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바로 가기

차례 바로 가기

앙골라

앙골라

앙골라

전쟁과 식량 부족, 창궐하는 치사적인 질병, 야수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초래하는 고통과 죽음. 성서는 그런 것들을 상징하는 묵시록의 말탄 자들을 사용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 시대에 있을 것임을 예언하였습니다. (계시 6:3-8) 그로 인해 전세계가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앙골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 나라 전역에 걸쳐, 이 묵시록의 말탄 자들의 거침없는 질주가 미치는 영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의 처지는 어떠하였습니까?

많은 여호와의 증인들은 잔인한 박해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일부 증인들은 끝없이 계속된 무자비한 내전에 참여하지 않고 아무 잘못이 없었는데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많은 증인들이 정치와 경제가 혼란에 빠지는 바람에 초래된 기근으로 인해 끔찍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도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고 그분의 목적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철저히 증거하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서로에게 나타내는 사랑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요한 13:35.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 주는 두 가지 사례를 고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40여 년 전에, 한 경찰 경감은 한 여호와의 증인에게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앙골라에서만큼은 ·⁠·⁠· 워치 타워 조직은 끝장났어, 끝장, 끝장났다고!” 잠시 후에 그 경감은 앙골라 태생의 또 다른 증인에게 위협적인 투로 말하였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알기나 해?” 하고 그 경감이 다그쳐 물었습니다. 그 증인은 침착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무슨 일을 당할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내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나를 죽이는 것이지요. 그보다 더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내 믿음에서 돌아서지 않을 것입니다.” 감옥과 형무소에서 여러 해 동안 잔혹한 학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인인 주앙 만코카는 그러한 결심에 굳게 고착하였습니다.

좀 더 최근에 와서, 우암보 지역 출신의 한 장로가 쓴 편지 가운데는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극심한 식량 부족과 의약품 부족으로 인해 회중들이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과 형제들의 물질적 상태는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쁩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물질적 상황이 심각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영적으로 건강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마태 24장디모데 둘째 3:1-5에 나오는 예언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극심한 시련에 직면해서도 그처럼 긍정적인 태도를 나타낼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자신이나 다른 인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하느님의 왕국을 신뢰할 때 생기는 믿음과 용기가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들은 현재 누가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처럼 보이든 혹은 상황이 얼마나 어렵든 간에, 하느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통치하는 하느님의 아들이 승리할 것이며 그분의 통치 아래 땅이 낙원이 될 것임을 온전히 확신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7:13, 14; 계시 6:1, 2; 19:11-16) 앙골라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경험을 통해서 심지어 지금도 하느님께서 나약한 인간들이 인내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정상적인 것을 초월하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고린도 둘째 4:7-9.

하지만 앙골라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의 역사를 더 자세하게 알아보기에 앞서, 그 나라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재력이 많은 나라

앙골라는 아프리카의 남서부에 자리 잡고 있는 국가로서, 북쪽으로는 콩고 민주 공화국과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나미비아, 동쪽으로는 잠비아, 서쪽으로는 대서양에 접해 있습니다. 면적은 124만 6700제곱 킬로미터로서, 대략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독일을 합친 정도의 면적입니다. 앙골라는 16세기에 앙골라를 식민지화하기 시작한 포르투갈보다 거의 14배나 더 큽니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인구의 50퍼센트가량은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포르투갈어가 여전히 공식 언어이기는 하지만, 앙골라는 다언어 사회입니다. 움분두어, 킴분두어, 키콩고어는 이 나라에서 사용되는 40개 이상의 언어 중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들입니다.

여러 해 동안 앙골라의 풍부한 자원은 다른 나라들로 빠져나갔습니다. 식민 통치 기간 중에는, 수백만 명의 노예가 역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로 보내졌습니다. 앙골라의 비옥한 토양은 한때는 바나나, 망고, 파인애플, 사탕수수, 커피 등을 풍성하게 산출하였습니다. 식민 통치의 굴레에서 벗어난 후에는, 내전에 발목을 잡혀 경제 발전이 저해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골라는 여전히 연안에 석유 자원이 풍부하며 다이아몬드와 철광이 다량 매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앙골라가 가진 최대의 자원은 겸손하고 결단력 있는 사람들이며, 그들 중 수만 명이 하느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왕국 통치 아래 있을 밝은 미래에 관한 약속에 깊은 사랑을 나타내 왔습니다.

“네 빵을 물 위에 내놓아라”

앙골라에서 보고된 여호와의 증인의 최초의 활동은 그레이 스미스와 그의 아내 올가의 활동이었습니다. 그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출신의 파이오니아 부부였습니다. 1938년 7월에 그 부부는 녹음된 성서 연설을 틀 수 있는 시설을 갖춘 차를 타고 요하네스버그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그 차에는 워치 타워 출판물이 가득 실려 있었습니다. 3개월간 여행하면서, 스미스 부부는 「파수대」 예약을 받고 8158권의 성서와 서적 그리고 소책자를 전하였습니다. 그 부부는 벵겔라, 루안다, 사다반데이라(지금의 루반구) 그리고 앙골라 서부의 다른 도시들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광대한 지역에서 성서 출판물을 널리 배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기 때문에, 관심을 나타낸 사람들과 연락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한동안, 그 부부의 전파 활동에는 눈에 띄는 성과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 11:1의 이러한 원칙이 참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네 빵을 물 위에 내놓아라. 여러 날이 흐르면 네가 그것을 다시 찾을 것이다.”

진리의 씨앗 중에는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싹이 튼 것도 있습니다. 우일라 주에서 들어온 한 보고가 그 점을 알려 줍니다. 스미스 부부가 전파 여행을 한 지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안드라디라는 한 남자는 자신이 마흔한 살일 당시 사다반데이라에 살고 있을 때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차를 몰고 지나가던 누군가로부터 워치 타워 출판물을 받은 일을 떠올리곤 하였습니다. 그때 그 남자는 「부」(Riches)라는 출판물을 받고 「파수대」를 예약하였습니다. 그는 브라질 지부로 편지를 하였고 브라질 지부는 그가 서신으로 하는 가정 성서 연구를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는 마련을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안드라디가 자신의 우편물이 검열을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성서 연구가 중단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증인들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1967년에, 막 침례를 받은 줄레이카 파렐레이루가 사다반데이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는 진리에 대한 지식이 비교적 많지 않았으며, 당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그 나라에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한 여자와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는데, 그 여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구두 만드는 사람이 그 자매와 같은 종교를 믿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파렐레이루 자매가 수선할 신발을 가지고 그 구두 만드는 사람에게 가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을 보여 주자, 그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이 자매는 그 남자와 성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바로 안드라디였습니다. 그는 당시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아내가 살해당하는 광경을 목격하는 바람에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왕국 희망은 그에게 호소력이 있었으며, 그는 그 희망을 굳게 잡았습니다. 그는 1971년에 여호와의 증인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1981년에 80세의 나이에 사망할 때까지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신체 장애와 노령에도 불구하고 모든 회중 집회에 정기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석하는 그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앙골라인들을 교육하고 격려하려는 노력

약 60년 전에, 앙골라 북부의 침례교 교단에 속한 시망 토쿠라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앙골라의 음반자콩고에서 벨기에령 콩고의 레오폴드빌(지금은 콩고 민주 공화국의 킨샤사)로 이사 가던 중에, 토쿠는 한 친구의 집에 들렀습니다. 그 집에서 토쿠는 「루스 에 베르다데」(현재는 「데스페르타이!」)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잡지에는 「천국, 세계의 희망」 소책자의 포르투갈어 번역본이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토쿠는 그 번역본에 관심이 있었지만, 그의 친구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토쿠에게 그 잡지를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 역시 몇 달 전에 스미스 부부가 전한,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한 성서 출판물을 갖게 되었습니다!

1943년에 레오폴드빌에 도착한 후, 토쿠는 성가대를 조직했는데 그 성가대는 시간이 흐르면서 규모가 커져서 단원의 수가 수백 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토쿠는 동료 앙골라 이주민들을 교육하고 격려하려는 열의가 있었기 때문에, 「천국, 세계의 희망」을 키콩고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점진적으로, 그는 자신이 작곡하는 찬송가에 자신이 배운 왕국 희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성서 진리를 포함시켰습니다. 그는 또한 그러한 지식을 사용하여 일부 성가대 단원들과 성서 토의를 하였습니다. 레오폴드빌에서 일하던 또 다른 앙골라인인 주앙 만코카가 1946년에 토쿠의 성서 연구 집단과 연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 밤에 집회가 열렸으며, 만코카는 50명 정도 되던 참석자들 중에 항상 끼어 있었습니다.

1949년에 그 집단의 성원들은 자신들이 배우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강한 열망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레오폴드빌에서 전파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파는 침례교회 교직자와 벨기에 당국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토쿠가 이끄는 종교 집단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주앙 만코카도 체포된 사람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달 동안 투옥되어 있었습니다. 그 후 토쿠와 관련하여 발전되고 있던 그 단체를 떠나기를 거부하고 워치 타워 협회에서 발행한 출판물을 읽는 것을 중단하지 않기로 한 사람들은 그들의 고국인 앙골라로 추방되었습니다. 결국 1000명 정도가 추방되었습니다.

앙골라의 포르투갈 당국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앙골라로 되돌려 보내진 사람들은 앙골라 전역으로 분산되었습니다.

그때를 즈음하여 1950년에, 성서 진리가 앙골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우암보에도 소개되었습니다. 우암보는 당시에는 뉴리스본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발전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주앙 다 실바 비마, 레오나르두 손잠바, 아구스티뉴 침빌리, 마리아 에토시 및 프란시스쿠 포르투갈 엘리세우 등이 이곳에서 여호와의 충성스런 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가족도 여호와와 그분의 의로운 표준에 대해 배우도록 도왔습니다.

토쿠와 일부 다른 사람들은 북부에 있는 한 커피 농장에서 일하도록 이송되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토쿠의 견해는 이미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토쿠와 그의 집단이 여전히 레오폴드빌에 있을 당시부터, 영매술을 행하는 시망 킴방구의 추종자들이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집회 중에 한번은, 그들이 일부 사람들이 영의 부어짐이라고 생각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시험하여 그 영이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인지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요한 첫째 4:1) 주앙 만코카는, 성서 연구를 제쳐 놓고 ‘영’에 의지하는 쪽을 선호하는 것을 보고 좋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앙골라로 돌아온 후, 주앙 만코카는 결국 루안다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만코카는 살라 필레문과 카를루스 아구스티뉴 카디와 함께 그 종교 집단에 속한 다른 사람들에게 성서에 고착하고 성서와 조화되지 않는 관행을 배척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나중에, 토쿠가 남부 지방에 있는 한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을 때, 그는 루안다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토쿠는 킴방구의 추종자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으로부터 훨씬 더 큰 영향을 받고 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1952년에, 그 종교 집단과 연합하고 있던 한 사람의 배신으로 인해, 주앙 만코카와 카를루스 아구스티뉴 카디와 살라 필레문은 체포되어 어선용 선착장이 있는 유형지인 바이아두스티그레스로 추방되었습니다. 배신자는 두 명의 아내를 두고 있는 위협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스스로 루안다의 그 종교 집단의 지도자가 되려고 하자 일부 사람들은 거의 거기에 넘어갈 뻔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부정직한 방법을 사용한 것이 탄로나 당국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며, 그 역시 유형지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세 가지 임무를 띤 손님

1954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는 바이아두스티그레스에 있는 종교 집단으로부터 몇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성서 출판물을 받기를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1955년에 워치 타워 선교인인 존 쿠크가 프랑스에서 앙골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세 가지 임무가 있었습니다. 우선 앙골라에 1000명의 증인이 있다는 보고의 진위 여부를 조사하고, 가능하다면 그들을 돕고, 앙골라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합법화하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아야 하였습니다. 그가 5개월에 걸쳐 여러 집단과 모임을 가지면서 조사해 본 결과, 증인의 수가 1000명에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1955년 앙골라의 야외 봉사 보고가 알려 주는 것처럼, 그 나라 전역에 있는 좋은 소식의 전파자는 30명에 불과하였습니다.

포르투갈 당국이 존 쿠크가 앙골라 남부 바이아두스티그레스에 있는 주앙 만코카와 그 작은 종교 집단을 방문하는 것을 허락하기까지는 몇 주가 걸렸습니다. 쿠크 형제는 그곳에 5일간 머물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았으며, 성서에 대한 그의 설명은 그가 여호와 하느님을 진정으로 섬기고 있는 조직을 대표하고 있음을 만코카와 그 밖의 사람들에게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쿠크 형제는 방문 마지막 날에 유형지의 최고 행정관을 포함하여 약 80명이 모인 가운데 “이 천국의 기쁜 소식”이라는 주제로 공개 강연을 하였습니다.

쿠크 형제는 앙골라에 머무르는 몇 달 동안, 토쿠를 만나 볼 수 있었으며 또한 그를 지도자로 추앙하던 여러 곳에 있는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 중 다수는 단순히 토쿠파를 따르는 추종자들이었으며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외적인 경우로서 루안다에 있던 젊은 남자 안토니우 비지가 있었는데, 그는 여호와의 목적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를 갈망하였습니다. 토쿠 자신은 당시 사다반데이라 근처의 한 마을에 연금되어 있었으며 우편물을 보내거나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쿠크 형제의 방문은 바이아두스티그레스에 있는 충실한 사람들의 작은 집단에게 큰 격려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만코카 형제는 그 방문이 자신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지 않음”을 확인시켜 주었다고 회상합니다. 또한 보고된 것보다 증인의 수가 적긴 하였지만,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쿠크 형제는 보고서에서 자신이 만난 일부 사람들은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있”으며 “아주 좋은 밭이 이곳에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격려가 뒤따르다

쿠크 형제가 방문한 이듬해에, 협회는 또 다른 유능한 형제인 길르앗 학교 졸업생 머빈 패슬로를 그의 아내 오로라와 함께 루안다로 파견하였습니다. 그 부부는 존 쿠크 형제가 작성한 65명의 예약자와 그 밖의 관심자의 명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패슬로 부부는 예약자들과 접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잡지가 집주소가 아니라 우체국 사서함으로 배달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무렵에 베르타 테이셰이라라는 여자가 포르투갈에서 루안다로 돌아왔습니다. 베르타 테이셰이라는 포르투갈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만났으며 성서 진리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나타냈었습니다. 리스본의 지부 사무실은 그가 루안다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패슬로 부부에게 통지하였으며, 그 부부는 그와 신속하게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테이셰이라의 친족 중에는 우체국에 근무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예약자의 주소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예약자들 중 다수는 열심 있는 성서 연구생이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친구들과 이웃에게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패슬로 부부는 50명 이상의 사람들과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패슬로 부부는 그곳에 도착한 지 두어 달이 지난 후에, 자신들의 방에서 「파수대」를 사용하여 정기적인 성서 연구 집회를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집회를 열기 시작한 첫 달이 끝나 갈 즈음에는, 방이 너무 좁아졌습니다. 베르타 테이셰이라는 어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강의실 중 하나를 집회 장소로 사용하도록 제공하였습니다. 8개월 후에 앙골라에서는 최초로 여호와의 증인이 침례를 베푸는 일이 루안다 만에서 있었습니다.

당시 앙골라의 상황 때문에, 패슬로 부부와 아프리카 형제들이 접촉하는 일은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 중 일부는 패슬로 부부를 방문하였습니다. 연구를 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그들을 방문하던 사람으로 안토니우 비지가 있었는데, 그는 존 쿠크가 찾아낸 진지한 연구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감금되어 있던 주앙 만코카도 그 부부에게 격려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첫 번째 침례가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정부는 패슬로 부부의 비자 갱신을 거부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은 앙골라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 부부는 “씨”를 심고 다른 사람들이 뿌린 씨에 물을 주는 훌륭한 일을 하였습니다. (고린도 첫째 3:6) 또한 그 부부와 앙골라 형제들 사이에는 깊은 애정의 띠가 형성되었습니다. 경찰이 적대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에, 패슬로 부부는 현지의 형제들, 특히 아프리카 형제들에게 자기들을 배웅하러 나오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띠는 너무나 강하였습니다. 패슬로 부부가 배를 타기 위해 배로 들어가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와서 애정을 표현하였습니다.

