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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라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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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루바 섬과 보네르 섬과 쿠라사우 섬. 베네수엘라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세 개의 섬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카리브 해의 다른 섬들과 같은 녹음이 우거진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막과 밤마다 드리워지는 신비로운 그림자와 낮이면 눈부신 대조를 이루는 색채의 아름다움입니다.

이곳에서는 강우량이 적어서 무성하게 자란 거대한 선인장의 모습이 어디에서나 눈에 띄며, 그 중 가장 빼어난 종류는 카두시입니다. 디비디비나무도 이곳에서 잘 자라는데, 이 나무는 꼭대기 부분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어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마치 묵묵히 서 있는 보초처럼, 재식 농장 건물들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윤곽을 드러내고 우뚝 서서 지나간 식민지 시대를 생각나게 해 줍니다. 그리고 염소들이 시골 지역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껑충껑충 뛰어 길을 건넙니다.

아루바 섬과 보네르 섬에서는 관광 산업이 활기를 띠고 있지만, 쿠라사우 섬은 정유업과 근해 조업으로 생기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각 섬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 하나는 담수화 시설이며, 이 시설은 바닷물을 증류하여 식수를 위한 물과 전력을 위한 증기를 공급해 줍니다.

현재 전체 인구가 거의 25만 명이 되는 이 섬들은 15세기에 스페인 사람들이 발견하였습니다. 그 후에 네덜란드인들이 이 섬들을 점령하였고, 잠깐씩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의 손에 넘어갔다가 1815년에 이 섬들은 다시 네덜란드인들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1954년 이래, 원래 이 세 개의 섬과 리워드 제도의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던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제도는 국내 문제에서 자치권을 행사해 왔습니다. 하지만 1986년에, 아루바는 스타투스 아파르테 즉 분리된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문화와 언어

네덜란드 정부 아래 있는 이 섬들은 종교적 관용의 분위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규모가 큰 프로테스탄트 단체들이 있긴 하지만, 주민들은 주로 로마 가톨릭교인들입니다. 쿠라사우 섬에는 견고하게 자리 잡은 유대인 공동체도 있습니다. 전 세계 40 내지 50개국 출신의 사람들이 여러 인종이 융합된 사회에서 평화롭게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각 섬은 나름대로 독특한 고유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면모를 지닌 이 사회에 성서 진리가 뿌리를 내렸으며, 지금까지 계속 무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여러 가지 언어를 구사하며, 언어를 바꾸어 가며 말하는 일이 보통이기 때문에 자기가 어느 언어를 쓰고 있는지를 쉽게 잊어버릴 것 같습니다. 네덜란드어가 공용어(公用語)이고 사업 분야에서는 영어와 스페인어도 널리 사용되지만, 이들의 모국어는 파피아멘토어입니다. 한 학설에 의하면, 파피아멘토어는 17세기가 되기 전에 서아프리카의 카보베르데 제도에서 발달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포르투갈인들이 그 제도를 아프리카 침입의 발판으로 삼았고, 아프리카인들과 포르투갈인들의 의사소통을 위해 새로운 혼성어—아프리카어와 포르투갈어가 혼합된 언어—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언어가 다른 집단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통용되는 언어를 공통어(共通語)라고 합니다. 나중에, 이곳의 섬들에 끌려온 노예들을 통해 그 언어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언어는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영어, 프랑스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파피아멘토어는 그 모든 언어가 혼합된 언어가 되었습니다.

노예들 사이에서 발달하여 이 섬들에 들어오게 된 이 공통어는 사실상, 의사소통의 장벽을 뚫어 주어 사람들을 연합시키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공통어가 쓰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스바냐 3:9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언어입니다. “그때에 나는 뭇 백성들에게 순결한 언어로 바꾸어 주는 일을 해서,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하느님을 섬기게 할 것이다.” 이 “순결한 언어”는 일부 섬 사람들이—사회적, 인종적, 때로는 국가적 차이를 초월하여—서로 연합하게 만들어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세계적인 여호와의 증인의 연합체와도 함께 연합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파피아멘토어, 영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회중이 각각 따로 있지만, 성서 진리의 공통어는 튼튼한 사랑의 띠 안으로 형제들을 끌어들입니다.

진리의 서광

진리의 첫 씨가 어떻게 이 섬들에 뿌려졌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진리의 서광이 비치면서 오랫동안 로마 가톨릭교의 보루였던 이 섬들을 뒤덮은 어둠이 차츰 걷히기 시작하였습니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에, 몇몇 사람이 이곳에서 전파하였습니다. 또한, 종교 서적을 파는 한 행상인이 본의 아니게 진리의 씨를 뿌렸는데, 그가 취급한 서적 가운데는 하느님의 조직에서 생산한 출판물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행상인의 두 딸 페를과 루비는 아버지와 함께 일하다가 여러 해 뒤에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 다 현재까지 믿음 안에서 계속 충실합니다.

1940년에, 정유소에서 일하는 트리니다드 사람인 브라운 형제가 쿠라사우 섬에서 최초로 침례를 베풀었으며, 그가 사회한 다섯 사람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마르틴 나렌도르프와 빌헬미나 나렌도르프 부부와 에뒤아르트 반마를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원래 수리남 출신입니다.

나렌도르프 부부의 딸인 아니타 리브레토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940년에 나는 여섯 살이었어요. 부모님이 영어를 하는 형제와 연구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부모님은 네덜란드어만 아시고 영어는 거의 이해하지 못하셨지만, 많이 노력하신 끝에 6개월 만에 침례를 받으셨지요. 우리 집에서 집회가 열렸는데, 지금처럼 잘 조직되어 있진 않았어요. 부모님이 영어로 쓰인 책들을 이해하려고 진땀을 흘리다 보면, 연구하는 저녁 모임인 집회가 자정이 넘도록 계속되곤 하였습니다.” 전파 활동은 주로 영어로 했는데, 그 작은 집단 성원들의 파피아멘토어가 유창하지 않았고 또 그 언어로 구할 수 있는 서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현지 주민들은 가톨릭 교회가 성서를 읽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성서를 읽지 않았습니다. 사제들이 성서를 발견하기만 하면 압수하는 일이 흔히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제가 형제들 주위를 쫓아다니면서, 발을 구르며 “내 양들을 건드리지 마시오!”라고 소리치곤 하였습니다.

아루바 섬과 보네르 섬에 뿌려진 씨

1943년에, 이전에 재림교파 신자였던 욘 히폴리트, 그리고 마르틴 나렌도르프가 아루바 섬을 방문하여, 자신의 휴가 기간을 사용해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그들이 처음으로 그 섬에 좋은 소식을 전파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쿠라사우로 돌아온 뒤, 히폴리트 형제는 브루클린에 있는 본부에 편지를 써서 야외 봉사에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3년 후에 선교인들이 파견되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형제는 그들이 오기 전에 사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욘 히폴리트와 같은 용기 있는 쿠라사우 형제들은 전도서 11:6에 있는 교훈을 따랐고 풍부하게 씨를 뿌렸으며, 그 씨는 나중에 뿌리를 내리고 싹이 텄습니다.

1944년에는, 그레나다의 에드문트 쿠밍스, 그리고 트리니다드의 우드워스 밀스가 아루바 섬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들은 산니콜라스에 있는 정유소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섬의 동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산니콜라스 읍은, 정유소에서 일하려고 서인도 제도 전역에서 몰려든 이민자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특히 열정적인 공개 연사였던 밀스 형제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대단히 큰 힘이 되었습니다. 1946년 3월 8일, 밀스 형제와 쿠밍스 형제는 산니콜라스에 최초의 영어 회중을 설립하였습니다. 그 회중은 전도인이 11명이었고, 밀스 형제가 부회(회중)의 종이었습니다.

그곳의 첫 침례는 1946년 6월 9일에 있었습니다. 침례받은 네 사람 가운데는 티모티 J. 캄프벨 그리고 빌프레트 로게르스가 있었으며, 1946년 말에는 전도인 수가 두 배가 되었습니다. 그 뒤로, 이민 온 증인들—보이텐만 가족, 데프레이타스 가족, 캄프벨 가족, 스코트 가족, 포터 가족, 마이어 가족, 티트레 가족, 포스틴 가족 등—이 그 회중과 연합하였습니다.

밀스 형제는 비공식 증거에서 상당히 성공적이었는데, 그의 직장 동료 가운데 오리스라는 한 속기사가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오리스는 1947년 1월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밀스 형제는 자매를 하나 얻었을 뿐 아니라 신붓감을 찾은 것이었는데, 나중에 그와 오리스가 결혼하였기 때문입니다. 1956년에 두 사람은 길르앗 학교 제27기에 참석하도록 초대받았고, 그 후 나이지리아로 파견되었습니다.

