이르에서 여호와의 증인에게 법적 인가가 나던 때를 그들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 킨샤사에서 열린 첫 대회는 3817명밖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아직까지도 가장 뜻 깊은 대회입니다. 1998년에는, 그 나라의 불안정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유익을 얻은 53만 4000명이 주의 만찬을 기념하기 위하여 모였을 때 그 기쁨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적합한 왕국회관들을 마련하다

영국에서 회중 수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적합한 왕국회관을 마련하는 일이 지속적인 도전이 되었습니다. 일부 회중들은 세 든 회관이나 다른 장소에서 모였는데, 그 모든 곳이 우리의 장엄하신 하느님 여호와를 숭배하기 위하여 함께 모이는 그리스도인 집단에게 알맞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적합한 집회 장소가 절실히 필요하였습니다.

왕국회관으로 사용할 건물을 구하기가 항상 쉽지는 않았습니다. 때때로 반대가 극심하였는데, 특히 종교적 편견이 있는 곳에서 그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 의뢰하고 책임 있는 형제들이 끈기를 나타낸 결과 성공을 거두어, 반대자들이 크게 놀라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1970년대 초 웨일스, 스완지의 한 회중에서는 빈 예배당을 왕국회관으로 사용하려고 매입 제의를 하였습니다. 그 건물 소유주인 교회 집사는 그 집이 여호와의 증인에게 팔리는 일을 자기 눈으로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배당은 우체국에 팔려, 임시 전화 교환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지만 1980년에, 우체국에서는 더 이상 그 건물이 필요치 않게 되자 건물을 경매에 부쳤습니다. 회중의 한 장로가 그 소식을 듣고는, 얼마에 응찰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동료 장로들과 의논하였습니다. 건물 감정사는 그 건물을 부지와 함께 시가 2만 파운드(3800만 원)로 추산하였습니다. 형제들은 1만 5000파운드(2900만 원)에 입찰하여 낙찰되었을 때 참으로 기뻤습니다! 알맞게 개축한 다음, 그 건물은 여호와께 봉헌되었습니다.

서남부 지방의 해변 읍 엑스마우스의 회중에서 성원이 증가하여 다른 회중을 구성하게 되었을 때, 형제들은 더 큰 왕국회관을 지을 새로운 장소가 필요하다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그 지방 의회가 소유하고 있는 부지가 이미 도시 계획법상 종교 용지로 지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 냈습니다. 증인들은 그 부지를 매입하려고 협상을 벌였습니다. 그러자 그 의회에서는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는 그 토지의 매매 계약이 완료될 수 없다는 특이한 단서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건축 공사는 1997년에 완료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의회측에서는 합의 사항을 준수하였습니다. 그 왕국회관을 사용하는 회중들은 이 일을, 그들의 지역에서 참 숭배의 확장을 추진하는 그들의 노력에 대한 여호와의 축복의 증거로 봅니다.

유럽에서는 최초

부지를 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왕국회관의 신축은 종종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그런데 1982년으로 끝나는 10년 기간 중, 영국에서는 회중 수가 943개에서 1147개로 증가하였습니다. 건축 활동이 그러한 성장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어떤 조처가 필요하였습니다.

1983년 9월, 미국과 캐나다로부터 건축 공사에 경험이 풍부한 일단의 형제들이 런던 북쪽 101킬로미터에 있는 노샘프턴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신속한 건축의 필요성 문제를 다루어 왔으며, 개발된 실제적인 해결책을 제공하고자 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방 형제들과 나란히 일하여 왕국회관 신축을 경제적으로 그리고 신속히 하도록 지원하였습니다. “일단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정상적인 시공자라면 6개월이 소요될 일을 최근에 4일 만에 달성하였다. 그것도 4분의 1의 비용으로 해냈다”고 「건축 설계」(Building Design)지는 그 다음달 호에서 보도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유럽에서는 최초인 이 속성 건축 왕국회관의 공사를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그 다음해 1000명이 넘는 자원 봉사자들이 웨일스의 작은 도시 돌게슬리에서 왕국회관 건립을 지원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건축 공사가 나흘이 아니라 이틀 만에 완료되었습니다. 33명의 그 고장 증인들은 웨일스, 잉글랜드 그리고 미국에서 온 증인들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온 형제들도 현장에 와서 공사 진행을 살펴보고는 돌아가서 그와 같은 공법을 시행하는 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해외 형제들의 지원은 영국의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혜택을 주었는데, 이번에는 그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노퍽의 킹스린에 있는 두 회중은 이 일을 특이한 방식으로 해냈습니다. 1986년에 그곳 회중들은 그들이 사용해 오던 목조 건물을 대치할 왕국회관의 신축을 준비하느라 바빴습니다. 그들은 아일랜드에 있는 코브 회중이 차고를 개조해서 집회를 갖는데 45명 내지 50명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돕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구건물과 함께, 의자와 음향 장치를 포함해서 그 내부 집기 일체를 코브의 증인들에게 제공하기로 하였습니다. 창틀을 교체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자, 그 지방 형제들은 그 비용을 충당할 금액을 충분히 기부하였습니다. 인근 회중들은 지붕 트러스를 새로 올리는 데 드는 금액을 헌금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에 더해서 노퍽 형제들은 발송비 전액을 부담하였습니다.

킹스린의 한 주임 감독자 피터 로즈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회관 건물을 해체하다 보니 일이 엄청나더군요. 부분품 하나하나를 손상이 가지 않게 떼어 내어 각기 번호를 붙여 두었다가, 거대한 조각 그림 맞추기라도 하듯 재조립해야만 했습니다.” 1986년 5월 해체 작업을 완료한 후, 모든 부분품을 한 콘테이너에 포장하여 배편으로 아이리시 해 건너 코브로 발송하였습니다. 코브 형제들은 6월 7일과 8일의 주말에 새 회관을 세우기로 계획하였습니다. 이때는 바로 킹스린의 형제들이 그들의 왕국회관을 신축하기로 한 날짜였습니다. 두 왕국회관이 그 주말에 완공되었습니다.

자금 조달과 숙련된 지원

「우리의 왕국 봉사」 1987년 4월호 영국판에는 건물의 신축 및 매입 후 개축을 목적으로 “적절한 저비용 자금 조달”을 위한 ‘협회 왕국회관 기금’의 설치에 관심을 이끄는 삽입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재물을 균등하게 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둘째 8:14) 그 기사의 결론은 이러하였습니다. “앞에 있는 중차대한 임무를 인식하면서 대회 회관 신축을 위해 해온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는) 관대한 헌금에 감사하는 한편, 우리는 여호와께서 왕국회관에 관한 현재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실 것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잠언 3:5, 6.”

그 다음해 통치체는 지부 사무실을 통하여 형제들로 된 위원회가 이 나라 여러 곳에 구성되도록 마련함으로써, 형제들의 전문 경험을 활용하여 왕국회관 건축 활동을 조직하는 일을 지원하게 하였습니다. 1998년까지 16개의 지역 건축 위원회가 임명되었습니다. 이들 위원회는 영국에서 이미 700개가 넘는 왕국회관의 신축과 개축을 지원하였습니다.

이들 위원회에서 일하는 형제들 대다수는 돌보는 가족이 있습니다. 이 활동에 시간을 많이 바칠 수 있는 형제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다섯 자녀의 아버지인 마이클 하비는 아내인 진의 협조하에 왕국회관 건축 일을 다른 일에 우선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둘 다 생활에서 왕국을 첫째 자리에 두라는 예수의 권고의 가치를 터득하였습니다. (마태 6:33) 마이클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온전히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실망시키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진도 이에 동의합니다. “우리 딸 레이철이 아홉 살쯤 되니까 빨리 자라서 이내 옷이 안 맞게 되었지요. 새것을 사 줄 돈이 여의치 못해서 우린 옷을 수선해서 맞게 고쳐 가지고 그럭저럭 입히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순회 대회 전날, 그 애 고모가 세일에서 샀다고 하면서 새 외출복 두 벌을 보내 왔지요. 둘 다 레이철에게 딱 맞았고, 더구나 그건 대회 날짜에도 딱 맞춘 것이었어요!” 그들의 아들 둘은 건축 일에 참여하는 한편, 진과 딸들은 숙소를 청소하고 건축 공사에 관련되는 일을 맡아 합니다. “우리의 건축 일이 우리를 결속시켜 줍니다. 정말로 이 일은 가족이 함께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마이클의 설명입니다.

1980년대에 지은 왕국회관들의 경우, 일을 하는 자원 봉사자 수가 수백 명, 심지어는 수천 명에 달하는 곳들도 있었습니다. 일을 간소화할 목적으로 하비 형제는 덴마크로 여행하여 그곳에서 왕국회관 건축 일을 하는 형제들과 상의하였습니다. 더 큰 도움이 된 것은 협회에서 각 회중에 새로운 왕국회관이 필요할 때 협회는 이미 준비해 놓은 설계 도면 선집(選集)을 제공할 수 있다고 통보하였을 때였습니다. 그 결과, 전보다 필요한 자원 봉사자 수가 줄고 작업량이 격감되면서, 검소하면서도 알맞은 왕국회관이 영국 전역에 세워졌습니다.

단지 좋은 보도 기사만이 아니었다

왕국회관을 짓는 연합된 노력과 그 일을 수행하는 속도로 인해 대중에게 훌륭한 증거가 이루어집니다. 신문에서 종종 그 상황을 보도합니다. 1990년, 지방 신문 「이브닝 에코」의 보도 사진 기자 빅터 래그덴은 템스 에스추어리 북쪽의 캔비 섬에 짓는 새 회관의 3일간의 공사를 취재 보도하였습니다. 그가 금요일 아침 건축 현장에 도착하였을 때는 건축 자재 외에는 별로 눈에 띄는 것이 없었습니다. 한 트레일러의 입구에 “보도실”이라는 표지가 핀으로 매달려 있었습니다. 빅터가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때는 현장에 똑바로 세워져 있던 구조물이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게 정말로 감명을 준 것은 공사장 일꾼들이었습니다. 남녀노소가 함께 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빅터는 현장 사진을 찍고는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신문 편집인에게, 그 주말에 이따금 현장에 돌아가서, 3일 내에 회관을 지을 것이라는 증인들의 주장이 사실로 증명될 것인지 살펴보게 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세 명의 기자와 함께 공사 진행을 취재하였습니다.

