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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

니카라과

니카라과

니카라과는 적절하게도 열대의 낙원으로 묘사되어 왔습니다. 니카라과의 동해안은 카리브 해의 맑은 청록색 바다를 내다보며, 서해안은 태평양에서 밀려오는 거센 파도에 씻깁니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이 땅은 숲과 농장과 강이 한데 어우러진 한 폭의 모자이크 그림에, 수많은 호수들이 오래된 화산의 분화구들에 보석처럼 박혀 있습니다. 하지만 그 호수들은 두 개의 거대한 호수—니카라과 호와 마나과 호—에 비하면 마치 자그마한 파란 물웅덩이들로 보입니다. 그 면적이 8200제곱 킬로미터나 되는 니카라과 호 하나만 해도 이 나라 전체 면적의 6퍼센트 이상을 차지합니다!

수도인 마나과는 면적이 약 1000제곱 킬로미터나 되는 마나과 호의 남쪽 연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적절하게도, 원주민어의 한 가지 언어로 “마나과”는 “큰물이 있는 곳”을 뜻합니다.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인 마나과는 인구가 약 100만 명으로, 이 나라 전체 인구 500만 명의 20퍼센트입니다. 마나과는 태평양 연안의 좁은 저지대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에 니카라과 주민의 약 60퍼센트가 살고 있습니다. 그 밖에 30퍼센트는 중부의 고지대에 살고, 나머지 10퍼센트 미만이 동쪽으로 인구 밀도는 낮으면서 면적은 전 국토의 절반을 차지하는 두 자치 구역에 살고 있습니다.

니카라과의 남쪽 국경에서는 중앙아메리카의 지협이 좁아져서, 카리브 해와 태평양의 거리가 불과 220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산후안 강이 니카라과 호에서 카리브 해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니카라과 호와 태평양을 분리시키는 리바스 지협은 겨우 18킬로미터에 불과합니다. 파나마 운하가 건설되기 전에는 산후안 강과 니카라과 호를 잇는 수로가 여행자들이 많이 다니는 항로였기 때문에 이 지역은 매우 탐낼 만한 곳이었습니다. 실제로 역사를 살펴보면, 이곳은 마야족·아스텍족·톨텍족·치브차족 등 여러 부족은 물론, 외세 즉 스페인·프랑스. 영국·네덜란드·미국·소련의 영향권에도 들어갔던 지역입니다.

많은 부족과 국가들이 끼친 영향은 니카라과의 다언어·다문화 사회에 나타나 있습니다. 태평양 지역의 주민은 주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메스티소 즉 스페인 사람들과 원주민들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들로 되어 있고, 카리브 해 지역은 뚜렷한 다인종 사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미스키토족·크리올족·메스티소족이 주류를 이루면서, 인구가 적은 수모족·라마족·가리푸나족—아프리카계 카리브족 집단—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종 집단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유 언어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꾸밈이 없고 개방적이며 우호적입니다. 이들은 또한 종교심이 깊으며, 성서를 사랑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이 기록을 읽어 보면 알게 되듯이, 니카라과 사람들의 국민성은 자연과 인간 두 가지가 다 초래한 역경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세기에 두 차례나 마나과는 이 지협의 태평양 쪽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붕괴되었습니다. 니카라과 동부는 다른 종류의 자연재해—대서양에서 발생한 파괴적인 허리케인—을 겪었습니다. 그에 더하여, 내전과 정치 혁명과 가혹한 독재 정권들은 재앙을 가중시켰습니다.

그러나 성서 진리의 순수한 물은 이 아름다운 호수와 강의 나라에도 흘러들어, 정직한 마음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계시 22:17) 그렇습니다. 오늘날 니카라과에서 도도히 흐르는 영적 마련의 강은 이 나라의 왕국 전파 활동을 여호와께서 풍성히 축복하셨음을 증명합니다. 불과 60년 전만 해도 좋은 소식은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에 불과하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특히 그러합니다.

초창기에는 물방울이

1945년 6월 28일,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 제1기 졸업생이자 친형제간인 프랜시스 월리스와 윌리엄 월리스가 마나과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마나과에서 좋은 소식을 조직적으로 전파하는 일을 시작하여, 장차 올 세대의 선교인들을 위한 길을 닦아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 나라에 왕국 소식을 처음 들여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1934년에 마나과를 방문한 한 파이오니아 자매가 마나과를 비롯한 이 나라 지역에서 출판물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45년까지만 해도 여호와의 증인에 관하여 들어 본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월리스 형제들은 야외 봉사에서 휴대용 축음기로 성서에 근거한 연설을 틀어 주었는데, 그러한 일은 그 시절의 니카라과에서는 참으로 특이한 일었습니다! 그리하여 첫 달에는 705명이 왕국 소식을 경청하였습니다.

그해 10월에는 선교인 네 명이 더 도착하였습니다. 부부들인 해럴드 덩컨과 에블린 덩컨, 윌버트 가이절먼과 앤 가이절먼이었습니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왕국을 광고할 열의에 찬 이 선교인들은 일련의 공개 집회들을 계획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45년 11월에 니카라과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광고지를 건네 주면서 성서 강연에 초대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집회 장소 근처에서 정치적인 소요로 거리에서 싸움 판이 벌어져 프로그램이 중단될 위험도 있었지만, 집회는 평화롭게 진행되어 40여 명이 그 최초의 공개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파수대」 연구와 봉사회도 선교인 집에서 매주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1946년은 선교인들과 성서의 소식에 제일 먼저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에게 행복한 해였습니다. 반응을 보인 사람 가운데 당시 24세였던 아르놀도 카스트로는 자신이 처음 성서 진리를 알게 된 경위를 회상하면서 미소를 짓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방짝들인 에바리스토 산체스와 로렌소 오브레곤과 함께 영어를 배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바리스토가 시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더니 책을 한 권 흔들어 보이면서 ‘우리에게 영어를 가르쳐 줄 미국 사람을 찾았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것이 그 ‘선생님’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에바리스토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된 시간이 되자 우리 세 청년은 영어 교습을 받을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우리 ‘선생님’인 선교인 윌버트 가이절먼은 책을 들고서 그렇게 열심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성서 연구생’들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좋아하더군요.”

“그 책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The Truth Shall Make You Free’)였는데, 우리는 그 책을 일주일에 두 번씩 연구했습니다.” 아르놀도의 설명입니다. “결국 영어는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성서 진리는 분명히 배웠지요.” 아르놀도는 1946년 8월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고, 그 후 니카라과로 돌아와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해 말까지는 방짝 두 사람도 침례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83세인 에바리스토 산체스는 그 초기 시절을 회상하면 즐겁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집회를 볼 장소가 없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몇 사람밖에 안 되기 때문에 선교인들 숙소에서 집회를 가졌지요. 나중에는 2층 집을 세내어 삼사십 명이 그곳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가졌습니다.”

이 세 청년이 선교인들을 따라 야외 봉사에 나선 최초의 니카라과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마나과에서 다음에는 마나과 근교에서 봉사하였습니다. 그 당시 마나과의 인구는 약 12만 명으로 지금보다 적었습니다. 도로가 포장된 곳이라고는 중심가의 12구획 되는 구역뿐이었습니다. 에바리스토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걸어 다녔습니다. 버스도 없었고, 포장된 도로도 없었고, 오직 기찻길과 달구지 길만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건기냐 우기냐에 따라 우리는 흙 속이나 진창 속에 푹푹 빠지면서 다녔지요.” 하지만 그렇게 노력한 보람은 있어, 1946년 4월에는 52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지부가 설립되다

바로 그달, 브루클린의 본부에서 네이선 H. 노어와 프레더릭 W. 프랜즈가 처음으로 니카라과를 방문하였습니다. 4일간의 방문 중에 158명의 청중이 노어 형제의 공개 강연 “너희 열방들아, 기뻐하라”를 들었습니다. 프랜즈 형제가 이 연설을 스페인어로 통역하였습니다. 떠나기 전에 노어 형제는 이곳의 전파 활동을 감독할 여호와의 증인의 지부 사무실을 니카라과에 개설하였습니다. 코스타리카에 있다가 얼마 전에 온 26세의 윌리엄 유진 콜이 지부의 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후 수십 년간, 지부는 히노테페·마사야·레온·블루필즈·그라나다·마타갈파와 같은 곳에 선교인 집을 세웠습니다. 순회 감독자가 새로 형성된 회중과 집단들을 방문하여 형제들을 강화하고 격려하는 마련도 생겼습니다.

반대자들이 반짝 성공을 거두다

형제들의 열심은 신속히 열매를 맺었고, 그 일은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박해의 첫 조짐이 두 명의 선교인이 임명되어 있던 카리브 해 연안의 블루필즈 읍에서 보였습니다. 사태는 최악으로 치달아 1952년 10월 17일에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법원 명령이 발해졌습니다. 증인의 모든 활동을 금하는 이 법원 명령은 한 출입국 관리가 서명은 했지만, 실은 가톨릭 교직자들이 사주한 것이었습니다.

블루필즈·레온·히노테페·마나과에 있던 선교인들이 이 법원 명령을 통고받았습니다. 당시 대통령인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를 포함해서 관계 당국에 청원을 해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형제들은 작은 집단으로 모이기 시작하였고, 가두 잡지 봉사를 중단하였으며, 지부의 서적은 안전한 곳들로 분산시켰습니다. 우리의 종교적인 적들은 여호와의 증인을 공산주의자라고 거짓 신고를 함으로 활동을 금지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우리는 변호사를 고용하여 법원의 결정에 대하여 대법원에 상소하였습니다.

일부 형제들이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굴복하였지만, 대다수의 형제들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 장성하고 두려움 없는 선교인들이 지주가 되어, 이 나라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전파하고 함께 모이기를 계속하였습니다. (사도 1:8; 5:29; 히브리 10:24, 25) 그러던 중 1953년 6월 9일—금지령이 내려진 지 8개월밖에 안 되었을 때—대법원은 만장일치로 여호와의 증인에게 승소 판결을 내려 숭배와 언론의 자유에 대한 헌법상의 권리를 재확인하였습니다. 음모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초창기 선교인들이 도전에 직면하다

교직자들의 반대가 초창기 선교인들이 직면한 유일한 도전은 아니었습니다. 길르앗 제12기 졸업생인 시드니 포터와 필리스 포터 부부의 경우를 고려해 봅시다. 이 부부가 1949년 7월에 니카라과에 도착하였을 때, 시드니는 전국을 망라하는 순회구의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시드니는 그 당시 여행하는 봉사가 어떠하였는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교통 편으로 기차와 버스를 이용했습니다. 숙소를 제공할 형제가 없는 경우가 흔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침구와, 물을 끓이고 요리하는 데 필요한 작은 휴대용 스토브를 가지고 다녔지요. 우리는 한 번 나가면 10주 동안 지부를 떠나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구역이 어찌나 생산적인지 일부 지역에서는 관심자들을 돌보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일례로, 나중에 마나과 순회구에 있었을 때 아내는 성서 연구를 열여섯 건이나 사회했답니다! 어디서 그런 시간이 났느냐고요? 우리가 쉬는 날과 회중 집회가 없는 날 저녁에 아내는 연구를 사회한 겁니다.” 이들 초기 선교인들은 참으로 헌신적이었습니다!

1957년에 도착한 도리스 니호프 자매는 자신이 받은 첫인상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는 3월 말, 건기라서 시골 풍경이 온통 갈색이었어요. 그 당시에는 차는 보기 드물었고, 그 대신 모두 말을 탔는데 총을 가지고 다니더군요! 마치, 서부 영화 촬영 세트 장에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그 시절에 사람들은 대개 부자 아니면 빈민 둘 중 하나였는데, 주로 가난했지요. 설상가상으로, 니카라과는 영토 분쟁으로 온두라스와 전쟁중이었고, 내가 도착하기 6개월 전에는 소모사 가르시아 대통령이 암살을 당해 이 나라가 계엄령 아래 있었습니다.”

“나는 레온에 임명되었는데, 대학 도시였어요.” 도리스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스페인어를 많이 알아듣지 못하니까 학생들이 내게 짓궂은 장난치기를 좋아하더군요. 예를 들어, 어떤 학생들에게 내가 다시 와서 성서에 관해 이야기해 주겠다고 제안을 하니까, 그렇게 하라고 하더니 자기들의 ‘이름’을 알려 주면서 웃더군요. 한 학생은 자기의 이름으로 대통령 암살범의 이름을 불러 주었고, 다른 학생은 악명 높은 어떤 게릴라 단원의 이름을 댄 것이었어요! 재방문을 가서 그런 이름을 대 준 학생들을 찾았으니, 교도소에 가지 않은 게 신기한 일이지요!”

마타갈파의 주교와 면담하다

마나과에서 북쪽으로 약 1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마타갈파 시가 커피 재배 지역의 구릉지에 포근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네 명의 선교인이 1957년에 이곳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조세핀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대학에서 그 당시 수학 교수로 있던 아구스틴 세케이라는 그 시절 마타갈파의 종교적인 분위기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민들은 주로 가톨릭교인이었는데, 사제들, 특히 주교를 무서워했습니다. 그 주교는 내 자녀 중 한 아이의 대부였습니다.”

이러한 두려운 분위기 때문에 지부에서는 선교인 숙소를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일례로, 한 집을 세내는 계약을 하면서, 지부에서는 변호사인 집주인에게 선교인들이 그곳에서 그리스도인 집회를 열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문제 없습니다”라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그 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도리스 니호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이삿짐을 다 가지고 도착한 날, 집주인이 울상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이사를 오지 말라고 통지하는 전보를 우리에게 보냈다는 거예요. 왜냐고요? 우리에게 집을 빌려 주면, 그의 아들이 가톨릭 학교에 못 다닐 거라고 주교가 그에게 협박을 한 것이었어요. 다행히도, 우리는 그 전보를 받지 못했고, 이미 한 달치 월세를 낸 상황이었지요.”

“우리는 그달에 다른 집을 구했지만 매우 힘들게 얻었습니다.” 도리스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주교가, 이 지역 사업가로 담력이 있는 그 집주인에게 압력을 가하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지요. ‘글쎄요, 주교님이 매달 제게 400코르도바를 주신다면, 이 사람들을 쫓아내겠습니다.’ 물론, 주교는 돈을 주지 않았지요. 하지만 기가 꺾이지 않은 주교는 상점마다 찾아가 여호와의 증인과는 말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벽보를 붙였어요. 또한, 상점 주인들에게는 우리에게 물건을 팔지 말라고 말해 두었지요.”

선교인들의 열심에도 불구하고, 마타갈파에서는 성서 진리의 편에 서고자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수학 교수 아구스틴은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피라미드를 건설한 파라오들은 오래 전에 죽었는데 왜 피라미드는 아직까지도 존재하는지 궁금하였습니다! 그는 한 선교인이 방문하여 자신이 품었던 의문들에 대한 답을 성서에서 보여 주던 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아구스틴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죽는 것이 아니라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고 죽은 사람들은 부활될 것임을 보여 주는 성구들에 나는 매료되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진리임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아구스틴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나는 내가 나가는 대학에서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총장인 수녀에게도 했지요.” 아구스틴의 말입니다. “그랬더니 총장이 내게 일요일에 자신의 집에 와서 ‘세상 끝’에 관해 토의를 해 보자고 권하더군요. 놀랍게도, 그곳에 도착해 보니 마타갈파의 주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교가 말하더군요. “여보게 친구, 자네가 믿음을 잃어 가고 있다고들 하더군.”

내가 대답했습니다. “무슨 믿음을요? 가져 본 적도 없는 믿음을? 저는 이제서야 참 믿음을 가지려고 배우고 있는 걸요.”

이렇게 장장 세 시간에 걸친 토의가 시작되었고, 수녀는 옆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새로 발견한 믿음에 대한 열심 때문에 아구스틴은 때로는 상당히 직설적으로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영혼불멸이라는 비그리스도교 교리를, 순진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돈을 뜯어내려는 술책이라고까지 역설하였습니다. 요점을 예시하기 위하여 아구스틴은 주교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제 어머니께서 사망하셨다고 칩시다. 당연히 저는 주교님을 의지하면서 우리 어머니가 연옥에 계시니 미사를 드려 달라고 할 겁니다. 주교님은 저에게 예배 비용을 청구하실 겁니다. 8일 후에 미사를 다시 드리고, 1년 후에 또 드리고, 그 뒤에도 또 계속하시겠지요. 하지만 결코 저에게 ‘여보게, 자네 어머니의 영혼은 이제 연옥에서 나왔으니 더 이상 미사를 안 드리겠네’라고는 하지 않으실 겁니다.”

