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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 (브라자빌)

콩고 (브라자빌)

콩고 (브라자빌)

소포를 뜯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제목이 번쩍거리는 자주색 책이 나왔습니다. 에티엔은 의아해하였습니다. 이 소포가 자기 앞으로 온 것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주소에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방기의 한 정부 부서의 수석 제도사, 에티엔 은코운코우라는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티엔은 그 책을 주문한 적도 없고, 발신 주소인 스위스 워치 타워 역시 전혀 모르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그 책에 설명되어 있는 성서 진리가 이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진리는 또한 수천 명의 동료 아프리카인들을 거짓 종교와 부족 간의 편견과 문맹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줄 것이었습니다. 진리는 많은 사람들이 이제 곧 오게 될 정치적 기대감에 도취되었다가 그에 따른 환멸에 휩쓸려 가지 않게 보호해 줄 것이었습니다. 진리는 충격적인 사건들이 일어나는 기간에도 확신과 희망을 줄 것이었습니다. 진리는 또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고무하여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게 할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에 대한 기사 내용은 여러분에게 감동과 격려를 줄 것입니다. 하지만 에티엔이 그다음에 어떻게 했는지 알아보기 전에, 에티엔이 고향으로 여기던 이 아프리카 나라에 대한 배경 지식 얼마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1492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로 그 유명한 항해를 떠나기 10년 전, 포르투갈 선원들은 디오구 캉의 지휘 아래 아프리카 중부에 있는 콩고 강 어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뱃전에 부딪히는 그 강물이 대양에 다다르기까지 수천 킬로미터를 흘러왔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 포르투갈 선원들은 번창하던 콩고 왕국의 주민인 현지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수백 년 동안, 포르투갈 무역상 및 유럽의 무역상들은 해안을 따라 살고 있던 아프리카인들로부터 상아와 노예를 사들였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180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륙 지방으로의 모험을 시도하였습니다. 이 지역을 탐험했던 매우 유명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은 프랑스 해군 장교였던 피에르 샤보르냥 드 브라자입니다. 브라자는 1880년에 현지의 왕과 조약을 체결하여, 콩고 강 이북의 지역을 프랑스 보호령으로 삼았습니다. 후에 그 지역은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가 되었으며 그 수도는 브라자빌이었습니다.

오늘날 브라자빌은 현재 콩고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콩고 강변에 위치해 있습니다. 콩고 강은 캉이 탐사 도중 배를 정박했던 바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둥근 돌과 암붕(岩棚)으로 이루어진 400킬로미터를 굽이치며 흘러 내려갑니다. 그리하여 캉이 탐사 항해 도중 배를 정박했던 바다에 이릅니다. 브라자빌에서는 강 건너 콩고 민주 공화국의 수도 킨샤사의 스카이라인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나라 모두 콩고 강의 이름을 딴 국명을 채택하고 있어서 구분을 위해 콩고(브라자빌), 콩고(킨샤사)로 표기하기도 합니다.

브라자빌을 지나 강 하류의 급류와 폭포 때문에, 배를 타고서 강을 따라 대서양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브라자빌과 해안 도시인 푸앵트누아르 사이를 잇는 철도가 있습니다. 콩고 주민의 대부분은 이 두 중심 도시나 그 인근에 살고 있습니다. 더 북쪽으로 일부 해안의 읍들과 도시들이 있지만 무덥고 숲이 울창한 이 나라는 대부분의 지역이 인구 밀도가 낮습니다.

진리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 시작하다

이제 다시 에티엔의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에티엔이 소포로 책을 받은 때는 1947년입니다. 에티엔은 책을 받은 바로 그날, 한 이웃 사람과 함께 제1장을 읽고 토의하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진리가 담겨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다음 일요일에 몇몇 친구들도 초대하여 함께 그 책을 읽고 성구들을 확인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참석한 사람들은 배운 것에 기뻐하였고, 다음 일요일에 다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두 번째 모임에는 오귀스탱 베욘이라는 세관원이 참석하였습니다. 그 역시 에티엔처럼 원래 브라자빌 출신으로, 참다운 자유를 가져오는 진리를 열심히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그다음 주에 에티엔은 편지 두 통을 받았습니다. 한 통은 카메룬에 있는 친지가 보낸 것인데 그는 에티엔이 종교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워치 타워 협회의 스위스 사무실로 에티엔의 이름을 적어 보냈다고 썼습니다. 다른 편지는 스위스에서 온 것으로, 에티엔에게 책을 보낸다는 말과 함께 그 책을 읽어 보고 가족 및 친구들과도 돌려가며 읽으라고 격려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에는 더 자세한 내용을 얻을 수 있게 프랑스의 주소도 들어 있었습니다. 이제 에티엔은 어떻게 해서 그 책이 자신에게 오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그는 여호와의 증인의 프랑스 지부 사무실과 정기적으로 서신을 교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에티엔과 오귀스탱은 브라자빌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에티엔은 브라자빌에 있는 아는 사람인 티모테이 미에무누아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는 한 공업학교의 학장이었습니다. 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가 따르던 길은 진리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게 되어 기쁩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티엔은 계속해서 자신이 배운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또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책을 동봉하였습니다. 티모테이는 에티엔과 오귀스탱과 마찬가지로 성서의 소식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들 세 사람이 바로 성서 진리를 받아들인 최초의 콩고인이며 이들은 각자 다른 많은 사람들도 성서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계속 도왔습니다.

