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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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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인 형제 관계의 결속은 1998년에 체코 공화국의 여호와의 증인에게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인도하는 생활의 길”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키는 국제 대회들이 전세계에서 열리고 있었습니다.

미국 미시간주 폰티액에서 열린 대회에 모인 4만 2763명 가운데는 체코 공화국에서 간 345명도 있었습니다. 그 대회 참석자들은 적어도 44개 나라—아메리카·유럽·아프리카·아시아의 나라들—로부터 모였습니다. 체코 공화국에서는 별도로 700명이 슬로바키아의 700명과 함께 독일 뉘른베르크 대회에도 참석하였는데, 그 대회는 독일에서 동시에 다섯 군데에서 열린 대회 중 하나였습니다. 이 대회들에 참석한 국제적으로 혼합된 청중의 총수는 21만 7472명이었습니다.

체코 대표단은 대회 도시들에 도착하여 따뜻한 환영을 받았을 때, 그리고 전에 만나 본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정답게 자기 집을 숙소로 제공하였을 때, 그리고 나서 대회가 열리는 날 국제 대표단들에게 보내는 열광적인 환영의 박수 소리를 들었을 때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뉘른베르크에서는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에서 온 증인들이 깊은 감회로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이 재회의 기회에 대한 기쁨으로 포옹하고 종종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었습니다.

같은 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바로 체코 공화국에서 열린 그와 비슷한 대회들에 참석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더 큰 대회에서 제공된 프로그램에 더하여 참석자들이 두 권으로 새로 완성된 성서 백과 사전 「성경 통찰」의 체코어 번역판을 받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이 대회들은 체코 공화국의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에서 참으로 행복한 행사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있기까지 걸어온 역정(歷程)은 길고도 험난하였습니다. 그 모든 일은 100여 년 전에 시작되었으며, 여호와 하느님의 사랑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최근의 이러한 상황은 전개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1891년, 당시 워치 타워 협회 회장인 C. T. 러셀은 유럽 순방 중 매우 잠깐이지만 프라하를 방문하였습니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여호와의 증인은 커다란 성장의 기간을 경험하는 동시에 고난과 박해 그리고 체질하여 걸러내는 일을 겪었습니다. 그들의 활동은 46년 동안 완전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금지령 아래 있지 않았던 때에도 증인들이 항상 법적 인가를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체코 땅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경험한 것은 예언자 예레미야의 경험과 같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틀림없이 너를 대적하여 싸울 것이지만, 너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말이다.”—예레미야 1:19.

체코로 알려지다

1918년 10월, 세계 외교 중심지들에서의 정치 협상 끝에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중부 유럽에 형성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시적으로 와해되었다가, 6년이 넘는 나치의 압제 후 재등장하였습니다. 또 40년이 넘는 공산주의 통치를 견뎌 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정치적 존재는 74년 만에 사멸하였습니다. 1993년에는 이 나라의 동쪽 부분이던 곳이 슬로바키아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그리고 실레지아의 일부를 포함하는 서쪽 부분은 체코 공화국, 줄여서 체코가 되었습니다.

체코 공화국의 크기는 동서로 약 500킬로미터, 남북으로 약 250킬로미터입니다. 북쪽과 서쪽으로는 삼림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산악지대가 있습니다. 또 사이사이로 강들이 흐르는 비옥한 곡창 지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부 유럽의 많은 지역이 그러하듯, 환경 오염은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주민의 대부분은 크고 작은 도회지들에 삽니다.

1912년에서 1970년까지의 구체코슬로바키아 전체에 대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상에 관해서는 「1972 연감」(영문)에 간략한 보고가 실려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이 이번에 나오지만, 이 보고는 현재의 체코 공화국에 주된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유산

수도 프라하는 때때로 100개의 뾰족탑을 가진 도시로 불립니다. 그러나 그 많은 교회 뾰족탑들도 체코 공화국이 오늘날의 체코—기본적으로 무신론적인 나라—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러했던 것은 아닙니다.

모라비아의 통치자 라스티슬라브공(公)의 요청으로 비잔틴 제국의 황제 미카엘 3세는 기원 863년에 선교단을 모라비아에 파견하였습니다. 선교단을 구성한 두 사람인 콘스탄티누스(후에 키릴루스로 알려짐)와 메토디우스는 그리스의 테살로니카 출신의 교직자들이었습니다. 이 지역 언어로 예배를 주재하는 일 외에도 콘스탄티누스는 모라비아인들이 말하는 슬라브 말에 적합한 자모(字母)를 고안해 냈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그 자모를 이용해서 성서의 일부를 번역하였습니다. 그렇긴 했어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하는 일은 먼 훗날의 일이었습니다.

긴급한 소식을 선포하다

C. T. 러셀의 짧은 프라하 방문이 있은 지 약 16년 후인 1907년, 한 연로한 성경 연구생(당시 여호와의 증인의 명칭)이 한 달에 한 번씩 북부 보헤미아를 방문하여 성서 서적을 배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에를러 형제로서, 독일 드레스덴에서 왔습니다. 그는 리베레츠를 비롯하여 여러 읍에서, 한 번 오면 이삼 일 동안 열심히 증거하였습니다. 그는 C. T. 러셀의 저서 「아마겟돈 전쟁」을 배부하면서 대재난이 1914년에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선포하였습니다.

1912년에 와서는, 몇몇 열정적인 사람들이 성서 진리의 씨를 뿌리고, 작은 집단을 구성하였으며 또 침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1914년에 세계 대전이 일어날 때 성경 연구생들은 그 일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기대가 그 해에 모두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초기의 여러 해 동안 성경 연구생들이 이곳에서 배부한 서적은 독일어 서적이었습니다. 일부 독일어권 주민들은 그것을 감사히 받았습니다. 플제니 출신의 카를로타 양코브초바는, 드레스덴에서 와서 1925년에 자기 집을 방문한 성경 연구생으로부터 어머니가 러셀 형제의 책을 몇 권 받았던 일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곧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자매는 이렇게 말합니다. “개인 연구와 집회 준비를 많이 하였습니다. 매주 일요일은 하루 종일을 야외 봉사에 보냈지요. 우리는 성경 연구생들이었고, 「파수대」를 연구하고 서적들을 읽었으며, 또 「회보」[현재의 명칭은 「우리의 왕국 봉사」]도 받아 보았습니다.”

점차 서적이 체코어로 번역되었습니다. 1922년에는 흥미진진한 출판물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를 볼 수 있었는데, 그 책을 체코 사람들에게 배부하기 위하여 세 사람이 콜포처로 전 시간 봉사에 들어갔습니다. 늦어도 1923년까지는 16면판 「파수대」를 이곳에서 매달 체코어로 볼 수 있었습니다.

체코 땅에서 좋은 소식을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1923년에 안토닌 글레이스너는 아내와 함께 독일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워치 타워 협회 지부 사무실로부터 보헤미아로 파견되었습니다. 1916년에 모스트 읍에서 이미 집회를 사회한 바 있는 글레이스너 형제의 감독하에, 협회는 그곳에 서적 보관소를 개설하였습니다.

1928년에 마그데부르크 지부 사무실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활동을 좀더 면밀히 감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집단들을 조직하는 일이 개선되고, 야외 봉사 효율이 증대되었으며, 콜포처 활동을 조정하는 일이 개선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각 집단은 물론 콜포처(현재 파이오니아로 알려진 봉사자들의 선구자)들도 전파할 확정된 구역을 임명받았습니다. 그 해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들어온 보고를 보면, 106명의 선포자로 구성된 25개의 작은 집단과 여섯 명의 콜포처가 있었습니다. 모두 합하여, 그들은 6만 4484부의 서적과 소책자 그리고 2만 5000부의 잡지를 전하였고, 관심자들을 인류의 여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인 하느님의 왕국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 다음해, 오토 에스텔만이 워치 타워 협회의 감동적인 “창조 사진극”을 가지고 독일에서 왔습니다. 그 사진극은 이 나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관객들에게 상영되었습니다. 이 활동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1933년 후반기인데, 그때 형제들은 프라하에서 가장 큰 영화관 카피톨을 빌려 “사진극”을 4회 연속으로 상영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영화관을 이틀 저녁 더 예약하였습니다. 그 후에 있을 성서 강연에 초대받기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름과 주소를 적어 냈습니다. 물론, 조직의 성장이 분명히 드러나면서 박해도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예상하라고 말씀하신 박해입니다.—요한 15:18-20.

좋은 소식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

이 시기에, 좋은 소식은 후일에 이 나라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한 남자에게 전해졌습니다. 그의 이름은 보후밀 뮐러였습니다. 1987년에 지상 생애가 끝나 갈 때 그는 55년이 넘는 충실한 봉사를 회고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그가 믿음을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제 수용소와 감옥에서 보낸 약 14년이라는 세월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1931년, 열여섯 살이던 보후밀은 식자공이 되려고 일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동생 카렐은 서적 제본 기술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토마시 뮐러는 오랜 전통과 역사를 크게 자랑하는 ‘동포 교단’에서 지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카렐의 직장 상사는 그에게 “창조 사진극”을 관람하라고 입장권을 주었습니다. 첫 상영을 보고 난 뒤 카렐은 감격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전부 설명하고는, 자기가 받아 온 독일어로 된 두 권의 책을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다음날 저녁, 그는 한층 더 감격해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체코어 「창조」 책을 가지고 왔습니다. 자신이 느낀 바를 설명하면서, 그는 성서 강연에 더 초대받기 위하여 프로그램이 끝날 때 집 주소를 제출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한 달쯤 지나, 가족이 일요일 점심을 막 마쳤는데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보후밀 뮐러는 훗날 이렇게 썼습니다. “아버지가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잠시 현관에서 방문객과 이야기를 나누시더니, 얼굴에 놀란 표정을 하시고는 주방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첫말씀이 이러하셨습니다. ‘이런 일은 난생 처음인데. 생각 좀 해봐, 일요일인데 한 남자가 우릴 강연에 초대한다고 우리 집까지 일부러 찾아와 주다니! 성경 연구생들이 하는 강연이래. 우리 동포 교단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 우린 너무 게으르단 말이야!’” 그후 뮐러 가족은 작은 집단의 여호와의 증인들과 정기적으로 만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보후밀은 여호와께 헌신하였지만, 그 후로도 2년가량은 침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 즈음에는 이미 회중 감독자(당시 명칭은 봉사 지휘자)의 보조자로 일하여 집회를 사회하고 있었고, 또 협회의 프라하 사무실에 있는 베델 집에서도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침례의 심각성을 그 당시에는 모든 증인들이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략 이때쯤 보후밀의 사촌인 리부셰 슈테케로바가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가 침례는 더 빨리 받았습니다. 슈테케로바 자매는 훗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삼촌인 토마시 뮐러는 종교심이 매우 강한 분이셨습니다. 1932년 어느 여름날 오후, 삼촌은 내게 하느님의 이름 여호와에 대해, 세상의 장래에 관해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하는 집단의 놀라운 성서 집회에 관해 말해 주었지요. 마침내 삼촌은 J. F. 러더퍼드의 저서 「구출」 책을 전해 주셨습니다. 나는 창조주께서 내가 이해하기 원하시는 것이 있다는 점을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처음 참석한 봉사회에서, 프라하에서 이제 곧 두 번째로 침례가 있게 되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듣기는 했어도, 무슨 일이 곧 있게 된다는 얘긴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 오는 길에 뮐러 삼촌이 ‘너도 침례받고 싶지 않니?’ 하고 물으시더군요. ‘그렇지만 저는 아직 아는 게 없잖아요’ 하고 이의를 제기했지요. 삼촌은 계속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넌 말하자면 개종자인 거야. 너는 성서를 알고 있지. 넌 그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알고, 너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면 되는 거야.’ 그래서 삼촌에게 침례받게 서명을 해 달라고 했고, 1933년 4월 6일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 자매는 자신에 대한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배웠고, 그래서 1995년에 사망하기까지 그분을 충실하게 섬겼습니다.

그 시절에는 새로운 관심자와의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지 않았습니다. 야외 봉사 훈련이란 종종 다른 증인을 따라 한 집으로 가서 관찰하고 난 다음에 혼자 가서 하게 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당시 여러 해 동안 많은 여자들이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생활에서 봉사의 직무가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고, 그래서 많은 일을 달성하였습니다. 그들은 종종 자녀들을 함께 데리고 다녔는데, 그 결과 자녀들이 먼저 여호와의 축복을 경험하였습니다. 블랑카 피코바는 열 살 때 어머니와 야외 봉사에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자매는 한 가지 일을 기억합니다. “어머니와 나는 한 마을에서 봉사하도록 구역 임명을 받았습니다. 내게는 마을 광장 주변을 돌아가며 봉사하라고 말씀하시고, 어머니는 외곽에 있는 집들에서 봉사하셨지요. 광장에 다가가면서 보니까 거기에 거위가 꽉 차 있어서, 그만 겁에 질려버렸어요. 다른 동물은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거위는 두려워했거든요. 거위들이 슛슛 하다가 나를 물려고 해서 나는 가방을 방패막이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절망 끝에 “주 여호와여, 구해 주세요!” 하고 기도했지요. 눈 깜짝할 사이에, 거위들은 도망가고 내 곁엔 커다란 세인트버너드 개가 서 있지 않겠어요. 쓰다듬어 주었더니, 개는 집집으로 나를 따라다녔습니다. 거위들은 다시는 감히 내게 가까이 오질 못했지요.” 나중에 그의 어머니는 그 일로 인해 블랑카가 여호와의 사랑의 돌봄을 자각하게 된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하다

1932년에는 유럽의 이 지역에 봉사의 직무에 사용할 또 하나의 도구가 생겼습니다. 「황금 시대」(지금의 「깨어라!」)가 체코에 등장한 것입니다. 그 해에 7만 1200부가 사람들의 손에 전해졌습니다. 「황금 시대」를 읽고 난 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성서를 더 광범하게 다룬 다른 출판물도 받고자 하였습니다.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기회를 주기 위하여, 독일로부터 파이오니아들이 파견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서 검소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1932년에 보고를 낸 84명의 파이오니아 가운데 34명은 독일 출신이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의 경우, 이러한 활동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 언어에 숙달되기까지, 그들은 무슨 일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까? 프라하에서 봉사한 독일 형제 오스카 호프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나라의 언어는 몰랐지만, 나는 매일 사람들을 집으로 방문하였습니다. 내가 왜 방문하는지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서, 그들이 자기 나라 말로 된 짧은 연설문이 실려 있는 증거 카드를 읽어 보도록 요청했지요. 이러한 방법으로 수천 부의 성서 출판물을 체코 사람들의 손에 전해 주었습니다.”

