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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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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야자나무, 울창한 열대성 수목, 백사장, 아름다운 바다—이 모든 것이 필리핀이라는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색입니다. 약 7100개의 섬으로 된 이 군도는 동양의 진주로 불려 왔습니다. 이러한 매력에 더하여, 감정이 풍부해서 춤과 노래를 즐기는 쾌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섬나라를 방문하게 된다면, 우호적이고 호감이 가는 이곳 주민들이 베푸는 놀라운 후대를 아마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의 뇌리에 필리핀은 전혀 다른 모습—재해의 현장—으로 떠오릅니다. 어떤 사람은 피나투보 산의 분화로 진흙 사태가 여러 시가지를 휩쓸고 지나간 일이 생각나거나, 평화 시로는 세계 최악의 해상 참사로 연락선 도냐 파스가 유조선과 충돌하여 수천 명의 사망자를 낸 일을 기억할지도 모릅니다. 사실상, 벨기에 재해 확산 연구 센터는 필리핀을 세계 제1의 재해 발생 가능 국가로 꼽았습니다. 태풍·홍수·지진·화산 폭발이 잦습니다. 그런데다 많은 주민들의 상대적으로 빈곤한 경제 상태까지 겹치면서, 아름답지만 고난을 겪는 나라라는 인상이 우리에게 심어져 있습니다.

필리핀 전역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이 나라에 살고 있는 7800만 명의 주민에게 성서 진리를 바쁘게 알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연재해의 위협은 차치하고라도, 수많은 작은 섬들에 그리고 산악과 정글의 오지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야 하는 도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동은 수행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은 여러 가지 상황을 겪으면서도 뛰어난 대처 능력을 나타내 왔습니다. 그 결과, 제자를 삼는 활동에서 여호와의 축복을 경험해 왔습니다.

어떤 면에서 필리핀의 증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참 숭배의 회복을 열망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기쁨이 여러분의 성채”라는 느헤미야의 말에 격려를 받았습니다. (느헤미야 8:10)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전에 직면해서도 여호와의 숭배를 증진시키는 활동을 기쁘게 진척시켰습니다. 느헤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필리핀 전역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여호와의 기쁨을 그들의 성채로 삼고 있습니다.

진리의 빛이 처음 비치다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로마 가톨릭이 우세한 나라라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필리핀 사람들에게는 원래 토착 종교들이 있었지만, 300년이 넘는 스페인의 지배는 주민들에게 가톨릭교를 심어 놓았습니다. 미국이 관할하던 반세기 동안 사람들은 다른 형태의 종교도 접해 보았지만, 지배적인 신앙은 여전히 가톨릭교입니다. 국민의 약 80퍼센트가 이 종교를 신봉합니다.

1912년에 저명한 성경 연구생—여호와의 증인의 이전 명칭—인 찰스 T. 러셀이 전 세계 순회 강연 여행 중 마닐라에 체류하였습니다. 1월 14일에 그는 마닐라 그랜드 오페라 하우스에서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습니다. 참석한 사람들에게 서적이 배부되었습니다.

성서 진리의 씨가 더 뿌려진 것은 1920년대 초로서, 캐나다의 윌리엄 티니 형제가 성경 연구생의 다음번 대표자로 왔을 때였습니다. 그는 성서 연구반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캐나다로 돌아가야 했지만, 관심을 갖게 된 필리핀 사람들은 성서 연구반을 계속하였습니다. 우편으로 오는 서적의 도움으로, 사람들의 마음에는 진리가 계속 살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193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933년에는 진리의 소식이 필리핀에서 라디오 방송국 KZRM을 통해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같은 해, 조지프 두스 산투스가 하와이에서 세계 전파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처음 머무른 곳이 필리핀이었는데, 그는 여행을 더 이상 계속하지 못하였습니다. 두스 산투스 형제는 이곳에서 왕국 전파 활동을 인도하고 지부 사무실을 개설하는 책임을 맡게 된 것입니다. 사무실은 1934년 6월 1일에 운영을 시작하였습니다. 두스 산투스 형제는 여호와를 섬기고자 하는 이 나라의 몇몇 사람들과 함께 분주하게 전파하고 서적을 분배하였습니다. 반대가 있었는데도, 1938년에는 이 나라 전도인이 121명이었고, 그중 47명은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인들은 영어를 보급하고 있었지만, 형제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고유어로 성서를 더 잘 배운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도전이 된 이유는 필리핀 전역에서 90개에 가까운 언어와 방언이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서적을 몇 가지 주요 언어로 번역하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39년에 지부 사무실은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서 강연을] 타갈로그어로 녹음하고 있고, 이것으로 주의 영광을 위하여 음향 기기와 축음기를 더 사용하게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들은 또 「부」(Riches) 책을 타갈로그어로 번역하는 일에 대해서도 보고하였습니다. 2년 뒤에는 필리핀의 네 가지 다른 주요 언어로 소책자들을 번역하는 일이 완료됨으로써, 이 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왕국 소식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 시기에 진리의 소식에 반응을 나타낸 사람 가운데 학교 교사인 플로렌티노 킨토스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1912년에 마닐라에서 러셀 형제의 강연에 직접 참석했던 사람과 이야기하던 중에 여호와의 백성의 활동에 관하여 다소 알게 되었습니다. 1936년에 플로렌티노는 한 여호와의 증인으로부터 성서를 설명하는 밝은 색깔의 책 열여섯 권을 입수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플로렌티노는 교사 일에 바쁜 나머지 얼마 동안은 그 무지개 색깔의 책들을 비치해 두기만 하고 읽어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전쟁이 터지고 일본군이 침공하는 바람에, 여러 가지 정상 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이제 시간이 생긴 플로렌티노는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짧은 시간 내에 그는 「부」, 「적」(Enemies), 「구원」(Salvation) 책들을 독파하였습니다. 책을 읽는 일은 일본군에게서 도망할 필요가 생겨 중단되었지만, 진리의 씨는 이미 그의 마음에 심어져 있었습니다.

세계 대전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성장하다

제2차 세계 대전은 필리핀 군도 전역에 있는 여호와의 종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기하였습니다. 전쟁이 시작될 때, 필리핀에는 373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수는 적어도 순결한 숭배를 증진시키고자 노력하면서 두드러진 열심과 융통성을 발휘하였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마닐라에서 시 외곽의 작은 소도시들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전파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전쟁 때문에 성서 출판물을 국내로 들여오는 것은 불가능하였지만, 형제들은 전쟁이 나기 전에 개인 집들에 비축해 두었던 출판물을 배부할 수 있었습니다. 재고가 바닥나자, 그들은 사람들에게 책을 빌려 주는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직업을 그만두고 좋은 소식의 전 시간 선포자가 된 살바도르 리와그는 전쟁이 발발할 당시 민다나오 섬에 있었습니다. 그는 몇몇 형제와 함께 산악 정글 속으로 대피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신권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극도의 조심성을 발휘해서 돌아다녀야 하였는데, 그것은 일본군에 징집당해 그들의 주둔군에서 복무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반(反) 일본 게릴라들은 형제들을 종종 일본 스파이로 의심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일본군 점령 기간에도 작은 대회들을 개최할 기회들이 있었습니다. 순회 대회가 마닐라에서 개최되어, 많은 사람이 참석하였습니다. 링가옌에서도 대회가 열렸습니다. 주민들은 낯선 사람들이 트럭으로 오는 것을 보고 놀랐지만, 아무도 방해하지는 않아서 대회는 성공적으로 열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모든 활동을 축복하셔서, 증인들의 수는 급증하였습니다. 전쟁이 시작될 때 373명이던 여호와의 찬양자가 만 4년 뒤에는 2000명을 넘어섰습니다.

두스 산투스 형제가 필리핀에서 왕국 전파 활동을 조직하는 일을 인도하도록 임명받던 일을 상기해 보십시오. 1942년 1월에, 그는 마닐라의 한 일본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열심의 영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좋은 소식을 수용소 안에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수용소 생활은 고되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갔습니다. 두스 산투스 형제는 투옥될 때 몸무게가 61킬로그램이었는데 석방될 때는 36킬로그램에 불과하였습니다.

미국은 1945년에 죄수들을 석방하면서, 두스 산투스 형제를 하와이로 귀환시켜 주겠다고 제안하였지만 그는 거절하였습니다. 왜 거절하였습니까? 그의 기쁨은 왕국 활동에 있었고, 그래서 그는 그 활동이 필리핀에서 진전되는 것을 보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임무를 대신할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두스 산투스 형제는 “그가 올 때까지 나는 머물러 있고자 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조지프 두스 산투스에 대해, 힐라리온 아모레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는 정말로 열심히 일하고, 형제들의 영적 필요에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필리핀 형제들은 아무런 특별 훈련을 받지 않았는데도, 전쟁 전이나 전시에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전쟁이 끝나고 오래지 않아 도움이 왔습니다. 길르앗 졸업생들인 얼 스튜어트, 빅터 화이트, 로렌소 알피체가 1947년 6월 14일에 도착하였습니다. 드디어 두스 산투스 형제는 자기를 대신할 사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949년에 그는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하와이로 돌아갔습니다.

스튜어트 형제가 지부의 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초창기에 온 다른 선교인들은 대부분 야외에 임명되었습니다. 길르앗에서 훈련을 받은 선교인들의 효과에 대해, 필리핀 출신으로 길르앗에 다녀온 빅터 아모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활동을 조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이 길르앗 졸업생들로부터 일을 배웠습니다. 진보가 있었습니다. 1975년이 되기 전에 전도인이 7만 7000명에 육박한 것입니다. 1946년에는 2600명에 불과했는데 말입니다.” 처음 세 형제가 온 뒤로 적지 않은 수의 선교인들이 뒤를 이었는데, 그중에 브라운 부부와 윌레트 부부는 세부에서 봉사하고, 앤더슨 부부는 다바오에서 활동하였습니다. 또 스틸 부부와 스미스 부부 그리고 핵텔 형제와 브룬 형제도 있었습니다. 닐 캘러웨이는 1951년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나중에 필리핀 자매 네니타와 결혼하여 필리핀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봉사하다가 1985년에 사망하였습니다. 덴턴 홉킨슨과 레이먼드 리치가 영국에서 1954년에 도착하였으며, 그들은 필리핀에서 48년이 넘는 기간 왕국 활동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외국인 길르앗 졸업생들만 필리핀에서 왕국 전파 활동의 조직과 확장에 기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50년대에는 필리핀 형제들도 길르앗 학교에 초대되었고, 그들 중 대부분은 본국으로 돌아와 봉사하였습니다. 처음 세 사람은 살바도르 리와그, 아돌포 디오니시오, 마카리오 바스웰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빅터 아모레스는 자신이 받은 훈련을 여행하는 활동과 베델에서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나중에 가족을 부양하였지만, 전 시간 봉사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는 여행하는 감독자로, 그러고는 라구나 도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아내 롤리타와 함께 70대 후반까지 봉사하였습니다.

1970년대에 전진을 계속하다

활동이 급속히 전진하면서, 전도인 수는 계속 증가하여 1975년에는 7만 7000명을 넘어섰습니다. 전반적으로 말해서, 여호와의 종들은 영성을 유지하면서 하느님을 계속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하지만 현 사물의 제도가 1975년에 끝나지 않자, 많은 사람이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중단하였습니다. 1979년에 와서는, 전도인 수가 5만 9000명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 순회 감독자로 일하던 코르넬리오 카녜테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1975년 때문에 침례를 받고는 이삼 년 머물러 있었습니다. 1975년이 지나가자 그런 사람들은 진리를 떠났습니다.”

그렇지만 절대 다수는 그리스도인 봉사에 대한 합당한 견해를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단지 격려가 필요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부 사무실은 특별 강연들을 마련하는 조처를 취하였습니다. 그 결과 활동적인 전도인들이 격려를 받았을 뿐 아니라, 일부 무활동자들도 여호와를 다시 활동적으로 찬양하도록 도움을 받았습니다. 형제들은 하느님을 어떤 날을 염두에 두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섬기는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시적인 감소의 시기가 있고 나서 왕국 전도인 수는 극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실망으로 인해서 여호와의 모든 선하심을 잊지 않았던 사람들은 참으로 축복을 받아 왔습니다!

외딴 지역을 개척하다—산악 지대에서

필리핀을 구성하는 수천 개의 섬들은 남북으로 약 1850킬로미터, 동서로 약 1100킬로미터에 이르는 공해(空海)에 산재해 있습니다. 일부 섬들은 무인도이고, 많은 섬에는 험준한 산악 지대가 있습니다. 그러한 외딴 곳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은 도전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한 지역 가운데 칼링가-아파야우 도(道)가 있습니다. 루손 섬 북부의 험준한 코르디예라센트럴 산악 지대에서는, 주민들이 종족들과 촌락들로 나뉜 채 제각각 고유의 방언과 풍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사람 사냥’은 20세기에 사라졌지만, 촌락 간의 적대감은 계속 일상적이라서, 반목과 살인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제로니모 라스티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에는 그 지역에 특별 파이오니아를 보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곳 주민들이 그 형제들을 죽일 작정으로 뒤쫓아 다니곤 했으니까요.”

해결책은 자매들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제로니모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여자들은 뒤쫓아 다니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전통이 있거든요.” 자매들은 그곳 주민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때가 되자, 그 지방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고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고장 주민의 문화를 익히 알고 있어서, 효과적으로 증거할 줄 알았습니다. 그 결과, ‘사냥꾼들’—진리를 원하는 사람을 찾아내는 사냥꾼들—이 산악 지역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칼링가-아파야우 도 전역에 증인이 몇 명에 불과하였으나, 지금은 두 개의 순회구가 있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인접한 산악 지대인 이푸가오 도에도 1950년대 초에는 증인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세 명의 정규 파이오니아가 수백 년 된 계단식 논들 사이에서 정착하고 있는 주민들에게 전파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시골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그 지역에는 18개의 회중에 315명의 전도인이 있습니다.

최북단의 산악 지대인 아브라 도에서, 문제는 아직 증인이 아무도 없는 마을들을 어떻게 찾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 순회 감독자는 그 오지 벽촌들에 좋은 소식을 전해 주려는 열망을 품고서, 34명의 전도인에게 티네그 근처의 지역에 가서 자기와 함께 전파하자고 권하였습니다. (사도 1:8) 대중 교통편이 없으므로, 일행은 산악 지역 깊숙이 7일 동안을 걸어서 인가가 약 250호가 있는 열 개의 촌락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순회 감독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모든 짐 꾸러미를 지고서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가는 일은 대단히 도전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여섯 밤 중에서, 우리는 나흘 밤을 산악의 노천이나 강가에서 자면서 보냈습니다.” 일부 마을 사람들은 증인을 맞이해 본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한 곳에서 만난 남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27년 전에 여호와의 증인이 우리 아버지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여호와의 증인에게 진리가 있다고 하셨지요.” 모두 합하여, 그 일행은 60부의 서적과 186부의 잡지, 50부의 팜플렛, 287장의 전도지를 배부하였고, 여러 건의 성서 연구를 시범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다른 외딴 지역에서 전파하다

팔라완 섬은 필리핀에서 큰 섬에 속합니다. 좁고 기다란 이 섬은 434킬로미터나 뻗어 있습니다. 인구 밀도가 높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섬들로부터 외따로 떨어져 있는 팔라완 섬은 다양한 종족이 사는 숲의 고장으로, 이주민 정착촌들을 포함하여 여러 외딴 취락들도 산재해 있습니다. 어떤 임무라도 수행할 태세가 되어 있는 선교인 레이먼드 리치가 그곳에 순회 감독자로 파견되었습니다. 증인은 몇 사람 안 되는데 가야 할 구역은 멀고도 멀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955년에서 1958년까지 그곳에 임명되었는데, 팔라완 섬 전체에 전도인은 열네 명뿐이었습니다. 그들을 방문하는 데 다섯 주가 걸리더군요.”

그때 이후로, 그곳은 아직도 도전이 남아 있는 곳이기는 해도, 많은 진척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40대 초인 페비 로타는 팔라완에서 1984년에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자매는 두마란 섬에서 봉사할 때 있었던 일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집인 줄 알고 다가갔습니다. 또 한 집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는데, 집이 있더군요!” 야자나무 지대 깊숙한 곳에 한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코코넛 과수원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성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페비가 말합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일이 아니었더라면, 난 깊숙한 그곳까지 가지 않았을 거예요.” 그곳에 이르기 위해서, 페비와 그의 봉사 짝은 코코넛 과수원을 지나고 바위와 모래가 깔린 해변이 길게 뻗은 곳을 걸어가느라 하루를 보내곤 하였습니다. 밀물 때면, 무릎까지 차오르는 바닷물 속을 걸어갔습니다.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그들은 한 달에 한 번 그곳에 가서는 며칠을 보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려면 식품과 책, 잡지 그리고 여분의 옷가지를 힘겹게 가져가야 하였습니다. “뙤약볕은 내리쬐는데 벌레에 쏘이고 물리면서 간다는 것은 고행이 아닐 수 없었어요. 우리는 땀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도착하곤 했지요.”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그 관심자 부부가 성서 연구에서 매우 빠르게 진보하는 것을 보게 되어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 부부는, 침례교인인 관리인이 그들이 증인들과 연구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코코넛 과수원 일을 강제로 그만두고 떠나야만 하였습니다. 나중에 페비는 그 부부 중 아내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면서도 기뻤습니다. 그 여자는 이미 침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페비의 말에 의하면 “지역 대회에서 있은 파이오니아들을 위한 모임에 우리와 함께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수고의 훌륭한 열매를 보게 되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필리핀 남쪽에 있는 큰 섬 민다나오에는 찾아가기 힘든 지역이 많습니다. 네이선 세발리오스는 그곳에서 여행하는 감독자로 아내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회중을 방문하지 않는 주간이면, 격지 구역에서 전파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은 형제 자매들에게 같이 가자고 권하였습니다. 한번은 그 일행이 열아홉 대의 오토바이를 타고서 여러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도로는 울퉁불퉁한데다 질퍽거리고, 증인들은 강이나 내를 만나면 대부분 다리가 없어서 곧바로 건너가야만 하였습니다. 그 지방 주민들은 가진 돈은 거의 없었지만, 형제들이 가져온 서적에 대한 보답으로 손으로 만든 부드러운 비를 헌물하였습니다. 형제들이 집을 향해 돌아올 때 오토바이마다 비가 수북이 실려 있는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네이선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두는 몸은 지치고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우리가 한 일이 여호와의 뜻이었다는 것을 알기에 기쁨에 차서 돌아왔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 방법을 강구하다

근년에 여호와의 조직은 왕국 전파자들이 증거하기 위해 모든 기회를 이용할 것을 권해 왔습니다. 이 권고는 이 나라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 특히 적절하였습니다. 다바오, 세부, 마닐라 수도권과 같은 대도시는 세계적인 도시들과 매우 흡사해서, 사업장·사무실·아파트·출입 제한 주택 단지들이 허다합니다. 이러한 곳에 사는 주민들과 접촉하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순회구의 일부인 마카티는 최근까지 마를론 나바로가 담당하였습니다. 마를론은 봉사 훈련 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로서, 세 회중에 임명된 구역인 마카티 금융가에서 전파하는 활동을 조직하느라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다수가 파이오니아인 형제 자매들이 선정되어 이 지역에서 효과적으로 일하도록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도시 구역에서 성서 연구는 상가 건물이나 공원에서 사회하며, 일부 성서 연구생은 집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코리 산투스 자매와 아들 제프리는 둘 다 파이오니아입니다. 종종 그들은 아침에, 때로는 일찍이 여섯 시에 가두 증거에 나섭니다. 그 시간대면, 공장에서 야간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이처럼 가두 증거를 하는 동안에도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처음 접촉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는 진보하여 침례를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도시권 밖에서도 전도인들은 사람들에게 증거할 기회를 찾는 데 깨어 있습니다. 28년 이상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해온 노르마 발마세다는 차를 기다리고 있는 한 부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어디 가시죠?”

