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바로 가기

차례 바로 가기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예수께서는 좋은 흙에 심어진 씨에 관한 예를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인식을 발전시키는 사람들을 묘사하셨습니다. 그들은 곤경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소식을 선포하는 일을 충실하게 계속함으로써 “인내로 열매를 맺”습니다. (누가 8:11, 13, 15) 지상에서 이 점이 우크라이나에서보다 더 분명했던 곳은 별로 없습니다. 이곳에서 50년 이상의 금지령과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증인은 살아남아 번창한 것입니다.

2001 봉사 연도 중 이 나라의 최고 전도인 수는 12만 28명이었습니다. 그 중 5만 6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지난 5년 동안에 성서 진리를 배웠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이 형제들은 이 나라 인구와 맞먹는 수인 5000만 부 이상의 잡지를 전하였습니다. 매달 평균, 지부에서는 관심자들로부터 더 알아보기를 원한다는 1000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이 모든 일은 과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입니다. 참으로, 순결한 숭배의 승리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고려하기 전에, 이 나라의 땅부터 고려해 봅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적인 흙 말고도, 우크라이나는 우수한 문자적 토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거의 절반이 기름진 검은 프레리 토(土)로 뒤덮여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그것을 체르노젬이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흑토(黑土)’입니다. 이 토양은 온화한 기후와 함께 우크라이나를 세계 최고 농업 생산 지역의 하나로 만들어, 사탕무·밀·보리·옥수수를 비롯한 농작물을 산출합니다. 고대로부터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곡창 지대로 알려져 왔습니다.

동서가 1300킬로미터, 남북이 900킬로미터에 달하는 우크라이나는 프랑스보다 조금 더 큽니다. 123면의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나라는 동유럽에서 흑해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북부는 삼림들로 수놓여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기름지고 비옥한 평원들이 펼쳐지다가, 아름다운 크림 산맥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서쪽으로 가면, 구릉지대가 험준한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이어지는데, 이곳은 살쾡이·곰·바이슨(들소)의 서식지입니다.

약 5000만 명의 주민이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겸손하고 후대를 잘하며 근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 두 가지를 할 줄 압니다. 그들의 집 안으로 초대를 받게 되면, 아마도 보르시치(사탕무 수프)와 바레니키(삶은 만두)를 대접받을 것입니다. 즐거운 식사가 끝나면 민요로 여흥을 즐길 수도 있는데, 그것은 많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노래와 악기 연주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신앙에 접해 왔습니다. 10세기에 동방 정교회가 들어왔습니다. 그 후 오토만 제국은 이슬람교를 우크라이나 남부에 들여왔습니다. 또 중세기에는 폴란드 귀족들이 가톨릭을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20세기에는 공산주의 치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이 나라 방방곡곡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전까지만 해도 증인들 대부분은 우크라이나 서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이 나라가 네 개의 영토 즉 볼린·할리치나·트란스카르파티아·부코비나로 나뉘어 있었던 것입니다.

진리의 씨가 우크라이나에 뿌려지다

여호와의 증인의 이전 명칭인 성경 연구생은 우크라이나에서 한 세기가 넘도록 활동해 왔습니다. 저명한 성경 연구생인 C. T. 러셀은 1891년의 첫 해외여행 중에 유럽과 중동 지방의 여러 나라를 순방하였습니다. 당시 터키의 콘스탄티노플로 가던 길에, 그는 우크라이나 남부에 있는 오데사를 방문하였습니다. 그 후 1911년에 일련의 성서 강연을 유럽의 주요 도시들에서 했는데, 그 중에는 우크라이나 서부의 리보프 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열차 여행으로 러셀 형제가 리보프에 도착하였을 때, 그 도시에서는 인민당이라고 하는 커다란 홀을 3월 24일로 예정된 그의 강연을 위해서 빌려 놓고 있었습니다. 일곱 개의 지방 신문에 아홉 번의 광고를 내고 대형 포스터들을 게시하여, 모든 사람이 “뉴욕에서 오는 유명하고 존경받는 연사” 러셀 목사의 강연 “예언 속의 시온주의”를 듣도록 초대하였습니다. 러셀 형제는 그날 이 연설을 두 번 하도록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러셀의 활동을 맹렬하게 반대하는 미국의 한 유대인 랍비가 리보프에 있는 그의 동료들에게 성경 연구생들을 비난하는 전보문을 보냈습니다. 그로 인해 선동된 사람들은 러셀이 연설을 못하게 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 홀은 오후에나 저녁에나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었지만, 반대자들도 와 있었습니다. 지방 신문 「비에크 노비」(새 시대)는 이렇게 보도하였습니다. “[러셀의] 통역자가 처음 몇 마디 말을 하자, 시온주의자들이 소란을 일으켜, 그 고함 소리와 휘파람 소리 때문에 그 선교인이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러셀 목사는 연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 시위는 그날 저녁 여덟 시 연설 때 더욱 맹렬하였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러셀 형제가 하고자 했던 연설 내용을 듣고 싶어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러셀의 소식에 관심을 나타내고 성서 출판물을 요청하였습니다. 나중에 러셀 형제는 리보프 방문에 대해 이렇게 술회하였습니다. “이번에 겪은 일과 관련해서 하느님의 섭리가 무엇일지는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 그 문제에 대한 [유대인들의] 소동으로 인해, 일부 사람들은 차분하고 질서 있는 분위기에서 우리의 말을 들은 것보다 더 깊은 조사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소식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없었지만 진리의 씨는 뿌려져서, 나중에 여러 성경 연구생 집단이 리보프뿐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여타 지역들에서도 형성되었습니다.

1912년, 독일에 있는 성경 연구생 사무실에서는 우크라이나에 배포되는 한 달력에 큰 광고를 실었습니다. 그 광고는 독일어판 「성경 연구」 총서를 읽어 볼 것을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독일 사무실은 우크라이나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성경 연구」 및 「파수대」 예약 두 가지를 다 요청하는 편지를 50통 정도 받았습니다. 이 사무실에서는 1914년에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그 관심자들과 접촉을 유지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우크라이나는 네 개의 인접 국가에 분할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중부와 동부 지역은 공산주의 러시아가 점령하여 소련에 합병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서부는 다른 3개국에 분할되었습니다. 할리치나와 볼린 지역은 폴란드에 합병되고, 부코비나는 루마니아에, 트란스카르파티아는 체코슬로바키아에 합병되었습니다. 이들 세 나라는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성경 연구생의 전파 활동도 허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중에 열매를 맺게 될 많은 진리의 씨가 우크라이나의 서부 지역에 처음으로 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처음 싹들

20세기 초, 우크라이나의 많은 가족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성서에 근거한 우리 출판물을 읽고서 우크라이나에 있는 친척들에게 보냈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성경 연구생의 가르침을 잘 알게 되자, 본국으로 돌아와 고향의 마을들에서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개의 성경 연구생 집단이 생겨나, 나중에 회중들로 성장하였습니다. 1920년대 초에는 진리의 씨가 폴란드에서 온 성경 연구생들에 의해 할리치나와 볼린에 뿌려졌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루마니아와 몰다비아(지금은 몰도바)에서 온 형제들은 부코비나 지역에 진리를 들여왔습니다.

이로 인해 훗날의 성장을 위한 훌륭한 토대가 놓였습니다. 「파수대」(영문) 1921년 12월 15일호에서는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최근에 우리 형제들이 [부코비나]를 방문하였습니다. ·⁠·⁠· 그곳을 이삼 주 동안 방문한 결과로 일곱 개의 반이 구성되어, 지금 「성경 연구」 총서와 「그림자인 성막」(Tabernacle Shadows)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 반들 가운데 한 반은 성원이 70명가량이나 됩니다.” 1922년에는 부코비나의 콜린키프치 마을에서 스태판 콜차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침례를 받았으며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침례받은 최초의 형제였습니다. 나중에 열 가족이 그와 함께하였습니다. 이와 비슷한 성장이 트란스카르파티아 지역에서도 있었습니다. 1925년경에는 대략 100명의 성경 연구생이 벨리키루치키 마을과 인근 마을들에 있었습니다. 그 뒤로, 최초의 전 시간 종들이 트란스카르파티아에서 전파를 시작하면서 성경 연구생의 가정집들에서 집회를 사회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오래된 증인인 알렉세이 다비듀크는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진리를 알게 되었는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1927년에, 한 마을 사람이 볼린 지역에 있는 란코베 마을에 우리 출판물 한 가지를 가져갔습니다. 그 출판물을 읽고 난 그 마을의 몇 사람은 지옥불과 영혼에 관한 가르침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 책에는 폴란드의 로지에 있는 성경 연구생 사무실 주소가 나와 있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네 마을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한 달 뒤, 한 형제가 가서 성서 연구 그룹을 조직하였습니다. 열다섯 가족이 이 그룹에 가담하였습니다.”

진리에 대한 그러한 열정은 그 당시 초창기에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할리치나 지역에서 브루클린에 있는 성경 연구생의 본부에 보낸 편지에 나타나 있는 감사의 말씀을 고려해 봅시다. “여러분이 발행하는 책들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많은 상처를 치유해 주며, 대낮의 빛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책들을 더 보내 주실 것을 부탁합니다.” 다른 관심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우리에게 서적을 보내 주실 것을 여러분에게 부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여기서는 서적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을에 사는 한 남자가 여러분에게서 책을 몇 권 받았는데, 이웃 사람들이 그 책들을 빼앗아 가 버렸습니다. 그 사람은 그 책들을 읽어 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 사람은 동네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자기 책을 되찾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처럼 예리한 관심의 결과, 리보프의 페카르스카 거리에 성경 연구생 사무실이 개설되었습니다. 이 사무실에서는 할리치나와 볼린으로부터 많은 서적 신청을 받아서, 정기적으로 브루클린으로 보내 신청에 응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1920년 중반까지는 진리의 씨가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분명히 싹이 터 있었습니다. 여러 성경 연구생 집단이 구성되어 있었고, 그 중 일부는 나중에 회중들이 되었습니다. 이 초창기 활동에 관한 기록이 매우 드물게 남아 있기는 하지만, 구할 수 있는 보고에 따르면 1922년에 할리치나에서 열두 명이 기념식을 거행하였습니다. 1924년에 「파수대」는 우크라이나 남부 사라타 읍에서 49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음을 보고하였습니다. 1927년에는 트란스카르파티아에서 370명 이상이 기념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활동 상황을 설명하는 가운데, 「파수대」(영문) 1925년 12월 1일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금년에 한 형제가 미국에서 유럽에 있는 우크라이나로 파견되었습니다. ·⁠·⁠· 폴란드가 지배하는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훌륭한 봉사가 많이 수행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서적에 대한 엄청난 수요가 증가 일로에 있습니다.” 몇 개월 후 「황금 시대」(지금의 「깨어라!」)지는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갈리시아[할리치나]에만 20개의 반[회중]이 있습니다. ·⁠·⁠· 그 중 일부는 ·⁠·⁠· 조직되어 주 중 집회를 열고, 일부는 일요일에만 모이며, 일부는 조직하고 있는 중입니다. 반들이 더 생겨날 전망이 있습니다. 다만 그들을 인도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사실은 영적인 의미로 우크라이나의 흙이 매우 비옥함을 드러냅니다.

초기의 야외 봉사

트란스카르파티아에서 보이테흐 체히는 1923년에 침례를 받고서, 나중에 베레호베 지역에서 전 시간 전파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봉사 나갈 때 대개 서적 가방 하나는 손에 들고, 다른 하나는 자전거에 매달고, 또 배낭에 서적을 가득 채워 등에 지고 갔습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마을이 스물네 개 있는 구역을 임명받았습니다. 전도인은 열다섯 명이었고, 그래서 1년에 두 번 서적을 가지고 이 마을들을 다 돌려면 전력을 다해야만 했습니다. 매주 일요일이면 새벽 네 시에 우리는 그 중 한 마을에 모였습니다. 그곳에서부터 우리는 15 내지 20킬로미터를 걷거나 버스를 타고서 주변 지역으로 가곤 했죠. 우리는 호별 방문을 보통 오전 여덟 시에 시작해서 오후 두 시까지 했습니다. 종종 우리는 걸어서 집으로 갔고, 같은 날 저녁 집회 때는 모두가 경험한 일을 즐겁게 이야기했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이건 궂은 날이건 숲 속을 가로질러 지름길로 가고 강을 건너 다니곤 했어도, 아무도 불평한 적이 없었죠. 우리는 행복하게 창조주를 섬기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사람들은 형제들이 집회 참석이나 전파를 위해서는 40킬로미터를 걷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실로 참 그리스도인들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봉사를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한번은 「천국—세계의 희망」 소책자를 한 부인에게 제공했더니, 그것을 받고는 싶은데 헌금할 돈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배가 고팠던지라, 삶은 달걀 한 개하고 소책자를 교환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부인은 소책자를 받았고, 나는 달걀을 먹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트란스카르파티아 주민들은 집집으로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형제들은 이런 관습을 잘 활용하였습니다. 그들은 서적을 가방에 넣어 가지고는 주민들의 집으로 가서 자신들의 믿음을 표현하는 노래를 부르곤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멜로디를 좋아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종종 집 안으로 초대되어 노래를 더 불러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때로는 노래하고 나서 돈을 받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면 그 대신 성서 출판물을 기꺼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크리스마스 철에는 서적 보관소가 종종 바닥이 나곤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특별 노래 활동은 2주일간 계속되곤 하였는데, 그것은 로마 가톨릭교와 그리스 가톨릭교가 크리스마스 축하 행사를 서로 다른 주간에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1920년대 후반부에 와서 크리스마스의 이교 기원이 성경 연구생에게 분명해지면서 그 특별 노래 활동은 중단되었습니다. 형제들은 그러한 집중 전파 활동에서 큰 기쁨을 누렸고, 새로운 전도인 집단들이 트란스카르파티아에 계속 생겨났습니다.

처음 대회들

1926년 5월, 트란스카르파티아 지역에서 성경 연구생의 첫 대회가 벨리키루치키 마을에서 열렸습니다. 150명이 참석하고, 20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다음 해에는 같은 지역에 있는 도시 우즈고로트의 중앙에 있는 공원에서 열린 옥외 대회에 20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곧 다른 대회들도 트란스카르파티아의 여러 읍에서 조직되었습니다. 1928년에는 리보프의 첫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후 할리치나와 볼린에서도 대회들이 열렸습니다.

1932년 초에는 대회가 트란스카르파티아의 솔로트비노 마을에서 열렸는데, 대회 장소는 성경 연구생이 정규 집회를 갖는 집의 뜰이었습니다. 대략 500명이 참석하였고, 그 가운데는 독일에서 온 책임 맡은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지방 회중의 장로인 미하일로 틸니아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독일과 헝가리에서 우리 대회에 온 형제들이 제공한 잘 준비된 연설을 마음껏 즐겼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면서, 연사들은 다가오는 시련 아래서 우리가 충실을 유지하도록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극심한 시련이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실제로 왔습니다.

1937년에는 참가자들이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서 열리는 큰 대회로 여행하기 위하여 한 열차 전체를 전세 내었습니다. 열차는 솔로트비노 마을을 출발해서, 트란스카르파티아 지역을 통과하면서 각 역에 멈추어 대회 참가자들을 태웠습니다. 객차마다 “여호와의 증인 대회—프라하”라는 글귀가 나붙어 있었습니다. 그 일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 훌륭한 증거가 되었고, 오래된 증인들은 이날까지 그 행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숭배 장소를 건축하다

성경 연구생의 초기 집단들이 형성되면서, 자체 숭배 장소를 세울 필요가 생겨났습니다. 최초의 집회 장소는 1932년에 트란스카르파티아의 디브로바 마을에 세워졌습니다. 그 후로 두 개의 회관이 인근 마을들인 솔로트비노와 빌라체르크바에 더 세워졌습니다.

그 회관들 가운데 일부가 전시에 파괴되거나 압류되었던 현실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자체 왕국회관을 갖고자 하는 염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현재 디브로바 마을에는 여덟 개의 왕국회관이 있고, 여섯 개의 인근 마을에도 열여덟 개가 있습니다.

번역 활동의 진전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가 시작할 무렵, 많은 가족이 우크라이나에서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그 새로운 나라들에서 진리를 받아들였고, 그래서 수많은 우크라이나어 집단들이 형성되었습니다. 일찍이 1918년에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이 우크라이나어로 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와 해외에 있는 우크라이나어권 사람들에게 영적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1920년대 초가 되면서, 자격을 갖춘 한 형제가 정기적인 차원에서 성서 출판물을 번역할 필요성이 분명해졌습니다. 1923년, 캐나다에 사는 에밀 자리츠키가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라는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주된 업무는 성서 출판물을 우크라이나어로 번역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캐나다와 미국에 있는 우크라이나어·폴란드어·슬로바키아어 집단들을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에밀 자리츠키는 우크라이나 서부 소칼 읍 근처에서 태어나, 나중에 부모와 함께 캐나다로 이주한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마리야라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여성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다섯 자녀를 키웠습니다. 무거운 가족 책임에도 불구하고, 에밀과 마리야는 그들이 받은 신권 임명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1928년 워치 타워 협회는 캐나다 위니펙에 한 가옥을 구입하여, 그 집이 우크라이나어 번역 작업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그 초창기에 형제들은 호별 방문 봉사에서 휴대용 축음기를 사용하여 성서 강연 음반을 틀어 주었습니다. 자리츠키 형제는 브루클린에 초대되어 그러한 강연들을 우크라이나어로 녹음하였습니다. 1930년대에는 반 시간짜리 우크라이나어 라디오 방송물 몇 가지를 위니펙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제작하였습니다. 이 라디오 방송에서 에밀 자리츠키를 비롯한 경험 있는 형제들은 의미심장한 공개 강연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강연에는 1928년에 출판된 노래책에 나오는 노래로 4부 합창을 곁들였습니다. 청취자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동되어 수백 통의 편지와 전화를 보내 왔습니다.

40년 동안 에밀 자리츠키는 아내 마리야와 함께 번역자로서 그들의 임명을 충실히 수행하였습니다. 그 기간에 「파수대」는 매 호가 우크라이나어로 번역되고 있었습니다. 1964년에는, 그때까지 자리츠키 형제를, 아내 안네와 함께 여러 해 동안 보조해 오던 모리스 사란추크가 번역 업무를 감독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영적 도움의 손길

열심 있는 전도인들이 개인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역에 걸쳐 진리의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 왔지만, 조직적인 전파 활동이 트란스카르파티아에서 시작된 것은 1927년 이후였으며, 할리치나에서는 그보다 더 뒤였습니다. 그 전에는, 다량의 서책과 소책자가 루마니아어·헝가리어·폴란드어·우크라이나어로 배부되면서도 전파 활동이 보고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격지 집단들이 회중들로 조직되기 시작하고, 전도인들은 호별 방문 전파를 정기적으로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이미 많은 성서 서적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1927년에는 우크라이나 최초의 서적 보관소가 트란스카르파티아의 우주고로트 시에 개설되었습니다. 1928년에는 독일 마그데부르크의 사무실이,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에 속해 있던 트란스카르파티아 지역의 회중들과 콜포처들을 돌보도록 임명되었습니다.

1930년에는 우주고로트 근처의 베레호베 읍에 사무실이 설치되어, 트란스카르파티아의 성경 연구생 활동을 감독하게 되었습니다. 보이테흐 체히가 그 사무실의 감독자로 일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마련은 전파 활동에 매우 유익하였습니다.

프라하와 마그데부르크의 사무실에서 온 몇몇 형제는 자기 희생 정신을 나타내어 종종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장거리 여행을 해 가면서,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그 아름다운 지역의 벽촌 오지들에 전하였습니다. 그 열심 있는 형제들 가운데는 마그데부르크 지부에서 온 아돌프 피츠케가 있었습니다. 그는 카르파티아 산맥에 있는 라히프 지방에서 전파하도록 파견되었습니다. 그 지방의 여러 형제들은 이날까지도 이 충실하고 겸허하면서 부담스럽지 않은 형제에 대한 즐거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2001년에는 그 지역에 네 개의 회중이 있었습니다.

1930년대에는 “창조 사진극”이 트란스카르파티아의 여러 읍과 마을에서 상영되었습니다. “사진극”은 슬라이드와 영화로 구성된 여덟 시간짜리 상영물로서, 음반에 녹음된 성서에 근거한 해설이 동시에 나왔습니다. 독일에서 에리히 프로스트가 파견되어 이곳 형제들을 도와 “사진극”을 상영하였습니다. 프로 시작 전에, 형제들은 일반 대중을 상영 장소에 초대하기 위하여 광고지를 나누어 주고 포스터도 게시하였습니다. 관심은 대단하였습니다. 베레호베 읍에서는 군중이 어찌나 많이 모였던지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기다려야만 하였습니다. 경찰은 그 거대한 군중을 보고서, 질서가 깨져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경찰은 그 행사를 취소시킬 것을 고려했다가, 그만두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상영이 있고 나서, 사람들은 많은 치사들을 보내 오면서 “사진극”을 다시 보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러한 관심은 그 지방 종교 지도자들을 자극하여, 좋은 소식의 전파 활동을 좌절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그 활동을 계속 축복하시어 성공을 보게 하셨습니다.

1920년대와 30년대에 볼린과 할리치나 지역은 로지에 있는 폴란드 지부의 감독 아래 있었습니다. 1932년에는 폴란드에서 형제들이 와서 이 지역들에 관심을 집중하여, 모든 「파수대」 예약자의 주소를 브루클린에서 받아 가지고 재방문을 실시하였습니다.

당시 폴란드 사무실 감독자였던 빌헬름 샤이데르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진리에 호응하였습니다. 우후죽순처럼 관심자 그룹들이 할리치나의 도시와 마을들에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그런 그룹 가운데는 매우 크게 성장하여 지역 사회 전체를 망라한 경우도 있습니다.”

형제들은 대부분 가난하였지만, 전파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서적과 음반을 구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을 하였습니다. 1936년에 침례를 받은 할리치나의 미콜라 볼로치는 축음기를 사기 위해 두 마리 말 가운데 한 마리를 팔았습니다. 농부가 말을 판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였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네 자녀를 부양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말 한 마리 가지고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많은 새로운 사람들이 이 축음기에서 우크라이나어로 흘러나오는 성서 강연과 왕국 노래를 듣고서 여호와를 알고 섬기게 되었습니다.

할리치나와 볼린에서 1930년대에 전도인이 크게 증가한 사실을 예시하면서, 빌헬름 샤이데르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폴란드에서 전도인이 1928년에는 300명에 달하다가 1939년에 와서는 1100명이 넘었는데, 그 절반이 우크라이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지역(할리치나와 볼린)에서는 활동이 훨씬 늦게 시작되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한 증가를 돌보기 위해서 폴란드 지부에서 루드비크 키니츠키가 할리치나와 볼린에 여행하는 감독자로 파견되어 전파 활동을 지원하였습니다. 할리치나의 초르트키브가 고향인 그의 가족은 이미 20세기 초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키니츠키 형제는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 후, 고향 땅에 있는 진실한 동포들을 돕기 위하여 귀국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형제 자매들이 이 열심 있는 봉사자를 통하여 받은 영적 도움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1936년 가을, 폴란드어판 「황금 시대」에 금지령이 내려지고 그 편집인이 1년의 징역형을 받게 되었을 때, 키니츠키 형제는 금지된 「황금 시대」 대신 발행되는 「새날」(New Day)지의 편집인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44년 그는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마우타우젠-구젠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여호와께 충실한 삶을 마쳤습니다.