외국인의 유입을 억제하기 위한 정부의 특별 행정 입법 때문에 외국에서 온 파이오니아들은 대부분 1934년에 떠날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활동이 이미 많이 수행되었습니다. 그 해 중에, 파이오니아들은 정규 집단에 임명되지 않은 지역의 대부분에서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외국인 파이오니아들이 그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바로 그 해, 협회는 이 나라 증인들에게 축음기 판에 녹음된 성서 강연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 나라의 형제들은 칭찬할 만한 솔선력을 나타냈습니다. 프라하 회중에서는 ‘인디언 750’형 오토바이를 사이드카와 함께 구입해서, 사이드카에 확성 장치를 설치하였습니다. 마을의 광장이나 공터 같은 곳에 도착하면 형제들은 확성 장치를 높은 삼발이에 설치한 다음, 녹음된 음악을 틀어 놓고서 그동안에 호별 방문을 하였습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음악에 이끌려 나왔을 때, 형제들은 짧은 성서 강연이 실린 레코드 판을 틀곤 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형제들은 일요일 단 하루 아침에 여러 마을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법적 등록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위한 법적 기초를 마련하는 조처가 1930년에 취해졌습니다. 이 조처에는 부동산 소유권을 보유하고 서적을 취득하며, 그 밖의 필요한 봉사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법인체의 구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프라하에서 특별 모임이 열려, 참가자들은 두 개의 법인체를 구성하는 계획을 적극 수용하고 그에 대한 정관들을 승인하였습니다. 첫 번째 법인체는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체코 지부)라고 명명되었습니다. 이 법인체는 출판물을 취득하고 집회를 관장하며 서적을 배부하는 업무를 취급하였습니다. 두 번째 법인체는 ‘만국 성경 연구회 체코슬로바키아 지부’(Mezinárodní sdružení badatelů Bible, československá větev)라 칭하고, 그 소재지를 프라하에 두었습니다. 이 법인체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감독하는 법적 대행 기관 역할을 하였습니다. 만국 성경 연구회의 체코슬로바키아 지부에 세 개의 사무실을 설치하여, 각각 이 공화국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업무를 취급하게 하였습니다. 체코 땅에서의 활동은 브르노 시에 소재한 사무실에서 감독하였으며, 안토닌 글레이스너가 이사장직을 맡았습니다. 이 법인체들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복음 전파 활동을 원활하게 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3년 후인 1933년, 워치 타워 협회는 프라하에 지부 사무실을 열어, 여기서 인쇄 활동을 수행하였습니다. 이 일이 필요하게 된 것은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한 후 발생한 어려운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독일에서는 금지령이 내려지고,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협회 지부가 압류당하였던 것입니다. 마그데부르크에서 온 에드가르 메르크가 프라하에서 지부의 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프라하 출신의 카렐 코페츠키는 베델 집과 사무실을 감독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프라하에서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인 자존심과 그 밖의 요인들로 인해서 이들 두 형제 간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1936년에 프라하 지부는 스위스에 소재한 협회의 중앙 유럽 사무소의 감독하에 들어갔습니다. 그 직후,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협회의 법인체에서 책임 있는 자리를 차지하던 두 사람 카렐 코페츠키와 요세프 귀틀러가 사임하였습니다. 그들 대신에 요세프 바너와 보후밀 뮐러가 그 자리에 임명되었습니다. 새로운 지부의 종은 하인리히 드벵거로서, 성품이 온화하고 이미 여러가지 신권 임명을 맡아 본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종이었습니다. 사랑에 찬 감독과 함께 회중들은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불안이 점증하던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절실히 필요하던 소식—을 선포하는 일에 계속 기쁘게 참여하였습니다.

국제적인 모임에 의해서 강화되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다른 나라들에서 증인들이 대회를 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대회를 열기를 열망하였습니다.

당시 명칭으로 말해서 큰 ‘국제 모임’을 프라하에서 마련하여, 바리에테 극장에서 1932년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열기로 하였습니다. 이 대회는 그러한 국제 대회로는 이 나라에서 처음이었습니다. 공개 강연은 시기 적절하게도 “멸망을 앞둔 유럽”이라는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프로그램은 체코어·독일어·헝가리어·러시아어·슬로바키아어로 통역되었습니다. 참석자 수는 1500명이었습니다. 강력한 증거가 행해졌습니다. 대회 기간에 대표자들이 호별 방문 봉사에 참여함으로써 2만 1000여 부의 성서 출판물을 사람들에게 전하였던 것입니다.

1937년에 또 하나의 국제 모임이 프라하에서 열렸습니다. 수백 명의 방문객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폴란드·독일 등지에서 왔습니다. “그 대회는 참으로 훌륭한 대회였습니다!” 뮐러 형제가 나중에 회상하였습니다.

좋은 소식의 전파는 계속해서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으로 진전되었습니다. 1937년 중에 증인들은 일곱 대의 확성 장치와 50대의 축음기를 활용하여 녹음된 성서 강연을 재생하였습니다. 그 해에 이 장비를 사용하여 녹음된 성서 강연을 2946회나 총 3만 1279명에 달하는 청중에게 공개적으로 제공하였습니다. 그 해의 체코슬로바키아 활동 보고서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이 나라 전역에서 좋은 소식의 전파 활동은 전진해 왔다. 그 소식은 도회지는 물론 시골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들었으며, 심지어 으리으리한 대저택이나 산 위에 있는 유서 깊은 고가(古家)에까지 이르렀다.”

다가오는 나치의 위협

제2차 세계 대전이 임박하였습니다. 유럽에서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그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었습니까? 군복무에 대한 양심적 거부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아직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어느 주요 전통 종교도 그리스도인 중립을 유지하는 선까지 성서 표준을 옹호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나라에서 그리스도인 중립 옹호자로 투옥된 첫 사람은 보후밀 뮐러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1937년 10월 1일 군에 입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양심은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종들이 ‘전쟁을 배우’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나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이사야 2:4) 나는 앞에 놓인 시련을 이길 힘과 인내력을 여호와께서 나에게 주실 것을 크게 의지하였습니다. 내가 취한 입장으로 인하여, 1939년 3월 말까지는 군법정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네 번 받았고, 그때마다 몇 개월의 금고형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를 돌이켜볼 때, 지금은 그러한 시련들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시련들이 다가오는 더욱 험난한 때를 대비하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치의 위협이 증가하면서, 여호와의 종들에게 가해지는 압력도 증대되었습니다. 독일 국경에 인접한 변경 지역에서는 반대 행위가 강렬해졌습니다. 1938년 8월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가 금지되어, 증인들은 작은 집단으로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리부셰 슈테케로바는 이렇게 썼습니다. “1938년 중에 정치적으로 긴장된 상황이 심화되어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서 증거하도록 자신을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후 전시에는, 어떤 사람과 충분히 사귀고 난 다음에 우리의 믿음에 관하여 이야기하곤 하였습니다.”

1938년 중에 독일은 진격하여, 당시로는 체코슬로바키아 국경 안에 있던 수데텐란트를 점령하였습니다. 전쟁을 피하기 위한 시도로 영국과 프랑스는 수데텐란트가 독일의 일부라는 히틀러의 요구를 묵인해 주었고, 그리하여 그곳 주민들은 나치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독일의 점령이 시작되면서

1939년 3월 15일, 독일군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전역을 점령하였습니다. 히틀러는 ‘보헤미아 모라비아 보호국’이라는, 자체 대통령과 꼭두각시 정부가 있는 새로운 국가를 고안해 냈습니다.

신속하게 게슈타포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그들은 3월 30일에 워치 타워 협회의 프라하 사무실에 들이닥쳤습니다. 4월 1일, 보후밀 뮐러는 그리스도인 중립 때문에 받은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석방되었습니다. 감옥에서 기차역으로 가는 도중 지부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는 훗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다음날 도착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고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날 우리는 세 사람이 베델에 있었습니다. 할 일이 많았습니다. 인쇄 장비 일부는 네덜란드로 발송하기 위하여 이미 한 항구에 대기 중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즉시 포장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마테이카 형제와 나는 그 임무를 맡는 한편, 카피누스 형제는 사무실과 베델 구내를 정리하였습니다. 그러는 한편 우리는 잡지—「파수대」와 「위안」(지금의 「깨어라!」)—도 번역하였습니다. 또한, 게슈타포가 3월에 급습하였을 때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다량의 체코어 서적과 소책자들을 다른 곳으로 비밀리에 옮겨 갔습니다. 그처럼 뒷정리를 하는 동안 게슈타포는 그것도 모르고 지부에 몇 번이나 왔다갔습니다.”

점령이 시작된 후, 전파할 여건이 매우 곤란해지리라는 점이 분명하였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났습니다. 드벵거 형제는 게슈타포가 자기를 체포하러 오던 바로 그날 저녁 체포 직전에 스위스로 떠났습니다. 뮐러 형제 역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떠나는 데 필요한 허가를 정부 당국으로부터 이미 받은 상황이었는데, 베른에 있는 지부로부터 편지가 도착하였습니다. 그 편지는, 그가 자신의 임무를 계속함으로서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형제들에게 필요한 감독과 격려를 베풀 수 있다면 유익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뮐러 형제는 그 즉시 제의에 응하고서, 자신의 마음이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자기 여권을 파기해 버렸습니다.

48년이 지나간 후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지금 나에게 1939년 봄에 프라하를 떠나지 않은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 본다면, 단호히 ‘아닙니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머물러 있었던 것을 결코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기가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이 나를 둔 곳입니다. 실로, 자주 당한 그 모든 끔찍한 고난과 구타도, 해마다 활동이 성장하고 주위에 전능자의 즐거운 숭배자의 무리가 증가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느끼던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1939년부터 내내, 게슈타포의 손에 의한 검거 선풍이 일었습니다.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는 브르노 회중의 영적 기둥인 오토 부흐타도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마우타우젠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하였습니다. 1940년 가을, 전에 프라하의 지부 사무실에서 일한 적이 있는 카피누스 형제는 모라비아에서 다른 형제 자매들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충실한 증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계속 말씀을 전파하였습니다.

보다 순조로운 시기에 여호와를 섬기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숭배를 버리고 여호와의 백성의 적들과 제휴하였습니다. 카렐 코페츠키는 매우 유능하고 열심 있는 형제였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그의 동료 일꾼이던 뮐러 형제가 1940년에 만났을 때는 코페츠키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형제들은 한 성서 출판물을 등사해서, 우편으로 보내려고 봉투에 넣었습니다. 뮐러 형제는 그것을 자루에 넣어 가지고 프라하의 이 우체국에서 저 우체국으로 연이어 자전거로 달렸습니다. 그는 각 우편함에 봉투를 몇 개씩 넣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한 우체국에 들어섰을 때 어떤 남자가 카운터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SS 단원의 제복을 입고 있더군요. 걸음을 멈추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그 사람이 몸을 돌리는 바람에 우리는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되었습니다. 잠시 우리는 서로를 응시했습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그 얼굴은 이전의 형제 카렐 코페츠키였습니다! 나는 얼른 침착성을 되찾고서, 한 카운터로 걸어가 양식 한 가지를 집어 들고는 우체국을 나서서 자전거를 타고 황급히 떠나 버렸습니다.”

다음해에 뮐러 형제는 이 나라의 활동을 감독하는 일을 하다가 체포되어 마우타우젠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불타는 가마” 속에서 전파하다

여러 해에 걸쳐서, 강제 수용소와 그곳에서 당한 우리 형제들의 고난에 대하여 많은 사연이 기록되어 왔습니다. 그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는 체코에서 끌려간 여호와의 증인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당한 고난을 세세히 열거하지는 않겠지만, 그 “불타는 가마” 속에서도 그들이 어떻게 영적으로 세움을 받았고,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세워 주었는지 설명하고자 합니다.—비교 다니엘 3:20, 21.

당시 전세계 사람들은 ‘리디체’라는 체코의 마을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1942년 6월 9/10일, 히틀러의 직접 명령에 따라, 한 독일 장교의 죽음에 대한 보복 행위로 온 마을이 폐허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 마을 이름이 유럽 지도에서 지워지게 되었습니다. 그 공포 상황에서 살아남은 보제나 보드라지코바는 후일에 이렇게 술회하였습니다. “게슈타포는 우리 마을을 샅샅이 돌았어요. 남자는 모두 사살하고, 아이들은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어 갔으며, 여자들은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로 실려 갔습니다. 거기서 나는 우리 주 여호와의 증인들을 만났지요. ·⁠·⁠· 한번은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보제나, 내가 성경 연구생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어. 그들은 놀라운 얘기를 하던데. 동화처럼 들리긴 하지만 그들의 주장인즉, 성서가 말하는 것은 참되고 하느님의 왕국이 도래해서 악을 일소할 거라는 거야.’ 그 후 그들을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내게 하느님의 왕국에 대해 증거해 주었는데, 나는 그들의 소식에 매료되는 느낌이었어요,” 물론, 보제나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많은 수감자들은 수용소 내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행실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알로이스 미체크는 이렇게 술회합니다. “전시에 나는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마우타우젠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의 증인들은 어떻게 해서인지 「파수대」를 비롯한 서적을 구할 수 있었는데, 그걸 가지고 일부 동료 수감자들을 가르치더군요. 친위대는 그걸 막을 도리가 없었지요. 그래서 경고 조치로, 친위대는 수용소 내 증인 열 명당 한 명을 사살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증인을 줄을 맞추어 세워 놓고는, 매 열 번째 되는 사람을 무장 경비하에 한쪽으로 끌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미리 약속이나 한 듯이 나머지 90퍼센트의 형제들이 돌아서서, 사형 집행을 하기로 선택된 무리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열 명당 한 사람을 죽이기 원한다면, 우리 모두를 죽이시오!’ 이러한 의사 표시로 온 수용소 안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고, 친위대도 감동한 나머지 그 명령을 철회하더군요. 나는 이 사건의 목격 증인이었습니다.” (요한 15:13) 그러면 이 사건이 그의 생애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그의 딸 마리에 고골코바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우타우젠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관찰한 일로 인해 아버지는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지요.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 즉시 침례를 받으시고는, 하느님의 왕국을 열심히 전파하고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우셨습니다.”