1950년까지는 아루바 섬의 전파 활동이 대부분 산니콜라스에서 수행되었습니다. 그곳 주민들이 주로 영어를 사용하였고 형제들이 파피아멘토어는 거의 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아루바 사람은 아무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가차없는 박해로 인해, 원래는 우호적인 아루바 사람들이 부추김을 받아 증인들을 반대하게 되었고 그래서 진보가 늦추어졌습니다. 그 초창기에는, 화가 난 집주인이 칼을 휘두르면서 증인을 뒤쫓아오는 일이 꽤 흔하였습니다. 때로는 형제들에게 뜨거운 물을 들이붓거나 개들을 풀어놓기도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집주인이 형제들을 집 안에 초대해 놓고는 그대로 앉혀 놓은 채 나가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이 섬들에서는 방문객의 시중을 들어 주지 않는 것은 모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아루바 섬의 파이오니아인 에드위나 스트루프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사제들은 교회를 떠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하겠다고 말하면서 신자들을 위협하곤 했지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형제들의 열심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형제들은 여호와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꾸준함을 나타냈습니다.

사막의 어떤 식물의 씨는 몇십 년 동안 휴면 상태에 있다가, 강우량이 적절한 때를 만나면 싹이 나고 마침내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됩니다. 보네르 섬의 세관원인 야코보 레이나의 경우가 이와 비슷하였습니다. 야코보는 1928년에 「창조」(Creation)책을 한 권 입수하였습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가정에 태어났으며 프로테스탄트 종교들도 조사해 보았는데, 도무지 만족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창조」 책을 읽자마자, 진리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 책에는 여호와의 종들이 발행한 다른 책들의 제목도 열거되어 있었지만, 야코보는 그 책들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19년이 흐른 뒤, 1947년에 쿠라사우에 사는 누나 집을 방문했을 때야 비로소, 누나와 성서 연구를 하고 있는 선교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야코보는 그 여러 해 동안 자기 지갑에 간직해 두었던 목록을 보면서 그 제목의 책들을 가지고 있느냐고 선교인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선교인의 가방에 든 서적을 모조리, 적어도 양장본 서적 7권과 소책자 13부를 받았으며,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의 정기 구독도 신청하였습니다. 오래 전에 동했던 그의 영적 식욕을 마침내 채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토록 여러 해 동안 휴면 상태에 있던 진리의 씨가 이제 성장에 필요한 물을 공급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쿠라사우에 도착한 첫 선교인들

1946년 5월 16일, 길르앗 학교 제6기 졸업생들인 토머스 러셀 예이츠와 그의 아내 헤이즐 예이츠가 거의 미개척 구역인 쿠라사우에 도착하였습니다. 예이츠 형제는 이 섬들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며, 1999년에 사망할 때까지 50년 이상 임지에 머뭅니다. 그는 도중에 잠시 중단한 기간만 제외하고는, 1950년부터 1994년까지 지부 일을 감독하였습니다. 언제나 넘치는 유머와 한없이 낙관적인 태도와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던 그는, 왕국 전파 활동이 크게 확장되는 것을 보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남편을 충성스럽게 지원한 예이츠 자매는 지금까지 임지에 충실히 머물러 있으며, 모두에게 격려의 원천입니다. 예이츠 자매는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렌도르프 형제와 반마를 형제 그리고 관심자인 클레멘트 플레밍의 따뜻한 환영을 받은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클레멘트 플레밍은, 「어린이들」(Children)이라는 책을 입수하여 읽고 나서 진리를 발견했다고 확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여러 가지 가르침에 동의할 수 없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나중에 증인들과 연합하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첫 선교인들을 환영하는 자리에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46년 7월에, 새로 온 선교인 러셀 예이츠가 그에게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왕국 전도인인 플레밍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흔세 살이나 되었지만, 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아마겟돈을 통과하여 새 제도로 들어갈 무리에 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믿음과 인내의 훌륭한 모범이 아닙니까!

예이츠 자매는 이렇게 말합니다. “공항에서 우리를 데리고, 돼지 꼬리와 절인 생선을 파는 가게의 위층에 있는 방 두 개짜리 공동 주택으로 가더군요. 그 집에는 가구도 없고 화장실도 없어서, 더 나은 숙소를 찾을 때까지 그 후 6개월 동안 아래층에서 샤워를 해야만 했습니다.” 예이츠 자매가 여러 차례 이질에 걸렸지만, 그 부부는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예이츠 형제는 이렇게 썼습니다. “삶을, 특히 여호와의 봉사자들의 삶을 흥미롭게 해 주는 것은, 생활 조건도 경치도 심지어 언어도 아니고 바로 사람들이다. 그리고 어느 임지에 가든지 거기에는 사람들이 있다.”

이 용기 있는 선교인들은 현지인의 언어인 파피아멘토어를 배우면서, 그와 동시에 순결한 언어 즉 진리의 공통어를 쿠라사우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에게서 배운 사람들 가운데 카밀리오 기리고리아가 있었는데, 그는 현지인으로는 최초로 1950년에 침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정유소에서 일했기 때문에, 좋은 소식의 열렬한 선포자인 헨리쿠스 하셀을 비롯한 여러 형제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진리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78세인 카밀리오는 장로이며, 지금까지 24명을 헌신에 이르도록 도왔습니다. 1946년에 선교인들은 쿠라사우에 최초의 영어 회중을 설립하였습니다. 하지만 최초의 파피아멘토어 회중은 195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형성되었습니다.

아루바에 계속 진리의 빛이 비치다

1949년 7월, 캐나다인들인 헨리 트위드와 앨리스 트위드 부부가 길르앗 학교 제12기를 졸업하고 아루바에 왔는데, 이들은 순결한 언어를 가르치는 데 의미심장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헨리는 키가 크고 홀쭉한 체형으로 친절하고 부드러운 성향으로 알려졌고, 앨리스는 기민한 재치와 봉사에서 보여 준 지칠 줄 모르는 활력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세 개의 섬 모두에 살면서 활동한 선교인은 이 부부뿐이며, 이들의 자기 희생적인 영과 열심은 수십 년 후에도 애틋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1950년에 윌리엄 예이츠(러셀의 사촌)와 그의 아내 메리 예이츠가 길르앗 학교 제14기를 졸업하고 쿠라사우에 임명되었습니다. 1953년에 그들은 아루바로 가게 되었습니다. 거의 50년이 지났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임지에 머물러 있습니다. 믿음과 인내의 뛰어난 모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메리는 봉사의 직무에서 보통 이상의 열심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메리는 늘 증거 활동의 선두를 달렸고, 윌리엄은 성서 출판물의 번역에 몰두하였습니다. 윌리엄과 메리가 도착하기 전에는, 두 영어 회중이 현지인들 사이에서 거의 발전이 없었습니다. 윌리엄과 메리는, 파피아멘토어를 하는 아루바 사람들 가운데 참을성 있게 체계적으로 진리의 씨를 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서히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윌리엄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선교인 집의 뜰에 있는 커다란 키위나무 밑에서 「파수대」 연구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때는 100명이나 참석했지요. 우리는 가톨릭 교회에서 버린 긴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이 1954년에 거행되었고, 이어서 회중 서적 연구가 파피아멘토어로 조직되었습니다.

아루바 사람이 처음으로 성서 진리를 배우다

젊은 청년인 가브리엘 헨리케스는, 주말이면 때때로 어찌나 술을 많이 마시는지 월요일 아침에는 정유소에 출근하지도 못하곤 하였습니다. 그의 직장 상사는 가브리엘의 생활 방식을 개선시켜 주고 싶어서, 자신은 무신론자이면서도 그에게 선물로 「깨어라!」지의 정기 구독을 신청해 주었습니다. 그 잡지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가브리엘은 자기 장인과 성서 연구를 하고 있는 트위드 부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연구하는 책이 스페인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브리엘이 장인을 위해 번역을 해 주었습니다. 곧 가브리엘 자신의 관심이 자라게 되었고, 1953년에 빌 예이츠와 메리 예이츠가 그와 함께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브리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드디어, 내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1954년에, 그는 여호와께 헌신하였고 침례받은 최초의 아루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도인 16명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파피아멘토어 회중이 1956년에 형성되었는데, 1957 봉사 연도 말에는 전도인 26명이 보고를 하였습니다. 아루바 사람들은 일단 “큰 바빌론”의 거짓 가르침에 눈을 뜨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자, 진리를 사랑하고 좋은 소식을 열심히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계시 17:5) 그런 사람들 가운데 다니엘 웨브가 있습니다. 다니엘과 처음에는 반대하던 그의 아내 니니타가 진리를 받아들였으며, 둘 다 열렬한 왕국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들의 모범을 따랐습니까?