티모테이는 공업학교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이 저녁 시간에 성서 토의에 참석하도록 초대하였습니다. 또한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들을 추가로 요청하는 편지도 썼습니다. 이 집단은 집회를 열고 최선을 다해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노에 미쿠이자와 시몽 맘푸야 같은 일부 학생들은 후에 여호와의 조직 내에서 감독자의 특권을 누렸습니다.

1950년에는 남로디지아(현재 짐바브웨)에 살던 선교인 에릭 쿡이 방기와 브라자빌에 있는 작은 규모의 관심자 집단들을 격려하기 위해 방문하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쿡 형제가 프랑스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는 것이었습니다. 에티엔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이 겸손하고 동정심 많은 형제는, 자신의 조그만 영불(英佛) 사전을 가지고, 우리에게 왕국 전파 활동과 신권 조직에 대해 설명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때로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완전히 추측하지 않으면 안 되었죠.”

제한이 가해지다

쿡 형제의 방문은 시기적절하였습니다. 1950년 7월 24일에 식민 당국의 고등 판무관이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한 모든 출판물의 수입과 배부에 제한을 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듬해에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에 있는 전도인들은 468회의 공개 집회를 열었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6부의 출판물밖에 전할 수 없었습니다. 「1952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영문)은 이 형제들에 대한 이해와 동정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구역은 방대한데 불과 37명의 왕국 소식의 전도인만이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나라에 여러분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도 자기 고향에 있는 몇 명을 제외하면, 다른 활동적인 증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진리와 증거하는 절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출판물이나 협회로부터 받을 수 있었던 몇 통의 편지에서 읽은 내용뿐입니다.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아프리카의 형제들이 바로 [이러한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후에 자크 미셸이 그 집단을 격려하고 훈련을 더 베풀기 위해 프랑스에서 왔습니다. 공업학교의 학생이었던 노에 미쿠이자는 학생들이 궁금해하던 질문 하나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까?” 모든 사람의 시선이 미셸 형제에게 집중되었는데, 그는 성서를 열어 시편 104:15을 폈습니다. 자크는 그 구절을 읽고 나서 그리스도인들은 포도주를 지나치게 많이 마셔서는 안 되지만 포도주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브라자빌에서 새로 침례받은 형제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열심히 증거하였습니다. 주말에는 정기적으로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 킨샤사에서 전파하였습니다. 1952년에는 콩고 강 남쪽에 사는 콩고 사람이 처음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브라자빌에 있는 형제들은 초기에 킨샤사에 있는 형제들을 돕기 위해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그 역할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1954년 12월에 형제들은 브라자빌에서 대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참석자 수는 650명이었으며 70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진리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을 거짓 종교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교국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것을 보고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정부 당국이 여호와의 증인을 반대하게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경찰은 티모테이 미에무누아가 증인들의 지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자주 경찰서로 소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협하고 구타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 때문에 낙담하지 않았으며 브라자빌에 있던 다른 여호와의 백성들 역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성서 진리에 대한 관심은 계속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자 당국은 더 심한 조처를 취하였습니다. 티모테이 미에무누아와 전에 공업학교 학생이었고 진리를 받아들인 아롱 디아모니카는 두 사람 다 정부에 고용되어 있었습니다. 1955년에 정부는 그들을 내륙 지방에 있는 먼 도시로 전근을 보냈습니다. 티모테이는 잠발라로, 아롱은 임폰도로 전근이 되었습니다. 전파 활동을 중단시키려는 그러한 시도는 형편없이 실패하였습니다. 브라자빌에 있는 형제들은 계속해서 열심히 활동하였고, 한편 티모테이와 아롱은 그 구역들을 개척하여 새로운 지역에 회중을 설립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열심히 활동하였지만 외국 형제들의 도움을 애타게 바랐습니다. 이러한 도움은 곧 베풀어졌습니다.

1956년 3월에 처음으로 프랑스에서 네 명의 선교인 즉 장 세뇨보스와 이다 세뇨보스 부부, 그리고 클로드 듀폰과 시몬 듀폰 부부가 도착하였습니다. 1957년 1월에는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에서 증거 활동을 감독할 지부 사무실이 브라자빌에 설립되었습니다. 세뇨보스 형제는 지부의 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장과 이다 부부가 지금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는 회중들을 방문하던 도중, 이다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장은 자신의 임지에서 계속 봉사하였습니다.

