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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 민주 공화국 (킨샤사)

콩고 민주 공화국 (킨샤사)

콩고 민주 공화국 (킨샤사)

‘우리는 자루 속에 든 아프리카 옥수수 낟알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씩 떨어지면 그곳이 어디든지, 언젠가는 비가 오고 우리는 많아지게 됩니다.’ 50여 년 전에 당시 벨기에령 콩고로 알려져 있던 정부 당국에 의해 많은 고난을 당한, 한 충실한 여호와의 증인은 위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어지는 지면을 통해, 생기를 주는 비와도 같은 여호와의 축복이 콩고 전역에서 어떻게 왕국 선포자들의 수를 놀랍도록 증가하게 해 주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현재 콩고 민주 공화국 또는 콩고(킨샤사)로 알려져 있는 이 나라는 아프리카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습니다. * 이 나라는 적도에 걸쳐 있으며, 국토의 대부분이 무성한 숲으로 덮여 있습니다. 광대한 삼림과 사바나에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수많은 야생 동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또한 천연 자원이 풍부하여, 오랫동안 국제적인 관심을 끌어 왔으며 침략과 내전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어 왔습니다.

콩고 자유국은 1885년에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를 주권자 겸 단독 소유자로 하여 설립되었습니다. 하지만 콩고 국민들의 삶은 자유와는 매우 거리가 멀었습니다. 레오폴드의 부하들은 상아와 고무를 강탈하기 위해 콩고 국민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고 극도의 잔학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벨기에에 가까이 있던 유럽 국가들은 심히 분개하였고, 레오폴드는 결국 압력에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1908년에 콩고 자유국은 폐지되었으며, 벨기에 의회가 지배하는 식민지인 벨기에령 콩고가 되었습니다. 콩고는 1960년에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콩고 국민들은 종교심이 매우 많습니다. 교회와 신학교와 신학 대학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성서 구절을 인용하여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참 그리스도교를 확립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콩고에서 그 일이 특히 어려웠던 것은 사람들이 한동안 여호와의 증인을 키타왈라라고 하는 종교 운동과 혼동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혼동을 해결하는 문제

“키타왈라”는 “지배하다, 지시하다, 또는 다스리다”를 뜻하는 스와힐리어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운동의 목표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으로서 벨기에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 목표를 이루는 최선의 방법이 종교로 가장하는 것이라고 추리하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키타왈라 집단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출판물들을 입수하여 연구하고 배부하였습니다. 그들의 모임 장소를 나타내는 간판에는 “워치 타워”라는 문구가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뿌리를 내리기 오래 전에, 콩고 남동부에 있는 카탕가 주에서는 이러한 “워치 타워 운동”이 큰 세력이 되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은 키타왈라 추종자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키타왈라는 자신들의 정치적인 견해와 미신적 관습과 부도덕한 생활 방식을 지지하는 쪽으로 성서 진리를 왜곡시켰습니다. 그들은 납세를 거부하였고 식민 통치자들에게 대항하였습니다. 일부 집단들은 당국에 대항하는 무장 반란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벨기에 정부가 그들을 법으로 금지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1956년에 벨기에령 콩고의 한 지역 판무관은 키타왈라의 배경에 대해 밝혀 주는 한 신문 기사를 집필하였습니다. 그 기사는 북로디지아(현재의 잠비아)에 살던 한 니아살랜드(현재의 말라위) 원주민, 토모 니이렌다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니이렌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성경 연구생(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하고 있던 한 사람으로부터, 종교 교육을 받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기사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니이렌다는] 1925년에 [콩고의] 카탕가로 들어와서, ··· 자신을 음와나 리사 즉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칭하였다. 그는 원주민들이 마법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두려움을 이용하여, 자신을 따르는 사람은 마법사로부터 해방될 뿐 아니라 정부든 교회든 기존 권위가 부과하는 온갖 종류의 세금과 명령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될 수단을 갖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마법사로 낙인 찍혀, 의식을 잃을 때까지 구타를 당하고, 그런 다음 강제 ‘침례’ 도중에 익사하였다. (어떤 강에서는 55구의 시체가 회수되었다.) 토모는 한 마을의 부촌장으로부터 고발당한 후, 가까스로 탈출하여 로디지아로 돌아갔다. 로디지아 당국 역시, 그가 저질렀던 살인을 혐의로 그를 찾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에, 그는 체포되었고 재판을 받은 다음 교수형에 처해졌다.”

벨기에 당국에 따르면, 1923년부터 1925년에 걸쳐 소위 음와나 리사가 카탕가에 여러 차례 들어오게 되어 콩고 내에서 키타왈라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여호와의 증인이 그 나라에 입국 및 체류 허가를 받기 수십 년 전이었습니다.

혼동이 일어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아프리카에는 독립 교회가 많다는 사실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몇몇 사람들은 그러한 조직이 수천 개나 된다고 추산합니다. 아프리카 종교 전문가인 존 S. 음비티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그리스도교가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는 교회에 속한 종단, 종파, 그룹, 분파의 수가 많다는 데 있다. 이들 중 많은 수는 외국에서 들어온 것들이다. 하지만 아프리카 그리스도인들 스스로 창시한 것이 더 많다. 그 이유 가운데는 언제까지나 외국인 선교사들의 지배 아래 있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도 있고, 개인적인 권력욕도 있고, 아프리카의 문화나 문제들을 반영한 그리스도교를 만들고자 하는 바람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그리하여 많은 독립 교회들이 있게 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기성 종교들로부터 교리를 빌려오거나 거기서 떨어져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키타왈라 운동도 그다지 독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키타왈라의 존재는 콩고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할 아주 좋은 기회를 그리스도교국에게 제공해 주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키타왈라와 여호와의 증인 사이의 차이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고의적으로 키타왈라와 여호와의 증인은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잘못된 견해를 조장하였습니다.

교회들은 그러한 거짓말을 퍼뜨릴 수 있는 유력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국의 종교들, 특히 가톨릭 교회는 벨기에령 콩고에서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지위를 누렸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은 그 나라에서 아무런 법적 지위도 가지지 못했는데,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계속 그런 상태로 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몹시 경계하는 태도로 자기들의 개종자들을 지키면서 여호와의 증인이 자기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원주민들 가운데서 폭동, 반란, 부족 간의 충돌이 일어나면 편리하게도 키타왈라(흔히 워치 타워 운동이라고 불렸음)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워치 타워라는 이름은 정부 관리들과 당국에 매우 혐오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콩고에서 여호와를 섬기기 원하던 사람들에게 큰 어려움을 초래하였습니다.

이 나라가 독립하게 되기까지 수십 년 동안, 다른 나라에 있던 여호와의 증인들은 콩고 당국에,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는 워치 타워 운동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설명하는 편지를 거듭거듭 보냈습니다. 하지만 여러 해 동안 계속, 관리들은 이러한 자생적인 종교 운동의 활동을 여호와의 백성들의 활동과 관련시켜 생각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을 콩고로 보내려는 계속된 시도는 대부분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증인들이 이 나라에 입국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나라에 있던 참 증인들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콩고 인근의 지부 사무실들에서 들어온 콩고에 대한 보고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그 어려웠던 초창기에 일어났던 일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30년간의 이 콩고 일지에서 발췌한 내용과 그것에 덧붙인 설명을 검토해 보도록 합시다.

콩고 일지—1930-60년 국가별 보고에서 발췌한 내용

1930년: 벨기에령 콩고에서 출판물에 대해 문의하는 편지들을 받았다.

1932년: 벨기에령 콩고를 비롯하여 중앙 아프리카 가운데 아직 증거되지 않은 다른 지역에서도 전파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1932년 5월부터 여호와의 증인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 사무실은 전 시간 봉사자들의 콩고 입국 허가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벨기에 당국에 계속 반복하여 제출하였습니다. 이러한 청원은 묵살되었습니다. 하지만 콩고와 북로디지아 사이에 사람들의 이주가 있었기 때문에 일부 로디지아 형제들이 콩고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대개 그 체류 기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1945년: [벨기에령 콩고]에서 하느님과 그분의 신권 왕국을 옹호하려면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활동과 출판물이 완전히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연합하고 있다고 말하는 콩고 내 아프리카인들은 특정 지역으로 이송되어 때때로 여러 해 동안 거의 감금 상태에서 지내게 될 수도 있다. 콩고에서 우리에게 보낸 편지가 좀처럼 이곳[북로디지아]에 도착하지 않고, 반송 우편 역시 배달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 교직자들로 가득한 이 나라에 있는 우리의 동료 왕국 일꾼들을 돕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일이 수행되고 있다.

1948년: 현재 두 명의 왕국 전도인이 그 지역에 살고 있으며, 브뤼셀 사무실로 얼마의 보고를 보내고 있다. 우리는 언젠가 이 광대한 지역이 열려서 그곳에서도 왕국 복음이 전파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1949년: 가톨릭교가 우세한 이 지역에서 증거 활동은 여러 해 동안 극심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계속되어 왔다. 과거에 사제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되는 것에 대한 처벌로서 때때로 물도 없이 소금 한 덩어리를 먹이곤 하였지만, 현재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스페인 종교 재판에서 사용한 방법과 더 흡사하다. 그들은 정부가 그들을 대신하여 악독하게 압제해 주기를 원하고 있다. 여러 해 동안 아프리카인 전도인들은 증거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부정기형을 받고 교도소에 복역하고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엘리자베스빌(현재는 루붐바시)에서 [5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카사지의 특별 강제 노동 수용소에 보내지기도 한다. 여기서 그들은 작은 구획의 땅에서 노동을 하며, 가족과 함께 또는 가족과 떨어져서 고립의 고통을 겪고 있다. ··· 기간은 10년까지 연장될 수도 있다. 충절을 포기하는 끔찍한 값을 지불하지 않고는 자유나 공의에 대한 희망을 조금도 가질 수 없는 상황 하에서 이러한 격리 생활은 대개 여러 해 동안 계속된다.

그 결과 지하 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어, 집회는 비밀리에 열리며 체포될 위험 때문에 모임 장소를 변경해야 한다. 대부분의 증거 활동은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과 그들의 벗들을 방문하여 이루어졌지만, 그처럼 조심스럽게 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일을 당하였다. 증인들은 체포되어 카사지 수용소로 보내진다.

이러한 시기에 북로디지아 지부 사무실의 루엘린 필립스가 그곳에서 박해받는 증인들을 위해 중재하기 위하여 벨기에령 콩고로 여행하였습니다. 그가 왕국 전파 활동의 성격과 더불어 증인들의 신앙과 키타왈라의 신앙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자 총독과 다른 정부 관리들은 잘 들었습니다. 어느 시점에서 총독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렇게 물었습니다. “만일 내가 당신들을 도와준다면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소?”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 나라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50년: 지난 한 해는 벨기에령 콩고에 살고 있는 형제들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으며, 그들은 많은 고난을 겪었다. 봉사 연도 초에 그 구역으로 보낸 책들과 편지들 얼마가 전달되지 않았으며 연락 수단은 거의 끊겨 버렸다. 다음으로 1월 12일에 총독은 협회를 금지하고, 협회 성원이거나 그들과 모임을 가진 사람 또는 어떤 방법으로든 그들을 지원한 모든 사람들에게 두 달간의 구금과 2000프랑의 벌금을 부과하였다. 가톨릭계 언론은 기뻐하며 이러한 결정을 환영하였다. 체포가 잇따랐다. 전에 엘리자베스빌에서 [회중의] 종으로 있던 사람으로부터 일 년 전에 입수한 명단이 협회와 연합하고 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을 추적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그들은 아내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형기를 마친 후 북로디지아의 아프리카인 형제들은 추방되었지만, 콩고가 고향인 벗들은 많은 경우 엘리자베스빌에서 [500킬로미터] 떨어진 카사지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그곳에는 아직도 일부 형제들이 있다. 몇몇 추방된 형제들은 극히 적은 식품만 공급받았으며, 사카니아에서 북로디지아 국경까지의 마지막 30킬로미터를 걸어서 가야만 하였다.

최근에 비밀 경찰의 수가 늘었으며, 성서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엘리자베스빌 지역에서 온 두 명의 유럽인 자매가 「파수대」를 가지고 있고 증거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45일간의 구금을 선고받았으나, 좋은 행실을 조건으로 (즉 주를 위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3년간의 집행 유예 처분을 받았다는 소식을 조금 전에 받았다. 그들은 매일 추방을 걱정하며 살고 있다.

1951년: 벨기에의 신문과 잡지에는 여호와의 증인과 워치 타워 협회가 벨기에령 콩고에서 “키타왈라”라고 부르는 광신적인 원주민 운동과 연관되어 있다고 비난하는 기사들이 수없이 실렸다. 벨기에에서는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기사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해당 신문이나 잡지는 그 반론을 반드시 실을 것이 법으로 요구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중상하는 기사들로부터 왕국 활동을 변호하기 위하여 이 권리를 이용하였으며 우리의 반론은 실리게 되었다.

1949년 1월 [12일] 이후로 벨기에령 콩고에서는 워치 타워 협회의 활동이 금지되었으며, 여호와의 참 증인들은 이러한 거짓 보도들 때문에 고난을 당해야 했다. 식민지 장관에게 항의서를 제출하였고, 여호와의 증인과 워치 타워 협회는 파괴적인 “키타왈라”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였지만 이러한 항의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받을 수 없었다.

벨기에령 콩고에서는 ‘말씀의 전파’를 완전히 근절시키기 위하여 왜곡된 보도, 박해, 벌금, 구타, 투옥, 추방과 같은 무기들이 사용되었다.

1952년: 중앙아프리카에도 “철의 장막”이 있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서는 철의 장막이 벨기에령 콩고 국경에 드리워져 있다. 로마 가톨릭이 지배적인 이 나라에서, 증거 활동에 내려진 금지령은 끝없이 계속되고 있다.

이 나라에서 간간이 들어오는 얼마의 보고는 아프리카인 전도인들이 겪는 추방과 투옥과 구타 등의 고난에 대해 알려 준다. 여러 지역에서 증인에 대한 악의적인 적개심이 커진 것 같다. 이 나라의 원주민은 증거를 하다가 적발되거나 심지어 워치타워 출판물을 가지고 있다가 적발되어도 노동 수용소로 추방당한다. 심지어 성서를 소지하는 것은 여호와의 증인 중 한 사람이라는 표로 여겨졌다.

형제들의 집은 끊임없이 감시를 받으며 자주 수색을 당한다. 한 형제는 이러한 보고를 하였다. “[벨기에령 콩고의 경찰은] 우리 때문에 잠도 자지 않고 여호와의 증인들만 찾아 다닙니다. 지금은 이전보다 더욱 심각합니다.”

전도인 30명의 8월 보고가 모처럼 이 사무실에 도착하였는데 그 보고의 하단에는 데살로니가 첫째 5:25의 이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다. “형제들이여, 우리를 위하여 계속 기도해 주십시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로디지아 출신의 아프리카인 증인들은 콩고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붙잡히면 투옥되었고 나중에는 추방당하였습니다. 대부분은 교도소에서 단기간 복역하였지만 일부 형제들은 노동 수용소로 보내져 여러 해 동안 억류되기도 하였습니다. 한 형제는 콩고의 여러 교도소에서 거의 5년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를 구금한 사람들은 자주 그를 구타하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증거 활동을 중단하지 않으면 석방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충실한 형제가 다음과 같이 말한 때도 1952년이었습니다. ‘우리는 자루 속에 든 아프리카 옥수수 낟알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씩 떨어지면 그곳이 어디든지, 언젠가는 비가 오고 우리는 많아지게 됩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북로디지아 지부 사무실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분명히, 형제들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 박해 때문에, ‘자루 속에 든 아프리카 옥수수’는 콩고에 퍼지고 있다. 한 번은 루사카에 있는 지부 사무실에서 콜웨지 지역의 증인들과 연합하고 있는 수백 명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그렇지만 소식에 따르면 이제 그들 가운데 많은 수가 콩고의 다른 지역들로 이송되고 있다고 한다.” 형제들이 이렇게 흩어지게 된 결과 제자를 삼는 활동이 확장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이 이 나라의 남동부 지역에서 열심히 활동을 계속해 나가는 동안, 레오폴드빌(현재는 킨샤사)에 처음으로 진리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브라자빌에 있는 형제들은 영적으로 급속히 성장하였고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열정적으로 전하였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배를 타고 콩고 강을 건너와 레오폴드빌에서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52년에 빅토르 쿠바카니와 그의 아내가 킨샤사에서 최초의 침례받은 증인이 되었습니다. 곧이어 회중이 형성되었습니다.