지구 감독자인 해리 아넛은 패슬로 부부가 루안다에 있던 1958년에 그 부부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1959년 2월에 해리 아넛이 다시 지구 감독자로서 앙골라를 방문하려고 했을 때에는, 만코카 형제와 테이셰이라 자매를 포함한 소수의 사람들이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습니다. 그러나 거의 즉시, 경찰이 개입하였습니다. 경찰은 아넛 형제를 그 사람들로부터 떼어 놓은 다음 그의 소지품을 수색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넛 형제는 만코카 형제와 같은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경찰관은 이 상황이 왜 그토록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경찰관은 노발대발하며 만코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알기나 해?” 그때까지 6년을 감옥에서 보냈으며 여러 차례 구타를 당한 적이 있는 만코카 형제는 침착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슬피 울지 않습니다. 나는 무슨 일을 당할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한 무슨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만코카는 결의에 찬 태도로 이렇게 단언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 믿음에서 돌아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는 아넛 형제 쪽을 바라보면서 격려의 미소를 보냈습니다. 아넛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곤경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으며 그 상황에서 내가 낙담하지 않게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 아프리카 형제가 수년간의 투옥 생활을 하고 나서도 그처럼 확고하고 용기 있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을 보는 순간 참으로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아넛 형제는 자신이 타고 온 바로 그 비행기를 타고 그 나라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넛 형제는 떠나기 전에 만코카 형제와 짧으나마 세워 주는 만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일곱 시간에 걸친 심문을 받은 후, 만코카 형제 역시 풀려났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1주일 후, 만코카 형제는 친구인 카를루스 카디와 살라 필레문과 함께 마침내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때를 즈음하여, 루안다 근교인 삼비장가에 방을 하나 세냈으며, 바로 그곳에서 앙골라 최초로 공식적인 여호와의 증인 회중이 집회를 열었습니다. 당시에는 노래로 집회를 시작하고 마칠 수 있었으며, 이 노랫소리는 인근에 사는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파수대」 연구 집회 중에 청중이 실제로 참여할 수 있으며 집회 후에 질문을 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사실로 인해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교국의 교회에는 없는 이러한 의견 교환은 그곳의 활동에 큰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뱀과 같이 조심스럽고”

1960년에는 앙골라에서의 좋은 소식의 전파 활동에 대한 감독권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에서 포르투갈 지부로 이전되었습니다. 이 두 나라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유대가 강화된 것은 앙골라와 오랫동안 앙골라를 식민지로 통치했던 포르투갈 간의 정치 관계가 악화된 것과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인접 국가인 벨기에령 콩고의 독립과 그 후 그곳에서 발생한 내전은 앙골라의 정치적 분위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식민 정부는 감시를 강화하였지만, 앙골라에서 독립을 위한 게릴라전이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1961년 1월에, 앙골라의 중부 지방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2월에는 루안다에서 쿠데타가 시도되었습니다. 그리고 3월에는 가난에 찌든 북부의 콩고 지역에서 임금에 대한 쟁의가 있은 후, 앙골라인들이 수백 명의 포르투갈 이주민들을 죽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광범위한 보복이 있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공산당인 앙골라 민중 해방 운동(Movimento Popular de Libertac̩ão de Angola, MPLA), 앙골라 민족 해방 전선(Frente Nacional de Libertac̩ão de Angola, FNLA), 앙골라 완전 독립 민족 연합(União Nacional para a Independência Total de Angola, UNITA) 등 3개의 주요 식민 통치 반대 운동 단체가 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전은 여호와의 증인의 작은 집단에 직접적인 문제를 야기하였습니다. 언론은 증인들을 “적그리스도적 분파이며 사회에 해가 되는” 사람들로 낙인찍었습니다. 기자들은 「깨어라!」 기사를 잘못 인용하여 증인들의 목적이 “최근 북부 지방에서 발생하고 있는 테러 행위를 조장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런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잘못된 주장을 하였습니다. 「깨어라!」지의 사진 아래에는 “종교 선전이 원주민들의 정신에 해를 끼치다”라는 설명 어구가 있었습니다.

같은 기간 중에,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은 끊임없는 감시를 받았습니다. 도착하는 모든 우편물이 엄격하게 감시당하였기 때문에 포르투갈 지부와의 연락이 제한되었으며, 워치 타워 출판물을 받기가 몹시 어려웠습니다. 우편을 통해서 어떤 출판물이라도 받은 사람들은 경찰의 심문을 받았습니다.

식민 정부는 같은 가족 성원이 아닌 사람이 둘 이상 모이는 모든 모임을 의심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조심하면서 집회 장소를 바꾸었으며 작은 집단으로 모였습니다. 하지만 1961년에 열린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는 13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기념식이 끝난 후 만코카 형제와 필레문 형제는 참석자들을 방문하여 그들이 집에 안전하게 도착하였는지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들이 나타낸 사랑 어린 염려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가혹한 시험의 시기

실베스트레 시망의 경험은 당시 새로운 성서 연구생들이 어떤 어려움에 직면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줍니다. 1959년에 당시 학생이던 실베스트레 시망은 급우로부터 「지옥불—성서의 진리인가, 이교의 공포 교리인가?」라는 전도지를 받았습니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전도지를 읽은 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으로 가르침받아 왔던 지옥에 관한 진리를 배운 즉시, 나는 교회에 나가기를 중단하였으며 협회 출판물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긴장감이 감돌던 그 당시에, 증인들은 관심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도 바로 집회에 초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년쯤 지나자 증인들은 실베스트레를 초대해도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참석한 집회가 끝난 후, 그는 안식일에 대해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는 대답을 듣고는 자신이 진리를 찾았음을 확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진리의 가치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였습니까? 다음 주인 1961년 6월 25일에 두 번째로 집회에 참석하였을 때, 배운 것에 대한 그의 인식이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순찰을 돌던 군인들이 집회를 중단시킨 것입니다. 모든 남자들은 밖으로 나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아연으로 도금한 쇠파이프로 구타당하였습니다. 구타당한 형제들 중 한 명은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치 이성이 없는 짐승을 죽일 때처럼 구타를 당하였습니다. 정말이지, 사람들이 돼지를 시장에 내다 팔기 전에 죽이기 위해 몽둥이로 때리듯이 매를 맞았습니다.” 실베스트레 시망을 비롯하여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몸에는 아직도 구타당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 다음 형제들은 일렬 종대로 행군하여 한 축구 경기장으로 갔는데, 거기서 형제들은 앙골라 북부에서 일어난 내전에서 아주 최근에 가족을 잃은 성난 유럽인들로 이루어진 군중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군인들과 일부 유럽인들을 포함한 군중들이 또다시 형제들을 잔인무도하게 구타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실베스트레를 비롯한 여러 형제들은 트럭에 실려 상파울루 감옥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 감옥은 악명 높은 비밀경찰이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다시 한 번 잔인하게 구타를 당하였으며 감방 하나에 짐을 쌓아 올리듯 던져졌습니다. 심하게 부상을 입고 많은 피를 흘린 그들은 죽도록 내버려졌습니다.

당국자들은 주앙 만코카를 집단의 지도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만코카가 「파수대」 연구 사회자였기 때문입니다. 그 끔찍한 구타 후에, 당국자들은 「파수대」지의 한 항을 자신들의 방식대로 잘못 해석하여, 만코카가 백인들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혐의로 처형하기 위해 그를 끌고 갔습니다. 만코카 형제는 동일한 잡지를 브라질이나 포르투갈에 있는 유럽인의 손이나 가정에서 발견하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지 물었습니다. 만코카는 「파수대」는 누구나 보는 잡지이며 모든 국적의 사람들이 연구하는 것임을 지적하였습니다. 그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당국자들은 그를 차에 태우고 여호와의 증인인 한 포르투갈인 가족의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당국자들이 그곳에서 동일한 잡지를 보게 되고 그 가족도 동일한 내용을 연구하였음을 알게 되자, 그들은 처형하려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만코카 형제는 상파울루 감옥에 있는 다른 형제들에게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만족스러워한 것은 아닙니다. 당국자들이 상파울루의 감옥으로 돌아왔을 때, 호리호리한 체격의 포르투갈인 교도소장은 만코카 형제를 “자신의 보살핌 아래” 두었습니다. 이 “보살핌”에는 음식도 주지 않고 오후 내내 뜨거운 태양 아래 있게 하는 것이 포함되었습니다. 그 다음 5시에 교도소장은 채찍을 가져다가 만코카 형제에게 휘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만코카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 사람처럼 채찍을 휘두르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쓰러져 죽을 때까지 채찍질을 멈추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한 시간 동안이나 계속 무자비하게 구타하였지만, 만코카 형제는 결국 아무 고통도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매를 맞는 도중에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던 것입니다. 기진맥진한 교도소장은 만코카가 죽어 가고 있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한 군인이 만코카를 질질 끌고 가 상자로 덮어 두었습니다. 민병대가 그가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밤에 왔을 때, 그 군인은 만코카를 덮어 둔 상자를 보여 주면서 그가 이미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회복되었으며, 그 군인은 3개월 후에 살아 있는 만코카를 식당에서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다음 그 군인은 만코카 형제에게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갑자기 졸음이 쏟아진 덕분에 만코카 형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만코카 형제는 다른 형제들과 다시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으며, 형제들은 감옥 안에서 집회를 보았습니다. 상파울루 감옥에 5개월간 감금되어 있는 동안 세 번 열린 공개 강연에 약 30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감옥에서 이루어진 증거는 외부의 회중들을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관심을 보인 많은 수감자들이 석방된 후 발전하여 침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감옥에서 보낸 몇 달 동안, 실베스트레 시망은 그곳 형제들의 체계적인 성서 연구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필요한 영적 힘을 얻었습니다. 그 집단의 성원들은 그 감옥으로부터 다른 감옥들과 노동 수용소들로 이송되었으며, 이송된 곳에서 더 잔혹한 구타를 당하고 더 힘든 노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베스트레 시망은 여러 곳에서 4년간 투옥되어 있다가 1965년 11월에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루안다로 돌아갔으며, 그곳에서 랑겔 지역에서 모임을 갖던 증인 집단과 연합하였습니다. 이미 믿음의 시험을 받은 그는 1967년에 마침내 침례를 받았습니다. 만코카 형제를 포함하여 그 감옥에 있는 다른 형제들은 1970년이 되어서야 풀려났지만 다시 수감되고 말았습니다.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도 않을 것이다”

앙골라는 내전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길을 배우게 되면 그들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가지치는 낫을 만들 것”이며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2:3, 4) 앙골라에 있는 젊은이들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1969년 3월에 정부는 그리스도인 중립을 타협하기를 거부한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잔인한 행동을 개시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체포된 사람들 중에는 루안다에 살던 안토니우 고베이아와 주앙 페레이라가 있었습니다. 고베이아 형제는 직장에서 체포되어 지저분한 감방에 갇혔습니다. 그가 투옥된 지 45일이 지나서야 그의 어머니가 그를 방문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페르난두 고베이아와 안토니우 알베르투와 안토니우 마티아스도 우암보에서 체포된 사람들 중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세 번씩 끔찍한 구타를 당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페르난두의 어머니조차 심한 구타로 인해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형제들은 군 사령관에게 편지를 써서 학대를 폭로하였으며, 그러자 잔혹 행위가 줄어들었습니다.

안토니우 고베이아는 그들이 인내하는 데 도움이 된 것 몇 가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고베이아의 어머니는 자신이 가져온 음식 속에 「파수대」 한 페이지를 숨겼습니다. “그 한 페이지의 「파수대」는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파수대」는 또한 우리의 영성을 강하게 유지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머리에 떠오르는 성서 주제로 벽에 대고 전파하곤 하였습니다.” 사기를 북돋기 위해서, 일부 형제들은 약간의 유머를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무슨 중요한 행사를 알리기라도 하듯이 큰 목소리로, 그들이 감방에서 얼마나 많은 파리를 잡았는지를 광고하곤 하였습니다.

앙골라에서 투옥된 사람들 중에는 포르투갈 출신의 젊은 남자 여섯 명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군 복무를 하도록 보내졌으나 양심적으로 그렇게 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인 다비드 모타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보호를 여러 번 느꼈습니다. 관리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충절을 꺾으려고 하였으며, 우리들 중 아직 침례를 받지 않은 일부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였습니다. 관리들이 반복적으로 사용한 한 가지 수법은 한밤중에 우리를 깨운 다음 우리 중 다섯 명을 뽑고 또 그 중 한 명을 골라서 장전된 것으로 보이는 권총을 머리에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었습니다. 돌아가 취침하라는 명령이 있은 지 30분 후에, 똑같은 수법이 반복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살아 있는 데 대해 여호와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결국 당국으로부터 존중을 받게 되었으며 감옥에서 집회를 볼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6명의 동료 수감자가 감옥에서 침례받는 것을 볼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형제들은 45세가 될 때까지는 감옥에 있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렇게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투옥되어 있는 동안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경험을 하면서 믿음이 단련되었습니다. 오늘날, 그 형제들 대부분은 회중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식민 통치가 갑자기 끝나다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앙골라에서 13년간 벌어진 식민 정부와의 전쟁이 종지부를 찍었으며, 포르투갈군은 철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0개월 동안 운영될 예정으로 1975년 1월 31일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임시 정부는 단지 6개월간만 존속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이러한 갑작스런 변화가 여호와의 증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습니다. 중립 때문에 카부 레두 감옥에 투옥되어 있던 25명의 여호와의 증인은 5월에 사면되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아프리카 식민지를 상대로 한 전쟁을 포함하여, 모든 전쟁에서 어느 편도 들기를 거부하였던 포르투갈 출신의 여섯 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유럽인 형제들은 이 예기치 못한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기로 하였습니까? 다비드 모타는 이렇게 말합니다. “감옥에서 여호와와의 친밀한 관계로 강화된 우리 여섯 명은 모두 앙골라에 남아서 즉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종교에 대해 관용을 나타내는 분위기는 앙골라에 있던 1500명의 증인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비밀경찰도 없었고, 체포도 중단되었으며, 증인들은 자유롭게 집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증인들은 루안다를 샅샅이 뒤져 늘어나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 오락 시설 및 기타 장소들을 찾아냈습니다. 그때까지, 이 나라에 있던 18개의 회중은 모두 가정집에서 집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파빌량두페로비아에서 특별 봉사의 집회를 열기 위한 마련이 있었습니다. 여러 회중에서 초대된 400명의 형제 가운데에는 지금은 포르투갈 베델 성원인 주제 아우구스투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자유로운 분위기 가운데서 그토록 많은 형제 자매들을 보았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자유롭게 어울리고 다른 회중과 교제를 즐김에 따라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혼란스런 시기의 영적 즐거움

앙골라 민중 해방 운동, 앙골라 민족 해방 전선, 앙골라 완전 독립 민족 연합 등 3대 경쟁 정당 간에 권력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파벌의 무장 단체들이 루안다에 침입하여 본부를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저격병들만 발포하였지요”라고 목격자인 루이스 사비누는 말합니다. “그러다가 증오심이 커지면서 보다 강력한 무기들이 사용되었습니다. 거리에 탱크가 등장하였으며 로켓포가 발포되었습니다. 형제들의 집을 포함해서 수백 채의 주택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회중 집회를 계속해서 서적 연구 장소에서 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었습니다. 마누엘 쿠냐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가까운 거리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기관총 소리 때문에 집회가 중단되는 일이 흔하였습니다. 총성이 멎을 때까지 모두가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다가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하곤 하였습니다. 때로는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서 전등을 껐습니다. 집회가 끝나면, 형제들은 조심해서 자리를 떠났습니다.”