주교가 말하였습니다. “아, 그거야 영혼이 언제 나오는지는 하느님만 아시니까 그런 거지!”

“그렇다면 영혼이 연옥에 들어간 때는 주교님이 어떻게 아시기에 저에게 비용을 청구하기 시작하실 수 있나요?” 아구스틴이 반문했습니다.

토의를 하는 중에 아구스틴이 또 다른 성구를 인용하기 시작하자, 수녀가 주교에게 말했습니다. “주교님, 이 사람이 나쁜 성서를 사용하고 있네요. 루터교 성서잖아요!”

“아니요. 내가 준 성서라오.” 주교가 대답했습니다.

토의가 계속되면서 아구스틴은, 성서에 나오는 모든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주교가 말하는 것을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구스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이 예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처럼 하느님의 말씀보다 교회의 전통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1962년 2월에 아구스틴 세케이라는 마타갈파에서 최초로 침례받은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계속 영적으로 진보하여 나중에는 파이오니아로, 장로로 그리고 1991년 이후로는 니카라과의 지부 위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마타갈파 전체로는 2002 봉사 연도에 번창하는 두 개의 회중에 왕국 전도인 총수가 153명이었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특별 파이오니아들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봉사의 직무를 확장하도록 감동을 받아 파이오니아 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힐베르토 솔리스와 그의 아내 마리아 세실리아 그리고 그의 여동생인 마리아 엘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1961년에 침례를 받고, 4년 뒤에는 상당히 효율적인 특별 파이오니아 팀이 되었습니다. 이 나라 여러 곳에 있는 아홉 개의 회중이 이 삼총사에 의해서 형성되거나 강화된 회중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임지 중 하나가 니카라과 호 가운데 있는 오메테페 섬이었습니다.

오메테페는 면적이 276제곱 킬로미터로 두 개의 화산에 의하여 형성된 섬인데, 그중 하나는 높이가 1600미터입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 화산들 때문에 섬이 8자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 명의 파이오니아는 새벽녘부터 오메테페에서 봉사를 하는데, 우선 버스로 갈 수 있을 만큼 간 다음에 모래 해변을 따라—흔히 맨발로—걸어서 이 섬의 여러 마을을 방문하였습니다. 이들은 18개월의 기간에 걸쳐 오메테페 전역에 몇 개의 격지 성서 연구생 집단을 조직하였는데, 가장 큰 집단은 로스아티요스에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로스아티요스에서 새로운 전도인이 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담배 농사가 주 수입원이었지만, 이제는 성서로 훈련받은 그들의 양심이 그 일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다수는 수입이 줄어드는데도 불구하고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들의 봉사를 풍성히 축복하시는 다른 많은 증거들에 더하여 그러한 믿음까지 보게 되어, 솔리스 가족은 참으로 기뻤습니다! 실로, 이 지역의 전도인 수가 이내 32명으로 늘어나는 바람에 왕국회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새로운 전도인 중 한 사람인 알폰소 알레만은 수박을 재배하였는데, 한 필지의 땅을 회관 부지로 쾌히 기증하였습니다. 하지만 로스아티요스의 전도인들은 어떻게 건축 자금을 마련할 것이었습니까?

힐베르토 솔리스는 자원 봉사자들을 조직하여, 알레만 형제가 제공한 수박 씨를 기증된 땅에 심었습니다. 힐베르토는 이 집단이 여호와를 위하여 수박을 재배하도록 격려하면서 스스로도 열심히 일하여 본을 보였습니다. 체구는 작아도 힘이 넘치는 자매인 마리아 엘사는 그 작은 전도인 집단이 어떻게 작물을 가꾸었는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아직 어둑어둑할 때 일찍 일어나 밭에 물을 주었어요. 세 가지 품종에서 수확이 좋았어요. 알레만 형제는 자기 보트를 이용하여 니카라과 호를 건너 그라나다로 수박을 운반하여 거기서 팔아서 건축 자재를 구입했지요. 그렇게 해서 로스아티요스의 왕국회관이 지어졌는데, 그 때문에 오빠는 그 회관을 가리켜 수박으로 만든 작은 회관이라고 불렀답니다.” 이렇게 보잘것없이 시작해서, 현재는 오메테페 섬에 세 개의 번창하는 회중이 있습니다.

힐베르토와 그의 아내 및 여동생이 나타낸 겸손과 적극적인 영, 그리고 여호와를 온전히 신뢰하는 태도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힐베르토는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사람을 어린 송아지로 여겨야 합니다. 그들은 사랑스럽지만 아직 약합니다. 그들의 약점 때문에 결코 속상해할 것이 아니라, 강해지도록 그들을 도우십시오.” 그처럼 사랑에 찬 태도로 인해서, 모범적인 이 세 명의 파이오니아가 265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도와 헌신하고 침례받게 하였음이 분명합니다! 힐베르토의 아내는 그 이후로 충실한 가운데 사망하였고, 이제 83세인 힐베르토도 건강이 상당히 악화되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섬기려는 열망은 여전히 강렬합니다. 한편, 마리아 엘사는 36년간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해 온 소감이 어떠한지 최근에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지금도 첫날 같아요! 여호와께서 우리를 그분의 조직으로 이끌어 주시고, 이 놀라운 영적 낙원에서 우리에게 작은 몫을 주셔서 기쁘고 또 항상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러 해에 걸쳐서, 열심히 일하는 많은 파이오니아들은, 이 솔리스 가족처럼 여호와의 관대한 축복 덕분에 니카라과에서 많은 왕국 열매를 보아 왔습니다.

1972년의 마나과 지진

1972년 12월 23일 자정이 막 지나, 마나과는 리히터 규모 6.25를 기록한 지진으로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이는 원자 폭탄 약 50개와 맞먹는 에너지입니다. 지부 사무실은 마나과의 동부 지역에 위치해 있어서, 진원지로부터 불과 18구획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선교인이 잠자리에 있었습니다.” 당시 지부 감독자인 리바이 엘우드 위더스푼의 말입니다. “지진이 멈추자, 우리는 서둘러 길 한가운데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러자 진동이 두 차례 곧바로 연달아 더 일어났습니다. 우리 주변 사방에서 집들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짙은 먼지 구름이 도시를 가득 메웠고, 중심가 쪽에서는 빨간 불꽃이 올라 맹렬한 화재가 발생한 것 같았습니다.”

지진의 진원지는 상업 구역 땅 바로 밑이었고, 그래서 불과 30초 만에 마나과는 초토화되었습니다. 생존자들은 숨을 헐떡이며 먼지와 잔해 속을 헤치며 기어 나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일부에서는 사망자 수가 1만 2000명을 웃도는 것으로 추정하였지만, 정확한 수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마나과에서는 가옥의 약 75퍼센트가 파괴되어, 거의 25만 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날로부터 3일간 약 10만 명이 이 도시에서 빠져나갔습니다.

그리스도인 사랑으로 구호에 나서다

지진이 나던 당일 정오까지는 지부에서 마나과에 있는 회중 감독자들로부터 온전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 충실한 형제들은 하나같이 신속하게 행동하여 회중 성원들을 일일이 방문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알아냈습니다. 다행히 시내에 사는 1000여 명의 증인 가운데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지만, 80퍼센트 이상이 집을 잃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사랑은 이웃 나라들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의 형제들을 신속히 돕게 하였습니다. 지진이 난 지 22시간도 안 되어, 식품·식수·의약품·의류를 가득 실은 트럭들이 지부에 도착하였습니다. 사실, 지부는 구호물자를 제일 먼저 공급한 구호 센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에 더하여, 니카라과의 여러 회중에서 자원 봉사자들이 몰려들었고, 곧 모두는 의류를 분류하고 식품을 포장하고 이 물품들을 발송하는 일에 분주하였습니다. 구호물자가 심지어 세계 먼 곳에 사는 증인들로부터도 도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진이 있은 다음날, 지부 감독자는 코스타리카·엘살바도르·온두라스 지부에서 온 대표자들과 만나 구호 활동을 더욱 조직하였습니다. 마나과 시외에 사는 니카라과 증인들은 수도를 떠나야 했던 형제들에게 사랑으로 자신들의 집을 개방하였습니다. 수도에 남아 있는 증인들은 그리스도인 집회와 야외 봉사를 위하여 여러 집단으로 조직되었습니다. 순회 감독자는 이들 집단을 방문하여 격려하면서 구호물자를 전달하였습니다.

지진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생활고가 악화되어 가는데도 왕국회관과 형제들의 집을 재건축하는 일은 진척되었습니다. 더욱이, 새로운 관심자들이 회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이 생활에서 왕국 권익을 계속 첫째 자리에 두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신 것이 분명하였습니다.—마태 6:33.

「1975 연감」(「‘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라’」)은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마나과 지역의 14개 회중 대부분은 지금도 금이 간 건물에서 집회를 보거나 집 마당에 지붕을 만들고 그 아래서 집회를 보고 있다. 흥미롭게도 작년 이래 이들 집회 참석자 수는 배로 증가하였다. 형제들은 작년 평균 전도인 수의 20퍼센트가 증가하였다. 지금은 2689명이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고 있으며, 417명이 침례를 받았다.”

이렇게 증가가 계속되자 오래된 지부 시설은 부적합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1974년 12월—대지진 후 2년 만에—새로운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이 완공되었을 때, 전도인들이 얼마나 기뻐했겠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지부 시설은 마나과 중심지에서 남쪽으로 16킬로미터 떨어진 엘라이손이라는 조용한 거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선교인들이 사랑과 연합의 본을 세우다

1945년에 두 명의 월리스 형제들이 도착한 이래, 니카라과에 온 선교인들은 믿음과 인내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면에서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처럼 훌륭한 특성들 때문에 선교인들은 서로 간에 그리고 이 나라 형제들과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선교인인 케네스 브라이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나과 지진이 있은 후에 지부에서는 도움을 베풀어, 형제들을 집에서 나오게 하고, 형제들이 숨진 친족들을 장사하는 일을 거들어 주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함께 일하다 보면, 서로 아주 가까워지기 마련이지요.” 동료 선교인들에 관하여, 마거리트 무어(전에는 포스터) 자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국적과 배경이 다르고 개성도 각각이지만, 연합된 가족 분위기로 인해서 개개인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케네스 브라이언과 새런 브라이언 부부와 같은 선교인들은 프랜시스 월리스와 안젤린 월리스 부부, 시드니 포터와 필리스 포터 부부 그리고 에밀리 하딘같이 노련한 선교인들의 본으로부터 유익을 얻게 된 것을 큰 특권으로 여깁니다. 새런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모두들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지요.”

여러 해에 걸쳐서 많은 선교인 부부들도 여행하는 봉사를 수행하였습니다. 사실, 열심 있는 선교인들이 놓은 튼튼한 기초는 니카라과에서 첫 30년간에 걸쳐 나타난 훌륭한 영적 증가에 이바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영적인 집은 곧 시험을 받을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지진이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영적으로 더 위험한 것—국가주의와 혁명—에 의해서였습니다.—고린도 첫째 3:12, 13.

정치 혁명의 불길로 시험을 받다

1970년대 말, 산디니스타 민족 해방 전선(스페인어 약호로 FSLN)이 이끄는 정치 혁명이 니카라과 전역을 휩쓸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이 혁명으로 42년 된 군부 족벌 체제가 전복되었습니다. 니카라과에서 15년간 선교인으로 봉사했던 루비 블록은 그 기간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정치 선전이 난무하던 그 여러 해 동안, 사람들은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았습니다. 군부와 민족 해방 전선 사이에 무력 충돌이 잦았지요.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려면 온전히 여호와를 신뢰해야 했습니다.”

정치 문제에서 그리스도인 중립을 유지하는데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산디니스타 동조자들에게 소모사 정권이나 미국 중앙 정보국(CIA) 요원이라는 비난을 자주 받았습니다. 외국인에 대한 강한 반감도 조장되고 있었습니다. 일례로, 선교인 자매 엘프리데 우르반이 야외 봉사를 하고 있는데, 한 남자가 우르반 자매에게 첩자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우르반 자매는 말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제게는 카메라나 녹음기도 없는데요. 게다가, 제가 이 마을에서 누구를 혹은 무엇을 염탐하려 든다는 말씀인가요?”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고도의 훈련을 받았으니까, 당신의 눈이 카메라고 당신의 귀와 뇌가 녹음기지.”

그 당시 마나과의 거리에서 사람들은 이런 대중 구호를 외쳤습니다. “그리스도교와 혁명은 상충되지 않는다!” 1970년대에 라틴 아메리카에서 대중의 지지를 얻은 이러한 사고방식은 해방신학을 반영하는 것으로, 로마 가톨릭교 내에서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만들어 낸 견해였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의하면, 해방 신학의 목표는 “종교적 신앙을 정치적·서민적 일상사와 관련시킴으로써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를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루비 블록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이 우리에게 흔히 던진 질문은 ‘혁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였어요. 우리는 인류의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하느님의 왕국이라고 설명해 주었지요.” 그렇게 호전적인 정치 분위기 속에서 여호와께 충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루비는 이렇게 부언합니다. “저는 여호와께 중립을 지킬 힘을 주실 것을, 말로만이 아니라 정신과 마음속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을 항상 기도했습니다.”

수개월간의 폭동 끝에, 민족 해방 전선은 1979년 5월에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전면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소모사 데바일레 대통령은 하는 수 없이 국외로 피신하였고, 그의 국민 방위군은 해체되었습니다. 그해 7월에, 국가 재건 정부라는 새로운 군사 정권이 행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 혁명 기간에 5만 명의 니카라과인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형제들의 상황은 어떠하였습니까? 「우리의 왕국 봉사」 1979년 11월호에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렸습니다. “형제들은 좋은 영을 가지고 있으며 집회와,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폭동이 있었던 기간에 목숨을 잃은 형제는 ··· 세 명이다. 집을 잃은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형제들은 대개가 세든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요 손실은 재산을 약탈당하거나 파손당하는 것이었다. 교통수단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버스들은 파괴되었으며 도로들은 이제 겨우 보수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휘발유는 매우 귀하다.” 그러나 더 큰 시련들이 여호와의 백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체포와 추방

새로운 정부가 여호와의 증인의 중립 입장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점이 곧 분명해졌습니다. 일례로, 관세국에서는 서적 수입을 까다롭게 만들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81년에 제정된 법령은, 모든 민간 및 종교 협회는 법적 인가를 받기 위해 재등록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형제들에게 이 인가가 나올 때까지, 이전의 법적 지위는 정지되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재등록을 요청하는 탄원은 계속 묵살되었습니다.

1981년 9월, 앤드루 리드와 미리엄 리드 부부는 중부 고지대에서 순회 봉사를 하던 중 체포당하였습니다. 10일 동안 이 부부는 여러 유치장을 전전하면서 최악의 상황을 겪었습니다. 결국 이 부부는 비밀경찰 본부로 끌려가 대부분의 시간을 서로 다른 감방에서 보냈습니다. 이 부부는 자주, 그것도 한 번에 종종 여러 시간 동안 심문을 받았는데, 그 목적은 그들에게서 책임 있는 형제들의 이름을 알아내려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 자기 배우자가 미국 중앙 정보국 요원임을 자백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리드 부부는 미국 시민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결국에 가서는, 모든 것이 착오였다는 통고를 받았습니다. 그들에 대한 정식 고발이 없었는데도, 이 부부는 코스타리카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떠나기 전에, 리드 부부는 여호와의 증인이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입장은 용납될 수 없고, 모든 니카라과인은 조국을 위해 싸울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중하게도, 지부 위원회는 이 나라 형제들을 더욱 집중적으로 훈련시켜 지부 사무실이 폐쇄된다 하더라도 활동을 감독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한편, 순회 감독자와 대리 순회 감독자를 위한 강습, 장로와 상당수의 봉사의 종들을 위한 일련의 천국 전도 강습 그리고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큰 모임을 갖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예를 들어, 마사야 시 당국은 1981년 12월에 두 번의 “천국 충성” 지역 대회 중 한 대회를 열도록 경기장 사용을 보장했었지만, 대회가 열리기 불과 36시간 전에 약속을 취소하였습니다. 이 결정은 시장 집무실이 아니라 중앙 정부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사전에 주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루 전에 형제들은 관대한 한 자매의 닭 사육 농장을 대회 장소로 대신 사용하도록 조정하였습니다. 그 장소는 마나과에서 약 8킬로미터 떨어져 있었습니다. 대회장을 준비하기 위하여 자원 봉사자들이 밤샘 작업을 하였습니다. 6800여 명의 형제들이 새로운 대회 장소에 관하여 신속히 구두로 전달받았습니다.

