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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기아나

프랑스령 기아나

프랑스령 기아나

어디를 가나 밀림입니다. 마치 거대한 녹색의 카펫이 남부의 투무쿠마케 산맥으로부터 북부의 대서양에 이르기까지 펼쳐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울창한 강우림을 뚫고, 마로니 강과 오야포크 강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다가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이 두 강 사이에 있는 땅이 프랑스령 기아나입니다.

연중 절반 이상 계속 내리는 비는 초목이 무성한 자연 환경을 조성합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내륙으로 파고 들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해안 지역을 벗어나면 양호한 도로가 거의 없고, 여울이 많아 강을 따라 여행하는 것도 도전이 됩니다. 여울들의 이름만 보아도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있는데, 예컨대 소프라카(산산조각 여울), 그로소(큰 여울), 소탕부르(북 치는 여울), 소레세데데(죽도록 버려두는 여울), 아듀바트(이젠 끝장이다) 등입니다.

숲 속에는 1000종이 넘는 수목과 현란한 모습의 난초를 비롯하여, 다습한 열대 환경에서 번성하는 식물들이 있습니다. 170종이 넘는 포유동물, 720종의 조류 그리고 무수한 종의 곤충이 이곳에 서식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아나콘다, 카이만 악어, 재규어 그리고 개미핥기도 있는데, 이들은 사람의 눈에 자주 띄지 않습니다. 사람이 있는 낌새를 채면 슬그머니 달아나기 때문입니다. 길이나 강물 위로는 선명한 파랑 나비들이 유유하게 날아다니고, 눈부신 색깔의 새들이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쏜살같이 날아갑니다.

식물과 야생 동물들이 다채롭듯이, 인종과 문화도 대단히 다양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마을들은 해안을 따라 그리고 강을 따라 드문드문 흩어져 있습니다. 그 종족들 가운데는 갈리비족·아라와크족·팔리쿠르족·와야나족·에메리용족·오양피족이 있습니다.

남아메리카의 이 작은 땅에서 대다수의 주민은 해안 지역과 수도 카옌에 밀집되어 있습니다. 수리남과의 국경을 따라 강변 촌락들에서 사는 부시 니그로도 있는데, 이들은 아프리카에서 끌려와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하다 도망 나온 노예들의 후손입니다. 그들은 스라난어라는 일종의 크리올어를 합니다. 약 100년 전에는 아시아계 이민이 싱가포르, 베트남, 중국에서 도착하였습니다. 1977년에는 묘족 사람들이 라오스로부터 망명객들로 도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시아계 사람들을 비롯하여, 마르티니크·과들루프·아이티·브라질·수리남·도미니카 공화국·세인트루시아·레바논·페루 그리고 본국인 프랑스로부터 이민 온 사람들이 15만 명이 넘는 인구의 과반수를 이룹니다.

혹독한 생활 여건

1500년경에 첫 유럽인들이 이곳에 도착하였지만, 이 땅에 정착하려던 그 초기의 시도들은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연 환경이 너무도 혹독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프랑스령 기아나를 구성하는 영토는 17세기에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장기 복역수들을 프랑스로부터 보내, 카옌·쿠루·생로랑 같은 곳에 있는 형벌 수용소에서 강제 노역을 시켰습니다. 정치범들은 ‘악마의 섬’에 가두었는데, 그곳에서 단지 소수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러한 정치범 수용소들은 오래 전에 폐쇄되었습니다. 지금은 쿠루가 유럽 위성 발사 센터의 소재지입니다. 프랑스령 기아나는 유럽으로부터 71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지만, 여전히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한 행정 구역 즉 프랑스 해외 행정구이며, 따라서 유럽 연합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 금의 도시가 있다는 전설이 월터 롤리 경에 의해 전해진 지 거의 300년이 지난 19세기 후반에 드디어 금이 발견되었습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도, 1920년대에 와서는 금에 열광한 사람들이 1만 명가량이나 일확천금을 꿈꾸고 강우림 깊숙이 뚫고 들어갔습니다.

그 후 다른 사람들이 이곳에 왔는데, 그들 역시 프랑스령 기아나의 혹독한 생활 여건을 감내하는 데 필요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개척자들이 온 것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성서 진리의 씨가 뿌려지다

이 용감한 개척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은 병과 죽음을 끝내고, 모든 민족의 사람들이 형제로서 함께 살도록 도우며, 이 땅을 낙원으로 만들 하느님의 목적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사야 2:3, 4; 25:8; 33:24; 계시 7:9, 10)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끝이 오기 전에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이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에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언하신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 24:14) 이 중요한 복음 전파 활동이 프랑스령 기아나에 이른 때는 1946년이었습니다. 프랑스령 기아나에 처음 온 여호와의 증인들은 대부분이 과들루프나 마르티니크와 같은 프랑스 해외 행정구들이나, 서쪽으로 인접한 네덜란드령 기아나(현재의 수리남)에서 왔습니다.

진리의 씨를 처음으로 심은 사람은 과들루프에서 온 열심 있는 봉사자 올가 라알란드 형제였습니다. 1945년 12월에, 그는 프랑스령 기아나의 내륙으로 마나 강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어머니와 친동생들을 방문하기 위하여 여행을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사는 마을에 이르기 위해서는 카누를 타고 강을 따라 며칠을 가야 하였습니다. 가는 길에 그는 벽이 없고 야자나무 잎을 얹은 작은 초가집에서 유숙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전파하고 성서 서적을 전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사는 마을인 오수브니르에 도착해서, 그는 집안 사람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아연실색하게도, 그들은 그를 악귀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1946년에 그는 예수의 죽음의 기념식을 거행하였는데, 친동생들만 청중으로 참석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의 어머니는 그곳 사제의 부추김을 받아 아들을 쫓아내면서, “악귀들은 이곳 내 집에서 살 수 없다!”고 소리질렀습니다. 어머니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그의 열심은 식지 않았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그는 광산이나 데그라 즉 교역소들에서 머물다 가면서 전파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은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강둑에 있는 한 오두막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열대성 비가 한차례 퍼붓더니, 커다란 나무 하나가 우지끈하는 무서운 소리를 내면서 쓰러졌습니다. 엉겁결에 올가는 강물로 뛰어들었는데, 실은 그 강물에 피라냐라는 살인 물고기가 득실거린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가 해를 입지 않은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가 신통력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확신하였으며, 그래서 그를 추앙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소식을 더 잘 들었습니다.