내륙 지역으로

그때 즈음에 오귀스탱 베욘은 순회 감독자였습니다. 오귀스탱은 그 나라의 북쪽과 서쪽에 있는 깊은 숲 속 마을들과 피그미족의 야영지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자주 그리고 먼 곳까지 걸어 다녔기 때문에 그곳 전역에서 “걷고 있는 사람”이라고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장 세뇨보스 형제는 베욘 형제와 함께 다니기도 했습니다. 장은 자기들이 가고 있다는 것을 적도의 숲 속 깊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들은 “걷고 있는 사람이 백인과 함께 오고 있다”라는 소식을 북소리로 전달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행은 많은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은 콩고(브라자빌)에만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세뇨보스 형제와 다른 선교인들이 와 있었고 게다가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 영화를 상영함으로 그러한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성서 진리는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을들에도 점차 전파되면서 영매술 행위와 부족 간의 불화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지역에 있던 많은 형제들은 문맹자였습니다. 그들은 시계가 없어서 해의 위치를 보고 집회에 갈 시간을 결정했습니다. 야외 봉사를 한 시간을 계산할 때는 조그만 나뭇가지를 사용하였습니다. 누군가에게 증거할 때마다 나뭇가지 하나를 손수건에 쌌습니다. 나뭇가지가 네 개가 되면 한 시간을 봉사한 것이 됩니다.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매 월말에 야외 봉사 보고를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형제들은 보고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전파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의 주된 주제가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법적인 사태 진전과 정치적 변화

1950년에,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한 출판물에 수입 제한 조처가 내려졌음을 기억할 것입니다.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제한 조처는 제자를 삼는 활동을 중단시키지 못했습니다. 당황한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행정 당국에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여호와의 증인이 공산주의자라는 거짓된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1956년의 어느 목요일 새벽 다섯 시에, 열 명의 형제가 체포되었습니다. 체포 소식은 신속히 퍼졌으며 종교적 반대자들은 기뻐하였습니다. 재판은 당일에 열렸는데 그 법원은 재판 과정을 방청하려고 몰려든 형제들로 가득하였습니다.

노에 미쿠이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며 마태 24:14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성취시키고 있는 하느님의 종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우리 출판물을 읽어 본 우리 측 변호사는 만일 모든 사람이 여호와의 증인과 같다면 범죄자가 한 명도 없게 될 것이라고 법정에서 말했습니다. 같은 날 오후 평결이 나왔는데 ‘무죄’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기쁨에 차서 집으로 달려가 옷을 갈아 입었는데 그날 저녁에 집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이미 도시 전체에 퍼져 있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집회에서 우리는 목청껏 왕국 노래를 불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노랫소리를 듣고 놀랐습니다. 우리가 감옥에 있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콩고는 1960년 8월 15일에 독립국이 되었습니다. 정치적 폭력이 불길처럼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이러한 사건들에 적극 개입하였지만 여호와의 증인은 계속 전파 활동을 하였습니다. 1960년에 총 3716명이 브라자빌에서 열린 순회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북부 지방에서도 사람들은 회중들로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70명의 전도인이 살고 있던 한 지역에서는 거의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회중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1961년 12월에 여호와의 증인은 레 테무앵 드 제오바(Les Témoins de Jéhovah)라는 법적 단체로 등록하였습니다. 법적 인가가 유익을 가져오긴 했지만 형제들은 그러한 것들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뇨보스 형제는 얼마 후 일어난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날 보안국의 한 고위 관리가 우리의 그리스도인 중립을 흠잡아 나를 소환하였습니다. 그는 이 나라에서 나를 추방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협박대로 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그는 심장 마비로 사망하였습니다.”

1960년대 선교인들의 생활

1963년 2월에 프레드 루커스와 맥스 대닐레이코가 아이티에서 도착하였습니다. 프레드는 결혼한 후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는 회중들을 방문할 때 누가 어느 집 식구인지 분간해 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장로의 아내가 누구인지, 또 어린이들은 누구의 자녀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형제들은, 여자들이 결혼한 후에도 원래의 성을 계속 사용하고 자녀들의 이름은 친척이나 가족의 친구 이름을 따서 짓는 중앙아프리카의 관습을 따랐습니다.

방문한 첫날 밤에 왕국회관에서 만난 형제들은 조용하였으며 우리를 보고는 수줍어하였습니다. 집회가 시작되고 나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회관의 한쪽 편에는 형제들과 나이 든 남자 아이들이 앉아 있었고 반대편에는 어린아이들과 자매들이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집회가 시작될 때 형제들 쪽 자리는 거의 꽉 차 있었지만 자매들 쪽에는 앉아 있는 사람이 얼마 없었습니다. 집회가 진행되자 더 많은 자매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성서와 책을 머리에 이고 우아하게 균형을 잡으며 들어왔습니다.