지부가 폐쇄되다

1982년 3월 20일 토요일 오전 6시 40분, 이언 헌터는 동료 선교인들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출입국 관리들과 자동 화기로 무장한 군인들을 가득 실은 버스 한 대가 밖에 도착하였습니다. 군인들은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숙소를 포위하였습니다. 이언의 말은 이러합니다. “관리들은 우리에게 한 사람당 단지 여행 가방 하나와 작은 손가방 하나에 짐을 꾸리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말하지 않고, 다만 어떤 조사를 앞두고 우리가 잠시 머무를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슬기롭게도, 지부 위원회 조정 위원인 라이너 톰슨은 살며시 사무실로 들어가 다른 선교인 집들에 전화를 해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귀띔해 주었습니다.”

루비 블록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날 저는 바울이 한 이러한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어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의 청원을 하느님께 알리십시오. 그러면 모든 생각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여러분의 마음과 정신력을 지켜 줄 것입니다.’ (빌립보 4:6, 7) 무장한 한 군인이 주방에서 감시하는 동안, 라이너 톰슨 형제는 우리를 대표해서 기도를 하였고 우리 모두는 진심으로 ‘아멘’하였지요. 그러자 우리는 마음이 완전히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대처할 힘을 주실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 교훈을 항상 기억하고 소중히 간직할 겁니다.”

헌터 형제는 그러고 나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버스에 태워서 시골 구석에 있는 오래된 커피 농장으로 끌고갔습니다. 나는 관리들에게 우리는 외국인들로서 우리 대사관에 말할 권리가 있다고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주초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어 그런 권리들은 다 말소되었다고 하면서, 일단 나라 밖으로 나가면 누구든 원하는 대상에게 말할 수 있다고 대답하더군요. 우리가 니카라과에서 추방되리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암암리에 인정한 셈이지요.” 그날, 지부에서 생활하고 있던 아홉 명의 선교인은 따로 나뉘인 채 코스타리카 국경으로 실려 갔습니다.

한편, 다른 두 집에 있던 선교인들은 톰슨 형제의 전화를 받고 신속히 대처하였습니다. 이 나라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오프셋 인쇄기를 비롯하여 많은 장비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개인 소유물도 많이 치워 놓았습니다. 출입국 관리들은 도착해서 보니, 집들이 거의 비어 있는데다 선교인들은 여행 가방을 챙기고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날 저녁, 이 두 선교인 집에 사는 열 명의 선교인은 공항으로 끌려갔습니다. 필리스 포터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더러 반혁명 분자들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아무도 우리 몸이나 짐에 대해 보안 검색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비행기 탑승권은 없었지만 수하물 티켓을 보고 파나마로 추방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이 나라에 유일하게 남은 두 선교인—순회 활동을 하고 있던 영국인 부부—은 몇 달 후에 추방되었습니다.

단 며칠 만에, 선교인들은 코스타리카 지부에서 재회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선교인들은 통치체로부터 임명을 받아 근처에 있는 벨리즈·에콰도르·엘살바도르·온두라스에서 봉사를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라이너 톰슨과 진 톰슨 부부 그리고 이언 헌터는 이제 니카라과의 활동을 감독하게 된 형제들과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코스타리카에 잠시 잔류하였습니다.

니카라과의 형제들은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었습니까? 그 당시 헌터 형제는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우리가 추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간 눈물을 흘리고 나서,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들은 중단 없이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전국 위원회에 새로 임명된 형제들은 힘차게 인도하고 있어, 일을 잘 해낼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니카라과 형제로서 오래된 순회 감독자인 펠릭스 페드로 파이스는 선교인들의 출국에 대해 형제들이 어떻게 느꼈는지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몹시 섭섭하였습니다. 선교인들은 정말 자신을 바쳤고 충성을 유지하였지요. 그들이 본을 보인 덕분에 형제들이 강화되어 이 나라에서 활동을 위한 튼튼한 기초가 놓여진 것입니다.”

제한은 받아도 금지는 당하지 않다

정부들은 정치·전쟁·사회 분규에 대한 증인들의 중립 입장을 때때로 오해합니다. 그 때문에 가끔 하느님의 백성에 대해 모순된 태도를 취합니다. 예컨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소모사 정권 하에서는 반대자들이 그들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산디니스타 민족 해방 전선은 형제들을 미국 중앙 정보국 요원이라고 비난합니다. 언론도 그에 가세하여, 우리를 “반혁명 단체”라고 부릅니다.

그렇기는 했지만 여호와의 증인이 니카라과에서 법적으로 금지당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1982년에서 1990년 사이에 그들의 숭배의 자유가 엄격한 제한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출판물을 국내로 반입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 더하여, 그들의 활동—실은, 국민 전반의 활동—을 밀접히 감시할 수 있는 제도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스파이로 감시하다

한 의회 도서관 편람은 이러한 사실을 밝혀 줍니다. “혁명 직후, 민족 해방 전선 역시 니카라과에서 가장 대중적인 이익 집단들을 대표하는 대규모 조직들을 육성하였다.” 이러한 집단들 가운데는 노동자·여성 연합회·목축업자·농민·소작농 단체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상기 편람은 “1980년경 산디니스타의 산하 조직들은 약 25만 명의 니카라과 국민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알려 줍니다. 이 조직들 가운데 강력한 조직으로 공산당식인 산디니스타 방어 위원회들 즉 CDS가 있었습니다. 인근 위원회들로 구성된 CDS는 도시 지역에서 구획별 인구 조사를 실시함으로써 “모든 개인의 소재를 파악하였다”고 상기 문헌은 알려 줍니다. 이 조직들은 정부를 위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확산하는 데 효과적인 도구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면밀히 감시당하게 되었는데, 특히 증인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 벌인 강력한 선전 운동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반혁명 활동 또는 “이데올로기적 편향” 혐의를 받은 사람들은 산디니스타 당국자들 앞에서 인근의 CDS로부터 정기적으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면 흔히 이런 사람은 비밀 경찰대인 국가 보안 총이사회 요원들에게 체포당하기 일쑤였습니다.

CDS의 한 가지 기능은 야간 경비 임무를 조직하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인근에서 범죄나 반혁명 활동이 발생하는지 감시하는 당번을 서도록 요구되었습니다. 증인들은 이 근무에 가담하지 않았을 뿐더러, 자기 집을 이 위원회의 주간 모임에 사용하도록 허락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증인들은 거리 청소와 같은 여타 자원 봉사는 수락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증인들은 광신자들이며 국가 위험 요소로 간주되었습니다. 한 형제는, “80년대 거의 내내 ‘이 집은 감시 대상임’이라는 글귀가 우리 집 현관에 쓰여 있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담대하게

형제들은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고 봉사에 참여할 때 자신에게 불필요한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서 신중을 기하였습니다. 집회는 대중의 눈에 띄지 않게 가족 규모의 집단으로 개인 집 또는 간판 없는 왕국회관에서 열렸습니다. 이웃 상황에 따라서, 형제들은 집회 시간에 대개 왕국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도인들은 회중에서 사용하는 여러 가지 양식과 보고에 자기 이름 대신 숫자를 기입하였습니다. 그에 더하여, 관심자들은 적어도 6개월간 연구하고 영적 진보의 증거가 보이지 않는 한 집회에 초대되지 않았습니다.

대회는 규모가 축소되고, 프로그램도 길이가 단축되었습니다. 연설 골자를 비롯한 자료를 각 회중에 보내면, 지방 장로들은 자격을 갖춘 봉사의 종들의 도움을 받아 회중 단위로 프로그램을 구성하여 제공하였습니다. 전국 위원회 위원들과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이런 대회들을 가능한 한 여러 군데 방문하였습니다.

장소는 구두 전달로 광고되었는데, 대회가 취소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대회장은 대회 직전에 변경되어 속히 알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1987년에 한 시골 동네에서는, 약 300명이 모이는 대회를 위해서 한 형제의 집 뒤뜰을 준비하였습니다. 갑자기 한 장교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습니다. “도대체 이게 다 뭐요?” 장교가 물었습니다.

“파티를 열려고 하는데요” 그 형제가 대답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장화를 보고서 그가 국가 보안국에서 나왔다는 것을 직감한 것입니다. 그러고는 그 장교는 가버렸습니다. 당국이 눈치를 챘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한 형제 자매들은 그날 밤샘 작업 끝에 모든 시설을 철거하였습니다. 새벽 다섯 시에는, 의자와 연단, 주방 기구 일체를 제거하는 동시에,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장소에 설치하였습니다. 건강한 젊은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형제들에게 새로운 대회 장소를 알렸습니다. 그날 아침 늦게, 한 트럭의 무장 군인들이 원래의 대회 장소에 도착하였습니다. 대회를 저지하고, 젊은이들은 골라 군대에 끌어가며, 주동자 형제들은 체포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것은 집주인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 다 어디 갔소?” 장교가 물었습니다.

“글쎄요, 어젯밤엔 파티를 열었지만, 지금은 다 끝났는데요.” 형제가 대답하였습니다.

“대회를 연 거 아니오?” 장교가 물었습니다.

“직접 보시죠. 여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형제가 말하였습니다.

못마땅한 장교가 또 물었습니다. “그럼, 어제 여기 있던 천막들은 어떻게 되었소?”

“파티가 끝나서요. 다들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형제가 대답하였습니다.

그 후에 군인들은 떠났습니다. 그동안, 형제들은 다른 장소에서 영적으로 세워 주는 프로그램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을 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뱀과 같이 조심스럽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하게 되십시오.” (마태 10:16) 전도인들은 이 말씀을 집회와 대회와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야외 봉사와 관련해서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도인들은 크게 무리 짓는 일을 피하고, 짝과 함께 사전에 임명된 구역에서 슬기롭게 봉사하였습니다. 순회 감독자인 펠릭스 페드로 파이스 형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봉사하면서 가지고 다닌 것은 성서뿐이었지요. 매일 다른 형제가 나와 함께 야외 봉사를 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어떤 회중을 방문할 때, 화요일 저녁에는 한 서적 연구 집단에 갔고, 목요일에는 다른 연구 집단에 갔으며, 일요일에는 또 다른 연구 집단에 갔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이런 경계 조처를 다소 완화할 수도 있었습니다.”

압수와 체포

1982년 7월 어느 날 밤, 100명에서 500명 이상에 이르는 폭도들이 국가 보안국 요원들을 대동하고서 이 나라 여러 지역에서 몇 군데의 왕국회관을 습격하여, “인민의 이름으로” 접수하였습니다. 8월 9일 저녁 일곱 시에서 아홉 시 사이에도, 다섯 개의 왕국회관과 한 대회 회관 그리고 엘라이손 가(街)에 있는 이전 지부 건물도 점유당하였습니다. 3월에 선교인들이 추방되고 난 뒤, 여섯 명의 니카라과 형제와 남아 있던 한 선교인 부부가 지부에서 자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당국이 조소하는 폭도들을 끌고 와서 그들마저 쫓아내면서, 심지어 개인 물건도 가져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정부는 몰수한 왕국회관들에 대한 권한을 CDS에게 부여하여, 회관들은 이제 ‘인민의 재산’으로 명명되었습니다. 명분인즉, 회관을 공공 용도로 개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총 50개의 자산 가운데 35개가 불법 점유를 당하였지만, 결코 정식으로 압류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국가주의의 열기 속에서, 책임 있는 형제들은 밀착 감시뿐 아니라 종종 협박까지 당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동네에서는 CDS 폭도들이 형제들을 그들의 집 앞에서 몇 시간 동안 괴롭히면서, 비방과 정치 구호를 외쳐 댔습니다. 국가 보안국 장교들은 가택을 수색하고, 일부 경우에는 강탈까지 하였습니다. 전국 위원회의 위원들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장로들이 체포되어 가혹한 처우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일을 먼저 당한 장로들 가운데 한 사람인 호엘 오브레곤은 당시 순회 감독자였습니다. 1982년 7월 23일, 국가 보안국 요원들은 이 형제와 아내 닐라가 손님으로 묵고 있던 집을 포위하고 그를 체포하였습니다. 5주일 동안의 끈질긴 노력 끝에 닐라는 남편을 면회할 허락을 받았는데, 그것도 무장 요원의 입회 하에 3분 동안만이었습니다. 호엘은 학대를 당한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닐라는 남편이 야위었고 대화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호엘이 우리에게 협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한 요원이 귀띔해 주었습니다.

90일간 구금되고 나서, 호엘은 결국—몸무게가 20킬로그램이나 줄어든 상태에서—석방되었습니다. 이 나라 다른 지역의 장로들도 체포되어 심문을 당한 다음 석방되었습니다. 그들의 충절의 본은 참으로 형제들의 믿음을 강화하였습니다!—99-102면 “비밀경찰과의 일전” 네모 참조.

징집 문제로 그리스도인 젊은이들이 시험받다

애국적 군 복무로 알려진 국민 개병 제도가 1983년에 시행되면서, 특히 젊은 형제들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17세에서 26세까지의 남자는 2년간을 현역으로, 그 후 2년을 예비역으로 복무하는 법적 의무를 지게 되었습니다. 징집을 당하면 곧바로 군부대에 투입되어 훈련을 받았습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규정은 없었고, 거부자는 구금되어 기다렸다가 재판을 받고 나서 2년의 징역형에 처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여호와께 충성을 유지하려는 각오로, 담대하게 이 시험에 직면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1985년 2월 7일, 마나과에서 정규 파이오니아를 하던 스무 살의 기예르모 폰세는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러 가는 중에 경찰에 체포당하였습니다. 이 형제는 군 신분증이 없었기 때문에 군 훈련소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무기를 들기는커녕, 기예르모는 젊은 신병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을 본 한 지휘관은 이렇게 버럭 소리질렀습니다. “여기는 교회가 아냐. 군대란 말야. 여기에서는 우리에게 복종해야 돼!” 기예르모는 사도행전 5:29을 인용해서 “우리는 사람들보다 통치자로서 하느님께 순종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화가 치민 나머지, 쿠바에서 온 군사 훈련 요원인 지휘관은 그의 성경을 잡아채면서 “오늘 밤에 이야기 좀 하자”는 말로 위협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의지력을 마비시킬 의도로 가하는 일종의 심리적 고문을 기예르모가 당하게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다행히도, 그 지휘관은 자신이 위협한 대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3일 뒤 기예르모는 감옥으로 이송되어 악조건에서 9개월 동안 감금당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계속하여, 감옥 안에서 성서 연구는 물론 집회까지 사회하였습니다. 이 어려웠던 시기에, 나중에 기예르모는 전국 위원회를 보조하는 귀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일부 젊은 형제들은 투옥당한 것이 아니라 산악 지대로 끌려가 비정규 전투단이라는 군 부대에 투입되었습니다. 각 전투단은 산악 정글 전투 훈련을 받은 80명 내지 90명으로 된 중대 다섯 개 혹은 여섯 개로 편성되었습니다. 바로 산악 정글에서 콘트라(민족 해방 전선에 대항하는 게릴라)와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형제들은 군복을 입고 무기를 드는 일을 거부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체벌과 욕설을 당하는 것은 물론 강제로 전투 현장에 투입되었습니다.