일요일에 빅터는 새 회관에서 열린 바로 그 첫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결과, “위대한 여호와!”라는 표제 아래 두 페이지에 걸친 양면 전단(全段) 기사가 신문 지면을 장식하였습니다. 그 후 회중의 한 장로가 빅터를 방문하였습니다. 성서 연구가 빅터와 시작되었습니다. 빅터가 말합니다. “3주도 안 되어, 나는 하느님의 이름을 배워서, 기도 가운데 그저 탄원이나 하는 대신 이제 감사를—여호와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빅터는 지금 침례받은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넓히는 일’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많은 증거 활동이 영국 내의 이민 집단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대부분은 자신도 이민을 왔거나 여러 언어를 할 줄 아는 증인들에 의해서 수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도움이 더 필요하였습니다.

1993년경에는 200만 명의 아시아계 주민이 영국에 살고 있어서, 그 인구 대비가 1대 28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도 아대륙에서 왔고, 다른 사람들은 동아프리카에서 왔습니다. 이미 약 500명의 펀자브어권, 그리고 150명의 구자라트어권 전도인들이 영어 회중들과 연합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500건이 넘는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민 온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기회가 주어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영어밖에 모르는 사람은 다른 언어와 문화권 사람들에게 증거하려고 할 때 무력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지부 사무실에서는 본토 증인들이 모든 인종의 사람들에게 폭넓은 사랑을 발전시키고 다른 사람들의 복지를 돌보는 데 그리스도와 같은 영을 발전시킬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들은 “넓히”라는 격려를 받았습니다. (고린도 둘째 6:11-13; 빌립보 2:1-4) 「우리의 왕국 봉사」에서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는 구역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봉사의 직무 중에 나타내신 따뜻함과 관심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영국에 있는 증인들은 “광대한 선교 봉사의 밭이 사실상 우리를 찾아왔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외국어권 사람들에게 배려를 나타내기 위해, 영국의 모든 증인들은 구역에서 만나는 외국인들을 해당되는 외국어 회중에 인도하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증인들이 개인적으로 다른 어떤 언어를 할 수 있든 없든 간에, 그들 모두는 영국으로 이주해 온 광대한 선교 봉사의 밭을 돌보는 데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외국어 회중을 위한 구역은 주로 그처럼 인도받은 결과를 가지고 구성됩니다.

그 결과 1996년에 그레이스 리는 베트남에서 와서 잉글랜드 북동부 타인 강변의 뉴캐슬에 사는 한 부인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중국어를 말하였습니다. 그레이스는 따뜻한 환영을 받으면서 즉시 집안으로 초대되었습니다. 그는 그 여자가 베트남에서 전쟁 중에 많은 고통을 받은 난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10년가량을 살아왔지만 아직도 영어가 서툴렀습니다. 그 여자는 그레이스에게 자기는 거의 자포자기에 빠지는 일이 잦았으며, 도움을 구하기 위해 의지할 사람도 없노라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또 그레이스에게, 4년 전에 아름다운 그림이 많이 들어 있는 책을 받았는데 영어를 읽지 못해서 이해를 할 수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우울해질 때면 언제나 그 그림들을 들여다보곤 하는데, 그러고 나면 우울증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고 마음 속에 희망이 부풀어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책장에서 그 책을 꺼내다가 그레이스에게 건네 주면서, 무슨 내용인지 알아볼 수 있도록 자기에게 읽어 주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책은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였습니다! 그레이스는 그에게 영어 책을 읽어 주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을 해 줄 수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레이스는 자기 가방에 손을 넣어 중국어로 된 같은 책을 꺼냈습니다. 그 부인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성서의 소식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즉시 그는 성서 연구에 동의하였습니다.

‘넓히는 일’의 일환으로써 지부 사무실에서는 그러한 민족 집단들이 영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자라도록 돕는 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콜린 시모어와 그의 아내 올리브는 영국 전역에서 회중들을 방문하는 일에 이미 20년간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들이 섬기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나타냈으며, 그 점은 그들이 지중해의 몰타 섬과 고조 섬에 있는 회중들을 방문하는 동안 특히 분명해졌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회중 집회 중에 몰타어로 대답을 해 보기까지 하여, 그곳 형제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것입니다.

1994년 9월, 콜린은 잉글랜드 전역의 비영어권 집단 및 일부 외국어 회중들을 위한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각 집단이 회중이 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면밀히 평가하였으며, 이미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회중들도 강화하였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이 순회구가 가장 작았지만—단지 12개 회중에 전도인 750명 정도—3년 내에 가장 큰 순회구가 되도록 발전하여, 전도인이 1968명이고 그 가운데 388명은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습니다. 그 이후 외국어 순회구 수는 3개로 늘었습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다

다른 언어를 하는 이민 온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성서 진리를 나누어 주기 위하여, 일부 영국 증인들은 다른 언어를 배우려는 자진성을 개인적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영국의 여러 곳에서 파이오니아를 해 온 엘리자베스 에멋이 있습니다. 처음에 그 자매는 자기 구역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펀자브어를 배우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76년에 새로운 임지에서 그는 우르두어로 봉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구자라트어였습니다. 관심자들을 도우려고, 그는 대회장에서 인도와 파키스탄 전도인들을 찾아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클리프턴 뱅크스와 어맨다 뱅크스 부부의 경우에는 1993년 러시아 대회에 참석한 일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귀국 후, 그들은 그 고장의 도서관에서 러시아어 학습서를 구하고, 러시아어권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이사하였으며, 그곳의 러시아어 회중에서 파이오니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책임과 가족을 돌보는 사람이라면, 어학 공부는 물론, 회중과 야외 봉사에서 온전한 활동 계획을 수행할 시간을 찾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영국의 특별한 필요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봉사를 확장하고자 하는 파이오니아들에게 격려가 주어졌습니다. 파이오니아 봉사를 그만두지 않고서도, 그들은 한 가지 언어의 기본을 배웠습니다. 필요한 지침을 얻기 위하여 일부 파이오니아들은 새로운 언어의 기초 수준의 단기 과정을 밟았는데, 흥미로운 결과가 있었습니다.

21년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해 온 크리스틴 플린 자매는 다른 일곱 명의 파이오니아와 함께 1996/97년에 구자라트어 강좌에 등록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강사들은 인도인 부부였는데, 그렇게 많은 영어를 사용하는 학생들이 그 어학 과정에 가담하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크리스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여러 학급을 조정해 주었습니다. 내가 야외 봉사 제공 연설을 준비하는 데도 도와 주었고, 심지어는 우리 집회까지 일부 참석하였습니다.”

대략 같은 시기에, 크리스틴은 세속 직업을 새로 시작하였습니다. 직장에서 그는 구자라트어를 사용하는 젊은 여자를 만났습니다. 크리스틴이 구자라트어로 인사를 하자, 그 젊은 여자는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왜 그 언어를 배우고 있는지 궁금해하였습니다. 크리스틴이 설명을 해 주고 훌륭한 증거를 하자, 젊은 여자는 이렇게 응답하였습니다. ‘다른 어떤 종교도 그 성원들에게 그렇게 까다로운 언어를 배우라고 권하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네는 정말 뭔가 말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나 보군요.’

역시 파이오니아인 폴린 던컨은 1994년에 벵골어 학습에 몰두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 언어가 대단히 까다로웠습니다. 그 자매는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여러 번, 나는 여호와께 눈물로 간구하면서, 이 언어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래서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렇지만 여호와의 성령과 함께 나의 결의와 노력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겼는데, 포기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에요. 지금은 놀라운 결과를 얻고 있거든요.” 또 다른 파이오니아인 베벌리 크룩 자매는 자신이 벵골어를 배운 것이 자기가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 언어를 배운 이래 봉사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우리가 자기네 말을 배우느라 시간을 바쳤기 때문에 우리가 자기들을 틀림없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지요.”

제니퍼 찰스는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온 많은 난민이 있는 한 프랑스어 회중의 파이오니아 자매인데 이렇게 말합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운 덕택에, 내 구역에 있는 사람들이 언어를 모르는 나라에 와서 사는 심정이 어떠한지를 이해하게 되었어요.”

여러 해에 걸쳐, 더 필요한 곳에서 봉사할 수 있는 독신 자매들을 포함하여 많은 파이오니아들은 필요가 있는 인근 회중으로 이사하는 문제에 관하여 순회 감독자와 이야기해 보도록 권유받았습니다. 그 중 일부는 외국어 밭에서 도움을 베풀기 위하여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대런던 지역에서, 100명이 넘는 파이오니아 자매들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영어 이외의 언어를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들의 봉사는 열매가 풍성하였습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성서를 연구하고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선교 봉사의 영이 지속될 때

여러가지 사유로, 선교인이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영국으로 돌아올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훌륭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14년간 선교 봉사를 하던 윌프레드 구치와 그웬 구치 부부는 1964년에 나이지리아에서 런던 지부로 왔습니다. 그것은 나이지리아에서의 봉사가 불만족스러워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 봉사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윌프레드가 영국 지부를 감독하는 일을 담당하도록 임명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태도가 적극적이어서, 그들은 영국의 많은 파이오니아들이 여호와께서 그분의 조직을 통해서 어떠한 길로 인도하시든지 봉사에 자신을 제공하도록 격려할 수 있었습니다. 윌프레드는 종종 “여러분은 파이오니아를 30년 하는 것보다 선교인 활동 1년 동안에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입니다”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뜻은, 우리가 성경 구절을 더 많이 알게 되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인생 그리고 우리 형제 자매들과 사이 좋게 지내는 법을 더 많이 배우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길르앗 제45기 졸업생들인 존 바커와 패트 바커 부부는 곧 부모가 될 시기에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타이완에서 중국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표준 중국어를 배우려고 열심히 공부한 바 있었습니다. 영국에 돌아와서 그들은 좋은 소식을 전할 만한 중국 사람들을 열심히 찾아 다녔습니다. 자녀들이 성장하여 결혼한 뒤 이 부부는 정규 파이오니아로 등록하였으며, 지금은 버밍엄의 미들랜드 시에서 중국어 집단이 속해 있는 회중에서 생산적인 봉사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연구한 몇 사람은 진리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전에 가나에서 선교인이던 데이비드 셰퍼드는 지금 아내와 세 자녀가 있습니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무슨 연유가 있었습니까?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가나에 있는 형제들이 참으로 가진 것이 별로 없는 것을 보고 나니까, 나도 자신의 생활을 가능한 한 단순하게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데 도움이 되더군요.”

