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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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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남아메리카 대륙의 동남면을 따라 4000킬로미터가량 뻗어 내려가는 아르헨티나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땅입니다. 국경선 안쪽으로 험준한 안데스 산맥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봉우리들은 6000미터 이상 솟아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열대림이 있어 재규어와 맥이 그 속에서 어슬렁거립니다. 남쪽으로는, 티에라델푸에고 섬 주변의 몹시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펭귄과 고래가 놀고 파도는 30미터 높이까지 넘실거립니다. 평원에서는 말 탄 가우초(아르헨티나의 카우보이)들이 드넓은 소 방목장을 순찰하고 다닙니다.

이 나라의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증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증인들은 전국 방방곡곡의 크고 작은 주요 도시들에 있습니다. 12만 명이 넘는 증인들은 산악 지역에서, 밀림 속에서, 평야 지대에서 그리고 해안 지역을 따라가며 전파합니다. 이 나라 수도의 초고층 빌딩 구역에서도, 산간벽지의 마을에서도 증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 나라의 변화무쌍한 지형도 좋은 소식의 전파를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문화적·언어적 장벽도, 아니 경제적 난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좋은 소식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전파되고 있습니다.—마가 13:10.

이러한 결과는 그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열심과 믿음이 넘친, 헌신적인 남녀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성서의 소식을 선포하겠다는 결의를 분명히 나타내 왔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말씀을 전파하십시오. 순조로운 시기에도 곤란한 시기에도 긴급하게 그 일을 하십시오”라는 교훈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디모데 둘째 4:2) 그렇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성취된 일에 대한 영예를 그들 자신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단지 여호와의 영에 의해서만 이 일이 이루어진 것임을 인정합니다.—스가랴 4:6.

기초가 놓이다

이곳에서 이루어진 일의 기초가 놓인 것은 여러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진리가 이 나라의 벽지 구석구석에까지 이르게 된 내력을 살펴보면 참으로 믿음이 강화됩니다. 1923년에 조지 영이 캐나다에서 남아메리카로 왔습니다. 브라질에서 광범위하게 증거한 다음, 그는 아르헨티나로 관심을 돌렸습니다. 몇 개월 내에 1480부의 서책을 비롯하여 30만 부의 성서 출판물을 아르헨티나 25개의 크고 작은 주요 도시에서 배부하였습니다. 선교 여행을 계속하여 남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로 가기 전에,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왕국 소식을 널리 전하려는 노력에 대한 하느님의 승인의 미소가 내내 매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1924년, 당시 워치 타워 협회 회장 J. F. 러더퍼드는 후안 무니스라는 스페인 형제를 아르헨티나에서 봉사하도록 임명하였습니다. 2년 후 무니스 형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워치 타워 협회의 지부 사무실을 설치하여, 아르헨티나·우루과이·칠레·파라과이의 왕국 전파 활동을 보살피게 하였습니다.

무니스 형제는 아르헨티나에 거대한 독일어권 주민이 있음을 파악하고서, 그들도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반응으로, 러더퍼드 형제는 독일인 전 시간 봉사자인 카를로스 오트를 보내어 그 언어 집단을 지원하게 하였습니다.

이 나라에는 그리스인도 많았습니다. 1930년에는 그리스계의 니콜라스 아르히로스가 성서의 소식을 배워 알게 되어,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에 있는 수백 명의 그리스어권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스페인어에 능숙해지면서 아르헨티나의 북반부에 노력을 집중하여 이 나라 22개 주 가운데 14개 주에서 하느님의 말씀의 씨를 뿌렸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폴란드 사람인 후안 레바흐가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 다른 폴란드계 증인과 함께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두 전 시간 봉사자들을 동반하고서 아르헨티나의 남부 지방에서 구역을 돌았습니다.

1930년도 보고를 보면, 수십만 부의 출판물이 그리스어·독일어·스페인어뿐 아니라, 러시아어·레트어·리투아니아어·아랍어·아르메니아어·영어·우크라이나어·이디시어·이탈리아어·크로아티아어·포르투갈어·폴란드어·프랑스어·헝가리어로도 배부되었습니다.

그처럼 단지 7년 만에, 왕국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활동은 스페인어권 주민은 물론 다른 언어 집단들에도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때는 계속 성장하는 데 참으로 순조로운 시기였습니다.

방대한 구역을 일사천리로

돌아야 할 구역은 엄청나서, 대략 미국 면적의 3분의 1에 상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증인들에게는 그처럼 광대한 땅이 왕국 소식을 전파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걸어서 여행한 사람들도 있고, 자전거나 열차·마차를 이용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930년대 초엽, 이 나라 중심부에 있는 코르도바 주에 사는 아르만도 메나치는 자신이 진리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동차 정비소를 팔아 전 시간 봉사자로 일하였습니다. 그 후 낡은 버스를 구입하여 캠프용 자동차로 개조함으로써, 열 명 이상의 전도인이 함께 여행하면서 좋은 소식을 전파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르헨티나 북부에서 적어도 10개 주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1930년대에 이미,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완벽한 철도망을 갖추고 있어서, 그 총연장이 4만 킬로미터를 넘어섰습니다. 그 결과, 열차는 전파 활동의 확장에 뛰어나게 유용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일부 파이오니아는 일정한 철도 노선 구간을 따라 자리 잡고 있는 취락들을 구역으로 임명받아 전파하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호세 레인들은 대서양 연안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서부터 칠레 국경에 인접한 멘도사 주에 이르는 ‘웨스턴’선의 전구간, 그러니까 1000킬로미터가 넘게 뻗은 지역을 자기 구역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철도 회사에서 일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서의 소식을 아르헨티나의 먼 곳들에까지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였습니다. 북동부의 산타페 주에서 진리를 배운 에피파뇨 아기아르는 철도 회사에 다니다가 더 북쪽에 있는 차코 주로 전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는 즉시 그곳에서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업무상 2000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추부트로, 그 후 다시 북쪽에 있는 산티아고델에스테로로 여행하게 되었을 때는 그러한 주에서도 왕국 소식을 널리 전하였습니다.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인 리나 데 미돌리니는 바히아블랑카 시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메다노스에서 증거하였습니다. 이 자매는 자전거를 기차에 싣고 가서,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것을 이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자매를 자전거 타는 성서 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자매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하루는 기차 기관사가 이 자매가 돌아가기 위해 도착하지 않은 것을 알고는 이 자매를 위해서 기차 출발을 늦추기도 하였습니다!

길르앗에서 훈련받은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초창기의 증인들은 넓은 지역으로 여행하여 많은 서적을 배부하면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왕국의 희망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체계적인 성서 교육과 개선된 조직의 필요성이 분명해졌습니다. 1945년, 당시 워치 타워 협회 회장인 네이선 H. 노어는 아르헨티나를 방문하여 회중들에게 ‘신권 전도 과정’(신권 전도 학교)을 스페인어로 시작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그는 또 아르헨티나의 형제들에게 파이오니아 활동에 착수하고,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 갈 목표를 세우도록 격려하였습니다.

머지않아, 두 아르헨티나 사람이 길르앗 학교를 수료하고 1946년에 아르헨티나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에 뒤이어 1948년에는 다른 나라들로부터 선교인들이 임명받아 왔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길르앗 제1기생들인 찰스 아이젠하워와 로린 아이젠하워, 비올라 아이젠하워, 헬렌 니콜스, 헬렌 윌슨과 함께 제4기생인 로베르 밀러도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소피에 소비아크, 이디스 모건, 에설 티시하우저, 마리 헬름브레히트 등 많은 선교인이 더 왔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78명의 선교인이 아르헨티나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들의 복음 전파의 영은 이 나라 증인들을 격려하여 그들을 본받게 하였습니다. 1940년에는 전국에 20명의 파이오니아가 있었던 반면, 1960년에 와서는 그 수가 382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현재는 아르헨티나에 1만 5000명이 넘는 파이오니아가 있습니다.

곤란한 시기에 대처하다

여러 해 동안 아르헨티나에서는 전파하는 데 시기가 순조로웠습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예언하신 바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그분의 추종자들의 활동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한 15:20) 그래서 노어 형제가 1949년에 아르헨티나를 방문했을 때, 경찰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매우 멋진 홀에서 모이는 대회에 대한 허가 건을 갑자기 취소하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대회는 한 왕국회관에서 열렸는데, 그나마 방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요일 오후 4시 40분, 경찰은 노어 형제의 연설을 중단시키고는 참석해 있던 사람들과 함께 그를 체포하였습니다. 경찰은 체포 이유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당국은 그 이튿날 이른 아침까지 장시간 형제들을 널찍한 건물 앞마당에 서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형제들은 풀려났습니다.

분명히 아르헨티나에서 여호와의 숭배자들에 대한 박해의 바람이 이미 일기 시작한 것입니다. 같은 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주로 인하여, 모든 종교 단체는 외무부 종무국에 등록할 것을 요구하는 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다음 해, 후안 도밍고 페론 치하의 정부는 아르헨티나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금지하였습니다. 그 법령은 여호와의 증인의 공개 집회와 함께 전파 활동도 금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워치 타워 협회 지부는 폐쇄되지 않았습니다.

전반적으로 말해서, 당국은 증인들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활동을 계속하도록 용인하였습니다. 그렇긴 했어도 관리들은 종종 금지 조치를 발동하여, 대회를 취소하거나 어느 왕국회관을 폐쇄하였습니다. 때때로 증인들은 개인 집에서 집회를 갖다가 또는 공개 봉사에 참여하다가 체포되어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증인들은 ‘뱀과 같이 조심스럽게 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마태 10:16) 사람들에게 증거할 때 성서만을 사용하였습니다. 회중들은 8 내지 12명의 전도인으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들로 조직되었습니다. 금지령 하에서 처음 몇 년 동안은 집회 장소가 정기적으로 바뀌었습니다. 형제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집회 장소를 찾았는데, 그곳이 젖 짜는 우리든, 이엉을 얹은 막사든, 농장 취사장이든, 심지어는 나무 아래서든 가리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함께 모이는 일이었습니다.—히브리 10:24, 25.

형제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노어 형제는 1953년에 밀턴 헨첼을 동반하고 아르헨티나를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금지령 때문에, 일반 대중의 이목을 끌까 봐 큰 대회를 열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전국적인 대회라고 부르던 것을 마련하였습니다. 노어 형제는 칠레로부터 항공편으로 멘도사로 왔고, 헨첼 형제는 파라과이로부터 입국하였습니다. 따로따로 여행하면서, 그들은 56개 장소에서 열린 지방 ‘대회’들에서 연설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임 가운데 일부는 그 지방 증인이 소유한 농장에서 피크닉을 갖는 형식으로 열렸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이 두 형제가 형제들이 모인 곳들을 방문하여, 각 청중을 위해 두 시간의 집회를 사회하였습니다. 하루 동안에, 그러한 모임이 아홉 군데에서 열렸습니다. 도합 2505명이 이 특이한 종류의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금지 조치가 완화되다

후안 페론의 군사 정권이 1955년에 전복되면서 큰 집단들이 형성되었습니다. 왕국회관을 소유한 회중들의 경우, 형제들은 왕국회관이라는 간판을 내걸지는 못했어도 그곳에 모이도록 권유받았습니다. 당국이 간헐적으로 괴롭히는 가운데서도, 여호와의 축복으로 회중들의 수와 크기는 점차 증가하였습니다.

1956년에는 지부에서 이 나라 여러 곳에서 작은 대회들을 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첫 대회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라플라타 시에서 열렸습니다. 300명의 참석자들은 첫 노래—“열국은 그의 백성들과 함께 기뻐하라!”—를 부르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감격하여 목이 메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동료 신자들과 모여 함께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은 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때까지도 금지령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1957년 12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레 앙바사되르 홀에서 전국 대회를 열고자 시도하였을 때, 경찰은 참석자들이 도착하고 있는 가운데 대회장을 폐쇄하였습니다. 네 명의 형제가 경찰에 유치되고, 경찰 허가 없이 집회를 열었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아르헨티나의 헌법은 종교와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에, 형제들은 이 문제를 법원으로 가져갔습니다. 1958년 3월 14일, 증인을 옹호하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 일은 아르헨티나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첫 법적 승리였습니다.

또 한 번의 정권 교체가 1958년에 있었습니다. 이제는 아르헨티나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대한 법적 승인을 취득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과 아르헨티나에서 그들이 처한 입장을 설명하는 특별 서한을 모든 입법 관계자·신문 편집인·하원 의원 및 판사들에게 보냈습니다. 훌륭한 증거가 행해지기는 하였지만, 법적 승인은 받지 못하였습니다.

증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음해에는 종교의 자유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준비하여 정부에 보냈습니다. 그 서류에는 32만 2636명의 서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지부 대표로 찰스 아이젠하워가 정부 관계자를 방문하였습니다. 해외로부터 온 7000건이 넘는 편지도 법적 인가를 호소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법적 신분이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증인들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상당히 누그러졌습니다. 그 결과 형제들은 점차 순조로워 가는 시기를 활용하여 회중들을 영적으로 강화하였습니다.

1961년에는 천국 전도 강습이 조직되어,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물론 회중의 감독자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처음에는 한 달에 걸친 과정이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부의 한 왕국회관에서 실시되었습니다. 나중에는 강습 장소가 지부로 옮겨졌습니다. 하느님의 양 떼를 돌볼 자격을 갖춘 감독자들이 늘어나면서 전도인과 파이오니아 수는 1960년대에 해마다 증가하여, 1970년에 와서는 1만 8763명의 전도인과 1299명의 파이오니아 신기록에 달하였습니다.

지부 확장

아르헨티나에서 왕국 선포자 수가 증가하면서 지부 시설을 확장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1940년 이래 워치 타워 협회의 지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온두라스 가 5646번지에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그 건물이 해체되고, 1962년 10월에는 새로운 큰 건물이 같은 부지에 세워져 입주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1960년대 말경에는, 지부가 다시 너무 협소해져서 증가에 보조를 맞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지부 건물 뒤로 작은 구획의 부지를 매입하여, 이 나라 증인들이 새로운 숙소 및 사무실 건물을 건축하였습니다. 그에 더하여, 구 지부 건물과 신축 건물에 인접한 피츠로이 가에 있는 한 건물을 매입하였습니다. 구 지부 건물의 철거 작업은 1970년 10월에 시작되었으며, 건축 기술을 가진 이 나라 증인들이 주 인력원이 되었습니다. 지부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정규 일과 시간이 끝난 뒤에 가세하여 일을 거들었습니다. 주말이면 인근 회중들에서 온 여호와의 증인들도 일에 가담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세 개의 건물이 연결되어 하나의 복합 건물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당시 워치 타워 협회 부협회장인 F. W. 프랜즈가 1974년 10월에 봉헌사를 하였습니다. 아르헨티나의 형제들은 완공된 그 지부 복합 건물이 틀림없이 아마겟돈 때까지 야외 봉사에 필요한 것들을 충족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도무지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지부가 봉헌되던 바로 그 해에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는 「파수대」와 「깨어라!」를 이 나라 국내에서 인쇄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그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하나의 종교 단체로서 법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쇄기를 수입할 수 있는 법적 기구를 마련하기 위하여 1974년 12월에 ‘리오플라텐세 문화 협회’(Asociación Cultural Rioplatense)를 구성하였습니다. 인쇄기는 프랑스에서, 재단기는 독일에서, 중철기는 미국에서 왔습니다. 그 모든 것이 기증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쇄실에서 일하는 형제들은 인쇄기를 확보하는 일과 그것을 운영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하였지만, 「파수대」 1975년 4월 15일호가 워치 타워 협회로서는 전세계에서 이곳에서 처음으로 사용하는 오프셋 윤전 인쇄기에서 미끄러져 나올 때 형제들은 참으로 기뻤습니다! 이 일은 여호와의 증인의 인쇄 역사상 하나의 이정표였습니다.