다니엘처럼, 다른 많은 사람도 진리를 배우고 진리에 따라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틀 잡았습니다. 그렇게 연구를 시작한 사람으로 페드로 라메인이 있습니다. 하루는 페드로가 집에 돌아와 보니, 독실한 가톨릭교인인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가 연구하는 책들을 못쓰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직 새로운 인간성을 입지 못한 페드로는, 그 보복으로 어머니의 형상들을 부숴 버렸습니다. 페드로가 한 행동 때문에 속이 상한 어머니가 사제에게 불평을 했더니, 사제는 형상이 무가치하다는 페드로의 생각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분개한 어머니는 사제를 쫓아 보내고, 성서를 조사해 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결국, 마리아와 그의 남편 헤나로는 여호와께 헌신하였습니다. 지금은 그 부부와 그들의 자녀 11명과 손자녀 26명과 증손자 한 명—도합 40명—이 모두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사위인 다니엘 반데르 린데는, 자기 부모에게 버림을 받으면서도 침례를 받았습니다. 집에서 쫓겨 나고 가톨릭 사제에게 구타당했지만, 그는 진리를 가졌음을 확신하고 견뎌 냈습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자신이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여호와께서 많은 사람이 성서 진리를 배우도록 돕는 일에 그를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딸 프리스켈라와 그의 남편 마누엘은 쿠라사우 지부 사무실의 번역부에 출퇴근하는 베델 봉사자들입니다. 또 다른 사위인 토니 역시 여호와와 우리를 지탱해 주는 그분의 약속에 대한 큰 믿음을 나타내야 했는데, 그가 병에 걸려 수술을 다섯 차례나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토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의사들은 내가 가망이 없다고 포기했지만, 나는 여호와께 힘을 달라고 계속 기도합니다. 나와 인연을 끊다시피 한 친형제들은, 나에게 세계적으로 수많은 영적 형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마가 10:29, 30.

섬들에서 이루어진 발전

1965년에, 길르앗 제20기 졸업생인 알베르트 쉬르는 건강이 나빠져서 쿠라사우를 떠나야 했지만, 훌륭한 “추천서”들을 뒤에 남겨 놓았습니다. (고린도 둘째 3:1, 2)그 추천서들 가운데 한 사람인 올리베 로게르스는 1951년 9월에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올리베는 한 남자와 17년 동안 결혼하지 않은 채 동거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높은 표준을 배우고 나서 그 남자를 떠났더니, 그 남자가 뒤늦게 결혼하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올리베는 그 청혼을 거절하고 침례를 받았으며, 파이오니아 대열에 가담하여 병이 들기 전까지 거의 40년 동안 그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로게르스 자매가 쾌활하게 구역에서 일하는 모습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이 자매에 관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불굴의 정신과 강인함을 지닌 이 자매는, 대가족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여호와께 헌신하도록 도울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앤탤리스 제도와 아루바에는 여호와를 섬기며 열심히 일하는 가족이 많이 있습니다. 마르타 가족, 쿠루스 가족, 데이코프 가족, 라메인 가족, 리케트 가족, 포스틴 가족, 오스티아나 가족, 루메르 가족과 같은 대가족들은 회중들의 기반을 이루며 회중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붙임성 있는 외제네 리카르드손이 여호와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 것은 15세 때였습니다. 그는 정식으로 성서 연구를 해 본 적이 없었는데도 모든 집회에 참석함으로 꾸준히 진보하여 17세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1956년에 정규 파이오니아로 임명을 받고 나서 그에게는 큰 문제로 보이는 어려움에 직면하였는데, 그것은 교통수단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임명받은 구역은 집에서 2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라, 교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 피아노를 자전거와 맞바꾸었지요. 우리 가족은 그렇게 바꾼 사실을 알고 어찌나 충격을 받았던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나에게는 대단히 실용적인 거래였어요. 넉 달 뒤에 내가 반다아바우의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기 때문에 특히 그러하였습니다.” 외제네의 말입니다.

새로운 구역으로 진출하다

그곳에서 쿠누쿠라고 알려져 있는 반다아바우의 시골 지역은, 쿠라사우의 서쪽에 위치해 있으면서 이 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이 지역은 완만한 구릉 지대로 이루어져 있고 섬의 나머지 부분보다 좀 더 녹색을 띱니다. 집들이 여기저기 점을 찍어 놓은 듯이 흩어져 있어서, 이 구역에서 일하는 데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요구됩니다. 젊고 열심 있는 또 다른 파이오니아인 클린톤 빌리암스가 외제네와 합세하였고, 그 두 사람은 함께 이 새로운 미개척지로 진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외제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이 지역은 섬의 나머지 부분에 비해 쉬운 구역이 아니었습니다. 주민들은 상당히 친절하고 정말 기분 좋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보통 그 이상의 관심은 보이지 않았지요.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2년 동안 일하면서 훌륭한 경험을 했습니다. 첫 달에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하느님의 왕국이 1914년에 설립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증명할 수만 있다면 증인이 되겠다고 하더군요. 그 결과 그 남자가 정말 증인이 된 겁니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까지요. 그 후, 내가 어떤 여자와 이야기를 했는데, 그 여자는 자기 조카가 성서에 대단히 관심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날 저녁에 다시 가서 그 조카에게 증거를 했지요. 그 조카의 이름은 시로 하이데였습니다.”

외향적인 사람인 시로는 자신의 견지에서 이렇게 그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매우 독실한 가톨릭교인이었고, 교리 문답도 아주 잘 알고 있어서 학교에서 가르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늘 내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있었지요. 나는 교회에 참석을 못하면 왜 죽을 죄를 짓는 것이며, 이 사실을 빨리 고백하지 않으면 왜 지옥에 가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한 젊은이가 자전거를 타고 우리 집에 찾아와, 우리 이모에게 성서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종교에 관심이 있는 걸 아는 이모는, 그에게 내가 집에 있을 때 다시 오라고 권했습니다. 나는 종교에 관해 내가 더 많이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만날 시간을 몹시 기다렸지요. 그날 저녁, 외제네가 우리 집에 나타났습니다. 그가 내가 매일 암송하는 사도 신경에 예수께서 지옥에 가셨다는 내용이 나온다는 사실을 지적했을 때, 나는 깜짝 놀라 말문이 막히고 말았지요. 내가 그 내용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빨리 암송해 버리기 때문에 그 의미를 놓쳤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나는 성구가 어디 있는지 하나도 찾을 수 없는데, 외제네는 뭐든지 설명할 때마다 성서를 사용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는데, 당장 연구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시로는 나중에 아내의 반대를 받으면서도 침례를 받았습니다. 마침내, 아내 역시 그의 훌륭한 모범을 보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30년 동안 충성스럽게 여호와를 섬겨 왔으며, 시로는 25년 전부터 장로로 일하고 있습니다.

외제네는 1958년에 길르앗 학교에 참석한 뒤 반다아바우로 다시 임명되었는데, 그곳에는 여전히 교통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야외 봉사에 참여할 때, 때로는 함께 봉사하는 형제는 13명인데 차는 한 대—내 차—뿐이었지요. 이 말은 30킬로미터의 거리를 두 번씩 왔다갔다 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나는 첫 그룹을 구역에 내려 놓고 두 번째 그룹을 태우러 급히 돌아가곤 했습니다. 늦은 오후에는, 오전에 한 것과 같은 식으로 형제들을 다시 집까지 태워다 주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루 종일 봉사할 수 있었지요. 피곤하긴 했지만, 우리는 참 즐거웠습니다!” 외제네는 몇 해 동안 여행하는 활동에서 봉사하는 특권도 누렸습니다.

쿠누쿠에 생긴 변화

1959년에, 역시 그때쯤에는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클린톤 빌리암스가 쿠누쿠에서 계속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유제니라는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와 결혼했는데, 유제니는 친절한 성품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1970년에는 조르흐플리트베이얀코크 마을에 전도인이 17명인 회중이 형성되었고, 집회는 피테르스 크위르 가족의 집에서 열렸습니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인 와나 피테르스 크위르 자매와 그의 딸 에스테르, 그리고 밍겔 가족과 크위만 가족이 회중을 격려하고 돕기 위해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1985년쯤에는 회중이 성장하여, 전도인이 76명이고 집회 참석자가 125명이 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미국의 형제들이 사랑에서 우러나와 판네쿠크에 왕국회관을 건축하겠다고 자원했으며, 오래된 왕국회관은 선교인 집으로 바뀌었습니다. 2년 만에 전도인 수가 142명으로 증가하였고, 그 결과 1987년에 테라코라 회중이 형성되었습니다.

숙박할 곳을 찾는 것이 파이오니아들에게는 늘 문제였으며, 유게네는 염소들이 차지하고 있던 빈 집을 수리해야 했던 일을 기억합니다. 그는 염소들의 “향기”를 제거하려고 여러 주 동안 애썼습니다. 염소 고기는 이곳에서 진미로 여겨집니다. 대회에서 음식을 준비하던 시절에, 여러 해 동안 염소 고기가 흔히 사용되었고, 형제들은 맛있게 양념한 염소 고기 요리를 먹으면서 즐거운 점심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고기가 상해서 화장실에 자주 들락거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러셀 예이츠는 미미라는 이름을 가진 염소 이야기를 즐겨 하였습니다. 한번은 그 염소가 성서 세 권과 노래책 여러 권과 기타 책들과 많은 잡지를 먹어 치웠습니다. 그 염소의 주인인 리타 마테브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염소가 우리 서적을 어찌나 많이 먹던지, 우리는 그 녀석을 거룩한 염소라고 불렀답니다.” 결국은 미미를 팔았습니다.