그 부인이 대답하였습니다. “키리노 도(道)요.”

“그곳에 사시나요?”

“그건 아닌데, 남편이 여기 이푸가오에선 살기가 너무 힘들다고, 그곳으로 이사할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이 말이 대화를 나누는 계기가 되어, 노르마는 인간의 문제들을 해결할 왕국 정부에 관한 좋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각자 자기 길을 갔습니다. 몇 해가 지난 뒤, 한 순회 대회에서 한 부인이 노르마에게 다가오더니 자신은 노르마가 이야기를 건넨 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침례를 받았고, 두 딸과 남편도 성서 연구를 잘하고 있었습니다.

케손시티에 있는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는 형제들은 모든 증거의 기회를 활용하기 위하여 깨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펠릭스 살랑고는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열심 때문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베델 봉사를 하면서 종종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2000년에, 한 숙소동을 추가로 짓는 공사가 진행 중일 때 펠릭스는 건물 외벽을 올리기 위해 고용된 일꾼들을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는 기사장에게 접근하여, 일꾼들에게 이야기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펠릭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점심 식사 후에 현장에 가 보니까, 그 기사가 100명이 넘는 일꾼들을 모아 놓았더군요.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대해 설명한 다음, 큰 환난을 생존하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설명하였습니다. 나는 팜플렛 한 상자와 「지식」 책 한 상자를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나는 일꾼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데 관심이 있으면 그 출판물들을 한 부씩 가질 수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펠릭스는 또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세계적으로 지원을 받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는, 출판물과 봉투를 야자나무 아래 갖다 놓았습니다. 많은 일꾼이 책이나 팜플렛을 가져갔으며, 여러 사람이 그 봉투에 기부금까지 넣었습니다.

기사장을 포함해서 몇몇 사람은 연구에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매주 월·수·금 점심시간에 펠릭스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팜플렛을 가지고 기사장과 연구할 마련을 하였습니다. 그 기사장은 펠릭스에게 “나는 여기서 배우는 것을 아내와 친구들에게 설명합니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현장에서 일하던 다른 두 기사는 물론, 한 경비 요원과 두 여사무원도 연구를 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기회에 증거하는 것은 여호와의 축복을 가져옵니다.

선교인들이 들어오다

여러 해에 걸쳐, 훈련받은 외국인 선교인 69명이 필리핀에 와서 왕국 전파 활동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덴턴 홉킨슨과 레이먼드 리치는 처음에는 야외에 임명되어 먼저 선교인, 나중에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하였습니다. 그 후에는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도록 임명받았습니다.

여러 명의 길르앗 졸업생이 1970년대에 도착하여, 새로 설치된 인쇄 시설 운영에 기여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로버트 페비와 그의 아내 퍼트리샤는 그 이전에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봉사하였습니다. 로버트는 필리핀 지부에 집필 담당 부서를 설치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그들이 1981년에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세계 본부에서 일하기 위해 떠나는 것을 보게 되자, 모두는 섭섭해하였습니다.

딘 재석과 캐런 재석 부부는 1980년에 미국에서 도착하여, 라구나 도에서 잠시 타갈로그어 어학 공부를 한 다음 지부에 임명되었습니다. 1983년에 훈련을 추가로 받고 나서,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개발하여 성서 서적의 언어별 발행을 지원하는 데 필수적임이 증명된 바 있는 컴퓨터 시스템의 사용법을 국내 및 인근 섬나라들의 형제들이 배우도록 도왔습니다.

휘베르튀스(베르트) 휘프나겔스와 저닌 휘프나겔스 부부는 네덜란드에서 1988년에 도착하였습니다. 지부에서는 때마침 대대적인 건축 공사를 시작할 참이었습니다. 그 부부는 전에 지부 건축 경험이 있어서 베르트는 중장비 조작에 익숙해 있었으므로, 그 공사를 지원하도록 임명받았습니다. 베르트는 중장비를 조작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훈련시켰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초부터 나는 이 나라 형제들에게 트럭과 백호(드래그 셔블 굴착기), 불도저, 로더, 크레인을 운전하는 법을 훈련시켰습니다. 나중에는 중장비 일을 하는 형제들이 20명 내지 25명의 집단을 이루게 되더군요.”

그 후 다른 네 명의 길르앗 졸업생이 그들과 합세하였는데, 페터 벨렌과 베아테 벨렌 부부는 독일에서, 게리 멜턴과 테리사 진 멜턴 부부는 미국에서 왔습니다. 벨렌 부부 역시 지부 건축 경험이 있었고, 멜턴 부부는 미국 베델에서 5년 동안 일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지부 건축 일에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전인 1963년에 마지막 선교인 집이 폐쇄되었는데, 그것은 자격을 구비한 필리핀 파이오니아들이 야외 활동을 돌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1년에 통치체는 여섯 명의 선교인을 야외로 내보내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이 선교인들은 지부 일에 경험이 있었지만 야외에서 유효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경험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저닌 휘프나겔스는 18세에 특별 파이오니아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자매는 이제 자신의 경험과 활발한 성격을 형제들과 새로운 사람들을 격려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남편 베르트는 다른 유익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선교인들이 야외에 있으면 사람들이 우리의 활동이 국제적인 규모라는 걸 이해하게 되지요.” 한편 다른 선교인들은 계속 지부에서 관리 업무를 비롯한 임무들을 돌보았습니다.

필리핀은 선교인들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선교인들이 나가기도 하는 나라입니다.

선교인들이 나가다

선교인들이 아직 들어오고 있는 동안, 필리핀은 다른 나라에 가서 선교 활동에 참여할 필리핀 파이오니아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나라의 파이오니아들은 길르앗 졸업생들과 동일한 조직적 훈련을 받지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우수한 파이오니아가 많았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제자를 삼는 활동은 인근 나라들보다 필리핀에서 훨씬 더 빠르게 확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64년을 시점으로, 자격을 갖춘 필리핀의 파이오니아들은 아시아와 태평양의 섬들 전역에서의 선교 봉사를 받아들이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파견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부부들이었지만, 대부분은 전 시간 봉사에 10년 이상 경험이 있는 독신 파이오니아들이었습니다. 2002년 중반까지, 149명이 19개 나라에 파견되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74명은 그들의 임지에 머물러 있습니다. 서류 수속을 밟는 동안, 장차 선교인이 될 사람들은 지부에 머물면서, 임지에서 그들에게 도움이 될 훈련과 경험을 습득합니다. 이 선교인들은 여러 해 동안 전파 활동에 어떤 기여를 하였으며, 어떤 도전과 기쁨을 경험하였습니까?

로즈 카궁가오(지금은 엥글러)와 클라라 델라 크루즈(지금은 엘로리아)가 처음으로 나간 선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임지는 타이였습니다. 1년쯤 지나, 앙헬리타 가비노가 같은 임지에서 그들과 합세하였습니다. 물론, 다른 선교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언어 습득이 큰 도전이었습니다. 앙헬리타는 타이어를 배우던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 이삼 주 동안은, 책에 쓰인 글자가 온통 ‘벌레’로 보여 좌절감에 빠져 있었고, 집회에서는 언어 장벽 때문에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배워서, 습득한 이 언어를 사람들을 돕는 데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처음 몇 사람에 이어서, 자원하는 파이오니아들의 꾸준한 대열이 여러 나라로 파견되었습니다. 포르페리오 후무아드와 에반젤린 후무아드는 1972년에 한국으로 가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언어를 잘 배워서, 선교 밭에서 2년 반이 지난 뒤 후무아드 부부는 순회 활동을 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1970년, 살바시온 레갈라(지금은 아예)는 아홉 명의 필리핀 자매들 중 한 사람으로 홍콩에 도착하여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광둥어를 배우는 일이 첫 번째 도전이었습니다. 광둥어에는 아홉 가지 성조 즉 소리의 높낮이가 있습니다. 성조가 달라지면 단어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살바시온은 그 성조와 씨름하던 일을 기억합니다. 한번은 성서 연구생에게, 그들이 기거하던 곳에서 “귀신 때문에” 나왔노라고 이야기하였는데, 실은 “집세가 비싸서” 나왔던 것입니다. 점차 그 자매는 언어를 습득하였습니다. 살바시온은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성서에 들어 있는 진리의 소식을 배우도록 도왔습니다. 지금은 홍콩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인도네시아 사람을 많이 만나기 때문에, 열심히 인도네시아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단호하면서도 우정적인 형제인 로돌포 아송은 1979년에 파푸아뉴기니로 임명받았을 때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는 언어를 배우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잘 습득한 결과, 그 나라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여행하는 감독자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파푸아뉴기니에서는 회중들을 방문하는 일이 필리핀에서와는 매우 달랐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혼자서 타는 작은 카누의 노를 원주민들처럼 서서 젓는 법을 배웠습니다.”

대회에 대하여, 로돌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거리는 멀고 마땅한 교통편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작은 대회들을 마련했습니다. 라리미야 마을에서 열린 대회는 내가 참석해 본 대회 중 가장 작은 대회였습니다. 총 참석자 수가 열 명이었거든요.” 다른 행사로서, 그는 아기라는 마을에서 열리는 모임을 위해서 대회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또 대회 사회자로 일하도록 임명받고, 음향부와 식품 봉사부를 돌보도록, 드라마를 감독하도록 그러면서 다윗 왕 역을 하도록 임명받았습니다.” 그는 실로 그 임명에 진력하였으며, 나중에는 솔로몬 제도에서 선교 봉사를 즐겼습니다.

1982년에 루손 섬 출신의 적응성이 뛰어난 아르투로 빌랴신이 솔로몬 제도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순회 감독자로 일하면서, 상황이 필리핀과는 판이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많은 섬들에 가려면 경비행기가 최상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은 우리 비행기가 충돌을 했는데, 우린 모두 살아남았습니다. 또 한번은 시계가 좋지 않아서 하마터면 산허리를 들이받을 뻔했습니다.” 일부 회중을 방문하던 일에 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조상 숭배를 하는 삼림 지대 주민 가운데 있는 회중들을 방문하기 위하여, 강우림 속을 헤쳐 가다가 질퍽한 가파른 언덕을 오르기도 합니다.” 아르투로는 2001년에 예기치 않은 건강 문제로 사망하였지만, 충실한 선교인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아시아와 태평양의 선교 밭으로 파견된 필리핀 형제 자매들로부터 들어온 이와 같은 경험담은 많습니다. 도전이 있어도 자기 희생적으로 자진하는 이들 여호와의 종들은 그 나라들에서 전파 활동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호와를 성채로 삼도록 돕는 기쁨

기쁨은 여호와의 축복 가운데서 발견됩니다. (잠언 10:22) 1974년에 대만에 파견된 아델리에다 칼레테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곳에서 우리의 활동을 축복하시고 내게 그 일익을 담당할 기회를 주셔서 그지없이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지금은 마셜 제도에서 봉사하고 있는 폴 타부니가오와 마리나 타부니가오 부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72명이 여호와를 섬기도록 도왔습니다. 그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지금은 장로, 봉사의 종, 특별 파이오니아, 정규 파이오니아 그리고 활동적인 회중 전도인들로 일하고 있어서 마음이 기쁩니다.”

1980년 이래 파푸아뉴기니에서 봉사하고 있는 리디아 팜플로나는 84명이 헌신과 침례의 단계에 이르도록 도왔습니다. 이 자매는 최근에 열여섯 사람과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으며, 그들 대부분이 지금 집회 참석을 한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그의 개인 소감은 분명코 많은 선교인들의 심정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게 맡겨 주신 봉사의 직무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드립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이 우리의 봉사의 직무를 축복해 주시기를 빕니다.”

필리핀 선교인들이 파견된 나라의 지부들에서는 그들이 그 나라 구역에서 일하는 데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있습니다. 타이 지부에서는 이런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필리핀에서 온 선교인들은 훌륭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타이에 와 있는 여러 해 동안 믿음의 본들이 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연로해 가면서도 꾸준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타이와 타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곳을 자신들의 고향으로 여깁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훌륭한 선교인들을 보내 주신 것에 대하여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천국 전도 강습 마련으로 장로들이 자격을 갖추다

파이오니아들이 다른 나라들에서 봉사하도록 필리핀에서 처음 파견되던 바로 그 시기에 즈음해서, 여호와의 조직은 자기 고장의 회중에서 책임을 맡고 있는 점증하는 수의 자격 있는 형제들을 훈련하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천국 전도 강습은 이러한 훈련을 수행하는 주된 마련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첫 번째 강습은 1961년에 한 달 과정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길르앗 강사였다가 베트남에서 선교인으로 일하게 될 잭 레드퍼드가 필리핀에서 이 과정의 강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첫 강습은 지부에서 열렸고 영어로 진행되었습니다.

영어가 일부 형제들에게는 무난하기는 하였지만, 필리핀에서는 항상 다른 공용어와 방언들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장로들은 자신의 고유 언어로 열리는 강습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입니다. 그래서 1960년대 중반부터는 이 강습이 몇 개의 언어로 진행되었습니다. 코르넬리오 카녜테는 비사얀 제도와 민다나오 섬 전역에서 강사로 일하던 일을 기억합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세 가지 언어, 그러니까 사마르-레이테어·세부아노어·힐리가이논어로 그 강습을 다루었습니다.”

해가 지나면서 이 강습은 일정을 잡는 일을 포함해서 변경되어 왔습니다. 근년에는 이 강습이 주말에 장로들을 위해서는 하루 반 동안, 봉사의 종들을 위해서는 하루 동안 열렸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약 여덟 개의 언어로 강습을 베푸는 도전이 남아 있습니다. 지부에서 이러한 언어를 할 줄 아는 장로들이 나가서, 여행하는 감독자들을 위한 훈련 강습을 사회합니다. 그 다음에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회중의 장로와 봉사의 종들을 위한 실제 강습을 사회합니다. 지난번 강습에서는 1만 3000명의 장로와 8000명의 봉사의 종이 이 훈련으로부터 유익을 얻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을 위한 도움

그 후 파이오니아들도 훈련을 더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1978년에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 첫 학급이 열렸습니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포함하여 그 당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던 모든 사람이 그 학급에 등록하였습니다. 그 이래로 1979년과 1981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학급이 열렸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강습으로부터 큰 유익을 얻었지만, 참석하기 위해서는 도전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강습을 받으러 가기 위해 재정적 희생을 감수한 사람도 있었고, 교통 편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산티아고 시에서 열린 강습에 참석한 사람들은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해야만 하였습니다. 순회 감독자 로돌포 데 베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1989년 10월 19일 이사벨라 군 산티아고에 경보도 없이 최대 풍속 205킬로미터의 초강력 태풍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날 아침 왕국회관에서 학급을 시작할 때만 해도, 소나기가 좀 내리고 바람이 약간 부는 정도라서 우리는 파이오니아 강습을 진행하였습니다. 하지만 바람은 점점 거세지더니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하더군요. 금세 지붕이 날려 가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곳을 떠나가려고 했지만, 바깥에선 많은 물건이 날리고 있어서 더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건물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지만, 모두는 무사히 생존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존하게 된 것이 여호와 덕분인 동시에, 그러한 상황에서는 탁자나 책상 밑에 몸을 숨겨야 한다는 「깨어라!」 잡지의 제안 때문이라고 합니다. 데 베라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탁자들 밑에 숨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간 뒤 우리는 떨어진 나뭇가지와 함석지붕 조각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건물 안에서 탁자 밑에 머물러 있던 사람은 모두가 다치지 않았습니다.”

매년 강습은 일곱 개 언어로 진행됩니다. 2002 봉사 연도까지 2787개의 학급이 열려 총 4만 6650명의 파이오니아가 이 과정을 수료하였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이 기술을 향상시키고, 계속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사람들로서 빛나”면서 여호와께 온전한 신뢰를 두도록 돕는 데 이 과정은 참으로 훌륭한 마련이 되어 왔습니다!—빌립보 2:15.

초창기의 오프셋 인쇄 작업

야외에서나 회중에서 하는 모든 활동은 훌륭한 성서 출판물을 구할 수 없다면 훨씬 더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필리핀을 위한 인쇄는 브루클린에서 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초에는 바로 케손시티에 있는 지부 구내에 공장을 세웠습니다. 브루클린에서 보유하고 있는 것과 유사한 활판 인쇄 장비가 설치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지부에서는 모든 잡지를 바로 현지에서 인쇄하게 되었습니다.

그 70년대가 지나기 전에, 핫메탈 방식을 사용하는 활판 인쇄는 인쇄 업계에서 서서히 사라지면서 오프셋 인쇄를 선호하는 추세가 분명해졌습니다. 세계 본부에서 보낸 지침을 보면, 우리도 점차 이러한 변화를 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였습니다.

1980년에 지부는 시중에서 사진 식자 장비를 구입하였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에서 같은 기종의 장비를 이미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에 그들의 경험을 전수하였습니다. 이 컴퓨터 식자 시스템은 거의 같은 시기에 구입한 소형의 매엽식(枚葉式) 오프셋 인쇄기와 병행하여 가동되었습니다.

소규모 단계이지만 이러한 설비를 가지고 형제들은 오프셋 인쇄에 사용되는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활판 인쇄용 라이노타이프 조작에 폭넓은 경험을 이미 쌓아 온 데이비드 나모카가 사진 식자 장비 사용법을 익혔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오프셋 인쇄 연판을 만드는 법 그리고 새로 구입한 인쇄기로 인쇄를 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그렇게 해서 1980년대 말경에는, 이미 지부에서 오프셋 방식을 사용하여 「우리의 왕국 봉사」의 일부와 적은 인쇄 부수를 요하는 언어들로 된 잡지들을 찍어 내고 있었습니다.

오프셋 인쇄 방식으로 기술이 전환되면서 또한 컴퓨터의 사용이 도입되어, 번역 및 인쇄 전(前) 작업을 하는 형제들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차츰차츰 형제들은 경험과 자신감을 터득해 나갔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이러한 방식을 이용하는 인쇄 작업의 질과 양을 두 가지 다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실로 1982년에는 형제들이 진보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였던지, 4색 출판물인 「왕국 소식」 31호를 단색 오프셋 인쇄기를 사용해서 인쇄하였습니다. 인쇄 용지를 인쇄기에 여섯 번 통과시켰는데, 네 번은 4색으로 된 면을 위해서 그리고 두 번은 2색으로 된 면을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작업이었고, 질적으로 조금은 개선의 여지가 있었지만 4색 「왕국 소식」을 우리 자체 설비로 제작한 것을 보고서 모두가 기뻐하였습니다.