열여덟 살인 조반니 가이탄이 그러한 학대를 견뎌 냈습니다. 조반니를 강제로 입대시키려는 시도가, 그가 침례받기를 고대하던 1984년 12월 지역 대회 직전에 벌어졌습니다. 그는 군 훈련소로 끌려갔고, 거기서 45일 동안 군인들은 그가 소총을 사용하고 정글에서 전투하는 법을 강제로 배우게 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서로 훈련받은 양심과 일치하게, 조반니는 “전쟁을 배우”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사야 2:4) 그는 군복을 입지 않았고 무기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후 27개월 동안 군인들과 함께 행군하도록 강요당하였습니다.

조반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과거에 배운 것들을 묵상하며, 관심을 나타내는 군인들에게 전파함으로 자신을 강하게 유지했습니다. 시편 필자의 이런 말을 자주 되새겼습니다. ‘내가 산들을 향하여 눈을 들리니,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올까? 나의 도움은 여호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에게서 오는구나. 그분이 결코 너의 발이 비틀거리지 않게 하시니, 너를 지키시는 분은 결코 졸지 않으신다.’”—시 121:1-3; 데살로니가 첫째 5:17.

약 40번 정도나 전투 현장에 강제로 투입되었지만, 조반니는 조금도 다치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풀려난 뒤에 그는 1987년 3월 27일 침례를 받았고, 그 후 곧바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많은 충실한 젊은 형제들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105-6면 “전투 현장에 강제로 투입되다” 네모 참조

중립을 변호하다

정부 통제 하의 언론은 CDS와 함께, 여호와의 증인이 애국적 군 복무에 대한 반대 운동을 펴기 위하여 호별 방문을 이용한다고 거짓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인즉, 증인들은 니카라과 젊은이들이 군 복무를 거부하도록 설득함으로써 국가 안보를 저해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인데도, 이러한 주장이 자주 반복되다 보니 검찰관과 판사들마저 편견을 갖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들을 혁명의 지지자들로 공언하는 저명한 복음 교회 지도자들도, 종교적인 이유로 중립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인민의 적”이라고 하였습니다.

변호사인 한 증인은 군 복무 거부로 2년 형을 선고받은 젊은 형제들 25명에 대한 상소 건을 담당하였습니다. 양심적 병역 거부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상소의 목적은 피고인의 선량한 행실에 관한 기록, 체포에 불응하지 않은 점을 들어 형량을 줄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전체는 아니지만 일부의 경우 형량이 6개월 내지 18개월 줄어들었습니다.

법정에 가 본 한 형제인 훌리오 벤다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을 제외하고는 어떤 젊은이도 종교적인 이유로 군 복무를 거절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점입니다. 열일곱 살의 우리 젊은이들이 반대하는 방청객들에게 둘러싸인 채 판사와 군 검찰관 앞에서 확고한 신념으로 중립을 옹호하는 것을 보고 자랑스러웠습니다.”—고린도 둘째 10:4.

인쇄 활동이 지하로 들어가다

이 기간 전체에 걸쳐, 통치체는 코스타리카 지부와 니카라과 전국 위원회를 통하여 니카라과 형제들에게 계속 도움과 지침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서적 수입이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적절한 때에 양식’이 제공될 것이었습니까? (마태 24:45) 다시 한 번 여호와께서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1985년에 형제들은 「파수대」 연구 기사를 비롯한 성서에 근거한 자료를 한 인쇄업자의 협조로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통로는 우리의 활동이 반대자들에게 노출되게 만들기 때문에 위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부가 폐쇄되기 직전까지 대회 프로그램과 기념식 초대장을 인쇄하는 데 사용하던 오프셋 인쇄기를 활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인쇄기는 마나과 교외에 사는 한 자매의 집에서 가동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해 11월, 그 인쇄기는 정부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이러한 방해로 인해 활동을 멈추지 않고, 형제들은 즉시 낡은 등사기를 다시 설치하였습니다. 그 등사기에다 수탉이라는 별명도 붙였습니다. 전에는 강연 쪽지·편지·프로그램을 인쇄하던 기계였습니다. 교환할 부품을 구하기가 어렵게 되었을 때 형제들은 그 지방에서 다른 중고품 등사기를 구할 수 있었고, 그것에는 병아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나중에는 엘살바도르 지부에서 기계를 한 대 제공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축 이름으로 일관하여, 그것은 암탉이라고 불렀습니다.

정교하진 못해도 결코 효과가 떨어지지는 않는 이 인쇄 방법에 등사판이 사용되었는데, 그것을 형제들은 라스 타블리타스 즉 작은 판이라고 불렀습니다. 가구 만드는 소목장이로 1954년에 침례를 받은 페드로 로드리구스가 만든 그 기구는 두 개의 사각형 틀을 경첩으로 연결한 것인데, 위 틀에는 천으로 된 망사를 깔고 아래 틀 즉 바닥에는 유리나 나무 판을 깔았습니다. 설계가 간단하듯이 인쇄 과정도 간단하였습니다. 타자한 등사 원지는 위 틀에 집어넣어 망사에 밀착시키고, 아래 틀에는 백지를 집어넣었습니다. 잉크를 롤러로 망사에 바른 다음, 한 번씩 누르고는 새 종이를 집어넣었습니다.

단조롭기는 했어도 이 인쇄 방법으로 몇 가지 출판물을 생산하였는데, 그중에는 왕국 노래 225곡 전체가 실린 「여호와께 찬양의 노래를 부르라」 노래 책도 있었습니다. 인쇄 활동에 참여한 에드문도 산체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일단 형제들이 그 작은 판을 사용하는 데 익숙해지면 분당 20면은 찍어 냈습니다. 노래 책만도 도합 5000부나 만들어 냈지요.”

등사기에 들어가는 원지를 준비하는 일에 처음으로 기여한 자매들 가운데는 에드문도의 아내 엘다도 있었습니다. 자녀까지 딸려 있는 엘다는 자신의 수동식 타자기를 이용해서 이른 아침에 시작해서 밤늦게까지 「파수대」 연구 기사를 등사기용 원지에 타자하였습니다. 그 자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남편은 코스타리카에서 받은 잡지 한 부를 내게 넘겨주곤 하였습니다. 나는 인쇄 팀이 몇이나 있는지, 어디서 일을 하는지 전혀 몰랐답니다. 그저 내게 맡겨진 부분의 일만 알고 있었지요. 만약 발각되는 날이면 우리 집, 우리 가구—모든 것을 압수당하고 우리는 체포되어 어쩌면 ‘실종자’로 증발하고 말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에 대한 사랑과 두려움은 우리가 가질 수도 있었던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인쇄 작업장

기예르모 폰세는 인쇄 작업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기억합니다. 그는 교정 일을 하면서, 원지를 준비하는 형제들과 인쇄 및 배포를 하는 형제들 사이에서 연락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폰세 형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작업장은 특정 증인 가족들의 집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각 작업장은 방안에다 또 방을 만든 것으로, 그곳이 작은 작업 공간이 되었습니다. 등사기 소리를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작업장 바로 바깥에다 녹음기나 라디오를 놓아두고는 음량을 크게 했습니다.”

땀에 흠뻑 젖은 채 형제들은 이 작은 방들에서 하루에 아홉 시간 내지 열 시간씩 일해서 「파수대」와 같은 출판물을 등사하였습니다. 종종 이웃 사람이 호기심을 나타내거나 누군가가 당국에 밀고할 때면, 통고받는 순간 하던 작업을 모두 다른 집으로 옮겨야 하였습니다.

그 일은 베델 봉사로 간주되었으며, 그 일에 참여한 사람들은 젊은 독신 형제들이었습니다. 펠리페 토루뇨는 열아홉 살에 갓 침례받고 나서 한 인쇄 작업장에서 일하도록 초대되었습니다. 펠리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처음 받은 인상은, 밀폐되다시피 한 골방에 들어갔더니 원지 교정액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열기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고, 조명은 작은 형광등에 의지하였습니다.”

다른 도전들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기계를 수리해야 할 때—자주 하였는데—간단히 정비 가게에 가져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등사기는 누구 겁니까? 뭘 인쇄하고 있습니까? 그 일은 중앙 정부의 허가를 받았습니까?’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형제들 스스로 수리를 해야 하였고, 때로는 부품을 만들어 쓰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잦은 정전이었습니다. 폰세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쇄 팀들은 생산이 지체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가끔 보면 등잔불 밑에서 일하느라 코들이 까맣게 그을어 있더군요. 이 훌륭한 젊은이들이 나타낸 인식과 성향, 자기 희생 정신은 나로 하여금 일을 계속하게 만들었습니다.”

소중한 추억들

펠리페 토루뇨는 자신이 지하에서 인쇄 일을 하던 4년간을 흐뭇한 마음으로 뒤돌아봅니다. “나는 형제들이 이 필수적인 영적 양식을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항상 유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해진 여러 가지 제약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쁨으로 일을 했습니다.” 펠리페의 말입니다. 이 일에 1988년 6월부터 1990년 5월의 종료 시기까지 참여했던 오마르 위디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게 가장 큰 감동을 주었던 한 가지 일은 형제 애정의 분위기였습니다. 새로 온 형제들은 자진해서 배우고자 열심이었고, 여러 가지 일을 참을성 있게 가르침받았습니다. 작업 조건은 이상적인 것이 못 되었지만, 자원 봉사자들은 나이는 젊어도 영적인 남자들로서 이러한 형태의 봉사에 따르는 희생에 대해 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반니 가이탄도 인쇄 작업장에서 일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가 힘을 내게 해 준 것은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그 당시 금전적인 보상을 받지 못하였지만 개의치 않았지요. 우리는 필요한 것들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나는 이미 여호와께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던 상황에 여러 번 처해 봤었거든요. 그래서 물질적 필요에 대해 크게 염려하지 않고 있었지요. 기예르모 폰세, 넬손 알바라도, 펠리페 토루뇨 같은 형제들이 내게 훌륭한 모범이 되어 주었고요. 인도하는 나이 든 형제들 역시 나를 강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경험이 참으로 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하 활동에 참여한 모든 형제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호와의 후원을 경험하였는데, 인쇄 활동 그 자체만 해도 그러하였습니다. 가이탄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상적으로는, 원지 한 장 가지고 300번 내지 500번을 찍습니다. 우리는 그걸로 6000번이나 찍어 댔습니다!” 원지를 비롯한 인쇄 재료의 생산율을 높일 필요가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나라 공급 물량에도 한계가 있었지만, 그런 물건은 국가의 감독을 받는 가게에서만 구할 수 있어서 유달리 많은 수량을 구입하면 눈에 띄게 되어 구매자가 체포당할 위험성에 노출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형제들의 노력을 축복하셨습니다. 당국은 최초의 오프셋 인쇄기를 제외하고는 어느 작업장도 발견하거나 폐쇄하지 못하였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세속 직업을 가진 형제들도 종종 큰 위험을 무릅쓰고 이 활동에 기여하였습니다. 예컨대 많은 형제들이 자신의 차량을 이용해서 방방곡곡으로 인쇄물을 배달하였습니다. 때로는 하루 종일 여행하면서 여러 군 검문소를 통과하였습니다. 그들은 운반하다 발각되는 날이면 차량을 빼앗기고 체포당하며 심지어 투옥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겁내지 않았습니다. 당연하게도 이 형제들은 전적으로 아내들의 지원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이제 살펴보겠지만, 일부 아내들도 이 곤란한 시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습니다.

용기 있는 영적인 여자들

여러 그리스도인 여자들이 제한을 받던 시기에 니카라과에서 특출한 용기와 충성을 나타냈습니다. 남편과 협력하여, 그들은 한번에 여러 달 동안 자기 집을 지하 인쇄 활동 장소로 제공하였습니다. 또한, 일하는 형제들의 식사를 자신의 비용으로 준비하였습니다. “우리 젊은 형제들과 이 자매들 간에는 긴밀한 그리스도인 결속이 자라갔습니다.” 인쇄 활동을 조정하는 일을 하던 넬손 알바라도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분들은 우리들에게 어머니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아들인 것처럼, 그분들이 많은 일을 하시게 하였지요. 때로는 할당된 물량을 마감 시간에 대기 위해 새벽 네 시까지 힘들게 일했는데, 특히 「날마다 성경을 검토함」 소책자와 같은 가외의 일이 예정되었을 때면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둘이서 때로는 거의 24시간씩 교대해 가면서 일했습니다. 그런데도 어김없이 자매들은 꼭두새벽에도 우리를 위해 식사를 마련해 주곤 했습니다.”

집 안에 인쇄기를 설치한 가정들은 안전을 관리하는 일까지 맡았습니다. 가정 주부들이 대개 이 임무를 맡았는데, 남편들은 낮에는 세속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한 자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기계에서 나오는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라디오가 터져 나가게 크게 틀어 놓았습니다. 누군가가 대문가에 다가오면, 작업실에 있는 형제들에게 경계를 보내기 위해 특별한 전구를 켜는 스위치를 눌렀지요.”

종종 방문객은 동료 증인이나 친척들이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자매들은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재치 있게 그들을 돌려보내려고 애썼습니다. 상상이 가겠지만 이 일이 언제나 쉽지는 않았던 것이, 이 자매들은 보통 때 같으면 후대를 매우 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후아나 몬티엘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그 집 뜰에는 캐슈나무가 있었습니다. 동료 증인들이 이 나무에서 열매를 따기 위해 종종 찾아오기 때문에 후아나의 집 뜰은 스스럼없는 모임 장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후아나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 집에서 인쇄기를 돌리는 특권을 받았을 때 남편과 나는 그 나무를 잘라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우리가 왜 느닷없이 교제를 덜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되었는지 형제들에게 해명할 수는 없었지만, 인쇄 활동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요.”

지금은 고인이 된 콘수에로 베테타는 1956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자매의 집도 인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형제들은 그 자매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서는 의심을 사지 않고 서적을 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안전한 장소—한 구획쯤 떨어진 한 형제의 집—에 정차하였습니다. 베테타 자매는 사망 전에 가진 회견에서 그 당시를 회상하였습니다. 그 자매는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잡지는 말아서, 각 회중으로 갈 자루에 채워 넣었습니다. 자루는 각각 15킬로그램 정도 나갔지요. 그 형제 집으로 가기 위해 우리 며느리와 나는 자루를 머리에 이고서 우리 집 뒤쪽으로 도랑을 건너 다녔어요. 이웃 사람들은 아무 눈치도 채지 못했답니다. 그 자루들은 대개 여자들이 머리에 이고 다니는 것들과 하나도 다르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 충성스럽고 용기 있는 자매들은 형제들에게 참으로 소중하였습니다! “자매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참으로 큰 특권이었습니다.” 기예르모 폰세가 그 당시에 자신과 함께 일한 여러 형제들을 대표하여 연설하는 가운데 한 말입니다. 이해할 만하게도, 그처럼 훌륭한 그리스도인 여자들은 그 남편들과 함께 자기 자손들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이 파란많은 시대에 자녀들이 겪었던 도전들 가운데 몇 가지를 돌이켜 보기로 합시다.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자녀들

그 부모들처럼, 비밀 인쇄 활동과 서적 배달에 참여한 집안의 자녀들 역시 특출한 충성을 나타냈습니다. 그 당시 아직 집에 두 자녀가 있던 클라우디아 벤다냐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 집에서는 다섯 달 동안 뒷방에서 인쇄기가 돌아가고 있었지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형제들을 도우려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아이들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형제들은 아이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등사된 「파수대」 지면을 모아서 철하는 일을 시키더군요. 아이들은 성구와 왕국 노래를 외우도록 격려해 준 이 젊은 형제들과 함께 있기를 참으로 좋아했답니다!”

벤다냐 자매는 계속 말합니다. “내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남편과 나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어려운 때에 살고 있다는 것과, 이 일은 여호와를 위한 일이며 따라서 우리가 충성을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설명해 주었지요. 아이들은 아무에게도—친척, 심지어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에게조차—이 일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되었지요. 고맙게도 아이들은 충실하게 순종해 주었습니다.”