사랑과 연합의 영을 조성하는 대회들

여러 해 동안, 적당한 모임 장소—특히 대회 장소—를 찾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길르앗 학교 제5기 졸업생인 맥스 개리는, 쿠라사우의 부에나비스타에 형제들이 소유하는 최초의 왕국회관을 짓는 일을 조직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이 왕국회관의 건축 공사에 마음을 다해 적극 나섰고, 건물이 완공되었을 때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1961년에 쿠라사우에 두 번째 파피아멘토어 회중이 형성되어 그 아름다운 새 왕국회관에서 집회를 보았는데, 현재 거의 50년째 좋은 소식의 전도인인 빅토르 마누엘이 그 당시에 회중의 종으로 섬겼습니다. 1962년 3월 28일, 브루클린 베델에서 온 네이선 H. 노어 형제가 이 왕국회관을 봉헌하였습니다.

1970년대에는, 부에나비스타 왕국회관에 인접한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콘크리트를 부어 바닥을 만든 다음, 연단을 세웠습니다. 이곳은 여러 해 동안 크고 작은 대회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쿠라사우에는 강우량이 아주 적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옥외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소나기가 쏟아져 옷과 책을 적시는 바람에 형제들이 놀라기도 했으나, 그들의 기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우산을 펴 들고 계속 프로그램에 열중하곤 하였습니다. 과거에는 이러한 모임을 두 가지 언어로 진행했는데, 어떤 연설들은 영어로 제공하면서 통역하였고 다른 연설들은 파피아멘토어로 요약하였습니다. 지역 대회는 아루바와 쿠라사우에서 교대로 열렸으며, 일부 참석자들은 전세 낸 비행기를 타고 대회가 열리는 섬으로 갔고, 다른 참석자들은 배를 타고 갔습니다. 한번은 나이아가라호를 타고 대회에 가던 많은 사람이 뱃멀미로 고생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불편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영적 잔치에 대한 그들의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16세였던 잉그리드 셀라사는, 할머니가 그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돼지를 팔았다고 회상합니다. 대회 참석자들은 형제들의 집에 머물렀는데, 바닥에서 잠을 자기도 하였습니다. 지속적인 벗 관계가 형성되었고, 사랑과 연합의 즐거운 영이 편만하였습니다. 1959년에는 반다아바우에 있는 산타크루스 재식 농장 건물에서 첫 파피아멘토어 대회가 열렸습니다. 잉그리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음식과 간이 침대와 장비를 버스에 잔뜩 싣고 대회장을 향해 떠났습니다. 대회 프로그램들은 영적 잔치였고, 저녁이 되면 우리는 밤하늘 아래 성서 게임도 하고 왕국 노래도 불렀지요. 나는 우리가 형제 관계를 누리고 있다고 진정으로 느낄 수 있었던 그곳에서 보낸 사흘을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1969년에 열린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와 같은, 믿음을 강화시키는 국제적인 모임들도 형제들 사이의 사랑과 연합의 영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새로운 대회 회관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부에나비스타의 부지가 너무 좁아지게 되었는데, 마침 회중들의 관대한 기부로 형제들은 정유소의 한 건물을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켈프웨이크 지역에 위치한 이 건물의 외부를 개수하여, 여러 해 동안 순회 대회와 지역 대회를 이곳에서 열었습니다. 최근에 지부 사무실은, 이 건물을 헐고 720석을 갖춘 대회 회관으로도 사용될 수 있는 두 개의 왕국회관을 짓도록 승인을 받았습니다. 형제들은 이 마련을 무척 기뻐하고 있습니다.

1968년 이전에 아루바에서는 빌린 건물에서 대회를 열었지만, 확장이 이루어지면서 영구적인 대회 회관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대회를 열기에 충분한 규모의 왕국회관을 짓자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1968년에, 그곳 형제들은 열심히 자기 희생적으로 일한 끝에, 여호와를 찬양하는 장소인 보기 좋은 회관을 건축하였습니다. 그 회관을 짓는 동안, 키가 큰 선인장들이 시야를 가려 행인들은 그 건축 공사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첫 대회가 열리기 전 주에, 정부는 선인장을 자르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회관이 하룻밤 사이에 생기다니—아니, 그렇게 보였으니—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곳 주민들은 그것을 기적으로 여겼는데, 많은 사람이 그 회관이 정말 하룻밤 사이에 건축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나중에 속성 건축 회관이라는 형태로 실제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보네르에서 발전하는 활동

1949년에, 브루클린 본부의 특별 대표자인 조슈아 스틸먼이 보네르를 방문했는데, 이 무렵 그곳에서는 야코보 레이나와 농부인 마타이스 베르나벨라가 활동적으로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침례를 받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보네르에서 최초의 공개 강연이 마련되었습니다. 약 100명이 왔지만, 30명만 건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나머지 70명은 그 지방 가톨릭 사제가 모임을 방해하려고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러셀 예이츠는 한때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마치 이집트에 내린 우박처럼, 돌들이 양철 지붕에 쏟아지기 시작했지요. 폭죽이 터지고, 사람들이 양동이를 두드려 댔습니다.” 그런 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진리의 씨가 퍼지고 뿌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 이듬해에 보네르의 첫 증인들인 야코보와 마타이스가 쿠라사우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1951년에 러셀 예이츠와 윌리엄 예이츠가 베르나벨라 형제의 집에서 집회를 조직하였으며, 1952년에는 크랄렌다이크의 세낸 회관에 새로운 회중을 설립하도록 클린톤 빌리암스가 보네르에 파견되었습니다. 빌리암스 형제가 그 일을 하는 동안 가톨릭 사제가 분노하게 되었고, 사제는 그를 추방하려고 애썼습니다. 이 사제는 빌리암스 형제의 성서 연구생들 중 한 여자를 설득하여 형제가 부당한 성적 접근을 했다고 고소하게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그 여자는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사제는 계획이 좌절되자 빌리암스 형제가 자기 양들을 채간다고 비난하면서 그를 와라와라라고 불렀는데, 그 말은 그 섬에서 볼 수 있는 맹금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영에 힘입어, 빌리암스 형제는 다시 쿠라사우로 임명될 때까지 계속 그 새 회중을 강화하였습니다. 1954년에는 첫 순회 대회가 열렸고, 그때 이래로 크고 작은 대회들은 보네르에 있는 형제들의 영적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또한 여호와의 증인이 제작한 영화를 보러 모여들었고 그 영화들이 흥미를 일으키긴 했지만, 1969년에 특별 파이오니아인 두 사람, 페트라 셀라사와 그의 딸 잉그리드가 파견되기 전까지는 거의 발전이 없었습니다.

페트라와 잉그리드 모녀는 도착했을 때 차가 없었지만, 걸어서 거의 섬 전체를 돌았습니다. 그들의 성서 연구생들 중 많은 사람이 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두 자매는 앉아서 머리에 덮개를 쓰고는 모든 집회를 사회하였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쿠라사우에서 한 형제가 비행기를 타고 와서 그들과 함께 봉사하고 공개 강연을 하였습니다. 그 후 페트라가 떠나야 했을 때, 또 다른 특별 파이오니아인 클라우데트 테소이다가 잉그리드와 합세하여 성서 진리를 배우도록 계속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정치가의 아내가 완벽한 정부를 발견하다

순결한 언어를 배운 사람들 가운데는 저명한 정치가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애칭으로 모두에게 다라고 불리는 카리다드 아브라함은 보네르 정부의 한 장관의 아내였습니다. 다의 두 아들과 사위도 정치에 활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다 자신도, 남편을 위해 활발하게 유세를 했고 널리 알려진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다의 한 자녀의 대부인 프로테스탄트 교직자는 다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남자는 다의 친구이자 교직자였으므로, 다는 그 거짓된 말을 믿었습니다.

다는 남편이 죽은 뒤에 네덜란드로 이주하였고, 거기서 프로테스탄트 교직자 두 사람이 자기들이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종교에 환멸을 느낀 다는 교회에 나가기를 중단하였습니다. 나중에 다는 성서 연구를 받아들여 증인이 되었고, 다시 보네르로 이주하였습니다. 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진리가 너무 놀라웠기 때문에, 내 백성에게 돌아가서 알려 주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다는 이제 보네르의 문제의 해결책으로 인간 정부를 옹호하지 않고, 영구적이고도 진정한 해결책 즉 예수 그리스도의 수중에 있는 하느님의 왕국에 관해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다가 자기 아들을 위한 선거 운동을 하러 온 줄 알고 문을 열어 주었다가, 다가 전하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도 다가 워낙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증인이 갔다면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많은 사람이 왕국 소식에 유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지 언어로 볼 있게 된 출판물

사람들이 자신의 모국어로 성서 출판물을 읽을 수 있으면, 진리에 마음이 더 빨리 감동됩니다. 하지만 첫 선교인들이 도착했을 때, 파피아멘토어로는 성서 출판물이 전혀 없었습니다. 영어와 파피아멘토어를 섞어 가며 집회를 사회하였고 영어와 스페인어와 네덜란드어 출판물을 사용했기 때문에, 형제들은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애를 많이 써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번역된 출판물이 절실히 필요하였습니다. 하지만 파피아멘토어는 어휘가 제한되어 있었고, 사전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으며, 파피아멘토어를 기록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여러 해 후에, 노련한 번역가인 윌리엄 예이츠는 이렇게 썼습니다. “왕국 소식을 출판하는 일을 하면서, 우리는 이전에 파피아멘토어로는 말로도 글로도 표현된 적이 없는 것들을 말과 글로 표현해야 하였다. 통용될 기준을 정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1948년에 형제들은 첫 소책자 「만민의 환희」를 번역하였습니다. 1959년에는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의 번역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른 양장본 서적들의 번역과, 파피아멘토어로 「파수대」인 「토렌 디 비힐란시아」와 「깨어라!」 즉 「스피에르타」의 정기 번역도 잇따랐습니다. 점차, 그곳 사람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하느님의 말씀의 진리를 읽고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을 휘어잡고 있던 교회의 세력이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번역은 집회에서 부르는 노래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앤틸리스 제도의 사람들은 노래할 때 열정을 가지고 큰 소리로 노래합니다. 하지만 초창기에는 노래책이 스페인어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 열정을 다소 누그러뜨렸습니다. 하지만 1986년에 형제들이 파피아멘토어로 된 노래책을 받았을 때, 왕국회관에는 뚜렷하고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위대한 하느님 여호와에 대한 감정을 노래로 마음껏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 브리텐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왕국회관에 처음 나갔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노래였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감동되어 눈물을 흘렸어요.”—이사야 42:10.