그 마련이 시작의 계기가 되긴 하였지만, 컴퓨터 사진 식자와 오프셋 인쇄로의 전면적인 전환은 어떻게 이룩할 것이었습니까? 여호와의 조직은 모종의 복안을 간직하고 있었고, 필리핀 지부도 머지않아 그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조직이 멥스를 제공하다

통치체는 수십 가지 언어로 좋은 소식을 출판하는 독특한 필요성을 충족시킬 컴퓨터 사진 식자 시스템의 생산을 승인하였습니다. 다종 언어 전산 사식 시스템(MEPS)이 브루클린에서 개발되었습니다. 지부에서 일시적으로 시중에서 구한 장비를 사용해 본 것이 제한된 규모로 컴퓨터와 오프셋 인쇄 방식을 이용하는 계기는 되었지만, 멥스로 인하여 필리핀 지부는 세계 전역의 다른 지부들과 함께 이 분야에서 전진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두 부부가 필리핀에서 뉴욕 월킬로 초대되었습니다. 형제들은 멥스 컴퓨터의 보수 유지 그리고 멥스 프로그램을 응용한 인쇄 전 작업에 관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다른 부부인 플로리젤 노이코와 그의 아내는 브루클린에 머물면서, 노이코 형제가 맨(M.A.N.) 오프셋 인쇄기 조작법을 익혔습니다. 이 기술은 필리핀 지부가 인쇄 전 작업의 컴퓨터화 및 오프셋 인쇄 방식으로 본격적으로 돌입하는 데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1983년, 맨 오프셋 인쇄기 한 대가 필리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장비를 설치하는 데 오스트레일리아 지부에서 온 라이오닐 딩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노이코 형제는 자신이 브루클린에서 배운 것으로 이 나라 형제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1983년 말에는 첫 잡지가 이 인쇄기에서 미끄러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스템이 아직은 충분히 갖추어지지 못해서, 당분간은 잡지를 핫메탈 방식과 오프셋 인쇄 방식을 병용해서 생산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스템의 완성이 요원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 멥스 컴퓨터가 1983년 말에 도착하였으며, 월킬에서 훈련받은 두 형제는 멥스 장비의 조작 및 보수 유지 법을 다른 형제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단기간 내에 생산에 들어갔습니다. 수십 명의 베델 성원이 이 시스템을 활용하여 번역·본문 입력·조판·사진 식자를 하는 법은 물론, 컴퓨터를 보수하는 법까지 철저히 훈련받았습니다. 필리핀에서는 사용되는 언어의 수 때문에 훈련 과정이 복잡합니다. 「파수대」만 해도 영어를 제외하고도 일곱 가지 언어로 준비됩니다. 멥스는 그 임무를 수행하는 데 안성맞춤입니다.

생산되는 출판물의 품질이 괄목할 만하게 개선되었습니다. 인쇄 일을 하는 형제들에 대해서 공장에서 일하는 시저 세사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형제들은 대부분 농부들입니다. 일부 형제들은 가진 기술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영을 통해서 형제들을 움직이셔서 인쇄 일을 비롯하여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걸 보면 감탄스럽습니다.” 형제들은 숙련되어 갔고, 전도인들은 야외에서 점점 더 마음이 끌리는 출판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쇄 방법상의 이러한 기술 향상으로 인하여 가능해진 더 중요한 유익—영적 유익—이 있었습니다.

영적 양식의 동시 제공

필리핀용 잡지가 브루클린에서 인쇄될 때는, 영어 잡지에 나온 기사가 필리핀 언어들로 출판되는 데 6개월 이상이 걸렸습니다. 잡지는 국내에서 번역되었지만, 원고와 교정 결과를 주고받고 나서 인쇄된 잡지가 마지막으로 발송되는 데는 시간이 꽤나 걸렸습니다. 잡지 인쇄가 1970년대에 필리핀으로 이전되었을 때, 시간은 절약되었지만 잡지 내용은 여전히 영어판보다 6개월 늦었습니다. 많은 필리핀 형제들은 ‘자국어를 영어와 동시에 볼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 그것은 꿈에 불과하였습니다.

하지만 멥스가 출현하고 생산 절차가 조정되면서 이제껏 꿈이던 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통치체는 같은 자료를 같은 시간에 연구함으로써 모든 여호와의 백성에게 강력한 연합 효과가 생길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목표가 추진되어, 1986년 1월에는 「파수대」가 영어와 동시에 이 나라의 4개 언어— 세부아노어·일로카노어·타갈로그어·힐리가이논어—로 나왔습니다. 그 밖의 언어들로도 속속 나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1988년 대회에서는 「계시록—그 웅대한 절정은 가까왔다!」 책을 영어판과 동시에 3개 자국어로 받게 되어 참으로 놀랐습니다! 형제들은 기뻤습니다. 관심자들에게 전할 고품질의 서적을 받게 된 것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의 대다수의 형제들과 동시에 동일한 영적 급식 프로그램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출판물의 이러한 개선은 이 나라 일부 지역이 소란스러웠던 와중에 이룩된 일이었습니다. 그 출판물들은 모든 사람이 여호와를 그들의 성채로 삼아야 할 끊임없는 필요성을 역설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정부군 대 반란군의 대결

반군 집단들의 활동은 1980년대에 이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거세졌습니다. 일부 집단은 공산당 운동과 연계되어 있었습니다. 정부군과 정부 타도 세력간의 교전은 점점 더 다반사가 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충돌은 종종 여호와에 대한 형제들의 신뢰에 시험이 되었습니다.

전도인 62명의 회중이 있는 한 지역에서, 형제들이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 보니 반군과 정부군이 일전을 위해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의 집들은 바로 그 중간에 있었습니다. 한 장로는 반군에게 가고, 다른 장로는 정부군에게 갔습니다. 그들은 피해를 받게 될 민간인이 많기 때문에 그곳에서 교전을 벌이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의 요청은 묵살되었습니다. 형제들은 도피할 수가 없어서 왕국회관에 모였습니다. 한 장로가 그들 모두를 대표하여 기도를 하였는데, 아주 길게 그리고 바깥에 있는 정부군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하였습니다. 형제들이 눈을 떠 보니까, 그 양쪽 진영은 어디로인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습니다. 전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형제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보호하셨음을 확신하였습니다.

디오니시오 카르펜테로는 아내와 함께 16년 이상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해 왔습니다. 그는 필리핀 남중부(南中部)의 네그로스오리엔탈 도에서 순회 활동을 하던 첫해에 일어난 일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리난투얀 회중을 방문하였습니다. 수요일에 전도인 40명이 우리와 함께 야외 봉사에 참여하여 우리는 흐뭇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군이 우리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소굴은 왕국회관 근처에 있었습니다. 반군 네 사람이 우리 숙소로 오후 네 시에 우리를 조사하러 왔더군요. 그 회중의 한 장로가, 나는 순회 감독자이고 그래서 그들의 회중을 6개월마다 방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분명히 그 사람들은 그 설명을 믿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디오니시오가 군 요원이라고 의심하고는 자기들이 사살할 수 있게 그 장로더러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오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 장로는 먼저 자기를 죽여야 할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버렸습니다.

디오니시오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밤새도록 개들이 짖어 대는 바람에, 반군이 와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우리는 그날 밤 네 차례나 기도하면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그때가 건기였는데도 비가 억수로 내리더군요. 우릴 죽이려고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은 떠나가 버렸습니다.”

일요일 집회 후에 디오니시오는 장로들에게 자신과 자기 아내는 다음 회중을 향해 떠나겠다고 알렸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반군의 소굴을 지나가야만 하였습니다. “반군 한 사람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더군요.” 디오니시오의 말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우리가 떠나고 있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저녁 여덟 시에, 반군은 왕국회관에 가서 우릴 내놓으라고 했답니다. 장로들은 우리가 이미 떠났고 그들의 소굴도 지나서 갔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우릴 못 봤던 것입니다. 이 경험은 우리가 어려움에 직면해서 여호와를 신뢰하고 용기를 낼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디오니시오는 기쁜 마음으로 그분의 봉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충돌은 때때로 증거 활동을 어렵게 만듭니다. 충돌 장소에 우연히 잘못 들어갔다가는 교전 현장에서 꼼짝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쪽 아니면 저쪽 편에서 무력 충돌이 임박했음을 형제들에게 알려 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발생할 때면 형제들은 그 교전이 끝날 때까지 좀 더 평화롭게 증거할 곳을 선택합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왕국 증거 활동은 계속되며, 형제들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중립의 시험들

예수께서는 자신의 추종자들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세상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그들도 세상의 일부가 아[닙니다].” (요한 17:14)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필리핀의 여호와의 증인도 세상의 정치 및 군사 충돌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그들은 “칼을 잡”지 않았으며, 무기를 내려놓고 여호와께 가르침받은 대로 평화의 길을 추구해 왔습니다. (마태 26:52; 이사야 2:4) 이러한 중립 입장은 필리핀 전역에 잘 알려져 있어, 어느 편에 있는 사람들이나 여호와의 증인은 그들에게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문제들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여호와의 종들이 분명히 보여 주어야 했던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이 그들에게 보호가 되었습니다.

여행하는 감독자로서, 윌프레도 아렐랴노는 평화로운 구역이나 그다지 평화롭지 못한 구역 등 다양한 구역에서 봉사하는 폭넓은 경험을 해 왔습니다. 1988년에 그는 필리핀 남중부의 한 회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곳 형제들은 정부 타도 분자들로부터 대정부 반란에 가담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완강히 거절하였습니다.

윌프레도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방문하던 주간에 정부군이 회중 구역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민들로 타도 분자들을 퇴치할 시민군 부대를 구성하려고 하였습니다. 정부 대표자들과의 모임에서, 형제들은 그들이 타도 분자들이나 정부의 시민군에 가담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설명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일부 주민들은 우리의 입장을 반대한 반면, 정부 대변인은 우리를 존중해 주었습니다.”

윌프레도는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한 형제는 집회 후 자기 농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을 가린 포로 두 사람을 끌고 가는 중무장한 사람들의 일행과 마주쳤습니다. 그는 정부 측 모임에 참석하였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사실대로 그랬다고 대답했습니다. 무장한 사람들은 그가 시민군에 가담했는지 알고자 했고, 그에 대해 그는 가담 안 했다고 하면서 자신의 중립 입장을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가던 길을 계속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몇 분이 지난 뒤, 그는 두 발의 총성을 듣고서는 눈을 가렸던 그 두 사람이 처형되었음을 직감했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에 필리핀 법은 전 국민의 투표를 의무화하였습니다. 위반자는 투옥되었습니다. 이때는 여호와의 백성이 하느님에 대한 충성심을 나타내 보일 기회가 되었습니다. 세계 전역의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필리핀에 있는 여호와의 종들도 정치에 중립 입장을 유지하여, “세상의 일부가 아”닌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요한 17:16.

1986년에 정부에 변화가 생기고 나서, 이 나라의 헌법은 수정되어 투표에 대한 요구 조항은 삭제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형제들은 입장이 완화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형제들, 특히 학령기의 형제들은 다른 시험에 직면하였습니다.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않음’

아이린 가르시아는 루손 섬의 중부, 팜팡가 도에서 자라났습니다. 이 여학생은 아직까지도 많은 청소년들에게 시험이 되고 있는 문제에 직면하였습니다. 고등학교에서는 군사 훈련이 요구됩니다. 그렇지만 여호와의 증인인 학생들은 전쟁하는 법을 가르치는 학과 수업에 참여할 수 없다고 개인적으로 결정하였습니다. 먼저, 아이린은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예언자 다니엘 시대의 충실한 세 히브리 청년들을 염두에 두고서, 군사 훈련 단장을 직접 찾아가 훈련에서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다니엘 3장) 그는 아이린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설명을 해 줘서 고맙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참가하지 않는 결과로 나쁜 점수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아이린은 “그건 괜찮습니다. 다른 과목들에서라도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에게는 군사 훈련 대신 다른 할 일이 주어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일로 인해 다른 증인 아이들은 면제를 요청하는 문제가 없어졌고, 난 그래도 10등 이내로 졸업했답니다.”

모든 훈련 단장들이 면제를 허용하지는 않았습니다. 학생이 졸업하기 어렵게 만든 단장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긴 했어도 여호와의 원칙을 고수함으로 수많은 청소년들은 한 가지 중요한 교훈 즉 여호와의 왕국 편에서 확고한 입장을 취하고 이 세상 일에서 중립을 유지하면 여호와의 보호와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가르침받았습니다.—잠언 29:25.

대회의 수가 증가하다

이제 여호와의 백성의 영적인 모임에 눈을 돌려 봅시다. 대회는 항상 기쁜 행사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이 나라에 증인의 수가 적었던 때 이래로 큰 모임은 전후까지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형제들을 이러한 면으로 강화하려는 시도는 있었습니다. 실제로, 「1941 연감」(영문)은 마닐라에서 1940년 3월에 대회가 열렸다고 보고합니다.

독자는 조지프 두스 산투스가 일본에 의해 투옥된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드디어 1945년 초에 미군에 의하여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형제들의 영적 복지에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형제들 중 다수가 조직 안에서 새로운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정 성서 연구를 통해서 성경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법을 배우도록 돕는 마련이 실시되었습니다. 팡가시난 도 링가옌 시에서 1945년 말경에 열린 전국 대회가 그 일을 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습니다. 약 4000명이 참석하였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대단한 관심을 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전쟁도 끝난 때라서 참으로 즐거운 행사였습니다!

그 시점부터 내내 대회 참석자 수는 전도인 수가 늘어남에 따라 꾸준히 증가하였습니다. 약 17년 후, 그 4000명은 3만 9652명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대회가 한 장소에서만이 아니라 일곱 군데에서 열렸습니다. 다시 15년이 지나자(1977년), 지역 대회 참석자 수는 10만 명을 돌파하였습니다. 그때는 20개의 대회가 전국 각지에서 열렸습니다. 8년 후에는 참석자 수가 20만 명을 넘어서고, 1997년에는 지역 대회 참석자 수가 30만 명 이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2002년을 위해서는 63개의 대회를 계획할 수 있었는데, 이는 사상 최대의 수입니다. 여러 섬을 통과하며 여행한다는 것은 도전이 되며 때로는 경비가 많이 듭니다. 여러 장소에서 대회를 갖게 되면, 대회장이 형제들에게 가까워져서 참석이 용이해집니다. 그 결과 더 많은 사람이 이러한 영적 잔치들로부터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참석 노력을 축복하시다

크고 작은 대회에 참석하는 것은 내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947년에 이 나라 북부 지방에서 형제들은 해안 도시 비간에서 열리는 순회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두 개의 뗏목을 타고 아브라 강을 따라 떠내려 왔습니다. 강 어귀에 이르자, 그들은 대회가 끝나면 산악 지대의 집으로 돌아갈 버스 표를 사기 위해, 뗏목을 분해해서 그 재목을 팔았습니다. 그들은 쌀 포대, 장작 다발, 잠자는 요, 여러 명의 자녀 그리고 따뜻한 미소까지 가지고 왔는데, 그 미소들은 대회가 진행되면서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쌀·땔감·구식 화로·잠자리를 비롯하여, 그들은 물질적 필요를 완비하였습니다.

1983년에 필리핀 남부의 다바오델수르 도에 있는 카부란 회중에서 출발한 일행은 산악 지역을 넘어 사흘 길을 걸어서 발동기선 부두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발동기선을 타고 대회장까지 또 하루를 갔습니다. 그들은 “왕국 연합” 지역 대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즐거운 연합을 누린 것이 그 노력과 비용을 들인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1989년에 한 가족은 두 살과 네 살 된 두 자녀를 데리고 순회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팔라완 섬의 엘니도 읍으로부터 약 70킬로미터를 걸었습니다. 안내 표시가 되어 있는 오솔길이 별로 없는 정글 속을 걷느라 이틀이 걸렸습니다. 그들은 걸어가면서 몸에 달라붙은 거머리를 떼어 내야 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틀 동안 비가 끊임없이 내렸습니다. 여러 군데 시내와 강을 건너야 했지만, 다리라고는 없었습니다.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 가족은 안전하게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참으로 형제들과 연합을 즐겼습니다!

다른 지역들에서, 가족들은 재정 능력의 한계로 대회에 참석할 만큼 돈을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라몬 로드리게스가 1984년에 그러한 문제에 봉착하였습니다. 그는 루손 섬의 동해안 바깥 폴리요 섬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라몬은 어부였습니다. 대회 때까지 1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가족 일곱 명 중 한 사람이 참석할 돈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로 여호와께 기도하고서, 라몬과 열두 살 된 아들은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노를 저어 바다로 나가 그물을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나, 아들이 집 쪽으로 가까이 돌아가서 해 보자고 졸라 댔습니다. 그쪽으로 가서 한 번 더 시도해 봤습니다. 라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린 기대도 안 했는데, 고기가 가득한 그물을 끌어올리다 보니까 어찌나 많은지 배가 가득 차 버리더군요.” 무려 500킬로그램이 넘는 물고기를 잡은 것입니다! 그 고기를 팔았더니, 로드리게스 가족 모두가 대회에 참석하는 데 드는 금액보다 더 많이 들어왔습니다.

다음날 밤, 대회 참석을 원하는 다른 형제들이 똑같은 장소에 그물을 던지고서, 또 100킬로그램이나 되는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로드리게스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증인이 아닌 어부들이 동시에 나가서 그물을 던졌는데, 그들은 한 마리도 못 잡았기 때문에 놀랐습니다. 그들이 한마디 하더군요. ‘대회 참석하러 가는 거니까 그들의 하느님이 축복하신 거야.’” 재삼재사 필리핀의 증인 가족들은 영적인 것을 생활에서 첫째 자리에 두고 자신의 기도와 일치하게 행동할 때, 기쁨과 여호와의 축복이 따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두드러진 대회들

전 세계 여호와의 백성은 흐뭇한 마음으로 지나간 대회들을 기억합니다. 필리핀에 있는 형제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모든 대회 프로그램을 소중히 여기지만, 어떤 경우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면서 마음과 정신에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때로는 국제적인 모임이나, 어쩌면 선교인들이 본국으로 돌아와 참석자들에게 경험담을 들려주는 대회가 그런 경우일 것입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적지 않은 수의 필리핀 형제 자매들이 다른 아시아 나라들이나 바다의 섬들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몇 번에 걸쳐, 전 세계 증인들이 기금을 헌금하여 선교인들이 모국에 돌아가 그곳의 대회에 참석하도록 도운 적이 있습니다. 필리핀 선교인들 역시 그러한 사랑의 마련으로부터 혜택을 받았습니다. 1983년과 1988년, 1993년, 1998년에 수십 명이 도움을 받아 필리핀에 돌아와서 가족 및 친구들과 함께 대회를 즐겼습니다. 1988년 보고를 보면, 12개 나라에서 봉사하는 54명의 선교인이 필리핀에서 열리는 대회를 위해 돌아왔습니다. 그 당시, 이들 54명은 전 시간 봉사 기간이 평균 24년이었습니다. 참석자 모두는 프로 중에 그들이 소감과 경험담을 이야기할 때 즐겼습니다.

관련된 사건이나, 악조건을 무릅쓰고 진행하려는 형제들의 결의 때문에 대회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컨대, 1986년 “하나님의 평화” 지역 대회가 민다나오 섬의 수리가오에서 열리기 직전에 풍속 150킬로미터의 태풍이 그 도시를 강타하였습니다. 스타디움 지붕이 심하게 파손되었습니다. 그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전력이 끊겨, 대회가 끝난 뒤까지도 복구되지 않았습니다. 물은 6킬로미터 밖에서 길어 와야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증인들은 함께 모이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은 부서진 연단에서 남아 있는 부분을 회수하여 스타디움 옆 체육관에 다시 설치하였습니다. 발전기를 임대하여, 조명 몇 개, 음향 시설 그리고 식당의 냉장고에 전력을 공급하였습니다. 5000명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하였지만, 최고 참석자 수 9932명이 대회를 즐겼습니다! 확실히 그들은 순조로울 때만 그리스도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국제 대회들은 특별히 기억에 남습니다. 통치체는 국제 대회가 마닐라에서 1991년과 1993년에 열리도록 마련하였습니다. 대표자들은 이 도시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여행을 해서 다른 나라를 방문할 만한 여력이 없는 필리핀 형제 자매들에게는 이 대회가 격려를 주고받을 수 있는 참으로 훌륭한 기회였습니다! (로마 1:12) 외국인 대표자들은 필리핀 형제들이 자신들에게 나타낸 따뜻하고 우호적인 환대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온 한 부부는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환영에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우리 모두를 두 팔을 벌려 맞이하고서 참으로 사랑스럽게 우리를 감싸 주었습니다!”