아우라 릴라 마르티네스의 집 역시 맨 처음 인쇄 장소로 사용된 집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자매의 손자녀들은 인쇄지를 정합하고 제본해서 포장하는 일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들 역시 자기 집에서 일하는 형제들과 매우 친숙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에우니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학교에 가서 벤다냐 형제 댁 그리고 에우가리오스 형제 댁 아이들과 거의 매일같이 함께 놀았지만, 각자의 집에서 서적이 인쇄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해 후까지도 전혀 몰랐어요. ‘정말로? 너희 집에서도 그랬니?’ 하고 서로에게 물어 보면서 우리는 놀랐답니다. 실로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들로 자라가면서도 우리 중 아무도 서로에게 말 한 마디 안 했던 것입니다. 분명히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 일을 보호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어렸을 때의 그러한 경험은 이 청소년들에게 계속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지금은 봉사의 종으로서 특별 전 시간 봉사를 하는 에메르손 마르티네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작업장에 있던 형제들은 내 인생의 모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열여덟 살 내지 열아홉 살밖에 안 되었지만, 아무리 작은 경우에도 영적 책임을 인식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나는 질적으로 일하는 것의 가치를 배웠습니다. 내가 인쇄된 지면을 정합할 때 한 면이라도 빠뜨리게 되면, 누군가가 그 내용을 놓치고 말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여호와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 형제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의 중요성이 내게 심어졌지요.”

에드문도 산체스와 엘다 산체스 부부의 딸인 엘다 마리아는 어머니가 「파수대」를 비롯한 출판물을 타자한 원지를 전달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자기 자전거에 싣고서 다섯 구획 떨어진 폰세 형제의 집으로 날랐습니다. 원지를 딸에게 건네 주기 전에, 산체스 자매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싸서 작은 바구니 속에 넣어 주었습니다. 엘다 마리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순종하도록 나를 훈련시키셨어요. 그래서 이 제한 기간이 닥쳤을 때, 나는 지시를 주의 깊이 따르는 일에 익숙해 있었지요.”

이 자매는 인쇄 활동을 감독하는 일을 하는—아버지를 비롯한—형제들이 직면하는 위험을 깨닫고 있었습니까? 엘다 마리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종종 아버지는 집을 나가기 전에, 만약에 아버지가 체포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슬퍼해서는 안 된다고 내게 말씀하시곤 했어요. 그런데도 귀가 시간이 늦어지는 날이면,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안전을 위해 여러 번 기도하던 생각이 납니다. 우리는 국가 보안국에서 나온 사람들이 우리 집 앞에 차를 세우고는 우리를 감시하는 것을 자주 보았어요. 누가 와서 어머니가 문간에 나갈 때면, 나는 어머니가 벌여 놓은 일을 모두 모아다 감추곤 했습니다. 여호와께 그리고 우리 형제들에게 충성을 나타내는 면에서 부모님이 보여 주신 모범과 훈련에 대해 매우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려서 확고한 기초를 닦아 놓은 그 시절의 많은 청소년들은 지금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으며, 여러 형제가 각 회중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진보는 여호와의 백성에 대한 그분의 풍부한 축복의 증거입니다. 그들 가운데 아무도 그 어려운 시기에 영적 양식 없이 지내지 않았습니다. 실로 왕국의 좋은 소식은 계속 전진하여, 심지어는 산디니스타 정권 때 투옥당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좋은 흙”을 찾아내기까지 하였습니다. (마가 4:8, 20)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게 되었습니까?

왕국의 씨가 교도소 내에 뿌려지다

산디니스타 혁명이 일어나자, 수많은 국민 방위군 패잔병은 물론 반체제 정치인들이 구금 상태에 있다가 1979년 말에서 1981년까지 진행된 특별 재판에 출두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이전 국민 방위군 장병들은 최고 30년까지 형을 받아, 마나과 북동쪽으로 11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카르셀 모델로(모델로 교도소)에 투옥되었습니다. 이제 살펴보겠지만, 마음이 정직한 많은 사람들이 이 죄수들로 득시글거리는 살벌한 교도소 내에서 영적으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1979년 말, 마나과에 사는 한 장로는 동료 증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증인은 진리를 알기 전에 소모사 정부 하에서 군 복무를 한 적이 있어서 감금되었는데, 아직 카르셀 모델로로 가지는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편지 가운데서 그 형제는 다른 재소자들에게 나누어 줄 서적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서적을 전달한 두 장로는 그 형제를 면회할 허락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형제는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료 수감자들에게 계속 증거하면서, 심지어 그들 중 일부와는 성서 연구까지 사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연구생들 중 한 사람인 아나스타시오 라몬 멘도사는 영적으로 빠르게 진보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배우는 내용이 너무 좋아서 그 형제가 다른 재소자들에게 전파할 때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거절하는 사람도 있었고 듣는 사람도 있더군요.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열두 명가량이 휴게 시간에 구내 공터에서 함께 연구하게 되었지요.” 약 1년 뒤에는 그 최초의 그룹 가운데 한 사람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1981년 초에 이 작은 성서 연구생 그룹은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카르셀 모델로로 이감되었는데, 그곳에서도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 좋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성서에 근거한 서적도 재소자들에게 신속히 배포되어, 일부 서적은 더 많은 “좋은 흙”을 찾아냈습니다.

호세 데 라 크루스 로페스와 그 가족의 예를 살펴봅시다. 그 가족 중에는 증인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호세가 투옥된 지 6개월 후, 그의 아내는 길거리에서 증인들을 만나 「나의 성서 이야기 책」을 받았습니다. 그 아내의 유일한 목적은 그 책을 남편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호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서 이야기」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그것이 교회에서 나온 책인 줄 알았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지요. 그 책에 감동한 나머지 몇 번이나 읽고 난 뒤, 같은 감방의 열여섯 명에게 보여 주었더니 그들 모두가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마치 한 잔의 청량음료와 같았습니다. 다른 감방들에서도 재소자들이 그 책을 빌려 달라고 요청하는 바람에 모든 감방을 다 돌고 나니까, 나중에는 한 벌의 낡아빠진 놀이용 카드처럼 닳고 해어져 버리고 말더군요.”

호세의 동료 재소자 가운데 몇 사람은 복음주의 교회들의 신자들이었고, 그중에는 목회자들도 있었습니다. 호세는 그들과 함께 성서를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창세기 3:15의 의미를 물어보았을 때 그것은 신비라는 이야기만 듣게 되자 실망하였습니다. 하루는 성서 연구생인 한 재소자가 호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대답은 댁에서 가지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한 그 책에 들어 있습니다. 원한다면 나와 함께 연구할 수 있습니다.” 호세는 그 제의를 받아들였고, 「성서 이야기」 책 덕택에 창세기 3:15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자신을 증인이라고 밝히는 재소자들과 교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호세가 카르셀 모델로 안에 있는 이 독특한 집단에 끌리게 만든 것 가운데 한 가지는 그들의 훌륭한 행실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알기로 매우 타락한 생활 방식을 영위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를 연구한 결과 훌륭한 행실을 나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호세의 말입니다. 그러는 동안 호세의 아내는 증인들로부터 계속 서적을 구해다가 남편에게 보내 주었고, 그에 따라 남편은 영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사실상 그 연구 집단은 호세에게 감옥에서 그 동(棟)의 한 구역을 임명하기까지 하여, 그는 각 감방을 다니며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몇 권 안 되는 서적을 관심자들에게 빌려 주고 또 휴게 시간에 그 동에서 열리는 집회에 그들을 초대할 수 있었습니다.

재소자들의 영적 필요를 돌보다

마나과 동부 회중에서는 카르셀 모델로에서 서적을 읽고 영적 진보를 하고 있는 늘어나는 재소자들의 영적 필요를 돌보았습니다. 그 목적으로 그 회중에서는 특정한 형제 자매들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재소자들에게 서적을 갖다 주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면회는 30일 내지 60일마다 허용되었지만, 재소자는 자신이 사전에 요청한 사람과만 접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관심자들 모두가 그 지방 증인들과 직접 접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수감자들이 이내 서로 만나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나과 동부 회중의 장로들은 카르셀 모델로 내에서 확장하는 집단의 활동을 조직하고 인도하는 일에 기여하였습니다. 그들은 특히 영적으로 인도하는 수감자들과 정기적인 접촉을 유지하면서, 그들에게 주간 집회들을 사회하고 질서 있는 방식으로 전파 활동을 수행하며 그 모든 활동을 보고하는 법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이 재소자들은 그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때쯤에는 큰 성서 연구생 집단이 교도소 내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적절한 신권 질서가 분명히 필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카르셀 모델로에는 원래 네 개의 동이 있었는데, 각 동은 2000명까지 재소자를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방문하는 장로 중 한 사람인 훌리오 누녜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각 동은 서로 독립되어 있어서 주간 집회는 각 동의 휴게 구역에서 별도로 열렸으며, 모두 합쳐 80명가량이 참석하였습니다.”

통 속에서 침례를 받다

새로운 사람들이 발전함에 따라, 몇 사람이 침례를 받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습니다. 방문하는 장로들은 침례 지원자들을 승인하면서, 영적으로 인도하는 재소자들이 바깥에서 열릴 대회와 일치하는 날짜에 침례를 마련하게 하였습니다. 대개, 침례 연설은 그 전날 밤에 한 감방에서 행하고, 다음날 아침 재소자들이 목욕 갈 때 지원자들은 침례를 받았습니다.

호세 데 라 크루스 로페스는 1982년 11월에 교도소 내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쓰레기통 속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제를 사용해서 그 통을 북북 문질렀습니다. 그런 다음 통 안에다 잠자리용 시트를 대고 물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침례를 받으려고 모여 빙 둘러서 있는 참에 무장한 간수들이 왔습니다. ‘누가 이 침례를 허가했소?’ 그들이 묻더군요. 인도하는 형제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일을 하는 데는 허가가 필요 없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간수들은 무언의 수긍을 하면서 그 절차를 지켜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침례 지원자들에게 하는 두 가지 질문을 받은 다음 통 속에 들어가 물에 잠겼습니다.” 적어도 34명의 재소자들이 이런 식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일부 수감자들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오마르 안토니오 에스피노사였습니다. 그는 카르셀 모델로에서 30년 형기 중 10년을 복역하였습니다. 재소자들은 주기적으로 이동하였으며, 오마르가 두 번째 되던 해에 같은 감방의 수감자 가운데 증인이 한 명 있게 되었습니다. 오마르는 다른 재소자들이 이 사람에게 정기적으로 찾아와 성서를 가르침받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감동한 나머지 오마르도 성서 연구를 요청하였습니다.

오마르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을 사용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하루에 한 장씩 다루었습니다. 열하루가 지나자, 그는 전도인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 책 22개 장을 마칠 때는 침례받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그 문제를 좀 더 시간을 두고 고려해 볼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에게 두 번째 책 즉 교도소에서 방금 받은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를 연구하도록 권하였습니다. 한 달 남짓해서 오마르는 이 책도 끝마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흡연을 중단하고 다른 변화도 하였습니다. 분명히 성서 진리가 그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보고서 형제들은 그의 열망이 진정한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따라서 오마르는 1983년 1월 2일 통 속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교도소에서 하는 수화

교도소를 방문하는 장로들에게서 받은 교훈을 전달하거나 봉사 보고와 같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수감되어 있는 전도인들은 각 동(棟) 간에 의사소통을 해야 하였습니다. 1982년에 침례받은 멘도사 형제는 그들이 이 일을 어떻게 하였는지 알려 줍니다.

“우리 중 일부는 재소자들 사이에 생겨나 발달한 일종의 수화를 배웠습니다. 기념식을 지킬 때가 되면, 우리는 해가 진 시간을 추정한 다음 서로에게 신호를 보내 우리 모두가 같은 시간에 기도에 참여할 수 있게 했습니다. 우리는 매년 이렇게 했습니다. 수화는 우리가 「파수대」 연구를 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떤 동에 있는 형제들에게 그 주간 연구 기사가 없을 때는, 우리가 기사 전체를 그들에게 수화로 불러 주었습니다. 받는 쪽에서는 관찰하는 형제가 다른 친구에게 그 수화를 말로 불러 주면, 그 친구는 그 기사를 글로 써 내려 갔습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어떻게 영적 양식이 교도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까?

영적 양식이 재소자들을 양육하다

마나과 동부 회중의 장로들과 장로들의 가족을 비롯한 전도인들이 정기적으로 카르셀 모델로를 찾아와 재소자들과 면회를 하였습니다. 거의 10년 동안 그들은 그 형제들을 위해서 「파수대」와 「우리의 왕국 봉사」를 포함하여 물질적 양식과 영적 양식 두 가지를 다 공급하였습니다. 물론 영적 양식은 숨겨야 하였습니다.

한 장로는 잡지를 자신의 커다란 목발 속에 감추었습니다. “어린이들은 거의 수색당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아이들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훌리오 누녜스의 말입니다. 면회객들은 기념식 표상물까지도 교도소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었습니다.

동마다 면회하는 날이 따로 정해져 있었고, 승인받은 면회객은 대개 하루 종일을 재소자와 함께 넓은 구내 뜰에서 지냈습니다. 이렇게 해서 소수의 증인 수감자들은 마나과의 형제 자매들과 만나 영적 공급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 이 재소자들은 각기 자기 동으로 돌아가 자기들이 받은 것을 서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왕국 노래까지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로페스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동에서는 우리 중 한 사람만, 방문하는 형제들과 접촉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한 번에 두세 가지 노래의 곡을 익혀 가지고 돌아와서 나머지 우리에게 가르치는 일은 그 재소자가 담당하는 몫이었지요. 우리는 노래 책이 한 권밖에 없었기 때문에 모두가 집회 전에 연습을 했습니다.” 멘도사 형제는 증인 면회객을 맞을 수 있는 소수의 수감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멘도사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카를로스 아얄라와 그의 가족이 내게 면회를 왔지요. 그의 두 딸은 내게 적어도 왕국 노래 아홉 곡은 가르쳐 주었는데, 나는 그 노래를 우리 동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로페스 형제는 그 노래들을 한 사람 거쳐 배운 사람 가운데 속합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중에 바깥에 나가서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기쁘면서도,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그동안 정말로 똑같은 가락으로 노래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좀 놀랐습니다.”

교도소 내에서 영적 강함을 유지하다

교도소 내에서 형제들과 관심자들은 어떠한 환경을 견뎌야 했으며, 어떻게 영적으로 강함을 유지하였습니까? 멘도사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교도소에서 급식은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몇 번인가는 수감자 전원이 두들겨 맞았고, 때로는 간수들이 우리 주위에서 총을 쏠 때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엎드렸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의 긴장을 고조시키기 위한 방책이었지요. 다른 재소자 중 일부가 간수들과 충돌하는 일이 생기면, 우리는 밖으로 내몰려 벌거벗은 채 뙤약볕에서 몸을 태우는 단체 기합을 받았습니다. 우리 증인들은 이런 경우를 이용해서 서로를 세워 주고 위로했습니다. 개인 연구에서 배운 성구들을 기억해 내어 그 요점을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연합되고 강화되었지요.”

수없이 많은 자유 시간을 이용하여, 많은 증인과 관심자들은 성서를 네다섯 번씩 통독하였습니다. 수중에 들어온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들을 전부 다 꼼꼼하게 그리고 몇 번이고 연구하는 일이 그들에게는 특이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멘도사 형제는 「연감」 책들을 생각하면 특별한 감사를 느낍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다른 나라들에서 온 경험담들, 지도들—우리는 그 모두를 연구했습니다. 매년 우리는 각 나라의 증가, 회중 수, 새로 침례받은 사람 수, 기념식 참석자 수를 비교했습니다. 이러한 일로부터 커다란 기쁨을 얻었지요.”