마침내 라알란드 형제는 주민 800명의 대서양 연안 마을 마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 처음으로 6개월 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그는 집회를 조직하였고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 주는 성서 진리를 열 명의 관심자에게 정기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요한 8:32) 사람들은 별명으로 그를 페르 팔레토(재킷 신부)라고 불렀는데, 이유인즉 그들이 ‘정장 신부’라고 부르는 그 지방 사제와는 대조되게 그는 늘 재킷을 입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라알란드 형제는 서적은 동이 났지만 공개 강연을 하였고,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파하였습니다. 그는 그 지방 교직자와의 열띤 토론도 회피하지 않는, 원기 왕성한 연사라는 평판을 얻었습니다.

어머니를 방문한 지 2년쯤 지나서, 라알란드 형제는 과들루프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전파한 결과로 침례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많은 씨를 심었습니다. 그 열매는 나중에 열릴 것이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일꾼들

1956년에 워치 타워 협회는 수리남 지부에 있는 빌렘 반 세아일에게 프랑스령 기아나로 가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이러합니다. “경비행기를 타고 우리는 생로랑에서 카옌으로 가서 작은 호텔에 3주가량 머물렀습니다. 우리는 「라 비 에테르넬」 [영원한 생명] 책을 가지고 카옌의 상당한 부분을 돌면서, 수백 부를 전하였습니다. 분명히 관심은 있었지만, 우리는 프랑스어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연구를 시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호별 방문에서 우리의 서론은, ‘어제 우리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비행기로 카옌에 도착하였습니다’였습니다. 두 주일이 지나서도 우리는 ‘어제 우리는 카옌에 도착하였습니다’로 시작했는데, 그것이 우리가 프랑스어로 할 줄 아는 유일한 서론이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오래된 극장에서, 우리는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 영화를 상영하였습니다. 해설은 한 남자가 프랑스 방언으로 번역하고 이것을 다시 한 여자가 프랑스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관심은 상당했지만, 그 관심을 어떻게 키워 나갈 것이었습니까?

수리남으로부터 더 많은 증인들이 돕기 위하여 왔습니다. 그들 가운데 파울 나아렌도르프와 세실 피나스 그리고 넬 피나스가 있었습니다. 온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은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습니다.

예기치 않은 근원으로부터도 도움이 왔습니다. 프랑스의 뒹케르크에서 한 가족이 성서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열여섯 살인 아들 크리스티앙 보네카즈만 계속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그 가족이 카옌에 이주하였을 때, 크리스티앙은 자신이 전에 성서에서 배운 것들에 대하여 급우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한 친구가 관심을 나타냈고, 그의 세 누나도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크리스티앙은 협회에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무렵, 그자비에 놀과 사라 놀 부부가 1958년에 길르앗 학교를 졸업하고서 마르티니크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협회는 놀 형제에게 프랑스령 기아나에 가서 그곳에 있는 작은 집단을 도울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여행은 작은 배로 10일이 걸렸는데, 그동안 그자비에는 갑판 위에서 잠을 자야 하였습니다.

카옌에 도착하면서 놀 형제는 관심자들로부터 영접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가 머무는 동안 자기들과 함께 식사하자고 권하였으며, 그가 한 전과자가 운영하는 호텔에서 쾌적한 방을 구하도록 마련해 주었습니다. 매일 놀 형제는 매우 후대를 잘하는 크리스티앙과 그의 가족과 성서를 연구하고 영적인 토의를 하였습니다. 성서 진리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깊어 갔습니다. 몇 주도 안 되어 크리스티앙은 침례받고 싶은 열망을 나타냈습니다. 그의 친구와 두 누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억수 같은 비 때문에 놀 형제는 침례 연설을 예정대로 해변에서 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타고 간 작은 자동차 안에 앉은 채로 그들에게 연설을 하였습니다. 이어서 그들은 물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베푼 첫 침례였습니다.

이 나라에 머무는 동안, 놀 형제는 시간을 야외 봉사에 잘 활용하였습니다. 한 주 만에 그는 가져온 출판물을 거의 다 전하였습니다. 그는 잡지 한 부만을 남겨 두었다가 사람들에게 예약을 맡기 위한 견본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3주 내에 그는 70건의 예약을 맡았는데, 그 가운데는 중국어 예약도 열 건이 넘었습니다. 어떻게 그가 중국어로 용건을 설명할 수 있었습니까? 그는 길르앗 학교에서 찍은 학급 사진을 보여 주면서 그 학급에 있던 중국 학생들을 가리키고, 그리고는 수많은 몸짓을 사용하였습니다. “그게 효과가 있었던 겁니다.” 그의 말입니다. 그가 증거한 사람들 가운데는 미셸 발라르도 있었는데, 그의 동생은 사제였지만 그는 이 나라 내륙에서 금을 찾아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놀 형제가 떠난 뒤에는 크리스티앙 보네카즈가 그곳 카옌에서 작은 집단의 활동을 인도하였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직후 1960년에, 과들루프에 있는 지부가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활동을 감독하도록 임명받았습니다. 이제 좀 더 정기적인 도움을 받아서 참으로 유익하였습니다! 기초는 이미 놓여 있어서, 이제는 점진적으로 세워 나가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목적으로, 1960년에 옥타브 텔리즈가 마르티니크로부터 파견되어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우리 잡지를 예약한 사람들과 다른 워치 타워 출판물을 받은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갔습니다. 같은 해에 역시 마르티니크에 있던 테오파니 빅토르가 프랑스령 기아나로 이주하여 봉사하였는데, 머지않아 그 자매도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보다 전인 1954년에 반 파르도라는 네덜란드 사람이 마르티니크 태생의 아내와 함께 수리남의 파라마리보로 이주하였는데, 그곳에서 그의 아내가 증인들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다음해 그 부부는 생로랑으로 이주했는데, 그곳은 수리남과 프랑스령 기아나를 가르는 마로니 강 바로 건너편이었습니다. 수리남에서 두 증인 피나스 형제와 리브레토 형제가 석 달에 한 번씩 카누로 마로니 강을 건너와서 5년가량 그 부부가 여호와와 그분의 요구 조건에 관한 지식에서 자라도록 도왔습니다. 1960년 12월 수리남의 파라마리보에서, 워치 타워 세계 본부로부터 밀턴 헨첼이 방문한 기간에 열린 대회에서 반 파르도 부부는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온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1961년 5월, 과들루프에서 지부 감독자인 니콜라 브리사르가 카옌에 있는 16명의 전도인을 방문하여 그곳에서는 처음 열리는 순회 대회에 참가하였습니다. 대회 후, 그는 영화 “신세계 사회의 행복”을 250명의 관객에게 상영하였습니다. 그는 놀라운 반응에 고무되어 다른 영화—“활동하는 신세계 사회”—를 더 상영하였습니다. 그 영화들을 생로랑에서 상영할 때에도 그처럼 훌륭한 반응이 있었습니다. 생로랑의 부시장은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내 생전 처음으로 그와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형제들과 악수하면서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의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시민 회관 사용 허가를 시장에게 요청해 봤습니까? 내가 그 문제를 내일 거론하겠소.” 허가가 나왔는데, 영화를 상영할 뿐만 아니라 매일 저녁 성서 공개 강연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총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잊지 못할 방문 기간에 협회 영화도 보고 성서에 근거한 연설도 들었습니다. 그 부시장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신들과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당신들, 여호와의 증인들 말이오.” 약 2년 뒤인 1963년 3월에, 여호와의 증인의 첫 회중이 카옌에 설립되었습니다. 집회는 도시 외곽으로 프티모나코라는 곳에 있는 한 작은 집에서 열렸습니다.