브르노 출신인 올드리히 네스로브날도 강제 수용소에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는 전쟁 혐오증이 있어서,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탈출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는 일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어 간첩죄로 고소되고, 그래서 다하우 수용소로 유형을 가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술회합니다. “우리를 수용소로 실어 가는 수감자 호송 열차 안에서, 열세 살 소년이 창가에 앉아서 무언가를 읽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소년은 자기가 읽고 있는 책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소년에게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성서요’라고 대답하더군요. 소년은 내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소년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 봤지요. 이름은 그레고르 비친스키였고, 폴란드 출신이더군요. 다음날 그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제출하게 되어 있는 물건들의 목록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던 겁니다. 그 목록이 독일어로 되어 있어, 타협하는 진술에 서명을 하는 게 아닌가 두려웠다는군요. 소년은 구타를 당했지만, 그 구타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

나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성서 한 권을 구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성서가 도착했습니다. 그 성서를 정기적으로 읽기 시작했지요. 오스트라바[모라비아 지방]에서 온 어떤 남자가 나를 눈여겨보더군요. 읽고 있는 내용을 이해하느냐고 묻기에, 반쯤 이해하겠다고 대답하였지요. ‘그러면 더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까?’라고 물어서, ‘그럼요’라고 대답하였지요. ‘그러면 내일 오후 여섯 시 이후에 어디어디서 만납시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집회는 매일 오후 여섯 시 이후에 열렸으며, 일요일에는 세 번 모이더군요. 집회 사회자와 제목은 미리 정해져 있었습니다. 나의 ‘선생님’은 서적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구두 수선공이었는데, 손으로 베껴 쓴 모든 서적이 그의 작업 의자 아래 숨겨져 있더군요. 그러다가 1년 반 동안 그레고르의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1944년 말 여러 부속(部屬) 수용소에서 돌아오는 수감자 무리를 살펴보다가, 내가 찾던 그레고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키가 거의 50센티미터는 더 커 보였는데, 끔찍이나 말라 있더군요. 검역을 받고 나서 그레고르는 집회에 우리와 함께 참석하였지요. 우리는 서로 따뜻하게 환영하였고, 그리고 나서 그가 말하더군요. ‘나는 당신을 여기 혼자 남겨두지 마시길 주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강제 수용소 안에서의 기념식

그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을 거행하는 것이 가능하였습니까? 실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개개인들은 그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의아해하였습니다. 보제나 노바코바 자매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기념식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어요. 나는 표상물을 취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당혹스러운 심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만사를 돌보아 주셨지요. 그분이 내 열망을 아신 까닭에, 기념식 날 한 막사로 불려 가게 되었습니다. 국적이 서로 다른 몇몇 자매가 벌써 거기 와 있었습니다. 표상물을 취하는 일을 포함해서 기념식은 방해받지 않고 거행되었습니다. 감사와 영광과 영예가 우리 하느님 여호와와 그분의 어린 양에게 돌아가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누룩 없는 빵과 포도주를 구할 수 있었습니까? 그 자매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마침 인근의 퓌르스텐베르크 읍에 있는 국영 농장에서 일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어떻게 해서인가 우리에게 표상물을 공급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받은 후에 노바코바 자매는 또 하나의 경험—어려웠지만 믿음을 강하게 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하루는 세면장으로 불려 나갔습니다. 샤워기가 있는 세면장인데, 샤워기를 틀면 물 대신 가스가 나왔습니다. 가스에 중독된 여자들은—때로는 아직 산 채로—가마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한 여자 간수가 내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그래 너희들 비벨포르셔[여호와의 증인을 부르던 말], 너희들은 가스실에 들어갈 거야! 너희 여호와가 너희를 구할는지 어디 두고 보자!’” 노바코바 자매는 몸을 돌려,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 여호와여, 내가 죽게 된다면 부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내 자녀들을 당신의 돌보심에 온전히 맡깁니다.” 그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자매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기도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수석 의사가 들어와 내 보라색 삼각형을 보더니, ‘비벨포르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누가 당신을 여기로 보냈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간수가 보냈다고 대답하니까, ‘여기서 나가! 당신이 있을 곳은 저쪽이야!’ 하면서 문쪽을 가리켰습니다. 내가 나가고 있을 때 간수가 하는 말이 들렸습니다. ‘여호와가 저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걸 이젠 확실히 알겠군.’”

나치 점령 중의 증거 활동

이 시기에 야외 봉사 보고가 집계된 바는 없지만, 좋은 소식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계속 전파되었습니다. 클라드노 읍 출신의 루제나 리반초바는 이렇게 썼습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하느님께 믿음을 두라고 가르치시면서, 사제들이 가르치는 식으로 하지 말고 우리에게 사람들을 존중하라고 하셨어요. 1940년에, 프라하에서 온 한 자매가 우리에게 증거를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놀라우신 하느님이자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여호와에 대해서 배우기 시작했지요. 1943년에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나는 모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시절 전시 상황에서도, 여호와께서는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이끌어 내고 계셨습니다. (사도 13:48) 프라하 출신인 프란티셰크 슈나이드르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가톨릭 가정이었지만 교회에 가본 적은 없었어요. 나는 기계공으로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술집에 드나들면서 카드놀이를 했지요. 어떤 남자가 와서는 맥주 한 잔을 들면서 손님들에게 증거를 하곤 했습니다. 손님들은 그를 놀려 대곤 했지요. 그런데 나는 카드놀이를 하면서도 한쪽 귀로는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마태 24장에 관하여 이야기하더군요.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기에 옳은 이야기라고 말해 주었지요. 그랬더니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더군요. 가보니까 집회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 집에는 이미 일곱 명이 와 있더군요. 내가 물었지요. ‘사제는 언제 오십니까? 좀 알려 주시죠.’” 그러나 사제는 오지 않았습니다. 프란티셰크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요세프 발렌타가 사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프란티셰크는 성서 연구를 계속해서 1942년 8월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해 그는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계속 필요한 도움을 베푸셔서 그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프란티셰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우타우젠에서 마르틴 포에칭거 형제를 만났습니다. 용기 있고 슬기로운 형제더군요. 내게 슬리퍼 한 켤레를 만들어 주었고, 언제나 서적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정기 집회를—물론 비밀리에—일요일마다 바로 ‘플라츠’(광장)에서 가졌습니다.” 그곳은 수감자 점호 때 사용하는 장소였는데 말입니다.

얀 마추시니 역시 자신에게 영적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훗날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전시에 나는 광산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형 둘과 함께 광부 악단에서 연주를 했지요.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고요. 손이 노인처럼 떨리는 그런 한심스러운 상태였지요. 하루는 술에 취해 가지고 스스로도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느님에게 큰 소리로 기도하면서 내가 가진 문제들로부터 빠져 나갈 길을 찾게 해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곧, 마침 그의 누이를 방문하고 있던 한 증인 자매가 방문 끝에 이 남자와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길게 나누게 되었고 성서와 함께 세 권의 소책자를 주었습니다. 그 책들을 읽으면서 그는 자기가 진리를 배우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는 흡연, 알코올 남용, 악단 연주 생활을 그만두고, 집회에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1943년에는 양어장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는 전시 내내 집회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타협’이라는 단어의 의미 그리고 형제를 배반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것을 가르침받았습니다. 이 가르침은 앞에 놓여 있는 박해—그렇습니다, 심지어 전쟁이 끝난 후에도 다가온 박해—에 대비하는 훌륭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상대적 평화의 시기를 선용하다

전쟁이 끝난 뒤 1945년부터 1949년까지는 여호와의 백성에게 상대적 자유와 함께 어느 정도 평화의 시기였습니다. 그때는 영적 재건의 시기였으며, 우리 형제들이 새로워진 열심으로 하느님이 주신 전파 활동에 참여한 시기였습니다.—마태 24:14.

첫 번째로 할 필요가 있었던 일은 모든 회중과 개별 전도인들의 소재를 파악하는 일이었습니다. 일부는 사망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이주하였으며, 독일 국적을 갖고 국경 지방에 살던 수천 명은 추방당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맨 처음 귀국한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인 뮐러 형제는 각 회중과 연락망을 재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는 한편 다른 나라의 협회 지부 사무실들과도 접촉하고자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허사였습니다. 그러다가 6월 초 스위스 베른으로 보내는 전보가 드디어 전달되었습니다. 베른에서 오는 편지가 속속 도착하기 시작하였는데, 편지마다 독일어 「파수대」가 몇 면씩 들어 있었습니다. 번역 작업은 신속히 진행되었습니다. 1945년 8월에 프라하의 형제들은 전후(戰後) 첫 호의 체코어 「파수대」를 등사판 인쇄로 발행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증인들이 전쟁 전에 전파한 소식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이제 기꺼이 귀를 기울였습니다. 성서 공개 강연—녹음 연설이 아니라 자격 있는 연사가 직접 하는 연설—이 특색을 이루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백 명씩 참석하였습니다. “신세계에서의 자유”라는 제목으로 첫 강연이 1945년 11월 11일 프라하 농업 증권 시장의 홀에서 행해졌습니다. 약 600명의 청중은 매우 열광적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는 동안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그러한 공개 강연이 1885회나 실시되었습니다. 지금 여호와의 증인인 많은 사람들은 그 강연들 덕분에 진리에 이끌렸다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 중 하나가 티보르 토마쇼프스키인데, 지금은 보헤미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한 증인이 세속 일을 하던 중에 티보르를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성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티보르는 그가 겸허해서 좋은 인상을 받았고, 그래서 그 증인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 일로 인해 집회에도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티보르는 나중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내와 내가 그 집회에서 경험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습니다. 그처럼 특출한 강연은 들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세 명의 연사가 번갈아 연설을 했습니다. ‘이 연사들은 틀림없이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겠지요’ 하고 내가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아뇨. 농부들인 걸요,’ 들은 내용이 너무나 놀라워서 우리는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음주 사무실에서 일에 집중이 안 되었고, 일요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집회에 빠진 적이 없습니다.”

증인들이 봉사의 직무를 수행한 장소들 가운데는 강제 노동 수용소들도 있었는데, 거기에는 전쟁이 끝나서 전쟁 포로와 추방 대기 중인 독일 사람들이 억류되어 있었습니다. 그 시기의 활동 보고를 보면, “형제들은 강제 노동 수용소에 있는 독일 사람들—주로 나치 당원들—을 방문하면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변화된 환경이 그들로 하여금 성서 진리를 잘 받아들이게 할 것입니까? 여호와의 증인은 그들에게 그러한 기회를 주고자 한 것입니다.

1945년 11월, 뮐러 형제를 지부 감독자로 임명하는 공식 임명장이 왔습니다. 그 다음해 여름 형제들은 노력 끝에 프라하 근교의 숙돌에서 새 건물이나 다름없는 4층 건물을 매입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조용한 작업 공간과 베델 가족을 위한 훌륭한 숙소가 되었습니다. 전국이 각각 대략 20개 회중으로 구성되는 순회구들로 구분되어, 순회 대회들이 정기적으로 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대회들과 관련해서 언제나 호별 방문 봉사가 있었고, 일요일 오후에는 공개 강연을 통해서 훌륭한 증거가 행해졌습니다. 신권 전도 학교가 회중마다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더 많은 형제들이 여호와의 영의 도움으로 공개 강연을 할 자격을 구비하게 되었고, 전도인들은 더 잘 가르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대회도 마련되었습니다. “기뻐하라”와 “평화의 군왕”이라는 강연들로 두드러졌던 대회가 1946년 브르노에 있는 한 클럽 단체의 시설인 베세드니 둠에서 열려 170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스위스, 베른에서 프란츠 취르헤르가 그 행사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다음해 대회가 브르노에서 열렸을 때는 세 명의 세계 본부 요원—N. H. 노어, M. G. 헨첼, H. C. 커빙턴—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였습니다. “만민의 환희”라는 공개 강연을 포스터와 광고지로 시내 전역에 광고하였는데, 2300명이 그 강연을 듣기 위해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소를 적어 냈고, 앞으로 있을 모임에도 초대받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였습니다.

1948년 초 정부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공산당이 집권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계속 좋은 소식을 열심히 전파하였습니다. 그 해 왕국 선포자 수에 있어서 25퍼센트의 증가를 경험하였습니다. 9월에 또 하나의 대회가—이번에는 프라하에서—열렸습니다. 공개 강연은 “하느님의 왕국—온 인류를 위한 희망”이라는 시기 적절한 주제를 부각시켰습니다. 그리고 앞에 놓인 일들을 내다볼 때, “시련 아래서 충절을 유지함”이라는 강연 역시 실제로 대단히 적절하였습니다. 대회가 진행되는 바로 그동안에도, 여호와의 백성의 적들은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먹구름이 다시 일다

형제들이 감옥에서 석방된 지 4년도 못 되었는데, 정세는 돌변하였습니다. 1948년 11월, 보헤미아 서부의 카를로비바리에서 열린 순회 대회에 폭풍의 먹구름이 나타났습니다. 대회 자체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11월 28일 일요일 오후 뮐러 형제가 공개 강연을 하고 있을 때 대회장 뒷좌석 일부를 민간인 복장을 한 국가 보안국 요원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날 뮐러 형제가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데, 카를로비바리 회중의 감독자 올드르지흐 스쿠피나가 그를 찾아와, 국가 보안국이 몇몇 형제들의 집을 수색하여 서적을 압수해 갔노라고 흥분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뮐러 형제는 프라하 베델과 통화해 보려고 애썼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그곳에서도 분명히 발생한 것입니다. 그는 급히 프라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베델 건물에 다가가면서 보니, 두 남자가 일꾼들인 척하고 있지만 실은 베델 집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베델에서 뮐러 형제는 한 형제를 만나 이런 보고를 들었습니다. 국가 보안국 요원 몇 사람이 베델 구내를 샅샅이 수색하고 나서는 사무실을 봉쇄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가 도착한 지 45분도 못 되어, 내무부에서 나온 두 명의 관리가 베델 집에 나타나 그 건물이 압류되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뮐러 형제는 항의를 제기하면서, 압류하기 전에 법원 명령서가 나와야 함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들이 떠난 뒤, 그는 국가 보안국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서류철의 일부를 자신의 부모가 사는 집으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베델로 돌아왔을 때는, 국가 보안국 요원 한 명이 그를 비롯하여 그와 함께 일하는 두 자매에 대한 체포 영장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델 가족의 다른 성원들은 이미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법원 명령이 그렇게 빨리 내려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러 달이 지나, 형제들이 구금되어 있는 동안, 구금당한 형제 가운데 카피누스 형제가 편지를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협회의 활동을 중단시키고 그 재산을 압류한다는 1949년 4월 4일자—집행 후 4개월도 더 지난 시점—의 내무부 결정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치가 있었지만, 7월에 국가 재판소는 증거 부족으로 형제들에 대한 형사 소송 절차를 중지시켰습니다. 형제들은 사전 구금 상태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재판소 청사를 자유의 몸으로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내무부에서 나온 두 명의 관리가 그들을 세우고는, 공산당 정치 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그들을 2년간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낼 것이라고 통보하였습니다. 법적 절차에 따라 집행할 수 없는 일을 단지 독단적인 행정 명령으로 자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뮐러 형제는 클라드노로 이송되어, 탄광에서 일하였습니다.

전국을 휩쓴 검거 선풍은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심한 곤경을 초래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공산당 관리들이 기대하던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뮐러 형제가 감옥에 있을 때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던 것입니다. “머리를 잘라 버리면, 몸뚱이는 죽을 거다.” 그들은 뮐러를 비롯한 책임 있는 형제들이 “머리”라고 생각하였지만, 그리스도인 회중의 실제 머리는 하늘에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분별하지 못하였습니다.—에베소 4:15, 16.