1953년: 약 250명의 형제들이 이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전파 활동에 어느 정도 참여하고 있다고 알려 주는 보고를 받았는데 아마도 그보다 더 많은 수의 형제들이 있을 것이다. 증거는 출판물을 거의 혹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재방문]을 하거나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것으로 제한되어 있다. 형제들은 언제 가택 수색을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한 형제는 소위 “친구”라는 사람이 소책자 두 부를 가지고 있다고 신고하여, 엘리자베스빌에 있는 중앙 교도소에서 두 달 동안 복역하였다.

1954년: 벨기에령 콩고에서는 협회와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대한 전면적인 금지령이 계속되고 있다. ··· 충실한 증인들은 교도소에서 다른 재소자들을 상대로 전파 활동을 수행하고 있는데, 재소자들은 작은 종잇조각과 몽당연필로 필기를 하고 그것을 가지고 가서 교도소에서 나눠 준 성경을 보며 좀 더 확인을 한다. 일부 교도소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다른 재소자들과 분리 수용하는데 그 이유는 분명 그러한 활동 때문이다.

여호와의 증인들과 키타왈라의 활동은 둘 다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관리들은 이 나라로 보내오는 성서 출판물을 몰수하였습니다. 관리들의 검색을 피한 출판물은 때때로 키타왈라가 가로채어 자신들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과 키타왈라는 체포되어 구타당하고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여러분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아볼 것입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마태 7:16) 식민지 당국은 형제들의 훌륭한 행실을 관찰하였으며 형제들과 키타왈라 사이의 차이점을 분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55년: 이 나라에서 활동에 대한 금지령은 계속되고 있으며, 가까운 장래에 금지령이 해제될 가망이 거의 없지만 여호와를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의 열심을 꺾지는 못했다. 작년에 많은 형제들이 투옥되고 추방당하였지만 형제들은 손을 늦추지 않았다.

현 상황에서는 호별 방문 봉사가 불가능하며 따라서 [재방문]과 가정 성서 연구를 한다. 한 회중에서 편지한 바와 같이, “여호와께서 아마겟돈 전쟁 전에 이 나라에서 좋은 소식을 집집으로 전파할 수 있게 해 주실지는 모르”지만 전도인들은 좋은 소식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일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1957년: 의문의 여지 없이 지난해의 활동은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특히 정부 관리들과 언론으로부터 그러하였다. 지난 11월에 [밀턴 G.] 헨첼 형제는 레오폴드빌에 있는 벨기에령 콩고 정부와 직접 교섭을 벌였고 그때 협회와 여호와의 증인에 내려진 금지령을 해제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는 이 첫 교섭에 이어서 레오폴드빌을 한 번 더 방문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뉴욕과 브뤼셀에 있는 대표자들이 교섭을 이어 갔다. 나중에는 아프리카 문제에 정통한 한 벨기에 사람이 북로디지아 지부 사무실을 방문하였고, 그에게 우리의 활동과 우리가 전하는 소식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금지령은 계속되고 있으며 벨기에령 콩고에 있는 형제들은 극심한 어려움 아래 활동해야 한다. 기념식에는 작은 집단으로 모임을 가졌지만, 총 216명이 참석하였다.

1958년: 작년에 좋은 소식의 전파에 대한 금지령과 형제들의 투옥이 계속되는데도 불구하고 왕국 소식은 더 많은 결과를 거두며 퍼져 나갔다.

1959년: 처음으로 형제들은 회중 집회를 열 수 있다는 구두 허가를 지방 당국으로부터 받게 되었다. 하지만 활동에 대한 법적 금지령은 아직 해제되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어떤 회중 집회도 열 수 없었으며 가정집에서 성서 연구를 위한 단지 소규모의 집회만 열렸다. 이제 형제들은 바쁘게 되었으며 처음으로 조직한 회중 집회로 기념식을 마련하였는데, 레오폴드빌에 있는 다섯 [회중]에 총 1019명이 참석하였다. 관찰자들은 집회들이 열렸다는 사실에 경탄하였을 뿐만 아니라 형제들이 그리스도인 동료 관계 속에서 나타내는 기쁨에 찬 영을 목격하면서 놀라워했다. 그로 인해 몇몇 사람들은 ‘형제들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사랑’ 때문에 형제들이 여타 종교인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알게 되었다.

콩고에 선교인을 파견하는 것은 아직 가능하지 않았지만, 1958년 6월 10일에 승인된 관용 법령에 따라, 그곳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실내 집회 장소에서 모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자유롭게 모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로 기쁨에 가득 찼습니다. 때때로 비밀 요원들이 이러한 집회들에 참석하였고 형제들의 훌륭한 행실과 질서에 대해 칭찬하였습니다.

다른 긍정적인 사태 진전도 있었습니다. 1956년까지는 모든 학교들이 종교 조직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편견이 없는 새 식민지 장관은 공립 학교들을 설립하였고 소수 집단에게도 보다 관용적인 태도를 나타내도록 권장하였습니다. 관리들이 키타왈라와 여호와의 증인의 차이점을 식별해 감에 따라 두 집단을 혼동하는 일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흩어진 옥수수 위로 생기를 주는 소나기가 조금 내린 것과 같았습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여호와의 편에 가담하였습니다.

그 즈음에 한 추장이 몇몇 증인들을 붙잡아 재판을 해 달라고 지역 행정관 앞에 데리고 갔습니다. 행정관은 그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물었습니다. 추장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행정관은 추장을 몹시 꾸짖고 형제들을 풀어 주었으며, 그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교통편을 제공해 줄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1960년: 작년에 벨기에령 콩고에서는 활동에 놀라운 진전이 있었다. 이 나라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고 활동이 계속 법적으로 금지령 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이 왕국회관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여는 것이 가능하였다.

수도인 레오폴드빌 시에서는 기념식 철에 특별한 일이 있었다. 그 도시에 있는 여섯 [회중들은] 일요일에 공개 강연 집회를 함께 갖는 마련을 하였고, 1417명의 참석자를 보며 감격하였다. 그때에 [감독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 감격을 이렇게 썼다. “그런 모임을 시도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매우 행복했습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우리를 둘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웃 지부들의 보고를 정리한 이 30년간의 일지를 통해 콩고에서 벌어진 활동의 개요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더 큰 발전이 있었는지 알아봅시다.

국가의 독립이 다가오다

1950년대 말에, 북로디지아 지부의 감독을 받던 콩고의 왕국 전파 활동은 법적 인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관리들에 의해 묵인되고 있었습니다. 한편 새로운 문제들과 불안한 사태가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국가주의가 강하게 자라났으며, 식민 세력에 대한 저항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1959년 1월에는 폭도들이 레오폴드빌에 있는 상점들을 약탈하고 불로 태웠습니다. 그들은 또한 교회들을 약탈하고 우상들을 길거리로 내던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벨기에 관리들과 지방 정당들의 대표자들 사이에 회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1960년 6월 30일을 국가의 독립일로 정하였습니다. 물론 여호와의 증인은 아무도 그 폭동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나라 전역에서 지방 정당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구성원들은 정치적 신념보다는 흔히 부족적 유대에 의해 결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형제들에게 당원증을 사게 하려고 극심한 압력을 가하였습니다. 침례를 받은 지 일 년이 된 피에르 마프와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960년 6월의 한 토요일이었습니다. 정오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레오폴드빌의 구공항을 지나쳐 가는데, 한 남자가 칼을 들고 내게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당원증을 꺼내 봐’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내 얼굴에 칼을 휘둘러 코를 베어 버렸습니다. 그는 계속 칼로 나를 찔렀습니다. 나는 달아나려고 했지만 땅에 쓰러졌습니다. 나는 여호와께 부활 때 나를 기억해 주셔서 아내와 여섯 자녀를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짧은 기도가 끝나자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군인들이 나를 죽이려 했던 그 사람의 무릎을 총으로 쏘아 쓰러뜨린 것입니다. 경찰은 나를 병원에 실어다 주었고 거기서 나는 치료를 받았습니다. 성서 구절들은 내게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최초의 선교인 도착과 지부 사무실 개설

살펴본 바와 같이 여호와의 증인의 대표자를 콩고로 보내기 위해 거듭거듭 노력을 기울였지만 성공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상황들은 변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에르네스트 호이세 2세가 입국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호이세 형제는 검은 곱슬머리에 키가 크고 건장한 벨기에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콩고에서의 생활이 자신이나 아내 엘렌, 그리고 11살 된 딸 다니엘에게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은 알고 있었습니다. 에르네스트의 경험은 앞에 놓여 있던 일을 수행할 자격을 적절히 갖추게 해 주었습니다. 그는 1947년 브뤼셀에서 베델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일 년 후에 그는 결혼하였고 아내와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에르네스트는, 키타왈라와 여호와의 증인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특별하게 마련된 팜플렛을 가지고 변호사들이나 관리들과 접촉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는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습니다.

에르네스트는 콩고 입국 서류를 얻으려고 여러 번 시도하였으며 심지어 벨기에 국왕에게 개인적인 청원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에르네스트의 이름은 콩고 입국에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의 명단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에르네스트는 꾸준히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아프리카로 여행하여 이웃 나라들을 통해 콩고로 들어가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그는 콩고(브라자빌)의 수도인 브라자빌로 여행할 수 있는 비자를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레오폴드빌로 갔습니다. 그가 도착하자 근무 중이던 관리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그의 이름이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들의 명단에 올라 있기 때문에, 그에게 비자를 발급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관리들 중 한 사람인 시릴 아둘라(나중에 수상이 되었음)는 에르네스트가 콩고 입국을 여러 차례 시도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전 식민주의자들이 호이세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호이세는 콩고의 벗임에 틀림이 없다고 추리하였습니다. 에르네스트는 임시 비자를 받았고 후에 체류 비자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1961년 5월에 여호와의 증인은 콩고에 제자 삼는 활동을 감독할 대표자를 두게 되었습니다.

에르네스트는 엘렌과 다니엘을 불러왔고, 그해 9월에 다니엘은 레오폴드빌에 있는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1962년 6월 8일에는 최초의 지부 사무실이 수도에 개설되었습니다. 사무실과 숙소는 반 에트벨드 거리(현재는 뒤 마르셰 거리)에 위치한 삼 층짜리 아파트에 있었습니다. 공간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출판물은 서적 보관소에 따로 보관하였습니다. 심각한 주택난 때문에, 이러한 상황은 그다지 이상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최상의 해결책이었습니다.

호이세 형제는 즉시 활동에 착수하였습니다. 그는 브라자빌 지부 사무실에서 영사기와 필름을 빌려 왔습니다. 그다음 “신세계 사회의 행복”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레오폴드빌에 있는 회중들과 일부 정부 관리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모두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증인들 사이에 국제적인 형제 관계가 존재하는 것을 보는 것은 형제들뿐 아니라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매우 계몽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흑인 형제가 유럽 형제들에게 침례를 주는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레오폴드빌의 시장은 그 영화를 매우 즐겁게 보고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만들어 낸] 이 작품을 가능한 한 많이 보도록 권장해야 합니다.” 처음으로 네 번에 걸쳐 상영을 했을 때 무려 1294명이 참석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여러 해 동안 기다린 끝에 마침내 도움을 베풀어 줄 사람이 있게 되어서 매우 기뻤습니다. 이전에는 유럽의 형제들에 대해 이름만 들었을 뿐입니다. 벨기에 당국은 벨기에에 여호와의 증인이 한 사람도 없다고 단언해 왔기 때문에 일부 형제들은 증인들이 실제로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던 적도 있었습니다. 형제들에게는 호이세 형제가 그들 가운데 함께 있게 되어서 벅찬 기쁨을 느꼈습니다.

진리를 적용하는 일—도전이 되다

형제들이 진리를 생활에 적용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부족 간의 적개심이 지속되고 있었고, 일부 회중의 감독자들은 다른 감독자들과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한 부족민이 주로 있는 회중에서 누군가가 제명되었을 경우, 그 제명된 사람은 자기와 같은 부족 출신의 형제들이 많이 있는 다른 회중의 장로들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습니다. 한 회중에서 내린 결정이 다른 회중에서는 효력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부족의 관습이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부족 중심의 생각이 회중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부족의 관습 때문에 다른 문제들도 생겨났습니다. 일부 부족들 가운데서는 부부 관계가 부족에 대한 충성에 기초를 두고 성립되었습니다. 보통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친밀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결혼은 부족의 마련으로 여겨졌습니다. 부족의 구성원들이 어떤 결혼을 승인하지 않는 경우, 그들은 남편을 강요하여 아내를 버리고 부족에서 결정한 다른 여자를 취하도록 강요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비참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종종 남편의 가족들은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가져가서 아내와 자녀들을 빈털터리로 만들어 버리곤 하였습니다. 일부 부족들에서는 아내가 사망하면 남편이 그 책임을 져야 하였으며 아내의 가족들이 그에게 벌금을 부과하였습니다.

다른 문제들도 있었습니다. 아직도 콩고의 많은 사람들은 자연적인 원인 때문에 사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믿습니다. 그 때문에 매장할 때 그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찾아내는 의식이 있습니다. 책임을 질 사람의 머리를 미는 일을 포함하여 다른 많은 관습들이 행하여집니다. 몇몇 부족들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남편의 부족에 소속된 남자와 성 관계를 가짐으로 소위 정화(淨化)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장례식 때에는 죽은 사람에게 말을 하는 경우도 흔히 있는데 그것은 육체가 죽을 때 영혼이나 영은 살아남는다는 믿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깊이 뿌리박힌 모든 관습들을 고려해 보면, 순결한 숭배를 드리기 원하는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던 문제들이 쉽게 상상이 될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주장하던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관습들을 온전히 버리지 않고, 심지어는 그런 관습들을 그리스도인 회중 안으로 들여오려고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담대하고 정직한 감독자들이 필요하였습니다. 여호와를 사랑한 사람들은 기꺼이 그러한 감독자들로부터 배우고자 하였으며 필요한 변화를 하였습니다. 이미 진리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의 강하게 방비된 사상을 무너뜨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을 키타왈라와 혼동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부 사무실이 개설되었다는 소식이 전국에 퍼지자 형제들로 이루어진 많은 집단들에서 회중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키타왈라 집단들 역시 그렇게 하였습니다. 한 보고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무려 23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와서, 여호와의 증인으로 인정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긴 명단을 제시하였다. 때때로 이러한 명단들은 가로가 70센티미터에 세로가 90센티미터나 되는 종이에 작성되어 있기도 했었고, 때로는 두세 마을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개인들이나 집단을 여호와의 증인으로 인정하기 이전에, 먼저 누가 참 그리스도인이고 누가 키타왈라인지를 확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호이세 형제는 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장성한 형제들을 파견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처는 수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이들 충실한 형제들이 겪은 얼마의 경험을 고려해 보도록 합시다.

키타왈라와 맞서다

1960년에 비교적 체구가 작고 성격이 온화한 폰티엥 무캉가 형제는 콩고에서 최초의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콩고(브라자빌)에서 훈련을 받은 후에 레오폴드빌에 있는 회중들과 인근에 있는 몇몇 격지 집단들을 방문하였습니다. 하지만 훨씬 더 어려운 임무가 앞에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키타왈라와 맞서는 일이었습니다.

