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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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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무리를 수용하기 위한 건축

1935년에 여호와의 증인은, 낙원이 된 땅에서 영원히 여호와를 섬길 전망을 가진 큰 무리를 지금 현 사물의 제도 기간 중에 모으려고 하시는 하느님의 목적에 관하여 성경으로부터 배워 알게 되었습니다. (계시 7:9, 10) 같은 해에 최초로, 하와이의 증인의 한 집회 장소를 왕국회관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은 수많은 그러한 왕국회관이,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성서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그 의로운 표준을 인정하는 사람들로 넘치고 있습니다.

왕국회관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사람의 수는 수백만에 이릅니다. 매년 수십만 명이 침례를 받음에 따라, 더 많은 왕국회관의 필요성이 절박합니다. 1998년의 조사를 보면, 약 8000채의 왕국회관이 40개의 개발 도상국에서 긴급히 필요하였습니다. 그러한 필요를 충당할 목적으로 지난해에는 무엇을 달성하였습니까?

‘지역 왕국회관 사무소’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오스트레일리아·독일과 같은 거점에 설치되었습니다. 이들 활동 기지로부터 프로젝트 감독자들은 각각 동·서 아프리카, 아시아-태평양 지역, 동유럽에서 왕국회관 건축 프로그램을 조직하는 일을 지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까지 77명의 국제 건축의 종이 아프리카 21개 나라, 동유럽 7개 나라 그리고 아시아-태평양 지역 4개 나라에서 이 일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2개 나라 역시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가능한 곳에서는 전 시간 ‘왕국회관 건축단’을 구성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가능한 범위에서는, 현지의 건축 방식과 자재를 사용하며 그곳 형제들이 건축 과정에 참여하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초기에는 국제 건축의 종 한두 사람이 필요한 훈련을 베풀기 위해서 이들 건축 팀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집회 장소는 긴급히 필요한데 경제 사정으로 그곳 형제들이 건축 자재를 구입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할 경우에는, 국제적인 형제 관계를 통해 이러한 면으로도 지원하고자 노력합니다.

가나에서 형제들은 왕국회관 건축 프로그램을 능률적으로 수행하도록 도움을 받고 나서, 작년에는 왕국회관을 13채나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한 해에 고작 4채가 평균이었던 것입니다. 부룬디에서는 국제적인 지원을 받아 11채의 왕국회관을 단지 몇 개월 만에 건축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부룬디, 기테가에 있는 왕국회관은 그 회관이 자리잡고 있는 언덕 위에 지은 것으로는 최초의 건물이었습니다. 그 고장 풍습에 따라, 그 지역에 사는 많은 시민들은 이제 그 언덕을 가리켜 ‘여호와의 산’이라고 부릅니다.

라이베리아는 1998년에 40퍼센트 그리고 1999년에는 19퍼센트의 전도인 증가를 경험하였습니다. 이 나라에서 여러 해에 걸친 내전이 지나간 뒤, 대부분의 회중은 왕국회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 있는 우리 형제들 대다수는 실직을 포함하여 심각한 경제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필요한 왕국회관을 건축할 수 있도록 다른 나라 형제들이 베푼 재정적 지원에 대해 그들은 참으로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건축 활동을 조직하는 일을 도우러 왔던 다섯 명의 국제 건축의 종의 지원에 대해서도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1800채 이상의 왕국회관을 필요로 합니다. 나이지리아의 아베오쿠타에서는, 건축 활동에 참여하고 있던 그곳 증인들 사이의 연합과 근면을 보고 인근 교회의 한 지도자까지도 감동되어 자원하여 일을 거들었습니다. 그 여자는 지금 자신이 건축을 도운 그 왕국회관을 사용하는 회중과 함께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토고에서는, 한 마을에서 왕국회관 건축을 강경히 반대하는 바람에 형제들은 다른 곳에 건축 공사를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멋진 왕국회관이 세워지는 것을 보고는, 그 말썽 피우던 곳에도 회관을 하나 더 지을 수 있는지 물어 왔습니다.

스리랑카에서는 회중들이 개인 집에서나, 코코넛 잎을 엮어 만든 조그마한 가건물에서, 또는 뒤뜰에다 햇볕을 가리는 차일을 치고 그 아래서 집회를 갖곤 하였습니다. 그들은 더욱 적합하고 품위 있는 숭배 장소를 갖게 되어 참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13채의 왕국회관 건축 공사가 스리랑카에서 현재 진행 중이고, 그 외에도 20채는 계획 단계에 있으며, 다음 5년 동안 50채가 건축될 예정입니다.

적합한 왕국회관이 있을 때,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마련하시는 교훈으로부터 유익을 얻기 위하여 더 잘 모입니다. 그래서 페루, 리마 교외에 큰 왕국회관을 새로 지었을 때, 그 회관을 사용하는 세 회중의 참석자 수가 모두 증가하여, 1년도 안 되어 75명의 새로운 전도인이 야외 봉사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 회중이 있는 대도시들에서는 왕국회관이 두 개 이상 있는 건물을 세움으로 부지를 적절히 활용하고 있습니다. 5월 29일과 30일의 주말에 루마니아에서는 그러한 왕국회관 복합 건물 세 동을 봉헌하였습니다. 클루지나포카에서 한 건물에는 네 개의 왕국회관이 있고, 또 한 건물에는 두 개의 왕국회관이 있습니다. 그 다음날 타르구무레스에서는 일곱 개의 왕국회관이 있는 복합 건물을 봉헌하였습니다.