참 숭배가 계속되다

이 암흑기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참 숭배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곧 이어서 형제들은 예수를 메시아 왕으로 증거하는 활동을 진전시키는 마련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프라하의 요세프 스코호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박해가 시작된 지 며칠 뒤, 한 회중 감독자인 그로스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내게 열 명의 전도인의 이름을 알려 주면서 그들을 돌봐 달라고 했습니다.” 얼마 동안 그들은 여전히 호별 방문을 시도하였지만, 점차 다른 활동 방법을 습득해 나갔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투옥되어 있었지만, 밖에 있는 형제들은 계속 서로 모였습니다. 공공 집회 장소는 사용할 수 없었지만, 대회는 단축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커다란 아파트에서 열었습니다. 때로는 좀더 큰 대회를 숲 속에서 열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대회가 1949년 네이데크 읍 근교의 올드르지호프에서 열렸습니다. 바위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 경사면이 청중석이 되어 참석한 200명을 수용하였습니다. 근처에는 빈집과 헛간 그리고 연못이 있었습니다. 침례를 주기 위해서, 형제들은 헛간에 칸막이를 설치하여 남녀용 탈의실을 마련하였습니다. 연못을 청소하고, 물 속으로 내려가는 나무 계단을 갖다 놓았습니다. 그 대회에서 37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연구용 성서 출판물을 구하는 일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테플리체 출신인 비코르질 형제가 제출한 기록이 사실을 밝혀 줍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950년에 테플리체 시에는 우리 세 사람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스위스에 있는 한 자매로부터 우편으로 프랑스어 「파수대」를 받곤 하였습니다. 한동안 접촉이 끊겼다가, 얼마 지나서 회복되었습니다. 나는 상징적인 언어로 된 편지들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편지들에서는, 내가 누군가를 찾아 내면 그가 다른 누군가를 알고 있고, 그러면 다른 그가 이번에는 또 다른 누군가를 알고 있어서, 그런 식으로 연락망을 재구성할 것을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인도하는 형제들이 감옥에 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조직의 연락망을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식적인 임명도 없이 기능을 발휘해서, 그야말로 각자가 할 필요가 있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파수대」를 받는 일은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습니다.”

이때는 이 나라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한 시기의 시작이었습니다. 활동이 중단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여호와의 펴신 손 덕택이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활동은 계속 증가하였습니다.

잠시의 집행 유예

예기치 않게도, 1950년 초에 모든 여호와의 증인은 형제 자매를 불문하고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석방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뮐러 형제는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우리가 없는 동안 훌륭한 조직이 형성되어 온 것을 보고 경탄해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영은 얀 세빈 또는 야로슬라프 할라와 같은 젊은 형제들을 움직여 열심히 앞장을 서게 하였습니다. 야로슬라프의 아버지는 1948년에 체포되었지만 (그래서 그 후 옥사하였지만), 야로슬라프는 많은 형제 자매들에게 모범이 되고 격려의 큰 근원이 되었습니다. 풀려난 형제들은 전국(구체코슬로바키아)에서 활동적인 증인의 수가 2년도 안 되어 52퍼센트나 증가하여, 1581명에서 2403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해에는 38퍼센트가 더 증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이 1951년에 체코어로 여섯 부분으로 나뉘어 발행되자, 더욱더 성장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 출판물은 가정 성서 연구를 위한 기본 서적이 될 것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연구생이 여호와께 바치는 봉사의 생애에서 좋은 출발을 하는 데 필요한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공산당 관리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고운 눈으로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1952년은 여호와의 백성에게 또 한번의 심한 박해가 지속될 기간의 시작이었습니다.

다시 “불타는 가마” 속으로

1952년 2월 4일 이른 아침 시간에 뮐러 형제는 다시 국가 보안국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눈을 가리운 채 감옥으로 실려갔습니다. 후일에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 다음 14개월 동안은, 독방에서 눈을 가리지 않은 채 밖에 나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거의 하루 걸러 취조관은 나를 자기 사무실로 데려갔습니다. 거기서 지루한 취조를 당하였는데, 취조 중에 그들은 내가 간첩 활동에 연루되었고 또한 반역죄를 저질렀음을 시인하도록 설득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경찰 조서가 수없이 작성되었다가 파기되고 또 다른 조서가 작성되곤 하였습니다. 취조관들은 적어도 교묘하게 유죄를 암시하는 내용이라도 조서에 포함시키려는 의도로, 계속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였습니다. 나는 거듭거듭 그러한 조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약 16년 후 석방될 때, 내무부의 한 관리는 내가 사형 대상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고 귀띔해 주었습니다. 1953년 3월 27일 나는 눈을 가리운 채 판크라치 법원으로 법정 심문을 받기 위해 끌려갔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나는 극심한 심리적 압박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 재판이 이틀간 계속된 것입니다. 재판은 극비리에 진행되었습니다. 방청석은 오로지 내무부에서 나온 취조관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알고 보니까, 1952년 2월 4일은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에서 검거 선풍이 있었던 날이었습니다. 그 날 국가 보안국은 총 109명의 여호와의 증인(형제 104명과 자매 5명)을 체포하였습니다.

그 날 투옥된 사람 중에는 에밀리에 마치치코바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952년 2월 4일, 남편은 입원 중인데 국가 보안국에서 세 남자와 한 여자가 새벽 3:30에 우리 집에 왔더군요. 나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지요. 그들은 집을 샅샅이 수색하고는 찾아 낸 물건을 압수하였습니다. 나는 오스트라바 시에 있는 지방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이미 우리 증인들이 많이 와 있었어요. 우리를 대량 검거하는 중이더군요. 그들은 우리를 새로 회칠은 하였지만 역겨운 냄새가 나는 차가운 감방에 집어넣고, 차가운 세숫물을 넣어 주고는 철문을 잠가 버렸습니다.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갈 때는 언제나 우리에게 검은 안경을 씌우더군요. 그들은 감방들에 염탐꾼들을 집어넣었지만, 우리는 그들과 하느님의 왕국 외에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답니다. 그 앞잡이들은 심지어 왕국 노래도 부르고 기도하는 시늉도 하더군요. 그 정도까지 적들은 우리의 믿음을 꺾고자 획책하였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강화시켜 주셨습니다.”

프라하의 터무니없는 재판

이때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정치범 재판이 많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재판 결과 내리는 선고는 극히 가혹하여, 장기 징역 아니면 사형이었습니다. 1953년 3월 27일과 28일,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재판은 바로 이 시기에 열렸습니다. 비공개로, 여호와의 증인의 주요 감독자들에 대한 두 건의 겉모양뿐인 재판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재판은 첫 재판 후 한 달 만에 열렸습니다. 선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뮐러 및 포겔: 징역 18년에 처함. 피고 세빈, 그로스 및 할라: 15년. 나할카: 12년. 노바크: 8년. 포루브스키: 5년. 피고 전원은 재산을 몰수하며 시민권을 박탈한다.”

이들 재판에 관하여 일반 대중이 알 수 있었던 내용은 신문에 나오는 것뿐이었습니다. 신문에서는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공산당 일간지 「루데 프라보」(붉은 법) 3월 30일자에 나온 왜곡된 보도 내용이 한 가지 예입니다. “미 제국주의자들은 인민 민주 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증오심에서 우리의 노동자 계급을 사회주의 노선에서 이탈시키고자 갖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 프라하 순회 법정은 미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한 가지 형태의 파괴 활동을 다루었다. ·⁠·⁠· 재판에 회부된 자들은, 신봉자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자칭하는 종파의 간부들이었다. 미국 브루클린에서 조정하는 이 조직은 그 파괴적 경향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 1949년 이후 금지되어 온 조직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내에 세계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침투시켜 온 바, 이는 순수 그리스도교라는 미명하에 우리 노동자 계급의 사기를 와해시키고 국가와 국법에 증오심을 부추기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며, 또한 그 신봉자들이 제오열(第五列)의 역할을 담당하게 될 궁극적인 전쟁을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기 시작하였다.”

법원의 판결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와 같은 사실의 왜곡 조작은 하나의 선례를 남겨, 이 나라 전국에서 답습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양 같은 자들을 발견하다

그렇지만 심지어 감옥 안에서도 증거할 기회는 있었습니다. 기지가 있어야 했는데, 우리 형제들은 그 방도를 찾아 냈습니다. 수감자 중에는 성서 진리에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차슬라프에서 온 프란티셰크 야네체크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전쟁 중에 나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1948년, 새로운 형태의 폭력에 동의할 수 없어서 공개적으로 불공정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11년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옥중에서 나는 성서를 갖도록 허락받았는데, 노역이 없는 시간에는 성서를 가르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내가 사제인 줄 알았더군요. 우리는 서로 다른 막사에서 지냈지만, 가끔 막사 밖에서 화재 감시라는 야경을 섰습니다. 어느 날 밤 내가 야경을 보고 있는데, 날은 몹시 춥고 하늘엔 별이 총총했습니다. 역시 야경을 시작한 다른 수감자가 인접한 막사들 사이에서 나오더군요.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래 당신도 여기서 파라오를 섬기고 있군, 그렇죠?’ ‘그런데 파라오가 누군지 아시오?’ 하고 그가 묻더군요. ‘그럼요, 이집트의 통치자죠.’ ‘그러면 그가 누구를 전영하는지 아시오?’ ‘모릅니다!’ ‘그러면 이쪽으로 오시오. 알려 줄 테니까.’ 우리는 두 시간 동안 함께 걸었는데, 그가 나에게 설명을 잘 해 주더군요. 나는 신속히 발전하였죠.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진리에 대한 내 열망을 보셨습니다.” 프란티셰크는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하여 성서를 연구하였으며, 얼마 안 있어 매달 여호와의 봉사에 70에서 80시간을 보고하였습니다.

옥중에서 진리를 배운 많은 사람들은 그곳에서 침례도 받았습니다. 어떻게 받았습니까? 정치범으로 수감 중 진리를 배운 라디슬라프 슈메이칼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일하던 탄광에서는 커다란 광산용 압축기들의 냉각탑들에 접근할 수가 있었습니다. 1956년 6월에 다른 몇 사람과 함께 나는 이들 냉각탑 중 하나의 저수통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일이 쉽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오후 근무 교대 전 짧은 틈을 이용해서 해야 했기 때문이었지요. 우리는 속옷을 가지고 냉각탑으로 가서 침례를 받고 재빨리 갈아입고는 작업장에 출두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종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헌신을 표상하는 길을 찾도록 도와 주신 데 대해 감사히 여겼습니다.—마태 28:19, 20.

탄광의 “성자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금지령은 여러 각도로 그리고 서로 다른 정도로 시행되었습니다. 그것은 장소마다, 때마다 달랐습니다. 여하한 상황에서도, 형제들은 양심적으로 그리스도인 충절을 유지하고자 애썼습니다. 그 결과 많은 형제가 투옥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958년에 한 행정 명령이 내려진 결과로, 나이가 30세 미만인 탄광부에게는 군복무 면제가 허용되었습니다. 체포당하여 징역을 선고받을 때까지—그래서 아마도 탄광에서 일하게 되기까지—기다리는 대신 일부 형제들은 탄광에 취업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자유를 누렸습니다. (잠언 22:3) 그리하여 사람들이 이들 증인을 부르는 식으로 말해서 “성자들” 또는 “사제들”이 여러 탄광에서 종업원 명단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탄광들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많이 있어서, 튼튼한 회중을 형성하기 시작하였고 그 가운데서 형제들은 영적으로 장성하여 자격을 갖춘 봉사자들이 되었습니다.

10년 동안, 에두아르트 소비치카는 클라드노 읍 근교의 카메네 제흐로비체 마을에 있는 탄광에서 일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기억으로는, 내가 취업한 탄광에서 같은 시기에 함께 일한 형제들의 최고 수는 30명가량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근무조에서 일하였고, 우리끼리 서로 너무 가까이 지냄으로써 스스로를 다른 광부들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규칙을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보통 부르는 말로 “성자들”은 많은 시선을 끌었습니다. 조롱도 받고 모욕도 당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남모르게 존경도 받았지요.” 그곳 광산들에서 형제들은 증거할 기회를 포착하였으며, 누가 관심을 나타내면 귀중한 성서 서적도 빌려 주곤 하였습니다.

휴가를 다른 증인들과 보내다

그 당시가 어려운 시기이긴 하였지만, 여호와의 백성의 생활 가운데는 휴가가 들어설 자리도 있었습니다. 세심하게 계획할 때, 그러한 휴가는 신체적 새 힘뿐 아니라 영적 세움도 얻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많아야 열 명 정도가 참석해서 집회가 열리던 시절에, 30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한두 주일 동안을 함께 지내게 되면 어떠하였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누구를 초대할 것인지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였습니다. 계획을 짜는 사람은 노인보다 젊은 사람을, 자매보다 형제를 선호하는 일이 없도록 고려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장성한 몇몇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포함시킴으로써 필요한 감독이 베풀어지게 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주된 관심사는 균형 잡힌 영적 프로그램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매일의 일과는 이런 식이었습니다—아침 기도, 일용할 성구 그리고 성서 읽기. 어떤 날 오후에는 한 시간 길이의 집회가 있었습니다. 저녁에는 종종 사전 준비된 프로그램이 들어 있는 영적 모임이 있었습니다. 하루 중 그 나머지 시간은 자유였습니다. 형제 자매들은 연구나 도보 여행, 수영 같은 것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봉사는 대개 도보 여행에 포함시켜 했는데, 그때에도 따라야 할 불문율이 있었습니다. 20명의 일행이 여행을 한다고 상상해 봅시다. 마을에서, 숲 속에서, 들판에서 그곳 주민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한 형제나 자매가 일행에서 벗어나 대화를 걸어 보려고 시도합니다. 나머지 일행은 계속 갈 길을 갑니다.

단체로 즐기는 이러한 휴가는 많은 유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믿음을 강화하였고, 좋은 소식의 확산에 기여하였습니다. 이러한 단체 휴가는 이 나라 여호와의 증인의 현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때건 여호와의 종들은 영적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습니다.

교활한 공격

“거짓의 아버지”인 사탄 마귀는 사실을 왜곡시키고 하느님의 충실한 종들을 왜곡 보도함으로써 확신을 침식시키고자 합니다. (요한 8:44) 사탄은 그러한 술책을 사용해서 고대 이스라엘을 약화시켰고, 1세기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에게 등을 돌리게 하였으며, 또 초기 그리스도인 회중을 붕괴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민수 13:26-14:4; 요한 5:10-18; 요한 셋째 9, 10) 사탄의 목표에 기여하는 일부 사람들은 스스로 탁월해지고자 합니다. 자기가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실은 모든 사실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그들은 의견을 강경하게 제시합니다. 사탄은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을 다 이용할 수 있으며, 이 나라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1950년대 후반은 체코슬로바키아의 형제들에게 참으로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많은 형제들은 감옥에 있었고,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와의 연락은 두절되어 있었습니다. 주도권을 잡은 일부 형제들은 성경에 확고한 근거를 둔 것이 아닌,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디도 1:9; 야고보 3:1) 시대의 압력에 대한 반응으로, 일부 개인들은 모든 사실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비교 잠언 18:13, 17) 소수의 사람들은 “제자들을 끌어 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기 시작하였습니다.—사도 20:30.