하느님께서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끌어 모으시다

1920년대 초에 롤라라는 성경 연구생이 고향인 할리치나의 졸로티포티크로 돌아왔습니다. 성서를 사용하여 롤라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신의 모든 종교 형상을 파괴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그 지방 사제가 롤라의 전파 활동을 중단시키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사제는 한 경찰관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해서든 롤라가 걸어 다니지 못하게 해 준다면, 내가 위스키 한 병을 주겠소.” 경찰관은 사람을 구타하는 것은 자기가 할 일이 아니라고 대꾸하였습니다. 그 후 롤라는 미국에 있는 형제들로부터 서적이 든 소포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제는 다시 그 경찰관을 찾아와서, 공산주의 서적이 든 소포가 우체국에 도착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다음날 경찰관은 누가 그 소포를 찾아가는가 보려고 우체국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물론 롤라였습니다. 경찰관은 롤라를 경찰서로 연행하고서 그 사제도 불러들였습니다. 사제는 그 책들이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서적에 공산주의 가르침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경찰관은 그 일부를 지방 법원에 보냈습니다. 나머지는 자신이 직접 보관하였습니다. 그는 그 출판물을 읽어 보다가 그 속에 진리가 들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머지않아 그는 아내와 함께 성경 연구생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중에 그는 침례를 받고 열심 있는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그처럼 사제는 제자를 삼는 활동을 중단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본의 아니게도 루드비크 로다크가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격려했던 것입니다.

이 무렵 한 그리스 정교회의 사제가 아내와 함께 리보프에서 미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주 직후 그의 아내는 사망하였습니다. 슬픔에 잠겨 그는 아내의 영혼이 어디에 가 있는지 알아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는 뉴욕에 있는 몇몇 영매술자의 주소를 구했습니다. 그들이 모이는 장소를 찾다가 실수로 그 건물의 다른 층으로 가는 바람에, 그만 성경 연구생의 집회에 들어가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한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침례를 받고, 한때는 브루클린 베델의 인쇄 공장에서 일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서 그는 할리치나로 돌아와 좋은 소식을 계속 열심히 전파하였습니다.

우크라이나 동부에도 빛이 비치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초기의 전파 활동은 우크라이나의 서부에서 많이 수행되었습니다. 이 나라의 나머지 지역에는 어떻게 진리가 이르렀습니까? 그 영적 토양에서도 우크라이나 서부에서만큼 소출이 풍성할 것입니까?

1900년대 초기에 스위스에서 성경 연구생인 트룸피 형제가 우크라이나 동부의 한 탄광 지역에 엔지니어로 일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가 이 지역에서는 최초의 성경 연구생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1920년대에 전파 활동을 한 결과, 하리코프 시 근처의 류비미프스키포스트 마을에 성서 연구 그룹이 형성되었습니다.

1927년에 서유럽에서 다른 형제가 칼리니프카 마을에 있는 탄광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는 옷 가방에다 성서 서적을 가득 넣어 가지고 와서, 왕국 희망에 큰 관심을 나타낸 한 작은 집단의 침례교인들에게 전파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이 형제는 이제 성경 연구생이 된 작은 집단을 남겨 두고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1927년 「파수대」는 기념식을 지키기 위하여 18명이 함께 칼리니프카에 왔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인근 마을인 예피파니프카에서도 11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그에 더하여, 그해에 류비미프스키포스트에서는 30명이 기념식을 지켰습니다.

브루클린 본부의 형제들은 소련에서의 발전 상황에 끊임없이 유의하면서, 왕국 전파 활동을 법적으로 확립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러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캐나다 형제 조지 영이 1928년에 소련에 입국하였습니다. 그는 머무는 동안에 우크라이나 동부의 하리코프 시를 방문하여, 그곳 성경 연구생 집단과 함께 3일간의 작은 대회를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정부 당국의 반대로 그는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 연구생 집단들이 그 당시 키예프와 오데사 두 곳에도 있었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영 형제는 브루클린에 소련의 상황에 관하여 보고하였습니다. 영 형제의 추천이 있은 뒤, 우크라이나 형제인 다니일 스타루힌이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소연방 전체에서 성경 연구생을 대표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조지 영이 방문하기 수년 전, 스타루힌 형제는 당시 소련의 교육 인민 위원(교육 장관)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와 토론하는 가운데 성서를 옹호한 적이 있었습니다. 브루클린 본부의 J. F. 러더퍼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 형제는 이렇게 썼습니다. “다니일 스타루힌은 열심이 있고 활동적입니다. 그는 열다섯 살의 소년 때 한 사제와 성서에 관한 토론을 하였습니다. 그 사제가 화가 치민 나머지 십자가를 들어 소년의 머리를 치는 바람에, 그는 마루에 쓰러져 실신하였습니다. 지금도 그의 머리에는 그 자국이 있습니다. 다니일은 교수형에 처해질 뻔했지만, 미성년자라서 4개월간 감옥살이만 하였습니다.” 스타루힌 형제는 그곳 회중을 등록하고 공식 허가를 받아 우크라이나에서 성서 출판물을 인쇄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소련 당국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1920년대 말과 1930년대에 소련 당국은 맹렬히 무신론을 장려하였습니다. 종교는 조소를 받았고,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자는 “모국의 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1932년에 풍성한 수확을 거둔 뒤, 공산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의 마을 사람들에게서 모든 식량을 압수해 갔습니다. 그 뒤로 인위적으로 유발된 이 가뭄 때문에 6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여호와의 종들의 작은 집단들은 이 어려운 시기에 나라 밖 형제들과 아무 접촉이 없었는데도 충절을 지켰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믿음 때문에 감옥에서 여러 해를 보냈습니다. 트룸피 가족, 하우서 가족, 다니일 스타루힌, 안드리 사벤코, 샤포발로바 자매는 그러한 충절 고수자 가운데 몇 사람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그들이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일과 사랑을 잊지 않’으실 것으로 확신합니다.—히브리 6:10.

호된 시험의 때

1930년대 말, 동유럽의 여러 국가에서는 국경선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나치 독일과 소련이 약소국들을 삼키기 위하여 그들의 세력권을 확장하였던 것입니다.

1939년 3월, 헝가리는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아 트란스카르파티아를 점령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금지령이 내려지고, 모든 왕국회관은 폐쇄되었습니다. 정부 당국은 형제들을 잔인하게 학대하고 많은 형제들을 투옥시켰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벨리키비치키프 마을과 코빌레츠카폴리아나 마을에서는 대부분의 증인들이 투옥되었습니다.

소련군이 1939년에 할리치나와 볼린 지역에 도착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서부 국경은 폐쇄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폴란드 사무실과의 접촉이 두절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한 뒤로는 조직이 지하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형제들은 서클이라고 부르는 작은 집단으로 모였고, 더욱 조심스럽게 봉사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그 후 나치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였습니다. 독일 점령 기간, 교직자들은 대중이 여호와의 백성을 반대하도록 선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할리치나에서 맹렬한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집들은 창문들이 박살 나고, 많은 형제들이 심한 구타를 당하였습니다. 겨울철에 어떤 형제들은 성호(聖號) 즉 가슴에 십자가를 긋지 않으려 한다는 이유로 찬물 속에 강제로 몇 시간 서 있었습니다. 자매들은 막대기로 50대의 매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상당수의 형제들이 충절을 지키다가 생명을 잃었습니다. 예를 들면, 게슈타포는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전 시간 봉사를 하던 일리아 호부차크를 처형하였습니다. 호부차크 형제가 하느님의 왕국을 열심히 전파하였기 때문에, 한 가톨릭 사제가 그를 게슈타포에게 넘겼던 것입니다. 그때는 호된 시험의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종들은 계속 굴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종종 위험을 무릅써 가며 서로를 도왔습니다. 스타니슬라프(현재는 아바노프란코프스크) 시에서 한 유대계 여자와 두 딸이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게토 즉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나치가 시내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처형할 작정이라는 상황을 파악하고서, 그 세 자매를 피신시킬 마련을 하였습니다. 증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 가며 전쟁 기간 내내 이 유대계 자매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우크라이나 서부의 형제들은 일시적으로 조직과의 접촉이 끊어져서, 나아갈 향방을 제대로 몰랐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아마겟돈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얼마 동안 형제들 간에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전쟁터에서도 싹이 트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우크라이나에 비탄과 파멸을 가져왔습니다. 3년 동안 이 나라는 거대한 전쟁터로 변하였습니다. 전선이 우크라이나 땅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동부에서 시작하여 나중에는 서부 깊숙이까지 많은 읍과 마을들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 기간에 55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1000만 명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전쟁의 공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인생에 환멸을 느끼게 되고 도덕 원칙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상황에서 진리를 배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미하일로 단이라는 트란스카르파티아의 한 젊은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시작 전에 여호와의 증인의 말을 즐겨 듣다가, 1942년에 군 복무 소집을 받았습니다. 군사 훈련을 받던 중 한 가톨릭 사제가 군인들에게 종교 소책자를 나누어 주었는데, 내용인 즉 적어도 한 명의 공산주의자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하늘 생명이 약속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고 이 젊은 군인은 당혹스러웠습니다. 전쟁 중에 그는 한 교직자가 사람들을 죽이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진리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고향에 돌아와 여호와의 증인을 만났고, 1945년 말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 단 형제는 소련 감옥의 끔찍한 상황을 인내하였습니다. 석방되고 나서 그는 장로로 임명되었으며, 지금은 트란스카르파티아의 한 회중에서 주임 감독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소책자를 상기하면서 그는 이렇게 빗대어 말합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를 한 명도 못 죽였습니다. 그래서 하늘 생명은 생각도 못하고, 그저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나 고대하는 거죠.”

강제 수용소에서도 비옥한 흙이 열매를 맺다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기름진 흙은 풍작을 가져올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치 독일의 점령 기간에 비옥한 흑토가 우크라이나로부터 반출되었습니다. 줄을 이은 유개 화차에 우크라이나 중부에서 비옥한 흙이 실려 독일로 보내졌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유개 화차에도, 말하자면, 장차 역시 비옥한 흙이 된 무엇인가가 실려 있었습니다. 약 250만 명의 젊은 남녀들이 강제 노동을 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서 독일로 끌려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강제 수용소가 귀착점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인 중립 때문에 투옥된 독일 증인들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강제 수용소 안에서도 증인들은 말로나 행동으로나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한 수감자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증인들은 강제 수용소에서 나머지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기질이 우정적이고 낙관적이었죠. 그들은 행실로 다른 수감자들에게 말해 줄 매우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 몇 해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강제 수용소에서 함께 있던 독일 증인들로부터 진리를 배웠습니다.

아나스타시야 카자크는 독일 슈투트호프 강제 수용소에서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아나스타시야와 열네 명의 증인을 포함한 수감자 수백 명은 바지선으로 덴마크로 수송되었는데, 그곳에서 덴마크 형제들은 증인들을 찾아내어 신체적·영적 필요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같은 해에 아나스타시야는 코펜하겐의 대회장에서 열아홉 살에 침례를 받고 우크라이나 동부의 고향으로 돌아와, 거기서 열심히 활동하여 진리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 후 카자크 자매는 전파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다시 11년 동안 투옥되었습니다.

이 자매는 청소년들에게 이런 조언을 합니다. “여러분의 생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환난이건, 반대건, 어떤 고난이건—포기하지 말아요. 계속 여호와께 도움을 청하세요. 내가 깨달은 바로는 그분은 자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거든요.”—시 94:14.

전쟁의 시련

전쟁은 가혹하고 잔인하여, 군인이나 민간인을 막론하고 어려움과 고난과 사망을 초래합니다. 여호와의 증인도 전쟁의 냉엄한 결과로부터 제외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증인들은 이 세상에 있지만 세상의 일부는 아닙니다. (요한 17:15, 16) 지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증인들은 정치적으로 엄정 중립을 유지합니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의 증인들은 이러한 입장으로 인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리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살아 있거나 죽었거나 전쟁 영웅들에게 영예를 돌리지만, 여호와께서는 용감하게 그분께 충성을 증명하는 사람들을 영예롭게 하십니다.—사무엘 첫째 2:30.

1944년 말경, 소련 군대는 우크라이나 서부를 재점령하고 국민 개병 제도를 발표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크라이나의 게릴라 부대들은 독일군과 소련군 양쪽에 대항하여 싸움을 벌였습니다. 우크라이나 서부의 주민들은 게릴라 대열에 가담하라는 압력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여호와의 종들이 중립을 지키는 데 있어서 새로운 시련으로 다가왔습니다. 싸우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많은 수의 형제들이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이반 막시미우크와 그의 아들 미하일로는 일리아 호부차크에게서 진리를 배웠습니다. 전쟁 중 그들 부자는 집총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게릴라에 의해 억류되었습니다. 그보다 얼마 전 이 게릴라는 소련 군인 한 명도 억류하였습니다. 게릴라는 이반 막시미우크에게 그 포로가 된 군인을 죽일 것을 명령하면서, 그렇게 하면 석방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막시미우크 형제가 거부하자 그들은 잔인하게 그를 살해하였습니다. 아들 미하일로도 같은 식으로 죽였으며, 유리 프레유크와 그의 열일곱 살 된 아들 미콜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소련군에 입대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처형되었습니다. (이사야 2:4) 또 다른 형제들은 10년의 감옥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투옥된 형제들에게도 생존의 가망성이 매우 희박하였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당시 전후(戰後) 기간에는 자유로운 사람들도 굶주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44년 미하일로 다세비치도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투옥되었습니다. 10년간 투옥되기에 앞서 그는 6개월 동안 조사를 받았는데, 그로 인해 쇠약해져서 완전 탈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감옥의 의무대에서는 그에게 “고칼로리 식단”을 처방하였습니다. 그래서 감옥의 주방에서는 그의 오트밀 죽에다 한 찻숟갈의 기름을 얹어 주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그에게 허용된 유일한 음식이었습니다. 다세비치 형제는 살아남아 23년간 소련 전국 위원회에서, 나중에는 우크라이나 전국 위원회에서 일하였습니다.

1944년, 부코비나 지방의 한 회중에서는 일곱 명의 형제가 군 복무를 거부하여 각각 3년 내지 4년의 감옥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 중 네 명은 감옥에서 굶어 죽었습니다. 같은 해 인근 회중에서는 다섯 명의 형제가 각각 10년의 시베리아 수용소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들 가운데서는 한 사람만 귀향하였습니다. 나머지는 그곳에서 죽어 간 것입니다.

「1947 연감」은 이러한 사건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1944년 나치 괴물의 전선이 서쪽으로 밀리고 있을 때, 전쟁을 러시아에 유리하도록 종결 짓기 위하여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 장정은 모두 동원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 형제들은 영원한 계약의 불가침성과 자신들의 중립을 유지하였습니다. 많은 수의 형제들이 주에 대한 충실성 때문에 생명을 박탈당하였으며, 다른 형제들은—이번에는 1000명이 족히 넘게—다시 동쪽으로 이 광대한 대륙의 광활한 평원으로 끌려갔습니다.”

그와 같은 대이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증인은 계속 그 수가 증가하였습니다. 1946년에 우크라이나 서부에서는 기름부음받은 자 네 명을 포함하여 5218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안도의 한숨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형제들—그 모든 역경을 인내하고 하느님께 충성을 유지해 온 사람들—은 가슴 설레는 희망과 격려의 소식을 전선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전파하였습니다. 군인들은 물론 전쟁 포로들은 환멸을 느끼면서 고향에 돌아왔지만 인생의 의미를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성서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컨대 1945년 말경 트란스카르파티아의 빌라체르크바 마을에서는 51명이 티사 강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해 말에는 그 회중의 전도인이 150명이었습니다.

그 당시 우크라이나 서부와 폴란드 동부에서는 우크라이나 사람들과 폴란드 사람들 사이에 반목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상당수의 우크라이나 폭력단과 폴란드 폭력단이 형성되었습니다. 어떤 경우 이 폭력단들은 한 마을 안에 다른 국적의 소지자가 살고 있으면 그 마을 주민 전체를 학살하기도 하였습니다. 슬프게도 일부 형제들이 이러한 대학살의 와중에 희생되었습니다.

그 후 소련과 폴란드 간에 협정이 체결되어, 약 80만 명의 폴란드인이 우크라이나 서부로부터 폴란드로 재이주하고, 약 50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폴란드 동부로부터 우크라이나로 이주하였습니다. 그 이주자들 가운데는 증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회중들이 재정착되었으며, 형제들은 이러한 본국 송환을 새로운 구역에서 전파할 가능성으로 보면서 이 새로운 신권 임무를 받아들였습니다. 「1947 연감」은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이 모든 역이동은, 정상적인 시기라면 이르기 힘들었을 구역에까지 진리가 급속히 확산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달갑지 않은 사태까지도 여호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한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서부 국경이 폐쇄될 당시, 형제들은 우크라이나와 여타 소연방 지역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조직하는 조처를 취하였습니다. 파블로 지아테크는 전에 우크라이나와 여타 소련 지역에 대한 전국의 종으로 임명된 바 있었습니다. 나중에 열심 있는 두 형제 스타니슬라프 부라크와 페트로 토카르가 그를 보조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그들은 리보프에 있는 한 그리스도인 자매 집에 숨어 지내면서, 영적 양식을 소련 전국에 공급하기 위하여 서적을 인쇄하였습니다. 리보프에서 번역하고 인쇄하기 위하여 서적을 폴란드로부터 들여오는 일은 커다란 위험을 수반하였습니다. 때때로 상당수의 형제 자매들이 폴란드에 사는 친척 집을 방문할 허가를 애써 얻어 낸 다음, 돌아오는 길에 우리 서적을 몰래 들여오곤 하였습니다. 한동안은 기차 기관사가 서적을 금속 상자에 넣어 증기 기관차 보일러 속에 숨겨 가지고 나르기도 하였습니다!

1945년 말 지아테크 형제는 체포되어 10년의 감옥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를 대신하여 부라크 형제가 전국의 종이 되었습니다.

박해가 다시 일다

1947년 6월에 한 형제가 형제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인쇄물을 운반하던 중 리보프의 거리에서 저지당하여 체포되었습니다. 보안 당국은 그 형제가 정기적으로 인쇄물을 전달하는 증인들의 주소를 제시한다면 우리 조직을 법적으로 등록해 주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그 형제는 그 말을 곧이듣고 그들에게 당시 전국의 종인 부라크 형제를 비롯하여 30명에 가까운 형제들의 주소를 댔습니다. 그 후 그들 모두가 체포되었습니다. 그 당사자 형제는 진심으로 후회하면서, 자기가 보안 당국을 근거 없이 신뢰하였음을 인정하였습니다.

체포된 형제들은 추가 심리와 법정 심문을 받기 위하여 키예프에 있는 감옥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 직후 부라크 형제는 옥중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부라크 형제는 체포되기 전에 볼린 지역의 지역의 종 미콜라 치바와 접촉하여 그에게 우크라이나와 여타 소련 지역의 활동에 대한 감독 업무를 위임할 수 있었습니다.

소련 보안 당국이 그렇게 많은 책임 있는 형제들을, 지하 인쇄 공장들에서 일하는 형제들과 함께 일거에 체포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소련 관리들은 우리 서적을 반(反)소련 서적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증인들은 국가의 질서를 와해시키는 활동을 한다고 거짓 고발되어, 많은 사람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형 선고는 25년의 수용소 형으로 감형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시베리아에서 복역하도록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들을 그렇게 멀리 보내는 이유를 변호사에게 묻자, 그는 농담조로 이렇게 대꾸하였습니다. “거기 가서 당신네 하느님을 전파하라는 거겠지 뭐.” 나중에 보니 이 말은 너무나도 들어맞는 말이었습니다!

1947년부터 1951년까지의 기간에, 책임 있는 여러 형제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증인들은 서적을 인쇄하기 때문에도 구금을 당하였지만, 군에 입대하거나, 선거 때 투표하거나, 자녀를 파이어니어 동맹 즉 콤소몰(청소년 공산 연맹) 단체에 입회시키지 않았기 때문에도 구금을 당하였습니다. 단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투옥 사유가 되었습니다. 종종 가짜 법정 증인들도 재판 중 증언을 하였습니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보안 당국에게 협박을 당했거나 매수된 이웃 사람 또는 직장 동료였습니다.

때때로 당국자들은 공개적으로는 아닐지라도 동정심을 나타냈습니다. 이반 심추크는 체포되어 독방에 6개월간 감금되었습니다. 독방 안은 굴속처럼 정적이 감돌고 거리의 소음조차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취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조사관은 그에게 도움을 베풀어, 대답하는 법을 이렇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당신이 타자기와 서적을 어디서 누구로부터 구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그런 질문엔 대답하지 마시오!” 그리고 심문을 받으러 갈 때에도 그 조사관은, “이반, 포기하지 마시오. 포기하지 말아요, 이반” 하곤 말하였습니다.

어떤 마을들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은 창문에 커튼을 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증인들이 그들의 서적을 읽거나 집회를 보고 있는지를 이웃이나 경찰이 쉽사리 알아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영적 양식을 섭취하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때때로 「파수대」 사회자용 ‘연단’이 특이하였습니다. 「파수대」를 사회하고 낭독할 때, 그 형제는 식탁보가 바닥까지 닿는 식탁 아래 앉곤 하였습니다. ‘청중’은 으레 식탁 주위에 앉아 경청하고 해설도 하였습니다. 아무도 사람들이 식탁 주위에 앉아서 종교 집회를 즐기리라고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법정에서 증거하다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미하일로 단은 1948년 말에 체포당하였습니다. 그 당시 그는 기혼으로, 한 살 난 아들이 있는데다 아내는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재판 중에 검사는 25년의 감옥 형을 구형하였습니다. 단 형제는 판사들에게 마지막 진술을 하는 가운데 예레미야 26:14, 15의 말씀을 사용하였습니다. “나는 이제 여러분의 손 안에 있으니, 여러분의 눈에 좋은 대로, 옳은 대로 나에게 행하십시오. 다만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죽인다면, 무고한 피가 여러분 자신과 이 도시와 그 주민들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참으로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셔서 여러분의 귀에 이 모든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경고는 판사들에게 효험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숙의한 끝에 판결을 내렸는데, 선고는 감옥 10년에 러시아 오지 유형 5년이었습니다.

단 형제는 조국을 배반한 매국노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판결 내용을 알게 되자 그는 판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체코슬로바키아 정부 아래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고, 나중에는 헝가리 치하에서 살았습니다. 이제는 소련이 우리 영토에 진입하였는데, 저는 민족으로는 루마니아인입니다. 제가 어느 조국을 배반한 것입니까?” 물론 그 질문은 묵살되었습니다. 그 재판 후에 단 형제는 딸아이가 태어났다는 흐뭇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에 힘입어 그는 감옥과 러시아 동부의 수용소에서 그 모든 굴욕을 견뎌 낼 수 있었습니다. 1940년대 말에는 우크라이나·몰다비아·벨로루시에서 온 많은 형제들이 소련의 감옥에서 굶어 죽어 갔습니다. 단 형제는 몸무게가 25킬로그램이 줄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자매들도 박해받다

소련 치하에서 형제들만 박해를 받고 장기형을 선고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매들도 똑같이 잔인한 학대를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마리야 토밀코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에서 진리를 배웠습니다. 나중에 이 자매는 우크라이나에 돌아와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시에서 전파하였습니다. 이 자매는 전파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948년에 25년의 수용소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20년의 수용소 형을 선고받은 다른 자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심리 중 저는 여러 죄수들과 한 감방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랬어도 그 여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파하였습니다. 뜻밖에도 그들은 내 말을 유심히 듣더군요. 감방은 사람으로 가득하였죠. 우린 모두 바닥에서, 마치 통조림 속 정어리들처럼 차곡차곡 붙어서 잤습니다. 우리가 잠을 자다가 몸을 반대편으로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두가 동시에, 그것도 구령에 맞추어 몸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1949년, 자포로제 시에서 한 침례교 지도자가 지방 보안 당국에 우리 자매 다섯 명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바람에 그 자매들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은 반소련 선동죄로 기소되어, 각각 25년의 수용소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리고 전 재산을 압수당하였습니다. 사면령이 내려지기까지 7년 동안 그 자매들은 러시아 북부 오지에서 복역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한 자매인 리디아 쿠르다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집으로 편지를 보내는 일은 일년에 두 번 만 허용되었고, 그것도 철저한 검열을 받았습니다. 그 기간 내내 우리에겐 아무 서적도 없었고요.” 그렇지만 그 자매들은 여호와께 충실을 유지하면서 왕국의 좋은 소식을 계속 전파하였습니다.