1993년에는 마닐라에서 스타디움 세 곳을 사용하였으며, 통치체 성원이 연설할 때는 언제든지 세 군데가 전화 중계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이 타갈로그어로 발표되었을 때 참가자들은 참으로 감격하였습니다! 한 젊은 자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기쁨에 넘쳤어요. 「신세계역」을 타갈로그어로 받게 될 때를 고대해 왔었거든요. 그 성경을 받다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1998년에는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1958년 이래 처음으로 필리핀 형제들이 다른 나라들로 대표단을 파견하도록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107명이 미국의 서해안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갔습니다. 9월에는 35명이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에 참석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러한 대회들은 여호와의 백성을 교육하고 연합시키는 데, 그리고 모두가 여호와를 그들의 성채로 삼도록 돕는 데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을 야외 활동으로 돌려 봅시다. 언어가 그렇게도 많은 나라에서 어떻게 이 일이 수행되어 왔습니까?

좋은 소식을 여러 언어로 제공하는 일

앞서 언급하였듯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의 언어로 진리를 배우기가 더 쉽습니다. 필리핀에서는 여러 가지 언어가 사용되기 때문에 이것이 도전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증인은 사람들에게 그들 고유의 말로 증거하고 또 성서 출판물을 여러 가지 언어로 구비함으로써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대개 한 증인이 특정 언어 집단에 가게 되는 것은 이미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일 것입니다. 어떤 경우 그 언어를 아는 증인이 거의 없을 때는, 열심 있는 전도인이나 파이오니아들이 그 언어를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된 사도 바울을 본받았습니다.—고린도 첫째 9:22.

필리핀이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들 가운데 세계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긴 하지만, 영어가 주민 대부분의 모국어는 아닙니다. 모두가 영어를 잘 읽는 것은 아니어서, 몇 가지 필리핀 언어로 출판물이 필요합니다. 여러 해에 걸쳐 여호와의 증인은 성서 출판물을 적어도 그 언어들 중 열일곱 가지로 번역해 왔습니다. 한두 가지 팜플렛밖에 없는 언어도 있는데, 이를테면 남부 지방에 사는 이슬람교 주민의 언어인 타우수그어나 이 나라 북단에 가까운 곳에 사는 작은 인종 집단이 사용하는 이바나그어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사람들이 주요 언어 일곱 가지 중 하나를 이해하고 편하게 사용합니다. 「파수대」는 이 언어들로 번역되고 인쇄됩니다. 그래서 왕국회관이나 크고 작은 대회에서 영적 양식은 이 언어들로 주로 제공됩니다.

근년에 정부에서는 기본적으로는 타갈로그어와 동일한 필리피노어의 사용을 권장해 왔습니다. 한 세대가 넘는 동안 그 효과는 주목할 만했습니다. 대화와 인쇄물에서 필리피노어의 사용은 현저히 증가한 반면, 다른 언어의 사용은 변동이 없거나 줄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파수대」의 인쇄 부수에도 반영되고 있습니다. 1980년에는 타갈로그어판의 호당 총 발행 부수가 2만 9667부였습니다. 2000년에 와서는 그 수치가 4배가 되어, 호당 12만 5100부에 이르렀습니다. 같은 기간에, 영어판은 변동이 미미하고 여타 필리핀 언어판들은 다소 증가하였을 뿐입니다.

베델 가족이 야외 활동을 지원하다

약 380명의 전 시간 봉사자들이 ‘대마닐라’라고 일컫는 복합 도시의 일부인 케손시티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지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69명의 번역진이 자국어로 번역하고 교정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번역진의 일부는 근년에 「신세계역」의 히브리어 성경 번역을 3개 언어 즉 세부아노어·일로카노어·타갈로그어로 완료하였습니다. 이 성서의 그리스어 성경이 1993년에 발표된 이래 내내 형제들은 「신세계역」 전서를 받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타갈로그어판을 2000년 말에 지역 대회 발표물로 받고서 참으로 감격하였습니다! 세부아노어와 일로카노어판이 곧 뒤를 이었습니다. 야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명료하고 정확하고 일관성 있는 성경 번역판으로부터 이제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필리핀 베델 가족 성원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28개의 언어 및 방언을 할 줄 압니다. 그래서 많은 성원이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을 번역하는 자격을 잘 구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번역 일은 베델에서 하는 활동의 일부일 뿐입니다.

베델 자원 봉사자들은 매우 중요한 야외 전파 활동을 지원하는 여러 가지 업무를 수행합니다. 일부 형제들은 잡지를 비롯한 출판물을 인쇄합니다. 자원 봉사자들은 또한 서적을 루손 섬의 여러 지역으로 배달합니다. 여러 사람이 장비 수리·요리·청소와 같은 베델 집 자체에서 필요한 지원 업무를 수행합니다. 다른 성원들은 봉사부에 임명되어, 여러 언어로 서신 연락을 함으로써 회중들, 여행하는 감독자들 그리고 야외에서 일하는 전 시간 봉사자들을 지원합니다. 필리핀 군도 전역에 있는 약 3500개의 회중들과 얼마나 많은 서신을 주고받을 것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부가 1934년에 처음 설립된 이래 1970년대 중반까지는 지부 활동이 지부의 종 즉 감독자의 감독 아래 있었습니다. 조지프 두스 산투스가 하와이로 귀국한 다음에는, 캐나다 선교인인 얼 스튜어트가 약 13년 동안 그 책임을 맡았습니다. 다른 두 형제가 그 후에 단기간씩 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66년에, 이미 1954년에 와 있던 덴턴 홉킨슨이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가 그 직책에서 약 10년 동안 부지런히 일하고 있을 때, 여호와의 조직은 전 세계 지부들을 감독하는 데 새로운 마련을 시행하는 것이 적절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계 전역의 모든 지부에 보낸 지시와 일치하게, 1976년 2월 감독 업무는 단 한 사람으로부터 지부 위원회로 이관되었습니다. 통치체의 인도 하에 일하는, 자격을 갖춘 이 일단의 남자들은 야외와 지부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을 내릴 책임을 지게 될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필리핀 지부 위원회는 다섯 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원래의 위원들이 대부분 외국의 선교인들이라서 필리핀 형제들의 수를 늘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동안은 위원회가 일곱 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이 지부 위원회 마련의 이점이 곧바로 나타났습니다. 지금 지부 조정 위원으로 일하는 덴턴 홉킨슨은 소견을 이렇게 피력합니다. “되돌아보면 그 마련이 얼마나 현명하고 시기적절한 조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업무의 양과 조직의 크기로 볼 때,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붙들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책임의 짐이 이제 보다 더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습니다.”

잠언 15:22은 “조언자가 많으면 성취된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상의할 때 지혜의 귀중한 결집이 이루어집니다. 필리핀 지부 위원회는 그 원칙을 적용합니다. 홉킨슨 형제가 지부 감독자로 임명된 이래 베델 요원의 규모는 10배로 증가하였고, 업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부 위원회는 현재 여호와의 오래된 종들 다섯 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전 시간 봉사에 평균 50년 이상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의 통합된 경험은 이 모든 섬들에서의 활동이 여호와의 손의 인도 아래 활기 있게 진전되어 감에 따라 확실히 도움이 되어 왔습니다. 지부 위원회를 비롯한 베델 가족 모두는 이 활동을 지원하는 일을 웅대한 특권으로 여깁니다.

진리를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

전파 활동을 수행하는 일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정확한 지식에 이르는 것”이라는 하느님의 뜻과 참으로 일치합니다. (디모데 첫째 2:4)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필리핀 전역에서 열심 있는 전파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까?

마를론은 항상 말썽을 일으키는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흡연, 술 취함, 마약 사용,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난동을 부리는 등 못된 버릇이 많은 사람으로 마을에 알려져 있었습니다. 증인들이 찾아왔을 때 마를론의 어머니가 왕국 소식에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그에게 연구를 사회하기 위해서 먼짓길, 진창길을 걸어 다녔습니다. 처음에 마를론은 함께 연구하는 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가끔 그저 지나치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어머니에게 연구를 사회하는 형제들은 그에게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연구를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국회관 집회에 처음 참석하기 위하여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자르기까지 하였습니다. 마를론이 급속히 발전하자, 주민들은 그의 생활 방식이 크게 달라진 것을 보고서 놀랐습니다. 마를론은 지금 전 시간 파이오니아 봉사자로 일하면서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습니까? 그는 파이오니아들이 그의 어머니와 연구하기 위하여 찾아오는 바로 그 꾸준함을 보고 그들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노라고 밝혔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일 경향이 있는 부류의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소식의 선포자들은 사람들을 미리 판단하지 않고, 그들에게 들을 기회를 제공합니다. 마린두케라는 작은 섬에서 한 특별 파이오니아가 한 집에서 증거를 하였습니다. 증거를 마치고서, 그 자매는 그곳에 다른 사람이 또 살고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집주인은 위층에 누가 산다고 대답하고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힘들게 올라갈 것 없어요. 그 남자는 난폭한데다 걸핏하면 화를 터트린답니다.” 그런데도 파이오니아는 그 사람에게도 왕국 소식을 들을 기회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으로 올라가서 보니까, 그 남자는 마치 이 파이오니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 같았습니다. 자매는 미소를 지으면서 무료 가정 성서 연구를 제의하였습니다. 카를로스라는 그 남자가 그 제의를 반가워하는 것 같아서 자매는 놀랐습니다. 그 남자 그리고 그의 아내와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파이오니아가 두 번째 방문하던 날, 카를로스는 자신과 아내는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토로하였습니다. 파이오니아가 처음에 아래층을 방문하였을 때, 카를로스는 자기 귀를 마룻바닥에 대고 들었으며, 그 집주인이 파이오니아에게 위층으로 올라가지 말도록 만류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그는 그 파이오니아가 그 권유를 무시하고 무조건 올라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평화를 찾게 해 달라는 자기들의 요청에 대한 응답일 것 같아서 그랬던 것입니다. 성서 연구는 정말로 그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침례를 받았으며, 카를로스의 아내는 지금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자입니다.

빅토르라는 남자는 불교와 가톨릭교의 가르침에 접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왜 그렇게도 많은 종교가 있는지 궁금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직접 진리를 탐구해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슬람교·힌두교·신도·유교·진화론과 기타 철학들을 조사해 보고 나서 그것들 중 아무것도 자기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탐구하던 중에, 그는 성서에만 정확한 예언이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서 탐구에 집중하였습니다. 성경을 조사함으로써, 그와 그의 여자 친구 마리벨은 자기들 스스로 삼위일체·지옥불·연옥이 거짓 가르침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도 뭔가 빠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마리벨과 결혼한 뒤 얼마 지나서, 빅토르는 한 증인과 이야기를 하다가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점을 자신의 성서로 확인한 다음, 빅토르는 기도할 때 즉시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는 왕국회관에 참석하면서 영적으로 빠르게 발전하였습니다. 그와 마리벨은 둘 다 1989년 5월에 침례를 받았고, 빅토르는 현재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하면서 회중들을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온갖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도와 왔습니다. 루손 섬의 남부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를 하던 프리미티바 라카산딜리는 어떤 마을에서 한 부부와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두 자녀가 있는데, 경제적으로는 가난하였습니다. 한번은 프리미티바가 성서 연구를 하기 위해 도착했다가 깜짝 놀랐는데, 큰아이가 그 집 안에서 자루 속에 들어가 매달려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프리미티바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어머니가 칼을 휘두르면서 그 아이를 막 죽이려던 참이었어요. 나는 멈추게 하고서 왜 그런 짓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경제적으로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프리미티바는 그들에게 그들의 문제에 관한 성서의 교훈을 알려 주었고, 그로 인해 아이의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서 연구를 계속하였고, 집회 장소에 가려면 8킬로미터를 걸어가야 하는데도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부부는 발전해서 침례를 받았으며, 지금 남편은 회중에서 장로입니다. 프리미티바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을 뻔했던 그 아이가 지금은 정규 파이오니아랍니다.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분의 종들에게 부여하신 활동은 현재와 미래에 생명을 구하지요.”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함

아직도 왕국 선포자가 별로 없는 지역이 많습니다. 파이오니아들과 전도인들이 그러한 곳에 가기로 자원하였습니다. 파스콸 타토이와 마리아 타토이 부부는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필리핀 서편 코론 제도의 구역에서 봉사를 지원하기 위하여 특별 파이오니아인 앙겔리토 발보아와 함께 가기로 자원하였습니다. 생계 수단으로, 파스콸은 다른 한 형제와 고기잡이를 나가고, 마리아는 찹쌀떡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순회 감독자는 방문 기간에 다른 섬인 쿨리온에서 봉사할 필요성을 언급하였습니다. 그곳에는 나환자촌이 있는데 전도인은 네 명뿐이었습니다. 그는 타토이 부부에게 그곳에 가도록 권하였습니다. 파스콸과 마리아는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였으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노력을 축복해 오셨습니다. 쿨리온에 있던 네 명의 전도인이 지금은 두 개의 회중이 된 것입니다.

1970년대 중반에 수많은 선상 난민이 베트남에서 도피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마침내 필리핀에 다다랐습니다. 약 20년 동안 난민 수용소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한 큰 수용소가 팔라완 섬에 있었습니다. 필리핀 형제들은 이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해 주기로 자원하였습니다. 베트남어를 하는 한 형제가 미국에서 와서 도왔습니다. 수용소 안에서 진리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 전에 여호와의 이름과 증인들을 잘 알게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필리핀의 여러 오지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격지 봉사를 할 때 종종 전도인들과 파이오니아들을 동반합니다. 노르마 발마세다가 산악 지대인 이푸가오 도에서 봉사하던 이야기를 합니다. 그 자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대개 월요일에 가는데, 서적이 가득한 봉사 가방과 옷가지, 식품을 가지고 가지요. 토요일 아침까지 쓸 만큼 말입니다. 그날 오후에는 우리의 회중 집회를 보기 위해 돌아옵니다.”

일부 회중에서는 전파 여행을 마련하는데, 특히 날씨가 좋을 때 합니다. 그들은 벽촌 지역으로 가서 며칠이나 1주일을 보내기도 합니다. 지금은 베델 봉사를 하는 니카노르 에방헬리스타는 그러한 봉사를 하던 일을 기억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골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관심이 있으면 ‘우리 집에서 묵어 가셔도 돼요. 여기서 식사 준비도 하고요’ 하는 것이 필리핀 풍습입니다. 때때로 파이오니아들은 밤늦게까지 관심자들과 성서 연구를 하곤 하였습니다. 바로 거기서 잤으니까요.”

에이타족이 진리를 배우다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증거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여호와의 종들은 에이타족—다른 이름으로는 네그리토족—과 접촉을 해 왔습니다. 에이타족은 필리핀의 원주민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수가 비교적 적어서, 그들과 접촉하는 일은 항상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들 중 다수가 유목민으로서 산림 속에서 살면서, 사냥감을 잡거나 야생 열매와 야채를 찾아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프리카의 피그미족과 다소 유사한 데가 있어, 키는 150센티미터가 못 되고 검은 피부색에다 곱슬머리입니다. 공동 사회에 동화되어 온 사람들도 있고, 인구 밀집 지역 가까이서 좀 더 영구적인 터전을 잡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 다수는 피나투보 산 주변의 산악 지대에서 내내 살다가, 그곳에 엄청난 화산 폭발이 있던 때에 거처를 옮긴 것입니다.

다른 집단의 에이타족이 필리핀 중앙의 파나이 섬에 살고 있습니다. 로디비코 이노와 그의 가족은 그 지역 출신의 에이타족입니다. 성서 원칙을 적용함으로 로디비코는 많은 변화를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는 나쁜 습관이 많았습니다. 빈랑을 씹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도박을 했거든요. 또 대단히 폭력적이었지요. 그래서 우리의 가정생활은 불행했습니다. 이런 나쁜 습관을 버리지 않았더라면 난 벌써 생명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내 이가 검붉은 색이었는데 이제는 하얘졌지요. 지금은 회중의 장로입니다. 이 모든 축복은 여호와로부터 받은 것이지요.” 이 에이타족 가족처럼, 비록 작은 부족 출신일지라도 사람들은 여호와의 길을 따르는 데서 오는 자유를 경험하고 있습니다.—요한 8:32.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자유를 전해 주다

도움을 받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들입니다. 1950년대 이래 여호와의 증인은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을 방문하는 데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상당수의 수감자들이 도움을 받아 진리의 길을 받아들였습니다.

젊은 사람인 소프로니오 하인카드토는 반정부 반란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는 체포되어 6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루손 섬의 뉴 빌리비드 교도소 수감 중, 그는 재소자들에게 허용되는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한 재소자에게 유의하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이미 여호와의 증인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거의 매일같이 성서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소프로니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과거에 투쟁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 참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향상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느님의 왕국만이 바람직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배워 알게 되었습니다. 인근 회중에서 오는 형제들의 도움으로 소프로니오는 영적으로 발전하여, 농작물 급수용으로 사용하는 교도소 우물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형기를 마치고 난 뒤, 소프로니오는 꾸준히 노력하여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전 시간 봉사 기간에 그는 열다섯 명 정도가 진리의 길을 받아들이도록 도울 수 있었습니다. 결혼 후에는 여섯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중 셋은 지금 전 시간 봉사를 즐기고 있는데, 한 사람은 순회 감독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1995년에는 아들 가운데 둘이 봉사 훈련 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진리는 진정한 자유를 소프로니오에게, 그의 가족에게 그리고 그가 도운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팔라완 섬의 이화히그 유형지에 있는 수감자들에게 전파해 오고 있는데, 사실 그들은 바로 그 구내에 조그마한 왕국회관을 짓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방화, 절도 및 몇 건의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 중이던 한 재소자가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에서 배운 것을 적용하도록 도움을 받았을 때, 그의 삶은 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23년이 넘는 기간 감금된 생활을 하고 나서, 이 남자는 곧 석방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는 그 오랜 세월 후에 다시 자기 가족과 함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족은 그 사람 때문에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나머지 “제발 돌아오지 말아요”라고 전갈을 보냈습니다. 그 가족은 하느님의 말씀이 그의 생활에 가져온 엄청난 변화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차분하고 평화로운 그리스도인이 고향 마을에 돌아왔을 때 그 가족은 참으로 놀랐습니다!