대회 회관을 마련하는 일

큰 모임을 갖기 위해서 여러 나라에서는 대회 회관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왕국회관/대회 회관 복합 건물이 한 해 동안 두 군데 봉헌되었습니다. 각 복합 건물에는 세 개의 왕국회관이 들어 있어 이들을 합치면 하나의 커다란 대회 회관이 됩니다. 이 봉사 연도 중 폴란드에서 있은 괄목할 만한 행사는 한 주말에 세 곳의 대회 회관을 봉헌한 일이었습니다. 통치체의 두 성원인 시어도어 재라스와 대니얼 시들릭이 이 특별 행사에 참여하여 각 대회 회관에서 격려적인 연설을 하였습니다. 소스노비에츠 시에 6400석을 갖춘 야외 계단식 대회장이 생겨 가장 큰 대회 회관 중 하나가 되었는데, 그 시설은 7월 중에 다섯 번의 지역 대회를 여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98만 419명의 왕국 전도인이 있는 미국에서는 작년에 네 개의 대회 회관이 봉헌되어, 현재 총 40개가 되었습니다. 52만 8034명의 전도인이 있는 브라질에서는 열일곱 번째 대회 회관을 봉헌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홀이 두 개인 시설로서 총좌석이 1만 개로, 상파울루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습니다. 벽이 없는 대회 회관 두 개가 나이지리아에서 지난해에 봉헌되었는데, 한 곳은 오타 그리고 다른 곳은 이바단으로, 수용 능력은 각각 1만 명과 5000명입니다.

다른 시설들도 세계적인 성서 교육 프로그램을 추진하기 위하여 마련되고 있습니다.

워치타워 교육 센터

미국 뉴욕 주 패터슨에 소재한 현재 28개 건물로 된 워치타워 교육 센터를 건축할 목적으로, 1986년에 필요한 법적 조치의 일부가 처음으로 취해졌습니다. 1989년에는 드디어 건축 공사를 개시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1994년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교육 활동에 관계되는 여러 사무실이 건물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95년에는 길르앗 학교가 이 시설로 이전하였습니다. 지부 위원들을 위한 강습과 여행하는 감독자들을 위한 강습 역시 여기서 운영합니다. 최종적으로 1999년에는 봉헌식 프로그램이 거행되었습니다. (이에 관한 보고는 「파수대」 1999년 11월 15일호에 나옴) 수만 명의 증인들과 관심자들이 매년 이 시설을 견학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자발적인 헌금과 자진하는 형제 자매들의 연합된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호와의 축복으로 이룩된 결과를 보고서 기뻐합니다.

필요한 지부 시설들

여러 나라와 지역에서 여호와의 찬양자 수가 증가하면서 새로운 지부 사무실을 건축하는 일도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세계 본부는 물론 그러한 지부 사무실 요원은 베델 가족 성원들로 구성되는데, 그들은 특별 전 시간 종들의 성직자회에 포함됩니다.

볼리비아: 괄목할 만한 신권적 확장으로 인하여 1999년 3월 20일, 볼리비아의 산타크루스에 새로운 지부 사무실을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이전 지부가 1968년에 봉헌되던 당시의 전도인 714명으로부터 볼리비아에서 왕국 선포자 수는 사상 최고 수인 1만 5388명으로 증가하였으며, 1999년 기념식 참석자 수는 5만 3312명에 달하였습니다.