진리가 그들에게 이른 경위

그 첫 회중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실베스트르 형제와 자매가 있었는데, 부부가 다 마르티니크 태생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까? 1952년의 어느 날, 실베스트르 부인이 식품 가게에 가고 있는데, ‘마귀의 섬’의 한 이전 수감자가 부인을 보더니 책 몇 권을 남편에게 갖다 주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인은 그 사람이 그 책들을 어디서 구했는지 몰랐지만, 그 책들은 워치 타워 출판물이었습니다. 남편이 그 책들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집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 자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탁자 위에 그 책들을 내려놓다가 보니까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는 제목이 눈에 띄더군요.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 책에 즉시 관심이 쏠렸습니다. 남편이 집에 왔을 때, 나는 남편에게 내가 하느님의 이름에 대해, 우상 숭배에 대해 그리고 금단의 실과가 실제로는 무엇인지에 대해 읽어 본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답니다. 그전에는 그런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거든요. 나는 즉시 이것이 진리라는 걸 확신하였습니다. 당장 나는 예배 참석을 그만두었지요. 증인들을 만나 본 적은 없었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배워 알게 된 내용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하였고, 또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어 보라고 권했답니다. 그로부터 9년 후, 테오파니 빅토르라는 부인이 우리 집 문간에 와서 내게 「깨어라!」 잡지 두 부를 전하더군요. 나는 그 부인이 나갈 때, 어느 종교에 속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연합회’라고 대답하더군요. ‘저런’ 하면서 내가 소리쳤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지금까지 9년 동안이나 기다려 왔는데! 나와 시간 약속을 해 줄 수 있어요?’” 시간이 지나, 이 부인과 남편은 여호와를 숭배하기 위해 확고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일찍이, 일하는 곳에서 그자비에 놀의 방문을 받았던 미셸 발라르도 이 나라에 증인들이 몇 사람 되지 않을 때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증인들이 여는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그는 자신이 품고 있던 의문점들에 대해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빅토르 자매가 그에게 성서 연구를 제의하자 그는 즉시 이를 수락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 잔은 그에 대해 몹시 언짢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밖에 나가서 연구를 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렇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이 배우고 있는 것이 진리라고 확신하게 되었고, 그것을 아내에게 전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아내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잡지 기사들을 선택하여, 아내가 보지 않을 수 없는 곳에 두었습니다. 마침내 잔도 성서 연구를 하기로 동의하였고, 1963년에 두 사람은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의 자녀들 역시 진리를 받아들여, 그 가운데 장 다니엘 미쇼트(잔이 미셸 발라르와 결혼하기 전에 둔 아들)는 지금 지부 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령 기아나 출신의 젊은 교사 폴 숑 윙이 증인들과 접촉하게 된 것은 프랑스 유학 시절이었습니다. 그는 세상 상태와 사람들의 태도로 인해 환멸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프리메이슨단에 귀의했는데, 그를 괴롭히고 있던 문제들에 대한 답을 거기서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진리가 어딘가에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하곤 했으며, 그래서 진리를 찾아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과 접촉하자 진리를 발견하였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프랑스령 기아나로 돌아오는 즉시 그는 미셸 발라르와 접촉하게 되었고, 참으로 반갑게도 자기 집 바로 근처에 왕국회관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1964년에 침례를 받았고, 그의 아내는 그 다음해에 받았습니다. 그는 빠르게 진보하였습니다. 회중에서 유능하고 자원하는 남자들이 절실히 필요하던 참이라, 그는 만 1년 만에 회중의 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회중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지금은 지부 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격지 전도인들을 돕는 일

카옌에 있는 회중은 성장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곳의 전도인들은 자기들의 노력을 그 지방 구역에만 국한시키지 않았습니다. 카옌의 형제들은 주기적으로 주말 방문을 마련하여 생로랑·마나·이라쿠보에 있는 격지 전도인들의 작은 집단들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런 여행을 하는 데는 일정이 빡빡하였습니다. 먼저 그들은 카옌에서 차를 타고 해안을 따라 수리남과의 국경에 있는 생로랑으로 갔습니다. 토요일 오후 여섯 시에 공개 강연과 「파수대」 연구를 포함하는 집회를 열었습니다. 하룻밤을 머문 다음에는, 북쪽으로 달려가 마나에서 오전 여덟 시에 집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카옌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길가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그들은 이라쿠보에 들러 오후 세 시에 같은 내용의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는 카옌으로 돌아왔습니다.