몰다비아 형제들에게 도움을 베풀다

그러한 역경 가운데서도 증인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1947년, 인접 국가인 몰다비아(지금은 몰도바)가 심한 기근을 겪었습니다. 우크라이나 형제들은 자신들도 가난하면서 몰다비아의 동료 신자들의 필요에 즉시 호응하여 밀가루를 보냈습니다. 우크라이나 서부에 사는 증인들은 상당수의 몰다비아 증인들을 불러들여 자기 집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그 당시 몰다비아에 살던 한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저는 고아라서 정부로부터 하루 200그램의 빵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파이어니어 연맹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걸 못 받았죠. 그런데 우크라이나 서부 형제들이 밀가루를 보내와, 전도인당 4킬로그램씩 받게 되어 무척이나 흐뭇했답니다.”

소련에서 법적 등록을 시도하다

1949년에 볼린 지역의 세 장로(미콜라 퍄토하, 일랴 바비추크, 미하일로 추마크)는 우리의 활동에 대한 법적 등록을 신청하였습니다. 그 직후 추마크 형제는 체포되었습니다. 남은 두 형제 중에 미콜라 퍄토하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신청서를 처음 보냈는데 회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신청서를 모스크바에 제출하였습니다. 그 문서는 키예프 시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곳 관리들은 형제들과의 접견을 허락하고서, 등록은 여호와의 증인이 당국과 협력하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물론 형제들은 중립의 입장을 타협하는 일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오래지 않아 이 두 형제도 체포되어, 각각 25년의 수용소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볼린 지방 당국에 내려 보낸 특별 각서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사교 집단”은 “명백한 반소련 운동 조직으로서 등록 대상이 못 된다”고 천명하였던 것입니다. 지방 종무실 책임자는 여호와의 증인을 염탐하여 국가 보안 당국에 보고하라는 지시도 받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당국에 협력하다

1949년, 트란스카르파티아의 한 침례교 지도자는 당국에 탄원하여, 증인들이 자기네 교인들을 개종시키고 있다는 불만을 제기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방 회중 장로인 미하일로 틸리아크가 체포되어 10년의 감옥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어린 두 자녀와 함께 집에 남겨졌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그러한 행태를 보고서, 진실한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이해하고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1950년에 트란스카르파티아에서 침례교인 소녀인 바실리나 비벤은 자기 교회의 교직자가 자기 동네에 사는 두 증인의 활동을 당국에 일러바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증인들은 체포되어 6년의 감옥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들은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교직자에게 아무런 반감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바실리나는 이 증인들이 참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감동을 받은 소녀는 증인들과 성서를 연구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 자매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찾게 되어 여호와께 감사해요.”

러시아 유배 길

여호와의 증인이 선포하는 성서 진리는 무신론적 공산 통치 이념과는 양립할 수 없었습니다. 잘 조직된 증인들은 하느님의 왕국을 옹호하는 서적을 비밀리에 인쇄하여 배부하였습니다. 그에 더하여 성서의 가르침을 이웃과 친척들에게 보급하였습니다. 1947년에서 1950년 사이 당국은 1000명이 넘는 증인들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1951년에 당국은 하느님의 백성을 괴멸시킬 것으로 생각되는 계획을 비밀리에 수립하였습니다. 남아 있는 증인들을 동쪽으로 5000킬로미터, 멀리 러시아의 시베리아로 유배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1951년 4월 8일, 6100명 이상의 증인들이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습니다. 이른 새벽 군인들을 태운 트럭들이 각 증인들 집에 들이닥치더니, 가족들에게 두 시간의 여유를 주면서 먼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귀중품과 개인 소지품만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집 안에서 눈에 띈 사람들은 모두가—남녀노소 할 것 없이—유배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었다거나 신체가 허약하다고 해서 면제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신속하게 단 하루 만에, 그들은 유개 화차에 무리 지어 실려 유배 길에 올랐습니다.

그 시간에 집에 없던 사람들은 뒤에 처져 있었지만, 당국에서는 그들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공식적으로 당국에 유배된 가족과 연합하게 해 줄 것을 신청하였습니다. 당국은 그런 문의에 응답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 친족들이 어디로 추방되었는지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 외에도, 증인들은 몰다비아·벨로루시 서부·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에서도 추방되었습니다. 도합 9500명가량의 증인들이 이들 6개 공화국에서 추방된 것입니다. 군대의 호송 하에 그들이 실려 간 유개 화차는 보통은 가축을 실어 나를 때만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외양간이라고 부르는 화차였습니다.

증인들 가운데 아무도 그들이 어디로 끌려가는지 몰랐습니다. 그 긴 여행 길에, 그들은 기도하고 노래하며 서로를 도왔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유개 화차 밖으로 천을 내걸어, “우리는 볼린 지역의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또는 “우리는 리보프 지역의 여호와의 증인입니다”와 같은 어구로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밝혔습니다. 중도에 각 역에서 정차할 때, 그들은 우크라이나 서부의 다른 지역에서 온 비슷한 열차들에도 그와 유사한 표시가 나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로 인해 형제들은 다른 지역의 증인들도 유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전문(電文)’은, 열차에 실려 시베리아로 가는 이삼 주 동안 형제들을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이러한 이동은 영구적인 유배로 획책된 것이었습니다. 결코 여호와의 증인을 시베리아에서 떠나도록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 계획이었습니다. 그들은 감옥에 있는 것이 아닌데도 정기적으로 지방 등록 사무소에 신고해야만 하였습니다. 위반한 자에게는 수년 간의 감옥 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현지에 도착하는 즉시 숲 속에 그대로 팽개쳐졌습니다. 나무를 자르는 도끼만 주어 그것으로 거처와 생계 수단을 마련하게 하였습니다. 처음 몇 해 겨울을 생존하기 위해서, 증인들은 대개 땅에 구덩이를 파고 잔디로 지붕을 얹은 원시적인 움막을 만들어야 하였습니다.

지금은 크림 반도에서 장로로 일하는 흐리호리 멜니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947년에 누나가 체포된 뒤로 나는 자주 당국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나를 나무 막대기로 때렸습니다. 몇 번인가는 담벼락에 열여섯 시간이나 세워 놓더군요. 이 모든 짓은 내게 압력을 가하여 증인인 누나에 대해 거짓 증언을 하도록 강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열여섯 살이었습니다. 누나에 대한 증언을 거부하니까 지방 당국은 못마땅해서 나를 없애고자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1951년에 우리도 시베리아로 유배를 당한 것입니다. 두 남동생, 여동생 그리고 내가 고아들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우리 부모는 이미 사망하셨고, 형과 누나는 10년간 복역하는 중이었으니까요. 스무 살에 나는 남동생 둘과 여동생 하나를 돌보는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시베리아에서 처음 2년간 감자와 차로 연명하던 때가 종종 생각나는군요. 우리는 차를 수프 접시에다 마셨죠. 잔은 그 당시 사치품이라서요. 그러나 나는 영적으로는 원기 왕성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해서 며칠도 안 되어 나는 공개 집회를 사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신권 전도 학교도 시작했고요. 나로서는 그런 책임들을 수행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남동생들과 여동생을 돌보기 위해 과도한 육체 노동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멜니크 가족은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에 대한 충실성을 유지하였습니다.

머지않아 도착하게 될 증인들과 지방 주민들 간의 의사소통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로, 시베리아 당국은 식인종이 시베리아로 오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일단의 증인들은 도착하고 나서, 그곳 마을들에서 주거 할당을 받기 위해 두어 시간 기다려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노천이지만, 형제들은 얼어붙은 출림 강의 강둑에 앉았습니다. 4월 중순이긴 했어도 땅에는 아직 잔설이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큰 불을 피워 몸을 따뜻하게 하면서, 노래하고 기도하며 또 여행 중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형제들이 놀랍게도, 그곳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가까이 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마을 사람들은 증인들이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자기 집의 문이나 창문을 모두 닫는 것이었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마을 주민 가운데 가장 용감한 사람들이 도끼로 무장한 채 증인들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로 식인종이 도착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951년에 당국은 트란스카르파티아에 있는 증인들도 유배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빈 유개 화차까지 끌어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형제들을 유배하려던 그 결정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취소되었습니다. 트란스카르파티아는 금지령 기간 중에 소련 전체를 위한 서적이 생산되던 주된 지역 가운데 한 곳이 되었습니다.

연합이 지속되다

형제들 대다수가 시베리아로 추방되었기 때문에, 뒤에 남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조직과의 접촉이 끊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마리야 흐레치나는 체르노프치에서 조직이나 동료 신자들과 접촉이 끊긴 가운데 6년 이상을 지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매는 계속 여호와를 의지하면서 충실을 유지하였습니다. 1951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대부분의 형제들이 투옥되거나 유배당하는 가운데 여러 회중에서는 자매들이 인도하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태의 목격 증인인 미차엘 다세비치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시베리아 유배의 영향을 나는 직접 받지 않았습니다. 유배 대상자 명단이 작성될 때 나는 아직 러시아에서 복역 중이었거든요. 내가 우크라이나로 돌아온 직후에, 우리 지역에 있던 증인들 대부분은 시베리아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조직과의 접촉이 끊긴 증인들 개개인을 찾아내서 연구 집단과 회중들로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순회 감독자의 책임을 수행하기 시작한 겁니다. 내게 그런 일을 하라고 임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죠. 매달 모든 회중을 방문해서 보고서를 걷고, 아직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서적을 이 회중에서 저 회중으로 배포하곤 하였습니다. 종종 우리 자매들이 회중의 종의 일을 수행하였으며, 어떤 지역에서는 순회의 종의 책임도 수행하였습니다. 형제들이 없었으니까요. 안전을 기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순회구 회중의 종들의 모든 모임을 밤중에 공동묘지에서 열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죽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밤에 와서 우리를 방해하지는 않으리라고 확신했던 겁니다. 대개 그런 모임에서는 속삭이는 소리로 말을 했죠. 한번은 너무 크게 속삭였는지, 공동 묘지 옆을 지나가던 두 남자가 있는 힘을 다해서 달아나더군요. 그 사람들은 틀림없이 죽은 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1951년에 유배가 있고 나서, 당시 전국의 종이던 미콜라 치바는 계속 벙커 안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성서 출판물을 인쇄하였습니다. 1952년에 공안대는 그가 있던 곳을 찾아내어 그를 체포하였고, 그리하여 그는 감옥에서 여러 해를 보냈습니다. 치바 형제는 1978년에 사망하기까지 내내 충실을 유지하였습니다. 치바 형제 외에도, 그를 돕던 여러 형제가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형제들은 국외로부터의 접촉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최근 호 잡지를 제때에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몇 형제가 루마니아어로 된 「파수대」지를 1945년에서 1949년분까지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 형제들은 그것을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유배되거나 투옥되지 않은 증인들은 동료 신자들을 크게 염려하였습니다. 그들은 온갖 노력을 기울여 투옥된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였습니다. 재소자들에게 방한복과 음식과 서적을 넣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를테면, 트란스카르파티아 지역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은 소련 방방곡곡에 산재한 54개의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형제들과 접촉을 유지하였습니다. 여러 회중에서는 ‘기대 헌금’이라고 명명된 헌금함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이 헌금함에 모금된 금액은 옥중에 있는 형제들의 필요를 돌보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따뜻한 감사의 편지와 함께 야외 봉사 보고가 여러 감옥과 수용소에서 들어올 때는, 자유의 몸으로서 충실하고 자기 희생적인 그 형제들에게 크나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상황이 개선되다

소련 수상 요시프 스탈린이 사망한 뒤로 증인들에 대한 태도가 개선되었습니다. 1953년부터 소연방에 사면이 선포되고, 그 결과 일부 형제들이 석방되었습니다. 그 후 ‘국가 위원회’가 형성되어 이미 선고된 형량을 재심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여러 형제들이 석방되는 한편, 다른 형제들은 감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수년에 걸쳐, 투옥된 증인들 대부분이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면은 1951년에 유배된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일부 감옥과 수용소에서는 그 안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된 사람의 수가 원래 그곳에 들어간 증인의 수보다 많았습니다. 그러한 증가로 인하여 형제들은 격려를 받았고, 그들이 그 기간 확고한 입장을 취한 데 대하여 여호와께서 참으로 축복하신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석방이 된 뒤, 많은 형제들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조직과의 접촉이 끊긴 증인들을 찾아내기 위하여 대대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도네츠크 지역에 살던 볼로디미르 볼로부예프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958년에 다시 체포될 때까지 나는 조직과 헤어져 있던 증인들 약 160명의 소재를 알아내어 도울 수 있었습니다.”

사면이 선포되었다고 해서 형제들이 전파할 자유를 더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형제 자매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다시 장기 감옥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를테면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의 마리야 토밀코는 1955년 3월의 사면 덕택에 25년 감옥 형 중에서 8년 동안만 복역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3년 후 이 자매는 10년의 감옥 형과 5년의 유배를 다시 언도받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이 자매에 대한 선고문은 이러합니다. “그는 여호와 신봉 사상에 관한 서적과 필사본을 소지하고 읽었”으며 “여호와 신봉 신앙을 이웃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일을 활동적으로 수행하였다.” 7년 뒤에 이 자매는 신체 장애인으로 석방되었습니다. 토밀코 자매는 온갖 시련을 인내하였으며, 현재까지 충실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정부 당국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의 가족을 분리시키기 위하여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종종 보안 당국은 증인들에게 하느님과 가족 중 하나를 택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여호와의 백성은 가장 혹독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였습니다.

트란스카르파티아 지역에 사는 한나 보코치는 남편 누추가 열심히 전파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된 때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감옥에 있을 때 남편은 악의적인 모욕을 수없이 감수했습니다. 6개월간 독방에 감금되어 있으면서 침대도 없이 의자 하나만으로 지냈습니다. 잔인하게 구타당하고 급식도 박탈당하였고요. 서너 달 만에 아주 수척해져서 몸무게가 36킬로그램으로, 보통 때의 반밖에 안 나갔습니다.”

그의 충실한 아내는 홀로 남아 어린 딸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당국은 보코치 형제가 믿음을 타협하여 그들에게 협력하게 하려고 압력을 가하였습니다. 가족과 죽음 중 하나를 택하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보코치 형제는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고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에 충실함을 유지하였습니다. 감옥에서 11년을 보냈으며, 석방된 뒤로는 장로로서, 나중에는 순회 감독자로서 1988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리스도인 활동을 계속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종종 시편 91:2다음과 같은 말씀으로부터 힘을 얻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말하리라. ‘당신은 나의 도피처이시요 나의 성채이시요 나의 하느님이시니, 내가 신뢰하렵니다.’”

큰 인내의 본을 하나 더 고려해 봅시다. 유리 포프샤는 트란스카르파티아 지방의 순회 감독자였습니다. 결혼한 지 10일 만에 그는 체포되었습니다. 신혼여행을 가는 대신, 러시아의 모르드비니아에 있는 감옥에 가서 10년간 복역하였습니다. 충실한 아내 마리야는 남편에게 열네 번 면회를 갔는데, 그때마다 편도 1500킬로미터 정도를 여행하였습니다. 현재 포프샤 형제는 트란스카르파티아 지방의 한 회중에서 장로로 일하고 있으며, 그의 사랑하는 마리야는 충실한 사랑으로 남편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역경 하에서의 또 다른 인내의 본은 올렉시 쿠르다스와 리디아 쿠르다스 부부입니다. 이들은 자포로제 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1958년 3월, 이 부부는 딸 할리나를 출산한 지 17일 만에 체포되었습니다. 다른 열네 사람도 그 지역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쿠르다스 형제는 25년의 강제 수용소 형을 선고받고, 그의 아내는 10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들은 헤어져서, 올렉시는 모르드비니아의 수용소로, 리디아는 어린 딸과 함께 시베리아로 끌려갔습니다.

쿠르다스 자매는 우크라이나에서 시베리아로 실려 가던 3주간의 여정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끔찍했습니다. 우리 일행은 우리 딸과 나, 나디야 비시니아크와 바로 며칠 전 감옥에서 심문 기간에 태어난 그의 아기, 그리고 다른 두 자매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여섯 사람이 단지 죄수 두 사람을 태우도록 칸막이가 된 유개차 독실에 들어갔습니다. 아기들은 아래쪽 침대에다 누이고, 우리는 여행 기간 내내 위쪽 침대에서 쭈그린 채 앉아 있었어요. 빵과 절인 청어 그리고 물로 연명하였고요. 급식은 성인 죄수 4인분뿐이었죠. 아기들 먹을 것은 아무것도 못 받았어요.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아기와 함께 감옥 구내 병원에 보내졌습니다. 거기서 자매 몇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에게 조사관이 내 딸을 빼앗아 고아원에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더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 자매들은 시베리아에 사는 그 고장 형제들에게 내 딱한 사정을 알렸습니다. 그 후, 열여덟 살인 타마라 부리아크(지금은 타마라 라블리우크)가 내 딸 할리나를 데려가려고 수용소 병원에 찾아왔더군요. 내가 타마라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우리의 영적 자매이긴 해도 생면부지인 사람에게 소중한 내 어린 딸을 내어 준다는 게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수용소에 있는 자매들이 부리아크 가족이 충성스럽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어 크게 위안이 되었지요. 딸아이를 타마라의 보호에 맡긴 때가 생후 5개월 18일이었어요. 내 딸과 다시 함께 살게 된 것은 그 후 7년이 지나서였지요!

1959년에 새로운 사면령이 소연방에 의해 선포되었습니다. 그 사면령은 일곱 살 미만의 자녀를 둔 여자들에게 적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간수들의 말은 내가 먼저 내 믿음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래서 수용소에 남아 있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쿠르다스 형제는 마흔세 살 때인 1968년에 석방되었습니다. 진리를 위하여 모두 15년을 복역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철저히 폐쇄된 감옥에서 보낸 8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우크라이나로, 아내와 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들 가족이 마침내 다시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를 만나자, 할리나는 아버지 무릎에 앉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빠! 난 오랫동안 아빠 무릎에 앉아 볼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이제 잃어버린 세월을 보충할 거예요.”

그 후로 쿠르다스 가족은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녔습니다. 정부 당국이 계속해서 그들을 거주지에서 추방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살다가, 다음에는 그루지야 서부, 그 다음에는 북(北)카프카스에서 살았습니다. 최종적으로 하리코프로 이주하여,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할리나는 지금은 결혼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충실하게 그들의 하느님 여호와를 계속 섬기고 있습니다.

숭고한 믿음의 본

때로는 심한 믿음의 시험이 수개월, 수년, 심지어 수십 년 계속되었습니다. 한 예를 살펴봅시다. 유리 코포스는 트란스카르파티아의 아름다운 후스트 읍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그는 스물다섯 살 때인 1938년에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그는 나치 정권을 지지하는 헝가리 군대에 입대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8개월의 감옥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트란스카르파티아에서 그 당시 지방 법은 신앙범에 대해 사형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그러한 사형을 허용하는 나치 법이 적용되는 전선으로 끌려갔습니다. 1942년에 코포스 형제는 21명의 증인들이 포함된 다른 죄수들과 함께 군 호송 하에 러시아의 스탈린그라드 근처 전선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들을 그리로 보낸 것은 처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도착 직후 소련군이 공격을 개시하여 독일군과 함께 형제들도 포로로 잡았습니다. 형제들은 소련의 한 수용소로 끌려가, 1946년까지 그곳에 있다가 석방되었습니다.

코포스 형제는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 구역에서 전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그 활동 때문에, 1950년에 소련 당국은 그에게 25년의 강제 수용소 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사면을 받아 6년 후에 석방되었습니다.

석방된 다음, 이제 마흔네 살이 된 코포스 형제는 한나 시시코와 결혼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역시 증인이었으며, 10년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최근에 석방된 몸이었습니다. 그들은 결혼 등록 신청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결혼식 전날 밤 그들은 다시 체포되어 10년의 수용소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모든 역경을 헤쳐 나왔고, 그들의 사랑은 결혼이 10년간 지연되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인내하였습니다. (고린도 첫째 13:7) 마침내 1967년에 석방된 뒤, 그들은 식을 올렸습니다.

이것으로 그들의 사연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1973년에 코포스 형제는 이제 나이 60에 또다시 체포되어 5년의 수용소 형과 5년의 유배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유배 형기는 아내 한나와 함께 고향인 후스트에서 5000킬로미터 떨어진 시베리아에서 보냈습니다. 그 지역은 자동차나 철도로는 갈 수가 없고 공로(空路)로만 가능한 곳이었습니다. 1983년 코포스 형제는 아내와 함께 후스트로 귀향하였습니다. 한나는 1989년에 사망하였고, 그는 계속 여호와를 충실하게 섬기다가 1997년에 사망하였습니다. 모두 합해서 코포스 형제는 여러 종류의 감옥에서 27년을 복역하고 유배로 5년을 보냈습니다. 총계 32년입니다.

이 겸허하고 온유한 사람은 한 세기의 거의 3분의 1을 소련의 감옥과 노동 수용소에서 보낸 것입니다. 그처럼 특출한 믿음의 본은 적들이 하느님의 충성스러운 종들의 충절을 파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 줍니다.

일시적 균열

인류의 적인 사탄 마귀는 참 숭배를 실천하는 사람들과 대적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합니다. 신체적 학대를 가하는가 하면, 형제들 사이에 의심을 조장하고 분쟁을 유발시킵니다. 이 점은 특히 우크라이나의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1950년대에 여호와의 증인은 가혹한 괴롭힘을 당하였습니다. 당국은 서적이 인쇄되고 있는 장소를 알아내기 위하여 부단히 탐색하였습니다. 책임 있는 형제들이 계속 체포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활동을 감독하는 일을 인도하는 형제들이 연속해서, 심지어는 서너 달마다 대치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유배나 투옥, 신체적 폭력, 고문으로도 잠잠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보안 당국은 새로운 전략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들은 형제들 간에 불신의 씨를 뿌림으로 조직을 내부로부터 균열시키려고 획책하였습니다.

1950년대 중반에 보안 당국은 활동적이고 책임 있는 모든 형제들을 즉각 체포하는 일을 중단하고, 그들을 정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형제들은 정기적으로 보안 당국의 사무실로 불려 갔습니다. 그들은 협력한다면 돈을 받고 좋은 직업을 보장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협력을 거부하면 투옥과 굴욕을 당할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몇몇 사람이 두려움이나 탐욕으로 인하여 타협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조직 내 신분을 유지하는 가운데, 보안 당국에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 상황을 제보하였습니다. 또한 정부 당국의 지침을 순종적으로 이행하여, 무고한 형제들이 충실한 형제들의 눈에 배반자로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많은 형제들 사이에 불신의 영을 조장하였습니다.

파블로 지아테크는 그러한 불신과 근거 없는 의심 때문에 심한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이 겸손하고 열심 있는 형제는 수용소에서 여러 해를 보내고 여호와를 섬기는 데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1940년대 중반에 지아테크 형제는 전국의 종으로 일하였습니다. 체포되고 나서, 우크라이나 서부에 있는 감옥에서 10년간을 복역하였습니다. 1956년에 석방되었고, 1957년에는 전국의 종으로 다시 일하였습니다. 전국 위원회는 지아테크 형제 외에 여덟 명의 형제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시베리아 출신이 네 사람, 우크라이나 출신이 네 사람이었습니다. 이 형제들이 소연방 전체의 왕국 전파 활동을 감독하였습니다.

엄청난 지역을 관할하면서 끊임없는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이 형제들은 원활한 의사소통을 유지하거나 정기적인 모임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아테크 형제를 비롯한 위원들에 대한 유언비어가 퍼졌습니다. 지아테크 형제가 보안 당국에 협력하고 있다느니, 증거 활동을 증진하는 데 사용할 자금을 이용해서 개인용 저택을 지었다느니, 그가 군복을 입은 것을 본 사람이 있다느니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한 소문은 스크랩북에 모아져 시베리아에 있는 지역 및 순회 감독자들에게 보내졌습니다. 이러한 비난은 하나도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1959년 3월에 시베리아의 일부 순회 감독자들은 전국 위원회에 자신들의 야외 봉사 보고를 제출하는 일을 중단하였습니다. 분리된 사람들은 본부와 상의해 보지도 않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감독 업무를 수행하도록 임명된 지방 형제들의 지시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소연방 내 여호와의 증인 사회에 몇 해 동안 분열이 야기되었습니다.