볼리비아의 열대성 저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새로운 지부 사무실은 전적으로 국내 인력으로—그중 많은 부분은 증인들의 자원 봉사로—그리고 국산 자재를 안목 있게 선별 사용하여 건축되었습니다. 그 결과 냉방 시설 없이도 시원한 실내 환경을 조성하면서 수목이 우거진 구내(構内) 환경과도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설계가 실현되었습니다. 통치체 성원인 게리트 뢰시의 방문 중 이 시설은 이 나라 최초의 대회 회관과 함께 여호와께 봉헌되었습니다. 이 행복한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는 수천 명의 볼리비아 증인들과 함께 11개 나라에서 온 방문객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는 이 나라 선교 봉사의 역사 54년 가운데 어느 시점에서든 볼리비아에서 봉사한 적이 있는 이전 선교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모잠비크: 여호와는 위대하고 크게 찬양받으실 분”입니다. (시 48:1) 이 말은 모잠비크의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에서 즐겨 사용하는 표현인데, 1998년 12월 19일 새로운 지부 시설이 인도양에 가까운 마푸토에서 봉헌될 때 이 표현이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 일은 불가능해 보였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1991년에 이르기까지 꼬박 20년이 넘도록 정부의 금지령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해에 증인의 수는 고작 6000명을 넘었습니다. 1998년말에 와서는 2만 9514명의 전도인 최고 수를 보고하였습니다. 새로운 지부 시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대다수의 모잠비크 형제들은 이런 종류의 건축 공사에 경험이 없는데, 어떻게 지부를 건축하였습니까? 많은 국제 건축의 종과 국제 자원 봉사자들로부터 도움이 베풀어졌으며, 그들은 그 일을 하는 동안 이 나라 증인들을 훈련시켰습니다. 15개국에서 온 손님들이 봉헌식에 참석하였으며, 같은 주말에 26킬로미터 떨어진 마툴라에서 모잠비크 최초의 대회 회관이 또 봉헌되었습니다. 참으로 여호와는 위대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에 찬 돌봄이 없었다면, 모잠비크에 있는 그분의 종들은 이처럼 역사적인 행사를 결코 목격하게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뉴칼레도니아: 1998년 10월 24일, 새로운 지부 사무실과 한 대회 회관이 뉴칼레도니아에서 봉헌되었습니다. 이 시설은 지부 규모를 3배 이상 확장한 것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세 개의 번역 팀이 뉴칼레도니아와 부속 섬들의 필요에 부응하여 직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봉헌식은 행복하고 다채로운 행사였습니다. 프로그램 가운데 두드러진 것으로 건축 공사의 주요 장면을 보여 주는 시청각물 상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뉴칼레도니아의 여호와의 증인에게 특별히 기쁜 일은, 통치체의 로이드 배리가 그 행사에 함께 참석하여 봉헌사를 한 것이었습니다.

세네갈: 여호와의 증인이 최초로 세네갈에 1951년에 도착한 이래, 이 지부 구역에 사는 수백만 명의 주민들에게 이르기 위하여 많은 노력이 기울여졌습니다. 18개 나라에서 온 194명의 선교인이 이 나라에서 봉사해 왔습니다. 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이 비그리스도교인인 이 나라 구역에서 수백 명이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다카르 교외에 있는 케이프 알마디에스에 세우는 새로운 지부의 건축 공사에는 이 지역 사람들 대부분에게 새로운 공법이 사용되었습니다. 크레인이 커다란 조립식 패널을 하나하나 제자리로 들어올릴 때마다 구경꾼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딱 들어맞고 똑바르게 그리고 제대로 되었습니다. 이곳 아프리카 대륙 최서단(最西端)에서 1999년 6월 19일에 가진 봉헌식을 끝마치면서 참석자 모두는 “여호와여, 감사합니다!”를 마음으로부터 함께 노래하였습니다.

아프리카

아프리카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현대 역사는 1880년대로 거슬러올라갑니다. 1920년대에는 집중적인 공개 전파 활동이 이 대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봉사년에는 아프리카 전역에서 83만 명이 넘는 전도인이 그들의 이웃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장엄한 일들”에 관하여 알리는 일에 참여하였습니다.—사도 2:11.

많은 청소년이 학교를 증거 구역으로 삼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큰 격려가 됩니다. 모잠비크에서, 어린 자매인 도르카스는 자기 급우들은 물론 교장을 비롯한 전체 교사에게 증거하는 것을 개인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 자매는 현재 여덟 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데, 성서 연구생 중 여섯 명은 정기적으로 집회에 참석합니다. 그 외에도 세 명은 침례를 향하여 발전한 다음, 자격을 구비하여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도르카스의 학교 교사 네 명이 회중 집회에 참석하라는 그의 초대를 각각 여러 차례 받아들였습니다. 도르카스의 아버지는 지금 그 중 한 교사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5년 전에 이 자매가 전학을 갈 즈음에 증거하기 시작한 또 한 교사는 결국 그의 꾸준함에 반응을 보여, 참 숭배에 가담할 생각을 가지고 성서 연구에 동의하였습니다.

1995년 이래 나이지리아에서는 5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청각 장애인들에게 별도의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한 지역 대회에서 연설이 수화로 통역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많은 일반 전도인들은 이 언어로 의사 소통을 하는 법을 배우고자 하였습니다. 1년 남짓 만에, 61개 회중으로부터 216명의 전도인과 파이오니아들이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집회에서 통역할 만큼 수화를 배웠습니다. 80개가 넘는 회중에서 지금은 청각 장애인들의 유익을 위해 집회에서 통역 마련을 하고 있습니다.

코트디부아르에서 플로렌스라는 젊은 여자는 수녀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교리가 설명할 수 없는 신비라는 말을 듣고 실망한데다, 한 사제가 끈덕지게 부도덕한 접근을 해 오는 바람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여자는 수녀원을 떠났습니다. 후에 부르키나파소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호별 방문 봉사에서 그 여자를 만났습니다. 「요구」 팜플렛과 「지식」 책을 연구함으로써 그 여자는 신속히 여호와의 행복한 종이 되었습니다.