전국에서 가장 큰 여자 교도소가 대마닐라 시 만달루용에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여호와의 증인은 이 시설에 제한된 출입만 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성서를 이미 연구하고 있던 한 여자가 이 교도소로 이감되고 나서 방침이 변하였습니다. 교도소측은 그 여자에게 교도소 내 다른 종교 집단 중 하나에 가담해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그 여자는 자기는 그럴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오직 여호와의 증인과만 숭배하기를 원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교도소 측은 이에 동의하고는 증인들이 이 시설에 매주 방문하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몇몇 여자 수감자들이 침례를 받았으며, 한 인근 회중은 관심 가진 여자 수감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정기적으로 「파수대」 연구를 비롯한 일부 집회를 사회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소식은 교도소에 있는 일부 수감자들에게 독특한 자유를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여호와께 귀중하며, 그분의 백성은 그러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오래된 종들이 끈기 있게 일하다

한 성서 잠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백발은 의의 길에 있을 때에 아름다운 면류관이다.” (잠언 16:31) 그렇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여호와의 기쁨을 그들의 성채로 삼아 온 사람들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만 해도, 필리핀에서 신권 조직은 작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전으로까지 자신의 봉사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그래서 레오데가리오 발라안을 만나 보는 것은 매우 격려적입니다. 그는 1938년 이래 전 시간 봉사자로 일해 왔습니다. 전시에 그와 동료들은 일본군에게 학대를 받으면서도 계속 전파하였습니다. 전후에는 아내 나티비다드와 함께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다가, 마침내 여행하는 활동을 하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말년에 그들은 판가시난 도에서 노약자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였습니다. 나티비다드는 2000년에 사망하였지만, 레오데가리오는 그 임명을 계속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가 항상 해온 일—전파 활동—을 하려는 그의 결의는 모든 사람에게 격려가 되고 있습니다.

증거 활동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급속히 증가하였습니다. 그 당시 진리를 배운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계속 봉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대전 중에 파시피코 판타스는 증인인 이웃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성서 출판물을 읽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엔 일반 [지금의, 정규] 파이오니아를 신청했는데, 아직 침례도 안 받은 상태였거든요.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기에 받았지요.” 그때가 1946년이었습니다. 파시피코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면서 전국을 몇 군데 다녔습니다. 그는 다른 특권도 누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길르앗 제16기 학급에 초대를 받았고, 뉴욕에서 열린 1950년 국제 대회에도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졸업 후에는 미국 미네소타 주와 노스다코타 주에서 순회 감독자로 일했고, 그 후 필리핀으로 돌아와서는 마닐라에서 줄곧 민다나오 섬에 이르기까지 파시그 강 이남의 전국을 담당하는 지역 감독자로 일하였습니다.”

그 다음 몇 해 동안 판타스 형제는 베델에서 그리고 여행하는 감독자로서 다양한 임명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1963년에 그는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에게는 자녀들이 생겼고, 그래서 그들은 정착하여 가족을 부양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한 가족으로서 계속 여호와를 섬겼으며, 세 자녀 모두 여호와의 찬양자로 성장하였습니다. 이 세 사람은 지금 모두 장로로 일하는데, 한 사람은 봉사 훈련 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베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노년인데도 판타스 형제는 회중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숭배에 바칠 만한 회관들

근년에 이르러서야 필리핀의 여호와의 백성은 숭배 장소로서 왕국회관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절대다수의 회중은 형제들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물론 1세기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집회를 보기 위하여 가정집들을 사용하였습니다. (로마 16:5) 그렇지만 현대에는 회중들이 성장하면서 많은 사람을 안락하게 수용할 수 있는 장소를 갖는 일이 바람직하게 되었습니다.

데이비드 레드베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재원의 부족으로 인해 그렇게 하기가 매우 어려운 회중들이 많았습니다. 큰 도시인 대마닐라에서도 왕국회관을 회중이 소유한 부지 위에 지은 경우는 한 군데밖에 없었습니다. 왕국회관이 있는 다른 모든 곳에서는, 회중이 건물은 가지고 있어도 대지는 소유하지 못했지요.” 형제들의 임금 수준이 너무 낮아서 회중들은 대지를 확보할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방편껏 변통을 해 나갔습니다. 자신들의 개인 소유를 기꺼이 제공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덴턴 홉킨슨는 마닐라 형제 산토스 카피스트라노를 기억하는데, 그는 자기 집 2층을 약 40년 동안 왕국회관으로 사용하도록 제공하였습니다. 홉킨슨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카피스트라노의 아내가 사망하고 나서, 그의 자녀들이 아래층에 기거했습니다. 왕국회관이 2층에 있어서, 그는 매우 좁은 공간을 자기 방으로 쓰면서 그 한 면에 주방을 두고 있었습니다. 왕국회관이 2층 대부분을 차지했던 겁니다. 그 형제가 불편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본인은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행복해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형제들의 태도였지요.”

마침내 왕국회관을 회중이 소유한 땅에 짓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페소의 가치가 상승하고 1980년대에 와서 임금도 어느 정도 인상되어, 돈을 빌리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몇 회중이 대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통치체가 제정한 사랑의 마련이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왕국회관 기금에 관한 광고가 미국과 캐나다에서 있었고, 그 후 오래지 않아 필리핀은 왕국회관 건축이라는 특정 목적으로 기부된 기금으로부터 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마련은 “균등하게 하는 일이 있게 하”는 원칙을 따른 것으로, 대여금 마련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고린도 둘째 8:14, 15) 일은 서서히 시작되었지만, 그 마련이 다른 나라에서 효력을 발휘해 나가는 상황을 듣게 되자, 점점 더 많은 형제들이 격려를 받아 그들도 왕국회관을 갖고자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이 마련은 참으로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왕국회관 예탁금에 관하여, 지부 사무실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왕국회관 건축 계획은 총 1200건이 넘어섰습니다. 이 마련은 분명히 전국 각지에 대단한 파급 효과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기금의 큰 몫이 다른 나라들로부터 들어왔지만, 점차 필리핀 형제들이 자체 마련을 지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지부 사무실은 이렇게 말합니다. “최근 수년간은 왕국회관 건축 계획의 모든 재원이 필리핀 국내 형제들로부터 들어오는 반환금과 기부금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경제가 침체된 지역일지라도 자금을 공동으로 운영할 때 대단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많은 수의 회중이 현재 왕국회관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전국에 대략 3500개의 회중이 있는데, 아직도 자체 모임 장소를 필요로 하는 회중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회중들 가운데 약 500개는 전도인이 15명 미만이어서 왕국회관 기금을 이용할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왕국회관을 소유하는 일이 보다 더 실현 가능하도록 회중들을 합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집회 시간표에 대한 견해의 조정

자체 왕국회관을 소유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일부 회중들은 벽촌에 있습니다. 형제들은 두 시간이나 네 시간 또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 험한 지형을 걸어가야 집회 장소에 도착합니다. 그 결과, 집회를 보기 위해 중심지에 1주일에 한 번만 모이는 것이 현실적인 지역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런 회중들 가운데 많은 회중에서는 회중 서적 연구만 제외하고는 모든 집회를 하루에 갖습니다. 형제들은 네 가지 집회에 참여할 준비를 해 가지고 왔습니다. 점심 식사도 가지고 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집회 장소까지의 먼 거리를 1주에 한 번만 왔다 갈 필요가 있게 되고, 다른 날에는 야외 봉사와 같은 활동을 거주 지역에서 수행하였습니다.

1980년대에는 이런 관례가 그다지 벽촌도 아닌 회중, 심지어는 도시 지역의 회중들에도 파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마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일부 형제들이 돈을 절약할 방도를 생각한 것 같습니다. 집회 보는 날수가 적어짐으로 인해 오가는 일이 줄고 비용도 줄었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지나치게 편의 위주가 된 나머지, 아마도 다른 날의 시간을 교육이나 세속일과 같은 개인적인 일을 추구하는 데 사용한 것 같습니다.

점점 더 많은 회중들이 네 가지 집회를 하루에 보고, 어떤 회중에서는 심지어 다섯 가지 집회를 전부 하루에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추세는 필리핀의 회중들이, 주 중 각기 다른 3일에 집회를 갖는 세계 전역에 있는 대부분의 여호와의 백성이 행하는 것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음을 의미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이 면에서 다소 균형을 잃게 되었습니다. 1991년의 지구 감독자 방문 중에 이 문제가 주의를 끌게 되었습니다. 지구 감독자는 통치체와도 상의하였습니다. 통치체의 반응은 이러하였습니다. “우리는 참작할 만한 극단적인 상황이 있는 것이 아닌 한, 그것이 좋은 관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처음에는 도시 지역, 다음에는 시골 지역에 있는 형제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 확립된 집회 마련에 순응한다는 점 외에도, 회중들은 모든 집회 자료를 세 시간 반이나 네 시간 안에 억지로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보다 별도로 집회들을 가짐으로써 영적으로 유익을 얻게 될 것이라는 점이 지적되었습니다. 어린 자녀들과 새로운 관심자들은 그런 긴 집회 시간표를 따르기가 어려웠습니다. 장로들도 여러 집회보다 한두 집회를 준비할 때 질 높은 연설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언에 대한 회중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절대다수의 회중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신속히 주 중 집회를 갖는 조정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매우 벽촌인 회중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회중이 매주 좀 더 균형 잡힌 영적 프로그램을 즐기고 있습니다.

대회 회관들

수십 년 동안 순회구들은 학교 운동장 스탠드, 체육관, 경마장 등 공공시설을 이용하여 대회를 열었습니다. 어떤 불편이 있더라도, 형제들은 즐겁게 연합하는 이러한 기회들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왕국회관의 경우처럼, 대회 회관을 확보하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경제적인 제약이 여기에도 절실히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순회구들은 자체 모임 장소를 가지려는 열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꽤 여러 군데에 수수한 대회 회관이 세워졌습니다. 이 회관들은 다른 여러 나라에서처럼 여러 순회구가 아니라 대개 한두 순회구가 사용합니다. 많은 경우 부지는 기부를 받거나, 적당한 가격으로 특히 시골 지역에 매입하였습니다. 그러면 형제들은 그들의 헌금을 공동 관리하여 간단한 구조물을 세웠는데, 대개 벽은 없고 청중을 가려 주는 지붕만 있는 홀에 콘크리트 바닥·연단·좌석이 있습니다.

대마닐라 지역에서는 그것마저도 가능하지 않았는데, 무엇보다도 땅값이 엄청나게 비싼데다 도회지에 적합한 구조물을 세우는 비용 때문이었습니다. 이 지역 회중들이 그 목적으로 기금을 모으기 위해 헌금하였지만, 거두어들인 금액은 땅을 매입하는 데만 필요한 금액에도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가 거의 다 가도록, 대마닐라에서 대회는 계속 학교나 경기장 스탠드 같은 곳에서 열렸습니다.

한편 대마닐라 지역에서 회중과 순회구의 수가 계속 증가하여, 대회 회관에 대한 필요성이 절실해졌습니다. 적당한 땅을 물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건립 계획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특권을 알리는 편지가 각 회중으로 나갔습니다. 1992년에는 약 6헥타르의 땅을 대마닐라의 북단 라그로 구 인근에서 찾아냈습니다.

대마닐라의 회중들은 헌금과 자원 봉사자들을 보냄으로 건축 공사를 지지하였습니다. 국제 종들이 몇 개 나라로부터 입국하여 공사를 지원하였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으로 뉴질랜드에서 온 로스 프랫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997년 3월 우리는 브루클린으로부터 착공 승인을 받았습니다. 토공사(土工事)가 큰일이었는데, 건물 정지 작업을 하기 위해 2만 9000세제곱 미터의 흙을 파냈습니다. 상근 인원이 50명 내지 60명이었지요. 대회 회관은 1998년 11월에 완공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봉헌되었습니다. 그 회관은 1만 2000명까지 수용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지역 대회도 그곳에서 열 수 있습니다. 이 대회 회관은 벽면이 틔어 있어, 청중이 프로를 듣고 있는 동안 열대성 훈풍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대마닐라 시내 및 주변의 열여섯 개 순회구가 현재 이 회관에서 정기적으로 영적 프로그램을 즐기고 있습니다.

지부 자산의 증가

야외에서 회중과 순회구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지부의 업무량도 증가하였습니다. 1980년에는 야외에 약 6만 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10년이 지나가기 전에, 필리핀은 전도인이 10만 명을 넘는 나라들의 대열에 가담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같은 기간에 베델 가족은 102명에서 150명으로 늘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초에 벌써 지부 건물의 공간은 협소해지고 있었습니다. 수용 공간이 더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통치체에서 부지를 더 구해 보라는 지시가 왔습니다. 펠릭스 파하르도는 진행 사항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베델 근처에 매물로 나온 부동산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집집으로 다녔습니다. 필리핀이나 중국인 소유주들은 부동산을 팔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한 부동산 소유주는 단호하게 ‘중국 사람은 팔지 않아요. 우린 사들이지, 절대로 팔진 않는다고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지부 근처에서는 아무 땅도 구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다른 곳에서 부지를 물색하였습니다. 필요하다면 지부 사무실을 도시 밖으로 이전할 수도 있었습니다. 인근의 도(道)에서 몇 군데 부지를 찾아냈습니다. 통치체는 라구나 군의 산페드로 근처에 있는 큰 필지의 땅에 특히 관심을 가졌습니다. 한 형제가 적당한 가격으로 내놓은 땅이었습니다. 매입하라는 승인이 났습니다. 그 땅에 사무동·베델 집·공장을 짓는 설계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곳으로 이전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 지역에는 전화가 없었고, 도로 상태도 나빴으며, 안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부지가 지부가 들어설 최적의 장소가 아님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농장으로 만들어서 베델 가족의 필수품을 공급하게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더 많은 지부 공간의 필요성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상치 않은 사건의 반전으로 여호와의 지시가 나타나는 것 같았습니다. 펠릭스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뜻밖에도, 우리에게서 가장 가까운 이웃 주민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땅을 팔려고 하는데요. 1000제곱 미터인데, 여러분에게 팔았으면 해요.’ 그래서 통치체는 그 땅을 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세계 본부에 우리의 건축 계획을 제출했을 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부지를 더 구해 볼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좀 더 큰 부지가 필요합니다.’

그 직후, 한 의사와 변호사가 찾아와서는 ‘우리의 부동산을 여러분에게 팔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 땅 역시 1000제곱 미터였습니다. 다음으로, 근처에 약 1헥타르의 땅을 가지고 있던 한 부인도 팔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땅을 아주 적당한 값에 팔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꽤 큰 땅덩어리를 차지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본부에서는 ‘좀 더 알아보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생각지도 않은 도움의 손길이 왔습니다. 이미 자기 부동산을 우리에게 매각한 그 의사와 변호사가 다른 이웃 주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그들도 땅을 팔라고 설득시켰던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자기 땅을 지부에 내놓았습니다. 인근 부동산을 거의 다 매입하고 났을 때, 또 한 가지 제안을 본부로 보낸 바 있습니다. 그러자 다시 이런 회답이 왔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땅이 좀 더 필요합니다.” 형제들은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이 근처에는 더 나올 땅이 없는데.’

이때쯤 해서 전화가 걸려 왔는데, 그것은 전에 ‘중국 사람은 팔지 않아요’라고 말하던 사업가가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에 관한 전화였습니다. 지금은 팔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펠릭스는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리치 형제와 내가 알아보니까, 다른 아무도 그 매물에 관심이 없더군요. 그래서 우리가 아주 싼값에 사들였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이 문제에 개입하신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 1헥타르의 땅이 또다시 추가되었고, 드디어 본부에서도 “건축 설계를 착수할 만큼 확보되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변함에 따라, 산페드로의 농장은 더 이상 필요치 않음이 분명해졌습니다. 베델 가족을 위한 식품의 상당 부분은 농장에서 생산하는 비용보다 더 낮은 가격으로 대량 구매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농장을 매각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91년에는 농장이 새 소유주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매각에 따른 수익은 지부에 새 건물을 짓는 비용을 충당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새로운 지부 시설을 건축하다

지부가 이제 소유하게 된 땅은 1947년에 매입한 원래의 1헥타르 필지의 세 배 이상 크기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일본 지부에 소재한 지역 건축 기술 사무소의 지원을 받아 설계도를 작성하였고, 정지 작업은 1988년 중반에 시작하였습니다. 낡은 목조 건물의 일부는 헐게 되어 있었습니다. 새로운 건물 가운데는 11층짜리 숙소동과 2층 높이의 큰 공장이 포함될 것이었습니다. 왕국회관도 부지에 건립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일에 임명된 길르앗 졸업생들 외에도, 약 5개국에서 300명에 가까운 형제 자매들이 장기 국제 종 및 단기 국제 건축 자원 봉사자들로 와서 건축 공사에 기여하였습니다. 인근 주민들은 외국 사람들이 와서 일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이 자비를 들여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한층 더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국내 형제 자매들도 국제적 연합의 분위기에 가세하였습니다.

땅을 취득할 때처럼, 여호와의 인도는 공사가 진행되면서도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면, 필리핀 내에서 한 회사만이 그 건물에 필요한 유형의 지붕 판재를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부의 자재 주문은 그 회사의 주문자 명단에 301번째로 올라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그 회사의 부사장과 직접 면담할 약속을 하고서, 우리 활동의 자원 봉사적 성격을 설명하였습니다. 그 회사의 이사회가 모임을 갖고 형제들의 요청을 승인하고는, 그 주문을 생산 목록에서 제1번으로 앞당겨 놓았습니다. 그 자재가 배달된 직후, 그 회사의 근로자들은 동맹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지부 건축 공사에 참여한 수많은 형제들은 훌륭한 영을 나타냈습니다. 매주 약 600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인근 회중들에서 일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 사실상 공사 일의 30퍼센트 정도는 이 자원 봉사자들이 한 것입니다.

높은 건축 표준이 유지되었습니다. 필리핀 열도는 활성 지진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 건축의 구조 설계를 하는 형제들은 그 11층 건물이 강한 진동을 견딜 수 있도록 보강하였습니다. 이 고품질의 건물들은 1920년대에 지은 것까지 포함하는 이전 것들과 비교하여 참으로 달랐습니다! 가장 오래된 것들은 헐려 새 건물이 들어설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드디어 1991년 4월 13일, 지부 봉헌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통치체의 존 바가 1718명의 청중에게 봉헌사를 하였습니다. 40년 이상 여호와를 섬겨 온 형제 자매들이 봉헌식에 초대되어 10개국에서 온 손님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즐겼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전화선을 통하여 필리핀 열도 6개소에 중계된 영적으로 세워 주는 프로그램으로부터 7만 8501명이 유익을 얻었습니다.

필리핀 형제들이 국제 종들로 진출하다

지부 공사 기간에, 다른 나라에서 온 국제 종들은 필리핀 형제들에게 기술을 전수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훈련시킨 후베르투스 휘프나겔스의 소감은 이러합니다. “이곳의 많은 형제들은 매우 열심이며, 배운 것을 적용할 줄 압니다.” 그 결과, 필리핀 공사가 끝났을 때 훈련받은 이 형제들 가운데 일부는 국제 종으로 나가, 다른 나라들 특히 동남아시아에서 추진되는 지부 건축 공사를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케손 도 출신인 조얼 모랄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마닐라의 지부 건축 공사장에서 1주일 동안 자원하여 일할 생각으로 왔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일손이 필요하였으며, 계속 머물러 있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비록 건축 일에 폭넓은 경험이 없었지만, 지부 공사 일을 하는 가운데 외국인 국제 종들로부터 배움으로써 기술을 신속히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필리핀 공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타이의 새 지부 건축을 지원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조얼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지도 않고 있는데, 타이에 가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필리핀에서의 공사 경험이 국제 건축 활동을 준비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 것입니다.” 그는 타이에서 건축 일을 지원하면서 1년 이상을 머물렀습니다.