분리된 형제들은 다른 순회 감독자들도 설득하여 같은 입장을 취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일부 순회구는 월 야외 봉사 보고를 임명된 전국 위원회가 아니라 분리된 형제들에게 보냈습니다. 대부분의 회중에 있는 형제들은 자신들의 야외 봉사 보고가 전국 위원회로 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몰랐기 때문에 회중 활동이 영향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지아테크 형제가 몇 차례 시베리아 여행을 한 후로 몇몇 순회구에서는 야외 봉사 보고를 다시 전국 위원회로 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신권 조직으로 돌아오다

1961년 1월 1일 시베리아로 봉사 여행을 갔다 오는 길에, 지아테크 형제는 열차 안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10년 감옥 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번에는 러시아의 모르드비니아에 있는 “특별” 수용소 행이었습니다. 그곳은 왜 “특별” 수용소였습니까?

여러 수용소에서 복역을 함으로 형제들은 다른 수감자들에게 전파할 기회가 생기게 되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 일로 당국은 낭패를 보았습니다. 궁리 끝에 그들은 주요 증인들을 한 수용소에 모아들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를 할 수 없게 만들기로 작정하였습니다. 1950년대 말에 소련 내 여러 수용소로부터 400명 이상의 형제들과 100명 가량의 자매들을 모아다가, 모르드비니아에 있는 두 수용소에 수용하였습니다. 재소자들 가운데는 전국 위원회에서 일하던 형제들을 비롯하여, 여호와의 의사 전달 통로로부터 분리되어 나갔던 순회 및 지역 감독자들도 있었습니다. 그 형제들은 지아테크 형제 역시 수감된 것을 보고서, 그가 보안 당국에 협력했었다는 말이 믿을 근거가 희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한편, 지아테크 형제의 체포를 예견하고, 이반 파시코프스키로 하여금 전국의 종의 업무를 인수하게 하는 조치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1961년 중반, 파시코프스키 형제는 폴란드의 책임 있는 형제들과 만나 소연방 내 형제들 사이에 분열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본부에 있는 네이선 H. 노어 형제가 지아테크 형제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편지를 보내 줄 수 있겠는지 물었습니다. 그 후 1962년에 파시코프스키 형제는 소연방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보내는 1962년 5월 18일자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하였습니다. “때때로 본인에게 들어오는 소식에 의하면 소연방에 있는 여러분 형제들은 여호와 하느님의 충실한 종들이 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계속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일부에게는 형제들과 연합을 유지하려는 노력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본인이 알기로 이러한 현상은 빈약한 통신 여건 때문인 동시에, 여호와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한 거짓 이야기의 의도적인 유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이 이 편지를 쓰는 것은, 협회가 파블로 지아테크 형제와 소연방에서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 감독자들로서 그와 함께 일하는 형제들을 인정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타협과 극단적인 견해는 둘 다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정신이 건전하고, 합리적이며, 하느님의 원칙에 있어서 융통성이 있으면서도 확고해야 합니다.”

그 편지는 지아테크 형제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과 함께, 소연방 내 여호와의 백성을 연합시키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감옥과 수용소에 수감 중이던, 분리되어 있던 많은 형제들이 조직과 다시 연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지아테크 형제가 조직을 배반하지 않았으며 본부에서도 그를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사실을 이해한 것입니다. 이 수감 중인 형제들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때, 자기 고장의 회중 장로들이 충실을 유지한 형제들과 접촉하고 야외 봉사 활동을 보고하기 시작하도록 권하였습니다. 그 후 10년 이내에, 분리되었던 형제들 대다수가 이 조언을 따랐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연합의 목표에 달하는 일은 계속 도전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수용소 내에서 충성을 유지하다

강제 수용소 생활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수감된 증인들은 그들의 영성 때문에 종종 다른 수감자들보다 잘 견뎌 낼 수 있었습니다. 서적을 가지고 있었고, 장성한 동료 신자들과 의사소통을 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훌륭한 영을 갖는 데 그리고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한 수용소에서, 자매들은 일부 서적을 어찌나 감쪽같이 땅속에 묻어 두었는지 아무도 그것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한번은, 한 검사관이 수용소 내에서 모든 “반소련 서적”을 일소하기 위해서는 그 일대 땅을 2미터 깊이로 파서 흙을 뒤집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수감된 자매들은 그 잡지들을 얼마나 철저히 연구했는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부 자매들은 그 「파수대」 잡지 내용의 일부를 암송할 수 있습니다.

형제 자매들은 어려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 충성을 유지하고 성서 원칙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전파 활동을 이유로 5년을 수용소에서 보낸 바 있는 마리야 흐레치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피의 신성함을 존중함으로 순결을 유지함’이라는 기사가 실린 「파수대」를 받고서, 우리는 수용소 식당에서 고기가 나올 때는 점심을 먹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당시 수용소에서 사용하던 고기는 피를 제대로 빼지 않은 것이었거든요. 교도소장은 증인들이 어떤 점심 식사는 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자 강제로 우리를 원칙에서 빗나가게 만들 작정을 했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아침, 점심, 저녁 식사로 고기를 내라고 명령했습니다. 두 주일 동안 우리는 빵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시고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견딜 수 있을지 아신다는 것을 알므로, 그분을 전적으로 의뢰했습니다. 그런 ‘영양식’ 기간이 2주가 끝나 갈 무렵, 교도소장은 마음이 바뀌어 우리에게 채소와 우유에다 더 좋은 버터까지 주기 시작하더군요. 우리는 여호와께서 참으로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인내하는 데 도움이 된 것

다른 수감자들에 비해, 형제들은 매우 긍정적이고 자신감 있는 인생관을 유지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소련 감옥의 참상을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 해 옥살이를 한 올렉시 쿠르다스 형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인내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여호와와 그분의 왕국에 대한 깊은 믿음, 감옥 안에서 신권 활동에 참여한 것 그리고 정기적인 기도였습니다. 도움이 된 또 다른 것은 내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내가 할 일에 계속 몰두한 점도 있지요. 지루함은 모든 수감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거든요. 우리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정신병을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신권적인 일에 계속 분주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또한 감옥 내 도서실에서 세계사와 지리와 생물학 관련 서적을 구할 수 있는 대로 빌려 보았고요. 인생에 대한 나의 관점에 보탬이 되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내 믿음을 강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1962년에 세르히 라블리우크는 3개월간 독방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형제는 아무에게도, 심지어 간수에게도 말을 건넬 수가 없었습니다. 정신을 정상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성구를 생각해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1000개가 넘는 성구를 기억해 내어, 종이에다 연필심을 가지고 적었습니다. 연필심은 내내 마루 홈 속에 숨겨 두었습니다. 그는 또 과거에 연구했던 「파수대」지 기사 제목을 100개 이상 기억해 냈습니다. 앞으로 20년 동안의 기념식 일자도 계산해 냈습니다. 이 모든 일로 인하여 그는 정신적으로는 물론 영적으로 지탱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에 대한 믿음을 살아 있고 강하게 유지하였던 것입니다.

간수들의 “봉사”

보안 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 출판물은 모든 장애를 통과하여 감옥에 있는 형제들에게까지 도달하였습니다. 간수들 역시 이 사실을 깨닫고는, 수시로 모든 감방을 철저히 수색하여 문자 그대로 구석이란 구석은 다 뒤지곤 하였습니다. 또 서적을 찾아낼 심산으로, 수감자들을 이 감방에서 저 감방으로 주기적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옮기는 동안 수감자들은 철저한 수색을 받았고, 서적이 발견되면 압수당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서적을 들키는 일을 어떻게 예방할 수 있었습니까?

대개 형제들은 서적을 베개와 매트리스, 구두, 옷가지 속에 감추었습니다. 일부 수용소에서는 「파수대」지를 깨알 같은 손 글씨로 베꼈습니다. 수감자들이 이 감방에서 저 감방으로 옮겨 갈 때, 형제들은 때때로 그 소형 잡지를 비닐로 싸서 혀 밑에 감추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그 희귀한 영적 양식을 보존하여 영적 식사를 계속할 수가 있었습니다.

바실 분하는 진리를 위하여 여러 해 옥살이를 했습니다. 감방 짝인 페트로 토카르와 함께 그는 목수 연장통에 이중 바닥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감옥으로 몰래 들여온 출판물의 원본들을 그 속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이 형제들은 감옥 내 목수들이었고, 그래서 그 연장통은 그들이 감옥 안에서 목수 일을 할 때 지급받았습니다. 그들은 연장통을 대출받을 때, 그 잡지 원본을 꺼내어 복사를 하곤 하였습니다. 그날 일이 끝나면 그 잡지는 다시 연장통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교도소장은 그 연장통에 자물쇠를 세 개나 채워 가지고 이중으로 잠근 문 속에 그것을 보관하였습니다. 톱이나 끌과 같은 목수 연장은 수감자들이 흉기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성서 출판물 색출 시간에도 간수들은 잠겨진 연장통은 조사할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 연장통은 교도소장 소관 비품 가운데 간수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하 형제는 서적 원본을 감추어 둘 다른 곳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시력이 나빴기 때문에 안경을 여러 개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소자들은 안경이 한 번에 하나씩만 허용되었습니다. 나머지 안경은 특별한 장소에 보관되어야 하였고, 재소자들은 필요할 때만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분하 형제는 자기 안경들을 넣어 둘 갑들을 특별하게 만들어 가지고, 그 속에 출판물의 소형 복사 원본을 집어넣었습니다. 형제들이 잡지를 복사할 일이 생길 때면, 분하 형제가 간수에게 다른 안경을 갖다 달라고 요청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단지 천사들만이 서적을 간수들의 손에서 보호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상황들도 있었습니다. 분하 형제는 체슬라브 카즐라우카스가 비누 20개를 감옥 안으로 들여오던 때를 기억합니다. 그 중 반은 우리 출판물로 속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간수가 비누 열 개를 골라서 찔러 봤는데, 서적이 든 토막은 하나도 찌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꾸준한 연합 활동

1963년부터 전국 위원회의 형제들은 야외 봉사 보고서를 브루클린으로 정기적으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출판물을 마이크로필름으로 받는 마련도 생겼습니다. 그 당시 소연방 전체에는 열네 개의 순회구가 있었는데, 그 중 네 개가 우크라이나에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의 수가 늘어나면서 일곱 개의 지역구가 우크라이나에 형성되었습니다. 보안상 각 지역구는 여자 이름으로 불리었습니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지역구는 알라, 볼린 지역구는 우스티나, 할리치나 지역구는 리우바로 불리었고, 트란스카르파티아 지방에는 카티아, 크리스티나, 마시아라는 지역구가 있었습니다.

한편 KGB(국가 보안 위원회)는 계속 증인들의 연합을 파괴하고자 획책하였습니다. 한 KGB 사무실 책임자는 상관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이 분파의 균열을 촉진할 목적으로 우리는 여호와 신앙의 인도자들의 적대적인 활동을 진압하고, 동료 종교 신자들의 면전에서 그들의 위신을 떨어뜨리며, 그들 사이에 불신 풍조를 조성하는 과업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KGB 요원들은 이 분파를 서로 반목하는 두 그룹으로 균열시킬 방도를 취했습니다. 한 그룹은 현재 복역 중인 여호와 신앙 인도자 지아테크의 추종자들로 형성되어 있고, 다른 그룹은 소위 반대파 신봉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평신도들 사이에 이념 분쟁을 일으키고 조직 단위의 와해를 진전시키는 데 적합한 조건과 전제가 조성돼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서한은 KGB의 시도가 난관에 봉착하고 있음을 시인하였습니다. 계속되는 내용은 이러합니다. “여호와 신앙의 인도자들 가운데 가장 열성인 반동 분자들이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조직 단위들을 강화하는 노력을 기울임으로 우리의 행동을 무력화하는 단계를 취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형제들은 계속 연합 활동을 수행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노력을 축복하셨습니다.

KGB는 분리된 형제들에게 노어 형제가 보낸 것처럼 위장한 가짜 편지를 제시하여, 별도로 독립된 여호와의 증인 조직을 구성하려는 복안을 지지한다고 하였습니다. 조직 계통으로부터 분리가 허용되는 예로서 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선 경우를 인용한 그 편지는 소연방 전역에 배포되었습니다.

충실한 형제들은 그 편지의 사본을 브루클린으로 보냈고, 1971년에 그 편지가 터무니없는 날조임을 폭로하는 회답을 받았습니다. 아직도 하느님의 백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던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노어 형제는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습니다. “협회가 사용하는 유일한 의사 전달 통로는 여러분의 나라에 있는 임명된 감독자들을 통하는 통로뿐입니다. 임명된 그 감독자들을 제외하고는 여러분의 나라에 있는 그 어느 개인도 여러분 가운데서 인도하는 권위를 받지 않았습니다. ·⁠·⁠· 여호와의 참된 종들은 하나의 연합된 집단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여러분 모두가 임명된 감독자들 아래 그리스도인 회중의 연합으로 돌아와서, 우리가 연합하여 증거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참으로 바라며 또 기도하는 바입니다.”

이 편지는 형제들을 연합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형제들은 아직도 기존의 의사 전달 통로를 신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독립적으로 본부와 접촉하는 체제를 구성하려고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리된 형제들은 한 가지 시험을 해 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10루블 짜리 지폐를 브루클린으로 보내면서, 형제들에게 그것을 둘로 잘라서 그 두 조각을 우크라이나로 보내되, 그 지폐의 반쪽은 분리된 형제들에게 우편으로, 나머지 반쪽은 본부에서 사용하는 통로에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당연히 반쪽은 우편으로 보내왔습니다. 나머지 반쪽은 인편으로 전국 위원회 성원들에게 왔습니다. 위원들은 이제 그것을 트란스카르파티아 지방의 책임 있는 형제들에게 주었고, 그들은 분리된 형제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도, 분리된 형제들 중 일부는 전국 위원회 성원들이 보안 당국과 틀림없이 결탁한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의혹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그런 일은 있었어도 분리된 형제들의 대부분은 조직으로 돌아왔습니다. 사탄과 KGB가 소연방에서 분쟁을 일으켜 여호와의 증인 조직을 근절시키려던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은 그 수와 힘에 있어서 증가하여, 연합을 이루고 활동과 새로운 구역에서 진리의 씨를 뿌리는 활동을 부지런히 수행하였습니다.

바실 칼린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생활을 영위하려는 우리의 열망을 억누르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믿지 않는 동료 유배자들에게 계속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와 별의별 범죄로 유배된 사람들이었죠.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소식에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이 사람들 가운데 마침내 여호와의 증인이 된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국가 보안 당국과 지방 정부 양측에서 우리에게 가해 오는 박해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금지령 하에서의 그리스도인 생활

그러면 이제 금지령 하의 처음 몇십 년 동안 그리스도인 활동이 어떠하였는지 개괄적으로 살펴보기로 합시다.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1939년부터 금지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파 활동과 회중 활동은 진전되었습니다. 물론, 형제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사람들에게 증거해야만 하였습니다. 관심자들에게, 그를 방문하고 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처음부터 알려 주지는 않았습니다. 종종 가정 성서 연구는 성서만을 사용하여 사회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진리를 배웠습니다.

회중 집회도 그와 유사한 상황에서 열렸습니다. 많은 곳에서 형제들은 매주 여러 번 늦은 저녁이나 한밤중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발각되지 않도록 창문에는 두꺼운 천을 드리우고서 석유 등불 아래서 연구를 하였습니다. 통상적으로 각 회중은 「파수대」를 단지 한 부만 받았습니다. 그것은 손으로 쓴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형제들은 복사기로 프린트한 잡지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대개 형제들은 개인 집에 매주 두 번씩 모여 「파수대」 연구를 하였습니다. KGB는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 장소를 찾아내어 책임 있는 형제들을 처벌하고자 하는 결의로 기세가 등등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또한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기회로 삼아, 함께 모여 잘 준비된 성서 강연을 듣고 서로를 격려하였습니다. 결혼식 때는 많은 형제 자매들이 성서를 소재로 한 시들을 낭독하고 고대 의상을 갖춘 성서 드라마를 공연하곤 하였습니다. 이 모든 행사는 그 자리에 참석한 증인이 아닌 많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많은 형제들이 단지 그런 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그렇지만 1960년대에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집회가 발각되면, 보안 당국은 대개 집회 참석자 전원의 명단을 만들고 집주인은 반 달분의 임금에 해당하는 벌금형에 처했습니다. 때로는 이런 방침이 황당무계할 정도로 시행되었습니다. 한번은 미콜라 코스티우크와 그의 아내가 자기 아들네 집에 찾아갔습니다. 즉시 경찰이 들이닥쳐 ‘참석자 전원’의 명단을 만들었습니다. 그 후 경찰은 코스티우크 형제의 아들을 찾아와, ‘여호와 신봉자들의 불법 집회’를 이유로 벌금을 납부하라고 하였습니다. 코스티우크 가족은 이 사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아무 집회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국은 그 벌금형을 취소하였습니다.

기념식을 거행하다

끊일 줄 모르는 난관에 대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실망하지 않고 계속 정기적으로 모였습니다. 기념식을 거행하는 것이 가장 도전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KGB는 특히 기념식 때가 되면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항상 행사 날짜를 대강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증인들을 주시하고 있으면 기념식 모임 장소를 발견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면 보안 당국은 새로 증인이 된 사람들과 ‘아는 사이’가 될 수 있게 될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이러한 계략을 알고 있었으므로 기념식 날에 대해서 극히 조심하였습니다. 찾아내기 어려운 장소에서 기념 행사를 가졌습니다. 관심자들에게는 사전에 기념식 날짜와 장소를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대개 증인들은 기념식 당일에 관심자의 집에 가서 곧바로 모임 장소로 데려가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트란스카르파티아의 형제들이 기념식을 한 자매의 집 지하실에서 거행하였습니다. 그 지하실은 침수되어 있었으므로, 아무도 사람들이 그곳에서 무릎 깊이의 물속에 모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물 위로 올라오게 단을 설치하고 그 지하실을 기념식에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낮은 천장 아래 단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하였지만, 기쁜 마음으로 기념식을 진행하는 동안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경우로, 1980년대에 한 그리스도인 가족은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저녁 무렵 그들은 기념식을 거행하기 위해 다른 형제들과 함께 숲 속에 모였습니다. 비가 쏟아지고 있어서, 모든 형제 자매는 우산을 받고 촛불을 들어 불을 밝힌 채 둥그렇게 모여야 하였습니다. 끝나는 기도 후에 모두는 떠나갔습니다. 그 가족이 집에 도착해 보니 뜰 입구 대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경찰이나 보안 당국이 그들을 찾고 있었던 것임이 분명하였습니다. 몸은 피곤하고 젖어 있었지만, 온 가족은 아침에 집을 떠나 기념식에 참석하였고 그러느라 당국과 맞닥뜨리지도 않게 되어 행복하였습니다.

키예프에서는 형제들이 기념식을 가질 만한 안전한 장소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한해는 기념식을 차 안에서 거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한 형제가 운수 회사에서 버스 기사로 일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버스 한 대를 대절하였습니다. 그 버스는 여호와의 증인만을 태우고는 그 도시 밖 숲 속의 공터로 갔습니다. 버스 안에서 형제 자매들은 작은 탁자에 기념식 표상물을 차려 놓았습니다. 또 약간의 음식도 가져왔습니다. 갑자기 경찰이 현장을 덮쳤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형제들을 방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루 종일 일하고 나서 버스 안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 사람들로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들에서는 기념식 날 형제들의 집에 대한 일대 수색이 있었습니다. 해가 지자마자 경찰관이 서너 명씩 탄 차들이 증인들이 살고 있는 집들에 다가왔습니다. 경찰은 형제들이 집 안에 있는지 아니면 종교 행사에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점검하곤 하였습니다. 증인들은 항상 이러한 수색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정장 위에다 낡은 작업복을 걸치고는 일상적인 집안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이 집에 머물러 있는 것이지 무슨 종교 행사에 나갈 예정이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수색이 끝나자마자 그들은 낡은 옷은 벗어 버렸고, 그러면 기념식에 갈 채비가 다된 것입니다. 지방 당국은 자기들이 할 일을 다해 흡족하였고, 형제들은 기념식을 평화스럽게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서적 숨기기

1940년대 말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자기 집에 서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25년 형을 선고받은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스탈린이 1953년에 사망한 후, 서적 소지 죄에 대한 선고는 10년 형으로 줄었습니다. 나중에는, 증인 서적 소지죄가 벌금형에 처해졌고 서적은 압수·파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금지령 기간 내내 형제들은 서적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을 신중하게 강구하였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서적을 증인이 아닌 친척이나 이웃 사람의 집에 갖다 두었고, 다른 형제들은 금속 통이나 비닐 가방에 넣어 자기 집 정원에 파묻었습니다. 트란스카르파티아에서 장로인 바실 구조는 1960년대에 카르파티아 산맥에 있는 숲을 “신권 도서실”로 이용하던 일을 상기합니다. 그는 서적을 우유 통에 넣어 숲으로 가져가 뚜껑이 지면 높이가 되게 묻었습니다.

그리스도인 활동을 하다가 16년을 감옥에서 보낸 한 형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서적을 가능한 곳이면 어디에나 감추었습니다. 벙커 속, 땅속, 건물 벽 속, 이중 바닥을 깐 상자 속 그리고 바닥이 이중인 개집 속에 두었습니다. 우리는 서적을 빗자루 속에, 그리고 (대개는 야외 봉사 보고를 넣어 두는) 속이 빈 밀방망이 속에도 숨겼습니다. 그 외에도 숨기는 장소로 우물, 변기, 문짝, 지붕, 장작 더미가 있었습니다.”

지하 인쇄 시설

공산당 스파이와 정부 당국이라는 두 가지 감시의 눈에도 불구하고, 영적 양식은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계속 공급되었습니다. 진리의 적들은 우리의 서적이 소연방 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고, 그 점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59년 말 소련 철도 근로자 신문인 「구독」(Gudok)은 여호와의 증인이 성서 서적을 소련으로 들여오기 위하여 기구를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물론, 우리의 서적을 기구로 우크라이나에 들여온 것은 아닙니다. 국내의 개인 집들에서 재생산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형제들은 서적을 인쇄하는 데 가장 실제적이고 안전한 장소는 잘 위장한 벙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벙커를 지하실이나 언덕에 팠습니다.

1960년대에 그러한 벙커 중 하나를 우크라이나 동부에 만들었습니다. 환기와 전기 시설도 갖추었습니다. 벙커 입구는 너무나 잘 은폐된 나머지 경찰이 한번은 그 벙커 바로 위에서 금속 봉으로 땅을 찌르면서 하루 종일을 보냈습니다. 그러고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한번은 비밀 인쇄 시설 한 군데가 보안 당국의 엄격한 감시 하에 들어갔습니다. 서적이 그 집에서 인쇄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는 관련자들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형제들에게는 문젯거리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종이를 집 안으로 가지고 들어갈 것이며, 어떻게 서적을 가지고 나올 것입니까? 드디어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한 형제가 종이 묶음을 아기 포대기 속에 싸서 그것을 아기인 양 집 안으로 안고 들어갔습니다. 들어와서는 그 종이는 거기에 남겨 두고, 새로 인쇄한 우리 잡지를 포대기에 싸서 그 ‘아기’를 집 밖으로 안고 나왔습니다. KGB 요원들은 그 형제가 들락거리는 것은 보았지만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도네츠크 지역, 크림 반도, 모스크바, 레닌그라드(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형제들은 이 벙커에서 인쇄된 서적을 받았습니다. 젊은 형제 몇 사람이 볼린 지역의 노보볼린스크 시에 그와 비슷한 벙커를 만들었습니다. 이 형제들은 이 벙커의 위치를 비밀에 부치기로 얼마나 결의했던지, 우크라이나에서 우리의 활동이 법적으로 승인이 나고 9년이 지나서야 다른 형제들이 그것을 보도록 허용하였습니다!