눈코 뜰새 없는 마라톤 주말이었지만, 그 일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습니다. 그 여행은 가는 데만도 250킬로미터나 되는 여정이었습니다. 도로는 붉은 흙 길인데다 파인 데도 많았습니다. 열대성 호우가 내리고 나면, 도로는 범람하였고 때로는 물이 1미터나 차기도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몇 시간을 기다렸다가 물이 줄어든 다음에야 계속해서 갈 수가 있었습니다. 대여섯 대의 차량이 대열을 이루어 함께 다닐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도로에 파인 데가 너무 깊어서 차들이 빠져 꼼짝달싹 못하기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형제들은 숲에 가서 작은 나무들을 잘라다가 나무줄기들을 파인 곳에 얹어 놓아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모두가 차를 밀어냈습니다. 첫 번째 차가 커다랗게 파인 데를 통과하고 나면, 다음 차를 끌어내는 데 그 차를 사용하였습니다. 쿠루와 마나에서 나룻배를 기다릴 때에도 시간은 지연되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형제들은 모기의 공격을 받지만, 그러면서도 그 시간을 활용하여 통행인들에게 잡지를 제공하였습니다.

격지 집단의 전도인들은 이러한 방문으로 크게 세움을 받았으며, 그들이 나타내는 감사의 표현은 여행 중에 겪는 그 어떤 문제도 상쇄하고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 유익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카옌에서 온 형제들도 방 파르도 형제 부부, 팡탕 자매, 바르트뱅 자매 그리고 데프레타 자매가 나타내는 후대와 열심에 크게 격려받았습니다. 그 후 과들루프로부터 플레로 형제 부부가 와서 이 지역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도록 마련되었으며, 그들은 관심을 키워 나가는 데 훌륭한 일을 하였습니다. “모든 나라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라는 예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함에 있어, 여호와의 증인은 프랑스령 기아나에 있는 사람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마태 28:19.

진보—더디지만 확실하였다

1970년에는 카옌 회중에 129명의 전도인이 있었고, 격지 집단이 생로랑과 쿠루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 수는 적었어도 여호와의 증인은 이 나라에서 잘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진보는 더뎠습니다. 다시 10년이 지나서야 이 나라에서 왕국 선포자 수는 두 배가 되었습니다.

영적인 진보는 일부 사람들이 제명 처분 및 회개에 관한 성서의 교훈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관계로 저해되었습니다. 전도인들 사이에 분열이 나타났습니다. 장로의 회가 내린 결정을 지지한 사람도 있었고, 지지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과들루프에서 온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이 문제에 관하여 통치체로부터 온 교훈을 형제들과 함께 검토하였습니다. 여호와의 통로를 통하여 온 지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전도인들의 영에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요인은 우리가 카옌에서 행하는 전파 활동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였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매우 영향력이 컸습니다. 교직자들은 증인들을 멸시하였고, 증인을 반대하도록 그들의 양 떼를 부추겼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형제들은 주춤하지 않았습니다. 실로 그들의 열심은 지역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이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증인들은 그 집 뒤편으로 돌아가서 사람이 뒤뜰에 숨어 있지나 않은지 찾아보곤 하였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재림론자를 만나면 안식일에 관하여, 복음주의 교회 성원을 만나면 지옥 불과 영혼불멸에 관하여 열띤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런 토론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기도 하였습니다!

마르티니크로부터 순회 감독자로 일하기 위하여 여행을 오던 다비드 모로는 그런 논쟁 한 가지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가 한 젊은 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제칠일 재림교의 목회자 한 사람이 와서 토론에 가담했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관해 이야기하자고 주장하더군요. 우리 형제 비르고는 자신은 하느님의 왕국에 대해 이야기하러 온 것이라고 말했지만, 토론은 어느새 안식일 쪽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목회자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겁니다. 다가올 낙원에서도 안식일은 여전히 지킬 겁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이사야 66:23을 인용하더군요.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이제 비르고 형제가 목회자에게 질문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 의하면 지난 수요일은 무슨 날이었습니까?’ 목회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몇 가지 대답을 시도해 봤지만, 지난 수요일과 그 성구를 연결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은 월삭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보세요! 여러분은 안식일은 지키면서 월삭은 잊어버린 겁니다! 여러분은 성서로부터 가장 작은 글자 하나보다 큰 것을 제거하고 있는 겁니다.’” 비르고는 나중에 다비드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봉사하러 나갈 때마다 달력을 보고서 월삭 즉 신월이 언제인지 확인하는데요, 그건 재림론자를 만날 것에 대비해서입니다.”

형제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옹호하는 데 노련해지기는 했지만, 어떤 형제들은 양 같은 사람을 찾아내는 일보다 논쟁에서 이기는 일에 더 치중하고 있었습니다. 일반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증거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였고, 여호와께서는 필요한 도움을 베푸셨습니다.

선교인들이 내륙을 개척하다

1970년대 말, 길르앗 학교에서 훈련받은 선교인들은 물론, 프랑스에서 직접 선교 봉사 임명을 받은 파이오니아들이 프랑스령 기아나에 도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회중들을 훈련시키고 강화하는 중요한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좀 더 재치 있고 효과적으로 증거하는 법을 가르침받았습니다. 선교인들은 또한 이 나라 여러 언어 집단에 전파하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서 이 나라 형제들도 그들을 본받아서, 영어·포르투갈어·스라난어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어의 일종인 갈리비어를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재 프랑스령 기아나 지부는 배부 서적을 18개 언어로 공급합니다.

1991년 4월 조나답 라알란드와 그의 아내는 둘 다 길르앗 학교 졸업생으로서 뉴칼레도니아에서 봉사하던 중에, 회중을 강화하도록 쿠루 지역에 임명되었습니다. 조나답의 아버지 올가 라알란드도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초창기에 성서 진리의 씨를 뿌린 바 있습니다. 280명이 넘는 전도인이 지금은 쿠루에서 여호와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선교인들은 또한 새로운 구역을, 특히 접근하기 어려운 내륙에서 개척하는 데 선두에 서서 노력하였습니다. 그런 일을 하려면 말라리아와 같은 열대병에 노출되고, 뱀과 마주치고, 곤충 떼를 견뎌 내며, 격지 마을에 이르기 위해 세찬 강물과 위험한 여울을 헤쳐 나가고, 폭우와 진창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춤하지 않았습니다.