그 시기에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뮐러 형제는 훗날 이렇게 썼습니다. “1956년 1월 어느 날 발디체 형무소에서 한 사무실로 끌려갔는데, 두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무부에서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들은 우리가 교리의 일부를 ‘완화’해야 한다고 설득하려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 문제에 동의할 수 없었고, 그래서 회견 시간은 짧았습니다. 1957년에도 내무부로부터 두 명의 다른 관리가 찾아왔습니다. 그 세 시간의 토의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습니다. 나는 제반 문제점에 대한 증인들의 견해와 태도를 기탄없이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군복무, 수혈, 노동 조합, 기타 여러가지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끝에 가서 그 중 한 사람이 ‘뮐러 씨, 우리들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더군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친구가 되는 사람들은 매우 친밀하면서 공통 관심사가 많지요. 우리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공산주의자들은 무신론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공통되는 부면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함께 살면서 공존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관리가 말하더군요. ‘당신의 대답이 마음에 듭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당신을 신뢰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 마지막 질문을 한 것은 장차 서로 간에 어떤 의미 있는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상황에 대한 해결책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 대화를 시작으로 해서 특정 형제들과 정부 당국 사이에 좀더 기탄없는 의사 소통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감돌던 분위기로 인해서, 이러한 회견 소식을 전해 들은 일부 증인들은 이 책임 있는 형제들이 타협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런 식의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여하한 그리스도인 원칙도 타협하지 않으려는 강한 열망에서 마음이 움직여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언행이 독선적인 소수의 사람들은 정부 관리들과 이야기를 나눈 형제들에 대한 불신감을 거침없이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은 사실에 입각한 것이었습니까?

다른 요인들도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50년이 넘게 여호와를 충성스럽게 섬겨 온 유라이 카민스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책임 있는 형제들과 많은 장로들이 체포된 뒤, 회중과 순회구에서 인도하는 자들 중 일부는 전도인들의 행동 강령을 작성하여,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믿음에 의한 순종을 장려”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 것입니까! (로마 16:26) 국민에게 투표를 요구하는 법 때문에 일부 증인들은 투표소에 가곤 하였지만 양심상의 이유로 정치 후보자에게 투표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이 타협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어떤 면으로는 이해할 만하게도, 일부 형제들은 그리스도인 형제들에 대한 학대 때문에 당국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뮐러 형제는 이렇게 술회합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매우 고심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1957년 가을 [옥중에서] 편지를 써서 형제들이 사물을 올바로 보도록 돕고자 했습니다.” 그 중 한 대목은 이러합니다.

“내 마음에 또 다른 고통이 있습니다. ·⁠·⁠· 내가 형제들에게 상기시키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집회는 성경을 연구하고 여호와의 증인들이 발전해서 자격을 더 잘 구비한 봉사자들이 되도록 훈련하는 일에 바쳐진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집회에서 정치를 논하거나 여하한 반국가적 견해를 표명한다는 것은, 집회가 어디서 열리든 그리고 단 두 사람이 참석하거나 여러 사람이 참석하거나를 막론하고, 분명히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형제들이여, 이 점에 유념해서 그러한 논의를 조금도 허용하지 마십시오. 나나 다른 형제들이 투옥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누가 현 체제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러한 감정을 해소할 것을, 내 이름으로 그리고 다른 형제들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간청하는 바입니다. 진노와 적개심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하느님께 제시하였고 여러분도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로마 12:17-13:1.

충실한 형제 자매들은 이 편지를 받고 크게 격려를 받았습니다. 얀 테사르즈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1957년에 우리는 그의 편지, 옥중에서 쓴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타협의 표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합리성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러한 견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뮐러 형제의 편지는 논란과 많은 억측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회중으로부터 분리되다

정치범에 대한 대사면이 1960년 5월에 발표된 후, 옥중에 있던 여호와의 증인 대부분이 석방되었습니다. 감격의 시간이었습니다! 위협을 받았지만, 그들은 즉시 좋은 소식의 전파를 재개하였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세운 모범을 마음에 간직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구속에서 놓이자 말씀을 계속 전할 수 있는 담대함을 기도로 구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4:23-31) 그러나 새로운 시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의심과 불신이 형제들 사이에서 이미 자라고 있었습니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뮐러 형제가 형제들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강경하고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던 일부 형제들은 그 편지를 회중에서 낭독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1959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활동적인 증인의 수는 2105명이었으나,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아직도 여호와를 섬긴다고 주장하면서도 이전 그리스도인 동료들과 연합하여 섬기지 않았습니다. 이들 분리된 자들 가운데서 인도하는 일을 하던 자들은 뉴욕 브루클린 본부와 당시 워치 타워 협회장 N. H. 노어의 승인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진전되는 상황으로 인하여, 그 분리된 자들이 이전 그리스도인 동료들에게 품었던 의심은 가중되었습니다. 이즈음 체코슬로바키아 정부 관리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그들이 혐의를 두어 온 바와는 달리 미 제국주의의 간첩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반적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중단시키거나 또는 그들의 믿음을 타협하도록 설득하는 일이 불가능했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전체주의 공산 정권인 정부는 증인들과 대화를 개시할 단계를 밟았습니다. 그것은 강요된 대화였습니다. 국가 보안국의 목표는 종교적 감정이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작용하지 않고, 가능하다면 지지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때때로 그 접촉은 뮐러 형제나 순회 감독자 한 명을 경찰서에 호출하여 심문하는 형태를 취하였습니다. 가끔은 카페에서 우호적으로 보이는 대화를 나누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일부 목격자들은 모든 사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한 논의에 관여하는 형제들이 국가 보안국에 협력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 형제들 일부의 이름이 협력 혐의자 명단에 오르기도 하고, 이들이 국가 보안국의 요망에 부응하여 출판물의 기사를 수정한다는 비난도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찾”으라는 사랑에 찬 격려

노어 형제는 주의 일에 대하여 그리고 여호와의 조직과 함께 충실히 봉사하고자 애쓰는 형제들에 대하여 크게 염려하였습니다. 1961년 12월 7일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형제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 가운데서 미가 2:12 및 시편 133:1과 같은 성구들에 주의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제반 문제에 대한 협회의 입장을 설명하고, 책임을 맡아 온 특정 형제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습니다. 실로 이 일은 형제들에게 “여호와를 찾”으라는—여호와의 영이 그분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 어떻게 작용하는지 분별하라는, 그리고는 여호와께서 사용하고 계시는 대행 기관과 연합하여 일하라는—사랑의 격려였습니다. (스가랴 8:21) 여기 그 편지의 한 대목이 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들: ·⁠·⁠· 본인에게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형제들 대다수는 신권적으로 그리스도인 연합을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빈약한 통신 수단 탓으로 소수의 형제들은 유언비어나 소문의 영향으로 자신의 마음 가운데 의심이 생기게 하고, 그 결과 일부 형제들은 협조를 하지 않거나 자신의 봉사 보고를 제출하지 않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태는 그러한 소수 형제들에게 불행과 고난을 가져올 뿐이며, 이미 그런 상태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협회가 야누시카 형제와 보후밀 뮐러 형제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일하는 형제들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 감독자들임을 인정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기 위해서 이 글을 써보내는 바이며, 또한 여러분이 히브리 13:1, 7, 17에 나오는 바울의 말을 유념할 것을 간청하는 바입니다. 이 형제들은 여러분에게 관심이 있으며 모두가 여호와 하느님께 충실하도록 돕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므로 겸손하게 그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 또한 여러분과 함께 일하게 되어, 모든 일에서 여호와께 찬양이 돌아가기 바랍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편지를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아담 야누시카는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하지 않은 행실로 인하여 제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노어 형제의 편지를 깊이 인식한 형제들도 있었지만, 모두가 그 충고에 따라 자신을 재조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1962년에 문제가 심화되었습니다. 일련의 기사가 「파수대」에 게재되어, 첫째로 하느님에 대한, 그 다음에는 세속 통치 권위 즉 로마 13:1에 나오는 “위에 있는 권위”에 대한 그리스도인 책임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출판된 내용은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의 시정을 의미하였습니다. 불신하고 비평적임을 드러내던 자들은 그 기사들이 사실상 내무부의 지시하에 뮐러 형제가 조작한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였습니까? 그 당시 설득당하기를 원치 않는 자들을 설득하고자 노력하는 일에 모든 시간을 사용하는 대신, 형제들은 의에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관심을 쏟았습니다.

훗날, 조직을 버렸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여호와의 축복이 이 조직 위에 있다는 증거를 보고서 복귀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렇지만 1989년에 통치체가 “여호와를 숭배하고 연합하여 그분을 섬기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자상한 편지를 보낼 때까지 이탈해 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편지는 현재 성취되고 있는 스가랴 8:20, 21과 이사야 60:22과 같은 예언들에 주의를 이끌었습니다. 또 마태 24:45-47, 고린도 첫째 10:21, 22 그리고 에베소 4:16에 나오는 성경적 교훈과 표준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편지의 일부 내용은 이러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현재까지도 지상의 다른 모든 곳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따르고 있는 신권적 마련과 절차에 활동적으로 연합하고 있지 않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세계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러분의 나라에도 존재하는 바와 같은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과 연합하여 일하고자 하는 여러분의 염원의 증거를 보여 줄 것을 격려하기 위하여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장에서 이러한 의로운 염원을 우리가 선정한 형제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나타내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편지를 마련하여 여러분에게 읽어 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찾아와서 이 편지를 통해 우리에게서 위임받았음을 밝히는 형제들을 전적으로 신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 무리로 돌아와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도록 권하는 일은 그들의 특권인 것입니다.—요한 10:16.”

통치체의 입장에서 취한 이러한 조처는, 회중들이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과의 의사 소통이 단절되었던 시기에 사탄의 교활한 공격으로 발생한 피해의 남아 있는 상처를 치료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장래의 봉사를 위해 조직하고 훈련하다

1960년에 증인들이 출감한 후, 체코 땅에서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과 관련해서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조직과 훈련이 중요하였습니다. 당시 지속되던 어려운 여건하에서 이러한 목표를 달성한 것은 여호와의 사랑 넘친 보호와 축복이 있었다는 충분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신권 조직이 크게 진일보하게 한 마련은, 여행하는 감독자들과 회중의 종들(현재의 주임 감독자들)에게 성서로부터 특별한 훈련을 제공하는 천국 전도 강습이 1961년에 개설된 일이었습니다. 당시 순회 감독자로 일하던 프라하 출신의 카렐 플자크는 그 첫 학급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학급은 카를로비바리 근처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가 보안국에서도 그 위치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종 순간에 형제들은 은밀한 시골집에 모이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많은 젊은 형제들은 여호와에 대한 봉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빨리 장성하여, 천국 전도 강습으로부터 유익을 얻도록 곧 초청받았습니다. 그 중 한 형제인 야로미르 레네체크는 열네 살 때 회중 서적 연구 사회자로 일하였습니다. 열여섯 살에는 부회중의 감독자로 임명되었고, 20세에 천국 전도 강습에 참석하도록 초청받았습니다. 그는 지금 지부 위원회의 한 성원입니다.

1961년에 실시된 또 하나의 훈련 계획은 야외 봉사의 질을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한 경험 있는 전도인이 경험이 적은 전도인을 훈련시키도록 임명되곤 하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준비하고 함께 야외에서 봉사하였습니다. 그 목표는 훈련받는 전도인을 충분히 도와서, 다음 번에는 그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기에는 비공식적으로 증거하는 것만 가능하였지만, 훈련으로 인해서 많은 전도인들은 여호와의 효과적인 찬양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우편물은 빈번히 정부에 의해서 면밀하게 검열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신권적인 통신에서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되었습니다. 순회 감독자의 방문은 언제나 열렬히 고대하는 행사 기간이었습니다. 에두아르트 소비치카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세속 직업을 가져야만 했고, 그래서 격주로 주말마다 금요일에서 일요일 저녁까지—한 달에 총 5일가량—회중과 함께 일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법적 제한이 없는 나라에서 순회 감독자들이 한 주일에 한 회중과 함께 일하는 시간과 같은 분량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순회구는 대개 단지 여섯 개의 회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형제들을 통해서 회중들과 연락이 유지되어, 회중들은 최신의 상태로 유지되어 나갔습니다.

경고를 망각했을 때

활동이 번창하고 있을 때에는 때때로 여호와의 증인이 아직도 금지령 아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가 쉬웠습니다. 감독 책임을 맡은 형제들은 모든 활동에서 건전한 정신을 나타낼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증인들은 사용하고 있던 방법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더 빠른 결과를 원하였습니다.

1963년의 어느 날 프라하의 한 공원에서는 두 형제가 사람들을 모아 한 무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형제 중 한 사람이 벤치 위에 올라서서 연설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반대하는 소리를 하자, 그 형제는 그를 마귀의 앞잡이라고 불렀습니다. 경찰이 도착하여 형제들의 신분을 물었는데,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은 대대적인 경찰 작전을 야기시켰습니다. 이삼일 만에 프라하에서 100명이 넘는 형제 자매들이 구금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두 가지 결과가 있었는데, 그것은 재판받는 일과 형제들이 이 일로부터 교훈받는 일이었습니다. 체포당한 사람 가운데 여섯 명은 재판에 회부되고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 사건이 봉사 활동을 침체시키지는 않았지만, 형제들에게 실용적인 지혜의 필요성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잠언 3:21, 22) 이 점은 금지령 해제에 대한 희망이 고조되던 1960년대 후반에 특히 중요하였습니다.

숭배의 자유가 수평선상에?

1968년은 예기치 못한 변화의 해였습니다. 소위 개혁주의 공산당 세력이 정권을 잡고 민주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국민의 환영을 받았고, 그래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라는 말이 나돌았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여호와의 증인은 어떻게 대응하였습니까? 삼가는 태도였습니다. 체제의 자유화를 환영하면서 혹시라도 금지령이 해제되기를 바라긴 하였지만,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 조급한 단계는 밟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길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잠언 2:10, 11; 9:10) 비교적 자유로웠던 8개월이 지나고, 바르샤바 조약국 5개국의 군대가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에 진입한 것입니다. 약 75만 명의 군대와 6000대의 탱크가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국민들은 망연자실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프라하의 봄’ 기간 여호와의 증인의 중립적인 행동은 후년에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부 당국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이 정부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사건들이 있은 뒤 체코슬로바키아 시민들은 잠시 동안 서유럽으로 자유롭게 여행할 기회를 누렸습니다. 많은 여호와의 증인이 이러한 상황을 활용하였는데, 그것은 주로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가 그 해에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체코슬로바키아 전국에서 약 300명의 형제 자매들이 가장 가까운 대회 도시인 서독의 뉘른베르크로 여행하였습니다. 그 대회는 그들에게 영적 힘을 더욱 불어넣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뒤 곧 국경은 다시 폐쇄되었습니다.

1970년대 초는 정치 정상화라고 불리는 기간의 시작이었습니다. 1968년 개혁 운동의 동조자들은 정치 및 문화 생활로부터 조직적으로 제거되었습니다. 거의 3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그러한 일을 당하였습니다. 국가 보안국 관리들의 거의 4분의 1이 개혁에 동조했다가 그만 직업을 잃었습니다. 암흑 시대가 다시 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기간이 1950년대와는 달랐지만, 국가 보안국이 다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예의 감시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이 나라 일부 지역에서는 형제들이 투옥되었습니다. 증인들은 전파를 중단하지는 않았지만, 더욱 조심스러웠습니다.