이와 유사한 인쇄 시설이 카르파티아 산맥 깊숙한 곳에서도 가동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작은 개천에서 수도관을 통해 물을 벙커 안으로 끌어들였고, 그 물로 작은 발전기를 돌려 조명용 전기를 공급하였습니다. 하지만 인쇄기는 손으로 돌렸습니다. 상당량의 서적이 이 벙커에서 인쇄되었습니다. KGB는 그 지역에 더 많은 서적이 나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그 인쇄 시설에 대한 수색에 나섰습니다. 경찰은 그 벙커를 찾아내려고 광범위한 곳을 파 보았습니다. 심지어는 지질학자들로 가장하고 그 산맥 일대를 헤매고 다니기까지 했습니다.

당국이 벙커의 위치를 알아낼 만큼 근접해 왔다는 상황을 형제들이 알아차렸을 때, 이반 드지아프코는 인쇄 시설을 감독하는 일을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미혼이라서 체포를 당해도 자녀가 아버지를 빼앗기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1963년의 여름이 끝날 무렵, 그 벙커는 발각되었고 드지아프코 형제는 그 근처에서 즉각 처형되었습니다. 지방 당국은 희희낙락하여, “여호와의 증인이 미국과 라디오 송신기로 교신하던 곳”으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무료 관광을 시켰습니다. 그 주장은 거짓이었지만, 이 슬픈 사건은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소식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재 카르파티아 산맥의 그 지역에는 20개가 넘는 회중이 있습니다.

부모에 의한 교육의 가치

서적 압수, 벌금형, 투옥, 고문, 처형에 더하여, 일부 증인들은 자녀를 빼앗아 가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우크라이나 동부에 살던 리디아 페레푈키나에게는 네 자녀가 있었습니다. 내무부 관리인 남편은 아내가 증인이라는 이유로 1964년에 이혼 신청을 냈습니다. 법정은 페레푈키나 자매에게서 자녀 양육권을 박탈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일곱 살인 쌍둥이—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는 아버지에게 맡겨졌고, 그 아버지는 두 자녀를 데리고 1000킬로미터 떨어진 우크라이나 서부로 전근을 갔습니다. 법정은 다른 두 자녀는 고아원에 보내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진술할 기회가 주어지자, 리디아는 법정에서 “저는 여호와께서 제 자녀를 제게 돌려주실 능력이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재판이 끝난 뒤, 리디아는 여호와의 인도와 돌보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당국은 나머지 두 자녀를 고아원에 보내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살게 하였습니다. 7년간 연속해서 휴가 때면 리디아는 다른 두 자녀 즉 쌍둥이를 만나러 긴 여행을 하였습니다. 전남편은 어머니가 아이들을 만나도록 허락하려 들지 않았지만, 리디아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이 사는 도시에 도착하면, 자매는 역에서 밤을 지내고 나서 자녀들을 등굣길에서 만나곤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이 귀중한 기회를 이용해서 아이들에게 여호와에 관하여 알려 주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리디아는 충성스럽게 자녀들의 마음에 ‘눈물로 씨를 뿌렸습니다.’ 나중에 그는 ‘기뻐 외치며 거두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시 126:5) 쌍둥이는 열네 살이 되었을 때 엄마와 함께 사는 쪽을 택하였습니다. 리디아는 자녀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자녀 가운데 둘은 다른 행로를 선택한 반면, 리디아와 이 쌍둥이는 충성스럽게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상황의 개선

1965년 6월, 우크라이나 대법원은 여호와의 증인의 서적은 종교적인 성격의 것이며 반소련 서적이 아니라는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 결정은 단 한 건의 소송 사건에 적용되는 것이었지만, 장차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있게 될 판결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국은 성서 서적을 읽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체포하는 일은 중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파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증인들을 계속 투옥시켰습니다.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변화가 1965년 후반부에 일어났습니다. 소연방 정부는 1951년에 시베리아로 유배시킨 모든 증인들을 해방한다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이제 그들은 소련 전국을 자유롭게 여행하도록 허락되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압수당한 가옥이나 가축 등 재산을 반환할 것을 요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등록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 때문에 그들 중 소수만이 과거의 거주지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1951년에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던 많은 형제들은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게오르기아·북카프카스 등 소연방 여러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에 정착하면서, 이 지역들로 진리의 씨를 가져갔습니다.

압력에도 불구하고 확고함을 유지하다

앞에서 언급한 변화가 상황을 개선시키기는 하였지만, KGB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KGB는 증인들을 협박하여 믿음을 포기하게 하려는 시도로 다양한 수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한 가지 행위는 형제를 직장에서 끌어다가 KGB 사무실이나 호텔에 며칠간 구금하는 것이었습니다. 구금 중 KGB 요원들은 서너 명이 한 조를 이루어 그 형제에게 설교하고 질문하고 달래고 협박하곤 하였습니다. 그들은 교대로 이렇게 하여 형제가 계속 잠을 못 자게 만들곤 하였습니다. 나중에 형제는 석방되지만, 하루 이틀 후에는 다시 구금하여 같은 식으로 다루었습니다. KGB는 빈도는 적었지만 자매들에게도 이러한 일을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거듭거듭 KGB 사무실로 호출당했습니다. 형제들에게 믿음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가함으로써 보안 당국은 조직 내에 새로운 협력자들을 양성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형제들이 믿음을 타협하는 일에 응하지 않을 때는 도덕적·감정적 압력을 가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 해 동안 트란스카르파티아에서 순회 감독자로 일한 미하일로 틸니아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한번은 대담 중, 군복 차림의 보안 관리들의 태도가 매우 호의적이고도 긍정적이었습니다. 나에게 근처 식당에서 식사나 같이하자고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그저 미소를 지으면서, 탁자 위에 50루블(월급의 반 정도)을 내놓고는, 그들끼리 가서 식사하라고 했지요.” 틸니아크 형제는 그가 군복을 입은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동안 그들이 틀림없이 사진을 찍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진은 훗날 그가 믿음을 타협하였다는 ‘증거물’로 이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형제들 사이에 불신의 씨가 뿌려질 것이었습니다.

수십 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저버리게 하려는 압력을 받았습니다. 트란스카르파티아에 살던 벨라 메이사르가 한 가지 사례입니다. 1956년에 처음 체포를 당한, 경험 없는 이 젊은 형제는 우리의 활동에 관한 어떤 선언문에 본의 아니게 서명을 하였는데, 그 결과 일부 형제들이 보안 당국에 호출당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후 메이사르 형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는, 그 형제들 중 아무도 형을 선고받지 않게 되도록 여호와께 간청하였습니다. 결국 형제들은 체포당하지 않았지만, 메이사르 형제 자신은 8년간의 감옥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집에 돌아온 뒤로도, 그는 자기 마을을 떠날 권리를 2년간 박탈당하였습니다. 매주 월요일이면 경찰서에 출두하여 신고를 해야만 하였습니다. 1968년에는 군사 훈련을 받으러 가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1년간의 감옥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형기를 마치고는 집으로 돌아와서는 계속 여호와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1975년에는 마흔일곱 살에 다시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메이사르 형제는 5년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서도 러시아의 야쿠츠크 지방으로 끌려가 5년간 유형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곳으로는 비행기로 실려 갔는데, 그것은 그 지방으로 가는 도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행 도중, 그를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젊은 군인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나이 드신 분이 어쩌다 그렇게 위험한 범죄인이 되셨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으로 메이사르 형제는 자신의 생활 방식을 설명하면서 이 땅에 대한 하느님의 목적에 대해 훌륭한 증거를 하였습니다.

메이사르 형제가 도착하자 처음에는, 지방 당국이 서류에 기재되어 있는 것을 보고서 이 “극히 위험한 범죄인”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나중에는 메이사르 형제의 훌륭한 그리스도인 행실 때문에 지방 당국은 보안 관리에게, “그런 범죄인이 더 있으면, 꼭 우리에게 보내 주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메이사르 형제는 1985년에 57세가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21년의 투옥 생활 동안, 그의 충실한 아내 레기나는 트란스카르파티아에 있는 그들의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거리가 멀고 또 상당한 비용이 드는 일이었지만, 그는 옥중에 있는 남편을 자주 면회하러 갔습니다. 도합 14만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다닌 것입니다.

석방된 후에도 라코시노 마을에 있는 그의 집으로 경찰과 보안 관리들은 메이사르 형제를 끊임없이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찾아오다 보니 우스꽝스러운 상황도 벌어졌습니다. 1990년대 초에 통치체의 시어도어 재라스는 전국 위원회의 형제들과 함께 트란스카르파티아의 우주고로트를 방문하였습니다. 리보프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메이사르 형제를 잠시 방문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인근에 사는 한 자매는, 세 대의 승용차가 메이사르 형제의 허술한 집으로 달려가서는 아홉 사람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찌나 겁을 집어먹었던지 이 자매는 다른 형제의 집으로 달려가서는, 숨을 헐떡이면서 KGB가 메이사르 형제를 또 잡으러 왔다고 알렸습니다! 자신이 잘못 알았다는 것을 알고 나서 이 자매는 얼마나 다행스러워하였는지 모릅니다!

조직의 개선과 변화

1971년에는 미차엘 다세비치가 전국의 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당시 전국 위원회는 우크라이나 서부 형제 세 사람, 러시아 형제 두 사람, 카자흐스탄 형제 한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 각자는 여행하는 감독자로도 일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 각자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세속 직업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서부 형제들이 감독하는 구역은 그들이 거주하는 곳에서 꽤 멀었습니다. 스테판 코젬바는 트란스카르파티아로 여행을 다니고, 알렉세이 다비듀크는 우크라이나 서부의 나머지 부분과 함께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까지 방문하였습니다. 다세비치 형제는 우크라이나 동부·러시아 서부와 중부·북카프카스·몰다비아로 여행하였습니다. 전국 위원회의 형제들은 앞서 언급한 지역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순회 및 지역 감독자들과 모임을 갖고 지방 증인들을 격려하며 봉사 보고를 걷었습니다.

이 형제들은, 외국에서 관광객으로 들어오면서 서적과 우편물을 가져오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과도 접촉을 유지하였습니다. 1960년대 말에서 1991년에 종교의 자유가 오기까지, 우리를 반대하던 자들은 우편물 교환을 결코 막을 수 없었습니다.

1972년에 통치체는 형제들을 장로로 임명하는 일과 관련해서 추천서를 서류로 작성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이러한 추천서 명단이 경찰의 손에 들어가지나 않을까 두려워 그렇게 하기를 주저하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와 같은 명단은 어느 회중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종종 형제들은 자기 회중에 있는 형제들의 성조차 몰랐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형제들이 자신의 이름이 명단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장로로 일하도록 추천되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련이 아무런 부작용 없이 확립되자, 다른 형제들도 마음이 바뀌어 추천에 응하고 회중에서 장로의 책임을 충실히 맡아 보았습니다.

수색 중에 여호와께서 보호하시다

어느 날 아침 경찰관들은 바실 분하와 나디 분하 부부의 집을 수색하러 왔습니다. 분하 자매가 잠을 자는 네 살 난 아들과 함께 집에 있는데, 갑자기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경찰이 왔다는 것을 직감한 분하 자매는 야외 봉사 보고와 증거 활동에 관계되는 다른 서류들을 난로 속으로 재빨리 던져 넣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경찰에게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경찰관들은 난로로 달려가더니, 그슬린 보고서들을 조심스럽게 끄집어내어 탁자에 있는 신문 위에 펼쳐 놓았습니다. 그슬린 종이에 쓰인 글씨가 아직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집 안 수색을 마치자, 경찰관들은 모두 분하 자매를 데리고 헛간을 수색하러 갔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어린 아들이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는 까맣게 탄 종잇조각들이 탁자 위에 있는 것을 보고는 치워 없애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그슬린 보고서들을 모두 가져다가 쓰레기통 속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어린이용 침대로 되돌아갔습니다. 경찰관들은 돌아와서, 그 파손되기 쉬운 ‘물적 증거’가 완전히 소멸된 것을 보고서 어안이 벙벙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1969년에 분하의 집은 다시 수색을 당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분하 형제가 집에 있었고, 경찰은 회중 야외 봉사 보고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주의하게도 그것을 탁자 위에 놓아두는 바람에, 분하 형제에게 그것을 파기할 기회를 허용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15일간의 금고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 후로 보안 당국은 분하 형제를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얼마 동안은 게오르기아와 다게스탄에서 살면서 전파를 하였습니다. 나중에 그는 우크라이나에 돌아와 충실을 유지하다가 1999년에 사망하였습니다.

보안 당국에 의해 조직된 ‘선교 여행’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많은 활동적인 형제들이 보안 당국에 의해 이곳저곳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였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지방 당국은 그들의 관할 지역에서 수행된 반종교 활동의 결과에 대하여 부정적인 보고를 키예프로 올리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감시 결과, 지방 당국은 여호와의 증인의 수가 매년 증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키예프로 보내는 그들의 보고서에는 증인들이 증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방 당국은 강제로 형제들이 자기네 소관 구역을 떠나게 하곤 하였는데, 그렇게 함으로 자기네 지역에서 증인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지 않다는 보고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증인들이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결과 진리의 씨는 확산되었습니다. 대개 이들은 전파 활동에 앞장서던 증인들이었습니다. 사실상, 이 열심 있는 형제 자매들은 우리가 요즈음 사용하는 표현으로 “더 필요한 곳”으로 이사하도록 당국으로부터 “격려”를 받은 셈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구역에 가서 봉사하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회중들이 세워졌습니다.

예를 들어, 테르노폴 시 근교에 살던 이반 말리츠키는 자기 고향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우크라이나 남부에 있는 크림 반도로 이주하였는데, 그곳에는 소수의 형제들만 살고 있었습니다. 1969년에는 크림 반도에 회중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60개가 넘습니다! 이반 말리츠키는 여전히 그 중 한 회중에서 장로로 일하고 있습니다.

금지령 하의 마지막 해들

1982년 소연방에서 정치 지도 체제에 변동이 생긴 후, 또다시 박해의 물결이 우크라이나 전역을 휩쓸면서 2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이번의 박해는 소연방 지도자들의 재가에 의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소련 지도자들은 다만 각 공화국에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한 개혁을 하겠다는 열의와 열심을 과시하고자 우크라이나 일부 지역의 지방 당국은 소수의 탁월한 증인들을 투옥시켰던 것입니다. 형제들 대다수는 이 박해의 물결로 인해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일부 증인들은 실제로 감정적·신체적 해를 당하였습니다.

1983년에, 트란스카르파티아에 살던 이반 미갈리는 4년간의 감옥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소련 당국은 이 58세 된 장로의 전 재산을 압수하였습니다. 미갈리 형제의 집을 수색하던 중, 보안 당국은 우리 잡지 70부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겸손하고 평화를 애호하는 남자는 그 지역 사회에서 성서 설교자로 유명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 즉 서적 소지 및 설교가 그의 체포 사유로 적용되었습니다.

일련의 집단 재판이 1983년과 1984년에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많은 증인들이 4년 내지 5년간 투옥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형제들은 추운 시베리아나 카자흐스탄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내에서 복역해야만 하였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감옥 안에서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감옥 규칙을 어겼다는 날조된 죄목을 그들에게 씌운 것입니다. 그 목적은 그들의 형기를 늘리기 위한 구실을 찾자는 것이었습니다.

상당수의 교도소장들은 또한 형제들을 소련에 있는 정신 병원에 보냈는데, 증인들이 정신병에 걸려 하느님을 숭배하는 일을 그만두게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영이 형제들을 붙들어 주었고, 형제들은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에 충성을 유지하였습니다.

신권 통치의 승리

1980년대 후반부에는 순결한 숭배에 대한 반대가 어느 정도 완화되었습니다. 지방 회중들은 전도인의 증가를 경험하였으며, 형제들은 서적을 더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증인들은 해외의 친척을 방문한 후에 잡지와 서적들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형제들로서는, 특히 소련의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형제들로서는, 성서 출판물의 원본을 만져 보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일부 형제들은 「파수대」 원본이 철의 장막을 통과하여 들어올 날을 살아생전에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과 다투던 여러 해가 지나간 뒤, 정부 당국은 드디어 누그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이제 지방 종무실의 민간인 대표자들로부터 만나자는 권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 일부 당국자는 브루클린에 있는 세계 본부에서 온 여호와의 증인과도 기꺼이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이해할 만하게도, 형제들은 처음에는 이것이 덫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분명히 여호와의 백성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1987년에는 당국이 투옥된 증인들을 석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로 상당수의 형제들은 이웃 나라 폴란드에서 열리는 1988년 지역 대회에 참석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서류상으로는, 친지 및 친척 방문이 목적이었습니다. 매우 놀랍게도, 당국으로부터 해외 여행 허가가 났습니다! 폴란드 형제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온 방문객들에게 관대하게 서적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귀국하면서 우크라이나 형제들은 국경에서 검색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세관 관리들은 성서 출판물을 압수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형제들은 성서를 비롯한 출판물을 국내로 들여올 수가 있었습니다.

후대를 잘하는 폴란드 형제들은 우크라이나에서 훨씬 더 많은 형제들이 그 다음 해에 방문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래서 1989년에는 수천 명이 폴란드에서 열리는 세 번의 국제 대회에 조심스럽게 참석하였고, 그래서 더 많은 서적을 우크라이나로 들여왔습니다. 같은 해, 종무실과의 협의에 따라 여호와의 증인은 외국으로부터 우편으로 종교 서적을 받을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습니다. 다만, 한 우편물당 각 출판물 두 부씩으로 제한되었습니다. 독일 형제들은 소포로 서적과 잡지를 정기적으로 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비밀리에 벙커 속에서 아니면 늦은 밤 개인 집 지하실에서 잡지를 복사하는 대신, 형제들은 자기 고장의 우체국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출판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꿈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많은 오래된 증인들의 심정은 유배 생활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의 심정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꿈을 꾸는 자들 같았네.” (시 126:1) 그러나 그 일은 그 아름다운 “꿈”의 시작에 불과하였습니다.

바르샤바 대회

1989년에 브루클린의 형제들은 전국 위원회가 우리의 공개 봉사를 등록하는 협상을 당국과 시작해 볼 것을 권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브루클린 베델의 밀턴 헨첼과 시어도어 재라스가 우크라이나의 형제들을 방문하였습니다. 다음 해에는 당국에서 수천 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폴란드 대회에 참석하도록 공식적으로 허가하였습니다. 여행 서류에 기재할 때 형제들은—자랑스럽게 그리고 빛나는 눈빛으로—그들이 폴란드에 가고자 하는 것은 친지나 친척을 방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라고 신고하였습니다!

바르샤바 대회는 우크라이나에서 온 이 방문객들에게 매우 특별한 대회였습니다. 기쁨의 눈물이 뺨에 흘러내렸습니다. 동료 그리스도인들과의 만남에서 오는 기쁨, 그들의 모국어로 된 4색 인쇄 출판물을 받는 기쁨, 그리고 함께 모이는 자유를 누리는 기쁨이었습니다. 폴란드 형제들은 그들에게 사랑에 찬 후대를 베풀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제공하였습니다.

같은 믿음을 가진 많은 이전 재소자들이 이 바르샤바 대회에서 처음으로 서로 만났습니다. 모르디니아 “특별” 수용소—수백 명의 증인들이 수감되었던 곳—출신이 100명이 넘게 그곳에서 상봉하였습니다. 그들 중 많은 형제들은 그저 선 채로 서로를 바라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릴 뿐이었습니다. 몰다비아에서 온 한 증인은 벨라 메이사르와 한 감방에서 5년을 지내고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나는 당신이 줄무늬 옷을 입은 것만 기억하는데, 지금은 양복에다 넥타이까지 메고 있잖아!” 하고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종교의 자유!

1990년 말, 사법 기관들은 일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무혐의 처리를 하여, 증인들의 권리와 특권을 회복시켜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전국 위원회는 여호와의 증인을 대표하여 정부 당국과 만나는 대표단을 구성하였습니다. 독일 지부에서 온 빌리 폴이 이 대표단을 관장하였습니다.

모스크바와 키예프에서 정부 당국자들과 회합을 오래 지속한 끝에 증인들은 염원하던 자유를 획득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종교 단체는 우크라이나에서 1991년 2월 28일에 공식적으로 등록되었습니다. 그러한 등록은 소연방 영토에서는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습니다. 한 달 후인 1991년 3월 27일, 이 조직은 러시아 연방에서도 등록되었습니다. 그처럼 50여 년간의 금지령과 박해가 끝나고 여호와의 증인은 마침내 종교의 자유를 획득한 것입니다. 그 후 곧 1991년 말에, 소련은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좋은 흙이 풍성한 소출을 내다

1939년에, 지금은 우크라이나인 곳에 약 1000명의 하느님의 왕국 전도인이 있어서 비옥한 흙—사람들의 마음—에 진리의 씨를 뿌렸습니다. 52년이라는 금지령 기간, 형제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의 공포, 시베리아 유형, 심한 구타, 고문 그리고 처형을 감수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간을 보내면서 “좋은 흙”은 25배 이상의 소출을 냈습니다. (마태 13:23) 1991년에는 전도인이 우크라이나의 258개 회중에 2만 5448명 그리고 구소련의 여타 공화국들에 약 2만 명이었습니다. 그들 대다수는 진리를 우크라이나 형제들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러한 흙은 성서 출판물의 형태로 된 “비료”를 필요로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활동에 대한 법적 등록에 뒤이어, 독일의 젤터스에서 발송하는 서적을 받을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 첫 발송 서적이 1991년 4월 17일에 도착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리보프에 조그마한 서적 보관소를 개설하여, 그곳을 기점으로 서적을 트럭, 기차, 심지어는 비행기로 우크라이나·러시아·카자흐스탄 등 구소련 국가들 전체에 있는 회중들에 전달하였습니다. 이 일은 영적 성장을 한층 더 촉진하였습니다. 1991년 초에, 인구 200만의 도시인 하리코프에는 회중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같은 해에, 전도인 670명의 이 한 회중은 여덟 개의 회중으로 분할되었습니다. 현재는 그 도시에 40개가 넘는 회중이 있습니다!

소연방은 1991년에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전국 위원회는 구소련의 15개 공화국을 1993년까지 관할하였습니다. 그해에 통치체 형제들과의 모임에서는 두 개의 위원회를 구성하여, 하나는 우크라이나를 다른 하나는 러시아와 구소련의 여타 13개 공화국을 담당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우크라이나 전국 위원회에는 미차엘 다세비치, 알렉세이 다비듀크, 스테판 코젬바, 아나니 흐로훌에 더하여, 세 명의 형제 즉 스테판 흘린스키, 스테판 미케비치, 로만 유르케비치가 추가되었습니다.

그때, 우크라이나어 서적에 대한 수요의 증가에 대처하기 위하여 번역 팀을 구성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캐나다 형제들인 에밀 자리츠키와 모리스 사란추크가 아내들과 함께 이 일에 참여해 왔습니다. 이 작은 팀은 헌신적인 일꾼들로서 많은 출판물을 번역하였습니다. 그렇지만 1991년부터는 확대된 우크라이나 번역 팀이 독일에서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98년에는 폴란드로 옮겨 그곳에서 활동을 계속하다가, 최종적으로 우크라이나로 옮겨 왔습니다.

지역 대회들

1990년에 리보프 지방의 형제들과 모임을 가진 뒤 재라스 형제는 시립 경기장을 살펴보고서, “우리는 이곳을 내년 지역 대회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그를 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그 일이 도대체 가능할 것인지 의아해하였습니다. 우리 조직은 아직 등록도 안 돼 있고 형제들은 그때까지 대회를 조직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다음 해, 조직은 등록이 되었습니다. 1991년 8월에는 1만 7531명이 바로 이 경기장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하였고, 1316명의 형제 자매들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폴란드 형제들을 사전에 우크라이나로 초대하여 그 대회를 조직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해 8월에 또 하나의 대회를 오데사에서 갖기로 계획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회 주간이 시작할 때 러시아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로 인하여, 그곳 관리들은 형제들에게 오데사에서 대회를 열 수 없을 것이라고 통지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시 관리들에게 허가 신청을 계속하는 한편, 여호와를 온전히 의뢰하는 가운데 최종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드디어 책임 있는 형제들은 최종 결정을 받기 위하여 목요일에 관리들에게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날 오후 형제들은 대회를 진행하라는 허가를 받아 냈습니다.