나는 회중 성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아내와 나를 소개하기 위해 연단에 올라갔습니다. 따뜻한 환영의 말을 한 다음 잠시 멈추고 회관의 남자들 쪽을 주시한 채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10분을 드릴테니 여러분의 아내와 자녀를 찾도록 하십시오. 이제부터는 전 세계 여호와의 백성들 모두가 하는 것처럼 가족과 함께 앉으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기쁘게 이 제안을 따랐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 역시 도전이 되었습니다. 루커스 형제의 아내인 리아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짐을 꾸릴 때 접을 수 있는 조그만 침대, 모기장, 물동이, 휴대용 물 여과기, 의복, 서적, 잡지, 그리고 성서에 근거한 영화 필름들을 챙기곤 했어요. 영화를 보여 주려면 전기 코드, 전구, 필름 통, 영화 대본, 작은 발전기, 휘발유 통을 가지고 다녀야 했답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전부 가지고 현지 트럭을 타야 했지요. 운전석 옆 자리에 앉아서 가려면 새벽 2시까지 트럭 정류소에 나가야 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햇볕이 내리쬐는 트럭 뒤편 짐칸에 동물들과 짐들과 다른 많은 승객들과 함께 앉아서 가야 했지요.

한번은 더위 속에서 여러 시간을 걸어 집에 도착했는데, 글쎄 군대개미들이 우리가 묵고 있던 작은 진흙 오두막에 쳐들어왔지 뭐예요. 물동이를 타고 올라가서는 자기들의 몸으로 다리를 만들어 가며 자그만 마가린 통에까지 기어올라 가 마가린을 깨끗이 비워 버렸더군요. 그래서 그날 저녁은 마른 토스트에 정어리 통조림을 반씩 나누어 먹었죠. 피곤하기도 했고 조금 처량한 생각도 들었지만, 바깥의 형제들이 모닥불 주변에서 부드럽게 왕국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어요. 얼마나 부드럽고 아름다운지 잠들기에 더없이 좋았죠!”

충실한 선교인들과 지방 장로들

1956년부터 1977년까지 20명이 넘는 선교인들이 콩고(브라자빌)에서 봉사하였습니다. 이곳 생활이 그들에게 항상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 개개인은 왕국 전파 활동에 가치 있는 기여를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지부의 종으로 일한 사람들은 모두 선교인이었습니다. 세뇨보스 형제가 1962년에 프랑스로 돌아갔을 때 래리 홈스가 전파 활동을 감독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1965년에 래리와 그의 아내 오드리가 선교 봉사를 중단한 후에는 루커스 형제가 지부의 종이 되었습니다.

많은 지방 형제들 역시 인도하는 일에서 뛰어난 모범이 되었습니다. 1976년에 지부 위원회 마련이 도입되었을 때 통치체는 선교인으로 일하던 야크 요한손과 팔레 브예르, 그리고 지방 형제인 마르슬랭 응골로 세 사람을 임명하였습니다.

오귀스탱 베욘—“걷고 있는 사람”—은 1962년에 길르앗 제37기 학급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졸업 후에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갔는데 그곳은 거의 15년 전에 그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책을 읽었던 곳이었습니다. 오귀스탱은 시간이 지나 결혼하고 아이를 가졌으며, 브라자빌로 돌아와 그곳에서 자신의 집을 그리스도인 집회를 위해 사용하도록 제공하였습니다. 나중에 그는 재산의 일부를 왕국회관을 위해 기부하였고 후에 왕국회관이 건축되었습니다.

오귀스탱 베욘과 티모테이 미에무누아는 이미 사망하였습니다. 티모테이는 죽기 전에 자신의 경험담 일부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 내용은 히브리 10:39에 나오는 이러한 말씀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서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영혼을 살아 있게 보존할 사람들입니다.” 콩고에서 처음 진리를 받아들인 세 사람 중 한 사람인, 에티엔 은코운코우는 이제 90세가 다 되어 갑니다. 이 형제들은 실로 충실한 봉사에 있어서 뛰어난 모범이 됩니다!

시험의 때

1970년 8월에 콩고는 공산주의 정부 형태를 채택하였습니다. 예전에 당국이 형제들을 괴롭히면서 여호와의 증인은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던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자 새 당국자들은 형제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새 정부는 한동안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공개적으로 지역 대회와 집회를 열었으며 새로운 선교인들 역시 입국 허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형제들은 공산 정권의 영향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일부 관리들이 선교인들을 스파이라고 고발하였습니다. 그 후 1977년 1월 3일,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선교인들은 차례로 추방되었고 마지막으로 야크 요한손과 린다 요한손만 남게 되었습니다. 야크는 이 시기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부 사무실에 우리만 남아서 보낸 그 몇 달 동안은, 아마 선교 봉사를 하면서 경험해 본 것 중 가장 믿음에 시험이 되면서도 믿음을 강화시켜 준 기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미국 중앙 정보국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해서 정부의 적들은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큰 위험에 직면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보호의 손길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보았으며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노에 미쿠이자는 수상에게 탄원하여 야크와 린다가 이 나라에 계속 머물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 요청은 묵살되었고 그들은 떠나야 하였습니다. 지부의 재산과 왕국회관들이 압류되었고 지부 사무실은 폐쇄되었습니다. 잠시 동안 프랑스 지부가 전파 활동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았지만, 후에 이 책임은 킨샤사 지부 사무실에 위임되었습니다.