위험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봉사의 직무를 확장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델루시리우 올리베이라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식민 정부 하에서는 우리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호별 방문을 하는 것은 전도인 대부분에게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이 앞장섰으며 다른 사람들도 뒤를 따르도록 격려했습니다. 야외 봉사를 위한 모임은 지지율이 매우 높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주위에서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올리베이라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야외 봉사 중에 총성을 듣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때로는 보도에 있는 흥건한 피를 피해 가기 위해서 보도에서 내려서야 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거리에서 시체와 마주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두 자매(그 중 한 명은 파이오니아)가 야외 봉사를 하고 있는데 근처에서 폭탄이 터졌습니다. 그 중 한 자매가 벽에 가능한 한 바짝 붙어 웅크리고는 집에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파이오니아 자매는 조금만 더 하자고 그 자매를 격려하면서, 폭탄이 또 터지면 그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날 오전 중에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 그 자매들은 한 부부와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그 부부는 일주일에 세 번씩 연구를 하자고 요청하였습니다.

불안한 상황도 형제들이 1975년 3월에 한 공공 강당에서 최초의 순회 대회를 여는 것을 가로막지는 못했습니다. 대회를 위해서 지붕이 있는 루안다 최대의 건축물인 시타델라 데스포르티바를 임대하였습니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던 사람들만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참석수는 2888명이나 되었습니다.

모든 일이 잘 진행되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두 번째 대회에 관심자들과 성서 연구생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아니발 마갈량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회장에 들어서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연단 위에 큼지막한 글씨로 쓰여 있는 대회 주제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베드로 둘째 3:11’이었습니다.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에, 대회장은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참석 수가 7713명이라는 발표가 있자, 우리는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쁨의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던 장면은 분명 앞으로 대규모의 모아 들이는 일이 있을 것임을 알리고 있었으며, 우리는 여호와께서 이런 날이 오기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해 주신 데 대해서 그분에게 감사하였습니다.”

마치는 기도가 있은 후, 형제들이 대회장을 청소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그 지역 전역에서 총격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한 경험은 형제들이 ‘평화를 미워하는 자들과 더불어 장막을 치고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하는 또 하나의 증거였습니다.—시 120:6.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지다

이 나라는 경쟁 관계에 있는 3개의 정치 파벌로 분열되고 있었으며 루안다는 투쟁의 중심 지역이 되었습니다. 남자와 여자, 심지어 어린이까지 강제로 징집하여 민병대들이 조직되었습니다. 군복을 입은 12세밖에 되지 않은 남자 아이들이 거리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자동 소총을 가지고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댔습니다. 기관총의 총성, 수류탄의 폭발, 로켓포 그리고 미사일 때문에 사람들이 여러 날 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앙골라는 끊임없는 전쟁의 나락으로 추락하였습니다. 그 결과 앙골라 어린이들의 한 세대 전체가 멀리서 총성과 폭탄 폭발음이 들려오는 폭력적인 분위기에서 잉태되고 태어나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을 강화하기 위해서, 충실한 영적 목자들은 출퇴근 길에 정기적으로 그들의 집을 잠깐씩 방문하였습니다. 목자들은 모두가 아무 일 없이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곤 하였으며 종종 그들 가족과 함께 한두 성구를 낭독하였습니다.

집회에 참석하고 봉사를 하려면 용기와 여호와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으로 식별되는 것은 종종 최선의 보호책이 되었습니다. 파우스티누 다 로샤 핀투가 협회 사무실로 가던 길에 한 군인이 갑자기 그에게 소총을 겨누며 이렇게 날카롭게 말했습니다. “어디 가는 길이지? 어느 정당 소속이지? 가방을 내놔 봐!” 가방을 열었을 때, 군인은 성서 한 권과 얼마의 워치 타워 출판물밖에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순간, 그의 태도가 누그러졌습니다. “아니, 여호와의 증인이군요! 미안합니다. 실례했습니다. 그냥 가세요.”

또 다른 경우로, 어떤 군인이 한 젊은 자매에게 다그치듯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느 정당 소속이오?” 그 자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어느 정당과도 관련이 없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그 말을 하자, 그 군인은 자기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가씨를 좀 봐! 이 아가씨를 잘 보라고! 이 아가씨가 입은 치마를 좀 봐! 옷차림이 얼마나 정숙해. 다른 여자들과는 달라. 여호와의 증인이거든.” 그 자매는 조심하라는 친절한 경고의 말 한마디와 함께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전쟁이 격렬해지면서 회중, 특히 지방에 있는 회중과의 연락이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군부대가 마을에 들이닥쳐서 집들을 약탈한 다음 남은 것을 태워 버리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수의 증인들을 포함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숲으로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00명의 전도인이 있고 집회 참석 수가 300명 정도 되던 방가에서는, 그들 모두가 한 번에 며칠씩 집을 버리고 숲으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잠바와 셀라에 있던 회중들 역시 ‘영혼’만을 ‘전리품처럼’ 갖고 피신하였습니다. (예레미야 39:18) 루방고에 남아 있던 유럽인 증인들 대다수는 이웃 나라 나미비아의 빈트후크로 피신하였습니다.

숲 속에 숨어 있던 형제들에게 출판물을 갖다 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습니다. 말란제, 로비토, 벵겔라, 가벨라, 우암보, 그리고 루방고에 있던 회중 등 일부 회중들과의 연락이 한 번에 여러 달씩 두절되었습니다.

슬픔의 시기

식민 통치의 굴레가 벗겨지자마자, 수천 명의 포르투갈인들은 이 나라를 떠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정부 상태가 확산되자, 도피하는 일이 더욱 긴급해졌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지품을 거의 가지고 갈 수 없었습니다. 유럽인들에 대한 증오가 어느 정도로 강했는지를 알려 주는 한 가지 예로서, 한 정당은 조상들이 백인들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혼혈아들까지도 죽이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물론, 우리의 포르투갈인 형제들과 앙골라인 형제들은 그러한 적개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형제 사랑의 강한 유대가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인들이 떠나는 것은 많은 가까운 친구들과의 이별을 의미하였습니다. 1975년 6월까지는 활동을 인도하는 일을 하던 모든 포르투갈인 형제들이 떠나야 하였습니다. 전파 활동을 감독하고 하느님의 양 떼를 칠 책임이 충실한 현지 형제들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책임을 맡은 형제들의 대다수는 가장이었으며 전 시간 세속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인 형제들이 떠나서 슬퍼하긴 하였지만, 그 형제들은 여호와의 도움으로 계속 일을 수행해 나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형제들이 직면한 상황은 어떠하였습니까? 포르투갈 지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루안다 사무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걱정스러운 소식을 받았습니다. “이제 도시는 폭격을 받고 있습니다. 도로는 차단되었습니다. 다른 도시와의 통신은 두절되었습니다. 루안다 항은 폐쇄되었습니다. 상점들에서는 식품이 동나 가고 있습니다. 약탈과 강탈이 시작되었습니다. 오후 9시부터는 통행금지가 실시됩니다. 그 시간 이후에 거리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총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들의 전진

이 정치적 혼란기는 전례 없는 영적 성장의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최고 전도인 수는 전년도보다 68퍼센트 증가한 3055명이었습니다. 기념식 참석자 수는 1만 1490명이었습니다!

1975년 9월 5일, 오랫동안 고대하던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임시 정부의 법무부 장관이 여호와의 증인을 법적으로 인가된 “종교 단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주앙 만코카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형제들은 참으로 기뻐하고 행복해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그동안 공개적으로 숭배를 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가 뭔지 전혀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이 일은 마치 감옥 문이 활짝 열린 것과 같았습니다. 처음으로, 일반 대중이 다 아는 가운데서 집회와 순회 대회를 열 수 있었습니다. 1976년 봄에 개최되도록 조직된 순회 대회들은 활동에 큰 자극제가 되었으며 다가올 수년 동안 필요하게 될 결의를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다섯 개의 순회 대회가 계획되었지만, 한 번에 단지 서너 회중만 모이도록 하는 조심성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주말에 순회 감독자로 회중들을 방문하도록 세 명의 형제가 임명되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앙골라의 상황 때문에 감독자들은 협회가 마련하는 특별 강습 중 그 어느 것에도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장로들을 위한 최초의 천국 전도 강습을 1976년 5월 19-24일에 개최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두 명의 앙골라 형제가 포르투갈에서 열린 강습에 참석하여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돌아온 후 루안다에서 강습을 사회하였으며, 마리우 P. 올리베이라가 지원을 위해 포르투갈 지부에서 왔습니다.

23명의 장로는 그들이 “하느님의 양 떼를 치”도록 돕기 위해서 마련된 성서에 근거한 교훈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였습니다. (베드로 첫째 5:2) 당시 순회 감독자로 섬기고 있었던 카를루스 카디는 그 강습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장로들은 새로운 관점에서 여호와의 조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강습을 통해 형제들은 교육을 중시하는 여호와의 조직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회중 형제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성서 원칙을 적용하도록 돕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 강습은 또한 장로들이 회중 활동을 더 잘 조직하고 장로들과 함께 섬기는 봉사의 종들의 능력을 보다 온전히 사용하는 방법을 이해하도록 도왔습니다.”

법적 인가는 또한 성서와 성서 출판물을 수입할 수 있음을 의미하였습니다. 5개월 내에, 일부 회중들은 최초의 잡지를 받았습니다. 마침내 32면으로 된 온전한 「파수대」와 「깨어라!」지를 받게 된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었습니다! 형제들은 그들에게 ‘열린’ ‘활동으로 인도하는 큰 문’을 통해 신속하게 움직였습니다. (고린도 첫째 16:9) 그러나 앙골라의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심각한 문제들이 더 있게 되었습니다.

포르투갈로부터의 공식적 독립은 예정대로 1975년 11월 11일에 있었지만, 주요 정당 간의 투쟁은 전면적인 내전으로 치달았습니다. 독립적인 정당들이 창당되었으며 루안다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앙골라 민중 해방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우암보는 앙골라 완전 독립 민족 연합과 앙골라 민족 해방 전선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정당들이 서로를 대항하여 벌이는 정치 선전 때문에 인종과 부족 간에 전례 없는 증오가 있게 되었습니다. 수도인 루안다에서는 무자비한 살상이—심지어 거리에서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는 일마저도—일상사가 되었습니다. 많은 경우, 희생자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루안다 지역 출신이 아님을 밝혀 주는 언어로 말한 것뿐이었습니다. 외부인들에 대한 이러한 증오는 긴장을 초래하였으며, 이러한 긴장으로 인해 북부와 남부 지방 출신의 많은 사람들이 출신 지역으로 도망하면서 대규모의 인구 이동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형제들은 영적 형제들의 필요를 돌보기 위해서 자신들의 출신지가 아닌 지역에 용감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여호와 만세!”

여호와의 증인은 다시금 잔인한 박해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루안다의 증인들은 지역 위원회로 소환되었으며 그들은 증인들에게 당원증을 사라고 강요하였습니다. 이렇게 감정이 격해진 분위기 속에서, 앙골라 민중 해방 운동의 중앙 위원회 정치국은 증인들이 사람들을 부추겨 국가를 거역하고 국기에 불경을 나타내고 군 복무를 거부하게 하고 있다고 증인들을 비난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측의 설명은 무시되었습니다.

1976년 3월에, 성서 출판물이 포르투갈에서 앙골라로 발송되었습니다. 선적된 출판물에는 잡지 외에도 성서 3000권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 1만 7000권과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 책 3000권이 있었습니다. 당국은 이 모든 출판물을 압수하여 태워 버렸습니다.

1976년 5월 27일에, 정부 라디오 방송은 모든 지역 위원회와 국가 조직에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철저히 감시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자체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서 여호와의 증인이 국가 전복을 꾀하고 있다고 매일 공공연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증인들은 식품을 타려고 서 있는 줄에서 쫓겨났습니다. 회중 집회가 열리는 장소 밖에 폭도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주제 도스 산투스 카르도수와 그의 아내 브리지다의 자녀들은 정치 구호를 외치고, 국가를 부르고, “여호와를 타도하라”라고 외치도록 심한 압력을 받았습니다. 그 어린이들은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조롱을 당하였습니다. 당시 아홉 살이던 주제 2세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아요. 그럼 내가 만세를 부를게요!” 모두가 기대에 차서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이 소년은 “여호와 만세!” 하고 크게 외쳤습니다. 반대자들은 주제 2세가 뭐라고 말했는지를 깨닫기도 전에, 일제히 “만세!”를 외쳤습니다.

“용광로” 속에서

여당은 증인들에게 강제로 군 복무를 시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더 많은 극악한 박해가 있게 되었습니다.

1977년 2월 17일, 우일라 주 출신의 열심 있는 형제인 아르투르 바나캄비는 자신의 중립 입장을 설명해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그와 다른 세 명의 형제는 감옥으로 가는 길에 거리에서 줄을 지어 걷게 되었습니다. 거리를 청소하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구경꾼들은 형제들을 구타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다음날 세 형제의 아내들이 남편의 행방을 알아보려고 감옥에 갔습니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 후에, 그 아내들은 무자비하게 채찍질을 당하여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게 되었습니다. 그날 오후에 자매들은 남편들이 갇혀 있는 바로 그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텔레스 형제는 열흘 후에 투옥된 또 다른 일단의 형제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35명은 ‘용광로’나 다름없는 곳에 갇혔습니다. 그 ‘용광로’는 길이가 7미터이고 폭과 높이가 3미터인 방이었습니다. 철근 콘크리트로 된 천장에는 작은 통풍구가 2개 있었는데, 그 통풍구는 사람의 손이 들어가지도 않을 정도로 작았습니다. 때는 가장 더운 시기였고, 그 감방은 정말이지 용광로나 다름없었습니다. 당국자들은 우리를 죽일 작정이었기 때문에, 두 개의 통풍구를 막아 버렸습니다.

그곳에 갇힌 지 4일째가 되자, 우리는 이 잔혹한 열기를 견딜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여호와께 간청하였습니다. 우리는 다니엘 시대에 불타는 가마에 던져졌던 충실한 세 젊은이를 기억하였습니다. 다음날 새벽 3시쯤에, 문에서 쾅 하는 큰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게 되어 정말 안심이 되었습니다! 문을 연 사람은 간수였습니다. 간수는 여전히 반쯤 잠든 모습으로 문을 열고는 쓰러졌습니다. 약 10분쯤 지난 후에 간수는 일어나더니 아무 말도 없이 문을 닫았습니다. 우리는 잠깐이나마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게 해 주신 여호와께 감사드렸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7명의 형제가 추가로 우리 감방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앉아 있을 공간조차 없었습니다. 우리는 몇 차례 구타를 당하였습니다. 열기가 더 강해졌고, 열로 인한 물집과 구타로 인한 상처에서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났습니다.

3월 23일에는 표상물 없이 연설만으로 기념식을 치렀습니다. 당시 우리는 모두 45명이었습니다. 우리들 중 일부는 ‘용광로’ 속에서 52일을 보냈지만 살아남았습니다.”