무캉가 형제가 처음으로 여행한 곳들 중 한 군데는 키상가니(당시에는 스탠리빌이라고 불렀음)였는데, 그곳은 수도에서 16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곳까지 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호이세 형제가 야외 봉사에서 만난 한 유럽 사람이, 콩고가 막 독립하고 나서 스탠리빌에서 찍었던 사진을 호이세 형제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사진에는 철도 역 앞에 큰 간판이 있었는데, 간판에는 성경이 펼쳐져 있는 그림이 있고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만국 성경 연구생 협회—콩고인의 종교 키타왈라—파트리스 E. 루뭄바 만세—앙투안 기쟁가 만세—M.N.C. 정부 만세”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분명히 키상가니에 있는 키타왈라가 여호와의 증인의 법적 단체들의 이름을 도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키상가니에 진실한 여호와의 증인이 있었습니까? 그 점을 알아보기 위해 무캉가 형제가 파견되었습니다. 지부가 가지고 있던 정보라고는 붐바에서 진리를 듣고 1957년에 키상가니로 돌아갔다는 사뮈엘 치카카라는 남자에 관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사뮈엘은 여하한 키타왈라 집단에도 속해 있지 않았으며 무캉가 형제를 간절한 마음으로 돕고자 하였습니다. 무캉가 형제는 후에 이와 같이 썼습니다. “나는 사뮈엘과 함께 워치 타워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조사하러 갔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목회자를 방문하였는데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집단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들 중 몇몇이 성서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들 모두는 영혼불멸을 믿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내를 서로 교환함으로 사랑을 나타내라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내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들은 그 도시에 있는 키타왈라를 체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키타왈라는 싸움을 벌였습니다. 경찰은 병력을 강화하기 위해 군인들을 불렀습니다. 키타왈라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다음날 사상자들을 태운 배 한 척이 강을 건너왔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목회자의 비서가 있었는데, 그는 내가 이틀 전에 그들의 지도자를 찾아갔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내가 그들을 당국에 밀고하였다고 거짓 비난을 하면서, 나 때문에 싸움에서 사람들이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키타왈라 동료들에게 내가 도망가지 못하게 단단히 지키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들이 나를 죽이기 전에 피할 수 있었습니다.”

벨기에의 신문들은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기사의 제목을 “여호와의 증인과 경찰의 싸움”이라고 썼습니다. 하지만 키타왈라와 여호와의 증인의 차이점을 알고 있었던 콩고 당국은 정확한 보도를 하였습니다. 콩고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하는 신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뮈엘 치카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여전히 진리 가운데 있으며 키상가니 초포 동부 회중에서 장로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현재 키상가니에는 1536명의 전도인이 22개 회중으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사뮈엘의 아들인 로토모는 약 40년 전의 폰티엥 무캉가처럼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바로잡는 일을 한 순회 감독자

프랑수아 단다도 증인들과 키타왈라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노력한 순회 감독자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때는 어려운 시기였고 많은 혼란이 있었습니다. 키타왈라는 항상 자신들의 모임 장소에 영어로 ‘워치 타워’라는 문구가 들어간 간판을 걸어 두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출판물에는 언어에 상관없이 발행소 페이지에서 ‘워치 타워’라는 글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누군가가 우리의 출판물을 읽었고 하느님의 백성을 찾으려 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지방 언어로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이라는 간판이 걸린 모임 장소와 영어로 ‘워치 타워’라고 적힌 간판이 걸린 모임 장소를 발견할지 모릅니다. 그 사람이 어느 쪽으로 가기가 더 쉬웠겠습니까? 얼마나 혼동이 되었을 것인지 이제 알 것입니다.

많은 형제들은 정확한 지식이 없었고, 구할 수 있는 출판물도 거의 없었습니다. 회중들은 흔히 진리를 키타왈라의 교리와 혼합하였는데 특히 결혼의 신성함과 관련하여 그렇게 하였습니다. 내가 방문했던 한 도시에서는 ‘연합된 형제들 전체를 사랑하라’는 베드로 첫째 2:17이 회중 내에서 어떤 형제든지 자매들과 성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자매가 남편이 아닌 형제에 의해 임신한 경우에도 남편은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였습니다. 일 세기에 그랬던 것처럼 ‘가르침을 받지 못한 불안정한 사람들이’ 성경을 곡해하고 있었습니다.—베드로 둘째 3:16.

나는 결혼에 관한 문제를 포함하여 여호와의 표준에 대한 매우 직접적인 성경적 연설을 했습니다. 꾸준히 조금씩 바로잡아 나가야 할 문제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내를 교환하는 행위는 즉시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기쁘게도 형제들은 올바른 성경적 견해를 이해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도시에 있는 몇몇 키타왈라의 성원들조차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무캉가 형제와 단다 형제 등 그들과 같은 많은 형제들의 노력으로 인해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키타왈라와는 다르다는 점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아무도 “키타왈라”를 “워치 타워”와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습니다. 키타왈라가 지금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과거와 같이 눈에 띄거나 강력하지 않습니다. 많은 지역에서는 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조직이 강화되어 증가가 이루어지다

1962 봉사 연도 말에는 콩고 전역에서 2000명 이상의 전도인들이 열심히 여호와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감독자에 대한 성경적 요구 조건을 갖춘 형제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문맹도 한 가지 문제였는데 특히 연로한 사람들 가운데서 그러하였습니다. 또 다른 문제로, 부족의 관습이 엄청난 장애물이 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의로운 표준을 신속하게 따르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키타왈라와 연합했던 사람들은 봉사의 특권을 받기 위해서 여러 해를 기다려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점차 건전한 성경적 가르침과 여호와의 영의 작용에 힘입어 형제들은 회중에서 감독의 직분을 맡기에 적합한 자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나라 전역에서 용기 있는 순회 감독자들과 파이오니아들은 형제들을 강화하고 훈련하기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 무렵에 잠비아에서 훈련을 받았던 순회 감독자와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카탕가와 남(南)카사이 같은 내전에 휩싸여 있던 지역에도 들어갔습니다.

독립 후—종교적 관용이 베풀어진 시기

1958년에 정부가 형제들에게 상당한 종교적 자유를 준 관용 법령을 공표한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1960년대 초에 형제들은 계속해서 공식적인 법적 인가를 요청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정부 보조금이나 다른 재정적 지원을 받으려고 간청하였던 것이 아니라 법적인 인가를 받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인가를 받으면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좋은 소식을 전파할 수 있게 될 것이었습니다. 많은 지역에서 지방 당국이 형제들에게 조직적인 공격을 하였기 때문에 법적 인가를 받는 것이 긴급하게 필요하였습니다. 집회 장소가 불에 탔고, 형제들은 구타와 체포를 당하고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형제들이 법무부에 항의를 하면, 항상 이러한 똑같은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유감이지만 여러분들은 법적 인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여러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에 더하여 내륙 지역의 혼란스러운 정국 역시 문제였습니다. 이 나라의 특정 지역들에서는 중앙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지역에서는 지부 사무실에서 보내는 편지 한 통만으로도 충분히 지방 당국이 형제들을 감옥에서 석방시키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대가 굳게 뿌리내린 지역에서는 박해와 투옥으로부터 형제들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킨샤사의 형제들은 거의 반대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이 도시에서는 단지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만 큰 규모의 모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64년에 지부 사무실은 수도에서 두 차례의 순회 대회를 열 계획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형제들에게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은 특별한 모임들에 참석하여 연설을 제공하는 일과 대회 부서를 조직하는 일에 대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형제들은 열의에 찬 나머지, 대회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였고, 그것이 당시의 레오폴드빌 주의 주지사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지방 당국에 배포할 한 편지의 등사 원지를 준비하였습니다. 그 편지에는 증인이 전파하거나 숭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을 보면 모두 체포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편지를 등사하라고 보냈을 때, 그 일을 마침 한 형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그 형제에게는 등사할 종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또 그는 레오폴드빌의 상점들에도 재고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감독관이 편지 사본을 받으러 왔을 때 그 형제가 보여 준 선반은 비어 있었고 종이가 한 장도 없었습니다!

한편 형제들은 그 문제에 대해 여호와께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뜻밖에도 정부는 몇 개의 새로운 주를 만들기로 결정하였고 그 반대자가 다스리던 주는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하느님의 백성을 괴롭히거나 멸하려고 한 사람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좌절되었습니다.—이사야 54:17.

많은 선교인들의 도착

1960년대에 조직에서는 기회를 잘 활용하여 선교인들을 콩고로 보냈습니다. 킨샤사에는 작은 선교인 집이 개설되었습니다. 1964년 3월에 선교인 줄리언 키슬과 마들렌 키슬 부부가 캐나다에서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킨샤사 베델 가족의 성원으로서 충실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입국한 몇몇 선교인들은 현재 다른 나라들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1965년에 스탠리 보거스와 버사 보거스 부부는 아이티에서 봉사한 후 콩고로 임지가 변경되었습니다. 여행하는 감독자였던 보거스 형제는 건강 문제로 1971년에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1965년 말쯤에 마이클 포티지와 바버라 포티지 부부가 콩고에 있던 선교인들과 합류하였습니다. 그들은 현재 영국 베델에 있습니다. 윌리엄 스미스와 앤 스미스 부부는 1966년에 콩고로 배정되었는데 그들은 주로 카탕가에서 봉사하였습니다. 그들은 금지령 때문에 1986년에 케냐로 임지가 변경되었습니다. 독일 출신으로 길르앗 제44기 학급을 졸업한 만프레트 토나크는 콩고에서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하였습니다. 금지령이 내려졌을 때 그의 임지는 케냐로 변경되었습니다. 그는 현재 에티오피아 지부의 조정 위원입니다. 1969년에는 데럴 샤프와 수잔 샤프 부부가 길르앗 제47기 학급을 졸업한 후 콩고로 왔습니다. 그들은 콩고에서 추방된 후 잠비아로 임지가 변경되었으며 그 이후로 루사카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다른 선교인들은 서아프리카의 나라들로 임지가 변경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라인하르트 스페어리히와 하이디 스페어리히가 있었는데 그들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이러한 비극적인 일은 그들을 아는 모든 사람에게 큰 슬픔이 되었습니다.

1966년에는 킨샤사 이외의 지역에서는 최초의 선교인 집이 콩고의 남동부에 위치한 루붐바시에 개설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루붐바시의 북서쪽에 있는 콜웨지, 카사이 주의 카낭가(당시에는 룰루아부르그)에도 개설되었습니다. 선교인들이 와 있는 것은 형제들을 안정시켜 주고 진리에 따라 생활하도록 돕는 강력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카사이에서는 형제들 사이에 부족 간의 적개심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선교인들은 어느 부족에도 속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를 중재하고 사법 문제를 공정하게 처리할 좋은 입장에 있었습니다.

1968년부터 1986년까지 60명 이상의 선교인들이 이 나라 각지에서 봉사하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미국에 있는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를 졸업한 사람도 있었고 독일에 있는 길르앗 분교를 졸업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에 더하여 프랑스어를 하는 파이오니아들이 선교인으로 콩고에 곧바로 오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지 언어를 배웠고 모두가 왕국의 좋은 소식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1960년대의 왕국회관

큰 도시들에는 집회 장소가 보통 벽이 트인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건물은 덥고 습도가 매우 높은 날씨에 유리하였으며, 대체로 저녁이나 이른 아침, 선선할 때 집회를 가졌습니다. 비가 오지 않을 때에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우기에는 종종 집회를 다른 날로 연기해야 하였습니다.

1962년에는 첫 왕국회관이 봉헌되었습니다. 그 회관은 킨샤사의 킴반세케에 위치해 있었으며 그 당시에 있던 여섯 회중들 중 한 회중의 소유였습니다. 그 이후로 콩고에 있는 회중들은 매우 솔선하여 왕국회관 건축에 참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따금씩 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때때로, 회중이 회관을 짓는 데 형제가 자신의 땅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였지만 법적 서류는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그 형제가 사망하였을 때, 그 가족 성원들이 와서 회관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압류하곤 하였습니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나중에 금지령 기간에는 지방 당국이 많은 회관들을 차지하고는 자기들이 정한 용도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왕국회관 건축이 대대적으로 시행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 전역에서 왕국회관이 건축되었습니다. 대부분 간소한 건물이기는 하였지만 모든 회관은 그것을 지은 사람들의 믿음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한 선교인이 집회 장소에 관해 한 말을 고려해 보십시오.

“레오폴드빌에 있는 왕국회관에 가려면 우리는 미장을 안 한 콘크리트 집들 사이로 난 통로를 걸어 내려가야 합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우리를 따라옵니다. 우리는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마당으로 들어섭니다. 벽이 트인 왕국회관은 형제들이 사는 집 뒤편에 있습니다. 형제들은 왕국 노래를 연습하고 있습니다. 그 노랫소리는 정말 감동적입니다! 그들은 마음을 다해 노래를 부릅니다. 나무 그늘이 회관에 드리워져 햇빛을 가려 주어서 참 좋습니다. 회관에는 약 200개의 좌석이 있습니다. 연단은 콘크리트로 만들었고 지붕은 골함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만일 연사가 키가 크면 상체를 약간 구부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부 사무실에서 온 편지나 회중 임명을 게시하기 위한 게시판이 있습니다. 출판물을 놓는 탁자도 있습니다. 형제들은 연단 주위에 화분을 놓아두었습니다. 형제들은 저녁에도 집회를 가질 수 있도록 석유램프를 사용해서 불을 밝힙니다. 아이들은 우리가 떠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큰길까지 우리를 따라 나와 줍니다.

이제 우리는 콩고 내륙 깊숙한 곳으로 여행합니다. 초가들로 이루어진 마을에 들어서면 왕국회관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이 회관은 아홉 개의 기둥이 잎을 엮어 만든 두툼한 지붕을 지탱하고 있는 건물입니다. 회관 바닥에는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파 놓은 작은 도랑들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바닥에 앉을 때 발을 도랑 속에 둘 수 있어 불편하지가 않습니다. 집회를 사회하는 형제 위쪽에는 지방 방언으로 ‘왕국회관’이라고 쓴 간판이 걸려 있습니다. 대략 30명이 참석해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 가운데 반 정도만 전도인일 것입니다. 그들은 왕국 노래를 몇 곡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음악적 지식은 부족하지만 열정으로 그 부족함을 채우고 있으며, 우리도 마음을 다해 함께 노래를 부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나라의 북부 지역으로 여행합니다. 랜드로버 자동차를 세우고 마을을 바라봅니다. 모여 있는 초가들이 보이고 그 뒤로는 다른 집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건물이 보입니다. 이 건물은 두꺼운 대나무 기둥을 서로 단단하게 연결시켜 만든 것입니다. 창문과 문은 대나무 벽을 잘라내어 만들었습니다. 지붕은 풀로 되어 있습니다. 건물의 정면에는 깔끔하게 다듬은 잔디 사이로 좁은 길이 나 있으며 그 잔디 위에는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쓴 조그만 간판이 있습니다.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 왕국회관에 도착하면 형제들이 기쁘게 환영해 줍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대나무 장대로 만든 긴 의자들이 똑바로 세워 놓은 대나무 말뚝을 가로질러 놓여 있는 것이 보입니다. 왕국회관 지붕이 방수가 되어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만일 대나무 말뚝에 물이 스며들면 대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신속하게 자랍니다. 그러면 바닥에서 30센티미터 높이의 의자가 훨씬 더 높아질 것입니다. 게시판에는 집회 시간표와 지부 사무실로부터 온 편지가 게시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은 쪼갠 대나무와 갈대를 함께 엮어 만든 탁자에 놓인 출판물을 받아갑니다.

우리는 카탕가를 향해 남쪽으로 여행하는데 이곳에 오니 해가 막 지고 있습니다. 이곳의 날씨는 훨씬 더 선선하기 때문에 따뜻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마을에 도착하여 왕국회관으로 가까이 가는데 형제들이 노래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마을에 있는 형제들은 보통 손목시계가 없기 때문에 해를 보고 집회 시간을 어림합니다. 보통 회관에 제일 먼저 도착한 형제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여 대부분이 도착하여 집회를 시작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부릅니다. 우리는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 두 개의 버팀대를 붙여서 만든 의자에 꼭 붙어 앉습니다. 출판물은 오래된 진열장에 보관하는데 바퀴벌레나 흰개미가 들어와 종이를 망쳐버릴 수 있기 때문에 장시간 보관할 수는 없습니다. 집회가 끝나자 형제들은 우리가 회관을 둘러보게 해 줍니다. 벽은 작은 나뭇가지를 갈대로 묶은 다음 그 위에 진흙을 덮어 만들었습니다. 이 방수 지붕은 풀을 엮어서 만들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종들을 보호하신다

1960년대에는 내전과 폭력이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일부 여호와의 백성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때때로 집회는 정치적인 모임으로 오인받았기 때문에, 형제들이 함께 모이기 위해서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였습니다. 에카퇴르 주에서는 형제들이 집회를 보고 있던 왕국회관으로 무장 군인들이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형제들이 하느님을 숭배하기 위해 모인 것이지 정치 선전을 하려는 것이 아님을 금세 분간하였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자기들이 종교나 하느님을 대적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떠나갔습니다.