“하느님의 승리” 국제 대회

1974년 초, 아르헨티나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리오세바요스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하느님의 승리”라는 주제로 열린 국제 대회를 즐겼습니다. 1만 5000명가량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대단히 많은 방문객에게 제공할 적합한 숙박 시설을 준비하는 일은 여러 달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증인이 아닌 많은 사람들도 방문하는 대표들에게 숙박을 제공하였는데, 방문객들은 훌륭한 사랑의 증언을 “말”로만이 아니라 “행함”으로 하였습니다. (요한 첫째 3:18) 당국에서도 커다란 대지의 사용을 승인하여, 그곳에 천막과 이동 주택들을 질서 정연하게 배열하고 성경적인 거리 이름까지 온전히 갖춘 천막촌을 수용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은 지역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먹구름이 지평선상에 일다

형제들이 증가된 숭배의 자유를 누려 오긴 했지만, 고난의 때가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1973년 6월, 후안 페론이 17년이 넘는 유배 생활에서 복귀하여 대통령 직에 취임해 있었습니다. 페론파와 비페론파 간의 게릴라전은 이 나라를 분열시키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폭력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1976년 3월 24일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군사 정부는 의회를 해산하고 좌익을 소탕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월드 북 백과사전」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많은 사람의 민권을 침해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재판 없이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고 죽어 갔다. 그 희생자 가운데 많은 수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런 사람들을 로스 데사파레시도스(실종자)라고 부른다.” 시민들의 활동에 대한 경찰의 감시가 강화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그러한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서 그들의 중립 입장을 고수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헨테」지는 1976년 7월호에 국기에 등을 돌리고 있는 아이들의 사진들과 함께 기사를 게재하면서 그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터무니없는 왜곡이었습니다! 그 지역에 사는 증인 자녀 네 명은 그 사진을 찍었을 날에 학교에 가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여호와의 증인은 국가의 상징물에 대해 그러한 불경을 나타내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선전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증인들을 적대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회적 소요는 정부로 하여금 분쟁의 씨로 보이는 여하한 것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음이 분명하였습니다. 그 당시 카를로스 페렌샤는 여행하는 감독자로서 매우 위험한 지역에 있는 한 회중을 방문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방금 지부로부터 아르헨티나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대한 금지령이 임박하였음을 알리는 편지를 받은 참이었습니다. 카를로스가 길을 걸어가면서 그 편지 내용을 생각하고 있는데, 차 한 대가 그를 지나가더니 돌이켜서는 곧바로 그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세 남자가 내리더니 그에게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거친 목소리로 그의 신분 증명서를 보자고 요구하였습니다. 카를로스는 자신이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를 경찰서로 연행하였습니다. 카를로스는 그 편지가 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되도록 여호와께 기도하였습니다.

경찰관들은 카를로스를 불빛이 희미한 방으로 끌고 가서, 그의 얼굴에 강렬한 조명을 비추면서 그 중 하나가 소리쳤습니다. “당신, 그 가방에 든 게 무엇이요?” 그의 책가방에 든 내용물이 탁자에 모두 쏟아졌습니다. 바로 성서와 몇 부의 잡지 그리고 그 편지였습니다!

한 경찰관이 소리질렀습니다. “「파수대」로구먼! 「파수대」야! 파괴, 파괴 분자들!”

그러나 경찰관 중 책임자가 그를 꾸짖었습니다. “조용히 좀 해. 바보 같으니라고, 당신은 「파수대」도 못 봤어?”

그러는 동안 카를로스는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존경하는 태도를 나타내고자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 경관이 출판물들을 검사하고 나서, 그들은 카를로스에게 모든 것을 치우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경관이 가로막더니, “그 봉투 안에 든 것은 무엇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카를로스는 협회 편지가 든 봉투를 그 경관에게 넘겨주고는 몇 초 동안 기다린 다음, 이렇게 물었습니다. “실례지만,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지.” 경관이 편지를 보다가 고개를 들면서 대답하였습니다.

카를로스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제가 알기로 여러분은 이 사회의 안전을 위해서 경계를 하고 계십니다.” 그 말이 그 경관의 관심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카를로스는 성서를 펴서 오늘날의 폭력 사태가 성서 예언의 성취라는 점을 보여 주었습니다.

카를로스가 말을 마치자 그 경관은 “나도 동감이요, 친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더니 편지를 다 읽어 보지도 않은 채 돌려주었습니다.

이미 금지된 활동에 대한 금지령

금지령이 임박하였다는 사실을 지부에서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1976년 8월 말, 연방 경찰이 협회의 지부를 수색하였습니다. 조사관 책임자는 지부에서 화기를 비축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노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지부 위원인 움베르토 카이로가 조사관들을 서적 보관 장소로 안내하였습니다. 물론 아무 총기류도 없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총이라고는 단지 경찰이 움베르토에게 겨누고 있는 총들뿐이었습니다! 경찰은 그를 2층에 있는 지부 조정 위원 아이젠하워 형제의 사무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조사관 책임자는 수색 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다음 형제들에게 서류에 서명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더니 그 책임자는 정부가 여호와의 증인에 관한 법령을 입안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귀띔해 주었습니다. 즉시 지부 위원회는 여행하는 감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여 정부의 금지령에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이미 1950년 이래 금지령 아래 있었습니다. 이미 금지된 활동을 금지하는 일이 가능합니까? 그 대답은 즉시 왔습니다. 지부 위원인 토마스 카르도스는 그 새로운 금지령이 발효되던 날인 1976년 9월 7일에 일어난 일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새벽 다섯 시에 거리에서 소음이 들려와 우리는 잠에서 깼습니다. 번쩍이는 적색 불빛이 셔터를 통해 들어오더군요. 아내가 얼른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다가는 내게로 향하더니, 단지 ‘그 사람들이 왔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중무장한 경찰관 네 명이 범인 호송차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경비병들이 사무실과 공장에 즉각 배치되었습니다. 카르도스 형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일용할 성구를 고려하고 아침 식사를 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일을 할 수 있을지 의아해했습니다. 경찰은 반대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그날 아침, 우리는 한 무장 경찰관은 입구를 지키고 다른 경찰관은 식탁에 정중히 앉아 있는 채로 성구를 토의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제 어떻게 되나?’ 하고 궁금해했지요.”

1976년 8월 31일자 법령은 전국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불법화하는 것으로서, 사실상 이미 1950년 이래 금지령 아래 있던 활동을 금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은 지부 사무실과 인쇄 시설을 외부와 차단시켰습니다. 그 직후 이 나라의 모든 왕국회관도 폐쇄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사람들보다 통치자로서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예수의 사도들의 모범을 본받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사도 5:29) 아르헨티나의 증인들은 “곤란한 시기에도” 성서의 소식을 계속 전파하였습니다.—디모데 둘째 4:2.

난관을 극복하다

지부가 공식적으로 폐쇄된 이후, 지부 위원회에서는 사무실들과 인쇄 시설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움베르토 카이로는 자신의 사무실의 위치를 자주—거의 매달—바꾸어 가며, 동료 신자들의 아파트나 상점·가정집·사무실에서 일해야만 하였습니다. 찰스 아이젠하워는 형제가 소유한 술 가게에서 한때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지부 위원회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지에 있는 여러 차고 안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베델 가족의 숙소 구역은 폐쇄되지 않아서, 지부 식구들은 베델 집에서 먹고 자면서 한 가족으로서 그날의 성구를 함께 토의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각자 자기가 일하는 곳으로 출퇴근하였습니다. 사무실이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베델에 와서 베델 집을 보살피는 가족 성원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였습니다.

경찰은 베델에 기거하는 사람들의 활동에 대해 의심을 품었습니다. 몇 번은, 열 명가량인 베델 가족 전체가 경찰서로 불려가 심문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경찰은 아르헨티나에서의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 전모를 알아내고자 하였습니다. 누가 지방 회중들을 보살피고, 그들은 어디에 거주하는가? 아이젠하워 형제는 그러한 심문 시간에 대해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활동이나 형제들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없게 하면서도 진실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가 대단히 힘들었죠. 당국자들이 매우 집요하게 질문을 해 왔으니까요.”

“다과회를 중단하라”

1976년의 금지령이 내려지기 직전, 협회는 「왕국 소식」 특별 호의 전세계 배부 마련을 하였습니다. 정부가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대한 제한을 가중시킨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당시 여행하는 감독자였던 파블로 후스티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우리에겐 해답이 없었기 때문에 지부에 문의해야만 하였습니다. 배부 운동을 연기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지부에서 판단한다면, 장로들은 ‘다과회를 중단하라’라는 전갈을 받을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지침으로부터 오해가 발생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정부 법령이 발효된 직후, 첫 번째로 후스티 형제와 자매는 말라르궤 회중을 방문하였습니다. 이 회중은 국경 수비 경찰이 그 본부를 두고 있는 멘도사의 남쪽에 있었습니다. 후스티 부부는 그곳 시내 외곽에 있는 전국 고속도로 관리 공단 건물에서 살면서 일하는 한 장로의 주소밖에 몰랐습니다. 그 장로는 그곳에 없었는데, 한 인부가 그가 운동하러 자주 가는 근처 숲 속에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좁은 길을 따라 가면서 후스티 형제는 그곳이 매우 외지고 적막한 곳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문득, 그곳이야말로 의심을 사지 않고 함께 모일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날이 일요일이어서, 혹시 그 회중이 모임을 갖고 있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는 혼자서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후스티 부부가 놀랄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소개한 다음 파블로는 회중에 관해 질문하였습니다. 그 형제는 “아, 여기 말라르궤에서는 모든 일을 중단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파블로가 되물었습니다. “모든 일이라니요?”

대답은 간단명료하였습니다. “‘다과회를 중단하라’는 전보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집회, 전파 ·⁠·⁠· 모든 일을 중단한 겁니다.” 다행히도, 그렇게 한 회중은 그곳뿐이었습니다.

번개처럼 방문하다

지부가 폐쇄되자, 지부 위원들은 순회 감독자들과 모임을 갖고 그들에게 활동을 수행하는 방법에 관해 지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시간제 세속 직업을 구하고 영구 주소지를 정함으로써 그들의 활동에 대해 의심 사는 일을 가급적 줄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오전 시간에는 여러 가지 제품을 판매하는 일을 하고, 그런 다음 오후 시간에 회중들을 섬겼습니다.

순회 감독자들은 지부의 지침을 가지고 자신의 순회구를 번개처럼 방문하였습니다. 단 한 주 만에, 약 20개 회중으로 된 순회구의 장로들을 방문하였습니다. 순회 감독자들은 변화된 환경을 고려하여 집회를 사회하는 방법과 증거하는 방법에 대한 지침을 주었습니다. 장로들은 또한, 순회 감독자의 방문 기간은 반드시 한 주간 전체가 아니라, 회중에 있는 서적 연구 집단의 수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집회는 개인 집에서 열리고, 각 집단에 하루의 방문이 할당될 것이었습니다.

금지령 기간 중에 순회 감독자들은 지방 전도인들이 지부 위원회와 접촉을 유지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였습니다. 금지령 기간에 순회 감독자로 일한 마리오 메나는 이처럼 회고합니다. “그 당시 회중들을 섬기고 형제들을 위로한다는 것은 참으로 특권이었습니다. 우리는 녹음된 대회 프로그램을 함께 듣거나, 이웃 나라들에서 구한 새로운 출판물을 함께 보거나, 세워 주는 경험담을 들려줌으로써 형제들을 격려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선교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사회적 소요는 악화 일로에 있었습니다. 외국인들을 우호적인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선교인들에게는 다른 임명을 받을 기회가 부여되었습니다. 일부 선교인은 그러한 권유에 응하여 새로운 임지에 가서 충실하게 봉사하였습니다.

다른 선교인들은 아르헨티나에 남아 있었습니다. 길르앗 제13기생인 마리 헬름브레히트는 산타페 주의 로사리오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금지령이 발효되던 날 아침, 이 자매는 한 집에 가서 초인종을 울렸습니다. 더운 여름 아침이라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라디오 소리가 꽝꽝 울려 나오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마리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아르헨티나 전국에서 금지되었다는 뉴스 속보를 들었습니다! 마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 여자가 문간에 나왔을 때, 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평상시처럼 그에게 전파하였습니다. 우리는 계획된 대로 오전 내내 전파하였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는 머물러 있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것에 대해 우리는 감사하였습니다. 겁에 질려서 전파를 못하던 회중 성원들은 우리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고서, 곧 우리와 함께 봉사에 나섰습니다.”—데살로니가 첫째 5:11.

감추어진 보물

이 나라의 증인들은 이처럼 순조롭지 않은 시기에도 용기와 기지를 발휘하였습니다. 로베르트 니에토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동정적인 한 치안 판사가, 왕국회관이 곧 폐쇄되고 서적이 압수될 것이라고 귀띔해 주더군요. 즉시 우리는 두 대의 차로 왕국회관에 가서, 보관해 두었던 다량의 서적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우리가 떠나오는데, 뒤에서 경찰과 군대가 왕국회관을 폐쇄하고 서적을 압수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도착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왕국회관을 폐쇄하는 임무밖에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회관에 남아 있는 책이라고는 도서실에 있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회중 장로들이 조심스럽게 밤중에 왕국회관에 들어가서 조용히 서적을 옮겼습니다. 그 후 서적을 작은 꾸러미들로 싸서, 형제들에게 분배하였습니다.

투쿠만 주에서, 네리다 데 루나는 서적을 자기 집에 숨겼습니다. 그 자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책을 커다란 화분과 단지들 속에 숨기고는, 그 위에 인조 식물을 올려 놓았지요. 그리고 서적 상자들은 세탁실에다 감추어 두었고요. 어느 날 아침 군인 두 명이 세탁하는 곳까지 포함해서 온 집안을 수색하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옆에 서서 열렬히 기도하고 있었죠. 군인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더군요.”