“용광로”에서 풀려난 후, 그 형제들은 1300킬로미터 떨어진 동부의 목시쿠 주에 있는 사카상게 노동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박해가 “합법화”되다

1978년 3월 8일, 앙골라 민중 해방 운동의 중앙 위원회 정치국은 “‘여호와의 증인’ 교회”를 불법 단체로 규정하고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이 점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 루안다의 라디오 방송국은 하루 세 차례씩 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원래의 포고문은 포르투갈어로 작성되었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일주일 동안 이 포고문을 초크웨어, 키콩고어, 킴분두어 및 움분두어로도 방송하였습니다. 결국, 이 포고문은 정당지인 「조르날 데 안골라」 1978년 3월 14일자에 게재되었습니다. 사실상, 이러한 금지령은 이미 자행되고 있었던 잔학 행위를 “합법화”한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인민 국방 기구(ODP)의 비난이 거세졌습니다. 많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투옥되었습니다. 루안다 전역의 공장들은 아무런 예고 없이 방문을 받곤 하였습니다. 말라스 오닐 가방 공장에서는 14명의 증인이 체포되었습니다. 루반구에서도, 또 다른 13명이 체포되었습니다. 며칠 후에는, 은달라탄도에서 50명이 체포된 것이 보고에 의해 확인되었습니다. 금지령이 내려진 지 단 일주일 만에, 적어도 150명의 형제 자매들이 투옥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증인들은 직장에서 이유 없이 해고되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모범적인 행동을 보이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좋은 실적을 올린 것은 전혀 참작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해고된 일부 사람들은 국가의 경제 발전과 관련된 책임 있는 직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여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한 군대 장교는 에밀리아 페레이라가 집 앞에 있는 것을 보고는 왜 민병대에 가담하지 않는지를 물었습니다. 페레이라가 자신은 살상이나 피를 흘리는 일과 관련된 것은 그 어느 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자, 그 군대 장교는 페레이라가 증인임을 알아차렸습니다. 페레이라가 증인임을 인정하자, 그 장교는 페레이라에게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타라고 말하였습니다. 페레이라의 두 여동생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왔다가, 그들 역시 트럭에 떼밀려 올라타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페레이라의 아버지가 집에 왔습니다. 그 장교는 그 역시 트럭에 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차가 막 떠나려고 하는데, 근처에 살던 한 형제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역시 붙잡혀 강제로 트럭에 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감옥으로 끌려갔으며 거기서 자매들은 여자 감방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밤마다, 관리들은 젊은 자매들을 성폭행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매들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소리를 지르며 큰 소리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러한 반응 때문에 관리들의 사악한 의도는 좌절되었으며, 자매들은 폭행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말란제 주에 있는 형제들 역시 가혹한 시험을 받았습니다. 74세였던 주제 안토니우 바르톨로메우는 가혹한 학대로 인해 사망하였습니다. 두밍가스 안토니우는 체포와 반복되는 구타로 인해 몸이 많이 약해진 탓에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였습니다. 마누엘 리베이루는 감옥에서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독살되었습니다.

금지령이 내려진 다음 주에, 루안다에 있는 모든 회중들의 장로들은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앞으로의 활동에 대한 성경적 격려와 지도를 받았으며, 그러한 격려와 지도가 회중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그들이 ·⁠·⁠· 너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여호와]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출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1978년 연표어를 검토한 것은 그들의 결의를 강화시켜 주었습니다.—예레미야 1:19.

정부 당국에 탄원하다

1978년 3월 21일에, 앙골라의 여호와의 증인 협회의 이사로 봉사하고 있던 3명의 형제는 앙골라 민중 해방 운동의 중앙 위원회 정치국에 탄원서를 보내어, 위법 여부는 법원이 결정할 것과 증인의 불법적인 투옥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이 탄원서의 사본을 국방부, 법무부, 교육부, 문화부 장관과 공화국 대통령 및 수상에게도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무 답변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본을 따라서, 앙골라의 최고 권력자에게 다시 한 번 탄원하였습니다. (사도 25:11) 포르투갈 지부가 보낸 이 탄원서는 앙골라 인민 공화국의 대통령에게 여호와의 증인의 기록을 검토하고 그들에게 말할 기회를 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였습니다. 감금된 여호와의 증인 각자에 관한 진실을 법원이 조사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번에는 포르투갈 지부가, 문제를 조사하겠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굳은 결심에 깊은 감명을 받다

앙골라의 내전이 계속 맹위를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에서 오는 방문객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1979년에 앙골라의 전국 위원회는 나이지리아 지부에서 파견한 감독자인 앨버트 올리가 8월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형제들은 참으로 행복해하였습니다!

올리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게 있어 앙골라에 있는 것은 일주일 내내 군대 막사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어디를 보나 무장한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거리에서 들려오는 총성 때문에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앙골라의 증인들은 그전 여러 해 동안 급속한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그 나라가 여전히 식민 통치를 받고 있던 1973년부터 1976년까지는 전도인 수가 266퍼센트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77년에 박해가 심해지고 뒤이어 1978년에 금지령이 내려지자, 성장이 멈추었습니다. 이 나라의 많은 증인들은 침례를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로서, 1975년에만 1000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31개의 회중이 있었지만, 많은 회중에는 장로가 없었습니다. 영적 목자들의 사랑 어린 돌봄이 없었기 때문에, 일부 심각한 문제들과 도덕적 불결함의 사례들이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말란제, 와쿠쿤구 및 은달라탄두 등의 지역에 있던 전체 회중의 성원들은 이제 노동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올리 형제는 도착하자마자 토의해야 할 사항들을 개괄적으로 보여 주는 광범위한 의제를 받았습니다. 지방 형제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하느님이 주신 봉사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방법들에 주의가 기울여졌습니다. 종이 공급이 제한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출판물을 공급하는 방법에 대한 지침이 전달되었습니다. 또한 더 많은 출판물을 현지 언어로 공급해야 할 필요성도 논의되었습니다. 물론, 자격을 갖춘 번역자들을 찾아서 훈련시키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었습니다.

회중 내의 문제들에도 주의가 기울여졌습니다. 올리 형제는 장로들을 포함한 모두가 성서 표준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 누구도 교훈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느껴서는 안 되었습니다. 침례 자격, 혼인 신고, 순회 감독자의 회중 방문과 관련된 질문에 대한 답이 제시되었습니다. 앙골라의 형제들은 협회가 이 경험 많은 형제를 통해서 성경적인 지침을 받도록 마련해 준 데 대해 감사하였습니다.

올리 형제의 방문 기간 중에, 루안다의 장로들과 다른 지역에서 올 수 있었던 모든 장로들이 참석하는 모임이 열렸습니다. 오전 10시에, 모임 장소로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서, 참석자들이 한 사람씩 도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장소가 감시를 받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오후 7시에 모임을 시작하기 전에 모임 장소를 두 번이나 변경하였습니다. 올리 형제가 세 번째 장소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47명의 장로가 마당에 앉아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이지리아 베델 가족의 인사가 전해지자, 참석자들은 감사의 표시로 아무 말없이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는 한 시간 동안 연설을 하면서 장로 마련에 대해 성서적인 토의를 하였으며, 그리스도인 회중에 더 많은 장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들의 책임을 약술하였습니다. 연설이 끝난 후에, 형제들은 추가로 두 시간 동안 질문을 하였으며 그 후 그들은 통행금지 시간 전까지 집에 안전하게 돌아가기 위해 자리를 떠나야 했습니다.

올리 형제는 앙골라 형제들과 보낸 그 일주일에 대해서 어떻게 느꼈습니까? “정말이지, 큰 유익을 얻었습니다. 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섬기려는 형제 자매들의 굳은 결심에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들이 가진 놀라운 희망 때문에 미소를 짓고 있는 그 형제들을 보고 나는 눈에 눈물을 글썽인 채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앙골라를 떠났습니다.”

뒤이은 방문

올리 형제의 방문이 있은 지 1년 후에, 통치체는 역시 나이지리아 지부에 있던 앨버트 올루베비를 앙골라의 형제들을 섬기도록 파견하였습니다. 올루베비는 50명의 정규 파이오니아를 위해서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을 개최하도록 권하였습니다. 또한 올루베비는 6개월마다 참석자 수를 제한하여 순회 대회를 개최해 보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올루베비 형제의 방문 중에, 장로들과 장로가 없는 회중에서 책임을 맡고 있는 형제들이 참석하는 세 번의 모임이 열렸습니다. 참석자 수는 102명이었습니다. 장로들이 성서 원칙을 옹호하고 양 떼 위에 군림하지 말고 모범이 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성서 교훈이 제공되었습니다. (베드로 첫째 5:3) 아직 장로가 없는 회중에서 장로 임명 추천을 할 때 어떤 절차를 따라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 답이 제시되었습니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 중에 실베스트레 시망이 있었는데, 그는 거의 4년간 감옥과 노동 수용소에 있으면서 이미 믿음을 시험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장로로 섬긴 그는 유럽 형제들이 1970년대 중반에 앙골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순회 감독자로서 더 큰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제, 6개월마다 순회 대회를 열기로 한 마련에 따라서, 지역 감독자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시망 형제는 자녀가 6명 있었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세속적 책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임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시망 형제는 지난 20년 동안 이 임명을 본이 되는 방법으로 수행해 왔습니다. 시망 형제는 또한 지부 위원으로도 섬기고 있습니다.

올루베비 형제는 방문을 마치고 나서 격려적인 사태 진전에 대해서 보고하였습니다. 증인들이 집회를 보고 전파를 할 때 여전히 조심해야 하긴 하였지만, 징집 연령이 된 사람들에 대한 극악한 박해가 약해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당시 감옥이나 노동 수용소에 여전히 약 150명 내지 200명의 형제들이 갇혀 있었지만, 1982년 3월에는 그 수가 30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영적 양식을 나누어 주는 어려운 일

금지령 기간 내내, 정기적으로 영적 양식을 공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영적 양식을 정기적으로 공급하는 데는 종종 상당한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무엇보다도, 「파수대」를 등사하는 데 사용할 종이를 구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종이를 구입하려면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였습니다. 전도인이 3000명도 넘었지만, 한동안은 종이 공급이 부족하여 연구 기사를 800부 내지 1000부밖에 생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형제들은 소형 인쇄기를 사용하여 심지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와 같은 작은 책들까지도 부드러운 표지를 사용하여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난두 피게이레두와 프란시스쿠 주앙 마누엘은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 출판물 제작 임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활기찬 형제들은 더 큰 규모로 등사 작업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장소들을 찾아냈습니다. 종종, 안전을 위해서 장소를 바꿔야 하였습니다. 일부 장소들의 경우, 등사기는 창문도 없고 통풍구도 없는 방음실에 설치되었으며, 그 때문에 작업 환경이 매우 열악하였습니다. 옆방에서는 다른 자원 봉사자들이 잡지의 페이지 순서를 맞춘 다음 철하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자원 봉사자들은 그날 밤에 잡지를 배포할 수 있도록 페이지 순서를 맞춰서 잡지를 철하고 포장하는 일을 끝내야 하였습니다. 주의를 끌 만한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 등사 작업의 증거물을 모두 치워야 하였습니다.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두 대의 등사기를 동시에 “주방”에서 가동하였는데, 여기서 “주방”이란 영적 양식이 담긴 출판물을 제작하는 장소를 의미하였습니다. 한 팀의 형제들이 매일 일하면서, 활자 형틀을 만들고 교정을 보고 등사를 하고 페이지 순서를 맞추고 철을 하고 회중으로 잡지들을 운반하였습니다.

출판물을 루안다 외부에 흩어져 있는 회중들로 배달하는 일은 배달원들이 맡아야 하였습니다. 배달원이 되는 것은 위험한 임명이었습니다. 배달원으로 봉사했던 한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금지령이 공식적으로 선포된 후 몇 달이 지나서, 나는 내 세속 일 때문에 벵겔라 지역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협회의 지방 사무소가 로비토와 벵겔라에 있는 회중들로 배달할 몇몇 물품들을 내게 맡겼습니다. 나는 그 도시들에 있는 형제들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들과 접촉하기 위해서 내가 갖고 있었던 유일한 연락 방법은 벵겔라에 있는 한 장로의 전화번호였습니다. 안전을 위해서,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암호명 ‘이사야의 가족’뿐이었습니다.

벵겔라에 도착하였을 때, 모든 일이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는 것 같았습니다. 공항에서 나는 내 업무의 성격 때문에, 으레 그랬던 것처럼 소지품 검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꾸러미는 아무 문제 없이 안전하게 도착되었습니다. 일단 도시에 도착하자, 나는 형제들이 와서 꾸러미를 가져가도록 하기 위해서 즉시 그 형제들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나와 통화한 형제는 몸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하였지만, 호텔로 누군가를 보내 그 꾸러미를 받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호텔에 머문 4일 동안 내가 그 형제에게 매일 전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와서 꾸러미를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떠날 날이 되자, 나는 꾸러미를 가지고 루안다로 다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자, 대표단의 단장은 모든 단원들과 그들의 짐을 검색받게 하여 다른 여행자들에게 모범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나는 (1) 꾸러미를 쓰레기통에 버릴 것인지 아니면 (2) 꾸러미를 가진 채로 체포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였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고 나니, 잠언 29:25에 있는 ‘사람을 보고 떨면 올무에 걸리게 되고, 여호와를 신뢰하는 이는 보호를 받는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토록 많은 영적 양식을 버리는 것은 큰 낭비가 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상황에 직면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경찰이 출판물과 잡지들을 발견하였을 때 공개적으로 큰 소동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맨 끝에 줄을 섰습니다. 소지품 검사를 받을 사람이 두 명밖에 남지 않았을 때, 나는 누군가가 ‘죄송합니다만 꾸러미 하나 때문에 루안다에서 온 대표단 중 한 명을 찾고 있는 사람이 여기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어. 나는 지금 “여호와의 손이 너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라는 이사야 59:1의 성취를 보고 있는 거야.’ 그리고는 서둘러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내가 그 형제에게 이르렀을 때, 내게는 단지 ‘이사야의 가족’이라는 말을 할 시간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대답했고 꾸러미를 받았습니다. 비행기가 막 출발하려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에게 말 한마디 건넬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는 ‘고난의 때에 우리의 구원’이십니다.”—이사야 33:2.

위험에도 불구하고 양 떼를 돌봄

전쟁—묵시록의 불 같은 색 말을 탄 자—은 계속해서 앙골라인들의 삶을 황폐시켰습니다. (계시 6:4) 도시와 공장들은 폭격을 받고, 도로에는 지뢰가 설치되고, 다리들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고, 물 공급은 차단되고, 마을들은 습격을 당하였습니다. 민간인을 학살하는 일이 일상사가 되었습니다. 농작물은 파괴되었고, 농부들은 도시로 피신하였습니다. 전쟁 난민들이 루안다로 몰려들었습니다. 식품 배급과 암시장의 상황 때문에 하루하루 생존하는 것이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의 사랑 어린 협력은 달리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위험한 시기에, 루이 곤살베스와 엘더 실바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회중들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러한 방문을 어떻게 조직해야 하였는지에 대하여, 곤살베스 형제는 이렇게 썼습니다. “1982년 5월에 순회 감독자는 처음으로 톰부아를 방문하였다. 35명의 형제가 그날 오전 10시부터 잘 계획된 간격을 두고 드문드문 집회 장소에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침묵을 지키며 기다렸다. ODP(인민 방위 기구)가 도시의 모든 움직임을 통제하고 있었다. 나는 11시간 후인 오후 9시에 야음을 틈타 도착하였다. 30분 후에 집회가 시작되었고 새벽 4:40분까지 계속되었다.”

순회 봉사를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혼자였고 자녀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중의 영적 권익을 돌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 중 한 사람으로 지금은 지부 위원인 한 형제는 일반적인 순회 방문이 어떠했는지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각 회중을 일주일간 방문하도록 일정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방문은 화요일이 아니라 월요일에 시작하였습니다. 전체 회중이 한번에 모이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입니다. 회중 서적 연구 집단별로 방문을 하였으며, 회중이 큰 경우는 하루 저녁에 여러 집단을 방문하곤 하였습니다. 집회 시간을 서로 다르게 하여 순회 감독자가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들로 이동하면서 방문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순회 감독자는 각 집단의 유익을 위해서 프로그램을 반복하였습니다. 따라서, 한 주 동안, 순회 감독자는 자신의 모든 연설을 각각 7번 내지 21번이나 하곤 하였습니다. 한 주간의 활동은 꽉 차 있고 힘들었지만, 형제들은 회중에 격려를 베푸는 일에서 끈기를 나타냈습니다.”

루이 곤살베스는 1983년 1월에 쿠발이라는 도시로의 힘들었던 여행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여행에서 거의 생명을 잃을 뻔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회중을 방문하는 유일한 방법은 보호를 받기 위해서 군대의 행렬과 함께 이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상황을 주의 깊이 점검한 다음, 군은 35대의 차량이 출발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우리는 고디뉴 형제의 차를 타고 여행하였으며, 우리 차는 6대로 구성된 차량의 행렬 중 세 번째 차였습니다. 출발한 지 겨우 2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게릴라가 미사일을 발포하여 제일 앞서 가던 군용 트럭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직후에 미사일이 또 발사되어 두 번째 차량도 파괴되었습니다. 두 개의 폭탄이 우리 차에 맞았지만 폭탄이 터지지는 않았습니다. 차가 여전히 달리는 상태에서, 고디뉴 형제는 모두에게 차에서 뛰어내리라고 소리쳤습니다. 몸을 피하기 위해 숲 속으로 황급히 달려가는데, 총알이 날아와 내 왼쪽 귀가 거의 떨어져 나갔고, 나는 기절하였습니다.”