그 주말에 1만 2115명이 모인 것을 보고 1943명이 침례를 받은 일은 참으로 놀랍고도 흐뭇한 광경이었습니다! 대회가 끝나고 이틀 뒤, 형제들은 시 관리들을 다시 찾아가 우리가 대회를 열도록 허가해 준 데 대한 감사를 표명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시 의장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책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대회장에 가 보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다 알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훌륭한 경우는 결코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모임을 개최할 허가가 필요할 때는 나는 언제든지 허락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때 이래 형제들은 아름다운 오데사 시에서 지역 대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습니다.

두드러진 국제 대회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행사는 1993년 8월 키예프에서 열린 “하나님의 가르침” 국제 대회였습니다. 6만 4714명이라는 참석자 수는 우크라이나에서 열린 대회로는 사상 최고였으며, 그 수에는 30여 개 나라로부터 온 수천 명의 대표단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영어로 제공된 프로그램은 16개국어로 동시에 통역되었습니다.

경기장 관람석의 5개 구역 전체에서 형제 자매들이 서서 두 가지 침례 연설 질문에 라고 대답하는 것을 목격할 때는 참으로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시간 반이 지나가는 동안, 7402명이 여섯 개의 침례용 풀에서 침례를 받은 것은 하느님의 백성의 현대 역사에서 단일 대회에서 침례받은 수로는 최고였습니다! 이 두드러진 행사는 여호와의 증인이 언제까지나 잊지 못하고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그 도시에는 열한 개의 회중밖에 없었는데 어떻게 이처럼 어마어마한 대회를 조직할 수 있었습니까? 그 전해와 마찬가지로 폴란드 형제들이 와서 숙박부 일을 지원하였습니다. 지방 형제들과 함께 나서서 그들은 가능한 한 많은 호텔과 기숙사를 알아보고, 심지어는 유람선까지 빌렸습니다.

가장 까다로운 업무는 경기장을 빌리는 허가를 받는 일이었습니다. 스포츠 행사 외에도 그 경기장에서는 주말이면 큰 장이 서는데, 아무도 그 장이 서지 못하게 만드는 허가를 받아 낸 적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허가가 나왔습니다.

심지어 시 당국에서도 형제들이 준비하는 일을 지원하기 위하여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이 위원회에는 경찰·교통·관광과 같은 시의 여러 기관의 기관장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시내에서 대회 참가자들을 운송하는 데 특이한 마련이 시행되었습니다. 형제들은 대중 교통 요금에 대한 선수금을 지불함으로, 대회 가슴표를 단 사람은 승차 시에 요금을 지불할 필요 없이 대회장에 와서 정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형제들은 동유럽에서 가장 큰 경기장의 하나인 리퍼블리컨 (지금은 올림픽) 스타디움에 오갈 때 지하철·전철·시내 버스에 신속히 승차할 수 있었습니다. 대회 참가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경기장 주변의 빵 가게들이 추가로 문을 엶으로, 형제들은 다음날을 위한 식품을 신속히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경찰서장은 질서 정연한 대회를 보고서 놀란 나머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행한 모든 일은 여러분의 훌륭한 행실과 더불어, 여러분의 전파 활동보다 나에게 더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는 잊어버릴지 몰라도 자신이 본 것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근처의 지하철에서 일하는 여자들 몇 명이 대회 참가자들의 훌륭한 행실에 대해 감사하기 위하여 대회 관리 사무실로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일하면서 스포츠 행사나 정치적인 행사를 수없이 치러 봤지만, 우리들에게 관심을 나타낼 정도로 정중하면서도 행복해 보이는 방문객들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우리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행사 때는 인사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거든요.”

키예프의 회중들은 대회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바빴습니다. 약 2500장의 관심자 방문 쪽지가 더 알아보고자 하는 관심자들로부터 회수되었던 것입니다. 현재 키예프에는 열심 있는 전도인들의 회중이 50개가 넘습니다!

일단의 형제들은 대회장으로 여행하는 도중에 소지품을 모두 강탈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부유해지고자 결심한 그들은 키예프로 여행을 계속하기로 결정하고서, 입고 있던 옷만 걸친 채 대회장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구체코슬로바키아에서 온 일단의 형제들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형제들에게 주려고 여분의 옷가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 사실이 대회 관리 사무실에 알려지자, 소지품을 잃은 형제들은 즉시 필요한 모든 옷가지를 제공받았습니다.

전진을 위한 도움의 손길

그처럼 비이기적인 사랑을 나타낸 본보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습니다. 1991년에 통치체는 서유럽에 있는 몇몇 지부에 동유럽에 사는 형제들을 위해 식품과 의복을 제공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증인들은 이처럼 도울 기회를 감사히 여겼으며, 참여하고자 하는 그들의 자진성은 모든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식품과 중고 의류를 기증하는가 하면, 새 옷을 사 보낸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서유럽의 각 지부에서는 그런 물품이 든 상자·여행 가방·자루를 수집하였습니다. 수톤이나 되는 식품과 의복이 네덜란드·덴마크·독일·스웨덴·스위스·오스트리아·이탈리아로부터 수송 행렬을 이룬 트럭에 실려 리보프로 전달되었습니다. 종종 형제들은 동유럽에서 왕국 활동에 사용하도록 자신의 트럭까지 기증하였습니다. 국경에서 관리들은 필요한 서류를 발급하는 데 매우 협조적이어서, 모든 배달을 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물품을 배달하러 간 형제들은 그것을 받는 모습에 감동되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리보프로 차를 몰고 간 일행은 여행담을 보고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140명이나 되는 형제들이 트럭에서 짐을 부리기 위해 모여 있었습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 겸손한 형제들은 연합된 기도를 함으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마음을 나타냈습니다. 일을 마쳤을 때 형제들은 다시 한데 모여 여호와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가진 것이 별로 없는 가운데서도 풍성하게 베푸는 그곳 형제들의 후대를 받은 다음 우리는 큰길까지 배웅을 받았는데, 거기서도 그들은 우리와 작별하기 전에 길가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먼 귀로에 많은 것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독일과 폴란드 형제들의 후대와 함께 리보프에 있는 형제들의 후대, 그들의 강한 믿음과 기도하는 태도, 그들 자신이 궁핍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잠자리와 음식을 대접하는 후대 정신, 그들이 보여 준 연합과 친밀함 그리고 그 감사하는 태도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또한 그처럼 관대하게 베푼 본국에 있는 우리 형제 자매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덴마크에서 차를 몰고 온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가지고 온 것보다 가져가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형제들이 보여 준 사랑과 희생의 영은 우리의 믿음을 크게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기증된 물품 가운데 많은 분량은 몰다비아·발트 제국·카자흐스탄·러시아를 비롯하여, 역시 크게 필요한 다른 곳들에도 전달되었습니다. 일부는 컨테이너에 실려 시베리아, 심지어 동쪽으로 7000킬로미터나 되는 하바로프스크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지원을 받은 형제들로부터 보내 온 따뜻한 감사의 편지는 감동적이고 격려적이면서도 연합을 느끼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참여자들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예수의 말씀이 참됨을 실감하였습니다.—사도 20:35.

1998년 말, 트란스카르파티아에서는 대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공식 출처에 따르면, 6754채의 가옥이 침수되고 895채가 진흙 사태로 완파되었습니다. 파괴된 가옥 가운데 37채는 증인들이 사는 집이었습니다. 즉각적으로 리보프 지부에서는 식품과 비누·침대·담요를 실은 트럭을 그 지역으로 보냈습니다. 그 후 독일과 캐나다 형제들이 옷가지와 가재도구를 보내 왔습니다. 슬로바키아·체코 공화국·폴란드·헝가리 증인들은 식품을 제공하는 동시에, 파괴된 가옥을 재건할 건축 자재도 보내 왔습니다. 많은 현지 형제들도 복구 활동을 거들었습니다. 증인들은 식품·의복·장작을 동료 증인들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제공하였습니다. 증인들은 집 마당과 밭의 오물을 제거하였으며, 증인이 아닌 사람들의 가옥을 보수하는 일도 도왔습니다.

영적 도움을 받다

그렇지만 물질적 도움만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50여 년을 금지령 하에 있던 터라, 우크라이나의 증인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을 조직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1992년에 독일 지부의 형제들이 우크라이나의 활동을 조직하는 데 지원하기 위하여 파견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장차 베델 업무를 시작할 기초가 놓였습니다. 그 후 독일·미국·캐나다에서는 형제들을 보내, 제자를 삼는 활동을 감독하는 일을 지원하게 하였습니다.

야외 활동에 경험 있는 형제들도 크게 필요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폴란드에서 봉사 훈련 학교 졸업생들이 많이 와서 회중들을, 나중에는 전국에 걸쳐 순회구와 지역구들을 돌보았습니다. 그에 더하여 미국과 캐나다에서 부부들이 건너와서 현재는 순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슬로바키아·이탈리아·체코 공화국·헝가리에서 온 형제들도 순회 감독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련들은 이 나라의 많은 형제들이 여러 봉사 부면에 성경 표준을 적용하고 그에 따라 조절하는 데 기여해 왔습니다.

성서 출판물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

1990년대의 후반부는 특별 서적 배부 운동으로 특징 지워진 시기였습니다. 「왕국 소식」 35호를 1997년에 배부하고 나서, 1만 장에 가까운 방문 쪽지를 관심자들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팜플렛을 요청하든가, 아니면 직접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우리 서적에 대한 인식은 널리 확산되어 있습니다. 한 산과 병원을 방문한 형제들은 「가정의 행복—그 비결」 책을 그 병원에 매주 열두 부씩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병원측에서는 새 아기를 낳게 되는 각 부부에게 출산 증명서와 함께 이 책도 주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수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우리 잡지에 익숙해지고 그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공원에서 전파하던 증인들이 「깨어라!」지 한 부를 한 신사에게 전하였습니다. 그 신사는 증인들에게 감사하고는, “가격이 얼만가요?” 하고 물었습니다.

“우리의 활동은 자진적인 기부로 충당되고 있습니다”라고 형제들이 설명하였습니다. 그 신사는 1흐리브니아—당시 700원 정도—짜리 지폐를 헌금하고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즉시 그 잡지를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동안 그 형제들은 공원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15분도 채 안 되어 그는 형제들에게 다가오더니 자기가 받은 잡지에 대하여 1흐리브니아를 더 기부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벤치로 가서 읽기를 계속하였고, 형제들은 계속 전파를 하였습니다. 얼마쯤 지나서 그 신사는 다시 형제들에게 다가오더니 또다시 1흐리브니아를 주었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그 잡지가 정말 흥미롭다는 것을 알았노라고 하면서, 정기적으로 읽어 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훌륭한 교육으로 성장이 촉진되다

우리의 활동에 법적 인가가 난 뒤로, 전진 운동은 가속화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상당한 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일부 전도인들이 호별 방문 봉사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50년이 넘도록 모든 증거는 비공식적으로만 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영의 도움을 받아 형제 자매들은 그들에게는 새로운 증거 방식에 성공적으로 적응하였습니다.

또한 회중마다 다섯 가지 주간 집회를 모두 조직하는 일도 가능해졌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전도인들은 연합하게 되었고 더 큰 활동에 대비하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받았습니다. 형제들은 여러 봉사 분야를 신속히 익히고 진보하였습니다. 새로운 학교와 강습들이 우크라이나의 증인들에게 훌륭한 교육을 베풀었습니다. 예를 들어, 1991년에는 신권 전도 학교가 모든 회중에 개설되어 증인들의 전파 활동을 훈련시켰습니다. 1992년부터는 장로와 봉사의 종들을 위한 천국 전도 강습이 형제들에게 큰 도움이 되어 야외 봉사에서, 회중에서 가르치는 일에서 그리고 양치는 일에서 앞장서게 해 왔습니다.

1996년에는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이 우크라이나에서 개설되었습니다. 처음 5년 동안, 7400명이 넘는 정규 파이오니아들이 이 2주 과정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유익을 얻었습니까? 한 파이오니아는 “저는 여호와의 손에 있는 진흙이 되어 이 학교를 통해서 빚어지게 된 것이 행복합니다”라고 편지하였습니다. 다른 파이오니아는 “파이오니아 강습을 받고 나서 저는 ‘빛나기’ 시작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한 파이오니아 강습 학급은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강습은 참석한 모두에게 참으로 축복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람들에 대한 예리한 관심을 발전시키도록 촉구하였습니다.” 이 강습은 57개월 연속 정규 파이오니아 신기록 달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경제 여건이 어렵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파이오니아들이 어떻게 생계를 꾸려 나가는지 궁금해합니다. 봉사의 종으로 일하는 한 파이오니아는 부양할 자녀가 세 명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와 나는 함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철저히 계획해서 우리의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들만 구입합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의지하면서 검소한 생활을 합니다. 올바른 태도를 가짐으로써, 우리는 얼마나 적은 액수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 때때로 스스로 놀라기도 하지요.”

봉사 훈련 학교가 1999년에 도입되었습니다. 100명에 가까운 형제들이 그 첫 해 중에 학교에 참석하였습니다. 많은 형제들에게는 만연한 경제적 난관 속에서 이 두 달 간의 과정에 참석하는 일이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점은 여호와께서 형제들에게 지원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봉사 훈련 학교에 초대받은 한 형제는 멀리 떨어진 구역에서 정규 파이오니아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파이오니아 짝과 함께 다가오는 겨울에 필요한 식품과 석탄을 구입할 만큼의 돈을 저금해 두었습니다. 그가 학교에 초대받게 되자, 그들은 석탄을 사든지 아니면 그가 학교에 갈 기차표를 사든지 양자택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문제를 논의한 끝에 그가 학교에 가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 결정을 하고 난 직후에, 외국에 사는 그 형제의 누이가 돈을 보내 왔습니다. 그 돈은 학교에 갈 여비로 충분하였습니다. 학교를 수료할 때 이 형제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라는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교육 마련들은 여호와의 백성이 야외 봉사와 회중 활동에 더 효과적으로 참여하도록 자격을 구비시켜 주었습니다. 전도인들은 좀 더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법을 배워 알게 되었고, 장로와 봉사의 종들은 회중에서 더 큰 격려의 근원이 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결과 ‘회중들은 믿음 안에서 계속 굳건해지고 그 수가 날마다 증가하고 있습니다.’—사도 16:5.

신속한 증가가 변화를 가져오다

우크라이나에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법적 인가가 난 뒤 몇 해 동안에 증인의 수는 4배로 증가하였습니다. 엄청난 증가를 이 나라 여러 지역에서 경험하였습니다. 자격을 갖춘 장로들 역시 크게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종종 회중들은 두 번째 장로가 생기자마자 분할하고 있습니다. 일부 회중에서는 전도인이 500명에 이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한 급성장으로 인해 활동을 감독하는 일과 관련하여 변화가 필요하였습니다.

1960년대까지는 폴란드 지부가 우크라이나의 활동을 감독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그 뒤로 독일 지부가 감독과 지원을 베풀었습니다. 1998년 9월에는 브루클린 세계 본부의 감독 하에 우크라이나가 지부가 되었습니다. 그때 지부 위원회가 조직 문제를 관리하도록 구성되었습니다.

급성장으로 인하여 지부 시설의 확장도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1991년부터, 리보프가 구소련의 15개 공화국을 위한 서적 배부 센터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해 두 부부가 독일 지부로부터 도착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작은 사무실이 리보프에서 운영되었습니다. 1년 후에는 가옥을 하나 매입하여 전 시간 사무실 근무자들이 입주하였습니다. 1995년 초에 와서는 우크라이나 사무실에서 일하는 자원 봉사자 수가 급격히 증가하여 다시 이전할 필요가 생겨, 이번에는 17개 회중이 사용하는 여섯 개의 왕국회관으로 된 복합 건물로 이전하였습니다. 이 모든 기간 내내, 형제들은 “언제 어디에 우리도 자체 베델을 건축할 것인가?” 하고 궁금해하였습니다.

지부와 왕국회관의 건축

일찍이 1992년에, 형제들은 지부 시설을 건립할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적당한 장소를 조사하는 동안 몇 년이 지나갔습니다. 형제들은 때가 오면 적당한 장소가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계속 이러한 필요성을 기도로 여호와께 말씀드렸습니다.

1998년 초, 리보프 북쪽 5킬로미터 지점으로 브리우호비치라는 작은 읍에 있는 그림 같은 소나무 숲에서 부지를 찾아냈습니다. 바로 이 장소 근처에서는 금지령 기간에 두 회중이 숲 속에서 집회를 가진 바 있습니다. 한 형제는 이렇게 소감을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숲 속에서 마지막 집회를 연 지 10년이 지나서 같은 숲에서, 그렇지만 전혀 다른 환경에서—우리의 새 지부 부지에서—집회를 가질 기회가 다시 오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1998년 말, 첫 국제 종들이 현장에 도착하였습니다. 독일 젤터스의 지역 설계 사무실 형제들이 설계 도면을 열심히 작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99년 1월 초에는, 정부 인가가 난 뒤 건축 현장에서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22개 국적의 250명이 넘는 자원 봉사자들이 현장에서 일하였습니다. 주말이면 최고 250명까지 이 나라의 자원 봉사자들도 건축 공사 일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축 공사 일을 하는 특권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모든 회중에서 주말에 전세 버스로 브리우호비치에 와서 자원 봉사를 하였습니다. 종종 그들은 현장에 제시간에 도착하여 건축 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밤새도록 달려왔습니다. 하루 종일 고되게 일하고 나서, 그들은 피곤하지만 만족하고 행복한 채 다시 올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가는 데 또 한 번 밤을 새웠습니다. 20명으로 된 한 형제 일행은 베델 공사장에서 여덟 시간 일하기 위하여 우크라이나 동부의 루한스크 지역에서 기차로 34시간을 달려왔습니다! 이 여덟 시간의 일을 위해서, 이 형제들은 각자 세속 직장에 이틀간의 휴가를 냈고, 기차표를 사느라 월급의 반 이상을 지출하였습니다. 그러한 자기 희생 정신은 베델 건축 팀과 베델 가족 모두에게 격려가 되었습니다. 공사는 신속히 진행되어, 2001년 5월 19일에 지부 봉헌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35개국의 대표자들이 그 행사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특별 모임에서, 시어도어 재라스는 리보프에서 3만 881명의 무리에게 연설하였고 게리트 뢰시는 키예프에서 4만 1142명에게 연설하여, 그 총수는 7만 2023명이었습니다.

왕국회관 문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1939년에 트란스카르파티아에서 몇 채의 왕국회관이 파괴된 뒤부터는, 1993년까지 우크라이나에 공식적인 왕국회관이 없었습니다. 그해, 네 개의 왕국회관으로 된 아름다운 복합 건물이 디브로바라는 트란스카르파티아의 마을에 여덟 달 만에 건립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여섯 채의 회관이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에서 완공되었습니다.

전도인들이 많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왕국회관도 많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복잡한 법적 절차, 물가 상승, 치솟는 건축 자재비로 인해 1990년대에는 왕국회관을 110채밖에 짓지 못하였습니다. 수백 채가 더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2000년에는 새로운 왕국회관 건축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이미 그 수요를 충당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수확 활동을 계속하다!

2001년 9월에는 우크라이나에 1183개의 회중에 12만 28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있었으며, 39명이 순회 감독자로 일하였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뿌려진 진리의 씨는 훌륭한 열매를 풍성하게 산출하였습니다. 일부 가족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5대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흙”이 참으로 훌륭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훌륭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은 후에”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간직”하였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형제들은—종종 눈물로—씨를 “심었고”, 다른 형제들은 비옥한 흙에 “물을 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것이 자라게 하시며, 우크라이나에 있는 그분의 충실한 증인들은 계속 “인내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누가 8:15; 고린도 첫째 3:6.

일부 구역에서는 증인 대 인구 비율이 특출합니다. 예를 들어, 트란스카르파티아 지역에 있는 여덟 개의 루마니아어권 마을에는 59개의 회중이 3개의 순회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유배와 심한 박해를 통하여 여호와의 증인을 우크라이나에서 근절하려던 종교적·세속적 반대자들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은 성서 진리의 씨를 뿌리기에 비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현재 여호와의 증인은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있습니다.

예언자 아모스는 “쟁기질하는 사람은 정녕 수확하는 사람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아모스 9:13) 여호와의 축복으로 흙이 어찌나 생산적이 되었는지, 다음 수확 철을 위하여 쟁기질할 때가 오는데도 수확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여호와의 증인은 이 예언이 참됨을 경험하였습니다. 장래를 내다보면서, 그들은 2001년 기념식에 25만 명 이상이 참석한 것으로 보아 더 큰 성장의 전망이 매우 좋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모스 9:15에 기록된 바와 같이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그들을 그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다시는 내가 그들에게 준 그 땅에서 뽑히지 않을 것이다.” 계속 진리의 씨를 뿌리고 풍성한 수확을 거두면서, 하느님의 백성은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여호와께서 이 예언을 온전히 이루실 때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한편, 우리는 눈을 들어 밭을 보면서 참으로 희어져 수확하게 된 것을 보고 있습니다.—요한 4:35.

[140면 삽입]

“다니일은 교수형에 처해질 뻔했지만, 미성년자라서 4개월간 감옥살이만 하였습니다”

[145면 삽입]

“증인들은 강제 수용소에서 나머지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행실로 다른 수감자들에게 말해 줄 매우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166면 삽입]

1951년 4월 8일, 6100명이 넘는 증인들이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174면 삽입]

“종종 우리 자매들이 회중의 종 일을 수행하였으며, 어떤 지역에서는 순회의 종의 책임도 수행하였습니다”

[183면 삽입]

신혼여행을 가는 대신, 그는 감옥에서 10년을 보냈다

[184면 삽입]

“생면부지인 사람에게 소중한 내 어린 딸을 내어 준다는 게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193면 삽입]

여호와의 증인은 유배나 투옥, 신체적 폭력, 고문으로도 잠잠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보안 당국은 새로운 전략을 동원하였다

[207면 삽입]

KGB는 분리된 형제들에게 노어 형제가 보낸 것처럼 위장한 가짜 편지를 제시하였다

[212면 삽입]

KGB는 특히 기념식 때가 되면 촉각을 곤두세웠다. 항상 행사 날짜를 대강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31면 삽입]

그들로서는 성서 출판물의 원본을 만져 보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238면 삽입]

“여러분이 행한 모든 일은 여러분의 훌륭한 행실과 함께, 여러분의 전파 활동보다 나에게 더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 자신이 본 것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241면 삽입]

“우크라이나 형제들이 보여 준 사랑과 희생의 영은 우리의 믿음을 크게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249면 삽입]

이 여덟 시간의 일을 위해서, 이 형제들은 각자 세속 직장에 이틀간의 휴가를 냈고, 기차표를 사느라 월급의 반 이상을 지출하였다

[124면 네모와 삽화]

여러 세기에 걸친 성서 번역판들

상당 기간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9세기에 번역된 「고대 교회 슬라브어」 역본 성서를 사용하였다. 언어가 변해 감에 따라 이 역본은 여러 시기에 개정되었다. 15세기 말경, 겐나디우스 대주교는 슬라브어 성서의 전면 개정 작업을 지휘하였다. 이 개정판이 다시 한 번 개정된 결과, 최초로 인쇄된 슬라브어 성서가 나왔다. 이 번역판은 「오스트로크 성서」로 알려져 있으며, 1581년에 인쇄되었다. 오늘날에도 권위자들은 이 성서를 인쇄 기술상 우수한 표본으로 평가한다. 이 성서는 그 이후 우크라이나어 및 러시아어 성서 번역판들의 기초가 되어 왔다.