영적 양식을 공급하는 일

물론 이 나라 형제들이 회수하여 숨길 수 있었던 서적은 머지않아 고갈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영적 양식을 그들에게 계속 공급하셨습니다. 피츠로이 가에 있던 인쇄 시설은 폐쇄되었지만, 인쇄 활동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다른 장소들에서 계속되었습니다. 잡지는 산타페 주와 코르도바 주에서도 인쇄되었습니다. 인쇄된 지면은 다른 장소로 보내져서 철해졌습니다. 처음에는 회중에서 연구 집단당 단지 한 부의 잡지를 받았지만, 나중에는 전도인당 한 부로 증가하였습니다. 이 인쇄 시설 중 하나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단지 두 구획 떨어져 있는 집의 다락방에서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금지령 기간에 서적을 인쇄하여 발송하는 일을 한 루벤 카를루치는 인쇄를 하고 있던 집의 집주인이 그들을 찾아와서 헌병들이 가가호호 수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던 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즉시 형제들은 인쇄를 중단하고 트럭 한 대에다 인쇄기만 빼놓고는 모든 것을 재빨리 실었습니다. 루벤은 이렇게 상기합니다. “그 수색 작전은 너무도 광범위해서 우리는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 지역을 빠져나갈 도리가 없었습니다. 근처에 한 음식점이 눈에 띄기에, 우리는 그리로 들어가서 수색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네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그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귀중한 서적을 받게 되었으니까요.”

“총잡이 페피타”

「파수대」와 「깨어라!」는 한동안 수도에서 건축 중이던 한 건물에서 비밀리에 철해지고 있었습니다. 그 건물은 원래 왕국회관으로 지으려던 것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베델 가족 성원인 루이사 페르난데스가 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루이사 자매와 그의 동료들이 막 일을 시작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사람은 경찰 조사관이었습니다! 그는 기계에서 나는 소음 때문에 이웃 주민들로부터 불만이 접수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지당한 얘기였습니다. 사실 그 중철기가 어찌나 시끄러웠던지 우리도 그것에다 페피타 라 피스톨레라(총잡이 페피타)라는 별명을 붙여 놓았거든요.” 루이사의 말입니다.

바로 그때 지부 위원 한 사람이 도착하여 우리가 하는 일을 설명하였습니다. 조사관이 말하였습니다. “내가 오늘 오후에 다시 왔을 때 이곳에 아무도 없기만 하다면, 나는 아무것도 안 본 것으로 하겠습니다.” 즉시 형제들은 모든 것을 트럭에 싣기 시작하였습니다. 두 시간 만에, 잡지를 철하던 작업은 흔적도 없어졌습니다.

그 기계 설비를 어디로 가져간 것입니까? 지부의 인쇄 공장은 폐쇄되었지만, 뒷문을 통해서 공장 건물로 들어가는 것은 가능하였습니다. 루이사를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은 모든 것을 구베델 인쇄 공장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잡지를 철하는 일을 눈에 띄지 않게 계속하였습니다.

과자 공장보다 낫다

잡지를 생산하여 아르헨티나 전역으로 배달하기 위해서는 잡지를 철하는 공장을 이 나라의 다른 지역들에도 설치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1957년 이후 특별 파이오니아를 해 온 레오닐다 마르티넬리가 로사리오에서 그 작업에 참여하였습니다. 인쇄된 지면이 철해지기 위해 도착하면, 임명받은 형제 자매들은 설치된 기다란 테이블 위에 잡지 면들을 면 수에 따라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면 한쪽 끝에서부터 출발해서 각 작업자는 지면들을 순서대로 맞추기 시작하여 결국 다른 끝에 다다릅니다. 완성된 잡지가 한 뭉치로 쌓이면, 눌러 공기를 빼냄으로써 상자에 잡지가 더 많이 들어가게 해야 하였습니다. 유압 프레스 기계가 없던 터라 한 뚱뚱한 자매가 자원해서 그 일을 맡아 했습니다. 상당한 크기의 더미가 쌓이면 그 자매는 그 위에 올라앉아 그것이 보기 좋게 납작해지기까지 기다렸습니다. 그 다음엔 다른 사람이 그것을 상자에 넣어 깔끔하게 포장하였습니다. 이 방식이 매우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작업자들은 그 자매더러 다이어트를 하지 말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산타페 시에서는 잡지를 철하는 데 가이탄 가족이 그들의 집을 제공하였습니다. 조심해서 했는데도 그 집에서 상자들이 들락거리는 것을 이웃 사람들이 목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가족이 과자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후 1979년에 지부는 그 작업을 그곳으로부터 다른 장소로 옮겼습니다. 이웃들은 궁금해진 나머지 나중에, 과자 공장이 문을 닫은 것이냐고 물어 왔습니다. 가이탄 자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가 만든 ‘과자’는 맛있었고 이웃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영양가가 있었답니다!”

서적 배달

잡지를 비롯하여 서적을 형제들에게 배달하는 일은 또 다른 도전이었습니다. 대(大)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에서는 전략적으로 배치한 서적 보관소에 잡지를 공급하기 위한 노선이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한번은 루벤 카를루치가 잡지를 배달하고 있는 중에, 이제 한 곳만 더 들르면 되는 참인데 한 경찰이 그에게 신호를 보내 차를 범인 호송차 뒤 길가에 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루벤은 긴장한 가운데 시키는 대로 하면서, 내내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차를 길가에 대고 멈추자, 경찰이 트럭에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안하지만 내 차 좀 밀어 주시겠습니까? 내 차가 도무지 시동이 안 걸린단 말입니다.” 루벤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서 그야말로 기꺼이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배달을 끝마치기 위하여 경쾌한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산타페의 로사리오 지역에서 순회 감독자로 일하고 있던 단테 도볼레타는 조립 공장에서 잡지를 받아다가 순회구의 모든 회중에 분배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한 달에 적어도 두 번씩은 왕복 200킬로미터 정도를 돌아다녀야 하였습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그는 밤늦게 다녀오는데, 한 회중에서 활동을 마친 후에 출발해서는 때로는 해 뜰 녘에 돌아오기도 하였습니다. 한번은 검문소에 긴 차량 행렬이 늘어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는데, 그곳에서 30명이 넘는 중무장한 군인들이 각 사람이 소지한 문서와 짐을 일일이 검사하고 있었습니다. 한 군인이 단테에게 물었습니다. “차 안에 있는 게 무엇이오?”

“내 물건입니다.” 단테가 대답하였습니다.

군인이 말하였습니다. “어서 트렁크를 여시오.”

그 말에 단테가 대꾸하였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다닐 것 같습니까?”

다른 군인이 그 대화를 우연히 듣고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내 버려. 여호와의 증인은 무기나 금지품을 가지고 다니는 법이 없어.” 2년 동안 단테는 수색을 당하지 않고 서적을 배달할 수 있었습니다.

집회를 그만두지 않음

금지령이 내려진 바로 그 주부터, 아르헨티나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함께 모이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10:25) 작은 집단으로 모이면서, 그들은 자주 집회 장소와 시간을 변경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장로들에게는 일이 많아져서, 종종 같은 집회를 다른 집에서 여러 번 사회해야 하였습니다.

소도시 토토라스에서는 집회를 볼 만한 유일한 집이 시내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증인들은 더욱 조심하였습니다. 집주인 레베르베리 형제는 잡동사니를 넣어 두는 서랍이 달린 일반 탁자같이 보이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상판을 들어 올릴 수 있게 되어, 그 안에 책과 잡지를 숨겨 둘 공간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입구에서 문을 두드리면, 서적을 모두 탁자 속에 재빨리 감추었습니다!

전도인들은 집회 때 평상복 차림을 하였습니다. 자매들은 때때로 머리를 곱슬곱슬하게 하는 롤러를 끼고, 느슨한 바지를 입고는 장바구니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집회는 재미있게도 마테아다스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마테는 종종 쿠키나 케이크와 함께 마시는 차입니다. 마테 차를 마시기 위해 모이는 다과회는 아르헨티나에서 매우 일상적인 관습이어서, 이러한 분위기 설정은 영적인 모임을 위장하는 데 이상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긴장된 순간도 있었습니다. 테레사 스파디니는 충실하고 후대를 잘하는 자매로서 이웃에서도 훌륭한 평판이 나 있었습니다. 순회 감독자 방문 중 35명의 집단이 집회를 보기 위해 그의 집에 모였습니다. 갑자기 순찰차가 집 앞에 차를 대더니, 한 경찰관이 문을 두드렸습니다. 즉시, 연설을 하고 있던 형제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로 내려앉았습니다. 테레사가 문간에 가서 응답하니까, 그 경찰은 “테레사, 댁의 전화 좀 써도 될까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자 테레사는 “우리 가족이 재회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경찰이 경찰서에 전화를 걸자, 거기 모였던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서 그가 자기들 모두를 연행해 갈 범인 호송차를 요청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히 그 전화는 다른 건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화를 마치자 경찰관은 테레사를 향하여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더니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가족 재회를 즐기십시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찰 수색에 대처하다

한 집단이 침례를 위해 모임을 갖고 있는데, 이웃 사람이 그 집회를 경찰에 신고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모임의 진정한 목적을 은폐할 수단으로 이미 아사도 즉 바베큐 요리를 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으므로, 계획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구운 고기는 아르헨티나에서 인기 있는 요리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렇게 멋진 위장에 대해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군용 트럭으로 도착하자, 형제 자매들은 그 군인들더러 이 사교 모임에 함께하자고 극진하게 권유하였습니다. 군인들은 거절하고는, “디저트”로 무엇이 나오는지는 알아보지도 않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때로는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말이 보호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한번은 이웃 사람들이 당국에 전화로 개인 집에서 모인 집회에 대해 고발하였는데, 경관들은 모든 참석자들이 떠나가고 장로들만 남아 있는데 도착하였습니다. 경찰이 문을 두드리자 그 집에 사는 자매는 “다들 가고 종들만 남아 있는데요”라고 응답하였습니다.

경찰이 대꾸하였습니다. “저런, 종들은 필요 없는데. 우리가 원하는 건 책임자들이지!” 그들은 빈손으로 돌아갔습니다.

금지령 아래서 전파하다

제한된 가운데서도 전파 활동은 지속되었습니다. 물론, 이처럼 어려운 상황 하에서 형제들은 조심스러웠습니다. 대개 두 사람보다 많은 증인이 한 구역에서 동시에 봉사하지는 않았습니다. 자라 셸렌베르크 자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람들을 방문하던 방식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손바닥에 딱 들어가는 조그만 구역 지도를 만들었지요. 뒷면에는 종이 한 장이 아코디언 식으로 접혀져 있어서 거기에 모든 집의 번지 목록이 들어 있었고요. 우리는 한 구획의 각 면에서 한 집씩만 방문하고선 그 목록에다 그 집에 체크 표시를 해 두었습니다. 그 구역에서 봉사하는 다음 전도인이 다른 집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였죠. 그리고는 다른 구획으로 가서 다른 한 집을 방문하였답니다.”

이러한 전략이 실시된 지 얼마 안 되어, 세실리아 마스트로나르디는 혼자서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한 집의 문을 두드리는데, 경찰이 오토바이를 타고서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그는 나에게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더군요.” 세실리아의 말입니다.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 한 가지, 그에게 증거하고 「생명—그 기원은 무엇인가? 진화인가, 창조인가?」 책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책을 받고 그에 대한 헌금을 하면서, 우호적으로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나는 그 경찰이 나를 체포하려고 멈춘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챘습니다. 그는 내가 방문하고 있던 바로 그 집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지각색의 방법이 전파 활동을 위장하는 데 동원되었습니다. 한 자매는 일부러 화장품 회사에 들어가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집집을 다니면서 고객들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86세로 29년간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해 온 마리아 브루노는 주머니에 묘목들이 삐쭉 나오게 넣어 가지고 다니다가, 원예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관심을 가진 주부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 자매는 진리의 씨를 심는 일로 인도하는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금지령이 발효된 직후에 침례받은 가게 주인 후안 빅토르 부체리 역시 사람들에게 자신이 배운 좋은 소식을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그의 가게 벽에는 종교화, 유명 스포츠의 포스터 그리고 연예계 인물 모습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것들 대신, 경치가 나오고 그 밑에 성구가 실려 있는 사진들을 붙였습니다. 그의 고객들에게 얼마나 뜻밖의 일입니까! 부체리 형제는 그 그림이나 성구에 대해 질문을 해 오는 사람들에게 증거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열 건이 넘는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중 몇 사람은 진리 안으로 들어왔으며, 현재도 여전히 충실한 형제들입니다.

녹색 성서를 가진 사람들

금지령 기간의 어려움으로 아르헨티나의 전도인들은 훈련을 받아 더 나은 봉사자들이 되었습니다. 성서만을 사용해서 첫 방문을 하게 된 이후, 그들은 이의를 극복하고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에 성구를 찾아내는 데 숙달하게 되었습니다.

의심을 사는 일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때때로 「신세계역」이 아닌 다른 성서를 사용하였습니다. 스페인어 고어체로 된 가톨릭 성서 「토레스 아마트」를 사용하던 중, 한 형제는 예기치 않은 반응을 만났습니다. 성구를 읽어 주자 이해하지 못한 집주인은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서를 자기가 가져오겠노라고 제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형제가 너무나 놀랍게도, 그 부인은 「신세계역」을 들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신세계역」은 표지가 녹색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 나라 사람들은 녹색 성서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정부의 규제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으므로, 그런 금지법은 사람들의 호기심만 일으킬 뿐이었습니다. 한 집주인은 자매에게 그의 성서가 무슨 색이냐고 물었습니다. 자매가 사실대로 녹색이라고 대답하니까, 그 부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좋아요. 나는 ‘녹색 성서를 가진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듣고 싶어요.” 그 자매는 안으로 초대되었고 활발한 토의가 진행되었습니다.

누가 그 책을 가지고 있는가?

한동안 아르헨티나의 증인들은 그들이 숨겨 온 서적을 사용해서 전파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러한 재고는 동이 났고, 서적을 새로 들여오는 일은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과거에 압류되었던 22만 5000권의 책이 지부 창고에 봉인된 채 있었습니다.