기절하기 전에, 그는 세 명의 게릴라 군인이 다른 형제들을 쫓아가는 것을 보았지만, 형제들은 밀림 속으로 피했습니다. 곤살베스 형제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깨어나 보니, 내 머리는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몇 시간 후에, 나는 기어서 다시 도로로 나갔습니다. 한 군부대가 나를 발견하여 응급 치료를 한 다음, 벵겔라 병원으로 나를 데려갔습니다.” 곤살베스 형제는 나중에 그 호송대의 차량이 모두 불에 타거나 다른 방법으로 파괴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차들에 타고 있던 12명이 목숨을 잃었고 11명은 심한 총상을 입었습니다. 곤살베스 형제와 함께 여행 중이던 형제들만이 유일하게 총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곤살베스 형제는 한 쪽 귀가 거의 전부 떨어져 나가고 개인 소지품도 잃긴 했지만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께 마음속 깊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생명을 주는 물을 나누어 줌

대부분의 앙골라인들이 오로지 생존만을 생각하고 있던 때에, 여호와의 증인은 이 거대한 구역 전역에 “더 좋은 일에 관한 좋은 소식”을 전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52:7) 그들은 어떻게 이 일을 수행하였습니까?

루안다의 한 파이오니아는 자신과 자신의 아내와 어린 딸이 함께 봉사를 하러 나가곤 하였다고 설명합니다. 집주인에게 인사를 한 다음, 그 가족은 어린 딸이 마실 물을 한 잔 달라고 부탁하곤 하였습니다. 집주인이 물을 주면, 그 가족은 집주인이 친절하게 딸에게 준 시원한 물보다 더 큰 유익을 가져다 줄 물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게 무슨 물인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 가족은 여호와의 왕국의 축복과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설명하곤 하였습니다.—요한 4:7-15.

그 가족은 봉사할 때 가방이나 성서나 출판물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집주인이 성서를 가지고 있고 그러한 내용에 대해서 읽고 싶어하면, 그 가족은 집주인의 성서를 사용하여 토의를 계속하곤 하였습니다. 관심을 나타낸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다시 방문하곤 하였습니다. 이처럼 슬기로운 접근 방법들을 사용하여, 증인들은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고, 회중들은 꾸준히 성장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외진 지역들에도 좋은 소식이 이르고 있었습니다. 찬디 쿠이투나의 노력을 통해서, 좋은 소식은 나미비아 국경 근처의 감보스 지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찬디 쿠이투나는 당시 로지디아였던 지역에서 왕국 소식을 처음으로 접하였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탄광에서 한동안 일을 한 후,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소를 사육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는 정기적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가서 워치 타워 출판물을 구해 왔으며, 1961년에 그러한 여행을 하던 도중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 그는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마차에 물과 식품과 성서 출판물을 싣고 킴보(작은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한 번에 2-3개월씩 전파하였습니다. 마차가 고장나면, 그는 황소를 타고 여행을 계속하곤 하였습니다. 심지어 70세의 나이에도, 그는 다른 전도인들과 걸어서 200킬로미터가 넘는 여행을 하였습니다.

찬디 쿠이투나는 평원을 한가로이 거니는 거대한 소 떼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족장 사회에서, 그는 인정받는 지도자였습니다. 하루의 일과는 종을 쳐서 모든 사람들을 모이게 한 다음 그가 지방 언어로 성서 한 구절을 검토하는 것을 듣게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집회가 있는 날이면, 귀에 익은 징 소리를 내서 약 100명이 모여 영적인 교훈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감보스 전역에서, 찬디 쿠이투나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성서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의 값진 출판물들을 개인적으로 연구하여 배운 것을 적용함으로써, 쿠이투나 형제는 다른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 탁월한 모범을 세웠습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 쿠이투나 형제는 「“이 천국의 기쁜 소식”」 소책자를 냐네카어와 카냐마어로 번역하였습니다.

루안다의 사무실은 쿠이투나 형제가 나미비아 빈드후크에 있는 형제들을 통해서 가끔씩 제출하는 야외 봉사 보고를 통해서 쿠이투나 형제의 활동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증인들이 쿠이투나 형제와 보다 밀접히 교제하도록 하기 위해서, 1979년에 루안다 사무실은 순회 감독자인 엘더 실바를 그에게 보냈습니다. 엘더 실바는 그때의 여행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실바 형제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차를 타고 시안지까지 160킬로미터를 여행하였습니다. 거기서부터 남은 70킬로미터는 걸었습니다. 6시간이나 억수 같은 폭풍우가 몰아쳐 계속 걷기가 거의 불가능하였습니다. 때때로 무릎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걷기도 했지만, 그 지역에는 사나운 야생 동물이 많았기 때문에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진흙 때문에, 소지품들을 막대기에 매달아 어깨에 짊어진 다음 맨발로 걷는 것이 더 편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리오카펠라 지역에 이르렀으며, 목적지인 쿠이투나 형제의 킴보(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 우리는 배가 고팠고 기진맥진해 있었기 때문에, 마을의 여자들이 우리에게 신맛이 나는 그곳 특유의 옥수수 우유인 불룬가(키상구아)와 코코아와 이히타(피랑 데 마산구)라는 옥수수 음식을 주었습니다. 따뜻한 불 옆에서 쉬고 나니, 예정된 활동을 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 방문은 감보스 지역에서 좋은 소식을 조직적으로 전파하는 면에서 진일보를 이룬 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1986년 8월에 카술루바르 강에서 있었던 18명의 새로운 형제 자매들이 침례를 받은 일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침례는 왕국 소식이 감보스 지역에 처음으로 전해진 지 40년 만에 처음 있는 침례였습니다. 이 지역에서 수행되는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온 파이오니아들은 기쁨에 넘쳤습니다. 그 침례를 목격한 쿠이투나 형제가 얼마나 행복해했는지는 이루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기뻐서 껑충껑충 뛰면서, 쿠이투나 형제는 말했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궤를 싣고 오던 다윗이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사무엘 둘째 6:11-15) 쿠이투나 형제는 지금도 계속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남부 앙골라에서의 봉사

1975년에, 남부 앙골라의 우일라 지역 출신으로 키가 큰 18세 여성인 티몰리가 파이오니아인 주제 티아카탄델라의 노력을 통해 진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티몰리는 성서 소식에 인식을 나타냈지만, 티몰리의 부모는 강하게 반대하였습니다. 티몰리는 한 번에 며칠씩 음식도 먹지 못하고 매를 맞았으며, 급기야는 돌에 맞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티몰리는 60킬로미터를 걸어서 루반구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회중 집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회중의 읽기 쓰기 강습반의 도움으로, 그는 신권 전도 학교에 등록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였습니다. 티몰리는 1981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티몰리는 또한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바느질을 배웠으며, 자기가 입을 수수하고 단정한 옷을 만들어 입습니다. 그와 같은 부족 출신으로 1978년에 왕국 소식을 들은 남자 3명과 여자 4명이 1980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1983년에는, 루반구 출신의 주제 마리아 무빈디가 3개월간 보조 파이오니아로 등록하였습니다. 그는 남쪽으로 가서, 자우와 감보스 마을들 주변의 시골 지역에서 전파하였습니다. 그는 나미베 주로 내려가서, 그 지역의 주요 부족인 무쿠바이스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 지역이 더 크게 필요한 지역임을 깨닫고, 그는 정규 파이오니아로 등록하였습니다. 다른 파이오니아들 역시 이 지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무빈디 형제가 이 지역에서 전파하게 되면서, 성서 진리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생활에서 필요한 변화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에 대한 자기들의 봉사가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일부다처, 부도덕, 술 취함, 미신 등 비성경적인 관습들을 버려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허리 싸개인 친크와니 외에도 더 옷을 차려 입기 시작하였습니다. 남녀들이 결혼을 법적으로 등록하기 위해서 꾸준히 루반구로 여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여행은 평생 처음으로 자기가 살던 마을을 떠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결혼을 등록하기 위해서 출생 증명서와 신분증을 원하는 감보스 지역 출신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들자 그들과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 10년 동안 문이 닫혀 있던 시안제의 민사 등록 사무소가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무빈디 형제는 1986년에 간염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열심 있는 봉사는 풍성한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그와 그 지역에서 일한 다른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증거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이 지역에는 9개의 회중이 있으며 아직 회중으로 조직되지 않은 10개의 집단이 있습니다. 이 회중들과 집단들은 이 지역에서 참 숭배를 증진하고 있습니다.

감시가 강화되다

1984년에 인민 자경단(BPV)이 구성되면서, 우리 형제들에게 다시금 압력이 가해졌습니다. 인민 자경단의 임무는 혁명 과정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계속 철저히 감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민 자경단은 어떻게 그러한 임무를 수행하였습니까? 당시 순회 감독자로 봉사한 두밍구스 마테우스는 당시 상황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루안다 구석구석에서, BPV라는 머리글자가 새겨진 파란색 완장을 차고 있는 인민 자경단 단원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경단 단원은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검문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집회에 출판물을 가지고 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1985년 12월에는 총 800개의 자경단이 루안다에서 복무하도록 조직되었으며, 따라서 회중 집회를 여는 것 자체도 불가능해졌습니다.

에시 라르구 세르파 핀투에서는 약 40명의 단원으로 구성된 한 자경단이 전 지역을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앙골라 해방 인민군이 그들과 함께 다녔습니다. 이 사람들이 누군가를 추격하거나 누군가를 조사하기 위해서 멈추어 세우려 할 때 총을 쏘는 소리를 흔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한 회중은 한 형제의 집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 계획을 하였습니다.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조금 전에, 우리는 자경단원 한 명이 집회 장소로 들어오는 형제들을 관찰하면서 형제들의 이름을 노트에 적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 집에 살고 있던 형제는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그 형제는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그 자경단원 뒤로 다가간 다음, 그에게 상당히 가까이 다가갔을 때 ‘여러분, 보세요! 도둑이에요. 도둑 좀 잡아요!’ 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깜짝 놀란 그 자경단원은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모두 떨어뜨린 채 도망쳤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아파트 건물에서 나오고 다른 사람들도 무슨 일이 있나 보려고 창문으로 고개를 내미는 동안, 그 형제는 자기 집에 들어와서 장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 이제 집회를 시작해도 됩니다. 상황이 해결되었습니다.’ 방문 주간에 그 집에서 열리도록 계획되어 있던 모든 집회에는 더 이상 다른 문제나 방해가 없었습니다.”

“국물이 샜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외국의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안토니우 알베르투는 외국계 석유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앙골라 형제들과 포르투갈 지부 간에 중요한 우편물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일을 도왔습니다.

그러던 1987년 어느 날, 공항 경찰이 순회 방문을 비롯한 여러 민감한 사안들에 관한 편지가 든 꾸러미를 압수하였습니다. 알베르투 형제는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조만간 자신이 체포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그는 정오에 집에 가서 식구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그는 그 문제를 감독하는 형제에게 전화를 걸어 간단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국물이 샜습니다.”

그 후, 알베르투 형제는 용감하게도 공항 경찰 보안 책임자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알베르투 형제는 식민 통치 시절에 자신이 젊은 포르투갈 남자들과 함께 투옥된 적이 있으며 자신이 그들과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아 왔는데 그 편지가 든 꾸러미를 공항에서 압수당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보안 책임자는 그 꾸러미를 압수한 사람에게 전해 주도록 카드를 한 장 써 주었는데, 그 카드의 내용은 그 꾸러미를 보안 책임자의 집무실로 가져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알베르투 형제가 그 카드를 공항에 있는 담당관에게 전달하자, 그 담당관은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그 편지를 보안 책임자에게 전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편지는 이미 소각되었던 것입니다! 아무런 해도 없었으며, 알베르투 형제는 크게 안도하였습니다.

여호와의 길로 걷기로 결심함

전쟁이 계속되면서 또한 여호와의 증인들의 그리스도인 중립을 깨뜨리려는 새로운 압력이 가해졌습니다. 1984년 2월에, 무기를 들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13명의 젊은 남자가 체포되었습니다. 체포된 사람들 중 단 3명만이 침례받은 증인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이거나 성서 연구생이었습니다. 위협과 신체적인 학대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길로 걸으려는 그들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2:3, 4) 슬프게도, 그들이 항공편으로 루안다로 호송되던 도중, 그들을 태운 비행기가 이륙을 하다가 추락하여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망하였습니다.

1985년 4월에, 아홉 사람—침례받은 증인들과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들과 관심자들을 포함하여—이 그들의 중립 입장을 타협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요한 17:16) 그들은 열차로, 그 다음에는 헬리콥터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지역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군인들이 그들을 강제로 전쟁에 참가시키려고 하였을 때 마누엘 모라이스 데 리마가 거부하자, 그는 총살되었습니다. 다른 한 형제는 화포에 맞아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으며, 따라서 그는 전투 지역 밖으로 이송되어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형제들 중 두 명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너희를 태우고 온 헬리콥터는 여호와의 것이 아니야.” 따라서 그곳을 떠나는 유일한 방법은 게릴라 군대들과 야생 동물들이 있는 지역을 가로질러 200킬로미터를 걸어서 빠져나가는 것뿐이었습니다. 루안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다시 수감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호와 하느님과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의 지배를 받는 것이 올바른 삶의 길이라고 여전히 확신하고 있었습니다.—누가 10:25-28.

또 한 번은, 증인 4명이 앙골라 최남단의 외딴 군부대로 이송되었습니다. 군인들은 전쟁이 치열하면 증인들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미겔 키암바타가 회상하는 바와 같이, 일부 군인 장교들은 이 증인들의 확고함에 감동받고 그들이 해롭지 않은 사람들임을 깨닫고는 그들에게 그 지역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 증인들은 그러한 자유를 사용하여 여호와께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시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마련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1987년에 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을 거행하였을 때 47명이 참석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집회 참석수는 58명으로 늘어났습니다.

1990년에도 그리스도인 중립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 중 약 300명이 여전히 투옥되어 있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각각 5년 이상인 형을 여러 번 치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재판도 없이 4년간 투옥되었습니다. 심지어 사면령이 내려진 후에도, 일부 교도소 관리들은 형제들에게 사면 사실을 알리지 않고 그들을 교도소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증인들이 교도소에서 가장 우수한 일꾼들이라고 생각하고 교도소 밖에서 일을 해도 탈옥할 염려가 없는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석방을 지연시킨 관리들도 있었습니다. 그 사면령은 1994년에 2명의 증인이 추가로 체포되어 사형당하는 것을 막아 주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더 흘러, 한 파이오니아 자매는 「왕국 소식」 35호를 배부하다가 전에 군인이었던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 군인은 무기를 들기를 거부하던 증인 3명이 사형당할 때 자신도 그곳에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면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될 것 같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 남자는 증인들이 다른 사람을 죽이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죽음에 직면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여호와의 증인이 되면 세상에는 분명 평화가 있을 것임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팜플렛을 받고 가정 성서 연구에 동의하였으며, 회중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리의 물이 계속 흐르다

여호와께서는 예언자 에스겔에게 하느님의 거대한 영적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에 대한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생명수는 장애물들 아래로 또는 옆으로 흘러 거친 땅을 지나면서, 치사적인 환경이었던 곳에 생명을 소생시켰습니다. (에스겔 47:1-9) 오늘날 장애물들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주는 진리의 물은 앙골라를 포함하여 230개가 넘는 나라들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종종 장애물들은 만만찮아 보였지만,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생명수는 이러한 장애물들을 피해갈 길을 찾아냈습니다. 1980년대 내내, 검열이 매우 엄격하였기 때문에 배달원의 소식이 부정기적으로만 겨우 루안다 사무실에 전달되었습니다. 하지만 새 힘을 주는 진리가 담긴 성서 출판물은 통행이 비교적 쉬웠던 앙골라와 나미비아 사이의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포르투갈어와 현지 언어로 된 출판물을 구하였습니다. 이 지역에서 몇 년 동안 이러한 마련이 효과가 있었습니다.