다른 한 경우로, 키상가니에서 베르나르 마융가와 다른 몇몇 전도인들은, 지방 정부의 고관들을 찾아내어 처형하려던 반군에게 붙잡혔습니다. 베르나르는 어느 부족에 속해 있는지 질문받았을 때 “나는 여호와의 증인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놀란 반군 지도자는 설명을 요구하였습니다. 베르나르는 성경을 사용하여 증거하였고 그러자 반군 지도자는 “모든 사람이 당신만 같다면 전쟁은 없을 텐데”라고 말했습니다. 베르나르는 붙잡혀 있던 다른 증인들과 함께 풀려났습니다.

마침내 법적 인가를 받다!

1965년까지 콩고 베델은 여전히 킨샤사 중심지에 있는 한 아파트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장소는 협소했습니다. 왕국 선포자들의 수가 4000명에 달하였으며 더 큰 시설이 필요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부지런히 찾아다닌 끝에 킨샤사의 리메테 지역에 있는 데젤레팡 거리 764번지에 위치한, 6년밖에 안 된 집을 한 채 구하였습니다. 그 건물은 이층 건물이었고 침실이 네 개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작업에 착수하였고 일층의 큰 거실과 식당을 개조하여 사무실로 만들었습니다. 차고는 발송과 등사 인쇄를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1972년에는 이 건물을 증축하였습니다.

1965년 11월에 조제프데지레 모부투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습니다. 지부 사무실은 또다시 법적 인가를 요청하는 서류를 제출하였고 1966년 6월 9일에 모부투 대통령은 그것을 허가하는 법령에 서명하였습니다. 이제 여호와의 백성은 콩고 내에서 법적 인가를 받은 다른 모든 종교와 동일한 권리와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32년 이래 형제들이 노력하고 기도해 온 것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전파하고, 큰 대회들을 열고, 재산을 소유할 자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도 6년밖에 가지 못했습니다.

대회들을 통해 큰 증거가 이루어지다

법의 보호 아래 순회 대회를 조직하는 일은 형제들에게 정말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열한 차례에 걸쳐서 처음으로 열린 일련의 대회들에는 총 1만 1214명이 참석하였고 465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대회들로 인해 지방 교회들은 강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교직자들은 이 비옥한 구역이 자기들의 영토라고 생각하고는, 여호와의 증인이 이곳에서 법적 인가를 받지 못하게 하려고 격렬히 싸워 왔던 것입니다. 카사이 주의 간다지카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이 시장에게 항의하였습니다. 시장이 그들의 협박에 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청년들을 대회장으로 보내어 모임을 방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회장에서는 성서에 근거한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기 위해 와 있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서 말썽을 일으키려던 사람들도 자리를 잡고 앉아서 영화를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필름의 릴을 갈아 끼우는 동안, 수천 명에 달하는 군중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만세!”

이제 여호와의 증인은 큰 지역 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지만 실제로 대회를 열 수 있기까지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였습니다. 성서 드라마를 준비해야 하였으며 드라마를 하려면 의상 역시 필요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음향 장치를 설치하고 작동시켜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자원하고 배우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순회 대회에서 섬기기 위해 여행함

1964년에 콩고에는 두 개의 지역구를 구성할 만큼의 순회구가 있었습니다. 1969년에는 카사이에 세 번째 지역구가 형성되었으며 1970년에는 네 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도로 사정이 열악하였기 때문에 지역 감독자들이나 그 밖의 사람들은 크고 작은 대회를 위해 여행하면서 종종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예로서, 지역 감독자 윌리엄 스미스가 순회 대회를 위해 여행하는 길을 함께 따라가 봅시다.

“시골에 비가 엄청나게 와서 강물이 불어났습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카미나였는데 그곳에서 순회 대회를 열 계획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곳까지 가려면 320킬로미터를 더 가야 하였습니다. 폭우 때문에 어떤 도로는 진흙 바다가 되었고, 다른 곳에서는 도로가 침수되어 유실되었습니다. 계곡 한 곳은 호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승용차와 트럭과 정부 차량들이 곳곳에 주차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2주 정도 지연될 것이라고 예상하였습니다.

형제들이 순회 대회 프로그램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참석하기 위해 며칠을 걸어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계곡을 우회해 갈 수 있는 길이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조그만 샛길을 만들었는데 땅이 너무 물러서 지역 감독자가 그 길을 지나 카미나로 가기 전에는 아무도 지나가게 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두 마을에 있는 형제들이 하루 종일 밤새도록 그리고 그 다음날까지 꼬박 일하여 불통된 구간을 우회하는 새로운 길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나는 곧 형제들을 발견하였으며 형제들이 낸 길로 지프차를 운전하여 지나가려고 준비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과연 지프차가 지나갈 수 있을 것인지 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새 길에 들어선 다음 몇 미터도 못 가서 지프차가 무른 땅에 빠지는 것을 보고 우리는 정말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형제들이 밀어보았지만 차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은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얼굴에 실망했다는 표가 역력히 나타났습니다. 그렇지만 지역 감독자를 대회에 보내야겠다는 그들의 결심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새 길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 구경꾼들은 자기들의 차로 돌아갔습니다. 형제들은 다시 시도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차를 무겁게 만든 출판물들과 음향 장비들과 발전기 등의 짐들을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형제들이 땅을 파고 차를 밀자 바퀴가 돌면서 지프차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시간 후에 우리는 진흙탕을 성공적으로 빠져나온 것을 축하하여 환호하면서 왕국 노래를 불렀습니다. 차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던 일을 형제들이 해낸 것입니다. 순회 대회는 그 형제들이 열심히 일해 준 덕분에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과 함께 계셔서 자신의 뜻을 행할 수 있게 그들을 도와주십니다.”

새 정권이 변화를 가져오다

면적이 수천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적도의 우림 지역과 사바나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교인들이 비교적 큰 읍들에서 전파하는 동안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는 지방 형제 자매들은 시골 구역을 개척하였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 중 다수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강한 회중을 세우는 일은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나라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형제들은 생활에 영향을 받게 될 것이었습니다.

1970년에는 일당제가 시행되었습니다. 그 당은 혁명 인민 운동당(프랑스어로는 Mouvement Populaire de la Révolution) 혹은 MPR이라고 알려졌습니다. 그 당의 정책은 전통적인 가치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으며 거기에는 읍과 도시들의 이름을 다시 짓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스탠리빌은 이미 키상가니로 바뀌었고, 엘리자베스빌은 루붐바시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정부는 1971년에 국명과 주요 강의 명칭을 콩고에서 자이르로 바꾸었습니다. 화폐 역시 프랑에서 자이르로 변경하였습니다. 정부는 사람들의 이름도 바꾸도록 요구하였는데, 그리스도교적인 이름은 아프리카식 이름으로 바꿔야 하였습니다. 넥타이를 매는 일은 유럽인들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금지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 형제들은 존중심을 나타내는 태도로 복종하였습니다.—마태 22:21.

그 정치 이념에 따르면, 콩고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자동적으로 MPR의 현역 당원이 되었습니다. 직장에 나가거나, 학교를 다니거나, 시장에서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당원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정당 배지를 달아야 하였으며, 특히 관공서에 출입할 때 그렇게 해야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에게는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형제들은 직장을 잃었고 자녀들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몇몇 정부 관리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입장을 이해해 주었습니다. 내무부 장관은 자신을 위해 일하던 한 형제에게 왜 정당 배지를 달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그 형제는 성경적인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그 장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잘 알기 때문에 문제 삼지는 않겠지만 청년 운동은 당신을 힘들게 할거요.”

모부투 대통령은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많은 불평을 접수하고서, 한 모임에서 당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일 나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다 해도, 그 문제는 여호와의 증인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 것이오. 예수를 배반한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보시오. 그는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유다였소. 만일 누군가 나를 배신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사람일거요.’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베델 확장

1971년 1월에 브루클린 본부에서 네이선 H. 노어 형제가 콩고를 방문하였습니다. 그의 방문 중에 토의된 한 가지 안건은 베델 집과 사무실을 확장하는 것이었습니다. 1970년경에는 거의 1만 4000명에 달하는 전도인이 194개 회중과 200개가 넘는 격지 집단에 연합하고 있었습니다. 콩고에서 출판물 수요가 점점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델 창고가 협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노어 형제가 현재의 건물이 증축될 것이라는 발표를 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설계자는 당시 건물의 두 배 규모의 새로운 현대식 이층 건물의 설계도를 작성하였습니다. 그 설계도에는 큰 사무실, 큰 창고, 그리고 추가 숙소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71년 6월에 건축 설계에 대한 승인을 받았고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다호메이(현재는 베냉)에서 파견된 돈 워드가 건축을 감독하였습니다. 일을 돕기 위해 킨샤사의 39개 회중에서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왔으며, 그들은 함께 건축 공사를 마쳤습니다. 야외에서 그리고 베델에서의 이러한 모든 확장은 그리스도교국의 종교들을 더욱 자극하게 되었는데 이제 그 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970년대—용기를 나타내고 조심해야 했던 때

1971년 12월에 정부는 전국에서 형성되고 있던 많은 새로운 종교들과 기도 모임을 단속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새로운 법안에 따르면 단 세 개의 종교만이 합법적이었는데 그 종교들이란 로마 가톨릭 교회, 프로테스탄트 교회, 그리고 현지 종교인 킴방구주의자 교회였습니다. 1972년에 다른 세 종교 즉 이슬람교, 그리스 정교회, 유대교 역시 인가를 받았습니다. 더 작은 규모의 많은 종교들은 자신들을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분류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1971년부터 1980년까지 인가를 받지 못한 반금지 상태의 기간이 있게 되었는데 그 기간에 하느님의 백성의 활동은 어느 정도 제한을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공식적인 인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선교인들을 추방하라는 명령도 없었고 베델 역시 간섭받지 않았습니다. 카낭가의 선교인 집은 폐쇄되었지만 부카부, 키상가니, 콜웨지, 루붐바시에 있던 선교인 집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더 이상 큰 지역 대회를 조직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지역에서 형제들은 왕국회관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큰 왕국회관에서는 소규모 순회 대회를 열었습니다. 지방 당국의 태도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강한 반대가 있던 지역에서는 형제들이 박해와 체포를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수백 명의 형제들이 투옥되었습니다. 지방 당국이 호의적인 곳에서는 형제들이 자유롭게 그들의 종교적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제한에도 불구하고 증인들은 계속 담대하게 전파하였습니다. 세 명의 형제와 한 명의 자매로 이루어진 집단이 사람들에게 증거하려고 시장에 갔습니다. 한 형제가 관심을 보인 사람에게 서적을 전하자 두 명의 남자가 다가와서는 그 형제를 체포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형제를 정당 당사로 끌고 가서 방 안에 두고 당의 책임자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당의 책임자는 방에 들어오면서 형제가 대기실에 있던 다른 남자에게 「사람은 진화되었는가 혹은 창조되었는가?」 서적을 전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선전을 계속하고 있나?” 책임자가 힐문하였습니다.

형제는 대답하였습니다. “저, 만일 누군가가 ‘사람은 진화되었습니까 혹은 창조되었습니까?’ 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책임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형제를 체포한 사람을 향해 돌아서서 말했습니다. “그를 보내 주게. 그는 권한이 없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그 형제는 시장으로 돌아와 계속 증거하였습니다. 나중에 그 책임자는 지나가다가 우연히 그 형제를 보게 되었습니다. 책임자는 그 형제를 가리키며 동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용감한 사람이오. 그렇지 않소?”

1974년에 지부 감독자 에르네스트 호이세는 주치의의 권고에 따라 벨기에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에르네스트는 얼마 동안 폐기종을 앓아 왔고 말라리아로 인한 잦은 발병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형제들은 호이세 형제의 가족을 사랑하였습니다. 그 가족은 활동에 의미 깊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벨기에에서 그 가족은 열심히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에르네스트는 1986년에 사망하였고 그의 아내 엘렌은 그로부터 8년 후에 사망하였습니다. 한편 킨샤사에서는 1966년 이래 선교인으로 봉사해 온 티머시 A. 홈즈가 지부 감독을 맡게 되었습니다.

1980년에 다시 법적 인가를 받다

1980년 4월 30일에 공화국 대통령은 여호와의 증인 협회를 법적으로 인가하는 법안에 서명하였습니다. 진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많아져서, 기념식에는 9만 226명이 참석하였고 관심자들의 가정에서 대략 3만 5000건의 성서 연구가 사회되었습니다. 새로운 전도인 신기록과 파이오니아 신기록이 수립되었습니다. 야외의 필요를 더 효율적으로 돌보기 위해서는 더 나은 시설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당시 콩고 지부가 이미 소유하고 있던 땅의 2.5배나 되는 토지를 구입하도록 통치체가 허락하였을 때 뛸 듯이 기뻐하였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어려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러 해 동안 형제들은 대규모 지역 대회를 조직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자유로이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80년에는 전국 곳곳에서 다섯 번의 “하나님의 사랑” 지역 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일부 대회 참석자들은 엄청난 거리를 여행해야 하였습니다. 많은 가족들은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400킬로미터 이상을 걸었습니다. 매우 고립된 지역에 있던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는 깊은 모래밭과 우림 지역을 통과하여 2주 동안 700킬로미터 이상을 자전거로 여행하였습니다. 콩고(브라자빌)와 부룬디와 르완다에서도 대표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그 후로 해마다 더 많은 지역에서 지역 대회를 조직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종교적인 자유를 갖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경제적 압력이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생계를 유지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물가가 치솟았지만 급료는 인상되지 않았습니다. 교통비는 너무 비싸서 대부분의 형제들은 장거리 여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부 사무실에서는 사랑스럽게도 대부분의 형제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좀 더 가까운 곳들에 더 많은 지역 대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콩고의 도로는 장애물 경주 코스와도 같아서, 쓰러진 나무, 손상된 다리, 깊은 모래밭, 그리고 진흙 구덩이가 곳곳에 있습니다. 지부의 대표자들과 그들의 아내들은 크고 작은 대회들을 위해 봉사할 때 항상 자기 희생의 영을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흔히 며칠간을 노숙하며 걸어가야만 하는 충실한 지방 형제 자매들의 희생과 비교할 때 그들의 희생은 작은 것입니다. 아직도 형제들에게는 지역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50 내지 150킬로미터를 걷는 일이 흔히 있는 일입니다.

새로운 선교인 집이 개설되다

1980년에 법적 인가가 남에 따라 새로운 선교인들이 입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81년에는 고마(키부 주)에 새 선교인 집이 개설되었습니다. 그 후로 2년 동안 더 많은 선교인 집이 리카시(카탕가 주), 음부지마이(카사이 주), 키퀴트(반둔두 주), 그리고 항구 도시 마타디(콩고 강 하류)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폐쇄되었던 선교인 집들이 다시 개설되었습니다. 마침내 1986년에는 이 나라에서 11번째의 선교인 집이 이시로(오리앙탈 주)에 문을 열었습니다. 이러한 선교인 집은 서적 보관소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선교인들은 지부 사무실과 야외 사이의 연결 고리와도 같았습니다. 지방 형제 자매들은 선교인들로부터 받은 격려와 훈련에 대해 깊이 감사하였습니다. 1981 봉사 연도는 2만 5753명의 전도인 신기록을 수립하며 끝을 맺었습니다. 증가의 가능성이 매우 컸습니다.

킴빌리키티를 두려워하지 않음

킴빌리키티는 한 부족 신의 이름입니다. 레가 부족 사람들이 이 신을 숭배하였는데 이 사람들은 콩고 동중부 지역의 깊은 삼림 지대에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 사냥꾼과 농부와 어부로 이루어진 이 사람들의 삶은 킴빌리키티와 연관된 종교적 신념에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이 교파는 베일에 싸여 있으며 사제들은 이 신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 지역에 살던 여호와의 증인들은 킴빌리키티를 두려워하지 않는데 그들은 여호와께서 오직 한 분의 참 하느님이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이 먹을 염소나 닭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과 같은 킴빌리키티 사제들의 요구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들뿐입니다.