연방 경찰은 압류 상태에 있던 그 책을 압수하여 한 종이 재생 회사에 매각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한 운송 업자가 베델에 가서 그 책을 실어 재생 회사에 가져다 주기로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운전 기사는 여호와의 증인인 이웃 사람과 과거에 성서를 연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운반하는 물건을 알아보고서 그는 이웃이었던 증인에게, 여호와의 증인이 자기한테서 그 책을 사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필요한 조치를 한 다음, 경찰의 허가 하에 그 책은 지부가 지정한 장소로 운송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22만 5000권의 책은 당국이 예상하던 바와는 매우 상이한 방법으로 ‘재생’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용기 있는 형제들을 통해서도 그분의 백성을 부양하셨는데, 그러한 형제들은 자원하여 협회에서 발행된 책을 다른 나라들로부터 가져왔습니다. 정규 파이오니아인 노르베르토 곤살레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번은 우루과이의 한 지부 위원이 우리에게 「천국 전도 강습」 교재 100부를 아르헨티나에 있는 책임 맡은 형제들에게 전해 달라고 맡겼습니다. 우리는 이 귀중한 자료를 국내로 들여올 수 있었습니다. 세관을 무사히 통과했을 때 우리 모두는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아마도 그처럼 높이 뛸 수 없었던 유일한 형제는 그 자료를 자기 목발 속에 숨겨 왔던 형제였을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증인들은 워치 타워 협회에서 발행한 서적의 가치를 그 어느 때보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금지령이 시작될 때 각 연구 집단은 「파수대」를 단 한 부 받았습니다. 그 한 부의 잡지가 전도인 모두에게 회람되었고, 그들은 연구에 참여하기 위하여 질문과 대답을 베꼈습니다. (빌립보 4:12) 「파수대」의 표지는 그 내용을 위장하기 위하여 공백이었지만 그 안에 든 영적 양식은 더없이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이러한 특별 마련을 통하여 힘을 얻고 연합하였습니다.

대회를 숨기는 방법

아르헨티나의 형제들은 구할 수 있는 서적을 사용해서 작은 집단으로 모이는 집회를 통하여 영적으로 양육받기는 하였지만, 세계의 다른 곳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 누리는 매년 세 번의 대회로부터는 어떻게 유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금지령이 발효된 이후의 첫 대회들은 ‘예비 대회’라고 불렀습니다. 장로들과 그 가족들만 대회들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후에 장로들은 그 프로그램을 소속 회중에 가서 반복하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 지칠 줄 모르고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해 온 엑토르 찹은 이렇게 말합니다. “때로는 대회를 들에 나가 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시골로 나가면 사육 동물들이 우리를 둘러싸지요. 우리는 연설 내용에 귀 기울이느라 너무 열중하였기 때문에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참석하지 못하는 형제들을 위하여 여러 형제가 프로그램을 녹음하였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한바탕 웃지 않을 수 없었는데, 연설 녹음 가운데는 소가 음매 하는 소리, 수탉의 꼬끼오 소리, 당나귀 우는 소리가 뒤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형제들은 대회가 종종 시골로 나가서 열렸기 때문에 대회를 “야유회”라고 즐겨 불렀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서 잘 가던 곳은 산타페와의 경계에서 가까운 시골 지역으로, 스트라고무르드라는 곳이었습니다. 그 장소는 수목으로 둘러싸여 있어 잘 가려지기 때문에 이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야유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어느 날 그 아름다운 수목이 잘려 나간 광경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려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들은 “야유회”를 계속 밀고 나가, 한 나무의 그루터기는 연사용 연대로, 다른 것들은 참석자 모두가 앉을 의자로 사용하였습니다.

형제들이 대회를 보는 데 사용한 다른 장소로는 여호와의 증인이 소유한 한 공장이 있었습니다. 그 공장의 소유주는 큼직한 상자형 트럭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대회에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운전 기사는 사방으로 다니면서 한 번에 열 내지 열다섯 명을 트럭에 하나 가득 싣고서 공장으로 돌아와, 차고 문을 닫고서 그 안에다 그들을 내려놓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100명가량이 이웃이나 경찰의 눈에 띄지 않고서 함께 모일 수 있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다른 증인들은 대회에서 영적 양식으로부터 유익을 얻기 위하여 그 당시 브라질이나 우루과이로 여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교도소에서 집회를 갖다

1976년의 금지령 이전에도, 우리의 젊은 형제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킨 결과로 충성의 시험에 직면하였습니다. 이사야 2:4에 나오는 “전쟁을 배우지” 않는다는 성서 원칙을 따랐기 때문에, 많은 형제들은 3년 내지 6년의 금고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교도소 안에서도 그들은 성서를 연구하고 집회를 여는 방안을 강구하였습니다. 그들은 또 교도소 내에서도 왕국 소식을 열심히 전하였습니다. 인근 회중의 장로들은 이 충실한 젊은이들을 기꺼이 방문하여 격려를 베풀고 매우 중요한 영적 양식을 공급하였습니다.

1982년 이래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는 오마르 치에데르는 1978년에서 1981년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 있는 막달레나 군 교도소에 투옥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군복을 입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그곳에 간 것입니다. 이 교도소는 몇 개의 대형 막사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각 막사에 있는 20개의 감방은 같은 복도를 향해 있었고, 각 감방은 크기가 가로 2미터에 세로 3미터였습니다. 수감된 증인들은 복도 끝에 있는 세 개의 감방을 집회 장소로 사용하였습니다. 한번에 열 내지 열두 명만 함께 모일 수 있어서, 매주 종종 여덟 번 내지 열네 번의 집회가 열렸습니다.

형제들은 그들 중 한 사람이 감방 구멍을 통해 내다보고 있다가 누군가가 접근하면 집단에게 경계를 발하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집단에게 경고하는 몇 가지 신호를 고안하였습니다. 때로는 감시자가 단순히 벽을 두드렸습니다. 다른 경우에는 감시자와 청중 가운데 한 사람 사이에 실을 연결하였습니다. 위험의 조짐이 보이면, 감시자는 실을 당기고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그 집단에게 경계를 발하였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암호 말이 들어 있는 문장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감시자는 “누구 봉투 가진 사람 있어요?”라고 소리칠 수도 있었습니다. “봉투”라는 암호 말을 듣는 즉시 형제들은 몸을 숨겼습니다. 각자 숨을 곳이 지정되어 있었는데, 침대 밑이건 문 뒤건, 감방 구멍을 통해 들여다볼지도 모를 간수에게 보이지 않는 곳이면 어디나 상관없었습니다. 이 모든 소동은 소리 없이 수초 내에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잘 조직되어 있어야 하였습니다!

한번은 집회 도중, 낯선 사람이 막사에 들어오고 있다는 경고를 받고는 형제들이 재빨리 숨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한 수감자가 문을 열더니 무엇인가를 탁자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는 나가다가 돌아서더니, “왜 다들 숨고 있지?” 하고 물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한 간수가 호루라기를 불면서, 청소 일에 자원할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저 사람 때문에 숨고 있는 겁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방문객은 쾌히 동감하고는 빨리 사라져 주었습니다. 형제들은 더 이상 방해받지 않고 집회를 마쳤습니다.

교도소 내 비밀 도서실

증인들은 훌륭한 행실로 인하여 교도소에서 부가적인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교도소 인쇄기들을 운영하였고, 영화관·의무실·이발실을 담당하였습니다. 왕국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형제들은 그들의 힘으로 획득한 특권을 최대한 활용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막달레나 교도소의 청사진을 보면 영화관이 직사각형인데, 실제로는 벽 모퉁이들이 둥글게 처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벽 뒤로 2.4미터 높이에, 폭 1.8미터, 두께 1.2미터의 공간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도서실로는 안성맞춤이어서, 성서와 워치 타워 협회 출판물을 비축해 두었습니다!

이 교도소에서 3년을 보낸 엑토르 바렐라의 설명에 의하면, 형제들은 영사실에서 벽 판자 한 장을 들어내고 작업대 위로 올라서면 이곳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식당에 있는 찬장들 뒤에도 책을 숨겨 두었습니다.

가끔 형제들은 교도소 구내를 떠나 잠깐 가족을 방문하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 형제들은 종종 이 기회를 이용하여 최근 호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를 들여왔습니다. 지금은 여행하는 감독자인 로돌포 도밍게스는 그런 경우에 일어났던 한 가지 일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파수대」와 「깨어라!」를 옷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교도소에 도착해 보니까, 교도관들이 철저히 몸수색을 하는 바람에 길게 줄을 서 있더군요. 조금씩 조금씩 우리는 검사 지점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 차례가 왔을 때, 교도관이 바뀌더니 수색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교도소 안에서 회중 집회를 다 봤습니다.” 도밍게스 형제가 계속 말합니다. “사실, 나는 나의 첫 공개 강연을 그곳에서 했습니다.” 투옥된 증인들은 심지어 시대 의상을 완전히 갖춘 성서 드라마도 공연하였는데, 그러한 일은 가족 방문 때 개인 물품을 들여옴으로써 실현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교도관들은 샌들이나 토가(고대의 겉옷) 같은 것들이 어디에 쓰이는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철창 뒤에서 제자를 삼다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활동은 철창 뒤에서도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교도소 내에서 형제들의 열심과 훌륭한 행실을 보고 유익을 얻은 사람들 가운데는 노르베르토 하인도 있었습니다. 그는 아르헨티나 군에서 복무하던 중 마약 복용 죄로 투옥되어 있었습니다. 몇 군데의 교도소에서 그는 양심적 병역 거부로 구류된 젊은 증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는 증인들의 태도에 감명을 받았으며, 푸에르토 벨그라노 교도소 수감 중에 성서 연구를 요청하였습니다. 한 달 내에 그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 연구를 마쳤습니다. 그 후 그는 막달레나 교도소로 이감되어, 1979년에는 교도소 안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침례 연설은 일요일 저녁 아홉 시경에 있었습니다.” 노르베르토는 회고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약 열 명이 참석하였는데, 다른 형제들도 감방 바깥에서 주시하고 있었지요. 연설이 끝나고 나는 두 명의 형제와 식당으로 갔는데, 거기엔 솥과 냄비를 씻는 커다란 통이 있더군요.” 그 “침례 통”에는 찬물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노르베르토가 그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때가 한겨울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확고하게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히브리 11:27) 노르베르토와 그의 아내 마리아 에스테르는 지금 베델에서 충실하게 15년 이상 섬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나에게 벌을 내리시라고 요청하지 말아 줘요’

많은 교도관이 증인들에게 관용을 나타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 군 교도소에서 주임 교도관 한 사람은 자신이 당직하는 날이면 언제나 형제들에게 음식과 담요를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악덕 교도관이었습니다. 우고 코로넬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느 날 아침 동트기 전에, 이 교도관은 내가 있는 감방 문을 발로 걷어차 열고서는 나를 밖으로 질질 끌어내더니, 다섯 명의 무장 군인을 가리키면서 내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노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나로 하여금 내 믿음을 포기하는 각서에 서명하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거절하자, 내가 곧 죽게 될 것이니까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라고 하더군요. 화가 치민 그는 다음에는 나를 벽돌담에 세우더니, 총살 집행대에 총을 겨누라고 한 다음 ‘발사!’ 하고 명령하였습니다. 나는 총에서 공이가 딸각하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총들은 장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단지 내 충절을 깨뜨리기 위해 꾸며진 속임수였던 것입니다. 그 간수는 틀림없이 내가 공포 가운데 울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내게로 다가왔습니다. 나의 차분한 모습을 보더니, 그만 자제력을 잃고서는 고래고래 소리지르기 시작하더군요. 나는 다시 감방으로 끌려가면서, 다소 동요되어 있긴 했어도 여호와께서 확고하게 해 달라는 내 기도에 응답하셔서 흐뭇했습니다.”

우고가 다른 교도소로 이감 가기 며칠 전 이 주임 교도관은 그 다음날에는 강제로 우고가 군복을 입게 만들겠노라고 전 막사에 공표하였습니다. 심지어 여호와도 그 일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교도관은 말하였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다음날 그 교도관은 끔찍한 자동차 사고를 당해 목이 잘려 나가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교도소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그 군인이 우쭐대고 협박을 가한 데 대해 하느님이 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실로, 그날 밤 나를 내 감방으로 데려간 간수는 하느님께 자기에게도 벌을 내리시라고 요청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우고는 지금 미시오네스 주의 비야우르키사에서 장로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군 복무를 거절한 이 젊은이들이 매우 어려운 상황 하에서 충절을 유지하였다는 것입니다. 교도소 당국은 일부 형제들을 총살시키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매를 맞거나 음식을 지급받지 못하거나 독방에 감금되었습니다. 이 형제들이 받은 처우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타낸 믿음과 충절은 군 요원은 물론 다른 재소자들에게도 강력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정기적인 가족 연구로부터 유익을 얻다

자녀들 역시 ‘그들 속에 있는 희망에 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 앞에서 변호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베드로 첫째 3:15) 당시 일곱 살과 여덟 살이던 후안 카를로스 바로스의 아들들이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교장은 큰 아이에게 학급 전체가 보는 앞에서 국기 경례를 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가 거부하자 여교장은 고함을 치고 그를 때리고는 국기 쪽으로 그를 밀쳤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그는 국기 경례를 거부하였습니다. 교장은 두 아이를 교장실로 데려가서 강제로 그들이 애국가를 부르게 하기 위해 한 시간 동안 애를 썼습니다. 자신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교장은 그들을 퇴학시킬 작정을 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행정 법원에 제기되었습니다. 공판 중에 판사는 소년들을 곁으로 불러 그들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즉각적인 답변에 판사는 어찌나 화가 났는지,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다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더니 재판장을 떠났습니다. 15분 후에 돌아왔지만, 그때까지도 눈에 띄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판결은 증인들에게 유리하게 내려졌습니다. 유리한 판결을 내린 뒤, 판사는 바로스 형제에게 말하였습니다. “댁의 가족은 정말 훌륭합니다! 만약 모든 가족들이 그처럼 높은 원칙을 지니고 있다면, 이 나라 형편이 이보다 나을 것입니다.” 바로스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번 경험으로 저는, 정기적으로 가족 연구를 함으로써 우리 자녀들이 확고한 태도를 취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 일인지 통감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1979년에, 아르헨티나 대법원은 이 자녀들이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순조로운 시기가 다시 오다

1950년 이후 줄곧 지부는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여호와의 증인을 법적으로 하나의 종교로 승인해 주도록 신청서를 제출하였습니다. 법적 승인을 획득하려면 몇 가지 단계를 밟아야 하였습니다. 첫째로, 적정 수의 성원을 확보하면서, 성서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과 같은 사회적·종교적 목적을 가진 법적 단체를 구성하는 일이 요구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이 법적 단체를 등록해야 하였습니다. 그 목적들이 합법적이라고 정부가 인정할 수 있어야 하였습니다. 정부가 승인하고 나면, 등록 번호가 부여되었습니다. 이 등록 번호를 가지고, 하나의 종교 단체로서 법적인 승인을 받기 위한 신청을 할 수 있었습니다. 1981년까지, 여호와의 증인은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의 사회적·종교적 목적은 불법이라는 점을 구실로 승인을 거부당하였습니다.