“인간 존재 육천 년”

1969년 체코어 「파수대」지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 가운데서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책에 근거한 일련의 기사를 개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1장에는 “인간 존재 육천 년이 가까워 오고 있다”라는 소제목 아래 희년과 성서 연대에 관한 설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내용으로 인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그로 인해 많은 의문과 허다한 억측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사무실에서는 1972년 2월 22일자로 모든 회중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에서는 아마겟돈이 닥칠 날짜에 대해서 어떤 단정적인 주장도 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하여 장문의 설명을 제시하였습니다. 협회의 어느 출판물에서도 아마겟돈이 어느 특정한 해에 올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음을 지적하였습니다. 편지의 결론은 이러하였습니다. “전세계 여호와의 증인은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아무도 1975년 이전이나 그 해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 개인적인 주장을 첨가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주장도 성경적 근거가 없으며, 전파 활동에 해로운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두 일치되게 말하고,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게 하여, 같은 정신과 같은 방향의 생각으로 일치 연합하’도록 힘쓰십시오. (고린도 첫째 1:10) 그 날과 시간에 관하여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마태 24:36.

실제로 발생한 일

1975년 2월에 몇몇 형제들이 경찰 작전에 의해 검거되었습니다. 그 해가 진행되면서 이 나라 여러 지역에서 검거가 잇따랐습니다. 이전에 여러 번 투옥된 적이 있는 브르노 출신의 스타니슬라프 시메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1975년 9월 30일 나는 체포되었고 내 집과 직장은 수색을 당했습니다. 경찰은 다섯 자루의 서적을 압수하였지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200명가량의 국가 보안국 요원들이 작전에 투입되었다더군요. 그들은 40채의 가옥을 수색하여 반 톤에 달하는 물건을 압수해 갔다고 합니다. 우리는 13 내지 14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가택 수색은 몹시 애를 태우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감독자들의 집에는 종종 회중 보고서가 있었는데, 잘 감춰 두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두 번 이상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종들을 해치고자 하는 자들의 눈을 멀게 하셨습니다. 플젠 출신인 마르자크 형제는 이처럼 회상합니다. “나는 그때 야외 감독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리 문이 달린 장 안에 봉사 보고 용지, 헌금 그리고 모든 장로와 봉사의 종의 명단이 들어 있는 커다란 봉투를 넣어 두었지요. 수색을 하는 사람들이 그 장에 다가서자, 아내는 나를 쳐다보고 나더니 조용히 여호와께 도움을 간청하기 시작하더군요. 그 사람들은 유리 안으로 그 큰 회색 봉투를 들여다보았는데, 마치 눈들이 멀어서 그걸 못 본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보호해 주신 데 대해 여호와께 마음 속 깊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 형제들에 대한 국가 당국의 처우는 때로는 우스운 면도 있었습니다. 1936년에 침례를 받고 여러 번 투옥된 미할 파제카시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1975년에 나는 다시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집행 유예를 받았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같은 해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30주년 기념일에 ‘독일 제국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수고한’ 데 대한 상으로 내 연금이 오른 것입니다. 사유인즉, 내가 그리스도인 중립을 위해서 강제 수용소에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회중 구역 지도를 만들다

1976년 2월 1일,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돌보기 위하여 5인 전국 위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 위원들은 미할 모스칼, 안톤 무린, 보후밀 뮐러 (조정 위원), 에두아르트 소비치카 그리고 온드르제이 카들레츠였습니다.

그 해 후반에 온드르제이 카들레츠는 개인적으로 핀란드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지부 사무실을 방문하였습니다. 봉사부에서 그는 지역구, 순회구 및 회중 구역을 표시해 놓은 핀란드 지도를 관찰하였습니다. 귀국 후 전국 위원회의 한 모임에서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그와 같이 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뮐러 형제는 그런 지도가 정부 관리들 측의 의심을 사게 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를 야기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강력히 지적하였습니다. 카들레츠 형제가 회상합니다. “나는 그 문제를 다시 제기할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꼭 두 달 뒤 뮐러 형제 자신이 그 문제를 제의하더군요.” 그러한 마련의 필요성이 분명해졌던 것입니다. 머지않아 모든 회중이 그 일에 착수하였습니다.

그러나 220개 회중에 8개 지역구와 35개 순회구가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구역을 어떻게 구분할 것입니까? 그 임무는 프라하 출신의 야로슬라프 보우드니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독창성을 발휘할 여지가 많았지요. 게다가, 일을 매우 철저하게 하는 뮐러 형제와 나란히 일하는 것은 굉장히 멋진 일이었습니다. 열의에 가득 차서 그리고 수없이 기도하면서, 내 임무에 전력투구하였지요. 회중 구역 간의 경계점 수천 개소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과 수많은 도면 작성을 해야 했습니다.”

다른 구역에까지 이르다

각 회중에 최초로 구역이 임명된 후, 임명되지 않은 지역을 관리할 수 있는 회중들은 그렇게 해 보도록 권유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가외의 구역 임명을 받으려는 여러 회중들의 자진성은 매우 감동적이었는데, 특히 모라비아 지방의 오스트라바 주위에 있는 회중들의 경우가 그러하였습니다. 어떤 회중은 20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까지 가야만 그 구역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활동은 어떻게 조직되었습니까? 형제들은 온 주말을 바쳐 구역에 가곤 하였습니다. 토요일 아침에 떠났다가 일요일 저녁에 집에 도착했습니다. 자동차는 항상 만원이었고, 형제들은 각자 비용을 부담하였습니다. 전도인들은 격주로 그러한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전도인들은 여행자로 행동하도록 권유받았습니다. 마을 밖에서 하차한 다음 마을 안으로 한 방향으로만 걸어가서, 우정적으로 대화를 시작하여 점차 증거하는 쪽으로 이끌어 가다가, 반대를 만나는 경우에는 원래의 화제로 돌아가서 우정적인 태도로 결말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10년이라는 기간 중, 어려움을 겪었던 경우는 아주 드물었습니다.

다른 구역에 이르기 위해서, 장로들의 추천을 받은 일부 파이오니아들은 한정된 기간 임명되었습니다. 여러 해 전에 했던 것처럼, 그들은 대개 일 주일이나 그 이상 보냄을 받았습니다. 프라하에서 최초로 그렇게 한 파이오니아들 가운데 두 자매인 마리에 밤바소바와 카를라 파블리치코바가 있었는데, 그들은 거의 30년간 봉사 짝이었습니다. 카를라가 이렇게 회상합니다. “마리에는 1975년에 퇴직했어요. 퇴직한 둘째 날 우리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기 위해 모라비아로 출발했지요. 그때는 박해 기간인지라 그런 봉사가 위험했는데, 특히 우리가 가 있던 곳이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오스트리아 국경 근처에서 봉사했는데요. 그곳에 사는 자매가 귀띔해 주더군요. ‘아무 서적도 가지고 가지 말아요. 누가 붙잡으면, 가까운 데 가는 중이라고 하고서 그 장소를 떠나되, 내게로 돌아오진 말아요. 내가 나중에 소지품을 보낼 테니까요.’ 그러나 여호와께선 우리를 축복하셨어요. 이런 종류의 봉사에서 겪은 우리의 첫 경험은 놀라웠거든요. 우리는 매년 그런 식으로 파이오니아를 하면서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갔지요.”

때때로 그러한 파이오니아 여행은 그들을 고향에서 더 멀리 떠나가게 만들었습니다. “형제, 불가리아에 전도인이 필요하답니다! 형제는 러시아어를 하니까 그 일에 적격인데요.” 프라하의 한 형제는 바로 이러한 말을 1970년대 후반에 들었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자원하여 불가리아에 정기적으로, 때로는 1년에 두 번씩 여행하였는데, 13년 동안 그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국내에는 충분한 일거리가 없어서 체코 전도인들이 불가리아로, 훨씬 더 험난한 상황 속으로 여행을 가야만 했던 것입니까? 체코슬로바키아에도 할 일이 많았지만,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도움을 베풀고자 하는 강한 열망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 활동에 참여하였던 프라하 출신의 형제는 그 당시 불가리아 밭에 관하여 이렇게 진술합니다. “불가리아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후대를 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 가까워지게 되었지요. 시간이 지나자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이해하겠더군요. 그들은 진리를 주로 가족 성원들에게 전하곤 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에게는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한번은 내가 소피아에서 기념식 사회를 임명받았을 때, 많은 전도인들이 참석한 기회를 이용했습니다. 경험담과 실연을 사용해서 우리는 전도인들에게 좀더 ‘안전하게’ 증거하는 법을 보여 주었습니다. ‘저는 성서를 연구하는데요’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중립적인 소재로 대화를 시작하여 점차 성서로 이끌어가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제가 어디선가 들은 얘긴데, 성서에서는 ·⁠·⁠·’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요. 전도인들은 이 새로운 봉사 방식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래서 하느님에 관한 소식은 그들에게 가까운 사람들의 테두리를 넘어서 파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열정적인 활동이 관리들의 눈에 거슬리다

좋은 소식의 전파 활동에 대한 증가된 노력은 언제나 즉시 박해자들의 눈에 띄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슬기롭게 하려고 애를 썼는데도 그러하였습니다. 카를로비바리 근처 네이데크에 있는 회중이 행정 관리들과 경찰의 주목을 끈 회중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한 유라이 카민스키가 말합니다. “한때 그들은 전국의 활동이 네이데크로부터 지휘를 받고 있는 것으로 진지하게 믿기까지 했습니다. 공산당 고위 간부들은 우리의 활동을 저지할 방도를 찾고자 잦은 회합을 가졌습니다. 한번은 전문가들이 멀리 프라하로부터 모여들어, 카를로비바리의 한 호텔에서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참석자 가운데는 두 명의 정부 관리, 각 정부 부처 대표들 그리고 경찰 대표들이 있었습니다. 약 200명이 참석했지요.

연사는 연대 위에 우리의 「진리」 책을 올려 놓았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의 조직을 주도 면밀하게 분석해 가면서, 우리가 매우 철저하고 유능한 조직임을 지적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찬사가 극에 달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보다 더 잘 조직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한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다

공산당 경찰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 날짜를 숨기는 일은 불가능하였습니다. 프라하에 살고 있던 보제나 폐트니코바가 그러한 경우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그 당시에는 회중에 형제들이 별로 없던 터라, 자매들이 개인 집에서 집회를 사회하도록 임명받았지요. 집회에는 기껏해야 열 명이 모였어요. 지난 1975년에 우리 집단은 기념식을 위해서 그때까지 한 번도 집회가 열린 적이 없는 장소에서 모이기로 했습니다. 40분쯤 지났는데, 초인종이 울리고 현관문을 거칠게 걷어차는 소리가 나서 우리는 당황했어요. 소란이 계속되자 집주인이 문을 열었지요. 세 사람이 방으로 들어서는데, 둘은 경찰 복장이었고 하나는 사복 차림이었습니다. ‘아니 저런! 폐트니코바 부인, 당신이 이런 데 있을 줄은 몰랐소!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그 민간인이 묻더군요. ‘우린 예수 그리스도의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좀 앉아서 우리가 기념식을 마치게 해 주세요’ 내가 침착하게 대답했지요. 물론 거절당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신분증을 보자고 하더니, 차례차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자리에 와 있는 이유를 심문하더군요. 그러다가 한 노인 자매를 심문할 차례가 되었어요. 나는 할머니가 뭐라고 대답할지 좀 겁이 났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의 대답은 우리 모두에게 격려적이었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이고, 여호와를 공경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노인이라 다행인 줄 아시오.’ 경찰관의 대꾸였습니다. 그 용기를 보고 놀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를 강제로 내보냈는데, 나는 그곳 경찰서에서 기념식을 사회했다는 조서에 서명을 해야 했습니다.”

12년 후인 1987년에 보헤미아 지방의 어떤 곳에서는 국가 보안국이 기념식 관계로 여러 형제들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기념식이 어디서 열렸는지 그리고 누가 사회를 했는지 알아보는 데 있었습니다. 한 곳에서는 기념식이 끝나 갈 무렵 참석자 모두가 경찰에게 신분 조사를 당하였고, 한 형제는 구금을 당한 뒤 취조를 받았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세 자매들을 형사 죄로 고소하였는데, 이유인즉 그들이 한 부인을 방문하여 “여호와의 증인으로 불리는 금지된 종파의 서적을 연구”해 오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 자매인 밀루셰 파블로바는 파르두비체에서 금고형을 받았는데, 어떤 일을 하다가 현행범으로 붙들려서가 아니라 단지 혐의를 근거로 선고를 당하였습니다. 공식적인 선고 사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전문가의 진술에 따르면, 피고는 금지 서적을 배포 및 복사해 왔다. 본 항소 법원은 원심을 확정하면서, ‘그를 일벌백계로 선고하였음’을 부언하는 바이다.”

영적 양식을 마련하는 일

공산주의 시대에는 연구용 성서 서적을 몹시 조심스럽게 마련하였습니다. 일반 증인은 서적이 어떻게 번역·인쇄되어 사용하도록 제공되는지 몰랐습니다. 번역자들과 교정자들은 물론 인쇄·제본에 관여하는 사람들까지도 공개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번역자는 체코어 「파수대」 기사를 타자로 정서한 다음 교정자에게 넘기고 나면, 회중 집회에서 사용될 때까지는 그 자료를 다시 보지 못하였습니다. 서적과 팜플렛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이런 식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의 질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습니다. 「깨어라!」지는 그 당시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장로의 회조차도 자기 회중에 있는 누가 번역에 관여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때때로 번역 일이 늘어난 결과 이 형제들의 야외 봉사가 저조하게 되면, 장로들은 그들이 아마도 영적으로 식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들을 돕고자 노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번역자들과 교정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밝히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계획의 실천에 착수하였습니다. 「신세계역 성경」 전서를 체코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1982년에서 1986년 사이에 이 성서는 바로 이곳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또한 인쇄되고 다섯 권으로 제본되어, 각 증인 가정에 한 부씩 공급되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신세계역」을 슬로바키아어로 발행하는 작업도 진행되었지만, 그 성서는 나중에 가서야 완성되었습니다.

서적을 인쇄하기까지

1950년대에, 투옥되지 않은 형제들은 형제 자매들이 영적 양식을 빠짐없이 섭취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금지령이 내려지고 책임 있는 형제들이 체포된 후 얼마 동안은 종종 단 한 부의 「파수대」를 가지고 여러 회중이 함께 보아야 하였습니다. 그 상황은 점차 개선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회중당 한 부, 그 후에는 가족당 한 부가 되었습니다. 전도인들은 손으로 베껴 써서 노트를 만들곤 하였습니다. 타자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네이데크 회중의 유라이 카민스키는 형제들이 직면한 전형적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드디어 형제들이 타자기를 구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낡은 것이었습니다. 그 타자기를 형제들에게 판 사람은 형제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바로 땅속 구덩이에서 파냈습니다. 나중에는 새 타자기들은 물론 사진 확대 장비도 구입하는 방도를 알아냈습니다.”