지난해에 두 번이나,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의 방기에서는, 전쟁으로 분열된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부터 강을 건너 도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증인들에게 왕국회관들과 가정집들이 개방되었습니다. 7월에 200명이 넘는 형제 자매들과 그들의 가족이 다른 난민들과 함께 방기로 넘어와야 하였습니다. 난민의 대다수는 부두 앞 노천 공터에 모여 있었지만, 우리 형제들은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돌봄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위해 두 왕국회관에서 린갈라어로 집회가 마련되었고, 다섯 가지 주간 집회가 모두 사회되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관찰한 한 지방 당국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은 경탄스럽군요. 여러분의 회관을 이들 빈민을 수용하기 위해 개방하다니 말입니다. 이 일로 여러분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회관 앞을 지나가던 또 한 사람은 선교인을 불러 세우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네는 전파하는 그대로 실천하는군요. 잘되길 바랍니다. 하느님이 이 일을 보시고 당신들을 축복하실 겁니다.”

가나에서 한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은 몇 해 전에 입원해 있는 동안 몸이 상당히 불편하면서도 병상에서 병상으로 증거를 하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고마워하는 사람도 있었고, 거절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 여자는 귀담아듣기는 하는데 겉보기에 반응이 없었습니다. 몇 해가 지나, 가나에서 “하느님이 인도하는 생활의 길” 지역 대회에 참석했다가, 지금은 특별 파이오니아가 된 그 전도인은 한 여자를 보고 누구인지 알아차렸습니다. “아니, 여긴 어떻게 왔어요?” 하고 파이오니아가 물었습니다.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신 분이셔요. 나는 항상 자매를 언젠가 다시 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자매가 병원에서 내 마음속에 심어 준 왕국 진리에 대해 감사하려고 말입니다. 그때는 몸이 너무 아파서 반응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자매가 ‘어떤 거주자도 “내가 병들었다”고 말하지 않을’ 하느님의 왕국 아래 낙원에서 사는 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해 준 것이 자꾸만 생각나서 곰곰이 되새겨 보았지요. 그래서 퇴원하자마자 여호와의 증인을 찾았는데, 그 증인들이 더 가르쳐 주기 시작했어요. 그 후 얼마 안 있어 자리를 옮기게 되었어요. 새로 발령받은 곳에서도 여호와의 증인을 찾아 성서 연구를 계속하였지요. 그 결과 내일 이 대회에서 침례를 받게 되었답니다.” 그 두 여인은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로 그 병원에서 증거한 것이 정말로 훌륭한 열매를 맺었던 것입니다!

말리에서, 마술 행위 때문에 13년 동안 지체 부자유자가 된 한 여자가 여호와의 증인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손과 무릎으로 기어야만 돌아다닐 수가 있었습니다.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에게 회중 집회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긴 했지만, 신체 장애의 정도로 보아 우리 자매는 그가 왕국회관에 오게 되리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여자는 이미 진리에 감동되어 있었습니다. 그 여자가 왕국회관 앞에 와서 집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형제 자매들이 목격하였을 때 얼마나 놀랐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승용차를 가진 형제가 나중에 그를 집에 데려다 주기로 하였습니다. 연구가 진전되고 여호와에 대한 믿음이 자라감에 따라, 그 여자는 악령들에 속박된 상태에서 풀려났습니다. 서서히 양다리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하더니, 6개월이 지나자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여호와의 침례받은 종입니다.

우간다의 한 정규 파이오니아는 새로운 직장에 출근한 둘째 날 점심 식사 시간에 직장 동료와 이런 식으로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봐요, 난 직장 동료의 이름을 전부 안다는 게 꽤 도전이 되는 것 같아요.” 그의 동료가 말하였습니다. “아, 걱정할 것 없어요. 곧 문제 없을 겁니다. 난 윌리엄이라고 해요.” 파이오니아가 대답하였습니다. “자기 소개를 해줘서 고마워요. 친절하군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안다는 것이 세계적인 문제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무슨 말이죠?” 하고 윌리엄이 물었습니다. 파이오니아는 이렇게 계속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우주와 모든 생물의 창조주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쉽사리 그 이름을 댈 수 있겠어요?” 하느님의 이름에 관한 토의는 그 다음날 성서 연구로 이어졌습니다. 윌리엄은 이 파이오니아가 자기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도록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지금은 그의 가족 성원 다섯 명이 침례받은 증인입니다. 기념식 전에 파이오니아는 사무실마다 찾아가 동료들을 이 중요한 행사에 초대하였습니다. 40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 참으로 기뻐하였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종종 그들은 자기 집을 버리고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난민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면, 그들은 좋은 소식을 계속 전파합니다. 서아프리카, 기니비사우의 수도에 사는 많은 형제 자매들은 부바 읍으로 240킬로미터를 도피하였습니다. 한 형제와 그의 아내가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는데, 그때는 회중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머지않아 수도로부터 증인들이 도착한 뒤에는 집회가 마련되고 증거 활동이 진전되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40명이 집회에 참석하고, 70건의 성서 연구가 사회되었습니다.