형제들은 몇 가지 부면에서 제한을 받았지만 다른 나라의 증인들이 인내해야 했던 혹독한 박해를 경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일부 형제들은 두려워하였고 이러한 두려움은 전염성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여전히 정기적으로 집회를 열기는 했지만 호별 방문 봉사가 사실상 중단되었습니다. 그래서 킨샤사 지부 사무실은 형제들을 격려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장로들을 강 건너편으로 파견하였습니다.

파견된 장로들 가운데는 앙드레 키툴라가 있었습니다. 1981년 6월에 그는 순회 감독자로서 브라자빌에 있는 12개 회중을 방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도시에 있던 첫 번째 회중을 방문했을 때, 형제들이 화요일에 신권 전도 학교와 봉사회에 참석한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수요일 아침에 전도인들 가운데 야외 봉사를 위한 모임에 나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앙드레는 혼자서 전파하기 시작하였는데 한 집주인은 그에게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전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우리를 위로해 주곤 했지만 이젠 다들 사라져 버렸어요!”

그날 아침 계속 전파하는 도중에 앙드레는 한 형제를 만났는데, 그는 “우리 모두는 집집으로 전파하던 습관을 버리고 말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에 이 형제는 앙드레의 활동에 대해 다른 전도인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오후에는 몇몇 자매가 봉사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자빌 전역에 호별 봉사 활동이 재개되었습니다. 앙드레와 그의 아내 클레망틴이 그곳에서 봉사한 삼 년 동안에, 체포된 형제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수도 외곽에 있는 형제들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브라자빌의 형제들이 집집으로 전파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들 역시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당시 킨샤사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던 다비드 나웨즈는 지부가 강 건너편에 도움을 베풀기를 특히나 기뻐한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킨샤사에서 진리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브라자빌 형제들 덕분이었습니다. 후에 그곳에서 공산 체제로 인해 활동이 둔화되었을 때 이곳의 증인들은 그쪽 형제들을 도우러 갔습니다. 전도서 4:9, 10에 나오는 이러한 지혜의 말씀은 확실이 참되었습니다. ‘둘이 하나보다 나으니, 그들이 자기들의 수고에 대하여 좋은 상을 얻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넘어지더라도, 다른 하나가 그 짝을 일으킬 수 있다.’ 우리의 경우를 두고 형제들은 ‘콩고가 두 나라인 것이 한 나라인 것보다 낫다’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정치적 변화 속에서 앞으로 밀고 나아감

1991년에는 정치적 상황에 대격변이 있었습니다. 콩고(브라자빌)는 일당제 국가에서 다당제 국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거리의 사람들은 도취감에 휩싸였지만 형제들은 시편 146:3에 나오는 이러한 경고의 말씀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너희는 존귀한 자들을 신뢰하지 말고 땅의 사람의 아들도 신뢰하지 말아라.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 이러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이 증명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변화는 여호와의 백성에게 유익하였습니다. 1991년 11월 12일에 내무 장관은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대한 금지령을 해제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하였습니다. 압류되었던 왕국회관들은 반환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전의 지부 건물은 반환되지 않았으며, 지금까지도 대통령 경호대가 점유하고 있습니다. 1992년 8월에는 15년 만에 처음으로 브라자빌과 푸앵트누아르에서 지역 대회가 조직되었습니다. 그해에 성서 연구 수는 5675건으로 증가하였으며, 그것은 전도인 수의 거의 네 배에 해당하는 수였습니다.

한편 법적 신분의 회복으로, 선교인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다시 열렸습니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임명되어 북쪽으로 파견되었는데 그곳에는 집회에 참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자였습니다. 도시들에 있는 회중들은 많은 사람들이 읽고 쓸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 역시 잘해 왔습니다. 그때는 이 나라 전역에서 문맹 퇴치 운동을 강화할 때였습니다.

1993년의 선거로 인해 정부에 또 다른 변화가 있었습니다. 야당의 불만이 널리 퍼져 몇 주 동안 비상사태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무장 충돌, 파업, 통행금지, 도로 봉쇄, 약탈이 일상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고 환멸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지속되었습니다. 1991년의 도취 상태는 끝나고 말았습니다.