조슈아 에스피리투와 사라 에스피리투 부부는 둘 다 필리핀 지부 공사 일을 하는 동안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부 봉헌 직후 결혼하였고, 함께 국제 종으로 일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이삼 개월이 지나 그들은 다른 나라들의 건축 활동에 참여하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때 이후로 그들은 다섯 나라에서 봉사해 왔는데, 아시아 세 군데, 아프리카 두 군데였습니다. 조슈아는 아직 필리핀에 있을 때의 경험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들에서 온 형제들과 함께 일하는 동안 기술을 배웠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할 수 있는 지식이 생긴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 파견되었을 때, 그들은 그 나라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여기 있지는 않을 겁니다. 앞으로는 여러분이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다른 나라로 가는 목표에 대해, 그는 이렇게 밝힙니다. “우리는 단지 일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참으로 노력하지요.”

물론, 다른 여러 나라에 가는 데는 융통성이 요구됩니다. 제리 아유라는 타이·서사모아·짐바브웨 등 몇 군데에 파견되었습니다. 그의 소감은 이러합니다. “나는 여호와께서 온갖 종류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니까 우리도 그들을 사랑하지요.” 이 필리핀 형제들은 여호와의 일에 국제적인 규모로 기여할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합니다!

시국이 불안한 상황에서도 활동을 중단하지 않다

여호와의 기쁨을 자신의 성채로 삼는 일에는 어려운 시기에도 그분에게 계속 충성을 나타내는 것이 포함됩니다. 필리핀에서 여호와의 종들이 충성을 증명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습니다.

계엄령은 1981년 1월 17일에 해제되었지만, 시국의 불안은 1980년대가 지나가도록 끊이질 않았습니다. 1986년 2월에는 정부가 뒤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정권 교체는 비교적 평온하여, 심지어 “인민의 정권” 혁명이 일어난 지역에 위치해 있던 회중들까지도 집회와 전파를 방해받지 않고 계속하였습니다. “인민의 정권” 군중 곁을 지나가면서, 전도인들은 사제들과 수녀들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그들의 행동을 부추기는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새 정부는 즉각적으로 특정한 변경 조치를 단행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시국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새 정부가 정권을 잡고 나서 처음 3년 동안은 몇 차례 유혈 사태를 포함하여 여러 번 쿠데타 시도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지부 공사 중에 외국인, 내국인을 막론하고 건축 일을 하던 형제들은 도시 건너편에서 반군 병사들이 자기네 군 막사를 폭파해 버리는 현장을 목격하고서 놀랐습니다. 이런 일들은 비교적 잠깐 마주치는 일이었지만, 그로 인해 일부 회중들에게 보다 안전한 장소에 있는 왕국회관에서 모임을 갖도록 권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여러 해 동안, 정부군과 반군 세력 간의 불안은 민다나오 섬의 몇몇 지역에서 계속되었습니다.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그곳 형제들은 슬기롭게 행동하면서 여호와를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봉사 훈련 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순회 감독자인 레나토 둥고그는 한 분쟁 다발 지역에서 봉사하였습니다. 한번은 레나토가 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군인이 그에게 “어디 가시오?” 하고 물었습니다.

레나토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여행하는 봉사자입니다. 형제들을 강화하고 그들과 함께 전파하러 가기 위하여 1년에 두 번씩 방문합니다.”

군인이 응답하였습니다. “하느님이 당신과 함께 하심이 틀림없군요. 그렇지 않으면 벌써 죽었을 겁니다.” 이처럼 혼란의 와중에서도 형제들은 여호와를 신뢰하는 가운데 일을 수행하며, 그로 인해 크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국기 배례 문제로 다시 법원에 가다

청소년들은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시험받아 왔습니다. 1955년 6월 11일,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모든 공립 및 사립학교 학생에게 필리핀 국기에 경례를 요구하는 공화국령 제1265조 법에 서명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자녀들은 세계 전역의 증인 청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양심적인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탈출 20:4, 5) 그들은 국가의 상징물을 존중하기는 하지만, 어떤 대상에 대한 종교적 신봉 행위로 그들이 여기는 일에는 양심적으로 참여할 수 없습니다. 마스바테 섬에서 헤로나 가족의 자녀들이 국기 배례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였을 때, 그 일로 인해서 1959년에 소송이 제기되어 필리핀 대법원까지 갔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여호와의 증인의 종교적 입장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대법원은 국기는 “형상”이 아니며, “국기에는 어떠한 종교적 의미도 전혀 들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처럼 대법원은 종교적인 사안과 종교적이 아닌 사안을 직접 법제화해 놓았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증인들의 종교적 신념이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형제들은 성경의 원칙에 확고부동하였습니다. 대법원의 판결로 인해서 어느 정도 난관이 초래되었으나, 예상했던 것만큼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국기 배례 문제는 대법원의 그 판결이 1987년 행정 법전에 편입되기까지는 다시 논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1990년에 세부 지역에서 상당수의 여호와의 증인 자녀들이 퇴학을 당하였습니다. 한 학교 교장이 그 법규를 강경하게 시행하였던 것입니다. 퇴학 처분이 줄을 이었습니다.

보도 매체에서 퇴학 처분 건을 다루었습니다. 그러자 한 인권 위원회가 교육을 거부당하고 있는 이 아동들에게 관심을 표명하였습니다. 상황이 1959년과는 달라진 것 같았습니다. 이제 다시 그 문제를 공론화할 여호와의 때가 된 것입니까? 그 당시 세부에서 장로로 일하던 에르네스토 모랄레스는 이렇게 상황을 설명하였습니다. “편집인들, 신문 기자들, 교육자들을 비롯해서 모두들 우리에게 그 문제를 법원으로 가져가라고 역설했습니다.” 지부와 세계 본부에 있는 법률부의 자문을 받아, 소송을 제기하기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그렇지만 지방 원심 법원에 이어 상소 법원에서도 불리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1959년의 헤로나 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에 역행하기를 꺼렸던 것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쟁점을 다시 대법원으로 가져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과연 그 건을 심리하려고 할 것입니까? ‘하겠다’는 것이 대법원의 답변이었습니다! 증인 변호사인 펠리노 가날이 앞장서서 최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며칠 안으로, 대법원은 그 건에 대해 판결을 내릴 동안 퇴학당한 학생 전원의 복학을 요구하는 강제 명령을 내렸습니다.

양측에서 변론 자료를 제출하였습니다. 심사숙고 끝에, 대법원은 1959년의 판결을 파기하고, 국기 배례, 충성의 맹세 낭송, 애국가 봉창을 하지 않는 여호와의 증인 자녀들의 권리를 옹호하였습니다. 대법원은 그 역사적인 판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위반하면 퇴학당한다는 ··· 조건으로 ··· 국기 배례를 강요당할 수 있다는 발상은 언론의 자유에 대한 권리 그리고 종교에 대한 공언 및 숭배의 행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권리 장전에 익숙해 있는 현 세대의 필리핀 국민의 양심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법원은 또한, 여호와의 증인의 퇴학 처분은 “1987년의 헌법에 의거하여 자유로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판결하였습니다. 「마닐라 크로니클」지는 “대법원이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35년간의 불공정을 바로잡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재심을 요구하는 재정 신청이 반대 측에 의해 제기되었지만, 1995년 12월 29일 대법원은 그 신청을 기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판결은 계속 효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이 거둔 참으로 멋진 승리였습니다!

재난에도 불구하고 활동을 계속하다

이 보고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필리핀은 종종 재난으로 고통을 당합니다. 형제들에게 영향을 미친 몇 가지 재난에 대해 살펴봅시다.

지진: 이 나라 열도는 두 개의 큰 지각 구조 판의 경계부에 위치해 있어서, 지진이 나기 쉬운 나라입니다. 한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매일 적어도 5회의 지진이 발생하며, 사람이 감지하지 못하는 지진은 그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 대부분은 생활에 아무런 방해를 끼치지 않지만, 가끔은 심한 지진이 엄청난 파괴를 가져옵니다.

1990년 7월 16일 오후 4시 26분, 그처럼 심한 지진이 강한 여진을 동반하면서 루손 섬 중앙에 있는 도시 카바나투안 부근을 강타하였습니다. 벵게트 도(道) 역시 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상당수의 학교와 호텔이 붕괴되면서 인명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그 시각에, 그곳에서 지역 감독자로 일하고 있던 훌리오 타비오스는 아내와 함께 벵게트의 산악 지대에서 열리는 순회 대회장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채소를 실어다가 바기오에 가서 파는 한 형제가 자기 트럭에 그들을 태워 주었습니다. 산길을 구불구불 돌아 나오다가, 그들은 도로가 좁아진 부분에 왔을 때 앞에서 다가오는 차를 통과시켜야 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산에서 바윗돌이 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강한 지진이라는 것을 직감하였습니다. 훌리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형제가 트럭을 좀 더 넓은 데로 애써 후진시키고 나니까, 큼직한 바위 덩어리 하나가 방금 우리가 비킨 자리에 쿵 하고 떨어지더군요. 우리는 위험을 면해서 감사했습니다. 잠시 후 두 번째 진동이 나는데 보니까, 우리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가 춤을 추듯이 흔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산들의 경사진 부분이 온통 쏟아져 내렸습니다.

산사태로 도로가 막혀 버렸습니다. 대회장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다른 어느 곳에 가더라도 마찬가지지만—걸어서 산을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질녘이 되었을 때, 그들은 한 친절한 사람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다음날 그들은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높은 산을 올라갔습니다. 대회장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지진의 피해에 대처하기 위해 서로 돕고 있는 몇몇 형제들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위험한 산길을 따라 도보 여행을 한 끝에 그들은 대회가 열릴 나기 읍에 도착하였습니다. 훌리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은 우리가 도착하리라고는 더 이상 기대하지 못했던 터라 참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몹시 지쳐 있었지만, 행복한 형제 자매들이 우리를 환영하는 것을 보고서 새 힘을 얻었습니다.” 지진에도 불구하고 많은 형제 자매들은 안간힘을 쓰고 그곳에 옴으로, 영적인 것들에 대한 깊은 인식을 나타냈습니다.

그 당시 지부에서는 새로운 건물들을 짓고 있던 중이었다는 이야기가 기억날 것입니다. 숙소동이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1990년의 그 지진은 그 건물에 대한 첫 번째 구조 시험이 되었습니다. 앞뒤로 흔들리자 일부 베델 성원들은 메스꺼움을 느꼈지만, 그 건물은 내진 설계의 효력을 발휘하여, 손상을 입지 않고 강한 진동을 견뎌 냈습니다.

홍수: 고온 다습한 열대 기후라서, 이 나라 대부분의 지역은 강우량이 많습니다. 특정 지역에서는 매우 쉽사리 홍수가 발생합니다. 46년간 전 시간 봉사를 해 온 레오나르도 가멩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무릎까지 차오르는 진창길을 3킬로미터나 걸어가야 하였습니다.” 줄리아나 앙헬로는 홍수가 잦은 팜팡가 도의 구역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해 오고 있습니다. 이 자매는 이렇게 말합니다. “왕국 소식을 가지고 관심자들을 찾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작은 외륜선을 타고 갔습니다. 노를 젓는 형제는 예리한 시각이 있어야만, 나무에 도사리고 있던 뱀이 갑자기 배 안으로 떨어지는 일을 여차하면 피할 수 있습니다.” 1960년 이래 특별 파이오니아인 코라손 갈랴르도는 팜팡가 도의 구역에서 여러 해를 보냈습니다. 때로는 타고 갈 배가 없어서, 거의 어깨까지 차오르는 물속을 걸어가야 했던 일을 이 자매는 기억합니다.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 자매는 훌륭한 태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는 환경에 적응하는 법을 익히고, 또 여호와께서는 충성스러운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서 그분을 의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피나투보 산에서 화산 이류(泥流)로 흘러나온 진흙이 많은 저지대를 메워 버린 이래, 팜팡가에 홍수가 나면 이제 물이 다른 지대로 흘러 넘치기 때문에 사태가 악화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순회 감독자인 헤네로소 칸라스는 수해 때문에 야외 봉사 때 종종 장화를 신거나 심지어 맨발로 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그런 불편을 마다하지 않고 계속 갑니다.

홍수가 특별히 심해서 지역 사회 전체가 피해를 당하는 경우, 형제들은 서로서로 도우며 한편으로 증인이 아닌 사람들도 돕습니다. 필리핀 남부, 다바오델노르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읍 관리들은 그 도움에 너무 감사한 나머지 감사를 표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화산: 필리핀에 화산이 많지만,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화산은 피나투보 산이었습니다. 1991년 6월, 화산은 엄청난 버섯 구름과 함께 폭발하였습니다. 낮이 사실상 밤으로 변하였습니다. 아마겟돈이 시작했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화산재가 서쪽으로 멀리 캄보디아에까지 떨어졌습니다. 삽시간에 피나투보 산은 66억 5000만 세제곱미터의 화성 쇄설암 물질을 뿜어냈습니다. 그 무거운 화산재로 인하여 지붕, 심지어는 건물 전체가 내려앉았습니다. 분출물의 상당량이 화산 이류를 이루어, 엄청난 현탁액의 흐름이 가옥들을 휩쓸거나 덮어 버렸습니다. 화산재와 이류가 함께 덮쳐 왕국회관과 형제들의 집이 심하게 파손되거나 파괴되었습니다. 그 당시 타를라크에서 정규 파이오니아로 일하던 줄리우스 아길라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집은 통째로 재 속에 파묻혀 버렸습니다.” 그 가족은 집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페드로 오안다산은 그 지역에서 순회 감독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은 결코 여호와에 대한 숭배와 봉사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참석률은 항상 100퍼센트 이상이었지요. 그뿐 아니라 화산 이류로 인해서 전파 활동에 대한 형제들의 사랑이 줄어들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대피한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재해 지역에서도 전파를 계속하였으니까요.”

그러한 재해는 그리스도인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기회가 됩니다. 피나투보 산 폭발 중 그리고 그 후에 형제들은 서로를 도와서 대피하였습니다. 지부에서는 신속히 한 대의 트럭에 쌀을 실어 보냈으며, 쌀을 내려놓은 다음 그 트럭은 형제들을 피해를 입은 도시 지역에서 대피시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마닐라의 형제들은 그 궁핍한 상황을 전해 듣고는 즉각적으로 응하여 기금과 의류를 보냈습니다. 파팡가 도의 베티스에서는 젊은 형제들이 이재민을 돕는 구호반을 구성하였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한 관심자 부인이 있었는데, 그 남편은 진리에 반대해 오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젊은 형제들이 그 부부의 집을 개축하는 데 도와주자, 그 남편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지금은 증인이 되었습니다!

태풍: 이 나라에서 기상에 의한 모든 재난 가운데, 태풍 즉 열대성 저기압이 가장 큰 파괴를 가져옵니다. 평균 매년 약 20회의 태풍이 이 열도를 강타합니다. 그러한 폭풍은 강도는 제각기 다르지만, 강한 바람과 호우로 특징을 이룹니다. 종종 그 세력은 건물을 파괴할 정도로 강합니다. 그뿐 아니라 농작물을 망가뜨려 농부들의 생계에 피해를 줍니다.

재삼재사 증인들의 집과 농작물은 피해를 입어 왔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형제들은 대개 재기하여 계속 생활을 영위해 나갑니다. 이 나라의 일부 지역에서는 태풍이 너무 자주 발생하여 거의 예삿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칭찬할 만하게도 형제들은 극복하는 법을 배웠으며, 생활상의 문제들에 잘 대처해 나갑니다. (마태 6:34) 물론 인근에 사는 형제들은 어려움에 처한 형제들 소식을 듣게 되면, 자원해서 식품이나 돈을 보내어 돕습니다. 이따금 예외적으로 심한 폭풍이 지나간 뒤에는, 여행하는 감독자가 지부 사무실과 접촉하면, 지부 사무실에서는 기꺼이 구호 마련을 조직합니다.

성서 출판물의 배달

필리핀은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출판물을 각 회중에 적시에 그리고 양호한 상태로 보내는 일이 항상 도전이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우편 제도를 이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종종 「파수대」와 「우리의 왕국 봉사」가 집회에서 연구할 날짜가 되기 전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지부의 발송부에서 일하는 제후 아몰로는 변화를 재촉하게 된 계기를 기억합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배달 지연 문제를 떠나서, 1997년에는 우편료가 껑충 뛰었습니다.” 2주마다 약 36만 부의 잡지를 발송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막대한 금액이 들어갈 상황이었습니다.

지부의 형제들이 우리 출판물을 배달하겠다는 건의를 통치체에 보냈습니다. 신중한 검토 끝에 승인이 났습니다. 루손 섬의 경우에는 지부에서 트럭이 직접 나갑니다. 하지만 다른 지역들은 바다에 의해 서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부에서는 믿을 만한 화물 운송업체를 이용해서 잡지와 서적을 배로 필리핀 열도 각 섬의 선정된 지점에 보냅니다. 이 배달 거점으로부터 운전자들은 발송품을 트럭으로 각 하치 장소까지 운반합니다. 운전자가 출발 지점으로부터 멀리 오는 경우, 형제들은 기꺼이 자기 집을 숙소로 제공하여 그가 다음 행선지로 계속 가기 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금전적인 이득을 떠나서도, 형제들은 필요한 출판물을 적시에 그리고 양호한 상태로 받게 되어 무척 좋아합니다. 부수적인 효과로서, 그들은 지부에서 나오는 형제들과 정기적으로 접촉하기 때문에 조직에 더 가까워짐을 느낍니다. 많은 형제 자매들은 ‘워치 타워’라는 이름이 눈에 뜨이는 트럭이 지나가는 것을 보기만 해도 격려를 받습니다.

이 마련이 어떤 면에서는 부가적인 증거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번은 루손 섬 남부의 비콜에 홍수가 났는데, 때마침 배달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간선 도로에 물이 차올라 차량들이 멈춰 섰습니다. 공교롭게도, 출판물을 실은 트럭이 한 형제의 집 앞에 멈춰 섰습니다. 그 가족은 그것을 보자, 운전하는 형제들에게 “들어와서 식사하고, 홍수가 빠질 때까지 여기서 머물다 가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증인이 아닌 운전자들은 어디서 숙식을 해결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더니 그 베델 운전자들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댁들은 이 사람들과 무슨 관계입니까?”

형제들은 대답하였습니다. “우리의 영적 형제들이지요.”

다른 운전자들이 대꾸하였습니다. “증인들은 바로 그렇군요! 금방 만난 사이인데도 여러분은 서로를 믿는군요.”

국경 너머에서

이제 잠시 이 나라 밖으로 눈길을 돌려, 해외에 거주하는 많은 필리핀 사람들에 대해 고려해 봅시다. 대영 제국의 전성기에 사람들은 그 영토에서는 “해가 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필리핀 사람들에게는 해가 지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비록 필리핀이 작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필리핀 사람들은 전 지구상에 흩어져 있습니다. 직업상 또는 다른 이유로 수십만 명의 필리핀 사람들이 다른 나라들로 갔습니다. 그로 인해 어떻게 일부 사람들이 성서 진리를 배우게 되었습니까? 이미 증인인 사람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도왔습니까?