[삽화]

이반 페도로프는 1581년에 우크라이나어로 「오스트로크 성서」를 인쇄하였다

[141면 네모와 삽화]

바실리 칼린과의 회견

출생: 1947년

침례: 1965년

약력: 1951-65년 유배. 1974년에서 1991년까지 사진판으로 서적을 인쇄함. 1993년 이래 러시아 지부에서 일하고 있음.

저의 아버지는 여러 다른 정치 체제와 여러 다른 정부 당국 아래 살아야만 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 서부가 독일에게 점령당했을 때, 아버지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구타를 당하였습니다. 왜 구타당했느냐고요? 사제가 독일 경찰에게 여호와의 증인은 교회에 나가지 않으니까 공산주의자라고 모함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엔 소련이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저의 아버지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압제를 당하였습니다. 아버지를 미국 스파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여호와의 증인의 신앙이 당시 득세하고 있던 종교의 신앙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아버지와 가족은 시베리아로 추방되었고, 아버지는 그곳에서 살다가 사망하였습니다.

[147-151면 네모와 삽화]

이반 리트바크와의 회견

출생: 1922년

침례: 1942년

약력: 1944-46년 투옥. 1947년부터 1953년까지 러시아 북단의 강제 수용소들에서 복역.

1947년에, 나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루츠크에 있는 보안이 가장 삼엄한 감옥으로 끌려가, 그 안에서 양손을 무릎에 얹은 채 곧은 자세로 앉아 있어야 하였습니다. 다리를 뻗을 수 없었습니다. 3개월 동안 그런 식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검정 코트를 입은 사람이 나를 심문하였습니다. 그는 내게서 우리의 활동을 인도하는 형제들에 관한 정보를 얻어 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내가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알려 주기를 거부하였습니다.

1947년 5월 5일, 군사 법정은 내게 10년의 수용소 감금형을 선고하여 보안이 가장 삼엄한 격지의 수용소들에 보냈습니다. 사실, 당시 나는 젊었기 때문에 그들의 명칭으로 제1급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제1급에 속한 사람들은 증인 여부를 막론하고 모두 청년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가축 운반용 화차에 태워져 러시아의 북단에 있는 보르쿠타로 실려 갔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증기선에 실려 나흘을 항해한 끝에 카라 해협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는 생명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툰드라 벌판에 왜소한 북극 자작나무뿐이었습니다. 그곳에서부터 우리는 밤낮으로 나흘간을 걸어가야만 하였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젊었습니다. 우리는 굳은 빵 조각과 훈제 순록 고기를 받았습니다. 이 식량과 함께 우리는 그릇과 따뜻한 천으로 만든 담요를 지급받았습니다. 비가 엄청나게 오더군요. 우리가 메고 다니는 담요가 물에 푹 젖어, 지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이 담요 한 장을 붙들고 비틀어 짜고 나면, 다시 가벼워지곤 하였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동안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지붕이, 내 머리를 가릴 지붕이 생기겠지!’ 그러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이끼가 무성한 공지(空地)였습니다. 간수들이 말하더군요. “짐들을 풀어. 여기가 살 곳이야.”

어떤 죄수들은 울음을 터트렸고, 다른 죄수들은 정부를 저주하였습니다. 거기서 나는 결코 아무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 나의 하느님, 당신은 나의 피난처이시고 나의 요새이십니다. 여기서도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소서.”

그들은 철조망이 없어서 경계선을 따라 밧줄을 쳤습니다. 보초도 세웠습니다. 일상 그렇듯이 보초들은 항상 책을 읽고 있었으며, 우리가 2미터 이내로 접근하면 발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끼 깔린 땅바닥에서 그날 밤을 지냈습니다. 비는 우리 위로 퍼붓고 있었습니다. 내가 밤에 깨어나서 1500명을 둘러보니 그 사람들 모두에게서 김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 주변은 온통 물바다였습니다. 이곳은 이끼 지대인 데다가 물까지 뒤덮여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비행기가 착륙해서 우리에게 식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비행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간수들에게는 특별한 트랙터가 있었는데, 타이어가 엄청나게 커서 진창에 빠지질 않았습니다. 그 트랙터가 간수들에게는 일용품을 날라다 주었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 비행장을 만드느라 사흘 동안 밤낮으로 일했습니다. 비행기가 착륙할 수 있도록 이끼를 제거해야 하였습니다. 경비행기 한 대가 밀가루를 가져왔습니다. 그 밀가루를 끓는 물에 갠 것을 우리는 식사로 먹었습니다.

우리는 등골이 빠지도록 일을 하였습니다. 길을 닦는 공사를 해서 철도 레일을 깔았습니다. 우리는 인간 컨베이어 벨트 노릇을 해서, 무거운 돌을 날랐습니다. 그 겨울은 내내 음산하기만 하고 대단히 추웠습니다.

우리는 노천에서 하늘을 보면서 잠을 자야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비가 바로 쏟아져, 몸이 젖고 배고프고 추웠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젊었던지라 활력이 있었습니다. 간수들은 걱정 말라고, 곧 지붕이 생기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군용 트랙터에 400명용 천막을 칠 만한 피륙이 실려 왔습니다. 우리는 그 천을 펼쳐서 천막을 세웠는데, 그래도 잘 곳은 여전히 이끼 깔린 땅바닥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풀을 모아다가 우리가 기거하는 그 임시변통의 천막 안에 깔아 두었더니, 그 풀이 부식하여 퇴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가운데서 잠을 잤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이가 생기더군요. 이에 물려 우리는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몸에만 있는 게 아니라 옷 구석구석까지 큰 것, 작은 것 할 것 없이 붙어 있었습니다. 실로 끔찍했습니다. 일하고 돌아와서 눕기만 하면, 그것들이 몸을 갉아 대는 바람에 우리는 긁고 또 긁어야 하였습니다. 잠이 들기만 하면 살을 뜯어먹었습니다. 우리는 십장에게 “이가 우리를 산 채로 먹습니다”라고 사정했습니다. 그는 “이제 곧 당신들을 먹은 이를 갖다가 불고기를 해야겠군”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온이 영하 30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교도관들은 날씨가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였습니다. 드디어 날씨가 다소 누그러지자, 그들은 이동용 소독 설비를 옮겨 왔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영하 20도였고, 천막은 온통 찢어져 있었습니다. “옷을 벗어”라고 하더군요. “이제 세탁을 하게 된다. 옷을 벗어라. 너희들의 의복을 소독할 것이다.”

그래서 거기서 우리는 영하 20도의 날씨 속에서 옷을 하나하나 벗어, 갈기갈기 찢어진 천막 속에서 드디어 발가벗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판자들을 가져와, 우리는 그것을 마루로 삼았습니다. 그 판자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내 몸을 바라보았습니다. 참으로 흉물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도 마찬가지더군요. 근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온통 오그라들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피골이 상접해 있었습니다. 나는 화차에 오를 수도 없었습니다. 기진맥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제1급—건강한 젊은 일꾼—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곧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거든요. 젊은 남자들이 말입니다. 이제 나는 피할 길이라고는 없어 보였기 때문에 여호와께 도와 달라고 진정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증인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는 이 노역을 면하기 위해서 일부러 손이나 다리 하나를 얼려서 그 때문에 잘라 내게 만드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무섭고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하루는 초소 중 한곳 가까이에 서 있다가 보니 거기에 의사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내가 체포된 뒤로 함께 이동해 오면서 하느님의 왕국에 대하여 증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죄수였지만 이미 사면을 받은 상황이었습니다. 그에게 다가가서 보니까, 틀림없이 그는 자유의 몸인 것 같았습니다.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름이 사샤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나를 쳐다보더니, “이반, 자네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내게 그 말을 하자 나는 어린애처럼 울고 말았습니다. 그는 “당장 의무대에 가 보게” 하더군요.

의무대에 간 다음, 나는 노역 제1급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수용소 안에 있었습니다. 이제는 제3급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휴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지정된 지역으로 보내졌습니다. 그곳 지휘관이 말하더군요. “나는 널 이곳으로 초대하지 않았다. 네 발로 온 것이다. 그러니 알아서 네 할 일을 하라.” 그래서 나는 조금씩 그곳 생활에 적응해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내게 더 이상 등골이 빠지는 노역은 없었습니다.

나는 1953년 8월 16일에 석방되었습니다. “마음대로 가라”고 하더군요. 내가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나를 보존해 주신 데 대해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나는 먼저 숲 속으로 갔습니다. 그곳 작은 숲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여호와께서 장래를 위하여,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장래의 활동을 위하여 나를 보존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렸습니다.

[삽입]

‘조금만 더 있으면 지붕이, 내 머리를 가릴 지붕이 생기겠지!’

[삽입]

그곳 작은 숲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여호와께서 나를 보존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렸습니다

[155, 156면 네모와 삽화]

볼로디미르 레프추크와의 회견

출생: 1930년

침례: 1954년

약력: 정치 활동을 하다가 1946-54년 투옥됨. 모르드비니아의 한 수용소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만남.

나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그 때문에 1946년에 공산당은 내게 15년의 수용소 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그곳에 있더군요. 그들은 내게 전파를 했고, 나는 즉시 진리를 식별하였습니다. 우리는 보안이 철저한 수용소에 있었던 탓으로 성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종이 쪽지를 찾아서 모아 두곤 하였습니다. 몇 장을 모아 가지고 작은 공책을 만들었습니다. 나는 형제들에게 기억나는 대로 성구를 내게 알려 주고 그 구절이 성서 어디에 나오는지도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공책에다 받아썼습니다. 나는 또 나중에 들어온 형제들에게도 질문을 하였습니다. 누가 성서 예언에 대해 아는 게 있으면, 그것도 적어 놓았고요. 나는 제법 많은 성서 구절들을 모아서, 그것을 전파 활동에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전파하기 시작할 때는 나 같은 젊은 친구들이 꽤나 있었습니다. 내가 제일 어렸습니다. 겨우 열여섯 살이었으니까요. 이 젊은이들에게 이야기하면서 말했습니다. “우린 의미 없는 고생을 해 온 겁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의미 없는 것에 목숨을 걸어온 거죠. 그 어떤 정치 이념도 우리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왕국 편을 들어야만 합니다.” 나는 공책을 보고 외워 둔 구절들을 인용했습니다. 기억력은 아주 좋았거든요. 내 또래 동배들을 빨리 납득시켜 놓았더니, 우리에게, 여호와의 증인에게로 오기 시작하더군요. 그들도 형제가 되었습니다.

[157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의 증인에게 적용된 형벌들

국내 유배: 유배자들은 격지로, 대개는 시베리아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일하고 거주해야 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거주 지역을 이탈할 수 없었다. 주 1회 또는 월 1회 지방 경찰서에 등록하도록 요구되었다.

실내 감옥: 세 명 내지 열 명의 수감자가 한 감방에 수감되었다. 하루에 두세 번 음식을 받았다. 일 1회 또는 주 1회 감옥 구내를 걷는 것이 허용되었다. 노역은 시키지 않았다.

수용소: 대부분 소재지가 시베리아였다. 수백 명의 수감자가 함께 막사 생활을 하였다. (한 동에 대개 20-100명 수용) 적어도 하루 여덟 시간씩 수용소 구내나 그 밖의 장소에서 일하였다. 노역은 힘들었으며 공장 건설, 철로 부설 또는 벌목하는 일 등이었다. 수감자들은 작업장에 오갈 때 간수들의 호송을 받았다. 수용소 내에서 수감자들은 일과 시간 후에는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삽화]

시베리아, 러시아: 유배된 우크라이나 증인들의 자녀들이 땔감으로 장작을 잘게 패고 있다, 1953년

[161, 162면 네모와 삽화]

표도르 칼린과의 회견

출생: 1931년

침례: 1950년

약력: 1951-65년 유배. 1962-65년은 투옥.

내가 구치소에서 조사받고 있을 때, 여호와께서는 나를 위해 기적과 같은 일을 행하신 적이 있습니다. KGB(국가 보안 위원회) 소장이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조사관이 앉아 있었고, 검사가 그 옆 자리에 있었습니다. KGB 소장이 조사관에게 말하더군요. “이걸 저 사람에게 보여 주시오! 미국에 있는 그의 형제들이 쓸데없는 짓을 꾀하고 있다는 걸 읽어 보게 하시오!”

그들은 내게 그 종이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대회 결의문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한 번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 보았습니다. 검사가 조바심이 나서, “칼린 씨! 당신 지금 그걸 외우고 있는 거야?” 하더군요.

내가 말했죠. “예, 처음에는 그냥 빨리 읽어 내려갔는데요. 그 의미를 좀 파악해 봐야겠습니다.” 속으로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결의문을 다 읽고 나서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께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을 움직여서 이렇게 하도록 해 주신 여호와 하느님께 감사하는 바입니다. 오늘 제 믿음은 이 결의문을 읽음으로 인해서 너무나도 강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증인들의 말에 동의하는 바이며, 그래서 하느님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찬양할 것입니다. 그분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수용소에서나, 감옥에서나, 제가 있는 곳 어디에서나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것이 제 사명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아무리 고문한다 해도, 여러분은 제 입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이 결의문에서 증인들은 그들이 모종의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심지어 극심한 박해가 올지라도, 충실을 유지하도록 여호와께서 도와주실 것을 알기 때문에 그분을 섬길 것이라고 결의한 것입니다! 저는 이 어려운 시기에 믿음 안에 굳게 서도록 여호와 하느님께서 제게 힘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저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결의문이 저를 그토록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저를 사살하기 위해 담벼락에 세운다 해도, 저는 움칫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부활을 통해서도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나는 조사관들의 실망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 결의문이 나의 믿음을 약화시키리라고 생각했는데, 도리어 나를 강화시켰던 것입니다.

[167-169면 네모와 삽화]

마리야 포포비치와의 회견

출생: 1932년

침례: 1948년

약력: 6년간 감옥 및 수용소 생활. 열 사람 이상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움.

1950년 4월 27일에 체포될 때, 나는 임신 5개월이었습니다. 7월 18일에 10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전파 활동을 하였다는, 다시 말해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알려 주었다는 이유로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 일곱 명이, 형제 네 명과 자매 세 명이 선고를 받았습니다. 각각 10년씩 받았지요. 나의 아기는 8월 13일에 태어났습니다.

사실, 감옥에 있을 때 나는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로부터, 우리가 살인자나 도둑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배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했습니다. 마음속에 기쁨이 있었습니다. 나는 독방에 수감되어, 감방 안에서 앞뒤로 걸어 다니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군인이 감방 창구를 열더니, “이런 처지에서 노래가 나오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아무에게도 나쁜 일을 안 했으니까요.” 군인은 그냥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나에게 매질은 않더군요.

“믿음을 버리라. 당신의 처지가 어떤지 살펴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은 내가 감옥에서 분만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이유로 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했습니다. 나는 내가 죄인이 아니라는 걸, 여호와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인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행복했던 겁니다. 그런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그 후, 수용소에서 일을 하다가 양손에 동상이 걸렸습니다. 나를 병원에 보내 주더군요. 병원 의사는 내게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여의사는, “당신은 건강이 좋지 않아요. 여기 와서 나와 함께 일하는 게 어때요?”라고 했습니다.

물론 수용소장은 그 제안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왜 이 여자를 데려다가 당신 일을 시키려고 합니까? 다른 집단에서 골라 보시오”라고 했습니다.

여의사가 말하더군요. “다른 사람은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병원에는 선하고 정직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여자에게 병원 일을 시키려고 합니다. 내가 알기로 이 여자는 아무것도 훔치지 않을 것이고, 마약을 사용해 보려고 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들은 우리를 신용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보는 특별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지 알아본 겁니다. 그 점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죠.

결국 의사는 소장을 설득했습니다. 소장은 실은 내가 목재를 자르는 일을 잘했기 때문에 나를 붙들어 두려고 했던 것이더군요. 여호와의 백성이 일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우리는 항상 정직하고 양심적인 일꾼들이었지요.

주: 마리야의 아들은 우크라이나의 빈니챠에 있는 감옥에서 태어났다. 생후 2년 동안 아기는 감옥 내의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 후에는 친족들이 아기를 시베리아로 이미 유배되어 가 있는 아버지에게 보냈다. 포포비치 자매가 출옥할 때 아들은 여섯 살이었다.

[삽입]

“저는 행복합니다. 아무에게도 나쁜 일을 안 했으니까요”

[175면 네모와 삽화]

마리야 페둔과의 회견

출생: 1939년

침례: 1958년

약력: 1951-65년 유배.

일단 우리가 열차에 자리 잡은 다음, 모두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유배 길에 오른 다음, 다른 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노래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노래책에 나오는, 우리가 아는 노래는 모두 불렀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탄 유개 화차에서만 노랫소리가 들렸는데, 나중에 우리 열차가 다른 열차를 먼저 통과시키기 위해 정거장에 설 때마다 보니까 그 열차에도 우리 형제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 열차에서도 노랫소리가 들려오곤 했습니다. 몰다비아에서 온 증인들이 있었고, 다음에는 부코비나에서 온 루마니아 증인들이 지나갔습니다. 열차가 많더군요. 이 열차들은 여러 지점에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그들 모두가 우리 형제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열차 칸에서도 여러 노래가 작곡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격려를 주고,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가지게 해 주었지요. 그러한 노래들은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관심을 여호와께 집중하게 해 주었습니다.

[177면 네모와 삽화]

리디아 스타시치신과의 회견

출생: 1960년

침례: 1979년

약력: 마리야 필리피프의 딸. 그 어머니와의 회견은 208-9면에 나옴.

내가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는 장로이셨고, 회중을 인도하셨습니다. 나는 할아버지의 일과를 기억하고 있지요. 아침에 일어나시면, 세수하고 나서는 기도를 하셨어요. 그리고는 성서를 펴시는데, 그러면 우리 모두는 모여 앉아서 일용할 성구와 함께 그 장 전체를 읽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정기적으로 나더러 중요한 서류를—말거나 가방에 넣은 것을—도시 변두리에 사는 다른 장로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집에 가려면 언덕을 올라가야만 했어요. 나는 그 언덕이 싫었습니다. 가팔라서 올라가려면 기를 써야 했거든요. “할아버지, 안 갈 거예요! 좀 안 갈 수 없나요?” 하곤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때마다, “안돼. 네가 가야 한단다. 서류를 가져가거라”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속으로, ‘안 갈 거야! 안 간다고!’ 하곤 했습니다. 그러고 나선, ‘아니야, 가야 돼. 뭔가 중요한 일이 거기에 달려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곤 했지요. 머릿속에선 항상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정말 가기 싫었지만, 그래도 가곤 했지요. 그 일을 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그 일은 매우 자주 있었어요. 그건 내 일, 내 책임이었습니다.

[178, 179면 네모와 삽화]

파블로 루라크와의 회견

출생: 1928년

침례: 1945년

약력: 감옥과 수용소에서 15년을 보냄. 현재 우크라이나 동부의 아르테모프스크에서 주임 감독자로 일함.

1952년에 나는 소연방의 카라간다에 있는 통제가 엄격한 수용소에 있었습니다. 그 수용소에는 증인이 열 명 있었습니다. 시간은 너무도 더디게 지나가, 우리는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우리에게 기쁨과 희망은 있었지만 영적 양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일과 후에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전에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통해서 배웠던 것을 모두 생각해 냈습니다.—마태 24:45-47.

나는 누나에게 편지를 써서, 수용소 실정을 알리고 우리에게 영적 양식이 없다는 사정을 설명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수감자들은 그런 편지를 보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송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렇지만 마침내 누나가 그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누나는 소포를 준비하여, 그 속에 바삭바삭한 빵과 함께 신약 성서를 넣어 가지고 내게 부쳤습니다.

수령 절차가 매우 까다로웠습니다. 수용소 당국은 소포를 그대로 수감자에게 넘겨주는 법이 없었거든요. 종종 내용물을 분리하였고, 모든 것을 샅샅이 조사하였습니다. 예컨대 깡통을 점검할 때는, 가짜 바닥이 있거나 가장자리에 무엇인가 숨겨져 있지 않은지도 확인하였습니다. 심지어 마른 빵도 검사하였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소포를 받게 될 사람의 명단에 내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나가 소포 속에 신약 성서를 넣어 보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나는 너무 기뻤습니다. 제일 까다로운 검사관이 자리에 앉아 있더군요. 수감자들이 ‘성깔’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소포를 받으러 가니까, “어디서 오는 소포를 기다리는가?” 하고 묻더군요. 나는 누나의 주소를 댔습니다. 그는 짧은 쇠지레를 들어 그 상자를 열더군요.

뚜껑을 열자, 상자 가장자리와 식품 사이에 신약 성서가 눈에 띄었습니다! 나는 잠깐 시간을 내어 속으로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저것을 제게 주십시오.”

놀랍게도 검사관은 “어서, 이 상자를 가져가 버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믿을 수가 없으면서도, 나는 상자 뚜껑을 덮어 막사로 가져갔습니다. 신약 성서를 꺼내어 내 매트리스 속에 쑤셔 넣었습니다.

형제들에게 내가 신약 성서를 받았다고 알려 주니까,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더군요. 그것은 여호와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무엇을 얻는다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영적으로 우리를 지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우리 아버지 여호와께 그분의 자비와 돌보심에 대해 감사하였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고 자신들을 영적으로 강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게 해 주신 데 대해 우리는 참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였습니다!

[180, 181면 네모와 삽화]

리디아 브조비와의 회견

출생: 1937년

침례: 1955년

약력: 1949-65년 유배.

10대 시절에 나는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아서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우리는 아버지를 사랑했거든요. 나는 아버지와 작별 인사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반과 나는 아버지가 가시는 것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밭에서 기장을 수확하고 있었거든요.

우리가 밭에서 돌아오니까, 어머니는 아버지가 붙들려 가셨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나는 공허감, 상실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공포나 증오심은 없었어요.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거든요. 우리는 항상,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다면 여러분도 박해할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어요. (요한 15:20) 우리는 이 성구를 아주 어려서 배웠습니다. 우리는 그 성구도 알고 있었고 모본이 되는 기도도 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당국자들이 하고 있는 일은 무지 때문이었지요.

몰다비아가 루마니아의 관할 아래 있을 때, 아버지는 아버지의 사건이 법정에서 변호가 가능한 일임을 아셨습니다. 우리는 법정에서 방청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날은 우리에게 매우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놀라운 증거를 하셨습니다. 검사의 기소 내용에는 아무도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증언에는 모두가 입을 딱 벌린 채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버지는 한 시간 40분 동안 진리를 옹호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매우 분명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증거를 하셨지요. 법원 관계자들도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법정에서 증언하여 진리를 공개적으로 변호할 수 있어서 가슴 뿌듯했습니다. 우리는 조금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주: 1943년에 독일 정부 당국은 브조비 자매의 부모를 체포하여, 이른바 소련에 협력하였다는 명목으로 25년의 감옥 형을 선고하였다. 일 년 이내에 소련군이 진주하였고 그들을 석방하였다. 그 후 이번에는 소련 당국이 이 자매의 아버지를 체포하였다. 브조비 자매의 아버지는 도합 2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삽입]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우리는 아버지를 사랑했거든요. 나는 아버지와 작별 인사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186-189면 네모와 삽화]

타마라 라블리우크와의 회견

출생: 1940년

침례: 1958년

약력: 1951년 유배. 100명가량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움.