부룬디에서, 기테라니이 회중에 있는 30명의 전도인은 160킬로미터를 걸어서 카얀자에서 열리는 순회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여행은 사흘 길이었습니다. 자전거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어느 정도 거리를 태워 준 다음에, 뒤에 처져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되돌아가 그들이 어느 거리만큼 앞서는 지점까지 태워 주는 등의 일을 하였습니다. 은제이마나 진의 가족은 전체가—아내, 장모, 소아마비에 걸려 지팡이를 사용하는 자녀를 포함하여 일곱 자녀가—그 여행을 하였습니다. 크게 기뻐하면서 모두는 대회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아메리카 대륙

18세기경에는, 성경 전서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는 언어가 되어 있던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로 나와 있었습니다. 19세기 후반에는, 나중에 여호와의 증인으로 불리게 된 사람들이 성서 교육 프로그램에 착수하여, 1935년경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거의 모든 나라에 파급되었습니다. 현재는 이들 나라에 276만 9625명의 열심 있는 증인들이 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날씨가 매우 추워지는데도, 좋은 소식의 전파는 계속됩니다. 알래스카에 있는 노스폴 회중의 한 장로는 호별 방문 봉사가 심지어 섭씨 영하 37도에서도 계속되고, 집회는 기온이 섭씨 영하 48도까지 내려가도 열린다고 알려 줍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봉사하려면 인내가 요구됩니다.

일부 대도시 구역에는 건물이 많은데, 그러한 곳에서는 범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집주인이 전도인에게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주는 일이 드뭅니다. 아르헨티나에서, 그런 건물에서 증거하던 한 전도인은 인터폰으로 이야기하는데, 한 부인이 주의 깊이 귀를 기울였습니다. 다음 번에 대화를 계속하기로 약속이 되었습니다. 여러 번 재방문을 하였는데 직접 대면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흥미로운 대화가 오고 갔으며, 인터폰을 통해 성구도 읽어 주었습니다. 드디어 4개월 뒤, 그 부인은 전도인을 자기 아파트로 초대하였고,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전도인이 참을성 있게 꾸준했던 보람이 있었습니다.

미국에는 1만 7000개가 넘는 양로원이 있어, 수십만 명의 고령 시민이 기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인 집단에 좋은 소식을 가지고 어떻게 접근할 수 있습니까? 일부 회중에서는 그러한 시설에서 일하는 노인 활동 담당자에게 접근하여, 거주자들의 영적 필요를 충당하는 데 일조하겠다고 자원함으로써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한 경우를 들면, 회중에서 나온 자원 봉사자들이, 참석하기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무료 주간 성서 연구를 사회할 용의가 있다는 설명을 하였습니다. 제안은 기꺼이 수락되었습니다. 종종 양로원 직원, 가족 성원, 기타 방문객이나 자원 봉사자들도 연구에 가담하곤 하였습니다. 노인 활동 담당자는 이러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연구 그룹은 영적인 지원을 제공하여, 이곳 거주자들의 복지를 계속 증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서 연구를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합니다.” 그 여성 담당자는 그 마련이 노인들에게 얼마나 정신적 활력을 불어넣었는지 인식하였습니다. 직원들이 기쁘게도, 한 연로한 부인은 양로원에 들어온 이후 내내 말을 하지 않다가 성서 연구 시간에 해설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노인 남자는 다른 어떤 그룹 활동에도 참석한 적이 없었는데, 성서 연구에는 열심히 참석하였습니다.

칠레에 사는 한 자매는 공동 묘지에서 증거하던 중, 열두 살 된 아들을 사고로 잃은 한 부인과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슬픔에 잠긴 그 어머니는 아들의 무덤을 매일 두 번씩 찾아왔습니다. 증인 자매는 부인에게 부활의 희망을 들려 주었고,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부인은, 역시 어린 아들을 잃고서 매일같이 아들의 무덤에 갔다 오는 이웃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부인도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부인의 어머니가 공동 묘지를 찾아왔다가, 자기 교회 사제에게 죽은 손자를 위해 예배를 봐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사제가 불쾌하게 대답하는 바람에, 할머니는 교회 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이들 세 부인은 그들이 새로 찾은 희망을 공동 묘지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을지라도, 누군가가 진리를 배우도록 돕는 일에서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사용하시게 하겠습니까? 코스타리카에서 한 선교인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 자매는 아직 스페인어로 의사 소통을 제대로 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독실한 가톨릭 교인인 아나와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팜플렛을 성서와 함께 사용하였습니다. 아나는 시력이 좋지 않아서, 항이나 성구를 낭독할 때 그저 듣기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점에 대해 해설하였습니다. 한 주는 아나가 선교인 자매에게 다음과 같은 격려적인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없어서 제게 불편한 건 없어요. 우리가 토의해 온 많은 내용은 가톨릭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하고는 달라요.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장황한 설명을 제가 들었더라면 믿지 않았을건대, 댁은 저에게 이러한 것들을 긴 설명 없이 성서로부터 직접 보여 주기에, 그래서 그게 정말 성서의 가르침이라는 걸 알 수 있답니다.”