여러 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뻗쳤습니다. 일부 전문직 종사자들은 형제들이 성서를 구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증인 친척이 있는 일부 군인들을 포함하여, 심지어 군인들까지도 큰 위험을 무릅쓰고 앙골라의 형제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소중한 복사기를 포함하여 사무용 물품들이 몇 차례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명의로 발송되었습니다. 그러한 인사들 중 한 명은 나중에 여호와의 백성과 함께 하느님의 “평화의 군왕”의 지도 아래 봉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이사야 9:6.

1984년에, 티에리 뒤투아와 그의 아내 마누엘라가 자이르(현재는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앙골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 부부는 지방 형제들의 깊은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뒤투아 형제는 키가 컸고 종종 러시아인으로 오인받았습니다. 당시의 정부 하에서, 앙골라의 많은 러시아인들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전적인 자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외모는 전쟁에 찌든 이 나라에 여호와 하느님께서 어떻게 메시아 왕국을 통해 인류에게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고 그 평화가 땅 끝까지 편만하게 할 것인지를 알려 주는 출판물들을 가지고 들어오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시 72:7, 8) 뒤투아 형제는 사업상 항공기 조종사들과 얼마의 접촉을 하게 되었는데, 그 조종사들은 성서 출판물이 든 상자들을 앙골라로 가지고 들어오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그러면 뒤투아 형제는 그 상자들을 공항에서 가져다가 형제들에게 전달하곤 하였습니다. 뒤투아 형제는 또한 병약한 형제들을 위해서 절실히 필요한 의약품도 구해 주었습니다.

뒤투아 형제를 통해서 책임 있는 형제들은 사업가인 일리디우 실바를 소개받았는데, 그는 복사기 두 대를 기증하였습니다. 정부가 국내에 있는 사무용 기계의 재고를 모조리 조사하여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이 그러한 복사기를 구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실바 역시 마침내 침례받은 여호와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축복을 받았습니다.

전자 복사 장비를 통해서, 20면으로 된 「파수대」를 발행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잡지에는 앙골라 형제들이 이전에는 받아 보지 못했던 중요한 부가적 기사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단기간 내에, 매호 평균 1만 부가 배부되었습니다. 또한 「성경을 검토함」 책자가 등사되었는데, 이 책자는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포르투갈로부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유익하다’」에서 선별한 자료가 보내졌으며, 이 자료 역시 등사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소책자 형태로 그 자료를 받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자료는 신권 전도 학교 프로그램을 풍성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영적 마련들은 참으로 새 힘을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의 증거들 가운데에는 이 나라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한 것도 포함됩니다. 1987 봉사 연도 말에, 여호와의 증인으로 활동을 보고한 사람의 수는 8388명에 달하였는데, 이 수는 1978년에 금지령이 내려진 때로부터 150퍼센트 증가된 수였습니다. 회중의 수가 여러 배 늘어, 33개에서 89개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관심자들을 집회에 초대하기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지만, 집회 참석자 수는 전도인의 약 150퍼센트였습니다. 전도인들의 매월 야외 봉사 평균 시간은 약 18시간이었으며, 가정 성서 연구는 2만 3665건에 달하였습니다! 물론, 경제적 문제들도 있었고 식품도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은 여호와의 약속을 확신했기 때문에 용기를 갖고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계속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사도 4:31.

순회 감독자들을 위한 특별 훈련

회중을 위해서 끊임없이 헌신적으로 일하는 여행하는 감독자들 역시 격려를 필요로 하였습니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자신들이 1988년 11월에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리는 여행하는 감독자들을 위한 특별 강습에 참석하도록 마련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참으로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포르투갈 베델 가족과 매일 교제를 하면서 그들이 느낀 기쁨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강습에 참석한 루이스 카르도수는 그들의 느낌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 강습은 내게 특히 기쁨에 넘친 기간이었습니다. 우리는 포르투갈 베델 가족으로부터 너무나도 따뜻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형제들이 우리를 위해서 해 준 일은 정말 끝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에게 그 강습 기간은 즐거운 활동과 학습으로 가득 찬 34일이었습니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먼저 2주일 동안 포르투갈 순회구에서 여행하는 감독자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그들을 보고 배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음 2주 동안, 그들은 강습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강습은 그들의 신권 활동 분야를 특별히 다루었고 그들이 강사로서 참여하게 될 천국 전도 강습을 위해 그들을 준비시켜 주었습니다. 다음 주에, 그들은 포르투갈의 장로와 봉사의 종을 위해서 열린 천국 전도 강습에 참석하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앙골라의 형제들은 포르투갈의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자신들이 강습을 통해 배운 것들을 현지 형제들에게 어떻게 가르치는지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카르도수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강습은 좋은 연구생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내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는 이전에는 결코 해 본 적이 없는 방법으로 연구 조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형제들은 모범을 통해서 아내들에게 어떻게 배려를 나타내어 우리가 함께 연합하여 활동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잊을 수 없는 강습 기간은 형제들이 우리에게 ‘창조 사진극’을 보여 주었을 때 절정에 달하였습니다. 나는 창조 사진극에 대해서 말을 많이 들었었는데, 이제 직접 창조 사진극을 보게 되어 너무 기뻤습니다.”

그러한 강습에 대한 후속 조처로서, 1990년 10월에 포르투갈의 순회 감독자인 마리우 노브레는 고국에 있는 회중들을 섬기는 앙골라의 순회 감독자들과 함께 일하도록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2개월 동안 형제들을 훈련시켰는데, 그의 친절하면서도 참을성 있는 접근 방식은 많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매우 흐뭇해하면서, 노브레 형제는 그가 앙골라에 도착하고 나서 며칠 후에 있었던 경험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인이 198명인 한 회중에서 내가 공개 강연을 하도록 마련되었습니다. 나는 487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놀랍게도, 주임 감독자는 나에게 그 연설을 한 번 더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회중의 절반만이 집회에 참석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나는 그 요청에 응하였고, 두 번째 연설을 했을 때는 461명이 참석하여, 총 참석수가 948명에 이르렀습니다!”

노브레 형제는 체류 중에 앙골라 형제들의 일상생활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총격 때문에 루안다의 거리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상황에 신속히 적응하였으며 사람들이 왕국 소식에 대해 나타내는 대단한 관심에 주의를 집중하였습니다. 그가 머물던 숙박 시설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을 내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최저의 생활필수품에 불과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심각한 가뭄

1990년대 초에 3개월간 심한 가뭄이 많은 피해를 초래하면서, 묵시록의 검은 말의 말탄 자—기근—가 앙골라 남부를 강타하였습니다. (계시 6:5, 6) 농작물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람들은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리스본의 「디아리우 데 노티시아스」지에 따르면, 가뭄으로 인해 최소한 1만 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소식이 포르투갈 지부에 전해지자, 형제들은 즉시 형제들과 성서 진리에 관심을 나타낸 사업가들을 통해서 두 대의 대형 선적용 컨테이너에 구호물자를 실어 보냈습니다. 한 대의 컨테이너는 벵겔라로, 다른 하나는 루안다로 보내졌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는 나미비아를 통해서 트럭으로 25톤의 구호물자를 보냈습니다. 형제들은 빈트후크에 도착해서 앙골라 영사관에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구호물자를 전달할 수 있도록 앙골라 입국 허가를 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영사관측에서는 증인이 앙골라에서 공인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지만, 구호물자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필요한 서류들을 기꺼이 발급해 주었습니다. 심지어 안전한 수송을 위해서 군대의 호위를 받도록 마련해 주었습니다.

트럭이 쿠네네 강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다리에 도착하였을 때, 형제들은 모든 구호품을 더 작은 트럭으로 옮겨 실어서 안전하게 건너편에 도착한 다음 다시 전부 큰 트럭으로 옮겨 실어야만 했습니다. 30개소 이상의 군 검문소를 통과한 후, 트럭은 루반구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성공적인 임무 수행을 통해 세 번 더 구호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되었으며, 매번 여러 톤의 소중한 구호품이 수송되었습니다.

첫 번째 트럭이 도착하였을 때 루반구에 있었던 플라비우 테이셰이라 켄탈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오후 세 시쯤 트럭이 도착하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큰 기쁨과 안도감을 느꼈지만, 그와 동시에 놀라고 좀 당황했습니다. 25톤이나 되는 출판물과 옷과 식품을 어디에다 보관한단 말입니까? 우리의 왕국회관에는 문도 없고 창문도 없었으며, 우리 집은 그 많은 상자들을 두기에는 너무 작았습니다. 우리는 신속히 형제들을 조직하여 형제들이 밤낮없이 구호품을 지키도록 했으며, 모든 구호품을 왕국회관에 두었습니다.”

모든 구호품은 신속하게 분배되었습니다. 켄탈 형제는 계속 이렇게 회상합니다. “때는 전시였습니다. ·⁠·⁠· 당시에는 종종 전체 회중이 볼 잡지가 단 한 부밖에 없을 때도 많았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형제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목숨을 내걸었던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참으로 감사하였습니다! 그러한 사랑은 예수께서 자신의 인간 생명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주심으로 인류에게 나타낸 사랑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요한 3:16.

벵겔라의 장로들이 보낸 감사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32명의 자원 봉사자가 접수된 구호품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느라 매우 바빴습니다. 우리는 친절한 마음이 감동되어 우리에게 이러한 선물을 보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기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 중 누구도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지 않았습니다.

인권에 대한 약속

1991년 5월 31일, 적대 관계에 있는 앙골라의 파벌들 간에 정전 협정이 체결되어, 상대적인 평화의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인권과 정치적 권리를 약속하는 새로운 헌법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16년간 계속된 내전으로 나라는 초토화되었습니다. 약 30만 명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남자의 예상 수명은 43세였으며, 여성은 46세였습니다. 실직과 물가고는 점점 심해졌습니다. 교육 제도가 심각하게 붕괴되었습니다. 대규모의 재건 작업이 필요하였습니다. 이러한 재건 작업에 1978년부터 발효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금지령의 해제도 포함될 것입니까?

1991년 10월 22일, 여호와의 증인의 종교 협회를 앙골라에서 등록해 달라는 요청서를 법무부 장관에게 제출하였습니다. 또한 이러한 요청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보도 자료도 발행하였습니다.

바로 다음날 「조르날 데 앙골라」지는 한 기사를 실었는데, 그 중 일부는 이러하였습니다. “앙골라의 여호와의 증인의 대변인의 말에 따르면, 이 단체의 법적 인가에 대해서 낙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으며, 법무부가 나타낸 준비 과정의 반응도 만족스럽다.” 그 기사는 또한 앙골라의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를 실었으며,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대한 금지령이 해제된 포르투갈이나 모잠비크와 같은 나라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기록도 함께 다루었습니다.

앙골라에서는 처음으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서 호의적인 기사가 실린 것입니다! 며칠 후에, 그 신문사의 책임자는 그러한 기사를 실은 데 대해서 잘했다는 격려 전화를 많이 받았으며, 심지어 영향력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도 전화가 걸려 왔다고 말했습니다.

“결코 잊지 못할 경험”

이미 여호와의 증인들은 보다 자유롭게 함께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100명가량의 전도인이 있는 회중들이 집회에 300명 내지 500명이 참석하고 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때까지 가정집에서 소규모로 집회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증인들이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입니까? 뒷마당이 있는 일부 형제들은 얇은 금속판으로 지붕을 세운 다음 그 공간을 회중이 사용하도록 제공하였습니다. 많은 회중들은 그냥 야외에서 집회를 가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참석할 만한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전도인들은 상당히 발전한 성서 연구생들만을 집회와 대회에 초대하도록 권고를 받았습니다. 숭배 장소가 절실히 필요하였습니다.

형제들이 당장 해야 할 일들을 따져 보고 미래의 필요를 검토하는 것을 돕도록 포르투갈에서 더글러스 게스트와 마리우 P. 올리베이라가 파견되었습니다. 그들이 머무는 동안, 루안다의 127개 회중의 장로와 파이오니아가 참석하는 특별 모임이 열렸습니다. 수도 외에 다른 지역에 있는 30개 회중에서 온 장로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전국에서 온 대표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참으로 격려적인 시간이었습니다!

게스트 형제에게도 그 방문은 깊은 감동을 주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30년 이상 편지를 통해서 이 형제들과 긴밀하게 일해 왔습니다. 그 방문을 회상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형제들이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서 전혀 불평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의 미소 띤 얼굴 표정에서 내적인 평화가 배어 나오고 있었으며, 그들이 영적으로 살아 있고 건강하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그 나라에서 전파 활동을 확장할 전망에 대해서만 말하였습니다. 그 방문은 정말 결코 잊지 못할 경험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법적 인가를 받다

1992년 4월 10일에, 정부 기관지인 「디아리우 다 레푸블리카」지는 여호와의 증인 협회가 법적 승인을 받았음을 공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로 인해 그들에게 찾아온 기회를 온전히 활용하겠다는 결심으로 타올랐습니다. 신속하게, 새로운 전도인 신기록인 1만 8911명이 달성되었는데, 이 수는 지난해의 평균 전도인 수보다 30퍼센트 증가한 것이었습니다. 5만 6075건의 가정 성서 연구—전도인 1인당 평균 3건—는 풍성한 수확이 앞에 놓여 있음을 시사하였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는 이제 「파수대」와 「깨어라!」를 비롯한 출판물을 앙골라로 보내도 좋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앙골라의 회중들로 출판물을 신속히 배부하기 위해서 두 대의 트럭을 구입하였습니다. 「파수대」 1992년 5월 1일호 2만 4000부와 「깨어라!」 1992년 5월 8일호 1만 2000부가 도착하였을 때 형제들은 참으로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할 수 있는 서적이 충분히 공급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일부 전도인들은 연구를 사회하기 위해서 연구 서적에 있는 질문과 답을 전부 암기하곤 하였습니다.

또다시 어려운 시기가 닥치다!

폭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992년 9월에 선거가 있고 나서, 나라는 다시 내전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10월 30일에 5개의 주요 도시인 루반구, 벵겔라, 우암보, 로비토 그리고 특히 루안다에서 격렬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루안다에서는 분쟁이 일어나고 나서 처음 며칠 동안에만 1000명이나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병원에는 환자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시체들이 거리에 널려 있었습니다. 전염병이 퍼져나갔습니다. 여러 주 동안 전기, 식품, 물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도둑질과 약탈이 만연하였습니다. 대다수의 민간인들은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루안다에서 여호와의 증인 중 몇 명이 죽임을 당하였고 실종 신고가 된 사람도 몇 명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처한 이러한 비참한 상황에 대한 보고가 포르투갈에 들어오자, 포르투갈 지부는 즉시 식품과 의약품을 보냈습니다.

정치 파벌들이 서로 분쟁을 벌인 이 기간 중에, 일반 대중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엄정 중립을 지키는 것을 관찰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권력 투쟁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는 유일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이 우호적으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관심 있는 사람들이 거리에서 증인들에게 다가와 성서 연구를 요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증인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면서,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이 성서 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확신하였으며, 그로 인해 하느님의 왕국에 대한 그들의 확신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증인들은 「계시록—그 웅대한 절정은 가까왔다!」 책, 그 중에서도 특히 이 마지막 날의 야수들의 활동에 대한 부분을 연구하는 것이 매우 시기적절하다는 것을 인식하였습니다.

통치체가 보낸 소식

폭력 사태가 다시 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통치체는 앙골라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염려를 표명한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편지를 포르투갈 지부에 보냈습니다. 이 편지는 무엇보다도 앙골라 형제들의 즉각적인 필요를 다루었습니다. 이 편지의 결론 부분에서, 통치체는 앙골라의 형제들에게 자신들의 따뜻한 사랑을 전해 줄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루안다에서 이 소식을 접하게 된 형제들은 어려운 시기에 처한 자신의 백성을 너무나도 부드럽게 돌보는 이처럼 사랑 많은 조직을 주신 데 대해서 여호와께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표현은 폭력 사태 중에 생명을 잃은 형제들의 가족들에게 특히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정표가 된 지역 대회

1993년 1월이 되자, 루안다의 상황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고, 전국 각지에 있는 많은 전도인들이 수도에서 열린 “빛 비추는 자” 지역 대회에 참석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상당히 먼 거리를 걸어서 왔습니다. 우암보 주에서 온 한 자매는 네 명의 어린 자녀를 데리고 7일을 걸었습니다. 자녀들 중 맏이도 겨우 6살에 불과하였습니다. 그 자매는 기진맥진하여 도착하였지만 영적 잔치를 즐길 것을 기대하며 행복해하였습니다.