이 이야기는 할리나에 관한 것입니다. 1958년, 그가 생후 17일 되던 날 그의 부모는 체포되었습니다. 할리나와 엄마는 시베리아의 수용소로 끌려왔습니다. 엄마가 젖이 나오던 5개월째까지는 할리나가 엄마와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 뒤로, 엄마는 일하러 나가야 했고 아기는 보육원으로 데려갔습니다. 우리 가족은 인근의 톰스크 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우리 회중에 편지를 써서, 누가 보육원에서 그 딸아이를 데려다가 그 부모가 석방될 때까지 기를 수 있겠는지 물어 왔더군요. 물론, 편지가 낭독될 때 모두는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어요. 젖먹이 아기가 그런 처지에 있다는 것은 슬프고도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얼마 동안 생각할 시간을 주었습니다. 1주일이 지났습니다. 아무도 그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나서지 않았어요. 우린 다 형편이 나빴거든요. 두 번째 주에 오빠가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이 아기를 우리가 데려와요.”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무슨 말이야, 바시아? 엄마는 벌써 늙고 병들었잖아. 알다시피, 다른 사람의 아이를 맡는다는 건 큰 책임이란다. 아기는 동물이 아니거든. 소가 아니야. 암송아지도 아니고. 아기란 말이야. 그것도 다른 사람의 아이라고.”

오빠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기를 데려오자는 거예요, 어머니. 아기가 동물이 아니니까요. 아기가 그런 상황에, 수용소에 있다는 걸 생각 좀 해 보세요! 아직도 그렇게 어리고, 그렇게 여린데 말이죠.”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내가 병들고 감옥에 있고 굶주렸지만, 너희는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라는 말을 우리가 들을 때가 오지 않을는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의 아이를 맡는다는 건 큰 책임이란다. 우리와 함께 있다가 그 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지?”

오빠가 말했습니다. “그 애한테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고요?” 그러고 나서 나를 가리키더니 말하더군요. “우리에게는 타마라가 있잖아요. 타마라는 자유롭게 여행해서 아이를 데려올 수 있어요. 우리가 합심해서 이 아이를 부양할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생각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가는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나는 마린스키 수용소로 갔습니다. 그 아기를 데리러 간 것입니다. 형제들은 내게 그곳으로 가져갈 서적을 주었습니다. 또 내게 카메라도 주어 아기 엄마의 사진을 찍어 오게 하였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 자매를 모르기 때문에 알아 두기 위해서였습니다. 카메라는 수용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서적은 가지고 갔습니다. 단지를 하나 사서 그 속에 서적을 넣고 그 위에 기름을 얹어 놓았습니다. 입구를 통해 들어갈 때, 경비병이 기름 아래 무엇이 있는지 조사하지는 않더군요. 그래서 서적을 수용소 안으로 가져가게 된 것입니다.

나는 아기 엄마인 리디아 쿠르다스와 얼굴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수용소에서 그날 밤을 보내기까지 했거든요. 그건 아이를 내보낼 서류가 준비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할리나를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우리가 집에 도착했을 때, 할리나는 생후 다섯 달 며칠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기를 잘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심하게 아프게 되었습니다. 의사들이 오곤 했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찾아내지 못하더군요.

의사들은 아기가 내 아이인 줄로 생각하고는 내게 압력을 가해 왔어요. “어떻게 된 엄마지? 왜 아기에게 젖을 안 먹이는 거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감옥에서 데려온 아이라는 말을 하기가 두려웠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난 그저 울기만 하고 아무 말도 못했지요. 의사들은 나를 꾸짖고, 어머니에게 고함을 치며 내가 시집가기엔 너무 어리다고, 나부터 젖을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열여덟 살이었지요.

할리나는 병이 심해서 호흡이 곤란했습니다. 나는 계단 밑으로 가서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느님, 여호와 하느님, 이 어린아이가 죽어야 한다면, 아이 대신 제 목숨을 취하소서!”

아이는 바로 의사들이 보는 앞에서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들은 “가망이 없소. 살아나지 못할 거요. 살아나지 못한다고요” 했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내 앞에서 했고, 어머니 앞에서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울고 계셨습니다. 나는 기도하고 있었고요. 그런데 아이는 살아났습니다. 아이 엄마가 석방될 때까지 우리와 함께 살았습니다. 7년 동안 우리와 함께 있었고, 다시는 한 번도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할리나는 지금 우크라이나의 하르코프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매로서 정규 파이오니아입니다.

[삽입]

“여호와 하느님, 여호와 하느님, 이 어린아이가 죽어야 한다면, 아이 대신 제 목숨을 취하소서!”

[삽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타마라 라블리우크(전에는 부리아크), 세르히 라블리우크, 할리나 쿠르다스, 미하일로 부리아크, 마리야 부리아크

[삽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르히 라블리우크와 타마라 라블리우크 부부, 미콜라 쿠이비다와 할리나 쿠이비다(전에는 쿠르다스) 부부, 올렉시 쿠르다스와 리디아 쿠르다스 부부

[192면 네모]

한 순회 감독자의 보고, 1958년

“공산당 청소년 조직원 열 명가량이 사실상 형제 개개인을 염탐하여 형제들의 동태를 상당히 파악할 수 있었으니 형제들에게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뿐 아니라 밀고하는 이웃 사람들, 거짓 형제들, 여기저기 깔려 있는 경찰, 법정 최고 25년의 수용소 또는 감옥 행 선고, 시베리아 유배, 종신 강제 노동, 구류, 때로는 어두운 감방에서의 장기 구류—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왕국에 관해 몇 마디 말을 꺼내는 사람에게 닥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전도인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한이 없고 그들의 태도는 천사들과 같아서, 싸움을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일이 여호와의 일이며, 최후의 승리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자기들이 누구를 위하여 충절을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고난을 당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기쁜 일입니다.”

[199-201면 네모와 삽화]

세르히 라블리우크와의 회견

출생: 1936년

침례: 1952년

약력: 감옥과 교도소에서 16년 복역. 일곱 번 강제 이사를 당함. 약 150명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움. 그의 아내 타마라의 회견 내용이 186-9면에 나옴. 세르히는 현재 하르코프 시 근처의 로한 회중에서 장로로 일하고 있음.

나는 모르드비니아에서 7년을 살았습니다. 이곳은 보안이 철저한 수용소였지만,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에는 많은 출판물이 배포되었습니다. 어떤 간수들은 서적을 집으로 가져가 자신이 읽고 나서 그것을 가족과 친척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때때로 한 간수는 두 번째 교대 근무 시간 중에 내게 오곤 했습니다. “뭐 가진 거 있나, 세르히?” 하고 말하곤 했습니다.

“뭘 원하십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곤 했지요.

“읽을 거 말야.”

“내일 수색이 있을 겁니까?”

“있지. 내일은 제5대를 수색할거야.”

“좋습니다. 어떤 침대 위 수건 밑에 「파수대」가 있을 겁니다. 가져가도 됩니다.”

그 수색은 실시되었고, 그 간수는 그 「파수대」를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간수들은 다른 아무 서적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수색에 대해 사전에 알았으니까요. 이런 식으로 어떤 간수들은 우리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들은 진리에 마음이 끌렸지만, 직업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형제들이 그곳에 있는 여러 해 동안 간수들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았습니다. 생각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범죄도 저지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동조자로 몰려 실직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활동을 어느 정도까지 봐줬던 것입니다. 그들은 서적을 가져가 읽었습니다. 그로 인해 박해의 열기가 식어질 수 있었습니다.

1966년 무렵 모르드비니아에는 증인이 약 300명 있었습니다. 행정 관리들은 기념식이 어느 날 열리게 되어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해에 우리를 방해할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이미 「파수대」를 연구하지만, 우리는 금년 기념식을 끝장 낼 것이다. 너희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수용소 내 각 부서 직원들은 비상사태 해제 신호가 날 때까지 자기 사무실에 남아 있어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가—감시 요원, 행정 요원, 수용소장 할 것 없이—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나가서 도로로, 연병장으로 갔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매일 일조 점화와 일석 점호를 받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회중 즉 집단별로 모여, 연병장 주위를 거닐었습니다. 각 집단에서는 한 형제가 연설을 하였고, 다른 형제들은 따라가면서 들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표상물이 없어서 단지 연설만 들었습니다. 그 당시 수용소에는 기름부음받은 자는 하나도 없었지요. 오후 9시 30분쯤, 모든 순서가 끝났습니다. 모든 집단은 도로를 걸어가면서 기념식 행사를 마친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들 모두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욕탕 옆에 함께 모였습니다. 그곳은 출입구 검문소에서 가장 먼 구석에 있었습니다. 300명 중에서 약 80명 내지 100명이 혹한의 삼림 지대에서 밤중에 합창을 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노래에 대한 반응이 어떠했겠는지 좀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노래 25번을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제목은 옛날 노래책에 나오는 “나는 당신을 위해 죽으렵니다”였지요. 누구나 다 그 노래를 알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감시탑에 올라가 있는 군인들까지 우리더러 “25번을 부릅시다!” 하고 소리치곤 하였으니까요.

그날 밤 우리가 노래를 시작하자, 전 요원들이 우리를 중단시키기 위해 각 사무실에서 목욕탕까지 뛰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착했을 때, 그 노래를 중단시킬 수 없었습니다. 노래하지 않고 있던 형제들 모두가 노래하는 형제들 주위로 견고한 원 모양으로 빙 둘러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수들은 우리가 노래를 마칠 때까지 미친 듯이 빙빙 돌기만 하였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모두는 해산하였습니다. 간수들은 누가 노래하고 누가 노래를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모두를 독방에 감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203, 204면 네모와 삽화]

빅토르 포포비치와의 회견

출생: 1950년

침례: 1967년

약력: 167-9면에서 회견한 마리야 포포비치의 아들로 옥중에서 태어남. 1970년에 체포되어, 전파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서 4년간 복역. 3일간의 법정 심문 중, 35명이 포포비치 형제가 자기들에게 전파했다는 사실을 증언함.

여호와의 증인이 처한 상황을 단지 인간 관계의 관점에서 평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박해를 받은 이유를 정부를 비난하였기 때문인 것만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관리들은 단지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관리들은 충성의 대상을 바꾸었지만 우리는 한결같은 충성을 나타냈습니다. 우리가 겪은 고난의 진정한 근원을 성서에서 이미 밝혀 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단지 억압자들의 무고한 피해자로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인내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에덴 동산에서 제기된 쟁점—하느님의 통치권이라는 쟁점—에 대한 분명한 이해였습니다. 그것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쟁점이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통치권을 옹호하는 단호한 태도를 나타낼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개인적 관심사뿐 아니라 우주 주권에 대한 관심사와도 관련이 있는 쟁점을 옹호하는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우리는 관련된 진정한 쟁점들에 대한 차원 높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강화되어, 최악의 상황 아래서도 충절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단순한 인간 관계 이상을 바라본 것입니다.

[삽입]

하느님의 백성이 박해를 받은 이유를 정부를 비난하였기 때문인 것만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208, 209면 네모와 삽화]

마리야 필리피브와의 회견

출생: 1934년

침례: 1952년

약력: 1951년에 시베리아에 추방되어 있던 언니를 방문하러 감. 마리야는 시베리아에서 진리를 배우고, 나중에는 유배 중인 형제와 결혼함.

아버지가 사망하셨을 때, 경찰이 우리 집에 찾아왔습니다. 여러 명이 왔더군요. 그들은 마을 위원회와 지역 위원회 소속이었습니다. 그들은 노래와 기도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더군요. 우리는 기도를 금하는 법은 없다고 대답했지요. 그들은 장례식을 언제 거행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알려 주니까 떠나가더군요.

형제들은 일찍 왔습니다. 함께 모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이 장례식에는 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경찰이 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 시작했습니다. 한 형제가 막 기도를 시작하는데, 경찰을 가득 실은 트럭이 도착하더군요. 그 형제는 기도를 끝마쳤고, 그래서 우리는 공동묘지로 갔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따라왔는데, 우리가 공동묘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허락했습니다. 그 형제가 다시 기도를 하자 경찰은 그를 체포하려고 하더군요. 그러나 우리 자매들은 경찰이 그 형제를 붙잡지 못하게 하기로 이미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경찰관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형제 주위를 빙 둘러쌌습니다. 혼란한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 한 자매가 그 형제를 유도하여 공동묘지 바깥으로 해서 집들 사이로 빠져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어떤 아는 사람이 자가용 차를 타고 오고 있어서, 형제는 그 차를 잡아타고 떠났습니다. 경찰은 사방을 뒤졌지만 그 형제를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가버렸습니다.

자매들이 종종 형제들을 보호한 것이지요. 보통 때는 형제들이 자매들을 보호하였지만, 그때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매들이 형제들을 보호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삽입]

그때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매들이 형제들을 보호해야만 했습니다

[220, 221면 네모와 삽화]

페트로 블라시우크와의 회견

출생: 1924년

침례: 1945년

약력: 1951-65년 유배. 블라시우크 형제가 유배된 지 얼마 안 되어 그의 아들은 병이 나서 사망하였음. 그 다음 해, 그의 아내는 다른 아들을 출산한 직후 합병증이 발발하여 서서히 사망하였음. 블라시우크 형제와 어린 아기만 남았음. 1953년에 그는 재혼하였고, 그의 새 아내가 그 아이를 돌보았음.

나는 1951년에 우크라이나에서 시베리아로 유배된 사람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두려움을 몰랐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러한 영을 형제들에게 넣어 주셔서, 그들은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은 그들이 말하는 태도에 분명히 나타나 있었습니다. 이런 전파 임지로 가겠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느님께서 정부가 우리들을 그곳으로 실어 보내도록 허락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후에 정부 당국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큰 실수를 저지른 겁니다.”

형제들이 물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말입니까?”

“우리가 당신들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 말이요. 그래서 지금 당신들은 여기서도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있지 않소!”

형제들이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또 다른 실수를 저지를 것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두 번째 큰 실수는 그들이 우리에게 사면을 내리고 우리를 석방한 후에, 우리가 고향으로 가지 못하게 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어디든 가도 좋소. 고향만은 제외하고”라고 했던 것입니다. 나중에서야 그들은 제정신이 들어 이러한 조치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정책으로 인하여, 좋은 소식은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227면 네모와 삽화]

안나 보프추크와의 회견

출생: 1940년

침례: 1959년

약력: 1951-65년 유배. 시베리아로 추방될 때 열 살이었음. 1957년부터 1980년까지 지하 활동을 하면서 성서 출판물을 인쇄함.

KGB는 종종 우리를 이용해서 형제들을 알아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사진들을 보여 주곤 하였지요. 나는 “보세요,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른다니까요, 글쎄”라고 말하곤 했지요. 우리는 항상 그런 식으로 대답을 했습니다. 나중에, 내가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서 안가르스크 읍으로 걸어가다가 그곳 KGB 책임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종종 나를 소환하여 심문하던 사람이라서 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내게 말하더군요. “스테판 보프추크 말인데, 당신은 그 남자를 모른다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당신이 그 사람과 결혼을 했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내가 대답했습니다. “저한테 사진을 보여 주면서 그이를 소개해 준 분은 댁이었잖아요?”

그는 손뼉을 치면서 말하더군요. “이런! 우리가 또 죄인들이 됐구먼!”

그러고 나서 우리는 함께 웃어 댔습니다. 내 인생에서 재미있는, 유쾌한 한 순간이었지요.

[229, 230면 네모와 삽화]

소피야 보프추크와의 회견

출생: 1944년

침례: 1964년

약력: 1951-65년 유배. 일곱 살 때 어머니, 언니, 오빠와 함께 시베리아로 끌려감.

우리는 시베리아로 끌려가면서 우리가 그곳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자유가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요. 「파수대」에서 다른 나라에서 열리는 대회에 관한 기사를 읽을 때면, 여호와께 우리 생전에 한번만이라도 다른 나라에서 열리는 대회 같은 곳에 참석할 기회가 오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말 그대로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축복하셨지요. 1989년에 우리는 폴란드에서 열리는 여호와의 증인의 국제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으니까요. 대회에 참석한 그 벅찬 환희, 그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폴란드 형제들은 우리를 온 마음을 다해 환대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4일간 있었어요. 우리가 대회에 참석을 한 것입니다! 여호와에 관하여 더 배우고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교훈을 받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지요. 우리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모두에게 우리의 경험담을 들려 주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나라에서 왔지만 모두가 우리 형제더군요! 경기장 주위를 걸어 다니면서 흐뭇한 평온감을 느꼈습니다. 그 모든 일을 겪고 나서—그처럼 기나긴 금지령을 치르고 나서—보니 마치 우리가 이미 신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어떤 상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모든 것이 깨끗하고 아름답기만 했어요. 우리는 프로가 끝나고서도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곧바로 떠나지 않고, 형제들과 어울려 교제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언어가 이해되지 않을 때는 물론 통역자가 있었고요.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할 때도 우리는 서로 입을 맞추었습니다.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243, 244면 네모와 삽화]

로만 유르케비치와의 회견

출생: 1956년

침례: 1973년

약력: 중립 문제로 6년간 수용소 생활. 1993년 이래 우크라이나 지부 위원으로 일하고 있음.

진리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다른 사람들을 돕고 지원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이 점을 절실히 느낀 것은 1998년에 트란스카르파티아에서 큰 홍수가 나서 수백 명, 그야말로 수백 명의 주민이 하룻밤 사이에 가옥과 함께 세간을 모두 잃었을 때였습니다.

이틀이 채 안 되어, 일단의 형제들이 현장에 도착하여 구호 위원회들을 구성하였습니다. 그 위원회들은 각 가정, 각 마을에 어떤 구호를 베풀 것인지를 결정하였습니다. 두 개의 마을이 특히 타격이 심하였는데, 그곳은 바리와 비시코베였습니다. 이삼일 안에, 어느 가족이 어떤 도움을 받고 누가 도울 것인가 하는 계획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 형제들이 트럭으로 도착하여 진흙 바다를 삽으로 걷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형제들이 목재를 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서, 이 지역 사람들은 하나같이 크게 놀랐습니다. 증인이 아닌 사람들은 탄복하였습니다. 이곳 비시코베에 사는 한 자매가 한 팀의 형제들이 진흙탕을 치우고 있는 곳에 있었습니다. 뉴스 특파원이 그 자매에게 다가와 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자매가 대답하였습니다. “언어가 다 달라서 잘은 모릅니다. 루마니아어, 헝가리어,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를 하거든요. 그래도 한 가지는 알지요. 이 분들은 우리 형제 자매들로서 우리를 도와주고 있는 거랍니다.”

이삼일 내로 형제들은 도움의 손길을 뻗어, 재해 가족들을 돌보아 주고 다른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반년이 지난 뒤에는 사실상 증인들의 가옥이 모두 재건되어, 그 지역에서 새집에서 살기 위해 제일 먼저 돌아온 사람들은 증인들이었습니다.

[254면 도표]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우크라이나의 정규 파이오니아 (1990-2001년)

10,000

8,000

6,000

4,000

2,000

0

1990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1

[254면 도표]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우크라이나의 여호와의 증인 * (1939-2001년)

120,000

100,000

80,000

60,000

40,000

20,000

0

1939 1946 1974 1986 1990 1992 1994 1996 1998 2001

[각주]

^ 582항 1939-90년 기간의 수치는 대략임

[123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러시아

벨로루시

폴란드

볼린

할리치나

리보프

트란스카르파티아

부코비나

우크라이나

키예프

하리코프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루한스크

자포로제

도네츠크

오데사

크림 반도

몰도바

루마니아

불가리아

터키

흑해

[118면 전면 삽화]

[127면 삽화]

보이테흐 체히

[129면 삽화]

할리치나의 보리슬라프 읍에서 열린 첫 대회, 1932년 8월

[130면 삽화]

트란스카르파티아의 솔로트비노에서 열린 대회, 1932년

[132면 삽화]

40년 동안 마리야 자리츠키와 에밀 자리츠키 부부는 번역자로서 그들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133면 삽화]

우크라이나 최초의 서적 보관소는 1927-31년에 우주고로트에 있는 이 집에 있었다

[134면 삽화]

카르파티아 산맥의 라히프 지역으로 버스를 타고 봉사를 가려고 하는 일행, 1935년: (1) 보이테흐 체히

[135면 삽화]

우크라이나어로 된 초창기 음반 「종교와 그리스도교」

[136면 삽화]

코스마치 회중, 1938년: (1) 미콜라 볼로치는 축음기를 사기 위해 두 마리 말 가운데 한 마리를 팔았다

[137면 삽화]

많은 사람들이 열심 있는 봉사자로 기억하는 루드비크 키니츠키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여호와께 충실한 삶을 마쳤다

[142면 삽화]

(위 왼쪽) 산악 지대에서 전파하기 위해 오누프리 릴추크와 함께 여행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또 (오른편) 아내 파라스카와 함께 있는 일리아 호부차크는 가톨릭 사제에 의해 게슈타포에게 넘겨진 뒤 처형당하였다

[146면 삽화]

독일 슈투트호프 강제 수용소에서 나온 다른 증인들과 함께 있는 아나스타시야 카자크 (1)

[153면 삽화]

이반 막시미우크(위에 아내 예브도키야와 함께 나옴)와 그의 아들 미하일로(오른쪽)는 충절을 타협하기를 거부하였다

[158면 삽화]

최초의 우크라이나어 성서 출판물들

[170면 삽화]

스무 살에 흐리호리 멜니크는 남동생 둘과 여동생 하나를 돌보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176면 삽화]

마리야 토밀코는 15년간의 투옥 생활을 인내해야 하였지만, 지금까지 충실을 유지하고 있다

[182면 삽화]

누추 보코치가 1960년에 감옥에서 딸을 잠시 만나고 있다

[185면 삽화]

리디아 쿠르다스와 올렉시 쿠르다스 부부(위)가 체포되어 서로 다른 수용소에 투옥될 때, 딸 할리나는 생후 17일이었다. 할리나 쿠르다스가 세 살 때(오른쪽): 이 사진은 할리나의 부모가 아직도 투옥 중이던 1961년에 찍은 것임

[191면 삽화]

결혼식 전날 밤 한나 시시코와 유리 코포스는 체포되어 10년의 수용소 형을 선고받았다. 그들은 10년 후에 식을 올렸다

[191면 삽화]

유리 코포스는 한 세기의 거의 3분의 1을 소련의 감옥과 노동 수용소에서 보냈다

[194면 삽화]

파블로 지아테크는 여호와를 섬기는 데 전 생애를 바쳤다

[196면 삽화]

네이선 H. 노어가 소연방 형제들에게 보낸 1962년 5월 18일자 편지

[214면 삽화]

우크라이나와 소련의 여타 지역을 위한 서적은 우크라이나 동부의 이와 같은 벙커들에서 인쇄되었다

[216면 삽화]

맨 위: 카르파티아 산맥 깊숙이 숲을 이룬 언덕에서 이반 드지아프코는 비밀 벙커를 가동하였다

[216면 삽화]

위: 미하일로 디올로가 벙커 입구가 있던 자리의 옆에 앉아 있다. 거기서 그는 이반 드지아프코에게 종이를 공급하였다

[216면 삽화]

오른쪽: 이반 드지아프코

[223면 삽화]

벨라 메이사르가 21년간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충실한 아내 레기나는 남편을 자주 면회하기 위해 도합 14만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왕래하였다

[224면 삽화]

미차엘 다세비치는 1971년에 전국의 종으로 임명되었다

[233면 삽화]

여호와의 증인이 우크라이나에서 1991년 2월 28일에 등록된 것은 그러한 등록으로는 소연방 영토에서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237면 삽화]

1993년 키예프 국제 대회에서 7402명이 침례를 받은 것은 하느님의 백성의 현대 역사에서 단일 대회에서 침례받은 수로는 최고였다

[246면 삽화]

1999년 초, 리보프에서 있은 봉사 훈련 학교 제1기 졸업식

[251면 삽화]

위: 베델 가족이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일하던 왕국회관 복합 건물

[251면 삽화]

중간: 베델 가족이 1994-5년에 사용하던 가옥

[251면 삽화]

아래: 나드비르나 읍에 있는 왕국회관—우크라이나에서 새로운 왕국회관 건축 프로그램으로 건립된 첫 회관

[252, 253면 삽화]

(1-3) 우크라이나의 새로 봉헌된 지부

[252면 삽화]

(4) 지부 위원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 스테판 흘린스키, 스테판 미케비치; (서 있는 사람들) 안드리 셈코비치, 로만 유르케비치, 존 디더, 위르겐 케크

[253면 삽화]

(5) 우크라이나 지부 봉헌식에서 연설하고 있는 시어도어 재라스, 2001년 5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