니카라과에서 증인들은 특정호의 「깨어라!」를 학교 교사들에게 전해 주기 위하여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오늘날 청소년에게 어떠한 희망이 있는가?”라는 주제가 역점을 둔 기사의 한 가지 예입니다. 그러한 기사가 가치가 있음은 명명백백합니다. 한 도시에서는, 한 교사가 반대하긴 했지만 학교 교장은 증인들에게 전체 학생이 모인 데서 설명회를 가져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한 시간 반에 걸친 심포지엄 연설을 제공하였고, 많은 학생들이 서적을 요청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전에 반대했던 그 여교사는 이제 자신이 교장으로 있는 학교에서 증인들이 그 설명회를 다시 열어 줄 것을 원하였습니다. 그대로 해 주었습니다. 그 여교장과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고, 지금 그 여교장은 증인들이 학생들에게 매달 연설해 주기를 원합니다.

유라시아

유라시아라는 명칭은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의 대륙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대륙에서 처음으로 아브라함에게 좋은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갈라디아 3:8) 또한 이 대륙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시대에까지 계속되는 복음 전파 활동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마태 28:19, 20) 여호와의 증인은 유라시아에 있는 약 80개 나라에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워치 타워 협회는 이미 수백 가지 언어로 성서 서적을 인쇄해 온 데 더하여 1995년 이래 36개의 언어를 추가함으로써, 이 지역에 사는 1억 7000만 명에게 더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언어 가운데는 몽골어, 아제르바이잔어, 우즈베크어, 카자흐어, 타지크어, 펀자브어(나스탈리크어)가 있습니다.

1999년 중 코소보에서는 심각한 문제들이 격화되었습니다. 코소보로부터 80만 명에 육박하는, 유고의 소수 민족 알바니아인들이 난민이 되어 이웃 나라들로 왔습니다. 그 가운데 거의 50만 명은 알바니아로 도피하였습니다. 난민 가운데는 여호와의 증인 열네 명과 그들에게 딸린 자녀 여덟 명이 있었습니다. 알바니아의 증인들은 그들의 집을 개방하였고, 매우 어려운 시기가 지나기까지 이 형제들을 도와 주었습니다. 민족간의 갈등이 악화되어 감에 따라, 코소보 형제들이 우선해서 해야 할 일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들은 세르비아계 형제들이 안전한지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한편 세르비아계 증인들은 소수 민족 알바니아계 형제들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들과 접촉하고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민족간의 증오와는 대조적으로, 그들 사이에는 참으로 사랑이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4개월이 지나자 코소보 형제들은 집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들은 물질적인 많은 것을 얻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위로가 되는 하느님의 왕국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데 사용할 서적 상자들을 요청하였습니다.

벨기에에서는, 한 증인이 인터폰으로 한 부인에게 이야기하자, 부인은 당분간은 그런 이야기를 나눌 심경이 아니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우리 자매는 나중에 전화로 다시 연락하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부인은 며칠 후 실제로 그 전화를 받았을 때 놀랐습니다. 그는 자기가 이사를 가야만 하고 그래서 공공 복지 사무소에 다른 아파트를 구하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해 두었다고 사정을 설명하였습니다. 또 한번 전화 통화가 있고 나서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그래서 증인 자매는 그 부인 앞으로 편지를 써서 공공 복지 사무소에 보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 편지는 그 부인의 서류철로 들어갔고, 몇 주 후 드디어 부인이 편지를 받았을 때 접촉이 재개되었습니다. 그때는 「우리의 왕국 봉사」에서 이렇게 제안하던 때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연구를 시작하기 위해 연합된 노력을 기울이고 우리의 노력을 여호와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한다면, 분명히 우리는 새로운 연구를 찾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 열렬히 기도를 드린 다음, 우리의 자매는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가 부인과 몹시 성서 연구를 하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부인은 동의하였습니다. 지금 부인과 그의 남편은 회중 집회에 참석하며, 부인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신이 배우고 있는 좋은 것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어느 비오는 날, 한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 자매와 그의 봉사 짝은 증거가 거의 되지 않은 말레이시아의 한 읍에서 가게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세찬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면서 근처에서 서 있던 한 중학생이 다가오더니 그들이 제공하고 있는 서적을 요청하였습니다. 무료 가정 성서 연구 마련을 그 여학생에게 설명해 주고 나서, 파이오니아들은 그들이 묵고 있는 곳을 알려 주었습니다. 한 주일가량 지난 뒤 학생이 전화를 하였습니다. 서적을 다 읽었고 더 원하였습니다.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책을 탐독하는 이 소녀는 거의 매번 방문 끝에는 출판물을 더 요청하였습니다. 때로는 밤중에 전화를 걸어 출판물에서 언급하는 서적을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파이오니아들은 단지 임시로 그 읍에 와 있었기 때문에, 연구는 한동안은 직접 만나서 그 다음에는 서신 연락으로 사회하였습니다. 2개월 만에 이 소녀는 「지식」 책을 마쳤습니다. 그는 자기 친구들에게 그리고 버스에서도 전파를 하였습니다. 그는 훌륭하게 발전하여 지금은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으로서, 침례받을 자격을 구비하기 위하여 열심입니다.