서적을 복제하는 데 여러 사람이 관련되었습니다. 칠순이 넘은 노인까지 포함하여 여러 자매가 타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형제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서적을 감옥 안으로 넣어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1958년에는 「파수대」를 소형 사진판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사진판 잡지를 세 부까지는 비누 덩어리나 치약 속에 숨겨 옥중에 있는 형제들에게 들여보내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형제들은 자신이 베껴 쓴 사본을 만들고서는 원본은 파기하곤 하였습니다.

1972년에 헤르베르트 아다미는 서적을 복제하는 일을 지원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전국을 위하여 서적을 생산하는 일을 조정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초기에는 서적이 수백 명에 달하는 회중 전도인들의 손으로 만들어졌지요. 나중에 가서는—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하기 직전에는—현대적 설비를 두루 갖춘 종합 인쇄 시설을 지하에 갖추었는데, 그 생산 용량은 그 당시 필요한 서적의 여러 배에 해당하였습니다.”

처음으로 등사기를 사용하던 시절에 관하여, 아다미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쉽사리 발각되지 않는 장소를 사전에 정해 두었다가 1년에 네 번가량은 인쇄 장비 전체를 옮겨야 했습니다. 매 작업 기간에 인쇄 팀은 약 1만 2000부의 서적을 인쇄하고 엮어서 제본한 다음 발송했습니다. 작업 기간은 1주일 정도였지요. 작업자들은 새벽 네 시에 일어나고, 종종 자정이 지나서야 취침했습니다. 작업이 완료되면, 나는 서적 꾸러미들을 가까운 기차역으로 실어가곤 하였지요. 거기서 짐이 배달업자에게 넘겨지면 업자는 때로는 60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까지도 운반해 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자체적으로 지은 제작소들에서 형제들은 비밀리에 자체 등사기를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두 합쳐, 그러한 등사기를 160대나 만들었으며, 그 일부는 루마니아에 있는 형제들에게 공급하였습니다.

1980년대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형제들은 오프셋 인쇄를 하기 시작함으로써 인쇄의 질이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 형제들은 스스로 오프셋 인쇄기를 조립하였습니다. 1년 반 내에, 열한 대를 조립하였는데, 거기에는 전자 제어 윤전 급지기도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한 대의 인쇄기는 시간당 양질의 인쇄를 1만 1000장 찍어 낼 수 있었습니다.

프라하의 인쇄 시설 두 곳이 수색당하다

1986년이 끝나 갈 무렵 국가 보안국은 기어이 우리 인쇄 시설 중 두 곳을 찾아 내어 폐쇄시켰습니다. 그 중 한 곳을 수색한 후, 내무부의 부내(部内) 회보에 보도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 회보 한 부를 우호적인 한 경찰관이 증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선, 증인들을 외국의 정치 운동과 연계시키고자 시도하는 상습적인 선전이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보도는 경찰 작전을 상술하고, 증인들에게 내려진 선고 내역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보도는 뜻밖에도 이러한 점을 시인하면서 끝을 맺었습니다. “여호와 숭배자들은 외부 사람들에 대해서 매우 품위 있게 처신한다. 그들은 자진해서 도움을 베풀고 열심히 일하는데, 그러나 거기까지다. ‘사회주의 활동대’와 같은 일에는 투신하지 않는다. 여호와 숭배자들이 도둑질, 흡연, 알코올이나 마약 남용을 한 사례는 알려진 바 없다. ·⁠·⁠· 그들 중 아무도 여하한 도덕 사범이나 재산권 침해로 기소된 적이 없다. 이 종파의 성원들은 진리를 말하고자 노력한다. 그들은 결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단지 ‘형제’ ‘자매’라고 부른다. 그들은 항상 자기 자신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며, 특정한 정보를 제시하도록 요구받으면 침묵을 지키는데, 그것은 피의자일 경우만이 아니라 증인으로 소환되는 경우에도 그러하다.”

물론, 인쇄 시설이 한두 곳 폐쇄되었다고 해서 하느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활동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87년은 더욱 증가한 한 해가 되었습니다. 체코 땅에서 9870명이라는 새로운 전도인 신기록을 달성한 것입니다. 평균 699명이 보조 또는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법적 등록이 가능하였는가?

장로의 회가 여호와의 증인의 각 회중의 활동을 감독하도록 세계적으로 마련된 1972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동일한 마련이 시행되었습니다. 1976년에 다섯 명의 위원으로 이루어진 전국 위원회가 이 나라 안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돌보도록 임명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의 증인도, 그들에게 필요한 업무를 담당할 법인체도 법적으로 등록된 바 없었고, 업무를 수행할 사무실도 체코슬로바키아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1979년 3월, 미완성된 3층 건물을 프라하에서 두 증인 개인 명의로 매입하였습니다. 열 내지 열두 명의 자원 봉사자 집단들이 1주일씩 교대해 가며 건물 공사를 하러 왔습니다. 심지어 슬로바키아의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 프라하로 여행해 오기도 하였습니다. 6개월 내에 숙소에 입주할 수 있었고, 1년 후에는 사무실로 사용할 부분도 준비되었습니다. 그 건물은 1994년 봄까지 적합한 사무실로 사용되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의 상황은 법적 등록을 달성할 목표로 협상이 시작될 수 있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1979년 6월 1일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 회의 간부회 산하 종무 사무국 앞으로 서한이 전달되었습니다. 그 서한은 이렇게 진술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으로 알려진 종교 단체를 대표하여 본인들이 회견을 요청하오니 부디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본인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조직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특정 개인들이 여러분과 함께 본 종교 단체와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현행 법 제도 간의 상호 관계를 조정하는 문제를 고려하고자 하는 의사가 있음을 적극 개진하는 바입니다.”

회답은 약 1년 뒤에 왔으며, 논의는 1980년 4월 22일에 전개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등록 신청서가 내무부에 제출되었습니다. 정관 외에도 그 신청서에는 논리 정연한 13개 항목의 진술이 열거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제5항은 이렇게 진술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국가의 인정을 받게 된다면, 전체 회중들은 이 목적을 위하여 지정된 장소에서 집회를 열게 될 것입니다. 회중들은 소집단으로 분리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집회는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 의하여 사회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워치 타워 협회는 산하 회중들을 더욱 원활히 감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정부 당국에서는 여호와의 증인 회중들의 활동 상황을 더욱더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정부 대표자들은 자유로이 공개 집회를 참관하여, 이러한 모임들이 과연 무해하고 유익한 모임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런 회답도 오지 않았습니다.

국가 보안국에 의한 대대적인 심문

1985년의 분위기는 정치 체제상의 불안한 정세를 그대로 반영하였습니다. 그 체제는 체제 안정에 위협을 제기하는 여하한 대상에게도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 형제들에 대한 심문이 더욱 잦아졌습니다. 많은 건수가 프라하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수많은 형제들이 치안 본부장으로부터 소위 경고장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영구 보호 관찰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해가 지나는 동안, 회중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프라하 사무실로부터 다섯 번 편지를 받았는데, 거기에는 “여러분이 합리적임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십시오”라는 빌립보 4:5의 원칙을 따르라는 친절하면서도 확고한 격려가 들어 있었습니다.

국가 보안국이 제시한 흥미로운 제안

그러다가 1988년 초에 국가 보안국은 국내에서 책임 있는 형제들에게, 협회의 세계 본부 대표자가 연방 내무부의 몇몇 관리들과 비공식 회담을 갖기 위해 내방하는 일을 주선해 줄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의제 가운데는 “권한을 가진 국가 관리들과 장차 가능한 토의를 위한 예비 단계로서, ·⁠·⁠· 상호 관계에 관한 부면들”도 있었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한 가지 변화였습니다.

그 모임을 준비하는 일이 확정되기 전에, “하나님의 공의” 지역 대회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열렸습니다. 당국의 주지하에,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비교적 많은 수의 증인이 참석하였습니다.

한편 협회 본부 요원들과 내무부의 고위 인사들 간의 토론을 위한 준비는 점차 진전되었습니다. 양측 간의 회합이 드디어 1988년 12월 20일 아침, 프라하의 포룸 호텔 회의실에서 열렸습니다. 협회 대표는 통치체에서 나온 밀턴 헨첼과 시어도어 재라스 그리고 독일 지부에서 온 빌리 폴이었습니다. 통치체에서 온 형제들은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았습니다. 인내와 시간이 필요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그 일은 커다란 진일보였습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 회합은 그 다음해에 발생한 일에 의미 심장하게 기여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주요 국제 대회가 폴란드의 세 도시에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참석하기를 원하였으며, 그 문제를 국가 보안국 관리들과 협의하였습니다. 증인 중 1만 명에게 폴란드 여행 허가가 나왔을 때, 형제들은 참으로 흥분하였습니다! 그 수는 그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절반이 넘는 수를 의미하였습니다. 내무부에서 출국자 전원의 명단을 요구하였을 때 일부 증인들에게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여행을 한 사람들은 모든 기대를 능가하는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정성”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키는 대회 프로그램에 의해서, 대회 참석자들의 열렬한 영에 의해서 그리고 폴란드 증인들이 보여 준 놀라운 후대에 의해서 커다란 세움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활동에 초점을 맞추다

그 후 같은 해인 1989년 11월 17일에 학생 봉기가 프라하에서 일어났습니다. 공산 정권은 잔인한 힘으로 대응하여, 특수 경찰대를 투입하여 프라하의 ‘국민의 거리’에 모인 시위대를 해산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공산주의 정부에 반대하는 평화 시위 운동을 촉발하였습니다. 그 운동은 후일에 ‘벨벳 혁명’으로 일컬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국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특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감정이 격앙되어 그리스도인 중립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89년 11월 22일, 우리의 프라하 사무실은 체코슬로바키아 내에 있는 모든 회중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의 일부는 이러하였습니다. “형제들이 복음 전파 활동에 집중하여, 아무 일에도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태도입니다! ·⁠·⁠· 우리는 친애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의 훌륭한 활동과 슬기를 깊이 인식합니다. 여러분의 봉사와 그 결과는 여호와께서 이 나라에 있는 자신의 증인들과도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우리는 그 점을 소중히 여기며, 우리가 여호와 하느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기를 그분께 기도합니다. 우리의 사랑을 확신하시고 형제로서의 우리의 인사를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 직전에 끝난 봉사 연도에 체코 땅에서 전도인 최고 수는 1만 1394명—또 하나의 훌륭한 증가—이었습니다.

1989년 말경 체코슬로바키아에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우리의 전국 위원회는 즉각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의 신분을 합법화할 방도를 추구하였습니다. 일부 위원들은 최고 회의 간부회를 방문하였는데, 이 방문의 결과로 작성된 문서는 그 당시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책임 있는 관리가 서명한 이 문서는 이렇게 진술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교회의 준비 위원회가 한 발표에 근거하여, 우리는 1990년 1월 1일자로 동 교회가 1939년에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중단되고 1949년 4월 4일 재차 금지된 바 있는 이 교회의 활동을 재개하는 문제를 고려한다.” 그 문서는 법적 등록을 향한 첫 단계의 한 부분을 의미하였습니다.

등록으로 가는 멀고먼 길

정부가 “여호와의 증인 교회”의 활동 재개를 인정하기는 하였지만, 또다시 거의 4년에 걸친 끈질긴 노력 끝에 협회는 체코 공화국에서 법적으로 등록되었습니다.

1990년 1월 12일, 여호와의 증인 종교 협회의 등록을 위한 공식 신청서가 체코 공화국 문화부에 제출되었습니다. 모든 절차는 통치체, 본부 법률부 및 국내 변호사들과의 긴밀한 협조 아래 처리되었습니다. 3월 1일과 2일에 헨첼 형제가 프라하를 방문하였습니다. 무린 형제와 소비치카 형제를 대동하고 헨첼 형제는 국무 총리 집무실과 문화부를 방문하였습니다. 두 건의 방문은 우리의 신청 건이 신속히 등록되는 데 역점을 두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신규 등록법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서 아무런 가시적 결과가 없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우리는 청원이나 수상과의 면담을 포함하여 다각도로 노력하였습니다.

1992년 3월 19일, 신설 교회 및 종교 협회 등록에 관한 법이 통과되었습니다. 그 법은 종교 협회 신청서에 그 성인 신봉자 1만 명의 서명이 첨부되는 경우에만 등록 절차가 시작될 것임을 명시하고 있었습니다. (공산 정권하에서 수십 년간 법적 기능을 발휘해 온 소위 전통 종교들은 자동적으로 등록되었음.)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은 신청을 다시 하고 필요한 제반 서류를 제출할 필요가 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등록 준비 절차를 밟던 중인 1993년 1월 1일에 또 한번의 변화가 일어나,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 공화국 두 나라로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1993년 9월 1일 수요일 체코 통신사는 다음과 같은 보도 건을 접수하였습니다.

“1993년 9월 1일 오늘 오전 10시에 여호와의 증인 종교 협회 대표자들은 체코 공화국 문화부에서 등록 문서를 받았다. 여호와의 증인 대표자들은 문화부 관리들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개인적 혜택을 위한 여하한 재정 지원이나 국가로부터 여하한 직접적인 재정 지원도 요청하지 않을 것임을 표명하였다. 등록은 오늘부로 유효하다.”

이 중대한 사태 진전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일부 신문에서는 짤막한 고지 사항으로 끝났습니다. 다른 신문들에서는 그 보도를 두드러지게 취급하여 “여호와 숭배자들, 고대하던 것 획득” 또는 “여호와의 증인은 승인된 종교”라는 표제를 실었습니다. 이 진전은 체코 공화국 내에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박해가 끝난 것을 의미하였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며칠 안 되어, 보도 매체를 통한 가차없는 공격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특징으로 보아,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가장 무례한 공격은 종교계 언론에서 나왔습니다. 편향된 기사들에는 등록 과정에서 증인들에게 제시되었던 질문과 함께, 그 답변 내용에 대한 기고가의 억측까지 실려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협회의 대변인들이 증인들은 특정 사안을 믿거나 실천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다고 말할 때 기만적이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답변 내용이 그들의 조직의 원칙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적대적인 운동은 새로운 시대, 즉 잔인한 투옥의 시대가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이 조롱의 대상이 되는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때는 여호와의 증인 각자가 여호와 하느님과 그분의 조직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자신의 충성에 대한 또 다른 종류의 공격에 과감히 맞서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믿음으로 행동하다

여호와의 증인은 바로 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법적 등록이 완료되기까지 기다렸다가 공개 집회—심지어 큰 대회—를 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1990년 1월에 공개 활동을 재개할 것임을 관리들에게 이미 통보한 바 있습니다. 바로 그 달에 모든 회중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이 마련되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유익을 얻으라”라는 시기 적절한 주제를 부각시켰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두 시간 진행되는 순회 대회였습니다. 그 모임들은 규모가 적당하였지만, 장소를 빌려서 사용하였습니다. 각 장소에 한두 회중이 함께 모였습니다. 그러다가 봄이 되면서 더 큰 순회 대회로 이어졌습니다.