활동이 증가하면서 번역자가 더 필요하게 되었고, 열심 있는 두 젊은 파이오니아 즉 레이몬드 피테르스와 야닌 콘셉시온이 번역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현재는 9명으로 된 팀이 번역부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1989년에는 번역자들을 지원하는 가치 있는 도구인 멥스 소프트웨어를 갖춘 컴퓨터가 도착하였고, 마침내 「파수대」를 다른 언어와 동시에 파피아멘토어로 발행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전파 활동에 도움이 되는 훌륭한 마련이었습니다.

많은 선교인들의 도움

1962년에 길르앗 학교 제37기 졸업생인 존 프라이가, 길르앗 학교 재교육 코스에 참석하게 된 러셀 예이츠를 대신하여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18개월 후에 프라이 자매가 임신하게 되자 프라이 형제 부부는 영국으로 돌아가고, 예이츠 형제가 다시 지부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1964년 12월 31일, 네덜란드의 아헤 반달프센이 길르앗 학교 제39기를 졸업하고 이 섬들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가 쿠라사우에 발을 내디디자, 쏘아 올린 불꽃이 터지는 장려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귀청이 떨어질 듯한 폭죽 소리가 밤 공기를 타고 울려 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섬 사람들이 그를 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행사는 현지 주민들의 연례적인 전통으로, 악한 영들과 묵은 해의 불운을 내쫓고 새해가 왔음을 알리는 그들 나름의 방식이었습니다. 젊고 원기 왕성한 반달프센 형제는 순회 활동을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지역 활동을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선교인들처럼 새로운 고향을 사랑하게 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민들은 인정이 있고 손 대접을 잘하며 정직합니다. 이곳에 임명된 것은 즐거움이고 특권입니다.”

1974년에 아헤 반달프센 형제는 트리니다드 출신의 자매인 줄리와 결혼하였고, 줄리와 함께 여행하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줄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주민들의 우정적인 태도와 아량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나는 파피아멘토어를 할 줄 몰랐지만, 사람들이 협조적이어서 전파하는 일이 즐거웠어요. ‘콘 타 바이?’(안녕하세요?) 하고 말하고 나서 식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안부를 묻는 것은 쉬운 일이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이곳의 습관이지요. 출판물을 전하는 것도 쉬웠어요. 어려운 일은, 네 가지 언어의 출판물이 든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먼지와 바람과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일이 순전한 기쁨이었어요.” 1980년에 아헤와 줄리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아헤의 아버지를 보살피기 위해 네덜란드로 갔다가, 1992년에 쿠라사우로 돌아왔습니다.

길르앗 학교 제67기 출신인 로버터스 버커스와 그의 아내 게일은, 반달프센 부부가 없는 동안 순회 활동을 계속하면서 전 시간 봉사에 대한 열정을 크게 불러일으켰습니다. 1986년에는 오토 클로스테르만과 그의 아내 이본네가 길르앗 학교를 마치고 쿠라사우로 왔으며, 클로스테르만 형제는 1994년에 지부 조정 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부부는 2000년에 네덜란드로 돌아갔습니다. 2000년 3월에 반달프센 형제가 지부 위원회의 한 성원으로 임명되었고, 그 부부는 베델에 초대받아 현재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1997년에는 브루클린의 그래픽부에서 일하던 그레고리 두혼과 그의 아내 섀런이, 외국 지부에서 섬기는 베델 봉사자들로 쿠라사우에 임명되었습니다. 등록 간호사인 섀런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말기 암으로 고생하는 러셀 예이츠 형제를 돌보는 데 말할 수 없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2000년 3월에는 두혼 형제가 지부 조정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모두들 그의 친절과 접근하기 쉬운 성격을 무척 고마워하였습니다. 현재 그레고리 두혼, 클린톤 빌리암스, 아헤 반달프센이 지부 위원회의 성원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파이오니아 봉사는 풍부한 상을 받는다

마르가레트 피테르스는 성서 연구를 시작했을 때 자기 종교에 만족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처음에는 종교를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나는 가톨릭 교회 그리고 레지오 마리에와 성가대의 활동적인 성원이었거든요. 하지만 성서를 연구하고 나서, 내가 배운 내용이 틀렸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야외 봉사에 나오라고 초대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 아니라, 나가겠다고 자청했어요. 나는 다른 사람들도 거짓 종교에서 나와 진리의 편에 서기를 원했으니까요.” 마르가레트는 1974년에 침례를 받고, 지난 25년 동안 정규 파이오니아를 해 왔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마르가레트를 축복하셨으며, 그의 많은 경험 가운데 하나만 보아도 그 점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마르가레트는 멜바 쿰스라는 소녀가 찾아왔기에, 연구해도 좋은지 아버지의 허락을 받으라고 제안하였습니다. 쿰스 씨는 마르가레트가 자기에게 나타낸 존경심에 탄복하여, 딸뿐 아니라 온 식구가—모두 일곱 명이—연구를 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마르가레트는 그들 모두가 침례를 받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렸으며, 한 아들은 나중에 장로가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본 또 다른 파이오니아는 블란치 반헤이도른이었습니다. 블란치는 1961년에, 그의 남편인 한스는 1965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블란치는 지난 35년 동안 파이오니아를 해 왔습니다. 그동안 여섯 자녀를 키웠으며, 그 중 두 자녀는 지금 정규 파이오니아입니다. 이 모든 일은 남편의 신체적·감정적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 부부는 65명이나 되는 사람이 여호와께 헌신하는 단계에 이르도록 함께 도왔습니다.

블란치의 많은 경험 가운데 하나는 이웃 여자인 세라피나에 관한 것입니다. 블란치는 세라피나와 연구를 시작했는데, 세라피나의 남편인 테오가 맹렬하게 반대를 하였습니다. 테오는 세라피나의 책을 태워 버리고, 블란치가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자기가 블란치에게 휘두를 칼을 갈고 있다고 모두에게 말하였습니다. 한스는 테오가 그토록 반대하는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테오의 한 친구의 아내가 그 지방의 한 종교의 교직자와 공부를 시작했던 모양입니다. 나중에 그 여자는 교직자와 함께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테오는 자기 아내도 그렇게 될까 봐 겁이 났던 것입니다. 한스는 히브리 13:4을 사용하여, 결혼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설명하였습니다. 이제 마음이 푹 놓인 테오는 아내가 연구를 계속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세라피나는 침례를 받았고, 얼마 후에 테오도 침례를 받았습니다. 두 사람은 현재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블란치는 오전 11시에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점심을 먹으러 집에 돌아와, 두 시간 후에 아들 루신을 낳은 이야기를 합니다! 블란치는 파이오니아 봉사의 특권을 계속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파이오니아를 하면 계속 준비하고 연구하게 되며, 다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만족을 얻게 되지요.” 블란치의 말입니다.

정상적인 것을 초월하는 능력

마리온 클레프스트라 역시, 전 시간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서 큰 만족을 발견하였습니다. 마리온은 십대 소녀 시절에 맹인인 자기 할머니에게 잡지를 읽어 드리다가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1955년에 여호와께 헌신하고 1970년에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아들 알베르트도 어머니의 발자취를 따라 지난 18년 동안 파이오니아 봉사를 해 왔습니다.

마리온은 아홉 자녀의 어머니인 요한나 마르티나와 연구를 하였습니다. 요한나의 남편인 안토니오가 몹시 반대를 했기 때문에, 마리온은 그가 있을 때는 연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나는 남편이 집에 있을 때는 대문에 헝겊 조각을 매달아 놓았고, 그것을 본 마리온은 나중에 다시 오곤 하였습니다. 마리온의 참을성과 요한나의 꾸준함 덕분에, 요한나와 안토니오는 진리를 받아들여 부부가 동시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아홉 자녀 가운데 여덟 명을 여호와께 헌신하도록 도왔습니다.