이탈리아에서 한 증인은 새로 이사 온 사람과 사귀었습니다. 그 이웃은 남편이 직장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직장 건은 성사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족만 이탈리아에 남겨 둔 채 그 남편은 직장을 찾기 위해 다시 해외로 나갔습니다. 남편이 떠나 있는 동안, 이 증인 부부는 그의 아내가 시장에 가도록 도와 주고, 그의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었으며, 때로는 부인과 자녀들을 식사에 초대하고 그에게 절실히 필요한 정신적인 지원을 베풀었습니다. 부인은 그들이 왜 그 모든 일을 해 주느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그 부인은 전에는 증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볼 시간이 전혀 없었는데, 이제는 증인들이 믿는 것을 알고 싶어 궁금하다고 말하였습니다. 부인과 정기적인 성서 연구가 사회되었고, 부인은 회중 집회에도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증인 부부는 그에게 성서 연구를 제의하였지만, 그는 마음에 평화가 없었기 때문에 거절하였습니다. 직장을 구하는 데 다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가족이 이탈리아의 다른 지방으로 이사하였을 때, 증인 부부는 그곳 왕국회관 주소를 구해 그 부인이 회관에 나가도록 격려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매우 소심해서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매는 매주 전화를 걸어, 여호와에 대한 부인의 관심이 살아 있게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 부인은 두 증인이 가두 증거를 하는 것을 보고서 그들에게 성서 연구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집회에도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그의 남편은 직장을 구했습니다. 그도 연구를 요청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지금 헌신하고 침례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두 큰 자녀도 침례를 받았고, 셋째 자녀는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입니다.

룩셈부르크에서 한 파이오니아 자매는 자기 구역에 있는 모든 사람과 접촉하는 데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집에는 항상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고, 집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파이오니아가 딸을 데리러 학교에 가는 길인데, 항상 부재자이던 그 집 앞에서 승용차가 눈에 띠었습니다. 사실, 바로 그 시간에는 야외 봉사에 나가기로 작정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나와서는, 자기는 사실 성서에는 관심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정말 알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자매는 그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책을 남겨 두었습니다. 자매가 남편과 함께 몇 번 재방문한 다음,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그 남자는 일과가 꽉 짜여 있어, 3주에 한 번씩만 연구하기로 동의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서서히 그는 새로운 인생관을 갖게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배우고 행하는 데 시간을 더 투자할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일주일에 나흘 밤을 바쳐 가며 열렬히 추구하던 탁구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 중립 문제를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자, 그는 종사하던 직업을 그만두고 급료가 반도 안 되는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한 변화를 한 것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기뻤습니다. 어쨌든 나는 내 생활을 성서 원칙과 일치시키기를 무척이나 원했거든요. 나는 진리 안에서 계속 진보하여 더 이상 아무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고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이 되었으며, 5개월 후에는 여호와에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물침례를 받았지요.”그는 그 파이오니아 자매가 그렇게 철저히 봉사의 직무를 수행해 준 데 대하여 참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전세계의 섬들

여호와께서는 섬들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온 땅이 그분의 왕 되심을 기뻐하라고 권하십니다. (시 97:1) 이미 기원 33년 오순절에, 크레타 섬 주민들은 이 권유를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 속하였습니다. 20세기에는 전세계의 섬들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응하였습니다. 필리핀에서는 13만 2496명이 여호와의 왕 되심의 영광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본 열도에서는 22만 2857명이 이 행복한 봉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서너 명밖에 살지 않는 섬들에서도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즐거워할 기회를 누리고 있습니다.

사모아에서 한 젊은 파이오니아 형제가 나타낸 친절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형제는 그 지방에 있는 병원의 외래 환자 진찰실에 가서, 번호를 받고, 진찰받을 차례를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번호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다른 대기 환자들 대부분보다 더 아파 보이는 한 연로한 부인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는 간호사에게 자기 차례를 그 부인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그 부인 차례에 할 수 없겠느냐고 상냥하게 물었습니다. 간호사는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동의하였습니다. 다시 형제를 부르는 차례가 왔을 때는, 그가 사는 마을의 한 족장(마타이)이 와서 그의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 형제보다 더 아팠기 때문에, 그가 지체 없이 진찰을 받게 하기 위하여 형제는 다시 자기 차례를 포기하였습니다. 나중에 우리 형제는 그 연로한 부인을 다시 만났는데, 이번에는 시장에서 만났습니다. 부인은 그를 보고서 매우 반가워하고는, 그가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는 대답을 듣자, 부인은 과거에 증인들이 자기를 찾아왔을 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증인들이 참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부인의 주소를 알게 되었고, 정기적인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을 족장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파이오니아의 아버지에게, 전에는 자기가 증인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는데 이제는 그들을 자기 집으로 환영한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기념식에 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처음에 싫어하던 것을 결국은 좋아하게 만들 줄 아는군요.”

사업 구역에서 성서 연구를 시작하고자 시도하는 것이 실제적입니까? 때로는 그렇습니다. 키프로스의 한 특별 파이오니아는 한 사업가에게 잡지를 정기적으로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 남자가 자신이 읽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였을 때, 파이오니아는 「요구」 팜플렛을 사용해서 성서 연구 마련을 보여 주었습니다. 연구는 그 사람이 일하는 바로 그곳에서 진행되었는데, 환경을 고려하여 파이오니아는 그 시간을 매번 10분 또는 15분으로 제한하였습니다.