그러한 대회들에서 만사가 순조로웠습니다. 그래서 지역 대회—4일간의 전국 대회—를 그 해 여름 프라하에서 개최할 마련을 하였습니다. 이 행사를 위해 프라하의 에브젠 로시츠키 경기장을 임차하였으며, 통치체의 두 성원 헨첼 형제와 재라스 형제가 프로그램에 참여하였습니다. 최고 참석자 수는 2만 3876명이었고 1824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순결한 숭배가 절대적 승리를 거둔 대회였습니다. 대회 분위기는 그 전해에 열린 폴란드 대회와 뛰어나게 비슷하였지만, 이번에는 이 나라에서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로 열린 것입니다! 대회에 대한 강렬한 감격이 솟구치면서, 기쁨의 미소와 진심 어린 감사의 눈물이 교차하였습니다.

40년 동안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말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개적으로는 귓속말로만 하던 말이었습니다. 이 집단에 대한 엄청난 거짓 소문이 나돌면서, 이들은 ‘불법적인 종파’로 매도되기 일쑤였습니다. 이제는 언론계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증인들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회에 대한 언론의 보도는 대체적으로 호의적이었습니다. 언론에서는 증인들이 대회 시작 전에 스타디움에서 행한 일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두 달 동안이나 증인들이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약 9500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5만 8000시간을 바쳐, 스타디움을 말끔히 청소하고, 의자를 수리하고, 하수도 시설을 손보았으며, 스타디움 전체에 흰 회칠을 하였습니다. 일간지 「프라하 석간」(Večerní Praha)의 한 기자는 웃는 얼굴들과, 체코슬로바키아 전국은 물론 다른 나라들에서도 온 사람들의 조화로운 혼합, 그리고 그들의 정결한 말씨에 경탄하였습니다.

그 해에 또 하나의 중요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1990년 8월 30일 베히니에 회중의 왕국회관이—이 나라 최초로—봉헌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또 하나의 행사, 참으로 엄청난 행사로 이어졌습니다.

결코 잊지 못할 대회

여호와의 증인의 국제 대회를 1991년 8월 9일부터 11일까지 프라하에서 개최한다는 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그 첫 단계는 경기장을 빌리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곳을 빌릴 것입니까? 세계에서 가장 큰 경기장 가운데 하나인 프라하의 스파르타키아드 스타디움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아직 법적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경기장 전체를 당시 전국 위원회 조정 위원인 안톤 무린 개인 이름으로 빌렸습니다. 이것은 용기 있는 추진이었습니다. 이 일은 여호와에 대한 강한 신뢰의 행동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이 일을 축복하셨습니다.

숙박부는 엄청난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인데, 그 일을 감독하는 책임은 루보미르 뮐레르에게 임명되었습니다. 통치체의 형제들은 양호한 숙박 시설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헨첼 형제와 재라스 형제는 직접 프라하 전역에서 추천된 호텔들에 대한 순회 조사에 나섰습니다. 그 형제들은 호텔 방에 들어가서 침대를 검사해 보기까지 하였습니다. 공용인 욕실과 화장실이 층마다 있는 호텔은 일고의 여지가 없다고 그들은 말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헨첼 형제가 설명하였습니다.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숙박객들이 서로 다른 시간에 들어오고 나가니까 그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회 참석자들은 일반적으로 같은 시간에 나가고 돌아옵니다. 화장실에서 벌어질 상황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형제들을 그런 상황에 처하게 할 수는 없지요.” 일을 조직하는 국내 형제들은 통치체 성원들이 각 참석자의 복지에 개인적 관심을 나타내는 것을 보면서 실질적인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경건한 자유 애호자” 국제 대회의 최고 참석자 수는 7만 4587명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2만 9119명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참석하였고, 2만 6716명은 독일에서, 1만 2895명은 폴란드에서 왔습니다. 나머지 5857명은 그 외 36개 나라에서 왔습니다. 2337명의 새로운 사람들이 침례를 받는 모습은 장관이었는데, 그 가운데 1760명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480명은 독일에서, 나머지 97명은 폴란드에서 나왔습니다.

전체 대회의 절정은 분명히 8월 10일 토요일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체코슬로바키아 청중석 전체가 일어나 우레와 같은 기립 박수를 한 것입니다. 그것도 문자 그대로 10분 동안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얼굴과 얼굴이 기쁨으로 빛을 발하였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 그 모든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통치체 성원인 앨버트 슈로더가 한 연설의 결론 부분에서 청중에게 처음에 영어로 된 새로운 책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소 실망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한 권으로 새로 인쇄된 「신세계역 성경」을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로 동시에 발표한다고 광고함으로써 그들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기쁨의 눈물이 많은 대회 참석자들의 얼굴에서 흘러내렸습니다.

그 대회는 참석자들의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언론은 어떠하였습니까?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일부 보도는 편파적이었고 일부는 우호적이었습니다. 8월 12일 월요일에, “경기장은 만원이었다”라는 표제하에 체코 및 모라비아-실레지아 지방의 일간지 「벤코프」는 이렇게 보도하였습니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여호와의 증인의 국제 대회가 프라하에서 열려, 유럽 전역과 아메리카 및 일본으로부터 7만 5000명의 대표단이 참석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1912년 이래 활동해 오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 대표단들은 사려 깊음과 자기 수양이 두드러진 사람들이었다. 대회 행사는 질서 정연하고 매우 잘 준비되어 있었다. 토요일의 침례 행사 중 비가 오기 시작했지만 청중은 자리를 뜨지 않고 새로운 성원들을 긴 박수로 환영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법적 등록은 그 후 2년 동안 얻어내지 못하였습니다.

확장의 시기

법적 절차는 느린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이 나라에서 활동이 가속화됨에 따라 신권 조직의 필요성은 증가하였습니다. 1980년 이래 형제들은 프라하에 있는 3층 건물을 중앙 사무실로 사용해 왔는데, 주거 공간이 부족하였습니다. 1990년에 활동이 더욱 공개적으로 수행되기 시작하면서, 형제들은 그 건물 구조를 새롭게 변경하였습니다. 숙소 방들을 없애 버리고 건물 전체를 여러 개의 사무실로 개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식의 사무실입니까? 큰 방들을 나무 칸막이로 구분하여 작은 작업 공간들로 만들었습니다. 이 공간들은 사무실일 뿐 아니라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침실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침대가 자신의 사무실 책상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공간이 더 필요하였습니다.

1993년 봄, 프라하에서 신축된 10층 건물이 성서 교육을 증진시키는 일에 사용되도록 협회에 기증되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온 자원 봉사자들이 그 건물을 개조하는 데 참여하였습니다. 1994년 5월 28일과 29일에 봉헌식 프로그램을 가졌습니다. 여러 해 동안 공산 정권하에서 여호와께 충성을 유지해 온 여호와의 증인 수십 명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통치체 성원 앨버트 슈로더가 프로그램에 참여하였으며, 네덜란드·덴마크·독일·미국·스위스·슬로바키아·영국·오스트리아·우크라이나·이탈리아·폴란드로부터 손님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1993년에 별개의 두 나라로 분리될 당시 두 나라는 오스트리아 지부의 감독하에 아직 하나의 전국 위원회가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나라에서 사정은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해 이 각각의 나라들을 위한 전국 위원회가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1995년 9월 1일에 체코 공화국에서 지부 사무실이 운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얀 글뤼크셀리그, 온드르제이 카들레츠, 야로미르 레네체크, 루보미르 뮐레르, 에두아르트 소비치카가 통치체에 의하여 지부 위원회에서 일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그 후 루보미르 뮐레르가 러시아에서 특별 봉사를 하도록 임명되면서, 페트르 지트니크가 체코 공화국에서 지부 위원회의 새로운 성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속성 건축’ 왕국회관들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들은 모일 장소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러한 모임에 적합한 장소를 물색한다는 것이 체코 공화국에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건물 소유주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임대를 거부합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새로운 것이나 해묵은 것을 막론하고 증인에 관해 그릇된 인상을 주는 선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회중에서는 회관을 짓거나 낡은 건물을 개조할 기회를 찾습니다. 새로운 건물을 세우기 위해 시도된 방법 가운데 가장 실제적인 방법은 속성 건축 방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1993년 11월 20일, 체코 공화국에서 이 방식으로 지은 최초의 왕국회관이 봉헌되었습니다. 그 회관은 세지모보우스티 읍에 건축되어 현재 그곳에 있는 두 회중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왕국회관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1999년 5월 현재, 전국에서 242개의 회중이 증인 자체 소유인 84채의 왕국회관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체코 공화국의 형제 자매들은 다른 나라에 있는 여호와의 동료 종들의 재정 지원이 없었다면 이렇게 많은 아름다운 왕국회관들을 지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국제적 형제 관계에서 오는 관대함은 체코 형제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에 있는 형제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종들의 마음에 그러한 영이 싹트게 하시고 그처럼 최상의 조직이 생기게 하신 여호와께 진정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원합니다.—고린도 둘째 8:13-15.

자유 가운데 숨겨진 함정

1989년의 공산주의의 몰락에 대한 도취감은 이제 멀리 사라졌으며, 많은 새로운 문제들이 계속 생기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전에는 모르던, 열심히 일해서 부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 불안, 급증하는 범죄, 물가 상승 그리고 인간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그 밖의 부정적인 요인들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생활 수준의 향상은 물질주의와 경쟁심 그리고 시기심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많은 도시 생활자들은 그들이 여가를 보내기 원하는 시골에다 조그마한 별장을 두고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해외로 비용이 많이 드는 휴가를 떠납니다. 새로 획득한 민주주의는 아무 때나 아무 것이나 비평하는 자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부도덕한 생활 방식을 선전하는 물꼬를 터놓았습니다. 공산주의 아래서는 감히 생각도 못하던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사태가 엄습하였고, 일부 사람들은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풍조는 일부 여호와의 증인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상당수가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중단하였는데, 그것은 물질주의적 생활 방식에 열중하게 되거나, 지나치게 사회 활동에 정신을 쏟거나, 결혼에 대한 성서의 높은 표준을 외면하거나, 무엇이나—여호와의 신권 마련을 포함하여—비평하려 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중 조직에 남아 있는 쪽을 택한 사람들도 자신의 사고 방식을 따르도록 회중을 조정하려 들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태는 확고부동한 감독자들에 의해 해결되기까지 긴장을 야기하였습니다.

체코 공화국에서 현재 하느님을 섬기고자 애쓰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신론과 진화론으로 기울어진 사회에 둘러싸여 있음을 실감합니다. 현 사회는 종교를 유치한 전통이나 철학적 궤변으로 여깁니다. 공격적인 한 대중 매체는 끊임없이 여호와의 증인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나치와 공산주의 감옥의 가혹한 시련 가운데서 그리고 그러한 시련을 이용하던 자들의 속임수 가운데서 직면하던 상황과 같이 침투력이 강한 믿음의 시험이 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절대 다수는 이러한 시험에 직면해서 믿음 안에 굳게 서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 문제에 대해 품고 있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1999년 봄에 체코 헌법 재판소에서는 두드러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체코 신문 「인민 일보」(Lidové Noviny) 1999년 3월 11일자의 한 기사에서는 “브르노에서부터 양식(良識)이 확산되다”라고 전하였습니다. 브르노는 헌법 재판소가 있는 곳을 말합니다. 그 법원에서는 여하한 양심적 병역 거부자도 군복무를 거부한다 하여 두 번씩이나 재판에 회부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판결은 상당수의 여호와의 증인에게 어느 정도 부담을 덜어 줍니다. 이번 사건에서 얻은 소득은 여호와의 증인이 체코의 법 체제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것임을 사계(斯界)에서는 널리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의 힘으로

체코 공화국의 여호와의 증인은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이웃들에게 계속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바는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 많으신 우리의 하느님 여호와를 알게 되고, 믿음을 나타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분이 만드신 놀라운 마련들을 인식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위하여 증인들은 종종 여호와의 증인은 “위험한 사교”라는—자주 반복되는 비방에 의해 형성된—사람들의 생각을 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증인들은 수십 년간의 무신론적 정권하에서 파생된, 종교를 전반적으로 경멸하는 생각도 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증인들은 이 면에서 성공하고 있습니까?

1999년에 여호와의 증인 1만 6054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242개 회중에 모였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참석하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합니다. 총 참석자 수는 3만 1435명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바라는 것은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인내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인 행로를 성공적으로 달리도록 돕는 것입니다. 대중에게 전파하는 한편 증인들은 또한 서로가 믿음 안에서 계속 굳건한 상태에 있도록 돕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우리 시대에 일어날 일들을 설명하시면서 “여러분 자신의 인내로 여러분은 자기 영혼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 21:19) 사도 베드로도 영감을 받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모든 것의 끝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건전한 정신을 가지고, 기도하기 위하여 깨어 있으십시오. 무엇보다도 서로 열렬히 사랑하십시오.” (베드로 첫째 4:7, 8) 그 사랑이 그들로 하여금 귀중한 성서의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또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인 연합 가운데 서로에게 다가가도록 계속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165면 삽입]

“머물러 있었던 것을 결코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68면 삽입]

“‘열 명당 한 사람을 죽이기 원한다면, 우리 모두를 죽이시오!’ 온 수용소 안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184면 삽입]

‘조롱도 받고 모욕도 당하였지만, 남모르게 존경도 받았지요’

[187면 삽입]

“그것은 타협의 표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합리성이었습니다!”

[150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독일

폴란드

슬로바키아 공화국

오스트리아

체코 공화국

보헤미아

프라하

리디체

클라드노

카를로비바리

모스트

테플리체

리베레츠

모라비아

브르노

실레지아

[148면 전면 삽화]

[153면 삽화]

드레스덴 출신의 에를러 형제

[155면 삽화]

오토 에스텔만은 전국을 다니며 “창조 사진극”을 상영하였다

[157면 삽화]

보후밀 뮐러

[167면 삽화]

보제나 보드라지코바는 강제 수용소 안에서 진리를 배웠다

[169면 삽화]

프란티셰크 슈나이드르와 알로이스 미체크—둘 다 마우타우젠 강제 수용소에 투옥되었다

[173면 삽화]

제2차 세계 대전 후 많은 사람들이 공개 강연에 모여들었다

[175면 삽화]

제2차 세계 대전 후 베델 가족과 지부 사무실

[178면 삽화]

숲 속에서의 모임, 1949년

[185면 삽화]

단체 휴가는 영적 세움을 얻는 기회가 되었다

[194면 삽화]

지부 위원인 야로미르 레네체크는 어린 시절부터 봉사에 열심이었다

[207면 삽화]

밀턴 헨첼과 시어도어 재라스를 비롯하여 그 밖의 형제들은 법적 등록을 추진하였다

[210면 삽화]

1989년 폴란드 대회에 참석한 체코 대표자들

[216면 삽화]

1991년 프라하 국제 대회—특별한 행사

[218면 삽화]

체코 번역 팀

[223면 삽화]

프라하 지부 사무실

[223면 삽화]

아래: 지부 위원회(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얀 글뤼크셀리그, 야로미르 레네체크, 온드르제이 카들레츠, 페트르 지트니크, 에두아르트 소비치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