1978년 초에 그 종파의 성원들은 공공연하게 여호와의 증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여러 채의 왕국회관을 불태웠고, 형제들을 그들 소유의 집에서 내쫓았으며, 형제들의 소유물을 강탈하였습니다. 또한 그 종파는 마술과 주문을 사용하여 형제들을 해치려 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허사였습니다. 그러다가 1983년 8월에 그 종파의 성원들은 무시무시한 계획을 실행에 옮겨서, 팡기 마을 근처에 있던 여덟 명의 형제를 잔인하게 살해하였습니다.

이 소름끼치는 사건은 회중에, 특히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버지를 잃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지부 사무실과 지방 형제들은 피해를 입은 가족들에게 영적 및 물질적인 도움을 베풀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한편 살인자들은 이 고립된 삼림 지역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죄를 지은 사람들은 결국 체포되었습니다. 재판은 킨두에 있는 지방 법원에서 열렸습니다. 피고인들은 킴빌리키티 신이 살인을 하도록 그들을 부추겼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검사는 누구에게 진정으로 책임이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지적하였습니다. “과거에 킴빌리키티 의식에 참여한 적이 있고 비밀들을 알고 있는 [레가 부족의] 일부 사람들이 이제는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밀들, 특히 킴빌리키티라고 불리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과 관련된 비밀들을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증인에 따르면 앞서 언급한 신은 의식을 주재하는 연로자들이 만들어 낸 큰 속임수이며, 그 신이 제물을 요구했다는 것은 거짓임이 폭로된 것입니다.”

따라서 킴빌리키티 신이 아니라 피고인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사건으로 항소하였을 때 부카부의 고등 법원은 살인자들에 대한 사형을 확정하였습니다. 검사는 킴빌리키티 숭배자들이 앞으로 여호와의 증인을 공격할 경우 얻게 될 결과에 대해 경고하였습니다. *

그때 이후로도 다른 사건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 종파의 성원들은 이제 그러한 일들을 숲 속에 숨길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 킴빌리키티에게 의지하여 보호받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편 여호와의 증인은 사람들이 이 종파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충실하게 계속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러한 노력들을 사랑 넘치게 축복해 오셨습니다. 현재 이 지역에 있는 회중들에는 300명 이상의 열심 있는 전도인들이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사랑하며 킴빌리키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활동이 금지되다

1985년 즈음에 콩고에서 왕국 활동은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1980년에 매입한 대지 위에, 새로운 베델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약 60명의 외국인 자원 봉사자들이 도우러 왔습니다. 그 봉사 연도 말에는 야외의 전도인 수가 거의 3만 5000명에 달하였고 파이오니아 신기록이 수립되었습니다. 60명의 선교인이 전국 곳곳에서 열심히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회중 장로들과 파이오니아들을 훈련시켰습니다. 큰 증가를 위한 준비가 모두 갖추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누리는 영적·육적 번영을 호의적으로 바라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직자들은 정치인들을 부추겨 형제들의 활동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1986년 3월 12일에 모부투 대통령은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금지하는 법령에 서명하였습니다. 그 다음날에, 금지령이 국영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발표되었습니다. 한 아나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콩고]에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소식을 결코 다시는 듣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의 말은 완전히 틀렸음이 밝혀질 것이었습니다!

지부 사무실에서는 지역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던 네 명의 선교인을 불러들이고 지역 활동을 수행하도록 현지 형제들을 임명하였습니다. 선교인들은 더 이상 공개적으로 전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치 가택 연금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방 형제들은 전파할 때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하였습니다. (마태 10:16) 안타깝게도 많은 관심자들은 두려워서 연구를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몇몇 왕국회관들은 폐쇄되었으며 파괴되기도 하였습니다. 정당이 압류한 회관들도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작은 집단으로 모임을 가져야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밤에 자기 집에서 체포되었으며, 소유물을 도난당하였습니다.

에카퇴르 주에서는 많은 형제들이 구타를 당하고 투옥되었습니다. 한 특별 파이오니아는 심한 구타를 당하고 3개월 동안 교도소에 감금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은 라디오를 통한 발표 때문이었습니다. 이때까지 금지령을 실행하는 정식 법이 통과된 적은 없었습니다. 금지령이 발표되고 얼마 안 있어 형제들이 탄원을 하였지만 답변은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986년 6월에 이 나라의 대통령은 공개 연설을 통해서 증인들은 애국심이 없고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상황이 너무나도 급속히 바뀌었습니다! 한때 존중받던 사람들이 갑자기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지부 건축은 중단되었고 기쁨에 찬 활동으로 떠들썩하던 건축 현장에는 침묵이 흘렀습니다. 외국인 자원 봉사자들은 모두 출국해야 하였고 건축 장비는 매각해야 하였습니다. 20명 정도의 지방 형제들만 남아서 그곳의 경비를 섰습니다.

그러다가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보안 국장에게서 온 1986년 6월 26일자 편지에 모든 선교인들이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다고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금지령은 1972년의 금지령과는 완전히 달랐는데 그 당시에는 선교인들이 국내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습니다. 선교인들이 출국하려고 꾸려 둔 개인 짐들이 발송부에 가득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습니다! 7월 중에 23명의 선교인이 다른 나라로 떠났습니다. 휴가 차 출국해 있던 선교인들은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콩고에서는 또 한 번의 정련의 시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지하 활동을 위한 재조직

반대자들이 여호와의 백성을 낙담하게 만들거나 그 조직을 와해시키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오산이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성령의 힘과 하느님의 백성의 결의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중추적인 역할을 할 소수의 경험 많은 선교인들은 가까스로 이 나라에 남게 되었습니다. 지부 요원들은 여러 개인 주택에서 왕국 전파 활동을 감독하는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전국 곳곳의 가정집에서 파이오니아 봉사 강습을 주재하였습니다.

영적 양식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은 계속해서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들을 인쇄하고 배부하였습니다. 지부 사무실은 지역 및 순회 대회 골자들을 회중들로 보냈고 회중에서는 그러한 골자로 된 자료를 가지고 연설을 하였습니다. 순회 감독자들은 회중을 방문하는 동안 현지 언어로 녹음한 대회 드라마를 들려주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1986년부터 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매년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활동을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형제들은 큰 유익을 얻었습니다.

한편 장로들은 정부 당국과 접촉하여 정치적 중립에 관한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고 중립이 체제 전복과는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여호와의 이름과 목적은 이 나라의 최고위 당국자들을 포함한 모두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종들은 엄정 중립을 지키지만 평화스럽고 체제 전복을 꾀하지 않는 독특한 사람들로 분명히 두드러지게 되었습니다.

왕국 선포자가 감소되었다가 증가함

1987년 봉사 보고에 의하면 전도인 수가 6퍼센트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두려워하였고 자신들이 금지당한 조직에 속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지역에서는 혹독한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반대는 역효과를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한 지방 추장은 여호와의 증인을 반대하는 연설을 하기 위해 특별한 모임을 열었습니다. 그 추장은 「나의 성서 이야기 책」 한 부를 들어 올리고는 그 책을 배부하는 사람은 누구든 체포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책이 어떤 책인지 알아볼 수 있게 먼저 살펴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추장은 그렇게 하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은 책에서 읽은 내용을 좋아하였습니다. 그 후에 몇몇 사람들은 다른 마을에 사는 특별 파이오니아에게 그 책을 몇 부 요청하였습니다. 그 특별 파이오니아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사람들과 열 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내가 그 추장의 마을에서 전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추장이 우리를 반대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들은 진리를 배울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형제들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였습니다. 여러 면으로 제한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속박되지는 않”았습니다. (고린도 둘째 4:8) 1988 봉사 연도가 마칠 때에는 전도인이 7퍼센트 증가하였습니다. 약 6만 건의 성서 연구가 사회되고 있었습니다. 베델 봉사부의 형제들은 주요 도시들을 방문하여 격려를 베풀고 지방 장로들 및 여행하는 감독자들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한편 지부 사무실은 마찬가지로 활동이 금지되어 있던 이웃의 콩고(브라자빌)와 부룬디를 계속 감독하였습니다.

콜웨지에 있는 어떤 학교에서 교장으로 일하던 한 형제는 정치적인 서약을 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이 일 때문에 심하게 구타를 당하고 루붐바시로 이송되었는데 반대자들은 그곳에서 그가 죽게 될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형제는 침착하게 자신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석방되었으며 콜웨지로 돌려보내졌습니다. 그를 구타한 사람들은 그에게 사죄를 해야 하였습니다! 그는 교직에 다시 복직되었으며 장학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88년 10월에 지방 추장들은 킨샤사에 있던 베델 건축 현장을 점거하고 수 톤의 성서 출판물들을 압류하였습니다. 군인들은 정기적으로 서적들과 성서를 상자째 훔친 다음 지방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출판물들을 사 갔으며 덕분에 형제들은 그런 사람들과 곧바로 성서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1989년에는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왕국 전도인들의 수가 4만 707명이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종교적 적대자들은 격분하였습니다. 가톨릭 교회에 우호적인 인사로 잘 알려져 있던 당시의 법무 장관은 콩고의 모든 검사들에게 여호와의 백성의 활동이 계속되는 데 대한 당혹감을 표현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기소하고 왕국회관들을 폐쇄하도록 부추겼습니다. 나중에 그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한 연설 가운데 여호와의 백성을 “진짜 악마들”이라고 묘사하였습니다. 이 일은 그 장관의 출신 주인 반둔두 주에서 얼마의 박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아이들을 교도소에 보내다

이 시기에 여호와의 증인 자녀들 몇몇은 특정 정치 의식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여 학교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두 소년의 아버지 역시 체포되어 어린 아들들과 함께 투옥되었습니다. 교도관들은 그들에게 어떤 음식도 주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한 교도관은 어리둥절해하며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이 교도소에는 살인자도 있고 도둑도 있는데 그들에게는 음식을 줍니다. 그런데 이 남자와 그의 두 아들들에게는 음식을 안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치에 맞는 답변을 듣지 못한 그 교도관은 스스로 그들에게 음식을 주었습니다. 교도소에서 소년들은 11일을,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인 특별 파이오니아는 7일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련도 그들을 낙담하게 만들진 못했습니다.

키퀴트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한 남자는 증인인 아내가 체포된 후에 역시 체포되었습니다. 두 딸은 이미 투옥되어 있었습니다. 관리들은 그 남자가 아내와 신앙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교도소에서 나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는 나가기를 거절하면서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떠나지 않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가족과 함께 석방되자 그는 성서를 연구하였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현재 회중의 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국내의 혼란

1991년 9월에는 킨샤사에서 군부 반란이 일어났으며 이어서 곳곳에서 약탈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문에 대량 실업과 급격한 물가 상승뿐만 아니라 심각한 식량 부족과 연료 부족이 초래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 사무실과 프랑스 지부 사무실에서는 구호물자를 보내 왔습니다.

콩고 지부는 국내의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해 애를 쓰면서, 이웃 나라들인 앙골라와 수단에서 온 증인 난민들을 돌보는 일도 하였습니다. 콩고 북동부에서는 당시에 여행하는 감독자였던 제카리아 벨레모가 수단에서 온 난민 형제들의 집단을 방문하였습니다. 그가 제한된 영어 실력으로 청중에게 연설을 하면 그것은 아랍어로 통역되었습니다. 제카리아는 형제들이 연설을 얼마나 알아듣는지 궁금하였습니다. 약 5년이 지난 후에 베델을 방문한 두 젊은이가 그에게 다가와서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를 기억하시겠어요? 우리는 난민 수용소에서 형제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있었죠. 형제가 해 주신 그 모든 격려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후에 이 두 젊은이는 여호와께 헌신하였습니다.

종족 간의 분쟁은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던 또 다른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카사이 출신의 많은 사람들은 남쪽의 카탕가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런데 1992년과 1993년에 카탕가 사람들이 그들을 주 밖으로 쫓아내 버렸습니다. 카사이 출신의 사람들 대부분은 직장과 재산과 집을 두고 떠나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집단으로 함께 모여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수용소 등의 장소로 피신하였습니다.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카사이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 가운데 약 4000명이 여호와의 증인이었습니다. 근처에 살던 형제들은 가진 것이 거의 없었고 양식도 부족했지만, 도움을 베풀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였습니다. 카탕가 북쪽의 주요 도로에 있는 한 회중에서는 형제들을 보내 도착하는 각각의 트럭에 증인이 타고 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형제라는 것이 밝혀지면 누구든 필요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는 수용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난민 형제들에게 나누어 줄 식품과 약품을 여러 대의 트럭에 실어 보냈습니다. 이러한 구호품은 여러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통치체에서도 역시 킨샤사에 있는 형제들에게 지시하여 가족들이 카사이에 다시 정착하여 밭을 일굴 수 있도록 식품과 약품에 더하여 괭이와 삽을 구입하도록 하였습니다.

변화의 다른 조짐들

1990년 4월 24일에 있었던 대통령의 연설과 기자 회견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공식적 입장에 뚜렷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신호였습니다. 대통령은 국내 및 외국 언론인들과 가진 기자 회견에서 정부가 언론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포함하여 모든 기본적인 자유를 옹호하였다고 확언을 하였습니다. 이 일은 형제들에게 좀 더 공개적으로 전파하고 집회를 가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교도소에 투옥되어 있던 사람들도 석방되었습니다.

1986년에, 콩고에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소식을 결코 다시는 듣지 않게 될 거라고 확신에 차서 말했던 한 라디오 방송인을 기억하십니까?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1986년에 금지령이 내려졌을 때 콩고에는 3만 4207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1990 봉사 연도 말에는 콩고의 전도인 수가 5만 677명이 되었고 15만 6590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의 반대와 중상과 박해와 분노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자루 속에 있던 아프리카 옥수수의 낟알들은 많아졌습니다. 1997년에 모부투 대통령 정권이 전복되었을 때 이 나라에서 도망쳐야 했던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라 바로 그 방송인이었습니다.

다시 자유로워지다

1986년에 내려졌던 대통령령으로 인해 여호와의 증인의 모든 활동은 금지되고 국내에 있던 증인들의 법적 단체는 해체되었습니다. 하지만 1993년 1월 8일에 자이르(콩고) 대법원은 여호와의 증인 대 자이르 공화국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대법원은 대통령령이 정당하지 않았다고 판결하였으며 따라서 대통령령을 파기하였습니다. 이러한 판결은 형제들에게 크나큰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대법원 판결은, 대통령과 그의 지지자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새로운 과도기 헌법을 적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혼란을 초래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판결이 앞으로 있을 판결의 기준을 세운 것으로 보았습니다. 증인들은 논쟁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았지만, 이 일은 여호와의 이름에 영광이 돌아가게 하는 참으로 큰 증거가 되었습니다! 많은 신문 기사들은 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논평을 하였습니다. 그 후에 법무부는 여호와의 증인이 그들의 종교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다시 갖게 되었음을 여러 주의 주지사들에게 알렸습니다. 여호와의 백성과 참 숭배가 거둔 참으로 값진 승리였습니다!

콩고 내 출판물 발송의 복잡함

콩고는 광대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콩고는 바콩고의 얼마 안 되는 해안 지역 외에는 모두 육지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대부분의 큰 화물은 마타디 항으로 들어옵니다. 약 3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마타디와 수도 사이에는 두 도시를 잇는 단선 철도 하나와 포장도로 하나가 있습니다.

유럽의 지부들에서는 콩고 지부에 사륜 구동 트럭 몇 대를 보냈는데 그 트럭들은 발송이나 건축 공사에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1999년부터는 마타디에서 베델 서적 보관소를 운영해 왔습니다. 킨샤사로 출판물을 운반할 트럭이 지부에서 오기 전에도, 출판물을 바로 배에서 내려 보관소에 저장해 둘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마련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980년대에도 킨샤사를 출발하여 카낭가와 음부지마이에 있던 선교인 집의 서적 보관소에 들른 다음 루붐바시까지, 이 나라를 가로질러 여행하는 것이 가능하였습니다. 제트기로는 킨샤사와 루붐바시 사이를 약 두 시간 만에 갈 수 있었지만 짐을 실은 트럭으로 가려면 2주나 걸렸습니다! 그런데다 해가 거듭될수록 도로는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되었습니다. 한편 배가 다닐 수 있는 강의 구간이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지만 킨샤사에서 내륙 지방으로 올라가는 배편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어려움 외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정치적 불안 상태가 지속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킨샤사를 중심으로 베델에서 차량으로 발송할 수 있는 거리에 더욱 제한을 받습니다. 지부에서 먼 곳까지 출판물을 발송하는 최상의 방법은 항공 화물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지부들에서는 콩고의 형제들에게 출판물을 공급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었습니다. 카메룬 지부는 출판물을 트럭에 실어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을 경유하여 콩고 북부 지역으로 보냅니다. 르완다 지부와 케냐 지부에서는 콩고 동부 지방의 필요를 돌봅니다. 남쪽의 일부 지역에 있는 회중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잠비아로부터 출판물을 받습니다.