그러한 환경 아래서 새로운 전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물론 신권 조직에 대한 훌륭한 지식을 빨리 흡수하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열심 있는 전파자와 가르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1986년 2월에, 카르셀 모델로의 43명의 전도인은 80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었습니다. 평균 83명이 주간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영적으로 해방된 이 모든 수감자들은 머지않아 자유를 더 누리게 될 것이었습니다. 정부가 모든 정치범들에게 사면을 내리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카르셀 모델로에 마지막으로 있던 30명의 전도인이 1989년 3월 17일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마나과 동부 회중은 새로 석방된 전도인들이 옮겨 가는 지역에 있는 장로들과 접촉하는 마련을 신속히 하였습니다. 한편 그 장로들은 이 새로운 형제들을 환영하였으며, 이들 가운데 많은 형제들은 나중에 장로, 봉사의 종,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제한이 닥쳐도 전파 활동을 중단하지 않다

어려움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니카라과의 전도인 수는 제한받던 시기에 계속 급속히 증가하였습니다. 사실상 일부 지역에서는 거의 전부가 새로운 사람들로만 구성된 회중들도 형성되었습니다. 한 예가 라 레포르마 회중입니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인 안토니오 알레만과 그의 아내 아델라는 마사야 읍과 그라나다 시 사이의 시골 지역에서 증거하기 위하여 매일같이 돌아다녔습니다. 그중 한 동네가 라 레포르마였습니다. 여기서 1979년 초에 알레만 부부는 이제 막 아내와 사별한 젊은 남자 로살리오 로페스와 연구를 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로살리오는 함께 살고 있던 처가 식구들에게 자신이 배우고 있는 내용을 알려 주었습니다. 먼저 장모에게, 다음에는 처남과 처제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22명으로 이루어진 가족 집단이 6킬로미터 떨어진 마사야에 있는 집회 장소로 걸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로살리오의 처가 식구들이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호별 방문 전파를 한다고 집회에서 배웠는데, 우리는 그 일을 하고 있지 않잖아.”

“좋습니다. 오는 일요일에 전파하러 나갑시다.” 로살리오가 말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그대로 하였습니다! 로살리오가 연설을 하고, 22명은 모두 그 집으로 몰려갔습니다! 안토니오가 다음번 연구하러 왔을 때, 로살리오는 함박웃음을 머금고 “우리 모두는 이번 주에 나가서 전파했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안토니오는 자신의 연구생들의 열심을 보고 기쁘기는 했지만, 그 젊은 부부들에게 먼저 그들의 개인 문제들을 올바로 정리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1979년 12월에 로살리오와 그의 처남 우베르 로페스가 이 가족 집단 중에서 처음 침례받는 사람들이 되었고, 다른 가족 성원들도 속속 그 뒤를 이었습니다. 그 후 만 3년이 지나, 라 레포르마 회중이 설립되었습니다. 그 회중은 전도인 30명—모두 한 가족—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베르, 그의 형제 라몬 그리고 로살리오가 장로로 임명되었습니다. 1986년에는 그 회중 성원 54명이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습니다.—99-102면 네모 참조.

라 레포르마 회중 성원들이 열심히 전파한 결과, 주변 지역에 점차 여섯 개의 다른 회중이 형성되었습니다. 여기서 또한 기억할 점은, 형제들은 아직도 그들의 열심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정부 당국의 감시의 눈 아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베르 로페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군부의 시달림을 받았지만, 결코 전파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전파 활동은 이 어려운 시기에 증가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러하였습니까? 많은 형제들이 직업을 잃고서도 정규 혹은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노력을 축복하셨습니다. 1982년에는 니카라과에서 좋은 소식의 전도인이 4477명이었지만, 1990년에 와서는—8년의 제한과 박해 후에—그 수가 7894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것은 76퍼센트의 증가였습니다!

제한이 해제되다

1990년 2월, 국제 감시 하에 실시된 선거를 통해서 니카라과는 정부의 변화를 이룩하였습니다. 그 후 머지않아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제한이 폐지되고, 군 징집은 종식되었으며, 방어 위원회는 해체되었습니다.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형제들은 더이상 엿보는 이웃의 눈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해 9월, 과테말라에서 지부 위원으로 일해 오던 이언 헌터가 니카라과 전국 위원회의 새로운 조정 위원이 되었습니다.

지난 8년간 전국 위원회는 사무실이나 사무 기기도 갖추지 못한 채 니카라과의 활동을 감독하였습니다. 사실 말이지, 헌터 형제는 자신이 과테말라 지부에서 사용하던 타자기를 가져온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겼습니다! 지방 형제인 훌리오 벤다냐는 친절하게도 할 일이 많은 그 형제들에게 자신의 사무 기기를 많이 제공하였습니다.

마나과 교외의 한 집을 구해서 지부 사무실로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상당수의 형제들은 정상적인 베델 생활이 생소하였습니다. 비밀리에 여러 다른 장소에서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일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훈련에 잘 호응하여 필요한 조정을 하였습니다. 그 젊은이들 대부분은 계속 여호와를 충실히 섬기고 있으며, 일부는 다른 분야의 전 시간 봉사에 임하고 있습니다.

지부 일을 돕기 위하여, 다른 나라들로부터도 형제들이 파견되었습니다. 선교인들인 케네스 브라이언과 새런 브라이언 부부는 1990년 말에 온두라스로부터 니카라과로 재임명되었습니다. 1991년 1월에는 멕시코 길르앗 분교 제1기 졸업생들인 후안 레예스와 레베카 레예스 부부가 코스타리카로부터 건너왔고, 역시 멕시코의 제1기 졸업생인 아르날도 차베스와 그의 아내 마리아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로타르 미항크와 카르멘 미항크 부부가 2년 뒤 파나마로부터 도착하였는데, 로타르는 파나마에서 지부 위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새로운 지부에 임명되어, 합당한 조직적 체제로 업무가 재가동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현재 니카라과 베델 가족은 여러 국적의 37명의 성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991년 2월에는 지부 위원회가 임명되어 전국 위원회를 대치하였고, 니카라과 지부는 1991년 5월 1일에 공식적으로 재개되었습니다. 이제 장래의 성장을 위한 기초가 놓였으며, 그리하여 그 성장은 참으로 인상적인 것으로 전개될 것이었습니다! 1990년에서 1995년까지 4026명의 새로운 제자가 침례를 받아 51퍼센트의 증가를 보았습니다. 이러한 성장으로 적합한 모임 장소들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억나겠지만, 지난 1982년 당시 총 35개소의 소유 자산을 폭도들에게 빼앗겼습니다.

소유 자산의 반환을 청구하다

왕국회관들이 처음에 불법적으로 점유당하였을 때, 형제들은 수동적으로 대세에 따라가지 않고 즉각적으로 정부에 호소하면서, 니카라과 헌법을 근거로 변론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법적 요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의 요청은 묵살되고 말았습니다. 1985년에는 형제들이 당시 니카라과 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내기까지 하여, 법적 인정과 전 재산의 반환을 요청하였습니다. 그에 더하여 내무부 장관과의 면담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신정부가 1990년 4월 출범하면서, 형제들은 신속히 다시 한 번 청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새로운 내무부 장관에게 제출하여, 여호와의 증인을 법적으로 재등록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넉 달 만에 청원이 수리되었을 때, 형제들은 참으로 기뻐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였습니다! 그때 이후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는 니카라과 정부로부터 국제 선교단 신분을 부여받았으며, 그리하여 자유롭게 그리고 그러한 비영리 단체에 부여되는 일반적인 면세 혜택을 받으며 운영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왕국회관들을 되찾는 일은 내내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그중 일부는 전 정권의 지지자들에게 ‘부여’되었던 것입니다.

형제들은 새로 형성된 ‘압류 재산 재조정을 위한 전국 위원회’에 호소하여, 전 재산의 반환을 요청하였습니다. 이 일은 사실상 절차가 매우 복잡다단하였는데, 우선은 다른 조직 또는 개인들로부터 들어오는 방대한 건수의 유사한 호소 건들의 물량 때문이었습니다. 1년간의 집요한 노력 끝에 한 건의 자산을 1991년 1월에 반환받았습니다. 형제들은 또한 왕국회관을 점유하고 있는 개인들을 찾아가 어떤 타협점을 모색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취득한 것을 혁명에 따른 합법적 ‘이득’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지부 자산은 그 해 말에 반환되었지만, 구내를 점유하고 있는 가족을 위해 그들이 나가 살 집을 대신 매입해야 하였습니다. 그 후 몇 해에 걸쳐 형제들은 점차 30내지 35개소의 자산을 되찾았으며, 되찾을 수 없는 자산에 대해서는 국채의 형태로 보상을 받았습니다.

자연재해에 대처하다

이 보고의 앞부분에서 언급한 바 있는 지진 외에도, 화산과 허리케인 역시 니카라과에 피해를 입혔습니다. 1914년 이래, 이 나라에서 가장 활동적인 화산인 세로 네그로는 열두 번이나 폭발하여, 방대한 면적의 농작물을 잿더미로 뒤덮어 버렸습니다. 1968년과 1971년의 폭발 시에 레온에서 선교 봉사를 하던 엘프리데 우르반은 그 상황이 어떠하였는지 이렇게 묘사합니다. “검은 모래와 재가 그 도시 위에 2주일 동안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지붕이 내려앉지 않도록 삽으로 재를 퍼내야만 했지요. 여러 세기 전에 구(舊) 레온 시가 그런 식으로 파묻혀 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려할 만도 했습니다. 고운 모래가 바람에 사방으로 날렸습니다. 우리의 구두, 옷, 침대, 음식, 심지어 책갈피에까지 들어갔더군요. 그렇지만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도 형제들은 계속 집회에 참석하고 야외 봉사에 참여했습니다.”

1998년 10월에는, 일부 전문가의 말로 “지난 두 세기 동안 서반구를 강타한 허리케인 중 가장 치사적인” 허리케인인 미치가 중앙 아메리카 전역에 들이닥쳤습니다. 「엔카르타 백과사전」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미치는 니카라과에서 3000명 내지 4000명의 사망자를 내고 광범위한 재산 피해를 일으켰다. 호우로 인해 카시타스 화산의 분화구에 호수가 형성되고, 그로 인해 80제곱 킬로미터를 뒤덮는 산사태가 일어나 몇 개의 마을을 쓸어 갔다.” 최근 수치에 의하면, 사망자 수는 2000명이 넘습니다.

피해를 입은 다른 나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니카라과의 여호와의 증인들도 대대적인 구호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특정 도시들에서는 증인 자원 봉사자들이 자전거 팀을 구성하여 차량 통행이 불가능한 지역으로 달려 들어가, 형제들의 안부를 묻고 식량을 비롯한 보급품을 전달하였습니다. 종종 그들은 그곳에 도착한 첫 구호 대원들이 되어, 방금 집을 잃은 형제들을 매우 기쁘게 하였습니다. 코스타리카와 파나마의 증인들은 신속히 72톤의 식품과 의류를 보냈습니다. 즉각적인 필요를 충족시킨 다음, 구호대는 몇 개월 동안 계속 활동하여 왕국회관을 보수하고 형제들을 위해 새집들을 건축하였습니다.

‘다른’ 니카라과

1987년 정부는 니카라과의 동부 지역을 형성하는 지역에 두 개의 자치 지구를 신설하였습니다. 전에는 셀라야로 알려진 그 지역을 지금은 북대서양 자치구(스페인어 약호로 RAAN) 및 남대서양 자치구(RAAS)라고 부릅니다. 이들 지역은 니카라과 국토 면적의 약 45퍼센트를 차지하지만, 인구는 약 10퍼센트만이 이곳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금광과 은광이 점점이 이어져 있는 이 두 지역은 험준한 중부 고원의 동쪽 경사면으로부터 뻗어 내려 모스키토 해안의 석호와 습지들에 이릅니다. 그 사이에 열대 우림, 소나무와 야자나무의 사바나들이 있는데다, 수많은 강과 천들이 카리브 해로 제각기 꾸불꾸불 흘러 들어가 변화무쌍한 경치가 전개됩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메스티소족은 물론 미스키토족과 같은 토착민들의 마을과 읍, 작은 도시들이 그 지역에 형성되어 왔습니다.

이 지역의 미스키토족·수모족·라마족·크레올족 주민들 대다수에게는 수도 마나과가 딴 세상처럼 보입니다. 실로 아직 동과 서를 잇는 포장도로조차 없습니다. 대서양 지역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미스키토어나 크레올어, 또는 다른 토착어들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주민 대부분이 프로테스탄트교, 일반적으로 모라비아교를 신봉하여, 가톨릭이 지배적인 태평양 지역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이처럼 거의 모든 면에서—지리적으로, 언어적으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동과 서는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좋은 소식이 이 ‘다른’ 니카라과에 과연 어떻게 전해질 것이었습니까?

왕국 소식이 먼 밭까지 전해지다

증인 선교인들은 일찍이 1946년에 동부 지역을 탐방하여 서적을 전하였습니다. 1950년대에는 순회 감독자 시드니 포터와 그의 아내 필리스가 해안 소도시들인 블루필즈와 푸에르토카베사스, 콘 제도 그리고 광산촌들인 로시타·보난사·시우나를 방문하였습니다. 시드니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광산촌들을 한 번 찾아가면, 우리는 각자 1000부가 넘는 잡지와 100부가 넘는 서책을 전했습니다. 모두가 책 읽기를 좋아하더군요.” 오래지 않아 이들 여러 광산촌에 격지 집단이 형성되었고, 1970년대 이후에는 이 집단들이 점차 회중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 자치구에 속한 다른 지역들은 여러 해 동안 거의 미개척 상태였습니다. 지리적 고립과 연결 도로의 부재, 연중 8개월이 넘는 열대성 폭우가 전파 활동에 주요 장애로 작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열심 있고 대담한 수많은 파이오니아들이 나타내 보인 바와 같이, 이러한 장애들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로 그들의 결의와 수고 덕분에, 지금은 두 자치구에 일곱 개의 회중과 아홉 개의 집단이 생겨 400명의 왕국 전도인이 있습니다.

이들 지역에 사는 증인들이 겪는 난관을 예시하기 위하여, 스물두 살인 한 형제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매주 세 번, 그는 가장 가까운 회중이 위치한 로시타 광산촌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약 여덟 시간 산길을 오르내립니다. 그는 그 회중에서 봉사의 종이자 정규 파이오니아로 일하고 있습니다. 자기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침례받은 증인인 그는, 집들이 대개 걸어서 두 시간 거리에 서로 떨어져 있는 이 산악 지역에서 보통 혼자서 봉사합니다. 한 집에 들어갔다가 시간이 늦어지면, 거기서 자고 다음날 아침 그 지역에서 증거를 다시 시작합니다. 밤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아버지가 사망하여, 이 젊은 형제는 장남으로서 가족을 돌볼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의 한 동생도 지금은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이 되어 봉사에 함께 다닙니다.

1994년 이래 지부에서는 이 광대한 지역에서 매년 특별 전파 활동을 조직해 왔습니다. 열심 있는 정규 파이오니아들 가운데서 선발된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건기에 4개월 동안 두 자치구의 격리된 읍과 마을들에서 활동합니다. 이 끈질긴 파이오니아들은 극심한 더위, 험난한 지형, 뱀, 들짐승, 식수 오염 그리고 전염병 감염 위험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철저히 증거하고 관심자들과 성서 연구를 사회하며, 기념식을 포함하여 그리스도인 집회를 여는 것입니다. 그들이 달성하는 결과는 지부에서 어느 곳에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임명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참고가 됩니다. 여러 해에 걸친 이 마련의 결과로 최북동 지역인 코코 강변의 와스팜 읍과 산카를로스 읍에 회중과 집단들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두 자치구에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메스티소족이 대거 유입되긴 하였지만, 토착민인 미스키토족이 아직도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인종 집단입니다.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이 몇 가지 미스키토어로 나와 있으며, 몇몇 파이오니아는 이 언어를 습득하였습니다. 그 결과 왕국 소식은 후대를 잘하고 성서를 사랑하는 이 주민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인상을 심어 왔습니다.