활동에 적합한 시설

인쇄된 성서 서적은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1970년대 초에 런던 지부는 여러 다른 나라들에 생명을 주는 영적 양식을 공급하는 데 있어 거점(據點)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그 양식 중 많은 부분이 아프리카 여러 나라로 갔으며, 일부는 멀리 오스트레일리아까지 갔습니다.

점차 다른 인쇄 지부들이 잡지 생산의 일부를 인계받는 한편, 런던의 인쇄실은 영어·네덜란드어·스와힐리어에만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영국에 있는 두 대의 만(MAN) 활판 인쇄기는 일정이 꽉 차 있었습니다. 일정에 맞추기 위해, 1977년에는 그 인쇄기 중 한 대가 3주마다 야간 운행까지 하였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런던에 있는 협회 시설을 확장할 시기였습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사용해 오던 밀힐의 워치 타워 하우스에는 지부에서 생산하는 인쇄 물량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공간이 더 이상 없었습니다. 도시 계획상의 규제 사항은 워치 타워 하우스에 그 이상의 공장 시설 공간의 개발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통치체는 공장을 이전하는 동시에 기존의 베델 숙소는 확대하여 업무에 필요한 형제들의 늘어나는 수를 수용하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최종적으로, 건평 3000제곱 미터의 공장 자리를 13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웸블리에서 구하였습니다. 2층 건물에 공장의 확장은 물론 숙소·주방·식당 그리고 안내 시설이 들어설 충분한 실내 공간이 있었습니다. 공장 운영이 1980년에 이 장소로 옮겨 가면서, 기존 장비는 다섯 유닛으로 된 새로운 해리스 오프셋 인쇄기로 보강되었고, 2년 내에 연간 잡지 생산량은 3832만 8000부에 달하였습니다.

한편 밀힐의 워치 타워 하우스에서 기존 건물을 연장하는 증축 공사가 진행되어, 베델 가족을 위한 방 41개가 추가되면서 식당과 주방도 확장되었습니다. 지역 감독자로서 건축 기술 경력을 가진 존 앤드루스가 베델로 부름을 받아 건축 공사 팀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이 나라 여러 곳으로부터 증인들이 자원하여 주말마다 일하였습니다. 1981/82년 동절기의 폭설과 혹한에도 불구하고 공사는 신속히 진행되었습니다. 증인이 아닌 얼마의 인력이 하도급자로 고용되어 형제들과 나란히 일하였습니다. 만 2년이 조금 지나 그 건물의 증축 부분이 사용할 수 있게 준비되었습니다. 이때는 또 하나의 두드러진 행사와 거의 같은 시기였습니다.

어마어마한 일

1982년 6월, 통치체는 영국에서 펜실베이니아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1983년 연례 총회를 개최해 달라는 지부 위원회의 초청을 수락하였습니다. 이 행사는 이중적인 중요성을 띠게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지부에서 연례 총회를 주최할 바로 그 주말에 런던 베델의 새로운 증축 부분에 대한 봉헌식을 가질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데니스 로프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어느 날 아침 여덟 시경에 베델에 있는 피터 엘리스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드 몽포르 홀을 10월 1일자로 예약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이곳은 「어린이들」 책이 발표된 1941년 9월 2-10일의 주목할 만한 대회의 개최 장소였습니다. 그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의 와중에서 우리 형제들이 그리스도인 중립을 위해 용기 있는 입장을 취하던 시기에, 지금은 통치체 성원이 된 앨버트 D. 슈로더가 영국에서 지부의 종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연로한 사람들이 일찍부터 알아 온 여호와의 충실한 종들과의 옛정을 새로이 하는 데 이 연례 총회가 얼마나 놀라운 계기가 될 것이었겠습니까!

1983년 연례 총회는 북아메리카가 아닌 지역에서 열리게 될 최초의 총회였습니다. 레스터로부터 미들랜드의 더들리 대회 회관으로 프로그램을 연결할 계획이 추진되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더 많은 형제들이 그 행사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우선적으로 초대되는 사람들은 40년 이상 여호와를 섬겨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주말에 여러 베델의 가족 성원들을 초대한다는 소식이 유럽 전역의 지부에 전해졌습니다. 그 모든 유럽 대표자들을 수용할 숙소가 영국 베델에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방문객을 수용할 숙박부를 계획하였습니다.

한편 로프트 형제는 레스터 시 의회측과 접촉하다가, 우리가 그 홀을 예약하고자 하는 바로 그 주말에 그 도시에서 가장 큰 회사 중 하나가 연례 만찬 무도회를 열 것이라는 얘기만 듣게 되었습니다. 자세히 알아보니까 그 행사는 실제로는 9월 30일에 있을 예정이지만 행사 후에 청소할 일이 항상 너무 많아서 홀이 그 다음날까지 예약되어 있다는 사실을 데니스는 알아냈습니다. “우리가 책임지고 그 장소를 청소한다면, 10월 1일자로 예약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데니스가 물었습니다. 그 관리자는 동의하였고 그래서 데니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그때는 그가 얼마나 엄청난 일을 떠맡은 것인지를 거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9월 30일 자정, 각 조장 아래 그룹별로 조직된 400명의 형제들이 그 사교 행사장에서 나온 쓰레기를 치우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또 탁자들을 치우고 3000개의 의자를 갖다 놓아 총회를 준비하였습니다. 그 일은 단 여덟 시간 만에 수행하기에는 엄청난 노역이었습니다. 데니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특이한 점은 그 형제들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연례 총회에 초대받은 사람들인데, 그런데도 그저 그 일에 한몫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아니 그 일을 위한 준비를 했다는 것 자체가 그 형제들에게 지금까지도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형제들은 연단에 카펫을 깔고 연단 주변을 따라 꽃 장식을 하였습니다. 오전 여덟 시에 홀은 완전무결하였습니다. 그곳 직원들은 어안이벙벙하여 서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이 총회에 무엇인가 매우 특별한 일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과연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잊지 못할 총회

레스터에서 있은 영적 잔치에 참석한 3671명 가운데는 37개의 다른 지부들에서 온 693명의 대표자들이 있었습니다. 참석자 중 많은 수가 기름부음받은 형제 자매들이었습니다. 텔퍼드에서 온 레그 켈런드와 페인턴에서 온 에마 버넬은 두 사람 다 99세로서 영국 대표자들 가운데 최고령이었습니다. 글래스고에서 온 재닛 테이트와 함께 메리 그랜트, 에디스 가이버, 로버트 워든은 각각 80대와 90대의 나이로서,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진리를 배웠습니다. 이들 각자는 여호와의 봉사에서 참으로 평생에 걸친 경험을 해 왔습니다! 그들은 영국에서 여호와의 찬양자 수가 수천 명에서 9만 2320명이 되기까지 증거 활동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들은 통치체 성원들이 베풀게 될 격려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앨버트 D. 슈로더는 “여러분이 피곤하지 않기 위하여 여호와께 계속 희망을 두라”는 이사야 40:31에 근거한 제목으로 연설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몇몇 충실한 형제들과 회견하였습니다. 로버트 워든과 해럴드 라브슨은 둘 다 글래스고 출신인데 각각 1913년과 1914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로버트 앤더슨은 51년간 파이오니아를 해 왔으며, 어니 비버는 17년간 순회 감독자였고 그의 세 자녀는 선교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그 여러 해 동안의 여호와에 대한 봉사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였습니다. 다른 통치체 성원인 대니얼 시들릭은 “가장 좋은 일은 앞으로 올 것이다”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지금까지도 그 연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 형제는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초대장을 받았을 때, 1941년 드 몽포르 홀에서 열렸던 전시(戰時)의 훌륭했던 대회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 났습니다. 전쟁으로 파괴된 영국 땅에서 기적처럼 열렸던 그 대회는 확실히 우리가 참석한 것 중 최상의 대회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일은 앞으로 올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에 대한 감사로 넘쳐 흐르는 마음으로, 우리의 창조주께, 그분이 임명하신 왕 그리스도 예수에게, 그리고 그분이 그렇게도 분명하게 사용하시는 조직에 계속 충성하겠다는 결의에 차서 그 총회장을 나왔습니다.”

이 행사 후 많은 대표자들은 런던으로 여행하여 베델 증축 건물의 봉헌식 프로그램을 즐겼습니다. 그 회기들은 전화선으로 노스 런던 대회 회관에 연결되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당시 협회장 프레더릭 프랜즈가 제공한 봉헌사를 들을 기회를 얻었습니다.

좋은 인쇄 공장 자리

지부 시설은 아직도 이상적이 아니었습니다. 워치 타워 하우스는 밀힐에 있는가 하면 공장은 13킬로미터 떨어진 웸블리에 있었습니다. 25명 내지 30명의 베델 형제들이 매일 그곳에 일하러 다녔습니다.

여러 해 전, 당시 협회장 N. H. 노어는 U.K. 광학 회사 소유로서 워치 타워 하우스의 길 건너편에 있는 한 건물이 인쇄 공장 구내로 이상적일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 건물을 확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986년 9월 우체국에서 주관한 한 모임에서 우리의 발송부 감독자 필립 해리스는 U.K. 광학 회사가 비터시힐에 소재한 그 건물을 비울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즉시 이 2헥타르의 부지를 구입할 협상을 벌였습니다. 2개월 뒤 매매가 완결되었고, 그와 동시에 웸블리 공장을 매각하는 협상도 성공적으로 타결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공장 신축 공사가 본격적으로 개시되었습니다.