슬프게도, 안토니오는 나중에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몇 년 후에 요한나의 두 자녀 역시 같은 식으로 사망하였으며, 세 번째 아이가 다른 비참한 환경에서 사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요한나는 그 모든 일을 겪으면서도, “정상적인 것을 초월하는 능력”을 주시는 여호와를 신뢰하면서 굳건하게 서 있었습니다. (고린도 둘째 4:7) 강한 믿음이 붙들어 준 덕분에, 그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시기를 인내했을 뿐 아니라 지난 25년 동안 파이오니아 봉사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81세인 요한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위대하신 여호와, 바로 그분이 나를 붙들어 주시는 분이지요. 그분에게 끊임없이 간청하는데, 나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이상은 거의 모든 회중의 뼈대를 이루고 있으면서 회중을 윤택하게 해 주는, 열심히 일하는 충성스러운 파이오니아들에 대한 몇 가지 예에 불과합니다. 1998년에 파이오니아의 요구 시간이 조정되자, 다른 많은 사람에게도 이 봉사 분야에 들어갈 기회가 열렸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현하며, 이 강습은 그들을 더 훌륭한 봉사자들로 훈련시키는 데 참으로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열심 있는 전도인들도 여호와에 대한 찬양의 함성에 소리를 보태고 있는데, 그들 가운데는 다음 경험이 알려 주듯이 비공식 증거에 매우 성공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1950년대 초에, 가이아나 출신의 젊은 의사인 앨버트 히스가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 있는 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다른 종류의 병 고침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안과 전문의인 그는, 계시록 3:18에 기록되어 있듯이,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안연고”에 관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앨버트는 자기가 처방하고 싶은 것이야말로 그러한 “안연고”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964년에 그는 가족과 함께 쿠라사우로 이주하였고, 예수께서 지상에 있는 자신의 종 반열에게 맡기신 영적 병 고침의 프로그램에 관해 계속 배웠습니다. (마태 24:45) 1969년에, 앨버트와 그의 아들은 같은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앨버트는 자신의 진료소에서 환자들과 종업원들에게 널리 증거하였습니다. 앨버트 덕분에 많은 사람이 진리의 물로 인도되었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현재 장로들입니다.

예기치 않은 혼란

쿠라사우의 생활은 늘 태평스러웠습니다. 여러 해 동안, 거의 전원시와도 같은 그 평화를 깨뜨릴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를 극적으로 바꾸어 놓을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1969년 5월 초, 지구 감독자인 로버트 트레이시는 자기 만족에 대해 그리고 이 섬의 평온해 보이는 상태로 인해 안이해져서 거짓 안전감에 빠질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였습니다. 그때는 그 평온함이 깨어지기 직전이었습니다. 몇 주도 채 지나지 않은 5월 30일, 한 노동 분쟁이 거세져서 난폭하게 되었습니다. 약탈하고 불태우는 일이 발생하면서, 한때 조용하던 지역 사회가 정치적 불안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습니다. 클린톤 빌리암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셔츠도 입지 않은 한 남자가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내 차를 향해 오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한때 나와 성서 연구를 하던 사람이 나를 위해 달려와서, ‘그 사람은 아니야! 좋은 사람이라네’ 하고 소리치더군요. 그 남자는 다가오더니, 방금 슈퍼마켓에서 약탈한 통조림 몇 개를 내 차의 좌석에 던져 놓고는 걸어가 버렸습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보호해 주신 여호와께 감사를 드렸지요.”

그 험난한 시기의 혼란과 불안정의 와중에서도, 여호와의 백성은 가까운 장래에 하느님의 왕국이 모든 사람에게 완전한 정부를 마련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가운데 차분하고 안전하게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는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실 것입니다. (시 145:16) 오늘날 사람들은 1969년 5월 30일을 이 섬의 역사의 전환점으로 봅니다.

새로운 지부 사무실들

1977년에 사망할 때까지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 성원으로 봉사한 네이선 H. 노어는, 언제나 선교인들에게 예리한 관심을 나타냈고 형제들을 강화하기 위해 자주 외국을 여행하였습니다. 1956년에는 지구 감독자들도 전 세계의 형제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는데, 이 “사람들로 된 선물”은 이 세 개의 섬의 활동에 박차를 가하였고 “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에베소 4:8; 골로새 4:11) 1950년에 노어 형제는 처음으로 이 섬들을 방문하였고, 쿠라사우에 머무는 동안에 러셀 예이츠를 지부의 종으로 하는 새로운 지부 사무실을 열 마련을 하였습니다. “포로들에게 자유를”이라는 노어 형제의 연설에 관해, 예이츠 형제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 연설은 마치 그가 각 사람에게 연단에 올라오라고 요청하여 개인적인 조언을 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1955년에 노어 형제가 다시 방문하여, 아루바 섬의 오란예스타트에 있는 완공되지 않은 왕국회관에서 연설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노어 형제는 일단의 형제들과 함께 대회를 위해 쿠라사우 섬으로 떠났습니다. 마지막 공식 방문이었던 1962년에, 노어 형제는 쿠라사우의 부에나비스타에 있는 왕국회관을 봉헌하고, 시기적절한 연설로 형제들에게 대단히 큰 격려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또한 빌렘스타트의 바로 외곽에 있는 오스테르베크스트라트의 한 장소에 새로운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과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것을 승인하였습니다.

그 건물의 설계를 위해 고용한 건축 기사의 아버지는 유태인으로서 여호와의 증인들과 함께 나치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헤이즐 예이츠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참 종교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여호와의 증인의 종교지요.” 이 지부 사무실은 1964년에 봉헌되었고, 1978년에는 지구 감독자인 앨버트 D. 슈로더의 추천으로 확장되었습니다. 1990년 무렵에는 더 큰 시설이 필요하다는 점이 분명해져서, 새로운 건축 부지를 물색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성과가 없었습니다.

1998년 11월에, 기존 건물을 매입하여 지부 시설로 개조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빌렘스타트의 바로 외곽의 편리한 위치인 세루로라웨흐라는 거리에 있는 공동 주택의 복합 건물을 매입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2월 4일에 매매가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것을 보고, 형제들은 시편 127:1과 일치하게 여호와께서 그 노력을 축복하고 계시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개조된 건물들은 아름답고 쾌적하며, 여호와의 이름에 영예와 영광을 돌리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999년 11월 20일, 새로운 지부 시설의 봉헌식이 지부의 뜰에서 거행되었고 273명이 참석하였습니다. 통치체의 게리트 뢰시는, 새로운 건물들이 어떻게 여호와의 웅대한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될 것인지 설명하기 위해 예언자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다음날에는 운동 경기장에서 열린 특별 프로그램에 2588명이 참석하였으며, 많은 사람에게 이 행사는 2000 봉사 연도의 절정이었습니다.

피 문제를 다룬 라디오 방송

여호와의 증인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15:29과 일치하게, 그들은 피를 멀리합니다. 성서에 근거하여 수혈을 거부하는 그들의 입장은, 좋은 의도를 가진 의사들과 권위자들에게서도 오해를 받아 왔습니다. 1983년에 쿠라사우의 한 판사는 에즈몬드 기브스와 비비안 기브스가 하느님께 받은 부모로서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아기에게 수혈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사건이 뉴스에서 광범위하게 보도되자, 부정적인 정보가 많이 퍼졌습니다. 한 라디오 방송국은 문제를 밝히기 위한 프로그램을 방송했는데, 휘베르트 마르가리타와 그의 아내 레나 그리고 순회 감독자인 로버터스 버커스를 포함한 일곱 사람이 나와서 세 시간 동안 그 주제에 관해 토의하였습니다. 형제들은 피에 관한 성서의 견해를 능숙하게 설명하였고, 그 프로그램은 감돌고 있던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여호와의 요구 조건을 이해하도록 사람들을 돕는 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수혈을 하지 않는 쪽을 택할 환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의사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학교 교사인 헤르다 페르비스트가 심한 교통사고를 당하여 즉시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헤르다는 피를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혈액 수치가 2로 떨어졌습니다. 외과 의사는 헤르다가 피를 더 잃지 않도록 두 단계의 수술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와 같은 숙련되고 헌신적인 의사들에게 감사합니다. 그러한 의사들은 때때로 자신의 양심과 씨름하면서도, 수혈하지 않는 쪽을 택할 환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용기와 충절을 나타냅니다.

쿠라사우의 병원 교섭 위원회의 사회자인 길례르모 라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위기 상황에서 도와 달라는 요청이 수시로 들어옵니다. 이 위원회가 없었다면, 훨씬 더 많은 문제가 발생했을 겁니다.” 아루바에서 이 위원회의 사회자로 일하는 알프레도 물레르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그는 아루바에서 처음에는 의사들의 반대가 얼마간 있었지만 지금은 의사들 대부분이 여호와의 증인에게 협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순회 감독자들의 사랑에 찬 봉사

이 세 개의 섬에서 초기에는 성장이 매우 느리긴 했지만 늘 꾸준한 증가가 있었으며, 출판물도 쉽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1964년에는 4개 회중에 전도인이 379명이었지만, 1980년에는 16개 회중에 전도인 1077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1981년과 2000년 사이에는, 전도인이 2154명으로 증가하고 회중 수는 네덜란드어 회중 2개와 스페인어 회중 2개가 추가되어 29개로 늘어났으며, 기념식 참석자 수는 6176명이 되었습니다.