엘리 르갈라드와 뤼체트 르갈라드 부부는 카옌과 생로랑에서 훌륭한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 부부는 또한 이 나라의 서부 국경을 이루는 마로니 강 상류 지역의 전혀 손댄 적이 없는 구역에서 활동하였습니다. 형제들과 작은 집단을 구성하여, 그 부부는 생로랑에서 마리파술라까지 모든 강변 마을들로 3주간의 전파 원정에 나섰습니다. 이 여행은 성원 한 사람이 심한 말라리아에 걸리는 바람에 생로랑에서 치료받느라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륙으로 들어가는 전파 운동은 재개되어 그곳 주민들이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금을 찾던 19세기의 탐험가들이 세워 놓은 마을인 생텔리에 도달하려면, 해안에서 시나마리 강을 따라 이 나라의 중앙부를 통과하는 카누 여행을 일곱 시간 동안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등에 무거운 자루를 메고서 밀림 속으로 이틀간 30킬로미터를 걸어가야 합니다. 그곳에 가서 증거하려면 누구나 3일분 식품에다 충분한 수량의 서적을 가져가야 합니다. 밤이 되면 짐승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불을 피워야 하고, 달아매는 그물 침대도 아마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프랑스에서 파견된 두 선교인 에리크 쿠지네와 미셸 부케는 그러한 여행을 해서 150명의 주민에게 철저한 증거를 했을 때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들이 머무는 동안 행한 환등 강연에 2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바로 이 사람들 가운데서 형제들은 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애쓰고 있던 파넬리를 만났습니다. 그 여자는 전에 로마 가톨릭교인이었습니다. 근년에는 재림교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가 속해 있던 종파에서는 아무도 생텔리에 사는 그를 찾아와 준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성서 통신 교육 과제물을 우편으로 제출하곤 하였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는 증인을 만났을 때, 그들만이 생텔리와 같은 외딴 곳에 사는 사람들을 방문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파넬리는 형제들과 1주일 동안 매일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6개월간 도시로 이사하였습니다. 그 기간에 매주 세 번씩 연구를 하였습니다. 마을로 돌아왔을 때는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파넬리는 증인이 아닌 남편과 어린 자녀 다섯을 돌보고 있었지만, 진리에 대한 열심으로 인하여 매달 40시간 이상을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데 바쳤습니다. 그는 또한 관심자들을 위하여 집회를 조직하는 일에도 기여하였습니다. 그가 기념식을 마련하였을 때 4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그 이후 파넬리는 해안 지대로 이사하였지만, 계속 봉사에 활동적입니다. 그는 딸들 중 한 명이 막 침례를 받았고 이제는 남편도 연구하고 있어 기뻐합니다.

이 나라 동부에 있는 코·와나리·파바르 역시 선교인들의 발길이 처음 닿은 고장들입니다. 쿠지네 형제는 1987년에 이 나라의 몇몇 증인들과 함께 그 지역으로 처음 전파 여행을 가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룻배를 타고 간 다음, 붉은 흙 길 40킬로미터를 달려 어떤 늪지대에 도착하였습니다. 차를 멈추었을 때 무시무시한 포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쿠지네 형제는 틀림없이 재규어가 이제 막 공격해 올 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동행하던 형제들은 쿠지네 형제를 안심시키면서 그것은 그들이 다가오는 바람에 당황한 일단의 울음원숭이들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찾고 있던 한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 부부는 카옌으로 이사하여 발전해서 침례를 받았으며, 지금은 프랑스령 기아나의 포르투갈어 밭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점차, 여러 다른 격지 구역들도 찾아갔습니다. 그랑상티·파파이시통·사윌 역시 선교인들이 맨처음 방문해서 유익을 얻은 고장들 가운데 속합니다. 전에 전파된 적이 없는 구역들 대부분을 지금은 왕국 전도인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있습니다.

마리파술라에서 전파하다

마로니 강 상류 지역에서 매우 중요한 마을인 마리파술라는 일찍이 1963년에 왕국 소식이 들어간 곳입니다. 당시 성서 연구생이던 아드리앙 장-마리는 직업상의 이유로 1년에 세 번씩 그곳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진리에 대한 열정이 솟구쳐서, 그 기회를 철저히 증거하는 데 이용하였고 또 항상 많은 성서 출판물을 남겨 놓았습니다.

다른 전도인들 역시 마리파술라에서 증거하였지만, 스라난어를 사용하는 그 고장 주민들과 의사소통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고장 사람들이 ‘타키-타키’로 알고 있는 스라난어는 영어를 기초로 하면서 네덜란드어·포르투갈어·프랑스어와 여러 아프리카 및 인도 언어의 성분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수리남 지부는 스라난어를 하는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마리파술라에 3개월 내지 6개월 동안 파견해 보았지만, 그 고장 주민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 결국에는 형제들이 수리남에서 온 외국인들이라는 구실로 마을에서 쫓겨났습니다. 실은 그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코르넬리 랭게와 엘렌 랭게 부부가 1992년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파견되어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스라난어를 알고 있어서 전파하기가 매우 수월하였으며,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어서 주민들이 더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매주 3일 동안은 마리파술라에서 전파하고, 다음 3일 동안은 마리파술라에서 카누로 한 시간 거리인 파파이시통 마을에 가서 증거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마리파술라에 있는 그들의 집에서 집회를 열었습니다. 2년간 활동한 후, 여덟 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이 부부는 이 격지 구역에서 꾸준함을 나타냈습니다. 사람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허다한 문제들에 직면하면서도 인내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참을성은 보람을 거두어 두 개의 회중이 형성되었습니다.

성서의 소식에 호응한 사람으로 앙투안 타파니에가 있는데, 그는 정령 숭배 사회에서 최고 권위자인 그랑 망의 근친이기 때문에 지역 사회에서 유지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타파니에는 내연의 처가 둘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 강 유역에서는 흔한 관습입니다. 그래서 타파니에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입장에 서게 되자, 두 여자 중 하나와 결혼을 하든지 아니면 독신으로 남든지 일생일대의 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집에 살고 있던 두 여자는 그가 자기들 둘 중 한 사람을 택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한바탕 심하게 싸웠습니다. 지금 앙투안 타파니에는 침례받은 행복한 증인으로 한 아내와 함께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다른 여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얼마쯤 지난 뒤 그 여자도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해서 지금은 침례받은 여호와의 종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인식이 이 지역에서 자랐습니다. 한 지역 단체는 증인들에게 집회 장소를 무료로 3년간 사용하게 해 주었습니다. 왕국회관을 지을 때가 되자, 이 지지자들은 함석판을 절반이나 기증하였습니다. 다른 지역 단체는 텔레비전 방송국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나와 있던 워치 타워 협회의 비디오 다섯 가지를 방영해 주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그 이름을 지닌 조직」 비디오는 마을 주민들에게 특히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증인들은 과거에 적대적이던 이 지역에서 이제는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1993년에 와서는 마리파술라와 파파이시통 두 곳에 다 왕국회관이 생겨, 이 마로니 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은 왕국 소식을 정기적으로 들을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야포크 강을 따라