우선, 새 공장이 들어서기 위하여 비터시힐 뒤편의 구건물을 헐었습니다. 터파기 작업을 진행하다가 형제들은 이 지역이 공업용 폐기물 하치장으로 사용된 장소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잡다한 것들을 모두 걷어 내고 보니까, 커다란 지하실을 건물 설계도에 추가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5000명이 넘는 자원 봉사자들이 영국과 해외에서 와서 그 공사에 50만 시간이 넘게 바쳤습니다. 그 결과 다가오는 여러 해 동안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훌륭한 공장과 차고가 생겼습니다.

건축 공사의 제2 국면에는 새로운 사무실 건물이 들어서기 위하여 U.K. 광학 회사의 낡은 사무실 겸 공장 복합 건물을 헐어 내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다른 건물들과 유사한 건물 외관을 유지하도록, 도시 계획 당국은 우리의 신축 사무실 건물을 벽돌로 지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일은 두께를 반으로 쪼갠 벽돌을 콘크리트 패널에 부착시킴으로 달성되었습니다. 벽돌로 장식된 157개의 패널을 들어다 제자리에 세움에 따라, IBSA 하우스(만국 성경 연구회 하우스)는 신속히 그 모습을 갖추어 갔습니다. 그 직후 현장을 방문한 한 회사의 간부는 벽돌공을 몇 명이나 고용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적어도 50명은 틀림없을 거야”라고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단지 여섯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가 그 일을 다 해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1993년, 비터시힐 언덕 위의 이 신축 사무동 및 공장동 건물 단지는 사용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 시설은 통치체의 앨버트 D. 슈로더가 방문하였을 때 봉헌되었습니다. 그때쯤에는 전국에서 12만 7395명이 야외 봉사에 참여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기뻐할 이유가 되었습니다!

국제적인 규모의 지원

우리의 인쇄 시설 운영이 웸블리로부터 IBSA 하우스의 새 장소로 이전하는 동안, 독일에 있는 협회의 지부가 지원하여 영어 잡지를 인쇄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머지않아 인쇄 시설 운영이 런던에서 재개되어, 생명을 주는 진리를 제시하는 수천만 부의 잡지가 우리의 새 공장에 설치된 인쇄기에서 쏟아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동아프리카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런던의 인쇄 공장에서는 오랫동안 세계의 그 지역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잡지 공급품을 생산해 오고 있었습니다. 영어판과 스와힐리어판 잡지가 둘 다 정기적으로 그곳에 발송되고 있습니다. 카리브 해의 섬들 역시 영국으로부터 공급품을 받습니다. 여러 해 동안, 바나나 수송 선박들이 서인도 제도로부터 영국의 서부 해안으로 화물을 실어 날랐습니다. 그 선박들은 그 제도에 필요한 화물을 싣고 돌아가는데, 그 화물 가운데는 무료로 운송되는 정기적인 잡지 발송품이 포함됩니다. 협회의 자선 활동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국외로 보내는 컨테이너를 수출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송부는 남는 공간을 활용하여 경제 사정이 어려운 지역에 있는 형제들에게 필요한 여러가지 공급품을 보냅니다. 이 나라 전역의 왕국회관에서 남게 된 수만 개의 의자가 그런 식으로 라이베리아, 모잠비크, 세네갈, 탄자니아, 잠비아와 같은 나라들로 수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열심히 배우는 관심자들로 현재 터질 듯이 가득 차는 회중들이 그 의자들을 사용합니다.

1994년 보스니아의 전쟁 상황으로 인해 그곳의 우리 형제들을 위한 조직적인 구호 활동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오스트리아 지부에서는 기꺼이 식품·의복 등을 비롯한 물품을 공급하였습니다. 그러나 보스니아 당국이 앞으로는 반드시 법적으로 등록된 기관에게만 발송품을 보내야 한다는 법령을 포고하였을 때, 영국 지부는 도움을 요청받았습니다. 법적인 서류를 영어와 크로아티아어로 준비한 다음, 공증을 받아 속달 편으로 보냈습니다. 서류가 도착하였을 때는 구조단이 이미 빈을 떠난 뒤였습니다. 자동차로 달려간 형제들은 국경선에서 구조단을 따라잡아, 구조 물품이 통과하기 직전에 서류를 건네 주었습니다.

1998년 8월에 인쇄 시설 운영을 프랑스로부터 영국으로 이전할 마련을 하고 있을 때, 루비에르의 베델 가족 성원 중 50명이 증가된 업무량을 지원하기 위하여 런던 베델로 옮겨 갔습니다. 광범위한 협상 끝에, 1999년에는 거대한 두루마리 오프셋 인쇄기를 비롯한 인쇄 장비도 루비에르로부터 런던으로 옮기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베델 봉사자들이 영어를 배우려고 애쓰고 영국 베델 봉사자들이 프랑스어 표현을 좀 해 보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모두는 성서 진리의 “순결한 언어”를 말하는 데 연합되었고, 그리하여 여호와께 영예를 드리는 과업을 달성하는 데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일할 수 있었습니다.—스바냐 3:9.

섬들로 진출하다

여러 해 동안 영국 지부는 여러 곳에 있는 상당수의 섬들의 전파 활동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영국 제도에 포함되는 섬들도 있습니다. 남해안 밖에 있는 와이트 섬에는 일곱 개의 번창하는 회중이 있습니다. 아이리시 해에 있는 맨섬에는 전도인 190명가량의 번성하는 회중이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서해안 밖에 있는 헤브리데스 제도는 60명이 넘는 전도인의 터전으로, 그들은 외딴 촌락들에서 정기적으로 증거합니다. 스코틀랜드의 북동쪽 뾰족한 땅끝 너머에 있는 오크니 제도와 셰틀랜드 제도는 두 곳 다 계속 성장하고 있는 회중이 있어, 본토에서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철저한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셰틀랜드 제도의 파이오니아들은 그들의 구역을 북해에까지 연장하여, 고기잡이하고 있는 배들을 찾아가 승선한 선원들에게 전파하였습니다.

채널 제도의 한 섬인 건지에 있는 두 회중은 그보다 작은 올더니와 사크 섬에서 증거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이 일은 상당한 노력을 요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정기적인 증거를 1980년대 초부터 사크 섬 주민들—지금은 575명—에게 해 오고 있습니다. 건지 섬에서 온 한 파이오니아가 사크 섬에서 전파하다가 한 젊은이를 만났는데, 그의 어머니는 영국 제도의 다른 섬에서 증인이었습니다. 처음에 그 젊은이는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계속 토의한 끝에 한 증인 부부가 그 사람과 그의 여자 친구와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주로 우편으로 사회하는 연구였습니다. 건지 섬과 저지 섬의 회중들이 비용을 분담하여 한 달에 한 번씩 한 파이오니아를 올더니 섬과 사크 섬에 보냈습니다. 그처럼 개인적인 도움과 우편 연구 덕택에 그 젊은이와 여자 친구는 둘 다 점차 영적으로 진보하였습니다. 도움을 더 베풀기 위하여, 한 장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연합된 숭배」 책을 사용하여 전화로 연구를 사회하였습니다. 1994년 4월에 그 젊은 남자 그리고 이제 그의 아내가 된 그 젊은 여자는 침례받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현재는, 기상 조건으로 인해서 바다를 건너 건지 섬으로 가지 못할 때에는 전화선 중계로 회중 집회로부터 유익을 받고 또 참여도 합니다. 실로 모든 사람이 좋은 소식으로부터 유익을 받도록 돕고자 진지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인근에 있는 저지 섬에는 세 개의 회중이 번창하고 있습니다. 이 회중들은 건지에 있는 회중들과 교대로 연례 지역 대회를 개최하는데, 참석자는 그 지방 증인이 500명가량이고 영국의 다른 지역에서 약 1000명이 방문합니다. 그에 더해서, 많은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계절 노동자들이 이 섬에 오기 때문에 이 고장 전도인들 일부는 그들에게 좀더 효과적으로 왕국 소식을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포르투갈어를 공부하였습니다.

훨씬 더 먼 곳에 포클랜드 제도가 있습니다. 그 제도의 주민 2200명 가운데 많은 수는 셰틀랜드 제도를 비롯하여 스코틀랜드의 섬들에 그들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아서 너터와 그의 아내는 자녀들과 함께 증거하는 일에 참여하기 위하여 1980년에 영국에서 포클랜드 제도로 이주하였습니다. 2년 후, 세상 사태의 추이로 보아 영국 지부가 그곳의 전파 활동을 총괄하는 것이 현명할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포클랜드 제도는 런던으로부터 대략 1만 30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지만, 그곳의 작은 회중을 섬기기 위한 방문들을 마련하였습니다. 영국으로부터의 그러한 감독 마련은 15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지난 50년 기간 중 대부분이 그러하였듯이, 영국 지부는 지중해 한복판에 있는 몰타 섬의 여호와의 백성의 활동 역시 감독하고 있습니다. 그곳 몰타 섬에서 사도 바울은 기원 58년경 로마로 가는 길에 배가 파선당한 바 있습니다. (사도 28:1) 그 근처에 그보다 작은 자매섬 고조가 딸려 있습니다. 오늘날 두 섬 다 번창하는 여호와의 백성의 회중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1936년 이래 몰타 섬으로부터 증거에 대한 보고가 더러 있긴 하였지만, 왕국 활동이 몰타 주민 가운데 확립된 것은 1970년대가 되어서였습니다. 그곳 주민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 반복된 시도를 거듭했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정부와 개인 생활을 굳게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제주알다 리마는 열세 살 때 어머니가 식구들에게 여호와의 증인인 이웃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을 처음 들었습니다. 그때가 1970년이었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나에게는 그 말이 참으로 특별한 것이었어요.” 제주알다의 회상입니다. (시 83:18) 그 후 부모는 그가 성서의 소식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성서를 계속 연구하고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으며, 여호와께 헌신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1981년, 그는 이냐치오라는 불굴의 열심을 가진 활달한 이탈리아 청년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몰타에서 전 시간 봉사자로 일하는 특권을 누려 왔으며, 약 1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왔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몰타 사람들입니다.