1976년 11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대한 재개된 금지령이 발효된 지 단 2개월이 지나서, 지부는 아르헨티나 국가 법원에 금지령의 철회를 탄원하였습니다. 그에 더하여 지부는, 애국 의식 참여 거부를 이유로 증인 자녀들을 학교로부터 추방한 사건과 양심적 병역 거부로 인한 형제들의 투옥 건 그리고 워치 타워 협회 출판물의 압수 건을 가지고 상고하였습니다.

1978년 10월 10일에는 미주(美洲) 인권 위원회에도 이러한 내용을 호소하였습니다. 동 위원회에서는 정부가 여호와의 증인의 인권을 침해하였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금지령을 철회할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1980년 12월 12일 사실상의 군사 정권은 미주 인권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금지령을 해제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여호와의 백성은 아르헨티나에서 자유롭게 모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일은 형제들에게 참으로 큰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더 이상 금지되지 않았어도 그들의 종교 조직은 아직 법적 승인이 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마침내 1984년 3월 9일, 정부는 ‘여호와의 증인 연합회’를 하나의 종교로 승인하였습니다. 법적 승인을 얻어내기 위한 여러 해에 걸친 투쟁이 끝난 것입니다. 드디어 왕국회관이라는 간판을 내걸 수 있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형제들은 참으로 서로 기뻐하였습니다! 모두가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행하신 일로 큰일을 하셨”다는 시편 필자의 말에 공감하였습니다.—시 126:3.

그러나 법적 승인은 왕국회관에 간판을 내거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리스도인 장로인 시리아코 스피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금지령이 해제되고 큰 대회를 다시 열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 하느님 여호와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구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좋은 시설을 사용하고 싶었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새 시립 경기장 마르 델 플라타를 사용하려고 여러 번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법적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용 허가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984년에는 여호와께 감사하게도 증인들이 법적 승인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는 시립 경기장은 물론, 최근에는 신축된 스포츠 센터도 우리 대회를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큰 모임이 주는 격려적인 분위기를 형제들이 누려 본 지 여러 해가 되었으므로, 지부에서는 다가오는 지구 감독자 프레드 윌슨의 방문을 최대한 선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두 주도 안 되는 기간에, 대 부에노스아이레스로부터 오는 형제들을 베레스 사르스피엘드 경기장에 수용할 마련을 추진하였습니다. 그 행사는 금지령이 해제된 이래 처음 갖는 큰 모임이었습니다. 단기간의 통지에도 불구하고, 거의 3만 명에 이르는 무리가 1984년 2월 15일 기쁨을 주는 영적 “축제”에 참석하였습니다.—시 42:4.

금지령의 영향

군사 정권 아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실종되고 처형당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정부의 강경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증인 가운데는 아무도 실종된 사람들 가운데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증인들은 생명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금지령 때문에 세상에 더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금지령이 있기 전에는, 증인들에게 무슨 종교에 속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대답을 듣고서는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짓곤 하였습니다. 금지령이 있고 난 뒤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37년간 전 시간 봉사자로 일해 온 수사나 데 푸체티는 이렇게 말합니다. “금지령이 끝났을 때는, 우리를 ‘여호와의 아들들’이나 ‘여호와파’라고 부르지 않았고, 우리를 복음주의 단체들과 혼동하지도 않더군요. 금지령 기간에, 정확한 우리의 이름이 라디오와 신문에 자주 언급되었답니다. 한 가지 흐뭇한 결과로, 사람들은 드디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법적 군 복무 면제

거의 같은 시기에, 여호와의 증인 연합회를 하나의 종교로 인정한 조치를 취했던 종무부 차관 마리아 T. 데 모리니 박사는 여호와의 증인 연합회, 종무부 장관 및 국방부 장관을 대표하는 사람들 간의 의미심장한 회합을 주선하였습니다. 그 회합의 목적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군 복무 면제를 고려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부 위원회는 정규 파이오니아들이 군 복무로부터 면제받게 되기를 바랐는데, 당국자들은 더 확대해 줄 용의가 있었습니다.

당국자들은 학생으로 간주되는 사람에게도 면제 조치를 적용할 의사가 있었으며, 신권 전도 학교에 등록된 모든 사람도 신학생으로 고려하였습니다. 침례받은 형제가 만 18세가 되고 병역 신고가 요구될 때에는 소속 회중의 장로들이 그의 품행을 증명하는 서류를 작성하여 서명하게 됩니다. 이 서류를 지부 사무실로 보내면 서명을 한 다음, 종무부 등록 사무소로 발송합니다. 그러면 그곳에서는 증명서를 발급하는데, 형제가 그것을 군 당국에 제출함으로써 군 복무는 면제되었습니다. 이 효율적인 제도는 1990년대에 군 복무 의무제가 폐지되던 시기까지 시행되었습니다.

모든 곳에서 놀랍게 성장하다

1950년에서 1980년 사이에,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정부의 금지령 아래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그 어려운 시기에도 말씀을 계속 열심히 전파하였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증가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1950년에는 아르헨티나에 1416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1980년에 와서는 3만 6050명이 되었습니다!

법적 승인과 함께 더 큰 증가가 이사야 60:22과 일치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 성구는 이러합니다. “그 작은 자가 천이 되고, 그 보잘것 없는 자가 강대한 나라가 될 것이다.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그 일의 속도를 더할 것이다.” 전국 각지로부터 들어온 보고를 잠깐만 살펴봐도 이 말이 참됨이 역력히 드러납니다. 예컨대, 금지령 해제 이후 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프란시스코솔라노 회중의 70명의 전도인이 지금은 일곱 회중의 700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리오네이그로 주의 싱코살토스에서 장로로 일하는 알베르토 파르도는 싱코살토스에 전도인이 15명밖에 없던 때를 기억합니다. 지금은 세 개의 회중이 있고 총 전도인이 272명이어서, 주민 100명당 증인 한 명의 비율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카르멘데파타고네스 회중의 마르타 톨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 1964년에 작은 방에서 모이던 작은 집단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현재 세 개 왕국회관의 250명의 형제 자매들과 비교하면 놀랍기만 합니다.”

팔미라와 주변 도시들에서는 급속한 증가 때문에 공개 강연과 「파수대」 연구를 매 주말 두 번씩 가짐으로써 형제 자매들이 왕국회관에서 보다 안락하게 집회를 보도록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기념식을 위해서는 더 큰 홀을 빌렸는데, 그것은 참석자 수가 계속해서 250명을 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86년 이래, 원래 팔미라 회중에 임명되었던 네 곳의 도시에는 회중들이 형성되었습니다.

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전도인이 33명이던 원래의 호세레온수아레스 회중은 다섯 개의 회중으로 늘어났습니다. 그곳의 장로인 후안 셸렌베르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새로운 회중을 형성할 때마다 우리의 구역은 작아집니다. 지금 우리 구역은 16개 구획의 길이에 8개 구획의 폭밖에 안 되는 작은 부분입니다. 우리는 임명된 구역을 일주일에 한 번 내지 두 번 돕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많은 사람들은 냉담하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담이 생기고 성서 연구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왕국회관은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전도인 100명 가운데 대부분이 걸어서 집회에 올 수 있습니다.”

파이오니아의 영이 왕성하다

금지령이 해제되면서 광범위한 활동 분야가 열렸습니다. 왕국 선포자들이 크게 필요한 구역들이 많았습니다.

1983년 12월,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 부부 열 쌍이 여호와의 증인이 거의 돌본 적이 없는 지역에서 전파 활동을 시작하기 위해서 3개월 동안 파견되었습니다. 선정된 부부들은 이미 정규 또는 보조 파이오니아들로서 순회 감독자들의 추천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목표는 서적을 전하고 성서 연구를 시작하도록 노력함으로써 광범위한 증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인근 회중들의 전도인들이나 서신 왕래를 통해서 돌보고자 하였습니다. 이 운동은 훌륭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지금은, 그 파이오니아들이 봉사하던 열 개의 도시 가운데 아홉 군데에 회중이 있습니다.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 가운데 아르헨티나 데 곤살레스가 있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아르헨티나는 에스키나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네 자녀를 데리고 도착하였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씩 그들의 집에서는 한 침실이 집회 장소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호별 방문을 할 때 거의 매 집에서 안으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우선 집주인은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자녀가 몇인지 그리고 어디서 묵고 있는지 알고 싶어하였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준 다음에는 기꺼이 우리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더군요. 나는 성서 연구를 일곱 건 시작할 수 있었는데, 그 중 한 건은 한 부인 그리고 그의 네 자녀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는데, 한 번도 집회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몇 달 만에 어머니는 딸과 함께 침례를 받았고, 그 딸은 나중에 파이오니아가 되었어요. 모두가 여전히 여호와를 충실하게 섬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행복하답니다.”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자족하다

파이오니아의 영을 가진 사람들 일부는 극심한 날씨와 고립 그리고 원시적인 생활환경에 기꺼이 적응하였습니다. 호세 포르테와 에스텔라 포르테 부부가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산타크루스 주에 있는 리오투르비오에 파견되었을 때, 그 지역에는 다른 증인도 성서 연구생도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리오투르비오는 아르헨티나의 최남단에 위치해 있어 기온이 종종 섭씨 영하 18도보다 훨씬 아래로 떨어집니다.

포르테 부부는 증인들의 친척이 소유하고 있는 집의 작은 방 하나에서 기거하면서, 리오갈리에고스에 있는 가장 가까운 회중까지 300킬로미터를 다녔습니다. 한번은 집회에서 돌아오는데, 인적이 없는 고속도로에서 자동차 엔진이 과열되어 버렸습니다. 라디에이터에서 물이 새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온은 위험할 정도로 낮아서, 그들은 그 고장 사람들이 엘 수에뇨 블랑코라고 부르는 상태 즉 죽음에 이르게 하는 가누지 못하는 수면 상태를 겪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잠이 들지 않도록 여호와께 기도하였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그들은 근처에 있는 목장에 이르러 몸을 덥게 하고 라디에이터에 물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포르테 부부는 가장 인구가 밀집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전파하여, 얼마 되지 않아서 30건 이상의 발전하는 성서 연구가 생겼습니다. 단시일 내에 하나의 집단이 시내에 형성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산간이나 시골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접촉하고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일년에 한 번씩 호세는 말을 타고 6일 내지 7일간의 전파 여행을 다녔습니다. 한번은 호세와 그의 동료가 한 목장에 다가가는데, 공격적인 경비견을 데리고 있던 한 여자가 그들과 마주쳤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신분을 밝히자 그 부인은 그들을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아니 여기서도!”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 반응을 나타내는지 물으니까, 그 부인은 설명하기를 자기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베델 바로 근처에 살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부인은 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이처럼 외딴 곳에까지, 그것도 카우보이 같은 옷을 입고 찾아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 부인은 그들을 초대하여 먹을 것을 주었고, 그들은 활기찬 성서 토의를 하였습니다. 포르테 부부의 끈덕진 노력은 결실을 보아, 지금은 리오투르비오에 31명의 전도인으로 구성된 번창하는 회중이 있습니다.

떠 있는 왕국회관

전파할 순조로운 시기를 이용할 결심을 한 사람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 파라나 강의 삼각주 지역에 사는 섬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도전에 응하였습니다. 그 삼각주에서 증거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닌데, 그것은 섬들 간의 거리, 교통수단을 구하는 문제 그리고 예측을 불허하는 날씨 때문입니다. 개인 배로 다니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또 위험합니다. 그런데도 끈질긴 노력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1982년에 와서는 격지 집단이 티그레 회중 소속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 티그레 회중의 형제인 알레한드로 가스탈디니는 길이가 7미터 되는 가벼운 플라스틱 배에다 프로판 가스로 구동되는 모터를 단 엘 카르핀초호를 만들었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온 라몬 안투세스와 그의 가족도 그 삼각주에서 왕국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그들 소유의 범선을 제공하였습니다. 이 열심 있는 형제들은 열정적으로 앞장서서, 주말에 그들의 봉사를 지원하도록 다른 회중들의 전도인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가족 단위로 진리를 받아들임에 따라, 연구들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섬들에 사는 사람들은 배가 거의 없는데다 공공 교통수단도 없었기 때문에, 관심자들 대부분은 막상 집회 참석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그들 서로가 함께 만나 서로를 영적으로 강화하도록 도왔습니다. 예를 들면, 모두가 기념식에 참석하는 일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배 한 척이 돌아다니면서 침례받은 증인들과 관심자들을 태우고는 그들이 배 안에서 기념식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나중에 카를로스 부스토스와 그의 아내 아나 그리고 딸 마리아나가 삼각주 지역에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습니다. 지부에서는 프레쿠르소르 1호라는 모터보트를 구입해서 지원을 베풀었습니다. 이 배에는 주방과 욕실 그리고 세 사람이 잘 수 있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배의 고물에 있는 마리아나의 잠자리는 엘 사르코파고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그곳이 너무 좁아서 관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20명의 전도인이 삼각주 지역에 살면서, 티그레 회중의 일부로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형제들이 지금은 각자 배를 가지고 있어서, 신권적 책임을 돌볼 준비가 보다 잘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용 왕국회관을 짓는 꿈은 이룩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지역의 끊임없는 홍수 때문에, 건물을 짓기에 적합한 땅은 값이 매우 비쌉니다. 기금이 제한되어 있는 작은 집단으로서는 이 장애물이 넘을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땅은 귀한 반면 물은 흔했습니다. 그러므로 떠 있는 왕국회관을 짓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한 왕국회관을 짓는 데 지부가 앞장을 섰고, 그리하여 1999년 6월에는 완공되었습니다. 지금은 티그레 회중에서 장로들이 번갈아 가며 이 왕국회관을 찾아와 그 집단을 위해 주간 집회들을 사회합니다.

한국계 주민에게 이르다

아르헨티나의 여호와의 증인은 다양한 지리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르기 위해 노력할 뿐 아니라, 국적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도 노력을 기울입니다. 두 번째 금지령이 내려지기 전인 1971년에 황영근과 그의 가족은 아르헨티나로 이민와서, 스페인어 회중과 연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인들 사이에서 제자를 삼는 활동이 결실을 맺고 또 한국으로부터 증인들이 더 이민을 옴으로써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모론에서는 한국어 집단을 형성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매주 다섯 가지 회중 집회를 모두 열었으며, 1975년에는 아르헨티나 최초의 한국어 회중이 설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1년 후에는 그들의 첫 왕국회관을 여호와께 봉헌하였습니다.