리카르도 말릭시는 공항 컨설턴트로 일하였습니다. 직업상 그는 여러 나라를 다니기 때문에, 그와 그의 아내는 그런 환경을 이용하여 전도인이 매우 드문 나라들에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습니다. 사실상 그런 나라들 가운데 일부는 전파 활동에 제약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방글라데시·우간다·이란·탄자니아와 같은 나라에 있는 동안, 여호와를 알도록 몇 사람을 도울 수 있어서 행복하였습니다. 회중을 세우는 데 기여한 경우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일하면서 전파한 나라들 가운데는 라오스·미얀마·소말리아가 있습니다. 리카르도가 은퇴할 때까지 그들은 이 일을 28년 동안 하였습니다. 좋은 소식을 광범위한 밭에서 전파하는 데 그처럼 훌륭한 기여를 하게 되어 그들은 참으로 행복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타국에 가서 일하기 위해 필리핀을 떠날 때는 증인이 아니었지만, 그곳에 가서 진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가톨릭교인인 로이나는 처음에 중동에 일하러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 여자는 성서를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중에는 홍콩에서 일자리를 얻었는데, 홍콩은 수많은 필리핀 여자들이 가정부로 일하는 곳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매일 밤 하느님께 나를 바로 하느님의 왕국으로 인도할 사람을 제발 보내 달라고 기도하였어요.” 선교인인 존 포터와 카를리나 포터 부부가 로이나와 만나 성서 연구를 하도록 도울 때, 그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로이나는 필리핀 지부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경험을 알려 주는 동시에 누군가가 아직 필리핀에 있는 자기 남편을 찾아가서 그에게 성서의 소식을 설명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이민 간 필리핀 사람들은 현재 다른 여러 나라에서 큰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1900년대 초에 하와이에서는 재식 농원 일손이 모자랐습니다. 많은 필리핀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하와이에서 처음으로 진리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필리핀 이민들이었습니다. 지금은 하와이에 일로카노어 회중 열 개와 타갈로그어 회중 한 개가 있습니다.

수많은 필리핀 사람들이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증인들이 많습니다. 미국 최초의 필리피노어 회중은 1976년에 캘리포니아 주 스톡턴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미국 지부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필리핀 사람들의 밭은 매우 잘 발전해서, 1996년 9월 3일에는 첫 번째 필리핀 순회구가 세워졌다.” 2002 봉사 연도에 약 2500명의 전도인으로 이루어진 37개의 필리피노어 회중이 미국 지부의 감독 아래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타갈로그어 회중 또는 집단들이 괌·독일·사이판·알래스카·오스트레일리아·오스트리아·이탈리아·캐나다에도 있습니다.

이 필리핀 사람들은 비록 다른 나라들에 가 있기는 해도, 영적 양식을 공급받기 위해서는 필리핀에 있는 형제들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필리핀 언어들을 위한 모든 출판물 번역을 마닐라에 있는 지부에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 더하여, 괌·미국·하와이를 포함하여 몇몇 나라에서는 일로카노어나 타갈로그어 둘 중 하나로 대회가 마련됩니다. 이 대회들을 위한 번역물도 드라마 녹음을 포함해서 모두 필리핀에서 옵니다.

다른 언어 집단들로 뻗어 나아가다

섬 나라 방방곡곡에서, 그 지역 자국어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훌륭한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근년에, 철저한 증거를 이전에 받지 못한 사람들과 접촉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로마 15:20, 21.

여러 해 동안 필리핀에는 영어 회중이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필리핀 사람들은 영어를 어느 정도 알기는 하지만, 대개 유창하게 말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영어 집회가 필요하였습니다. 1960년대 말에 형제들은 팜팡가의 클라크 공군 기지 주변에서 이 문제를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요원들의 부인인 자매들은 이 나라 언어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형제들이 영어 집회 마련을 조직하는 일을 도왔는데, 그 집회들은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 해 동안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대마닐라에서도 그와 비슷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 미국 자매가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그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자매가 연합하던 타갈로그어 회중에서 장로로 있던 파시피코 판타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자매에게 미안하더군요. 자매는 정기적으로 참석하는데, 집회에서 별로 얻는 게 없었으니까요.” 오래지 않아 다른 미국 사람들도 그 회중에 왔습니다. 공개 강연과 「파수대」 연구를 영어로 하자는 제의가 나왔습니다. 그러한 집회가 마련되었고, 판타스 형제가 앞장을 섰습니다. 마침내 다른 집회들도 추가되었으며, 다른 사람들도 도움을 베풀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지부에서 일하고 있던 데이비드 레드베터와 조지 레드베터 부부가 그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 훌륭하게 성장한 끝에, 그 작은 집단은 두 개의 영어 회중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영어 회중이 생기게 되자,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았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온 모니카가 그중 한 사람입니다. 그 여자는 이미 거기서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충실한 가톨릭교인인 그의 부모는 격렬하게 반대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니카를 필리핀의 ‘가톨릭 환경’으로 보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마닐라에 데려와서는, 여권도 주지 않고 가톨릭교인인 외할머니 집에 남겨 두었습니다. 모니카가 회중을 찾게 된다 하더라도 연구를 계속할 수는 없었습니다. 미국에서 자라난지라 타갈로그어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에서 그와 연구하던 자매가 조지 레드베터에게 전화를 걸어, 누군가가 모니카와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조지는 지금은 영어 회중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로 모니카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조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니카는 필리핀에 ‘유배’되어 있는 6개월 동안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모니카가 침례받고 나서 2주일이 지났을 때 그의 어머니는 ‘여기 네 여권이 있다. 돌아오거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니카는 이미 증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영어 회중에 대하여 참으로 감사하였습니다!

또 다른 유익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과거에 봉사해 본 적이 없는 지역을 찾아갔습니다. 대마닐라에는 부유층이 사는 주택 단지들이 있는데, 그 거주자들 가운데는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구역에서 문을 여는 데 영어가 도움이 되었습니다.

중국어 구역을 열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중국어 집단이 구성되었습니다. 서적 연구는 크리스티나 고가 운영하는 구두 가게에서 열렸습니다. 그렇지만 그 집단은 너무 작아서 도움이 더 필요하였습니다.

선교인 레이먼드 리치와 결혼해서 필리핀에 온 엘리자베스 리치는 그간 홍콩에서 16년간 봉사를 해 왔습니다. 광둥어를 익히고 진리를 배우도록 중국 사람들을 도운 엘리자베스의 경험이 활용되었습니다. 그 시기에 전후해서, 그 구역에 임명된 두 특별 파이오니아 중 한 명이 에스터 아타나시오(지금은 에스터 소)였습니다. 에스터는 이렇게 상기합니다. “그 지역에서 우리가 봉사를 시작할 때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이 누군지 모르더군요.” 그렇기는 했어도 마닐라의 중국어 공동체에는 여호와의 이름과 백성이 서서히 소개되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광둥어는 알고 있었지만, 마닐라에서 사용하는 주된 중국어 방언은 푸젠어라서 또 하나의 방언을 배워야 했습니다. 진리 안에 새로 들어온 젊은이 칭 충 추아가 이 집단과 연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푸젠 방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에 집회에서 통역으로 일하였습니다.

이 집단은 점차 발전하였습니다. 1984년 8월에는 작은 회중이 형성되었습니다. 많은 도전이 남아 있기는 해도, 도움을 베풀고 있는 사람들은 이전에 철저한 증거를 받아 보지 못한 이 구역에서 전파하는 일을 기쁨으로 여깁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듣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또 다른 언어와 구역에—청각 장애인에게—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여호와의 뜻인 것 같았습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필리핀에서는 청각 장애인이 여호와에 관하여 배우도록 돕는 마련이 사실상 없었습니다. 회중과 연합하는 청각 장애인은 극소수였지만, 보기 드물게 예외적인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머니가 증인인 마누엘 루니오는 한 자매로부터 성서 진리를 배우도록 도움을 받았는데, 그 자매는 종이에 일일이 글을 써 가며 그와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는 1976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세부 섬에서, 로르나와 루즈는 쌍둥이로서 둘 다 청각 장애인인데 시각 장애인인 외삼촌에게서 성서의 소식을 가르침받았습니다. 시각 장애인 파이오니아가 어떻게 청각 장애인을 가르칠 수가 있었겠습니까? 한 보조자의 도움을 받아 그는 도해를 사용하였습니다. 또 그의 사촌이 그가 하는 말을 쌍둥이가 이해할 수 있는 손짓으로 통역하였습니다. 그들은 정식 수화를 배운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1985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렇긴 해도 그런 시도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이었습니다.

몇 가지 일이 계기가 되어 이 구역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선교인인 딘 야체크와 카렌 야체크 부부가 1993년 중반에 어떤 훈련을 받기 위해 브루클린 베델에 가 있을 때, 번역 봉사부에서 일하는 형제들은 필리핀에서는 청각 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필리핀에서 한 젊은 자매는 증인 가족의 청각 장애인 친구와 의사소통하는 법을 배울 목적으로 수화반에 등록한 적이 있었습니다. 또 대마닐라의 나보타스에서 리사 프레스닐료와 이 자매의 파이오니아 짝은 그들의 구역에서 청각 장애인들을 만났는데,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파이오니아들은 청각 장애인들에게 왕국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하여 수화를 배울 생각을 하였습니다.

지부에서는 마닐라에서 정규 파이오니아인 아나 리사 아세베도가 청각 장애인 학교에서 일하고 있으며, 수화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필리핀에 몇 안 되는 증인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는 이러한 요청을 받았습니다. “베델 성원들에게 수화를 가르쳐 주지 않겠습니까?”

자매의 대답은 ‘예’였습니다! 그는 모든 청각 장애인들이 어떻게 증거를 받게 될 것인가 하고 종종 궁금하게 여겨 왔던 것입니다. 베델 성원들과 회중의 정규 파이오니아들을 포함해서 한 학급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보타스의 자매들은 이미 수화 과정에 등록하고 있다가, 이 학급에 들어와서 계속 배웠습니다.

그러자 일이 신속히 진전되었습니다. 6개월이 안 되어, 수화 통역이 대마닐라의 세 개 회중에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1994년에는 순회 대회와 지역 대회에서 처음으로 통역이 마련되었습니다. 첫 목표 중 한 가지는 증인 부모의 청각 장애 자녀들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몇 자녀가 처음으로 침례받은 성원들이 되었습니다. 몇 해 동안 수화 통역 없이 충실하게 집회에 참석해 오던 마누엘 루니오는 이 새로운 마련들로부터 유익을 얻게 되어 행복해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이 나라의 다른 곳에서도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리사 프레스닐료가 파이오니아 짝과 함께 올롱가포에 파견되어 청각 장애인 구역에서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도움을 받았습니다. 2002년 중반까지는 수화 집단이 마닐라 외에 20개 지방에 형성되었습니다. 발전의 이정표는 이 나라 최초로 1999년 4월에 대마닐라 수화 회중이 형성된 일이었습니다. 첫 수화반에 참석한 베델 성원이며 지금은 그 회중의 장로인 호엘 아세베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매우 중요한 이 일에 우리를 사용해 주셔서 행복합니다.” 그렇습니다. 청각 장애인들도 왕국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이전에 봉사되지 않은 이 구역에서 발전을 보는 것은 참으로 기뻐할 이유가 됩니다.

큰 시설이 필요하게 되다

1990년대에 새로운 구역에서 봉사를 시작하고 오래된 구역에서는 한층 더 철저히 봉사함에 따라, 회중과 연합하는 전도인 및 새로운 사람들의 수가 꾸준히 증가해 왔습니다. 잡지 수요가 증가하였고, 서적과 팜플렛이 필리핀 언어들로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번역되었습니다. 그 결과, 지부 성원도 상당히 증가해 왔는데, 그것은 인쇄·번역·교정 일을 하고 또 형제들과 회중들을 위해 필요한 다른 봉사도 수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새 숙소동은 1991년에 완공된 지 얼마 안 되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 건물은 250명을 수용하도록 설계되었는데, 1999년에는 베델 가족이 350명에 달하였습니다.

지부 구내에 건물을 지을 공간이 아직도 있어서, 통치체는 1991년에 완공한 것과 흡사하게 또 하나의 숙소동을 건축할 것을 승인하였습니다. 그 공사는 1999년에 시작하여 2001년 말에 완료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현장 수용 능력을 거의 두 배로 만듭니다. 사무실 공간도 추가되었는데, 이는 야외에서 확장하는 활동의 필요에 응하기 위하여 절실히 필요했었습니다. 부설된 시설로는 대형 세탁실, 봉사 훈련 학교 교실 그리고 개선된 도서실 설비가 있습니다. 국내 기술자들과 국제 종들이 이 공사를 하기 위하여 임시로 베델 가족과 함께 생활하였습니다. 새 건물을 완공한 후에도 이 자원 봉사자들은 계속 머물러, 1991년에 지은 건물에 대한 개수 작업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건축 활동에는 많은 일이 포함되지만, 염두에 두는 목표는 오로지 한 가지 즉 생명을 주는 성서 진리의 확산을 지원하는 시설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봉사 훈련 학교가 필요를 충족시키다

봉사 훈련 학교가 1987년에 미국에 개설되었을 때, 필리핀에 있는 많은 형제들은 ‘우리도 그 훈련으로부터 유익을 얻는 일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대답이 1993년에 왔습니다. 이 학교가 이듬해에는 필리핀에서 운영되기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장로나 봉사의 종으로 어느 정도 조직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자격을 갖춘 형제들을 대상으로 부가적인 훈련을 제공할 것이었습니다. 수백 명의 형제들이 신청하였습니다.

여행하는 감독자 두 명과 한 명의 선교인이 강사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첫 학급은 1994년 1월에 강의에 들어갔습니다. 이 훈련을 받은 형제들은 회중에서 형제들을 섬기는 자격을 더욱 갖추게 되었습니다. 한 회중에서는 그 회중과 연합하는 이 학교 졸업생에 관하여 이와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형제는 학교에 가기 전과 비교해서, 지금은 집회 프로를 다루는 방법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이 영적 훈련으로부터 유익을 얻기 위하여 물질적 희생을 치렀습니다. 로널드 몰리뇨는 화학 기술자로 훈련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학교 초대장을 받은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한 회사로부터 고임금과 주택 제공, 보험 등의 혜택을 제공하는 일자리를 제안받았습니다. 로널드는 그 두 가지 기회를 놓고 심사숙고한 끝에 영적인 것을 택하였습니다. 그는 제18기 학급을 졸업하고 파이오니아로서 자신의 봉사를 계속 즐겼습니다. 로널드는 최근에 파푸아뉴기니에서 선교 봉사를 시작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윌슨 티파이트는 제1기 학급을 수료한 뒤 한 가지 결정을 내려야 하였습니다. 그는 교사로서 보장받는 세속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더 필요한 곳에서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라는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르치는 직업이 내 적성에 맞았지만, 동시에 왕국 관심사가 내 인생에서 첫째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의 특권을 받아들였으며, 여호와께서 그 분야에서 그의 봉사를 축복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윌슨은 지금 필리핀 남부에서 지역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학교에 온 학생들 대부분은 필리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통치체는 다른 아시아 나라들에서도 학생들이 오도록 마련하였습니다. 학생들을 보낸 나라들 가운데는 네팔·말레이시아·스리랑카·인도네시아·캄보디아·타이·홍콩이 있습니다. 학생 중 일부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제한된 나라들에서 왔습니다. 함께 받는 훈련을 통하여 학생들은 매우 세워 주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사인 아니발 사모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한받는 나라들에서 온 학생들은 그들이 모든 상황에서 어떻게 여호와를 신뢰해 왔는지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듣고 필리핀 학생들은 힘을 얻습니다.” 한편,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들은 수수한 배경에서 나온 필리핀 형제들이 어떻게 역경 가운데서 여호와를 섬겨 왔는지 알게 됩니다.

스리랑카에서 온 학생 니드후 데이비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항상 소중히 여길 추억거리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두 달간의 훈련이었습니다. 그저 놀랍기만 하군요!”

학교 시설은 바로 지부 내에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준비된 교과 과정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뿐 아니라, 지부에서 어떻게 일이 조직되는지를 직접 봄으로써도 배웁니다. 베델에서 영적인 정신을 가진 형제 자매들과 접촉하게 됨으로 그들은 본받을 만한 믿음의 훌륭한 모범들을 보게 됩니다. 또한 전도인 수가 적거나 제한된 상황에 처해 있는 나라에서 온 형제들은 대규모의 조직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35개 학급으로부터 922명이 졸업하였습니다. 졸업한 필리핀 형제 가운데, 75명은 현재 여행하는 감독자로,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대리 순회 감독자로 전국에 있는 193개 순회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여섯 명은 베델에 임명되었고, 열 명은 파푸아뉴기니와 미크로네시아에서 선교 임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수백 명이 고향 구역이나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정규 파이오니아로 일하고 있습니다. 학교가 문을 연 지 8년 만에, 6만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파이오니아의 영이 훌륭하여, 일반적으로 회중들의 성장이 현저합니다. 이 형제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을 적용함으로써 훌륭한 전진에 기여해 왔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진해 오다

이 섬나라 전역에서 놀라운 일들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3500개에 가까운 회중과 연합한 열심 있는 형제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가장 훌륭한 정부,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바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보고들은 매우 격려적입니다. 2002 봉사 연도의 마지막 7개월 동안, 매달 새로운 전도인 신기록에 도달하였습니다. 8월에는 14만 2124명이 왕국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과 목적이 수많은 섬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여호와의 종들은 이사야 24:15에 나오는 이러한 예언과 같은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다의 섬들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한다.’

열심 있는 전파자들 가운데는 수만 명의 정규 파이오니아가 있습니다. 1950년에는 파이오니아가 307명밖에 없었지만, 2002년 4월 말경에는 2만 1793명이 있었습니다. 이 수에 특별 파이오니아 386명과 그달의 보조 파이오니아 1만 5458명을 더하면 총 수는 3만 7637명으로, 총 전도인의 27퍼센트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전 시간 종 대열에 가담하기 원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2002 봉사 연도 중에는 5638건의 정규 파이오니아 신청서가 승인되었습니다.

이 모든 활동은 훌륭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계속 호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2002년 3월에 기념식 참석자 수는 43만 10명이었습니다. 10만 건에 가까운 성서 연구가 매달 사회되고 있습니다. 2002 봉사 연도 중 6892명의 새로운 제자들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1948년에는, 이 나라에 증인이 5359명당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549명당 한 명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직 기회를 열어 두고 계시는 동안, 이 바다의 섬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더 여호와의 찬양자들에게 가담하리라는 전망이 밝습니다.

계속하려는 결의에 차다

C. T. 러셀이 1912년에 방문하였을 때, 몇 개의 진리의 씨가 필리핀의 흙에 뿌려졌습니다.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 씨들은 싹이 트고 자라났습니다. 그 씨는 일부가 ‘순조로운 시기에도 곤란한 시기에도’ 진리의 편에 섬으로써 훌륭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디모데 둘째 4:2)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그 성장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속도가 붙어, 이제는 십여 만 명이 여호와의 활동적인 찬양자들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그들은 전 세계 여호와의 백성의 회중을 구성하는 약 600만 명과 함께 여호와의 이름에 영예를 돌리면서 기쁘게 일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이 알려 주는 바와 같이, 활동이 항상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땅은 아름답지만, 그 허다한 섬들의 주민들을 찾아가는 일은 왕국 선포자들의 담력을 시험하였습니다. 점점이 흩어져 있는 외딴 섬들을 찾아가기 위하여 폭풍의 바다에 맞서는가 하면, 양 같은 사람들을 찾아서 고원 지대의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필리핀의 섬들은 유달리 재난—지진·홍수·태풍·화산 폭발—이 많지만, 그러한 재난이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증인들의 활동을 멈추게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들은 참 숭배를 되살리기 위하여 회복된 땅에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상황은 그들에게 매우 불리하였지만, 여호와의 기쁨이 그들의 성채였습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은 불굴의 정신과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분명히 나타내 왔습니다. 증인들은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알고 있으며, 시편 121:7의 “여호와께서 모든 재앙에서 너를 지켜 주시리니, 너의 영혼을 지켜 주시리라”는 말씀을 믿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후원으로 증인들은 이 제도가 끝나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도울 것을 고대합니다. 그 후에는 이 7100개의 섬들을 포함하여 이 땅 전역에서 부활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게 될 것을 예상합니다. 그러고 나면 낙원이 된 이 땅의 아름다움은 빛을 발하여, 창조주에게 찬양이 돌아갈 것입니다.