시계 수리업을 하는 조 아시악은 마음이 넓고 친절한 몰타 남자인데, 진리를 삼촌에게서 처음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독립적인 천성 탓으로, 고향을 떠나 오스트레일리아로 여행을 갔습니다. 조가 그곳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하기 시작하자, 그의 친형 하나가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네가 여호와의 증인이 되려고 한다는 얘기를 들으시면 어머니가 돌아가실 거고, 난 네가 다시 그곳에 간다면 회관에 불을 지를 거야.” 그런데도 조는 꾸준하였는데, 그렇게 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자신과, 그에게 위협한 형을 포함해서 일곱 명의 친형제 자매가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조는 몰타로 돌아온 다음 결혼하였고, 그와 그의 아내 제인은 고조 섬의 구역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매주말 그들은 연락선을 타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아들 데이비드가 태어난 뒤에는 그 여행이 힘에 겨워졌는데, 그래서 그들은 고조에 정착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1984년에 회중이 설립되었을 때 그들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지금 고조에는 27명의 전도인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체 왕국회관에서 집회를 보며, 정기적으로 좋은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몰타어로 되어 있기만 하다면

성서 진리를 자신들의 언어인 몰타어로 표현하게 되자, 이 섬에서 더 많은 주민들이 여호와와 그분의 길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는 일에 발전하게 되었습니다.—골로새 1:9, 10.

제주알다 리마의 성서 연구생 중 한 사람인 헬렌 마사는 모든 집회가 영어로 열리던 때를 기억합니다. 듣고 있는 말을 이해하기가 때로는 무척 힘들기도 했지만, 헬렌은 훌륭한 교훈을 받은 기억들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 자매는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몰타에서 봉사한 영국 형제 노먼 러더퍼드가 참을성 있게 가르치던 일에 대해 종종 이야기합니다. 길르앗 제11기 졸업생들인 노먼과 그의 아내 이사벨은 자신들이 외국인이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하였습니다. 그들의 열망은 종교적, 가족적 반대에 직면하여 용기 있는 입장을 고수하는 그 고장 형제 자매들 곁에 머물러 그들을 지원하는 것이었습니다.

1970년대 초에, 영어에 유창한 언론인 조 미칼레프는 노먼 러더퍼드가 자기와 성서를 연구하기로 동의하자 기뻐하였습니다. 조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질문을 하곤 했는데, 예 또는 아니요라는 대답이면 만족해했을 겁니다.” 그러나 노먼은 가르치는 일에는 단지 질문에 대답하는 것 이상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노먼은 세부점으로 들어가서, 왜 그것이 예인지 또는 왜 그것이 아니요인지 설명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이 조의 믿음을 강화시켰습니다.

조가 처음 참석한 집회들이 영어로 진행되었는데도, 얼마 후에 일부 참석자들은 「파수대」 각 항의 요점을 몰타어로 요약하라는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하기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조의 동생 레이는 자기가 요약한 것을 적어 두기로 결심했지만, 해 보니까 항 전체를 번역하는 것이 오히려 쉬웠습니다. 조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여행하는 감독자로 몰타를 방문한 피터 엘리스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더니, 우리에게 복사기를 구입할 것을 제안하더군요.” 그래서 1977년에 최초의 타자기판 몰타어 「파수대」가 등장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그들이 타자해서 등사 원지를 만들거나 수정하는 데 도움이 필요할 때, 인쇄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언론인 조—말고 누가 또 있겠습니까! 조가 소리쳤습니다. “저런! 이 일이 제대로 되려면 누군가가 책임을 맡아야 되겠군요!” 형제들이 응수하였습니다. “글쎄요, 누구를 추천하시겠습니까?” 이에 조가 대답하였습니다. “모르긴 하지만, 내가 해 볼 용의는 있어요.” 그렇게 해서 조가 몰타어 출판물의 번역에 관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오늘날 출판물을 번역하는 마련은 집필 위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 독립적으로 추진되는 것은 아닙니다.

1979년에 첫 인쇄판 몰타어 「파수대」가 등장하였습니다. 번역 팀이 점차 그 일을 인수하였으며, 현재 몰타어로 「파수대」는 월 2회, 「깨어라!」는 월 1회 발행되고 있습니다. 더욱 진전을 보게 된 것은 1998년 1월 지구 감독자 더글러스 게스트의 방문 중, 모스타 읍에 있는 I.B.S.A. 하우스에 새로운 번역 사무실과 선교인 집 그리고 왕국회관이 봉헌되던 때였습니다. 그 다음날 631명이 모여 몰타에서의 왕국 활동의 진전에 관한 보고를 들었습니다.

사랑에 찬 감독을 하도록 훈련받다

그분의 백성에게 사랑에 찬 관심을 나타내시는 여호와께서는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을 실제로 칠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울 것이다].” (예레미야 23:4) 그러한 목적으로,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백성에게 장로들을 마련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장로들에게 교훈과 훈련을 베푸셔서 그분의 양들을 위하여 그분이 원하시는 종류의 사랑에 찬 감독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1960년대 이래, 자격을 구비한 형제들이 영국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천국 전도 강습에서 받은 훈련으로부터 유익을 받아 왔습니다. 이 마련은 4주 과정으로 시작하였는데, 나중에 2주로 축소되었습니다. 회중을 감독하는 형제들과 함께 여행하는 감독자들도 초대를 받았습니다. 학급들은 런던 베델에서 열렸습니다. 그 후, 교육을 좀더 편리하게 받을 수 있도록 강습이 장소를 옮겨 가며 실시되어 이 나라 여러 곳에서 학급이 열렸습니다. 회중들, 나아가서는 조직 전체가 유익을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1977년 중에 15시간 과정이 모든 장로를 대상으로 실시되었습니다. 그 이래로 그와 비슷한 학급이 다양한 길이로 열렸습니다. 주의 깊이 관심을 기울인 제목들 가운데는, 양 떼의 사랑이 많은 목자들로서 여호와를 본받는 법, 회중 집회에서 가르치는 법, 각 회중 내에서 복음 전파 활동을 수행하는 법 그리고 여호와의 의로운 표준을 옹호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1997년에 열린 천국 전도 강습의 모든 회기에 1만 1453명의 장로와 1만 106명의 봉사의 종이 초대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제공한다

회중에서 일하는 장로들 외에도 다른 자격 있는 남자들이 여행하는 감독자로서, 순회구를 구성하는 일단의 회중들이나 지역구를 구성하는 일단의 순회구들을 돌보는 일을 합니다. 그러한 여행하는 감독자 77명이 1455개 회중과 70개 순회구를 현재 영국 전역에서 돌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자격에 달할 뿐 아니라 자신의 생활을 조절하여 그러한 봉사에 자신을 제공한 남자들입니다.

1970년대 초로 돌아가서, 한 여행하는 감독자는 데이비드 허드슨이 신권적인 생애를 추구하도록 격려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데이비드는 전자 복사(複寫) 회사의 부서 책임자로서 세속 직장에 깊이 매여 있었습니다. 그러다 회사에서 갑자기 그의 자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제 그는 통치체 성원인 라이먼 스윙글이 1984년에 웨일스, 카디프의 모임에서 한 말을 인식하였습니다. 스윙글 형제는 세상에서의 출세를 ‘가라앉는 배에서 놋쇠 장식을 닦아 광을 내는 일’에 비하였습니다. 데이비드와 그의 아내 아일린은 자신들이 파이오니아를 할 수 있도록 일상 생활을 조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구간에 말이 있는 넉넉한 집을 포기하고, 좀더 온전히 여호와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생활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1994년 이래 데이비드는 아내를 동반하여 순회 감독자의 책임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 다 여호와를 섬기는 기쁨이 그들이 포기한 물질적인 어떤 것이든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레이 볼드윈은 1970년대 중엽에 진리를 배우면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은 자신이 바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다 바칠 만한 가치가 있다고 굳게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침례도 받기 전에, 세속 직장에서 그가 다른 도시로 자리를 옮기는 조건으로 승진을 제의받았을 때 그는 거절하고 그 대신 시간제 근무를 요청하였습니다. 침례를 받고 나서는 즉시 보조 파이오니아로 녹명되었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와 그의 아내 린다는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신권 활동에 자신을 더 제공할 수 있도록, 레이는 이제 슈퍼마켓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유리창 청소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1997년 9월 이래 그 역시 순회 감독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긴급 의료 상황에 직면한 증인에게 사랑에 찬 지원을 베푸는 병원 교섭 위원회와 관계되는 책임을 기꺼이 맡고 있습니다. 이 활동은 훈련받는 시간을 계속 요하는 데,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1990년 10월 브루클린의 병원 안내 봉사부로부터 세 명의 대표자가 영국 버밍엄에서 세미나를 개최하기 위하여 도착하였습니다. 네덜란드, 몰타, 벨기에, 아일랜드, 영국, 이스라엘에서 온 152명의 형제들이, 의료 당국이 피 문제에 관한 우리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돕는 방법에 관한 훌륭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브루클린에서 온 방문객들은 런던과 다른 주요 중심지 두 곳에서 대표자들이 우리의 입장에 대한 이유를 병원 당국에 설명하도록 훈련하는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제2차 세미나를 1991년 2월에 노팅엄에서 가진 후, 병원 교섭 위원회는 전국적으로 운영에 들어갔습니다. 그 다음해에는 16개 위원회가 더 임명되었고, 이 형제들은 스토크온트렌트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증인들과 당국자들 간의 협조를 확대하기 위하여, 또 하나의 세미나가 1994년 6월 서리 대회 회관에서 열려, 판사, 사회 봉사자 그리고 소아과 의사들에게 접근하는 법에 관한 훈련을 베풀었습니다. 이 세미나는 의료계 종사자들과의 협조를 훨씬 더 강화하는 데 기초를 놓았습니다. 개인적인 접촉을 실시한 결과, 영국에서 피와 치료에 관한 증인의 견해를 기꺼이 존중할 의사 표시를 한 3690명이 넘는 의사의 명단을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런던 북쪽 루턴 지역의 병원 교섭 위원회 사회자는, 자신이 이 위원회 일을 시작하였을 때는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요구되는 일들을 모두 다 깨닫지 못했었다고 선뜻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처럼 여호와와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을 깊이 사랑하는 아내의 사랑에 찬 지원에 대해 고마움을 느낍니다. 그는 점차 그 지역의 한 주요 병원의 의료진 및 관리직 양측과 원활한 업무 관계를 수립해 나갔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의료상 응급 사태에 직면할 때 우리는 항상 지원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지요”라고 그는 말합니다. 이 봉사를 수행하는 정신으로 인해 많은 경우 훌륭한 증거를 할 길이 열렸습니다.