정치적인 혼란과 더불어 인종 문제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부족 간의 분쟁 때문에 일부 형제들은 안전한 곳으로 이사해야 하였습니다. 그 결과 몇몇 회중들은 해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형제들은 진리가 인종적인 증오심으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해 주었음을 거듭거듭 나타냈습니다. 그러한 불안한 시기에도 형제들은 부족 배경에 상관없이 서로 돕고 보호해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직 여호와께서만 참다운 안전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킨샤사 지부 사무실은 인도와 격려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1996년 말이 되자 이 나라의 상태는 다시 평화로워졌고 전도인 수는 3935명에 이르렀습니다. 다섯 명의 선교인이 브라자빌의 선교인 집에서 생활하며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1997년 4월에 두 부부가 더 도착하면서 푸앵트누아르에도 새로운 선교인 집이 개설되었습니다.

강 북쪽의 콩고(브라자빌)에서는 생활이 평온해졌고 왕국 전파 활동도 잘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웃 나라인 콩고(킨샤사)에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투 지역이 킨샤사에 가까워지자 킨샤사에 있던 선교인들은 피난해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5월 말까지, 킨샤사의 선교인들은 브라자빌과 푸앵트누아르에서 동료들과 함께 열심히 봉사하였습니다. 아무도 며칠 내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습니다.

내전이 일어나다

1997년 6월 5일에 브라자빌에서 갑자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전쟁은 당시 재직 중이던 대통령에 충성스러웠던 군대와 전임 대통령을 지지하던 군대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었습니다. 중포병대가 도시와 그 주변에 포격을 가하고 파괴하였습니다. 수천 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시체들이 도처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도시가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전선이 어디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브라자빌이 누리던 안정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습니다. 킨샤사로 가는 배편도 운항이 중단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숲으로 도망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카누를 타고 노를 저어 강에 있는 작은 섬들로 피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콩고 강을 건너 킨샤사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킨샤사 부근에서도 전투가 있기는 했지만, 브라자빌의 전투에 비하면 그다지 격렬하지는 않았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형제들도 문제를 겪게 되었지만, 진리가 하느님의 종들의 정신과 마음에 미친 영향은 정말 확연히 구별되었습니다! 그들은 시편 46:1, 2에 기록된 이러한 말씀을 전적으로 확신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도피처이시요 힘, 고난 중에 쉽사리 찾을 수 있는 도움이시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으리, 땅이 변하여도, 산들이 흔들려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로 빠져들어도.”

많은 형제들은 가까스로 킨샤사까지 왔으며, 그곳의 지부 위원회는 그들에게 식품과 거처와 의료 봉사를 베풀 마련을 하였습니다. 킨샤사의 가족들은 브라자빌에서 온 동료 신자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사랑과 후대를 베풀었습니다.

피난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일부 형제들은 브라자빌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형제들 중에는 장 테오도르 오테니와 정규 파이오니아이던 그의 아내 잔이 있었습니다. 8월에 그들의 집에 포탄이 떨어져서 집이 부서지고 잔은 심한 부상을 당했습니다. 장은 아내를 데리고 급히 킨샤사로 갔지만 너무 늦어 버렸습니다. 장은 그때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아내는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봉사의 직무에 대해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소를 적어 둔 노트를 나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내 성서 연구생들을 모두 찾아가 줘야 해요. 그들은 나에게 정말 소중하거든요.’ 아내를 끌어안고 나서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을 때 아내는 이미 사망했더군요.” 장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부활의 약속에 대한 온전한 확신을 가지고 계속해서 열심히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두 나라의 수도를 오가는 정규 배편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소형 모터보트를 가진 사람들은 브라자빌을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배편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루이노엘 모툴라, 장마리 루바키, 세포리앙 바케바를 비롯한 용감한 브라자빌 형제들은, 실종된 형제들을 찾는 일과 아직 브라자빌에 있는 형제들을 돕는 일에 자원하였습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작은 섬들과 강변을 수색하기 위해, 작은 보트를 타고 거센 콩고 강의 강한 물살에 맞서야 하였습니다. 또한 잔혹 행위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브라자빌의 전투 지역에도 들어가야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형제들을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야 하였습니다.

세포리앙은 이미 강을 건너 본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내전 기간에 여러 차례 강을 건너다녔습니다. 때로는 브라자빌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구호품을 공급하기 위해 강을 건너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번은 비교적 안전하게 살고 있던 브라자빌 형제들을 위해 쌀 열 포대를 가지고 강을 건넜습니다. 물론 강을 건너는 것이 도전이 되는 일이긴 했지만 쌀을 약탈자들에게 빼앗기지 않고 목적지까지 운반하는 일은 훨씬 더 도전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타고 있던 승객들 중에 기품 있어 보이는 남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세포리앙에게 쌀을 가지고 어디로 가는지 물었습니다. 세포리앙은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성서에 근거한 희망을 전하였습니다. 보트가 강가에 닿자 그 남자는 자신이 고위 관리임을 밝혔습니다. 그는 군인 몇 명을 부르더니 세포리앙이 형제들에게 쌀을 운반할 차편을 구할 수 있을 때까지 쌀을 지키라고 지시했습니다.