과들루프에서는 가두 증거를 특별히 강조해 왔습니다. 전도인 대 인구 비율이 1대 55인데, 가두 증거가 정말 필요합니까? 점점 더 사람들이, 집에 있을 때는 위성 텔레비전이나 유선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데 열중합니다. 사람들이 집에서 나와 있을 때 그들이 멈추어 좋은 소식을 듣게 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한 순회 감독자는 세인트마틴에서 15명의 전도인 그룹이 가두 봉사를 하여, 약 두 시간 만에 전도지는 물론 250부의 잡지를 배부하였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물론 출판물을 기꺼이 받는 사람이 너무 바빠서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고 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활 환경이 그 사람의 영적 욕구를 자극하게 될 때, 우선 순위는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로서, 레스아비메 시에 사는 한 여자는 아버지가 사망한 후 마음이 의문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 여자는 거의 매일같이 연구하기를 원합니다. 처음에는 「요구」 팜플렛을, 다음에는 「지식」 책을 사용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추리」 책으로 연구 조사도 하여 참조된 성구들을 종이에 적어 둡니다. 그는 자기가 “개인용 성경을 복사한 이스라엘의 왕과 같”은 심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마도 “소위 모든 그리스도교가 성서를 가지고 있지만 한 종교만 성서를 실천에 옮기는데, 그것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하쓰코는 일본에 사는 홀어머니로, 두 자녀를 양육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재정적으로 부양하기 위해서 그는 두 가지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여호와에 대해 그리고 인류에 대한 그분의 사랑에 찬 목적에 대해 증거할 시간을 언제 냅니까? 자전거로 직장에 가는 데는 각각 20분가량 걸립니다. 그는 매일 이 시간을 증거하는 데 사용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행인, 자동 판매기 앞에 있는 사람, 배달하는 사람, 공사장 일꾼 등등—에게 이야기합니다. 수줍은 성격이라서, 처음에는 대단히 힘들었습니다. 자신이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잡지가 말하게 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또한, 나가기 전에 기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가 실로 점차 수월해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지난 2년 동안 계속 증거해 왔는데, 지금은 매달 200부에서 300부의 잡지를 전합니다. 그 가운데는 거리에서 잡지 통로를 만들어 전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여호와의 증인—그 이름을 지닌 조직」 비디오는 여호와께서 사용하시는 조직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자라게 하는 데 강력한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한 부인은 5년이라는 기간 동안 협회의 잡지를 비롯한 출판물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주에는 증인들이 그 부인이 보도록 그 비디오를 남겨 두었습니다. 다음 방문 때, 그 부인은 전도인들을 집안으로 초대하였습니다. 비디오를 보고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그 부인은 자기를 방문한 증인들을 신뢰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조직도 신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날 부인과 정식으로 「지식」 책 연구가 시작되었고, 그 다음주에 그 부인은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서 조언을 구합니까? 때때로 신문이나 잡지 칼럼니스트에게서 구합니다. 뉴칼레도니아에서 한 파이오니아는 세속 잡지에 제기된 그러한 한 질문에 대해 「깨어라!」의 한 호에 멋진 대답이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는 질문자에게 보내는 글을 써서 그 편지를 잡지 발행인에게 보내면서, 전달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자매는 자기가 그 문제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기사 제목을 언급하고 일부 소제목을 열거하였으며, 몇 가지 인용문을 선별하여 포함시키고는, 그 자료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곧 회답이 와서 그 잡지를 보냈으며, 그리하여 영적인 도움을 더 제공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아일랜드에서 전도인들은 그들의 구역에서 아프리카·동유럽·동양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벨파스트의 한 회중에서 한 번은, 공개 강연과 「파수대」 연구를 만다린 즉 표준 중국어로 하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22명의 관심자가 참석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한 선교인 부부가 벨파스트에서 취업하고 있거나 대학에 다니는 중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훌륭한 활동을 수행한 결과였습니다. 1993년 이래 그 선교인들은 중국의 17개 성(省)과 타이완의 여러 도시에서 온 75명과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습니다. 중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많은 관심자들과 연락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한 번은 부부가 성서 연구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내가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곳에 가서는 성서 연구를 계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슬퍼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몇 주 후 그 남편은 흥분하면서 이야기하기를, 아내로부터 소식이 왔는데, 하루는 아내가 직장에 나가 있는 사이에 증인들이 찾아와, “아일랜드에 있는 댁의 친구들이 우리가 방문하도록 요청했습니다. 다시 찾아오겠습니다”라는 쪽지를 남기고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왔습니다! 중국에서 또 한 부부는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댁이 몹시 보고 싶습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일들이 매우 많았지만, 가장 귀중한 것은 댁과 함께 성서를 연구한 일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서가 지금은 우리 생활의 기본이 된 것 같습니다.”

[49면 삽화]

(1) 모잠비크, (2) 세네갈, (3) 뉴칼레도니아, (4) 볼리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