세계 본부에서 봉사를 시작하다

영국에서 신권적 생애를 시작한 형제들 가운데는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인 뉴욕 브루클린에서 봉사하도록 초청받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존 E. 바는 1913년에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하여 부모로부터 진리를 배웠습니다. 십대 시절에는 수줍음 때문에 호별 활동에서 집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가 매우 어려웠지만, 여호와의 도움으로 그 장애를 극복하였습니다. 1939년에 그는 런던에서 베델 봉사를 시작하라는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어려웠던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몇 년 동안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하다가, 1946년에 런던 베델로 돌아오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처음 베델 가족 성원이 된 지 21년 만에 그는 길르앗 학교 제11기 졸업생으로 열심 있는 자매인 밀드리드 윌렛과 결혼하였고, 그 후 자매는 그와 함께 베델 봉사를 하였습니다. 1977년에 그는 통치체 성원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내에게 이야기하자, 아내는 처음에 그가 농담을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되어 그 다음해 두 사람은 뉴욕 브루클린의 세계 본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도 행복하게 봉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밖의 사람들 역시 본부 요원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앨런 보일이 있는데, 그는 리버풀에서 태어났고 런던 베델에서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미술가로서의 능력을 온전히 활용하기 위하여, 협회는 1979년에 브루클린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초대하였습니다. 에릭 베버리지는 버밍엄에 살고 있다가 1949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21년간 선교 봉사를 한 후, 그와 그의 아내 헤이즐은 1981년에 브루클린 베델 가족 성원이 되었습니다. 잉글랜드 남부 켄트, 샌드위치에서 태어난 로버트 페비는 아일랜드에서 9년간 봉사하고 나서 아내 퍼트리샤와 함께 필리핀에서 9년을 더 봉사하다가 그들도 1981년에 세계 본부에서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지부를 감독하는 일의 변화

여러 해 동안 영적 자격을 갖춘 상당수의 남자들이 영국 지부에서 책임을 수행하는 일에 앞장서 왔습니다. 앨버트 D. 슈로더가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된 후, A. 프라이스 휴스가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때 그는 그리스도인 중립 때문에 복역 중이었습니다! 휴스 형제의 그리스도인 중립의 원칙에 대한 고수는 철저히 시험받았습니다. 그는 이 문제로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투옥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두 번 더 투옥되었던 것입니다. 휴스 형제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조직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가지고 지부를 감독하는 일을 20년이 넘게 계속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일한 사람들은 아직도 그의 친절한 태도는 물론, 어떤 책임을 수행하든 관계없이 야외 봉사에 대한 사랑을 강렬하게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위원회가—한 개인 대신에—각 지부에서 일을 감독하게 하는 마련이 1976년에 시행될 때, 윌프레드 구치가 조정 위원으로 임명되고, 그와 함께 존 바, 프라이스 휴스, 필립 리즈, 존 윈이 임명되었습니다. 그 원래의 그룹 가운데 몇 사람은 그동안 사망하였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지부 위원회에 추가되었는데, 현재는 존 앤드루스, 잭 다우슨, 론 드레이지, 데니스 더튼, 피터 엘리스, 스티븐 하디, 베번 비고 그리고 존 윈이 포함됩니다.

국제 대회의 기쁨

여호와의 증인은 세계적인 형제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유럽의 나라들에서 수십 년간의 가혹한 억압이 지난 뒤 자유롭게 함께 모이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전세계 증인들 사이에 커다란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국제 대회가 불가능했던 나라들에서 그러한 대회를 개최할 얼마나 적절한 시기입니까! 이 일로 인해 영적으로 세움을 받는 일과 함께 훌륭한 공개 증거가 있게 될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기꺼이 이 일에 한몫을 하였습니다.

1989년, 세 개의 커다란 “경건한 정성” 대회가 폴란드에서 마련되었을 때, 적어도 37개 나라로부터 대표단이 그 역사적인 행사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영국에서 온 721명도 있었습니다. 폴란드, 포즈나니의 대회장에서 나타난 영에 대하여 데이비드 시브리와 린 시브리 부부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대단했습니다!” 또 이렇게 부언합니다. “그런 분위기는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전에는 단지 작은 집단으로만 모이던 러시아와 동유럽의 우리 형제들 수천 명과 자유스럽게 뒤섞여 어울리다니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알고 보니, 심지어 목숨을 걸고 참석한 사람들도 있더군요. 그들에겐—그리고 우리에게도—가슴 벅찬 시간이었습니다!” 그 다음해, 동독과 서독 사이에 국경 통제가 풀린 뒤, 영국에서 건너간 584명은 참으로 승리의 축하 행사였던 한 베를린 대회장의 열광적인 청중 가운데 있었습니다. 1991년, 현재는 체코 공화국인 나라에서 프라하의 스트라호프 스타디움으로 7만 4587명이 운집하였을 때, 영국에서 간 299명도 기쁜 마음으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같은 해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모인 35개 나라로부터 온 증인들 가운데에도 영국은 많은 대표단을 보냈습니다. 1993년 러시아의 모스크바 대회장에는 영국에서 770명의 대표단이 갔으며,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는 283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그 모든 대회는 역사적인, 결코 잊을 수 없는 행사였습니다.

그 외에도 영국 대표단이 참석한 국제 대회들이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북아메리카 그리고 동양에서도 열렸습니다. 증인들이 그처럼 특별한 기회에 친밀한 벗 관계를 누림에 따라, 그리스도인 사랑의 결속은 강화됩니다. 바로 여기에, 하느님의 말씀 가운데 예언된 바와 같이 그들이 “모든 나라와 부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다는 실제적인 증거가 있습니다.—계시 7:9, 10.

다양한 배경으로부터

영국 제도에서 성서의 소식에 반응을 보이고 여호와의 증인이 된 사람들은 다양한 배경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여호와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분을 온전히 섬길 수 있도록 자신의 생활에서 의미심장한 변화를 하였습니다.

자메이카 태생의 직업적인 재즈 드럼 연주자 도널드 데이비스는 1960년에 영국에 왔습니다. 1969년에 성서 서적 얼마를 받기는 하였지만, 13년 후 증인 두 사람이 그에게 하느님의 이름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해 줄 때까지는 성서에 진정한 관심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에스겔 38:23; 요엘 2:32) 그 후 같은 해 그와 한 악사 친구는 가까운 지역 대회장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곧 자신이 배우는 것을 적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무와도 문제를 의논하지 않았는데도, 도널드는 자신이 음악가의 길을 걸으면서 동시에 여호와를 섬기자면 어려움이 생길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악기를 팔고 1984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한 것이, 지금도 그가 누리고 있는 특권이 되었습니다.

토니 랭미드는 아내가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할 때 영국 공군 장교였습니다. 아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말이 아니라” 나타낸 행실이 그를 납득시켰습니다. (베드로 첫째 3:1, 2) 그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평화로운 삶을 추구하기 위하여 공군을 떠났습니다.—이사야 2:3, 4.

프랑크 카울은 성공회 신앙 가운데 자랐지만, 때가 되자 다른 곳에서 진리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왕국회관에 갔다가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 런던에서 경제학 교수로 일하고 있지만, 회중 집회가 열리는 저녁에 대학측에서 세미나를 계획할 때면 그의 결정은 그가 무엇보다도 여호와의 증인임을 보여 줍니다.

수재너는 왕립 발레단의 단원으로 있을 때, 학교 동창을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성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침례받은 증인으로서, 그는 새로운 파이오니아 천직을 수행하기 위한 시간을 사서 자신의 생활을 봉사의 직무를 중심으로 구축하기 위하여, 발레 공연 횟수를 줄이고 무용 교사가 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지금은 결혼해서, 남편 케빈 가우와 함께 리버풀에서 수가 증가하고 있는 중국인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표준 중국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르네의 여동생 크리스티나는 증인이었지만, 르네는 종교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나중에 런던에서 일을 하면서 대영 박물관에 자주 가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거기 갔다가 견학 안내인이 성서와 박물관의 여러 전시물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을 듣고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동생이 자기에게 알려 주려고 하던 것들이 일부 생각났습니다. 머지않아 르네 디어필드 역시 증인이 되었습니다.

앤드루 메러디스는 복역 중에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의 인생 행로가 크게 바뀌었습니다. 출소 후 그는 펀자브인 증인과 결혼하였고, 두 사람은 동부 런던의 펀자브어권 주민들 가운데서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닥샤 파텔은 케냐에서 힌두교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는데, 그 여자 자신도 독실한 힌두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국, 울버햄턴에서 증인과 성서를 연구하면서, 자신이 진리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스스로 인생의 결정을 할 만한 나이가 되자, 침례를 받고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그와 그의 남편 아쇼크는 현재 런던 베델 가족의 성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 업무와 관련해서 그들은 인도와 네팔 그리고 파키스탄으로 여행하여 성서 서적의 번역 일을 도와 왔습니다.

그들은 증거를 계속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매년 더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에 대한 숭배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즐거워합니다. 1972년 이래 영국에서 활동적인 증인의 수는 두 배 이상이 되어, 지금은 총수가 12만 6535명입니다.