봉사 훈련 학교—야외에 축복이 됨

1995년에는 킨샤사에서 봉사 훈련 학교 제1기 학급이 조직되었습니다. 2003년 4월까지 16개 학급에서 400명이 넘는 형제들이 훈련을 받았습니다. 학생들 중 다섯 명은 지역 감독자가 되었으며 60명이 넘는 형제들은 순회 활동을 하며 봉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50명의 형제들은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러한 형제들은 전파 활동에 열정을 불어넣는 데 기여하는 훌륭한 자산이 되어 왔습니다.

일부 형제들에게는 학교에 참석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조르주 무톰보는 학급에 참석하라는 초대장을 받았을 때, 반정부군이 장악하고 있던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가 열리는 킨샤사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카미나까지 400킬로미터를 자전거로 여행해야 하였습니다. 그는 여행 중에 3일 동안 비를 맞으며 가야 했고 16군데의 군 검문소를 거쳐야 하였습니다. 또한 범죄가 극성을 부리는 지역을 통과하기도 하였습니다. 한 곳에서는 역시 자전거를 탄 집단 강도들에게 쫓기기도 하였습니다. 뒤쫓던 강도들 가운데 두목의 자전거 바퀴의 바람이 빠지자 추격은 끝이 났습니다. 아마도 그 강도들은 조르주의 외모를 보고 그가 증인이었음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의 하느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신 것을 보았으니 더 이상 그를 쫓지 않겠다고 소리쳐 말했습니다.

신권적인 증가에 보조를 맞추기 위한 시설들

1965년부터 지부 사무실은 킨샤사 리메테의 데젤레팡 거리 764번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1991년에는 그 도시의 산업 지역에 한 구획의 토지를 매입하였습니다. 이 대지에 있던 세 동의 큰 건물은 전에 직물 공장에서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정비소로 사용된 것들이었습니다. 형제들은 건물들을 개조하여 지부 업무를 집중화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정치적인 불안과 불확실성 때문에 계획이 지연되기는 하였지만 1993년에 국제 종들이 도착하면서 새로운 지부 시설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996년 4월에는 지부 성원들이 데젤레팡 거리에서 새로운 시설들로 이사하였습니다. 이사를 마친 후에 한 베델 장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가족 모두가 함께 다시 모인 것을 보니 10년 전에 우리의 활동이 금지령 아래 놓이게 되었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우리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이 건물들을 주신 데 대해 여호와 하느님과 그분의 보이는 조직에 깊이 감사합니다.” 1996년 10월에는 전도인 수가 10만 명이 되어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형제들은 더 큰 증가를 기대하며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선교인들이 지원하러 오다

1990년대에는 선교인들이 다시 입국하여 금지령 기간 내내 남을 수 있었던 일곱 명의 선교인과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1995년 7월에는 세바스티앵 존송과 그의 아내 기셀라가 세네갈에 있다가 콩고로 재배치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선교인들도 왔습니다.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벨기에, 영국, 프랑스에서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1998년 3월에는 크리스티앙 벨로티와 쥘리에트 벨로티 부부가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왔습니다. 1999년 1월에는 페터 빌헬름과 그의 아내 아나리세가 세네갈에서 콩고로 재배치되었습니다. 후에 말리와 세네갈과 카메룬으로부터 선교인들이 추가로 콩고에 입국하였습니다.

1999년 12월에는 킨샤사의 주거 지역에 새로운 선교인 집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 집에는 열두 명의 선교인이 삽니다. 루붐바시의 선교인 집은 1965년부터 중단 없이 운영되어 왔습니다. 2003년에는 그곳에 두 번째 선교인 집이 문을 열었습니다. 현재는 네 부부가 이 집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2002년 5월에는 콩고의 동부 지역에 있는 고마에 새로운 선교인 집이 개설되었으며 네 명의 선교인이 이곳에 배정되었습니다. 선교인들은 이 넓고 생산적인 밭에서 계속 축복이 되어 왔습니다.

전시의 그리스도인 중립

이 선교인들 대부분은 국내 정세가 격변하는 시기에 도착하였습니다. 1996년 10월에 콩고의 동부 지역에서 내전이 일어나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모부투 대통령을 퇴진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1997년 5월 17일에 로랑데지레 카빌라의 군대가 킨샤사에 입성하였으며 그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의 TV 시청자들이 굶주림과 질병 탓에 허약해진 난민들의 끔찍한 모습을 보고 있는 동안, 여호와의 백성은 계속 성서에 근거한 희망과 위로의 소식을 선포하였습니다. 슬프게도 약 50명의 증인들을 포함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콜레라 등의 질병 때문에 많은 사람이 사망하였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 대부분은 신분증이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전파 활동을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는 형제들에게 문제가 됩니다. 도로를 따라 많은 군 검문소가 있습니다. 한 회중에서는 전도인들이 신분증이 없었으므로 한 장로는 형제들에게 「사전 치료 지침 및 면책 각서」를 대신 제시하라고 제안하였고 형제들은 그 제안에 따랐습니다. 한 검문소에서 군인들은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필요 없소. 시민들에게 발급되는 국가 신분증을 내놓으란 말이오!”

형제들은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을 밝혀 주는 카드입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형제들이 지나가게 해 주었습니다.

키상가니에서는 정부군 편에서 싸우던 외국인 용병들이 네 명의 젊은 형제를 감금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적에게 정보를 제공하였다는 거짓 고발을 당하였습니다. 매일 아침 용병들은 열 명의 포로를 골라 수풀 안으로 데리고 가서는 사살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들은 여덟 명의 포로와 함께 형제 두 명을 골라냈습니다. 그들은 차를 타고 출발하였습니다. 가던 중에 도로에 시체가 한 구 있어서 트럭이 멈추었습니다. 용병들은 형제들에게 그 시체를 묻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일을 마친 다음 형제들은 트럭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는데, 트럭이 그들을 두고 가 버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도망할 수도 있었지만 감옥에 남아 있던 동료 두 명의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트럭에는 여덟 명의 포로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총살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감옥으로 돌아오자 모든 사람들은 그 두 형제가 살아서 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반군이 그 읍을 장악하였고 감옥의 문은 폭파되어 버렸습니다. 용병들은 달아났으며 형제들은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유럽 지부들의 지원을 받다

많은 콩고 사람들은 1996년부터 전쟁을 겪어 왔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살던 곳을 떠나야 하였습니다. 수천 명의 콩고 형제들은 탄자니아나 잠비아의 난민 수용소로 도피하였습니다. 콩고가 점점 반군의 세력 아래 들어가게 되자 지부 사무실은 점령된 지역에 있는 형제들과 연락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베풀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주요 도시들에는 물질적 도움을 베풀기 위해 구호 위원회가 세워졌습니다. 베델 가족은 구호물자를 나눠 주는 일을 돕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함으로 자진하는 영과 자기 희생의 영을 나타냈습니다. 벨기에와 프랑스와 스위스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은 신발 1만 8500켤레와 담요 1000장과 더불어 수 톤의 식량과 의복과 의약품을 항공편으로 콩고에 보내 주었습니다. 구호 활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고통은 많이 완화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1998년 10월에 킨샤사의 신문에 실린 한 기사는 이렇게 보도하였습니다. “유럽의 여러 다른 나라들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그리스도인 회중들은 힘을 합하여, 콩고 킨샤사와 콩고 브라자빌에 보내기 위하여 400톤이 넘는 구호품을 모았다. 영국과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온 자원 봉사자들의 협조를 통해 37톤의 쌀, 분유, 콩, 비타민 비스킷이 항공 화물로 이미 벨기에 오스탕드를 떠나 킨샤사로 보내져서 킨샤사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전국 본부에 도착하였다. 또 다른 비행기가 ··· 38톤의 식량을 싣고 ··· 도착할 예정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르완다 대학살 이후 계속해서 동아프리카 난민을 위한 구호 활동을 펴 온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 여호와의 증인의 대변인은 총 200톤이 넘는 식량과 의약품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자진적인 기부 물품이 콜레라 전염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당시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온 여호와의 증인들은 수용소의 난민들을 돕기 위해 여러 개의 팀을 구성하였다. 그 대변인은 또한 여호와의 증인들이 동유럽과 보스니아에 있던 절박한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 기부한 구호물자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전쟁도 영적 발전을 저해하지는 못하다

1998년 9월에 반군은 킨샤사 교외의 은지리를 공격하였습니다. 혼란 가운데 한 무리의 형제들이 순회 감독자가 머무르고 있던 집에 피신하였습니다. 순회 감독자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으며 그런 다음 그들에게 이사야 28:16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 구절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은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모두에게 침착함을 유지하고 인도를 받기 위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은지리를 빠져나가기 위해 다리를 건너야 한다고 제안한 한편 다른 사람들은 철로를 따라가야 한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결국 형제들은 그곳에 머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3일 후에 정부군이 그 지역을 다시 장악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만일 어느 길이든 자기들이 생각했던 길로 갔다면 아마 전투 지역에 갇히고 말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카탕가에 있는 무세카 키푸지 회중의 한 형제는 군인들에게 생선을 팔고 있었습니다.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다음에 한 군인은 그 형제를 반대 정당의 스파이라고 고발하였습니다. 그는 묶여서 심하게 구타를 당한 다음 그 지역의 군 본부로 끌려갔습니다. 그가 도착한 때는 밤이었습니다. 군인들은 그 형제에게 자기들을 위하여 춤을 추라고 하였습니다. 그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두운데 춤추는 것을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럼 대신 노래를 해.” 그들이 말했습니다. 형제는 마음을 다해 “너희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를 불렀습니다. 가사에 감동을 받은 군인들은 그 노래를 다시 불러 보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는 그 노래를 두 번째로 불렀습니다. 군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른 노래를 불러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형제는 자신의 부족 언어인 킬루바어로 “여호와여, 감사합니다”를 불렀습니다. 노래를 마치자 그를 붙잡은 사람들이 그를 풀어 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군인들은 형제를 읍에 데리고 가서는 형제의 이웃 사람들에게 형제가 스파이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몇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군인들은 떠나기 전에 형제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죽을 뻔했소. 하지만 이제 죽지 않을 거요. 당신의 종교가 당신의 목숨을 살렸소! 당신이 부른 두 노래의 가사에 정말 감명받았소. 당신의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마시오!”

왕국회관 건축이 여호와께 찬양을 돌리다

근년에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는 재원이 제한되어 있는 나라에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일을 돕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콩고의 형제들은 이러한 조처를 환영하였는데 그곳에는 왕국회관이 절실히 필요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킨샤사에는 298개 회중이 있었는데 적합한 회관은 20채도 안 되었습니다. 전국 곳곳에 수백 채의 회관이 필요하였습니다. 1999년 4월에 킨샤사에서 왕국회관 건축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후에 이 프로그램은 콩고의 다른 주들에까지 확장되었습니다. 2003년 초에는 콩고(브라자빌)와 콩고 민주 공화국(킨샤사)에 대략 175채의 왕국회관이 완공되었습니다.

1950년대부터 진리를 접해 온 한 남자는 자신의 집 맞은편에 왕국회관이 건축되는 것을 관찰하고는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증인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지요. 이제는 그들이 기울인 노력의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전에는 내 동생의 집 옆에 왕국회관을 지었는데 이번에는 내 집 맞은편에 지었군요. 어디든지 증인들이 나를 따라다니는 것 같습니다!” 이 남자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과 이 새로운 왕국회관의 봉헌식 초대에 응하였습니다. 그는 현재 정기적으로 집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마테테에 있는 세 회중은 1994년에 매입한 낡아 빠진 건물에서 집회를 보았습니다. 형제들은 건물을 수리할 돈이 전혀 없었고 그래서 그 건물은 6년 동안이나 그런 상태로 있었습니다. 이 건물의 길 건너편에는 큰 교회가 있었습니다. 교회를 건축할 때 그 교회 목사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곧 다른 곳으로 옮길 거라고 말했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깔끔한 집회 장소가 없는 것에 대해 형제들을 조롱하였습니다. 그 회중에서 새로운 왕국회관을 건축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벽돌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에도 일부 이웃들은 계속해서 조롱하였습니다. 그들은 결과를 보고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그 지역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가장 훌륭한 건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증인과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하던 한 이웃 사람은 형제들이 이룩한 일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여자는 공사 현장에 와서는 다음에 증인이 방문하면 잘 들어 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한 건축 현장에서는 일꾼들을 위한 음식을 요리하고 있던 자매에게 어떤 여자가 다가왔습니다. 그 여자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교회를 짓고 있나요?”

자매는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왕국회관을 짓고 있어요.”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이 건물은 당신들과 꼭 같겠군요. 당신들은 항상 깔끔하고 깨끗하죠. 당신들의 교회는 당신들을 꼭 닮을 것 같아요!”

지부 관리 체제의 조정

야외의 필요를 돌보기 위해 지부 위원회를 재조직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1996년 5월에 통치체는 조정을 하였습니다. 1996년 5월 20일 세바스티앵 존송이 지부 조정 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두 달 전에 지부 위원이 된 페터 루트비히와 함께 활동을 감독할 축소된 지부 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해가 지나면서 다른 사람들이 임명되었는데 그들은 다비드 나웨즈, 크리스티앙 벨로티, 뱅자맹 반디윌라, 페터 빌헬름, 로베르 엘롱고, 델팡 카부사, 그리고 우노 닐손이었습니다. 페터 루트비히와 그의 아내 페트라는 건강상의 이유로 독일로 돌아가야 하였으며 현재는 그곳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지부 위원회에 속한 형제들은 야외 활동 전반에 신권적인 인도를 베풀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북아메리카, 유럽, 일본 출신의 많은 여호와의 종들이 국제 종이나 외국 지부에서 섬기는 베델 봉사자 또는 선교인으로 임명되어 콩고로 파견되었습니다. 2003 봉사 연도 중에 킨샤사 베델 가족은 성원이 250명이 넘을 정도로 커지게 되었습니다. 평균 연령은 34세였습니다.

할 일이 아직도 많다

고대의 한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를 신뢰하며, 여호와에게 확신을 두는 사람은 축복을 받는다.” (예레미야 17:7) 콩고의 여러 지역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형제들은 계속해서 왕국의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이 나라 전역에 영적인 지원을 베풀고자 하는 지부 사무실의 노력이 내전으로 인해 제한을 받고 있지만 12만 2857명의 새로운 전도인 최고 기록에 도달한 것을 보는 것은 격려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콩고에 있는 충실한 종들이 겪은 경험에 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콩고에서 좋은 소식을 변호하고 법적으로 확립하는 일에 공헌한 많은 형제 자매들의 이름을 다 언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여호와의 승인을 받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의하지 않으시므로, 여러분이 거룩한 자들을 섬겨 왔고 또 계속 섬기면서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일과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히브리 6:10.

할 일은 여전히 산더미처럼 많습니다. 개척해야 할 새로운 구역들이 있습니다. 왕국회관을 건축해야 합니다. 지부 시설은 확장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50년이 넘는 콩고의 신권 활동을 돌이켜 보면, 우리는 1952년에 한 형제가 한 이러한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루 속에 든 아프리카 옥수수 낟알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씩 떨어지면 그곳이 어디든지, 언젠가는 비가 오고 우리는 많아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늘의 우리 아버지, 여호와 하느님께서 왕국의 씨가 어느 정도까지 자라게 하실지 보게 되기를 큰 기대를 가지고 기다립니다.—고린도 첫째 3:6.