금지령 기간에, 한국어 회중은 작은 집단들로 나뉘었습니다. 한국 형제들은 회중적으로 함께 모이기를 갈망하였기 때문에 공개 강연과 「파수대」 연구를 위해서 한 달에 한 번씩은 공원에서 집회를 열 마련을 하였습니다. 경찰은 한국어를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그 집회가 종교적 성격을 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금지령이 해제된 후, 한국어 밭은 꾸준한 증가를 보였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전국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전파하려면 합당한 자를 찾아서 종종 수백 킬로미터를 여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년 두세 번씩 한국 증인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각 주로 여행하여, 한국 상인들이 있는 곳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근면함을 축복해 오셨습니다. 현재, 네 개의 회중에서 평균 288명의 한국 전도인이 말씀을 열심히 전파하고 있습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한국어 회중은 스페인어를 하는 순회 감독자가 방문하여, 집회와 야외 봉사 그리고 양치는 방문에 통역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렇지만 1997년에는, 길르앗 102기생들인 스티븐 리와 준 리 (이승호와 김윤경) 부부가 아르헨티나·브라질·파라과이의 한국어 회중들을 섬기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이 부부는 한국계이고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기 때문에 형제들은 그들의 방문으로부터 큰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편파적이 아니신 우리 하느님 여호와의 이러한 사랑의 마련에 대해 모두가 매우 감사하고 있습니다.—사도 10:34, 35.

이 부부는 이 세 나라의 기후와 물과 음식에 계속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매 6개월 중에 그들은 아르헨티나에서 3개월, 브라질에서 2개월, 파라과이에서 1개월 머뭅니다. 한국어 회중을 섬기지만 이 나라들의 언어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브라질에서 포르투갈어로 말하는 일에 더해서, 이 부부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스페인어 말씨에도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도 그들은 이 참으로 국제적인 순회구에서 즐거움을 누립니다. 2년 후, 이 순회구에서 파이오니아 수는 10명에서 60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호와를 찬양하다

1970년대에, 청각 장애인들이 회중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면서 특별한 돌봄을 필요로 하는 또 하나의 집단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집회로부터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수화 통역자들이 필요하였습니다. 1979년 무렵에 한 집단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비야데보토에 사는 코코 얀존과 코카 얀존 부부의 집에서 모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였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청각 장애인들의 수는 금지령 기간은 물론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계속 증가하였습니다. 1980년대에 청각 장애인 형제 자매들은 그 통역자들과 함께 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특정 회중들에 임명되었습니다. 프로그램 전체가 청각 장애인들을 위해 통역되어, 그들이 집회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청각 장애인들은 회중에서 좀 더 온전히 참여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래서 1992년에 지부에서는 그들과 통역자들을 하나의 수화 회중으로 모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청각 장애인 전도인들은 그들의 언어로 가르치고 해설하고 전파하는 일에 활동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화 회중은 내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혼자서 자녀를 키우는 청각 장애인 자매 실비아 모리의 말입니다. “청각 장애인 형제 자매들과 더 많이 만나게 되어 매우 흐뭇하답니다. 전에는 우리가 여러 구화 회중에 분산되어 있어 일주일에 한 번밖에 서로 보지 못했거든요.”

다른 청각 장애인 자매인 엘바 바사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수화 회중이 없을 때 저는 곧잘 낙심하곤 했는데 지금은 매우 행복해요. 그건 제가 보조 파이오니아를 할 수 있고, 여호와를 섬기는 데 계속 바쁘고, 또 영적인 형제들과 더 많이 만나기 때문이랍니다. 여호와께 매우 감사합니다.”

수화가 한 가지 시각적인 의사소통 수단이 된 이래, 협회의 비디오는 특히 효과적입니다. “여호와의 증인—그 이름을 지닌 조직” 비디오는 이미 아르헨티나 수화로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더하여,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팜플렛과 그 밖의 출판물의 비디오판도 준비 중에 있습니다. 현재 아르헨티나 전국에는 네 개의 수화 회중이 있어 총 전도인이 200명인데, 그 가운데는 장로와 봉사의 종으로 섬기는 38명의 청각 장애인 형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어권 주민을 위한 도움

1993년이 끝나갈 무렵, 해외 회사들이 아르헨티나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르헨티나에 파견된 그 직원들 가운데 일부는 침례받은 증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스페인어는 별로 못하지만 영어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적 필요를 돌보고 또 증가하는 영어권 밭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르기 위하여, 이 나라 최초의 영어 회중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형성되었습니다. 영어를 배운 일부 아르헨티나 형제들이 자진하여 나서서 이 새 회중을 지원하였습니다.

이 회중이 1994년 6월에 설립된 이래 열 명이 침례를 받았으며, 아르헨티나에 잠시 거주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아듣는 언어로 제공되는 집회를 즐기면서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한 마푸체족 젊은 여성이 전파의 문을 열다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진리의 정확한 지식에 이르”도록 돕는 일에는 인디언 보호 구역에 살고 있는 원주민에게 이르는 일도 포함됩니다. (디모데 첫째 2:4) 남서부에 있는 네우켄 주에는 마푸체 인디언 보호 구역이 있는데, 그곳의 추장은 증인들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과거 다른 종교 집단들의 행실 때문이었습니다. 마푸체족의 한 젊은 여자 파트리시아 사비나 과이키밀은 어머니로부터 몇 가지 출판물을 구했는데, 그 어머니는 그것을 보호 구역 밖에서 일하다가 받았습니다. 파트리시아는 지부에 편지를 써서 자료를 더 요청하였습니다. 답신하는 일을 맡은 자매 모니카 로페스는 파트리시아에게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을 보내면서 성서 연구 마련을 설명하였습니다. 파트리시아가 이 제의를 받아들여, 그들은 서신 왕래를 통하여 일년간 서로 만나본 적도 없으면서 연구하였습니다.

하루는 누군가가 모니카의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는 파트리시아를 보고서 기뻐 어쩔 줄 몰랐습니다. 파트리시아는 출산을 앞둔 자기 언니를 데리고 구급차로 시내에 나왔던 참이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보낼 수 있었던 그 짧은 시간, 모니카는 그에게 왕국회관을 보여 주면서 집회가 어떻게 사회되는지 설명해 주고는 다가오는 순회 감독자 방문에 그를 초대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파트리시아는 계속 훌륭하게 발전하였습니다. 실제로, 어느 날 아침에는 그날의 성구가 전파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그는 자기 암말에 안장을 얹고서 아침 일곱 시부터 초저녁 때까지 이웃 사람들에게 증거하였습니다. 그의 증거 활동으로 인하여 외부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 이 보호 구역에서 전파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파트리시아는 1996년에 침례를 받았으며, 계속 “구원의 좋은 소식”을 인디언 지역 사회에 확장하였습니다. (시 96:2) 지금은 다른 인디언 보호 구역들도 증인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있습니다.

왕국회관의 필요성

금지령 후 순조로운 시기에 아르헨티나의 여호와의 증인이 열심히 전파 활동을 확장해 감에 따라, 적절한 왕국회관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왕국회관은 허술하게 지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북부에 있는 산티아고델에스테로 주에 있는 한 회관은 벽이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왕국회관 건축 공사에 참여해 온 루이스 베니테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포르모사로 가는 길에 아이젠하워 형제와 저는 형제들이 벽 높이가 1.2미터인데다, 지붕도 문도 창도 없는 집에서 모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앉을 자리로는, 형제들이 마분지를 벽돌 위에 깔아 사용하더군요. 비가 올 땐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일부는 우산을 가져오고 나머지는 비를 맞지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금지령이 1980년에 해제된 후, 추부트 주 트렐레우에 있는 회중의 장로들은 영적 교훈을 받으러 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만한 큰 장소가 그들에게 없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반 홀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 집에서 가정 일을 해 주던 한 자매는 그 홀을 집회 장소로 사용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허락이 나서, 회중은 그 홀에서 무료로 칠팔 개월 동안 집회를 보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한 형제의 가구 점포를 잠시 사용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회중에서 그 장소를 한없이 사용할 수는 없어서, 형제들의 가정집에서 작은 집단으로 모이는 마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보다 영구적인 집회 장소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회중 성원들은 처음으로 왕국회관을 짓기로 결의하였습니다. 5년간 집회 장소를 물색한 뒤, 트렐레우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마침내 여호와께 헌납할 왕국회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전도인 수가 증가하는 바람에 왕국회관을 다시 지을 필요가 생겼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회중들은 왕국회관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참 숭배를 위한 적합한 건물을 마련하기 위하여 무슨 조처가 있어야 하였습니다.

지부가 해결에 나서다

이러한 필요에 부응하여, 지부는 왕국회관 건축 프로그램을 개발하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건축 기금을 조달하는 예탁 마련뿐 아니라, 안락하고 실용적이면서도 수수한 회관을 짓기 위한 전문적인 설계 도면도 제공하였습니다. 그에 더하여, 건축 일을 조직하는 법도 제안하였습니다. 자격을 갖춘 형제들이 임명되어 기술 지원을 베풀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으로 왕국회관은 두 달 만에, 나중에는 단지 30일 만에 건축되었습니다.

다른 왕국회관이 필요했던 트렐레우의 회중들도 이 간소화된 건축 프로그램으로부터 혜택을 받았습니다. 건축이 시작된 지 단지 60일 후에 그들은 새 회관에서 집회를 즐겼습니다. 그 일은 그 도시 사람들에게 큰 증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쓰레기장에 불과하던 공터가 갑자기 아름다운 왕국회관으로 꾸며지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 지역의 건축 업자들은 너무 좋은 인상을 받은 나머지 그 형제들을 고용하고자 하였습니다!

큰 모임을 위한 대회 회관

한편 아르헨티나의 형제들은 더 큰 모임을 가질 수 있는 대회 회관의 필요성을 인식하였습니다. 북부의 미시오네스 주에 있는 오베라에서, 한 가족이 한 구획의 땅을 기증하여 그곳의 형제들은 벽은 없이 지붕만 있는 임시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한 번의 대회가 1981년에 그곳에서 열려, 30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같은 부지에, 지금은 2200명을 수용하는 더 영구적인 구조물이 들어서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연합회가 1984년에 등록된 이후, 두 개의 대회 회관이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에서—하나는 1986년에 모레노에서, 다른 하나는 1988년에 로마스데사모라에서—여호와께 봉헌되었습니다. 로마스데사모라에 있는 대회 회관은 원래 방치되어 있던 공장과 창고였습니다. 1985년 7월 9일 약 1500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나타나, 중단 없이 강행되는 18일간의 건축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건물을 청소하고, 공장 일부를 1500명을 안락하게 수용하는 강당으로 개조하였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철야 작업으로 첫 번째 대회에 맞추어 대회 회관을 완성하여, 그 대회가 1985년 7월 27일에 열렸습니다. 현재는 대회 회관이 네 곳에 있는데, 그 가운데는 1993년에 코르도바에서 봉헌된 대회 회관도 있습니다.

지역 대회는 어디에서 열 것인가?

끊임없는 증가로 인하여, 지역 대회를 열 적합한 시설을 임대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대회장 임대료는 비쌌고, 그러한 시설의 관리자들은 종종 계약 조건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음향 시설을 비롯하여 필요한 장비를 운송하고 설치하는 일은 불편하면서 또한 비효율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형 노천 경기장에서는 청중이 바깥 날씨에 노출되어 프로그램으로부터 온전한 유익을 얻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수도에서 남서쪽에 있는 농촌 지역 카뉴엘라스에 대지를 매입하였습니다. 지역 대회 회관을 건립하여, 지역 대회는 물론 다른 대회에도 사용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대회 회관은 이 나라에서 이미 사용 중인 네 곳의 대회 회관 시설에 추가될 것이었습니다.

널찍한 9400석의 지역 대회 회관이 착공한 지 6개월도 안 되는 1995년 10월에 첫 지역 대회에 맞추어 준비되었습니다. (요엘 2:26, 27) 1997년 3월에 이 시설은 여호와께 봉헌되었습니다. 통치체의 케어리 바버가 열정적인 봉헌사를 하였으며, 그 다음날 그는 커다란 리베르 플라테 스타디움에서 열린 특별 모임에도 참여하였습니다. 그 경기장은 전국 각지에서 온 7만 1800명의 형제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 중에는 파타고니아로부터 3000킬로미터를 여행해서 온 집단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지부 시설

1984년 12월에는 5만 1962명이라는 왕국 선포자 신기록에 또다시 달하였습니다. 이러한 증가로 더 많은 서적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더 큰 인쇄 시설이 요구되었습니다.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칼다스 가 1551번지에 있는 한 복합 건물을 매입한 후, 개조하여 공장과 사무 공간을 늘렸습니다. 지부에서는 또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엘카노 가 3850번지에 있는 방치되어 있던 도자기 공장을 매입하여, 이를 헐어 내고 아름다운 새 숙소 복합 건물을 건축하였습니다.

도합 640명의 전 시간 일꾼들이 건축 공사에 참여하였는데, 그 가운데 259명은 국제 건축 프로그램으로부터 왔습니다. 이에 더하여, 주말이면 수백 명의 형제 자매들이 와서 거들었습니다. 공사 현장에 200명이 넘는 해외 자원 봉사자들이 함께 있게 되자, 재미있는 현상도 더러 벌어졌습니다. 한 형제는 흰 팔로모스(비둘기 수컷) 열두 마리를 요청하는 신청서를 작성하였습니다. 구매부 감독자는 왜 새를 신청하는지 의아해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그 형제는 흰 페인트 포모스(튜브) 열두 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건축 공사 기간에 아르헨티나는 초고속 물가 상승을 겪고 있었습니다. 건축 자재 가격이 때로는 하루 동안에 세 배로 뛰는 바람에, 구매 관계자들에게 도전이 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건축 현장에 있던 형제들은 가장 중요한 일—말씀을 전파하는 일—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한 납품업자는 공사 현장에 종종 회사 직원들을 보냈는데, 그들은 자재 주문과 함께 항상 철저한 증거도 받았습니다. 도합 20부의 잡지와 다섯 권의 서적을 이 회사 직원들에게 제공하였고, 그 업주의 사무실에는 여러 부의 잡지가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공사 자체가 하나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틸트업 공법을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철근 콘크리트 판벽을 현장에서 부어 만든 후 크레인으로 제자리에 올리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특이한 건축 공법이어서 국내 건축 업자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토요일 아침이면 건축 대학의 학생들이 찾아와 관찰하고 견학 안내도 받았습니다.

1990년 10월, 이 아름다운 복합 건물은 여호와께 봉헌되었습니다. 통치체의 시어도어 재라스가 이사야 2:2-4에 근거하여 고무적인 봉헌사를 하였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초창기에 진리의 씨를 심는 데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지부들에서 온 손님들과 함께 이 기쁜 행사에 참석하였습니다.

또 다른 확장

새 지부 시설이 봉헌되자마자, 칼다스 가에 있는 공장 복합 건물을 포함해서 또 다른 확장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적을 보관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지하실이 있는 3층 건물이 인접 구획에 건축되었습니다. 25명으로 이루어진 자원 봉사자 집단이 8개월 만에 그 건축 공사를 완료하였습니다.