대개, 세포리앙은 브라자빌에서 피난하는 형제들을 돕기 위해 강을 건너다녔습니다. 그중 한번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콩고 강의 물살이 매우 거세긴 하지만 보트를 가진 사람들 대부분은 위험한 급류 쪽으로 휩쓸려 내려가지 않고 안전하게 다니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 일곱 명과 다른 사람 다섯 명을 태우고 브라자빌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강 한가운데서 연료가 바닥나 버렸습니다. 배를 잡아맬 수 있는 작은 섬에 가까스로 갈 수 있었습니다. 작은 보트가 다가오더니 그 보트 주인이 킨샤사에서 연료를 사 가지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자 우리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연료를 가지고 올 때까지 기다린 한 시간 반은 정말 길고도 걱정스러웠습니다.”

얼마 안 있어 킨샤사 지부는 약 1000명의 형제 자매들을 비롯하여 그들의 가족과 관심자들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1997년 10월이 되자 전쟁이 끝났고 피난민들은 브라자빌로 돌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브라자빌과 푸앵트누아르에서 봉사하던 모든 선교인들은 전쟁 때문에 모두 대피한 상황이었습니다. 일부는 고국인 영국과 독일로 떠났고 다른 선교인들은 베냉과 코트디부아르로 갔습니다. 다시 어느 정도 평온해지자 일부 사람들은 임지인 콩고(브라자빌)로 돌아왔습니다. 게다가 1998년 12월에는 세 부부와 독신 형제 한 명이 프랑스에서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킨샤사 지부 사무실에서 섬기던 경험 많은 선교인인 에디 메이와 패멀라 메이가 브라자빌로 왔으며 새로운 선교인 집이 개설되었습니다.

다시 내전이 일어나다

이듬해에 브라자빌에서는 다시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또다시 몇몇 증인들을 포함하여 수천 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이제 도착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선교인들 대부분은 인근의 카메룬에 있는 선교인 집으로 대피하였습니다. 전쟁이 해안에 있는 푸앵트누아르까지 확산될 것이라는 소문이 계속되었지만, 세 명의 선교인은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마침내 1999년 5월에 내전은 종식되었습니다.

많은 증인들이 피난해야 하였기 때문에 이 나라에 있던 회중 수는 108개에서 89개로 뚝 떨어졌습니다. 현재 브라자빌에는 1903명의 전도인이 23개 회중과 연합하고 있습니다. 푸앵트누아르에는 24개 회중에 1949명의 전도인이 있습니다. 두 차례의 내전 중에, 다른 곳에 있던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의 영적 형제 자매들을 위해 물질적인 도움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그러한 지원은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졌습니다.

전쟁과 기근과 질병과 다른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콩고(브라자빌)에 있던 증인들은 월 평균 16.2시간의 야외 봉사 시간을 유지하였습니다. 두 번째 내전이 끝난 1999년 4월에는 모든 전도인의 21퍼센트가 어떤 형태로든 전 시간 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진리 가운데서 기뻐함

전쟁은 이 나라를 파괴시키고 황폐시켰습니다. 브라자빌에서 재건축이 진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축 계획 가운데는 사람들이 성서 진리를 배우는 곳인 왕국회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002년 2월에 푸앵트누아르에 두 채 그리고 브라자빌에 두 채, 그래서 총 네 채의 왕국회관이 봉헌되었습니다.

브라자빌에서 열린 이러한 봉헌식 가운데 한 봉헌식에서 한 연로한 형제는 금지령하에 있던 15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형제들은 1월 1일에 공터에서 하루 동안의 대회를 열려고 계획한 적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사람들이 신년 축하를 하고 있을 것이므로 방해받지 않고 대회를 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전 프로그램이 끝나자 경찰이 들이닥쳐 대회를 중단시켰습니다. 그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대회 장소를 떠났지요. 오늘 이 동일한 장소에 다시 오니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군요. 하지만 이번에는 새로 지은 왕국회관을 봉헌하기 위해 이곳에 있기 때문에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습니다. 이 아름다운 새 회관은 그때의 바로 그 자리에 건축한 것입니다!

이제는 에티엔 은코운코우와 오귀스탱 베욘과 티모테이 미에무누아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책을 통해 진리를 배우게 된 때로부터 50여 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에 콩고(브라자빌)에 있는 수천 명이 그 세 사람의 믿음의 본을 따랐고, 현재도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어 장래에 대한 전망이 밝아 보입니다. 1만 5000건 이상의 성서 연구가 사회되고 있으며, 이 수는 전도인 수의 3.5배에 달합니다! 2003년 기념식 참석자 수는 무려 2만 1987명으로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2003 봉사 연도가 끝나 갈 무렵, 15명의 선교인을 포함한 4536명의 전도인은 다른 사람들도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배우도록 돕기 위해 계속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습니다.—요한 8:31, 32.