연속 2주 동안 인더스트리얼 페어 파빌리온을 임대하였습니다. 발전기와 음향 장치는 포르투갈로부터 공급받았습니다. 형제들이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는 사람들만을 초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대회 모두 파빌리온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찼습니다. 두 대회의 참석자 수를 합하면 2만 4491명에 달하였습니다. 이 대회에서 앙골라의 형제들은 드라마를 포함하는 3일간의 전체 지역 대회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즐겼습니다. 이 대회들에서는 629명의 새로운 봉사자가 침례를 받았으며, 대회 참석자들은 「땅에서 영원히 사는 길」 팜플렛을 키콩고어, 킴분두어, 움분두어로 그리고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에게 관심이 있으신가?」 팜플렛을 포르투갈어로 받게 되어 기뻐하였습니다.

정부 관리들도, 참석한 증인들의 훌륭한 행실을 주의 깊이 관찰하였습니다. 루안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는 너무나도 뚜렷하게 대조되었습니다. 첫 번째 대회가 시작되던 날, 되돌아온 난민들에 대한 폭력 사태가 도시의 여러 지구에서 발생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약탈이 만연하였습니다. 일부 형제들의 집들을 포함하여, 집들이 파괴되었습니다. 다시 발생한 폭력의 먹구름은 여호와의 백성이 즐기는 영적 빛과의 대조를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만들었습니다.—이사야 60:2.

회중들과 사무실 간의 연락이 두절되다

다시 시작된 분쟁으로 인해서, 지방에 있는 대부분의 회중들과 루안다 사무실과의 연락은 서서히 두절되었습니다. 저항군은 1993년 1월에 우암보에 자체 사령부를 세웠고, 뒤이어 맹렬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아름다운 도시가 거의 완전히 파괴되는 동안 형제들은 함께 숲 속으로 피신하였습니다. 4개월 동안, 그 도시에 있던 11개 회중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습니다. 드디어, 4월에 다음과 같은 짧은 소식이 접수되었습니다. “우암보 11개 회중의 기념식 참석자 수 3505명. 아직까지 애도할 일은 없음.” 형제들 중 아무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는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그 후 여러 달과 여러 해가 지나면서, 더 많은 보고들이 어렵사리 들어왔으며, 그러한 보고들은 충실함과 인내의 기록을 담고 있었습니다. 한 회중은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2개월간의 최악의 시기 중에는 전투가 너무 격렬해서 낮에는 어느 누구도 거리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형제들은 한 아파트 건물 지하에 함께 모였습니다. 형제들은 밤이 되면 다음날 마실 수 있도록 끓여 둘 물을 구하러 나가곤 하였습니다. 한 건물에서 다른 건물로 거리를 건너려고 한 사람들은 종종 저격병들의 총에 맞았습니다. 형제들은 어떻게 식량을 구하였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원을 한데 모은 다음 터무니없이 비싼 값으로 군인들로부터 쌀을 샀습니다. 각자에게 하루 한 컵이 배급되었습니다. 식량을 구할 수 없을 때는, 끓인 물을 마시면서 배고픔의 고통을 달래곤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출판물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영적으로 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잡지와 서적들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제 여호와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크완자 노르테 도에 있던 한 회중은 2년간 루안다 사무실과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고립된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 증인들은 야외 봉사 기록과 접수된 헌금을 충실하게 보관하였습니다. 형제들 자신의 처지도 매우 어려웠지만, 그들은 개인 용도로 그러한 기금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세계적인 활동을 위해서 개인적으로 계속 소액의 헌금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사무실과 연락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기금이 사무실에 전달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에 대한 인식을 나타낸 참으로 뛰어난 본입니다!

베델의 확장

1992년 말에, 여호와의 증인 협회는 전국 위원회의 사무실로 임대했던 3층 집을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해에, 협회는 출판물을 보관하는 데 적합한 창고를 하나 임대할 수 있었으며 그 창고는 나중에 소규모의 인쇄 작업에 사용되었습니다. 2년 후에는 그 3층 집을 개축하고 3층의 별채를 추가로 건축하는 계획이 추진되었습니다.

이 공사를 위한 자재를 현지에서 구입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건축물은 포르투갈에서 조립식으로 제작한 다음 컨테이너에 실어 앙골라로 보냈습니다. 카를루스 쿠냐와 조르제 페가두와 노에 누네스가 건축 공사에 자신들의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서 포르투갈에서 왔습니다. 공사 감독자였던 포르투갈 출신의 마리우 P. 올리베이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1994년 7월에 건축 공사가 시작되어 컨테이너가 속속 도착하면서 베델은 벌집처럼 일하는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사실상 베델 가족 전원이 모든 공구와 페인트, 타일, 문, 창틀 등 건축 자재가 실린 컨테이너에서 짐을 내리는 일을 거들었습니다. 베델 가족은 시간을 절약해 주는 건축 과정에 대해 읽어 본 적은 있었지만, 이제 3층 건물이 얼마나 빨리 지어지는지를 보면서 자기들의 눈을 의심하였습니다.”

건물이 완공되었을 때, 한 지방 형제는 이러한 감사의 편지를 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베델 건물을 짓는 일에 내가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드립니다. 처음에 이 공사는 마치 꿈만 같았지만, 이제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내게 큰 격려가 된 일용할 성구 토의에 참석하는 것은 정말 대단한 특권이었습니다. 나는 또한 모든 베델 가족 성원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대회에서 연설할 때 외에는 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베델이나 다른 건물을 건축하게 된다면, 그 공사에 참여하는 큰 특권을 받게 해 달라고 여호와께 간청합니다.”

그때 이후로, 점증하는 필요를 돌보기 위해서 루안다에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4.5헥타르의 땅을 구입하였습니다. 아마 이곳에 새로운 사무실과 베델 집을 건축하게 될 것입니다.

돕기를 간절히 원하는 형제 자매들이 다른 나라들로부터 앙골라에 도착하였습니다. 8명의 선교인이 1994년 5월과 6월에 도착하였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는 형제들은 여러 차례 오가면서 새로운 인쇄기를 설치하는 것을 돕고 인쇄기의 사용법을 지방 형제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포르투갈 형제들은 사무실의 컴퓨터, 부기, 그리고 다른 조직상의 문제들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 외국 지부에서 섬기는 캐나다와 브라질의 베델 봉사자들이 자신들의 기술을 제공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이 일을 돕기 위한 그들의 자진성과 그들이 소중한 기술을 지방 형제들에게 가르쳐 준 데 대해서 크게 감사하였습니다!

대회들이 좋은 증거가 되다

1994년에는 더 많은 장소에서 지역 대회를 열도록 하는 마련이 있었습니다. 최초로, 두 번의 지역 대회가 지방에서 열렸습니다. 벵겔라에서 열린 대회에는 2043명이 참석하였고, 나미베에서 열린 다른 대회의 최고 참석자 수는 4088명이었습니다. 총 참석자 수는 6만 7278명에 달하였으며 962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한 대회 시설의 책임자는 그가 본 것에 크게 감명을 받은 나머지 그 경기장을 2주간 무료로 사용하도록 제안하였습니다. 한 관심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예의를 잘 지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염탐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계속 여러분들과 연합하고 싶습니다. 가능한 한 속히 내게 강사를 한 명 보내 주시어 내가 여러분의 모범을 확고히 따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1995년 8월에 계획된 “기쁨이 충만한 찬양자” 지역 대회를 위해서, 증인들은 루안다 중심부에 있는 대형 스타디움을 확보해 놓았습니다. 형제들은 나무 의자를 상당 부분 교체하고 새로 칠을 하고 수도 배관을 수리하였습니다. 일반 대중들은 참석하라는 초대에 어떤 반응을 나타낼 것입니까? 초대에 대한 반응은 대단하였습니다! 첫 번째 주말에는 청중이 넘쳐 축구장에까지 자리를 잡았으며 관람석 아래의 공간을 가득 메웠습니다. 대표자들은 4만 35명이 참석하였음을 알고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다음 주말에는, 3만 3119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그 대회들에서 총 1089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전국에 여호와의 증인의 수가 2만 6000명도 채 안 되는데,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서 왔습니까? 그 중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가르치는 성서 소식에 관심을 나타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루안다의 한 통신사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장면이 이곳 코케이로스 스타디움에서 연출되고 있다. 온갖 사회 계층의 약 6만 명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지역 대회에 참석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로 주목할 만한 일이다. 남녀노소가 모두 한데 모여 ·⁠·⁠· 그들의 하느님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격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곳에 도착하는 대표자들을 관찰한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것은 별로 없지만 모두 단정하고 청결하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회기 중에는 모두가 주의를 집중하였습니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계수를 하고 있는 안내인들뿐인 것 같았습니다. 일요일 오전 회기 전체에 참석한 정부의 한 차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스타디움 안에 있는 사람들과 밖에 있는 사람들은 완전히 다르군요. 여러분의 프로그램이 지닌 실용적인 가치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정말 훌륭합니다!”

앙골라의 증인들은 세계 다른 지역에서 열리는 여호와의 백성의 대규모 대회에 대해서 읽은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그곳에서 자기 나라에서 열리는 그러한 대규모 대회에 참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극도로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 여러 해 동안 끈기를 나타낸 후 받은 참으로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들은 경이감마저 느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인류 역사상 이토록 중대한 시기에 지상에 있는 여호와의 특별한 가족의 일부가 되도록 해 주신 여호와에 대한 감사로 가득 찼습니다.

앙골라에 지부가 설립되다

좋은 소식의 전파는 빠르게 확장되었습니다. 1994년에서 1996년 사이에, 전도인 수는 매년 평균 14퍼센트씩 증가하였습니다. 최고 전도인 수가 2만 8969명에 이르렀고, 가정 성서 연구 건수도 6만 1000건을 넘어섰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협회가 1992년에 등록되었을 때는 회중이 213개였지만, 1996년에는 회중 수가 405개로 증가하였습니다. 그 해의 기념식 참석자 수 10만 8394명은 앞으로 더 많은 풍성한 모으는 일이 있을 것임을 시사하였습니다.

루안다의 사무실을 지부로 변경함으로서, 지방의 필요를 더 신속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1996년 9월 1일부로, 앙골라의 지부 사무실이 운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통치체는 전국 위원회에서 이미 충실하게 섬겨 온 3명의 형제들 즉 주앙 만코카와 두밍구스 마테우스와 실베스트레 시망을 지부 위원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두 명의 선교인 형제인 주제 카시미루와 스티브 스타리키가 그들과 함께 섬기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사무실에서 지부로 전환하는 일을 돕도록 포르투갈 지부의 더글러스 게스트가 1996년 6월에 앙골라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56명의 베델 가족에게 그들이 모든 면에서 훌륭한 모범을 세워야 할 필요에 대해 연설하였습니다. 루안다 광역시의 5260명의 장로들과 파이오니아들 그리고 그들의 아내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에서는 지부 위원들과 연로한 다른 형제들과의 회견을 통해 앙골라의 여호와의 백성 역사의 주요 부분들을 회고하였습니다. 게스트 형제는 그들에게 여호와를 신뢰하고 힘의 근원으로 그분을 바라봄으로 얻게 되는 용기에 대하여 연설하였습니다.

모국어로 진리를 알리려는 노력

계시록 7:9은 “모든 나라와 부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오는 “큰 무리”의 사람들이 여호와를 숭배하는 일에 합세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예언에는 분명 앙골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앙골라에서는 42개 언어와 많은 방언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움분두어, 킴분두어, 키콩고어가 가장 널리 사용되는 토착 언어입니다.

여러 해 동안, 회중 집회에서는 흔히 연구 자료를 포르투갈어에서 최소한 하나의 현지 언어로 통역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개인용 연구 자료를 갖기 위해서는 포르투갈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교육의 기회는 아주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움분두어로 구할 수 있게 된 최초의 출판물들 중 하나는 「“이 천국의 기쁜 소식”」 소책자였습니다. 1978년에 한 장로는 그 소책자를 한 부 받고 나서 이렇게 평하였습니다. “이 소책자가 움분두어로 발행되었기 때문에 모사메데스[지금의 나미베]에는 전도인이 300명도 넘게 될 것입니다. 이 지역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움분두어로 말하고 이 언어로 읽습니다. 이 소책자는 진정한 축복입니다!” 그 소책자는 정말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현재 나미베에는 21개 회중에 1362명의 전도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소식을 앙골라인들의 모국어로 제공하여 그들의 마음에 이르려면 더 많은 일이 이루어져야 하였습니다. 온전히 갖추어진 번역부를 구성하기 위한 기초를 놓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1992년에 법적으로 등록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번역자로 일하게 될 3명을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로 보내 예비 교육을 받게 하였습니다. 컴퓨터도 구매하였습니다. 그 다음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에 있는 키스 위길과 그의 아내 에블린 위길이 이곳에 와서 새로운 부서를 조직하고 협회의 ‘번역 도구’(Translation Tools)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면에서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출판물이 현지 언어로 공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움분두어로는, 「땅에서 영원히 사는 길」과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에게 관심이 있으신가?」와 같은 팜플렛이 발행되었습니다. 그 팜플렛들은 그 후 여러 가지 전도지와 함께 키콩고어와 킴분두어로도 발행되었습니다. 1996년에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지식」 책과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팜플렛이 이 세 가지 언어로 발표되었습니다. 한 지역 감독자는 자신이 섬긴 주최 회중들 중 한 곳에서 아주 간단하고 직접적인 제공 연설을 사용하여 한 주 동안 90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이듬해에 회중 수는 478개에서 606개로 늘어났습니다.

형제들이 자신들의 모국어로 성서 진리를 듣고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었습니다! 1998년에는 우암보에서 최초로 온전한 움분두어 지역 대회가 열렸습니다. 참석자 수는 3600명이 넘었습니다. 대표자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셨어!” 1999년 1월 1일호부터 「파수대」가 움분두어로 발행되었을 때 그러한 사랑에 찬 관심의 증거가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절실히 필요한 왕국회관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앙골라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왕국회관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1992년 이래로, 루안다에서만도 회중 수가 147개에서 514개로 증가하였습니다. 전국적으로는 회중 수가 200퍼센트 이상 증가하여 696개가 되었습니다. 많은 회중들의 경우 평균 집회 참석자 수는 200명 내지 400명입니다. 1998년에 열린 대회들에서는 전도인의 4배에 달하는 참석자 수가 보고되었습니다! 적절한 모임 장소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루반구 시의 최초의 왕국회관이 1997년에 세워졌으며, 로비토에서는 1998년 7월에, 그리고 (루안다 바로 남쪽에 있는) 비아나에서는 1999년 12월에 최초의 왕국회관이 세워졌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국제 왕국회관 건축 프로그램의 도움으로, 지금은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앙골라에서 사용할 용도로 옆면이 트인 철골조 이동식 왕국회관을 설계하였습니다. 왜 이동식으로 설계하였습니까? 토지에 대한 확실한 소유권을 취득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건물이 세워진 후에도 누군가가 나타나서는 자신이 그 토지의 정당한 소유주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왕국회관은 필요할 경우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옆면이 트여 있는 것은, 이곳의 무더운 기후 속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쾌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조립식 왕국회관의 자재가 2000년 5월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나라에는 현재 여러 형태의 왕국회관이 24채밖에 없으며 향후 5년간 355채의 왕국회관이 추가로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진행 중인 일들이 절실한 필요를 충당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왕국회관과 관련된 일 외에도, 미래를 위해서 1만 2000명이 앉을 수 있는 옆면이 트인 방식의 철골조 순회 대회 회관이 계획 중에 있습니다.