[각주]

^ 3항 이 나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콩고 자유국, 벨기에령 콩고, 콩고, 자이르로 불러 왔으며 1997년부터는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부른다. 이웃 나라인 콩고(브라자빌)와 구분하기 위해 콩고(킨샤사)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이어지는 내용 가운데서는 이 나라를 가리키는 데 콩고라는 이름을 사용할 것이다.

^ 155항 「파수대」(영문) 1985년 3월 1일호 3-10면 참조.

^ 173항 마침내 대법원 판결에 의해서, 1980년대 초에 베델 건축 공사가 시작되었던 압류된 대지에 대한 재산권을 형제들이 되찾게 되었다. 나중에 군인들이 그곳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결국 군인들이 2000년에 철수하였을 때 지방 관리들이 전체 대지를 작은 구획으로 나누어 불법 거주자들에게 불법으로 매각해 버렸다. 현재 그 지역은 수백 명의 불법 거주자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229면 삽입]

“이제 우리는 [콩고]에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소식을 결코 다시는 듣지 않게 될 것입니다.”

[249면 삽입]

“당신은 죽을 뻔했소. 하지만 이제 죽지 않을 거요. 당신의 종교가 당신의 목숨을 살렸소!”

[168면 네모]

콩고(킨샤사)의 개요

국토: 적도에 걸쳐 있는 콩고(킨샤사)는 인접해 있는 콩고(브라자빌)보다 면적이 여섯 배나 넓다. 콩고 북부는 대부분 열대 우림으로 뒤덮여 있는데 숲이 빽빽해서 햇빛이 땅에 거의 도달하지 못한다. 이 나라의 동부 지역에는 산맥과 활화산들이 있다. 콩고 서부에는 대서양 해안이 37킬로미터 펼쳐져 있다.

국민: 5500만 명의 콩고 사람들은 200개가 넘는 아프리카 민족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인구 중 가톨릭이 50퍼센트를 차지하며, 프로테스탄트가 20퍼센트, 킴방구 추종자들이 10퍼센트, 모슬렘이 1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언어: 많은 언어들이 사용된다. 공용어는 프랑스어이지만, 주요 아프리카 언어는 린갈라어, 킹와나어, 스와힐리어, 콩고어, 칠루바어이다.

생활: 콩고에는 석유, 다이아몬드, 금, 은, 우라늄 같은 천연자원이 많이 있지만 최근에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수출이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외채가 증가하였다. 시골 지역의 가족들은 카사바와 옥수수와 쌀 등을 재배하여 대부분의 식품을 자급한다.

야생 생물: 야생 동물들이 많이 있다. 삼림 지역에는 개코원숭이, 고릴라, 원숭이가 많다. 탁 트인 지역에는 영양, 표범, 사자, 코뿔소, 얼룩말이 살고 있다. 강에는 악어와 하마도 서식한다.

[173, 174면 네모와 삽화]

그는 진리를 찾아 구하였고 진리를 발견하였다

앙리 카나마는 르웨나에 있는 복음주의 교회의 성원이었지만, 그 종교가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기도하고 묵상하기 위해 종종 산으로 올라가곤 하였다. 거기서 그는 보이지 않는 영들과 이야기를 한다고 주장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하느님께서 어딘지는 몰라도 아주 멀리 계신다고 앙리에게 말했다.

앙리는 참 하느님을 찾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흘러 그는 한 사람을 만나 프랑스어 「깨어라!」지 한 부를 받았다. 앙리가 그것이 바로 성서 진리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찾고 있던 것이었다! 그는 잡지 안쪽에서 찾은 여호와의 증인의 주소로 편지를 썼고 얼마 안 있어 서신으로 성서 연구를 즐기게 되었다. 결국 앙리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와 몇몇 친지들은 어떻게 침례를 받을 수 있는지 편지로 질문하였다. 그들이 받은 답장에는 이웃 나라들에 있는 지부 사무실에 연락하라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부 사무실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앙리와 엘리자베스, 그리고 이폴리트 반자와 그의 아내 줄리엔으로 이루어진 작은 그룹은 북로디지아로 가기로 하였다. 진리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시벰바어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비용을 계산하였고 실행에 옮겼다. 그들은 그곳에서 6개월 동안 머무르고 나서 1956년에 침례를 받았다.

같은 해에 그들은 콩고로 돌아가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열심히 전하였다. 1961년에는 앙리와 그의 동료 몇 사람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들은 추장 한 사람을 살해할 음모를 꾸몄던 한 지방 추장을 죽인 키타왈라 추종자들이라는 혐의를 받았다. 물론 이러한 혐의는 아무 증거도 없었고 그들은 나중에 석방되었다.

그 후에 앙리와 엘리자베스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들 부부는 마침내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순회 활동을 하며 봉사하였다. 앙리는 1991년에 사망하였지만 엘리자베스는 아직도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다. 그들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인 일루가는 순회 활동을 하고 있다.

[178면 네모와 삽화]

알베르 루이누—충실한 증인

알베르는 1951년에 콩고(브라자빌)에서 온 직장 동료인 시몽 맘푸야를 통해 처음 진리를 접하게 되었다. 알베르는 치과 의사가 된 최초의 콩고인이었으며, 그의 높은 사회적 지위 때문에 진리의 편에 서기가 쉽지 않았다. 그와 그의 아내는 1954년에 기념식을 지키고 난 후 침례를 받았다. 그 당시에는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침례는 밤에 베풀어졌다.

알베르는 1958년부터 1996년까지 여호와의 증인 협회(증인들의 현지 등록 법인)의 법적 대표자로 봉사하였다. 그는 1800명의 청중 앞에서 호이세 형제의 결혼식 주례 연설을 통역하던 일을 기억한다. 먼저 그 주례사에서는 그리스도인 아내의 책임을 설명하였다. 알베르는 자신의 아내를 비롯하여 참석한 자매들을 바라보면서 키가 커지고 흡족한 느낌이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남편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들을 때에는 자신이 작고 초라해진 기분이었다고 회상한다. 주례사가 끝날 즈음에는 그는 키가 무릎 높이로 작아져 버린 기분이었다!

[삽화]

알베르 루이누와 에밀리에 루이누 부부

[191-193면 네모와 삽화]

폰티엥 무캉가와의 회견

출생: 1929년

침례: 1955년

약력: 콩고에서 최초의 순회 감독자로 봉사함.

1955년에 나는 치통 때문에 병원에 갔습니다. 치과 의사였던 알베르 루이누는 치료를 해 준 다음, 더 이상 고통이 없을 때에 대해 알려 주는 계시록 21:3, 4을 보여 주더군요. 나는 주소를 알려 주었고, 알베르가 그날 저녁에 나를 방문하였습니다. 나는 영적으로 빠르게 진보하였으며 같은 해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나는 1960년에 콩고 전역의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순회 활동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타는 듯한 햇볕 아래 짐을 가득 실은 트럭의 짐칸에 타고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을 여러 날 동안, 심지어는 몇 주 동안 여행을 하였습니다. 밤에는 모기가 못살게 굴었습니다. 트럭은 자주 고장이 나서 고칠 때까지 기다려야 하였습니다. 혼자서 표지판도 없는 길을 걸어 다녔으며 때때로 길을 잃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콩고 북부에 있는 한 읍을 레옹 앙자파와 함께 방문했습니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12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다른 읍을 향해 함께 여행하다가 길을 잃어서 꽉 막힌 닭장에서 하룻밤을 자야 했습니다. 닭의 몸에 있던 벌레들이 우리를 계속 물어서, 그곳에 창문이 없는데도, 주인은 바닥 한가운데다가 조그맣게 불을 피웠습니다.

그날 밤에 주인의 아들과 마을 사람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곧 그 주인도 같이 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일 진다면 우리에게도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에 우리는 벌레들과 연기와 싸움 때문에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새벽이 되기 전에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몰래 빠져나왔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또다시 길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을 따라 하루 종일 갔습니다. 날이 저물어 갈 무렵에 허기지고 기진맥진한 레옹이 자전거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그는 바위에 얼굴이 부딪혀 윗입술에 깊은 상처가 났습니다. 피가 몹시 흘렀지만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레옹을 보자마자 누가 그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알고 싶어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가 자전거에서 떨어졌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내가 그를 다치게 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날 밤에도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레옹은 고통스러워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벌로 나에게도 상처를 입히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아침에 우리는 계속 가서 마침내 얼마의 약을 구할 수 있는 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레옹의 입술에다 머큐로크롬을 쏟아 붓듯이 했고 찢어진 상처를 봉하려고 겸자를 여섯 개나 죄어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게메나까지 80킬로미터를 더 갔고, 마침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작은 병원에 레옹을 남겨 둘 수 있었습니다. 나는 혼자 계속 가서 아내를 다시 만났으며 우리는 강을 따라 킨샤사로 내려가면서 계속 활동하였습니다.

폰티엥의 아내 마리는 종종 이러한 여행에 동행하였다. 마리는 1963년에 사망하였다. 1966년에 폰티엥은 재혼하였고 1969년까지 순회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정규 파이오니아로 여전히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다.

[195, 196면 네모와 삽화]

프랑수아 단다와의 회견

출생: 1935년

침례: 1959년

약력: 1963년부터 1986년까지 여행하는 감독자. 1986년부터 1996년까지 콩고 베델에서 봉사함. 현재는 장로이자 특별 파이오니아임.

1974년에 나는 반둔두 주의 켕게에 있는 한 회중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그때 집권당에 속해 있던 호전적인 사람들이 우리 형제 일곱 명을 체포하였습니다. 우리를 체포한 주된 죄목은 국가 수반에게 영예를 돌리는 정치 의식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창문도 없는 가로세로 2미터의 감방에 감금하였습니다. 우리는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고 서로의 몸에 기대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일 두 번씩만 감방에서 나갈 수 있었는데 우리는 그 감방에서 45일 동안을 지냈습니다. 아내인 앙리에트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를 만나 보기 위해 킨샤사에서 290킬로미터를 여행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내에게 일주일에 단 한 번만 면회를 허용해 주었습니다.

하루는 검사가 교도소를 찾아왔습니다. 그에게 영예를 돌리는 정치 의식이 열렸습니다. 우리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정치적인 노래를 부르며 당의 구호를 반복하여 외쳤습니다. 검사는 격분하여 나에게 여섯 명의 형제가 노래를 부르도록 명령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명령할 권한이 없으며 노래를 부를 것인지의 여부는 그들이 결정할 문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나는 구타를 당하였습니다.

후에 우리는 사륜 구동 자동차의 뒤 칸에 태워졌습니다. 우리를 지키기 위해 군인 두 명이 함께 탔고 그 검사는 운전사와 함께 앞 좌석에 탔습니다. 우리는 반둔두 주의 주도인 반둔두 시를 향해 갔습니다. 차는 매우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형제들에게 꽉 붙잡고 있으라고 말한 다음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가 기도를 마치자마자 차가 너무 빠른 속도로 커브 길을 돌다가 전복되었습니다.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은 것이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차를 바로 세우고 난 후, 검사는 두 명의 군인에게 우리를 데리고 걸어서 교도소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차는 계속 반둔두 시를 향해 갔습니다.

우리가 교도소로 돌아왔을 때 군인들은 그곳의 관리자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고하였고 우리를 풀어 주라고 그들에게 간청하였습니다. 교도소의 관리자는 우리처럼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셨다고 믿게 되었고 그 때문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후 며칠간 일반 감방에서 지내게 되었고, 뜰에서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우리는 석방되었습니다.

프랑수아와 앙리에트 부부는 24년간 순회 활동을 하며 봉사한 후 베델에 초대를 받았다. 10년이 지난 다음 그들은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도록 임명이 바뀌었다. 앙리에트는 1998년 8월 16일에 사망하였다.

[200-202면 네모와 삽화]

마이클 포티지와의 회견

출생: 1939년

침례: 1956년

약력: 아내 바버라와 함께 콩고에서 29년간 봉사하였음. 현재는 영국 베델에 있으며, 런던의 린갈라어 회중에서 장로로 일함.

가장 큰 도전은 의사소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콩고의 공용어인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해야 하였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카탕가에서는 스와힐리어를 배웠고, 카낭가에서는 칠루바어를 터득해야 하였으며, 킨샤사에서 봉사하게 되었을 때에는 린갈라어를 배웠습니다.

이 모든 것은 매우 유익하였습니다. 첫째로 형제들은 우리가 그들과 대화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고 우리와 더 쉽게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우리가 그들의 언어를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그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관심의 증거로 보았습니다. 둘째 유익은 봉사의 직무가 더욱 의미 깊은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집주인은 우리가 그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들으면 처음에는 대개 놀라며, 이어서 기뻐하고, 그다음에는 존중심을 나타내면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기꺼이 들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지역 활동을 하며 여행할 때, 현지 언어에 대한 지식은 위험할 뻔 했던 상황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졌을 때에 군대와 정당의 도로 봉쇄가 흔히 있었는데, 도로 봉쇄를 한 곳은 돈을 강탈하기 좋은 곳이 되었습니다. 특히 외국인들은 손쉽고 수지맞는 대상으로 여겨졌습니다. 우리는 바리케이드에 서게 되면 군인들에게 현지 언어로 인사하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놀라서 움찔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물었습니다. 단순히 인사만 배워 말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하는 일을 현지 언어로 정확히 설명하면 보통 그들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출판물을 요청하였으며,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하여 안전한 여행이 되기를 빌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프리카인 형제들이 나타내는 진정한 자기 희생적인 사랑에 자주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러 해 동안 콩고는 일당제 국가였고, 여호와의 증인 등 중립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격렬하게 반대하였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는 지프차를 타고 다니면서 지역 활동을 하고 대회에서 형제들을 섬겼습니다.

한 대회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마지막 날 저녁 회기 중에 정당의 지방 책임자가 연단 뒤로 왔습니다. 그는 술에 취해 욕설을 하면서, 모두에게 당원증을 사야 된다고 말해야 한다면서 연단 위로 올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우리가 거절하자 그는 화가 나서 우리에게 고래고래 욕을 하면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정부를 대항하니 투옥시켜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몇몇 형제들이 겨우 설득하여 그를 보냈습니다. 그는 우리에 대해 행정관에게 보고할 것이며 그런 다음 돌아와 지프차와 우리가 머물고 있던 초가를 태워 버리겠다고 소리치며 떠났습니다. 우리는 그의 말이 공연한 위협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놀랄 만한 사랑을 나타내 주었습니다. 두려워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모여서 여호와를 신뢰하고 그분의 손에 문제들을 내맡기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교대로 우리가 머물던 초가와 지프차를 밤새 지켜 주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감동적인 경험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정당을 지지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우리가 떠난 다음에 닥칠지 모르는 그 어떤 잔인한 행위도 기꺼이 감내하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기 희생적인 그리스도인 사랑의 표현에 더하여, 콩고에서 보낸 여러 해 동안 우리가 경험한 가슴 뭉클하게 하는 여러 가지 사랑의 표현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211-213면 네모와 삽화]

테런스 래섬과의 회견

출생: 1945년

침례: 1964년

약력: 12년 동안 선교인으로 봉사함. 린갈라어, 스와힐리어, 프랑스어를 배움. 현재 아내 그리고 두 자녀와 함께 스페인에서 봉사하고 있음.

레이먼드 놀스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키상가니로 간 것은 1969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인구 23만 명의 그 도시는 콩고 북동부에 있는 주의 주도였습니다.