오야포크 강이 프랑스령 기아나와 브라질 사이를 흐르는 이 나라 동쪽 국경 지대에서는 어떤 일이 수행되고 있었습니까? 1973년에 아드리앙 장-마리는 생조르주 시에서 훌륭한 증거를 하였습니다. 그의 첫 방문은 3일간 지속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그는 다시 두 번 찾아왔으며, 20명이 참석하는 공개 집회를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몇 건의 성서 연구를 서신 왕래로 시작하였는데, 연구생들이 편지를 쓰는 데 익숙하지 않은 탓으로 좋은 성과를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같은 강 연안의 부시니그로 마을 탕파크에서도 장-마리 형제는 성서의 소식에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찾아냈습니다.

10년 후인 1983년에, 에티에니즈 망데와 자클린 라피토가 이 격지에 파견되어 더 증거하고 관심자들을 도왔습니다. 가능할 때는 카옌에서 형제들이 주말에 비행기 편으로 생조르주에 와서 이 자매들과 함께 야외 봉사에 참여하고 공개 강연도 마련하여 그들을 지원하곤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열매가 분명히 나타나기까지는 많은 참을성이 요구되었습니다. 망데 자매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내가 몇 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했는데요, 얼마 되지 않아서 지방 사제가 우리의 활동을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더러 말하더군요. ‘사제가 우리에게, 증인들은 마귀의 앞잡이니까 당신들에겐 관심도 기울이지 말고 집 안으로 들이지도 말라고 했어요.’ 내 연구생 중 몇 사람도 연구를 중단했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꾸준함을 나타내자 결과는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미셸 부케와 특별 파이오니아인 리샤르 로즈도 그 지역에서 진리에 관심을 증진시키는 데 한몫하였습니다. 생조르주에서 많은 증거가 행하여졌지만, 1989년부터 그들은 그 지역 바깥에 있는 구역에 집중하도록 임명받았습니다. 최근에 로즈 형제는 아내와 함께 프랑스령 기아나로부터 길르앗 학교에 초대되는 첫 파이오니아들이 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 부부는 지금 아이티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일단 오야포크 강의 프랑스령 기아나 쪽 연안에 발판이 구축되자, 강 건너 브라질 쪽의 작은 구역에서도 활동 마련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이아포크라는 도시는 인구가 1만 명인데, 생조르주로부터는 카누로 약 20분 거리입니다. 형제들은 생조르주보다 오히려 그곳에 관심이 더 많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자, 그 구역에 집중하였습니다. 모로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한 가게의 뒤편에서 유숙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유숙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자기도 ‘자매’라고 하는 한 싹싹한 부인이 우리에게 잠자리와 몸 씻을 큰 물통을 제공해 주고 있었습니다. 아내 마릴렌이 물에서 냄새가 난다고 투덜거리자 그 고장의 젊은 파이오니아들은 웃어 댔습니다. 모두들 뒤뜰 어둠 속에서 몸을 씻고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우리는 깜짝 놀랄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물통 속에 커다란 쥐가 빠져 죽어 있다가 물 위로 떠올라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일로 그들이 봉사의 직무에서 누리고 있던 좋은 경험들이 무색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 오이아포크에서 부케 형제는 한 필지의 대지를 매입하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와 로즈 형제는 카옌에서 온 다른 파이오니아들 및 형제들과 함께 일하여, 80석의 왕국회관과 부속 숙소를 건축하였습니다.

1990년대에는, 특별 파이오니아인 다 코스타 형제 부부가 오이아포크로 와서 활동을 지원하였습니다. 그 부부는 모든 학교를 방문하여 실용적인 책인 「청소년은 묻는다—질문과 효과있는 대답」을 교장들에게 전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 부부는 또한 이 책을 모든 학생들에게 전하도록 허락을 구하였습니다. 허락이 났습니다. 책의 내용에 대해 전해 듣고는 모든 학생과 모든 교사가 책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부부는 250부를 전하였습니다.

다 코스타 형제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우리는 이 지역 군부대 지휘관과 의미 깊은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지식」 책 한 부를 전하였습니다. 지휘관은 그 책을 받고서, 그 부대 장병들의 음주와 부도덕을 다루는 문제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우리는 장병들에게 강연을 마련하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지휘관은 그 생각이 좋다고 하면서, 그 다음주에 소규모 인원을 집합시킬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우리가 강연을 하려고 가서 보니, 군인이 140명이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강연 내용에 주의를 집중하였습니다. 우리는 70부의 잡지를 전했습니다. 그 이상 가져가지 않았던 것인데, 그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 모임에 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마련은 여러 주일 계속되었습니다. 그 군인들은 한 기지에 오래 머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 대부분과 접촉을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긴 했어도, 도움을 받은 데 대해 여러 사람이 좋은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로자라는 젊은 여자가 브라질에서 증인들과 성서 연구를 했었지만, 좋은 소식에 온전한 반응을 나타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프랑스령 기아나의 금광에서 일하면 많은 돈을 벌 기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자기 집과 성서 연구를 팽개치고 프랑스령 기아나에 불법 입국하려는 의도로 오이아포크에 도착하였습니다. 삼림 깊숙이 금광에서 남자들 가운데 산다는 것이 여자에게 안전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 여자는 광산으로 떠나기 전에, 오이아포크에서 염려하는 한 자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상황을 재고해 보았습니다. 그 여자는 마태 6:25-34에 나오는 성서의 교훈에 깊은 감동을 받고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로자는 여호와께 헌신하고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몇 년간의 별거 끝에, 그 여자는 남편과 재결합하였습니다.