예를 들면, 북대서양 자치구의 리쿠스 강 가까이에 퀴위팅니라는 미스키토족 마을이 있는데, 2001년 파이오니아 특별 활동 기간에 그 마을의 46채의 집 가운데 여섯 채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해에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그 마을에서 40건의 성서 연구—한 집당 한 건—를 사회하였습니다! 만 한 달이 지나자 세 명의 연구생이 침례받을 의사를 표명하였는데, 그중 한 사람은 그 고장 모라비아 교회의 부목회자였습니다. 두 쌍의 부부가 전도인이 되고 싶어하였지만, 법적 혼인을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파이오니아들은 그들에게 결혼과 침례에 관한 성서의 표준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날짜가 되기 직전에, 이 두 부부가 결혼 증명서를 높이 들어 보이면서 그들에게 다가왔을 때 얼마나 기뻤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성과가 많던 그 특별 활동 이후로, 와스팜의 전도인들은 정기적으로 퀴위팅니까지 19킬로미터를 다니면서 새로운 관심자들이 영적으로 진보하도록 돕고 또 봉사의 직무를 위해 그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코코 강 연안의 몇몇 미스키토 마을에서 전파하던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사회 사업을 하는 큰 그룹의 미국인들을 만났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그들에게 상당수의 영어 잡지를 전하였습니다. 와와 강 가까이 있는 프란시아시르피 마을에서는 침례교인들이 조그마한 학교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 건축 팀의 책임자는 한 파이오니아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탄복합니다. 여러분은 여기서도 성서를 가르치고 있군요. 우리 종교에서도 이런 활동을 추진하기 바랍니다.”

절실히 필요한 경험 있는 형제들

제한받던 시절, 니카라과 증인들의 60퍼센트가량은 작은 가족 집단보다 크지 않은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봉사를 위한 출판물도 서너 가지밖에 안 되었습니다. 대회는 회중 수준으로 열렸고, 프로그램도 단축되었습니다. 가족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장성한 상당수의 형제들이 여행하는 감독자들을 대신하였지만, 그것도 시간제로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래된 많은 증인 가족들이 그 격동의 시기에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습니다. 따라서 활동이 법적으로 다시 등록되었을 때, 경험 있는 장로들과 파이오니아들이 긴급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장로들은 조직 절차에 관한 훈련을 받고자 갈망하는가 하면, 전도인들은 야외에서 서적을 전하는 방법과 같은 일에 대한 지침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이러한 필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통치체는 엘살바도르·멕시코·푸에르토리코에서 열린 봉사 훈련 학교 졸업생들을 니카라과에 임명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한 형제인 페드로 엔리케스는 엘살바도르 봉사 훈련 학교 제1기 졸업생으로서 1993년에 니카라과에서 순회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멕시코로부터 경험 있는 11명의 순회 감독자가 이 현대판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도움을 베풀었습니다.—사도 16:9.

지난 9년 동안 니카라과는 또한 58명의 길르앗 졸업생을 받았으며, 그들은 전국에 있는 여섯 군데의 선교인 집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들의 장성은 회중들의 건전한 영적 분위기에 기여해 왔으며, 그들은 많은 청소년들이 전 시간 봉사를 바람직한 목표로 바라보게 도왔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니카라과에 왔던 사람들은 이 나라를 전파자의 낙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지금도 사실입니다. 지부의 봉사부에서 일하는 한 형제는 이렇게 자평합니다. “니카라과는 아직도 전도인과 파이오니아들이 자기가 성서 연구를 몇 건이나 사회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나라입니다. 관심자가 그렇게 많으니까요.” 수긍할 만하게도,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돕는 데 열심이고 그래서 비용을 계산해 본 많은 사람들이 니카라과에서 봉사하는 일에 관해 문의해 왔습니다. 실로 2002년 4월까지 19개국으로부터 289명의 파이오니아들이 이 나라로 이주해 와서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이 모든 추수 일꾼들에 대하여 이 나라 증인들은 참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마태 9:37, 38.

전국적인 모임으로 감격하다

제한을 받기 전 마지막 전국 대회는 1978년에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 1999년 12월에 마나과에서 열릴 지역 대회 초대장을 받고서 얼마나 감격하였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가족 성원들은 모두가 참석할 수 있도록 교통비를 비롯한 경비를 저축하기 시작하도록 격려받았습니다. 이 기금을 확보하는 일에 일부 증인들은 상당한 기지를 발휘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니카라과에서는 돼지고기가 일상 식품이기 때문에, 상당수의 형제들은 돼지를 사다가 키워 나중에 팖으로써 살아 있는 ‘돼지 저금통’을 구하였습니다. 현명하게 계획하고 결정한 결과,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2만 8356명의 증인들과 관심자들이 12월 24일에 시작하는 “하느님의 예언의 말씀” 지역 대회를 위하여 마나과 국립 야구 경기장에 올 수 있었습니다.

대회 참가자들은 그 대회 토요일에 784명이 물에 잠기는, 니카라과 활동 역사상 가장 큰 침례 행사를 보고서 참으로 감격하였습니다! 이전에 이 나라에서 봉사하던 선교인들이 참석하여, 격려적인 경험담을 청중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대회는 언어나 종족의 배경에 상관없이 모두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영적 진리의 한 가지 “순결한 언어”에서 진보할 것을 그 어느 때보다도 한층 더 결심하도록 감동시킴으로 강력하게 연합시키는 효과를 발휘하였습니다.—스바냐 3:9.

무수혈 치료를 받을 권리를 옹호하다

니카라과에는 세 개의 병원 교섭 위원회가 있으며, 그들의 활동은 지부에 있는 병원 안내 봉사부의 조정을 받습니다. 수혈 문제가 발생할 때 증인 환자들을 돕는 일 외에도, 이 위원회는 의료계 종사자들과 학생들에게 여호와의 증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여러 가지 수혈 대체 요법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로, 병원 교섭 위원들은 의사와 의대생들에게 강의와 함께 시청각 설명회를 제공하였는데, 그들 가운데 일부는 자청하여 매우 긍정적인 논평을 하였습니다. 사실상, 점점 더 많은 외과 의사와 마취 전문 의사들이 여호와의 증인에게 협조하여 수혈 문제에서 성서에 근거한 증인의 입장을 존중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해 왔습니다.

앞으로 전진할 것을 결의하다

니카라과의 신권 역사는 자연재해든 인재이든 그 어느 것도 좋은 소식의 전진을 저지할 수 없다는 풍부한 증언을 제시합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참으로 바로 “그 작은 자가 천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60:22) 1943년에 제출된 이 나라 최초의 봉사 보고서에는 단지 세 전도인의 활동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40년 후에는 4477명의 전도인 신기록을 보였습니다. 선교인들이 돌아오도록 허용되던 1990년에는 그 수가 7894명으로 상승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축복은 90년대에도 계속되어, 그 10년간 왕국 선포자 수는 거의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자연히, 이러한 증가로 인해 더 많은 왕국회관이 긴급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지부에서는 종합 건축 프로그램을 지휘해 오고 있는데, 여기에는 약 120채의 왕국회관의 건립과 함께, 마나과 남쪽 11킬로미터 지점인 티쿠안테페에 새 지부를 건립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이 지부는 2003년 4월에 완공될 것입니다.

근년에 니카라과에서는 경제가 상당히 호조를 보여, 특히 마나과는 고용 기회, 교육, 연예 분야에서 급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건축 붐이 이 도시에서 지속적인 성장 추세를 보이면서, 지금은 현대적인 레스토랑·주유소·쇼핑센터들이 즐비합니다. 쇼핑센터에는 소비재를 비롯하여 서구 사회의 눈길을 끄는 허다한 상품들이 가득합니다.

그러한 환경은 여러 가지 유혹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기합니다. 진리 안에 오래된 한 장로는 이렇게 소감을 피력합니다. “변화가 빨리 일어나고 있어요. 그건 마치 콩밥밖에 먹어 본 적이 없는 아이 앞에 쟁반 수북이 과자를 갖다 놓고서 ‘이거 조심해야 돼!’ 하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 여호와를 섬기는 방법은 알고 있지만, 지금은 적이 교활합니다. 이러한 상황이 대처하기 더 힘들지요.”

그렇기는 하지만, 여호와의 백성이 그 제한받던 시기에 나타낸 충성과 열심과 용기는 계속 훌륭한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그 시절에 자라난 많은 자녀들이 지금은 장로와 파이오니아, 베델 자원 봉사자들로 일하고 있습니다. 니카라과에는 지금 열일곱 개의 순회구에 295개의 회중과 함께 31개의 격지 집단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2002년 8월 보고는 1만 6676명이라는 전도인 신기록을 보여 주는데, 같은 해 기념식 참석자 수는 6만 6751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는 바는 이 다채로운 나라에서 한층 더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선의의 해”가 끝나기 전에 그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61:2) 그렇습니다. 하늘의 우리의 아버지께서 “물이 바다를 덮고 있듯이” 온 땅이 “여호와에 관한 지식으로 가득 찰” 때까지 우리의 영적 낙원의 경계를 계속 확장하기를 빕니다.—이사야 11:9.

[72면 네모]

니카라과의 개요

국토: 니카라과는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이다. 이 나라는 중앙의 산맥에 의하여 양분된다. 서부는 담수호 지역이며, 덜 비옥한 동부 지역은 대부분이 강우림과 평야이다. 니카라과에는 약 40개의 화산이 있는데, 일부는 활화산이다.

주민: 대부분은 스페인어를 하는 메스티소 즉 아메리카 인디언과 유럽인 조상의 혼혈이다. 소수의 모님보족과 서브티아바족 인디오가 서해안에 살고 있고, 동부에는 미스키토족·수모족·라마족 인디오와 함께 크리올족 및 아프리카계 카리브족이 포함된다. 주요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이다.

언어: 스페인어가 공식 언어이며, 여러 토착어도 사용된다.

생활: 농업이 니카라과 경제의 근간이다.

식품: 국내에서 소비되는 주요 농작물은 쌀·옥수수·콩·사탕수수·플랜틴 바나나·카사바 및 여러 가지 과일이며, 수출품으로는 커피·설탕·바나나·해산물·소고기 등이 있다.

기후: 니카라과는 열대성 기후로, 강수량은 지역에 따라서 1900밀리미터 내지 3800밀리미터이며, 기온은 해안 지역이 평균 섭씨 26도 전후인 반면, 고원 지방은 약간 낮다.

[99-102면 네모와 삽화]

비밀경찰과의 일전(一戰)

우베르 로페스와 텔마 로페스

약력: 성장한 세 자녀의 부모. 우베르는 지방 회중에서 장로로 일하고 있음.

혁명 정부 아래서, 봉사의 종과 장로들은 종종 국가 보안국에 체포되어 하루에서 수주일까지 감금 상태에서 심문을 당하였다. 성서에 근거한 중립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은 인민을 선동하여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정식으로 고발을 당한 적은 없었다. 심문관들은 또한 우리의 ‘지도자들’과 ‘인도자들’의 명단을 원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치른 많은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 우베르 로페스로서, 지금은 장로로서 성장한 세 자녀의 아버지이다. 1985년 12월, 로페스 형제는 마나과 남동쪽 약 40킬로미터 거리의 시골 지역 라레포르마에 있는 그의 집에서 체포당하였다. 그의 아내 텔마는 그날의 고통을 이렇게 토로한다.

“오후 네 시에 두 대의 지프차가 우리 집 앞에 서는데, 한 대에서는 국가 보안국 요원들이 내리고, 또 한 대에서는 군인들이 내려 우리 집을 에워싸더군요. 남편이 집에 없다고 요원들에게 이야기하니까, 그들은 집을 수색하겠다고 하면서 나와 아이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열 살이던 우리 큰아들 엘메르가 집 안에 있었어요. 엘메르는 그들이 책장에서 세속 서적, 신권 서적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꺼내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책들 사이에는 남편이 숨겨 둔 회중 기록이 있었지요. 침입자들이 책들을 꺼내어 지프에 싣자, 엘메르가 ‘아저씨, 내 교과서도 가져가는 거예요?’ 하고 소리치더군요. 한 군인이 퉁명스럽게 ‘좋아, 그건 도로 가져가’ 하고 대답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우리 아들은 자기 책과 함께 회중 기록도 빼낼 수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데, 군인들이 다시 왔습니다. 우리에게 총을 겨누고는 아이들이 보고서 울고 있는 앞에서 남편을 끌고갔습니다. 군인들은 남편을 왜, 어디로 끌고 가는지 알려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로페스 형제는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마사야 감옥으로 끌려가 각종 범죄자들이 있는 감방에 갇혔습니다. 나는 즉시 여호와의 증인임을 밝히고서 이 남자들에게 몇 시간 동안 증거를 했습니다. 자정에 한 사람이 내게 총부리를 겨누고는 감방에서 나오라고 지시하더니, 바깥 어둠 속에 대기하고 있던 지프에 올라타라고 하였습니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으라는 말을 들었지만, 타고 보니 지프 안에는 다른 네 사람이 고개를 숙인 채 있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날 저녁에 체포된 마사야 지역의 장로와 봉사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날 밤 두 번이나 그들은 우리를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처음에는 커피 밭에서, 두 번째는 한 도회지에서 우리를 건물 벽에 한 줄로 세워 놓더군요. 두 경우 다 그들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우리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에는 우리를 히노테페에 있는 감옥으로 끌고 가서 각각 다른 감방에 3일 동안 가두었습니다.

우리는 한 번에 두세 시간 이상은 잠을 자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감방들은 어둡게 만들어 놓아서, 낮인지 밤인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반복해서 심문실로 불려 들어가, 전파 활동과 집회 그리고 ‘지도자들’의 이름을 추궁받았습니다. 나를 취조한 한 심문관은 우리 부모를 체포해서 정보를 강제로 알아내겠다고 협박하기까지 하더군요. 내가 감방에 있을 때, 실제로 우리 부모와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까지 했습니다. 그렇지만 내게 들려온 것은 나를 속여서 우리 가족이 끌려와 심문당하는 줄로 알게 만들려고 녹음한 것이었습니다.

넷째 날인 목요일에, 나는 석방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내 종교를 전파하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서약하는 진술서에 서명을 해야 했습니다. 나는 또 동료 증인들은 이미 서명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건 물론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서명을 거부하면, 다시 제자리로 보내 감옥에서 썩게 될 것이오.’ 심문관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면 나를 석방하지 마시고, 이곳에 그냥 두십시오.’ 내가 대답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 거지?’

‘제가 여호와의 증인이기 때문인데, 그 말은 제가 전파한다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우리 다섯 사람은 같은 날 석방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우리가 평정을 유지하여 형제들을 배반하지 않도록 강화시켜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건이 있고 나서도, 우리는 끊임없는 감시 하에 있었습니다.”

[105, 106면 네모와 삽화]

전투 현장에 강제로 투입되다

조반니 가이탄

침례: 1987년

약력: 침례받기 불과 몇 주 전에 체포되어, 28개월간 BLI에 강제 배속됨. 8년 이상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 중.

일부 젊은 형제들은 울창한 산악 정글에서 전투를 벌인 비정규 전투단(스페인어 약칭으로 BLI)에 강제로 배속되었다.

이러한 젊은이들 가운데 조반니 가이탄이 있었다. 아직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이면서, 조반니는 28개월간을 그 부대에서 보냈다. 그는 침례받기 불과 이삼 주 전에 체포당하였다. 조반니는 이렇게 말한다. “시련은 첫 전투가 있고 나서 시작되었습니다. 한 장교가 나더러 사망한 군인에게서 벗긴 피 묻은 군복을 빨라고 명령하더군요. 나는 이것이 그리스도인 중립의 타협에 이르는 연쇄 고리의 첫 고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거부를 했습니다. 그 장교는 노발대발하며 내 뺨을 내리쳤습니다. 그는 권총을 꺼내 내 머리에다 짓누르고는 방아쇠를 당겼는데, 총은 발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총으로 내 얼굴을 내리치면서, 다시 한 번 불복하면 사살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 다음 18개월이 넘는 기간, 그 사람은 나를 매우 힘든 생활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러 번이나 내 양손을 하루 종일 묵어 두는 바람에 나는 식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로 종종 총과 수류탄을 강제로 내 등에 매단 채 부대에 앞장서서 정글 속을 뚫고 걸어가게 만들었습니다. 적의 총받이로 삼은 것입니다! 그는 나를 구타하면서 사살하겠다고 위협했는데, 특히 전투가 한창이어서 다른 병사들이 내 주위에서 죽어가는 데 내가 총을 들기를 거부할 때 그러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았고 두려움을 나타내지도 않았는데, 여호와께서 내게 용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1985년 3월 어느 날 아침, 어떤 형제들과 나는 산악 지대에서 내려와, 우리 가족과의 면회가 허용된 지역으로 갔습니다. 그곳은 마나과 북동쪽 약 30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물루쿠쿠 근처였습니다. 가족과 함께 식사하면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바로 그 장교가 혼자서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음식을 한 접시 갖다 주었습니다. 그는 먹고 나더니 나를 오라고 부르더군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여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그는 자기가 나를 가혹하게 다룬 데 대하여 사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내 신앙에 관해 묻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이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직후 군 트럭 사고로 사망하였던 것입니다.”