언어가 각각 다른 집단들을 섬기기 위해 적어도 세 가지 언어를 할 수 있는 순회 감독자들이 필요했는데, 그러한 형제들을 찾기가 늘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개의 섬들은, 바울처럼 자신의 영혼까지 주기를 기뻐하는 여행하는 감독자들을 갖는 축복을 누려 왔습니다. (데살로니가 첫째 2:8) 이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로, 지금은 수리남에 있는 선교인들인 훔프리 헤르마뉘스와 루드밀라 헤르마뉘스, 그리고 현지 파이오니아들인 에드셀 마르가리타와 클라우데테 마르가리타가 있습니다. 아루바의 파이오니아들인 프랑키 헤름스와 마리아 헤름스도 순회 활동에서 봉사하다가 베델에 초대되어, 지금은 번역 팀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1997년에 이전에 벨기에에서 순회 활동을 하던 마르크 밀렌과 에디트 밀렌이 형제들을 강화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멀리 이곳으로 왔습니다. 새로운 선교인이 모두 그렇듯이 밀렌 부부도 언어를 배워야 했는데, 그 힘든 과정에서 때로는 아주 우스운 일이 벌어지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밀렌 형제가, 그리스도인은 참호(부라쿠) 속에 숨는 군인 같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는 것이 그만 당나귀(브리쿠) 속에 숨는 군인 같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힘든 일이었는데도, 마르크와 에디트는 끈기를 나타냈습니다. 그 언어에 능통하게 된 이 부부는 현재 네덜란드어와 파피아멘토어 회중들을 기쁨으로 섬깁니다. 2000년에는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순회 감독자가 이곳의 영어와 스페인어 회중들을 섬기도록 하는 새로운 마련이 생겼는데, 파울 혼손과 마르샤 혼손이 그 마련에 참여한 첫 부부가 되었습니다.

속성 건축 왕국회관

1985년에, 머나먼 알래스카를 포함한 미국 각지에서 형제 294명이 쿠라사우의 판네쿠크에 왕국회관을 지으려고 왔습니다. 9일 만에 완공된 새로운 회관은 많은 사람의 화제에 오르게 되면서, 훌륭한 증거가 되고 또 사랑과 연합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주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열심히 미국에서 온 자원 봉사자를 돕는 것을 보고 감탄하였습니다. 라미로 물레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느 때처럼 기술적인 문제점들이 있었습니다만 극복되었고, 회관을 짓는 일에 여호와의 영이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일요일 저녁에 형제들은 방금 지은 새 회관에서 여호와를 숭배할 수 있었는데,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의심하던 사람들에게는 눈이 휘둥그레질 일이었지요.”

이렇게 건물이 완공되자, 그 지방 교직자들도 무척 놀란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오전에 텔레비전으로 그 보도가 나간 뒤, 차 한 대가 회관 앞에 와서 섰습니다. 그 차에서 누가 내렸습니까? 다름 아닌 쿠라사우의 주교와 그와 동행한 사제 세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길게 늘어진 흰 겉옷을 바람에 휘날리면서 놀라움과 불신이 역력한 가운데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의 비이기적인 행동을 모두 다 이야기하자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이곳에서 형제들을 섬기기 위해 고향을 떠나온 반아이크 부부, 호른벨트 부부, 펠프스 부부와 코르 퇴니센과 같은 초창기 선교인들이 있습니다. 또한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면서도 많은 사람을 진리로 인도한 페드로 기리고리, 셀 수 없이 많은 재방문을 하면서 쉐르 아실레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 시어도어 “톨 보이” 리처드슨,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들인 마리아 셀라사, 에드나 아르바시오, 이세니아 “췌나” 마누엘, 베로니카 왈이 있습니다. 그리고 앞을 보지 못하고 다발성 경화증에 걸려 있으면서도 꾸준히 전파하였고 자기를 격려하려고 찾아온 사람들을 언제나 격려해 준 쾌활한 세페리타 돌로리타가 있습니다. 이러한 충실한 이들을 비롯하여 아낌없이 헌신적으로 일한 여러 사람들은, 이 세 개의 섬에 있는 형제들의 정신과 마음에 그 인상이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사막에 꽃이 피다

1980년대에 아루바는 폭발적인 경제적 번영을 경험하였습니다. 이제는 초현대식 호텔이 백사장에 늘어서 있고, 카지노의 환한 불빛이 세계의 관광객들을 유혹합니다. 자연히, 이러한 상황은 주민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주게 되었는데, 그 화려하게 치장한 물질주의가 고개를 들어 많은 사람에게—심지어 회중 내의 일부 사람들에게도—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섬에서, 특히 스페인어 밭에서는 영적으로 많은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앞장서서 일할 유능한 형제들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반면에 쿠라사우는 심한 경제 불황을 겪고 있으며, 많은 사람이 네덜란드로 이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형제들도 이 섬을 많이 떠나는 바람에 회중들이 영향을 입어서, 쿠라사우와 보네르에서는 지난 수년 동안 거의 증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로 접어든 우리에게는 머리를 들고 기뻐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왕국이 다가왔으며, 하느님의 백성은 “합당한 성향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계속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13:48) 한때 메말라 있던 이 영적 사막이 진리의 물에 흠뻑 젖게 된 것입니다.

[72면 네모와 삽화]

플라밍고와 당나귀

조용하고 자연이 손상되지 않은 보네르에서는, 바닷물로 소금을 만드는 일이 섬 사람들의 소득을 올리는 중요한 산업이다. 플라밍고는 소금기가 많은 먹이를 먹고 산다. 이 섬의 염전에서 그러한 먹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까닭에 보네르는 색깔이 화려한 이 새가 서식하기에 이상적인,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원래는 염전에서 부리기 위해 수입해 들여온 당나귀들이, 그 일을 기계가 대신 하게 되는 바람에 다시 야생 상태에서 스스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 당나귀들이 지금은 시골 지역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다. 당나귀들을 보존하기 위해 이 섬에서는 당나귀 보호 구역과 당나귀 입양 프로그램을 계획하였다.

[87면 네모와 삽화]

쿠라사우의 박공지붕과 폰톤 다리

쿠라사우의 수도인 빌렘스타트는 예스럽고 아름다운 도시이다. 박공지붕이 있는 건물들은 암스테르담을 연상시키면서도, 선명한 색상으로 칠이 되어 있다. 세인트안나 만이 이 도시의 중심을 가르며 통과한다. 엠마 폰톤 여왕 다리가 도시의 두 부분을 연결해 주며, 이 다리는 큰 선박들이 수심이 깊은 항구로 들어가도록 순식간에 열릴 수 있다. 처음에는 이 다리를 건널 때 맨발이 아닌 한 요금을 내야 했는데, 맨발은 가난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신발을 빌려 신고 부자들은 요금을 내지 않으려고 신발을 감추는 것이었다!

[93면 네모]

사제에게 먼저 인사를?

“사제의 위엄이 어찌나 높고 당당해졌는지, 우리가 길을 가다가 사제와 천사를 만난다면 사제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게 될 것이다.”—쿠라사우에서 발행된 가톨릭 주간지 「라 우니온」 1951년 8월 10일자에서 번역됨.

[95면 네모와 삽화]

좋은 평판의 가치

1986년 9월에, 러셀 예이츠는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주소로 자메이카에서 보낸 소포를 찾았다. 우편물 검사관들 앞에서 그 소포를 열어 본 그는, 한 층으로 깔려 있는 잡지 밑에 마리화나 4킬로그램이 든 꾸러미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아연실색하였다! 즉시 경찰이 그를 연행하였다. 하지만 그는 쿠라사우의 체신부 장관으로부터 좋은 추천을 받았는데, 그 장관은 예이츠 형제가 불법적인 마약에 관련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장관이 그토록 확실하게 보증해 주지 않았다면, 예이츠 형제는 교도소에 갈 뻔하였다. 결국, 그는 곧 풀려났다. 이 사건은 그곳 신문들에 널리 보도되었으며, 한 신문에서는 예이츠 형제를 “매우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그가 “모두에게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대단히 관심이 많다”고 보도하였다. 이 경험은 좋은 평판의 가치를 강조해 준다.

[96면 네모와 삽화]

왕국 활동의 특이한 부면

해마다 「날마다 성경을 검토함」 소책자가 상당히 많이 전해진다. 지난 몇 년 동안에, 파이오니아들은 그 소책자를 수백 부 전할 수 있었다. 지셀레 헤이데는 입원하게 되자, 그 기회를 이용하여 같은 환자들에게 비공식 증거를 하였다. 환자 중 한 사람인 니노스카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혹시 “그 작은 책”이 있느냐고 지셀레에게 묻는 것이었다. 처음에 지셀레는 무슨 책을 말하는 것인지 몰랐으나 마침내 「날마다 성경을 검토함」 책이라는 것을 이해하였다. 그때부터 그들은 매일 아침에 성구를 토의하였다. 두 사람이 다 퇴원한 후에 성서 연구가 마련되었다. 1년이 채 못 되어, 니노스카는 침례를 받았다. 현재, 그의 남편과 자녀들도 증인들과 성서 연구를 하고 있다.