그동안 여호와의 증인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활동을 축복하실 것을 확신하면서 전진하려는 결의에 차 있습니다. 증인들은 그들의 생활을 여호와의 예언자의 다음과 같은 말씀과 일치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분에 대한 찬양을 알려라.”—이사야 42:12.

[232면 삽입]

“하느님이 당신과 함께 하심이 틀림없군요. 그렇지 않으면 벌써 죽었을 겁니다”

[153면 네모]

초기에 뿌려진 진리의 씨

찰스 T. 러셀과 그의 일행은 1912년에 필리핀을 방문하였다. 비록 그들이 브루클린 본부에서 이 나라를 방문한 첫 공식 대표자들이긴 하였지만, 기록을 보면 다른 두 명의 성경 연구생이 이미 필리핀에 와서, 사람들이 성서 진리를 배우도록 돕고 있었다. 루이스 벨은 미국에서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남편과 저는 1908년에 필리핀에 가서, 교사로 일했습니다. 우리는 시발롬 읍에서 유일한 미국인들이었지요. 우리는 브루클린에 성서 책자를 수백 킬로그램 주문했습니다. 그 책자는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다음엔 태평양을 건너 마닐라로, 거기서는 도서(島嶼)간 연락선 편으로 시발롬으로 운송되었습니다.

우리는 시간과 기회가 있을 때면 그 책자들을 배부하면서 주민들과 이야기하였습니다. 봉사 시간이나 배부한 곳을 기록해 두지는 않았지요. 주민들은 가톨릭교인들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우리 말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더군요. 우리는 의료 훈련을 받은 교사들이었지만, 일차적으로는 좋은 소식의 사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거친 도로를 따라 도보로 가거나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때로는 대나무 돗자리 바닥에서 잠을 자고, 생선과 밥을 한 그릇에다 먹었습니다.

목회자 러셀이 1912년에 마닐라를 방문했을 때, 우리는 그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벨 자매는 러셀 형제가 마닐라 그랜드 오페라 하우스에서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강연할 때 참석하였다.

[156면 네모]

필리핀의 개요

국토: 약 7100개의 섬이 차지하는 육지 면적은 대략 30만 제곱 킬로미터이다. 섬들은 남북으로 약 1850킬로미터, 동서로 1125킬로미터 펼쳐져 있다. 섬들은 크기가 매우 다양해서, 가장 큰 섬은 포르투갈보다도 좀 더 큰가 하면 가장 작은 섬은 너무 작아서 만조 때가 되면 사라져 버린다.

주민: 말레이족의 후손이 주종을 이루지만, 일부는 중국·스페인·미국계이다.

언어: 필리핀에서 사용하는 수십 가지 언어 가운데, 비콜어·사마르-레이테어·세부아노어·일로카노어·타갈로그어·판가시난어·힐리가이논어가 보다 널리 사용되고 있다. 영어와 필리피노어가 공식 언어로 간주되는데, 필리피노어는 주로 타갈로그어로 구성된 것이다.

생활: 도회지에서는 크게 다양하지만, 시골 지역에는 농부와 어부가 많다. 쌀·사탕수수·바나나·코코넛·파인애플 등 농작물을 널리 재배한다.

식품: 식사 때마다 대개 쌀밥을 먹는다. 생선을 비롯한 해산물이 매우 흔하며, 열대 지방에서 자라는 채소·과일과 함께 먹는다.

기후: 이 나라는 열대성 기후로서, 전체 섬들이 비교적 일정한 기온을 유지한다. 일반적으로 이 나라는 강수량이 많다.

[161, 162면 네모와 삽화]

힐라리온 아모레스와의 회견

출생: 1920년

침례: 1943년

약력: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점령 기간에 진리를 배움. 당시에는 이 나라에 증인 수가 적었음.

나는 전시에 침례를 받았는데, 그때만 해도 형제들이 호별 방문 전파를 하는 것이 가능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의심하였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였습니다. 결국 시골로 도피해야 하였지만, 1945년에는 마닐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당시 나는 「파수대」를 타갈로그어로 번역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번역 일은 새벽 두 시가 되도록 늦게까지 해야 하였습니다. 번역한 자료는 등사판으로 인쇄하여, 일단의 증인들에게 보냈습니다. 자기 희생이 필요하였지만, 우리는 형제들이 영적 돌봄을 받기 때문에 매우 행복해하였습니다.

진리 안에서 여러 해를 보내면서 나는 여호와께서 자비로우심을 보아 왔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을 영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참으로 돌보십니다. 전후(戰後) 구호품이 필리핀에 답지하던 때가 기억나는군요. 정말이지, 많은 사람이 바지나 구두를 비롯한 의류품을 지원받았습니다! 그런 혜택을 받은 많은 파이오니아들은 매우 감사하여 전 시간 봉사에 한층 더 매진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정말로 그분의 백성을 돌보셔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급하십니다.

[173, 174면 네모와 삽화]

사랑받은 선교인

닐 캘러웨이

출생: 1926년

침례: 1941년

약력: 증인 가정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함. 길르앗 학교 제12기에 초대되었으며, 필리핀에 임명받아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하였음.

닐 캘러웨이는 열심 있는 선교인으로서, 형제들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왕국 활동에는 진지하면서도, 쾌활한 기질을 나타낸 그는 이 나라 전역에서 봉사하였다. 그는 자신의 여행하는 활동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한다.

“때때로 우리는 구역에 이르기 위하여 두 시간 동안 산길을 가곤 하였는데, 가면서 왕국 노래를 불렀습니다. 15명 내지 20명이 일행이 되어 오솔길을 따라 모두가 한 줄로 걸어가면서 노래를 부르노라면, 외국을 임지로 받았다는 사실로 인해 내 마음은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시골 구역의 작은 집들에 전하고, 이들 소박한 주민들이 방바닥에 앉아서 내 말을 한마디한마디 귀담아듣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리고 다음번 방문에 이어 나중에는 그들을 왕국회관에서 보게 되면, 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왕국에 관해 알려 주기 위하여 더욱더 열심히 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닐은 민도로 섬의 자매인 네니타와 결혼하여 함께 충실히 봉사하다가 1985년에 사망하였다. 필리핀 형제들은 지금도 그에 대해 정겹게 이야기한다. 한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캘러웨이 형제는 형제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착한 사람이었지요. 그는 어떤 상황에도 조정할 줄을 알았습니다.” *

[각주]

^ 342항 캘러웨이 형제의 체험담이 「파수대」(영문) 1971년 8월 1일호에 나온다.

[177면 네모와 삽화]

이넬다 살바도르와의 회견

출생: 1931년

침례: 1949년

약력: 선교인으로 1967년 3월에 타이에 파견됨.

내가 선교인으로 타이에 파견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착잡한 심정이었습니다. 기쁘면서도 다소 염려스럽고, 머릿속에선 많은 질문이 떠오르더군요.

내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1967년 3월 30일이었습니다. 내게는 이 나라 말이 귀에 설었습니다. 이 나라 말은 성조 언어로서, 낮은, 높은, 깊은, 올라가는, 날카로운 음조가 있거든요. 언어를 배우기는 어려웠지만, 나는 이 나라와 외국인 형제들로부터 사랑에 찬 도움을 받았습니다.

1967년부터 1987년까지 나는 수쿰위트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새로운 회중으로 임지를 옮기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 일은 힘들 것 같았습니다. 20년 동안 함께 일해 온 형제 자매들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죠. 톤부리로 옮기면서 바로 그런 심정이었답니다. 그런데, 실은 모든 게 생각하기 나름이더군요. 톤부리에 12년 있다가, 1999년에는 다시 수쿰위트로 옮기게 되었죠. 다른 선교인들은 나더러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같겠다고들 하더군요. 그러나 이제는, 어느 회중에 임명되든지 그곳이 내 고향이 될 수 있답니다.

[178면 네모와 삽화]

언어를 배우던 일을 돌이켜 보면

베니토 군다야우와 엘리자베스 군다야우 부부

약력: 베니토는 아내 엘리자베스와 함께 필리핀에서 순회 활동을 하였음. 1980년에 선교인으로 홍콩으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53명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움.

광둥어를 배운다는 것은 중국어에 대해 아무런 배경 지식이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큰 시험이었습니다. 진지한 노력과 끈기에다 겸손까지 참으로 필요합니다.

한번은, “나는 시장에 갑니다”라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광둥어로는 “나는 닭 거름 있는 데 갑니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야외 봉사 중에 내 아내는 집주인이 아는 한 자매를 가리켜 “아, 내가 그분을 알아요”라고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아, 내가 그분을 먹어요”라는 말이었습니다. 집주인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우리는 중국어 밭에서 일한 경험을 매우 소중히 여깁니다.

[181, 182면 네모와 삽화]

리디아 팜플로나와의 회견

출생: 1944년

침례: 1954년

약력: 필리핀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경험을 쌓은 뒤, 1980년에 파푸아뉴기니에서 봉사하도록 초대받음. 84명 이상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움.

나는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는 것이 염원이었기 때문에 그 임명을 받고 감격했습니다. 동시에, 가족을 처음으로 떠나는 일이라서 걱정도 되었고요. 나는 파푸아뉴기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는데, 들은 이야기로 조금 알고 있는 것도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격려하시면서, “여호와 하느님은 우리가 어디서 그분의 뜻을 행하든 우릴 돌보실 거야” 하시더군요. 나는 수락한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도착해서 보니, 형제들은 매우 친절하였고, 주민들도 우호적이었습니다. 나는 필리핀에서 전하던 것보다 더 많은 서적과 잡지를 매달 전했습니다. 그러나 언어와 풍습이 우리와는 매우 달랐습니다. 나는 ‘그래, 여기선 이삼 년 동안만 봉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시 어머니와 함께 파이오니아를 해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요 언어 두 가지를 습득하고 이 고장 풍습을 다소 익히고 난 뒤에는 이곳 주민들을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지낸 2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나는 진리를 꽤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특권을 누려 왔으며, 일부 사람들에겐 읽기와 쓰기를 가르침으로써 제대로 연구하여 진리를 그들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러저러한 모든 축복으로 인해, 나는 파푸아뉴기니가 이제는 내 고향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뜻이라면, 일이 다 되었다고 그분이 말씀하실 때까지 아니면 이곳에서 내 생애가 끝날 때까지 그분의 봉사에 기꺼이 사용되겠습니다.

[191, 192면 네모와 삽화]

필레몬 다마소와의 회견

출생: 1932년

침례: 1951년

약력: 1953년에 전 시간 봉사 시작. 그 후 결혼하고 순회 활동 시작. 자녀들을 양육한 뒤, 특별 파이오니아로 아내와 함께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함. 현재까지 비사야 제도 및 민다나오 섬에서 여러 가지 임명을 수행 중.

심한 곤경으로 1960년대에는 전 시간 봉사가 어려웠습니다. 옥수수와 쌀 농사를 망치는 쥐 떼가 극성을 부려 식량이 귀했습니다. 우리는 옷과 신발이 해어져서 더 이상 도회지로 전파하러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들로, 산으로 그리고 멀찌감치 스페인어 구역으로—대개 신발도 없이—갔습니다. 나는 제대로 된 옷이 없었기 때문에 순회 대회에서 프로를 맡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지역 감독자 베르나르디노 형제가 친절하게도 내게 자기 셔츠를 빌려 주어서, 연설을 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우리보다 더 어려웠습니다. 꾸준히 하고자 하는 우리의 결의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1982년, 중립 문제 때문에 시험이 우리에게 닥쳤습니다. 민다나오 섬에서는 반정부 반란이 빈발했습니다. 나는 소위 반군 관리들에게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군은 나를 좌익계 ‘강사’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렇지만 한 정부 관리가,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전적으로 성서에 나오는 것이지 정치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해명해 주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반군으로부터도 부정적인 인물로 여겨졌는데, 그것은 내가 전파하러 갔을 때 먼저 스페인어권 구역의 자치 단체장에게 증거하고 나서 반군 파견 대장에게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를 건드리지 못한 것은, 나와 함께 연구하는 한 반군 관리가 우리를 옹호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수십 년 동안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곤경과 시험을 살아남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보호에 대해 감사드립니다.—잠언 18:10; 29:25.

[217, 218면 네모와 삽화]

파시피코 판타스와의 회견

출생: 1926년

침례: 1946년

약력: 1951년에 길르앗 제16기 졸업. 현재는 케손시티에서 장로로 일함.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라구나 도의 우리 이웃에 여호와의 증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초대해서 그들의 서가를 이용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 서가에는 「창조」(Creation), 「입증」(Vindication), 「화목」, 「종교」(Religion), 「적」(Enemies), 「어린이들」(Children)을 비롯하여 좋은 책이 많더군요. 일본군이 우리 읍에 불을 질렀을 때 우리는 그 증인들과 헤어지게 되었지만, 나는 1년이 더 지난 뒤 그들을 마닐라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집회에 나가기 시작하였고, 침례를 받고 나서는 일단의 파이오니아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우리가 임명받은 곳은 타야바스 도—나중 이름은 케손 도—전체였습니다. 우리는 읍에서 읍으로 다니며 봉사하였고, 잠은 빈 버스나 관심자들의 집 같은 곳에서 잤습니다.

마우반에 와 있을 때, 일단의 게릴라 전투원들이 그 읍을 습격했습니다. 우리는 공회당 2층에서 자고 있다가, 소동 때문에 잠에서 깨었습니다. 경찰들이 아래층에 붙잡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총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입니다.

게릴라들은 2층으로 몰려왔습니다. 그중 하나가 우리에게 손전등을 비추며, “당신들은 누구야?” 하고 소리쳤습니다. 우리는 잠이 들어 있는 척했지요. 그가 재차 물으며,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당신들 필리핀 경찰대 소속 스파이들 아냐?”

“아, 아닙니다.” 우리가 대답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들 카키복을 입고 있잖아.”

우리는 옷은 헌물받은 것이고, 우리 구두는 미국에 있는 우리 형제들이 구호물자로 부쳐 준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지휘관이 말하더군요. “좋아, 구두는 내가 가져간다.” 그래서 나는 구두를 벗어 주었습니다. 그는 또 내 바지도 내놓으라고 하더군요. 금세 우리 모두는 속바지 바람이 돼 버렸답니다. 우리가 여벌의 옷을 가지고 가길 잘했더군요. 그런데 실은, 그처럼 그들이 빼앗아 간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온 동네 사람들이 우리를 그 전투원들이 보낸 스파이로 여겼을 테니까요!

우리는 나막신을 사 신고 마닐라로 돌아간 다음에는, 비사얀 제도로 곧장 가서 전파를 계속했습니다.

판타스 형제는 길르앗 학교에 가기 전에, 전 시간 봉사에 참여하고 형제들의 종(지금의 순회 감독자)으로 봉사하였다. 필리핀에 돌아와서는 지역 감독자로 그리고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그 후에 가족을 부양하였다.

[168, 169면 도표와 삽화]

필리핀—연대표

1908년: 미국에서 온 두 명의 성경 연구생이 시발롬 읍에서 증거를 시작하다.

1910

1912년: 찰스 T. 러셀이 마닐라 그랜드 오페라 하우스에서 연설하다.

1934년: 지부가 설립되다. 「왕국으로 도피하라」(Escape to the Kingdom) 소책자가 타갈로그어로 발행되다.

1940

1947년: 첫 길르앗 졸업생이 도착하다.

1961년: 천국 전도 강습 학급이 시작되다.

1964년: 필리핀 파이오니아들이 이웃 나라들에서 선교 봉사를 시작하도록 초대받다.

1970

1978년: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 학급이 시작되다.

1991년: 새 지부 건물이 완공되어 봉헌하다. 피나투보 산이 분화하다.

1993년: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이 타갈로그어로 발표되다.

2000

2000년: 「신세계역」 전역 성경이 타갈로그어로 발표되다.

2002년: 14만 2124명의 전도인이 필리핀에서 활동 중이다.

[그래프]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총 전도인

총 파이오니아

150,000

100,000

50,000

1940 1970 2000

[199면 도표]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대회 참석자 증가 도표 (1948-99년)

350,000

300,000

250,000

200,000

150,000

100,000

50,000

0

1948 1954 1960 1966 1972 1978 1984 1990 1996 1999

[157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필리핀

루손 섬

비간

바기오

링가옌

카바나투안

피나투보 산

올롱

케손시티

마닐라

민도로 섬

비사얀 제도

마스바테

세부 섬

민다나오 섬

수리가오

다바오

팔라완 섬

엘니도

[150면 전면 삽화]

[154면 삽화]

찰스 T. 러셀과 윌리엄 홀의 필리핀 방문, 1912년

[159면 삽화]

조지프 두스 산투스, 아내 로사리오와 함께, 1948년. 산투스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3년간의 잔인한 옥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열심 있는 왕국 선포자였다

[163면 삽화]

처음으로 필리핀에서 길르앗 학교에 간 형제들: 아돌포 디오니시오, 살바도르 리와그, 마카리오 바스웰

[164면 삽화]

전파하기 위하여 산악 지대를 걸어가는 모습

[183면 삽화]

수많은 파이오니아들이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으로부터 유익을 얻었다

[186면 삽화]

컴퓨터 사진 식자가 1980년에 시작되었다

[189면 삽화]

좋은 소식을 필리핀의 여러 언어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199면 삽화]

“하나님의 가르침” 국제 대회, 1993년

[199면 삽화]

“기쁨이 충만한 찬양자” 지역 대회의 침례 장면, 1995년

[200면 삽화]

대회 때 귀국하여 방문한 필리핀 선교인들

[202면 삽화]

타갈로그어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이 1993년 대회에서 발표되었다

[204면 삽화]

컴퓨터의 도움을 받는 성서 번역

[205면 삽화]

「신세계역」 전서를 자신의 고유어로 받고 행복해하는 파이오니아

[207면 삽화]

지부 위원회—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 덴턴 홉킨슨, 펠릭스 살랑고. (서 있는 사람들) 펠릭스 파하르도, 데이비드 레드베터, 레이먼드 리치

[211면 삽화]

많은 베트남 난민들이 필리핀에 있는 동안 진리를 배웠다

[215면 삽화]

나티비다드 발라안과 레오데가리오 발라안 부부는 각각 전 시간 봉사에 60년 이상을 바쳤다

[222, 223면 삽화]

근년에 지은 왕국회관들

[224면 삽화]

대마닐라 대회 회관(위)과 마닐라 외 지역의 대회 회관들

[228면 삽화]

왼쪽: 존 바가 1991년 지부 봉헌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228면 삽화]

아래: 지부 건물들, 1991년

[235면 삽화]

여호와의 증인이 거둔 승리를 신문에서 인정하다

[236면 삽화]

지진·화산 폭발·홍수로 문제를 겪게 되지만, 열심 있는 전도인들은 계속 전파한다

[246면 삽화]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들은 청각 장애인들이 영적 프로그램으로부터 유익을 얻도록 돕기 위하여 수화를 배웠다

[246면 삽화]

이 나라 최초의 수화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 학급의 학생들과 강사들, 2002년 초

[251면 삽화]

필리핀의 봉사 훈련 학교 제27기 학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