[116-118면 네모와 삽화]

두 전국 위원회 위원의 회고담

제한 기간 동안 니카라과의 활동은 코스타리카 지부의 관할 하에 있게 되었다. 니카라과에는 전국 위원회가 임명되어 이 나라를 감독하였다. 그 위원회에서 일한 두 형제 알폰소 호야와 아구스틴 세퀘이라가 그 시험의 기간을 회고해 본다.

알폰소 호야: “나는 마나과에서 장로로 일하고 있다가 1985년에 전국 위원회에서 일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내 직업은 한 유명 은행의 가장 큰 지점의 책임자였습니다. 은행 업무에 관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여호와의 조직의 금융 자산을 최대한 보호하는 데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한때 니카라과의 통화는 급속히 평가 절하되어 경제가 휘청거렸습니다. 보통 구두 한 켤레가 250코르도바이던 것이 금세 200만 코르도바에 팔렸던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 시기에 이 나라는 연료 부족까지 겪게 되어, 형제들이 서적을 멀리 떨어진 회중들로 배달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형제들에게 필요한 연료를 지원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후원해 주셨습니다.

우리 가족은 내가 전국 위원회 위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35세라서 군 예비역에 편입되어 있었습니다. 네 번에 걸쳐 군은 나를 징집하려고 했는데, 한번은 우리 집에까지 와서 끌어가려 했습니다. 그 사건이 분명히 기억나는데, 아내와 세 어린 자녀가 내 곁에 있는 상황에서 내게 향한 소총의 총대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는 은행에서 일자리를 잃은 적은 없었습니다.”

아구스틴 세퀘이라: “내가 보아코의 한 작은 읍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던 1982년에 선교인들이 추방됐습니다. 그 후 나는 전국 위원회에 임명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우리 회중의 형제들은 이 임명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사무 일을 보고 난 뒤 회중과 함께 야외 봉사에 나가곤 했습니다.

전국 위원회 위원들은 모두가 책임을 수행할 때 익명을 사용했고, 우리는 각자의 일에 대한 세부 사항을 서로에게 알리지 않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체포 시에 보호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무실이 없었고, 이 집 저 집에서 일을 했습니다. 서류 가방은 호기심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때때로 서류를 자루 속에 넣고 그 위에 양파를 얹어 그 줄기가 보이게 했습니다. 몇 번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체포된 적은 없었습니다.

코스타리카 지부 위원회 위원들이 몇 차례 우리를 방문하여 격려와 지침을 주었습니다. 내게 가장 기억에 남고 격려적이었던 일은 1987년 1월의 코스타리카 지부 봉헌식이었는데, 그 행사 때 전국 위원회의 한 위원과 내가 통치체 성원 두 사람을 만나 보는 기쁨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이 보고가 출판되기 얼마 전에, 세퀘이라 형제는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86세였으며, 22년 이상 전 시간 봉사를 해 오고 있었다. 그는 니카라과 지부 위원회의 한 성원이었다.

[122, 123면 네모와 삽화]

우리는 교도소 내에서 참 자유를 발견하였다

1979년에서 1989년 사이, 카르셀 모델로는 전(前) 정부 관련 군사 및 정치범 재소자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왕국 소식은 이 담벼락을 뚫고 들어가 마음이 정직한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채워져, 그들 속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인간성을 배양하였다. (골로새 3:5-10) 여기 전 수감자 몇 사람이 소감을 피력한다.

호세 데 라 크루스 로페스: “수감되던 당시 나는 비참한 상태에 있었고 희망도 미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 있던 동료 수감자들을 만났습니다. 나는 성서에 대한 그들의 설명과 훌륭한 행실, 두 가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결국 나는 영적 만족을 얻게 되었고 희망이 생겼습니다. 내가 진정한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인간 정부를 위해 내 생명을 바치려 해 왔다면, 나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주신 분께는 얼마나 더 충성을 바쳐야 할 것인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석방된 뒤에, 아내와 딸들 그리고 다른 세 가족 성원도 진리를 배웠습니다. 참으로, 여호와께서 나를 위해 해 오신 일에 대해 나는 이루 다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로페스 형제는 마나과에서 장로로 일하고 있다.

오마르 안토니오 에스피노사: “나는 열여덟 살 때 30년 형을 선고받고 10년을 살다가 사면을 받았습니다. 자유를 잃었던 일은 유감스럽지만, 바로 그 교도소에서 나는 여호와와 참 자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방종한 생활을 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방향 전환을 했습니다. 내 잔이 영적인 의미로 가득 차게 되어 여호와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내 결의는 여호수아의 이러한 결의와 똑같습니다. ‘나와 내 집안은 여호와를 섬길 것입니다.’—여호수아 24:15.”

에스피노사 형제는 리바스 시에서 장로로 일하고 있다.

아나스타시오 라몬 멘도사: “수감된 지 몇 개월 안 되어, 나는 스스로 성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여호와의 증인인 동료 재소자와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진리를 찾았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침례를 미룬 것은 나를 체포한 자들에 대한 증오심이 끓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여호와의 승인을 받지 못하는 정신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 나의 해로운 태도를 극복하도록 도와 달라고 열렬히 기도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내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이 아니라 악한 태도와 행동을 미워하도록 참을성 있게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나는 1982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1989년에 석방된 이래,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던 이전 군인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과 성서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중 몇 사람은 지금 내 영적 형제들입니다.”

멘도사 형제는 마나과에서 봉사의 종으로 일하고 있다.

[141-145면 네모와 삽화]

목회자의 기도가 응답되다

테오도시오 구르디안

침례: 1986년

약력: 구르디안 형제는 지금 왐블란 회중에서 장로로 일함.

산디니스타와 콘트라 간의 전투가 한창이던 1986년, 산후안델리오코코 읍의 작은 회중에서 두 명의 전도인이 북쪽으로 온두라스 국경 가까이 불모에 가까운 구릉 지대에 자리 잡은 중부 고원의 읍 왐블란까지 100킬로미터를 여행하였다. 작은 집단의 증인들이 왐블란에 살았었는데 전투 때문에 2년 전에 그곳을 떠나고 없었다. 이 두 형제는 테오도시오 구르디안이라는 남자를 찾아가고 있었다. 구르디안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왐블란에 있는 복음 교회에서 목회자로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마나과의 모든 프로테스탄트 종교들의 목회자들 조직인 ‘니카라과 전국 목회자 연합’(스페인어 약호로 ANPEN)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산디니스타가 정권을 잡은 직후, 이 목회자 연합은 목회자와 교구민들이 산디니스타 방어 위원회를 비롯하여 군대를 포함하는 제반 조직에 참여할 것을 승인하는 합의서에 서명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나는 괴로웠습니다. ‘하느님의 교역자가 어떻게 무기를 들수 있단 말인가?’ 하고 자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그 당시 왐블란에 살고 있던 한 증인 가족으로부터 「참다운 평화와 안전—그 근원은 무엇인가?」 책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 책을 밤이 맞도록 읽었습니다.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도 정기적으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이것은 진짜 영적 양식이었습니다. 실제로 나는 그 내용을 내 설교에 사용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교회 본부에 알려지자, 그들은 나를 마나과의 중앙 사무실로 호출하였습니다.

내가 목회자로서 지식이 부족해서 그릇 인도되고 있다고 판단한 본부 요원들은 내가 마나과에서 공부하도록 8개월짜리 장학금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증인 출판물에서 배운 것들은 성서에 확실한 근거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본부 요원들에게 ‘왜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호별로 전파하지 않습니까? 왜 우리는 사도들도 요구하지 않았는데 십일조를 거둡니까?’ 하는 등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 질문에 대해 만족스런 대답을 듣지 못하였고, 곧 그들은 나를 증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더군요.

이런 일을 겪고 나서 나는 교회와의 연합을 끊고, 마나과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1984년이었고, 증인들은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2주일 동안 찾다가 실패하고는, 왐블란으로 돌아와 작은 옥수수와 콩밭을 경작해서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왐블란에서 살던 증인들은 그 지역을 떠나기 전에 많은 서적을 배부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방문한 집들에서 그 출판물들이 눈에 띌 때마다 ‘이 책을 읽으시는 중입니까? 내가 사 가도 되겠습니까?’ 하고 묻곤 하였습니다. 대개는 그 책을 내게 주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자 내게 작은 신권 도서 서가가 차려졌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증인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없었는데, 왐블란 주민들 역시 나를 증인으로 부르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얼마 안 있어, 국가 보안국 요원들이 내 활동에 대해 심문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콘트라 반군을 지지하는 자들의 이름과 같은 정보를 입수해 오기만 하면, 인근 마을들에서 전파를 해도 좋다고까지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러분이 요청하는 대로 하게 되면, 내 하느님을 부인하는 것이 되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전적인 정성을 요구하십니다.’

또 한 번은 한 장교가 산디니스타 정권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문서에 내가 서명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나는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권총을 꺼내 들고는, ‘우리가 혁명에 이바지하지 않는 기생충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나?’ 하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내게 총을 쏘지는 않고 재고할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날 밤 나는 아내와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아내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그 서류에 서명을 한다 해도 나는 어쨌든 죽게 될 거요. 그러나 서명하지 않고 죽게 된다면, 여호와께서 부활 시에 나를 기억해 주실 거요. 아이들을 돌보면서 여호와를 신뢰해요. 우릴 도우실 거요.’ 다음날 아침 나는 그 장교에게 ‘내가 여기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여하튼 나는 서명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축하하오. 나는 당신이 그런 식으로 대답할 줄 알고 있었소. 난 여호와의 증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있소.’ 그러고는 나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 후 나는 좀 더 공개적으로 전파하면서, 여러 먼 동네들까지 다니며 관심자들에게 함께 모이자고 권했습니다. 처음 반응을 보인 사람들 가운데 한 노부부가 있었고, 다른 가족들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30명이 정기적으로 모였습니다. 나는 오래된 「파수대」를 사용해서 그 자료를 강연으로 제공했습니다. 잡지가 한 부밖에 없었으니까요. 나는 몇몇 군인들과도 성서를 연구했는데, 그중 한 사람은 나중에 증인이 되었습니다.

1985년에, 한 지나가던 군인이 내게 왐블란에서 남쪽으로 11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히노테가 읍에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이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나는 왐블란에 있는 한 성서 연구생에게 함께 거기에 가 보자고 했습니다. 히노테가의 시장에서 수소문한 끝에 드디어 우리는 한 증인 가족의 집을 찾아냈습니다. 부인이 문간에 나왔습니다. 우리도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신분을 밝히자, 부인은 기념식 때문에 왔느냐고 묻더군요. ‘기념식이 뭡니까?’ 우리가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부인은 자기 남편을 부르더군요. 그 남편은 우리가 성실하다는 확신이 서자 안으로 들어오라고 권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기념식은 전날 밤에 거행되었지만, 우리는 그 집에서 3일 동안을 묵으면서 생전 처음 회중 서적 연구에도 참석했습니다.

왐블란으로 돌아온 뒤, 나는 계속 전파하고 혼자서 집회를 사회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1986년 기념식 전날, 서두에 언급한 두 형제가 도착한 것입니다. 우리 작은 성서 연구생 집단은 시골 마을들에 있는 모든 관심자들에게 신속히 소식을 전달하여, 우리의 첫 기념식에 85명이 참석했습니다.

나는 그 해 10월, 내 첫 성서 연구생들과 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앞서 언급한 노부부로서 그때는 이미 80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현재 왐블란 회중은 전도인 74명과 정규 파이오니아 3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나는 장로 중 한 사람으로 일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2001년에 우리는 왐블란 외에도 세 개의 마을에서 기념식을 거행하였는데, 총 참석자 수는 452명이었습니다.”

[80, 81면 도표와 삽화]

니카라과—연대표

1925

1934년: 한 파이오니아 자매가 방문하여 이 나라에 서적을 전하다.

1937년: 소모사 정권이 집권하다.

1945년: 첫 길르앗 졸업생이 도착하다.

1946년: N. H. 노어와 F. W. 프랜즈가 마나과를 방문하다. 지부가 설립되다.

1950

1952년: 가톨릭 교직자들의 촉구로 금지령이 내려지다.

1953년: 대법원이 금지령을 해제하다.

1972년: 지진으로 마나과가 황폐되다.

1974년: 새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이 완공되다.

1975

1979년: 산디니스타가 소모사 정권에 승리를 거두다. 혁명 중 사망자는 5만 명에 육박.

1981년: 여호와의 증인의 법적 신분이 보류되다.

1990년: 여호와의 증인이 법적 승인을 다시 얻다.

1994년: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 100명을 임명하다. 그와 유사한 특별 활동을 계속 벌이다.

1998년: 허리케인 미치가 중앙아메리카를 강타하여, 니카라과에서 4000명이 사망하다.

2000

2002년: 1만 6676명의 전도인이 니카라과에서 활동하다.

[그래프]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총 전도인 수

총 파이오니아 수

20,000

15,000

10,000

5,000

1950 1975 2000

[73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온두라스

니카라과

마타갈파

레온

마나과

마사야

히노테페

그라나다

니카라과 호

오메테페 섬

리바스 지협

산후안 강

블루필즈

코스타리카

[66면 전면 삽화]

[70면 삽화]

위: 프랜시스 월리스(왼쪽)와 윌리엄 월리스 형제 및 여동생 제인

[70면 삽화]

아래 (뒷줄, 위에서 아래로): 윌버트 가이절먼, 해럴드 덩컨, 프랜시스 월리스; (앞줄, 위에서 아래로): 블랜체 케이시, 유진 콜, 앤 가이절먼, 제인 월리스, 에블린 덩컨

[71면 삽화]

위: 아델리나 카스트로와 아르놀도 카스트로 부부

오른쪽: 도라 산체스와 에바리스토 산체스 부부

[76면 삽화]

도리스 니호프

[76면 삽화]

시드니 포터와 필리스 포터

[79면 삽화]

아구스틴 세케이라는 마타갈파 최초의 전도인이었다

[82면 삽화]

마리아 엘사

[82면 삽화]

힐베르토 솔리스와 아내 마리아 세실리아

[87면 삽화]

1972년의 지진으로 마나과는 황폐되었다

[90면 삽화]

앤드루 리드와 미리엄 리드

[90면 삽화]

루비 블록과 케빈 블록

[92면 삽화]

농장이 “천국 충성” 지역 대회를 위해 사용되었다

[95면 삽화]

1982년에 니카라과에서 추방당한 선교인들

[109면 삽화]

금지령 하에서 서적을 인쇄한 형제들, 수탉, 암탉, 병아리 등사기들과 함께

[110면 삽화]

엘다 산체스는 두려움 없이 원지를 준비하였다

[115면 삽화]

이 자매들은 형제들이 인쇄하는 동안 식사를 준비하고 망을 보았다

[126면 삽화]

앞줄: 교도소 내에서 진리를 배운 형제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J. 로페스, A. 멘도사, O. 에스피노사; 뒷줄: 카를로스 아얄라와 훌리오 누녜스는 교도소를 방문하여 형제들을 영적으로 도운 장로들이다

[133면 삽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제한이 해제된 뒤, 이 집이 지부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134면 삽화]

허리케인 미치가 지나간 뒤, 자원 봉사자들은 자전거를 이용하여 식량과 보급품을 전달하였다. 왕국회관과 가정집들을 재건하는 일도 하였다

[139면 삽화]

RAAN의 마을인 바나크루스에 난관에도 불구하고 좋은 소식이 전파되고 있다

[147면 삽화]

1999년 “하느님의 예언의 말씀” 지역 대회. 1978년 이래 최초의 전국적인 대회로 2만 8356명이 참석하였다

[147면 삽화]

대회 참석자들은 니카라과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인 784명이 침례를 받는 것을 보았다

[148면 삽화]

2002년 초의 지부 위원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언 헌터, 아구스틴 세케이라, 루이스 안토니오 곤살레스, 로타르 미항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