지금 성서의 소식에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전에 여호와의 증인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까? 소수는 그러한데, 그들은 증인들이 사업장과 가두에서 활동에 박차를 가하면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한 증인은 처음으로 사업 구역에서 전파하다가, 많은 관심을 보이는 한 회사 접수계 여직원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틀 후 재방문한 결과 즉시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그 연구가 그 여자로 하여금 여호와의 길을 걸을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전에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 본 적이 없었는데, 그것은 주중에는 내내 직장에 가 있고 주말에도 대개 집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흔한 경우로,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생활 환경이 변한 사람들인데, 결혼을 하거나, 자녀가 생기거나, 나이가 들거나, 갑자기 병에 걸린 결과로 그럴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그저 제쳐놓았던 질문들에 대해 이제는 해답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1995년 8월, 침례교인으로 자란 85세의 한 부인이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에게 관심이 있으신가?」 팜플렛을 기꺼이 받았습니다. 그는 여러 번 그러한 질문을 해 보았지만,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성서를 연구하기로 동의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요구 조건을 배우고 그분의 사랑에 찬 돌보심에 감명을 받게 되면서, 자신의 생활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흡연을 중단하였는데, 그것은 거의 60년이나 된 습관이었습니다. 그곳의 회중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으며, 1997년 9월 캐서린 메이는 그리스도인 침례를 받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순회 대회장에서 물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동안, 침례 지원자로서 자기처럼 연로한 부인이 그의 눈에 띄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름아닌 자기 친동생, 다른 도시에 사는 에블린이었습니다. 두 사람 가운데 아무도 서로가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두 노인들이 여호와에 대한 헌신을 통하여 연합되어 이제 영적 자매들이 되었으므로 기쁨의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증인들을 환영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이 나가는 교회에서 근년에 생긴 일들로 인해 크게 당혹해하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리스 해스킨스는 1939년에 여호와의 증인으로부터 서적을 처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국 국교회의 확고 부동한 신봉자인데다 자기 지역에서 교회 평의회 회원이었습니다. 약 56년이 지나서, 호별 방문 중인 한 증인이 모리스의 형수와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증인이 다시 와서 모리스를 만나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모리스가 성서에 대한 질문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방문을 받자, 모리스는 즉시 증인에게 동성애와 여성 성직 임명에 대한 성서의 견해를 설명하는 성구를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지식」 책을 사용하여 성서 연구하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변화는 즉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주교와 만난 자리에서, 그동안 배운 지식으로 인해 그는 여성을 교구 전임 성직자로 임명하는 문제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디모데 첫째 2:12) 곧 영국 국교회를 탈퇴하고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으며, 84세의 나이에 침례받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분별력과 꾸준함을 나타내는 증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 부인이 자신을 “무신론자이자 인도주의자”로 소개하자, 재클린 갬블은 부인이 무엇을 믿는지 정중하게 질문하였습니다. 대답은 이러하였습니다. “사람과 생명을 믿지요.” 부인이 바빴기 때문에 우리 자매는 전도지를 남겨 두고 재방문을 약속하였습니다. 남편 마틴을 동반하여 재클린은 그 집을 다시 방문하였고, “사람과 생명”에 대해 한 말에 관하여 다시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주부의 남편 거스도 그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고 사회 복지 사업 종사자라는 말을 듣고, 그들은 남편을 만날 마련을 하였습니다. 부인 크리스틴은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침례 단계까지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스는 왕국회관에 오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렇기는 했어도 아내가 증인과 연구를 시작한 이래 자기 자녀들이 다른 많은 청소년들의 특성과는 다르게, 자라면서 매우 공손해져 간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스에게 전환점은 1978년에 왔습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국제 대회 기간에 아내는 자기가 사는 구역에서 증거하고 있던 일단의 전도인들에게 정중하게 커피를 대접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통치체의 어떤 성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집을 떠나기 전에 자기들이 사용한 그릇을 씻었습니다. 그날 저녁 거스가 집에 돌아오자, 크리스틴은 예기치 않은 손님들에 관해서 흥이 나서 그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추기경이 우리집에 와서 그릇을 씻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군!” 거스의 소감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랑스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에 거스는 가족과 함께 왕국회관에 갔습니다. 거스는 자기들이 받은 환영과 베풀어진 사랑에 압도되었습니다. 거스는 곧 그러한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의 참다운 제자들 사이에서만 찾아보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요한 13:35) 에든버러에 돌아와서 거스는 곧 연구를 시작하여, 자신을 괴롭히던 질문들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답을 얻고 여호와께 헌신하였습니다.

물론, 구역에 있는 사람들이 관심을 거의 또는 전혀 보이지 않을 경우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그들을 계속 찾아가는 데는 인내와 긍정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여러 시간 거절과 무관심을 겪고 나면 실망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증인들은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합니까? “무관심은 다루기 힘들고 도전이 되는 문제이죠”라고, 링컨셔의 라우스에 사는 에릭 히클링은 시인합니다.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본들을 묵상해 보는 것이 그가 꾸준함을 나타내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는 열심히 기도하는데, 그것도 자주 합니다. 모세, 예레미야, 바울, 그리고 물론 예수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충실하게 꾸준한 것과 여호와의 축복이야말로 증가를 경험하는 데 기여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입니다. 39년 전, 프랭크 맥그리거와 로즈 맥그리거 부부는 주민들이 종교심이 강해서 여호와의 증인을 달갑지 않게 여기던 고장에서 임명을 수행하였습니다. 그 임명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어떠하였습니까? 프랭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수줍음이 많았고, 그래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내와 나는 그 일을 여호와로부터 온 임명으로 여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고장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도록 기도했답니다.” 그러한 충실한 봉사의 결과로, 지금은 전도인 74명의 회중이 생겼는데, 그 중 3분의 2는 바로 그 읍에서 진리를 배웠습니다. 맥그리거 부부는 이 일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단지 여호와에 의해 사용될 수 있어서 기쁠 따름입니다.—고린도 둘째 4:7.

회중들을 방문하는 일에 계속 참여하고 있는 오래 된 증인인 제프 영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형제들에게 그날 봉사가 어떠했느냐고 종종 묻습니다.” 누군가가 부정적으로 대답하면, 그는 그들이 달성한 많은 긍정적인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편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헌신에 합당한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늘 한가운데를 날고 있는 천사’와 협력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여호와를 알게 되도록 격려하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우리는 증거함으로써 경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달성하였다면 어떻게 그날 성과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추리합니다. 제프는 이렇게 계속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환경에 따라 그리고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것에 따라 반응을 나타냅니다. 중요한 것은 증거를 하고 좋은 소식을 알리는 일에서 나타나는 우리의 충실성입니다.”—계시 14:6; 고린도 첫째 4:2.

“여호와의 축복” 가운데 즐거워하다

영국의 많은 증인들은 20년, 40년, 50년 또는 그 이상 여호와의 활동적인 증인으로 일해 왔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잠언 10:22에서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축복—그것은 부유하게 해 주고, 그분은 거기에 고통을 더하시지 않는다.” 영국에 있는 수만 명의 여호와의 증인은 그 선언의 진실성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증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맡겨진 최대의 특권입니다.” 이 말은 베이징스토크에 사는, 이제는 70대 중반인 코넬리어스 호프가 봉사에 반세기 동안 참여한 후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에 대하여 묘사하는 말입니다. 거의 50년 전에 침례를 받았고 남편이 순회 감독자인 앤 길람은 자신의 봉사의 직무가 “여호와와 그분의 아들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1942년에 침례받은 데니스 매슈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봉사의 직무는 음식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강화시켜 주는 음식 말입니다. 사람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하느님의 뜻을 행하면 만족이 있거든요.” 그의 아내 메이비스가 이렇게 덧붙입니다. “젊어서부터 계속해서 여호와를 섬기고 보니까, 더 나은 인생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 된 증인들은 사람들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의 반응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호와의 봉사에서 40년 이상을 보낸 뒤, 뮤리얼 태버너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어느 근원으로부터도 진정한 영적 도움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전보다 더 우리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러한 도움을 받아들일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그의 남편 앤소니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생활에서 변화를 하는 것을 보는 것은 여호와의 영이 그분을 숭배하도록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기적을 보는 것이죠.”

하느님의 말씀만이 줄 수 있는 희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데는 만족이 따릅니다. 데번, 플리머스의 도시 감독자 프레드 제임스와 그의 아내가 그들이 봉사한 여러 해를 돌이켜 보면, 그들은 침례받도록 발전하게 도운 사람들을 100명이 넘게 셀 수 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장로로, 봉사의 종으로 그리고 파이오니아로 일합니다. 그들의 세 아들도 모두 학교를 마치면서 파이오니아 봉사에 참여하였고, 지금은 장로들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인, 길르앗 졸업생 데이비드는 선교인이자 파키스탄 지부 위원회의 한 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임스 형제와 자매는 참으로 풍부한 보람을 얻는 삶을 누려 왔습니다!