더 많은 사무 공간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된 바로 그 시점에, 베델 집에서 한 구획 떨어진 건물을 매각한다는 고시가 나왔습니다. 이 도시에서는 건축 허가서 발급이 점점 더 엄격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구조물이 완성되어 있는 시설물을 취득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비록 건물이 30년 이상 되긴 하였지만 고급 자재로 지어져, 내장은 재질이 단단한 나무로 되어 있고 외벽은 대리석으로 마감되어 있었습니다. 이 건물을 매입·개조하여, 지금은 여러 사무실과 함께 구매부·봉사부·건축부·회계부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 건물은 1997년 카뉴엘라스 지역 대회 회관과 동시에 봉헌되었습니다.

이웃 나라를 돕다

금지령 기간에, 브라질이나 우루과이와 같은 이웃 나라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아르헨티나 형제들이 영적 양식을 구하는 일을 지원하였습니다. 지금은 아르헨티나 지부가 이웃에 있는 칠레의 필요에 응하고 있습니다. 1987년 1월 이래 잡지를 칠레로 보내고 있는데, 처음에는 외부 업체를 이용하다가 1992년 이후에는 협회 소유의 트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칠레로 오고 가려면 해발 3100미터의 안데스 산맥을 넘어야 합니다. 트랙터로 트레일러를 끄는 대형 화물차를 눈 덮인 산의 꾸불꾸불한 도로를 따라 몬다는 것은 운전 기사의 입장에서 대단히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일입니다. 한 구간은 아찔한 U자형 커브가 서른한 번이나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장거리 수송은 그만한 보람이 있습니다. 칠레 형제들이 잡지를 제때에 받아 보기 때문입니다.

4색 인쇄가 잡지를 호소력 있게 만들다

세상이 더욱더 영상 지향적이 되어감에 따라, 협회는 「파수대」와 「깨어라!」를 총천연색으로 인쇄하는 문제를 고려하였습니다. 목표는 우리 잡지를 매력적인 형태를 갖추면서도 경제적으로 적정선에서 발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워치 타워 협회는 새로 수리한 4색 오프셋 해리스 윤전기를 아르헨티나 지부로 보냈습니다. 인쇄기는 뉴욕 주 월킬에서 분해하고 포장해서 발송해야 하였습니다. 이 귀중한 화물이 1989년 10월 10일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을 때는 재조립을 해야 하였습니다. 세계 본부로부터 경험 많은 형제들이 아르헨티나로 여행하여 이 일을 감독하고 또 윤전기 운전자들을 훈련시켰습니다.

4색 인쇄는 잡지 배부 수를 크게 증가시켰습니다. 그것을 예시하자면, 4색 인쇄가 시작된 다음해인 1991년의 잡지 배부 수는 628만 4504부에서 724만 8955부로 거의 백만 부나 증가하였습니다!

국제 대회가 서로 격려하는 기회가 되다

그토록 여러 해 동안 금지령을 겪은 뒤, 아르헨티나의 증인들은 국제 대회를 다시 한 번 주최할 기회가 오기를 갈망하였습니다. 드디어 1990년 12월에 그들은 “순결한 언어” 국제 대회를 위해서 20개국이 넘는 나라들로부터 거의 6000명에 달하는 외국 대표자들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환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통치체의 존 바와 라이먼 스윙글이 참석하여 격려적인 연설을 하였습니다. 4일간의 프로그램은 리베르 플라테 및 벨레스 사르스필드 스타디움 두 곳에서 제공되어, 총 참석자 수가 6만 7000명을 넘었습니다.

숭배에 연합되어 있으면서도 대표자들의 문화적 다양성은 다채롭게 전시되었습니다. 스페인 자매의 아름다운 민속 의상, 일본 여인들의 전통적인 기모노 그리고 멕시코 대표들의 검은색 정장에 테가 넓은 솜브레로 모자를 쓴 모습을 누구나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대회가 끝났을 때, 아무도 자리를 뜨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다른 민족 집단들은 동시에 왕국 노래를 자기 나라말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손수건을 흔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거의 한 시간이나 계속되고 나서야 대회 참석자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한 신문 사진 기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일찍이 아르헨티나에서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 이런 감동, 이토록 따뜻한 분위기 말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나라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았을 때 아르헨티나 형제들이 얼마나 흥분하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일이 1993년에 있었습니다. 목적지는 어디였습니까? 칠레, 산티아고였습니다. 1000명 이상이 아르헨티나로부터 여행하여 참석하였습니다. 전세 버스 열네 대가 부에노스아이레스로부터 1400킬로미터를 여행하여 산티아고로 갔습니다. 대표단이 26시간의 여행 중 안데스 산맥을 넘어가면서 즐긴 경치도 장관이었지만, 4일간의 “하느님의 가르침” 지역 대회에서 24개국으로부터 온 약 8만 명의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연합하는 기쁨과는 비교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1998년에, 아르헨티나 지부는 “하느님이 인도하는 생활의 길” 국제 대회에 참석할 대표단을 브라질의 상파울루와 캘리포니아의 샌디에이고에 보내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오래된 특별 파이오니아인 사라 부흐두드는 아르헨티나에서 간 400명 이상의 대표단과 함께 샌디에이고에서 대회를 흠뻑 즐겼습니다. 이 자매의 소감은 이러합니다. “우리를 형제들의 집에 숙박하게 한 통치체의 마련은 매우 인자한 마련이었어요. 그로 인해 우리는 인종과 언어의 장벽이 더는 없을 신세계에서의 삶이 어떠할 것인지를 어렴풋이 보게 되었거든요.”

“가르침받은 자의 혀”

형제들의 열심 있는 전파 활동과 국제 대회들을 포함한 영적인 마련의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호응하여 점증하는 전도인의 대열에 합류하였습니다. 1992년에는 9만 6780명의 신기록을 달성하였습니다. 1984년에 법적으로 등록된 이래 증인들의 수가 두 배가 된 것입니다.

분명히, 점증하는 여호와의 양 떼를 돌볼 더 많은 목자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32:1, 2; 요한 21:16)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회중을 보살필 독신 장로와 봉사의 종을 훈련시키는 교육 과정 즉 봉사 훈련 학교를 마련하셨습니다. 1987년에 미국에서 그 학교가 시작되었고, 1992년 11월에는 아르헨티나에서 그에 해당하는 학교가 문을 열었습니다. 구베델 복합 건물이 학교를 운영하기에 이상적인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웃 나라들에서 온 91명을 포함하여 이제까지 375명의 학생이 이 특권에 대해 특별한 인식을 나타냈습니다. 봉사 훈련 학교를 위하여 그들이 세속 직업으로부터 두 달간의 시간을 내는 것은 도전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직장을 포기하거나 잃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왕국 권익을 생활에서 첫째 자리에 두는 사람들을 부양하십니다. 많은 형제들이 전보다 급여가 더 좋은 직장을 더 좋은 조건으로 얻는 축복을 받았습니다.—마태 6:33.

우고 카레뇨는 제1기 학급에 참석하도록 초대받을 때 은행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보수가 좋았고, 근무 시간도 파이오니아를 할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께 열렬히 기도하고 나서 상사에게 다가갔는데, 봉사 훈련 학교에 참석하기 위해 장기 휴가를 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우고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정말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 과정을 마칠 때까지 제자리를 남겨 두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사회가 이 문제를 고려한 후, 그의 장기 휴가 신청은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졸업하면서 우고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라는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봉사에서 한 달에 140시간을 바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우고는 열렬히 기도하고 나서 상사에게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상사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을 잃게 돼서 매우 유감입니다만, 새로 하는 일에서 잘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하고 있는 우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생활에서 첫째 자리에 두는 쪽을 택할 때 그분이 우리를 부양하신다는 사실을 저는 여러 번 보아 왔습니다.”

이 졸업생들은 그들이 임명된 회중을 세우는 일을 하면서, “지혜는 그 일에 의해서 옳다는 것이 증명됩니다”라는 예수의 말씀이 참됨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마태 11:19) 집회의 질이 향상되어 집회 참석 수가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받은 훈련을 활용해서 형제들은 하느님의 양 떼를 치는 일을 할 때 “피곤한 사람에게 말로 응답하는 방법”을 분별해 내고자 노력합니다. (이사야 50:4) 졸업생 가운데 일부는 현재 순회 감독자로 일하고 있고, 또 여러 사람은 대리 순회 감독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피를 멀리’하도록 돕다

전도인의 수가 증가하면서, 치료를 받을 필요가 있는 증인들의 수도 증가하였습니다. 이들은 ‘피를 멀리하라’는 성서의 명령에 따라 살고자 애쓰기 때문에, 이들을 돕기 위한 지원 봉사 체계를 수립하는 일이 실제적인 일이 되었습니다.—사도 15:29.

의료계에서는 수혈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이를 시행하는 일을 삼가기를 꺼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판사들도 증인 환자에 대한 강제 수혈을 서슴없이 승인하였습니다. 한 경우에 판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피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는 의사를 밝히는 유효한 법적 문서를 가지고 있는 환자에게 수혈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병원 교섭 위원회 프로그램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국제 세미나가 1991년 2월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렸습니다. 브루클린의 병원 안내 봉사부에서 온 세 명의 형제가 볼리비아·아르헨티나·우루과이·칠레·파라과이에서 온 230명의 형제를 위해 강사로 일하였습니다. 세미나에 참석한 형제들은 증인 환자들에게 필요한 점들을 파악하는 법 그리고 무혈 치료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여 의사들을 지원하는 법에 관해 배웠습니다.

현재 98명의 장로로 구성된 17개의 병원 교섭 위원회가 아르헨티나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활동하면서, 의료계에 중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여호와의 증인에게 사랑에 찬 지원을 베풀고 있습니다. 그들의 활동을 다른 수백 명의 자기 희생적인 장로들이 보충하고 있는데, 그들은 환자 방문단을 구성해서 증인 환자들을 찾아가 돕고 격려합니다. 현재 아르헨티나에서는 3600명의 의사가 여호와의 증인을 무혈 치료하는 데 기꺼이 협력하고 있습니다.

사랑에서 우러나온 구조 활동

아르헨티나 역시 자연재해를 면할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그러한 역경에 어떻게 대처합니까? 1977년 11월 23일 리히터 지진계로 진도 7.4를 기록하는 지진이 아르헨티나의 중서부 지방 일대에 심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 당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금지령 아래 있었지만, 형제들은 즉시 구호 활동을 조직하였습니다. 인근 지방에 사는 증인들은 사랑에서 우러나와, 악조건 아래서도 개의치 않고 구조 활동에 참여하였습니다.—데살로니가 첫째 4:9.

재해가 발생하던 날, 인접해 있는 멘도사 주와 산루이스 주의 증인들은 모든 차량을 동원하여 피해 지역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지진으로 인해 거대한 균열들이 생겼기 때문에, 당국에서는 폐허화한 카우세테 시로 통하는 도로의 대부분을 폐쇄하였습니다. 이웃 도시들을 통하여 돌아가는 다른 경로들을 통해서, 증인들은 식품과 의복 그리고 응급 처치 용품을 가져갔습니다. 그들이 그 도시에 접근해 보니 땅에서 연기 같은 것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것은 지진으로 발생한 흙먼지였습니다. 눈깜짝할 사이에 사람들은 집과 가재도구를 잃어버렸고, 어떤 사람들은 생명까지도 잃은 상황이었습니다. 울부짖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습니다. 카우세테에서는 형제들의 집 모두를 포함하여 1000채 이상의 가옥이 완파되었습니다. 신속히 증인들은 임시 수용 시설을 설치하였습니다. 100명 가량의 증인이 구호 활동에 가담하였습니다.

카우세테 회중의 정규 파이오니아인 마리아 데 에레디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이웃집의 딸이 막 해산하려던 참이라서 진통이 오고 있었어요. 형제들은 이웃집에다 커다란 천막을 쳐서 임시 주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바로 그날 밤에 심한 폭풍이 불었지요. 감사를 느끼고 있던 그 이웃은 이렇게 소리치더군요. ‘우리 교회에선 우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아무도 안 나타나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은 우리에게 거처가 필요할 때 우릴 구해 주는군요!’”

1998년 4월, 증인들은 또다시 구조 활동을 벌였습니다. 집중 호우가 아르헨티나의 북부, 특히 코린엔테스·포르모사·차코·산타페 주에 심한 홍수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72시간 동안에 코린엔테스 주 고야 시에 600밀리미터의 호우가 내렸습니다. 가옥이 침수되어, 이 지역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80퍼센트가 가재도구를 망쳤습니다. 홍수는 농작물과 가축은 물론, 다리와 간선 도로까지 쓸어가 이 도시로 가는 진입로마저 차단되어 버렸습니다. 피해 지역의 순회 감독자인 에리베르토 딥 형제는 지방 장로들과 협력해서, 그 구역을 몇 구획으로 나누어 형제들을 집집으로 찾아가 확인하였습니다. 일부는 카누를 이용하여 왕국회관으로 대피시켰습니다. 식품과 의복 그리고 의약품을 모두에게 공급하였습니다.

인근의 엔트레리오스 주에 사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고야에 사는 동료 신자들이 곤경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신속한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단 이틀 만에 엔트레리오스 주 파라나 시의 열두 개 회중은 거의 4톤에 달하는 쉽사리 부패하지 않는 식품을 의류와 함께 수집하여, 이 물자를 도로국에서 빌린 트럭에 실었습니다.

구호물자를 전달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두 개의 다리가 쓸려 나간 것입니다. 다리가 있었던 첫 번째 도강 지점에서 형제들은 멈추어, 도로 보수반 요원들을 도와 수백 개의 모래 주머니를 쌓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형제들은 짐을 차에서 내려, 강 건너편으로 나른 다음, 그들을 위해 기다리고 있던 트럭들에 다시 실었습니다.

두 번째 수송 구간에서는, 세찬 물살이 심하게 범람했던 탓으로 트럭을 운전하기가 힘들어진 도로를 따라 가야만 하였습니다. 해질 녘이 되어 그들은 두 번째 도강 지점에 이르렀는데, 거기서는 꽤 큰 보트를 가지고 있던 군인들이 응낙하여 몇 번 왕래해 가며 물품을 건너편으로 옮겨 주었습니다.

그곳에서 구조단은 드디어 고야에서 온 형제들을 만나, 함께 여행을 계속하였습니다. 고야 형제들은 동료 신자들이 나타낸 사랑과 결의에 진정으로 감동을 받았고, 반면에 파라나에서 온 형제들은 홍수 피해를 입은 형제들의 굳은 인내를 보고 격려를 받았습니다.

홍수 지역에 있는 회중들 역시 그들의 사랑을 꾸준히 표현함으로써 증거를 하였습니다. 한 가지 사례를 들면, 한 자매의 믿지 않는 남편은 호우로 인해 경제 사정이 어려워진 것을 크게 걱정하면서 근심스러워 하였습니다. 그 자매는 남편에게 회중에서 도움을 베풀 것이라고 안심시켰습니다. 다음날 장로들이 식료품을 잔뜩 가지고 그 집에 도착하였을 때, 남편의 우울하던 심정은 기쁨에 넘친 경탄으로 바뀌었습니다! 정부와 민간 단체의 구호물자가 마침내 사람들에게 도착할 무렵, 증인들은 이미 네다섯 번이나 지원을 받았습니다.