지금은 오이아포크에 전도인 25명의 회중이 있습니다. 생조르주에서 다섯 명의 전도인의 노력도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한 생조르주 주민은 장 르네 마투랭이었습니다. 지금 그는 봉사의 종으로, 그리고 그의 아내는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기쁨을 주는 대회

성서 시대에 여호와의 숭배자들은 숭배를 위하여 정기적으로 모이라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신명 16:1-17)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대회들은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여호와의 현대 숭배자들에게도 주요 행사였습니다. 전도인 수가 소수였을 때에도 형제들은 대회를 조직하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한 형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960년대에는 우리 지역 대회가 팔 일간 열렸습니다. 성서 드라마도 네 가지였고요. 배우들은 자기 대사를 암기해야 하였고, 몇 명 안 되는 전도인들이 하느라고 진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다행히도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로부터 여러 형제들이 와서 대회를 지원해 주곤 했죠.” 그들이 와 준 것을 형제들은 깊이 감사하였습니다. 이 나라 형제들 대부분이 공항에 나가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로부터 도착하는 대표단들을 영접하곤 하던 때를 아직도 많은 형제들이 흐뭇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임은 참으로 기쁜 행사였습니다. 대회마다 영적 잔치였고, 형제들은 여호와께서 “너희는 ·⁠·⁠· 너희 하느님 여호와 앞에서 칠 일 동안 기뻐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심정이었습니다.—레위 23:40.

경험이 많은 형제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그들은 대회를 조직하는 일을 맡아 하고 연설을 하였으며, 종종 여러 드라마에 겹치기 출연을 하였습니다. 한 형제가 세 드라마에 나오면서 대여섯 가지 연설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점심 시간에 영양가 있는 식사를 준비하여 제공하는 마련으로 일은 더 많았습니다. 식단에는 때때로 돼지·도마뱀·아구티(들쥐)·거북·아르마딜로도 올랐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대회 기간에, 형제들이 식탁에 올리기 위하여 사냥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아야 하였습니다.

대회 모임 장소를 찾는 일은 언제나 도전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초창기에는 발라르의 집을 사용하였습니다. 형제들이 그 집 뜰에다 간이 건물을 지었는데, 해마다 그 간이 건물을 연장하여 늘어나는 청중을 감당해야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청중이 200명이 넘자, 더 넓은 장소를 물색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임대로 구할 수 있는 장소가 핸드볼 경기장이나 농구장밖에 없었습니다. 형제들이 무대를 만들고, 참석자들이 앉을 의자는 각자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형제들은 그러한 상황을 긍정적인 태도로 보았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자기 자리를 노인에게 양보하기를 결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양보하고 나면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여러 해 동안 댄스홀을 대회장으로 빌렸습니다. 토요일 회기가 끝나면 형제들은 실내를 재빨리 치워야 하였습니다. 밤새도록 계속될 댄스를 준비하려고 악사들이 이제 막 도착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침 일찍, 형제들은 다시 가서 실내를 청소하고 일요일 오전 회기를 열 준비를 하였습니다. 물론 그곳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종교 집회를 열기에 적합하다고 여길 만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형제들이 그런 댄스 홀인 ‘귀야나 궁’이나 ‘오 솔레이 르방’ 또는 ‘오 카나리’에서 모였을 때, 그로 인해 구역 주민들로부터 조롱을 샀습니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이러한 장소들도 증가하는 대회 참석자 수를 수용하기에는 더 이상 충분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결국, 형제들은 마르티니크나 과들루프에 있는 대회 회관을 본떠서 자체 대회 회관을 짓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철근 골조 위에 함석 지붕을 얹는 것이었습니다. 1000명가량을 수용할 정도로 크면서도, 용이하게 해체할 수 있어야 하였습니다. 다음 단계로 할 일은 이 대회 회관을 세워 사용할 부지를 물색하는 것이었습니다. 장-다니엘 미쇼트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대지의 일부를 제공하였습니다. 이 마련은 몇 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엄청난 건축 공사 계획

진리에 대한 관심이 자라면서 더 큰 대회 회관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2000석의 대회 회관을 건축할 수 있는 크기의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년 동안을 알아본 끝에, 그들은 위치도 좋고 가격도 적당한 3헥타르의 부지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나라 형제들은 건축 공학과 공사에 필요한 경험이 없었으므로, 프랑스 지부에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건축 계획의 구상은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 계획은 1993년에 이행되었습니다. 공사 내역은 2000제곱 미터의 대회 회관, 다섯 채의 왕국회관, 세 채의 특별 파이오니아 숙소 및 세 채의 선교인 집을 망라하였는데, 그 모든 시설이 단 8주 만에 완공되었습니다!

많은 자재가 프랑스로부터 32개의 대형 콘테이너에 실려 발송되었습니다. 트랙터·트럭·버스·콘크리트 블록·함석판 등의 건축 용품은 물론 다량의 식품까지도 배에 실려 왔습니다. 프랑스 국내의 여러 지역 건축 위원회가 이 건축 공사에 관여하여 매우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건축 공사가 진행되면서 약 800명의 형제 자매들이 자비로 프랑스로부터 와서, 네 곳의 건축 현장에서 500명의 국내 형제 자매들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서쪽 끝에 있는 공사 현장은 동쪽 끝에 있는 현장으로부터 25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서 원활한 의사소통이 필요하였습니다. 프랑스 형제들은 그 2개월 기간 중 교대로 왔는데, 한때는 500명이 프랑스에서 와서 422명의 국내 형제들과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모든 일꾼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일은 도전이 되었습니다. 많은 국내 가족이 프랑스 일꾼들을 두세 명씩 접대하여, 호텔에 머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일꾼들에게는 교통편도 필요하였습니다. 한 형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직장에 가는 길에 우회하여 일꾼들을 현장에 내려 주었고, 직장에서 돌아올 때도 가서 그들을 태워 오곤 했습니다. 우리는 일꾼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된 인원은 마투리에 소재한 대회 회관 (왕국회관 하나도 수용하도록 설계됨) 현장에서 일하는 한편, 시나마리에서는 다른 형제들이 왕국회관 한 채와 작은 선교인 집 한 채를 짓고 있었습니다. 마나에서는 또 다른 왕국회관 한 채와 선교인 집 한 채를 건축하고 있었습니다. 마나의 스라난어권 지구에서는 왕국회관 한 채와 부속 건물인 특별 파이오니아 숙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생로랑에서는 330석의 왕국회관과 6인용 선교인 집 한 채를 지었습니다. 두 회중이 그곳에서 집회를 갖습니다. 이 큰 왕국회관은 스라난어 대회용으로도 사용되고 있는데, 그 참석자 수는 종종 600명 선에 육박합니다.