우리는 그 지역에 있는 소수의 전도인들과 많은 관심자들로부터 정말 따뜻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파파야, 파인애플, 바나나, 그리고 우리가 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열대 과일들을 선물로 수북이 갖다 주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살아 있는 닭과 거북을 가지고 오기도 했습니다. 사뮈엘 치카카가 친절하게도 우리에게 숙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곧 방갈로 하나를 세내었습니다. 그 후에 니컬러스 포네와 메리 포네 부부, 그리고 폴 에번스와 메럴린 에번스 부부가 우리와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키상가니 최초의 선교인 집을 개수하고 페인트 칠을 하였습니다. 건물은 숲 덩굴과 큰 잡초들로 덮여 있었으며, 그것을 청소하는 동안 다락방에서 두 마리의 사향고양이를 쫓아내야 했습니다. 나중에 피터 반즈와 앤 반즈 부부, 그리고 앤 하크너스도 선교인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는데, 앤은 나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키상가니에서 전파한 처음 4년 동안 린갈라어와 스와힐리어를 배웠으며, 후대를 잘 베풀고 친근한 그곳 사람들과 가까워졌습니다. 연구가 얼마나 많았던지 우리는 연구생들을 모두 돌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봉사해야 했습니다. 키상가니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는 전도인이 열 명도 안 되던 그 집단이 여덟 개의 회중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번은 이투리 강 가의 길을 따라 운전해 가던 중, 우리 그룹은 한 피그미 마을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주민들에게 전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몇몇 학자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피그미족은 숲을 어머니 혹은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숲에서 의식주를 얻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피그미족은 숲을 신성한 곳으로 보며 몰리모라고 하는 의식을 통해 숲과 친교를 나눌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의식에는 모닥불 주위를 돌며 춤을 추고 노래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긴 나무 관으로 된 몰리모 트럼펫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데, 그 사람들은 그 트럼펫을 불어서 음악 소리와 동물 소리를 냅니다.

우리는 보통 한 장소에 한 달 정도만 머무르는 이 유랑 민족의 신기한 취락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야영지는 어린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만든 벌집 모양의 숙소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숙소는 입구가 하나뿐이었고 두 시간 내에 지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각각의 숙소는 몇 사람 정도가 안에서 웅크리고 잘 수 있을 만큼의 크기였습니다. 몇몇 아이들은 우리들에게 다가와 우리의 피부와 머리카락을 만지려고 했는데 그 아이들은 전에 한 번도 백인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우호적인 숲 사람들을 만나 전파하는 것은 참으로 큰 특권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그들의 야영지 근처에 있던 마을에서 온 여호와의 증인을 전에 만나 본 적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215, 216면 네모와 삽화]

다비드 나웨즈와의 회견

출생: 1955년

침례: 1974년

약력: 콩고 베델 가족의 모든 성원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을 봉사하였음. 또한 지부 위원 중 한 명임.

나는 1976년에 베델 초대장을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편지에는 “긴급한”과 “당장”이라는 단어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콜웨지에 살았고 킨샤사까지는 약 245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습니다. 집을 떠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이사야가 했던 것처럼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대답하고 싶었습니다—이사야 6:8.

베델에 도착했을 때 형제들은 타자기를 보여 주면서 타자를 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나는 재봉사라 재봉틀을 작동하는 법은 알지만 타자기는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타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때 나는 번역부와 봉사부에서 일하였습니다.

나중에는 문서부에서 일하도록 배정되었습니다. 그 일 가운데는 사람들이 출판물에서 오려 내 사무실로 보낸 쿠폰을 처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다른 출판물들을 요청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출판물을 받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나는 종종 궁금하였습니다. 그중 한 번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두 명의 젊은 남자는 빠르게 진보하였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파이오니아가 되었고 이어서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베델에 초대되었을 때 그중 한 사람은 내 방 짝이 되었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돈을 요구하는 편지를 베델에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이 자원 봉사 활동임을 설명하고 그 사람들이 성서를 연구하도록 격려하는 적절한 답장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얼마 전에, 한 형제는 자기가 그러한 답장 덕분에 진리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 편지를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여러 해 전에 베델에 돈을 부탁하는 편지를 쓴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격려 편지를 받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이제는 진리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후에 법적인 문제를 돌보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정당 배지를 달지 않았다고 고발당한 지방 형제들을 돕게 되었습니다. 나는 용기를 내서 당국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배지가 나타내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전이 이제 막 끝났는데, 여러분과 맞서 싸우던 사람들도 모두 배지를 달고 있었습니다. 배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배지는 사람이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결코 내전을 일으킬 시민이 아닙니다. 이러한 준법 정신은 배지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은 석방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상황에서 항상 우리를 도와주셨습니다.

이제 내가 베델에서 봉사한 지도 27년이 넘었습니다. 신체적으로 약간의 제한을 받고 있고 세속 교육도 많이 받지 못했지만 여호와께서 나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베델에는 당장 처리해야 할 긴급한 일이 있습니다!

[219, 220면 네모와 삽화]

고드프리 빈트와의 회견

출생: 1945년

침례: 1956년

약력: 길르앗 학교 제47기 졸업생. 콩고에서 17년간 봉사하였음. 현재 르완다 지부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음. 린갈라어, 스와힐리어, 영어, 칠루바어 및 프랑스어를 함.

1973년에 카낭가에서 한 지방 형제와 함께 야외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국에서 우리가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던 집에 들이닥쳐 우리를 체포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후 2주간을 교도소에서 지냈습니다. 교도소에서는 음식을 전혀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 나의 선교인 짝인 마이크 게이츠가 음식을 갖다 주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석방되었습니다. 석 달 후에 마이크와 나는 영국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기로 예약해 놓은 날, 근처 회중에 있는 모든 형제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만나 보고 얼마의 음식도 갖다 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형제들의 면회를 신청하였을 때 치안관이 우리도 체포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우리를 교도소로 이송할 교도소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우리가 탈 비행기가 이륙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겠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도소에 도착하니 석 달 전에 수감되어 있을 때 함께 있었던 많은 재소자들이 아직도 그곳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게 음식을 갖다 주던 짝도 함께 투옥된 것을 보고 재소자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누가 당신에게 먹을 것을 가지고 오죠?”

우리는 우리 형제들이 음식을 가져올 거라고 대답했지만 그들은 못 믿겠다는 식으로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지역에 다른 유럽인 증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날 우리의 콩고인 형제들이 그 재소자들과 나눠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음식을 가지고 오자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국제적인 형제 관계와 우리를 연합시켜 주는 사랑에 대한 훌륭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 사랑스러운 형제들은 투옥될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에게 음식을 갖다 준 것입니다. 닷새 후에 우리는 석방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영국으로 갔으며 국제 대회 날짜에 딱 맞춰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224-226면 네모와 삽화]

은제이 카타시 팡디와의 회견

출생: 1945년

침례: 1971년

약력: 독신으로 어려운 구역에서 두려움 없이 봉사하였으며 후에 1988년부터 1996년까지 남편과 함께 여행하는 봉사를 하였음. 현재 킨샤사에서 특별 전 시간 봉사를 수행하고 있음.

1970년에 킨샤사에 있는 집에서 성서를 읽던 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나가 보니 한 남자가 어린 아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성서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더니 내 성서에서 마태 24:14을 펴 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항상 내 자신이 매우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고 자부해 왔지만 그 성경 구절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나를 도와주었고 우리는 흥미 있는 토의를 계속하였습니다.

그 형제는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을 보고 다음 일요일 집회에 나를 초대하였습니다. 증거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집회는 한 형제의 집 뒤에서 열렸습니다. 강연이 좋았기 때문에 나는 「파수대」 연구까지 남았습니다. 그날 저녁에 형제들이 집에 찾아와서 나와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나는 침례를 받았고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우리의 왕국 봉사」에서 이 나라의 다른 지역에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반둔두 주의 켕게로 갈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형제들은 동의하였지만 몇몇 형제들이 그곳에서 체포되었다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모든 사람을 다 체포할 순 없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저녁에 도착하였는데, 순회 감독자인 프랑수아 단다가 그 회중을 방문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매우 기뻤습니다. 다음날 아침 야외 봉사 모임에 나갔는데, 프랑수아와 몇몇 형제들이 체포되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보안 책임자는 나에게 무언가 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소. 만일 당신이 켕게에 머무르겠다면 마음대로 해도 좋소. 하지만 당신이 가방을 들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당신을 체포할거요.”

읍 사람들은 보안 책임자와 그의 요원들에 대해 아주 못마땅해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보안 요원들이 범죄와 싸우러 나가야지—그곳에는 범죄자들이 많았다—여호와의 증인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마침내 형제들은 석방되었습니다.

나는 1975년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고, 여러 읍과 마을을 방문하여 각각의 장소에 이삼 주씩 머물렀습니다. 오래지 않아 관심자들로 이루어진 여섯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나는 지부에 그 집단들을 인도하고 돌볼 형제들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장바티스트 팡디를 만났는데 그 역시 특별 파이오니아였습니다. 전에 나는 결혼과 전 시간 봉사에 대해 선교인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오랜 기간 동안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기 원한다면 자녀를 갖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장바티스트도 같은 생각이었고 우리는 결혼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자녀가 있어야 든든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였고 부모들이 몹시 실망하게 된 경우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남편과 나는 그러한 면에서 실망거리가 전혀 없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특히 나는 나의 가족이 진리 안으로 들어와서 행복합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뿐 아니라 네 명의 남동생과 한 명의 여동생이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도왔습니다.

시편 68:11에서는 “좋은 소식을 알리는 여자들이 큰 군대로구나”라고 알려 줍니다. 이 말씀은 우리 자매들에게 큰 책임이 있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나에게도 할 일을 허락하신 여호와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40면 네모]

영적 양식을 번역하는 일

콩고의 공용어는 프랑스어이지만 킨샤사와 콩고 강 주변에서는 린갈라어가 주요 언어로 사용된다. 린갈라어는 어휘가 많지는 않지만 매우 의미 깊은 표현들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어 “회개하다”라는 말은 코봉골라 모테마인데 이것은 문자적으로 “마음을 뒤집다”를 의미한다. 마음과 감정이 관련된 또 다른 표현은 코키티사 모테마인데 문자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다”, 달리 표현하면 “진정하다”를 의미한다.

수십 년 동안 「파수대」는 린갈라어로 번역되어 왔다. 현재 출판물은 콩고에서 사용하는 다음과 같은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로몽고어, 린갈라어, 린곰베어, 마시어, 모노쿠투바어, 스와힐리어(콩고 방언), 오테텔라어, 우룬드어, 응바카어, 칠루바어, 키난데어, 키송게어, 키투바어, 키펜데어, 킬루바어.

[247면 네모]

신체장애에도 불구하고 열심을 나타냄

스무 살의 리샤르는 몸이 마비가 되어 15년 동안 침대에 누워 지냈다.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은 머리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1997년 1월에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이 되었다. 리샤르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꾸준히 전파한다.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다. 그는 매월 평균 10시간을 전파한다. 1998년 4월 12일에 그는 들것에 실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개울로 가 거기서 침례를 받았다. 현재 그는 정기적으로 집회에 참석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친족 가운데 한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데 그 친족은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며 잘 발전하고 있다. 신체적으로는 약하지만 이 형제는 하느님의 영에 의해 강하게 되었다.

[248면 네모]

“세상에 속하지 않음”

어느 날 학교에서 갑자기 교사가 학생들을 한 명씩 반 학생들 앞에 세우고 국가를 부르게 했을 때 열두 살인 에스터는 깜짝 놀랐다. 에스터는 자기 차례가 되자 교사에게 자신은 국가를 부르지 않는다고 공손하게 말했다. 그다음 일어난 일을 에스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선생님은 화를 내셨어요. 그래서 제가 다른 노래를 불러도 되는지 물었죠. 선생님은 그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불렀어요. 그러자 선생님은 학생들 전체에게 박수를 치라고 말했고 아이들은 선생님의 말씀대로 했어요.

수업을 마치고 나서 선생님은 나를 따로 부르시더니 그 노래가, 특히 가사가 정말 좋았다고 말씀하셨어요.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지요. ‘너희 여호와의 증인들은 정말 세상과 구별된다는 걸 알겠구나. 네가 교실에서 하는 행실 역시 그 점을 보여 준단다.’

급우 중 하나도 매우 인상이 깊었나 봐요. 그 친구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대답해 주었죠. 그해 말에 우리는 헤어져야 했지만 그 친구에게 이사 갈 지역에서도 여호와의 증인을 찾아보라고 권했어요. 그 친구는 그렇게 했고 지금은 자매가 되었어요.”

[251면 네모]

정직은 하느님께 영예가 돌아가게 한다

한 형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 형제가 소속된 조에서 실수를 하는 바람에 장비의 일부가 망가졌다. 이사는 모든 근로자들을 해고하려고 작정하였다. 그는 근로자들에게 봉급을 주고 그들을 집으로 보냈다. 형제가 집에 도착해서 보니 자기가 500프랑(1달러가 조금 넘음)을 더 받은 걸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 돈을 돌려주려고 돌아갔다. 그는 그 기회를 이용해 증거하였고 이사는 형제의 정직성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머지 형제에게 계속 남아서 자신을 위해 일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76, 177면 도표와 그래프]

콩고(킨샤사)—연대표

1932년: 여호와의 증인을 벨기에령 콩고에 보내려고 시도하다.

1940

1949년: 법령에 의해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비공식적인 금지령이 강화되다.

1960

1960년: 콩고가 독립하고 종교적 관용의 시기가 도래하다.

1962년: 레오폴드빌(현재는 킨샤사)에 지부 사무실이 개설되다. 최초의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1966년: 여호와의 증인에게 법적 인가가 나다.

1971년: 법적 인가가 취소되다.

1980

1980년: 다시 법적 인가를 받다.

1986년: 여호와의 증인이 금지되다.

1990년: 종교적 자유가 비공식적으로 허용되다.

1993년: 대법원이 1986년의 금지령을 취소하다. 새 지부 공사를 시작하다.

2000

2003년: 콩고(킨샤사)에서 12만 2857명의 전도인이 활동 중이다.

[그래프]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총 전도인 수

총 파이오니아 수

120,000

80,000

40,000

1940 1960 1980 2000

[169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수단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콩고

브라자빌

콩고 민주 공화국

이시로

붐바

콩고 강

키상가니

고마

부카부

반둔두

킨샤사

카사이

켕게

키퀴트

마타디

카낭가

음부지마이

카탕가

카미나

르웨나

콜웨지

리카시

루붐바시

앙골라

잠비아

[162면 전면 삽화]

[185면 삽화]

엘렌 호이세와 에르네스트 호이세 부부, 딸 다니엘, 킨샤사에서, 1960년대

[186면 삽화]

영화 “신세계 사회의 행복”에 나오는 국제 대회의 침례 장면을 본 많은 콩고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199면 삽화]

마들렌 키슬과 줄리언 키슬 부부

[205면 삽화]

간소한 집회 장소들이 전국 곳곳에 건축되었다

[207면 삽화]

킨샤사 지부 사무실, 1965년

[208면 삽화]

콜웨지에서 열린 대회, 1967년

[209면 삽화]

열악한 도로 때문에 여행이 어려웠다

[221면 삽화]

1980년에 킨샤사에서 열린 “하나님의 사랑” 지역 대회는 그곳에서 8년 만에 처음으로 열린 대규모 대회이다

[223면 삽화]

많은 사람들이 단지 크고 작은 대회들에 참석하기 위해 음식과 소지품을 가지고 며칠을 걷는다

[228면 삽화]

혹독한 금지령이 내려지기 불과 석 달 전인 1985년 12월에 킨샤사에서 “충절 고수자” 대회가 열렸다

[230면 삽화]

금지령 기간에 우리의 형제들은 투옥과 잔인한 구타를 인내하였다

[235면 삽화]

당시에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하던 제카리아 벨레모가 수단에서 온 난민 형제들의 집단을 방문하는 모습

[237면 삽화]

국내의 열악한 도로 위로 출판물을 운송하기 위해서 튼튼한 차량이 사용된다

[238면 삽화]

콩고(킨샤사)의 봉사 훈련 학교 제1기 학급, 1995년

[241면 삽화]

기셀라 존송과 세바스티앵 존송 부부

[243면 삽화]

킨샤사에 있는 이 집에는 12명의 선교인이 살고 있다

[244, 245면 삽화]

유럽에서 구호물자가 도착하여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98년

[246면 삽화]

일루가 카나마(아래 왼쪽)와 마젤라 미털레지(삽입 사진의 왼쪽) 같은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전쟁으로 파괴된 지역에서 많은 도전에 직면한다

[252, 253면 삽화]

(1) 킨샤사 베델 시설

(2-4) 최근에 건축한 왕국회관들

(5) 왕국회관 건축 공사를 돕고 있는 한 형제

[254면 삽화]

지부 위원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페터 빌헬름, 뱅자맹 반디윌라, 크리스티앙 벨로티, 다비드 나웨즈, 델팡 카부사, 로베르 엘롱고, 세바스티앵 존송, 우노 닐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