피의 신성함을 존중함

또 다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1996년 10월에 사랑 많은 10명의 장로로 구성된 병원 교섭 위원회(HLC)가 루안다 광역시에 있는 수백 개의 회중을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방 증인들은 ‘피를 멀리’하려는 자신들의 열망을 고려한 치료를 받도록 도와주는 잘 훈련받은 형제들을 갖게 되어 매우 기뻐하였습니다.—사도 15:28, 29.

전쟁 중에 파괴되지 않은 의료 시설은 1970년대 중반 이후로 거의 유지 보수를 하지 않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약품도 부족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의사들이 무혈 치료와 수술 프로그램을 확립하는 면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기꺼이 협조할 것입니까? 처음에는, 대부분의 의사들과 병원 관계자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만날 약속을 연기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응급 의료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말란제 주에 사는 한 형제가 위 종양 수술을 받기 위해서 루안다에 있는 아메리쿠 보아비다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한 병원 교섭 위원이 그 형제의 아내와 함께 담당 의사를 방문하였습니다. 그 병원의 외과 과장인 자이미 데 아브레우 박사가 그 두 증인을 맞이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그 의사는 여호와의 증인과 피에 관한 그들의 입장을 잘 알고 있었으며, 포르투갈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에 무혈 프로그램에 대해서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데 아브레우 박사의 협조 덕분에, 수혈 없이 수술이 성공적으로 행해졌습니다. 나중에, 병원 교섭 위원회에서 일하는 형제들은 데 아브레우 박사와 그의 수술팀을 만나서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였습니다. 현재 5명의 의사가 피에 대한 증인들의 입장을 존중함으로 증인들에게 협조하고 있습니다.

수확을 위한 많은 일꾼들

일단 많은 조직적인 필요와 출판물의 필요가 해결되자, 야외에서 나타나는 큰 관심에 더 많은 주의가 기울여졌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그렇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습니다”라는 말씀은 앙골라에 참으로 잘 적용됩니다! (마태 9:37) 보고들은 수십 개의 도시들에서 진리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돌보는데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밝혀 줍니다.

이러한 필요에 부응하여, 협회는 “수확”하는 일을 돕도록 11명의 선교인을 더 보냈습니다. 일부 선교인들은 해안 도시인 벵겔라와 나미베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앙골라 사람들 가운데서 대다수의 일꾼들을 일으키셨습니다. 단지 지난 5년 동안에 2만 1839명이 침례를 받아 이 나라에 있는 헌신한 여호와의 찬양자들의 무리에 가담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눈이 그들을 살핀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이 있는 모든 지역으로 경험 있는 형제들을 보내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있었습니까? 이 일이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더욱 확실한 증거가 제시되었습니다. (스가랴 4:6) 여호와의 눈이 그분의 모든 종들은 물론, 참 하느님을 알고 섬기기를 진정으로 원하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살피고 있습니다.—시 65:2; 잠언 15:3.

크완자 노르테 주의 일부 마을 사람들이 루안다로 여행하여 거리에서 잡지를 배부하고 있던 증인들로부터 잡지를 구하였습니다. 그 잡지에 참으로 좋은 소식이 담겨 있는 것을 확인한 마을 사람들은 루안다에 있는 증인들을 본받아 잡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함께 모여야 할 필요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집단의 한 남자가 집회를 사회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마을은 외딴 곳에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이 3년 전에 법적으로 등록되었다는 소식이 이 지역 당국에는 도달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모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단념하지 않고 숲속에서 집회를 열었습니다.

마침내, 킬롬부 두스 뎀부스에 사는 사람들이 회중을 조직하는 면에서 도움을 받기 원하고 있다는 소식이 루안다 사무실에 전해졌습니다. 1997년 10월에 한 순회 감독자가 이 마을로 파견되었으며, 그가 방문하는 동안 140명이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순회 감독자는 지방 당국에 여호와의 증인이 법적으로 유효한 단체라는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서 여호와의 증인 협회의 정관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 집단은 이제 기쁘게도 공개적으로 함께 모이고 있으며, 현재 많은 관심자들을 돕고 있는 파이오니아들도 그들 중에 있습니다.

1996년에 아나 마리아 필로메나는 비에 주에 있는 한 작은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관심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한 집단이 서적 연구와 「파수대」 연구를 위해 매주 모이게 되었습니다. 침례받은 형제가 없었기 때문에 아나 마리아가 집회를 사회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지방의 고위 군 사령관이 집회에서 무엇을 가르치는지 직접 보기 위해서 일요일 집회에 참석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군 사령관은 두 명의 군인과 함께 왔습니다. 그가 떠나기 전에 “이 지역에서는 두려워 말고 여러분의 일을 계속하십시오” 하고 말한 것을 보면 그가 들은 것에 대해서 대단히 만족해한 것 같습니다. 이 작은 집단은 이제 40명의 전도인이 있고 일요일 집회에는 150명이 참석하는 움분두 쿠이투 비에 술 회중이 되어 있습니다.

우이제 주의 회중들은 약 2년 정도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영적 양식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지역의 한 증인은 공급품을 운반하는 정규 항공편과 관련이 있는 한 인척에게 그러한 문제점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그 인척은 친절하게도 다음 비행기편에 순회 감독자와 특별 파이오니아와 400킬로그램의 출판물을 무료로 실어 날라 주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그 비행기편으로 도착한 형제들은 한 회중이 고립된 5개의 집단을 돌보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각각의 집단이 여는 집회에는 50명 내지 60명의 관심자가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1996년 초에 같은 주에서 한 순회 감독자는 4년 이상 조직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한 회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순회 감독자는 어떤 상황을 보게 되었습니까? 전도인은 75명뿐이었지만, 총 794명이 그가 한 공개 강연에 참석하였습니다! 분명히, 고립된 지역에 사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이 형제들의 열심을 약화시키지는 못하였습니다.

루안다에서 남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가벨라 지역에서도 진리에 대해 큰 관심이 있다는 비슷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곳의 한 파이오니아는 주중에 매일 밤마다 하나씩 5개의 회중 서적 연구를 사회하고 있습니다. 그 파이오니아 역시 ‘수확하는 “주인”에게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마태 9:37, 38.

“우리 시대에 가장 비극적인 분쟁”

앙골라 전역에서 좋은 소식을 선포하기 위해서 여호와의 증인이 벌이고 있는 활동은 이 나라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더욱더 놀라운 것입니다. 국제 연합의 한 보고서는 앙골라의 내전을 “우리 시대에 가장 비극적인 분쟁”이라고 묘사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겪은 고통을 고려해 보면, 그러한 묘사에 반론을 제기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심지어 정전 후에도, 하루에 1000명이 죽임을 당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2000년 3월에 「뉴욕 타임스」지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인구가 1200만 명인 앙골라에서 내전으로 100만 명이 사망하고 300만 명이 현재 자신들의 집을 버리고 떠나 있다.”

그 모든 총성은 멎었지만, 전쟁의 휴유증은 남아 있습니다. 앙골라는 세계에서 지뢰가 가장 많이 묻혀 있는 나라 중 하나이며 지뢰 폭발로 인해 팔다리를 잃은 사람이 7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어이없게도, 서로 분쟁을 벌이고 있는 파벌들은 지금도 계속 지뢰를 매설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농부들은 밭을 버려두고 있으며 그로 인해 전 인구의 식량 부족 사태가 더욱 절망적인 상황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폭력의 와중에서 여호와의 증인도 무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크완자 노르테 주에서는 4명의 증인과 한 명의 관심자가 정부군과 저항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사망하였습니다. 일부 증인들은 지뢰 폭발 사고와 특정 대상 없이 시장에서 폭발한 폭탄 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1999년에는 4명의 증인이 우암보에서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식품과 다른 공급품들을 전달하려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그러한 사망 사건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증인 역시 의식주의 부족으로 큰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1999년에 내전이 심해지자, 많은 여호와의 증인들을 포함하여 170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집을 버리고 도망해야 하였습니다. 전쟁 때문에 피난한 사람들은 종종 이미 사람이 너무 많아 비좁은 집에 살고 있는 인척들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장로들은 가족 부양 때문에 많은 압박을 받고 있으면서도, 형제들의 영적인 필요를 계속 돌보고 있습니다. 이 증인들이 처한 곤경에 반응하여 여러 대의 컨테이너를 가득 채운 식품과 의복과 절실히 필요한 의약품을 공급해 준 이탈리아, 포르투갈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형제들에 대해서 이들이 느끼는 감사의 깊이는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의 모범들

고대에 금을 제련하기 위해서 뜨거운 열을 사용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종들이 인내하고 있는 시련은 시험받은 질의 믿음을 산출하고 있습니다. (잠언 17:3; 베드로 첫째 1:6, 7) 노소를 막론하고, 앙골라에 있는 많은 여호와의 증인은 그처럼 시험받은 질의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50년도 더 전에 주앙 만코카와 함께 벨기에령 콩고에서 소중한 성서 진리를 배운 오래된 봉사자 카를루스 카디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은 형제들을 포함하여, 우리 형제들이 나타낸 용기 있고 결의에 찬 입장으로 인해 강력한 증거가 행해졌습니다. 형제들의 행동만이 아니라 권위를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말함으로써 강력한 증거가 행해졌습니다.”

그러한 증거를 한 사람으로 안투네스 티아구 파울루가 있습니다. 그는 그의 그리스도인 중립을 깨뜨리려는 사람들에 의해 무자비한 학대를 당하였습니다. 현재 그는 주스티누 세자르, 두밍구스 캄본골루, 안토니우 무푸마, 다비 미시, 미겔 네투 등 그와 비슷한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과 함께 앙골라 베델 가족 성원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감옥에서 6년 이상을 보낸 알프레두 침바이아는 현재 아내와 함께 순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 자매는 적대 관계에 있는 한 부족이 자기 남편을 가족으로부터 떼어놓은 다음 끌고가 살해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 자매는 살고 싶으면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도망가야 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콩고 민주 공화국에 가기 위해서 그 자매는 4명의 자녀와 함께 걸어야 하였습니다.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10개월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피난을 가기 전에, 그 자매는 자신이 임신하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 자매는 콩고 민주 공화국에 도착하기 전에 아기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아이는 나중에 사망하였습니다. 그 자매는 끊임없이 기도하였습니다. 그 자매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러한 상황에서는 여호와께 무거운 짐을 내맡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시 55:22)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 연민에 빠져 “여호와여, 왜 하필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입니까?”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킨샤사에 도착하였을 때 이 자매는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운 나머지, 그곳에 도착한 첫 달에 보조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고대의 믿음의 남녀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기록은 앙골라의 여호와의 종들을 적절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말을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칼날을 피하고, 약한 상태에서 강력해지고, 얼마의 타협으로 석방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을 당한 사람들의 모든 믿음의 모범에 관하여 계속 말하려면 우리에게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들은 조롱과 채찍질로, 아니, 그 이상의 속박과 감옥으로 시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시련을 당하고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들에게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11:32-38) 그 형제들이 그들을 박해한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받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무정부 상태 때문에 궁핍하게 살고 있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약속의 성취에 그들의 눈을 단단하게 고정시키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그리고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히브리 11:16.

앙골라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맹렬하게 말을 모는 묵시록의 말탄 자들의 가혹한 영향을 계속해서 겪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4만 명이 넘는 이 나라의 전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데 1000만 시간 이상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은 관심자들과 매월 평균 8만 3000건 이상의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면서 바쁘게 지냈습니다. 앙골라에 있는 왕국 전도인들의 간절한 열망은 예수를 통해 하느님께서 가능하게 하시는 참된 생명을 선택할 기회를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이 갖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불안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연례 주의 만찬 기념식에 18만 1000명 이상이 모였을 때 그들은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밭이 희어져 수확해야 한다는 풍부한 증거를 보고 있습니다.—요한 4:35.

전세계의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함께, 앙골라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의 하늘 왕이자 지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 승리를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시 45:1-4; 계시 6:2) 자신들이 직면하고 있는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의는 그들의 사랑 많으신 하느님 여호와의 충성스런 종이자 충실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시 45:17.

[68면 삽입]

‘우리의 물질적 상황이 심각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영적으로 건강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성서 예언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73면 삽입]

그들은 성서를 연구하고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앙골라로 추방되었다.

[78면 삽입]

“당신이 내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나를 죽이는 것이지요. 그보다 더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내 믿음에서 돌아서지 않을 것입니다.”

[82면 삽입]

그는 진리를 찾았다고 확신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 진리의 가치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였는가?

[85면 삽입]

감옥에서 형제들은 무엇이든 머리에 떠오르는 성서 주제로 벽에 대고 전파하곤 하였다.

[89면 삽입]

그들 주위에서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지만, 그들은 봉사의 직무를 계속 열심히 수행하였다.

[91면 삽입]

그리스도인 목자들은 출퇴근 길에 정기적으로 잠깐씩 방문하였다. 목자들은 종종 그들 가족과 함께 한두 성구를 낭독하였다.

[96면 삽입]

“좋아요. 그럼 내가 만세를 부를게요!” 모두가 기대에 차서 기다렸다. 마침내, 이 소년이 크게 외쳤다. “여호와 만세!”

[103면 삽입]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들이 가진 놀라운 희망 때문에 미소를 짓고 있는 그 형제들을 보고 나는 눈에 눈물을 글썽인 채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앙골라를 떠났습니다.”

[108면 삽입]

“순회 감독자는 자신의 모든 연설을 각각 7번 내지 21번 하곤 하였습니다. 한 주간의 활동은 꽉 차 있고 힘들었습니다.”

[111면 삽입]

이 족장 사회에서, 그는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그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16면 삽입]

그리스도인 중립을 깨뜨리려는 압력을 받으면서도, 여호와의 길로 걸으려는 그들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124면 삽입]

“우리는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형제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목숨을 내걸었던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참으로 감사하였습니다!”

[128면 삽입]

일반 대중은 여호와의 증인이 엄정 중립을 지키는 것을 관찰하였다.

[138면 삽입]

회중은 696개이지만 왕국회관은 24개뿐이다.

[81면 지도와 삽화]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대서양

콩고 민주 공화국

앙골라

루안다

말란제

로비토

벵겔라

우암보

루반구

나미베

바이아두스티그레스

나미비아

[66면 전면 삽화]

[71면 삽화]

그레이 스미스와 올가 스미스 부부

[74면 삽화]

존 쿠크(가운데)와, 앙골라에서는 최초로 참 숭배에 대해 확고한 태도를 나타낸 사람들 가운데 포함되는 주앙 만코카(오른쪽)와 살라 필레문(왼쪽)

[87면 삽화]

1975년의 짧았던 자유의 시기에 모인 열정적인 무리들

[90면 삽화]

전쟁으로 황폐된 나라

[102면 삽화]

영적 양식이 생산되던 “주방”

[104면 삽화]

실베스트레 시망

[123면 삽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앙골라에 보낼 구호물자를 싣는 모습

[126면 삽화]

위: 루안다의 장로들과 정규 파이오니아들을 위한 특별 모임

[126면 삽화]

1991년 앙골라에서 주앙 만코카와 마리아 만코카 부부 그리고 마리우 올리베이라와 함께한 더글러스 게스트(좌측)

[131면 삽화]

루안다의 여호와의 증인이 처음 사용했던 사무실

[134면 삽화]

7만 3154명이 참석한 루안다의 “기쁨이 충만한 찬양자” 지역 대회

[139면 삽화]

앙골라에 있는 24개 왕국회관 중 하나인 철판 지붕 구조물

[140면 삽화]

지부 위원회(좌측에서 우측으로): 주앙 만코카, 스티브 스타리키, 실베스트레 시망, 두밍구스 마테우스, 주제 카시미루

[140, 141면 삽화]

지부가 구성된 1996년 당시의 앙골라 베델 가족

[142면 삽화]

끔찍한 학대 속에서 믿음을 증명한 많은 베델 가족 성원 중 일부: (1) 안투네스 티아구 파울루, (2) 두밍구스 캄본골루, (3) 주스티누 세자르

[147면 삽화]

카를로스 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