[삽화]

네덜란드어, 영어, 파피아멘토어 「날마다 성경을 검토함」

[104면 네모]

‘하느님에 대한 열심이 있지만 정확한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다’

어느 날 오전, 휘베르트 마르가리타와 모레나 반헤이도른은 야외 봉사를 하다가 모렐라라는 여학생을 만났다. 모렐라의 표정이나 표현을 통해, 그가 ‘정확한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닌, 하느님에 대한 열심이 있음’이 나타났다. (로마 10:2) 모렐라는 자기가 로마 가톨릭교에서 매일 수업을 받고 있으며 그 길이 하느님을 숭배하는 길임을 확신한다고 설명하였다. 휘베르트와 모레나는 모렐라와 성서 연구를 할 마련을 했는데, 그 마련이란 이러한 것이었다. 모렐라는 자기를 가르쳐 주는 사제에게 가서, 배우고 있는 내용을 확인해 볼 것이다. 만일 사제가 어떤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모렐라는 동의하지 않는 성경적 이유를 제시해 달라고 요청할 것이다. 만일 모렐라가 증인들이 가르쳐 주는 것이 성서와 어긋난다고 느끼게 된다면, 성서 연구를 중단할 것이다. 얼마 안 있어 모렐라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비성경적임을 발견하였다. 사제가 질문에 대해 갈수록 더 불안해한다는 것을 깨달은 모렐라는, 사제에게 받는 수업을 모두 중단하였다. 모렐라는 진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침례를 받았고, 지금은 여호와를 충실하게 섬기고 있다.

[107면 네모와 삽화]

아루바의 모래와 바위

카시바리와 아요의 거대한 바위들은 아루바의 경관을 이루는 매혹적인 특징의 하나이다. 다바유로 인디언이 그렸다고 믿어지는 벽화들이 있는 동굴들도 참 볼 만하다. 일년 내내 화창한 날씨와 길게 뻗은 백사장은 수많은 관광객들의 마음을 끌어 해를 거듭하여 이 섬을 찾게 만든다.

[110면 네모]

“어린 아기들의 입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은 어린 아기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찬양이 나오게 하셨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마태 21:16) 이 세 개의 섬에 있는 어린아이들의 경우에도 이 말씀은 참되다. 열다섯 살인 모리스는 아루바 섬에 살고 있다. 모리스가 일곱 살이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지역 대회에서 모리스를 찾을 수가 없었다. 걱정을 하면서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베델 신청자들을 위한 모임이 열리고 있는 방의 뒤쪽에서 모리스를 찾았다. 모리스는 베델 봉사를 신청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모임의 사회자는 그 아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냥 있어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사실, 베델에서 여호와를 섬기고 싶은 모리스의 열렬한 욕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모리스는 13세에 침례를 받았고, 모든 임명을 잘 준비하면서 회중에서 열심히 일한다. 그는 여전히 베델에서 봉사하겠다고 결심하고 있다.

보네르에서, 여섯 살인 렌조는 왕국회관에 초대를 받고 그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고, 렌조는 그때부터 가톨릭 교회에 나가기를 거절하였다. 렌조는 부모에게 왜 교회에서는 낙원에 관해 가르쳐 주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이 질문이 부모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렌조의 부모는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 렌조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렌조의 성서 연구생 중 한 사람이 침례를 받았다. 이제 여덟 살이 된 렌조는 보네르에서 열린 순회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115면 네모와 삽화]

이구아나탕을 드실까요?

아래 사진과 같은 이구아나를 이 세 개의 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파충류인 이 동물은 그 가치를 높이 인정받고 있는데, 애완 동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구아나는 스프와 탕에 들어가는 주 재료인 것이다. 그곳의 한 요리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 맛이 꼭 닭고기 같습니다. 고기가 아주 연하고 부드럽지요.”

[71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아이티

카리브 해

베네수엘라

아루바

오란예스타트

산니콜라스

쿠라사우

빌렘스타트

산타크루스

부에나비스타

보네르

크랄렌다이크

[66면 전면 삽화]

[68면 삽화]

아루바의 호이베르흐 회중에서는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함께 평화롭게 협력한다

[70면 삽화]

페를 마를린은 아버지와 함께 다니며 종교 서적을 팔았으며, 나중에 증인이 되었다

[73면 삽화]

아루바 섬, 산니콜라스의 최초의 영어 회중

[74면 삽화]

아루바로 이민 온 사람들의 일부: (1) 마사 포스틴의 현재 모습, (2) 이민 온 후에 사망한 그의 남편 해밀턴, (3) 로베르트 티트레와 포스티나 티트레

[75면 삽화]

우드워스 밀스와 오리스 밀스가 결혼한 날

[76면 삽화]

아루바의 파이오니아인 에드위나 스트루프

[77면 삽화]

야코보 레이나는 1928년에 「창조」 책을 읽고 진리가 담겨 있음을 알아차렸다

[78면 삽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길르앗 학교 제6기 졸업생들인 러셀 예이츠와 헤이즐 예이츠, 제14기 졸업생들인 메리 예이츠와 윌리엄 예이츠

[79면 삽화]

헨리쿠스 하셀(왼쪽)은 좋은 소식의 열렬한 선포자였다

[79면 삽화]

카밀리오 기리고리아는 현지인으로는 최초로 1950년에 침례를 받았다

[80면 삽화]

앨리스 트위드와 헨리 트위드의 자기 희생적인 영과 열심은 애틋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81면 삽화]

가브리엘 헨리케스는 「깨어라!」의 정기 구독을 선물로 받았다. 그는 침례받은 최초의 아루바 사람이 되었다

[82면 삽화]

니니타 웨브는 처음에는 진리를 반대하였다. 니니타와 그의 남편 다니엘은 열렬한 왕국 선포자가 되었다

[82면 삽화]

마리아 라메인은 사제에게서 종교적 형상이 무가치하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독실한 가톨릭교인이었다

[83면 삽화]

알베르트 쉬르는 훌륭한 “추천서”들을 남기고 떠났다

[84면 삽화]

올리베 로게르스는 많은 사람이 여호와께 헌신하도록 도왔다

[85면 삽화]

위: 17세에 침례를 받은 외제네 리카르드손은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다

[85면 삽화]

아래: 젊은 클린톤 빌리암스가 그와 합세하여 “쿠누쿠”로 진출하였다

[86면 삽화]

1956년경 아루바의 선교인 집

[89면 삽화]

위: 1962년에 브루클린 베델에서 온 네이선 H. 노어가 봉헌한 이 왕국회관은 쿠라사우에서 형제들이 소유한 최초의 왕국회관이었다

[89면 삽화]

오른쪽: 거의 50년째 좋은 소식의 전도인인 빅토르 마누엘은 두 번째로 형성된 파피아멘토어 회중에서 봉사하였다

[90면 삽화]

위: 1969년에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열린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

[90면 삽화]

오른쪽: 동일한 프로그램을 위한 쿠라사우 대회장

[94면 삽화]

페트라 셀라사(오른쪽)와 그의 딸 잉그리드는 도움을 베풀도록 1969년에 보네르에 파견된 특별 파이오니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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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아멘토어 「파수대」

[98면 삽화]

위: 폴린 프라이와 존 프라이

[98면 삽화]

아래: 아헤 반달프센이 길르앗 학교 제39기를 졸업하고 1964년에 도착하였다

[99면 삽화]

위: 야닌 콘셉시온과 레이몬드 피테르스는 9명으로 이루어진 번역 팀에 속해 있다

[99면 삽화]

오른쪽: 에스트랄리타 리케트가 일할 때 사용하는 컴퓨터와 멥스 소프트웨어는 번역자들을 지원하는 귀중한 도구들이다

[100면 삽화]

왼쪽: 로버터스 버커스와 게일 버커스는 순회 활동을 하면서 전 시간 봉사에 대한 열정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100면 삽화]

아래: 줄리 반달프센과 아헤 반달프센은 1992년에 쿠라사우로 돌아왔고, 2000년에는 베델에 초대받았다

[100면 삽화]

아헤 반달프센, 클린톤 빌리암스, 그레고리 두혼은 지부 위원회에서 봉사한다

[102면 삽화]

블란치 반헤이도른과 한스 반헤이도른은 65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여호와께 헌신하는 단계에 이르도록 도왔다

[108면 삽화]

(1) 1964년에 봉헌된 지부 사무실

[108면 삽화]

(2, 3) 1999년 11월 20일에 봉헌된 현재의 지부

[112면 삽화]

순회 활동을 하여 이 세 개의 섬에 축복이 된 부부들 가운데는, (위) 루드밀라 헤르마뉘스와 훔프리 헤르마뉘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파울 혼손과 마르샤 혼손 그리고 에디트 밀렌과 마르크 밀렌이 있다

[114면 삽화]

초창기 선교인들: (1) 반아이크 부부와 (2) 호른벨트 부부와 (3) 코르 퇴니센은 이곳에서 형제들을 섬기기 위해 그들의 고향을 떠나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