이 초대형 건축 과제가 이룩된 후, 일부 프랑스 형제들은 프랑스령 기아나에 정착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건축 기술로 공헌한 데 이어, 장로·봉사의 종·건축 위원회 성원으로 봉사함으로써 회중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후에 그들 중 일부는 새로운 지부 시설들을 건축하는 데 참여하였습니다.

지부 사무실의 필요성

프랑스령 기아나 지부는 1990년에 수도 근처의 도시 몽졸리의 한 셋집에서 업무를 개시하였습니다. 다비드 모로가 지부 위원회 조정 위원으로 일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1981년에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뒤 마르티니크에서 봉사하는 동안, 그는 종종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업무를 임명받아 수행하곤 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지부 위원회에는 장-다니엘 미쇼트, 폴 숑 윙, 에리크 쿠지네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크리스티앙 벨로티가 그들과 함께 일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회중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소상히 아는 장성한 형제들을 통하여 자국 내에서 인도를 받게 되어 깊이 감사하였습니다.

지부가 형성되던 당시 이 나라에는 173명당 한 명의 왕국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전도인 660명 가운데는 이 나라 여러 지역에 임명된 선교인 14명도 들어 있었습니다. 전도인 수가 계속 증가—어떤 해에는 18퍼센트나 증가—하여 좀 더 적합한 사무 시설을 물색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1992년에 지부 사무실은 카옌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마투리로 옮겨 갔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에 통치체는 좀 더 우리의 필요에 맞는 건물을 건축하도록 승인하였습니다. 새로운 복합 건물을 실제로 짓기 위하여 2년 동안 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형제들은 참으로 기뻐하게 되었고, 훌륭한 증거도 행해졌습니다!

봉사의 직무의 도전

이 나라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는 수고와 자기 희생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진실한 성서 연구생들은 이 점을 관찰합니다. 그러한 연구생 가운데 한 여자는 자신과 연구하는 증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저는 댁이 제게 나타내는 사랑과 정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 달 동안, 비가 오는 날에도 정기적으로 오셔서 제게 좋은 소식에 관한 지식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보답으로 일요일마다 집회에 나가겠습니다.” 그 여자는 말 그대로 했으며, 심지어 몇몇 친구를 데리고 오기까지 하였습니다.

때때로, 연구를 사회할 곳까지 가기 위해서 전도인들은 도랑 위에 가로질러 놓은 나무줄기를 타고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무줄기의 일부가 물에 떠 있을 때는 이 외나무 타기가 여간 도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비드 모로가 몸의 평형을 유지하느라 양팔을 벌리고서 한 파이오니아 자매의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철버덩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자매는 기를 쓰고 나무줄기 위로 다시 올라왔고, 도착해서는 더러워진 데를 씻고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습니다.

다른 곳에서, 부케 형제는 카누를 타고서 한 마을에 도착해 보니 마침 조수가 나간 때라 강기슭이 질퍽질퍽한 갯벌이었습니다. 마을을 향해 걸어가면서 그는 무릎까지 개흙에 빠졌습니다. 25미터 정도를 지나서야 드디어 마른땅에 이르렀습니다. 친절한 마을 사람들이 물을 주어 그는 다리를 씻었고, 그리고 나서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접근하는 일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사는 마을들이 오지이고 언어가 다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문명의 폐해로부터 그 영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정부가 일반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체계적인 전파 활동이 그들의 마을에서는 허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 원주민이 생필품을 사기 위해 인근 마을을 찾아올 때면 여호와의 증인은,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에게 재앙인 말라리아를 포함하여 어떤 병도 없는 세상에 대한 놀라운 희망을 그들에게 전해 주고자 노력합니다.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의 경우, 약속을 지키거나 특정 시간에 집회에 참석하는 일은 그들의 사고방식에 일대 전환을 요합니다. 30년 전만 해도, 원주민들은 시계라는 것을 차 본 적이 없었고 무슨 일이든 서두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집회에 정시에 참석한다는 것은 상상도 해 보지 못하던 일입니다. 한 자매는 기도 중에 자신이 도착해서 기분이 좋았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끝나는 기도였습니다! 한번은 선교인이 생조르주에서 전파하다가 한 남자에게 레지나 마을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 멀어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얼마나 걸리는데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흐레만 걸어가면 됩니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견해로 볼 때, 일부 사람들이 진리를 좋아하면서도 하느님을 섬기는 결심을 하는 일을 뒤로 미루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가정생활과 관련해서 부족의 법과 성서 원칙 사이에서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때로는, 여호와의 길로 걷기로 한 그들의 결정이 촌장의 격노를 사기도 하였습니다. 한 마을에서는, 그 지역에서 봉사하던 특별 파이오니아와 그의 아내가 촌장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형 집행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마을에서 도망 나왔고, 그 후 300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임지를 옮겼습니다.

이러한 도전이 되는 일들에도 불구하고, 온갖 배경과 신분의 사람들이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마시십시오”라는 초대에 응하고 있습니다. (계시 22:17) 작년에 최고 전도인 1500명이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참여하였습니다. 그들은 관심자들과 성서 연구를 평균 2288건 사회하였습니다. 4월 19일에는 5293명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는 바는 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224면 전면 삽화]

[228면 삽화]

올가 라알란드

[230면 삽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크리스티앙 보네카즈와 그자비에 놀

[234면 삽화]

미셸 발라르와 잔 발라르 부부

[237면 삽화]

콩스탕스 플레로와 에드모젠 플레로 부부

[238면 삽화]

(1) 강우림 속으로 난 나무를 깐 길, (2) 짐을 지고 가는 에리크 쿠지네와 미셸 부케, (3) 아메리카 원주민 마을

[241면 삽화]

엘리 르갈라드와 뤼체트 르갈라드 부부

[251면 삽화]

8주간의 국제 건축 공사: (1) 마투리에 있는 대회 회관; (2, 3) 마나, (4) 생로랑, (5) 시나마리에 있는 왕국회관 및 숙소들; (6) 프랑스령 기아나의 증인들이 프랑스에서 온 수백 명과 함께 공사에 참여하였다

[252, 253면 삽화]

프랑스령 기아나의 지부 사무실 및 베델 집과 지부 위원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폴 숑 윙, 다비드 모로, 장-다니엘 미쇼트, 에리크 쿠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