여러 해 동안 충실한 봉사를 해 온 영국의 많은 증인들은 자신의 봉사의 직무로부터 훌륭한 결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리처드 제섭과 헤이즐 제섭 부부는 반세기 이상을 대부분 전 시간 봉사로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께 헌신하는 특권을 깨닫도록 도와 왔으며, 그 모두가 제섭 부부에게 소중합니다. 그런데 잭 다우슨과 린 다우슨 부부와 연구하던 일이 계속 특별히 기억에 남습니다. 그 일은 출신이 비슷한 사람들 간의 우호적인 방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헤이즐과 잭은 두 사람 다 잉글랜드 북동부 출신입니다.) 방문은 곧 성서 연구로 이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잭은 성서 연구를 잠시 중단해야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리처드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런, 그렇게 해선 안 되죠. 책을 먼저 끝내야지요. 그리고 나서 원한다면 그만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호와께 헌신하였고, 파이오니아 활동에 들어갔으며, 베델 가족 성원이 되었습니다. 잭은 지금 지부 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일부 젊은이들이 성서 진리에 대하여 반응을 보인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한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던디 지역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는 로비나 아울러와 그의 남편 시드니는 열두 살 때 성서 연구하러 자기 집에 오기 시작한 폴 컨즈가 보여 준 발전에서 특별한 즐거움을 얻었습니다. 진리는 신속히 그의 마음에 자리잡았지만, 아버지가 더 이상 연구하는 것을 금하였기 때문에 폴은 자신이 나이가 들어 애버딘에서 대학을 다닐 때까지 기다렸다가 성서 연구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는 신속히 발전하였습니다. 침례를 받은 후에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1992년에 그는 봉사 훈련 학교에 참석하였습니다. 셰필드에서 장로로 일하면서, 스페인어 공부에 몰두하였고, 1998년에는 파나마에 가서 선교 봉사를 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영국에서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봉사에 따르는 축복을 그들은 소중히 여깁니다. 예를 들면, 빌 톰스턴과 준 톰스턴은 결혼한 지 8년이 넘었는데,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는 중에 첫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시간이 지나, 세 딸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가정 생활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계속 중요한 위치에 두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일과는 꽉 짜여 있었지만 가족이 일을 함께 한 것이 그들이 성공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빌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딸아이들을 위한 시간을 내지요. 아이들이 10대가 되었을 때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스케이트나 볼링, 수영, 공놀이를 하기 원하면 우리도 같이 갔지요.” 지금은 세 딸이 출가했는데, 정규 파이오니아들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빌의 말을 빌리자면 “가장 훌륭한 생활 방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현재 77명의 형제가 (대부분이 기혼으로) 영국에서 여행하는 감독자들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 봉사는 주마다, 해마다 일정이 꽉 짜인 생활입니다. 제프 영은 이 봉사에 참여하다가 나이가 들어 건강 문제로 필요한 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 비는 여행 가방을 들고 다니는 생활을 하면서 매주 다른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러한 종류의 생활에 대해 비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답은 이러합니다. “몹시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각 회중을 방문할 때마다 우리의 그리스도인 가족이 증가되었기 때문이죠. 우리는 가는 곳마다 형제 관계의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여호와께서 어떤 임명을 주시든 간에 우리의 생활은 풍요로워질 뿐이죠.” 현재를 즐기면서 한편 그들은 미래에 있을 일을 예리하게 기대합니다. 제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제도는 이제 끝이 났습니다. 지나간 거나 마찬가지죠. 그 후 우리는 이 땅을 낙원 상태로 회복하는 일에 참여하는 놀라운 전망을 가질 것입니다. 일단 부활이 시작되면 있게 될 성서 연구들—참으로 엄청난 일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의 아내가 덧붙입니다. “여호와를 반대하는 데 성공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기분은 참으로 놀랍군요.”

“하느님이 인도하는 생활의 길”을 옹호하다

1998년 7월에 “하느님이 인도하는 생활의 길”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킨 9개의 국제 대회가 영국에서 동시에—에든버러, 리즈, 맨체스터, 울버햄턴, 더들리, 노리치, 런던, 브리스틀, 플리머스에서—열린 것은 흥분을 자아내는 행사였습니다. 60개가 넘는 나라에서 대표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프로그램 전체가 영어뿐 아니라 프랑스어·스페인어·펀자브어로 제공되었습니다. 그 다음 주말에는 대회가 그리스어로 열렸습니다.

통치체 성원 네 명—존 바, 시어도어 재라스, 앨버트 D. 슈로더, 대니얼 시들릭—이 영국 대회들에 참석하였는데, 그들이 연설할 때 대회장들은 모두 전자 통신 방식을 통해 함께 연결되었습니다. 현재 외국 밭에서 봉사하고 있는 선교인들의 참석으로 감동은 더하였습니다. 영국에서 선교 봉사를 나간 수백 명 가운데, 110명이 이들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들의 열심과 자기 희생의 영은 프로 중에 그들과 회견하는 내용을 들은 모두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들 대회에서 보고 들은 것으로 참석자들의 마음은, 심지어 청소년들까지도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대회 마지막 회기 중에 채택된 결의문은 모두가 걷기로 결심한 경건한 생활의 길을 명시하였습니다. 프로그램이 끝난 뒤, 달링턴에서 온 한 증인 부부의 네 살 된 아들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엄마, 난 정말 여호와를 사랑해요. 엄마랑 아빠도 아주 아주 많이 사랑하지만 여호와를 더 많이 사랑해요.” 왜 그러냐고 묻자, 아이는 여호와는 우리에게 낙원의 희망을 주시고 그분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죽도록 보내셨으니까, “그래서 그분을 더 많이 사랑할 필요가 있어요”라고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든버러와 런던 두 곳에서는 프로그램이 종료될 때 여러 나라에서 온 대표단들이 서로에게 손수건을 흔들었고 그리고는 오래오래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도 많은 사람들은 왕국 노래를 계속 불러, 여호와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드렸습니다.

지금까지 행해진 증거

광범위한 증거가 영국에서 행해져 왔습니다. 1881년에 수십만 장의 전도지를 단 몇 주일 동안에 주요 도시에 배포하였을 때 이미 그 일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뿌려진 씨의 일부가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습니다. 1914년에 6개월 동안 “창조 사진극”이 98개 도시에서 총 122만 6650명의 관객에게 상영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당시 영국에는 182개의 회중이 있었습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회중과 연합한 사람들의 증가된 수가 호별 봉사에 참여하여 집주인들에게 개인적으로 증거하면서, 증거 활동은 강화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영국에서 봉사에 6억 5074만 6716시간을 바쳤고, 관심자들에게 2억 9729만 4732건의 재방문을 하였으며, 일반 대중에게 7410만 5130부의 서적 및 소책자와 함께 5억 6747만 1431부의 잡지를 전하였습니다. 평균적으로, 영국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사람들의 집을 매년 두세 번 방문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호별 방문 복음 전파 활동으로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어서, 문이 열리고 말쑥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보이기만 하면 많은 집주인은 즉시 “여호와의 증인이죠?” 하고 묻습니다.

여호와에 관한 지식으로 가득 찰 땅

1891년에 C. T. 러셀은 영국의 밭을 살펴보고는 “이미 익어서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 사물의 제도의 종결 기간에 행해지고 있는 수확은 분명히 그 끝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거대한 수확임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1900년에 영국에는 단지 138명의 성경 연구생(당시에는 여호와의 증인을 그렇게 불렀음)이 있었고, 그 대부분이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수가 910배나 됩니다. 그 당시 성경 연구생이 사용하던 법적 기관은 미국 밖의 첫 번째 지부 사무실을 개설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전세계에 109개의 지부가 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24개 지부가 있고, 다른 25개 지부가 유럽에 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19개 지부가 있습니다. 아시아 그리고 전세계 여러 지역의 섬들에 41개의 지부가 더 있습니다. 이 지부들과 협조하여 일하는 590만 명의 증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드높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있는 그분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알리는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께서 충분하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증거하는 일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물이 이미 여호와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 왕좌로부터 풍부하게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열렬한 태도로 이러한 초대가 발해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오십시오.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마시십시오.” (계시 22:1, 17) 죽은 자들이 일으킴을 받을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중, 의문의 여지 없이 수십억의 사람들이 이 사랑의 마련에 응할 기회를 더 얻게 되어, 그들에게도 영원한 생명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이제까지 수행되어 온 하느님의 교육 프로그램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 앞에는 하느님의 새로운 사물의 제도에서 본격적으로 “물이 바다를 덮고 있듯이, 땅이 틀림없이 여호와에 관한 지식으로 가득 찰” 때가 놓여 있습니다.—이사야 11:9.

[86, 87면 지도와 삽화]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잉글랜드

대회 회관들이 전국에 걸쳐 편리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1) 맨체스터, (2) 런던 북부, (3) 더들리, (4) 서리, (5) 이스트피닌, (6) 브리스틀, (7) 에즈웨어

[삽화]

이스트피닌

에즈웨어

서리

맨체스터

브리스틀

[66면 전면 삽화]

[70면 삽화]

톰 하트

[72면 삽화]

협회의 첫 번째 지부 사무실

[72면 삽화]

현재 사용 중인 시설들

[74, 75면 삽화]

이들은 외국어 밭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이주하였다: (1) 클로드 굿맨, (2) 로버트 니즈벗, (3) 에드윈 스키너, (4) 존 쿡, (5) 에릭 쿡, (6) 조지 필립스, (7) 조지 니즈벗. 배경: 동아프리카로 여행하는 콜포처들

[79면 삽화]

오페어 아가씨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나타낸 프란치스카 해리스

[90면 삽화]

콜롬비아에서 봉사하는 비라 불

[90면 삽화]

배리 러시비와 자네트 러시비—“항상 더 일하기 원하였습니다”

[92면 삽화]

더들리 대회 회관에서의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

[95면 삽화]

영국 베델 가족의 아침 숭배

[96면 삽화]

영국의 봉사 훈련 학교 제1기 졸업식

[102면 삽화]

영국의 첫 속성 건축 왕국회관(노샘프턴, 웨스턴 페이벌)

[107면 삽화]

마이클 하비와 진 하비

[108, 109면 삽화]

외국어 회중에서의 봉사를 택한 파이오니아들

[116, 117면 삽화]

A. D. 슈로더가 1983년 레스터에서 열린 연례 총회에서 오래 된 증인들과 회견하고 있다

[123면 삽화]

셰틀랜드의 파이오니아들이 그들의 바다 구역에서 고기잡이 배에 접근하고 있다

[131면 삽화]

존 바와 밀드리드 바

[133면 삽화]

지부 위원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 피터 엘리스, 존 윈. 서 있는 사람들: 베번 비고, 스티븐 하디, 존 앤드루스, 론 드레이지, 잭 다우슨, 데니스 더튼

[138, 139면 삽화]

증거 활동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140, 141면 삽화]

여러 해 동안의 충실한 봉사를 되돌아보는 사람들: (1) 시드니 아울러와 로비나 아울러, (2) 앤소니 태버너와 뮤리얼 태버너, (3) 리처드 길람과 앤 길람, (4) 제프 영과 비 영, (5) 프레드 제임스와 루스 제임스, (6) 코넬리어스 호프와 리키 호프, (7) 데니스 매슈스와 메이비스 매슈스, (8) 리처드 제섭과 헤이즐 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