파이오니아의 영이 꺾이지 않다

홍수 피해 지역의 형제들은 비록 물질적으로는 큰 손실을 당하였지만, 말씀을 전파하려는 결의에 차 있었습니다. 홍수 지역에서 상당수의 전도인들이 전파 활동을 증가시켰습니다. 한 회중에서는 회중 구역의 80퍼센트가 침수되었는데도 많은 전도인들이 보조 파이오니아로 등록하였습니다!

회중들은 도심지 사업 구역·병원·버스 터미널·고층 빌딩에서 전파할 마련을 하였습니다. 비는 계속 왔지만, 파이오니아들은 그러한 구역에서 봉사하면서도 비교적 비에 젖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보조 파이오니아들 역시 하나의 팀으로 일하는 법을 익혀, 야외 봉사 마련을 지지하면서 적극적인 영을 나타냈습니다. 매우 어려웠던 상황에서 여호와의 인자한 돌봄을 경험한 결과, 그들 가운데 여러 명이 지금은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세상 장면은 변하고 있다

“이 세상의 장면은 변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한 아르헨티나 지부는 순회 감독자들에게 더 많은 사람과 접촉할 수 있도록 그들의 봉사 계획표를 조정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고린도 첫째 7:31) 어떤 지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전 시간 직장에 나가기 때문에 사람들을 낮에 집에서 만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가두 증거나 사업 구역 증거를 하루 중 이른 시간에 하고, 호별 방문 전파 활동은 늦추어 저녁 시간에 하도록 제안받았습니다. 전화 증거와 비공식 증거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전도인들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모든 기회에 깨어 있으라는 권고를 받고 있습니다.

호별 방문 전파를 하던 중에 한 자매는 어떤 남자가 길 건너편 공원에서 자녀들과 함께 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좀 망설이기는 하였지만, 이 자매와 짝 자매는 그 남자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들은 대화를 시작하면서, 그 남자의 적극적인 반응에 놀랐습니다. 그 남자는 자기 주소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이 자매와 그의 남편이 방문해 보니 그 남자는 아내와 함께 그들의 방문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몇 번의 대화가 있은 다음,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전에도 여호와의 증인이 그 집을 자주 방문했지만, 그 아내는 한 번도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었습니다. 그 가족은 지금 잘 발전하고 있으며, 집회에도 참석하고 참여합니다.

남부에 있는 산타크루스 주에서 훌리안 보르케스는 여행 안내인이라는 입장을 이용하여 빙하 국립공원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비공식 증거를 합니다. 이 공원은 열세 개의 주요 빙하가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그 중에는 폭이 거의 5킬로미터나 되는 페리토 모레노도 있어 전세계로부터 관광객을 끌어들입니다. 관광객들이 그 빙하의 아름다움에 경탄할 때, 이 형제는 창조주에게 관심을 이끈 다음 여러 언어로 서적을 전합니다. 이처럼, 아르헨티나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파하기 위하여 모든 기회를 이용하고 있습니다.—디모데 첫째 2:4.

가두 증거는 성서의 소식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이르는 또 한 가지 수단입니다. 가두 증거에 매우 활동적인 빅토르 부체르는 한 비정규 전도인에게 함께 봉사하자고 권하였습니다. 그 전도인은 오전 8시 30분까지는 직장에 가야 함으로 그들은 가두 봉사를 오전 5시 30분에 시작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이른 아침 봉사 활동 덕분에, 그 전도인과 그의 가족 아홉 명은 봉사에서 다시 정기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서 연구도 시작하고 잡지를 한 달에 176부나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로 다른 사람들도 격려를 받아 이른 아침 가두 증거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오래된 선교인들—아직도 활동하는 봉사자들

여러 해에 걸쳐 많은 선교인들이 아르헨티나에서 봉사하면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낯선 풍습에 적응하였으며, 건강 문제를 인내하고 금지령 기간의 고난에도 용기 있게 대처하였습니다. 일부 선교인은 임지 변경이나 건강 문제, 가족 책임 때문에 이 나라를 떠나야 하였습니다. 길르앗 제6기 출신의 형제인 그웨니드 휴스는 나중에 결혼하여 두 아들을 키웠습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계속 여호와를 충실하게 섬겼습니다. 다른 사람들, 예를 들면 오펠리아 에스트라다와 로린 아이젠하워는 임지에서 계속 봉사하다가 사망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길르앗 초기 학급 출신의 헌신적인 선교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임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길르앗 제1기생들인 헬렌 니콜스와 헬렌 윌슨은 1948년에 아르헨티나에 임명되었습니다. 1961년 그들은 북서부의 투쿠만 주에 파견되었습니다. 그 당시 산미겔데투쿠만 시에는 작은 회중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 도시 내에 열세 개의 회중에 일곱 개의 왕국회관이 있고, 그 주변 지역에 다섯 개의 회중이 더 있습니다. 이러한 증가에 한몫을 했다는 사실이 이 선교인들에게는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길르앗 제1기생인 찰스 아이젠하워는 쿠바에서 선교 봉사를 시작하였는데, 그곳에서 그는 1943년부터 1948년까지 봉사하면서 전도인 수가 500명에서 5000명으로 증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에 그는 아르헨티나로 임명되어 선교인으로, 나중에는 순회 감독자로 그리고는 지역 감독자로 1953년 4월까지 봉사하였습니다. 그 해에 그는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전도인 수가 900명에서 12만 명 이상으로 증가하는 것을 보는 특권을 누려 왔습니다. 지부 조정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는 아이젠하워 형제는 이렇게 소감을 말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여호와의 봉사에 온전히 바치는 것보다 젊은 남녀에게 더 행복을 가져다 주는 일은 없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기쁨

전 시간 봉사의 직무를 천직으로 택한 아르헨티나의 증인들 역시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사용하고 있어서 행복합니다. 마르셀로 포피엘과 마리아 올리바 포피엘은 각각 1942년과 1946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두 사람 다 44년 동안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해 왔습니다. 포피엘 부부에게는 1976년의 금지령이 새로운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1950년의 금지령 직후에 이미 제한 조치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재개된 금지령이 몰고 온 제한 조치에 새로운 사람들이 대처하도록 도와, 봉사를 충실히 계속하도록 격려하였습니다. 마르셀로는 여호와를 섬겨 온 여러 해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충성스럽게 섬겨 온 것은 기쁜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그분을 섬기는 특권을 주시고 우리가 생애에서 가장 좋은 시절을 참으로 가치 있는 활동을 하면서 보내게 해 주신 여호와께 매우 감사합니다.”

1957년에 침례를 받고 거의 40년간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해 온 피에트로 브란돌리니도 이 말에 동감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전 시간 봉사에 사용해서 행복합니다. 자신이 감히 바랄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축복들을 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항상 자기를 영육 간에 돌보아 오셨다고 열정적으로 말합니다.

피에트로는 이제 70세가 넘어 가끔 건강 문제를 겪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특별 파이오니아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그는 가톨릭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피에트로가 그에게 성서 연구를 제의하자 그 교사는 기꺼이 수락하였습니다. 연구를 네 번 하고 나서 그 사람은 피에트로에게 자신이 진리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였습니다. 피에트로는 그가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한다는 사실을 그 학교에 있는 사제들이 알게 되면 직업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피에트로는 그 교사가 하느님의 말씀의 진리를 그처럼 소중한 것으로 여긴다는 말을 듣게 되어 참으로 기뻤습니다!

훌륭한 일에 열심을 나타내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시대의 긴급성을 깨닫고 “훌륭한 일에 열심”을 나타냈습니다. (디도 2:14) 현재 아르헨티나에는 12만 명이 넘는 전도인이 있으며, 그 가운데 7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조절하여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에르난 토레스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거의 70세인데다 눈멀고 휠체어에 갇혀 있어서, 파이오니아 시간 요구 조건을 달하는 데 남들보다 가외의 노력이 듭니다. 어떤 날에는 일찍 일어나서 그가 사는 지역에 있는 양로원에 가서 자리를 잡습니다. 거기서 그는 사람들에게 성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재방문을 하며, 잡지 통로인 그 거주자들에게 잡지도 전합니다. 날씨가 좋으면 건물 바깥에 앉아서 주변을 거니는 사람들에게 전파합니다. 다른 날에는 한 형제나 자매가 그를 호별 방문 봉사에 동반합니다. 그가 보지 못하므로, 그의 봉사 짝은 그가 말을 거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를 그에게 알려 줍니다. 남자가 문간에 나오면 그의 짝은 그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립니다. 여자가 나오면 두 번 두드립니다. 젊은 사람이면 세 번 두드립니다.

또 다른 정규 파이오니아인 롤란도 레이바는 이발사입니다. 그는 자기 이발소 안에 워치 타워 협회 출판물을 비치해 놓습니다. 최신 호 「파수대」와 「깨어라!」를 항상 눈에 띄게 비치합니다. 손님들은 읽을 거리가 워치 타워 출판물뿐인 데 대해 익숙해져 있습니다. “제가 받는 이발 요금이 매우 싸니까, 손님들은 제 사정을 충분히 이해해 줍니다.” 롤란도의 말입니다. 그는 한 손님을 이발하면서 거울을 통해,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을 살펴봅니다. “누군가가 흥미 있어 하며 잡지를 읽는 것을 보면, 저는 그 사람의 머리를 깎을 때 대화를 시작합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롤란도는 한 봉사 연도 중에 163건의 예약을 맡았습니다! 그는 또한 손님들과 여러 건의 성서 연구도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현재 사회하고 있는 연구 중 여덟 건은 그의 이발소에서 비공식 증거를 통하여 마련된 것입니다.

청소년들도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열세 살 된 형제인 엘베르 에기아는 후후이 주의 산페드로에 있는 센트로 회중에서 지난 2년 동안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한 자매가 가두 봉사를 하다가 만난 남자의 주소를 그에게 넘겨주자, 엘베르는 애써 찾아간 끝에 그가 무술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형제가 그 사범에게 다가가서 방문 목적을 설명하자 그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지식」 책을 한 부 받았습니다. 그 사람은 그 책을 즐겨 읽고는 무술을 가르치는 제자들을 위하여 여러 부를 더 요청하였습니다. 그 결과 엘베르는 50부의 서적과 40부의 팜플렛 그리고 몇 부의 잡지를 전하였습니다. 그는 사범을 비롯하여 25명의 제자와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몇 사람은 잘 발전하고 있습니다.

땅의 가장 먼 곳까지 간 증인들과 그곳에서 나온 증인들

열심 있는 전도인들이 원래 다른 나라들로부터 아르헨티나로 좋은 소식을 가져왔는데, 이번에는 아르헨티나 형제들이 자기 희생의 영을 본받았습니다. 베델 가족은 286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300명의 형제 자매들이 특별 전 시간 봉사의 다른 부면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바쳐 더 크게 필요한 나라들에서 봉사하였습니다. (이사야 6:8) 예를 들어, 1980년대에 통치체는 20명의 아르헨티나 형제가 길르앗 학교는 수료하지 않았지만 파라과이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도록 마련하였습니다. 보다 최근에는 다수의 독신 자매들을 비롯한 봉사자들이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이주하였습니다. 그들은 좋은 소식을 선포하기 위하여 고온 다습한 기후에도 기꺼이 적응하였습니다. 지금도 파라과이에서 봉사하고 있는 73명의 아르헨티나 형제 자매 가운데 많은 수가 더 많은 사람에게 이르기 위하여 원주민 언어인 과라니어를 배우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많은 사람이 볼리비아와 칠레로 가서 파이오니아로 또는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동유럽에서 활동의 문이 열렸을 때, 헝가리어를 하는 한 아르헨티나 형제는 그 일에 응하여 지금은 헝가리에서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한 부부는 아프리카의 베냉에서 전파 활동에 기여하기 위하여 이주하는 문제에 대하여 문의하고 나서, 선교인으로 그곳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 영적 낙원에 거하는 여호와의 모든 백성의 태도를 반영합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왕국의 좋은 소식의 열렬한 선포자들은 자원하여 “순조로운 시기”는 물론 “곤란한 시기”에도 ‘긴급하게 말씀을 전파’해 왔습니다. (디모데 둘째 4:2) 그들의 꾸준한 노력에 힘입어, 아르헨티나에서 현재 1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여호와를 찬양하면서 그분의 풍부한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잠언 10:22.

[186면 그래프와 삽화]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금지령 기간 중 증인 수의 증가

1950년 1960년 1970년 1980년

1,416명 7,204명 18,763명 36,050명

[148면 전면 삽화]

[150면 삽화]

이들은 아르헨티나에서 좋은 소식이 전파되도록 기초를 놓는 데 기여하였다. (1) 조지 영, (2) 후안 무니스, (3) 카를로스 오트, (4) 니콜라스 아르히로스

[152면 삽화]

이 버스를 사용하여, 아르만도 메나치는 다른 열심 있는 증인들과 함께 적어도 10개 주에서 전파하였다

[156면 삽화]

금지령 기간 중인 1953년에 열린 대회 중 한 곳에 있는 노어 형제(오른쪽)

[161면 삽화]

여호와의 증인이 사용한 최초의 오프셋 윤전 인쇄기

[162면 삽화]

1974년 리오세이바요스에서 열린 “하느님의 승리” 국제 대회

[178면 삽화]

어려운 시기에 숲 속에서 열린 대회

[193면 삽화]

파라나 강의 삼각주 지역에 떠 있는 왕국회관

[194면 삽화]

스티븐 리와 준 리 부부는 한국인을 위한 국제적인 순회구에서 일한다

[200면 삽화]

티에라델푸에고의 우수아이아에 있는 최남단 속성 건축 왕국회관의 하나

[202면 삽화]

아르헨티나에 있는 대회 회관들: (1) 모레노, (2) 코르도바, (3) 로마스데사모라, (4) 미시오네스

[204면 삽화]

카뉴엘라스 지역 대회 회관

[208, 209면 삽화]

1990년 국제 대회

[215면 삽화]

아르헨티나 북부에서 심한 홍수로 많은 사람들이 거처를 잃었다

[218면 삽화]

지금도 아르헨티나에서 일하고 있는 초창기의 선교인들: (1) 필리아 스파셜 (2) 이디스 모건 (3) 소피에 소비아크 (4) 헬렌 윌슨 (5) 마리 헬름브레히트 (6) 찰스 아이젠하워

[223면 삽화]

(1) 지부 위원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M. 푸체티, N. 카발리에리, P. 히우스티, T. 카르도스, R. 바스케스, C. 아이젠하워

지부 시설: (2) 사무실, (3) 인쇄 공장, (4) 베델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