[143면 삽입]

북소리는 “걷고 있는 사람이 백인과 함께 오고 있다”라는 소식을 전달하였습니다

[144면 삽입]

형제들은 시계가 없어서 해의 위치를 보고 집회에 갈 시간을 결정했습니다

[151면 삽입]

“바깥의 형제들이 모닥불 주변에서 부드럽게 왕국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어요. 얼마나 부드럽고 아름다운지 잠들기에 더없이 좋았죠!”

[140면 네모]

콩고(브라자빌)의 개요

국토: 콩고는 가봉과 카메룬과 중앙아프리카 공화국과 콩고 민주 공화국 사이에 위치해 있다. 면적은 핀란드나 이탈리아보다 넓다. 해안 평야가 내륙으로 60킬로미터 정도 뻗어 있고 그 너머에는 높이 800미터가 넘는 고원이 펼쳐진다. 울창한 숲과 큰 강은 이 나라의 나머지 부분의 주된 특징이다.

주민: 인구는 300만 명이 넘고, 많은 부족들로 이루어져 있다. 울창한 삼림 지역들에는 피그미족이 살고 있다.

언어: 공용어는 프랑스어이지만 북쪽 지역에서는 린갈라어가 널리 사용된다. 남쪽에서는 모노쿠투바어가 사용된다.

생활: 기본적 필요는 자급적 농업과 민물낚시와 바다낚시로 충당한다. 삼림 지역에는 야생 동물들이 많아서 숙련된 사냥꾼은 쉽게 식품을 얻을 수 있다.

식품: 주식으로 카사바나 쌀을 많이 먹는다. 이런 것을 매운 소스로 양념한 생선이나 닭고기와 함께 먹는다. 과일은 망고, 파인애플, 파파야, 오렌지, 아보카도 등 다양하다.

기후: 콩고는 열대성 기후로 연중 내내 덥고 습하다. 뚜렷하게 구분되는 두 계절 즉 3월부터 6월까지의 우기와 6월부터 10월까지의 건기가 있다.

[148, 149면 도표와 그래프]]

콩고(브라자빌)—연대표

1940

1947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책이 처음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키다.

1950년: 선교인 에릭 쿡이 브라자빌을 방문하다. 당국이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한 출판물에 제한을 가하다.

1956년: 3월에 최초의 선교인들이 프랑스에서 도착하다.

1957년: 1월에 지부 사무실이 개설되다.

1960

1961년: 12월 9일에 법적 단체로 등록되다. 하지만 출판물에 대한 제한은 이듬해까지 계속되다.

1977년: 여호와의 증인이 금지되다. 지부 재산이 압류되고 선교인들이 추방되다.

1980

1981년: 앙드레 키툴라가 브라자빌에서 전파 활동을 회복하도록 돕다.

1991년: 내무 장관이 금지령을 해제하다. 15년 만에 처음으로 지역 대회가 조직되다.

1993년: 사회적, 정치적 동요가 비상사태로 치닫게 되다.

1997년: 6월 5일 내전이 일어나다. 선교인들이 피신하다. 킨샤사 지부 사무실이 1000명의 난민을 위해 식품과 거처와 의료 봉사를 마련하다.

1999년: 또다시 내전이 일어나다. 선교인들이 다시 피신하다.

2000

2002년: 2월에 처음으로 네 채의 신축된 왕국회관이 봉헌되다.

2003년: 현재 4536명의 전도인이 콩고(브라자빌)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래프]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총 전도인 수

총 파이오니아 수

5,000

2,500

1940 1960 1980 2000

[141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카메룬

적도 기니

가봉

콩고

임폰도

잠발라

브라자빌

푸앵트누아르

콩고 강

콩고 민주 공화국

킨샤사

앙골라

[134면 전면 삽화]

[138면 삽화]

1949년의 초기 성서 연구 집단 성원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장세트 문참보테, 티모테이 미에무누아와 오딜 미에무누아 부부, 노에 미쿠이자

[139면 삽화]

에티엔 은코운코우

[142면 삽화]

장 세뇨보스는 회중들을 방문하기 위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니면서 콩고 내륙 지역을 여행하였다

[147면 삽화]

프레드 루커스와 리아 루커스 (중앙), 오귀스탱 베욘의 집에 모인 회중 성원들과 함께

[150면 삽화]

푸앵트누아르 근처 대서양에서 침례받는 모습

[152면 삽화]

길르앗 제37기 학급에 참석한 “걷고 있는 사람” 오귀스탱 베욘, 1962년

[153면 삽화]

이 건물은 1967년부터 1977년까지 지부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155면 삽화]

노에 미쿠이자

[158면 삽화]

루이노엘 모툴라와 장마리 루바키 그리고 세포리앙 바케바